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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TO 54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4)

선생님은 감동했다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한 애들을 데리고 정문을 나가자 김 선생님과 관광버스 두 대가 보인다.

"선생님, 이 버스 뭐예요? 선생님이 빌리신 거예요?"

"그래."

예약해 둔 곳도 서울이라 학교에서 그리 먼 건 아닌지만 인원이 80명이니 전세 버스를 빌렸다.

택시 수십 대로 왔다 갔다 하면 복잡하고 인원 파악도 힘들 테니까.

"어? 보건 선생님이다."

"안녕하세요."

"얘들아, 안녕."

"보건 선생님도 같이 가시는 거예요?"

"김 선생님이 기자분도 소개해 주셨고 도움을 많이 주셨거든. A 조는 선생님이랑 같이 여기 버스 타고 B 조는 김 선생님이랑 같이 탑승해."

버스마다 보호자는 1명씩 있어야 할 것 같아 김 선생님께 혹시 괜찮으면 동행해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두 버스를 돌아다니며 애들이 다 탄 걸 확인하고 출발했다.

"선생님 저희 뭐 먹으러 가는 거예요?"

"멀리 가요?"

"설마 한우?"

"저는 회 먹고 싶은데…."

"저는 랍스터요!"

질문 세례를 퍼붓는 녀석들에게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라 말하자 다들 궁금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이다.

40분가량을 달려 목적지 부근에 도착하자 지루해하던 학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백제호텔 아니야?"

"백제호텔 맞네. 예전에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에 온 적 있어. 음식 퀄리티 진짜 개쩌는데."

"호텔 뷔페면 비싸지 않아?"

주말·공휴일에 1인당 약 13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비싸긴 하지.

사실 아예 통째로 빌리느라 돈이 좀 더 들긴 했지만 상관없다.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할 때, 이 녀석들은 나를 신뢰하고 지지해 줬으니까.

녀석들이 내게 보내 준 믿음과 신뢰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다.

지금도 처음 글을 봤을 때를 생각하면 살짝 울컥해질 것 같은 게,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선생님,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여기 안 갈 건데?"

"도착했습니다."

"자자, 근처에 버스 댈 데가 없어서 주차장만 빌린 거니 다들 김칫국 그만 마시고 내리자."

마지막까지 페이크를 주자 이 순수한 녀석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렸지만 이내 내 거짓말은 들통나고 말았다.

김 선생님이 인솔한 B 조 아이들에겐 말을 해 버렸으니까.

"진짜 호텔 뷔페 가는 거예요?"

"대박! 선생님 최고!"

"강신혁! 강신혁!"

"다들 그만. 식당은 전세 내긴 했지만, 호텔에 머무는 손님도 있으니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돼. 자, 줄 서서 들어가자."

우렁찬 함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는 녀석들과 함께 호텔에 들어섰다.

식당까지 데려가서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으라고 말하고 나도 음식을 가지러 가려다가 기사님들 생각이 나서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계약할 때 따로 밥을 챙겨 줘야 한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어차피 전세 냈고 나갔다가 다시 오시려면 번거로울 테니까.

아까 같이 이야기하고 올라오면 편했을 텐데 애들 인솔 때문에 미처 생각을 못 했다.

혹시 다른 곳으로 이미 식사하러 가 버리셨으면 전화를 하려 했는데 다행히 두 분은 버스에서 이야기 중이셨다.

"20분 거리에 곰탕집 하나 있네. 거기 가서…."

"어?"

"두 분 식사 안 하셨죠? 들어가서 같이 식사하시죠."

"네? 아니, 여긴 너무 비싼 곳이라…."

"저희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세 냈거든요. 애들이 이렇게 많은데 두 분 추가 된다고 돈 더 받진 않겠죠. 여기서 다른 식당까지 가기도 번거로우실 텐데 들어가셔서 같이 드시죠."

두 분 다 살짝 부담스러운 표정을 하셨지만, 재차 권해 함께 식당에 도착했다.

"편하게 식사하세요. 이따 갈 때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드시라고 말하고 음식을 적당히 챙겨 자리로 와 보니 김 선생님은 벌써 접시를 3개나 비웠다.

"여, 여기는 접시를 좀 늦게 치워 주네요."

"편하게 드세요. 뷔페인데 많이 드셔야죠."

"여긴 처음인데 음식들이 다들 괜찮네요."

"다행이네요."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기사님들 챙기는 걸 깜빡해서요. 어차피 전세 냈으니까 같이 드신다고 돈 더 받는 것도 아니라서 오셔서 식사하시라고 했어요."

"진짜 강 선생님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네요."

"하하…. 참, 지난번에 제대로 인사를 못 했던 것 같은데, 기자분 소개해 주신 건 정말 감사했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우리는 팀이잖아요?"

"아, 그래도. 감사해요. 오늘도 이렇게 도와주시고, 제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애들도 말도 잘 듣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덕분에 맛있는 식사도 하고. 오히려 저 말고 다른 선생님 불렀으면 섭섭했을 거예요."

"그럼 나중에 더 좋은 데서 식사 대접 한번 하겠습니다."

"정말요? 기대할게요."

기대라…. 뭐, 사부 때문에 중식당 알아본 곳이 몇 곳 있으니 그중 괜찮은 데 데려가면 되겠지.

접시를 비우고 음식을 가지러 가며 아이들을 봤는데 다들 먹기 바쁘다.

잘 먹는 걸 보니 뿌듯하다.

"저기… 선생님, 콜라도 시켜도 돼요? 쥬스랑 에이드밖에 없는데."

"선생님이 아까 뭐라고 했지? 눈치 보지 말라고 했잖아. 콜라든 사이다든 얼마든지 시켜 먹으렴."

호텔이라 그런지 캔 하나에 8,000원이라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오늘만큼은 돈은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데 쌤, 보건 선생님이랑은 많이 친하신 것 같은데, 혹시…."

"진수는 그만 먹고 버스로 가고 싶은가 보구나?"

"아, 아닙니다…."

바로 꼬리를 마는데, 하여간 요 녀석은 나서서 매를 버는 스타일이다.

"방학 때 같이 사냥 다니면서 친해졌어. 제주도에도 같이 갔었고. 보건 선생님 곤란하실 테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애들을 한 바퀴 싹 둘러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직원이 와서 접시를 치우는데 그새 또 많이 가져다 드셨는지 접시가 상당하다.

"애들 챙기느라 제대로 못 드시는 것 같은데, 전 거의 다 먹었으니까 제가 애들 볼게요. 많이 드세요."

"아니에요. 애들이 진짜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먹고 있는데요, 뭐. 저도 충분히 잘 먹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드세요."

"참, 강 선생님, 이설이 채용 시험 붙은 건 알고 계세요?"

"정말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전화 왔던 것 같은데, 제가 요새 소송이랑 오늘 일도 있고… 신경 쓸 게 많아서 깜빡 잊고 다시 전화를 못 했네요."

병원도 다니고 변호사와 미팅도 하고 오늘 일로 버스와 호텔 예약 등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깜빡했다.

어차피 당연히 붙을 거라 예상했다.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A 랭크 헌터인 데다 교감과 친분까지 있으니 떨어지면 오히려 이상하지.

"이설이도 이해할 거예요. 앞으로 학교에서 점심도 같이 먹고 자주 어울려요."

"저야 당연히 환영이죠."

드디어 나도 밥 같이 먹을 사람이 생기는구나.

"보건실에 오시면 커피도 맛있게 타 드릴게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멋쩍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김 선생님의 요리 실력과 취향을 생각하면 식초를 탄 커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소송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데스패치 측에서 정정 보도 낸 건 봤는데 계속 소송하신다고 들어서."

"정정 보도는 정정 보도고 피해 보상은 별개죠. 시간이 좀 걸릴 거라는데 제가 자료만 보내 주면 변호사님들이 알아서 다 해 주시니까 제가 신경 쓸 건 많이 없어요."

"그래도 신경을 아예 안 쓸 수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죠. 데스패치 쪽은 언론중재위원회? 여기에 중재 신청을 했는데 여기서 해결이 안 되면 법원 절차를 밟는다고 해서 일단 악플러들만 고소하는 중이에요."

"잘 해결되시길 바랄게요. 악플러들도 꼭 다 처벌하시고요."

"물론이죠. 절대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 * *

"만식아, 피방 고?"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여보세요?"

"마포서 사이버수사과입니다. 김만식 군 맞죠?"

경찰?

"그런데요?"

"예전에 강신혁 씨 기사에 댓글 달았던 사실 있죠?"

"네? 아니, 그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보이스 피싱인 줄 알았는데 진짜 경찰인 것 같다.

"기억이 없다라… 포털 아이디 SD21354 아니에요? 기사에 '선생은 개처럼 발정 나서 학생이나 건드리고, 애새끼도 선생이 꼬신다고 넘어가서 가랑이나….' 어우, 심하게도 썼네. 이래도 기억 안 나요?"

"그게… 예전에 썼던 것 같긴 한데…."

"강신혁 씨랑 서은서 씨에게 고소돼서 경찰에 출석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아야 하는데, 학생이니 이번 주 토요일 올 수 있죠? 아, 미성년자니까 부모님도 모시고 와야 해요."

"저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바로 지울 테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그런 댓글을 썼다는 걸 부모님이 알면 끝이다.

"이미 고소장이 접수돼서 합의를 보려고 해도 부모님이 보셔야 하니 불가능하니까 토요일 오전 중으로 부모님 모시고 와요."

"그때는 기사가 그런 내용이어서 다들 욕하는 분위기였잖아요. 저도 기사 보고 욕한 건데…."

다시 한 번 사정했지만, 경찰은 아무리 그래도 선은 지켰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토요일까지 꼭 부모님 모시고 오지 않으면 잡으러 올 수 있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어 버렸다.

"만식아, 무슨 전환데 그래? 피방 안 감?"

"안 가…."

망했다….

* * *

"지금 뭐라고 했어? 얼마라고?"

"강신혁 측에서 피해 보상으로 요구하는 게 7억이고, 서은서 측에서도 1억을…."

"이미 정정 보도까지 냈는데, 하…. 그래, 서은서 1억은 그렇다고 치자. 아니, 강신혁은 7억이 말이 돼? 완전히 날강도잖아."

"그게… 위자료, 정신과 치료 비용, 치료를 받느라 일하지 못한 금액, 변호사 비용까지 전부 합산해 청구한 금액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는 기사는 봤지만 교사 생활은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필시 배상금을 더 뜯어내려는 수작이다.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장앤김이라고 해도 변호사 1명당 2억씩 받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언론중재위에 알아보니까 1억은 위자료고 1억은 치료비와 변호사 선임비 등을 포함한 기타 비용이고 나머지 5억이 일실수입 손해를 기준으로 책정한 거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일실수입이 무슨 5억이나 해!"

설령 교사 일을 쉬고… 아니, 그만뒀다고 해도 5억은 말이 안 되지.

아무리 헌터 학교라고 해도 일개 교사가 연봉도 아니고 월급이 억 단위는 아닐 테니까.

"헌터 학교 교사들은 방학 때 포탈 사냥을 다니니 당시 수익으로 책정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5억은 말이 안 되지. 강신혁 그 자식이 S 랭크 헌터야? B 랭크 헌터잖아. 우리 기사 나간 것도 8월 말이고."

"그게 정확히는 19일입니다."

"19일이면 말일이지. 그래도 대충 10일 정도밖에 안 되는데 B 랭크 헌터가 하루에 5천씩 벌었다고?"

"그렇습니다. 중재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 평균 수익이 5천 이상입니다."

"말이 안 되잖아. 뭔가 조작하거나 사기 친 거 아니야?"

"강신혁 측에서 제출한 자료가 국세청에서 발급받은 자료라…."

미치겠다.

강신혁 허위 보도 이후로 광고도 줄줄이 취소돼서 가뜩이나 회사 사정이 어려운데.

8억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중재위 중재 포기하고 법원 쪽으로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공익 목적이었다고 우기고 오래 끌면 그쪽도 지쳐서 배상금을 조금 낮출 수 있을 것 같은데…."

"운이 좋으면 조금 깎일 수도 있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지연이자도 내야 할 텐데…."

"하…. 중재위원회 다음 주라고 했지? 그때까지 생각해 볼 테니까 나가 봐."

"저기, 아직 말씀드려야 할 게 남았습니다."

"또 뭔데?"

"강신혁 측에 고소당한 악플러들에게 계속 전화가 오는데, 우리 쪽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강신혁 그 자식 진짜 독하네. 싹 무시해. 자기들이 악플 쓴 거잖아."

"그게, 우리 기사가 아니었다면 자기들이 악플을 썼겠냐며 책임지라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하는데. 항의성 전화가 빗발쳐서 업무가 안 될 지경이라…."

하…. 진짜 미칠 것 같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5)

낭중지추

다사다난했던 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지 어느덧 2주란 시간이 흘렀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요즘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오늘은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지만.

지난 2주간 상당히 바쁘게 보냈다.

학기 초라 서류 업무도 많고 소송 관련해서도 변호사가 대부분 알아서 해 주긴 해도 내가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꽤 있었으니까.

거기다 사부까지 챙겨야 하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데 다행히 어제 데스패치 측에서 백기를 들었다.

변호사들은 데스패치가 중재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 했지만, 예상과 달리 데스패치 측에선 우리가 중재위에 제출한 조건 그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내게 고소당한 악플러들이 연대해 데스패치 측에 소송을 걸었다는데 이길 가능성 없는 우리와 다투기보단 그쪽에 주력하기로 한 것 같다.

원래 메이저 언론사도 아니었고 허위 보도 이후 광고도 많이 끊겨 자금 사정이 안 좋다고. 원래 배상금을 다 받아 내는 것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10억쯤 부를 걸 그랬다.

데스패치와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악플러들은 계속 고소 중이다.

처음에는 잘못된 기사를 보고 댓글 단 건데 너무하지 않냐고 우기는 사람이 많대서 싹 무시하라고 했다.

같은 기사를 보고도 악플러들처럼 심한 댓글을 달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니까.

안타깝게도 벌금은 최대 200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그냥 내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합의를 원했다.

변호사 셋 모두 내게 합의하는 게 좋을 거라고 권유했다.

검사가 기소 유예를 하는 경우도 있고 법원까지 가도 초범이고 반성한다고 하면 200도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며.

벌금의 최대치인 200을 내겠다는 놈들은 합의를 해 주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어림없는 소리.

합의할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고 말하며 약하든 강하든 무조건 처벌받게 해 달라고 했다.

만약 합의했다면 언론에서 내가 데스패치에게 이미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 놓고도 돈독이 올라 합의금 장사를 한다며 물어뜯을지도 모르니까.

애초에 고소의 목적은 돈이 아니다.

"강 선생, 오늘 비도 오는데 끝나고 한잔 어때? 해물파전에 막걸리로. 콜?"

박 선생님은 참 한결같다.

일도 많고 오늘은 사부에게 가야 하니 거절하고 회의를 마치고 검술 훈련장에 올라왔다.

주식을 한 번 확인하고 웹 서핑을 하다 보니 밖이 시끄럽다,

수업 시간이 된 것 같아 어제저녁에 챙겨 둔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데, 지난번에 호텔 뷔페 사 준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다.

"선생님, 그건 뭐예요?"

"선생님이 너희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지."

* * *

"사부, 혹시 삼재 검법이라고 아십니까?"

"삼재 검법? 처음 들어 보는데. 지금 배우는 무공도 대성 못 했으면서 다른 무공은 왜 찾냐?"

"그럼 혹시 제가 익힌 것 말고 다른 무공은 잘 모르십니까?"

"천마 놈이나 삼봉이 놈 무공은 몇 개 알고 있긴 한데, 왜?"

"제 학생들에게 가르치려고요."

"학생이라면 제자를 말하는 거지? 제자면 네 녀석 무공을 알려 줘야지, 왜 다른 무공을 찾아?"

"그 학생이란 게 사부가 생각하는 제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뭐라고 설명해야… 아!

"무관에서 돈 받고 무공 가르칠 때 비기 같은 것까지 가르치진 않잖습니까? 대충 그런 느낌인데 이번에 도움을 좀 받아서 제 무공까진 아니더라도 쓸 만한 걸 가르치고 싶어서요."

사부의 세계에서는 삼류 무공이라도 이곳에서는 꽤 쓸 만할 테니까.

"무슨 뜻인진 알겠지만 우리 문파 기본 무공도 가물가물한데…. 그냥 라면이나 좀 사 주지 그러냐?"

애들이 사부처럼 먹을 거에 환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밥 한 번 사 주고 끝내는 건 아닌 것 같다.

"먹을 건 이미 사 줬습니다. 그러지 말고, 대단한 게 아니라도 좋으니 뭐 아는 거 없어요?"

"으음, 꼭 무공일 필요는 없지? 예전에 무당산에 갔다가 삼봉이 놈한테 배운 게 하나 있긴 한데…."

"오, 뭡니까?"

