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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와!"

제자리에서 껑충 뛰는 김사제.

"제가 3레벨이 됐어요! 제가 주교가 됐다고요!"

"어때요? 거북한 느낌 같은 거 있어요?"

"신기해요. 전혀 없어요. 몸이 진짜 가벼워요. 신님이 계신 천상으로 승천할 것만 같아요!"

"잘 됐습니다. 그럼 이것도 마저 먹죠."

"저기, 초인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저 주교라구요. 주교."

"그래도 준비한 것까진 먹어야죠. 4레벨 안 될 겁니까?"

"4레벨 되고 싶긴 한데요, 나중에 돼도 괜찮아요. 몇 년 후에 돼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어서 드시죠."

"으······"

강권하다시피 황금을 퍼먹였다.

준비한 골드바와 예술품 세 점까지 모두 클리어.

4레벨은 못 됐다.

애초에 4레벨이 되려면 수백 억대 황금이나 수십 억대 황금 무게로 만든 예술품이 필요하다.

내가 준비한 예산은 1억. 처음에 김사제에게 감정료로 주려고 했던 금액에 불과했다.

이걸 가지고 3레벨이 된 것만 해도 엄청나지.

확실히 장점이 있는 녀석이고, 교단이다.

"휴."

김사제가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저 정말 강해졌어요. 신님께서 힘을 많이 내려주셨어요."

김사제의 시작 특성은 [치유의 손].

레벨이 오를 때마다 특성이 늘어난다.

지금은 3레벨이니까 [정화]와 [신성 방어막], [빛의 화살]이 생겼겠지.

김사제가 손 위에 빛 덩어리를 띄우더니 으스대듯 말했다.

"어때요? 엄청 강해 보이지 않아요?"

10대 후반.

원래 세계에서는 멀쩡히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

강해진 걸 자랑하고 싶겠지만 번지수 잘못 찾았다.

이 막장 세상에서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다간 뒷골목 어디쯤에서 죽어 자빠지기 십상이니까.

휙!

들고 있던 숟가락을 던졌다.

투척 특성으로 정확히 빛 덩어리를 맞췄다.

빛이 푸스슥 꺼지자 김사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

"사제 씨. 3레벨 됐다고 무적은 아닙니다. 방심하면 3레벨 아니라 5레벨 초인도 훅 가요."

"쳇. 그렇게 정색하실 필요 없잖아요."

"정색해야죠. 사제 씨, 1레벨과 3레벨은 다릅니다. 1레벨은 이런 빈민가에서 숨어 살 수 있지만 3레벨부터는 어쩔 수 없이 노출될 수밖에 없어요. 아티팩트와 성물로 정체를 숨기고 다녀도 이단심문관들이 언젠가는 냄새를 맡고 쫓아올 겁니다. 그때 그런 허접한 능력 자랑하다간 정말로 죽어요."

"방어막으로 막으면 되죠."

"방어막이요? 한 번 써보세요."

어려서 그런지 사회의 쓴맛을 모른다.

김사제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두 손을 겹쳤다.

서서히 전개되는 방어막.

내 마력 방어막은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살짝 파란색을 띠고 있다면 김사제의 방어막은 농도가 굉장히 짙은 우윳빛이었다.

탱탱하게 탄력이 있어 누르면 튕겨 나올 듯한 질감.

방어력만으로 따지면 마력 방어막보다 훨씬 나은 신성 방어막.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다.

구석에 놔둔 골프백에서 소총을 꺼냈다.

총이야말로 내 대답.

철컥, 일부러 쇳소리를 내고 겨냥하자 김사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반칙이죠!"

"왜 반칙인데요?"

"그야······"

"사제 씨. 여기 살면서 철권파랑 단검파랑 싸우는 것도 못 봤습니까? 소총이랑 산탄총 막 쏘잖아요? 권총은 잘 쓰지도 않아요. 거기다 수류탄에 로켓포까지 동원했는데 못 봤습니까?"

"봤어요······"

"앞으로 사제 씨가 마주칠 상황입니다. 소총은 애교에요. 어떤 놈은 기관총 갈길 거고 어떤 놈은 대물 저격총 쏴댈 겁니다. 신성 방어막이요? 소총탄은 막겠지만 그게 한계죠."

무한하게 막을 수도 없다.

소총탄 수백 발을 맞으면 방어막도 깨진다.

나는 소총을 거두고 당부하듯 말했다.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사제 씨 신이 깨어날 때까지는요. 우선 지역 회합부터 소집하고 주교 인정을 받으세요. 그다음 용병을 고용하든 교단 수호자들을 성기사로 만들든 해서 보호를 받고요. 전사에게 보호받지 못하는 사제는 정말로 무력합니다."

김사제 자체가 전투력이 약한 편이다.

사제,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캐릭터.

물몸에 철저히 보조 능력.

치유의 손-정화-신성 방어막 3종 세트는 참 좋지만 빛의 화살로 뭘 하겠어.

게임에서는 치유의 손과 빛의 화살을 지우고 가호와 축복 같은 걸 쥐여 주곤 했지. 치유는 김사제가 나한테 준 성물로 써도 되니까.

머리를 숙이고 있던 김사제가 고개를 든다.

나를 보는 두 눈에 한 가닥 열망이 감돌고 있었다.

"그럼 초인님을 고용해도 될까요?"

"저를요?"

"네. 초인님이라면 믿을 수 있어요."

자기 친형 보듯이 신뢰감 가득한 눈빛.

입이 조금 깔깔해졌다.

나는 적당히 이용해 먹으려고 친절하게 군 건데 이 녀석이 너무 순진하다 싶어서.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나는 단호하게 머리를 저었다.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쉽네요······ 뭘 하셔야 하는데요?"

"강해져야 합니다."

"성기사가 되도 강해지는데요?"

"그것보다 훨씬 더요."

일개 성기사로 만족할 수는 없지.

7대 교단 성기사도 아쉬운 판에 이런 극소규모 교단이라면 더더욱.

김사제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더 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그래도 당분간만 절 호위해주시면 안 될까요? 초인님 말씀대로 지역 회합을 소집할 생각인데 저 혼자 가기가 그래요. 주교님도 오실 거고······"

"좋습니다. 그 정도는 해드리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의뢰비 드려야죠?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기대하지요."

뭐 주려고 그러니?

많이 안 바란다.

성검 한 자루. 딱 성검 한 자루만 줘라.

형이 그거 하나만 받고 만족할게.

김사제가 즉석에서 편지를 휘갈겨 썼다.

인주에다가 자기 엄지를 문지르고는 편지에 찍는다.

신성력을 꾹꾹 눌러 담아서.

아주 약한 마력 파장이 느껴진다.

다른 초인들은 몰라도 같은 교단의 사제들은 알 것이다.

이 지장이 3레벨 초인, 즉 자기들 기준으로 주교에 의해 찍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주교의 소집령.

누가 감히 거부하겠나.

완성된 편지를 신상 손에 올리고 태웠다.

우윳빛 신성력 연기가 신상의 코에 빨려 들어간다.

신상이 눈을 한 번 빛내고는 침묵했다.

김사제가 큰일 해냈다는 듯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 내일 바로 모이기로 했어요."

"다들 근처에 있나 보죠?"

"그럼요. 서울이랑 수도권 사는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사제님들도 이 근처 많이 계세요."

"몇 명이나 온답니까?"

"모르겠어요. 그래도 대여섯 분은 오시지 않을까요?"

주교님은 안 오셨으면 좋겠는데.

김사제가 중얼거리다가 내 시선을 느끼곤 헤헤 웃었다.

바로 다음 날 밤.

서울 근교의 한 폐교회.

재건축이 진행 중인 곳에서 지역 회합이 열렸다.

"어허, 김사제 아니냐!"

"3레벨이 되었다고?"

"이런 세상에! 신님의 축복이 있으셨구나!"

"우리 교구에서 주교가 탄생하다니!"

"잘 됐구나. 잘 됐어!"

워낙에 작은 공동체라 그럴까?

김사제의 레벨 업 소식을 들은 사제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모인 인원은 여섯.

2레벨 1명에 1레벨 5명.

한숨만 나오는 숫자였다.

"올 사람은 다 왔나 봅니다. 슬슬 시작할까요?"

좌장격인 2레벨 사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시지요."

"시작하셔도 되겠습니다."

"그럼······"

막 개회 선언하려고 할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어둑한 폐교회를 가로질렀다.

"누구 마음대로?"

웃고 있던 김사제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끼이익!

폐교회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두컴컴한 바깥.

흐리다 못해 창백한 보름달 아래.

한 노인이 덩치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매부리코에 비쩍 말라 까마귀를 연상시키는 용모.

오른손에 든 황금 지팡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많이 본 지팡이.

특히 황금 지팡이 끝에 달린 장식이 익숙했다.

'저건······'

X자 모양 장식.

자세히 보니 알겠다.

게임 속 김사제의 이마에 있던 흉터와 완벽히 일치했던 것.

"주교님이세요."

그래. 바로 그놈이었다.

김사제 개인 퀘스트의 주요 빌런.

스토리 상 김사제를 파문하는 장본인.

주교가 냉기를 폴폴 날리며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특히 김사제를.

황금 쌓는 김사제 -4-

"가관이다. 가관이야."

주교가 까마귀 우짖듯이 말했다.

"누가 너희에게 마음대로 회합을 열 권한을 주었지? 이러다 이단심문관에게 발각당하기로 하며 어쩌려고?"

매섭게 김사제를 쏘아보는 주교.

2레벨 사제가 항변하듯이 말했다.

"주교님. 교단의 사제라면 누구든 회합을 열 권한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흥! 교법을 준수했을 때의 이야기지. 변절자 주제에 회합 주최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

"변절자라니요?"

사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주교가 품에서 편지를 한 장 꺼내 흔든다.

신상을 통해 단체 전달되고 구현되었을, 김사제가 작성했던 편지.

편지에 찍힌 지장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주교가 포효하듯이 외쳤다.

"분명 3개월 전만 해도 1레벨이었던 자가 갑자기 3레벨이 되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지? 우리 교단의 방법으로는 이렇게 빠르게 승급할 수가 없다. 백억을 태워도, 이백억을 태워도 2레벨이 한계다! 교단의 형제들을 팔아넘기고 신성력을 하사받은 것이 분명하다!"

"서, 설마요!"

"사제 녀석이 그랬을 리가요!"

"저 순한 놈이 우릴 배신했을 리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김 주교님의 유일한 아들 아닙니까! 분명 혁신적인 방법을 찾았을 겁니다! 김 주교님처럼요!"

주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지막 말을 한, 김 주교를 언급한 사제를 죽일 듯이 쏘아본다.

뭐라고 버럭 외치기 전, 2레벨 사제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주교님께서 사제 녀석을 의심하는 건 이해합니다. 우리 교단은 실로 엄혹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무턱대고 변절자라는 낙인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우선 김 사제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혹시 압니까? 김 사제가 정말로 좋은 레벨 업 방법을 찾았을지요."

"흥!"

분명히 합리적인 말.

그러나 주교는 코웃음만 한 번 쳤다.

쿵! 하고 황금 지팡이를 땅에 내리찍더니 거느리고 온 덩치들을 보며 명령했다.

"멍청이들이랑 말을 섞은 내가 잘못이지. 잡아 와!"

"예, 주교님."

주교가 데려온 덩치는 십여 명.

양옆에 서 있던 덩치 둘이 나섰다.

칼날 같은 기상.

육중한 근육질 체구.

두툼한 방호복과 초대형 삼단봉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마력 파장.

나와 비슷하다.

전사 계열 2레벨 초인. 김사제네 교단에서는 수호자라 불리는 자들이다.

사제들이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주교님! 이건 횡포입니다!"

"멋대로 수호자들을 동원하시다니요!"

"수호자들은 주교님의 사병이 아닙니다!"

"시끄럽다! 교단의 정의를 바로 잡는 일이다. 수호자들은 어서 타락한 사제를 잡아 와라!"

주교가 호령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불길한 황금 불꽃이 타올랐다.

거기 새겨진 능력은 [고통].

사제 계열 특성 중에서 상당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특성이었다.

나섰던 사제들이 찔끔하여 물러났다.

수호자들이 침중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사제야. 미안하다."

"좋게 좋게 가자. 주교님께서도 잠깐 저러다 마실 거다."

자기들도 꺼림칙한 모양.

그러나 교단의 명령은 지엄하고 하급자는 상급자를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다.

"초인님."

김사제가 벌벌 떨며 나를 보았다.

어리긴 어리네.

본인도 주교면서 왜 같은 주교한테 겁먹고 그래?

배에 힘 딱주고 내가 주교다! 외치면서 강하게 나가야지.

어쩔 수 없다.

고등학생이나 됐을 애한테 뭘 바라겠어.

내가 다 떠먹여 줘야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 파장을 발산한다.

우우웅.

웅장한 무형의 힘이 기지개 켜듯 뻗어나간다.

흑염도 최대한으로 개방한다.

대기가 진동하고 시선이 파르르 쏠린다.

다가오던 수호자들이 눈가를 찌푸리며 멈춰 섰다.

주교도 내 기세를 느꼈는지 경계하는 눈초리를 던졌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위압]

[마력 회복][마력 흡수][흑염]

도저히 2레벨이라고 볼 수 없는 특성 세트.

마법사나 가능할 거대한 마력이 전사의 위압감을 품고서 쏟아져 내렸다.

수호자들이 얼굴을 굳힌다.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삼단봉에 손을 가져간다.

"흥."

나도 따라서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잡았다.

검을 잡은 나는 허당이지만 수호자들이 그걸 알까?

[파산검법]

이걸 장착하고 위압감을 쏟아내자, 묵직하던 기세가 섬뜩하도록 예리하게 바뀐다.

마치 숙련된 검사처럼.

수호자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다, 당신은 누구요?"

"나?"

뒤쪽, 김사제를 향해 한 번 턱짓했다.

"김사제의 챔피언이다. 사제 씨를 데려가겠다고? 자신 있어? 자신 있으면 해봐. 머리통 분리될 각오는 하고."

눈에 힘을 주고 수호자들을 노려본다.

수호자들의 떨리는 눈동자 안.

내가 비친다.

살기가 철철 넘치는, 짐승처럼 눈을 번들거리는 내가 있다.

살인을 망설이던 나는 이미 없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인 끝에 살인마가 된 나만 남았을 뿐.

"우리 교단의 일이다! 외부인은 끼어들지 마라!"

"못 들었어? 사제 씨 챔피언이라니까? 챔피언, 대전사(代戰士)라고. 강제로 집행하고 싶으면 뒤에서 땍땍대지 말고 앞으로 나와. 그 잘난 지팡이로 공격해 보라고."

"이 무엄한 자가!"

"할 말 없으면 꼭 무엄이니 어쩌니 하더라. 사제야, 뭐하냐?"

"네? 네?"

"니가 어떻게 3레벨이 됐는지 설명해."

나도 모르게 존대 따위 집어치웠다.

김사제는 오히려 그게 더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벌벌 떨던 게 무색하게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가 3레벨이 된 건······"

차분하게 설명한다.

나와의 첫 만남부터 황금 먹기를 강권 받은 것.

실제로 황금을 으깨어 차에 타 마시자 신이 직접 반응하고 신성력이 폭증한 것까지.

주교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단! 이단이다!"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지팡이를 휘두르는 주교.

그러나 사제들의 반응은 딴판이었다.

"하지만 신님께서 허락하셨다는데······"

"마음에 안 드셨으면 신성력을 안 내리셨겠지."

"안 내리기만 하셨겠습니까? 즉각 신성력을 회수하셨겠지요. 신님께서는 관대한 분이 아닙니다."

"사제 녀석이 3레벨이 된 걸 보면 이게 맞는 것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도 이미 느낀 것이다.

김사제가 말할 때마다 은은하게 번지는 3레벨 신성력을.

수호자들도 그랬다.

이젠 아예 뒤로 빠져 김사제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김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한 명.

주교 하나뿐이다.

"섭금번제(攝金燔祭)는 이단 중의 이단이다! 감히, 그딴 이단 행위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이단이 아니에요! 신님께서 허락하셨다고요!"

"헛소리! 신님께서 섭금번제를 허락하셨을 리가 없다! 수백 년 전에 이미 이단 판명받았단 말이다!"

"그건 비효율적이라 그랬던 거고, 이 방법은 훨씬······"

"시끄럽다, 이단놈아! 내가 네놈을 정화해서 신님께 바치겠다! 변절자놈! 이단놈! 고통의 화염 속에서 영원토록 참회하라!"

주교가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화염이 치솟는다.

금빛 신성력이 들불처럼 피어오른다.

활활 소용돌이치며 지팡이 끝에 불꽃을 조각하는 그 순간.

뻐억!

나는 주교에게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커허억!"

신음을 터뜨리며 나동그라지는 주교.

"주, 주교님!"

"주교님!"

"아, 안 돼!"

"초인님! 뭐 하시는 거예요!"

각양각색의 비명이 내 귀를 어지럽혔다.

싹 다 무시했다.

주교의 멱살을 쥐고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퍼억! 퍽퍽!

그리고 주먹질 몇 방.

강퍅한 주교의 얼굴이 금세 찐빵처럼 부어오른다.

처음부터 알아봤지.

실전 경험 없다는 거.

전사 계열 초인에게 호위도 없이 앞으로 나선다? 고작 십여 미터 거리에서?

날 잡아 잡수 하는 격.

지팡이도 빼앗고 주교를 질질 끌고 오자 아주 난리가 났다.

"주교님을 놔드려라!"

"이 교적놈!"

"무슨 짓이냐!"

"초인님······ 이건 너무 하시잖아요······"

심지어 김사제까지 날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순둥이 같으니.

이쯤 되면 호구지. 호구.

자기 죽이려고 고통 마법을 발동시킨 놈을 편들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김사제 옆에다 주교를 거칠게 패대기쳤다.

"끄억!"

주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다.

사제들이 벌 떼처럼 내게 항의했다.

"아무리 김 사제의 챔피언이라고 해도 주교님을 폭행하다니!"

"우리 교단을 우습게 본 것이 아니고서야!"

"수호자들은 뭘 하는 거냐? 주교님을 지켜라!"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입만 살아서는.

나는 주교의 머리채를 잡아서는 쭉 들어올렸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다!"

주교가 몸부림을 치지만 옆구리를 한 대 때리자 조용해졌다.

수호자들이 가까이 오긴 했으나 제대로 행동하진 못했다.

내가 손만 가볍게 휘둘러도 주교가 죽어버릴 수가 있으니까.

"신성 모독한 새끼를 좀 팼기로서니, 그게 죄가 됩니까?"

"신성 모독?"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할 말이 없으니 아무 말이나 지껄이나 본데, 우리를 너무 무시한 것······"

"사도 후보에게 감히 이단이니 어쩌니 지껄였으니 신성 모독이지요."

"으응?"

"어?"

사도 후보.

생뚱맞게 등장한 단어에 다들 뇌 정지가 온 모양이다.

눈을 끔뻑거리고 입을 뻐꾸기처럼 헤 벌린다.

"사도 후보?"

"사도 후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문에 찬 시선이 쏟아진다.

나는 가만히 김사제를 돌아보았다.

김사제의 눈이 흔들렸다.

주위를 돌아보고는 나를 보고 눈을 깜빡인 다음, 떨리는 손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저, 저요?"

"그래. 너. 네가 사도 후보다."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 되는데?"

"우리 교단에 훌륭하신 분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많은 분을 제치고 제가 사도 후보라뇨······ 말이 안 돼요."

사실 김사제가 아니어도 괜찮다.

조건은 3레벨. 그리고 황금 섭취.

그중에서도 다른 교단과 관련 있는 황금 예술품을 삼킬 것.

게임 스토리 상 김사제가 그 조건에 맞았을 뿐이지.

나는 미리 준비한 황금 알갱이를 꺼냈다.

옛 아버지 교단의 미니어처 황금 신상을 녹여서 은단 크기로 만든 것이다.

'옛 아버지 교단은 사제네 교단의 주적이지.'

3천 년 전 과거.

재물의 신은 교단 연합군에게 살해당했다.

1억 어치 황금으로 3레벨 사제를 찍어내는 교단이다.

그 시대에는 가치가 훨씬 컸겠지만, 다른 교단들 보기에 얼마나 눈꼴 시렸겠어.

교단 연합군 중 핵심이 옛 아버지 교단.

따라서 재물 교단의 사도 조건은 옛 아버지 교단과 관련된 황금 예술품을 먹는 것으로 완결된다.

내가 어제 김사제에게 괜히 황금 예술품 석 점을 먹여놓은 게 아니라고.

"먹어."

"이, 이게 뭔데요?"

"먹으면 알아."

김사제가 불안함에 눈을 떨면서도 순순히 황금 알갱이를 받았다.

그리고 섭식.

파파팟!

황금빛이 터진다.

더없이 화려하고 현란한 빛이, 신성광이 움트듯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이런! 결계! 결계를 쳐!"

"결계! 빨리!"

