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2

* * *

콰아아앙!

뒤쪽에서 날아온, 괴뢰 떼들의 폭격에, 나는 몸을 비틀어 피하고, 무형검으로 광선들을 쳐 내며 섭명함이 봉인된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며칠 동안 묵묵히 나를 추격하기만 했던 괴뢰들의 입에서, 괴군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음, 안타깝지만. 이제 스무 날 뒤면 승천문이 완전히 닫힌다. 이제 슬슬 다른 놈들을 쫓아가야 할 시간이기에, 나는 이만 가 보려 한다.]

'드디어…!'

드디어, 괴군이 나를 포기하고 비승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어진 괴군의 말은 상상초월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말하기를, 네 이야기는 너무 감동적이기에 꼭 함께하고 싶다 하더군. 그러므로….]

긱, 기기긱, 기기기긱!

갑작스레, 저 멀리.

허공이, 열리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합심하여 너를 열심히 잡기로 결정했다. 반드시, 반드시 너를 잡아갈 것이다!]

까딱!

그리고, 균열 너머로 드러난 것은.

마치 진짜 사람의 손 같은, 새하얀 손가락 하나였다.

손가락!

꾸웅!

그리고, 손가락이 까딱거리자, 전방의 바다가 갈라지며, 지축이 뒤집혔다.

"…!"

하늘의 구름이 모조리 쪼개지며, 바람이 불던 해역의 바람이 모조리 잦아들었다.

'이게 도대체….'

[그녀가 너를 원하고 있다. 어서 이리 오려무나.]

나는, 저 손가락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괴군의 [그녀]!

찌릿, 찌릿….

'섭명함의 동력 기관을, 한 기의 괴뢰 안쪽에 박아 넣었다는, 괴군의 최대 작품…!'

그리고.

기이이잉!

[그녀]의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새하얀 섬섬옥수가, 점차 균열 너머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오싹, 오싹!

'미쳤군, 이건 안 된다.'

저 손 하나에서.

고작해야 손바닥 하나에서, 송진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위압감이 느껴진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있었다.

괴군의 [그녀]는, 절대로 천인기 급 괴뢰 따위가 아니다.

비록 안목이 낮은 결단경 애송이의 생각일 뿐이었으나.

안목이 낮을지언정, 900년의 세월을 살아오며 생긴 직감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아마도….

'사축기 급 괴뢰!'

괴군의 저력에, 전신에 오한이 돌 정도였다.

손바닥 하나에서 송진과 같은 기세가 느껴지는 저 괴물이, 사축기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나는 결심했다.

'저 미치광이 천재에게서, 최대 20일을 도망쳐야 한다고?'

불가능하다.

부우우우웅!

공간 균열을 통해, [그녀]의 섬섬옥수뿐이 아닌, 수많은 괴뢰 떼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어느덧, 해역의 하늘이 괴군의 괴뢰로 가득 차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공간 균열은 괴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실수했다.

저 미치광이에게 동정을 사겠답시고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줘서는 안 됐다.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떴다.

'이번 생은, 가장 짧은 생이 되겠어.'

나는 저 미치광이에게 잡혀, 몇천 년을 썩지도 죽지도 못한 채.

생체괴뢰가 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한 몸으로 갇혀 지내는 걸 상상했다.

아무리 이미 내 정신이 비범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런 미친 짓은 견딜 수 없었다.

'자살하자.'

이 소중한 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미치도록 안타까웠으나.

원립과의 대화로 내 삶에 대한 정체성을 조금 더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삶은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니라, 삶에서 주고받는 마음이 있기에 비로소 축복.

그렇다면, 아직 인연을 쌓지 않고, 마음을 주고받은 빈도가 거의 없는 지금이라면.

이 삶은, 포기할 수 있다.

나는 각오를 굳혔다.

'죽는다.'

사는 것을 궁리하는 것보다, 죽는 것은 간단했다.

당장 죽을 방법이 몇 개씩이나 넘쳐난다.

내가, 내 머리를 폭발시켜 죽으려 했을 때였다.

'…잠깐.'

나는 문득 내 내단 속에 잠들어 있는 무색유리검을 떠올렸다.

'지금 죽으면, 이 무색유리검은 어찌 되는 거지?'

한 번 주인으로 인식됐으니, 다시 한번 죽어도 회귀를 따라오는가?

아니면, 한 번 따라왔더라도 백홍주로 연결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죽으면 그냥 이 시간대에 남겨져 사라지는가?

움찔!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자살은 쉽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살은 안 된다.

'백홍주를, 구해 마셔야 해!'

그래, 최소한 백홍주를 마시고 죽어야 한다!

나는 미친 듯이 괴뢰들의 공격을 피하며, 원래 계획했던 대로 섭명함을 향해 미친 듯이 날아갔다.

쿠구구구구구!

손밖에 안 나타난 [그녀]의 섬섬옥수는, 내게 간혹 어마어마한 범위의 공격을 날렸으나.

손에는 눈이 달리지 않은 탓인지, 정확도가 굉장히 낮았다.

물론, 그 여파만으로도 나는 죽을 지경이었지만.

'빌어먹을.'

나는 이를 악물고 송진이 봉인된 해역으로 들어갔다.

섭명함의 결계가 보인다.

푸확!

나는 전신에 두른 무형검을 통해, 그대로 결계를 뚫어 버리고 섭명함을 향해 쇄도하였다.

그리고.

콰아앙!

나는 마침내 섭명함의 갑판 위에 내려앉아, 빠르게 조종실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섭명함의 조타륜이었다.

하지만, 똑똑히 기억난다.

[섭명함, 시동!]

쿠구구구구!

내 의지에 따라, 섭명함이 시동되며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봉명성, 봉명성으로 가야 해!'

내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였다.

[이…놈…!]

쿠구구구구!

섭명함의 하층에서부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진이었다.

[이 도적놈이, 감히 섭명함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 하느냐…?]

나는 우선 가타부타할 것 없이, 섭명함을 허공간으로 전송시키며 말했다.

"괴군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선배님. 그를 피해 도망치느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뭐…?]

괴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송진의 귀화가 미친 듯이 타올랐다.

그리고.

콰아앙!

기어코, 괴군의 괴뢰들이 섭명함의 봉인지에 있는 결계들을 뚫고 이곳까지 도달했다.

콰과광!

무수한 괴군의 괴뢰 떼들이 몰려온다.

그리고, 그것을 본 송진의 눈두덩이에서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이… 괴군…! 이놈…! 네가 감히 어디라고 이곳을 또 오느냐! 아직도 섭명함에서 뜯어 갈 게 남았느냐!?]

원념이 줄기줄기 섞인 그의 목소리.

송진은 당장이라도 괴군을 씹어먹을 듯 섭명함의 갑판으로 내려가 괴뢰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괴뢰 떼들이 섭명함에 올라타려는 순간.

쉬이이이―

시커먼 귀무가 섭명함을 둘러쌌고, 섭명함은 어느새 다시 허공간에 진입하였다.

"후우…."

나는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말씀드렸다시피…."

[됐다! 괴군에게 쫓기는 게 아니냐!]

"예, 예."

그가 두 눈에서 푸른 귀화를 폭발시키며 씹어뱉듯이 외쳤다.

[저 미치광이가 아무리 그래도 비승을 포기하면서까지 네놈을 쫓지는 않을 테니… 승천문이 열릴 지금 시기에, 조금만 더 견디면 될 거다.]

"그럼…."

그때였다.

기이이잉!

허공간의 한쪽.

그곳에, 현계와 이어진 공간 균열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으로 익숙한 섬섬옥수가 진입하였다.

그리고, 섬섬옥수를 본 송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놈! 왜 [그녀]까지 너를 쫓는다는 말을 안 한 거냐!?]

"예…?"

[제길, 다 끝났군. 괴군이 널 잡겠답시고 저 인형까지 꺼냈다면, 넌 이제 끝이다. 난 더 못 도와준다.]

송진도 그런 말을 할 정도다.

'역시….'

나는 송진을 보며 말했다.

"선배님, 역시… 자살이 옳겠지요?"

[오, 신박한 방법이군. 네가 죽으면 네 혼은 섭명함에 봉인시켜 함부로 섭명함을 이동시킨 값은 받아 낼 테니, 똑똑히 알아라.]

나는 송진이 으르렁거리거나 말거나,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았다.

이 시기의 봉명성의 좌표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 이왕 자살할 것, 조금 더 섭명함을 쓰고 자살하겠습니다."

[뭣…!?]

파아아앗!

나는, 저 멀리서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섬섬옥수를 흘긋 보고는, 조타륜을 잡고 섭명함을 이동시켰다.

파아앗….

섭명함은 다시 현계의 어느 공간으로 진입했고, 나는 현계의 공간에서 다시 봉명성의 좌표를 향해 섭명함을 진입시켰다.

'짧은 시간 동안, 파랑만장하게도 보내는군.'

나는 눈앞에 떠오른, 허공간에서 부유하는 봉명성을 보며 혀를 찼다.

우웅!

나는 정순지력을 엮어 금제 파훼 족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금제 파훼 족자를 전부 만들었을 때였다.

기이이잉!

다시금, 괴군의 [그녀]가 우리를 찾았는지 현계에서 공간 균열을 열고 섬섬옥수를 뻗는다.

콰앙!

나는 금제를 파훼한 후, 바로 봉명성의 내부로 진입했다.

'백홍주가 있는 층이…!'

나는 미친 듯이 봉명성의 상층으로 올라가며, 백홍주를 찾았다.

'찾았다…!'

콰앙, 콰아앙!

나는 무형검으로 금제 내부의 주요 회로들을 전부 잘라 내며, 미친 듯이 금제를 두들겼다.

그리고.

쩌저저저적!

봉명성의 한쪽 면이,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싹, 오싹!

봉명성의 벽이 무너지자 보인 것은, 어느새 팔목까지 나온 [그녀]의 섬섬옥수!

나는, [그녀]의 섬섬옥수에서 뿜어지는 폭발적인 힘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빨리, 빨리!'

쩌억!

[그녀]가 손을 펼쳤다.

그리고.

콰앙!

내 무형검이, 마침내 금제를 깨부쉈다.

백홍주가 있는 단지는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벌컥!

나는 황급히 백홍주의 뚜껑을 열고, 단지째로 들어 백홍주를 마구 들이켰다.

우우웅!

다시금 내 체내에 넣어 놓은 법보들이 윙윙거리며 나와 깊숙한 연계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

'확실히….'

내 영혼과 법보가 연결이 된 것이, 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그녀]의 손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인력이 느껴졌다.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크윽…!'

아니, 실제로 내 몸은 [그녀]의 손아귀를 향해 빨려가고 있었다.

저항이 불가능하다!

'제길, 안돼!'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쿠구구구!

저 멀리서,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고, 현계로 넘어가는 송진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기수식을 잡았다.

지지난 삶에서 김영훈의 발자취를 좇아, 월도답천을 발견하고.

지난 삶에서 비로소 원립을 죽이며 월도답천에 완전히 이르렀다.

분명, 나는 김영훈과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이 맞았다.

그랬기에 공간을 넘는 그의 능광도가 아닌, 베고자 하는 것만을 베는 무형검으로 무형검이 진화한 것일 터.

하지만….

'분명, 내 무형검은 그때 공간을 벴다.'

일순간 김영훈의 능광도가 되어서!

그 말은 즉.

어쩌면….

'월도답천에 이른 자는, 다른 이의 월도답천을, 흉내 낼 수도 있다는 게 아닌가?'

짜내라…!

머릿속에서 방법을 짜내…!

화르르륵!

나는 상단전을 강기로 불태우며 각성시켰다.

백회에서 시작된 흐름이, 미간으로 향하며 상단전이 강기에 타올랐다.

"으오오오오오!"

그때의 그 감각을, 떠올린다.

무형검은 단악검법에서, 능광도는 단맥도법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두 무공의 뿌리는 사실 하나였다.

그렇다면, 무형검에서 거슬러 올라가, 공간을 베는 능광도에, 잠시나마 도달하는 것이 정녕 불가능한가?

완전히 능광도를 얻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잠시만 그의 것을 흉내 내는 정도라면….

파아아앗!

필사의 집중과 함께, 어느덧 [그녀]의 손아귀가 눈 앞에 다가왔고.

나는 허공간에서 있는 힘을 다해 손에 쥔 것을 내리 베었다.

피이이잇!

무형검이, 찰나간 황금빛으로 화한다.

동시에.

번쩍!

나는, 허공간에서 벗어나 현계에 도달해 있었다.

촤아아악!

저 멀리, 나와 같이 허공간에서 막 빠져나온 송진이,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는 것이 보였다.

타앗!

나는 섭명함에 날아가, 숨을 골랐다.

[뭐냐, 자살한다 하지 않았더냐? 자살할 거면 섭명함에서 내려서 자살해라…!]

다시금 [그녀]가 쫓아오는 게 두려운 듯, 송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문득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혹, 선배님께선 망령을 영혼 깊숙한 곳에 이어붙이는 법술 같은 걸 아십니까?"

[음? 알고 있기야 하지.]

"제게, 그걸 걸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왜 그런 걸 해 줘야 하느냐?]

'이런 젠장….'

지금의 송진은 나와 일면식도 없이, 나한테 잠시 섭명함을 강탈당했을 뿐인 이라는 것을 잊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웅!

공간 균열이 갈라지며, 다시금 [그녀]의 섬섬옥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목을 넘어, 팔꿈치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당장 섭명함에서 내려라! 썩! 그래, 됐다. 그런 법술쯤이야 얼마든지 펼쳐 주마!]