"삼봉이 그놈이 무공은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보잘것없었지만, 산에 살아서 그런지 약초에는 빠삭해 탕약만큼은 기똥차게 잘 만들었거든. 녀석이 나중에 제자 생기면 만들어 먹이라고 알려 준 건데…."

"잠깐만요. 사부,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왜 이제야… 악! 왜 때려요?"

"산삼도 두 뿌리나 처먹어 놓고 욕심내기는. 근골을 튼튼하게 만들고 혈도를 깨끗하게 만드는 정도라 네놈 수준에선 필요 없다."

"에이, 그럼 그냥 보약 같은 거네요."

보약은 한의원에서 지어도 그만인데 괜히 기대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만든 보약보단 훨씬 낫다. 영약처럼 내공을 늘려 주는 건 아니지만 효과는 확실하니까. 게다가 보약은 비싼 재료가 들어가지 않느냐? 무당파는 청렴을 추구하는 도문이라 가난하다. 그래서 녀석의 탕약의 재료는 전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약초다."

"알았으니까 뭐 다른 거 없어요?"

"효과 괜찮다니까 그러네."

무당산에서 흔한 약초였을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선 안 흔할 수도 있고.

설령 흔하다고 해도 어차피 효과가 없으면 말짱 꽝이니까.

"싸고 비싸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효과가 중요하죠. 제가 먹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면 사부도 안 먹어 봤을 텐데, 어찌 확신하십니까?"

"삼봉이랑 천마 두 녀석 다 비슷한 나이대의 제자를 거뒀는데, 마교에서 삼시 세끼 잘 먹였다는 천마 놈 제자보다 산속에서 나물이나 뜯어 먹인 삼봉이 제자 놈이 키가 훨씬 컸다."

꽤 그럴싸해 보이지만 표본이 1명이라면 그냥 유전적 차이 아닐까?

마교에서 빡빡하게 수련시킨다고 밤에 잠을 잘 안 재웠을 수도 있고.

무당 무공을 가르치는 과정에 성장판을 자극하는 운동 같은 게 있었을 수도 있다.

"삼봉 씨 제자가 원래 잘 클 체질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부모가 기골이 장대했다거나…."

"두 녀석 다 똑같은 체질이었다. 그리고 내가 고작 한 녀석만 보고 효과가 있다고 했겠냐? 삼봉이가 만든 탕약을 먹은 무당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키도 크고 건장했다."

표본이 좀 더 있었구나.

그럼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건데….

"그래도 그런 약 같은 건 꾸준히 오래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 오래는 아니던데. 삼봉이 놈이 말하길 지도 맨날 약초나 캐고 다닐 수는 없으니 일주일에 네다섯 번, 두 달 정도만 먹였다더라."

듣다 보니 꽤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 어차피 사부가 아는 삼류 무공도 없다니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챙겨 줘야겠다.

* * *

"간식이에요?"

"음료수?"

기대하는 표정으로 다가온 녀석들이 내가 상자를 열자 금세 실망하는 표정으로 바뀐다.

"쌤, 저는 건강해서 보약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저도 한약 안 받는 체질이라서…."

"쌤 저도 안 먹을래요."

"저도 싫어요."

이 자식들 봐라?

내가 얼마나 신경을 써서 만든 건데.

직접 달이진 않고 건강원에 맡긴 거긴 해도, 혹시라도 부작용이 있을지 몰라 한의사는 물론 한의약 학과 교수에게도 찾아가 자문까지 구했다.

"다들 한 포씩 먹어. 선생님이 너희들 생각해서 준비한 거니까 열외는 없다."

다들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1명씩 나와서 약을 가져간다.

"으윽. 쌤, 이거 너무 써요."

"뭐로 만든 거예요?"

"엄살 부리지 마.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거야. 전부 몸에 좋은 약초들만 넣었으니 흘리지 말고 쪽쪽 빨아 마셔."

"엄살이 아니라 이거 거짓말 안 하고 사약급인데요?"

"소인은 억울하옵나이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진수 넌 구보 한 바퀴 추가."

"아니… 쌤, 진짜 이거 더 마시면 죽을 것 같아요."

사실 어제 도착하고 나도 한 포 뜯었다가 한 입 먹고 전부 버리긴 했다.

자문을 구했던 전문가들도 전부 몸에 좋은 약초들이라 같이 달여도 이상은 없겠지만 이대로 만들면 너무 쓸 테니 감초라도 넣으라고 했는데….

하지만 괜히 다른 약초를 넣었다가 효과가 반감되거나 없어지면 곤란하니 넣지 않았다.

"앞으로 두 달간은 수업 전에 약 먹고 시작할 거야."

"두… 두 달이나요?"

"이런 걸 어떻게 두 달이나 먹어요?"

"쌤이 우리를 독살하려 한다!"

"어허, 반론은 받지 않는다. 다 너희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 * *

오후 수업까지 마치고 서류 업무 할 게 몇 개 있지만 급한 건 아니고 금요일이라 일찍 퇴근했다.

사부에게 가려는 건 아니다.

사부는 지난주에 토요일 가겠다고 해 뒀으니까.

오늘 일찍 퇴근한 건 최서라 때문이다.

점심시간에 녀석에게 안타스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으니 퇴근하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금요일이다 보니 늘 만나던 교사 체력 단련장이 아닌 밖에서 만나기로 해서 간단히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학교를 빠져나와 구석에 차를 대고 전화를 하려는데 양반은 못 되는지 먼저 전화가 왔다.

위치를 알려 주고 잠시 기다리자 녀석이 도착했다.

"차 너무 구석에 댄 거 아니에요? 오는 데 한참 걸렸네."

"학교 앞이잖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오해 살 수도 있는데."

"뭐 어때요?"

"뭐 어떻냐니…."

예전에도 그렇고, 연애할 생각 없다면서 자꾸 신호를 보낸다.

"선배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누가 봐도 예전에 제가 체이스 길드에 가서 연수해서 아는 사이라고 설명하면 되죠. 우리가 불륜 커플도 아니고."

"말이 청산유수네. 그래, 알았으니까 할 말은 뭔데?"

"선배가 이번에 엄청 유명해졌잖아요. 이미지도 좋아졌고. 그러니 어떻게든 다시 꼬셔 보래요."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번에 해명을 하는 과정에서 내 능력이 많이 드러났으니까.

대표적으로 지난번 연수 실기 평가 때도 혼자서 B 랭크 10인 포탈을 한 시간 만에 처리했고.

해랑 길드 길드원들이 지역신문과 인터뷰에서 내가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한다고 말해서 교감과 결투도 재조명됐고… 심지어 예전에 오우거를 혼자 잡았던 것까지 기사가 나왔다.

지금은 기사가 거의 내려가긴 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나는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하지만 원작의 강신혁은 그렇지 않았지.

언뜻 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미세한 변화나 사소한 행위가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나비효과'라는 말도 있으니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좀 막막하다.

겨우 논란을 벗어났는데 또다시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선배?"

"아, 응."

"지난번이랑은 달리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끌어들이라는데…."

"설마 무력으로 어떻게 해 보겠데? 아니면 너한테 미인계라도 쓰래?"

"그런 말은 안 했지만 정 안되면 협박이라도 하라고…."

"해도 안 먹혔다고 해."

"그럼 위쪽에서 예전에 선배가 안타스였다는 걸 폭로할지도 몰라요."

"내가 안타스에 들어가서 한 것도 없잖아. 호구처럼 돈만 뜯겼지. 난 몰랐다고 잡아뗄 거야."

예전이라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논란으로 단순히 유명해지기만 한 게 아니라 선한 이미지를 구축했으니까.

실제로도 돈만 뜯겼지 다른 건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건 그렇죠…."

대답하는 최서라의 표정이 좋지 않다.

생각해 보니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최서라가 곤란해진다.

나를 안타스에 가입시킨 건 바로 이 녀석이니까.

"안타스와는 더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나를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그쪽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

"…알았어요."

"삼원그룹 회장 정필재, 국회의원 노광식, 법무부 1차관 김종철. 일단 이 정도면 되겠지."

"갑자기 뭐예요?"

"전부 안타스 코리아 핵심 인물들이야. 앞으로 귀찮게 하면 이 사람들 정체는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전부 까발릴 거라고 말해."

"그런 걸 어떻게 안 거예요?"

"나름대로 조사를 하다 보니. 안타스도 섣불리 나서진 않을 테니 너한테도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인상 좀 펴."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결론을 내렸다.

더는 원작에 연연하지도, 바뀌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기로.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안의 송곳은 뚫고 나오는 법.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 능력은 알려졌을 거다.

이미 벌인 일도 많은데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애초에 사부를 만나고 무공을 배울 때부터.

아니, 내가 강신혁이 된 그 순간부터 이미 원작은 달라졌을 테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6)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추석 땐 뭐 하실 거예요?"

"추석? 아, 곧 추석이네."

최서라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오랜만에 나왔는데 같이 밥이라도 먹자는 권유를 받아서 학교 근처 번화가에 있는 식당에 왔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추석이면 다들 집에 가는 건가?

애들 먹이는 약 최소 일주일에 다섯 번은 먹어야 하는데….

집에 갈 때 싸 주고 챙겨 먹으라고 해도 분명 안 먹는 녀석들이 있을 것 같다.

먹는 거 인증 동영상이라도 촬영하라고 해야 하나?

"선배?"

"아, 뭐… 별 계획 없어. 기숙사에서 쉬거나 등산이나 가겠지."

강신혁은 고아다 보니 가족이나 친척이 없으니까.

원래 나도 가족과 사이가 틀어진 터라 명절은 늘 혼자 보냈다.

그나마 특별한 건 연휴 말미에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정도?

사부가 있긴 하지만 추석이라고 사부랑 같이 송편 빚고 전 부치는 건 좀….

지난번에 보니 떡도 잘 드시던데 송편이나 한 팩 사 가야겠다.

"기숙사에 있으면 밥은 어떡하려고요? 추석 땐 급식실도 쉬어요."

"배달시키거나 나가서 먹으면 되지."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보육원 봉사 활동 안 갈래요?"

"보육원을 명절에도 가려고?"

얘는 방학 때도 봉사하고 명절에도 봉사라니 참 대단하다.

"애들이랑 같이 송편도 만들고 전도 부쳐 먹고 꽤 재밌어요."

어디가 재미 포인트인지 이해가 잘 안 간다.

그냥 생고생 같아 보이는데….

"난 그다지 끌리진 않네. 친척 집은 안 가?"

"아, 별로 안 친하거든요. 예전부터 왕래를 안 했는데… 이상한가요?"

천애 고아인 나와 달리 최서라는 부모님 돌아가신 거니 친척은 있지 않을까 해서 무심결에 한 말인데 표정이 안 좋다.

괜한 말을 했나?

"안 이상한데? 이 상했으면 치과 가야지."

"…선배?"

"응?"

"그게 뭐예요? 완전 아저씨 같아요. 진짜 선배만 아니었으면…."

"미안."

나름 분위기 반전을 위해 날린 회심의 드립이었는데…. 별로 좋은 반응은 아니지만 그래도 녀석의 표정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요샌 가족끼리만 모이거나 아예 해외여행 가는 사람도 있는데 이상할 건 없지."

"그러니까 봉사 활동 같이 가요."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좀 봐줘. 요새 바빠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

"알았어요. 아, 수련회는 가요?"

"수련회?"

"10월에 중간고사 끝나면 수련회 가잖아요. 아, 선배는 담임이 아니라 안 가나?"

"그렇지 않을까?"

따로 이야기를 들은 게 없다.

사부가 있는 포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따라갔겠지만, 이미 찾았으니까.

안 그래도 매주 강원도에 가고 있는데 굳이 갈 필요나 있나 싶다.

"그럼 쉬겠네요. 부럽다."

안 가면 쉬는 건가?

"출근은 하지 않을까?"

"어차피 애들도 없잖아요."

"그렇네. 넌 어디로 가는데?"

"제주도요. 참, 선배 여름에 제주도 다녀왔다고 했죠?"

"그랬지. 맛집이라도 추천해 줄까?"

"됐어요. 어차피 일정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니 알려 줘도 못 가요."

"좋겠네."

"좋긴요. 수련회는 따로 교관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수학여행은 전부 교사가 인솔해야 해서 신경 쓸 게 얼마나 많은데요."

내 기억에 수련회든 수학여행이든 선생들은 자기들끼리 술 마시고 놀고 그랬던 것 같은데.

헌터 학교는 좀 다른가?

* * *

슈욱―.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지만 감각대로 몸을 옆으로 뺐다.

"이걸 피해?"

사부도 꽤 놀란 표정인데,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눈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고 피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어떻습니까? 저도 그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요."

"겨우 한 번 피한 것 가지고. 이것까지 피하면 인정해 주마."

뭐야, 이거?

사부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가 수십 개로 갈라진다.

다시 한 번 감각을 끌어올렸지만, 전방위에서 들어오는 공격이라 도저히 피할 곳이 없다.

딱!

"악! 이건 사기 아닙니까? 피할 데가 없잖아요!"

"피할 데가 없긴 왜 없어? 실초는 하나뿐, 나머진 다 허초였는데. 그리고 못 피하겠으면 받아쳐야지."

"받아쳤다가 또 내상 입으면요?"

예전에 멋모르고 받아쳤다가 현격한 내공 차이에 피까지 토한 적이 있다.

거의 일주일을 고생해서 손에 사정을 좀 두면 안 되겠냐니까 그러면 제대로 된 대련이 되겠냐며 콧방귀만 꼈다.

"무인이 내상을 두려워하게 돼 있나?"

이 양반이….

"제가 내상으로 다쳐서 일을 못 하게 되면 사부 라면도 없을 텐데요?"

"자식이, 또 치사하게."

"치사? 다음 주 라면은 없습니다."

"못된 놈. 먹는 거 가지고 그러는 게 어디 있냐?"

"알았으니까 대신 한 판 더 해요."

"더 해 봤자 또 못 피할 텐데. 감각 수련이나 계속해라."

귀찮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가 버린다.

삼이라도 몇 뿌리 더 사서 먹어야 하나?

사부는 내공은 이미 넘치니 더 먹을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

자리를 정리하고 동굴로 가 보니 또 라면을 끓이고 있다.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드십니까?"

"네놈이랑 한바탕했지 않느냐. 너도 먹을 거면 물 더 넣고."

"저는 됐습니다. 그보다 사부, 다음 주에 올 때 산삼 한두 뿌리 더 사 올까 하는데…."

"내가 저번에 필요 없다고 했냐, 안 했냐? 네 녀석한테 부족한 건 내공이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이라고."

"기억은 하고 있는데 그래도 먹으면 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뭘 그리 조바심을 내? 지난번에 그놈이랑 다시 대련이라도 하기로 한 거냐?"

"그런 건 아닌데, 요새 발전이 너무 더딘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수련에 신경을 좀 덜 쓴 것도 있지만 절정이 된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 할 발전이 없다.

물론 지금도 내 실력은 준수한 편이다.

교감 같은 S 랭크 헌터들만 아니라면 누구든 자신이 있다.

하지만 원작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 이상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지금 상황에서 안주하는 순간 발전은 없다.

휘둘리지 않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더디기는. 무공에 입문한 지 1년도 안 된 녀석이 절정이면 엄청나게 빠른 거지."

늘 무시하던 양반이 웬일이래?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제가 좀 재능이 있긴 하죠?"

"개똥 같은 소리. 전부 내가 잘 가르쳐서지."

"…."

"뭐? 불만 있냐?"

진짜, 라면 통제할까 보다.

* * *

"연휴라고 다들 놀지만 말고. 연휴 끝나면 바로 중간 평가 있는 거 알지?"

"네."

"쌤도 연휴 잘 보내세요."

"알았다. 다들 약도 꼭 챙겨 먹고. 아까도 말했지만 약 먹는 거 동영상 안 찍어 오는 녀석들은 태도 점수 감점이야."

다들 울상이다.

이젠 좀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은수와 은서가 다가온다.

"선생님."

"왜?"

"추석 때 어디 가세요?"

"아니. 안 가는데?"

원래 사부랑 보낼까 했지만 명절이니 차도 많이 막히고, 어차피 주말에 갈 테니 그냥 기숙사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럼 연휴 마지막 날 저희 집에 오실래요?"

"어? 왜?"

"어머니께서 도와주신 게 고마워서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물어보라고 하셨거든요."

"마음은 고맙지만 명절이잖아. 친척도 보고 가족끼리 보내야지."

"저희 친가 외가 둘 다 서울이라서 추석날만 잠깐 들렸다 바로 오거든요. 추석 다음 날 시간 안 되세요?"

"따로 하는 건 없긴 한데…."

약간 부담스럽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냥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은 건데. 저희 집 학교랑도 가까워요."

"점심 어떠세요? 안 되시면 저녁도 괜찮아요."

"둘 다 어려우시면 어머니가 명절 음식이라도 따로 싸서 보내 드린다고 하셨는데…."

"뭘 그렇게까지…. 그럼 추석 다음 날 들를게. 주소랑 시간 알려 줘."

