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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 *

법기 제작의 시작은, 우선 내가 '만드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북향화의 공방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아주 간단한 공예품부터 제작하는 법을 배웠다.

우우웅!

치이이...

나는 북향화의 공방에서 막 내 손으로 만들어진 유리 공예품을 바라보았다.

귀한 재료는 초보자가 사용할 수 없으니, 사막에 널린 모래로 유리 공예품을 만들며 제작에 익숙해지는 것이 첫번째였다.

"흐음..."

북향화는 내가 만든 유리 공예품을 들어 쳐다보았다.

"이건 뭐죠?"

"저주인형입니다. 제 공법에 사용되는 녀석이지요."

"저주인형은 보통 사람 형상으로 만든다고 아는데... 이건 불가사리인가요?"

"...사람입니다만."

내 말에 북향화는 잠시 입을 가리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감각에 그녀의 근육의 움직임이 잡히며, 그녀가 웃음을 참는다는 것이 느껴졌다.

"흠흠... 서 도우는, 제작에는 재능이 없으시군요."

"...예전부터 뭘 만드는 일엔 재능이 없었습니다."

"휴..."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내게 말했다.

"일단 계속 만들어 보죠. 점점 나아질 거에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내 제작 실력은 딱히 나아지진 않았다.

불가사리 모양이었던 유리 인형이 그나마 사람 모습으로 변해가긴 했으나, 여전히 북향화의 눈에는 부족한 면이 많아보였다.

나는 북향화에 의해 법기 제작뿐이 아닌, 법기 사용 역시 훈련을 받았다.

법기를 만들려면 법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같았다.

북향화는 천색성에 온 김영훈과 함께 나와 특별한 훈련을 시작했다.

부웅, 부우우웅!

북향화의 벌 괴뢰를 내가 조종해 김영훈을 상대하고, 그녀는 내가 조종하는 괴뢰를 보며 보완할 점이나 고쳐야 할 점, 혹은 새로 떠오르는 영감 등을 받아 적었다.

나는 벌 괴뢰를 움직이며 동시에 북향화에게서 받은 여러 법기들 역시 움직여서 김영훈을 몰아붙였다.

"흐으으읍!"

콰아앙!

김영훈이 법기에 튕겨나가며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법기들은 법력으로 구동되었으나, 그 움직임은 철저히 내 무리를 따르고 있었기에 김영훈은 물론이고 나와 북향화 모두가 도움이 되는 훈련이었다.

나는 그녀와 김영훈을 훈련시키며 그에게 다음 경지로 향하는 길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그를 다듬었다.

북향화는 내게 인형 공예품으로 시작해, 비검 형태의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것을 연습시켰다.

검 형태로 연습을 하니, 익숙한 탓인지 조금 더 제작이 쉬웠다.

나는 유리 형태의 비검 공예품을 끝없이 만들며 점차 '제작'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몇 개월이 지났다.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북향화의 법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법기 제작은 아니었지만, 법기점을 찾는 수도자들에게 법기를 설명해주거나 판매하는 일, 법기들을 관리하는 건 내가 하고 있었다.

"이보쇼, 주인장. 이 도가 상태가 이상한 것 같은데."

"김 형은 어차피 법기는 필요도 없잖습니까. 그리고 법기점 주인은 북 선자지, 제가 아닙니다."

"큭큭, 가게를 부부가 운영하면 부부 두 사람 다 주인장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김영훈은 구경하던 도 형태 법기를 내려놓은 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근 몇개월간 여기서 너랑 북 소저랑 거의 살다시피 하지 않았냐? 지금 천색성에서 법기를 사가는 수도자들한테, 이 법기접은 '젊은 수도자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소문이 다 났더구나."

"..."

"보아하니까 북 소저 아버님 되시는 분도 너랑 북 소저가 곧 결혼할 것 같다고 하시더군. 흐하하, 뭐 언제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한다."

북중호와 김영훈은 술친구가 되어 있었다.

'젠장. 왜 소문이 그렇게 난 건지...'

나는 살짝 어이가 없어짐을 느끼며, 실없는 소리를 하는 김영훈을 법기점 바깥으로 내보내고, 가게를 나가 근처 시장으로 나갔다.

북향화가 법기 구상에 쓸 종이를 사오라고 했었기에 심부름을 나온 것이었다.

종이 가게에 왔을 때였다.

"아이고, 신랑 선인님 아니십니까?"

"예?"

종이 가게 주인인 노파가 홀홀 웃으며 내게 종이 한 뭉치를 건냈다.

"저번에 관찰사 선인 대인의 따님과 함께 사이좋게 거리를 거니시는 걸 봤습니다. 근래에 들어서 아예 같이 사신다 들었는데, 혼인하신 게 아니셨는지요?"

내가 당황하자, 노파는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이 보며 물었다.

"...아직 혼인은 안 했소만."

"아이고, 아직 거기까지는 안 하셨군요. 그래도 성 사람들 모두 두분이 천생연분이란 건 알고 있으니 빨리 혼인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 아니..."

내가 노파의 말에 당황스러워 할 때, 종이가게 앞 집 다른 가게의 주인도 나와 노파에게 한 마디를 보탰다.

"이 성 안에서 두 분 선인님들이 정인(情人)이신 걸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암요, 몇 년을 두 분이 같이 붙어 다니는 걸 봐 왔는데 말입지요."

"..."

아무래도 소문을 듣자하니, 나와 북향화는 이미 법기점을 운영하는 부부 수도자로 성 안에 소문이 쫙 퍼진 듯 싶었다.

'미치겠군.'

도대체 소문이 왜 이렇게 퍼졌단 말인가.

나는 사람들의 때아닌 축하를 받으며 종이뭉치를 받아 공방으로 돌아갔다.

* * *

"뭐? 아직도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김영훈이 내게 도를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의념을 읽어내어 궤적을 파악해 공격을 전부 막아내며 대답했다.

"아직 저희는 서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으으윽! 속 터져 죽겠구나! 아니, 너는 그렇다 치고 북 소저는 왜 네놈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지? 분명 내가 읽은 의념으론..."

"그만 좀 하시지요."

나는 김영훈의 도들을 피해 제압한 후 그의 급소를 손으로 노리며 말했다.

"그래, 이번에도 내가 졌다. 하지만... 슬슬 덕분에 감을 잡고 있어."

확실히 점차 그의 속도가 이전과 달리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몇년만 더 수련을 한다면 월도입천에 대해 확실히 감을 잡을지도 몰랐다.

"근데 너는 왜 아직도 사람 마음에 대해 감을 못 잡는 거냐. 이제 슬슬 제대로 고백하고 사귀라니까?"

"...그만 좀 하시라 했잖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김영훈과의 대련을 끝내고, 북향화와 함께 오늘치 제작 연습을 하기 위해 그녀의 공방으로 내려갔다.

내 뒤쪽에선 김영훈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렸다.

"야 이놈아! 제발 좀 고백 좀 하란 말이다! 보는 사람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라...'

그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옅게 한숨을 쉬며, 북향화의 공방에 들어갔다.

* * *

몇 년이 더 흘렀다.

우우웅!

나는 북향화의 공방에서, 막 만든 유리 검 공예품을 꺼내들었다.

"어찌저찌, 이제는 공예품 만드는 실력도 성장하셨네요. 이 정도면 실제 검과도 차이가 거의 없는걸요?"

"선자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요."

나는 검 공예품뿐이 아닌 유리 인형들 역시 둘러보았다.

이제 내 유리 공예 실력은 상당히 성장해서 어느새 유리 인형들 역시 상당히 실물과 비슷해져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인형이나 검뿐이 아닌 다른 것들 역시 제작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서 도우, 또 불가사리를 만드신 건가요?"

"...불가사리가 아니라, 꽃입니다만."

"아, 꽃이었군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제가 손재주가 없는 탓이지요."

나는 잠시 그녀와 잡담을 주고받은 후, 바깥으로 나섰다.

어느덧 천색성에서 지낸지도 10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색성의 길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이곳의 사람들과도 썩 안면을 트게 되었다.

회귀햇수 약 10년차.

길고도 짧은 그 시간.

그 안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서 선인님,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십니까."

나는 지나가는 노인과 인사를 주고받고, 근처의 이웃들과 인사를 한 후 천색성 바깥.

답천사막으로 나갔다.

여러 변화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부웅, 붕, 부웅!

김영훈이 어느덧 끊임없는 대련과 참오를 통해, 월도입천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칼춤을 추며 무수한 무리(武理)를 엮어내며, 답천사막의 모래바람에 실린 모래알갱이 하나하나를 일일이 쳐내고 있었다.

실로 정신나간 무위!

후웅, 후우웅!

점차 그의 칼춤에 황금빛 기색이 서린다.

그가 억지로 짜낸 빛이 아닌,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마치 태양과도 같은 그 빛살이.

'며칠 전부터 저 상태군.'

깨달음에 닿기 직전의 상태다.

'과연, 김 형. 이번에는 어디까지 도달하실 수 있으십니까?'

10년이다.

고작 10년 안에 월도입천에 코앞에 도달해서 경계를 넘으려 한다.

아직 그에게는 50여년의 세월이 남아있었다.

'보여주십시오!'

점차 그의 칼춤이 빨라진다.

답설무흔이라 했던가?

비록 눈밭은 아니었지만, 그는 모래밭을 밟으며 그 어디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순간.

'그의 심상이, 자리를 잡는다...!'

