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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臨終)(5)

시작된다.

두쿵!

김영훈이 두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잠시 후.

두근, 두근!

김영훈의 내단에서 강기가 뿜어져 오르며 심장을 자극했다.

심장을 직접 자극하는 고통이 상당한지, 김영훈은 이를 짓씹으며 버텨냈다.

"하, 하하.. 짜릿짜릿하군."

얼마간 심장을 자극하던 김영훈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은현아, 정말 대단하구나. 넌 어떻게 이걸 버틴 거냐. 하하하..!"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곁에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심장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도, 김영훈은 단순히 고통에만 스스로를 맡기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어떠한 홀황경에 맞닿아 있었다.

'저 눈...'

그리고 저 의념의 흐름.

나는 저 모습을 알고 있었다.

무공을 겨룰 때도 몇 번은 저 눈을 하며 홀황경에 빠지니까.

새 무공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김영훈의 기혈과 내공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단전의 내단과 중단전의 심장으로, 내공이 이어지며 어떠한 연계를 형성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리고, 강기로 자극되며 불안정했던 그의 심장소리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자기 수명조차 극복해내는 재능...인건가.'

내단에서 흐르는 기의 흐름이 심장과 완전히 연결된다.

심장은 피를 뛰게 하고, 내단은 강기를 보내 자극시킨다.

두근, 두근!

김영훈의 생명과 무공이 완전히 일체되는 듯 했다.

그에게, 두 개의 심장이 생겨났다.

피를 돌게 하는 염통.

강기를 돌게 하는 내단.

두근 두근 두근...

얼마 후, 김영훈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안정되었다.

'허 참..'

김영훈은 눈을 뜨며 힘겹게 웃었다.

"무의식 중에도 심장을 계속 뛰게 했으니, 이제 심장마비는 걱정할 게 없지. 하지만, 그래도 아프군."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강기로 매 분 매 초 동안 심장을 억지로 뛰게 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을 리 없었다.

후우우웁!

그러나, 김영훈은 고통에 찬 얼굴로 다시 집중을 시작했다.

다시금 새로운 무공이 창시된다.

후우우우..

그가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깊게깊게 숨을 내뱉으며, 그의 의식에 흐르는 고통을 전신으로 퍼트리고, 다시 전신에서 의식영역 전체로 분산시킨다.

그는 호흡에 따라 고통을 조절하고 있었다.

"호흡을 멈추면 다시 고통이 시작되겠지만, 이 호흡을 계속하는 한 이 고통 역시 극히 완화될 터. 하하, 어떠냐!"

그는 새로운 무공으로 자신의 한계를 가볍게 찢어버린 후, 내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나 나는 쉬이 웃을 수 없었다.

'식은땀이로군.'

김영훈의 전신은, 비오듯 젖어있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피로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방금 그 시간.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으나, 그 시간동안 김영훈은 극악의 고통 속에서 필생의 의지력을 쥐어짜낸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신적 압박을 받았을텐데도, 김영훈은 저렇게 히죽 웃으며 농담을 하는 것이었다.

"김 형.."

"뭘 그렇게 보냐."

김영훈은 호흡을 안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 네놈도 이랬다. 그런 눈빛은 너 자신에게나 보내거라. 나 역시..."

김영훈은 눈을 감고, 칼집에 손을 얹었다.

그가 의식을 집중한다.

"나 자신의 명을 뛰어넘어, 나 자신을 더욱 다그칠 시간을 만들어낼 테니..!"

우우웅!

김영훈이 웃었고, 그의 의식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김영훈의 전신은 마치 황금빛 불티 속에서 타오르는 듯했다.

황금의 빛살이 그의 도신에 몰려든다.

그리고, 이전과 같이 김영훈의 내공이 혈관과 경락을 형성하며, 그의 생명력과 같이 연동된다.

능광도가, 또 다른 내단으로 화하기 시작했다.

김영훈의 내단은 그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김영훈의 능광도는 그의 내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무(武)는 그의 생명(生命)이었다.

필생의 집중력과 함께, 김영훈은 손에 쥔 도신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심장마비도, 고통도 전부 재능으로 극복해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하늘이 내리칠 하늘의 벌.

천뢰(天雷).

구구구구-

김영훈의 수명이 끝이 나고, 시간이 흐르자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내 수명이 본디 밤이었고, 그날 새벽녘에 먹구름이 꼈다면.

김영훈의 수명은 본디 낮이었고, 밤하늘이 지상을 덮은 지금에서야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우릉, 우르릉...

먹구름 안쪽에서 청뢰(靑雷)들이 일렁거렸다.

간다.

김영훈의 심어가 울려펴진다.

동시에, 푸른 섬광이 하늘에서 김영훈에게 내리꽂혔다.

파아아아앗!

그리고 동시에.

김영훈이 필생의 집중력으로 쥐고 있던 도를, 그대로 휘둘렀다.

특별한 필살기도, 오의도 아니었다.

그저 능광도로 사용한 올려베기.

김영훈이 평소에도 연습해오던, 단순한 올려베기였다.

'말 그대로 능광(凌光)...'

그러나, 그 속도는.

지금까지 준비해온 그 빠르기는.

나 자신조차도 순간 놓쳤을 정도로 가공할 빠르기였다.

내가 천뢰를 가를 때, 나는 예뢰안으로 번개의 위치를 미리 예언하고 그곳에 맞춰 무형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김영훈은, 그냥 순수한 빠르기로 번개와 동시에 도를 휘둘러 도신과 벼락을 맞대었다.

금광(金光)이 청뢰를 사르고 하늘로 올라가, 그대로 먹장구름을 찢어발긴다!

"아아..."

김영훈이 해맑게 웃었다.

갈라진 먹구름 사이로, 무수한 별빛들이 내려왔다.

김영훈은 별하늘의 빛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도신은 가공할 강기에 그대로 녹아버려, 아예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나.

그는 그럼에도 도의 손잡이를 놓지 않고 웃었다.

"봐라, 넘지 않았느냐!"

왈칵!

어쩐지, 내 가슴 속에서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 그를 보며 웃어주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벗이 내일을 함께 살아간다면.

300년이 외롭지는 않으리라.

* * *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김영훈은, 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 곳곳에 주름이 져 있었다.

"...김...형...?"

"으음..."

김영훈은 내가 띄워준 수계 법술의 물방울 위로, 자신을 비춰보았다.

"이, 이게..."

"..."

오기조원에 이르고 환골탈태를 이룬 후.

그 후에는 거의 노화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늘 몸에 활력이 넘치고 생명력이 흘렀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생명의 숙명(宿命).

노화(老化).

우리의 시간은 멈춘 게 아니었다.

하늘이 허락해 준 세월 안에서 최대한 생기있게 지냈을 뿐.

이제 하늘이 더 허락치 않으니.

생명 그 자체도 빠르게 빠져나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연해진 표정으로 김영훈을 바라보았고, 그는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마간 스스로를 덤덤하게 보던 김영훈은 피식 웃었다.

"괜찮다. 사실 처음부터 이 쪽으론 크게 기대 안 했으니..."

그는 주름이 낀 얼굴로 옅게 웃었다.

"도리어, 나는 지금 기쁘다. 천뢰를 가르며 새로운 영역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으니. 무(武)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는데, 어찌 절망만 할소냐!"

김영훈은 도를 쥐며 말했다.

"내일 늙어죽을지언정, 영원히 가족을 보지 못하고 이 세계에서 스러질지언정.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이마. 무학(武學)의 역사(歷史)에 한 획이라도 더 긋고 떠나겠다!"

그 말을 한 후, 김영훈은 도를 잡은 채 수련을 이어나갔다.

황금빛 빛무리를 두르고, 그는 매일같이 새로운 무학을 만들어내기도, 기존의 무학을 정립하기도, 깨달음을 깨닫고, 갈무리하기도 했다.

약 칠주야가 지났다.

김영훈의 얼굴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차 노쇠해져 갔다.

머리가 새하얗게 새었으며, 얼굴에 주름이 더욱 더 늘어났다.

무공을 수련하며 전신이 근육으로 알차게 차 있었으니만큼 몸이 쪼그라들지는 않았으나, 점차 기력이 약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김영훈은 그래도 도를 놓지 않았다.

그는 실시간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무를 수련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칠 주야가 되었을 때의 어느 날.

그가 내게 말했다.

"은현아. 우리가 처음 이곳에 떨어졌던 그곳 말이다."

"예. 등선향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등선향... 혹시, 그곳에 갈 수 있느냐?"

"등선향... 말입니까..?"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승천문이라는 게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진 것도 어쩌면 그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고. 죽을 날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면, 승천문을 눈으로 보고라도 죽고 싶구나."

