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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TO 65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5)

"2학교도 도착 완료했나요?"

"예. 조금 전에 10반까지 다 올라왔다고 연락 왔습니다."

우리 학교와 2학교 학생을 다 합치면 400명이나 되다 보니 꽤 넓은 수련원 운동장이 완전히 꽉 들어찼다.

"바로 입소식 진행하죠."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애국가 제창, 묵념에 이어 교육대장 훈화가 진행됐다.

교직 생활 1년밖에 안 됐다던데 떨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게 무척 매끄럽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긴장이 될 텐데 전날 따로 연습이라도 했나 보다.

뭐, 그래 봤자 애들은 지루해하는 표정이지만.

훈화에 이어 교관 소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1학교와 2학교 학생 대표가 나와 선서하는 것으로 입소식이 끝났다.

내가 담당하게 된 과목은 장애물 코스.

학생들 인솔 및 생활 관리는 업체 측 사람들이 하기로 했고 오전은 PT 체조라 좀 쉴까 했는데 교감에게 호출이 왔다.

왜 불렀냐고 물으니 일단 오라고 하는데 혹시 교육대장을 2학교 선생이 맡아서 기분이 상했나?

교감이 있는 교직원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벌써 이불 깔고 자는 사람도 있고 아직 점심때도 안됐는데 모여서 술을 먹는 사람들과 화투를 치는 무리까지 있다.

완전히 놀자판 그 자첸데, 누구는 교관하고 누구는 놀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감은 없어서 다른 숙소에 있나 나왔다가 복도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다.

"강 선생님은 교관 옷도 잘 어울리시네요."

"김 선생님? 선생님도 오셨어요?"

뭐지?

보건 선생은 학교에 김 선생 한 명뿐이라 당연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온다는 이야기도 따로 못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 주는 2학년과 3학년 둘 다 실습 기간이라서 학교에 애들이 없거든요."

"아, 그렇군요."

"교관 하시는 선생님들은 어제 도착하셨다고 들었어요.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누구 아버님 때문에…."

"네? 아, 아버지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원래 안 오실 계획이셨다고."

"네. 보강 수업도 거의 매일 있고 좀 쉬려 했죠."

"아버지가 강 선생님을 좋게 보셔서 그런 거예요. 이번에 A 랭크 승급 심사도 볼 수 있게 추천서도 주셨다면서요?"

"그런 보상이 없었으면 절대 안 했죠."

"그렇게 된 거였구나. 강 선생님은 장애물 교관이셨죠? 일정 보니까 오후에 하던데, 저도 구경 가도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오셔도 뭐, 별거 없을 텐데요. 그보다 교감 선생님 숙소는 어딘가요? 숙소로 오라고 해서 왔더니 안 계시네요."

"아, 2학교 교감 선생님 만나러 간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저기 맨 끝에 있는 방이에요. 따라오세요."

김 선생님을 따라 맨 끝방에 가서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방 중앙에는 교감 그리고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 1명이 있는데 아마 2학교 교감인 것 같다.

"이게 누구야, 선화 아니야? 시집 가도 되겠네."

"봉팔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애인도 없는데 시집은 무슨. 어? 강 선생도 왔나?"

분위기도 그렇고 김 선생이 교감 딸이라는 걸 알 정도면 꽤 친한 사이인가 보다.

"이쪽은 2학교 교감 마봉팔. 자네도 이름은 들어 봤지?"

당연히 알고 있다.

마봉팔은 김만동처럼 국내에 딱 10명 밖에 없는 S 랭크 헌터로 원작에도 등장하니까.

김만동과 비교해도 거의 밀리지 않는 체구지만 외형과 달리 실력 있는 마법사로 바람 계열 마법을 주로 쓴다.

주인공과 같은 학교는 아니라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신혁입니다."

"이야기 많이 듣고 기사에서 사진도 봤는데, 실물이 훨씬 낫구먼. 마봉팔일세."

먼저 손을 내밀기에 악수를 하는데… 뭐지, 이 사람?

맞잡은 손을 통해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다.

내공을 살짝 일으켜 마나를 튕겨 냈다.

"뭐 하십니까?"

"이 친구가 하도 칭찬을 하길래 테스트를 해 보려던 건데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원래 이 영감탱이가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거든. 자네가 이해하게. 악의는 없었을 거야."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아, 그건 이따가 둘이서 이야기…."

"무슨 비밀이야기길래 둘이서만 이야기해? 잠깐, 혹시 만동이 너… 우리 2학교 선생이 교육대장 맡은 것 때문에 부른 거야?"

마봉팔 교감이 옆에서 놀리는 투로 이야기하니 김만동 교감의 표정이 안 좋다.

"무슨 말을, 그런 거 아닐세."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번에 우리 학교에서 A 랭크 선생 보낸다니까 용 써 봤자 2학교는 1학교에 안 될 거라며 거들먹거렸잖아."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교감을 보니 마 교감 말이 맞는 것 같다.

설마 했는데 진짜 그 이유였다니.

"딱 보니 여기 강 선생을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B 랭크 헌터는 A 랭크 헌터한테 안 되지."

너무 거들먹거리는데….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사정을 못 들은 눈치다.

내가 양보한 걸 들었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는 말 못 할 테니까.

"그 말씀은 조금 듣기 거북하네요."

"뭐?"

"2학교 선생님들에게 이야기 못 들으셨나 보네요. 원래 교육대장 자리를 두고 결투를 해서 제가 이겼지만 2학교 선생님에게 양보한 거거든요."

"강 선생, 그게 무슨 말인가?"

"어제 서로 교육대장 하겠다고 논쟁하다가 결국 결투로 결정하기로해서 제가 나갔거든요. 2학교에서는 교육대장인 김 선생님이 나오셨고 김 선생님이랑 제가 1:1로 싸우면 그쪽이 너무 불리한 것 같아 전부 덤비라고 했는데 두 분만 더 나오셨어요. 뭐, 어쨌든 제가 이겼는데 양보해서 김 선생이 교육대장을 하게 된 겁니다."

"우리 김 선생을 자네가 이겼다고?"

"김 선생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 두 분까지 해서 동시에 1:3으로 싸웠죠. 그래도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 주려고 2학교 선생님들 다 같이 덤비라고 했는데 2학교 선생님들이 그렇게는 못 하시겠다고 해서…."

"1:3으로 싸웠는데 자네가 이겼다고? 거짓말하지 말게."

마봉팔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다.

"믿기 힘드시면 교관 중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럼 자네가 이겼는데 왜 김 선생에게 양보를 한 건가?"

"애초에 전 교육대장 자리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거든요."

"아니, 그럼 그냥 우리 학교 다른 선생에게 맡기던가 하지. 왜 2학교 선생에게 양보했나?"

내가 3:1로 이겼다니 아까보단 표정이 풀어지긴 했는데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교감이 내게 묻는다.

이 양반은 내가 실기 선생들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알면서 그러네.

"우리 학교 선생들은 패기가 없었거든요. 상대가 A 랭크 헌터라니까 겁먹어서 결투도 안 나가려고 해서 제가 나간 건데, 그래도 2학교 김 선생님은 실력 차이를 보고도 끝까지 싸우려 했고 패배하고 쿨하게 인정했거든요."

"크흠, 그랬군."

김 선생은 약간 놀란 표정이고 김만동과 마봉팔은 내가 양쪽을 다 까서 그런지 뻘쭘한 표정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저도 준비를 해야 해서…."

"아, 그래. 가 보게."

더 있어 봤자 귀찮기만 할 것 같아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장애물 교장으로 가는데 운동장을 보니 PT 체조가 한창 진행 중이다.

수련원 업체 직원들이 다들 군 간부 출신이라더니 유격 훈련이 떠오를 만큼 무척 빡빡하게 시키고 있다.

고생한다 생각하며 지나가려는데 백 선생이 다가왔다.

"강 교관님, 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는지 속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오려는데, 잠깐 봐주시면 안 될까요? 여기부터 저쪽까지 훈련 태도가 안 좋은 교육생들이 보이면 따로 열외 시켜서 뒤로 보내시면 됩니다."

귀찮았지만 백 선생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알았으니 얼른 다녀오라고 말했다.

백 선생이 떠나고 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지켜보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평소에 구보를 비롯해 체력 훈련을 많이 해서 그런지 우리 검술반 애들은 다들 잘 따라 하는… 잠깐. 진수 이 녀석 보게?

입만 뻥끗하고 소리를 전혀 안 내고 있다.

그래도 제자니 모른 척 넘어가 주려 했지만,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도 실실 웃기만 하고 소리를 안 내니 어쩔 수 없다.

* * *

입소식이 끝나자마자 교관의 지시에 따라 짐을 숙소에 옮겼다.

숙소는 TV에서 봤던 군대 침상 식으로 되어 있다.

다른 학교 애들도 있어서 살짝 어색했지만, 인사를 나눌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바로 휴대폰을 걷고 교관이 나눠 준 군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운동장에 나가야 했으니까.

그리고 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지옥이 시작됐다.

"교관이 마지막 구호 생략하라고 했는데 또 나왔네. 다들 정신 안 차리지?"

"죄송합니다!"

"그래. 오늘 종일 여기서 교관과 함께하고 싶은 여러분의 마음 잘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처음에는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숫자가 늘어가고 쌓여 가니 점점 힘이 든다.

교관들은 계속 옆에서 목소리 크게 하라고 윽박지르고.

실수할 것 같으면 나처럼 입 모양만 따라 할 것이지, 답답하다고 생각하는데… 어? 선생님이다.

아까는 다른 교관이었던 것 같은데 반가운 마음에 웃었는데 어째 선생님 표정이 안 좋다.

"거기 332번 교육생."

"쌤?"

"쌤? 332번 교육생, 수련회 기간에 쌤이라고 부르게 되어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332번 교육생, 이진수."

"수련회 기간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교관입니다. 본 교관이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332번 교육생은 왜 소리를 안 내고 입만 뻥긋합니까? 교육받기 싫습니까?"

"죄송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죄송하면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지금 교육생만 힘듭니까?"

"아…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럽니까? 뒤쪽으로 열외!"

"쌤! 아니, 교관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가서 기합받고 정신 차려서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열외!"

그래도 정이 있는데 좀 봐주지, 너무하다고 생각하며 열외 장소로 향했다.

열외 장소에 도착하자 나를 본 열외 교관이 바로 인상을 쓴다.

아까 열외 되면 편해질 줄 알고 일부러 대충해서 열외를 했는데 열외는 더 지옥이었다.

"332번 교육생 또 왔어? 우리 다시 보지 말자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죄송합니다."

"말 그만하고 얼른 저쪽에서 푸시업 시작합니다. 하나에 내려가면서 정신을, 둘에 올라오면서 차리자, 복창합니다. 하나!"

"정신을!"

"둘!"

"차리자!"

"자동."

"정신을! 차리자!"

"332번 교육생, 목소리 그것밖에 안 나옵니까?"

"아닙니다!"

"30회 더 하고 끝나면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게 무슨 수련회야….

분명 학생회 선배들이 수련회에 가면 교관들이 힘들게 하려고 해도 학교에서 하는 수업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놀다 오는 거라고 했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

끙끙대며 푸시업을 다 하고 일어서는데 울상으로 걸어오는 민희가 보인다.

"너도 쌤한테 걸렸냐?"

"땅에 머리 닿았다고. 한 번만 봐달라니까 들은 체도 안 하시더라."

"쯧쯧. 열심히 좀 하지 그랬냐?"

"지는. 자기도 열외당했으면서."

"난 소리만 안 냈지 동작은 제대로 했거든. 그리고 푸시업도 이미 끝났지. 나 먼저 간다. 고생해라."

"332번 교육생 지금 뭐 하나?"

"네? 아니 저 다 해서 가려고…."

"끝나면 교관이 자리로 돌아가랬지 떠들랬나? 설마 지금 시간 때우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른 교육생들은 지금도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데. 마인드가 잘못됐어. 332번 교육생 푸시업 30회 추가."

그런 거 아닌데… 혼자 떠든 것도 아니고.

억울했지만 민희 녀석은 어느새 엎드려서 푸시업을 하고 있다.

진짜 행동 한번 빠르다.

결국, 다시 엎드려 푸시업을 하면서 옆을 보니 김민희 이 녀석 웃고 있다.

"그러게. 다 했으면 곱게 갈 것이지 왜 사람을 약 올리고 그래?"

아주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구나.

"너 이따 보자."

"교관님, 옆에 있는 교육생이 자꾸 말 겁니다."

저… 저 사악한 녀석!

"누구? 아니, 또 332번 교육생이야?"

"여기 교육생이 먼저 웃었습니다."

"교육생이 교관입니까? 본 교관은 웃지 말라고 한 적 없습니다. 웃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라는 말도 모릅니까?"

"아니, 얘는 그런 의미로 웃은 게 아니라…."

진짜 억울하다.

"332번 교육생은 진짜 안 되겠네. 푸시업 그만하고 PT 8번 준비합니다."

피티 8번이라니….

"…차리자! 교관님, 저 30회 다했는데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112번 교육생은 자리로 복귀합니다."

으으, 김민희… 넌 내가 어떻게든 복수한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6)

점심을 먹고 드디어 나도 교관 임무에 투입됐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할 게 없다.

이론 설명을 비롯해 진행까지 직원들이 거의 다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하는 거라곤 처음에 시범을 한 번 보여 주는 것과 학생들이 안전장치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 정도밖에 없다.

학생들도 다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잘 따라 줘서 정말 편하다.

원래 시범도 직원이 했었는데 안전장치 확인도 옆에서 다른 직원이 같이 도와줘 내가 너무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시범 정도는 내가 하겠다고 했다.

헬기 레펠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까.

사실 헌터 학교 학생들에게 헬기 레펠은 큰 의미가 없다.

군대에 가면 일반 보병들도 하는 게 레펠 훈련이지만 헌터 학교 학생들은 군대를 가지 않으니까.

물론 군대 대신 정부에 소속돼 일할 때 몬스터가 포탈을 빠져나오는 일이 생기면 정부 소속 헌터로 출동하면서 헬기를 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흔하진 않을 테고.

한 번 해 본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수련원에 시설이 있으니까 하는 거다.

"강 교관님, 이론 설명 다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한 명씩 올려 보내 주세요."

무전을 보내자 학생들이 올라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은수 녀석이 긴장도 안 되는지 나를 보곤 활짝 웃는다.

진짜 헬기는 아니지만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인 11m라 다들 처음에 올라오면 긴장하기 마련인데.

다른 조였던 은서도 와서 잔뜩 긴장하다 하강했는데 은수는 오히려 기대하는 눈빛이다.

안전 장비 확인이 끝나자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하강 장소로 향하는데 준비 자세도 완벽하다.

"13번 교육생, 하강 준비 끝."

"13번 교육생은 지금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직원 하나가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며 질문을 던진다.

내일 저녁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애들이 훈련을 받았던 모습을 보여 주는 시간이 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몇몇 애들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며 촬영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오글거린다 생각하지만 뭐, 애들에겐 추억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네? 없는데요."

"아…. 하강합니다."

이번에도 망한 것 같다.

직원들이 바라는 건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이런 대답이 나와서 '그럼 부모님 사랑합니다, 크게 외치고 하강합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감동적인 상황을 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런 대답을 한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만만치 않지.

특히 우리 은수는 너무 용감하다.

은수를 시작으로 아이들을 하나둘씩 하강시키다 보니 어느덧 교육이 끝났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5시다.

시간상 이번에 오는 조가 마지막일 것 같은데 막 도착한 조들을 보니 이번에도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여학생 한 조, 남학생 한 조 이렇게 두 조를 같이 수업을 진행하는데 여학생 조에는 민희가, 남학생 조에는 진수가 있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남학생들부터 차례대로 올라왔는데 가장 먼저 진수 녀석이 올라왔다.

늘 장난기 넘치던 녀석인데 얼굴이 상당히 굳어 있다.

고소공포증이라도 있나?

"장비 확인 끝. 가서 준비해."

"332번 교육생 이진수, 하강 준비 끝."

"이진수 교육생 표정이 안 좋은데.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괜한 걱정이었나?

대답이 아주 우렁차다.

"목소리가 아주 좋아. 이진수 교육생, 여자친구 있나?"

또 시작이네.

"네?"

"없으면 말고."

"아닙니다. 여자친구는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어라?

의외의 대답이다.

"오, 그래? 그럼 좋아하는 사람 이름 크게 외치며 하강하도록."

진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곧장 아래로 몸을 던졌다.

"김민희, 좋아한다! 나랑 사귀자!"

깜짝 놀랐다.

원작에서 진수와 민희가 커플로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티격태격하기만 해서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여기서 고백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을 못 했다.

밑을 보니 아주 소란스럽다.

"강 교관님?"

"장비 확인하셔야죠."

"아, 네."