나는 김영훈의 심상이 일순간 거대해지며 또렷해짐을 느꼈다.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형상.

황금빛의 강으로 된 거대한 붕조!

그의 심상이 또렷해짐과 동시에, 김영훈의 눈빛에 정광이 돌았다.

그의 의식영역이 황금빛 태양처럼 빛나며, 그의 도신에 깃들었다.

"월도입천."

쿠구구구구구!

"능광도!"

번쩍!

황금빛이 사방으로 폭발하며 천공을 향해 치솟아, 사막을 지나던 구름 한 자락을 그대로 잘라내었다.

그리고 황금빛의 안쪽, 그곳에서 김영훈은 세상의 기쁨이 다 담긴 표정으로 나왔다.

"도달했다! 서은현!"

그가 희망찬 얼굴로 도신을 잡고 나와 내게 말했다.

"덤벼라!"

화악!

능광도가 내게 쇄도해왔다.

나는 그 익숙한 빠르기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이거다.'

능광도를 흉내낸 그 어설픈 가짜가 아닌, '진짜' 능광도였다!

콰아앙!

나는 무형검을 꺼내며 능광도에 맞부딪혔고, 거대한 폭음이 사막을 휩쓸었다.

황금빛이 번뜩이며 김영훈이 찰나간 눈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눈을 희번뜩거리며 무형검을 쥐고 사방으로 넓게 흩뿌렸다.

무형검은 거대한 폭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고, 빛을 넘보는 속도로 내 주변을 날던 김영훈은, 폭풍을 마주한 새처럼 날아다니며 내 무형검을 마구 피해갔다.

'훌륭하군...!'

파아앗!

찰나를 잘라내고 내 앞에 어느새 도달한 김영훈이, 내게 황금빛 도신을 내리쳤다.

나는 무형검을 변형시켜 삽시간에 나와 그의 사이를 틀어막고, 다시금 무수한 무색의 궤적을 그에게로 쏟아내었다.

일초와 일초 사이, 찰나의 찰나 사이에 수천 합의 격돌이 오갔다.

사막이 마구 깎여나가고, 모래가 녹아 유리로 변하며 계곡이 만들어지고 구름이 찢겨나간다.

쿠과과광!

나는 황금빛을 찢어발기고 김영훈의 품 안쪽으로 들어가 무형검을 올려쳤다.

찰나의 틈새에서 김영훈은 빛에 가까운 반응속도로 무형검을 방어하고, 내게 서른번에 가까운 공격을 가했다.

나는 무형검의 궤적을 내게 덮어씌워 그의 공격을 방어하며 그를 하늘로 띄워올렸다.

촤아아악!

우리는 사막의 구름을 찢고 그 위쪽으로 올라갔다.

촤아악!

사막의 건조한 구름 안쪽에도 약간의 물기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닿은 물기들은 우리의 움직임에 바로바로 증발되어 버렸고, 나와 김영훈의 주변에 남은 물방울들은 몇 방울 되지 않았다.

콰아아앙!

나와 그의 참격에, 주변의 물방울들이 쓸려나가며, 몇 남지 않은 물방울들이 사라졌다.

나와 김영훈 사이에 남은 물방울들은 어느새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일곱 방울.

피잇!

김영훈의 능광도가 무형검의 궤적을 꿰둟고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형검이 삽시간에 일흔 세번의 변화를 일으키며 능광도를 흐트러뜨린 후, 수백개에 달하는 변화로 그를 덮쳐갔다.

그 격돌에 일곱개의 물방울 중 하나가 터져나가며 증발했다.

남은 여섯 개의 방울들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듯, 물방울들을 따라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김영훈이 내 주변으로 돌아가며 나를 사방에서 압박했다.

나는 무형검을 사방으로 뻗치며 그의 실체를 잡았고, 그변화에 한 개의 물방울이 터져나가며 물방울은 다섯 개가 되었다.

파앙, 팡, 파앙!

우리는 몇 번의 공방을 더 주고받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함께 내려가며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으므로, 저 아래에 대지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웅!

나는 무형검의 변화를 눈 앞의 물방울 중 두 개에 담아 김영훈에게 쏘아보냈다.

무형검에 담긴, 단악검법에 대한 모든 변화가 전부 그 안쪽에 들어섰다.

함부로 받아칠려 하면 순식간에 전신이 찢겨나갈 터!

김영훈은 물방울 두 개의 변화를 살펴보더니, 능광도를 잡고 변화의 형태가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꿰뚫어 내게 쇄도해 왔다.

두 개의 물방울이 다시 터졌고, 우리 사이에는 세 개의 물방울만이 남았다.

김영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산바람의 초식을 사용해 나를 찔러왔고, 그 찌르기에 물방울이 하나가 더 터져나갔다.

나는 간신히 찌르기를 피했지만 얼굴에 약간 흠집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키이잉!

무형검에서 수백수천가지의 변화가 일어나며 해일처럼 김영훈을 덮쳐갔다.

콰아아앙!

그는 변화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내 무형검의 기교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 하나가 더 터져나갔고, 남은 물방울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물방울보다 빨리 지상에 착지해서 기수식을 잡았다.

물방울이 완전히 땅에 떨어진다.

파아아앗!

김영훈의 능광도가 빛난다.

김영훈의 기운이 능광도와 혈관마냥 연결되며, 그의 외부에서 기운을 빨아들였다.

능광도가 내단의 역할을 한다. 김영훈은 그 상태에서 기수식을 잡았다.

나 역시 무형검을 쥐었다. 동시에 내 체내의 정순지력들이 무형검과 연결되며, 내 생명력 역시 무형검과 연동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무형검 역시 체외의 내단이 되어 기운을 증폭시켰다.

마지막 남은 물방울이 정확히 우리 사이에서의 눈높이까지 떨어졌을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웃으며, 서로를 향해 최고의 일격을 쏟아부었다.

서로의 무공이 내뿜는 기세에 의해 마지막 물방울이 알아서 증발해버리는 그 순간.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격렬해진 대련과, 그 감정 속에서 마침내 그에게 내가 내린 결정을 알려주었다.

연(16)

콰과과광!

빛이 폭발하며, 김영훈은 내 무형검을 맞고 튕겨나가 모래사막 한복판에 쳐박혔다.

"쿨럭, 커억! 컥!"

먼지구름 속에서 김영훈이 컥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퉷, 퉷! 이런 젠장, 서은현 이 비겁한 놈 같으니! 이 순간에 그런 걸 말해?"

"하하, 죄송합니다."

그는 모래를 뱉고는, 도를 쥐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젠장, 후우..."

잠시 모래를 털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됐다. 어차피 내 공격은 네 공격에 못 미쳤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는 가슴을 쿵쿵 치며 말했다.

"이제야 고백하기로 한 거냐! 으아아! 답답해서 피 토하는 줄 알았다!"

"..."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만..."

"거 참, 답답한 놈 같기는. 도대체 뭐가 쉽지 않다는 거냐?"

"그냥... 말씀드리기 어려운 그런 게 있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능광도에 오른 김영훈과 대련을 하며, 확실히 느꼈다.

무형검을 잡는 와중에도, 초식을 쓰는 와중에도, 최선의 집중을 하는 중에도.

연분홍빛 연심이 내 가슴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무(武)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지금껏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녀에 대한 연심 역시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단 것을 깨달았다.

'뿌리치는 게 불가능할 바에는, 받아들이자.'

도저히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떠날 수도 없었다.

북향화와 얘기하고 있으면 편안했다.

그녀에게서 공예품을 배울 때엔 회귀의 고통이 잠시나마 잊혀졌다.

그 무수한 상실들에 대한 아픔이 찰나나마 잦아든다.

그 편안함은 너무도 강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언제 고백할 게냐? 내가 도와줄 게 있냐?"

"아, 고백은 할 겁니다만..."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최근에 제가 유리로 꽃을 만드는 것을 연습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꽃을 만들었더니 불가사리라고 하더군요. 해서 꽃 형태는 잡힐 때까지 잠시 기다릴 예정입니다."

내 말을 들은 김영훈이 또 다시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제기랄, 또 기다린다는 거냐! 보는 사람들 주화입마 오겠구나!"

"흠, 흠..."

"이 답답한 놈이...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고백하란 말이다!"

"거 참, 김 형 진정하시지요."

나는 짜증을 내며 가슴을 치는 김영훈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앗, 잠시만요 김 형."

나는 문득 품에서 울리는 전음부를 꺼냈다.

"앗...!"

"또 뭐냐?"

"아, 죄송합니다 김 형. 얼른 성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리려라, 이 놈아!"

나는 전음부를 핑계로 천색성으로 날아갔다.

물론 김영훈이 껄끄러워 그를 버려두고 빨리 간 것도 있었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 때문이기도 했다.

청문령이, 돌아왔다.

* * *

"잘 지내셨는가, 서 도우, 북 선자."

"오랜만입니다, 청문 도우."

나는 청문령을 맞이하며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청문령은 껄껄 웃으며 비행 법기에서 내려와 북향화의 법기점에 들어왔다.

나와 북향화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북향화가 차를 타왔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청문령이 본론을 꺼냈다.

"진법이 9할 9푼 완성되었네."

"아...!"

"그리고 나머지 1푼은 북 선자가 법기를 최종적으로 조정한 후, 다시 봉명성에 가서 그 진법을 설치한 후 다시 조금 조정하면 끝이지."

