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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밟아온 것 (16)

놈이 쌓은 수도의 근원.

금단(金丹).

일반적인 신체야, 놈이 익힌 그 특유의 마공으로 재생한다고 쳐도.

수행의 근원인 금단만큼은, 쪼개지면 대량의 생명력을 머금은 피 구름을 먹여야 재생이 된다.

그리고, 내 무형검은 원립의 방어막을 투과해,

놈의 몸을 통과해, 그대로 놈의 금단을 내리찍었다.

"아…."

처음.

놈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바로 다음 순간.

놈이, 무슨 일이 일어난지 이해한 표정.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녀석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무형검을 휘둘렀다.

촤락!

무형검은 이번에는 금단마저 투과하고 지나가, 그대로 놈의 원영을 베어 낸다.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악!"

놈이, 세상에 없을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피식, 피시식….

아무리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법보든 뭐든.

아예 원영이 훼손되고, 금단이 쪼개진 수도자.

축기기 대원만 수준으로 영락한 놈의 경지를 올려 봤자, 결단 초기 수준이었다.

촤악!

내가 다시 놈의 경맥을 베자, 녀석의 경맥에서 법력이 질질 새기 시작했다.

금단이 깨지니, 마공 역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녀석의 재생력이 약해졌다.

놈의 경지가 다시 한번 추락했다.

쉬이이이….

결단 초기도 아닌, 축기기 수준.

"아, 아아, 아아아악!"

놈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른다.

"후우…."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호흡을 조절했다.

지금 내 몸 상태는, 우공이산의 영향으로 진즉 죽었어야 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월도답천의 경지에 이르며.

육신과 하나 된 무형검이, 죽었어야 하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상황.

이미 전신의 경맥이 다 끊기고, 금단이 박살이 날 듯 덜덜 떨리고 있다.

경맥에 흐르는 무형검을 다시 회수해서 의식으로 되돌리는 순간.

내 육신은 무너져 내릴 터였다.

나는 원립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녀석을 잡았다.

놈은 이제, 개처럼 바닥에서 기며, 봉명인을 부여잡고 울먹거리는 중이었다.

"왜, 왜… 천운이 나를 따르고 있는데, 왜…!"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에게 다가갔다.

"이럴 리 없다, 봉명인이 잘못되었을 리 없어…!"

녀석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내게서 멀어지려 비척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은 문득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축기기까지 떨어진 수행이었다.

다 무너진 놈의 법보인 흑색의 성이 작동을 하기에 그 수준이지.

놈이 이곳을 나가 도망치면, 녀석의 수행은 더더욱 처참히 떨어질 것이 뻔한 상황.

원립이, 나를 바라보았다.

"서, 성에 대한 비밀을 알려 주겠다. 잠깐 멈춰라…!"

나는 놈에게 다가갔다.

"잠깐, 오지 마라! 서, 성에 대한 비밀이 싫다면, 혈마진해광은 어떠냐? 혈쇄수림결이나, 혈목귀시의 제련법도 알려 주겠다!"

저벅, 저벅….

"그, 그래! 아직 성의 지하에 영석과 영단들이 잔뜩 남아 있다! 전부 주겠다!"

저벅….

"전부, 원하는 걸 전부 말해라. 모두 들어주마. 나, 나와 손을 잡고 천인기들이 비승한 세상을 누려 보자!"

내가 한 발 나아갈 때마다, 놈이 한 발 뒷걸음질을 쳤다.

"봉명인! 봉명인에 숨겨진 이야기도 털어놓겠다! 진정, 진정해라! 원하는 걸 말해라. 원하는 걸…."

그리고, 나는 마침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의 다리를 그대로 걷어찼다.

푸콱!

"…! 크아아아아악!"

무형검이 깃든 내 발차기에, 놈의 양다리가 그대로 잘려 나갔다.

놈은 그대로 벌러덩 넘어져,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악! 나, 날 고문할 생각이냐?"

녀석은 억지로 웃음을 가장하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촤륵, 촤르륵….

저 바퀴벌레 같은 재생력은.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놈의 다리를 천천히 재생시키고 있었다.

"크, 크흐. 소, 소용 없다. 봐서 알겠지만, 몸이 폭사하는 정도로는 죽지도 않아…! 말했지 않으냐! 서휼의 삼 초를 맞고도 살았다고! 그 정도 고통은 혈마진해광에 수록된 감각 차단만 사용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부웅!

나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내 손 안쪽으로, 반투명한 붉은 깃발이 들렸다.

오행혈주번.

상대에게 금제를 박아 넣거나, 고문을 할 때에 사용되는, 고통의 깃발.

오행혈주번을 본 원립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혈주번의 술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나도, 나도 오행혈주번을 익혔다. 오행혈주번으로 나를 고문하거나 금제를 걸 생각이라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나는 혈주번에 영향을 받지 않아. 우리, 이렇게 비효율적인 대화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를 해 보는 게…."

즈우웅!

내 손에 들린 오행혈주번에, 음혼귀주문이 깃들기 시작했다.

깨알 같은 저주문이, 오행혈주번을 오염시켰다.

얼마 후, 오행혈주번은 핏빛 깃발이 아닌, 시커먼 어둠의 깃발로 변해 버렸다.

음혼귀주문의 고통을 관장하는 저주문에 겹쳐, 오행혈주번의 고통을 관장하는 부분의 법술을 엮어, 완전히 새로운 법술을 창조해 낸 것이었다.

음혼귀주문으로, 고통에 대한 이해가 극한까지 숙련된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흑색귀주번(黑色鬼呪幡)."

나는, 새로 만든 깃발의 이름을 정했다.

그리고, 당황하는 원립을 내려다보며, 막 재생된 원립의 다리에.

그대로 흑색귀주번을 내리꽂았다.

"…!!!"

원립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놈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하얗게 물들었다.

고통을 차단시킬 수 있네 뭐네 했던 말은, 저주문 같은 법술의 고통은 통용되지 않는 모양.

나는 다시금 흑색귀주번을 소환했다.

"오행혈주번은 안 통한다만… 이건 썩 괜찮은가?"

"…! …! …!"

"만족스럽나 보군."

푸콱!

나는 놈의 다른 쪽 다리에, 그대로 다시 한번 흑색귀주번을 박아넣었다.

놈의 두 다리는 흑색귀주번에 꽂혀, 그대로 고정되었다.

원립은 피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 쓰러져 꿈틀대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몇 개만 더 박고 끝내 주마."

꿈틀!

원립은, 눈을 까뒤집고 피거품을 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퍼벙!

녀석은 결인을 맺어, 그대로 제 다리를 폭발시키고는, 그 폭발력으로 멀리 떨어져 나가 버렸다.

하지만, 정말 멀리 가지 못했다.

기껏해야 몇 보?

웃긴 일이었지만, 딱히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흑색귀주번 몇 개만 박아넣고, 심한 고문은 별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에 검은 깃발을 들고 녀석에게 걸어갔다.

두 다리가 잘린 녀석은, 양손으로 비척비척 기어가며 내게서 벗어나려 갖은 애를 썼다.

정순지력도 거의 바닥난 모양인지, 놈의 재생은 아까보다도 더뎠다.

"그냥, 네 남은 금단을 으스러뜨리고. 사지를 뽑아 동서남북에 던져놓은 후. 남은 몸을 발기발기 찢어발긴 후."

철퍽, 철퍽!

놈은 내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며, 그렇게 기어 나갔다.

"머리통을 남겨 놓고, 네 남은 원영 조각도 전부 흩어놓을 뿐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말한 것 이상의 고문은 하지 않고 보내 주마."

철퍽, 철퍽….

나는, 양손으로 기어서 도망치는 녀석을 향해, 흑색귀주번을 치켜들었다.

푸콱!

"…!"

놈의 허벅지에 흑색귀주번을 박았다.

이어, 나는 녀석의 하반신 곳곳에 흑색의 깃발을 꽂아 넣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도록.

"금단 조각이… 어디쯤에 있으려나…."

나는 흑색귀주번으로 놈의 금단이 있을 법한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외쳤다.

"사, 살려, 살려 주십시오! 혈노, 혈노의 법술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저를 노예로 부리셔도 됩니다. 혈마진해광, 혈쇄수림결, 이 성과 관련된 모든 것. 봉명인에 대한 것. 전부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문, 고문을 하실지언정 제발 살려 주십시오…!"

"…."

"주, 죽이지 않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이, 이건 어떻습니까?"

녀석이, 자신의 얼굴에 반쯤 남아 있는, 검은 가면을 마구 주물렀다.

그리고, 녀석의 체형이 약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놈이 제 얼굴에서 손을 떼자.

녀석은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원립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변하였다.