남자애들이 다 하강하고 드디어 여자애들 차례가 왔다.

두 명을 내려보내고 나니 얼굴이 홍당무가 된 민희가 올라왔다.

"17번 교육생 얼굴이 너무 붉은데, 몸 상태 안 좋아?"

옆에 있던 직원이 묻는데 아마 진수의 고백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괜찮습니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무리할 필요 없어."

"아니에요.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장비 이상 없고. 가서 준비하고 보고 하도록."

"17번 교육생 김민희, 하강 준비 끝."

"지금 생각나는… 어? 교육생 이름이 김민희인가?"

"그렇습니다."

"김민희 교육생, 준비됐으면 하강."

"강 교관님?"

직원이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내 그럴 줄 알았다.

"하강해."

딱 보니 아까 진수의 고백을 대답하라는 식으로 민희를 곤란하게 할 것 같아 바로 내려보냈다. 그런데… 아무래도 괜한 참견을 한 것 같다.

"그래, 이진수! 나도 너 좋아. 사귀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려가면서 대답을 해 버렸으니까.

* * *

어떻게 복수를 할까 고민했는데 교관의 여자친구 있냐는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백해서 혼내 주기로.

쩌렁쩌렁 외치며 멋지게 착지하자 다들 난리가 났다.

"진수 남자였네."

"멋있다."

"받아 줘라."

"받아 줘!"

민희 녀석을 보니 얼굴이 완전히 빨개져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있다.

"하긴, 둘이 맨날 붙어 다닐 때부터 수상했어."

"다들 왜 이리 소란이야! 다들 끝날 때까지 PT 체조 할까?"

교관의 엄포에 금방 소란이 정리됐다.

이 정도면 아까 일을 제대로 갚아 준 것 같다.

"이진수, 너 진짜 김민희 좋아함?"

"총 맞았냐? 아까 PT 체조 할 때 쟤 때문에 기합 더 받아서 고백 공격 한 거임."

"고백 공격? 설마 고백해서 혼내 준다 이런 거야?"

"빙고."

"이진수 이 자식 완전 또라이네."

"리얼. 야, 그런데 김민희가 받아 주면 어쩌려고?"

"김민희가 잘도 받아 주겠다. 걔가 뭐가 아쉬워서 진수 같은 애랑 사귀겠냐?"

"하긴, 진수랑 비교하면 민희가 훨씬 아깝지."

"그래. 민희도 눈이 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벌인 일이긴 한데… 이 자식들 너무한 거 아닌가?

"아니, 내가 뭐가 부족해서 김민희가 아까워?"

"어? 이진수 화낸다. 왜 화내?"

"말만 고백 공격이라고 해 놓고 진짜 고백한 거 아니야?"

"맞네. 찐 고백이었네. 고백 공격이라는 건 차일까 봐 밑밥 깐 거고."

"진짜 그래. 김민희가 아깝다. 됐냐?"

이런 것들도 친구라고… 어휴, 그냥 말을 말아야겠다.

"그래, 이진수! 나도 너 좋아. 사귀자!"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고 귀를 의심했다.

"대박! 방금 김민희 맞지?"

"민희도 진수에게 관심 있었나 본데? 이걸 받아 주네."

아니… 절대로 이, 이럴 리가 없을 텐데….

* * *

훈련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왔다.

7시 반부터 담력 테스트가 예정되어 있지만, 업체 직원들이 진행하는 거라 오늘 내 일정은 끝났다.

막상 한 건 별로 없다고 해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정신적으로 약간 피곤하다.

진수 녀석이 고백했던 것도 그렇고, 민희가 바로 받아 준 것도 좀 충격이었다.

진수 녀석 장난만 치는 천덕꾸러기라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봤다.

양치나 하러 나가려는데 생활관 문이 열리더니 2학교 선생님들이 들어왔다.

"강 선생님, 식사는 하셨어요?"

"방금 먹었습니다. 양치하려고요. 선생님들은요?"

"저희도 막 먹었어요. 참, 내일 저녁에 강 선생님은 어떤 거 하실 거예요?"

"어떤 거라니요?"

내일 일정은 오전과 오후는 전부 등산이고 밤에는 레크리에이션 시간이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오늘 찍은 동영상 보여 주고 애들 장기자랑 같은 걸 한다고 들었는데….

뭐지?

"아직 전달 못 받으셨어요? 아까 교감 선생님들이 오셔서 교관들도 레크리에이션 때 참여하면 좋지 않겠냐고 하셔서 학교 별로 한 팀씩 나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왜 제가…."

"같이 자리에 있던 1학교 선생님들이 강 선생님 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추천하시던데요. 1학교 교감 선생님도 호의적인 반응이어서 당연히 강 선생님이 나오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다.

평소에도 사이가 안 좋고 이번에 교육대장도 2학교 선생에게 양보했으니 어디 한번 당해 보라는 식인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기,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바로 교감을 찾아가 싫다고 말했다.

"왜? 다른 선생들은 다 자네를 추천하던데? 역시 같이 교관을 하다 보니 좀 친해진 모양이야."

"하나도 아닙니다. 누가 봐도 좋은 의미로 추천한 게 아니잖습니까."

이건 추천이 아니라 짬을 때리는 거다.

'개소리하지 마세요'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참고 좋게 돌려 말했다.

"자네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S 등급 포탈 공략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충 노래 한 곡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교감 선생님이 하시면 되겠네요."

"내가 아는 노래라곤 트로트뿐인데 학생들이 좋아하겠나?"

"저는 아예 아는 노래가 없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못 믿는 눈친데 거짓말이 아니다.

물론 전생에서야 작업할 때 노래를 듣기도 했고 좋아하는 가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소설 속 세계.

그것도 매우 인기 있었던 상업 소설이다.

상업 소설은 실재하는 가수나 노래 제목을 넣을 수가 없다.

저작권을 가진 본인이 소설을 쓰거나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는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

예전에 한번 검색을 해 보기도 했지만 실제로 내가 좋아하던 가수들의 노래들은 이 세상에 없다.

물론 여기에도 가수는 있다.

아이돌도 있을 거고 걸 그룹도 있겠지.

실제로 카페를 가거나 거리에서 노래를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지나가다 들은 거고, 워낙 바쁘게 살다 보니 따로 찾아 들은 노래는 없다.

"진짠데요?"

"어떻게 사람이 노래를 하나도 모를 수가 있어? 자네 대한민국 사람이잖아. 애국가도 몰라?"

하하… 그래. 어쩌면 애국가 정도는 똑같을 수도 있다.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어떻게 애국가를 부릅니까?"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애국가를 부른다?

어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럼 춤이라도 추던가. 아니, 그리고 왜 나한테 와서 그러나? 그렇게 하기 싫으면 다른 선생님들이랑 이야기해서 조율하게."

아니… 이 양반아, 그 작자들이 내 사정을 봐주겠냐고!

다들 자기가 하기 싫으니까 나한테 떠넘긴 걸 텐데, 답답하다.

"안 할 겁니다. 그냥 2학교 선생님들만 하는 거로 가죠."

"그건 좀 곤란한데. 계약 위반이지 않나?"

"무슨 계약 위반입니까? 거래는 보강 수업이랑 교관 역할 하는 거였지. 장기자랑 나가는 건 없었잖아요."

"어허, 이미 추천서 받았다고 이러긴가? 장기자랑에 학교마다 교관 중에서 한 팀씩 나가기로 했으니 교관 업무에 포함되는 거잖나?"

"…."

원래라면 학생들만 나가는 장기자랑에 교관까지 참여시킨 게 누군데.

완전 개똥 논리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아까도 자네가 결투 이겼다고 해서 넘어가긴 했지만, 자네가 하기 싫다고 2학교에 교육대장을 넘겨준 것도 나는 별로…."

교감하고는 말이 안 통할 것 같아 다른 선생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백 선생마저도 자기는 장기가 없다며 미안하다고 거절하는데… 진짜 돌아 버리겠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7)

우리 선생님은 큐피드

"자, 그럼 지금부터 우리 헌터 학교 학생들의 끼를 뽐낼 수 있는 시간 설악 장기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MC로 나선 직원의 말에 학생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내지른다.

아까 등산할 때는 힘들어하더니 아주 기운이 넘쳐난다.

하지만 난 죽을 맛이다.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탁을 해 봤지만 대신 나가 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든 안 하려고 궁리하다 등산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병원에 간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도할 수 없었다.

교관 중에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선생이 있고 우리 학교 보건 선생인 김 선생도 여기 있으니까.

"강 선생님, 연습은 좀 하셨어요?"

처음 만났을 때 결투했던 창술사 선생인데, 2학교 측에선 이 사람이 나간다.

"그럴 시간이 있었어야죠. 진짜 죽겠네요."

"너무 부담 가지시는 거 아니에요? 대회 같은 것도 아니고 점수 매기는 것도 아닌데, 편하게 하세요."

다른 2학교 선생님들이 말해 줬는데 여기 창술 선생은 원래부터 춤을 좋아하고 학창 시절에는 댄스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유가 넘친다.

"맞아요. 관객이라고 해 봤자 다 학생들인데 뭐 어때요?"

옆에 있던 다른 2학교 선생이 거드는데 지금 약 올리는 건가?

사실 이미 선택은 했다.

"강 선생님은 노래하신다고 하셨죠?"

"네."

댄스와 노래 중에 내가 선택한 건 노래다.

방구석에서 글만 쓰던 작가다 보니 클럽이라곤 20살 때 딱 한 번 가 본 게 전부라 댄스랑은 정말 아무 접점도 없으니까.

그래도 노래방은 친구들과 자주 갔었다.

"어떤 노래 하실 거예요?"

교육대장 김 선생이다.

"자작곡입니다. 장르는 락발라드?"

"자작곡이요? 오, 작곡도 하시는 거예요?"

"아, 네. 뭐, 그냥 취미 삼아서…."

"대단하시네요. 기대할게요."

자작곡이란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고 전생에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부를 생각이다.

아는 노래도 없고 새로 연습할 시간도 없는 데다 교감 말대로 애국가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기대하지 마세요."

노래방에서 수십 번은 불렀던 노래라 가사나 음 같은 건 전부 기억하는데 세상에 없는 노래다 보니 반주도 없다.

그래도 아예 모르는 노래보단 낫겠지.

한 명 한 명 학생들의 무대가 끝나고 점점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2학교 김현필 선생님의 멋진 댄스 무대 잘 봤습니다. 1학교 선생님도 질 수 없겠죠? 그럼 다음 차례는 1학교 강신혁 선생님입니다."

대회 나가서 상 받았다는 게 정말인지 내 바로 앞 차례인 창술사 선생의 무대는 정말 멋있었다.

학생들 반응도 무척 좋았는데 분위기가 한껏 업되어 있어 더 부담이 된다.

차라리 내가 먼저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우리 선생님 잘생겼다!"

"선생님 멋있어요!"

검술반 학생들인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강신혁 선생님은 부르실 곡은 자작곡이라고 하는데 노래하기 앞서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딱히 설명할 게 없는데….

"장르는 락발라드, 제목은 '너에게로 떠나는 여행'입니다. 원래 교관의 참여는 예정에 없던 일이라 반주가 없는 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가수인 머즈의 노래다.

사실 이 곡보다 다른 곡을 더 좋아하지만 수련회 장기자랑인 만큼 신나는 노래가 좋을 것 같아서 이 곡을 골랐다.

* * *

"와, 대박. 우리 선생님 노래 진짜 잘한다."

"노래 실력도 실력인데 노래 자체가 너무 좋던데. 가사도 좋고 엄청 신나고."

"그러게. 이런 노래를 직접 만드시다니, 우리 선생님은 진짜 못하는 게 뭐야?"

* * *

학생들 반응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앵콜 요청이 엄청나게 쏟아져서 나도 모르게 한 곡을 더 할 뻔했을 정도였다.

반주도 없는 데다 다들 처음 들어 보는 걸 텐데 세상이 바뀌어도 역시 명곡은 명곡인가 보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노래가 잘 불러졌다.

워낙 많이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고 노래 자체도 그리 높은 편이 아니긴 하지만 고음 파트도 완전 부드럽게 올라가고 전생보다 확실히 쉽게 느껴졌다.

강신혁이 원래 노래 쪽에 재능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음공을 배운 건 아니지만 명색이 초절정 고수다 보니 육체 스펙이나 호흡도 전생보다 훨씬 좋아졌으니까.

"강 선생님, 노래 정말 잘 들었어요."

"가수… 아니지, 직접 작곡하신 노래라고 하셨으니 싱어송라이터 하셔도 되겠던데요? 노래 너무 좋던데."

"하하…."

"죽겠다고 하시더니 완전히 엄살이셨네요."

2학교 선생들이 다가와 칭찬을 건네는데 우리 학교 실기 선생들은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

내가 망신을 당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한 방 먹여 준 것 같아 통쾌하다.

* * *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마지막 알람이라 빠르게 준비하고 기숙사를 나섰다.

어제 수련회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하루 정도 쉬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정상 수업이다.

수련회 마지막 날 일정이 퇴소식뿐이라 오전 일찍 끝나긴 했지만, 사부에게 들렸다 늦게 도착했다.

이번 주말엔 승급 심사도 봐야 하고 김 선생, 홍 선생과 식사 약속도 잡혀 있어 가지 못하니까.

예선전도 아직 2주나 남아서 보강 수업도 계속 해야 하고 예선이 끝나면 기말고사다.

기말고사 끝나면 바로 축제니 축제 준비도 해야 할 테고….

얼른 방학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식당에 들어왔다.

아침 메뉴도 별로라 대충 허기만 달래고 방에서 챙겨 온 홍삼이나 먹으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 쌤?"

"세진이구나.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요. 수련회는 잘 다녀오셨어요?"

3학년은 실습 갔다고 들었는데 어제 복귀한 모양이다.

그런데 실습 간 곳에서 밥을 안 줬는지 다이어트를 하는 건지, 며칠 사이에 많이 마른 것 같다.

"나름. 그런데 세진이 너 요새 다이어트 같은 거 하니?"

"네? 아니요."

원래부터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던 녀석인데 지금은 좀 핼쑥해 보일 지경이다.

"며칠 전에 봤을 때 보다 마른 것 같은데. 약은 챙겨 먹었지?"

"그럼요. 하루도 안 빼 먹고 먹었어요."

흐음, 며칠 안 먹이긴 했지만 다른 녀석들은 약 먹고 나서 키도 크고 살도 오르던데 세진이한테는 약이 잘 안 맞나?

우리 애들과 달리 3학년이다 보니 성장기가 끝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밥 좀 많이 먹어. 아, 이것도 밥 먹고 먹어."

먹으려던 홍삼을 건넸다.

"선생님이 드시려던 거 아니에요?"

"난 교무실 가면 또 있거든."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녀석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이따 보강 때 봐."

세진이와 헤어져 교무실에 도착했다.

며칠간 못 봤던 다른 선생님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수업 자료를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회의 시간이 됐다.

회의는 별 내용 없었다.

수련회 여파로 들떠 있는 애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수업에 집중할 수 있게 분위기 조성 잘해 달라는 이야기 정도?

우리 검술반 애들은 워낙 잘 따라 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검술 훈련장에 도착해 서류 업무를 좀 하다 시간이 돼서 나오니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뭉쳐 있고 말도 안 섞는다.

단체로 싸움이라도 했나?

아웅다웅하면서도 늘 붙어 있던, 이제는 커플인 진수와 민희조차 아예 떨어져 있다.

대놓고 물어보면 답을 안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일단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민희가 선두에 서서 구보하고 진수는 잠깐 선생님 좀 도와줘. 안에서 가져올 게 있거든."

"네."

"네."

민희가 구보를 시작하자 진수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쌤, 뭐 들고 가면 돼요?"

"사실 들고 갈 건 없고, 뭐 하나 물어보자. 너희들 왜 그래?"

"네?"

"분위기가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남학생이랑 여학생이랑 서로 말도 안 섞고. 무슨 일 있지?"

"아, 저기, 그게…."

녀석답지 않게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진다.

무슨 사고라도 쳤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주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수련회 때 녀석이 고백했던 게 진짜 고백이 아니었다.

민희를 곤란하게 만들 목적으로 고백한 거라는데, 이 녀석은 진짜....

솔직히 아예 마음이 없으면 그런 장난 같은 건 하지 않았을 테니 기왕 그렇게 된 거 둘이 잘 사귀면 아무 문제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진수 녀석이 고백 직후 옆에 있던 친구들에게 가짜로 고백한 거라고 말을 해 버렸단다.

이런 사실은 민희 귀에도 들어갔고 고백을 받아 준 민희만 완전히 우스워졌다.

진수와 민희 둘 다 반 대표와 부대표로 각각 남자와 여자들의 중심이다.

여자애들은 민희의 편을 들며 진수를 욕했고 남자들은 진수가 장난으로 그런 건데 왜 그리 과민 반응 하냐며 진수를 감싸고 돌면서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다.

