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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연 (19)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전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어…?"

살아 있는 것은, 수도자들 뿐.

천색성 전체가 무너져 있었고, 모든 민간인들은 백골(白骨)만을 남긴 채, 그들의 생명력은 하늘로 올라가 허공에 뭉쳐져 있었다.

주변은 그들의 피로 가득했다.

그나마 수도자들은 멀쩡한 것 같았으나, 연기기 수도자들 중 약한 이들부터 피를 토하더니, 그들의 단전이 펑펑 터져 나가, 단전에서 법력과 생명력이 뽑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만… 둬라…!"

쿨럭, 쿨럭!

나는 피를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신이 욱신거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김영훈은 나보다 더욱더 피를 많이 뿜어내면서, 겨우겨우 일어서고 있었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고함을 지르며 무형검을 휘둘렀으나, 정순지력도 내단의 강기들도, 거의 다 써 버려서인지 무형검은 허공에서 흩어져 버릴 뿐이었다.

원립은 더 이상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해서 혈제의 진을 발동시키며, 수많은 인간들의 생명력, 수도자들의 법력과 생명력 등을 모아, 자신의 혈영이라는 것에 흡수시키고 있었다.

"커헉, 컥…!"

나는 피를 왈칵 토했다.

'다, 다른… 사람들은…?'

수행이 낮은 이들부터 진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저 멀리 북중호와 북향화, 청문령 역시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방금 원립이 흩뿌린 일격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들 역시 피 칠갑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였다.

"이제… 끝인가 봅니다."

"원영기 수도자… 하하, 그런 걸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소."

북중호와 청문령이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의 원립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목숨을 걸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단악검법 최후절초.

우공이산이라면…!

최소한 저 원영기 괴물에게 상처는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나도 목숨을 걸지."

김영훈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의 배에는 구멍이 몇 개가 뚫려 있었다.

축기기 수도자도 아닌 그가, 그 정도 상처를 입고 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미 죽은 목숨, 저 빌어먹을 놈에게 한 방은 먹이고 죽겠다. 나와 은현이가 목숨을 걸면, 분명…."

그때였다.

문득, 김영훈은 북향화와 눈을 마주쳤다.

북향화가 뭔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인 듯 싶었다.

그녀의 전음을 들은 김영훈은 흠칫 놀라는 듯했다.

'뭐라고 한 거지?'

독순술로 입술을 읽어 내려 했지만,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눈 앞을 가려 제대로 읽지 못했다.

김영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북향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그때였다.

북향화가 결인을 맺었다.

부우웅!

벌 괴뢰가 잔해들 사이에서 이쪽으로 날아왔다.

덜걱, 덜거걱!

벌 괴뢰는 아까의 충격에 어딘가 망가졌는지, 덜걱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웅!

그녀가 다시 결인을 맺자, 우리 주변으로 보호법진이 펼쳐졌다.

방음법술도 걸려져 있는 것을 보아, 우리의 대화를 원립이 엿듣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는 듯했다.

원립은 잠시 우리를 내려다보았으나, 별 신경 쓰지 않고 혈제진을 계속 발동시켰다.

벌레들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듯.

"청문 선배님께서 진을 약화시켜 주신 덕분에, 이 괴뢰로 한 번은 공간 전송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햐, 향화 선자!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어서 그걸 타고 나가십시오!"

그래, 분명 이웃 성인 연도성에 벌 괴뢰의 공간 좌표를 놔두었다 했었다.

이웃 성까지 오면 원립이 쫓아오기 힘들 것이다.

연도성은 나름 벽라국 안쪽의 성으로, 공묘세가의 영지와도 붙어 있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에 향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촤아악, 촤아악!

이제 혈제진의 힘이 강해져, 민간인은 물론이고, 중저계 연기기 수도자들의 단전이 터지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고, 연기기 극성인 수도자들 역시 피를 토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저희밖에 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방금 영훈 님과 얘기를 나눴을 때, 영훈 님은 죽음이 확정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면 저희 중 아버님, 저, 청문 선배님, 그리고 당신밖에 벌 괴뢰로 탈출할 수 없단 것이겠죠. 하지만 지금 괴뢰의 상태로 보아, 한 번 공간 전송을 하면 망가질 겁니다."

"그, 그럼…."

향화는 청문령을 바라보았다.

"청문 선배님께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나 청문령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다. 나는 이미 살 만큼 산 늙은이고, 수명도 거의 남지 않았는데, 남은 수명 동안 내 벗들을 버려두고 온 악몽에 사로잡혀 지내라는 게냐. 가문에서 할 일도 전부 완성했으니, 이 늙은이 귀찮게 하지 말고 나보다 젊은 놈 중에 아무나 하나가 가거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북향화가 펼친 보호법진을 바로 나가 버렸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는 최후까지 저항하겠다는 듯, 천린수해성의 공법을 끌어올리며 원립을 노려보았다.

청문령의 주변으로 녹빛의 영기가 피어오르며, 진도(陣圖)를 그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쿠구구구구!

청문령의 진도가 수변으로 녹빛의 나무 형상을 피워올렸다.

나무들은 자라나며 서로 얽히더니, 한 그루의 거목이 되어 원립으로부터 우리를 가렸다.

김영훈은 씨익 웃으며 다 부러진 도를 잡고 그 역시 보호법진 바깥으로 나갔다.

"어차피 죽은 목숨. 더 이상 뭘 얘기해야 하겠느냐! 난 가 보련다!"

타닷!

그는 전신의 기운을 격발시키며, 능광도와 함께 청문령이 만들어 낸 거목 위로 올라갔다.

거목 위로 한 마리 황금빛 새가 내려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김영훈을 따라 바로 보호법진을 나가려 했다.

그리고.

터억!

북중호와 북향화가 동시에 나를 붙잡았다.

"뭘 하십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고는 나를 잡아당겼다.

"어딜 가는가, 사위."

"당신이 사는 게 역시 좋을 것 같아요."

"헛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와 영훈 형님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원립에게 상처라도…."

"방금 영훈 님과 전음을 나누며 들었는데."

북향화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분이 말하시기를, 당신과 영훈 님 자신이 목숨을 걸더라도, 저 노괴에게 제대로 된 상처를 입힐 확률은 희박하다고 하시더군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죽은 천색성 사람들의 복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말일세, 사위."

북중호는 진중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네보다 더욱 더 오래토록 천색성에 산 우리가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은가?"

"이 성은 아버지에게는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곳이고, 제게는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이 담긴 성입니다. 오늘 죽더라도 이곳은 떠나지 않을 거예요."

"북 어르신! 향화 선자를 막아 주십시오!"

"시끄럽네. 힘도 다 빠진 것 같은데, 자네가 가게. 나도 내 아내와 함께한 이곳에서 도망칠 생각이 없고… 딸애는…."

잠시 북향화를 쳐다보다 나를 쳐다본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까 나와 말이 끝났네. 자네를 살리기로!"

콰아악!

북중호의 법술이 내 몸을 잡았다.

나는 무형검으로 그의 법술을 뜯어 버리려 했으나, 힘이 다 닳아 버린 무형검으로는 그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부우웅!

"얌전히 살게나!"

벌 괴뢰가 내 몸통을 잡았고, 나는 피를 토하며 두 사람을 보았다.

"아, 안 돼! 이러지 마십시오! 햐, 향화 선자! 나는 사실…."

꼬옥!

북향화는 내게 다가와 나를 꼬옥 안아 준 후, 자신의 어머니의 유품이라던 옥색 노리개를 내 품에 넣어 주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도착지에 제가 선물을 준비해 놨답니다."

"으… 아아아아!"

투둑, 투두둑!

나는 북중호의 속박법술을 온 힘을 다해 뜯어 내고, 나와 북향화의 자리를 바꾸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죽어도 됩니다!! 나는 죽어도 시가…."

그리고, 북향화가 결인을 맺었다.

"안녕히 가세요. 당신."

파아아아앗!

보호법진이 풀렸고, 벌 괴뢰가 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멀리서 원립이 흠칫 놀라며 결인을 맺는 것이 보였다.

청문령의 거목과, 김영훈의 능광도가 핏빛 해일에 집어삼켜진다.

북중호가 백색의 범 형태의 법술을 사용했고, 북향화 역시 저물법기에서 수많은 법기들을 꺼내 대항하기 시작한다.

김영훈이 우공이산의 초식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남은 축기기 수도자들이 생명을 불태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북향화가 나를 잠시 돌아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벌 괴뢰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파아아아아앗!

* * *

피이이잇!

"크아아악!"

콰과광!

나는 벽라국 연도성의 앞에 떨어졌다.

벌 괴뢰는 공간을 넘는 도중, 더욱 더 몸이 망가진 것인지 그대로 산산조각 나 허공에서 박살이 나 버렸다.

"커헉! 컥…."

나는 피를 흘리며 몸을 지혈하고, 우선 바로 운기요상을 하며 내단에 내공을 욱여넣었다.

쿠구구구!

내단이 주변의 기운을 흡입했고, 빠른 속도로 내단 안쪽으로 공력이 차올랐다.

나는 손을 벌벌 떨며, 예전 북향화가 만들어 줬던 내 저물대에 손을 넣어 영석 몇 개를 꺼냈다.

우우웅!

나는 영석의 영기를 바로 흡수하며 내공을 더욱더 빠르게 흡수하였다.

얼마 후, 내공이 얼마간 차올랐다.

나는 강환 몇 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공력이 회복된 걸 깨닫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 했다.

천색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

내가 움직이자, 주변의 모래가 치솟아 오르며, 숨겨져 있던 진법들이 드러났다.

'이건….'

진법의 가운데에서, 뭔가가 빛나며 솟아오른다.

그것은, 작은 목함이었다.

나는 북향화가 말했던 '선물'을 기억하며, 빨리 그 목함을 품에 넣고, 바로 허공을 박차며 천색성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제발, 제발…!'

빠르게 연도성이 다시 뒤로 멀어졌고, 주변의 풍광이 쉭쉭 뒤로 지나간다.

나는 입에서 거품이 나올 정도로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제발…!'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피 냄새가 맡아졌고, 저 앞에, 천색성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천색성의 주변을 뒤덮었던 혈제의 진은, 사라져 있었다.

"제발…!"

나는, 천색성으로 달려갔다.

* * *

철퍽, 철퍽….

천색성은 피바다였다.

발 곳곳에 시신들이 채였고, 나는 양손을 덜덜 떨며 성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무너진 건물의 잔해 너머, 내가 찾던 이들을 발견했다.

"아, 아아…."

김영훈은, 여덟 조각으로 몸이 분해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청문령은, 혈목자의 성명법술인 혈목(血木)이 전신에 돋아나 죽어 있었다.

북중호는 목이 사라진 채, 단전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

그리고, 북향화는….

"아, 아아… 아아아…."

살아, 있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로 잔해를 헤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그녀의 단전이 있던 부분부터 시작해, 그 아래쪽의 몸은 완전히 없어져 있었다.

"햐, 향화… 향화…."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가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조, 조금만 기다, 기다려…. 내, 내가 하반신을, 찾아오겠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하며,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경맥에 남은 정순지력이 조금이나마 남아 겨우겨우 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혈을 짚어, 고통이 느껴지지 않게 하고는 내 몸에서 강기를 짜내어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사, 살 수 있습니다. 하, 하반신을, 찾으면…."

그리고,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단전이 통째로 뜯겨 나갔는데, 어찌 산단 말입니까."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서 수사."

"향화…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을 살려…."

"서 수사."

그녀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죽습니다."

어쩐지 그녀는 죽을 때가 된 탓인지, 그 어떤 때보다 이성적으로 보였다.

"제 유언을 들어 주시지요."

"아닙니다, 유언이라니. 당신은 죽지…."

"서 수사, 당신은… 정말 못난 사람이군요."

"예…?"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서 수사의 위세를 이용해서, 제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어머니를 그리 대한 공묘천색 장로에게 복수도 하려 계획했습니다만."

"…."

"그동안 저와 좋은 감정이 있었다고 착각하셨나 보군요. 제 아버님도 당신을 부추기니, 정말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전부 제 아버님과 사전에 얘기하여 서 수사를 제게 넘어오게 함이었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 털어놓으니, 시원하군요."

"…."

"당신의 힘을 본 순간부터 당신에게 미인계를 사용해 정략 결혼을 할 생각을 했습니다. 법기 다루는 힘이 뛰어난 축기기 수도자였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결단기 이상의 수도자였다니. 아버님에게 말하고, 바로 당신을…."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향화 선자. 왜 그리도 냉정하게 말씀하십니까.'

왜 그간의 일들을 거짓된 감정이라 말하십니까.

'왜 그렇게 냉정한 듯 말을 하면서….'

당신의 의념은, 나를 향하고 있단 말입니까.

향화의 의념은, 죽는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공포로 물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의념은 선명한 연분홍빛이었고, 그 의념은 나를, 오로지 나를 뒤덮고 있었다.

향화의 의념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들려왔다.

"축기기씩이나 되셨으면서, 너무 순진하시군요, 서 수사."

―당신에게 앞으로 마음의 짐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왕 찾아오신 것, 어쨌든 제 유언이나 들어 주시지요."

―그래서 부디 이리 말을 내뱉는 점을 용서해 주세요.

"우선 제 아버지는 어머님의 묘 옆에 묻어 주시고, 저는 제 공방 밑에 묻어 주십시오. 가능하다면 천색성 사람들의 유해도 수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제 가지만, 당신이 저를 잊고 새 삶을 사셨으면 합니다.

"제 법기점에 있는 기타 법기들은 어차피 죽을 몸이니 서 수사가 가지시지요. 유해를 수습하는 대가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당신에게 더욱 많은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용해서 미안합니다. 별로 당신에 대한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당신은 날파리들을 막아 주는 썩 훌륭한 도구였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라도, 부디 저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시지요?"

―울지 말아요.

"…당신에 대해서 마음에 안 드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법기도 못 만들고…."

―당신과 하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은데….

"손도 둔하며, 머리도 나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한테는 가끔 오만해지기도 하고."

―둔한 만큼 따스하고, 머리가 나쁠지언정 부드럽고, 오만해질지언정 아래를 살필 줄 알고.

"이상한 면에서 쓸데없이 감성적이기까지 하군요. 그만 질질 짜십시오. 저는 사내답지 못한 자가 너무 싫습니다."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울지 마세요.

"이제… 어머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님의 앞에서, 당신과… 가약을 맺고 싶었습니다.

연분홍빛 의념은, 한 송이 꽃이 되어 나를 뒤덮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서 수사."

―당신과, 다시 함께하고 싶습니다. 서 가가(哥哥).

뚝, 뚝뚝….

눈앞이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보이는 것은 연분홍빛의 의념.

그리고, 점차 의념이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몸이 점차 식어 간다.

얼마 후, 향화의 의념은 전부 흩어졌고, 그녀의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눈물을 닦자, 향화의 영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내 손은 그를 허망하게 통과할 뿐이었다.

그녀의 영체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듯하더니, 어느덧 흩어져 버렸다.

나는 허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에는 아직도 연분홍빛 의념이 넘실거렸다.

향화의 의념이 아닌, 나의 의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연분홍빛의 의념은 피처럼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천색성을 가득 채운 핏물과 같이, 내 의념은 주변의 핏빛과 같이 시뻘겋게 물들어, 주변을 메웠다.

나는 향화의 시신의 손을 잡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툭, 투툭….

어쩐지, 눈물의 색깔이 시꺼멨다.

아니, 눈물의 색깔이 아니었다.

눈에서,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칠공에서.

아니, 전신에 난 모든 숨구멍에서.

시꺼먼 저주문(詛呪文)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음혼귀주문의 창시자는 108개의 저주문을 동시에 다뤘다고 한다.

쉬이이이―

하지만, 내 전신에서 뿜어지는 저주문의 개수는, 108개를 벌써 훌쩍 넘은 상태였다.

후우우―

내가 숨을 들이쉬자, 저주문들은 그대로 부스러져 법력이 되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삽시간에 단전에 법력이 다시 가득 차올랐다.

나는 법력을 공력으로 바꿔 내단 안으로 집어넣었다.

스아아아아―

주변으로 싸늘한 냉기가 퍼져 나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회복된 공력으로 무형검을 띄워 올려 잡았다.

"놈의… 심장을 뽑아 오겠습니다."

나는, 저주문이 섞인 시커먼 눈물을 흘리며, 등을 돌려 천색성 위로 날아올랐다.

연 (20)

죽인다.

놈을 죽인다.

발기발기 몸을 천참만륙해서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다.

스아아아아!

허공을 박차며 날아가는 내 주변으로, 시커먼 저주문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지며 그 흔적이 남았다.

나는 요족의 지각을 켠 상태로 놈의 흔적을 좇았다.

놈의 흔적을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이 지나간 자리의 영기들은 전부 불안정하게 어그러져 일렁이고 있었으며, 대놓고 피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쉬이이이―

나는 내 주변에서 뿜어지는 음혼귀주문들을 흡수하여, 법력으로 삼고, 법력을 내단으로 돌려 공력으로 삼은 후 무형검에 공력을 집어넣어, 무형검을 더욱더 가속시켰다.

쿠구구구!

파공성이 울리며, 내가 허공을 거니는 충격파에 의해 주변의 모래가 흩어지며 모래폭풍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눈이 시뻘게진 채, 피 냄새가 진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

"…."

그곳은 천색성 아래쪽에 위치한 다른 사막 부족이었다.

이 부족 역시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원립은 혈제를 지내며, 점차 원영기의 실력을 되찾는 중이었고, 점차 그의 속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따라잡지 못한다.

놈은 점차 속력이 올라갈 터였다.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쉬이이이익!

파공성이 울리며, 저 멀리서 갈색의 비검 법보가 내게 날아왔다.

콰아앙!

나는 무형검으로 법보를 막아 내고, 비검 법보를 날린 자를 보았다.

"네놈… 네놈이냐! 네놈이 공묘세가의 휘하 부족을 학살한 사람이냐!"

공묘세가의 결단기 원로인 듯했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학살당한 부족을 쳐다보며 내게 소리쳤다.

"이놈! 대답해라!"

나는 말 없이 무형검을 휘둘렀다.

쿠과과광!

원립과 상대하기 이전, 만전의 상태보다는 한참 약해졌으나, 충분히 결단기급의 위력.

공묘세가의 원로는 그 위력을 보고 흠칫 놀랐는지 법보를 회수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텅 빈 눈으로 그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걸 봤으면 아시겠지. 이 성에서 나는 혈제의 기운과, 내 일격의 기운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나도 이 짓을 한 흉수를 쫓고 있소. 이 자가 내 소중한 사람들을 다 죽였소."

"그, 그런… 네가 이것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없지 않나! 이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 아느냐! 당장 배상…."

콰아아앙!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공묘세가 원로를 향해 한 번 더 무형검을 날렸다.

그의 바로 옆에 작은 계곡이 생겨났다.

"시끄럽다, 닥쳐라. 죽여 버리기 전에."

스아아아―

내가 입을 벌릴 때마다, 저주문들이 수백 개씩 쏟아져 나와 내 주변을 메웠다.

저주문들은 셀 수도 없이 주변을 많이 채웠고, 그 모습은 검은 빛의 안개가 나를 둘러싼 것 같았다.

"으, 으윽… 다, 당신 같은 마공을 익힌 마두가 하는 말을 어찌 믿으란 말이오…!"

"…이건, 마공이 아니다."

쿨럭, 쿨럭!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서, 기침을 하니, 입에서 더욱 더 많은 저주문이 쏟아져 나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고통을 깨달아,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선각후통 계열의… 공법. 그래,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누구도 희생시킬 일이 없는, 그런… 공법이다. 마공이 아니야…!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았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소리쳤다.

카학, 카하학!

입을 열 때마다 시커먼 저주문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왜…! 왜 내게서 앗아 가느냔 말이다…! 왜…! 왜! 왜!"

나는 저주문이 섞인 시커먼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잡고 전신에서 저주문으로 이뤄진 검은 안개를 뿜어 냈다.

"왜!!!"

한동안 발광하는 나를 보던 공묘세가 장로가 움찔거릴 때였다.

파아아아앗!

저 멀리, 천색성 방향에서 청광이 번뜩이며 누군가가 날아왔다.

"누가!!! 누가 령이를 죽였느냐! 누가!!!"

청문중진.

청문세가의 가주였다.

청문령의 전음부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이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그가 검은 안개 속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너! 이게 어찌된 일이냐! 설명해라!"

"아, 청문세가 가주시구려. 아시는 자요?"

"청문령의 벗이외다."

"나는 이 자가 이 학살극의 흉수가 아닌지 의심하는 중이오. 저 시커먼 것… 저게 마공이 아니고 뭐요?"

"…이 녀석의 신원은 내가 보증하겠소. 그리고 지금 천색성에 있던 령이 역시 숨졌소. 이 녀석은 령이의 벗이었으니 그럴 녀석이 아니오."

청문중진은 공묘세가의 원로에게 내 신원을 보증했고, 나는 그를 보며, 텅 빈 눈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답천사막에서 결단기인 척 숨어 있던 원영기 노괴가,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한 지금 이 학살극을 일으켰단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 설명을 들은 청문중진은 물론 공묘세가의 원로의 얼굴 역시 심각해졌다.