"엄마한테 맛있는 거 많이 해 놓으라 할게요."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선생님은 음식 안 가려. 그럼 그때 보자."

애들을 보내고 교무실에 돌아왔더니 자리가 대부분 비어 있다.

내일부터 추석 연휴다 보니 다들 일찍 퇴근한 것 같다.

남아 있는 선생님들도 다들 퇴근하려고 준비하고 있고.

자리에 앉는데 품속에 진동이 느껴져 꺼내 확인하니 최서라에게 메신저가 왔다.

[선배, 퇴근했어요?]

[아니, 교무실인데. 넌 벌써 퇴근했냐?]

[저는 기숙사 가는 길. 지금 나가면 복잡할 것 같고 1시간 정도 지나면 사람들 좀 빠질 것 같은데 그때 정문에서 봐요.]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봉사 활동은 같이 안 하는 대신 같이 장을 보고 보육원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가야 한다고 해서 조금 귀찮긴 하지만 같이 봉사 활동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대신 녀석이 오늘 저녁을 산다고 했으니 비싼 거로 얻어먹을 생각이다.

서류 업무를 하다 퇴근 카드를 찍고 기숙사에 돌아왔는데 매점도 문을 닫고 사람도 다 빠져나가서 그런지 휑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쉬다 나와야겠다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어? 민 선생님?"

"이제 퇴근하시는 거예요?"

"서류 업무 할 게 좀 있어서요. 집엔 오늘 안 가시나 보네요."

집에 가는 것치곤 복장이 너무 편하다.

"저는 집이 좀 멀어서. 연휴도 3일밖에 안 되잖아요."

"아예 안 가시려고요?"

"네. 어차피 가 봤자 잔소리만 들을 테고. 그냥 기숙사에 있으려고요. 강 선생님은요?"

"저도 기숙사에 있으려고요."

"연휴 내내요?"

"갈 곳이 없어서…."

"아, 죄송해요."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요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는데, 쉴 수 있으니 좋습니다."

"저기… 강 선생님, 그럼 내일 점심 같이 어때요?"

"점심이요?"

"기숙사 식당도 쉬니까…."

민 선생님 얼굴이 살짝 붉다.

잠깐, 이거 데이트 신청 아닌가?

"저야 좋죠."

"그럼 내일 제가 연락 드릴게요."

민 선생에게 대시하거나 밥 한번 먹자고 했다가 까인 선생님들이 한 트럭이라고 들었는데.

물론 김칫국 마시는 걸지도 모르지만 내 인생에도 봄날이 오려나 보다.

민 선생님이 내일 점심때 연락을 주신다고 해서 알겠다고 대답하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고 주차장에 내려왔다.

원래 지난번처럼 정문 밖 구석에서 만나서 태울 생각이었지만 사람이 없어서 전화를 하자 잠시 뒤 녀석이 도착했다.

"웬일이에요? 학교 안에서 다 보자고 하고."

"사람이 없잖아. 마트는 어디로 갈까?"

"아무 데나 상관없는데, 가까운 데로 가요. 아니면 저녁 먼저 먹을까요?"

"나는 상관없긴 한데… 뭐 사 줄 건데?"

"뭐 먹고 싶은데요?"

"한우."

"하, 한우요? 벼룩의 간을 빼 드시려고…."

"어허, 오늘 마트까지 편하게 모셔다드리고 내일 아침 일찍 운전기사 노릇도 해 주는데, 한우가 아까우십니까?"

"사 드리면 되잖아요. 대신 내일 봉사 활동 같이 콜?"

"아쉽지만 내일 점심 약속이 있어서 그건 좀 곤란한데."

"거짓말 치지 마요. 명절에 어디 안 간다고 그랬잖아요."

"아, 오늘 생겼어. 아는 선생님이 이번에 연휴 때 어디 안 가신다고 내일 점심 같이 하자고 하셨거든."

"선배가 아는 선생님도 있었어요?"

"어이, 그건 말이 좀 심하지 않아?"

"어떤 선생님인데요? 헌터는 아닐… 아, 혹시 방학 때 같이 사냥했다는 사림이에요?"

"아니. 원래 친하게 지내던 기술 선생님인데, 엄청 미인이셔."

"미인이면… 여선생님?"

어째 표정이 안 좋다.

"왜?"

"선배가 여선생님이랑 친하게 지낸다는 게 신기해서요."

"어허, 너 나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이번에 선배가 돈 많다고 소문나서 접근하려는…."

"떽. 원래 친했거든. 그리고 나 여선생님들이랑도 잘 지내."

방학 때 같이 다니던 김 선생도 홍 선생도 다 여자였는데.

잠깐… 이 녀석 혹시 그건가?

"지금 질투하냐?"

"제가 무슨 질투를 해요.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질투가 맞는 것 같다.

원래 강한 부정은 긍정이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7)

선배 조금 멋있는 것 같아요

"선배, 좋은 아침."

"별로. 쉬는 날에 6시 기상이라니…."

"어제 한우 사 줬잖아요."

"그래서 나왔잖아."

모자를 한 번 더 눌러 쓰고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목적지인 보육원이 있는 곳은 파주.

명절이라 막힐지도 모른다고 최서라가 보챘는데 예상 외로 차는 별로 안 막혀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파주에서도 시내가 아니라 꽤 시골 쪽이지만 시설은 나름 괜찮아 보인다.

"짐은 같이 날라 주는 거죠?"

"그 정도 서비스는 해 드려야죠."

어제 장 본 것들을 옮기고 있는데 아이들이 최서라를 보고 뛰어온다.

"서라 언니!"

"서라 누나다!"

"얘들아. 안녕."

오래 봉사를 다녔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많이 친해 보인다.

"누나 남자 친구예요?"

"잘생겼다."

"고맙다."

"어? 나 이 아저씨 TV에서 본 것 같은데."

"서라 씨, 어서 와요."

"아, 원장님,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요. 이쪽은… 어? 강신혁 헌터님?"

지난번 사건 때문에 그런지 애들도 그렇고 원장님도 나를 알아본다.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반갑습니다. 안 그래도 서라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실물이 훨씬 나으시네!"

"아, 감사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쁘게 이야기하진 않은 것 같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명절이잖아요. 전 부칠 거랑 송편 재료에 과일이랑 애들 먹일 고기 좀 샀어요."

"늘 고맙네. 아침 아직 안 먹었지?"

"네. 선배도 안 먹었죠? 온 김에 밥은 먹고 가죠?"

"어? 강 헌터님은 가시는 거야?"

"아,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괜히 눈치가 보인다.

그냥 내려만 주고 바로 갈 걸 그랬나?

딱히 배가 안 고파서 괜찮다고 했지만 서라의 성화에 못 이겨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짐을 다 옮기고 식당으로 왔는데 애들이 참 많다.

대부분 초등학생인가?

중,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큰 애들도 보이고 유치원 다닐 것 같이 아주 어린애들도 있고, 연령대가 다양하다.

"서라 언니다."

"안녕."

"옆에 있는 아저씨는 언니 남자 친구예요?"

"그런 거 아니야. 같은 학교 선생님인데 오늘 언니 여기까지 태워 주셨어."

"이 아저씨 잘생겼다."

칭찬은 고맙지만 왜 최서라는 언니고 나는 아저씨냐….

한마디 할까 했지만 구질구질해 보일 것 같아 묵묵히 숟가락을 들었다.

밥은 꽤 괜찮다.

학교 밥보다는 못해도 고기반찬과 야채도 있고 국도 건더기가 실하다.

추석이라 잘 나온 걸 수도 있지만, 강신혁의 기억에 있는 보육원 식사는 대부분 풀떼기였고 양도 적었다.

여기 보육원은 좀 괜찮은 것 같다.

반찬도 반찬이지만 애들 표정도 밝고.

아까 봤던 원장도 사람 좋아 보였고.

"애들 귀엽죠?"

"어? 뭐… 그래."

"그러니까 밥 먹고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붙잡더니 밥값 시키려고 그런 거였나?

점심 약속이 있긴 하지만 갈 때도 올 때만큼 걸린다고 생각하면 여유가 있긴 하다.

"같이 전이라도 부치자고?"

"에이, 선배가 할 수 있겠어요? 애들이랑 공놀이나 같이 해 줘요."

….

전생에서 20살 때부터 독립해서 9년을 자취했고 강신혁도 5년이나 혼자 살았는데, 너무 무시한다.

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 그냥 가겠다고 대답했다.

"약속 때문에 그래요?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갈 때는 막힐지도 모르잖아."

최서라는 약간 서운한 표정이었지만 못 본 척하고 밥을 마저 먹었다.

"다 먹은 건 직접 설거지하는 거야?"

"저쪽에 가서 잔반 버리고 담가 두시면 돼요. 그런데 진짜 갈 거예요?"

"애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랑 공놀이하고 싶진 않을 것 같은데."

"핑계는…. 알았어요, 가요."

아주 예전에 보육원 봉사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봉사 활동을 가서 잘해 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며 정을 줬는데 다음번에 가니 모른 척하고 어색해해서 실망했다고.

몇몇 영악한 애들은 일부러 착해 보이고 돈 많아 보이는 자원봉사자한테 가서 애교 부려서 원하는 선물을 받아 내기도 한다고.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겠지.

아니,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훨씬 많을 거라 생각한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실망했을 때는 찾아와서 잘해 주던 봉사자가 어느 순간 발길을 끊었을 때라고.

이미 아이들은 한 번 아픈 상처를 겪었는데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꼴이니까.

그렇기에 자원봉사자들에게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최서라처럼 지속적으로 봉사를 하면 아이들도 마음을 열겠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은 없으니까.

애초에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 모두가 동정을 바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서라와 같이 있었음에도 내게 말을 걸던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아직 미취학으로 보이던 아이들뿐이었다.

그 이상 되어 보이던 아이들은 아예 말을 걸지도, 다가오지도 않았고.

여전히 섭섭한 표정을 하는 최서라에게 나중에 보자고 이야기하고 차로 돌아왔다.

* * *

같이 음식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랑 좀 놀아 주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너무 매정하다.

식사를 마치고 다 같이 모여 전을 부치고 아이들과 함께 송편도 만들었다.

다 빚어서 찌러 가려는데 원장님이 내게 손짓을 한다.

가서 더 도와드릴 게 있냐고 물었는데 고개를 저으시더니 휴대폰을 건네셨다.

명절이라 입양 갔던 아이들에게 전화라도 온 건가 싶었지만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Web 발신)

한서은행 08:58 68****12-10 입금 10,000,000원 KD국민 강신혁]

"강신혁 씨는 가셨지? 애들 보느라 이제 봤는데 후원 계좌에 천만 원이나 보내셨더라고."

"깜짝 놀랐지. 서라 씨에게도 이야기 안 했던 모양이네."

"아, 네."

나도 깜짝 놀랐다.

애들과 잠깐 놀아 주는 것도 안 하고 가서 매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원금이라니….

왠지 미안하다.

"기부 영수증 발급해 드려야 할 텐데… 연락처 좀 줄 수 있지?"

"아, 네. 저… 일단 제가 먼저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원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겨 전화를 걸었다.

―어? 왜? 차에 뭐 두고 내렸어?

"그게 아니라… 선배, 도대체 뭐예요?"

―응? 뭐가 뭐야?"

"후원금 말이에요. 천만 원이나 보냈잖아요."

―아, 그거 바로 확인이 되는 거였구나.

"갑자기 그런 큰돈을…."

―애들 보니까 옷이 좀 많이 낡았던데, 옷도 좀 사 입히고 남는 건 간식이나 사 주라고 해.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진짜 선배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요."

―얼마나 된다고. 너도 많이 냈을 거 아니야. 야, 혹시 거기 원장님이 횡령하진 않겠지?

"그럴 의도였다면 제게 말을 했겠어요? 애초에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래 보이긴 하더라. 나쁜 사람처럼 보였으면 나도 기부 안 했지. 아무튼,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야?

"네. 아, 원장님이 기부 영수증 발급 때문에 전화하실 거예요."

―기부 영수증? 됐다 그래. 귀찮아. 어차피 그런 거 없어도 지출 많아서 세금 환급이니까.

* * *

―선배 조금 멋있는 것 같아요.

아까는 그리 섭섭해하더니.

"그걸 이제 알았냐?"

―네? 선배는 진짜….

"진짜 멋있다고? 알아. 운전 중이니까 이만 끊을게."

"어휴, 그래요. 연휴 잘 보내세요."

―너도 연휴 잘 쉬고 나중에 봐."

* * *

서라 녀석, 꽤 놀란 눈치다.

녀석처럼 꾸준히 자원봉사는 못 하겠지만 기부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기숙사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쉬는 날인데도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넘게 운전했더니 약간 피곤하다.

조금 있다가 또 나가야 하지만 한 시간 정도는 쉴 수 있겠지.

방에 돌아와 바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혹시 잠들지도 몰라 알람까지 맞춰 놓고 다시 누우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민 선생님과 뭘 먹을지 뭘 할지 생각하며 뒹굴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아직 11시도 안 됐을 건데 벌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민 선생이 아니었다.

"네. 김 선생님."

―강 쌤, 지금 학교 기숙사죠?

"네? 아, 네."

―식사는 하셨어요? 추석 연휴라 학교에서 밥 안 줄 텐데.

"그렇긴 한데 그냥 대충 나가서 먹었어요."

―연휴 동안에는 계속 기숙사에 계시는 거죠?

"네? 뭐, 그럴 것 같긴 한데… 왜 그러세요?"

―저 지금 학교로 가고 있거든요.

"예?"

―추석 음식 좀 가져다드리려고요.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조금 감동… 아니, 잠깐만.

"혹시 직접 만드신 건가요?"

―네! 당연히 직접 만들었죠.

조졌다.

"저기… 김 선생님, 괜찮습니다."

―에이,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니, 제가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 봐야 하거든요. 그냥 마음만 감사히…."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그래. 어차피 같이 먹는 것도 아니고 일단 받기만 하고 안 먹으면 그만이니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20분 정도 지났나?

다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김 선생에게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기숙사 1층으로 내려가자 쇼핑백을 들고 있는 김 선생이 보인다.

"강 선생님! 여기에요."

쇼핑백 크기로 봐선 양이 상당한 것 같은데…. 받아서 들어 보니 묵직한 게, 많이도 넣었다.

"정말 감사하지만 굳이 번거롭게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

"에이, 동료잖아요. 명절에 아무 데도 안 가신다고 하셔서 생각이 나서 조금 싸 왔어요."

조금이 아니잖아, 이 사람아….

"갈비찜도 있고 전 몇 가지랑 나물 몇 가지… 아! 김치도 넣었어요. 김치는 이설이 어머니가 보내 주신 건데 맛있어요."

그럼 김치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드시면 좋을 텐데, 점심 약속이세요?"

"아, 네. 방학 때 고향에 안 가신 선생님이 있어서 같이… 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민 선생님이다.

장이라도 보고 오셨는지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가 들려 있다.

"어? 강 선생님,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 보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민 선생님도 고향 안 가셨나 보네요?"

"연휴도 짧고 부모님 잔소리가 심해서요. 그런데 보건 선생님은 원래 출퇴근하시지 않아요?"

"강 선생님 명절 음식 좀 챙겨 드리려고 왔어요."

"네? 아, 두 분 여름에 같이 사냥하셨다고 하셨죠. 강 선생님은 좋으시겠네요."

좋기는 개뿔.

민 선생이 김 선생의 요리 실력을 몰라서 그렇지.

안 다면 절대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어? 그럼 오늘 민 선생님이랑 점심 같이 드시기로 하신 거예요?"

"네."

"혹시 따로 예약 같은 거 하셨어요?"

"그런 건 아닌데… 왜 그러세요?"

"그럼 휴게실에서 이거 같이 드실래요? 나중에 데워 먹으면 별로 맛이 없잖아요."

안 된다, 이 악마야.

"저기…."

"어머, 그래도 돼요? 강 선생님 챙겨 주려고 하신 건데."

"다 같이 먹으면 좋잖아요. 양도 넉넉하니까 괜찮아요."

"저야 좋죠. 안 그래도 명절 음식 생각났는데."

민 선생님 안 됩니다….

"강 선생님도 괜찮죠?"

미쳐 버리겠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8)

가정방문

어제 온종일 굶었더니 배 속이 텅 빈 것 같다.

그저께 김 선생이 가져온 음식을 먹고 속이 안 좋아 하루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떻게 갈비찜에 초콜릿을 넣을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갈비찜뿐만 아니라 전들은 엄청나게 짜고 나물들은 시큼하고 텁텁하고 심지어 맵기까지 했다.

특별한 맛을 내 보기 위해 불닭 소스를 조금 넣었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민 선생이 처음에 좋다고 하지만 않았으면 넘어갈 수 있었는데.

더군다나 민 선생은 몇 입 먹더니 치사하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 덕에 혼자 먹느라 죽는 줄 알았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으려고 물을 올리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은수 어머니인데 무슨 일… 아, 오늘 낮에 가기로 했지.

깜빡 잊고 있었다.

"네, 은수 어머님."