청문령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정말 수고해 주었네. 가주님 역시 무사히 장생과가 열리면, 자네들에게도 상으로 내린 후, 청문세가에서 상응하는 보상을 한두개 더 내리기로 했다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특히 서 도우는 섭명함 등 봉명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만큼, 원한다면 아예 바로 청문세가의 객경 장로 위를 줄 수도 있다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보상들 역시 자네에게 돌아갈 것이고."

"감사히 받지요."

나는 부풀어 오른 기대를 안고 청문령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제, 김영훈의 수명도 조금은 늘어날지 모르겠군.'

장생과를, 피워내기만 한다면!

그때였다.

"서은현 이 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간 거냐!"

김영훈이 마침 법기점 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청문령은 김영훈을 바라보았고, 김영훈 역시 청문령과 눈이 마주쳤다.

내 무공 스승이었던 자와, 수도 스승이었던 자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얼른 청문령과 김영훈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청문 도우, 저기 김 형은 저와 같은 특이한 공법...을 익혀, 법력이 감지되지 않아도 축기기급 이상의 실력을 가지신 분이시니 잘 대해주십시오."

"알겠네."

"김 형도 여기 계신 청문 도우는 축기기 수도자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학식을 지니신 분이시니 그 학식에 맞는 대우를 부탁드립니다."

"음, 알겠다."

나는 서로를 인사시킨 후, 청문령과 약간의 토론을 나눈 후 회의장에서 나왔다.

청문령 역시 북향화와 조금 더 토론을 나눈 후 회의장에서 나왔다.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나름 즐거웠네. 그나저나..."

청문령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서 도우, 북 선자와 혼인은 했는가?"

"...예?"

"몇 년 전에는 그래도 다른 건물에서 묵는 것 같았는데, 방금 회의실에 들어가니 아예 곳곳에 서 도우의 생활 흔적이 보인 것 같아서 말일세.

아예 이곳에서 사는 것 같아서 혼인했느냐 물은 것일세."

"아, 그건..."

내가 무어라 하려 했을 때, 김영훈이 답답하다는 듯 나와 청문령의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말도 마십시오. 서은현 이 놈은 지금껏 저기 북 소저와 제대로 사귀고 있지조차 않습니다."

"음?"

"글쎄 들어보십시오. 저 놈이 말입니다..."

청문령은 어느덧 나와 북향화의 관계를 주제로, 김영훈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 모두 답답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서 도우, 정말 답답해서 못 봐주겠군. 10년 전부터 언제 둘이 가약을 맺을까 궁금했는데, 아직도 정식으로 사귀지조차 않았단 건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청문 형. 저 답답한 놈은 말입니다, 제 고향에서도 저 놈을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리 그 사람이 티를 내도..."

"험험...! 그만좀 하십시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도망치듯 북향화가 남아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흠, 북 선자."

"아, 서 도우, 생각해보니 이제 오늘도 연습하실 시간이네요."

"그렇습니다. 빨리 시작하시지요."

나는 그녀와 함께 바로 공방으로 들어가 유리 공예품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그녀가 법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들 역시 가르쳐주는 터라 그것들 역시 배우는 중이었다.

"제가 알려드리는 용어들을 숙지하신 후, 제가 법기에 대한 내용들을 정리한 이 '기련총람(器鍊總攬)'을 읽어보시면 법기에 대해 확실히 아실 수 있으실 거에요."

"알겠습니다, 추후에 읽어보지요."

나는 그녀를 따라 몇몇 유리 공예품을 만들었다.

잠시 나를 봐주던 그녀는 공방의 다른 쪽으로 가서 청문령이 가져온 진법 법기들을 다시 조정하기 시작했다.

잠시 공방에는 공예품을 만드는 나와 진법 법기들을 조정하는 북향화의 작업소리만이 울렸다.

비검 공예품을 만들어 본 후, 북향화가 좋아한다는 백목련 공예품을 만들어본 나는 유리로 된 백목련을 들어보였다.

'불가사리...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나름 꽃 같지 않나.

"...북 선자."

"네, 무슨 일이신가요?"

"제 실력이 변변치 않아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서 도우. 도우가 만든 작품들도 훌륭한 작품들이 많은걸요?"

"작품이라니요, 북 선자가 만드시는 법기들에 비하면, 제가 만드는 건 그냥... 유리 덩어리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흠..."

법기를 조정하던 그녀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서 도우, 유리를 뭘로 만드시는지는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근처 모래로 만드는 게 아닙니까?"

"맞아요. 잠시 줘보실래요?"

그녀는 내가 들고 있던 불가사리를 닮은 유리 꽃을 받아, 유리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 시작했다.

"모래는 그냥 흔히 있는 돌 조각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모래들이, 알맞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 유리 공예품이 되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죠?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고, 그저 운명과 인연이 닿지 못한 것들이 있을 뿐이라고."

점차 그녀의 손 안에서, 내가 만들었던 유리 불가사리가 제대로 된 꽃의 형상을 찾기 시작했다.

"그 말은, 제대로 된 운명이 닿기만 한다면, 어떤 것도 아름다운 공예품이 될 수 있단 거죠. 안 그런가요?"

파아앗!

그녀는 유리로 된 모과꽃을 내게 건내며 말했다.

"어떤 꽃을 만들고 싶어하셨는지는 몰라, 서 도우와 잘 어울리는 모과꽃으로 만들어 봤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나는 잠시 모과꽃을 받아들어 쳐다보았다.

"벽라국 사람들은 유리를 좋아해요. 사막에서 모래로 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두울 때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빛을 받으면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향화 선자."

나는 모과꽃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원래는 꽃을 제대로 만들 실력이 되면 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네?"

"저는..."

두근, 두근...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내 분위기를 알아챈 건지, 점차 얼굴이 붉어졌다.

무수한 말이 입속에 떠돌았다.

무슨 말을 해야하지?

뭐라고 말하는 게 가장...

그때였다.

"자, 잠깐!"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도, 서 오라버니한테 드릴 게 있어요! 내, 내일까지 드릴 테니까 내일까지...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향화 선자."

"아, 그리고 제가 잠시 공방에서 집중할 게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공방에서 나갔다.

"음?"

그리고, 나는 공방 밖에서 헛기침을 하고 있는 청문령과 김영훈, 북중호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이야 애저녁부터 느끼곤 있었다.

북중호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보게."

툭툭

그는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웃으며 법기점을 나갔고, 청문령과 김영훈은 서로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저 둔한 놈이..."

"북 선자도 보아하니 거절할 것 같진 않군."

둘은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크흠,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모르긴! 눈이 달려 있으면 의념을 읽었을 텐데, 정말 모르는 거냐! 아주 이 악물고 모르는 척을 하거라!"

나는 김영훈의 잔소리와 청문령의 조언을 들으며 법기점을 잠시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자기는 글른 것 같았다.

* * *

북향화는 공방 안쪽에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향화 선자...'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제야 이름으로 불러주시네, 오라버니도.'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던 그녀는 진법 법기를 전부 조정해서 보관한 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공방 한 구석.

작은 목함.

북향화는 목함을 열어, 그곳에 담겨있는 종이를 꺼냈다.

종이에는 한 법보의 구조도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10년간 끊임없이 궁리하고, 서은현의 무형검을 관찰하고 구상한 결과.

그렇게 거의 완성된 법보의 구조도였다.

'이제, 완성시키자.'

서은현에게 딱 맞는 법보였다.

처음에 그녀가 서은현에게 법보의 조건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미친 사람인 줄 알았지.'

그런 말도 안되는 조건의 법기라니!

하지만, 그녀는 한 번 해 보자는 식으로 도전욕을 불태웠다.

처음에는 그냥 도전욕에 불과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이 되었다.

진심으로 서은현을 위한 무구를 만들고 싶었다.

오늘 서은현이 그녀에게 하려고 했던 말.

분위기로 보아,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내일 그 말을 듣고 싶었다.

내일이면 완성이 될 테니까.

사락, 사락...

그녀가 붓을 놀리자, 구조도에 획이 추가되었다.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서은현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메웠다.

어느새 북향화의 얼굴에는 사색의 문양이 떠올랐다.

치이이이!

그리고, 사색의 문양이 밝게 빛났다.

흑색과 자색의 얽혀있던 두 문양이, 점차 얽히며 하나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기문법재는 강한 감정을 느낄 때 자질이 성장한다고 하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들 역시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감정이 그녀의 자질을 성장시키기 시작했다.

북향화는 홀린 듯이 구조도의 획을 그어갔다.

자신의 사문(四紋)이 삼문(三紋)으로 변화하는 것도 모른 채.

세 개의 문양이 나타나자, 그녀의 손이 빨라졌다.

어떻게 해야 더욱 더 이상적인 법보를 완성할지가 한 손에 잡힐 듯 했다.

10년 동안 고민하며 완성해온 법보가, 그녀에 의해 더욱 더 완벽하고 새롭게 그 구조를 완성했다.

그녀는 자색, 금색, 연분홍색.

세 개의 색을 지닌 문양을 얼굴에 띄운 채 쉼없이 서은현의 법보의 구조도를 세세하게 짜내려 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연(17)

여느 사막의 날씨가 그렇듯.

그날 역시 하늘은 창명했다.

"은현아, 그만 좀 돌아다녀라."

나는 김영훈의 핀잔에, 내가 천색성 앞쪽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다만··· 조금 많이 떨려서."

"뭐가 떨리냐? 이 웃기지도 않는 놈 같으니. 쯧쯧···."

나는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맞을까.'