"이, 이 혈체는 남녀가 뒤섞인 몸인지라. 어느 쪽도 가능합니다. 원하신다면 봉사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

"어떤 아름다움이든 전부 구현이 가능합니다. 성숙한 걸 좋아하십니까? 조금 어린 쪽을 좋아하십니까? 제발, 제발 봉사하게 해 주십시오…! 사, 살고 싶습니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의 앞으로 다가가,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말했다.

"사람을 갈아서 얻은 아름다움 따위, 관심 없다."

"제, 제발… 이, 이건 어떠십니까."

꿈틀.

녀석이, 익숙한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같이 있었던 여자를 잊지 못하신다면… 그 얼굴로도 봉사를…."

나는, 놈의 머리카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놈이 완전히 그녀의 얼굴로 변하기 전.

그대로 놈의 상반신을 걷어찼다.

푸콱!

놈의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촤륵, 촤르륵….

녀석은 마지막 재생력을 쥐어짜 내, 상반신을 느릿하게 재생해 갔다.

나는 얼굴을 재생해 가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입을 닥쳐라. 한 번만 더 그 구역질 나는 입을 열면, 턱을 뽑아 버리겠다."

"으, 읍…."

꿈틀, 꿈틀….

녀석은 내가 대로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을 바꿨다.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완전한 무면(無面).

그것이 원립이란 녀석의, 진짜 얼굴이었다.

남자도, 여자도, 사람도 아닌.

그저 더러운 마두인, 그 녀석의 본질 그 자체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말했듯이, 너를 고문하지 않겠다. 나는…."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얼굴이 없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지금 축복을 주려고 하는 거다."

푸콱, 푸콱!

녀석의 양팔 역시 흑색귀주번을 박아 고정시키며,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삶을 완결지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나는 지금 네게, 그런 과분한 축복을 주려 하는 것이다."

"으, 으으…."

놈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내가 입을 열면 턱을 뽑아 버린다고 엄포를 놓은 탓인지.

얼굴을 꿈틀거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너도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힘들었겠지. 다 잊어버리게 해 주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거다…."

푸콱!

내가, 마지막 흑색귀주번을 녀석의 단전 조각이 있는 곳에 완전히 박아 넣었을 때였다.

쩌어억!

무면인 녀석의 얼굴에, 입만이 돋아났다.

원립은, 입만이 생겨난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쳤다.

"그게! 뭐가 축복이란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나는 살고 싶다! 주, 죽기 싫어! 죽기 싫단 말이야!"

나는 말없이, 놈의 사지를 차례대로 뜯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사지가 뜯기면서도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제발, 차라리 고문을 해 다오! 아니, 고문을 해 주십시오! 사, 살려 줘! 고문을 하고 날 범할지언정 제발 살려만, 살려만 달란 말이다! 왜, 왜 죽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물론 나도 너를 고문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 한시라도 빨리, 네 죽음을 바라는 원혼들이… 몇 명이나 될지…. 네게 원통하게 죽은 수많은 이들이, 황천에서 네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이상 시간을 끌 순 없다.

놈의 양팔을 뜯어, 남쪽과 북쪽에 던졌다.

"죽기 싫다! 흐아아! 죽으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그냥 끝이라고! 죽음이 축복이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도 많은 이들에게 축복을 내린 거 아니냐! 말을 해 봐라, 이 미치광이야! 죽음이 축복이라면, 삶은 무슨 저주란 말이냐?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 네가 말하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뭐냐!"

놈의 다리를 뜯어, 동쪽과 서쪽에 던졌다.

"축복과 저주의 차이가 뭐냔 말이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축복을 내렸을 뿐이야! 왜 내가 저주를 흩뿌리고 다닌 악인인 것처럼 나를 벌한답시고 이러느냐! 웃기지 마라! 너는 그냥 나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야!"

촤락, 촤락, 촤락!

녀석의 몸을, 조금씩 찢기 시작했다.

"나를 죽이는 게 자비인 것처럼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제발, 제발 나를 살려 줘! 아니, 죄송합니다."

몸이 점차 없어지자, 공포가 극대화되는 것인지.

원립은 더더욱 크게 비명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 그러지 마십시오. 그만, 그만해! 그만해 주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촤락!

놈의 육신이 전부 찢겨 나갔고.

[살 거야! 살 거….]

육신에 숨어 있던, 이제는 거의 조각이 나, 흩어지기 직전의 놈의 원영이 나타나.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촤악!

손에서 뻗어 나간 무형검이, 그대로 원립의 원영에 적중했다.

파츠스스….

녀석의 원영은, 그대로 흩어졌다.

나는 원립의 수급을 들었다.

얼굴이 없이, 비명을 지르던 입만이 돋아난.

흉측하고 기이한 수급.

나는, 원립이 입던 붉은 혈포를 끌어와 놈의 머리를 싸맸다.

저벅, 저벅….

나는 천천히.

잔해들을 헤치고 나갔다.

"서, 수사…."

잔해들의 너머에는, 부상을 수습하고 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원립의 수급이 담긴 혈포를 들어 보였다.

그들의 눈에, 희색이 돌았다.

"드디어… 그 노괴를…!"

청문중진의 안색에, 복잡한 표정이 감돌았다.

안도감, 성취감, 복수심, 아쉬움….

무어라, 내가 형언할 수 있는 감정들은 아니었다.

결단기 수도자들 중, 몸이 성한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전부 몸이 잘리거나, 축난 상황.

"일단… 서 수사. 우리는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이곳에서 몇 주간 기력을 회복해야 할 것 같네."

청문중진이 내게 말했다.

청문중진은 물론이었고, 배신자 세력들.

막리황천을 비롯해, 살아남은 벽천기, 북방, 동방의 수도자들.

그들은 현재, 서란이 불러모은 귀혼들에 의해 제압당해 포박당한 상태였다.

몸 상태로만 따지면, 현재 그의 상태가 가장 좋았다.

물론….

뚝, 뚝….

감정 상태는, 그가 가장 힘든 듯했지만.

서란은, 섭명함의 잔해.

송진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었던 조타륜을 꼭 잡고, 혼이 나간 표정으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이에게, 나는 함부로 위로를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 옆에 서서.

한참을 그와 함께 송진을 묵념해 주었다.

뚝… 뚝….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서란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생전에도… 아니, 생전에도란 말이 웃기긴 하지만… 아직 남아 계실 때에… 스승님은 줄곧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고…."

"…."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너무, 갑작스럽군요."

"…."

"…그래도, 스승님께서 제 이런 모습을 보시면… 대로하시며 당장 일어나라고 하시겠지요."

서란은 눈물을 닦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겠지만. 앞으로 계속, 스승님이 전수해 주신 공법을 수련해 나갈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비승해서… 용왕께 물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나보다 강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눈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의 뒤편에 있는 슬픔을 볼 수 있었다.

"제 몸 상태가 가장 멀쩡하니,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지금…."

"서 도우."

나는 서란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오. 송진을… 추모해 주시오."

"…."

잠시 말이 없던 서란은,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말씀대로… 이곳에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오."

나는 서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런 후, 나는 아직도 하늘에 떠 있는 봉명성을 바라보았다.

타앗!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짜내, 땅을 박차 봉명성으로 올라갔다.

봉명성은 도대체 무슨 힘으로 구동되는 건지, 아직도 허공에 떠 있었으며.

심지어, 아주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복원되고 있기까지 했다.

나는 잠시 이 기이한 성을 쳐다보고는, 봉명성의 잔해를 뒤졌다.

얼마 후, 나는 벽문성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땅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나는 청문중진에게 벽문성의 유해를 건넸다.

"부디, 잘 수습해 주시오."

"…알겠소."

청문중진과 남은 결단기 수도자들은, 남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는 중이었다.

나는 벽문성의 품속에, 유리 조각을 넣어 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서… 수사?"

성제국 6가 중 하나.

준씨세가의 가주가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서 수사가, 노괴를 사냥하셨지요?"

"맞소."

"지금 우리가 돌아다니며 확인한 바, 노괴의 성의 지하에 엄청난 영약과 영석, 법보들과 재물들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노괴를 사냥하는 데에 공이 가장 큰 서 수사가 선택권을 가지는 것이…."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필요 없소."

"아…!"

어느새 내 주변으로 몰린 결단기 수도자들의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

"아, 그러면 혹시 말입니다."

준씨세가 가주가, 은근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는, 원립의 발기발기 찢어진 사체 조각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저, 원영기 수도자의 남은 육신에도 흥미가 없으십니까? 저걸로 단약을 만들어 먹으면 굉장한 효과가 있을 것이고… 또 원영기 수도자의 육신을 연구만 해도, 원영기에 도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데… 혹여 저것도…."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원립의 수급만 있으면 되오. 다른 건 다 필요 없소."