"기적이다!"

레벨 업?

아니다.

4레벨이 되려면 황금을 쌓고 쌓아야 한다.

이건 사도 특성 개화였다.

이름마저 잊힌 신이 드디어 외부와의 소통 창구를 개척하고 단말을 내려보내는 것.

사제들이 안간힘을 쓰며 결계를 만들었다.

수호자와 덩치들은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교는 넋이 나간 것처럼 한마디만을 되뇌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나는 여전히 주교를 제압한 채 김사제의 전직 장면을 구경했다.

어제 미리 전직시키지 않은 이유?

이놈 때문이다.

멍청하고 무능력한 주제에 욕심 많고 질투심 많기로는 빌런 캐릭터 중에서도 원탑이거든.

살려놓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존재.

그래서 일부러 전직 조건 완료 직전에 멈췄고, 주교직만 인정받는 척 편지를 쓰게 했지.

금빛 폭발.

그렇게 표현해야 할 시간이 지나갔다.

드디어 김사제가 눈을 떴다.

"아······"

눈에서는 성광이 빛나고 머리 뒤에서는 후광이 회전한다.

"헤일로다."

"헤일로야."

사제들이 감탄하며 김사제 머리 뒤 후광을 주시했다.

만지면 만져질 것 같은 금속성 고리.

종교화에서 묘사되는 후광보다는 행성의 고리를 연상시켰다.

"어?"

김사제는 실제로 만져보기까지 했다.

"이거 어떻게 없애죠?"

"기도해."

"기도하면 돼요? 어, 이런 거로 기도하면 신님이 화내지 않을까요?"

"3천 년 만에 얻은 사도한테 화를 낸다고? 절대 안 그러니까 나 믿고 기도해 봐."

"어······ 그럴게요."

김사제는 곧이곧대로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눈에서 번쩍이던 성광도 머리 뒤에서 회전하던 빛의 고리도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진다.

"돼, 됐어요!"

"그렇다니까."

"제, 제가 진짜 사도 후보에요?"

"아니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도 예하시지."

"어······"

혼란스러운 표정의 김사제.

내버려 두고, 아까 나한테 항의했던 사제들을 쏘아보았다.

"자, 정식으로 묻겠습니다."

"무엇을······"

"사도 후보한테 이단이니 뭐니 한 새끼를 좀 팼기로서니, 그게 죄가 됩니까?"

아까와 똑같은 질문.

그러나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한 이상 사제들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지요."

"죄가 안 됩니다."

"흠! 흠! 아까는 저희가 조금 성급했습니다. 김 사제가, 아니 사도 예하께서 사도 후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해서······"

"허허. 알고 보니 대전사께서 김 사, 사도 예하의 챔피언이 아니라 우리 신님의 챔피언이셨나 봅니다."

"암요, 암요."

"그러니까 사도 예하께서 사도 예하이신 걸 알아보신 게지요."

"우리에게 새로운 번제 방법도 가르쳐 주셨고요."

"이분이야말로 우리 신님의 대리자 아닙니까?"

태세 전환하고는.

그리고 뭐? 신의 대리자?

이상하게 나를 엮으려고 하기 전에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사제야. 니네 신한테 하나만 더 물어봐."

"뭘요?"

"질투와 시기에 빠져서 같은 교단의 주교를 암살하고, 그 아들인 주교 후보는 크지 못하게 교묘하게 방해하고, 사도 후보를 이단으로 몰아붙여서 죽이려고 한 자를 어떻게 심판해야 하는지 말이야."

"네?"

김사제는 못 알아들은 눈치.

그러나 사제들은, 또 수호자들은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다.

내가 지칭한 주교가 누구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에.

"허······"

"설마 설마 했는데······"

"저게 진짜일까요?"

"신님께서 주시는 답을 들으면 알겠지요."

김사제가 어리둥절 해하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녀석.

"어······ 죽이라고 하시는데요?"

"아, 안 돼!"

어리바리한 얼굴로 말하는 김사제.

최후를 직감하고 절규하는 주교.

망설이지 않았다.

근력 특성을 장착하고 양쪽 턱을 잡은 다음 그대로 돌려버렸다.

우드득!

소름 끼치는 뼈 소리.

주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사제와 수호자들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김사제 혼자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주교님은 왜요!"

"신탁받았잖아. 이놈 죽이라고."

"네?"

"니네 신이 죽이라고 했다고."

신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화가 났겠어.

수천 년을 반정령 비슷한 상태로 존재하다가 겨우 제대로 된 공양을 받고 조금이나마 자아를 되찾았는데, 그걸 방해하려는 놈이 있네?

착한 신도 아니고 황금 밝히는 이기적인 신이니 당연히 치우려고 들겠지.

안 죽이고 놔뒀어도 신성력을 회수했을걸?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눈동자.

나는 김사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몰라도 돼. 애는 공부나 열심히 해."

"애 아니거든요?"

"고등학생이면 애지, 애. 아직 미짜잖아."

어딜 미성년자 주제에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해.

추악한 진실은 잠시 몰라도 좋다.

언젠가 김사제도 주교와 자신에게 얽힌 진실을 알게 되겠지.

그때야말로 김사제가 진정한 성인이 되는 날이 아닐까.

"아."

김사제가 잠깐 멈칫했다.

"신님께서 레반트 지역으로 가라네요."

"거기가 니네 교단 시작한 곳이잖아. 뭐라도 있나 보지."

"네······ 고대 보물 창고 찾아서 거기 있는 황금 바치라고 하시네요. 힘이 부족하신가 봐요."

"그럴 만하지."

게임에서도 나오는 내용이다.

개인 퀘스트 완료 직후 김사제는 잠깐 파티를 이탈한다.

준수한 능력의 사도 직업이 되어 돌아오지. 레벨도 올라가고.

그런데 여기서는 좀 다른가 보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래? 할 수 없지. 공적인 일이잖아. 보물 창고 찾아서 번제도 잘 지내고 교단도 잘 추슬러. 쉬운 일은 아닐 거야."

기왕이면 나도 성물 좀 챙겨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선 신이 살아 있을 때 숨겨 놓은 보물 창고인 모양. 그때야말로 교단 전성기였으니 내용물도 어마어마하겠지.

김사제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마웠어요. 형! 형 아니었으면 저 정말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예요. 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

"신님께서 계속 재촉하셔서 저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의뢰비는 우편으로 보낼게요! 대한민국 지부에 형이 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얼마든지 기다릴게."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겨우 다음날.

김제사 이름으로 커다란 택배 세 개가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풀어헤쳤다.

첫 번째는 주교의 황금 지팡이.

내 전리품이었다.

'이건 팔자.'

과연 몇억을 받을까?

아니, 몇억 수준이 아니지.

수십억도 가볍게 호가할 물건이다.

그리고 두 번째.

상자 속에 미려하고도 실용적인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아하하."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R 성검]

처음으로 얻은 R 등급 무기.

마검과 함께 모든 검사의 워너비, 성검.

이것 하나만으로도 김사제를 도와준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세 번째 상자를 개봉한 후 성검 따윈 깡그리 잊게 되었다.

상자 속에서 빛나는 성물 한 점 때문이었다.

변이체 사태 -1-

변이체 사태

커다란 조각상이었다.

황소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사제 교단네 신상.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다.

심장 대신 박힌 마력핵에서 번지는 마력 파장이 진짜였지.

[성역]

소유자의 의지에 의해 일정 공간을 안전지대로 만든다.

성역에는 소유자가 허락하지 않은 존재는 침입하지 못한다.

마력핵의 용량을 넘어서는 강자가 침입하면 추방함과 동시에 강하게 경고를 발한다.

추방도 못할 강자라도 저지 효과 정도는 발휘된다.

나는 신상을 길게 쓸어 보았다.

'4레벨짜리네.'

최고수가 3레벨인 교단이 4레벨 신상을 보냈다.

이거 하나 만들려고 고생 꽤나 했을 텐데······

그리고 성검.

[성검] 고유 특성을 가진, 누가 뭐래도 1티어 무기.

고유 특성답게 매우 강력하다.

암흑 속성 적에게 추가 피해를 주는 [광격], 모든 능력치를 증가시키는 [강화], 모든 종류의 공격에 저항하게끔 하는 [보호], 이 세 특성의 복합 특성이니까.

대신 다른 아티팩트처럼 숙련도를 쌓아도 성검 특성을 가져오진 못한다.

성검 특성 획득은 성기사만 가능한 일.

'고맙다, 김사제.'

수억을 써가면서 황금과 제물을 마련한 보람이 있었다.

황금 지팡이에 성검에 성역 신상······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신상과 성검을 들고 지하 수련실로 내려갔다.

구석진 곳에 신상을 설치한 후 활성화.

우우웅.

무형의 파장이 내 집을 뒤덮었다.

이걸로 한 시름 놓았다.

사실 보안이 부족한 감이 있었는데 성역이면 충분하겠지.

채앵!

성검을 뽑아본다.

생긴 것은 전형적인 서양의 롱소드.

표면에 새겨진 신성 문자가 유려하게 반짝인다.

칼날을 따라 빛이 한 모금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여기에 손에 찰싹 달라붙는 손잡이.

'비싸겠다.'

N급 성검도 비싼데 R급 성검이라니.

허공에 몇 번 휘둘러 보았다.

신성 문자가 반짝이며 공간에 낙인을 찍는다.

찍힌 낙인이 흘러 은하수 궤적을 남겼다.

갑자기 흥이 올랐다.

자세를 잡고 파산검법을 전개했다.

산 부수기, 산 가르기, 산 꿰뚫기.

그냥 동작만 취한 것도 아니다. 일점과 참격, 강타, 연격을 번갈아 가며 썼다. 하나씩 썼다가 둘을 합쳐서 쓰고, 셋을 합쳤다가 연속으로 펼치고, 아주 전력을 다해 마력을 쏟아냈다.

"허억, 허억, 허어억."

며칠 새 마력이 많이 안정화됐지만 아직도 멀었나 보다.

금세 마력이 떨어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대신 내 앞에 명멸하는 은색 빛무리가 사금파리 폭풍 치듯 일렁였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손을 댔다간 갈기갈기 찢기고 말겠지.

사그라드는 빛무리를 넋 놓고 보다가 다시 성검을 움켜쥐었다.

'열심히 해야지.'

많이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멀었다.

지금도 총알 한 방이면 황천길 떠날 수 있다고.

단검파 혼자 쓸어버렸다고, 사이비 교단 주교와 수호자를 가볍게 제압했다고 자만하면 안 된다.

아케인 서울에 나 정도 초인은 쌔고 쌨으니까.

"후읍! 흡! 흡!"

수련에 골몰한다.

파산검법을 수련하고, 에인헤랴르 연공법으로 마력을 운행하고, 지치면 마법 욕조에 들어가 마력천 물에 몸을 담근다.

효과는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잠재된 마력이 모두 마력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넥타르의 마력을 모두 흡수하고도 남겠다.

집밖에는 아예 나가지도 않았다.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를 빼면 1층에도 안 올라갔다.

잠?

그런 사치는 다 집어치웠다.

마력천에서 마력 연공만 해도 수면을 대체할 수 있으니까.

몸에 부담이 가긴 했으나 대단히 빨리 강해지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잠재된 마력이 드디어 끝을 보일 정도.

"쿨럭!"

너무 달린 걸까?

부작용이 찾아왔다.

피를 한 번 울컥 토하고는 입을 닦았다.

"너무 무리했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는 법인데.

마력이 너무 빨리 강해져서 생긴 부작용.

육체가, 특히 심장이 마력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격하게 운동을 하든 전투를 치르든, 하다못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시간을 보내든 간에.

우선 특성을 전반적으로 바꿨다.

[마력심][마력 안정][명상]

[활기][인내][재생]

내 몸을 강화하고 보호할 특성 위주로.

'그래도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이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는데 드러누워 있을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몸을 일으켰다.

먼저 침실로 가서 금고 안을 확인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만 해도 20억이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절반으로 줄었다.

대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으니까.

황금 지팡이를 집어넣고는 금고를 잠궜다.

'돈이나 벌까?'

광질?

그딴 건 안 한다.

황금 지팡이 팔면 그만인데 뭐하러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해?

대신 스마트폰을 들었다.

[최선수 소장]

[초인님 아니십니까! 어쩐 일이십니까?]

"아, 네.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저는 뭐 잘 지냅니다. 사무소에는 별일 없고요?"

[하하하. 요즘엔 일복이 터졌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다니깐요!]

"예? 왜요?"

[다 초인님 덕분이죠. 벌써 소문이 짜 하니 났습니다. 초인님이 저랑 계약 관계라는 거요. 덕분에 여기저기서 의뢰가 마구 들어오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해야 하는 의룁니까?"

[대부분은 아닙니다. 몇 개 괜찮아 보이는 의뢰를 킵해두긴 했습니다만 초인님 쉬신다고 하셔서 연락은 안 드렸고요.]

"그래요? 잘됐네요. 마침 실전이 필요해서요. 적당히 실전을 치를 수 있는 의뢰가 있으면 받고 싶습니다."

[실전이요? 좋지요! 혹시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까?]

"예. 3레벨 초인 상대는 힘들지만 1레벨이나 2레벨 초인, 혹은 변이체가 상대인 의뢰가 있을까요? 그런 의뢰가 딱인데요. 꼭 사람이 아니라 마물이어도 됩니다."

그런데 1레벨 2레벨 마물이 있어야 말이지.

이 좁은 땅덩이의 마물은 몽땅 토벌된 지 오래.

휴전선 근처로 가면 많이 있지만 거기도 동부군과 서부군이 꽉 잡고 있다.

두 군단이 사냥 허가를 내주는 것은 오직 3레벨 이상의 초인뿐.

최 소장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이름 하나를 꺼낸다.

[하나 있긴 있습니다만······ 거참,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뭔데요?"

[제 1 매립지, 아시죠?]

"당연하죠."

[얼마 전에 다른 인력사무소에서 청소팀을 보냈는데 그만 그 안에서 전원 변이가 됐답니다.]

"잠깐만요. 전원 변이?"

[예. 드론을 넣어 확인했는데 최소 변이체 여섯이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합니다.]

"미친. 몇 레벨인지는 모르고요?"

[거기까진 모른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변이됐을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오염 마력에 노출됐다는 뜻이고, 2레벨 한두 마리가 있어도 이상하지가 않지요.]

"맙소사."

최소가 1레벨 여섯 마리.

어쩌면 2레벨이 있을 수도, 여섯이 아니라 한두 마리 더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청소부 협회가 처리하지 않나요?"

[그게, 뒷구멍으로 들어온 의뢰입니다. 청소부 협회에 연락할 수가 없다고요.]

"왜요?"

[뻔할 뻔 자죠. 높으신 분들의 사정 아니겠습니까. 청소팀 중에 한두 명 변이되는 거야 청소팀에서 알아서 유야무야 시키고, 문제 되면 인력사무소 관리 소홀이라고 떠넘기면 되지만 청소팀 전체가 변이되는 건 공무원 목 여럿 날아갈 문제죠. 특히 이번 청소부 협회장이 좀 대가 센 사람입니다. 야망도 있고요. 관리국이랑 대립각 세우고 있어서 거기 의뢰했다간 좋다고 기자들한테 기사거리 던져줄 겁니다.]

그렇지.

청소부 협회장 박대엽.

게임에서도 주요 빌런으로 등장하잖아.

"그래도 오래 놔두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매립지에 고인 오염 마력 청소 안 하고 방치하면 대괴수급 오염체가 탄생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대폭발할 수도 있고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며칠 정도는 괜찮지요. 최소한 한 달 정도는 썩어야 합니다. 정 방법이 없으면 그 전에 청소부 협회에 연락하겠지요. 초인 용병을 쓰거나요.]

용병!

말이야 바른 말이지 3레벨 초인을 용병으로 쓰면 그깟 변이체 몇 마리 못 잡겠나.

돈이야 엄청나게 깨지겠지만 모가지 날아가는 것보단 낫다.

원래 세계의 공무원과 이 세상 공무원은 대우와 사회적 위상이 하늘과 땅 차이거든.

"변이체라······"

위험하긴 해도 산탄총 갈기면 된다.

총 앞에선 모두가 평등한 법.

여섯 마리 전부 2레벨이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보수는 어떻게 됩니까?"

[돈은 많이 못 준답니다. 1레벨 변이체 마력핵 하나당 1억, 혹시 2레벨 변이체가 나오면 3억을 주기로 했습니다. 대신 전리품은 초인님이 갖는 조건이고요.]

"짜네요. 자기 자리가 걸렸는데 그거밖에 못 준대요?"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어필을 좀 해봤는데, 현금은 힘들고 대신 아티팩트를 하나 주겠답니다. 성공 보수로요.]

"어떤 아티팩트입니까?"

[그게 말입니다, 초인님······]

최 소장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마총에 관심 있으십니까?]

"마총이요? 당연히 관심 있지요. 아, 혹시 마총 준대요?"

[바로 그렇습니다.]

마총은 마검의 총 버전.

총은 공격력이 더 중요하니 성총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곤 했다.

"문제가 있나요? 저주받았다거나······"

[마검이랑 마총이 대부분 그렇죠. 저도 사진만 한 장 받았지, 감정서를 받진 못했습니다. 그쪽 말로는 감정을 아예 안 받았다고 합니다.]

"저주 물건이랑 마검 취급하면 대부분 그렇죠. 저주 안 밝히고 파는 게 더 비싸잖아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진 한 번 보여주세요."

혹시 내가 아는 물건일 수도 있으니까.

띠링!

곧 사진이 전송되어 스마트폰 화면에 떴다.

영화에서도 게임에서도 흔히 나오는 콜트 M1911을 빼다 닮은 권총.

차이점이라고 하면 총열을 따라 흑금이 길게 박혔고, 거기에 이글거리는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아는 권총이다.

흔히 [흑염]이라고 불리는 R급 마총.

'이게 여기서 나오네.'

옛 아버지 교단에서 배교자를 총살할 때 쓰는 마총.

제대로 맞히면 꺼지지 않는 검은 불꽃이 타올라 희생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

단, 저주가 붙어 있다.

사용자에게 흑염 디버프를 건다는 것.

여기에 마력 효율도 좋지 않다.

마력을 가공하여 흑염탄을 쏘는 물건인데 효율이 좋을 수가 없지.

그러나 내게는 둘 다 해당 사항이 없다.

난 이미 신열 디버프를 극복하고 흑염 특성을 얻었으니까.

마치 나를 위해 준비했다고 외치는 듯한 물건이었다.

'이건 가야 해.'

주무장은 성검과 마총.

부무장은 돌격소총과 자동산탄총, 유탄 발사기.

이 조합이면 무서울 게 없다.

"괜찮은 총이네요. 수락하겠습니다."

[진심이십니까? 무슨 저주가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마총은 저주 해제도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총입니다."

[어······ 기성품인가 봅니다.]

"그렇죠. 옛 아버지 교단 처형총입니다."

[아하!]

"이제 아시겠죠?"

[하하하! 그럼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거 완전히 초인님을 위한 총이네요!]

"바로 그겁니다."

흔히 말하는 성마 빌드.

성검과 마검, 마검과 성갑, 성검과 마총 등 다양한 조합으로 만들 수 있다.

내 경험상으로는 다른 종류 무기로 챙기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았지.

성검과 마검을 함께 쓰면 간섭 현상이 나타나지만 성검과 마총, 마검과 성총은 그렇지가 않거든.

최 소장이 스마트폰 너머에서 껄껄 웃었다.

[초인님과 함께 한 거야말로 제 생애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관리국에다가 초인님께서 의뢰 수락하셨다고 답변 넣겠습니다. 관리국이 몸이 잔뜩 달아 있으니까, 아마도 내일 바로 처리해달라고 할 겁니다.]

"그럼 미리 가 있죠."

[아닙니다, 아니에요! 초인님께서 가시는데 제가 모셔다드려야지요! 내일 아침 8시, 8시 어떠십니까? 제가 초인님 댁까지 모시러 가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죠!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그럴 수는 없죠! 하여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다음날.

최 소장 차를 얻어타고 제 1 매립지에 도착했다.

저번에는 쥐뿔도 없는 일용직 청소부로 왔었지.

그때는 말단 공무원 하나 나오고 끝이었는데, 오늘은 소장부터 말단까지 전부 마중을 나왔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악수를 청하는 반백 머리 남자.

가볍게 손을 흔들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변이체 여섯 마리라고 했지요? 혹시 레벨은 확인 못 하셨습니까?"

"예······ 아시다시피 오염 마력 때문에 마력 감지가 힘듭니다."

"그렇겠죠."

마법사를 부르면 간단하지만 이 인간들이 그럴 리 없지.

나는 골프백을 열어 무장을 시작했다.

왼쪽 허리에는 성검.

오른쪽 허리춤에는 수류탄 다발.

등에는 두툼한 자동산탄총.

오른손에는 유탄 발사기를 결합한 소총.

왼팔에는 새로 산 팔 방패.

츄리닝 아래에는 방호복.

