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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 *

우리는 촌로가 알려준 봉우리를 넘어, 지네가 산다는 동굴에 도착했다.

곳곳에 사람의 인골이 낭자해 있었고, 안쪽에는 거대한 기운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가, 축기 후기경 요괴였군.'

나는 왜 수도가문 사람들이 이 요괴를 처리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축기경이라면 나름 수도가문의 장로급 인사였다.

그것도 장로들 중에서도 상당한 고서열의 장로.

그렇다고 범인들의 생활을 위해 굳이 결단기 가주나 원로급 인사가 나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우우웅!

동굴에 들어선 우리에게, 의식영역을 통해 지네의 영언이 울려왔다.

[누구, 냐?]

나는 잠시 동굴 안쪽의 어둠을 직시했다.

뭔가가 안쪽에서 꿈지럭거리더니, 이내 거대한 지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영언으로 지네에게 물었다.

[왜 인간 마을을 습격해서 그들을 잡아먹나? 다른 사냥감도 많을텐데. 거기에...]

나는 여우 요괴의 반응을 생각하며 말했다.

[사람 고기가 너희에게 그렇게 맛이 좋은 건 아닌 듯한데, 어째서 사람 고기를 굳이 찾아 먹는 거지?]

지네는 잠시 더듬이를 꿈지럭대더니 말했다.

[사람, 고기. 먹으면, 나와 같은, 자식들을, 낳을 수 있다.]

[뭐?]

[나, 외로웠다. 내 동족들은, 나와 같은 지성이 없다, 동족들과, 아이 낳아도, 내 아이들은 수명이 짧다.

예전에는, 나와 말이 통하는, 친구들,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하늘을 움직이는 인간들이 내 친구들, 다 잡아갔다. 기운이 강한 이들은 잡아가고, 이 근방엔, 나밖에, 안 남았다.]

나는 지네 요괴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생각, 했다. 지성이 있는 사람, 먹으면, 자식들도, 지성이 있을, 거다. 그래서, 사람 중에서 아직 순수한 피를 가진, 처녀와 총각이란, 것들을, 먹었다.]

요족은 본디 일반적인 짐승이 오래 살아 요단을 얻음으로써 탄생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짐승이 오래 살아 보았자, 뭘 얼마나 오래 살겠는가.

보통 일반적인 짐승이 요족이 되는 것은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을 타고나거나,

대형 요족이라 불리는 거호족, 성붕족, 해룡족 등 특별한 피를 받고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피를 가진 대형 요족이 아닌, 일반적인 요족들은 그 형질이 딱히 유전되진 않았다.

수도자들은 수도자끼리 혼인하면 영근이 유전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수도세가라는 것이 있는 것이었고.

하지만 요족은 어떤가.

이들은 요족이라고 통틀어 불릴지언정 사실 전부 다른 종족이었고, 같은 종족끼리 만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거기다가 같은 종족끼리 만나서 교미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영성의 유전 확률은 인간 수도자들보다 낮았다.

그리고, 그런 것은 딱히 사람 고기를 먹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네가 그런 걸 먹는다고, 네 자식들이 요단을 가진 채 태어나진 않는다.]

[아니, 반드시, 태어날, 거다!]

[누가 그랬지?]

[내, 직감이, 그랬다! 인간들은, 요단이 없어도, 머리가, 좋다! 분명, 그런 인간들, 먹으면...]

나는 지네의 말을 끊었다.

[그런 일은 없다. 네 자식들이 너와 같아지는 방법은, 그저 자식들이 오래 살아남아 영성을 깨치고 받아들여 요단을 스스로 응결하는 법 밖에 없어.]

[아니다! 너희, 영기를 품은 족속도, 내게 찾아와 말했다, 응원한다고! 그리고, 마을 먹는 거, 허락해줄, 테니, 나한테, 허물, 달라고, 했다!]

'역시, 수도가문들은 지네의 허물을 댓가로 지네를 내버려둔 거로군.'

어차피 수도가문에게 범인들의 마을 한둘 따위야 알 바도 아니고, 지네도 예상외로 강하니 응원하는 채 하며 허물이나 받아낸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너를 응원한답시고 기만한 것이다. 그들이 응원한다고 네 자식이 갑자기 영험해지진 않는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라!]

내 말에 지네는 갑자기 몸을 뒤틀며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 자식들은, 전부, 나와 같아질 거다! 너희도, 순결한, 처녀와 총각이니, 너희를 먹으면, 가능할, 가다!]

쿠구구구구!

지네가 몸을 뒤틀며 독을 내뿜었다.

나는 그 독기에 격공장을 쏘아 물리며,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아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사람도 이미 수십은 잡아먹은 놈인 듯하니..."

"...예, 삶을 끝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동굴 곳곳에 쌓인 인골을 보며 참담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나는 무형검을 쥐고, 지네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익!

지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동굴 안쪽에서 수천마리의 박쥐떼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곳곳에서 다른 지네들은 물론이고 뱀과 전갈 등, 수많은 독물(毒物)들이 주변에서 기어나왔다.

쿠과광!

지네는 무형검을 꺼낸 내게 몸통박치기를 시도했고, 나는 동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녀석은 정순지력을 풍기는 나를 먼저 사냥할 예정인지 내게 달려들었고, 지네가 불러낸 독물들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북 소저, 괜찮겠습니까?"

나는 독물들에게 노려지는 그녀에게 소리쳤고, 북향화는 말 없이 저물법기를 열었다.

쿵, 쿵!

쿵쿵쿵쿵쿵!

그리고, 그녀의 저물법기에서 수십개의 비검 법기, 거울, 비파, 방울, 비수, 바퀴, 베틀, 북, 거문고 등 수백개에 달하는 법기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주변을 메웠다.

"제 걱정은 마세요."

쿠구구구구!

그리고, 수많은 법기들이 동시에 발동하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늘 주머니는 든든하게 하고 다니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사방으로 비검과 수많은 법기들이 날아가며 독물들을 밀어내고, 강력한 법술들을 흩뿌렸다.

"하..."

나는 아득하게 많은 법기들을 꺼내 주변으로 흩뿌리는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걱정할 건 없는 여자로군.'

나는 눈 앞에서 독안개를 흩뿌리는 거대 지네를 보며 무형검을 들어올렸다.

[네 자식 얘기는 안타깝지만, 네가 먹어온 인간들은 무고한 인간들이고, 네 자식들이 영성을 갖추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계속 사람을 먹겠다니 어쩔 수 없군.]

부웅!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검이 천변만화하며, 내게 뿜어지던 독안개를 모조리 걷어내어 버렸고, 그대로 지네를 후려쳐 떨쳐 버렸다.

'단단하군.'

지네의 갑피는 상당히 단단했다.

'아무리 공격용이 아니라 안개를 걷어낼 용도로 휘두른 거라 해도 한 번은 막아낼 줄이야...'

물론 정작 무형검을 얻어맞은 지네는 입에서 독혈을 토하며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딱 봐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잘 가라."

나는 지네의 위쪽으로 떨어지며, 지네의 머리에 무형검을 박아넣었다.

콰아아앙!

전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단기 수준의 무형검이다.

축기경 후기 수준의 지네 요괴는, 이젠 솔직히 전투의 대상도 아니었다.

[키...이익, 키에엑...]

벌레 요괴는 생명력이 끈질긴 것인지, 녀석은 머리에 무형검이 박혔음에도 몸을 몇 번이 꿈지럭 거렸다.

[내, 자식, 들... 자식...들...]

잠시 꿈지럭거리던 녀석은, 독혈을 뿜어내며 읊조렸다.

[이...놈, 곱게는, 안, 죽을, 거다...]

우우웅!

지네의 머리에서부터 어떤 파동이 뿜어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파동은 지네 요수가 부리던 독물들에게로 가 닿았고, 북향화를 상대하던 독물들은 이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방금 그건...'

요족어를 할 줄 아는 나였기에, 방금 지네가 뿜은 파동을 읽을 수 있었다.

'놈... 독물들로 하여금 마을을 계속 습격하라는 명을 내렸군.'

당장 오늘밤부터, 독물들이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할 터였다.

"빠르게 끝내셨네요."

"흠, 소저는 그걸 보고도 아직도 내 법기를 만들 생각이 드십니까?"

"아하하, 그건 제 자존심이라니까요. 꼭 만들 거에요."

그녀는 두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네 요수는 죽었고,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지네 요수가 마지막에 독물들에게 내린 명령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단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 독물들까지 해결해 줘야겠지요. 소저는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흠..."

잠시 고민하던 북향화는 금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런 류의 주문은, 보통 3~5달. 정말 길면 반년까지 가곤 해요. 그러니까, 마을에 반년 정도만 작동하는 수호법기를 하나 설치해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독물들은 밤에만 습격을 한다 했으니, 밤에만 마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 되고요. 그렇게 반년 정도만 버티게 하면 나머지는 자연히 알아서 해결될 거에요."

"호오..."

연기사는 이런 방면으론 유용한 듯싶었다.

"좋은 방법이군요."

"그렇죠, 그나저나..."

그녀는 동굴 안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유해들을 수습해 볼까요?"

* * *

나는 서악 마을 사람들을 불러와, 동굴 안쪽에 있던 독기들을 법술로 빼낸 후 그들이 동굴로 들어가 친지의 유해를 수습하게 해 주었다.

"감사, 정말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눈물투성이가 되어, 자신의 아들의 유해를 되찾고는 내 손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외다."

나는 담담히 촌장의 감정을 받아준 후, 그에게 지네 요수가 독물들에게 내린 명령을 전달했다.

"그, 그런..."

"걱정 마시오, 내 벗이 그런 점 역시 며칠 안에 해결해 준다 하니."

나는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는 북향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은 내가 독물들의 침입은 막아주겠소."

"아아...!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북향화에게도 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성제국어는 몰랐으나, 촌장의 인사를 받고 따스한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모든 이들의 유해가 다 수습되었다.

"이만 마을로 돌아가지요."

"잠시만요, 서 수사."

"예?"

북향화는 저 계곡 아래 떨어진 지네 요수의 시신을 가리켰다.

"혹시 저 근처로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아, 물론이지요."

우리는 지네 요수의 사체 근처로 다가갔다.

"어떤 일 때문이십니까? 아, 혹시 법기 재료를 구하려 하십니까?"

"음..."

잠시 지네 요수를 쳐다보던 그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 요수도 묻어줄까 해서요."

북향화는 요수의 앞으로 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요수도 자식들의 어머니였던 거잖아요. 죄없는 사람들을 먹어치운 극악한 요괴이긴 하지만, 전부 모성애로서 행동한 것이니 단순한 악이라 보기엔 힘들겠죠. 그리고..."

그녀는 옥색 노리개를 들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쩐지, 제 어머니 생각도 나네요."

"...알겠습니다. 같이 묻어드리죠."

우리는 동시에 토둔술을 사용해서 지네 요수를 땅속으로 묻었다.

그리고 북향화는 지네 요수를 묻은 후 자신의 저물법기에서 유리팔찌를 빼내서 그 위에 놓아주었다.

'벽라국인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 유리 부장품을 놓는다 했었지...'

"이제 가죠."

"그러지요."

나는 북향화를 따라가며, 그녀가 만들어준 지네 요수의 무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 위쪽에는 그녀가 놓아둔 유리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서악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죽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한바탕 슬픔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이젠 더는 공포에 떨며 마을을 떠날 걱정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더욱 더 그들에게 크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일단, 죽은 이들의 위령제를 겸해 조촐한 마을 축제를 열 예정입니다. 혹여 두 선인 분께서 참석해주시어 축제를 빛내주실 수 있으신지..."

나는 촌장의 말을 북향화에게 전했고, 그녀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참석하겠다고 하였다.

"북 소저는 참석하겠다 하외다."

"알겠습니다. 하면 선인 님은...?"

촌장은 나를 보며 물었다.

'참여해야 하나...?'

별로 축제에는 흥미가 없어, 고민할 때였다.

"반려 분도 참여하신다 하시는데, 어찌 신랑 분께서 참여를 망설이십니까. 허허.."

"...우리 둘은 딱히 반려가 아니오만."

"아, 저런. 아직 혼인을 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아니, 애초에 북 소저에겐 따로 혼인이 약속된 사람이 있소."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외다. 나는 그럼 마을 외곽에서 독물들을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을테니 축제 준비를 하시오."

나는 북향화에게 축제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곧 해가 떨어질 터였다.

"음?"

그때, 나는 마을 외곽에서 한 서책을 들고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얘야, 마을로 들어가거라. 축제가 시작될 거다."

"아, 선인님."

아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언니가 곧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그랬니? 언니는 어디갔는데?"

"언니는 저 산 너머로 갔어요! 산 너머 부잣집에서 일을 하고 온다고 했어요!"

아이가 가리킨 산은, 지네가 살았던 산이었다.

"..."

나는 순진하게 서책을 들고 기다리는 아이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나저나, 그 서책은 뭐니?"

"아, 옛날옛적 설화들이 담긴 서책이에요. 언니가 돌아오면 읽어준다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나는 씁쓸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는 게 어떠니?"

"조금 더 기다릴 거에요. 오늘 마을 어른들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했어요. 제 언니도 돌아올 거에요."

"...얘야. 그 책은 내가 읽어주마."