"김 형..."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쓰디쓴 진실을 토해내야 했다.

"...승천문은, 1000년에 한 번 열립니다. 이미 우리가 왔을 것이라 추정되는 그 승천문은... 70여 년 전 그 날. 우리가 이 세계에 떨어진 그 이후 닫혔습니다."

"그러냐.."

김영훈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것도 괜찮다. 우리가 처음 왔던 그곳으로 가 보고자 하는 것이니. 등선향에 갈 수는 있느냐?"

"...제가 알기로."

나는 등선향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을 설명했다.

"등선향은 안쪽에 있는 존재가 바깥으로 나오기는 쉽지만, 바깥의 존재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등선향을 둘러싼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원영기 수도자이거나, 혹은 공간균열에 휘말려 우연히 등선향에 떨어져야 하는 걸로 압니다."

"흐흠, 그럼, 등선향의 결계가 있다는 곳은 어디이냐?"

나는 답천사막의 중앙, 그 위에 숨겨진 천공도가 등선향이며, 그 위쪽 허공에 등선향을 둘러싼 결계가 있다고 설명을 했다.

"흐음..."

잠시 생각하던 김영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다. 들어가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그 곁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떠나가는가.

나는 김영훈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섭명함에 올라탔다.

지난 17년간 가동시킬 일 없었던 섭명함이 다시 위로 떠올랐다.

음풍을 타고 오르며, 거대한 흑색의 폐함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시죠."

김영훈은 허공답보를 펼쳐 섭명함의 위로 뛰어올라 탑승했고, 나는 조타륜을 잡고, 김영훈의 마지막 여행을 송별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출항!"

쿠구구구!

흑색의 폐함이, 어떤 비행법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답천사막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답천사막에는 한나절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나는 섭명함을 조작해, 정확히 등선향의 아래에 위치한 곳에 섭명함을 세웠다.

쿠구구구!

섭명함은 모래사막 한 가운데에 몸을 뉘였다.

"흠, 저 위쪽에 등선향이 있다는 거냐?"

"예."

당장 아래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창명하고 맑은 사막의 하늘만이 보일 뿐.

그러나, 나는 저 위쪽에 거대한 환상결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가 볼까..."

김영훈은 허공답보를 펼쳐 하늘로 올라갔고, 나 역시 허공답보를 시전해서 그를 따라갔다.

얼마간 허공을 밟고 올라갔을까, 저 위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로군. 어디 한번.."

부웅!

김영훈이 능광도를 휘둘렀다.

번쩍!

황금빛이 불타오르며 허공을 타격한다.

콰아앙!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결계가 능광도를 막아섰다.

나 역시 무형검을 휘둘렀지만 결계는 멀쩡했다.

"하하, 그렇군. 알았다."

감영훈은 결계를 확인한 후, 섭명함으로 다시 내려왔다.

"저 위쪽이 등선향... 우리가 떨어진 곳이구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옅게 미소를 짓더니 맑게 웃었다.

"우리는 저곳을 통해서 왔을 확률이 높겠지. 고맙다 은현아. 그래도,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죽을 수 있게 해 주어서."

머리는 하얗게 새었고, 얼굴엔 주름이 잔뜩 졌으나 그 미소에선 여전히 김영훈이 보였다.

김영훈은 그날부터 다시 도를 들고 무에 매진하였다.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 * *

하루가 지날수록 김영훈의 모습은 폭삭 늙어갔다.

점차 눈빛에선 빛이 흐려져 갔고, 머리카락도 슬슬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영훈의 도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은 저렇게 노쇠해졌건만, 그가 평생을 이룩해 온 것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아니, 노쇠해질지언정 그 순간에도 그가 쌓아올린 무예는 높아지는 듯 했다.

죽음을 앞둔 김영훈의 무학은 점차 알기 힘든 흐름이 많이 섞이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설마, 월도입천에 이르고 27년만에 또 다시 새 영역에 이르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겠지.'

등봉조극에서 그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 몇 백년을 지샜는가.

또 다시 새 경지를 개척한다고?

아무리 김영훈이라도 그것은 힘들 터였다.

나는 김영훈의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동시에 그의 무학을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다.

그리고, 김영훈이 천뢰를 가르고 48일째.

나는, 김영훈이 내일 죽을 것이리란 것을 짐작했다.

덜, 덜덜..

그는 이제 완전한 노인이 되었다.

도를 쥔 손이 벌벌 떨린다.

도법을 펼치기 시작하면 떨림은 멎었으나, 그는 무공을 펼치지 않는 순간에는 그냥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다.

'49일을 버티지 못하고... 가시겠군요.'

김영훈의 몸을 뒤덮은 죽음은, 이젠 그 크기가 커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형님.'

당신은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시겠지요.

더는 살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데, 그런데도 어째서...

'당신은 웃고 계시는군요.'

웃고 있다.

김영훈은 도를 쥐고, 무공을 수련하며 웃고 있었다.

사악, 삭!

도를 잡고 휘두를 때에 응당 나는 붕붕 소리조차, 이젠 나지 않고 있었다.

김영훈이 자연스레 휘두를 때마다, 도신이 공기의 결을 완벽히 갈라내며 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김영훈의 무는 어느덧 궁극(窮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내일 가시렵니까."

나는 죽음의 기색 역시 극한에 치달은 그를 보며 물었다.

김영훈은 청각 역시 마비된듯, 그저 도를 잡고 그가 익혀온 모든 무학을 정립할 뿐이었다.

"...형님의 임종을, 이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나는 김영훈의 49일, 그 마지막을 마음속으로 준비하였다.

* * *

마지막 밤은 유난히 별이 밝았다.

나는 밤새 갑판에 서서 눈을 감고 수많은 무학의 깨달음을 중얼거리는 김영훈을 보았다.

"내일 아침 드실 미음을 준비해 드리지요."

나는 답천사막에 올 때, 섭명함에 실어두었던 쌀을 가지러 내려갔다.

나는 축기기에 이른 후부터 서너달에 한 번씩만 조금씩 음식을 먹으면 될 뿐이었지만, 김영훈은 내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최소 며칠에 한번씩은 음식을 먹어주어야 했다.

이제 그는 이빨도 전부 빠져 음식을 씹을 수조차 없기에 , 죽이나 미음만을 먹어야 했지만.

마지막 가는 날, 좋은 미음만이라도 먹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내가 쌀을 퍼서 갑판으로 올라왔을 때였다.

"그나저나 형님. 오늘도 안 주무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갑판에 있던 김영훈은, 사라져 버렸다.

"...어?"

나는 쌀을 담은 그릇을 주변에 내려놓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답천사막 어디를 둘러봐도, 김영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이동한 것이라면 파공성이라도 일어야 하는데...'

말 그대로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월수궁무록을 사용한 건가?'

나는 당황하며 은식술로 의식을 압축시켜 주변을 탐지해 보았으나, 여전히 김영훈은 감지되지 않았다.

"무슨..."

그리고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은, 요족의 지각을 켜고 주변에 남아있는 영기의 흐름을 읽었을 때였다.

"아..."

인근 음양의 흐름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듯이.

그리고 그 베인 흔적은, 그대로 하늘로 이어져 있었다.

하늘로, 저 등선향으로.

"아..."

나는 황급히 허공답보를 펼치며 등선향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나는 등선향의 결계가 있는 곳으로 갔을 때.

헛웃음이 터지며 입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런 미친..."

등선향의 결계가, 날카로운 뭔가에 베인 듯 쩍 갈라져 그 틈새를 드러내고 있었다.

쿠우우우!

그 틈새로 등선향의 영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 영기를 흡수하며 결계가 느릿느릿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하루이틀이면 결계가 전부 회복될 것 같았다.

"허, 허허..."

김영훈이 죽기 직전의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죽음으로 우울해졌던 정신이 충격과 당황, 흥분으로 싹 뒤덮혀 버렸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등선향으로 들어갔다.

그 안쪽에서 요족의 지각을 켜자, 여전히 영기의 흐름이 쫘악 갈라진 것이 보였다.

잘려나간 영기의 흐름은 등선향의 중심을 향해 있었다.

"미친, 미친..."

너무 어이가 없고 경이로워, 헛웃음과 함께 제대로 말이 안 나온다.

파아앗!

나는 사고를 10배로 가속하고 미친듯이 등선향의 중심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반나절쯤 후.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일어날 때 즈음.

나는 미친듯이 달려 겨우겨우 영기에 난 그 자국을 따라 등선향의 중심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허, 허어..."

숨을 고르며 도착한 그곳엔, 여전히 이곳 저곳에 난 공간균열.