"아, 알겠습니다. 수급쯤이야 서 수사의 공이니 얼마든지 가져가셔도 되지요. 하하, 그러면… 노괴의 육신은 저희가 가져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은 내 눈치를 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들개 무리처럼 원립의 시신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개 떼에게 원립의 시신을 던져 준 후.

그렇게 사막을 걸어, 천색성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뜨겁다.

덥다.

남은 법력은 이제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였고.

금단도, 경맥도.

언제든지 무형검을 풀면 그대로 무너질 상태였다.

저벅, 저벅….

나는 비척거리며, 사막을 걸었다.

타앗!

가끔 그러다가 기운이 나는 듯하면, 무형검의 힘에 힘입어, 몇백 장씩을 그대로 날아갔지만.

기력이 다하면 그대로 다시 땅으로 떨어져, 사막을 걷기를 반복했다.

서란에게 부탁했으면 빨리 천색성에 도착했겠지만.

소중한 이를 잃은 이의 추모 시간을 뺏을 수는 없었다.

나는 허리춤에는 무색유리검을, 한 손에는 원립의 수급을 들고.

그렇게, 천색성을 향했다.

멀다.

그리고 넓다.

"허억…."

나는 뜨거운 사막의 열기에, 그대로 비틀거렸다.

푸확!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흑색귀주번을 소환하여 땅에 박았다.

얄궂지만, 음혼귀주문의 힘은 상당히 많이 솟아나고 있었다.

다만 음혼귀주문의 특성상, 치유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고, 공력으로 돌려도 그 특유의 음습한 독기가 남아 있었기에, 내 몸 상태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지금껏 꺼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더 살 생각도 없고.'

저주인형을 몇 개 더 만들어, 부상을 떠넘길 수준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음이 이미 찾아왔는데 월도답천의 경지로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을 써, 날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비둔술은 금단의 힘을 빌리는 법술이었고, 내 금단에 조금의 충격이라도 더 가해지면, 무형검으로 억지로 붙들어 맸든 안 맸든 금단이 박살 날 것 같았으니까.

'뭐, 지팡이로는 쓸 만하군.'

푸욱!

나는 흑색귀주번을 소환해 내, 땅에 박고, 힘겹게 다음 걸음을 디디며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자, 내가 지나온 길에는 수 개의 검은 깃발들이 사막에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본디 저주문도, 혈주번도.

가만히 놓아두면 저절로 사라지는 속성이 있는 법술들이었다.

혈주번의 경우에는 상단전에 꽂아넣을 경우 금제가 되어 반영구적으로 남지만.

저렇게 바깥에 꺼내 두면 그대로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내 진득한 고통이, 너무나 철철 넘쳐흐르는 이 고통이.

흑색귀주번들을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남아 있게 했다.

'얼마나 지속되려나.'

어쩌면, 내가 죽은 후에야 사라질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검은 깃발들을 돌아보다, 다시 흑색귀주번을 소환해, 힘겹게 발을 디뎠다.

그러다가 조금 기력이 돋으면, 다시 무형검의 힘으로 날기를 반복하고.

다시 기력이 떨어지면 비척거리며, 흑색귀주번을 사막에 꽂으며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 * *

얼마나, 왔더라.

지금이 한 달째인가.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원립과 싸울 때보다, 어째 지금이 더 힘들었다.

내리쬐는 햇볕.

버썩 마르는 입 안.

고통을 호소하는 전신.

무형검만 풀어 버리면 편해질 수 있다는 얄팍한 죽음에 대한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외롭군.'

말 그대로, 사막에 홀로 떨어져 천천히 천색성을 찾아가는 나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에 빠져 있었다.

푸콱!

흑색귀주번을 다시 땅에 박아 넣었다.

최근, 귀주번에 다시금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깃발이 있는 부분이, 깃발이 아닌, 커다란 혹 덩이처럼 축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이전보다 더더욱 흉측한 모습이었고, 생김새만으로도 어떠한 악의가 풍기는 것이 보였다.

푸콱!

나는, 내가 고통스러워짐에 따라, 더더욱 흉측해지고, 더더욱 기이해지는, 이 혹 덩이가 달린 막대기를 사막에 꽂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갔다.

'향화… 선자.'

맞습니다.

분명 이 삶은 덧없지 않고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의미도 있으나, 고통 역시 있지 않겠습니까.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과연 살아 있는 것이.

정말로 좋기만 한 것일까요.

'고통…스럽습니다.'

지글지글 익는 이 사막이.

마치 지옥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옥에 고통의 이정표를 찍으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쯤… 도착할까.'

* * *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저벅….

저벅….

푸콱

내가 소환하는 흑색귀주번, 아니, 흑색귀주번이었던 막대기에는.

이제 혹을 넘어, 웬 머리통만 한 덩어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 덩어리는 악의(惡意)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시꺼먼 저주를 온 사방에 퍼뜨릴 듯했다.

이제는, 이 진득한 악의의 덩어리가, 정말 내가 죽어도 사라질지도 의문이었다.

'모르겠군….'

어차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기묘한 악의의 덩어리가 몇 개쯤 더 생긴다 한들.

상관이 있을까?

푸콱!

나는 덩어리가 달린 막대기를 꽂으며, 쓰러지지 않게 몸을 지탱하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파앙!

조금 기력이 돌아왔다.

나는 무형검을 타고 다시 날아갔다.

한참을 날았을 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철퍽!

나는 결국 다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가, 저곳까지 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제, 편히 쉬고 싶다….

푸콱!

나는 막대기를 하나 더 소환해, 땅에 박았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자….'

분명 그들의 영전에.

이 녀석의 머리를 바치겠다고, 그리 맹세했으니….

푸콱, 푸콱, 푸콱….

고통의 이정표를 몇 번이나 찍으며, 비척거리며 걸어갔을까.

어느덧 천색성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깜빡.

'…?'

방금, 뭔가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기분 탓인가?

휘이이이….

모래바람이 불었다.

나는 모래바람 사이로, 내 앞에 있던, 누군가의 발자국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발자국…?'

누군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휘이이이!

찬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저 멀리.

천색성의 방향에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은 주변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사방 곳곳에 비를 뿌렸다.

쏴아아아아―

사막에, 비가 내렸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입을 열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왜, 비가 내리는 거지…?'

비가 내릴 천기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여우비였다.

내가 비척거리며 걸어갈 때였다.

'음…?'

분명.

폐허여야 할 천색성의 터에.

새하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어…."

탁, 탁, 탁탁탁탁!

나는, 사막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천색성에 도달한 나는,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희뿌연 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립에게 학살당했던, 천색성에서 죽었던 모든 이들.

북중호와 청문령이, 빗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원립의 머리를 내려놓았다.

덜, 덜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원립의 수급에 저주문으로 음화(陰火)를 붙였다.

시커먼 음화는 빗물 속에서도 원립의 머리를 지글지글 불태웠다.

드디어, 해냈다.

'이제, 편해질 수… 있는… 건가?'

그때, 청문령이 한 곳을 가리켰다.

나는, 쓰러지려던 육신을 부여잡았다.

청문령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청문령이 가리킨 곳.

북향화의 공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가 밟아온 것 (17)

나는 멍한 표정으로, 성내를 걸었다.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어쩐지 기분이 좋게 들렸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걸어간 길 끝에는.

꿈에도 그렸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떠 있다고 해야 하나.

"향…화…."

나는, 잔뜩 말라붙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휘몰아쳤다.

"어떻…게…?"

문득, 나는 어떠한 시선이 느껴져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떻게는요. 원귀가 되어서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분명… 그때…."

그녀의 영체가 하늘로 올라가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문득, 그녀는 내가 쳐다보았던 곳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

맞다.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살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로 마음이 통했다.

나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단박에 눈치했다.

[연도성에서 같이 추고 싶었는데, 결국 여기서 추게 되네요.]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허리춤에 찬 무색유리검을 들어, 온 힘을 짜내 법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무색유리검들은, 본디 천색성에 사는 사람들의 묘비로 만든 것.

내 의지에 따라, 삼천 자루의 유리검들은 다시 각자의 무덤이 있던 자리로 가 꽂혔다.

나는 그런 후, 그녀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웃었다.

부채는 서로 없었기에, 우리는 부채를 쥔 시늉을 하고, 자세를 잡았다.

악기 소리는 없었지만,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사위를 추었다.

우리는 서로 천천히 합을 맞추기 시작했다.

서로의 손에는 부채가 없었기에, 둘의 손끝이 스쳤다.

나는 왼쪽으로 세 번의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이 움직이며 한 바퀴를 돌고, 다시 한번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산 망인(亡人)과 죽은 망인(亡人)은 빗속에서 천천히, 유리검들이 꽂힌 묘지 사이를 돌았다.

