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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 *

'뭐지? 그 사람은?'

북향화는 갑작스레 찾아와 자신의 증표를 넘겨주고 간 그 남자를 떠올렸다.

당황스럽기도 했다.

몇 년째 연동된 법기의 신호가 잡히지 않다, 갑자기 두 군데에서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다.

법기가 망가졌나 했지만, 그녀가 뜯어 보았을 때 멀쩡하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두 개의 신호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녀는 몰랐지만, 월량이 자신의 고손자의 넋을 기린 사당에 노리개를 넣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하나로 되돌아온 신호를 보며, 그녀는 은근히 떨리고 긴장했었다.

왠지 언제라도 그자가 찾아올 것 같았기에.

물론, 진즉 자신의 어머니가 지어 준 짝은 죽었을 수도 있고, 그저 제3의 인물이 법기를 주운 것이었을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근 며칠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가 온갖 망상을 해 왔던 '그'가 찾아왔다.

그는 놀랍게도 그녀의 노리개에 얽힌, 증표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녀는 놀랐다.

그 말인즉, '그'가 자신의 어머니가 말해 준 짝이 맞다는 뜻이 아니란 말인가?

그 사실을 알자, 묘하게 두근거리는 기분과 떨리는 기분이 공존했다.

하지만 그녀가 해 왔던 이런저런 기대들이 전부 무색하게.

'그'는 그냥 자신의 노리개를 그녀에게 줘 버리고는 바로 뛰쳐나가 버렸다.

자신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

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해 왔던 결과였다.

그녀가 노리개를 쥔 상대랑 결연을 맺거나 혼인을 하는 것은 어머니의 바람이었을 뿐이고.

사실 상대는 그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약속을 안 지켰을지언정.

오히려, 그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노리개를 전달해 주러 사막을 건너왔단 뜻이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상대의 인성은 짐작할 만했다.

'좋은 분이셨던 것 같네….'

그녀는 최근 그녀를 쫓아다니는 후기지수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보여 준 인품의 반 정도만 되는 사람이 있었어도 고민을 해 봤겠는데….'

그저 모두 철없는 후기지수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북향화는 잠시 바깥을 쳐다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것과 그의 것이 합쳐져, 뭔가 더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영근이 없는 범인이었지만 나름 기술을 익혀 법기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나름 공묘천색의 혈통이라서인지, 법기 만드는 재주가 있던 그녀의 어머니는 썩 품질이 좋은 법기를 만들고는 했지만, 북향화는 어머니의 실력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재능으로 어머니를 뛰어넘은 지가 오래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노리개를 보며 생각했다.

'두 개의 법기가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고? 거기다가 이 기묘한 신령스러운 기운…. 어머니가 만든 게 맞는 건가? 이건 꼭… 법기가 아니라 법보(法寶) 같은데?'

그녀가 의아해하며 노리개를 자세히 들어 볼 때였다.

주륵….

"…어?"

향화는 문득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두근, 두근….

왠지 모르게, 그녀는 가슴이 아프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노리개를 보며,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느꼈다.

"잠시만…."

주륵, 주르륵….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 마구 솟구친다.

향화는 가슴이 미친 듯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방금 나간 그 사람을 떠올렸다.

"아, 안 돼…."

그자를 잡아야 한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벌컥!

그녀는 떨리는 다리로, 비척거리며 법기점의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 주변 어디에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휘이이이….

맑은 사막의 하늘에는, 어쩐지 새카만 귀무(鬼霧)가 허공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비행 법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들어 보며, 턱 끝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을 느끼며 생각했다.

'왜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뭐지, 이 감정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자를, 찾아야 해.'

그를 찾아서 물어봐야 했다.

도대체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북향화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눈물을 닦으며 결심했다.

'그자를 찾자.'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갔든.

찾아서, 물어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

* * *

[누구를 만나고 온 거냐?]

"…그냥, 지인입니다."

[그러냐.]

송진이 내게 말했다.

[너, 흑색귀골곡의 귀도공법을 배워보는 건 어떠냐? 네 영혼 곳곳에 쌓여 있는 죽음의 기운들… 그리고 방금 내보인 그 심한 감정 파동…. 본 곡의 공법과 최고의 상성을 자랑할 것 같다만.]

"…마공은 사양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송진의 말에서, 그에게 받아야 할 것을 받기로 했다.

"혹시 흑색귀골곡에 '군마용갱권'이란 공법이 있습니까?"

[아, 있긴 하지. 아무도 안 익혀서 늘 서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공법서였는데, 네가 어찌 아느냐?]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혹여… 그 공법서를 주실 순 없으십니까? 한번 익혀 보고 싶군요."

축기기 공법서 수준이었지만.

자신의 법보와 교감할 수 있는 공법서.

나는 노리개까지 향화에게 주고 온 지금.

무색유리검과 더욱 더 깊게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말했다.

송진은 선선히 군마용갱권의 공법서를 주었고, 나는 군마용갱권의 요결을 머릿속에 넣어 둔 후 그에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만…."

나는 송진의 섭명함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너무나도 감정이 거세게 끓고 있다.

빨리 무슨 일이든지 해서 잠재워 버리고 싶었다.

* * *

벽라국 동남부.

그곳에 있는 벽씨세가.

나는 섭명함과 함께 벽씨세가의 상부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혈체를 써 볼까….'

나는 내 의식으로 조종하는 원립의 혈체를 일으켜 세웠다.

우우웅!

혈체를 통해, 혈체의 얼굴에 마기로 가면을 씌우니, 겉보기에는 원립과 완전히 똑같아졌다.

우우웅!

원립의 혈체가 허공으로 날아가며, 벽씨세가의 위쪽에 올라섰다.

그리고 얼마 후.

섭명함의 소란과 원립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벽천기와 벽씨세가 원로원이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혀, 혈목자 대인. 어쩐 일이십니까?"

벽천기는 황급히 주변에 방음 결계를 치며 말했다.

나는 혈체의 입을 통해 말했다.

[가문의 영석을 전부 가져와라.]

"예, 예?"

[말을 듣지 못했나? 가문의 영석이란 영석은 전부 가져오라고 명했다.]

"하, 하오나 어찌…."

[말이 많군.]

우우웅!

나는 혈체의 손을 통해, 벽천기와 벽씨세가 원로원의 머리에 박혀 있는 오행혈주번들을 감응했다.

'몇백 년 전부터 암약해 왔다더니, 전부 머리에 꽂아 뒀었군.'

찌이이잉!

"…!"

"끄으으읍!"

"으으으으읍!"

오행혈주번의 위력 중 20분지 1 정도만을 끌어낸 탓인지.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사들은 미칠 듯이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간신히 버티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많구나. 대계를 위한 것이니, 잔말 말고 영석이란 영석은 전부 가져오기나 해라.]

"끄…읍…! 아, 알겠…습니다…!"

얼마 후.

벽천기의 명령에 의해, 벽씨세가의 수도자들이 몇백만 개나 되는 벽씨세가의 영석을 전부 가져와 혈체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본가에 있는 영석 전부입니다. 이것의 십분지 일 정도 되는 양의 영석들이 각 영지에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모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됐다. 이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또 하나 말해 두자면….]

나는 혈체의 입을 빌려 그에게 말했다.

[조씨세가의 유적을 발견해서 그걸 연구하고 있다 했지?]

"…그렇습니다."

[조씨세가의 유물들 중, 마도(魔道)에 해당하여 수도자는 물론이고 범인들의 인명을 희생하는 유물들이나 약방문, 혹은 공법서들 역시 전부 이 앞으로 가져와라. 함부로 복제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예."

내가 오행혈주번을 움직이며 서슬 퍼렇게 경고하자, 벽천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촌각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혈체의 앞으로 그것들을 가지고 왔다.

우웅!

나는 혈체의 저물대를 열어 그것들을 전부 받아 냈으며, 혈체의 법술로 녀석들이 가져온 영석들을 섭명함에 전부 실은 후 말했다.

[됐다. 앞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거라. 내가 다시 연락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혈목자 대인!"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도자들은 허리를 굽혀 혈체를 향해 인사했고, 나는 혈체를 조작해 섭명함에 태운 후, 송진에게 부탁해 청문세가로 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걸로, 지난 생에 받았던 배신은 잊어 주도록 하지.'

벽천기가 격천부 대신 봉천부를 던져 원립을 죽일 수 있던 그 순간에 초를 쳤던 것을 생각하면.

솔직히 치가 떨리기는 했다.

하지만….

'벽문성이라는 녀석을 자제로 둔 걸 감사히 생각해라.'

나는 벽문성의 얼굴을 봐서, 벽씨세가는 딱 이 정도로만 넘어가기로 했다.

'막리세가처럼 막장 마도 가문 역시 아니기도 하니….'

거기에 조씨세가의 유적에서 발견했다는 마도의 비술들이나 제련법 역시 전부 회수했으니 막리세가처럼 발전하지도 않을 터였다.

쿠구구구!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섭명함은 어느새 다시 청문세가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원립의 혈체를 움직여, 청문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구!

원립의 뒤쪽에서, 월도답천의 기세를 꺼내며 청문세가를 짓누르기를 얼마나 했을까.

잠시 후, 청문세가 가주인 청문중진과, 청문세가의 원로원이 나타났다.

"워, 원영기 선배님이십니까?"

[그렇다.]

"청문세가에는 어떤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청문중진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혈체를 향해 물었다.

나는 혈체의 입을 움직여 말했다.

[내가 눈여겨보는 자가 있으니, 청문세가의 청문령이라는 수도자가 그리 선각후통에 밝다고 하더군. 축기 3대 위인이라 하며 고명이 자자하니. 그가 쓴 책을 읽어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진정 선각후통의 대가더구나. 하여 그와, 그의 가문인 청문세가에 후원을 하고 싶어 찾아왔다.]

쿠구구구구!

나는 벽씨세가에서 탈탈 털어온 몇백만 개의 영석들을, 청문세가의 앞마당에 꺼내서 쌓아 두었다.

삽시간에 가문 하나분만큼의 영석을 받게 된 청문중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가, 감사합…."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 이 섭명함의 주인, 흑색귀골곡의 원로분이셨던 송진 선배님께 부탁하여 말해 놓겠다.

너희는 앞으로 영석을 내면 섭명함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줄 테니, 목 속성 공법을 주로 익히는 청문세가 가솔들을 데리고 봉명성으로 자주 가서 영력을 쌓도록 하라.]

나는 내가 정리한 목 속성 공법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봉명성의 진법을 파훼할 수 있는 족자금제를 넘겨주며 말했다.

혈체를 통한 내 말에, 청문중진과 원로원은 물론이고.

어느덧 나와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청문세가 장로회 역시 내게 읍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선배ㄴ…."

[그만!]

나는 장로회 중.

느릿하게 허리를 숙이던 청문령을 슬쩍 보며 외쳤다.

'역시….'

이럴까 봐 본체가 아니라 혈체로 대신해서 주게 한 것이었다.

청문령에게 '선배님' 소리를 들으며 감사 인사를 받으면.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혈체로 선배님 소리를 듣는다 한들.

가슴이 매우 시렸다.

[됐다. 감사 인사는 하지 말아라. 명령이다. 그럼… 잘 있어라. 청문령에게 지원을 최대한 해서, 그가 결단기에 좀 이르렀으면 좋겠군.]

나는 빠르게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한 후.

바로 섭명함에 탑승하여 송진에게 성제국으로 이동해 달라고 부탁했다.

쿠우우우우!

귀무가 섭명함을 뒤덮으며 공간을 이동했다.

* * *

"허…."

청문중진은 헛웃음을 뱉으며, 눈 앞에 쌓인 영석 무더기들.

그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허, 허허허…."

그는 청문령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령아, 네가 해 온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고명하신 선배님이 네가 쓴 책들과 이론에 감명받아 주고 가신 선물이니…."

"…그렇, 군요."

"어깨를 펴라, 령아! 모두 들어라! 이번에 들어온 영석은 령이의 이름 아래에 들어온 것이니. 영석 중 삼분지 일은 령이의 것으로 쓰일 것이다. 불만 있느냐?"

청문세가의 장로와 후기지수들, 원로원 전원이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청문중진은 껄껄거리며 말했다.

"일단 모두 영석들을 정리해라! 그리고 령아,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 터이니, 오늘부터는 기초법술보다는 결단기에 오르는 것을 힘써 보자꾸나. 선배님께서 네가 결단기에 오르기를 희망하시며 이 많은 선물을 주고 가셨는데, 실망하시면 아니 되니 말이다!"

청문령은 잠시 침묵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 합니다."

* * *

쿠구구구!

섭명함은 성제국.

진루세가의 위쪽에 출현하였다.

'서방 삼국의 배신자 가문은, 진루세가가 마지막이군.'

막리세가는 갈아 버렸고.

벽씨세가에게선 영석을 뜯어 냈다.

'하지만 진루세가는 어찌할까.'

벽씨세가는 내가 맺혔던 울분에 비해, 벽문성이 있었기에 그 정도로 봐준 것이고.

막리세가는 내가 맺혔던 울분에 더해 평소 해 오던 잔악한 짓이 있었기에 그리 끝낸 것이었다.

하지만 진루세가는….

평소 맺혔던 울분도, 잔악한 소문도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벽문성의 경우처럼 좋은 기억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잠시 고민하다, 원립의 혈체로 진루세가에 내려갔다.

얼마 후.

진루세가 가주인 진루연천과 결단기 원로원이 나타났다.

"어머나, 혈목자께서 이런 머나먼 서쪽 끝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진루연천은 고혹적인 목소리로 혈체에게 다가왔다.

나는 혈체를 통해 결인을 맺으며, 그녀와 다른 원로원들에게 꽂혀 있는 혈주번을 발동시켰다.

찌이이이잉!

"끄읍…!"

"으으윽!"

한순간에 결단기 세력 전체가 무력화되었다.

[지금부터.]

나는 혈체의 입을 통해 말했다.

[북방 대초원에 오행혈주번을 꽂아 둔 세력들. 동방 국가들에 오행혈주번을 꽂아 둔 세력들을 네게 알려 주겠다. 너는 일단 북방과 동방을 돌아다니며 그들에게서 각각 이백만 개의 영석,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받아 내라.]

우우웅!

나는 혈주번의 법술을 혈체의 손에 들려 준 후.

혈체가 결인을 맺게 하였다.

우우우웅!

혈주번이 변화하며, 붉은 깃발 문신이 되어 진루연천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사용하면, 개인에게 세 번에 한하여 그들의 상단전에 꽂힌 오행혈주번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들을 찾아, 내 이름 아래에서 영석들을 받아 내 모은 후, 그 영석들을 전부 청문세가에 내 이름으로 전달하라.]

"처, 청문세가에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일이 끝나면 열어 보아라. 네가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열리게 된 서신이다. 그 서신 안에 네가 다음으로 할 일을 적어 두었으니, 반드시 그대로 행하라. 네가 일을 다 끝내기 전에 서신을 열면, 서신에 쓰인 금제가 발동해서 내게 연락이 오게 됐으니, 함부로 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나는 금제를 걸어 놓은 서신을 그녀에게 건넸다.

진루연천은 서신을 받아들어 소중히 저물법기 안에 넣었다.

[그럼 내 명을 시행하고 있도록 하라.]

서신의 안쪽에는.

'모든 일이 끝나면 청문세가에 진루세가의 모든 것을 바쳐 청문세가의 산하 세력이 되어라.'라는 명을 적어 두었다.

진루세가에 대한 벌이기도 했으며.

'아마 저 녀석도 좋아하겠지.'

진루연천도 행복해할 만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다….'

나는 섭명함과 함께, 한 마을로 날아갔다.

익숙한 마을이었다.

'지네 녀석에게 횡포를 당할 마을….'

나는 이번에는 본체로 마을에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나를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촌장에게 물었다.

"저 봉우리 너머에 지네 괴물이 살고 있지 않소?"

"그, 그렇습니다…. 그 괴물이 마을의 총각과 처녀들을…."

"내가 처리해 줄 테니,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오."

"어, 어떤 부탁입니까?"

"이 마을에…."

정순지력으로, 지지난 생 만나서 설화집을 읽어 주었던 아이의 얼굴을 그려 주었다.

"이리 생긴 아이가 있지 않소?"

"아, 책방네 딸애로군요. 있습니다만."

"그 아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소. 안내해 주시오."

나는 촌장의 안내를 받아, 그 아이를 찾아갔다.

'그 책, 분명 평범한 책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더 숨겨진 비밀이 있을 터였다.

지지난 삶에서는 분노에 미쳐 지내느라 딱히 더 비밀을 발굴할 생각을 못했었지만.

이번 생에서는 해 볼 법했다.

마을의 책방을 운영하는 이는 나이가 있는 학사였고, 딸애라는 아이는 옆에서 인형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설화집을 한 권 가지고 계시지 않소?"

그리고, 이어진 학사의 말에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설화집? 우리 집에서는 그런 애 같은 책은 취급 안 하오만."

"…뭐라?"

나는 동화의 내용을 설명하며, 그런 설화가 담긴 설화집이 있지 않느냐 재차 물었다.

내 말을 들은 학사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방으로 들어가 책들을 한참을 뒤적였다.

"없소. 그런 책 같은 건 없소. 그리고 종명자 이야기? 내가 이 지역에서 이십 년째 살아오며 공부를 해 왔소만, 종명자 이야기 같은 전래동화는 들어본 적도 없고.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설화나 성어에 관련된 고사가 쓰인 책을 자주 읽어 주는 편이외만, 상제니 종명자니 하는 책은 정말로 본 적이 없소이다."

백회(百會) (5)

'내가 본 설화집이, 없는 내용이라고?'

흔한 동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동화였다고?

'아니, 그러면… 왜 '지난 회귀'에서는 분명히 있었던 책이, 지금은 없다는 거지?'

기이하다.

너무나도 기이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느덧 금신자 양수진이 남겨 놓은 운명의 잔영으로 향했다.

'그래, 분명 그 잔영은 쇄천봉 인근에 운명의 인력을 설치해 놓았고, 그 잔영을 보려면 말도 안 되는 확률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쩌면, 그 동화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역시 양수진.

혹은 다른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운명의 인력으로 끌려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내용의 동화이며.

그것을 보려면 무언가 말도 안 되는 확률의 기적을 구현해야 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

최소 진선급 이상의 존재인 양수진이 남긴 것과 같다면.

어쩌면 그 기이한 내용의 설화는, 말도 안 되는 확률의 기적을 거쳐야만 다시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하면 언젠가 그런 책을 발견하거든 꼭 내게 말해 주시오."

나는 옆에서 인형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

"너도 그런 내용의 책을 보거나, 혹은 그런 내용이 떠오르면 꼭 말해다오. 내게 아주 필요한 거란다."

"네!"

여자아이는 가지고 놀던 일곱 개의 인형을 껴안으며 해맑게 대답했다.

"음, 그런데 언니는 어디에 있니?"

"언니? 무슨 언니. 내 애는 외동딸이외만."

학사가 은근히 불편한 기색으로 내게 말했다.

'뭐지?'

나는 거기에서 또다시 기묘한 점을 느꼈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어딘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든다.

'음, 하긴. 그랬지. 이 꼬마아이는 지난 삶에 자기 부모님을 기다린다고 했으니….'

왜 나는 갑자기 언니라는 말을 내뱉었을까.

"어쨌든 감사드리오."

어쨌든 나는 감사 인사를 한 후.

일단 예정대로 지네 요괴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타아앗!

단박에 자리를 박차고 고개를 넘자.

지네 요괴가 사는 지네굴이 보였다.

그리고.

카앙, 캉, 캉!

지네굴 앞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무림인들이 보였다.

'아, 저 자들이 그 자들인가 보군.'

촌장이 고용했다는 무림 고수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검기를 뿜으며 지네 요수를 향해 병장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검기는 지네 요수의 갑피에 흠집도 내지 못했고, 도리어 지네 요수가 내뿜는 독기에 하나둘 피를 토하는 것이 보였다.

"죽어라, 죽어라, 이 괴물아!"

한 무림인이 피를 토하면서도 지네 요괴에게 달려들었다.

지네 요괴는 입을 쩌억 벌리고 녀석을 맞이하였다.

곧바로 머리통을 뜯어 버릴 모양.

찰나.

나는 찰나의 틈새를 찢고,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부웅!

손바닥에서 나간 격공장이 무림인 사내를 휘감아 부드럽게 동굴 바깥까지 내보냈고, 반대쪽 손에서 나간 무형검이 지네 요수를 강하게 밀쳐 냈다.

콰아아앙!

지네 요수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아, 아니…."

"저게 무슨…."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는 무림 고수들에게 손을 뻗었다.

촤아아악!

내 무형검이 그들의 요혈을 짚었고, 점차 그들의 경락에 스며들어, 곳곳의 기를 강제로 운용시킨다.

그리고.

파앗!

"크억, 쿨럭!"

"크웨에에엑!"

무형검이 기를 인도해 주자, 그들의 몸에 고여 있던 지네의 독기가 그들의 입을 통해 전부 빠져나왔다.

"기본적인 독기를 빼내 주었소만, 의원을 찾아가서 다시 치료받으시오. 너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독기는 나도 어쩔 수 없으니…."

나는 그렇게 말하고, 지네 요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키륵, 키르륵!"

"놈."

나는 요족어를 통해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흘긋 보니, 지네 요수는 나를 경계하는 듯하면서도, 더욱 깊은 굴속으로 도망치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아래쪽에 녀석의 알로 보이는, 손톱보다도 작은 쌀알 같은 것이 그득그득하게 있었다.

녀석은 제 알들을 지키려고 잔뜩 독기를 뿜으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것이었다.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단박에 쪼개 버리려던 무형검을 잠시 거두었다.

"…물러가라. 다시는 인간을 잡아먹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풀어 주마."

"키륵, 크륵…."

잠시 몸을 움찔대던 지네가, 내게 말했다.

"자식, 들을… 나와 같게, 만들지 못하면… 어찌… 어찌…."

녀석은 절망스러운 의념을 토해 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찌 살아가겠, 습니까. 외롭… 습니다. 위대하신, 분… 차라리, 지금 여기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지네가 축 늘어진 기색으로 말했다.

