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미친개(2)
베일의 미로에 입장한 강현이 휘파람을 불었다.
"분위기 좋네."
강현은 미로형 던전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그래서 처음 미로형 던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좁고 칙칙한 공간을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던전에 입장하니 의외로 널찍한 통로에 분위기 있어 보이는 인테리어까지 나오자 상당히 즐거웠다.
"벽의 재질이 일반적인 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 벽을 두드려보던 신성아가 말했다.
"부수고 지나가는 것은 무리겠군요."
"누나. 부서지는 벽이면 미로형 던전일 리가 없잖아요."
"으음, 확실히 그렇습니다."
안유성의 말에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강현 님은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시니, 길을 찾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흥. 마력 감지라고 해봤자 변태처럼 다른 사람을 훑는 데나 쓰는…. 아악!"
구시렁대는 윤나래의 뒤통수를 후려친 강현이 카메라를 들었다.
"먼저 작동 시험부터 해볼까?"
강현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영상 촬영 버튼을 눌렀다.
"오오... 된다!"
무려 던전 안에서 카메라가 작동한다. 이미 전해들은 말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 것은 전혀 다른 충격과 즐거움을 주었다.
강현은 한동안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윤나래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줘요?"
"오늘 촬영 담당은 너니까."
강현의 말에 윤나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유가 뭔데요?"
"여기서 네가 제일 약하잖아."
"뭐, 뭐라고...요?!"
"사실이 그런 걸."
특수 능력자 관리팀.
윤나래는 그곳에 속해 있으면서 대한민국 최고라는 최동우를 포함해 수많은 거대 길드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촬영기사 취급을 받자 울상을 지었다.
"왜. 화면에 나오고 싶어서 그래? 너도 나중에 찍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됐어요!"
윤나래가 앙칼지게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쯧. 히스테리 부리기는..."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강현이 손을 비볐다.
"그럼 시작한다."
잔뜩 들떠있는 모습.
윤나래는 인상을 쓰며 마지못해 강현을 카메라에 담았다.
"위튜브 여러분. 안녕하세요! 배데스 길드의 강현입니다. 뭐, 이미 다 알고 계시죠?"
"우엑. 연예인 병이다."
"닥쳐."
윤나래에게 인상을 팍 쓴 강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저와 길드원들이 던전 공략에 나섰는데요. 바로 악명 높은 B등급 던전. 베일의 미로입니다!"
"..."
"뭐해? 빨리 호응해. 박수도 치고."
-짝짝짝짝...
성의 없는 박수소리를 들으며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려 능력자들의 무덤. 능력자 개미지옥이라 불리는 이곳, 베일의 미로는 아직 한 번도 코어 공략에 성공하지 못한 던전입니다!"
"..."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코어를 부수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던전이 개방됩니다."
"맞습니다! 신성아 학생. 아주 잘했어요."
"헤헤..."
둘이서 콩트를 찍는 모습을 윤나래와 안유성이 못 볼 꼴 본다는 듯이 쳐다봤다.
"던전이 개방되면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그럼 아주 큰일이겠죠?"
"예."
"그래서! 오늘 우리 배데스 길드가 찾아왔습니다."
"..."
이어지는 침묵에 강현이 인상을 썼다.
"쓰읍... 박수."
-짝짝짝짝...
다시 자본주의 미소로 돌아온 강현이 말을 이었다.
"베일의 미로에 대해 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알아서 찾아보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강현은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제 뛰어난 감에 의하면 이쪽 방향에서 코어가 느껴지네요."
강현이 가리킨 곳은 벽이었다.
"...?"
"그럼 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잠깐, 길을 만든다니…."
다급한 윤나래의 말을 무시하고 강현이 망치를 들어 올렸다.
"흐으읍!"
-콰아아앙!
그리고 격돌하는 망치와 벽.
"켈록, 켈록! 이게 뭐야?!"
"오오. 솔직히 나도 될까 싶었는데, 이게 되는구나?"
강현의 앞에는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러분 보셨죠? 이제 미로형 던전에서 힘들어하지 마세요. 이렇게 코어를 느끼고, 그 방향으로 길을 터주면 됩니다."
"..."
"참 쉽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강현을 보고 윤나래가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
**
던전 공략은 막힘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콰앙, 쾅! 쾅!
강현은 앞을 막는 벽을 닥치는 대로 박살냈다.
-달그락, 달그락!
-주...죽, 죽어라...
"뼈다귀가 왜 돌아다녀!"
앞을 막는 몬스터도 닥치는 대로 박살 냈다.
-다그라락... 다락...
순식간에 뼈 무더기로 변하는 언데드들을 보며 윤나래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몬스터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날이 올 줄이야...'
베일의 미로에 등장하는 적들은 B등급임을 감안해도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상성이 좋지 않았다.
소규모 정예로 등장하는 놈들은 회피할 공간이 제한적인 통로에서 휘몰아치는 강현의 망치에 무방비하게 당할 뿐이었다.
"강현 님. 함정입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함정들.
함정 해제에 관한 스킬, 능력을 보유한 이가 없다면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위험천만한 것들 뿐이었다.
"타입이 어떤 거야?"
"전형적인 것들입니다. 창, 화살, 저 위에선 무거운 철퇴 같은 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흐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금방 해제하겠습니다."
"됐어. 시간 아깝게."
해제 따위는 없었다.
손을 휘저은 강현이 당당하게 나아갔다.
-푸슉!
-촤자자장!
강현이 발을 뻗자마자 온갖 흉기들이 몰아쳤다.
강현은 최대한 그것들을 피해냈지만, 워낙 치밀하게 설계되었기에 많은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현 님!"
무기에는 특수한 처리가 된 것인지, 어지간한 칼날도 튕겨내는 강현의 피부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능력자라면 단숨에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말 그대로 치명적인 함정.
"생각보다 아프네."
하지만 강현에게는 그저 조금 아픈 함정에 불과했다. 불과 30초도 지나지 않아 강현에게 난 모든 상처가 아물었다.
"됐다. 가자."
이후로도 강현은 어지간하면 몸으로 함정을 때웠다.
자신의 신체 내구도와 회복력을 믿은 것이다.
그 결과 남들보다 몇 배는 빠른 공략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고작 시간이 아깝다고 함정에 맨몸으로 뛰어들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윤나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잠시, 전부 조용해봐."
그때였다.
다음 통로를 열기 위해 망치를 휘두르던 강현이 멈춰 섰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소리가 들렸어."
"소리 말입니까..?"
신성아는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윤나래 또한 정신을 집중을 했지만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형. 저쪽 말하는 거죠?"
"오, 너도 들었냐?"
"아뇨. 저는 감으로."
"아..."
어쨌든 안유성의 육감에도 무언가가 걸려들었다는 뜻이었다.
강현은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
-콰아앙!
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휘날렸다.
"켈록, 켈록!"
"거봐. 내가 무슨 소리 들렸다고 했지?"
"역시 강현 님이십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강현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강현이다!"
"미친, 이걸 뚫고 온 거야?"
"배데스 길드야. 이제 살았어!"
하나같이 초췌한 모습을 한 열세 명의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위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난민들을 바라보는 순간,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이거다!'
계산을 끝낸 강현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금수 길드의 길드장에게 햄버거를 건넸다.
"성함이 조운성 씨라고요?"
강현의 말에 햄버거를 우물우물 거리던 조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쩝쩝."
"햄버거 맛은 어떻죠?"
"정말, 너무... 너무 맛있습니다..."
조운성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맛이 없다고 했다간 저 거대한 망치가 자신에게 내려쳐질 것만 같았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다른 분들도 한입씩 드세요."
강현의 말에 길드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저희는 괜찮은데..."
"네! 맞아요! 이렇게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런 신세까지 질 수는 없어요. 하하..."
"아닙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그들의 완곡한 거절에도 강현은 막무가내였다.
"힘들고, 각박하고, 굶주리고! 여러분들이 이 엿 같은 던전에서 하셨을 고생에 비하면 이 햄버거는 아무것도 아니죠. 자, 받으세요."
"저희는 정말 괜찮…."
"받으세요."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햄버거를 받아 든 이들이 마지못해 먹기 시작했다.
'윽, 맛없어...'
고작 한 입 베어 문 것뿐인데 저도 모르게 욕이 나오는 맛이었다.
"지금 이딴…!"
순간 속마음을 내뱉을 뻔한 남자와 강현의 눈이 마주쳤다.
강현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은 확실하게 말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서 말하라고.
"이딴?"
"이딴 귀한걸! 먹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맛이 어떻습니까?"
"정말 맛있네요. 던전에서 이런 햄버거라니. 꿈만 같습니다. 하하하!"
그제야 만족한 강현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맛있어!"
"살면서 먹어본 햄버거 중 최고야!"
"어떻게 던전에서 햄버거를 먹을 수 있지? 흑흑..."
그 후 몇 차례 더 인터뷰가 이어지고, 강현이 마무리를 지었다.
"이 햄버거는 정서빈 박사님이 만드신 아이템입니다! 무려 인벤토리에 보관이 가능하고, 미량의 마력을 회복시키는 효과도 있습니다. 맛은 말할 것도 없죠."
"..."
"이 카메라도 마찬가지! 던전에서 전자기기의 사용에 음식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다니 혁명 아닙니까?!"
"..."
"여러분들도 이 햄버거만 있었다면 이렇게 고생하고, 힘들지 않으셨을 텐데... 그렇지 않나요?"
"마, 맞아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은 강현이 대한민국 대통령은 아랍인이라 해도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좋아. 식사가 끝났으면 이제 움직여 볼까요."
"예...?"
분량을 모두 뽑아내자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던전 깨러 가야죠. 평생 여기서 살 거예요?"
**
금수 길드는 강현과 함께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강현은 굳이 던전의 입구까지 이들을 데려다 줄 마음이 없었고, 금수 길드는 자력으로 입구까지 돌아갈 능력이 없었다.
노말 코어가 보였다면, 제거한 후 포탈을 열어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발견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이 던전에는 노말 코어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뭘 본거지?"
"진짜 같은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강현과 함께하는 던전 공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던전의 벽을 부숴서 지형지물을 파괴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충격인 것은 강현의 공략 방식이었다.
"목숨이 몇 개는 있는 건가..."
무모함의 끝.
강현은 정말 파괴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지형지물이든, 몬스터든 그의 앞에서 사이좋게 박살났다.
"후우, 도착이다!"
금수 길드는 무려 열흘 동안 베일의 미로를 헤맸다.
그런데 강현은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보스룸에 도착했다.
"아으... 근육을 무리하게 썼더니 좀 피곤한데?"
하루 종일 망치를 휘두르느라 강현의 근육은 잔뜩 성이 난 것 같았다.
"결국 노말 코어는 없었네?"
"예."
보통 던전에는 노말 코어가 최소 한 개, 많게는 다섯 개 이상도 존재한다.
하지만 베일의 미로에는 단 한 개의 노말 코어도 없었다.
이런 경우는 베난디의 숲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러니까 다들 공략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지지."
베일의 미로 자체는 굉장히 좁은 던전이었다.
입구에서 보스룸까지 직선 코스로는 하루도 걸리지 않을 거리.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수많은 미로로 엉켜 있었으며, 먹을 것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언데드 던전이라는 환경이 수많은 능력자를 죽음으로 인도해 왔었다.
"여러분도 이제 왜 베일의 미로가 그렇게 악명 높은 던전이었는지 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식량 문제만 해결됐더라도 던전의 난이도는 굉장히 낮아졌겠죠."
강현이 갑자기 카메라를 보며 강연을 시작했다.
"배데스 길드는 다행히도 인벤토리에 보관 가능한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 큰 어려움 없이 올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단 한 톨의 식량도 가져오지 않았어도 문제없을 것 같았지만, 감히 딴죽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보스를 공략하기 전에..."
강현이 갑자기 인벤토리에서 햄버거를 꺼내더니 주섬주섬 포장을 뜯었다.
"으음... 햄버거를 먹었더니 기운이 솟는군요. 지체 없이 바로 보스 공략에 들어가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햄버거를 먹는 그의 얼굴은 정말 햄버거가 맛있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독한 놈.'
'돈미새... 자낳괴...'
'혹시 다른 햄버거를 먹는 건가?'
금수 길드원들은 혹시 강현이 다른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것은 100% 그들이 먹은 것과 같은 햄버거였다.
"아, 배부르다."
마침내 모든 햄버거가 강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슬슬 들어가 볼까나."
"예? 벌써 들어가십니까?"
강현이 보스룸 앞에 서자 조운성이 당황했다.
그들이 휴식을 한 지 3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쉬면 뭐해요. 마력도 다 찼는데 이제 가야죠."
"그래도 피로를 최대한 풀고 가는 게..."
원래 보스 공략 직전에는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됐어요. 이 정도 피곤한 것 가지고. 다들 괜찮지?"
"형 옆에서 구경만 한다고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요. 얼른 가요."
"저도 괜찮습니다."
안유성과 신성아 또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시작할까."
