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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 *

괴군은 문득 기묘성채의 최상층에서 괴뢰들의 일상을 지켜보던 중.

아래쪽의 한 곳에서 소중히 서 장군을 껴안은 김연이, 서 장군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오오."

괴군은 감격한 모습으로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름답군. 드디어 괴뢰 속에 숨겨진, 진정한 마음을 보는 법을 깨달았구나. 그래, 훌륭하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보시오, 제자도 드디어 나와 한없이 가까워졌구려. 이제… 어쩌면 몇백 년만 더 기다리면, 당신을 완성할 수 있겠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유리 공예품을 쓰다듬듯,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 * *

"…그나저나 오빠. 만약 오빠가 이런 상태라면, [그녀] 역시 어쩌면…."

김연은 내게 [그녀]에 대해 물어 왔다.

"…예? 정말인가요? [그녀]는 오빠처럼 아직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군요. 그렇다면, 괴군 그자가 중얼거리는 건 정말로 미쳐서였던 건가요?"

나는 내가 알아낸 사실들을 심어로 전달해 주었다.

"…미쳤군요. 영혼마저 제작하려 하다니. 그나저나 저는 그런 걸 알아차리지는 못했는데,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안 거죠?"

"아, 그렇군요. 직접 괴뢰가 되어서 보는 시야와, 인간의 시야는 차이가 있는 건가요?"

"어쨌든 오빠의 말대로라면… 기묘성채를 벗어나려면, 오류를 만들고, 그 오류를 만들 때 괴군에게 틈이 생기는 순간을 노려야 한단 건가요?"

정겨운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괴군의 손아귀에서 도망칠 방안을 의논했다.

철컥, 철컥….

김연은 왼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왼팔은 어느덧 괴뢰로 개조되어 있었다.

"기묘성채 안에서, 괴군은 신(神)이나 다름없으니… 이 안에서 틈을 만들려면 오빠가 기묘성채 전체를 장악해도 부족해요. 차라리 외부의 원조를 기다리거나, 제가 경지를 올리는 걸 기다려야 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겠죠."

괴군의 괴뢰들 중 합체기 괴뢰들 역시 어마어마하게 늘어나 있었다.

거기에, 김연의 말에 따르면, 괴군은 어느새 쇄성기 괴뢰를 만드는 방법 역시 점차 찾아내는 중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가 쇄성기 괴뢰가 된다면 정말로 막을 수 없다고도 하였다.

"물론, 1천~1천5백 년 정도만 있으면 저도 최소 합체기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쩌면 그때가 되면, [그녀]가 아무리 강해도 한번 해 볼만은 하겠죠. 그 괴군조차도 쇄성기 괴뢰를 만드는 것은 지금 머리가 아픈 모양이니… 시간이 상당히 걸릴 거예요."

김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긴 힘드니, 어쩌면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어요. 강민희 언니를… 토벌하는 토벌군이 민희 언니를 토벌하고 나면, 어쩌면 우리 역시 토벌하러 올 수도 있어요."

강민희 대리는, 현재 굉장히 무시무시한 뭔가로 변태하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합체기 수도자들이 모여 그녀를 토벌할 예정이라 했고.

강민희 대리를 토벌하고 나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었다.

"…참, 절망적이네요. 다들. 전 과장님은 미쳤고, 오 차장님도 미쳤고, 민희 언니는 불가사의한 괴물이 되었고, 혜서 언니는 감감무소식… 우리는 둘 다 미치광이한테 잡혀서 개조받았네요. 김 부장님은 죽었을… 예? 살아 있을 거라고요? 후후, 농담도. 비승도 못하셨잖아요?"

그녀는 내 말에 웃으며 말했다.

"회사에서는 서로 데면데면하셨으면서. 왠지 굉장히 김 부장님을 믿으시네요? 그분 굉장히 착하시긴 하지만, 회사 사람들이랑 모두 데면데면했어서…."

김연은 회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던가.'

나는 오랜만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잘 생각은 안 났지만.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듣자, 조금씩 생각나는 게 있었다.

확실히.

김영훈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그리고 김연과도 원래는 무난한 사이였다.

내가 그녀의 사수였고, 날 잘 따랐던 신입 사원이었던 게 김연이었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떠오르는군.'

그녀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깊숙히 묻혀 있던 기억들이 조금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연이 입장에선 무난한 사이라고 하면 서운하겠군.'

나는 몰랐지만, 그녀는 꽤 열정적으로 호감을 드러냈던 모양이니까.

오랜만에.

평범한 인간이던 시절의 기억을 추억하였다.

김연과 처음 만났던 날.

그녀에게 일을 천천히 가르치던 날.

김연이 서류를 잘못 전달해서 사수인 내가 다 책임지고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제출했던 일.

회식 자리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나서 김연이 술에 꼴아 내게 매달려 엉엉 울다가 토했던 일.

믿고 의지했던 사람, 서로 싫어했던 사람,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김연과 관련된 기억들만이 저 기억 너머에서 떠올랐다.

우리는 잠시 동안 회사 일들을 추억하며, 그에 대한 대화도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가 걸리든.

'꼭, 탈출하자. 연아.'

"네. 은현 오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굳은 마음을 나눴다.

다시금, 500여 년이 흘렀다.

* * *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하늘을 난다.

광한계에 온 지도 거의 천여 년.

그 사이에 괴군에게 더욱더 개조받은 기묘성채는, 이제 어느덧 순수한 비행 성능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기묘성채 뒤로 수십억에 달하는 괴뢰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어느덧 합체기 급 괴뢰 역시 백여기에 달했고.

[그녀]는, 쇄성기 급에 도달했다고 하였다.

어디까지나 괴군의 말에 의하면 말이었다.

나는 김연의 옆에서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통솔했다.

김연은 어느덧 사축기 중기에 도달했다.

이제 그녀의 전력은 사실상 합체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래 봤자 괴군에게서는 아직도 벗어나기가 요원했으나.

나와 그녀의 마음은 상당히 풀려 있었다.

"…이번에는, 가능하겠죠? 이번에 있을 혼란을 생각하면."

'분명, 그럴 거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쿠구구구!

저 지평선 너머로, 수억에 달하는 종족과, 수백에 달하는 합체기 수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는 인족도 있었고, 요족도 있었다.

"하, 이게 누구야? 여기가 어디라고 이 뱀 새끼가 발을 들여?"

그리고.

요족 중에는 서휼 역시 사축기 최정상에 도달한 채로 나와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지난 천 년간 광한계 전역에 명성을 떨치신 노야의 소식에, 같은 수계 출신으로…."

"아가리 닥쳐라.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그나저나 이놈, 몸에 걸치고 있는 기이한 법보들이 많아졌구나? 그것들의 효용인 게야? 이전처럼 속이 안 읽히는데?"

김연도 그랬고, 나 역시 서휼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서휼은 천 년 전과 달리, 도저히 월도입천의 시야로도 속을 읽을 수가 없었다.

뭔가 희뿌연 장벽 같은 것이 시야를 차단시키고 있었다.

"하하, 광한계 종족들이 심족의 시야를 두려워한다는 거야 유명한 일이지요. 때문에 이렇게 심족의 그 눈을 가리는 법보가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노야께서도 대단하시군요. 수계에 있을 때의 저는 심족이 뭔지도 몰랐습니다만, 노야께서 그때부터 심족의 눈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흥! 속이 시꺼먼 놈이 아니랄까 봐, 누가 제 속을 알아볼까 차단 법보를 주렁주렁 차고 있구나. 흐히히, 이 몸과 같은 시야를 가진 놈들이 많은 광한계에 오니 불편해 미칠 지경이겠구나?"

"하하, 노야. 사담은 이만하도록 하고. 어쨌든 생각해 보셨습니까?"

"흥!"

괴군이 기묘성채 위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래. 좋지. 천인경 요족들 일만이 모여 펼치는 만요계천진(滿妖界遷陣)으로 추후에 나를 도와 기묘성채를 완성시켜 준다는 게 정말이라면…."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격스럽군요. 제가 살다살다 노야와 손을 잡을 날이 있을 줄이야."

"흥! 나도 쇄성기에 오른 [그녀]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니 딱히 네놈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다. 입 닥치고 안내나 해라."

"하하, 알겠습니다."

파아아앗!

괴군의 기묘군단(奇妙軍團)이 기묘성채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서휼이 모아 온 수억의 요족 군단과 수백의 타 종족의 합체기 수도자들.

어마어마한 전력의 세력이 연합하여 한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꼬옥….

김연이 내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 정도라면, 분명히 기회가 생길 거에요."

나는 씁쓸하게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분명.

이것이 나와 김연이 괴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기회였다.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

결국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그녀를 짓밟아 흩어 버린다는 것을 전제했다.

서휼이 모아 온 합체기 수도자 중 한 명이 소리를 쳤다.

"보, 보인다!"

쿠구구구구!

지평선 너머.

시커먼 구름이 올라온다.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키야아아아아아!

수백, 수천억에 달하는 귀곡성이 천지를 울렸다.

찌릿, 찌릿….

저 구름.

구름으로 보이는 거 검은 것은, 구름이 아닌, 하나하나의 귀신들이었다.

합체기 수도자들의 눈에 긴장감이 어렸고.

괴군의 눈에 호승심이 어렸다.

어마어마한 수의 귀신 무리.

하지만 진정 무시무시한 것은, 저 귀신 무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지닌 이.

쿠오오오오오!

[끼야아아아아아!]

"귀, 귀…."

사축기 수도자 중 한 명이 덜덜 떨며 외쳤다.

"귀도성모(鬼導聖母)다…!"

"귀도성모가 보인다! 모두 전열을 재정비하라!"

"귀모(鬼母)가 괴군과 일전을 벌일 동안, 후방에서 진을 짠다!"

쿠과과과과!

귀신 무리의 중앙에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내지른 비명에, 대지가 그대로 뒤집히며, 천지사방이 음기(陰氣)로 가득 차올랐다.

마치 세계의 일부가 명계와 치환이라도 된 듯한 풍경.

김연은 착잡한 표정으로 그 존재를 바라보았고, 나 역시 서 장군의 안쪽에서 씁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희 언니…."

강민희 대리.

흑색귀골곡의 제자로 잡혀간 그녀는.

천 년이 지난 지금.

정신이 나간 채로 쇄성기 급의 귀물(鬼物)이 된 채, 수백, 수천조의 혼령을 부리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어둠의 중앙.

그곳에는, 시커먼 귀체(鬼體)로 변한 몸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시퍼런 눈물을 흘리며, 시퍼런 귀화에 휩싸여 있는 강민희가 있었다.

산발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천지사방으로 뻗쳐, 구름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고, 귀체가 된 강민희의 육체는 수 장 크기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이런 젠장! 원영기 이하는 저 괴물을 직시하지 마라!"

"살아 있는 이는 함부로 귀모의 비명을 들어선 안 된다! 감각 차단의 법술을 써라!"

키이이이익!

키에에엑!

강민희의 비명에, 기묘성채 뒤쪽에 있던 연합 중.

원영기 이하의 수도자들 상당수가 한 번에 그대로 귀물(鬼物)로 변이해 버렸다.

키이이이익!

끼야아아!

귀물이 된 이들은 그대로 강민희 쪽으로 날아가, 그녀의 주변에서 울부짖고 있는 검은 구름에 합류하였다.

물론.

괴군과 김연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살아 있는 것이 없는 괴군의 진영에서는 그 어떤 괴뢰도 딱히 이상이 없었다.

인공 혼들이 진동하긴 했지만.

애초에 진짜 영혼도 아니었던 만큼 큰 영향은 없었다.

"크히힛, 자. 그럼 약속은 잊지 마라. 서 용가리 놈아."

"하핫, 노야께서 귀모를 토벌하신다면, 노야의 지난 악행은 전부 덮기로 전 종족이 합의를 봤습니다. 귀모에 의해 광한계의 오십분지 일이 벌써 죽음의 땅으로 덮였는데, 노야와의 약속이 대수겠습니까?"

그리고.

괴군 조연과, 귀모 강민희가 부딪혔다.

부우우우웅!

수십억의 괴뢰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올라, 귀신 무리에 부딪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수도자들은 기묘성채의 후방에서 법술로 괴군을 지원하였다.

"…다녀오세요, 오빠."

'그래.'

이미 서 장군의 회로는 9할 이상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번 전투에서는 나가야 했다.

타앗!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강민희를 감싼 귀신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우우우웅!

괴군의 의지가 기묘성채를 통해 전달되고.

기묘성채가 모든 괴뢰들을 통솔하였다.

나는 기묘성채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다른 괴뢰들과 움직였다.

우우우웅!

내 눈으로 영력이 몰렸다.

번쩍!

나와 다른 사축기 괴뢰들의 눈에서, 일제히 광선이 나갔다.

쩌엉, 쩌엉, 쩌엉!

검은 구름이 광선에 의해 뻥뻥 뚫린다.

귀신들의 숫자는 괴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질 자체는 괴뢰 쪽이 우세하였다.

쿠구구구!

끼야아아아!

끄아아아!

물론, 귀왕급 귀물들 역시 존재했기에, 괴뢰들 역시 고전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비등비등해 보이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나와 귀물들이 싸우던 도중.

천지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강민희가 부딪히고 있었다.

새하얀 빛에 휩싸여, 창을 휘두르는 [그녀]가, 귀신들의 중심에 둘러싸여 마구 비명을 지르는 강민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그녀가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천지가 찢어지며 시커먼 귀신들이 밀려났다.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귀물들과 전투를 벌이며, [그녀]와 강민희의 전투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둘의 격차를 분석했다.

'[그녀]는 현재 최대 출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합체기 수도자는 일격에 찢어발겨 버릴 법한 공격이, 강민희에게 수십 번은 내리꽂힌다.

하나.

'강민희는, 비명만 지르고 있을 뿐…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랬다.

강민희가 비명을 지르며 수많은 귀신들을 통솔하며, 수억에 달하는 귀신 무리들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쇄성기 급의 힘을 지닌 강민희는 힘을 쓰는 모습이 없었다.

'어쩌면….'

나는 희망을 품고서 둘의 전투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

번쩍!

뒤쪽에서 서휼과 요족들, 그리고 수많은 종족의 연합군이 빛을 뿜었다.

그들이 짜고 있던 진법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쿠구구구구!

주변의 용맥을 끌어모은다.

천지간의 영력이 연합군의 방향에 몰렸다.

그리고.

파아아앗!

어둠을 찢어발기는 새하얀 섬광이 날아와, [그녀]를 도와 강민희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수억에 달하는 종족과, 수백의 합체기 수도자들이 짠 진에서.

[그녀]의 일격 일격과 동급의 위력을 지닌 공격들이 뿜어진다.

쿠우우우웅!

그리고.

수억의 귀신 무리들이 자진해서 공격을 막아 냈기에, 지금껏 한 번도 공격을 허용한 적 없는 강민희가.

마침내 연합군에서 쏘아 보낸 빛에 얻어맞았다.

[아아아아아!]

강민희가.

귀모(鬼母)가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그녀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에서 기다란 귀조(鬼爪)가 돋아났다.

그것이.

번쩍!

끝이었다.

싸아아아아―

연합군 전체의 소음이 가라앉았다.

지금껏 신나게 기묘성채를 통해 강민희를 밀어붙이던 괴군마저도.

나도, 김연도.

모두가 입을 닫았다.

[그녀]가, 반으로 찢어져 뒤로 훨훨 날아간다.

"안 돼에에에에에!!!"

괴군이 미친듯이 울부짖는다.

동시에.

귀모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천지사방이 귀신으로 뒤덮인다.

조무레기 같은 귀신들만 있던 그녀의 주위로, 명실상부한 사축기 급의 귀왕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번뜩!

귀모의 귀조가 번뜩이자.

대지의 절반이 공간째로 뜯겨 나갔다.

두 번의 손놀림.

그것으로, [그녀]의 반신이 뜯겨 나갔고.

연합군의 절반이 그대로 궤멸해 버렸다.

"이럴리없어이럴리없어이럴리없어…!"

괴군은 머리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발작했고, 서휼은 미소를 유지하며 연합군의 뒤쪽에서 명령을 내렸다.