"민희에게 사과는 했어?"

"그게… 메신저는 차단당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려고 해도 얼굴 보기도 싫으니까 꺼지라고…."

"그래서 안 했다고?"

"아니, 저는 그냥 진짜 장난으로 그런 건데…. 걔도 평소에 저 엄청 괴롭히고 장난 걸고 그랬는데…."

변명을 늘어놓는 걸 보니 아직 정신 못 차렸다.

"이진수, 고백이 장난이야? 민희가 너한테 이런 장난 친 적 있었어?"

장난도 정도가 있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건 진짜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아니요…. 저기, 그럼… 선생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뭘 어떡하기 어떡해?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지."

"하지만 민희가 아예 저랑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해서…."

"아예 민희랑 절교할 거 아니면 받아 줄 때까지 빌어야지. 남자애들에게도 진수 네가 잘못한 거라고 제대로 설명하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고개를 푹 떨구는데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다.

너무 몰아세웠나?

덩치만 컸지 아직 17살밖에 안 된 애니 실수할 수도 있는 건데.

"선생님도 민희랑 한번 이야기해 볼게."

"정말요?"

"너무 기대하진 마. 이야기 한 번 해본다는 거지. 강제로 화해하라고 하진 않을 거야."

용서할지 말지는 피해자가 선택하는 거니까.

"가… 감사합니다."

진수와 함께 다시 사무실을 나와서 구보를 뛰게 하고 평소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분위기는 아주 안 좋았지만 그래도 수업은 다들 열심히 참여해서 잘 마쳤고, 뒷정리를 핑계로 민희를 남겼다.

"선생님, 정리 다 끝났어요."

"수고했어. 민희, 오늘 점심은 선생님이랑 같이 먹을래?"

"네?"

"아침에 보니까 점심 메뉴 별로던데, 급식실 말고 매점 가자."

"혹시 진수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쩝, 둔한 누구와 달리 민희는 눈치가 빠르다.

"겸사겸사. 진수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 할 것도 있으니까 같이 가자. 선생님이 살게."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거절하진 않아서 민희와 함께 교직원 매점으로 향했다.

"아까 진수에게 이야기는 들었는데…."

"저… 선생님, 진수랑 화해하라는 말이면 안 들을래요."

살짝 떠보려 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진수 이 녀석 미운털이 박혀도 아주 단단히 박힌 모양이다.

"응? 선생님이 왜? 선생님도 사정을 들었는데 당연히 안 그러지. 선생님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다니 실망인데."

"네? 아니, 저는…."

"선생님도 진수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아까 진수에게 이야기 들었을 때도 많이 혼냈어."

"정말요?"

"응. 진수 그 녀석은 그저 장난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진짜 선생님밖에 없네요. 제가 잠깐 미쳤던 것 같아요. 그런 애 같은 녀석이 뭐가 좋다고."

"하하…."

"역시 저는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나중에 졸업하면 선생님이랑 결혼할래요."

아니, 왜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거지?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8)

혹시 누가 듣고 오해라도 할까 걱정돼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다.

"어? 아니, 학생은 좀…."

"졸업하면 상관없잖아요?"

"아니, 그래도…."

"농담이에요. 선생님이 멋있긴 하지만 경쟁자가 너무 많거든요."

"선생님이 좀 인기가 많긴 하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곤 피식 웃는데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이다.

매점에 도착해서 컵라면을 비롯해 여러 가지 요깃거리를 사서 밖으로 나왔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꽤 많이 나눴지만, 진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섣부르게 꺼내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고 먹다가 체할 수도 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사 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진수 많이 혼냈다고 했잖아. 진수도 잘못한 거 느꼈는지 사과하고 싶다고 하던데…."

"선생님이 혼내시니까 그 자리 모면하기 위해서 그런 거겠죠. 남자애들이 자기 편들어 주니까 잘못한 거 없다는 식으로 말하던 앤데."

어우,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더니 말에도 냉기가 폴폴 묻어 나온다.

"그래도 같은 반이잖아. 보강도 같이 하는 데다 둘 다 검술 전공이니까 앞으로 2년 넘게 계속 마주칠 텐데, 불편하지 않겠어?"

"저한테 걔는 이제 투명인간이라 상관없어요. 아까는 강제로 화해시킬 생각 없으시다면서 자꾸 이러실 거면 저 그만 갈래요."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 그런데 민희야, 선생님은 진수가 완전히 장난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네?"

"아무 마음도 없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말 망신 주겠다는 이유만으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보통은 그렇지 않잖아."

"그만큼 걔가 악질인 거죠."

하아, 너무 답답해서 너희 둘은 원작에서 다른 사람들 눈꼴을 시리게 만드는 애정 행각을 시도 때도 없이 벌이는 커플이었다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선생님도 이번 일은 무조건 진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수 자체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라고 생각해. 민희도 알지 않아?"

"모르겠어요. 만약 선생님 말처럼 진수가 저한테 정말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이젠 의미 없잖아요."

"의미가 왜 없어?"

"자기가 장난으로 고백한 거라고 애들에게 다 말해서 저만 바보가 됐는데, 이제 와서 진짜였다고 말해도 남들은 다 그냥 제 기분 풀어 주려고 억지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저 이만 갈게요."

남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며 잡을까 생각을 했지만, 그냥 보냈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말만 쉽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폐쇄적인 헌터 학교의 특성에다 감수성이 풍부한 10대 청소년인 민희에게는 더더욱 어려울 거다.

안 그래도 말하는 민희 녀석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휴, 진수 그 녀석은 어쩌자고 이런 터무니 없는 짓을 벌인 건지….

아까 꿀밤이라도 몇 대 먹여 줄 걸 후회가 된다.

그냥 내버려 둘까?

어차피 내 연애도 아니고, 아까 수업할 때도 분위기는 안 좋았지만 수업 진행하는 데 지장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원작의 억지력이란 게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다시 화해하게 될 테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답일까 싶지만….

역시 그렇게는 못 하겠다.

수업 진행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불편한 분위기는 싫다.

민희와 진수 둘 다 대표를 맡아 나를 많이 도와줬으니까.

아끼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의 큐피드가 한번 되어 볼까 한다.

* * *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진수를 보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불러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검술 훈련장에 와 보니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밥도 거른 것 같은데… 이 녀석도 어지간히 애가 타는 모양이다.

"일찍 왔네. 밥 안 먹어?"

"생각이 없어서요. 그보다 선생님, 민희랑 이야기는 하셨어요?"

"응. 민희가 화가 많이 났더라. 이제부터 널 투명인간 취급 할 거라던데?"

진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저 어떡하죠?"

"어떡하긴 아까도 말했잖아. 받아 줄 때까지 비는 것 말곤 없어."

"투명인간 취급이면 아예 사과도 안 받고 무시한다는 거잖아요."

"선생님이 도와줄게."

"정말요? 쌤…"

감동받았는지 달라붙으려 하길래 옆으로 비켜 피했다.

"그 전에 일단 하나 물어보자."

"뭐든 물어보세요!"

"민희에게 고백했던 거 정말 100% 장난이었니?"

"아… 그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잘 생각하고 말해."

"고백은 정말 장난이었지만, 민희는… 솔직히 좋아해요. 제가 애들에게 장난이라고 말만 안 했어도…."

내 그럴 줄 알았다.

"거기까지. 그 정도면 됐어."

"그럼 도와주시는 거죠?"

"내일 선생님이 수업 평소보다 일찍 끝내 줄게. 그때 모두 앞에서 다시 고백하는 건 어때? 진심으로 민희를 좋아하는데 부끄러워서 장난이라고 말했던 거라고."

"어… 저기, 모두 앞에서 그러는 건 좀…."

"이진수, 지금 그런 거 따질 때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아니, 그러면 저는…."

"민희는 네 거짓 고백 때문에 모두 앞에서 널 좋아한다고 말해서 바보가 되어 버렸는데, 네 입장이 아니라 민희 입장부터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민희가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또 장난친다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신통력이라도 생긴 거야? 해 보지도 않고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럼 이대로 영영 민희에게 투명인간 취급당하고 살아도 괜찮아?"

"그건, 싫어요…."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해서 안 받아 주는 게 뭐가 두려워? 다 네가 저지른 업보잖아."

"…."

"결자해지. 네가 저지른 일은 네가 해결해야지. 안 될 것 같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그… 그렇죠."

"민희가 장난이라는 생각이 안 들게, 네 진심이 느껴지도록 진지하게 고백하면 되잖아."

말하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진수 녀석 표정은 무척 심각하다.

금방 답을 해 주지 않을 기미라 오늘 보강 수업은 쉬어도 괜찮으니 생각 정리하고 연락하라고 말하며 녀석을 보냈다.

너무 몰아붙인 경향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질질 끌어 봐야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이왕이면 오늘 안에 연락이 오면 좋겠다.

사무실로 들어와 서류 업무를 하다 밖이 소란스러워 시계를 보니 어느새 보강 수업 시간이 됐다.

참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진수랑 세진 언니 아직 안 왔어요."

진수야 내가 오늘은 쉬라고 했으니 넘어가고, 늘 가장 빨리 오던 세진이가 지각이라니 의외다.

"진수는 아까 찾아와서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쉬라고 했어. 세진이는 따로 이야기 들은 게 없는데 은수가 전화해 볼래?"

"아까 기다리면서 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전화도 안 받는다니…. 아침에 봤을 때도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걱정이 된다.

일단 은수에게 다시 한 번 걸어 보라고 하려는데 저 멀리서 뛰어오는 세진이가 보인다.

"늦어서 죄송해요. 깜빡 잠들어 버려서…."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괜찮아."

"언니가 지각을 하다니…. 언니도 사람이었네요."

"아,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다른 녀석들이었으면 벌점 줬겠지만 세진이는 매번 빨리 왔으니까 이번엔 넘어갈게."

"다음부턴 일찍 일찍 다닐게요."

"언니,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꾀병 핑계로 아예 안 온 사람도 있는데요, 뭘."

세진이를 위로하는 척 진수를 돌려 까는 민희다.

생각해 보니 은수와 은서도 민희랑 친하니 진수 사건을 알고 있겠지.

정규 수업 때처럼 편들어 줄 남자애들도 없으니 왔으면 눈치를 엄청 봐야 했을 텐데.

오늘 쉬라고 하길 잘했다.

녀석이 빨리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보강 수업을 시작했다.

홍 선생님은 2학년이 실습을 가서 학교에 없고 김 선생님은 수련회 끝난 다음 날이라 바로 부르기가 좀 그래서 오늘은 도와주는 선생님이 없다.

그래서 1명씩 대련을 하고 나머지 애들은 지켜보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일단 은수부터 은서와 민희까지 대련을 했는데, 어째 셋 다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늘 하던 방식대로 내공은 아예 사용하지 않고 학교 교본에 있는 검술만 사용했는데 다들 맥을 못 춘다.

특히 민희는 마음이 심란하다는 게 검에도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너무 별로였다.

"다들 실망인데. 겨우 3일 쉬었다고 감 다 잃은 거야? 이 상태면 보강 시간 늘려야겠는데?"

"아니… 선생님이 수준을 갑자기 올리신 거 아니에요?"

"맞아요. 예전보다 검이 더 빨라진 것 같았는데."

"빨라지긴 뭐가 빨라져. 전이랑 똑같은 수준인데. 빠르게 느껴진다면 너희 문제지."

전에는 절정이었고 지금은 초절정이긴 하지만 피차 수준을 맞춘 상태라 큰 차이는 없을 테니 핑계다.

설령 차이가 있더라도 여기서 수준을 더 낮출 수는 없으니 애들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검의 빠르기는 문제가 아니야. 선생님은 너희들이 반응할 수 있는 속도에 맞췄고 교본에 있는 검술만 사용하니까. 배운 대로만 했다면 너희들이 유리했을 텐데 뭐가 잘못됐을까?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질문을 던지자 셋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혀를 차며 답을 말하려는데 세진이가 손을 든다.

"그래. 세진이가 말해 봐."

"셋 다 파훼식을 사용하긴 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중간중간 교본 검술을 사용할 때가 있었어요."

"'역시 세진이야'라고 할 뻔."

"네?"

"애들이 요즘 이게 유행이라던데? 무의식적으로 교본 검술을 사용해서 문제가 된 건 맞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니지."

당황한 표정에서 분한 표정으로 바뀌는데 역시 승부욕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냐고 재차 물었지만 3명은 아예 대답할 기미가 안 보이고 세진이도 모르는 눈치다.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집중을 안 해서 그런 거지."

"저는 집중했는데요."

"저도 집중하긴 했는데…."

아니, 이것들이….

앞서 반만 맞았다고 이야기할 때 농담도 좀 섞어 말하긴 했지만 이후부터는 진지하게 말했는데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말은 누가 못 해? 선생님이 늘 말했지. 대련할 땐 늘 실전이라 생각하고 임하라고. 제대로 집중했는데 왜 파훼식이 아니라 교본 검술을 썼지?"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말하자 그제야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학생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서은수, 집중했다고 했으니까 말해 봐."

"어… 그게, 너무 급하게 막다 보니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검술을 사용했던 것 같아요."

"집중했는데 무의식적으로란 말이 왜 나오지? 앞뒤가 안 맞잖아. 다음 서은서, 너도 집중했다고 했으니 말해 봐."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은수와 은서 둘 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김민희."

"네? 선생님,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 안 했으면 집중 안 했다는 거 아니야? 오늘 가장 안 좋았던 게 너야. 네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오늘 같은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며칠 쉬던가 하지 그래?"

"아, 죄… 죄송합니다."

민희 녀석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인데. 사실 민희는 넘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모두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민희만 특별 취급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원래는 며칠 쉬는 게 아니라 아예 때려치우라고 하려다가 많이 순화한 거다.

풀이 죽은 녀석들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비록 내가 뭐라 해서 그런 거지만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는 속담처럼 3명 모두 아끼는 제자들이라 다들 더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혼낸 거니까.

개인적으로는 갈구는 것보단 칭찬하는 걸 선호하지만, 발전을 위해선 어느 정도 갈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애들이 내가 이런 마음이라는 걸 알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내고 간식이라도 사 줘야겠다.

채찍질을 했으면 당근도 줘야 하는 법이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9)

애들에게 지켜보라고 하고 세진이와 대련을 시작했다.

본인이 혼난 건 아닌데도 분위기 때문에 덩달아 긴장한 것 같았는데 막상 대련에 들어가니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실력을 발휘한다.

앞서 대련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공격을 시작했다.

챙―!

안정적으로 막아 내고 반격을 하는데 확실히 세진이는 수준이 다르다.

약간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보이긴 해도 파훼식을 능숙하게 사용해 점점 우세를 잡아 간다.

"지금부턴 응용을 약간 해 볼 건데, 괜찮지?"

"네!"

교본 검술에 약간씩 변형을 줘 공격했는데도 조금 전처럼 완벽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우위를 지키며 잘 막아 내고 있다.

원작에서 김세연이 주인공 중 1명인 김도현 못지않은 재능러로 나오긴 하지만 아직 응용은 이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진짜 대단하다.

물론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앞서 지적했던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야 차차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녀석의 검이 지난번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미리 이야기를 하고 속도를 아주 약간 올리자 반응속도가 늦어지더니 움직임도 점차 둔해진다.

아직 15분도 안 됐는데, 벌써 지친 건가?

컨디션이 상당히 안 좋은 것 같다고 생각돼 녀석의 검을 날려 버리는 것으로 대련을 끝냈다.

"전체적으로는 좋았는데 지난번보다 검이 많이 가볍네. 체력도 좀 떨어진 것 같고."

"아… 운동 시간을 조금 더 늘릴게요."

"아니, 그렇게 심각하진 않은데 선생님 생각엔 운동 부족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네? 그럼 어떻게 보완을…."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애들아, 너희가 봐도 세진이 며칠 전보다 좀 야윈 것 같지 않아?"

"저희도 아까 이야기했었어요. 언니 살 엄청 빠졌잖아요."

"다이어트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요새 실습도 나가고 많이 움직이다 보니까 그런 것 같아. 괜찮아."

지금 보니 세진이 녀석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있는데 괜찮기는.

잠도 잘 못 자는 모양인데 3학년은 1학년보다 수업 시수도 많고 학생회장까지 맡고 있으니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주말도 이틀 내내 아버지 길드원들과 함께 포탈 공략을 다니니 거의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스케줄이 빡빡하다.

물론 세진이가 예비 헌터… 아니, 거의 헌터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학생인 건 맞지만, 헌터가 철인은 아니다.

마나로 근력과 체력을 보조할 수 있긴 해도 말 그대로 보조할 뿐이지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세진이에게는 운동 시간을 늘리는 것보다 푹 자고 잘 먹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선생님은 훈련 못지않게 휴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당분간 보강 수업을 쉬는 건 어때? 세진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냉정하게 보강 수업은 세진이에게 별로 의미가 없다.

