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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 *

"…그래서, 뭐라고?"

나는 가부좌를 틀고 원영기를 오르다가 남은 잔재 기운을 기령들에게 불어넣으며, 눈앞의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저희, 약혼하기로 했거든요."

"네!"

"…."

나는 눈 앞의 수인과 홍연을 쳐다보았다.

머리에 뿔이 달린 각주족의 수인과, 박쥐 날개를 단 기익족의 홍연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임시 총독에 오르고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마족 꼬마 아이들도 상당히 성숙했고, 이전에 남녀가 구분되지 않던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뭐, 대충 알고 있긴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거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머리 아픈 부분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런데, 나더러 너희 약혼의 증인이 되어 달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랬다.

이 녀석들은 날더러 증인을 봐 달라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인족이다. 너희 약혼 증인은… 저기 견 수사가 해 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래, 이 녀석들. 그런 건 이 박식한 내가 봐 주는 게 훨씬 나을 게다!]

견신은 내가 풀어 준다고 했으나.

종족 특성상 혼자서는 아무 곳도 가지 못해, 마물을 제압해 기생해야 했다.

그러나 정작 마련산맥은 마물들이 거의 분포하지 않았고, 견신은 자신을 탈출시켜 줄 마물을 구할 수가 없어, 그냥 동족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며 구조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18년째.

견신은 동족들로부터 구조 신호의 답을 듣지 못했다.

결국 녀석은 아예 포기했는지 그냥 내 옆에서 간혹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놀 뿐이었다.

"그치만… 인족이라고 해도, 총독님처럼 좋은 인족은 없는걸요?"

"다른 마계 점령지에 비해서도, 굉장히 저희 점령지는 살기 좋은 편이라 하고, 또 총독님이랑 같이 있어 봐서 그런지, 총독님이 정말 편한걸요?"

"…그나저나, 너희들 각각 부족에 허락은 받은 거냐?"

둘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고는 말했다.

"네!"

"물론이죠!"

"…거짓말하지 말려무나."

"어떻게… 에잇, 그보다 상관없잖아요?"

"결혼 증인도 아니고, 약혼 증인만 해 주세요!"

결국, 나는 녀석들의 투정에 못 이겨 증인을 서 주기로 했다.

두 마족은 공령지 안쪽, 공령석들이 가장 밝게 빛나는 장소에 서서 서로의 미래를 약속했다.

'내가 왜 이런 걸 봐 주는 건지….'

나는 두 젊은 연인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한 것 같았다.

아직 암흑 속으로 침잠하지 않은 기억.

먼 옛날, 내 첫사랑과 모과꽃과 백목련을 심었던 그 시절의 기억과, 꼭두각시의 성채에서 입을 맞췄던 사랑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뭉클….

'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을 보며 그동안 가슴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심마가.

무언가 풀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뭔가, 알 것 같다….'

나는 두 마족을 축복해 주고, 총독 관저로 올라갔다.

깨달음을 정리하기 전, 우선 총독부에서 밀린 일들을 전부 해치워 놓고, 긴 시간 동안 폐관에 들기 위함이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무언가, 몇 발자국만 더 디디면, 심마를 풀어내고 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총독부에서 관리관과 함께 오랜만에 작업들을 처리할 때였다.

"초, 초, 총독님!!!"

"음? 무슨 일인가?"

총독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나와 관리관이,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인족 총연맹에서 각 점령지에 파견한 총연맹의 전령이었다.

나는 총연맹 전령의 감정 상태를 보고,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말해 보게. 무슨 일이지?"

"과, 광한계 본토로부터의 전령입니다. 그, 그, 그러니까…."

그는 덜덜 떨며, 품에서 옥간을 꺼내 천천히 옥간을 읽기 시작했다.

"지, 지, 진선(眞仙)이, 인족의 한 구역에 나타나 힘을 썼고, 인족의 천공도 중 뇌령도라는 천공도가 그대로 천뢰(天雷)에 불타 증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살피러 간, 광한계 여러 종족에서 오신 합체기 태수분들과, 인족의 합체기 태수분들 역시 죽거나 치명상을 입으셨다 하십니다."

"…!"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뇌령도는, 금신천뢰문이 자리를 잡은 천공도의 이름이었다.

'이 시기였던가….'

그리고 전령의 말이 이어졌다.

"무, 문제는 인족의 합체기 태수분들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마계의 첩자들에 의해 마계의 심처(深處)에 닿았다는 첩보가 왔습니다."

"…그 말은, 마계 합체기 마족들도 그걸 들었다는 거로군."

지금까지, 커다란 전쟁은 대부분 아무리 경지가 높아도 사축기 수사들이 최대 전력이었다.

그야, 합체기 수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어느 쪽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테니 말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인마대전 역시 사축기 수사들이 참전을 했어도, 인족의 합체기 수사들은 물론이고 마계의 심처에 있는 합체기 수사들 역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참전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진선에 의해 광한계의 합체기 수사들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진마계 합체기 수사들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인즉.

'인마대전에서, 진마계 합체기 태수들이 움직일 것이라는 뜻!'

상황이, 격변(激變)하기 시작하였다.

작가의 말: 빌드업용의 이야기가 조금 길었습니다. 너무 끌리지 않게, 빌드업용 이야기는 한 편에 눌러 담았으니 이것으로 용서해 주시고, 그동안 장마 때문에 제 컨디션이 망가졌던지라 글의 긴장감도 조금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장마 기간이 끝나 가니, 앞으로는 조금 더 퀄리티에 신경을 쓰도록 해 보겠습니다아….

모든 독자님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잃어버린 것 (1)

'제길, 앞으로 상황이 급변할 거다.'

마족 합체기들이 나선다면,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는 것은 물론이다.

점령지를 전부 토해 내고, 최악의 경우에는 인족 영역이 마족에게 침범당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총독부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계 역시 광한계와는 달랐으나, 천기는 이곳에도 존재했고, 앞으로의 상황에 천기가 크게 결정을 미칠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하늘을 확인할 때였다.

"음? 연 도우, 무슨 일인가?"

어느덧, 연진이 내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반백반흑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 도우…."

나는 연진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그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고 하늘을 보며 내 옆에서 천기를 읽어내렸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네놈, 누구냐."

"…아?"

