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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 *

휘이이이이!

며칠이 지났다.

청문규를 비롯한 원정대는 광령지 인근을 벗어나, 어떤 곳에 도착했다.

"여기가…."

거대한 전투가 일어났던 흔적.

지반이 뒤집어지고, 거대한 계곡이 몇 개씩이나 생겨난 장소.

그리고, 곳곳에 괴뢰 조각으로 보이는 것이 흩어져 있는 폐허.

"한령족의 부족 한 개가 있던 곳입니다."

서은현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괴군이 다녀갔군요."

청문규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괴군, 이 미치광이 놈 같으니. 하계에 있을 때보다 벌이는 미친 짓의 규모가 장대해졌어."

"…일단, 괴군의 기묘성채가 보이는 곳까지는 이동하도록 하지요."

"…그러지."

그들은 파괴의 참상을 따라 이동했다.

얼마 후, 청문규가 허공에서 멈춰섰다.

광령지 인근 거대한 대수림!

그 대수림의 끝자락, 머나먼 산이 있는 곳 그 끝에, 작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기 보이는군. 괴군의 기묘성채다."

청문규의 말에, 오현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 저, 점 같은 게 말입니까?"

"그래."

"…너무 먼 것 아닙니까? 염탐을 하라고 했는데, 이 정도 거리라면… 염탐이라는 게 가능은 한 건지 모르겠는데…."

"무슨 소리, 염탐이고 뭐고, 저 미치광이의 능력을 낮잡아보면 안 되네. 이 정도가 딱 적정 거리야. 이 이상 미치광이에게 근접하면 잡혀서 개조당할 걸세."

부르르!

괴군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인지, 청문규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하계에서 비승하기 전, 괴군에게 잡혔다가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었나?'

오현석은 청문규가 괴군과 얽혔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5년 동안이나 여기서 괴군을 관찰해야 한다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뭐가 걱정인가, 수도자들에게 5년쯤이야 순식간이지. 아직 사제는 수도공법을 수련한지 얼마 안 되어서 수도자들의 시간 감각이 익숙지 않은 모양이군."

청문규는 껄껄 웃으며 오현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현석은 작게 한숨을 쉬며, 주변 수림의 나무 위쪽에 내려앉았다.

'뭐, 여기서 고민해 봤자지. 일단, 계속 하던 대로 수련이나 계속해야겠군. 그리고 서은현과 얘기를 해서, 틈이 나면 김연 주임도 한번, 찾을 수 있으면 찾아봐야겠어.'

그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부좌를 틀었을 때였다.

'…?'

저 나무 아래로, 서은현이 땅에 손을 짚고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봐, 은현아. 뭘 하는 거냐?"

오현석의 부름에 서은현은 담담하게 말하였다.

"지금부터, 땅 밑으로 기묘성채까지 통하는 회로를 그리려 합니다."

"뭐?"

"제 회로가 기묘성채까지 가서 닿으면, 기묘성채와 괴군의 눈에 띄지 않고도 김연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한번 믿어 주시지요."

"아, 뭐… 믿는 거야 당연한 게 아니냐. 뭘 그런 걸 말하느냐."

"…감사합니다. 혹여나 청문 사형님들은 못 믿으실 수 있으시니 그분들께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뭐, 알겠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는 서은현을 믿었다.

근래에 들어, 아무리 이상하다고는 했지만 역시 그는 자신의 후임이었던 사람.

한때 자신을 따랐던 사람을 믿는 거야, 그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다.

* * *

우우우웅!

5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우우우웅!

오현석의 주변에서, 빛이 회오리치며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구구궁!

그의 기운이 절정으로 치솟았다.

'결단 최고봉, 천상열차분야!'

마침내, 결단기의 끝자락에 도착하였다!

오현석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순히 최고봉이 아니다.'

뭔가 계기만 있다면 순식간에 원영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광령지 인근의 대지에는 늘 기묘한 생명력이 흘렀고, 그 생명력이 오현석의 연체공법에도 상당히 도움이 된 탓에 수행 속도가 한참 빨라진 덕이었다.

"드디어…."

오현석은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드디어, 서은현과 경지 상으로는 같아졌다."

그랬다.

서은현은 5년간 결단기 최고봉, 천상열차분야에 다다르긴 했지만, 원영기의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었다.

결단 대원만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오현석은 서은현과 경지 상으로 동급이 이른 것이었다.

'뭐, 경지 상으로는 동급이라도 아직 전투는 성립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꾸구국….

오현석은 어쩐지, 지금이라면 서은현과 제대로 된 대련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임무 기간도 끝나 가는데, 녀석과 대련을 해 보고, 김연은 어찌할 것인지 한번 물어봐야겠군.'

그는 비둔술을 써서 저 멀리, 땅을 짚고 눈을 감고 있는 서은현에게 다가갔다.

"서은현! 김연 주임하고 연락할 방도는 아직 못 찾은 거냐?"

"아닙니다. 기묘성채에 회로를 접촉시키고 나서, 기묘성채의 통제권 중 십만 분지 일을 탈취하느라 시간이 조금 많이 걸렸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김연 주임과 접촉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냐. 그럼 며칠 후에는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들이 거의 달성된다는 거로구나."

"그런 셈이지요."

"그럼, 얼마 후에는 돌아가게 될 테니 말이다."

오현석의 말에, 서은현이 그를 보며 말했다.

"대련하시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죄송하지만, 김연의 상황을 하루빨리 알아보는 게 우선…."

그리고, 서은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

오현석이 서은현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앙!

푸른 섬광이 서은현을 향해 쏘아졌다.

서은현이 빠르게 회피하며 오현석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 아니, 후… 그런 각오로 오셨습니까?"

"하, 아주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듯이 말하는구나!"

"…."

"예전부터 그랬지. 뭔가 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건 제대로 말하지도 않고, 나와 얘기를 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느냐 하면, 가끔씩 보여 주는 인간적인 그 모습들은 내가 알던 서은현의 모습들이었다!"

쿠웅!

오현석이 발을 굴렀다.

주변의 대지가 진동했다.

"도대체 뭐냐! 뭐가 문제길래 이 세계에 오고, 수련을 받기 시작하며 나와 대화를 피하는 거냐!"

쿠구구구!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너는 누구냐! 내가 아는 서은현이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냐!"

오현석은 서은현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서은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근처에서 대련하는 것은 위험하니, 자리를 뜨지요."

타앗!

그와 함께, 서은현이 땅을 박차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오현석 역시 서은현을 따라 날아갔다.

얼마간 두 사람은 대수림 위를 날아, 한참을 날았다.

반나절을 날았을까, 마침내 대수림 너머, 거대한 황무지의 한복판에 도착한 서은현이 오현석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차장님께서 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 차장이라…."

오현석은 씨익 웃었다.

"대리 달고 난 후부터는 사석에서는 쓴 적이 없는 호칭이었는데, 날 그렇게 부른다라…. 정말 내가 알던 서은현인지, 어디 한번 볼까?"

그와 동시에, 오현석이 기세를 폭발시켰다.

쿠웅!

그가 발을 구르자, 대지가 뒤집어졌다.

그와 함께, 일순간 오현석의 몸이 대지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하지만 서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부웅!

콰아앙!

그리고, 그곳에 숨어 있던 오현석이 모습을 드러내며 서은현을 향해 주먹을 뻗어 왔다.

부웅!

파아앙!

공기가 폭발하며, 서은현은 오현석의 주먹을 부드럽게 받아낸 후 그의 품으로 들어가 손바닥을 뻗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오현석의 몸이 빛나더니, 그가 서은현의 위쪽으로 이동하였다.

쿠구구구!

그가 다리를 내리찍으며 서은현이 있던 곳에 내리꽂혔다.

대지가 폭발하며, 다음 순간 주변이 용암의 바다로 화하였다.

화르르르!

불길로 뒤덮힌 용암의 바다에서, 오현석이 서은현을 향해 쏘아져 갔다.

콰앙, 콰앙, 콰아앙!

오현석의 주먹 일격 일격이, 원영 중기 급의 힘과 속도!

서은현은 비둔술과 보법, 그리고 예리한 기운에 몸을 싣고서 전력을 다해 오현석의 공격들을 피했다.

그리고, 오현석이 몸에 힘을 더더욱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부웅, 부웅, 부웅!

오현석의 속도가 올라간다.

이제는 그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폭발하며, 파공음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리고, 점차 오현석의 주먹이 서은현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기 시작하였다.

'닿는다, 닿는다!'

그리고 마침내.

피이잇!

오현석의 몸이 오채색으로 밝게 빛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서은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퍼어억!

그의 주먹이, 서은현에게 '닿았'다!

쿠구구구궁!

서은현이 뒤쪽으로 밀려나며 저 멀리 황무지의 한구석에 처박혔다.

"후우…."

오현석이 땅에 내려앉으며 씨익 웃었다.

"어떠냐, 이제 조금 나와 해 볼 만한 것 같으냐?"

쉬이이이….

서은현이 내리꽂힌 곳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고, 그 중심에서 서은현이 일어나고 있었다.

덜렁, 덜렁….

서은현은 무표정하게 먼지 구덩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양팔은 부러져 있었다.

치이익….

물론, 그가 한 걸음을 걸어 나올 때마다 생명력이 팔로 몰리며 다시 치유되고는 있었지만.

"…뭐, 확실히 이제는 어느 정도 저를 따라오실 순 있으시군요."

그리고, 그가 오현석을 쳐다보았다.

움찔!

오현석은 순간, 마치 거대한 범을 눈앞에 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일반인이었던 시절, 무기도 없이 호랑이 같은 맹수 앞에 던져진 기분.

등골이 싸하고, 감각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꿀꺽!

'녀석이….'

"그럼, 이제…."

'진짜 힘을 쓰기 시작한다.'

"제대로 싸워 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서은현이 손을 펼쳐 수도(手刀)의 형태로 만들고는,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수도를 가로로 휘둘렀다.

피잇!

"…!!!"

오현석은 생명의 위기를 느낌과 동시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뒤쪽에서 그가 들어 올렸던 지반과, 그가 지반을 흔들어 솟아오른 산들이 가로로 잘려 나가는 것을 얼핏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기술을 써도 될 것 같군요."

씨익….

서은현이, 웃는다.

하지만 오현석은 그것이 '웃는다'라는 감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맹수가 먹잇감을 찾고서, 입을 벌리는 듯한 느낌.

파아앗!

오현석이 황급히 의념의 세계로 진입하며 서은현의 공격을 보려 했다.

어느덧 의념에 대한 그의 이해도는 심화되어, 푸른 선과 붉은 선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오현석은 절망했다.

'피할 수, 없다!'

서은현의 주변으로, 수천, 수억 개에 달하는 궤적들이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그를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궤적'은 연체공법의 오채색의 기운에 덧입혀진 채 오현석에게 쏘아져 왔다.

쿠과과과광!

사방팔방으로 검의 궤적이 난무한다.

의념의 세계 안쪽에서, 오현석은 의념을 통해 서은현이 펼치는 절학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단악검법.

산수화!

쿠구구구구!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피하지 않는다!

우드득!

오현석의 몸에 성광지력(星光之力)이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오현석의 피부로 별빛이 뿜어지며, 오현석의 체내가 반투명하게 비춰 보였다.

그러나 오현석의 체내로 비춰 보이는 것은 근섬유나 피, 뼈와 장기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별하늘!

마치 우주와 같은 성천(星天)이 오현석의 몸 안에서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운행되고 있었다.

일순간, 오현석은 마치 '밤'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이 변화하였다.

카앙, 캉, 캉!

무수한 궤적들이 오현석의 몸을 때렸으나, 궤적들은 오현석의 몸을 파고들지 못하였다.

"이게, 끝이냐?"

파앙!

오현석이 땅을 박차고 궤적들을 맞아 가며 서은현에게 달려들었다.

파츠츳!

그의 주먹에 창령격원결의 푸른빛이 맴돌았다.

오현석은 정신을 집중하며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궤적 하나하나가, 성광호체공의 구결을 발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으면 위험한 것들이다. 내 육체 강도는 성광호체의 구결을 발동하지 않은 맨몸 상태가 원영기 수사 급이니, 하나하나가 원영기 급에도 치명상이란 소리.'

우우우웅!

오현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광호체를 발동시킨 지금은 법력 소모가 너무 빠르다. 빨리 끝내야 해!'

파아앗!

오현석은 서은현의 앞에 도착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자, 이게 끝은 아니겠지? 서은현!"

그리고, 서은현이 미소지었다.

"좋군요. 그렇다면…."

그리고, 오현석은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서은현에게 주먹을 내리치려던 것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콰과과과!

그와 동시에, 서은현의 몸 주위로 시꺼먼 것들이 솟구쳤다.

치이이이….

주변의 땅이 썩어들어 간다.

수천 개의 저주문들이, 원독을 품고 서은현을 둘러싼다.

"수도공법도 한번 써 볼까요?"

"하하하… 빌어먹을 놈."

오현석이 씨익 웃었다.

'지금까지 썼던 건, 수도공법도 아니었다고?'

그리고, 수천 개의 저주문이 마치 촉수처럼 오현석을 노려 왔다.

"음혼귀주."

촤아악!

오현석의 다리로, 몇 개의 저주문이 달라붙었다.

그와 동시에 오현석은 그의 다리가 수 배는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크윽!'

파아앗!

그가 별빛을 집중시키자 저주문이 흩어지며 다시 다리가 돌아왔지만, 오현석은 방금 것으로 느꼈다.

'저주문 하나로 그런 효과였는데, 저 수천 개의 저주문을 전부 맞는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패배한다!

"천린수해."

쿠우우우우!

서은현의 주변에서 촉수처럼 넘실거리던 저주문의 강이, 진도를 그리더니 서은현의 주변으로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저주문으로 이뤄진 썩은 고목들의 숲이 주변을 메웠다.

그리고, 고목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서은현의 저주문들을 증폭시켜 각각 하나하나가 수천 개의 저주문 법술들을 오현석에게 쏘아 내기 시작했다.

"하하, 성가시기만 하다!"

쿠구구구구!

오현석은 호탕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고, 허공을 마구 강타하였다.

그의 주먹에 깃든 푸른 기운이 폭사되며 저주문 법술들을 상쇄한다.

하지만, 서은현이 다시금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꾸구구국!

썩은 고목의 숲 안쪽에서, 서은현과 똑같이 생긴 나무인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츳, 파츠츠츳!

나무인형들을 향해, 서은현이 손을 올려놓자 나무인형들의 위쪽으로 기이한 회로가 깔리기 시작하였다.

'서은현이 다루는 괴뢰 회로!'

쿠구구구!

동시에, 괴뢰들 열다섯 기가 일시에 원영기 급 기세를 내뿜기 시작하였다.

철컥, 철컥, 철컥!

괴뢰들이 일시에 입을 벌렸다.

괴뢰들의 입쪽으로 저주가 섞인 기운이 몰렸다.

오현석은 느꼈다.

저건 못 피한다.

'그렇다면, 맞받아치면 될 뿐!'

촤라라락!

성광호체를 발동시킨 상태에서 오현석은 양 주먹을 쥐었다.

파아아앗!

그의 등 뒤쪽으로 푸른 날개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 쌍, 두 쌍, 세 쌍….

그리고 네 쌍!

"제사익!"

총 여덟 장의 날개를 단 오현석이 서은현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자, 받아 봐라!"

쿠구구구구!

서은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천지간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리고, 서은현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읊조렸다.

"천인기의 일격인가…?"

그와 함께, 빛이 폭발하며 섬광이 사방천지를 뒤덮었다.

서은현의 꼭두각시들과, 오현석의 창익천쇄가 부딪혔다!

* * *

치이이이….

오현석은 숨을 들이쉬며 몸을 일으켰다.

쿨럭!

그가, 피를 토했다.

"뭐… 냐."

눈앞에는 서은현이 있었다.

그리고, 서은현은 다소 그을리고, 상처를 입기는 했다.

하지만, 오현석보다는 한참 멀쩡했다.

"왜, 내가 내 공격에, 상처를 입은, 거지?"

"오 차장님은, 저주술사와 싸우신 적이 없군요. 차장님과 싸우던 중 피를 채취하여, 아까 만들었던 서 장군들에게 먹였습니다. 저주인형을 자기 손으로 공격하셨으니, 그만큼 본인도 충격을 받으신 거겠지요."

"…그런가."

"그래도 오 차장님은 정말로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몰린 것은, 스승님을 제외하고는 정말 오랜만…."

"시끄럽다!"

오현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 차장님이 아니었잖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을 몰아쉬었다.

"형이라고 불렀던 기억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냐! 갑자기 재수 없게 사람을 모르는 척하는 건, 그만두란 말이다!"

그리고, 그가 기운을 끌어올렸다.

촤아아악!

그의 좌반신에서 네 장의 날개가 돋아났다.

"창익천쇄는, 두 번 몰아친다!"

그리고, 서은현은 씁쓸한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콰과과광!

천인기 급 일격이라고 서은현이 평했던, 창익천쇄의 일격이 다시금 서은현에게 쏘아진다.

그리고, 서은현의 뒤쪽에서 다시금 저주문으로 이뤄진 숲이 자라났다.

서은현이 기수식을 잡으며 읊조렸다.

"백란축성."

파아아앗!

저주문들이 일제히 반전되며, 새하얀 백란(白蘭: 백목련)이 되어 피어났고, 서은현의 기운이 폭증하였다.

의념을 넘어, 서은현의 절학명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답천(踏天), 무형검!

슈칵!

그것이, 끝이었다.

"…."

오현석의 창익천쇄는 두 동강이 나서 서은현의 뒷편 양쪽에서 폭발했다.

서은현은 여전히, 피해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인상깊었던 대련이었습니다. 이제…."

그리고.

오현석이 외쳤다.

"아직!"

쿠구구구구!

오현석의 몸에서, 기운이 끓어올랐다.

"안 끝났다!"

그리고, 오현석이 저물도를 열어, 저물도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물주머니였다.

그리고 물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령스러운 느낌의 액체.

"광령성수…!? 그만한 양이면 가격이 어마어마할 텐데…."

그와 동시에, 오현석이 눈을 빛냈다.

"이 생명의 힘… 굉장히 나와 잘 맞더구나. 그리고 말이다."

쿠구구구!

하늘에, 먹장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서은현은 그것을 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잠깐,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오늘!"

