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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 *

등선향에서 반년이 지났다.

쿠릉, 우르릉...

나는 하늘에서 으르렁대며, 내 무형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흩어지는 먹장구름을 바라보았다.

천기가 변화하며, 내게 300년의 수명이 부여된다.

나는 결단경 중기 여우의 요단을 흡수해서, 축기기 극초기, 각수(角宿)의 경지를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연(2)

우르릉...

나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수명이 다하지 않아도, 내가 새로운 수명을 내려받으려 하면 먹구름이 나타나는 건가...'

일반적인 수도자가 축기에 이를 때 저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이 역시 천거현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새로운 수명을 내려받는다는 점에서, 뭔가 하늘이 나를 방해하고자 했던 모양.

하지만, 나는 무형검을 회수하며 피식 웃었다.

"몇 번이고 막아봐라."

번개를 전부 쪼개고 구름도 흩어, 하늘을 박살내 줄 테니.

쿠구구구-

체내에서 흐르기 시작한 정순지력을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그게 그 축기기의 수도자...라는 거냐?"

옆에서 호법을 서주던 김영훈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다.

등선향에 떨어진지 반년.

김영훈은 내 지도에 의해, 어느덧 삼화취정에 완숙한 무인이 되었다.

아마 내 지도를 따라 2, 3년만 더 있으면 오기조원에 진입할 터였다.

"그렇습니다. 이제, 앞으로 약 350년은 더 살 수 있겠지요."

"어마어마하군..."

그는 혀를 내두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직장 동료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하나같이 엄청난 재능을 지녔나 보구나. "

"별 말씀을요. 우연히 구한 요괴의 요단이 아니었다면, 축기기까지 오르는 데에 몇십 년은 썼을 겁니다."

나는 영기를 다 잃고 빛이 바랜 결단기 여우의 요단을 들어올렸다.

여우의 요단은 분명 결단 중기경의 것이었지만, 축기 중기경의 깨달음밖에 없는 나는 여우의 요단에 담긴 기운을 전부 흡수할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잡스러운 요기를 정제하고 남은 정순한 기력만 골라 흡수하느라 흡수율이 낮은 것도 있고 말이지...'

어쨌든, 여우의 요단 덕에 오월입도경을 대성하고 축기기에 오를 수 있었다.

'앞으로 축기 2수까지는 지난 삶에 얻었던 천린수해성과 음혼귀주문의 깨달음으로 막힘없이 가면 된다.'

거기에 축기 3수, 규루위묘필자참은 아예 칠성제의 때에 축복을 받아놓아서 빠르게 진도가 나갈 테니, 이번 삶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축기 후기까지는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하면 축기 대원만까지도 노려볼 수 있겠어.'

물론, 그 전에 해야할 일들이 있었지만.

"그럼 김 형. 이만 등선향을 나가볼까요?"

"오, 드디어 나가는 게냐? 좋구나. 제발 사람 얼굴 좀 보자꾸나!"

내 말에 김영훈은 희희낙락하며 신나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김영훈과 함께 등선향을 나설 준비를 했다.

* * *

휘이이이-

나는 등선향에서 나와, 답천사막에 떨어져, 법술을 사용해 사막 위를 질주했다.

김영훈은 드넓은 사막의 풍광을 보며 절로 감탄하였고, 나 역시 축기기에 올라 얻은 무진장의 정순지력을 써 빠르게 벽라국 방향으로 향하였다.

'그나저나, 원립이 있는 성으로 가 보는 게 좋으려나.'

생각해보면, 천인기들이 비승한지 얼마 안된 지금 시점의 그라면, 결단기 수준일수도 있었다.

'결단기 수준이라면, 축기기에 올라 정순지력을 얻은 지금의 내가 어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아직도 상단전 안쪽의 의식세계.

그곳에 박혀있는 오행혈주번이 느껴진다.

'오행혈주번은 어찌됐든 원립의 신통술. 지금 바로 찾아갔다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다.'

찾아가도 이 오행혈주번을 처리한 다음에 찾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오행혈주번은 역시...'

나는 남쪽, 흑풍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인기 잔혼. 흑색귀골곡의 송진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과 함께 일단 벽라국으로 향하였다.

* * *

휘이이이-

"콜록, 콜록..."

"이런 제길, 은현아.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왔습니다!"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모래폭풍을 만나고, 며칠의 시간을 거쳤다.

모래폭풍은 잦아들고 있었으나, 그 동안 상당히 법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 덕분에 법력으로 일정 주기마다 물을 생성했던 것을 할 수 없어져, 나와 김영훈은 지금 이틀째 물을 못 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옷도 넝마가 되고,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더는 없군. 젠장할...'

그래도 이제 거의 벽라국에 도착했다.

얼마 후면 천색성이 보일 것이다.

휘이이이!

얼마나 모래바람을 뚫고 법술을 사용하며 나아갔을까.

저 멀리, 천색성이 보였다.

"김 형, 저기 성입니다!"

"오, 오오..! 어서, 어서 가서 물 좀 먹자꾸나..!"

'답천사막은 여러 번 건너왔어도 늘 건너기 힘들군...'

견딜만할 때도 있었지만, 모래폭풍을 자주 만나면 늘 이렇게 초죽음이 되어서 도착하기가 일수였다.

촤아아악!

나와 김영훈은 천색성의 앞에 멈춰섰고, 천색성의 경비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지! 누구시오!"

나는 군말없이 다가가 손 위로 법술 몇 개를 띄워 보여주었다.

"어, 엇... 수도자!?"

천색성은 법기로 유명한 성인 탓인지, 법기를 구매하려는 수도자들이 자주 찾았고, 그 덕에 일반인들도 수도자의 존재에 대해 아는 이들이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사막을 건너고 온 사막 부족 수도자요. 들어가게 해 주시오."

"어, 어떤 부족이신지..."

"주립 부족이외다."

"아, 가장 큰 부족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여기 통행증입니다."

몇 번의 삶동안 천색성을 드나들며 생긴 요령이었다.

물론 주립 부족엔 나 같은 수도자는 있지도 않았으나, 이들이 그걸 확인할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곳에 없을 것이다.

"사, 사람이구나..."

김영훈은 반년만에 보는 사람들이 반가운지, 벽라국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이곳저곳을 두리번 거리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삼화취정의 경지에서 보는, 사람들이 흘리는 무수한 의념의 색들을 관찰하였다.

'아마 오기조원도 금방 도달하겠군.'

열정적으로 감정의 색을 관찰하는 걸 보면 금세 의식영역에 도달할 터였다.

'그나저나...'

나는 사막과 붙어있어, 뜨거운 천색성의 공기를 들이마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을 마실 만한 곳이... 어디 없으려나."

천색성에 온 것도 사실상 거의 200년 만인지라, 우물이 어디 있었는지 조금 가물가물했다.

내가 타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 거릴 때였다.

"물을 찾으시는 건가요?"

한 백의의 여인이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물론이고 옆의 김영훈 역시 고개를 열정적으로 흔들었다.

"따라오세요, 저희 가게에서 물을 좀 드릴게요."

"아, 감사드립니다, 소저!"

우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천색성의 작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그녀의 가게는 '백색법련(白色法蓮)'이라는 이름의 법기 상점이었다.

촤악!

그녀는 법기상점의 한 구석에 놓인 나무통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 나에게 건냈다.

"물을 드시고, 그쪽 분은 다른 바가지를 가져올 테니..."

그러나 김영훈은 그녀가 새 바가지를 가져오기도 전에, 허공섭물을 써 물을 끌어와 자기 입으로 가져가 미친 듯이 퍼마시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 동료가 목이 많이 탔는지라..."

"괜찮아요. 사막에서 저런 분들이 한두 분은 아닌걸요."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준 바가지를 들고 물을 마셨다.

'살 거 같군.'

내가 내 법력으로 만들어낸 물들은, 마셔도 기본적인 갈증만 해결될 뿐, 물을 마셨을 때의 충족감이 없었다.

내 몸에서 빼낸 걸 다시 내 몸으로 집어넣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역시 외부의 물을 먹으니, 그제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하아... 정말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소저. 이틀째 물을 못 먹었는데..."

"아니에요, 어차피 조금만 지나가면 천색성의 우물이 있는 곳이 나왔는걸요. 그나저나 의식을 보아하니 수도자이신 것 같은데, 맞나요?"

"아...!"

나는 그제야 그녀 역시 수도자임을 알아보았다.

법력의 파동으로 보아, 약 연기기 11성 정도의 실력으로 보였다.

그리고, 문득 그녀를 예전에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앗, 당신은..."

그랬다.

먼 옛날.

내가 처음으로 등선향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와, 답천사막을 건넜을 때에 물을 주었던 그 수도자!

"절 아시는 건가요?"

그녀의 눈빛에 살짝 경계심이 어렸다.

'음 뭔가 오해를 하는 건가.'

"오해는 마십시오, 소저. 아주 예전에도 천색성에서 소저에게 물을 얻어마신 적이 있어서, 그 은혜를 기억한 것일 뿐입니다."

"아, 그런 거였군요."

그제야 다시 그녀의 경계심이 풀렸다.

"공묘세가나 벽씨, 청문세가의 자제들이 가끔 저를 찾아와 귀찮게 하는 바람에 조금 놀랐었네요. 다행히 일전에 도움을 드린 분일 뿐이었다니 저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하하, 이전에도 이런 선행을 많이 베푸셨나 보군요."

"사막을 헤메는 분들을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인심도 좋으시군요."

나는 말을 하며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게 법기...'

솔직히 무형검이라는 압도적인 상위호환이 있기에, 지금껏 법기 같은 것은 쓸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법기점의 법기들을 둘러보니, 법기를 쓴 적 없는 눈으로 보아도 썩 쓸만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법기들에서 풍기는 영력의 파동이 굉장히 안정적이군.'

요족의 지각으로 보아도 상당히 영기의 순환이 자연스러운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그나저나 이 법기들은 누가 만든 겁니까? 과연 천색성이 법기로 유명하다더니, 법기에 조예가 없는 제가 봐도 품질들이 뛰어나군요."

"아하..."

내 말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여인이 만든 건가?'

그녀에게서 일어나는 황금빛의 의념을 관찰할 때였다.

입꼬리를 씰룩이던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객들의 옷이 너무 헤진 것 같은데, 저희 집에서 안 쓰는 옷이라도 드려도 될까요?"

"아, 그러시다면 너무 감사한 일일진데..."

"사양하실 것 없습니다. 정말로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옷들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거적떼기가 된 나와 김영훈을 다시 한번 본 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서 두 벌의 옷을 가지고 왔다.

조금 낡은 옷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입은 옷들 보다는 깨끗했다.

그녀가 입은 것과 같은 백의(白衣), 사막의 색과 같은 황의(黃衣).

두 벌의 도복이었다.

"집에서 아무도 안 입고 박혀있던 옷들인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지고 왔습니다. 기왕 물을 대접한 것, 옷가지도 대접해 드리지요."

"너무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군요."

"허어..."

김영훈 역시 어느새 물을 다 마시고, 입을 닦으며 걸어왔다.

그는 벽라국어는 몰랐으나, 그녀가 옷을 주려 한다는 내 설명을 듣자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옷을 골랐다.

김영훈은 황의의 옷을, 나는 백의의 옷을 골라, 가게 구석의 가려진 곳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 훨씬 보기 좋으시군요."

"좋은 옷을 주셔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정 그러시다면 축기기 선배님께 빚을 지워두는 셈 치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고, 나는 추후에 옷값을 갚으러 오겠다 한 후, 백색법련 법기점에서 나왔다.

* * *

나와 김영훈은 천색성에서 나와 벽라국의 여러 성들을 거쳐, 먼발치에서 청문령을 보고 인사를 올렸고.

다시 연국에 도착해, 진씨세가의 결계를 넘어 제자들을 잠시 보고 왔다.

그런 후, 연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흑풍해에 도착했다.

"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예,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래, 뭐. 무공 연습이나 하고 있으마."

나는 잠시 김영훈을 떼어놓은 후, 서휼이 준 파공주와 호풍응룡변을 잠시 꺼내 보았다.

'음, 어떻게 할까...'

지난 생에서는 파공주는 그냥 바다 깊숙한 곳에 버려버렸다.

하지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버리지 않기로 했다.

'자폭용 공간 속성의 법보라...'

나중에 동귀어진을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남겨놓는 것도 방법일 터였다.

'이번에 서란을 도와 송진의 잔혼을 처치하고, 봉명성의 좌표를 얻으면...'

어쩌면 이번에는 김영훈에게 줄 장생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난 생에, 원립이 펼친 법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명력을 쥐어짜내 장생과를 급속성장시킨 법술.

물론 그 법술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승님에게 탄탄히 배운 기초진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법술의 큰 틀은 분명히 이해했다.

'어쩌면, 이번 생 안에, 김영훈이 죽기 전에 그걸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게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수만 있다면...'

그의 수명을 늘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촤아아아!

나는 허공을 박차며 서란의 처소로 향했다.

* * *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됐다.

나는 서란에게 내 힘을 보여준 후, 호풍응룡변 공법서를 보여주어 그의 신임을 얻고 그와 함께 송진이 있는 섭명함으로 가, 진법을 얌전히 해체하고 섭명함의 최하층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송진은 시커먼 귀기에 휩싸인 해골의 형상이었다.

"이보시오, 흑색귀골곡의 원로 송진."

[...네놈은 뭐냐.]

그가 음산한 귀기를 흩뿌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섭명함을 내놓으시오."

쿠구구구!

내 말에 그의 귀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으나, 지난 삶의 마지막에 보았던 원립보다는 한참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무형검을 잡으며 그를 마주보았다.

왠지 이번에는 그를 상대하는 것이, 전만큼 크게 떨리지 않았다.

연(3)

쿠구구-

예상외로, 송진은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나를 관찰했다.

[뭐냐, 노옴. 인족에게 요단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기괴한 의식법술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는데...

네놈은 노부를 아는가 보구나.]

명백한 경계태세!

'이번에는 진법결계를 때려부수지 않고, 그냥 조용하게 들어와서인지 나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해 준비가 충분치 않나 보군.'

지난 생에서, 섭명함의 귀기를 다 빨아먹어 결단 대원만급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섭명함의 귀기를 빨아먹지 않아 결단 중후기 정도의 기세밖에 드러나지 않았다.

"어찌 청색귀골곡의 위명을 들어보지 못했겠소. 하물며 청색귀골곡을 이끄는 천인기 수도자야 말할 것도 없지!"

[크흐흐, 노부가 괴군에게 죽었다는 것도 들어봤다는 말인데, 노부를 놀리는 것이냐?]

쿠구구!

그리고, 송진이 어느 정도 귀기를 모은 것인지.

그가 공격을 시작했다.

끼아아아아!

수천 마리의 백골들이 주변에서 파도처럼 일어오르며 내게 쇄도한다.

나는 무형검을 뻗었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능곡지변.

무형의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가시처럼 뻗어나가며, 주변의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 상태에서 또 다시 검이 변화를 일으킨다.

단악검법, 단맥도법, 권법, 각법, 조법, 지법, 창법...

수많은 무공의 변화가 섞인다.

지난 삶의 김영훈과 함께 연구했던 모든 분야.

200년동안 내가 다시 추가하고 개량한 나의 무형검이, 1초에 수백 번의 변화를 동원하며 송진을 밀어붙였다.

그의 법술이 깨져나가며 그의 주변이 내 무형검에 완전히 장악당했다.

첫 격돌.

그리고 송진은 첫 격돌에서 나에게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송진의 몸 주변으로 귀기가 빨려들어가더니, 그가 귀조를 단 거대한 귀물로 변하였다.

지난번에 보았던 모습.

그러나 이번에는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단악검법, 용맥, 기산심천, 단애.

촤아아악!

무형검이 더욱 더 빠르게 움직이고, 크기가 거대해지며, 속도가 따라갈 수 없게 변하였다.

귀물의 전신이 삽시간에 난도질당했고, 귀물화가 풀린 송진이 다시금 법결을 맺었다.

쿠오오오!

푸른 빛 귀화가 그의 손 안쪽으로 모인다.

하지만.

단맥도, 산바람!

피잉!

극속의 찌르기가 정확히 귀화의 약한 지점을 반응할 수 없이 찔러버리자, 귀화는 그의 손 안에서 그대로 터져버렸다.

[크으윽...]

세 번의 격돌.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실력 차는 명백해졌다.

지난 200년동안 단련하고 또 단련해오며 극한의 숙련도를 계발한 무형검이다.

최초로 송진과 맞붙었을 때의 무형검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변화를 자랑한다.

만약 천인기 수준의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시절의 그라면 몰랐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송진은 나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색.

그러나 나는 그를 더 압박해 들어가는 대신, 조금 주제를 돌려보기로 했다.

"흠... 나 역시 괴군을 본 적이 있소만."

괴군과 서휼이 보이지 않는 구름 위에서 일전을 벌였던 것을 떠올렸다.

손짓 한 번에 등선향 전체를 물로 감싼 서휼.

그리고 그런 서휼과, 다른 해룡족들을 시종일관 압도했던 괴군.

"솔직히, 그런 괴물과 싸워서 잔혼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 같소만."

[...]

내 말에 송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의념이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우울함과 한탄으로 뒤섞이는 것이 보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그 전쟁 당시의 괴군은 갑작스레 우리와 싸우겠다고 해서 준비도 없이 달려들었었고, 그 상태에서 본곡의 3분지 1을 궤멸시킨 거니까.

만약 그가 제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우리와 전쟁을 벌였다면 그 날 흑색귀골곡은 50만년의 역사가 끊겼을 거다.]

"..."

송진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찌하여 네놈같은 강자가 섭명함에 쳐들어왔고, 섭명함을 노리는 것이냐. 이 섭명함은 폐함이고, 너는 딱히 섭명함의 귀기가 필요한 공법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데...]

"흠..."

나는 잠시 변명을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 해룡족 반요 놈의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그의 말에 내 뒤쪽에 숨어있던 서란이 움찔거렸다.

송진의 눈에서 타오르는 귀화가 더욱 더 크게 일렁거렸다.

[본곡에... 네놈들 따위의 물건은 없다. 본곡의 것은 오직 본곡에만 보관되느니, 탐욕을 버리고 썩 꺼져라..!]

그러나, 서란은 침을 한번 삼키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선배님께 부디 자비를 청합니다. 제가 찾는 것은... 제 어머님의 유품입니다."

화르륵!

송진의 눈에서 더욱 더 시퍼런 귀화가 치솟았다.

[네놈 어미의 유품을 왜 본곡의 섭명함에서 찾느냐!]

"...그것은, 저희 어머니께서 흑색귀골곡의 제자셨기 때문입니다."

쿠구구구!

송진은 몸을 들썩거리는 듯 하더니, 나와 내 무형검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의 세 번의 격돌을 떠올리며 나를 가늠하는 모양새.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지난 삶, 무형검을 얻은 직후 김영훈과 그를 사냥하고, 200년의 시간동안 다시 무형검을 참오했었다.

지금이라면, 그가 섭명함의 귀기를 다시 전부 빨아먹고 나와 한판 붙어도 크게 밀릴 것 같지 않았다.

하물며 갑작스레 내가 찾아와서 제대로 대비도 못한 지금이야.

'덤벼 봐라.'

나는 얼마간 그와 눈싸움을 했고, 잠시 우리를 가늠하던 듯한 송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좋다. 정 그렇다면 반나절의 시간을 줄 테니 섭명함을 뒤져, 네놈 어미의 유품을 찾아봐라. 그 시간 안에 찾지 못한다면, 나는 흑색귀골곡의 원로된 입장으로서, 본곡에 무단으로 침입한 네놈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쫓아낼 것이야..!]