"전군, 진법 변형."

파아아아앗!

괴군을 지원하던 후방의 진법이, 괴군과 귀모를 그대로 가둬 버리는 울타리로 변모한다.

서휼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괴군에게 말했다.

"늘 감사드립니다, 노야. 저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할 테니, 시간을 벌어 주시지요. 그럼 이만…."

"그럴 줄 알았다, 이 뱀 새끼…."

부우우우웅!

괴군의 괴뢰들이, 훨훨 날아오던 [그녀]의 반신을 받아 기묘성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묘성채, 포격!"

기묘성채에서 [그녀]와 동급의 힘이 모이더니, 서휼과 연합군이 쳐놓은 울타리를 향해 광선을 내뿜었다.

콰창창!

진법은 단박에 깨지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금이 갔고, 서휼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그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을 성싶더냐? 어림없는 소리. [그녀]와 나의 세계, 그 자체인 기묘성채 역시 쇄성기에 버금가는 괴뢰다."

콰아아앙!

다시 한번 기묘성채가 발사한 광선이 진법 결계를 두들겼고, 마침내 진법 결계에 구멍이 났다.

"네놈한테 뒤통수를 한두번 맞아 보느냐, 이 뱀 녀석아…."

"하하, 이번에도 노야를 곤란하게 만들기엔 역부족이었군요."

"조금만 거기서 기다리거라, 방금 뜯겨진 [그녀]의 몸체로 네놈 몸을 개조해다가 붙이면 그만이겠구나."

하지만 서휼은 여유를 잃지 않고 괴군에게 말했다.

"뭐, 해 볼 수 있으시면 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제 곧 존자(尊者)께서 지원을 보내신다 하시니, 그분마저 넘고 오신다면, 그때는 제 최후의 패를 보여드리지요."

우우우웅!

그 말과 동시에, 서휼과 연합군은 진법 너머에, 어느새 만들어져 있는 전송진의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파아앗!

전송진은 서휼과 모두를 한 번에 전송시켜 버리고는 바로 빛을 잃어버렸다.

"흐흐, 짜증 나는 놈. 전 기묘성채 주민들은 들으라! [그녀]가 회복에 들어가야 하니, 후퇴한다!"

빠드득, 빠득!

괴군이 손가락을 미친 듯이 씹어 대며, 광증이 번들대는 눈으로 괴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길….'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너무 금방 끝났다.

괴군의 [그녀]가 아니라, 기묘성채 자체가 타격을 받았다면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괴군의 괴뢰들을 통솔하는 기묘성채가 멀쩡한 이상, 아직 도망은 요원했다.

나는 김연의 옆으로 귀환했다.

"어, 어떻게 하죠? 은현 오빠…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조금만 더 기다리자.'

너무 위험하다.

괴군의 전력이 대폭 약화되었지만, 나는 서휼이 배신할 때 최소한 괴군의 뒤를 거세게 노려 그의 기묘성채에 타격은 입힐 줄 알았으나.

모은 병력의 절반을 온존시킨 채 괴군과 싸우지도 않고 후퇴할 줄은 몰랐다.

'지금은 위험해….'

"…네."

김연은 입술을 짓씹고, 기묘성채의 부름에 이끌려 기묘성채를 따라 강민희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연은 뒤를 돌아, 진법 너머에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강민희를 보았다.

그녀는 딱히 우리를 쫓지 않았고, 방금의 일격으로 궤멸시킨 연합군 절반의 혼령들을 집어삼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괴로워하고 있군.'

우리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광한계에 떨어진 모든 동료들 역시.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제기랄….'

모두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짙은 무력감에 빠져, 괴군의 패잔병들과 함께 광한계의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괴군의 기묘성채와 함께 강민희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고 있을 때였다.

우우우웅!

"음?"

괴군이 미간을 씰룩거린다.

괴군의 기묘성채가 향하는 방향에서, 공간이 쪼개진다.

그리고, 미약한 녹색 빛이 공간의 틈새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쿠웅!

'그것'은 삼척동자만한 크기였다.

김연의 가슴께나 올 어린아이 같은 체형의 작은 녹빛의 존재는, 등 뒤에 두 자루의 박도(朴刀)를 매고 있었다.

'사축기? 합체기?'

그 존재는 경지를 제대로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존재의 등장에 괴군은 얼굴을 굳히며 기묘성채를 멈추었다.

남은 괴뢰 군단 역시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섰다.

"네가 용가리 놈이 말한 '존자'냐?"

괴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그마한 존재에게 물었다.

녹빛의 두건을 쓰고 있는 작고 볼품없는 존재는, 두건과 마찬가지로 녹빛의 작은 손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두 존재의 시선이 얽혔다.

[구현(具現)의 첫걸음을 밟았군. 음, 아닌가? 아, 그렇군. 그냥 의식을 단련하다 우연찮게 닿았어.]

"뭐라는 게야?"

[하긴 인족 중에 의식에 대해서 참오하는 놈이 많지 않은 걸 생각하면 그 정도만 닿아도 엄청난 거겠군. 스스로가 뭘 얻었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안타깝구나. 쯧쯧….]

갑자기 괴군을 품평하며 혀를 차던 그가, 괴군에게 물었다.

[그래… 일단 네가 수계에서 올라왔다는 괴군 조연이냐? 광한계 전역에 너와 귀모 때문에 대혼돈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이거 기이하군. 왜 합체기도 안 되어 보이는 놈인데, 네놈이 나타나니까 천기가 바뀐 거지?"

[흠,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듣던 대로 광한계에서 제대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한 놈이라 진짜 모르는 건지.]

오싹!

나는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수도자들.

사축기니 합체기 수도자니 하는 이들에게선, '괴물'을 만났을 때의 위기감을 느꼈지만.

저자는 달랐다.

마치, 절정 고수 시절 등봉조극의 달했던 김영훈과 싸웠을 때 느꼈던, 무인으로서의 위기감.

마치 잘 벼려진 칼을 눈앞에 둔 듯한 긴장감!

[꼬마야, '존자'라는 칭호는 말이다.]

스릉!

작은 녹색의 손이, 등 뒤에 차고 있던 박도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쇄성기(碎星期), 혹은 그에 준하는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만 붙는 칭호란다.]

"네가 쇄성기라고? 귀모에 비하면 한참 약해 보이는데…?"

[흠, 그야 당연하지. 내 본체는 지금 먼 차원에서 광한계로 귀환하는 도중이고. 백운성사께서 하도 급히 보채셔서 기운 일부를 떼어 낸 분신(分身)만 먼저 보낸 거니까.]

"흐히히히! 귀모는 육신으로 괴뢰를 만들기 애매했는데, 너를 잡으면 진짜 쇄성기 존재로 만든 괴뢰를 만들 수 있단 거구나!"

[이거… 소문대로 진짜 미친놈이군. 쯧쯧… 보아하니 마음이 잔뜩 썩어 있구나. 그 정신 상태로 어찌 살아 있는 거지? 한 가닥 희망만을 붙잡고 자살하지 않고 버티는 건가?]

그가 괴군을 보며 말했다.

쿠구구구구!

괴군의 기묘성채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상을 입긴 했지만, 고작 합체기 수준 쇄성기 수사의 분신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흐히히! 부족했던 쇄성기 수사의 자료 역시 너로 인해 보충할 수 있겠구나!"

[…흠. 확실히 기운은 그럭저럭 쇄성기 수준의 괴뢰군.]

그리고.

우웅!

녹색의 작은 몸을 지닌 그가, 박도를 들어 올렸다.

'아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전율했다.

김연도 괴군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로지 나만이 그 자세를 보며,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착각하나 보구나. 기운만 쇄성기 수사들을 흉내 내는 걸로 끝이 아니야. '진짜' 쇄성기 수사들은, 슬슬 필멸자의 테를 벗어나 신(神)이 되어 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삼라만상의 모든 빛이, 저 박도 한곳으로 몰린다.

그 섬칫한 예기에, 내 영혼마저 꿰뚫리는 듯했다.

[나는, 쇄성기에 준하는 경지에 올랐을 뿐. 딱히 쇄성기 '수사'가 아니라서, 날 우연찮게 이겨도 네가 원하는 건 못 얻을 거란다, 꼬마야.]

"뭬야?"

[영광으로 알아라. 꼬마야. 본 존자는 심족(心族) 최고 지도자, 함천존자(陷天尊者) 장익(暲翼).]

파아앗….

박도가, 천천히 떨어진다.

너무나도 느린 그 일 수.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무학이 어그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심족에겐 합체기 급이니 쇄성기 급이니 힘의 크기가 큰 의미 없으니. 이 일 수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다음 순간.

기묘성채가 쪼개졌다.

연의 연 (2)

쉬이이이….

녹색의 섬광이 스러지고 난 자리.

그곳은 공간째로 뜯겨 나가, 시커먼 허공간의 공허를 드러내고 있었다.

스르륵….

녹색의 손이, 박도를 자신의 등 뒤로 집어넣었다.

구구구구구!

거대한 성의 조각이, 허공간 아래로 떨어졌다.

두건을 쓴 자.

함천존자 장익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성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군… 이걸 피해?]

쿠구구구구….

떨어지는 기묘성채의 조각은, 3분의 1 정도였다.

세 개의 원통형 성이 합쳐진 기묘성채에서, 한 개의 원통형 성만을 꼬리 자르듯이 잘라 버리고.

그의 눈앞에서 도망쳤다.

[재밌는 녀석들이군. 미치지만 않았으면 같이 차나 한잔하며 깨달음을 나눠 봤을지도 모르겠어….]

우우웅!

장익의 옆으로 조그마한 환영이 떠올랐다.

비췻빛 작은 사슴뿔이 이마에 돋아난, 청발의 미청년.

서휼의 환영이었다.

[심족의 존자께, 지족(地族) 총연맹 총군사 서휼이 인사 올립니다.]

[지족 총연맹? 그런 게 생겼나?]

[예, 귀모와 괴군을 비롯해, 학살마 낙뢰자나 기타 여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지족 전체가 이번에 뭉치기로 했습니다.]

[흐음….]

[그나저나, 어째서 존자께서 괴군을 놓아 주셨는지 여쭈어봐도 괜찮을지요?]

서휼의 환영의 질문에, 장익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백운성사께서 나를 재촉하시긴 하셨다만,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디까지나 귀모를 먼저 처리해 달라고 하셨다. 괴군은 우선 순위가 떨어진다. 안 그래도 분신체라, 힘을 좀 쓰니까 벌써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잖느냐.]

우우우웅….

장익은 반쯤 투명해진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귀모도 위협적이긴 하지만,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도리어 광증과 이성이 공존하는 괴군이야말로 앞으로 더 세가 불어날 수 있으니, 그자부터 처리하는 게 낫지 않으신지….]

그 말에 장익은 괴군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번의 공격을 날렸다.]

[…?]

[하나는 저놈의 성을 쪼갰고, 나머지 하나는 놈의 제자 중 하나의 심상에 불어넣었다.]

[…제가 심족의 기오막측한 공법은 이해가 아니 되어서 그런데, 혹여나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그리고 괴군의 제자는 한 명인데, 제자 중 한 명이라 함은….]

서휼의 물음에, 장익은 서휼을 흘긋 바라보더니 손을 흩었다.

파스슷!

그 손짓에 서휼의 환영이 어그러진다.

[귀모가 이쪽으로 오는군. 이성이 휘발되긴 했어도 별의 힘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괴군 놈의 괴뢰보다는 훨씬 더 쇄성기에 가깝구나. 저 정도를 베려면 집중해야 하니, 이제 연락은 이쯤 하지.]

쉬이이….

서휼의 환영이 일그러졌다.

장익은 혀를 차며 말했다.

[더러운 걸 봤군. 지족에도 망조(亡兆)가 들었어. 저런 놈이 총군사 자리를 꿰차다니… 쯧쯧.]

쿠구구구구!

지평선 너머로, 검은 구름과 함께 그 중앙에서 울부짖는 존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릉, 스릉….

장익은 등 뒤에서 두 자루의 박도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흠, 괴군이나 귀모…. 둘 다 아무리 봐도 저 서휼이란 놈보다 덜 위험해 보이는데…. 백운성사께서 귀모와 괴군만 우선 격살하라 하신 게 맞는 건가? 뭐, 지족이 망하면 심족들도 숨통이 트일 테니… 일단 내버려 두지.]

그는 박도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작은 그의 몸뚱이를 시작으로, 녹색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구….

기묘성채는 삼분지 일이 뜯겨 나갔음에도 속도가 줄지 않고 빠르게 나아갔다.

허공간을 넘고, 온갖 기이한 강산을 넘어, 마침내 한 자리에 도착했다.

쿠구구구!

천 년 전 기묘성채가 머물렀던 계곡과 비슷한 계곡.

괴군은 그곳에 기묘성채를 내리고, 황급히 [그녀]를 수리하러 기묘성채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지금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기묘성채도 제 기능이 잘 돌아가지 않고, 괴군의 [그녀]도 지금 반쪽이 난 현시점.

지금이야말로 괴군에게서 탈출할 적기였다.

내가 김연에게 내 뜻을 심어로 전달했을 때였다.

"지금 가자고요?"

김연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절걱, 절걱….

나는 기묘성채가 지금 개판이 난 상황을 이용해, 괴뢰들을 이용해 오류를 잔뜩 만들어 낸 후.

다시 내 얼굴 쪽으로 오류를 몰아넣고 말했다.

"연, 아… 무슨, 의미, 냐?"

"…은현 오빠. 우리가 지금 저 미치광이한테서 그냥 탈출하면, 저 미치광이는 다시 [그녀]를 수리하고, 방금의 패배를 양분으로 삼아 더 성장할 거예요."

"연, 아…."

"탈출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지금 죽여야 해요."

그녀의 눈에서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아니, 은은한 노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용암과도 같은 증오였다.

"연, 아… 너는, 복수를, 하고 싶은, 거니?"

"…네.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맞아요! 맹세했잖아요? 괴군의 앞에서 [그녀]를 산산조각 내어 버리겠다고! 우리는 저 미치광이한테 잡혀서 이 꼴이 되어 버렸는데, 저 미치광이는 자기 인형한테 박아 대면서 제 세계에 빠져 언제까지고 행복해할 거잖아요?"

뿌드득….

"은현 오빠.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제 의식으로 장악하고, [그녀]를 괴군의 앞에서 빼앗을 수 있어요…!"

김연이 잔뜩 망가진 표정으로 웃으며 외쳤다.

"지금밖에 오지 않는 기회에요! 오늘 여기서 저 미치광이를 해치우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죗값을 받아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콰악!

그녀가, 괴뢰로 개조된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의 가슴에 맺힌 한은 도대체, 도대체 어디에 풀어야 한단 말이에요? 네?"

나는 기묘성채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저 미치광이에게 쌓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은현 오빠, 이 기묘성채에서 탈출하게 되면… 그때에 우리 제대로 마음을 터놓기로 했잖아요?"

그랬다.

나는 그녀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게 된 후.

괴군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후에야, 그녀에게서 받은 마음을 돌려 주겠다고 했었다.

"[그녀]를 산산이 박살 내어 버리고, 괴군을 재로 만들어 버린 후에. 이곳에서 저희 제대로 된 혼례식을 올려요. 오늘, 오늘이야말로 기회에요!"

"…."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묘성신전을 대성한 이후.

그날부터, 그녀의 광증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광증 대신 무언가 기묘한 집착이 생기는 것을 알아챘다.

기묘성심전을 대성한 날부터, 김연은 나, 그리고 이 기묘성채에 대한 기묘한 집착이 생겼다.

나에 대한 집착이야 상관은 없었다.

이해도 했다.

하지만 기묘성채에 대한 집착은 살짝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었다.

기묘성심전의 요결의 이해도가 김연을 뛰어넘는 나조차도 살짝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도리어 월도답천에 이르러, 심상에 대한 통제가 완벽한 나였기에 김연보다 기묘성심전의 집착을 잘 떨쳐내는 걸지도 몰랐지만….

'왠지, 수상하군.'