오현석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너를, 이기기로 했다!"

쿠구구구구!

그의 기운이 증폭된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푸른 번개가 떨어졌다.

그리고 푸른 번개의 옆으로, 금색(金色)의 번개가 같이 떨어진다.

이색(二色)의 천뢰!

결단기 대원만에 이른 이가, 또다시 천뢰를 맞는다는 것.

그것은 곧, 그 자가 원영기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지지지직!

오현석은 두 줄기의 벼락을 맞으며, 한 발 한 발 서은현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위험합니다! 오지 말고 앉아서 공법을 운용하십시오!"

하지만 오현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서은현에게 걸어갔다.

쿠릉, 쿠르릉, 쿠르르릉!

천뢰에 대지가 패이고, 땅이 유리가 된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천벌 속에서, 오현석은 서은현에게 기어코 도착했다.

서은현은 이를 짓씹었다.

"…그런 각오입니까."

그리고, 서은현이 자세를 잡았다.

"…다시 가겠습니다."

오현석은 말이 없었다.

천뢰 속에서, 담담히 힘을 끌어올릴 뿐.

"백란축성."

서은현의 몸 위로 괴군의 회로가 뻗쳐 왔다.

동시에 축성문의 힘이 그의 힘을 증폭시켰다.

그는 보이지 않는 무형검을 잡아들고, 최대치로 힘을 끌어올리며 기수식을 잡았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서은현의 등 뒤에서도, 세 장의 날개가 돋아났다.

"저 역시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당연히 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굳이 펼치지 않았을 뿐."

파츠츠츳!

서은현의 손에 몰린 푸른 기운이, 무형검과 뒤섞이며 더더욱 예리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천겁을 맞으며 오현석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서은현이 눈을 꿈틀거렸다.

'보라색?'

오현석의 몸은, 보랏빛으로 들끓고 있었다.

서은현은 처음으로 순간 혼란을 느꼈다.

'뭐지, 저건?'

벨 수 없다.

답천에 이른 후, 서은현은 절대적인 자신감을 얻었다.

그의 무형검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

벨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은 서은현 개인의 출력이 부족해서였을 뿐.

이론상 그의 검은 벨 수 없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서은현은 처음으로 혼란을 느꼈다.

벨 수 없다!

눈앞의 저것은, 벨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마치, 아득한 혼돈 같은 느낌.'

자신의 검은 혼돈을 벨 수 있는가?

서은현은 그의 검을 참오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오현석을 쳐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룰지언정, 그걸 다루는 것은 오현석이라는 한 명의 인간. 그렇다면….'

서은현의 눈이 오현석과 그 사이에 수천 수억 개의 궤적을 예지하였다.

'가장 약한 점을 어떻게든, 찾는다!'

우우우웅!

오현석의 등 뒤로, 다시금 날개가 돋아났다.

보랏빛의 날개였다.

다섯 쌍의 날개가, 오현석의 등 뒤에서 돋아났다.

"혼원(混元), 천쇄(天碎)!"

쿠구구구구!

오현석이 주먹을 뻗었다!

보랏빛의 기운이 서은현에게 날아간다.

그리고 동시에, 서은현이 무형검을 휘둘렀다.

"단악(斷岳)!"

촤좌좌좍!

수만 개의 참격이 오현석을 향해 뻗쳐 나간다.

새하얀 참격과, 보랏빛 권격이 부딪혔다.

쿠그그그극!

백색과 자색!

두 빛깔이, 천지를 순간 이분하는 듯했다.

쿠국, 쿠구구국!

그리고, 보랏빛이 새하얀 빛을 점차 짓누르기 시작했다.

점차 백색의 참격들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보랏빛의 폭풍이 앞을 향해 나아간다!

보랏빛의 폭풍이 백색의 참격들을 완전히 먹어치우려는 순간!

쿠르릉!

하늘에서 오현석을 향해 내리치던 천겁이, 마침내 그쳤다.

오현석이, 원영(元靈)을 얻었다!

파아아앗!

천지간의 서광이 일순간 오현석에게 비추는 듯하더니, 오현석의 기세가 강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현석이 두르고 있던 혼원의 기운 역시 스러져 버렸다.

"흐아아아아아!"

쿠구구구!

원영기!

마침내 원영기에 오른 오현석이, 주먹에 더욱더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백색의 빛은 보랏빛이 사라지자마자 다시금 오현석의 영역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오현석의 영역이, 점차 백색의 참격에 그대로 뭉텅이로 잘려 나가며 줄어들고 있었다.

"타아아아앗!"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두 영역이 일순간 폭발하며 섬광을 드리웠다.

치이이이….

오현석과 서은현이 있던 곳.

그곳에, 반경 삼십 리에 해당하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말 그대로 천재지변!

천재지변의 중심.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후후, 빌어먹을."

"…."

"질기구나."

오현석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서은현은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번 일격에 많은 것을 쏟아부은 모양새!

두 남자는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오현석의 좌반신에는 아직 다섯 장의 날개가 남아 있었다.

"…창익천쇄는 두 발. 하지만 너는 두 발의 창익천쇄를 방금의 일격에 몽땅 몰아넣었군."

"…."

"내가 이걸 네게 맞추면, 내 승리다."

서은현은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말했다.

"…맞추면, 말이지요."

"못 맞출 것 같으냐?"

서은현은 투명한 눈으로 오현석을 바라보았다.

오현석 역시 맑고 자신감이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이 달려들었다.

슈릉!

서은현의 손에 투명한 허공이 잡혔다.

그가 눈을 빛냈다.

'방금 전의 공방은, 내가 분명 유리했다.'

오현석이 더욱더 내상을 깊게 입었을 터!

'산외산부진이 있으니만큼, 무형검은 내 상태에 상관없이 그 위력 그대로 사용이 가능하다. 오현석 차장님이 맞추기 전에 산외산부진을 쓰면….'

파앗!

오현석의 주먹과 서은현의 절초가 다시금 부딪친다!

폭발은 방금처럼 거대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오현석 역시 창익천쇄가 한 발 남았다는 듯이 말했으나 그 역시 상당히 기운을 방금 전의 일격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폭발은 작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작은 폭발 속에서 수많은 의념을 주고받으며 반격을 시도했다.

'내가, 이긴다!'

서은현이 눈을 빛내며 오현석의 의념을 차단했다.

오기조원 이상의 고급 경지를 응용할 필요도 없이, 삼화취정 정도의 경지에서만 압박해도, 아직 두 개의 색밖에 볼 수 없는 오현석은 그의 아래였다!

오현석은 이를 악물었다.

'밀리고 있다.'

이대로 지는가.

'그렇군.'

오현석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서은현은 그가 원영기에 이르고도, 한참은 더 수련해야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심지어 아직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그가 더럽고 치사한 방법을 쓰며, '대련'이 아닌 '전투'를 한다면 오현석은 몇 번이고 죽었을 터였다.

'안타깝구나. 그저, 네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다음 순간, 오현석의 눈에 청색과 적색의 선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

두 색의 선은, 오현석이 의념의 세계에 진입한 후 처음 보는 색상을 만들어 냈다.

자색(紫色)!

보랏빛 선이, 오현석과 서은현 사이에 존재했다.

그리고 오현석은 보랏빛 선을 통해 서은현의 의도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서은현이 드러내 놓지 않았던 그의 고민 역시, 아주 조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오현석은 자줏빛 선을 따라, 있는 힘을 쥐어짜 내어 서은현의 사각을 향해, 반대쪽 손을 들어 내질렀다.

동시에!

콰아앙!

오현석의 주먹이, 처음으로 '무방비한' 서은현의 얼굴에 맞았다!

"서은현!"

콰득, 콰드드드득!

오현석의 무(武)의 경지를 절정 수준으로 인지했던, 서은현의 미세한 방심!

그 단 한 번의 방심이, 오현석의 주먹을 허락해 버렸다!

"내가!"

콰드드드드득!

오현석의 주먹에 별빛과 푸른빛, 오채색의 빛이 몰렸다.

그와 동시에, 서은현의 얼굴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이겼다!!!"

콰아아아아앙!!!

서은현의 머리가, 폭발해 버렸다!

서은현은 머리가 박살 나 버린 채, 그대로 목이 없어져 버린 채로 힘없이 주저앉았다.

이 세계에 온 지 수십 년.

그동안 오직 서은현과 대등해지기 위해 수련해 온 오현석의 주먹이, 서은현을 이긴 순간이었다.

* * *

치이이이….

꿈틀, 꿈틀….

결단기 대원만의 경지에 이른 서은현의 머리가, 점차 재생되기 시작했다.

철퍽!

서은현은 바닥에 큰 대 자로 쓰러졌다.

"후우… 빡세군."

"…삼화취정에 오르신 걸, 축하드립니다."

꿈틀, 꿈틀….

안면을 재생시켜 말하며 서은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그래, 마지막에 네 의념을 느끼며 조금 알 수 있었다. 아마 스승님도 모르고, 나 같은, 네 동료였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사실이겠지."

오현석은 서은현을 보며, 착잡한 눈으로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냐?"

"…하하."

서은현이, 웃었다.

주륵….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알고, 있습니다. 오현석 차장님…. 아니, 오 사형(師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친절하고, 믿을 만한 사람인지."

서은현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좋은 사람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오 사형, 당신이, 누군지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예전의 있었던 대부분의 일들이, 도저히 생각이 안 납니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서은현이 쓰디쓰게 웃었다.

"…치매인가 봅니다."

* * *

오현석 사형이 좋은 사람인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사람에게서, 먼 옛날 따뜻한 말을 들었고, 그 사람과 좋은 추억을 쌓았'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 있기에.

그렇기에 더더욱 오현석과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는 1회차 이전의 일들이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세상에서 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어떤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이, 점차 저 아래로 침잠해 가고 있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무미건조하고 최대한 차가운 태도로 오현석이 나와 대화를 나누려는 것을 밀어낸 것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 그와 나누었던 좋은 추억들이 더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더더욱 실감하게 될 테니까.

그 뿌리가 없어진 듯한 공허한 기분이, 내 정신을 좀먹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오현석과 최대한 거리를 두었었다.

"…죄송합니다, 오 사형."

쿵, 쿵, 쿵!

그리고,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 오현석이 걸어왔다.

"뭐, 됐다."

오현석은 나를 일으켜 주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거 아니냐."

그가 친근하게 웃었다.

"오늘부터, 현석 형이라 불러라. 앞으로 기억을 찾을 수 있게, 어떻게든 같이 방법을 찾아 주마."

"…예, 형님."

나는, 어느새 스승님인 창호자와 똑같이 호탕한 미소를 짓는 오현석을 보며 대답하였다.

스승의 은혜 (6)

기억이라는 건 무엇일까.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내가 느낀 바로 기억이란 일종의 '뿌리'였다.

사람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허무하다,

'첫 번째 회귀였나, 두 번째 회귀였나….'

그 이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처음 죽었을 때.

누가 나를 돌봐줬던 것 같다.

강 씨네 아들이었나, 주 씨네 손녀였나.

평범하게 늙어 죽었던 때의 기억이 점차 시간의 흐름에 의해 침잠되고 풍화된다.

당연하게도 그 이전의 기억들 역시 그러했고.

아마, 괴군에게 잡혔던 일천 년의 세월이 가장 문제였던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만.

괴뢰에 갇혀, 오직 괴뢰를 장악하기 위해 천 년을 버텼던 그때.

내 영혼이 너무나도 많이 풍화됐던 것이리라.

내 최초의 삶에 대해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김영훈,

그리고 김연 정도였다.

둘 다 각각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했던 이들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잊어버리려면 전부 잊어버릴 것이지.

왜 애매하게 잊어버린 것인가.

'왜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애매한 기억은 남아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거냐.'

나는 오현석이 주는 광령성수 한 모금을 마시며 방금 소모된 기혈과 정혈을 보충했다.

생명력이 가득한 광령지의 물답게 순식간에 터졌던 머리가 완전히 나아 버렸다.

"자, 이제 돌아가자."

"…예."

나는 오현석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파아앗!

하늘이 일렁이며, 푸른 둔광이 날아왔다.

청문규였다.

"이 미친 놈들! 여기서 뭘 한 거냐!?"

"아… 대련했습니다만?"

오현석의 말에 청문규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듯했다.

"괴군이 알아차리면 어쩌려고 이 난리를 피워!"

나는 청문규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괴군의 시선은 여기까진 절대 미치지 못합니다."

"뭐? 네가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야 당연히, 괴군의 성에서 천 년이나 일해 왔던 입장으로 괴군과 기묘성채의 탐지 범위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미친놈 취급받거나, 간첩으로 고문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괴군의 괴뢰들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는 땅에 괴군의 괴뢰들의 설계들을 그리고, 그 내부 회로와 기관 장치를 그리며 청문규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일전 하계에 있을 당시, 괴군의 괴뢰들이 남긴 잔해를 뜯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와서 본 한령족의 잔해에서도 괴군의 괴뢰 잔해들을 볼 수 있었고요. 그걸 바탕으로 분석해 봤습니다만…."

괴뢰에 대한 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청문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 일단 알았다. 뭐 대충 그렇다 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거라. 이곳은 인족의 구역이 아니라, 이종족의 구역이다. 괜히 이종족들에게 잘못 트집을 잡힐 수도 있어!"

"예, 주의하겠습니다."

나와 오현석은 청문 사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원정대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이 되었다.

* * *

파아아앗!

나는 회로를 그리던 곳에 가서 눈을 감았다.

지반 밑.

그 아래로 괴군의 기묘성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회로를 그렸다.

회로를 그리고, 영력을 부여하는 것 자체는 6개월 정도 걸렸었다.

다만 회로를 기묘성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묘성채에 접속시켜, 점차 기묘성채의 제어권을 느릿하게 빼앗는 데에만 4년이 넘게 걸렸다.

파츠츠츠츳!

'그래도, 이제 끝이다.'

예전에는 장악하는 데에 일천 년이 걸린 회로들.

기묘성채의 회로 하면 이골이 나 있는 몸이었다.

내 기억에, 영혼에 회로가 새겨져 있는 느낌이었다.

타앗!

오현석이 밤늦게까지 회로에 손을 대고서 집중하는 내게 다가왔다.

"…일단, 기억이 어디까지 나는지는 대충 말해 줄 수 있느냐?"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야 들키기가 두려워 입을 닫고 있었으나, 막상 내가 기억이 없다는 것을 들키자 마음이 편하였다.

"김영훈 부장님, 그리고 김연 주임에 대한 기억은 어째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 외엔 딱히 뭐가 없더군요.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아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

한숨을 쉰 그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일단, 네가 그런 줄 몰랐으니… 앞으로 나 역시 기억에 도움이 되는 영약이나, 공법서들을 조금 알아보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현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원영기에 오를 때 있었던 일이었다만, 혹시라도 이게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말해 주마."

"어떤 도움입니까?"

"원영기에 올라, 체내에 원영(元靈)을 생성하던 그 순간. 나는 마치 주마등 같은 것을 보았다."

"주마등?"

"그래, 인생의 모든 순간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는데, 이게 만약 원영기에 오를 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라면 너도 이 주마등 같은 것을 보며 뭔가 기억을 찾을 확률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나는 눈을 빛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원영기에 오르는 것으로 이 기억의 소실을 막을 수도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은 원영기를 목표로 더 수행해 보지요."

아무리 늦어도 원영기에 진입하는 데에 천 년이 다시 걸릴 리는 없었다.

'결단기에 이른 이후, 수명이 600년은 조금 넘을 정도로 늘어났으니, 그 안에 결단기 대원만에서 원영기에 못 이를 리는 없겠지.'

그리고 오현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영기에 이르면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일단 지금은 김연과 접촉부터 해 보자.'

우우우웅!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기묘성채의 제어권 일부를 기묘성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장악한 후.

기묘성채의 괴뢰 중 하나의 눈을 통해 기묘성채 곳곳을 둘러보았다.

'김연이 지내는 곳이라면 아마….'

부우웅!

나는 벌 괴뢰의 몸을 움직여 기묘성채의 내부로 들어가, 기묘성채 안쪽의 장원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부우우웅!

저 멀리, 연분홍빛 경장을 입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김연이 보였다.

나는 우선 기묘성채 전체의 흐름을 읽어냈다.

기묘성채 전체에 흐르는 거대한 유사 의념과 광기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은 괴군의 작업실 방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괴군은 현재 공방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벌 괴뢰로 그녀의 앞에 내려앉았다.

김연이 멍하니 벌 괴뢰를 바라보았다.

나는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식을 움직였다.

'기묘성심전, 발동.'

우우웅!

벌 괴뢰를 장악한 내 의식이 움직였다.

기묘성심전은 진즉 대성한 지가 오래인 공법.

그리고, 기묘성심전의 최종 형태에 따라 내 의식이 올올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내 의식이 마치, 김연의 의식처럼 실처럼 올올이 풀려나갔다.

그것은 마치 범인들의 의식과도 비슷해 보였지만, 범인들의 의념이 각각이 색이 있다면, 기묘성심전의 의념의 실은 모두가 의식 영역과 같이 투명했다.

"어…?"

벌 괴뢰에서 의식의 심이 뿜어져 나오자 움찔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 벌 괴뢰를 통해 나의 의식 실을 그녀의 의식에 접속시켰다.

"이, 이게 무슨…."

―연아.

그리고, 나는 내 의식 실을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

통했다.

그러니, 이제 만나러 가겠다.

파아아앗!

나는 내 옆의 허공에 강환을 띄워 올렸다.

내 의식이 떨어져 나간 분신이 내 옆에 섰다.

나는 강환을 괴군의 회로에 불어넣었다.

츠츠츠츠츳!

회로를 통해 강환이 빠르게 기묘성채 쪽으로 이동하고, 기묘성채에 도착한 강환이 내가 만든 벌 괴뢰에 안착하였다.

그리고, 김연의 눈앞에 '내'가 나타났다.

우우웅!

겉보기에는 동그란 구슬 같은 기운 덩어리.

하지만, 의식을 다룰 줄 아는 그녀의 눈에는, 강환의 진짜 모습이 보일 터였다.

―…잘 지냈니?

나는 강환을 통해 심어를 전달하며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절걱, 절걱….

그녀의 왼손은 어느새 괴뢰 팔로 개조당한 상태였다.