"제 피와 살을, 뜯어먹고, 남은 자식들이, 그나마 저와 같아질 수, 있도록… 저를… 죽여 주십, 시오…."

"…."

뜨거운 모성애였다.

내가 이 녀석을 죽일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뒤쪽에서, 독기를 어느 정도 억누른 모양인지.

아까 전 피를 토하면서도 지네에게 달려들었던 무림인 검객이, 이쪽으로 달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존자께 인사드립니다! 이 쇤네가 감히 존자께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뭔가."

나는 녀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부디! 놈을 찢어 죽여 주십시오! 최대한 고통스레 죽여 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지네는 요족어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녀석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놈이, 제 연인을 잡아먹었습니다! 놈을 죽여 주십시오! 반드시! 부탁드립니다!"

"…."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시 지네를 돌아보았다.

'그래, 뭘 고민하고 있나.'

모성애는 분명 숭고하나, 그럼에도 이 녀석은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더군다나.

나는 연인이 잡아먹혔다는 무림인의 말에 내 가슴 안쪽이 욱신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래도 넌 죽어야 할 것 같구나. 뭔가 남길 말이 있느냐?"

나는 지네를 보며, 다시 손을 치켜들었다.

지네는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자식, 들이… 저 같은… 아니, 당신, 같은…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지네는, 자신이 죽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고개를 몇 번이고 조아렸다.

"자식들만, 은… 부디…."

"…그래. 힘써 보지."

나는 지네에게 다가가,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푸콱!

무형검이 녀석의 전신을 통과하며, 단숨에 모든 신경을 끊고 놈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아마 고통은 없었으리라.

"…됐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지네가 죽자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올리는 무림인을 보고, 지네가 깔고 있던 곳을 들춰 보았다.

그곳에는 수천 개의 지네 알들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요수 지네의 알보다는, 그냥 평범한 지네의 알 같았다.

아니, 사실 느껴지는 영기는 한 올도 없었으니.

지네의 요력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 한 그냥 알일 터였다.

나는 저물대에 지네의 쌀알만 한 알들을 전부 옮겨 담았다.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힘써 보마."

나는 지네를 잠시 쳐다본 후.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무림인들을 지나쳐 다시 마을로 갔다.

"이걸로 지네는 처리되었소."

"가, 감사합니다…! 부, 부디 이거라도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선인님!"

나는 촌장이 내미는 것을 보았다.

깨끗한 백의 도복이었다.

이 마을에서 쌍선무를 출 때에 입는 옷.

"…고맙게 받겠소."

나는 그에게서 백의 도복을 받아 갈아입었다. 옷을 입고 있으니, 문득 지난 삶이 떠오르는 듯했다.

'…좋군.'

나는 그때의 추억을 잠시 음미하고는 말했다.

"최고의 선물이오. 고맙소."

타앗!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섭명함으로 다시 뛰어 올라갔다.

"이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선배님."

[놈, 어딜 이렇게 많이 왔다 갔다 하는 거냐. 그래, 일단… 다음 목적지는 또 어디냐?]

나는 그에게 말했다.

"봉명성입니다."

쿠구구구구!

송진은 섭명함을 잡고, 봉명성에 들어갔다.

촤아악!

나는 봉명성의 외벽 금제를 파훼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전하군.'

그리고, 나는 봉명성 안쪽을 뒤져 필요한 물건들을 획득했다.

여러 가지 선주들.

특히 백홍주.

그리고….

'그러고 보니, 이건….'

나는 곰방대 하나를 발견했다.

기다란 장죽 형태의 곰방대.

'일반 짐승에게 영성을 불어넣어 준다는 법기였었나…?'

나는 가만히 법기의 설명을 자세히 보았다.

―법기 요선죽(妖仙竹).

―불을 붙여 피운 후, 짐승에게 그 영기를 쐬게 하면 짐승이 영성을 가지게 될 확률이 1모(毛: 만분의 일)만큼 올라간다.

―한 짐승에게 쐬어 주면 최소 5년 동안은 같은 연기를 쐬게 하면 안 된다. 독한 기운을 가졌기에 쉬이 죽을 수 있다.

―짐승이 아닌 요수 역시 축기경 요수라 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 연기를 쐬면 죽을 수 있고, 결단경 요수는 칠 주야에 한 번, 원영경 요수는 하루에 한 번이 연기의 정량이다.

"…."

순간 지네의 자식들에게 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바보 같아지는 확률이었다.

'무슨 방사능 폐기물도 아니고….'

이 정도면 요수를 기르는 데에 쓰는 게 아닌, 그냥 독연으로 요수를 죽이는 수준의 곰방대가 아닌가?

나는 어이가 없었으나, 혹시 몰라서 일단 장죽을 저물대에 넣었다.

그런 후 주변을 뒤지던 중.

또 한 가지 유용한 것을 발견했다.

"봉천부, 두 장."

천인기급 방어력을 가지게 해 준다는 봉천부였다.

'이 부적 때문에….'

나는 슬쩍 원립의 혈체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때문에 한순간 어마어마한 절망에 빠졌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일단 챙겨 두지.'

나는 봉천부 역시 저물대에 넣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이제는 더 이상 봉명성에서 구할 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봉명인을 얻어 볼까…."

쿠구구구구!

나는 품에서 원립이 준 붉은 진법 깃발 법기들을 꺼냈다.

쿠우우웅!

원립의 혈체가 결인을 맺자, 법기들이 빛을 발하며 봉명성 내부에 흐르는 힘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봉명성 내부의 힘을 자체적으로 충돌시켜서, 법기들이 봉명성의 층을 하나둘씩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장생과 나무의 위쪽에서 떨어지는 잔해 조각들을 전부 쳐 냈다.

쿠우우우우….

얼마 후.

봉명성의 모든 층이 무너져 버렸고, 허공에서 빛이 번뜩이기 시작한다.

파아아앗!

'봉명인….'

내가 봉명인을 바라볼 때.

송진과 서란이 봉명성 안쪽으로 들어왔다.

송진이 봉명인을 보며 눈을 빛냈다.

[봉명인이라, 오랜만이군.]

그가 내게 물었다.

[봉명인은 그런데 왜 얻으려는 건가? 자네도 그 원립 놈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비승하려고?]

"아, 봉명인은 천운을 끌어당겨 준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봉명인을 잡고서 말했다.

[천운? 천운이야 좋긴 하지. 하지만 봉명인의 축복을 받으려면 받지만, 그걸 품속에 넣고 다니지는 말게. 봉명인의 소지자는, 이 세계와 인력으로 연결된 봉명인에 이끌려 비승이 힘들어지거든. 결국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게 되니까.]

"하하…."

나는 씨익 웃었다.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이번에 승천문을 조사하며, 봉명인을 품에 넣고 조사한다.'

그렇게 한다면, 혹시나 공간 폭풍에 휘말릴지라도 결국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게 아닌가?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비승이 아닌 승천문 조사였기에, 상관이 없었다.

내가 봉명인을 바라볼 때였다.

파아아아앗!

봉명인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주변에 있던 내게 찬란한 빛을 흩뿌렸다.

어쩐지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봉명인의 축복이군. 보통은 접촉해야 받을 수 있는 축복이건만… 자네도 어지간히 강한 운명을 타고났나 보군.]

"예…?"

[몰랐나? 봉명인은 운명에 반응하며, 강한 운명을 타고난 이에게 더욱더 강하게 반응하지. 그 축복도 마찬가지며. 자네가 접촉도 하지 않았는데 봉명인이 미리 축복을 자네에게만 쐈다는 건, 자네가 타고난 운명이 어마어마하단 소리일세.]

"그렇군요…."

새로운 사실이었다.

'내 운명이라….'

확실히, 조금 강하기는 했다.

운명의 틀을 벗어나려고만 하면 미친 듯이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뜨릴 정도로.

나는 봉명인을 거머쥐며 말했다.

"그나저나, 선배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또 뭔가?]

나는 송진에게 한 진법의 구조도와, 진법 법기의 구조도를 건넸다.

"이 진법 법기를 봉명성 1층에 설치하고, 발동시키면… 5년 뒤, 봉명성에 장생과가 열릴 겁니다. 서 도우에게 하나 주시기 바랍니다."

[허어…!]

송진은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꾸 뭘 주기만 하는군. 이래서는 소원권이 없어지지 않겠는데….]

"하하,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면 족합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장생과가 열리면, 그 열매를 연국의 김영훈이라는 사내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왜 자네가 직접 전달치 않고?]

"그건… 사정이 있습니다."

승천문을 조사하러 가서, 괜스레 공간 폭풍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고.

공간의 미아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이 세계 바깥에서 이곳을 관찰하는 대경계 존재에게 찍혀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만큼, 이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옳을 터였다.

"이게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흐음….]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자네, 설마 지금 수준으로 상계에 비승하려는 건가?]

"…."

송진은 내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너무 갑작스럽군. 왜 그리 급하게 움직이는 거지? 우리 같은 수도자들에겐 몇백 년이고 시간이 있어. 물론 지금 아직 승천문이 안 닫히기는 했지만, 천 년 뒤에도 또 기회가 있네.

자네는 분명 재능이 뛰어나니, 천 년 정도면 충분히 천인기 대원만을 찍고 비승 준비를 할 수 있을 걸세….]

"천 년이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천 년이 지나도 이 수준일 수도 있지요."

[…?]

송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내 재능은 내가 잘 알았다.

천 년이 지나도 간신히 수도공법으로 원영기에 도달하면 다행이고.

무공 역시 김영훈이 몇 단계는 더 뛰어넘는다 한들.

나는 정작 김영훈이 아니었다.

'천 년은 너무 길다.'

그리고, 어차피 한 번은 조사해 봐야 하는 과정이다.

오히려 인연을 그리 많이 쌓지 않은 이번 생이야말로 승천문을 조사하기 가장 적당한 시기일 수도 있었다.

북향화에게 노리개를 전달하며, 그 생각은 굳어졌다.

'천 년이나 살며, 다시 이번 생의 그녀를 만나진 말자.'

다시 한번 이번 삶의 그녀를 만나면.

왠지 나는 참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여하튼… 제 선택입니다. 존중해 주십시오."

[…뭐, 마음대로 하시게. 여하튼 내 제자가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자네가 부탁한 것들은 다 해 주지. 어려운 것들도 아니니.]

송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봉명성에서 나와, 다시 등선향으로 향했다.

* * *

휘이이이이!

시커먼 유령선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허공간에서 나온 섭명함이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왜 굳이 허공간을 통한 공간 이동을 하지 않으냐 물으니, 허공간을 너무 자주 들락거리면 섭명함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였다.

"그나저나, 송진 선배님께서는 상계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일단 기본적으로 그 원가 놈이 말한 것쯤은 대형 세력의 고위층쯤 되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네.]

송진이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으며 설명을 이었다.

[특히나 금신천뢰문, 흑색귀골곡, 거호, 성붕, 해룡족 같은 역사가 깊은 집단은 더더욱 알고 있는 게 많지. 긴 역사 동안 승천문을 통해 비승한 선조분들이, 우리와 간혹 연락을 하기 때문일세.]

"…호오, 혹시 상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시면 여쭤봐도 됩니까?"

[나도 자세히 아는 건 아닐세. 정말로, 몇천 년에 한 번씩만 가끔씩 연락이 닿을 뿐이니… 일단 사천 년 전에 흑색귀골곡과 연락이 닿았던 상계의 선조 중 한 분이 전한 바로는, 상계의 영력은 기본적으로 등선향의 영력보다 수백 배 이상 풍부하며, 상계의 인족들은 범인이 없다 하더군.]

"범인이 없단 말씀입니까?"

[그래, 나도 처음 들었을 때 그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상계에서는 막대한 천지영력 덕에, 아기가 체내에서 수정될 때부터 영력의 영향을 받아 단수기 수도자가 된다고 하더군. 태어나자마자 수도자인 셈이야. 조금 자질이 있는 녀석들은 태내에서부터 연기기 1, 2성을 달고 나오는 이들도 있고…. 정말 말이 안 되지 않는가?]

"…."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아예 범인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도대체 영력 밀도가 얼마나 높으면 그딴 일이 가능한 걸까.

송진이 내 표정을 보고 놀랐는지 낄낄거렸다.

[또한 상계에서는 빠르면 20대 초. 늦으면 4, 50대면 전부 축기기에 도달한다 하더군. 200세를 넘은 이들은 대다수가 결단기 수도자라 하고. 그나마 원영기 수도자부터는 상당한 깨달음이 필요하기에, 거기서도 수가 확 줄어드는 모양이네만…. 정말 불공평하지 않나? 누구는 축기기에 오르려고 사람을 갈아먹어야 하는데, 누구는 태어나서 숨만 쉬어도 축기기라니. 크흐흐….]

"정말… 말도 안 되는군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곳에는, 막리세가 같은 가문이 없을 터였다.

[거기다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계에서 인족은 나름 지배 종족에 해당되며, 상당히 높은 위격을 누리는 종족인 모양일세. 말 그대로 상계는 극락인 셈이지. 끌끌…. 이 정도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정보고, 나머지 더 기밀 정보들은 금제가 걸린 중요 정보라서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쿠우우우우!

저 멀리, 등선향을 덮고 있는 결계가 보였다.

나는 송진의 옆에 있다, 문득 한 가지가 더 생각이 나 물어보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상계 중에는 명귀계라는 게 있는데, 흑색귀골곡과 뭔가 연관이 있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만. 혹시 뭔가 연관이 없습니까?"

뭔가 딱 봐도 대놓고 흑색귀골곡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었다.

원립은 고력, 명귀, 자금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했지만.

어쩌면 송진은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송진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긴 하지. 애초에 승천문이 생기기 전에는 흑색귀골곡에서 주로 비승하는 계가 명귀계였으니.]

"이건 순수한 호기심입니다만. 왜 그럼 굳이 흑색귀골곡에서는 명귀계가 아닌, 승천문과 연결된 광한계로 비승하는 겁니까?"

[흠, 그거야 승천문을 이용한 비승이 훨씬 안전하고 확실한 것도 있고, 또….]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이 이후부터는 금제가 걸린 정보라 직접 누설은 못 하겠다만….]

그가 클클거렸다.

[왜 마도 종문들도 굳이 진마계가 아니라 그와 전쟁 중이라는 광한계로 비승했겠느냐? 원가 놈은 전쟁 중이라고 말했지만, 너무 옛날의 정보만을 알고 있어. 어쩌면, 뭔가 다들 광한계로 비승하려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뭔가, 진마계와 광한계가 벌이는 전쟁의 판도가… 광한계에 유리한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등선향의 결계를 향해 무형검을 내리쳤다.

쿠과과광!

무형검에, 결계가 쪼개지며 섭명함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입구를 만들었다.

쿠우우우!

섭명함은 그대로 멈추지 않고 등선향의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쿠릉, 쿠르르릉….

뇌운이 몰아치고.

뇌운의 아래에서, 천뢰들을 흡수하며 떠 있는 반으로 쪼개진 비석.

그리고, 비석 너머에 있는 사람 몸통만 한 빛나는 공간문.

승천문(昇天門)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섭명함은 공간 균열들이 즐비한 지역 이전에 그 거체를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럼, 일단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오냐, 알아서 잘해 봐라.]

"…선배님, 정말 지금 비승하셔야 하겠습니까?"

"하하, 서 도우는 내 걱정은 마시고, 부탁했던 대로 김영훈이란 분께 장생과나 후에 전달해주시길 바라겠소."

송진과 서란.

둘은 표정은 달랐으나, 나를 걱정하는 의념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둘과 인사를 한 다음.

저물대에서 지네 알들을 꺼냈다.

"자, 내가 뭔가를 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등선향의 영기를 먹고 계속 크면 어쩌면 네 어미의 바람대로 요수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런 후, 나는 요선죽에 불을 붙이고 그 연기를 지네 알들에게 쐬어 주었다.

요족이 될 확률이 만분지 일만큼이라도 올라가고, 그래도 등선향의 농밀한 영기가 있으니 이 영기를 먹으면 요족이 될 확률이 조금이나마 더 올라갈 터였다.

그때였다.

파삭, 파사사삭….

애초에 때가 됐던 건지.

아니면 요선죽이나 등선향의 영기에 영향을 받은 건지.

순간 꽤 많은 새끼 지네들이 알을 깨고 나왔다.

녀석들은 그대로 등선향 곳곳으로 흩어졌다.

'잘들 살려무나.'

내가 요선죽을 저물대에 집어넣었을 때였다.

"음?"

작은 새끼 지네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내 발 위로 올라왔다.

"흐음…."

나는 이 녀석을 들어 다른 곳에 놓아주었으나, 어째 이 녀석은 계속해서 내게로 돌아와 내게 달라붙었다.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그냥 붙여 둬라. 네놈 지금 봉명인을 가지고 있지 않으냐? 봉명인이 네놈에게 어울리는 천운을 부여한 거다. 천운이 데리고 와 준 인연이니 그냥 함께하는 게 더 득이 될 게다.]

"…그렇군요."

나는 잠시 지네를 보다, 녀석을 들어 올려 내 어깨에 붙여놓았다.

"나는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날 거다. 괜찮으냐?"

새끼 지네는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녀석을 쳐다본 후, 송진과 서란에게 인사를 한 후.

승천문을 향해 나아갔다.

"자, 그럼…."

쿠구구구!

회귀 약 보름째.

나는 닫히기 직전의 승천문을 보며, 원립의 혈체를 앞세웠다.

"승천문을, 조사해 볼까."

승천문의 앞에 다가간 내가, 봉천부 두 장을 꺼내, 한 장을 발동시키고 혈체의 몸에 부여했다.

"자, 가라. 어디 한번…."

그때였다.

파직, 파지지직….

"…?"

문득, 저 위쪽에 있는 비석이 번갯불을 심하게 튀기기 시작했다.

'뭐지?'

그때였다.

번쩍!

쿠르르릉!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러운 낙뢰가 나를 때린다.

"…!"

쿠구구구구!

승급 천겁 급의 번개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강력한 힘이었다.

무형검을 전신에 두르는 경지가 아니었다면 필히 서은현 구이가 되어 버렸을 위력!

내가 이를 악물고 낙뢰를 버틸 때였다.

파아아앗!

"…!?"

익숙한 잔영이, 눈앞에 나타난다.

피눈물을 흘리는, 시뻘건 번개를 몸에 감고 있는 그림자.

'양수진…!?'

나는 쇄천봉에서 봤던 그림자를 떠올리며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그때.

양수진의 잔영이 입을 열었다.

[종명자여, 이 잔영을 봤다는 것은, 그대가 쇄천봉에 남겨 둔 내 진언을 들었다는 뜻.

긴말은 하지 않겠네. 만약 상계행을 고민하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 흉측한 세계에서 빨리 나가기를 바라지. 특히나 이 세계는 종명자에게 특히 위협적인 곳. 그대가 이 세계에 오래 있어 좋을 일 따위는 어떤 것도 없다네…. 어서 떠나게, 이 흉측한 머리 안에서….]

파아아앗!

낙뢰가 그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쩌어어어억!

양수진이 만들었다는 승천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입을 쩌억 벌리고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내 품 안쪽에 있던 봉명인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으나,

투쾅!

어떠한 강력한 척력(斥力)에 의해 봉명인은 그대로 내 품속에서 빠져나가 튕겨져 나가 버렸다.

"뭣…!?"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

나는 승천문에 의해 삼켜져 버렸다.

* * *

"저, 저게 무슨…!"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란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고, 송진이 당황하며 귀화를 불태웠다.

피시싯….

서은현을 잡아먹은 승천문은, 그대로 바로 닫혀 버렸다.

[이런 현상은… 들어 본 적이 없거늘….]

본래 한 번 열렸다가, 수일에 걸쳐 천천히 작아지고, 종래에는 먼지만 하게 작아진 상태에서 스러지는 것이 승천문이었다.

저런 식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사람을 잡아먹고, 갑작스럽게 닫혀 버리는 현상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투웅, 퉁, 퉁….

서은현의 품에서 튕겨 나온 봉명인이, 그들의 앞으로 굴러왔다.

슈르르륵….

주인을 잃은 봉명인은, 잠시 그들의 앞에 떨어져 있다, 근처에 있던 다른 공간 균열로 딸려 가 버렸다.

봉명인은 자신이 가진 운명의 인력을 통해 봉명성으로 다시금 돌아갈 터였다.

그리고, 해방성 안에서 해방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허공간을 떠돌아다닐 터였다.

송진과 서란은, 느닷없이 승천문에 잡아먹힌 서은현을 보며,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이나 묵념하였다.

승천(昇天)

쿠구구구구구!

수많은 소리와 빛살이 나를 스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에 무형검을 집중했다.

'전신이, 짜부라질 것 같다…!'

아마 답천의 경지로 인해 전신에 무형검이 깃들어, 몸이 어마어마한 강도를 띄지 않았다면 촌각에 바로 짜부라져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을 터.

'봉천부를…!'

나는 잇몸에서 피가 나올 듯이 이를 악물며, 봉천부를 꺼내 들었다.

"봉천부, 발동!"

쿠구구구구구!

부적으로 어마어마한 기세가 몰리며, 봉천부의 힘이 내 몸을 뒤덮었다.

공간 통로에도 천지영기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천지영기들이 내 몸을 두르며 전신의 영기가 단 한 올도 새어 나가지 않을 만큼 빽빽한 결계를 내 몸에 둘렀다.

"커헉! 헉!"

나는 피를 토하며 겨우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런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나는 승천문의 공간 통로 안쪽에서, 어딘가 [위]를 향해서 끌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키이이잉!

몸에 깃든 봉명인의 축복이 나를 저 멀리로 이끌고 있었다.

승천문에 들어서자, 봉명인의 축복은 확실한 인력이 되어 나를 끌고 가고 있었고, 나는 그 인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쿠구구구구!

'아마 얼마 후면 결국 상계에 도착하겠군. 하지만….'

나는 전신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봉천부의 결계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봉천부가 빨리 효력을 다할 것 같다. 아마 상계에 도착하기 전에 봉천부가 깨질 가능성도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봉명인을 떠올렸다.