"연, 아… 괴군은, 미친놈, 이지만… 동시에, 이성이 공존하는, 자이다. 그가 우리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어."

"…괜찮아요, 오빠."

우우우웅!

스르르륵!

그녀의 의식이, 실처럼 풀어헤쳐졌다.

사락, 사라라락!

순식간에 그녀를 중심으로, 기묘성채에 의해 통제받던 괴뢰들이 그녀에게 통제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실처럼 늘어진 의식이, 괴뢰들의 영력 회로로 들어가 삽시간에 괴뢰들을 장악한다.

"괴군, 그는 내 진짜 능력이 뭔지 이해하지 못해요. 단순히 의식이 큰 게 아니에요. 은현 오빠, 오빠의 마음을 확인한 날부터, 500년 전의 그 날부터, 저는 제 명(命)을 깨달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쩐지 그녀의 웃음에는 기이한 광기가 깃들어 있다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제 능력은 제 운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아마 오빠도,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각자의 명을 깨달으면 능력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쿠구구구!

그녀의 의식에, 점차 무시할 수 없는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천상금뢰지체? 귀도음화선근? 일문성체? 그런 멍청한 체질들이 아니야…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지며 얻은 '진짜' 권능은… 자질을 확인한 이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기에 헛소리나 해댄 것뿐…."

우우우웅!

파아아앗!

그녀의 의식이 빛을 뿜었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의식은 기묘성채 전체를 뒤덮었다.

괴군의 성이, 새하얀 실에 뒤덮여 먹히고 있었다.

[괴군은 분명 대단한 자에요. 그가 창조한 기묘성심전이, 대성할 시에 제 권능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가 되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개 끝이야. 은현 오빠, 저를 도와주세요.]

파츠츠츠츠!

김연의 전신이, 그녀의 의식을 따라 새하얗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새하얀 실이 뭉쳐진 유령 같아 보였다.

[저를 도와, 저 미치광이를 처단하고, 우리 해로하며 살아요.]

"…알, 겠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느릿하게 말했다.

"일이 끝나고, 내 마음을, 제대로 말해 주마."

[고마워요.]

그녀는 싱긋 웃더니, 기묘성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변의 괴뢰들을 장악했다.

우우우웅!

서 장군의 육신에 깔린 영력 회로가, 전부 내 의식의 통제 하에 놓인다.

서 장군의 영력 회로뿐이 아니었다.

괴군의 괴뢰들.

그 괴뢰들이 연동되는 영력의 흐름 역시, 일종의 보이지 않는 영력 회로나 마찬가지였다.

의념을 닮은 그 영력의 흐름들 역시, 전부 내 의지 하에 놓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긱!

기묘성채 전체의 통제권 중 일부가 내 의식 하에 놓인다.

기묘성채가 거부 반응을 보이며, 수십억에 달하는 '웅성임'을 뇌리로 쏟아 냈지만, 나는 기묘성채를 바라보며 웃었다.

"천 년을, 너를 파악해 왔다."

한없이 생명체에 가까운, 광기의 요람.

수많은 인공 혼에서 뿜어지는 유사 의념의 파장을 엮어, 중심부로 모아 진짜 의념을 만들고,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영혼을 제작하는 미치광이의 공방.

오로지 광기로 운용되는 녀석.

하지만, 나 역시 천 년을 버티며 회로를 몰래 장악하고, 녀석의 광기를 파악해 왔다.

"네놈에게, 지지, 않아…!"

우우우우웅!

나는 기묘성채를 장악해 갔고, 김연은 괴뢰들을 장악해 갔다.

천 년.

괴군에게 잡히고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가 약해진 틈을 타 드디어 반역을 시작하였다.

* * *

철컥, 철컥, 철컥….

괴군의 공방 안쪽.

괴군은 [그녀]의 조각난 몸을 수복하여 대강 형체를 잡아 주었다.

"오오, 다행이구려. 그래도 전투 기능만 망가졌고, 중요 기능은 대부분 멀쩡하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오…."

괴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진동하며, 괴군에게 그의 제자의 반역을 알렸다.

"흠?"

따악!

괴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공방 안쪽에 있던 기관 장치들이 움직이며, 괴군의 앞으로 한 개의 거울을 가지고 왔다.

거울로 영기가 몰리며 거울이 일그러지더니, 점차 괴뢰들을 장악해 가며 상층으로 올라오는 김연의 모습을 비췄다.

김연은 새하얀 실 같은 의식을 사방으로 뻗치며, 새하얀 빛에 뒤덮인 기이한 모습이었다.

괴군은 그 모습을 잠시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음, 도망치지 않고 여기로 온다는 건, 역시 기묘성채를 장악하러 온다는 건가?"

마침 광증이 도지는 게 아닌, 이성이 조금 돌아온 모양새.

그는 김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기묘성심전의 유혹과, 나에 대한 증오를 못 이겼나 보군."

잠시 거울을 들여다보면 괴군이 눈을 감았다.

"…기묘성채도 반파되고, 당신도 제대로 된 꼴이 아닌 지금에서야 기묘성채를 장악하는가…. 진즉 미쳤다고 생각했거늘, 이성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괴군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타깝군, 더 좋은 상황에서 기묘성채의 탈환을 시도했으면 좋았을 것을…. 뭐, 어쩔 수 없는가."

어쩐지,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최선이라면 받아들여야지. 길었구나…."

괴군이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드디어, 오늘… 기묘성채가, 완성된다."

잠시 [그녀]와 포옹을 하던 괴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묘성채의 최중심부이자, 최상층.

공방의 위층이자, 지금껏 김연에게조차 개방하지 않은 마지막 층.

철컥, 철컥, 철컥….

그의 손짓에, 마지막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천장에서부터 나선형으로 내려왔다.

괴군은 [그녀]와 손을 잡고 천천히 마지막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마지막 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계단을 없애거나 하지 않았다.

* * *

콰아앙!

괴뢰들을 장악하고, 서은현을 통해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그녀가, 기묘성채 전체를 점차 그녀의 의식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이 기분….'

기묘성채의 광증과 웅성임은 서은현이 대신 떠안아 준다.

그리고 그녀가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움직여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다.

먼 옛날, 칠성제의를 뚫을 때 이후로 이런 상황이 얼마나 있었는가.

비록 이번에는 새로운 경지를 뚫는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삶을 향해 도약할 기회를 얻을 시간이었다.

콰아앙!

김연의 명을 받은 괴뢰들이, 괴군의 공방을 두들겼다.

'드디어….'

김연은 의식을 조종하며 공방 너머를 노려보았다.

기묘성채의 최중심부는 의식으로도 탐지할 수가 없었다.

특수한 금제가 걸렸다기보다는, 너무 진짜 같은 의념들이 미친 듯이 표면을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의식을 함부로 뻗는 것만으로도 광증에 휩싸이니 말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공방도 이제, 끝이야.'

콰아앙!

마침내 공방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이제, 이곳은 나와 오빠의 집이 될 거야….'

그녀의 가슴 속에서 깊은 분노와 고통이 치솟아 올랐다.

비록 서은현은 아직 괴뢰 속에 가까스로 남아 있다지만.

그가 처음 괴뢰가 되었을 때.

어떤 고통이 있었는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수백 년을 반쯤 미쳐 지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괴군은 그녀의 몸 역시, 기묘성채를 다루는 데에 더욱더 도움이 된답시고 개조까지 하였다.

'용서할 수 없어.'

김연의 눈에서 증오가 활활 타올랐다.

'나와 은현 오빠의 사랑을 망친 그 미치광이는, 그 미치광이가 가장 아끼던 것을 박살 내는 것으로 벌할 거야.'

저벅, 저벅….

괴군의 공방 안으로 들어간 김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 하."

천장을 향해 나선형으로 난 계단.

기묘성채의 마지막 층이자, 숨겨진 공간.

"추하게 기묘성채의 최심부에 숨으셔서 저를 상대하시겠단 건가요? 스승님… [그녀]의 엄마 아빠 할애비를 다 데리고 와도 이 판도는 이제 바꿀 수 없습니다."

저벅, 저벅….

그녀는 이를 악물고 괴군이 남겨 놓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부터, 기묘성채는 제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눌 거예요."

저벅….

그리고, 계단의 끝자락에 도달해.

공방의 위층에 올라선 김연은 흠칫 놀랐다.

"…이건…?"

* * *

우우웅!

기묘성채 바깥에서, 김연에게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넘기고, 기묘성채의 광증을 받아내던 나는 기묘성채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연결이… 희미해졌다.'

김연의 의식 실은 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의식을 연결한 채,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와 연결된 의식의 실이, 희미해졌다.

마치 뭔가, 굉장히 시끄러운 장소에 있을 때 조금 멀리 떨어진 친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굉장히 강렬한 의념의 격류들이 나와 그녀의 연결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당장 기묘성채의 광기를 상대하기만도 버거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 장군의 머리가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아마 여기에서 더 무리한다면 서 장군의 머리가 폭발해 버리고, 나는 그대로 영혼이 흩어져서 죽어 버릴 터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해라!'

나는 이를 악물며 김연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 * *

"…이게, 뭐야?"

김연은 황당한 눈으로 괴군이 숨겨 놓은 층을 쳐다보았다.

"왔느냐, 제자야?"

괴군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으로 김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들어 있던 광증은, 씻은 듯이 없어져 있었다.

"…꽤 안색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스승님. 귀모와 그 녹색 난쟁이에게 제대로 교육을 당하시고 나니 정신이 치료되셨나 보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느냐. 내 정신을 치료한 건 너란다, 제자야."

괴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길고도 길었다. 네가 광기에 미쳐서, 그 거대한 의식으로 내 기묘성채를 빼앗아 탈환할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무슨…."

"한데, 예상 외로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구나. 내가 가장 약해지고, 기묘성채가 다 망가진 지금에야 나를 습격한 것을 보면…."

김연이 괴군을 노려보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다 계획된 일이었다고?"

"그렇단다. 기묘성채를 진정으로 완성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뭐…? 그게, 무슨 뜻이야…?"

그녀는 괴군에 대한 최소한의 존칭마저 집어던졌다.

"너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광증에 미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이성이 돌아올 때면 항상 막막했지. 기묘성채를 제대로 완성하려면, 내가 최소한 쇄성기 급에는 도달해야 하고, 괴뢰들의 수도 천억을 넘겨야 하며,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여서야 기묘성채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를 찾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너만 있으면 그런 막대한 자원도, 괴뢰도, 경지도 필요 없을 테니까."

"…."

"여기까지 성장해 주어서 고맙구나, 제자야. 네가 기묘성채를 탈환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네 막대한 의식에, 기묘성채가 제대로 가동되며… 드디어 기묘성채가 완성될 거란다."

괴군의 입에서,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미안하구나. 이 미치광이를 원망해라."

"…당신."

김연이 냉혹하게 웃으며 괴군을 노려보았다.

"당신 말에 의하면, 내가 괴뢰들로 그냥 기묘성채를 때려 부수기만 해도 당신이 고통받을 수 있단 거 아닌가?"

"하하, 괴뢰들은 기묘성채를 공격하지 못하게 설정되었단다. 만약 그 설정마저 바꾸고 기묘성채를 공격하게 하려면, 너는 기묘성채를 장악해야 하고, 기묘성채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기묘성채를 우선 완벽하게 발동시켜야 한다는 거지."

김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그냥 기묘성채를 돌려주고 나가 버린다면?

그럼 괴군은 다시 미치광이가 되어서, 기묘성채를 다시 되찾고 그녀를 개조해 버릴 테였다.

잠시 침묵하던 김연은 괴군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착각하는 게 있군, 당신은 내 재능이 뭔지 몰라."

"그래, 알고 있단다. 그 어떤 문헌을 뒤져 봐도 너 같은 의식을 지닌 자는 없으니까. 하지만 잊은 게 아니냐? 기묘성심전을 대성한 내 의식과 네 의식이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그 말은, 처음 보는 네 자질이라 한들 내가 도달한 경지에서 어느 정도는 추론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란다."

"…그래서, 추론해 보셨나?"

"…글쎄, 한번 직접 확인해 보거라."

괴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연의 의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더욱더 무섭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기묘성채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뭔가를 발동시키기도 전에 더 빨리 성 전체를 장악하면 끝날 일."

기이이잉, 철컥철컥철컥….

기묘성채 최상층.

그곳으로, 수많은 인공 혼들의 의념의 파장들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김연의 명을 받은 괴뢰들이 미친 듯이 기묘성채의 최상층으로 날아든다.

두 괴뢰사의 기묘한 대결이 시작되었다.

김연이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괴군이 기묘성채 심부에 있는 괴뢰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김연 역시 괴군의 괴뢰들을 빼앗으려 했으나, 괴뢰들은 그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괴뢰들은 조작 방식이 조금 특이해서 말이지. 아마 네가 기묘성채를 10할 완전히 손에 넣고서야, 천천히 통제권을 뺏을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최상층의 괴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연은 미소를 잃지 않고 법력을 끌어올렸다.

"잊으신 건 아니겠죠? 사축기에 이르렀지만, 이미 제 실력은 합체기에 비견된다는 사실을…. [그녀]도 아닌 이딴 괴뢰들로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괴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 애초에 전투용 괴뢰가 아니란다."

동시에, 괴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김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괴군이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점차 김연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뭐야, 당신… 이건…?"

그리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혼을… 제작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괴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

김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아니야. 웃기지 마…. 당신은 그래서는 안 돼…."

쿠구구구구!

김연의 의식이 점차 기묘성채를 장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묘성채의 10할을 장악한 순간.

김연은 괴군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기묘성채를 괴군 대신 발동시켜 준 것만으로, 아니.

괴군조차 못 끌어내는 기묘성채의 '모든 힘'을 이끌어 낸 그 결과로 인해.

괴군이 진정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던 풍경이, 그녀의 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김연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가 기묘성채를 통해, 눈앞의 풍경을 중단시키려 해도 눈앞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괴군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위업.

미치광이가 만들어 낸 대작.

괴군이 부채를 들고서 입을 열었다.

"기묘성채 최후단계. 연의 연(宴). 발동."

그 날.

괴군 조연이 진정으로 만들고자 했던 작품이.

김연의 손에서 태어났다.

연의 연 (3)

철컥철컥철컥철컥….

기관 장치들이 미친 듯이 움직이며, 하나의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운명은 곧 인력. 그 말은 곧, 운명은 뭔가를 끌어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서휼의 계략에 놀아나던 먼 옛날, 놈과 함께 봉명성을 방문해서 운명의 인력을 느꼈을 때 떠오른 발상이다."

사방의 풍광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괴뢰들의 몸에, 환영처럼 어떠한 형상들이 씌워지다, 종래에는 완전한 인간으로 변하였다.

기묘성채의 최상층에, '밤하늘'이 떠올랐고, 왁자지껄한 축제의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운명이 형이상학적인 현상을 끌어오는 게 가능하다면. 어쩌면… 나의 과거, 그 시공간 역시 끌어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김연이 서 있는 장소와 괴군이 서 있는 장소가 분리되었다.

아예 다른 이공간(異空間)이 창조되기 시작했다.

"봉명성의 모조품인 기묘성채를 만들었던 그날부터 꿈꿔 오고, 꿈꿔 왔다. 드디어…."

괴군이 환하게 웃으며, 괴뢰가 아닌 진정한 사람으로 바뀐 상대와 함께 부채를 들고 사위를 추기 시작했다.

조연이라는 인간이, 삶을 살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두 남녀가 부채를 잡고 잔치를 즐기던 그때의 그 시공간(時空間) 그 자체가 기묘성채의 중앙에서 재현된다.

파츠츠츠츳…!

김연은 자신의 기력이, 눈앞의 시공간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생명력까지 빨려 가면서도, 김연은 기묘성채를 움직이는 의식을 떼어 놓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와 은현 오빠를 지옥으로 밀어 넣고, 지금 뭘 하는 거야? 왜 당신만 행복해지려는 거야? 웃기지 마…!]

김연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을 비롯해, 수억의 생명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악인이.

저 안에서 천국에 도달한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기긱, 기기기긱!