우우웅!

송진은 섭명함의 망령 한 마리를 꺼내, 내 상단전에 그대로 불어넣었다.

―끼야아아아!

불쾌한 이물감과 함께, 망령의 혼이, 송진의 귀력에 의해 나와 들러붙는 것이 느껴졌다.

망령이, 잠시간 나와 이어진다.

[썩 내려라!]

그리고, 망령은 송진의 명을 듣는 모양인지, 내 영혼과 이어지자 내 몸을 멋대로 조종하여 강제로 섭명함에서 뛰어내리게 만들었다.

쿠구구구구!

[그녀]의 손아귀가 나를 향해 뻗쳐 왔고, 나는 마지막 순간, 그대로 머리를 향해 무형검의 기운을 몰아넣었다.

그리고.

퍼버벙!

그것이, 나의 열두 번째 회귀(回歸)였다.

12회차의 첫날

찌이잉!

나는 약간의 두통이 생기는 머리를 잡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머리를 폭발시켜 죽은 게 조금 충격이 컸던 것 같았다.

'그것도 그렇고….'

생각해 보니, 내 손으로 직접 자살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할 바에야 죽음을 택한 거긴 하다만….'

아무래도 한 번의 삶을 그대로 날려 버린 것에 대한 슬픔, 분노, 그리고 아쉬움과 충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또한.

'괴군에게 어설프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고….'

소름이 돋는다.

도대체 그 노괴는….

나는 머리를 흔들며 잡념들을 잠재웠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리고.

찌릿!

역시나, 배 부근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칼로 배를 후비는 것 같은 고통!

하지만, 나는 싱긋 웃었다.

'다시 한번….'

전승되었다.

백홍주가,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내 영혼과 연결된 것이, 그대로 전승된다면…!

내가 의식을 집중할 때였다.

찌이이잉!

두통이, 아까부터 느껴진 두통이, 의식을 집중하자 더욱 거세게 느껴졌다.

'뭐지, 이건?'

아프다!

혼백을 칼로 쑤시는 듯이 아팠다!

'단순히 무형검으로 머리를 터트린 고통의 잔향이 아니었던 건가?'

아까부터 느껴졌던 두통은, 계속해서 이어지며 내 머리를 후벼팠다.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면 더더욱 찌릿거리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의식의 크기는 문제가 안 된다.'

오행혈주번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의식을 봉해 주고 있었다.

예전의, 머리가 폭발하기 전의 그 두통이 아니었다.

이 통증은, 마치….

'살이 도려내졌을 때와 유사한 기분… 그래.'

나는 마침내 문제가 뭔지를 알 수 있었다.

'내 혼백(魂魄)이, 뜯겨 나가 있어!'

많이 뜯겨 나가지는 않았다.

신체로 치면, 살갗이 약간 벗겨진 느낌.

하지만 분명히 '뜯어진' 듯한 느낌이었고, 혼백이 뜯겨 나간 부위는 분명.

'망령과, 내 영혼이 연결되었던 바로 그 부위다!'

그랬다.

망령은 내 혼백과 연결된 부위째로 뜯겨,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말인즉.

'법보는 같이 회귀할 순 있지만… 지성을 가진 게 나와 함께 시간을 넘어오려 하면, 뜯겨 나간다는 건가?'

혼백에 난 상처를 관조해 볼 때, 누군가가 일부러 잡아 뜯거나 베어 냈다기보단, 뭔가 거친 것에 걸려서, 그것을 억지로 지나가려다가 뜯겨 나간 모양새였다.

'나와 연결된 물건까지는 어느 정도 허용이 됐지만, 지성체부터는 문제가 된다는 거군.'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망령이 함께 회귀했다는 것이 밝혀졌다면, 앞으로 동료들의 영혼도, 향화의 영혼도 어쩌면….

'아니, 됐다.'

나는 잡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하나하나의 삶은 유일하니, 오히려 더더욱 소중히 여기면 될 뿐.'

그래, 그러면 될 뿐이다.

내가 생각을 막 정리했을 때였다.

화아아악!

"흠!"

나는 고개를 살짝 젖혀, 내 뺨을 노리는 손길을 피해 냈다.

"피, 피해?"

생각해 보니, 원래 수면술로 바로 재워 버린다는 것을 법보의 전승과 망령의 전승을 바로 확인하느라 까먹었었다.

"이 새끼가! 지금 네가 뭘 했는지 자각이 있는 거야!"

"아하…."

어째, 굉장히 반가운 음성이었다.

이 말도 사실, 못 들어 본 지 굉장히 오래되지 않았는가?

녀석은 까칠하게 방방 뛰며 내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너무 화내고 살면, 정신 건강에 안 좋습니다. 진정하시지요."

"뭐, 뭐?"

900살 이상 먹은 원립 같은 마두나, 1600살 이상 먹은 괴군 같은 미치광이들과 쫓고 쫓기다 고작해야 30대 초인 이 녀석이 욕하는 걸 듣고 있자니 왠지….

'굉장히 귀엽군.'

세 살 먹은 아가가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방금 뺨을 맞았어도 그리 기분은 안 나빴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뺨을 때리고 귀엽게 욕을 하는 것 외에 뭘 할 줄 아는가?

나를 잡아서 개조할 것도 아니고, 갑자기 주변인들을 학살해서 갈아먹을 것도 아니다.

"서은현 이 ^%$&$%$^…."

"그래그래, 알았으니 심호흡이나 해라."

나는 나를 두들겨 패려, 마구 주먹질을 하다 나를 한 대도 못 맞히고 결국 지쳐 쓰러진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김영훈이나 오 차장, 강민희 대리, 오혜서 대리, 김연 주임은 이쪽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난 숨을 헐떡이는 전명훈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들 어째,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나는 그들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 세계가 다른 세계인 것도 모르고 SUV를 찾자느니,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느니 하며 두런거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런 그들을 보자니, 굉장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그들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한번, 제가 저 나무 위로 올라가 근처에 도로나 저희 차가 있나 확인하죠."

"으음? 서 대리. 올라갈 수 있겠는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타닷!

나는 뒷짐을 지고서, 체내의 기(氣)와 근육의 움직임을 극한으로 세밀하게 조작하여 내공 없이 두 다리만으로 나무를 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나무의 끝자락에 올라가 등선향의 정경을 본 후, 그들에게 내려왔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방금 어떻게 한 건가?"

오 차장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말 그대로 뒷짐을 지고서 날듯이 몇 미터 길이의 나무를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니.

말도 안 될만한 신기일 것도 같았다.

나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여기서 눈을 뜬 후부터 왠지 몸이 가벼운 느낌이군요."

"…허어…."

이번에도 동료들은 다시 두 무리로 나뉘어졌다.

오혜서 대리와 김연 주임이 나와 함께 동굴로 향했고,

강민희 대리와 전명훈 과장, 김영훈과 오현석 차장은 SUV를 찾는답시고 주변을 나섰다.

"어, 동굴이에요."

"그렇군요."

그들은 동굴을 보며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주변의 나뭇가지를 모아, 바람막이와 모닥불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딱히 김영훈의 라이터가 필요 없다.

부웅!

치이이익!

적당한 나뭇가지를 잡고 그대로 조금 마른 나무의 표면에 대고 스치자, 바로 나무의 표면에 불이 붙었다.

순간적으로 근육을 조여 극한으로 가속하는 무공 수법이었다.

나는 검불들에 그 불을 실어다가 붙였고, 그런 다음 나뭇가지를 다시 휘둘러 나무 표면에 생긴 불을 꺼 버렸다.

"…어, 어떻게 하시는 거에요?"

오혜서 대리가 큰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역시나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냥, 되더군요."

이후, 나는 근처에서 나무 열매들을 가져와 그들과 구워 먹으며, 다른 동료들을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동료들이 왔고, 나는 그들에게도 나무 열매들을 나누어 주었다.

전명훈은 내가 준 건 안 먹으려 했지만, 나는 끈질기게 녀석에게도 나무 열매를 권했다.

결국 녀석은 화를 내면서도 내가 권한 열매를 먹었다.

우리는 밤 늦게까지 잡담을 했다.

'굉장히… 오랜만이군.'

이들과 이런 마음 편한 대화를 나눈 것도 거의, 400년 만이다.

지난 삶과, 지지난 삶, 그리고 지지지난 삶에서는 시작부터 여우 사냥이니, 괴군과의 독대니 하는 일들에 휘말려 제대로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 이전의 삶들은 거의 4, 500년 전의 일들이었기에, 나는 굉장히 새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서 대리님, 스마트폰 아직도 신호가 안 잡히나요? 데이터도 안 되고 진짜… 여기 어디지?"

"…."

'데이터가… 뭐였더라.'

스마트폰은 대략 생각이 났다. 전음부 비슷한 물건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데이터니 뭐니 하는 세세한 것들은 조금 기억이 희미했다.

900년 전에나 사용했던 물건이고, 근 몇백 년 동안 들어 본 적조차 없던 물건인지라 조금 헷갈린다.

'으음… 나중에 한번 김영훈과 현대 문물들이나, 회사에서 있었던 기억들에 대해서 조금 물어봐야겠어.'

의식이 거대해질수록 기억력이 올라갔지만, 그래도 900년이다.

거기에 현대 동료들 역시 안 만난 지도 오래되어 이제는 희미한 것도 있었다.

"서 대리님? GPS도 먹통이고 참, 공기도 수상할 정도로 맑은데. 여기 한국은 맞긴 할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 대화에 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오랜만에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 * *

휘이이이―

모든 동료들이 잠들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와, 황주삼이 있는 곳으로 갔다.

동료들을 바로 재우지 못한 덕에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를 나눴지만, 삼을 먹으러 갈 시간을 놓쳤다.

우적, 우적….

나는 삼을 먹고 환골탈태를 했다.

의식 영역이 제대로 자리를 잡으며, 오행혈주번으로 봉인하지 않아도 의식이 완전히 주변을 메웠다.

결단기의 의식 영역.

그 여우 녀석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의식의 크기였다.

"후우…."

나는 단전에 흐르는 내력을 느껴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내단까지는 만들지 않았다.

내단이야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우우우웅!

나는 허공으로 강환을 띄웠다.

허공에서 강환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내단이 있으면, 강환을 만들어 내는 난이도가 굉장히 하강하기에 그동안 내단도 굳이 만들었던 거였다만….'

이미 500년 이상 강환을 사용하며 숙련된 몸이었다.

이제는 굳이 내단이 없어도, 강환을 만들고 쪼개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우우웅!

허공에 아홉 개의 강환이 도열했다.

스르륵!

아홉 개의 강환이 녹아내리며, 의식 영역과 합쳐져 무형검을 만들었다.

나는 무형검을 바르쥔 후, 그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내단을 만든 후, 내단을 통해 바로 무형검과 하나 되지는 않았지만….'

월도답천의 진가는, 월도입천의 '진짜 힘'을 전부 끌어내는 것.

한 마디로, 이전에 다뤄 보았다면….

우우우웅!

'지금도 다루는 게 가능하단 말이지.'

피이이잇!

무형검이 변화했다.

더욱더 투명하고, 허허로워진 기색.

겉모습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슈웅!

내가 무형검을 휘두르자, 옆에 있던 나무의 겉은 멀쩡하고 속만 잘려 나갔다.

'역시, 월도답천의 경지를 어느 정도 재현 가능하군.'

물론 내단 없이 무형검으로만 월도답천을 구현하는 것은, 훨씬 정신력의 소모가 많고 귀찮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구현은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월도답천의 경지를 관조할 때였다.

쿠웅!

익숙한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

여우였다.

[감히 숲의 주인이 멀쩡히 있는데….]

결단기에 달했던 내 의식 영역을 감지하고 잠자다 일어나서 온 모양.

나는 녀석이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무형검을 휘둘렀다.

슈욱!

[…!]

내 무형검은 여우의 거죽을 그대로 투과하여, 여우의 요단이 있는 곳에 닿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사방팔방으로 뻗쳐 여우의 주요 장기가 있는 곳에 닿았다.

이대로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우의 거죽은 남겨 둔 채 장기와 요단만 전부 회쳐 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조용히 요단을 적출해 버리면, 괴군도 알아채진 못하겠지.'

여우의 눈이, 의식이 공포로 물들었다.

달, 달달달달….

나는 잠시 덤덤하게 놈이 떠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슈르르륵….

나는 무형검을 녀석의 몸에서 다시 회수했다.

[….]

여우는 나와 녀석의 사이에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그대로 입을 닫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살려 주마."

[가, 감사합….]

"요단을 내놓거라."

[…!]

나는, 이 녀석을 조금 도와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 그게….]

"조각 난 채로 요단을 바칠 게냐, 멀쩡한 상태로 요단을 바칠 게냐."

[으으….]

내가 무형검을 들며 압박하자, 여우는 끙끙거리더니, 결국 다시 입에서 새하얀 구슬을 토해냈다.

우우웅!

내가 새하얀 구슬을 잡자, 여우의 거체가 점차 작아졌다.

그리고, 녀석은 결국 꼬리가 세 개 달렸을 뿐인 일반 여우로 돌아갔다.

"킹, 키잉…."

여우는 지성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잠시 멍한 눈을 보다, 내 손에 들린 자신의 요단을 보자, 탐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그러다가, 그걸 들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도망치려 하였다.

우우웅!