'내가 부탁까지 했는데도, 기어이 이 정도는 개조를 해 놨군.'

우우웅!

그녀의 경지는 현재 나와 같은 결단 대원만의 수준이었다.

이전 생에는 이즈음에 벌써 원영기는 뛰어넘었던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내가 옆에서 기묘성채의 광증을 막아 주고 기묘성심전의 해석을 돕지 않아서 원영기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조용. 괴군이 들을 수 있다. 의식을 진동시켜서, 눈앞에 있는 내 환영에 불어넣어라. 얇은 실을 눈앞에 두고, 그 실 안에다가 네 소리를 불어넣는다고 상상해라.

나는 천천히 기묘성심전의 구결을 그녀에게 알려 주며, 그녀가 의식을 통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도왔다.

[…은현, 오빠…?]

―그래, 나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아….]

"으…."

그녀가, 결국 육성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털썩!

김연은 자리에 주저앉아 괴뢰 팔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해서 울었다.

―…나는 지금 근처에 있다. 근처에서 네게 의식 분신을 보낸 것이니, 일단 기묘성채에서 현재 나올 수는 있는 상황이느냐?

[…네, 나갈 수는 있어요. 다만 기묘성채 근방 100리를 넘어서면 천인기 급 괴뢰들이 감시역으로 따라붙어요.]

―그럼 됐다. 천인기 급 괴뢰들을 데리고 우선 나오너라.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오랜만에 다시 보자꾸나. 내가 말하는 곳으로 나와라. 우선….

* * *

치지직….

괴군의 회로를 통한 연결이 끊겼다.

이 이상 기묘성채에 접속하면 기묘성채가 알아차릴 수도 있을 터였다.

"…현석 형님."

"뭐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김연 주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 정말이냐?"

"예, 저희가 싸웠던 황무지 쪽으로 올 예정입니다. 현석 형님도 만나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지, 옛 동료를 보는 건데!"

나는 오현석과 함께, 다시금 우리가 대련했던 황무지로 나아갔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커다란 달이 떠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기이하단 말이지.'

이 광한계는 수계보다도 훨씬 거대할 터였다.

정말, 대충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거대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 '달'이라는 게 떠 있는 걸까.

'어쩌면 저것도, 달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나는 달을 노려보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파아아아앗!

저 멀리서 괴뢰들의 느낌이 이쪽으로 느껴졌다.

'괴뢰들이 오자마자, 괴뢰들의 괴뢰 회로를 제압한다.'

기묘성채에서 떨어진 상태의 괴뢰들이라면, 얼마든지 빠르게 회로를 제압할 수 있다.

괴뢰들의 원영기든 천인기든, 천 년간 괴군의 회로를 다뤘던 내게는 상성이 극단적으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괴뢰들에게 휩싸여서 오는 김연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의념의 색이 왜….'

오싹!

그리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옆에서 기다리던 오현석의 몸을 잡고 옆으로 피했다.

타앗!

늙고 쭈글쭈글한 손가락이 내가 있던 자리의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김연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 도망치세요, 오빠!"

"흐히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릿, 찌릿….

사축기 급에 도달한 노괴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공방에서 나와 보니, 제자가 잔뜩 들뜬 의념으로 어디를 가려 하길래 살펴봤더니, 머릿속으로 온통 네 생각을 하고 있더구나. 그래, 서은현이라 했던가? 드디어 약속을 지키러 온 게로구나!"

괴군이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내가 언젠가 기묘성채로 찾아가 김연의 괴뢰가 되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

물론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으나, 그걸 믿은 모양인지 괴군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괴군의 옆으로 몇 기의 괴뢰들이 더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사축기 급의 괴뢰들.

그리고 사축기 최정상급의 힘을 지닌, [그녀] 역시 그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현석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김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를 무슨 괴뢰로 개조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동화가 있었거든. 일국의 왕녀를 마도 수사로부터 구하기 위해 타국의 왕자가 와서 구해 주는 그런 동화였었나. 제자를 위해 망설임도 없이 괴뢰가 되겠다는 네 모습을 보고, 나는 마치 네가 왕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왕자'는 어떠냐? 그래, 왕태자! 너를 '서 태자'로 진화시켜 주마! 마음에 들지 않으냐?"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 장군 외에, 다른 건 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나와라, 진본(眞本) 서 장군."

쿠구구구구구!

내 등 뒤에서, 괴군과 뒤지지 않는 기세를 지닌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의 은혜 (7)

"오호…."

괴군의 눈에 호기심이 번들거리는 듯했다.

그가 서 장군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놀랍군. 회로를 완벽히 재현했어. 하지만 재료가 애매하군. 사축기 급 괴뢰기는 하다만, 온전한 사축기의 실력을 내는 건 절대 무리구나."

그가 씨익 웃으며 서 장군의 곳곳을 가리켰다.

"일단 관절 사이에 있는 연결 부분들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어. 저러면 무리한 움직임이 있으면 관절부터 무너질 게다. 그리고…."

괴군은 서 장군의 가장 큰 약점을 정확히 짚어 내며 말했다.

"무엇보다, 동력로가 빈약하군. 안쪽에 광령성수로 어떻게든 동력로를 최대한 만든 것 같은데…. 그걸 가지고는 사축기 급의 위력을 낼 수가 없다. 기껏해야 사축기 수도자의 일격을 서너 번이나 재현할 수 있을까? 물론 그것만으로도 천인기 이하에서는 적이 없겠지만 솔직히… 제대로 만들어진 괴뢰는 아니구나."

나는 괴군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으음?"

"사축기 수도자의 일격 서너 번이 아닌, 단 한 번의 공격만을 할 수 있게 설계된 괴뢰지요.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서 장군의 우반신으로 거대한 힘이 몰렸다.

그와 동시에, 서 장군의 우반신 뒤쪽에서 여덟 장의 푸르른 날개가 돋아났다.

우우우웅!

서 장군의 오른팔에 별빛이 깃들고, 오채색의 빛이 서 장군을 뒤덮었다.

그 모습을 본 오현석의 얼굴에 놀란 기운이 감돌았다.

"제, 제팔익!"

창익천쇄, 여덟 번째 날개.

이 사축기 급 서 장군은, 가진 힘을 모두 짜내어 단 한 번.

사축기의 극한에 다다른 공격을 내지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연체술과 괴뢰술을 동시에 익힌 나였기에 만들 수 있는 괴뢰.

그것이, 이번 생에 만든 서 장군이었다.

그 모습을 본 괴군이 킬킬 웃었다.

"놀랍구나. 창호자 녀석의 절기가 아닌가? 후흐흐…. 창호자의 밑에 들어가서 배우더니, 상당히 멋진 걸 만들 수 있게 되었군."

나는 잠시 괴군을 보며 말했다.

"예, 보시다시피. 저는 창호자의 밑에서 눈부신 성장을 이뤘습니다. 현재의 저는 천인기 이하에서는 사실상 적이 없는 수준이지요."

"그래, 그 정도라면 충분히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구나?"

"맞습니다. 하나, 과연 김연도 그럴까요?"

"흐음?"

"제가 와서 보기에, 물론 괴군께서도 연이를 충분히 잘 가르치셨지만 제 눈으로 볼 때는 몇 가지 부족한 것이 보였습니다."

어차피 괴군을 만나게 된 것.

아예 오늘.

이 자리에서 그와 단판을 짓자.

"흐으으으으으음…."

괴군이 눈알을 뒤룩거리며 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얼마간 뒤룩거리는 눈동자로 내 전신을 훑어보던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나는 침을 삼켰다.

괴군의 광증이,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의 상태.

지금부터는.

한 마디라도 잘못 내뱉으면 그대로 개조당한다.

"대인의 공법을 대성하지는 못했더군요. 제가 알기로 대인의 의식공법인 '기묘성심전'은 인간의 의념을 수도자의 시선에서 분석한 것이라 압니다만. 맞습니까?"

"그래."

"그리고 창호자의 아래에서 공부한 것입니다만, 창호자께서도 역시 삼화취정의 단계에 오르셔서 의념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셨더군요."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면, 연이에게도 무공을 가르치면 연이 역시 삼화취정에 올라 의념의 색을 보고, 그를 기반으로 가묘성심전 역시 더욱더 대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공을?"

괴군의 눈 안쪽에 있는 광증이 더더욱 심해졌다.

"내 제자가 무공을? 왜?"

나는 월도답천에 이른 경지로, 내 심상을 조절해 괴군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게 조절하며 괴군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말 없이 토둔술로 옆에 있는 땅을 헤집어, 두 자루의 흙 창을 만들었다.

두 자루로 된 단창.

나는 단창을 잡고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에 춘 춤은 쌍선무의 자세와 똑같았다.

그러나 쌍선무에서 시작된 춤은 점차 단창의 경로에 의해 드러나며 하나의 무(武)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괴군의 눈이 커져 갔다.

총 8초식으로 된 창법의 초식.

나는 두 자루의 창을 잡고, 안정성과 조화성, 그리고 무결성을 추구하는 창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내었다.

파앙!

두 자루의 단창은 마지막 초식에서 한 자루의 창으로 합쳐지며, 1초식부터 이어졌던 두 자루 단창의 춤사위가 마지막 초식에 이어지며 최후 절초를 강화시키는 초식이었다.

두 자루의 단창이 이어지는 동시에, 1초식부터 이어진 힘의 기세가 일 점 집중되는 최후의 찌르기.

그것이 이 이름 모를 창법의 마지막 절초였다.

나는 괴군의 앞에서 창법을 마친 후 괴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흠칫 놀랐다.

'저 눈빛은….'

맑다!

괴군의 눈빛은, 지난 생의 마지막에 봤던 맑은 눈빛과 비견될 정도로 맑았다.

"…좋은 걸 보여 주었구나. 가거라."

"예…?"

"어서 가라고 하였느니라.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며 잠시 광증이 물러갔다. 다시 광증이 도지기 전에 어서 가라."

"…허…."

이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이야.

그 광경을 옆에서 바라보던 오현석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저, 괴군 노인장. 노인장의 앞에서 이 서은현 녀석이 계속 춤추고 있으면 문제없는 거 아니오?"

"큭큭…. 그거 재밌는 소리구나. 하지만 원래 모든 약은 계속 사용하면 내성이 생기는 법. 사람의 의식에도 그건 똑같은 말이다."

괴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처음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계속 보다 보면 다음부터는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 모르는 일이다. 방금 전에 네 녀석의 춤사위를 보고 잠시 정신이 든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 어서 가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연이도 데리고 가겠습니다. 허해 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문득 괴군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녀석은, 해야 할 일이… 있…."

"…언젠가 다시, 연이가 당신에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면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연이가 해 줄 수 있도록."

"끄…으윽… 너…."

광증이 도지기 시작하는 듯.

괴군이 나를 보며 괴로운 눈으로 물었다.

"너…. 네가 내가 바라는 게 뭔지… 안다는 말…이냐?"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괴군의 눈동자가 바싹 졸아들었다.

"…그래, 그럼 어디… 해 봐라…."

그리고, 나는 대답과 동시에 서 장군을 통해 오현석과 김연의 팔을 붙잡고, 빠르게 우리의 야영지가 있는 곳으로 비둔술을 써 날아갔다.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괴군이 있던 방향에서 광대한 의식 파동이 울려 퍼졌다.

[어디가어디가어디가어디가어디가….]

쿠구구구구구!

저 멀리, [그녀]가 내뿜는 새하얀 광채가 비춰 온다.

동시에, 괴군과 [그녀]가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게섯거라게섯거라게섯거라게섯거라게섯거라게섯….]

"대, 대리님! 그냥 절 놓고 가세요!"

"됐다. 현석 형님, 괴군은 우리를 쫓아올 테니, 현석 형님을 야영지에 던져 드리겠습니다. 현석 형님은 지금 상황을 사형님들께 알리고, 광령지 인근 전송진으로 가서 대기해 주십시오."

"그, 그래!"

나는 서 장군의 팔을 들어, 오현석을 야영지가 있는 곳으로 던져 버렸다.

그런 후 우리를 따라오는 괴군을 따돌리기 위해 서 장군을 타고 미친 듯이 대수림 곳곳을 날아다녔다.

'기묘성채 방향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 그 주변에는 괴뢰들이 미친 듯이 많이 포진하고 있을 테니. 광령지 인근으로 가는 것도 안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나는 머리를 굴리며 도주로를 궁리한 후.

최적의 경로를 찾아냈다.

"서 장군, 오행장원전 발동!"

나는 서 장군의 체내에 흐르는 오행장원전의 구결 회로를 통해 공법을 발동시켰다.

서 장군의 몸에서 오채색의 빛이 뿜어졌다.

파츠츳!

그와 동시에 서 장군은 대지에 가까워졌다.

푸확!

나는 서 장군과 함께 토둔술을 써 땅 아래로 녹아들었다.

'땅 밑까지 쫓아올 수 있소, 괴군?'

쿠과과과광!

그러나 내가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

나와 서 장군이 숨어들었던 땅의 지반 자체가 드러나며 저 위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숨었다고못찾아낼줄알았느냐네이놈감히내제자를데리고….]

파츠츳.

하지만 나는 서 장군을 통해 다시금 더더욱 깊은 곳의 땅 밑을 파고 토둔술로 내려갔다.

땅을 파헤쳐서 단박에 찾아냈다고?

더 깊이 들어가면 뭐 어쩔 건가.

콰앙, 콰앙, 콰앙!

그렇게, [그녀]가 땅을 파헤치고 [서 장군]이 토둔술을 펼쳐 더더욱 깊숙이 땅 밑으로 숨는 기묘한 추격전이 계속되었다.

우우우우웅!

그러던 중.

나는 내 품속에 있던 전음부가 미친 듯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청문규가 보내는 전음이었다.

나는 전음부를 발동시킨 후, 악을 지르듯이 대답했다.

"궁금하신 게 많겠지만, 우선 전송진 근처에서 빨리 전송진을 열고 대기해 주십시오! 곧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파츳!

나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전음부를 꺼 버린 후 위쪽에서 우리를 쫓아 내려오는 [그녀]와 괴군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한 번의 기회. 그걸 놓치면 안 된다.'

수도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천하제일인이 몇 번의 생을 갈아 넣어 만든 무공.

부우우웅!

월수궁무록의 기운이, 내 전신의 무형검에 맴돌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이다. 모든 집중력을 짜내라!'

쿠웅, 쿠웅, 쿠웅!

[그녀]가 점차 가까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쿠웅!

마침내, 서 장군이 토둔술을 펼치기도 전 [그녀]가 흙을 파내고 서 장군의 바로 뒤쪽으로 따라왔다.

그리고.

"서 장군! 날려라!"

아까 전 준비해 놓았던, 서 장군을 통한 창익천쇄의 일격이 발동되었다!

여덟 장의 날개!

쿠구구구구구!

어마어마한 빛의 와류가, 서 장군의 주먹에서 발동된다!

[그녀]는 피하려는 듯했지만, 애초에 순수한 무공 경지는 기껏해야 오기조원일 터인 [그녀]로서는 월도답천에 이른 내가 조작하는 서 장군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피할 방향을 예상하고 그곳을 향해 서 장군의 팔을 내뻗었다.

콰과과과!

푸른 섬광이 [그녀]의 상좌반신을 으스러트렸고, 그 너머에 있는 괴군을 향해서까지 날아갔다!

콰아아아앙!

괴군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그를 통해 일순간 괴군의 의식이 요동쳤다.

'지금이다!'

"서 장군, 자폭!"

파아아앗!

나는 서 장군의 위쪽으로 올라가, 연이를 안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서 장군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마침내 폭발하였다.

파아아아앗!

나는 그 폭발력을 이용해서 빠르게 지금껏 파 온 구덩이를 날듯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구덩이 끝에서 막 서 장군의 공격을 피한 괴군과 눈이 마주쳤다.

"너…."

그리고, 나는 괴군을 향해 한 마디를 내뱉어 주었다.

"다시 돌아와서, 연이가 연의 연을 끝마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조금만 참아 주시지요."

"…뭣?"

'연의 연'을 언급한 내 말에, 괴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괴군의 의식이 요동쳤다.

나는 그 틈새를 노려 기묘성심전을 발동하였다.

기묘성심전을 통해, 괴군의 기묘성심전과 찰나 동안 감응하며 현재 그의 의식의 가장 약한 틈을 찾아내었다.

월수궁무록.

극의.

노중로무궁!

파아아아앗!

내 의식이 일 점 집중되었다.

하지만 의식은 이전과 같이 점(點)의 형태는 아니었다.

이번에 발현된 노중로무궁의 수법은, 하나의 검(劍)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월도답천에 도달한 내 무형검!

그 무형검을 압축하여, 기묘성심전으로 파악한, 현재 괴군의 의식이 가진 가장 약한 점을 찌른다!

피이이잇!

일순간 빛살이 번뜩이는 듯하더니, 괴군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끄아아아아아악!!!]

단순히 노중로무궁의 수법이 아니었다.

의식을 집중한 다음, 거기에 저주문까지 한가득 몰래 담아 놓았다.

'저주, 발동!'

파츠츠츳!

[이노오오옴!!!]

괴군과 나의 현재 차이는 인간과 벌레 정도의 차이였다.

하지만, 나는 독을 가진 독벌레였다.

잠깐 쏘이면 치명상은 아닐지언정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가 고통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놈들을쫓아놈들을쫓아놈들을….]

쿠구구구구!

그와 동시에, 괴군을 따라왔던 사축기 괴뢰들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품속에서 전음부를 꺼내 들어 외쳤다.

"청문 사형! 전송진 준비는…."

[됐다! 서은현 이 망나니 같은 놈, 어서 오기나 해라!]

"옛!"

나는 그와 동시에 연체술로 단련된 육신의 힘, 무형검을 덧씌운 답천의 속도, 비둔술의 힘을 모두 합쳐 미친 듯이 광령지 인근 전송진을 향해 날아갔다.

쿠구구구구!

비승 첫날 괴군이 잡아 괴뢰로 개조한 녹갑 목인 괴뢰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파아아앗!

'찰나다.'

괴군의 괴뢰로 천 년을 지냈다.

사축기 급 괴뢰가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는지 정도는 빠삭했다.

츠츠츳!

나는 무형검을 바르쥔 채, 무형검의 안쪽을 조정하며 안쪽에 괴군의 회로들을 깔았다.