강현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자! 여러분! 그러면 이제 보스룸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가만 보면 아주 천직이야..."
윤나래는 지금껏 강현이 방송을 하지 않고 어떻게 참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강현은 들떠 보였다.
"강현 님이 관종 기질이 있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사돈 남 말하네."
"크흠..."
마지막으로 다시 장비를 점검한 강현이 빙긋 웃으며 보스룸 앞에 섰다.
"그럼 진짜 간다."
"우오!"
87화 미친개(3)
87. 미친개(3)
"그럼 진짜 간다."
"우오!"
강현이 기합을 넣으며 문을 밀었다. 제법 육중한 무게.
-쿠구구구
"어지간한 놈들은 문 여는 것도 일이겠어."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움직이며 소음이 일었다.
"저놈이 보스인가 보네요."
"혼자인 것 같습니다."
문을 열자 일행을 반기는 것은 드넓은 홀(Hall)이었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
곳곳에 걸린 촛대 위에서 타오르는 초가 음산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저건 뭐하는 컨셉충이야?"
그 공동 한가운데에 놓인 의자. 그곳에 전신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색 의자. 검은색 풀 플레이트 갑옷. 심지어 칼집도 검은색이다.
남자를 바라보며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가 무슨 어둠의 기사야? 쓸 데 없는 똥 폼은."
-나는 어둠의 기사다.
"응?"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사실이라고 한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어둠의 기사 베일. 너희는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머릿속을 직접 두드리는 듯한 음성.
제법 익숙한 느낌이었다.
"설마 너도 해골이냐?"
-그렇다. 나는 죽어서도 이곳을 지키기 위해 망자가 됐다.
"몬스터 주제에 설정도 세세하네."
지금껏 자신의 과거 이력을 읊은 몬스터는 이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떡하냐. 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별 관심이 없는데."
-...
"그냥 얌전히 마정석이나 내뱉고 꺼져."
강현의 말에 어둠의 기사, 베일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거 신기한 일이군.
"...?"
-나도 네 사정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던 참이었다.
"허..."
-이곳을 찾아온 불청객들의 운명은 오직 죽음뿐. 곧 망자가 될 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기엔 나는 너무 오래 존재했다.
놈의 농담 같은 말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거 마음에 드는 해골이네."
-나는 기사다.
"알았어. 새꺄."
베일과 대화를 하며 몸을 풀던 강현이 신성아에게 눈짓을 줬다.
"어떤 것 같아?"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예. 상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확실히 이번 던전은 쉬웠습니다. 무려 B등급 던전인데도 말이죠."
아무리 강현이 벽을 부수고 치트키를 써서 깬 거나 다름없다고 해도 던전은 B등급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쉬웠다.
"던전의 등급이 수많은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에 비춰봤을 때..."
"저 놈이 던전을 B등급으로 만든 주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지."
"예."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도 심상치 않은 게, 뭔가 오싹하긴 하네."
그때, 강현의 말을 끊고 안유성이 앞으로 나섰다.
"형은 잠시 빠져 있어요. 제가 먼저 붙어 볼게요."
"왜?"
"일반적인 괴수형 몬스터가 아니라, 사실상 인간형 몬스터라 봐야 돼요. 저런 상대에 탐색전은 기본이죠. 그리고 형이랑 같이 싸우면 방해되잖아요."
안유성이 나름 일리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냥 지금까지 너무 시시해서 몸이 근질거린 건 아니고?"
"먼저 가요!"
"하여간 저 미친놈..."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럼 베일의 미로 보스 공략.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안유성은 잔뜩 들떠서 달려갔다. 굉장히 무모하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신중했다.
어쨌거나 상대는 B등급 던전의 보스. 그것도 전문적으로 칼을 다루는 보스 몬스터이다. 때문에 그는 평소에 사용하던 메이스가 아닌 검을 든 채였다. 검이 더욱 기민한 대응이 가능하리란 판단에서였다.
-채채채챙!
안유성과 베일의 검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토해냈다.
-훌륭한 재능이군.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오호, 입으로 싸우는 타입인가?"
-오늘 진짜 전사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순간 베일이 예상치 못하게 발길질을 가했다.
"진짜 전사라더니... 크헉!"
안유성은 본능적으로 팔을 교차해 막아냈지만, 신체 스펙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강한 충격이 몸을 강타함과 동시에 안유성이 쏘아지듯이 날아, 벽에 처박혔다.
"속박의 줄기!"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윤나래가 마법을 사용했다.
땅을 뚫고 올라온 거대한 나무줄기가 빠르게 베일을 향해 날아들었다.
-신성한 기사의 싸움에 끼어드는군.
그저 가벼운 휘두름.
베일이 휘두른 일검에 윤나래의 마법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쐐애애액!
그 틈을 타 신성아가 날린 마력 화살이 베일의 뒤통수로 날아들었다.
-카앙!
마력화살은 상당히 강한 기술로 마력 또한 굉장히 많이 드는 스킬이었지만, 허무하게 베일의 칼에 튕겨져 나갔다.
-날파리 같은 가벼움이군.
"신체 스펙이 최소 강현 님 수준입니다. 속박 같은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신성아가 소리쳤다.
-채앵, 챙! 콰앙!
전투는 급박하게 흘러갔다.
안유성과 신성아, 윤나래의 협공. 언뜻 보기엔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은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고려해서 움직일 만큼의 경험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놈이잖아? 하하하하!"
사실상 베일의 모든 공격을 혼자 견디고 있던 안유성이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전투의 열기가 올라갈수록 그의 몸놀림이 더욱 기민해지며, 정신은 한없이 날카로워졌다.
-너는 전투가 즐거운가.
그런 안유성을 향한 베일의 음성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투는 신성한 것이다. 진실된 기사. 진정한 전사가 무엇인지 알려주려 했거늘, 내가 멍청했군.
"무슨 소리야?"
-죽어라.
순간 베일의 검이 벼락과도 같이 내려쳐졌다.
-까앙!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진 위력. 힘의 대부분을 흘려냈음에도 안유성의 팔이 저릿하게 울렸다.
"힘만 무식하게 세네. 꼭 누구처럼."
-찌지직
그때 안유성의 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검이 부서지기 직전의 상황.
'이런... 제대로 된 장검 하나 준비해 놓는 건데.'
안유성의 장검은 강현에게서 얻은 C등급으로, 나름 상등품이었다. 사실 안유성이라면 더 좋은 검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검이 주무기도 아니었고, 여태껏 안유성은 검의 성능에 구애받을 정도로 전투에 몰려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나뭇가지만 들어도 이길 상대들과 싸우는데, 평범한 장검이면 차고 넘쳤다.
'젠장...'
하지만 베일의 검술 실력, 신체 스펙. 어느 것 하나 안유성보다 낮은 것이 없었다.
-채앵!
안유성이 검을 쳐내며 다급히 물러섰으나 곧장 베일이 따라붙었다.
-죽어라.
'너무 빨라!'
재차 날아드는 검격.
무기를 바꿀 찰나의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검은 이미 한계다.
'막을 수 없어!'
그때였다.
-콰앙!
지켜보던 강현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베일을 걷어찼다.
베일은 단숨에 수십 미터를 날아가 홀의 기둥에 처박혔다.
"하여간 온갖 똥폼 잡더니."
"기술로 싸울 것 같은 놈이 형처럼 무식하게 힘만 쓸 줄 알았어요? 퉤!"
피가 섞인 끈적한 침을 뱉은 안유성이 숨을 골랐다. 잠깐 사이에 안유성은 마치 비라도 맞은 마냥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게 구해준 사람한테 할 소리냐. 쯧쯧."
강현이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외친다.
갑작스러운 베일의 말에 모두가 멈춰 섰다.
-너희를 죽이라고. 끊임없이 나를 몰아붙인다!
"..."
-하지만 나는 참고 견뎠다. 기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저런 사특한 말에 굴종하며 따르는 것은 기사라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겠군.
"뭔 개소리야?"
-머릿속의 울림과 내 의지가 원하는 것이 같아졌군.
베일이 말을 함과 동시에 검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치솟았다.
-죽어라.
"마력?"
그것의 정체는 마력이었다.
강현 본인도 한창 연습 중인 기술이기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전부 조심해. 막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 장난은 끝났다.
"절대, 절대로 접근전을 벌이면 안 돼!"
강현의 말과 동시에 베일이 검을 휘둘렀다.
-스걱!
윤나래, 신성아의 마법과 화살은 베일의 검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안유성 너도 마찬가지야. 공격은 무조건 피해."
"알겠어요."
안유성 또한 강현과 자주 대련을 했기에 저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놈의 마력은 한눈에 봐도 강현보다 깔끔하게 운용되고 있다.
-스걱, 파삭!
놈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것에 걸리는 것이 무엇이든 잘려나갔다.
-콰과과광...
심지어 거대한 돌기둥마저 단숨에 잘려나가는 모습에 강현이 침을 삼켰다.
'엿됐다.'
저 마력에 당한다면 강현 자신도 갑옷채로 잘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높아진 체력 수치, 맷집으로 견딜 만한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덤벼! 이 컨셉충아!"
하지만 그럼에도 나서야 했다.
지금 이곳에서 놈의 검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그래도 놈에 대한 파악이 어느 정도 된 상태라 다행이야.'
강현은 베일과 안유성의 싸움을 지켜보며 쉼 없이 머리를 굴렸다.
'검으로는 안 돼.'
그 결과는 절망적.
자신은 검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놈을 이길 수 없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강현은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편, 빠르게 베일에게 달려갔다.
-챙!
강현의 검은 푸른 마력이 뒤덮여 있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예상 밖의 묵직함에 베일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입만 산 놈은 아니었군.
"전부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해! 머리를 노려!"
언데드 몬스터는 신체가 조금 부서진다고 해서 타격을 받지 않는다.
오직 중요 마력이 저장된 부위를 공략해야 했기에 강현은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두개골만을 노렸다.
"얼른! 얼마나 붙잡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콰앙, 쾅!
검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푸른 빛과 검붉은 빛.
두 개의 빛이 부딪칠 때마다 폭음이 울리며 빛이 폭사됐다.
-무식한 힘에 비해 검술 실력은 허접하군.
"닥쳐!"
베일은 분명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버프를 사용한 강현에게 미치지는 못했다.
"크윽!"
그러나 근본적인 검술 실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검붉은 마력에 베인 강현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수초 내에 회복됐어야 하는 상처지만, 놈의 마력이 회복을 저지하는 듯했다.
-시시하군.
"커헉!
순간 내질러진 발차기.
빈틈을 노린 날아온 공격에 직격 당한 강현이 뒤로 날아갔다.
"지금!"
그때, 베일과 강현의 접전에 다가오지 못하고 기회를 엿보던 길드원들이 한 번에 움직였다.
-너희들도 이만 끝내주지.
세 명의 합공에도 베일은 여유로웠다.
그의 검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잘려 나갔기에 셋은 쉽사리 덤비지 못하고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하나.
윤나래에게 달려간 베일이 검을 휘둘렀다.
"마력 방패!"
윤나래가 재빨리 마법으로 대응했지만 소용없었다.
-스걱!
베일의 검이 손쉽게 마력 방패와 함께 윤나래를 갈랐다.
"끄아아아!"
피를 뿜어내며 날아간 윤나래.
그 모습에 안유성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젠장!"
그러나 기교, 스피드, 힘, 마력까지 모든 것이 우위에 있는 베일에게 안유성의 공격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둘.
"크헉!
금세 공격을 허용한 안유성이 저 멀리 날아가 기둥에 부딪혔다.
신성아는 고민에 빠졌다.
'너무 경솔했어.'
무려 B등급의 던전이다.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하다못해 한시환이나 조동원, 조성찬 형제 같은 핵심 인력을 더 데려왔어야 했다.
'강현 님이라도 살아야 한다.'
아직 보스룸의 문은 열려 있다.
만약 보스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설정이라면 충분히 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젠장...'
저 멀리 금수 길드원들이 도망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시간을 벌 수 있는 이는 자신과 안유성 뿐이다.
"강현 님! 도망치십시오. 시간을 벌겠습니다!"
88화 미친개(4)
88. 미친개(4)
"커헉!
갑작스러운 발길질에 날아간 강현은 한쪽 벽면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더럽게 아프네."
놈의 완력은 보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력했다. 도대체 뼈밖에 없는 몸에서 어떻게 이렇게 강한 힘을 내는지 의문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어떡하지?"
도저히 놈을 쓰러뜨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빌게인의 장검이 있었다면 지체 없이 광전사를 사용했겠지만, 지금은 얌전히 연구소에서 수리를 기다리는 상태.
"그래도 순수한 완력은 비슷해."
자신의 버프와 윤나래의 버프까지 더하면 완력 자체는 약간이지만 우위인 듯했다.
"강현 님! 도망치십시오. 시간을 벌겠습니다!"
신성아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고민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시벌! 나도 모르겠다!"
몸의 회복을 끝낸 강현이 다시 베일에게 달려갔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X까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 얌전히 죽을까?"