그리고 나는 무형검으로 여우의 뒷덜미를 잡아 내 앞으로 끌고 왔고, 여우는 캥캥거리며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시끄럽다. 며칠간 내 옆에 있어라."

나는 여우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은 후.

그대로 녀석을 동굴로 데려왔다.

다음 날.

회사 동료들, 그 중에서도 여직원들은 어느새 동굴 안에 들어온 꼬리가 세 개인 여우를 보며 대경하였다.

"이, 이게 뭐야?"

"돌연변이?"

"그것보다… 귀엽네요?"

김영훈과 오현석 차장 역시 꼬리 세 개의 여우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전명훈조차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뭐야! 괴물이잖아!"

그들은 두런두런 모여서 여우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

그 때.

스르르르….

머리가 두 개인 붉은 뱀이, 다시 나왔다.

'이 녀석도 뭔가 오랜만인데.'

[인, 간, 들….]

"으, 으아…!"

[특이한, 냄새가… 나는군….]

슈르륵, 슈륵….

[너희의 피를….]

그리고, 뭐라고 말을 하던 뱀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싸아아아―

내가 의식 영역을 드러내며 살기를 쏘자, 뱀은 입을 닫았다.

[…그, 음. 저 쪽으로 가면 맛있는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습니다. 좋은 등선향 구경 되시지요.]

뱀은 내 눈치를 보며 바로 다시 등을 돌려 달아나 버렸고, 말하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을 본 회사원들은 경악을 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이 곳이 정상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얘기를 나눴다.

나는 잠시 그들을 보며, 며칠 후 도착할 천인들을 기다렸다.

* * *

며칠 후.

쿠구구구구!

익숙한 얼굴들이 날아왔다.

흑색귀골곡 원로원주 백골귀마 허곽.

금신천뢰문 태상 장문인 금벽호.

창천개벽문 개파사조 창호자 청문선우.

세 천인들이 허공에서 내려오며, 제자를 선별하였다.

이번에 나는 내단을 형성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결단기 급의 의식 영역 역시 오행혈주번과 은식술로 꾹 억눌러서 연기기 급의 의식을 유지하는 중이었기에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금벽호가 대강 자질 검사를 한 후, 오영근이라는 말에 모두가 관심을 껐다.

'아마 조금 자세하게 검사를 했으면 오행혈주번이 들켰겠지만….'

그들은 오영근인 것을 확인한 후에는 아예 관심을 꺼 버린 듯했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것이, 창호자였는데….

[결단경 요수의 내단을 가지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흠, 혹시….]

창호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내단을 벽라국에 있는 청문세가에 전달해 줄 수 있느냐? 내 후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

"…."

우웅!

창호자는 내 손등에 청문세가의 추천권을 찍어 주었다.

[만약 전해 준다면 그 추천권을 사용해서 청문세가의 외부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해 주마. 어떠냐?]

[쯧, 뭘 그리 설득하고 있나? 연기기도 못된 놈 같은데. 나 같으면 그냥 뺏어 버렸을 거다.]

금벽호는 그런 창호자를 보며, 전명훈을 자기 저물대에 집어넣고는 말했다.

창호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린 후학의 것을 뺏어서 뭘 하나? 그리고 어차피 우리야 이 내단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마는 정도인데.]

[흥. 우린 먼저 간다.]

흑색귀골곡과 금신천뢰문은 창호자보다 먼저 출발했고, 창호자는 내 어깨를 툭툭 쳐 주며 말했다.

[우리 뒤로, 다른 천인기 놈들도 올 테니, 등선향에서 나가고 싶으면 그 녀석들에게 부탁하거라. 나는 지금 청천갑(靑天鉀)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는지라 함부로 공간을 만질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은 비승을 앞둔 상서로운 시기이니, 다른 천인기 놈들도 네가 부탁한다면 하나같이 들어줄 게다.]

그는 그렇게 말해 준 후, 하늘을 날아서 금벽호와 백골귀마를 따라 날아갔다.

"…."

나는 날아가는 창호자를 바라보았다.

다음 날.

쿠릉, 쿠르릉….

서휼이 나타났다.

녀석은 또다시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오 대리를 안고 날아갔다.

나는 이번에는 딱히 녀석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안합니다, 오혜서 대리.'

이미, 정해져 있다.

운명에는 인력이 있고, 몇 번이나 거스르려 했지만, 그저 결과를 앞당기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생에는 동료들을 더 좋은 천인기에게 넘기려 굳이 노력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어차피, 지금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괜히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더욱더 혼란스러운 결과를 내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수 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나는 오혜서 대리마저 사라지자 괴로워하는 김연 주임과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녁.

김연 주임이 의식을 각성하고, 괴군이 날아왔다.

꿈틀.

나는 괴군의 익숙한 면상을 보자 순간 전신에 오한이 들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의념과 심상까지 들키지 않도록 잘 다스렸다.

괴군은 김연 주임을 제자로 받아 놓겠다 하고는, 나와 김영훈을 들어, 공간 균열을 열고 그대로 던져 넣었다.

나는 어검술의 힘으로, 캥캥거리는 여우 역시 끌어와 뒷목을 잡았고, 그대로 공간 균열 안쪽에서 허공간으로 떨어졌다.

공간 균열 너머로, 나와 김영훈마저 눈앞에서 잃게 되자 다급히 우리에게 손을 뻗는 그녀가 보인다.

'아….'

나는, 김 주임의 의념의 색을 보며.

그제야 천색성에서 김영훈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 *

"…!"

읍, 읍!

나는 허공간을 넘어 눈을 떴고, 갑작스레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이곳은…!

무형검!

부웅!

콰아아앙!

"커허헉!"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괴군, 이 미치광이가…!'

나는 내가 나온 곳을 보며 숨을 골랐다.

내가 나온 곳은, '땅 속'이었다.

'무작위로 전송시킨다는 게, '땅 속'도 포함이었던 건가…!?'

그나마 무형검을 얻은 상황에서 이렇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잠깐.'

나는 황급히 의식 영역을 풀어, 김영훈을 찾았다.

김영훈과, 그리고 내가 데리고 온 여우도 땅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무형검으로 땅을 파헤쳐서 둘을 파낸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

익숙한 문자와 언어들.

이곳은….

"따, 땅 밑에서 사람이 튀어나왔어…."

"뭐지?"

"이상한 옷이야…."

연국의 번화가였다.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가 연국의… 아, 아니오."

나는 기억력을 되살려 이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렸다.

연국 연산성.

내가 최초의 삶에서 떨어졌던 성이었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나는 기절한 김영훈과 여우를 들쳐업고, 빠르게 보법을 펼쳐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인근 사파 무리와 산적들을 소탕하고, 돈을 끌어모은 후.

번개같이 김영훈의 신분 패와, 그가 살 장원을 마련했다.

나는 김영훈을 재워 놓은 상태에서, 빠르게 일을 진행했다.

장원을 관리할 시비와, 김영훈에게 언어와 문자, 문화를 추가로 가르칠 학사를 고용했다.

그리고, 김영훈의 뇌리에 모든 무공 요결들.

그리고 오기조원, 등봉조극, 월도입천, 월도답천에 도달하는 요결을 남겨 준 후.

나는 여우에게 지금껏 보관해 왔던 요단을 던져 주었다.

케켕!

여우는 요단을 받아 삼키더니, 다시금 장원 안쪽에서 거대한 거체를 드러냈다.

녀석은 나를 쳐다보며,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승천문이 열릴 기간이라, 등선향에 계속 있었으면 네 요단이나 뽑혔을 거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부탁이나 하나 하지."

[예, 하명하십시오….]

"살려 주는 대신, 저 인간을 보호해 다오."

나는 김영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우는 바로 납죽 엎드리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예, 예….]

"언젠가 내가 돌아올 터이니, 함부로 식인을 하지 말아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되었다."

나는 잠시 김영훈을 바라본 후.

우선은 이번 생에 남아 있는 할 일들을 하러 출발했다.

확인할 것을 확인했고.

이제 원영기에 비견되는 월도답천에도 도달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할 일들을 다 끝내 놓고, 다시 등선향으로 돌아간다.'

무공을 익히고, 수도자를 꿈꿨던 날부터.

아주 먼 옛날부터 세웠던 목표.

'최소한의 무력을 갖췄으니, 이제….'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승천문을, 조사하러 간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했을 일.

공간 폭풍에 휘말려,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아주 먼 옛적부터 계획해 온 목표였다.

이제 한 번은 조사하러 갈 때가 되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

동료들은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생은 이 목숨을 바쳐,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단초를 알아볼 것이다.

나는 빠르게 허공을 날았다.

백회(百會) (1)

김영훈에게서 멀어진 후.

나는 우선 인근 야산에서 내단부터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내단이 형성된다.

나는 백회로부터 전신의 기를 모아 집중하였다.

백회혈은 백 가지의 기혈이 모인다는 뜻으로 백회(百會)라고 불린다.

동시에 천지간과 통하는 인체의 최중요 부위이기도 했다.

백회로 기운이 모이며, 내단이 점차 녹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녹아든 내단은 전신의 기혈로 흩어지며, 손아귀에 쥔 무형검과 이어진다.

무형검은 전신으로 깃들며 전신의 맥에 흘렀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전신에 흐르는 무형검을 백회로 모아, 상단전에서 통합(通合)시켰다.

온전히 무형검이 전신에 자리 잡고, 나 자신이 곧 검이 된다.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의 힘을 무형검을 통해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 느껴졌다.

또한 역으로 내 육신과 세포를 이용해 무형검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낸 무형검의 극한이 바로.

피이잇!

내가 검을 휘두르자, 인근 산맥에 흐르는 천지영기 그 자체가 일순간 뚝 끊기는 것이 느껴졌다.

원하는 걸 벨 수 있는 힘.

'원립은 계위라고 했던가?'

녀석이 말한 계위라는 것은 정확히 몰랐지만, 내 무형검이 극한으로 벼려지자, 뭔가.

차원 비슷한 것을 넘는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껴지긴 했다.

나는 내가 능광도를 흉내 내서 공간을 베어 냈던 것 역시.

무형검과 능광도의 능력이, 둘 다 차원에 관련되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 보았다.

'뭐, 계속 답천의 경지에서 무형검을 사용하며 확인해 봐야겠고….'

나는 다시 자리를 박차며 생각을 이었다.

파아아아앗!

무형검과 하나된 상태로 자리를 박차자, 나는 무형검 그 자체가 되어 비둔술보다도 훨씬 빠르게 날아갈 수 있었다.

'우선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볼까.'

연국에 왔으면 해야 할 것.

첫 번째는.

'녀석들의 얼굴을 봐야지.'

매 회차마다 잊지 않고 찾아왔었다.

이번 회차 역시 빼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빠르게 진씨세가로 날아갔다.

* * *

'자고 있군.'

나는 숙소에서 훈련을 받고 잠든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다."

나는 녀석들을 둘러보며, 과거의 내 제자들에게 입을 열었다.

"살아 보니, 사람은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려들어야 할 때가 있더구나."

이것은 그 아이들에 대한 사과였다.

"내 짧은 견식과 아집으로, 그것을 모르고 너희에게 내 뜻을 강요했다."

물론, 그때는 나 역시 내 입장이 있었다.

가 봤자 개죽음당할 것이 당연한 암살 시도.

친지의 원혼을 이용한 법술로, 잔뜩 이상으로 부풀려진 증오.

녀석들의 의념을 보며, 녀석들이 서로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고, 증오 속에서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이 아이들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힘 없는 자의 입장이었다.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으면,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황제를 미리 암살해 왔으면 됐을 것을.'

이것저것 변명할 것은 많았지만.

할 말은 한 가지였다.

"그때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나, 지금에라도 힘을 써 주마. 잘 살아다오."

숙소에서 나와, 스승이었던 입장으로서 숙소를 향해 절을 한 번 올렸다.

절을 올리는 것에는,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뿐이 아닌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의도 역시 담겨있다.

나는, 내 인연이었던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그렇게 진씨세가의 혼백 보관소로 갔다.

수많은 수정 구슬들이 보관된 창고.

나는 그들을 보며, 무형검을 휘둘렀다.

슈칵!

내 무형검이, 수정 구슬과 영혼들을 연결한 법술을 잘라 냈다.

그리고 법술은 그대로 베여 나가며, 원혼들이 구슬 바깥으로 나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당신들의 아이들은, 살아남은 이들은, 진씨세가에서 여생을 평안히 마치며. 대대손손 행복하게 지낼 것입니다. 부디 사후에나마 편안히 성불하소서."

아아아….

아아….

원혼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얼마간 몸을 떠는 듯하더니,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

얼마 후, 혼백 보관 창고에서, 경보 법술이 울리려 했으나 나는 그 법술마저 베어 버린 후.

유유히 진씨세가를 나왔다.

이제 연국에서 남은 일은.

"막리세가."

지난 생에 연합을 배신했던, 이 배신자 놈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리는 것 뿐.

"네놈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를… 단 하나도 찾지 못하겠구나."

파아아앙!

나는 지난 생에 연합의 주축으로서 알아 놓았던 막리세가의 본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 * *

막리세가의 본가는, 내게 아주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연국 수도 서경성!

파아앙!

나는 공기를 찢어 가르며, 서경성의 위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나는 그대로 서경성의 한복판을 향해 몸을 내리꽂았다.

쿠과과과광!

내 몸이 그대로 무형검이 되어, 서경성의 한복판을 뚫고 지하로 내려간다.

쿠구구구구!

얼마간 땅을 뚫고 내려간 나는, 마침내 텅 빈 공동이 나타난 것을 확인했다.