아무래도 나와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은 부담이 되는 듯, 송진은 결국 우리와 타협을 하였다.

쿠우우...

송진의 눈에서 끓어오르던 귀화가 가라앉았다.

나 역시 무형검을 거두어들였다.

[명심해라. 반나절이다. 반나절 안에 어미의 유품을 찾지 못하면 섭명함에서 나가야 할 것이니라..!]

"...알겠습니다."

서란은 송진에게 감사인사를 올리고,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본 후 그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약 반 각 후.

나는 섭명함의 최하층.

지난 삶에서 서란의 어머니의 유품을 찾았던 방을 찾아, 바로 서란에게 옥간을 찾아주었다.

"혹시, 여기 이거요?"

"아...!"

서란은 울 듯한 표정이 되어 손을 떨며 내게서 옥간을 받아들었다.

"감사, 감사합니다. 선배님..."

"별 것 아니오. 그나저나 저 귀신 놈은 조금 화난 것 같은데..."

나는 서란의 어머니의 방 바깥쪽.

그곳에서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며 서 있는 송진을 발견했다.

[이, 이 놈... 왜 그 아이의 방을 알고 있는거냐. 너...! 넌 그 아이와 무슨 관계지...!?]

그 말에 서란 역시 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렇게 되나...'

하긴, 바로 서란의 어머니의 방을 찾아 들어가는 것을 보면 내가 그의 어머니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귀찮아질 것을 예감하고는,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 그에게 변명을 하였다.

"나는 일전, 등선향 인근에서 흑색귀골곡의 원로원주 백골귀마 허곽 역시 만난 적이 있소. 그리고 그 분께서 한 가지 훌륭한 것을 얻어 기분이 좋아지시어 내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하셨소.

그리고 그 때에 옆에 있던 해룡왕 서휼이 나를 시켜 서란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였고, 나는 그 심부름을 수월하게 이행하기 위해 서휼에게 전말을 듣고 서란의 어머님의 처소 위치를 백골귀마께 여쭌 것이오."

[뭣...]

잠시 내 말을 듣던 송진은 믿기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이를 갈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

"그나저나 문 앞에서 비키시는 게 어떻소? 나도 서란도 나가고 싶소만. 당신이 제안한 반나절 안에 찾지 않았소?"

[...잠깐.]

송진은 귀화가 불타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너, 반룡 녀석아. 네놈 어미는 내게도 특별한 아이였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네 어미가 남긴 유서를 읽어라.]

"무슨..."

서란은 뭔가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시퍼런 귀화를 흩뿌리는 송진이 으르렁거리자 어쩔 수 없었는지 자리에 앉아 옥간을 펼쳐들었다.

나는 서란의 가족사에까진 관여하고 싶지 않았기에 물러서 있었고, 송진 역시 서란의 뒤로 가 그와 함께 옥간을 읽어내렸다.

얼마 후.

"...크흑."

서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송진의 눈에서 타오르던 귀화가 약해졌다.

아니,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멍청한 것. 해룡왕 하나를 제외한 해룡족은 전부 성품이 개차반이고 제놈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것들이란 걸 몰랐단 거냐.]

그는 귀체로 된 팔을 들어올려, 부들부들 떨면서 서란에게서 옥간을 낚아챘다.

서란 역시 굳이 그것을 잡고 있지 않고, 송진에게 순순히 옥간을 건냈다.

[이 멍청한 것아...! 책임감도 없이 죽어버린 네 남편이란 놈이 뭐가 좋았단 말이냐! 이 아둔한 것..! 멍청한 것...!]

우드득!

송진의 손에, 옥간이 쪼개지려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서란은 황급히 그에게서 옥간을 빼앗았다.

송진은 서란을 노려보았다.

[나는... 네놈이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더욱 더 싫어졌다. 네놈 때문에 그 아이의 인생이 망해버린 게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파츠츳...

나는 문득, 송진의 두개골 위쪽으로 귀체가 새로이 얼굴을 덮는 것을 보았다.

귀기가 그의 두개골로 모이며, 얼굴을 만들었다.

지난번 보았던 장년인의 얼굴이었다.

시커먼 귀체로 구현된 그의 얼굴은, 푸른 색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수에 쳐죽이고 싶으나...]

그는 나를 흘긋 돌아보며 뇌까렸다.

[서휼이 보냈다는 저 특이한 놈에게 감사하거라. 섭명함을 지키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을 것이 두렵고 두려워... 네놈을 가만히 놔 두는 것이니...]

"..."

서란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문득 송진에게 절을 올렸다.

"...부디, 제 어머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뭐라...]

"평생을 해룡족에서조차 반편이라며 멸시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해룡왕께서도 이번 비승에 저는 따라갈 수 없다 하시면서 저를 내버려두고 가셨지요.

부디, 선배님. 어르신. 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간청드립니다... 제 어머니에 대해 얘기해 주십시오."

[이 놈이 지금...]

쿠구구구!

검푸른 귀기가 선실을 채웠다.

하지만 내가 무형검을 드러내어 귀기를 걷어냈고, 송진은 나를 노려보았다.

"얘기가 뭐가 그리 어렵소?"

나는 그의 심상과 의념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당신도 정작 얘기를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은데."

그는 귀기를 흘리는 귀신의 형상일지언정, 그의 심상은 맑은 바다위, 붉은 돛단배였다.

그는 분명, 맑은 사람이었다.

내게 속마음을 들킨 송진은 이를 악물며 잠시 몸을 떨더니, 두 팔을 늘어뜨렸다.

쿠우우...

귀기가 다시 가라앉는다.

[...서휼이 무서운 놈을 보냈군.]

털썩!

송진은 비틀거리는 듯 하더니, 선실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잠시 그는 침묵했고, 서란도 침묵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실 안에서는 약간의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송진의 심상을 읽고는, 선실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서란을 해칠 생각이 없어져 있었다.

얼마 후, 선실 안쪽에서 송진이 서란에게 뭔가를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느릿느릿,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던 송진이었으나.

어느덧 그의 말은 빨라졌고, 점차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서란 역시 그에게 호응해주며, 둘은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상상도 못했던 광경이군.'

서란과 송진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광경.

나는 잠시 무형검을 들어올리며 생각했다.

운명을 벗어나자, 더욱 더 새로운 것이, 더욱 더 많은 것이 새로이 다가온다.

전하지 못했던 말들도, 이해하지 못했던 인연들도.

새롭게 만나 새로운 미래를 그린다.

나는 다시 한 번 선실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의념을 읽은 후, 섭명함의 갑판으로 나갔다.

흑색귀골곡이 흑풍해에 숨겨놓은 진법결계.

원통형의 우물 형태의 결계의 중심부.

그곳에서는 뻥 뚫린 하늘이 보였다.

어느덧 하늘은 밤이 되었다.

저 구름 너머로 별빛이 언뜻언뜻 보이는 듯 했다.

"...강해지자."

더욱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모든 운명의 인력을 벗어날만큼 커져서, 새로운 미래를,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자.

나는 그렇게 결심하였다.

서란과 송진은 날밤을 새고 얘기를 했으며, 다시 해가질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또 다시 날밤을 새고, 해가 뜰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둘 사이에서 어떤 대화가, 어떤 감정의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놈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운명을 넘어선 인연은 상상도 못할 새로운 기적을 낳기도 하였다.

송진은, 서란을 제자로 들이기로 하였다.

연(4)

"...무슨 바람이 든 거요?"

[외부인은 알 것 없다. 모르면 닥쳐라.]

"..."

순간 짜증이 났지만, 서란과 송진.

둘 모두 어느 정도 서로에게 기대를 하는 것이 보였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축하드리지."

"선배님께도 감사, 또 감사드릴 뿐입니다."

"되었소. 서 도우가 기쁜 것을 보니, 나 역시 해룡왕의 심부름을 잘 수행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구려."

서란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언젠가,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불러주십시오. 전부 선배님의 덕이니, 선배님의 부탁은 무조건 세 번은 어떻게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호의는 고맙게 받지."

서란이 내게 인사를 했고, 송진은 불퉁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한 마디를 던졌다.

[어쨌든 내 제자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스승으로서 따로 보답을 해 주려 한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느냐. 세 가지만 들어주지.]

"세 가지라..."

나는 우선 그에게 내 상단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여, 내 상단전에 걸린 정신금제를 풀 수 있으시오?"

[흠?]

내 말에 송진은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누가 네게 정신금제를 건 거지? 그렇진 않겠지만 혹여 해룡왕이나 그런 자인가? 천인기 수도자의 금제는 풀 수 없다.]

"아니오. 혈목자 원립이라는 놈인데, 혹시 아시오?"

[아...]

송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지. 답천사막에 사는, 특이한 법보(法寶)를 가지고 있는 그 결단기 수도자가 아닌가. 자질이 없어 원영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수명도 다 된 것을 단약으로 억지로 연명하고 있다 아는데.]

"특이한 법보?"

[그래, 흑색의 성 형태의 법보인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그 성 안쪽에서 법보의 주인은 경지를 뛰어넘는 강함을 가질 수 있더군.

결단 대원만은 원영기의 강함을. 원영 초기는 원영 중기의 강함을. 원영 중기는 원영 후기의 강함을.

그렇게 경지를 뛰어넘는 실력을 지니게 해 주는 강력한 법보를 지니고 있어,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한 결단기 애송이지.]

오싹!

'만약 저번에 답천사막에서 바로 원립을 찾아갔다면...'

흑색의 성 안에서, 원영기의 실력을 발휘하는 원립을 상대해야 했을 터였다.

'찾아가지 않기를 잘했군.'

나는 속으로 작게 안도를 하며 물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법보를 천인기 선배분들이 탐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오?"

[아, 그거...]

송진은 혀를 차며 말했다.

[천인기 이상한텐 효용이 없기 때문이지. 거기에다가 그 법보는 운명의 인력을 가진 강력한 선보(仙寶)라, 한 번 얻으면 그 인력에 이끌려 비승의 난이도가 훨씬 극악해진다네.

그래서 아무도 딱히 손대려 하지 않는 거야. 뭐, 듣기로는 특이하게도 해룡왕은 그 법보를 찾아다녔단 풍문이 있지만.]

"흐음..."

'혈목자가 굳이 봉명성을 때려 부수며 봉명인을 찾았던 건, 그 흑색의 성 때문이기도 했던 건가...'

"어쨌든, 내 정신금제는 그 혈목자 원립이란 자가 박아넣었소. 혹여 해체할 수 있으시오?"

[어디보자, 어떤 금제인지 알려면 내가 네놈의 상단전에 내 의식을 흘려봐야 알 것 같은데.]

"그걸 빌미로 내 의식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 놈이, 아무리 잔혼 상태로 영락했다지만 나를 염치도 모르는 놈으로 아느냐..!]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섭명함에 대고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 약속할 수 있소?"

[그래, 섭명함에 대고 나 송진은 네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 되었나!?]

"흠, 좋소."

난 고개를 끄덕인 후, 그에게 조심스레 내 상단전을 허락했다.

송진의 서늘한 의식이 내 의식영역으로 침투해왔다.

얼마 후, 내 상단전 안쪽, 그 안의 오행혈주번을 송진의 의식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오행혈주번을 관찰하던 그의 의식은 내 상단전에서 나갔고, 송진이 입을 열었다.

[생전이라면 아마 한 달쯤 연구하면 해체해줄 수 있었을 것 같군.]

"그 말은..."

[지금은 조금 힘들다. 원립에게 당한 금제라 했더냐? 그 놈도 나름 원영기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라, 지금 내 실력으로는 쉽지 않다.]

"그런가..."

[하지만.]

송진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의 얼굴을 뒤덮던 귀체가 풀려, 그의 얼굴이 해골 형상으로 돌아왔다.

[너 스스로 금제를 장악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줄 수 있지. 이 방법이 조금 느리더라도 착실하게 금제를 해제할 수 있고, 완전히 해제하면 아예 그 금제를 네가 연화시켜, 네 고유한 법술로 만들 수 있을 것이야.]

"호오, 어떤 방법이오?"

[일정법(一情法)이라는 의식 공법이다. 하나의 감정에 끝없이 집중하며, 그 감정을 이해하고 네 정신금제를 그 감정으로 물들여 네게 속하게 하는 신통이지.]

우우웅!

송진은 섭명함의 망가진 부위를 뗴어내서 그곳에다가 일정법의 구결을 적어 건내주었다.

[자, 수작은 안 부렸으니 가져가면 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도 말 해라.]

"흐음, 고맙소."

나는 일정법의 구결을 의식으로 훑은 후, 그에게 공법을 요구했다.

'군마용갱권과 규토장성공 중 어떤 것이 좋으려나.'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본 후, 규토장성공을 요구했다.

[규토장성공이라... 익히기가 꽤 까다로운 놈인데 괜찮으냐?]

"상관 없소."

[흠, 대성한다면 용맥을 움직일 수 있는 공법인지라 적수가 없겠지만, 한 자리에 붙박혀서 그 대지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공법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선각후통 류의 공법임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면 힘이 급감하기에 반푼이 공법이다만...]

"그 말은, 원래 있던 자리에 붙박혀만 있다면 힘이 급증한다는 말이 아니오?"

나는 지난 삶을 떠올렸다.

'어차피 등선향이나 봉명성 한 곳에 틀어박혀 있을 듯 한데, 규토장성공을 익히고 수성(守城)을 하는 게 낫겠지.'

[뭐 네놈이 원한다면야.]

송진은 또 다시 규토장성공의 구결을 건냈다.

[마지막 부탁은 있느냐?]

"마지막 부탁은..."

나는 송진을 보며 서란을 가리켰다.

"서 도우를 잘 가르쳐 주시오. 그거면 됐소."

[...]

어차피 서란도 나를 도와준다고 했는데, 굳이 송진에게서 있는 힘껏 모든 것을 뜯어낼 필요야 없다.

송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당황한 기색을 흘리다가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다. 그 부탁은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니 무효로 치고, 나중에라도 따로 네놈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고맙소."

나는 송진에게 허리숙여 인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란의 일도 잘 해결이 되었고, 일정법에 적힌 대로라면, 약 3, 40년 정도면 오행혈주번 문제도 전부 해결될 터였다.

'이제 남은건...'

김영훈의 수명을 늘릴 방안이었다.

나는 원립이 사용했던 비술의 틀을 떠올렸다.

'큰 틀은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세세한 방식을 내가 다시 새로이 정립해서, 장생과를 열리게 할 수 있을까.

일단 필요한 것은 강력한 힘.

원립이 빨아들였던 결단기 수도자들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에 비할만한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강력한 힘.

'어떤 게 있으려나...'

문득, 나는 막 받은 규토장성공에 생각이 미쳤다.

시간을 들이면 끝끝내 용맥(龍脈)을 다루게 되는 공법.

'용맥이라면...'

나는 규토장성공을 빤히 쳐다보았다.

'용맥의 거대한 힘을 원립의 법술로 정제하여, 장생과를 열리게 할 수 있을까?'

대지에 흐르는 대자연의 거대한 힘이라면, 어쩌면 수천 수만 명어치의 생명력과 비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망상에 가깝긴 하다.'

사실 허황된 생각이었다.

그런 게 그렇게 쉽게 가능했다면 이 세상에 마도 가문은 왜 있고 인간 단약은 왜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허황된 법술이라도 계획해봐야 한다.'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투자하고 투자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진법, 그리고 지식.'

새로운 지식이다.

그리고, 진법에 대한 지식이라면...

'축기기 3대 위인. 연단의 막리운련. 법기의 공묘천색. 그리고, 진법의 청문령.'

청문령을 찾아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 * *

나는 송진으로부터 규토장성공을 받고, 흑풍해에서 빠져나가 김영훈이 기다리고 있던 곳으로 왔다.

"그 며칠 새에 또 성장하셨군요..."

김영훈은 벌써 또 다시 오기조원에 한 발짝 다가가 있었다.

"그래, 말이 안 통하다 보니까 여기 사람들의 의념을 읽는 것에 더 집중하다보니 삼화취정의 경지가 올랐다."

나는 그 성장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제아무리 오기조원에 대해 내가 쉽게 풀어서 가르쳐 줬다지만, 벌써 저 경지에 근접하다니.

'예상보다 더 빨리 경지에 오를 수도 있겠군.'

나는 잠시 생각해 본 후, 그에게 말했다.

"김 형, 그러면 이제 슬슬 저희는 헤어지는 게 어떻습니까?"

"뭐? 갑자기 그게 뭔 소리냐?"

"제가 볼 때, 김 형은 얌전히 제가 풀어서 정리한 깨달음을 받아먹는 것보단, 스스로 깨달음을 체화하며 응용할 때 더욱 더 성장속도가 빠른 것 같군요.

지난번에 오기조원은 물론이고, 등봉조극, 월도입천에 이르는 월도입천무의 깨달음도 전부 알려드렸지요?"

"그랬지."

"그럼 앞으로는 스스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월도입천에 도달해 보시지요."

그의 성향이라면, 괜히 나를 따라다니는 것보단 세상과 부딪히며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 훨씬 빠르게 경지에 이르는 것일 터였다.

그는 당황하는 듯 했으나, 내 이어진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김영훈과 헤어지고, 그에게 나중에 연국의 황제와 막리세가란 이들을 없애줄 것을 부탁한 후.

연국에서 나와 벽라국 청문세가로 향하였다.

* * *

'청문세가 본가로 바로 찾아가면 청문세가에서 놀라겠지...'

본래 수도가문의 본가들은 알 사람들은 알고있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비밀이었다.

결단기 이상의, 가주, 원로급 수도자들은 다른 가문의 본가들을 알고 바로 본가로 찾아가도 실례가 되지 않지만.

기껏해야 축기기인 장로급 수도자들은 타 가문을 찾아갈 때, 가주의 명이 아닌 이상 수도가문의 영지를 거쳐서 가는 게 기본적인 예의였다.

물론 내 실질적인 전력이야 결단기 급이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실력은 축기 극초기, 각수였으니 축기기 급으로 행하기로 했다.

투우웅!

나는 청문세가의 영지로 가, 그곳을 뒤덮은 진법결계에 법술을 사용해서 자극을 주었다.

내 정순지력에 결계가 잠시 반응하더니, 얼마 후 안쪽에서 연기기 12성의 수도자가 한 명 걸어나왔다.

"저는 청문세가의 자재, 청문전이라 합니다. 어느 가문의 선배님이신지요?"

그는 공손하게 내게 예를 갖춰 물었고, 나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저는 떠돌이 산수로, 귀 가문의 청문령 수사(修士) 께서 축기경 3대 위인이라 하여, 진법에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분께 상의할 일이 있어 잠시 귀 가문을 찾아왔습니다."

"아! 그분을 찾아오셨군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영지의 장로님께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전음부를 꺼내더니 법력을 불어넣고 내가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얼마 후.

영지 안쪽에서 축기기 수도자가 걸어나왔고, 나를 환대해 주었다.

"허허, 본인은 청문단이라 하외다."

일반적인 청문세가의 수도자 답게, 그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거한이었고, 나를 영지 안쪽 그의 거처로 안내하였다.

"귀한 객께서 청문세가를 방문하여 주어서 감사하오. 청문령 형님을 뵙고자 한다 들었소. 진법에 대해 상의하고자 한다고?"

"그렇습니다."

"혹시 객의 성함을 여쭤도 되겠소?"