-굳이 발악하며 죽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다시 두 개의 빛이 얽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강현의 푸른 마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마력도 떨어지면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군.
강현은 어쩐지 놈의 목소리가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못해?"
그때였다.
강현이 베일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집어던졌다.
-드디어 미친건가.
그리고는 무작정 베일에게 달려들었다.
"큭..!"
베일이 휘두른 검에 옆구리를 크게 베었으나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못한다고?"
마침내 놈의 코앞까지 온 강현이 놈의 양손을 붙잡았다.
-뭐하는 짓이냐?!
"보면 알 거 아냐?"
순간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근력에 베일이 당황했다.
"네 잘난 면상 좀 보자."
강현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있는 힘껏 놈의 투구를 들이받았다.
-까아앙!
단번에 놈의 투구가 찌그러지며 떨어져 나가고, 새하얀 뼈만 남은 두개골이 드러났다.
-네놈...
텅 빈 놈의 눈두덩이에서 붉은빛이 폭사됐다.
-이게 신성한 전투에서! 명예로운 기사가 할 짓인가?!
"뭔 개소리야! 그딴 거 줘도 안 해!"
-콰직!
강현의 이마와 놈의 두개골이 다시 한번 부딪혔다.
-크아아! 떨어져라!
"내가 이 구역 미친개야! 새꺄!"
강현이 카미엘의 반지에 내장된 스킬, 미친개를 발동했다.
*미친개 – 미친개는 한번 물면 죽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동시에 거칠게 발버둥 치는 베일의 경추(목뼈)를 깨물었다.
"은디드는 므리가 뜨르즈도 사냐?"
(언데드는 머리가 떨어져도 사냐?)
그리고는 있는 힘껏 목을 당겼다. 성인 남성이 양손으로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강현의 목에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올라왔다.
"끄으으으!"
-뭐하는 거냐! 이런 미친놈이!
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박.
순간 위기감을 느낀 베일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강현은 베일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게 껴안고 있었고, 입으로 목을 물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이런 짓이 통할 거라 생각하나?! 그만둬!
"왜이르케 따따케?!"
그러나 베일의 경추는 강현의 생각처럼 쉽게 뽑혀 나오지 않았다.
'그거다!'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강현이 마력운용을 시작했다.
강현의 몸에 내재된 마력이 점차 입가로 모이고, 이빨에서 푸른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카드드득
베일의 목뼈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베일이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 이거 놔라!
베일이 유일하게 자유로운 두 다리를 놀려서 벽으로 돌진했다.
-퍼억! 퍼억!
-떨어져라, 떨어지란 말이다!
벽으로 돌진해 강현의 몸을 벽에 처박았지만 소용없었다.
-퍼억, 퍽!
-떨어져!
강현은 여전히 핏대를 세우며 베일의 목을 뽑아내고 있었다.
-뚜둑, 뚜두둑...
점차 목뼈에서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안돼에에에에!
-파가각!
마침내 베일의 경추가 몸에서 뽑혀 나왔다.
"으아아!"
자신의 입에 매달린 채로 덜렁거리는 베일의 두개골. 그것을 집어던진 강현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포효했다.
**
-이런 비겁한...
베일은 몸과 머리가 분리된 상태에서도 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멈춘 채였고, 음성 또한 힘에 부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데 무슨 비겁 타령이야."
-이놈...
"그러니까 네가 이런 곳에서 해골바가지, 망령 신세인 거야."
-끄아아아아!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잘 가라."
그리고 베일의 두개골을 향해 전력으로 내려쳤다.
-퍼걱!
베일의 머리가 단숨에 쪼개지며 수십 조각으로 나눠졌다.
"아으... 이빨이야. 이 나이에 임플란트 알아볼 뻔했네. 시벌."
"강현 님. 마정석..."
"응? 아! 마정석!"
강현이 다급히 두개골 잔해를 뒤졌다.
"하아, 다행이다."
다행히 영롱한 빛을 내는 구슬 크기의 마정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마터면 던전 다시 돌 뻔했네."
무기 수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B등급의 마정석이 필요하다.
느껴지는 마력이 충만한 것이 무기 수리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레벨업!]
[능력 강현식 싸움박질(F)이 생성됩니다]
[능력 강현식 싸움박질(F)이 능력 중급 체술(D)과 합쳐집니다]
[능력 강현식 싸움박질(F)이 강현식 사투(C)로 변화합니다]
갑자기 시야를 메우는 메시지.
"이게 뭔 소리야...?"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던 강현이 상세 설명을 확인했다.
강현식 사투(C)
능력 : 목숨을 건 전투에서 적을 해치우고,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설명 : B등급 언데드 보스를 이빨로 물어뜯어버린 강현에게 건네는 누군가의 선물. 강현의 개싸움은 이제 하나의 경지가 된 듯하다.
"..."
한동안 강현은 멍하니 설명을 들여다봤다.
"사람을 잔인한 가정 파괴범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뭐? 개싸움? 장난하냐!?"
"왜 저래..."
한심하게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강현은 한동안 발광을 이어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기다려라. 내가 언젠가 한방 먹이고 만다."
강현은 죽기 전에 반드시 관리자의 얼굴에 주먹을 꼽아 주리라 다짐했다.
"후우... 일단 드랍템이나 확인하자."
겨우 진정한 강현이 베일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확인했다.
이름 : 베일의 장검
등급 : C+
내구도 : 328/350
설명 : 엘린 공주의 호위기사 베일이 사용하던 장검. 평생 공주를 지키기 위해 검을 수련한 베일과 함께한 장검에는 그의 신념이 담겼다.
능력 : 차분함, 수호자
*차분함 – 사용자의 정신이 안정된다.
*수호자 –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사용자의 능력이 상승한다.
설명을 본 강현의 표정이 구겨졌다.
"쓰레기네."
얼핏 보기에 능력이 두 개나 달려 있으니 좋은 것 같았지만, 전부 애매한 능력뿐이었다.
"빌게인의 장검이 수리될 때 까지는 지난번에 받은 장인의 장검을 계속 써야겠어."
강현은 베일의 장검을 안유성에게 넘겼다.
"이거 너 써라."
"쓰레기라면서요."
"없는 것보단 나을 거 아냐."
"쳇."
안유성이 마지못해 검을 받았다.
"다음은 갑옷인가?"
강현이 칠흑같이 어두운 갑옷을 들어 올렸다.
이름 : 베일의 갑옷
등급 : B
내구도 : 2389 / 2500
설명 : 엘린 공주의 호위기사 베일이 사용하던 갑옷. 항상 뒤에서 공주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그에게 맞춰 겉치장보다 실용성이 강조된 갑옷이다.
능력 : 내구도 강화, 경량화
*내구도 강화 – 갑옷의 강도를 올려주며 쉽게 내구도가 닳지 않는다.
*경량화 – 갑옷의 무게를 낮춰준다.
"이건 제법 쓸 만한데?"
누구에게나 적용이 가능하고, 갑옷에 꼭 필요한 능력들만 달려 있었다.
게다가 높은 등급의 경량화가 걸린 것인지, 지금껏 강현이 들어 본 풀 플레이트 갑옷 중 가장 가벼웠다.
"그래도 로날드의 갑옷보다는 별로니... 아무나 필요한 사람한테 줘야겠네."
강현은 이미 튜토리얼에서 받은 B등급의 로날드의 갑옷이 있었다.
그리고 로날드의 갑옷에는 자가 수복이 갖춰져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갑옷을 부숴먹는 강현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다른 건 뭐 없나?"
"여기 책과 반지도 있습니다."
"오, 뭐야?"
보상이 아쉬워지려는 찰나, 신성아가 책을 건네 왔다.
"능력이면 좋겠는데..."
스킬은 이미 현재 운용 중인 것들을 유지하기에도 마력이 간당간당했다.
때문에 강현은 마력이 들지 않는 능력과 관련된 것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일의 검술]
"대박이다!"
이름부터 이미 대박의 느낌이 왔다.
베일의 검술(F)
능력 : 베일이 사용하던 검술을 익힌다.
설명 : 기사로써 이름을 떨친 베일. 그는 비록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지망생들의 선망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좋은 거 맞지 이거?"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베일의 검술 실력은 안유성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아마 기본 검술보다는 좋을 것이다.
"모르겠다! 뭐 배우는 건데 지금보다 안 좋아지기야 하겠냐."
강현이 곧장 능력을 습득했다.
[능력 베일의 검술이 생성됩니다]
[상급 검술(C)이 베일의 검술(F)과 합쳐집니다]
[베일의 검술이 D등급으로 상승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상급 검술(C)'이 사라지고 대신 '베일의 검술(D)'가 생성되어 있었다.
"C등급에서 D등급으로 떨어지긴 했는데... 좋은 거겠지?"
베일의 검술이 더 상위의 능력이니 그에 맞춰 등급이 낮아진 것이 분명했다.
"그래. 분명 그럴 거야..."
강현은 찝찝함이 남아 있었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반지는 뭐야?"
"엘린의 반지라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엘린? 그 베일이 지켰다는?"
"예."
엘린이라면 베일이 지니고 있었던 아이템 설명에 나온 공주의 이름이다.
이름 : 엘린의 반지
등급 : C+
내구도 : 79/80
설명 : 왕국의 셋째 공주 엘린이 착용하던 반지다. 평소 병약했던 엘린을 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능력 : 체력 6 스텟 증가, 마력 방패
*마력 방패(C) – 하루에 한 번 스킬 마력 방패(C)를 사용한다.
"옵션이 괜찮네."
강현 자신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었지만, 반지만 놓고 봤을 때는 아주 준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이건 누구한테 맞지?"
"저한테 좋을 것 같은데요..."
아이템을 확인한 윤나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렇네."
"네..."
"그래."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반지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
"왜 그렇게 쳐다봐?"
"그러니까 나한테 맞는 것 같다고요."
"어쩌라고."
"이런 개…!"
"이번 던전에서 네가 뭘 했는데?"
강현의 말에 윤나래가 꿀을 먹은 것 마냥 입을 닫았다.
확실히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 공략에 한 일이 딱히 없었다.
"..."
"푸후흡. 농담이야. 농담."
다시 반지를 꺼낸 강현이 윤나래에게 넘겼다.
"주려면 그냥 줄 것이지. 왜 놀려요?!"
"내 마음인데? 크큭."
"으으...!"
"꼬우면 덤비던가. 이기면 너 길드장 시켜 준다니까?"
"됐어요!"
그렇게 정도 정리가 끝나고 강현이 메인 코어를 제거하려는 찰나였다.
조금 전 도망쳤던 금수 길드가 돌아오고 있었다.
"뭐야? 도망쳤으면 끝까지 갈 것이지 왜 다시 왔어?"
어차피 메인 코어를 제거하는 순간 모두에게 포탈이 생성된다.
굳이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던전을 탈출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것들이 미쳐가지고 보상을 나눠 달라는 건 아니겠지?'
강현은 정말로 그런 거라면 따귀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리라 다짐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다행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다가온 금수 길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이마가 땅에 닿도록 숙였다.
"에휴, 됐으니까 일어나요."
금수 길드가 돌아온 이유는 별거 없었다.
'강현에게 밉보이면 안 돼!'
처음에는 그대로 던전 입구까지 도망칠 생각이었지만, 예상외로 강현이 선전하자 그들은 다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강현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잘못하면 전부 죽는다...'
소문으로는 강현이 피도 눈물도 없으며, 이미 몇 개의 길드를 던전 안에서 조용히 처리했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그들은 혹시 모를 후폭풍이 두려워 도저히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살려만 주십시오!"
금수의 길드장 조운성은 정말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죄했다.
"됐어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감사합…"
"대신!"
강현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짓던 조운성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대신..?"
"인터뷰 몇 개 좀 더 땁시다."
강현은 자신의 화려한 B등급 공략을 널리널리 알려줄 조연들이 필요했다.
**
소란스러웠던 당일치기 던전 공략이 끝나고, 강현은 던전 포상금을 지급받기 위해 교환소를 찾았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던전 포상금 받으려고요."
"획득하신 코어를 보여주시겠어요?"
직원의 말에 강현이 코어를 꺼냈다.
"이건...?"
"B등급 던전 베일의 미로. 메인 코어요."
"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어디론가 전화를 건 직원이 열심히 설명을 했다.
"네, 네! 배데스 길드의 강현 님이십니다."
계속해서 '네'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직원이 마침내 통화를 종료했다.
"휴우..."
"뭐가 잘 안 풀렸어요?"
"아니요. 던전 포상금으로는 이례적인 금액이라서요... 윗선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한건 하긴 했죠. 하하!"
"..."
"크흠, 그래서 얼마입니까?"
"예. 포상금은 40억입니다."
"좋았어!"
이번 공략 한 번으로 지금까지 모은 모든 돈을 합친 것만큼 벌어들였다.
"이거 잘못하다간 재벌이 되겠어! 크하하하!"
잠시 뒤. 통장에 새로 불어난 40억을 보며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던전은 세금을 안 떼는 게 참 다행이야."
자칫하면 10억 달하는 세금 폭탄을 맞을 뻔한 강현이었다.