"음... 언니한테 읽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는 선인이잖니? 내가 읽어주면 네게도 복이 있을 거란다."

아이는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요?"

"그럼."

"그럼 읽어주세요."

나는 아이가 든 설화집을 받아들고, 토 속성 법술을 써 흙을 들어올려 나와 아이가 앉을 의자를 만들었다.

"와아..."

"신기하지? 앉아라. 읽어주마."

나는 설화집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절로 헛숨을 들이켰다.

"뭣...!"

설화집의 첫 장에는, <제일장(第一章), 종명자(終命者) 이야기>라는 소제목이 적혀있었다.

연(11)

종명자 이야기...?

내가 떨리는 눈으로 설화집을 노려볼 때였다.

"선인님...?"

"...아, 미안하다. 읽어주마."

나는 설화집을 읽어주었다.

설화집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옛날 옛적,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상제(上帝)가 있었다.

-상제에게는 일곱 명의 아끼는 제자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상제와 제자들은 크게 다투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를 떠나,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

-상제는 일곱 제자들이 자신의 명(命)을 듣지 않는다 하여, 그들을 종명자(終命者)라 불렀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혹독했고, 종명자가 된 일곱 제자들은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하늘 나라를 그리워했다.

-상제는 그 모습을 보며 일곱 제자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늘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만들었고, 일곱 제자가 길을 걸어 다시 하늘에 도달하게 하였다.

-일곱 종명자는 다시 상제가 깐 하늘길을 걸어, 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에 돌아와, 상제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며 행복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이 설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였다.

그리고.

오싹, 오싹!

나는, 왠지 모르게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솟아오르는 듯한 역겨움과 공포심이 몸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진다.

왜일까?

이 설화 자체는 동화의 일종으로, 어린아이들에게 '집을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라는 교훈을 담은 동화일 뿐이었다.

하지만.

'왜지?'

이 문장 하나하나에, 흉(凶)함이 느껴진다.

특히 설화의 결말, 종명자들이 상제의 곁에서 행복하게 지냈다는 것은 읽자마자 오한이 전신을 덮치는 것 같았다.

"선인님, 괜찮으세요?"

아이는 내가 걱정스러운 듯 내 팔을 잡아당겼다.

"아...!"

나는 문득, 내가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괜찮단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러니 걱정 마려무나."

'뭐지, 이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과 내용에, 영혼보다 깊숙한 곳에서 이런 감정이 치솟는다.

뭔가가 이상했다.

대체 이 내용이 뭐길래?

'뭔가 책이나 종이에 다른 게 숨겨져 있는 건가?'

나는 <종명자 이야기>를 다 읽어주고, 다음 설화로 넘어갔다.

'아, 이건 나도 아는 설화군.'

다행히 제이장의 설화부터는 예전에 봤던 평범한 설화였다.

한겨울날 어머니가 먹을 잉어를 구하기 위해 얼음장에 몸을 던진 사내라든가.

운명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탑을 쌓은 노인의 이야기라든가.

예전에도 똑같이 보았던 '지성이면 감천'의 교훈을 전하는 설화들이었고, 나는 이번에는 기묘한 기분이 들지 않고 편안하게 아이에게 설화들을 읽어주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음? 이것도 처음보는 설화인데...'

제십삼장, <둥근 땅 사람들 이야기>라는 설화는 나 역시 처음 보는 이야기였다.

'아, 이건...'

북향화가 흘리듯 해 주었던 내용의 설화였다.

성계(星界)라는 곳에도 사람들이 사는데, 그들은 둥글게 생긴 땅에 붙어서 산다는 것이었다.

"와아, 어떻게 사람들이 땅에 붙어서 살죠? 이 둥그란 부분 밑에 사는 사람들은 아래로 떨어지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화집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설화집의 마지막 장은, 내가 저번에 보고 왔던 '세상의 끝'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상의 동서남북으로 가면 세상의 끝이 나오고, 세계순력이니 뭐니 하는 것이 세계를 감싸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 표시한 지도가 있었다.

'이건...'

지도의 중심에는 커다란 사막이 있었고, 사막의 중심에는 작은 섬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사막의 왼편에는 벽라국, 연국, 성제국으로 보이는 나라들이.

오른편에는 여러 부족국가들이.

윗편에는 커다란 초원이.

아래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동서남북의 끝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었고, 이 경계선 너머로는 해, 달, 별 등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이 세상의 전부... 인건가...음?'

나는 문득 지도 바깥에 아주 작게 그려진, 원통형의 작은 뭔가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봉명성...? 이것도 나와있다고? 허...'

단순한 시골의 설화집이라기엔, 지나치게 내용이 자세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설화집에서 또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선인님, 근데 이것 좀 보세요. 여기 해랑 달이요~"

꼬마아이는 지도 바깥에 표시된 해와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꼭 눈알 같아요!"

"..."

지도는 마치 해와 달을, 눈알처럼 그려놓았다.

금빛의 해 속에는 실핏줄 같은 것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기 힘든 동공이 그려져 있었고, 은빛의 달 역시 해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해와 달의 동공은 둘 다 지도 속 대륙을 향하고 있었다.

오싹, 오싹!

나는 이것이 '눈알'임을 인식하자 또 다시 전신에 오한이 돋는 게 느껴졌다.

'도대체 뭐지, 이 세계는...?'

문득, 저 멀리서 지는 해와, 저 멀리서 뜨는 달이, 너무도 두렵게 느껴졌다.

'...아니, 아닐 거야. 그냥 시골의 어린애가 가지고 있는 책일 뿐이야. 서책을 만든 사람이 그냥 장난삼아 그려놓은 거겠지...'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드는 무시무시한 생각들을 내몰아 버렸다.

'그런데, 왜 시골의 꼬마아이가 가지고 있는 서책에 담긴 지도에, 봉명성은 물론이고, 답천사막 중앙의 등선향까지... 정확히 그려진 거지...?'

뿌득...

책을 덮어도 해와 달에 그려진 희미한 동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 책을 만든 사람은 뭘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뭔가 이 책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걸까?

"저기... 이 책 내게 주지 않겠니?"

"네? 안 돼요! 그건 제 언니가 오면 같이 읽으려고 한 책이란 말예요!"

"흠..."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으려나...'

상당히 고집이 센 아이 같았다.

그때, 저 멀리서 해가 져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곧 밤이 되겠군.'

독물들이 몰려들 때였다.

"그나저나 얘야, 이제 들어가지 않겠니? 밤에 바깥에서 돌아다니면 위험하단다."

"음... 언니 기다려야 하는데..."

"오늘 마을에서 축제도 하잖니? 축제 보고 싶지 않니?"

"음..."

잠시 고민하던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선인님도 같이 가면 갈게요!"

"음...? 나는..."

"선인님 안 가면 저도 안 갈거에요!"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법술로 만들었던 흙 의자를 다시 무너뜨렸다.

"알겠다. 알겠어, 나도 가면 될 거 아니니."

직후, 나는 다시금 법결을 맺어 흙 인형을 하나 만들었다.

웅얼웅얼...

그리고, 음혼귀주문의 공법을 운용해, 작은 저주문을 하나 만들어 흙 인형에 불어넣었다.

"우와, 선인님. 그 인형은 뭔가요? 기분 나쁘게 생겼는데..."

"...저주인형이란다."

음혼귀주문에는 저주인형을 만들어, 저주문을 통해 원격으로 조작하는 법술이 들어있었다.

저주인형을 통해 저주를 내릴 수도 있었고, 이렇게 저주문 한두개를 불어넣어 행동을 입력시킬 수도 있었다.

108개의 저주문을 동시에 다뤘다는 음혼귀주문의 창시자는, 사람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 108개의 저주문을 곳곳에 불어넣은 다음 진짜 사람과 똑같이 조작했다고도 한다.

우웅!

저주문이 들어간 저주인형은 꿈틀거리며 어색하게 움직이더니, 나 대신 마을 어귀에 섰다.

"나 대신 저게 경계를 서줄 거란다."

뭔가가 마을의 경계를 넘으면 저주인형이 신호를 보내고, 나는 그걸 감지해서 멀리서 날려버리기만 해도 충분했다.

"우와... 역시 선인님은 신기하네요."

"하하, 이제 신기한 걸 봤으니 얼른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있자꾸나."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수결을 맺으며, 세 개의 흙 인형을 더 만들어, 저주문을 날려넣은 다음 마을의 사방위로 나누어 보내버렸다.

이걸로 방위는 문제 없다.

* * *

"어머, 서 수사도 축제에 참여하실 건가요?"

축제의 전통 복장이라는, 새하얀 백의의 궁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북향화가 아이와 함께 걸어오는 나를 보았다.

축제의 규칙에 따라, 그녀는 머리장식 역시 마을의 다른 여인들과 같이 수수한 비녀를 한 개만 꽂은 상태로 있었다.

"네, 이 아이 덕분에 말이죠."

"와아, 선녀님이시다!"

아이는 북향화에게 다가가 마을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외모는 그리 특출나지 않을지언정, 백의를 입고 단정하게 있으니 썩 아름다워 보였다.

"아, 선인님도 축제에 참여하시렵니까?"

촌장과 마을 장정 몇몇이 다가와 물었다.

"그렇소만... 혹시 뭐가 문제가 되오?"

"아! 아닙니다. 다만 혹시 산간지대의 축제들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알고 있소. 위뢰제, 경술제, 쌍선무. 세 개의 축제가 가장 유명하다지?"

"예. 이번 축제는 그 중에서도 쌍선무(雙扇舞)의 축제입니다. 해수(害獸)에게 사람들이 잡혀간 후에는 늘 쌍선무의 제를 벌여 심신을 위로합지요."

성제국 산간지방에는, 일 년에 한 번씩 번개가 산간지역 전체를 덮는 날에 벌이는 위뢰제,

그리고 경전과 학문의 나라인 성제국에서 주최하는, 경문 등을 읊는 서생들의 축제인 경술제.

그리고 산간지방에서 해수나 요괴에게 사람들이 잡혀가면 다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말라고 비는 쌍선무의 축제가 가장 유명했다.

"나도 알고 있소. 아, 그런데 쌍선무는 참여하려면 참여자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벌이는 축제라 했던가..."

생각해보니 급하게 참여하겠다고 하면 남는 옷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건 괜찮습니다. 선인님의 몸에 맞는 옷이야 체격 맞는 청년들에게 받아오면 되니..."

"음, 됐소. 그럴 바에야 그냥 참여를 안 하고 말지."

말이 받아오는 거지, 사실상 축제에서 빠지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때, 북향화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 건가요?"

"아, 그게 축제에 참여할 옷이 없어서 저는 그냥 역시 빠지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문제였나요? 촌장님께 전해주세요, 서 수사의 옷은 제가 만들겠다고요."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빨리 전해 드리세요."

나는 당황했으나 일단 촌장에게 그 말을 통역했고, 촌장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물러갔다.

"아니, 북 소저. 이제 곧 축제가 시작인데..."

"됐고, 팔 벌려 보세요."

그녀는 어느새 저물법기에서 줄자 비슷한 도구를 꺼내, 내 몸 곳곳을 재 보고는 다시 저물법기에서 뭔가를 꺼냈다.

퍼엉!

쿠웅!

그녀의 저물법기에서, 작은 모형 집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싶더니, 펑 소리와 함께 눈 앞에 떨어졌다.

"이, 이건..."

"제 휴대용 공방이에요.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얼른 만들어 올 테니까."

얼마 후, 그녀의 공방 안쪽에서 뭔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백색의 도복을 꺼내서 가지고 왔다.

"...혹시 그냥 그 공방 안에 원래 들어있던 옷은 아닙니까?"

나는 상식을 벗어난 제작 속도에 공방 안쪽을 슬쩍 보며 물었다.

"공방 안에 왜 이 지역 전통 복식이 들어있나요? 잔말 말고 입어 보시죠."

"허..."

'이게 기문법재인가...'

뭔가를 '만드는'것에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다는 이들.

일반적인 법기라면 몰라도, 일반 옷 한 벌 정도는 그냥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듯 했다.

나는 잠시 그 속도에 감탄하며, 옷을 받아 그녀의 공방 안쪽에서 갈아입었다.

내가 받은 것은 치렁치렁한 백색 장포였다. 신발까지 깔맞춤이라 내 몸은 제3자가 보기에 백로 같아 보였다.

"음, 서 수사한테도 꽤 어울리는걸요?"

"험, 고맙습니다. 북 소저도 꽤나 잘 어울리십니다."

"어머, 고마워요."

퍼엉!

그녀는 휴대용 공방을 다시 작게 만들어 저물법기에 집어넣었다.

나는 곧 열린다는 축제의 터로 갔다.

그곳에선 촌장이 한창 축제 준비를 감독하고 있었다.

"아, 선인님. 오셨군요. 하하, 잘 어울리십니다. 쌍선무의 제는 몇 번째 해 보시는지요?"

"아, 사실 이번이 처음이요. 그전까지는 서책으로만 본 축제인지라..."

촌장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마을에서 선인님께 최초의 쌍선무의 제를 보여드릴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나 역시 오랜 전통을 견식할 수 있어 영광이외다."

"성제국 산간 지역에 천육백년동안 내려져 전해지는 전통 깊은 축제이니, 즐겁게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작게 놀라며 되물었다.