쏴아아아아―

우리를 지켜보던, 뭇 영혼들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씩 빛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 갔다.

청문령도, 북중호도.

김영훈을 제외한 무수한 벗들과 이웃들의 얼굴이 보였다.

영혼들이 사라질수록, 비가 점차 그치며, 하늘의 구름 역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의 축제에서 했던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무명천은 없었기에, 내 손끝은 그녀의 얼굴을 살짝 스쳤다.

다시금 서로의 손끝이 스쳤다.

하늘의 빛깔은 자색이었다.

노을이 저물고 있었고, 밤하늘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중이었다.

우리는 다시금 오른쪽으로 세 번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우리의 손끝이 몇 번이나 스쳤고, 우리는 마침내.

우리가 원래 서 있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뚝, 뚝….

눈물이 나왔다.

놀랍게도, 200년간 떨어뜨렸던 검은 눈물이 아니었다.

나는 200년 만에,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향화를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다음 생이 시작되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냥 무작정 자살할지도 몰랐다.

"그냥… 죽고 싶습니다."

하늘에게, 무릎 꿇고.

두 손을 싹싹 빌며 간청하고 싶다.

제발, 제발 나를 죽여 달라고.

이젠, 정말로 죽고 싶다고.

'이 생에 죽는다면, 황천에서 만날 수라도 있지 않나.'

하지만 내겐 죽음 이후는 허락되지 않는다.

황천에 도달하려는 순간, 나는 다음 생으로 가 버리니까.

그저, 그녀의 앞이었기에.

가까스로 그리 오열하며 빌고 싶은 것을 참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뺨을 양 손으로 살짝 누르며 말했다.

[안 돼요.]

"향화… 당신 없는 세상은, 저주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저주란 말입니다."

[그럼, 저와 함께했던 순간도, 저주인가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입술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제가 남겨 둔 것들도, 저주나 고통이었나요?]

그녀가 무색유리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리고.

그녀가 눈을 감고, 내게 입술을 가져왔다.

그녀가,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차갑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그녀의 입술을 잠시 가만히 느꼈다.

얼마 후, 내게서 떨어진 그녀가 물었다.

[제가 당신에게, 방금 드린 것도 저주였나요?]

"…아닙…니다."

향화는, 나를 껴안았다.

[제가 원귀가 됐든지, 누가 명계의 문을 열어 줬든지. 어쨌든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는 단 하나예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나는 200년 동안 가슴 속에 묵혀져 있던 뭔가가, 새하얗게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직접 남기지 못한 게, 제 가슴에 맺힌 한(恨)이었어요.]

나 역시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응어리졌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듯 기이하다.

응어리졌던 한 마디를 내뱉고, 연분홍빛 의념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던 중.

나는 그 무수한 변화를 읽으며, 음혼귀주문의 숨겨진 면을 깨달았다.

어쩌면, 창시자도 몰랐을 이 너머의 경지.

아니, 오히려 창시자를 한참이나 뛰어넘은 나였기에 발견한 경지.

파아아앗!

내 몸 곳곳에 맺혀 있던, 시커먼 저주문들이, 반전(反轉)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삶이 곧 고통이고 저주일지언정.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고, 통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가없는 축복이 아닐까.

시커먼 저주문들이, 일제히 반전되며 숨겨진 면을 드러내었다.

* * *

"음…?"

원립이 사망한 흑색성.

그곳에 있는 잔해들을 뒤지며, 아직까지도 원립이 숨겨 놓은 재물들을 뒤적이던 결단기 수도자들.

"원영기 노괴의 집안은 뒤져도 뒤져도 뭐가 계속 나오는군."

"죽을 뻔했지만, 확실히… 그런데, 서란 수사는 어디 가셨소?"

수도자 중 한명이, 서란을 찾았다.

"음, 모르겠군. 어딘가로 황급히 날아가던데? 뭔가 발견했나 보더만… 도대체 무슨 보물을 발견했길래, 계속 텅 빈 표정을 하고 있던 그자가 그리 미친 듯이 날아갔던 건지."

"그거 궁금하군… 뭐, 사실 상관은 없소. 어차피 우리도 챙길 만큼 챙겼으니까."

그렇게 두런거리며, 원립의 처소를 뒤지던 이들 중 한명이, 무언가 이변을 감지했다.

"음? 잠깐, 저건…?"

서은현이 원립의 몸을 고정할 때에 썼던 흑색귀주번.

흑색귀주번의 곳곳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 * *

서은현이 사막 곳곳에 꽂아두고, 버리고 갔던 시커먼 덩어리가 매달린 막대기들.

그 막대기들에 달린 덩어리의 끝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아앗!

덩어리가 터져 나가며, 꽃봉오리와 같이 개화(開花)하였다.

개화한 꽃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지고 있었다.

파앗, 파앗, 파앗!

서은현이 밟아온 길을 따라, 사막에 수백 개의 백목련들이 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했다.

* * *

파아아앗!

나는 내 몸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주술문들을 보며, 웃었다.

사방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축문(祝文)들은 저주문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것이 느껴졌다.

[이것 봐요, 살아 있으니까 새 공법도 창시하셨네요.]

"그저 음혼귀주문을, 당신과 함께했던 마음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에이, 완전히 다른 공법이잖아요.]

우리 둘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웃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단 하나도 어색하거나 하지 않다.

[한 공법의 조사께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공법의 이름은 소녀가 지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시지요."

그녀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축문에 손을 가져가며 떠받쳤다.

어쩐지 새하얀 축문은, 백목련의 형태로 승화하고 있는 듯했다.

[백란축성문(白蘭祝聖文). 괜찮으실까요?]

나는 그녀의 손 아래에 내 손을 받치며 말했다.

"기억하겠습니다."

잠시 축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걸 보던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혼백이, 점차 더더욱 투명해지며,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저도 잊지 않을게요.]

"…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나는 저물대를 열었다.

예전 서란의 서고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상계의 선사들은, 부부의 연을 맺을 때에 이리한다고 하더군요."

마침, 백홍주 한 병이 저물대에 남아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허공으로 점차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저물대를 뒤적였다.

술잔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백홍주의 절반은 그녀의 묘 앞에 붓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나는 남은 백홍주 절반을, 그녀의 앞에서 마셨다.

우웅!

박살이 나기 직전인 금단에, 백홍주가 들어오자 백홍주의 효과가 발동하며 다시금 법보와의 연계가 생겼다.

우우웅!

사방에 꽂힌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진동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영체는 작은 빛무리가 되어, 완전히 형체를 잃고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빛무리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며, 빙글빙글 허공을 돌았다.

마치, 누군가와 다시금 쌍선무를 추기라도 하는 듯.

어쩌면 살아 있던 그 시절의 기억과, 그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과, 춤사위를 추는지도 몰랐다.

나는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제, 힘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그녀의 노리개를 빼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단화(丹火)로 노리개를 달궈, 노리개를 법보화시켰다.

나는 눈을 감고, 노리개를 소중히,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백홍주의 약력이 남은 것인지, 노리개 역시 나와 강한 연계가 생기는 것이 느껴졌다.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원립이 마지막에 발악하며 외쳤던 말들이 떠올랐다.

'축복과 저주의 차이가 무엇이냐… 라.'

축복과 저주는 생과 사로 나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 이어진다면, 그것이 곧 축복이고.

사람의 마음이 끊어진다면, 그것이 곧 저주가 아닐지.

이번 생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옥의 끝에서 마음을 나누며.

어쩌면 지옥과 천국은.

저주와 축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이어지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 깨달음을 얻으며, 원립의 마지막 절규에서 벗어났다.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그 마음을 전달해 주셔서."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전신의 힘을 완전히 뺐다.

진즉 무너졌어야 할 경맥과, 금단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지옥의 끝자락에서, 평안하게 눈을 감았다.

* * *

우우웅!

서은현이 눈을 감고, 사방으로 흩뿌려졌던 무색유리검들이, 하나하나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인과 강력한 연계가 생긴 무색유리검들이, 천천히.

하나하나씩,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웃으며 죽은 서은현의 금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자루씩 날아와 그의 몸에 꽂히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서은현의 손에 들린 노리개와, 삼천 자루의 무색유리검들이, 일제히 환한 빛을 내뿜었다.

* * *

북향화의 어머니.

북중호의 아내, 연의 묘소.

그곳에 있는 목련나무 앞으로, 두 개의 나무가 커 있었다.

200년의 세월 동안, 어떻게 죽지 않고 커 간 두 나무는, 마침 우연하게도 같은 날 꽃이 피었다.

모과나무와 백목련.

두 꽃나무에서, 각각 한 송이의 꽃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꽃나무의 꽃은, 200년 전 누군가 준비해 놓은 혼례식의 단(壇) 위에 내려앉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휘이이이이!