"서은현이라 합니다. 서 수사라 불러주시지요."

"알겠소 서 수사. 하하, 서 수사 같은 인재가 형님께 진법에 대해 묻고자 찾아오니, 본 가문에도 영광이오.

일단 서 수사같은 귀인이 찾아왔으니, 본인이 본가에 얘기를 넣어보고 말씀 드리겠소. 우선 차부터 한잔 하며 천천히 기다려 봅시다."

청문단은 축기기에 이른 나를 동급의 손님으로 예우해주며 극진히 대접해 주었고, 나는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수도공법에 대한 것은 얘기할 게 별로 없었지만, 청문세가는 전투에 대한 것에 관심이 많은 호전적인 가문인지라, 나와 그는 전투경험을 공유하며 실컷 대화를 나누었다.

며칠 후, 나는 청문세가 본가에 초대받았고, 드디어 청문령을 직접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 *

청문세가 본가.

그곳의 어느 객실.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리며, 염소수염을 한 어느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공손히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위명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안녕하시오. 과한 예는 차릴 필요 없소. 동급 수사끼리 뭘.. 서 수사라 부르겠소. 청문 수사라 불러주시면 된다오."

나는, 지나간 시간에 스승이었었던 이를 보며, 울지도 웃지도 못한 표정으로, 억지로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청문... 수사."

스승님은, 청문 수사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연(5)

"어디 불편한 곳이 있소?"

"아닙...니다. 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청문... 수사."

나는 청문령을 마주보며 감정을 숨겼다.

그는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으나, 더 묻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나 역시 자리에 앉았다.

"진법에 대해 상의하실 것이 있어 나를 찾아오셨다 들었소."

"예. 원영기 수도자가 일전 펼친 법술을 보고, 그 틀을 따서 진법을 만들려 하여, 진법의 대가이신 청문 수사를 찾아왔습니다."

"어떤 진법인지 볼 수 있소?"

나는 내가 기획해놓은 진법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청문령은 얼마간 진도를 뜯어본 후 말했다.

"그러니까, 강한 힘을 응집하여 그것을 생명력으로 바꾸어, 천지영물의 생장을 촉진시키는 진법이로군. 맞소?"

"맞습니다."

"비효율적인 일이오. 차라리 마도 가문들에서 그 특유의 더러운 방법들로 생명력을 정제하여 쏟아붓는 게 더 빠를 지경이지.

지금껏 왜 이런 진법이 개발이 된 적이 없겠소? 무식한 양의 영기를 쏟아부어도 그걸로 천지영물을 빠르게 생장시킨다는 건 굉장히 더딜 수밖에 없소."

"하지만 제게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기에 이리 부탁드립니다.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흠..."

잠시 진도를 보던 청문령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 수사가 이런 멍청한 진법 구조도만 가지고 날 찾아오진 않았으리라 생각되오. 뭔가 정보를 더 가지고 있어서 내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한 장의 서책을 더 꺼냈다.

수원목과 장생과에 대해 수록된 서책이었다.

"제가 생장을 촉진 시키려는 천지영물에 대해서는 미리 자세히 조사를 해 왔습니다. 해당 영물의 종, 해당 영물의 위치, 주변의 영맥의 상태, 공간의 특이성.

거기에 영물의 현재 상태까지 전부 알아왔습니다. 현재 꽃이 피고 과육이 열리기 직전의 상태이며, 몇백년만 더 있으면 과육이 완전히 맺히는 상태지요.

저는 진법을 통해 그 과육이 열리는 기간을 몇백 년만 더 촉진시키고 싶은 겁니다."

"흠."

청문령은 내가 준 서책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정도라면, 해당 천지영물에만 적용되어 몇백년 정도만 성장을 촉진시키는 진법 정도는..."

서책을 들여다보던 그는 흠칫 몸을 떨었다.

"허어, 장생과라...! 한 알만 먹어도 수명을 백 년은 늘려준다는 그...!"

"맞습니다."

"...이건 가주님께도 한번 얘기를 드려봐야겠소. 수명을 이 정도로 큰 폭으로 늘려주는 영물은, 결단기인 가주님께도 어마어마한 보물일 테니까.

특히 승천문이 열리고 수많은 천인기 선배분들이 비승한 지금에야... 어쩌면 가주님께 지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오."

그는 서책을 보고 내게 궁금한 것을 묻고, 또한 진법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그와 하룻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음, 벌써 날이 밝았군."

"무슨 상관입니까."

"허허, 간만에 무척 즐거웠소. 하지만 가주님께도 보고를 올려야 하기에 이만 자리를 떠야겠소.

서 도우(道友)는 지금껏 내가 만나온 축기기 수도자 중 가장 학식이 높고 공법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사람이오. 솔직히 그 말도 안되는 진도를 내밀 때만 해도 미친 놈인 줄 알았다만...

덕분에 본인도 많이 배우고 가게 되는구려."

"아닙니다. 청문 도우...께 제가 배운 게 더 많습니다."

도우.

동급의 친한 수도자들끼리의 별칭.

그는 밤새도록 나와 얘기를 나누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를 도우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제자 놈!

-서 수사

-서 도우

시간이 지나며 바뀐 나에 대한 호칭들.

언젠가.

청문령의 입에서, 선배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될까.

나는 방 바깥으로 나가는 청문령을 배웅하며, 어쩐지 씁쓸한 맛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내가 거대해지는 만큼, 운명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기적과 변화를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생긴 것을 느꼈다.

언젠가 청문령의 입에서부터 선배님이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무서웠다.

"하하, 서 수사. 령 형과는 잘 얘기 나누셨소?"

"아, 청문단 수사."

나를 본가에 안내해준 청문단이 내게 걸어오며 물었다.

"령 형이 그렇게 즐거워하며 얘기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외다. 늘 청문세가에는 근육쟁이들밖에 없다고 툴툴대기 일수였는데. 정말 간만에 신났던 것 같소."

"청문령 수사께 질문드리기만 했던 것 같은데, 그걸로 기뻐하셨다니 쑥쓰러울 뿐입니다."

"질문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어디요? 령 형은 같은 축기기 장로들한테도 아무것도 모른다며 매번 툴툴거리는 분이오. 지난밤 얘기 나누는 걸 들어보니, 령 형이 한 번도 그 특유의 까칠함을 안 드러내던데, 정말 서 수사의 학식에 감탄할 따름이외다."

"별 말씀을. 그저, 스승님이... 잘 가르쳐 주셨을 뿐입니다."

나는 씁쓸한 입맛을 삼키며, 애써 밝게 웃었다.

"그렇구려. 혹시 어느 분에게 사사받으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소?"

"...죄송합니다. 스승님의 함자는 말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알겠소. 보아하니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정말 본가의 자제들이 서 수사의 반만 닮아도 좋겠소."

청문단은 한숨을 내쉬며, 최근 자제들이 요행을 찾아 여자 뒤꽁무니만 쫓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느니, 언제 한번 전부 집합시켜 두들켜 팬 다음 기강을 잡아야겠다느니 하며 잡설을 늘어놓았다.

얼마간 잡설을 하던 청문단은 슬쩍 나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소, 서 수사? 만약 서 수사쯤 학식이 되는 분이 본가의 자제들을 훈계해 준다면..."

그는 내게 청문세가로의 영입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동급의 수사인 나를 강제로 잡아다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들겠다는, 웃긴 행위보다는 정중하게 제의를 하는 것이,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싶었다.

"아쉽지만 저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은 맞지 않는 성격인지라..."

"그렇소? 아쉽구려. 참으로 심지가 굳은 것이, 내 후손 놈에게도 좀 보고 배우라고 하고 싶구려..."

"최근에 청문세가의 자제분들때문에 힘드신가 봅니다?"

나는 일전 영도회에서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던 청문세가의 남매를 떠올리며 물었다.

청문세가의 자제들 성격이 하나같이 그렇다면, 그걸 수습해야 하는 청문세가의 장로들로선 조금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음, 힘들다기보단 조금 속을 썩이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오. 아니, 속을 썩인다기 보단 이상한 풍문에 홀려서 하라는 수행은 안 하고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니 속이 터질 지경이오."

"여자 뒤꽁무니요?"

청문단은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이게 다 괴군 그 존재 때문이오. 젠장할. 그 존재가 비승 전에 온 천지를 쏘다니며 활개친 걸 모두가 봐왔기에,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 믿고 눈이 벌게져서 따라다니는 놈들이 있소.

그 중에서도 벽씨세가의 후기지수, 그 망나니 놈이 문제지! 그 놈은 축기기에 이르렀으면서도 점잖지 못하게 발정난 개새끼처럼 청문세가의 순진한 아이들까지 꼬드겨 여자 꽁무니를 같이 쫓아다니고 있다오!"

청문단은 화가 난다는 듯이 가슴을 다시 한번 두들겼다.

"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들을 수 있을지요?"

아무래도 그의 의념을 읽어 보아하니, 속이 답답하니 누가 제발 자신의 푸념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들어 보시오. 글쎄, 벽씨세가의 최고 후기지수, 벽문성이라는 놈이 어느 날 괴군, 그 천인기 수도자와 같은 자질을 타고난 수도자를 벽라국에서 찾았다는 것이오."

"뭣...!"

나는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괴군과 같은 자질이라면..."

"그래, 그 미치광이 늙은이와 같은 종류의 자질이오. 그래서 벽라국의 청문, 벽씨, 공묘 삼가는 물론이고 타국의 수도자들도 관심을 가졌었지.

하지만 알고보니, 그 수도자가 괴군과 같은 자질을 지닌 것은 맞으나, 괴군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자질을 가졌소."

"그 자질이란 게 무엇입니까?"

청문단은 나를 보며 도리어 의아하단 기색으로 물었다.

"괴군의 자질에 대해 모르시오? 괴군은 기문법재(奇文法才)라는 재질을 타고난 존재요.

기문법재의 자질을 지닌 이는 법기나 진법, 괴뢰 등 뭔가를 '만드는' 일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외다.

기문법재를 타고난 이는 뭔가를 집중하며 만들기 시작하면 피부 위로 기이한 문양이 떠오르고, 그 문양의 색상의 갯수에 따라 칠문법재(七文法才)부터 일문법재(一文法才)까지의 명칭이 있소.

색상이 많으면 그만큼 혼탁하고 쓸모 없는 자질이고, 색상이 적으면 그만큼 정순하고 천부적인 자질이지."

"호오, 특이한 자질이구려."

그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뭐 사실 법재니 뭐니 하지만, 진짜 제대로 된 법재는 일문법재부터 삼문법재까지고, 사문법재부터 오문법재는 그냥 평범한 수재 정도의 자질이오.

그리고 육문법재부터 칠문법재는 사실상 피부만 꼴사납게 흉할 뿐, 뭔가를 만드는 일에 감각이 있는 범재일 뿐이지."

나는 청문단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벽문성이라는 그 놈이 발견한 그 수도자는, 고작해야 사문법재(四文法才)의 자질을 지닌 수도자.

수재 수준의 자질을 하나 발견해내고, 그걸 가지고 괴군과 같은 자질을 지닌 이를 발견했느니 하며, 그를 얻는 자는 가문에 엄청난 공헌을 하는 것이랍시고 자기 가문 자제들은 물론 청문세가, 공묘세가의 자제들도 꼬드겨서 그 여자 뒤꽁무니만 쫓게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열이 뻗치겠소!"

"저런..."

"청문세가 놈이었으면 실컷 두들겨 주는건데, 벽씨세가 자제 놈이라 찾아가서 두들겨 팰 수도 없고, 답답해 미치겠소이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 때였다.

"안 그래도 가주님과 그 얘기도 잠시 나눴다."

"음?"

청문령이 청문세가 본전에서 걸어나오며 나와 청문단에게 말했다.

"가주님께서 서 도우와 같이, 그 화근을 아예 틀어막아 버리라 하더군."

"그건 무슨말이오, 령 형?"

"서 도우가 가져온 장생과에 대한 정보. 가주님께서 그 정보의 진실 여부를 가지고 원로님들과 토의한 결과, 봉명성에 가본적 있는 원로께서 그 정보의 진실성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하여 가주께서 이번 일에 대한 무한한 지원을 해 주실 것을 허락하셨다."

아무래도 봉명성에 대한 정보는 각 가문의 가주, 원로급 이상에게는 풀려있는 정보인 듯 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을 틀어막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무슨 상관이긴, 서 도우와 함께 진법을 연구해야 하는데, 진법에 쓰일 법기들을 제공할 자가 필요하지 않느냐."

청문령은 찬찬히 청문단과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래서 이번에 가주께서, 최근 가문 자제놈들 사이에서 떠들썩한 그 여자에게 아예 정식으로 의뢰를 넣어 진법 법기를 제작하게 하실 요량이다.

청문세가의 이름으로 주문을 하고, 그 여자가 공방에 틀어박혀 버리면 본가의 자제들이나 타 가의 자제들이 시끄럽게 구는 걸 청문세가의 행사를 방해하는 걸로 간주해서 합법적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지."

"확실히... 사문법재라면 괴군보다는 한참 못해도 상당히 뛰어난 법기장인의 자질이니까,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겠구려."

"암 그렇겠지. 하하, 서 도우가 가져온 진도 덕분에 골칫덩이 자제들에 대한 것도 해결이 되었구려."

청문령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문득 의문이 생겨 질문했다.

"기문법재란 자질이 법기나 괴뢰 등, 뭔가를 만드는 것에 뛰어난 재능이란 건 알겠습니다만...

그렇다면 괴군은 기문법재란 자질 중에서 어떤 수준이었습니까?"

"말이라고 하오? 당연히 일문법재(一文法才)지."

"괴군의 재능은 말 그대로 악마적인 재능이라오. 오죽하면 승천문이 열리기 전, 수많은 천인기 선배들이 괴군만 떴다 하면 다 도망다녔겠소?"

청문령과 청문단은 일전에 괴군을 본 적이 있는 것인지, 둘 다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문법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문법재라...'

나는 문득 괴군과 같은 종류의 자질을 지녔다는 그 수도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자, 그럼 령 형. 청문세가답게 시원시원하게 일을 진행해야겠지. 그 여자를 납치해오면 되는 거요?"

"그래, 빨리 가서 납치해 오자꾸나."

"...?"

'뭐라고?'

나는 순간 청문령과 청문단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그들에게 되물었다.

"아니, 정식으로 주문을 넣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맞소. 다만 진법 법기 등은 앞으로 그 진법을 연구하며 그때그때 만들어서 계속 실험하며 진법과 함께 개량시켜야 할 텐데.

아예 청문세가에서 만들어서 청문세가에서 바로 실험을 진행하면 좋지 않겠소? 그래서 아예 납치해와서 만들게 시키려 하오만."

청문령과 청문단은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다, 생각해보면 이 가문은 과하게 호방한 가문이었지...'

생각해보면 내가 약할 때는 나를 납치해서 강제 혼인시키려 했던 가문이었다.

"납치해와서 어쨌든 정식으로 영석을 지급하고 제대로 주문을 넣을 거요."

"가주님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계획이니 거주지를 잠시 옮기는 것 외엔 딱히 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오만."

"..."

나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가서 그 사문법재란 수도자를 만나본 후, 그 후에 의견을 묻는 게 어떤지요?"

* * *

어쨌든 나와 청문령, 청문단은 진법에 쓰일 진법 법기들.

그 진법 법기들을 제작할 사문법재의 법기장인을 납치하기 위해, 벽라국 동쪽으로 비행법기를 타고 날아갔다.

'음? 그런데 이 방향은...'

내가 문득 기시감을 느낄 때였다.

"서 도우는 청문세가의 방식이 조금 낯선 모양이오?"

"아, 예 아무래도."

청문령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본가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도적놈같이 구는 게 아니오. 상황을 보고,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하는 거지.

다만 가문의 기조에 따라 조금 과격하게 할 뿐이고."

"..."

"우리를 위해서만 법기장인을 납치하자고 한 게 아니오. 지금 그 여자는 청문세가는 물론이고 벽씨, 공묘, 삼가의 자제들에게 둘러싸여서 잔뜩 시달릴 터이니.

오히려 청문세가의 보호를 받는다 하면 더 좋아할 수도 있지."

"흠..."

확실히, 청문단의 설명에서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법기장인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가문의 시조이신 창호자 청문선우님께서는 이런 말을 남기셨다오.

'늘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며 움직이되, 한 번 움직이면 어찌 움직이든 호방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청문세가에서 나를 잡아 강제로 혼인시키겠답시고 달려들었던 일 역시, 내게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조금 과격할 수는 있으나 늘 상대의 입장도 헤아리는 집안.

그것이 청문세가인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 방향이면... 사문법재라던 그 법기장인이 설마.'

저 멀리, 벽라국 최동단의 천색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령 형. 납치는 동앗줄로 할 거요, 보쌈으로 할 거요?"

"보쌈으로 하자꾸나."

"..."

연(6)

휘이이이!

답천사막과 붙어 있는 천색성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청문령과 청문단은 커다란 보자기를 하나 챙겨 아래쪽을 훑어보았다.

"내 기억으로 그 여자가 살았던 곳이···."

그리고, 청문령의 시선이 어느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안쪽에는 일전 보았던 '백색법련' 법기점이 있었다.

"저기군."

'그 여인이었었나.'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어찌 해야 하나를 마음속으로 고민했다.

"그나저나 령 형, 골목에 다른 세가의 자제들이 있는 거 아니오?"

"음, 그렇군."

말 그대로였다.

골목 주변에는 의식 영역을 가지고 있는 수도자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 축기기 급으로 보이는 수도자조차 있었다.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한심한 것들이다. 청문세가에서 저 여인을 데려간 걸 알게 최대한 화려하게 납치하자꾸나."

"그럽시다."

그리고, 청문령과 청문단은 모래바람을 뚫고 배 형태의 비행법기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문법재는 본가에서 발주할 물건이 있어 청문세가에서 데려가겠다!"

"뭣···."

"그게 무슨···."

청문단의 우렁찬 외침에, 주변의 수도자들이 움찔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축기기 중기경의 청문단의 기세 앞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축기기 초기 수준의 의식을 지닌 수도자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청문단이 가져온 보자기를 펼쳤을 때였다.

"내 딸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좀 곤란한 일이외다."

쿠구구구!

새하얀 영기가 불어닥친다.

청문단은 움찔거리며 양 팔을 교차해 영기의 파도를 막았고, 영기는 꿈틀거리며 거대한 범의 형상으로 변해 청문단과 청문령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다시 건물들의 위로 올라가 범을 내려다보았다.

쿠구구구!

'이건, 축기 후기!?'

영기로 이뤄진 새하얀 범 역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영기의 범이 흩어지며 그 중심에서 백의를 입은 한 장년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새하얀 백의를 입고, 목에는 푸른 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있었으며, 손목에는 유리 팔찌를 비롯해서 전신 곳곳에 유리로 된 법기를 잔뜩 차고 있었다.

"본인은 공묘세가의 객경 장로, 북중호(北中虎)라 하외다. 청문세가 분들이 내 딸애한테 뭘 바라고 찾아오신 건지는 모르나, 주문하실 게 있으시다면 그런 과격한 행위가 아닌 정중한 주문 신청을 부탁드리오."

"음, 공묘세가의 객경 장로인가."

"해당 천색성을 관할하는 인물인가 보군."

청문령과 청문단은 한 발 물러서는 기색이었고, 나는 그를 기억 속에서 떠올렸다.

'이전에 나를 공묘세가에 영입하려 했던 그 축기기 수도자···!'