-우우웅
"응? 전화인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강현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신태길 팀장이었다.
"어쩐 일이에요?"
-벌써 던전을 클리어하신 겁니까?
"벌써 소식이 들어갔어요?"
-예. 강현 씨가 클리어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악명 높은 던전을 이렇게 빨리 클리어할 줄은 몰랐습니다.
"웬일이에요? 비행기를 다 태워주고. 혹시 뭐 부탁할 거 있어요?"
-하아, 그런 거 아닙니다. 보스의 마정석은 바로 연구소로 보내 주시죠. 정서빈 소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예. 그럼 이만.
신태길이 통화를 종료하려는 순간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지난번에 이야기한 거 있잖아요. 위튜브."
-예.
"이번에 시험 삼아 영상 찍었거든요? 내일 안으로 올라갈 테니 확인해 봐요."
-알겠습니다. 굳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는 걸 보면 상당히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올라오면 보기나 해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통화를 종료한 강현은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며 실실 웃었다.
"이건 무조건 뜬다."
**
대박. 말 그대로 초대박이었다.
"야. 너 이번에 강현이 올린 영상 봤냐?"
"강현? 무슨 강현?"
"배데스 강현 인마!"
"그게 뭔데?"
"미친놈이. 아직도 안 봤어? 빨리 봐라. 클라스가 다르다. 완전 미쳤어!"
거리 어디를 가든 배데스 길드, 강현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났다.
-베일의 미로를 이틀 만에 올클리어 해버리네. ㅋㅋㅋㅋ
-저거 벽이 원래 저렇게 막 부숴지는 거냐?
-미로를 뚫고 그냥 들어간다. 엌ㅋㅋ 그런데 보스 잡는건 더 충격임 ㅋㅋㅋ
-내가 미친개 강현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개 ㅋㅋㅋ
어딜 가나 미친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바로 햄버거였다.
-던전 안에서 햄버거라니 뭐지?
-들리는 말로는 저거 인벤토리에 넣으면 반영구 보존이라 합니다.
-마력 회복도 조금 된다는 것 같음
-와 마력 회복에 반영구 보존에 미쳤는데?
-심지어 맛도 으마으마하다함.
-응. 개당 200만원
-미친 200만원 실화? ㅋㅋㅋㅋㅋㅋㅋ
-양산 시작하면 가격은 많이 떨어지겠지...
-그래도 200은 좀 심한데.
사람들 사이에 햄버거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대다수였다.
"어때요?"
정서빈 소장을 만난 강현이 한껏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홍보 하나는 제대로 하셨네요."
"제가 원래 한다면 합니다."
"전국에서 납품 의뢰가 엄청나게 들어오고 있어요. 심지어 해외에서도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홍보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 마정석을 볼까요?"
"아, 그랬지."
강현은 오늘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인벤토리에서 마정석을 꺼냈다.
"색이 좋네요. 우선 마력 측정부터 해볼까요."
"그런 것도 가능하나 보네요."
마력 농도 측정. 처음 듣는 단어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 세계가 달려들어서 연구하고 있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죠."
"오호..."
"아직 민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진행된 상태예요."
말을 하며 정서빈이 거대한 기계에 마정석을 올려놨다.
-위이이이잉
기계에서 소음이 나며 스크린에 적힌 숫자가 계속해서 올라갔다.
"이건... 올라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네요."
"이거 구하는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요. 아마 꽤 높게 나올 거예요."
스크린의 숫자는 계속 올라가 어느새 25000을 돌파하고 있었다.
"와."
"왜요?"
"방금 한국 최고 기록치를 넘어섰어요."
정서빈의 말에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33700
"끝났나요?"
"네. 33700이라니. 터무니없는 수치네요."
"그 정도예요?"
"네. 현재까지 알려진 공식 최고 기록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에요."
"그러면 수리 걱정은 없겠네요."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분명 마음에 들 만한 결과물이 나올 거예요."
89화 아버지와 아들(1)
89. 아버지와 아들(1)
"소식은 들었나?"
싸늘함이 감도는 공간.
안무석 회장의 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소식이라 하시면?"
"배데스가 B등급 던전을 클리어 했다는군. 그것도 이틀 만에 말이야."
안무석의 말에 강신 길드의 길드장, 김준용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온 나라가 그 일로 떠들썩하니 모를 리가 없지요."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안회장님께 장난을 치겠습니까. 하하."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김준용은 여전히 웃음을 띤 채였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모습.
마치 약에 취하기라고 한 것 같은 모습에 안무석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콰앙
흥분한 안무석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B등급 공략을 지시한 게 언제인데, 왜 시작도 하지 않은 거지? 내가 이러려고 너희에게 투자하는 줄 알아?! 이러다가 내기에서 지기라도 하면, 자네는 각오해야 될 거야!"
자존심의 문제였다.
안무석은 사업을 시작한 이례로 단 한 번도 져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에 처음으로 패배할 위기에 놓였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리고 건방지기까지 한 놈이 수장으로 있고, 자신의 모지란 아들놈이 속해있는 단체에 말이다.
"안회장님. 고정하시지요. 그러다가 쓰러지시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김준용은 여전히 웃음을 유지한 채였다. 그것도 평소에는 듣지도 못한 느글느글한 말투로.
보통 때였으면, 잔뜩 경직된 얼굴에 연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네놈... 무슨 생각이냐?"
그제야 안무석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말을 하며 안무석은 조용히 비상호출기를 눌렀다.
"안회장님. 저희랑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뭐...?"
순간 김준용의 뒤에 서있던 능력자들이 안무석을 붙잡았다.
"네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경호! 경호원들은 어디 있나!?"
"그 불량한 친구들이라면 이미 편히 쉬도록 해줬습니다. 한국에서 총을 가지고 있다니 불법 아닙니까? 뭐, 앞으로 영원히 그런 짓은 못하도록 했으니 찾지 마시죠."
"김준용. 네노옴!"
안무석의 노성을 무시하고 김준용이 손을 흔들었다.
"편히 모셔라. 귀한 분이시니."
**
정서빈과의 대화가 끝나고, 길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오늘도 신태길은 묵묵히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
"신태길 씨."
"예."
"이런 일에는 말단 쓰면 안 돼요?"
"말단한테 어떻게 강현 씨를 맡깁니까?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참나. 내가 언제 무슨 사고라도 쳤... 아니.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신태길이 대답하지 않자 머쓱해진 강현이 창밖을 바라봤다.
"신태길 씨."
"예."
"내일부터 위튜브 본격적으로 할 계획이에요. 저번에 말한 것들."
"으음..."
"이번 결과로 알겠지만, 화제성은 단연 최고일 거예요."
"확실히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여기로 돌리는 동시에, 유익한 교육도 하고.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대단하지 않아요?"
"..."
"그렇죠?"
"강현 씨."
"예."
"요즘 들어 상당히 재수가 없어지신 것 아십니까?"
"하여간 이 양반은 농담도 못해."
혀를 찬 강현이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강현 씨.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영상의 시작은 뭐로 하실 생각입니까?"
신태길의 물음에 강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에요?"
"...?"
"고블린부터 조져야죠."
고블린을 혼내줄 생각에 강현은 벌써부터 흥이 돋았다.
"응? 누구야?"
그때 강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꺼내자 액정에 신성아의 이름이 떠있었다.
"웬일이지?"
항상 길드 사무실에서 모이기에, 따로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거의 없는 둘이었다.
강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 무슨 일이야?"
-강현 님. 큰일입니다.
"왜?"
-안무석 회장이 납치됐습니다.
**
배데스 길드의 전투훈련장.
며칠 전에 완공된 이 시설의 중앙에서 안유성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압!"
안유성의 주위에는 메이스, 장검, 방패, 투척무기 등 온갖 아이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안유성은 미친 듯이 훈련장을 뛰어다니며 모든 무기를 활용해 연습용 장비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
같이 훈련하던 던전 공략 2팀의 길드원들이 그 모습을 멍하나 바라봤다.
"사람이 아니야..."
대부분의 배데스 길드원들은 강현 외에 다른 인물들이 전투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입단 시험은 강현 혼자서 진행했고, 그 후 던전 공략은 팀별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각 팀의 팀장급들만 해도 엄청난 실력자였는데, 안유성의 움직임은 그런 팀장급과도 차원이 달랐다.
사실 몸놀림만 놓고 보면 강현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안유성이었기에, 그 놀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아..."
대략 한 시간 동안 날뛰던 안유성이 마침내 멈춰 섰다.
"아직 부족해..."
지난번에 치러진 베일과의 전투.
그때 안유성은 처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체감했다.
자신보다 힘과 기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상대를 만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가자."
잠깐 숨을 고른 안유성이 다시 훈련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부길드장님."
한 길드원이 안유성에게 다가왔다.
"예?"
"전화가 와서..."
"아, 고마워요."
스마트폰을 건네받은 안유성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박 비서님?"
항상 안무석 회장의 바로 옆에 그를 보좌하는 박용진 비서. 그에게서 온 전화였다.
평소에 그에게 연락을 올 일은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안유성이 전화를 걸었다.
"예. 박 비서님."
"작은 도련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회장님께서 납치되셨습니다..."
안유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무석 회장의 경호는 국내 최고로 이뤄져 있으며, 그의 곁에는 강신 길드까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즉, 납치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잠깐만 혹시..."
순간 안유성의 육감이 움직였다.
"강신 길드예요?"
"예."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안유성이 이마를 짚었다.
"하아..."
"다행히 회장님이 가지고 계신 위치 추적기가 아직 작동 중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언제 무용지물이 될지 모릅니다."
"바이탈 사인(vital sign)은 어때요?"
안무석 회장이 지니고 있는 초소형 기계장치는 위치뿐만 아니라, 그의 활력 징후까지 실시간으로 보내준다.
"다행히 아직까지 큰 이상은 없습니다만, 언제 놈들이 회장님께 해를 가할지 모릅니다. 도련님. 도와주십시오."
"..."
"현재 경호원들이 총출동해서 쫓고는 있지만, 그들 또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신 길드는 국내 6위에 랭크돼 있는 최상위의 길드였다.
당연히 경호원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능력자들로 이뤄져 있든, 강신에게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박 비서님. 아버지 위치 제 스마트 폰으로 보내줄 수 있죠?"
"예. 이미 조치해 놨습니다."
"알겠어요."
안유성이 곧장 자신의 옷을 챙겨 입고는 훈련장을 떠났다.
"어디 가십니까?"
"누나. 지금 급하니까 당장 강현 형한테 말 좀 전해줘요."
안유성은 도중 마주친 신성아에게 간단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박 비서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뇨. 누나는 얼른 형을 데리고 와줘요."
"하지만…."
"지금 말다툼할 시간 없어요."
순간 안유성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처음 보는 안유성의 모습에 신성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어디로 가는 거냐...'
스마트폰으로 확인된 위치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만간 서울을 벗어날 것 같았다.
"젠장!"
위치추적기가 언제 들통날지 몰랐다. 들통나지 않더라도 놈들이 던전에 숨어들기만 하면, 신호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붉은 색 스포츠카에 올라탄 안유성이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끼이이이익!
강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 쏘아지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빠아아앙!
"이런 미친 새끼야!"
스포츠카가 도로 위를 내달리며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끝없이 연출됐다.
차량의 속도는 이미 100km를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기만 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
복잡한 시가지를 벗어난다면, 속력이 빠른 자신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 올 것이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순간 상념이 들이닥쳤다.
'아버지... 그 남자를 구하는데 내가 이렇게 나서야 하는 건가?'
떠올려 보면 행복한 추억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안유성이 어릴 때부터 안무석은 사업을 벌이느라 바빴고, 안유성이 자랐을 때는 오직 무시와 폭언, 구타뿐이었다.
'아버지. 그 남자가 없다면 내 인생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오직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자신이 굳이 그를 구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의문들이 끊임없이 몰아쳤다.
"씨발!"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소리를 지른 안유성이 더욱 세게 액셀을 틀어 밟았다.
스포츠카가 붉은 꼬리를 남기며 도로 위를 질주했다.
**
"어디로 가는 거냐."
안무석의 전용 세단.
외부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그 차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외부의 도움으로부터 안무석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 회장님."
안무석의 물음에 강신의 길드장, 김준용이 눈을 떴다.
"닥치세요. 나도 귀찮게 당신 몸에 손대고 싶지 않으니까."
"너희들...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했나? 으윽!"
순간 김준용이 손을 뻗어 안무석의 얼굴을 틀어쥐었다.
"닥치라고 했을 텐데.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게 괴롭힐 수 없다는 말은 아니야."
"으으윽!"
볼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력에 뼈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똑똑한 양반이니 이해했을 거라 생각하겠어."
"하악, 하아..."
고통에 허덕이던 안무석은 김준용이 손을 놓자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거냐?"
고통스러웠으나 안무석은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곳의 대화는 실시간으로 박용진 비서에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놈들의 목적이 내 목숨이었다면, 그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놈들은 나를 죽이지 않았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겠지.'