과연 한 사람에게 연심을 건네는 것이 맞을까?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죠?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고, 그저 운명과 인연이 닿지 못한 것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 말은, 제대로 된 운명이 닿기만 한다면, 어떤 것도 아름다운 공예품이 될 수 있단 거죠. 안 그런가요?

나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의 곁에 있으면,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서, 가끔 꿈 같을 때도 있었다.

지금껏 운명에 버림받기만 해 온 나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지금까지 닿지 못했던 제대로 된 운명이, 그 인연이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시간에 휩쓸려, 언젠가 사라질 인연이라 할지라도···.'

인연이, 그 마음이 닿았다면, 서로 만나야지만 아름다운 무언가로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녀와 함께해서, 언젠가 다시 회귀하고,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그녀의 존재는, 지금껏 내게 있었던 모든 아픔과 상처를 봉합해 주는 듯했다.

사람은 상처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여태껏 700여 년 동안 인연을 잃어만 왔다.

또 잃을 것이다.

하지만.

―벽라국 사람들은 유리를 좋아해요. 사막에서 모래로 쉽게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어두울 때는 진가가 드러나지 않지만 빛을 받으면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해요.

나는 먼지였고, 모래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명백하게 내 빛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애, 한 순간만 빛날 수 있을지라도.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로 마음먹었다.

'설사 다음 생의 당신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은 이미 너무 커져 버렸으니, 이번 생애에 불살라 빛을 내겠습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마음은 정했나 보구나."

김영훈이 옆에서 그런 나를 보며 씨익 웃어 주었다.

"예."

휘이잉!

청문령과 북중호가 저마다 비행법기를 타고, 천색성 성문 앞에 서 있는 내게 날아왔다.

"서 도우, 드디어 두 사람이 천년해로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군. 그동안 답답해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 드디어 이어지는 건가?"

"자네 멱살을 잡고 딸과 가약을 맺게 하고 싶은 걸 그동안 꾹 참아 왔는데, 이제야 조금 진전이 있군."

북중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예 이번 기회에 혼인도 해 버리게나. 아, 그렇지. 내가 혼례식 준비도 다 해놓겠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니, 자네 지금 감히 장인의 말에 토를 다는 건가?"

그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청문 수사, 여기 서 수사가 내 딸애한테 고백을 하면 둘을 연이의 묘소 앞으로 데려와 주시구려. 연이의 묘 앞에서 두 사람이 천년가약을 맺을 수 있게 아예 혼인식 준비를 해 놓지."

"아, 아니···."

"좋소. 얼른 가시구려."

내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청문령과 김영훈이 나를 붙잡았고, 북중호는 신난 표정으로 비행 법기를 타고 저 멀리, 그의 아내의 묘소로 날아갔다.

"하하, 이놈아. 순순히 잡혀 결혼이나 하거라."

"아니··· 혼인이란 걸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당황해서 두 사람을 쳐다보자, 청문령과 김영훈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서 도우, 지금 자네와 북 선자를 10년 전에 봤는데, 그때부터 둘이 서로를 좋아했던 게 빤히 보였구만. 오히려 이제야 정식으로 정인이 되는 게 너무 늦단 생각은 안 하는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냐! 이미 천색성에선 너와 북 소저 다 부부라고 알고 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것 빨리 진짜 부부가 되는 게 낫겠지."

나는 두 사람에게 붙잡혀 덕담 아닌 덕담을 잔뜩 듣고 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내가 두 사람에게 붙들려 있을 때였다.

부우우웅!

문득, 저 멀리 북향화의 공방에서 벌 괴뢰가 날아올라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벌 괴뢰의 손에는 공간 좌표로 쓰이는 진법 원반과, 작은 목함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뭐지?'

내가 의아해할 때였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북향화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험험, 그러면 난 이만 가 보마."

"나도 가 보겠네. 서 도우, 그럼 잘 해 보시게나."

김영훈과 청문령은 각자 나와 북향화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며 다른 곳으로 가 버렸고, 북향화는 내 앞으로 왔다.

"서 도우, 하실 말씀이··· 어떤 건지 여쭤도 될까요?"

"그것이···."

나는 머뭇거렸다.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오라버니, 더우신가요? 얼굴이 붉으시네요. 저도 서 도우한테 배워서 진맥 정도는 할 수 있는데, 해 드릴까요?"

"흠흠···."

그녀는 나를 흉내 내며 내 얼굴을 보곤 밝게 웃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그동안 이를 악물고 모른 체했던 그녀의 감정.

그리고, 이제는 내 감정이 그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뭔가 놀림 받는 것 같았지만, 썩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향화 선자도 더우신가 봅니다. 얼굴이 붉으시군요."

"앗···."

그녀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는 서로 피식피식 웃었다.

"일단, 잠시 걸을까요, 향화 선자?"

"네, 은현 오라버니."

우리는 천색성을 돌아다녔다.

천색성 곳곳의 가게의 일반인들, 수도자들이 우리를 보며 인사를 건냈다.

나는 그녀와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사 먹고, 천색성의 가게들을 구경했다.

북향화의 아버지인 북중호가 천색성을 관할하는 관찰수사였기에, 성벽에 올라가서 사막을 구경하기도 했다.

"사막은 정말 덥더군요. 공기가 건조해서 수계법술로 물을 만들려고 해도 쉬이 물이 모이지 않는 것이··· 정말 예전에 건널 때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 그런가요?"

"예, 향화 선자가 물을 안 주셨더라면 필히 목이 바싹 타서 죽었을 겁니다."

나는 북향화에게 처음 물을 마셨던 때를 기억했다.

물론 처음 물을 얻어마신 북향화는 지금의 북향화가 아니다.

'아니지.'

사실 생각해 보면, 두 번째로 만나서 물을 마셨던 북향화 역시, '지금의' 북향화는 아니었다.

나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의 그녀였다.

'어쩌면···.'

나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인연을 맺는 것을 두려워했고, 연심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은 사실 매 순간, 매 초 변한다.

그렇기에 1초 전과 1초 후의 인간도 사실은 다른 존재였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껏 매 회귀 때마다 다시 만나는 이들을, 이전 회귀에서의 인물들과 별개의 사람들로 구분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달라져도, 이 마음만은 변하지 않을 텐데. 나는 지금껏··· 너무 두려워만 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일 터.

하지만 나는 헤어지는 순간의 고통이 너무나도 두려워, 지금의 마음을 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래, 언젠가 다시 회귀한다고 해도···.'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와 함께하기로 한 순간부터, 그때부터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은 이미, 내 가슴 속에 있다. 어차피 마음 속에서 나와 하나가 될 테니···.'

이 마음을, 고백하자.

"···."

"···."

물론, 마음을 먹었더라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 더웠다.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북향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도자들은 늘 보호법술로 피부를 한 겹 덮고 있기에 태양빛의 따가움과 더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축기기 수도자들은 정순지력이 자연스레 호신강기를 형성하기에 더욱더 일반 수도자보다 튼튼했고.

하지만, 어떤 법술을 써도 자체적으로 나는 이 더움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듯했다.

"저···."

"오라버니···."

우리는 동시에 말을 하려다 다시 서로 피식 웃었다.

"먼저 말하시죠."

"네, 사실··· 은현 오라버니한테 드리려고, 준비한 게 있거든요."

부우웅!

어느새 벌 괴뢰가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부우웅!

벌 괴뢰의 날갯짓에, 시원한 바람이 우리 둘 사이의 열기를 식혀 주었다.

벌 괴뢰의 앞발에는 부채 두 개가 들려져 있었다.

북향화는 부채 두 개를 잡아, 하나를 내게 건냈다.

"쌍선무, 그때 췄던 춤 기억 나시나요?"

"기억 납니다."

"며칠 후에, 저 멀리 연도성에서 작은 축제가 열리는데, 그곳에 가서 다시 추시지 않으실래요?"

"아, 그때 췄던 춤이 인상깊으셨나 보군요."

"네. 꼭 은현 오라버니와 다시 추고 싶었거든요."

"하하, 저도 말을 들으니 다시 한번 향화 선자와 추고 싶군요. 다만···."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왕 쌍선무를 출 거면, 다시 성제국에 가서 추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청문 도우와 함께 다시 봉명성에 진을 설치하고, 성제국으로 가 보지요. 우리가 함께 지켰던 마을도 다시 가 보고요."

"그것도 좋긴 하지만, 사실 연도성 쪽에 오라버니한테 드릴 선물을 준비해 놨거든요."

"선물이라···."

나는 문득, 내가 준비해 놓은 선물이 조금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도 향화 선자한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어머, 뭔가요?"

나는 목 속성 영석을 꺼냈다.

북향화에게 받은 짤막한 가르침들을 모아서 만든, 내 최초의 법기였다.

"이건··· 불가사리인가요?"

그녀가 내 법기의 형태를 보며 장난스레 물었고, 나는 법기에 법력을 불어넣으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렇게 생긴 불가사리, 보셨습니까?"

한순간에 꽃과 똑같은 법기를 제작할 정도로 내 손이 좋은 손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기에 회로를 새겨, 원하는 법술을 불어넣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법술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있었다.

파아아앗!

목 속성 영기가 빛을 뿜었다.

천린수해성의 영기가 밝게 빛난다.

동시에 영력이 맺히더니, 꽃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백목련이었다.

"당신에게 어제 모과꽃을 받았으니, 저는 백목련을 드리겠습니다."

"와아···."

수많은 법술이 맺혀 취한 백목련 형상.

북향화는 백목련을 잠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법기··· 못 만드셨네요."