묘소 안쪽으로 불어온 바람에, 모과꽃은 묘소 바깥, 사막의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백목련은 그 자리에 남아 자리를 지켰고, 모과꽃만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한 번째 회귀(回歸)였다.

11회차의 첫날

깜빡.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태까지와 달리, 그 어떤 때보다 평안한 죽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쓰라린 죽음이기도 했다.

주륵….

나는 눈물이 나왔으나, 한 번 눈물을 닦고는 정신을 차렸다.

삶의 마지막에서,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느꼈다.

그녀는, 내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삶을 계속 살아가며, 슬퍼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무너뜨릴 정도로 괴로워하지는 말자.

그녀가, 슬퍼할 테니까.

나는 그렇게 결심하며, 수결을 맺었다.

의식 영역이 파동치며, 일어나려는 동료들을 잠재웠다.

익숙한 두통이 생기려는 듯했지만.

우웅!

나는 머릿속에 들어 있는, 오행혈주번을 통해 의식을 바로 억눌렀다.

급하게 의식을 쪼개거나 영약을 먹을 필요가 없으니, 상당히 편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욱신!

"…!?"

나는 비틀거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이건 또 무슨….'

머리가 아픈 것이 해결되니, 이제는 배인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배를 부여잡고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배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정확히는, 단전 부근이었다.

'왜 또….'

나는 이를 악문 후, 우선 영약을 찾아가기로 했다.

얼마 후, 나는 삼을 먹고 빠르게 환골탈태를 한 후, 빠르게 내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단을 만들고 나서야 배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잦아든 것이 느껴졌다.

'도대체,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갑작스레, 내단 부근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이건…?'

나는, 내단에서 느껴지는, 그 익숙한 기운에,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그리고, 나는 우선 내단에서 강기를 뿜어내어 정순지력으로 제련한 후, 약식으로 수결을 맺었다.

촤라라락!

그리고.

파아아앗!

내 주변으로.

삼천 개의 익숙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법보(法寶) 무색유리검(無色琉璃劍).

향화가 내게 만들어 준 내 전용 법보가, 시간을 넘어서 나를 따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포옹!

무색유리검이 나온 후, 마지막으로 비췻빛의 노리개 역시,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을 닦았다.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지 말자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인데.

또다시 추하게 질질 짜고 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전승… 되었어…."

사람의 인연이.

시간을 넘어, 전해졌다.

그녀와 지냈던 시간들.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나는 시간을 함께 넘어갈 수 있는 동지를 얻었다.

* * *

얼마간, 실컷 무색유리검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은 후.

나는 고민을 해 보았다.

'어떻게, 나를 따라온 거지?'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내가 단화로 제련한 본명법보라서 나를 따라온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뭔가가 더 있는가.

그리고 특별한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고민해 보다가, 한 가지에 생각이 닿았다.

'백홍주.'

선주(仙酒)라고 불리는 백홍주.

나는 백홍주의 능력을 떠올렸다.

'분명, 법보와의 연계를 강화시키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를 잘 생각해 보았다.

분명 백홍주를 처음 마셨을 때.

긴박한 상황이었어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

'영혼 그 자체와 법보와 연결되는 듯한 일체감이 들었지….'

단순히 연계가 강화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백홍주로 인해, 일순간 내 혼백과 법보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혼백이 시간을 역행함에 따라, 법보 역시 나를 따라온 건가?'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되었다.

단순히 본명법보만이 나를 따라왔다 하기엔, 북향화의 노리개는 마지막에서야 단화로 법보화를 시켰었다.

'백홍주가, 법보가 내 회귀를 따라오도록 도운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이번 생에, 백홍주를 다시 얻어 시험해 보자.

그리고 만약 어쩌면….

가능하다면….

'법보뿐이 아니라….'

타인의 혼백까지 나와 함께 회귀하는 게 가능하다면…!

만약 그리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발견일 수도 있었다.

'그래, 추후에 다시 봉명성에 가서 백홍주를 얻어 보고 확인해 보자.'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난 생의 깨달음을, 재현해 볼까.'

우우웅!

정신을 집중하고, 강환들을 띄워 올렸다.

총 아홉 개의 강환.

아니… 내단까지 합쳐.

열 개의 강환이다.

우우웅!

허공에 있던 강환이 의식 영역에 녹아들어 가고, 단전에 있는 강환이 똑같이 녹아내리며 체외의 무형검과 연결된다.

그리고, 체내의 내단과 연결된 무형검이, 다시금 내 전신 곳곳에 깃들기 시작했다.

다시금 그 기분이 내 전신을 장악했다.

근섬유 한 올 한 올에 무형검이 깃드는 기분.

이건 마치….

'마치, 축기기 수도자가… 아닌가?'

축기기 수도자는 혈관에 강기가 흐르는 것처럼, 이 영역에 이른 무인은 전신에 월도입천의 깨달음이 깃들어 흐른다.

그리고 그 말인즉.

'어쩌면, 월도답천의 경지부터는, 무인 역시 수명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연기기 칠성제의를 치르지 않아, 내 수명을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나는 그럴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우선 답천경에 이르며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크르르르….

익숙한 녀석이 나타났다.

"그래, 나올 줄 알았다."

여우는 나와 또다시 익숙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세 번에 걸쳐서, 기어코 나를 잡아먹겠다는 여우를 보며, 나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정 그렇다면, 일단 답천경의 공능은 너로 시험해 보도록 하마."

"…?"

그리고.

콰아아앙!

나는 여우에게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렸다.

"케에엑!"

여우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월도답천의 공능, 첫 번째.

육신이 완전히 월도입천과 동기화되었기에, 신체 어느 부위로 공격을 가해도 무형검을 사용한 것과 똑같은 흔적이 남는다.

첫 돌격에서 나와의 차이를 깨달았는지, 기세가 죽은 듯한 모습.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육신이 완전히 무형검과 동기화되었으나, 무형검을 원래 휘두르던 대로 휘두르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했다.

놈은 두 번째 일격을 맞자, 꼬리가 상당히 처져 있었다.

답천의 공능 두 번째.

기본적인 공방의 능력이 훨씬 좋아졌다. 열 개의 강환을 모조리 써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생명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탓인지.

훨씬 더 무형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의 한계치가 높아진 듯했다.

거기에, 무형검을 늘 잡고 있어야만 가속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이제 그냥 있어도 무형검과 하나였기에 가속이 가능했다.

거기에 가속 역시 단순한 10배를 넘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가속이 가능했다.

콰아앙!

극속으로 달려들어 녀석을 후려치자, 이제 여우는 내게 완전히 반응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두려운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녀석은 나와의 거리를 재더니, 의식 영역을 제 몸과 같이 압축한 상태에서, 더더욱 빠르게 도망쳤다.

답천의 공능 세 번째.

무형검만을 다루던 시절에는, 사실 대부분 허공답보를 통해 날아다녔다. 결단기 수도자들이 갖는 비둔술을 쓰지 못했기에, 장거리 비행이 어려웠고, 허공답보로 비둔술을 멀리 쫓아가기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하지만, 무형검과 완전히 하나가 된 지금은, 마치 비둔술처럼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했다.

쐐애애애액!

콰아앙!

나는 도망치는 여우를 향해, 무형검 그 자체로 화하여 날아들어, 녀석을 메다꽂았다.

녀석의 덩치도 덩치였기에, 지축이 흔들렸다.

놈이 저항하려 했으나, 나는 놈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답천의 공능 마지막.

슈왁!

내 손이 녀석의 가슴 어림에 닿았고, 여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만히 보면 내가 그저 여우의 가슴을 만지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내 손에서 뻗친 무형검이 여우의 거죽을 그대로 통과해, 여우의 요단에 도달해 존재감을 발하는 상황이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영훈 형님이 말한, '강환은 모두 하나, 무와 나는 일체'에 해당하는 깨달음이었다면.

마지막 공능은 나와 그의 차별점이었다.

'영훈 형님은, 공간을 베어 냈다.'

그리고, 김영훈의 능광도를 모사했던 나 역시 일순간이나마 공간을 베어 내는 데에 성공했었다.

그러므로, 능광도가 답천에 도달할 때 가지게 되는 힘은 공간 절단, 혹은 공간 탈출이라고 보는 게 맞는 듯싶었다.

아마 그와 내가 추구하는 게 달랐던 탓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빛을 넘고 싶어 했고, 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

결국 공간을 넘는 능광도라면 정말로 빛을 뛰어넘은 셈이고, 원하는 것만 골라 벨 수 있는 무형검이라면 정말로 모든 한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요, 용서… 해 주십시오."