공묘세가의 원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놈을 잡아야 하오! 이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원립이라는 원영기 노괴가 지금 각 성을 돌며 혈영이라는 것을 회수할 때마다 실력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각 성의 생령들을 흡수해서 원 실력보다 더욱더 강해진다는 뜻! 지금이 가장 약할 때이니, 잡아서 죽여야 하오!"

그러나 청문중진은 안색이 안 좋았다.

"어떻게 할 작정이오? 그 원영기 노괴는 점점 원영기의 실력을 회복하며 더더욱 빨라지고 강해질 텐데, 우리는 그자를 잡기는커녕 쫓아가기도 힘든 실정이오!"

공묘세가의 원로가 전음부를 꺼내 들었다.

"본가의 원로원과 가주님께 연락하겠소! 당신도 청문세가 원로원에 연락을 돌려 결단기 수도자들을 불러모으시오! 이 자의 말대로 원영기 노괴가 북쪽 대초원에도 들렀으면, 그곳 부족들의 결단기 수사들도 현재 황급히 그를 쫓고 있을 터!"

그가 말했다.

"지금 당장 전 대륙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그 원영기 노괴물을 죽여야 하오!"

두 결단기 수도자는 자신의 가문에 전음부를 날렸다.

"…혹, 그 원립이라는 원영기 수도자가 어떻게 이동할지 짚이는 게 있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흔적을 보고 뒤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그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원립이 있는 성의 위치가 떠올랐다.

"…그 노괴가 어디로 갈 지는 모르지만, 그자가 어디로 돌아올지는 알고 있소이다."

"뭣…! 정말이냐!"

나는 그때 봤던 흑색의 성과, 흑색의 성의 자리에 대응되는 별자리를 기억해서 둘에게 알려주었다.

"그래, 하면 우선 본가의 원로원, 벽씨세가의 가주에게도 다 연락을 돌리지. 원영기 마두가 설치기 시작했다는 건 전 대륙이 알아야 하는 일이니, 연국의 진가, 막리가에도 연을 넣겠다."

"성제국은 연국 가문들에서 전달할 것이니, 답천사막 너머 동방의 국가들에는 공묘세가에서 연락을 넣겠소. 그 원영기 노괴가 이미 들렀는지는 모르지만 경고는 해 줄 수 있을 터."

"청문세가는 북쪽 대초원의 부족장들에게 연락을 넣겠다."

청문중진과 공묘세가의 원로는 심각한 얼굴로 각자 전음부를 꺼내 들고 연락을 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전 대륙에 이걸로 연락이 닿았을 터, 그럼 이 녀석이 말해 준 좌표대로 원영기 노괴가 돌아올 그자의 동부로 가 봅시다!"

공묘세가의 원로가 그렇게 말한 후, 그는 답천사막 방향으로 비둔술을 써 날아갔다.

청문중진은 나를 보며 말했다.

"너는 이만 돌아가서 남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해 다오. 령이의 벗이었으니, 그 아이의 유해도…."

"같이 갑시다."

나는 청문중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역시 그놈에게 볼일이 있소."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고작해야 축기기인 네 실력으로는…."

콰아앙!

나는 무형검을 휘둘러, 내 실력을 보여 주었다.

청문중진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실력을 숨겨서 미안하오. 나는 결단경의 실력이오. 부디, 나도 청문령의 복수를 할 수 있게 해 주시오."

"…알겠네."

청문중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청문중진과 함께 원립의 본거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휘이이이이!

"여기 진법이 있군."

나와 청문중진, 공묘세가의 원로는 답천사막의 한복판, 거대한 모래바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진법이 있는 걸 보면, 진법 안쪽이 그 원영기 노괴의 본거지일 가능성이 크겠구려."

"진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

두 사람은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았고, 나는 말 없이 앞으로 나가 진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 자네가 진법을 만질 줄 아는가?"

"다행이군. 하긴, 령이와 함께 진법을 연구하기도 했으니…."

청문령을 생각하자 그의 죽음이 생각난 듯, 청문중진은 두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며칠이 지났다.

파아아아앗!

답천사막의 한복판.

그곳으로,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북쪽 대초원에서 온, 초원의 복식을 한 부족의 부족장들이라는 결단기 수도자들.

동방의 답천사막 너머에서 온, 그곳에서 군주로 군림한다는 결단기 수도자들.

벽라국의 삼가.

그리고 청문세가 가주 청문중진과 그 휘하 결단경 원로원 6인.

공묘세가 가주 공묘령과 그 휘하 결단경 원로원 6인 .

벽씨세가 가주 벽천기와 그 휘하 결단경 원로원 5인.

연국의 쌍가.

막리세가 가주 막리황천과 그 휘하 원로원 7인.

진씨세가 가주 진여운과 그 휘하 원로원 5인.

성제국의 칠가.

진루세가 가주 진루연천과 그 휘하 원로원 8인.

하씨세가 가주 하련.

거씨세가 가주 거복원.

준씨세가 가주 준제열.

열전세가 가주 열전리.

오리세가 가주 오리천령.

전씨세가 가주 전칠선.

답천사막 서쪽의 삼국에서 온 결단기 수도자 49인.

답천사막 북쪽의 대초원에서 온 결단기 수도자 43인.

답천사막 동쪽의 부족 국가에서 온 결단기 수도자 54인.

그리고 떠돌아다니던 희귀한 결단기 산수 3인.

100명이 넘는 결단경 수도자들이 빼곡히 진법의 주변을 둘러쌌다.

북쪽 대초원의 부족장 중 하나라는 이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폭거요! 그 원영기 노괴가 학살한 부족들이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정도요!!!"

"우리 벽라국 역시 그 원영기 노괴가 수십 개의 성에서 혈제를 지내 학살극을 벌였네! 그런 마두가 더 이상 활개 치게 둘 수 없어!"

"애당초 천인기 선배님들이 비승할 때를 노려, 수행을 숨기고 있다 지금에서야 드러내다니. 그 마두가 어떤 흉악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오! 그 원영기 노괴가 더 이상 활개 치게 둘 수 없소!"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진법 바깥에서 분노에 차 씩씩거리고 있었고, 그중 진법을 익힌 진법사들 몇몇이 나를 도와 모래바람의 진법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놈을 기다렸다가 습격해서 죽여 버려야 하오!"

그리고 그중에서, 산수 출신이라는 3인의 결단기 수도자 중, 방립을 쓰고 갈의를 입은 노인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놈이 내 고손자를 죽였어! 죽여 버릴 테다! 그놈의 뼈를 잘근잘근 씹어 반드시 고아 먹을 테다!!!"

나처럼 소중한 이를 잃은 이도.

"그놈이 학살한 부족은 공묘세가의 휘하 부족이었소! 그 부족에서 얼마나 귀한 광석을 캐내는데! 그 원영기 노괴는 필히 배상을 해야 할 것이오!"

배상을 원하는 이도.

"대초원의 혈통을 학살하다니, 이 무슨 치욕이란 말인가! 놈의 육신을 찢어 땅에 떨어진 본 부족의 명예를 바로잡으리라!"

명예를 원하는 이도.

"그자가 우리 국가의 도시를 완전히 부숴 버렸소! 그런 위험한 이가 더 이상 활개 치게 둘 수는 없지. 얼른 제거해야 할 것이오!"

원립이 더 강해지기 전에 발본색원하자는 이도.

수많은 의견들이 오고 갔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혈목자 원립.

그 학살마 노괴를 죽여야 한다.

파아아앗!

나와 결단기 진법사들의 노력으로 인해, 모래 폭풍의 진법이 사라졌고, 저 안쪽의 흑색의 성이 보였다.

"우선 놈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놈이 도움을 받을 만한 법보나 진법 같은 것이 있거들랑 전부 박살 내어 놉시다!"

"그래, 좋소! 원영기 노괴를 상대하려면 만전의 준비를 해야겠지!"

나는 말 없이 결단기 수도자들 사이에 껴서 흑색의 성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청문중진에게 다가가 저 성의 효능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 주었다.

청문중진은 다른 이들에게 소리쳤다.

"저 성은 일종의 법보로, 그 원영기 노괴는 제 법보 안쪽에서 경지를 한 단계 올릴 수 있다고 하오! 그 노괴가 원영 초기의 실력을 회복한다면 원영 중기의 실력을, 원영 중기의 실력을 회복한다면 원영 후기의 실력을 저 성안에서 발휘한다 하오! 그 노괴가 돌아오기 전에 저 성을 가루로 만들어 버려야 하외다!"

청문세가 가주 청문중진의 말은 빠른 신임을 얻고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체내 금단에서 법보를 꺼내 흑색의 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아아앗!

흑색의 성 형태의 법보 위로 어떤 결계 같은 것이 떠올랐다.

결계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법보를 가로막았고, 성이 무너지지 않게 지켰다.

"크윽, 원영기급 공격이 아니라면 이 결계를 뚫기 힘들 듯하군."

"하면…."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빠르게 회의를 했다.

"고대 진법이오. 진법사들이 달려들어도 고대 결계를 해체하기는 요원할 터. 힘으로 부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소."

"하면 어찌…."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고, 우리는 사막 위에서 하나둘 진중한 표정으로 원립을 상대할 방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며칠 후.

쿠구구구구!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핏빛의 구름이 올라온다.

100명을 훌쩍 넘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원영… 초기… 최고봉…!"

붉은 피 구름을 몰고 오는 원립을 보며, 결단기 수도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원립의 기세는 나와 맞붙었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고, 그 흉험함은 익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하, 벌레 놈들이 소문은 빠르구나. 나를 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예까지 왔느냐?]

쿠구구구구!

피구름을 몰고 온 원립이 좌중을 둘러보며 오연하게 말하였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이 많은 결단기 수도자를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청문중진이 앞으로 나서 원립을 노려보며 외쳤다.

쿠구구구구!

원립은 피 안개 속에서 오연하게 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반딧불이가 많다고 해서, 태양 빛에 비하겠느냐.]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의 살기가 원립을 향했고, 원영 초기 최고봉의 힘을 회복한 원립이, 피 구름을 감싸 안으며 읊조렸다.

[덤벼라, 벌레들아.]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나아가 무형검을 뽑아 들었다.

지난 며칠간 법력과 공력은 전부 회복했다.

반드시, 이번 기회에 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네가 밟아온 것 (1)

원립이 도착하기 사흘 전.

"놈을 죽일 것입니다."

청문중진은 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원립 학살 사태를 최초로 발견한 결단기 수도자인 청문중진에겐, 이번 원립 사냥 무리에서의 임시적인 지휘권이 주어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도 그자를 찢어 죽이고 싶네. 하지만, 계획이 필요해. 지금 당장 150여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였으나, 모인 기간도 짧고 회의할 시간도 짧았네. 우리가 저 노괴물을 상대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

"자네를 비롯해, 몇몇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지금 분노에 눈이 돌아갔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야.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오히려 방해만 될 걸세."

"…제 목적은 그놈을 죽이는 겁니다."

"…지금 결단기 진법사들과 짠 계획이 성공하면, 원립에 의한 공포에서 결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해방될 수 있네. 심지어 원립이 그 안에 수명이 다해 버리면 오히려 그 역시 좋겠지."

뿌득….

나는 검은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제… 손으로 놈을 죽일 수 없단 말입니까…."

청문중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라고 왜 놈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그놈은 거리낌 없이 전 대륙에 우리가 겪었던 것과 같은 학살극을 흩뿌릴 것일세. 원영기 수도자가 한 분도 안 계신 지금,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어질 걸세."

"…."

"부디… 전 대륙의 평화를 위해… 도와주게.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한 마음이 되어 계획에 참여해야 해…."

나는 청문중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의념 역시 고통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디 힘을 빌려주게. 공묘세가 가주도 숨겨 오던 가문의 비전까지 빼 들었어…."

그의 부탁에, 나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

"…하면,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뭔가?"

"계획에 협조해서 가주님의 지휘에 따라 원립을 밀어붙이되, 저는 기회가 오면 최대한 원립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알겠네. 그 정도야 당연한 거지. 자네뿐이 아닌…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사실상 그리 하려 할 터인데."

청문중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서 계획의 참여를 확인받은 후, 나와 같이 원립을 죽여 버릴 것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방립의 갈의 노인을 설득하러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청문중진을 잠시 바라보고, 다시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과 결단기 진법사들이 모여 계획했다는 계획.

그 계획의 중심인, 원립의 동부, 흑색의 성을 쳐다보았다.

'성공하려나.'

아마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그들의 계획대로 된다면, 수백 년간 세상은 평화로울 테고.

나는 이전 삶에서도 답천사막 대학살이 일어난 후, 수백 년간 평화를 느꼈으니까.

'만약… 성공한다면, 오히려 내 복수는 뒤로 밀리는 것인가.'

과연, 그것이 맞는가.

지금 이 순간, 놈의 육신을 발기발기 찢지 않고, 내가 버틸 수 있겠는가.

'…최대한, 노력하자.'

틈을 봐서, 결단기 수도자들이 그런 복잡한 계획을 짤 것도 없이, 바로 원립을 죽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사흘 후.

원립이, 지평선 너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 * *

나는 며칠 전 있었던, 청문중진과 대화를 나눴던 때를 떠올리며 무형검을 거세게 잡았다.

'계획이, 아예 성립되지도 않도록… 놈을 이 자리에서 죽인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나는 산외산부진의 태세를 유지하며, 기(氣)로 이뤄진 경락을 바로 무형검과 이어 버렸다.

목숨을 건다.

콰아앙!

무형검은 그 누구의 공격보다도 빠르게 내쏘아져 원립에게 가 부딪혔다.

그러나, 내 무형검은 원립의 주변을 감싼 피 구름에 막혔을 뿐이었다.

척, 척, 척, 척!

내 뒤쪽으로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이 도열하며 각자 법술과 법보를 뿜어냈다.

수(水), 화(火), 풍(風), 뢰(雷)에 해당하는 법보들이 원립의 피 구름을 뚫었다.

"죽어라, 이 악귀 놈!"

고손자를 놈에게 잃었다는 갈의 방립 노인이 비색의 바퀴 형태의 법보를 입에서 뿜는다.

다른 수도자들이 뚫어 놓은 피 구름의 구멍으로, 노인과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이 각기 법보를 꽂아 넣었다.

쿠웅, 쿵, 쿵!

폭광이 번뜩이며, 원립이 섬뜩한 미소를 짓는다.

키이이잉!

폭광 너머로 적색의 장막이 번뜩였다.

어느새, 그가 네 개의 적색 보탑을 꺼내 그의 주변에 결계를 펼친 채였다.

'더 단단해졌군.'

지난번에 결단기 대원만 수준의 그와 싸웠을 때에는 고작 결단 대원만 수준의 법력을 먹어서였는지,

몇 번 후려치면 결계가 흔들렸던 것과 달리, 원영기의 법력을 머금은 결계는 나와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이 법보를 쏟아부었는데도 튼튼했다.

[쯧쯧, 웽웽대는 것이 썩 시끄럽구나.]

원립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막아!"

"노괴가 힘을 쓴다!"

"전부 공격하시오!"

100명에 달하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일시에 법보와 가장 강력한 법술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천지가 진동할 듯하며, 그 여파만으로 근처 사막이 유리가 되어 녹아내리고, 모래 폭풍이 사방팔방으로 번져 나갔다.

쿠오오오오!

결단기 수도자들의 합격에, 직경 5리에 달하는 범위에 1리에 달하는 깊이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휘오오오오!

지형이 바뀌며 지축이 흔들린다.

쿠구구….

그리고, 폭발 너머, 그 안쪽에서, 피 구름이 넘실거린다.

"으윽, 미친…!"

"이래도 안 죽었다고…!?"

결단기 수도자들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서린다.

그리고, 원립이 혀를 차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져 왔다.

[일반적인 원영 초기라면, 위험했겠구나. 하지만 글쎄… 나는 일반적인 원영 초기도 아닐뿐더러… 더군다나 네놈들은 금번 비승에 붙어가지도 못한 저급 자질을 지닌 버러지 놈들이 아니더냐?]

피이이잉!

피 구름 안쪽에서, 핏빛의 광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모여 진을 치시오. 노괴가 그 법술을 쓸 것이오!"

나는 원립을 노려보며 사방으로 외쳤다.

며칠간, 나를 비롯해, 대초원에서 원립에게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 두 명의 증언으로 인해 원립의 법술에 대한 특징이 모든 결단기 수도자들에게 퍼졌다.

때문에 우리의 증언을 들은 결단기 수도자들은 원립의 법술과, 그 위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모두 이쪽으로!!"

청문중진과 공묘령이 옆에 붙어서 큰소리로 외쳤다.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그들에게로 붙었고, 며칠간 연습해 둔 보호진을 알맞게 짜며 법진을 완성했다.

저계 수도자들이 배우는 아주 간단한 호신(護身)의 진.

하지만, 그것을 펼치는 자들은 결단기 수도자들이었고, 그들의 법력이 한데 모이자,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형성해 냈다.

번쩍!

원립의 법술이 폭발했다.

혈광이 사방팔방으로 넘실거리며, 천지사방이 핏빛 속에 잡아먹히는 듯했다.

빠직, 빠지지직!

호신의 진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금이 갔으나, 100명이 훌쩍 넘는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진법은 결코 쉬이 깨지지 않았다.

치이이이!

얼마 후, 핏빛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잦아드는 핏빛 너머로, 우리는 다시금 비슷한 규모의 법술을 준비하는 원립을 볼 수 있었다.

"모두 다시 공격해라!"

"틈을 주지 마!"

140여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은 각각 다섯 무리로 나뉘어, 사방과 상공에서 원립을 공격해 갔다.

나는 원립의 전방에서 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미친 듯이 무형검을 휘둘렀다.

총천연색의 법보와 법술들이 원립 주변의 방어막을 두들겼다.

그리고.

원립이, 다시금 법술을 완성했다.

"혈(血), 수(樹), 해(海)!"

촤라라라락!

원립이 자신 주변의 피 안개를 흡수한다.

그리고, 원립이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붉은 수정 해골이 박혀있는 나무 지팡이.

마치 아기의 손 같은 작은 나뭇가지들이 몸체에 빼곡히 자라난 그 지팡이가, 시뻘건 빛을 내뿜었다.

촤라라라락!

지팡이에 자라난 작은 나뭇가지들이, 미친 듯이 자라나 사방으로 뻗쳐 나간다.

콰과과과!

"피, 피해!"

"절대 닿지 마라!"

"아, 안 돼! 저리 가!"

가지들은 사방으로 뻗치고 또 뻗치다 못해, 원립을 중심으로 사막에 핏빛의 숲을 형성해 내었다.

몇몇 결단기 수도자들이 원립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녀석의 수해(樹海)에 그대로 갇혀 버렸고, 그들은 삽시간에 전신의 기혈이 전부 빨려 목내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수해의 중심에 있던 원립은 몇 명의 결단기 수도자를 빨아먹은 후 어쩐지 방금 소모된 기력이 회복되어 버린 것 같았다.

"제길, 괴물 같은 놈…! 그래도 네놈이 우리 전부를…."

촤락, 촤락, 촤락!

원립의 주변으로, 일곱 개의 족자가 떠오른다.

"해(解)!"

그가 법결을 맺자, 족자에 피로 그려져 있던 요혼들이 풀려났다.

하지만 요혼들은 지난번에 나를 상대했듯이 각각 나뉘어 다른 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허공에서 서로 뭉치기 시작한다.

쿠구구구!

그리고, 한 마리의 요혼이 서로 다른 요혼과 겹쳐질 때마다, 요혼의 수행이 폭증하는 것이 느껴졌다.

키잉, 키잉, 키잉!

결단기 수준이었던 요혼이, 점차 결단 중기 최고봉을 넘어 결단 후기, 결단 대원만에 다다른다.

그리고.

키잉, 키잉, 키이잉!

일곱 마리의 요혼이 완전히 겹쳐져, 그 어떤 짐승도 아닌 괴이(怪異)의 형상이 되었을 때.

요혼에게서 느껴지는 수행은 원영기에 달하였다.

"아, 아아…."

"하하…."

비록 요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진짜 원영기는 아니었고, 법술도 기껏해야 예닐곱 개를 사용하면 기운이 다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원립의 옆에 원영기급 전력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끼아아아아!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원립이 저물대를 열자, 귀곡성이 울리며 내가 봤던 혈수가 솟구치며, 낫을 든 두 마리의 귀왕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그 귀왕은 원립의 법결에 따라 원립의 주변에 있는 피 안개로 들어가 그대로 피 안개와 동화되었다.

쿠구구구구!

원립의 피 구름이 거대하게 뭉치며, 두 마리의 귀왕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미친…."

"일반적인 원영기 수도자도… 아니잖나…."

새로 강화된 귀왕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원영 초기에 조금 못 미치는 기운을 지녔고, 두 마리가 합쳐지면 충분히 원영 초기에 해당하는 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 계속 해 보려느냐, 벌레들아?]

그때였다.

"모두 포기하지 마라!"

공묘세가의 가주, 공묘령이었다.

갈의를 입은 미부인인 공묘령은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에서도 수많은 법보를 꺼내 들고 외쳤다.

"어차피 원영기 수도자를 상대할 수 없단 건 모두 알고 있지 않았나! 원래 세운 계획대로 놈을 몰아붙여!"