푸확!

커다란 공동에는, 막리세가에서 걸어 놓은 공간 압축이 걸려 있었는지, 안쪽의 공간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대략 어느 정도였냐면, 작은 산맥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 산맥 위쪽으로 거대한 궁전이 하나 서 있었고, 그곳에서는 진득한 시체 냄새와 함께 짙은 마기(魔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일전에 듣기로, 원래부터 이곳이 막리세가의 본거지는 아니었다 한다.

마도선파 연맹의 본거지였던 곳으로, 막리세가도 분명 이곳에 있기는 했으나, 지금 같은 저 궁전이 아닌, 저 궁전의 밑자락에 있는 작은 땅에 세 들어 살던 세입자 신세였다고 한다.

하지만 연맹 전체가 상계로 비승한 지금, 막리세가가 주인 없는 동굴을 차지한 것이었다.

파아아앗!

나는 허공을 가르며 막리세가의 본가를 향해 날아갔다.

공동의 천장에는 어마어마한 야명주들이 박혀 빛을 내고 있어 전혀 어둡지 않았고, 오히려 대낮처럼 밝았다.

그렇게, 나는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의 앞을 막고 있던 막리세가의 축기기 수도자 두 명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인. 혹 결단기 선배분이신지요?"

내가 비행법기 없이 그냥 날아오는 것을 보고, 비둔술을 썼거니 한 모양이었다.

비행법술은 아니었지만, 그의 판단은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난 이놈들보다는 선배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정정할 게 세 가지가 있군. 우선 첫째, 나는 결단기가 아니다."

"아, 그럼 특이한 공법을 익힌 도우셨나 보오?"

"둘째, 나는 네놈들의 도우도 아니고, 대인도 아니다."

내 딱딱한 말투에, 뭔가 심상찮음을 느낀 건지.

문지기 둘의 안색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셋째, 나는 네놈들에게 인사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으니, 인사는 돌려 두마."

그들은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소?"

"너희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러 왔다. 이 요구만 들어주면 다시 돌아가겠다."

나는 이 녀석들에게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 우선 너희는 더 이상 단약 제조를 위해 애꿎은 인명을 희생시키지 마라. 둘, 연국에서 쌓아 온 더러운 기반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라. 셋, 너희들이 단약을 위해 죽여 온 이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내라."

내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녀석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정도만 지키면 너희들 가문은 보전시켜 주는 것으로 하지. 어떠한가?"

"이… 미친 놈이…!"

축기기 초기 수준의 둘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내게 손을 뻗쳤다.

"죽어라! 이 미치광이 놈!"

촤아아악!

시체 냄새가 풍기며, 강한 척력이 나를 밀어냈다.

하지만,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부웅, 콰아앙!

내 손길에, 녀석의 손에서 나오는 척력과 함께 놈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죽었고, 그놈의 너머에 있는 궁전의 문 역시 절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어…."

내 무위를 본 나머지 한 명의 축기 초기 수도자가, 입을 쩍 벌리고 내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으, 으아아! 겨, 결단기 수도자…!"

녀석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녀석이 다섯 걸음을 내디뎠을 때.

놈은 그대로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놈들을 무시하고 갈라진 문으로 들어갔다.

저벅, 저벅….

시커먼 궁전 안쪽.

한때 마도선파 연맹이 썼다는, 마도의 총본산.

그 안쪽에서, 수백 명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여덟 개의 강력한 기운이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쿠구구구구!

가주인 막리황천.

그리고 7인의 결단기 원로원.

"웬 미치광이 놈이 감히… 막리세가를 습격해?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하자마자 날뛰다니, 예의도 모르는 놈이로구나."

원로 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으르렁거린다.

"경맥에 흐르는 힘을 보면 기껏해야 결단기… 아니, 단(丹)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축기기? 이놈이 지금 정신이 나가서 여기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야?"

"너는 감히 멀쩡히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네 몸을 푹 고아 만든 단은 어떨지 한번 실험해 달라는 거로구나."

개떼들이, 시끄럽게 짖는다.

그리고 들개 떼의 우두머리인 막리황천은, 가좌에 앉아 나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시끄럽게 개처럼 짖어 대고 있지만, 다들 긴장하고 있군. 그렇지? 정말로 미친놈이 아니라면, 믿고 있는 구석이 있으니 쳐들어온 것일 테니 말이야…."

금단의 힘을 느끼지 못했고, 축기기들처럼 경맥에 강력한 힘만이 흐르고 있으니.

나를 축기기로 착각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이룬 힘은 수도공법과는 완전히 다른 힘.

"모두 시끄러우니, 한꺼번에 덤벼라."

보여 주마.

답천(踏天)에 도달한 힘을.

쿠구구구구!

내가, 나 자신과 완전히 하나 된 무형검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 *

막리세가 가주, 막리황천이 가좌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막리세가 원로원 7인 역시 원로석에서 일어섰다.

막리세가의 축기기 장로들 삼백오십여 명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쿠구구구!

막리황천의 주변으로, 용오름이 치솟아 오른다.

"감히, 막리세가에 도전한 미치광이에게, 막리세가의 힘을 보여 주마."

그리고, 서은현과 막리세가가 부딪혔다.

쿠과과광!

수백 명의 막리세가 인원들과, 서은현의 일 수가 부딪혔다.

그리고.

"…!?"

"…?"

"???"

막리황천을 비롯한 원로원.

그리고 장로회 전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정체불명의 침입자에게 합격을 퍼부은 것은 그들이었는데.

도리어 궁전 바깥으로 튕겨 나온 것이 그들이었다.

"뭐지? 이 무슨…."

그리고.

저벅, 저벅….

궁전 바깥으로, 서은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내 요구는 다시 말하지만, 간단하다. 하나, 인간 단약을 그만 만들 것. 둘, 연국을 떠날 것. 셋, 인간 단약을 만드는 데에 쓴 인간들을 위해 천도제를 지내 줄 것."

그가 서슬 퍼런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본다.

"마지막 자비이자, 요구다.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막리황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괴이한 공법을 익힌 수도자다! 모두 태세를 단단히 방비해라!"

"…후우."

서은현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분명, 너희에게마저도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나를 원망치 말거라."

그리고, 그가 힘을 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무형검은 강환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강환과 내단은 생명력이 연결된 것을 제하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그런 발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김영훈의 체외 내단.

체외의 월도입천에 자신의 생명력을 연결해서, 월도입천을 강화시키는 방식.

그리고, 월도답천에 오르며 체내의 내단뿐이 아닌, 신체 자체와 완전히 합일한 월도입천은, 그 자체로 실시간으로 체외 내단을 유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사실상 체외 내단보다도 압도적으로 좋은 효율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강기의 경맥이 아닌, 진정으로 생명과 연결된 셈이니까.

그렇기에, 답천에 이른 존재의 무형검은, 그 자체만으로도 월도입천 때와 강화 폭 자체가 달랐다.

서은현이,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과 연결된 무언가가 휘둘러진다.

부앙!

막리황천은 섬찟한 예감에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그가 있던 자리의 천지영기들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오싹!

'위험하다.'

막리황천은 이를 악물며, 결인을 맺었다.

"시천하(屍川河)!"

쿠구구구!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 녹빛의 강물이, 궁전에서부터 쏟아지며 서은현을 덮친다.

그와 함께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도 각각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운룡요귀결!"

"호풍마룡변!"

"음수취화!"

속성의 차이는 조금씩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음(陰)한 속성의 법술들이 서은현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리고, 서은현이 손을 휘둘렀다.

월악!

퍼엉, 퍼벙, 퍼버버벙!

반월형으로 휘둘러진 투명한 무언가에 그들의 법술들이 일거에 터져 나간다.

그리고, 서은현이 다시 손을 휘둘렀다.

괴암.

그를 주변으로, 무형의 폭풍이 일기 시작한다.

무색의 궤적들이 회오리치며, 점차 커진다.

콰가가가가!

궤적의 힘에,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막리세가의 궁전이 가장 먼저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궤적의 회오리는 점차 커지며 막리세가 전체를 덮쳐 갔다.

"막아!"

"제길!"

몇몇 결단기 원로들이 무색의 궤적을 막으려 법보를 꺼내 후려쳤지만, 법보들은 궤적의 폭풍을 뚫지 못하고 스러질 뿐이었다.

산수화.

쿠구구구구!

몰아치던 폭풍이 일변하며, 궤적이 변화한다.

파아아앗!

다음 순간.

사방팔방으로 무색의 궤적이 휘몰아치며 공동 전체를 난도질했다.

산맥이 갈려 나가고, 공동의 곳곳이 쩍쩍 갈라진다.

그리고 그제야, 막리황천은 안색을 딱딱히 굳혔다.

"워, 원영기 수도자…?"

최소한, 저건 분명 결단기 수도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리황천은 마지막까지도 서은현의 궤적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결단기는 분명 넘어섰지만, 원영기라 보기에는… 약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판단은 빨랐다.

'원영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 그의 준하는 전력이다. 잘못 판단했어.'

"모두 들으라! 저자는 원영기 노괴다! 천인기 선배분들의 손을 피해 숨어 있던 원영기 노괴가, 막리세가를 치려 하고 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막리세가의 본거지이자, 마도선파연맹의 본성이 있던 곳! 우리는 마도선파연맹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로서, 결코 원영기 노괴에게 물러나지 않는다!"

막리황천은 생각했다.

'위력이 분명히 결단기는 넘어섰지만, 원영기라 하기에는 분명히 약하다.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하자마자, 빠르게 원영기에 오른 놈이겠지. 사막의 그자처럼…. 하지만 사막의 그자가 숨겨 둔 힘에 비해, 놈의 공격은 단순하고 약하다. 이놈 정도라면….'

막리황천의 눈가에, 탐욕이 스쳐 지나갔다.

'막리세가의 힘을 총동원하면, 잡을 수 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영기 수도자의 시체로 만든 강시는, 어떤 위력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구나! 원영기 노괴를 잡고, 막리세가는 다시 한번 위대한 도약을 할 것이다!"

그의 선언에, 원로원들이 진중한 표정으로 법보를 전부 꺼내 들었다.

축기기 장로들도 역시 동시에 같은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총공격을 퍼부어라! 원영기 노괴를 막아!"

쿠구구구구!

그리고, 수많은 법술들과 법보들, 법기들이 서은현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음기가 폭발하며, 마기로 이뤄진 법술들이 서은현을 몰아친다.

축기기 장로들이 가문의 창고에서 전쟁용 병기를 꺼내와 발동시켜 서은현에게 날렸다.

공성용 병기가 서은현에게 날아갔고, 수많은 귀화와 강시 군단이 그를 파도처럼 덮쳐 갔다.

막리세가의 궁전에 설치된 수많은 진법 결계가 작동하며 서은현의 힘을 제약했다.

그리고.

서은현이, 검(劍)을 휘둘렀다.

"흐아아아악!"

"빨려 들어간다!"

"막아! 막아!"

단악검법, 첩첩산중!

쿠과과과과!

무색의 궤적이 사방팔방으로 뻗쳐 나가며 동공 전체를 메운다.

수십의 축기기 수도자들의 몸이 갈라졌고, 결단기 원로들의 신체 몇몇 군데가 뜯겨 나갔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 무색의 궤적이, 마치 촉수처럼 마구 꿈틀거린다.

단악검법, 산명곡응.

티이잉!

꿈틀거리던 궤적은, 파장의 형태가 되어 공동 전체를 울렸고, 공동 안에 있던, 서은현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일시에 피를 토했다.

단악검법, 유릉!

쿠르르릉!

무색의 궤적이 굽이치며 한 곳에 몰린 축기기 수도자들과, 그들을 이끌던 결단기 원로 셋을 그대로 쓸어버린다.

쿠구구구!

그리고.

무형검과 일체화된 서은현의 기세가 더더욱 강건해지기 시작했다.

"막아! 막으란 말이다!"

"진법을 짜라!"

"원영기 노괴가, 힘을 쓴다!"

"노괴를 막아!!!"

"흐아아아아아!"

단악검법, 기산심천!

무색의 궤적을 몸에 입은 그가, 보보(步步)를 디딘다.

마치, 산군이 산을 넘어 날듯이.

산군월악비(山君越岳飛)의 보법은, 무형검과 하나 된 서은현에 맞춰져, 그 자체로 흉악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무색의 범이 날뛴다.

8인의 결단기 수도자들을 필두로, 수백 명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범의 움직임에 마구 쓸려 나갔다.

"시간을 벌어라! 진이 거의 완성되었다!"

막리황천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이곳은 막리세가의 본거지이자, 마도선파연맹이 그들에게 줘 버린, 마도의 총본산.

그곳에 펼쳐진 진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을 맺어라!"

"음신!"

"마화!"

세 명의 결단기 수도자, 백오십 명의 축기기 수도자.

각각 그렇게 구성된 두 무리가, 각기 다른 결인을 맺는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막리황천과 원로원주가 동시에 결인을 맺으며, 진법을 완성시킨다.

"음신마화시귀진! 발동!"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구!

막리세가의 궁전에서 시커먼 마화(魔火)가 솟구치며 서은현을 집어삼켰다.

마화에서 뿜어진 음기가 결계를 이뤘고, 결계에서는 수많은 귀곡성이 뿜어지며 주술문이 나타나 결계를 완성했다.

여덟 명의 결단기 수도자가, 팔 방위에서 일제히 결인을 맺는다.

"봉(封)!"

쿠구구구구!

얼마 후.