놈들의 의도와 목적, 정체를 밝히려면 끝없이 말을 걸어야 했다.
"하아, 이 노인네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김준용이 피곤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기절시키고 가는 게 편할까? 응?"
"크큭. 해볼 테면 해 봐라. 이미 살만큼 산 인생이다. 너희들이 무슨 위협을 하던 통할 거라 생각하느냐? 하하!"
안무석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김준용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게 노망이 났나. 왜 이렇게 지랄이야!? 응!? 진짜 그냥 죽여줄까?"
"죽여라. 할 수 있다면."
"끄아아아아!"
화를 참지 못해 자동차 시트에 대가리를 박던 김준용이 돌연 행동을 멈추었다.
"이봐요. 안 회장님. 설마 그거 믿고 그렇게 설치는 거야?"
"자, 잠깐!"
순간 안무석에게 달려든 김준용이 그의 피부를 뜯어냈다.
그 안에는 안무석이 숨겨왔던 초소형 기계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크아악!"
"이깟 기계장치.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네놈..."
"하하! 드디어 평소대로 돌아왔네. 당신 같은 사람이 고작 이것만 믿고 설쳐댔다니, 정말 재미있어?"
-파지직
김준용의 손 안에서 정밀 기계장치가 허무하게 부서졌다.
그 모습을 본 안무석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이 꼴을 보고 싶어서 내가 모른 척을 했다니까! 크하하하! 아주 재미있어. 이봐요. 안 회장님. 이제 할 말 없지? 응? 그러니까 얌전히 닥치고 가자고."
신이 난 김준용이 열심히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길드장님!"
"왜?"
"누가 따라붙었습니다."
"그딴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알아서 쳐내."
이미 자신들을 쫓아온 안무석의 경호 차량을 다섯 대나 날려버린 상황이다.
그 이후로는 잠잠해져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그새 또 새로운 차량이 붙은 것 같았다.
"그게... 경호 차량이 아닙니다."
"뭐?"
"붉은색 람보기니 아벤도르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안무석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붉은색 람보기니 아벤도르.
바로 자신의 아들. 안유성이 몰고 다니는 차량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90화 아버지와 아들(2)
90. 아버지와 아들(2)
"찾았다."
마침내 안무석 회장의 차량을 발견한 안유성이 속도를 올렸다.
-부아아앙!
우렁찬 배기음이 도로를 진동했다. 동시에 안무석 회장에게서 오던 신호가 끊어졌다.
"결국 들켰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신호가 끊어졌다면 찾는데 애를 먹을 뻔했다.
"응?"
순간 앞쪽에서 마력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크큭.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거야?"
전투가 시작되자 안유성은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전투에는 복잡한 고민 따위는 필요 없다. 오직 살아남고, 적을 죽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다.
-끼이이익!
불구덩이가 생성됨과 동시에 안유성이 핸들을 급격하게 틀었다.
-콰앙!
차량의 옆에서 폭발한 마법에 굉음이 울렸다.
언뜻 '이걸 피했어!?' 라는 소리가 스쳐갔다.
놈들의 놀람은 당연한 것이다.
시속 200km에 가깝게 달리는 차량에서 마주 날아오는 화염을 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안유성처럼 미리 모든 것을 예상하고 계산할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가능한 묘기였다.
"재미있잖아!"
미소를 지은 안유성이 재차 속력을 올렸다.
두 차량은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붙었다.
창문 너머로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응?"
순간 뒷좌석에 탑승한 놈들이 무언가를 꺼내 든 것이 보였다.
총이었다.
-끼이이익, 콰앙!
놈들이 총을 조준하기 전에 안유성이 핸들을 꺾어 차량을 들이박았다.
"이런 미친놈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경악한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당!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려온 총성과 함께 유리창이 박살 났다.
놈들은 적어도 다섯 대의 차량에 나눠서 탑승한 것 같았다.
"저것들부터 처리해야겠네."
사악한 미소를 지은 안유성이 마력 방패를 시전했다.
"마력 방패."
기초적이면서 대중적인 스킬.
원래라면 단순히 적의 공격을 막는 것이 용도로 끝이다.
그마저도 조금만 강한 충격을 받으면 속절없이 깨어지고 만다.
하지만 안유성의 활용은 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부아앙!
차량 점프대.
안유성은 자신이 지나친 아스팔트 바닥 위에 비스듬히 마력 방패를 시전 했다.
원래라면 차량과 충돌하자마자 박살 났어야 할 마력 방패이지만, 바닥에 낮게 깐 상태에서 약간의 경사를 주자 기적이 일어났다.
"으아아!"
"날아간다!"
마력 방패를 지나친 놈들의 차량이 마치 차량 점프대를 지난 것처럼 허공을 날았다.
-콰과과광!
당연히 마력 방패의 경사도에도 변칙을 주었기에, 차량은 회전이 들어간 공처럼 미친 듯이 돌아가며 도로 밖에 처박혔다.
"저게 뭐야? 도대체 무슨 스킬이냐고?!"
-콰앙, 쾅!
흔하디 흔한 마력 방패다.
애초에 처음부터 마력 방패를 이용해 허공을 날아다니던 안유성이었기에 보일 수 있는 묘기였다.
평범한 이들은 방법을 듣더라도 절대 활용할 수 없는 기행이다.
놈들은 무엇에 당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로 하나하나 사라져 갔다.
"능력자 주제에 총질이라니,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말이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무법자들을 처리한 안유성이 싱긋 웃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달릴 생각이야?! 슬슬 내려서 결판을 보는 게 어때?"
"으아아아! 저딴 핏덩이 새끼한테 전부 뭣들 하는 거야!?"
분노를 참지 못하고 김준용이 괴성을 내질렀다.
"길드장님.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대기하는 길드원들이 있으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후우..."
길드원의 말에 김준용이 숨을 골랐다.
"시간이 촉박하게 생겼어. 저놈 덕에 시선을 제대로 끌어버렸다고. 알겠어?!"
"예...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강원도 홍청군의 소리산.
안유성이 있던 강남에서 8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원래라면 한 시간 반은 걸렸을 거리다.
하지만 안유성은 불과 오십 분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면허 정지는 거의 확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던전인가?"
거대한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
그곳에는 십수 명의 능력자들이 무기를 든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무석 회장과 함께 있던 놈들은 이미 던전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바빠서 그런데 비켜줄래?"
"농담이 지나친 놈이군. 살아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
안유성의 말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뭐, 나도 딱히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어."
안유성이 말을 함과 동시에 단검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곧장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내 다시 던지기를 반복했다.
하나의 단검이 손을 떠나감과 동시에 새로운 단검을 꺼내 손에 쥐는 방식. 눈 깜짝할 새에 수십 개의 단검이 놈들을 향해 날아갔다.
-슈슈슈슉!
무려 B등급의 무기술로, 단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놈들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이깟 잔재주를!"
놈들이 단검을 막고 피하던 그 순간. 신체를 가속시킨 안유성은 이미 놈의 코앞에 와있었다.
"으, 으어…!"
-콰직!
당황한 놈의 얼굴에 메이스를 꽂아준 안유성이 방패를 꺼내 들었다.
-콰아앙!
"어떤 미친놈이야! 범위 마법 쓰지 말란 말이야!"
놈들은 동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범위 마법을 안유성에게 날렸다.
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던 안유성은 차분하게 공격을 막고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 방패.'
순간 안유성에게 다가오던 놈의 발아래에 비스듬한 마력 방패가 생성됐다.
"어억?!"
경사지게 만들어진 마력 방패를 디딘 놈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덕분에 놈이 휘두르던 창이 옆에 있던 놈의 동료를 향했다.
"크아악! 뭐하는 거야!?"
놈들이 당황한 사이 안유성은 재빨리 파고들었다.
그리고 사이좋게 놈들의 턱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끄르룩..."
경악한 놈들의 눈이 치켜떠지고,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안유성은 점차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저 멀리서 마법을 쓰는 놈.
단검이 손을 떠나간다.
결과는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스킬로 놈의 중심을 흩뜨려 놨으니, 놈은 피하지 못한다.
당연하게도 단검은 허우적거리는 놈의 목덜미에 틀어박혔다.
안유성은 그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곧장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방패를 들었다.
마법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방패 위로 몇 개의 무기가 떨어진다.
-카앙!
팔을 짓누르는 묵직한 충격.
그 순간에 안유성은 이미 손도끼를 꺼내 쥔 채였다.
안유성이 낮아진 자세 그대로 손도끼를 휘둘러 한 놈의 갑옷 사이를 찍어버렸다.
"끄아아악!"
-퍽!
그리고 일어나는 힘과 함께 방패를 휘둘러 놈의 얼굴을 후려친다.
놈이 쓰러지는 자리에는 이미 생성해 둔 뾰족한 마력 방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방패라고 부를 수 없는, 날카롭게 벼려진 그것이 쓰러지는 놈의 눈에 틀어박혔다.
-후웅, 후웅!
재차 날아오는 검과, 거대 도끼.
도끼는 느려서 피하기 쉽다.
도끼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아슬하게 피해내고, 도끼를 이용해 검의 동선을 차단한다.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꺼낸 단검을 놈의 팔꿈치 안쪽에 틀어박았다.
다른 급소는 단단한 금속으로 보호돼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제법 터프한 놈이었는지 곧장 다른 무기를 뽑아냈다.
하지만 그 사이 메이스를 빼든 안유성이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콰앙!
투구와 함께 놈의 머리가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그 충격에는 터프한 놈도 별 수 없었는지 그대로 허물어졌다.
안유성은 놈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걷어차 날려버렸다.
검을 휘두르려던 적이 날아온 동료를 받아 드느라 주춤한다.
-쐐애액!
안유성은 곧장 뒤로 돌아 단검을 집어던졌다.
막 화살을 쏘려던 다른 놈이 기겁하며 단검을 피했다.
"휴우..."
아슬아슬하게 단검이 비껴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활쟁이.
그러나 연달아 날아온 단검이 놈의 뺨을 뚫고 들어왔다.
-퍼걱!
"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에 얼굴에 메이스를 박아 넣었다.
"하아..."
안유성이 잠시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15초.
불과 15초 만에 일곱 명의 능력자가 죽었다.
조용한 산자락에 바람이 불어오고, 경악과 침묵이 공기를 얼렸다.
"재미있다."
안유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놈들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괴, 괴물이야..."
공포에 빠진 몇 놈이 뒷걸음질 쳤다.
"젠장, 뭣들 하는 거야! 쫄지 말라고 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강신 길드야!?"
놈들의 대장이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전부 동시에 조져!"
"으아아아!"
강신은 일반적인 길드가 아니다.
간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는다.
도망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확률에 높은 곳에 베팅할 수밖에 없었다.
"죽어!"
놈들이 완전히 이성이 마비된 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멈췄던 광역 마법들도 다시 몰아쳤다.
안유성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동료의 희생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피로 얼룩진 안유성의 메이스가 허공을 가르고,
-콰직!
눌어붙은 핏자국 위에 새로운 피가 더해졌다.
**
"그러니까, 여기 보이는 게 그 안무석 회장 위치라는 거지? 안유성은 이걸 쫒아서 가고 있고."
"예."
신성아의 대답에 강현이 서둘러 차로 달려갔다.
"뭐하고 있어! 당장 쫓아간다!"
신태길이 다시 운전을 맡고 강현과 신성아는 뒷좌석에 탑승했다.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이들이 이동한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 봤을 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마 따라잡는 건 힘들 겁니다."
"씨발! 일단 가봅시다!"
신태길이 강하게 액셀을 밟고 차량이 쏘아지듯 출발했다.
"강현 님. 여기 이거..."
"이게 뭐야?"
갑자기 신성아가 강현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거기에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서울 양양고속도로, 논문 1교 지점입니다.
현재 일단의 무리들이 차량 추격전을 벌이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와 차량 8대가 완파된 모습입니다.
이들의 정체는 국내 유명 능력자 단체, 강신 길드이며 현재 혜성 그룹의 안무석 회장을 납치…
뉴스를 들은 신태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후우, 얼마나 됐다고 또 대형 사건이라니..."
"인상 펴요. 그래서 지금 해결하러 가잖아요."
강현이 피식 웃으며 신태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나저나 강신 길드라... 최근 안무석 회장이 투자하고 있는 곳 아닙니까?"
"맞아요. 저번에 만난 적도 있어요."
"예?"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깜짝 놀랐다.
"강현 씨. 설마 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시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냥 사정이 있어서 만난 거고, 이건 나랑 관계없는 일이라고요!"
그때였다.
신성아가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툭툭 두드리던 그녀가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뭐?"
"더 이상 위치가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아..."
한숨을 내쉰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단 계속 가야지. 아직 뉴스에 나온 지점도 멀었어. 그리고 차 돌려요! 거기 엄청 막힐 것 같으니까."
"그럴 예정이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로, 차량이 질주하는 소음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신호가 끊어진 지점에 도착한다 해도 문제다.'