"그, 그래…! 계획대로만 하면…!"

"맞소!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호오…?]

결단기 수도자들은 모두가 제 목숨이 아까운 줄 아는 이들이었고, 원립을 상대하고자 하였으나, 그만큼 신중한 이들이었다.

하여, 그들은 원립을 직접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원립이 이곳에 도착할 그 며칠 동안, 그들은 원립을 상대할 방안을 미리 내놓았고, 전부 그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나를 비롯한 몇몇은 계획이고 뭐고 상관없이 원립을 죽일 기회를 최대한 노리고 있었지만 말이었다.

'죽인다.'

계획이고 뭐고 필요 없다.

전부 원립을 직접 맞상대하기 두려운 이들이 내놓은 타협이 아닌가?

죽일 수 있다.

틈새만 보인다면!

콰앙,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괴, 괴물…!"

괴이한 요혼과 원영 초기 귀왕의 합세에, 결단기 수도자들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미친 듯이 원립에게 돌진하며 원립을 몰아붙였다.

"죽어라! 이 마귀 놈!"

나는 갈의를 입은 방립의 노인과 함께 원립의 앞에서 그를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피싯, 피시싯!

나와 그의 공격에 의해, 점차 원립을 보호하는 보탑 결계에 금이 가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 없어져 버려라!!!"

갈의 방립 노인은 피눈물을 흘리며 마구 법술을 쏟아부었고, 나 역시 시커먼 눈물을 흘리며 저주문을 잔뜩 섞어 무형검으로 결계를 내리쳤다.

나와 노인을 비롯해서, 원립에게 친지를 잃어 미친 듯이 원립을 죽이려 하는 한두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더 이쪽으로 가세하여 결계를 후려쳤다.

그리고.

콰아아앙!

나와 노인의 합격에, 기어이 보탑 결계가 뚫렸다.

"밀어붙여라!!"

청문중진이 뒤쪽에서 사자후를 터트렸다.

청문세가의 원로들이 구멍이 뚫린 원립의 결계를 넘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악!

세 명의 청문세가 원로들이 원립에게 매달려, 그를 한 곳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 벌레들이, 감히 어디에 손을 대는 것이냐.]

촤악!

원립의 위쪽으로 반투명한 핏빛 깃발이 세 개가 떠올랐다.

콰앙!

하지만, 내 무형검에 의해 혈주번들은 그대로 쓸려 나가 사라졌고, 청문세가 원로들 외에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몇몇은 원립에게 달려들고,

몇몇은 법보나 법술을 원립에게 붙여 밀어붙였다.

[이놈들이…?]

원립은 밀어붙여지는 방향이 어디인지 깨달았는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꿍꿍이인 게냐?]

"죽어라!!!"

"목을 뽑아 주마."

갈의 노인과 나는 원립을 향해 각각 무형검과 바퀴 형태의 법보를 날렸다.

그리고, 원립이 입을 벌렸다.

쉬아아아악!

열일곱 개의 뼈 단검 법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치링, 치리링!

단검 법보들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며, 사방으로 핏빛 기운을 흩뿌렸다.

"잠깐, 모두 산개해라!"

청문중진의 목소리가 울렸고, 청문세가 원로들은 그에 황급히 떨어졌다.

하지만 미쳐 반응이 늦었던 몇몇 결단기 수도자들은, 원립의 법보를 피하지 못했다.

촤아아악!

핏빛의 참격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원립에게 붙어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그들의 금단은 원립의 주변에 있던 피 구름에 그대로 삼켜져 버렸다.

잠시 피 구름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리는 듯했으나,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원립은 주변의 피 구름을 흡수하며 다시 기력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벌레 떼도 썩 수가 많으니 귀찮구나. 본좌가 원영 중기에만 도달했어도 저항도 못 하고 내 한 줌 양식이 되었을 것들이….]

"놈이 회복한다!"

"막아라!"

원립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나와 갈의의 방립 노인이었다.

"죽어라!"

"죽어라!"

우리는 동시에 외치며 원립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촤아악!

단검 법보들이 참격을 흩뿌리며 우리를 노렸다.

하지만 갈의 노인은 기이한 법술을 써 참격을 막아 냈고, 나 역시 무형검을 전신에 덮어 참격을 막아 냈다.

콰아앙!

나와 노인은 거의 몸통박치기를 하듯이 원립에게 달려들어, 그를 밀어붙였다.

청문중진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가까워진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진법사들은 준비해라!"

콰아앙!

나와 갈의 노인의 사이로, 푸른 둔광과 함께 청문중진이 그 육중한 몸을 부딪쳐 왔다.

[이… 놈들이…!]

그리고, 마침내 원립을 상대하기 위해 결단기 수도자들이 세웠던 계획이 발동하였다.

콰아앙!

청문중진이 힘을 줘서 원립을 후려치자, 원립의 몸은 녀석의 동부인 흑색의 성 안쪽, 그곳의 안쪽 결계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 제 주인은 결계가 막지 않는군."

청문중진은 원립을 보며 뇌까렸다.

나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그를 쳐다보다가 법력을 끌어올려 결인을 맺었다.

나와 다른 진법사들이 모여, 결계에 법력을 흘려 넣는다.

'죽이지는 못했나.'

뿌드득….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는 듯했다.

하지만, 청문중진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나라고 왜 놈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이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그놈은 거리낌 없이 전 대륙에 우리가 겪었던 것과 같은 학살극을 흩뿌릴 것일세. 원영기 수도자가 한 분도 안 계신 지금,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어질 걸세.

―부디… 전 대륙의 평화를 위해… 도와주게. 최소한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한마음이 되어 계획에 참여해야 해….

뿌드득….

나는 이를 악물며, 다른 진법사들과 함께 결계진 위쪽에서 법력을 보탰다.

'그래,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다음에는.

"네놈의 목을 뽑아 가져갈 것이다! 원립!"

그들의 원한을 갚으리라…!

나는 저주문이 섞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다른 진법사들과 함께, 흑색 성의 결계진을 이용한 봉인진(封印陣)을 펼쳤다.

"봉(封)!"

쿠구구구구!

원립의 동부 위쪽으로, 오색찬연한 빛살이 맴돌며, 원립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쿠구구구!

진법사들이 봉인진을 펼침과 동시에, 다른 수도자들이 각자 자신의 비술로 주변의 용맥을 움직였다.

"양천(陽天)."

진씨세가 가주 진여운과 휘하 원로원들이 양 속성의 용맥을 끌어와 진법에 잇는다.

"음신(陰神)!"

막리세가 가주 막리황천과 휘하 원로원들은 음 속성의 용맥을 끌어와 진법에 이었다.

음양이 진법에 붙었고, 각각 세가들의 가주들은 음, 양에 더불어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에 해당하는 용맥들을 끌어와 진법에 이었다.

음과 양은 각각 건(乾)과 곤(坤)이 되어 팔괘(八卦)에 해당하는 용맥이 진법에 이어졌다.

공묘세가 가주인 공묘령과 동방의 결단기 군주 중 세 명이 봉인진 위에서 결인을 맺으며, 봉인진을 완성하였다.

"팔괘흡령봉진(八卦吸靈封陣)! 봉(封)!"

파아아아앗!

쿠구구구구!

답천사막에 흐르는 용맥이 진에 이어지며 진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쿠웅, 쿠우우웅!

진의 안쪽에서 핏빛이 번뜩이는 듯하며, 진이 마구 흔들렸다.

"소용없다! 공묘세가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팔괘흡령봉진은 제대로만 펼쳐지면 원영기 수도자도 가둘 수 있지. 더군다나 네 동부에 있는 기이한 결계를 진법사들이 며칠 동안 연구하여, 결계에 성질에 더해 진을 강화시켜 펼쳤다. 네가 천인기에 도달하지 않는 이상. 아니, 천인기 중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절대 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쿠웅….

공묘령에 말에, 안쪽에서 울리던 충격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원립의 목소리가 울렸다.

[훌륭한 봉인진이군. 쉬이 나갈 수 없겠어.]

"이 노괴야, 네놈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평생 그 안에서 갇혀 있다가 늙어 죽어야 할 것이다!"

공묘령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잠시 진 안쪽에서 침묵이 맴도는 듯하더니, 이내 폭소가 터져 나왔다.

[흐하하하! 재밌는 것이로다. 너는 기억했다. 내가 봉인을 나가면 잔뜩 귀여워해 주지.]

공묘령은 그 자신감 넘치는 말에 당황하는 듯했으나, 피식 웃으며 진을 내려다보았다.

"늙은이, 허세는! 이 진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나이를 헛으로 처먹었나 보구나."

[쯧쯧, 내가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이 아니 되진 않는다, 어린 것아. 잘 생각해 보아라. 결단기 수도자들이라면 천기를 읽어 보아라! 별자리를 읽고, 이 부근이 어떤 곳인지 보아라…!]

"뭐?"

공묘령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봉인진을 내려다보았다.

[큭큭큭… 이해가 안 되느냐? 실마리를 주지. 지난번의 해방성(解放城)은 어느 곳에서 몸을 드러냈느냐?]

"뭐…?"

그의 말에, 답천사막 동방의 군주 중 한 사람이 희번득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한낮이었으나, 결단기 수준의 수도자쯤 되면 천기를 읽는 능력이 강화되어 한낮에도 별자리를 읽는 것이 가능했다.

"자, 잠깐…! 이, 이 좌표… 그리고 지난번 해방성이 나타났던 자리를 생각해 보고, 다음 위치를 계산해 보면…."

그리고, 문득 그 군주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이, 이곳이오! 이 근처에, 해방성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오!"

그 말에 대초원의 부족장 중 한 명이 눈을 부릅뜨고 되물었다.

"봉명성이!? 이 자리가 다음번 봉명성이 나타나는 자리라고…!?"

"뭐야…! 보, 봉명성이 나타나…?"

"그, 그렇소…! 해방성의 규칙과, 지난번 해방성이 나타났던 위치를 생각해서 계산하면, 이 근처에 해방성이 나타날 거요! 200년 후면 이 봉인이 아무 쓸모가 없단 말이오!"

결단기 수도자들은 그 말에, 전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봉인진을 쳐다보았다.

[하하하, 어리석은 것들. 봉명성도 생각지 못했느냐…? 본좌는 200년 후 풀려날 것이다. 그때까지, 혈영을 회수하며 모아 둔 양식으로, 수행을 원영 후기까지는 끌어올려 줄 터이니, 네놈들은 200년 후 원영 후기 수도자와 싸울 준비를 해 두어야 할 터이다…!]

"마, 말도 안 돼!"

"이런 멍청한! 왜 봉명성을 생각지 못한 거요!"

"누가 그런 것까지 계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지난번 봉명성이 나타난 것도 200년 전의 일이고, 지금 이 자리에 봉명성이 나타나는 건 수천 년 전의 일이었는데!"

"이런 머저리같은! 해방성 때문에 저 마두가 풀려나게 생겼잖소!!!"

각 세력의 결단기 수도자들은 마구 언성을 높였고, 나를 비롯해서 산수라고 하는 3명의 결단기 수도자는 멍청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속한 세력이 없는 이들이다 보니 정보에 약한 듯싶었다.

그중 나와 함께 원립을 찢어 죽이려 했던, 갈의의 방립을 쓴 노인이 외쳤다.

"이놈들! 뭐라는 거냐! 해방성은 또 뭐냐, 봉명성은 대강 뭔지 안다만, 왜 봉명성이 이 근처에 나타나면 봉인이 풀린다는 거야!"

노인의 물음에, 공묘세가 가주 공묘령이 입술을 뜯으며 말했다.

"노사께서는 산수셨던지라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으셨나 보군요. 봉명성은 해방성(解放城)이라고도 불립니다. 왜냐하면 봉명성은 그 자체로 해방(解放)을 상징하며, 봉명성이 나타나는 순간 그 일대의 천지영기는 해방의 상징에 감응하며 갇혀 있던 것들을 해방시키지요."

"뭣…? 봉명성에 그런 능력이 있다고?"

나 역시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원립이 대학살을 일으키고, 200년 후에 나타났던 이유가… 저것인가?'

공묘령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계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봉명성은 애당초 이 세계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뭔가를 해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선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것이 특수한 선보일지, 아니면 어떤 신화적인 혈통일지, 그도 아니라면 고대 존재의 혼백일지는 모르지만요."

"봉명성이 뭘 위해 만들어졌든 관심 없소. 그래서… 하려는 말이 뭐요?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노사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아마 맞으실 겁니다. 한 마디로, 봉명성이 나타나는 곳에 봉인이 있다면, 그 봉인 역시 해방성의 기운에 감응해 완전히 해체되거나, 혹은 한참 약화됩니다."

"그 말은…."

청문중진이 노인의 말을 받아 진중하게 말했다.

"저 노괴가, 200년 후 봉명성이 강림하면 다시 풀려난다는 말이오."

술렁술렁….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수많은 결단기 수도자들이 공포에 질린다.

그때.

청문중진이 소리쳤다.

"모두 들으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공포에 떨 것이 없소! 어쩌면 잘된 일일 수도 있소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청문 가주?"

"노괴가 학살극을 시작한 것을 알고, 대륙의 결단기 수사들께서 긴급하게 모이셔서 허겁지겁 원립을 상대하셨소. 분명, 모두가 만전의 상태는 아니셨을 것이오. 그렇지 않소?"

"마, 맞소!"

"그, 그래. 연단을 하던 중에 원영기 노괴가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 해서 급히 튀어나와서 제 실력을 내지 못했소이다!"

청문중진의 말이 이어졌다.

"200년은 우리 같은 이들에겐 긴 시간이 아니라지만, 절대 짧은 시간도 아니외다.

전 대륙의 기재들이 천인기 선배들과 함께 비승했다고 해도, 원영기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이들만 올라갔을 뿐. 결단기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기재들은 충분히 남아 있소! 200년 동안 인재들을 더욱 양성하고, 결단기 수도자의 수를 늘리고, 더욱더 만반의 준비를 하면 될 것이오.

우리가 며칠 간의 준비로 저 노괴를 함정에 몰아넣었듯이, 200년간 준비를 하면 아무리 원영 후기 노괴라도, 아니 원영 대원만 노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에, 곳곳에 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안색이 점차 밝아졌다.

"200년 후! 우리는 200년 후를 기약해, 저 원영기 노괴를 잡아낼 것이오! 물론 200년 안에 저 노물이 수명이 다해 버린다면 두말할 것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키워 낼 기재들이 있고, 미래가 있소! 준비를 더 할 수 있소!"

그의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나는 그제야, 회귀를 반복하며 궁금했던 일의 전모를 대강 알 수 있을 듯싶었다.

"이번에 일어난, 답천사막의 대학살(大虐殺)을 기억하며, 200년 후에 노괴와 벌일 대전쟁(大戰爭)을 준비합시다!"

회귀 10년차.

괴군의 행동으로 벌어진 작은 나비 효과로 인해,

답천사막 대학살이 수십 년은 빠르게 앞당겨졌고.

그로 인해 전 대륙은 200년 후에 있을 혈목자 원립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네가 밟아온 것 (2)

[프흐흐, 어디 한번 해 보거라. 기다리고 있겠다. 200년 후에 날 최대한 재미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니….]

결계 안쪽에서, 원립은 우리를 비웃으며 기척을 죽였다.

"우선 노괴가 듣는 앞에서 계획 등을 회의할 수는 없으니. 우선 각 세력의 장들께서는 세력으로 돌아가시어, 답천사막 대학살과, 200년 후의 대전쟁에 대비할 준비를 시작해 주시기 바라외다!"

청문중진이 그리 말하였고, 동방의 군주 중 하나라는, 전신에 새하얀 붕대 같은 것을 두른 수도자가 우리에게 외쳤다.

"그리고 전 대륙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다음 번에 모여 회의를 준비해야 할 것이오. 언제쯤 다시 만나 회의를 열 것인지 결정하고 갑시다."

그의 말에 잠시 두런거리는 것 같던 결단기 수도자들이, 점차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해, 친지를 잃은 결단기 수도자들 몇몇.

그리고 나와 같은 산수라는 갈의 방립 노인은 텅 빈 표정으로 원립의 성 옆에 서 있었다.

얼마 후.

결단기 수도회의의 시기와 장소가 정해졌다.

시기는 지금부터 10년 후.

동방의 부족 국가들과, 서방의 성제, 연, 벽라 삼국의 수도자들이 무난하게 도착할 수 있는 북방 대초원.

대초원에서도 원립에게 첫 번째로 학살당한 초원 부족의 마을이었다.

각 가문의 가주들에게 회의의 초대장으로 쓰일 부적들이 주어졌고, 세력이 없는 나와 결단기 산수 3명에게도 따로 초대장이 주어졌다.

그렇게, 결단기 수도자들은 시기와 장소, 그리고 초대장을 받고는 각자 비둔술을 사용하여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친지를 잃은 북쪽 대초원의 결단경 부족장 두 명.

청문령을 잃은 청문중진.

그리고 산수 세 명과 나.

우리는 모든 결단기 수도자들이 돌아간 후에도 잠시 남아 흑색의 성을 노려보았다.

그 중 산수 두 명은 얼마 후 분노를 삭이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방립을 쓴 갈의 노인과 나, 청문중진은 그대로 해가 져 버릴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한참을 눈이 빠져라 흑색의 성을 노려보던 우리는, 달이 중천에 뜰 때가 되어서야 하나 둘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제 가겠다. 령이의 유해를 수습해야 하니."

"…저도 같이 가지요."

'유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벽라국 방향을 바라 보았다.

청문중진은 갈의 방립 노인에게 말했다.

"월량 노사께서도 수습하실 사람의 유해가 있지 않으십니까? 노괴를 아무리 노려보셔 보았자 의미가 없으니, 후일을 기약하고 물러나지요."

"…상관없다."

갈의 방립 노인, 월량은 이를 갈며 말했다.

"내 고손자 내외는, 이번 대학살 때 죽은 게 아니니라. 대략 10여 년 전에 살해당한 녀석이었고, 지금껏 흉수를 찾지 못해 전 대륙을 떠돌아다녔다만…. 이번 대학살 때 저 노괴 놈이 학살극에 남긴 법술을 보고, 놈이 내 고손자 내외를 죽인 놈이라는 걸 확신했다. 고손자의 유해는 십 년 전에 진즉 수습하였으니 신경 쓰지 말고 가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후손은 답천사막 대학살 때에 죽은 것이 아닌 대략 10여 년 전에 원립에게 살해당했고, 그는 이번 대학살 때에 자신의 후손을 죽인 범인이 원립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뿜어지는 의념을 읽어내며 물었다.

"후손을 많이 아끼셨나 보오."

그가,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게 뭐라 하려던 모양이었으나, 내 텅 빈 눈을 들여다보고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너는 누구를 잃었지?"

"정인, 스승, 친구. 그리고 이웃들."

"…그런가. 내 후손 녀석은… 내가 가장 아끼던 녀석이었다. 나도 네 기분을, 너도 내 기분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아마 우리 서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뚝, 뚝….

그는 피가 섞인 눈물을 흘리며, 이를 갈았다.

"몇백 년이 걸리든, 놈을 쥐어뜯어 그 육신으로 젓갈을 담가 먹고 싶은 기분이니라…."

그는 다시 원립이 갇힌 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먼저 가서 이번에 가 버린 소중한 이들의 유해를 수습해 주어라. 나는 내일쯤 출발하지. 이 분노를 삭이고, 훗날에 놈을 함께 죽일 날을 고대하겠다."

나와 청문중진은 잠시 그를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그를 내버려 두고 벽라국 방향으로 출발하였다.

* * *

천색성에 다시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휘이이이―

사막의 모래 폭풍을 뚫고 도착한 천색성은, 엉망이었다.

"…."

"…."

성 곳곳에는 피가 낭자해 있었으며, 성벽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성문은 무너져 있었으며, 그나마 성벽만이 그럭저럭 형태만 남아, 한때 이곳이 성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성 안쪽은, 여전히 처참했다.

수많은 민간인들, 수도자들의 유골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나와 청문중진은 다른 이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가지런히 놓인 김영훈.

목이 사라지고 단전에 구멍이 뚫린 북중호.

혈목이 전신에 돋아나 있는 청문령.

하반신이 사라진 북향화.

그들은 유해는 지난 며칠 동안.

사막의 건조한 공기에 노출된 채로 있었던 터인지, 전부 반쯤 썩었다가 말라붙어 보존되어 있었다.

청문중진은 말없이 청문령의 유해로 다가가, 그의 육신 안쪽에서부터 뻗어 나온 혈목을 차츰차츰 제거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김영훈에게 다가가, 여덟 조각으로 나뉜 유해를 수습해 주었다.

'내단이… 없군.'

그의 사체를 다시 합치자, 김영훈의 단전 역시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내단이 사라진 것이 보였다.

나는 그런 후 주변을 돌아다니며 북중호의 목과 북향화의 하반신을 찾아보았다.

북중호의 목으로 보이는 고기 조각은 찾을 수 있었으나, 북향화의 하반신은 어디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북중호의 목만을 가지고 가 그의 시신 위에 다시 놓아 주었다.

나는 쭉 다른 이들의 시신들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김영훈의 경우엔 뭔가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북중호와 북향화.