단검파와 싸울 때처럼 완전 무장한 상태.

여기에 [치유] 목걸이와 [강건] 장갑도 빼놓을 수 없다.

쭈우웁, 쭈아압.

장갑이 내 피를 빠는 소리가 뼈를 타고 들렸다.

다이아는 쓰지 않았다.

강건 특성을 가져오면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건 좋은데 당장 쓰는 특성이 9개에서 8개로 줄어드니까.

일단은 킵.

당분간 페널티를 감수하고 쓸 작정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예.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그그긍.

콘크리트 구조물 문이 열렸다.

심연의 괴수처럼 아가리를 벌린 어둠.

후욱,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예전에 왔을 때와는 공기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오염 마력······'

고작 며칠 청소 안 했다고 이렇게 돼?

총 쥔 오른손에 힘 한 번 꾹 주고 발을 옮겼다.

기기긱.

문이 닫히고 무저갱 아래보다 짙은 암흑이 나를 삼켰다.

변이체 사태 -2-

철컥.

접이식 헬멧을 장착했다.

부착된 고글이 작동하며 내부를 훤히 밝혀준다.

원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야 할 형광등.

지금은 모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형광등만 아니라 내부 모든 전기 시설이 끊어진 상태.

아까 문도 공무원들이 수동으로 열었지.

'왜 저러지?'

오염 마력이 퍼졌다고 전기가 차단되지는 않는 법.

떠오르는 가능성에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변이체 중에 전기 관련 특성을 가진 놈이 있다는 얘기네.'

썩 느낌이 좋지 않다.

전기 관련 특성이 있다면 1레벨일 수가 없으니까.

2레벨 변이체!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심해야겠어.'

먼저 보면 내가 이긴다.

소총탄을, 특히 내 산탄총을 막으려면 3레벨은 되어야 한다고.

그것도 그냥 3레벨이 아니고 방어 특화 3레벨.

마력 방어막이나 철갑 등 방어 관련 특성도 있어야 하고.

내가 조심할 것은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당하는 거였다.

[사격][총격술][민감]

[마력심][오염 저항][집중]

특성을 교체했다.

소총을 들어 지향 사격 자세를 취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염 마력 농도도 이상해.'

제 1 매립지와 다른 오염 시설 모두, 오염 마력은 내부 격리 공간에 고이게끔 설계되어 있다.

격리 공간에서 오염 마력이 농축되고 농축되다 못해 괴수 오염체가 탄생하거나 대폭발이 일어날 수는 있어도 여간해서는 누출되지 않는다는 뜻.

그런데 왜 이렇게 오염 마력이 느껴질까?

방독면을 뚫고 구리구리한 냄새가 올라올 지경이다.

심지어 방호복 아래 피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있어.'

청소팀 9명 중 6명이 변이된 것도 이상하다.

어떤 비밀이, 추악하고 음험한 비밀이 저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했다.

탓!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말고 멈칫했다.

멀리, 내가 가던 방향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변이체?'

청소 일정이 모두 정지된 상태.

쥐새끼 한 마리 생존할 수 없는 환경.

이 와중에 나 말고 다른 존재가 있다면 변이체일 수밖에 없다.

탓!

또 그 소리.

확실히 들었다.

몸집 작고 잽싼 어떤 존재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분명했다.

나는 총을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검을 뽑을까?'

총을 쓰면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다.

당연히 변이체들을 불러모으는 효과가 있다.

그러느니 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검으로 싸워도 소리는 나.'

내가 무슨 암살자도 아니고 말이지.

차라리 숫자를 줄일 수 있을 때 확실히 줄여놓는 게 낫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최대한 집중했다.

귀로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정면을 응시했다.

더는 아까 들렸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만 공기가 차츰 얼어붙고 뒷목이 뻣뻣해지며 전신의 솜털이 바싹 일어났을 뿐.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느껴진다.

내 심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내 마력이 초조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무엇인가 살기를 품고서 나를 주시하고 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가 또르륵 떨어졌다.

스스슷.

뭔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이때.

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정면이 아니었다!

뒤, 뒤였다!

휙!

바로 몸을 돌렸다.

고글로 보는 선명한 세상 속, 이질적인 괴물 한 마리가 눈에 잡혔다.

"이 새끼가!"

타타타타탕!

바로 난사.

조준간을 연사로 두고 한 탄창을 모조리 비워냈다.

날카로운 총성이 연달아 울리며 오렌지빛 불꽃이 어두운 세상을 찢어발겼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괴물이 아득바득 춤을 추었다.

"끼에엑!"

거대 박쥐처럼 보이는 그것.

단숨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초록색 피가 천장은 물론이고 벽과 바닥까지 잔뜩 뿌려졌다.

잠깐, 초록색 피?

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고글 화면에도 경고가 떴다.

[방독면 작동]

독이다!

그것도 공기와 만나자마자 부글거리며 끓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급한 대로 민감을 지우고 독 저항 추가.

"끼에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히 탄창 하나를 몽땅 갈겼는데도 박쥐가 날 향해 달려들었다.

피막 날개를 거대하고 퇴화한 눈은 흉측하다.

괴악하게 벌린 입은 마귀상어처럼 이중 턱이며, 송곳 같은 뾰족한 치아가 3열로 돋아나 징그럽기 짝이 없다.

"젠장!"

총알을 그렇게 뒤집어썼는데도 살아 있을 정도면 2레벨.

나는 소총을 거꾸로 잡고 방망이처럼 휘둘렀다.

부우웅, 퍽!

정확히 턱을 강타하는 개머리판.

박쥐가 덜컥 정지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기세를 줄이지 않고 나를 덮쳤다.

"이이익!"

순간적으로 회피 특성을 장착, 몸을 날리지 않았으면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캬아아악!"

기세 좋게 울부짖는 박쥐놈.

운이 없었다.

몸 곳곳에 총상을 입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지만, 하나같이 치명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슬러그탄을 먹였어야 했어.'

내가 쓰는 소총 구경은 5.56 밀리미터.

사람 상대로는 충분하지만 저지력은 약한 편이다.

철컥.

이 와중에도 나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박쥐가 울부짖으며 흘려보낸 3초.

그 3초 동안 정확한 동작으로 탄창을 결합했다.

"키이잇?"

이미 한 번 쓴맛을 본 박쥐.

지성도 이성도 다 날아갔지만 생전의 기억을 어느 정도는 가진 모양이다.

내가 탄창을 결합하자마자 움찔했다가 땅을 박찼다.

탓!

조금 전에 들었던 바로 그 소리.

경쾌한 발놀림이 지면을 때리고, 그 거대한 몸이, 날개 펼치면 5미터는 될 법한 시커먼 그림자가 나를 덮쳐왔다.

나는 침착하게 총을 조준했다.

[집중] 특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후욱, 뜨거운 입김이 내 목덜미를 핥는 듯하다.

거대한 괴물이 세상을 가리며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보이느니 시커먼 그림자뿐이다.

그러나 기다렸다.

서서쏴 자세를 취하고, 맞춰놓은 가늠자와 가늠쇠 선에 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단 1초.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

뻗어오는 손이, 아니 무쇠 발톱이 내 가슴에 닿기 직전.

가늠자에, 또 가늠쇠에 박쥐 머리가 들어왔다.

타앙!

단 한 발.

총성이 대기를 갈랐다.

퍼억!

"큭!"

철퇴처럼 변형된 무쇠 발톱이 내 명치를 때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힘이 쭉 빠지지만, 통증보다 먼저 번뜩이는 것은 승리의 감각이었다.

'이겼다!'

거대 박쥐가 축 늘어진다.

사람으로 치면 미간이라고 해야 할까.

퇴화한 눈과 눈 사이, 기묘한 촉각이 돋아 있는 부위에 구멍이 뚫렸다.

작고 작은 구멍.

그러나 뇌가 곤죽이 되었다는 증명.

"끄윽!"

이긴 건 좋은데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진다.

나는 급히 목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하얀 성광이 어리며 내 몸을 훑고, 빛이 가슴으로 집중되더니 숨이 확 트였다.

시체를 밀어내고는 겨우 빠져나왔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2레벨 초인보다 상대하기 더 힘든 느낌.

솔직히 말하면 전술에 문제가 있었지.

소총에서 언더배럴 유탄 발사기를 분리했다. 산탄총에 대신 결합하고 탄창도 미리 장착한 벅샷 대신 슬러그탄 탄창으로 바꿨다.

마지막으로 시체에서 마력핵까지 추출한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건진 건 있어.'

2레벨 마력핵은 별것 아니다.

나는 산탄총 가늠자에 눈을 맞췄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정렬되자 집중력이 고조되면서 가늠자 속 세상이 후욱 확대된다.

[조준] 특성.

사람과 싸우든 괴물과 싸우든 유용한 특성.

나는 산탄총을 조준한 채 그대로 시선을 옮겼다.

'올 때가 됐는데.'

예상대로였다.

꾸웅, 꾸웅, 꾸웅.

무겁고 육중한 것이 걸어오는 소리.

"키키킥, 키킥!"

"야하하학! 이히히!"

어린아이 떠들 듯, 혹은 귀곡성 퍼지듯 괴상한 소음이 들린다.

위기감에 저절로 아랫입술을 깨물게 된다.

'아까도 이랬지.'

박쥐 변이체는 분명히 내 정면에서 소리를 냈었다.

탓, 탓, 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러고는 쭉 뒤로 돌아 천장을 기어서 내게 접근했지.

어느 정도는 지능이 있다는 뜻.

다른 변이체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얕보면 안 돼.'

쭈욱 주위를 훑었다.

마침 내가 있는 곳은 주 복도에서 양쪽으로 보조 복도가 뻗어 나가는, 십(十)자 형태 교차로.

골목으로 들어가 산탄총을 움켜쥐고 엎드렸다.

위장포가 있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바라지는 말자.

대신 사기 특성을 발동한다.

[죽은 척]

은신도 같이 쓰고 있으니 여간해서는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쿠웅, 쿠웅, 쿠웅.

한참이 지나고 어둠 속에서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고름투성이인 거구.

키가 엄청나게 컸다. 허리를 쭉 펴면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아까부터 덜렁거리던 형광등이 머리에 부딪혀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네 개고, 그중에 오른팔은 쇳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의수를 쓰다가 변형되기라도 했나?

"크르르······"

거구가 걸쭉한 가래를 흘리며 주위를 돌아본다.

그러더니 박쥐 시체에 다가가서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크워어!"

크게 고함 한 번 지르고는 시체를 집어 던져 버리는 거구.

시체가 벽에 처박힌 후 퍽 터졌다.

초록색 체액이 사방으로 뿌려지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힘 한 번 세네.'

행동이 굼떠서 그렇지 굉장히 위협적인 녀석.

본능적으로 유탄 발사기에 손이 갔으나 참았다.

아직 다가오는 기척이 몇 더 있었으니까.

"캬캬캬! 이히힉!"

입이 다섯 개, 눈이 세 개인 변이체.

삽처럼 변형된 손을 기괴하게 흔들며 깔깔 웃고 있었다.

"크흠!"

거구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고깃덩이가 된 박쥐 시체를 보고는 춤추듯 온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하나 더.

뒤에서 은밀하게 접근해 온 그림자.

이놈은 한 술 더 떴다.

부정형 변이체였다.

얼핏 보면 사람.

다시 보면 사람 형체 슬라임.

자세히 보면 내부에 반쯤 용해된 사람 뼈를 담고 있는 것이 보인다.

흐느적흐느적 소리 없이 기어오는 변이체 뒤로 끈끈한 점액 흔적이 1자로 길게 남았다.

'세 마리가 다야?'

나머지 둘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침 변이체 셋이 박쥐 시체 근처에 옹기종기 모였잖아.

딸깍.

츄리닝으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다.

세열 수류탄이 아니라 봉인탄.

그리고 [투척].

또르르륵.

말이 투척이지 바닥을 통해 굴렸다.

둥근 봉인탄이 투척 특성 보정을 받아 정확히 변이체들 사이로굴러갔다.

"크륵?"

"키히힛!"

봉인탄이 발치까지 굴러온 다음에야 눈치챈 변이체들.

이변은 없었다.

지능은 있을지 몰라도 지성도 이성도 없는 변이체니까.

봉인탄이 잠시 후 폭발하면서, 흐린 마력광이 변이체들을 뒤덮었다.

"크허헉?"

"이히히힛! 아하하핫!"

왜, 안 아프다고?

빛도 그리 따갑지 않고 폭발이 센 것도 아니다.

봉인탄의 효과는 오직 하나.

마력 흐름을 잠시나마 봉인하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집중]하여 유탄 발사기를 거구 발치에 [조준]한 후 신중하게 [사격]했다.

퉁!

유탄 발사기 특유의 공기 빠지는 소리.

물수제비 치듯 시커먼 탄환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바로 엎드렸다.

특성을 모조리 교체하고 마력 방패로 전면을 막았다.

꽝!

그리고 울리는 폭음.

먼지가 훅 치솟는 것과 동시에 쇳조각이 변이체들을 휩쓸었다.

"끄어억!"

"케헤에에엑!"

"크흑!"

변이체건 뭐건 현대 병기 앞에선 고기 조각에 불과하다.

거구도 다섯 입도 슬라임도 바닥에 엎어져 꾸물거리고 있었다.

놀라운 점은 셋 다 즉사하지 않았다는 것.

마력핵이나 두뇌가 파괴되어야 죽는데, 쇳조각이 운 좋게도 급소를 피해간 모양이다.

역시 괴물은 괴물.

나는 침착하게 산탄총을 들어 조준했다.

그리고 원거리에서, 내가 숨어 있던 지점에서, 20미터 거리에서 방아쇠를 차분히 당겼다.

투앙! 투앙! 투앙!

정확히 세 번.

쓰러진 거구와 다섯 입의 머리가 날아갔다.

슬라임은 머리를 잃었는데도 여전히 꿈틀거렸다.

투앙!

마지막 한 발 더.

[보물찾기]

특성을 활용해서.

보물찾기 특성이 정말로 효자였다. 특성을 활성화하자 마력핵이 들어있는 부위가 표시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오른쪽 발등에 마력핵이 있었던 것.

'역시 이상해.'

아무리 변이체가 되어도 그렇지 부정형으로, 신경계가 마력 회로와 마력핵으로 대체될 정도로 변이되는 일은 드물다.

냄새가 났다.

'사람 잡아먹는 건 결국 사람이지.'

마력핵을 추출한 다음 구석에 가서 엎드렸다.

거의 30분을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다.

총소리로는 유인이 안 되는 걸까?

유탄도 터뜨렸는데?

다시 움직일까 생각할 때였다.

스스슥, 스스스슥.

어둠 속에서 길쭉한 그림자가 꾸물거린다.

얼핏 보면 사람을 닮은 형상.

나는 고글을 통해 정체를 확인했다.

썩은 진흙을 뭉쳐 빚은 듯한 몸.

머리에 박혀 어둑한 빛을 뿜는 마력칩.

몸 주위로 번지는, 원혼 특유의 음울한 마력 파장.

아케인 서울에서는 망령체라 명명한 괴물.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게 된다.

망령체는 절대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으니까.

강령술사 혹은 암흑사제.

오직 그들만이 오염체 잔해에 마력칩을 시술하고 원혼을 강령시켜 망령체를 만들 수 있었다.

스스슥, 스스스슥.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망령체.

한두 방향이 아니다.

교차로 모든 방향을 점거하고는 꾸역꾸역 밀려온다.

[아, 아.]

선두에 선 망령체가 별안간 사람 말소리를 냈다.

망령체가 말을 한다고?

자세히 보니 망령체 얼굴, 사람으로 치면 입이 있을 곳에 오래된 스피커가 달려있었다.

심지어 눈은 고물 카메라, 귀는 낡아빠진 마이크였다.

[거기 계신 초인님. 저랑 이야기 좀 하죠.]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분명히 은신 특성을 활성화한 상태.

그런데 망령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내가 여기 숨은 것을 안다는 듯이.

변이체 사태 -3-

"그럽시다."

꿇릴 건 없다.

은신을 풀고 앞으로 나섰다.

망령체가 사람처럼 빤히 나를 주시한다.

[거, 한 가지 물어봅시다.]

"그러던가요."

[남의 구역에서 깽판을 치는 이유가 뭡니까?]

남의 구역?

오염 시설에 니 구역 내 구역이 어디 있어?

······짚이는 게 있었다.

"청소부 협회냐?"

[그럼 뭐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망령체.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다.

청소팀 중 6명이 변이체가 된다?

그 와중에 생존자도 없다?

오염 마력이 통로까지 넘쳐나고, 내부 전기 시설은 다 꺼져 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테러.

그리고 오염 시설에서 벌어지는 테러라면, 첫 번째 용의자가 바로 청소부 협회다.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데. 왜, 날 여기서 죽일 자신은 있고?"

살인멸구할 생각이냐?

산탄총을 들고 유탄 발사기에 손을 가져갔다.

하필이면 망령체.

내가 챙겨온 탄종과 궁합이 나쁘지만 안 쓰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망령체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초인님의 활약은 잘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변이체 셋이면 고생하실 줄 알았는데 너무 쉽게 쓰러뜨리더군요. 그래서 협상을 했으면 합니다.]

"협상하자고?"

[예. 저희는 언제나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응?"

[진심으로 제안하는 겁니다. 초인님, 초인님 정도 전투력이면 우리 협회에서도 최상위권입니다. 회장님이나 부회장님 정도는 아니어도 그 아래 이사 정도는 충분히 되지요. 우리 협회에 입회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내가 왜?"

[그렇지 않으면······]

망령체가 말을 흐렸다.

대신하여 다른 망령체들이 일제히 한 발짝 내디뎠다.

"기아악!"

이어 전신을 떨어 기괴한 소리를 지른다.

입도 성대도 없이 외친 고함.

거의 수백 구는 되는 망령체가 터뜨린 울음이 콘크리트 벽면에 난반사되어 괴상한 합창을 자아냈다.

[초인님은 시체 기사가 되어 입회하게 될 거니까요!]

음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강령술사 특유의 마력이 담긴, 원혼과 저주를 켜켜이 쌓은 듯한 바람이다.

나는 뻐근해 오는 목덜미를 한 번 주물렀다.

망령체가 스피커를 통해 다시 한번 외쳤다.

[결정하시죠! 자발적으로 입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어서 입회하시겠습니까?]

"노예 아니면 죽음이야? 아주 염병하고 자빠졌네."

[흐흐흐. 그럴 리가요. 저희 협회장님은 인재를 우대하십니다. 초인님 같은 분을 노예로 부리지는 않으십니다. 합당한 연봉, 합당한 업무, 합당한 직위를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오셔서 근무하시면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내 대답은 이거야."

철컥!

유탄 발사기에 유탄을 장전했다.

망령체 카메라에 붉은 광채가 스쳤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는 니네가 하겠지. 사람 잘못 건드렸어."

퓽!

유탄 발사.

길쭉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개조 망령체를 그대로 지나쳐서 망령체 무리 정중앙에 직격.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시커먼 먼지가 일어났다.

쇠 파편이 사방을 갈기갈기 찢지만, 나는 애초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망령체는 총에 강하지.'

상성 상 안 좋다.

유탄과 폭탄 역시 마찬가지다.

고폭탄이나 소이탄을 챙겨왔으면 모르겠으나 내가 가져온 것은 모조리 대인유탄과 세열수류탄.

쇳조각이 물컹물컹한 내부를 찢어봐야 뭐하겠냐고.

운 좋게 마력칩을 부수지 않는 한 모조리 재생된다.

역시나 그랬다.

망령체 십여 구가 쓰러졌지만 재생되며 일어서고 있었다.

[크크크.]

선두에 선 개조 망령체가 비웃음을 흘렸다.

[총잡이 주제에 내게 대적하겠다고? 후후. 얌전히 시체 기사나 돼라!]

스스슥, 스스슥.

꾸물거리며 다가오는 망령체.

전후좌우 모든 방향이 막혔다.

자칫 잘못하다간 압사당해 죽을 판이다.

"흥."

밀려오는 긴장감.

콧방귀 한 번 뀌며 떨쳐냈다.

내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채앵!

검을 뽑는다.

R 등급 성검.

기묘한 빛이 검신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성검을 얻고 처음 보는 반응.

표면의 신성 문자가, 문자를 상감한 신성 금속이, 칼끝을 장식한 보석이 공명하면서 맑은 성광을 뿜고 있었다.

[아니?]

경악하여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망령체.

[서, 성검?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성검이 단 줄 알아?

나는 입술을 비틀며 특성을 교체했다.

한 땀 한 땀, 특성 하나마다 충분히 고민해서.

[파산검법][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

[오염 저항][근력][흑염]

내가 총잡이인 줄 알았다면 완전히 오산.

지금 나는 전사다.

아니, 성기사다.

느릿느릿 꼬물꼬물 지렁이처럼 기어오는 합성 좀비 따위 간단히 썰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탓!

땅을 박찼다.