하늘에서 우릉거리는 뇌운.

뇌운의 아래에서 번개를 흡수하며 떠 있는 비석.

그리고...

김영훈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나는 공간균열들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최대한 균열들을 피하며 김영훈이 남긴 흔적으로 다가갔다.

"이건..."

발자국.

발자국이었다.

김영훈이 남긴 발자국이었다.

나는 발자국과, 주변의 영기의 흐름을 보며 발자국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기수식?'

나는 발자국을 따라 밟아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기수식이었다.

단맥도법의 기수식.

나는 도법을 따라 펼치며 김영훈이 남긴 기수식을 따라 펼쳐보았다.

'아니, 단맥도가... 아니다?'

단순히, 단맥도 '만'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껏 창시한 무공들.

정립한 무공들.

개조, 진화시킨 수많은 무학들이 단맥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보지도 않은 채 직접 전부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나는 단맥도의 흐름만을 따라가며 빌지국을 밟았다.

그러던 도중.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발자국의 깊이가, 점차 깊어지고 있다?'

그 자체는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지금까지의 단맥도의 흐름과,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은,

단악검법과 단맥도의 최후절초.

우공이산(愚公移山)의 특징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공이산이 펼쳐진 '방법'이었다.

'우공이산은, 상대가 반드시 있어야 펼칠 수 있는 초식이다.'

상대가 없으면 하다못해 벽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벽이고 뭐고 없이 허공에다가 우공이산을 펼친 것이었다.

'이게 무슨...'

우공이산은 자멸기(自滅技)였다.

연습 삼아서 내공을 불어넣지 않고서는 연습할 수 있었지만.

내공을 불어넣고 펼치면 그 이후부터는 필멸(必滅)의 절초.

산외산부진은 몸에 무리가 가다가 죽을 순 있을지언정 적당히만 펼치면 그래도 죽지는 않을 수 있지만.

우공이산의 초식은 펼치는 순간 9할 이상의 확률로 사망한다.

애당초,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상에게 목숨을 갈아넣어서 동귀어진하거나, 치명상을 입히라고 만들어진 절초.

이 우공이산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 초식의 주였기에, 무조건 상대방이 필요한 초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초식을 아무 상대 없이 펼친 거지?'

나는 의문투성이인 상태로, 김영훈을 따라 우공이산의 절초를 펼쳤다.

역시나 역이용할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선 기운이 그냥 허공을 훑고 지나갈 뿐이었다.

'이래서야 그냥 산외산부진의 초식인데.'

우공이산은 산외산부진을 기반으로 하여 펼쳐지기에 무조건 산외산부진을 펼치며 해야했고, 상대가 없으면 산외산부진 특유의 지치지 않는 정도의 효과만 볼 뿐, 발자국이 깊어지진 않는다.

그런데 김영훈은 현재 우공이산을 명백히 펼치고 있었다.

이 발자국과 기수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나는 김영훈의 발자국을 따라 끊임없이 초식을 이어나갔다.

그의 환영이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무공을 펼치는 듯 했다.

그의 환영은 빛과도 같은 속도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그가 펼치는 무공의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의 환영이 툭툭 끊어지고 발이 꼬인다.

나는 황급히 자세를 잡으며 발자국을 따라갔으나, 그 환영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내 발이 완전히 꼬여 넘어지려 할 때.

"아..."

나는 김영훔의 발자국이 이곳에서 끝난 것을 알아챘다.

그의 마지막 발자국은 그 어떤 발자국보다 깊었고, 발자국을 밟으며 폭탄이라도 터진 건지 이 주변이 다 뒤집어 엎어져 있었다.

나는 발자국이, 김영훈의 환영이 남긴 기수식을 따라, 능광도를 쥐고 있다 생각하고 그대로 도를 잡고 대각선으로 올려베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

김영훈의 도신이 지나간 자리에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듯한 공간균열이 하나 나 있었다.

이 자리는 승천문이 열리는 자리였다.

"...김... 형...?"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공간균열을 향해 물었다.

승천문은 분명 아니었다.

지난 삶에서 승천문을 한 번 목격했을 때.

그때 보았던 그 신령스러우면서도 기묘한 그 느낌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괴군이나 서휼이 우리를 멀리 전송시킬 때 열었던 공간균열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김영훈은 분명 공간균열을 만들고 이 너머로 넘어가 버렸다.

어딘가로 전송되었을까?

아니면 공간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터져 죽었을까?

그도 아니면, 공간의 압력마저도 빛의 속도로 베어내고.

이 균열 너머.

'어딘가'에 도착했을까?

"하. 하하. 하하하..."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김영훈은 죽음을 앞두었었다.

나는 그의 임종을 맞이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임종을 맞이할 수 없었다.

김영훈은 넘어가 버렸다.

얌전히 내가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을 것이라는 내 예상을.

무의 새로운 영역을.

이 세계 너머 새로운 공간을.

그는 넘었다.

높은 확률로 죽었겠지만.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 앞은, 완전한 미지(未知)였으니까.

나는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김영훈이 말도없이 홀연히 나를 떠나, 등선향에 들어와 새로운 경지를 추측하게 하고 공간 균열로 진입해 자신의 시체도 찾지 못하게 한 이유.

그 의도가 읽힌다.

김영훈은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것이며, 내가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지 모를 것이다.

-그러니 이 너머가 궁금하다면.

-300년 동안 나를 잃은 것을 개의치 말고, 남은 시간 동안 무(武)를 궁구하며 버텨내라.

그는 내가 300년을 버텨낼 희망을 남겨두고, 그렇게 떠난 것이었다.

"하하하하...!"

나는 웃고 또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난 동시에 그가 남겨놓은 발자국들을 처음부터 다시 밟아가며 그가 도달한 경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그의 임종을 지키려 했지만.

되려 임종을 향한 내 절망과 고독만이 임종을 맞았을 뿐이었다.

그래.

죽은 것은 내 고통과 고독, 절망 뿐.

김영훈은 임종을 지킬 필요가 없다.

그는 살아있었으니까.

저 너머에.

그리고 이 마음 안에.

그 곳에 살아있을 테니까.

나는 울며 웃으며 김영훈이 남긴 발자국을 밟아가며.

내 마음의 임종(臨終)을 맞이하였다.

* * *

어느덧 정신을 차리니, 저녁놀이 되었다.

얼마나 김영훈의 발자취를 밟았을까.

얼마나 이 마음을 분출했을까.

마음이 가라앉자, 그제야 내 눈에 공간균열의 옆쪽.

김영훈이 남긴 것이 보엿다.

그것은 도흔으로 바닥에 새겨진 글귀였다.

나는 그가 남긴 글귀에 다가갔다.

글귀의 첫 마디는, 다음 경지에 대한 실마리였다.

"그것이, 당신이 본 너머입니까..?"

생화(1)

강환은 사실 하나.

무(武)와 나는 일체(一體).

그것이, 김영훈이 남긴 글귀의 첫 마디.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해석하려 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문장을 받아들였다.

우리 같은 경지의 무인들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오히려 함축된 의미를 망가뜨릴 뿐이었다.

'강환은 사실 하나···.'

나는 아홉 개의 강환을 주변으로 띄워 보였다.

아홉 개처럼 보이는 이 강환이 사실 서로 하나라는 의미일까.

하기야, 생각해 보면 전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나라는 틀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웅―

강환들에 변화가 일어나며, 허공에 녹고 무형검으로 화하였다.

'그러나, 강환들이 나 자신의 속에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론, 그냥 무형검의 깨달음과 다를 게 없다. 뭔가 다른 갈래의 깨달음이 더 필요한가.'

무와 나는 일체라.

"흐음···."

나는 무형검을 잡았다.

무와 나는 일체라는 말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나와 무형검은 사실상 동일한 존재였다.

사실상의 분신(分身)!

이미 하나가 될 것도 없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나가 되어야 할까.

나는 고민을 이어 가며 무형검을 쥐었다.

"···모르겠군."

천천히 알아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나는 김영훈이 남긴 글귀를 계속 읽어 갔다.

첫 마디가 무공에 대한 글귀였다면, 그 이후는 그냥 내게 보내는 안부 편지였다.

잘 먹고 잘 지내라.

쉬엄쉬엄 쉬기도 하면서 지내고, 너무 인생 팍팍하게 살지 말고 소저 친구라도 꼬셔 봐라.

조금 더 재밌게 살아 봐라.

등등···.

―이 재미없는 놈아.

김영훈이 직접 눈앞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더 헷갈리라고 무공 구결은 저따위로 적어 놨다. 그래야 멍청한 네놈 머리로 파고들려 안 하고 쉬엄쉬엄 쉬면서 살지 않겠느냐.