그리고 청문령은 할 것을 다 했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나는, 이만 가 보지."

청문중진은 어느새 청문령의 유해에서 혈목을 전부 제거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한 후 안아 들고 내게 말했다.

"령이의 장례에 참석하고 싶다면, 한 달 후 본가에 찾아오게나. 자네가 령이의 벗이었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맞아 주겠네."

"…알겠소."

청문중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청문령의 유해를 안아 든 후, 둔광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팔방에 널려 있는 백골들과 시체들.

이미 말라붙어 버린 핏자국들.

그리고.

비쩍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는 이들의 시신들.

마지막으로, 하반신이 아예 사라져 찾을 수도 없는 북향화의 시신.

덜, 덜덜….

나는 이를 악물며, 손을 떨었다.

주변으로 의식을 뻗어, 이 자리에 남아 있는 혼(魂)들이라도 있는지 찾아보았다.

모두가 이 자리에서 원통한 죽음을 당했으니, 원귀라도 되어 있진 않을까 해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물론이고, 영력이 강한 수도자들조차 단 한 명도 원혼으로 남아 있는 이는 없었다.

한이 없을 리는 없었고, 아마….

쨍―

나는 뜨겁게 내리쬐는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사막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천색성 특유의 그 강렬한 양기(陽氣)를 버티지 못하고, 있던 원혼들마저 햇빛에 의해 전부 강제로 승천한 게 아닌지 싶었다.

나는 한참을, 한참을 멍하니, 북향화의 시신 앞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아직도 조금 현실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지독한 악몽이라고, 누군가가 말해 주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멍청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북향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말라 비틀어져 죽어 버린 북향화의 얼굴이, 내 눈동자에 비취어 왔다.

"아…."

그리고, 그제야.

나는 현실감이 조금 들어왔다.

"아, 아아… 아아아…."

이것은 현실이었다.

나는, 이 끔찍한 현실에 서 있었다.

"아아아아…!"

나는, 털썩 주저앉아, 기어가듯이 상반신만 남은 그녀의 시체에게로 다가갔다.

부들부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사체에 손을 가져가, 혹시라도 망가질까, 나는 조심스레 시체를 들어, 껴안았다.

그녀의 시체는 가벼웠다.

원래도 가벼웠지만, 하반신이 사라지고, 며칠 동안 말라붙어 있던 탓인지.

정말로. 깃털만큼 가벼웠다.

꼬옥….

나는, 그녀의 남은 몸을 껴안고,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받친 후, 내 머리를 그녀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둘의 이마가 부딪혔다.

삼류 소설도 이리 우습진 않으리라.

서로 사랑한다고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아니, 그 말을 하기 직전에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난다?

마치 삼류 작가가 억지 신파를 위해 쓴 작위적인 설정처럼.

모든 게 억지 같고 작위적인 것 같았다.

"도대체…."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운명이란 뭐란 말이냐…!"

도대체 왜 나에게서 앗아가는 것이냔 말이다!

"왜 도대체 내게!"

왜! 왜! 왜!!!

끄읍, 끄읍….

나는 북향화의 시신에서 잠시 떨어져, 가슴을 두들겼다.

카학, 카하학!

쾅! 쾅!

가슴을 두들기자, 입에서 저주문 덩어리가 다시금 튀어나왔다.

뚝, 뚝뚝….

쉬이이이―

몇 개일까.

나는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저주문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대략, 삼천 개 정도인 듯싶었다.

108개를 다뤘다는 창시자의 수준을 진즉 뛰어넘었다.

무공에는 어떤 무공이든, 그 무공을 만든 이의 의(意)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의를 깨달으면 그 무공의 극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는 무공이 아닌 수도선술에도 있었다.

나는 이제야 음혼귀주문의 창시자가 음혼귀주문을 만들며 새긴 깨달음.

음혼귀주문의 의(意)를 깨달았다.

인간의 운명은 곧 고통(苦痛).

사람의 삶은 곧 저주(詛呪).

이 세상은, 고통으로 이뤄져 있다.

나는 이를 갈았다.

여러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분노와 고통.

절망과 슬픔.

다음에 든 감정은 미안함과 수치심.

나 자신에 대한 자학심이었다.

'미안하다, 얘들아.'

이전 내 아집과 미련함. 그리고 나약함으로 인해 갇혀 있었던 제자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에게 심어진 '분노'는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것도 있겠으나, 진씨세가에서 친지의 원혼을 심어, 법술로 증폭시킨 것 역시 있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을 막아섰다.

그때의 나는 아무 힘도 없었고, 어리석었으며 할 수 있는 것 역시 없었기에.

그 멍청한 아집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내가 키운 녀석들이 개죽음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에서야, 나는 내가 했던 짓이 얼마나 멍청한 아집 덩어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어쩌면, 어떤 인간은 개죽음을 당하더라도 복수를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너희들을 막아서 놓고, 지금 너희와 똑같은 맹세를 하려 하는구나….'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아니, 늘 한심스러웠다.

매번 죽을 때마다.

매번 시간이 되돌아갈 때마다.

한심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단순히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북향화로 인해 봉합되었던, 잠시 잊고 있었던.

그동안의 삶에서 얻었던 그 모든 고통과 상처를, 그녀를 잃고 나서야 다시 제대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시신을 유리 공예품처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뇌까렸다.

"맹세… 하겠습니다."

주변에 흩뿌려진 핏물은 말라붙어 검게 변했고.

피 냄새도 모래바람에 흩어져 희미해졌지만.

내 주변은 나를 뒤덮은 의식 영역으로 인해, 시뻘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코끝에 아스라이 혈향(血香)이 풍겨오는 듯했다.

"그 녀석을 잡아… 금단(金丹)을 잡아뽑아 으스러뜨리고, 원영(元靈)을 뽑아 찢어 흩어 버린 후…."

칠공에서 시커먼 저주문을 뿜어내며, 나는 핏빛의 의념과, 검은빛의 저주문 속에서, 백의를 입은 채 죽은 북향화의 시신을 꼬옥 끌어안았다.

"놈의 사지(四肢)를 뜯어 뽑아… 동서남북 사방에 던져 뿌려 놓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그 구멍에, 고통이 가득 차올라서,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을만치 먹먹하다.

"남은 육신을 발기발기 찢어… 개 떼에게 흩어 던져 준 다음…."

저녁놀이 천색성에 드리우고 있었다.

천색성 인근은 어느새 새빨간 저녁놀에 잠겨 온 사방이 붉어져 있었다.

나와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답천사막 방향으로 늘어져 있었다.

"흉수의 수급(首級)만을 남겨… 당신의…."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북중호, 김영훈.

이 자리에는 없는 청문령.

그리고, 천색성에서 학살당한, 모든 이웃들.

종이 가게의 노파, 묘목 가게의 주인, 천색성의 경비병, 연인들, 아이들, 여인들, 청년들….

"그리고… 그 놈이 짓밟아온 이들의… 영전(靈前)에 바쳐, 향을 피우겠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부르짖는건지.

그 자신도 모른 채, 하늘을 향해 거친 목소리로 맹세하였다.

"반드시… 그리하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나는 피눈물과 검은 눈물이 섞여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향해 복수를 맹세하였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천천히 다른 이들의 유해를 수습해, 천색성에 묻어 주기 시작했다.

며칠에 걸쳐, 천색성은 그렇게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어 갔다.

나는 북향화의 유언대로, 북중호는 그의 아내 연의 묘소 옆에 무덤을 만들어 안장해 주었고, 북향화의 상반신은 그녀의 공방 아래에 묻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북향화의 공방에 들어가, 내 볼품없는 제련 실력으로 유리 공예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괜히 어설프게, 불가사리를 닮았다는 인형이나 꽃 같은 것은 만들지 않았다.

나는 내가 가장 잘 만드는 것.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을 만들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검 형태의 공에품.

나는 사막의 모래를 녹여, 유리 비검 공예품을 하나하나, 만들어 갔다.

그리고, 나는 유리 검들을, 묻어 준 천색성 사람들의 무덤 앞에 부장품으로 꽂아 주었다.

벽라국에선 죽은 이들에게 유리 부장품을 놓아 주니, 그에 맞는 장례 형식이기도 하였다.

며칠 후.

천색성은 수천 개의 유리 검들이 무덤에 꽂혔으며, 나는 마지막으로 김영훈의 앞에, 유리 도(刀)를 꽂아 도묘(刀墓)를 만들어 주었다.

털썩!

이제 내일이면 청문세가에서 청문령의 장례가 치러진다 한다.

나는 청문령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전, 북향화의 무덤 앞에 앉았다.

아직 그녀의 무덤에는 유리 공예품을 바치지 않았다.

내 뒤로는 이미 수천 자루의 유리 검들이 꽂혀 있었건만.

나는 아직,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기 싫었는지도 몰랐다.

그래, 나중에.

그녀에게 바칠 부장품은, 원립의 목을 이들의 영전에 바친 그 후에 만들어, 그녀의 무덤에 놓아두자.

나는, 그녀가 남긴 옥색 노리개를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뚝, 뚜둑….

시커먼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얼마간 이 앞에서 묵념한 나는, 북향화가 남겨 둔 목함을 꺼냈다.

목함에 안에 담긴 것은 법보는 아니었다.

그저, 법보를 만들 수 있는 법보의 설계도.

나는 법보의 설명을 읽어내려 갔다.

북향화는, 내가 말한 모든 조건을 지킨 법보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법보의 이름은 무색유리검(無色琉璃劍).

법보의 재료는 사막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모래였고.

회로는 간결했으며.

그녀가 지금껏 내게 제일 많이 연습시켜 온, 유리 비검 형태의 법보였다.

네가 밟아온 것 (3)

나는 한참이나 무색유리검의 구조도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만든 작품을 감상했다.

법기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술적인 구조였다.

무형검의 힘을 10할, 아니, 12할의 위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위대한 법보.

그것이, 그녀가 남겨 놓은 법보의 구조도였다.

나는 그 구조도를 보며,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무덤가에 앉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또 웃었다.

그리고, 밤이 되고, 다음 날로 넘어가기 전.

나는, 청문세가로 출발하였다.

청문령의 장례를 보기 위하여.

* * *

청문령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무려 축기기 3대 위인이라 불렸던, 청문세가의 자랑거리인 그였다.

동시에 가주인 청문중진의 조카인 그였기에, 그의 장례는 가주의 주도 하에 크게 치러졌다.

수많은 청문세가의 장로와 원로들.

그리고 후기지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엄숙하게, 청문령의 입관(入棺)을 바라보았다.

나는 청문중진의 뒤쪽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이젠 눈물도 더 나오지 않는다.

그저, 청문령의 장례식에 흉한 저주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음혼귀주문을 억누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끼이이익!

그의 관이 덮혔고, 청문령은 청문세가의 가묘에 안장되었다.

얼마간 청문중진이 앞에 나서 축문을 읊었고,

나는 그 축문을 들으며 그의 죽음 역시, 똑똑히 가슴 속에 담았다.

언젠가, 그의 죽음 역시 한데 담아 원립에게 돌려줄 것이다.

그리 정했다.

청문령의 장례식은 몇 주간 더 이어졌고, 그의 장례식이 끝난 후.

청문중진은 청문세가의 원로원과 장로들을 모아, 청문령의 죽음.

그리고 답천사막 대학살과, 혈목자 원립에 대하여 회의를 하였다.

나 역시 청문령의 벗인 결단기급 전력의 명목으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니, 다른 것 때문인가.'

나는 청문중진이 원로원들의 앞에, 청문령이 지금껏 만들었다는 진법을 펼치는 걸 보며 생각했다.

"지금껏 세가의 원로원에게만 알렸던 사실이고, 이번 사건만 아니라면 쭉 비밀로 했겠으나… 마침 봉명성이 이백 년 후 나타날 위치가 노괴의 동부 인근이라 하니 지금 기회에 말하도록 하겠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선, 봉명성에 들어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천인기 선배들이 가져가셨네. 하지만, 원로원은 알고 있으나, 령이의 진법을 사용하면 이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장생과들을 수확하는 게 가능하네.

하여, 나는 우선 200년 후가 오기 전에, 먼저 봉명성에 들어가 장생과들을 수확하는 계획을 제안하고자 하네."

아무래도 그는 집단의 수장답게, 집단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는 처지일 터.

그는 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서 수사, 령이가 죽은 일은 안타까우나, 령이와 자네가 만든 진법이 헛되이 쓸 수는 없네. 하여, 혹시 자네가 섭명함을 통해 다시 봉명성으로 갈 수 있는…."

내 감정을 최대한 배려하며, 그는 조심스레 물어 왔다.

하지만 나는 '봉명성'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봉명성."

"음?"

"봉명성, 봉명성, 봉명성…!"

내가, 갑자기 미친 것처럼 봉명성을 마구 되뇌자, 결단기 원로와 청문중진은 움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봉명성을 떠올리며, 미친 듯이 외쳤다.

"봉명성을 이용하면, 원립을 잡을 수 있다!!!"

원립은, 봉명성에 들어올 것이다.

봉명성의 전층을 부수고, 숨겨져 있던 봉명인을 노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를 위해 봉명성에, 무조건 들어올 터였다.

"가주께서도 기억나실 것이오! 봉명성! 봉명성의 축을 자극하면, 어떻게 되는지!"

두서가 없는 말이었지만, 청문중진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챈 듯 눈을 빛냈다.

"…! 서 수사의 말은, 원립을 결단기 수준까지 끌어내리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소!"

나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원립을 잡을 수 있소! 놈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고, 복수를 할 방도가 있단 말이오!"

"…하지만, 서 수사가 말하는 방법은 결국 봉명성의 진법을 끌어올려, 봉명성 내의 모든 존재의 수행을 한 단계 봉인하는 게 아닌가? 유지 시간도 길지 않고… 심지어 수행의 봉인은 모두에게 적용되네. 그 노괴가 결단기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은 축기기 수준으로 떨어지니, 결국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잡을 수 있소."

"뭐라?"

"내가 익힌 공법은, 봉명성의 봉인이 내리눌러도 그 안에서 힘을 쓰는 게 가능하오. 그래서 그때 가주와 청문령 도우가 전송진으로 빠져나갔을 때, 나 역시 그 공법으로 공간 압력을 견디며 나갔던 것이지. 봉명성의 진법을 발동시킨 후, 원립을 결단기로 끌어내리고 나와 붙이면 놈을 충분히 죽일 자신이 있소이다!"

내 말에 청문중진은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고, 결단기 원로원들 역시 수군거리는 기색이었다.

청문세가의 장로들만이 우리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 말, 보장할 수 있겠소?"

"영석만 준다면, 송진에게 말하여 섭명함을 타고 다시 봉명성에 가서 증명해 드릴 수 있소이다."

북향화가 건드렸던 회로는 무엇인지 기억이 난다.

어떻게 건드렸는지도 알고 있고.

청문중진은 진중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10년 후 열릴 결단기 수도자들의 회의에, 서 수사의 능력을 꼭 증언해야겠구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서 수사의 역할이 막중하구려."

"알고 있소. 증명이 필요하다면 영석만 주시오. 언제라도 증명해 드리겠소."

청문중진은 원로들과 장로들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후, 그들과 토의를 했다.

얼마 후.

우리는 결국 다시 봉명성에 가 보기로 결정하였다.

* * *

쿠구구구!

수많은 비둔술의 둔광이 하늘을 날았다.

이번 사안은 장생과는 물론이고, 원영기 수도자인 원립을 죽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었기에.

나와 청문중진은 물론, 청문세가의 원로원 중 두 명만이 세가에 남아 본가를 지키고, 결단경 원로원 4인 역시 우리를 따라오기로 하였다.

청문중진은 나를 비행법기에 태워, 타 원로들의 둔광과 같은 속도로 함께 흑풍해로 가는 중이었다.

무형검의 가속은 빠르기는 빨랐으며, 단거리에서는 비둔술 이상의 속도를 자랑했지만.

애초에 장거리용으로 개발된 비둔술과 전투용으로 개발된 무형검은 장거리 비행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때문에 나는 결단기급 전력일지라도 장거리 비행에서는 이렇게 결단기 수도자의 비행법기에 타서 쫓아가는 것이 안정적이었다.

"우선, 봉명성에 들어가면 령이와 자네가 만든 진법을 깔아 장생과를 5년에 걸쳐 완전히 생장시키고 과실을 전부 수확한 다음, 5년 후에 나머지 결단기 수도자들에게 자네의 계획을 말해 주고 봉명성을 개방할 생각일세. 괜찮겠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립을 죽일 수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소."

"그런가… 알겠네."

청문세가가 장생과를 독점하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애당초 내가 원래 장생과를 얻으려던 목적인 김영훈은 여덟 토막이 나서 죽었는데.

쿠구구구!

청문세가 결단기 장로들과 나는 흑풍해, 섭명함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였다.

촤아아!

마지막 결계를 뚫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섭명함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우리의 기세를 느꼈는지, 송진이 섭명함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오래간만입니다, 서 선배님."

서란이 흑색의 마의를 입고서 송진의 옆에 서 있었다.

이전의 그의 반인반요의 모습은 피부 곳곳에 비늘이 드러나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이마에 돋은 용의 뿔과 뒤에 자라난 용의 꼬리를 제외하면, 완전히 사람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송진이 가르친 공법과 관련이 있는 듯했으며, 그의 주변으로는 음산한 귀기가 감돌고 있었다.

'축기 최고봉에 도달했군.'

거기에, 그는 축기 대원만에 도달하여, 결단기의 문턱을 밟기 직전에 와 있는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제대로 인사를 받아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지금 상태론 밝은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입을 열지 않은 것이었다.

송진은 내 눈빛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결단기 수도자 다섯 명과, 결단기급 존재인 나.

그리고 우리가 짓고 있는 표정을 둘러본 그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그… 지난번에 봉명성에 두고 간 것은 조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

"…."

청문중진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저희는 그 일을 따지고자 온 게 아닙니다, 선배님. 다만 현재 대륙의 상황이 혼란스러워 다들 진중한 기색으로 있는 것이니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군요."

[험, 험…. 그렇다면야.]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나를 슬쩍 보며 청문중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대륙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더냐? 나도 별자리를 읽었다만, 천기에 크게 변혁이 일더구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륙 쪽에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났단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혈목자 원립. 그 노괴가, 원영기의 실력을 되찾고 답천사막 인근에서 어마어마한 학살극을 벌였소. 내 소중한 이들이 그 학살극에 모조리 죽었소."

[뭣!?]

송진은 그 말에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혈목자? 그 녀석이 원영기가 되었다고…? 각 종문과 종족에서 자질을 조사할 때에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결단기라고 판단되어 버려둔 놈이었다만….]

"그자가 모든 이들을 속이고 있었소. 진즉 원영기에 도달했다가, 비술로 스스로의 원영을 혈영이라는 것으로 나누어 쪼개, 답천사막 인근에 흩어놓았다 하더군."

나는 퀭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벌인 답천사막 대학살에, 전 대륙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나서 그를 봉인했으나, 200년 후 봉명성이 그가 봉인된 봉인지에 떠오른다 하여 각 세력은 전부 원영기 수도자와의 대전쟁을 준비 중이오."

[허….]

내 말을 들은 송진은 서란을 쳐다보았다.

[이런 제길, 하필 원영기에 도달해도 제자 놈에게 제일 위협적인 놈이 원영기에 올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군.]

"음…?"

나는 퀭한 눈으로 송진과 서란을 보며 물었다. 내 의념이 다시금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 놈이, 서 도우에겐 왜 위협적이오?"

내 목소리에 깃든 노기에, 송진은 물론이고 청문중진과 청문세가의 원로들 역시 몸을 움찔거렸다.

송진이 서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놈이 익힌 혈마진해광(血魔鎭海光)이라는 마공 때문이지. 그 놈은 수 속성, 특히 바다 요족들의 진혈(眞血)을 뽑아서 자신의 육신의 재생력을 극대화시키는 공법을 익혔다. 해당 마공으로 요족들의 요혼을 뽑아 제련해 부릴 수도 있지. 그리고 놈의 혈마진해광과 가장 궁합이 좋은 것은… 해룡족이다.]

그가 서란을 쳐다보는 눈에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얘기지만, 원립 녀석이 결단경 해룡족을 하나 사냥했다가 해룡왕 서휼이 그를 사흘 밤낮을 추격해 훈계하고, 자비로운 해룡왕이 그에게서 해룡족의 요혼과 시신을 돌려받은 후 그를 용서해 주었다는 일화는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지.

서휼 그 자는 자비롭지만, 너무 물러터졌어. 청색귀골곡이었다면 본문의 제자를 해한 녀석이 있다면 혼백을 뽑아 귀령으로 제련해 버렸을 것을!]

'해룡족의 요혼과 시신을 돌려받아…?'

나는 원립이 부렸던 일곱 요혼 중, 해룡의 형상을 하고 있던 혈룡의 요혼을 떠올렸다.

'…서휼이 돌려받았다면, 왜 그 요혼은 원립의 손에 있는 거지?'

[…어쨌든, 이제 서휼 그자도 없는 이상. 놈은 해룡왕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을 테니… 혈마진해광을 수련하기 위해 서란을 노릴 가능성도 있다는 거다. 서란은 반룡이지만 여하튼 왕손(王孫)이니, 그 피의 가치를 아는 원립이라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 테지….]