"천육백년... 상당히 역사가 깊은 축제외다?"

"예, 전설로 전해지기를, 먼 옛날, 이 산간지역에 유명한 악귀를 두 신선들께서 처치하시고, 두 신선들께서 함께 추셨던 춤사위에서 시작된 것이 쌍선무의 제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신선님들이 악귀를 처치하고 춤사위를 추셨듯이, 요수나 해수에 사람들이 잡혀가면 두 신선들의 영험함을 빌어 다시는 이런 일이 있지 말라고 축제를 지내는 것이지요."

촌장은 문득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지네 요괴가 너무 가까이 살고 있어, 사람들이 잡혀가도 유해 수습은 꿈도 못 꾸고 축제를 지낼 엄두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치 전설의 두 신선과 같이, 선인 두 분이 나타나시어 저희 마을을 구해주시니, 이 노인네는 얼마나 감동인지 모르겠군요."

나는 촌장의 말을 들으며 축제의 현장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구경했다.

얼마 후, 해가 지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마을의 아낙들과 어른들이 북과 징, 집에 있는 비파를 퉁겼다.

음악은 어찌되었든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성격이 뒤섞인 축제답게, 너무 경박하지 않았고 은은한 선율이 있는 곡이었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으로 청년과 처녀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모두 똑같은 백의를 입고 있었으며, 마을 아낙이 청년과 처녀들에게 다가와 각각에게 종이부채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각각의 집에서 쓰던 부채들인지, 종이부채는 전부 다 형태가 달랐으며 하나같이 낡아 있었다.

심지어 갯수가 몇개 부족하자, 아예 그냥 종이를 접어 대강 손에 쥐는 경우도 있었다.

펄럭, 펄럭!

공터의 양쪽으로, 먼 옛날의 두 신선에 대한 그림을 담은 족자가 펼쳐졌다.

그리고 촌장이 공터 앞에서 죽은 이들에 대한 명복을 빌고, 두 신선의 영험함을 빌어 다시는 이런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는 축문을 외웠다.

그리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쌍선무(雙扇舞)는 말 그대로 부채를 쥔 남녀 한쌍이 모여 춤사위를 추는 것이었다.

특이한 점은 축제 초기엔 여자 쪽은 백색의 무명천으로 면사포마냥 얼굴을 가리고 있어, 서로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음, 북 소저는 의식영역을 아예 거뒀군.'

아무래도 의식영역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단박에 서로를 알아차릴 테니, 재미가 없어 그런 듯 싶었다.

나 역시 두 눈을 감고 의식영역을 무형검으로 바꾸었다.

공터에서 남녀들이 한 쌍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공터의 끝자락에서 짝을 잡지 않고 겉돌며, 무형검을 저 멀리 날렸다.

슈웅!

저주인형의 감지에 걸려, 마을로 진입하려던 독물 한 마리가 그대로 무형검에 맞고 터져 버렸다.

퍼엉, 퍼엉!

나는 대강대강 춤을 추며, 마을의 중심에서 마을의 방위에 힘을 더 썼다.

북향화가 며칠 후에 법기를 만들때까지는, 그 동안은 내가 마을을 지켜주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하는 게 맞을 터다.

'끝자락에서 보법 연습이나 하는 게 좋겠군.'

나는 쌍선무의 춤과 비슷하게 보법을 연습하며 겉을 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음?'

저 멀리, 반대방향에서 나와 같이 겉돌며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니, 당신은 또 왜 겉도는 겁니까?'

열정적으로 축제에 참여하겠다더니.

나는 어색하게 춤을 연습하며 이쪽으로 오는 북향화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도 어떻게 나를 알아본 건지 나를 쳐다보았다.

"서 수사?"

"역시 북 소저였군요. 여기서 왜 겉돌고 계시는 겁니까? 축제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어하시는 것 같더니."

"아, 그게... 춤이 어렵네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나저나, 무명천으로 앞이 안 보일 텐데 어떻게 절 알아본 겁니까?"

그녀는 나름 축제를 즐기기 위함인지, 의식영역을 범인들과 같이 머리 안쪽으로 숨겨두었다.

때문에 의식을 쓰지도 못할텐데, 그녀는 나를 바로 알아본 것이었다.

'무명천에 앞이 가려져 있어, 양옆과 상대의 발밖에 안 보일 텐데...'

"어떻게 알아보기는요, 서 수사가 입은 옷, 신발, 다 제가 만든 건데 왜 못 알아보나요?"

그녀는 도리어 내게 되물어왔다.

"그건 그렇고 서 수사는 어떻게 절 알아본 거죠? 서 수사야말로 제가 얼굴을 가리고 있고, 의식이 흝는 느낌도 없었는데?"

"아, 그거야..."

나는 간단하게 그녀와 춤의 합을 맞추기 시작하며 대답해 주었다.

"소저의 숨 소리, 심장 박동 소리, 체형, 냄새, 손의 모양 등은 전부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가렸어도 그런 것들은 안 변하죠."

내 말에, 그녀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아, 아니 도대체 그런 걸 왜 외우고 다니시는 거죠?"

"아, 그건 말입니다..."

나는 순간 '절정에 이를 때의 버릇입니다'라고 말을 하려다, 뭔가 어감이 이상하다는 걸 생각해냈다.

절정 고수나 절정경이라고 해도, 그녀는 아마 무림인의 경지는 별 관심도 없을 터였다.

'절정에 이를 때의 습관이라는 건 뭔가 변태같은데...'

그럼 그냥 평소의 버릇이라고 할까?

'저는 평소에 사람들의 숨소리, 심장소리, 체형, 냄새 등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라...'

어쩐지 이것도 굉장히 변태 같이 느껴졌다.

'제길,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걸 왜 걱정하는 거지.'

딱히 사람들뿐이 아닌 주변 환경에도 다 적용하고 다니는 감각이었기에 이상함을 못 느꼈었다.

'그래, 그냥 적당하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상적으로 보일만한 대답을 말했다.

"그냥, 소저가 유난히 기억에 남더군요."

'그래, 이 정도면 정상적으로 보이겠지.'

우리는 점차 춤사위의 합을 맞춰 가며 공터 끝자락에서 안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된 건가?'

나는 그녀를 흘끔 보았다.

북향화는 내 대답을 듣고 아무 말도 없었다.

'음? 어디 아픈건가?'

그리고 왠지 그녀의 목 위쪽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저, 괜찮으십니까?"

"..."

"소저?"

"그만 말 거세요. 서 도우. 안 그래도 춤사위가 어려운데 서 도우 때문에 헷갈리네요."

"하하, 미안하군요."

나와 그녀의 손에 들린 부채의 끝이 스쳤다.

동시에 내 무형검은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마을로 달려드는 독물들을 쫓아냈다.

나는 왼쪽으로 세 번의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이 움직이며 한 바퀴를 돌았고, 다시 한 번 서로의 부채 끝이 스쳤다.

어느덧 우리는 공터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고, 축제의 2막이 시작되었다.

사락, 사락, 사라락...

마을의 청년들이, 눈 앞에서 춤추던 상대의 얼굴에 씌인 무명천을 벗겼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을 따라 북향화의 얼굴에 씌인 무명천을 벗겨냈다.

"하아... 이제야 앞이 보이네요."

그녀는 무명천이 더웠던 건지,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금 서로의 부채 끝이 스쳤다.

우리는 다시금 오른쪽으로 세 번 보법을 밟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내 무형검 역시 마을을 회전하며 원을 그렸다.

몇 겹의 원이 그려지며, 겹쳐지고 수많은 변화와 함께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독물들을 뿌리쳤다.

마을의 중심에서는 수많은 횃불들과 북소리, 비파소리, 현 소리들이 울리며, 젊은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북 선자는 어째 앞을 보셔도 춤을 못 추니, 그냥 몸을 못 쓰시는 것 같습니다만."

"몸치라고 놀리시는 건가요? 서 도우도 옷을 제대로 못 입은 걸 봐선 남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서로의 부채 끝이 스쳤고, 우리는 이색적인 산간지방의 축제 속에서 서로를 놀리며 피식거렸다.

사람들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으며, 몇몇은 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몇몇은 두 신선이 그려진 족자를 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족자에는 창을 든 신선과, 곱사등이 신선이 악귀를 물리친 후.

두 신선이 무기를 내려놓고 부채를 쥔 채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얼굴에 천을 두른 신선과, 곱사등이 신선은 입만이 그려져 있었는데, 둘은 서로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연(12)

쌍선무의 제는 달이 중천에 뜨자 서서히 흥이 식었고, 점차 정리되었다.

"힘들었지만, 상당히 재밌었네요."

북향화는 싱긋 웃으며 땀을 닦았다.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군요."

나는 축제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이나 축제 때 밟았던 보법과 춤사위를 반복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뭘 하시는 건가요, 서 도우?"

"아, 어째 이 춤사위가..."

붕, 붕, 붕!

나는 몇 번이고 회전하며 춤사위에 숨겨진 동작을 이끌었냈다.

"창법(槍法) 같아서 말입니다."

파앙!

허공에 강기를 씌워 손에 잡고, 그대로 허공을 찌르자, 춤사위 속에 숨겨져 있던 창법이 내 손에 구현되었다.

'공방일체의 무결성을 추구하는 창법이군...'

창법의 무리(武理)가 자연스럽게 춤사위에 섞여있어 쌍선무를 추며 체득할 수 있었다.

어느덧 무공을 익힌지도 수백년을 넘었다.

일정 경지 이하의 무공들은 그 생성 원리와 무리를 간단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기에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몇 번 정도 창법을 펼치며, 창법을 완전히 복원해 보았다.

'상당히 훌륭한 창법이다. 김영훈이 직접 개량해준 24초의 단악검법에는 못 미치지만, 초창기 내게 만들어줬던 12초의 단악검법에는 충분히 비할만한 좋은 무공이야.'

나는 창법을 복원해 본 후, 나를 옆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는 북향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색성에서도 간혹 봤어요. 그게 '무공'인 건가요?"

"예, 범인들이 익히는 호신술입니다. 수도자들에게는 잡기 취급당하는 정도지만, 제대로만 익히면..."

우우웅!

나는 무형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경지까지 도달하는 게 가능하지요."

부웅!

무형검이 다시 사방으로 날아가며, 마을에 침입하려 드는 독물들을 격추시켰다.

"아하, 서 도우가 지닌 그 법술은, 그러니까 원래 무공이었던 거군요."

"음, 원래 무공이 아니라 지금도 무공이긴 합니다만..."

사실 이제는 몸을 움직이는 무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력이 강해진 점은 있었다.

"어쨌든..."

나는 무형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 북 선자가 법기를 만들고자 하시면, 참고하라고 알려드렸습니다."

"어머, 그동안은 계속 부정적인 쪽이시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보네요?"

"문득, 무인(武人)들도 쓸 수 있는 법기는 없을까, 만약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그러나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저는 무인들을 위한 법기가 아니라 서 도우에게 맞는 법기를 만들 예정인데."

"뭐, 일단 완성이 되면 추후에 한 번 보도록 하지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무인인 걸 알게 된 이상, 무인에게 맞는 법기가 완성될테니.'

"그럼 축제도 재밌었으니, 이제 일을 해 볼까요?"

쿠웅!

그녀는 다시 저물법기에서 휴대용 공방을 꺼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마을의 수호법기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까앙, 깡, 까앙!

공방의 안쪽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갔고, 그날을 기점으로.

나와 북향화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 * *

며칠 후.

쿵, 쿵, 쿵, 쿵!

북향화는 네 개의 장승을 꺼냈다.

"약 2년은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호법기입니다. 이 법기들을 마을의 사방에 설치하시면 독물들이 침입하지 못할 거에요."

"가, 감사합니다, 선인님!"

북향화가 만든 장승들은 마을의 사방에 설치되자, 빛을 뿜으며 마을을 뒤덮는 결계를 만들었다.

얼마 후, 결계가 빛나더니 투명하게 변했고, 장승들 역시 투명하게 빛나며 보이지 않게 변했다.

"혹시 수도가문들에서 마을에 와서 법기들을 발견하면 괜히 귀찮으니, 은신기능도 넣어놨죠."

"좋은 생각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다음 날 독물들이 결계 안으로 제대로 침입하지 못하는 걸 본 후에야 우리는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길이 없습니다. 선인님들..."

"아니외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꼬마아이가 들고 있는 설화집을 잠시 떠올렸으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몇년 후면 더 클 테니, 그때 다시 와서 설득하고 받아오는 게 좋겠지.'

"...우리도 축제때 잘 놀았소."

"영광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한 후, 그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법기를 타고 다시 날아올랐다.

성제국의 산간지역을 지나,

나와 북향화는 성제국의 중심 수도,

성제국 동쪽 연국과의 국경지역,

연국의 수도,

연국 곳곳의 문파들,

연국과 벽라국의 국경지역,

벽라국의 서부 등.

수많은 장소를 거쳐 유람하고, 독특한 문화를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연국은 현재 황조가 바뀐 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으나, 북향화는 그 특유의 분위기 역시도 나름 색다르게 받아들이며 좋아하는 듯 했다.

그렇게, 우리는 벽라국 동부.

천색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약 4개월만의 귀환이었다.

* * *

"...정말 미안하군."