'본래는 승천문에 들어가도, 봉명인의 힘으로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려 했건만….'

설마 기이한 척력에 봉명인 자체가 튕겨 나가 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쿠구구구!

나는 당장이라도 무너지려 하는 봉천부를 지켜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위쪽으로 올라가는 원립의 혈체를 바라보았다.

나는 혈체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한 가지를 떠올렸다.

원립 놈에게서 전해 받은 법술.

나는 혈체와 동시에 결인을 맺었다.

"혈체피갑(血體皮鉀)의 술! 개(開)!"

그와 동시에, 혈체의 몸이 활짝 '열렸'다.

쫘아아악!

녀석의 내부 장기와 근육, 몸의 안쪽이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 안쪽에 있던 장기와 근육들이 전부 핏물이 되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내가 결인을 맺자, 혈체는 내 몸으로 날아와 나를 감싸 안았다.

전신을 혈체가 뒤덮고, 곧이어 혈체의 몸이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꾸구국!

전신의 근섬유에 혈체가 스며들며 전신이 더더욱 강화되었다.

육신의 강도와 재생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으며, 일순간 혈체가 사용하던 법술들을 전부 사용 가능해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즈우우웅!

혈체의 몸에 깃들었던 봉천부의 기운이, 내 봉천부의 기운과 합쳐지며, 봉천부의 유지 시간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었다.

파아아앗!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던 봉천부의 막이 다시 굳건해졌고, 나는 일단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좋아, 언제쯤 상계란 곳에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당장 목숨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빛살과 소리들이 주변을 스치고 있다.

솔직히 뭐가 뭔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승천문 안쪽… 이곳에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진 이유가 있을지도….'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승천문 안쪽.

상계로 통하는 공간 통로를 둘러보았다.

피이이이이잇!

수많은 빛살들 사이로, 간혹 마치 우주(宇宙) 같아 보이는 성천(星天)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수한 공간과 차원으로 보이는 것들이 얼핏 얼핏 눈을 스쳤고, 나는 문득 저 아래쪽.

'내가 나온' 세계의 형태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세계'는….

마치….

"…어?"

* * *

나는그것을보았다그것도나를보았다우리는눈이마주쳤다그것은거대한옥….

* * *

"…허억!"

뭐지?

방금 뭐였더라?

피이이잇!

나는 아직도 내가 상계로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주변으로는 수많은 빛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빛살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풍경들로 보아, 나는 내가 상당히 많이 올라왔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순간 의식이 끊겼었는데….'

나는 두통이 이는 머리를 붙잡았다.

왜 의식을 잃었더라?

'공간 압력 때문에 잠깐 기절했었나?'

봉천부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그 너머로 상당한 압력이 전해져 왔다.

물론 그 정도야 참을 만은 했지만, 간혹 압력이 심해지는 구간이 있었기에, 순간 심한 압력이 있었다면 내가 정신을 잃었을 가능성도 있긴 했다.

'그런데 의식을 잃기 직전에, 내가 뭔가를 봤던 것 같은데…'

나는 지끈거리리리리리리는 관자놀놀놀이를 붙붙잡고 의식을 다스려렸다.

'제제젠장. 머리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히 안정되고는 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끈거리는 두통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한….

쿠구구구구!

내가 의식을 잃었던 순간이 꽤 길었는지, 벌써 봉천부가 무너지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제길, 봉천부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안 그래도 처음보다 압력이 더더욱 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공간 통로 안의 천지영기도 더욱 짙어졌지만, 그만큼 봉천부를 두드리는 저항력이 거세진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봉천부의 효력이 다하는 순간 나는 잘 짓이겨진 서은현 주물럭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될 수는 없지!'

나는 [위]를 향해 끌려가는 와중, 자세를 잡았다.

'압을, 흘려 낸다!'

나는 나를 내리누르는 압박을 향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김영훈은 그때 분명, '혼자서' 우공이산을 펼쳤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펼칠 수 있는 자멸기.

그런 우공이산을, 허공을 향해 펼쳤다는 말은 곧.

'세계 그 자체가 무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

허공(虛空) 그 자체를 베어 내며, 그 허공과 합을 주고받아 우공이산을 완성한 것이다.

물론 나는 우공이산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산외산부진 정도라면….'

슈웅, 슝, 슈웅!

허공을 향해 무형검을 휘두른다.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은 계위라고 부르는 것.

내 검이 차원의 너머를 스치는 게 느껴진다.

부웅, 붕, 붕!

차원 너머.

세계를 이루는 기(氣) 그 자체와 검이 부딪히는 게 느껴졌다.

'벤다.'

나는 기(氣)를 베어 내며, 그를 시작으로 나를 덮쳐 오는 어마어마한 '압력' 그 자체를 향해 검무를 추었다.

피이잇!

쩌어억!

검무가 공간의 압력을 베어 가른다.

그와 동시에 봉천부에 가해지던 압력이 줄어들었다.

'우공이산은 펼칠 수 없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초식을 쏟아붓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가로 베기, 하단세, 올려 베기, 찌르기, 변초, 공방일체….

무수한 초식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오며 하나의 형으로 화한다.

단악!

촤아아악!

위쪽의 압력이 쪼개진다.

빠득, 빠드드득!

물론 그랬음에도 여전히 무수한 압력이 나를 조여 오고 있었고, 봉천부는 점차 그 힘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파아아앗!

파캉!

마침내, 봉천부가 그 힘을 다했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나는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압력에 저항하며, 무형검으로 사방의 압력을 더욱더 빨리 베어 냈다.

하지만, 점차 압력이 강해진다.

우득, 우드득!

베어 내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여 압력만으로도 무형검을 덧씌운 전신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꿈틀!

나는 무언가, 공간 통로 저편에서 꿈틀거리며, 공간 사이를 헤엄치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또 뭐지?'

공간의 틈새에 사는 생물인 듯한 그 기괴한 것은, 다행히 내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그 기세는 천인기에 못지않았다.

나는 등골이 시린 것을 느끼며, 일단 계속해서 압력을 베어 냈다.

우득, 우드드득!

혈체를 몸에 깃들여서 내구성과 재생력을 높였음에도, 전신이 공간 압력에 박살 날 것만 같다!

그리고, 내 칠공에서 마침내 피가 터져 나왔을 무렵!

파아아아앗!

콰아아아아앙!

나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막' 같은 것에 부딪히며 피를 토했다.

촤아아악!

무형검이 자연스레 '막'을 베어 냈고, 나는 여기까지 끌려오던 관성에 의해, 막을 뚫고 마침내 '위'로 진입할 수 있었다.

파아아앗!

"크웨에엑! 커헉, 거헉!"

나는 입에서 피를 한 됫박은 쏟아 냈다.

그리고.

"이건…."

[바닥]이 손에 닿는다.

그리고, 그 지독한 공간 압력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으며.

안정적이고, 이전 세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밀도의 천지영기가 느껴진다.

등선향보다도 수십 배는 많은 영기.

이전 세계의 일반적인 지역에 비하면 수백 배는 되는 수준.

"허억… 헉…?"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상계(上界)…?"

내가 주변을 둘러보려 할 때.

쿠웅!

[이건 또 뭐냐.]

내 앞으로, 녹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나타났다.

그는 기이하게도 인간이나 요족처럼 피와 살로 된 몸이 아닌, 나무와 흙으로 이뤄진 몸체를 가진 족속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크억! 크어어억!"

'숨이, 안 쉬어진다!'

사축기(四軸期)!

천인기를 아득히 뛰어넘은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단순히, 그를 의식 영역에 담으려고 하는 순간부터 내 머리가 빠개질 것만 같았다.

나는 황급히 그를 알아보려던 생각을 접고, 의식 영역을 회수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려다가, 황급히 시선을 깔아 그의 그림자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를 직시하고 있자면, 어쩐지 두 눈이 세게 아려 왔기 때문이었다.

천인기 미만은 직시하지도 못할 존재.

사축기의 수도자!

[뒤늦게 얇아질 대로 얇아진 공간 장막을 뚫고 나오다니, 거기다가 기운은 고작해야 축기 수준… 수상하군. 허공간의 괴이한 생물체가 인족 흉내를 내며 침입한 건가?]

쿠구구구구!

사축기의 수도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건…!'

[그녀]의 한 손바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세!

'터, 터져 죽는다!'

긴장과 공포에 눈동자가 바싹 졸아들었다.

나는 피를 토하며 억지로 말을 하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으음?]

사축기 수도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목소리가 울린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청갑 거한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차, 창호자…!?'

"내 아는 얼굴이군. 허공간의 괴생명체는 아닌 듯합니다."

[흐음….]

푸쉬이이이….

사축기 수도자의 손에 맺혔던 기운이 스러졌다.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호자의 뒤편에는, 그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수 명의 천인기 수도자들과, 원영기 수도자들.

그리고 하나같이 심상찮은 기세를 풍기는 거한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저 뒤편, 오현석 차장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창호자의 양옆.

그곳에, 각각 금포를 입은 중년인과 흑색 마의를 입은 중성적인 얼굴의 존재가 있었다.

파직, 파지지직!

금포 중년인, 금신천뢰문의 태상 장문인 금벽호.

그의 뒤쪽으로는 뇌기를 뿜어내는 천인기 수도자 여러 명과, 원영기 수도자들 상당수.

그리고 수많은 금신천뢰문의 문도들이 보였다.

끼야아아아!

키야아!

그리고 흑색 마의인, 흑색귀골곡의 원로원주 백골귀마 허곽.

그의 뒤편으로는 두 대의 섭명함이 공중에 떠 있었고,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주변에서 울리는 중이었다.

또한….

"호오, 이건 예상치 못한 방문인데…."

청포를 입고, 비췻빛 사슴뿔이 이마에 돋아난 청발의 미청년.

서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휼의 뒤쪽으로는, 천인기급 기세를 풍기는 거대한 해룡(海龍)들이 수 마리 이상 본체를 드러내고 있었고, 그 뒤쪽으로 그보다 기세가 작은 어린 해룡들 수십 마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서휼의 양옆으로는 거호족과 성붕족의 대표들, 그리고 그들의 족원 역시 자리를 잡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흐히히, 기이한 일이로다. 어찌 저놈이 여기까지 온 거지?]

괴군 조연.

그는 다른 세력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뒷짐을 지고 나를 쳐다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는 김연 주임이 왠지 모르게 엎어져 입에서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괴군이 무슨 짓을 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괴군이 보호해 줬더라도 공간 압력에서 버티느라 충격이 컸던 것 같았다.

등선향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 앞에 있던 사축기의 존재가 말했다.

[설명해라. 이 녀석이 아는 놈이라고?]

"맞습니다. 그 녀석은 분명… 하계에 있을 때, 승천문을 통과하기 이전에 봤던 녀석입니다. 그때 저희 셋이 모여 검사도 해 봤으니, 분명 인족입니다. 수상한 괴생물체가 아니었습니다."

[흐음, 하면 이 축기급 정도로 보이는 인족이, 대체 어떻게 스스로 광한계(光寒界)에 비승했다는 말이냐?]

사축기 목인(木人)의 말에, 창호자는 그 역시는 짐작이 아니 되는지 헛기침을 했다.

그때였다.

서휼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어쩌면, 그 역시 특이한 자질을 지녔을 수도 있겠군요. 저희는 등선향에서 비승하기 전, 일단의 인족 무리들을 만났고, 그 인족 무리들이 저마다 한 가지씩 재미있는 자질을 가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여 비승 전에 각 세력에서 자질이 없다 생각된 이들은 내버리고 각기 한 명씩 인재들을 나눠 가졌습니다만…. 알고 보니 모두 특이한 재능을 지녔나 봅니다. 스스로 우리를 따라 비승을 하다니, 남은 인족 한 명도 어떤 재능을 지녔는지 조금궁금해지는군요."

서휼의 설명에 녹갑의 목인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특이한 재능? 도대체 무슨 특이한 재능들을 지녔단 말이지?]

"하하…."

그 말에, 서휼은 씨익 웃으며 세 천인은 물론이고 괴군과도 시선을 교환했다.

괴군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팔짱을 끼고 입을 닫았다.

"그냥 특이한 자질들입니다. 뭐, 아무리 특이해 봤자, 광한계의 고명한 혈통들과 공법을 익힌 수사 분들께 비할 수 있겠습니까?"

세 천인들 역시 각자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특이하긴 하지만, 정말 별 것 없는 자질이지요."

"그냥 각 문파의 공법에 딱 맞는 인재들이라 데려온 것뿐입니다."

[흐음….]

그리고, 녹갑 목인이 눈을 빛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군. 제대로 말하라. 이제 막 광한계에 올라온 것들 주제에, 어찌 이리 숨기는 게 많으냐?]

쿠구구구구!

녹갑 목인의 기세가 좌중을 뒤덮었다.

나 역시도 숨쉬기가 힘들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아니, 사실상 심장이 당장이라도 마비될 것 같았기에, 무형검으로 억지로 심장을 뛰게 해야 할 수준이었다.

'처, 천인기 수도자들은, 어떻지?'

그때였다.

순간 녹갑 목인의 기세에 눌리는 듯하던 천인기 수도자들이, 일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 서휼이 뒷짐을 지고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놈이…?]

그때였다.

"…!?"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쿠구구구구!

서휼의 기세가, 올라간다.

그리고, 이전 세계보다 수백 배는 농밀한 인근의 천지영기가, 서휼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쿠드드드득!

서휼의 기세가, 점차 녹갑 목인의 기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기세가 커지고 있었다.

"…광한계의 선배님께서, 혹여나 오해하실까 말씀 올리겠습니다."

[뭣…!?]

저벅, 저벅, 저벅….

서휼뿐이 아닌, 금벽호, 허곽, 청문선우 역시 점차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휼과 마찬가지로 수백 배는 농밀한 광한계의 천지영기를 빨아들이며, 그들의 기세가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저희는 단순히 수명 때문에 도망치듯 상계로 비승해 온 이들과는 다릅니다. 도리어 천인기 대원만에 도달하고, 사축기로 향하는 깨달음도 진즉 얻어 정립했으나, 단순하게 자원이 부족하여 경지를 높이지 못해 상계로 비승했을 뿐…."

쿠구구구구!

찌릿, 찌릿….

나는 갑자기, 서휼 역시 직시하기가 어려워진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세 천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쩌어어엉!

다음 순간.

빛이 폭발하듯이 서휼과 금벽호, 허곽, 청문선우에게서 휘광이 뿜어지더니, 그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동시에.

파아아앗!

녹갑 목인의 기세가 완전히 중화되며, 나는 그제야 조금 숨을 쉬기가 편해짐을 깨달았다.

"혹여나 하계에서 올라온 부족한 후배들이 조금 마음에 안 드실지라도, 저희 나름대로 잔뜩 노력해 온 몸이니, 후배들을 조금은 존중해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서휼의 말이 끝났고, 나는 다시금 그들을, 아니, 그들의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계의 천지영기를 잔뜩 흡수한 그들은, 사축기 수도자가 되어 있었다.

녹갑 목인은 순식간에 사축기 수도자 네 명에게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천겁도 받지 않고 어찌 경지를…?]

"하하, 비승 전에 금 태상장문께서 문파의 신물을 써서, 사축기 천겁을 미리 분산시켜 맞게 해 주셨지요. 우리는 사축기에 바로 도달해도, 천겁을 미리 당겨 맞고 왔는지라 천겁이 내리치지 않습니다."

창호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녹갑 목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들이 녹갑 목인을 둘러싸고 압박할 때였다.

쿠구구구구!

하늘에서, 거대한 기운이 움직이며, 몇 명의 사축기 수도자들이 더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번 기수 비승자들은… 다들 특별하군.]

[공간 압력이 추가되는 걸 감내하고서, 자기 문파와 함께 비승한 녀석들이라니… 그것만으로도 괴물들이라 생각했건만….]

[도달하자마자 사축기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재능들을 지녔다니….]

그들은 감탄스럽다는 듯이 금벽호, 허곽, 청문선우, 서휼 등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구!

금신천뢰문, 흑색귀골곡, 창천개벽문, 거호, 성붕, 해룡족 등.

여러 세력의 천인기, 원영기 수도자들 중에서, 농밀한 천지영기를 흡입하여 바로 정체된 경지를 높이는 이들이 생겨났다.

쿠구구구!

그들 역시 전부 금신천뢰문 신물의 도움을 받은 것인지.

전원이 딱히 천겁을 내리받지는 않았다.

물론, 앞의 넷처럼 한 번에 사축기에 도달한 이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었다.

쿠구구구!

그리고, 저 옆에서 입을 닫고 있던 괴군은 뭔가 정체된 경지를 뚫기는 한 모양이었지만, 사축기에 이르지는 않았다.

천인기의 극한에 도달하긴 한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저 성격에, 금신천뢰문의 도움을 받진 않았을 테고, 천겁을 당겨 맞지 않아서 지금 당장 승급 천겁을 극복하고 사축기에 오르진 못하나 보군.'

내가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을 둘러볼 때였다.

[어쨌든 다들 기세를 거두시게, 후배님들. 자네들이 아무리 대단한 기수라 해도, 이 비선대(飛仙垈) 근처에는 합체기 선배님도 계시니 자중해 주시게나. 흑색귀골곡, 금신천뢰문 등의 문파를 보니, 수계(首界)에서 비승한 이들인 모양이네만. 각자 인족(人族)의 영역으로 안내해 주겠네. 그리고 자네들, 요족들은….]

쿠구구구구!

수도자들이 말을 잇기 전.

저 멀리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하늘에서 먹장구름이 일었다.

곧이어, 먹장구름을 몰고 온 존재가 아래로 내려왔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龍)이었다.

서휼 본체보다도 더더욱 거대한 거체를 가진, 사축기 정상의 힘을 가진 용이 해룡족 측에 착지하였다.

[지족(地族) 진룡맹(眞龍盟) 장로 규련이라고 함세. 이거, 이번 기수 수계(首界) 비승자들이 물건이라더니. 벌써 사축기에 이르렀을 줄이야. 자네들 요족들은 나를 따라 요족 영역으로 가도록 하지.]

"하하, 하계에서도 고명은 전해 들었습니다, 규련 선배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규련에게 인사를 올렸고, 규련은 서휼의 얼굴을 보고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듯하며 콧김을 뿜었다.

[자, 어쨌든 빨리 출발함세. 저 족속들과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

규련은 녹갑 목인을 포함한, 인족 사축기 수도자들을 잠시 노려보며 요족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서휼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 이 후배에 대한 처분이 잠시 필요해서 말입니다."

서휼은 그렇게 말하며 쓰러져 있는 내게 부드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하하, 이것 참… 진룡 싸움에 개미허리 터지게 해서 미안하군. 괴롭게 한 것은 사과하네. 어떤 독특한 재능을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까지 비승하느라 힘들었지 않는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서휼의 손을 잡지 않고, 내 다리로 일어나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나저나 이 녀석.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우리를 쫓아온 게냐?"

창호자가 녹갑 목인을 지나쳐 내게 오며 물었다.

"안 그래도 우리가 며칠은 더 먼저 출발했는데, 우리가 비승하자마자 바로 쫓아온 건 또 어찌한 거고?"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군.'

정상적이라면, 나는 지금 이들과 얘기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들은 나보다 며칠은 먼저 비승했고, 한참은 늦게 출발한 내가 이들과 같은 시기에 상계에 도착하는 건 기묘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괴군이 웃으며 말했다.

[상계와 특출난 인연이나 운명이 있었나 보지. 당장 봉명인의 축복만 해도, 운명의 인력이 더 강한 이들은 더욱더 빨리 상계에 도달하게 해 주지 않느냐? 우리가 며칠에 걸쳐 겨우 비승한 상계를, 저놈은 특출난 운명을 지녀 반나절 만에 비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크흐흐….]

'봉명인 때문인가….'

아무래도 이들이 며칠에 걸쳐 힘겹게 공간 압력을 뚫고 비승하는 동안, 나는 봉명인의 축복을 받아 순식간에 비승한 게 원인인 듯했다.

파츠츠츠….

그때였다.

내 아래에 있던 바닥이, 갑자기 빛을 뿜더니 표면이 기묘한 결계로 뒤덮였다.

"이건…?"

"비선대라는 것이라 하더군. 하계에서 올라오는 모든 수사는 이 비선대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 이제 올라올 수사가 없으니, 비선대가 닫히고 우리가 뚫고 온 차원 장막을 회복시키는 것이라네."

서휼이 우리가 밟고 있는 바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우우웅!

비선대가 결계로 뒤덮이자, 동시에 왠지 일렁이던 주변의 공간이 안정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서휼이 말했다.

"그래서, 어찌할 텐가?"

"…?"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자네 동료들의 재능은 진즉 확인했네. 자네 역시 스스로 비승함으로써, 특출난 재능을 입증했고…. 모두가 이미 비승도 했으니만큼, 자네만큼의 재능이라면 가리지 않고 데려가려 할 걸세. 나 역시 자네가 꽤 욕심이 나고 있으니…."

서휼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 흥미가 돋았다.

"선택하시게. 우리는 이제 각자 광한계 선배분들의 인도에 따라 흩어질 것이니. 자네는 어떤 세력과 함께 가겠는가?"

그 말에, 나는 우선 전신의 힘을 풀었다.

파츠츳….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무형검이 허공으로 풀려난다.

'일단, 좋다. 생각을 해 볼까.'

그리고 그때였다.

[이놈…!]

녹갑 목인을 비롯해, 허공에 떠 있던 다른 사축기 수도자들.

그리고 진룡맹이라는 곳을 대표해서 온 저 용족 장로라는 자 역시.

모두가 진노한 의념을 드러내었다.

'뭐지?'

내가 당황할 때, 그들이 내 무형검을 보며 외쳤다.

[가만 보니, 심도공법을 익힌 심족의 첩자가 아니냐!? 안 그래도 수상하다 여겼거늘!]

"예…?"

[죽어라, 이 첩자 놈! 자세한 건 죽이고 혼을 뽑아 물어보겠다!]

"잠ㄲ…."

그리고.

푸콱!

나는 무엇에 당하는지도 모르고 그대로 터져 죽었다.