내가 살기를 쏘아 내자, 연진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하네. 천기가 급변해서 말이지. 갑자기 초대흉(超大凶)이 천기에 떡하니 떠오르면서, 필멸(必滅)이 고정되어 버렸거든. 이거 참, 금신천뢰문이 멸망했다 해서 좋아했는데, 좋아하기가 무섭게 바로 죽을 날이 확정되어 버렸어. 큭큭…."

"…누구냐고 물었다."

금신천뢰문이 멸망했다는 건, 방금 인족 총연맹 전령이 총독인 내게 보고한 사건이었다.

그런 것을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결단기 수사인 연진이 알 수 있단 말인가?

'이놈, 연진이 아니다.'

누군가가, 연진의 몸을 뒤집어쓰고 나와 얘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이함을 느꼈다.

연진을 아무리 노려보아도, 어째선지 그의 의념과 기질이 지금껏 내가 알던 그와 다른 점이 없었다.

"이거, 젊은 사람을 너무 놀려 댔나 보군. 미안하네, 본녀는 연위(淵瑋). 연진의 선조라네."

우득, 우드득… 우드드득!

점차, 연진의 몸 이곳저곳이 비틀리며, 그의 체형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총독도 지금 얼굴이 급변해서 천기를 막 읽어 대는 걸 보니, 광한계 본토에서 뭔가 큰일이 보고돼서 천기를 읽어 보려는 것이겠지? 혹시 알려 줄 수 있겠는가?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금신천뢰문이 망하고, 천뢰번(天雷幡)의 기운이 사라졌으며, 동시에 나와 연진의 운명에 횡액이 깃든 것인지."

우드드득….

얼마 후, 연진은 완전히 체형과 골격이 변하고, 얼굴이 변화하여 완전한 여성의 몸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또한 본래 좌측은 백색, 우측은 흑색이었던 연진의 머리칼은, 좌측은 흑색, 우측은 백색으로 흑백의 방향이 전환되어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렇군요."

나는 침을 삼키며, 이번에 점령한 8차 점령지의 절반 이상을 뒤덮는 장대한 의식 크기를 둘러보았다.

그 거대한 의식을 지닌 존재가, 숨김없이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의 행인들이, 총독부의 관리들이, 곳곳의 수도자들이 이 의식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느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찌릿, 찌릿….

"사축기 선배님께서, 도대체 왜 진혼(眞魂)을 조그마한 결단기 후배의 몸에 숨기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을 해 드리자면…."

사축기(四軸期) 수도자.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따위가 아니었다.

사축기 최고봉, 합체기의 영역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 수도자의 혼백!

일전 만났던 송진처럼, 죽어 버린 혼백의 조각인 잔혼이 현세에 붙어 있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사축기 수도자가, 멀쩡한 자신의 혼백 전체를 결단기 수준인 자신의 후손의 몸 안에 욱여넣은 꼴!

나는 긴장을 돋우며 설명을 해 주었다.

"광한계 인족 영역 본토에, 진선이 힘을 드러내어 금신천뢰문과 뇌령도 전체를 증발시켜 버렸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합체기 태수분들도 치명상을 입으셨다 하더군요. 아마 제 예상입니다만, 그 진선이 금신천뢰문의 신물인 천뢰번을 가져간 것 같습니다."

"아아, 그런 거군. 하긴, 내 세대까지만 해도 천뢰번에는 나쁜 전설이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전해져 왔는데. 정말로 횡액을 부르는 물건이었을 줄이야."

연위라는 여인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를 경계하며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어떤 분이신지 여쭐 수 없겠습니까?"

"이름은 말해 주지 않았나?"

"어디서, 뭘 하던 분이신지, 그걸 여쭙는 겁니다."

"아하하, 이거 결단기 주제에 총독을 단 놈 아니랄까 봐 썩 범상찮구나.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결단기의 몸으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싸아아아….

주변의 기운이 내려가며,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주위의 천지영기가 굳으며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내가 의식 파동을 보내자 내 그림자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밀려나오며 내가 숨을 쉬기 편하게 해 주었다.

쿠구구구구!

"음!?"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꼬마야, 그림자에 뭘 넣고 다니는 거지?"

"궁금하시다면, 우선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상황 설명을 해 주시면 말씀드리지요."

"아하하, 나랑 정보 거래를 하자는 건가? 미안하지만, 나와 진아의 죽음이 운명으로 고정되어 버려서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군. 솔직히 그냥 돌아다니면서 지금껏 살면서 못했던 일 다 해 봐야 하나 그런 생각밖에 안 드는데…."

"연진 도우의 몸으로 도대체 뭘 하시겠다는 건지, 그의 상관이기 이전에 친구로서 물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연 선배님. 당신은 뭘 하던 분이시며, 어디에서 왔고, 왜 연진 수사의 몸에 숨어들어 있었으며, 목적은 뭔지를 알아야겠습니다."

꾸우우웅!

내 그림자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뿜어지며 연위의 압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림자에서 손이 튀어나오며,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서 장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계에서 지내며, 서 장군을 다시 만드는 일도 꾸준히 해 왔다.

마계의 특별한 재료들을 사용해서 서 장군을 보강한 결과.

나는 사축기 초기 수준의 진본 서 장군을 마침내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눈앞의 혼백이 사축기 끝자락에 도달했었던 존재라지만.

엄밀히 지금 저자의 수행은 결단기 중기 수준이었고, 의식만 사축기 최정상 수준.

물론, 명색이 사축기 최고봉에 도달했던 자이니만큼 온갖 기오막측한 신통을 알고 있겠지만, 사축기 서 장군이 있는 한 내가 그렇게 꿀릴 것은 없었다.

"흐음, 이거 재미없군. 남자는 자고로 와들와들 떠는 맛이 있어야 하건만. 진아는 그래서 귀여웠는데 말이지. 뭐, 일단, 본녀는 뇌운각(雷雲閣) 원로, 연위라고 하네."

"뇌운각?"

"그래, 수계에서 비승한 후, 금신천뢰문을 배신하고 뇌운각에 금신천뢰문의 본명공법과 주요 신통을 싸그리 털어놓은 배신자이기도 하지. 그 덕에 금신천뢰문이 단체 비승을 한 후, 금신천뢰문의 천뢰번에 호되게 얻어맞고 죽기 직전까지 몰린 후, 진아의 육신에 숨어들어 가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놈이기도 하고."

"…."

"적의 눈을 피하려면 적의 둥지 밑이 가장 안전할 거라 생각해서 진아를 금신천뢰문에 입문하게 했네. 그런데, 이번에 비승한 금벽호란 놈이 감이 좋은 놈 같아서 그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이번에 마계행 원정에 참여하기로 한 거였지."