그가 그녀의 아버지였던 모양이었다.

"본 가문에서 찾아온 이유는···."

청문령은 찬찬히 북중호에게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얼마간 청문령의 말을 듣던 북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연유로 딸애를 납치하려 했던 것이군. 조금 화가 나긴 하지만, 청문세가의 면을 보아 참겠소. 또한 어쨌든 지금 딸애가 삼가의 자제들 때문에 곤경을 겪는 것도 맞으니···."

잠시 얼굴을 찌푸리던 북중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청문세가에 딸애가 가라고 허락을 해 주고 싶어도, 딸애는 가지 않을 거요."

"음? 그게 무슨 소리요?"

청문령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북중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저 애 어미의 유언 때문이오. 언젠가 천색성에 딸애와 혼약을 약속해 놓은 혼약자가 증표를 들고 찾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었소. 때문에 딸애는 어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천색성을 안 떠나려 하지."

"음···."

청문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안 되겠소? 나름 가주님이 명한 일인지라 중요한 일인데···."

"딸애 성격이라면, 며칠 정도라면 몰라도 그런 중요한 일로 몇 달이나 천색성에서 떨어지는 일은 맡지 않을 거요. 그리고 딸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납치한다면 본인과 한판 붙어야 할 것이고."

잠시 고민하던 청문령과 청문단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소. 아예 본인이 천색성에서 진법을 연구하기로 하지. 서 도우는 어떻소?"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청문령은 아래쪽 골목에 모여 있는 삼가의 자제들을 보며 호령을 했다.

"이놈들! 너희들이 둘러싼 그 사문법재 법기 장인에게는 청문세가가 가문의 이름을 써 정식으로 주문을 넣어야 하는 물품이 있다! 몇 년은 걸리는 물품이니, 앞으로 법기 장인을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청문세가의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알고 청문세가의 이름으로 벌할 것이니, 썩 물럿거라!"

그 말에, 후기지수들 대다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후기지수 중, 내 육체 나이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한 수도자가 허공으로 떠오르며 청문령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축기 3대 위인 청문령 수사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나도 벽씨세가의 최고 후기지수 벽문성 수사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 아슬아슬하게 정도선파 연합의 단체비승전에 떨어졌다지?"

"하하, 부끄럽습니다."

갈색 장포를 입은 벽문성은 그 특유의 긴 꽁지머리를 쓸며 말을 이었다.

"다만 청문령 수사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청문세가의 일일지라도, 지금 저와 타 가문의 여러 후기지수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내기 중에 있습니다. 청문세가의 일도 중하지만, 내기는 잠시면 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기? 무슨 내기?"

청문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고, 벽문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만드는 법기를, 우리 후기지수 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길고 긴 천색성에서의 칩거를 끝내고 법기를 제대로 다룬 후기지수와 타국 여행이라도 가기로 했지요."

"허, 지금 그러니까 청문세가의 일이 급한데 법기 장인을 데리고 여행을 가겠다고?"

청문단이 벽문성을 보며 눈에서 불을 뿜었다.

아직 축기기 초기의 기세를 가진 벽문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말이 아닙니다. 어쨌든 약조만 받으려는 것이고, 청문세가의 일이 끝난 후에 여행을 떠나도 상관없습니다."

"흠··· 북 수사께선 따님이 웬 젊은 놈들과 여행을 떠난다는데 안 말리셨습니까?"

청문단의 말에, 북중호는 선선히 말했다.

"내가 허락한 거요. 딸애가 어미의 유언에 사로잡혀 너무 천색성 안에만 박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리 하라 했지. 그리고 당연히 내가 따라갈 거요."

청문단과 청문령은 나를 돌아보았다.

"서 도우께서는 괜찮소?"

나는 벽문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내기라는 것이 대략 얼마나 시간이 걸리지요?"

"아, 그것이···."

그때였다.

파아아앗!

백색법련 안쪽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 마침 법기들이 완성이 된 모양입니다. 한 한나절만 기다려 주시면 내기가 끝이 날 요량입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 정도야 뭐···."

청문단과 청문령 역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한나절 동안 내기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나 구경하기로 했다.

얼마 후, 백색법련이 있는 법기점 안쪽의 공간에서 공간 파동이 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물법기와 같은 느낌···. 밖보다 안이 큰 법술이 사용되었나 보군.'

이전 연국 황제를 죽이러 갔을 때도, 연기기 수준의 황제가 밖보다 안이 큰 누각에 몸을 피했던 것이 생각났다.

'저 법기점 자체도 하나의 그런 누각 같은 법기인 건가?'

얼마 후 법기점의 문이 열렸고, 골목에 모인 후기지수들과 벽문성이 법기점으로 들어갔다.

청문령과 청문단 역시 북중호를 보며 허락을 구한 후, 법기점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북중호에게 허락을 구한 후 법기점으로 함께 들어갔다.

화아아악!

우우웅!

법기점 자체에 걸린 공간법술이 발동되며, 나는 법기점의 모습이 지난번에 들어왔을 때와 완전히 달라졌단 걸 느꼈다.

거대한 대 위로, 깃발, 도검, 거울, 방울, 족자, 바퀴 등.

수많은 형태의 법기들이 올라가 있었고, 예상대로 백의를 입은 그녀가 대 위에 올라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 역시 북 소저의 법기들은 뿜어내는 기질부터가 다르구려."

벽문성은 법기들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약조대로 이 법기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북 선자는 그 수사와 유람을 약조하셔야 하오."

"걱정 마시죠, 벽 수사. 다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제대로 다루는 것'의 기준은 제가 정합니다."

"알겠소, 기준을 들어 보겠소이다."

그녀는 방울 형태의 법기를 들어 올리며 법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아앗!

방울에서 새파란 빛이 뿜어지며 주변을 물들이고, 그녀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수막(水幕)을 드리웠다.

그 수막 위로는 총 열 개의 줄무늬가 떠올랐다.

"제가 이번에 만든 법기들은, 10할의 위력을 내게 되면 법기들 위로 각각 1할마다 1개의 줄무늬가 떠오르도록 설정되었습니다. 즉 여러분이, 제가 만든 법기 중 어떤 것이든 골라, 단 하나라도 법기의 성능을 6할 이상만 끌어올리면 기준을 채웠다 인정하겠습니다."

"하하하, 6할이라고?"

벽문성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습구려, 아무리 북 선자가 만든 법기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여기 모인 쟁쟁한 가문의 자제들이 법기의 6할도 못 끌어낼 것 같소?"

벽문성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누구나 6할은 다 끌어낼 테니, 누가 가장 법기의 성능을 잘 끌어올렸는지로 내기의 승자를 가려야겠군."

공묘세가의 복식을 입은 한 후기지수가 낄낄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그 후기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쎄요, 솔직히 6할도 너무 높게 잡아 욕을 먹는 게 아닌지 걱정했습니다만. 여기 계신 분들 중 법기의 힘을 2할이나 제대로 끌어내실 분이 몇이나 되실까요?"

"뭐, 뭣···!"

그 말을 들은 공묘세가 후기지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를 무시하는 거요!?"

"아니, 무시는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먼저 하지 않았습니까?"

흠칫!

일순간, 그녀의 기세가 변했다.

부드럽고 상냥해 보이던 모습이 사라지고, 노기를 띤 그녀의 눈빛이 좌중을 압도했다.

"감히 내 법기를 앞에 두고, 누구나 6할이나 힘을 끌어낼 것이라고요? 내 법기가 그리 쉬워 보였나 봅니다?

지금까지 백색법련에 전시된 실패작들을 보고 제 법기가 만만하다 생각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자리를 떠 주시지요. 저는 유람이고 뭐고 제 법기의 진가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과는 말조차 섞기 싫군요."

그녀의 서슬 퍼런 기세에, 공묘세가의 자제는 움찔 거리는 듯싶더니, 가슴을 탕탕 치며 앞으로 나섰다.

"좋소, 그러면 내가 가장 먼저 법기를 만져 보지! 법기가 그래 봤자 법기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공묘세가의 자제는 대 위로 올라가더니, 그 위에 있던 깃발 형태의 법기를 잡았다.

우우웅!

그리고 얼마 후.

피시식···.

법기는 불이 들어오는 듯하더니, 그대로 불이 꺼져 축 늘어져 버렸다.

"어, 어?"

"자신만만하시더니, 법기를 발동조차 못 시키시는군요."

"아, 아니··· 이익! 깃발 형태의 법기는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오!"

공묘세가의 후기지수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다른 법기들도 마구 만지며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법기들은 빛조차 발하지 못하고 피식 꺼질 뿐이었다.

그나마 빛이 들어왔던 것은, 그가 가장 익숙하다고 호언장담을 한 거울 형태의 법기였으나, 거울 법기조차 1할의 힘을 뜻하는 1개의 줄무늬조차 떠오르지 못했다.

"이, 이건 사기요! 뭐 이런 법기가 다 있소! 사용하라고 만든 법기가 아니잖소!"

그가 그녀를 향해 고함을 쳤으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실력이 없다면 예의라도 있으면 좋겠군요. 이만 내려가시지요. 당신이 다룰 수 있는 법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이익···!"

공묘세가 자제의 주변으로 토 속성의 영기가 빠져나왔다.

나는 북중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북중호는 혀를 차며 팔짱을 낄 뿐이었다.

"필요 없소. 딸애의 법기는 하나같이 힘을 끌어내기가 난해하지만···."

콰아앙!

공묘세가의 자제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법술을 사용했다.

쿠르르···.

그러나, 그의 법술을 그녀가 보여 준 법기에서 나온 수막에 의해 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막에는 열 개의 줄무늬가 떠올라 있었다.

"제대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상당한 성능을 자랑하니까···. 사실 아비인 나도 딸애의 법기에서 8할의 힘을 끌어내는 게 최대라오."

북중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예의도 실력도 인품도 없는 쓰레기였군. 썩 꺼지시지요."

우우웅!

그녀의 손짓에, 주변에 있던 네댓 개의 법기가 허공으로 떠올라 열 개의 줄무늬를 발하며, 공묘세가의 자제를 가리켰다.

공묘세가의 자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듯 했으나, 이내 다른 세가 자제들의 야유에 의해 대를 내려왔다.

"큭큭, 저 놈, 저럴 줄 알았네."

"제 놈이 무슨 법기를 다루겠다고."

"법기가 유명한 세가인 공묘세가에서도 법기를 못 다루기로 유명한 놈이잖나."

다시 법기를 정리한 그녀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음 분 계신가요?"

그리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녀의 법기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법기 장인이군."

청문령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믿고 맡겨도 되겠어."

"저 정도면 나름 법기의 천재 아닙니까? 아무도 법기의 힘을 제대로 못 끌어올리는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도전했지만, 가장 많이 법기의 힘을 끌어낸 이가 2할까지 끌어올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문령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뛰어나긴 하지만, 저 정도 법기는 상급 제련사라면 누구나 다 제련할 수 있소. 그리고 공묘천색, 그 발정난 놈에 비하면 아직 그 발끝만큼도 쫓아가기 힘든 게 보이는군. 공묘천색 놈이 가끔 본인에게 제놈이 만든 법기를 자랑하러 찾아왔소만, 그 법기와 비교하면 저 사문법재의 법기 장인은 아직 한참 모자라오."

청문령은 냉정하게 그녀를 평가했다.

"보아하니 일부러 법기의 회로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 같은데, 공묘천색의 법기들은 회로가 간결하고도 아름다웠지."

그는 법기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는 듯, 멀리서 법기들을 뜯어보며 평가했다.

"영력 회로가 복잡하면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도 성능이 좋은 법기를 만들 수야 있으나, 글쎄. 과연 저게 좋은 법기인지는 모르겠구려."

북중호는 청문령의 말에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아직 제 딸은 공묘천색 장로님과 비교해서 한참 모자라지요. 하지만 회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나름 이유가 있어서이니 이해해 주시지요."

"뭐, 알겠소. 본가의 일을 맡을 때만 제대로 맡아 주면 된다오."

청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기점 안에 모인 수많은 수사들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깃들었다.

그 많은 이들 중 뛰어난 몇몇 사람조차 법기의 6할은 커녕, 2할에나 간신히 미치는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몇몇은 아예 시도도 하기 전에 포기해 버리기도 하였다.

"이건 사기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점차 군중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듯했으나, 뒤쪽에서 지켜보는 북중호와 청문령, 청문단, 그리고 나의 기세에 눌려 함부로 폭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좌중을 뚫고 한 사람이 나섰다.

"벽 수사가 나섰소!"

"그, 그래. 축기기라면 어쩌면···."

후기지수들을 끌어모았다는, 벽문성이었다.

"과연 명불허전이더구려. 북 선자의 법기들은 잘 보았소. 하지만, 역시 법기의 힘을 6할밖에 안 끌어내는 건 너무 쉽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대 위로 올라서 법기들을 둘러보았다.

"축기기쯤 되면 법기를 어찌 다뤄야 하는지가 전부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소, 선자. 6할이 아니라 9할을 조건으로 내걸었어도 부족했을진대···."

그리고, 벽문성이 한 비검(飛劍) 법기를 들어 올렸다.

"보여드리겠소, 축기기 수도자의 실력을!"

우우우웅!

그의 정순지력이 비검에 빨려들어 갔다.

비검이 빛을 발하며 줄무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줄무늬 하나, 둘···.

그리고 셋!

"오오··· 줄무늬 세 개!"

"저게 축기기 수도자인가!"

"아무도 못 끌어냈던 3할까지 힘을 끌어냈어!"

그러나 줄무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줄무늬··· 네 개!"

"벌써 4할이야!"

그러나, 점차 벽문성의 안색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거, 어디까지 가려나···.'

파아아앗!

벽문성이 정순지력을 쏟아붓자, 법기에 다섯 번째 줄무늬가 떠올랐다.

"5할!"

"이런, 벽 수사께서 바로 기준에 닿으시겠는걸?"

하지만 나는 물론이고, 청문령과 청문단.

북중호는 코웃음을 치거나 혀를 찼다.

벌써 벽문성이 힘들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쯧쯧, 아무 이해 없이 힘만 쏟아 넣고 있군. 내가 해도 7할은 끌어낼 수 있겠는데···."

청문령은 혀를 차며 뇌까렸고, 그 말은 주변으로 울려 퍼져 수많은 이들의 눈총을 샀다.

축기 3대 위인이라는 청문령을 대다수가 알아봤는지, 많은 이들이 다시 험험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깜빡, 깜빡···!

벽문성의 얼굴이 시뻘개졌을 때쯤, 여섯 번째 줄무늬가 희미하게 깜빡이며 떠올랐다.

그리고.

피시싯!

비검의 불이 꺼졌다.

"되, 되었소! 보시오 북 선자. 비검의 힘을 6할이나 이끌어 내었소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싸늘했다.

"6할? 벽 수사께서 보여 주신 게 정말로 6할이 맞습니까?"

"줄무늬가 보였지 않소!"

"흠···."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고, 좌중이 그녀의 결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검(劍)을··· 왜 저렇게 다루지?"

솨아아악!

움찔!

나는 말을 뱉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시선은, 청문령을 향했던 시선들과 달리 빠르게 사라지지 않았다.

벽문성 역시 내 말을 들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축기기인 내게 함부로 말을 하는 이들은 없었지만, 다들 불만이 가득 찬 기색이었다.

그리고, 잠시 나를 바라보던 벽문성이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하하, 보아하니 수사께서는 저와 나이도 비슷한 듯한데, 어찌 그리 함부로 장담을 하시는지요?"

"아,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다만 제가 본디 검을 주로 만졌던 사람인지라 무심결에 한 소리를 했습니다."

"아, 검수(劍修)셨나 보군. 한데 이 벽 모 역시 나름 검수(劍修)라고 자부해 온 사람이외다. 그런데 어찌 처음 보는 형장께서 벽 모의 방식을 폄하하시는지?"

"검수(劍修)?"

아무래도 비검술 등을 수련하는 수도자를 말하는 듯 했다.

"그러니까, 벽 형은 지금 비검술을 주로 익혀 온 검수란 말이십니까?"

"그렇소, 벽씨세가의 검도 천재라고도 불리며 축기기에 진입한 것이 본인이오. 보아하니 형장은 축기기 각수의 단계인 듯한데, 같은 축기 초기라도 방수의 단계인 본인이 형장보단 검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겠소이까?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외다."

"···."

움찔

가만히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검의 이해를 논해?'

감히 내 앞에서?

나는 굳은 표정으로 대를 향해 올라갔다.

"무슨···."

나는 대 위쪽에 있는 법기 중, 검 형태의 법기를 하나 골라잡아, 법력을 불어넣었다.

"잘 보시오. 검(劍)은···."

우우웅!

"이렇게 쓰는 거요."

법력이 불어넣어지자, 검이 빛을 뿜었다.

줄무늬가 하나, 둘씩 떠오른다.

그리고 줄무늬는 셋, 넷을 넘어, 다섯 개가 나타났다.

"하, 하하··· 그 정도가 끝이면···."

그리고, 여섯 번째 줄무늬가 나타났다.

"···!"

벽문성은 물론이고, 좌중에 모인 수많은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눈을 부릅떴다.

명확한 여섯 번째 줄무늬!

그러나 나는 계속 법력을 불어넣었다.

정순지력은 벽문성보다 한참 달렸으나, 검에 대한 이해만으로도 검 법기의 힘을 끌어오는 건 부족함이 없다.

쿠우우우!

일곱 번째 줄무늬가 떠올랐다.

벽문성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고, 그녀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여덟 번째 줄무늬.

청문령과 청문단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고, 벽문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김이 빠진 웃음을 내보였다.

아홉 번째 줄무늬.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북중호도 흠칫 놀라며 더더욱 내 검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리고.

쿠구구구!

검 법기로 영기가 몰려들며, 마지막 열 번째 줄무늬를 형성했다.

법기의 힘을 10할 완벽히 끌어냈다!

"하, 하하···."

벽문성은 허탈한 표정으로 몇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엔 패색이 짙어 있었고,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인 의념을 뿜고 있었다.

짝짝짝짝···.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놀랍군요. 여태껏 제작자인 저 말고는 법기의 힘을 전부 끌어내셨던 분은 없으셨···."

우우웅!

나는 그녀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더욱 더 법력을 불어넣었다.

'감히 내 앞에서 검에 대한 이해를 논해?'

보여 주겠다.

무엇이 검수(劍修)인지를!

눈앞의 검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잊어라!

쿠구구구구!

검이 마구 진동하며, 열 개의 줄무늬 위로, 한 개의 줄무늬가 더 떠올랐다.

열한 개의 줄무늬!

"뭣···!"

그리고, 그동안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안색이 변했다.

"어, 어떻게···?"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검을 관조했다.

검 안쪽으로 수백 개에 달하는 영력 회로들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회로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검의 본질.

베고 찌르고 휘두르는 무기.

그 도구의 힘을 어떻게 극한까지 끌어올리는가.

그것은, 도구가 내 팔과 하나가 될 때까지 휘두르는 것이다.

단악검법, 제일초, 월악!

파아악!

내가 기수식을 잡고 검 법기를 한 번 휘두르자, 검 위에는 총 열두 개의 줄무늬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내 앞에 와서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이런 출력은 설정한 적이 없는데, 12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13개, 14개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우우웅···.

나는 정순지력을 빼내며 말했다.

"그러면 검이 망가질 것 같군요. 검이 망가지지 않는 한에선 12할이 이 법기의 최대치인 듯합니다. 좋은 법기군요."

나는 다시 검을 건네고 물러났다.