송진은 걱정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그런 송진에게, 청문중진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원립 그 노괴는 전 대륙을 피로 물들일 가능성이 높기에, 전 대륙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여, 200년 후에 돌아올 원립을 막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원립을 상대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하여 선배님을 찾아왔습니다."

청문중진은 송진에게 원립을 상대할, 봉명성을 이용할 계획을 말해 주었다.

[요는, 봉명성에서 그 놈의 경지를 끌어내리고 싸워 놈을 죽이겠단 건가?]

"예. 맞습니다."

[…위험하군.]

송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봉명성, 해방성이라고도 불리는 그 유물은… 그 성이 본체가 아니다.]

"예?"

청문중진과 원로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게 무슨 뜻인지요?"

[모르나 보군. 하늘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봉명성은, 본래 손바닥만한 작은 성 형태의 원통형 도장이다. 지금의 봉명성은 그 도장을 크게 확대시킨 모습의 성으로 지어진 것이지.]

송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봉명인, 해방인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승천문이 생기기 이전, 비승의 축복을 부여하여, 축복을 받은 대상자의 운명을 상계의 인력에 이끌리게 하여, 대상자와 상계의 거리를 좁히는 선보일세. 하지만 운명의 인력을 부과하는 그 부가 효과로… 봉명인의 소지자는 천운(天運)을 부여받게 되어 있네.]

"천운… 말씀입니까?"

[그래. 결단기인 자네들은 운명에 대해 잘 인지가 안 되겠지만, 천인기에 도달했던 나는 천명(天命)이라는 것의 힘을 알고 있기에 경고를 해 줄 수밖에 없어. 놈을 봉명성에 끌어들여 싸운다는 건, 놈이 봉명인을 얻어 천명의 가호를 등에 업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봉명인이 끌어들이는 운명의 인력보다, 더욱더 강한 운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그 천운 앞에 누구도 어쩔 수 없게 될 것이야.]

"운명… 천운…."

청문중진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결단기 수준으로 추락했다지만, 송진은 분명 천인기의 잔혼이었고, 그의 경험과 관록은 결단기 수준인 청문중진이 댈 수 있는 게 아님을 잘 이해하는 듯했다.

"잠깐, 그런데 선배님. 그 봉명인… 이라는 것의 정보는 저희도 모르고 있던 것인데. 그 노괴가 알고 있을 확률은…."

그때, 청문세가의 원로 한 명이 송진에게 질문을 던졌다가, 자신의 질문에 있는 모순을 깨닫고 말을 바로 흐렸다.

자신들이 모른다고, 그들보다 오래 살았을 '노괴'가 꼭 모른다고는 확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봉명인의 존재를 알고 있기도 했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원립은 봉명인의 존재를 알고 있소. 그에게서 살아남으며 알아낸 정보 중 하나요."

회귀에 대한 것은 말할 수 없기에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계획을 취소할 생각이오? 그가 봉명인을 얻는 게 문제라면… 그가 얻기 전에 죽여 버리면 될 것을."

나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 봉명성에 가서 내 말을 증명하지 않아 다들 긴가민가한가 보오. 어쨌든 봉명성으로 가 내 말을 증명해 보이지."

내 말에 청문중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서 수사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수확해야 하니, 그러도록 하지."

쿠웅!

원로 중 한 명이, 가져온 영석을 송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선배님께 부탁드립니다. 섭명함으로 봉명성에 가 주십시오. 어쨌든 저희는 봉명성에 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 그 정도 영석이라면….]

송진은 영석을 확인한 후, 다시금 섭명함을 띄웠다.

쿠구구구!

섭명함이 떠오른다.

나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란에게 다가갔다.

"서 도우."

"예, 서 선배님."

"지난번에, 내 부탁은 무엇이든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 않소?"

"그렇습니다."

나는 품에서 파공주를 꺼냈다.

"서 도우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소."

"그건…."

"이것의 작동법을 가르쳐 주시오."

네가 밟아온 것 (4)

"이건…?"

서란은 내게서 파공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이걸…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그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해룡왕께서 서 도우를 하라 하시며, 그 법보를 전달하라고 하셨소. 그리고, 나는 탐욕을 부려 그 법보를 내가 가지고 있었소만…."

자폭용 법보를 굳이 서란에게 전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정작 파공주는 법력을 불어넣어도 쓸모가 없었고, 뭔가 특수한 조건이 채워져야 발동하는 성질의 법보인 듯했다.

"일단 미안하오. 하지만…."

"잠시…."

그리고, 서란은 그 법보를 받아 든 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서란은 파공주를 소매에 넣고, 섭명함의 조종실로 날아가 송진에게 갔다.

그는 송진과 뭔가 대화를 나누는 듯했고, 조종실 쪽에서 복잡미묘한 의념들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얼마 후, 섭명함은 이공간에 있는 봉명성에 도착하였다.

그때까지도 서란은 송진과 파공주를 들고서 뭔가 대화를 계속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가, 봉명성에서 돌아와 다시 얘기를 나누기로 결정한 후, 청문세가의 결단기 수사들과 봉명성으로 진입하였다.

* * *

"우선 진법을 설치하기 전에, 다들 기다려 주시지요."

나는 청문중진과 청문세가 원로원에게 언질을 준 후, 봉명성의 축으로 가 북향화가 했던 것과 같이, 그녀가 건드렸던 부분을 그녀가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건드렸다.

그리고.

쿠구구구구!

봉명성 전체에 압력이 생겨나며, 나와 청문세가 원로원들의 법력이 한 단계 봉인되었다.

쿠그그극!

'수행이….'

한 단계 떨어졌다.

나는 겉보기에는 연기기.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은 축기기로 수행이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자, 그럼 보여 주시오. 정말 서 수사가 이 상태에서도 결단경의 전력을 낼 수 있단 말이오?"

한 청문세가의 원로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형검을 바르쥐고, 근처에 있는 봉명성 내부의 구조물 하나를 향해 휘둘렀다.

지난번에 북향화와 왔을 때도 반파되어 있던 그 구조물은, 내가 무형검을 휘두르자 일격에 그대로 갈려 나가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이제 조금 믿으시겠소?"

내 말에, 청문세가의 원로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봉명성의 진법이 해제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약 일각 정도가 이 진법이 유지되는 시간이오. 아마 봉명성의 회로에 손을 대서 어떻게 유지 시간을 늘려도 반 시진 정도가 최대겠지."

청문세가의 원로들은 각자 내 말을 들으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어쨌든 내 능력이 확인은 되었으리라 생각되외다."

원로원과 청문중진은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추후에 원립을 잡을 때, 수사의 능력을 바탕으로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겠소."

"험험, 그건 그렇고…."

원로 중 한 명이, 청문중진에게 말했다.

청문중진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내게 말했다.

"하면, 혹시 서 수사가 이제 진법을 펼쳐 주실 수 있으시겠소?"

"그러겠소."

어차피 다음 생에도 와서 펼쳐야 하는 진법.

미리 펼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나는 그들에게서 북향화가 만든 진법 법기를 받아, 봉명성 1층 곳곳에 설치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봉명성 중앙 수목원에 있는, 장생과가 열리려 하는 수원목에 다가갔다.

나는 얼마간 수원목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작 저 과실을 먹어야 할 자는 사라졌는데,

과실을 수확할 방법은 이제야 알아냈다.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퀭한 눈빛으로 수원목을 보며, 무미건조하게 진법을 발동시켰다.

쿠구구구구!

봉명성 전역의 영력이, 이 부근으로 몰려왔다.

답천사막, 천색성 인근의 부실한 영맥으로 펼쳤던 진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거대한 영기의 파도가 이곳으로 몰려와, 주변을 메운다.

청문중진과 원로원은 그 장엄한 광경에, 모두 입을 벌리고 그를 구경했으나, 나는 퀭한 눈으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쿠구구구!

"…이제 법진이 발동했소. 앞으로 5년 후, 진법이 이 인근에 축적된 목 속성의 영력을 장생과에 쏟아부어, 장생과들을 급속히 성장시킬 것이오."

"그렇구려. 고맙소."

나는 청문세가 원로원의 감사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는 잠시 진법을 조금 조정한 후, 봉명성에서 나왔다.

"우선 감사드리오, 서 수사. 5년 후 다시 와서 장생과를 수확하도록 하지."

나와 청문세가 원로원, 그리고 청문중진은 5년 후를 기약한 후 헤어졌다.

그리고, 청문세가 사람들이 사라지자, 송진과 서란이 내게 다가왔다.

쿠우우우!

송진의 의지에 의해 섭명함이 다시 공간을 넘어 머나먼 대해 위에 안착하였다.

"무슨 일이오?"

복잡한 의념을 흘리던 서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법보… 정녕, 용왕께서 주셨단 말씀입니까?"

"…그렇소."

"정녕, 제게 전달하라고 하셨단 말이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란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하였다.

"혹, 이 섭명함 앞에서 귀도맹세로 그 진위 여부를 증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물든 채로 말했다.

섭명함에 대고 하는 맹세는, 그 맹세나 발언이 어겨졌을 때 사후에 섭명함에 혼이 빨려든다고 하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섭명함에 대고 맹세하지. 서휼이 파공주를 서 도우에게 전달하라고 부탁한 것이 사실이오."

"…하, 하하…."

서란은 아연한 표정으로 웃으며 머리를 짚었다.

잠시 그런 그를 쳐다보던 송진은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 용왕에게 그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 비정한 자였을 줄이야.]

송진은 파공주를 꺼내며 말했다.

[서란과 내가 조사해 본 결과, 이 법보는 해룡족의 진원진혈을 가진 이가 '지정한' 사람만이 발동시킬 수 있다. 진원진혈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법보에 간섭도 불가능하며, 진원진혈을 지닌 해룡족이 지정한 자가 아니라면 발동이 불가능한 거지. 그리고….]

그는 파공주를 보며 말했다.

[이 파공주에 지정된 자는, 서란 본인이었다.]

"…스승님, 불초 제자…."

[들어가 쉬고 있어라.]

"감사, 합니다."

서란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잠시 혼자 있겠다고 하고는 섭명함 안쪽으로 들어갔다.

송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놈은 이 법보가 무슨 법보인지 아느냐?]

"알고 있소."

나는 사실대로 말했고, 그 말에 송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두덩이에서 귀화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폭용 법보라는 걸 알면서… 서휼의 명을 받았단 말이냐?]

"그래서, 지금껏 전달하지 아니했잖소. 그리고 그 법보는 내가 사용할 용도로 작동법을 알려 달라고 한 것이외다."

[….]

"그렇게 바로 알아차릴 줄은 몰랐지만."

지지난 생의 서란은 법보를 직접 발동시킬 때가 되어서야, 파공주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설마 이렇게 보자마자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송진이 훌륭하게 가르치고 있나 보군.'

나는 송진을 쳐다보았다.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던 그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고맙다. 제자에게 그 법보를 전달치 않아 주어서. 그 법보가 발동되었다면, 섭명함이 무너지고, 나는 여기서 제자를 가르쳐 청색귀골곡의 명맥을 이을 시도도 하지 못했겠지.]

송진은 씁쓸한 말투로 파공주를 바라보았다.

"별 것 아니오. 그나저나… 내가 지난번에 당신에게 받았던 소원권이 하나 남아 있었지."

[아, 그랬지. 분명.]

나는 송진에게 말했다.

"마지막 소원권을 쓰겠소. 부디…."

뚝, 뚝….

떠올리는 것만으로, 주변에서 저주문들이 치솟는다.

"나를… 도와주시오."

흠칫!

송진은 움찔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움을, 바라외다."

[….]

그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서란에게 부탁해라. 아마, 내 제자가 네게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게다.]

"그건 무슨 말이오?"

송진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제자를 심해 속으로 보내어, 그곳의 음기를 모아 오라고 시켰지. 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를 더 시킨 바 있다.]

"음?"

그가 섭명함 위쪽에서, 흑풍해의 남쪽을 가리켰다.

[저 먼 바다 끝, 남쪽에 있는 [세계의 끝] 인근에, 해룡족의 본거지가 있지. 해룡왕이 거했던 해룡궁(海龍宮). 그리고, 서휼은 어쩐 일인지 서란을 이곳에 남겨두고 가면서, 녀석이 해룡궁에서 수련하지 못하게 하고 해룡궁을 거대한 봉인(封印)으로 덮어 버렸다고 하더군.]

나는 잠자코 송진의 설명을 들었다.

[서란에게 듣기로, 섭명함을 자폭시키고, 섭명함이 예전 집어삼켰던 해룡족의 혼을 해방하면, 그 요혼이 서란에게 봉인을 푸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라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제자가 된 이상, 섭명함을 박살 내서 그런 짓은 절대 허락 못 하고, 서란에게 원영기가 되어서 섭명함에 직접 간섭하여 요혼을 찾아내라고 했지. 원영기 수도자는 섭명함이 먹어치운 혼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러려면, 해룡족의 영약이 잔뜩 남아 있을 해룡궁에 들어가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제자에게 부식 계열의 신통을 가르쳐 준 후, 서휼의 봉인을 가서 뚫어 보라고 하였다.]

송진은 큭큭 웃으며 말했다.

[해룡족의 혼을 구해 내고 해룡궁에 들어가느냐, 해룡궁에 들어가 실력을 키우고 해룡족의 혼을 구해 내느냐. 그 순서의 차이가 생겼을 뿐.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란도 그리하겠다 하였고…. 그리고 내가 가르쳐 준 신통에, 귀골곡의 고명한 진법도 가르쳐 주어서 녀석이 해룡궁의 봉인을 뚫게 했다. 그리고 이제 봉인의 귀퉁이가 거의 다 뚫렸다는 모양이고, 강력한 한 방으로 봉인을 뚫기만 하면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날더러 서 도우를 도와 봉인을 뚫어 달란 거요?"

[그래, 네가 익힌 그 기괴한 공법은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자랑하니, 분명 봉인을 뚫을 수 있겠지. 제자를 위해서 지금껏 강력한 한 방을 위해 귀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만, 네가 도와주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지.]

아무래도 서란을 위해 내 힘을 이용하려는 모양.

하지만 상관이야 없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서 도우를 도와 봉인을 뚫으면, 원립을 상대할 방도가 생긴다는 건가?"

원립.

그 녀석을 최대한 상대할 방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휼의 능력이 크다고는 해도, 섭명함도 없는 녀석이 해룡족의 장구한 역사 동안 쌓인 그 많은 보물들을 전부 가지고 비승했을 리는 없지. 분명 상당히 많은 보물이 해룡궁의 안쪽에 남아있을 터다. 그리고, 해룡족의 보물은 대다수가 원립 놈의 양대 주력 공법인 혈마진해광에게 상성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보물이다. 놈에게 상극인 기물들이 잔뜩 쌓여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지…!]

그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서 도우를… 돕도록 하겠소."

아무래도 좋다.

그놈에게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 말에 송진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섭명함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안색이 어두운 서란이 걸어 나왔다.

"…도와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

"그렇네."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란은 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 남쪽 끝으로 가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알겠다.]

그렇게 우리는, 해룡족의 본거지였다는 해룡궁.

남쪽 [세계의 끝]이 있다는 곳을 향해 섭명함을 조종하여 날아갔다.

* * *

쨍―

[흐음, 역시 섭명함과는 잘 안 맞는 해역이야.]

남쪽 바다는 잔잔했고, 하늘이 맑았으며, 태양이 거세게 내리쬐고 있었다.

천지영기가 안정적이었으며, 폭풍 같은 것도 일어날 일이 없어 보였다.

수시로 구름이 끼는 흑풍해와 비교하면 남쪽 바다는 굉장히 평화로운 듯했다.

'무엇보다….'

천지간에 떠도는 영기(靈氣) 자체가 굉장히 깨끗하고 따스했다.

일말의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제자야, 그럼 안내하거라.]

"예, 스승님. 해룡궁은 이 심해 밑바닥에 있습니다."

서란은 바다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무리 날씨가 맑았다지만, 푸르른 대해 속은 시꺼멨고, 깊이도 굉장히 깊어 보였다.

하지만 송진은 상관하지 않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타륜을 잡을 뿐이었다.

[좋아, 그럼 다들 알아서 숨을 참거라.]

쿠구구구!

곧이어, 섭명함이 귀기에 휩싸이기 시작하더니 바다 아래로 잠수를 하기 시작했다.

'별 기능이 다 있군.'

촤아아아!

나는 물을 막아 내는 섭명함의 귀기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섭명함의 귀기는 수면 위쪽에서는 햇빛에 닿아 조금씩 소모되는 듯했으나, 점차 심해로 내려가자 심해의 음기를 흡수하며 알아서 힘을 보충하는 듯했다.

'이게 다 망가진 폐함의 기능이라….'

나는 잠시 섭명함을 둘러보다가 관심을 꺼 버렸다.

북향화, 김영훈, 청문령, 북중호와 천색성의 이웃들.

그들이 죽은 이후론, 왠지 어떤 일에도 딱히 감흥이 없었다.

신기한 것을 보아도 잠시 흥미가 일고 말 뿐이었다.

쿠구구구구!

얼마간 심해로 내려가던 섭명함이, 마침내 심해의 바닥에 닿았다.

쿠구궁!

[도착했군. 너는 서란을 따라 해룡궁에 걸린 봉인을 뚫어 다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참고 서란과 함께 섭명함의 귀무 바깥을 나섰다.

촤아아악!

어마어마한 수압이 나를 내리눌렀지만, 혈관에 강기가 흐르는 시점에서 그건 별로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숨을 못 쉬는 것 역시 범인들에 비해 3, 4일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서란은 해룡 형태로 변화하였고, 앞서 심해 속을 헤엄쳤다.

'수면 위는 굉장히 따스하고 기분 좋은 영기들이 많았건만….'

그 밑에 있는 심해는, 어쩐지….

'말라붙어 있군.'

어둡고, 생명력이 없었다.

심해에도 생명체는 산다.

하지만, 어쩐지 이 근방에는 생명체가 한 마리도 살지 않았다.

의식 영역에는 미생물조차 잡히지 않았다.

마치 사해(死海)라도 되는 듯이.

얼마 후, 나는 서란을 쫓아가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어둠의 장벽.

시커먼 반구형의 뭔가가, 전방에 있는 심해 밑의 땅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장벽이 주변의 생기(生氣)를 끝없이 흡수하는 것이 보였다.

"이게 그 해룡궁의 봉인인가?"

요족어는 공기가 아닌 영기를 진동시켜 말하는 것이었기에, 능력만 되면 딱히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나는 숨을 참은 상태에서 서란을 보며 물었고, 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저 구석에, 봉인의 흐름이 가장 약한 곳에 부식의 신통을 걸어 봉인을 약화시켜 놓았습니다."

나는 서란을 따라 다시 얼마간 헤엄쳤고, 봉인의 한 귀퉁이.

그곳에 둘러싸인 시커먼 안개를 볼 수 있었다.

쿠구구구!

음기와 귀기가 진법에 의해 잔뜩 뭉쳐, 봉인의 한 구석을 향해 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다.

"흑색귀골곡의 귀곡부휴진(鬼哭腐䝗陣)이라는 진법입니다. 봉인이나 결계, 방어진법에 구멍을 내는 것으로 유명한 전쟁용 진법이라 하시더군요."

송진이 가르쳐 주었다는 흑색귀골곡의 고명한 진법이라는 것 같았다.

나는 서란을 따라 귀곡부휴진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시커먼 안개로 휩싸여 있었고, 그 안개들이 진도를 그리며 봉인의 한 구석에 푸른 귀화를 태우고 있었다.

나 역시 진법에는 일가견이 있었기에, 귀곡부휴진이 봉인의 어느 부분을 약화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저 가운데를 공격하면 되는 거요?"

"맞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나는 담담하게 무형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귀곡부휴진을 향해 무형검을 찔러 들어갔다.

쿠우우우우!

심해의 대지가 흔들렸다.

물속이라 거대한 폭음이 울리지는 않았으나, 주변으로 거대한 파장이 퍼져 나가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하지만 서휼이 쳐 놓았다는 진법은 아직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걸론 부족하단 건가.'

나는 다시금 무형검을 들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

쿠오오오!

다시금 심해 밑에 먼지구름이 일어난다.

'약화된 게 이정도라니….'

이번에는 진동은 있었지만, 여전히 봉인은 두터웠다.

나는 단악을 펼친 후, 바로 월악의 자세로 돌아갔다.

산외산부진을 유지한다.

나는 산외산부진을 유지한 채로, 몇 번이고 서휼의 봉인에 단악을 때려 넣었다.

무형검으로 펼친 단악의 절초가, 약 16번 정도 연속해서 봉인에 부딪혔을 때였다.

쩍, 쩌저적!

봉인이, 갈라진다.

그리고.

촤아아아아!

그곳으로 구멍이 뚫리며 주변의 물이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푸흡!"

나는 물살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푸하!"

촤아아아아!

안쪽 공간은 공기가 가득찬 것인지 숨을 쉴 수 있었다.

얼마 후, 서란이 인간형으로 변해 안쪽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와 보는군요.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서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향수에 젖은 듯했다.

'어마어마한 생기(生氣)로군.'