기묘성채를 장악한 그녀의 의지가, 마침내 성채 최심부의 명령들에 닿았다.

철컥, 철컥….

기관 장치들이 하나둘 멈추며, 눈앞의 시공간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생명이….'

눈앞의 시공간과, 그녀의 목숨이.

어느덧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으윽…!]

김연은 이를 악물었다.

어마어마한 기력이 눈앞의 시공간으로 빨려 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의 생명력이 모조리 빨려 죽을 상황.

'안 돼, 안 돼…!'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서, 그녀의 일생을 망친 악인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럴 순 없어!'

그녀는 기묘성채의 기관 장치들.

그 움직임을 파악하며, 눈앞에서 구현되는, 과거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아마 저 춤사위가 끝나면, 다시 모든 것이 연기처럼 흩어질 터.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녀의 기력이 빨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생명력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떨어지겠지만, 그것만이 그녀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김연은 그러기 싫었다.

'왜, 왜 저 광인이 행복한 모습을 봐야 하는 건데?'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망쳐 놓은 악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저 안쪽에서, 괴군 역시 생명력이 저 시간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아마, 괴군이 만들어 낸 이 시간이 스러지면 괴군 역시 빈사 상태가 될 터.

조금만 기다리면, 괴군은 그냥 죽을 터였다.

하지만.

'저 미치광이가, 저렇게 행복에 휩싸여 죽는다고?'

뿌드득….

[용납 못 해…!]

파칵, 파칵, 파칵!

눈앞의 이공간을 향해, 그녀의 의식 실들이 점차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김연은 점차 그녀와 눈앞의 이공간이 동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콱!

그녀의 상단전이 과열되며, 그녀의 코와 눈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김연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기어코 괴군의 작품을 파괴하려 손을 떨었다.

그때였다.

콰악!

김연의 손을, 억센 누군가가 잡았다.

서은현이었다.

* * *

나는 눈앞에서 만들어진 시공간과, 그것을 망가뜨리려 힘쓰며 기어이 자신마저 죽으려 하는 김연을 번갈아 보았다.

연이가 기묘성채를 장악한 후.

그 후부터는 웅성임이 사라졌기에, 비로소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연아, 그만해라."

[오빠….]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왜 저자는 저렇게 행복하게 죽어야 하고, 우리는 저자가 망친 인생 속에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너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이럴 순 없어…. 저자도, 평생을 좇아온 목적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고통을….]

"연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게 아니냐?"

[예…?]

"이 세상은, 그래. 지옥이다. 불공평하고, 미쳐 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곳. 그게 이 세상이다. 하지만…."

그리고, 나는 그녀를 껴안아 주었다.

"그래도, 너와 내가, 마음을 주고받지 않았니."

그 옛날.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사막의 유리는 빛이 비취면 아름다운 보석같이 빛나지만, 빛이 비취지 않으면 날카롭고 위험한 흉물이 된다고.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내게 준 마음 역시 컸으나, 그녀와 마음을 주고받으며 얻은 삶의 가치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잠시 잊고, 김연을 더욱더 꼬옥 안아 주었다.

"사람의 삶은, 지옥이지만.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았다면, 어쩌면… 저기 저 미치광이보다 더욱더 좋은 천국에 이를 수도 있지 않겠니."

톡, 톡….

내 어깨 위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껏, 나는 네 마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딱딱하고 차디찬 꼭두각시의 몸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 고통이, 그 설렘이, 그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나는 인형 속에서 줄곧 마음을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네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제 끝이 다가왔으니, 이제 네게도 내 마음을 줄 수 있으니…."

스르르….

새하얀 실들에 휩싸여 있던 김연은, 어느새 다시 연분홍빛 경장을 입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 마음을, 받아 주겠다."

"…고마워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내 품에서 울며 말했다.

"고마, 워요. 정말…."

파츠츠츳….

그녀는 더 이상 의식으로 눈앞의 공간을 파고들지 않았다.

더 이상의 동화는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력이 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기묘성심전이, 기묘성채를 발동시킨 그녀의 힘을 공간 안과 강제로 연결시켜 놓았다.

언젠가 저 이공간이 스러지면 김연도 무사할 테지만, 저 이공간이 김연의 생명력을 다 먹어 치우고도 멀쩡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김연과 저 공간의 연결을, 끊어야 해.'

우우웅!

나는 서 장군의 왼손에 기력을 모아, 김연과 공간 사이의 기력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기력은 잘리지 않았고, 도리어 더더욱 원활하게 그녀의 생명력이 저 공간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 생각했다.

'평범한 공격으론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예 끊고 자르는 데에 특화된 공격을 해야 한다.

우우우웅!

나는, 서 장군의 몸으로 개조당한 후.

굉장히 오랜 시간 만에 무형검을 꺼냈다.

우우우웅!

조금 어색했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몸으로, 영혼으로 익힌 무학인 탓인지.

내 무형검은 다시금 자연스레 예기를 드러낸다.

'벤다….'

쿠구구구구구!

무형검에, 사축기 급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우우우웅!

동시에 내가 장악했던 괴뢰들의 기운 역시 끌어와, 무형검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무형검이 더욱더 투명해지고, 종래에는 쥐고 있는 나조차도 그 감각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허허로워졌다.

'벤다.'

무형검에 사축기 최정상급의 힘이 깃들며, 벨 수 없는 어떤 것이라도 벨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되었다.

'벤다!'

그리고 마침내.

예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부웅!

파아아앗!

무형검이 그대로 눈앞의 기력을 가른다.

벨 수 없던 것조차 베는 검답게, 기의 흐름 역시 그대로 베여 나간다.

하지만.

'크윽….'

괴군이 만들어 놓은, 이 거대한 흐름을 전부 베는 것에는 실패했다.

수많은 인공 혼들이 만들어 낸 의념.

그 무수한 의념들의 장대한 흐름이 만들어 낸, 눈앞의 시공간.

그 시공간이 빨아들이는 그 거대한 흡입력보다도,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한 것이었다.

'시공간, 시공간 그 자체를 잘라낼 수 있다면….'

그 정도의 힘, 혹은 기예가 있다면 베어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시 한번….'

나는 다시금 혼신의 집중력을 다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부웅!

하지만, 여전히 마찬가지.

나는 눈을 감고, 예전에 능광도를 흉내 냈던 그 감각을 떠올렸다.

내 심상으로 들어가, 능광도를 떠올려 염상한다.

나는 투명한 도산지옥 위에서, 도산의 예기를 받아 손 안쪽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부족하다….'

이 도산 전체를 움직여도 과연, 미치광이의 이 거대한 업적을 베어 내는 게 가능할까?

'연이의 생명을 빨아먹는, 이 공간의 흐름을 베어 내려면….'

능광도도, 무형검도 뛰어넘는,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더, 힘이 더 필요하건만…!'

그때였다.

'…?'

나는 문득.

내 심상.

투명한 도산의 가운데, 웬 이상한 것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녹색의 박도(朴刀)였다.

하늘을 향해 끝이 솟아 있는 주변의 도산검들과는 다르게.

그 박도는 저 혼자만 손잡이가 위쪽으로 가게 정직히 박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덩그러니.

그리고.

나는 어쩐지 그 박도에서 어떠한 끌림을 느꼈다.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내 심상 속.

나는 내게 끊임없이 소곤거리는 그 박도를 향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박도의 손잡이를 쥐고, 내 도산에서 그것을 뽑아 냈을 때였다.

파아아앗!

"…!"

내가 쥐고 있던 무형검이, 그대로 녹빛으로 물들며 한 자루의 박도가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뇌리를 울렸다.

[구현 2단계라니. 제 스승보다 뛰어난 특이한 놈 같길래 내 일격을 네 심상에 꽂아 두었다.]

녹색의 작은 소인이, 내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너는 괴군에게 역심을 가지고 있지? 네가 내 일격을 뽑아 들 날은 아마 괴군에게 역심을 드러낼 그날일 터. 네 몸에 조금 무리가 가겠지만….]

그 녹색의 소인.

함천존자, 장익.

나는 그자가 펼쳤던 기수식과 똑같은 자세를 잡고, 멍하니 눈앞의 힘의 흐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녹색의 박도가, 떨어져 내렸다.

[사용한다면, 충분히 네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게다. 어떻게 네가 심족의 방식으로 구현 두 번째까지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네 심상을 보아하니, 훌륭한 한 명의 심족이구나. 하니, 도움을 주겠다.]

파괴(破壞).

오직 그 두 글자만이 뇌리에 떠오른다.

아아, 이것은.

오로지, 모든 것을 파멸시켜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투법(鬪法)이다.

눈앞의 상대를, 거슬리는 대상을,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그 모든 것을 모조리 박살 내어 놓기 위한 경지.

나와 김영훈과는, 또 다른 해답.

콰가가가각!

녹색의 박도가 그대로 공간 그 자체를 찢어발기며 전진한다.

거대한 힘의 흐름?

이 앞에선 애들 장난일 뿐이다.

모조리, 모조리 파괴해 버린다.

녹색의 일도가, 그대로 남은 기묘성채를 다시 반으로, 공간째로 박살 내어 버린다.

콰드드득!

천지가 녹광으로 뒤덮이고, 서 장군의 영력 회로 중 양팔의 회로가 모조리 그 출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 버렸다.

내가 한창 끌어왔던, 기묘성채의 다른 괴뢰들의 영력마저 모조리 소진되어 버렸고.

동시에.

쿠구구구구구!

김연이, 괴군의 공간에서 떨어져 나왔다.

촤아아아….

그녀의 의식과 생명이 공급되지 않자, 괴군이 만들어 낸 이공간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나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두 팔에, 어떻게든 일단 무형검을 씌워 움직이면서 튕겨져 나가는 김연에게 날아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쿠과과과과!

기묘성채의 남은 부위 중 절반이, 그대로 박도가 빚어낸 파괴흔.

공간이 찢겨져 나간 그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허공을 밟으며 괴군의 공간 그 옆으로 우선 자리를 옮겼다.

푸쉬이이….

얼마간 일렁이던 괴군의 공간이, 마침내 천천히 흩어졌다.

"드디어…."

"끝이네요…."

나는 김연을 내려놓았다.

과거의 공간이 무너져 내린다.

다시금 기묘성채의 최상층에 남은 것은, 우뚝 멈춰 버린 괴뢰들뿐이었다.

[그녀] 역시 과거의 모습에서, 다시금 괴뢰의 형태인 지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괴군은 아까보다도 폭삭 늙어 버린 상태로 [그녀]와 손을 맞잡고 웃고 있었다.

기력이 전부 소진되어, 한 줌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괴군에게로 다가갔다.

털썩!

그리고, 우리가 괴군에게 다가가자.

괴군은 [그녀]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죽었군."

"…그러네요."

미치광이의 목적은,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을.

그 시공간을 다시금 소환하여, 그 안에서 죽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의 괴뢰들을 바라보았다.

"…왜, 이 미치광이가 가짜 영혼을 만들려 했는지, 이제야 밝혀졌네요…."

김연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괴군의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그녀의 손으로 이 시공간을 완성했기 때문일까.

그녀는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

"괴군은, 운명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듯. 사람 역시 운명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으로, 지금껏 수많은 가짜 영혼을 만들었던 거예요."

기묘성채를 완성시킨 그녀의 입에서, 기묘성채의 비밀이 흘러나왔다.

"수많은 가짜 영혼을 움직여, 운명에 영향을 미쳐 인력을 만들어 내고. 그 인력을 통해, 자신의 과거. 가장 행복한 순간을 다시 불러내어 재현하자. 그게, 이 광인의 목적이었던 거죠."

김연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영력 회로에 영력이 한 올도 없었다.

그녀 역시 어마어마한 일을 겪었던 터라 힘이 빠진 것인지.

힘없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기대, 죽은 괴군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래."

길었다.

정말 길었다.

우리는.

드디어 마침내.

괴군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영력 회로가 타 버려, 이제는 움직이지 못하는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은현 오빠."

"응?"

"할 말이 있는데요…."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하늘 위쪽에, 거대한 결계가 펼쳐졌다.

파아아앗!

결계진의 중앙에는, 한 마리 푸른 용이 위엄 넘치게 그려져 있었다.

결계진의 너머에서, 서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천존자께서 말씀해 주셔서, 다행히 그분의 공격을 좌표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후후, 노야. 지금 살아 계십니까? 아니면 존자께서 숨겨 두신 일격을 맞고 드디어 눈을 감으셨습니까? 너무 멀어서 상황은 잘 모르겠군요.]

우우우웅!

결계의 중앙으로, 힘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런…!"

나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힘이 풀린다.

함천존자의 일격을 쏟아 낸 직후인 탓인지.

전신이 망가져 있었다.

괴군의 기묘성채를 한참 발동시킨 김연 역시 손가락 하나 들지 못하는 상황.

그녀는 괴뢰들을 조종해 보려 했으나, 남은 괴뢰들조차 얼마 없었고, 그마저도 망가진 것들이 대다수였다.

[노야께서 돌아가셨을 수도 있으나. 만에 하나라도, 정말 만에 하나라도 노야께서 살아 계신다면 매우 곤란해집니다. 하오니, 질긴 목숨 붙잡지 마시고 이만 눈을 감으시기를.]

쿠구구구구!

결계진의 중앙에 있는, 용의 문양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인다.

동시에 용의 주변으로 온갖 기이한 선수(仙獸)들이 나타난다.

[드디어 우리의 악연이 끝나는군요. 제 평생의 호적수에게, 이 서휼이 경의를 표합니다. 자, 그럼….]

쿠구구구구!

[부인, 발동해 주시지요.]

번쩍!

선수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환영이 되어 진 아래로 나타났고, 그들이 각자 입을 벌렸다.

거대한 빛이 천지간을 메웠다.

나는 천천히 떨어지는 그 빛살을 보며, 옆의 있던 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체념한 눈빛이었다.

"…은현 오빠."

"…연아."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한 가지, 허락을 구해도 되겠니?"

"뭔가요?"

"앞으로."

나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눈물이 말라 버린 몸이었으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만약 우리에게, 다음 생이 있다면… 그다음 생에도. 네가, 지금까지 나와 함께해 온 네가 아니더라도…."

주변이 하얗게 물들었다.

"계속, 계속 네게 이 마음을 전해도, 괜찮겠느냐?"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녀가 빛무리 속에서 웃었다.

"은현 오빠, 제 비밀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엄청난 비밀 하나 알려 드릴까요?"

"잠깐…."

"저는 사실…."

잠시 머뭇거린 김연은, 어떤 꽃망울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은현 오빠가 너무나 좋아요. 그러니… 그렇게 해 주세요."

"…그거 정말."

빛에 휘말려, 전신이 사라진다.

나는 옅게 웃었다.

"굉장한 비밀이구나."

조연의 연회 끝에서.

김연의 연심을 확인한 나는.

연(戀)의 연(緣)을 끝맺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천 년을 넘게 서로 함께해 온 두 인형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끝에서.

빛무리 속에 잠겨, 마침내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네 번째 회귀(回歸)였다.

14회차의 첫날

몇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불쾌한 감각.

죽기 직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모든 상황.

즈우웅!

발밑의 비선대에 결계가 펼쳐지며, 주변 공간 파동이 안정된다.

광한계로 비승한 직후의 상황.

그리고.

지난 생의 막바지에 들렸던, 그 역겨운 목소리.

"선택하시게. 우리는 이제 각자 광한계 선배분들의 인도에 따라 흩어질 것이니, 자네는 어떤 세력과 함께 가겠는가?"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벽호.

허곽.

청문선우.

서휼….

그리고.

괴군.

나는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본 후.

괴군의 옆에 쓰러져 거품을 무는 중인 김연을 쳐다보았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서휼의 답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괴군의 옆에 쓰러져 있는 김연에게 다가갔다.

괴군의 눈에 이채가 어렸으나,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로 기절한 김연의 요혈을 짚었다.

"으, 으헉!"

김연은 헛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눈을 떴다.

"어, 어…? 여긴, 서 대리니…."

그리고, 나는 김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바로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다.

"호오오…."

괴군이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다른 이들의 눈에 당황이 서렸다.