그런 후, 나는 허공을 향해 월수궁무록을 사용하였다.

피이잇!

일순간 사축기 괴뢰가 나를 찾지 못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원유!'

나는 그 틈을 타서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던 살덩이를 꺼내 들었다.

촤라라라락!

살덩이가 펼쳐지며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기묘한 느낌의 미인이 내 옆에 나타났다.

"혈체피갑!"

촤라락!

원유의 몸이 열리며, 내 몸을 뒤덮었다.

김연은 그 모습을 보며 순간 놀라는 모양이었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가자!"

파아앙!

내 비둔술 위로, 원유의 비둔술 역시 겹쳐지며 둔광의 속도가 더더욱 올라갔다.

순식간에 사축기 괴뢰에게서 멀어지는 듯싶었으나, 이내 사축기 괴뢰가 시야를 조정하며 다시금 나를 찾아냈다.

'제길, 벌써 끝이냐.'

괴군의 괴뢰들은 인공 혼이 들어 있어 반쯤은 자의적인 판단도 가능하고, 일반적인 기관 장치에 비해서 훨씬 똑똑했다.

그렇기에 의식을 베어 내서 인식을 피하는 월수궁무록도 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괴뢰는 괴뢰.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정을 하면 월수궁무록은 소용이 없었다.

파아아아앗!

녹빛의 둔광이 뒤쪽에서부터 나를 잡으려 번뜩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 멀리, 전송진이 있는 곳이 보인다!'

광령지 인근의 부족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옆.

작은 사당.

그 안쪽에, 인족과 통하는 전송진이 있었다.

인족이 전송진을 통해 도시 안쪽에 바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한 부족에서 저렇게 자신들의 도시 바깥에 전송진을 설치한 것이었다.

'오히려 고맙군. 지금 같은 때에는 쓸데없는 검문도 필요 없을 테니!'

번쩍!

녹빛이 번뜩이며, 사축기 괴뢰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제길!"

나는 망설임 없이 내 다리를 잘라 버린 후, 다리에 저주문을 잔뜩 불어넣어 주고 다시금 날아갔다.

퍼어어엉!

뒤쪽에서 저주가 폭발했으나 사축기 괴뢰는 저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다시금 나를 쫓아오려 했다.

"회로, 동결!"

파아앗!

그러나 내가 수결을 맺자, 저주문 안쪽에 넣어 둔 괴군의 회로에 쓰이는 명령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가 사축기 괴뢰의 몸을 잠시 멈췄다.

'멈춰 둘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약 10초.'

우우우웅!

나는 내 금단 안쪽의 수행 경지를 불태워 가면서까지 비둔술의 속도를 높였다.

'5초 남았다!'

콰아아앙!

나는 사당 앞쪽으로 폭격하듯이 떨어져 내렸고, 사당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당의 안쪽에는 전송진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청문규가 전송진을 발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형! 발동시키십시오!"

'4초.'

타닷!

나는 연이를 끌어안고 전송진의 안쪽으로 도착했다.

'3초.'

파아아앗!

전송진이 발동하며, 전송진의 바깥과 안을 차단시키는 결계가 발동했다.

'2초.'

우우우웅!

전송진의 아래쪽에 있는 진법도가 회전하며 반대쪽에 있는 전송진과 연결되었다.

'1초…!'

우우우우웅!

"전송진, 발동!"

우리는 빛에 휩싸였다.

파아아앗!

그리고.

눈앞에서 녹빛이 번뜩이며, 전송진의 차단 결계를 뚫고서 사축기 녹갑 목인의 팔이 들어와, 내 머리통을 단단히 붙잡았다!

격변(激變) (1)

콰드드득!

녹갑 목인 괴뢰의 손가락이, 두개골을 파고든다.

그리고 두개골 안쪽, 상단전에 자리 잡은 내 혼(魂)이 괴뢰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크윽…!'

파아아앗!

그와 동시에, 전송진이 발동했고 우리는 공간을 넘기 시작했다.

피이이이잇!

빛의 광류가 흐르며, 우리는 인족 영역을 향해 이송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따라와…!'

우드득!

내 혼백을 잡고 있는 괴뢰가, 사축기의 경지를 이용하여 공간을 넘어, 전송 그 자체를 따라오고 있다!

우우우웅!

'혼백이, 뽑혀 나간다!'

머리가 잡힌 게 문제가 아니었다.

머리통이야 잘라 내도 다시 자라난다지만, 사축기 괴뢰의 회로가 내 혼백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혼백이 뽑혀서 그대로 육신만 전송당하게 될 터였고, 그러면 볼 것도 없이 다음 생이었다.

'아니, 다음 생이 아니라 괴군에게 영혼만 잡힐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역시 최악이다!

"빌어먹을 서 태자든 서 세자든…."

카각, 카가가가각!

나는 전송의 빛에 휩싸여 공간을 넘어서며, 아직까지도 따라붙어 있는 사축기 괴뢰의 양손을 붙잡았다.

"어느 쪽도 다 싫으니까…."

키이이잉!

혼백을 이용해, 괴뢰의 회로를 역으로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꺼지란 말이다…!"

우우우웅!

크드드득!

점차, 내 힘에 괴뢰의 손이 밀려 나가며, 괴뢰의 몸체가 전송의 빛 너머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나, 괴뢰는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쓰며 전송의 빛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으려 했다.

"흐아아아아!"

그리고, 내가 악을 지르며 괴뢰를 밀어낼 때였다.

쿠웅!

내 뒤쪽에서 굵은 손과 얇은 손.

두 개의 손이 괴뢰를 각각 잡았다.

오현석과 김연이었다.

"꺼져라!"

"괴군에게로 돌아가!"

오현석은 연체공법으로 얻은 무식한 완력으로.

김연은 기묘성심전으로 괴뢰에 접속하여 점차 괴뢰를 밀어내며, 그렇게 각각이 나를 도왔다.

쿵, 쿵, 쿵!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괴군의 장난감 주제에, 내 사제들은, 못 잡아간다…!"

청문규를 비롯해, 같이 전송의 빛 속에서 전송되던 창천개벽문의 사형과 사저들이 힘을 몰아주었다.

그들의 두꺼운 팔뚝이 각자 괴뢰를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파아아앙!

괴뢰의 손이 내 머리통에서 떨어졌고, 나는 법력을 쥐어짜 냈다.

"창익!"

쿠구구구!

등 뒤로 세 장의 날개가 자라난다.

내 오른손에 푸른 와류가 맴돌았다.

"천쇄!"

쿠과과과광!

광대한 빛이 괴뢰를 바깥으로 떨쳐 낸다.

사축기 급의 녹갑 목인으로 만들어진 괴뢰는, 마침내 전송의 빛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며 허공간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피이이이잇!

그리고 드디어.

번쩍!

우리는, 인족 총연맹 본좌.

천인도의 전송진이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짧고도 길었던, 괴군 임무가 끝난 것이었다.

* * *

휘이이이이―

밤바람이 부는 대지

광령지 인근의 황무지에서, 괴군은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의 눈 안쪽에서는 광증과 이성의 빛이 번갈아 가며 드러났고,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쥐고 있었다.

"…내, 연의 연을, 알고 있었다…."

"잡아서개조해봐야해잡아서머리통을뜯어보면…."

"아니야, 그럴 필요 없다…."

"놈이내제자를데리고갔어이제연의연을어찌완성시키려한다는말이냐그말도안되는목표치를다채워야만…."

"그만! 그만! 조용히 해라! 크윽! 어차피, 녀석이 연의 연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나 같은 미치광이 노인 밑에서 수련 받아 연의 연을 발동시키는 게 아닌, 제대로 수행하여 경지를 높이고 연의 연을 발동시켜 준다면…."

스르르….

괴군의 독백이 이어지며, 그가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때마다 괴군의 눈에 깃든 광증이 잦아들었다.

"…아아. 그래, 다시 볼 수 있어. 그때의 그 순간을…."

괴군은 하늘 위를 떠다니는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를 부축해 주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모두들…. 연의 연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길고 긴, 이상하고 아름다운 모든 인연이 해소될 그 날이…."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괴군은 눈을 감으며 미소지었다.

"…비익창(比翼槍)을 그런 녀석 손에서 보게 될 줄이야. 간만에, 추억을 돋게 해 주어서 고맙다…."

이미 달아나 버린 서은현에게 나직이 감사 인사를 하며, 괴군은 다시금 포근하게 광기 속으로 침잠해 갔다.

* * *

인족 영역, 시운도.

나는 김연을 데리고, 비승한 인족이 와서 신분 패를 증명받는 시운도에 와서 그녀의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

다만 김연은 '괴군의 제자'였다는 이명 때문에, 한동안 천인도에 있는 총연맹으로 불려가서 자세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조사를 받으면 모든 일이 끝날 줄만 알았다.

"…예?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물론이고, 오현석 역시 창호자가 한 말에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만큼 창호자가 김연을 데리고 온 우리에게 한 말은, 탐탁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그 말을 전해온 창호자 역시 상당히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구나. 하지만 어쩌겠느냐, 솔직히 말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게 그녀에게 더 나은 건 맞긴 하다."

그랬다.

'괴군의 제자' 김연이 인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전 인족에 알려졌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번에 비승을 같이 해서 김연의 재능에 대해 알고 있는 흑색귀골곡과 금신천뢰문이 김연을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희 창천개벽문의 사람들이 임무를 맡아, 창천개벽문의 힘으로 구했습니다만, 도대체 그들이 뭘 했다고 김연을 요구하는 겁니까?"

"…후우, 뭐 보상도 상당히 해 준다고 하고, 여러 미사여구를 붙여서 설명하긴 했다만, 그 놈들 본심은 이거겠지."

창호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금신천뢰문과 흑색귀골곡에서 왔다는 서한들을 구겨 버렸다.

"일문성체를 지닌 오현석과, 홀로 비승한 서은현 너를 현재 창천개벽문에서 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알이 꼴린데, 거기에 괴군의 제자로 들어갔던 김연 역시 우리 쪽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인 게다. 그러니 적당히 형평성에 맞게 자기들한테도 사람을 나눠 달라는 게지."

"…."

뿌드득….

나는 사람을 무슨 물건 취급하는 그들의 행태에 짜증이 치솟았다.

"나도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두 문파에서, 김연을 자신들 두 문파 중 한 곳에 보내서 형평성을 맞추지 않으면 오현석의 재능과 김연의 재능, 그리고 연기기도 안 된 몸으로 홀로 비승한 서은현 네 비밀을 사방에다 뿌리고 다니겠다 하더군."

"…치졸한 건 둘째 치고…."

나는 화를 참으며 말을 이었다.

'두 문파는 보내면 안 된다.'

한 문파는 근시일 내에 멸문이 확정됐고, 한 문파는 500년 안에 강민희가 폭주해서 망해 버린다.

"그들에게 있는 천상금뢰지체와, 귀도음화선근의 인재 등을 우리가 발설하지 못하리란 법은 또 뭡니까?"

"…그렇게 되면 공멸이지. 안 그래도 합체기 노괴들이 인족 영역에 잔뜩 몰려 있는 지금, 그런 보물들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인족 영역 전체가 전쟁터가 될 테니."

창호자가 한숨을 쉬었다.

"뭐,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본문에는 김연이 익힐 만한 공법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오행장원전을 수련시키면 내 장담하건대 열흘도 안 되어서 김연은 창천개벽문에서 탈출하려 할 게다."

"…."

"지금까지는 연약한 연기기, 축기기들을 잡아다가 수련시켰기에 도망쳐도 잡아 올 수 있었지만, 저렇게 사축기 급 의식을 지닌 아이를 잡아다가 수련시키면, 도망치는 걸 잡기도 쉽지 않아."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하긴, 괴군의 개조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난 김연이었다.

홍령체는 토, 목 속성의 영근이었으니, 아마 그녀라면 두들겨 맞는 수련과 생매장당하는 수련을 병행할 확률이 높았고, 그걸 겪는다면 열에 아홉의 확률로 공포에 질려 창천개벽문에서 탈출할 게 뻔했다.

'어차피 창천개벽문에서 못 버틸 바에야, 금신천뢰문과 흑색귀골곡에 넘겨 주자는 거군….'

창한도의 다른 종문에 넘기는 것 역시, 그 다른 종문들 중 어떤 종문도 흑색귀골곡이나 금신천뢰문과 동급의 종문이 없었으니.

김연은 두 문파 중 하나를 선택해 가는 게 가장 성장 가능성이 높은 셈이었다.

물론 창천개벽문이 구해 온 사람을, 다른 문파에서 제자로 삼겠다고 하는 건 기분이 나쁜 일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보상을 해 주겠다고 했으며, 창호자도 두 문파를 아는 만큼 그들이 제자를 나쁘게 대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두 문파로 가게 둘 수는 없었다.

'진선이란 존재가, 금신천뢰문에 도착하기까지 앞으로 약 2, 30여 년이 남았다.'

아니, 사실 이것도 정확한지 아닌지 잘 몰랐다.

나는 지난 생에 그저 서 장군에 갇혀서 김연이 전해 주는 걸 들었을 뿐이었고.

김연도 제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던 처지는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장 내년에 금신천뢰문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걸 말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진선이 오기 전까지만이라도 그녀를 데리고 있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금신천뢰문이 사라질 터였고, 흑색귀골곡 역시 금신천뢰문이 천뢰번 때문에 사라진 이후에는 자신들의 섭명함이 안전한지를 조사하느라 바쁠 터였으니 문제없었다.

"…스승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김연 그녀는…."

"안다. 비승 첫날에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예…."

"너는 역시나 김연과 같이 있고 싶은 모양이지?"

"…예."

최소한 그 위험한 두 문파에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음, 하지만 두 문파가 성화를 내면…."

"그렇다면."

나는 창호자를 보며 말했다.

"50년. 50년 정도만 더 같이 있게 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50년이라…."

내 말에, 옆에서 얘기를 듣던 오현석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50년이 무슨 말이냐? 그걸 두 문파가 인정을 하겠…."

"음, 뭐, 좋아. 아무리 그래도 대창천개벽문의 사람들이 구출해 온 사람인데, 50년 정도 더 데리고 있는 것 정도는 양심이 있다면 뭐라 말 못 하겠지."

"스, 스승님…?"

오현석은 창호자의 결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직도 수도자들의 시간 감각이 이해 가지 않는가 보군.'

창호자의 나이만 일천 살을 넘었다.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노괴에게, 고작 50년이란 세월은 그리 긴 것이 아니었다.

"허… 시간 감각이 아직도 조금 이해가 되지는 않는군…."

"하하하, 곧 익숙해질 게다. 그나저나 그 김연이란 아이와 50년 정도 더 시간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명분이 있기는 하겠지."

창호자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에게 이전에 마족을 추격하는 임무와 괴군을 염탐하는 임무 두 개를 맡겼었잖느냐?"

"예, 그렇지요."

"그 마족은 5년 새에 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마족이 혈음계의 쇄성기 급 천마(天魔)를 소환하려 했다는 정황이 잡혀, 이 일로 인해 인족 총연맹에서 진마계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 진마계의 마족 놈이 자칫하면 혈음계의 무시무시한 존재를 불러낼 뻔한 거니까."

창호자의 말이 이어졌다.

"현재 인족 총연맹에서는 이 일을 빌미로 하여금 마계를 침공하려 하고 있지. 너희는 앞으로 김연과 함께, 50년간 진마계(眞魔界)를 침공하는 선봉군으로 복무하고 오너라."

"진마계 침공… 말입니까?"

그렇게, 나와 오현석.

그리고 김연은 창호자의 제안에 따라 진마계 침략군의 선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 * *

진마계.

고위 마족들의 회담 장소인 유천역(幽川域).

시커먼 어둠의 강이 흐르는 곳.

그 어둠의 강 아래에 있는 유천성에서 진마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자네들 각마족(角魔族)의 멍청이 하나가 광한계로 넘어가, 혈음계 존재를 광한계 인족 영역에 소환하려 했다 했지 않소!"

"제기랄! 그놈이 혈음계 천마 놈들 첩자였을 줄 내가 어찌 안단 말이오! 혈음계 놈들이 온갖 기오막측한 마공으로 첩자를 만드는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책임을 지라는 말이오! 지금 비열한 인족 놈들이 그걸 빌미로 마계를 침략하겠다 선전포고까지 한 상황이란 말이외다!"

"더러운 인족 놈들 같으니. 광마대전이 있었던 때에, 다른 광한계 종족들은 진마계에 식민지를 잔뜩 만들어 놓고 갔는데 제놈들만 못 만들었다고 지금 강짜를 부리는 거요!"

유천성의 회의장 내부에서는, 시커먼 마기를 흘리는 흉악한 마족들이 근심 어린 기색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들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오. 지난 광마대전 때에는 후방 지원을 하느라 우리와 싸우지 못해, 진마계에 식민지를 만들지 못한 인족이라고는 하나…. 들리는 말로, 인족들은 혈음계 존재들처럼 독랄하고 교활하며, 무시무시한 종족이라 들었소."

"맞소. 말을 할 줄 알고 지성이 있어도 종족이 다르단 이유로, 인족들은 수많은 종족들을 갈아서 단약으로 해 먹는다고 들었소이다."

"추악한 존재들 같으니!"

"마계가 단결하여, 그 추악한 인족들을 막아 내야 하오. 안 그러면 수많은 마족들이 인족 수도자들에게 잡혀 한 줌 단약이 될 것이오!"

전신에 뿔이 돋아난 각마족의 요마가 회의를 주도하며 마족들을 단결시켰다.

회의가 끝난 후.

각 마족들은 유천성에서 떠나, 각각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중, 각마족의 대표로 나왔던 요마가 혀를 찼다.

"쯧쯧, 역시나 지금의 진마계는 틀렸어. 광한계가 쳐들어온다는 것도 아니고, 광한계의 천족 중, 인족이 쳐들어온다는 말에 다들 저렇게 벌벌 떨다니."

그의 생김새는 대략 인간 같았지만, 인간의 칠공이 돋아나 있어야 할 부위 중.

눈과 귀는 뿔이 대신 돋아나 있었다.

우우웅!

각마족 요마는 자신의 영역으로 날아가며, 저물도를 꺼내 펼쳤다.

저물도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붉은 심장 같은 것을 꺼내, 허공에서 쥐어 터트렸다.