나는 주변에 가득 찬 거대한 영력을 보며 주변의 영기를 흡입했다.

봉인 바깥보다 안쪽에 있는 영력이 기이할 정도로 높았다.

아무래도 봉인은 단순히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것뿐이 아닌, 주위의 영기와 생기를 흡수해 안쪽으로 밀집시키는 역할도 했던 듯했다.

그때였다.

'음?'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해룡궁을 보았다.

마치 인간 세상의 황궁과도 같이, 고풍스러운 전각과 고궁(古宮)들이 늘어서 있다.

비취빛의 기와가 얹어진, 언뜻 신령스럽게 보이는 전각들은 주르륵 늘어서 장대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늘어서 있는 전각들을 보며,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익숙한데…?'

쿠드득!

나는 토벽(土壁)의 법술을 펼쳐 뒤쪽 균열에서 쏟아지는 물을 막았다.

그런 후 허공을 박차 하늘로 날아올랐다.

"선배님?"

서란이 나를 보며 의아한 듯 물어 왔지만, 나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고풍스러운 이 해룡궁의 모습을 한 눈에 담았다.

'해룡궁의, 이 구조는…?'

나는, 해룡궁과 같은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네가 밟아온 것 (5)

'이건 분명….'

내 눈앞에 있는 해룡궁의 전체적인 구조와,

봉명성 최상층의 숨겨진 밀실에서 보았던 해룡족의 주술진.

그 구조가, 어째선지 겹쳐 보였다.

한참 동안 해룡궁을 눈에 담던 나는, 다시 내려와 서란에게 물었다.

"서 도우, 혹, 해룡궁의 구조에 대해 아시는 게 있나?"

"아, 해룡궁의 구조에 대해서 말이십니까?"

서란은 허공을 손으로 쓸며, 주변에서 흐르는 영력을 어루만졌다.

"선배님께서도 현재 느끼고 계시듯이, 이 해룡궁에는 늘 서기(瑞氣)와 편안한 영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해룡궁이 있는 이곳은 늘 기이한 서기가 맴돌았으며, 은은한 성스러움마저 어느 정도 느껴지고 있었다.

동시에 해룡궁의 영력을 흡입하면 어쩐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해룡궁 자체가 일종의 주술을 이루고 있으며, 용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주술은 해룡궁에 거하는 해룡족들이 늘 정갈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할 수 있도록 정신을 맑게 각성시키는 용도의 진이라 하셨습니다."

'정신 각성의 진…?'

나는 봉명성 숨겨진 방에 있는 진을 떠올렸다.

'구조가 거의 비슷하니, 효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분명 봉명성의 진 역시 정신과 관련된 진일 터….'

나는 의문에 빠졌다.

'왜… 봉명성에 정신과 관련된 진이 남아 있는 것이지?'

도대체 해룡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추후에 송진에게 이 진을 아느냐고 물어보긴 해야겠어.'

"그나저나, 어서 해룡궁을 뒤져 보지요."

서란은 주변을 둘러보며 앞장섰다.

"이곳은 외궁이라 여러 복잡한 진법이 펼쳐져 있지만, 내궁으로 들어가면 진들은 거의 없으니 내궁에서 법보나 영약 등을 찾아보면 될 듯합니다."

"알겠네."

나는 서란의 뒤를 따라, 외궁의 진법을 돌파하고 내궁으로 들어섰다.

해룡궁은 중심부로 갈수록 더욱 더 상서로운 기운과 성스러운 힘이 강해지는 듯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군….'

점차 의식이 맑아진다.

도대체 이곳에는 뭐가 있을까.

서란과 나는 중간에서 갈라져서 해룡궁 곳곳을 뒤져 보기로 했다.

'곳곳에 금제가 걸려 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미궁에 빠지는 진법 등은 전부 외궁에 있었으나, 내궁의 전각을 지키는 금제들은 곳곳에 펼쳐져 아직도 작동 중이었다.

'하나같이 만만한 금제는 아니군. 무형검으로 두, 세 번은 쳐야 풀릴 만한 것들이고….'

하지만 금제가 있다는 말은, 안에 쓸 만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다.

'어디부터 찾아볼까….'

내가 내궁 안쪽을 돌아다닐 때였다.

'음?'

나는 문득, 금제가 쳐진 수많은 내궁의 전각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금제가 펼쳐지지 않은 전각 하나를 발견했다.

그 전각은 다른 전각들보다 큰 축에 속했으며, 금제는 없었지만 전각 전체에 어떠한 주술문들이 새겨져 영기를 뿜고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이곳만 금제가 없다.

나는 기이함을 느끼며, 전각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움찔!

문을 열어 들어간 나는, 전각 안쪽에서 확 풍겨 오는 피비린내에 몸을 떨었다.

'여기는….'

전각의 안쪽은 넓었다.

전각의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책장이 있었고, 가운데 부분에는 넓은 천체도(天體圖)가 그려져 있었다.

천체도에는 28수에 해당하는 별자리,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에 해당하는 자리.

그리고 해와 달이 수놓아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천체도의 위쪽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르는 피가 흩뿌려진 채 말라붙어 있어 자못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도대체….'

더군다나 가장자리에 있는 책장들은 멀쩡했지만, 책장 안에는 책이 없었고 시커멓게 탄 숯덩어리들만 잔뜩 올려져 있었다.

책장들은 잔뜩 그을려 있는 것이, 마치….

'누군가가 이곳에 살던 이를 죽이고, 전각 주인의 책을 전부 불태워 버린 건가?'

제일 유력한 후보는 아무래도 서휼이었다.

그 자의 비틀린 심상으로 볼 때, 충분히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으니까.

'금제가 없는 이유는, 이곳에는 아무도 없어 굳이 금제를 걸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나 보군.'

누군가의 범죄 현장을 목격한 것 외엔, 딱히 소득이 없다.

내가 다시 전각을 나가려 할 때였다.

싸아아―

음혼귀주문을 수련한 나의 감각에, 뭔가가 잡혔다.

저주를 수련하는 음혼귀주문을 대성해 버린 나만이 알 수 있는 감각.

이것은….

'저주?'

누군가가, 이곳에 진득한 저주를 남겨 놓고 갔다.

그때였다.

기이잉!

내 내단이 갑자기 진동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깃들어 있던 진득한 저주가 내게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나는 당황하며 음혼귀주문의 저주문으로 저주를 상쇄하려 했으나, 저주는 이미 내게 들러붙은 후였다.

그리고.

―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곳에… 찾아올… 반요(半妖)는….

지독한 원념이 담긴 목소리.

―서란…밖에… 없으니….

고통에 가득 찬 그 목소리가 말한다.

―믿고… 맡기도록… 하마…. 란아, 천체도의 밑을… 들어 보아라….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목소리는 끊겨 버렸다.

피시식―

내게 들러붙은 저주는,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약간의 두통만을 내게 남긴 후 소멸해 버렸다.

'천체도의 밑을 들어 보라고?'

천체도가 그려진 바닥은 옥석으로 이뤄진 석장판이었다.

나는 정순지력을 양 팔에 잔뜩 불어넣은 후, 그대로 옥판 사이에 손가락을 욱여넣은 후 힘을 주었다.

우극, 우그그그극!

점차, 옥판이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옥판의 밑에는 다 썩어 가는 가죽 서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아무런 영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그냥 평범한 물건이었으며 순수하게 목소리 주인의 일기였던 모양이었다.

'의식 영역에도 안 잡혔던 물건인데….'

아무래도 이 옥판이 뭔가 의식이나 영기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어검술로 서책을 내 앞으로 끌고 온 후, 다시 옥판을 내렸다.

쿠구구!

옥판은 상당한 무게였기에, 나는 땀을 훔쳤다.

서책에는 요족어로 평범하게 '일기장'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이 자가 서란에게 자신의 일기장을 전달하려 한 거지?'

나는 일기장에 특별한 법술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역시 아무 법술도 요술도 걸리지 않은, 정말로 그냥 일기장이었다.

사락, 사락.

일기장의 주인은, 전횡(奠澋)이라는 해룡족의 원영기 장로 중 한명으로, 해룡족의 천문관(天文官) 직을 맡은 자였다.

일기장의 내용은 보통 전횡이 천문관 업무를 보며 특이한 천문 현상을 발견한 것, 혹은 그날 뭘 먹었는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날씨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일상 기록이 대다수였다.

―천원기 원로님과 오늘 담소를 나누었다. 세계의 끝을 계속 관측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지 않으냐고, 두통에 좋은 '단(丹)'을 섭취하라고 충고해 주셨다.

그는 해룡족의 원로를 만날 때, 천인기를 보통 '천원기(天圓期)'라고 표기하였다.

요족들은 천인기 대신 천원기라는 표현도 줄곧 쓰고는 했는데, 보통 천인(天人)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이들은 요족 우월주의를 가지고 있으며, 인족을 잡아먹고는 하는 이들이었다.

실제로 전횡은 인간 단약도 자주 먹고는 했던 이였다.

―호풍응단변을 익힌 가축들이 만들어 낸 단을 뽑아 섭취했다. 역시 효용성이 뛰어나다. 머리가 아픈 것이 사라졌다.

―왕께서 더욱더 뛰어난 가축공법도 만드셨다는 소문이 들린다.

―해룡족의 진혈을 가축에게 주입해 가축의 수행을 갈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가축을 해룡족이 전쟁에서 사망했을 시 놈의 육신을 그릇으로 한 번에 한하여 부활할 수 있게 하는 뛰어난 공법이라고 한다.

'쯧….'

아무리 다른 종족이라지만, 타 종족을 가축화시켜서 저 정도로 착취하는 것이 맞는 일인가.

나는 해룡족의 일화에 혀를 차며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사락.

그리고 그렇게 일기장을 넘기던 중, 나는 어느 부분에서 멈칫했다.

―오늘은 용왕과 나를 비롯한 천문관들, 그리고 해룡족의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였다.

―왕께서는 우리가 제출한 천문 기록들을 원로들에게 설명하며, 그분이 생각하고 있던 어떠한 추측을 말씀하시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 돋는 추측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의 생령은 결국 비승을 해서 세계를 벗어나야만 존엄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천원기 원로 한 분이 왕의 말에 반대하시었다. 너무 허황된 추측이라는 말이었다. 나 역시 소름은 돋았지만, 왕의 말이 조금 허황되다고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것이 많은 회의였다. 세상의 끝을 더욱더 자주 들러 천문을 자주 관측해 보아야겠다.

그날의 일기는 그것이 끝이었다.

'추측? 무슨 추측을 말하는 거지?'

서휼은 도대체 천문 기록을 보고 뭘 생각한 것일까.

나는 계속해서 일기장을 넘겼다.

이후 몇 장은 전횡의 일상 기록이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일기장의 한 부분에서 멈췄다.

―용왕께서 따로 관측하신 것이 또 있으신 모양이었다.

―왕께서 원로분들과 우리 천문관들을 불러모아, 그분이 말씀하신 추측에 대한 가설을 내놓으셨다.

―재미있는 가설이었다.

―이 세계에는 낮과 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천지영력이 음과 양으로 나뉘어 순환하듯.

―거시적 차원에서 장대한 영력의 기류가 음양으로 나뉘어 이 세계를 회전하기에, 낮과 밤이 있는 것처럼 착각이 될 뿐, 우리의 세상에는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뭐…?'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께는 불경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리 천문관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해와 달이 세계를 공전하는데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니!

―우리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원로분들께서 대노하시었다. 결국 우리는 원로원주님의 노갈성을 들으며 꾸중을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형을 받을 수도 있는 무례였으나, 왕께서는 역시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었다.

―왕께서는 조금 허황된 상상을 하시는 것 같지만, 그 드넓은 자비와 마음만큼은 정말 존경스럽다. 왕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해와 달이 세계를 공전한다… 라.'

아무래도 이 세상은 평평한 형태로 된 만큼.

거대한 태양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지동설이 아닌, 세계를 중심으로 해와 달이 움직이는 천동설이 정설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서휼의 발언이 신경 쓰였다.

'낮과 밤이 실재치 않는다면, 천동설도 지동설도 아닌 세계란 건가?'

나는 의문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최근 서란이라는 반인반룡 꼬맹이가 해룡궁을 헤집는다.

―왕의 혈통만 아니었다면 바로 내쫓아 버리는 건데, 늘 내게 달라붙어 짜증 나게 한다.

―왕께서도 늘 웃는 얼굴로 서란을 대하지만, 눈치가 있는 이들이라면 그분께서도 늘 녀석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얄궂게도, 그 짜증 나는 꼬맹이는 왕을 가장 잘 따르지만, 녀석은 알고 있을까.

―오히려 왕께서 그놈을 따돌리는 상황을 가장 많이 조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빨리 놈이 제 스스로 그걸 깨닫고 해룡궁에서 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

사락.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우리 천문관들은 세계의 끝으로 가 제대로 각을 잡고 해와 달의 공전을 관측해서, 왕의 추측을 깨 버릴 계획이었다.

―원로 분들 중에서도 몇몇 분은 은근히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셨다. 왕의 허황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시는 듯했다.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니, 그건 수많은 업적을 세운 왕께는 죄송스럽지만, 아무래도 왕께서 천문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리라.

―오늘부터 몇달 동안은 일기를 쓰지 못할 것이다. 쭉 세계의 끝에 틀어박혀 관측을 반복해야 하니까.

―가축들의 단을 많이 챙겨가야겠다. 세계의 끝을 계속 마주하면 두통이 심해지니.

사락, 사락, 사락.

다음 장부터는 백지였다.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던 나는, 문득 다시 일기가 쓰인 부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

이 부분의 필체는 굉장히 어지러웠다.

그리고 전횡이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일기를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으로, 해와 달의 관측에 성공했다.

―이럴 수가. 너무나 기이한 결과였다.

―해도 달도! 둘 다 세계를 공전하지 않는다!

―두 천체는 하늘의 한 자리에 붙박이듯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동쪽과 서쪽에서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조차 착시 현상이었다!!!

―해와 달의 실재 위치는 남쪽, 우리 해룡족의 본거지와 가장 가깝다.

―왕께서 내놓은 가설이 맞았다!!!

―해도 달도 공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며, 이 세계에는 낮과 밤이 없고, 우리가 낮과 밤이라 생각하던 것은 그저 천지영기의 음양의 흐름이 거시적으로 순환하는 결과일 뿐이었다!

전횡은 손을 덜덜 떨면서 글을 쓴 것인지, 글씨체가 굉장히 난잡했다.

나는 전횡의 글에서, 전횡이 굉장히 공포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왕의 가설이 증명되었다면, 이 세계는 뭐란 말인가?

―이 세계의 형상이란, 너무나도 흉측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불길한 곳에서 숨을 쉬고 수련을 하며 살아갔다는 것인가?

―우리가 구더기와 대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왕의 추측을 부정하려 관측을 시작했지만, 결국 나와 다른 천문관들의 천문 관측은 왕의 가설을 훌륭히 증명했을 뿐이었다.

―원로회에서 나를 부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천문관들도 전부 모일 것이다. 두렵다. 나는 괜히 이런 흉측한 사실을 증명해 버린 것이 아닌가?

사락, 사락.

다음 장, 그 장의 필체는 이전 장보다 조금 안정되어 있었다.

―참수형(斬首刑)이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확실히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나와 천문관, 원로원 전원이 왕의 말에 따라, 모든 종족이 한 번에 비승해야 한다는 왕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왕께서는 과연 자애로우시다.

―다른 종족들 역시 존엄을 챙길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참수형…?"

도대체 무슨 뜻인가.

뭔가 전횡이 저만 아는 사실을 일기장에 써 놓은 것 같았다.

'뭔가의 은어인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게 없다.

사락.

나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천문관의 결단기 막내. 아직 둔갑술도 펼칠 줄 모르는 어린 녀석이, 대륙으로 잠시 나갔다가 인족 마도 수도자에게 잡혀 죽었다 한다.

―왕께서 그 수도자를 쫓아가 훈계하고 주검을 받아 오셨다. 역시 인족들은 하나같이 음험하고 믿을 수 없는 쓰레기들이다.

―이놈들은 가축으로 쓰는 게 제일 좋은 것들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이놈들로 만든 단약이 제일 효험이 좋지 않은가!

―그리고 세계의 끝을 관측하면 머리가 아픈 것 역시, 가축들의 단이 제일 효과가 좋다. 물론 이제는 두통용으로 쓰일 일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끝을 오래 직시하면 두통이 왔던 이유, 그것은 대경계급의 진선(眞仙)과 나도 모르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임이 밝혀졌으니.

―꼭 진선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세계의 끝을 관측한다는 것은 진선의 의지를 계속해서 목도하는 것이니, 상단전이 알게 모르게 부하를 받는 것이다.

―이제 우리 천문관들은 더 이상 의미 없는 천문 관측을 멈추었다. 그러니 더 이상 단약도 필요 없을 것이고, 단약들은 비상용 약재로 쓰일 터이다.

"진선…?"

문득, 이전의 마을에서 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설화집이 떠올랐다.

설화집에는, 해와 달이 눈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최근 계속 기분이 나쁘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사실을 내 손으로 관측했기 때문일까.

―그 사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사실 나도 모르는 거대한 존재와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두렵다.

―그 존재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근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좀먹히는 것 같다.

―나뿐이 아닌, 대다수의 천문관들의 성격이 조금씩 폭급해지는 것이 보인다. 그들 역시 늘 안색에 공포가 서려 있다.

사락.

―이런 미친!

―괴군, 그 이상 성욕자 늙탱이가 사육장을 습격했다! 사육장을 관리하던 왕족은 물론이고, 사육장에 놀러 갔던 천문관 동지들도 전부 그 괴물에게 잡혀가 생체괴뢰로 개조당했다고 한다!

―사육장이 붕괴하고, 가축들이 전부 탈출했다고 한다.

―왕께서 달려나가시어 괴군을 추적하려 했지만 달아난 후라고 했다.

―너무나 속 쓰리고 원통한 일이다. 비상 약재들이 전부 도망치다니!

―최근엔 천문을 관측하지 않아 두통은 없다지만, 너무나 뼈가 아픈 손실이다.

사락, 사락.

―…최근 분위기가 이상했다.

―흑색귀골곡과 사이가 안 좋아져, 그들과 다투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난히 천문관 동지들이 자주 습격당하거나, 실종이 잦다.

―지난번 결단기 천문관 막내를 시작으로, 괴군의 습격부터 시작해, 유난히 천문관 동지들이 많이 습격당하는 것 같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실종된 천문관 동지도 적지 않다.

―아무래도 왕과 사이가 좋지 않아, 우리의 천문 관측을 응원하시며 왕의 허황된 추측을 반대하셨던 원로분들.

―그분들이 우리를 위험한 곳으로 내모는 곳일 확률이 높다. 천문관 동지들은 이 사실을 토의하며, 왕께 이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내가 대표로 왕을 찾아가 이 사실을 말했다. 왕께서는 믿음직한 얼굴로 잘 말해 주었다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그분께서 우리를 비호하겠다고 하셨다.

―특히 나는 해와 달을 직접 관측한 뛰어난 천문관이니, 단단히 비호할 것이라 일러 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관측한 사실로 인해 천문관은 물론이고, 천원기 원로분들조차 최근 인상이 변했다.

―그런 공포스러운 진실에는 원영기나 천원기에 구분이 없을 텐데도, 왕께서는 늘 자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다.

―역시 우리의 왕이다.

사락, 사락….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다음 장부터 전횡의 필체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천문관 동지 중, 이제 남은 것은 나밖에 없다.

―전부 흑색귀골곡과의 전투 중에, 혹은 괴군에게, 혹은 또 다른 기타 등의 재난으로 인해 소리소문없이 실종되거나 사망했다.

―분명 왕께서 비호하겠다 하셨거늘, 어찌 이리된 것이란 말인가?

―나는, 불경함을 알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무서운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왕과 반대하셨던 원로 분이 아닌, 왕께서, 직접 진실을 아는 천문관 동지들의 실종을 주관한다는 추측.

―그럴 리가 없다. 그분은 자애로운 분이시다. 걱정하지 말자. 괜한 걱정일 뿐이다.

사락.

그리고 바로 다음 장.

그곳의 필체는 완전히 어그러져 있었으며, 필체 자체에서 분노가 새어나왔다.

―왕이시여!

―왕께서 진실을 알고 있는 천문관 동지들을 죽음으로 밀어넣고 있다!

―나도 곧 죽을 것이다!

―나를 단단히 비호하겠다는 건, 내가 써먹을 곳이 많으니 마지막까지 뽑아 먹다가 마지막에 죽이겠다는 의미였을 뿐.

―나는 죽을 것이다. 비승에 참여치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도대체 왜 당신은 우리를 이리 내치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해룡족에 해가 되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천원기 원로분들조차 간혹 괴로워하시니까. 원영기에 이른 우리조차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니까.

―그래, 해룡족을 위한 것이라면….

―종족을 위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자.

분노로 시작되었던 그의 필체는, 일기를 쓰며 나름 마음을 정리한 탓인지 다시 안정되어 있었다.

….

사락.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편해졌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받아들이고만 있자.

―죽음을 받아들이니, 오히려 삶이 새로워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이 소중한 삶, 해룡궁의 정경….