옆자리의 벽문성은 허탈하고 분한 기색으로 나와 눈을 피했다.

저 멀리 청문령과 청문단은 내 기예에 놀랐는지 감탄한 기색이었으며, 북중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단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자는 정해진 듯하군요. 수사께선 성함이 어찌 되시지요?"

그녀는 잠시 내가 건넨 검을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다.

"제 이름은 서은현으로, 서 수사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만··· 애초에 저는 원래 내기에 참여자가 아닙니다만."

"참여자가 아니시기는요. 법기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수사께서도 참여자셨습니다. 다른 분들 중에서, 서 수사 급으로 법기의 힘을 끌어내실 분이 계십니까?"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없는 것 같군요. 하면 벽 수사의 말씀대로, 여기 계신 수사께 선택할 권리를 드려야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오."

벽문성은 씹어뱉듯이 말한 후, 그대로 법기점을 나가 버렸다.

수많은 연기기 후기지수들 역시 벽문성을 따라나섰고, 그 중 청문세가 자제들은 같이 따라나서려다가 청문단에게 잡혀 법기점 한 구석에서 기합을 받기 시작했다.

"어쨌든 수사께서 제 법기들을 제대로 다뤄 주실 분이란 걸 증명해 주셨으니, 이 법기들은 전부 수사께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대 위의 법기들을 가리켰고, 나는 잠시 법기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필요 없소."

"···예?"

"나는 법기를 안 쓰는 사람인지라···."

무형검이라는 압도적인 상위 호환이 있는데, 왜 법기 같은 걸 쓴단 말인가.

"그나저나 선자께서는 저를 기억하시는지··· 예전에 물과 옷을 주셨던···."

"지금 제 법기를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내 말에, 그녀의 의념이 달라졌다.

그녀는 지금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검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 법기를 사용치 않겠다는 것은, 제 법기가 시원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뭐지···? 괴군과 같은 자질을 지녔다더니, 광증도 비슷한 건가?'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해명하려 했으나, 그녀는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이 비검들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더 좋은 것으로 드리지요. 제 성공작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휙!

법기점의 안쪽으로 그녀가 뛰어 들어갔고, 북중호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딸애는 평소에는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인데, 법기에 관련되면 성격이 조금 바뀐다네. 스스로 만든 법기에 대한 긍지가 넘치는 아이이니, 이해하게나."

"아니··· 너무 과한 반응이 아닙니까···?"

"그게··· 자기 법기의 힘을 12할이나 끌어올린 수사가 서 수사밖에 없었거든. 생전 처음 보는 자이니만큼, 그런 자가 자기 법기를 사용 안 하겠다 한 것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과민 반응한 것이겠지."

그리고, 법기점 안쪽에서 다시 그녀가 품에 검 법기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내 앞에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준수한 영기를 뿜고 있었으며, 보기만 해도 넋이 나갈 정도의 명검들이었다.

"제가 가장 잘 만들었다고 자부할 만한 검 법기들입니다. 한번 잡아 보시고 결정해 보시지요!"

그녀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기색이 깃들었다.

나는 그 기색을 못 이겨, 검 하나를 잡아들었다.

우우웅!

검의 기운을 끌어올리자, 오색찬란한 영기가 법기점 안을 뒤덮었다.

아까처럼 줄무늬가 나타나진 않았으나, 나는 이번에도 법기가 가진 힘을 초과해서 힘을 끌어냈다는 걸 느꼈다.

그녀도 그것을 느꼈는지, 황홀한 눈으로 내가 쥔 검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만, 소저. 저는 법기가 딱히 필요가 없습니다."

"···예?"

움찔!

나는 그녀의 눈을 스친 섬뜩한 기운에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자신만만했던 미소가 바로 금이 가며, 이마 위로 혈관이 꿈틀대는 게 보였다.

"허허허, 법기 장인의 자부심은 그쯤 깔아뭉개는 게 어떤가, 서 도우."

청문령이 대 위로 날아오며 말했다.

축기기 수도자가 둘이가 앞에 서자, 그녀는 섬뜩한 기색을 지우며 표정을 돌렸다.

"서 도우와 나는 백색법련 법기점의 주인, 사문법재의 자질을 지닌 자네에게 의뢰를 맡기려 하오만."

"···무슨 의뢰이지요?"

"나와 서 도우는 어떤 진법을 개발하려 하는데, 그 진법에 쓰일 진법 법기들을 제작하려 하네. 도와줄 수 있는가?"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한데 진법 개발이라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는 분야가 아닌지요?"

"맞네. 해서 나와 서 도우가 천색성에 머무르며 자네와 함께 진법 개발을 시도할 것이야. 몇 년은 족히 걸리겠지."

그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쳐다보았다.

"하면, 진법 법기를 개발함과 동시에, 서 수사께서 만족하실 만한 법기 역시 동시에 개발해보도록 하지요."

"아니, 정말 필요 없는···."

청문령은 내 허리를 쿡 찔러 내 말을 막았다.

귓가로 청문령의 전음이 들려왔다.

―어디까지 법기 장인의 자존심을 깔아뭉갤 생각이신가, 서 도우. 법기가 있으면 나쁠 건 없으니 그만 받아들이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만. 전 소저가 주는 법기를 살 여력은 없습니다."

"이번 내기의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니, 이건 그 상품을 대신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제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하고, 서 수사께서 제 법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셨으니 무상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나는 할 말이 없어져 법기점의 한 곳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북향화(北向花)라 합니다."

"···서은현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힘내십시오, 벽 형."

"저희 가문의 어른들이 그러시는데, 북 선자의 자질은 기문법재 중에서도 사문법재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문법재는 일문법재부터 삼문법재는 되어야 정말 악마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합니다. 사문법재는 그냥 뛰어난 수재 정도의 자질이라 하는데,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벽문성은 연기기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하하, 위로 고맙소. 도우들.."

"그럼 이번엔 안타깝게 됐지만, 나중에 또 재밌는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벽 도우."

"나중에 뵙겠소!"

어느 정도 벽문성의 얼굴이 밝아진 듯하자, 연기기 후기지수들은 각자 비행법기를 타고 본가로 돌아가 버렸다.

얼마 후.

벽문성의 안색이 와락 일그러졌다.

"멍청한 것들··· 그녀는 단순한 사문법재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왜 네놈들을 끌고 다니면서 그녀를 귀찮게 굴고 짜증나게 만들었는데···!"

콰앙!

벽문성은 성이 난 듯 발을 한 번 구르며 이를 짓씹었다.

"웬 처음 보는 놈팡이한테 그녀를 빼앗길 수 없지···. 괴군과 같이 악마적인 자질을 가질 그녀를 내 것으로만 만들면, 가주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건만···!"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어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유람을 떠날 때를 노리자. 아직 내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야···!"

***

"봉명성···?"

법기점의 안쪽 회의실.

그곳에서 진법의 구조도를 받은 북향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전설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맞습니다. 그 안쪽에 있는 장생과의 생장을 촉진시킬 진법을 만들어야 하고, 그 진법에 맞는 진법 법기를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나와 청문령, 그리고 북향화는 탁자에 앉아 구조도를 뜯어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잠시 우리와 얘기를 나누던 그녀는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혹여 그 봉명성에 제가 들어가 볼 수는 없는 건가요? 만약 그곳의 영맥과 기질을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 곳에 알맞은 법기를 만들기가 더욱 쉬울 것 같습니다만."

"흐음···."

"거기에다가 봉명성 역시 하나의 법보라고 알고 있습니다. 법보의 힘을 제 진법 법기들의 힘으로 빌린다면 더더욱 효과가 뛰어난 법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문령은 고개를 저었다.

"봉명성은 400년에 한 번씩만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은 있어야···."

"아, 제가 몰래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긴 합니다만."

"···!"

내 말에 청문령은 상당히 놀라는 눈빛이었고, 북향화는 희색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어떤 방법이오?"

"아, 제 벗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나는 서란에게 통하는 전음부를 하나 꺼내들었다.

***

날이 저물었다.

서란에게 연락을 돌렸고, 나는 청문령과 함께 진법에 대해 토론하고, 구조도를 계속해서 짰다.

북향화는 진법 법기의 기초를 만들어 오겠다 하며 자신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후우···."

나는 청문령과의 토론을 마치고, 잠시 회의실에서 나왔다.

'여전히 어마어마한 질문량이시군.'

청문령은 굉장히 질문이 많았다.

늘 '왜 그렇게 생각하나?' 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며, 진법에 대해 토론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예리한 질문에 찔린 부분이 아플 때도 있었지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하기도 했다.

'이미 다시 볼 수 없는 예전이지만···.'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회귀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우울한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까앙, 까앙!

문득 법기점 안쪽, 북향화의 공방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 소저도 대단하군.'

여인의 몸으로 법기를 만들기 위해 저 뜨거운 불 곁에서 망치질을 한다.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공방 쪽으로 다가가, 그녀의 작업 모습을 엿보았다.

끼릭, 끼리리릭···.

그녀는 진법 깃발 법기에 뭔가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뭔가를 두들기고 만들어간다.

문득, 나는 그녀의 얼굴에 뭔가가 피어난 것을 보았다.

파츠츠···.

그것은 사색(四色)의 문양이었다.

마치 나뭇가지 같아 보이는 그 문양은 금빛, 보랏빛, 연분홍빛, 검은빛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검은빛과 보랏빛의 문양은 서로 엮여 있어, 반쯤 섞인 듯한 모양새였다.

'저게 사문법재···.'

불티들 사이에서, 네 가지 색을 몸에 지닌 채 법기를 주조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계속해서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러던 중.

문득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서 수사. 오셨나요? 마침 부탁드릴 게 있었는데."

"부탁하실 거라니요?"

"여기."

쿠웅!

그녀가 공방 안쪽으로 가더니, 커다란 상자를 하나 들고 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끼익···.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미완성으로 보이는 검 법기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까 서 수사를 보고 영검이 떠올라 만든 법기들입니다."

'한나절 사이에, 이 많은 걸 다 만들었다고?'

북향화는 다시 한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특별히 서 수사를 위해 만든 법기들입니다. 아직 완성품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쉽게 위력을 끌어내지 못할 걸요? 한번 힘을 불어넣어 보시지요."

나는 피식 웃으며 검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다시금 검의 힘을 끌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여전히 12할 이상의 출력을 뿜으며 빛을 내었다.

'실망하려나···. 기대를 깨게 되서 미안하게 되었군.'

내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음?'

북향화는 어쩐지 멍한 기색으로, 한도를 넘어선 채 출력을 뿜어내는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은 계속해서 달싹이며 법기에 대한 것들을 읊조리고 있었고, 그녀의 눈은 법기에 빠져 있었다.

'뭔가 영감을 얻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우우웅!

그녀의 피부 위로 네 가지 색의 문양이 다시 떠올랐다.

'사문법재는 그냥 수재 수준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일반 법기 장인들보다는 뛰어난 자질인 것 같은···.'

흠칫!

문득, 나는 멍한 상태의 그녀를 보며 몸을 떨었다.

보랏빛과 검은빛의 문양.

서로 얽혀 있던 두 가지 문양이, 점차 합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연(7)

치이이이-

"핫!"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정신을 차렸고 합쳐지고 있던 두 가지 문양은 그대로 다시 피부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뭐지, 그건?'

"소저, 괜찮소?"

"아, 괜찮아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녀는 싱긋 웃더니, 내게서 다시 법기들을 받아들었다.

"이번 것도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번의 실패를 경험 삼아 다음 걸 만들어 보죠."

그녀는 법기들을 다시 들고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포기를 모르는군...'

나는 옅게 한숨을 내뱉었다.

법기는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고집이 센 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건지.

나는 그 고집에서, 나와의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얕게 웃었다.

* * *

서란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사흘 후였다.

"섭명함을 쓰게 해 줄 수는 있지만, 영석을 달라...라."

나는 바로 청문령에게 사실을 말했다.

"서, 섭명함...?"

청문령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청문세가 가주에게 다시 전음부로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쿠웅!

천색성으로, 청문세가 가주, 청문중진이 직접 영석 팔만 개를 가지고 방문하였다.

"소문이 자자한 섭명함이라니, 영석만 내면 섭명함에 타볼 기회가 있는 건가?"

그는 영석이 담긴 저물법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나와 청문령에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아시는 선배님께서 단 한 번에 한하여 섭명함에 탑승하게 해 주신다 하셨습니다. 단, 알아두셔야 할 것이 이번에 탑승하실 섭명함은 괴군과의 일전에서 다 망가진 폐함으로..."

"알고 있다. 괴군이 단신으로 흑색귀골곡과 맞선 일화는 수도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지. 그나저나 어서 빨리 섭명함을 타 보고 싶군.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 대해를 휩쓸었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라니... 다 망가진 것이라도 한 번 타 볼수만 있다면 굉장한 영광이지."

청문중진은 진중한 그의 원래 성정답지 않게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섭명함을 탄다는 말에, 청문중진은 물론이고 청문령, 그리고 북향화의 안색 역시 기대에 가득찼다.

"그, 그 전설의 장인이 만든 배의 모조품... 그 섭명함을 볼 수 있다니..."

나는 약간 어색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서란과 함께 들어가 보고, 지난 삶에서는 내가 조작도 몇 번이나 해 본 섭명함이었기에 실감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섭명함의 가치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컸던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북향화, 청문령, 청문중진을 데리고 흑풍해로 날아갔다.

북중호도 딸과 함께 가고 싶어했으나, 그는 천색성을 관리하는 관찰수도자의 위가 있었기에 함부로 천색성을 나갈 수 없었고, 청문령과 내게 북향화의 안위를 부탁할 뿐이었다.

"저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

우리는 청문중진의 배 형태 비행법기에 함께 올라타, 내가 길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섭명함을 향해 나아갔다.

"그나저나 북 소저는, 천색성을 안 떠난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북향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몇 달씩이나 떨어져 있는 중요한 일은 맡지 않는 거에요. 봉명성을 들르는 데에는 며칠이면 된다고 하니 이번 원행에 따라나선거고요."

"그렇군요. 소저의 아버님께 듣기로, 소저가 천색성에서 오래 떨어지지 않으려던 이유는 어머님의 유언 때문이라 하던데..."

"네 맞아요."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옥색의 노리개를 들어 만지작거렸다.

"어머님도 법기장인이셨어요. 그리고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의 벗과 약조를 맺어 서로 아들과 아들이 태어나면 의형제를, 딸과 딸이 태어나면 의자매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조하셨다지요."

그녀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옥색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이건 어머님이 만드신 법기에요.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나머지 하나는 제 운명의 상대에게 있을 것이라 하셨어요.

어머님의 유언에 따라, 천색성에서 계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고, 그 때문에 성에서 안 떨어지려 하는 거에요."

"그렇습니까..."

나는 그녀를 보며 웃어주었다.

"언젠가 소저의 상대가, 소저의 앞에 나타나시길 빌겠습니다."

"고마워요."

북향화는 노리개를 잡고 배시시 웃어주었다.

쿠릉, 쿠르응...

어느새 청문중진의 비행법기는 섭명함이 있는 해역에 진입했다.

"저 앞에 결계가 있을 겁니다. 뚫고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

청문중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결계가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법기를 몰고 날아갔다.

꾸우웅!

법기가 허공에 부딪히는 듯 하더니, 우리는 결계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큰 귀신이다...]

[큰 귀신이 나타났다...]

또 다시 귀무 속의 귀신들은 나를 보며 큰 귀신이라고 하며 날뛸 듯이 굴었으나, 청문중진의 기세에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얼마나 귀무를 뚫고 갔을까, 우리는 마지막 결계를 뚫고 섭명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촤아아악!

"오오, 저게 섭명함...?"

"호오, 저것이 그 흑색귀골곡의..."

"전설의 장인이 만든 명함의 모조품..."

그리고, 섭명함의 위쪽에는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송진?'

그것은 결단경의 기세를 내뿜으며, 우리를 맞이하는 송진이었다.

"으음..."

청문중진은 송진의 기세를 느꼈는지 신나던 기색에서 진중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송진은 청문중진을 넘어서는 결단 후기경의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송진 원로. 서란 도우는 어디 있습니까?"

[심해의 음기와 귀기를 모아오라고 시켰다. 지금쯤 내 본명공법을 수련하며 심해 속에서 음기를 흡수하고 있겠지.]

"그렇군요."

송진은 내게 대답을 해준 후, 청문중진이 들고 있는 영석 상자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한 번 섭명함을 띄우는 데에 영석 만 개. 섭명함으로 한 번 공간이동을 하는 데에 영석 만개. 도합 이만 개의 영석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때도 역시 이만 개의 영석을 주어야 하고,

청색귀골곡의 섭명함에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영광비용으로 영석 이만 개를 내놓아라.]

총 영석 육만 개!

어마어마한 비용이었다.

"이 무슨..."

"알겠습니다."

내가 따지려 했으나, 청문중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상자에서 육만 개의 영석을 꺼내어 송진에게 건냈다.

"대청색귀골곡의 어른께 후학이 영석을 바칩니다."

[오냐, 태도가 바른 놈이군. 난데없이 섭명함을 내놓으라던 어디 강도 놈과는 인성 수준이 달라.]

"..."

청문중진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고, 나는 송진의 시선을 피했다.

[청문세가 녀석인가. 그 창호자의 후인들이면 그럴만 하지. 그래, 본인 역시 창호자에게 빚을 진 게 좀 있으니 영석 이천 개 정도는 깎아주도록 하마.]

송진은 청문중진의 옷에 있는 청문세가의 문양을 보며, 육만 개의 영석에서 이천개의 영석을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좋다, 그럼 어디를 가고 싶다고 했지?]

"봉명성에 진입해보고자 합니다."

[봉명성에? 지금은 봉명성이 열리는 시기가 아니라 원영 후기가 아니면 봉명성의 외벽 금제는 못 깰 텐데?]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게 수단이 있습니다."

나는 준비해온 금제 파훼 족자를 꺼냈고, 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본인이 되었다면 된 거겠지. 그럼 가 볼까...]

송진은 영석들을 가지고 섭명함의 조타륜 근처로 올라갔다.

쿠구구구!

송진이 조타륜을 잡자, 오만팔천개의 영석에 담긴 영기들이 빠져나왔다.

파아아앗!

영기들은 이내 섭명함으로 빨려들어가더니, 그대로 귀기가 되어 섭명함의 귀기를 채워주었다.

섭명함이 덜걱거리며, 주변으로 음풍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음풍에, 거대한 폐함이 점차 허공으로 떠오른다.

청문중진과 청문령은 신기한 눈으로 뱃머리에서 섭명함이 떠오르는 장면을 눈에 담았고, 북향화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섭명함의 이곳 저곳을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간다.]

파아아앗!

그리고, 섭명함이 순간 귀무에 휩싸이며 공간의 외곽, 허공간으로 진입하였다.

파츠츳!

그리고 허공간에서 얼마 후, 다시 현실로 강림했고, 성제국의 서쪽 대산맥 위쪽으로 전송되었다.

허공간을 이용한 공간 전송!

[어디보자, 봉명성의 좌표가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송진은 섭명함의 키를 잡은 채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금 섭명함을 허공간으로 진입시켰다.

파아아앗!

다시금 공간의 외곽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간의 외곽 허공간.

그곳에 떠 있는 거대한 원통형의 성을 볼 수 있었다.

[봉명성에 도착했다!]

"벌써..."

"이게 섭명함인가..."

청문중진과 청문령은 섭명함의 속도에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더, 더 보고 싶은데..."