검녹빛의 결계가, 날뛰던 서은현을 봉인해 버렸다.

"마화 속에서 날뛰다가, 점차 의식이 제압당하고, 강시로 제련될 거다. 흐흐… 흐하하하하!"

막리황천이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 보아라! 막리세가가, 원영기 노괴를 잡아 제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가 주먹을 쥐며 원로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막리세가의 영지에 전음부로 연락하라! 정혈이 더더욱 필요하다! 수많은 정혈을 더 사용해서 강시를 제련하면, 정말로…."

그리고.

쩌어어엉!

막리황천은, 그의 뒤쪽에서 난 거대한 소리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금이 잔뜩 간 결계가 보였다.

"…뭐?"

쩌어어엉!

그리고, 다시 한번.

거대한 소리가 울린다.

파캉!

동시에.

푸확!

마화가 이글거리는 결계 안쪽에서, 서은현의 손이 튀어나왔다.

콰드득, 콰득….

서은현의 한쪽 손은, 그대로 결계를 천천히 잡아 뜯었다.

그의 손에 서린 무색의 궤적에, 결계가 으스러지며 점차 균열이 넓어진다.

그리고.

푸확!

그의 다른 쪽 손 역시 결계 바깥으로 튀어나와, 그가 양손으로 균열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마화(魔火) 속에서, 서은현의 안광이 마치 귀화처럼 번뜩였다.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만… 한 가지가 틀렸다."

푸확!

서은현은 마화 속에서 튀어나오며, 새하얀 미소를 지었다.

"나를 봉인해 놓고, 떠들고 있을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지…."

"어, 어찌… 원영기 중기는 되어야 깰 수 있는 결계거늘!"

막리황천이 완전히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그리고, 서은현의 안광이 폭사되었다.

"내가 일반적인 원영기보다 체급은 약해도, 특화된 분야가 조금 강점이라서 말이다. 초기니 중기니 후기니 하는 건, 내 앞에서 별 의미가 없거든…."

싸아아아아!

마침내, 마화 속에서 완전히 튀어나온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자비를 베풀었을 때 알아서 받아들였어야지. 자, 아직도 안 도망친 건 용기 있게 망문(亡門)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지?"

쿠구구구구!

그의 전신에서 무색의 궤적이 끓어오른다.

"지금부터, 막리세가를 끝내겠다."

다음 순간.

동공이 새하얗게 끓어오른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

쿠구구구구구!

무색의 폭풍이, 그 누구도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공동을 메웠다.

궁전이 서 있던 산맥이 그대로 수천 갈래로 쪼개졌다.

막리세가의 궁전은 그대로 갈려 나가 모래 먼지가 되어 버렸다.

"후우…."

그렇게.

연국의 쌍가로 불리며, 수백 년간 연국의 황조를 지배해 왔던 막리세가는, 그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백회(百會) (2)

툭툭….

나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뒤를 돌아보았다.

쉬이이….

내가 뚫고 나온 땅에서, 흙먼지가 올라온다.

우드득!

나는 무형검을 움직여, 흙을 조금 더 덮어 주었다.

공동은 잔뜩 회쳐 놓긴 했지만, 정작 주요 결계들은 안 건드렸으니 갑자기 서경성이 무너진다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막리세가가 사라졌다.

본가에 있는 축기기 대다수와 결단기 원로원, 가주를 전부 없애 버렸으니, 남은 영지의 막리세가 인원들은 서서히 진씨세가에 의해 말라죽을 터였다.

나는 막리세가에서 챙긴 저물대 꾸러미들을 바라보았다.

막리세가에 있는 것들 중, 단약을 제외하고 영석이란 영석은 싹 챙겼다.

이것으로.

연국에서의 문제는 전부 해결했다.

'그럼 이제….'

나는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송진과 서란을 만나러 가야겠군.'

* * *

촤아아악!

새파란 바다.

나는 바다 위를 날아, 하루만에 연국에서 서란의 거처까지 도착했다.

촤르르르륵!

나는 무형검으로 물길을 열며 서란의 거처까지 바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가 사는 수중 동굴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촤아아악!

수중 동굴 안쪽에서, 서란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요족어로 서란에게 말했다.

"당신이 서란이오?"

그는 내 무형검의 기세를 느끼더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선배님은… 요족… 이십니까?"

"그냥 특이한 인족이오. 그리고…."

아마 이번 삶의 초기에는 별다른 이변 없이 서란에게 왔으니, 그가 서휼에게 예정대로 파공주를 전달해 받았을 터였다.

'뭐라고 설명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해룡족 장로, 전횡이라는 자의 부탁을 받고 당신을 찾아왔소."

"저, 전 장로님을 아십니까?"

서란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에게 파공주를 받고, 섭명함을 폭파시키라는 명을 받았을 터요. 그렇지 않소?"

"…그렇, 습니다."

"우선 그 파공주는 날 주시오."

"예? 예. 여기 있습니다."

서란은 수상쩍어하면서도, 내게 파공주를 건냈다.

나는 파공주를 건네받은 후 그에게 말했다.

"섭명함에 쳐진 귀골곡의 결계를 파훼하지 못해서 진입하지 못했겠지? 같이 가서 내가 결계를 파훼해 드리지."

"가, 감사합니다."

서란은 감사하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반인반룡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 본모습으로 변해도 된다오."

"…! 전 장로님이… 그런 것까지 말씀해 주셨습니까?"

"그렇다고 해 두지. 일단 따라오시오. 섭명함으로 가지."

"…예."

서란은 수상쩍어하면서도, 나를 따라 섭명함을 향해 갔다.

나는 섭명함이 있는 해역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전방에 자리했다.

이 결계를 넘어서면 귀신들의 구역이 나온다.

"선배님, 우선 이 결계는…."

"됐소, 거기 계시오."

나는 서란을 뒤로 물린 다음, 그대로 손을 들어올렸다.

단악검법, 입산!

올려 베기.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촤아아아악!

허공이 쪼개지며, 결계가 잘려 나갔다.

그리고 결계 너머에 있던, 수만 마리의 귀신들로 형성된 귀무 역시 반으로 쩍 갈라져 길을 텄다.

쩌억….

서란의 입이 벌어졌고, 나는 멍한 서란을 끌고, 빠르게 섭명함이 있는 결계의 중심부로 향했다.

결계의 중심부.

단단한 마지막 결계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부웅!

콰가강!

내가 날린 무형검에, 이번에 결계는 한 번에 터져 나가 버렸다.

"허, 허억…! 결단기 수준으로도 한참을 두들겨야 깨지는 결계인데…."

잠시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서란은, 나를 공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수상쩍은 녀석이 원영기급 실력을 가지고 있단 것이니, 공포스러울 만도 했다.

"빨리 오시오. 만날 자가 있소."

"만날… 자 말입니까?"

"설마, 흑색귀골곡이 아무리 폐함이 됐더라도, 저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섭명함에 아무도 안 남겨 뒀으리라 생각하시오?"

나는 서란을 이끌고 섭명함의 최하층까지 바로 내려갔다.

그리고, 섭명함의 최하층에서 긴장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송진을 만날 수 있었다.

[…자네는 누구신가.]

송진은 내가 결계를 한 번에 터트려 버린 사실을 알고 있는 듯, 기세를 응축시키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뒤따라온 서란에게 말했다.

"인사하시오, 서 도우. 저분은 송진 선배님이라는 분으로 괴군 조연에게 살해당하신 이후, 이 섭명함을 지키고 계신 천인기 잔혼이시지."

"어, 안녕…하십니까?"

[…넌, 설마.]

서란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며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송진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 애의 자식인가. 이곳에는 왜 왔느냐?]

그 말에, 서란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어머니의 유품을 찾으러 왔습니다."

[네 어미의 유품을 찾으러 와?]

화르륵!

송진의 눈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내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목소리를 누그러뜨려 진노를 드러내지 않고서 말하였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전부 본 곡의 재산이다. 외인인 네놈에겐 줄 수 없다.]

나는 무형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찾을 기회나 주시지 그러십니까? 선배님."

내 무형검을 본 송진의 눈에서 귀화가 거세게 타올랐다.

노한 기색이었지만, 원영기급 전력으로 보이는 내가 칼을 들고 위협하자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자네는 어떻게 이번 비승에 안 끌려간 건가? 전 계위에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그 흉물(凶物)은 또 뭐고…? 제길….]

그는 이를 악무는 듯하더니, 두 주먹을 꽉 쥐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반나절, 반나절의 시간을 주마. 그 시간 안에 네 어미의 방을 찾아내서, 거기서 유품을 찾아봐라. 만약 그 시간 안에 나가지 않는다면, 내 혼백을 불태워서라도 천인기의 진노를 한 번은 보여 주겠다…!]

"…알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서란은 송진에게 절을 올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서란은 내 안내에 의해, 그의 어머니의 방에 도착하였다.

[자네…!]

송진은 진노하는 듯했지만, 입을 다물고 담담히 우리를 지켜보았다.

얼마 후 서란이 어머니가 남긴 옥간을 찾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송진 역시 은근슬쩍 들어와 그와 함께 옥간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방에서 나왔다.

얼마 후, 송진과 서란이,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들렸다.

나는 섭명함 바깥으로 나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흘이 지났다.

[…자네, 무슨 꿍꿍이지?]

송진이 섭명함의 갑판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나를 찾아와 물었다.

[왜 저 아이를 내게 데려온 건가? 그것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저 아이의 편을 드는 거지?]

나는 잠시 침묵하다 변명을 댔다.

"전횡이란 해룡족 장로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전횡…? 해룡족의 수석 천문관을 말하는 건가 보군. 흠….]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겁니까?"

[…저 아이를, 제자로 받기로 했다.]

다시금, 송진과 서란 사이의 사제의 연이 이어졌다.

서란과 송진은 섭명함의 갑판에서 내게 인사를 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쨌든 자네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하네.]

"저 역시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선배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 세 가지는 들어드리겠습니다."

[제자가 이러는데 나 역시 맨입으로만 있을 수는 없지.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나는 송진을 보며 말했다.

"우선, 섭명함을 사용하게 해 주시지요."

[뭐…?]

쿠웅!

나는 막리세가의 본가에서 가져온 영석 더미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 정도면 섭명함을 띄우는 데에 썩 부족하지는 않겠지요?"

그럴 리는 없을 터였다.

막리세가의 모든 영석을 가져왔으니까.

[음…!]

영석을 본 송진의 눈이 빛났다.

[충분하고 넘치는군. 그래, 어딜 가고 싶지?]

"우선… 해룡족의 해룡궁으로 가 보지요."

나는 그들과 함께, 해룡궁을 향해 움직였다.

* * *

쿠구구구!

귀무와 함께, 섭명함이 공간을 넘었다.

우리는 바로 해룡궁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혹시 섭명함의 주포로 해룡궁에 있는 봉인을 뚫을 수는 없습니까?"

[불가능하다. 섭명함에 남은 주포들은 전부 다 망가졌으니까.]

"그렇군요…."

나는 만리민랍이 쏴재꼈던 주포의 위력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힘을 써야겠군.'

나는 섭명함에서 내려, 수압에 견디며 무형검을 휘둘렀다.

지난 삶에서 서란이 진법을 설치했던 곳.

서휼의 봉인이 가장 약한 곳을 뚫으면 될 터.

쿠우웅!

무형검이 봉인의 안쪽.

가장 연약한 금제들부터 투과해서 짓이긴다.

금제들이 옅어지며, 얼마 후.

퍼엉!

봉인의 한쪽에 그대로 작은 구멍이 나 버렸다.

"서 도우, 따라오시오. 그리고 송진 선배님도 잠시 가능하시면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함정을 파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믿지?]

송진은 수상하다는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섭명함에 대고 맹세하지요. 맹세코 전 이곳에 함정 같은 건 파 놓지 않았습니다."

[흐음… 알겠다.]

송진은 결인을 맺으며, 섭명함의 귀기를 끌어와 자신에게 이어붙였다.

쉬이이이!

섭명함에서 귀기를 이어붙인 채 뛰어내린 송진, 그리고 서란과 내가 해룡궁으로 진입하였다.

[해룡궁… 서 용왕의 초대를 받았을 적 이후로 처음 와 보는군.]

"저 역시 오랜만에 와 봅니다."

우리는 해룡궁의 내궁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왜 이곳으로 부른 거지?]

"따라오시지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전횡이 죽은 전각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촤아악!

그리고, 전각에 들어갔을 때였다.

"핫!"

서란에게 끈적한 저주가 날아와 들러붙는 것이 보였다.

송진이 흠칫 놀라며 서란에게 들러붙은 저주를 떼어 내려 할 때였다.

파스스….

서란에게 들러붙은 저주는 그대로 녹아내렸다.

아무래도 전횡의 음성을 들은 듯, 서란의 눈이 떨렸다.

"전… 장로님…? 저, 저 옥판을 들어 봐야 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나아가 옥판을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익숙한 서책이 있었다.

나는 무형검으로 서책을 끌어온 다음 옥판을 내려놓았다.

그런 후, 송진에게 서책을 건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봐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니… 이건 그냥….]

그 때였다.

[뭣…! 젠장, 눈이 마주쳤군!]

책을 들여다보던 송진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꿈틀, 꿈틀….

책을 다 읽고 덮지도 않았건만.

갑자기 서휼이 남겨 놓은 서책이, 미친 듯이 꿈틀거린다.

촤아아악!

송진의 손에서 뻗어 나온 귀무가 책을 뒤덮었고, 송진은 다급하게 말했다.