그렇게, 나는 비승에 성공하자마자 그대로 전신이 터져 죽어 버렸다.

그것이, 나의 열세 번째 회귀(回歸)였다.

* * *

깜빡.

나는 눈을 떴다.

'제길, 비승하자마자 죽다니, 뭐 이런….'

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작거릴 때였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숲속이 아니다.

이곳은….

"선택하시게. 우리는 이제 각자 광한계 선배분들의 인도에 따라 흩어질 것이니. 자네는 어떤 세력과 함께 가겠는가?"

"…뭐?"

나는 눈앞의 서휼을 보며, 두 눈이 휘둥그레져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비선대 위.

내가 방금 죽었던 곳.

"잠깐, 잠깐…."

그리고, 이 사실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 회귀 시점이, 이곳으로 고정되었다.

"…이보게?"

"…아!"

나는 서휼의 물음에 흠칫했다.

그리고 나는 목인의 눈치를 보며, 무형검을 함부로 흩어버리지 않고, 체내 속에 기운을 최대한 숨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뜬금없이 회귀 시점이 고정된 지금.

금신천뢰문(金神天雷門).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

창천개벽문(蒼天開闢門).

요족들이 가는 진룡맹(眞龍盟).

그리고 정, 마 선파연맹 등 기타….

나는 이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13회차의 첫날

'선택?'

나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누구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

'당장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데….'

일단 회귀 시점이 갑작스레 고정되었다.

그것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시점이 고정되었다는 말은 곧.

'내가 회귀를 시작하고 해 왔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모든 일들이… 전부 고정되었다는 뜻….'

향화에게 준 노리개가.

송진과 서란의 관계가.

김영훈에게 준 장생과가.

죽은 원립과 없어진 막리세가가….

잘했든 못했든.

내가 해 온 행위들 자체가 고정되었다는 뜻이며.

그 말인즉….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은….'

문득,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과 함께 가슴 속에서 뭔가가 북받쳐 왔다.

'무의미하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를지언정, 최선을 다해 온 일들이.

그 삶이 무의미할지라도, 내가 하는 행동에 최선을 다한 그 결과가.

이번에 시간이 고정되며, 비로소 유의미하게 변화했다.

나는 하계에서 해 왔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아,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흐음, 고민이 긴가 보군."

서휼이 턱을 쓰다듬으며 걸음을 물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만 가 봐야겠어. 솔직한 마음으로는 자네가 탐이 나네만…."

서휼뿐이 아니었다.

다른 요족의 요왕들, 성붕왕, 거호왕 등도 나를 향해 입맛을 다시는 것이, 내가 썩 쓸 만한 인재로 보였단 뜻이리라.

하지만, 그들의 뒤쪽에서 나를 쳐다보는 용의 눈이 불만족스러웠다.

[그딴 잡것이 뭐 그리 중하다는 거냐. 건곤중역 근처에서 벗어나 지족의 영지까지 가려면 한세월이다. 빨리 출발해야 하노라.]

"장로께서 급하신 듯하니. 우리는 이만 가 보지."

"…예, 살펴 가십시오, 용왕이시여."

"하, 용왕이라. 말은 고맙지만 이제부터는 왕(王)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게나. 진짜 중경계 요왕(妖王)들께서 노하실 수 있으시니."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뒤를 돌아 규련 쪽으로 갔다.

나는 서휼에게 겉으로나마 인사를 하며 그를 배웅했다.

일단 지금으로선 서휼과는 같이 갈 생각은 없다.

몇 번의 생을 통해 정보를 조금 모은 후라면 몰랐지만….

'물론, 요족 연합 같은 진룡맹이 아니라, 아예 해룡족에 들어오라 했다면 지금이든 추후든 무조건 거절했겠지만.'

내가 떠날 채비를 하는 서휼을 바라볼 때였다.

[그럼 너는 인족이니 우리 쪽으로 와라. 어느 세력을 따라가든 일단 지내기 어렵지는 않겠지.]

상황을 보던 녹갑 목인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너, 아무도 선택할 생각이 없지 않느냐?]

멀리 떨어져 있던 괴군이, 번뜩 눈을 뜨며 말했다.

쿠구구구구!

그는 광한계의 천지영력을 흡입하며 어느새 천인기 대원만, 그 극성까지 도달해 있었고, 사축기에 한 발을 디딘 듯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세 천인과 서휼처럼 바로 사축기에 들지 않은 것은, 단순히 천뢰번의 힘으로 천겁을 당겨 맞지 않아서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사축기에 준하는 기세를 풍겨 대며 내게 말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면 나와 함께 가자꾸나. 너, 도대체 뭐지? 뭐지? 뭐지? 너무 궁금해 죽겠군. 어떻게 사람이 그런 심상을 가지지? 아아, 너무 궁금하다. 내 가제자로 받아 줄 테니, 날 따라와라. 날 따라와라. 날 따라와라. 날 따라와라. 나와 함께 광령지로 떠나자꾸나.]

그는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난 그 눈빛에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때, 녹갑 목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놈도 대단한 인재라는 건 안다만. 우선 너희들은 인족이 거하는 인족 영역으로 가 신분 증빙 패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기는 어딜 간다는 거냐. 너희 둘 다 우선 따라오기나 하거라.]

그때였다.

괴군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다. 난 [그녀]를 완성시킬 재료들을 찾아야 해. 그러기 위해 상계로 비승한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 광한계의 광령지(光靈池)를 찾아 [그녀]의 몸에 피를 돌게 할 것이다.]

[이놈이… 알아듣지 못한 거냐? 네가 뭘 하러 상계에 왔는지는 관심이 없다. 일단 네놈은 인족 영역으로 가서….]

그리고, 괴군이 갑자기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싫다!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명령하지 마라! 나는 당장 광령지로 향할 거다! 광령지를 찾아가 [그녀]를 완성시켜야 해! 막지 마! 막지 마!]

괴군의 행동에, 떠나려던 서휼은 물론이고, 막 사축기에 든 세 명의 안색이 점차 굳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력을 한 팔로 보호하며, 한 걸음씩을 물러서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괴군의 그런 행동에, 뒷골이 싸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 인간이, 미친 짓을 하기 전에는 항상 저러던데….'

―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

―더우월한존재로진화시켜주겠다는데?

―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자, 절로 몸에 오한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괴군의 태도에 노한 표정을 짓던 녹갑 목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미치광이를 보았나? 하계에서야 네놈이 지랄을 해도 천인기라 전부 떠받들었겠지만, 이곳은 광한계다. 감히 이놈이 어느 안전에서 발광을 하느냐?]

쿠구구구구구!

녹갑 목인의 손으로 천지영기가 몰린다.

[제대로 교육을 시켜 주마. 어디 계속 미친 척해 봐라. 아예 터트려 없애 버려 주마.]

그리고.

뚝.

괴군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녹갑 목인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를… 없애?]

괴군이, 양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우득, 우드득, 빠드드득!

[나를 없애?없애없애없애없애없애?아니아니아니아니…. 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니야…아아아, [그녀]가 말한다! 모두 조용! 조용! 아, 그래! 들리느냐? [그녀]가 내게 의견을 냈다!]]

괴군이, 광기로 가득 찬 눈으로, 손가락을 피가 흘릴 정도로 씹어 대며 말을 이었다.

[광한계에 비승한 기념으로, 사축기급 재료는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알아보자꾸나!]

[이… 미치광이 놈…!]

녹갑 목인이 손을 쓴다.

그리고, 서휼이 그를 데리러 온 진룡맹의 장로를 독촉하며 빠르게 도망쳤다.

세 천인이 자신들의 세력을 각기 보호막을 쳐 보호하였다.

나는 아직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누구도 딱히 나를 돕지 않았다.

그리고, 사축기 수도자와 괴군이 부딪혔다.

번쩍!

찌이이이잉!

둘의 격돌에, 천지영기가 요동치며 인근의 공간이 흔들렸다.

쿠구구구구!

"크헉!"

'제길, 혈체피갑이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다!'

혈체피갑이 제공하는 재생력 덕에, 나는 겨우겨우 살 수 있었다.

둘의 압력에 깔려, 바닥에 짜부라져 있는 나는,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둘이 격돌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최초로 괴군의 [전력]을 볼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

괴군이, 상자를 연다.

쿠과과과과과!

상자의 안쪽에서, 거대한 하나의 성채(城砦)가 빠져나왔다.

성은 마치 봉명성 세 개를 합쳐서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원통형 기둥 셋이 삼각형을 그리며 붙어 있는 괴군의 성채.

그리고, 성채의 위쪽에서 괴군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기묘성채(奇妙城砦)여, 입을 열어라!]

쿠구구구구!

괴군의 성채의 성문이 열리며, 하늘이, 뒤덮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그리고 경악한 것은 나뿐이 아니라, 광한계의 다른 사축기 수도자들마저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괴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웅!

벌 괴뢰, 거미 괴뢰, 사마귀 괴뢰… 동물 괴뢰, 인간 괴뢰….

온갖 괴뢰들.

그 괴뢰들이, 하늘을 메운다.

그 너머로 괴군의 음성이 울린다.

[축기경 괴뢰, 일억 구천만 기. 결단경 괴뢰, 십육만 오천육백 기. 원영경 괴뢰, 사천이백삼 기. 천인경 괴뢰, 육십삼 기. 사축경 괴뢰, 두 기.]

명실상부한 사축기 둘 급의 힘.

그리고 나머지 하늘을 뒤덮은 괴뢰들의 힘을 다 합친 괴뢰들의 힘.

그 힘의 크기를 총합하면….

'사, 사축기….'

네 명분의 힘 크기…!

나는 아연실색해서 입을 벌리고, 아래쪽에서 익숙하단 표정으로 얌전히 결계를 펼치는 중인 세 천인, 아니, 이제는 사축기 수도자가 된 그들을 쳐다보았다.

쿠구구구구!

괴군이 괴뢰들을 일사불란하게 조작하며 미친 듯이 녹갑 목인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멍하게 쳐다보던 다른 사축기 수도자들도 얼른 녹갑 목인을 도와주러 허공을 날았다.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아래쪽에 있는 흑색귀골곡을 쳐다보았다.

나는 오늘에서야 흑색귀골곡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종파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 정신 나간 괴물 딱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고작해야 문파의 삼분지 일만을 희생시켜 살아남다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종파가 아닐 수 없었다.

쿠광, 쿠과과광!

얼마간 수많은 축기경 괴뢰들 사이에서 번뜩이며 일전을 벌이던 사축기 수도자들.

그리고.

쿠과과과광!

괴뢰들 사이가 번쩍 뚫리며 원형으로 괴뢰들이 밀려 나간다.

그리고 그 틈새로 녹갑 목인이 전신에서 피 같은 액체를 흘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푸확!

괴군의 기묘성채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녹갑 목인을 포획했다.

그리고, 괴군의 괴뢰들이 일순간 다시 그의 성채로 빨려 들어갔고, 성채는 그의 상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아아앗!

괴군의 뒤쪽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뭔가]가 괴군을 붙잡고 있었다.

'저게, [그녀]…!?'

나는 흠칫 놀라며 그 [뭔가]를 바라보았다.

뭔가 사람의 형상인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지는 빛살과, 자세히 인식하려 하면 눈이 아릿거리는 현상 때문에 관찰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요 녀석!]

괴군이, [그녀]와 함께 내게 날아온다.

파앗!

아니, 날아온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그냥, 공간을 뛰어넘어 삽시간에 내 앞에 도달했으니까.

콰아악!

[그녀]가 허공을 움켜쥐자, 천지영기가 움직이며 나를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한쪽에서 거품을 흘리고 기절해 있던 김연 주임 역시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자, 가자! 사축기급 재료도 손에 넣었다!]

'이런, 제길!'

부웅, 부웅!

나는 무형검을 꺼내서 미친 듯이 저항하려 했지만, 사축기 급의 [그녀]의 힘에는 요지부동이었다.

[신나는구나! 히히! 쓸 만한 제자도 둘, 사축기 급 재료도 하나, 상계 비승도 성공했으니, 당신과 함께 춤출 날이 머지않았소! 아아아아!]

파아아앗!

괴군은, [그녀]와 함께 날아갔고, [그녀]에게 붙잡힌 나 역시 그에 끌려가기 시작했다.

뒤쪽이 삽시간에 멀어지며, 사축기 수도자들이 분노하여 미친 듯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쿠구구구구!

그들의 노성(怒聲)에 곳곳의 대지가 뒤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존재 자체로 자연재해를 뛰어넘어 천재지변인 이들.

사축기 수도자들이, 괴군 한 명에게 농락당하고 분노에 떠는 것이었다.

[저 미치광이를 쫓아라…!]

[전 광한계에 저놈을 수배해라!]

[이 광인 녀석! 전 천족이 네놈을 쫓아갈 것이야!]

나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괴군에게 잡혀가며 이를 악물었다.

'빌어처먹을!'

빨리 세력을 선택하지 않아, 괴군에게 잡혀가게 생겨 버렸다!

파아아아앗!

나는 괴군과, [그녀], 그리고 김 주임과 함께 빠르게 어딘가로 날아갔다.

광인(狂人) (1)

광한계, 백운대륙의 가장 높은 산.

천련대산의 정상.

그곳에, 백옥으로 이뤄진 새하얀 누각이 지어져 있었다.

누각의 안쪽은 기이한 빛살들이 너울처럼 안쪽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누각의 주변으로는 수많은 빛살들이 주변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우우웅!

그리고, 한 빛살이 누각의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파스스!

[흠, 수계(首界)에서 또 인재들이 대거 비승했다고? 그중 하나가 비선대의 순찰선사를 격살하고 육신을 포획해 도망쳤다라….]

파직, 파지지직!

빛살이 너울지는 누각.

그 빛살들의 바깥으로, 빛살들을 뚫고 뭔가가 누각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새하얀 나뭇가지였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는 새하얗고 잔뜩 주름이 진 손에 들려져 있었다.

[그 흉측한 세계에서 그만한 인재들이 대거 비승했다니…. 12만 년 만에 그 불길한 곳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다시 나왔으니, 또다시 전 세계가 혼란에 휩싸이겠구나…. 운명이 어찌 흐르게 될지….]

파아앗!

새하얀 나뭇가지 끝에서, 누각 주변을 왔다갔다 하는 빛살과 같은 빛덩이가 튀어나와, 어딘가로 빠르게 쏘아졌다.

[서한을 보냈다만, 출타한 쇄성기 아이들이 언제쯤 돌아올지…. 광한계의 가장 어른인 내가 하루라도 빨리 금신자에게서 얻은 부상을 치유해야 세계가 안정될 것이거늘….]

새하얀 나뭇가지를 손에 쥔 주름진 손은, 파들파들 떨며 다시 누각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우웅!

다시금 누각의 주변은 이전과 같이 빛덩이들이 주위를 왔다갔다하며 조용해졌다.

* * *

쿠구구구구구!

얼마간 괴군에게 잡혀서 사방을 뚫고 갔을까.

우우우웅!

산과 강을 넘고, 바다를 넘고, 온갖 기이한 곳과 공간을 뛰어넘은 괴군이, 나와 김연을 내려놓았다.

그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계곡이었다.

계곡의 크기는, 하계에 있던 적당적당한 크기의 계곡이 아니었고, 깊이가 3, 40여 리는 될 정도로 깊은 계곡이었다.

'뭐가 이리 크단 말인가….'

내가 광한계 지형의 압도적인 크기에 질려 할 때였다.

[이제야 귀찮은 것들이 안 쫓아오는군!]

괴군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그의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그가 상자를 열자, 다시금 상자 안쪽에서 거대한 성채가 튀어나왔다.

'저건, 역시….'

나는 기묘성채라고 불린 그 성채를 쳐다보며 확신했다.

기묘성채는, 봉명성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마치 봉명성 세 개를 삼각형으로 붙여 놓으면 저리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김새.

사실상 색 배합만을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옥빛 기와에 새하얀 석재로 이뤄진 봉명성과 달리, 괴군의 기묘성채는 갈색 기와에 흑색의 석재로 몸체로 이뤄져 있었으니까.

나는 궁금했지만, 괴군 앞에서는 쓸데없이 말을 놀리지 않기로 했다.

'일단, 도망치거나 자살할 틈을 찾아야 해.'

자살하는 것조차 지금은 옆에서 10장(약 30미터) 크기의 [그녀]가 전신에서 빛을 뿜으며 주변의 천지영기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동결하고 있었기에, 나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열려라, 기묘성채. 아래쪽의 것들을 정리해라.]

괴군의 기묘성채가, 각각의 성에 달린 세 개의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까 보았던 것처럼 억 단위의 괴뢰들이 쏟아져 나와, 계곡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쿠구구구구구!

얼마간 계곡의 아래쪽에서 굉음이 울리는 듯하더니, 다시금 괴뢰들이 위쪽으로 올라왔다.

괴뢰들의 품에는 각각 요수의 사체로 보이는 기괴한 짐승들과 곤충들의 사체들이 들려 있었다.

[자, 그럼 아래쪽도 정리했으니, 기묘성채는 아래쪽에 놓는 게 제일 좋겠어.]

쿠우우우우!

허공에 떠 있던 기묘성채가, 천천히 계곡 아래.

깊은 심연으로 내려갔다.

[히히, 그럼 당신도 그 녀석들을 데리고 오시구려. 먼저 내려가 있겠소.]

타앗!

괴군이 망설임 없이 기묘성채가 내려간 심연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다시금 [그녀]가 손을 뻗자, 나와 김연의 몸이 들어 올려진다.

'제길….'

나는 무형검을 꿈지럭거려 보았으나, 당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우웅!

[그녀]는 그 거체를 움직이며 나와 그녀를 데리고 내려갔다.

쉬이이이….

계곡의 심연 아래로 내려가자, 계곡의 아래쪽에서는 어느새 벌 괴뢰들을 잔뜩 꺼내, 기묘성채가 자리 잡을 터를 다지는 괴군이 보였다.

벌 괴뢰들이 하도 많아서인지, 거대한 기묘성채는 어렵지 않게 터를 잡고 계곡의 아래쪽.

심연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아 내려앉았다.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자리를 잡고, 그곳의 문이 열렸다.

[자, 당신도 들어오시오. 네놈들도 들어와라. 아아, 사축기급 재료라니. 너무 신이 나는군. 흥분돼서 미쳐 버릴 것 같아! 흐아아아아!]

"…."

우우웅!

10장 크기였던 [그녀]가 진동하더니, 점차 작아지며 사람만 한 크기로 변하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의 전체적인 외형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고, 등 뒤쪽에는 단창 두 자루를 메고 있었다.

구조를 보아하니 단창 두 자루를 합쳐 한 자루의 장창으로 만들 수 있는 구조의 무기였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얀 면사포로 뒤덮여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벅, 저벅….

[그녀]는 썩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기묘성채의 성문을 향해 들어갔으나, 나는 그 움직임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다.'

관절의 움직임이 인간의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분명한 괴뢰.

찌릿….

'제길, 오래 직시하기 힘들군….'

분명한, 사축기급의 괴뢰였다.

[이놈들, 안 들어오고 뭣 하느냐?]

우우웅!

괴군의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 있던 나와 김연은 그대로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괴군의 기묘성채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항할 수가 없다…!'

타앗!

나는 빨려 들어가는 관성에 그대로 머리부터 기묘성채의 바닥에 박혀 버릴 뻔했다.

하지만 그대로 균형을 잡고 제대로 자세를 잡은 나는, 내 옆에서 날아가던 김연을 그대로 안아 들어 잡았다.

'이곳은….'

나는 기묘성채의 안쪽을 둘러보았다.

기묘성채 역시 공간 법술이 적용되어 있는 건지,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명성의 내부와는, 완전히 다르군.'

쿠구구구구!

수많은 괴뢰들이 돌아다닌다.

수십 개의 누각과 전각, 그리고 공장 같아 보이는 곳에서 괴뢰들이 생산되고, 폐기되고, 수리된다.

수많은 구획에서 괴뢰들이 생성되고 관리되며….

'…?'

[생활]한다.

말 그대로였다.

마치 부부 괴뢰처럼 보이는 두 괴뢰가, 작은 괴뢰의 손을 잡고 기묘성채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기묘성채의 구획 곳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괴뢰.

춤을 추는 괴뢰.

저들끼리 뛰어다니며 까드득 거리는 작은 괴뢰들.

마치….

진짜 인간들이 사는 성 같았다.

하나….

오싹, 오싹….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그 기묘한 광경에 절로 소름이 끼치는 게 느껴졌다.

이 괴뢰들은 모두 저들이 인간인 것처럼 자연스레 행동했으나.

그들 중 어떤 것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없었다.

하나같이 기묘한 영기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기는 했고, 그 영기의 흐름이 썩 정교하여 마치 진짜 인간의 의념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것들]은 살아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마치 진짜 인간 같은 흉내를 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이 광경에 소름이 돋았을 때였다.

[뭘 그리 구경하느냐. 이쪽으로 와라.]

쿠구구구구!

"…!?"

주변의 공간이 어그러지는 듯하더니, 나와 김연은 기묘성채의 어떤 장소로 와 있었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톱니바퀴와, 기묘한 괴뢰의 팔들.

수많은 기관 장치들이 즐비한 공간이었다.

철컥, 철컥, 철컥….

흠칫!

그 기묘한 공간.

그곳에는 커다란 작업대가 놓여져 있었으며, 그 작업대 위쪽에서, 수많은 괴뢰의 팔과 기관 장치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괴군이 히죽히죽 웃으며, 녹갑 목인의 개조를 진행하고 있었다.

[과연 사축기 수사로군. 진짜 사축기 수도자의 육신을 바탕으로써 불안정한 [그녀]의 영력 흐름을 안정화시킬 수 있겠어. 흐히히, 완벽하군. 완벽해!]

괴군은 한참동안 자신의 장비를 쩔걱거리며 개조를 했다.

나는 그사이, 옆에서 아직까지도 기절해 있던 김연을 슬쩍 보았다.

'정신에… 금제를 당했군.'

단순히 기절한 게 아니었다.

상단전 안쪽에 오행혈주번과 비슷한 종류의 금제가 박혀, 그녀의 막대한 의식을 억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김연을 살펴볼 때였다.