천색성에는 청문중진과 청문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전송진이 작동했을 때엔 전송진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기에, 애초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었다.

그 후로 너희가 죽었거니 하며 명복을 빌어주고, 다시 서쪽으로 날아와 천색성으로 돌아왔다만..."

청문령이 청문중진의 말을 받아 말했다.

"다행히도 자네의 아버지인 북 수사가 자네의 생존사실을 확인해주어 기다리고 있었다네."

북중호는 목에 건 반지 목걸이를 들어보며 말했다.

"향화의 노리개와 이 반지는 연결되어 있기에, 향화가 살아있으면 이렇게 반지가 빛이 나지."

우웅!

반지는 한쪽 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자네도, 서 도우도 함께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걱정했다만 정말 안심이 되는군."

"흠... 어쨌든 가주인 내 실책으로 그런 위험에 빠졌으니, 추후에 배상금도 따로 내어주마."

북향화는 웃으며 청문령과 청문중진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세상의 끝에도 가 보고, 곳곳을 유람하면서 서 도우와도 더 친해질 수 있었는걸요? "

"저도 상관 없습니다. 다행히 제가 아껴두던 비술을 사용해 살아나올 수 있었으니까요. 살았으니 지난 일은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 역시 그의 사과를 받아주며 배상금은 거절했다.

하지만 청문중진은 오히려 더욱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 일은 따지지 않다니.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엄연히 잘못을 한 사실이 있으니, 정 배상을 받지 않겠다면, 추후에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는 한에서 한 번씩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죠."

"저 역시 가주님께서 정 그리 말씀하시면 거부친 않겠습니다."

나와 북향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문중진에게서 소원권을 받아내었다.

청문중진은 우리에게 다시금 사과를 한 후, 청문세가의 일 때문에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

"자, 그럼 다시 바로 진법 연구를 시작하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청문령은 북향화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우선은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한듯 하니, 연구는 사흘 후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네!"

그녀는 북중호와 얘기도 나누고, 짐을 풀고, 유람 중 만들었던 법기들, 그리고 성제국과 연국에서 산 법기들을 법기점에 쏟아두며 짐들을 풀었다.

나는 천색성의 성벽 위로 간단한 인지방해 법술을 걸고 올라가, 저 앞의 끝없는 사막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국의 성은 일종의 행정체계로 그 일대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벽라국의 성은 이름 그대로 성 한채만을 일컫는 것이었기에, 천색성 역시 이 성 한채만을 의미했다.

나는 이 작은 성 안쪽에서 느껴지는 복작복작한 의념들과, 눈 앞의 사막에서 느껴지는 광활한 영기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4개월간...'

솔직히, 재밌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왜 김영훈이 지난 생에 제대로 삶을 살아보라고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하군.'

북향화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번 원행에서 그녀와 친해지며, 그녀의 옆에 있을 때는 상당히 마음이 풀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나 자신을 꽉 억죄던 그 무언의 압박에서 순간만이라도 벗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조절했다.

'이 이상으로 나가면 안 된다.'

제자들과, 스승님과, 벗과, 무수한 김영훈들과 헤어지며.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가.

남녀사이에 연(戀)이 통한다면, 헤어질 때의 고통은 어떠하겠는가.

벗과 벗 사이에선 연정(戀情)을 가질 일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친애했던 이들일지라도, 그 고통을 가슴에 묻고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감정이 깊어져 연정을 가지게 되면, 나는 아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신이 붕괴해 버릴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지.'

지난 4개월간 즐거웠던 기억들을, 그저 그 상태로만 남겨놓자.

이 기억들이 더 위험한 감정의 선을 남지 않게 하자.

그리 결정했을 때였다.

휘이이이!

천색성의 노을이 보이고, 내 뒤로 익숙한 영기가 내려앉았다.

북중호였다.

그는 성벽의 끝으로 올라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래, 딸애와 유람은 즐거웠는가?"

"북 선자가 워낙 성정이 밝아 심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하,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그는 문득 의미심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서로 호칭이 바뀌었던데... 딸애가 자네를 '수사'가 아니라 '도우'로 부르더군."

"아..."

"거기에 자네도 호칭이 조금 바뀌었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북 선자에게 벗 이상의 감정은 없습니다. 거기다가, 북 선자는 어머님이 정해주신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것 말인가?"

북중호는 피식 웃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만나러 올 사람이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떻게 아는가? 그 자가 여인이면 의자매나 맺는 거지. 안 그런가?"

"하하, 그럼 절반의 확률로 혼약자이니, 어찌됐든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절반의 확률이라, 아예 그쪽에서 만나러 오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나 보군."

"예...?"

북중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딸애야 어미의 유언이니 저렇게 기다린다지만, 상대쪽이야 모르지 않나. 이쪽만큼 그 약속을 간절히 안 지킬 수도 있고."

"그렇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겠네."

해는 지평선 아래로 들어갔고,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딸애에게 운명의 상대 같은 사람은 없네."

"예?"

"내 약령환은 두 개의 노리개 법기와 연결되어 있지. 딸애가 가진 것 말이네. 법기의 주인이 살아있으면 약령환의 한쪽 면이 빛을 내는데, 보게나."

그가 목에 걸고 있던 반지 목걸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딸애가 열한살 때. 그애의 어미가 죽고 이, 삼년 후. 지금으로부터 십일년 전. 반지 반대편의 빛이 꺼졌네.

그 애의 운명의 상대? 그런 사람은 이제 없어. 죽었네. 객사했든, 급사했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이 바뀌면 바뀐 표시라도 나야 할진데, 그런 표시조차 없이 몇 년째 아무 빛도 안 들어온다는 소리는, 상대가 아무도 없는 객지에서 객사했을 확률이 높단 걸세."

"..."

"딸애도 이미 알고 있어. 애당초 노리개도 나머지 한쌍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진즉 알았을 걸세.

저 애는 그냥... 유언을 핑계로, 제 어머니와 함께했던 이 성을 떠나지 않으며 추억을 되새기는 것 뿐이라네."

북중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나름 좋다 자부하지. 그래서 저번에 벽문성 그 녀석이 그런 내기를 제안했어도 허락했던 거고."

난 벽문성이라는 축기기 후기지수를 떠올려 보았다.

'불순한 의념이 가득했었는데...'

하지만 나는 떠오른 생각을 집어삼키며 조용히 있기로 했다.

"내가 볼때, 자네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 같군. 아니, 솔직히 벽문성보다도 자네가 한참 더 나은 사람 같아 보여. 자네는 어떤가? 딸애에게 마음이 있지 않나?"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하군요. 저는 북 선자에게 벗 이외의 마음은 없습니다."

"흐음..."

잠시 나를 의미심정하게 본 북중호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지. 한번 지켜보겠네."

휘이이이!

그는 다시 성벽을 내려가 버렸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천색성 곳곳의 불이 켜져, 성 전체가 환해져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천색성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북향화가 납치되었다.

"이건..."

북중호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붉게 변한 약령환을 쥐고 나와 청문령을 찾아왔다.

"지금 향화가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소! 부디 도와주시오!"

"구조신호?"

"이건, 납치당했을 때만 쓰는 구조신호인데..."

북중호의 말에, 청문령의 안색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감히... 지금 청문세가와 함께 일하는 연기사를 납치했다는 건, 본가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뜻인가?"

청문령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 역시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북중호는 차차 사정을 설명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북향화가 방에 없었다.

방이 쓸데없이 어질러져 있었고, 어젯밤 처소의 금제가 교묘히 해체된 흔적이 있었으며, 지금 약령환으로 노리개를 통해 구조신호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누가 갑자기 납치한 거지?'

나는 우선 감각을 끌어올렸다.

"일단 북 소저의 방으로 데려다 주시지요."

요족의 지각을 끌어올린 상태로, 영기의 흐름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 * *

휘이이이!

사막 한 복판.

그곳에서 한 비검 형태의 비행법기가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비검 위에는 벽문성이 커다란 마대 자루를 어깨에 들쳐맨 채 모래바람을 떨치고 있었다.

"얌전히 계시지요, 향화 선자. 어차피 아무리 선자가 발버둥 치셔도, 선자는 지난 4개월간 준비한 제 계획에 따라 납치되셨습니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덕분에 준비시간이 많아져서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지요."

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마대자루 속에서 꿈틀거리는 북향화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제가 뿌리고 온 밀은향(謐隱香) 때문에, 특수한 추적용 요수가 아니면 저희를 추적할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그런 요수는 저희 벽씨세가에서 취급합니다.

제가 요수를 취급하는 장로님께 말해서 앞으로 칠주야간은 요수가 벽라국 어느 시장에도 나돌지 않을 것이니, 포기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꿈틀, 꿈틀..

그러나 여전히 마대자루 속에서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벽문성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남쪽을 바라보았다.

"우선 남쪽 바닷가에 준비해놓은 배를 통해 연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연국으로 가서 몇 개월 후에 다시 벽씨세가의 영지로 갈 예정이지요.

그 사이에 선자도 제 말을 잘 듣는 게 좋다는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선자가 지닌 자질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니, 선자에게도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하, 그만 꿈틀대시지요. 손발이 묶이고 법력이 제한당했는데, 아무리 선자라고 해도..."

투둑...

"으음...?"

촤아아악!

벽문성은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그가 메고 온 마대자루가 틑어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북향화가 그대로 빠져나가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무, 무슨...!"

우우웅!

북향화는 법술을 써 사막 위에 안전하게 착지했고, 벽문성을 노려보았다.

"벽 공자께서 이런 저열한 짓을 하실 줄은 몰랐군요."

"아, 아니..! 손발을 다 묶어놓고 법력을 봉인하는 부적도 붙여두었는데..."

북향화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 위에는 작은 딱정벌레 모양의 작은 괴뢰가 만들어져 있었다.

딱정벌레 괴뢰는 부적 조각으로 보이는 종잇조각을 막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괴군 선배님의 괴뢰들을 참고해서 만들었는데, 쓸만하더군요."

"아, 아니...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그걸 만들었다고? 왜 자꾸 꿈틀거리나 했더니만, 하,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것들로 그런 걸 만들어..?"

벽문성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다가도 웃음을 지었다.

"역시, 북 선자는 대단하시구려. 북 선자의 자질이 개화만 된다면 어떨지 더욱 궁금해지는군. 날 믿어주시오, 북 선자! 내게는 정말로 선자의 자질을 괴군과 같이 개화시킬 방안이 있소!"

"정중하게 제게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셨다면 들어드렸겠으나, 이런 무례는 너무 참기 힘들군요."

북향화는 싸늘한 눈초리로 벽문성을 쏘아보며, 귀에 차고 있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귀걸이가 빛을 내며, 한 개의 저물대를 뱉어냈다.

벽문성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하, 그게 저물법기였다니... 하지만 고작 법기 몇 점으론 연기기와 축기기 수도자 사이의 힘의 간극을 메울 수..."

그리고, 북향화가 저물대를 열자, 저물대 안쪽에서 수십, 수백 개의 비검 법기들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쿵, 쿵, 쿵쿵쿵쿵!

우우우웅!

북향화가 의식을 불어넣자, 수백개의 비검 법기들이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길...!"

벽문성의 안색이 썩어들어갔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선자를 거칠게 데려갈 수밖에 없겠구려!"

"헛소리 마시고...앗!"

그리고, 벽문성이 정순지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흠!"

벽문성과 북향화가 동시에 한쪽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

무색(無色)의 뭔가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래폭풍의 중심에는 한 인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벽문성이 안색을 찌푸렸다.

"제길, 누가 벌써 쫓아온 건가..? 어떻게 온 거지? 추적용 요수가 없으면 찾을 수가 없을텐데..."

그는 저물법기에서 비검 법기를 꺼내 쥐며, 모래폭풍의 중심에 있는 자에게 외쳤다.

"그래, 어디 와 봐라! 내가 바로 벽씨세가의 검도천재라 불렸던..."

부웅, 콰아아앙!

무색(無色)의 검광(劍光)이 벽문성의 옆으로 스쳐지나가며, 사막에 거대한 계곡을 만들고 저 너머의 모래언덕 하나를 폭발시켰다.

쿠구구구구!

땅이 진동하며, 사방팔방으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벽문성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겨, 결단기 선배님...?"

"아...!"

반대로 북향화는 검광의 주인을 알아보고,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그 순간.

"부, 북 선자! 도망가야 합니다!"

"뭣.. 이거 놓으세요!"

벽문성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북향화에게 접근해, 그녀를 들쳐업고 비검 법기에 올라탔다.

"자, 잠깐!"

"북 선자!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어떤 결단기 선배님이 노하신 겁니다! 도망쳐야 살 길이 보일 겁니다!"

"아니..."

파아아앗!

벽문성은 그대로 쏜살같이 하늘을 날아도망쳤다.

그에게 들쳐메인 북향화가 수결을 맺자, 사막 바닥에 꽂혀있던 수많은 비검 법기들이 날아올라 그들을 쫓아왔으나, 정순지력으로 법기를 구동시키는 벽문성을 제대로 쫓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그들을 쫓아왔던 검광의 주인.

서은현은 어이가 없단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저 놈이 여러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그는 바로 어젯밤 북중호의 얘기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북 수사, 사람 보는 눈이 자세한 거 같진 않군요. 저 놈이 마음에 들었었다니...'