그리고 북향화는 섭명함의 구석구석을 더 들여다보지 못해서 아쉬움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그만 봉명성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후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잔뜩 시무룩한 표정이었다가도, 다시 봉명성을 보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본좌는 봉명성 옆에다가 나흘간 섭명함을 정박해 두겠다. 나흘 안에 나오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 테니, 알아서들 하거라.]

"알겠습니다."

청문중진은 진중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가져온 족자를 꺼내들었다.

파아아앗!

봉명성 외벽의 금제가 깨졌다.

청문중진은 그를 확인하자마자 주먹을 들어 봉명성의 외벽을 때렸다.

쿠우우웅!

녹빛이 번뜩이더니, 봉명성 외벽이 깨져나간다.

우리는 외벽에 뚫린 통로로 봉명성에 진입하였다.

* * *

"와아..."

봉명성에 진입하자마자, 북향화는 탄성을 내질렀다.

'뭐지?'

봉명성의 외벽 안쪽은 그냥 복도일 뿐이었다.

공간 압축이 걸려있어, 굉장히 방대한 크기이기는 했으나, 보기에는 그냥 밋밋한 복도.

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름...답네요."

치이이-

그녀는 홀린 듯한 눈빛으로 봉명성 곳곳의 장식, 그곳에 흐르는 금제들, 그리고 깨알같이 미세한 영력회로를 쓰다듬었다.

"이게 그... 전설의 장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녀는 봉명성의 벽면을 쓸었다.

잠시 그녀를 보던 나와 청문령, 청문중진은 얘기를 나누었다.

"일단 그 장생과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해줄 수 있나?"

"알겠습니다."

나는 일행을 데리고, 봉명성 1층의 수목원으로 향했다.

휘이이이-

녹빛 영기가 가득한 수목원의 안쪽.

그곳의 중심부에는, 아직 어린 수원목이 한 그루 서 있었고, 그곳에는 장생과 한 덩이가 피어나기 직전의 상태로 있었다.

"오오, 이게 장생과..."

"가주님, 따시면 안 됩니다. 저 상태의 장생과는 100년은 커녕 1년도 채 수명을 늘려주지 못합니다."

"알고 있네, 청문령. 너무 탐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잠시 장생과를 홀린듯 바라보던 청문중진은, 장생과 나무에 달린 몇 개의 꽃을 본 후 말했다.

"말했던 진법이 완성만 된다면, 이 장생과는 물론이고 다른 꽃들도 피워올려 장생과를 맺게 할 수 있는거겠지?"

"완벽히 진법이 완성된다면 아마...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좋군. 그럼 나흘의 시간동안 청문령과 서 수사는 봉명성의 환경을 조사하며 진법 구조도를 짜고, 법기장인은 진법 법기를 구상해 놓으시게.

본인은 기왕 봉명성에 온 것, 봉명성 위층들을 탐색해 볼 테니."

그는 그 말을 한 후, 봉명성의 2층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흠, 난 장생과와 수원목을 중심으로, 이 인근의 영맥을 조사하며 구조도를 구상해 볼 테니, 서 도우는 수목원 바깥을 조사해서 진법 외부를 구상해 오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돌아다니며 봉명성을 연구해 보죠."

청문령은 장생과 주변을 계측하며 진법의 구조도를 짜기 시작했고, 나는 봉명성 1층의 외곽을 돌며 청문령이 짜는 내부 진법을 보완할 외부 진법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향화는, 내 주변을 따라다니며 봉명성 곳곳을 관찰했다.

"아, 정말 황홀하네요. 고마워요. 이런 멋진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그녀는 저물법기에서 작은 도구 같은 것을 꺼내, 봉명성의 벽면을 뜯고, 그 안쪽의 영력회로들을 관찰하며 말했다.

짤그락, 짤그락..

순식간에 벽면이 해체되고, 그 안쪽의 영력회로들이 드러났다.

북향화는 알 수 없는 장비들을 수 개나 꺼내서 영력회로들을 뜯고, 해체하고, 관찰했다.

"그럴 것 없으십니다. 다 소저의 복인 걸요. 그리고... 일전에 저와 제 동료에게 물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내 말에, 그녀는 손을 멈칫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 죄송하네요. 제가 워낙 사막의 여행자 분들께 물을 많이 대접해드려서... 어떤 분이셨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는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덕분에 정말 살 뻔 했습니다. 원래 성정이 좋으셨던 거군요."

나는 봉명성 외곽의 영맥을 보며 진법을 구상했고, 북향화는 봉명성 이곳저곳을 뜯어보며 수첩 같은 것을 꺼내 뭔가를 계속 기록했다.

그녀가 뜯어낸 벽면들은 얼마 후면 다시 자가수복이 되었기에 다시 고쳐놓을 필요는 없었다.

북향화는 자신이 뜯어놓은 벽면들이 자가수복되는 과정들 역시 세세하게 수첩에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나와 북향화가 다른 구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움찔!

북향화가 몸을 움찔했다.

그녀가 시선이 닿은 곳에는, 괴군의 꼭두각시.

그 잔해들이 있었다.

"이, 이것들은 설마..."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괴군의 꼭두각시 잔해들에게 다가갔다.

다 망가진 폐품들이었으나, 그녀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

"괴, 괴군의 작품들...!"

그녀는 눈이 돌아가서 잔해들로 달려가 잔해들을 헤집고, 뜯어보고, 자신의 저물법기에 마구 쓸어담기 시작했다.

'엄청난 반응이군...'

하기사, 법기를 제련하는 연기사들에게 괴군은 따지고 보면 업계의 극한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터였다.

'거기다가, 일문법재. 북향화보다도 몇 줄은 높은 재능을 지닌 이일테니...'

그녀가 침을 흘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였다.

"괴군의 괴뢰들이 소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나 봅니다?"

"말이라고 하시나요? 당연하죠! 그 분의 작품들은 잔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귀중품들이라고요!"

"허어..."

북향화는 아까 벽면을 뜯어내던 장비들을 이용해, 괴군의 괴뢰들을 분해하고 해체해 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망가진 부분이 많아서 아쉽네요. 잔해들도 잔뜩 가져간다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멀쩡한 잔해가 있으면..."

"멀쩡한 잔해 말입니까?"

나는 문득, 이전 봉명성을 돌아다녔을 당시 발견한 괴뢰를 떠올렸다.

'맞아, 상당히 멀쩡한 괴뢰가 한 기 정도 있었어!'

"아, 따라와 보시지요, 소저. 멀쩡한 괴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앗, 정말인가요?"

그녀의 얼굴에 잔뜩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이전에 갔던 장소로 갔다.

그리고 이전과 다를 것이 없이, 그곳에는 그 괴뢰가 있었다.

사람 몸통 크기만한 크기의 벌 괴뢰.

그것이, 상당히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북향화의 손 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익히 그녀의 감정이 짐작이 된다.

"이, 이건..."

그녀는 이 벌 괴뢰는 바로 뜯어보지 않고, 우선 잡고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안쪽에... 회로들만 조금 망가진 것 같군요. 외관도 멀쩡하고, 안쪽의 부품들도 조금 상한 것 외에는 거의... 멀쩡하군요. 이건..."

그녀의 얼굴에 흥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조금만 다 손보면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오호..."

북향화는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괴뢰를 조심스레 저물법기에 집어넣었다.

"정말, 이곳은 보물천지네요."

"보물천지라..."

정작 내가 왔을 때는 쓸모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었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이 1층에 피어있는 장생과 한 알 정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런 곳 역시 보물천지가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소저 같은 분에게는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괴뢰 잔해들을 보고 그냥 잔해더미라고만 생각했는데..."

"아하하,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그녀는 벌 괴뢰 외에도 주변의 잔해들을 쓸어담으며 말했다.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부 쓰레기일 뿐이죠. 하지만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북향화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괴뢰의 잔해 중, 영력회로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는 작은 판 같은 것을 꺼내들어 바라보았다.

"평범한 잔해라도, 쓰레기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보물이 되는 게 아닐까요?"

"인연이 있는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라..."

"뭔가가 쓰레기일지 아닐지는, 운명과 인연에 따라 달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실 이 세상에 쓰레기는 없다고 봐요.

그저, 운명과 인연이 닿지 못한 물건들이 있고, 운명과 인연이 제대로 닿은 물건들이 있는 거죠."

"..."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운명에 대한 생각에 작게 감탄하였다.

나와는 다른 관점의 운명관이었다.

'그저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했건만, 이런 관점도 있겠군.'

단순히 벗어나야 할 것이 아닌.

그 자체로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

'운명이라...'

내가 잠시 운명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어머, 이 부분은 왜 아직까지 수복이 안 된 거지?"

그녀가 한 괴뢰의 잔해를 저물법기에 집어넣고, 그 잔해 뒤쪽에 나 있는 외벽을 보고 있었다.

그 외벽에는 작은 상처가 난 채로 영력회로들이 잔뜩 드러나 있었고, 아직까지도 회로들이 자동수복되지 않고 있었다.

"봉명성에는 자동수복기능이 있을텐데... 이 부분은 왜 또..."

북향화는 장비들을 꺼내 그 부분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기기긱...

그녀의 뒤쪽, 작은 기둥 같은 곳이 열렸다.

동시에 그곳에서 작은 암기가 튀어나왔다.

'기관진식..!'

채앵!

나는 빠르게 달려가 암기를 쳐냈다.

"꺄악!"

"괜찮습니까, 소저?"

"저, 저는 괜찮은데..."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엇..."

내가 달려가서 그녀의 뒤쪽에서 암기를 쳐낼 때, 그 풍압에 그녀가 살짝 앞으로 쏠렸고, 그 덕에 그녀의 장비가 봉명성 외벽의 영력회로 중 한 곳을 깊숙히 푹 박아버린 상태가 되었다.

"저, 뭔가 잘못 건드린 거 같은데요."

"심각한...겁니까?"

"심각하다기 보다는, 봉명성의 숨겨진 기능 중에 하나가..."

쿠구구구!

"발동한 것 같네요."

"....!"

갑자기 봉명성 전체에 기이한 압박이 감돌았다.

그 압박은 주변을 맴돌며 내 전신 곳곳, 그 안쪽의 정순지력을 압박했다.

'이건...!'

내 법력이 제약당하며, 순식간에 축기기 극초기였던 내 수준이 연기기 극초기 수준까지 내려가 버렸다.

북향화를 보자, 그녀의 체내에 있던 법력은 거의 말라붙다시피 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수행 수준이, 총체적으로 한 단계씩 낮아진 건가...?'

거기다가 범위를 보니, 봉명성 전체가 잠시 이런 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청문세가 가주인 청문중진은 결단기이니 축기기 수준으로 수행이 제약당했을 것이고, 청문령은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수행이 제약당했을 터였다.

"일시적으로 제가 봉명성 내부의 어떤 금제를 촉발시킨 모양이에요."

"죄송합니다, 소저. 괜히 소저를 밀치는 바람에..."

"아니에요, 괜히 장비로 봉명성을 쑤셔대던 제 잘못이죠. 제가 다시 원래대로 해 볼게요."

그녀는 다시 황급히 길쭉한 장비를 외벽에 넣어 회로들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건...?'

봉명성의 안쪽.

괴군의 잔해들, 혹은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의 흔적과 함께 사방팔방에 널브러져 있던, 봉명성의 수호석상들이, 덜그럭 거리기 시작했다.

절걱, 절거걱...

수호석상들이 점차 수복되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뭐지, 금제의 영향을 받는 건가?'

맞는 듯 싶었다.

이 압박감이 생긴 이후부터, 영기의 흐름이 다시 저 수호석상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저, 금제 자체를 다시 없애는 건 가능한 겁니까?"

"예, 가능해요. 회로들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면 된다만,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서고 있는 수호석상들의 기운을 감지했다.

'아직 회복중인 탓인지, 다들 대략 연기기 초반쯤의 수준이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망가진 본래 몸을 수복하며 더 강해지겠군.'

나는 내 몸을 관조했다.

우웅!

법력은 제약당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공은 잘 움직였다.

'으음...?'

강환을 띄워보니 여전히 잘 띄워졌다.

내 무공은 법력이 제약당해도 아무 제약이 없는 것이었다.

연(8)

나는 무형검을 휘둘러 석상들을 쓸어버리려 했으나, 문득 뒤쪽에서 회로를 수리하는 북향화가 신경이 쓰였다.

'쓸어버릴 순 있지만, 괜히 청문령이나 청문중진에게 말하게 되면...'

문득 청문중진의 입에서 '도우'라는 말이.

청문령의 입에서 '선배님'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상상되었다.

'그럴 순 없지.'

나는 무형검을 꺼내려던 것을 멈추고, 그냥 평범하게 허공에 강기를 덧씌웠다.

우우웅!

'오기조원 경지로도, 연기기급 괴뢰들쯤은 충분하다.'

콰과광!

나는 허공에 강기를 씌운 채, 눈 앞의 석상들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석상들은 저항하려하는 듯 했으나, 아직 수복이 완전히 되지 않은 탓인지 붕강기에 휩쓸려 모두 갈려나가 버렸다.

우우웅!

그러나 석상들을 부순 후에도 석상들은 다시 파르스름한 빛에 휩싸여서 자동으로 수복되고 있었다.

'청문중진이나 청문령은 괜찮으려나...'

한 단계씩 경지를 떨어뜨리는 금제를 보아, 청문세가 가주인 청문중진은 경지가 제약당했어도 축기기급일 터였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하지만 청문령은 연기기급으로 떨어졌을 터.

"북 소저. 금제 해제는 멀었습니까?"

"거의 다 끝나 가요. 이제..."

파아아앗!

"이것만 다시 수복하면!"

그녀가 꼬챙이 같은 장비로 회로를 만지자, 회로가 빛나며,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저절로 수복되던 봉명성의 수호석상들은 다시 잔해가 되어 쓰러져 버렸다.

"휴우, 겨우 끝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소저. 역시 대단하시군요."

"아니에요, 어차피 일시적으로 촉발된 금제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해제될 금제였고, 전 그저 그걸 앞당긴 것 뿐인걸요."

북향화는 땀을 닦으며 다시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북 소저,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저는 청문령 수사가 무사한지 보고 오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녀는 선선히 수긍했고, 나는 청문령이 있을 1층 수목원으로 날아갔다.

수목원의 중심부, 그곳에선 청문령이 수목 속성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거대한 진도(陣圖)를 그린 채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진도의 외곽에는 수호석상으로 보이는 석상들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청문 수사,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소. 주변에 널린 게 목 속성의 영기인데다가, 이 주변의 영맥은 이미 조사가 끝나 내 진도에 끌어들여 법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에 위협적이진 않았소만..."

아무래도 청문령에게 그 정도 금제는 큰 위협은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방금 그건 도대체 뭐요?"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방금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수목원 한쪽에서 파공성이 울리더니, 비둔술과 함께 청문중진이 날아왔다.

"방금 그건 또 뭐냐!"

"아, 가주님."

청문령이 청문중진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사문법재 연기사가 봉명성의 회로를 건드려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예, 그렇습니다."

내 설명에, 청문중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지금 그녀는 어디 있지?"

"현재 봉명성 외곽에 있습니다."

"안내해라. 확인할 것이 있다."

나는 청문중진을 데리고 북향화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 가주님. 어쩐 일이신지요?"

"할 얘기가 있다. 방금 네가 금제를 촉발시켜 봉명성에 이현상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다."

"예, 맞습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이현상이 일어났을때, 봉명성 상층부를 둘러보던 나는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기이한 것이요?"

"그래, 봉명성 최상층, 그곳에 숨겨져 있던 어떤 기이한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아무래도, 봉명성에는 특별한 금제를 촉발시키면 드러날 수 있는 뭔가가 남아있던 듯 했다.

그는 북향화에게 말했다.

"한 번 더 그 이현상을 촉발시킬 수 있겠나?"

"가능은 합니다."

"흠... 하면 내가 딱 신호를 내릴 때에 맞춰서 현상을 촉발시켜야 하는데..."

"아, 그거라면 문제 없을 듯 합니다."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건드린 금제는, 보아하니 봉명성의 축을 이루던 금제 중 하나로 보입니다.

금제의 상태로 보아, 이에 대응되는 또 다른 금제가 셋은 더 있어 보이고요.

즉, 이러한 축이 봉명성에 사방에 존재하며, 그 축을 따라 봉명성의 각 층들이 형성된 것이니, 봉명성 최상층에 저와 가주님이 함께 올라가, 또 다시 축을 찾아서 이 금제를 촉발시키면 될 듯 합니다."

"흠, 알겠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따라와라. 령이는 가장 중요한 내부진법을 구상해야 하지만, 네가 맡은 외부 진법의 중요도는 높지 않으니.

금제가 촉발될 동안 네가 이 법기사를 지키고 있어라. 금제가 발동하면 봉명성의 수호석상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듯 하니..."

"알겠습니다."

나 역시 청문중진이 발견했다는 결계가 무엇인지 궁금했기에, 군말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나는 청문중진과 북향화와 함께, 봉명성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북향화는 봉명성 최상층의 축으로 가 그곳의 벽면을 뜯고 해체했다.

최상층은 공간압축이 되었다고 해도 다른 층보다 조금 좁은 편이었기에, 나는 저 멀리서 청문중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봉명성 최상층의 중심부에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몰랐던 뭔가가 있었나보군.'

[시작해라!]

그리고, 청문중진이 법력을 담아 사자후를 터트렸고, 그 말을 들은 북향화가 작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기이잉!

그녀가 뭔가 회로를 만지작거리자, 다시금 기이한 압력이 돌며 법력을 압박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파아아아앗!

청문중진이 있던 봉명성 최상층 중심부.

그 위쪽으로, 새하얀 빛이 터져나오며 숨겨져 있던 결계가 나타났다.

'저건 뭐지?'

나는 살짝 놀라서 그 결계를 자세히 관찰했다.

요족의 지각으로도 아무 변화가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결계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내 지각이 약한 탓인지, 그도 아니면 봉명성을 만들었다는 장인이 그만치 위대한 존재였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번에 나타난 저 결계는 분명 어마어마한 결계라는 것이었다.

'진한 공간파동... 저 결계 안에 또 다시 공간이 압축되어 있다. 저 안쪽으로 가면 뭔가 또 다른 장소가 나타난다는 거야...'

내가 그쪽을 바라볼 때였다.

결계를 관찰하던 청문중진이, 결계의 약한 지점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그러나 결계는 우릉거리며 진동하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그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들리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입모양을 보아하니 대략 '축기기 수준의 힘으론 뚫리지 않는다'라는 말인 듯싶었다.

청문중진은 계속해서 결계를 관찰했고, 나는 북향화의 주변에서 우리에게 달려드는 수호석상들을 박살냈다.

그리고 약 일 각의 시간이 흐르자, 금제는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금제가 사라지자 결계 역시 사라졌고, 청문중진이 다시 우리에게로 날아왔다.

"협조해주어 고맙다. 일단 너희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있거라. 남은 시간동안 하던 것을 하며 진법과 법기를 구상하도록 하여라."

그는 결계가 나타났던 곳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나는 이곳에서 남은 며칠간 기력을 모아보도록 하지. 축기기급의 힘으로는 못 뚫지만, 며칠을 모아, 청문세가의 비술로 한 번에 내지른다면 일순간 결단기급 일격은 될 테니..."

"알겠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원래의 목적대로 봉명성 곳곳을 조사하고, 진법의 구조도를 짰다.

동시에 셋이서 모여 얼마간 진법에 대한 회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다.

* * *

"일단 오늘로서 인근에 대한 기초적인 조사와 내부진법의 구상도는 끝이 났네."