―강 선생님 일어나 계셨구나. 연휴 잘 보내셨어요?

"네? 네. 어머님도 잘 보내셨나요?"

―네. 애들에게 오신다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귀찮으실 텐데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 때문에 번거로우신 게 아닌지…."

―전혀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강 선생님께서 우리 은서 목숨을 구해 주셨잖아요. 논란이 생겼을 때도 나서서 해명해 주셨고 언제 한번 꼭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너무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 가족 모두 강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요. 저희야말로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휴, 아닙니다."

―저… 그럼, 강 선생님, 식사는 12시 어떠세요?

"네. 저는 좋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맞춰서 준비해 놓을게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 있으신가요?

"가리는 거 없이 뭐든 잘 먹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아, 네 들어가세요."

사실 못 먹는 건 많다.

청국장이나 홍어 같은 건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데 은수 어머니께서 그런 걸 내놓으시지는 않을 테니까.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밥까지 말아 먹으려다가 점심을 위해 참았다.

설거지하고 방 청소를 끝내니 벌써 10시다.

은서에게 미리 받아 놓은 주소를 휴대폰 내비로 검색해 보니 30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서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초대를 받아서 가는 거긴 해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마침 은서 집 근처에 백화점이 있으니 케이크 같은 거나 좀 사 가야겠다.

* * *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작은 케이크 하나에 마카롱 같은 걸 몇 개 샀을 뿐인데… 백화점이라 그런가? 가격이 꽤 나간다.

원래라면 내 돈 주곤 절대 안 사 먹겠지만, 선물이니까.

뭐, 그래도 혹시나 아예 가게가 안 열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열어서 다행이다.

차로 돌아와 10분 정도 달려 은서네 집에 도착했다.

메이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겉으로만 봤을 땐 아파트가 꽤 좋아 보인다.

하긴 부모님 두 분 다 헌터라고 하셨으니 집안이 어렵지는 않을 테니까.

경비실을 지나 주차를 하고 주소대로 가서 인터폰을 누르자 문이 열린다.

23층이지만 엘리베이터가 빨라 금방 도착했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문 앞에 은수와 은서가 서 있다.

"안녕."

두 녀석의 안내를 받아 집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잘 지내셨죠? 아, 이거…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오는 길에 샀습니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뭘 이런 걸 다…."

"어? 이거 한성백화점에서 사신 거죠? 여기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마카롱도 있네.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선생님 최고!"

아주 좋아하는데, 어째 나보다 빵을 더 반기는 느낌이다.

"반갑습니다. 은수와 은서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이 악수를 청하시며 인사를 건네시는데 날카롭게 생기신 미남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은수가 아버지를 좀 많이 닮은 것 같다.

은서는 어머니를 좀 더 닮고.

"안녕하세요. 강신혁입니다."

"애들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얼른 들어오세요."

"네."

아직 준비할 게 조금 남았다며 소파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조금 뻘쭘하다.

애들이라도 있었으면 이야기라도 할 텐데, 다 어머니 도와준다고 가 버려서 아버님과 단 둘뿐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아버님이 먼저 은서를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꺼내시며 침묵을 깨셨다.

어머님에게 했던 것처럼 괜찮다고, 당연히 할 일을 한 거라고 대답하고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애들이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이렇게 직접 뵈니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네요."

"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어요. 학교에서 인기 많으시겠어요."

"과찬이십니다. 아버님이야말로 미남이신데요. 딸은 아빠를 닮는다던데… 은서랑 은수가 누굴 닮아 예쁜가 했더니 아버님 덕분이었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요."

"선생님이 너무 좋게 이야기해 주시네요. 애들 학교생활은 좀 어떤가요?"

"은수와 은서 모두 훌륭하죠. 성적도 우수하고 예의도 바르고 다른 선생님들도 칭찬 많이 하세요."

"다행이네요."

아주 흡족한 얼굴인데 역시 부모님들에게는 자식 칭찬이 최고인 것 같다.

"선생님, 준비 다 됐어요. 식사하세요. 아빠도요."

"가시죠."

아버님과 함께 은수를 따라갔는데 깜짝 놀랐다.

소갈비찜에 해물탕, 잡채, 각종 전과 나물, 김치만 해도 세 종류는 될 것 같은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다.

"명절에 어디 안 가셨다고 들어서 명절 음식을 위주로 준비해 봤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완전 진수성찬인데요."

"우리 집사람 요리 잘합니다. 어서 드시죠."

해물탕부터 한 수저 뜨는데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게 아주 예술이다.

갈비찜도 은은한 단맛과 함께 야들야들한 식감도 끝내주고.

이틀 전 김 선생이 가져온 음식과 종류는 비슷하지만 맛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아니, 아예 비교하는 게 죄송스러울 지경이다.

"어떠세요?"

"너무 맛있는데요. 식당 차리셔도 될 것 같아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많이 드세요."

메인 요리뿐만 아니라 밑반찬도 너무 맛있어서 밥을 싹싹 비우고 한 공기를 더 먹었다.

내가 사 온 케이크와 과일까지 디저트로 먹고 슬슬 가려 하는데, 어머님이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하시더니 부엌에서 쇼핑백을 하나 들고 나오셨다.

"아까 식사할 때 잘 드시던 것들로 조금 쌌어요."

말은 조금이라고 하셨지만 받아서 들어 보니 꽤 묵직하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앞으로도 우리 아이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 아, 안 나오셔도 됩니다."

"저희가 바래다드릴게요."

"아니, 선생님은 괜찮은데…."

"어차피 저희도 소화시킬 겸 앞에 공원이라도 가려고 했거든요."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저희 엄마 요리 잘하죠?"

"진짜 솜씨 좋으시더라. 어머님께 오늘 너무 잘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오랜만에 집밥 느낌이라 좋았다.

"반찬 떨어지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엄마한테 또 해 달라고 할게요."

"은서야, 그건 좀 아니지. 어떻게 매번 신세를 지겠어. 어머님도 일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선생님이 아니셨으면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텐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어머님도 그렇고 아까 아버님도,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니지만 한 번 구해 주고 계속 우려먹는 느낌이라 약간 부담스럽다.

"학생이 위험하면 선생님이 나서는 건 당연한 거지.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공원 간다며. 얼른 공원이나 가. 선생님 차 바로 앞에 있어."

"선생님, 많이 바쁘세요?"

"그런 건 아닌데… 왜?"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상담? 뭔데?"

"무투 대회 신청할까 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투 대회? 축제까지는 아직 한참 남지 않았나?"

무투 대회는 학교 축제 때 열리는데 축제는 12월 기말고사가 끝나고 시작된다.

"예선전은 11월부터 시작이라 담임 선생님이 중간고사 끝나면 참가 신청 받는다고 하셨는데… 잘 모르세요?"

생각해 보니 며칠 전 교무 회의 때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듣긴 했는데 진짜 나가려고?"

"선생님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냉정하게 말하면 입상은 힘들 것 같은데."

무투 대회는 국내에 있는 모든 헌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다.

학년별로 따로 나누지 않기에 대부분 3학년들만 참가하고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3학년들이다.

물론 우리 학교 학생회장인 세진이도 그렇고 소설 속 주인공도 1학년부터 우승을 하지만 그건 특이 케이스다.

은서와 은수가 우수한 학생은 맞지만, 또래 중에서 괜찮은 편이지 실습까지 경험한 2~3학년들을 상대로는 어려울 것 같다.

실제로 작년까지 2년 내내 우승을 차지했다는 학생회장과 대련도 해 봤으니까.

나야 쉽게 이기긴 했지만, 우리 애들이 붙는다고 생각하면 백이면 백 필패다.

"그… 세진 선배는 1학년 때부터 나가서 우승했잖아요."

"세진이도 아직 졸업을 안 했잖아. 이번에 참가 안 한다고 하던?"

"아니요. 잘은 모르지만 나올 것 같은데."

"그럼 학생회장 만난다고 생각해 보자. 이길 자신 있어?"

"아니요…."

"선생님, 예선은 다른 학교 학생들이랑 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그럼 목표는 예선 통과? 그렇다면 경험 삼아 나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목표대로 예선을 통과하든, 다른 학교의 강자를 만나 처참하게 박살이 나든 어느 쪽이든 애들에게 도움은 될 테니까.

"그럼 나가도 되는 거예요?"

"물론이지. 너희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뭘 물어봐?"

"담당 선생님이 신청서에 사인해 주셔야 하거든요. 그런데 창술 배우는 친구는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해서…."

"응? 왜?"

"1학년은 나가 봤자 재수 없으면 한 번도 못 이기고 떨어져서 망신만 당할 건데 뭐 하러 나가냐고…."

와, 이건 좀….

"정말 그렇게 말했대? 너무 심한데."

어떻게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저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세진 선배가 그랬는데 대회 나가서 떨어지면 가르치는 선생님이 창피당하니까 1학년은 잘 안 해 준대요. 선배도 1학년 때 나갈 때 담당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해서 교감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허락받으셨다고…."

"저희도 나가서 한 번도 못 이기고 떨어지면 선생님 이름에 먹칠하는 게 아닌가 해서…"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런 귀여운 녀석들을 봤나.

"쌤?"

"그런 걱정을 너희가 왜 해? 선생님은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니까 나가고 싶으면 나가."

"정말요?"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 이왕 나가는 거 한 번이라도 이기면 좋지. 참, 내가 알기로는 대회 참가하면 따로 저녁이랑 주말에 보강 수업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보… 보강 수업이요?"

교무 회의 때 들었던 것 같은데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해 흘려들었던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무투 대회 참가해서 보강 수업을 듣는데 귀찮다고 매번 안 나간다.

그러다 화가 난 보강 선생님이 찾아와서 벌을 주려고 하자 아예 싸워서 이겨 버리는 내용이 있다.

"왜, 보강이라니까 싫어?"

"보강 수업 좋아하는 학생이 어디 있겠어요?"

하긴, 그건 맞지.

"그럼 저녁이랑 주말에도 선생님이랑 수업하는 거예요?"

"글쎄. 누가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선생님은 아닐걸."

"네? 왜요?"

보강 수업을 맡게 되면 시간외근무수당이 나오긴 하겠지만 그런 푼돈 벌자고 내 휴식을 포기할 순 없으니까.

"선생님은 신입이잖아. 아마 경험 많은 3학년이나 2학년 선생님이 하시지 않을까?"

애초에 할 생각도 없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실망할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댔다.

"보강은 싫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해 주시면 나을 것 같은데…."

"저도요. 신입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에요? 검술 선생님들 중엔 선생님이 최고잖아요."

"아부하기는. 그래도 선생님은 바빠서 안 돼."

아이들의 칭찬에 그냥 내가 맡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49)

거래

"강 선생 일찍 왔네."

"아, 박 선생님. 애들 성적 입력을 아직 못 끝냈거든요."

그저께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검술반이라고 실기만 평가하는 건 아니라서 이론 시험 문제 출제부터, 시험 내용 검수, 실기 평가에 성적 입력까지 일이 너무 많다.

원래 어제 끝낼 생각이었지만 점수가 이상하다며 확인해 달라는 애들도 있었고.

확인해 보니 다들 OMR 카드를 밀려 쓰거나 착각하고 잘못 마킹한 거였지만.

그렇게 한 명 한 명 확인해 주다 보니 성적 입력을 다 못 끝냈다.

"오늘까지만 하면 되는데. 밥도 못 먹었겠네."

"한 끼 정도는 괜찮습니다."

박 선생 말도로 수업 끝나고 해도 되겠지만 오늘은 금요일.

아침을 거르는 게 금요일에 야근하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

그래도 일찍 나온 덕에 거의 끝나 가니 점심 먹고 마저 하면 얼추 끝날 것 같다.

"참, 어제저녁에 수련회 일정 나왔는데 강 선생 이름은 안 보이던데?"

"아, 저는 신청 안 했어요."

"어? 왜? 무슨 일 있어?"

수련회는 담임을 맡은 선생들만 가는 게 원칙이지만 담임이 아니더라도 1학년을 담당하고 있다면 같이 갈 수 있다.

막상 가도 선생들은 하는 게 없으니 그냥 놀러 가는 것과 다를 게 없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다들 동행하는 편이다.

만약 사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포탈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따라갔겠지만 한참 전에 찾았으니 안 간다고 했다.

물론 가지 않아도 출근은 해야 하지만 수업이 없으면 '개꿀'이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바로 중간고사라 일에 치여 살았는데 이번에 좀 제대로 쉬면서 여유를 좀 누려 볼 생각이다.

"담임이 아니면 안 가도 된다고 해서요. 요새 너무 피곤해서…."

"그래도 가면 재밌을 텐데. 수련원이 산에 있어서 공기도 좋아."

그 좋은 공기 매주 주말마다 마시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신청하라는 박 선생님에게 정말 생각 없다고 거절하고 일을 하다 보니 교무 회의 시간이 됐다.

수련회 관련 변경 사항이 있어 평소보다 회의가 좀 길어졌다.

오늘 아침 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는데 몇몇 학교 수련회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안전 사고나 외부 업체 직원들이 학생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등 문제가 많아 외부 업체에 전적으로 학생들을 맡기지 말라는 지침이다.

이미 예약을 해 둔 상태다 보니 선생 중에서 일부가 업체 직원과 함께 교관 역할을 하기로 결정됐다.

혹시나 불똥이 튀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미리 안 간다고 해 둔 덕분에 나는 제외되고 수련회에 가는 선생 중 일부가 교관을 맡게 됐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시간이 조금 여유가 있어 성적 입력이나 좀 더 하다 검술 훈련장에 가려는데 학년부장이 다가온다.

"강 선생, 교감 선생님이 잠깐 오라고 하시던데?"

"네? 무슨 일 때문에요?"

"내가 어떻게 아나? 아무튼, 난 전달했네."

어째 느낌이 안 좋지만 일단 교감실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를 하니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다.

"오. 강 선생, 어서 오게."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그러셨는데, 절 찾으셨다고…. 무슨 일이신가요?"

"많이 바쁜가? 아직 수업까진 조금 시간 있잖아.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일단 앉지."

웃으며 말을 하는 게 오히려 더 수상한데 일단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다음 달부터 무투 대회 예선이 열리는 건 알지?"

"네. 제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서도 4명이 나간다고 해서 어제 신청서에 사인해 줬거든요."

B 조 대표와 부대표인 은수랑 은서가 나간다니 민희랑 진수도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신청서를 가져와서 사인을 해 줬다.

"오, 1학년 검술반에서 넷이나 나가나?"

"솔직히 본선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기든 떨어지든 애들에겐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좋은 생각일세. 응당 청춘이라면 도전해 봐야지."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무투 대회 신청한 학생들 대상으로 보강 수업 하는 건 아나?"

"네. 홈페이지 공지 사항 봤습니다. 저녁이랑 주말에 한다고… 잠깐. 혹시 저보고 보강 수업 하라는 건 아니시죠?"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검술반 학생들은 자네가 좀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어째 불안하더니….

"저는 신입인데 3학년 선생님이나 2학년 선생님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3학년 최 선생이 하겠다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자네가 실력은 훨씬 낫지 않나?"

"실력이 좋다고 꼭 잘 가르치란 법은 없죠. 지원자가 있다면 지원자를 시키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하기 싫나? 자네 학생이 4명이나 나가는데? 3학년은 세진 학생 혼자고 2학년은 아예 출전자가 없어."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고 하는데 이놈의 영감탱이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진다.

"저희 학생들은 경험을 쌓으러 나가는 거라서. 우승 후보인 세진 학생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맡으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세진 학생과도 이미 이야기를 나눴네. 세진 학생도 최 선생보단 자네가 보강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 보강 수당은 꽤 짭짤하고 세진 학생이 우승하면 승리 수당도 나올 거고."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안 괜찮네만? 알았네. 지난번처럼 조건을 걸지."

"싫은데요."

"왜?"

뭐가 왜긴 왜야, 이 양반아!

지난번에 대련했을 때 내가 이겼는데 똥고집 부렸던 거 기억 안 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참았다.

"정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단 들어나 보게. 내가 선화한테 듣기로 자네가 아직 A 랭크 승급 심사 조건을 못 채웠다고 하던데, 맞나?"

"그런데요?"

A 랭크 승급 심사를 보기 위한 조건 중에 B 등급 포탈 100회 이상 클리어가 있다.

해외 경력까지 인정해 줬다면 이번 여름 방학 사냥으로 다 채웠겠지만, 국내 경력만 인정해 줘서 약간 모자라다.

많이 남은 건 아니지만 겨울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4분기 심사가 있어서 올해는 불가능.

겨울방학에 마저 채운 뒤 내년 3월에 신청할 예정이다.

"S 랭크 헌터의 추천을 받으면 포탈 클리어 횟수가 부족해도 승급 심사를 치를 수 있네."

오호라, 그런 제도가 있었구나.

"자네 실력이라면야 당연히 통과하지 않겠나? 마침 3분기 심사가 2주 뒤 일요일에 있는데, 어떤가?"

절대 안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꽤 솔깃한 제안이다.