"…그래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내 목적? 별거 없다네. 그냥 오래 살면서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소박한 목적이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추하게 후손 몸에 들어가 빌붙지 않았는가. 아하하… 뭐,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그녀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천기를 읽던 중, 금신천뢰문이 멸문했다는 걸 알았네. 나와 인연이 많은 문파이니 문파의 흥망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네만… 그 후에 확인해 보니, 운명에 [죽음]이 고정되어 버렸어."

"…죽음이 고정되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네, 나와 진아의 운명은, 앞으로 길어야 20년. 그 안에 [무조건] 죽을 걸세.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갑자기 운명이 극단적으로 단축되었어."

"…."

그녀가 한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오래 살고 싶었는데, 하늘이 그걸 별로 허락하고 싶지 않았나 보군. 이렇게 죽어 버리게 되다니."

"…연진 도우는 지금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네."

"잠시 연진 도우와 얘기하게 해 주십시오."

"뭐, 그러지."

우웅!

얼마 후, 잠시 의식이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거대한 의식이 사라지고 결단기 수준의 의식이 드러났다.

그리고, 연진이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악! 서, 선조님! 제, 제 아랫도리가 없어졌어요! 선조님! 제발 수련할 때 빼고는 제 몸 마음대로 좀 그만 바꾸세요!"

"…."

연위가 연진에게 의식을 통해서 뭐라 말을 하는 건지, 연진은 씩씩거리며 허공에다 대고 마구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니, 수련이고 뭐고, 저는 남자로 태어났잖아요! 매번 이렇게 선조님이 제 몸 뺏을 때마다 여성체로 바꾸는 거 좀 많이 짜증나거든요! 심지어 총독님한테 들켰어! 나 이제 어떻게 살라고요! 소문나면 책임질 거에요? 뭐? 어차피 살 날 얼마 안 남았으니까 해 봤다고? 으아아!"

"…연 도우."

"아! 죄송합니다 총독님. 저희 선조님께서, 후우. 여성분이셨던지라 후손인 제 몸을 차지할때마다 제 몸을 바꿔 대곤 하시거든요."

"흐음…."

나는 그의 몸을 보며, 그의 몸 안쪽에서 흐르는 음양의 흐름을 관찰하였다.

"변화할 때 상당히 영력 흐름이 자연스럽더구려. 그건 특수한 공법이오?"

"아…! 그건… 아, 선조님이 이따가 설명해 주신다 하시네요. 차후에 선조님한테 들으시면 될 것 같아요."

"…뭐, 알겠소. 일단…."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하였다.

"금신천뢰문의 현 상황은 대략 이럴 거요. 문파는 전멸했을 테고, 현재 생존자는 아마, 전명훈이라는 녀석 하나뿐. 그리고 아마 녀석도 현재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황일 터… 연 수사는 수명이 현재 2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알고 있소. 앞으로 어찌할 작정이오?"

"전 사형이 살아 계시다고요?"

"그렇소."

"하, 하면…."

잠시 고민하던 그는 표정을 굳혔다.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현장에 있던 사형께 여쭤보겠어요!"

"…알겠소. 하면 보내드리지. 어차피 앞으로 마계 합체기 태수들이 힘을 쓰기 시작할 테니, 본인은 그에 따라 점령지를 점차 물려야 할 터. 나도 뒤따라갈 채비를 하겠소."

어차피 마계에서 물러나고 나면 나 역시 전명훈에 대해 알아볼 참이었다.

"최대한 빨리 점령지를 정리하고, 총독직을 내려놓은 후 쫓아가겠소. 20년 안에는 최대한 해 볼 테니, 그 안에 살아 있으시기를 바라겠소."

"하하, 아마 외압으로 죽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선조님이 계시니… 아, 그나저나 선조님이 자꾸 총독님과 얘기하고 싶다고 보채시는군요. 선조님과 대면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다시금 의식이 꿀렁였다.

"흠, 결단기 수준 총독에게, 금신천뢰문의 생존자 한 명까지도 다 보고가 올라오나? 요새 인족의 정보망 수준이 상당히 발달했는걸?"

"…."

"뭐, 말하시기 싫으면 하지 마시게. 나도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었으니. 그것보다도, 자네 사축기 괴뢰는 아니더라도, 천인기 괴뢰라도 없나? 보아하니 그 괴뢰, 혼(魂)이 들어가기에 상당히 용이한 구조인데."

"선배님 육신으로 쓰시렵니까?"

"육신으로 쓰려는 건 아니고, 위급할 때 잠시 들어가서 본 실력을 발휘할 비장의 수단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예, 하나 드리도록 하지요."

나는 선선히 품속에서 저물도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음? 이렇게 쉽게 준다고?"

그녀는 어쩐지 미심쩍은 눈으로 저물도를 꼼꼼히 관찰하였다.

"함정은 없습니다. 어차피 연진 도우와는 벗이니까요.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으니 대답만 조금 해 주시지요."

"흠, 그래. 말해 보시게나."

나는 살짝 호기심이 들어 물었다.

"제가 익힌 창령성광오채대법이라는 공법 구결에도, 연진 수사의 몸에 흐르는 그 음양의 흐름도, 무언가 음과 양의 흐름이 공존하는 듯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서 여쭈어도 됩니까?"

"흐음… 시시한 질문이군."

우드득!

한순간, 그녀가 머리칼을 쓸자, 그녀의 몸이 우직거리는 듯하더니 다시금 남자 연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머리칼의 색 역시 좌우 반전되었다.

"일단, 이 성별이 반전되는 공법 자체는 뇌도공법의 기본에서 발전시켜 만든 정통 뇌도공법이네. 본디 '뇌전(雷電)은 음양(陰陽)이 기운을 주고받으며 일어난다.' 모든 뇌도(雷道) 신통의 핵심이 되는 구결이지. 음양이 기운을 주고받음을 태극의 순환으로 해석하여, 신체의 음양을 반전시켜 체내에서 뇌력(雷力)을 키워 나가는 게 이 태극진뢰신(太極震雷身)의 공법이라네."

"…혹시 금신천뢰문에서는 전부 그렇게… 성별을 바꾸는 공법을 익히는 겁니까?"

"음? 그건 딱히 아니라네. 이건 그냥 내 취향에 맞는 공법이라 익힌 게지. 아하하!"

사락!