사부가 만든 파훼식이 뛰어난 건 맞지만 세진이 실력이라면 파훼식이 없어도 무투 대회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다.

게다가 파훼식은 국내에서 가르치는 무기술 파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몬스터를 상대로 발전했으니 비슷한 부분들도 있겠지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니까.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네 뜻이 그렇다면야. 그래도 바쁘거나 힘들면 언제든지 선생님에게 연락하고 쉬어도 돼."

"네."

다른 녀석들 같았으면 옳다구나 하고 쉬겠다고 했을 텐데.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만 하자."

"어? 정말로요?"

"아직 8시 반도 안 됐는데…."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정말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거든. 이런 날도 있어야지."

"맞아요. 선생님 최고!"

간식까지 사 준다고 하니 다들 너무 좋아하는 게 아까 혼나서 시무룩했던 애들이 맞나 싶다.

* * *

씻고 나와 보니 벌써 7시다.

다시 한 번 휴대폰을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진수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직도 결정을 못 한 건가?

연락이 오면 꽃다발까지 주문해 주려고 꽃집도 알아봤는데 답답한 걸 넘어서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기숙사를 나와 식당에 도착했다.

어제 애들하고 야식을 먹었더니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적당히 먹고 급식실을 나오는데 막 급식실로 들어가는 진수 녀석이 보인다.

"이진수, 좋은 아침."

"어? 선생님, 좋은 아침이요."

인사는 좋은 아침인데 얼굴은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게 나름대로 고민을 하긴 한 것 같다.

"그래. 아직도 생각 중이야?"

"아… 아니요. 결정했어요. 저 오늘 다시 고백하려고요."

"그래. 잘 생각했어."

연락이 안 와서 아직 고민 중인 줄 알았는데 정말 잘됐다.

"오늘 수업 조금만 일찍 끝내 주시면… 아니, 차라리 수업 시작 전에 이야기하는 게 나을까요?"

"수업 일찍 끝내고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정했으면 미리 연락하라니까 왜 안 했어?"

"아, 선생님이 주무시고 계실 것 같아서. 아침에 교무실에 찾아가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그래? 알았다. 오늘 일찍 끝내 줄 테니까 잘해 봐."

* *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오늘 테스트 결과가 다들 좋았으니 선생님이 아이스크림 산다. 다들 쉬고 있고 민희랑 진수는 선생님 좀 따라올래?"

어제는 모두 앞에서 다시 고백하라고 하셨는데 왜 나랑 민희만 따로 부르시는 거지?

"이진수, 뭐 해? 안 와?"

"아, 네. 가요."

둘이서 먼저 이야기하라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수업 때도 그랬지만 민희는 아예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어색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아…. 다시 고백하는 게 맞는 걸까?

선생님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셨고 어젯밤 오래 고민하고 결정했지만 솔직히 걱정된다.

어떻게 이야기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걸음을 멈췄다.

"진수는 교문으로 가서 택배 좀 받아 올래?"

"네? 택배요?"

"어. 오늘 교보재 온다고 했는데 방금 도착했다고 문자가 왔네. 경비실에 가면 있을 거야."

평소 같았으면 민희를 보내라고 하거나 투덜거렸겠지만 마침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던지라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교문까지는 거리가 좀 있기에 너무 늦으면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속도를 높였다.

경비실에 도착해 선생님 심부름을 왔다고 말했는데… 어?

"저기, 이거 맞아요?"

"강 선생님 앞으로 온 건 이거 하난데?"

교보재가 아니라 예쁘게 포장된 장미꽃다발이다.

혹시 민희에게 건네주라고 주문하신 건가 생각하는 도중에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네, 선생님."

"경비실은 도착했어?"

"네. 그런데 교보재가 아니라 웬 꽃다발이…."

"빈손으로 고백하는 것보단 꽃다발이라도 건네주면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선생님이 주문했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진짜 감동이다.

"아, 정말 감사해요.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무슨 은혜까지. 그래도 비싸게 주고 시킨 거니까 잘해라."

"네. 알겠습니다. 제가 진짜 선생님한테 평생 잘할게요."

"나한테 잘하는 거 말고 고백 잘하라고. 그리고 그거 공짜 아니다. 잘되면 나중에 취업하고 갚아."

"네. 진짜 감사합니다."

"됐으니까 얼른 오기나 해. 아이스크림도 다 샀으니까 먼저 가서 선생님이 대충 분위기 잡아 둘게."

* * *

"선생님, 다 골랐어요."

"어. 그래."

전화를 끊고 민희에게 카드를 건네고 아이스크림 봉지 하나를 들었다.

"제가 2개 다 들 수 있는데."

"됐어. 어차피 손 남는데. 가자."

"선생님, 요새 간식 너무 자주 사 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싫어?"

"아니, 저희는 좋은데… 어제 점심도 그렇고 보강 때 야식도 사 주시고, 요새 돈 너무 많이 쓰시는 것 같아서요."

"괜찮아. 선생님 돈 많거든."

내 자산의 90% 비중이 넘는 화신전자 주식은 꾸준하게 오르고 있고 얼마 전 배당일에는 배당금도 제법 쏠쏠하게 들어왔다.

애초에 교사 월급 자체도 그렇게 적진 않고.

"김민희, 방금 그 표정 뭐야?"

아주 잠깐이었지만 초절정 고수의 눈을 피할 순 없지.

분명 재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아! 선생님 여자친구 될 사람은 진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표정이 아니었는데?"

"진짠데."

"아부해도 더 사 주는 건 없어."

"아이스크림이면 충분하거든요."

아까 진수랑 셋이 걸을 때는 진짜 말 한마디 안 해서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웃는 걸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이따 진수가 고백할 때도 잘되면 좋을 텐데.

민희와 함께 검술 훈련장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 당 하나씩이고 다 똑같은 거니까 고르지 마.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앞에 봉지에 버리고."

"선생님, 진수는요?"

"진수도 곧 올 거야. 그리고 다들 먹으면서 들어. 요새 남학생이랑 여학생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맞지?"

내가 대놓고 이야기를 할 거라 생각 못 했는지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던 민희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저기, 선생님, 그건 진수가…."

"왜 진수 탓만 해?"

"진수가 잘못한 거잖아."

"민희는 진수 안 괴롭혔어?"

어이구, 완전히 난장판이 따로 없다.

"다들 그만. 선생님도 왜 그러는지 이야기 들었어. 학생들끼리 일이니까 처음에는 간섭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제뿐만 아니라 오늘 수업 때도 그렇고 지금도. 졸업할 때까지 계속 볼 사이인데 이렇게 남학생 여학생 갈라져서 지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말이 맞아.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다들 안 그래도 돼."

생각과 달리 민희가 먼저 나서 버리는데, 진수 이 녀석 언제 도착….

양반은 못 되는지 저 멀리서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오는 진수가 보인다.

"이진수, 뭐야?"

"그거 어디서 났어?"

"설마 다시 고백?"

다들 아주 난리 법석이고 민희는 아까보다 더 당황한 표정이다.

"다들 조용. 민희 이야기는 들었지? 그럼 이제 진수 이야기도 들어 볼까?"

앞으로 나온 진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민희에게 지난번에 고백했던 건 정말 장난이었어요. 민희가 고백을 받아 줬을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좋았어요. 애초에 민희에게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장난은 생각도 못 했을 텐데 제가 너무 비겁했습니다."

평소에 까불거리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진수답지 않은 진지한 말투라 다들 놀란 표정이다.

"제 잘못인데도 저를 감싸 줬던 친구들에게도 미안하고 민희에게는 정말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염치없게도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진수는 민희 앞으로 걸어가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건넸다.

"정말 미안해.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정말 최선을 다할 테니까 만회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다른 때 같았으면 다들 환호성이나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받아 주라고 분위기를 띄웠을 것 같은데,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만큼은 다들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진수 녀석, 말은 잘하더니 속으로는 엄청 긴장했는지 손을 벌벌 떨고 있다.

하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잘 안 풀리면 진수가 아무리 넉살이 좋아도 앞으로 학교에서 얼굴을 제대로 못 들고 다닐 테니까.

이제 남은 건 민희 선택뿐.

내가 고백한 것도 아닌데 나까지 긴장이 된다.

민희 녀석,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살짝 화난 것 같기도… 어?

퍽―!

"어억!"

민희가 발로 진수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소리가 꽤 크게 난 거로 봐선 상당히 세게 맞은 것 같은데… 진수 녀석,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용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아파? 난 더 아팠어."

"아…. 미안."

어휴,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나중에 다시 고백하더라도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할 듯해 어떻게 정리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민희가 꽃다발을 받았다.

"용서는 이번 한 번뿐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수가 일어나더니 민희를 껴안는다.

그제야 애들도 소리 지르며 환호한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인데… 어째 눈물이 날 것 같다.

물론 감동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막상 잘되니 눈꼴시어지려 한다.

정작 나는 솔로인데….

이것들이, 언제까지 껴안고 있을 건지.

학교 교칙에 이성 교제는 막지 않지만 불순한 스킨십은 당연히 금지다.

"거기 두 사람, 이제 그만 떨어지지?"

겨우 포옹이라고 해도 솔로인 내 입장에선 완전 불순한 스킨십이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0)

헌터 학교 교칙 제10조 3항

"차는 좀 어떤가? 지인이 선물해 준 건데 향이 아주 좋아."

평소에 차를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라 딱히 좋은 건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쉬려 했지만, 급식실을 빠져나오다 교감에게 잡혔다.

또 무슨 이상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일요일에 있을 승급 심사에 대해 조언을 해 주겠다고 해서 교감실에 오게 됐다.

"괜찮네요."

"심사 준비는 좀 했나?"

"매일 보강 수업을 하다 보니 따로 준비는 안 했는데…. 그냥 평소 실력대로 보려고요."

"그래? A 랭크 심사 방식은 알지?"

"A 등급 포탈 공략으로 진행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A 등급 포탈을 가서 평가하는데, 응시자가 다섯이면 인원수에 맞게 심사관들이 붙지. 메인 심사관으로 S 랭크 헌터도 1명 동행하고."

S 등급 헌터도 온다고?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지원자 수준이 너무 떨어지거나 오우거같이 강한 몬스터들이 나오면 A 랭크 헌터들만으로는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건가?

"그럼 혹시 교감 선생님이 메인 심사관이십니까?"

"아니. 이번에 자네가 심사 볼 때 내 추천서가 들어갔으니 나는 안 되지. 어차피 자네 실력이면 누가 나와도 상관없지 않나?"

교감 말처럼 누가 나와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안면 있는 교감이었으면 조금 더 편했을 것 같은데 약간 아쉽다.

"그럼 누군지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나를 제외하면 9명밖에 안 되는데 한 번 맞혀 보겠나?"

"지난번에 뵀던 2학교 교감 선생님이십니까?"

"봉팔이 그 친구는 아니야."

"그냥 말해 주시죠."

"에이, 재미없게. 몇 명 안 되는데 좀 맞혀 보지 그러나?"

"저 그냥 갈까요?"

2학교 교감을 제외해도 8명이나 남는데 금 같은 점심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힌트를 주지. 자네랑 관련이 있는 사람일세."

"저랑요?"

교감 선생과 지난번에 한 번 봤던 2학교 교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아예 본 적도 없는… 아, 알겠다.

"이명강 씨인가 보네요."

학교에 오기 전 강신혁이 속해 있던 체이스 길드의 길드 마스터다.

"오, 틀렸네. 그 녀석은 지금 중동에 있을걸?"

"저랑 관련 있다면서요. 그럼 대체 누굽니까?"

"김대찬일세."

살짝 놀랐다.

김대찬은 아레스 길드의 마스터로 나처럼 검을 쓰는 헌터이자 세진이의 부친이니까.

내가 지금 세진이를 가르쳐서 관련이 있다고 한 모양이다.

"그렇군요."

"대찬이 그 녀석은 상당한 독설가야. 거기다 엄청 깐깐해서 메인 심사관을 맡았을 때 합격을 잘 안 시켜 주기로 유명하지."

"상관없습니다. 억지로 탈락시키는 것만 아니라면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 사람은 날 모를 테고 누가 심사관을 하든 내 실력이면 떨어질 리는 없을 테니까.

"자신감이 넘치는군. 하긴, 자네 실력이면 문제없겠지. 거기다 그 자식도 생각이 있으면 자기 딸내미 선생님이니 다른 때처럼 막 대하지도 않을 거야."

계속해서 교감이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줬는데 나도 한 번 찾아봤던 터라 아는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심사관 입장에서 감점 요인 등 심사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도 있어 나름 유익했다.

비록 내 점심시간은 다 날아가 버렸지만.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저녁을 먹고 보강 수업을 하기 위해 다시 검술 훈련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돼서 나가 보니 다들 도착… 어라?

오늘 도와주기로 한 홍 선생을 비롯해 다른 녀석들은 다 왔는데 또 세진이 녀석이 안 보인다.

쉴 거면 연락하라고 했는데, 혹시 애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물어봤지만 다들 못 들었다고 한다.

이틀 연속 지각이라는 건데, 녀석답지 않다.

"저희는 선생님에게 연락한 줄 알았는데…. 전화해 볼까요?"

"아니. 선생님이 해 볼게."

전화를 걸었더니 휴대폰이 꺼져 있다.

어제처럼 잠든 건가?

연락을 안 한 건 약간 괘씸하지만 어제 쉬고 싶으면 쉬라고 말을 했으니 그냥 수업을 진행하려는데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세진이가 뒤늦게라도 연락한 건가 했지만 김 선생이다.

"네, 김 선생님."

―세진이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네? 세진이요?"

―아까 저녁 시간 때 독서실 쪽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서 지금 보건실에 있어요.

"아… 어쩌다가요?"

―글쎄요. 다행히 금방 깨어나서 간단하게 검사를 했는데, 특별히 이상 있는 곳은 없고 단순 과로 같아서 수액 놔 줬어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래서 아직 세진이는 거기 있나요?"

―네. 수액도 덜 맞았는데 보강 수업 하러 가야 한다고 고집부리길래 제가 강 선생님에게 이야기할 테니 저 퇴근할 때까진 여기서 쉬라고 했어요. 기숙사로 보내면 또 안 쉬고 과제나 보강 수업 갈 것 같아서요.

"잘하셨어요. 안 그래도 어제부터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조금 쉬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었거든요."

―그러셨어요? 아까 이야기 들어 보니까 최근엔 하루에 세 시간도 안 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세상모르고 자네요.

"아,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그 정도일 줄은…."

―3학년은 지금이 한창 과제가 많은 시기거든요. 거기다 보강 수업도 하고 학생회장까지… 아, 또 주말엔 나가서 따로 포탈 공략까지 한다고 했죠? 스케줄이 진짜 살인적이네요.

"저도 그래서 좀 쉬라고 했던 건데, 자꾸 본인은 괜찮다고 해서…."

―세진이 실력이면 이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되지 않아요? 애가 너무 완벽주의자인 것 같아요.

완벽주의자라기보다는 자기에게 과한 기대를 거는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 선생님?

"아, 네."

―지금 수업 중이셨죠? 제가 너무 시간을 빼앗았네요.

"아니에요.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라 괜찮습니다. 그보다 김 선생님, 세진이랑은 이야기를 한번 해야 할 것 같은데, 언제 퇴근하세요?"

―그럼 강 선생님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아니에요. 피곤하실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서류 정리할 게 좀 많거든요.

"그럼 수업 끝나고 보건실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수업을 진행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집중이 잘 안 됐지만, 오늘은 내가 대련하는 게 아니라 홍 선생님이 상대를 해 주고 나는 조언을 하는 식이라서 별 탈 없이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애들을 먼저 보냈는데 홍 선생도 같이 가겠다고 해서 홍 선생과 함께 보건실로 향했다.

"오셨어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세진이는 아직 자고 있나요?"

"네. 저기 안쪽 침대에 있어요. 많이 피곤했는지 아주 푹 자네요."

"아, 곧 있으면 10시인데, 가 보셔야 하지 않아요?"

원래 미혼인 선생님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거의 기숙사 생활이지만 김 선생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산다는 이유로 출퇴근을 한다.

"아직 여유 있으니 깨워서 이야기 나누세요. 늦어도 이설이 기숙사에서 자면 되니까 괜찮아요."

"누가 재워 준대?"

"치사하게. 그럼 강 선생님한테 재워 달라고 해야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도 그건 좀…."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시니 약간 그렇네요."

"하하…. 이야기는 세진이 기숙사 데려다주면서 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래. 얼른 가. 아버지 걱정하시겠다."

"걱정은 무슨…. 내가 애니?"

그때 세진이가 있다는 침대 쪽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커튼이 걷히며 세진이가 걸어 나온다.