일단 A 랭크가 되면 랭크 수당이 올라간다.

A 랭크와 B 랭크 수당 차이가 꽤 클 텐데, 내년 첫 승급 심사는 3월에 있고 지금이 10월이니 11월 월급부터 반영된다고 해도 5개월 먼저 A 랭크 헌터 수당을 받을 수 있다.

수당도 수당이지만 겨울방학 전에 A 랭크 헌터가 되면 이설 씨와 김 선생과 파티를 해서 A 등급 4인 포탈도 갈 수 있고.

"보강은 일주일에 얼마나 해야 하는 겁니까?"

"할 생각이 있나 보군. 작년 기준으로 평일에는 수업 끝나고 두 시간 정도? 주말에는 다섯 시간 정도씩 하면 되네."

"평일은 그렇다 치고 주말 이틀 전부 다섯 시간씩은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수업 끝나고 한 시간 정도 봐주고 주말 하루 한 서너 시간 정도 생각했는데 아예 쉬는 날이 없을 줄이야.

주말엔 사부도 보러 가야 하는데 이런 빡빡한 일정이면 할 수 없다.

"시간은 자네가 맡아서 학생들과 조율하면 되지 않겠나? 학생들만 동의하면 일주일에 15시간 정도만 채워도 딱히 문제 될 건 없네."

그럼 평일에 두 시간씩 하고 토요일 오전까지 봐주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맡아 보겠습니다. 추천서는 바로 써 주시죠."

"잘 생각했네. 내 자네가 승낙할 줄 알고 추천서도 미리 써 놨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교감이 책상으로 가더니 봉투를 한 장 가져왔다.

"보강 수업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진행하면 되네. A 랭크 승급 심사도 다음 주부터 신청이니 잊지 말고."

알았다고 말하고 영감탱이가 건네는 추천서를 받으려는데 추천서를 건네던 영감탱이가 잽싸게 손을 빼 버린다.

"뭐 하십니까?"

"아, 할 이야기가 하나 더 있었는데. 내가 깜빡했군."

"알았으니까 일단 추천서 먼저 주시고 이야기하시죠."

"아니, 일단 먼저 듣게. 이 추천서가 진짜 귀한 물건이거든. S 랭크 헌터라고 언제든지 써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평생에 딱 세 번만 써 줄 수 있는 건데…."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걸 보니 뭔가 하나 더 얹어 시킬 생각인 것 같다.

이미 서로 합의 다 한 건데 치사하기 짝이 없다.

"뭔데요?"

그냥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일단 들어나 봐야겠다.

"수련회가 예전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건 들었지?"

수련회?

"네. 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다고 아까 회의 때 들었습니다."

"그래. 회의에서 수련회에 동행하는 선생 중의 일부가 교관 역할을 할 거라고 들었는데 교관 명단에 강 선생 이름이 빠져 있더군."

"저는 수련회 안 갑니다."

"어째서?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그런 건 아닌데 담임이 아니면 안 가도 된다고 해서 빼달라고 했는데요."

"그렇긴 한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같이 가는 게 어떤가? 학교에 있어 봤자 할 것도 없을 텐데. 겸사겸사 교관도 하고 말이야."

"교관이라면 이미 다 정해졌고 제 사정 아시지 않습니까?"

시범도 보이고 몸을 많이 쓰는 수련회 특성상 교관은 전부 헌터인 실기 선생들이 맡았고 나는 실기 선생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아직도 실기 선생들과는 사이가 안 좋나?"

"그들이 절 여전히 싫어하는데 제가 뭐 어쩌겠습니까?"

개학하고 몇몇 선생들은 그래도 인사를 하고 사과를 한 선생도 있지만, 이후에 어울리진 않아서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없다.

애초에 나도 친해질 생각이 없긴 하지만.

"하여간 선생이란 사람들이 참…. 아무튼,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 수련회는 인천에 있는 2학교 1학년들도 같이 가네."

수련회를 안 갈 거라 관심을 안 가져 확실치는 않지만, 회의 때 들었던 것 같다.

원작에서도 2학교는 아니지만, 부산에 있는 3학교와 같이 갔었으니… 뭐,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요?"

"우리 학교에서 일부 선생들이 교관을 맡기로 했으니 2학교에서도 몇몇 선생들이 교관 역할을 수행하게 될 텐데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옛날부터 우리 학교와 2학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사이가 안 좋다라….

라이벌 같은 건가?

같은 지역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이가 없다.

"본론을 말씀하시죠. 2학교랑 사이가 안 좋은 거랑 제가 수련회 안 가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같이 교관 역할을 하다 보면 트러블이 발생할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우리 학교가 약간 밀리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자네가 가서 교관을 하면 좋을 것 같네."

이유가 참 구차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수련회 교관을 하러 가는 건데 안 좋은 일이 생기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번에 교관을 맡은 건 전부 실기 선생들인데 걔네들이 뭐가 예쁘다고.

트러블이 생겨서 곤란해지거나 망신을 당하면 오히려 좋다.

"자네가 신입이라 몰라서 그래."

"그래도 싫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고. 강 선생, 2학교 1학년 선생 중에 A 랭크 헌터가 1명 있다던데. 균형을 맞추려면 우리 학교의 간판스타인 자네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간판스타는 무슨…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사양하겠습니다."

"추천서 필요하지 않나?"

진짜 이 영감탱이가.

"이미 보강 수업 하기로 딜 끝난 거 아닙니까?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그럼 수련회 교관 하면 보강 수업은 없던 일로 하는 겁니까?"

"아니, 강 선생, 우리 사이에 이러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나? 강 선생이 트러블 생겼을 때 도와주면 실기 선생들이랑 사이가 개선될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는 안 친해져도 상관없는데요? 아무튼, 원 플러스 원은 안 됩니다."

"치사하게 정말 이럴 건가? 내가 지난번 논란 때 동영상까지 찍어서 보내 줬지 않나?"

"그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이나 학생들도 나서 줬고, 어차피 제가 잘못한 게 없으니 자연스레 밝혀졌을 일…."

"어휴, 알았어. 어떻게 사람이 한 마디를 안 져 줘? 다음에 자네 부탁 한 번 들어 줄 테니 좀 가 주게."

말은 교감의 동영상이 없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지난번에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워서 알겠다고 했다.

지금 당장 부탁할 건 없지만 조금 더 튕겼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았으니까.

안 맞더라도 교감이 삐져서 김 선생에게 안 좋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고.

뭐… 썩어도 준치라고, 교감에 S 랭크 헌터니 언젠간 써먹을 날이 오지 않을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0)

진짜 천재는 따로 있었다

저녁을 먹고 무의식적으로 기숙사로 가려다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오늘부터 보강 수업이 있다.

수업은 7시 반부터라 여유가 있긴 하지만 미리 가서 기다릴 생각이다.

다시 나오기 귀찮으니까.

교감의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 주말 내내 고민을 많이 했다.

보강은 일반 수업과 달리 커리큘럼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막상 가르치려니 막막하기도 하고 괜히 하겠다고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름대로 준비는 했다.

검술 훈련장에 도착하니 낯익은 여학생이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학생회장이다.

"그래, 안녕. 일찍 왔네. 밥은?"

"먹었죠. 3학년이 제일 빨리 먹잖아요."

아, 그랬지.

밥 먹었으면 좀 쉴 것이지. 벌써 와서 몸을 풀고 있는 걸 보면 얘도 참 열심이다.

"아직 수업 전이지만 저랑 대련 한 번 어떠세요?"

"밥 먹고 바로 움직이면 안 좋은데."

"많이 안 먹어서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이따 애들 다 오면 부르렴."

내가 거절할지 몰랐는지 실망한 표정을 하는 학생회장을 지나쳐 사무실로 들어와 바로 컴퓨터를 켰다.

보강이라는 게 단순히 애들만 가르치면 되는 게 아니라 보강 수업 계획서도 따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번 주 계획서는 점심때 작업을 좀 해 둬서 거의 다 끝나 가긴 하는데, 매주 제출이라 살짝 짜증이 난다.

계획서 작성을 끝내고 시간을 확인하니 7시 20분이다.

준비한 것들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는데 여전히 학생회장만 있고 나머지 녀석들은 안 왔다.

2학년 검술반에선 신청자가 없어서 보강 수업 대상자는 은수와 은서, 진수와 민희 그리고 학생회장 이렇게 다섯 명.

늦으면 기합을 주려고 했는데 다들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보강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설명하는데 세진이만 빼곤 다들 표정이 안 좋다.

"평일은 매일에 주말도 한다고요?"

"쌤, 너무 빡빡한 거 아니에요?"

"다른 과목 숙제도 많은데…."

다들 불만을 토로하는데… 이 녀석들아, 나는 좋은 줄 아니?

"일요일에 쉬잖아. 그때 하면 되지."

"저기… 선생님, 저는 일요일에도 했으면 좋겠는데요."

"서, 선배?"

"선배, 왜 그래요? 3학년은 우리보다 과제 더 많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만… 뭐, 틈틈이 하면 되잖아. 작년에는 일요일에도 수업했었고."

당황스럽다.

애들은 다들 질린다는 표정인데 교사인 내가 봐도 약간 재수 없다.

"매주 일요일은 선생님이 외부 일정이 있어서 힘든데."

"아, 그러시면 어쩔 수 없죠."

"살았다."

"수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요? 저는 이론보단 실전을 많이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무투 대회 대비 보강이니 대련 위주로 진행할 예정이긴 하지만 이론 수업을 아예 안 할 순 없어."

"저는 이론은 필요 없는데…."

다른 녀석들은 불만이 없는지 별말 안 하는데 세진이만 이런다.

자기는 3학년이라 이론은 다 배웠으니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전이 중요한 건 맞지만 입 꾹 닫고 대련만 한다고 실력이 늘까?"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2년 연속 우승했고 올해도 우승 후보로 첫손에 꼽힌다던데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 같다.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은데, 실력이 비슷한 라이벌이라도 있는 건가?

"빠른 사과 좋아. 철저히 실전에 필요한 이론만 가르칠 생각이니 배운 걸 또 배우는 일은 없을 거야. 일단 이거부터 한 포씩 하고 시작하자."

가져온 박스를 가리키자 세진이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다.

"선생님, 설마 이거…."

"쌤? 이거 이제 안 먹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냥 취소하겠…."

"어허, 이진수, 신청은 네 마음대로 했지만 취소는 그렇게 안 되지.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와서 한 포씩 해."

"다들 왜 그래? 선생님, 뭔데 애들이 이러는 거예요?"

"성장기인 너희들에겐 아주 좋은 보약이지. 다른 애들은 두 달 전부터 먹었어."

"우와. 애들에게 따로 보약까지 지어 주시는 거예요? 진짜 1학년 애들이 부럽네요."

"선배,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저건 사약이에요."

"사약은 무슨. 선생님이 너희들 생각해서 챙겨 주시는 거잖아. 나 때는 이런 거 없었어."

"한번 먹어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걸요?"

"어릴 때부터 난 한약 많이 먹었거든. 그래서 잘 먹어."

자신 있게 걸어와서 약을 집어 그대로 잘라 단숨에 들이켠다.

"선배 그거 그렇게 한 번에 마시면 죽어요."

"어, 엄살은…. 약간 쓰긴 하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못 먹을 걸 먹은 표정이다.

"역시 학생회장이네. 앞으로 보강 수업마다 한 포씩 먹고 할 거야."

"네? 이걸 수업 때마다 먹는다고요?"

"정확히는 매일이지. 토요일에는 일요일 분량까지 가져가서 먹도록 하렴."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어허, 어릴 때부터 많이 먹어 봤으면 알잖아. 보약은 원래 꾸준히 먹어 줘야 효과가 있는 거. 자, 너희도 얼른 먹어."

재촉하자 다들 나와서 약을 먹는데, 표정만 보면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가 따로 없다.

"진짜 이건 계속 먹어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선배도 못 먹겠죠?"

"아… 아니, 나는 괜찮은데 너희들이 힘들까 봐 그런 거지."

그래도 선배라고 후배 앞에선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럼 수업 시작하게 자리 좀 옮기자."

* * *

수업은 실전 위주로 진행한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실내로 장소를 옮기셨다.

첫날인 만큼 기본적인 실력 파악 겸 대련을 먼저 할 줄 알았는데 이론 수업을 하려는 것 같다.

지난번 대련 때 그대로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지난번엔 제대로 공격 한 번 성공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후로 엄청나게 노력했다.

바뀐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프린트 가져올 테니까 그래 은수가 잠깐 선생님 좀 따라올래?"

"네."

은수와 같이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나오셨다.

"한 부씩 나눠 줘."

직접 만드신 듯한 프린트 표지에는 '파훼식'이라고 쓰여 있다.

웬만한 이론 교재보다 훨씬 두껍다.

설마 오늘 두 시간 동안 이것만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배우지 않은 걸 가르치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대련하고 부족한 부분을 조언해 주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강 선생님 실력이 대단한 건 알지만 솔직히 이론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별 기대 없이 표지를 넘겼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이거 검술만 있는 게 아니네요?"

"무투 대회에 검술반 학생들만 나가는 게 아니잖니."

"그렇다고 창술, 박투술, 궁술을 저희가 다 배울 수 없잖아요."

"마법은 배워도 마나가 달라서 못 쓰지 않아요?"

다른 애들은 아직 제대로 파악을 못 한 모양이다.

강 선생님은 우리에게 다른 과목을 가르치시려는 게 아니다.

"너희가 다른 과목을 왜 배워? 자세히 제목부터 다시 봐."

그제야 다른 아이들이 다시 프린트를 확인했지만 나는 이미 깨달았다.

표지에 적힌 제목 그대로 파훼식.

학교에서 가르치는 검술은 물론 창술과 박투술에 궁술, 마법까지 분석해 검으로 대처하는 최선의 방식이 적혀 있다.

"저기… 선생님,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어? 그렇지. 당연히 내가 만들었지."

"정말 대단하세요."

"뭐,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세진이는 이해한 모양이구나. 역시 우승 후보는 달라. 지난 주말에 고생 좀 했지."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데 절대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어렴풋이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던 부분들도 있긴 하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훨씬 많다.

이 자료만 제대로 습득한다면 응용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상대로는 절대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을 거다.

이런 걸 주말 이틀 만에, 그것도 혼자서….

지난번 대련에서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하고 졌을 때도 충격을 받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아니다.

그때는 경험과 나이의 차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강 선생님만큼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도 어릴 때부터 천재라거나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왔고 나름대로 증명을 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자만이었다.

진짜 천재는 따로 있었다.

* * *

보강 수업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협 소설에서 무공 고수들은 겨루다 보면 금방 상대 무공의 약점을 찾아낸다.

어떤 소설에서는 아예 상성을 가진 무공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있고.

가끔 사부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소설과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비슷한 게 많았으니 우리 사부도 가능하지 않을까?

늘 자기가 최고였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양반이니까.

내가 가르치는 검술을 비롯해 헌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박투술, 창술, 궁술 등 모든 실기 과목은 전부 커리큘럼대로 교육한다.

외국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국내에 있는 헌터 학교라면 모두 똑같은 내용을 가르칠 텐데.

그렇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분석하고 약점을 파악해 가르치면 어떨까?

물론 배운 걸 넘어 응용하는 녀석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기본은 똑같으니까.

2년 연속 우승했다는 학생회장과 대련을 돌이켜 봐도 응용보다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검술을 그대로 사용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포탈에 오면서 검술 교육 자료를 포함해 실기 과목 교육 자료를 몽땅 노트북에 옮겨 담아 왔다.

사실 실기 과목 교육 자료는 국가 기밀에 속하는 내용이라, 내가 선생이긴 해도 검술을 제외하고 다른 과목 자료는 접근 권한이 없다.

하지만 보강 수업에 필요하다고 교감에게 협조를 구하자 일사천리였다.

원칙적으로 반출은 안 되지만 따로 검사 같은 걸 하진 않으니까.

솔직히 국가 기밀이라 해도 별거 없다.

사부에게 보여 줬을 때도 무슨 이런 쓰레기 같은 걸 가르치고 있냐며 '삼류 무공만도 못한 쓰레기'라고 혀를 끌끌 찼을 정도니까.

"사부 잘 돼 가요?"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부에게 맡겼다.

요즘은 수련도 잘 안 봐주고 밥만 축내는데, 이렇게라도 좀 써먹어야지.

"사부?"

대답이 없길래 집중하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보니 한글 파일이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벌써 농땡이 피우시는 겁니까?"

"하늘 같은 사부에게 농땡이라니. 한참 전에 끝냈다."

"네? 벌써요?"

"그런 삼류도 못 되는 쓰레기 검술 파훼하는 데 반 시진이면 충분하지. 한글로 쓰는 게 아니었다면 이각도 안 걸렸을 거다."

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대충한 건 아닐까 싶어 노트북을 뺏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어떠냐?"

"좋은데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부분은 물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완벽하다.

어린 학생들이 보고 따라 할 수 있게 수준을 낮춰 달라는 내 요구대로 설명도 무척 상세하고 쉽다.