"연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좋아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하겠다."

지난 생의 그녀와 맺은 약속.

앞으로도, 후생으로 이어져도 계속.

다음 삶의 김연이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닐지라도.

몇 번이고 사랑하겠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니, 나는 거리낌 없이 그녀를 안고서 말하였다.

"예, 예…?"

김연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얼떨떨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어, 꿈인가?"

나는 그녀를 껴안고, 무형검은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의 몸에 혈체의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체내에 작은 법술이 하나가 새겨졌다.

앞으로도 계속 그녀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기묘성채의 영력 회로를 참조해 만든 것이라, 기묘성채 안쪽에 있는 한 괴군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를 조금 더 껴안아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조연 대인."

미치광이에게는 미치광이의 논리로 말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미치광이와 함께하며, 미치광이의 논리는 충분히 깨달았다.

"연이는 훌륭한 괴뢰사의 자질을 지닌 이입니다. 그녀의 동료였던 저였기에 알 수 있지요."

"호오…?"

"하니, 그녀를 훌륭한 괴뢰사로 키워 주십시오. 언젠가 제가 기묘성채에 들어가, 당신의 [주민]이 되겠습니다. 기묘성채의 [주민]이 된 채로, 괴뢰사가 된 연이에게 조종당하고자 합니다. 최대한 완전한 괴뢰사에게 조종당하고 싶으니, 그녀를 최대한 개조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그의 앞에서 내 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괴뢰가 되어 부려지고 싶다.

괴뢰에게 미친 미치광이에게 이것만큼 잘 먹혀드는 논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괴군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마구 쳤다.

"아아아…! 아름답구나! 좋아, 좋아! 그렇게 하겠다! 내가 이 아이를 잘 가르치지. 한데, 그 말은 너도 지금 당장 [주민]이 되겠다는 것이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상태의 저를 개조하시면, 그저 축기기 급 괴뢰 하나를 얻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약한 괴뢰가 되어서 연이에게 부려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더욱더 훌륭한 괴뢰가 될 수 있도록 수련을 하고, 언젠가 제 발로 기묘성채로 찾아가겠습니다."

"아아아아아…!"

괴군은 감동의 눈물을 쏟아내었다.

"이 얼마나 훌륭한 녀석이란 말인가! 좋다, 좋다! 언제라도 너를 위해 기묘성채의 문을 열어놓으마!"

김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쳐다보았고, 괴군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감격에 젖은 채로 눈물을 훔쳤다.

미치광이의 논리에 잘 맞춰서 설명을 하니, 확실히 알아들은 모양.

'이게 최선이겠지.'

나는 괴군에게 인사를 하고 뒤돌았다.

지금 당장 저 미치광이에게서 김연을 데려올 순 없다.

제 것을 뺏으려 한답시고 오히려 더욱더 발작하며 날뛸 게 눈에 뻔했기 때문이었으니….

나는 괴군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른 세력들을 쳐다보았다.

누구에게 갈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었다.

'우선….'

"창천개벽문의 시조이시자, 대청문세가의 시조이신 창호자 청문선우 님의 명성은 예전부터 흠모해 왔습니다. 청문세가의 인물들과도 이전부터 연이 있었던 바, 창호자 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벽라국어로 말하며 창호자에게 포권을 취했다.

창호자는 호탕한 얼굴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으하하하! 좋다! 본 창천개벽문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너도 훌륭한 본문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녹갑 목인이 지난번처럼 우리에게 각자 세력으로 가라고 말을 했을 때였다.

"싫어싫어싫어싫어… 내게 명령을 내리지 마라…! [그녀]가 말하고 있다! 조용!"

괴군이 발작을 하며, 상자를 열고 기묘성채를 꺼내 들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지난번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서휼은 황급히 규련과 요족 무리들을 이끌고 달아났고, 창호자는 익숙한 표정으로 결계를 쳤다.

쿠구구구!

푸른 결계가, 내 주변을 뒤덮었다.

쩌엉, 쩌엉, 쩌어어엉!

하늘이 번뜩이며, 괴군과 사축기 수도자들이 부딪힌다.

그리고.

촤아아악!

괴군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녹갑 목인을 기묘성채로 포획하여, [그녀]와 함께 저 멀리로 도망쳐 버렸다.

[저 미치광이 놈!]

[놈에게 수배를 내려라!]

비선대에 있던 사축기 수도자들이 노한 표정으로 괴군을 향해 일갈했다.

괴군을 향해 길길이 날뛰던 사축기 수도자들이 분기탱천해 있던 중.

창호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정말로 괴뢰가 되기 위해 저 미치광이를 찾아갈 거냐?"

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그 옆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제가 좋아하던 사람인지라 그리 말만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훌륭하구나! 동료를 생각해서 괴군 그 미치광이를 속여넘기다니!"

창호자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파스스….

창호자가 결계를 풀었고, 금벽호와 허곽 역시 결계를 풀며 웃었다.

"거 걸물이구나. 그 미치광이를 속여 동료의 안위를 보장하다니."

"귀골곡으로 왔어도 잘 해 주었을 것을. 안타까운지로고."

허곽은 특유의 중성적인 외모로 나를 쳐다보며, 혀를 핥았다.

나는 그에게도 예를 차리며 말했다.

"청색귀골곡의 원로, 송진 님과도 작은 친분이 있는지라 저도 조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오호, 송 원로와?"

"예, 괴군과의 일전에서 박살 난 섭명함을 지키시기로 하시며 하계에 남아 계시기로 하셨던 대단하신 분이시지요."

"허어, 이거 송 원로와도 안면이 있었다니, 정말 안타깝군. 이곳으로 왔다면 잘 해 줬을 텐데."

"하하, 이전부터 청문세가와 안면이 있었는지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허곽과도 잠시 안면을 튼 후.

바로 금벽호에게도 읍을 하며 말했다.

"금신천뢰문의 태상 장문인께, 이 서 모가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그래, 뭐지?"

우리의 대화를 흥미 있게 지켜보던 금벽호가 물었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고, 그대로 일단 물어보았다.

"혹여, 금신천뢰문의 선보, 천뢰번에 대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 당연한 소리를. 본문의 신물인데 그럼…."

"그렇다면…."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금벽호에게, 하계에 있었던 그 비석의 윗부분에 대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하여, 4만 년 전의 대전쟁으로 인해 그 비석의 윗부분이 훼손되었으며. 그 내용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보 천뢰번을 지니고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그리고.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벼락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

나는 이를 악물고 쓰러지며 벼락을 맞았다.

[이 방자한 놈이, 듣자 듣자 하니 본문의 선보에 대해 네놈이 뭘 안다고 멋대로 지껄이는 것이야…!? 네놈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느냐? 만약 그런 걸 알았다면 왜 지난번에 만났을 때 말하지 않은 것이냐?]

쿠릉, 쿠릉!

금벽호의 전신이 황금빛 번개에 휩싸여, 마치 뇌인처럼 변모하였다.

[혹시 지난번 하계에서 만났을 때는 몰랐다, 이딴 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우리가 비승하는 며칠의 시간 동안 네놈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금신천뢰문 옛 사당을 찾아내어 그 사당 한가운데에 있는 비석의 윗부분을 찾아내, 고대어를 해독해서 그 정도를 알아냈다는 말은 아닐 테고 말이다.]

"…."

정확하게 맞췄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를 능멸한다며 더욱 분노할 것이 어째 눈에 선했다.

[개벽문에 들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창호자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면 당장 네놈을 잿더미로 만들고, 혼백을 뽑아 귀골곡에 팔아 버렸을 테니…!]

파지직, 파직…!

다시금 황금빛 번개를 체내로 들이마신 그는 등을 돌리며 비선대에서 멀어졌다.

그와 함께 올라온 금신천뢰문의 여러 천인기 수도자들 역시 그를 뒤따라 갔다.

"흠흠, 솔직히 네 말은 신빙성이 그리 높지가 않으니, 금 장문인이 저리 반응할 수도 있지. 차후에 네가 열심히 수련하여, 네 말이 무게를 가지게 되었을 때 다시 말해 보려무나."

툭툭!

창호자가 내 어깨를 쳐 주자, 푸른빛 영기가 몸을 뒤덮으며 상처를 재생시켜 주었다.

"…감사, 합니다."

우우우웅!

그리고, 하늘 위쪽에서.

괴군을 추격하다 실패한 모양인지, 몇몇 사축기 수도자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일단 다들 신분 증명 패부터 만들도록 하지. 다들 나를 따라오게.]

사축기 수도자의 안내에, 금신천뢰문, 창천개벽문, 흑색귀골곡.

그리고 정, 마 선파 연합 기타 등등이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비선대에서 내려가, 장소를 이동하였다.

* * *

[이곳은 건곤중역이라고 불리는 영역의, 건곤성(乾坤城)이라고 불리는 곳일세.]

피부가 푸른 이종족 사축기 수도자가 우리를 인솔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광한계의 기운이 열리며, 하계와 이어지는 공간 균열이 있는 곳이기에 비선대를 짓고, 하계에서 온 이들을 관리하는 장소지. 수많은 종족이, 수많은 하계에서 비승하는 장소니만큼, 이곳에는 어떤 전쟁도 없고 어떤 분쟁도 없네.]

'수많은 하계라….'

역시나, 수계 말고 다른 하계들도 존재했던 모양이었다.

'지난 생에는 그저 꼭두각시로만 수많은 세월을 살아온 탓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길이 없었다.'

기껏해야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언제 일어나느냐, 그 정도만 알 뿐이었다.

우리는 사축기 수도자를 따라, 건곤성의 여러 문을 지나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리고, 건곤성의 문 중 커다란 푸른 옥빛 문을 통과했을 때.

와글와글….

우리는 어마어마한 인파들을 볼 수 있었다.

"호오, 이들은 뭐요?"

창호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나는 살짝 질려 하며, 대전에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하나하나가 전부 천인기 수도자였다.

[자네들과는 다른 하계에서 비승한 이들이지. 자네들이 통과한 것과는 다른 비선대를 이용해서 올라왔네. 건곤성에는 비선대가 그곳 말고도 상당히 많으니까.]

말을 마친 사축기 수도자가, 대전 위로 날아가 소리를 쳤다.

[성계(星界)에서 비승한 수도자들은 저쪽으로, 부해계(腐骸界)에서 비승한 수도자들은 저쪽으로 향하게!]

그 말에, 수십 명의 수도자들이 각각 다른 곳으로 향했다.

창호자는 그 말에 사축기 수도자를 보며 물었다.

"성계는 또 뭐고, 부해계는 뭐요?"

[아, 자네들한테는 아직 설명을 안 해 줬군. 대강 알기 쉽게 설명해 주자면… 자네들의 땅은 평평했나, 둥글었나?]

"음…?"

[땅이 평평하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세계가 보호받는 하계는 부해계라고 통칭하고. 땅이 둥글고, 하늘로 무한히 뻗어 나갈 수 있는 하계는 성계라고 함세.]

그 말에 창호자와 다른 이들은 부해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는 부해계인가 보군."

창호자가 부해계 비승 수도자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고, 금벽호와 백골귀마 역시 각기 문파 천인기 원로들을 데리고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하계에서 비승했다는 천인기 수도자들은, 사축기 초기의 기운을 뿜어 대는 창호자, 백골귀마, 금벽호를 보며 슬금슬금 뒤쪽으로 물러났다.

[자, 그럼 신분 증명 패를 발급하겠네. 모두….]

창호자와 천인기 원로들, 그리고 그들을 따라온 원영기 수도자들은 각자 신분 패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계에서 데려온, 수많은 종문의 제자들은 모두 증빙 패를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자기 종문을 데리고 단체로 비승했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이오!? 공간 압력이 정신 나간 수준으로 늘어날 텐데, 그게 가능하다고!?]

신분 증빙 패를 만드는 역할의 건곤성 사축기 장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수백만 명씩이나 다 되는 저놈들 증명 패를 내가 다 만들어야 한다고!? 미친 소리 하지 말아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도대체 어떤 괴물딱지들이 제 문파를 통째로 뜯어서 단체 비승한단 말이야! 아무리 저들이 압축 공간 내에서 진법을 펼쳐서 부담을 덜었니 뭐니 해도, 상리에 맞지 않는 말이야!]

얼마간 실랑이를 하던 장로의 말에 따라, 결국 세 종문의 제자들은 인족 영역으로 따로 가서 증명 패를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쿠구구구구!

우리는 각자 각 종족에서 마중 나온 사축기 수도자들에 따라.

건곤성에서 각 종족 영역으로 흩어졌다.

"허허, 미쳤군. 이번 비승에서 이만큼씩이나 우리 인족이 단체로 비승을 하다니…."

그리고, 우리를 마중 나온 사축기 인솔자.

허령이라고 하는, 흑색귀골곡의 선조 중 한 명이라는 자가 어이없다는 듯 우리를 보며 말했다.

"정말… 내 후대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선조님께 허곽이 인사 올립니다."

"…들었다, 올라오자마자 사축기에 올랐다고. 도대체… 이번 기수들은, 후우…."

허령은 잠시 우리를 둘러보더니, 혀를 내두르고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럼 일단 다들 따라와라! 인족 영역으로 간다!"

그리고, 다른 하계에서 비승한 인족들을 비롯해.

세 문파의 사람들은 각기 비행법기를 꺼내 들어 인족 영역으로 향하였다.

파아아앗!

나와 오현석 차장은 우선 창호자가 꺼내 준 비차 법기에 타서 날아갔다.

나는 무형검으로 그대로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혹여라도 심족 첩자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에, 무형검을 체내 안쪽에서 조금씩 풀어헤치며 없애 갔다.

사축기 수도자들이 맨 앞에 앞서 날아갔고, 나와 오 차장이 탄 비차는 창호자의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갔기에, 나는 사축기 수도자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선조님, 혹여 광한계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래, 어렵지 않지. 너희들에게 내려 준 정보도 있겠지만, 우선 설명을 하자면…."

허령의 입에서, 광한계에 대한 정보들이 흘러나왔다.

"광한계는 삼 대 종족이 존재한다. 천족(天族), 지족(地族), 심족(心族)."

"음? 하지만 아까 있었던 대전에는 훨씬 더 많은 종족이 있었던 것 같은데…."

뒤에서 따라오던 천인기 수사 중 한 명이 의아한 듯이 혼잣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허령이 대답해 주었다.

"맞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종족이 있지. 하지만 그 모든 종족을 전부 알 수 없으니, 광한계에서는 종족들의 특징을 크게 셋으로 나눠, 천, 지, 심족으로 나눈 것이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삼 대 종족을 나누는 기준은 딱 한 가지, 바로 [시야]다.

천족(天族)은 자기 종족에게 맞는 제사법을 찾아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천기를 읽는 눈을 지닌 종족. 우리 인족도 여기에 포함된다.

지족(地族)은 육신을 단련하고, 단련해서 육신의 한계를 이끌어 내, 특정 감각을 개화하여 대지의 영기를 읽는 눈을 지닌 종족. 주로 짐승에서 태어난 요족(妖族)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족(心族)은…."

나는 귀를 더욱더 기울이며, 허령이 말하는 심족에 대한 설명에 집중하였다.

창천개벽문(蒼天開闢門) (1)

잠시 말을 멈춘 허령은 미간을 찌푸리는 듯하며 말했다.

뭔가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

"…심족은, 지성체의 감정을 비롯해, 심상 그 자체를 읽는 게 가능한 종족을 통칭한다. 천, 지족에서 심도공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익혀, 감정의 색채를 읽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 그 자체를 읽는 종족이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허령은 살짝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물론, 사실 이 심족이란 녀석들은 말이 삼 대 종족이고, 그냥 구분을 위해 묶어 놓은 녀석들이지. 천족, 지족에 비하면 찌꺼기나 다름없는 녀석들이다. 세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천, 지족에 비해 '제대로 된' 심족 고수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은 만 명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지. 만 명이라니, 하! 내 후손만 해도 만 명이 넘겠거늘…."

'심족은 경지가 높은 이들이 적은가?'

나는 허령이 뱉어 주는 광한계의 기본 정보들을 귀에 잘 집어넣었다.