―그리고, 나는 어쩐지 나와 비슷하게 왕의 주도 하에 따돌림을 당하는 서란.

―그 아이와 최근 친해졌다. 동병상련일지도 몰랐다.

―그 아이는 영특한 아이였다. 이전까지는 종족과 혈통의 편견에 빠져 보이지 않았던 그 아이의 총명함이 보였다.

―귀여운 것 같으니. 이 녀석이 천문관에 들어왔다면 잘 대해 줬을 텐데….

―왕께서는 이 아이를 비승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대신 괴군과의 싸움에서 다 박살 난 흑색귀골곡의 폐함. 그곳에 아직도 갇혀 있을 해룡족 전사들의 혼을 해방시키는 임무를 맡기신다 하셨다.

―역시… 왕은 냉정하실지언정 해룡족을 생각하시는 분이다.

―서란, 이 아이 역시 안타깝지만… 종족을 위한 일이니, 희생해야 할 터이다.

―나 역시, 곧 종족을 위해 죽을 것이다. 왕이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아마 승천문이 열리기 전에 죽겠지….

이제 전횡의 일기는 거의 끝부분에 가까워져 있었다.

사락.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겼을 때였다.

'이건….'

피.

다음 장은, 말라붙은 피로 쓰여 있었다.

―서휼!!!

―네놈을 증오한다!

―우리 해룡족 전원이 그에게 속고 있다!

―그자는 왕(王)이 아니다, 그저 옹졸한 범부(凡夫)일 뿐.

―서란아, 네게 이 말을 남긴다. 너라면 언젠가 이 세계에 남아서도 해룡궁에 다시 돌아올 터이니, 내 일기를 읽고 서휼의 진면목을 알아야 한다.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그가 입에 담은 것들 중 어떤 것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괴군 이상의 미치광이이며, 마음이 망가진 괴물이다!

―해룡족조차….

―서란아, 지금 그가 나를 죽이러 오고 있다. 길게는 말을 남기지 못하겠다.

―추후에 이 일기를 꼭 보아 다오!

―지금껏 말벗이 되어 주어 고맙다.

사락….

그것이, 일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많은 것을 알 수 있던 일기의 내용들.

나는 전횡의 일기장을 덮었다.

'흉측한 세계의 형상? 낮과 밤이 실재하지 않는다? 서휼의 진면목….'

여러 가지 진실들이 혼란스럽게 머리를 맴돈다.

'원립조차도, 서휼의 영향을 받은 녀석이다.'

서휼, 그자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탁.

내가 일기장을 덮었을 때였다.

꿈틀.

"음…?"

꿈틀, 꿈틀….

일기장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뭣…!?"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고, 영기가 깃들어 있던 것 역시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리고.

푸확!

일기장의 틈 사이로, 푸른 손이 책장의 틈을 빠져나와 내 양팔을 으스러져라 잡았다.

쿠구구구구!

갑자기 전신이 무거워진다.

주변의 천지영기가 나를 압박하며, 이 자리에 고정한다.

"이게 무슨…."

그리고, 자애로움과 상냥함이 듬뿍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

서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일기장을 덮었다는 건, 서란 네가 파공주를 쓰지 않고 살아남아 어떻게든 해룡궁에 도달했다는 뜻이겠지. 전횡은 내 앞에서 일기장을 잘 숨겼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단다.]

"뭣…!"

[안타깝지만, 란아. 네 역할은 거기까지란다. 섭명함에 갇힌 해룡족 전사의 혼을 해방하는 것이 네 마지막 쓸모였고, 네가 이 이상 살아 있는 것은 방해만 될 뿐이니… 그만 잠들거라. 어미와 아비 곁으로 가거라.]

우득, 우드드득!

나는 안간힘을 다해 서휼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해룡궁 전체가, 갑작스레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휼…!"

네가 밟아온 것 (6)

콰앙!

나는 바로 전각을 박차고 나섰다.

파츠츠츳!

나를 붙잡고 있던, 책에서 튀어나온 새파란 팔은, 어느덧 빛무리에 감싸지더니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해룡궁 전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전혀 멈추지 않았다.

'해룡왕의 잔념(殘念)…!'

격으로만 따지면 잔혼인 송진보다도 한참 낮은, 해룡왕의 의식 찌꺼기.

그러나, 그런 하찮은 것이, 해룡궁 전체로 퍼져 나가며, 곳곳의 천지영력을 일깨운다.

그리고.

쿠웅, 쿠웅, 쿵!

해룡궁의 전각들이, 하나하나 전부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각 안쪽에서 수많은 기물(奇物)과 법보들이 튀어나와 허공에서 빛난다.

파아아앗!

삽시간에 온 사방이, 해룡궁의 수많은 기물들이 뿜어내는 빛살에 새파랗게 물드는 듯했다.

'이게….'

"선배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서란이 용형으로 변해 이쪽으로 날아들어 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서 도우…."

"예, 선배님."

"도망칩시다."

쿠구구구구!

푸른 빛의 수 속성 법보들이, 한데 뭉치더니 서휼의 잔념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법보들에서 뿜어지는 빛들이 일렁이며, 거대한 한 마리 청룡의 형상을 취하였다.

마치, 서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쿠과과광!

법보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용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쿠구구구구!

삽시간에 해룡궁이 용의 몸부림에 쓸려 나간다.

법보가 없었던 송진과도 차원이 달랐다.

말 그대로 해룡족이 여태껏 모아 온 수많은 법보들을 한데 모아 천인기의 잔념으로 엮어 부리는 것이니….

그 위력은, 원영기에 한없이 가까웠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배님! 옵니다!"

피이잉!

용이 우리를 향해 꼬리를 내리친다.

쿠과과과!

어마어마한 파괴흔이 남았다. 하지만, 진짜는 그다음부터였다.

달각!

용의 꼬리에서, 비늘을 이루고 있던 작은 법보 하나가, 용이 꼬리를 치운 후에도 남아 있었다.

"제길!"

파아아앗!

그리고, 그 법보가 푸른 빛에 휩싸이며 주변으로 빛을 흩뿌린다.

콰아아아앙!

법보가 자폭한다!

나는 서란의 앞에서 자폭의 여파를 막아 내며 폭발을 걷어 내었다.

손이 찌릿거렸다.

'안 그래도 봉인을 뚫을 때 산외산부진을 펼쳐서 몸이 안 좋은데….'

거기에 자폭을 한 번 막아 낼 때마다 팔이 떨린다.

도망쳐야 하건만….

'사방이 막혀 있다….'

사방이 봉명성의 봉인으로 막혀 있었고, 우리가 들어온 구멍조차 저 법보 더미의 용이 막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실정이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법보들까지 하나하나 소멸시키고 있군….'

거기에 우리가 피해가 눈에 띄게 보이지 않자, 법보의 용은 점차 많이 법보를 자폭시키고 있었다.

"저 자폭, 어떻게 할 수 없나?"

"…무리입니다. 게다가…."

서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 요술의 용이 점차 법보의 힘을 끌어내며 밝아지는 게 보이실 겁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와 싸울수록 법보의 용은 몸체를 구성하는 법보 더미는 점차 푸른빛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저게 완전히 환해지면, 용 전체가 자폭할 것입니다."

뿌드득….

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이를 갈았다.

'서휼…!'

그가 노린 것이 서란이었든 아니었든.

어쨌든 결국 이곳에서 그를 상대할 법보들을 얻어 원립을 밀어붙이려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파아아앗!

청룡의 형상이 계속해서 달아오른다.

이대로 가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

그리고 그때였다.

콰과과광!

봉인진의 한쪽 면이 흔들리더니, 진의 면 너머로 시커먼 폐함의 뱃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섭명함이었다.

[타라!]

송진이 외쳤고, 우리는 청룡의 몸부림을 피해, 겨우겨우 섭명함으로 날아가 올라탔다.

고오오오오!

청룡이 울부짖었고, 청룡의 몸체가 완전히 백열하였다.

저 거대한 거체가, 자폭한다!

그리고 동시에, 송진이 조타륜을 잡으며 공간 전송을 시도하였다.

섭명함이 귀무에 휩싸이며 허공간으로 이동했고, 우리는 해룡궁 전체가 푸른 빛에 휩싸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해룡궁에서 탈출하였다.

* * *

[…그래서, 제자가 구조 신호를 보냈길래 가 봤다만… 결국 해룡궁에 있는 법보들이 그 청룡 형태로 변해서 싹 다 자폭했다는 게냐?]

송진은 두개골을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무 수확이 없다는 거로군….]

서란도 송진도 울적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들에게, 전횡의 일기장을 보여 주었다.

"난리 통에 챙겨 온 거요. 이 일기장을 덮었을 때, 서휼이 일기장에 남겨 둔 잔념이 발동하여 그 난리를 쳤던 것이지."

[흠, 확실히, 서휼의 의식이 깃들었던 것이 느껴지는구나. 특수한 조건을 만족하면 놈의 의식이 발동하며, 정해진 정보를 전달하게 하는 구조야.]

정말, 주도면밀한 자였다.

혹여나 서란이 우연하게 섭명함을 부수고도 살아남는 데에 성공하여, 해룡궁에 도달했을 때.

그때에도 반드시 죽여 버리는 방식이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해서 서란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그럼, 이제 이 책에 더 깃든 뭔가는 없소?"

난 혹여나 또 다른 해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송진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렇다, 내 안목으로 볼 때 더 뭔가가 있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란에게 이것을 건넸다.

'다음부터는, 함부로 일기를 펼치지 말고 송진을 데려와 먼저 이걸 보여 주는 게 낫겠어.'

서휼의 의식이고 뭐고, 송진에게 건네준 다음 남은 그 잔념을 섭명함에 먹여 버리면 알 게 뭐란 말인가.

"해룡족의 천문관, 전횡이라는 자의 일지요. 한번 읽어 보시오, 그자가 서 도우가 읽으라고 남겨 둔 듯싶으니."

"아, 전 장로님의…!"

서란은 흠칫 놀라며 얼른 일지를 받아들었다. 그가 일지를 읽는 사이, 섭명함은 다시 흑풍해의 그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수확은 이 정도이려나….'

아마 그 정도 폭발이면, 다른 전각들은 물론이고 해룡궁에 남아 있을 영약들도 모조리 한 줌 가루가 되었을 것이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나는 송진에게 해룡궁의 구조, 그리고 내가 본 주술진에 대해 물었다.

"하여, 혹시 해룡궁의 구조가 말하는 주술진에 대해 혹시 아는 바 있소?"

[음, 네가 말하는 주술진이 정확히 뭔지를 모르겠군.]

송진은 턱뼈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의문에, 정신없이 일지를 읽던 서란이 잠시 고개를 들고 결인을 맺었다.

우우웅!

우리의 눈앞에 영력이 맺히더니, 내가 알고 있는 그 주술진의 형상이 되었다.

서란이 요력을 불어넣자, 주술진이 작동하며, 잠이 깨고 내 의식이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주술진을 말하는 겁니다. 스승님."

[아, 이거 말이군! 흑색귀골곡이랑 표현 방법이 달라서 뭔가 했더니….]

송진이 알아챈 듯하자, 서란은 다시 일지를 읽는 데에 집중했고, 송진은 눈앞의 법술을 보며 말했다.

[상단전을 각성시키는 법술을 요족의 요술진으로 표현한 것이, 이 진이네.]

"상단전… 각성…?"

[청색귀골곡과 해룡족은, 수만 년 동안 대해의 패권을 두고 다퉈 왔던 세력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법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도 했지. 그리고 그중 하나가….]

우웅!

송진의 손끝에서 뿜어진 귀력이, 그 자신의 백회혈 쪽으로 향했다.

[이 '각성의 술'이야.]

백회혈로 들어간 귀력이, 송진의 두개골 안쪽을 회전하는 듯하더니 얼마 후 송진의 미간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건…?"

나는 저 법술을 본 적이 있었다.

일전, 백골귀마 허곽이 김 주임의 의식을 강제로 각성시킬 때 사용했던 술법.

그리고, 진씨세가에서 상단전에 귀혼을 불어넣어 재능을 증폭시켰던 술법과 굉장히 흡사했다.

'당장 영훈 형님이 사용하는, 상단전 격발 역시 백회에서 시작해 미간으로 정순지력의 흐름을 인도하며 불태우는 것이니까….'

완전히 흐름이 똑같았다.

[나는 서휼의 진면목을 모른다만, 어쨌든 그자는 대외적으로는 부드러운 성군이었고, 늘 해룡족들이 정갈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했다. 때문에 정신을 맑게 유지시키는 각성의 술을 해룡궁 자체의 구조를 이용해서 펼쳤다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지.]

"…."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왜 그 '정신 각성의 술'을 봉명성의 숨겨진 층에 펼쳐 놓았단 건가?

나는 서휼이 한 짓을 송진에게도 말했다.

혹시 그라면 뭔가를 떠올릴지도 몰랐으니.

하지만 송진은 내 말을 듣고도 생각나는 것이 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군, 왜 봉명성의 조정실에 그런 걸…?]

"조정실?"

[그렇다. 너희들이 들어갔던 숨겨진 층은 봉명성의 조정실이야. 네가 보았던, 봉명인을 놓을 만한 대 위로 봉명인을 올리면 그를 통하여 봉명성의 조정이 가능하지.]

이건 나름 새로운 정보였다.

'조정실에 굳이 정신 각성의 술을 펼쳐 놓았다…?'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놈이 바라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를 고민할 때.

드디어 전횡의 일지를 다 읽었는지, 안색이 극히 어두워진 서란이 쓴웃음을 지으며 일지를 덮었다.

다행히 아까의 것으로 서휼이 부려 놓은 수작은 끝난 것인지, 또다시 일지에서 푸른 손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저는, 정말로 모든 분께 버림받고 커 왔던 것이었군요. 그나마 마지막에 마음을 트신 전 장로님을 제하면…."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고통이 섞여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파공주로 자살하기 이전의 표정인가….'

"제가… 살아 있는 의미는 무엇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전 같았으면,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 혹은 그가 상처를 덜 받게 하기 위해 조금 배려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에 와서는 별 감흥이 일지 않았다.

그나마 그가 고통스러운 의념을 흘리자, 그에 조금 동병상련이 일 뿐이었다.

'위로라는 걸,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따스한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

이전에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했던 거려나.'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서란까지 자살하면, 더더욱 우울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겨우겨우 기억을 떠올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걱정 말게, 서 도우. 자네는… 이제 진정으로 사제의 연을 맺고, 그 안에 있잖은가. 자네를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니, 그에게서 의미를 찾으면 될 터…."

"…그렇, 습니까…."

내 말에 그나마 서란의 얼굴에 있던 그림자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감사를 받고, 퀭한 눈으로 송진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사실 이리되면 원점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했소만, 마지막 소원권을 써서 정말로 도와주시면 아니 되외까?"

[…휴….]

송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제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200년이라면… 그 안에 제자 녀석을 결단기로 만들어서, 너를 돕게 해 줄 테니까. 물론 나 역시 도울 것이고.]

"…고맙소."

그렇게, 해룡궁에서는 현실적으로 큰 수확은 얻지 못했으나, 어떤 것보다 귀중한 정보를 상당히 많이 알아냈고, 송진에게서 나를 돕겠다는 약조 역시 확실하게 받아 내었다.

나는 그에게서 약조를 받은 후, 흑풍해를 나갔다.

* * *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청문세가에서는 그사이에 나와 함께 진법과 장생과를 회수했고, 이제 전 대륙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이는 대회의가 열릴 날이 다가왔다.

휘이이이!

나는 북쪽의 대초원을 빠르게 박차며 날아갔다.

'이 근방일 텐데….'

나는 초대권으로 받았던 부적을 들고 주변의 영기를 감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우웅!

나는 저 멀리, 진법에 가려져 있던 어떤 장소를 감응할 수 있었다.

타닷!

환영진으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장소였다.

그러나 그 장소에 부적을 가져다 대자, 진법이 빛나더니 내가 지나갈 길을 터 주었다.

나는 진법에 난 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북쪽의 대초원답게, 진법 안쪽에는 수많은 하얀 천막들이 잔뜩 쳐져 있었다.

그 천막들에는 수도자들의 천막답게 수많은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있었고, 그 안쪽으로 결단기 수도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 왔소, 서 수사?"

저 멀리서 청문중진이 내게 다가오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어 대답을 했다.

"여전하시구려."

"…."

그는 내 표정을 보며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웃는 법이 생각이 나지 않았고, 퀭한 눈빛은 바뀌지가 않았으니.

지금의 이, 퀭한 표정 외에 다른 표정을 짓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진법 너머로 또 다른 사람이 넘어왔다.

갈의 방립 노인.

월량이라는 자였다.

그 역시, 나와는 다르지만 10년 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뜩 노한 표정.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고, 간단하게 서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회의장이라는 가장 큰 천막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잠깐, 너…."

월량이라는 노인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허리춤에 찬 그거, 왜 네가 그걸 차고 있지…?"

"…?"

난 허리춤에 찬, 향화의 유품.

옥빛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내 정인의 유품이외만."

"뭐…? 그건… 내 고손자가 차고 다녔던 물건인데…?"

"아…."

나는, 어이없게 북향화의 운명의 상대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운명의 상대는,

내가 회귀를 한 시점에서 이미 진즉 원립에게 잡아먹힌, 월량의 고손자였던 것이었다.

네가 밟아온 것 (7)

"아, 그렇군. 내 증손며느리가 증손에게 시집을 올 때 가지고 왔던 물건이었어. 증손은 초원 부족 사람이었지만, 증손며느리는 벽라국 사람이었으니…. 그리고 고손자를 낳자 그 아이에게 노리개를 선물로 주었고. 듣고 보니…."

월량은 나와 천막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이런 곳에서, 이런 인연을 만나니.

"증손며느리는 자신의 친구가 낳은 아이와 내 고손자가 맺어지길 원했지만, 증손자가 적당히 고손자의 짝을 찾아 주었고, 고손자도 딱히 그 약속에 안 얽매이고 결혼했다."

나는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고손자가 결혼하고, 고손자 내외가 행복한 생활을 할 무렵… 원립 그놈이… 어느 날 그 아이의 부족을 습격했다…."

뿌드드득….

월량은 이를 갈았다.

그의 의념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모두가 다 죽었고, 내 고손자는, 하반신만 남긴 채 상반신째로 사라졌어. 그 아이가 평소 제 어미에게 받아 가지고 다니던, 그 노리개째로…."

"…."

"나는… 그 노괴에게서 내 고손자의 상반신을 꼭 받아 내고야 말겠다…!"

'상반신이라….'

나름의 운명이란 것은 있었나 보다.

북향화는 하반신을, 그녀의 짝이란 사람은 상반신을 원립에게 잡아먹혔으니까.

난 이를 부득부득 가는 노인의 옆에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어째서 타인에게 절망과 고통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나도, 이 자도.

모두가 원립에게 극악한 고통을 당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

나는 생각했다.

'놈에게는, 과연 소중한 것이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소중한 것이 있는 사람이, 그렇게 타인의 소중한 것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앗아 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고, 월량은 옆에서 원립을 끝없이 저주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전 대륙의 모든 결단기 수도자들이 모였고, 대회의가 시작되었다.

* * *

천막 안쪽에는 공간 확장 법술이 걸려 있었다.

안쪽에 있는 결단기 수도자들의 수는 약 200명으로, 그때 당시 미쳐 연락을 받지 못했던 군소 가문이나 외진 곳에 사는 산수, 혹은 왕따 당하는 세력의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오늘은 전부 한 자리에 모였기에, 지난번보다 50여 명 정도가 많았다.

약 200여명의 결단기들.

이것이, 지금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전력이었다.

"…그럼, 답천사막 대학살을 일으킨, 혈목자 원립. 그 노괴와의 대전쟁에 대한 대회의를 개최하도록 하겠소이다."

청문중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보며 말했다.

여러 결단기 수도자들의 회의 결과, 청문중진이 이번 연합의 지도자로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무래도 창호자의 후손이라는 점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각 세력에서, 원립을 상대할 이런저런 방안들을 내놓았다.

청문중진은 수많은 의견들을 수렴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의견이 나오지 않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하면, 마지막으로 청문세가에서 결론 내린 방안을 알려 주겠소."

얼마 후, 그의 입에서 봉명성과 그 안에서 한 단계 수행이 내려가는 진법금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원영기 수도자의 수행을 결단기급으로 한 단계 끌어내리자는 건가?"

"그렇소. 또한, 청문세가에서 들어가 확인해 본 바, 해당 성 안에 있는 대다수의 보물들은 천인기분들께서 비승에 가져가셨으나…."

그가 설명을 이었다.

"몇몇 선주(仙酒)에 해당하는 주류, 선부(仙符)에 해당하는 부적류, 잡기류 등이 몇몇 개 금제 안쪽에 남아 있는 것들을 확인했소."

"잡기류라면 어떤…."

"무슨 요족에게 영성의 주입을 돕는 곰방대니, 조금 더 튼튼한 저물법기니, 의복이 찢어지면 자동으로 수리해 주는 바늘, 먹은 음식의 소화를 돕는 가락지 같은 것들이니… 그런 애매한 것들 말이외다."

그 말에 잠시 기대가 찼던 결단기 수도자들의 눈에 허탈함과 실망감이 돌아왔다.