[젠장, 잠시 봉인을 걸어 놓았다. 일단 빨리 섭명함으로 가자!]

턱!

나는 송진의 어꺠를 잡고, 그대로 송진과 함께 무형검으로 섭명함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섭명함에 도착했을 때.

파아아앗!

귀무가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서책의 안쪽에서 푸른 빛살이 터져 나온다.

해룡왕 서휼의 의식!

그리고, 서휼의 의식이 내가 지난 생에 들었던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란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송진이 결인을 맺으며 외쳤다.

[먹어치워라, 섭명함!]

그와 동시에.

끼야야야야―

섭명함의 갑판에서 귀수들이 뻗어 나오며, 서휼의 잔념을 꽁꽁 묶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휼의 잔념은 그대로 섭명함에 빨려 들어가 버렸다.

쉬이이이….

그렇게 서휼의 잔념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서 용왕이 남겨 놓은 의식이군. 왜 이런 것을 남겨 둔 거지?]

송진은 의아해했고, 서란은 서휼의 말에서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떨고 있었다.

나는 서책을 집어들고, 서란에게 건냈다.

"이 안에, 전횡 장로의 일지가 적혀 있소. 서휼이 부려 놓은 꿍꿍이는 더 없으니, 한번 천천히 읽어 보시오."

"…알겠, 습니다."

서란은 진실을 알기가 두려운 듯,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잠시 덜덜 떨다 서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얼마 후.

뚝, 뚝뚝….

서란은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왕께서… 왕께서… 내게 보여 주셨던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었다고…?"

충격을 받은 듯.

서란은 그렇게, 한참을 서책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몇 시진 후.

"조금 진정되셨소, 서 도우?"

"…."

"나는 전횡 장로가 일지의 마지막 부분을 쓰기 전 그에게 부탁을 받았소. 당신을 잘 인도해 달라고. 그의 의지를 이어받아 여기까지 당신을 안내해 드렸으니, 앞으로의 판단은 알아서 잘 하시길 바라겠소."

서란은 이를 악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그는 무언가 결의를 다진 표정이었다.

잠시 우리를 지켜보던 송진은 나를 보며 말했다.

[방금 섭명함을 가동시킨 건, 소원으로 치지 않겠다. 이것으로 인해 내 제자가 해룡왕의 음험함을 알았고, 앞으로 해룡궁에 남은 수많은 해룡족의 보물 역시 획득할 테니까.]

"감사드리지요. 하면, 섭명함을 타고 몇 군데를 더 들러도 되겠습니까?"

[음…?]

* * *

늦은 저녁.

사막의 열기가 식고, 밤이 되가는 시각.

쿠구구구!

섭명함이, 사막 한 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흑색의 성이 보였다.

"송진 선배님, 저 성 밑에 어마어마한 원혼이 잠들어 있다는 건 느껴지십니까?"

[허어… 막대하군.]

"저것들을 이용해서, 저 흑색의 성을 덮은 결계를 깨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내 말에, 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다.]

쿠구구구!

얼마 후.

섭명함이 사막에 내려앉았고.

송진이 결인을 맺기 시작했다.

마침 태양도 뜨지 않은 한밤인지라, 원혼들의 음기가 더욱 더 강하게 끓어오른다.

끼야아아아아!

끼아아아아!

까아아아!

부글부글부글….

흑색의 성 밑에 깔려 있던, 수십 수백만의 원혼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을 느낀 것인지 흑색의 성 안쪽에서 피 안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냐, 누구냐? 어떤 놈이….]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립이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얌전히 처박혀 있을 것이지, 괜히 나와서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

[뭣…? 자, 잠깐! 섭명함? 흑색귀골곡?]

그리고, 송진이 법술을 완성하였다.

끼야아아아아!

귀신 떼가 울부짖으며, 송진의 귀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뭐, 뭐요! 갑자기 내게 왜 이러시는 거요!]

원립은 송진의 기세가 커져 가는 것을 보며 그의 정체를 짐작했는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발악하였다.

하지만 송진은 딱히 놈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귀도법술을 완성하였다.

[이런 젠장!]

슈르륵!

기이이잉!

원립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흑색의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흑색의 성을 뒤덮은 고대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쉬이이이이!

동시에, 핏빛의 진홍빛 강물이 흑색의 성 안쪽에서 흘러나오며 결계를 강화시켰다.

장원진력.

원립 놈의 예비 목숨이었다.

키이잉!

파직, 파지지직!

결계가 강화되며 기이한 뇌전을 내뿜었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

하늘이 음기로 충천한다.

일순간, 천인기의 실력을 회복한 송진이 뒷짐을 지고 허공으로 떠올라 흑색의 성을 내려다보았다.

[…운명의 인력을 가진 선보로군.]

"그렇다 하더군요."

괴군 역시 분명히 그런 말을 했다.

그 이전에도 간혹 저 성에 대해 그런 말을 들어 왔고.

송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저놈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만. 저 성 자체는 별 것 아닐지라도, 성에 운명의 인력을 공급하는 핵심(核深)이 성가시군. 그리고 놈은 지금 그 핵심의 바로 아래에 숨어 있다. 일격에 성을 박살 내 버릴 순 있겠지만, 핵심과 핵심의 뒤에 숨은 저 녀석은 못 잡을 수도 있다.]

"아, 상관은 없습니다. 그 정도만 해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잡지요."

[그래, 그렇다면….]

쿠구구구!

송진의 두 눈에서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대청색귀골곡 원로의 힘을 보여 주마….]

끼야아아아아!

쿠릉, 쿠르릉….

하늘에 먹장구름이 맺혔다.

곧이어, 먹장구름이 뭉치며 거대한 귀신 머리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천귀골진(舛鬼骨陣)! 개(開)!]

[끼야아아아아아아!]

천지간에 귀곡성이 울린다.

그리고, 먹장구름이 뭉친 귀신의 머리가 마구 어그러지더니, 그대로 흑색의 성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괴군이 던졌던 석상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위력!

그리고.

쩌어어엉!

장원진력을 잔뜩 머금은 흑색의 성의 고대 결계.

고대 결계는 잠시 버티는 듯했으나, 이내 시뻘게지더니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콰아아앙!

그리고, 고대 결계에 밑에 있던 흑색의 성이, 무너진다.

콰과과과광!

천지간에 음풍이 휘몰아쳤다.

얼마 후.

[허… 놀랍군. 조금 살살 치긴 했는데…. 그래도 성의 형태가 남아 있을 줄이야.]

송진이 놀랍다는 듯이 흑색의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방금 전의 무지막지한 일격을 맞고도, 흑색의 성은 완전히 가루가 되지 않고, 그래도 상층의 지붕 정도만 날아간 채로 어느 정도 형체는 유지한 상태였다.

물론.

[크아아악! 크헉, 크악!]

원립은 그 안쪽에서 반쯤 고깃덩이가 된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촤르륵, 촤륵!

놈은 장원진력을 있는 대로 끌어다가 몸을 재생시키는 중이었고.

그리고….

놈의 위쪽으로, 서휼의 형상이 아른거리다가 사라졌다.

송진은 서휼의 형상을 보며 잠시 귀화를 일그러뜨리다가,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휼의 잔념과, 저 성의 핵심이 내 일격을 막아 주었구나.]

"저건…."

나는 지난 삶의 일을 기억했다.

분명 괴군이 원립을 처리하고 난 후.

흑색의 성을 뜯어냈을 때, 그곳에 있었던 돌 조각이었다.

그때는 돌 조각보다는, 몰래 괴군에게서 도망치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기에 돌 조각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돌조각을 제대로 보게 된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직, 파지지지직!

끊임없이 황금빛 뇌전을 뿜고 있는 그 돌조각.

그것은, 등선향의 중심부.

승천문의 바로 앞에 떠 있던 그 비석의 윗부분이었다!

백회(百會) (3)

―…후대들을 위해 남겨 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전 등선향에서 보았던 비석의 내용을 떠올렸다.

윗부분이 뜯겨 나가 볼 수 없었던 내용.

'분명, 저 비석의 아랫부분이 뜯긴 모양을 볼 때, 저 비석이 그 비석의 윗부분이다!'

원립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기에 생각이 닿지 않았었다.

생각해 보면.

흑색의 성 인근에서 [금신천뢰(金神天雷)]가 적힌 석현판을 본 지가 꽤 됐다.

'상상도 못 했군.'

이 녀석이 그 금신천뢰문과 연관이 있었다니.

물론, 자세한 사항은 우선….

'놈을 제압하고 들어나 봐야겠군.'

[이… 크웩…!]

놈이 피를 토할 때.

나는 바로 놈의 앞으로 쇄도해 갔다.

쿠구구궁!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두른 무형검이, 녀석의 방어막에 부딪힌다.

성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안에서는 어찌어찌 원영기 급의 힘을 낼 수 있는 모양.

'하지만, 지난 생과는 상황이 다르지.'

투쾅!

나는 원립을 그대로 걷어찼다.

녀석은 방어막을 치는 듯했으나, 무형검은 그대로 방어막을 투과하여 녀석의 배를 걷어찼다.

푸확!

녀석이 피를 한 움큼 내뱉는다.

그리고, 무형검에 걷어차인 녀석은 그대로,

이곳저곳이 뻥 뚫린 흑색성의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콰아아아앙!

성의 영역 바깥으로 가자, 결단기 대원만 수준으로 하강한 녀석의 수행이 드러났다.

[이, 이 노옴…!]

원립이 이를 갈며 저물법기에서 일곱 개의 족자를 꺼낸다.

그리고 저물대를 열어, 혈수로 이뤄진 두 귀왕을 꺼냈다.

일곱 마리의 요혼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왕손 서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서란의 목소리가 사막을 울렸다.

"바다의 자식들은 해룡왕의 혈손에 조아릴지어다."

찌이이잉!

서란의 명(命)은 그대로 언령이 되어 요혼들을 얽어매었다.

해룡의 요혼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바닥에 엎드려 조아렸다.

그리고 이어서, 서란의 명을 거부하던 요혼들 역시 움찔거리며 바닥에 몸을 조아렸다.

"결단기 이상의 요혼들을, 오래 잡아 둘 순 없습니다!"

서란이 다급하게 외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끼야아아아아!

―끄아아아아!

저 앞에서 혈수로 된 귀왕 둘이 각기 낫을 들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뒤쪽에서 다시금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섭명함의 이름 아래에 명하노니.]

그리고.

[만귀(萬鬼)는 명하(冥河)를 건너는 나룻배 앞에 고개를 조아릴진저.]

쿠구구구구!

뒤쪽의 섭명함에서, 영체(靈體)에 대한 강한 흡입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

―키야아아악!

두 귀왕은 비명을 지르며, 섭명함에 빨려가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낫을 사막에 꽂아 넣고 버티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원립의 가장 큰 전력 중 셋이 무력화되어 버렸다.

'서란과 송진은, 원립과는 상성이 최고로군.'

지난 삶에서, 서란이 호풍진혈변을 익힌 원립을 제압하는 것을 보며 느낀 것이었지만, 이번 생에서 보니, 그냥도 상성이 좋았다.

물론 원립이 제대로 혈영들을 회수해서, 원영기의 기운을 자신의 요혼들과 귀왕들에게 공급이 가능했다면 아무리 서란이나 송진이라도 이렇게 원립을 쉽게 무력화하기 어려웠을 터였으나.

흑색성 바깥으로 내쫓긴 이 녀석은, 이렇게나 상대하기가 쉬워지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나는 무형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크윽, 이놈! 이 빌어먹을 놈! 쉬이 당할 것 같으냐!]

부웅, 부웅, 부웅!

그의 주변으로 단검 법보, 창 법보, 수정 해골 지팡이 등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의 위쪽으로 다섯 개의 오행혈주번이 떠올랐다.

촤라라락!

오행혈주번들이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리고, 나는 혈주번들은 그냥 맞아 주었다.

푸콱!

약간 따끔한 느낌과 함께, 오행혈주번들은 내 상단전에 자리 잡은 오행혈주번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뭣…!]

원립이 당황한 목소리로 몸을 떨었다.

저벅, 저벅….

나는 원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반응, 너도 오행혈주번을… 그래, 그렇다면…!"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가 회전한다.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법보와 원립 사이, 둘을 연결하는 법력의 끈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법보들이 땅에 떨어졌다.

[이, 이익!]

핏빛의 창에서 핏빛 귀왕이 튀어나와 창을 잡는다.

그리고 귀왕은 창에서 나오자마자, 섭명함의 흡입력에 저항하기 위해 창을 땅에 박아 넣고 꼴사납게 버티기에 급급했다.

결국 녀석에게 남은 것은 수정 해골 지팡이뿐.

[크으윽…!]

원립은 침음성을 흘리며 법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촤좌좌좌좍!

지팡이에서 뿜어진 빛에, 혈목(血木)이 사막에 돋아나고, 혈해(血海)가 사방을 뒤덮는다.

혈해에서 피 구름이 솟구치며 녀석의 몸을 뒤덮었다.

삽시간에 사방이 녀석의 영역으로 화한다.

핏빛의 귀수들이 내게 쇄도했고.

피 구름에서 수많은 해골들이 내게 달려든다.

혈해에서 핏물들이 솟구치며 피의 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들었다.

온 사방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나는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단 한 번의 참격.

그 참격에, 잡다한 모든 법술들이 전부 쓸려 나간다.

그러고도 참격은 힘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궤적을 바꾸며 뻗어 나가, 천지사방으로 가시덩굴처럼 뻗어 나간다.