"강 선생님?"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 때문에 깬 모양이다.

"일어났어?"

"네. 아… 강 선생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보강 안 갔잖아요…."

"김 선생님에게 이야기 다 들었어.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가 쉬어도 괜찮다고 했잖아.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저기, 지금 몇 시죠?"

"9시 조금 넘었어. 여기 강 선생님이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실 테니까 가서 다른 거 하지 말고 푹 자."

"아, 네."

"대답이 시원찮은데? 선생님이 사감 선생님에게 연등 시켜 주지 말라고 전화할 거니까 곱게 쉬어."

"저 월요일까지 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

"내일 하면 되잖아. 내일부터 주말인데."

"그게, 저 내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진 외부 일정이…."

"외부 일정? 세진이 너, 지금 그 몸 상태로 어떻게 포탈 공략을 가겠다는 거야? 안 돼."

"김 선생님 말씀이 맞아. 여기 강 선생님도 늘 말씀하셨잖아. 훈련만큼 휴식도 중요하다고."

김 선생님이 반대하고 홍 선생까지 거드는데 세진이 녀석, 대답을 안 한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려고 해서 김 선생에게 내가 데려다주면서 알아듣게 이야기한다고 말하며 세진이를 데리고 보건실을 나왔다.

"선생님들이 다 세진이 너 걱정해서 가지 말라고 하는 건데."

"죄송해요. 저도 아는데, 그래도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는 일정이니까…."

"아무리 사전에 약속됐다고 해도 너 오늘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지. 못 간다고 연락하면 되잖아."

"그게…."

"혹시 아버님 때문에 그래?"

"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아세요?"

"검을 쓰는 헌터가 검성을 모르는 건 말이 안 되지. 물론 개인적인 친분 같은 건 없지만 이번 주 일요일에 뵐 예정이거든."

"저희 아버지를요? 무슨 일로…."

"일요일에 선생님 승급 심사 있잖아. 오늘 점심때 교감 선생님이 알려 주셨는데 심사관이 네 부친이라고 하시더라고."

"아…."

"교감 선생님은 약간 깐깐하고 엄하다고 하시던데… 아, 너무 실례인가?"

"아니에요. 사실인데요.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내일 가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많이 화내실 거예요."

"그래도 세진이 넌 오늘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아, 혹시 아버님이 걱정하실까 봐 이야기 안 하려는 거니?"

"말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자식이라고 특별히 봐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이 시간에 갑자기 못 가겠다고 하면 제가 나태해서 그런 거라고 다그치실 분이에요."

무의식적으로 '그래도 아버지인데'라고 말하려다 말을 다시 삼켰다.

원작에서 김대찬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아예 기대를 안 하는지 담담하게 말하는 세진이가 안쓰럽다.

"전 괜찮아요. 오늘 김 선생님 덕분에 두 시간이나 푹 잤는데. 수액도 맞았잖아요."

"네가 말하기 곤란하다면 선생님이 이야기할 테니까 쉬어."

처음에는 가정사라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누가 봐도 피곤에 찌든 모습인데 애써 웃으며 이야기하는 녀석을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세진이 네가 곤란해지는 일 없도록 처리할 테니까 거절은 거절이야."

"괜히 저 때문에 일요일 심사에서 아버지가 안 좋게 평가할지도 모르는데…."

"에이, 설마 그러시겠어? 안 좋게 평가하셔도 선생님 실력이면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지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너스레를 떨며 말했지만 세진이는 고민이 되는지 무척 심각한 표정이다.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 선생님은 왜 이렇게까지 저에게 신경 써 주시는 거예요?"

"혹시 헌터 학교 교칙 제10조 3항 알아?"

"어… '모든 헌터 학교 교원들은 학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아니에요?"

"오, 잘 아네. 역시 전교 회장이야. 선생님은 그 교칙에서 말하는 안전의 의미가 단순히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아이들을 먼저 구하라는 뜻 하나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네?"

"아버님이 세진이 네가 잘되라는 의미에서 권한 일이어도 그 일 때문에 네 건강을 해치게 된다면 안전을 위협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그게 뭐예요."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자신을 낳아 준 부모라도 자식의 삶을 강제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녀는 부모의 인형이 아니다.

"이게 왜 궁금해? 사실 교칙도 교칙이지만 학생이 도움이 필요하면 선생의 도리로써 도움을 주는 게 당연하지 않아?"

"아… 원래 저는 선생님 수업 듣지도 않는데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어허, 민폐라니. 비록 내가 담임도 아니고 하루에 두 시간밖에 가르치지 않는 보강 선생이긴 해도 세진이 넌 내 수업을 듣는 내 학생이잖아. 안 그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여학생 기숙사 앞이다.

대답이 없어 녀석을 봤는데 어째 얼굴이 아까보다 좀 빨개진 것 같다.

날이 많이 쌀쌀해서 그런가?

어쩌면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 오글거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거절은 거절이니까 내일은 쉬는 거야. 알았지?"

"아,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다행이다.

"그래. 선생님만 믿으라고."

가슴을 탕탕 치며 오버를 하자 세진이 녀석이 피식거리며 웃는데, 무겁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1)

A 랭크 승급 심사

세진이를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강 선생?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야?

"교감 선생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깐 통화 괜찮으시죠?"

아까 세진이에게 아버지 번호를 받긴 했지만 일면식도 없는 내가 전화하는 것보단 교감을 통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괜찮네.

"세진이가 오늘 저녁 시간에 쓰러져서 보건실에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뭐라고?

"김 선생님이 보기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고 과로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수액도 맞고 보건실에서 좀 재우다가 지금 막 기숙사로 데려다주고 전화드린 겁니다."

―과로라니…. 그래도 특별한 이상은 없다니 다행이군.

"세진이를 좀 쉬게 했으면 하는데, 솔직히 보강 수업을 듣지 않아도 세진이 실력이면 무투 대회 우승은 문제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 보강 수업은 자네 담당이니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않나?

"이미 보강은 원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하고 쉬라고 말해 놨습니다. 제가 연락드린 건 보강이 아니라 세진이의 주말 일정 때문이에요."

―주말 일정?

"세진이가 주말에 외출해서 포탈 공략 다니는 거 아시죠?'

―알지. 이번에 자기 딸 WHCU 대회 꼭 우승시키고 싶다고 귀찮을 정도로 부탁해서 허락했지. 그게 왜?

"세진이 녀석, 컨디션도 안 좋은데 내일도 포탈 공략을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다면서. 이번 주는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부친에게 말하고 쉬라고 하지그래?

"저도 그래서 세진이랑 이야기를 해 봤는데 아버님이 많이 극성이시라서 쉬겠다는 말을 못 하겠다고 하던데요."

―대찬이 그 친구가 예전부터 조금 독한 면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요새 과제도 많고 학생회 일도 있고 보강까지 하는데, 주말까지도 못 쉬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훈련만큼 휴식도 중요한 거니까요. 그리고 주말 이틀 포탈 공략 다닌다고 해서 마나가 늘면 얼마나 늘겠습니까?"

―그렇지.

"세진이 녀석 요새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잔다네요. 살도 엄청 빠졌고 이러다 애 잡는 거 아닌지…. 교감 선생님이 세진이 아버지께 이야기 좀 잘해 주세요."

―내일 못 간다고 말해 주라고? 어떻게 이야기하면 되겠나?

"다른 학생들과 형평성을 위해서 외출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괜히 또 세진이가 하기 싫어서 교감 선생님께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내 통화하고 다시 연락하지.

전화를 끊고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교감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된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말을 바꾸냐며 반발을 했지만, 내가 알려 준 것처럼 형평성을 이야기하자 납득했다고 한다.

역시 교감 선생님을 통해 전달하는 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바로 세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 * *

"세진아, 안 자?"

"아, 독서실 가려고."

"오늘도 연등하려고?"

"응. 월요일에 제출해야 할 과제 아직 못 했거든."

"아까 쓰러져서 보건실 다녀왔다면서, 좀 쉬지. 과제는 내가 도와줄게."

"아니야. 내 과제인데 직접 해야지. 갔다 올게."

준비를 해서 방을 나왔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해 주시겠다고는 했지만, 아버지 성격이라면 허락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

물론 대신 이야기해 주시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고맙다.

특히 아까 내 학생이라고 말씀하실 땐 감동이었다.

1학년 아이들이 왜 강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실력이면 실력, 인성이면 인성,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으신데 나도 나중에 강 선생님 같은 헌터가 되고 싶다.

독서실에 도착해 들어가려는데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꺼내서 확인하니 아버지다.

강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것 때문에 전화하신 것 같다.

선생님은 내게 피해가 안 가게 해 주신다고 하셨지만 워낙 눈치가 빠른 분이라 내가 부탁했다는 걸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다.

"네. 아버지."

―그래 아비다. 조금 전에 교감 선생님하고 통화했는데 갑자기 주말 외출이 불가능하다고 하는구나.

강 선생님이 아니라 교감 선생님하고 통화를 하셨다고?

강 선생님이 교감 선생님께 이야기를 하신 건가?

―지난주만 해도 아무 말 없이 보내 줬으면서 왜 바꾸냐고 하니 다른 학생들과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그러던데… 혹시 네게도 무슨 이야기 하지 않더냐?

"아니요. 저는 딱히 들은 건 없는데…."

―그래? 참, 네 보강 선생이 누구랬지?

"강신혁 선생님인데… 왜요?"

―누가 형평성 운운하는 이야기를 꺼냈냐고 물어보니 네 보강 담당하는 선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던데.

"아, 강 선생님이 약간 원칙을 철저히 지키시는 경향이 있어서요."

―원칙주의자? 네가 주말에 보강 수업을 안 듣는다니까 그런 거 아니냐?

"네?"

―세진이 네가 주말에 자기가 가르치는 보강 안 받고 포탈 공략 다닌다니까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문제 제기할 이유가 뭔데? 자기가 학생도 아닌데 말이야. 꼴에 자기가 가르치면 얼마나 잘 가르친다고. 어차피 무투 대회는 당연히 세진이 네가 우승일 텐데.

"…."

―하여간 선생이라는 것들이 학생들 도움이 되는 일이면 협조를 좀 해 줄 생각을 해야지. 무슨 놈의 원칙 타령인지.

한참을 불만을 토로하시다 실습 때라도 최대한 몬스터를 많이 잡으라고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메신저가 와 있는데 강 선생님이다.

[또 연등하는 거 아니지? 교감 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아버님께 잘 이야기하셨대. 이제 주말에 포탈 공략하러 가지 않아도 돼. 그렇다고 바로 보강 나올 생각하지 말고 적어도 내일은 푹 쉬어.]

[아버지랑 방금 통화했어요.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주말에 포탈 공략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기쁘지만 기쁨보다 선생님 걱정이 앞선다.

강 선생님을 아주 안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일요일 승급 심사 때 만나서 괜한 트집을 잡지는 않을지….

선생님은 나를 위해서 나서 주셨는데 통화했을 때 선생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고 강하고 확실하게 말할 걸, 후회된다.

* * *

오늘은 일요일, 승급 심사가 있는 날이다.

바로 포탈로 가는 게 아니라 8시까지 협회로 가야 해서 식사도 거르고 일찍 학교를 나섰다.

주말이라 출근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차가 별로 안 막혀 생각보다 빨리 협회가 있는 강남에 도착했다.

헌터 협회는 10층은 훌쩍 넘을 것 같은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다.

그것도 강남에서.

이 세상에서도 강남은 땅값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지만 헌터 협회는 한국에 있는 그 어떤 협회보다 부유하다.

헌터들이 납부한 세금 중 일부는 헌터 협회에 들어가는데, 일부라고 해도 헌터는 일반인에 비해 고소득자니까.

협회장의 권한이 꽤 막강해서 많이 해 먹다가 주인공에게 참교육당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지금도 비리를 저지르고 있겠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참교육할 땐 재벌가인 집안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데, 일개 교사인 나 혼자로는 바위에 계란 치기니까.

나중에 주인공이 해결해 주겠지 생각하며 협회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려는데, 휴대폰이 계속 울린다.

[선생님, 심사 잘 보세요.]

[선생님, 파이팅]

[선생님이라면 반드시 통과하실 거예요! 파이팅!]

전화가 온 줄 알았는데 검술반 녀석들이다.

수업 때는 이야기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보강 수업받는 녀석들이 이야기한 건가?

일일이 답장을 해 주기엔 메시지가 너무 많이 와서 검술반 단체 채팅방에 고맙다고 답장을 남기고 검을 챙겨 내렸다.

건물 안에 들어서는데 주말 이른 시간인데도 꽤 사람들이 많다.

안내 데스크에 가서 헌터증을 제시하며 오늘 A 랭크 승급 심사를 보러 왔다고 했다.

"확인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3분 정도 기다리자 풍채 좋은 남자 1명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강신혁 헌터?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잘생겼네. 반가워요. 오늘 심사를 맡은 박현식이에요."

"강신혁입니다."

"20대라고 알고 있는데, 내가 연상이고 심사관이니 말 편하게 해도 괜찮죠?"

"네. 괜찮습니다."

"그럼 일단 마나 측정 먼저 해야 하니 같이 6층으로 갈까?"

"네."

현식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심사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며 말을 붙여 왔다.

처음엔 초면에 대뜸 말을 놓겠다고 해서 살짝 무례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대화를 나눠 보니 그냥 사람 자체가 털털하고 붙임성이 좋은 것 같다.

이틀 전에 교감에게 조언을 들어서 전부 아는 것들이었지만 적당히 대꾸해 주며 6층에 도착했다.

"줄이 왜 이렇게 길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인다.

"그러게요. 무슨 일 있나."

마나 측정은 금방 끝난다고 들었는데… 뭐지?

현식 씨와 함께 앞쪽에 가서 등록을 하며 물어보니 측정 기계를 원래 다섯 대 운영하는데 세 대가 어제 수리에 들어갔고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밀린 거라고 한다.

다행히 알고 있던 대로 측정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아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금방 내 차례가 됐다.

"방법은 알지? B 랭크는 50만이었지만 A 랭크 기준은 100만을 넘겨야 해."

"네."

실제로는 처음이지만 원작에서 주인공이 측정하는 장면을 봤기에 런닝머신과 비슷하게 생긴 기계에 올라섰다.

앞에 있는 손잡이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하면 앞에 달린 화면에 마나가 수치화되어 표시된다.

현식 씨 말처럼 랭크 별로 일정 기준을 넘겨야 하는데, 가장 낮은 F 랭크는 5천이고 E 랭크는 2만, D 랭크 10만, C 랭크 30만, B 랭크 50만, A 랭크 100만, S 랭크는 500만 이상이다.

최대 천만까지 측정이 된다고 하는데, 지금은 천만을 넘기는 사람이 없지만 졸업 이후에 측정을 하러 온 원작의 주인공이 천만을 넘기며 기계를 고장 낸다.

기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판단해 재측정을 하게 되지만 다른 기계들까지 모조리 박살을 내 버려 역대 최초로 측정 불가 판정을 받는다.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딱히 그렇게 할 생각은 없다.

마나 측정은 최소 조건일 뿐이니까.

마나의 양 말고도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해야 해서 높게 나와 봤자 별 의미 없다.

"뭐 해?"

"아, 아니요. 바로 하겠습니다."

잡생각이 많았다.

바로 손잡이를 잡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수치가 빠르게 올라가는데… 어라?

A 랭크 헌터의 상징은 검기다.

딱 검기를 일으킬 정도의 내공이면 충분할 것 같아서 조절을 했는데 수치가 이상하다.

[473만]

내가 검기를 검강으로 착각했나?

그럴 리가 없는데, 뭐지?

심지어 아직 검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내공의 절반도 안 들어갔다.

"너 뭐야? 실력자라고 듣긴 했는데 표정 하나 안 바뀌고 473만?"

"473만?"

"와, 방금 들었어? 473만이래. 그 정도면 거의 S 랭크 수준 아니야?"

"S 랭크 기준이 500만 아니었어? 저 사람 누구야?"

뒤에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댄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식 씨가 많이 놀랐는지 너무 큰 목소리로 말해서 다 들은 모양이다.

"이미 측정은 통과했는데 혹시 아직 여력이 있어? 그럼 조금 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관심 종자가 아니다.

마나 수치가 높게 나온다고 S 랭크 헌터로 바로 승급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이게 최선입니다."

말과 동시에 기계에서 손을 떼고 내려왔다.

"아쉽네. 조금만 더 했으면 500만도 넘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대단한데?"

"오늘 컨디션이 좋은 것 같네요."

"컨디션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나도 겨우 130만밖에 안 되는데.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하하…. 그래도 마나의 양이 헌터의 실력을 대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맞지."

"그럼 이제 포탈로 바로 가는 건가요?"

"아직 메인 심사관이신 김대찬 헌터님이 안 오셨어. 다른 A 랭크 심사자들도 측정해야 하니까 조금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지상 주차장에 가면 미니 버스 준비되어 있으니까 거기로 가 있어."