―삶의 방식은 너와 같이 매 순간을 갈아 넣는 것도 있겠지만.

―그런 것만이 어찌 삶이겠느냐. 삶은 곧 기쁨이니, 네가 기뻐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그렇게 살아 보려무나.

"···잔소리하시기는."

―그리고 네가 끓여 준 죽, 더럽게 맛없더구나. 요리 연습 좀 해라. 무딘 놈아. 난 이만 간다.

"하하하···."

―잘 먹고, 잘 '살아라'.

글귀의 마지막.

그것이 끝이었다.

난 간다느니, 잘 있으라느니.

그런 작별 인사는 없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듯이, 내게 희망을 주듯이.

"···버텨 내겠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길든.

당신이 준 화두를 가지고.

나는 공간 균열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준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 역시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았다.

김영훈이 남긴 발자국들의 위치와 형태를 머릿속에 새긴 후.

나는 그대로 승천문의 인근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날부터.

등선향에 눌러앉아 침식을 잊고 수련을 시작했다.

음혼귀주문과 천린수해성.

천린수해성은 목(木) 속성의 수도공법이었다.

그리고, 음혼귀주문은 오행속성을 팔괘의 괘상에 대입한 공법으로, 토(土) 속성을 팔괘의 곤(☷)에 대입한 공법이었다.

곤(坤)은 곧 음(陰)으로 해석되니, 토 속성을 기반으로 음(陰) 속성의 법력을 쌓는 공법인 것이었다.

'그리고 목(木)과 토(土)는 목극토(木剋土). 서로 상극의 관계이다. 하지만···.'

상생상극의 효과가 반드시 생(生)과 극(剋)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지의 아래를 나무의 뿌리가 파고들어 지반을 헤집지만.

동시에 나무의 뿌리가 지반을 잡아 주어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불에 물을 뿌리면 불이 꺼지지만, 불이 더욱더 거세게 타오르기도 한다.

금속은 불을 만나면 녹아 버리지만, 금속을 더욱더 단단하고 세밀하게 제련하기 위해서는 불을 써야 한다.

요컨대, 극(剋)의 관계는 제어(制御)를 뜻하기도 했다.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금속을,

금속은 나무를,

나무는 흙을.

상극은 서로가 기운을 강하게 해 주지는 못할지언정, 하나의 기운으로 다른 하나를 세밀하게 조작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후우우···.

음혼귀주문의 음기로 법력을 생성한다.

시커먼 저주문(詛呪文)이 주변으로 떠오르더니, 내 코와 입속으로 들어오며 법력으로 화해 영기의 별에 흡수된다.

각(角)의 영기의 별 옆으로, 저주문의 법력으로 형성된 항(亢)의 별이 점차 새로이 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태동을 관조하며, 음혼귀주문의 수련을 멈추고, 천린수해성의 수련을 이어 갔다.

파아앗!

녹빛의 영력이 모이며 저주문으로 형성된 법력과 섞였다.

천린수해성의 법력이 상생상극의 효과에 따라 음혼귀주문의 법력을 억누르며, 음혼귀주의 법력이 가진 음기(陰氣)가 함부로 번져 나가지 못하게 제어한다.

나는 음혼귀주와 천린수해를 번갈아 수행하며 눈을 반개했다.

'이게, 음혼귀주문···. 확실히.'

나와 굉장히 잘 맞는 공법인 듯했다.

고통에 대해 관조하는 공법이라 했던가?

내 고통을 기반으로 저주문을 만들어 내는 공법?

웅얼웅얼···.

법결을 외자, 음혼귀주문의 법력이 모이며 저주문을 형성해 냈다.

스아아아―

저주문 한 개만을 형성했을 뿐이건만,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며 전신이 찌릿거렸다.

하지만 이 전신이 찌릿거리는 기분 자체는 내게 꽤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자주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절망과 고통, 이 세계에 대한 분노와 처절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음혼귀주는, 상대에게 나와 같은 고통 속에서 싸우도록 강제하는 공법이었다.

'하, 누가 더 고통에 익숙하느냐로 승부가 갈리겠군.'

마공의 보조 공법으로 주로 쓰인다고 했지만, 이래서야 익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모를 것 같았다.

'저주문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자도 고통을 느껴야 한다니.'

물론 음혼귀주의 후반부까지 전부 익히면, 저주를 통해 미리 지정해 놓은 대상에게 자신의 고통을 9할 이상 전송시킬 수 있다지만.

거기까지 익히려면 고통에 익숙해져야 하고, 또 거기까지 익혀서 고통을 전송시킬 수 있다고 해도 1할의 고통은 어쨌든 느껴야 했다.

'웃기지도 않는 공법이로군.'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저주문을 법력으로 치환시켜 다시 흡수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절대 안 익힐 최악의 공법이었으나, 오히려 나에게는 최고의 공법이었다.

쿠우우우―

'법력이 이 속도로 쌓이는 게 맞나?'

원래도 은식술로 사영근에 버금가는 속도로 법력을 쌓았었다.

그런데 음혼귀주문으로 법력을 쌓으니, 말 그대로 삼영근자의 수행 속도에 준할 정도로 법력이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음혼귀주로 길을 뚫고, 그 뒤로 천린수해성의 법력으로 뿌리를 다지며 음기를 제어한다.

'이 속도라면···.'

어쩌면 이번 생 안에 축기기 1수(宿)는 완공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쌓아 올린 고통으로 대지를 다지고.

나를 믿어 준 스승님의 공법으로 씨를 뿌리며 싹을 틔운다.

마음의 밭에, 점차 숲이 자라나고 있었다.

***

"···몇 년째지."

나는 등선향에서 음혼귀주와 천린수해, 그리고 무형검을 수련하고 또 수련하며 흠칫 놀랐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던가.

[선배님, 들리십니까, 들리십니까?]

예전, 서란이 내게 주었던 전음부가 울리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어디에 계신 건지 모르겠군요. 일단 봉명성의 외부 금제 중, 가장 약한 부분의 금제의 파훼법을 알아내었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어느덧 서란이 금제를 파훼하겠다 장담한 시간이 다가왔다.

[선배님께서 오시기만 한다면, 봉명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오셔서 섭명함으로 공간 외곽에 같이 진입해 주시기만 한다면, 봉명성에 들어가 장생과 등을 따올 수 있습니다. 선배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장생과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런 건, 이제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분명 지금은 필요 없겠지만, 어쨌든 금제의 파훼법과 장생과의 위치 정도는 파악해 놔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전부 후일을 위한 기반이 될 테니까.

나는 등선향에서 나가, 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촤아아아!

무형검을 흩뿌리자, 그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 있던 섭명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구구구!

그동안 음혼귀주문과 천린수해성을 수련한 결과, 현재 내 단전에는 세 개의 영기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각(角), 항(亢), 저(氐)의 기운을 머금은 영기의 별들이 반짝이며, 정순지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형검의 출력과 사용 기간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있었다.

촤아아악!

모래가 완전히 파헤쳐진다.

나는 빠르게 무형검으로 사방을 휘갈겼으나,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쯧."

아무리 강한 힘을 휘두른들 무엇을 할까.

같이 합을 나눌 상대가 없는데.

만약 이번 생에 장생과를 얻는 방법을 알아내고, 다음 생의 김영훈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그는 사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서 나와 함께 수련을 하고, 내가 무형검을 얻는 것을 지켜보고, 내게 깨달음을 주고.

내가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먼저 깨달음을 얻고 저 너머로 훌쩍 떠나 버린 김영훈과.

다음 생애의 김영훈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아니, 사실상 모든 존재들이 그랬다.

김영훈은 가족을 그리워한다고 그랬던가?

나는, 없어지지 않을 삶이 그립고 그리웠다.

외롭다.

나는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섭명함을 일으키며, 서란이 보내 준 좌표를 향해 조타륜을 돌렸다.

이젠 섭명함에 남은 기력도 거의 없었다.

이제 한두 번 출항하면 그대로 부서질 터였다.

쿠구구구!

섭명함이 움직인다.

'하지만, 외로울지언정, 멈출 수는 없지.'

삶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이 모든 운명의 인력에서 벗어난다면, 정말로 허무하지 않을 삶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생에 찾을 장생과는 무의미하겠지만, 다음 삶부터는 유의미할 테니까.

무의미한 것은 없다.

나는 그렇게 되뇌며, 서란이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

"선배님, 기뻐해 주십시오. 이제 장생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서란은 흥분된 표정으로 한 손에는 기이한 주술 문양이 새겨진 족자를 들었다.

"제 벗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인족 진법가까지 초빙해서 겨우겨우 완성했습니다. 금제진법의 해제진입니다!"