"그냥 칭찬해 주시면 어디 덧나십니까?"

"오라버니도 제가 비검술하는 거 볼 때마다 훈수 두시잖아요? 늘 매번 '비검 그렇게 다루는 거 아닙니다' 하시면서요."

"그게··· 휴."

내가 쩔쩔매고 있을 때, 북향화는 내가 만든 법기를 받아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법기 회로들도 간결하게 잘 만들어졌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향화 선자는, 회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간결하게 잘 만들었단 건 욕이 아닌가?

"아, 그건 말이죠. 그냥 제 형식이에요."

그녀는 성벽에서 천색성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외조부이신 공묘천색 장로님께선, 제 어머니를 비롯해 수많은 사생아를 낳으셨더랬죠. 그 중에서 수도자질을 가진 사람은 공묘씨를 주지만, 자질이 없는, 저희 어머님 같은 분은 성도 주지 않고 천덕꾸러기처럼 키우다가 가문에서 내보내시곤 하셨어요."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분은 법기를 만드실 때, 회로를 간결히 만드시곤 해요. 그러면 범용성도 넓고 사용자도 굉장히 편하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회로를 복잡하게 만든 건, 어쩌면 외조부님에 대한 반발 심리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문득, 그녀는 벌 괴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은현 오라버니. 오라버니에게서 말씀을 전해듣고, 이번에 벌 괴뢰의 중심 회로를 완전히 수리하는 데에 성공했어요. 그런데, 굉장히 복잡할 거라고 생각했던 중심 회로는, 은근히 간결하더라고요. 그 간결한 회로들에서 변화가 일어나며 무수한 회로들로 퍼져 나가 이 괴뢰를 작동시키는 거예요."

어쩐지 그 작동 원리는 인간의 감정과 비슷한 듯 싶었다.

나 역시 삼화취정에서, 7개의 칠정들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를 목도했으니까.

"오라버니 덕에, 저도 성장했고, 덕분에··· 외증조부에 대한 묘한 반발심 등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은현 오라버니."

"···나 역시."

나는 그 미소에 미소로 답하며 말했다.

"향화 선자에게 너무도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신 덕에, 삶을 살아오며 생겼던 수많은 상처들이, 봉합되고, 당신을 만날 때마다 생의 고통들이 잊히는 듯했습니다."

어느새 나는 북향화의 손을 잡았다.

이 순간에,

모든 일이 잘 해결되는,

장생과를 얻을 날이 코앞인,

경지를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은 이 회차의,

지금 이 순간에 이 연심이 이뤄질 수 있는 이 상황에,

나는 너무나 깊은 감사를 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설명은 할 수 없지만, 당신은 내게 있어···."

나는, 천천히, 천천히 그녀에게로 얼굴을 옮겼다.

"···."

"···."

"···오라버니?"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향화 선자."

"네, 오라버니!"

그녀는 기대가 가득 찬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나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전신에 긴장을 곤두세운 채, 그녀에게서 얼굴을 띄우며, 말했다.

"···어디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연 (18)

"네?"

내 말에, 그제야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북향화도 눈을 떴다.

"공기 중에, 비린내가 갑자기 진동하는군요."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건….'

운수가 흉(凶)하게 물들었다.

요족의 지각으로 주변의 영력을 바라보자, 주변의 영기들 역시 불길하게 진동하는 중이었다.

"향화 선자, 어쩐지 천기가 흉합니다. 들어가 계십시오."

"오라버니…."

잠시 나와 같이 천기를 읽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저도 무슨 일인지는 파악을 하겠어요."

나는 그녀를 뜯어말리기보단, 더더욱 의식을 집중하며 냄새의 발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냄새가 성 자체에서 풍겨오고 있단 걸 깨달았다.

'뭐지? 성 전체가….'

내가 당황스러워할 때였다.

휘이이이이!

갑작스레, 동쪽.

답천사막 방향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답천사막 동쪽.

저 먼 곳에서, 뭔가 붉은 구름 같은 것이, 지평선 너머에서 기어올라 오고 있었다.

오싹, 오싹!

갑자기 피부 곳곳이 아리기 시작했다.

진득한 악의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성벽 위쪽으로 다른 이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청문령, 김영훈, 북중호 등.

"저건, 뭐지?"

"그보다 성에서 갑자기 영력이 기이하게 꿈틀거리고 있네!"

"혹시 청문 수사는 청문세가에 연락이 닿으십니까?"

김영훈은 경계가 서린 표정으로 도를 뽑아 들었고, 청문령은 전음부를 꺼내들고 청문세가에 연락을 넣었다.

북중호는 성관부 전체에 전음을 보내며 명령을 하는 모습이었다.

쿠구구구!

그리고, 저 멀리서 넘어오는 핏빛 구름을 보며, 나는 한 존재를 떠올렸다.

'혈목자, 원립!'

저 자가, 왜 이곳으로?

의문이 들었으나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북중호에게 물었다.

"저기서 오는 존재는 혈목자 원립이란 자로, 결단 대원만을 넘어선 마도 수도자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을 일상처럼 여기는 자이니, 이곳으로 오는 것 또한 그런 연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당장 성내 주민들을 피신시킬 방도는 없습니까?"

"일단 그래도 천색성에는 수도자들이 많으니, 그들의 비행법기에 민간인들을 태우면…."

그 때였다.

취이이이익!

성 자체에서 나던 피 냄새가, 짙어지다 못해 사방으로 피 안개를 뿜어냈다.

"뭣…!"

그리고, 피 안개들이 뭉치며, 핏빛 기둥으로 변했다.

총 여섯 개의 핏빛 기둥이 생겨나 성을 둘러쌌고, 핏빛 기둥들 사이로 붉은 빛의 장막이 나타나 성 전체를 둘러쌌다.

쿠구구구구!

동시에, 성 아래쪽의 용맥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건…!"

동시에, 성 아래쪽에서 들끓는 용맥의 기운에 맞춰, 내 체내의 기혈도 조금씩 움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아아악!"

"모, 몸이…!"

"몸이 안 움직여! 으아아악!"

"사, 살려 줘…!"

성내 주민들.

그 중 범인인 이들은 전부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엎어져 버둥거렸다.

그나마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은 사정이 조금 나아 보였으나, 그들 역시 들끓는 기혈을 진정시키느라 가부좌를 틀고 끊임없이 운공을 해야 했다.

김영훈 역시 기혈이 들끓는 듯했으나, 그는 내단 덕택인지 기혈을 금세 잠재우고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이건, 혈제(血祭)의 진이다!"

청문령의 안색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혈제?"

"인신공양 말일세! 마도 수도자들이 생명을 대량으로 공양하여 생명력과 수행을 끌어올리는 방법 말이야!"

"…!"

내 안색이 일그러질 때, 김영훈은 능광도를 뽑아 핏빛 벽을 바로 후려쳤다.

콰아아앙!

황금빛 도광이 핏빛 벽을 후려쳤으나, 핏빛 벽은 성의 용맥과 연결된 탓인지 쉽게 깨지지 않았다.

"제길, 꿈쩍도 안하는군."

"서 도우. 혈목자 원립이란 이는 어떤 자인가? 혹시 아는가?"

"그 자는…."

문득, 나는 그제야 지난 삶.

지지난 삶, 지지지난 삶들에서도 들었던, 한 사건을 떠올렸다.

답천사막 대학살.

답천사막 인근에 있는 부족과 성들에, 잔인한 학살극이 일어난 사건.

그리고 그 학살극으로 인해 수많은 수도세가 결단기 가주들과 원로들의 심기가 곤두섰고, 그는 200년 후의 대전쟁의 원인까지 되었다.

'아니, 뭔가가 이상한데?'

이전 생.

내가 북향화를 만났을 때는 회귀 후 40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작 1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왜, 사건이 몇십 년이나 앞당겨진 거지?'

나는 이를 악물고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문 도우, 혹시 이 혈제진을 해체하실 수 있으십니까?"

"…용맥과 연결된 진일세. 시도는 해 보겠지만, 시간이 걸려."

"그럼 시간은 저희가 벌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사이에 최대한 빨리 진을 해체해 주십시오."

"…알겠네."

청문령은 굳은 얼굴로 성 아래로 내려가, 진법의 축들을 붙잡고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김영훈과 북중호를 보며 말했다.

"지금 오는 자는 혈목자 원립이라는 마도 수도자로서, 그의 경지는 결단 대원만, 혹은 그를 조금 넘어섰을 겁니다."

안 그래도 이전 생보다 학살극이 빨리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원영기의 실력을 이 시간에 바로 얻지는 못했을 거야.'

그가 가진 경지를 한 단계 뛰어넘게 해 준다는 법보 역시, 내가 봤던 흑색의 성 형태 법보로, 그는 그 '안쪽'에서만 경지가 높아졌다.

'지금은 대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니 어쩌면….'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결단기급 무인인 나와 김영훈의 합공이라면, 어쩌면 원립을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저와 김 형은 결단기급의 실력을 지녔으니, 저 자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니 저와 김 형이 시간을 끌 동안, 북 어르신과 향화 선자는 전투의 여파가 천색성 사람들을 덮치지 않게 천색성을 보호해 주십시오."

북중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북향화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찮으시겠어요, 오라버니?"

난 벌 괴뢰를 흘긋 보며 말했다.

"향화 선자, 혹여 괴뢰를 통해 나갈 수 있다면 선자는 지금 바로 나가 주시지요."

"하지만, 천색성은 제가 자라 온…."