고속도로로 어디까지 이동했을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정보는 전혀 없었고, 뉴스 속보도 같은 장면만을 반복해서 보여줄 뿐, 새로운 정보는 없는 듯했다.
"강현 님!"
그때 신성아가 갑자기 소리쳤다.
"문자가 왔습니다. 안유성 씨입니다."
"뭐야? 어디래!?"
"소리산이랍니다."
"들었죠? 밟아요!"
남은 거리는 25km. 구불구불한 산길이었지만, 빠르게 움직인다면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꽉 잡으십시오!"
말을 한 신태길이 힘껏 액셀을 밟았다.
차량의 속도계는 이미 시속 180km를 넘기고 있었다.
91화 아버지와 아들(3)
91. 아버지와 아들(3)
알렉세이 카이스.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에서 이번 작전을 위해 특별히 파견한 인재였다.
그는 여러모로 뛰어난 능력자였지만, 특히나 정신과 관련된 마법에 아주 출중했다.
"크으으..."
"이 노인네가 왜 이렇게 끈질긴 거야!?"
알렉세이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평소와 달리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렉세이. 시간이 없다. 이 노인은 고작 레벨 1의 일반인이라고.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닥쳐! 거의 끝나가니까!"
김준용의 말에 알렉세이가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외쳤다.
김준용은 알렉세이의 푸른 눈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멍청한 새끼. 연합장에게 귀여움을 받는다고 아주 살판이 낫군.'
김준용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아마추어처럼 티를 내지는 않았다.
"후우, 거의 다 됐어."
구슬땀을 흘리던 알렉세이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마침내 안무석의 정신을 지배하는 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안무석 회장은 알렉세이의 손아귀에 들어온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혜성 그룹과 함께. 그리고 이것은 알렉세이나 안무석. 둘 중 한명이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로 연합에서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겠군. 연합장의 자리가 내 것이 되는 것도 멀지 않았어.'
알렉세이는 원래 연합의 말단에 불과했으나, 정신 관련 마법에 특출한 능력을 보이면서 초고속으로 간부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오만한 연합장 또한 그의 인형으로 만들어 최고의 위치로 올라설 것이다.
"네, 네놈들... 그냥 죽여라!"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어?"
알렉세이는 무릎을 꿇고 있는 안무석에게 다가갔다.
그가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칼을 넘기며 서늘하게 웃었다.
"동양의 늙은 원숭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 남은 인생은 내 손바닥 위에서 춤추면서 보내게 될 거거든. 뭐, 늙은 원숭이가 가지고 놀기에 귀여운 인형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하하하!"
알렉세이가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어젖혔다.
그 모습을 보던 안무석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퉤!"
"으윽..!"
시원하게 침을 뱉어준 안무석이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쯧, 더럽게. 어쨌든 끝났어. 이제 이 노인은 내 거야."
"수고했다."
"이제 세계 경제를 가지고 놀 일만 남았군. 흐흐."
안무석 외에도 알렉세이가 지배 중인 세계적인 기업가는 두 명이 더 있었다.
이제는 안무석까지 더해져 총 셋이니, 앞으로 연합에 자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크하하!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것이 아랫도리가 불끈해…."
알렉세이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퍼걱!
머리가 터져나갔기 때문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메이스에 맞은 알렉세이의 상반신이 완전히 터져나갔다.
"휴우. 다행히 메이스가 상하지는 않았네."
그리고 하늘에서 태연하게 점프해서 내려온 안유성이 알렉세이의 몸에 박혀 있던 메이스를 집어 들었다.
"..."
불쾌한 침묵 속에서, 믿기 싫은 현실을 부정하듯 경악으로 물든 이들이 안유성을 바라봤다.
"뭘 봐?"
**
안유성은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주변을 확인했다.
"딱히 보이는 건 없네."
숲으로 이뤄진 개방형 던전.
안무석 회장을 데려간 이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을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대충은 알 것 같긴 한데 말이야."
안유성의 육감이 대략적으로 어디인지는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무턱대고 이동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터.
"마력 방패."
안유성이 허공에 마력 방패를 생성해 그것을 딛고 올라섰다.
"읏차, 읏차."
마력 방패는 끊임없이 생성돼 마치 계단처럼 이어졌다.
이는 엄청난 난이도를 요하는 기술이었는데, 안유성은 이것을 튜토리얼을 졸업한 직후부터 연마했던 것이기에 실수는 없었다.
"이제야 좀 보이네."
지상에서 300m 이상 올라온 안유성이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
한번이라도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닥에 추락한다.
그가 강한 능력자이긴 했지만,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무사할지는 미지수.
'강현 형이라면 멀쩡할 것 같기도?'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가며 안유성은 계속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공터에 모여 있는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
외국인 남자가 안무석 회장에게 손을 뻗은 채로 마력을 내보내고 있었다.
"정신을 건드리는 게 목적이었어."
그제야 놈들이 안무석을 죽이지 않고 필사적으로 살리려 한 것이 이해가 되었다.
"저렇게 있으니 아버지. 당신도 결국 사람이네요."
무릎을 꿇은 채로 힘겨워하는 안무석이 보였다. 안유성은 항상 강인했던 아버지의 모습만 봐왔었기에, 이러한 장면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후우, 이제 어떡한다..."
안유성은 정신 마법에 대해 잘 모른다. 시전 중 강제로 끊으면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만약 마법이 성공했을 때 해제하려면 어떡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자칫하면 안무석 회장의 정신이 망가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말 그런가?"
아버지, 안무석 회장은 자신의 인생에서 거대한 벽이었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생각해보면 이건 어릴 적부터 이어온 자신의 트라우마를 제거할 좋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정신 차리자."
지금 그를 넘겨선 안 된다.
그의 육감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던 대로 해야지."
안유성은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런 종류의 고민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우우웅
허공에 몇 가지 장치를 해둔 안유성이 조심스럽게 메이스를 조준했다.
"준비하시고..."
마침내 알렉세이가 멈춘 순간.
"쏘세요!"
안유석이 전력으로 메이스를 집어던졌다.
-쐐애애액!
수백 미터 높이에서 전력으로 던진 메이스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지르며 날아갔다.
-퍼억!
메이스는 정확히 알렉세이의 정수리에 떨어지고, 그의 상반신이 폭탄에 맞은 것처럼 터져나갔다.
"나이스!"
그 모습을 보고 안유성이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휴우. 다행히 메이스가 상하지는 않았네."
다행히 소중한 메이스는 다친 곳이 없는 듯했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안유성이 주위를 둘러봤다.
"뭘 봐?"
"너..."
그런 안유성을 김준용이 죽일 듯이 노려봤다.
"니,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어..?"
분노로 인해 그의 얼굴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면경련이 온 듯한 그 기괴한 얼굴을 보고 안유성이 빙긋 웃었다.
"잠시만! 아직 남은 게 있어."
-딱!
안유성이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일어난다는…."
누군가 입을 연 그 순간.
-쐐애액, 콰가가가가강!
허공에서 수십 개의 병장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메이스를 집어 던지기 전.
안유성은 미리 공중에서 마력을 이용해 무기를 고정해 두었다.
-이건 제법 볼만하겠어. 크큭.
일반적으로 냉병기의 무게는 1kg 이상이다. 경우에 따라 5kg이 훌쩍 넘어가는 것들 또한 존재한다.
즉, 지금의 상황을 쉽게 말하면 63빌딩 꼭대기에서 5kg 아령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 결과. 지옥이 펼쳐졌다.
-퍼걱, 팍! 콰아앙!
"끄아아아!"
"커헉!"
쏟아진 무구들의 위력은 안유성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사방에 강신 길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좋네."
그 비명을 들으며 안유성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겐 지옥과도 같았던 몇 초가 흐르고, 땅 위에 서있는 놈들은 열이 되지 않았다.
"끄으, 이게 무슨…. 커헉!"
안유성은 놈들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 놈의 목에 단검을 집어던짐과 동시에 메이스를 휘둘렀다.
찰나의 순간.
당황으로 물든 상대의 눈동자가 흉포한 메이스를 담았다.
-콰직!
"전부 정신 차려!"
김준용의 외침에 그제야 강신 길드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당했지만, 이들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길드의 정예.
상대가 배데스의 부길드장이라 해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한 명 쯤이야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거다!"
"그래?"
남은 적들이 동시에 안유성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쾅! 채앵!
사방에서 날아드는 병장기.
정신없이 무기들이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그 순간에, 안유성은 웃었다.
'강해졌다.'
한동안 멈춰있던 실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느낌이었다.
싸움을 반복할수록, 힘든 상황에 몰아붙여질수록 감각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날아드는 병기들이 느껴졌다.
단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차단하고, 전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온다.
'이 놈은 괴물인가!?'
강신 길드원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분명 안유성의 속도와 힘은 뛰어났으나, 메우지 못할 격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대의 유효타도 먹일 수가 없었다.
"시시한데?"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기 도 전에 모든 길드원이 쓰러졌다.
"좋아, 아주 좋다고!"
안유성 평소에 게을리하던 훈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감각이 아주 날카로워져 있었다.
거기에 지금은 유례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극한까지 끌어올려진 상태.
지금 다시 베일과 붙는다면 전처럼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뭐해?"
안유성이 미소를 머금은 채 유일하게 서있는 남성. 김준용을 바라봤다.
"구경만 할 거야?"
"너... 너..."
김준용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계속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감히, 내가 일궈온... 연합장한테 뭐라 변명을... 큰일…."
"어디 불편해?"
"너, 너는..."
"나는?"
"반드시 죽인다... 내가 맹세하겠어..."
쉴 새 없이 떨리는 김준용의 몸.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죽여봐."
"주둥이 닥쳐어어!"
순간 김준용에게서 엄청난 마력이 폭사됐다.
여러 색이 섞여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마력. 마치 무지개와도 같은 마력이 사방을 할퀴었다.
-채앵!
동시에 김준용이 검을 뽑아들었다.
두 자루의 쿠크리(kukri).
양손에 쥔 쿠크리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니, 그것들은 정말 살아있었다.
검에서 돋아난 기괴스러운 이빨이 마치 혈육을 탐하는 생명체처럼 게걸스럽게 김준용의 마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무기네."
"죽어."
김준용이 검을 휘두르고, 검이 비명을 토해냈다.
-끼야아아아!
그리고 비명과 함께 날카로운 마력의 칼날이 토해졌다.
칠흑과도 같은 검기.
그 빛깔은 화려한 김준용의 마력을 먹어치운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두웠다.
안유성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깨닫고 몸을 피했다.
-촤좌자작!
검은 마력의 칼날에 닿은 숲의 나무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김준용의 쿠크리는 마치 마력을 뱉어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귀엽다는 말은 취소."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지 보겠어."
김준용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젠장, 나도 마력 기술을 배우던가 해야지!'
이전처럼 마력 방패를 함정처럼 이용한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다.
김준용이 몸에서 마력을 뿜어내 방패들이 닿기도 전에 녹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마력 활용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낭비가 심한 방식이었으나 김준용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끼아아아!
끔찍한 비명과 함께 칠흑 같은 칼날이 안유성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크윽!"
원래 가볍고 활동이 편한 갑옷을 선호하는 안유성이었기에, 저런 강력한 공격은 닿는 순간 치명상이다.
'뭐, 두꺼운 플레이트 갑옷이었다 하더라도 저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진 않지만.'
안유성의 옷과 갑옷이 찢기며 핏방울이 튀겼다.
"흐읍!"
"또다시 잔재주라니..."
안유성은 다급한 마음에 단검을 집어던졌다. 하지만 놈의 검기에 갈려 단숨에 수십 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에 흩어졌다.
'방법이 없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칼날.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마력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나, 놈의 마력은 마치 무한하기라도 한 것처럼 뿜어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안유성은 이미 계속된 전투로 상당히 지친 상태이다.
'재미있어.'
안유성이 씨익 웃었다.
이 정도로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럴 때는 안유성도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도박이 필요한 때다.
판단을 끝낸 안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렸다.
"크하하하! 벌써 포기한 거야? 응? 이렇게 쉽게 포기하냐고!"
도리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안유성을 본 김준용이 크게 웃어젖혔다.
-끼아아아아!
두 자루의 쿠크리가 비명을 토해내고, 다시 검은 마력 줄기가 안유성을 향해 날아갔다.
'흐읍!'
찰나의 순간.
안유성은 온 정신을 집중해 마력 그물을 바라봤다.
그리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우우웅
먼저 이동 경로에 최고 강도의 마력 방패를 생성한다.
동시에 인벤토리에 챙겨둔 무기들을 던지고, 안유성 자신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촤자자자장!
찰나의 순간.
안유성이 미리 설치한 마력 방패와 무기들을 이용해 교묘하게 마력 줄기의 경로를 틀어냈다.
안유성은 그 틈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슬하게 통과했다.
그동안 놈의 마력 줄기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끊임없이 관찰한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팔다리 한 짝 정도는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했다.
"이 자식이!"
김준용은 당황했다.
분명 마력에 갈기갈기 찢겼어야 할 안유성이 묘기를 하듯이 그 사이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잔재주는 인정하마!"