"다 같이 가는 건가요? 저 차 가져왔는데."

"개인 차량이 편하면 개인 차로 이동해도 되긴 하는데 어차피 심사 보고 헌터증 재발급하려면 다시 와야 하거든.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아?"

듣고 보니 다시 협회까지 와야 한다면 굳이 차를 몰고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알겠다고 말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미니 버스가 여러 대 있었지만 차량 앞쪽에 랭크가 다 적혀 있고 헷갈리지 않게 버스 옆에는 심사자들 이름까지 적혀 있어 내 이름이 적힌 버스에 탑승했다.

휴대폰으로 웹 서핑을 하며 시간을 때우다 보니 1명씩 사람들이 들어온다.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들 심사 때문에 긴장했는지 말이 없길래 나도 따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제외하고 4명이 더 들어온 상태에서 5분 정도 더 기다리자 아까 만났던 현식 씨를 비롯한 심사관들이 들어오는데 유독 한 명이 눈에 띈다.

교감만큼은 아니더라도 떡 벌어진 어깨에 체격이 상당히 좋고 눈매는 약간 날카롭다.

딸은 아빠를 닮는다더니 약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반갑습니다. 오늘 메인 심사관을 맡게 된 김대찬입니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2)

메인 심사관인 김대찬이 인사와 함께 심사와 관련해 간단한 브리핑을 하고 버스는 바로 출발했다.

그냥 내 차 타고 갈 걸 그랬나?

심사관들이 따로 조용히 하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상당히 무겁다.

응시자들이야 심사를 앞두고 있어서 그렇다고 쳐도 심사관들끼리도 대화가 없다.

그래도 오늘 공략할 포탈이 관악산이라 협회에서 그리 멀지 않아 다행이다.

40분 정도 달려 관악산에 도착했고 10분 정도 산을 올라 드디어 포탈 입구에 도착했다.

"바로 들어가죠."

메인 심사관인 김대찬을 선두로 심사관들이 입장하고 뒤따라 포탈에 진입했다.

포탈 진입 때마다 찾아오는 특유의 어지러움이 잦아들자 샛노란 모래사막이 눈에 들어온다.

사막형은 두 번 정도 경험해 본 적이 있는데 몬스터들이 모래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는 경우가 허다해 꽤 까다로운 편이다.

물론 다른 지형처럼 기를 퍼뜨려 몬스터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지만, 모래 속까지 기를 퍼뜨리려면 내공의 밀도를 높여야 해서 수색 범위가 좁아진다.

더군다나 A 등급 10인 포탈이니 내부도 넓고 몬스터도 강한 녀석들이 나올 테고 수도 많을 테니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다.

까다로운 지형이 나와서 그런지 응시자 표정이 안 좋다.

심사관들도 김대찬을 제외하곤 다들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아까 브리핑 때 이야기했던 것처럼 공략이 종료될 때까지는 편의를 위해 말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다들 모여."

김대찬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포지션을 정했다.

심사라고 해도 10인 포탈인 만큼 심사관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전투에 참여한다.

응시자는 남자 마법사 둘에 여자 무투가 하나, 남자 궁수 하나 그리고 검사인 나까지 이렇게 다섯이다.

시험관들은 전부 남자인데, 검사인 김대찬과 창술사인 현식 씨 외의 나머지는 전부 마법사다.

마법사 다섯에 궁수까지 1명 있으니 화력은 우수하지만 근접 포지션이 부족하다.

내게 부여된 역할은 전위.

물론 혼자는 아니고 무투가 1명과 현식 씨와 함께 셋이다.

특이하게 김대찬이 후위를 맡았다.

사막형 포탈 특성상 기습이 있을 수 있으니 후위도 중요하긴 하지만 정석대로라면 가장 실력이 좋은 S 랭크 김대찬이 전위를 맡아야 한다.

심사라서 그런 건가?

김대찬이 다 정리해 버리면 심사의 의미가 없다.

어차피 S 랭크 헌터인 김대찬이라면 후방에 있더라도 금방 이동할 테니까.

"이동하지."

김대찬의 지시에 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전방으로 내공을 퍼뜨렸다.

20분 정도 걸은 것 같은데 몬스터가 코빼기도 안 보인다.

A 등급 포탈 몬스터부터는 어느 정도 지능이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막 지형이라 해도 강하게 내리쬐다 보니 옆에 있는 현식 씨와 무투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나야 초절정에 오르면서 한서불침(寒暑不侵)을 이뤘기에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뒤를 돌아보니 김대찬은 나처럼 괜찮은 것 같은데 마법사들은 표정이 상당히 안 좋다.

빠르게 탐색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공을 조금 더 써서 거리를 확장시켰다.

대략 500m 정도 앞쪽 사선에 있는 모래 언덕에서 생명 반응이 느껴져 손을 들어 모두를 정지시켰다.

"신혁 씨?"

"방향을 저기 모래 언덕으로 잡죠. 저쪽에 몬스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응?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도 안 보입니다."

"선두, 왜 멈춘 건가?"

후위에 있던 김대찬이 다가왔다.

"강신혁 씨가 저기 보이는 모래 언덕에 몬스터가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서…."

"자네는 검사 아니었나? 저기 보이는 언덕이면 마나 스캔도 안 닿을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김대찬도 감지하지 못한 건가?

명색이 S 랭크에 위치까지 알려 줬는데… 이거 실망이다.

"마나를 퍼뜨려 감지했습니다."

"마나 감지? 안 그렇게 생겼는데 허풍이 좀 심하시네. 저기까진 500m는 될 것 같은데 무슨 마나를 거기까지 보내요?"

"확실한 거야? 환경이 환경이라 다들 지친 것 같으니 굳이 힘들게 언덕 쪽으로 갈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여자 무투가는 비아냥대고 현식 씨도 부정적인 의견이다.

하하…. 선화 씨와 이설 씨가 그립다.

두 사람은 내 말이라면 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주는데.

"일단 가 보지."

뒤이어 만약 몬스터가 없으면 감점하겠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리더인 김대찬이 내 편을 들어 줘서 방향을 변경했다.

"아니, 평지도 있는데 왜 이런 길로 가는 거예요?"

"앞에 가던 검사가 이쪽으로 가면 몬스터가 있다고 했다는데요."

"마나 스캔해도 모래 속에 숨어 있으면 안 나오는데 검사가 무슨 수로요?"

길이 험해서 그런지 뒤에 있는 마법사들이 불만을 토로해서 등이 상당히 따갑다.

몬스터가 도망가기라도 하면 엄청 욕먹을 것 같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거리가 100m 정도로 가까워 지자 몬스터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으니까.

지금 반응을 보면 일부러 도망치며 시간을 끌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옵니다!"

"뭐가 온다는… 어? 진짜였네."

경고를 하고 바로 검을 뽑아 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솟구치며 소형차 크기의 붉은 전갈들이 나타났다.

레드자이언트스콜피온.

외골격이 상당히 단단하고 약간이지만 마법 내성도 가지고 있어 꽤 까다로운 몬스터다.

전갈처럼 꼬리에는 독이 있는데, 이 독이 상당히 지독해서 피격되고 10분 이내에 해독 마법을 받지 않으면 100% 사망이다.

모습을 드러낸 녀석은 총 4마리.

"마법사들 마법 준비. 전위는 놈들이 마법사들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게 각자 가까운 위치에 있는 놈을 상대하고 중앙은 내가 맡는다."

후방에 있다가 어느새 앞쪽에 온 김대찬이 지시를 한다.

"그럼 저는 우측을 맡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바로 쇄도하자 놈이 사람 몸통만 한 집게발을 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내려찍는다.

푹― 푹―!

연속해서 내려찍다 보니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독도 독인데 힘도 꽤 좋은 것 같다.

역시 A 등급 몬스터라 그런지 속도도 크기에 비해 빠른 편이긴 한데 내 기준엔 미치지 못해서 피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다.

오우거보다는 확실히 느리고 트롤보다는 약간 빠른 정도?

놈이 다시 집게를 들어 올리는 틈을 타 빠르게 쇄도해 검기를 만들어 관절을 베었다.

서걱.

껍질보단 무른 느낌이 드는 관절을 베었는데도 걸리는 느낌이 있다.

조금 더 힘을 줘서 끝까지 베려 했지만, 놈이 꼬리를 날려 뒤로 몸을 뺐다.

푹―.

크와아앗!

한쪽 집게를 덜렁거리며 괴성을 지르는데 전갈도 소리를 낸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당연히 무슨 뜻인진 모르겠지만 대충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힐끗 뒤를 보니 마법사들이 열심히 주문을 외우고 있다.

조금 기다리면 마법이 준비될 것 같지만 혼자서 처치하는 게 좀 더 점수에 가산이 된다는 교감의 조언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쇄도했다.

멀쩡한 집게발로 내려찍으려 드는데 이번엔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검으로 맞섰다.

스윽― 쿵!

관절도 아닌데 아까와는 다르게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집게발이 잘려 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번엔 검기가 아니라 검강이니까.

이어서 꼬리가 날아왔지만 마저 베어 버리며 놈에게 붙었다.

꾸워어엇!

놈은 고통스러운지 당황한 채로 물러나려 했지만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놈의 몸통을 세로로 갈랐다.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데 크기가 크기다 보니 피가 좀 많이 튄다.

얼굴에 튄 것만 옷으로 좀 닦고 다른 헌터들을 보니 나름 잘 싸우고 있는데 아직 나처럼 끝장을 낸 사람은 없다.

김대찬도 양 집게발과 꼬리까지 잘라 버리긴 했는데 아직 숨통을 끊지는 않았다.

마법사들 테스트를 위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으니 저쪽으로 가면 안 될 것 같고.

현식 씨와 무투가 중에선 무투가 쪽이 좀 더 고전하는 모양새다.

응시자와 시험관이라는 경험의 차이도 있겠지만 애초에 무투가 자체가 이런 외골격이 강한 몬스터와 상성이 좋지 않다.

아직 오러도 못 쓰는 것 같은데.

아까 비아냥거렸던 게 생각나 마음에 들진 않지만 사소한 이유로 돕지 않을 수는 없으니 무투가 쪽으로 붙었다.

스윽― 쿵!

마침 무투가 등으로 꼬리가 날아가고 있어 그대로 베어 냈다.

신경을 무투가 쪽에 다 쏟고 있어서 아까보다 훨씬 쉽게 놈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거기 두 사람, 마법 준비됐으니까 물러나세요."

뒤에 있던 심사관이 외친다.

막 마무리하려던 참이라 약간 아쉽지만, 마법사들도 활약할 기회가 필요할 테니 지체하지 않고 몸을 빼냈다.

"프로스트프리즌!"

자이언트 전갈의 위쪽에서 하얗게 서리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몬스터를 뒤덮고 그대로 얼려 버린다.

놈들이 마법 저항이 있긴 해도 빙결 마법엔 취약한 편이라 탁월한 선택이다.

퍽―.

무투가가 다가가서 너클로 후려치니 얼음째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얼핏 보기엔 잘 마무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건 감점이다.

저렇게 조각을 안 내도 얼어서 죽었는데 괜히 사체값만 떨어지게 하는 일이니까.

다른 쪽도 전부 정리됐다.

현식 씨가 있는 곳은 전격 마법을 사용했는지 새까맣게 구워졌고 김대찬 쪽은 우리 쪽과 똑같이 빙결 마법으로 꽁꽁 얼려졌다.

응시자는 대체로 만족한 표정이지만 유일한 궁수의 표정은 좋지 않다.

현식 씨 쪽에 있던 몬스터를 노렸던 것 같은데 몸에 꽂힌 건 한 발도 없으니까.

근처에 화살이 열 발 정도 떨어져 있는 거로 봐서 아예 손 놓고 구경하던 건 아닌데 견제 정도는 됐겠지만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던 모양이다.

애초에 궁수의 화살로 뚫기에는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껍질이 너무 두꺼우니 상성이 안 좋았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까는 죄송합니다. 그런 거리에서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는 헌터가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아까 비아냥대던 무투가가 사과를 한다.

"괜찮습니다."

그러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말할까 했지만 괜히 분란을 일으켰다가 심사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특별한 부상자는 없어서 사체만 모아 두고 공략을 재개했다.

아까처럼 내공을 퍼뜨려 몬스터를 찾아냈고 전례가 있으니 다들 내 말을 믿는 눈치라 공략은 무척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렇게 세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거의 100마리 가까이 몬스터를 잡았다.

하지만 아직 하늘은 파란색이다.

두 번째 전투부터는 전투가 끝나고 5분에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오아시스는커녕 그늘 한 점 없는 사막이라 응시자들은 물론이고 김대찬을 제외한 다른 심사관들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신혁 씨, 여기 주변에도 몬스터 없어?"

"아, 네. 지금으로서는 딱히 느껴지는 게 없네요."

일찍 끝내고 싶어서 계속 내공을 퍼뜨린 상태로 이동하고 있지만 생명체 반응은 없다.

지금까진 처리한 몬스터들 수준과 숫자를 고려하면 아무리 10인 포탈이라고 해도 몇 마리 남지 않았을 텐데….

오늘 홍 선생과 김 선생에게 저녁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는데 이러다 늦는 건 아닌지 살짝 조바심이 든다.

"앞쪽의 언덕 밑에 가면 햇볕을 좀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서 조금 쉬도록 하지."

김대찬이 가리킨 곳을 보니 모래 언덕이 아주 높게 형성되어 있어 밑에 살짝 그늘이 져 있다.

이야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대형도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늘이 전부가 앉을 공간은 안 돼서 그런 것 같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뛰면 오히려 몸에 열나서 더 덥지 않나?

게다가 대형도 깨트렸으니 저 사람들은 감점일 것 같은데.

애초에 나는 더위에 영향을 받지 않아 굳이 그늘을 고집할 필요가 없고 감점은 싫어서 그대로 정속을 유지했다.

혹시나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참…. 어?

앞쪽에 펼쳐 둔 내공에 아주 미세하지만 생명 반응이 느껴진다.

앞에 달려가는 사람들인… 아니, 잠깐만. 사람이라면 이렇게 미세하게 잡힐 리가 없다.

"앞에 가시는 분들 멈춰요. 그쪽 방향에 뭔가…!"

바로 큰소리로 경고했지만, 한발 늦었다.

모래를 박차고 솟아오른 나타난 거대한 하얀색 몬스터가 가장 앞에 가던 무투가를 통째로 삼킨 채 다시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3)

같은 A 등급 몬스터일지라도 수준이 꼭 비슷하지만은 않다.

B 등급의 섀도우리퍼, A 등급의 오우거처럼 같은 등급이더라도 보통 A 등급 몬스터보다 월등히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들이 존재한다.

순식간에 무투가를 삼키고 사라진 저 녀석도 그런 녀석 중 하나다.

사막의 재앙 그레이트샌드웜.

길이는 최장 20m까지 자라고 직경도 2m는 가볍게 넘는 초대형 몬스터로 모래 깊숙한 곳에서 이동하여 발견이 쉽지 않고 외피는 오우거 가죽보다 질기고 웬만한 마법은 전부 튕겨 내고 재생력 또한 트롤 못지않다.

지능 수준도 높고 전 세계 기준으로도 1년에 한두 마리 정도밖에 발견되지 않지만 나올 때마다 피해자를 무척 많이 발생시켜 재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까지 국내에는 등장한 적이 없었기에 저 녀석이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는데….

"거기, 얼른 돌아와서 다시 대형을 갖춰!"

김대찬이 다급히 외치는데 이미 달려가던 헌터들은 빠르게 복귀 중이다.

다행히 두 번째 습격은 없었고 무사히 대형을 다시 갖췄지만, 김대찬의 표정은 심각하다.

"이대로 대형을 갖춰서 포탈 밖까지 신속하게 퇴각한다. 저 녀석은 지금 전력으로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야!"

그레이트샌드웜을 잡기 위해선 놈이 모래를 뚫고 올라왔을 때 속박 마법으로 붙잡아 두고 상대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S 랭크 마법사나 실력 뛰어나고 합이 잘 맞는 A 랭크 마법사가 최소 다섯은 필요하다.

물론 우리 일행도 마법사가 다섯이긴 하지만 이미 전투로 마나를 상당히 소모한 상태고 시험관 3명을 제외하면 2명은 이제 막 A 랭크 시험을 보러 온 응시자니까.

아무리 김대찬이 날고 기는 S 랭크 헌터라고 해도 모래 깊숙한 곳에 있는 녀석을 꺼낼 수는 없으니 정상적인 판단이다.

"아니, 그럼 현지 씨는 어떻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미 잡아먹혔는데. 생존 가능성은 없어."

김대찬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데 이건 명백히 틀린 판단이다.

그레이트샌드웜은 이빨이 없어 사람을 통째로 삼킨 채 오직 위산으로만 소화를 시킨다.