"향화 선자."

턱.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부디, 시도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잠시 후, 북향화는 괴뢰의 몸에 새겨진 공간 법진을 발동시키고, 괴뢰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벌 괴뢰는 허공을 빠르게 쇄도하다 공간 전이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혈제의 진에 한번 부딪히고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저 진이 공간 전이 역시 방해하고 있어요. 최소한 진이 조금은 약해져야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향화 선자. 혹시라도 청문 도우가 진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킨다면, 바로 벌 괴뢰로 도망치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오라버니, 하지만…."

"약조해 주십시오."

나는 그녀에게 눈높이를 맞춰 주며 말했다.

"저는 죽어도 되니, 당신은 살아 주셔야 합니다."

"향화야, 그렇게 하거라."

북중호 역시 진중한 얼굴로 북향화에게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겠어요."

"그럼, 무운을 빌지."

북중호는 북향화를 데리고 성벽 밑으로 데려가, 성내의 수도자들을 모아 민간인들을 보호하는 보호법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와 김영훈은 각각 무형검과 능광도를 빼들고, 혈제의 진 너머, 이쪽으로 날아드는 핏빛 구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쿠우우우!

핏빛 구름이 혈제의 진 전체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구름 속에서 핏빛 장포를 입은 한 인영이 점차 내려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는 핏빛의 장막을 손쉽게 투과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과 똑같은 핏빛 장포.

그리고, 반투명한 흑색의 무면탈.

혈목자 원립이었다.

'지금, 잡아야 한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기껏해야 결단 대원만 수준의 기운.

기껏해야 송진 정도였다.

그리고 송진이라면, 충분히 잡을 자신이 있었다.

'음?'

그때, 나는 문득 그가 지난 삶과 뭔가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주름?'

그랬다.

지난 삶의 원립은 가면을 쓰고 있을지언정 그의 피부는 매끈했고, 체격 역시 젊은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원립은 어쩐지 손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체격 역시 상당히 작았으며, 머리카락은 윤기넘치는 흑발이 아닌, 잿빛을 풍기는 백발이었다.

나는 무형검의 기세를 드러내며 원립에게 외쳤다.

"혈목자 원립! 천색성에는 어쩐 일로 오셨소?"

내 말에,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제길….'

나는 그의 시선 너머, 그의 내면에서 느껴지는 역겨운 심상에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똑같았다.

외면에 조금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의 내면의 심상은 이전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호오, 본좌의 명호를 알고 있느냐?"

원립은 거친 목소리로 가면 안쪽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이한 일이로고. 어찌 내 명호를 아느냐. 그 명호를 아는 분들은 전부 비승했고, 그 외에 알 만한 놈들은 내가 찾아내 다 죽였는데…."

"그런 것은 알 것이 없소. 다만 천인기 선배님들이 비승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찌 벌써부터 성 하나를 둘러싸고 이런 폭거를 부리시외까?"

"하하, 축기기 따위가 그걸 알아서 무얼 하느냐. 시끄러우니 그냥 죽어라."

쿠구구구!

원립이 결인을 맺자, 그가 끌고 온 피구름이 혈제의 진 안쪽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안쪽에서는 소름끼치는 귀곡성과 피비린내가 잔뜩 풍겼다.

나는 김영훈과 눈짓을 교환하고, 각기 능광도와 무형검을 휘둘렀다.

콰과과과광!

황금빛과 무색의 빛이 사방을 흝으며, 피구름을 흩어 버렸다.

우리의 기세에 놀란 것인지, 원립은 살짝 놀란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았다.

"호오, 축기기가 아니라 정체를 숨긴 결단기 놈들이었나."

"대답하시오! 아무리 당신이라도 우리 둘을 상대로 무사할 수 있을 성 싶소?"

나와 김영훈은 둘 다 결단기급의 월도입천에 다다랐고, 나 같은 경우에는 축기기의 경지와 월도입천의 경지가 상승 작용을 하며 결단기 최정상급의 힘을 내는 게 가능했다.

거기에 월도입천의 경지 역시 200년을 넘게 참오해 오며 무형검을 숙련했다.

결코 쉬이 지지 않는 것은 물론, 원립이 아직 이 정도에 불과하다면, 그를 사냥하는 것 역시 불가능만은 아니었다.

"흐음… 좋다. 축기기 벌레급은 아니니 대답을 들을 자격은 있겠지."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촤아악!

그리고, 그가 턱을 쓰다듬던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쓸었다.

우우웅!

그의 목덜미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오며, 어떠한 '손자국'을 드러내었다.

'저건…?'

"10여년 전. 승천문이 열려 있을 시기, 아직 모든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하기 전. 본좌는 한 천인기 수도자의 습격을 받아, 죽기 직전까지 갔다. 천인기 수도자가 갑자기 기분이 풀린 탓인지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가 남긴 이 저주는 사라지지 않고 내 몸을 좀먹었다."

"…."

'괴군이 한 짓의 나비 효과…!'

괴군 조연이 뿌린 저주문의 여파가 커지고 커져, 혈목자 원립의 행보를 몇십 년이나 앞당긴 것이었다.

"…결국 본좌는 저주를 풀려면 원영기의 실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본좌의 혈영(血靈)을 예정보다 조금 일찍 회수하기로 한 거다."

"혈영?"

"내 명호는 알아도, 그건 모르나 보군."

원립은 큭큭 웃는 듯하더니 양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그의 양손에서 핏빛이 뿜어지더니, 혈제의 진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혈제의 진이 떨려 오며, 내 기혈이 전보다 조금 더 날뛰기 시작했다.

김영훈의 안색이 조금 더 안 좋아졌다.

그리고.

퍼엉, 펑, 퍼벙!

성 안쪽에서 몸을 비틀던 민간인 중, 몸이 허약한 자부터 시작해서, 그 몸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퍼벙, 퍼버벙, 퍼엉!

그들의 육신이 터지고, 그 안쪽에서 정혈과 생명력이 빠져나와 혈제진의 중심부로 떠올랐다.

"그만둬라!"

나는 대노하며 무형검을 들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김영훈 역시 그 광경을 보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능광도를 펼치며 원립을 노렸다.

그러나.

"쯧쯧. 어리석기는. 네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군그래."

끼야아아아!

그의 핏빛 장포 안쪽에서, 소름끼치는 귀곡성이 울렸다.

"분명 현 시점에서 내 수행은 결단 대원만이 맞기야 하다만…."

그가 저물대에서 한 지팡이를 꺼냈다.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지팡이는, 수정으로 된 두개골 장식이 위쪽에 박혀 있었고, 나무로 된 몸체에는 사람의 손 같아 보이는 자그마한 나뭇가지들이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슈우우우―

그의 주변으로 다섯 개의 반투명한 핏빛 깃발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자 적색의 보탑(寶塔) 형태의 법보 네 점이 나와 주변으로 떠올라 그를 호위하듯 도열했으며, 그가 저물대에서 뭔가를 뒤적이자 시뻘건 혈수(血水)가 솟구쳤다.

혈수들은 그의 양 옆으로 떠오르더니 각각 낫을 들고 있는 거대한 귀왕(鬼王)의 형상으로 변하였다.

"본래는 원영기 수사였다. 비승할 시점에 들켜서 잡혀가지 않기 위해, 내 원영을 혈영(血靈)으로 흩어 답천사막 인근 곳곳에 뿌려 두어 수행이 잠시 내려갔을 뿐."

촤악, 촤악, 촤악!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저물대와 몸 곳곳에서 뭔가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일곱 개의 족자가 그의 양옆, 귀왕들의 앞쪽으로 펼쳐졌다.

족자에는 피로 그려진 해마, 룡, 팔초어, 청새치, 범고래, 산호초, 조개 등이 그려져 있었다.

"내가 원영기에 이르면서 모아 온 법보와 기물들, 그리고 원영에 이르며 대성한 신통들 역시 전부 멀쩡하다. 법력만 결단 대원만일 뿐일진대, 네깟 놈들이 감히 내게 대적할 수 있을 성싶으냐?"

촤아아아!

그는 마지막으로 열일곱 개의 뼈로 된 단검 법보들을 입에서 뱉어 내었다.

단검들의 손잡이에는 피눈물을 흘리는 해골이 조각되어 있었다.

"덤벼 봐라, 결단기 쓰레기들아. 너희의 금단(金丹)도 함께 잘게 짓이겨 내 혈영에 첨가해 주마. 아하하하…!"

나와 김영훈은 말없이 기수식을 잡았다.

퍼엉, 퍼벙, 퍼버버벙!

저 아래쪽.

북향화와 북중호, 수도자들이 막고는 있었지만 민간인들의 몸이 터져 나가며 그들의 정혈과 생명력이 점차 천색성 중앙의 허공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뿌득….

싸움의 시작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단악검법, 제일초, 월악!

개전(開戰)을 알리는 초식이 가로로 상대를 베어 간다.

키이이잉!

그의 사방을 둘러싼 적색의 보탑들이, 서로 연결되며 적색의 장막을 쳤다.

내 무형검은 장막에 가로막혔고, 그 안쪽에서 원립이 결인을 맺는 것이 보였다.

"거(去)!"

끼아아아아!

혈수로 이뤄진 두 명의 귀왕이 나와 김영훈에게 낫을 휘둘렀다.

"막아라, 내가 뚫겠다."

"예."

김영훈이 기운을 모았고, 나는 앞으로 나서 무형검을 펼쳤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수백 자락의 궤적이 종횡무진하며 귀왕들의 낫을 막고, 도리어 귀왕들의 몸집을 집어삼켜 갔다.