"그렇소?"

"이제 장생과를 찾으면···."

신나듯 떠들던 서란은, 문득 내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읽었는지 목소리를 줄였다.

"···선배님."

"무엇이오?"

"선배님의 벗이셨던, 그 다른 선배님은···."

나는 서란을 보며 웃어 주었다.

김영훈은 어찌되었을까.

"···등선(登仙)했소."

그래, 분명 그리되었을 것이다.

신선이 되어, 저 먼 하늘에서 분명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서란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제가 더 빨리 금제를 파훼했어야 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오. 서 도우가 신경 쓸 것 없소. 그는 분명··· 정말로 등선했을 테니까."

"···."

우리는 잠시 가만히 묵념했다.

"···어쨌든, 봉명성에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건 있을 테니, 한번 가 보도록 하겠소."

"···!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는 섭명함에 올라타 서란이 보여 준 좌표를 향해 조타륜을 잡았다.

이제, 봉명성이라는 곳에 들어가 볼 때였다.

***

쿠구구구!

섭명함이 공간을 뛰어넘었다.

시커먼 어둠 속.

우리는 공간의 외곽에 도착하여, 그곳을 부유하고 있는 봉명성에 도착하였다.

여전히 봉명성은 이전과 같은 자태로 공간의 외곽을 부유하고 있었다.

"선배님, 금제를 파훼하겠습니다."

서란은 봉명성의 옥빛 대문 옆, 그 바로 옆으로 날아가, 가지고 온 족자를 꺼내 들었다.

파아아앗!

기묘한 빛이 족자에서 뿜어지며, 봉명성의 금제에 맞닿았다.

파지지직!

금제 위로 수많은 주술문이 흘러나오며 족자의 빛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족자의 빛들이 엮이며 금제와 똑같은 주술문을 주없이 쏟아 내었다.

파치지직!

금제의 주술문이 족자의 주술문에 상쇄되며, 금제의 한켠에 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금제의 틈이 드러났습니다. 선배님! 선배님의 법술로 저곳을 돌파해 주십시오!"

나는 무형검을 세우고, 그대로 봉명성의 외벽을 돌파했다.

콰과과광!

서란은 나를 따라 들어왔고, 나는 외벽 안쪽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도 밖보다 안이 압도적으로 크군.'

이 안쪽에 공간을 어마어마하게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수많은 복도와 건물들이 안쪽에 좌르륵 늘어서 있었다.

"후우, 엄청나군요."

서란이 따라 들어와 주변을 보며 말했다.

우드드득···.

문득 뒤를 돌아보자, 내가 돌파한 외벽으로 토 속성의 영기가 몰리더니 자동으로 수복되기 시작했다.

역시 자동 수복 기능도 있는 듯했다.

"다시 나가는 것도 문제가 없겠지?"

"예, 금제의 해주진은 하나 더 가져왔습니다."

서란이 족자를 꺼내며 말했다.

"흠···."

나는 족자를 보며, 족자에 새겨진 진법과 주술문을 머릿속에 잘 담아 두었다.

다음 생에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이전에 봉명성에 다녀오신 해룡족의 어른께서 주셨던 정보를 토대로, 장생과가 있다는 수목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서란이 품속에서 낡은 지도를 꺼내며 말했다.

지도는 몇십 년은 된 물건인지, 바스러질 듯 낡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서란을 따라갔고, 봉명성의 복도 곳곳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러던 도중.

난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다.

'이건···.'

뭐랄까, 마치 폐기된 섭명함의 내부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같았다.

조용하다.

그리고, 수많은 구조물들이 어째 다 부서져 있다.

"···서 도우."

"예, 선배님."

"뭔가 이상하지 않소?"

"흠,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거대한 참흔(斬痕)이 새겨져 무너져내린 전각 하나를 가리켰다.

"봉명성 안의 구조물들은, 지을 때부터 원래 다 저렇게 지어진 것이오?"

"아···."

서란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도 말로만 들었지 들어와 보기는 처음인지라···."

"흠···."

나는 눈을 찌푸렸다.

어째,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느낌은 복도를 지나던 도중, 일단의 잔해(殘骸)를 본 후에 더욱더 커졌다.

'괴군의··· 괴뢰들?'

일전 섭명함 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장식의 잔해들.

그리고 괴군의 잔해들뿐이 아닌, 다른 잔해들 역시 보였다.

봉명성의 기운과 정확히 같은 기운을 가진, 석상(石像)들이었다.

"이건···."

서란도 이쯤 되자 위화감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눈을 찌푸렸다.

"서 도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여기까지 오지 않았소? 이 정도 규모의 유적이라면, 유적을 지키는 수호물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예. 전부··· 박살이 나 있군요."

서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괴군의 흔적뿐이 아니오. 아까 보았던 참흔, 그리고 어떤 곳엔 귀기가 서려 있었고, 어떤 곳은 박살이 나 있고, 어떤 곳은 아예 거칠게 뜯겨 나가 있었지."

나는 그를 보며, 현재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길한 추론을 말했다.

"봉명성이라는 게 어쨌든 공간 균열 안쪽을 떠돌다가, 몇백 년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낸다면. 승천문이 열리기 이전,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 전에 전부 쳐들어와서 봉명성 안쪽의 재물들을 싹 다 털어 갔을 가능성은 없소?"

"···."

서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설마 그 잡귀 놈이 일부로 이딴 정보를 줬단 건가?

'아니, 아닐 터다.'

마지막에 읽었던 송진의 심상은, 정말로 서란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었다.

'어쩌면, 봉명성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 송진이 죽은 이후일지도. 그가 죽은 이후에 봉명성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다음에 천인기 수도자들이 봉명성을 싹 다 털어 갔기에 아무것도 안 남았다는 걸 모른 채 서란에게 좌표를 줬던 건가···.'

"···이, 일단. 수목원까지는 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서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수목원에 쓸 만한 영약이 하나쯤은··· 그래도 남아 있을 수도···."

"···."

나는 얼굴을 굳힌 채, 일단 서란을 따라 수목원으로 향하였다.

얼마 후, 봉명성의 수목원에 도착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망할 천인기 수도자 놈들.'

수목원은 곳곳이 잔뜩 파여 있었고, 곳곳에 남아 있는 나무 같은 것들은 과실들이 전부 따져 있어 가지가 휑했다.

서란은 아연한 표정으로 장생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장생과가 열린다는 수원목(壽源木).

그 수원목에는, 아무 열매도 달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지째로 잘려 나간 부분조차 몇 군데 보였다.

천인기 수도자들은, 봉명성을 전부 알뜰하게 털어 간 것이었다.

"···빌어먹을."

서란이 짓씹듯이 뇌까렸다.

나 역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다음 생으로 가도, 김영훈의 수명은···.'

답이 없는 것인가···.

나는 답답한 마음에, 수목원의 천장을 쳐다보며 곳곳을 거닐었다.

황량하다.

수목원 자체에 흐르는 영맥은 상당했지만, 정작 그 영기를 흡수하고 자라난 영초와 영목들이 뽑히고 잘려져 있었다.

"···쯧."

김영훈은 결국, 수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몇 번의 삶을 살아도, 그의 제약은···.

저벅, 저벅···.

그렇게, 수목원을 거닐던 중이었다.

"···음?"

나는 문득, 열매를 다 따이고 잘려 나간 영목들 사이.

특이한 영력을 뿜어내는 나무를 하나 발견하였다.

"저건···."

그것은 아까 보았던 수원목과 같은 종의 나무였다.

다른 점은, 아까의 수원목보다 어린 종인지, 훨씬 크기가 작았다.

"···!"

그러나, 내 눈에 띈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잠깐, 잠깐··· 서 도우! 이리 와 보시오···!"

나는 헐레벌떡 어린 수원목으로 달려갔다.

어린 수원목에는, 몇 송이 꽃이 피어 있었고.

그중 하나의 꽃봉오리 밑이 부풀어 오르며, 열매와 같이 변하고 있었다.

"서 도우!"

생화(2)

'장생과...!'

나는 손을 떨며 아직 어린 수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얼마 후, 서란이 이곳으로 달려왔고, 열매가 맺히려는 수원목을 보았다.

"이, 이건..."

"어, 어떻소..?"

서란은 진중한 눈으로 장생과를 바라보았다.

"장생과가... 맞습니다...!"

"...! 그렇다면..."

"하지만."

서란의 안색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완전히 과실이 맺히지 않은 이 상황이라면, 장생과를 복용해도 수명이 크게 증가하지 않습니다. 장생과는 완전히 과실이 열리고 나서야 안에 함유된 천지생력(天地生力)이 활성화되어 수명을 크게 늘려주니까요."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혹 조금은 수명이 증가한다는 거요?"