그때였다, 허령의 말을 듣던 창호자가 질문을 했다.

"잠깐, 질문이 있습니다, 선배님. 감정의 색채를 본다거나, 육신을 단련하는 게 심족, 지족이라고 했는데…. 저나 괴군 조연이라는 자의 경우 의념의 색을 보는 게 가능하고, 저 같은 경우 육신을 단련하는 공법을 익혔는데… 익힌 공법으로 종족의 구분을 두면, 결국 차이가 없는 게 아닙니까?"

허령은 그 말에 입꼬리를 씨익 웃으며 답하였다.

"아니,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네 말대로, 우선 천족의 경우, 자신에게 맞는 제사법을 찾아낸 종족이기에 제사를 통해 천기를 읽는 눈을 얻어낼 수 있고. 육신 역시 따로 단련하여 지족의 눈도 이론상 얻을 수 있으며, 심족의 심도공법을 구하면, 이론상 심족의 눈도 얻을 수 있겠지. 이론상, 천족은 삼 대 종족의 모든 공법을 익히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에 천족이 가장 고귀한 종족이라 불리는 것이며, 천족에 속한 인족이 광한계의 지배종인 이유 중 하나다."

'…그럼 나는 저번에 왜 죽었던 거지?'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허령의 말을 들었다.

"지족의 경우, 저들 특유의 지족 공법, 요수공법 등을 익히고, 심도공법을 따로 익힌다면 이론상 심족의 눈도 얻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심족은 천족공법도, 지족공법도 익히지 못하는 멍청한 것들이지. 그저 저들의 심도공법만 열심히 파야 하는 찌꺼기들이다. 천족만 해도 천족 전체에 쇄성기 수사가 세 분이나 계시고, 지족은 쇄성기 수사가 둘밖에 없으며, 심족은 쇄성기 급의 심족이라곤 최고지도자 한 명밖에 없는 한심한 종족이다. 최고지도자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냥 노예 종족이었던 놈들이지."

한참을 심족을 씹어 대던 허령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심족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심도공법에 '특화된' 종족인 줄 알았건만….'

심도공법 '밖에' 익힐 수 없는 약한 종족인 것 같았다.

"만 명밖에 안 되는 제대로 된 심족 놈들이, 하나같이 기오막측한 심도공법을 익힌 게 아니라면, 진즉 모조리 잡혀서 씨몰살을 당했을 것들뿐이다! 천족이나 지족들도 의식공법을 익히거나 경험에 따라 감정의 색을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떻게 해서도 안 되더군…. 그래서 천족과 지족, 양대 종족은 심족 놈들을 잡아서 심도공법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중이지."

아무래도, 이론상 천족도 심도공법을 익히는 게 가능은 하나.

말 그대로 이론일 뿐이고, 천족 자체에서도 심도공법을 익힌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한 모양이었다.

허령은 옆구리를 자꾸 매만지며 심족을 욕하였다.

"…사실상 심족은 천, 지족에 의해 쫓겨 사는 놈들이다. 그렇기에 비선대에도 천족, 지족은 각기 하계에서 올라오는 후학들을 맞이하는 게 가능하지만, 심족에게는 그럴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지."

'저곳으로 푸른 선이 몰려 있군….'

나는 그의 의념을 읽으며 짐작했다.

그의 행동과 심리를 유추해 봤을 때.

예전 심족에게 옆구리를 뜯겨 나간 적이 있던 모양이었다.

얼마간 심족을 욕하던 허령은, 심족 말고 다른 종족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었다.

광한계 전체 종족들의 세력, 종류 등….

나는 이전에는 수배된 괴군에게 잡혀가 개조당했던 탓에,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정보들을 빨아들였다.

"광한계에는 한 분의 성반기 성사님, 다섯 분의 쇄성기 존자, 한 명의 쇄성기 급 심족 존자가 존재하며, 합체기 태수(太修)는 한 종족에 많으면 예닐곱, 적으면 한둘 존재할 정도로 희소하다. 또한…."

얼마간 허령에게 광한계의 기본적인 정보를 듣던 중.

우리는 마침내 인족의 영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쿠구구구구!

'저곳이, 인족 영역….'

나는 눈앞에 떠오른 장엄한 광경을 쳐다보며 작게 감탄하였다.

푸확!

새하얀 구름이 사방을 덮고 있는 지대.

구름을 뚫고 올라간 우리는, 사방 곳곳에 떠올라 있는 거대한 천공도(天空島)를 볼 수 있었다.

마치 등선향과도 비슷한 수십, 수백 개의 천공도들이, 새하얀 구름 위쪽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천공도들은 하나같이 희미한 원구형의 결계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곳이, 우리 인족이 터를 잡은 운도(雲島) 지대일세. 우선 자네들은 저기 있는 가장 작은 천공도, 시운도라는 곳으로 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신분 패를 발급해 준 후 각자 흩어져야 할 걸세."

"흠, 흩어져야 하는 겁니까?"

창호자가 주변의 정경을 둘러보며 아쉽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네. 자네들이 천인기 급이었다면 별말이 안 나왔을 테지만… 각 세력의 수장들이 하나같이 사축기 급이 아닌가?"

허령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인족 영역 규정상, 천공도 한 곳에 사축기 고수가 세 명 이상 머무는 것은 불가하네."

"흠, 뭐. 좋군요. 오히려 세 종문끼리 한 곳에 눌러앉아서 자원 때문에 얼굴 붉힌다면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나지요."

금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시운도로 가 보세."

그렇게 우리는 시운도라는 천공도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던 도중이었다.

"…? 잠깐, 뭔가 이상한데."

창호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역시 저 멀리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시운도라는 곳을 향해 눈을 찌푸렸다.

'뭔가, 원근감이….'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물론이고 창호자, 금벽호, 허곽의 얼굴에 전부 경악이 어렸다.

'저, 저게….'

각 천공도를 뒤덮고 있던 것으로 보이던, 얇은 장막들이.

어마어마한 거력을 품은 두터운 결계로 확대된다.

그리고 아무리 커봤자 등선향 급으로 커 보였던 천공도가, 점차 무지막지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쿠구구구구구!

"자, 시운도에 진입하겠네!"

가장 작은 섬으로 보였던 시운도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정신 나간 크기를 자랑하였다.

등선향?

그런 것 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

저건 차라리….

'답천사막…?'

벽라국, 연국, 성제국 삼국을 다 합친 크기를 자랑하는.

답천사막과도 같은 크기였다!

답천사막의 크기는, 수계의 대륙의 사분지 일을 차지하는 막대한 크기였다.

나는 시운도의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수십 개의 '섬'들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멀리서 봤을 때는 시운도보다 최소 대여섯 배, 많게는 열 배는 더 컸는데….'

지난 생은 서 장군의 몸에 갇혀, 기묘성채 안쪽에서만 거의 지낸 탓에 광한계의 크기를 실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실감이 간다.

광한계.

천족 영역 중 인족 영역.

인족 영역에 있는 무수히 많은 저 천공도 하나하나가, 곧 내가 지냈던 수계의 크기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것이었다.

"열려라!"

촤아아아악!

마치 바다를 연상케 하는, 드넓은 결계를 향해 허령이 손짓을 하자, 눈앞의 결계가 쪼개지며 우리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법한 거대한 구멍을 만들었다.

"들어가라."

"…."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우리는 모두 군말 없이 천공도로 들어갔다.

쿠구구구!

시운도는 곳곳에 광풍이 불어닥치는 곳이었다.

거기에 이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것이라기보단, 돌과 바위, 모래가 넘쳐나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따라와라!"

우리는 허령을 따라 시운도의 한쪽으로 날아갔다.

시운도의 바위산 지대.

그곳에 도착한 허령이 수결을 맺자, 바위산 중 하나가 점차 투명해지더니, 바위산 안쪽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전각이 드러났다.

말 그대로 산 하나 크기의 거대한 전각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모두 들어가서 각자 신분 증명 패를 받으면 된다!"

허령은 수결을 맺으며, 소매에서 수천 마리의 귀신들을 꺼냈다.

그가 부리는 귀신들이 수백만 명이나 되는 세 종파의 제자들을 각기 다른 곳으로 인솔했고, 우리는 각기 귀신 무리들을 따라가, 전각 곳곳에서 신분 증명 패를 받았다.

얼마 후.

파츠츳!

나 역시 신분 패를 부여받았다.

신분 패의 뒷면에는 천족을 뜻하는 천(天) 자가 양각되어 있었으며.

앞면에는 '인족'이라는 글자와 '서은현'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는 작게 내 소속을 뜻하는 '창천개벽문 소속'이라는 글자가 음각된 것이 보였다.

수백만 명이 일시에 신분 패를 증명받는 거대한 작업이었지만, 의외로 신분 패 수여 작업은 빠르게 끝났다.

산 하나 크기의 전각 안에는 광한계 인족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서 사무를 보고 있었고, 자잘한 잡무들은 전부 법술로 처리하며 일을 하는 중이었기에 일 처리 자체는 느리지 않은 편이었다.

대략 반나절이 지나, 모두가 신분 패를 받고, 완전히 광한계 인족 소속이 되었다.

"자, 그럼 시운도에서 기초적인 신분 증빙이 끝났으니…. 이제 각각 들어갈 천공도를 골라라. 다른 계면에서 온 천인기들은 각자 자유자재로 골라서 들어가면 되고, 수계에서 온 세 종파는…."

허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미안하지만 선택권이 없다. 하필 사축기 지도자가 있는 집단인지라, 아무 천공도나 들어갈 수 있진 않아. 우선 우리 흑색귀골곡은 나를 따라오면 될 테고, 자네들, 금신천뢰문과 창천개벽문은 완전히 곳곳으로 흩어져야 하네."

"알겠습니다."

"…그러지요."

창호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금벽호는 떫은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문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금신천뢰문도 역사가 짧지는 않은데, 왜 아무도 금신천뢰문을 마중 나오거나 하지 않는 거지…?'

사축기만 되어도 수명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지막지하게 늘어난다.

때문에 몇만 년 전 비승했다는 고인들만 와도 충분히 금신천뢰문은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얼마 후.

금벽호와 창호자는 전각 아래로 가, 천공도가 그려진 지도에서 적당한 천공도를 골라 흩어지기로 했다.

"자 그럼, 적혀 있는 천공도로 가면 된다. 앞으로 거기에서 생활은 우선, 각 천공도마다 인족 총령이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허령은 익숙하게 섭명함에 올라타며, 흑색귀골곡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검은 천공도로 나아갔다.

"그럼, 앞으로 무운을 비네, 창호자."

"나 역시."

창호자와 금벽호는 서로를 마주 보며 인사를 한 후.

각자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얼마나 금벽호와의 거리가 멀어졌을까.

나는 창호자에게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창호자 대인."

"이제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아, 예, 스승님.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휘이이이이!

저 멀리, 창호자가 선택한 천공도가 보였다.

"어째서 흑색귀골곡은 선조가 나와서 맞아 주는데, 금신천뢰문은 역사가 긴 종문임에도 누구도 나와서 맞아 주지 않고, 금 태상 장문께선 표정이 안 좋으셨던 건지…."

내 말에, 창호자는 혀를 끌끌 찼다.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금신천뢰문은 4만 년 전, 수계 전체에 대혼란이 일어났을 때 이후로는 상계와 제대로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4만 년 전의 금신천뢰문과 관련된 대전쟁에, 광한계로 먼저 비승한 금신천뢰문의 선조들 역시 연루되어 뭔가 문제가 생겼단 뜻이겠지. 때문에, 금신천뢰문은 몇천 년 전에 비승한 선조 몇몇을 제외하고는 광한계와 연락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며, 최근 비승한 천뢰문의 선조들은 오히려 금벽호 녀석보다도 약한 이들이 태반이라 하더군."

"…그렇군요."

그렇다면 금신천뢰문의 선보에 대한 것을 경고해 줄 선조는 어디에도 없단 것이었다.

'…금신천뢰문은 저대로 놔두는 게 맞는 것인가.'

몇 년 후, 확정적으로 진선에게 멸문을 당할 문파….

과연 어찌해야 저들을 막을 수 있을까.

'…답은 하나지.'

일단, 강해져야 한다.

어쩌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저 포학한 종파의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힘을 키워야 할 터였다.

'일단, 강해지자.'

나는 마음을 그렇게 굳게 먹으며 다짐했다.

"…으으으…."

"…괜찮으십니까, 오 차장…님?"

비차 옆쪽.

그곳에서 멀미로 고통스러워하며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오현석 차장을 보며.

나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비차는 빠르게 하늘을 날았지만, 현대의 비행기 같은 편리성은 없었기에 흔들리기도 매우 흔들렸고.

거기에 문 틈새로 어마어마하게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오현석 차장은 비차에서 출발한 후부터 나와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비행 멀미에 겹쳐 찬바람을 쌩쌩 맞으며 죽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혈 곳곳을 짚어 주었으나, 계속 비차가 흔들리니 계속 멀미가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휘오오오오!

저 멀리, 푸른 기운으로 둘러싸인 천공도가 보였다.

장대한 천공도.

시운도의 예닐곱 배 크기.

사실상 하늘에 떠 있는 대륙이나 다름없는 곳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모두들 들어라!"

창호자가 쩌렁쩌렁 목을 울리며 외쳤다.

"너희가 증명 패를 받을 동안, 허령 선배님께 듣기로. 각 천공도에 외부 세력이 자리를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한다!"

쿠구구구!

천공도를 감싼 두터운 결계가 가까워졌다.

파아아앗!

그리고, 창호자의 주먹에 시퍼런 휘광이 서리기 시작했다.

"천공도 내부 세력과 겨루어, 그들과 전쟁을 벌여 천공도에 있던 놈들의 영토를 빼앗는 것이 방법이다! 인족 총연맹 역시 이러한 적자생존식 경쟁이 인족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오히려 지지한다고 하더군! 모두 알겠는가? 하계나 광한계나, 본질적으로 다를 것은 없다!"

쿠구구구구!

창호자의 육신에서 어마어마한 투지가 흘러나왔다.

"약육강식! 강한 이만이 살아남는다! 자아, 대창천개벽문의 제자들이여, 광한계 토박이들은 얼마나 쓸 만한 놈들인지 확인해 주자!"

쿠구구구구!

창호자의 뒤쪽을 따라오던 수많은 창천개벽문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투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청문세가는, 애들 장난이었군.'

투도를 숭앙한다는 험악한 가풍을 지닌 청문세가였다.

하지만, 그 본류라 할 수 있는 창천개벽문이 내뿜는 투기는 가히 비교도 아니 되는 수준.

"자아,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박살 낼 시간이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 창한도(蒼寒島)로 들어가자!"

콰아아아아앙!

창호자가 가장 앞서 나가며, 그대로 몸통박치기를 하여 창한도라는 천공도의 결계에 커다란 바람구멍을 내어 버렸다.

* * *

우우우우웅!

창한도 전역에 전음이 울렸다.

창한도의 중앙, 거대한 옥빛 산봉우리의 정상.

그곳에 있는 푸른빛 누각에서, 여러 명의 천인기 수도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운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막 하계에서 올라온, 창천개벽문이라는 종파가 창한도에 자리를 잡기 위해 쟁탈전을 하러 찾아왔다고 합니다!"

"하계에서 종파가 올라와? 그게 무슨 소리요?"

"이번에 건곤성에서 들려온 소식인데, 제 종파를 데리고 비승한 괴물딱지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문파의 최고 어른이란 자가 비승하자마자 사축기에 이르렀다 합니다."

"사축기…? 이런 젠장. 창한도의 일반 문파들은 상대할 수 없겠구려. 그 정도 세력을 상대하려면…."

"서령문, 서령문이 나서야 하외다!"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그 말에 누각의 한쪽에 앉은 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위 장로, 서령문에는 사축기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창한제일종문으로서 자리매김하셨으면, 이럴 때 나서서 위계를 보여 주심이…."

그 말에, 곤색 장포를 입은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웃긴 부탁 아니오?"

"뭐요…!?"