여우가 몸을 덜덜 떨며 내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

지금 당장이라도, 여우의 몸에 침투한 무형검을 사용해 놈의 요단을 바로 적출해 낼 수 있다.

사실 방금 전까지 몇 번 이 녀석과 씨름한 것은, 그냥 답천경의 공능을 시험해 본 것이었고, 처음부터 1초 안에 여우의 내단을 바로 적출할 수도 있기야 했었다.

난 잠시 여우의 처우에 대해 고민하다가, 여우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됐다, 용서해 주마."

"가, 감사, 감사합니다…!"

녀석은 내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산을 넘어가 버렸다.

여우 녀석에게도 악감정은 남아 있었지만.

지난 삶.

너무나 큰 고통을 받았던지라, 여우 녀석에게 받았던 고통들 정도야, 어느덧 상당수 잊힌 상태였다.

'그리고 한 번 정도 그 꼴을 당했으면 충분하기도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여우에게 팔을 뜯어먹혔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1초도 들이지 않고 놈의 요단을 적출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올랐다.

물론, 월도입천에 이르고 400년 가까이 수련을 한 탓이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의식 법술을 이용해, 김영훈의 머릿속으로 우선 월수궁무록부터 시작하여, 월도답천에 이르는 깨달음의 구결을 전부 불어넣어 주었다.

'진짜 완전히 기억을 전송하는 법술이 있으면 편하겠군.'

지금까지 계속 의식을 통해 김영훈에게 지식을 전달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것은 '기억 전송'이라기보다는 '구결 전송'이라는 말이 더 맞는 술법이었다.

제대로 된 기억을 전달키보다는, 그저 정리된 구결을 전하는 기능이 더 컸다.

그렇게 김영훈에게 완전히 기억을 전송하였을 때였다.

저벅, 저벅….

'답천경에 공능이 하나 더 있긴 하군.'

기다리던 자가,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감지력이 더욱더 민감해졌다. 요족의 지각도, 의념의 흐름도. 전보다 더더욱 선명하고, 자세하게 보여.'

이전이라면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터.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경지가 되니, 알아차리는 것 정도는 허용되는 듯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수도의 후배, 서은현이 괴군 조연 선배님을 뵙습니다."

[호오, 여우와 싸우는 것은 흥미롭게 보았다.]

내가 1초에 여우의 요단을 적출해 버리지 않고, 시끄럽게 싸우며 주의를 끈 이유.

그것은, 바로 괴군을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네놈, 정말 이상한 놈이란 말이지. 원영기 수도자는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결단 중기경 여우를 무슨 장난감 인형처럼 가지고 놀지? 거기다가, 그건 연체지법인가? 의식이 육신을 덮고 있는데… 신기하군, 신기해.]

"수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선배님께 미욱한 재주를 보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허어, 기이하군. 법력은 안 느껴지는데….]

괴군은 이번에는 내 내단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답천에 이른 후, 내단은 무형검에 완전히 녹아 버렸으니까.

나는, 괴군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혹시 한 남녀 이야기를 아십니까?"

[음?]

"성제국의 산간 지역에는… 두 신선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오며, 그들의 의기(義氣)에 의해 구원받은 이들이, 그들의 행적을 기려 위령제를 하나 만들었다 하지요."

움찔.

나는, 나를 쳐다보는 괴군의 눈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희번덕한 눈으로, 어디 계속 해 보라는 듯이.

아마 괴군에 대해 잘못 말하면, 산 채로 잡혀서 그의 괴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내 얘기였다.

"저는, 아주 먼 옛날. 성제국 산간 지역에서 한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나는 괴군에게 회귀에 대한 것을 뺀,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하여, 저는 정인이 유해를 껴안고 맹세했습니다. 놈의 사지를 뽑아 동서남북에 흩뿌리고, 몸을 발기발기 찢어 개 떼에게 뿌려 준 후, 수급을 정인의 영전에 바치겠다고."

[….]

괴군은, 여전히 희번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이 자가 얘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나를 노려보는 것인지 모를 것 같은 눈빛.

하지만 나는 괴군의 의념을 지켜보며 알 수 있었다.

'통했다.'

그리고, 괴군이 입을 열었다.

[그… 놈의 이름이 뭐라고?]

"혈목자 원립. 답천사막… 이 좌표에 흑색의 성에 사는, 실력을 숨기고 있는 원영기 수도자입니다."

[그렇군….]

잘근, 잘근잘근잘근….

그가,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들을 입에 넣고, 마구 잘근거리며 씹기 시작했다.

침이 턱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괴군이, 그 상태에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안내해라.]

11회차의 첫날.

본래는 원격 저주로 조금 도움이나 받을까 해서 괴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

괴군과 함께 원립의 성으로 향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괴군의 손길 (1)

휘이이이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괴군과 함께 원립의 성 앞에 도달해 있었다.

'…뭔가 너무 허탈하군.'

송진의 힘을 떠올려 보면.

송진을 살해한 괴군이 이대로 손을 후려치기만 해도, 원립은 저 성 채로 으스러져 박살이 날 터였다.

[저 안에, 저놈이 있다는 거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성 밑에 막대한 원혼이 깔려 있군. 네 말이 헛되지 않아.]

괴군은 웅얼거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마구 잘근거리더니, 저물법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

괴군이 저물법기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돌 인형이었다.

돌하르방 같은, 작은 석상이었다.

그리고, 괴군이 그 석상을 흑색의 성에 집어 던졌을 때였다.

우우우웅!

석상이, 점차 거대해졌다.

점차 부풀어 오르며, 크기를 키우던 석상은.

어느덧 산맥만 하게 거대해졌고, 산맥 크기의 석상이, 조그마한 흑색의 성에게 떨어졌다.

쩌어어어엉!

천지가 울리는 듯하다.

흑색의 성의 방어결계가 작동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고, 석상은 그대로 계속 떨어져, 흑색의 성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성의 가장 윗부분부터가 석상의 밑동에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피 구름이 새어나오며 석상을 막아선다.

[선배님! 어떤 분이신지 모르나, 어찌 이 상서로운 시기에 비승에 참여도 못 한 후배를 괴롭히시나이까!]

그리고, 괴군이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 세계에 받아들여 훌륭한 새사람으로 재탄생시켜 주마. 너는 나쁘지 않은 작품이 될 것이야.]

그 말에, 원립이 질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런, 괴군! 이 미치광이가…!]

[나는 미치광이가 아니다. 나는 예술가다. [그녀]가 내게 그랬어. 나는 예술가이니라.]

괴군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손가락을 잘근거리며 말했고, 원립은 상대가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는지, 안간힘을 다해 피 구름을 불러 괴군의 석상을 막아 내려 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음?]

쿠구구구구구!

저 멀리서, 시퍼런 빛무리가 미친 듯이 이곳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하늘을 굽이치는 강줄기 같아 보이는, 신령스러운 모습을 한 존재.

해룡왕 서휼이었다.

"괴군 노야, 갑자기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어린 후배를 핍박하십니까?"

파아아앗!

나와 괴군의 앞에서 인간형으로 변한 서휼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 푸른빛이 감돌았고, 괴군이 꺼낸 석상이, 허공으로 천천히 들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립이 밑쪽에서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괴군 노야.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시면, 이 상서로운 시기에 이러지 마시고…."

그리고, 괴군은 서휼의 말을 무시하고는 나를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지렁이 같은 놈은 내가 뱀탕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너는 그동안 네 [그녀]의 원수를 갚아라.]

"…예, 감사합니다."

서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이런, 도우는… 특이한 공법을 익힌 것 같은데. 싸움이 아니라 대화로 해결을 하는 것이…."

그리고, 괴군이 눈을 번들거리며 품속에서 자신의 몸만 한 상자를 꺼내 들고, 상자의 뚜껑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가리 닥쳐라, 이 파란 지렁이 놈아. 오늘 네놈으로 뱀술을 담가 그녀와 마시겠다.]

"이런…!"

서휼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피했고, 괴군의 상자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나는 괴군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밑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쿠웅!

'지난번에 박살 내자마자 다시 오는 것 같군….'

기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흑색의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원립.

[자네는 누군가? 혹시 괴군의 지인… 인 건가? 그렇다면 저 분을 조금….]

"흠…."

나는 흑색의 성 안쪽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피 냄새가 진했다.

쿠구구구구!

위쪽에서는 천인기 수도자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듯,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실, 넌 내 원수는 아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이 녀석은 대학살을 일으키기 전이었다.

그러니, 아직 녀석은 내 원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원립을 노려보았다.

곳곳에서 풍겨오는 피 냄새.

그리고 흑색의 성 아래쪽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원혼들.

놈이 수백 년 동안 암약하며 모아 왔다는 장원진력들.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렇지만… 원수가 아니더라도, 네놈은 죽어야 할 놈 같군."