[자, 일단 기초적인 작업은 다 끝냈으니… 너희들에 대한 처우를 결정해 볼까?]

괴군이, 뒤를 돌아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형검을 꺼내 들었다.

자신의 아가리에 완전히 넣었다고 생각한 건지.

괴군은 더 이상 내 체내의 영기를 굳게 만들지 않았고, 나는 다시 무형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자살하고….'

나는 김연을 흘긋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녀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저 미치광이에게 개조되어서 천년만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지낼 바에야….

내가 무형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괴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뭘 하느냐. 네놈들을 내 제자로 삼겠다 했을 텐데. 이 사부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고?]

"…?"

나는 무형검을 내리치려다 말고 몸을 움찔했다.

'저게, 진짜로 하는 말일까?'

저 미치광이는 도대체 뭘 할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나는 괴군이 하는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 특유의 비틀린 정신세계에서 비롯된 말인지 파악하려 했다.

따악!

그때, 괴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엎어져 있던 김연의 상단전에 박힌 금제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푸화악!

쿠구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의식이 줄기줄기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마치 실 같은 의식이, 천지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하늘과 땅을 집어삼킬 듯한 그물과 같이 변모하였다.

하지만….

'저건…?'

나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운에 흠칫했다.

그녀는, 이토록 거대한 의식을 드러내면서도 이제 처음처럼 머리가 부풀어 터지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쌍색(雙色)의 기운.

황색과 청색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며, 그녀의 육신을 안정시키는 게 보였다.

"영질(靈質)?"

[승천문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예전에 구했던 귀한 영약을 먹였느니라. 홍령삼(紅靈蔘)을 먹여 홍령수지체(紅靈樹地體)를 얻게 해 주었으니. 내가 얼마나 인심을 썼는지 참…. 하긴 애초에 홍령수지체가 아니라면 그 무지막지한 의식을 견딜 수 없었겠지.]

"호, 홍령수지체!?"

나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귀도음화선근이나 천상금뢰신체 같은 것이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망상에 가까운 자질이라면.

홍령수지체는 그 정도로 신화적이진 않아도, 상당히 유명한 영근을 형성하는 체질이었다.

목(木) 속성과 토(土) 속성의 이영근이 생기는 체질이었는데,

그 체질의 특성상 천영근과 수련 속도가 다를 것이 없으며, 도리어 목 속성 영기와 토 속성 영기와 교감하며 그 미세한 결을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 있어 동급 경지 수사보다 훨씬 강한 것이 특징인 체질이었다.

다만 이 체질은 혈통적인 것보다는, 그 사람이 타고나는 영기(靈氣)의 차이로 인해 체질이 발현되었고, 홍령삼은 홍령수지체의 영기를 그대로 타고난 삼(蔘)이었다.

그렇기에 홍령삼을 복용한 이는 범인이든 수도자든 홍령삼의 영기를 받아들여, 홍령수지체의 수목 속성 영근을 개화하게 되는 것이었다.

'홍령체에는 육신을 조화롭게 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효용도 있다 하더니, 다행히 그 덕에 머리가 터지지 않은 것 같군….'

나는 의식 금제가 없어지자, 점차 몸을 꿈지럭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얼마 후, 김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눈을 비볐다.

"…꿈인가? 서 대리님하고 헤어졌었는데…"

"…꿈이 아니니까 정신 차리시지요."

내가 그녀를 부축해 주며 일으켜 주자, 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대리님…? 꿈이… 아니었어…?"

그녀는 뭔가 감격한 모양이었으나, 나는 그것보다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구경하는 괴군에게 신경이 더 쏠렸다.

"…노야께 여쭙겠습니다. 저희를 어쩌시려는 겁니까."

지금 당장 미치광이가 눈이 돌아가서 우리를 개조해 버릴지언정, 물어는 봐야 했다.

우리는 어찌 되는가?

그 말에, 괴군이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둘은 우선 내 제자로 삼을 것이다. 아니지, 가제자. 가제자가 좋겠군. 우선 가제자로 삼아 너희를 가르쳐 본 후, 내 진전을 이어받을 녀석을 골라 제자로 삼고, 이 기묘성채를 완성하게 할 것이다.]

'기묘성채….'

이곳이 대체 뭐길래, 괴군 이 자가 우리더러 완성해 달라는 것일까.

이자의 목적은 [그녀]와 관련된 게 아니었나?

나는 [그녀]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산더미같았지만.

사랑 얘기를 꺼냈다가 눈이 회까닥 돌아 나를 개조해 버리겠다고 할 괴군이 두려워 차마 그에 대해 묻지는 못했다.

[이 몸이 제자로 받아 주겠다는데, 감사 인사는 없는 것이냐?]

괴군이 우리를 보며 눈을 희번뜩거렸다.

나는 침을 삼키며, 우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김연의 어깨를 누르며 작게 말했다.

"김 주임님. 절 따라 하십시오."

"예, 예? 예."

김연은 나를 따라 괴군에게 사제의 예를 올렸다.

[흘흘, 좋군. 좋아…. 범인 주제에 사축기 최정상 의식을 가진 제자, 수도공법도 안 익힌 주제에 결단기급 의식을 가지고 혼자서 비승한 제자…. 너희 둘 모두 잘 키워… 반드시 내 꿈을 이루고 말리라…!]

수염을 쓰다듬던 그가 말했다.

[자, 그럼 우선… 아! 그렇구려. 미안하구나.]

괴군이, 옆에 서 있던 [그녀]의 괴뢰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군. 제자들의 이름도 모를 뻔했다니. 고맙소, 역시 나는 당신이 없으면 안 돼.]

"…."

"…?"

나는 [그녀]의 괴뢰에 매달려서 갑자기 울고 웃는 괴군을 보며 양손을 꽉 쥐었다.

김연은 아직 뭐가 뭔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이었으나, 많이 공포스러운 모양이었다.

[흠흠. 그래, 우선 나는 너희들도 알겠지만. 괴군 조연(早緣)이다. 나에 대해 모를 리는 없으니 내 소개는 이쯤 넘어가고, 너희는 이름이 뭐지?]

"서은현이라 합니다."

"김연…입니다."

[그래, 그래. 확실히 기억했다. 그래, 김연 너는 지난번에 승천문을 넘기 직전에 자질 검사는 다 하고 홍령삼도 먹였으니 더 알아볼 건 없다. 너는 이만 들어가 봐라.]

따악!

괴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벌 괴뢰가 나타나 김연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당황하는 새, 벌 괴뢰는 김연을 잡고 다시 공간을 뛰어넘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장내에는 나와 괴군만이 남게 되었다.

[네 자질은 뭔지 파악을 못 했단 말이지. 아까부터 신기하다고 느꼈다만, 그 의식을 몸에 두르는 건 요수공법도 아니고 뭐냐?]

어찌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부웅!

내가 손을 휘젓자, 무형검이 주변을 쓸었다.

[허어! 계위를 넘나들다니! 도대체 뭐지 그건?]

"…이건, 제 의식을 이용한… 특이한 공법입니다. 이것을 통해 비승을 할 수 있었지요. 이 힘을 다루는 데에는 제 의지와 마음이 중요하니, 만약 함부로 저를 개조하신다 하면 이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흐음,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힘이 심상과 직결되어 있어. 잠깐, 그렇다는 말은. 너….]

휘익!

괴군이, 내 앞으로 훌쩍 다가왔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너도 보인다는 뜻인가? '이 시야'가? 심상을 다루는 능력이라면 심상을 못 볼 리는 없는데?]

"…."

괴군의 시야와 내 시야가 마주쳤다.

그의 심상과 내 심상이 마주친다.

'어찌 말해야 하지?'

이자에게 정보를 주는 게 맞을까 틀릴까.

괜히 심상에 대해 말했다가, 그 분야가 괴군이 아는 분야인지라 내 심상만 남기고 나를 개조한다고 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흐음, 그런가….]

괴군은 살짝 아쉬운 듯이 뒤로 물러섰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려 할 때였다.

[그럼 일단 저 작업대에 좀 누워 보려무나. 우선 한쪽 팔만 개조해서, 개조한 팔로도 그 투명한 걸 뽑을 수 있는지 좀 실험하게 해 줄 수 있느냐?]

"사, 사실 심상을 볼 수 있습니다! 헛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오, 그러냐? 그거 참 놀랍군. 사실 예상은 했다. 알겠으니 누워 보려무나.]

위이이이잉!

녹갑 목인이 누워서 개조당하는 작업대 옆.

그곳에 새로운 작업대가 하나 더 솟아났고, 그 위쪽으로 수상한 괴뢰 팔들과 기관 장치들이 내려왔다.

광인(狂人) (2)

철컥철컥철컥….

사방의 기관 장치가 울린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빠져나갈 구석을 생각해 보았다.

'저 미치광이에게 더 뭔가 말을 거는 건 포기하자.'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개조나 되라 식이다.

'자살할까?'

하지만….

나는 막 벌 괴뢰에게 잡혀간 김연을 생각했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김 주임은 저 미치광이에게 홀로 잡혀 살며 똑같이 개조를 당해야 하는 건가….'

미치광이의 일면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을 때는 몰랐지만, 마주하고 나니,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김연을 괴군과 혼자만 함께하게 두어선 안 된다.

'일단 자살은…생각하지 말자.'

그렇다면 탈출은 가능한가.

'무형검으로 주변 괴뢰들의 회로만 끊고 도망치면….'

그것도 될 리가 없다.

원영기였던 원립에게는 어느 정도 통했다지만, 천인기 대원만의 노괴.

그리고 사축기 급의 괴뢰.

이것들이 당장 눈앞에 있으며, 이곳은 괴군의 아가리 속이다.

'제기랄.'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콰과과과!

내가 있던 자리로, 천장에서 수많은 괴뢰 팔들이 내려와 나를 향해 손을 뻗친다.

나는 식겁해서 산군월악비를 펼치며 괴뢰 팔들을 피했다.

[음? 피해?]

그리고, 내가 피하자 괴군의 눈알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답이 없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면 팔 하나로만 끝날 걸 전신이 강제로 개조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나는 괴군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 발로, 가겠습니다."

[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누워 보려무나. 내가 예쁜 걸로 하나 새로 달아 주지.]

"…."

나는 이를 악물고 작업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이 미치광이가 마취는 해 주려나.'

인권도 없는 이 시대에 사실 기대도 안 했다.

사실 나야 마취 정도 없어도 팔이 뜯겨 나가는 고통은 익숙했지만, 김연이 걱정일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개조받으면, 내가 마취약이라도 만들어서 먹여야겠군.'

아니나 다를까.

괴군이 내 옆으로 걸어오며 그대로 천장의 괴뢰 팔들이 내려온다.

[어디 보자, 입을 벌려 보려무나.]

괴군은 그렇게 말하며, 대뜸 내 입으로 손을 집어넣어 입을 벌린 후.

내 입안을 갑자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호오, 호오, 호오…. 좋아, 좋아. 몸놀림을 보고 예상이야 했지만, 역시 무림인이었군. 그렇지?]

"으으, 어으."

[그래그래. 알았다. 소문은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무림인에게 잘 대해 주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다. 치열을 보니 오기조원까지 도달한 대단한 녀석이구나. 아주 좋아. 재능이 풍부한 녀석이니, 부족함 없이 대해 주겠다. 그럼 조금 찌릿찌릿할 테니, 잠시만 참거라.]

"…?"

파지지지직!

갑자기 엄청난 뇌전이 나를 뒤덮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뇌전을 참았다.

'갑자기 번개로 지진다고?'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나를 덮은 뇌전 속에서 기절하지 않고 버텼을까.

뇌전이 사라지고, 괴군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뭐야, 기절 안 했느냐? 마취해 주려고 번개까지 쏴 줬는데. 정신력이 대단한 놈이로구나!]

'…보통은 번개로 상대를 지지는 걸 마취라고 하든가?'

내가 어이없어할 때, 괴군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정도로 정신력이 뛰어나니, 그냥 멀쩡한 상태로 개조해도 버틸 수 있겠구나?]

철컥!

그와 동시에, 내 입에 강제로 재갈 같은 게 물리고, 사지가 결박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마취가 안 됐으면 정신력으로 버티라고 할 게 아니라 한 번 더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왼팔을 향해 괴뢰 팔들과 기관 장치들이 몰려들었다.

* * *

쉬이이이….

"…."

[완벽하군! 아주 훌륭하게 되었어. 장하구나! 개조가 되는 동안 꿈틀거리지조차 않다니, 역시 훌륭한 자질을 가졌어!]

나는 한숨을 쉬며 작업대에서 일어났다.

'김연 주임이 걱정이군.'

나 정도 되니 미동도 안 하고 이 정신 나간 개조를 견딘 것이다.

일반 사람은, 아니, 일반적인 결단기, 원영기 수도자도 방금 개조에서 느껴진 고통은 쉽게 무시할 고통이 아니었다.

철컥, 철컥….

나는 왼팔을 들어 보았다.

이 미치광이가 나를 갑자기 개조한 것치고, 사실 새로 생긴 이 왼팔 자체는 꽤 쓸 만해 보였다.

한쪽 팔 안쪽에는 수많은 회로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으며, 내 의지에 따라 팔이 매우 부드럽게 움직였다.

거기다가 의식을 불어넣자, 팔에서 감각도 썩 잘 느껴졌다.

이것만 해도 의수로써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거기에 팔 안쪽에 내장된 기능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 느껴진다.

[자, 자. 우선 기본적인 동력은 기묘성채 안에서는 기묘성채의 힘을 흡수하여 돌아가게 만들어졌고. 바깥으로 나가면 네 기력을 빨아먹으며 그걸 동력으로 삼도록 설계되었다. 한번 성능을 실험해 보거라.]

철컥, 철컥, 철컥!

괴군의 작업실 한쪽으로, 웬 과녁 같은 것들이 잔뜩 솟아났다.

괴군이 달아 준 괴뢰 팔은 의식을 불어넣자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의식으로 전해졌다.

철컥!

왼손을 펴고 의식을 집중하자, 손바닥으로 기운이 몰린다.

그리고.

퍼어엉!

새하얀 광선이 뿜어지며 과녁 세 개를 동시에 재로 만들어 버린다.

'…팔자에도 없이 손에서 광선이 나가게 되었군.'

우우웅!

손가락을 살짝 굽히자, 다섯 손가락 끝으로 영력이 뭉치며 정순지력으로 이뤄진 새하얀 손톱이 튀어나왔다.

붕, 부웅!

내가 손을 휘두르자, 손톱의 길이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며 과녁을 썰어 버린다.

키잉, 철컥 철컥!

그리고 주먹을 쥐자, 팔 곳곳이 열리며 그곳에서 분사구가 사출된다.

콰과과과!

분사구에서 영력이 분출되며, 나는 주먹과 함께 날아가 과녁 하나를 그대로 박살 내어 버렸다.

주먹을 날릴 때 위력을 더하는 용도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당장 이 정도만 봐도, 평범한 일류 무림인이 이 팔 하나만 있으면 연기기 10, 11성 수도자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전부 무형검으로도 다 할 수 있는 기능들이군.'

오히려 경지가 너무 높은 내 입장에서는 거추장스러운 능력들이었다.

이런 능력들이야 부가 능력으로 봐야 할 것 같았고, 아무래도 괴뢰 팔의 진짜 능력은 다른 것일 터였다.

'조화력… 오기조원으로 신체의 균형을 완벽히 맞춘 이 몸과 완벽히 조화된다. 아무런 어긋남이 없고, 기혈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진짜 팔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느낌, 그리고 균형.

그게 이 팔의 진짜 장점일 터였다.

그리고, 괴군이 이 팔을 만들어 준 진짜 이유는 역시….

[뭘 하느냐? 그거 한번 뽑아 보라니까?]

부우웅!

무형검이 왼팔을 통해서 뿜어진다.

[호오! 그 팔로도 나오는구나!]

그는 심상인 무형검이 괴뢰 팔로도 뿜어지는지가 궁금했던 듯싶었다.

'몸에 붙어 있다는 걸 제외하면, 그냥 법보나 다름없으니 아무래도 당연하겠지.'

당장 법보에 씌워서 사용하는 기능도 있던 게 무형검이었다.

그냥 유리검에 무형검을 덧씌웠던 것과 아무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괴군은 뭔가 영감이 떠오르는지 입술을 핥으며 내 팔을 보고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번들거리던 눈으로 중얼거리던 괴군이, 어느 순간 머리를 부르르 떨었다.

[흠, 흠…. 그래, 됐다. 이만 가 봐라.]

부우웅!

장내에 이송용 벌 괴뢰가 다시 나타났다.

[이 녀석이 네가 앞으로 지낼 숙소로 안내해 줄 게다. 그럼 일단 가르침은 내일부터 주도록 하지. 우선 오늘은 쉬고 있으려무나.]

괴군은 내 대답은 딱히 듣지 않고, 사축기 목인의 육신으로 다가가 미친 듯이 무슨 짓을 하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나는 벌 괴뢰와 함께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파아앗!

공간을 넘어 날아온 곳은, 기묘성채 안쪽에 자리한 어떤 커다란 장원이었다.

장원 안은 마치 진짜 현실의 장원처럼 꾸며져 있었으며, 풀과 나무들, 그리고 작은 짐승과 곤충들이 무성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시비들이 움직이며 장원을 닦고 청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장원의 형태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살아 있는 게 단 하나도 없군.'

풀과 나무조차도 정교하게 만든 괴뢰였으며, 곤충과 작은 짐승들.

그리고 시비들 역시 인간인 척을 하는 괴뢰들이었다.

철컥, 철컥….

내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시비 괴뢰들이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나를 안내하겠단 건가?"

철컥, 철컥….

시비 괴뢰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괴뢰들을 따라 장원 내부로 들어갔다.

시비 괴뢰는 내가 지낼 숙소와 장원 곳곳의 장소를 안내해 주었다.

'삭막하군.'

괴뢰들은 친절했지만,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은 이 장소는 왠지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음?'

저 멀리, 자그마한 생기(生氣)가 느껴진다.

'이 기운은….'

나는 땅을 박차고 생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내가 있는 곳의 옆 장원이었다.

장원의 한구석, 그곳에 김연 주임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멍하니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연분홍빛 경장을 입은 그녀는 혼란과 공포가 가득한 얼굴로 괴뢰 시비들이 일하는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타앗!

나는 그녀의 옆에 내려앉았다.

"아, 서 대리님?"

내가 그녀의 옆에 내려앉자, 그녀의 얼굴에 희색이 맴돌았다.

"다행이에요!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여기는 너무 공포스러워요. 그리고 저 풀, 저 나무! 저것들조차도 전부 로봇 같은 거인 거 아세요? 여기는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어요! 저희, 앞으로 어떻게 하죠?"

"…."

나는 공포에 질린 김연의 얼굴을 쳐다보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김 주임님, 제 말 잘 들으십시오."

그녀를 위로라도 해 줄까 싶었지만, 한쪽 팔을 개조당하고 오니 마음이 굳어졌다.

"이제, 우리가 살았던 현대 사회는 잊으셔야 합니다. 이 세계에는 인권 같은 게 없으며. 우리를 납치해 온 저 미치광이 노괴는 틈만 나면 광증이 도져서 우리를 개조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철컥….

나는 내 왼팔을 김연에게 보여 주었다.

잠시 이해를 못 하는 듯하던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게… 뭐예요? 서 대리님, 장난하시는… 거죠?"

"김 주임님."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두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제 말을 잘 들으시지요.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우선 이 세계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이 세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무림인, 요괴, 수도자….

무공, 법술, 상계와 하계.

괴군 조연, 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

김연이 각성한 거대한 의식이 뭘 의미하는지 등.

"…이런 세상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 아직도 잘…."

"보여 드리는 게 빠르겠군요."

나는 수결을 맺었다.

괴뢰가 된 왼팔 역시 정순지력을 돌리는 데엔 문제가 없었고, 도리어 원본 팔보다 훨씬 튼튼했기에 법술을 쓰는 데엔 더욱 문제가 없었다.

"해(解)!"

촤라라락!

그와 동시에, 내 몸 곳곳에 스며들어 그동안 재생력을 높여 줬던 혈체피갑의 술법이 풀렸다.

촤르르르!

그리고 내 몸에 스며들어 있던 핏물이 옆으로 떨어지더니, 츄르륵거리며 다시 원립의 혈체로 돌아갔다.

촤륵, 촤르르륵….

혈체는 내게 그동안 계속 재생력을 부여해 주었던 탓에, 결단기 후기였던 수행이 연기기 초기 정도까지 한참 떨어져 있었다.

"이, 이게 대체…."

김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혈체를 바라보았고, 나는 혈체의 손을 통해 결인을 맺었다.

화르르륵!

혈체의 손 위에서 불꽃이 튀어나오고, 온갖 신이한 법술들이 나타났다.

"이제 좀 믿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은 이런 기이한 것들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믿기는 믿었어요. 이게 꿈인지 아닌지… 헷갈렸을 뿐이에요. 누가, 지독한 악몽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어요."

"…."

잠시 김연은 지친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때였다.

꿈틀, 꿈틀….

촤락!

혈체의 혈관이 꿈틀거리더니, 안쪽에서 새끼 지네가 한 마리 튀어나왔다.

'아, 이 녀석을 잊고 있었군.'

그동안 혈체를 통해 내 체내에 넣어 놓고, 혈체의 재생력을 몰아주며 공간 압력에서 버티게 했다.

물론 공간 압력이 압력이니만큼 수십 번은 더 터졌겠지만, 그래도 재생력도 재생력이니만큼 터졌다가 계속 재생되긴 했을 터였다.

'조금 미안해지는걸….'

혈체를 통해서 고통을 차단시켜 두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한 녀석의 몸을 몇 번이고 터트렸던 거니까.

'일단 계속 들어가 있거라.'

나는 혈체를 조종해, 지네를 다시 혈체의 혈관 속으로 들어가게 해서, 혈체의 살로 지네를 뒤덮어 혈체의 몸속으로 녀석을 밀어 넣었다.