"외부진법 역시 구상이 끝났습니다, 청문 수사의 내부진법을 완벽히 보조할 수 있을 겁니다."

"진법 법기 역시 봉명성과 연결해서 진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법기를 구상했어요."

어찌어찌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할 일을 전부 마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천색성으로 가서 진법을 다시 보고, 고치고, 진법 법기와 외진법, 내진법간의 연계를 다시 한번 맞춰봐야겠지. 그리고..."

청문령이 위층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가주님께서 최상층의 결계를 깨려 하신다고?"

"예."

"흠, 성의 금제와 직결된 결계는 함부로 깨면 뭐가 작동할지 모르는데... 특히 봉명성 같은 고대 유적은 말이야..."

그는 살짝 걱정을 표했다.

"내게 결계의 분석을 맡겼으면 빨리 분석할 수 있었다만... 아무래도 내게는 장생과 생장 진법의 구상을 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나 보군."

"아무래도, 장생과는 가주님께도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요."

나는 청문령과 함께 위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얼마 후, 청문령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역시 올라가 봐야겠어. 남은 시간은 하루도 채 안 되지만, 일단 결계를 분석해 봐야겠다. 괜히 가주님이 뭔가를 잘못 건드려 성의 금제가 더 촉발될 수도 있으니까."

그는 그 말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고, 나와 북향화 역시 그를 따라 같이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최상층.

그곳에선 청문중진이 오른 주먹에 영기를 불어넣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의 오른 주먹은 시퍼렇게 빛나며 주변 공간을 진동하게 하고 있었다.

'저게 청문세가의 비술인 건가...'

저 안에 담긴 기운이 폭발한다면, 한순간 원영기에 필적할 일격을 낼 수 있을 듯 했다.

"가주님, 진법의 구상은 기본적인 틀은 전부 잡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돌아가 세세한 틀을 잡는 것이고... 가주님께서 금제와 연결된 결계를 깨시려 한다는 말씀에 얘까지 왔습니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청문중진에게 말을 올렸다.

"하지만 금제와 연결된 진법은, 함부로 건드리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청문령. 하지만 모처럼 가주가 봉명성까지 왔는데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야 면이 서겠는가?

천인기 선배들께서 말 그대로 싹 긁어갔더군. 몇몇 부적류, 주류(酒流), 쓸데없는 장식 법기류 등만 남아있고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끄음..."

청문령은 옅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하면 결계를 분석할 시간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간을 주시면 최대한 문제가 안 생기는 쪽을 타격하실 수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연기사! 너는 다시 금제를 촉발시켜서 결계를 드러나게 하라!"

"네."

북향화는 청문중진의 명령을 받고 다시 벽면을 뜯어 금제를 촉발시켰다.

쿠르르릉!

다시금 금제가 촉발됐고, 결계가 나타났다.

청문령은 결계를 자세히 뜯어보았고, 금제가 촉발되는 시간이 다할 때마다 북향화는 다시 금제를 촉발시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가주님, 이 부분을 타격하시면 됩니다."

"그래, 이제 슬슬 섭명함도 출발할 시간이 됐으니 얼른 결계 안쪽만 확인해보고 나가도록 하지."

쿠구구구!

청문중진의 오른주먹에 모인 힘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 그럼 다시 금제를 촉발시켜라!"

북향화는 다시금 금제를 촉발시켰다.

지난 며칠간 봉명성 이곳저곳을 뜯어보고, 네 군데의 축이라는 곳을 다 돌아가며 금제를 촉발시킨 결과, 북향화는 어느덧 금제를 자유자재로 껐다켰다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파아아앗!

금제가 촉발되고, 결계가 나타난다.

청문령이 결계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이 부분입니다."

그리고, 금제에 의해 한 단계 낮아졌어도, 청문중진의 주먹에 담긴 힘은 원영기에서 결단기 수준으로 낮아졌기에 여전히 거대한 힘이었다.

꾸구구구궁!

청문중진이 주먹을 휘두르자, 결계가 뒤흔들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청문중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고, 청문령과 나, 그리고 북향화 역시 기대가 어린 얼굴로 결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청문령의 안색이 변했다.

"자, 잠깐, 가주님! 잠시 멈추십시오!"

기이이잉!

결계로부터 붉은 빛이 번져나온다.

그리고, 번져나온 붉은 빛은 이내 봉명성 전체를 물들였다.

째애앵!

결계가 마침내 깨져나갔다.

하지만, 결계에서 나온 붉은 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청문령? 문제가 없을 것이라 하지 않았나?"

청문중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청문령을 바라보았고, 청문령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문제가 없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결계 안쪽에서 결계를 비틀어 놨었군요. 이 경우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흠... 일단 퇴로부터 확보해 놓지."

청문중진은 결계에서 물러나 바로 봉명성의 외벽을 후려쳤다.

콰아앙!

외벽이 무너지고, 이제 저 바깥쪽의 외벽 금제만 다시 뚫으면 나갈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외벽의 금제가... 달라졌습니다."

나는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외벽의 금제 역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내가 가져온 금제 파훼 족자 역시 변이된 금제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청문중진의 안색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섭명함이 출발할 시간이 다 됐건만! 전음부는 안 통하나!"

그러나 나도 청문령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청문중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자신이 깨부순 결계를 돌아보았다.

"일단, 안쪽에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군."

* * *

봉명성 바깥, 허공간.

그 옆쪽에 섭명함을 정박시킨 송진이 봉명성을 올려다 보았다.

봉명성 전체가 시뻘건 빛에 휩싸여 있었다.

[이 금제 반응은... 그 놈들, 봉명성의 조정실을 건드렸나보군. 큭큭... 이제 약속 시간도 다 됐는데, 그놈들 실력에 이 금제를 깨고 나올 리도 없으니... 자비를 베풀어 조금 더 기다려 줄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던 송진은, 망설임 없이 조타륜을 잡았다.

[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조정실을 건드린 놈들이니, 내 알 바는 아니지. 제자 놈 수행이나 보러 가야겠어.

그리고 어차피, 조정실에 진입했으면 탈출로도 있을테니 못 나올 것도 걱정할 필요 없겠지...]

쿠구구구!

섭명함이 귀무에 휩싸이며 허공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문득, 조타륜을 잡고 있던 송진이 봉명성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으로 봉명성에 들어간 것도 800년 전인데... 탈출로... 제대로 남아 있겠지...?]

* * *

'이곳은...'

청문중진과 함께 들어간 결계 안쪽은, 거대한 서고(書庫)였다.

아니, 정확히는 서고 '였었던' 곳이었다.

"하, 여기까지, 아주 싹싹 긁어갔군."

청문중진은 허탈한 목소리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고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책장은 책 한 권 없이 휑했고, 곳곳에 먼지만 쌓여 있었다.

그리고.

"이 주술진이 결계 내부에서 결계를 비틀었던 주술진인 듯 합니다. 이 주술진 때문에 제가 분석을 잘못한 듯 하군요..."

서고의 바닥과 벽면, 천장에는 피로 그려진 기이한 주술진이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보아하니, 요족(妖族)들이 사용하는 요술진인 듯 한데, 요족어는 아예 할 줄 몰라 정체를 읽기가 어렵습니다."

청문령은 주술진을 분석하며 혀를 찼다.

청문중진 역시 진중한 눈빛으로 주술진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나는 주술진에 적힌 언어들, 그리고 주술진에 그려진 문양을 읽으며 몸을 흠칫 떨었다.

'이건, 해룡족의 문양인데?'

난 왠지 바로 이 곳에 이런 짓을 해놓은 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또 당신인가, 서휼?'

도대체 그는 뭘 목표로 하는 것일까.

내가 주술진들을 관찰할 때였다.

"그런데 저 대는 뭐지?"

청문중진이 서고의 중심, 한 작은 대를 가리켰다.

'저 대는...'

나는 그 대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 대 위에는 작은 홈 같은 것이 패여져 있었는데, 그 홈은 내가 지난 생에 봤었던 봉명인이 들어갈 크기와 딱 맞는 크기였다.

'봉명인을 저기다가 집어넣으면 뭔가가 작동되는 구조인가...'

"일단 저 곳을 조사해 보지요."

청문령을 필두로, 나와 북향화 등 진법사와 연기사들이 대 주변을 관찰해 보았다.

청문중진은 진중한 표정으로 우리가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나는 문득, 대 주변에 있는 책장 중 하나로 시선을 돌렸다가 작은 글씨를 발견하였다.

'고어(古語)인가?'

나는 성제국 황실 서고에서 서책들을 읽던 당시, 고어들 역시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무리없이 글귀를 읽어내렸다.

글귀의 내용은 대략 이해했다.

-구더기들을 위해 굳이 비승의 축복까지 준비할 이유가 무엇일까. 질 좋은 시체를 더 열심히 파먹으라고?

"....?"

'이걸 구더기라고 해석하는 게 맞나?'

대략 '시체 파먹는 벌레'란 의미의 고어였기에 구더기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가리키는 시체 파먹는 벌레... 구더기들은, 비승을 준비하는 이들을 일컫는 건가? 누가, 왜, 무슨 심정으로 이런 글귀를 남긴 거지?'

난 글귀를 바라보고, 그 주변에 무슨 장치나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지를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는 일단 그 글귀에서 신경을 껐다.

그렇게 주변을 조사할 때였다.

"찾았다!"

"찾았어요!"

청문령과 북향화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청문령은 천장에서, 북향화는 대 아래쪽의 바닥을 뜯어 회로를 건드리며 말했다.

우우웅!

동시에, 천장과 바닥, 두 부근에서 두 개의 새하얀 진법이 나타났다.

"이건..."

"전송진(餞送陣)..?"

청문중진과 나는 진법을 보며 읊조렸다.

"타, 탈출구가 있었군!"

청문중진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으나, 청문령은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어디로 통하는 전송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

그러나 청문령은 굳은 얼굴로 잠시 전송진을 보다 말했다.

"이 전송진을 통하더라도, 전송진을 이용하려면 공간 압력을 견뎌야 하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공간 압력을 견디게 해줄 전송부나, 전송영패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본디 공간을 넘어선다는 것은, 공간 외곽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승천문에 도전하는 것이 천인기 수도자뿐인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상계와 통하는 승천문 안쪽의 공간 압력은 천인기 수도자들이나 견딜 수 있는 압력이었으니까.

"...육신을 단련하는 청문세가의 공법을 익힌 나라면, 공간 압력에 견딜 수 있다."

청문령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나 축기기급이라면 공간 압력에 저항하는 건 시도도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하지만, 난 한 명 정도라면 내 실력으로 함께 보호하며 전송진을 이용하는 게 가능하다."

청문중진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쨌든 내 실책으로 이리 되었으니, 본 가주가 책임을 지고 전부를 바깥으로 데리고 가는 게 맞겠지. 내가 전송진을 이용해, 한 명씩 데리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마.

그렇게 한 사람씩 왔다갔다 하며 빼낸다면, 모두가 탈출할 수 있을 것이야."

그 말에 청문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나 가주님, 그렇게 되면 가주님이 부상을 입으실 수도 있을진데..."

"괜찮다, 괜한 욕심을 부려 결계에 들어오고자 했던 내 잘못이니,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맞겠지. 우선 청문령 너부터 함께 데리고 나가겠다."

그는 차례로 나와 북향화를 가리켰다.

"청문령을 데려다놓은 후, 너희도 차례로 데리러 오마. 기다리거라."

"알겠습니다."

"네."

아무래도 같은 혈족인 탓인지, 청문중진은 청문령을 우선 데려다 놓겠다고 하였다.

납득할만한 이유였고,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었기에 우리는 선선히 수긍했다.

"그럼,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한 번 가 볼까!"

청문중진은 청문령을 결단기의 힘을 사용해 보호한 후, 그대로 아래쪽의 전송진으로 뛰어들었다.

파아아앗!

전송진이 빛을 내며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전송이... 잘 된 것 같군요."

"그러게요. 도착한 곳이 이상한 곳은 아니었으면... 아앗!"

그리고 그때였다.

피시식...

청문중진이 사용한 전송진이, 빛을 잃고 꺼져 버렸다.

북향화는 당황한 채로 전송진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어찌된 거죠?"

"잠시 보지요."

나는 전송진을 보며,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를 알아챘다.

'제길, 충전식 전송진이다..!'

평소에는 봉명성의 힘을 끌어 유지를 하지만, 한 번 사용하면 봉명성으로부터 힘이 충전이 될 때까지 시간이 걸려, 다음번 사용에 시간이 걸리는 식의 전송진이었다.

아무래도 청문령 역시 다급했던지라 미쳐 알아채지 못했던 사실 같았다.

내가 알아낸 사실을 북향화에게 설명해주자, 그녀는 불안한 기색으로 결계 바깥을 바라보았다.

"충전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가요?"

결계 바깥에 만연해 있는 붉은 기운들이, 어느새 결계 안쪽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북향화는 안색이 새하얘진 채 말을 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 붉은 기운이 봉명성 전역에 가득 차면, 뭔가 더 강력한 금제가 가득찰 것 같은데... 보통 저런 류의 금제는 살상금제인 경우가 많아요."

"..."

"저,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이를 악물고, 천장에 있는 전송진을 바라보았다.

딱 봐도, 청문령과 청문중진이 전송된 전송진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을 것이 뻔한 전송진.

하지만, 이제 방법이 없었다.

"북 소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그게 뭐죠?"

"대신, 이 방법을 청문세간에 알리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예...? 아, 비밀이 있으신 거군요. 알겠어요. 비밀을 알리지 않겠다고 맹세할게요."

"그렇다면..."

우우웅!

나는 무형검을 손에 쥐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 무형검으로 나와 그녀를 동시에 감쌌다.

공간의 압력은 무형검으로 막는다!

결계 바깥에서 붉은 기운이 점차 이쪽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나는 바깥쪽을 흘긋 본후, 다시 천장의 전송진을 올려다 보았다.

"그럼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너무 가깝..!"

파아아앗!

두 사람의 몸에 무형검을 두른 채, 나는 그렇게 전송진의 빛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연(9)

피이이잇!

'크으읍!'

어마어마한 압력이 무형검을 압박해 온다.

수많은 색채와 빛살이 우리를 스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더욱 더 정순지력을 짜내어 무형검에 공급하였다.

얼마나 죽을 둥 살 둥 무형검을 유지하며 버텨 냈을까.

번쩍!

파아아앗!

무형검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지고, 나는 어느덧 내가 웬 전송진의 위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봉명성 안쪽의 공기와는 다른 공기가 맴돈다.

피시싯···.

발 아래쪽의 전송진은 그대로 꺼져 버렸다.

아무래도 이 전송진 역시 주변 영맥을 끌어모아 충전되는 충전식 전송진인 듯 했다.

'이곳은 어디지?'

내가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꼬물꼬물.

"아! 미안합니다, 소저."

나는 품 속에서 꿈틀대던 북향화를 놓아주었다.

"푸하! 어, 어떻게 잘 나왔네요."

한참 동안 내 품속에 있느라 더웠던 건지, 아니면 공간 전송의 압력 때문에 머리에 열이 뻗친 건지.

그녀의 얼굴은 발그스름했다.

"그나저나 방금 보여 줬던 그건 뭐죠? 뭔가 투명한 막 같은 게 우리를 덮었는데···."

"음, 그건···."

나는 말을 돌리려 하다,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빨간 것을 눈치챘다.

"그나저나 소저, 아직도 얼굴이 붉군요. 혹시 어디 안 좋으십니까? 전 의원이기도 해서 진맥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 아니! 제 말에 먼저 대답이나 하세요! 그건 뭐였는지 설명부터 해 주시죠?"

어쩐지 북향화는 평소와 달리 흥분해서 내게 소리를 쳤다.

'하긴 너무 갑작스러운 일들이 많았으니 심신이 피로해진 탓이겠지.'

나는 납득을 하며 무형검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주위를 돌리기로 했다.

"험험, 그나저나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봐야겠군요."

주변은 동굴 안쪽이었다.

동굴의 구조를 보니, 사방에 길이 뚫려 있었고, 미로같은 구조였다.

"아니, 말 돌리지 마시고 그게 뭔지 설명 좀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건 분명 결단기급의 기세를 뿜어 댔다고요!"

"소저, 일단 우리가 있는 동굴을 빠져나가고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북향화는 조금 진정하는 듯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동굴을 돌며 빠져나갈 길을 살폈다.

하지만 미로처럼 꼬인 탓인지, 어느 길로 가도 다시 전송진이 있던 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흐음, 이 동굴··· 진법(陣法)인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그런데, 그런 진법인 것 치고는 상당히··· 인위적인 티가 나지 않는 걸요?"

나는 미로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파훼하기가 제일 까다롭다는 천연진법인 것 같군요."

간혹, 나무들의 배열이나, 동굴의 형상, 혹은 지형 자체가 자체적으로 진법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 세운 진법은 규칙과 법리가 있기에, 파악만 할 수 있다면 파훼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천연적으로 세워진 이런 진법의 경우, 그 규칙과 논리가 인간의 것이 아닌 자연의 것이기에, 파훼의 난이도가 극악해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저는 토 속성의 공법을 익혔으니, 토둔술로 그냥 땅을 파고 나가죠?"

"저도 역시 토 속성 공법은 익혔습니다. 함께 땅을 파 보지요."

나와 북향화는 법결을 맺으며, 동굴 벽을 향해 동시에 토둔술을 사용하였다.

쿠구구국!

그러나.

구국, 구구국···.

"자, 잠깐···."

토둔술은 어째선지 잘 먹히지 않았고, 북향화는 뭔가를 알아챘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 암석, 영기를 흡수하는 재질을 지닌 괴흡석(乖吸石)이에요! 영기를 흡수한 후 어그러뜨려 분산시키기에, 법술이 잘 안 통하는 암석인데···."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방법이 없다.

결국, 이 방법을 또 시도해야 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요. 소저,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시지요."

"아, 아까 사용했던 그걸 또 사용하시려 하는군요!"

그녀는 눈을 빛내며 몇 걸음 떨어져, 품에서 수첩과 붓을 꺼냈다.

"···그건 또 왜 꺼내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서 수사께 가장 어울리는 법기를 만들어 보이겠다고요. 서 수사에 대해 잘 알수록 최적화된 법기를 만들어 드릴 수 있죠."

"아직도 안 포기하셨습니까?"

"어머, 포기가 뭐죠?"

나는 옅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했듯이, 이건 청문세가에는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맹세까지 했는걸요."

"그럼···."

쿠구국!

나는 허공을 바르쥐었다.

의식 영역에 강환이 섞이며, 무형검으로 화한다.

"의식 영역이···."

북향화는 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관찰하며 계속해서 수첩에 뭔가를 기록했다.

투웅, 투웅!

나는 무형검을 휘두르기 전, 주변의 벽면에 내공으로 격공장을 날려, 내공이 괴흡석에 통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괴흡석은 영기만 흡수해 어그러뜨리는 건지, 영기에 비해 불순한 내공은 잘 흡수하지 못했다.

'됐다.'

그렇다면, 충분히 뚫을 수 있다.

쿠구구구!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는 무형검을 잡고 그대로 올려베었다.

단악검법, 등맥!

콰과과광!

무형검이 하늘로 치솟으며, 동굴의 천장을 박살 내 버리고 하늘이 보이는 바람구멍을 뚫어 버렸다.

저 너머로 별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드리웠다.

"후우, 뚫었습니다."

"···."

나는 옆에서 나를 보고 있던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는 중이었다.