연위가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 한 바퀴 사이에, 연진의 몸은 몇 번이고 남녀의 성별을 오고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자네와 내 공법에 음양의 유사점이 있다고 했지? 그건 뭐, 본래 원영(元靈)의 경지에서는 음신(陰神)과 양신(陽神)을 단련하니, 원영기를 지나는 공법이면 너나할 것 없이 음양의 이치를 담고 있는 거겠지."

"음, 그렇군요."

"음양(陰陽)과 태극(太極)은 이 세상과 모든 수도공법의 근간 원리이니… 요수공법도 듣기로는 오히려 천족 공법보다 음양태극을 더 중요시한다지? 뭐, 궁금한 건 그게 다인가?"

"일단은 그 정도라고 해 두지요."

"좋네, 그럼 우리는 근시일 내에 점령지를 떠나 광한계로 돌아가도록 하지."

우웅!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연진의 의식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연진이 의식을 찾고서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선조님! 제 몸 좀 돌려놓고 가 주세요! 전 아직 조절하기 힘들단 말이에요! 아악, 정말…."

한숨을 쉰 연진은 나에게 얼마간 푸념을 늘어놓은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숙소로 가 짐을 챙겨, 광한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배웅해 준 후 총독부로 되돌아왔다.

'소동이 조금 있었지만, 천기는 확인했다.'

머지않았다.

약 7개월 뒤, 흉(凶)이 덮칠 것이다.

그 말인즉, 마족 합체기 태수들이 나선 이상 전선이 이곳까지 밀리기까지 7개월이면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오늘부터 인족 총연맹과 연계해서 하루빨리 점령지의 인원들을 피난시켜야 해.'

피난이 완료되면 그제야 책임자들이 자리를 비킬 수 있을 터였다.

아마 총연맹 역시 그렇게 명령을 내릴 터였다.

그리고, 얼마 후 총연맹의 전령을 통해 전해진 내용 역시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가진 않았다.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서.

"4차 점령지까지만 후퇴하라는 말인가?"

"예, 총연맹에서는 4차 점령지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조금 축소시킨 후, 그곳에서 총력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유가 있는가?"

"총연맹에서는 4차 점령진에 침계진(侵界陣)을 펼쳐, 이번에 점령한 점령지 중 최소 4차 점령지까지는 광한계의 영역으로 침식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으음…."

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인족 총연맹에서는 침계진이라는 결계 진법으로, 진마계에서 점령한 점령지 중 4차 점령지까지를 광한계의 영역으로 '먹어 치워' 버리려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4차 점령지까지의 영역에 진법으로 광한계의 차원 계면을 두르고, 진마계의 땅을 아예 광한계로 끌어들여 인족의 영역을 어떻게든 넓히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하면 궁금한 게 있는데, 8차 점령지에는 공령지가 있다. 공령지는 추후 비선대로 개발할 수도 있는 만큼, 차원이 다른 전략 자산인데 어째서 4차 점령지로 범위를 줄이는 거지?"

"아, 총독님. 이번에 발견한 공령지는 총 세 군데가 아닙니까?"

"맞지."

그랬다.

이번 마계 침공으로 인해, 인족은 마계의 구역에서 총 세 군데의 공령지를 발견했고, 각 공령지의 총독들에 의해 공령지는 엄중히 보호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걸세. 공령지의 가치는 광한계에서도 수많은 종족들이 탐내는 것이고, 쉽게 얻지도 못하는 것이네. 이번 인족 대침공으로 인해 공령지가 3개나 발견되었을 때, 인족 총연맹이 뒤집어졌다고 들었네. 그리고… 모든 공령지는 전부 4차 점령지 밖에 있지."

그랬다.

공령지는 말 그대로 광한계에서도 전 종족이 침을 흘리며 탐내는 것이었고, 이번 인마대전에서 공령지를 3개나 발견한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공령지는 각각 5차 점령지, 8차 점령지, 11차 점령지에 나뉘어 분포해 있었다.

"최소한 5차 점령지까지 후퇴한다고 했으면 이해를 했겠지만, 4차 점령지까지 전선을 물린다고…? 어째서지?"

그 말에, 총연맹의 전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주었다.

"인족 총연맹에서는, 인족이 진격하는 합체기 마족들을 막아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여, 총연맹은 어차피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는 공령지를 함정으로 삼고자 결정을 내렸습니다."

"…뭐?"

"얼마 후, 총연맹에서 진법사를 보내 공령지에 계멸천공진(界滅天空陣)을 설치하여, 합체기 마족들이 올 때 공령지와 함께 폭파시킬 요령입니다. 마계의 마맥이 쑥대밭이 되고, 공령지는 사용 불가할 정도로 망가질 것이며, 합체기 태수들 역시 공간 폭풍에 휘말려 상당한 부상을 입을 것입니다."

총연맹의 전령은 활짝 웃으며 해맑은 표정으로 총연맹의 의지를 전하였다.

"어차피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자원을, 적이 사용하게 해 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총연맹의 참모분들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군."

"예, 말씀하십시오."

"그 계멸천공진으로 공령지를 폭파시키면… 우리가 점령한 점령지 전체가 쑥대밭이 되겠지…?"

"그뿐이겠습니까? 공령지 너머의 공간 폭풍이 뿜어져 나올 테니, 근방 모든 지역이 공간 폭풍에 휩쓸려, 모조리 쓸려 나갈 겁니다. 합체기 태수들이 안정시키지 않고 자연 상태로 놔둔다면, 장장 1,000년간은 이 근처는 생명이 못 사는 불모지가 될 터! 장기적으로도 마계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만약 마계 합체기 태수가 안정시키는 것을 택한다면 합체기 태수의 진격을 늦출 수 있으니 굉장히 효율적인 전략이지요!"

"…그…렇군. 좋은 정보 정말 고맙네. 하면 일단… 오늘부터 피난을 시켜야겠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관리관이 냉정한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하면, 점령지 내 마계 부족들은… 전부 지금껏 미뤄 왔던 단약화를 진행하겠습니다."

"…뭐?"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볼 일이 없을 테니,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마족들을 부피가 적은 단약으로 바꿔서 챙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애완 마수로 데리고 가도 쓸모가 있겠지만, 피난을 가는 와중에 너무 부피가 큰 물건들을 챙기면 곤란할 테니까요."

"아니, 잠깐. 내 생각에는… 이곳에 남은 마족들은 그냥 멀리 쫓아 버리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리고, 내 말에 총연맹의 전령과 관리관이 나를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전령이 내게 물었다.