괴군이 지내는 이 기묘성채에서, 함부로 녀석을 꺼내 놓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그사이 조금 진정이 됐는지, 김연은 혈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서 대리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시나요? 그리고 이 여자…? 아니, 남잔가? 어쨌든 이 사람은 또 뭐죠?"

"김 주임님,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주임님은 물론이고 회사 동료들 모두 기이한 능력을 각성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네."

"저 역시 비슷합니다. 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몸 역시 제가 각성한 능력의 일환이고, 이 정보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런가요? 참, 제 능력 말인데…."

"그리고!"

나는 김연의 말을 끊었다.

"무슨 능력을 얻었는지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십시오."

"예? 여긴 저희 둘밖에 없는데…."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꼬옥….

나는 김연의 두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의념은 물론이고 얼굴 역시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네, 네! 약속할게요. 나중에… 말해 주실 거죠?"

"추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의념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니 약속해 주십시오. 주임님의 비밀은, 죽을 때가 되더라도 발설하지 말아 주시기를."

"네, 네…."

그녀의 의념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래서야, 앞으로 버리고 가기도 힘들겠군.'

김영훈이야 나와 헤어지면 조금 안타까워할지언정, 신나게 혼자서 잘 다녔다.

하지만, 이 상태의 그녀라면 나와 헤어졌을 때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나는 김연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주고, 이 세상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알려 주었다.

그렇게, 기묘성채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부터, 우리는 괴군에게서 각각 공법을 전해받았다.

연기기 기초공법서들과, 동시에 기묘심전(奇妙心典)이라는 공법서였다.

"기묘심전은 의식공법의 일종으로서, 의식을 단련하고 더더욱 키워 나가는 것에 주력한 공법이니라. 동시에, 기묘성채에 사는 주민들을 부리기 위해 꼭 필요한 공법이기도 하지. 연기기 때까지는 기묘심전을 익히고, 의식이 본격적으로 안정되는 축기기부터는 내 본명의식공법인 기묘성심전(奇妙性心典)을 알려 주마."

기묘성채의 주민들이라는 말로 보아, 아무래도 괴뢰를 조종하는 데에 최적화된 의식공법인 듯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김연을 도와 의식공법을 수련하고, 그녀가 기초공법을 더 잘 익히도록 도왔다.

반년이 지났다.

* * *

기묘성채가 자리 잡은 계곡의 위쪽.

쿠구구구구!

나는 반년 만에 내 주변을 두르며 회전하는 영기의 구름 다섯 갈래를 보았다.

'미친 속도군.'

여우의 요단이 없었음에도, 그냥 대기 중의 영기를 흡입하며 선각후통에 의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년 만에 오월입도경의 극성에 달했다.

이 상태라면 한 달 정도만 더 있으면 그대로 축기에 도달할 것 같았다.

그리고, 김연은 현재….

쿠릉, 쿠르릉….

계곡의 다른 쪽에서 칠성제의에 실패하여 조급한 얼굴로 입술을 쥐어뜯고 있었다.

천거(天拒) 현상.

김영훈 때는 몰랐지만.

아니나 다를까, 현대에서 넘어온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임이 틀림없었다.

"또… 실패했어요. 어떡하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지난 반년.

괴군은 내 왼팔뿐이 아닌, 내 양팔을 전부 괴뢰 팔로 개조했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린 팔 역시, 인간과 같은 질감이 아닌, 단단한 나무의 그것이었다.

나 역시 광한계에서도 천거 현상을 겪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괴군이 달아 준 괴뢰 팔에서 나가는 광선으로, 강환을 쏠 것도 없이 구름을 찢어발겨 천거 현상을 극복했다.

그리고 이 말인즉.

"서 대리님… 저 어떡해요? 괴군이, 제, 제 팔도 이제…."

천거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김연 역시 괴군에 의해 개조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다음 시운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 다시 도전해 보시지요. 그리고 괴군 역시…."

나는 그녀의 의식 영역을 바라보았다.

실처럼 이리저리 마구 흐트러졌던 반년 전과 달리, 괴군의 의식공법을 익힌 그녀의 의식은 이제는 차분히 원구형으로 천지를 덮고 있었다.

"김 주임님은 저처럼 함부로 개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아래쪽의 기묘성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반년.

괴군은 우리에게 의식공법과 기초공법을 전수해 준 후.

또다시 사축기 급 괴뢰를 만들겠답시고, 몇 개월째 지금 기묘성채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 틀어박혀, 사축기 목인의 사체를 개조 중이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괴군이 공방에서 두 달 뒤면 나온다고 했잖아요? 그 날까지 칠성제의를 아직도 끝내지 못하면…."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 팔을 바라보았다.

'천거 현상….'

나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구름을 보며 생각했다.

"김 주임님. 현재 기묘심전은 몇 성까지 익히셨죠?"

"11성이요."

기묘심전은 총 12성으로 되어 있으니, 대성을 한 발 앞두고 있었다.

"어쩌면, 천거 현상을 극복하실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 어떻게요?"

나는 괴뢰 팔을 들어 보였다.

"괴뢰의 힘 역시 '내' 힘으로 취급된다면, 어쩌면 김 주임님도 괴뢰들을 부리신다면…."

"시, 싫어요!"

그러나 김연은 고개를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서 대리님도 아시잖아요! 그 괴뢰들, 조종하려 하면…."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편하게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동원할 수 있으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기묘성채의 괴뢰들에는, 문제가 있었다.

"제, 제 정신이 이상해진다고요."

벌 괴뢰의 회로를 북향화가 연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묘성채의 괴뢰들에는 칠정에 대응되는 회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회로들은 기묘성채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괴뢰들과 연동이 되어 있다.

지자난 삶. 홀로 떨어진 벌 괴뢰는 조작할 때에 문제가 없었었다.

하지만 기묘성채 전체와 연동된, 괴뢰들의 회로를 조작하려 하니, 마치 회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조종자의 의식을 잠식하며, 기묘성채의 괴뢰를 조작하는 이는 정신에 어떻게든 이상이 오게 되어 있었다.

괴군의 광증에 맞게 설계되었기에, 괴군이 아닌 이가 조작하려면 괴군과 동화되어 정신이 분열되어 버리는 기묘성채의 괴뢰들.

그것이 김연이 현재 난항을 겪는 부분이었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천거 현상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있군….'

나는 걱정에 빠진 그녀를 보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하늘을 뚫는 걸 도와드릴 순 없습니다."

"…그럼…."

"하지만, 도움은 어떻게든 드려 보겠습니다."

"아…!"

나는 괴뢰가 된 양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맨정신으로 개조 수술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수술 전에 전기로 지져서 기절시킨다고 해도 말이다.

괴군은 사축기 괴뢰를 완성하고 나왔는데, 그녀가 천거 현상 때문에 아직도 연기기 7성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녀의 팔 역시 개조해 버릴 터였다.

'그 미치광이가 개조하는 걸 아예 막지는 못할지라도,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나는 공포에 떠는 김연을 보며 다짐했다.

한 달이 지났다.

쿠구구구구!

나는 축기기에 도달했다.

체내에 익숙한 정순지력이 흐른다.

쿠르르릉!

나를 향해 떨어지는 천뢰를 갈라 버리고, 먹장구름을 흩어 버린 후.

나는 계속해서 천지영기를 흡수하며 공법을 운용했다.

오월입도경 다음으로 운용하는 구결.

음혼귀주문.

파츠스스스….

음혼귀주문은 '고통을 느끼면' 경지가 오르는 공법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면' 경지가 오르는 공법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해도'였기에, 나는 축기기에 오르고 하루 만에 축기 초기의 극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시커먼 저주문이 전신을 맴돈다.

그리고, 이 정도만 되어도 김연을 도와줄 수 있을 터다.

'내일모레, 김연의 칠성제 시운이 잡힌다.'

그리고, 나는 음혼귀주문을 통해 그녀의 칠성제를 도울 요량이었다.

* * *

"괴뢰들을, 조작해 보라고요?"

"예."

나는 괴뢰들을 보며 말했다.

"광증이 느껴지실 테지만, 한번 의식을 불어넣어 보십시오."

"…알겠어요."

김연은 내 단단한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괴뢰들을 향해 의식을 뻗었다.

우우웅!

기묘성채의 주민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연기기, 축기기 급의 괴뢰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으, 으으윽…."

김연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다는 듯이 괴군의 광증을 견뎌 냈다.

나는 김연의 어깨를 잡고, 내 심상을 최대한 김연의 심상과 맞닿게 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김 주임님, 주임님의 의식에 제 의식을 덧대겠습니다. 기묘심전의 구결에 맞춰 의식 파장을 최대한 맞춰 주십시오."

"네, 네…!"

우우우웅!

김연 주임의 의식과 내 의식이 일순간 맞춰졌다.

그 순간, 그녀의 의식을 통해, 그녀가 조작하는 기묘성채와 연결된 괴뢰들의 광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끈적한 광기.

이 광기가 기분이 나쁜 것은, 단순히 정신 분열을 일으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꿈틀, 꿈틀….

광기가 원주인의 인격을 밀어내며, 점차 육신을 장악하고 광기가 조종자의 의식을 장악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우드득!

나는 김연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저주문을 통해 나를 저주인형으로 삼아 모조리 내게 떠넘겼다.

피싯, 피싯!

머리 곳곳의 혈관이 터져 나가며, 코피가 흘렀다.

'이 정도의 고통은….'

꾸욱!

나는 주먹을 쥐며, 내 정신을 집어삼키려는 광증을 도리어 압도했다.

'어림없다!'

쿠그극!

그 상태에서, 나는 김연을 보며 말했다.

아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 우리의 의식이 연결된 상태였으니까.

[이제 괴뢰들을 조작할 수 있으십니까?]

[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는 듯하더니, 두 손을 뻗쳤다.

쿠구구구구!

괴뢰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녀의 의지대로 사방팔방으로 도열했다.

수백 마리의 축기경 괴뢰가 김연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아직 그 정도군요.]

[네, 아직 익숙지가 않아요.]

[여하튼, 이걸로 시도는 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김연과 심어를 주고받으며 말했다.

[이제, 칠성제의를 지내 볼까요?]

철컥, 철컥, 철컥….

계곡 위쪽.

칠성제의를 지내는 제단.

그 주변으로, 수많은 괴뢰 군단이 자세를 잡고, 하늘을 향해 저마다의 법술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한계에서의 칠성제의는 이전 세계와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다른 것은, 이전 세계의 이십팔수와는 완전히 다른 별을 향해 제의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작 제의를 지낼 때 부르는 명칭은 똑같았다.

괴군이 몇 개월 전 납치해 온 인근 종족의 말에 의하면, 수도계에서 제의를 지내는 이십팔수의 별자리 명칭은 어느 차원을 가도 고정되었다고 한다.

진짜 별을 보고 그 별에 맞춰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닌.

그 별이 가진 '기운'에 맞춰 제를 지내기에, 어떤 세계든지 비슷한 '기운'을 가진 별이 있다면 그 별을 이전 세계의 별과 똑같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쿠릉, 쿠르릉….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김연은 제례를 끝마치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에 의해 조작당하는 수백 기의 축기경 괴뢰들이, 일제히 빛을 뿜었다.

콰광, 콰과과과광!

축기경 괴뢰 수백의 공격에, 하늘의 구름이 그대로 찢어졌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그녀 자신의 손으로 괴뢰들을 움직여 하늘을 찢은 것이기에.

하늘 역시 그녀의 행동을 인정해 준 듯했다.

파아아앗!

김연이, 연기기 7성에 무사히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은현 오빠.]

그녀의 의념을 통해, 짙은 안도감과 형언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고마워요….]

연기기의 고비를 넘긴 김연은, 눈매를 훔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의식의 연결을 끊었다.

"축하합니다. 김 주임님."

그녀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이제 경지 정체 때문에 개조당할 일은 없으시겠군요."

"네, 다 은현 오빠 덕분이에요. 그나저나 저희, 언제까지 주임님, 대리님하고 부를 거예요? 하핫."

김연이 천천히 제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여기 회사도 아닌데."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아니, 그것보다 은현 오빠, 회사에 있을 때는 반말하셨으면서, 왜 계속 존댓말하시는 거예요?"

"…."

'그랬던가?'

그것도 900년 전이다.

잘 생각도 안 났다.

"반말하세요. 칠성제의를 지내면서 느낀 건데…."

그녀가 깊은 안도의 의념과 함께 말했다.

"남은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야죠."

하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단순히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저 의념은, 내가 모를 리 없는 의념이니까.

"사실 저는…."

그때였다.

[오, 잘 지내고 있었느냐?]

불쑥!

공간을 뚫고, 괴군이 갑자기 머리를 들이밀었다.

번뜩!

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김연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나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전신에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괴군은 김연의 의념의 색을 보고 있었다.

[오오, 오오오… 오오!]

김연의 의념을 보는 괴군이, 수상쩍은 탄성을 질렀다.

미치광이의 뜻은 읽기가 힘드니, 언제나 긴장이 된다.

나는 침을 삼키며 괴군에게 물었다.

"…벌써, 나오셨습니까. 스승, 님…. 한 달은 더 있으셔야 오실 줄 알았습니다만…."

[아하! 예상외로 사축기 괴뢰가 빨리 만들어져서 말이다!]

촤아악!

공간을 찢고 나온 괴군이 손을 까딱였다.

쿠우우우우!

저 아래쪽에 있는 기묘성채가, 천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첩보를 보냈던 첩보 괴뢰가 [그녀]의 몸에 주입할 재료가 한가득인 광령지의 소재를 파악했다고 하더구나. 한데, 광령지를 점령한 광한계의 부족이 상당히 고강한 종족이라 하더군. 한령족(寒靈族)이라는 종족인데, 한령족의 합체기 수도자도 광령지에 거한다 하는 만큼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종족 같더구나.]

"…어찌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괴군이 핏발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양팔을 펼치며 외쳤다.

[어쩌긴 뭘 어쩌느냐! 전쟁이다! 한령족이고 뭐고 다 정복해 버리고, 내 앞을 막아서는 것들을 다 정복해 버리고! 세계가 나를 막아선다면 세계를 정복해 버리겠다! 히히히히! 세계 정복이다! 세계 정복! 자, 가자꾸나. 사축기 괴뢰를 만드는 방법 역시 안정화가 되었으니, 지금부터, 한령족과 전쟁을 하러 가겠다!]

쿠구구구구!

기묘성채에서, 명실상부한 사축기 급의 힘이 세 채가 뿜어져 나왔으며.

동시에 지난 반년 새, 승급 천겁을 겪고 사축기에 오른 괴군의 기세가 천지를 뒤덮었다.

광인(狂人) (3)

이 미치광이가 또 뭐라는 걸까.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빠르게 지워 내고 괴군에게 물었다.

"아직 사축기 급 전력은 다섯도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었다.

자잘한 괴뢰들을 전부 합치면 얼추 사축기 다섯 급의 전력이 될까 말까였지만.

당장 한령족의 전력만을 따져 봤을 때도 사축기 급 전력은 수도 없이 많다 들었다.

거기다가 합체기 급 수도자도 있다 들었는데….

그런데 무슨 사축기 급 전력이란 말인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그래서, 동료를 늘려야겠지?]

괴군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사축기 괴뢰 개조 공장은 틀이 잡혔다. '재료'만 있으면 무난하게 한 달 안에 전력을 뽑아낼 수 있지.]

오싹, 오싹!

'미쳤군.'

저 말은 곧….

[일단 인근에 있는 사축기 놈들을 하나둘 잡아들여, 기묘성채의 새로운 주민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한 재료들을 공장에 넣고 돌리면….]

괴군이 입이 찢어져라 웃는다.

[우리 편이 더더욱 많아지겠지! 안 그러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상대가 괴군이기에 현실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렇든 저렇든.

한 미치광이의 광증으로 인해, 광한계 전체로 퍼져 나갈 전란이 시작되었다.

* * *

쿠구구구구!!

나는 천재지변이 휩쓴 것 같은 눈앞의 상황을 쳐다보았다.

[이 악랄한 놈! 신호를 보냈으니, 수배된 네놈을 잡기 위해 인근의 사축기 동지들이 전부 달려들고 있을 것이다!]

괴군의 행동은 빨랐다.

빠르게 인근에 있는 사축기 수도자와 그가 살고 있던 대지를 침범했고, 그들과 부딪혀 사축기 수도자를 몰아붙였다.

쿠구구구구!

괴군은 기묘성채의 위쪽에서, 기묘성채를 통해 수억에 달하는 괴뢰 군단을 통솔하며 웃었다.

[재료가 복사된다고? 그거 너무 좋구나! 흐하하!]]

[왜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정말로 광한계 전체의 적이라도 되려는 것이야!?]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 그럼. 얌전히 기묘성채의 양분이 되거라.]

[이놈! 이 미치광이 놈! 흐아아아아!]

쿠구구구구!

수많은 축기경 괴뢰들이, 처음 보는 종족의 사축기 수도자에게 달라붙어, 그를 기묘성채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쿠웅!

그것이 끝이었다.

기묘성채 내부에서, 기묘성채의 공장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렸다.

아마 한 달 후면, 방금 천재지변을 일으키며 싸웠던 사축기 수도자는 괴군의 명을 따르는 충실한 사축기 괴뢰가 되어 다시 나올 터였다.

심지어 저 개조 공장은 아직 틀만 잡힌 상태였으며, 괴군이 사축기 수도자를 개조하며 점차 자료가 쌓이고, 정보가 쌓인다면…

'어쩌면 사축기 괴뢰를 생산하는 공정이 더더욱 빨라지고, 나중에는 아예 굳이 시체가 아니더라도 양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소름 돋는 전력이다.

과연 괴군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있기는 할까.

어쩌면, 전 대륙이 괴군에 의해 휩쓸릴지도 모른다.

'합체기 수사란 이들은, 왜 이런 자를 잡으려 하지 않는 건지….'

당장 비선대 근처만 해도, 합체기 수도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들은 괴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 괴군이 수배가 되었다고 했는데, 어째서 괴군을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추격하는 이들이 없을까.

나는 그들이 의문일 따름이었다.

'괴군이 더 성장하기 전에, 빨리 합체기 수사 급쯤 되는 이들이 그를 막아 줘야 한다.'

그래야만이, 나와 김연이 그에게서 해방될 테니까.

* * *

괴군의 파천황적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그를 쫓아오는 사축기 수도자들을 계속 잡아서 괴뢰로 개조했고, 한 번 전투를 벌일 때마다 그의 전력은 수직 상승했다.

위협을 느낀 사축기 수도자들이 연합을 해서 괴군에게 덤벼 오기도 했지만….

'…미쳤군.'

[흐하하! 재료가 복사가 된다고!?]

이미 사축기 수도자들을 잔뜩 갈아 넣어, 사축기 괴뢰 개조 공장을 한껏 진화시킨 괴군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첫 사축기 수도자를 격살하고 사축기 괴뢰를 만든 지 10년째.

현재 괴군은 46명의 사축기 수도자를 격살하고, 총 46기의 사축기 괴뢰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0년 새.

나는 결단기의 실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김연은, 어느새 원영기가 되었다.

"은현 오빠, 기묘성심결에 대해서 여쭤볼 수 있을까요?"

"…그래."

찌릿, 찌릿….

사축기 급 의식을 응결시켜 원영을 빚어낸 그녀는, 원영기에 도달하자 폭발적으로 힘이 드러났다.

본격적으로 의식의 힘이 법술에 영향을 미치는 원영기에 들어선 그녀는, 고작 원영기에 불과함에도 벌써부터 천인기 급 위력의 법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만으로 벌써 전신이 찌릿거리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김연이 사축기에 이르러도 괴군 저 노괴를 죽일 수 있느냐지.'

그녀가 사축기에 이를 때쯤이면, 괴군은 벌써 합체기 급 괴뢰를 여럿 만들어서 들고 다니지 않을까.

어쨌든, 지금으로썬 괴군에게 벗어나는 방법은 김연을 최대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괴군이 익힌 의식 공법, '기묘성심전'은 서휼의 호풍응단변처럼 수작도 부려지지 않았고, 딱히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공법이었다.

기묘성심전을 익히면 의식이 안정되고, 의식 곳곳에 대한 장악력이 높아지며, 의식이 더욱더 정순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동급 수도자보다 의식의 크기 자체가 커지는 효과가 있었으니, 상당히 훌륭한 공법이었다.

이 완벽한 공법의 단점은, 너무 난해하여 익히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은현 오빠가 없었으면 기묘성심전을 어떻게 여기까지 익혔을지, 벌써 머리가 아프네요."

하지만.

나는 기묘성심전의 구결을 받자마자 알 수 있었다.

기묘성심전은, 삼화취정의 단계에 이른 무인이 보는, 의념의 색조에 대한 것을 수도자의 시선에서 해석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념의 시야에서 발전하여, 완전히 심상을 들여다보고, 심상을 장악한 월도답천에 도달한 나는 바로 기묘성심전의 진의(眞意)를 깨우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원영기고, 나는 결단기였지만, 정작 공법의 이해도는 내가 더 높았기에 김연이 내게 가르침을 받는 기묘한 상황이 자주 만들어지고는 했다.

'아마 이 공법의 끝은, 월도입천이겠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월도입천에서 한 발짝 모자랐다.

월도입천이 자신의 심상을 구현화시킨다면, 기묘성심전을 대성하는 것으로는 그저 월도입천의 '시야'를 얻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괴군이 월도입천에 도달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군이 만들었다는 기묘성심전을 훑어보면, 아마 괴군이 도달한 경지는 진짜 월도입천보다는 수렴 진화에 가깝겠지.'

내가 등봉조극에 올라 내단을 얻고 내단이 요단과 같이 수렴 진화한 것처럼.

괴군의 의식공법인 기묘성심전 역시, 괴군의 노력에 월도입천에 한없이 가깝게 수렴 진화한 것일 터.

'단 한 발.'

기묘성심전이 가리키는 극한은, 정말로 월도입천에서 단 한 발짝만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이상을 넘어서면, 진짜 월도입천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괴군은, 본인도 모르는 새에 월도입천에 도달했는지도 모르지….'