서은현은 허공을 박차며, 무형검과 함께 벽문성을 쫓았다.

"히, 히익! 선배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 살려주십시오!"

벽문성은 모래폭풍 속에 잠긴 서은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서은현은 묵묵히 그를 쫓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사막에서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거기 서라...!"

쿠과과과광!

다시 한 번 서은현이 무형검을 내려쳤다.

다시금 사막에 계곡이 생겨났고, 벽문성은 더더욱 공포에 질려 전신의 정순지력을 비검 법기에 잔뜩 짜넣었다.

벽문성은 뒤쪽에서 쫓아오는 정체불명의 결단기 수도자가 벌인 참상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괴물, 괴물같은 결단기 수도자가 진노한 채 나를 따라오고 있다...! 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쿠구구구!

그리고, 벽문성은 그를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결단기 수사'가 힘을 모으는 것을 느꼈다.

'주, 죽는다...!'

투명한 뭔가가, 허공을 가르며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연(13)

모래 먼지가 비산한다.

나는 검을 휘둘렀다.

쿵, 쿵, 쿵!

전방의 세 개의 계곡이 생겨나고, 끝에 있던 바위 산맥 같아 보이는 것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녀석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나와 녀석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뒤를 쫓는 수백 개의 비검 중 하나를 잡았다.

우우웅!

그냥 허공에 씌워도 끔찍한 위력이며, 검에 씌우면 더욱더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이 무형검이었다.

법기에 무형검을 덧씌우자, 법기가 발동하며 영력을 내뿜었다.

파아아앗!

화 속성 비검인지, 비검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왔고, 무형검에 불길이 번지며 거대한 불의 검을 만들어 내었다.

부웅!

콰아아앙!

법기에 무형검을 씌워 휘두르자, 거대한 불의 참격이 날아갔고, 눈앞의 모래사막이 녹아 유리사막으로 변한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벽문성은 공포 때문에 법력 조절이 안 되는 것인지 나와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나는 다른 비검을 잡고 다시 휘둘렀다.

수 속성 비검.

촤아아아아!

전방의 사막이 늪지대로 변한다.

목 속성 비검, 진괘(震卦)에 대응해 뢰(雷) 속성을 머금은 비검을 휘두르자, 벼락이 사방팔방으로 떨어지며 사막 곳곳을 유리로 녹여 버렸다.

"크아아아악!"

벼락의 영향에 휘말려, 벽문성은 비명을 지르며 결국 비검의 조작에 실패하고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푸확!

녀석은 모래 언덕에 떨어져 버렸고, 놈의 몸에서 꿈틀거리다가 기어이 탈출한 북향화는 근처에 있던 자신의 법기들을 불러들여 안전하게 법기 위에 착지했다.

"음, 무사하셨군요."

"기다리고 계셨으면 이 녀석을 잡고 돌아갔을 텐데, 귀찮게 나오셨네요."

"흠, 아무리 법기가 많으셔도 축기기의 힘을 얕보면 안 됩니다."

나는 모래 언덕에서 막 빠져나온 녀석을 가리켰다.

스아아아아!

"음혼귀주(陰魂鬼呪)."

촤아아악!

몇 개의 저주문이 녀석에게 날아가, 그대로 놈의 머리에 박혔다.

"끄아아아아악!"

"제(制)!"

키이이잉!

저주문이 녀석의 상단전으로 파고들며, 정신 금제가 되었다.

녀석은 두 눈을 뒤집고 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수결을 맺으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흐끄하아악···! 아, 아악!"

"대답하면 고통이 잦아들 거다. 답해라."

"나, 나···."

녀석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재밌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만이··· 그녀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

"흠?"

"나만이··· 그녀를, 성장, 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납치한 거냐?"

"그···렇다···!"

어느덧 북향화도 곁으로 다가와 냉랭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당신이 저를 성장시킬 방법을 안다느니 하시던데. 그게 무슨 의미죠?"

"답해라."

우웅!

나는 저주문을 촉발시켰고, 벽문성은 눈을 까뒤집으며 대답했다.

"벼, 벽씨···세가에서, 얼마 전. 사막 가운데에서··· 그걸··· 찾았다···!"

"그거라니요?"

"조, 조씨··· 세가의··· 유적···."

나는 호기심이 들어 되물었다.

"조씨세가(早氏勢家)?"

그건 또 무슨 세가인가?

그때, 나는 옆에 있는 북향화의 얼굴이 심각해진 것을 보았다.

"조씨세가의··· 유적을 찾았다고요?"

"조씨세가가··· 유명한 세가입니까?"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고, 북향화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벽라국 동부에서 오래 지낸 분이 아니라면 모를 수 있겠죠. 조씨세가는 천 년 전 멸문한 세가로, 온갖 장막에 싸인 집안입니다.

천 년 전. 법기, 괴뢰, 부적, 단약 등, 온갖 제작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렸던 곳이지요. 물론, 일반 사람들에게 가장 설명하기 쉬운 위명은···."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나는 흠칫 놀랐다.

"괴군(怪君) 조연의 집안이라는 거죠."

'괴군의 집안···!'

나는 놀라며 벽문성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 벽라국 전체를 그 가문이 지배하며,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하던 가문이라 들었는데, 어느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했었지요.

일설로는 괴군이 광증이 도져 직접 멸문시켰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수조차 아닌데 제 가문을 제 손으로 멸문시켰을 리는 없어 신빙성 있는 소문은 아닙니다."

나는 괴군이 흐느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를 죽인 내 가문은 내 손으로 직접 몰살시켰다.

"···."

나는 잠시 침묵했고, 북향화는 정신을 못 차리는 벽문성의 심문을 이어 갔다.

"그래서, 조씨세가에서 뭘 발견하셨단 거죠?"

"조, 조씨세가의 유적···에서. 괴군 조연을 비롯해, 기문법재의 자질을 지닌, 자손들의 자질을 성장시킨, 특단의··· 비약을··· 제조하는, 법을··· 발견, 했다."

"특단의 비약? 그게 뭐죠?"

"크···으으윽!"

녀석은 저항하려는 듯했으나, 내가 정신 금제를 다시 자극하자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추, 축기단의 제련법에, 축기단에 쓰인 재료들의, 귀혼을 집어넣어, 법력뿐이 아닌, '감정' 역시 크게 증폭시키는, 비약이다. 기문법재, 는. '감정'이, 일정 이상으로, 요동치거나··· 혹은 오랜 세월의 노력으로, 경험을 축적하면··· '자질의 성장'이 가능한, 자질이···다. 칠문이, 육문으로. 사문이, 삼문으로. 이문이, 일문으로. 그리고, 북향화는, 사문법재, 중에서도, 노력이 어느 정도 쌓여··· 삼문법재에 도달할 가능성이 생긴, 기문법재, 이다!"

'그때 봤던, 반쯤 섞인 문양이 그런 것이었나···.'

나는 그녀에게서 드러났던, 서로 얽혀 있던 검은빛과 보랏빛 문양들을 기억했다.

"내, 내가, 도와만 주면. 삼문법재가 될 수 있는데. 내가, 나만이, 그녀를 성장시켜, 재능을 개화시킬 수 있는···."

"더 물어볼 게 있으십니까?"

"···없네요."

"알겠습니다."

나는 법결을 맺으며 녀석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하실 거죠?"

"원하신다면 백치로 만들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어쨌든 그자에게 받았던 호의도 있었으니, 그걸로 퉁치도록 하죠."

북향화는 벽문성을 냉랭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뿐이에요, 벽 공자. 이제 당신과 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니,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들었나? 저 말을 똑똑히 잘 기억해라."

우우웅!

나는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저주문을 약하게 촉발시켰다.

파아아앗!

"크아아아악!"

놈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아마 심문당했다는 기억이나 나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고, 마지막에 북향화가 한 말 정도만 기억에 남았으리라.

"이만 가지요."

"네."

북향화는 비검 법기들을 챙긴 후, 비행법기 위에 올라타 나와 다시 천색성으로 돌아갔다.

나는 사막 바람을 맞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비약의 약방문은 안 물으십니까? 어쨌든 선자에게 도움은 될 만한 약방문일 텐데."

"음···."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반적인 수사분들은 잘 모르시던데, 서 도우는 혹시 축기단의 주재료가 뭔지 아시나요?"

나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압니다만."

"아···! 그럼 말이 편해지겠네요. 저도 아버님이 알려 주셔서 알게 된 사실인데, 축기단에는, 인간의 생명력과 정혈이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약방문은 축기단을 기초로 한다 하니,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요."

"대부분의 수사들은 그냥 먹고, 알고도 먹는 수사들도 많은데 선자는 왜 안 드십니까?"

"혹시 서 도우는 축기단을 몇 알 드시고 축기에 드신 거죠?"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 먹었습니다만."

"아, 그럼 서 도우도 아시겠지만··· 그걸, 별로 먹고 싶진 않아서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리고, 생각을 해 봤는데."

북향화는 자신의 문양이 드러나는 곳의 피부를 매만지며 말했다.

"경험을 쌓고, 노력을 해서 자질을 성장시킬 수 있다면, 전 역시 그쪽으로 성장시키고 싶네요."

"그렇습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우리는 천색성에 돌아가며 자질에 대한 몇 가지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

천색성에 돌아가자 그녀는 북중호의 품에 안겼고, 북중호는 그제야 안색을 풀며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납치범이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북향화는 딱히 벽문성을 말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방의 금제나 호신법기의 수를 더 늘릴 뿐이었다.

그렇게, 북향화 납치 사건은 짧게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금 진법에 대한 회의가 재개되었다.

남은 부분은 이제 봉명성에서 구상한 외진법과 내진법, 그리고 진법 법기들간의 연계였다.

우리는 몇 달에 걸쳐 진법을 다시 짰다.

그리고, 진법의 완성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제, 남은 부분은 가장 구차하고 오래 걸리는 부분이네. 더 이상은 이제 머리 싸매고 궁리할 영역보다는, 시행착오를 거쳐 진법을 완성시키는 부분에 주안점을 둬야겠지."

이제 남은 것은 북향화가 진법 법기를 만들고, 진법 법기로 주변의 용맥을 끌어와 장생과를 대신해 다른 식물을 생장시켜 보고, 진법을 장생과에 맞게 미세 조종하는 과정이었다.

그 점은 용맥을 끌어모으는 점 때문에 시간이 다소 걸리는 일이었다.

진법 법기는 금세 완성되었다.

북향화는 일흔두 개의 진법 깃발과 서른여섯 개의 진법 원반을 만들었고, 나와 청문령은 진법 법기들을 받아 진법에 알맞게 북향화와 조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진법을 설치한 후 용맥이 모이기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

"일단 임상 시험을 할 장소가 필요한데···."

청문령의 말에, 진법 법기를 조정시켜 주던 북향화가 말했다.

"그럼 영맥이 진한 곳이면 되는 건가요?"

"그런 곳이 좋겠지. 어디 없는가?"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천색성 인근에 한 곳이 있긴 한데···."

"오, 그럼 그곳으로 가지."

"거기에다가 진법을 설치하려면, 우선 아버지의 허락을 받으셔야 해요."

"아, 북 수사의 사유지인가?"

북향화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어머니의 무덤이에요."

"···험험. 미안하군."

청문령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자네 어머니의 무덤에 진법 실험을 할 수는 없지. 그럼 조금 멀더라도 다른 곳을 찾아서···."

"아마 아버지는 허락하실 거에요."

북향화는 진법 깃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 진법의 목적은 영맥을 모아 풀과 나무들을 생장시키는 게 아닌가요? 어머님의 묘소는 영맥이 진해 조금 풀들이 자라지만, 그래도 사막인지라 휑하답니다. 진법의 힘으로 어머님의 묘소를 화사하게 만들어 주신다면, 아버님도 허락지 않으실 리는 없을 거예요. 제가 허락을 맡고 오죠."

그 말에 청문령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부탁하겠다."

북향화는 북중호를 찾아갔고, 얼마 후 북중호가 우리가 진법을 만들던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청문령에게 진법의 효과를 다시 한번 전해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좋아할 거요. 부탁드리오, 청문 수사."

"···정 그렇다면야."

그렇게, 진법의 임상 실험 장소는 북향화의 어머니, 북중호의 아내의 묘소로 정해졌다.

***

쪼르륵···.

위패에는 연(蓮)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북향화의 어머니, 북중호의 아내.

그녀의 이름은 연(蓮)이었다.

북중호는 연의 묘소에 술을 따라 준 후 잠시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연의 묘소는 천색성에서 조금 떨어진 사암 동굴 안쪽이었다.

'아니, 평범한 사암은 아닌가.'

영맥이 활발한 곳이라 그런지, 영력이 깃들어 있어 특별한 광석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북중호가 뚫어 놓은 것인지, 동굴의 천장은 하늘이 보이도록 뚫려 있어 빛이 들어왔다.

빛살 덕인지, 동굴 곳곳에는 이름 모를 꽃과 풀이 드문드문 올라와 있었다.

'이 위치는···.'

나는 연의 묘소의 위치를 보며, 옛 삶에서 북향화가 내게 처음으로 물을 주었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 동굴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녀는 그때도 이 동굴에 찾아가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진법을 설치해 주십시오, 청문 수사."