우우웅!

그의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며 외부의 시야가 차단된다.

그리고, 각마족 요마의 앞에 붉은 밀실이 나타났다.

"쇄령(碎玲) 존자께 각마족 할루(轄髏)가 인사드리옵니다."

속닥속닥속닥….

붉은 밀실 너머로 기묘한 속삭임이 전해지는 듯했다.

각마족 요마, 할루는 그 속삭임을 듣고자 귀에 돋아난 뿔을 기울였다.

곧이어 속삭임이 여러 정보로 해석되어 그의 뇌리에 박혀갔다.

"지족… 용왕… 협력… 혈음계… 강림… 광한계… 진선… 부활… 진선계의… 비밀… 무한한… 영광…."

얼마간 속삭임이 전해 준 바를 읊조린 할루가 붉은 밀실을 향해 절을 올렸다.

얼마 후, 붉은 밀실의 정경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존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나이다…!"

부스스….

할루를 뒤덮은 어둠의 장막이 걷혔고, 그는 광한계 방향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존자께서 말하신 대로 이뤄진다면, 우리 각마족이 혈음계의 뒤를 따라 진선계의 좌표를 얻을 수 있는 무궁한 영광을 누릴 수 있겠지. 그렇다면, 우리 각마족의 이름 아래에 광한계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는 이 비루한 진마계를 전부 뜯어고칠 수 있을 것이다…!'

각마족의 요마, 할루는 진마계 위에 떠오른 자줏빛 태양을 보며 웃었다.

격변(激變) (2)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서 대리님, 저거 보이시나요? 세상에, 불덩이가 허공을 떠 다녀요!"

나는 뱃마루에 앉은 채로, 내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창호자의 명을 받은 후.

나는 김연과 함께, 창한도에서 출발하여, 마계의 입구까지 향한다는 비선(飛船)을 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마계라….'

들어는 보았다.

듣자 하니, 4만 년 전 벌어진 광한계와 진마계의 대전쟁 광마대전.

광마대전에서, 진마계는 광한계에 대패하였고 그 이후로 광한계의 여러 종족들에게 마계의 일부를 식민지로 헌납해야 했다고 들었다.

광한계의 여러 종족에서는 마계의 자원들을 식민지로부터 가져와 마공을 익히는 수사들을 위해 자원을 공급한다고 하였다.

특히나 인족에서는 마계의 마족들을 노예로 사들여, 마족들을 갈아서 단약으로 만드는 마원단(魔原丹)이라는 단약을 만들어 팔았고, 마원단은 원영기에 오를 때는 물론이오, 원영(元靈) 그 자체에 도움이 되는 단약인지 수많은 종족에서 찾는 단약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단약을 만드는 인족들은 광마대전 때 후방 지원만 조금 했기에 식민지 분배 때에 숟가락을 얹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인족 총연맹에서는 이번 일을 빌미로 마계를 칩략하여 식민지를 만들어 내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게 맞는 건가.'

아무리 연이를 지키기 위한 명분이라지만, 나는 영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대리님, 대리님?"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김연이 내 앞으로 와서 물었다.

"아, 뭐라고 했었나?"

"아, 그냥 풍경이 신기하다고 했던 건데, 멍하니 있으시길래 어디 아프신가 해서…."

"아픈 건 아니고,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시군요. 사실, 오 차장님한테 들었어요."

김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기억… 잃으셨다면서요?"

"…그래, 어렴풋한 것만 기억이 나고,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구나."

"음…."

그녀는 내 옆에 앉아, 뒤쪽으로 흘러가는 광한계의 장대한 정경들을 함께 바라보았다.

"대리님, 아니, 은현 오빠."

"응?"

"현석 차장님이랑도 얘기해 봤는데, 이건 어떨까요?"

김연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저희가 기억하는 은현 오빠의 모습들을 얘기해 드릴게요."

"아…."

"은현 오빠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기억하는 오빠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 전에."

나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우선,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왔는지부터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아…."

그리고,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 * *

'아, 그렇군.'

나는 그런 나라에서 태어났구나.

나는 김연이 쭉 설명해 준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세계사에 대한 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지구. 나는 그런 별에서 온 거로군.'

"…사실, 지구에서 온 저희들이 보기에는 이 세계는 조금, 말이 안 되는 세계죠. 뭐, 세계가 평평하다나 뭐라나…. 그것도 그렇고 제대로 된 인권도 보장이 안 되고…."

"…우리 고향은, 인권이라는 게 있었던 곳이었나 보구나."

"아… 음, 뭐. 지구 전체가 그런 건 아닌데, 우리가 살던 나라는 대충 그렇긴 했었죠. 적어도 그렇게 대놓고 사람을 개조하거나, 잡아먹는 괴물들이 있던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팔을 어루만졌다.

괴뢰화시켰던 그녀의 팔은, 어느새 피와 살로 이뤄진 원래의 팔로 바뀌어 있었다.

괴뢰 팔을 떼어 내고 다시 돋아나게 한 것이었다.

그녀는 이 황당한 처사에 어이가 없어 했지만, 아무튼 팔은 며칠 전에 재생이 완료되었다.

"뭐… 대강 세계사랑 우리나라 역사는 대충 이래요. 기억나시나요?"

"음, 사실 잘 기억은 안 나는구나. 미안하다."

"괜찮아요. 어쨌든, 은현 오빠에 대해서 설명해 드려도 되나요?"

"그래."

그녀는 천천히 '나'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사수로서 그녀를 잘 도와주고, 힘든 일은 거의 무조건 도와주고, 그녀가 잘못 만든 문서를 전부 손봐 줘도 짜증 내는 기색도 없이 처리하는 사람.

간혹 상사에게 혼나기는 해도, 그 짜증을 결코 부하들에게 전가하지 않는 사람.

멍청해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직하게 맡은 일은 다 해내는 사람.

꽃 중에서는 모과꽃을 좋아하고, 음식 중에서는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

이런 사람, 그런 사람, 저런 사람….

'저게, 나였다고?'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좋은 쪽의 인상에만 치우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좋아하는 바람에, 내게서 좋은 인상 말고 나쁜 인상들은 전부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 듯했다.

어쨌든, 나는 그녀 덕에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략 짐작할 수는 있었다.

'회귀를 하기 전의 서은현이라는 사람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물론, 슬프게도 그 이상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기억의 조각 자체가 뜯겨 나가 버린 듯이.

그녀는 며칠 동안 내 옆에 붙어서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일들을 말해 주었고, 오현석 역시 중간부터 끼어들어서 자신이 기억하는 '나'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배를 타고 날아가며 며칠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창한도에서 온 비선, 마계 입구에 도착하였소이다. 모두 하선하십시오.]

비선 선장의 음성이 배 전체에 울렸다.

"우와… 땅을 밟는 게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네요."

"그러게 말이구나."

오현석과 김연이 땅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나 역시 오랜만에 밟는 흙의 감촉을 만끽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마계의 입구군요."

휘이이이….

문자 그대로, 새카만 안개 같은 것이 바람에 섞여서 날아오고 있었다.

꿈틀, 꿈틀….

붉은빛으로 꿈틀거리는 촉수가, 허공에 커다란 균열을 내고 공간의 틈새를 만들어 유지시키고 있었다.

촉수 자체가 공간에 간섭하여 구멍을 내는 것 같았다.

촉수가 만든 구멍은 반경 오 리는 될 정도로 아득하게 넓었으며, 구멍 너머로 시커먼 안개 같은 것들이 진득하게 포진해 있었다.

"혈교족(血鮫族)에서 빌려준 탄공초(呑空草)라는 것일세. 허공에 구멍을 내어서 차원 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혈교족의 보물 중 하나지."

그 거대한 촉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우리에게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걸어왔다.

"창한도에서 이렇게 마계 선발대에 지원을 보내 주어 고맙군."

검은 두루마기 남자는 우리와, 우리의 뒤편에서 막 내린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창천개벽문에서 나와 오현석, 김연을 제외하고 202명의 제자를.

창한도의 다른 종문들에서 도합 1024명의 제자를 보내어, 창한도에서는 총합 1229명의 인원을 마계 선발대에 보냈다.

"창한도 대표 종문이… 서령문이었던가?"

"창천개벽문으로 바뀌었소."

"아, 200년 전에 찾았을 때는 서령문이었는데 그새 또 바뀌었나 보군그래. 뭐, 어쨌든 와 줘서 반갑네. 나는 선발대 참모장 현운이라 하네. 흑린도의 현린어령문(玄鱗魚領門) 출신이지. 잘 부탁한다네."

"반갑소, 창한도 대표, 창천개벽문 개파조사의 직전제자 오현석이라 하오."

"마찬가지로 직전제자인 서은현이라 하외다."

우리는 각자 현운에게 인사를 했고, 현운은 우리가 머물 곳을 알려 주었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저 공간 균열 안쪽. 저 새카만 안개가 진마계의 차원 계면을 보호하고 있다네. 우리 임무는 진마계의 계면을 보호하는 저 장벽을 무너뜨린 후, 진마계의 안쪽으로 진입하여 진마계 안쪽 구역을 광한계의 영기로 침식시키는 것이라네."

우우웅!

현운은 우리에게 밝게 빛나는 황금빛 수정 구슬을 보여 주었다.

"이 광한옥(廣寒玉)을 가지고 마계로 가, 마계의 마맥(魔脈)이 있는 곳에 광한옥을 심고 진법을 펼치면 점차 광한옥이 마계의 마맥을 오염시켜 영력으로 치환해 주지. 광한옥이 묻힌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한계처럼 천지영기가 흐르는 공간으로 치환될 거라네. 우리는 그렇게 점차 진마계를 차차 침식시켜 나가며 후발대가 활동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 주 임무라 할 수 있네."

"그렇군요…."

우우우웅!

나는 밝게 빛나는 황금빛 옥구슬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빛 옥구슬은 휘황찬란하게 빛나며,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영기를 안정시키고, 체내의 수행을 느릿하게 올려 주는 것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보물이군.'

물론 수행 증진 효과는 결단기인 나 정도에게만 통하고, 원영기 이상에게는 그리 통하지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일단, 다른 선발대들이 전부 도착하기 전까지는 모두 차원 계면 앞에 있는 진법에 올라서서, 차원 계면을 뚫는 작업을 하고 있게나. 별 건 없고, 그냥 진법 위에 올라서서 법력만 공급하고 있으면 진법이 알아서 해 줄 걸세."

"예, 설명 감사합니다."

우리는 현운의 설명을 듣고, 각자 차원의 틈새 앞에 있는 진법의 각 부분으로 올라갔다.

'뭐, 차원 계면이 뚫리고 선발대가 출발하기까지는 사실상 몇 달은 남았다 했으니, 그 기간에 결단 후기로 떨어진 수행이나 되찾아야겠군.'

지난번, 괴군에게서 탈출하던 도중 나는 수행을 태우며 비둔술을 썼던지라 수행이 한 층 떨어져 있었다.

결단기 대원만까지 도달했던 수행이 결단 후기까지 떨어져 있어, 이 기회에 되찾는 것이 좋을 터였다.

내가 진법 위에 올라가, 법력을 조금씩 공급하며 공법들을 운용해 주변 천지영기를 흡수할 때였다.

"아, 창천개벽문의 제자십니까?"

'음?'

누군가 나를 아는 척해 왔다.

그는 금색 장포를 입은 젊은 소년이었는데, 왼쪽 머리는 하얀색이었고, 오른쪽 머리는 검은색인 기이한 머리칼을 지닌 이였다.

"본인을 아십니까?"

"아, 직접 아는 건 아니고… 저는 금신천뢰문의 제자입니다. 이번 마계 선발대에 지원하였지요. 그나저나 창천개벽문이면 같은 수계 출신 문파라고 들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아하니, 그는 수계에서 직접 비승한 것은 아니고 그저 금신천뢰문이 자리 잡은 곳에서 새로 뽑힌 제자인 모양이었다.

"…그저, 같은 결단기 수사끼리 잘 지내 보자는 뜻에서 말을 걸었습니다만…."

"…뭐, 잘 지내서 나쁠 건 없겠지요. 저는 서은현이라 합니다."

"서 수사셨군요, 저는 연진(淵震)이라 합니다. 그저 연 모라고 부르십시오."

나는 연진과 말을 트며, 문득 한 가지가 생각이 났다.

"귀 문파에, 혹여 전명훈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아! 태상문주님의 직전제자님 말씀이십니까? 예, 전 사형은 본문에서 유명하시지요. 저희 시조님이 창시하신 공법을 전부 익히시고 벌써 원영기의 경지를 넘보시고 계십니다.

하하, 전 사형께서는 정말 대단하시지요, 문파의 모든 어른들께서 앞으로 100년에서 200년만 있으면, 어쩌면 금신천뢰문에도 합체기 수사가 한 명 더 나올 거라고 입을 모아 칭찬 중이십니다. 저 같은 녀석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인재시지요."

연진이라는 소년은 전명훈을 동경이라도 하는 건지, 어째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실례지만, 연 수사의 나이가 어찌 되는지 여쭈어도 될지요?"

"아! 저는 올해로 벌써 아흔입니다."

"아흔… 젊으시군요. 그 나이에 결단 중기를 도달하셨으면 연 수사도 상당히 재능이 있다는 뜻인데, 어찌 그리 낙담하십니까."

"하하, 재능이라니요."

연진은 씁쓸한 눈빛으로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광한계에서 축기기야 나이만 어느 정도 차면 누구나 도달하는 것이고, 결단기 역시 머리가 조금 깨친 이라면 누구든지 도달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원영기부터는 절대적인 재능의 영역이며, 재능이 없는 자는 결단기에서 얻은 수명을 전부 써도 도달하지 못하니까요."

"…."

"저는 운이 좋아 금신천뢰문에 들어, 축기기에서 결단 중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제 끝인 모양인지, 아무리 단약을 먹어도 아무리 폐관을 해도, 수행의 진척 속도가 느려, 이번 생 안에 결단 대원만에 도달할 수 있을지나 의심스럽습니다."

씁쓸하게 웃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 수사는 결단 후기 자미원에 수행이 달한 모양이니, 원영기도 이번 생에는 무리가 아니겠습니다. 정말 부럽군요…."

"…아니, 뭐…."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만도 2,000년이 넘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런 것은 말하지 않고 연진을 위로해 주었다.

"저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를 악물고 수행을 하면, 수련 시간은 배신하지 않더군요. 연진 수사, 90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100세 안에 결단 중기에 이르는 것도 사실 굉장히 축복받은 자질입니다. 너무 상심하시지 말고, 열심히 수행을 지속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내 말에, 연진은 감동을 받은 의념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서 수사!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하하,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군요."

나는 그와 어느 정도 덕담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공법들을 계속 운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한 달 안에 결단기 대원만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니, 서 수사… 한 달 만에 결단기 대원만에 오르시다니, 이게 대체…."

"아니 이건…."

물론, 연진의 오해를 푸느라 조금 애를 먹어야 했지만.

'어쨌든, 결단기 최고봉에 도달했고, 2,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깨달음도 충분히 얻었다.'

마계행 선발대는 아직 인원이 전부 모이지 않았고, 차원 계면 붕괴 진법 역시 완성되지 않았기에 출발하려면 시간은 남았다.

'시간도 충분하고, 마계 계면 붕괴를 위한 진법 위쪽이니만큼 오히려 주변에서 경계를 해 주기에 안전하기도 하다.'

나는, 이번 기회에 원영기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2,000년을 살아왔고, 무형검으로 계위에 대해 조금씩 감을 잡아 왔다.'

깨달음도 마냥 뒤지지는 않는다.

'그럼… 마계로 출발하기 이전에, 원영(元靈)을 얻어 볼까?'

나는 진법 위에 앉아, 기운을 정리하며 눈을 감았다.

격변(激變) (3)

물의 높낮이는 수위(水位)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만약 차원에도 높낮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런 고민에서 만들어진 말이, 바로 계위(界位)이다.

차원에도 높낮이가 존재한다.

무형검을 다룰 때의 감각을 떠올려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는 낮은 계위에 속하고, 점차 높은 계위로 올라갈수록 형이상학적인 본질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원영(元靈)의 경지에 이른 자는 차원의 높낮이에 따른 계위를 식별하는 게 가능해진다.

원립과 싸웠을 때, 그리고 다른 원영기 수사들과 싸울 때.

그들이 간혹 결단기 수사는 의식으로 감지조차 하지 못하는 공격을 날린다든가, 혹은 공간을 쪼개고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계위를 식별하는 감각에서 기인했다.

보다 높은 계위에서 낮은 계위의 공간을 쪼개고 공격한다든가, 보다 높은 계위에서 낮은 계위에게 공격한다든가 한다면 그 이하 경지의 수사들은 감히 대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오현석처럼 아예 힘 그 자체를 무식하게 응집시킨다면 상위 계위에도 통하기는 하겠으나, 기본적으로 원영기가 결단기 수사를 압도하는 이유란 그러한 계위의 탓이었다.

츠츠츠츳!

'1,000년 동안, 괴군의 회로를 다뤄 왔다.'

괴군의 회로는 그 자체로 높은 계위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응집시키는 원리가 담겨 있었다.

또한 계위를 넘나드는 답천의 무형검을 사용하며, 보다 높은 계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러니 이제는.

'기(氣)를 모아, 높은 계위를 향해 혼(魂)을 도야시키면 될 뿐!'

파아아앗!

나는 금단의 중심으로 혼백과 의식을 집중시키며, 그와 동시에 무형검을 이용하여 높은 계위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무형검을 드러내어 공격에 사용하는 것이 아닌, 체내에 품은 채로 상위 계위에 도달하려는 것뿐이니 들킬 염려는 없었다.

나는 금단의 중심으로 의식을 집중시키며 힘을 계속해서 압축했다.

금단의 안쪽에서는 영기가 극점으로 뭉치며 더욱더 높은 계위를 향해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아….'

나는 문득, 금단의 중심을 관조하며 의(意)와 기(氣)가 뒤섞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원영인가….'

의식과 영기가 섞여 가며, 나는 문득 체내에서 거대한 음양(陰陽)이 맴도는 기분을 느꼈다.

츠츠츳….

'태극….'

태극은, 곧 역사(歷史).

태극이 그리는 나선의 원 너머로, 나는 어떠한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서은현이라는 사람의 역사였다.