"총독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총연맹에서도 이번 피난 작전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계 자원을 가져오며 피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만… 총독님께서 도대체 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건지 알 수 있을지요?"

"그게…."

나는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총연맹의 전령이 다가왔다.

"총독님, 총독님의 모든 행동은 주기적으로 총연맹에 보고되고 있습니다. 점령지에서 가장 온화한 정책을 펼치신 것도 총독님으로 기록되어 보고가 올라가고 있고요. 하여, 총연맹에서는 이런 걱정도 나돌고 있습니다."

총연맹의 전령과 내 눈이 마주쳤다.

"혹여나 총독님이, 진마계 마족들에게 홀려… 마계의 첩자가 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말입니다. 총독님, 저는 총독님을 믿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 인족을 배신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관리관 역시 내게 다가와서 서류를 들이밀었다.

"총독님, 빨리 결단을 해 주십시오. 단약화 작업을 허가해 주십시오."

"총독님, 옳은 결단을."

"지금부터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총독님, 어서…."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재촉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폭포처럼 덮쳐 오는 갈등과 고민 속에서, 나는 겨우겨우 억지로 입장을 정했다.

잃어버린 것 (2)

"불가(不可)."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관리관과 전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전령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숨소리가 방 안에 길게 울렸다.

"…합당한 이유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전령이 얼음장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피난을 갈 때 부피가 줄어들며, 인족 병사들의 수행 증진과 회복에도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마계의 약화를 꾀함과 동시에 차후에 인족에게 단약을 판매해서 얻을 수익까지…. 총독께서 방금 하신 말씀에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 들짐승들을 살리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숨을 들이쉬며, 머릿속에서 이유를 생각했다.

왜일까.

나는 왜, 동족도 아닌 마족들을 살리고 싶어할까.

나는 왜.

나는 왜!

눈앞으로, 내 앞에서 약혼을 하던 젊은 남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와 장기를 두며 한담을 나누던 촉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지난 세월간 총독부 아래에서 생활하던 마족들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나는 그 모든 세월의 모든 기억들을 뇌리에 담은 채.

그 인연들을 등에 업은 채, 눈앞의 인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옳으니까."

그리고, 전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옳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이번 전쟁에서 죽을 수많은 병사들, 수많은 인명들. 그들을 구할 수도 있는 자원을 그대로 포기하는 것이 당신의 선(善)이란 말입니까? 오히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진정한 선(善)이 아닙니까?"

"그건 자네의 선(善)이네."

"인족 총연맹의 선입니다."

"인족 총연맹이 인류를 대표하는가?"

"당연하지요."

"나는 대표해 주지 못하는 것 같군."

"총독님께서 인류를 배신이라도 하겠단 것처럼 들리는군요. 배신이야말로 악이 아닙니까?"

"이보게, 나는 우리 편이니 상대 편이니, 선악이니 하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인족이니 인류니 뭐니 해도, 그들은 내가 아니고 나도 그들이 아니야. 그들의 선은 내 선이 아니고, 그들의 삶은 내 삶이 아니지."

중요한 기억을, 아주 많이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나고 있었다.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

회귀로 인해 시간이 날아가지 않는, 내 모든 인연과 시간이 사라지지 않는 삶을.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위하여, 언제 어느 순간이든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내가 지금 자네에게 말하는 내 선은, 내 삶의 최선이네."

어쭙잖은 논리는 내세우지 않겠다.

내 선은 전령이 말하는 인류의 대의를 위한 선에 비해 하잘것없고, 독선적이고 그저 개인의 아집일지도 모른다.

그저 개인이 내세우는 위선일지도 모른다.

멍청한 헛소리에 개논리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이것이 나의 삶의 방식이네. 내 삶의 방식을 자네에게 강요하진 않겠으니, 자네 역시 자네의 삶을 내게 강요치 말게."

"당신의 자리에서 고집을 부린다는 것 자체가 강요라는 걸 모르는 겁니까?"

"…이만 나가 주게나."

우우웅!

나는 그림자에 숨어 있는 서 장군의 힘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 점령지에서 어차피 중요한 것은 공령지이고, 마족 부족은 7개밖에 되지 않아. 다른 점령지에 비하면 마족들의 수도 한참 적으니, 이 부족들을 다 갈아 넣어 봐야 단약이 몇 개나 나오겠나. 자네들은 광한계로 돌아가게. 남은 인족들이 피난 가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지원하지."

"…총연맹에는 그렇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방에서 나갔다.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피곤했다.

* * *

[총독 대인의 명에 따라, 이 지역에 사는 마족들의 추방을 명한다!]

인족의 마계 8차 점령지.

그곳에서, 수많은 괴뢰들이 날아다니며 마족들을 추방하고 있었다.

마족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자신들이 살아온 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저항하였다.

그러나 괴뢰들은 하나하나가 최소 결단기 급의 전력이었고, 마족들은 저항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총독 관저.

그곳에서, 나는 깊은 한숨을 들이쉬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멸천공진이라….'

마족들을 전부 단약화시키는 것은 막아 냈다.

이 정도는 아슬아슬했지만 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계멸천공진의 설치마저 거부하면 정말로 인족의 반역자가 될 터였고.

창천개벽문 역시 인족의 반역자를 길러 낸 문파로 찍혀 불똥이 튈 터였다.

나로서는, 비겁하지만 진법의 설치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인근에 사는 마족들을 이주시킨다. 멀리, 저 멀리로….'

계멸천공진의 위력은 반경 오백 리를 그대로 날려 버리고, 진에서 뿜어진 공간 폭풍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견 수사."

나는 총독 관저에 데리고 나온 견신에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대인?]

꿈틀, 꿈틀….

견신은 천장에 붙어서 내게 말했다.

"총독부의 인족들은 전부 광한계로 돌려보냈소. 감시인도 없으니 말해 주자면… 당신에게 일곱 부족의 통솔을 맡겨, 그들을 피난 보내고 싶소."

[피난…?]

"그렇소. 인족에서 곧, 대대적으로 학살을 시작할 거요."

계멸천공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간접적으로라도 그에게 의견을 전하기로 했다.

"그러니, 마족들을 데리고 최대한 멀리 인족의 점령지에서 나가 주시오. 최소 일만 리, 일만 리를 떨어져 나가 주셔야 할 거요."

[…뭔가, 인족에서 강력한 병기를 쓰시려나 봅니다. 합체기 최고봉 수사의 공격은 되어야 간신히 나올 법한 단위군요.]