"예, 아마 제가 알기로 이 상태의 장생과라면, 약 반 년 정도 수명이 늘어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

반 년.

완전히 열렸을때와 아닐 때가 너무 차이가 나지 않는가.

"서 도우가 보기에, 이 장생과는 완전히 맺히려면 얼마나 걸리외까?"

"...장생과는 꽃에서 열매가 되기까지, 약 6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형태를 보아하니 약 400년은 된 것 같군요. 200년만 더 기다리면 이 장생과가 맺히고, 다른 과실들도 하나둘 열릴 터입니다."

"...그렇구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200년.

내가 다시 회귀를 하고 바로 봉명성을 뚫어서 장생과를 따서 김영훈을 먹여도, 반 년 정도 수명을 더 늘리는 것 외엔 답이 없다.

나는 눈 앞의 수원목을 쓰다듬었다.

문득, 나는 내 단전에서 움틀거리는 목(木) 속성의 법력을 떠올렸다.

목(木)은 오행에서 생명력을 관장하는 속성이기도 했다.

때문에 목 속성 공법을 익힌 이들은 강력한 자가치유능력이나 재생능력을 장기로 삼았고.

그 중에서도 특수한 법술을 익힌 수도자는 목 속성의 생명력을 끌어올려 급속도로 식물 등을 생장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천린수해성은 그런 특수한 공법 중 하나였다.

"...서 도우."

우우웅!

나는 천린수해성의 정순지력을 끌어올려 그의 눈 앞에 보여주며 물었다.

"나는 목 속성의 공법을 익히고 있소. 만약 목 속성의 법력을 꾸준히 수원목에 불어넣는다면, 장생과의 결실을 조금 촉진시킬 수 있지 않겠소?"

"흐음..."

그러나 서란은 썩 좋지 않은 안색이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목 속성 법력이 영초의 생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건 분명 맞습니다. 하지만... 장생과 같은,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야 결실을 맺는 영초나 영과류는, 아마 선배님이 법력을 불어넣으셔야 하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실 겁니다."

"대략 어느 정도일 것이라 생각하오..?"

"저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천인기 수도자들도 영초를 생장시키겠다고 목 속성 법력을 영초에 쏟아붓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축기 수도자들은 되어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사축기..."

중경계급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 도우."

"예, 선배님."

나는 장생과를 보며 말했다.

"이 장생과가 열리려면 200년은 있어야 한다고 했지 않소?"

"분명 그렇습니다만..."

"그럼, 200년의 시간 동안, 난 계속 여기에 남아 목 속성 법력을 장생과에 꾸준히 불어넣어 보겠소."

"서, 선배님..?"

서란이 흠칫 놀란 듯 되물었다.

"그게 어쩐 말씀이십니까..?"

"그래도 이 장생과는 거의 다 열린 셈이니, 어쩌면 사축기 수도자만큼의 법력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소? 나는 계속 법력을 불어넣으며, 장생과가 원래보다 얼마나 더 빠른 속도로 열릴지 관찰해볼 생각이오."

장생과가 열리게 할 정확한 법력의 양을 알아두면, 추후에 외부에서라도 그 법력을 충당해서 장생과를 피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번엔 법력을 더더욱 쥐어짜내서 장생과를 열리게 하면 된다.'

장생과는 비록 열리지 않았을지라도, 이대로 손 놓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수명을 하늘이 부여해주었을지라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운명의 인력을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반드시, 장생과를 맺히게 할 것이다!'

나는 장생과를 노려보았고, 서란은 착잡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먼저 가신, 아니. 등선하신 그 친우분 때문이시군요."

서란은 내가 이러는 이유를 짐작한 듯,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봉명성의 몇몇 군데를 더 뒤져보고 오겠습니다. 정말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 전에 봉명성을 싹 털어갔는지... 뭔가 발견한다면 선배님께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소. 수명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면 서 도우가 다 가지셔도 되오."

"...알겠습니다."

서란은 내게 인사를 한 후 수목원에서 나갔다.

나는 며칠동안 가만히 앉아 천린수해성을 수련하며 수원목에 목 속성 법력을 불어넣었다.

며칠 후.

서란이 다시 수목원으로 돌아왔다.

"...선배님, 봉명성에서 몇 가지 자료와, 천인기 수도자들이 남겨놓고 간 것들을 찾아냈습니다."

"수명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오?"

"음...아닙니다."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부분 일회성 부적이나 선주(仙酒), 혹은 향초 같은 것들 뿐이더군요, 그도 아니면 그냥 평범한 짐승에게 영성(靈性)을 부여해주어 요족으로 진화시키는 법보 등이 남아있었습니다만..."

서란이 혀를 찼다.

"그조차도 대부분 결단기 수도자 대다수가 달려들어 붙어야 깰 수 있을만한 가공할 금제들이 쳐져 있어,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천인기 수도자들도 굳이 안 챙기고 버린 것들이니만큼 사실 그렇게 쓸만한 것도 없고 말입니다."

"일회성 부적이나 선주 같은 것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들이오?"

나는 문득 그가 말하는 것들이 궁금해져 물었다.

어쩌면 그것 중에서도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그러나 이내 들려온 서란의 말에 나는 조금 실망해야 했다.

"일회성 부적은 몇 시진 동안 천인기급 방어력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봉천부(封天符), 진법미궁을 형성하여 적을 순간 가두는 홍조부(弘曺符), 순간 요수로 변할 수 있는 변요부(變妖符) 등이 있더군요.

그리고 선주 같은 것은, 이름은 모르지만 바깥에서 선주들의 효과가 쓰인 옥간을 발견했는데... 마신 후 일순간 능력이 향상되거나 수행속도가 일순간 빨라진다거나, 향을 맡으면 의식이 맑아진다거나 하는 선주들밖에 없었습니다."

"흠..."

"부적과 선주 역시 전부 단발성으로 능력을 강화하는 것들이 대다수이고, 남아있는 법보 같은 것들은 전부 말씀드린, 짐승에게 영성을 부여하는 법보나, 먹은 음식을 빠르게 소화시켜주는 법기 등. 해괴한 것들만 남아있는지라... 이게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서란의 설명을 다 듣고는 피식 웃었다.

"말 그대로, 이 장생과 말고는 다 쓰레기들뿐이란 소리군."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장생과도 아직 안 열린 장생과이니, 천인기 수도자들이 가치가 없다 여겨 버리고 간 것이겠지요."

그가 옅게 한숨을 쉬며 내게 옥간을 하나 내밀었다.

"이 봉명성을 돌아다니며 만든 봉명성의 구조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적과 선주들, 그리고 법보들의 위치도 적어놨습니다.

솔직히... 하나하나가 결단기 수도자도 여럿이나 모여야 깰만한 금제로 보호되어 있기에 위치도 큰 의미는 없겠습니다만. 선배님께서 이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작정이라 하시니..."

"흠, 사실 나도 수명을 늘려주는 기물이나 영약 외엔 별 관심이 없어서, 굳이 찾으러 갈 것 같진 않을 것 같군. 하지만 어쨌든 서 도우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소."

알아놓으면 어쨌든 추후에 쓸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나는 서란에게 옥간을 받아 봉명성의 구조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서란은 옥간을 내게 건낸 후 내게 말했다.

"그럼 선배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 폐성(廢城)에서 시간만 낭비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그러시오. 참, 나갈 때는 어찌 나갈 작정이오? 내가 섭명함으로 일단 공간의 외곽에서 나가게 해 주지."

"아, 감사드립니다."

나는 서란과 함께 봉명성에서 잠시 나와, 봉명성 옆에 세워둔 섭명함을 조종하여 서란을 허공간 바깥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나저나 선배님. 제가 아는 바가 맞다면, 봉명성은 몇백년에 한번씩 대륙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마... 선배님께서 장생과를 지키실 동안 봉명성이 현계에 모습을 드러내면 다른 결단기 수도자들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소. 결단기 수도자들은 내 선에서 물리칠 수 있을 듯 하니."

"하하,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서란을 말을 하고는, 용의 형태로 변해서 바다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름 의리있게 할 말은 다 해주고 간 것이었지만, 나는 그가 나를 어려워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가는 걸음이 빠르군.'

하기사, 왠 결단기급 인족 수도자와 함께 있는 게 어찌 달갑기만 하겠는가.

나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끼며, 서란의 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이번 생에는 살아남았다.

요족은 인간보다 기본 수명이 훨씬 긴 편이었다.

특히나 용족은 더더욱.