원립이 수많은 법술들로 저항했으나, 궤적은 법술들의 강한 부분은 투과하고, 약한 부분을 베어 내며, 모조리 무화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촤학!

원립의 몸이 궤적의 폭풍에 휩쓸려 피떡이 되어 버린다.

물론.

촤륵, 촤르륵!

놈이 피 구름을 흡입하자, 육신이 꿈틀거리면서 재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재생을 하는 시간은 너무나도 길었다.

무려 두 호흡이나 걸렸으니까.

두 호흡이면, 무형검을 몇백 번은 휘두를 수 있다.

콰아앙!

콰앙, 콰앙!

눈앞에 있는 잡다한 것들이 쓸려 나갔고, 나는 순식간에 재생을 하는 원립의 앞에 다가가 놈을 걷어찼다.

쩌어엉!

재생을 하던 놈이, 그대로 다시 사막 저 멀리 날아간다.

츄르르르륵!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자랑하듯, 놈은 날아가면서도

다시 재생을 하였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다시 놈의 위쪽에 올라가 있었다.

두 다리를 굽혔다, 그대로 펼치며 두 발로 원립의 몸을 내려찍는다.

푸콱!

발에 닿은 원립의 신체가 두 동강이 나 버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촤락, 촤라라락!

놈의 조각난 신체에서, 핏물로 이뤄진 물고기들이 나타나 내게 날아든다.

붕, 붕, 붕, 붕!

내 주변으로 무형검이 회전한다.

공방일체의 태세가 된 채로, 날아드는 물고기 떼를 전부 갈아 버리며 그대로 다시금 놈에게 떨어지며 내리찍는다.

철퍽!

두 쪽으로 나눠진 놈의 몸 중,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 국물이 되어 버렸다.

하반신 쪽에서 놈이 다시금 상체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부웅!

등 뒤로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원립의 상반신을 핏물로 만들어 버린 나는, 어느새 상체를 재생 중인 하반신에 다가가 그대로 손을 올렸다.

콰아아앙!

그대로 손을 내리찍는다.

쿠구구구구!

재생되는 중인 원립의 몸과 함께, 놈의 아래쪽으로 계곡이 생기며 놈이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계속 재생해라, 바퀴벌레 놈."

츄륵, 츄르르륵!

반쪽이 난 녀석의 몸이 다시 붙기 시작한다.

화르르륵!

놈의 핏물은 혈화(血火)가 되어 나를 덮쳤다.

하지만, 무형검이 전신에 흐르는 나는 그대로 혈화를 뚫어 버리고 손을 뻗었다.

콰악!

내 손이, 원립의 머리통을 거머쥐었다.

"죽을 때까지 죽여 주마."

그대로 머리를 잡고, 사막의 땅에 내리꽂는다.

투과앙!

놈의 상반신이 다시 참흔(斬痕)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쯤 되자, 원립의 재생력이 확연히 느려진 것이 보였다.

쉬릭, 쉬리리릭!

나는 꿈틀거리며 상반신을 재생하는 원립을 보며 발을 들었다.

[자, 잠깐….]

콰아아앙!

지난 생에는, 괴군과 서휼의 눈치를 보느라 너무 쉽게 죽였다.

빠르게 죽인 것이 다행이었다.

괴군이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에서 조금 밀리는 기색이었으니.

그때도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면 서휼이 직접 찾아왔으리라.

[기다….]

퍼엉!

놈의 얼굴을 다시 차서 폭발시킨 후.

녀석이 제대로 몸을 재생하려 할 때마다 마구 공격을 퍼부었다.

중간중간에 날아오는 법술들은 무형검이 흐르는 몸으로 그냥 때워도 될 정도로 허약했고, 그마저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콰아앙!

놈의 얼굴을 한 번 더 터트렸을 때.

녀석이 한참을 지나서야 그럭저럭 재생한 것을 보며.

나는 놈의 배에 발을 올린 후 그제야 공격을 멈췄다.

"조금, 시원하군."

[크, 크아아악…!]

"네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금 쌓여 있던 게 있어서 말이지."

[크헉, 커헉!]

"이제 재생력도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그대로 금단을 밟아 깨 버리면 넌 죽는 거겠지?"

[크으윽….]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내게 왜 이러는 것입니까? 워, 원영기 수도자십…니까?]

"비슷하게 생각해라. 사실 바로 네 금단을 박살 내고 네 혼백을 베어 낼 수도 있었다만. 조금 때려 보고 싶어서 때려 봤다."

[아, 아닙…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살려 준다고는 안 했다만…."

[사, 살려 주시면…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제, 제 성에는 재물이 많습니다…!]

"널 죽이면 어차피 다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제, 제가 익히는 마공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난 마공에는 관심이 없는데."

[뭐, 뭘 원하십니까! 저는 아는 게 많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난 녀석의 머리채를 잡고 말했다.

"이제 조금 대화할 자세가 되었구나."

저벅, 저벅….

나는 녀석을 끌고, 섭명함으로 걸어갔다.

철퍽!

나는 원립을 섭명함의 갑판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너는 이제 내 노예다. 내 명에 거부할 수 없으며, 내가 죽이려 하면 저항 없이 순응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예! 지, 지금 당장 살려만 주신다면….]

"섭명함에 대고 맹세해라."

[…!]

원립의 의념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놈의 의념은 절망과 공포로 물들었다.

"진심으로 맹세한 게 아니군. 역시 지금 당장 죽여야…."

[맹세! 맹세하겠습니다! 섭명함에 대고 맹세합니다! 말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원립은 섭명함에 대고 귀도맹세를 하였다.

이제 녀석이 맹세를 어기면 녀석의 혼은 즉시 섭명함에 빨려 들어갈 것이다.

나는 놈에게 물었다.

"우선 기다려라."

일단 저 비석의 내용부터 확인할 때였다.

타앗!

나는 아래로 뛰어내려, 그동안 궁금했던 비석의 윗부분을 읽어내렸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비석의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조금 더 길쭉했고,

훨씬 많은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후대들에게 경고하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보(仙寶)는 결국 진선(眞仙)과 인력(引力)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진선과 관련이 된 자에겐 결국 재앙이 찾아올 뿐이니라.

이 흉측하고 기괴한 세계의 몇 아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그 불길함 덕택에 도리어 대다수의 진선이 천운을 읽어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후대여. 선보를, 혹은 선계의 것을 우연찮게 얻었다면 이 세계에 두어라.

대경계에 이른 이들의 욕망과 권능을 우스이 보지 말아라.

선보를 가지고 비승하는 자, 어떤 곳으로 비승하든 진선에게 들키고 말리라.

특히 나의 후예여.

금신천뢰문에서 자라나, 혹여나 선보 천뢰번을 가지고 비승하려는 이여.

내 경고를 무시치 말고, 선보 천뢰번은….

거기까지가 비석의 내용이었다.

나는 비석의 내용과, 등선향에 있는 후반부의 내용을 이어 보았다.

―…후대들을 위해 남겨 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그냥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격려가 아니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경고였다.

그리고, 나는 각기 자신의 문파와, 문파의 물건을 깡그리 챙겨 가던 세 천인.

그리고 해룡궁에 상당한 보물을 남겨 놓고 간 해룡왕을 떠올렸다.

'해룡왕은 이 경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

금신천뢰문을 위한 경고일 터인데.

정작 이번 대의 금신천뢰문은….

"선보(仙寶) 천뢰번(天雷幡)을 그대로 들고 가지 않았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야 선보의 '모조품'이고.

창호자의 청천갑이야 일반적인 법보를 뛰어넘은 '규격 외 법보'지만.

천뢰번은 엄연히 양수진의 '선보'라고 소문이 난 물건이었다.

'전명훈, 이 녀석….'

나는 무심코 그 녀석이 걱정되었다.

서휼과 괴군에게 잡혀간 오 대리와 김 주임만을 제일 걱정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걱정해야 하는 건 지금 당장 대경계 존재와 얽혔을 전명훈이었을 수도 있었다.

파직, 파지직….

나는 눈앞에서 번개를 튀기며 떠 있는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원립이 내 옆에 내려와 공손히 서 있었다.

"너는 금신천뢰문과 무슨 관계지? 이 흑색의 성은 뭐냐?"

[이 성은, 4만 년 전에는 등선향에 있던 성으로. 본디 금신자 양수진을 모시는 사당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당을 관리하는 일족의 후손입니다.]

뜯겨 나간 성.

나는 등선향에 남아 있던, 뭔가가 뜯겨 나간 듯한 흔적이 있던 검은색의 건축물의 터를 기억했다.

그것이 이 성의 다른 부위였던 것이었다.

"너는 금신천뢰문과 관계가 없는 건가?"

[4만 년 전의 전쟁에서 사당이 등선향에서 뜯겨 나가 사막까지 날아온 후부터, 저희 일족은 금신천뢰문의 기억 속에서 잊혔습니다.]

"그런가…."

나는 녀석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네 원래 목적은 뭐였지?"

[…천인기 분들이 전부 비승하신 후, 전 대륙을 지배하고, 전 대륙에서 공급받은 자원으로 마공을 극한으로 익혀 천인기 대원만이 된 후. 봉명인의 축복을 받아, 저 승천문과 연결된 상계가 아닌, 혈음계(血陰界)라는 상계로 비승하려 했습니다.]

"혈음계?"

[예. 지금이야 양수진의 승천문 덕택에 모두가 승천문을 통해 비승하는 구조가 되었으나… 12만 년 이전의 고릿적, 그때에는 분명 익힌 공법에 따라 비승할 수 있는 세계가 달랐습니다. 승천문과 연결된 상계는 마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곳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계보다는 수백 배 낫겠으나, 마공과 최적화된 세상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저는 봉명인을 통해 더욱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비승하려 했을 뿐입니다.]

"혈음계라는 것을 들어 보니, 상계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 같은데. 읊어 봐라."

원립은 내 눈치를 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측 가능한 상계는 현재 여섯 개가 있습니다. 혈음(血陰), 진마(眞魔), 고력(古力), 명귀(冥鬼), 자금(紫金), 광한(光寒). 고력, 명귀, 자금의 계는 정보가 없습니다만 광한계, 진마계는 유명하지요. 광한계는 현재 승천문과 연결된 세계. 진마계는 광한계와 인접해 있는, 광한계와 전쟁을 벌이는 세계입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느덧, 서란도 은근슬쩍 끼어들어 얘기를 듣고 있었고,

송진은 섭명함 위에서 팔짱을 끼며 원립의 얘기를 평가하듯 듣고 있었다.

[승천문이 없었던 때에는, 일반적인 선가공법이나 정도공법을 익히면 광한계로, 마도공법을 익히면 진마계로 비승했습니다. 진마계로 비승하면 진마계의 진마기를 받아들여, 마족(魔族)으로 전환이 가능하지요.]

"그럼 혈음계는 뭐지?"

[혈음계는, 본디 진마계의 일부였던 땅이었으나. 진마계에서도 특히나 사기와 음기, 탁기가 너무나 짙어 따로 떨어져 나간 세계라고 합니다. 진마계가 아니라 그곳으로 비승하면, 그곳의 힘을 흡수하여 진마계의 마족들보다 훨씬 고명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들 하지요.]

"흐음…."

말인즉슨, 이 녀석의 말은 말 그대로 전 대륙에서 대학살을 벌여, 마기를 극한으로 끌어모은 다음 더욱더 자신에게 맞는 특출난 상계로 비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휼은 도대체 이런 놈을 통해 뭘 하려던 거지?'

놈도 혈음계로 가고 싶었던 건가?

'아니다, 놈은 이 세계에 수작을 부려 놓은 게 너무 많아.'

녀석의 목적은 상계가 아닌 이 세계다.

원립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는 서휼의 목적을 추측할 수 없었다.

"너는 뭔가, 서휼에게 들은 말은 없나?"

[해룡왕에게 말입니까? 없습니다만… 해룡왕에게 들은 말은 아니고, 제가 그의 공법서와 피 한 방울을 훔쳐내긴 했습니다. 그 역시 원한다면 드리겠습니다.]

"…됐다."

정작 이 녀석은 해룡왕에게 스스로가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이 녀석의 목적과 해룡왕의 목적이 합치했다는 건데. 이 녀석이 혈음계로 가기 위해 벌이는 학살 자체가, 뭔가 해룡왕이 원하는 건가….'

"흐음… 그렇지."

생각해 보니, 이 녀석에게 얻어낼 게 남아 있었다.

"넌 봉명인의 비승의 축복을 받고자 하면, 봉명인을 얻고자 했겠군."

[그렇습니다.]

"하면, 봉명성의 층을 무너뜨릴 방법도 가지고 있겠지?"

[예, 봉명성의 층에 흐르는 기운을 분석해서, 봉명성의 전 층을 무너뜨릴 진법도 전부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하신다면 드리겠습니다…!]

원립은 자신의 저물대에서, 붉은 깃발 법기들을 꺼내서 내게 전해 주었고,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나와 청문령이 만든 진법처럼, 딱 봉명성에만 적용되는 진법이었다.

"그래, 그리고…."

나는 원립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보물 창고의 위치.

혈영들이 숨겨진 위치들을 전부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놈을 따라 이 흑색의 성 안쪽을 돌아다니며, 녀석이 숨기고 있던 것 역시 보게 되었다.

"이건…."

나는 커다란 핏빛 단지를 바라보았다.

단지는 새하얀 천으로 봉해져 있었고, 색깔은 붉었으나 원립의 다른 물건들처럼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도리어 향긋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지?"