중간중간 맞춤법 조금 틀린 것만 수정하면 그대로 사용해도 될 것 같다.

"에헴, 나 같은 고수에게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지."

칭찬해 주자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리는 게 살짝 배알이 꼴린다.

자기 무공 가르칠 때도 이렇게 좀 상세하게 설명해 주지.

물론 난이도가 달라서 그렇겠지만 나한테는 매번 어렵게 설명해서 이해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역시 사부님이십니다."

"허허, 이 정도면 네 녀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한 것만큼 빠르고 상세하며 정확하진 못하겠지만."

껄껄 웃으며 말하는데 아주 콧대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오히려 좋다.

"당연히 그렇겠죠. 사부는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이셨는데, 사부의 안목을 이 제자가 어찌 따라 가겠습니까?"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사부, 사부는 무림에서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쓰는 무인도 많이 상대해 보셨죠?"

"그걸 말이라고 권이나 장법을 쓰는 놈들부터 시작해서 18반 병기를 쓰는 놈들과 전부 겨뤄 봤지."

"오, 역시. 그래서 말인데… 사부, 그럼 이거 검술 파훼한 것처럼 다른 것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배알이 꼴린 것도 참고 사부를 띄워 준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해서다.

"어? 아니, 네 녀석도 할 수 있다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제 안목은 사부만 못하지 않습니까. 사부에게는 식은 죽 먹기라고 하셨고. 요즘은 명나라 때만큼 많은 무기를 쓰지 않아서 몇 개 안 됩니다."

"며… 몇 갠데?"

완전히 당했다는 표정이다.

"검술은 끝냈으니까 창술이랑, 궁술, 권각법, 이렇게 세 가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세 가지나?"

"세 가지나가 아니라 겨우 세 가지지요. 자료는 제가 사부 노트북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내일 제가 갈 때까지 끝내 주실 수 있죠?"

마음 같아선 마법까지 맡기고 싶지만, 사부가 있던 무림에는 그런 건 없었으니 힘들겠지.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자기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결국 알겠다고 대답한다.

사부님, 밥값은 하셔야죠.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1)

김세진

무투 대회 보강 수업을 맡게 된 지 어느덧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

하루는 사부가 만들어 준 파훼식으로 이론 수업을 하고 다음 날은 대련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홍 선생님, 시간 됐어요. 여기까지 하죠."

사부가 만들어 준 파훼식은 정말 훌륭하지만, 실전 경험이 필요하기에 김 선생과 홍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투 대회 상대가 어떤 계열일지 아직은 알 수 없으니까.

무투 대회를 준비하는 다른 반 학생들과 대련을 해도 되겠지만 담당 선생들이랑 안면도 없고 친하지 않아 친분이 있는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감을 통하면 다른 반 학생들과 대련 주선도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학생보다는 선생님들이 그래도 더 나을 테니까.

다행히 두 사람 다 흔쾌히 허락해 줬고 김 선생은 매주 한 번씩, 홍 선생은 창술 담당이지만 원래는 박투술이라 매주 두 번씩이나 수업에 나와 아이들과 대련을 해 주고 있다.

"다들 고생했어. 점심 맛있게 먹고…. 아! 갈 때 약 4일 치 챙기는 거 잊지 마."

오늘은 토요일이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 3일간은 1학년이 수련회를 가서 보강 수업이 없다.

보강 수업을 쉬는 건 좋지만 수련회에 가서도 교관 역할을 할 생각을 하니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지만.

원래대로라면 학교에서 여유롭게 보냈을 텐데….

"쌤, 다음 주는 수련회인데…."

"이진수, 수련회랑 약 먹는 거랑 상관없잖아. 진수 넌 아침저녁으로 두 포씩 먹을래?"

"아, 아닙니다. 가져갈게요."

"어? 강 선생님, 애들 보약도 지어 주셨어요?"

"지인 중에 한의사가 있는데 성장기 학생들에게 좋은 약이 있다고 해서….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진짜 아이들을 많이 아끼시네요. 너희들은 좋겠다."

홍이설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지만 정작 애들 표정은 별로다.

솔직히 나도 먹기 싫을 정도인데 애들은 오죽할까.

그래도 몇 달 전과 비교해서 다들 체력도 많이 붙고 키도 많이 컸으니 효과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성장기라는 걸 고려하면 원래 자랄 거였을 지도 모르지만….

"자, 그럼 뒷정리하고 들어가자. 홍 선생님, 먼저 가셔도 돼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어휴, 아니에요. 대련도 도와주셨는데….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돈 한 푼 안 줘도 일주일에 두 번이나 도와주는데, 뒷정리까지 시킬 수는 없지.

물론 완전 맨입인 건 아니고, 다음 주 승급 시험이 끝나고 저녁에 홍 선생과 김 선생에게 밥을 사기로 했다.

홍 선생님을 먼저 보내고 정리가 얼추 끝난 것 같아 애들도 돌아가라고 했다.

마무리하고 앞으로 4일간은 오지 않을 테니 노트북을 챙겨 문단속을 하고 나오는데… 어? 세진이 녀석이 안 가고 훈련장에 서 있다.

"저기, 선생님…."

"왜 안 갔어? 설마 대련 한 번 더 하자는 건 아니지? 너무 무리하는 거 안 좋아. 선생님도 좀 쉬자."

"그게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어서…."

"뭔데?"

"저… 다음 주부터 토요일 수업은 나오지 못할 것 같아요."

뭐지?

"그게 무슨 말이야? 왜?"

* * *

"다음 주 주말부터 학교에서 나오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길드에서 따로 팀을 꾸려 놨다. 솔직히 말해서 세진이 너에겐 보강 수업 같은 건 의미가 없잖니?"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진 알겠지만 동의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요."

강 선생님 수업은 내게 분명히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니? 이번 보강 수업을 교감 선생님이 직접 가르치시기라도 한다는 거니? 교감 선생님이 검술을 사용하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그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면 네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아비는 이해가 안 되는구나. 이번 'WHCU' 대회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니?"

역시 WHCU 대회 때문이었구나….

무투 대회 우승자는 다음 해 1월에 미국에서 열리는 WHCU-19(World Hunter Championship Under 19)에 참가할 수 있다.

작년 첫 출전 때는 8강까지 올라갔지만, 올해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첫 경기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기대하고 계시던 부모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을 실망하게 했다.

내 실력이 부족했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대진 운이 너무 안 좋았다.

첫 경기에서 나를 이기고 올라간 상대가 올해의 우승자가 됐으니까.

그나마 우승자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웠던 상대가 나였다는 이야기가 나와 어느 정도 체면치레는 했지만….

아쉬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국내 대회는 문제없잖니? 중요한 건 WHCU지. 작년에 네가 진 건 마나의 양이 부족해서야. 다른 나라들은 실습 위주인데 우리 한국은 그렇지 않잖니."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실망하셨던 것 같다.

솔직히 마나양의 차이도 있긴 했지만, 상대의 실력 자체가 한 수 위였는데….

강 선생님과 했던 대련만 봐도 그렇다.

선생님은 마나를 전혀 쓰지 않고도 나를 압도하셨으니까.

"국내 대회야 어차피 세진이 네가 우승할 테니 WHCU 대회를 대비하는 게 낫지 않겠니? 이번 WHCU 대회에서는 우승해야지."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나도 당연히 그러고 싶고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이런 과한 기대는 부담스럽다.

"학교 규정상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학기 중에는 외출이 불가능한데…."

"아비도 아니까 걱정할 거 없다. 교감 선생님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할 테니까."

"네?"

"별 도움도 안 되는 보강 수업받는 것보단 우리 길드에서 실습하는 게 훨씬 낫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편의를 봐주시겠지."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기는. 그럼 보강 수업만 받아도 내년 WHCU에서 우승할 수 있단 말이니?"

솔직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주말마다 외출해서 사냥한다고 해도 자신이 없는 건 매한가지다.

"…."

"세진아, 너는 이 아비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왜 그러는 거니?"

"…알았어요."

"그래. 다 너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그럼 다음 주 중으로 아빠가 교감 선생님과 통화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렴."

* * *

세진이는 다음 주부터 주말마다 실전 사냥을 나간다고 대답했다.

가르치는 학생 한 명이 줄어들면 그만큼 내 수고도 줄어들겠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원해서 맡은 건 아니지만 맡게 된 이상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애들도 잘 따라 줬고 실력이 느는 것도 보여 나름 보람도 느끼고 있었는데….

게다가 2학년부터 학생들이 실습을 나가긴 하지만 주말에는 실습을 진행하지 않고 규정상 주말 외출은 불가능하다.

따로 전달받은 이야기도 없고.

"선생님은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아, 아버지가 다음 주 중에 교감 선생님과 통화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교감에게 이야기한다고 했다고?

"혹시 아버님이랑 교감 선생님이랑 친분이 있니?"

그렇지 않다면야 그 꽉 막힌 원칙주의자 노인네가 쉽게 허락을 해 주진 않을 텐데.

학교 명예는 그래도 좀 신경 쓰는 것 같긴 했으니 해 주려나?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같이 모임도 하시고 협회에서도 가끔 만나실 테니까…."

모임을 하는 데다 협회에서도 만난다면… 헌턴가?

"혹시 그럼 아버님도 헌터?"

"네? 저희 아버지가 아레스 길드 마스터세요."

깜짝 놀랐다.

아레스 길드는 국내 10대 길드 중 하나니까.

내가 있던 체이스처럼 완전 최상위는 아니고 엄밀히 따지면 중위권 정도지만, 그래도 길드 마스터는 국내에 10명뿐인 S 랭크 헌터다.

이 녀석도 금수저였… 아니, 잠깐만. 아빠가 아레스 길드 마스터면 세진이가 히로인?

이 소설의 주인공은 빙의하는 주인공 이지성과 원작의 주인공 김도현 이렇게 둘이다.

물론 진짜 주인공은 이지성이기 때문에 히로인들은 이지성과 이어지지만 원작 주인공인 김도현도 짝이 없진 않다.

김도현의 히로인이 김세연이다.

여명 길드의 길드 마스터 김세연.

여명 길드는 2학년부터 진행되는 실습을 도와주는 길드 중 하나로 김세연은 주인공이 2학년 때 처음 등장한다.

첫 만남에서 김도현을 담당하는데, 김도현의 실력을 보고 호감을 가지고 계속 김도현만 담당하면서 친분을 쌓는다.

3학년 졸업 시즌에는 김도현에게 스카웃 제안을 하는데, 그래서 다른 주인공인 이지성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김도현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이지성의 언변에 넘어가 이지성과 같은 길드로 가게 된다.

그래도 여명 길드가 이지성이 만든 길드와 사이가 틀어지는 건 아니고, 수련밖에 모르던 김도현도 실력자인 데다 외모까지 출중한 김세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김세연도 김도현에게 호감이 생겨 끝내 커플이 된다.

"선생님?"

"아, 응."

"혹시 모르셨어요? 웬만한 선생님들은 다 알고 계셔서 선생님도 당연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몰랐어."

정말 세진이가 세연인가?

평소에 세진이같이 실력 있는 녀석이 원작에선 언급이 안 된 게 의아하긴 했지만 이름이 다르니 그냥 우수한 엑스트라인 줄로만 알았다.

"혹시 언니 있니?"

"아니요. 오빠밖에 없어요."

제주도에서 만난 오빠가 전부라면 세진이가 김세연이 맞는 건데. 그럼 이름은 왜….

아!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도 김세연이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여태 몰랐던 걸 보면 전에 이름이 뭐였는진 언급되진 않았던 것 같지만.

김세연이 진짜 주인공의 히로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작 주인공의 유일한 히로인이다 보니 비중이 아예 없진 않다.

관련 에피소드도 하나 따로 있는데 그 내용이 참….

"아레스 길드에서 주말에 사냥을 도와주기로 한 거니?"

"네. 아버지가 따로 팀까지 꾸려 놓으셨다고 그렇게 하자고 하셔서…."

말하는 표정이 안 좋은데,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간섭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럼 세진이 네가 선택한 게 아니란 소리구나. 선생님 수업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네가 부탁 한 건 줄 알았지."

"아니에요. 사실 아버지에게도 학교 규정도 있고 보강 수업도 많이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는데 WHCU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마나양을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셔서요."

"마나양도 중요하긴 하지. WHCU면 세계헌터챔피언십? 아, 무투 대회 우승하면 거기 나갈 수 있었지."

"네."

아직 무투 대회 예선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 WHCU를 말하는 건 조금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실력적으로 뛰어나기도 하고 2년 연속 우승하기도 했으니까 자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올해 1월에도 나갔겠네?"

"아, 그게… 나가긴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성적이 별로 안 좋았나?

이상하다.

국제 대회인 만큼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유망주들이 다 나오긴 하겠지만 그동안 가르치며 지켜본 세진이 실력이면 상위권은 물론, 우승도 충분히 노려 볼 수 있었을 텐데.

"성적이 별로 안 좋았나 봐? 그때 선생님은 중국에 있어서 못 봤거든."

"아, 그러셨구나. 저 첫 경기에서 떨어졌어요…."

"첫 경기에서?"

세진이가 결코 부족한 실력이 아닌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WHCU 수준이 높은가?

"대진 운이 안 좋았어요. 첫 경기 상대가 우승했거든요."

"아…."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된다.

"많이 아쉬웠겠네."

"안 그랬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운만 탓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실력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역시 우수한 학생이라 그런가?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겐 관대하기 마련인데 세진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2)

벽을 깨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수련회 잘 다녀오세요."

"그래. 주말 잘 보내."

원작이 바뀌지 않는다면 세진이는 아버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다.

그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내년 1월에 있을 WHCU 대회다.

올해 무투 대회 우승자는 세진이가 되겠지만 내년 1월에 있는 WHCU 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

올해 1월에 그랬던 것처럼 첫 경기에서 탈락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우승 문턱도 못 가 보고 떨어지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세진이의 아버지는 위로는커녕 엄청난 폭언을 쏟아부으며 질책한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착한 딸로 살아왔던 세진이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다.

그렇게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졸업하고 아레스 길드가 아닌 다른 길드에 가는 선택을 한다.

보통 부모라면 관계 개선을 위해 반성하고 어떻게든 딸을 달래서 화해할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세진이 아버지 김대찬은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감히 자기에게 반항한다며 인맥을 이용해 세진이가 들어간 길드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압박까지 넣는다.

결국 세진이는 원래 있던 팀에서도 쫓겨나 강신혁이 그랬던 것처럼 솔로 활동으로 별 영양가 없는 포탈만 전담하게 된다.

그 후로도 아버지의 방해는 끈질기게 지속되지만 세진이는 굴복하지 않는다.

버티고 버텨 끝내 길드를 설립할 수 있는 조건인 A 랭크 헌터가 되어 스스로 길드를 만들지.

아버지라면 치를 떠는데 소설에서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 준 거라 싫어서 개명을 했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나중에 연인이 되는 김도현이 이런 사정을 듣고 김대찬에게 명예 결투를 신청해 참교육을 한다.

메인 스토리가 아니지만 다른 에피소드에 비해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상황은 다르지만, 부모가 자식을 힘들게 하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껴 꽤 몰입해서 봤던 부분이니까.

아버지를 꺾고 사과를 받고 화해도 하면서 좋게 좋게 끝나지만, 솔직히 난 이 스토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부모라도 수년 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게 내게는 상당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수년도 아니다.

지금만 봐도 마나양을 늘려야 한다며 학교 규정까지 어기면서 주말에 사냥을 시키려 드는데 그동안 애한테 얼마나 부담을 줬을지 안 봐도 비디오니까.

생각해 보니 지금 보강 수업 스케줄도 과제가 많은 3학년인 데다 학생회장까지 하고 있으니 세진이에게는 꽤 빡빡하다.

거기에 주말 이틀 동안 사냥까지 다니면… 녀석, 쉴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개입을 해야 하나?

내가 나서지 않아도 나중에 잘 해결되긴 하겠지만 오랜 시간 녀석이 고생할 걸 생각하면 신경이 쓰인다.

보강 수업을 시작한 지 오늘로 6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새 정이 든 모양이다.

사실 세진이 녀석 첫인상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첫 만남에서 사전에 협의도 안 된 대련을 하자고 했으니까.

3학년이다 보니 본래 내 담당도 아니고.

하지만 수업에 가장 열성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세진이다.

첫날에는 약간 불만을 가졌던 것 같지만 두 번째 수업부터는 싫은 내색 없이 잘 따라 주고 있다.

첫날부터 먹이기 시작한 약도 다른 애들은 어떻게든 안 먹으려 엄살과 꼼수를 부리는 반면 세진이 녀석은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어도 그런 거 없이 잘 먹고 있고.

하지만 막상 내가 나선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WHCU 대회는 내년이니 지금 당장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아니니까.

본인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괜히 내 입장만 곤란해질 수도 있고….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 * *

"물은 왜 끓이냐?"

"면 좀 끓이려고요."

"여기에 면을 넣는다고?"