아마 서란의 수명과 의지, 그리고 자질이라면 충분히 추후에 결단경 요족이 될 터였다.

'잘 된 것이지.'

나는 서란을 잠시 바라본 후, 섭명함을 조작해 다시 봉명성이 있는 허공간으로 진입했다.

서란이 봉명성에서 나올 때 파훼했던 봉명성 금제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쿠구구구!

지금껏 타 왔던 섭명함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지금껏 머금고 있던 잔여 동력이 모조리 바닥난 것이었다.

"...잘 버텨줬다."

나는 섭명함에서 뛰어올라, 봉명성의 금제가 전부 재생되기 이전에 봉명성을 파고들었다.

뒤쪽에서는 섭명함이 산산이 부숴지며, 허공간의 공간기류에 흩어지는 것이 보여졌다.

나는 잠시 무너지는 섭명함을 바라본 후, 봉명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턴, 또 다시 고독의 시간이었다.

* * *

나는 음혼귀주문보다는, 천린수해성의 수행에 더 집중했다.

수원목에 불어넣을 천린수해성의 법력이 더욱 더 많이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우선 천린수해성은 목 속성 공법이었고, 수원목이 있는 곳은 봉명성의 수목원이었다.

'농밀하군.'

천인기 수도자들이 다 뽑아갔다지만, 봉명성에는 아직도 수많은 영초들이 남아있었다.

물론 약성이 있는 부분은 다 뜯겨나갔단 점에서 큰 쓸모는 없었지만.

영초들은 그 자체로 목 속성의 영기를 발산했다.

수목원은 등선향보다도 더욱 더 목 속성의 영력이 가득 차 있었다.

'천린수해성을 수행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군.'

나는 스승님이 준 천린수해성을 수련하며 시간을 보냈다.

선각후통의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법결을 연구하고, 연습했으며.

동시에 무형검을 늘 관조하고 참오하며 무형검을 수련해갔다.

김영훈이 남긴 실마리는 무엇일까.

그는 마지막에 어떤 무공을 펼친 것일까.

어떻게 상대방이 없이 허공에다가 우공이산을 펼친 걸까.

몇 년을 수련해도 그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무형검을 수련하며, 무형검에 점차 익숙해지고 무형검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가짓수를 더욱 더 완전하게 장악하는 것 정도가 내가 얻은 것들이었다.

뭘 어떻게 해서 공간을 자른 건지는 감도 안 잡혔다.

* * *

150년.

회귀햇수, 어느덧 150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봉명성에 들어온지는 약 50년째.

우웅!

영기를 들이쉬며 단전의 별들을 감지했다.

농밀한 목 속성의 영력이 가득한 수목원에서, 끊임없이 수원목에 법력을 불어넣으며 공법을 사용한 결과.

천린수해성은 쭉쭉 발전하여 어느덧 각(角), 항(亢), 저(氐), 방(房), 심(心).

다섯 개의 영기의 별을 형성한 채였다.

'이제, 곧 있으면 스승님도 따라잡겠군.'

얄궂겠지만, 사실이었다.

스승님은 각항저방심미(角亢氐房心尾).

여섯 개의 영기의 별을 형성하고 일곱 번째 영기의 별을 완성하기를 앞두고 있었으니까.

목 속성의 영력이 농밀하다 못해 흘러 넘치는 곳에서 수련을 한 덕분이었다.

나는 나름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여전히, 장생과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 같군.'

50년간 법력을 퍼부어댔음에도 장생과가 열리는 속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법력을 쏟아부어야 변화가 있단 말인가.

나는 옅게 한숨을 쉬며, 수목원을 떠나 봉명성을 돌아다녔다.

가끔 정 답답할 때는 봉명성 곳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서란이 준 봉명성의 구조도를 보며 돌아다니며 봉명성 곳곳의 구조를 더욱 더 확실히 익혔고, 뭔가 정말로 더 숨겨진 건 없나 확인을 하곤 했다.

그러나 봉명성의 복잡한 기문진법이나 미로 같은 구조를 8할 이상 꿰게 됐음에도, 딱히 더 숨겨진 영약이나 보물 같은 건 더 없었다.

'물론 아직 남은 금제들이 있긴 하지만...'

금제 안쪽으로 얼핏얼핏 보이는 것들은, 서란의 말대로 일회성 부적들이었다.

거기다가 금제들도 하나하나가 결단기 수도자들이 여럿은 모여야 겨우 깰만한 강력한 금제였기에, 나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런 곳은 지나쳤다.

'저게 괴군의 괴뢰인가.'

그런 금제들 안쪽의 쓸모없는 것들보다 흥미가 가는 것들은, 봉명성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괴군의 괴뢰의 잔해들이었다.

괴군도 봉명성을 약탈하는 데에 일조했던 모양인지, 이곳저곳에 괴뢰의 잔해들이 마구 굴러다녔다.

"그나저나, 이 괴뢰들은 전부 어느 정도 수준의 법기이려나..."

하나하나가 나름 강력해보인다.

거기다가 상당히 수도 많았다.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가 산산히 부숴져 있는 상태라 원래는 어떤 위력이었는지 잘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괴군의 괴뢰들의 잔해, 그리고 여기저기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이 남긴 흔적을 보고 다니던 중.

내 눈에 문득 독특한 것이 띄었다.

'저건...'

나는 주변의 잔해들을 헤치고 다가갔다.

'괴뢰...?'

괴군의 괴뢰.

그 중에서도 썩 멀쩡한 형태의 괴뢰였다.

벌을 닮은 형태의 괴뢰는 외형상의 문제는 거의 없어보였다.

'안쪽의 세세한 부품 같은 게 망가진 것 같군.'

사람 정도 크기의 벌 괴뢰는, 들어올리자 그 안쪽에서 쩔그럭 소리가 나며 뭔가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이건 한번 고쳐볼 수 없으려나.'

괴군의 괴뢰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문득 그의 힘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일개 개인이 종문 세 개를 동시에 상대가 가능한 건지.

'아마 괴뢰들을 통해 인해전술식으로 싸우는 게 괴군의 특기인 모양인데...'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괴군과 맞서야 할 때도 있을 터였다.

그때에 괴군과 맞서기 위해 그의 괴뢰들을 조금 연구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벌 괴뢰가 있는 위치를 기억해두고, 다시 돌아와 수련을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구!

"후우..."

나는 눈을 반개하며, 정순지력을 운용했다.

단전에는, 일곱 개의 영기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축기 제 1수(宿).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완공하였다!

'90년... 걸렸다.'

심지어 이것조차 봉명성의 수목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영지에서 수련했기에 겨우겨우 도달한 것이었다.

'거기에 스승님이 남겨준 심득도 한몫했지.'

회귀햇수 190년.

나는 그제서야 축기 1수, 즉 축기 초기를 벗어나 축기 2수, 축기 중기에 진입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의 시간이 더 걱정되었다.

'지금까지는 청존칠수에게 지낸 칠성제의의 힘을 빌어 각항저방심미기를 완성했다. 하지만, 두우여허위실벽, 규루위묘필자참, 정귀유성장익진은 칠성제의의 힘을 빌릴 수 없었기에... 수행 속도가 더 느려질 거야.'

물론 그래도 목 속성의 영기가 그득그득한 곳이니만큼, 어느 정도 진도는 나갈 터였다.

그리고 장생과도 역시 아직도 제대로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피어날 것인가...'

나는 옅게 한숨을 쉬며 장생과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축기 제 2수,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의 수행을 시작했다.

* * *

축기기 제 1수에 이르고 약 30년.

회귀햇수로는 22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수명이 130년은 남아있다니, 신기하군.'

원래 수명에 하늘로부터 300년의 수명을 내려받은 것이니, 아직도 살 날이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축기기 2수는 두(斗). 한 개의 별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

30년을 투자해서 겨우 한 개의 영기의 별이었다.

'봉명성에 들어오기 전엔 등선향에서 음혼귀주문을 수련했고, 들어와선 등선향보다 농밀한 목 속성 영력에 기대서 천린수해성을 수련해, 140여년에 걸쳐서 축기 1수를 완공했다.'

엄청난 영력에 기대어 20년에 하나 꼴로 영기의 별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칠성제의의 축수를 받지 않은 이후 경지부터는 30년에 영기의 별 하나 정도가 끝.

'재능없는 이는, 일반적으로는 300년 평생을 수련에 바쳐도 결단기에 이를까 말까겠어.'

꽃이 피려면 얼마나 많은 인고(忍苦)의 시간을 지새야 하는가.

아무리 법력을 불어넣어도 장생과는 피지 않고, 아무리 수련을 해도 이 자질로는 한참을 가도 부족했다.