성검을 양손으로 쥔다.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이, 재생되는 영상이 하나의 궤적을 그린다.

궤적이 눈앞의 망령체와 겹쳤다.

거의 본능에 가깝게, 지난 며칠 수련했던 바로 그 동작대로 성검을 내리쳤다.

산 부수기!

깔끔한 일격이 들어간다.

강타도 참격도 필요 없었다.

파산검법이 정확히 시연되었다.

깔끔하게 그어진 흰 빛이 머리통을 정확히 반으로 갈랐다.

으적!

그 끝에 마력칩이 걸렸다.

순간 희고 검은 빛이 번뜩였다.

성검 고유의 [광격] 효과.

추가 화염 피해를 입히는 [흑염].

두 속성이 마력칩을 부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부 마력 회로를, 생산하는 마력을 폭주시켰다.

펑!

안에 폭탄 넣고 터뜨린 것처럼 터져나가는 머리통.

오물 덩어리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나도 바로 앞에서 오물을 뒤집어썼지만 무시했다.

더럽다고 불평하기에는 망령체가 너무 많다.

많고 많아서 망령체 해일처럼 보일 지경이다!

치직, 치지직.

[말도 안 돼······]

떨어진 스피커가 그 말을 내뱉곤 작동을 중지했다.

파직.

스피커를 짓밟으며 전진한다.

"기아아악!"

온몸으로 합창하며 내게 다가오는 망령체들.

그러나 우스울 뿐이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검을 깊게 찔렀다.

푹! 푸욱!

두 마리 한꺼번에 관통!

작은 폭발이 일었다.

이 둘도 다를 게 없었다. 머리가 수박처럼 깨지며 오물을 흩뿌리는 신세가 되었다.

베고 찌르고 자르고!

쑤시고 쳐내고 가르고!

거의 신들린 듯이 움직였다.

내가 움직이면서도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몰랐다.

그저 훈련했던 대로, 머리에 그려지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또 내지를 뿐이다.

어둠 속에서 열기가 피어났다.

훅훅 숨소리 사이에서 땀이 후줄근하게 증발했다.

마력이 극한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땀이 나면 나는 대로, 오물이 묻으면 묻는 대로 수증기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쩌억!

방금도 도끼처럼 성검을 내리찍어 망령체를 작살 냈다.

나는 지치지 않는다.

벌써 수십 구를 베어 넘겼지만 몸에는 활기가 넘치고 마력은 여전히 넘쳐난다.

당연하지.

지칠 것 같으면 [활기] 특성, [마력 회복] 특성, 지나치게 마력이 오염됐다 싶으면 [마력 안정] 특성을 계속해서 갈아 끼웠으니까!

순간 화력이면 순간 화력.

지구력이면 지구력.

나는 그 어디서든 정점에 달해 있었다.

2레벨이라고는 보기 힘든 전투력.

무력만으로 따진다면 나는 3레벨 초인을 이미 넘어있을 것이다.

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 보고 있을 강령술사를 압도할 정도로!

"기아악!"

"기이이익!"

그러나 영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최소 수십 구를 베었음에도 망령체들이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인해전술.

나는 성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깔리면 끝이다.'

망령체는 사람보다 무겁다.

수십 마리가 날 깔아뭉개기라도 하면 끝.

강건에 근력까지 동원해도 벗어나기 어렵다.

'돌파한다.'

특성 교체.

[근력][활기][질주]

[방어][맷집][인내]

오로지 근육 전사만을 위한 특성.

심지어 오염 저항까지 뺐다.

"기아아악!"

이젠 코앞까지 밀려온 망령체들.

손을 꽈악 쥐었다.

쭈아압, 쭈압 하고 장갑이 거칠게 내 피를 탐한다.

목걸이도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기에 성검까지.

[강건]에 [치유], [성검]을 더하여 총 9개나 되는 특성.

'믿는다.'

속으로 뇌까리며 몸을 던졌다.

전력을 다해 땅을 박차고, 정면을 향해 돌진!

망령체와 부딪혔다.

성검으로 찌른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강타하듯이 밀어쳤다.

꽝!

작은 폭음.

망령체가 그대로 밀려 나갔다.

밀집되어 스크럼을 짜듯이 서 있던 망령체들이지만, 내 한 방을 견뎌내기란 불가능했다.

철썩! 철썩!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자기들 사이로 파고든 나를 향해 팔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역겨운 감촉이 츄리닝도 방호복도 무시하고 전해졌다.

분명히 물리적인 타격은 적다.

그러나 접촉할 때마다 파고드는 오염 마력이, 또 썩은 독 기운이 내 머리를 핑 돌게 만들었다.

"이이익!"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중첩된 오염 마력과 독에 당해 내장이 곤죽이 된다!

오염 저항도 독 저항도 쓸 수가 없다.

특성을 교체하면, 힘들다고 바꿔 버리면 놈들에게 붙잡힐 테니까!

"으아아아아!"

고함을 질렀다.

전신의 마력을 모아 함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모든 마력을 쥐어짠다.

심장에서, 혈맥에서, 장기에서 마력을 긁어모아 단숨에 터뜨린다.

다리가 후끈해졌다.

허리부터 골반, 다리까지 몽땅 불로 지지는 것 같다.

마치 신열이 다시 찾아온 듯한 통증.

그러다 별안간 시원해지면서, 거친 마력이 야생마처럼 혈맥을 질주했다.

새로운 길이 뚫린 것처럼.

마력 회로가 새겨진 고속도로처럼!

파앙!

내 몸이 붕 떠올랐다.

도저히 지나가지 못할 것처럼 밀집해 있던 망령체들을 지나친다.

아니, 머리를 뛰어넘었다.

문자 그대로 날아올라 따돌려 버린다.

거의 십여 미터 이상.

자칫 천장에 머리를 박을 뻔한 것을 겨우 피하고 정신을 차렸다.

"헉, 허어억."

숨이 가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도약] 특성!

포위망에서 벗어나기 가장 좋은 특성이자 기술.

그게 다가 아니었다.

멀리서 성검을 겨누고 정신을 집중하자 저절로 마력이 활성화되면서 몸을 앞으로 밀려고 했다.

이건 [돌진] 특성.

돌진과 도약!

굼벵이처럼 느린 망령체들로선 나를 잡을 방법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흐흐흐."

역시 특성 전환은 사기다.

김전사의 백지 신체 능력과 결합하면 더 그렇다.

쉽게 얻고 쉽게 지우고 마음대로 교체하고!

"죽어!"

돌진한다.

성검으로 머리를 쪼갠다.

바로 [연격]을 장착한 후, 산 가르기를 열댓 번이나 날린다.

슉! 슈슈슈슉!

희고 검은 궤적이 세상을 자기 색채로 수놓았다.

빗물이 사선으로 내리는 듯한 광경.

마력칩이 쪼개진 망령체들이 오물 덩어리가 되어 무너졌다.

끼아아······ 끼아아······

망령체를 하도 많이 끝장내서일까?

주입되어 있던 원혼들이 풀려나 귀곡성을 낸다.

희끄무레한 영체들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살······려······줘······]

[그······립······다······]

[너······무······추······워······]

[배······가······고······파······]

그러나 내게 접근하지는 못한다.

성검 때문이다.

성검이 지금도 맑은 빛을 뿌리며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퍼억! 철퍼덕!

쉬지 않고 축축한 통로를 누볐다.

돌진으로 접근하고 도약으로 빠지고.

성검으로 난도질하고 마력이 떨어지면 잠깐 쉬면서 보충하고.

신출귀몰한 내 움직임 앞에서 망령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냥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고.

내가 검을 찍으면 찍는 대로 터지고 찌르면 찌르는 대로 폭발하는 훈련용 허수아비.

"훅, 후욱, 훅!"

나라고 멀쩡하지는 않다.

백 마리를 넘어 2백 마리에 가까운 숫자.

내려치기 2백 번만 해도 힘들다. 그런데 치고 빠지면서, 집중하여 마력을 운용하고, 일격 일격에 혼을 담아 마력칩을 쪼갠다고 생각해 봐라.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직이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끝나려고 그렇게 아득바득 발악한 게 아니다.

죽을 거였으면, 무릎 꿇을 거였으면 이 막장 세상에 떨어진 즉시 목을 맸을 거라고!

"으아아아!"

고함과 함께 마지막 망령체의 목을 쳤다.

철퍼덕 떨어지는 진흙 뭉치.

오염 마력과 썩은 독이 훅 하고 올라왔다.

머리가 핑글 돌았으나 무시했다.

대신 일점으로 마력칩을 쪼개 완전히 끝을 보았다.

"허억, 허어억."

숨을 쉬기가 어렵다.

온몸이 오염 마력과 독에 절어서 나를 갉아먹는 느낌이다.

짝! 짝! 짝!

누군가 박수를 쳤다.

"이야, 대단하네. 총잡이인 줄 알았는데 성기사였어? 7대 교단은 아닌 것 같고, 어디 교단 소속이야?"

"알면 살려주게?"

"설마. 말 안 해도 돼. 널 시체 기사로 개조하다 보면 당연히 알게 될 거니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마력 실린 목소리만 살랑살랑 날아올 뿐.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심호흡]

[마력 흡수][마력 안정][마력 회복]

이 틈을 타 잠깐이라도 회복해야 한다.

나는 내 심장에 정신을 집중하며 에인헤랴르 연공법을 극한으로 운용했다.

삐걱, 삐이걱.

찢어지듯 아픈 심장.

불로 지진 것처럼 뜨겁디 뜨거운 마력 혈맥.

위장에서, 또 허파에서 역류하여 치솟는 핏물.

오래 쉴 수도 없었다.

저벅, 저벅.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하."

나는 탄식하듯 짧게 탄성을 질렀다.

"자신 있으면 직접 싸워 보시지?"

"전사 앞에 대놓고 나오는 마법사가 어디 있어? 있으면 호구 병신 새끼지."

어둠 속을 뚫고 나오는 두 그림자가 보인다.

시체 방패병과 해골 총잡이.

변이체를 개조하여 만든 언데드.

어딘가 숨어 있을 강령술사의 권속.

개조 상태를 보아하니 추정 레벨 2.

저 둘만 해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숨어 있는 강령술사까지 고려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그럼 죽어."

슈슈슝!

예고도 없이 날아오는 검은 마력 덩어리.

어둠 화살.

동시에 시체 방패병이 나를 향해 돌진했다.

변이체 사태 -4-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나갈 체격.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고릴라 같은 양 팔.

왼팔에 장착된 통짜 콘크리트 방패.

오른손으로 움켜쥔 것은 녹슨 철제 삽.

쿵쿵쿵!

덩치답지 않게 빠르다.

땅을 울리면서 달려오며 내가 바닥에 던져뒀던 소총과 산탄총을 차례로 짓밟았다.

"이익!"

방패에 얻어맞기 직전 몸을 날렸다.

회피 특성을 사용한 움직임.

방패가 아슬아슬 내 발목을 스쳤다.

그러나 좀비 방패병 뒤를 따라온 어둠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마치 유도 미사일이라도 된 듯 궤도를 꺾어서 내 등을 후려갈긴 탓이다.

뻐억!

생긴 건 까만 테니스공 같아도 위력이 상당했다.

평범한 사람이 맞으면 뼈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눈앞이 번쩍하면서 극렬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크윽!"

낮게 신음을 흘렸다.

피격 직전 방어용 특성 세트를 불러오고, 마력 방어막과 방어로 등을 보호했지만 그래도 아팠다.

눈물 찔끔 나는 것을 이 악물고 참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타앙!

경쾌하게 울리는 총성.

반사적으로 납작하게 엎드렸다.

제대로 피하지 못했는지 왼쪽 어깨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대단하구나, 대단해!"

어둠 속 목소리가 낄낄대며 웃었다.

"아주 좋은 시체 기사가 되겠어! 흐하하!"

개 같은 새끼.

욕을 하면서도 몸을 옆으로 굴렸다.

해골 총잡이.

기본은 시체이나 머리와 두 팔만큼은 뼈를 드러낸 그놈.

두개골과 양 팔뼈에 마력 회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두 손에 든 것은 싸구려 권총.

그래서 다행이었다. 데저트 이글 같은 대구경 권총이었으면 내 어깨가 이미 끝장났을 테니.

탕탕탕!

해골 총잡이가 나를 정확히 보고 총을 난사한다.

쿵! 쿵! 쿵!

시체 방패병은 나를 쫓아 통짜 콘크리트 방패를 내리찍는다.

"구더기냐? 굴러다니게?"

강령술사는 어둠에 숨어 마법을 뿌린다.

무형의 저주와 어둠 화살이 은밀하게 날아와 나를 후려쳤다.

"끄으윽!"

저주는 저주 저항으로 버텼지만 어둠 화살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몇 번 얻어맞고는 피를 토했다.

그나마 시체 방패병과 해골 총잡이가 여기 제 1 매립지에서 현지 조달해서 만든, 급조한 권속이라 다행이다.

만약 강령술사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권속을, 3레벨 변이체를 데려왔으면 난 여기서 끝났겠지.

'방법이 없을까?'

나는 피를 토하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마법사, 특히 강령술사 같은 초인을 상대할 때 철칙 하나.

권속과 싸워선 안 된다.

마법사를 직접 공격하여 죽여야 한다.

조금 전부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일정했다. 거리도 슬슬 감이 잡혔다. 어둠 화살도 거기서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도약과 돌진을 반복하면 충분히 도달할 지점.

그러나 무턱대고 돌진해서는 안 된다.

강령술사는 분명히 자기 주위에 함정 마법을 잔뜩 깔아놨을 테니까.

아마 내가 도약해서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겠지.

아까 망령체들과 싸우면서 도약하고 돌진하는 건 봤지 않겠어?

'방법은······'

있다.

나는 입을 한 번 틀며 웃었다.

직후, 도약을 활성화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어딜!"

슈슈슝!

기다렸다는 듯 어둠 화살 세례가 날아온다.

반사적으로 마력 방어막을 활성화했다.

어둠 화살이 날 거칠게 두드렸다.

"크윽!"

몸을 띄운 이상 피할 방법은 없었다.

퍼퍼퍽, 소리가 귀가 아니라 뼈로 들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통증이 밀려오지만 겨우 참았다.

눈을 부릅뜬 채 낙하한다.

멀찍이서 총만 쏘던 해골 총잡이에게로.

"기아악!"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는 해골 총잡이.

물러나지 않는다.

권총을 역수로 잡고 되레 나를 향해 휘두른다.

두개골의 마력 회로가, 또 팔뼈의 마력 회로가 형광 낙인을 찍은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도 공중에서 검을 내리쳤다.

도약 공격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내 노림수는 이 해골 총잡이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퍼억!

권총이 박살난다.

대신 내 성검도 막혔고 나도 추락했다.

바닥에 착지는 했으나 해골 총잡이 정면.

해골 총잡이가 능숙하게 새로운 권총을 뽑아서는 마구잡이로 난사했다.

타타타탕!

바로 엎드려서 총알은 피했으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쿵쿵쿵쿵!

그리고 바로 내 뒤까지 접근한 시체 방패병.

쩌저적!

아울러 내 그림자가 일어나 나를 단단히 결박했다.

여기서부터 함정이 있었구나.

어둠 마법 중 유명한 CC기, 즉 군중제어기인 그림자손이었다.

"흐, 죽어라!"

잘 걸렸다는 듯이 어둠창을 날리는 마법사.

장전을 끝마치고 내게 권총을 들이미는 해골 총잡이.

내 뒤에서 콘크리트 방패를 높이 들어 올린 시체 방패병.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나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딸깍.

망령체들과 싸우면서 거의 쓰지 않았던 수류탄.

그중 하나를 이미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또, 안전핀을 제거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너나 죽어, 등신아."

툭.

수류탄이 떨어지고.

솨아아!

기묘한 소음과 함께 회색 섬광이, 흐린 마력 파장이 거품처럼 번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권총을 들이밀던 해골 총잡이도, 방패를 내리찍으려 하던 시체 방패병도 딱딱하게 굳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둘의 피부에, 혹은 뼈에 새겨져 있던 마력 회로가 불안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나도 피를 토했다.

도도히 이어지던 마력 흐름이 강제로 끊어진 까닭.

"너, 너!"

당황해서 소리치는 강령술사.

타이밍이 좋았다.

내게 날아오던 어둠창도 이 마력 파장에 휩쓸려 소멸됐으니까.

이것이 봉인탄.

모든 마법사와 인조 마법 생명체의 천적.

봉인 방지 처리를 했으면 내가 내 꾀에 빠졌겠지만 급조한 권속한테 봉인 방지 처리를 했을 리가 없지.

딸깍.

나는 또 수류탄 안전핀을 뽑았다.

이번에는 정면.

길게 투척하자 강령술사가 격노하여 외친다.

"그깟 장난감에 당할 것 같아?"

뭔가 조치를 취하는지 음울한 마력 파장이 번진다.

하지만 틀렸다.

이번에는 봉인탄이 아니었거든.

파아앗!

화려하게 터지는 섬광.

세상이 흔들리며 찌이잉- 하는 이명이 내 대뇌를 간지럽힌다.

그래도 수십 미터 앞에서 터져서 견딜 수 있었다.

바로 섬광탄.

듣기 좋은 비명이 터졌다.

"으어억! 이 새끼가!"

아쉽게도 제압되진 않은 모양.

당연한 일이다.

일순 밝아진 세상 속, 그 압도적인 광량으로 확인한 강령술사 역시 헬멧과 고글,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었거든.

그러나 그것 말고 특별한 장비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에 찬 두툼한 손목 보호대가 특이할 뿐이다.

아마 저게 마법 지팡이 역할을 대신하겠지.

딸깍. 딸깍. 딸깍.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손에 잡히는 수류탄이란 수류탄을 모조리 던졌다.

거의 인간 폭격기.

혹은 인간 유탄 발사기.

세열수류탄, 섬광탄, 봉인탄 가리지 않고 던지고 봤다.

꽝! 꽝! 퍼엉! 파팟! 솨아아!

"으억! 어어억!"

강령술사가 급히 손을 휘젓는다.

주위에 깔아 놓은 마법 함정이 퍽퍽 터지며 마력으로 환원된다.

방어 마법이 실시간으로 포개졌다.

일어서는 쓰레기 벽, 증식하는 뼈의 벽, 핏빛 소용돌이치는 방어막, 겹겹이 씌워지는 어둠 방어막.

기긱, 기기긱.

슬슬 봉인탄 위력이 끝나가는 중.

시체 방패병과 해골 총잡이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기회는 오직 이 순간뿐.

달린다.

성검 한 자루 쥐고 뛰쳐나간다.

도약도 돌진도 질주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내 다리와 내 몸만을 이용하여 뛰었다.

강령술사가 나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너 이 새끼!"

폭발도 섬광도 그쳤다.

봉인 파장을 뒤집어썼지만 어떻게든 선방한 모양.

강령술사가 이를 갈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목 보호대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마력을 줄기줄기 토했다.

슈슈슈슝!

작정하고 날리는 어둠 화살.

얼마나 많이 쏴대는지 아예 탄막을 형성한다.

강령술사에게 가는 길을 막아버릴 정도.

피하려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

그 시간이면 강령술사는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도 남겠지.

으드득.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터지면서 비린 맛이 입 전체를 자극한다.

어질어질한 가운데서도, 정신을 금방 놓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더욱 땅을 박찬다.

물러설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방법이라고는 오직 하나.

몸으로 버티며 뚫고 나가는 것뿐!

"으아아아!"

마력 방어막도 사용하지 않았다.

방어에 사용할 특성 칸 하나조차도 아까웠다.

그냥 몸으로 밀고 지나갔다.

퍼퍼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몸이 춤추듯 흔들렸지만 무시한다.

정수리까지 튀는 통증을, 아픔을 꿀꺽 뱃속으로 삼킨다.

고통을, 괴로움을 연료 삼아 나아간다.

증오와 분노를 불태우면서, 오로지 강령술사 하나만을 씹어먹겠노라 몸부림친다!

"으으음!"

강령술사가 기이한 신음을 흘렸다.

자세가 진중해진다.

반쯤 유희 삼아 즐기던 태도에서, 드디어 나를 진정한 적수로 인정한 것.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두 팔을 교차한다.

오른팔의 손목 보호대에서, 왼손 검지의 반지에서 음울한 빛이 일어나 서로 꼬이고 꼬인다.

이어 폭풍처럼 몰아치는 어둠 마법들!

어둠 벽이 내 앞을 막아선다.

어둠 촉수가 나를 붙잡고 늘어진다.

어둠 화살이 기관포처럼 쏟아진다.

어둠 번개가 지그재그로 공간을 찢는다.

어둠 채찍이 거칠게 휘둘러진다.

"크아아악!"

이번만큼은 나도 참을 수 없었다.

저절로 비명이 터졌다.

화살에 얻어맞고, 번개에 지져지고, 채찍이 길게 상흔을 남기고.

이 정도만 해도 미칠 지경인데 촉수와 벽에 잡히니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저지되고 만다.