"북 소저···?"

"···아. 그렇군요."

그녀는 뭔가 알았다는 듯, 약간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단기 선배셨군요. 이 위력이면 틀림이 없네요. 축기기인 척 숨겨 오셨던 결단기 선배셨다면, 제 법기가 눈에 당연히 안 차셨겠죠. 법기가 아니라 단화(丹火)에 제련한 법보(法寶)를 사용하셔야 할 경지의 선배께, 제 법기는 너무 약했던 거군요."

"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결단기는 아닙니다."

"예···?"

나는 팔을 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정 못 믿으시겠으면 기운을 흘려서 보시지요. 전 정말로 결단기가 아니고, 그저 결단기급의··· 특이한 법술을 익혔다고 생각해 주시지요."

"흠··· 그렇게까지 말하시는 걸 보면 정말 결단기는 아니신 거겠죠."

그녀는 옅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해요."

"그러지요."

북향화는 품에서 나뭇잎 형태의 비행법기를 꺼내 땅에 던졌다.

법력을 먹은 법기는 우리 두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고, 우리는 나뭇잎에 타서, 바람구멍으로 올라갔다.

휘이이이―

바닷바람이 코를 찔렀다.

"이곳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방은 바다였다.

그리고 우리가 빠져나온 동굴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섬에 있는 미로 동굴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별자리를 확인하며 우리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곳은, 답천사막 서쪽···.'

성제국의 서쪽, 금신천뢰문이 있던 대산맥 너머.

극서(極西) 지방의 바다인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서남쪽인가.'

나는 별자리를 통해 대략 위치를 추정했다.

'그러면 다시 동북쪽으로 몇 주만 더 날아가면 금신천뢰문이 자리했던 대산맥이 보이겠군.'

다행히 내가 완전히 아예 모르는 곳으로 떨어진 건 아닌 듯했다.

'보아하니 청문령과 청문중진은 이쪽과 아예 반대, 극동쪽. 답천사막 동방의 국가들에 떨어진 것 같은데, 오히려 그쪽은 내가 가 본 적이 없어 떨어졌으면 상당히 곤란할 뻔했어.'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다행입니다, 북 소저. 다행히 동북쪽으로 가면 제가 아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은 성제국 대산맥 너머 극서의 군도로···."

그러나, 북향화는 어쩐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북 소저?"

"결정했어요."

그녀가 두 주먹을 쥐고 말했다.

"서 수사가 결단기 수사라도, 그렇다면 결단기 수사에게 어울리는 법보를 만들겠다고!"

"아니··· 저는 결단기 수도자도 아닐뿐더러···."

"그럼 축기기에는 법기로 사용하고, 결단기가 되면 체내에 집어넣어 단화로 법보화시킬 수 있는 최상급의 법기를 만들겠어요! 생각해보니 제가 물렀었네요. 결단기급 수사라 할지라도, 그조차 탐을 낼 법기를 만들면 될 것을! 저 자신에 대한 도전이니, 막지 말아 주시죠."

"···."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법기가 필요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겠군.'

"···일단 보시지요, 북 소저."

쿠구구!

나는 무형검을 다시 바르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옆의 바다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바다가 갈라지며, 밤바다에 풍랑이 일었다.

거대한 파도가 주변으로 쓸려났고, 나는 다시금 우리에게 덮쳐 오는 파도는 물론, 물방울 하나하나를 전부 무형검으로 튕겨 내었다.

"솔직히, 진심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법기가 필요 없습니다. 이 무형검은 모든 법기와 법보의 압도적인 상위 호환이지요.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며, 그 강도는 제 능력이 받쳐 주는 한 끝없이 올라가고, 예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위력도 방금 보셨듯이 바다를 가르고 산을 함몰시키는 수준입니다. 거기에 제 의식이 커질수록 함께 성장하는 제 분신이나 다름없기에, 제게는 솔직히 신외지물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정말로 포기란 걸 할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정 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말해 보세요."

나는 오히려 도전욕을 불태우는 그녀에게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 평범한 재료로도 쉽게 만들 수 있는 법기일 것.

둘, 나도 추후에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제작 난이도는 어렵지 않을 것.

셋, 무형검이 가진 무한대의 변화를 최대한 담아 낼 수 있는 법기일 것.

'이 정도면 포기하려나?'

평범한 재료로 높은 위력을 지닌 법기를 만들려면 수많은 회로를 법기에 새겨야 한다.

하지만 내가 제작 난이도가 낮은 법기를 요구했으니, 너무 회로가 많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무형검이 지닌 말도 안 되는 변화무쌍함을 전부 담아 내야 한다.

사실, 무한회귀를 하는 내게는 전부 필요한 조건이기는 했다.

내가 회귀를 하면서 구하기 어렵지 않은 재료여야 했고, 언젠가 그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녀 말고 최소한 다른 연기사에게 제련을 맡겨도 성공할 수 있을 수준이어야 했으며,

내게 도움은 되어야 했으니 무형검의 변화를 담아 낼 수는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실상 이 조건이면 포기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제작 조건이 정말 까다로우시군요."

"말했잖습니까. 난 정말 신외지물이 필요 없는 몸이라고."

"···한번, 해 볼게요."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진짜로, 그런 걸 만들어 내겠다고?'

"···뭐, 마음대로 하시지요."

나는 결국, 그녀의 의지 앞에 한 수 물러나 주기로 했다.

"자 그럼. 이만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성제국 대산맥 너머의 군도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만?"

북향화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군도보다 더 서쪽으로 가면, [세상의 끝]이 나온다는데, 그쪽으로 한번 가 보면 안 될까요?"

"[세상의 끝]?"

"네, 서 수사도 어릴 적에 동화책은 읽어 보셨겠죠? 서쪽, 북쪽, 동쪽, 남쪽. 사방의 끝으로 가면 세상의 끝이 나온다고요. 이 많은 바닷물이 어떻게 세상의 끝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여기까지 왔으면 세상의 끝은 한번 봐야 하지 않나요?"

"아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수도계에 몸담은 지도 벌써 몇백 년째.

21세기의 인류를 뛰어넘은 기술들이나 법술들도 있었던지라,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 수준은 중세 수준이라는 걸.

'세상의 끝 같은 건 없고··· 땅이 둥글다는 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 청문령과 청문중진이 동쪽에 떨어졌다면, 오히려 서쪽으로 가면 둘과 가까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아예 이 세상을 한 바퀴 돌아서 둘과 합류해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서쪽으로 가며 청문령에게 통하는 전음부를 계속 작동시켜 봐야겠군. 청문령이 일정 범위 내에 있다면 전음부가 통할 테니까.'

"좋습니다. 그럼 우선 조금 더 서쪽으로 가 보지요."

"너무 기대되네요. 전설로만 듣던 세상의 끝을 본다니···."

"하하···.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북향화는 저물법기에서 흰색 배 형태의 비행법기를 꺼냈다.

"제가 만든 법기에요. 조작은 제가 할 테니 서 수사는 정순지력을 불어넣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얼마 후, 배 형태의 법기는 빠른 속도로 서쪽을 향해 질주했다.

***

사흘이 지났다.

'도대체, 뭐지?'

"와아, 이게 세상의 끝이구나."

'이게, 맞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완전히, 상식을 벗어났다.

"서 수사도 와서 보세요!"

"···아, 미안합니다. 북 소저. 왠지 조금 어지러워서."

"어머, 비행 멀미가 있으셨었나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전 조금 더 구경하고 있을게요!"

뭔가가 이상하다.

이 세계는.

"세상에, 하늘이 제 발아래에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북향화가 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세상의 끝.

그곳에는, 마치 잘려 나간 듯이 바닷물과, 바닷물 아래에 대지가 끊겨 있었으며, 그 너머로는 완전히 새파란 하늘이었다.

그리고 저녁이 다가오자 저 아래에서 별들이 부상하는 것이 보였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게!

이 세계는 둥글지 않았다.

이 세상은 원형으로 평평하게 생겼으며, 이렇게 뚝 세상이 끊겨 있다.

"···이게, 세상의 끝···인 겁니까. 저도··· 처음 보는군요."

"역시 서 수사도 처음 보는군요. 하긴, 대다수의 사람들이 넓은 대륙 안쪽에서 일생을 보내거나 하니까요."

나는 천천히 세상의 끝에서 저 아래 하늘을 관찰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말 신기하죠? 이···."

텅, 텅···.

내가 다가가 허공을 만지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이 너머의 허공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막 같은 것이 바닷물이 쏟아지는 걸 막고 있다니. 어렸을 때 들었던 동화에는 세계순력(世界盾力)이라는 힘이라고 나왔었어요. 외부의 세계로부터 우리 세상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며, 동시에 바닷물이 아래로 새지 않게 보호해 주는 역할도 한다나 봐요."

나는 이 세계의 동화나 전설 같은 건 잘 모른다.

아니,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전부 미개한 중세인들의 전설과 미신 취급을 하며 거짓으로 치부했었다.

텅, 텅, 텅!

나는 몇 번 더 이 세계순력이라는 것을 두들겼다.

"···소저, 이 세계순력이··· 그러니까, 이 세계의 끝뿐이 아닌, 전 세상을 둥글게 뒤덮고 있는··· 겁니까?"

"네, 동화책 안 읽어 보셨나요?"

"···그렇군요."

나는 너무나 기이하고 이상한 이 세계에 대해, 기괴함을 느꼈다.

'투명한 막이 평평한 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그건 마치, 어항(魚缸)이나 양식장(養殖場) 같은 형상이 아닌가···?

이 세계는, 대체 뭐지?

연(10)

이 세계가 어항이라면, 도대체 비승은 뭘까?

승천문은 또 무엇이고, 봉명성은 무엇일까.

'아니, 아니다.'

나는 과격한 망상들을 지웠다.

'그냥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을 수도 있지. 과대망상 하지 말자.'

무엇보다 이 세계가 어항 같은 곳이라면.

금신자 양수진은 왜 다시 그 좁은 어항에 들어왔단 말인가?

상계에서도 허공을 찢고 다시 내려올만큼 강대한 존재가 왜?

'그냥 이 세상이 이렇게 생긴 것이겠지. 과대망상을 가지지 말자.'

왜냐하면, 너무 큰 상상을 하면 결국 심마(心魔)가 올 것 같았으니까.

"...둥글지 않은 세상이라..."

하긴, 생각해보면 대륙을 뒤덮는 천인기 수도자들이 마구 활개치는 세상이다.

그런 세계의 구조가 애초에 지구와 똑같으면,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세계가 얼마나 튼튼해야 그런 걸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 둥근 세계라 하니까, 생각해보니 다른 동화도 떠오르네요."

"....?"

북향화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릴때 읽은 동화책 중에는, 저 멀리 별들이 있는 성계(星界)에도 사람들이 사는데, 성계의 사람들은 둥근 땅에 붙어산다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재밌죠? 땅이 둥글다니. 둥근 땅에 붙어있으면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매달려 있어야 하려나요?

정말 재밌는 상상력을 발휘한 동화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나는 어느덧 노을이 지고, 하늘을 덮기 시작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성계...'

무수한 별하늘.

어쩌면, 저 별하늘은 제대로 된 행성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세상만 이런 기이한 구조인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 말고도 이런 기이한 구조의 세상이 더 있을까?

이 세상만 이렇다면, 이 세상은 도대체 왜 이런 기이한 구조인 것일까?

나는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봤지만, 머리만 복잡해 졌다.

'됐다, 일단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없다.'

가장 좋은 건, 천인기 이상이 되고 나서 직접 이 세계의 구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눈 앞의 일에 집중하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계의 끝에서 얼마간 하늘을 구경하던 북향화와 함께 다시 배에 올라탔다.

"정말, 아름답네요. 하늘이 발 아래에 있는 저 곳은..."

"...그러게 말입니다."

"휴우, 이제 갈까요?"

"좋습니다. 가주님과 청문 수사도 걱정하고 계실테니, 이만 돌아가죠."

"맞아요, 아 그리고 극서지방이면... 다시 벽라국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려나요?"

"못해도 한두달은 잡으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가 걱정하겠네요."

나는 북중호를 걱정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본디 북 소저의 내기에서, 상품으로 걸린 건 법기들이 아닌 북 소저와의 유람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유람한 걸로 치는 게 어떻습니까."

"그냥 허겁지겁 돌아가는 게 유람이라고요? 서 수사는 아깝진 않나 보네요?"

"아까울 게 무에 있겠습니까. 저야 원래 세상 곳곳을 잘 돌아다니던 산수인지라 유람은 실컷 했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밤바다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녀의 의념에서 아쉬움의 색을 읽어냈다.

"...돌아가면서, 그래도 성제국이나 연국 등에 들려 조금씩은 유람을 해 보지요."

"네, 그것도 좋겠네요."

"....?"

'왜 기분이 안 풀린 것 같지?'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의념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 *

휘이이이-

며칠 후.

우리는 동쪽으로 움직인 결과, 다시금 금신천뢰문의 터가 있는 대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금신천뢰문이 터를 잡았던 대산맥의 쇄천봉이라는 곳입니다. 북 소저도 들어보셨겠지요?"

북향화는 쇄천봉의 절경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지난 생에는 나와 김영훈에 의해 다 무너졌던 곳들이었는데, 멀쩡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

그녀가 쇄천봉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고서에서 봤어요. 가장 높은 봉우리에 금신천뢰문의 신물(神物), 선보(仙寶) 천뢰번(天雷幡)이 보관되어 있었다죠? 그 역시 천하에 없을 위대한 선보였다고 하던데.

장인으로서 그것 못 본 게 한이네요. 천하삼대신물을 보고 싶었는데, 다 망가진 섭명함 밖에 못 봤으니 너무 아쉽네요."

천하삼대신물(天下三代神物)은 전 대륙에 위명을 울렸던 세 문파의 신물(神物)을 의미했다.

흑색귀골곡의 섭명함(涉冥艦)

금신천뢰문의 천뢰번(天雷幡)

창천개벽문의 청천갑(靑天鉀)

그 보물들은 하나하나가 선보(仙寶), 혹은 선보에 맞먹는 규격 외 법보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금신천뢰문의 천뢰번은 금신자 양수진이 선계에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는 진짜배기 진선의 법보였다.

섭명함이 명계도 건널 수 있다는 전설이 있듯이, 천뢰번은 천겁(天劫)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전설도 있었으니, 그 위력과 위상은 직접 보지 않아도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작 청천갑은 별 소문이 없지만 말이지...'

애초에, 창호자가 볼 때마다 입고 있는 그 푸른 갑옷이 규격 외 법보라는 청천갑일 확률이 높았고, 볼 때마다 단단해 보이는 것 외에는 별 기능이 없어보였다.

때문에 누구도 청천갑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청문세가 역시 가문의 기밀이라 외인인 내가 물으면 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뭐, 애초에 신외지물엔 별 관심 없어서 상관도 없지만.'

북향화는 천뢰번이 머물렀다는, 쇄천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앗...!"

쇄천봉의 아래쪽.

저 아래에서 약초를 캐는 듯 하던 몇몇 노인과 젊은이가, 비행법기로 하늘을 날던 우리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북향화는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저, 저 분들은 왜 저희한테 절을 하는 거죠?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음... 북 소저. 천색성 바깥으로 한 번도 나와보신적 없으신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 벽라국 동부를 벗어난 적은 별로 없어서요. 연국에 간 적도 있긴 하지만. 한 사흘 정도만 법기 때문에 출장을 갔다가 서둘러 왔던지라..."

"아, 그러셨군요."

나는 그녀에게 일반인들이 수도자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천색성이나 벽라국 동부는, 공묘세가의 영역인지라 양질의 법기가 끊이지 않아 법기를 찾는 수도자들이 아주 많지요.

때문에 범인들도 수도자들에 대해 상당히 친숙한 반면, 연국이나 성제국은 수도자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범인들이 태반입니다. 그냥 전설 속에 전해지는 신선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요."

"아, 그렇군요..."

'왜 북중호가 자기 딸이 벽문성 놈이 말한 유람을 조건으로 한 내기를 했는데도 가만히 있었는지 알 것 같군,'

바깥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아, 그런데 저 분들, 뭐라고 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군요."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그녀는 악인도 아니었고, 사막의 여행자에게 물을 선뜻 건낼 정도로 선인이니, 그녀라면 범인들에게 간섭해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우우웅!

그녀는 비행법기의 고도를 낮추어 간절히 뭔가를 빌고 있는 이들에게 내려갔다.

"아, 시, 신선님이시다!"

"선인님들이 기도에 응답했어!"

"선인이시여! 부디 저희 마을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성제국어로 우리에게 빌었고, 나는 성제국어를 통역해서 알려주었다.

"저런, 어르신.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녀는 그 중 가장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촌로에게 물었고, 난 촌로에게 그녀의 말을 통역했다.

"무슨 일이오?"

외견상으로 보면 건방져 보이겠지만, 지금 내 정신적인 나이만 치면 이 촌로는 솔직히 핏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생을 넘기면 이제 원립보다도 더 늙은이가 되겠군.'

속으로 자조섞인 웃음을 지으며, 촌로에게 묻자 촌로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선인님! 저, 저희 마을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매번 보름마다 지네 요괴가 나타나 혼기가 찬 처녀와 총각을 잡아먹습니다.

하여 관아에 신고도 했으나, 관아에서도 묵묵부답이고, 무림고수님들을 초청하여 물리쳐 달라 했으나 전부 지네 요괴의 밥이 되었습니다!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관아에 요청을 했다면, 수도가문들이 움직였을텐데...'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대략, 서악이라는 산간지역의 마을은 평화로웠으나,

어느 날부터 지네 요괴가 나타나 마을의 혼기가 찬 처녀와 총각을 보름마다 잡아먹었다.

요괴는 지성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공물을 바쳐도 말이 통하지 않았고, 관아에 신고도 해 보았으나, 수상한 행색의 사람들이 지네에게 다녀온 후론 오히려 관아에선 그들을 모른척 했다고 한다.

서악 마을은 답답함에 못 이겨 무림고수를 초빙해 요괴를 잡아달라 했으나, 오히려 무림고수들은 전부 잡아먹히고 요괴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더 많은 마을사람이 잡아먹혔다고 했다.

'수상한 행색의 사람들이 다녀간 후로는, 오히려 관아가 모른채를 했다고?'

수도가문과 요괴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유추해 낸 후, 내가 유추해낸 사실까지 북향화에게 말해주었다.

"어쩌겠습니까, 소저. 복잡한 일인듯 한데, 도우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듯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돕고 싶어요. 만약, 서 수사의 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요."

"하하, 제 일정은 급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북 소저가 돕고자 한다면 저 역시 도와드리지요."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눈 후,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노인과 다른 약초꾼들에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소. 안내하시오."

"가, 감사합니다...!"

우리는 촌로의 안내를 받아, 배에서 내려 서악 마을로 갔다.

마을의 집은 수 채가 무너져 있었고, 곳곳에 지네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깊은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매번 지네 요괴가 찾아오려 할 때마다 막으려 애쓰지만, 지네 요괴는 늘 거슬리는 건 부숴 버리고, 숨어있던 처녀와 총각을 찾아 집채로 부숴버리고 먹어치웁니다..."

"..."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집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숨어있거나, 그도 아니면 마을을 떠나려 준비중이지요. 아마 선사님들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희 서악 마을은 그대로 해체될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촌로에게 물었다.

"알겠소, 일단 그 지네 요괴는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있소?"

"저 봉우리 너머에 큰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안쪽에 삽지요..."

나는 북향화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한번 갔다와 보겠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