'아, 이거구나.'

오현석이 말했던 주마등 같은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듯, '나'라는 인간의 역사를 관조하였다.

영력이 역류하며, 과거를 비춘다.

츠츠츠츳!

몇 달 전, 비선을 타고 오기 전 창호자에게 마계행을 다녀오라고 말을 들었던 순간.

그 이전, 김연을 데리고 막 인족 영역에 왔던 순간.

그 이전, 괴군에게 쫓기던 순간.

더 이전, 오현석에게 머리통이 폭발하던 순간.

이전, 오현석과 대련하던 순간.

막 회귀를 하여 창천개벽문을 선택한 순간.

괴군의 연의 연을 마주 보고, 연이와 입을 맞추며 서휼이 보낸 일격에 죽었던 순간.

괴뢰에 갇혀 지냈던 순간들….

기억은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일수록 느리고 명확하게 볼 수 있었으며, 내가 흐릿하게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기억을 거슬러 가며, 내 기억이 침잠해 있던 영역에 도달하였다.

'저것이,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들….'

그리고, 내가 잊어버렸던 '지구'에 대한 기억들은….

파아아아앗!

'아, 안돼, 너무 빨라!'

내가 잊은 시절의 기억들은, 차마 인식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돼! 이 기억을 봐야 한단 말이다!'

나는 심상 속에서 악을 쓰며 내가 잊은 기억들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 순간!

"커헉!"

나는 입을 벌리고 피를 토했다.

"크헉! 꺼억!"

심마(心魔)!

원영기에 이르던 도중, 다른 것에 너무 정신을 팔던 대가였다.

"꺼억, 꺼헉… 끄윽…."

나는 칠공에서 피를 줄줄 흘렸다.

파스스….

어느새 체내에서 생성되려던 원영은 흩어 없어졌고, 나는 내 뇌리에서 떠돌던 과거의 장면들이 저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크윽, 제기랄!"

콰아앙!

나는 내 머리를 향해 힘차게 주먹을 휘둘러 머리를 폭발시켜 버렸다.

"흐, 흐익! 서 수사?"

옆에 있던 연진이 기겁했으나, 나는 머리를 천천히 재생시키며 생각했다.

'머리를 터트려서 심마가 더 번지지 않게 막았다. 하지만, 원영기 도전은….'

끝나 버렸다.

"거기, 무슨 일인가!"

저 멀리서 현운이 날아와 머리를 재생시키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우선 입을 재생시키며 답해 주었다.

"…원영기에 도전하던 중, 순간 심마가 찾아와 머리를 폭발시켜서 심마를 막았습니다."

"뭐야?"

그 말에 현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지금 아무리 침공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치더라도, 그런 중대한 일을 상부에 말도 없이 진행하다가, 스스로 상처를 입어 전력이 감소되는 실책을 저질렀단 말인가!"

촤아악!

치이이익!

"…!"

현운은 머리를 재생시키던 나에게 공격을 날렸다.

그의 공격에, 재생되던 내 머리통이 다시 잘려 나갔고, 그는 내 목에 화상을 입혀 머리가 더 재생되지 못하게 하였다.

"…!"

[모두 들어라!]

현운의 성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여기 이 자는 마계 선발대가 출정하기도 전, 함부로 원영기에 도전하다 실패하여 심마로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원영기에 도전한다는 중차대한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진행하였다!

모두 들어라! 군대가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선, 전쟁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상관과 하관의 소통이 중요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보고를 하지 않고, 중차대한 경지를 넘다가 심마를 얻어걸려 부상을 스스로 입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여기 서은현은 앞으로 선발대가 마계의 방벽을 넘어, 지역 한 곳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머리가 없이 지낼 것을 명한다!]

"…."

졸지에, 나는 군법을 어긴 게 되어 한동안 목이 없이 지내게 되었다.

"서, 서 수사… 괜찮으십니까?"

[…뭐, 눈이 없어 의식으로만 주변을 봐야 하는 건 조금 귀찮긴 하지만 못 지낼 정도는 아닙니다.]

연진은 목 위쪽이 사라진 나를 보며 덜덜 떨며 물었다.

"그, 그…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연 수사께서는 머리가 없어져 본 적은 없나 보군요.]

"아니! 일반적으로 결단기 수사들 중에 머리가 없어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

'그렇군, 하계에서는 결단기 수도자들끼리 싸우면 십중팔구는 목이 날아가곤 하는데, 광한계에서는 그런 일은 별로 없는 건가.'

어쩌면 풍족한 자원 때문에, 싸울 일 자체가 많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가 연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김연과 오현석이 이쪽으로 황급히 날아와, 목이 없어진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으, 은현 오빠?"

"서은현!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거냐!"

[아, 별거 아닙니다. 그저….]

나는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니, 정말 너무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목을…."

오현석은 헛기침을 하며 김연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 원래 결단기 이상은 목이 잘려도 살 수 있으니, 이 정도는 보통 형벌을 줄 때는 다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건 그렇지만, 재생도 못 하게 한다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군율을 어지럽혔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맞겠지.]

내 말에 오현석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래도 조금 이상하군. 전쟁 전에 굳이 같은 편의 전력을 약화시킬 이유가 있나?"

[어차피 저 말고도 결단기나 원영기는 많으니 말입니다. 저 하나를 본보기로 보여 군율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한 것이겠죠. 무엇보다도 진짜 죽인 것도 아니고, 고작 목 하나 자른 것뿐이니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오현석과 김연을 달래고는,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원영기에 도전하며 그것을 봤습니다.]

"워, 봤느냐?"

오현석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어떠냐, 그 주마등으로 네 기억을 찾았나?"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가, 저을 고개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휘저으며 말하였다.

[형님도 아시겠지만, 주마등을 마주하면, 흐릿한 기억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 제대로 볼 틈이 없습니다. 아예 생각이 나지 않는 기억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한 마디로….]

"음, 계속 시도해 봐야 한다는 거로구나."

[예.]

원영을 얻기 이전에 보이는, 무수한 내 기억의 연속들.

아마 그것들을 무시하고 쭉 걸어나갔다면 나는 원영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심마가 작용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방법을 찾은 것이다.'

심마가 작용할지언정, 어떠한가.

나는, 내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실낱같은 방도를 찾은 것이었다.

심마가 덮쳐 오면 어찌할 건가.

'지금부터, 원영기에 틈이 날 때마다 도전한다.'

나는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그 기억의 흐름을 다시 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반드시 기억을 되찾고 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였다.

* * *

그리고, 다시금 몇 개월이 흘러, 마침내 선발대의 인원이 모였다.

그리고, 진법 역시 기운이 최고조로 끌어 올려져 있었다.

쿠구구구구!

진법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진의 기운은 마계의 입구에 있는 시커먼 안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곧이겠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의식을 통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법 곳곳에, 각 수도종문과 인족의 여러 가문에서 온 인재들이 앉아 법력을 공급하며 진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왔을 때, 사방이 휑했던 그때의 진법과는 차원이 다른 인원이었다.

'아마 앞으로 한두 종문에서 사람을 더 보내면 진이 완성되고, 선발대 역시 출발을 할 터.'

이미 선발대의 편제도 거의 잡혀 있었다.

원영기 수사들은 백인장을, 결단기 수사들은 십인장을 맡아 축기기 수사 열 명을 통솔하여 마계로 진격할 터였다.

물론 나는 출정 전에 벌을 받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현운의 말대로 죄가 사해지거나 따로 공을 세우기 전까지는 축기기 수사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결단기 수사의 십인대에 들어가서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들어간 십인대의 십인장은 옆자리의 연진이었다.

"후우, 긴장되는군요, 서 수사."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연 수사라면 충분히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으으, 왜 제가 십인장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가 서 수사가 저보다 경지가 높은데, 차라리 서 수사가 지휘하시는 게…."

[마음을 다잡으십시오. 어차피 저는 죄인인지라 지휘권을 가질 수 없으니, 연 수사가 수고해 주셔야 합니다. 정 필요하시면 옆에서 조금 도와드릴 테니 걱정은 마십시오.]

"서 수사!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나는 마계와의 전쟁에 앞서, 몸을 오들오들 떠는 연진을 위로해 준 후.

속으로 구결을 준비하였다.

창천개벽문에 들어가고, 여기까지 오기까지 그동안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그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삼령공'과 '군마용갱권'을 합치려고 공법을 연구하고, 구결을 분석해 내며 마침내 두 공법을 합치는 데에 성공하였다.

'조금씩 보완할 것들이 남았다만, 그래도 거의 다 되었어. 이제는 시험해 보기만 하면 된다.'

아직 이름이 없는 이 무명 공법은, 사용할 시 자신의 법보에 기령을 형성하고, 그 기령을 분신으로 삼아 수행 일부를 기령에게 나눠 준 후.

차후에 수행이 떨어졌을 시 기령의 도움을 받아, 더더욱 빠르게 수행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공법이었다.

'안타깝게도 수행 그 자체를 법보에 완전히 저장해 놓았다가 다시 한 번에 되찾는 건, 난이도가 너무 높아 실패했지만….'

물론 법보를 오랫동안 배양시키며, 법보의 질 자체가 주인을 따라 성장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리검 자체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우우웅!

나는 공법 수련을 하며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이 공법을 완성시키며, 내 마음대로, 인상 깊었던 존재의 기령을 얼마든지 형성할 수 있다는 것.'

그 말인즉.

'지금부터, 원영기에 이를 때 나타나는 주마등. 그 주마등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기령으로 만들어 보관한다.'

완전히 기억을 보관하는 건 힘들겠지만.

그 기억을, 그 추억을, 그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들을 기령의 형태로 법보에 기록해 놓는다면.

어쩌면, 너무나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잃어버린 주마등의 기억들 역시 전부 기록해 놓아, 내가 그 기록된 등장인물들을 보며 다시 기억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우웅!!

나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지난 몇 달동안, 나는 계속해서 원영기에 도전해 왔다.

물론 현운에게 찍혔으니만큼 다시금 원영기에 도전하는 것이 걸리면 다시금 벌을 받겠지만, 걸리지 않으면 될 문제였다.

물론 일반적인 원영기 도전이라면, 원영을 얻는 순간 천겁이 떨어지기에 숨기는 게 불가능할 터였으나.

지금의 나는, '원영기에 이르는 것'이 아닌.

'원영기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기억을 찾는 것'이 목표였기에.

원영을 얻지 않고 도중에 멈추기를 반복한다면 얼마든지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츠츠츠츳!

나는 다시 원영기에 도전하며,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이름 없는 공법을 발동시키며, 법보에 기령의 형태로 그 기억의 등장인물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츳!

내 주변으로 희뿌연 형체가 생기더니, 김연과 창호자, 오현석의 모습으로 화하였다.

이번 생에 만났던 인연들.

하지만, 기령을 차마 더 만들기도 전.

어느새 주마등은 빠르게 지나가 다시금 사라져 버렸다.

우우웅!

나는 다시금 형성되려는 원영을 흩어 내며, 그 원영을 흩어 낸 기운을 막 형성해 낸 기령들의 안쪽에 주입해, 내 수행을 나눠 보관하였다.

'기령을 형성하는 속도가 느리군.'

물론 익숙해지면 빨라질 터였다.

'앞으로, 이렇게 기령들을 형성해서 쭈욱, 주마등을 보고 내 기억을 기령으로 기록한다.'

나는 주변에 형성한 반투명한 세 사람의 기령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반드시, 기억을 되찾는다!'

"앗, 서 수사. 서 수사 주변에 희뿌연 그것들은 뭡니까?"

[아, 제가 익히는 공법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독특한 공법을 익히시나 보군요. 그나저나 서 수사, 그 희뿌연 것들 말입니다만…."

연진은 내가 형성한 기령들을 보며 자신이 살면서 보았던 희뿌연 것들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타인에게는 기령의 형상이 보이지 않고, 그저 희뿌연 안개의 형태로만 보일 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연진이 이상할 정도로 오늘은 더더욱 많이 떠든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 그렇군. 긴장되는 건가.'

이제 곧, 진법이 작동하고 마계의 입구가 열린다.

그럼, 정말로 마계 침공인 것이었다.

나는 연진과 말상대를 해 주며, 그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며칠 후.

우우우우웅!

진법이 찬란한 황금빛으로 변하였다.,

전방.

선발대의 사령관인, 인족 총연맹의 사자.

사축기 급의 수사, 사릉자(社陵子) 규석(硅石)이 법보를 꺼내 들었다.

[멸계진, 발동!]

그 말과 함께, 우리가 수 개월간 법력을 불어넣으며 준비시키던 진법이 작동했다.

번쩍!

황금빛이 몰려들며, 전방에 있는 진마계의 차원 장벽을 향해 쇄도하였다.

시커먼 안개가, 황금빛에 의해 찢어발겨져 흩어진다!

쿠구구구구!

[지금부터, 진마계 침공을 시작한다, 전군, 진격하라!]

그리고, 천인기 천인장, 원영기 백인장, 결단기 십인장들이 앞서 명 받은 대로 편제를 짜 대형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흐하하하! 야들야들한 마족 고기 맛 좀 보겠구나!"

"귀여운 마족 놈들, 이 어르신이 귀여워해 주마!"

"마족을 갈아 만든 단약이 마공에 그리 효험이 좋다는데?"

수많은 수사들이 각자 법보와 법기를 꺼내 들고, 혀를 핥으며 마계를 향해 쇄도하였다.

휘이이이이!

나는 십인장 패를 지닌 연진을 뒤따라갔고, 곧이어.

저 멀리 진마계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마계의 너머, 그곳에는 마족들이 성을 쌓고 방어진을 펼친 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악한 인족이 쳐들어왔다!"

"방진을 펼쳐라!"

"마계를 위해 모두 저 탐욕스러운 인족을 막아 내자! 단결하라!"

그렇게, 인마대전(人魔大戰)이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격변(激變) (4)

"마군(魔軍), 마원천련진(魔原天練陣)을 펼쳐라!"

하!

마족들이 도열하며 저마다 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전방이 시커먼 마기로 뒤덮이며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인족 측은 마기의 장벽을 향해 돌진하는 대신, 대열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마수(魔修)들, 전원 앞으로!]

마공(魔功)을 익힌 마도 수사들로 이뤄진 백인대 일곱 부대가 앞으로 나섰다.

'송진이 그랬었지, 하계 사람들 중, 마공을 익힌 이들조차도 진마계가 아니라 광한계로 비승하려 한다고….'

쿠구구구구!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키이이이이!

끼야아아!

크오오오오!

시커먼 귀물들이 마기를 흘린다.

마공을 익힌 마수들의 전신에서 시커먼 마공의 힘이 뿜어지며 눈앞의 마기의 장벽을 그대로 뚫기 시작했다.

[길을 뚫어라!]

쿠구구구궁!

마공을 익힌 마도 수사들이 각자 일격을 날리자, 순식간에 장벽이 뚫리며 길이 트였다.

길 건너편에서 마족들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정수(正修)들 앞으로!]

이번에는 정순한 정도공법을 익힌 정파의 수사들이 앞으로 나서, 새하얀 빛을 뿜는 공격들을 펼쳤다.

그 빛에, 건너편에 있던 마족들이 질겁하며 뒤로 피하는 것이 보였다.

그다음은 우리, 정사지간의 공법을 익힌 수사들의 차례였다.

[돌격하라! 마계의 마맥(魔脈)을 찾아, 백인장들에게 맡긴 광한옥을 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도록!]

수도자들이 산개하며, 각 백인장들의 지휘에 따라 우리를 둘러싼 마족들을 뚫고 가기 시작했다.

"비열한 인족들을 막아!"

"인족들이 마계를 오염시키려 한다!"

쿠오오오오!

시커먼 마기가 허공에서 뭉치더니, 검은 해골의 형상으로 변하여 우리가 있는 백인대를 향해 쇄도해 왔다.

"흥, 꺼져라!"

쿠구구구구!

우리가 속한 백인대의 대장인, 풍 계열의 공법을 익히는 원영기 수사의 일격에 해골이 그대로 흩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해골은 그대로 산산조각 흩어지는 듯하며, 수백 개의 작은 해골로 쪼개져 다시금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끼야아아아아!

"흐아아아아!"

연진은 그에게 날아드는 해골들을 바라보며 빠르게 결인을 맺었다.

"뇌, 뇌도련(雷刀蓮)!"

파치직!

노란 번개가 허공에 칼날을 만들더니, 그 칼날들이 수십 개가 모여 하나의 연화(蓮花)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연진을 둘러싼 번개의 연화는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해골들에게 적중하였다.

파치직!

연진이 날린 샛노란 번개가 닿자, 그대로 해골들은 증발해 버렸다.

[예로부터 뢰 속성은 파사멸마(破邪滅魔)의 힘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하하, 아무렴요. 음한 속성이나 귀마 속성에 특히 강하긴 합니다만… 솔직히 방금 전도 겁이 나서 법술을 실패할 뻔했는지라,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휘하 십인대를 활용해 보시지요. 제가 도와드려도 되고, 십인대로 들어온 축기기들의 힘을 빌려도 됩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때였다.

쿠우우우웅!

백인장이 사용한 법술로, 마족들의 성벽 한 곳이 무너졌다.

그리고 백인장이 우렁차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저 멀리, 마계의 마맥이 느껴진다! 우선 그곳으로 간다!"

휘이잉!

그는 용권풍을 몸에 두르고는 빠르게 그곳으로 날아갔고, 우리는 성벽을 넘어 그를 따라갔다.

성벽을 넘은 후, 의식으로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넘어온 공간 균열은 커다란 성벽과 결계로 덮여 있었다.

듣기로는, 마계로 통하는 공간 균열은 광한계 곳곳에 있으며.

마족들은 이번 인족들의 침공을 경계해 곳곳의 공간 균열에 성을 쌓았다는 것 같았다.

휘오오오오!

백인장을 따라 얼마나 날았을까.

백인장은 마계의 커다란 산 같은 것에 도착했다.

"이곳이 마계의 마맥이다. 마기가 잔뜩 흐르는군. 지금부터, 본 백인장은 광한옥을 사용해 마계를 침식하기 시작할 테니, 너희는 내가 방해받지 않게 주변을 호위하라!"

그의 말에, 총 열 명의 십인장들과 그들에게 딸린 십인대가 각각 백인장을 둘러싸고 원을 그린 채 주변을 경계했다.