파아아아앗!

뒤쪽에서 황금빛이 폭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를 피했고, 눈부신 빛살이 앞으로 쏘아져 갔다.

단맥도 산바람의 초식이 앞으로 나아가며 원립을 둘러싼 결계에 충돌했다.

꽈아아아앙!

녀석의 결계가 마구 흔들리는 것 같더니, 결계의 장막이 결국 뚫려 버렸다.

하지만, 장막의 안쪽에선 원립이 여유롭게 결인을 완성한 상태였다.

"해(解)!"

촤아아악!

그의 양옆으로 도열한 족자.

피로 그려진 바다 생물들이 족자에서 튀어나왔다.

"내 혈마진해광(血魔鎭海光)으로 제련한 요혼(妖魂)들이다. 어디 받아 보거라…!"

'한 마리 한 마리가 결단기급이다…!'

나는 김영훈의 옆에 서며 무형검을 잡았다.

"저 요혼들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폭발적이나, 소모가 빠릅니다. 제가 버틸 테니 형님이 놈에게 접근하십시오. 주변에 있는 핏빛 깃발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래."

단악검법, 산수화!

나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무형검을 흩뿌렸다.

결단기급 요혼들은 핏빛의 광채를 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팔초어의 촉수가 나를 가두고, 청새치가 뾰족한 부리로 나를 노린다.

산호초가 안쪽에서 가시처럼 뻗어 나가며 나를 압박한다.

단악검법, 기석, 괴암!

무형검이 수많은 기이한 변화와 함께 덩어리져 내 주변으로 몰아쳐 공방일체가 된다.

무형검의 회전에 청새치는 튕겨 나가고, 팔초어의 촉수와 산호초의 가지들이 전부 잘려 나간다.

꾸오오오오!

핏빛의 범고래가 그런 나를 향해 달려들며 입을 쩍 벌렸다.

단악검법, 용맥, 유릉.

무형검이 일순간 내 손에서 더더욱 기의 회전을 빠르게 하며 강화되고, 부드러운 찌르기와 함께 범고래의 입 안쪽으로 찔러 들어갔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범고래의 안쪽에 들어간 상태에서, 무형검이 크게 증폭되며 범고래의 몸체를 폭발시켜 버렸다.

사방으로 범고래 요혼의 잔혼들이 휘몰아쳤고, 그 틈새로 핏빛의 해마가 달려들며 내게 핏빛의 거품을 뿜었다.

부글부글부글…!

수많은 거품을 보며, 나는 무형검으로 피거품을 전부 쳐 냈다.

하지만 미처 쳐 내지 못한 세 개의 거품이 내게 날아오며 점차 커졌고, 결국 세 개의 거품은 서로 겹치며 하나가 되더니 나를 그대로 가둬 버렸다.

'크윽…!'

쿠구구구구!

전신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움직이기가 힘들다.

하지만.

단악검법, 산명곡응!

티이잉!

무형검이 진동하며 검명(劍鳴)을 떨어내었다.

자체적으로 예기를 지닌 진동이 거품 안쪽에서 마구 휘몰아친다.

단악검법의 궤적이 내 손 안에 있었기에 내 몸은 한 올의 상처도 없었고, 점차 거품이 떨리며 마침내 터져 버렸다.

퍼어엉!

단악검법, 심산!

나는 빠르게 다시 거품을 쏟아 내려는 해마의 품으로 파고들어, 무형검을 올려 베었다.

그러나, 그 한 순간.

촤아아악!

핏빛의 조개가 나와 해마의 사이로 빠르게 끼어들었다.

티이잉!

내 무형검은 조개의 껍질을 뚫지 못했고, 조개가 입을 벌려 나를 집어삼키려 하였다.

단악검법, 구산팔해.

나는 그 자리에서 무형검을 90번 이상 회전시킨 후, 눈앞의 조개를 팔방으로 베어 갔다.

촤아아악!

회전력이 실린 베기에 조개는 물론 그 뒤쪽에 있던 해마까지 16조각이 나서 흩어져 버렸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나는 해마와 조개 뒤쪽에서, 입에 기운을 모으고 있던 혈룡을 볼 수 있었다.

'저건…!'

나는 서란이 용형으로 발사했던 용의 숨결을 떠올리며 무형검을 들었다.

직격하면 결단기 최정상이고 뭐고 치명상일 터.

번쩍!

핏빛의 기운이 내게 쇄도한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나는 무형검을 들어 핏빛의 광선을 무형검에 담아낸 후,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하여 저 멀리서 부딪치고 있는 황금빛과 핏빛의 전장으로 던졌다.

혈룡이 쏜 핏빛의 기운이 원립에게 날아갔고, 원립의 주변에서 움직이던 네 개의 보탑이 또다시 결계를 만들어 냈다.

콰아아앙!

그러나 혈룡의 광선에 결계는 한 번에 박살이 났으며, 네 개의 보탑은 일순간 빛을 잃어버렸다.

쿠과과과광!

광선은 결계에 막혀 한 번 힘이 분산된 채로 김영훈과 원립에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다시금 힘을 모으려는 혈룡에게 달려들어 무형검을 들어올렸다.

혈룡은 나를 향해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며 날아와 뿔을 내밀어 나를 후려쳤다.

단악검법, 유곡.

나는 그 힘을 흘려 비틀어 무화시킨 후, 무형검을 올려 베었다.

단악검법, 입산!

촤아아악!

무형검은 혈룡을 그대로 반으로 쪼개 버렸고, 녀석은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슈우우우!

일곱 요혼을 전부 흩어 버렸지만, 놈들은 재생 기능이 있는 듯 허공에서 느릿하게 다시 뭉치고 있었다.

'그나마 재생하는 속도가 느린게 다행이군.'

단악검법, 첩첩산중.

촤아아아아!

무형검이 사방팔방으로 가시처럼 뻗어 나가며, 다시 응결되는 요혼들을 한 번 더 흩어 버렸다.

나는 그런 후 저쪽에서 열심히 부딪치고 있는 핏빛과 금빛을 향해 허공을 박찼다.

쿠구구구!

핏빛의 폭풍이 금빛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원립은 비둔술을 쓴 상태로 김영훈의 속도에 반응하며, 열일곱 개의 단검 법보들을 그에게 퍼붓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오행혈주번이 간혹 김영훈에게 날아들며 그의 신경을 분산시킨다.

거기에 혈수로 된 귀왕 둘도 다시 재생했는지 김영훈을 양옆에서 압박하는 중이었고, 원립 역시 그를 향해 지팡이를 쥐고 수많은 법술 폭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김영훈은 원군으로 온 나를 보며 외쳤다.

"저 지팡이로 쓰는 법술을 조심해라! 지팡이에서 나오는 법술들에 닿을 때마다 기혈이 흡수되고, 저놈은 기력을 회복한다!"

그는 원립에게 한두 번 원기를 빨린 것인지, 안색이 아까보다 창백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김 형은 귀왕들과 단검 법보들을 맡아 주시지요. 놈의 본체는 제가 공략하겠습니다."

내가 김영훈의 앞에 서고, 그는 내 뒤쪽에 서서 단검 법보들을 향해 산바람 17연격을 날린 후 귀왕들을 잡아끌어 놈들을 압박했다.

"꽤 하는 놈들이구나. 내 특제 강시들을 끌고 왔으면 더 볼만했겠어."

원립은 껄껄 웃으며 결인을 맺었다.

그의 수정 해골 지팡이의 수정 해골이 입을 벌렸다.

핏빛 구름으로 이뤄진 혈수(血手)들이 수백 수천 개씩 수정 해골의 입에서 뿜어지며 내게 쇄도했다.

'닿으면 정혈이 빨리며 원립은 기력을 회복한다라….'

그럼 하나도 안 닿으면 된다.

콰앙!

단악검법, 괴암!

무형검이 내 주변을 회전하며 공방일체가 된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나는 무형검을 회전시키며 혈수들을 모조리 쳐 내고 원립에게 돌진했다.

"흥!"

쿠우우우!

하늘에서 적색의 보탑이 나를 향해 내리찍어 온다.

방어결계용 법보였으나,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는 듯했다.

투웅!

나는 유곡의 초식으로 보탑을 내 옆으로 흘린 후 계속해서 놈에게 돌진했다.

원립은 정말 쉼 없이 법술들을 뿜어내 폭격을 해 왔다.

핏빛의 해일이 나를 덮쳐 왔고, 피로 이뤄진 나뭇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친다.

그 안쪽에서 여러 개의 핏빛 광선들이 나를 노렸으며, 핏물로 이뤄진 나방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그 법술들 중 한 올이라도 내 몸에 닿지 않도록 모조리 쳐 내며 원립에게 점차 다가갔다.

'송진보다 강하다…!'

천인기의 잔혼이라곤 했지만, 육신도 법보도 없이 그저 섭명함의 귀기에 의지해 겨우겨우 명계의 인력을 버티고만 있는 잔혼 송진과 비교하면, 숨김없이 결단기 최정상의 전력을 드러내며 법보를 잔뜩 사용하는 원립은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김영훈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퍼엉, 퍼벙!

뒷쪽에서 김영훈이 혈수로 이뤄진 귀왕을 터트려 버렸고, 원립의 법보를 떨쳐 낸 후, 내게 합세하러 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원립의 품에 파고들었고,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잘 가라…!'

그리고.

콰악!