[뭐…?]

나는 무색유리검을 뽑아들었다.

"죽어라."

쩌어엉!

놈이 반응할 틈도 없이, 내가 놈에게 달려들었다.

[크학!]

단순한 몸통박치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녀석의 배에 바로 구멍이 뚫렸다.

[이, 이놈…!]

원립이 보탑 법보를 꺼내고, 다른 법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을 향해 무형검을 늘어뜨려 휘둘렀다.

푸콱!

모든 법보와 방어법술을 무시하고, 무형검이 녀석의 몸을 그대로 갈랐다.

"어…?"

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설명해 주지 않고.

그대로 놈의 몸을 향해 수십 번의 참격을 휘둘렀다.

촤라라락!

놈이 삽시간에 전신이 찢겨 나가며 피 안개가 되었다.

"죽어라."

푸콰과곽!

여우가 내 팔을 뜯어먹었던 것은, 내 안에 단단한 분노로 자리 잡았었다.

때문에 여우를 상대했던 지난 삶에서는, 녀석을 상대하며 분노하고, 크게 날뛰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인 원립에 대한 내 감정은, 증오였다. 분노보다 더욱 더 농축되고, 끈적한 악의.

오히려 더욱 더 밀집되었기에, 내 악의는 여우 때처럼 흥분해서 쉽게 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무형검을 휘두르며, 시종일관 원립의 방어를 뚫고 놈을 회쳤고, 놈의 공격들을 피했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없었다.

촤락!

그저, 법술의 연결 고리가 되는 최중요 부위만 제외하고, 다른 부위는 전부 투과시켜 버린 후 베어 내면 그대로 놈의 법술이 해체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네놈은 뭐냐!]

원립이 당황하며 나를 더더욱 몰아붙였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놈의 법술들을 피했다.

이전과는, 가속할 수 있는 속도의 범위가 달라졌다.

파츠츳!

나는 녀석의 법술들을 피한 후.

그대로 놈에게 접근해, 무형검을 내리그었다.

무형검은 쓸데없는 것들을 베지 않고 투과한 후.

원립의 금단만을 그대로 베어 내 버렸다.

[…!]

놈이 고통에 떨었다.

우우웅!

녀석이 수결을 맺자, 피 구름이 흘러오며 놈의 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베어 낸 금단을 다시 재생하기 시작했다.

하나.

"계속 재생해라."

촤악, 촤라락!

나는 금단이 다시 재생되자, 다시금 무형검을 휘둘러 녀석의 금단을 잘라 냈다.

"몇 번이고 베어 내 주마."

촤락, 촤라락!

"답천사막 인근에 뿌려 둔 혈영들을 찾으러 갈 틈도 없을 거다."

내 말에, 놈은 흠칫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왜 네가 내 혈영들을 알고 있는 거지?]

"알 것 없다."

나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놈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놈…. 그래, 일단 같은 원영기 수도자라 상정하고 대응해 주마…!]

우우웅!

놈이 녀석의 법보와 귀왕들을 불러내었다.

삽시간에 4 대 1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어째….'

왜, 하나도 부담되지 않지?

힘이나 체급의 문제가 아니었다.

적의 의념이, 더더욱 생생히.

더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의식 영역으로 공간이 뒤덮였다고 해도 마찬가지.

그 안쪽에서, 원립의 의도가 훤히 읽히는 것 같다.

부웅, 붕, 붕, 붕!

혈운의 귀왕이 내게 낫을 휘둘렀다.

천, 지, 사방.

여섯 군데에서 귀왕들의 참격이 쇄도한다.

하지만, 나는 잠시 무의 흐름에 몸을 맡긴 후, 그대로 한 점을 향해 돌진했다.

파앙!

전신에 무형검이 깃든 채로, 나는 그렇게 가장 약한 부분의 참격을 박살 내고 뚫고 나왔다.

괴이의 요혼이 내게 달려든다.

녀석이 꼬리 같은 부분으로 나를 휩쓸어 왔다.

분명 맞으면 한 줌 육편이 될 일격.

하나….

'맞을 것 같지가 않군.'

나는 요혼의 공격을 피하고, 다시금 양 옆에서 나를 공격하는 귀왕들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 후.

부웅!

멀리서 법술을 날리는 원립에게 무형검을 날렸다.

원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피하는 듯했으나.

촤라락!

무형검은 다시금 궤적을 변화시키며 원립의 몸을 꿰뚫었다.

[…!]

녀석이 다시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방금의 공격으로 쪼개진 금단에 자신이 모아 온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금단을 회복시켰다.

[그렇군. 네놈, 계위를 넘나드는 공격을 하는구나. 단순히 원하는 것만 베는 게 아니라 계위의 높낮이를 조정하는 것이라면…. 원영기 수도자들에게는 그보다 흉악한 공격이 있을 수 없겠어.]

원립은 씹어뱉듯이 뭐라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딱히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요혼과 귀왕들의 공격을 피하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정말.

아직 대학살을 벌여, 혈영을 회수하기 이전의 녀석은, 정말로 약했다.

200년 후의 그 녀석과 비교하면, 같은 대상이라고 하는 게 미안할 지경.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나를 막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부웅, 부웅!

놈이 내게 은밀한 법술을 날려 보냈다.

월수궁무록도 아닐진데, 상당히 인지하기가 힘든 일격.

하지만, 나는 답천경에 이른 기묘한 감각으로 녀석의 법술을 그대로 잘라 내고, 놈에게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리고, 원립이 움찔거렸다.

[너… 지금, 계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알고 자른 게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자른 거냐?]

놈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은 뭐냐. 뭐냔 말이다! 제길, 저리 가라!]

콰앙, 콰앙, 콰앙!

나는 놈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아직도 순수한 체급으로는 내가 놈보다 약했다.

하지만, 답천경의 공능으로 얻은 무형검의 진정한 힘.

원하는 것을 베는 이 힘 앞에, 녀석의 법술들은 너무나도 쉽게 쪼개졌다.

단단한 부위는 투과하고, 연약하나 주요한 부위들만 파악해 베어 내면 되니까.

아무리 방어를 해도 소용 없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소용 없다.

부웅!

콰강!

내 무형검이 다시금 놈의 금단을 베어 내며 후려쳤고, 놈이 피를 토하며 뒤쪽으로 날아갔다.

[너…! 계위가 뭔지 감도 못 잡는다면 원영기 수도자가 아닐 터! 그런데, 도대체 계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건 뭐냐!]

"한 가지 묻지."

나는 놈의 앞에 다가가며 물었다.

"삶이란, 축복인가. 저주인가."

[뭐…?]

놈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스르릉―

나는 무형검을 놈에게 겨눴다.

"너와 싸우면서, 점차 감을 잡고 있다. 아까부터 금단만을 공격하고 있지만, 감각을 집중하면…."

모든 물리적 방어를 뚫고, 그대로 가장 중요한 부분.

혼(魂)을 베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얼마나 재생하든 상관 없이, 널 죽일 수 있다."

[…!]

200년 후의 원립과.

아니, 대학살 이후의 원립과 비교하면, 너무나.

너무나도 허약하다.

흑색의 성이 성 안쪽에서 결단 대원만이 원영 초기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게 해 준다 할지언정.

'법술의 위력만을 증폭시킬 뿐, 원영을 만들어 주진 않는 것 같군.'

원영을 품었을 때와, 지금의 녀석은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났다.

물론, 어쨌든 본래 원영기 수도자였다는 것이 허언은 아닌 듯.

놈은 내가 무형검에 집중한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

[계위를 극한으로 올렸군. 하하, 말 그대로 영혼도 베어 낼 수 있겠어.]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라."

나는 무표정하게 원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삶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흐, 당연한 걸 묻느냐?]

그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당연히 막대한 축복이지! 이 육신을 얻어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느냐? 삶이 축복이고,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다!]

"…그런가."

지난 생의 원립에게도 제대로 묻고 싶었으나, 분노에 눈이 돌아갔던 상황인지라 제대로 묻지 못하였다.

[왜 그딴 걸 묻는 거지? 너는 거꾸로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냐?]

"…한때 그랬다."

[뭐?]

놈은 나를 미치광이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알았다. 둘 다 아니야."

[…?]

그리고, 원립은 내가 아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삶도 죽음도 축복과 저주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 너를 보며 확신했다. 너는 최소한,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진 않군."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개소리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헛소리를 계속 하게 해서라도, 촌각이라도 더 살고 싶은 게 네 본심이 아니었나?"

[….]

녀석의 가면 뒤쪽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럼 잘 가라. 다시 보고 싶진 않을 거다."

[잠깐! 이, 이 봐. 진정해라. 우선 왜 나를 죽이는지 그것부터 설명해 주지 않겠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네놈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죽인다는 것부터 조금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만….]