물론 내부의 가죽 또한 외피 못지않게 강력하고 질겨서 뚫고 나오기는 어렵다.

그래도 A 랭크 헌터라면 30분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원작에서도 주인공의 일행 중 한 명이 그레이트샌드웜에게 잡아먹혔다가 구출되는 내용이 있다.

"아니요. 아직 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빠르게 저놈을 처치하면 살릴 수 있습니다."

"신혁 씨?"

"그게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미 리더가 퇴각을 지시했기에 다들 부정적인 의견과 표정이지만 정작 퇴각을 지시한 김대찬의 표정은 다르다.

"그레이트샌드웜은 이가 없습니다, 오직 위산으로만 먹이를 소화하는데 내피가 질겨서 뚫고 나올 수는 없지만 A 랭크 헌터라면 30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확실한 정보인가?"

"저는 헌터 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정확한 교육을 위해 각종 몬스터에 대한 논문과 자료들을 수시로 확인합니다,"

"하지만 저 녀석을 잡기 위해선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무리네. 정면으로 나와 준다면야 내가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상당히 영악한 놈이라고 들었는데…."

"저놈의 지능이 높은 것도 맞고 그레이트샌드웜을 잡기 위해선 S 랭크 마법사 혹은 실력 좋은 A 랭크 마법사 다섯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정석이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방법?"

"예전에 미국에서 발표된 논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레이트샌드웜은 사막형 포탈에서 등장하지만 물을 상당히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가설로 시작되는 논문이었죠. 실제로 비가 오면 놈이 모래 위로 올라오는 것을 봤다는 내용과 놈의 육체는 대부분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사막형의 포탈에 놈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놈 때문에 포탈이 사막화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놈이 물을 좋아하는 거랑 놈을 잡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논문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어서 방법이나 설명하게."

"놈을 유인하기 위해 마법으로 물을 뿌리는 겁니다. 그럼 놈은 비가 오는 줄 알고 올라올 겁니다. 그때를 노려 얼리고 잡으면 됩니다."

"잠깐만요. 빙결 마법 사용할 수 있는 건 2명뿐이에요."

"물 생성은 마법사라면 다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2명은 빙결 마법을 쓰고 나머지는 물 생성 마법을 쓰면 됩니다."

"그레이트샌드웜은 마법 내성이 상당해서 고작 2명으로는 놈을 얼릴 수 없을 건데…."

"저도 압니다. 그러니 놈을 얼리는 게 아니라 놈 주변의 땅을 얼리면 되죠. 땅에는 항마력이 없으니까요."

"땅을 얼린다고?"

"부드러운 모래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으로 변하면 놈도 쉽게 이동할 수 없을 겁니다. 물에 젖은 상태라면 얼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다들 감탄한 표정인데 사실 논문 같은 건 싹 다 거짓말이고 이건 원작에서 주인공이 사용했던 방식이다.

"물 생성이 쉬운 마법이긴 해도 이 넓은 지역 전체에 뿌릴 순 없어요."

"위치는 제가 특정할 수 있습니다."

놈이 깊은 모래 속에서 움직이긴 하지만 아까도 미세하게 알아챘으니 내공을 좀 더 끌어 쓰면 할 수 있다.

"그래? 그럼 한번 해 보지."

"그레이트샌드웜은 눈이 퇴화해서 시각이 아닌 진동을 통해 우리의 위치를 파악합니다. 물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공격할 수 있으니 땅이 완전히 얼어붙기 전까진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경고하고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모래 사이로 침투시키자 얼마 안 가 놈의 위치를 찾아냈다.

멀리 도망갔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사람 하나로는 성에 안 찼는지 그리 멀지 않은 20m 정도 앞쪽의 지하다.

"20m 전방 땅속입니다. 그쪽으로 물을 쏟아부어 주세요. 놈을 끌어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 여력을 남기지 말고 다 써 주세요."

마법사 셋이 주문을 외우자 이내 20m 앞 허공에 커다란 물방울이 생겨나며 무섭게 땅으로 쏟아진다.

바닥이 모래라 금세 스며들어 사라지고 있지만 물 생성은 기초 마법 중에서도 기초 마법.

여력을 남기지 말라고 해서 그런지 물은 끊임 없이 쏟아진다.

밖에 물이 있다는 걸 밑에 있던 녀석도 알았는지 젖은 모래가 솟아오르며 그레이트샌드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순식간에 무투가를 집어삼켰을 때는 머리만 나오고 다시 모래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천천히 올라와 전신이 드러났는데, 기차가 연상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다.

"저… 정말 물을 좋아하는 게 맞나 봐요."

"논문이 사실이어서 다행이네요. 지금입니다. 빙결 마법 부탁드려요. 최대한 놈이 맞지 않게 피해서요."

빙결 담당 마법사 둘은 미리 캐스팅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까처럼 서리가 생기더니 땅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다행히 놈은 물에 정신이 팔려 아직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 어? 뭐야?

갑자기 김대찬이 말도 없이 앞으로 쇄도한다.

완전히 얼어붙었을 때를 노릴 생각이었는데 말도 없이 왜 혼자 급발진인지….

답답함을 느끼며 나도 김대찬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앞서가던 김대찬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놈이 갑자기 몸을 틀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기 시작한다.

쿵! 쿵!

땅은 이미 얼려진 상태지만 깊게 얼진 않았는지 단 두 번 만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다행히 김대찬이 도착해 푸른 검강에 휩싸인 검으로 도주하는 녀석의 몸통을 찔렀다.

역시 검강이라 그런지 녀석의 질긴 가죽을 두부 자르듯 뚫고 들어가며 푸른 피가 튀었다.

하지만 거대한 놈에겐 그리 유효한 공격은 아니었는지 몸부림을 치더니 순식간에 꼬리로 김대찬을 후려쳤다.

쿵―!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방어 자세를 취한 것 같지만 힘을 완전히 상쇄시킬 수 없었는지 김대찬이 날아간다.

그러게 왜 혼자 나서서….

이대로 가다간 놈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내공을 끌어올려 전부 다리로 보내 겨우 놈에게 도달했다.

이미 2/3 이상 구멍으로 들어가 꼬리 쪽만 남은 걸 보고 바로 검을 날렸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꼬리까지 구멍에 들어가 버렸고 날렸던 검조차 보이지 않게 됐지만 상관없다.

이기어검은 결코 시야에 의존하는 기술이 아니니까.

신검합일(身劍合一)을 기반으로 검과 연결된 상태라서 내공과 정신력만 따라 준다면 범위는 무제한이나 다름없다.

물론 검과 거리가 늘어날수록 내공과 정신력 소모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결코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연결된 검의 감각이 꼬리를 관통했다는 걸 알려 와 그대로 검을 전진시켰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도망을 갔는지 단전이 저릿해지며 금방이라도 연결이 끊길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놈이 밑에서 무지하게 발광을 하는지 땅이 다 들썩이는데, 내 검은 기어이 놈의 머리까지 도달했고 심장과 같은 기능을 하는 핵을 가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연결도 끊어졌는데 몸에 힘이 쭉 빠지며 탈력감이 몰아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니 다행히 이 녀석이 마지막 몬스터였던 것 같은데… 어휴, 진짜 죽을 것 같다.

초절정이 되고 나서는 내공이 부족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예 바닥까지 싹싹 긁어 썼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것 같다.

"자… 자네가 해치운 건가?"

아까 날아갔던 김대찬이 돌아와 묻는데 무지하게 놀란 표정이다.

딱 보니 믿지 못하는 눈친데 '그럼 지가 혼자 땅에 들어가서 질식사라도 했을까요. 왜 갑자기 혼자 처나가서 일을 어렵게 만듭니까' 하고 한마디 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길게 말할 기운은 없어 짜내고 짜내 겨우 입을 열었다.

"다… 닥치고 땅이나 파요."

아까 검을 전진시키며 무투가의 생존을 확인했다.

몬스터가 죽었으니 스스로 올라올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 버티느라 힘을 다 썼을 테니 얼른 구하지 않으면 질식사할지도 모르니까.

닥치라는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처음엔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오라고 지시하더니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달려온 마법사들과 창술사와 궁수까지 모두 무기를 던지고 땅을 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이 들려오는 걸 보니 무투가를 구출해 낸 모양이다.

비록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사과도 받아서 잘못됐다면 무척 찝찝했을 텐데, 초면이고 오늘 보고 다시 안 볼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고생한 보람이 있다.

"자네의 검이지? 머리 쪽에서 발견했네."

현식 씨가 피가 잔뜩 묻은 검을 내민다.

"아, 감사합니다."

"대찬 님께서도 자네가 놈을 쓰러트렸다고 하셨는데 정말 놈의 핵에서 자네의 검이 발견돼 다들 깜짝 놀랐어. 몸은 좀 어때?"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 썼더니 말하기도 힘드네요. 무투가는 어떤가요?"

"의식은 없지만 숨은 쉬고 있는 걸 확인했고 바로 포탈 밖으로 보내 치료하기로 했네."

"다행입니다."

"움직일 수 있나? 치료가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 먼저 나가 치료받을 수 있게 조치하겠네."

"아, 그러면 심사는 어떻게…."

"공략 초기에 모래 속에 숨어 있는 몬스터들을 탐지한 것부터 시작해서 저런 녀석까지 혼자 잡은 거나 다름없는데 뭘 걱정하나? 당연히 합격이겠지."

"그렇군요. 치료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고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정말 괜찮나? 무리하지 말게. 이런 곳에서 어떻게 쉰다고…. 쉬더라도 나가서 쉬게."

"그래도 사체 정리가 남았는데."

"그런 건 우리끼리 해도 충분하네."

"아니, 그래도…."

"어허, 딱 보니 마나 탈진 상태인 것 같은데, 그럴 때 무리하면 안 좋아. 정산도 걱정할 거 없어. 바디캠에 다 기록되고 있어서 자네 몫을 누가 떼먹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 걱정 말고 나가서 쉬어. 자네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재차 괜찮다고 했지만 현식 씨는 고집부리지 말라고 하더니 김대찬에게 보고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나이스!

사실 이미 내공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고 체력도 어느 정도 돌아와서 혼자 걸을 정도까진 된다.

사실대로 말했으면 나도 꼼짝없이 사체 정리에 참여했어야 했을 테니 귀찮아서 엄살을 좀 부려 본 건데… 통해서 다행이다.

* * *

은색 신분증을 반납하고 5분 정도 기다리자 직원이 번쩍번쩍한 금색 신분증을 내어 준다.

A 랭크 헌터 강신혁.

이론 시험도 없고 마나 측정과 실전뿐이라 쉽게 통과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물론 마지막에 나타났던 그레이트샌드웜만 아니었다면 생각대로 됐겠지만….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어쨌든 아무도 죽지 않고 심사도 통과했으니 됐다.

정산도 나름 괜찮게 받았는데 그레이트샌드웜 사체는 미포함이다.

업체에서 경매로 붙여서 하루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효용성이 높은 희귀한 몬스터인 데다 기여도에 따라 분배해 준다고 했으니 기대가 된다.

모든 게 만족스럽지만 아직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명함을 꺼냈다.

[아레스 Guild master 김대찬

010-1234-4321]

사체 정리를 마치고 협회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릴 때, 김대찬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으니 승급 절차가 끝나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고 갔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4)

학부모 면담

응시자 명단에서 강신혁이라는 이름을 봤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다른 심사관이 마나 측정에서 473만이 나온 응시자가 있다며 꽤 유명하고 세진이 학교 선생인데 모르시냐고 묻는 걸 듣고, 그제야 세진이 보강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걸 생각해 냈다.

딸을 가르치는 선생인 걸 알았지만 편의를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자식이 김만동에게 형평성을 운운해서 세진이의 주말 훈련이 취소됐으니까.

얼굴도 허여멀겋고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 사내다운 구석이 전혀 없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시 놈이 먼저 아는 체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잘 봐달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 바로 탈락시킬 생각이었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다.

세진이는 잘 가르친다고 했지만, 세진이 기준에나 그렇지 내 기준엔 실력도 없으면서 자존감만 강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판이었다.

공략에서 보여 준 놈의 능력은 정말 의외였다.

공략 처음부터 마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모래 속에 있는 몬스터까지 탐지해 내는 신기를 보였다.

거기다 계속되는 사냥으로 다른 응시자와 심사관들까지 지쳐 땀을 흘리고 인상을 쓸 때, 녀석만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호흡 또한 흐트러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레이트샌드웜이 나타나 응시자 1명을 집어삼켰을 때도 상당히 곤혹스러웠는데 녀석 덕분에 응시자를 구해 낼 수 있었고.

가장 놀랐던 건 마지막 샌드웜의 사체에서 놈의 검이 핵을 찌른 채로 발견됐을 때다.

포탈 공략 완료의 신호로 하늘이 노란색으로 물들 때도 정말 놀랐지만, 검이 발견됐을 때는 정말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먼저 공격했을 때도 샌드웜의 머리는 땅속으로 들어간 상태였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사체의 상흔을 보면 어느 정도 확인을 할 수 있겠지만 잡아먹힌 응시자를 구한다고 난도질을 해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을 할 수 없어 아쉬웠다.

생각을 정리할 때 인터폰이 울렸다.

―이사님, 지금 밖에 강신혁 헌터가 왔습니다. 이사님을 뵈러 왔다는데요.

"내가 부른 거 맞으니까 들여보내요."

뒤늦게 김만동의 추천서를 받아 A 랭크 심사를 보게 됐다는 걸 알았는데, 김만동 그 양반 안목은 역시 경시할 수가 없다.

올해 겨우 25살밖에 안 됐는데 마나 수치도 그렇고 S 랭크 헌터로 성장할 자질이 보이니 스카우트 제의를 해 볼까 한다.

* * *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협회니까 8층으로 오라고 해서 약간 의외였다.

약속만 잡고 다른 날에 만날 줄 알았지, 이렇게 바로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저녁 약속을 했지만, 아직 시간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을 눌렀다.

속단할 순 없지만 아마 세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닐까 싶다.

어젯밤 세진이에게 문자를 보내고 자려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교감 선생님이 아버지를 설득할 때 내가 교감에게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나에 대해 상당히 안 좋게 이야기하기에 걱정이 돼서 전화했다는데, 이게 참….

교감이 내 이름을 거론할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다.

어쨌든, 교감에게 세진이의 주말 일정을 취소시켜 달라고 부탁한 건 나니까 세진이에게도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실제로 오늘도 딱히 눈치를 주는 것 같진 않았고 불이익 같은 것도 없었다.

[8층입니다.]

8층에 도착해 바로 안내판을 확인했다.

안내판에서 본 대로 우측으로 꺾어서 3분 정도 걷자 안내 데스크가 보인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김대찬 헌터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약속은 하셨나요?"

"네. 조금 전에 통화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 1명이 인터폰으로 짧게 이야기를 하더니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뒤따랐다.

지나가며 보니 방이 참 많고 방마다 익숙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전부 S 랭크 헌터의 이름이다.

S 랭크 헌터 모두 협회의 명예이사를 겸직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인 줄 알았지 협회 내에 이렇게 따로 개인 업무실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는 김대찬이 보인다.

"어서 오게. A 랭크 등록은 잘 끝났나?"

"네. 방금 헌터증 갱신했습니다."

"축하하네. 내 아까는 심사관도 있고 다른 응시자도 있어서 티를 안 냈는데 평소에 딸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오늘 활약도 정말 대단했고."

"아닙니다."

"아니긴. 자네 덕에 사람을 살렸는데. 아, 일단 앉지."

"아, 네."

어제 세진이에겐 안 좋은 이야기를 잔뜩 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호의적이지?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뭔지…."

"뭐가 그리 급한가, 이 사람아. 일단 차나 한잔하면서 이야기 좀 하다… 그래, 오늘 저녁 같이 하는 거 어떤가? 조금 있으면 저녁때인데. 술도 한잔하고."

"저녁에는 제가 선약이 있어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까 포탈에서의 활약 때문에 평가가 좀 올라간 모양이다.

"흐음, 내가 원래 말을 돌리는 성격이 아니라 바로 이야기하겠네. 우리 길드에 오지 않겠나?"

"네?"

"전혀 예상 못 한 표정이군. 내가 원래 이런 제안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닌데 오늘 자네 실력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탐이 나더라고."

당연히 딸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스카우트 제의라니….

김대찬의 말처럼 전혀 생각도 못 했던 터라 너무 당황스럽다.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교직 생활이 무척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요."

"너무 성급하게 대답하지 말게. 헌터 학교도 좋은 직장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벌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않나? 자네가 우리 길드에 온다면 내 바로 팀 하나를 맡기겠네."

팀장을 시켜 주겠다고?

진짜 이 양반 왜 그러지?

아레스 길드는 국내 10대 헌터 길드로 그런 길드의 팀장이라면 정말 괜찮은 자리인 건 맞다.