그가 촉수를 꿈틀대며 내게 물었다.

[그런 것을 제게 알려 주셔도 됩니까? 저는 마계 연합군을 만나면 당신에게 들은 정보를 그들에게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견 수사를 풀어 주기가 힘들어지잖소."

[서 수사니까 솔직히 말하는 겁니다. 저는 마계를 배신하고픈 마음도, 서 수사에게 거짓을 말하고픈 마음도 없습니다.]

"…멋지구려. 하지만."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아마 당분간은 도망치시는 데에만 주력해야 할 거요. 다시 말하지만, 일만 리. 최소치가 그 정도고, 어쩌면 그 서너 배는 더 가야 할 수도 있소. 그러니…."

우웅!

나는 저물도를 펼쳐, 옆으로 몇 개의 괴뢰를 꺼냈다.

연진에게 주지 않고 남은 천인기 급 괴뢰들 전부였다.

"괴뢰들에게 명령하겠소. 당신과 마계 부족들을 데리고 가능한 한 멀리까지 도망치도록. 당신은 당신의 정신 능력으로 부족들을 다독여 그들을 이끌어 주시오."

[…알겠소.]

철퍽!

견신은 얼마 후, 천인기 괴뢰의 머리에 달라붙어 바깥으로 나갔다.

얼마 후면 마족들의 정신을 제압해서 강제로라도 전부 바깥으로 끌고 나가리라.

'이제 점령지에 남은 인족도, 곧 죽을 마족들도 대부분 바깥으로 보냈다.'

얼마 후면 나 역시 몸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

'이게 최선인가.'

나는 과연 내가 한 짓이 최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과연 잘 한 것일까.

더욱더 최선의 수는 없었을까.

나는 얼마간 고민하고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한 장의 서신을 쓴 후.

지금껏 나를 지켜 오던 서 장군에게 서신을 들려 주고 의식을 불어넣어 명령어를 입력했다.

"…찾아갈 수 있겠지? 그에게 전달해라."

나는 서 장군을 통해 서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서 장군은 한 줄기 빛살이 되어서 저 멀리로 날아갔다.

아마 그의 속도면, 서너 개월 안에 목표에 도착해서 서신을 전할 터였다.

'…이걸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견신이 마족 무리를 데리고 이 8차 점령지를 빠져나가는 것뿐.

나는 견신과 붙어 있는 천인기 괴뢰들의 감각을 통해, 견신이 지금 어디쯤에 있는지를 파악했다.

'점령지를 거의 빠져나갔군. 그럼 나도 이제….'

그 때였다.

우우우웅!

"…!"

점령지 전체에, 상서로운 기운이 둘러싸이며 점령지 전체를 뒤덮는다!

나는 그 기운에 놀라 황급히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뭣… 이건…!?"

쿠구구구구!

결계!

하늘이, 결계로 뒤덮여 있었다!

8차 점령지 전체가 휘황찬란한 빛살로 덮여, 칠채색 빛무리를 뿜어내는 결계로 덮여 버렸다!

'저건….'

나는 결계의 축을 찾았다.

결계의 축은, 8차 점령지의 마맥에 꽂혀 있는 광한옥이었다.

점령지에 존재하는 7개의 마맥!

그곳에 꽂혀 있는 7개의 광한옥이 7각형의 결계를 엮어 낸다.

그리고, 결계의 위로 어떠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저건… 전령…!?'

아니, 아니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당신… 단순한 전령이 아니었군."

쿠구구구구!

결계진 위로 떠오른 거대한 얼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꽤 돌아가는군….]

"딱 봐도 나를 벌하러 온 것인데, 고작해야 결단기 수준의 전령이 그런 어마어마한 진을 발동시킬 권한이 있을 리가 없지…."

[맞네. 본인은 인족 총연맹 소속 합체기 태수(太修), 위령선이라 한다네. 모든 점령지에 파견되는 전령, 그리고 인족의 각 천공도에 파견되는 총연맹 소속 총령들은, 모두 본인이 공들여 만든 본인의 분신(分身)이지.]

"…!"

[총연맹에서 인족 전체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 그것이 본인의 책무라네. 한데 자네는 어떠한가, 8차 점령지 임시 총독 서은현. 자네에게 주어진 신성한 책무를 내팽개치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전령을 통해 전한 것은 내가 직접 총연맹의 결정을 듣고 자네에게 전한 것이야. 저 아까운 자원들을 낭비하는 건 둘째 치고, 자네는 지금 저들을 바깥으로 내보내려는 건가? 우리 점령지의 기밀과 작전을 누설할지도 모르는 적들을?]

우우우웅!

찌이이잉!

얼굴의 말소리에, 머리가 아파 오며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어졌다.

동시에 태수의 말에 복종하고, 그의 말대로 하고픈 마음이 절절해졌다.

저 말이 옳지 않은가?

저것이 진리가 아닌가?

"…괴, 뢰, 에…."

그러나, 나는 합체기 태수가 내뿜는 존재감을 이겨 내며, 온 힘을 짜내어 말을 내뱉었다.

"명, 령, 을… 해서… 마족들이, 마군과, 합류하는 시기를, 천공진 발동 이후로, 늦춰, 놓았습, 니다…!"

쿠드득!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습니다…!"

쿠웅!

나는 정신력으로 위령선의 압박을 떨쳐 내며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제 쪽에서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이 허약한 결단기 수사 하나 죽일 힘은 있으면서, 진선에게 공격당하는 뇌령도를 지킬 힘은 없었습니까…? 꼴에 합체기랍시고, 진선계의 편린을 구경하려다가 치명상을 입거나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도대체 왜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셨는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태수님?"

잠시 허공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위령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광한옥에 잠재된 결계를 펼친 건 자네와 마족들을 가둬 두기 위함이었네. 자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니… 또한 이 결계는 자네를 가둠과 동시에 내 의지를 자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지. 자네를 체포하는 건, 차후에 계멸천공진을 설치할 진법사가 도착하면 그때 체포할 것일세.]

"하하… 그렇군. 가둬 두는 기능밖에 없다는 거군요."

나는 광한옥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위령선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이 되는 광한옥을 파괴하거나 뽑아 버리려는 건가? 미안하지만, 진이 발동된 순간부터, 광한옥을 건드리면 진은 더더욱 강해질 뿐이라네. 광한옥의 힘이 오히려 더더욱 폭주하며, 종래에는 합체기 수사조차 잠시 발을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진이 될 테지.]