"이해라…."

나는 흑색의 성 곳곳에서 나는 비릿한 혈향.

그것의 근원들을 가리켰다.

"너는, 네가 죽여 온 이들의 이해를 바라고 죽여 왔나? 비참하게 남을 짓밟을 생각을 했으면, 자기도 그리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하지 않겠나?"

[잠깐, 잠깐! 이봐. 그래.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나?]

"저들도 너와 아무 사이 아니었겠지."

[그, 그러지 마라! 아, 안 돼! 살려 줘! 죽기 싫다! 제발!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 아느냐? 제발, 제발 날 죽이지 말아라!]

"그걸 아는 놈이 타인의 삶을 도둑질해 왔나?"

나는, 그대로 무형검을 내리쳤다.

[안돼! 안돼! 안돼에에에!]

슈칵!

내 무형검은, 그대로 원립의 머리를 투과해서, 놈의 혼백을 쪼개어 버렸다.

녀석은, 그렇게 혈영조차 회수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파스스스….

원립이 죽자, 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가면 역시 부스러졌다.

원립의 얼굴은, 아무것도 없는 무면이었다.

놈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나.

사람들을 잡아먹고, 육신을 합성해 대며, 제 얼굴조차 잃어버린 이 괴물이, 그 누구와 마음을 이어 보았겠는가.

마음이 없는 일생을 보낸 이자에게, 삶은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이렇게 간절하게 갈구해야 했던 것일까.

'딱히 알고 싶지는 않군.'

난 원립의 수급을 잘라, 흑색의 성 바깥으로 나갔다.

성 바깥에선, 괴군과 서휼.

그리고 서휼 주변으로 이전 생에 보았던 면면들이 포진하고 괴군을 포위하고 있는 중이었다.

"괴군 노야, 진정하시고 말씀을 들어 보시지요."

[닥쳐라, 이 사갈 같은 놈. 나를 막아서지 마라.]

"노야께서…."

그리고, 서휼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했다.

나는 서휼과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고는 원립의 수급을 들어 올렸다.

"…."

싸아아아아―

갑자기, 춥다.

서휼은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마치 심해 속에 알몸으로 던져진 것 같은 추위가 나를 덮쳐 왔다.

'어떤가, 서휼.'

서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놈의 의념과 심상을 읽으며, 그 어떤 때보다 더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괴군 역시, 서휼의 시시각각 변하는 의념을 읽은 것인지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저 놈이 한 짓이 썩 거슬렸나 보구나? 그렇지? 이 사갈 놈아, 또 무슨 흉계를 꾸민 게야? 응?]

잠시 나를 보며 말없이 웃던 서휼은, 괴군을 보며 말했다.

"…별 일은 아닙니다. 그냥, 인족 중에도 좋은 싹수가 보이는 후배가 있으니, 종족을 떠나 수도계의 선배로서 흡족할 따름이지요."

"…?"

나는 서휼의 의념을 읽으며, 그가 의외로 선선히 마음을 정리하는 것을 읽었다.

'왜지?'

원립은 놈한테 중요한 게 아니었나?

내가 고민할 때였다.

파앗!

서휼이, 어느새 순식간에 내 눈앞에 도착해 서 있었다.

'이 자, 방금 공간을 뛰어넘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순간 공간이 열린 것을 인지했다.

서휼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원립은, 한때 본 해룡족의 후기지수 중 한 명을 살해한 마두로, 본왕이 훈계를 했던 자이기도 하네. 하지만 그 저열한 본성을 못 버리고 수많은 학살극을 저지른 모양이니, 자네가 진정 제대로 그를 교육해 주었군."

"…."

이 자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이지?

서휼은 나를 싱긋 웃었다.

"본 왕은 그만 가겠네만. 아무래도 괴군 노야가 자네에게 흥미를 가진 듯하니 조심하게. 괴군 노야는 자신이 흥미를 가진 이를, 자신의 세계에 받아들인다며 생체 괴뢰로 개조하는 미치광이이니…."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 준 서휼은 다시금 허공으로 날아올라, 푸른 둔광과 함께 등선향으로 떠났다.

괴군을 포위했던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 역시, 그를 노려보다가 등선향 쪽으로 향하였다.

지난번에는 등선향에서 힘을 썼던지라, 등선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연행이 되었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답천사막에서 힘을 쓴 탓인지 딱히 그를 나무라는 이가 없었다.

[흐하하, 그나저나 이 성은….]

괴군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가자, 흑색의 성으로 내려와 성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선보(仙寶)의 일종이군. 운명의 인력이 담겨 있어. 어디 보자….]

그는 흑색의 성 이곳저곳을 뜯어보더니, 갑자기 흑색의 성의 한 곳을 무너뜨렸다.

[찾았군. 이게 인력의 근원인가?]

나는 슬쩍 괴군이 무너뜨린 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뭔가 빛나는 돌덩어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괴군이 그것을 흥미롭게 관찰할 때.

나는, 우선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서휼이 마음에 안 드는 자이긴 하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지.'

괴군은 정말로 미친 자였고, 괜히 그의 옆에 붙어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해부당하거나, 꼭두각시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괴군의 곁을 떠나, 무형검을 통해 답천사막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나는 회귀한 지 첫날도 채 되지 않아.

답천사막 대학살의 근원인 원립을 격살하고, 괴군에게서 벗어났다.

그렇게 이번 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다.

[어딜 그렇게 가느냐?]

오싹!

위이이이잉!

마치, 벌의 날개 같은 날개가 달린, 곱사등이 형태의 괴뢰가, 어느새 내 옆에 날갯짓을 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은근히 괴군을 닮은 그 괴뢰에선, 괴군의 목소리가 똑같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했구나. 네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 그녀와 상의해 보았다. 네 복수를 도와주고, 너를 우리 세계에 받아들여 주자고 합의가 끝났다.]

위이이이잉!

[걱정 마라, 너를 더 우월한 존재로 진화시켜 주려는 것이다. 일단 잠시 가만히 있어 보려무나.]

'이런 미친!'

나는 대뜸 손에서 톱날을 꺼내서 내게 휘두르는, 괴군의 괴뢰를 피했다.

[음? 왜 피하지? 왜 피하지? 왜 피하지?]

그리고, 괴군의 괴뢰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괴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왜피하지? 더우월한존재로진화시켜주겠다는데?네놈네놈네놈네놈….]

우우우웅!

괴뢰의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 강제로 잡아가더라도, 너를 진화시켜 주도록 하마.]

쿠구구구!

괴뢰에게서, 원영 초기 수준의 기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내가 괴군에게서 도망쳤던 지평선.

그곳에서부터, 이 괴뢰와 똑같거나, 더욱더 강한 기운을 가진 괴뢰들 몇 기가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잡히면, 개조당한다!'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괴군의 손길을 피해 미친 듯이 답천사막을 주파하기 시작했다.

괴군의 손길 (2)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괴군은 며칠 후 비승한다.'

그렇다는 말은.

며칠만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면,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부우우웅!

콰아아앙!

등에 벌 날개가 달린 괴뢰가 입을 벌리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사막에 버섯구름이 일어났다.

'며칠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오히려, 괴군의 괴뢰 같은 경우, 무형검으로 회로를 베어 버리면 사실 급격히 무력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그런 짓을 하다 오히려 괴군이 더 흥미를 가져 버리는 것을 경계했다.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자기 작품을 망가뜨렸다며 눈이 뒤집혀서 직접 쫓아오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부웅, 부웅, 부웅!

나는 괴뢰들의 공격을 피하며, 사흘 밤낮을 답천사막 위를 날았다.

괴뢰라는 것은, 확실히 성가셨다.

놈들은 지치지 않았다.

나 역시 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환골탈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단련할 시간도 없었고, 축기기에 도달해 내구도가 튼튼한 것도 아니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최대한 빨리 괴군이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칠 주야가 지났다.

부우우우웅!

나를 따라오는 괴군의 괴뢰들은, 그 숫자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나는 이를 으스러져라 악물었다.

괴군이, 본래 가야 할 시간보다도 늦게까지 머물며 나를 추격하고 있었다.

'젠장,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뭔가 그를 완전히 따돌릴 방법이 필요했다.

파아아앗!

나는 어느덧, 답천사막에서 벗어나, 사막 아래쪽의 작은 부족들을 지나쳐, 마침내 흑풍해에 다시 도착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바닷속에서 물고기 형태로 나를 쫓아오는 괴뢰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송진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흑풍해의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섭명함을 잠시 빌려야겠어.'

아마, 괴군이라면 송진도 이해해 주지 않을까…?

나는 섭명함이 봉인된 해역을 향해 날아갔다.

그렇게 또다시, 사흘이 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