급여도 교사보다 두 배 이상은… 아니, 최소 한 달에 1억 이상은 받을 테니 몇 배는 차이가 난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헌터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돈 때문에 교사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니까.

게다가 처음에는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헌터 학교에 왔지만, 교사라는 직업 자체에 매력을 느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 보게.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보여. 어쩌면 수년 내로 나와 같은 S 랭크가 될지도 모르지. 발전을 위해선 학교보다 길드가 낫지 않겠나?"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교원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포탈 공략도 하고 있고…."

"방학이 얼마나 된다고. 자네가 재능이 있다고 해도 S 랭크라는 경지는 그런 식으로 띄엄띄엄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세."

이 양반이 진짜, 좋게 말해도 못 알아먹네.

'나도 이미 초절정 고수니까 가르치려 들지 마, 이 양반아.'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다시 안으로 삼켰다.

상대는 학부모니까.

"죄송합니다."

"에잉, 쯧쯧. 거, 사람 참. 그럼 우리 교감 선생에게 말해서 세진이 주말에 다시 외출해서 포탈 공략할 수 있게 협조라도 좀 해 주게."

"네?"

"자네가 교감 선생에게 형평성을 들먹이며 반대했다고 들었네만."

"저기, 그건…."

"군소리 말고 세진이 생각해서 협조 좀 해 주지 그러나?"

세진이를 생각해서?

어이가 없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

"형평성도 형평성이지만 세진이 건강이 걱정돼 교감 선생님께 이야기를 드린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아시겠지만 세진이는 학교 학생회장도 하고 있고 3학년이다 보니 과제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말까지 나가서 포탈 공략을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하더군요. 살도 엄청 빠졌고 아버님께 이야기는 안 한 것 같은데 지난 금요일에는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꽤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쓰러진 걸 말해도 될까 고민을 했는데 역시 쓰러진 걸 이야기하길 잘한 것 같다.

아무리 자식에게 가혹한 부모라도 자기 자식이 과로로 쓰러졌다는데 거기서 더 억지를 부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세진이가 하기 싫다고 하던가?"

"네? 아니… 아버님, 지금 그게 무슨…."

"내 말 아직 안 끝났네. 세진이 스스로가 하기 싫다고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내가 어제도… 아니지, 생각해 보니 금요일에도 통화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네. 목소리도 멀쩡했고. 그냥 약간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닌가?"

생각 같아선 네 딸이 하기 싫다고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금요일 밤 한참 고민하다 내게 부탁한다고 말했던 세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 너무 생생하니까.

남의 애도 아니고 자기 애가 쓰러졌다는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답답하지만 세진이가 하기 싫어했다고 하면 또 세진이를 고양이가 쥐잡듯이 잡을 테니 마음을 가라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세진이는 성실한 학생입니다. 재능도 있고 이번 무투 대회에서도 세진이가 우승할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 너무 몰아붙이지 않으셔도 충분히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습니다."

"내가 세진이를 주말에 불러 포탈 공략을 시킨 건 그깟 무투 대회 때문이 아니라 WHCU 대회 우승이 목표이기 때문이네. 자네 말대로 우리 세진이에겐 재능이 있어.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재능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주마가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마가편(走馬加鞭).

직역하면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 더 빨리 뛰게 한다는 말로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북돋워 준다는 뜻이다.

"나는 세진이를 약하게 키울 생각이 없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걸세. 세진이는 나중에 내 뒤를 이어 길드를 이끌어 나가야 하니까."

원작으로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말 이기적이다.

이런 사람도 부모라고….

세진이가 너무 불쌍하다.

"저는 아버님의 교육 방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면 당장은 더 빨리 뛰겠지만 계속 채찍질을 하다 보면 말은 결국 쓰러집니다. 숨 고를 여유, 물 마실 틈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자네는 세진이 담임도 아니고 3학년 검술 담당 교사도 아닌 거로 아는데. 최근에 몇 번 가르쳤던 보강 담당이 학부모에게 교육 방식 운운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주제넘은 발언일세."

"가르친 시간이 아무리 짧았다고 해도 제가 세진이를 가르친 이상 세진이는 제 학생입니다. 헌터 학교 교사로서 저는 제 학생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고 학생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상에는 예외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설령 부모일지라도요."

"뭐? 지금 그 말은 내가 세진이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말인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세진이는 내 자식이야. 내 자식 내 방식대로 교육하고 키우겠다는데 자네가 무슨 상관인가!"

"아무리 낳아 준 부모라도 자식을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습니다."

"허, 계속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데, 난 다 세진이를 위해서 그런 걸세. 세진이도 여태 싫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군."

"아버님이 강압적으로 말씀하시니 그 착한 녀석이 어떻게 거부를 했겠습니까?"

"뭐? 보자 보자 하니까… 자네 도움 같은 건 필요 없네. 내가 교감 선생에게 다시 이야기할 테니까."

"아버님이 지금 같은 교육 방식을 고수하신다면 WHCU 대회 우승도 절대 불가능할 거고 끝내 세진이도 망가질 겁니다."

"그래도 세진이 학교 선생이라고 좋게 이야기하려 했건만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건가?"

"저야말로 세진이 아버님이시니 지금껏 좋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좋게 말하니 들은 체도 안 하고 자기 의견만 주장한 게 누군데?

"진짜 한번 해보자는 건가? 고작 A 랭크 헌터 주제에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거야! 자네랑은 더 말 섞고 싶지 않으니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썩 꺼지게."

험한 꼴 보기 싫으면 꺼지라고?

학부모라고 해서 참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얼른 안 나가고 뭐 하냐며 다시 한 번 고성을 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상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뭐 하자는 건가?"

내가 무슨 암기라도 꺼내는 줄 알았는지 경계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내가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은 암기 같은 게 아닌, 아까 포탈 공략에서 썼던 장갑이다.

"전혀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말로 안 된다면 헌터의 방식으로라도 아버님을 납득시키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장갑을 김대찬 앞에 던졌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65)

결투 장소는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협회 지하에 있는 결투장에서 하기로 해서 김대찬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에 도착했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없던 일로 해 줄 수도 있네."

"괜찮습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배려하는 척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역겹다.

결투 신청을 하면서 내가 걱정했던 건 딱 하나뿐이다.

자존심 강한 김대찬이 결투를 받아 주지 않는 것.

A 랭크 헌터인 나와 겨루는 것 자체가 격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거절할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도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진심이냐며 되묻길래 거절하는 줄 알고 놀랐지만 내가 진심이라고 하자 잠시 생각하더니 결투를 받아들였다.

내가 승리했을 때 조건은 모든 훈련을 세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어떤 식으로도 강요나 압박하지 않는 것인데 김대찬이 제시한 조건은 나의 퇴사였다.

나같이 무례하고 예의 없는 교사는 자기 딸은 물론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며 학교를 그만두란다.

나는 순수하게 세진이를 위한 조건을 걸었는데 퇴직이라니, 수지 타산이 전혀 맞지 않지만, 이의를 제기하면 안 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기면 그만이다.

"들어가지."

앞서가던 김대찬을 따라 결투장 안으로 들어왔다.

결투장은 학교에 있는 마법 결투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하지만 사람은 직원으로 보이는 3명 말곤 없는데, 지금이 5시라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운영 시간이 끝나서 그런 것 같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결투실 관리팀장 박원일입니다."

"그래, 박 팀장. 연락은 받았지?"

"네. 비서실에서 연락받았습니다. 저기, 그런데 혹시 이사님이 직접 결투하시는 건가요?"

"그렇네. 자네가 심판을 하면 되겠군."

"아, 알겠습니다. 상대는 이분이신가요? 규정상 상대도 등록해야 하는데…."

"네. 뭘 하면 되죠?"

"여기에 서명해 주시고 헌터증 한번 주시겠어요?"

직원이 건네는 서류에 서명하고 헌터증을 건네줬다.

절차가 그리 복잡하진 않아서 금방 결투장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준비 시간이 약간 걸린다고 해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다 보니 어느새 결투장 주변에 투명한 배리어가 생겨났다.

"세팅은 끝났는데,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네."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을 맡은 직원이 손을 올리며 시작을 알렸다.

"선공은 양보하지."

거만한 표정인데, 과연 언제까지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바로 검을 던졌다.

시작부터 내가 검을 던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볍게 몸을 비틀어 내 검을 피한다.

"어이가 없군. 검사가 시작부터 검을 던지다니, 뭐 하자는 건… 엇!"

김대찬이 피하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던 검이 방향을 선회해 다시 김대찬을 향해 날아갔다.

목표는 허벅지.

전혀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그래도 S 랭크 헌터라 그런지 피하긴 했는데 완벽하게 피하진 못해서 옷자락이 살짝 잘려 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옷만 스쳤는지 피는 안 보인다.

"저 사람 아까 헌터증에 검사라고 되어 있지 않았어?"

"그랬는데 검이 어떻게 저렇게 떠 있지?"

밑에 있던 직원들이 여전히 김대찬 주변에 떠 있는 검을 보고 놀랐는지 웅성거린다.

"마나로 검을 조종하는 건가? 신기한 기술을 쓰는군."

웅성거리는 직원들을 의식한 건지 태연한 척 말을 하지만 얼굴은 처음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럼 제가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검을 날렸겠습니까?"

몇 번 더 공격할까 생각을 했지만, 예상을 못 했을 때도 반응해 피했으니 이제는 재미 보기 힘들 것 같아 검을 불러들였다.

굳이 내공 소모가 큰 이기어검을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

"선공은 양보했으니 이젠 내가 가지."

김대찬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올라오더니 검을 완벽하게 휘감는다.

강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강기뿐이라 나도 검강을 일으켰다.

"와! 오러블레이드다!"

"어? 저 사람 검, 저것도 오러블레이드 아니야?"

"에이, 오러블레이드는 S 랭크 헌터만 쓸 수 있는 거 몰라?"

"아니야. S 랭크 헌터가 아니라도 오러블레이드 비슷한 기술을 쓰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도 그런 경우인가 본데?"

"그래 봤자지.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진짜한테는 안 되지 않겠어? 겉으로만 봐도 김 이사님 쪽이 색깔도 훨씬 진하고 밝잖아."

또다시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기어검만큼은 아니더라도 강기도 내공 소모가 꽤 심한 기술이다.

그래서 강기에 익숙해질수록 최소한의 내공으로 강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강기의 색깔도 옅어지고 빛도 약해진다.

색깔이 옅고 빛이 약하다고 해서 강기가 아닌 건 아니니까.

김대찬이 빠르게 다가오며 강기가 가득 실린 검을 휘두른다.

퍼엉― 퍼엉―!

나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서로 강기를 사용해서 그런지 검끼리 부딪치는데 무슨 폭격을 하는 것처럼 광음이 터진다.

첫 공격에 이어 쉴새 없이 몰아붙이는데, 속도 하나만큼은 지난번에 싸웠던 교감보다 훨씬 빠른 것 같다.

물론 힘은 교감이 절대 우위다.

하지만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교감보다 빠른 수준이라는 거지 나랑 가장 많이 대련한 사부와 비교하면 그리 빠른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김대찬의 검술이 다른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검술과 비슷한 면이 꽤 있다.

변칙적인 공격들은 속도를 맞춰 대응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검술을 이용한 공격은 파훼식을 응용해 단 번도 회피하지 않고 검으로 받아쳤다.

30합 정도 겨루자 김대찬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 간다.

그도 그럴 게, 단 한 번도 유효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으니까.

이게 전부라면 실망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김대찬이 지금까지 패턴과 달리 크게 검을 한 번 내지르더니 내가 막는 반동을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벌써 지치셨습니까?"

근거 없는 도발이 아니다.

김대찬의 검강은 처음보다 색깔도 옅어지고 밝기도 줄어든 반면 내 검강은 처음과 달라진 게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단순히 입만 산 건 아닌 것 같으니 이제부터 진심으로 상대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돌진해 들어오는데 확실히 조금 전과 비교하면 속도가 조금 늘었다.

공격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검술이 아닌 변칙적인 공격이고.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 * *

나가라는 말을 무시하곤 헌터의 방식을 들먹이며 결투 신청을 했을 때는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이제 막 A 랭크 헌터가 된 애송이가 무슨 배짱으로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심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을 땐 화가 나는 걸 넘어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기면 사표를 쓰라는 조건을 걸었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는 걸 보고 기가 찼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도 입만 산 건 아니었는지 결투가 시작되고 관례에 따라 선공을 양보하니 마나로 검을 조종하는 기이한 기술을 보여 하마터면 체면을 크게 구길 뻔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오러블레이드를 만들자 놈도 똑같이 오러블레이드를 만들었다.

처음엔 살짝 놀랐지만, 색깔도 옅고 희미한 형편없는 오러블레이드를 보니 가소로웠다.

오러블레이드는 결코 아무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마나를 쥐어짜서 겉모습을 비슷하게 만드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위력까지 따라 할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더 버틸 생각이었다면 나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싸우는 게 좋았을 텐데, 어리다 보니 경험이 부족한 것 같다.

저런 가짜는 몇 번 부딪히면 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진 않았다.

놈은 이제 막 A 랭크 헌터가 된 풋내기니까.

주제도 모르고 결투를 신청한 무례한 자식을 단번에 끝내는 건 너무 가벼운 처사니 조금씩 수준을 올려 제대로 벽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조금만 지나면 바닥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수준을 계속 높여 지금은 80… 아니, 90%까지 끌어올렸지만, 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내 모든 공격을 막아 내고 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던 가짜 오러블레이드 또한 건재하고 중간중간 반격까지 하고 있다.

이 자식 도대체 뭐지?

방심하다간 체면을 제대로 구기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을 크게 내지르고 놈이 막는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벌써 지치신 겁니까?"

갓 A 랭크 헌터가 된 애송이에게 이딴 소리를 듣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단순히 입만 산 건 아닌 것 같으니 이제부터 진심으로 상대하지."

애송이라고 무시하던 마음을 버리고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내 검은 단 한 번도 놈에게 닿지 않았다.

아무리 속도를 높이고 변칙적인 공격을 해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모조리 받아치니 미칠 지경이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녀석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건지….

벽을 느끼게 해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벽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뒤로 물러나 손을 들었다.

* * *

"이사님, 왜 그러십니까?"

"뭡니까?"

설마 기권인가?

그렇다면 진짜 실망인데….

"배리어 하나… 아니, 2개 더 늘려 줄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밑에 두 사람, 배리어 추가 좀 해 줘."

다행히 기권은 아닌 것 같다.

무슨 대단한 기술을 쓰겠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딱히 두렵진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 배리어와 바깥의 배리어가 2개 더 생겼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자네는 이만 내려가게."

"네? 저기, 그럼 심판은 어떻게…?"

"아래에서도 승패는 판정할 수 있지 않나?"

직원이 내려가고 잠시 뒤 호각 소리와 함께 결투가 재개됐고 김대찬이 왜 그런 요청을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까처럼 달려들지 않고 거리가 있는 상태 그대로 검을 휘둘러 강기를 쏘아 보낸다.

콰앙―!

나도 강기를 일으켜 막았지만 1개가 아니라 연이어 날아온다.

전부 막는 건 비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어 피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최대한 보법을 밟으며 피하고 피하기 힘든 것들만 받아쳐 냈다.

콰앙! 쾅! 쾅!

내가 피하거나 막아서 튕겨난 강기 덩어리들이 배리어에 부딪히자 광음과 함께 배리어가 터져 나간다.

다행히 바로 복구돼서 결투가 중단되진 않았다.

마나가 썩어 넘치나?

강기를 발출하는 건 검에 강기를 만들어 싸우는 것보다 마나 소모가 훨씬 클 텐데, 무슨 폭격 수준으로 강기를 쏟아 낸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아무리 많은 공격을 해도 맞추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군."

"그럼 조준을 잘 좀 해 보시던가요.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쏜다고 제가 맞겠습니까?"

도발에 도발로 응수하며 계속 보법을 밟으며 피하고 막았다.

아무래도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

김대찬의 마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무한한 건 아니니까.

본인도 이렇게 가면 불리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이런 무지성 소모전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10분 정도면 마나가 바닥날 거라 생각했는데, 강기 폭격은 거의 20분 가까이 지속됐다.

진짜 다른 건 몰라도 마나양 만큼은 인정해야겠다.

그래도 예상대로 쏘아 내는 강기가 점점 줄어들고 텀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결국 멈췄다.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패배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실컷 공격하곤 기권이라니 맥이 빠지지만 어쨌든 이겼으니 됐다.

"패배를 인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 승부는 나지 않은 거 아닌가?"

이 양반이 진짜.

"그럼 계속하시죠."

"나도 그러고 싶지만, 여건이 따라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군."

갑자기 무슨 여건 타령을… 아니, 잠깐. 설마?

하아…. 완전히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