[안에는… 제 혈체(血體)가 들어 있습니다.]

"…그 혈체라는 건 뭘로 만드는 거냐?"

[혈체의 경우, 기본적인 혈체 자체는 제 피를 영액 속에 배양하여 만듭니다. 그리고 추후에 특수한 기능을 추가하고 싶을 때는, 모아 둔 재료를 단지 안에 녹여 넣어 혈체에 서서히 합성하는 것이지요.]

"모아 둔 재료?"

[예, 인상 깊었던 적의 사체를 핏물로 녹여 놓은 용액이 있습니다.]

"…이 혈체라는 것에는 지금 얼마나 많은 '재료'를 녹여 넣었지?"

그러나 이어진 원립의 말은 나를 꽤 놀라게 했다.

[지금 혈체는 순수하게 법력을 쌓고 정순한 마기로 마공을 수련시키고 있기에, 합성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 혈영을 찾으러 가서 원영을 되찾고, 다음 봉명성이 나올 200년 동안 천천히 합성시키려 계획하였지요.]

"그렇군… 이 혈체에 대한 것 역시 전부 내놓아라."

원립은 내게 혈체를 만드는 법, 조작하는 법, 혈체를 강화시켜 합성시키는 법 등등을 옥간에 적어서 건네주었다.

그렇게, 나는 원립에게서 들을 만한 것은 전부 듣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제 들을 만한 것은 다 들은 것 같군."

[예, 전부 가감 없이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아 물론, 제 쓸모는 이게 끝이 아닙니다. 미리 오행혈주번을 박아 넣어 노예로 만든 녀석들도 있으며….]

그때였다.

지금까지 원립의 얘기를 듣고 있던 송진이 말했다.

[잠깐 놈의 머리를 조금 뜯어 보게 해 다오.]

[뭣…!]

[그럭저럭 맞는 말을 한 것 같다만… 마도 수도자들의 말을 왜 곧이곧대로 믿느냐. 당연히 꿍쳐 놓은 비밀이 지금까지 떠벌린 것들보다 훨씬 많겠지. 내가 놈의 상단전을 조금만 뜯어 보게 해 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토해 낼 수 있겠지.]

"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자, 잠깐!]

"가만히 있어라, 원립. 저항하면 죽이겠다. 섭명함의 맹세를 어길 셈이냐?"

[자, 잠깐 주인이시여!]

하지만 송진의 손길이 원립의 머리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얼마 후.

[끄아아아아악!]

원립이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송진이 말했다.

[대부분 말했다만, 스스로 제 머릿속의 정보에 금제를 걸어 놓은 것이 몇 가지 있더구나. 금제를 거칠게 뜯어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더군.]

송진이 말해 준 정보들은 대략.

혈음계의 고위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는 방법.

혹은 혈제를 효율적으로 지내는 비술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원립의 개인사 등이 포함된 것 등이었다.

"별로 쓸모 있는 정보들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감히 이놈이 수작을 부리며 네놈에게 숨겼다는 게 중요하지. 특히 혈음계의 존재에게 제물을 바쳐 소원을 이루는 방법은, 잘 쓰면 섭명함의 맹세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기에 위협적이다.]

"흠, 그렇습니까."

어차피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간 원립의 머리를 뒤적이던 송진이 말했다.

[해룡왕에 대한 정보 말이다만, 모르고 있다는 것도 거짓인 것 같군.]

"…! 뭔가 정보가 있습니까?"

송진의 눈두덩이에서 귀화가 타올랐다.

[…없다.]

송진이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전성기의 힘으로 내리쳤을 때 보였던 서휼의 잔영. 그것이 발동된 순간, 서휼에 대한 정보가 자동으로 삭제되도록 만들어진 금제…. 그 금제가 이놈의 상단전에 박혀 있구나. 이놈도 모르는 사이 제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지워진 것이야.]

"…."

결국 서휼에 대한 정보를 얻을 방법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군요… 하면 그게 끝입니까?"

[끝이다.]

쉬이이익!

송진은 원립을 풀어 주었고, 원립은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쓰러졌다.

난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좋다, 그럼 이제 쓸 만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 죽어라."

[자, 잠깐! 저, 저는 쓸모가 있습니다!]

"네가 숨겨 두었던 정보들까지 전부 다 빼냈다만?"

[아닙니다! 제가 이 세계 곳곳에서 암약하며 얻은 영향력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냐?"

[서방 삼 가와 북방 네 부족, 동방 다섯 국가가 제 손아귀에….]

"그렇군."

나는 무형검을 치켜들었다.

"잘 가라."

[왜, 왜, 왜! 아, 안 돼! 그러지 마라! 죽기 싫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 이 개자식아아아!]

슈캉!

무형검이 빛나며, 원립의 영혼을 그대로 베어 낸다.

그렇게, 원립은 모든 것을 뱉어 내고 그대로 죽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다음부터는 희망 고문하지 않고 더 편히 죽여 줄 테니.'

나는 싸늘하게 죽은 원립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읊조렸다.

송진이 클클거리며 웃었다.

[배신을 왜 상관하지 않나 했더니. 처음부터 살려 둘 생각이 없었구나.]

"배신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으니까요. 그냥 적의 목을 벤 것뿐입니다."

나는 놈을 바라본 후, 놈의 혈체가 담겨 있다는 단지를 바라보았다.

휘익!

단지를 봉한 면포를 열어 보니, 그 안쪽에는 지난 삶에 보았던, 익숙한 미인이 보였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이것.

나는 원립에게서 얻어 낸 법술로, 의식을 분리해 내 혈체에 집어넣었다.

번쩍!

혈체가 내 의식을 받아들여 눈을 떴다.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혈체는 새하얀 나신이었고,

흑단 같은 새카만 장발이 녀석의 주요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원립의 본명마공을 익히고 있군….'

아직 200년 후의 그만큼은 성장하지 못했는지, 혈체의 수행은 결단기 후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승천문을 조사할 때, 썩 쓸 만하겠어."

그래도 먼저 가서 죽어 줄 수 있는 인형이 하나 생긴 셈이니 썩 쓸 만했다.

거기에….

철퍽, 철퍽….

나는 혈체를 움직여, 원립의 혈포를 입게 하고, 녀석의 법보들을 착용하게 했다.

원립이 쓰던 법보들 역시 그대로 사용이 가능했으니 정말로 유용한 인형이 생긴 셈이었다.

"성 아래에 있는 영석이나 단약들은 송진 선배님께서 챙기시지요. 저는 저런 재물들은 딱히 필요 없습니다."

[오, 그러냐?]

송진은 반색하며 원립의 보물 창고를 털어, 섭명함을 충전시킬 수 있는 영석들을 잔뜩 실어 날랐다.

그렇게 원립의 성을 뒤지던 도중이었다.

"이건…."

나는, 원립의 성 창고에 굴러다니던 것 중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옥빛의 노리개.

"…."

월량의 고손자의 것이었다.

'진즉 잡아먹혔다고 했던가….'

나는 그 노리개는 월량에게 가져다주기로 결심했다.

얼마 후.

송진과 서란은 이제 내 부탁에 따라 다시 섭명함을 움직였다.

쿠구구구구!

섭명함은, 북방 대초원 곳곳을 돌았다.

북방 대초원 곳곳에 있는, 원립의 혈영들을 섭명함에 하나하나 먹이며, 원립이 혹시라도 부활할 가능성을 전부 없애 버렸다.

그리고 그러던 중.

나는 섭명함을 보고 당황하는 범인들과 수도자들 중.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월량이었다.

나는 섭명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네, 네놈은 뭐냐?"

월량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노리개를 건네주었다.

"…이건…."

나는 얼마간 월량의 고손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답천사막에 살던 원립.

그가 잡아먹은 수많은 이들.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월량의 고손자의 유품….

"…고맙다…."

월량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럽고, 그리고 아주 약간의 후련한 의념을 흘렸다.

"정말, 고맙다…!"

나는 월량의 감사 인사를 얼마간 들어 주며, 그와 함께 원립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잠시 묵념해 주었다.

* * *

섭명함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답천사막 인근, 북방, 동방, 남쪽 바다 인근, 그리고 서방의 벽라국 인근을 돌았다.

그리고, 섭명함의 뱃머리에서, 나는 익숙한 성을 발견했다.

쿠구구구!

섭명함은, 천색성의 위쪽에서 원립의 마지막 혈영을 향해 귀기를 드리웠다.

키이이이잉!

천색성 중앙에 박혀 숨어 있던 원립의 혈영이,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섭명함에 잡아먹힌다.

[휴우, 이제 다 끝났다. 혼을 벤 순간 어차피 부활할 가능성은 1푼 미만이었다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다니. 네놈도 어지간히 독하군.]

"…원립이 부활하는 걸 경계하기보다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서, 녀석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싶었던 겁니다."

나는 천색성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원립의 흔적이 남지 않았으면 했다.

꾸욱….

나는 월량에게 준 노리개가 아닌.

내 법보가 된 옥빛 노리개를 꾹 거머쥐었다.

"선배님, 잠시 만나고 올 사람이 있어 그러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래.]

나는 옥빛 노리개를 쥐고, 천색성의 가운데에 있는, 익숙한 공방의 앞에 뛰어내렸다.

두근, 두근….

가슴이, 떨려 왔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나는….

그리고.

끼이익….

나는, 법기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백회(百會) (4)

법기점은 내 기억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그 때의 그 광경이었다.

까앙, 깡, 깡!

공방의 안쪽에서는 여전히 그녀가 뭔가를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법기점을 둘러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후, 공방의 문이 열리며 사람이 걸어 나왔다.

기억과 똑같은 새하얀 백의.

그녀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쩐 일로 찾아오셨죠?"

"저는…."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부우우웅!

갑자기, 내 허리춤에 걸려 있던 옥빛 노리개가, 부르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노리개 역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한 쌍의 법기.

물론 지금은 두 개가 아닌, 시간을 넘어선 물건 덕에 세 개가 되어 버렸으나.

그 기능은 여전히 공명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신, 당신이… 그 사람인가요?"

그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며 노리개를 잡아들었다.

나는 말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그때였다.

파아아아앗!

그녀가 손에 든 노리개가 밝게 빛나더니, 갑자기 새하얗게 빛나며 빛무리로 변해 버렸다.

"…!!"

그리고, 빛무리는 내가 든 노리개로 날아들어, 그대로 스며들었다.

내가 가져온 것은, 시간을 넘어선 북향화 본인의 노리개.

한 마디로, 미래의 그녀의 것이라는 뜻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동일한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듯.

과거에 있던 그녀의 노리개는, 내가 쥐고 있던 노리개로, 그대로 빨려들어 와 흡수되었다.

피시식….

얼마 후, 북향화의 것을 흡수한 내 손의 노리개는, 어쩐지 더더욱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어쩐지 방금 전보다 더욱 더 단단해지고 더욱 더 신비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같은 것끼리 겹치며… 법보의 격이 오른 건가?'

나는 신비한 현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고, 향화 역시 놀란 눈이었다.

"같은 것들끼리 만나면, 그렇게 되는 거였나 보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음, 그런데… 그 노리개는 제 어머니의 유품이기도 했는데…."

그녀는 어쩐지 안타까운 듯한 기색이었다.

저 표정, 몸짓, 행동, 습관, 숨소리, 심장 박동….

모두, 그녀다.

그녀가, 살아 있다.

"그나저나 노리개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오시다니, 먼 길 힘드셨을 텐데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하시는 건 어떤가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뚝, 뚝….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낸, 나와 같은 감정을 나눈, 나와 같은 아픔을 나눈 그녀가, 아니었다.

"당신은… 저를 모르는군요."

"예…?"

나는 무심결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헛소리였습니다."

예상은 했다.

제자들이, 스승님이, 무수한 김영훈들이.

그들과 만나지 못했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각오는 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가슴이 너무나 시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보자 내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풍랑이 일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노리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어머님의 유품이 흡수되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예? 저야 상관은 없는데, 당신은… 운명의 증표를 그냥 주셔도 되는 건가요?"

운명의 증표라.

그걸 아십니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과 이어 주려 했던 상대는, 이미 혼인을 했고, 죽었습니다.

'진짜' 증표는, 아마 월량의 손으로 그의 무덤에 묻혔을 것입니다.

"…노리개를 가져온 사람과 혼인을 하시기로 하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감정들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손에 노리개를 쥐어주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노리개를 드리고 다시 가겠습니다."

"예…?"

"저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안도했고.

그녀의 눈빛을 보며 슬퍼했다.

나의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몰랐다.

차라리 그날 한날한시에 죽었다면, 황천에서나마 같이 있을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물을 참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감정을 참는 것은 어려웠다.

아마 타인이 내 의념을 읽었다면 나와 함께 울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을 기다려 주시며 증표를 보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겐 더 이상 그 증표는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드릴 터이니, 부디 증표를 받으시고 자유롭게 살아 주시지요. 더 이상 기다리시며 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요…."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그대로 등을 돌려 법기점을 나갔다.

다소 짧고 굵었던 만남.

하지만 나는 억지로 발을 떼어 내며 등을 돌렸다.

지금 등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엎어져, 그녀를 붙들고 미친 듯이 흐느낄 것 같았으니까.

다시는 이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 같았으니까.

타앗!

나는 법기점에서 나와, 섭명함에 올라탔다.

"빨리, 어디로든 가 주십시오."

[오냐.]

위이잉!

귀무가 섭명함을 둘러쌌고, 우리는 그대로 다른 곳을 향해 넘어가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