"숯불 구이 치킨에는 사리 넣어 먹어도 맛있거든요."

지난주에 토요일 저녁에나 올 거라고 사부에게 미리 말을 해 두긴 했지만, 왠지 미안해서 오면서 치킨을 2마리 포장해 왔다.

사리도 넣어 먹으려고 라면으로 해도 되지만 우동 사리를 사 왔다.

면을 삶아 숯불구이 치킨에 넣었다.

"잘 비벼서 드셔 보시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한 입 먹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 생각보다 괜찮구나.

"그렇죠? 라면으로 해 먹어도 괜찮습니다."

"넌 안 먹냐?"

"저는 오면서 대충 먹었어요. 사부 많이 드세요."

사실 점심 말고 안 먹었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다.

오전에는 수업하고 오후에는 장도 보고 운전도 두 시간 넘게 했으니까.

"다 먹고 대련이나 한번 할까?"

"됐어요. 컨디션도 별로고. 내일 평소보다 일찍 나가 봐야 하거든요."

"몇 시에 가는데?"

"10시 좀 넘으면 나가려고요."

수련회는 월요일부터지만 교관 역할을 맡은 선생들은 일요일 12시까지 수련원으로 가야 한다.

미리 가서 시설을 점검하며 어떤 과제를 담당할지 정한다는데 3일간 교관을 할 선생들끼리 안면도 좀 트고 친해지라는 의미로 이렇게 한 것 같다.

교관 역할은 헌터인 선생들이 맡았을 텐데.

나 빼고 모두 실기 선생일 테니, 으… 벌써부터 가기가 싫어진다.

"그럼 또 다음 주에 오는 것이냐?"

"아니요. 다음 주는 일이 있어서 아예 못 올 것 같아요. 대신 내일 저녁에 잠깐 들를 테니까 이따 필요하신 거 있으면 적어 두시고요. 대련도 내일 하죠."

그나마 포탈에서 수련원은 꽤 가까운 편이고 온종일 걸리지는 않을 테니 내일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포탈에 들릴 생각이다.

다음 주 일요일에는 A 랭크 승급 시험을 봐야 하니까,

시험이 끝나면 저녁에 김 선생과 홍 선생에게 밥도 사야 하고.

"요새 일이 꽤 바쁜 모양이구나."

"말도 마세요. 덕분에 요새는 제 수련도 못 하고 있다니까요."

"그래도 아이들은 계속 가르치고 있다면서? 너무 조급해하지 말거라. 깨달음은 수련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갑자기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잔뜩 무게를 잡고 말하는데 입가에 양념이 잔뜩 묻은 채로 말하니 하나도 멋이 없다.

"네네. 알겠습니다. 전 좀 잘 테니까 입가에 묻은 거나 좀 닦으세요."

"쯧쯧, 하여간 네 녀석은 좋은 말을 해 줘도…."

"으음, 어쩌면 내일 일이 늦게 끝나면 못 올지도 모르겠네요."

"이 자식이 또 협박을…. 어휴, 알았으니까 가서 쉬어라."

동굴에 들어와서 누웠는데 막상 자려고 하니 잠이 안 온다.

대련해 준다고 할 때 한판 할 걸 그랬나?

지금 다시 하자고 하면 안 해 줄 것 같고… 호수나 한번 갔다 와야겠다.

"어디 가냐? 쉰다며?"

"막상 누우니 잠이 안 와서요. 호수나 잠깐 다녀오려고요."

이 시간에 어딜 가냐고 묻는 사부에게 치킨이나 드시라고 대답하고 포탈 입구와 반대 방향으로 10분 정도 걷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호수라고 부르기에는 그리 크지 않고 물고기 같은 것도 없지만 깊이는 조금만 들어가도 발이 안 닿을 정도로 꽤 깊다.

예전에 한창 수련할 때는 땀을 식히러 매일 왔었는데 요새는 많이 움직여도 좀처럼 땀이 나질 않아 뜸했다.

옷을 벗고 들어갈까 하다 귀찮아 신발과 양말만 벗고 발만 담갔다.

그동안 주로 아침이나 낮에만 와서 몰랐는데 밤에 오니 꽤 운치가 있다.

물가라 그런지 바람도 선선해 그대로 내공 수련을 시작했다.

사부는 내공은 충분하다고 했지만 바쁜 와중에 그나마 짬을 내서 할 수 있는 건 내공 수련뿐이라서 틈틈이 해 왔다.

아까 사부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보강 수업까지 맡게 된 이후부턴 너무 바빴다.

당장 내일도 교관 역할 수행 때문에 수련원을 가야 하기도하고.

지난 삶에서도 작가로서 마감에 치여 살긴 했지만 어째 두 번째 삶에서 더욱 빡빡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오자마자 기연을 찾겠다고 산에 왔다가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교사 생활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엔 사부를 만나 무공 수련을 시작했으니까.

방학 때도 연수는 뺐지만 계속 사냥에, 수련에, 끝날 때는 루머 때문에 해명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개학….

교사라고 워라밸이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다시 태어났을 때 분명 이번 삶은 못 해 본 것들을 누리면서 즐겁게 인싸로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돌이켜 보니 여유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연애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만들지 못했다.

전생에는 그래도 많지는 않았지만 언제든 부담 없이 만나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물론 일반 과목 선생님들이나 김 선생과 홍 선생 같은 친한 동료들이 있긴 하지만 친구들처럼 완전히 편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보니 오히려 지금이 더 아싸 같다.

물론 어린 시절을 겪지 않고 바로 스물다섯의 강신혁이 됐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솔직히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 게 인싸의 삶인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막연히 외향적이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서 즐기며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인싸의 사전적 의미는 조직이나 무리 안에서 잘 어울리는 친화력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강신혁의 이력 때문에 시작부터 글러 먹었지.

따지고 보면 강신혁의 이력이 문제가 아니라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고 차별하는 실기 선생들이 잘못된 거지만….

그렇다고 지금 삶이 싫은 건 아니다.

바쁘게 산 것도 내가 다 선택한 거고 지금까지 생활이 의미가 없는 건 또 아니니까.

벽에 적힌 무공 구결이 아닌 사부를 만난 걸 시작으로 서라에게 안타스의 실상을 알려 주려고 같이 돌아다녔던 것도 나름 재밌었고 교감과의 대련도 결과는 패배였지만, 얻은 것도 있고 꽤 재밌었다.

여름 방학 때 아이들과 놀러 갔던 것도 좋았고.

오해를 받고 쓰레기로 몰렸을 때 학생들이 나서서 나를 지켜 주려 한 건 지금 생각해도 감동이다.

인싸가 뭐 별건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된 거지.

원래 내공 수련 중에는 생각을 많이 안 하는 편인데 분위기 때문인지 오늘은 생각이 좀 많다.

소설에서 봤던 것처럼 주화입마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내공 수련은 너무 많이 해서 호흡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사부가 알면 수련 중에 헛생각하면서 수련이 되겠냐고 혼낼 것 같지만.

아직 좀 멀었지만 겨울 방학이 되면 여름처럼 사냥만 하지 않고 여행도 다니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야겠다.

무공도 마찬가지다.

원작에 연연하지 않기로 한 이후부터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겼다.

수련을 못 하면 괜히 죄지은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막상 해도 큰 변화는 없는데….

어쩌면 사부도 은연중에 내가 강박 관념이 있다는 걸 알고 조급함을 버리라고 말한… 어?

갑자기 내공이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 했지만, 마음처럼 움직이질 않는다.

젠장,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주화입마라도 온 건가?

단전에 있는 내공이 계속해서 크기를 불려 나가는 느낌이 드는데, 이러다가 찢어지거나 터질 것만 같다.

예전에 절정에 도달했을 때 사부가 했던 것 이상의 고통이 밀려왔다. 왠지 정신을 잃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버티니 계속 몸집을 불려 나가던 내공이 단전을 빠져나갔다.

겨우 통제에 성공했나 싶었지만 단전을 빠져나온 내공은 혈도가 아닌 척추를 타고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건 평소 수련할 때 움직이는 경로가 아니다.

명치 부근을 지나 심장이 있는 부분까지.

고통이 점점 사그라지면서 내공이 계속 척추를 타고 올라간다.

심장에서 목으로.

목에서 미간 사이에 있는 인당혈에 도착했을 땐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당혈도 지나 내공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

고양감이 온몸을 가득 채우면서 폭발하듯 끓어오르던 내공은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너무나도 황홀한 감각에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감각은 조금씩 옅어졌다.

아쉬워하며 눈을 떴지만 아쉬움은 잠깐이었다.

"벽을 깼구나. 축하한다."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사부가 밝은 표정으로 축하 인사를 건넸으니까.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3)

호랑이와 개미가 싸우던가요?

무슨 일이든지 처음으로 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선례가 없으니까.

물론 선구자가 되어 스스로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번 수련회는 그렇게 되기 힘들어 보인다.

"교육대장은 우리 1학교의 김제하 선생님이 맡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교관으로 오신 1학교 선생님들 중엔 A 랭크 헌터가 1명도 없지 않아요? 이번 수련회 교육대장은 우리 2학교 김정현 선생님이 맡을 겁니다."

"김 선생은 작년에 임용돼서 아직 정규 교사도 아니라면서요?"

"정규 교사건 신입이건 무슨 상관입니까? 실력대로 해야지."

"애들 수련회 교관으로 온 건데 실력이 무슨 상관이라고. 경력으로 따지면 우리 1학교 김제하 선생님이 하시는 게 맞죠."

"거, 실력도 없는 사람이 무슨 교육대장을 한다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뭐 없는 말 했습니까?"

어휴, 그놈의 교육대장이 뭐라고….

어제 나는 벽을 깼다.

내가 느끼기에는 아주 잠시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한나절이 지나 있어 부랴부랴 준비해 겨우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수련원 식당에서 식사를 시작으로 시설과 커리큘럼 점검을 시작했다.

요새 수련회 관련 문제가 많이 제기돼서 그런지 업체에서 준비를 워낙 잘해 둬서 특별히 흠잡을 게 없었다.

시설 상태도 괜찮고 커리큘럼도 이상한 건 없고 밥도 학교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름 괜찮았으니까.

담당할 과제와 각자 맡을 조만 정하면 끝이라 생각보다 일찍 끝나겠거니 했는데 벌써 한 시간째 논쟁 중이다.

이런 긴 논쟁의 원인은 수련회 교관 총책임자인 교육대장 자리 때문이다.

얼른 끝나고 포탈에 가서 사부와 대련이나 하고 싶었는데 우리 학교 선생들도 그렇고 인천에서 온 2학교 선생들도 양보할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전에 교감이 2학교와 우리 학교가 사이가 안 좋아서 트러블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긴 했지만 진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참 한심하다.

"결투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2학교 선생 1명이 의견을 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계속 말로 싸워 봐야 결론도 안 나오는데 깔끔하게 결투로 정하는 게 백번 낫지.

"그렇게 하죠. 벌써 한 시간째 이러고 있으니 결투로 정하시죠."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나도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죠."

2학교 선생들이 이때다 싶어 우르르 나서 찬성하는데 우리 학교 선생들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도 그럴 게 2학교 교관으로 온 선생 중엔 A 랭크 헌터가 있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없으니까.

"무슨 교육대장을 정하는데 결투까지…."

"그럼 다른 대안이라도 있으신지?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그럼 대표로 학교에서 5명씩 나와서…."

2학교 측으로 넘어가나 싶었는데 우리 학교 선생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2학교에는 A 랭크 헌터가 있지만 C 랭크도 있는 반면 우리 학교 선생들은 전원이 B 랭크 헌터니까.

"무슨 결투를 다섯 번씩이나 해요. 하루 다 가겠네. 그냥 대표로 1명이 하죠."

"그쪽이 결투로 하자고 했으니 우리도 의견을 낼 수 있는 거죠."

또다시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업체 관계자들도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는지 2학교 측 편을 들어 줘서 30분 뒤에 학교마다 대표를 1명 뽑아 운동장에서 결투하기로 결정됐다.

2학교 선생들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가는데 우리 학교 선생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할 모양인 것 같다.

나야 뭐, 교육대장 같은 건 관심 없어 운동장에 미리 가서 기다릴 생각으로 나가려는데 백 선생이 다가온다.

"강 선생님, 혹시 학교 대표로…."

"저는 그런 자리 관심 없습니다. 아까 회의 때도 한마디도 안 했잖아요."

백 선생은 학기 초 모임 때 내가 비 헌터 학교 출신이라는 게 알려진 이후 말 한번 섞지 않았지만 2학기 개학 이후부터는 인사도 하고 말도 걸어왔다.

수업하러 가는 길에 내게 다른 선생들 눈치가 보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미안하다며 사과도 했다.

솔직히 좋은 생각은 안 들었지만, 사과까지 받았으니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낸다.

다른 실기 선생들도 내 능력이 알려지니 개학 때부터 말을 걸긴 했지만 백 선생처럼 따로 사과까지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강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2학교 측에서 교육대장을 하게 될 텐데…."

"저는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네요. 교육대장이 정식 직책도 아니고 고작 3일 수련회 책임자가 되는 건데…. 오히려 사고 같은 거라도 터지면 어차피 전부 교육대장이 뒤집어쓰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학교의 명예가 걸려 있지 않습니까?"

명예는 무슨 얼어 죽을 명예….

"우리 학교에서 교육대장을 맡는다고 우리 학교가 명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못 맡는다고 똥통 학교가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돈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책임만 지는 자리는 절대 사절이다.

사실 돈 더 준대도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선생님, 이건 학교 자존심이 걸린 문제에요."

애사심이 넘치네.

아니, 학교니까 애교심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할 생각 없다고 말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나서라고 교감이 내게 교관을 억지로 떠맡게 한 거겠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교관을 맡는 것뿐이었지 결투까지 나서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물론 트집 잡으려면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겠지만 상관없다.

이젠 나도 초절정 고수니까.

화장실을 잠깐 들렸다가 운동장에 내려왔다.

결투할 생각은 없지만, 구경은 당연히 할 생각이다.

가장 재미있는 구경 두 가지 중 하나는 불구경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싸움 구경이니까.

운동장에 나와 보니 우리 학교 선생들도 내려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중이다.

아까 논쟁할 때는 다들 그렇게 호전적이더니 A 랭크 헌터와 결투가 두려운지 다들 빼고 있다.

"강 선생은 진짜 안 도와주겠대?"

"백 선생은 그래도 인사하는 사이잖아. 다시 한 번 말해 보면 안 될까?"

누구 좋으라고.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나?

평소에는 투명인간 취급 하면서 자기들이 아쉬우니 이런 소리나 지껄이고 진짜 뻔뻔함 하나는 S 랭크 수준이다.

"아예 관심이 없다고 해서 힘들 것 같은데요."

"강 선생은 우리 학교 선생이란 자각도 없나?"

"학교도 안 나왔는데 뭘 알겠어요?"

쯧쯧.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저희는 정했는데 1학교는 아직인가요?"

2학교 측 여선생이 다가와 말을 하는데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저쪽에 가서 물어보시죠."

"강신혁 선생님이시죠? 그쪽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전 안 나갑니다. 교육대장 같은 건 관심 없거든요."

"B 랭크인데 오러블레이드를 쓴다고 해서 뭔가 싶었는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보네."

옆에 있던 남 선생 하나가 도발을 하는데 내가 많이 유명해지긴 한 모양이다.

반박을 할까 했지만 그러다 나보고 싸우자고 하면 괜히 남 좋은 일을 하게 될 것 같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우리 학교 선생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어차피 김 선생님이 교육대장 할 예정이었으니 김 선생님이 나가시죠."

"아니, 나는… 그래, 저쪽도 신입 교사인데 내가 나가면 좀 그렇지. 백 선생이 나가 보지그래."

"네? 아니, 저는 별로…."

학교에서 명문 길드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백 선생도 저러고 있으니 다른 선생들은 절대 안 나설 것 같다.

어휴, 왜 내가 부끄러워지려고 하지?

"쯧쯧. 그럼 그냥 기권하시던가요."

"그렇게는 안 되지요."

"그럼 누가 나오실 건데요? 빨리 좀 정하죠. 우리 2학교 대표는 김정현 선생입니다."

2학교는 예상대로 A 랭크 헌터를 내보냈다.

자기들의 승리를 확신하는지 거들먹거리는 게 좀 꼴 보기 싫긴 해도 평소에 날 무시하던 실기 선생들이 쩔쩔매는 모습이 아주 달다, 달아.

과연 어떻게 나오려나?

이대로 결투도 안 하고 포기할지 아니면 그래도 결투는 할지 흥미롭게 지켜보는데 아까 나를 도발했던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1학교 선생님들은 순 겁쟁이들뿐인가? 그쪽이라도 나오시죠? 적당히 봐주면서 할 테니까."

이제 보니 이 녀석이 2학교의 대표인 모양인데 어이가 없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내가 나서면 실기 선생들 좋은 일만 시키는 거라 철저히 무시하려 했지만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그쪽도 겁먹었나보죠? 우리 학교 선생님들 치료 마법 잘하시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오시죠."