단순히 본인도 모르는 새에 본인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그저 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 구결을 기묘성심전에 수록해 놓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놀라운 자다. 어떻게 본인이 무공을 수련하지 않고, 그냥 의식을 연구해서 삼화취정 너머, 오기조원 등봉조극을 넘어 월도입천에 근접할 수 있는 건지….'

기묘성심전은 나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공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완전히 무인의 시점에서만 의식 영역을 다뤄 왔으나, 기묘성심전은 나와는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의식 영역을 철저히 분석한 공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은현 오빠. 이번에 잡힌 한령족 수도자가 하는 말 들으셨나요?"

"음?"

나는 저 멀리서, 괴뢰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한령족 괴뢰를 쳐다보았다.

괴군은 10년 동안 차근차근히 한령족 영지를 파고들어 가며, 한령족 괴뢰들을 잔뜩 만들어 댔다.

그리고, 괴군에게 잡혀 온 한령족 중 많은 이들은, 우리가 이 광한계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광한계의 대체적인 흐름.

혹은 광한계의 주요 종족들.

최근 광한계의 동향….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광한계에 개열기 수사는 없고, 백운성사라고 불리는 성반기 수사만이 한 명. 쇄성기 수사는 전부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나가 돌아올 기약이 없다 하며, 최근 합체기 수도자들도 뭔가 이상한 조짐을 보인다고 하니…. 아마 괴군이 광한계를 정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김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되면, 뿔뿔이 흩어진 회사 동료들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겠지."

그녀는 동향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미치광이 괴군의 성채에서, 매일같이 괴뢰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 때문인지, 최근 그녀가 나와 한담을 나누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쩐지, 최근 점점 나와 가까이에 앉는 것 같았다.

"저, 은현 오빠?"

김연이 내게 살짝 더 가까이 앉았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미안하구나. 지금 괴군이 호출하고 있다."

나는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에게서 뒤돌아 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알았지만.

받아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혼약자가 있는 몸.

함부로 다른 이와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 * *

[자, 제자야. 이제 곧 한령족 정벌이 끝이 난다. 한령족의 본거지가 있는 광령성을 점령하면, 광령지가 손에 들어오고, [그녀]가 합체기에 이를 것이다! 흐히힛! 그리된다면, 기묘성채가 한 발짝 완성에 가까워지겠지….]

"…어찌 부르셨습니까?"

[아, 널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괴군이 말했다.

[한령족도 광령지를 뺏기기 싫어, 필사적으로 저항을 할 터다. 어쩌면 합체기 수사가 나설 가능성도 있겠지. 너희가 죽을 가능성도 크다. 그래서 말이다만,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한다.]

"무엇입니까?"

[너희를, 내 '세계'에 완전히 받아들이려 한다.]

"…!?"

[둘 다 훨씬 더 우월한 괴뢰가 된다면, 죽을 걱정도 없지 않겠느냐?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희 둘은 내가 친히 부부 괴뢰로 만들어 주겠다. 김연도 너를 연모하는 것 같은데. 둘 다 좋은 일이 아니더냐?]

뚝―

나는 그 말에, 혼란스러워 토할 것 같았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진정해라.'

사실 이 미치광이를 따라다니며, 어느 정도 이런 일은 예상을 했다.

'분노에 떠는 것으로 괴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해.'

오히려 안된다고 해 봤자, 눈이 뒤집히며 당장 우리를 개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미치광이의 논리에 맞춰서 타협해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10년간 괴군을 따라다니며, 그의 논리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무엇이냐?]

어차피 이 자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뜻은.

내 심상에 대한 특이점이고 뭐고, 그런 것들보다 사축기, 합체기 괴뢰들이 더 매력적이라, 더 이상 내 무형검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저는 스승님의 눈에, 기묘성채의 완전한 주민이 되는 것이 더 나은 저급한 자질을 지닌 놈이겠지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더욱더 우월해질 수 있게 도와 주겠다는 것이다.]

"옳습니다. 하지만, 김연은 아직 더 성장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나를 희생시키고, 아직은 그가 매력적으로 여길 김연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더욱 더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그녀는 괴뢰로 만드는 것보다, 괴뢰사로 제대로 키워 내는 게 더 효율적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괴군의 논리에 맞춰, 한 가지 이유를 더 대었다.

"만약 저를 괴뢰로 만들어 주신다면, 저는 그 거대한 의식을 가진 김연에 의해 다뤄지고 싶습니다."

[오오….]

"뛰어난 괴뢰사에게 다뤄지는 것 역시 괴뢰의 행복이 아닙니까? 저희 둘을 부부 괴뢰로 만들지 마시고 저만 괴뢰로 만드신 후, 연이에게 조종을 맡기시면…."

나는 월도답천에 달한 심상 조종으로, 괴군에게서 내 본심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저희 둘 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 완벽하구나! 완벽해!]

괴군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마구 박수를 쳤다.

[내가 너희 둘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마! 그래, 연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을 볼 때부터 알아보았다. 너희는, 내가 이루지 못한 완벽한 사랑을 해낼 수 있을 것이야!]

"…."

[자, 눕거라! 당장 너를 완벽한 괴뢰로 만들어 주마! 너는, 너는 최고의 괴뢰가 될 것이야! 너를, 그래. 기묘성채 전체의 무공 교관으로 삼겠다! 너는 기묘성채의 수호신이 되어, 성채의 장군이 될 것이니라!]

나는 겉으로는 감격한 표정을 짓고, 속으로는 이를 짓씹었다.

'미안하구나, 연아.'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 듯싶었다.

최대한 그녀는 개조당하지 않게, 괴군이 개조하고 싶어 할 때마다 내가 나서서 개조를 당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

내 짧고 굵었던 이번 회차는 여기까지인 듯싶었다.

'그래도, 괴군이 내 얘기를 들었으니, 너까지는 완전히 괴뢰로 개조하지 않겠지.'

그녀의 재능이라면,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언젠가 괴군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리고, 내 복수를 해 줄 것이다.

반드시.

철컥, 철컥, 철컥….

나는 괴군의 작업대에 올라가, 괴군의 개조를 기다렸다.

단순히 전신 개조가 아니었다.

나를 그의 세계에 받아들인다는 괴군의 발언은, 말 그대로 내 껍질만 조금 남긴 채 나를 꼭두각시로 개조하겠다는 의미.

오늘, 나는 죽을 것이다.

철컥, 철컥…!

소름 끼치는 기계음이 내 전신을 덮었다.

그것이, 나의 열네번째 회귀인 줄 알았다.

* * *

철컥….

'…?'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오, 완벽하군. 일어나라!"

끼이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전신이, 움직인다.

"내가 최선을 다해 너를 만들었단다. 원영기도 못 되는 몸이었지만,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넣었으니 사축기에 준하는 전력이 될 것이다. 앞으로 기묘성채를 잘 부탁한다, 서 장군."

그리고.

"맡겨만 주십시오, 성주(城主)."

내 입에서.

기묘한 기계음이 멋대로 튀어나온다.

"자, 그럼 자리로 가게나. 한령족과의 전투가 머지않았네."

"알겠습니다, 성주."

'나'는 몸을 움직여 괴군의 작업실을 나갔다.

전신이 공간을 뚫으며, 그대로 공간을 이동해 기묘성채의 외벽으로 향했다.

사축기 급의 공간 이동!

그리고.

'나'는 기묘성채의 외벽에서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뭣…?'

나는 당황스러운 심정으로 의식을 움직였다.

괴군에게 개조당하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었던가?

회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러한 예상이 무색하게.

'나'는 생체괴뢰가 된 그 상태로, 그대로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무, 무슨…!'

나는 당황하여 생체괴뢰가 된 '내' 몸 안에서 울부짖었다.

나는, 괴군에게 생체괴뢰로 개조당하고,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광인(狂人) (4)

나는 의식을 미친 듯이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의식을 움직여 봐도, 제대로 움직여지는 건 없었다.

무형검을 움직여 보려 해도, 정작 무형검은 펼쳐지지 않았다.

'제길,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괴군에게 잡혀 오기 전에는 생체 괴뢰가 되면 천년만년 죽지도 살지도 못하며 사는 줄 알았다.

지난 생에 괴군에게 잡히기 전 자살한 이유기도 했고, 이번 생 초반에 김연을 죽이려 했던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괴뢰들 중 살아 있었던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였다.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괴군의 밑에서 멍하니 숨만 쉬고 살아온 게 아니다.

나름대로 그의 괴뢰를 파헤쳐 보고, 그의 어깨너머로 그가 괴뢰를 만들고, 조작하는 걸 봐 온 상태였다.

'전부 그냥 시체였다…. 거기다가 이렇게 의식이 남아 있지도 않았어!'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라앉히고, 우선 내 혼(魂)을 관조했다.

영혼이, 괴뢰의 상단전에 그대로 안착되어 있었다.

마치 생명체의 혈관과 신경처럼 다닥다닥 깔려 있는 괴군의 영력 회로가, 내 영혼을 붙들고 있었다.

'이 회로들 자체는, 나뿐이 아닌 다른 괴뢰들에게도 깔려 있던 거였다…. 부숴진 괴뢰들을 봐 와서 알아. 그런데 왜 나만 영혼이 남아 있는 거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철컥!

내 몸이 갑자기 외벽 순찰을 하던 중.

우뚝 멈추더니,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괴군의 부름이었다.

파아앗!

괴군의 부름에 이끌려 온 곳은.

김연이 지내던 기묘성채 안쪽의 장원.

나와 그녀가 자주 만나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괴군과 김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선물이란다! 어떠냐?"

"…예?"

괴군의 광소에, 김연의 안색이, 점차, 점차 굳어 간다.

"…아니죠? 스, 스승님. 아니죠? 그렇죠?"

"음? 아! 걱정하지 마라! 서 장군은 제대로 서은현을 가지고 만들었단다. 네가 좋아하던 녀석을 이제 네가 다룰 수 있게 된 거란다! 아! 괴뢰와 괴뢰사의 시간을 더 방해할 수 없지! 오늘 밤은 잘 보내거라!"

괴군은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고, 김연의 눈에는 망연자실함이 깃들어있었다.

싸아아아―

그녀의 의념이 마구 뒤엉킨다.

분노, 슬픔, 절망, 고통, 공황….

모든 것이 섞여 버린 대혼돈.

"아, 아아…."

저벅, 저벅….

그녀가,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나를 어루만졌다.

"아아… 으아아아…."

덜, 덜덜덜덜….

아마 그녀가 음혼귀주문을 익혔다면.

그녀 역시 음혼귀주문의 창시자를 지금 넘어서지 않았을까.

"흐아아아아…!"

김연이,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왜…!"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다 기대했던 워크숍이 통째로 사라지고 이상한 세계에 끌려왔어! 미치광이 노인네에게 잡혀 와서 하루하루 공포 속에서 살아왔어! 그래도! 그래도 언젠간 은현 오빠와, 이곳에서 나가 제대로 함께할 수 있을 줄 알고, 그것만을 희망으로 버텨 왔는데!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드득, 드드드드드!

파스스스!

기묘성심전으로 인해, 안정적인 원구형으로 안착되어 있던 그녀의 의식이, 원래 형태대로.

마치 실처럼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기 시작한다.

실처럼 뻗쳐 나간 그녀의 의식은, 기묘성채 전역을 뒤덮었다.

"왜 내게서 다 빼앗아 가는 거야! 도대체 왜! 왜…!!!!!"

털썩!

김연은 내 앞에 쓰러지며, 내 몸체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공기가 진동한다.

공간 전체가 떨려 오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움직였다.

철컥!

"기묘성채 내에서 소동을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계음이지만, 상당히 나와 닮은, 그러나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

"…."

그 목소리에, 김연이 뚝 그쳤다.

그녀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기묘성채 내에서 소동을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흐, 흐히…."

김연이, 웃기 시작했다.

"그래, 알겠어… 가만히 있을게…."

싸아아아―

사방으로 뻗쳤던 그녀의 의식이, 다시 원구 형태로 압축된다.

그리고, 그녀의 의식이 검붉게 물들었다.

의념을 보는 내 눈에는, 삽시간에 그녀의 의식 영역이 덮고 있는 지역 전체가 어둠에 휩싸인 것 같았다.

스륵….

그녀가, 내 뺨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은현 오빠. 반드시… 괴군에게서 기묘성채를 빼앗아, 그의 눈앞에서 [그녀]를 산산조각 내어 박살 내고, 당신의 복수를 해 드릴게요…."

"성주님과 성주 부인에 대한 위해 행위는 성내에서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 조금만 기다려 줘요…."

'제길….'

괴뢰 바깥으로 의식을 뻗쳐 보려 했지만, 내 의식은 괴뢰 안쪽, 괴뢰의 상단전에 갇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의식만이라도 바깥으로 뻗칠 수 있다면, 어떻게 내 의식이라도 전할 수 있으련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내가! 내가 당신을! 구해 드릴게요!"

콰악!

김연의 양손이 내 머리통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괴군과 비슷한 광증이 자리 잡은 듯이 보였다.

그리고.

꿈틀, 꿈틀….

'…?'

그녀가 '나'를 꽉 움켜쥐는 사이.

내 발밑으로, 뭔가가 기어 올라온다.

'이 느낌은….'

지네였다.

꿈틀, 꿈틀….

녀석이, 괴뢰의 관절 사이로 들어와, 회로들이 즐비한 몸체 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10년.

10년이란 시간 동안, 내가 성채 안쪽에서 키워 왔던 녀석.

영기가 하계의 수백 배는 되는 환경인 탓인지, 녀석은 쉽게 죽지 않았고, 무럭무럭 컸다.

그리고 먹이를 주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 녀석은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내가 이렇게 되었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내 몸속에 기어 온 것 같았다.

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만.

나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렇게 남아 있다.

'…제길.'

그리고, 나는 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우우웅!

내 가슴 속에서 감정의 격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

뭔가, 기이한 기운이 내 영혼체를 얽어매었다.

'뭐지, 이건?'

굉장히 불쾌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생겨남과 동시에….

물컹….

뭔가 물컹거리는 감각이, 내 영혼체 한구석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월도답천에 달한 나는, 내 영혼체를 관조하며, 영혼체 바로 옆에 생겨난 이 감각의 정체가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내 감정의 격류에 따라, 괴뢰의 안쪽에 있는 영력 회로들이 움직이며 내 영혼체를 '복사'하고 있다!

내 감정의 흐름을, 그 격통을 똑같이 모사한 영력 덩어리가, 내 영혼체 옆에 생겨났다.

내 영혼을 완전히 복제한 것은 아니고, 방금 생겨난 그 감정에 대한 것들만이 복제되었다.

그리고.

우우웅!

영혼체가 있던 자리에, 복제 영력 덩어리가 생겨난 만큼, 내 영혼체가 상단전에서 '밀려' 나기 시작했다.

'…미쳤군.'

나는, 그제야 괴군의 생체괴뢰가 된 이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깨달았다.

생체괴뢰로 개조당한 후.

얼마 동안은 괴뢰의 안쪽에 있는 영력 회로에 붙들려, 이승에 남아 있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력 회로들은 영혼체를 모방한 영력 덩어리를 영력 회로 안쪽에 복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원본의 영혼체를 복제하다가, 완전히 원본과 비슷한 영력 덩어리의 복제가 완료되었을 때.

원본의 영혼체는 바깥으로 방출되어 흩어지며 저승으로 가 버리고, 그 자리를 괴군의 영력 회로가 만든 영력 덩어리가 차지하는 것이었다.

'아, 이제야 알겠군.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조작하면 느껴지는 광증의 근원.'

기묘성채의 괴뢰들은, 괴군이 만든 '인공 영혼'이 들어가 있다.

인공 혼들은 진짜 영혼과 비교하면 조잡한 영력 덩어리일지언정, 그래도 원본을 최대한 복제한 영력 덩어리이다.

원본의 기억, 경험, 감정 등 모든 것을 복제하지는 못하지만, 원본이 느낀 강렬한 감정 몇 개 정도는 그럭저럭 비슷하게 '표현' 되는 영력 덩어리.

그리고 그 영력 덩어리가 들어간 괴뢰들은, 기묘성채의 안에서 전부 연동되며 연결되어 있었다.

수많은 감정이, 어찌어찌 연결되어 휘몰아치는 세계.

그것이, 기묘성채(奇妙城砦)인 것이었다.

'어떻게 괴뢰들에서, 칠정과 똑같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비슷한 영력의 흐름이 느껴졌는지, 이제야 알겠군….'

인간의 혼을 복제한 영력 덩어리가 들어차, 인간의 의념을 흉내 내는 영력 파장을 내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눈앞에서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오열하는 김연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완전히 죽고, 회귀하는 건가.'

내 감정을 복제한 영력 덩어리가, 내 영혼의 크기만큼 커져 내 혼을 완전히 밀어내면, 나는 완전히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내 회귀는, 그때에서야 이뤄질 터였다.

김연이, 괴뢰의 몸에 달린 장식들을 부여잡고, 매달린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네? 이전에는 위로해 줬잖아요."

"은현 오빠, 예?"

"…왜, 말이 없어요? 왜? 왜?"

"…대답 좀 해 봐요. 대답을 하란 말이에요! 대답을 하세요! 제발! 제에발! 흐아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나를 부여잡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죽을 수, 없다.'

우우웅!

나는 바깥으로 방출된, 약간의 혼을 다시 억지로 구겨 넣듯이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천년만년 이 괴뢰에 갇힐 일은 없었다.

내가 이전에 본 대로, 이 괴뢰에는 영혼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나는 편하게 회귀하면 된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이미 실패하여, 아무것도 못 하고.

괴뢰에 갇혀 비참한 꼴이 되었을지라도.

이것은.

'내 삶이다!'

썩 유쾌하고 밝지는 못했을지언정.

김연과 나누었던 마음 역시 마음.

그녀와 마음을 나누었기에, 이 삶은 곧 축복.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으냐?'

우우웅!

나는 내 정신력으로, 도리어 복제된 영력 덩어리를 밀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퍼엉!

급조된 영력 덩어리는, 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버렸고, 영력 덩어리를 이루던 영기들이 괴뢰의 상단전에서 떠다녔다.

'이용할 수 있겠어.'

우우웅!

나는 터트린 인공 혼의 영력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괴뢰 바깥으로 의식을 뻗지는 못하지만, 인공 혼의 영력은 내 의식으로 다룰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웅성웅성웅성….

나는, 인공 혼의 영력에 의식을 뻗쳤을 때.

수백, 수억에 달하는 인간들의 음성이 한 번에 내 뇌리에 꽂히는 기분을 느꼈다.

기묘성채에 있을 수억에 달하는 괴뢰들.

그들이 발하는 감정.

하나.

'나 역시, 너희들에게 뒤질 만한 마음을 가진 게 아니다…!'

꾸우우웅!

나는 그 무수한 웅성거림에, 내가 겪어 온 고통으로 화답하며 그 웅성거림을 무시했다.

우우웅!

내 영혼을 속박했던 영력 회로.

그 일부가, 아주 미세한 일부가, 내 의식에 잠식되었다.

쿠구구구국!

내 영혼이 영력 회로를 장악하자, 영력 회로들이 저항한다.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강력한 압력이 내 영혼에 내리꽂힌다.

그때였다.

꿈틀, 꿈틀….

내 몸 안쪽으로 기어들어 온 지네가, 현재 영력 회로들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머리 부분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리고.

사각, 사각….

알고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본능이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가장 압박하는 회로 중 하나를 갉아먹었다.

꾸웅!

철퍽!

그와 동시에, 체내에 이물질이 날뛰는 것을 느낀 '내' 몸이 움직이며, 체내에서 영기의 압박을 높여 지네의 몸을 터트려 죽였다.

지네는 그대로 터져 죽었다.

재생시켜 줄 원립의 혈체 역시 떨어져 있으니, 이제 녀석은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었다.

'…고맙다.'

나는 아직 이름도 안 지어 준 녀석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하며, 녀석이 갉아먹은 회로를 향해 영력을 뻗쳤다.

즈우우웅!

'내' 몸은 영력 회로에 이상이 생긴 것을 간파하고, 수리 공장을 향해 움직이려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파아아앗!

지네가 갉아먹어 준 회로를, 내가 방금 모았던 인공혼의 영력으로 이었다.

회로는 문제없이 작동한다.

겉보기에는.

'내' 몸은 다시 그 자리에서 대기를 했고, 나는 겉보기에 이상이 없는, 지네가 갉아 준 회로를 통해 더욱더 '서 장군'의 몸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느리군….'

인공혼을 터트려 얻은 영력은 미약했고, 영력 자체가 기묘성채에 있는 다른 수억에 달하는 인공혼과 연결되어 있기에 다루면 광증도 치솟는다.

물론 광증은 정신력으로 극복이 가능했지만, 이런저런 것을 다 감안해도 '서 장군'의 영력 회로를 장악하는 데엔 굉장히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연아.'

나는 울다가 지쳐서 기절해 버린 김연을 보며 다짐했다.

'반드시, 내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것을… 네게 말해 주겠다.'

몇백 년이 걸리든.

아직,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네게 알리겠다.

'이 생에 너와 인연이 닿았으니… 이 축복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살아남아… 네게 마음을 돌려주마.'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다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렀다.

* * *

"은현 오빠… 그거 알아요?"

김연이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령족에 이어, 규루족, 팔허족, 각치족, 소령족, 공작족을 점령하고… 최근, 우리 동료들 소식들을 들었어요."

천인기에 이른 그녀가, 수많은 괴뢰들을 손끝으로 부리며 내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전명훈 과장님 얘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광인(狂人) (5)

"몇 년 전이었더라…. 한령족을 점령하러 갈 때, 왜 합체기 수도자들이 괴군을 막아서지 않나, 그걸 궁금해했잖아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듣자 하니, 인족 영역 부근에서, 광한계 전체를 뒤흔들 법한 거대한 운명의 파란이 일었다고 해요. 일설로는 선계(仙界)의 문이 열렸다는 풍문이 돌아, 모든 합체기 수도자들의 눈이 돌아가서 인족 영역으로 간 거였죠."

김연은 내 어깨를 장난하듯이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선계에 대한 그 소문이 정리됐어요. 짐작이 가시나요?"