"알겠소."

나와 청문령은 진법 깃발과 원반을 가지고 묘소 주변, 그리고 묘소 바깥, 묘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 곳곳에다가 설치했다.

진법 깃발들이 주변의 영기와 영맥을 끌어들였고,

진법 원반들이 영맥을 끌어모았다.

곧이어 묘소의 중앙에 영력이 가득 모이며, 주변의 영성이 차오른다.

드문드문 나 있던 풀과 꽃들의 생기가 더욱 활발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와 청문령은 바깥의 진법을 전부 설치하고, 안으로 들어와 진법을 조정하였다.

"생전에 수행 자질조차 없던 범인(凡人) 아내였소. 사후에야 영기 속에서 보내니, 다행이구려."

북중호는 묘소를 보며 말했다.

청문령은 위패를 보며 그에게 물었다.

"연이라, 예쁜 이름이로구려. 아름다운 아내분이셨겠구려."

"···맞소. 내 아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소. 좋은 어머니였고."

"성은 어찌 되시오?"

북중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내는 성이 없소. 집안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아서 없었지."

그는 아내의 묘소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북향화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북중호의 등을 보고 있었다.

"공묘세가의 축기 위인이신 공묘천색 장로님. 아내는 장로님의 사생아였소."

뿌득···.

청문령의 이마에 한 줄기 힘줄이 돋아났다.

"그 발정난 놈이··· 또 사고를 쳤구려···."

"원망하진 않소. 그분은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시고, 또 아내는 영근도 타고나지 못한 범인··· 공묘세가에서 사생아 범인에게 성을 줄 이유는 없었겠지···."

"···친우의 실수니, 내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소."

"아니오, 오히려 공묘천색 장로님 덕에 천색성이 있었던 것이고, 아내와 내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던 거겠지···."

잠시 묘를 바라보던 그는 저물법기에서 작은 묘목 하나를 꺼냈다.

"연이가 좋아하던 목련(木蓮)이오. 목련을 피워 내 주시구려."

"알겠소."

청문령은 목련의 묘목을 받아, 묘소 뒤쪽에 심은 후 진법의 영맥을 목련과 연결했다.

"앞으로 5년간 영맥이 영기를 축적한 후, 5년 뒤 목련의 묘목을 급속 생장시킬 것이오. 추후에 다시 와서 영맥을 확인해 보면 되겠지."

그는 옅게 한숨을 쉬며 나와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다들 수고하셨소. 남은 것은 5년 동안 기다리며 진법을 관찰하고, 자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시행착오를 해 보는 것밖에 없지."

"5년이라···."

청문령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늘그막에 본가에서 편히 쉬어야 할 판에, 진법 시험이나 하고 있다니···."

"하하, 죄송할 따름이군요."

"아니오, 서 도우가 죄송할 게 뭐 있소. 우리 가주님이 시킨 건데 뭐···."

청문령은 등을 치며 나갔고, 나는 북씨 부녀를 잠시 본 후, 그들과 함께 묘소에서 나왔다.

그렇게, 5년이 지났다.

***

북향화의 공방 지하.

그곳의 밀실.

"힘내십시오, 북 선자."

"흐으읏!"

나는 북향화의 등에 손을 대고 토 속성 법력을 불어넣어 주며 그녀를 독려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와 청문 수사가 말한 구결들과 함께···."

파아아앗!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서 정광이 일더니, 그녀의 입에서 영기의 구름들이 뿜어졌다.

후우우―

토, 목, 금의 삼영근을 지닌 북향화는 황색, 청색, 백색의 영기의 구름을 내뱉었다가 다시 흡수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르릉!

그녀의 아랫배 쪽에서 우렛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그녀의 체내에서 정순지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약 5년.

5년의 시간 동안, 북향화는 아버지인 북중호가 가져다주는 영약들, 그리고 선각후통의 최고 권위자인 청문령, 그리고 나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기기 극성에 다다랐다.

그리고 내 조언에 따라 영근 개수에 맞게 기초공법을 추가로 익혀, 전부 극성에 도달하게 한 후.

그 힘과 내 도움을 바탕으로 축기기에 이른 것이었다.

"아···! 정순지력이다···."

그녀는 손 위로 정순지력을 피워 올리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정말 고마워요, 서 도우."

"아닙니다. 벗의 부탁이었으니 이 정도야."

"하하, 청문 선배님도 저랑은 이제 나름 벗인데. 청문 선배님은 안 도와주시겠다 했는데요?"

"그야··· 청문 수사는 청문세가의 일원이시니 청문세가가 아닌 선자의 축기를 돕는 건 가문에서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그녀는 잠시 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밀실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며 웃었다.

"뭐, 그런 걸로 치죠. 그럼 일단, 시간도 됐으니 묘소에 들려요."

"···그러지요."

나와 청문령, 그리고 북향화는 지난 5년 동안 더욱더 사이가 좋아졌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북향화는 축기기에 올라 300년의 수명을 부여받았고, 5년 동안 축적된 용맥의 영기가 진법을 발동시키며, 진법은 목련목을 급속하게 생장시켰다.

"아아···."

우리는 연의 묘소 안쪽에 핀, 보랏빛 목련화를 보며 탄성을 지었다.

특히 북중호는 흐드러지게 핀 목련화를 보며 울 듯한 표정이었다.

"···고맙소, 청문 수사. 서 수사. 그리고, 고맙다. 향화야."

"오히려 영맥이 있는 땅을 내어 주셔서 우리가 고맙소."

청문령은 북중호의 감사를 담담히 받았다.

5년 전과 달리, 묘소는 훨씬 농밀해진 대기의 영기를 받아 훨씬 안쪽의 풀과 잡초들이 많이 자라나 있었다.

드문드문 풀과 들꽃들이 널려있던 과거와 비하면, 묘소 안은 훨씬 생기가 있고 활발하게 느껴졌다.

"이미 펼친 진법 법기를 거둘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이 진법이 확실하다는 건 확인했으니, 또 법기를 만들면 될 뿐이고."

"맞습니다."

"···고맙소."

이제 청문령과 내가 만든 진법에 의해, 연의 묘소는 계속 이렇게 생기가 넘치는 상태로 변할 터였다.

북중호는 다시금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고, 우리는 그와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약간의 인사치레가 끝난 후.

청문령은 진법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나는 청문세가로 돌아가, 청문세가 근처에서 봉명성 1층과 최대한 비슷한 영맥과 장소를 만든 후, 그곳에서 5년을 더 기다려 진법을 시험해 볼 계획이네. 그렇게 시험해서 이번에도 진법이 제대로 작동하면, 이번에는 정말로 봉명성이 있는 곳으로 가 진법을 설치하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부탁드리지요."

어차피 남은 과정에는 나나 북향화의 도움은 필요가 없었다.

진법 법기도 완성이 되었고, 진법도 완전히 조정되었으며, 남은 것은 청문령의 임상 실험뿐.

"그러면 5년 후에 보도록 하지. 서 도우, 그리고··· 이제는 같은 경지가 되었으니 북 선자."

"네!"

"알겠습니다."

청문령은 진법 법기와 짐을 챙긴 후 다시 청문세가로 돌아갔다.

"서 도우는 안 가시나요?"

"어차피 진법도 더 조정할 건 없으니 저는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음, 그럼 청문 선배님만 없어진 거고 서 도우는 계속 남아 계신 거군요."

"그런 셈이지요."

"다른 곳에 가셔도 되는데, 왜 굳이 이곳에 남기로 하신 건가요?"

"그건···."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녀는 내 반응을 보곤 배시시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알겠어요. 그럼··· 어쨌든 최소한 남은 5년 동안은 천색성에 계시는 거죠?"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저희 어머니 앞에 새 묘목이나 심어 볼까요?"

"음? 갑자기 말입니까?"

"서 도우가 남는다 하셨으니, 그를 기념해서요."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이끌려, 시장에 가서 얼떨결에 묘목을 한 그루 샀다.

"서 도우는 어떤 묘목을 사셨나요?"

"아··· 모과나무입니다."

나는 모과나무 묘목을 쓰다듬었다.

옛 삶의 스승님은 나를 보며 늘 모과나무를 닮았다 했으니, 그를 떠올려 산 묘목이었다.

우리는 각자 묘목을 품에 안고 연의 묘소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서 도우는 제 묘목은 뭔지 안 물어보시나요?"

"아, 죄송합니다."

"아하하, 괜찮아요. 제 묘목은···."

그녀는 꽃을 피운 목련화를 매만지며 말했다.

"백목련(白木蓮)이에요."

"백목련···."

"어머니가 목련을 좋아하셨듯이, 전 백목련을 좋아해요."

나는 어쩐지, 백의를 즐겨 입는 그녀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각자 모과 묘목과 백목련 묘목을 목련꽃의 양옆에 심었다.

진법의 대상은 목련이었는지라, 우리가 심은 묘목은 급속한 생장은 않겠지만, 그 옆에서 천천히 자연스레 커 갈 터였다.

"그나저나 북 선자, 왜 갑자기 묘목을 심자고 하신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내게 말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그 이유를 먼저 말하지는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다시 돌아갈까요?"

"···그러지요."

우리는 천색성으로 돌아왔다.

휘이이이―

그날 저녁.

나는 사막 바람을 맞으며, 천색성의 성벽 위에 걸터앉았다.

"사색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친구로군."

북중호가 또다시 내 뒤로 날아오며 말을 걸었다.

어쩐지, 5년 전 그날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북중호의 질문도 비슷했다.

"어떤가, 최근 딸애와 사이가 가까워졌던데."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내 딸에게 벗 이상의 감정이 없나?"

5년전 그날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대답은 달라졌다.

"···저는, 선자를 좋아하고 있군요."

"하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그는 껄껄 웃으며 내 옆에 걸터앉았다.

"사실 5년 전에 물었을 때도 자네는 내 딸을 좋아하고 있었어."

"···."

"그저 그때는 자네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연정이 작았다면, 이제는 숨기지도 못할 정도로 연심이 불어난 거겠지. 안 그런가?"

그는 정확하게 내 속내를 맞추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린 손을 치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 연심(戀心)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5년 전에는 그저 내 속을 숨겼을 뿐이지만, 이제는 너무 명백해졌다.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더는 못 속일 정도로.

"그래서, 딸한테 고백은 언제 할 건가? 내가 볼 때 자네가 고백하면 딸도 내치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지만.

"어르신···."

이게, 끝이었다.

"저는, 북 선자에게 고백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 이상은 정말로 위험하다.

이 사랑은 그저 한때 가졌던 좋은 추억으로만 남겨야 한다.

좋은 추억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영원히 시간의 너머로 사라졌을 때.

나는 정말로 미쳐 버리게 될 테니까.

"흐음···."

내 대답에, 북중호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자네, 남녀를 만나면 안 되는 특정한 종교가 있는가?"

"없습니다."

"혹시 기벽을 가지고 있어 남색을 즐기나?"

"···아닙니다."

"혹시 특수한 공법을 익혀 아랫도리를 못 쓴다든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왜?"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보며 물었다.

"도대체 왜 내 딸과 안 맺어지려고 그렇게, 5년 전부터 노력하는 겐가?"

"···."

"자네는 지금 자기모순에 빠져 있어. 자네가 정말로 확고하게 내 딸이 싫었으면, 이번에 청문 수사가 갈 때 같이 천색성을 떠났어야 했네. 하지만 자네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며 천색성을 떠나지 않았지. 그런데도 굳이 딸애와 맺어지지 않겠다고?"

그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해 얄팍한 거짓말을 했다.

"···제가 수련하는 특이한 의식공법이 있습니다."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일정법이라는 의식공법이지요. 하나의 감정에 집중해서 특수한 법술을 연화시키는 공법입니다만, 저는 지금 북 선자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이용해 제 감정을 북돋아 공법을 더 빠르게 수련하는 중이지요. 이번에 성에 남은 이유도 그저 공법을 더 빠르게 수련하기 위해서···."

"자네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군."

"일정법을 수련하는 건 사실입니다만."

"아니, 아니야."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감정을 이용하는 공법을 수련한다고 하지 않았나? 내 딸과 맺어진다면 오히려 더더욱 감정이 깊어질 걸 알면서 왜 그러지 않았지?"

"···."

"오히려 그게 자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나?"

그랬다.

나는 일정법을 수련하며 오행혈주번을 연화시키고 있었으나, 일정법에 사용된 감정은 연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정심(平靜心).

북향화를 생각할 때마다 두근거리는 내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일부러 나는 평정심의 감정을 일정법을 통해 수련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정법의 수련이 불가능할 정도로 연심이 평정심보다 커져, 평정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흠···."

나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고, 북중호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알겠네.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결정하는 게 좋을 거야. 일평생을 어머니의 유언을 핑계로 성 안에 자신을 가둔 아이일세.

그 아이의 운명은 내가 보건대 자네이고, 자네가 없다면 그 아이는 운명의 짝을 만나지 못하고 또다시 스스로를 더욱더 좁은 곳에 가두려 하겠지. 빠르게 결정해 주기를 바라겠네."

북중호는 성벽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눈을 감았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서쪽에서, 내 평정심을 뒤흔들 또 다른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잘 지냈냐, 은현아?"

김영훈이었다.

"한 판 붙자."

파아아앗!