하지만 그뿐이다.
놈은 지쳐있었고, 자신은 여전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죽어어!"
김준용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이 내려쳐지기 직전, 달려간 안유성이 검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김준용의 손을 붙잡았다.
"뭐하는 거냐!?"
갑자기 안유성에게 손을 붙잡힌 김준용이 당황하며 외쳤다.
"하아, 강현 형처럼 싸우기는 싫었는데..."
"뭐?"
한숨을 내쉰 안유성이 힘껏 고개를 젖혔다.
"자, 잠깐!"
그리고 단단한 이마를 김준용의 코에 내려찍었다.
"크아악! 이런 미친놈이!"
"내가 배운 게 이것뿐이야!"
안유성이 유일하게 강현을 인정하는 분야가 하나 있다.
막싸움. 혹은 개싸움.
지저분하게 싸우는 거라면 강현은 정말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안유성은 그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그 힘을 빌려야 할 때였다.
"으아아! 이 잡놈이! 감히!"
코를 얻어맞은 김준용이 괴성을 내질렀다.
잔뜩 분노한 놈이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이런 건 처음이지?"
"크억!"
안유성은 재빨리 놈의 다리를 걸어 무게중심을 흩뜨렸다. 그리고 놈의 아랫도리를 향해 전력으로 무릎을 찍어 올렸다.
-퍼걱.
"끄, 끄으으..."
세상 중요한 곳에 타격을 받은 김준용의 얼굴이 새하얗게 떴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김준용을 보며 안유성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 찝찝해."
안유성은 이런 불쾌한 감각을 느낄 바엔 차라리 칼을 맞겠다고 다짐했다.
92화 아버지와 아들(4)
92. 아버지와 아들(4)
"이거 놔라! 네놈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안무석 회장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를 붙잡고 있는 단단한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봐요. 안 회장님."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김준용이 안무석에게 다가갔다.
-짜악!
김준용은 거침없이 안무석의 뺨을 후려쳤다.
"닥치고 있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김준용이 턱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안무석을 붙잡고 있던 남자들이 그의 무릎을 꿇렸다.
"알렉세이. 준비가 끝났다."
김준용이 푸른 눈을 하고 있는 백인에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시작해."
"명령하지 마라. 원숭이."
"뭐..?"
"이런 소국(小國)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는 놈 주제에 누구한테 명령이냐."
갑작스러운 알렉세이의 말에 김준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연합장만 아니었으면, 한 손으로 찢어 죽였을 놈이 감히...'
단순 무력으로 김준용은 연합 내에서 한 손가락에 꼽힌다.
그에 반해 알렉세이의 무력은 평범한 수준이었는데, 그럼에도 연합 내에서의 위치는 김준용과 같은 수준이었다.
김준용의 눈에 알렉세이는 그저 편법으로 고속 승진을 한 비겁자에 불과했다.
김준용은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겉으로는 웃는 얼굴을 가장했다.
목적을 위해서는 잠시 자세를 낮춰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봐 알렉세이. 우리는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의 동지 아닌가. 부탁하네."
"흥."
알렉세이는 마지못해 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안무석에게 다가왔다.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라...'
중간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안무석은 생각에 잠겼다.
놈들은 러시아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자신이 모를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오산이다.
안무석은 6개 국어에 능통했고, 그중에는 러시아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은 정보를 더 모아야 해.'
지금 여기서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안무석은 계속해서 놈들의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척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다."
그때였다.
안무석의 앞에 선 알렉세이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동시에 안무석의 머릿속에 격통이 밀려왔다.
마치 기다란 바늘로 뇌를 휘젓는 것 같은 느낌.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에 안무석이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
극심한 고통에 당장에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포기해라!
머릿속에서 포기하라는 울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포기하면 편해진다.
강압적이면서도 달콤한 목소리를 따르면 고통에서 해방될 것 같았으나 안무석은 끝까지 버텨냈다.
"끄으으..."
"으음, 이 노인 말이야. 비능력자라 하지 않았나?"
"각성자이긴 한데 따로 레벨을 올리지는 않았어. 그냥 노인일 뿐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버티는 거지?"
원래 일반인에게 마법을 사용하면 3분 안으로 정신 지배가 끝난다. 그런데 안무석에게 마법을 사용한 지 이미 5분이 흘렀다.
"이상하군. 나름 세계적인 기업을 세운 남자라 이건가? 하하."
하지만 알렉세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법을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슬슬 끝이 보이고 있었다.
"으으... 그냥 죽여라!"
부들부들 떨던 안무석이 핏발이 선 눈으로 외쳤다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어?"
알렉세이가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안무석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만 포기해. 버틸수록 정신이 피폐해질 뿐이야."
"퉤!"
안무석이 마지막 힘을 짜내 알렉세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쯧, 더럽게. 어쨌든…."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은 무리다...'
이제 한계였다.
안무석은 편히 쉬고 싶었다.
의지와는 관계없이 고개가 숙여지고, 의식이 끊어지려는 순간.
-퍼걱!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의식이 돌아왔다.
동시에 안무석의 얼굴에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이게 무슨...'
안무석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햇살을 받으며 내려오고 있는 자신의 아들이 보였다.
'안유성...'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아들.
사실상 자신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그가 이곳에 왔다.
자신을 위해서.
"뭘 봐?"
당차면서 건방진 말투.
안무석은 어쩐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그 말에 괜히 웃음이 났다.
"크아아아아!"
"죽여!"
이윽고 살육전이 벌어졌다.
'대단하다.'
그동안 안무석은 수많은 능력자들의 전투를 지켜봤었다.
직접 능력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능력자와 몬스터.
혹은 능력자와 능력자.
수십, 수백 번의 전투를 영상으로 보고, 심지어는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했었다.
때문에 더 이상 능력자들의 전투를 보고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자신의 착각이었다.
'압도적이야.'
안유성의 전투를 본 안무석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금껏 봐왔던 어떤 전투와도 차원이 다른 모습.
안유성의 전투는 화려하고, 정확했으며, 기술적이었다. 아니, 그런 것들을 넘어 하나의 예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법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미 안유성에 대한 이야기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다.
그중에서는 안유성의 전투능력이 강현의 후광에 가려졌을 뿐이지 사실 국내 최상위에 속한다는 보고서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었군.'
그때는 피식 웃으며 넘겼던 보고서였지만, 안무석은 이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모든 적들이 쓰러지고, 어느새 서있는 것은 안유성과 김준용이 유일했다.
-끼야아아아!
그때였다.
김준용이 무기를 빼들고 본격적으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건 위험해!'
안무석은 저 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칼날과도 같은 검은 마력.
그 앞에서는 몬스터든 능력자든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안무석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스걱! 콰앙!
마력 줄기가 주변을 할퀼 때마다 지형이 바뀌었다.
압도적인 위력.
안유성의 새하얀 피부는 저 검기에 닿는 순간 갈기갈기 찢길 것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연출되는 조마조마한 장면에 안무석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제발...'
다행히도 안유성은 치명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지쳐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이대로라면 무너지고 만다.
"뭐하는 거냐!?"
순간 안유성이 앞뒤 가리지 않고 김준용에게 달려갔다. 지켜보던 안무석은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이윽고 보이는 곡예사와 같은 움직임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봤다.
'정말 상상을 뛰어넘는군... 하지만 김준용에게 접근한다 해도 어쩌려는 거지?'
그때 안유성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하아, 강현 형처럼 싸우기는 싫었는데..."
안무석은 왜 강현의 이름이 나오나 의문이었으나, 그 궁금증은 금세 해결되었다.
"크아악! 이런 미친놈이!"
"내가 배운 게 이것뿐이야!"
경악스러운 도그 파이트.
안유성은 상대를 물어뜯고 눈을 찌르는 등 비겁하다고 생각할 만한 짓을 서슴없이 했다.
절로 눈살을 찌푸릴 만한 광경이었지만, 안무석은 그 모습이 도리어 마음에 들었다.
'승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되는 법이지.'
김준용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안유성이 철저히 무기의 사용을 막으며 움직이자, 버티지 못한 것이다.
"끄, 끄으으..."
"이겼다아!"
쓰러진 김준용을 앞에 두고, 온몸에 피칠갑을 한 안유성이 포효했다.
그리고 안유성 또한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안 돼!"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안무석이 벌떡 일어났다.
"..."
누워있던 안유성이 멀뚱멀뚱 안무석을 바라봤다.
잠시 흐르는 정적.
"아, 이건 그러니까... 피곤해서..."
"..."
안유성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김준용 위에 걸터앉았다. 안무석도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서로를 마주 보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닌 기묘한 자세.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그 어색한 대치는 강현이 올 때까지 계속됐다.
**
던전 입구에 도착한 강현은 입구부터 펼쳐져 있는 처참한 살육에 눈살을 찌푸렸다.
신태길은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어디론가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현장을 정리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자."
"예."
한가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강현은 서둘러 던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이다!"
다행히 안유성의 마력이 느껴지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강현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그곳에서 마침내 안유성을 발견했다.
"왔어요?"
웬 남자의 몸을 걸치고 앉아있는 안유성.
전신에 피를 흘리는 것이 한눈에도 정상은 아닌 듯 보였다.
"뭐야? 다 끝났냐?"
"당연하죠. 이번에는 고생 좀 했어요."
안유성의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피곤함이라는 것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밑에 깔고 있는 그건 뭐야?"
"아, 이거요?"
안유성이 씨익 웃으며 일어나 남자를 뒤집었다.
"끄응..."
남자의 상태를 본 강현과 신태길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잡느라 고생 좀 했어요. 그래도 숨은 붙여 놨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신태길은 안무석에게 다가갔다.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안무석과 신태길은 구면이었다. 정부에서 혜성 그룹에 능력자에 대한 투자 및 공조를 요청했을 때, 신태길이 직접 움직였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협상은 결렬됐다.
비록 그리 살갑게 인사를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서로의 위치, 중요성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다행히도. 괜찮네."
그때였다.
바닥에서 김준용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으..."
"뭐야? 이거 아직 살아있었어?"
강현이 김준용을 발로 툭툭 밀며 말했다.
"당연하죠. 아직 아무것도 들은 게 없거든요. 죽이더라도 이것저것 캐물은 다음 죽여야죠."
"그건 그렇지."
안유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김준용을 들어 올렸다.
어린아이처럼 한 손으로 들려진 김준용이 신음했다.
"끄어억..."
"하아, 이 새끼 때문에 쓸데없는 고생한 것 생각하면..."
그렇게 김준용을 살펴보던 강현이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이놈 마력이 좀 이상하지 않아?"
"음... 확실히 일반적인 능력자와 다른 것 같기는 해요. 마력의 양도 비정상적으로 많고."
"뭔가 냄새가 난단 말이지."
"끄으윽...!"
멱살이 잡힌 채로 허공에 떠있던 김준용은 계속해서 버둥거렸다.
"강현 씨. 내려놓으시죠. 그러다가 죽겠습니다."
"알겠어요."
강현은 쓰레기를 버리듯 김준용을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팔짱을 꼈다.
"흐음, 이놈 정체가 뭘까요?"
"벌써 까먹으셨습니까? 강신 길드의 길드장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요? 다른 정체가 있을 거 아니에요. 배후, 흑막 같은 거."
"그걸 묻는다고 바로 대답하겠습니까?"
신태길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강현을 쳐다봤다.
"아씨. 왜 이렇게 태클이 심해요? 나도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요!"
잠시 신태길에게 눈을 흘긴 강현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너 누구냐고 인마."
"크큭... 그냥 죽여. 이런다고 내가 입을 열거라 생각해?"
"죽는 건 걱정하지 말고. 그전에 내가 궁금한 건 알아야 될 거 아니야."
강현의 말에 김준용이 미친놈 보듯이 강현을 바라봤다.
"강현 씨. 놈의 정체라면 짐작 가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래요?"
신태길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세계적으로 능력자 범죄 집단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중에 아시아권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은 중화 연맹,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 같은 곳들이 있죠."
"잠깐."
신태길의 말을 들은 안무석이 고개를 들었다.
"놈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네. 자유 능력자 해방 연합이라고 말이야."
"이 노친네가 어떻게...!"
안무석의 말에 김준용이 토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내가 그 정도 말도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김준용은 낙담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렸다.
"흥. 상관없어.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그래그래. 알겠으니까 좀 닥치고 있어."
강현이 김준용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크헉!"
"강현 씨! 그러다 진짜로 죽습니다."
"아, 걱정하지 마요. 다 조절하는 거라니까."
강현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크큭, 크흐흡..."
갑자기 김준용이 실성한 듯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뭐야?"
"너 말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건방지게 있을 수 있을까? 응?"
갑작스러운 김준용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개소리야?"
"우물 안에서 조금 강하다고 우쭐대는 꼴이라니. 머지않아 큰코다칠 거다. 나는 시작일 뿐이야. 조심하라고."
김준용이 실실거리며 말했다.
"이게 미쳤나."
"네들이 이번에 저지른 짓을 연합에서 알게 되면 반드시 복수할 거다. 어쩌면 연합장이 직접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절대…."