그녀가 숨을 들이쉬었다.

"전명훈 과장님이 가셨던 금신천뢰문이, 진선의 공격을 받아 씨몰살되었대요. 운명의 파란이니, 선계의 문이 열렸다니 하는 건 진선이 금신천뢰문을 찾기 전 전조 현상이었던 거예요. 큭큭…. 전 과장님만이 무시무시한 진선의 폭격에서 살아남아, 반쯤 맛이 가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기이한 건 그분이 가는 곳마다 번개가 떨어지는데, 그 덕분에 낙뢰자(落雷者)라는 별호도 얻으셨대요."

어쩐지,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색이 맴돌았다.

"낙뢰자 전명훈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찾고 있는데, 앞을 막아서는 이들은 개인이든 부족이든 가리지 않고 씨몰살시켜 버린다 하네요. 그 덕에 원한도 잔뜩 쌓여서 이곳저곳에 쫓기고, 그러다가 또 찾아가서 복수하고, 일족을 몰살시키고…. 몇 년째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해요. 덕분에 악명도 많이 쌓이셨다는데… 그래 봤자 우리보단 아니겠죠."

철퍽!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괴뢰들이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종족의 시체들을 가져왔다.

쿠구구구구!

하늘 위에서는 [그녀]가 어느새 합체기 급의 기세를 흩뿌리며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령족을 정벌하고, 광령지에 있는 재료들로 한껏 강화를 한 후.

[그녀]는 물론이고 기묘성채에 있는 괴뢰들 역시 전체적으로 전력이 상승하였다.

"여하튼, 인족 영역으로 합체기 수도자란 수도자는 싹 다 몰렸던 탓에, 이렇게 기묘성채의 전력이 한층 강해져, 합체기급 괴뢰도 벌써 몇 개나 생겼으니… 우리가 괴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한참 요원해진 셈이네요."

피가 흐르는 전장.

괴뢰들이 움직이며 전장을 정리 중이었고, 김연은 괴뢰들로 이뤄진 옥좌에 앉아, '나'를 옆에 세워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하튼, 나중에 전 과장님이랑도 한번 만나 보고 싶네요. 과장님이라면,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실까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심정을? 아하하…."

그녀는 비실비실 웃으며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민희 언니는 현재 흑색귀골곡과 함께 광한계를 돌아다니며 실력을 쌓고 계시대요. 듣기로는, 수백만 마리의 귀신 떼를 한 손으로 부린다는데…. 그 덕에 지금 광한계 전체에서 민희 언니를 모르는 이들이 없다네요. 우리가 악명으로 유명하다면, 언니는 엄청난 명성으로 유명하대요. 민희 언니를 노리려고 진마계와 혈음계, 명귀계의 첩자들이 습격했던 일도 있다네요. 후후…."

김연의 입을 통해, 동료들의 근황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오 차장님은, 창천개벽문에서 이름을 날리고 계세요. 개파사조인 창호자의 직전제자로서, 그를 따라 의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네요. 그리고 어쩌면, 추후에 괴군을 상대할 연합에 참여할지도 몰라요. 후후… 동료들에 손에 의해 구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며 말했고, '서 장군'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괴군이 명령한 것을 지키며 계속 전장 정리 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혜서 언니는, 오혜서 언니는… 소식이 잘 안 들리네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해룡왕 서휼과 혼인하여, 용왕비가 되었다고 하는데…. 서휼은 진룡맹의 군사(軍師)로 활동을 하며 이름을 떨치지만, 혜서 언니는 정작 소식이 없어요. 정말 신기하죠? 진룡맹에 속한 용족들도 몇 놈이나 잡아서 물어봤는데, 그중에서 혜서 언니 소식을 아는 놈들은 하나도 없다는 게…. 마치 정보가 일부러 다 차단된 듯해요. 후후… 괴군이 그러던데, 서휼이 손을써 뒀을 거래요. 그자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음험하다나 뭐라나…. 미치광이 주제에 남을 험담할 자격은 되나 모르겠어요."

꾸욱….

서 장군의 몸을 톡톡 두들기거나 쓰다듬던 그녀가, 서 장군의 몸을 움켜쥐었다.

"김 부장님은… 뭐 당연하지만 소식이 없어요. 하계에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은현 오빠랑 같이 괴군이 어딘가로 날려 보내지 않았나요? 은현 오빠, 김 부장님은 어떻게 됐을 것 같나요?"

"…."

"…오빠?"

"…."

"…내가 묻잖아요."

우드득….

김연의 의념이, 불안정해진다.

"내가 묻잖아, 대답하라고…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왜! 대답해! 대답해, 서은현! 대답하라고!!!"

쿠구구구구!

그녀가 진노하자, 하늘이 요동치며 대지가 진동한다.

천인기에 불과했지만, 거대한 의식으로 인해 증폭되는 그녀의 힘은, 사축기에 달하였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며, 천지사방이 요동쳤다.

"대체 왜! 나만 남겨 두고 간 거야! 왜!!! 제발! 제발 대답을 해 주세요! 은현 오빠, 동료들 얘기도 해 드렸잖아요? 뭔가 더 궁금한 건 없어요? 말해 드릴게요. 제발, 대답을 해 줘…. 그때처럼 나를 위로해 줘요…."

김연은 폭주하듯이 오열하며 서 장군의 어깨를 잡고, 마구 울부짖었다.

"흐아아아아!"

그리고, 나는 그 쓰라린 고통을 옆에서 느끼며, 속으로 이를 짓씹었다.

서 장군이 된 지도 80년째.

서 장군의 영력 회로를 장악하려 시도한 지도 80년째였다.

우우웅!

상단전 안쪽에 존재하는 회로는 어느 정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상단전으로 올라오며, 내 영혼을 복제하는 영력 덩어리들은 상단전으로 올라오는 즉시즉시 분쇄해서 내 가용 자원으로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겉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안면 부근이나, 목 부분의 회로는 아직 장악하지 못했으며, 회로를 장악해 가면 갈수록, 회로와 연결된 의식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의식들을 통해 더욱더 많은 곳에서 기묘성채의 '웅성임'이 전해져 왔다.

괴군은 80년간 광한계 온갖 곳곳을 쏘다니며 종족을 점령하고, 괴뢰들을 만들어 댔다.

10억.

약 10억에 달하는 괴뢰들이 기묘성채에 새로 들어앉았고, 그들의 '웅성임'은 더더욱 커졌다.

회로 하나를 장악할 때마다, 웅성임이 들어오는 창구가 하나 더 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웅성임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제발 내게 대답을 해 줘! 대답을…!"

'네 마음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는 내게, 계속해서 마음을 주고 있으니….'

이 마음을.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겠다.'

나를 위해 울어 주는 이에게, 보답하지 않는다면.

이 삶은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받을 생각이 없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나를 위해 울어 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내 옆에서 오열하는 김연을 인식하며, 더욱더 회로의 장악에 힘을 썼다.

그리고.

다시, 500년이 흘렀다.

* * *

김연은 사축기에 이르렀다.

괴군의 기묘성채는 더더욱 성장하였고, 어느덧 합체기 급 괴뢰들 역시 열다섯 기가 넘게 되었다.

괴군은 광한계 전체에 이름이 알려졌고, 그의 직전제자인 김연 역시 모르는 이들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더욱더 빛이 사라졌고, 서 장군을 붙잡고 미친 듯이 오열하거나 광증에 젖어 '사랑해요'라는 말을 반복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은현 오빠, 동료들 소식이 또 들어왔어요. 들어 보시겠어요?"

"…."

"들어 주겠다니 고마워요. 역시 제겐 오빠밖에 없어요. 흐힛…."

그리고, 어느 순간.

김연은 나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증상이 생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 멋대로 상상하고 말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500년.

그 시간 동안, 나를 잃고 괴군의 기묘성채에서 괴뢰들과 생활하며.

기묘성채의 광증을 받아들이며, 그녀는 미쳐 있었다.

"낙뢰자 전명훈은 학살마로 유명해졌어요.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들은 그 종족 전체를 몰살시켜 버리는 광인으로 유명하죠. 뭐, 전명훈은 이전에도 어차피 이런 식으로 유명했으니 넘어가고…."

오득, 오드득….

김연은 괴군과 같이 입에 손가락을 넣고 마구 짓씹으며 얘기를 이어 갔다.

"민희 언니! 아아, 불쌍한 민희 언니. 귀도공법을 익히며 수십억에 달하는 귀신 떼를 부리는 경지까지 올라갔다고 해요. 그런데, 귀신 떼를 너무 많이 받아들이다 못해, 미쳐 버렸다고 하네요. 자기 사문인 흑색귀골곡을 집어삼켜 멸문시켜 버리고, 귀골곡 일대를 집어삼켰다고 해요. 섭명함 한 대만이 겨우 거기에서 탈출했고, 합체기 수도자들이 민희 언니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다고 해요. 킥킥… 기묘성채는 토벌할 엄두도 못 내면서, 애매한민희 언니만 괴롭히러 가는 꼴이란…. 수많은 귀신을 잡아먹고, 부리며, 강력한 귀물(鬼物)이 되어 버린 언니는 현재 삽풍역 가운데 있는 곳에 터를 잡고 뭔가 강력한 존재로 우화(羽化)한다고 하네요. 후후…."

잘근, 잘근….

손가락을 씹으며, 김연이 이야기를 이었다.

"창호자가 죽은 후론, 오 차장님 역시 정신이 많이 불안정해졌다나 봐요. 술과 여색, 약 등 쾌락에 빠져 지낸다고 하던데. 회사에서는 그렇게나 듬직하셨던 분이 그렇게 망가질 줄 누가 알았겠나요? 그래도 창호자 아래서 가장 행복해 보이셨던 분이었는데, 사람 하나가 죽으니 그렇게 망가질 줄이야…. 하긴, 소중한 사람이 죽으면 누구든 망가지는 법이죠."

우득, 우드득….

그녀의 손에서, 피가 흐른다.

"김 부장님은 여전히 소식이 없어요. 뭐, 죽었겠죠. 큭킥… 그리고, 혜서 언니는…."

우득, 우드드득!

"아직도, 별 소식은! 없네요! 무소식이!"

우드득!

"희소식이라니까!"

우드득!

"좋은! 거겠죠? 그렇죠? 혜서 언니, 대답해 봐요. 김 부장님도 죽었을 테고, 나는 미쳤고, 전 과장도 미쳤고, 민희 언니도 미쳤고, 은현 오빠는 이렇게 됐는데! 혜서 언니, 혜서 언니만큼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죠? 그렇죠? 모두가 광인(狂人)이 되었어요. 혜서 언니만큼은!"

우드드득!

"이런 비참한 꼴이 없이, 해룡왕 옆에서,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겠죠? 그렇죠? 그렇다고 대답해 줘. 우리가 다 이렇게 됐는데, 한 사람쯤은 행복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지, 은현 오빠?"

우드드득….

어느새 그녀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쉬이이이이….

영기가 꿈틀거리며, 사축경에 달한 그녀의 육신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오빠… 제발, 대답 좀 해 줘요. 제발…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녀의 의식이 혼잡스럽게 사방으로 뻗쳤다.

그녀는, 기묘성심전을 대성하지 못했다.

대성했다면, 아직까지도 괴뢰에 들어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괴군의 앞에 설 때야, 월도답천에 달한 깨달음으로 그의 시선에서 내 심상을 가렸지만.

김연의 앞에서는 늘 심상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녀가 기묘성심전을 대성했다면 그것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맨정신으로 조종하며 점차 기묘성채 괴뢰들의 '웅성임'에 의해 정신이 광증으로 물들고 있다….'

기묘성채의 광증과 별개로, 기묘성심전 자체는 훌륭한 의식공법이었다.

하지만, 대성하기 전에 저렇게 광증에 물든다면 마지막 한 발자국을 밟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괴군은 기묘성심전을 대성한 다음 미쳤던 거겠지.'

나는 광증에 물들어 눈이 혼탁하게 물든 그녀를 보며 감정을 정리했다.

지난 500년간.

서 장군의 회로를 장악하며 알아낸 것들이 있었다.

우선, 괴군이 만든 괴뢰들은 전부 인공 혼을 가지고 있다.

영혼을 복제할 틈도 없이 죽어 버린 시체로 만든 괴뢰도, 아니면 시체가 없이 그냥 나무나 돌, 쇠 등으로 만들어진 괴뢰도.

다른 괴뢰들의 인공 혼을 모방해 만들어진, 양산형 영력 덩어리라도 들어 있다.

그러한 인공 혼, 영력 덩어리는 괴뢰들이 괴뢰 주제에 제법 의념과 비슷한 영력 파장을 내뿜게 한다.

그리고, 괴군의 영력 회로는 다른 괴뢰들의 회로와 연동이 된다.

그 연동을 통해 괴뢰들은 의념을 흉내 낸 영력 파장을 서로와 주고받는다.

그 파장은 괴뢰들을 하나로 엮어 주는 역할을 하며, 김연만큼 의식이 거대하지 않은 괴군이 기묘성채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만든다.

그렇게 하나로 엮인 괴뢰들은, 기묘성채 안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의념을 흉내 낸 파장을 강화시킨다.

인공 혼이 즐거움의 감정을 뿜어내며, 아이 괴뢰가 다른 아이 괴뢰들과 뛰노는 행동을 하면, 그 영력의 파장은 미약하지만 조금 증폭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수억에 달하는 괴뢰들이 한다면, 그 증폭률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다.

그렇게 증폭된 영력의 기묘한 파장은, 기묘성채 전체를 엮어 내며, 기묘성채의 중심으로 점차 몰린다.

중심으로 갈수록 감정 파동은 점차 실제 의념과 비슷하게 압축되고, 증폭된다.

그리고, 기묘성채 중심부의 감정들은 수억의 괴뢰의 인공 혼을 합쳐서 만든 것일지언정 진짜 인간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의 소용돌이 중앙에는, [그녀]가 존재했다.

나는 괴군의 괴뢰 속에서, 그의 행적을 좇으며.

그의 목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괴군은, 진짜 의념을 모으고 모아, [그녀]의 영혼을 제작하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녀]는 영혼이 없다.

아니, 500년간 괴군의 밑에서 생활하며 알아낸 바로는.

[그녀]는 사실 생체괴뢰조차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재료들에, 여러 가지 귀한 재료를 덧대 만들어진, 강력한 그냥 괴뢰.

그냥, 자신의 연인의 생전 모습을 최대한 반영해서 만든, 그냥 괴뢰일 뿐이었다.

괴군이 가진 최강의 괴뢰는 두 개였다.

하계에서부터 만들어 오며, 지금은 합체기 최정상까지 강화시킨 두 기의 사축기 괴뢰.

[그녀].

그리고 [기묘성채].

기묘성채를 통해 수많은 괴뢰들을 통솔하고, 기묘성채를 통해 괴뢰들의 인공 혼에서 감정을 엮어 진짜 의념으로 만들고.

기묘성채를 통해 의념을 공정해서 [그녀]의 영혼을 점차 완성시킨다.

'그렇게 해서,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연인이 과연 정말 자기 연인일지….'

나는 괴군의 정신 나간 목표를 추론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괴군의 목적은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인간의 영혼을 제작한다는 건 굉장한 금기였다만, 사실 그런 것보다는, 나는 그의 명령에서 벗어나는 것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영력 회로를 장악하는 이유 역시 괴군의 명령을 더 이상 회로가 받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서 장군'의 영력 회로 중 상반신은 어느 정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이라도 팔을 움직이면 김연을 토닥여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괴군이, 알아차린다.'

영력 회로는 다른 괴뢰들과 연동되어 있다.

그리고 연동된 회로를 통해 영력 파장이 서로 엮이며, 기묘성채 전체가 엮여 괴군의 손 안에서, [그녀]를 완성해 간다.

그렇기에, 아무리 홀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아무리 서 장군의 영력 회로를 장악했을지라도.

내 멋대로 괴군의 명령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면, 괴군이 바로 알아차릴 터였다.

'그리고, 괴군은 이번에 그 사실을 알아차리면 내 영혼을 완전히 이 괴뢰에서 뽑아 뜯어내 보려고 하겠지.'

그럴 순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지난 500년간, 나는 방법을 찾아냈다.

'연동된 회로를 통해, 괴군의 다른 괴뢰들 역시 점차 장악해 나간다.'

기묘성심전을 통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장악해 나가며, 괴군이 내린 명령만 제대로 이행하면 사실 괴군에게 들킬 리 없어.'

기묘성채 전부를 장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서 장군 주변에 있는 괴뢰들.

그 괴뢰들이 생활하는 구역 정도만 장악하면 된다.

'괴뢰들이 일사불란하게 괴군의 명을 따른다지만, 작은 오류 몇 개 정도는 어쩔 수 없고, 그런 오류들은 기묘성채가 자체적으로 수정을 하지, 괴군에게까지 정보가 올라가진 않는다.'

그리고, 구역 하나를 장악한 다음.

작은 오류를 쌓고 쌓아, 서 장군 하나에게로 오류를 몰아넣는다면.

그 짧은 틈새 동안은 괴군의 시야에서 벗어나서 장군의 육신을 조종할 수 있다.

'분명, 가능하다.'

벌써 서 장군 말고도 팔천 기의 괴뢰들의 영력 회로를 장악한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내 의식이 아닌, 서 장군의 영력 파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괴뢰들을 장악해야 했기에 괴뢰들의 장악은 생각보다 느렸다.

거기에 의식을 바깥으로 뿜으면 기묘성채가 이상을 알아차릴 수 있기에, 김연에게 말조차 못 전하고 있었다.

"흐, 흐히…."

나는 잠시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팔천 기 정도면, 서 장군의 몸을 움직이진 못한다.'

나는 결심했다.

'하지만… 팔 하나 정도는….'

철컥, 철컥, 철컥….

팔천 기의 괴뢰들이, 일시에 아주 약간씩 별것 아닌 오류를 낸다.

'방법을 어느 정도 찾아냈으니….'

그리고 그런 작은 오류는 기묘성채가 자체적으로 수정을 한다.

철컥철컥철컥….

나는 괴뢰들의 연동을 통해, 그 오류를 서 장군의 한쪽 팔로 모조리 몰았다.

철컥, 철컥, 철컥!

서 장군의 팔이 비틀리는 듯했으나, 내 의식이 서 장군의 팔을 장악했다.

그리고.

'오래 걸렸군.'

그래도 용서해 다오.

오늘을 시작으로, 다시, 지속적으로 네게 표현해 주마.

토닥, 토닥….

"…?"

서 장군의 팔이, 500년 만에 내 의지에 따라 김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류를 이용하면, 입도 조금 조종할 수 있다….'

아슬아슬하지만, 찰나 정도라면.

김연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

나는 서 장군의 입꼬리를 살짝 올려 주었다.

그리고, 오류는 금세 수정되어 내 행동들은 다시 돌아갔지만.

김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빠…?"

광증에 젖은 그녀의 눈이, 일순간 맑아진다.

어쩌면 정말로 믿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위안할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의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

내가 보여 준 작은 행동을 보며, 덜덜 떨며 양손을 들어, 서 장군의 팔을 잡았다.

"거기… 있어요?"

괴군의 제자로 500년.

그녀도 이제 괴뢰 제작법과, 괴뢰로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는 다 알고 있었다.

"인공 혼… 그 뒤에… 있어요?"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희망을 부여잡으며 나를 보며 물었다.

잠시동안 동원할 수 있는 오류를 다 사용한 나는 대답할 순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여태까지 오열하며 뿜었던 탁한 눈물과는 다른 것이었다.

"아아, 있구나. 그렇죠? 은현 오빠, 드디어, 드디어 대답해 주신 거죠?"

뚝, 뚝뚝….

500년 만에 대답을 들은 그녀는, 이를 짓씹으며 서 장군의 몸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대답해 줘서… 남아 있어 줘서…."

아주 작은 신호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그것에 매달리며, 내게 끊임없이 감사 인사를 했다.

괴군의 기묘성채.

광인의 성에 있던 미치광이 중 한 명이.

다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파츠츠츠츠….

그녀의 의식이 맑아진다.

그리고, 그녀의 성취를 막고 있던 광증이 사라지며.

김연의 기묘성심전이 만개(滿開)하였다.

'아아….'

그리고.

마침내.

나와 그녀가, 눈을 마주쳤다.

연의 연 (1)

"…있었, 구나."

눈물을 닦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는 닦아도 닦아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왜, 이제야 온 거예요."

월도입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심상 그 자체는 볼 수 있다.

그리고 심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심어(心語)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얘기.

나는 심어를 통해 내 뜻을 전했다.

심어의 경우 두루뭉술하고, 장면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언어로는 표현이 어려웠으나.

뜻 그 자체를 전하는 것이기에 바로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제가 조금만 더 버티고, 기묘성심전을 더 잘 수련했으면 진즉 볼 수 있었던 거네요. 아핫…."

김연은 지난 세월이 서러웠던 것인지.

웃으면서도.

감정을 토해 내듯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뭘 해 온 건지…."

나는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김연은 계속해서 울다 웃으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노력해 오고 계셨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내 심어를 정확하게 전달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도입천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어를 전달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야를 가지게 된 이들은 심어를 확실히 전달받는 것이 가능했기에, 누구도 모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렇군요. 계속, 계속 버티고 있었군요."

우리는 오랜 세월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괴뢰들 사이에서 지독한 고독감과 광기에 휩싸여 지냈던 그녀도.

5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천천히 동료가 미쳐 버리는 꼴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던 나도.

"고마워요, 오빠. 버텨 줘서…."

"아하하, 괴군한테는 심상을 숨기고 있었다고요? 어떻게 한 거예요?"

"역시… 오빠는 심상에 한해서는 괴군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거군요."

"이렇게,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게 얼마 만인지… 하하, 오빠도 그렇다고요?"

"아, 그런데 우리. 누가 보면 저만 혼잣말하고 있는 줄 알겠어요."

그녀는 깔깔거리며, 진심으로 기쁜 듯이 서 장군의 몸을 껴안았다.

"…뭐, 아무렴 어때요. 진실을 모르는 놈들은 신경 쓸 것 없어요."

김연은 소중히 서 장군을 껴안으며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