그가 황금빛에 물든 도신을 꺼내 들었다.

연(14)

'이건 무슨...!'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김영훈은 내게 도신을 뻗어왔다.

부웅!

콰아앙!

황금빛 도광이 내 몸을 후려쳤다.

축기기에 이른 몸인지라, 늘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과 다름없는 몸이었기에 피륙의 상처는 없었고, 그저 내 몸이 성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천색성 바깥의 답천사막.

주변에서 보는 눈이 없어지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무형검을 꺼냈다.

무형검의 기세를 느낀 김영훈의 안색이 달라졌으나, 그는 웃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부웅!

콰아앙!

황금빛 도가 내 무형검과 맞부딪혔다.

빠르다.

그리고 강력하다.

그리고.

"김 형."

"음?"

그것뿐이었다.

"아직... 월도입천에 이르지 못하셨군요."

콰아앙!

나는 능광도를 그대로 떨쳐버린 후, 김영훈을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그는 황금빛 도신으로 맞받아치려는 듯 했으나, 일순간 무형검이 더욱 빠르게 가속하며 그의 속도를 넘어버렸다.

쩌어엉!

김영훈은 가까스로 찰나의 틈을 타 내 무형검을 막아섰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 이상의 뭔가를 내게 보여주진 못했다.

'능광도의 속도가 무형검에 따라잡힌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능광도는 극속(極速)의 화신(化身)이었다.

말 그대로 시간의 찰나를 지배하는 무공.

그것이 능광도였다.

궤적의 자유를 지배하는 무형검에게 속도로 따라잡힐 정도로 한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김영훈의 경지를 어림짐작했다.

'등봉조극의 극한. 극한을 조금 벗어났나?'

그 정도가 다인 듯했다.

김영훈은 허탈하게 웃으며 황금빛 도광을 없애버렸다.

'역시...'

황금빛의 도신이 그의 의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저건 그냥, 황금빛의 도강(刀罡)일 뿐이었다.

"맞다. 월도입천에는 이르지 못했다."

"등봉조극의 극한이로군요."

솔직히 저 정도만 해도 정신 나간 속도였다.

'내가 회귀햇수로 지금 7년이 조금 덜 됐나?'

7년만에, 저 인간은 지금 등봉조극을 뚫고 그 극한에서 일부 벗어나기까지 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오기조원에 도달하는 데에만 10년을 썼던 사람이...'

월도입천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까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 무리(武理)를 알고 있으니만큼, 그를 목표로 더욱 더 미친듯이 수련해 경지에 이르는 기간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만 되셔도 정신 나간 수준의 성장속도입니다. 대단하시군요."

지난 생의 김영훈만 해도 당장 월도입천에 오르기까지 몇십 년을 소모했다.

오히려 등봉조극 수준의 무공으로 월도입천의 경지를 미리 '흉내'라도 내는 김영훈의 재능이 정신 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굴 놀리는 거냐? 반년도 안 돼서 월도입천이니 축기기니 전부 도달한 놈이..."

"..."

"그리고 너도 봤겠지만, 방금 보여준 황금빛 강기는 그냥, 네가 보여준 월도입천의 경지를 흉내내본 거였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황금빛 강기를 일으켰다.

우우웅!

황금빛 강기 안쪽으로, 강환(罡丸) 아홉 개분의 힘이 느껴졌다.

강환을 의식에 녹여 자연스럽게 합일시킨 것이 아닌, 억지로 강환을 으깨서 합일시킨 후 하나의 강기 속에서 제어하며 휘두르는 방식.

압도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유지시간도 짧다.

거기에 강환을 쪼갤 때 티끌만큼의 실수라도 있다면 즉시 전신 경맥에 충격이 와서 폐인이 될 위험이 동반된 무공.

"위험한 무공입니다. 그건 계속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보이는군요."

"문제없다. 미세한 흐름 하나하나 전부 세세하게 알아채고 조절할 능력이 있다면, 절대 폐인이 될 일이 없으니까."

나는 침묵하며 그의 황금빛 강기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은 그 미세한 흐름을 전부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만...'

말 그대로 김영훈의 압도적인 재능을 앞세워야만 사용이 가능한, 그만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쨌든, 순간적으로 월도입천의 경지를 따라잡게 해 준다 할지라도, 너무 비효율적일 뿐더러 진짜 강자 앞에서는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방식입니다.

당장 저만 해도 그걸 사용하는 김 형을, 축기기의 정순지력과 의식의 출력을 사용치 않고 순수한 무형검만으로도 10초 내에 제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속도의 화신이 된 능광도라면 몰라도, 지금 궤적의 화신인 무형검의 앞에서조차 속도로 제압당하는 저 강기공은 그저 쓸모없는 비효율의 극치일 뿐이었다.

그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나였기에 감히 말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건...'

애당초 김영훈이 등봉조극의 극한에서 무수히 반복했던 시행착오 중 하나였었다.

이번 삶의 김영훈에겐 삼류에서 월도입천에 이르는 무수한 무학에서, 지금까지의 김영훈이 거쳐왔던 시행착오를 알려주지 않았었다.

'파 봤자 아무것도 안 나오는 길이다.'

나는 살짝 시무룩해져 있는 김영훈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 먼 벽라국 동쪽 끝자락까지 찾아오셨다는 건..."

"그래. 네 말마따나 지금 이상한 길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너와 대련하며 등봉조극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널 찾아왔다."

"훌륭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월도입천에 이른지도 어느덧 200년이 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에게 길을 설명해 주는 것은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점차 빨라지고 있다.

생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목표가 제시될때마다.

김영훈의 재능은 무한한 샘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는듯, 그 목표에 맞춰 더욱 더 치솟았다.

동시에 그의 성장속도 역시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만약, 만에 하나 이번 생애에 장생과를 생장시키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남은 50여년 안에 월도입천 너머의 경지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구나...'

이번 생 안에, 새로운 경지가 개척될 것이다!

"자 그럼 김 형."

"음?"

"저한테 먼저 대련을 거신 건, 방금 보여준 강기공들 말고도 뭔가 다른 것들 역시 자신이 있으셨단 뜻이겠지요?"

"어... 아니, 방금 보여준 것도 오랜 시간 고심해서 만든 회심의 한 수였는데..."

나는 당황하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럼 당장 새로운 걸 짜내셔야 할 겁니다."

쿠구구구!

오랜만에 김영훈을 봤는데, 고작 이걸로 끝나서야 되겠는가?

무(武)를 제대로 겨루지 못해, 솔직히 말하자면 손이 근질근질 거리던 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정순지력도 안 쓰고, 의식도 김 형과 똑같이 맞춰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무형검도 안 꺼내지요. 뭐 솔직히 꺼내나 안 꺼내나 궤적의 변화를 이미 장악했기 때문에 차이도 없겠지만..."

"어, 어..."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수 년만에 나타난, 무를 겨룰 수 있을 눈앞의 상대에게 다가갔다.

이제야 예전, 내가 오기조원, 등봉조극 초입일 때도 신나서 나를 두들겨 패던 김영훈의 심정이 이해될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 한참을 외로이 지낸 이에겐, 정상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관계없이 놀아보고 싶은 것이었다.

상대가 나보다 경지가 얼마나 낮은지는 관계가 없었다.

그저, 그 상대 외에는 정상은 커녕 산의 입구조차 못 찾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 말이었다.

나는 그와 수준을 맞춰, 아홉 개의 강환을 띄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 * *

"이 분은 제 붕우(朋友)로서, 김영훈이라고 합니다, 북 선자. 김 형, 이 분은 북 선자로, 최근 저와 함께 어떤 진법을 제작하신 북향화 선자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네, 반갑습니다... 그보다..."

북향화는 김영훈의 위아래를 쳐다보며 작게 안쓰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비적(匪賊)을 만나신 건가요? 벽라국 동부는 성과 성 사이가 조금 거리가 있어 그 사이에서 도적떼를 흔히 만나곤 한답니다."

"..."

"잠시 기다리세요, 옷이라도 가져다드릴게요."

그녀는 거지꼴이 된 김영훈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고는 법기점 안쪽으로 옷을 가지러 갔다.

"...저번에 그 소저로군."

"네."

"...날 이 꼴로 만들어놓고 소개하니 기분 좋더냐?"

그는 내게 얻어맞아 살짝 부어오른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흠흠, 치료도 해 드렸잖습니까."

"회사에서 쌓인 게 많았냐?"

"...그렇다고 해 두지요."

솔직히 이제와선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은 기억도 안 났지만, 나는 김영훈의 시선을 피하며 대강 그렇게 넘겼다.

"후우, 그나저나 네가 소저 친구도 벌써 만들었을줄은 몰랐군. 연애는 잘 되가는 모양이구나."

김영훈은 나와 북향화 사이에 있었던 의념을 읽었는지, 예리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딱히 연애는 아닙니다만."

"연애가 아니야?"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법기점 바깥을 가리켰다.

법기점 바깥에선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한쌍이 걸어가고 있었다.

"저 둘의 의념은 보이지?"

"...보입니다만."

"그리고 네가 나보다 높은 경지인 이상, 뇌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한 네 자신과 그 소저의 의념도 봤을 테고."

"..."

"방금 지나간 연인들보다도 훨씬 풍부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둘이, 연애하는 중이 아니라고?"

'젠장...'

동급의 무인이란 건, 즐겁기도 한 사이였지만 서로에게 속내를 숨길 수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냥... 아닙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냐. 눈이 있으면 보이잖느냐. 너희가 서로한테 어떤 의념을 뿜고 있는지."

"..."

나는 김영훈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회사에서도 그러더니,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한거냐, 너는?"

"회사에서는 또 무슨 말입니까?"

거의 700년 전 일인데, 솔직히 기억도 안 났다.

의식의 크기가 커진만큼 기억력과 사고력도 높아는 졌지만, 그럼에도 700년은 가벼운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 회사에서는 진짜 몰랐겠지. 그때는 의념도 못 읽었을 테니까, 이 둔한 놈."

"예?"

"너 말고 우리 부서 사람들 다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놈아."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라리 무공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김영훈이 하는 말을 따라갈 수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김영훈은 나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그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

나는 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아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얼마 후, 북향화가 김영훈이 입을 새 옷을 가지고 나왔을 때도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김영훈이 천색성에 오고, 이틀이 지났다.

나는 북향화의 법기 재료 채집을 도와주며, 김영훈이 내게 했던 말들을 들려주었다.

"...해서, 갑자기 내 고향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지 뭡니까. 북 선자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푸흐흐..."

내 말을 듣자 북향화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서 도우.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제가 이상한 겁니까?"

"아뇨, 이상할 것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금 둔하시나 보네요."

"...예전부터 그런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피식피식 웃더니 말했다.

"서 도우의 고향사람 중에서, 서 도우를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단 뜻이잖아요!"

"음?"

나는 상상외의 대답에 흠칫 놀랐다.

'우리 부서 사람 중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우리 부서는 별로 여자 사원이 없었다.

8명 정도가 여자 사원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셨고, 그 중 셋은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남자친구가 없는 사람 중에 날 좋아할 만한 사람이면...'

강민희 대리, 오혜서 대리, 김연 주임, 신 주임 정도였다.

'신 주임은 애초에 나랑 마주칠 일도 거의 없던 사람이니까 아닐테고... 같이 왔던 동료인가? 그럼 누구지?'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내 그런 모습을 본 북향화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신경쓰이나 보네요, 서 도우?"

"흠...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신경쓰이진 않습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잡념들을 털어버렸다.

사실, 이제는 김영훈 말고는 나머지 동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났다.

700년이다.

무려 700년동안 제대로 말도 못 나눠봤다.

나를 좋아한 사람이 있었든, 내가 좋아한 사람이 있었든, 서로 싫어했던 사람이 있었든,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었든, 데면데면한 사람이 있었든,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있었든.

'누가 누군지, 기억도 감정도 다 풍화돼서 잘 모르겠어.'

"지금 제 옆에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별 감흥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제 곁에 있는 이들이 더욱 더 평소에 많이 떠오르고, 더욱 더 소중하지요."

"아..."

"음?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그녀의 손에서 법기 재료들을 받아 내가 들었다.

많이 더운 듯 싶었다.

우리는 어느새 백색법련의 공방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서 도우. 한 가지 보여드릴 게 있는데..."

북향화는 내게서 법기 재료들을 받아든 후, 공방 안쪽으로 들어가 정리하고는, 나를 공방 안쪽으로 불렀다.

"한번 와보세요. 아마 재밌으실 거에요."

"뭡니까?"

나는 그녀를 따라 공방에 들어갔다.

공방 안쪽 중심에는, 새하얀 천을 씌워놓은 뭔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그 윤곽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그건 설마..."

"네, 맞아요."

화악!

그녀가 천을 치우자, 그 안쪽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 괴뢰.

봉명성에서 가져온, 괴군의 괴뢰였다.

"괴군의 괴뢰를 복원해냈단 말입니까...?"

"회로의 중심부는 아직 복원을 못했어요. 너무 정교한 부분이었던지라. 하지만 나머지 회로는 전부 복원에 성공해서, 영력을 불어넣어서 직접 조종하면 움직일 수는 있죠. 중심회로가 망가진지라 전력은 못내지만, 6할 수준의 힘은 낼 수 있죠."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실래요?"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괴군의 괴뢰.