강령술사가 음험하게 웃음을 흘렸다.

"크크, 결국 이렇게 될 걸 그렇게 용을 빼셨어?"

합장하듯 두 손을 겹쳐 드는 강령술사.

시커먼 빛이 맺혔다.

어두운 소용돌이가 기세를 올리고 그 안에서 검붉은 화염이 태동했다.

그걸 보고서야 강령술사의 정체를 눈치챘다.

[R 카론]

청소부 협회의 세 이사 중 하나.

지금 준비하는 것은 카론의 최종기, 어둠불꽃.

시전 즉시 순수하고도 지극한 어둠 마력으로 전방을 불살라 버리는 기술.

순간 강렬한 유혹이 찾아왔다.

내 주머니에서 잠자고 있는 [광분] 안경.

또, 내 무의식 속에 숨겨진 [돌연변이] 특성.

이 둘을 사용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

'아직 아냐.'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카론이 등장했다는 것은 청소부 협회 연계 퀘스트가 발동되었다는 뜻.

그 끝에서 만날 존재를 생각하면 광분과 돌연변이는 아껴둬야 한다.

그리고 말이야······

아직은 막장의 막장까지 몰리지는 않았다.

위험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분명히 솟아날 방법이 있다고!

"으아아아아!"

용을 쓰며 팔을 들었다.

마력을, 근력을 뿌리까지 동원한다.

뒷일 따위 생각하지 않고 마력심을 극한까지 운용한다. 왼손에 일부러 힘을 주어 강건 특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여기에 맷집, 인내 등 전사로서 도움이 될 특성을 총동원한다.

우지직!

어둠 촉수가 끊어졌다.

성검이 어둠 벽에 파고들고 흑염이 타오르자 어둠 벽의 근간 마력이 모조리 녹아내렸다.

마력을 모으던 카론이 혀를 찼다.

"허, 그걸 그렇게 벗어난다고?"

잠깐 마력 모으기를 늦추고 손을 휘젓는다.

또다시 휘몰아치는 어둠 마법 5종 세트.

"으아아!"

더 쉽게 벗어났다.

[암흑 저항] 특성 덕분이었다.

어둠 마법에 얻어맞고 묶이면서 나도 모르게 획득한 것.

"허억, 허억!"

겨우 거리를 반쯤 좁혔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다.

카론이 득의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다 끝났다! 성기사야, 무릎 꿇고 네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지 그러냐? 혹시 알아? 네 신이 강림해서 구해줄지!"

카론이 두 손을 올린다.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태양처럼 사방으로 열기를 뻗치는 가운데, 중심으로 응축하여 어둠의 구처럼 보이는 마법.

3레벨 어둠 마법 중에서는 파괴력 원톱이나, 길고 긴 시전 시간과 막대하게 소모되는 마력 때문에 잘 볼 수 없는 그것.

카론이 두 손을 내민다.

화염이 개방된다. 암흑이 밀려온다.

칠흑의 불꽃이, 어둠의 물결 같기도 까만 화염벽 같기도 한 것이 나를 향해 쏟아진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성검을 들었다.

머리가 전에 없이 차갑다.

괴로움도 고통도 다 잊게 된다.

보이느니 불길뿐이고 느끼느니 열기뿐이지만 이상하리만치 냉정해진다.

꼭 오늘을 위해 살았다는 듯이.

특성을 교체했다.

[파산검법][일점]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

[돌진][근력]

나는 안다.

정면에서 적 보스의 최종기가 날아올 때.

전사 계열 초인이 검과 마력과 육체 특성을 정확히 갖췄다면.

그리하여 세 종류 특성이 삼위일체를 이룬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떠한 성과를 일궈내고야 마는지.

아주 잘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돌진했다.

성검이 가파른 검명을 터뜨리고, 장갑이 피를 빨며 흡족하게 웃었다.

조금 전부터 목걸이가 달랑달랑 빛을 발하는 중이다.

어둠불꽃이 나를 강타한다.

불태운다. 불사른다. 뼛가루 한 줌까지 소각하려 든다.

의미 없었다.

츄리닝이 타는 것도, 방호복에 불이 붙는 것도, 피부가 눌어붙어 통각 신경이 비명을 지르는 것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지극히 들끓는 고양감, 용암처럼 뜨거운 희열감에 몸과 정신을 모조리 맡기고 나아갈 뿐이다.

그런 내 시선 끝에 검이 있었다.

마력이 있었다.

검과 마력이 빚어내는 빛이 있었다.

번쩍!

언제였을까?

빛이 터져 나온 것은.

무형이되 유형의 물체를 베는 마력의 빛이 세상을 꿰뚫은 것은.

검기.

특성으로 말하자면 [섬광].

필살기라 불러 마땅할 그 막강한 힘이 카론을 관통했다.

청소부 협회 -1-

청소부 협회

"이, 이건······"

카론이 방독면 안에서 입을 뻐끔거렸다.

고글이 가로막고 있지만 보인다.

경악에 찬 눈빛.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이어지지 못했다.

덜컥.

결국 그렇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흐어어어어."

영혼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도 풀썩 쓰러졌다.

퍽!

어디에 부딪힌 건지 무릎이 심하게 아팠다.

"크윽, 쿨럭!"

격하게 피를 토하는 나.

심각하게 검은색인데다 다 썩은 악취까지 난다.

안 되겠다.

[에인헤랴르 연공법][재생][활기]

[마력 회복][오염 저항][독 저항]

특성을 교체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흐으읍, 흡."

피비린내가 개미 떼처럼 콧속으로 파고든다.

성검을 움켜쥐고 한참이나 심호흡한 다음에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그르륵······"

"그그그극······"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신음 둘.

그래, 저것들도 남아 있었지.

시체에서 성검을 뽑으며 겨우 일어섰다.

머리가 핑 돌고 시야가 잠깐 어둑해진다.

내상도, 중독도, 오염도 모두 심각한 수준.

성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한쪽으로 걸어갔다.

시체 방패병과 해골 총잡이가 흐릿한 안광을 번뜩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죽겠다, 진짜."

제작자가 죽어 허수아비가 된 둘.

검을 들어 내리쳤다.

참격!

내가 지치긴 지친 모양이었다.

마력칩이 든 머리에 성검을 맞추긴 했는데 채 절반도 뚫지 못하고 박혀 버린 것.

으······ 정신차리자.

"후욱, 후욱."

마음을 다잡고, 마력도 더 회복한 다음 도전.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갔다.

성검이 두개골과 마력칩을 깔끔하게 베고 나왔다.

철퍼덕!

천천히 모로 쓰러지는 시체 방패병.

해골 총잡이도 똑같이 처리했다.

시체 세 구가 바닥에 널브러지자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으으으."

긴장이 탁 풀렸다.

다리에서 힘이 쪽 빠져서 저절로 주저앉게 된다.

벽에 기대고 앉은 채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그리고 연공법을 운용하여 독을 손에 모은 다음, 신원 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처를 내어 바닥에 버렸다.

몸이 단박에 시원해지면서 한 줄기 맑은 기운이 마력 회로에 깃들었다.

[정화] 특성 획득.

나는 머리가 가물가물한 중에도 피식 웃었다.

'진짜 성기사도 아니고.'

흑염 대신에 성광을 얻었으면 완벽히 성기사 빌드다.

나는 스스로에게 정화를 거푸 사용했다.

알게 모르게 변형되던 신체가 정상을 되찾는다.

여기에 회복된 마력을 전부 목걸이에 투여해서 [치유] 발동.

몇 시간을 그런 다음에야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힘들다.'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내상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아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마력천.

그 안에서 최소 24시간은 쉬어야 완벽하게 회복되겠지.

"흐흐흐."

나는 더러운 벽에 기댄 채 웃음을 흘렸다.

카론, 카론이다.

어엿한 3레벨 초인이자 던전 보스, 카론!

2레벨에 잡으려면 한 파티 풀로 채워가야 하고 3레벨에서도 특성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솔로잉은 택도 없다.

그런 카론을 혼자 잡았으니 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지.

절그럭.

성검을 허리에 꽂고 일어섰다.

먼저 시체 강화병과 해골 총잡이의 마력핵부터 수거.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도 잘라서 골프백에 넣었다.

증거가 필요하니까.

찰칵, 찰칵.

사진도 찍고 마력칩도 수거했다.

주변을 쭉 돌면서 망령체 마력칩도 수집.

이미 반토막 나서 쓰지는 못하겠지만 공무원들한테 증거로 제출하면 어느 정도 보상은 주지 싶다.

마지막으로 카론의 시체에 다가갔다.

'손목 보호대랑 반지가 있었지?'

아마도 아티팩트.

상자깡을 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 터져서 피범벅이 된 시체를 앞에 두고 이렇게 흥분된다니.

나도 어느덧 훌륭한 사이코패스가 된 모양이다.

약간 씁쓸함을 느끼며 손목 보호대와 반지를 벗겼다.

'손목 보호대는······'

예상했던 대로 마법 지팡이의 경량화 버전이었다.

마법 회로를 짜 넣은 천으로 두툼하게 손목 보호대를 만들고, 그 안에 특수한 수정 팔찌를 여러 겹 배치한 다음 안감을 댄 물건.

나름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지만 그뿐.

흥미를 잃고 골프백에 던졌다.

그리고 반지를 손에 낄 듯이 쥐고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어, 뭐지?'

아무 느낌도 안 든다.

외형도 몰개성한 민무늬 금반지라 이름을 모르겠고.

마법이나 특성이 담겨 있으면 소유주한테 어떤 식으로든 느낌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반지를 만지작거리기 한참.

별안간 반지가 진동하며 내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뭔지 알겠다.

마력 저장 반지구나.

일종의 배터리처럼 마력을 저장해놓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아티팩트.

요즘에는 스마트폰, 헬멧, 벨트, 안경, 방호복 등에 마력 저장을 많이 부여해서 쓴다던데 카론 이놈은 좀 앤틱한 취향이었나 보다.

'아니네. 이거 용량이 엄청 크네.'

마력을 넣어보니 생각보다 용량이 컸다.

나도 전사 계열 초인치고는 마력 용량이 많이 큰 편인데 내 마력을 다 집어넣고도 꽤 남을 정도.

완전히 3레벨이 됐을 때를 가정하면 1.5 김전사라고 하면 될까?

카론도 그 정도였을 테니 이 조그마한 반지치고는 어마어마한 물건이다.

방호복에 마력 배터리 꽂아서 들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좋았어."

하나는 건진 느낌이다.

나중에 마총 쓸 때 반지랑 같이 쓰면 좋겠지.

아무리 내가 마력 회복 관련 특성이 많아도 마총을 난사하기는 부담스러웠거든.

서걱.

카론의 머리를 베어 역시 골프백에 넣었다.

나름대로 이름 있는 초인이지만 장비는 이 두 점이 전부였다.

제 1 매립지에서 퀘스트가 발생하면 이렇다.

설정상 청소부 협회의 세 이사 중 하나가 거의 맨몸으로 잠입하고, 제 1 매립지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키는 것.

'골치 아파지겠네.'

퀘스트 진행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연계 퀘스트가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청소부 협회와 갈등하게 된다.

이 세상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완전한 현실인 만큼 심하면 더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수 없다.

이겨내는 수밖에.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끝없는 투쟁은 예약된 거였다.

"오늘처럼만 하자, 오늘처럼만."

정말로 잘하고 있다.

오늘 나 완전 멋있었다고.

누가 그 급박한 순간에 정면으로 뚫고 나갈 생각을 했겠어.

나도 아케인 서울에서 쌓은 1만 시간이 없었으면 그렇게 하진 못했겠지.

스스로를 격려하며 일어섰다.

골프백에 망가진 총과 유탄 발사기를 넣자 무게가 상당했다.

기이이잉.

수동으로 출입구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내린 석양.

이미 퇴근했을 시간인데도 공무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치고 더러워진 나를 보자 놀라면서도 반색했다.

"초인님! 드디어 끝나신 겁니까!"

최 소장도 같이 있었다.

"초인님! 괜찮으십니까? 너무 늦어지셔서 무슨 일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일이 있긴 있었죠."

"예? 그래 봤자 2레벨 변이체 아니었습니까?"

변이체만 있었으면 쉬웠지.

몸서리를 한 번 치고는 더러워진 내 몸을 가리켰다.

"샤워랑 정화부터 해야겠습니다. 퇴근은 늦겠지만 중요한 이야기니까 다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 예, 당연하죠."

"그럼요. 기다리겠습니다."

공무원들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다.

슬슬 6월 말. 해가 떨어지려면 7시가 넘어야 한다.

이 시간까지 기다렸으면 됐지 왜 더 기다려야 하냐는 태도.

나는 다 묵살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분명히 배신자가 있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공무원은 여기서도 박봉이니까.

돈 좀 찔러주고 접대도 빡세게 해주는데 누가 거부하겠어.

게임에서는 배신자의 행동이나 정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연계 퀘스트의 설정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도 굳이 내가 직접 배신자의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다.

그런 건 공무원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해.

청소부 협회와 어떻게 싸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초인님.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바로 가죠."

공무원들이 모여 있는 곳은 오염 시설 관리소의 한 회의실.

관리소장을 필두로 주르륵 앉아 있다.

그중 젊어 보이는 공무원이 주위 눈치를 살피고는 내게 말했다.

"초인님. 다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변이체들만 다 잡아주셔도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퇴근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

내가 소식이 없을 때야 일이 커질 수 있으니 발 동동 굴리며 기다렸지만, 일단 살아서 나온 걸 보니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나 보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찌이익.

골프백을 열었다.

거기서 첫 번째로 시체 강화병의 머리를 꺼내 회의실 탁자에 내려놓는다.

쿵, 소리와 함께 탁자가 울렸다.

공무원들이 기겁해서는 벌떡벌떡 일어난다.

"아니, 잠깐만. 그거 뭡니까?"

"무슨 사람 머리를······"

"아냐! 사람 머리가 아냐! 저거 변이체다!"

"변이체라고요?"

"변이체인데 왜 머리에 마력 회로가 박혀 있습니까?"

아직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그들.

해골 총잡이 머리도 꺼내고, 따로 챙겼던 마력핵과 마력칩을 전시하듯 앞에 늘어놓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리버리하면 이 막장 세상의 주민 자격이 없다.

당장 공무원들 얼굴이 심각해졌다.

"설마, 이거······"

"예. 맞습니다. 그냥 변이체가 아닙니다. 제작 변이체, 아니 개조 변이체죠."

"그렇다는 건 혹시······"

"모두 이 얼굴 알아보시겠습니까?"

카론의 머리를 꺼냈다.

퍼렇게 질려서, 혀를 깨물고 있는 얼굴.

앞서 두 머리통은 괴물 같아 보이기라도 했지 이건 그냥 사람 머리였다.

"우욱!"

젊은 공무원 몇이 입을 가리고는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쯧쯧."

관리소장이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이란. 나 때는 머리통 아니라 시체가 수십구 굴러다니는 걸 직접 치우고 그랬었는데 말이야. 안 그래? 안 계장?"

"그랬지요. 몇 년 전만 해도 난리 아니었습니까."

"그때 협회 놈들 기강을 콱 잡았어야 했는데."

"의원님들이 협회 편을 들어주셔서 어쩔 수 없었지요. 전대 회장 수완이 너무 좋았습니다."

"흐, 협회장이 바뀌어서 다행이야."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요."

말본새를 보니 알아본 모양이다.

나는 골프백에서 마력칩을 모조리 꺼내 늘어놓았다.

쪼개지고 부서진 마력칩이 적어도 수백 개 이상.

관리소장의 낯빛이 달라졌다.

"마력칩? 카론이 쓰던 마력칩이면······ 좀비는 못 만들었을 거고, 설마 망령체입니까?"

"정확합니다."

"그냥 노획하신 게 아니고, 망령체를 잡고 가져오신 거고요."

"그렇죠."

"허어······"

관리소장이 경탄 섞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카론과 변이체를 잡은 것만으로도 대단하신데 망령체까지 이렇게 많이 잡으시다니, 저희가 초인님에 대해 파악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나 봅니다."

"솔직히 운이 좋긴 했죠."

"운도 실력입니다. 제가 초인은 아니지만 초인 분들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카론이 쓰레기 같은 인간인 건 맞지만 실력 하나는 진짜죠. 카론이 작정하고 준비했을 텐데 그걸······ 후,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변이체들도 당연히 잡으셨겠죠?"

"물론입니다."

증거품으로 마력핵을 추가로 제시했다.

공무원들이 부산하게 사진을 찍고 시료를 채취했다.

아울러 마법 보관함을 가져와서 내가 준 머리통 셋을 넣는다.

관리소장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초인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사실 초인님 말고 고용하려고 했던 용병팀이 있었는데, 그 용병팀 들어갔으면 아주 개판 났을 겁니다."

잘 아네.

게임에서는 정말로 그렇게 돌아갔다.

완전무장한 카론이 제 1 매립지 던전 최종 보스.

개조 변이체로 되살아난 용병팀이 중간 보스.

이 던전을 한 번은 깨야 제 1 매립지에서 광질이 가능해졌다.

나는 이 공정이 시작되기 전에 개입한 거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소송 걸어야죠. 안 그래도 저희가 갑질 좀 당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본때를 보여줄 작정입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에이, 초인님께서 증거를 이렇게 많이 가져다주셨는데 그렇게 되겠습니까? 청소부 협회 뒤 봐주던 의원님도 실각하셔서 그 인간들이 비벼볼 데가 없어요."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거대 세력도 아니고 고작해야 협회 하나.

공중분해 되는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싱글싱글 웃던 관리소장이 별안간 얼굴을 굳혔다.

"먼저, 초인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왜요?"

"괜히 저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신 것 아닙니까. 저희가 일처리만 제대로 했어도 오늘처럼 위험한 일은 없었을 텐데······ 그리고 도망치시지 않고 일을 제대로 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알긴 아네.

관리소장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마법 상자 두 개를 가지고 돌아온다.

두 개?

하나를 여니 기대했던 마총, 흑염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요한 두 번째.

거기에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수정병이 별빛을 담고 빛나고 있었다.

공무원들이 깜짝 놀라서는 관리소장을 쳐다보았다.

"소장님! 그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

"우리 관리소에도 하나밖에 없는 물건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만. 초인님 덕에 우리 목이 남아 있게 됐다는 거 몰라? 카론 그놈, 가만히 놔뒀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 불명예 퇴직이 문제가 아니야! 우리 모두 징역 먹었을 거라고!"

암, 그러고도 남지.

카론이 계속 남아서 사고를 치고, 대괴수 변이체가 탄생하거나 대폭발이 벌어졌으면.

관리소장이 내게 공손히 마총과 성수를 내밀었다.

"약속드린 보수와 제 마음의 선물입니다. 최상급은 아니고 상급이지만 언젠가 필요하실지 모르니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쁘게 받겠습니다."

안 그래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신전 가서 사와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잘 됐지.

감사히 받아 들자 관리소장이 이번에는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요?"

"혹시 청소부 협회장에 대해 아십니까?"

"조금은 알죠."

"성격도요?"

"예. 그냥 개진상 아닙니까. 내로남불이 패시브에, 주먹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죠."

"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아마 그놈이 초인님께 앙심을 품을 겁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그렇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청소부 협회에 전달이 되거든요."

관리소장이 주변 공무원들에게 눈을 흘겼다.

공무원들은 뭐 어떠냐는 눈치.

뇌물 받고 정보 파는 게 일상화된 세상의 모습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저희랑 계약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예? 계약이라뇨?"

"한 2년 정도 저희랑 전속 계약 맺으시고 오염 시설 관리국에서 일하시는 겁니다. 관리국은 초인님 같은 능력 있는 분들을 항상 환영하거든요. 특별 채용 형식으로 하면 문제 될 것도 없지요. 2년만 지나면 청소부 협회 다 망가져 있을 테니 소나기 피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다 마음에 들면 아주 뿌리 내리셔도 좋고요. 초인님이면 관리국이 아니라 그 위에 초인청까지 올라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관리소장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관리소장은 사람 좋게 웃고 있다.

최 소장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 원래 세계에서 날 등쳐먹었던 노가다 반장처럼.

"어······ 초인님?"

최 소장이 조심스럽게 날 불렀다.

말리고 싶은 마음 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마음 반.

공무원이 된다?

청소부 협회를 피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다.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세상 공무원의 위상은 원래 세계와는 하늘과 땅 차이니까.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는 다가오는 에피소드 연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공무원이 되어 따박따박 월급 받아먹고 뇌물 챙기면서 살면 특성은 누가 키워?

적당히 강한 초인으로 성장하다가 시류에 휘말려 죽어 나자빠지게 된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래서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청소부 협회 -2-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최 소장이 내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죠. 걱정하지 마세요."

"물론 저는 초인님을 믿지만, 청소부 협회는 단검파와는 상대도 안 됩니다."

"당연하죠."

단검파랑 비교하면 굴욕이지.

청소부 협회장만 봐도 그렇다.

4레벨.