하아….

정말 나서기 싫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쩔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더니, 이 자식은 기어이 선을 넘어 버렸다.

"호랑이가 개미랑 싸우던가요?"

"뭐, 뭐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귓구멍이 막히셨나? 그런 게 아니라면 이해력이 좀 부족하신 건가? 결투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자 건들거리며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모습이 꽤 볼만하다.

"이봐요,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해요?"

남자 옆에 있던 여선생이 화를 낸다.

애인이라도 되나?

"아무리 실기 선생이라도 그렇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모르십니까?"

상대방에서 먼저 무례하게 굴었는데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나 혼자 예의를 지켜 줄 필요는 없으니까.

"나서지도 못하면서 말 만큼은 소문처럼 아주 대단하시네요."

"허접쓰레기들끼리 싸우는 자리라 안 끼려 했던 건데… 뭐, 어쩔 수 없죠. 백 선생님."

"네, 네?"

"내가 나가도 되죠? 아, 물론 대표는 내가 안 하고 양도할 겁니다."

"아, 네. 그럼요."

"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허접쓰레기?"

허접쓰레기라는 말이 꽤 충격이 컸는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귀머거린 줄 알았는데 청력 좋으시네. 나야말로 2학교 선생님들 사정을 좀 봐드려야 할 텐데 얼마나 봐드려야 할지…. 아쉬운 대로 2학교 선생들 전체가 덤비는 건 어떻습니까?"

"뭐, 뭐요?"

"이 사람이! 우리 2학교를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봐 당신? 우리가 물로 보여?"

"한국말 몰라요? 내가 언제 2학교 선생님들이 물이라고 했습니까? 허접쓰레기라고 했지."

"저기… 강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그런 조건은…."

백 선생이 끼어든다.

솔직히 나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이러다 내가 지면 교육대장 자리를 뺏기게 돼서 그러는 것 같다.

물론 해가 서쪽에서 떠도 그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겠지만.

"자기가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데 끼어들지 마시죠."

"매스컴 좀 탔다고 자만심이 하늘을 찌르시는 것 같은데, 이 기회에 세상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알게 해 드려야겠네."

아이고, 무섭다.

그래. 누구나 다 계획은 있을 수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내가 승낙하자 심판을 누가 볼 거냐로 또 이야기가 늘어지길래 운동장에 와서 나를 중심으로 일 미터 정도 반경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전부 덤비라고 해 놓고 비겁하게 마법진을 미리…."

2학교 선생이 와서 시비를 건다.

마법진이라니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린지 모르겠다.

"이게 어딜 봐서 마법진으로 보입니까? 저는 마법 안 씁니다."

"강 선생님, 심판은 제가 맡기로 했습니… 어? 이 원은 뭔가요?"

"전부 덤벼도 수준이 안 맞을 것 같아서 그린 겁니다. 제가 이 원을 벗어나면 제 패배로 하지요."

시작하자마자 단번에 박살을 내 버리면 사술을 썼다며 우길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 정도 디스어드밴티지도 없으면 아예 긴장도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고작 B 랭크 헌터 주제에."

"상당히 건방지시네."

전부가 다 덤벼도 이런 디스어드밴티지가 없으면 아예 긴장이 안 될 것 같다.

"저기… 강 선생님, 안 그래도 3:1인데 굳이 이런 조건을 걸 필요가…."

"3:1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2학교 선생 전부 다 같이 덤비는 거 아니에요?"

"자기들도 명예가 있어서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3명만 나간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쯧쯧, 전부 나와도 안 될 텐데 무슨 자신감인지. 뭐, 자기들이 걷어차 버린 거니 나중에 다른 말 하진 않겠네요."

상대는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인데, 아까 내게 도발했던 남자는 검사인지 검을 들고 있고 창을 든 남자와 마법사로 보이는 내게 처음 말을 걸었던 여자다.

"네? 정말 괜찮습니까? 2:1도 아니고 3:1인데…."

"괜찮으니까 바로 시작하죠."

백 선생은 잠깐 고민하더니 2학교 선생들에게 준비되었는지 묻고 다들 동의하자 손을 내리며 시작을 알렸다.

아카데미의 검술 강사가 되었다 (54)

수련회

신호가 끝나기 무섭게 창을 들고 있던 남자 선생이 내게 창을 던져 가볍게 한 발자국 움직여 피했다.

쿵!

운동장 모래가 한 움큼 파인다.

담겨 있는 힘은 꽤 괜찮아 보이지만 공격의 궤적이 너무 뻔하다.

게다가 속도도 너무 느린 것 같은데.

이런 공격은 눈 감고도 피할 것 같다.

여선생은 마법사인지 영창을 시작했고 나를 도발했던 남자는 창술사와 달리 검을 꼬나쥐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여선생은 마법사라 제외하고 나머지는 둘 다 시작하자마자 달려들 거라 생각했는데.

명색이 A 랭크라는 건가?

꽤 조심하는 눈치다.

"둘 다 비켜요!"

여선생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웬만한 어른 머리만 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형태로 판단했을 땐 파이어버스트란 마법 같다.

기회를 노리던 검사도 동시에 움직이는데 시간차 공격을 할 생각인지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이 내 복부 쪽으로 날아든다.

만약 내가 어제 벽을 깨지 못했다면 약간이나마 위협적으로 느꼈을지도 모를 정도로 꽤 괜찮은 합공이지만 지금의 내겐 그저 가소롭다.

검으로는 불덩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칼은 왼손으로 잡았다.

"뭐… 뭐야?"

파이어버스트는 저랭크 헌터들이 사용하는 파이어볼과는 다르게 오러로 갈라도 폭발해서 전체 타격을 주는 꽤 성가신 마법이다.

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폭발 없이 불덩이는 사라졌다.

마법 자체를 구성하는 마나의 흐름을 보고 갈랐으니 당연한 결과다.

"맨손으로 어떻게 내 검을…."

시간차 공격으로 검을 내질렀던 남자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누가 맨손으로 잡았대?

당연히 왼손에는 수강을 일으켰다.

초절정이 아니라 초절정 할애비라도 맨손으로는 오러가 담긴 검을 잡을 수 없으니까.

쯧쯧, 검술 선생이라고 검만 쓸 거라 생각했나 본데 이런 게 A 랭크 헌터라니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검은 손의 연장선, 검으로 오러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으면 당연히 손으로도 만들 수 있겠죠."

애초에 수강은 벽을 깨기 전에도 가능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빠르게 만들지는 못했었지만.

당황한 기색으로 검을 빼려 힘을 주는데, 어림없지.

또각.

수강을 이용해 검신을 분질러 버림과 동시에 뒤로 돌아 부서뜨린 검 조각을 집어 던졌다.

푹!

"끄어억!"

창을 주우러 가던 선생의 복부에 그대로 명중해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그렇게 살금살금 가면 안 들킬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러니까 무기를 왜 던집니까?"

내공을 그리 많이 담진 않았는데 대비를 전혀 못 했는지 피도 많이 나고 상태도 안 좋아서 백 선생이 급하게 중지를 선언하고 창술사를 운동장에서 이탈시켰다.

"저도 그만하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검사도 완전히 질려 버렸는지 포기를 선언했다.

검이 그래도 통째로 부러진 건 아닌데… 쯧쯧, 패기가 없다.

뭐, 현명한 걸 수도 있지만 진짜 현명했으면 내게 덤비질 않았겠지.

"김 선생님은 어떻게…."

"저는 계속할 겁니다."

이미 2명이 이미 나가떨어진 데다 육체적으로 불리한 마법사인데… 아, 내가 원 밖으로 안 나가겠다고 한 것 때문인가?

그래도 패기 하나만큼은 가장 났다.

물론 계속하는 건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지만.

대련이 재개되자 운동장의 마나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강력한 마법을 준비하는 모양인데 기다려 줄까 하다 빨리 끝낼 생각으로 가볍게 검기를 날렸다.

팅.

쩌억―.

오호, 조금 놀랐다.

잘 날아가던 검기가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으니까.

배리어 같은 마법을 미리 시전해 둔 모양인데 투명해서 안 보이는 데다 워낙 마나가 요동을 쳐서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 김 선생님의 인비저블배리어는 오러로는 못 뚫는다고!"

어라? 이거 처음에 판단을 잘못했던 것 같다.

인비저블베리어는 A 랭크 헌터들이 사용하는 마법이니 A 랭크는 검사가 아니라 마법사였던 모양이다.

워낙 건들거리며 도발하기도 했고 아까 회의 때 이름도 김정현이라고 해서 당연히 검사가 A 랭크 헌터일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정현이라는 이름을 남자만 쓰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

방탄유리조차 총알은 막아도 대포는 막을 수 없으니까.

검기로 뚫을 수 없다면 검강을 쓰면 그만이다.

검에 검강을 일으키고 여선생을 향해 날렸다.

여선생이 다급히 몸을 움직이는데 검강을 잔뜩 머금은 내 검은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거리가 꽤 있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맞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날뛰던 대기의 마나도 여전한 걸 보니 무빙 캐스팅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무빙 캐스팅 자체는 웬만한 학생들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기술은 아니지만, 마법 수준이 높을수록 난이도가 아주 극악하게 올라간다고 들었다.

정확히 어떤 마법일지는 모르겠지만 준비 시간도 길고 대기에서 요동치는 마나를 생각하면 꽤 높은 수준일 텐데….

A 랭크를 딱지치기해서 딴 건 아니라는 건가?

주문을 외우는 여선생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밝아졌다.

검도 피했겠다 나는 원 안에서 나갈 수도 없으니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거 너무 방심했다.

아, 물론 내가 아니라 저 여선생이.

* * *

오러블레이드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심으로 놀랐다.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조금 강한 오러를 보고 사람들이 착각해서 부풀려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날아왔던 검에 서려 있던 건 예전에 딱 한 번 봤던 오러블레이드와 완전히 똑같았다.

우리 학교 선생 전체에게 같이 덤비라고 했을 땐 만용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저 원을 나오지 않겠다는 패널티만 없었다면 전부가 덤벼도 결코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상대가 너무 안일했다.

이제 곧 마법도 완성되니….

펑!

실드가 깨지면서 마나 역류가 발생했는지 충격 때문에 주저앉고 말았다.

뭐지?

도무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간다.

분명 검은 피했는데….

설마 자기네 학교 선생이 질 것 같으니 다른 1학교 선생이 끼어든 건가?

3:1에 패널티까지 있긴 하지만 결투 전에 본인이 이야기하고 진행한 거니 이건 정당한 명예 결투다.

어떻게 이런 비겁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앞에 시퍼런 오러블레이드가 넘실거리는 검이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공격할 것처럼 날 겨누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허공에 혼자 둥둥 떠 있는 채로.

* * *

모두가 빗나갔다고 생각했겠지만 내 검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빗나갈 수가 없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던 검을 급선회시켜 배리어를 부수고 여선생을 겨눴다.

"어떻게 한 거지?"

"무슨 검이 혼자서…."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론과 요령은 한참 전에 사부에게 배웠지만 그동안은 내공이 부족해 엄두도 못 내던 기술.

내가 사용한 무공은 기와 의념으로 원거리에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이기어검(以氣馭劍)이다.

"졌습니다."

패배 선언이 나오자 검을 불러들였다.

여전히 새파란 광채를 내뿜는 검이 천천히 내게 날아와 손에 잡힌다.

초절정이 되고 나서 내공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확실히 내공 소모가 크다.

빠르게 회복이 되고 있긴 하지만 아주 잠깐 운용했는데 체감상 내공의 1/3 정도가 소모된 것 같다.

가성비를 따지면 천마 검법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까 저 녀석들이 뱉은 말에 살짝 짜증이 나서 약간 오버를 했다.

사실 끝내면서 팔 하나 정도는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아까 자기네 학교 선생이 치료 마법 잘 쓴다고 도발하기도 했으니 검강으로 깔끔하게 자르면 다시 붙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

딱히 여자라고 봐준 건 아니고 아까 이미 피를 한 번 보기도 했고 어쨌든 앞으로 3일간은 같이 교관 임무를 수행해야 할 테니 위협으로 마무리했다.

"스… 승자는 1학교 강신혁 선생님."

심판을 보던 백 선생의 선언으로 결투는 끝이 났다.

"역시, 강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방금 그 기술은 도대체…."

"별거 아닙니다."

예상은 했지만 백 선생을 제외한 다른 선생들은 아예 말 한마디 걸지 않는다.

"저기, 그런데 교육대장은…."

백 선생도 욕심이 있나?

관심 없으니까 알아서 이야기해서 정하라고 말하려는데 아까 결투했던 2학교 선생 셋이 다가온다.

아까 창을 쓰던 선생은 복부 출혈이 꽤 심했던 것 같은데 치료 마법을 잘 쓴다는 건 허풍이 아니었는지 완전히 멀쩡해 보인다.

혹시 다시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러게 처음부터 다 같이 덤비라니까.

"저… 강신혁 선생님."

"네?"

"저희가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심하게 말했던 거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라니 너무 의외라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인정 못 한다고 다시 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아, 저도 말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사과를 했다.

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깔끔하게 승복하기도 했고 어쨌든 2박 3일간 같이 교관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이니…. 아,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김정현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교육대장은 김 선생님이 하시죠."

"네? 아니… 강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결투는 강 선생님이 이기셨잖아요."

백 선생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저는 괜찮습니다."

김 선생도 당황한 표정이다.

"저는 관심이 없어서 양도하기로 했거든요. 다른 두 분이 포기하셨는데도 마지막까지 계속 하시려는 패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교육대장을 맡으셔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패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네요."

당연히 개소리고 진짜 이유는 우리 학교 선생들이 싫어서다.

결투 전에 분명히 관심 없어서 양도한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우리 학교 선생에게 양도한다는 말은 안 했으니까.

* * *

오늘은 드디어 수련회.

수학여행이 아닌 수련회다 보니 놀러 가는 건 아니고 교육 같은 걸 한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수업보단 나을 테니까.

무엇보다 오랜만에 학교를 나간다는 게 너무 좋다.

"진수야, 얼른 준비해. 6시 반까지 운동장에 모이라고 했잖아."

"아, 그랬지."

"네가 제일 늦게 일어났어. 얼른 준비해."

시간을 보니 벌써 6시라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운동장에 나왔는데 다들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우리 반 버스를 찾는데 갑자기 옆구리에서 충격이 느껴진다.

"김민희, 아침부터…."

"반장이 지각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다."

"아니,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

"우리 버스 저기 있으니까 얼른 와."

옆구리를 문지르며 버스에 도착했는데 담임 선생님도 안 보인다.

"뭐야, 아직 쌤도 안 왔잖아."

"담임 선생님은 교관이라 어제 미리 가신댔잖아."

"맞다. 그럼 우리 반은 버스 선생님 없이 우리끼리 타고 가는 거야?"

"금요일에 설명하실 때 졸았어? 우리 반은 6반이랑 같이 버스 타잖아."

"민희야, 애들 인원 파악 끝났니?"

"네. 저희 반은 다 왔어요."

한 번 더 인원 체크를 하고 버스는 출발했다.

아침으로 준비된 김밥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수련원이 보인다.

"여기인 것 같은데?"

"건물이 좀 많이 허름하네."

"바퀴벌레 같은 거 무지하게 많이 나올 것 같아."

"산속이라 다른 벌레도 많을 것 같은데."

여자애들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눈치다.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자, 그럼 앞사람부터 천천히…."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먼저 가시죠. 지금부터 학생들은 저희가 통제하고 인솔하겠습니다. 교직원 숙소는 입구 쪽에 있던 건물입니다."

"네? 아, 네."

군복을 입고 빨간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들어오더니 6반 선생님을 내보냈다.

빨간 모자에 교관이라고 적혀 있는데 선글라스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이지만 우리 학교 선생님은 아닌 것 같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1학교 학생 여러분, 지금 바로 짐 챙기고 내려서 버스 앞으로 2열로 정렬하는 데 정확히 3분 주겠습니다."

"3분?"

"말투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꼭 군인 같네."

"다들 잡담하지 않습니다. 오리걸음으로 운동장까지 가고 싶지 않으면 빠르게 움직입니다!"

윽박지르는 식이라 약간 기분이 나빴지만 시키는 대로 버스에 내려서 애들을 정렬시키자 가만히 지켜보던 교관이 다시 다가왔다.

"행동이 왜 이렇게 느립니까! 교관이 아까 분명히 3분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여러분은 시간을 2분이나 초과했습니다."

"3분 만에 어떻게 줄을 서."

"그러게. 이 정도면 빨리한 거 아닌가?"

"저 사람 이상해…."

움직이면서 다들 불평불만을 토로한다.

교관에게도 다 들릴 것 같은데… 불안하다.

"거기 둘, 지금 뭐라고 했어? 교관이 잡담하지 말라고 안 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입소식을 하지 않은 걸 감안해서 경고로 넘어가지만 입소식 이후부터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가방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고 교관 따라옵니다."

어째 내가 생각하던 수련회랑은 많이 다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