"…고작 결단기 수사 하나를 체포하기 위한 진 치고는 어마어마하군요."

[고작 결단기가 아니네. 그동안 전령의 눈으로 자네를 잘 파악해 본 바, 자네의 총 전력은 사축기 급으로 판단되었지. 그 정도면 적절한 수준인 것 같네만.]

"…."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합체기 태수분들은 어째서 진선에게 치명상을 입으신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진선이 인족의 뇌령도를 공격했길래 지키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뇌령도에서 합체기 분들이 계신 천인도까지의 거리가 상당한 것으로 알며, 거기에 각 천공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상관치 않으시던 분들이 왜 진선이 강림했다고 그리 호들갑을 떠신 겁니까?"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으셨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보인다.

내가 진선을 언급하자, 위령선의 의식에 깃든 탐욕의 의념이 꿈틀거렸다.

탐욕.

그리고 아쉬움, 후회, 수치 등의 색상이 그의 안색에 드러난다.

'합체기 수사들은 이번에 힘을 쓴 진선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었다. 뇌령도를 위해 진선을 막아섰다거나 하는 게 아니야. 진선에게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고, 진선은 합체기 수사들이 원하는 걸 들어줄 생각이 없어,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사라진 것이지.'

감정의 색만 보아도 이야기가 얼핏 짐작이 되는 듯했다.

내 말에, 위령선은 잠시 침묵하다가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알 것이 아니네. 자네는 그저, 이 결계 안에서 진법사 겸 총연맹의 감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저 마족들과 기다리는 것뿐… 이 장막은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면 총연맹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유롭지. 물론 인족 한정이고 타 종족은 진입하지 못하지만… 자네가 정말로 마족과 내통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자네를 구하러 올 마족도 없네.]

"저는 내통하지 않았기에 상관은 없습니다."

[후후, 그건 감찰관이 판단할 터… 감찰관의 곁에 단약사를 딸려 보내니, 이참에 가두어 둔 마족들을 전부 약재로 만들면 될 것이야.]

"…마족들을 자원으로 쓰시려 함이십니까?"

[그게 무언가 잘못되었나?]

"…의미 없는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풀썩!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이 점령지에 남은 인족은 나 하나뿐.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포기한 것인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더니, 잘 되었군. 그럼 총연맹 재판소에서 보지, 8차 점령지 '전' 임시 총독 서은현….]

부스스스….

말을 전한 후, 얼굴은 결계진 속으로 녹아내리며 사라져 버렸다.

'그에게 서신은 보내 놓았다.'

어차피 정말로 마족 합체기 수사들이 도착해도 이렇게 된 이상 인족은 밀리지 않을 터다.

동시에, 나는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지.'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막아 낼 것이다!

우우웅!

내 주변으로, 희뿌연 무언가들이 일렁이며, 사방을 꽉 채웠다.

지난 18년간.

내가 이번 생에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이 이 공법에 기령으로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인물들을 기록해 가며, 기령이 많아질수록 공법의 숙련도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인물들을 기록할 수 있을 정도.

촤르르륵!

주변에서 영기가 뭉치며, 또 한 명의 인물을 기록했다.

방금 나와 얘기를 나눴던 위령선이었다.

'위령선은 내 총 전력을 사축기 급으로 인지하고 이 정도의 결계로 날 가두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날 체포하러 올 감찰관 역시 최소 사축기 급이라는 뜻.'

우웅!

'사축기 수사가 인족 총연맹에서부터 출발해 8차 점령지까지 오려면, 대략 칠 주야는 걸리겠지.'

나는 눈을 빛내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부터 칠 주야 안에, 기억을 찾는다.'

만약 그 안에 기억을 찾지 못하면 어찌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대로 원영기에 들어선다.'

원영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어쩐지 내 무형검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 변화한 무형검이라면 저 결계가 얼마나 단단하든 상관없이 베어 낼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파츠츳!

나는 눈을 감고, 그대로 무명 공법으로 기령을 만들 준비를 하며 원영기에 도전하였다.

'간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원영기에 도달하여….

내 삶에 찾아온 인연들을 지켜 낼 것이다!

잃어버린 것 (3)

나는 눈을 떴다.

츠츠츠츠츳!

수많은 풍경과 장면이 나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보내온 생(生).

내가 원영의 경지에 다시 도전하며 보는 환영들.

본래라면, 일반 수도자들은 원영기를 향해 이렇게 많이 도전할 수 없다.

깨달음이 부족하면 아무리 영약을 많이 먹어도, 원영 그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형검을 통해 더욱더 형이상학적인 차원 자체에 대해 감을 잡았고.

그를 통해 확실한 방향을 통하여 혼(魂)을 도야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기반이 되는 깨달음이 확실하니, 얼마나 원영기에 도전하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전한다…!'

파츠츠츠츳!

'할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이전 생을 돌아보며, 무명의 공법으로 끊임없이 기령을 형성해 갔다.

김연, 창호자, 오현석, 연진, 연위, 위령선, 관리관, 수인과 홍연, 견신, 현운, 괴군….

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 속에 나오는 장면들의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기록해 갔다.

동시에,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심마를 향해 질문하였다.

'나는 왜 기억을 찾으려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인족 총연맹의 정의에 반항적이지.'

'내가 선택한 선(善)이란 도대체 무엇이지.'

'내가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 건가.'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지?'

수많은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오고 갔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가슴 속에 모여 심마의 살을 불려 주었다.

심마가 입을 열었다.

'네가 기억을 찾으려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것이냐.'

'네가 정의에 반하는 것이, 네가 어기는 선이 과연 정말로 정의이며 선의인가?'

'네가 하는 일이 어디를 봐서 옳단 말이지?'

심마는 나를 향해 다가와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저 환상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왜 찾으려 하는 거냐? 그게 정말 쓸모가 있는 건 맞을까?'

숨을 쉬기가 어렵다.

우우우우웅!

등 뒤로, 수천 개의 기령들의 군체가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회차, 그리고 지난 회차의 내 인연들.

'드디어….'

1,000년의 세월 동안 흘러갔던 '지난 회차'의 등장인물들을 전부 기령으로 구현하였다.

단순히, 살아 있고, 나와 꼭 만나서 얘기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저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 잠시 만났던 이들, 서 장군의 몸으로 격살했던 이들 등 무수한 이들을 전부 기령으로 만들었다.