3레벨부터 진짜 초인으로 평가받고, 5레벨이 되면 원래 세계로 치면 국회의원 대우를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절대 만만하지 않다.

다른 간부들이라고 약할까?

부회장과 세 명의 이사 모두 3레벨이다.

1레벨, 2레벨은 적어도 수십 명 이상.

정면으로 싸우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어요."

"초인님······"

"이기면 그만이죠. 꼭 강한 쪽이 이기는 건 아니니까요."

"저야 초인님께서 공무원 특채 들어가시는 것보단 저와 계속 계약하고 계신 게 좋지만,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됩니다."

"방법은 있어요."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 어플을 켰다.

김포 인근을 비추는 지도 어플.

휙휙 넘겨서 동쪽으로 옮겨갔다.

"청소부 협회가 강서구에 있는 건 아시죠?"

"압니다. 어, 초인님? 청소부 협회에는 바로 쳐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큰일 나요!"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거길 혼자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되죠. 기관총 세례받고 죽을 일 있습니까? 유리한 시간에,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는 건 싸움의 기본입니다."

그럼 어디가 유리하냐.

지도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청소부 협회 연계 퀘스트는 대부분 제 1 매립지에서 시작한다.

그 이후 여러 분기가 발생하는데, 분기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곤 했다.

'그냥 기다릴 수도 있고, 간부들을 하나하나 암살해도 좋고, 협회에 쳐들어가기도 했고, 사업장을 하나둘 공격하는 방법도 있었지.'

최악은 아무 퀘스트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

게임에는 경고 하나 뜨지 않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강제 퀘스트가 뜨면서 협회장과 간부들이 초인 수십 명을 거느리고 쳐들어온다.

파티를 충실하게 키워놓았다면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게임이 굉장히 어려워진다.

현질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소장님. 건우봉이라고 아십니까?"

"건우봉이요? 당연히 알죠. 신림동 남쪽에 있는 금역이잖습니까."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요?"

"아······"

최 소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신림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대규모 마약 농장이 있다는 사실을.

또, 마약 외에도 무수히 많은 불법적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도.

건우봉을, 정확히 말하면 건우봉 금역을 점거한 세력이 무서워 말하고 다니지 않을 뿐이다.

"대충은 압니다."

"그렇겠죠. 그럼 거기가 청소부 협회 소유라는 사실도 아십니까?"

"예? 청소부 협회요? 청소부 협회가 왜 마약을 만듭니까?"

"부업이죠, 부업. 진짜는 신체 개조와 인신 매매, 신체 개조입니다."

"예에?"

"청소부 협회 뒤를 봐주고 있던 의원이 있다고 했었죠? 얼마 전에 실각했다고요."

"그, 그랬지요."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인물이 겨우 돈 몇 푼 받았다고 움직이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그 국회의원은 청소부 협회에게 주기적으로 상납을 받았습니다. 신체 개조된 어린 성노예들을요."

최 소장이 얼굴을 찡그린다.

"뉴스에서 성노예 여럿이 저택에서 발견되었다곤 하던데······ 그게 어린애들이었다고요?"

"예."

"저도 절대 깨끗한 놈은 아닙니다만 그 새끼 그거 진짜 죽일 새끼네요. 아니, 손댈 게 없어서 애들을 손대요? 신체 개조까지 하면서? 그래 놓고 집유 받아서 떵떵거리면서 잘 살겠죠? 에이, 엿 같은 세상."

창문을 내리고 가래를 탁 뱉는 최 소장.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가 말했다.

"그놈이 끝이 아닐 겁니다."

"어? 아! 그렇지요. 기껏 신체 개조 공방을 차려놓고 국회의원 한 놈한테만 상납하진 않았겠죠. 어, 일이 커지겠는데요?"

"예. 건우봉을 점령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청소부 협회 입장에선 어떻게든 일이 커지는 걸 막고 싶어 할 겁니다."

"그······ 초인님. 협회놈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납받던 놈들도······"

"그놈들까지 적으로 돌리면 안 되죠. 거래는 끊되, 비밀은 지키겠다고 마법 맹약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암요, 암요. 그 부분은 제가 처리하지요."

"아뇨. 소장님은 다른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최 소장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쳐다본다.

더럽고 역겹고 구역질나는 협상 아니냐.

그런 일을 자기가, 중개업자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는 표정.

나는 스마트폰에 머릿속 계획에 필요한 보급품을 빼곡히 적어나갔다.

[클레이모어, 대물 저격총, 거치형 기관총, 기관포, 고속 유탄 발사기, 로켓포, 대인 지뢰, 원거리 격발기, 원격 격발 폭탄, 인계철선, 고폭탄, 섬광탄, 봉인탄, 연막탄, 소이 폭탄, EMP 폭탄, CCTV, 비상 발전기, 도청기, 적외선 감지기, 레이저 감지기······]

최 소장이 내가 보낸 문자를 보곤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전쟁이죠. 청소부 협회와 싸우는 건데요."

"음······ 아, 함정을 파시려고요?"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잘 아는 지형을 선점한다.

그리고 거기에 함정을 무식하게 깐다.

청소부 협회가 무턱대고 쳐들어온다면 당할 수밖에 없게끔.

나는 아까 챙겼던 카론의 손목 보호대를 최 소장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팔면 돈이 꽤 될 겁니다. 아, 제가 받아놓은 마법 지팡이가 있는데 그것도 드릴게요. 이 돈 안에서 구해주세요. 모자라는 건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아, 마법 제어용 팔찌네요? 품질도 꽤 좋고요. 마법 지팡이는 또 뭡니까?"

"3레벨 고통 마법이 부여된 황금 지팡이입니다. 무게도 꽤 많이 나가요."

"헉, 그럼 아주 비싸게 팔리겠는데요? 알겠습니다. 아주 넉넉하게 구해 드리지요. 그런데 어디에 함정을 설치하시려는 겁니까? 아무리 경찰이 자기 구역 밖에서는 손 놓고 있어도 폭탄 막 터지고 기관총 막 긁어대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상급 기관까지 뇌물을 찔러주면 되긴 합니다만 그 정도 돈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나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우봉 금역에서 싸울 생각이거든요."

"아하!"

최 소장이 반은 감탄하고 반은 우려 섞인 탄성을 질렀다.

금역.

공간이 왜곡되고 지형이 변형된 지역.

자연히 밖에서는 안을, 안에서는 밖을 관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청소부 협회가 비밀리에 건우봉 금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자기네 비밀 시설을 운영할 수 있었지.

"건우봉 공격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예전에 단검파도 거기 공격했다가 크게 손해를 봤습니다. 그때부터 철권파한테 알음알음 밀리지 않았습니까."

"고작 단검파랑 저를 비교하시면 안 되죠."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저도 멍청하게 혼자 쳐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혼자 가도 된다.

2레벨 초인, 1레벨 초인이 여럿 있긴 해도 지금 나는 그 정도쯤 간단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

경지는 2레벨이어도 무력은 3레벨 이상이잖아.

카론을 혼자 죽여서 증명했고.

문제는 청소부 협회.

금역 안과 밖은 통신이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직접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내가 분신술 쓰는 손오공도 아니고 SOS 치는 걸 어떻게 막겠어.

손이 필요하다.

최소한, 건우봉 금역 내부 인원들이 밖으로 연락은 못 하게 할 정도 무력을 갖춘 인원이.

전화를 걸었다.

[김철권]

저번에 번호를 받아두었던 그 인간에게.

[음? 초인님?]

전화 받은 김철권은 조금 당혹해하는 목소리였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저번에 신원 시장에서 얘기는 들었습니다. 우리 애들 도와주셨다고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하하하, 그야 그렇죠. 그런데 어쩐 일이신지······]

나는 잠깐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번 계획에서 철권파는 상당히 중요한 조각이다.

건우봉을 포위하고 통신을 못 하게 해줘야 하고, 나를 대신해서 더러운 일도 처리해줘야 한다.

대신에 철권파가 가져갈 것도 있지.

"요즘 좀 어떻습니까? 독약파랑 나체파는 조용합니까?"

[후우, 조용하기는요. 사사건건 시비 걸어서 아주 죽겠습니다. 어쨌든 신림동 안으로 들어오는 건 막아내곤 있습니다만,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지금도 간부가 모자랍니까?"

[그야 뭐······ 동생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1레벨로는 모자라죠. 어떻게든 2레벨이 되어야 하는데요. 그렇다고 외부에서 영입하기도 어렵고요. 초인님도 아시잖습니까?]

사람 잘못 들였다가 조직 박살나는 건 한순간이다.

경찰에서 보낸 프락치일지, 다른 갱단에 고용된 비밀 용병일지 누가 알겠냐고.

가장 좋은 것은 내부 인사를 키우는 거지만 그게 어디 쉽나.

나는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사장님. 그래서 말입니다만, 신체 개조 공방 하나 가질 생각 없습니까?"

[신체 개조 공방이요? 생체 쪽입니까, 의체 쪽입니까?]

"둘 다입니다."

[허, 그런 물건이 있어요? 저는 당연히 기회만 된다면 가지고 싶지요. 그런데 왜 굳이 저한테 연락하신 겁니까? 초인님께도 꽤 도움이 될 텐데요.]

"불법적인 물건입니다. 제가 갖기는 좀 그래요."

[음······]

나는 사정을 정확하게 설명했다.

청소부 협회와 얽힌 것부터, 건우봉을 공략하고, 건우봉으로 청소부 협회를 유인하여 싸울 예정이라는 계획까지 전부.

김철권이 꺼림칙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청소부 협회와 싸워야 한다고요?]

"예. 단, 사장님은 건우봉 포위만 해주면 됩니다. 그다음에는 시설 뜯어가든 나중에 건우봉에서 쓰든 마음대로 하시고요. 청소부 협회랑은 저 혼자 싸웁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니까 하겠다고 하는 거죠."

[아니, 아무리 초인님이라고 해도 청소부 협회는······ 거기 협회장 4레벨인 건 아시고 하는 말이시죠?]

"압니다."

[하하, 이거 참.]

"다른 사람들한텐 알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갱단 하나 털고 마약이랑 설비 뜯어가신다고 해도 되요. 어차피 청소부 협회 그놈들 끈 떨어진 지 오래돼서 사장님한테 앙갚음도 못 해요."

[하긴 오염 시설 관리국에서 고소하면 그거 대응한다고 정신도 없을 테니······ 흠.]

혹하면서도 망설이는 기색.

"사장님. 생각해 보세요. 생체 변이와 의체 삽입이 다 되는 개조 시설입니다. 3레벨, 4레벨은 힘들어도 2레벨 강화병은 만들 수가 있다고요."

[그렇죠.]

"2레벨 간부 여럿 생기고 사장님도 어떻게든 3레벨이 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이 가십니까?"

[음······]

"지금처럼 신림동에서 아웅대는 시대가 지나갑니다. 동쪽으로는 관악구, 서쪽으로는 금천구까지 진출할 수 있습니다. 독약파? 나체파? 아무것도 아니죠. 사장님이 3레벨만 되면요. 안 그렇습니까?"

[당연한 말씀을.]

"그리고 동을 넘어서 구로 진출하면 슬슬 대외 이미지에도 신경 써야 하지 않습니까? 사장님이 마약과 매춘에는 손을 대도 인신매매와 지하 격투에는 손대지 않는 이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장에는 이익이 되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손해니까요.]

"그렇죠. 건우봉에 사장님이 찾는 해답이 있습니다. 거기, 마약 재배와 신체 개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린애들 납치해서 신체 개조하고, 성노예로 팔아먹는 게 본업이거든요."

[뭐······ 뭐라고요? 성노예?]

"같이 쓰레기 한 번 치웁시다. 쓰레기 치우고, 갈 데 없는 애들 사장님이 돌봐주자고요. 좋은 일도 하고 사장님 애들 강화도 시켜주고, 보육원에 학교 세워서 복지 일에 발 담그면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좋지요. 어떻습니까?"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럴 만하지.

김철권 본인의 트라우마 방아쇠가 당겨졌을 테니.

친동생이 없었으면 진작 자살했을지도 모르는 인생.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을 거다.

[······좋지요.]

잔뜩 억눌린 목소리.

[그딴 쓰레기들이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겹습니다. 협조하도록 하지요.]

"크게 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냥 포위만 하고, 밖으로 나오는 놈들 쏴서 SOS 못 보내게만 해도 충분해요."

[후후후. 누워서 떡 먹기지요. 내부 시설은 저희한테 다 주신다고 하셨지요? 초인님 말씀처럼 좋은 일도 하고 이미지에 실속까지 챙기는 일인데 안 한다고 하면 바보지요. 단, 청소부 협회는 어디까지나 초인님이 해결하시는 겁니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암요."

아무리 트라우마가 있어도 한 갱단의 보스다.

이득 없는 일에 미쳤다고 손을 보태주겠어?

잘못하면 청소부 협회랑 전면전 벌일 수도 있는 일인데.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나는 최 소장에게 힐끗 시선을 던졌다.

통신을 못 보내게 해도 오랫동안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정기 보고 정도는 하고 있을 테니까.

길어야 하루.

그 안에 전투 준비를 마치려면 최 소장이 준비를 잘해주어야 한다.

최 소장이 두 손가락을 폈다.

동시에 [이틀]이라고 입 모양을 보여준다.

"이틀 뒤 자정에 시작하죠."

[이틀 뒤 자정······ 좋습니다. 건우봉 금역 앞에서 뵙죠.]

칠흑이 내린 밤.

건우봉 금역을 급습했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수십에 초인도 여럿 있었지만 의미 없었다.

단 두 시간 만에 완전히 제압하고 무릎 꿇렸다.

나 혼자.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청소부 협회 -3-

탕!

총소리가 대기를 관통했다.

무릎 꿇고 엎드려 있던 놈들이 움찔한다.

나는 들고 있던 소총 개머리판을 바닥에다 대고 톡톡 두드렸다.

"죽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예, 예!"

"쏘지 마십쇼!"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얌전히 있으면 안 죽인다고."

벽에 기대어 잠깐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척척척 하고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김철권을 필두로 철권파 갱단원들이 계단을 통해 우르르 몰려온다.

"으음!"

김철권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무릎 꿇려놓은 덩치들 때문이 아니다.

아마도 간부였을, 슬러그탄 얻어맞고 머리가 날아간 강화병 계열 초인 때문에도 아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내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찬 철창.

철창마다 갇혀 있는 아이들.

어떤 아이는 고양이 눈을 하고 있고 어떤 아이는 강아지 귀와 강아지 꼬리를 달고 있다. 전신 피부가 뱀 비늘로 대체된 아이도 보인다.

신체 개조의 결과물.

강해지려고, 혹은 자기 능력을 올리겠다고 흔하게 신체 개조를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강요된 신체 개조는 명백히 불법이었다.

성인도 아닌 어린아이에게라면 더더욱.

"이 아이들입니까?"

"예. 데려가세요. 저놈들도 같이요."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김철권이 으르렁대며 눈에서 불을 뿜었다.

제압된 인원들이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박는다.

하지만 아직은 기력이 남았는지 대가리를 쳐드는 놈이 하나 있었다.

"혀, 협회장님이 아시면 네놈들······"

탕!

"히익!"

"헉!"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내가 즉석에서 머리를 날려 버리자 다른 놈들이 기겁해서는 몸을 움츠렸다.

철권파 갱단원도 적잖이 기가 죽은 눈치고, 오로지 김철권만 꼿꼿이 서서 날 쳐다본다.

"살려둘 가치 없는 놈들이니까 헛소리하면 그냥 죽이세요. 협조적인 놈만 살려두고요. 어차피 내일 지나면 다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렇지요."

김철권이 역겹다는 눈으로 경비원들을 쳐다본다.

"뭐해? 저놈들 다 묶어! 애들은 풀어주고!"

"예! 예!"

철권파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제압된 인원에게 수갑을 채우고 철창문을 연다.

아이들이 쭈뼛거리자 재촉하는 한편으로 어르고 달래며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조용히 김철권을 불렀다.

"사장님, 절 따라 오세요."

"그러지요."

건우봉 금역의 핵심 시설.

신체 개조 공방은 이곳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아까 간부놈을 죽이고 얻은 전자키를 대자 문이 삑삑거리며 열렸다.

팟!

자동으로 불이 켜지고 내부 모습이 드러났다.

"이야."

살짝 감탄하는 김철권.

그럴 만 했다.

중심부에 설치된 초대형 유리관.

오른편에는 인공 생체 증식 설비.

왼쪽에는 기계 의체 조립 장치.

그 셋을 묶는 거대한 마법진.

그리고 벽마다 빛을 뿜는 기둥 모양 마력 공급 기기.

웅웅웅.

막대한 마력 파장이 북소리처럼 심장을 건드렸다.

김철권도 느꼈는지 입맛을 싹 다셨다.

"이거 돈 꽤나 들었겠는데요."

"그렇죠? 어떻습니까. 쓸 만하죠?"

"쓸 만한 정도가 아니죠. 이거, 제대로 된 마법사와 마학자만 구해도 3레벨, 아니 그 이상까지 도전할 수 있는 설비에요."

"구한다면 말이죠."

청소부 협회는 그런 마법사와 마학자는 구하지 못했다.

카론?

아쉽게도 계통이 다르다.

시설을 개조해서 강령술 의체를 양산하는 것도 방법이 되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잘 됐네요. 알고 지내는 마법사가 있는데 연락해 봐야겠습니다."

"어떻게, 시설을 뜯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쓰시겠습니까?"

"이거 계속 말리는 느낌이 드는데······ 여기서 써야죠. 저걸 어떻게 하루 만에 뜯어갑니까."

"힘들죠."

"하지만 저희가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는 힘듭니다. 청소부 협회랑 부딪히면 저희는 바로 끝장난다고요."

"알죠. 뒤처리만 잘 부탁드립니다."

"후우, 내 참. 초인님은 정말이지 불가사의하네요. 처음 볼 땐 분명히 저보다 약했던 것 같은데."

김철권이 복잡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직접 만나는 건 이번이 세 번째.

노루 패거리와 싸운 직후, 단검파와 싸운 직후, 그리고 이번에 만난 거니까.

그때마다 빠르게 강해졌지.

거의 1레벨, 2레벨, 3레벨 아니었을까?

"하여튼 이길 수 있다는 거지요? 초인님이 지면 저희도 손해 많이 봅니다. 꼭 이기셔야 합니다."

"플랜 B 있으시면서 앓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야 뭐."

"사장님도 제가 지는 싸움 안 하는 거 아시니까 손 보태주시는 거 아닙니까?"

"사실 그렇죠. 초인님이 겉으로 보기엔 무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치밀하신 분이라는 거,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거든요."

김철권이 한 번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전자담배를 꺼내 길게 빤다.

내뱉는 숨결에서 마력광이 반딧불처럼 명멸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청소부 협회와 척을 졌으니 아예 끝장을 본다······ 이해가 안 가는 이유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청소부 협회가 무너진다고 해서 초인님께서 얻는 게 없지 않습니까. 이권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신 것 같고요. 어디 고용되신 것도 아닌데, 굳이 싸우시는 이유가 뭡니까?"

노련하면서도 날카롭게 날 탐색하는 눈빛.

김철권 입장에선 의심할 만하다.

사실 도망가면 그만이니까.

청소부 협회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어디까지나 수도권 이내.

외국으로, 하다못해 전라도나 경상도로 내려가면 청소부 협회가 어쩌기 힘들다.

끽해야 암살자나 보내겠지.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사장님. 사장님은 조직 키우는 게 가장 우선이지요?"

"그렇죠. 철권파는 제 분신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저도 비슷합니다. 단, 저는 제 개인의 무력을 키우는 게 우선입니다. 다른 전사들처럼요."

"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빨리 강해지는 이유요. 사장님이라면 어느 정도 눈치채셨을 것 같은데요."

"아!"

김철권이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왜 강해지긴. 백지 신체랑 특성 전환 때문에 강해졌지.

하지만 김철권은 여기까진 모를 것이다.

대신 [천재]니 [천살성] 같은,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 획득 증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천재와 천살성의 공통점 하나.

전투를 죽어라 치러야 빨리 강해진다는 것.

김철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씀드리자면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제가 왜 굳이 청소부 협회와 싸우려는 건지도 이해하셨지요?"

"암요, 암요. 100% 이해했습니다. 저 같아도 초인님 입장이라면 초인님처럼 행동했을 테니까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내가 천재든 천살성이든 자기를 먹잇감으로 볼 시간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해서.

대신 행동이 그만큼 조심스러워졌다.

"초인님께서 승리한다는 가정하에 뒤처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예. 건투를 빌겠습니다."

김철권이 내게 꾸벅 인사하고는 공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공방 안을 둘러본다.

깔끔하게 마감된 금속 시설에 그려진 마법진이 희미한 빛을 뿜고 있다.

마법과 과학이 어우러져 만든 풍경.

그 위에 얼룩처럼 묻은 핏자국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래! 거기다가 다 쌓아놔!"

"소장님! CCTV 고장 난 거 교체 끝났습니다!"