우우우웅!

우리의 뒤편, 백인장이 있는 곳에서는 진한 영기가 밀려오며, 주변에 가득한 농밀한 마기를 밀어내고 공간을 침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계의 공기가, 마치 영계의 것처럼 변하는군….'

우우우웅!

주변으로 영기가 피어나기 시작하자, 십인대에 있던 다른 축기기 수사들이 한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단을 지닌 이들이야 생명력이 극점에 달해, 먹고 마시지 않아도 수 년을 버티고 숨을 쉬지 않아도 체내의 영력만으로도 생존할 수 있었지만.

축기기 수사들은 아직 체내에 정순지력이 흘러 생명력이 높다 뿐이지, 이 정도로 인간을 벗어나지는 못했기에, 영계와 달리 대기에 마기가 짙은 마계의 환경에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주변을 경계할 때였다.

쿠구구구구!

저 멀리서, 수백 명의 마족들이 성난 의념을 흘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저기! 인족들이 마계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네 이놈들, 당장 침식을 멈춰라!"

얼굴에 눈 대신 뿔이 돋아난 마족, 그리고 머리가 두 개인 마족, 전신이 돌로 된 마족 등 기괴하게 생긴 마족들이 우리를 포위했다.

"전 대원들, 전부 놈들을 상대해라! 침식 지역에서는 서로 대등하다!"

"마계 침식 작업을 보호해라!"

인족과 마족들의 무리가 부딪혔다.

연진은 황급히 결인을 맺으며 법술을 펼쳤다.

"뇌도련!"

파치지지직!

다시금 노란 번개로 이뤄진 번개의 연꽃이 그를 둘러쌌다.

콰아앙!

덩치 큰 마족 한 명이 주먹질을 하자, 연진의 연꽃이 매우 흔들렸고, 그는 공포에 빠져 연꽃으로 법력을 불어넣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런 제길, 완전히 맛이 갔군.'

나는 덜덜 떨며 몸이 굳어 버린 연진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시, 십인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십인장님!"

나를 제외한 연진의 휘하 십인대원들 역시, 연진이 자신만을 보호하며 얼이 나가 있자 다들 혼란에 빠져 악을 써 댔다.

나는 우선 연진을 대신하여, 마족들의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다른 십인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 대원들, 십인장께서 큰 법술을 준비하고 계시니 일단은 내 명에 따르게. 우선 나를 제외한 축기기 아홉, 그중 자네부터 자네는 십인장님의 뒤로 가서 법기로 적들을 요격하게. 마족들은 십인장님의 번개와 상성이 좋지 않으니 십인장님의 뒤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야.]

내가 결단기의 기세를 드러내며 명을 내리자, 축기기 십인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명에 따랐다.

나는 십인대원들 아홉 중 다섯을 연진의 뒤로 보내고, 나머지 넷을 내 뒤에 오게 하였다.

"저, 저희는 선배님의 뒤에 있으면 되는 겁니까?"

[맞네. 나를 따라오게나.]

"예? 따라오다니요?"

[저기, 마족 무리 뒤편에서 꿈틀거리는 게 보이나?]

촤륵, 촤르르륵!

마족 무리 뒤편에는 거대한 촉수가 여러 개의 피리를 불며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나는 마족들의 의념을 읽으며 눈을 빛냈다.

[저 촉수 덩어리가, 마족들의 지휘관이네. 저놈이 우리를 둘러싼 마족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우리는 마족 무리를 뚫고 지휘관을 상대하며 놈을 귀찮게 할 걸세. 그렇게 되면 단번에 지휘부가 마비되니 다른 동료들이 조금 편해지겠지.]

"아, 아니 저희만으로 저 마족들을 뚫는다고요!?"

[충분히 가능하다네. 괜히 공포에 질려 있지 말고, 대형을 짜게. 쐐기 대형으로 돌진할 거야. 자네와 자네가 좌익, 자네들은 우익을 맡게.]

나는 네 사람을 양익에 둔 후, 품에서 살덩어리를 꺼냈다.

[나와라, 원유.]

푸콱! 철퍽, 철퍽!

살덩어리는 내 명에 의해 손에서 터져 나가더니, 얼마 후 꿈틀거리며 한 명의 인간으로 화했다.

핏빛 장포를 입은 남성과 여성이 섞인 존재가, 흑단 같은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나타났다.

원유의 모습에, 축기기 십인대원들이 입을 헤 벌리며 녀석의 얼굴을 감상했다.

[내가 다루는 혈체로, 그냥 꼭두각시 같은 것이니 입을 헤 벌릴 것 없다. 원유가 선두에 서서 길을 뚫을 것이고, 내가 후방에서 지원하며, 상공과 지반 밑에서 덤벼드는 놈들을 처리하마.]

우우웅!

원유가 입을 벌리자, 녀석의 금단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며, 녀석의 입을 통해 수정 해골 지팡이와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 그리고 네 개의 적색 보탑과 붉은 창 한 자루가 나타났다.

붉은 창에 붙어 있던 귀왕은 일전 섭명함에 먹혀 버렸기에, 원유는 직접 창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물론, 혈체인 원유를 다루는 것은 어차피 나였기에 원유의 자세 자체는 완벽했다.

"전원…."

나는 원유의 입을 통해 명을 내렸다.

"돌진."

파아앙!

그 말과 함께 원유는 축기기 수사들의 속도에 맞추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축기기 대원들은 원유의 양익에 붙어 그를 따라갔고, 나는 원유의 바로 뒤에 붙어 따라가며 결인을 맺었다.

[백란축성.]

우우우웅!

전신에서 환한 빛이 일어나며, 주변으로 수 개의 백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란은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십인대원들의 몸에 들어갔다.

"어, 어…?"

"이건 대체…!"

그리고, 십인대원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일순간, 그들의 전력이 모두 축기기 대원만까지 치솟았다.

나는 거기에 더해, 대원들에게 부여한 백란축성의 신통을 통하여 그들의 몸에 회로를 깔기 시작했다.

[음혼귀주.]

츠츠츳!

물론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 회로를 깔면 엄청난 고통과 더불어, 몸이 상당히 망가져 버리지만.

나는 그 고통과 회로의 폐해를 음혼귀주의 저주를 통해서 원유의 몸에 몰아넣었다.

축기기 대원만에 달한 그들의 몸에 회로가 깔리자, 그들은 전부 어엿한 결단기 급의 전력을 내뿜기 시작했다.

"어, 서, 선배님?"

"이게 도대체 무슨 힘입니까…?"

[내 축복이네. 여러 말 할 것 없고, 모두 속도나 더 내게나. 이제 결단기 급으로 속도를 좀 올려도 따라올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파아아앗!

원유와 나는 비둔술을 쓰기 시작했고, 다른 축기기 대원들 역시 그에 준하는 속도로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원유의 손에 들린 붉은 창에 의해 눈 앞의 적들이 그대로 갈려 나갔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 위로 떠오른 해골 지팡이가 입을 벌리자, 공격을 뻗어 오는 마족들의 정혈이 원유에게 흘러 들어가 녀석의 기력을 끊임없이 북돋아 주고 있었다.

티잉, 팅, 팅!

더군다나 네 개의 적색 보탑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바깥의 마족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고, 우리는 사방으로 공격을 흩뿌리면서 끊임없이 돌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쿠우우웅!

우리는 마족들을 지휘하는 촉수 덩어리의 앞쪽.

촉수 덩어리를 호위하는, 전신이 시커먼 그림자 같은 마족들의 앞에 멈춰섰다.

'호오, 원영기 마족이로군.'

그림자 같은 마족 중 셋은 결단기였고, 한 명은 원영기 급의 실력자였다.

[전원, 결단기 마족들을 상대해라. 나와 원유는 저 녀석을 상대하지.]

"예, 옛!"

후웅!

말은 필요 없었다.

검은 마족의 손길이 나와 원유에게 덮쳐 왔다.

쿠우웅!

원유가 적색 보탑들을 불러내어 결계를 펼쳐 막았으나, 보탑의 결계는 삽시간에 마구 흔들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악한 인족 놈들 같으니, 과연 명성에 걸맞게 생긴 것도 평범하지 않구나. 한 놈은 암놈도 수놈도 아닌 놈이고, 한 놈은 머리가 없이 돌아다니는 놈이라니….]

원영기의 그림자 마족이 우리를 보고 비웃으며 다시 손을 뻗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조금만 막고 있어라, 원유.]

"…혈마진해."

촤르르륵!

원유의 몸에서, 핏빛 바닷물이 폭발하듯 넘쳐나오며 원영기 마족을 덮쳐 갔다.

"혈쇄수림."

원유가 결인을 맺자, 핏빛 바닷물에서 핏빛 숲이 돋아나며 원영기 마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얽히고설키며, 마족을 마치 꼬챙이처럼 꿰려 했다.

하지만, 마족의 몸은 그림자로 되어있는 듯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아하하, 귀엽기는. 아직 계위에도 제대로 감각이 없는 결단기 인족 놈들 주제에, 이 몸을 해하려 했느….]

[창익!]

쿠구구구구!

내 등 뒤에서 세 장의 날개가 피어났다.

[천쇄!]

쿠구구구구!

결단 대원만의 연체사가, 전신의 힘을 쥐어짜 내 펼치는 창령성광오채대법의 비기.

창익천쇄가 펼쳐졌다.

[뭣…!]

푸른 빛의 와류가 원영기 마족을 덮쳐 가며, 녀석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원영기 마족이 울부짖었다.

[너, 네놈. 네가 그 심족이란 놈들….]

[쉿.]

타앗!

그리고, 빛의 와류 속에 숨겨져 있던 무형검의 폭풍이 마족을 갈아 냈다.

나는 놈이 입을 계속 놀리기 전에 놈에게 달려들어, 무형검을 씌운 손으로 놈의 머리통을 잡아챘다.

[패배했으면 얌전히 목숨이나 내놓으시게. 시끄럽게 종알대지 마시고.]

푸콱!

무형검이 녀석의 전신을 난도질했고, 결단기 이하의 공격은 통하지 않던 녀석의 그림자 육신은 그대로 무형검의 공격에 갈라져, 종래에는 흩어져 버렸다.

파스스스….

나는 녀석의 원영마저 흩어지고, 혼이 승천하는 것을 본 후.

옆에서 뽈뽈거리며 도망치고 있는 촉수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촉수 덩어리는 주변의 마족들을 통솔하는 위치인 듯했으나, 정작 신체 능력은 좋지 않은지, 꽤 열심히 달아나는 듯했어도 고작 세 걸음밖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보게, 도우.]

촤악!

나는 녀석의 몸에 돋아나 있는 촉수 다발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군대를 물리시게,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말고, 어서.]

꿈틀, 꿈틀….

촉수 덩어리 마족은 몸을 떠는가 싶더니 촉수를 통해 의식을 전해 왔다.

[…인족은 포로를 단약으로 갈아먹는다 들었소. 나는, 나는 지휘관이니 그런 무시무시한 대우 말고 제대로 된 포로 대우를 바라오.]

[음… 자네 목숨은 내가 책임져 주지.]

[아, 알겠소.]

촤라라락!

얼마 후.

촉수의 촉수 다발 끝에서 기묘한 의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얼마 후, 우리 백인대를 둘러싸던 마족 무리는 모조리 달아나 버렸다.

나는 촉수 다발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흠, 너희 군대를 그냥 항복시키게 하는 수도 있었을 텐데, 전부 도망가란 명령을 내렸군.]

[…어쩔 수 없었소. 나는 포로 대우를 해 준다 했지만, 내 부하들은 당신들이 잡아먹을지 어찌 안단 말이오?]

'어째, 식인종 군대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군.'

그래도 생긴 것보다는 굉장히 부하들에게 상냥한 지휘관인 듯했다.

[그래, 알겠다. 어쨌든 너를 사로잡은 것 하나로 나도 전공은 세웠으니 뭐라고 하진 않으마.]

나는 촉수 덩어리를 잡아 들어 올리고, 그대로 백인대로 돌아갔다.

얼마 후.

쿠우우우우!

백인장이 장악한 마맥에서 청량한 영기가 퍼져 나오더니, 주변의 마맥을 전부 영맥으로 물들였다.

"침식에 성공했다!"

촤아아아아!

주변 일대의 마기가 씻겨 내려가고, 영기가 사방을 밝힌다.

우리 쪽만 작전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는지, 저 멀리서도 영기의 빛살들이 보였다.

우우우웅!

영기의 빛살들은 마맥들을 영맥으로 물들이며, 서로와 만나 더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우리가 첫 발을 디딘 땅이 전부 웅혼한 영기로 물들었다.

[전 선발대에게 알린다, 1차 마계 침식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린다! 작전 성공을 축하하며, 지금껏 참전 이전에 군법에 의해 형을 받았던 죄인들의 죄를 전부 사하겠다! 다시 알린다. 1차 마계 침식 작전이….]

현운의 전음이 전 부대에 울렸고, 나는 목 위쪽을 천천히 재생하기 시작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게, 맞나.'

승전에 축하해야 했지만.

나는 내 옆에서 불쌍하게 꿈틀거리는 선량한 촉수 덩어리 마족과.

승전에 기뻐하며, 마족들을 잡아먹을 날을 기다리는 침략군인 인족의 사이에서.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우우웅!

얼마간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나는 문득 내 안쪽에서 뭔가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건….'

심마(心魔)였다.

이러한 고민이 생김과 동시에, 지금껏 내가 원영기에 오르며 생겼던 심마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심마의 진동을 느끼며 알 수 있었다.

'내 행동이 맞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날, 어쩌면 나는 심마를 없애고, 내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격변(激變) (5)

1차 마계 침식은 성황리에 이뤄졌고, 나는 촉수 덩어리를 상부에 넘기고 공을 인정받았다.

마족 지휘관을 사로잡은 것은 상당한 공에 속했고, 또한 내가 원영기 마족을 이겼다는 부하들의 증언에 따라.

나는 백인대를 이끌 수 있는 백인장의 패를 받게 되었다.

우웅!

"우리 천인대에 마계 참전 이전에 멋대로 경지 상승을 하다가 심마에 빠져 목이 잘린 녀석이 있다 하던데…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경지 상승을 했던 거였군. 이제부터 잘 부탁하네, 백인장."

내가 속한 천인대의 천인기 수사인 위률이라는 이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백인장들에게 모두 필수적으로 지급되는 영패와 법보, 그리고 광한옥을 바라보았다.

'광한옥….'

앞으로는 나 역시 마계 침식 작전의 선봉에 서서, 광한옥으로 마계의 땅을 침식해야 하는 것일 터였다.

나는 상층부에 감사를 표한 후, 내게 배속된 자리로 갔다.

이미 사방에는 천지영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어, 숨을 쉬는 데에도 부족함은 없었고, 축기기 이하의 수사들이 법술을 쓰는 데에도 아무 불편함도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어이, 제대로 법술을 써라!"

"벽을 올려!"

"지붕을 쌓아라!"

축기기 수사들만 있어도, 이역만리 마계의 땅에 광한계에 있던 것처럼 집을 지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벌써부터 이 근방에는 흙과 나무로 지어진 수많은 집과, 대궐 같은 저택, 장원들이 한가득했다.

축기기 수사들이 작정하고 토목 공사에 달려드니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인 것이었다.

"아, 백인장님, 오셨군요!"

이전, 잠시나마 내 상관이었던 연진과, 그의 십인대원들이 한 장원에서 나와 나를 맞아 주었다.

"역시 서 수사… 아니, 백인장님. 저보다 실력이 좋으시길래, 언젠가 출세할 줄은 아셨지만 벌써 이렇게 출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장원은 백인장님께 배정된 장원입니다."

"아, 고맙소, 연 수사. 그리고, 일단 다들 들어오시게."

나는 십인대원들을 장원 안으로 데리고 갔다.

"자네들은 내 백인대에 배속되었고, 앞으로도 후발대가 오면 내 백인대에 인원이 충원될 텐데, 그때까지 잘 지내보도록 하지."

"옛, 백인장님!"

"영광입니다!"

나는 연진과 십인대를 데리고 장원 안에서 잠시 약주를 나누었다.

얼마간 웃고 떠들던 우리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그들을 돌려보낸 후, 정적에 빠진 장원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

대지는 영기에 의해 밝아졌지만, 마계의 하늘은 아직도 마기 때문에 충충했다.

"…뭔가 이상하군."

나는 뭔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

하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금 침략군으로서의 시간은 흘러갔다.

* * *

마계 침공군의 직급은, 초창기에는 순수한 경지로 이뤄진 계급이었다.

하나, 침공이 이어지며 점차 직급은 전공에 따라 나누어졌다.

결단기인 나 역시, 동급 경지의 수사나, 혹은 원영기 수사들보다도 아득히 많은 전공을 세우며 어느덧 천인장의 영패를 수여 받았다.

듣자 하니, 천인장부터는 이후 진마계 식민지를 관리할 수 있는 총독의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고 했다.

'총독이라….'

어느덧 1차 마계 침식 작전 이후.

마계 침식은 꾸준히 이뤄져, 어느덧 아홉 번째 침식 작전을 끝내게 되었다.

우우우웅!

마계에 영기가 차올랐다.

그리고, 아직 도망치지 못한 마족의 패잔병들과 그런 패잔병들을 말 그대로 '사냥'하는 인족 수사들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느덧 내 옆으로 오현석과 김연이 다가와 혀를 찼다.

그들 역시 수많은 전공을 세워 천인장의 패를 달았다.

그리고, 내 곁에 다가온 오현석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스승님 명으로 오긴 한 거다만…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계라길래, 무슨 악마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았는데…."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법보를 들고 마족들을 쫓아가 뼈와 살을 분리하고, 피를 빼 담고, 혼백마저 흡수해 보관하는 인족들이었다.

"…누가 마족이고 누가 인족인지 모르겠구나."

"그러게요. 단순한 요마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결단기 이상부터는 요마족들도 전부 지성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뭔가 가슴이 울렁이는 느낌이었다.

심정적으로는 뭔가 그들에게 공감이 갔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마족들을 사냥하는 인족 수사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왜지.'

최근 들어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성과 감성이 뭔가, 너무 괴리되었다.

'이상하다….'

도대체 뭐가 맞고 뭐가 틀린 걸까.