"고작 하계에서 막 비승한 떨거지들을 상대하러 본문의 어르신께서 나서신다니. 닭 잡는 데 용 잡는 칼을 쓰는 격이오. 막 하계에서 비승한 녀석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소? 진정한 광한계의 수도공법은 견식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일진대. 쟁탈전이야 그냥 구실 같은 거고, 적당히 창한도 구석에 자리나 내어 주면 될 터요."

"하, 하지만 사축기 수도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흥, 당신들 종파에 있는 종파대진을 발동하면 막 사축기에 이른 수도자 한 명쯤은 막을 수 있잖소. 호들갑 떨지 마시오. 그리고 설마, 저 뭐시기 개벽문이란 문파가 진심으로 쟁탈전을 벌여 왔다고 생각하시오?"

그의 말에, 다른 천인기 수도자가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새로운 세력이 타지에 자리를 잡으려면 방법이 무조건 쟁탈전뿐인데, 어쩌겠소?"

"아니외다. 그냥 다른 더욱더 강한 세력에게 복속당하는 것도 방법이지. 한 마디로, 저 창천 뭐시기 문은 이리 말하는 것이오. '우리는 사축기 급의 전력이 있고, 호승심도 있다.' 그런 장점을 내세워 창한도 최고 세력에게 자신들의 전력을 비싸게 팔려는…."

"급보요!"

서령문 장로의 말을 끊고, 누군가가 전각으로 허둥지둥 날아왔다.

"서령문이 함락되었소!!!"

그 말에, 순간 뇌가 굳은 것인지.

서령문의 장로 위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 * *

콰아아아앙!

"여기가 제일 좋은 영맥이 흐르는 곳이로구나! 오늘부터 이곳은 대창천개벽문의 자리다! 썩 자리를 내놓아라!"

창호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서령문의 가장 높은 전각.

그곳에 있는 사축기 수도자의 멱살을 잡으며 외쳤다.

이와 같은 일은 현재 인족 영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 *

뇌령도.

뇌령제일종문, 뇌운각.

뇌운각이 있던 자리는, 말 그대로 뇌운각이 '있었던' 자리로 변했다.

쿠릉, 쿠르릉!

파직, 파지지직!

뇌운의 힘을 휘감은 깃발을 들고, 금신천뢰문의 태상장문인 금벽호가 오연한 눈으로 뇌운각을 내려다보았다.

"이 뇌운각이란 곳에, 하계에서 비승한 금신천뢰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망령되게 출신을 잊고 천뢰문의 비전공법을 팔아먹으며 호의호식한 천뢰문의 배신자가 있다고 들었다. 열을 셀 동안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뇌령도 전체를 지져 버리겠다. 하나, 둘, 아홉, 열."

콰르르릉, 콰르르릉!

금벽호는 상대가 대답할 틈도 없이 빠르게 열을 세고는, 깃발을 휘둘렀다.

동시에, 뇌령도 전역이 번개로 뒤덮이기 시작하였다.

* * *

끼야아아아아.

키야아아!

흑연도.

귀기와 음기가 가득 서린 흑연도 위로, 두 척의 검은 배가 떠올랐다.

"드디어 섭명함이 올라왔군. 오늘에서야 흑색귀골곡이 다시 흑연제일종문의 자리를 얻겠구나…."

쿠구구구구구!

허령이 전신에서 귀기를 끌어올렸고, 그 뒤에서 허곽이 수십만의 귀신 무리를 끌어오며 힘을 쓰기 시작했다.

시커먼 섭명함 위로, 시퍼런 귀화가 어렸다.

흑연도에, 흑색귀골곡의 마수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 * *

그 밖에도 인족 구역인 운도 지대.

곳곳에서, 새로 올라온 수많은 수도 집단이 기존 집단을 밀어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 * *

"커헉! 이 건방진 놈이…! 하계 놈 주제에…!"

콰과광!

곤색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저 멀리서 창호자의 손에 잡혀 있던 사축기 수도자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흐하하! 제대로 해 보려느냐! 어림도 없지, 순순히 자리를 본문에게 넘기고 물러나는 게 좋을 것이다!]

쿠구구구!

창호자의 기세 역시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두 사축기 수도자가, 하늘로 떠오르며 전투를 시작했다.

동시에 사축기 수도자들의 영언이 사방으로 울렸다.

[서령문도들은 들으라! 이 하계 땅개 놈들에게 광한계 본토 수사의 힘을 보여 주어라!]

[창천개벽문의 제자들은 들어라!]

콰과과광!

곤색 빛과 청색 빛이 하늘을 덮는다.

창호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우리가 이긴다!]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면 충분했다.

쿠구구구구구!

창천개벽문은 압도적인 힘으로 창한도의 종파 하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비차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화라는 걸 시도할 생각이 없는 것일까….'

시운도의 여러 행정관 수사들이 창호자에게 말하기를.

쟁탈전이 새 지역에 편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는 것 같다.

방식 자체는 그렇다 쳤지만, 설마 그냥 별말도 없이 막무가내로 바로 쳐들어갈 줄은 몰랐다.

'청문세가에 있을 때처럼, 얌전히 방안에서 수련하는 방식은 시도할 수 없겠군….'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콰아아앙!

나와 오현석 차장이 탄 비차 앞으로, 웬 괴인이 떨어졌다.

대강 이 서령문이라는 종파의 장로인 것 같았다.

"커헉! 컥! 이런 빌어먹을… 뭐 이런 괴물딱지들이 비승했단 말인가…!"

잠시 이를 갈던 장로와, 내 눈이 마주쳤다.

장로가 나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쿠구구구!

원영기 급의 기세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래, 종문의 귀한 제자들인가 보구나. 네놈들은 이제 내 포로다!"

잠시 그를 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비차에서 내렸다.

"흐하하, 그래. 빠른 항복은 현명한 생각이다. 무식한 하계 놈들 같으니…. 일단 네놈들을 포로로 잡고, 추후에 쟁탈전이 끝난 후에 네놈들의 목숨값으로…."

'무형검은 안 되겠지.'

뭐,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저 정도는 무형검이 없어도 될 것 같았다.

우우웅!

나는 아직도 내 몸을 덮고 있는, 혈체피갑에서 법력을 끌어모으며 법술을 맺었다.

"으응…?"

그가 의아해할 때.

쿠그그극!

땅에서 핏빛 나무가 자라나며, 내 옆에서 점차 뭉쳐지더니, 나무 인형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파삭, 파사사삭!

나는 나무 인형에 손을 얹고, 영력 회로를 빠르게 새겼다.

나무 인형이 점차 익숙한 얼굴로 변하였다.

우우웅!

잠시 후.

완성된 나무 인형의 영력 회로로, 주변의 천지영기가 빨려 들어가며 나무 인형이 엄청난 영기의 압력을 뿜기 시작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령문의 장로를 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서 장군이라는 친구인데, 생긴 건 이래도 마음씨는 착한 친구요. 이 친구와 잘 놀고 계시면 될 것 같구려."

우우우웅!

지난 천 년 동안 내가 빼곡히 파악했던 육신과 회로들.

구조를 해박하게 알고 있으니, 이제는 언제라도 복제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진짜 서 장군의 육신은 굉장히 값비싼 재료들이 수두룩하게 들어갔기에 정말로 사축기 급의 괴뢰를 1초 안에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고로, 방금 급조한 이 괴뢰의 힘은 대략….

콰아아아앙!

'원영 초기 정도인가.'

나는 눈에서 광선을 뿜는, 양산형 서 장군을 보며 생각했다.

서령문의 장로는 허겁지겁 광선을 피하며 법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는 서령문의 장로를 보며, 서 장군을 한 기 더 만들기 시작했다.

창천개벽문(蒼天開闢門) (2)

위이이잉!

파아앗!

서 장군의 눈에서 세 번째 광선이 나갔다.

"크으윽!"

서령문의 원영기 장로, 위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광선을 막아 냈다.

'기껏해야 연기기도 안 되는 애송이가 원영기 괴뢰를 불러낼 줄이야…!'

그러나 위탁은 짜증이 난 표정을 지을 뿐.

그렇게 힘겹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원영 초기 극초반 괴뢰였다.

결단기 대원만에서 몇 발짝 더 나간 괴뢰일 뿐이었다.

아무리 법력이 떨어졌다곤 하나, 원영 중기 수사인 그가 질 리는 없었다.

'법술도 거의 완성이 되었다. 이제….'

그가 막 법술을 완성해, 눈앞의 괴뢰를 없애 버리려 할 때였다.

퍼버벙!

안광에 광선을 모으던 '서 장군'이라는 괴뢰가, 갑작스레 제 혼자 폭발해 버렸디.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씰룩이던 위탁은 상황을 파악했다.

"아, 그렇군."

과부하다.

원영기 급 공격을 쏟아 낼 순 있지만, 세 번이 한계.

네 번 이상 광선을 쏘려 하면 그대로 망가져 버리는, 웃기지도 않은 성능을 지닌 괴뢰였던 것이다.

"쯧쯧, 이래서야 원영기 급 공격을 세 번 쏘는 게 한계인 결단기 괴뢰라는 말이 적합하겠어."

위탁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자, 재밌는 반항이었다만. 그럼 이제 순순히…."

그리고, 위탁이 서은현이 있는 곳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어?"

총 열일곱 기의 서 장군이, 서은현의 옆에서 기운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서은현이 혀를 차며 결인을 맺었다.

쿠구구국!

우드득!

그의 옆으로 막 18번째 괴뢰가 만들어졌다.

"한 기가 원영기 급 일격 3회를 쓰면 망가져 버리는군. 역시 재료가 너무 허접하니, 회로가 괴군의 것이어도 버티지를 못하는 건가…."

"뭐, 뭣…!?"

철컥, 철컥, 철컥!

그리고, 18기의 서 장군들이 동시에 입을 벌렸다.

파아아앗!

"서 장군포, 발포."

서 장군들의 입에서 동시에 18개의 백색 광선이 뿜어지며, 위탁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준비하던 법술을 날렸으나, 18개의 광선 앞에서 그가 준비하던 법술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빛의 격류에 휩싸이며, 위탁은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 *

나는 온몸이 숯덩이가 되어서 떨어지는 서령문 장로를 바라보았다.

"크, 크헉…!?"

과연, 끔찍한 생명력을 가진 원영기 수도자답게.

전신이 숯이 되었어도 아직 죽지 않았다.

"흐, 흐어어걱! 흐어억!"

물론, 나를 보며 끔찍한 악몽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주하긴 했지만.

툭! 투둑….

서령문의 장로의 전신 의복이 찢어지며, 그의 품에서 몇 가지 물건들이 떨어졌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물건들을 주웠다.

몇 개의 부적.

그리고 은은한 공간 파동이 느껴지는 두루마리 법기였다.

"이건…."

나는 두루마리 법기를 열어 보려 했지만, 금제가 걸려 있는지 법기는 열리지 않았다.

'금제라….'

나는 잠시 법기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파츠츠츠….

내 손끝으로 기운이 몰렸다.

그와 동시에 두루마리 법기의 표면에, 괴군의 회로가 깔리기 시작했다.

미치광이의 성채를 움직였던 장대한 회로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존재의 혼을 모방하는 회로가, 상대의 법기 위로 깔리며 법기를 장악해 나갔다.

위이이잉!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괴군의 회로가, 두루마리에 걸려 있던 금제를 뚫어 버렸다.

파앙!

두루마리 법기에서 미약한 빛이 터져 나오며, 금제를 이루던 주술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우우웅!

내가 두루마리 법기에 영력을 넣자, 두루마리 법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촤르르륵!

두루마리가 허공에서 펼쳐졌다.

"이건…."

두루마리 형태의 저물대!

두루마리의 안쪽에는 여러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그림을 향해 손을 뻗자, 내 손은 자연스레 그림 안쪽으로 쑤욱 들어갔다.

"허어…."

나는 그림 안쪽에 있는 물건 중 하나에 손을 뻗어 집었다.

우우웅!

강력한 빛을 뿜어내는, 썩 강해 보이는 법보였다.

"저물대보다도 편리하군…."

일반적인 저물법기는 안쪽이 보이지 않아, 가끔 뭘 넣어 두고도 다시 꺼낼 때 한참 찾아야 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물론 저물법기 안으로 의식을 집어넣어 뒤지면 금방 찾아졌지만.

애초에 이렇게 육안으로 저물법기 안쪽에 뭐가 어디에 들었는지가 확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편리성을 제공하는 듯했다.

나는 서령문 장로의 두루마리 법기를 뒤적여, 그의 자산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한 쌍으로 이뤄진 비수 법보 하나. 그리고 이름 모를 독초(毒草)들 여럿. 그리고 영물, 영수, 영충에 대한 서적… 거기에 영석이…사백만 개?'

이 정도면 하계 수도가문의 수년 치 예산이었다.

'…거기에 이름 모를 부적들 여섯 장. 하나같이 풍기는 영기가 범상치 않고, 마지막으로 이건….'

나는 두루마리 법기의 한구석에 있는, 새하얀 옥패를 꺼내 들었다.

'오, 서령문의 공법인가?'

옥패에는 빼곡하게 광한계 언어로 무언가 구결이 기록되어 있었다.

'…흠, 또 광한계 언어를 배워야겠군.'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일단 옥패를 품속에 따로 꺼내 넣어 놓았다.

얼마 후.

창호자가 서령문의 최고 어르신이라는 자에게서 승리하고, 창천개벽문이 서령문을 상대로 승리를 점하였다.

[이제부터, 이곳은 우리 대창천개벽문의 땅이다! 모두 썩 나가라!]

창호자에게 패배한 서령문의 어르신은 이를 갈며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고, 그 뒤를 따라 서령문도들이 일제히 달아나 버렸다.

"흐하하. 자, 우리가 승리했다! 전 문도들은 이제, 이사 준비를 하자!"

쿠구구구구!

창호자가 품속에서 한 개의 족자를 꺼냈다.

족자에는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산수화가 한 폭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산수화가 갑자기 빛을 뿜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동시에, 산수화에 그려져 있던 산이, 두루마리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작은 산맥 하나가, 서령문의 산봉우리 옆으로 떨어져, 그 옆에 작은 산봉우리를 하나 만들었다.

쿠우우웅!

어마어마한 폭음이 사방으로 울리며, 먼지구름이 일어 올랐다.

'…다시 봐도 미쳤군.'

공간법기 안에 자기 문파를 그대로 가지고 비승했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쿠웅!

가만히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와, 비차 안에서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하는 오 차장의 앞에.

창호자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자, 이제 너희들 역시 창천개벽문의 제자니, 앞으로 기거할 곳을 알려 주겠다."

그렇게, 그날 광한계 창한도.

그곳에서 창천개벽문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창천개벽문은 서령문과의 서열 정리를 완료한 후.

주변 문파로 사람을 보내, 그날 창한제일종문이 창천개벽문이 되었음을 알렸으며.

동시에 창한도의 분쟁을 관리하는, 창한도 총령이라는 이를 불러 정식으로 문파의 자리를 등록한 후.

인족 총연맹의 도움을 받아 인족 총연맹 사람을 초청하여 대대적으로 광한계 언어, 그리고 광한계의 지리, 기후, 일상 문화, 거기에 천문 등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특히나 광한계 언어와, 광한계 천문에 대한 것들은 수련을 하는 데에 있어 필수 요소였기에 제대로 배워야 했다.

'광한계에서는 저 별이 각수성인가.'

이전 생에는 기묘성채를 통해 주변 종족을 점령하고, 납치해 와서 강제로 정보를 뽑아냈다면.

이번 생에는 창천개벽문의 아래에서 체계적으로 정보를 체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현석 차장 역시 무슨 일인지 파악을 못 하면서도 일단 빠르게 광한계 언어를 체득해 갔다.

그리고, 창천개벽문이 창한도에 완전히 자리를 잡기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 * *

"후우…."

"이제 조금 나아지셨군요."

"그래, 고맙네, 서 대리."

지난 6개월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광한계 언어를 배우랴, 광한계 별자리들을 처음부터 다시 숙지하랴.

그런 것뿐이 아니라, 창한도에 정착해서 완전히 개편되는 창천개벽문 이곳저곳에 불려 가서 안면을 트는 등.