"연결했습니다! 이제 중앙 통제실에서 제어됩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니까! 두 배는 더 깔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전력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비상 발전기도 가져오라고 했잖아!"

"소장님! 그것까지 연결하면 전선에 과부하 걸립니다! 이거 한 달 내로 백 프로 불 나요!"

"한 달? 괜찮아! 일주일만 버텨도 돼! 닥치고 연결해!"

최 소장이 내가 주문한 보급품을 설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리 설계도를 그려줬지만 최 소장 혼자서는 부족하다.

나도 슬쩍 끼어들어 진두지휘했다.

"그 상자는 A-9 지점으로 보내세요."

"A-9······ A-9요······"

"초인님! 이건요?"

"그건 진입로에 쌓아두세요. 제가 직접 설치할 겁니다."

결국은 내가 다 마무리해야 한다.

악을 쓰던 최 소장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초인님. 이거 아침까지 다 될까요? 정기 보고가 아침 8시에 들어간다면서요."

"해야죠, 어떻게든."

"끙······"

"그리고 일 끝나면 저 친구들 데리고 어디 술집에 가셔서 하루 정도는 코 삐뚤어지게 먹여주세요."

"그야 쉽죠. 협회에 소식 들어가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청소부 협회가 언제쯤 쳐들어올까?

상황 파악을 하는 데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릴 것이다.

여기에 흩어져 있는 전력을 모으고 강서구에서 여기까지 오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빠르면 오후. 늦어도 밤.'

보급품 운반과 설치가 끝났다.

철권파도 최 소장이 데려온 인부들도 모두 떠났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시간.

"끄응!"

함정을 판다.

클레이모어를 진입로에 깔고 그 주변에 인계철선을 설치한다.

인계철선에는 수류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인 지뢰 역시 빠질 수 없다. 금역 안을 아주 지뢰밭으로 도배를 해놓았다.

요소요소에 기관총과 기관포를 놓고 원거리 격발기를 장착한다.

로켓포와 고속 유탄 발사기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은폐 엄폐하기 좋은 장소마다 도청기와 각종 감지기를 숨기고······

"후우!"

땀을 한 번 닦았다.

마력천을 파면서 얻은 [제작], [개조], [수리] 3종 세트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화력을 강화하려고 폭탄에다가 마개조를 조금 했거든.

뒷구멍으로 구해온 물건이라 고장 난 물건도 몇 개 있었고.

그렇게 함정으로 건우봉 금역을 도배하자 새로운 특성도 하나 얻었다.

[함정]

특성이 생기자 함정 설치가 더 쉬워진 느낌이었다.

더 은밀해지고, 더 정교해진 것은 덤.

그래서 이미 설치한 함정까지 싹 다 손을 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땀도 쫙 뺐지만 완성된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이상하지 않았거든.

설치한 내가 직접 봐도.

"아 참."

마지막으로 마법 욕조를 포장에서 꺼냈다.

내가 집에 설치했던 바로 그 물건.

여기에 20리터 말통에 든 물을 콸콸 들이부었다.

정확히 10개, 즉 200리터.

마법 욕조가 반응하여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은은한 마력 파장이 번지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조용히 뚜껑을 덮었다.

준비는 끝났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청소부 협회에서는 정기 보고를 기다릴 시간.

내게는 꿀맛 같은 잠깐의 휴식 시간.

중앙 통제실로 미리 이동했다.

모든 CCTV를 활성화하고, 도청기와 감지기 상태도 확인한 다음 싸구려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폭풍전야.

내 준비가 충분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

"크흐음."

청소부 협회 사옥 최상층 회장실.

말이 좋아 회장실이지 펜트하우스인 그곳.

협회장 박대엽은 정장 윗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기이잉.

청소 드론이 정장 윗옷을 받아 의류 관리기에 넣는다.

평범한 사람은 쓰기 힘든, 초고가의 청소 드론과 마찬가지로 초고가의, 청결 마법이 적용된 의류 관리기.

기분 좋게 중역 의자에 앉아 손을 뻗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고급 마법잔이 책상 위를 미끄러져 손에 들어온다.

"후후후."

바로 이 맛이지.

아침마다 출근해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정경.

통창을 통해 쏟아지는 따사로운 햇볕.

비서가 틀어놓았을 취향 맞는 클래식 음악.

코끝 혀끝을 자극하는 쌉싸래하면서도 달콤한 커피까지.

드디어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하는 성취감과 함께 불타는 정복욕이 스멀스멀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흥."

동쪽.

고개를 확 틀어 봐야만 보이는 방향.

그곳에는 청소부 협회 사옥 따위 가볍게 압도하는 마천루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그 정점.

저 멀리,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이 올라간 세 쌍둥이 건물.

강서구에서도 보이는 송파구의 초인탑.

박대엽은 초인탑을 보며 눈을 번들거렸다.

'언젠가는 입성하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박대엽의 인생 목표였다.

서울에서, 대한민국에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주인이 되는 것!

초인탑의 주인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주인이 아니고 뭐겠나.

일이 요즘 조금 꼬이긴 했지만 박대엽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오늘도 평온했어야 할 하루.

기대가 산산조각난 것은 출근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협회장님! 협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운영부장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협회장님! 저희가······ 저희가 공격당했습니다!"

"뭐? 자세히 말해 봐! 뭔 소리야!"

"건우봉! 건우봉 있잖습니까!"

"건우봉······ 아, 거기! 알지. 뭐야. 거기 공격당한 거야?"

긴장이 팍 식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조여졌던 근육이 풀어지고 잠깐 멈췄던 호흡도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박대엽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몇 년 전에도 그랬잖아. 어떤 멍청한 놈들이 양귀비밭 노리고 공격했나 보지. 적당히 이사 하나랑, 아니 이사도 필요 없지? 대외협력부에 용병 좀 고용해서 보내. 뜨거운 맛 좀 보여주라고."

"그게······ 그게 말입니다. 협회장님."

운영부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현지 모니터링 요원 통해서 확인한 겁니다만, 공격한 게 그놈이랍니다."

"그놈?"

"그······ 제 1 매립지에서 카론 이사님 죽인 놈 말입니다."

꽈아앙!

박대엽이 책상을 내리쳤다.

비싼 원목 재질에, 여러 생활 마법이 걸린 고급 중역 책상이 단박에 두 조각 난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죄, 죄송합니다."

"이 새끼! 이 씹어먹어도 시원하지 않을 새기! 카론을 죽인 걸로도 모자라 건우봉을 따먹었다고? 이 씨······"

쉬지 않고 욕설을 내뱉을 것 같던 박대엽.

별안간 몸이 딱 정지한다.

눈을 몇 번 굴리고는 운영부장을 따라 들어온 비서에게 물었다.

"잠깐만. 건우봉에 뭐가 있었지? 분명히 양귀비밭 말고도 중요한 게 있었는데?"

"그······ 백 의원님께 상납하던 거랑 암흑 시장에 돌리던 물건 만드는 공방이 있습니다."

"이런 시발!"

박대엽이 쪼개진 책상을 걷어찼다.

책상이 으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너 이 새끼는 조직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그놈이 건우봉 따먹을 때까지 모르고 있을 수가 있어!"

"사, 상황 파악 중입니다."

"이 새끼가!"

박대엽이 주먹을 꽉 쥐고 들어 올렸다.

막 내리치려는 순간, 비서가 최고급 마약 시가에 불을 붙여 내민다.

씹어먹듯이 시가를 물고는 연기를 내뿜는 박대엽.

청록색 마력광이 얼굴을 할퀴지만 운영부장은 아무 소리도 못 냈다.

"부회장이랑 이사들은?"

"부회장님은 대전 출장 중이시고, 바이퍼 이사님은 출근하셨습니다."

"에보니는?"

"그, 탐문 중입니다. 어제도 클럽에 가셨다고······"

"당장 싹 데려와!"

박대엽이 포효하듯 고함을 질렀다.

"협회가 망하게 생겼는데 뭐? 클럽? 클러어어업? 부회장도, 이사들도 싹 다 들어오라고 그래!"

"대외협력부도 소집할까요?"

"당연한 소리는 하지도 마라. 어? 부를 수 있는 용병 있으면 부르고, 놀고 있는 회원 있으면 싹 다 소집해! 싹 다!"

박대엽이 이를 갈며 허공을 주시했다.

어제 보고 받은 얼굴이 보인다는 듯이.

"김전사라고 했지."

오른쪽 뺨에 상처가 있는 애송이.

요즘 잘 나가는 초인이라고?

그래봐야 저레벨이다.

잘 쳐줘도 3레벨. 이제 겨우 초인 대접을 받는 어린놈이라고.

"죽여버린다!"

꽉, 손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었다.

박살 난 중역 책상을 정리하겠다고 날아다니던 청소 드론.

그 비싼 물건이 그대로 아작이 났다.

꽈드득!

유성검 -1- [무료 연재 마지막]

유성검

뙤약볕과 함께 그들이 왔다.

흐물흐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뚫고 하나둘 존재가 고정된다.

방탄복, 방탄모, 소총으로 무장한 자들.

[청소부 협회]

[대외협력부]

두 문양이 시선을 끈다.

지금은 정오를 살짝 넘긴 시점.

벌써 7월 초.

이글거리는 태양광이 드넓은 건우봉 금역, 원래는 작은 봉우리였으나 평야처럼 왜곡된 이 공간을 불태우고 있다.

도청기를 통해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들렸다.

"뭐야, 여기 왜 이래?"

"다 어디 갔어?"

"썅. 싹 다 불태웠네."

원래 건우봉 금역엔 대규모 마약 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걸 내가 다 불태워 버렸지.

당연한 거 아냐?

양귀비는 품종에 따라 다르지만 키가 1.5미터까지도 자란다. 그거 그대로 놔두면 시야에 방해가 된다고.

"전진! 전진해라!"

어쩐지 꾀죄죄한 몰골의 양복쟁이가 외쳤다.

청소부 협회원들이 전진한다.

불타버린 밭을 보고 긴장했는지 바짝 몸을 낮춘 상태.

그러나 그뿐이다.

탐지 계열 능력을 발휘한다거나 정찰 드론을 날리지는 않고 그냥 걸어오고 있었다.

진입로를 따라서.

내가 클레이모어를 설치한 바로 그 지점으로.

"흥."

선두 무리가 클레이모어 설치 지점을 막 지났을 때.

꾸욱, 하고 붉은 단추를 눌렀다.

내 손 아래에서 쇳소리가 들리고 모니터 안에서 붉은 화염이 푸욱 일어났다.

꾸우웅.

그리고 진동.

흙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오르고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아악!"

"으아아아!"

"뭐, 뭐야!"

"폭탄이다! 폭탄이 있어!"

모니터 안에서 사람들이 메뚜기떼처럼 뛰쳐나갔다.

춤추듯 몸을 꿈틀대다 쓰러지는 사람.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하는 사람.

공포에 무너져 아무 데나 총을 갈기는 사람.

나는 냉정하게 모니터를 쳐다보며 원거리 격발기를 쥐었다.

살짝 조준간을 맞춘 다음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자 한 줄기 선이 모니터 안을 가로질렀다.

직후 폭발!

또, 투타타타 울리는 경쾌한 총소리!

로켓탄과 기관총 세례였다.

진입로에서 살짝 들어온 지점.

원래라면 양귀비와 대마초 밭이 시작되는 장소.

바로 거기를 향해, 협회원들이 모인 곳을 향해 집중 사격이 쏟아졌다.

"후퇴! 후퇴!"

"뒤로 물러나!"

"금역 밖으로 나가라!"

"도망쳐!"

미리 세팅한 화력은 굉장했다.

고작해야 수십 명에게 로켓탄 여러 발, 기관총 몇 정을 동시에 쏟아부었으니까.

아쉬운 점은 그 와중에 초인들이 방어막을 만들었다는 점.

클레이모어로 선발대는 확실히 전멸시켰고, 이후 공격으로도 피해를 좀 줬지만 치명적이진 않았다.

'거의 다 초인이네.'

대부분 1레벨이고 2레벨이 드문드문 있는 수준이지만 확실히 그렇다.

내가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아지랑이가 일렁거리더니 몇 명만 안으로 들어왔다.

"어?"

슈우욱!

선두에 선 여자가 휴대용 미사일을 발사했다.

발사는 아무렇게나 한 것 같은데, 공중에서 궤도가 비비 꼬이더니 내가 설치한 기관총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새 좌표를 땄나?

아니면 초능력?

자세히 보니 둘 다인 것 같다. 의수를 장착한 강화병 초인이 미사일에 의수를 꽂아 좌표를 입력하고, 여자에게 주면 여자가 자기 기계 눈을 조작한 다음 미사일을 쏘고 있었다.

조금 전 써먹었던 기관총과 로켓포가 모조리 무력화되었다.

그다음에야 청소부 협회가 다시 들어온다.

모래 포대를 잔뜩 짊어지고서.

아예 진지를 구축한 다음 방어막 발생 장치까지 설치하고, 푸른 방어막을 만든 후에 자리를 잡았다.

"와, 씨······"

저 정도로 준비를 했다고?

협회장 그놈, 멧돼지 같은 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장난 아니네.

아까 봤던 꾀죄죄한 양복쟁이가 확성기를 들고 나왔다.

"김전사는 들어라!"

내가 여기 있는 걸 눈치챈 모양.

"당장이라도 항복해라! 항복하면 우리 관대하신 협회장님께서 자비롭게 처분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니 당장 항복해라! 항복하지 않으면 장담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널 죽인 다음 언데드로 되살려 영원토록 불에 타는 형벌을 내릴 것이다!"

거 무섭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진입로와 다른 구역의 함정을 머릿속에서 상기했다.

한참을 떠들던 양복쟁이.

오래가진 않았다.

입구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청소부 협회 본대가 진입한 까닭이다.

"뭐 하고 있어?"

특히 눈에 띄는 한 남자.

중년. 덩치가 크다.

양복을 입었는데 얼마나 근육이 우락부락한지 찢어질 것 같다.

눈 하나는 마법 안구이고 양손에 강철 장갑을 끼고 있었다.

박대엽.

청소부 협회장.

전사 계열 4레벨 초인.

그 뒤를 따라 긴 칼을 늘어뜨린 남자, 흑표범 닮은 여자와 벙거지를 눌러쓴 꺽다리가 들어왔지만 시선이 가질 않는다.

그만큼 박대엽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혀, 협회장님!"

양복쟁이가 허리를 굽혔다.

"공격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빨리해라."

"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방열!"

어? 방열?

협회원들이 플라스틱 상자를 착착 늘어놓았다.

거기서 시커먼 원통과 지지대, 원반을 꺼내더니 차근차근 조립해 나간다.

뭐야!

저게 왜 여기서 나와!

"박격포? 장난하나."

욕이 저절로 나왔다.

분명히 숙련된 움직임은 아니었다.

속도는 느렸고 조립하는 도중에도 설명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나는 조이스틱형 원거리 격발기를 쥐었다가 풀었다.

'이걸론 안 돼.'

로켓탄을 날려봤자 방어막에 막힌다.

철갑탄을 준비했으면 방어막을 뚫고 내부까지 타격할 수 있지만, 내가 준비한 건 모조리 고폭탄이니까.

방법은 하나.

나는 저격총을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대물 저격총이라면 방어막을 관통할 수 있다.

최소한 하나는 황천에 보낸다는 뜻.

하지만 청소부 협회라고 당하고 있을 리는 없지.

아예 참호를 파고 틀어박히든, 방어막을 몇 겹 더 치든 할 것이다.

삼중 방어막만 되어도 저격 따위로는 재미를 볼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망설이는 중에도 청소부 협회는 착착 단계를 밟아 나갔다.

"방열 끝났습니다!"

"바로 포격 시작해! 진입로 위주로 포탄 날리고, 포탄 남으면 밭이랑 건물에도 마구 쏴!"

"예!"

"로켓탄! 로켓탄 가져온 거 있지? 로켓탄 다룰 줄 아는 놈들은 보이는 창문마다 쏴버려! 안에도 함정이 있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박대엽 협회장도, 부회장도, 두 이사도 젖히고 지휘하는 남자.

꾀죄죄한 양복쟁이.

무심코 저격총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시작되었다.

퐁! 퐁! 퐁!

도청기를 통해 들리는 맥빠진 발사음.

슈웅! 슈웅!

더불어 로켓포 발사하는 소리.

발사음은 순차적으로 들렸지만 폭음은 동시에 터졌다.

꽝! 꽈과광! 꽈르릉! 쿠우웅!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다.

바깥에서 들리는 폭발음과 건물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 소음이 삼중주를 이루며 내 고막과 뼈를 한꺼번에 두들겼다.

푸르르르.

건물 가장 깊숙이 있는 통제실.

벙커버스터라도 얻어맞지 않는 한 안전한 곳.

그런데도 벽과 천장이 위협적으로 흔들린다.

머리 위에서 먼지가 쏟아진다.

전선을 건드렸는지 화면 몇 개가 꺼졌다가 복구된다.

번쩍! 꽈르릉!

한 차례 홍역이 지나갔는데도 바깥에서 섬광이 터진다.

내가 설치한 함정들이 망가지면서 내는 폭발이었다.

클레이모어가, 대인지뢰가, 인계철선에 달아놓은 수류탄이,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속이 쓰린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교한 포격은 아니야.'

방어선을 포격으로 무력화시키고 돌격하는 건 보병-포병 협동의 기본 전술.

그러나 자세히 보면 포탄 탄착점이 제멋대로다.

정교하게 구역별로 무력화시키는 게 아닌, 아무렇게나 쏘고 보는 것.

이건 지휘관인 양복쟁이는 어쩔지 몰라도 포병들은 전술 이해도가 극도로 낮다는 증거였다.

그럼 정해졌다.

나는 저격총을 들고 통제실을 나왔다.

또다시 포격이 날아오고 로켓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은 깨끗한 옥상.

난간에 저격총을 거치하고 노리쇠를 당겼다.

빼애애애앵!

진지 뒤편에 설치된 빨간 기둥이 뾰족한 경고음을 내뱉는다.

어쭈, 위험 감지기까지 가져오셨어?

"협회장님!"

"위험합니다!"

"협회장님을 보호해라!"

귀에 낀 인이어를 통해 도청기 소리가 들린다.

덩치 큰 박대엽을 둘러싸는 덩치들.

그러나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박대엽이 자기 경호원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니까.

우연이었을까?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처럼, 혹은 사자처럼 부리부리한 눈.

십자 조준선 안에서 박대엽이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박대엽이 입을 비튼다.

쏴 보라는 듯 오만한 웃음.

나는 잠깐 박대엽을 주시하다가 살짝 손을 틀었다.

[조준][사격][집중]

[밝은 눈][민감][은신]

십자 조준선에 전혀 다른 얼굴이 들어온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흐린 인상의 남자.

몸에 걸친 것은 꾀죄죄해 보이는 회색 양복.

청소부 협회를 진두지휘하고 있던, 조금 전에도 박대엽을 보호하라고 소리친 인물.

쏘았다.

따아앙!

묵직한 한편으로 날카로운 소리.

양복쟁이가 확 젖혀진다.

그리고 뿌려지는 핏물.

허수아비처럼 쓰러졌을 때는 이미 양복쟁이의 머리통이 사라진 다음이었다.

저격 성공.

급히 저격총을 거두고 자리에서 이탈했다.

건물 안으로 복귀하고 철문을 닫은 직후, 등 뒤에서 꽝 하고 폭발이 터졌다.

"성격 급하기는."

여기로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벽까지 내린 다음 복귀.

모니터를 통해 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박대엽이 주먹질을 하며 버럭버럭 화내는 중이고, 협회원들은 잔뜩 주눅 들어 있다가 하나둘 소총을 든다.

이어 전진하기 시작.

역시 양복쟁이를 저격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좋았어."

나는 저격총 조준경에 일부러 눈을 가져갔다.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십자 조준선 중앙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저격] 특성.

지금 써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아쉽다.

뭐 어때.

어떻게든 이기면 그만이지.

꽈앙!

"으아악!"

"어억!"

"지, 지뢰다!"

어설프게 밭을 헤치고 오다가 대인지뢰에 걸린 모양.

평범한 발목 지뢰도 아니다.

도약형 대인 지뢰다.

살상 반경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물건.

대충 봐도 열 명 가까이 휩쓸린 듯했다.

지뢰 탐지기 없이 대충 몸만 들이밀면 당해야지, 암.

"빌어먹을! 이 간사한 쥐새끼가!"

"협회장님! 고정하십쇼!"

"야! 멍청한 놈들아! 그냥 폭탄 던져서 길 뚫고 거기로만 가! 아까 이 부장이 포탄 날려서 함정 제거하는 거 봤잖아!"

"예! 협회장님!"

협회원들이 어설프게 수류탄을 던진다.

적당히, 이쪽이다 싶은 곳으로, 줄을 지어서.

덕분에 클레이모어 두 개가 터지고 숨겨 놨던 수류탄 더미도 작살 났지만 그게 뭐 어때?