나는 멍하니, 뭔가를 잊어버렸는지 떠올리지 못하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오현석과 김연과 함께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 * *

"점령지 임시 총독 말입니까?"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래, 서은현 자네가 여기 이번에 점령한 마련산맥에서 흑주강까지 이어지는 점령지를 관리할 임시 총독으로 임명되었네."

나는 현운에게 되물었다.

"저는 공을 많이 세웠다곤 하나, 아직까지 결단기 수사입니다만… 다른 천인기 분들에게 맡기시는 게 낫지 않은지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자네에게 임시 총독을 맡기려 하는 걸세. 다른 천인기 수사들은 다다음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점령지를 관리할 천인기 수사가 한둘 빠지게 되면 곤란하단 말이지."

"그렇군요."

"거기에, 최근 보고서로 올라왔네만. 자네가 간혹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인다는 보고가 와서 말이네. 오랫동안 전쟁터에 불려 나온 병사들은 간혹 정신에 이상이 오기도 하지. 이번 기회에 임시 총독으로 근무하며 푹 쉬고, 원영을 얻어 마음의 근간을 단단하게 하는 게 좋지 않나. 지난번 출정 이전에도 마음대로 원영기 경지 상승을 하려 하던 자네인 만큼, 이만치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나?"

나는 현운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현운, 이 자가 가진 의념의 색상….'

뭔가, 그의 의념의 색상에서 최근 들어 점차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아무래도 본인 역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여러 수도자들이 전쟁 중 겪는 정신병 중 하나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일단 넘기기로 했다.

'내 알 바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임시 총독 자리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그럼 오늘부터 자네는 8차 침식 구역의 임시 총독이네."

나는 현운에게서 영패를 수여 받고 그가 머무는 장원에서 걸어 나왔다.

후발대가 선발대에 합류하며, 더더욱 많은 인족 수사들이 최전방으로 나왔고.

마족들을 패퇴시킨 이후의 점령지는 수많은 인족 수사들에 의해 순식간에 번화가로 변화하였다.

수많은 축기기 수사들이 모여, 순식간에 도시와 성을 지어내고는 했으니 말이었다.

나는 번화가를 거쳐, 내게 할당된 장원으로 갔다.

장원 안쪽에서는 내 휘하 천인대 백인장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 천인장님 오셨다!"

"천인장님, 이번에는 뭐 받으신 거 없으십니까?"

백인장들은 대다수가 원영기였으나, 그들 중 아무도 나를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상 그들과 일대일로 싸워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최근 서 장군도 어느 정도 복원하며, 천인기 급은 되는 서 장군을 부렸기 때문에 딱히 내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인장들 중에서는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며 공을 더 세운 연진 역시 있었다.

그는 원영기 수사들 사이에서 술을 얻어먹고 얼굴이 빨개진 채로 헤롱거리고 있었다.

"모두 들어라, 나는 다음번 10차 침식 작전에서는 빠진다."

"예…?"

"아니, 어째서입니까?"

나는 임시 총독직을 부여받았음을 알렸다.

"아니! 천인장님만큼 유능하신 분이 어디 계시다고! 이게 맞습니까!"

"참모장 현운, 그 새끼 사실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 자식 머리통 박살 내 버리고 천인장님을 다시 뫼시겠습니다!"

"아이고~ 다른 천인장님들 중에 서 천인장님만큼 유능하신 분이 얼마나 계시겠습니까!"

"다들… 고맙네."

그동안, 솔직히 내가 이끌어온 천인대는 쭉 승승장구를 했던 게 사실이긴 했다.

물론 매번 큰 전공을 세웠다는 게 아닌, 자잘한 전공들을 상당히 많이 챙기면서도 대다수의 병력이 무사 생환했다는 점이 휘하 천인대에서 호평받는 부분이었다.

큰 전공을 탐하기보다는 작은 전공들을 챙기면서 부하들의 안전에 신경을 쓴 내 성향 덕택이었다.

"아, 천인장님. 이제 최전선에는 더 안 서신단 겁니까?"

연진이 술에 취한 채로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되었네."

"아… 그럼 저도 천인장님 따라 8차 점령지 따라가겠습니다아… 천인장님을 향한 제 충심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으하하! 연진 이놈, 천인장님을 향한 충심이 아니라, 천인장님이 빠지면 생환율 낮은 다른 천인대에 배속되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지?"

"웃기는 녀석일세! 야, 이놈들아! 연진 놈 잔에 더 퍼부어서 이 겁쟁이 놈 혼 좀 내 주자고!"

나는 원영기 수사들에게 둘러싸여 뻘뻘거리며 술을 잔뜩 받는 연진을 보며 피식 웃은 후.

장원 내 내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택 안쪽에서는 커다란 촉수 다발이 굴러다니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최초로 포로로 잡았던 마족 지휘관, 견신(見新)이라는 마족이었다.

포로 심문이 다 끝난 이후, 바로 단약사에게 보내지려던 것을 내 요청으로 인해, 내 애완 요수의 신분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견 수사, 지낼 만하신가 보오?"

[아, 서 대인. 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대인의 은혜 덕에 잘 지내고 있습지요.]

"대인이랄 것 없으시오. 그나저나, 이제 슬슬 견 수사를 풀어 드릴 날이 왔소이다."

내 말에, 촉수 다발들이 움찔거리며 나를 향했다.

"이번에 8차 점령지의 임시 총독으로 가게 되었소이다. 한동안 그곳에서 쉬고 있으라더군. 그래서, 8차 점령지 인근에 도착하면 풀어 드리겠소."

[…감사드립니다, 서 대인. 대인께서는, 제가 본 인족 중에서 가장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

처음 견신을 넘길 때, 나는 견신의 포로 대우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족의 '포로 대우'란, 머리에 침을 박아서 강제로 애완 요수로 만들거나, 혹은 내단을 뽑아서 단약으로 만드는 것이 '포로 대우'라고 했다.

때문에 견신이 단약방으로 들어가기 전, 겨우겨우 그를 구해 내서 내 애완 요수로 삼겠답시고 데려올 수 있었다.

물론 애완 요수를 부리려면 특수한 공법을 익히거나, 혹은 머리에 침을 박아야 했지만.

나는 견신을 데려온 후 견신의 머리에 박힌 침을 빼내 주어 금제를 없애 준 후.

제대로 된 포로 대우를 약속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 후, 차후에 풀어 주겠노라 약속한 적이 있었다.

"이보시오, 견 수사."

[예, 말씀하시지요.]

"…내 마족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견 수사가 볼 때에… 마족은 인족에 비해 선한 종족인 것 같소?"

[선한 종족이라… 말씀하시는 '선'의 기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흠?"

견신은 촉수를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타 종족을 마구잡이로 잡아 단약으로 먹는 것을 악이라 한다면 마족은 대체적으로 선합니다. 하지만 제가 속한 유촉족 같은 경우, 타 생물의 정신을 제압하여 조종하고, 그 체내에 기생하여 양분과 영기를 빨아먹다가, 숙주가 늙으면 숙주의 생명을 전부 빼앗고 다른 숙주로 옮겨 다니는 종족이지요. 그 밖에도, 타 종족의 몸에 알을 낳는 마족, 타 종족을 착취하는 마족, 타 종족과 걸핏하면 전쟁을 벌이는 종족 등… 저희 마족 역시 어떤 면에서는 선하지 않습니다.]

"…."

[제가 속한 유촉족은 정신을 제압하는 능력이 뛰어나기에, 상대의 의식을 읽는 능력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그래서,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대인의 정신을 읽어 보았을 때… 대인께서는 지금 자신이 하시는 일의 선악에 대해 고민하시는 듯하군요.]

"…맞소."

견신은 촉수를 꿈틀거리며 말하였다.

[아마 대인이 아니라 다른 인족이 물어보았다면 저는 인족이야말로 가장 더럽고 악하다고 답했겠습니다. 수많은 종족이 있기는 하고, 마계의 종족들이 여간 엽기적인 종족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솔직히 포로 대우를 원한다고 했을 때 다짜고짜 단약 방으로 데려가는 종족은 인족이 거의 유일한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대인이기에 인족에 대한 악감정이 아닌 어느 정도의 객관을 담아 말씀드린다면….]

견신이 촉수 하나를 들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약육강식. 그게 이 세상의 진리이자,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모든 생명들이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숙명입니다. 저희 마족 역시 이번에 침공을 받은 일이 억울하고, 인족이 굉장히 밉지만… 솔직히 말해서 마족의 힘이 강성해졌다면 저희 역시 언제라도 인족을 침략해, 앞서 말했듯이 저처럼 인족의 몸을 숙주로 기생할 수도, 인족의 몸에 알을 낳을 수도, 인족을 착취할 수도 있었겠지요. 다만 지금은 인족이 저희보다 강성하니 마계를 침략해 마족을 한 줌 단약으로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군, 답변 고맙소."

나는 견신을 뒤로한 후, 내 방으로 들어갔다.

'선악의 문제가 아닌 강약의 문제라….'

하지만, 뭔가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견신의 말은 명쾌하고 받아들이기 쉬웠으며, 내 안에서 피어나는 죄책감을 쓸어 버리기 좋았지만.

나는 뭔가 그것 말고도 다른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 가슴 속에서 내가 잊었던 뭔가가 더 있다.

분명히….

사흘 후.

나는 나를 따라가겠다는 이들과 함께 8차 점령지로 향하였다.

* * *

8차 점령지, 임시 총독 관저.

나는 총독 관저에서 나를 보좌하게 된 8차 점령지의 관리관에게서 점령지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해서, 현재 일곱 개의 마족 부족이 저희 점령지 내에 있습니다."

"타 점령지보다 부족 수가 많지 않군."

"예, 저희 점령지는 마련산맥에서 나는 마련금이란 금속이 많이 나기에 부족들을 착취해서 얻을 수 있는 자원보다는, 광맥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더 많기에 별 상관은 없습니다. 물론 임시 총독께서 원하신다면, 남아 있는 부족들로도 좋은 단약을…."

"됐네."

나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단약은 필요 없으니, 자원과 점령지 관리 얘기로 넘어가지. 내가 알기로 이곳 8차 점령지의 진짜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닐 텐데."

"…예. 이곳 8차 점령지에는, 임시 총독께서도 아시겠지만 공령지(空靈池)가 있습니다."

공령지(空靈池).

차원 계면의 장막이 약한 곳을 일컬었으며.

그 약한 차원의 장막은 마치 연못의 물처럼 투명하게 공간을 비춘다고 하여, 공령지라고 불렸다.

공령지의 근처에서는 저물도와 저물법기, 혹은 공간 법기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공령석이라고 하는 광석이 자주 돋아났기에 주요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공령지의 진짜 가치는 그런 게 아니다.

"앞으로 점령지가 완전히 식민지화되면, 공령지를 정돈하여 인족이 많이 포진한 하계를 찾아 잘 알아보겠습니다."

공령지는, 다른 말로 '끈 없는 비선대'라고도 불렸다.

공령지의 차원 장막을 정돈하고, 특정 하계와 연결하면 공령지는 그대로 비승하는 이들을 맞이할 수 있는 비선대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불안정한 공령지라, 최소 1, 2천 년은 있어야 하겠지만 다시 말해 그 정도 시간만 기다리면 공령지를 비선대로 개발할 수 있다는 얘기니, 임시 총독께서 가장 신경 쓰셔야 할 것은 앞으로 이 공령지가 될 것입니다."

"알겠네. 우선 이 공령지로 가 보도록 하지."

"예."

나는 관리관과 함께 공령지라는 곳으로 갔다.

"이곳이…."

공령지는 총독 관저의 지하.

그 아래쪽에 있는 암반 동굴을 통해 한참을 이동하면, 지하 동굴 안쪽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우우우웅!

나는 관리관과 함께 공령지에 도착하고는, 공령지의 장엄함에 잠시 입을 벌렸다.

고대한 지하 공동.

그곳에는 공령석들이 녹빛을 내며 곳곳에서 번쩍이고 있었고, 공령석들의 아래로, 거대한 지하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아니, 호수가 아니었다.

나는 관리관에게 공령지 한쪽을 가리키고는, 반대 손으로는 한쪽을 향해 작게 손짓을 하였다.

"이게 마계의 바깥 차원과 통하는… 공령지로군."

"맞습니다. 일반적인 호수와 달리 호수에 아무런 미동도 없잖습니까."

나는 거울처럼 보이는 호수의 표면을 보며 그 풍광에 감탄하였다.

"아름다군…."

"아름답다고 해서, 호수의 표면에 손을 대시면 절대 아니 되십니다. 공간 폭풍을 거스를 수 있는 사축기 수사가 아니라면, 호수에 닿는 순간 호수 바깥에서 불어닥치는 공간 폭풍에 의해 갈가리 찢기거나… 천운이 닿아 살더라도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차원에 떨어지거나 할 테니까요."

"조심하도록 하지."

"예, 그리고 총독님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은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진법도 쳐 놓았습니다. 공령지가 이곳 점령지 말고 다른 점령지에서도 조금 많이 발견되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와서 망치지 못하게 주의하셔야 하니, 총독께서도 혹여나 누군가 공령지에 접근한다면 가차 없이 처벌하심이 옳습니다."

"알겠네."

그 후, 관리관은 나에게 공령지에 관해서 몇 개의 주의를 더 준 후 나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공령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관람하다 나갈 테니, 위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예, 뭐 총독께서 그러신다면야…."

부웅!

결단기 수준인 관리관은 할 일이 많다는 듯, 비둔술을 사용해 빠르게 지상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얼마간 관리관이 간 곳을 바라보다가 공령지의 한 곳을 쳐다보았다.

"나오너라."

우웅!

내가 공령지에 들어서자마자 관리관의 눈을 피해 펼쳤던 월수궁무록.

내 월수궁무록은 어느새 원래의 구결을 초월해서, 이제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내 월수궁무록의 범위 안쪽에서, 쫄랑거리며 자그마한 생물들이 기어 나왔다.

"어린 마족들이군."

머리에 양 뿔이 돋아난 작은 꼬마와, 박쥐 날개를 가진 꼬마.

두 마족은 그런 이형의 신체를 제외하면 크게 인족과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너희는 이곳에서 뭘 하는 거냐.]

나는 마족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언을 울리며 말했다.

내 말에, 마족 아이들은 꼼지락거리는 듯하더니 말했다.

"여기는, 저희가 탐험하다가 찾아낸 비밀 장소인데요."

"네, 저희가 자주 놀던 곳이에요."

[…앞으로는 이곳에 오면 안 된다. 여기는 인족들이 점령한 곳이라는 소리를 못 들었느냐.]

"하지만, 우리가 먼저 발견했는데에…."

"했는데에…."

박쥐 날개의 꼬마가 뿔 머리 꼬마의 말을 따라 하며 울상을 지었다.

[…일단,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냐. 너희는 인근 종족의 아이들이냐?]

"네, 저는 각주족에서 왔고, 얘는 기익족에서 왔어요,"

"네, 우리 두 종족은 영역이 붙어 있어서 자주 놀아요. 그리고 얘랑 놀다가 땅굴을 발견해서 탐험하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후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가려무나. 여기서 놀면 사악한 인족이 너희를 잡아먹을 수도 있어.]

"네? 아저씨도 인족 아닌가요?"

"아저씨 사악한가요?"

[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어서 썩 나가려무나.]

"네? 저희가 왜요?"

"여기는 저희가 발견했다니까요?"

나는 이 꼬마 마족들을 어찌 쫓아낼까 고민했다.

'어린 애들한테 너무 겁주기는 또 그렇고….'

나는 잠시 고민한 후.

녀석들을 잠시 숨겨 놓은 후, 총독 관저로 가서 얼른 견신을 데리고 다시 공령지로 돌아왔다.

"이보시오, 견 수사. 이 애들한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 좀 해 주시오."

[…? 아니, 이 꼬맹이들! 도대체 여긴 왜 들어온 거야!]

견신은 두 마족 꼬마를 발견하자 촉수로 찰싹찰싹 때리며, 마계의 여러 교훈적인 일화를 들려주고는 빠르게 내쫓았다.

[휴우, 당황스럽군요. 일단 아이들을 무사히 돌려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큰 마족들이야 적대할 수 있으니 곱게는 안 돌려보냈겠지만, 어린 것들은 죄가 없으니 적대할 이유도 없겠지."

[맞습니다. 마계에서도 무수한 종족이 엽기적인 짓을 벌이지만, 각 종족의 새끼들만큼은 불문율로 서로 건드리지 않지요. …인족은 새끼고 뭐고 다 잡아가지만, 그래도 서 대인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

나는 견신에게 윤리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명동하는 기분을 느꼈다.

'…안 되겠어.'

나는 한숨을 쉬며, 일단 다시금 견신과 함께 총독 관저로 돌아왔다.

그런 후, 관리관에게 점령지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전해 듣고, 점령지에서 마족들로 단약을 만드는 것은 기본적으로 금지하는 법령을 포고하게 했다.

이유는 마련산맥의 자원 채굴을 위해 마족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나는 관리관에게 최대한 온건하게 점령지 정책을 펴라고 전하고서 다시금 조용한 공령지로 내려왔다.

견신도 적당한 날을 봐서 풀어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최근 점점 더 울렁이기 시작하는 가슴 속의 심마를 극복하기 위해, 빠르게 기억을 되찾고자 했다.

'기억을 찾자….'

우우웅!

조용한 공령지에서, 몇 번이고 광한옥으로 정화한 주변의 영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계속해서 원영기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새로 만든 공법으로, 법보에 기령을 만들어, 원영기에 오를 때마다 응집시킨 영기를 흩어 끊임없이 보관하였다.

그렇게, 나는 공령지에서 수 년을 보냈다.

공령지 안쪽은 내가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놨음에도 계속해서 두 명의 마족 꼬마들이 놀러 왔다.

꼬마들은 몇 번이고 내가 말을 해도 듣지 않고 계속 공령지를 찾아왔고, 나는 어느 순간 포기하고 공령지에 녀석들이 들어가지만 않게 봐 주었다.

꼬마 아이들의 이름도 차후에 알게 되었는데, 각각 수인(壽因)과 홍연(紅緣)이라고 하였다.

간혹 총독 관저에 큰일이 생길 때에는 관저로 올라가서 일을 보기도 했고, 고향이 보고 싶다고 엉엉 우는 연진을 달래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마계에서 수 년을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