원본의 6할 전력을 내는 괴뢰라면, 어느 정도 수준일 터인가?

나와 그녀는 괴뢰를 가지고 사막 바깥으로 나갔다.

"그럼 갈게요!"

부우우웅!

그녀가 괴뢰의 몸에 난 홈에다가 영석을 끼워넣고, 의식을 불어넣자 벌 괴뢰는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올랐다.

'엄청나군...'

나는 괴뢰 안쪽에서 소용돌이치는 빼곡한 회로들을 보며 작게 경탄을 터트렸다.

저 정도라면, 그냥 살아있는 생물의 혈관보다도 더욱 더 빼곡한 게 아닌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그녀가 괴뢰에 의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파앙!

"....!"

나는 흠칫 놀라며 강환을 띄워 눈 앞에 띄웠다.

콰아앙!

괴뢰의 엉덩이에서 나온 정순지력이, 뾰족한 침 형태로 분사되며 눈 앞의 강환에 부딪히고 있었다.

'무슨 속도가...'

다음 순간 벌 괴뢰는 다시 움직이며 내 뒤쪽으로 날아와 엉덩이의 침을 내밀었다.

콰드드득!

나는 정순지력으로 손을 감싼 후 벌 괴뢰의 침을 움켜잡았다.

'이 속도는...'

강환 5개를 사용한 김영훈급의 속도였다.

거기에 괴뢰가 사용하는 정순지력을 이용한 침 형태의 이 공격.

'축기기급 공격이다...'

심지어 이게 6할 위력이란다.

그 말은 즉슨, 괴뢰의 힘이 10할 전부 발동된다면, 이 벌 괴뢰는 축기 후기급의 강함을 지닌 괴뢰라는 소리였다.

오싹!

나는 벌 괴뢰를 통해 괴군의 힘을 간접적으로 실감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봉명성에 쓰레기처럼 버려져있는, 이 벌 괴뢰와 같은 잔해들이 얼마나 많았었더라?

봉명성뿐이 아닌 섭명함의 안쪽에도 이와 같은 잔해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괴뢰가 힘을 전부 발휘한다면, 그 속력은 등봉조극의 극한에서 9개의 강환을 사용하는 김영훈과 같아질 터...'

괴뢰 따위로 이런 속력을 내는 게 가능하단 건가?

파츳!

내가 상념에 잠겨있을 때, 벌 괴뢰는 침 형태의 정순지력을 잘라버리고 내게서 떨어져, 다시금 엉덩이로 침 형태의 정순지력을 분사했다.

피잇!

벌 괴뢰가 내게 다시 달려든다.

콰앙!

나는 벌 괴뢰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땅에 내다꽂았다.

"대단하군요. 괴군도, 괴군의 괴뢰를 복원해낸 북 선자도..."

"뭘요, 전투형 괴뢰도 아니고 망가진 부분도 없어서 크게 어렵진 않았는걸요."

"...예?"

등봉조극 경지의 속도로 움직이며, 찰나간에 상대에게 축기기급 일격을 박아넣을 수 있는 이 괴뢰가, 전투형이 아니라고?

"이게, 전투형이 아니라고요?"

"네. 침 외에는 특출난 공격기능도 없고, 속도만 빠르다 뿐이지 별 기이한 장치는 없잖아요? 괴뢰에 담긴 기능들만 봐도 알 수 있죠."

북향화는 내게 다가와 괴뢰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이 향한 부위에는 기이한 진법이 새겨져 있었는데, 진법에서는 진한 공간파동이 흘러나왔다.

"이건 물건을 운송할 때에 쓰이는 운송용 괴뢰에요. 제가 마침 공방 안쪽에 공간좌표를 찍어놨으니... 보시죠."

그녀가 괴뢰의 등 부분을 만지작거리자, 괴뢰가 웅웅거리며 자세를 바꿨다.

나를 향해 침을 내밀던 자세에서, 얌전하게 편안한 자세를 하고 앞발들을 내민 자세였다.

북향화는 내민 앞발 위로 유리팔찌를 올렸고, 괴뢰는 그걸 받아들어 품에 안았다.

"몸에 새겨진 공간 법진과, 특유의 속력을 이용해서..."

파아앗!

그녀가 괴뢰의 등을 조작하며 뭔가 명령을 입력하자, 벌 괴뢰는 앞쪽으로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가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저런 식으로 설정된 좌표로 공간이동을 해, 물건을 운송하는 운송용 괴뢰더군요."

"..."

"지금 제 공방에 도착해서 팔찌를 내려놨네요. 그리고 다시..."

그녀는 품에서 작은 진법 원반을 꺼냈다.

진법 원반에는 무수한 회로가 새겨져, 작은 공간 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파아아앗!

다음 순간, 공간 법진이 빛나더니, 벌 괴뢰가 눈 앞에 나타났다.

벌 괴뢰의 앞발 위에는 그녀의 공방에 있던 망치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짐을 이송하던 괴뢰였던 듯 싶어요. 괴군 조연 선배의 괴뢰성채(傀儡城砦)에는 이런 괴뢰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더군요."

"..."

이게 전투용 괴뢰도 아니고, 고작해야 짐 나르는 괴뢰라니.

나는 간접적으로 괴군의 저력을 느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술법과 무공 둘 다 천인기에 이르더라도, 괴군에게 비할 수나 있을련지 모르겠군.'

나는 눈 앞의 괴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문득, 나는 괴뢰를 보며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이 괴뢰...'

"북 선자, 이 괴뢰의 중심회로는 복원을 못 했다고 하셨습니까?"

"네. 회로들이 뭘 뜻하는지 이해도 안 되더라고요."

"...혹시, 저도 한번 이 괴뢰를 조종해 보면 안 되겠습니까?"

"네? 서 도우가요? 서 도우는 비검 법기 외에 다른 법기들은 잘 못 다루시지 않나요?"

"왠지, 이 괴뢰는 제가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흠..."

잠시 못 미더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내 앞으로 괴뢰를 가져다 놓고, 조작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일단 이 회로에 의식을 불어넣으시고 움직여 보시죠."

"알겠습니다."

나는 벌 괴뢰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벌 괴뢰 안쪽에서 흐르는 무수한 회로들이 내 의식을 빨아들인다.

"일단 회로는 총 일곱가지 회로가 있는데, 그 중에서 순차적으로 의식을 불어넣으셔야 할 회로가..."

옆에서 북향화가 뭐라뭐라 설명을 하는 듯 했지만, 나는 그 회로들에게서 나는 느낌에 집중했다.

'역시, 이건...'

내 예상이 맞았다.

우우웅!

나는 벌 괴뢰의 안쪽에서, 의식을 분리했다.

의식은 곧 의념의 집합.

그리고 의념은 무수한 색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색상 중에는, 인간의 감정의 뼈대가 되는 칠정(七情)의 색상이 존재했다.

나는 괴뢰의 안쪽에 불어넣은 의식을 일곱 개의 색상으로 분리했다.

우우웅!

일곱 개의 거대한 회로로, 일곱 개의 색상이 분리되어 흡수되었다.

동시에, 나는 벌 괴뢰와 완전히 일체(一體)된 느낌을 받았고, 벌 괴뢰를 어찌 조작해야 하는지가 한 손에 잡히는 듯 했다.

"북 선자, 괴뢰를 장악했습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의식을 주입해주시면..예?"

"보시지요."

부우우웅!

내 의지에 따라, 벌 괴뢰는 자연스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하늘을 빙글 돌았다.

북향화가 조종했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어, 어떻게..."

그녀가 조종하던 벌 괴뢰는 일직선으로 딱딱한 움직임밖에 내지 못했으나, 내가 조종하자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괴군도 월도입천의 시야를 가졌다면, 월도입천의 시야의 기반이 되는, 의념의 색을 보는 시야 역시 당연히 가지고 있었겠지...'

"어, 어떻게 한 거죠, 서 도우?"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얼마간 벌 괴뢰를 자연스럽게 조종한 후, 북향화의 앞으로 다시 괴뢰를 끌어내린 후 내가 느낀 것을 설명해 주었다.

칠정(七情)에 대한 것.

그리고 무림인 중 삼화취정, 오기조원에 이른 이들이 볼 수 있는 의념의 색상.

북향화는 내 설명을 들으며 수첩을 꺼내 내가 말하는 것들을 받아적었다.

* * *

그날 밤.

북향화는 공방 안쪽에서 벌 괴뢰의 회로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칠정의 의식이라...'

생각도 못한 분야였다.

애초에, 딱딱한 법기에 인간의 감정을 적용시킬 생각이라니.

'괴군 선배님은 도대체 뭘 만드셨던 거지...'

심지어 이 벌 괴뢰는 그날 봉명성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잔해 중, 멀쩡한 한 개의 괴뢰였을 뿐이었다.

'평소에 그분의 처소엔 이런 괴뢰들이 어마무시하게 많다는 건데...'

찌릿, 찌릿!

서은현이 괴군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오한을 느꼈듯이, 북향화 역시 괴군의 천재성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말도 안되는 재능... 역시 일문법재...'

말 그대로 악마조차 뛰어넘은 재능이었다.

잘그락, 잘그락

그녀가 회로들을 분석할 때였다.

문득, 북향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잠깐, 서 도우의 말대로라면, 이 괴뢰는... 단순히 감정이 들어있는 괴뢰가 아니야.'

우우웅!

그녀의 얼굴 위로 네 가지 색의 문양이 떠올랐고, 그녀의 눈동자가 괴뢰 안쪽으로 빨려들듯 집중력을 발휘했다.

'연결... 되어있다?'

북향화는 괴뢰의 회로들을 뜯어보며 분석했다.

'이 괴뢰는, 감정을 기반으로 괴군 조연의 다른 괴뢰들과 연동되어 있어.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거였어.

그리고, 이 괴뢰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흐름을 회로의 흐름으로 분석해보면...'

얼마간 회로들을 만지작거리던 북향화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툭!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장비 중 하나가 괴뢰의 몸 속으로 떨어졌다.

회로가 살짝 뭉개졌지만, 북향화는 창백한 안색으로 손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주르륵...

그녀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치이이이!

그녀의 피부에 돋아나 있는 네 가지 색의 문양이 그 어느때보다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북향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 괴뢰에게서 뒷걸음질을 쳤다.

"괴군 조연... 당신은 도대체, 뭘 만들려고 했던 거죠?"

그녀의 숨소리가 가팔라졌다.

북향화는 충격을 받은 채로 괴뢰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악마조차 뛰어넘은 재능과 발상...

아니, 만약 내 망상(妄想)이 맞다면, 그 자가 범하려는 영역은 하늘에게나 허락된 영역...

필멸자에겐 금기(禁忌)의 영역일진데...'

있을 수도 없는 망상이자 공상.

그것이, 북향화가 발견한 괴군 조연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쳤으니 말 그대로 금기를 범해서 그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치이이이-

격외(格外)의 깨달음, 금기를 범한 광인의 망상을 엿본 덕에 한없이 활성화되었던 북향화의 자질이 서서히 다시 가라앉기 시작했다.

얼마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북향화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공방 한쪽에 걸린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도화지에는 어떠한 법보(法寶)의 구상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서은현을 위해 짜고 있던 법보.

서은현이 말한 말도 안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서히 짜고 있던 구상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괴군의 계획을 엿봄으로써, 그 괴뢰 안에 담겨있던 무수한 감정들을 목도함으로써 지금껏 짜오던 구상도가 상당히 보완됨을 느꼈다.

북향화는 법보의 구상도로 다가갔다.

'괴군 조연의 미친 망상이 사실이라면, 내가 뭘 만들든 그의 작품을 따라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작업용 붓을 들고 법보의 구상도를 천천히 다시 그렸다.

'서 도우의 손에 들릴 때, 그 작품의 발뒷꿈치라도 따라갈 수 있을 작품을 만들 수는 있을 거야.'

사락, 사라락...

북향화는 진중한 눈빛으로 법보의 구상도를 다듬어갔다.

연(15)

"제 법기가, 거의 완성되었다고요?"

"네, 구상단계는 거의 끝났고, 이제 정확히 구조를 짠 후 제작만 시작하면 되는 단계에요."

"호오..."

나는 은근 기대가 되는 게 느껴졌다.

신외지물에 관심은 없다지만, 도대체 그녀가 어떤 법기를 만들었을지가 궁금하긴 했다.

"어떤 법기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그건 비밀이에요. 나중에 완전히 구조도까지 다 짜고 나면 알려드리죠."

"흠... 그러시구려."

"그리고, 서 도우가 해주실 일이 있어요."

"음?"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나를 그녀의 공방으로 데리고 갔다.

"오늘부터, 서 도우도 법기 제작을 배우실 거에요."

"으음...?"

"서 도우가 내건 조건 중에, 서 도우도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법기여야 한다는 게 있었잖아요?"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아하니, 북 선자는 나를 법기 장인으로 만들어서 그 조건을 채우시려는 겁니까?"

"아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어렵지 않으니까요. 아주 간단한 것만 만들 수 있어도 제가 짠 법기는 혼자 제작하실 수 있으실 거에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렇다면야, 가르쳐 주시지요."

어차피 법기 만드는 일 정도는 배워둬도 쓸만할 터였다.

그리고, 법기 교육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