원립의 손에, 반투명한 핏빛 깃발이 들렸다.

"걸렸구나."

콰아악!

놈이 내 머리에 핏빛 깃발을 박아 넣었다.

움찔!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 오행혈주번의 금제술은, 딱히 다섯 개만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김영훈을 쫓아다니던 다섯 개의 핏빛 깃발.

그리고, 원립이 결인을 맺자 그의 주변으로 수 개의 핏빛 깃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단전에 오행혈주번의 근원이 제대로만 자리잡혀 있다면, 얼마든지 소환할 수 있지. 하하하, 내 앞에서 이만큼이나 선전했으니, 너희 둘은 내 혈노로 쓰는 것도…."

그리고.

촤아아악!

나는 시끄럽게 떠드는 원립을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어…?"

원립은 상반신이 잘려 나간 상태에서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 오행혈주번이라는 거 말인데…."

나는 씨익 웃으며 무형검을 들어올렸다.

"같은 법술을 익힌 사람한테는 안 먹히는 모양이외다."

"뭣…?"

촤아아악!

나는 놈의 상반신을 수천 갈래로 조각내어 버리고, 남아 있는 놈의 하반신을 걷어차 버렸다.

'놈이 꽂은 오행혈주번이, 내가 일정법으로 연화한 오행혈주번에 그대로 흡수되어 버렸다….'

때문인지 9할 9푼 이상 연화했던 오행혈주번의 연화율이 9할5푼 정도로 떨어지긴 했으나, 그 정도야 상관은 없었다.

"이런, 벌써 끝낸 거냐?"

"놈이 방금 그 오행혈주번이 아니라 다른 법술을 썼다면 위험했겠지만, 어쨌든 끝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흐음, 전투 경험이 굉장히 많은 노련한 놈들 같았는데, 결단기 수도자와는 전투 경험이 없는 게냐?]

오싹!

나는 움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원립의 하반신이, 상반신이 사라졌음에도 그대로 허공에 떠 있었다.

촤락, 촤라라락!

원립의 하반신에서 핏줄기가 솟구치며, 점차 상반신의 형상을 되찾기 시작한다.

"저, 저게 무슨…!"

김영훈이 경악할 때, 원립의 영언이 울렸다.

[축기기 이상은 경맥에 흐르는 정순지력 때문에 장기가 몇 개 뜯겨도 며칠은 생존이 가능하며, 몇 달 잘 요양하면 재생이 된다. 하지만 그것뿐, 축기기들이야 목이 잘리면 죽지.]

나는 놈이 떠들면서 완전히 부활하기 전에, 놈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그러나, 어느새 핏빛 조개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촤아아아!

아까 흩어 놓았던 일곱 마리의 요혼들이 다시 완전히 재생해 버렸다.

[하지만 결단기부터는 목이고 뭐고 필요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 정도공법을 익히는 정도선파의 결단기들이야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뽑히면 몇 달은 요양해야 하지만, 나처럼 혈도(血道) 공법을 익힌 마도선파 수도자들은 금단(金丹)을 부수지 않는 이상 즉시 재생한다는 걸 몰랐던….]

"영훈 형님!"

단악검법, 오의, 단악!

나는 일곱 요혼을 향해 총력을 쏟아부으며 길을 뚫었다.

놈들은 발악하며 제 주인을 지키려 들었으나, 나는 산외산부진을 발동시키며 다시금 놈들에게 단악의 초식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놈이 떠벌거리는 사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놈에게 날아갔다.

촤르르륵!

그리고, 원립의 상방신이 9할 이상 재생된 상태.

그 상태에서 김영훈은 능광도를 사용해 단맥도법 오의, 도묘의 초식을 쏟아부었다.

빛살이 번뜩이며, 9할 이상 재생되었던 원립은 그대로 다시 갈갈이 찢겨 나갔다.

상하반신이 전부 흩어진 상태의 원립.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핏빛의 주먹만 한 금단(金丹)만이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김영훈이 원립의 금단을 박살 내기 위해 도를 치켜들었을 때였다.

[…내 법보가 딱히 이게 끝이라고는….]

촤아아악!

원립의 금단 안쪽에서, 핏빛의 창이 튀어 나왔다.

창은 김영훈의 심장을 바로 노렸고, 김영훈은 흠칫 놀라며 뒤쪽으로 빠졌다.

[말한 적이 없다만…?]

치이이이익!

핏빛의 창에서 피 안개가 뿜어지며, 또 다른 핏빛 귀왕의 형상을 취하였다.

"제길…! 저게 사람이냐!"

"축기기부터 이미 인간이 아니었는데, 뭘 그러십니까!"

나는 요혼들을 떨쳐 내며 금단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고, 김영훈 역시 창을 든 귀왕을 상대하며 금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원립의 잔해들이 금단 주변으로 뭉치며 점차 다시 놈이 몸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젠장!'

막아야 한다!

막아야….

그때였다.

푸콱!

부우우웅!

[어…?]

벌 형태 괴뢰가, 어느새 장내에 등장하여 정순지력으로 이뤄진 침을, 무방비한 원립의 금단에 박아 넣었다.

북향화였다.

[이, 이놈…!]

부우웅!

촤아아아악!

벌 괴뢰는 수 번의 침을 금단에 더 꽂아넣었고, 금단에서 뿜어진 법술에 벌 괴뢰가 뒤로 밀리는 듯했으나, 금단은 이미 수많은 균열이 생겨 빛을 잃은 상태였다.

[이…놈…!]

원립의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그리고, 금단은 그대로 저 아래쪽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향화 선자!"

나는 아래쪽에서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이곳을 보며 괴뢰를 조작하는 북향화를 보았다.

그녀 역시 해냈다는 표정과 함께 뿌듯함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촤아아아!

그리고, 청문령이 뭔가 해낸 것인지, 혈제의 진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 확연히 옅어진 상태였다.

"하하…."

나는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렇게 우리는, 괴군의 작은 나비 효과가 만들어 내, 몇십 년은 일찍 일어난 이 갑작스러운 답천사막 대학살을, 막아 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경탄이 나오는구나.]

"…뭐?"

꿈틀, 꿈틀….

원립의 금단이 아니었다.

천색성 중앙.

혈제진의 영향으로 원립에게 정혈이 뽑혀 죽은 이들의 생명력.

그것이 모인 허공에서, 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님!!!"

"안다!"

김영훈이 놈에게 달려 나가려 했을 때였다.

촤아아아아!

원립이 이곳에 몰고 왔던 피 구름.

혈제의 진 바깥을 덮고 있던 핏빛 기운들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촤아아아악!

피 구름이 우리에게 달려들며 우리를 방해했다.

'이건…!'

나는 피 구름 안쪽에서, 수만 명 이상의 생명력과 정혈, 그리고 그들의 원한 섞인 귀기와 고통이 흘러나오는 것을 읽었다.

'이, 이건…!'

사람.

이 피 구름의 핏방울 하나하나가, 전부 사람의 생명력이었다.

쿠구구구!

놈의 피 구름이, 쪼개진 채 떨어지던 금단에 흡수되었고, 금단이 재생되었다.

그리고, 떨어지던 금단이 다시 허공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천색성의 중앙에 있던 빛무리, 그 중앙에서 뭔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기였다.

영체(靈體)로 된 아기는, 수십 개의 눈알과 입, 그리고 손을 전신에 달고 있는 기괴한 형태의 아기였다.

그것의 입에서 원립의 영언이 튀어나왔다.

[축기기 수도자는 재생력이 조금 강한 정도고, 결단기 수도자는 금단이 깨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하면 안 죽는다면….]

기괴한 아기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떨어지던 원립의 금단이 그 아기에게로 날아갔다.

나와 김영훈은 그를 막으려 움직였으나, 피 구름이 우리를 둘러싸고 막아섰다.

[원영기 이상부터는, 원영만 멀쩡하면 금단이 박살 나도 안 죽는단다. 뭐, 일반적인 경우는 금단이 박살 나면 수행을 다 잃기야 하지만, 나는 준비성이 철저해서 그럴 일은 없지….

그리고, 말했잖느냐. 일찍이 진즉에 원영기에 오른 상태에서, 천인기들의 눈을 피하려 혈영을 나눠 답천사막 주변 성들에 흩뿌렸다고.]

쿠구구구구!

피 구름들이 그의 금단으로 끌려들어 간다.

다시 한순간에, 원립이 육체를 재생하고 피구름 안쪽에서 튀어나왔다.

쿠구구구구구.

그가 혈제진 바깥에 흩어놓았던 피 구름들이, 모조리 원립의 몸 안쪽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의 기운이 급격하게 치솟기 시작한다.

결단기 대원만을, 뛰어넘는다.

김영훈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원립을 바라보았다.

[잘 놀았다. 거기 금빛, 너는 내 혈시로 제련하고… 거기 너는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행혈주의 술법을 익혔으니, 정신 금제가 안 먹힐 테니까 그냥 죽어 줘야겠구나.]

피 구름을 전부 흡수한 원립은, 원영 초기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애초에, 네놈들 성에 먼저 들른 게 아니라, 북쪽 대초원에 남겨 둔 내 혈영들부터 전부 다시 회수하고, 그곳에 있는 양식들을 흡수한 후 이곳에 와서 잠시 놀아 줬더니, 그래 신이 났나 보구나. 어쨌든 인상 깊었다. 잘 가거라.]

파아아아앗!

다음 순간, 원립이 핏빛 광채를 뿜었다.

연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