"주류나 부적류, 둘 다 고대 수도자들이 남긴 보물인지라 쓸모는 있겠지만, 둘 다 단발성 보물이 아니오?"

"맞소. 확인해 본 바 일회용으로 특수한 능력을 부여해 주거나, 잠시 동안 능력이 상승하는 주류 몇 단지, 잠시 동안 특이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부적 몇 종류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더군."

"일회용이라면…."

"계륵이로군."

"쓸모야 있겠지만…."

그때였다.

벽씨세가 가주, 벽천기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부적, 부적류라 했었나?"

"그렇네."

"혹시 자네… 남아 있는 그 부적이 어떤 부적인지 확인했나?"

"그것까진 자세히 확인치 못했네."

벽천기가 히죽 웃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지난번 봉명성이 열렸을 때, 우리 벽씨세가 역시 봉명성에서 몇 가지를 챙길 수 있었지. 그중 하나가 이것이야."

"그, 그것은…!?"

우웅!

벽천기의 품에서 나온 것은, 신령한 빛을 흘리는 두 장의 선부(仙附)였다.

"격천부(擊天附), 천인기 수도자의 일격을 단 한 번에 한해 재현할 수 있는 선부. 봉천부(封天附), 천인기 수도자의 방어력을 단시간 동안 몸에 두르는 선부. 이 두 장의 선부를 지난 봉명성행에서 얻을 수 있었지."

"처, 천인기…!"

"그래, 이 격천부를 사용하면, 적중하기만 하면 그 노괴도 일격에 피떡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가능하네."

그는 청문중진에게 물었다.

"천인기 선배분들은 천인기급의 방어력이나 공격이 이미 있으니 필요가 없었겠지만… 봉명성에 남아 있는 선부 중에, 봉천부도 분명히 있을 걸세. 그리고…."

그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말했듯이 봉명성에 노괴를 빠뜨려 수행을 떨어뜨리고, 봉천부로 방어한 다음 격천부로 노괴를 요격하면…"

청문중진과 다른 이들의 안색에 희색이 돌았다.

나 역시, 원립을 죽일 희망이 보이자,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 노괴를 잡을 수 있네."

"허어, 원래는 다른 방법을 생각했네만, 수정해야겠군."

"음?"

청문중진이 나를 가리켰다.

"저기 서 수사는, 봉명성의 금제가 발동해도 금제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네. 때문에 계속 결단기급 전력이 유지가 가능하며, 결단기급으로 떨어질 원립을 일대일로 맞상대하는 게 가능한 자라네."

"허…."

벽천기가 놀라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장내에 있는 수많은 수도자들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벽천기가 말했다.

"그럼, 우리 벽씨세가와 저 녀석이 주력으로 앞에 나서 노괴를 압박하고, 나머지 수도자들이 후방에서 지원을 해 주기로 하는 게 어떤가?"

"잠깐, 우리 동방 역시 원영기에도 통하는 훌륭한 결전병기가 있다."

"우리 북방 초원의 부족들 역시, 한 단계 높은 이에게 통할 고명한 진법이 있소."

원영기 수도자는 분명 무시무시한 존재였지만, 수백 년을 살아오며 쌓아 온 원영기 수도자의 재물, 법보와 영석, 영약 등은 결단기 수도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때문인지, 이곳에 모인 결단기 수도자들은 서로가 벌써부터 전리품을 많이 나눠 먹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물론 나는 추한 밥그릇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봉명성 계획을 제외하면, 아마 다른 이들이 제안하는 방법들은….'

전부 안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200년 후에도 원립은 멀쩡하니까.

특히나 천인기 급의 위력을 자랑한다는 봉천부와 격천부.

'왜 저런 무시무시한 부적이 있었는데, 지난 생의 원립은 그렇게 멀쩡히 잘 살아 있던 거지?'

물론, 이번 생에는 봉명성 계획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그러니, 어쩌면 잡을 수 있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걸로는 안 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반드시.

이 생에 놈을 찢어 죽이지 않는다면, 이번 생에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할 수 없을 테니.

한차례 회의가 끝나고, 잠시 여러 수사들이 떠들고 있을 때.

나는 청문중진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한 가지 계획을 더 말했다.

"이 계획은 부디 불문에 부쳐 주시오. 나 혼자만이 진행할 터이니."

"그게 무슨… 아니, 그보다 그게 사실이오?"

"사실이오. 만약 이것이라면, 원영기 수도자라 할지라도 효용은 있겠지?"

"으으음… 물론이오. 제아무리 원영기 수도자라 해도 그건 만만치 않은 힘이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봉명성에 놈을 박아 놓고 상대하는 것 외에도, 몇 가지 계획이 더 필요했다.

놈을 확실히.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는 말이었다.

* * *

1차 대회의는 만족스럽게 끝났다.

그리고 사실상 앞으로의 계획들 역시 이번 대회의에서 거의 다 결정이 났고, 앞으로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면 될 뿐이었다.

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이며, 섭명함을 통해 몇몇 진법사, 금제사들과 봉명성으로 들어가 우선 봉명성의 얼마 남지 않은 보물들을 모조리 긁어 오는 작업을 시작했다.

키이이잉!

봉명성의 금제가 금제사들에게 의해 풀려나가고, 그 안에 있던 것들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음… 잡기류는 뭐, 정말 쓸 게 없습니다. 그냥 관상용이나 허세용이 더 많은 듯합니다."

"오히려 주류나 부적류가 더 쓸모 있겠군."

나와 함께 온 몇몇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혀를 차며 쓸모없는 잡기류를 보았다.

하나같이 쓸 곳이 없는 기이한 법보나 법기들이었기에, 딱히 욕심내는 이들은 없었다.

그나마 요수를 사육한다는 벽씨세가에서 짐승에게 영성을 불어넣는 곰방대를 조금 탐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럼 주류와 부적류의 금제도 해제해 보지."

나는 결단기 수도자들과 진법, 금제사들과 함께 부적류, 주류 등 역시 봉명성의 창고에서 꺼내는 데에 성공했다.

부적류로는 천인기급 방어력을 가지게 해준다는 봉천부 2개.

적을 진법미궁 속에 빠뜨린다는 홍조부 1개.

순간 요수로 변할 수 있는 변요부 1개 정도가 있었다.

그 외에도 몇몇 부적들이 더 있었지만, 그냥 시장에서 판매되는 결단기급 부적이었고, 별 효용도 없었다.

"주류는 그래도 꽤 많습니다. 아무래도 부적은 쓸모가 많지만, 주류는 자리도 많이 차지할뿐더러 단발성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많기에 많이 안 가져가신 듯합니다만…."

결단기 수도자들이 데려온 금제사와 진법사들이, 분류에 따라 선주들을 분류하며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다.

선주들은 대략 세 종류로 분류되었다.

마시면 재생력, 속도, 방어력, 힘 등 신체 능력이 단기간 강화되는 선주.

계령액, 천심수, 월령주, 하선주 등이 있었다.

또한 신체 능력이 아닌, 체내에 있는 법보와의 연계가 강해진다거나, 법보 자체를 강화시키고, 법보를 다루는 능력이 향상되는 등, 신외지물을 다루는 능력이 강화되는 선주.

모련섬, 진월루, 백홍주, 선염옥, 진라주 등이 있었다.

마지막은 그냥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단기간 동안 의식이 맑아지거나 법력이 정순해지는.

순수하게 즐기기 위한 선주.

홍매수, 전심주, 자락향, 자색규주 등이 있었다.

청문중진이 주류들을 보며 말했다.

"이러한 선주 종류의 주류들은, 추후 결전(決戰) 이전에 배분해 주어 능력을 증폭시키도록 할 수 있게 해 주겠소."

그는 나, 그리고 이곳까지 따라온 벽천기를 보며 말했다.

"특히 서 수사와 벽 수사, 그리고 동방의 만리민랍 군주. 이 세 분이 노괴와 정면으로 붙으시니 세 분께 가장 많은 종류의 선주가 주어질 것이오."

"알겠소."

"그중에서도 서 수사와 만리민랍 군주가 초반부 노괴의 발을 잡는 역할이니 두 분께 가장 많은 선주와 부적들이 주어질 것이외다. 그렇게 알아두시오."

만리민랍이라는 동방의 군주는 만족스럽단 듯 청문중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나는 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봉명성 안에 있는, 얼마 없는 보물과 선주, 부적류 등 소모품들마저 전부 꺼내어 분배를 계획해 두었다.

원립을 상대할 계획도 거의 수립되었고, 모든 가문과 부족, 국가들이 총력을 다해 새로운 결단기 수사를 길러 내기 위해 힘을 썼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 지나는 것뿐.

'남은 시간 동안, 수련을 해야겠군.'

200년이나 남았다.

그 안에, 대성한 음혼귀주문을 통해 축기기 대원만에 들어갈 것이다.

'아니, 지금의 음혼귀주문이라면….'

대원만에 들어가고도 한참은 남는다.

'그럼 남은 것은, 수련 장소인가….'

잠시 고민을 한 나는, 그곳에서 수련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월은 흐르고 흘렀다.

어느덧 200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 * *

휘이이이―

성제국 산간 지대.

그 위쪽으로 세 줄기의 둔광이 날았다.

비둔술을 쓰는 삼 인의 결단기 수사들이었다.

"그러니까, 벽 공자. 이번에 찾아갈 수사는 지네 굴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맞소. 듣기로는, 저주계열 공법을 익힌 수사라 하니, 그 음산한 기운에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더군."

"아으, 소름 끼치네요. 저주공법을 지네 굴에서 수련한다니."

"함부로 말을 삼가시오. 가주님과 원로님들께서, 그자가 노괴 사냥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하지 않았소?"

"흥, 가주님이야 권위를 존중해 드리지만, 우리도 이제 결단기인데 그깟 원로들 말은 언제까지 신경 써야 하나요? 벽 공자, 그나저나 도착하기 전에 저 성에서 잠시 유람이나…."

벽씨세가의 결단기 수사, 벽문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양옆에서 떠드는 두 명의 아름다운 결단기 수도자들은 마냥 좋아라 하며 그에게 자꾸 수작을 부렸으나, 벽문성은 관심이 없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 원영기 노괴를 사냥하겠답시고, 세가들에서 이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지원을 해 준 탓에 그나마 결단기에 오른 게 우리들인데. 지원을 받아 결단기에 이른 게 아닌 제 실력으로 결단기에 이른 원로들을 무시하다니….'

벽문성은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전이라면 결단기에 오르기 위해 축기기에서 주어진 300년의 수명을 모조리 썼어야 겨우 도달할까 말까였다.

'역시, 그녀만큼 현숙한 사람은 아무리 찾아도 없군.'

벽문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수사들과 함께 성제국 산간지대, 한 마을로 날아갔다.

파아앗!

세 갈래의 둔광이 마을의 위쪽에 떠오르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집에서 빠져나왔다.

벽문성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근방에 커다란 지네 굴이 있지 않으냐, 지네 굴의 위치가 어디인가?"

마을의 촌장으로 보이는 촌로가 나와, 벽문성의 앞에 공손하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지네 굴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봉우리 너머에 어둑굴이라는 건 있는데, 200년 전에는 어둑굴에 지네 요괴가 살았다는 전설도…."

"고맙군."

벽문성은 촌장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촌장이 가리킨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가 봉우리를 넘어서자 보인 것은, 한 험산한 산 중턱에 뚫린 커다란 동굴.

그리고, 그 동굴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어둠.

'저주문….'

그 스산한 기운에, 벽문성은 침을 삼켰다.

'저기서 새어나오는 어둠 한 자락 한 자락이 모조리 저주문이란 말인가….'

뒤이어 벽문성을 따라온 두 여인 역시 중턱의 동굴을 발견하였다.

"저게 그 미쳤다는…."

"쉿! 저주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벽문성은 뒤쪽에서 떠드는 둘을 약간 흘겨보고는 동굴 앞으로 내려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서 수사. 이제 노괴가 풀려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벽문성의 눈에, 일순간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복수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만 나와 주시지요."

쿠구구구!

동굴 안쪽에서,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밟아온 것 (8)

저벅, 저벅….

동굴 안쪽에서, '뭔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꿀꺽

그것이 걸어 나올수록, 주위로 뿜어지는 저주문은 더욱더 짙어졌다.

결국 벽문성은 견디지 못하고 허공으로 떠올라 위쪽으로 올라갔다.

구구구구….

어둠.

짙은 반구형의 어둠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벽문성은 어둠, 그 안에서 꿈지럭대는 수천 개의 저주문들을 보며,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눈치 없이 떠들던 두 수사들 역시 벽문성을 따라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입니다, 서 수사."

벽문성은 다시 한번 그에게 인사를 하며, 그의 실력을 재어 보았다.

'축기기… 제 4수(宿).'

각(角), 항(亢), 저(氐), 방(房), 심(心), 미(尾), 기(箕).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

규(奎), 루(婁), 위(胃), 묘(昴), 필(畢), 자(觜), 참(參).

정(井), 귀(鬼).

총 23수의 영기의 별의 기운이 느껴진다.

벽문성은 저주문의 중심에서 느껴지는 정순지력의 흐름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축기기 4수, 대원만의 실력이건만… 저 무시무시한 저주들은 도대체… 아무리 결단기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길 것 같지가 않군.'

일반적으로는 저주공법을 익히는 저주술사들 역시, 저주문을 다룰 때엔 30~40개. 많으면 6, 70개의 저주문을 다뤘다.

굉장히 특출한 경우에는 90개를 넘기도 했고.

하지만 저건 뭐란 말인가.

'한눈에 봐도 수천 개가 넘어 보인다만….'

일반적인 저주술사들보다도 수백 배 이상 뛰어난 저주술사라는 뜻이었다.

축기기 대원만에서 동급보다 수백 배 이상 뛰어나단 것은, 그 전력이 결단기나 다름없다는 의미였다.

벽문성은 검은 원구의 중심에 있는 거뭇거뭇한 뭔가를 향해 말을 이었다.

"말했듯이, 노괴가 깨어날 시간이…."

[알고 있다.]

거친 소리가 거뭇거뭇한 중심부에서 울려 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두웠고, 듣는 자의 심령을 위축시키는 기이한 효과가 있었다.

[빨리 가지. 앞장서라.]

"…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너무 명령조로 나오시는 게 아니신가요?"

벽문성을 따라온 한 수사가 검은 구체의 중심을 향해 말했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얼굴도 안 마주 보고 얘기하는 건 또 뭐고, 심지어 기운은 축기기인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결단기 수사인 우리에게 그런 예의 없는 태도로 나오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요?"

"공묘 선자!!"

벽문성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공묘세가의 수도자를 말렸다.

하지만, 예의 공묘 선자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신이 나가서, 벽라국 산간 지대를 돌아다니며 음습하게 부채춤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울부짖고 날뛰는 광인이라더니. 진짜 광인이면 이해라도 했겠지만 멀쩡히 말도 하시는 걸 보니…."

"조용히 하십시오!"

그리고 그때였다.

쿠구구구!

검은 구체에서, 시커먼 저주문 한 무더기가 그녀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저주문 무더기는 그대로 거대한 흑수(黑手)로 변모하며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듯 손을 펼쳤다.

"이, 이익!"

공묘세가의 그녀는 눈을 찌푸리며 결인을 맺어 방어법술을 펼쳤다.

푸른 구체가 흑수를 막아 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요!? 당신…."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화를 내려 했을 때.

흑수가 닿은 그녀의 보호막이, 썩어 들어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 뭣…!?"

"공묘 선자! 축성부를 사용하십시오!"

벽문성의 외침에,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 부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흑수가 그녀를 후려쳤다.

콰아아앙!

그녀는 그대로 흑수에 떠밀려 반대편 산자락에 날아가 꽂혀 버렸다.

먼지구름이 일렁인다.

"잠깐! 이런 미친… 공묘 언니에게 뭘 한 거야!"

"진 선자,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대화로 해결하겠습니다!"

"벽 공자, 가만히 계세요. 진씨세가를 무시하지 마세요!"

그녀가 씩씩거리며 결인을 맺자, 그녀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화탄(火彈)이 나타나 온 사방을 메웠다.

"그 건방진 그림자를 다 태워 버려 주마! 가라!"

화르르륵!

화탄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우(雨)."

피이이잇!

"충(衝)."

촤좌좌좍!

검은 구체 안쪽에서, 수백 개에 달하는 저주문들이 마치 화살과도 같은 속도로 그녀의 방향으로 날아왔다.

백 개의 저주문들이 화탄들을 터트려 폭발시켰고, 개중 수 개는 그녀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잇!

그녀의 뺨에 작은 핏방울이 하나 돋았다.

"감히… 그래 봤자 축기기 수제에…!!"

그러나, 검은 구체 속의 존재가 혀를 찼다.

"끝이다."

"무슨 헛소리! 아직 내 힘은 보여 주지도 않았다! 봐라, 진씨세가의 화릉염열포(火綾炎熱布)의 법술을 보여 주마!"

화르르르륵!

그녀의 주변으로, 마치 비단 자락 같은 화염의 너울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점차 화염 비단들의 열기는 무한히 치솟았고, 그 열기만으로도 주변 지형의 수분이 바싹 말라 갔다.

하지만, 검은 구체 속의 인영은 말이 없었다.

대신, 결인을 하나 맺자 아래쪽에서 흙 인형 하나가 올라왔다.

스르륵….

그리고, 저주문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저주문에는, 피가 한 방울 묻어 있었다.

"받아 봐라!"

동시에, 그녀가 법술을 발사했으며, 검은 구체 속 인영은 손가락을 까딱여, 핏방울이 묻은 저주문을 흙 인형 위로 가져가 흙 인형에게 흡수시켰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피시식!

"어, 어어?"

[왜 그러나, 공격을 해 보아라.]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흙 인형을 쳐다보았다.

저주문들이 변형되며, 흙 인형의 몸 구석구석에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저주문들이 꽂힌 위치는 법술을 쓸 때에 정확히 사용되는 영맥이었다.

[못 하겠나?]

사라락….

검은 구체 속 인영이 결인을 맺자, 흙 인형의 목 부분에 붉은 먹이 칠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거울의 술법을 통해 자신의 목을 바라보았다.

"뭣…!?"

그녀의 목에는 흙 인형의 목과 같은 곳에 같은 모양으로 먹이 칠해져 있었다.

[저주술사에게 피를 허락하다니, 어리군. 내가 이 목을 치면 어찌 되겠느냐?]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공포스러운 얼굴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어느새 그녀의 뺨에서 흐르는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아주 얇은 상처였건만, 피가 이상하리만치 멈추지 않았다.

스릉―

문득, 구체 안쪽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울렸다.

저벅, 저벅….

그리고, 검은 인영이 흙 인형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그러지 마!"

자신이 어찌 될지, 결과를 예상한 것인지.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에게 애원하였다.

그리고.

"그쯤 하시지요, 서 수사."

벽문성이 나타나 흙 인형과 서은현의 사이를 틀어막았다.

"노괴를 잡을 날을 앞두고 이리 아군끼리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도록 하지.]

따악!

그는 말을 하며 손가락을 튀겼고,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뺨에, 몸 곳곳에 어느새 스며든 저주문이 다시 몸 바깥으로 빠지며, 검은 구체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벗인 공묘세가의 수도자 역시, 전신에서 새카만 저주문들이 잔뜩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그들은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축기기라고 해서, 같은 축기기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결단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뿐.

그의 힘은 사실상 결단기나 다름없었다.

'이게… 원영기 노괴와 싸운다는 결전 병기….'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공묘세가의 벗에게 다가갔다.

"커헉, 쿨럭…."

공묘세가의 그녀는 축복의 기운을 지닌 축성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축복의 힘이 저주를 중화해서 일격에 전신이 썩지는 않은 듯했으나, 어느 정도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럼, 가지.]

쿠우우우!

시커먼 저주문들을 흩뿌리며, 저주문 속에 있던 서은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둠 속에 숨어 하늘을 날아갔고, 벽문성 역시 그녀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정화부와 치유부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서 수사가 저주를 거둬들였다곤 하지만, 정화부로 한 번 더 저주의 독기를 빼낸 후에 치유하십시오. 저자의 저주는 특히나 더 독기가 짙어서, 저주가 사라졌다고 해서 안심하면 후유증에 호되게 당한다 합니다."

"고, 고마워요. 벽 공자."

"하아, 그리고…."

벽문성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두 사람에게 경고를 했다.

"…지금 이리 다쳤으니, 원영기 노괴와의 전투에는 나오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나와 봤자 순식간에 죽어 원영기 노괴 간식이나 될 테니까요.'

벽문성은 뒷말을 가까스로 삼키고는, 뒤를 돌았다.

문득, 벽문성의 눈에 서은현이 나온 동굴 안쪽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저건….'

벽문성은 홀린 듯 그 반짝이는 것에 다가갔다.

그것은 유리 공예품이었다.

썩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 공예품은, 한 쌍의 남녀가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얼굴이 정확하지 않았으나, 여자 쪽의 경우에는 상당히 정확하게 만들어져 바로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벽문성은 한참이나 여자 쪽의 유리 공예품을 바라보다,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공예품을 들어 자신의 저물법기에 넣고는 동굴을 나가, 서은현을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