'나야 괜찮았지만, 차장님은 어떨지 모르겠군.'

그 역시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곳에 떨어져, 이상한 언어를 익히고 이상한 이들과 안면을 트느라 굉장히 바빴을 터였다.

지난 6개월간은 서로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정말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다녔을 정도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었다.

그나마 최근에는 조금 문파가 안정되고,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겨 내가 오 차장의 몸을 단련시켜 주는 중이었다.

"몸을 움직이니 조금 나아지는군. 역시 잡생각을 날리는 데엔 운동만 한 게 없지. 그나저나 서 대리, 회사에서는 골골대는 모습밖에 못 봤었다만… 의외로 헬스 트레이너 같은 모습도 보이고, 이거 신기하구만."

"하하, 감사합니다."

'헬스 트레이너가 무슨 단어지?'

어쨌든 대충 칭찬하는 말이 분명했기에, 나는 일단 웃으며 받아 주었다.

"차장님은 그래도 꽤 몸을 잘 다루시는군요."

나는 오 차장의 움직임을 보며 평가해 주었다.

기초적인 권장각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분명 김영훈만큼 천부적인 자질로 바로 무공의 진의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몸을 잘 통제하는 것이 보였다.

"뭐, 회사에서도 늘 이랬잖나. 늘 영훈 부장님이랑 등산을 가도 항상 여직원들은 중간에 기절하고, 자네랑 전 과장은 녹초가 돼서 쓰러지고, 나랑 영훈 부장님만 늘 정상 등반에 성공했지. 흐하하!"

"아무래도 두 분은 몸은 늘 잘 쓰셨으니 말입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은근슬쩍 뇌리로 회사에서 있었던 기억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전명철 전무와 함께하는 등산 워크숍을 간 적이 있었다.

정작 전명철은 조금 올라가다가 중간에 약수터로 빠지고, 다른 사람들만 정상에 올라가서 인증을 해 오라고 해서, 김영훈과 오현석 차장만 먼저 정상으로 등반했었다.

여직원들은 중간에 전부 기절해서 벤치에 앉아 쓰러지고, 나와 전 과장만이 어찌어찌 올라가다가, 가파른 산길 앞에서 주저앉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김영훈은 체력을 낭비하지 않고 감각적으로 체력을 잘 조정해서 등산했다면, 오현석 차장은 체력을 얼마나 낭비하든 끝까지 안 지치는 모습이었었다.

'원래도 괴물 같은 몸뚱이를 지닌 분이셨지….'

나는 체력 단련을 마친 오현석 차장을 보며 아득한 과거를 잠시 떠올렸다.

그때였다.

쿠우웅!

저 멀리서, 푸른빛이 날아와 우리 앞에 떨어졌다.

푸른빛 덩이는 얼마 후 빛이 사그라들더니, 그 안쪽에서 한 명의 인영이 걸어 나왔다.

약 팔 척(尺: 2.4미터) 정도는 되는 거구.

웃통을 다 벗고 다니며, 마치 칼로 조각한 듯이 선명한 복근.

창호자였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스, 스승님을 뵈엡습니다."

아직은 이 세계의 언어와 예법이 어색한 오현석은 더듬거리며 예를 취했다.

그러나 창호자는 그런 것은 별 상관없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귀찮은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 내가 찾아온 건, 이제 슬슬 창천개벽문도 창한도에 자리를 잡고, 너희도 광한계 언어가 유창해진 듯하니…. 이제 슬슬 수도공법을 익힐 때가 된 듯하여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오현석 차장은 아직도 수도공법에 대해 감이 잘 안 잡히는 듯.

어리둥절하며 일단 나를 따라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럼 일단 공법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들의 적성 검사를 조금 제대로 해 보도록 하지."

창호자가 근육을 부담스럽게 씰룩이며 말했다.

처음 비승을 했던, 광한계에서의 첫날을 제외하고.

창호자는 거의 늘 항상 웃통을 벗고 다녔다.

그게 남자답다나?

"일단, 본 창천개벽문의 공법은 절대다수가 전투 특화 공법이다. 물론 이번에 서령문을 점령하면서 몇몇 다른 수도공법도 얻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그닥 주류는 아니지.

오현석, 너는 일문성체라고 불리는 전설의 신체를 지녔으며, 서은현 너는…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혼자 비승할 수 있을 정도니. 둘 다 내 직전제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는 그의 말을 듣던 중.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너희는 내 직전제자이니만큼 서령문에서 얻은 공법들 따위는 필요 없고, 내 비전공법을 사사할 것이란 얘기인데. 우선 그 전에, 앞으로 뭘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어떤 식으로 가르침을 내릴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오늘 우선 간단한 시험을 해 보도록 하지."

"…그 간단한 시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창호자는 히죽 웃으며 자신의 주먹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된 게 주먹 하나가 내 머리통만 하다.

"나와 오늘 하루 종일 무한 자유 대련이다. 자, 우선 둘 다 덤벼 보거라. 내 힘은 일단 연기기 급으로 맞춰 주고 싸우마."

"그게 무슨…."

오현석 차장이 제대로 이해를 하기도 전.

콰앙!

창호자의 머리통만 한 주먹이, 오현석 차장의 배를 후려쳤다.

오현석 차장은 두 눈이 뒤집힌 채 그대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피잇!

다음 순간.

붉은 선이 내 배를 향해 내리꽂힌다.

나는 황급히 그 의념을 보며 창호자의 주먹을 피했고.

다음 순간, 창호자의 주먹이 내가 서 있던 곳 뒤쪽.

이 장 크기의 거대한 바위에 내리꽂혔다.

콰르르릉!

그 일격에, 그대로 바위가 한 번에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창호자에게 말했다.

"…그, 연기기 급으로 맞춰 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나는 연기기 때 이러고 다녔다만?"

"…."

누가 봐도 축기기 급 일격이다.

나는 새삼 창호자의 괴물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며 자세를 잡았다.

'무공은 쓰면 안 되겠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심족이라 하는지 모르고.

또 인족의 어떤 고수가 어떤 방법으로 심족을 구별할 수 있는지도 몰랐으니.

일단 몸을 사리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몸을 움직이는' 정도라면….'

무형검도, 강환도 쓰지 않고.

순수하게 의식 영역에 의지해서 상대의 공격을 읽고 피하는 정도는 괜찮을 터였다.

"하하, 어쨌든 내 일격을 피하다니. 과연 싹수가 있는 녀석 같군. 그럼… 어디 계속해 볼까?"

쿠웅!

창호자가 발을 구르자, 그의 발밑에서 청광이 돋아나며 저 멀리 피를 토하며 기절해 있는 오현석 차장에게 흘러 들어갔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전신이 박살 나도 계속 회복시키며 수련시킨다는 건가….'

이 무슨 정신 나간 수련법이란 말인가.

'아니, 아직 수련도 아니지. 수련하기 전에 그냥 자질을 알아보는 것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창호자의 수련 방식은,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가혹할지도 몰랐다.

"자, 그럼. 쓸 만한 제자가 생겼으니, 어디 한번 즐겁게 놀아 보자꾸나!"

부웅!

창호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직도 서 있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앗!

나는 창호자의 의념을 보며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의념의 궤적이 바뀌더니, 순간 알아보기 힘들게 의념이 변화하였다.

그와 동시에.

피잇!

상호자의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실수했어도 그대로 맞을 뻔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고, 창호자가 히죽 웃었다.

"의념을 변화… 이건, 삼화취정…!?"

"오호, 그걸 '보고' 피하다니. 너 역시 삼화취정인 거냐?"

쿵! 쿠웅!

창호자가 즐겁다는 듯이 양 주먹을 마구 부딪쳤다.

그때마다 푸른 기운이 그 주변으로 일렁였다.

"…대창천개벽문의 조사이신 스승님께서, 범인들의 기술을 익히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공을… 익히신 겁니까?"

"흠, 딱히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다. 다만… 내 공법 자체가 육신을 단련하는 공법이다 보니, 자연스레 몸으로 싸울 일이 많고, 몸으로 자주 싸우다 보니… 어느 순간 전투 중에 상대의 의념이 시각화되어 눈에 보이더구나."

창호자의 몸에서, 수천 개의 실들이 흘러나왔다.

하나하나가 최적화된 투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내 의념으로 그 투로들을 차단하고, 전부 피해 냈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부터, 전투를 하고, 하고, 또 하던 중. 상대의 의념과 내 의념이 뒤섞여 자색이 되는 것을 보았다. 그날부터, 인간의 다른 감정의 색 역시 집중하면 볼 수 있게 되었다. 뭐, 물론 나는 전투에 관련된 의념이 아닌 것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일반적인 감정의 의념은 더 파고들지 않았지만…."

부웅, 붕, 붕!

창호자의 주먹이 상, 하, 좌, 우를 메운다.

"범인들이 삼화취정이라고 부르는 이 경지 자체는, 상당히 전투에 쓸 만하다는 걸 알았다! 흐하하, 너 역시 삼화취정에는 도달했나 보구나! 좋아, 어디 한번 놀아 보자꾸나!"

창호자가 더욱 신난 듯한 얼굴로, 더욱더 주먹에 힘을 불어넣으며 나를 밀어붙였다.

'하긴, 애초에 삼화취정은 극한의 실전 속에서 주로 꽃피곤 하니까….'

주로 육탄 전투를 많이 하는 창호자라면 삼화취정의 경지를 얻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창호자의 주먹을 피하며, 정말 오랜만에 군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얼마 만에, 의념을 주고받으며 간합을 재고 싸우는 거지?'

김영훈이 아니라면 시도하지도 못했던 일들.

그렇다고 일반 무림인은 체급이 너무 안 맞아서 상대가 안 되어 상대하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나와 간합도 그럭저럭 맞출 수 있으며 체급으로는 오히려 나보다 아득한 상대가 있었다.

'오랜만에… 놀아 볼까?'

나는 씨익 웃으며 창호자와 의념을 주고받았다.

푸른 선과 붉은 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자색의 선으로 변한다.

서로의 행동과 행동이 예측이 된다.

창호자에게서 뻗어 나온 선이 내 미간을 향한다.

내 골통을 박살 낼 수도 있는 일격.

나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창호자의 주먹을 피한 후.

그대로 창호자의 다리 쪽으로 의념을 쏘아 보냈다.

창호자는 도리어 나를 향해 발을 걷어차 왔지만, 내가 보낸 의념은 눈속임이었다.

나는 아직 주먹을 회수하지 못한 창호자의 팔을 잡은 후, 그대로 그의 주먹에 실린 힘을 역이용해 부드럽게 화경으로 튕겨 내어 버렸다.

파앙!

"…허?"

그의 주먹에 실린 힘 중, 일부를 자극하여 그 방향을 바꾸었다.

방향이 바뀐 창호자의 힘이, 그의 팔 안에서 충돌하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조금 충격을 먹었을 터였다.

"호오…."

창호자의 눈이, 어쩐지 번들거린다고 느껴졌다.

치이이이….

약간의 충격이 들어갔던 창호자의 팔이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아주 좋군. 훌륭하다… 그럼, 계속해 볼까?"

타앗!

창호자가 다시금 내게 달려들었다.

무릎을 내밀어 걷어차는 공격은 반 보를 비틀어 피하고, 늑골에 반격.

발을 찍으며 내 발을 밟으려는 움직임은 발만 반 발자국 뒤로 디뎌 피한 후, 골반을 걷어차 반격.

그의 주먹은 고개를 틀어 회피 후, 상완골을 세 번 타격해 반격.

팔꿈치로 내리찍는 공격은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가 쇄골을 내리쳐 반격.

팔을 끌어안아 나를 가두려는 움직임에는 명치를 타격 후 다시 아래로 빠진다.

직후 나를 향하는 일곱 개의 붉은 의념.

각기 하체를 노리며 내가 피하는 것을 노린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앞으로 쏘아져 나가며 창호자의 급소를 향해 열네 개의 의념을 쏘았다.

부웅, 붕, 붕!

창호자는 급소를 딱히 보호하지 않고 내게 공격을 뻗어 온다.

하지만 나는 보보를 디디며 일곱 번의 공격을 모두 피한 후.

예정대로 창호자의 급소를 전부 타격했다.

하지만.

'때린 건 난데, 왜 내가 다치는 거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어느새 잔뜩 멍이 든 주먹을 바라보았다.

'웃통을 벗고 있는데, 살을 때리는 느낌이 아니라 금강석을 타격하는 느낌이군….'

순수한 박투와 무(武)의 영역에서는, 내가 창호자를 압도한다.

하지만, 수도자와는 다른 의미로 나와 체급이 달랐다.

단단하다!

너무 무식하게 단단하다!

거기에, 저 주먹에 한 대를 맞으면 그대로 사지가 분해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한 대만 맞아도 죽지만, 상대는 수천 대를 때려도 멀쩡한 기묘한 불합리를 강요하는 전투 방식.

그것이 창호자의 전투 방식이었다.

'무형검을 쓴다면, 그래도 충격을 줄 순 있을 텐데….'

내가 입맛을 다실 때, 창호자가 더욱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주먹에 힘을 더 주었다.

쿠구구구구!

"이거, 괜히 힘을 빼 주고 싸워서 미안하구나. 제자야…."

공기가 요동친다.

"네 실력은 알았으니…."

우우우웅!

대기의 기(氣)가 창호자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이제 축기기 급으로 싸워 주마!"

퍼엉!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에 버금가는 속도로, 창호자가 내게 쏘아져 온다.

"이런…!"

나는 아슬아슬하게 창호자의 주먹을 피했다.

콰아아앙!

창호자의 주먹에, 뒤쪽에 있던 작은 산봉우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축기기입니까?"

"나는 축기기 때 이러고 다녔다. 금벽호나 허곽, 그 친구들도 말 들어 보면 다들 이러고 놀았다는데, 딱히 이상한 건 아니지 않으냐?"

"…."

"자, 그럼.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파아앗!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내 앞에 나타난 창호자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씹어 삼키며, 그 짧은 찰나 자세를 재정비하고 손끝으로 기(氣)를 모았다.

그리고.

나와 창호자가 부딪쳤다.

* * *

쉬이이이….

창호자는 두 손을 부딪쳐 털며, 눈앞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파악이 끝났다. 훌륭하군. 제자 역시 삼화취정이라니, 나중에 육신만 조금 단단하게 수련시키면 좋은 대련 상대가 되겠어."

"…."

서은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눈을 까뒤집은 채, 오른팔과 오른 어깨 전체가 터져 나간 상태였다.

"…쩝, 너무 심했나 보군."

우우웅!

창호자가 푸른빛을 뿜어 서은현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그의 오른팔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

서은현의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그를 치료해 주던 창호자는,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

서은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맨주먹으로 창호자와 대련했다.

아무리 창호자가 제자를 어떤 방향으로 가르칠지 알아보기 위한 일환으로 힘을 제약하고 대련했다고 할지언정.

본래는 창호자의 새끼발가락만으로도 눌러 죽일 수 있던 것이 서은현이었다.

'흐음, 이 놈….'

창호자는 선 채로 기절한 서은현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뚝, 뚝….

창호자의 주먹 위로는, 실금 같은 상처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이하군. 분명 맨주먹끼리 부딪쳤거늘…."

그는 실금 같은 상처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검상(劍傷)이 아닌가?'

치이이….

비록 그 실금 같은 검상 역시 창호자가 힘을 주자 바로 치유되었으나, 창호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일문성체인 저 아이만을 신기하게 생각했거늘, 이 녀석도 굉장히 특이한 자질을 지닌 걸지도 모르겠어….'

씨익.

창호자가 서은현을 보며 웃었다.

"연체공법(練體功法)을 익히면 얼마나 괴물이 될지, 기대가 되는구나."

히죽 웃은 창호자는 뒤를 돌아, 막 정신을 차리는 오현석을 향해 다가갔다.

"자, 그럼 너도 나머지 자질 파악을 계속해 보자꾸나."

"자, 잠깐…."

콰아아앙!

얼마간 창천개벽문.

그 구석에 있는 서은현과 오현석의 처소 앞에서는, 푸른빛이 일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