그들과 내 관계는 별것 없었다.

하지만 1,0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무수히 쌓여 온 기억 속의 인물들은, 정말 많았다.

내 기억 속에서 어찌 되었든 자리를 많이 차지하며, 정말로 중요했던, 그 이전 삶들의 자리를 빼앗았다.

'이제, 드디어 이전으로 향할 수 있다.'

나는 심마를 마주 보며 말했다.

"뭐가… 중요한지는 모른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내가 옳은지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른다… 다 잊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심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외쳤다.

"그렇기에, 우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먼지나 다름없으니까…! 벌레나 다름없으니까, 그러니까 더욱더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지, 선한지, 잘하는 것인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그저 작고 작은, 우주의 먼지이자 벌레같은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내가 알고 있었던 것들만이라도, 더 이상 기억이 새지 않도록 잘 보관해야 하는 것이었다.

거친 세상의 앞에서, 너무나도 작은 이 몸으로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도록, 그렇게 모아 온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더는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파아앗!

나는 심상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에도 원영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공들여 오며 어루만진 '이번 생'과 '지난 생'의 기억은, 확실히 기령들로 못 박았다.

동시에, 무수한 기령들을 만듦으로 인해 기령을 만드는 무명 공법이 극성(極成)에 도달하였다!

'이제, 대성(大成)까지 한 발짝.'

기령을 만드는 속도는 이제는 거의 인식의 속도와 동일해졌다.

내가 '인식'만 할 수 있으면 그대로 기령을 만들어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우우웅!

나는 눈을 감고 다시금 원영기에 도전하였다.

하루.

나는 12회차의 대부분의 기억을 기령으로 복제하엿다.

이틀.

이번에는 11회차의 기억.

11회차와 12회차는 굉장히 짧았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흘.

나는 10회차의 기억에 도달했다.

10회차는, 내 생 중에서 가장 격정적이고 감정의 폭이 컸던 회차였다.

'아아….'

향화.

내가 사랑했던 사람.

그 사람과 마지막에 추었던 사위.

마지막에 나누었던 속삭임.

그 감정들….

그때 그 순간, 그 순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령으로 복제하여 기록하였다.

원립에게 복수를 마치기부터, 시작할 때의 모든 순간들.

그 순간들을 담는 데에 하루를 써 버렸다.

나흘째.

나는 200년 동안 내가 봉명성에서 원립을 향해 이를 갈며, 저주인형을 지네 굴에 집어넣어 놓고, 저주인형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의 형상을 기령으로 기록했다.

닷새째.

마침내, 닷새째에는 길고도 짧았던, 그녀와의 10년의 기억.

그 기억들을 기록하고, 드디어 10회차를 전부 기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엿새째.

9회차, 9회차의 봉명성에서 홀로 보낸 200년의 시간들.

그리고 서란과 송진의 모습과, 그 당시 나에게 희망을 주었던 김영훈의 모습을 기록에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레가 되었다.

8회차.

축기기에 오르고, 월도입천에 이르려고 발악을 하던 나와 김영훈의 시간들을 전부 기령에 담았다.

스스스….

어느덧.

내 주변에는 무수한, 셀 수도 없이 많은 기령들이 포진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지나온, 내 삶의 흔적들.

'감찰관이 오면, 그 때에 바로 원영을 얻는다.'

원영기에 오른 상태에서라면, 월수궁무록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천겁을 맞은 직후. 바로 월수궁무록과 함께 감찰관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결계를 무형검으로 파훼하여… 갇혀 있는 마족들과 함께 나간다…!'

그렇게, 나는 감찰관을 기다렸다.

"…."

그리고, 여드래째.

감찰관이라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뭐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계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감찰관이 오지 않는다.

"…하하…."

나는 씨익 웃었다.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나에게는, 천운(天運)이다.

그렇다면 지금 할 일은 한 가지.

'기억을, 마저 찾는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계속해서 공법을 운용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원영기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주마등을 되새긴다.

그리고, 공법을 통해 계속해서 기령을 새긴다.

1,000년간의 기억을 기령을 새겼던 13회차 이후.

무명 공법의 기령 복제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라져, 수 년이 걸렸던 지금까지의 속도를 한참 웃도는 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덕택에 나는 원영에 도전하며 기령을 더더욱 빠르게 형성할 수 있었다.

아흐레.

7회차의 기억을 수습했다.

천뢰를 맞으며 죽었던 일들부터 거슬러 올라가.

등봉조극에 오르며, 천거 현상을 뚫어 냈던 일.

연기기 구결들을 운용하며 수도공법을 익혀 갔던 일.

열흘.

6회차의 기억.

스승님의 앞에서 열 번 절을 올리고 죽었던 기억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스승님이 거목으로 나를 지켜 주었던 일.

그의 아래에서 수 년간 학습하며 수도의 기반을 다졌던 일.

하루에 한 번의 생.

5회차.

제자들을 지켜 주고 오기조원에 도달했던 기억.

4회차.

삼화취정에 오르며 목이 잘렸던 기억.

3회차.

평생을 바쳐서 절정경에 이르렀던 기억.

2회차.

수도자들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수련했던 기억.

1회차.

회귀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기억….

그리고, 최초….

'아….'

어느덧.

내 등 뒤로 부유하는 기령들의 수는, 이내 더 이상 세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아졌다.

김영훈, 북향화, 김연, 오현석, 청문령, 북중호, 송진, 서란, 창호자, 청문중진, 괴군, 서휼, 금벽호, 허곽, 원립, 막리황천, 현운, 막리현, 청문규, 진루연천, 연진, 연위, 현운, 진여운, 벽문성, 벽천기, 만리민랍….

어마어마한 군중 속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최초의 삶을 향한 기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수한 시간이 거슬러진다.

수많은 삶들을 되돌아보며, 나는 잊힌 기억들을 점차 되살렸다.

"이게… 내 삶이었던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먼 과거의 기억을 향해, 발을 옮긴다.

그렇게, 거스르고 거슬러 올라간 그곳에는, 내 최초의 기억이 있었다.

'이것이….'

여전히 빠르게 나를 향해 기억이 쇄도한다.

하지만, 1회차의 기억은 무명 공법으로 기령으로 기록하여 이미 전부 되찾았다.

무명 공법 역시 극성에 달하여, 아무리 빠르게 쇄도한들 기억을 기록할 수 있다!

'와라!'

그리고 드디어.

최초의 기억이, 나를 향해 덮쳐 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