강현이 손을 뻗어 김준용의 뺨을 틀어쥐었다.
"그래그래. 조언 존나 고맙네. 그런데 그거 아냐?"
"끄으으웁!"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나는 못 이겨."
강현의 오글거리는 대사를 들은 안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참나, 일은 내가 다 했는데, 왜 형이 똥폼을 잡아요?"
93화 참 쉽죠(1)
93. 참 쉽죠?(1)
김준용의 처리는 언제나처럼 신태길이 맡았다.
강현은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예정대로 촬영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소는 지긋지긋한 고블린이 출몰하는 F등급 던전이었다.
"카메라 잘 돌아가고 있지?"
"예."
강현이 목을 가다듬고는 카메라 앞에 서서 어색하게 자세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배데스 길드의 강현입니다. 지난번 베일의 미로 공략 영상에 너무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훕..."
말을 하는 강현은 굉장히 서투르지만 한편으로는 들떠있어 웃음을 유발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유성은 실소했고, 신성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영상은 몬스터 공략 영상인데요. 앞으로 시리즈로 진행될 예정이니 쭈욱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강현이 친근감을 주기 위해 최대한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본인 딴에는 제법 깜찍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한 행동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공포. 끔찍. 그 자체였다.
"그럼 첫 번째 공략 몬스터는 무엇이냐?!"
말을 하며 강현이 눈짓을 줬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윤나래가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두구두구두구두구우으..."
강현이 반 협박으로 얻어낸 저렴한 입 효과음.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바로 고블린입니다!"
-짝짝짝짝...
강현은 멋진 무대에 선 진행자처럼 양 팔을 벌려 성의 없는 박수 소리를 만끽했다. 그리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블린! 저도 참 지긋지긋한 놈들인데요. 사실 고블린이라는 이름 자체는 던전 사태 이전부터 자주 접할 수 있었죠. 영화나 소설을 보면 비쩍 마른 약골 괴물로 자주 등장하잖아요?"
"예에..."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초기에는 겁 없이 덤벼들다가 그대로 삼도천 수영하고 오시는 분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열심히 삼도천을 수영하는 자세를 취하던 강현이 멈칫했다.
"물론,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
"절대로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크흠!"
강현이 괜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계속 말했다.
"고블린은 아주 흔한 몬스터로 민병, 정규군, 기사까지 아주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케륵' 거리는 짜증 나는 소리가 특징으로 외형은 상당히 역겨운데요..."
말을 하던 강현이 어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 때마침 저기 있네요."
그리고는 한참 전부터 근처를 서성이던 고블린을 지금 막 발견한 것처럼 가리켰다.
강현의 발연기에 신성아가 웃으며 카메라를 고블린 쪽으로 움직였다.
"케륵, 케륵!"
"저 가래 끓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구타를 유발하네요."
"케엑!"
그때였다.
때마침 강현을 발견한 놈이 잔뜩 흥분해서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향한 욕설을 알아듣기라고 한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공략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케라아아!"
녹이 슨 장검을 든 고블린이 침을 질질 흘려가며 달려왔지만, 강현의 얼굴은 편안했다.
"이렇게 자세를 잡으시고."
고블린은 금세 강현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흐아압!"
기합과 함께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강현의 주먹.
-퍼어억!
그 주먹에 맞은 고블린의 머리가 고층 빌딩 떨어진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끝입니다."
"..."
"참 쉽죠?"
"지금 그걸 공략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이가 없네."
윤나래가 잔뜩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죠. 이건 고급자용 코스고, 당연히 초심자용 코스도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엑..."
강현의 느끼한 존댓말에 윤나래가 구토를 했다.
강현은 주먹을 쥐어 한번 흔들어 주고는 진행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초심자용 코스입니다. 우선 고블린을 찾아볼까요?"
말을 한 강현이 윤나래에게 눈치를 줬다.
"왜요?"
"윤나래 조교. 찾아오세요."
"그걸 내가 왜…."
"길드에서 돈도 줘. 아이템도 줘."
"..."
"처먹기만 처먹고 입 싹 닦으면 끝입니까?"
"..."
"하루 종일 안유성 쳐다보는 게 일과인 주제에 이런 거라도 해야지 안 그렇…."
"알겠어요! 간다고! 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윤나래가 숲으로 사라졌다.
"방금 사라진 이상한 복장을 한 소녀는 사실 많이 아픈 아이입니다."
윤나래가 사라지자 강현이 뜬금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를 두고 저런 양아치 같은 놈을 잘생겼다고 하다니. 쯧쯧..."
"..."
"안 그래요?"
"예..."
카메라를 들고 있던 신성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강현의 광신도인 그녀가 봐도 강현의 외모가 안유성에게 비빌 수준이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안유성은 근육질의 짐승돌(짐승 + 아이돌).
강현은 그냥 짐승. 그것도 정신이 반쯤 나간 짐승이었다.
"흐음..."
얼마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에도 윤나래가 나타나지 않자 인내심이 부족한 강현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 로리 오타쿠가 왜 이렇게 늦어?"
다행히도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윤나래가 숲에서 나왔다.
"고블린은?"
"여기요."
윤나래가 마법에 포박된 고블린을 강현에게 던졌다.
"예! 이제 초심자용 코스로 공략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후로 강현은 고블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진지하게 강의에 임했다.
"F등급의 일반 고블린은 별거 없습니다. 침착하게만 대응한다면 성인 남성 혼자서도 충분히 사냥이 가능하죠."
여유롭게 고블린의 공격을 피하며 강현은 고블린의 주요 공격 패턴, 약점 따위를 설명했다.
"이렇게 신중하게 공격을 피하신 다음, 무리하지 않고 상처를 늘려간다면 비능력자도 안전하게 사냥을 할 수 있습니다."
"케르르르..."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 고블린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참 쉽죠?"
"끝입니까?"
공략 강의가 종료된 듯하자 신성아가 카메라를 끄려 했다.
"잠시!"
"...?"
"이 영상은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 정서빈 아이템 연구소의 후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컷?"
"오케이! 커트!"
**
그날 저녁. 강현은 바로 편집자에게 받은 영상을 위튜브에 올렸다.
"아직은 반응이 미적지근하겠지."
강현은 솔직히 이번 영상에 대해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블린이 워낙 흔하고, 특히나 F등급에 대해서는 이미 양질의 정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찾아보니 비슷한 컨셉의 영상이 해외에는 이미 제법 풀린 상태였다.
"슬슬 반응을 살펴볼까."
강현이 스마트 폰으로 위튜브에 접속해 댓글을 확인했다.
-이거 뭐지? 장난치는 건가?
-무슨 고블린 가지고 강의 영상까지... 처음 영상처럼 신선하지는 않은 듯.
-마지막에 후원 실화인가?ㅋㅋㅋㅋㅋㅋ
-강현이 한방에 고블린 머리 날리는 건 좀 쩐다.
-요새 영상 둘러보면 저것보다 더 박살나는 것들 많음
-개노잼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그나저나 저 윤나래는 누구? 처음 보는데 배데스 간부진이랑 같이 움직이네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 귀엽.
-코스튬 복장 지린다. 헠헠
-강현이 로리 오타쿠라 부를 때 개뿜음 ㅋㅋㅋㅋㅋㅋ
-신성아 코인 하차하고 윤나래코인 탑승합니다.
의외로 윤나래에 대한 여론이 제법 괜찮았다.
"쳇, 귀엽긴 뭐가 귀여워? 쓸데없이 실실거리기는."
괜히 기분이 상한 강현이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냈다.
"크아! 시원하다."
단숨에 맥주를 비워낸 강현이 빈 캔을 구기며 미소를 지었다.
"두고 보자고. 앞으로 더 재미있어질 테니까."
**
그 후로도 강현의 공략 영상은 계속됐다.
쿠르카, 레드락, 타란크, 케이카, 해골 병사, 오크 등등.
비록 그리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들은 아니었지만, 강현은 어떤 몬스터든 가리지 않고 주먹 한 방에 터뜨려버리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참 쉽죠?
이른바 '참 쉽죠?' 시리즈는 강현의 예상대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야. 요즘 BadAss TV 보냐?"
그리고 서울 강남의 한 술집.
늦은 시각까지 술을 마시던 두 명의 남자도, 요즘 핫이슈인 강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게 뭔데?"
"그 있잖아. 강현이 나와서 몬스터 잡는 거."
"아, 지가 무슨 강의한다고 쇼하는 영상? 처음에는 신선해서 봤는데 지금은 딱히."
"왜? 존나 꿀잼인데."
"너무 어그로 같잖아. 강의한다고 잡는 몬스터라 해봤자 전부 약한 것들이고."
"..."
"전부 한방 컷 낸다고 무슨 현실판 원펀치맨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오버지. 고블린, 타란크 이런 거 한방에 죽이는 능력자는 지금도 널렸잖아."
계속되는 친구, 김연수 딴지에 정재선이 결국 발끈했다.
"야! 그래도 강현은 전부 맨손 주먹으로 날리잖아. 장비에 스킬 쓰는 거랑은 다르지."
"당연히 육체 강화 계열 스킬 썼겠지. 상식적으로 그냥 주먹질에 몬스터 머리가 퍽퍽 터져나간다는 게 말이 되냐?"
정재선 자신도 능력자이기에 잘 알고 있었다.
맨주먹으로 몬스터를 터뜨리는 건 스킬의 도움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네가 배데스 길드 팬인 건 알겠는데, 솔직히 걔들 난 비호감이라 딱히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해서 빈정거리는 김연수의 콧대를 눌러주지 않으면 평생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재선은 배데스 길드에 소속돼 있는 친구에게 들은 정보를 풀기로 결심했다.
"그럼 오우거라면 어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우거라니."
"내가 들은 건데, 너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강현이 다음 영상은 바로 오우거로 간데."
"..."
"오우거도 한방에 보내면 인정이냐?"
"뭐, 오우거라면 인정이긴 하지. 그런데 말이야..."
오우거란 말에 당황하던 김연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영상 조작일 수도 있잖아."
"뭐?"
"아무리 육체 강화 계열이라도 오우거까지 주먹 한방에 보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어차피 편집되는 영상이니 미리 패 놓고 막타만 치는 건지 알게 뭐야?"
"이 새끼가 말을 해도."
김연수와 정재선은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길드에 소속된 능력자였다. 레벨도 42 정도로 길드 내에서 제법 높은 편.
"우리 길드는 떼거리로 덤벼서 겨우 잡는데, 아무리 강현이라도 한방에 보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야. 그럼 내기해."
"뭐?"
"내기하자고. 시발. 강현이 영상 찍는데 찾아가서 직관하면 될 거 아냐."
정재선의 말에 김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네가 강현 구라라면서. 그러니까 내기하자고. 1,000만 원 빵."
"허 참... 강현이 영상 찍는 곳은 어떻게 찾아볼 건데?"
"우준이 알지? 얼마 전에 배데스 들어간 얘. 내가 우준이한테 물어볼 테니까 내기해."
"..."
"왜? 쫄? 쫄리면 뒤지시던가."
"해. 해. 시발. 오우거를 한방에 보내는 게 말이 되냐?"
"당연히 말이 되지. 강현이 휘두르는 그 커다란 망치 못 봤어?"
그 뒤로도 정재선과 김연수는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새끼. 후회하게 해 준다."
결국 술자리는 흐지부지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재선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야. 뭐하냐?"
-저녁에 던전 공략 끝나서 나와서 이제 쉬고 있었지.
전화 너머로 얼마 전에 배데스 길드에 들어간 친구 조우준의 목소리리가 들려왔다.
-웬일이냐? 전화를 다하고.
"그냥. 길드는 다닐 만 해?"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시벌. 배데스 길드 빡실 줄은 알았는데, 진심 상상을 초월해. 오늘만 해도 던전에서 세 번은 뒤질뻔했다니까? 근데 아무도 신경을 안 써. 여기 놈들은 그냥 전부 또라이야.
조우준은 그동안의 서러움을 풀려는 듯이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후우, 말하니까 좀 낫네. 그래서 왜 전화한 거야? 그냥 진짜 안부?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강현 때문에."
-강현? 우리 길드장님?
"어."
-길드장님이 왜?
"김연수 이 새끼가 요즘 강현이 찍는 영상 구라라잖아."
-음...
"네가 강현이 내일 오우거 잡을 거라며. 그래서 그거 구경하려고."
-괜찮으려나...
"제발. 부탁한다. 김연수 저거 콧대 한번 눌러야 한다니까? 이건 네 길드의 명예가 달린 일이기도 하다고!"
-하아...
조우준의 깊은 한숨에 담긴 고민이 느껴졌다.
"1,000만 원 내기도 걸려 있는데, 너 500 떼 줄게."
-돈은 됐고, 내일 길드장님 나가시면 바로 장소랑 해서 문자 보내줄게.
"오케이 땡큐! 진짜 고맙다."
통화를 종료한 정재선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김연수. 딱 기다려라."
94화 참 쉽죠(2)
94. 참 쉽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