좁은 길로 옹기종기 모여 진군하는, 그것도 각도 맞춰서 정문으로 진입하는 그들을 향해 원거리 격발기를 발동시켰다.

투투투투투투!

정문 뒤에 숨겨놓은, 정문에 미리 구멍을 내고 까만 천과 플라스틱판으로 가려놓은 20밀리미터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기관포 중에선 위력이 약하다고 해도 기관포는 기관포.

기차놀이 하듯 전진하던 협회원들이 가볍게 찢어져 버렸다.

"크아악!"

"으흡!"

"으어억!"

"사, 살려줘!"

그 결과는 말로 표현하기 끔찍할 지경.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협회원들 얼굴에 저릿한 공포가 깃들었다.

"이이익!"

박대엽이 그 멀리서 로켓탄을 손으로 집어던졌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로켓탄이 일직선으로 날아와서 기관포에 정확히 박힌 것.

거기다 신관이 정확히 발동하여 폭발하고 기관포를 끝장내 버린다.

"오오오!"

"역시 협회장님이십니다!"

"십만 청소부의 희망!"

"협회장님만 믿겠습니다!"

박대엽이 얼굴을 찡그린 채 주위를 돌아본다.

공교롭게도 아까 양복쟁이가 서 있던 지점.

양복쟁이야말로 청소부 협회의 브레인이었던 모양.

꿩 대신 닭이라고 부회장, 긴 칼 늘어뜨린 남자를 보자 부회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모두 들여보내시죠. 협회장님."

"흠. 희생이 크지 않을까?"

"건물 안에서는 설치할 함정이 적습니다. 들어가는 방마다 수류탄이랑 섬광탄 하나씩 까고 들어가면 되지요. 이 부장이 수류탄과 섬광탄은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서울대 나오고 똑똑한 새끼였는데······ 쯧! 좋아. 그렇게 해."

협회원들이 몰려든다.

벌써 반으로 줄어든 숫자.

그래도 1백은 넘는 머릿수.

나는 저격총 대신 자동 산탄총을 들고 일어섰다.

철컥.

모니터 안.

분주히 움직이는 협회원들.

그런데 익숙한 얼굴 두 개가 안 보인다.

에보니와 바이퍼.

박대엽을 따라 건우봉 금역에 진입했던 이사 둘.

'진짜는 그 둘이지.'

요란하게 폭탄을 터뜨리며 들어오는 협회원들은 눈속임이다.

성동격서라고 할까?

청소부 협회 세 이사는 모두 어둠과 친숙하다.

잠입에 일가견이 있다고.

끼이익.

문을 열고 통제실 밖으로 나왔다.

전장으로 택한 곳은 엘리베이터 앞.

내가 있는 5층에서는 가장 넓은 장소.

산탄총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린다.

왼손은 왼쪽 허리 성검 자루에 얹어 놓았다.

가슴 안쪽 주머니에 숨긴 마총이 든든한 느낌을 선사한다.

쿵······ 쿠웅······

쉬지 않고 올라오는 폭발음.

그러나 내 주변만큼은, 내가 서 있는 복도만큼은 기이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똑딱똑딱.

복도 끝 괘종시계 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지경.

땀이 턱 끝에 맺히고 입이 바싹 말라올 무렵.

내가 기다리던 손님들이 드디어 방문했다.

꺾어지는 통로 뒤에서, 또 그림자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둘.

에보니와 바이퍼.

"어머, 기다리고 있었어?"

에보니가 흑표범을 닮은 눈을 번들거렸다.

끼기긱.

반면 말없이 독화살을 팔뚝 쇠뇌에 장전하는 바이퍼.

말이 필요 없었다.

바로 산탄총을 난사했다.

유성검 -2- [유료 연재 시작]

투투투투퉁!

탄창 하나를 몽땅 비웠다.

총염이 세상을 할퀴었다.

"2레벨 주제에!"

벼락같은 공격이었지만 에보니는 콧방귀만 뀌었다.

몸을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뒤로 눕히더니 그대로 미끄러지며 내 전면에서 벗어난다.

덕택에 총알 세례는 허공만 갈랐다.

동시에 허리에 찬 쌍권총을 우아하게 들어올렸다.

타타탕!

총구를 뛰쳐나온 화염이 나를 덮친다.

피할 수는 있었다.

내게도 회피 특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괜히 요란하게 움직이는 대신 나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다.

[마력 방어막][마력심][방어]

[인내][맷집][집중]

에보니가 겨눈 머리와 복부.

두 곳을 포함하게끔 마력 방어막을 전개하고 방어까지 사용했다.

"어엇?"

에보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퍼펑!

마력 방어막에 막힌 총알이 폭발한다.

한 땀 한 땀 폭발 마법을 새겨넣은 마법 총알.

수류탄 정도 화력만 됐어도 위험했겠지. 하지만 권총에 각인한 마법이라 한계가 있었다. 그저 화염만 휘몰아쳤고, 당연히 내 마력 방어막과 방어를 둘 다 뚫진 못했다.

슈욱!

이때, 내 왼쪽 옆구리를 뜨끔한 감촉이 자극했다.

에보니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어때?"

바이퍼가 사각에서 독화살을 날린 것.

총이 아니라 굳이 쇠뇌를 쓰는 초인답게 치명적인 일격이다.

화살에 강력한 독과 마약을 합성한 극약이 묻어 있으니까.

철컥.

그러나 무시.

동맥을 타고 뇌로 올라오는 약 기운을 씹어버리고 탄창을 교체했다.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산탄총을 겨누자 에보니가 질겁해선 몸을 뺀다.

"뭐, 뭐야! 왜 효과가 없어!"

왜 없긴.

정화 특성 때문이지.

모든 약 기운을 해소하진 못했지만 정화로 일단 꺾어놓고 마약 저항 특성만 맷집 대신 장착했다.

독이야 뭐, 나중에 해독해도 되는 거고.

투웅! 투웅! 투웅! 투웅!

이번에는 난사하지 않는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쏜다.

그사이 내 옆구리와 등에 화살이 날아왔지만 방어막으로 막았다.

"흐······"

바이퍼가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잇소리를 내며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에보니는 뒤로, 옆으로, 다시 뒤로, 그래서 내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이익!"

에보니가 허리에서 수류탄을 하나 까서 던졌다.

같이 죽자고?

그럴 여자가 아니지.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산탄총을 마저 쏘았다.

쩌어엉!

눈앞에서 작렬하는 수류탄.

아니, 섬광탄.

생긴 건 수류탄이었는데 내용물은 섬광탄이었나 보다.

태양이 내려온 듯 무지막지한 광량이 쏟아졌다.

아울러 뾰족한 고주파음이 공성 병기처럼 내 고막을 관통했다.

정신이 아찔해지지만 견뎌냈다.

순간적으로 [결의] 특성을 장착한 덕분이다.

내가 계속 쓰고 있는 고글이 잘 막아주기도 했고.

'놓칠 수 없지.'

바로 코앞에서 섬광이 터져서일까?

일순 세상이 허옇게 보이긴 한다.

하지만 하얀 세상과 유독 대비되는 그림자, 흑표범처럼 유려한 곡선의 까만 인형이 재주를 넘으며 뒤로 도망치는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했다.

처음부터 내가 유도했던 그 자리.

똑딱똑딱 소리를 내는 괘종시계가 서 있는 지점으로.

딸깍.

주머니에 손을 넣어 격발기 단추를 눌렀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초신성 번쩍이듯 불길이 터져 나왔다.

시뻘건 화염이 단숨에 검은 그림자를, 에보니를 집어삼켰다.

내가 엎드리기 무섭게 고통에 찬 비명이 터졌다.

"아아악!"

괘종시계에 은밀하게 설치했던 특제 소이 폭탄.

그것도 마법 백린.

이거 하나에 10억을 넘게 쓴 보람이 있다.

"에, 에보니!"

거의 복도 전체를 휩쓴 화염.

바이퍼도 낭패한 모습이다.

항상 입고 다니는 망토를 휘두르자 마법진이 반짝이며 화염을 떨쳐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낭패한 모습조차 에보니에 비교하면 별것 아니었다.

에보니가 미친 것처럼 몸을 털며 벽을 연거푸 들이받았다.

"뜨, 뜨거워! 아아악! 아아아악!"

레이디께서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면 고통을 덜어드리는 게 인지상정.

전력으로 몸을 띄웠다.

도약하듯 일어나며 성검을 뽑아든다.

치켜든 성검 표면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비친다.

벌써 눈도 코도 입술도 타버린, 아직도 불이 피부를 파고들며 불사르고 있는 에보니.

뒤늦게 날 목격했지만 아무것도 못한다.

권총도, 비장의 무기도 전부 떨어뜨린 채 발광하며 벽에다 몸을 비비적거릴 뿐이다.

쌔액!

참격!

깔끔한 호선이 에보니를 가로질렀다.

근육질이지만 가녀린, 확실히 미인이다 싶은 목선을.

에보니가 정지했다.

딱딱하게 굳어서는 입을 헤- 하니 벌린다.

그것도 잠깐.

곧 혈선이 그어지면서 머리와 몸이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크윽! 에보니!"

바이퍼가 뒤늦게 분노한다.

촤르륵! 착!

팔뚝 쇠뇌에 부가 부품을 덧붙여 X자 마법 쇠뇌를 만들고, 거기에 마법 화살을 메긴다.

X자 몸체와 화살에서 심상치 않은 마력 파장이 번졌다.

성검을 들고 바이퍼를 마주 보는 나.

아직도 복도 전체에 화염이 넘실거린다.

나도, 바이퍼도 불길에 휩싸여 있다.

자연스레 바이퍼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지고 손을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 나는 평온했다.

왜?

화염 저항 때문에.

또, 인내 때문에.

저벅.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바이퍼의 동공이 쭈욱 확장되었다가 수축했다.

슈우욱!

파공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아온다.

맞았으면 반드시 내 마력 방어막과 방호복을 관통하고 몸에 꽂혔을 마법 화살.

맞지 않았다.

집중하고 있다가 바이퍼가 방아쇠를 당긴 순간, 회피해서 흘려보냈거든.

마력 방어막 표면이 좀 긁히긴 했지만 이쯤이야.

"이거나 먹어."

몸을 피한 직후 수류탄을 굴리듯이 던졌다.

이것마저도 투척 특성을 활용해서.

안전핀은 물론 안전손잡이도 제거하고 속으로 1.5초를 센 다음이었다.

바이퍼가 어떻게든 차려고 발을 들 때 수류탄이 터졌다.

꽝!

초인이건 뭐건 현대 문물 앞에선 평등한 법.

3레벨부터 진짜 초인이니 뭐니 하지만 가랑이 아래에서 터진 수류탄을 막는 건 방어 전사도 힘들다.

나는 이미 엎드려 있었다.

온갖 마력 회복 특성에 마력 방패를 활성화해서는 머리 앞을 보호하고 있었다.

투두둑!

그러고도 파편이 마력 방패를 관통하여 내 헬멧을 두들겼다.

헬멧을 안 썼으면 두개골에 구멍이 송송 뚫렸겠어.

"흐."

하지만 이겼다.

바이퍼는 고깃덩이가 되어 숨통이 끊어져 있었다.

둘 다 카론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초인이지만 쉽게 이겼다.

내가 수십 억을 써서 준비한 전장에서 싸웠으니까.

카론 때와는 정반대로.

레벨 차이 난다고 둘이 날 너무 얕보기도 했고.

"후으읍, 후읍."

마음 놓기에는 이르다.

이제 5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진짜는 곧 닥칠 부회장이고, 최후에 대면할 박대엽 협회장이다.

[에인헤랴르 연공법][마력심][마력 회복]

[상처 회복][재생][활기]

모든 특성을 회복 계열로 바꿨다.

연거푸 심호흡을 하며 마력과 상처를 회복한다.

마법 백린탄도 효력을 다했는지 푸들푸들 꺼졌다.

아직 방호복에 붙어 있는 불꽃을 털어내고 잠깐 벽에 기대어 섰다.

'힘들다.'

방호복 위에 입었던 츄리닝은 다 타버린 상태.

표면이 엉겨 붙은 방호복과 접이식 헬멧만 장착하고 있었다.

츄리닝 속에 숨겼던 마총도 달랑달랑 떨어질 것 같아서 허리춤에 대충 찔러넣었다.

산탄총 재장전까지 마친 다음 복도 밖을 주시했다.

쿠웅······ 쿠우웅······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고작 몇 분 후.

숨을 겨우 돌리고, 상처와 마력을 채 회복하지도 않은 시점.

쾅!

계단과 통하는 문이 열렸다.

수류탄이 들어오면 냅다 쏴 갈길 생각에 산탄총을 조준하고 있는데, 들어온 것은 엉뚱하게도 한 남자였다.

전신을 기계로 개조한, 눈만 생체 눈이고 두 팔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큰 칼로 바꾼 남자.

청소부 협회의 부회장.

[R 사이보그]

산탄총은 의미가 없다.

몸통을 맞추면 튕기고, 유일하게 생체인 눈도 투명 고글로 보호하고 있으니까.

부회장이 나를 쓰윽 훑어보았다.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청소부 협회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놀랍군."

귀로 들으니 확실히 기계음에 가까운 목소리다.

사람이 말하는 게 아니라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 같다.

"에보니와 바이퍼, 그 둘을 이리 간단히 쓰러뜨릴 줄이야."

부회장이 시체 두 구를 훑었다.

불타고 목이 잘리고 폭발을 뒤집어써 처참하게 변한 시체.

애초에 둘의 성향, 특성, 능력을 다 아는데 이렇게 이기지 못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나는 산탄총 노리쇠를 당겨 철컥 소리를 냈다.

"너도 저렇게 될 거다."

"후후. 나를? 그럼 쏴보시지."

부회장이 느긋하게 자세를 취했다.

왼손은 비스듬하게 하늘로, 오른손은 반대편 땅으로.

사마귀가 칼날 팔을 크게 벌린 듯한 모습.

아울러 따라온 협회원들이 일제히 총을 들어올린다.

나도 산탄총을 부회장에게 겨누면서 왼손을 살짝 움츠렸다.

원래대로라면 총열 덮개를 잡고 있어야 할 왼손.

지금은 아니었다.

대신 작은 격발기 하나를 쥐고, 총열 덮개는 그저 지지하고만 있었다.

그 상태에서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한 가지 묻자."

"뭐냐?"

"여기 진입하면서 수류탄은 왜 안 던졌지?"

뭔 소리 하냐는 듯 쳐다보는 부회장.

그리고 협회원들.

내가 여기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왜 수류탄 던지냐는 눈치.

폭탄 함정은 발동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랬다간 나까지 휩쓸릴 테니.

하긴 그렇긴 하지.

일반적인 폭발류 함정이라면.

"니들 진짜 멍청하다."

꾹, 격발기를 눌렀다.

팟!

무형의 파장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마력 파장은 아니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그것.

단, 초인이 아닌 사람은 감지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하는 힘.

복도에 타닥타닥 전깃불이 튀었다.

시야를 밝혀주던 형광등이 모조리 꺼져버리고 삑삑삑 경고음이 울렸다.

내 주머니에서도, 협회원들 주머니에서도.

스마트폰이 일순 고장 난 까닭이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진짜 목적은 부회장이었다.

파장을 뒤집어쓴 즉시 부회장이 꺽꺽대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끄어어억!"

눈을 까뒤집고 엎어지는 부회장.

기세 좋게 들었던 팔이 볼품없이 늘어지고 다리가 제멋대로 돌아간다.

몸통에서 기계 촉수들이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

협회원들이 기겁하여 부회장을 살폈다.

"부, 부회장님!"

"괜찮으십니까!"

EMP 폭탄 맛이 어때?

물론 기계 의체에 EMP 반사 처리는 했을 것이다. 어디서 싸구려 의체를 가져다 삽입하진 않았을 테니.

그래도 한계가 있다.

반사 처리 따위 고용량 EMP를 때려버리면 그만이라고.

아까 마법 백린이 10억짜리라고 했지?

이것도 10억짜리다!

"그래서 물어봤잖아."

오른손 검지에 힘을 주었다.

"수류탄 왜 안 던졌냐고."

투투투퉁!

연사로 긁었다.

EMP 폭탄이 매설된 문틀 아래 서 있던 협회원들이 우스스 쓰러진다.

추풍낙엽이 따로 없었다.

막 부회장에게 시선을 돌린 상태라 협회원들은 대응하지 못했다.

쏘면 쏘는 대로 갈기면 갈기는 대로 피를 뿌렸다.

"끄아악!"

"커헉!"

"사, 살려줘!"

"으어어억!"

다채로운 비명이 울렸다.

수십 명도 넘는 협회원들이 전멸한 것은 고작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탄창 하나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뒀다.

역시 근거리에서는 자동 산탄총이 최고라니까.

"크아악! 이노옴!"

부회장이 노호하며 달려든다.

역시 좋은 의체를 썼다.

EMP 폭발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뒤집어썼는데 벌써 움직이는 걸 보면.

채애앵!

번뜩이는 칼날이 날카롭다.

나는 산탄총을 거꾸로 쥐고 개머리판으로 칼날을 쳐냈다.

따당!

"웃!"

부회장이 크게 한 번 휘청인다.

그 틈을 타 성검을 뽑은 후 찔러넣었다.

일점!

부회장도 역시 만만하진 않다.

몸을 반쯤 기울여서 기계 몸통으로 성검을 튕겨냈다.

성검이 거칠게 긁고 지나가 흠집이 길게 남았지만 어쨌든 치명상은 아니다.

부회장이 몸을 다잡으며 외쳤다.

"그깟 어설픈 칼질로 날 이길 것 같으냐!"

어느새 EMP 후유증에서 많이 벗어난 모습.

확실히 강하긴 해.

전신을 기계 의체로 갈아버린 건 확실히 사기다.

[섬광]을 쓰지 않는 한 검으로 부회장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지.

부회장은 기계 의체를 입어 사이보그가 된 대신, 약점 몇 개가 생겼거든.

왼손으로 권총을 뽑았다.

마총 흑염.

왼손 검지를 방아쇠에 넣자 자연스럽게 마력 저장 반지가 마총과 접촉한다.

우우웅.

기다렸다는 듯 길게 울음을 터뜨리는 흑염.

총신에 새겨진 마법진이 음울한 빛을 토했다.

총구에는 검은 불꽃이 맺혀 은하수처럼 소용돌이쳤다.

부회장의 눈이 흔들린다.

유일하게 생체인 그 부위가 폭풍우에 휘말린 나뭇잎 배처럼 격랑을 일으킨다.

"잘 가라."

쭈웅!

일직선으로 발사된 묵광.

삐걱거리는 몸 탓에 피하지도 못 했다.

부회장이 흑염을 제대로 덮어썼다.

"끄아아악!"

마도과학 의체는 기본적으로 마법으로 움직인다.

흑염은 마력의 불길, 그 자체.

자연히 의체를 기동하고 유지하는 마법을 불살라 버렸다.

부회장이 길게 울부짖고, 흑염에 휩싸인 채 발광을 했다.

아까 에보니가 그러했듯이.

천천히 다가갔다.

부회장이 내게 손을, 그 큰 칼을 내민다.

최후의 발악이었을까?

아니면 살려달라고 비는 거였을까?

관심 없다.

푸욱!

눈을 찔렀다.

성검을 거꾸로 쥐고 체중을 실어 박아넣었다.

부회장이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기름기 섞인 마력 용액이 뚝뚝 떨어지고, 꼿꼿하던 고개도 떨어뜨리고 만다.

"후."

9부 능선이 코앞.

시체를 적당히 밀어놓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고속 유탄 발사기를 짊어진 채로.

퉁퉁퉁퉁!

"으억!"

"으아아!"

건물 앞에 모여 있던 청소부 협회.

무방비하게 서 있던 그들에게 유탄 수십 발을 먹여주었다.

폭발이 연거푸 터지고 검은 먼지가 뿌옇게 치솟았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쿠웅. 쿠웅. 쿠웅.

대신 뭔가 묵직한 진동이 다가왔다.

누군가 벽을 박차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유탄 세례쯤 퍼붓는다고 죽지 않았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인간만큼은.

이 인간은 소위 말하는 진짜니까.

"허, 참."

내가 유탄 폭격을 퍼부은 그 지점.

두툼한 난간 위.

한 남자가 지상에서 솟구친 먼지구름을 뚫고 나타났다.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봐도 존재감이 승천할 지경.

박대엽 협회장.

이리저리 찢어진 정장.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낭패한 몰골.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상처 하나 없다.

유탄을 수십 발도 넘게 쏴 갈겼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말이지······"

박대엽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본다.

"살면서 별의별 꼴을 다 당해봤지만, 오늘처럼 치욕적인 순간은 없었다!"

기이잉, 척.

강철 장갑이 변형되어 손부터 아래팔까지를 감쌌다.

그것을 신호로 박대엽이 달려들었다.

한 마리 식인 호랑이처럼.

유성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