후우-

목 속성의 영기를 불어, 수목원에 흔히 핀 잡초에 불어넣었다.

사르륵!

잡초는 목 속성의 영기를 흡수하자 부르르 떨더니 바로 꽃을 피웠다.

나는 잠시 잡초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영초라면 이 정도 영력으로는 턱도 없고, 끊임없이 법력을 먹여줘야 생장할 테지만.

잡초란 이렇다.

조금만 법력을 먹여줘도 바로 꽃이 피지만, 거기까지가 잡초의 끝이다.

나는 어쩌면, 잡초의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회귀로 인해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 이상은 압도적인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여기까지가 나의 끝이다.

'어쩌면 100여년을 더 살아도, 기껏해야 영기의 별 두, 세 개 만들고 끝이겠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래 지내서일까.

최근 우울한 생각이 더욱 많이 들었다.

하기사, 오래도록 수련을 하다가 광증이 도진 게 어디 한두번이던가.

나는 혀를 차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봉명성은 총 일곱 개의 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곳, 수목원은 봉명성의 1층에 있는 곳으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 상태에서는 1층이나 7층이나 차이도 없었다.

어차피 천인기 수도자들이 전 층에 있는 물건들을 싹 다 털어갔기 때문.

어쩌면, 1층에 있는 이 어린 장생과 나무만이 봉명성에 남은 유일한 보물일지도 몰랐다.

우우웅!

나는 수원목에 법력을 불어넣으며, 수원목이 자라고 자라, 봉명성의 모든 층의 천장을 꿰뚫고 거대해져 이 성 전체를 박살내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럴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나는 진지하게 그 망상에 대해 고민했다.

나무가 자라는 것은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땅이 영양가가 있어야 하며, 뿌리를 깊게 내리고, 물줄기를 빨아들여, 싹을 틔우고, 줄기를 기르고, 가지를 뻗어나가야 한다.

보는 사람은 그저 나무가 크는 것만을 보겠지만, 나무는 매 순간 굉장한 노력을 한다.

뿌리를 내리는 것도, 잎을 틔우는 것도, 가지를 뻗는 것도.

전부 나무가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니까.

그뿐인가.

'계절마다 달리 옷을 바꿔입어야지.'

봄에는 형형색색의 옷을.

여름에는 녹빛의 옷을.

가을에는 샛노란 옷을.

겨울에는 모든 옷을 벗고 잠시 잠을 잔다.

나는 수원목에 손을 얹고, 법력을 불어넣으며 천린수해성을 계속해서 수련하였다.

* * *

쿠구구구!

'매 계절이 한 번 지날때마다, 나무는 한 겹씩 커진다.'

서은현의 주변으로, 목 속성의 영기가 몰려들었다.

그의 주변으로 녹빛 나무 형태의 형상이 아른거렸다.

'나무의 나이테는 세월이 흐를때마다 하나씩, 조금씩 생겨난다.'

서은현은 어느덧 녹빛을 뿜는 나무가 되어 있었다.

'쌓고, 쌓고, 쌓고... 세월을 쌓아...'

녹빛의 나무와, 어린 수원목이 연결되어 무언가를 교류하는 것 같다.

그랬다.

서은현은 스스로도 모르게 수원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 하나의 나무에 집중하며, 법력을 나누고 또 나눈 결과, 수원목 자체가 서은현의 법력에 반응하고, 또 서은현의 천린수해성이 수원목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느릿하게 거대해진다...'

쿠구구구!

"...아."

어느덧, 서은현은 눈을 떴다.

그리고, 서은현의 주변에 나무 형상으로 쌓여있던 거대한 목 속성의 영력의 덩어리들이, 서은현의 체내로 들어갔다.

서은현은 홀린 듯이 눈 앞의 수원목을 보며 중얼거렸다.

"천린수해(千璘樹海)."

* * *

축기, 제 2수.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파아아아앗!

천린수해성의 공법.

그 본질을 깨닫자,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영기가 빨려오며, 영기의 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다섯 개의 영기의 별이 빛을 발했다.

'아아...'

총 12개의 영기의 별이 단전에서 빛을 발했다.

'지금, 지금이 대략 몇 년이 지난 거지...'

어느 순간 수원목에 법력을 주고, 또 주던 중, 확 시간감각이 사라졌었었다.

나는 수원목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나이테...'

수원목으로 법력을 흘려넣어, 수원목에 생긴 나이테를 읽어냈다.

그리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30년.

고작 30년만에, 축기 중기 완공에 거의 다 다다른 것이었다.

"하, 하하하..."

나무(木)

나무에 대한 관조와 고찰로 인해 천린수해성에 담긴 심득을 이해하였다.

그 덕에 이렇게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성장한 것일 터.

방금 것은 일종의 기연이었다.

아마 이런 류의 빠른 속도로 수행을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다시는 없을 터.

하지만, 나는 눈 앞에 달린, 점차 눈에 띌 정도로 익은 장생과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장생과는, 내 법력을 먹어오며, 느리지만 꾸준하게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래.'

나는,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회귀햇수 250년.

나는 축기 중기, 완공에 가까워지고, 천린수해성의 심득을 얻었으며, 장생과의 결실을 거의 눈 앞에 두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했다.

쿠구구구궁!

"...무슨!"

봉명성이 흔들린다.

동시에, 봉명성 곳곳에 영기가 더더욱 활발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나는 황급히 봉명성의 수목원에서 나와, 봉명성의 정문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끼이이이-

봉명성의 옥빛 대문.

대문이, 열리고 있었다.

쿠웅!

휘이이이!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대문의 바깥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그랬다.

공간 외곽.

허공간을 부유하던 봉명성이, 다시금 현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휘이이-

"큼, 콜록, 콜록!"

나는 먼지가 섞인 바람에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히 공기를 정화하는 법술을 펼쳤다.

어째, 바깥에서 불어오는 먼지가 많았다.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대문의 바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답천사막...?"

봉명성은 현재 답천사막의 상공에 나타나서 부유중이었다.

'허공간을 부유하다가 몇백년 꼴로 무작위로 나타난다는데, 이번에는 답천사막인가...?'

등선향과는 얼마나 가까우려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음...!?"

나는 문득, 하늘을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천기(天機)가 흉(凶) 하고 혼란(混亂)에 차 있었다.

축기기 제 2수에 이르고 나니, 조금 더 읽을 수 있는 천기가 많아졌다.

'이런 제길, 그나저나 이 흉(凶)함은 대체..."

내가 천기를 자세히 읽으려 할 때였다.

쿠구구구!

답천사막 한 곳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건, 피비린내!?'

나는 눈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문득, 나는 저 피비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싹!

'저건...'

폭발의 너머.

먼지구름이 젖혀지고, 그 뒤쪽에는 예전에 내가 스쳐지나가며 보았던 것이 언뜻 보였다.

거대한 흑색(黑色)의 성(城).

찌릿, 찌릿!

전신에 오한이 든다.

그때 느꼈던 불길함이, 최대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득,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200년 후의 대전쟁.'

생각해보면, 200년 후라는 기준은 내가 4, 50년은 지낸 후의 기준이었다.

즉, 회귀햇수 250년차인 지금.

'지금이, 대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란 말인가...?'

그리고, 그때였다.

파아아앗!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누군가들이 빠른 속도로 봉명성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건, 비둔술!?'

수십 명의 인영들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고, 한명 한명이 수도가문의 가주, 원로급 결단기 수도자들이었다.

"봉명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안쪽으로 피해!"

"노괴(老怪)가 쫓아오기 전에 어서!"

파바밧!

비둔술을 써 봉명성의 입구에 도착한 수십 명의 결단기 수도자들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각자 수결을 맺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그들 중 한명에게 물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넌 뭐냐! 축기기 주제에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지!? 됐다, 말 시키지 말고 비켜 있어라!"

그들 중 수염이 긴 백의의 노인이 수결을 맺으며 소리쳤다.

"봉명성을 닫아라!"

"폐문!"

쿠구구구!

옥색의 대문이 점차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발이 있었던 곳에서 아직 봉명성에 도착하지 못한 몇몇 결단기 수도자들이 이쪽을 향해 소리지르는 것이 들렸다.

"잠깐, 도우들! 기다리시게!"

"아, 안 돼! 아직 문을 닫지 마!"

"잠깐, 잠깐!!!"

끼이이익- 쿵!

그러나 봉명성에 들어온 결단기 수도자들은 사색이 된 채로 더더욱 더 수결을 빠르게 맺었고, 이내 봉명성의 대문은 닫혀 버렸다.

"허, 허억..."

"다, 닫았다..."

그리고, 그제야 결단기 수도자들은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일인 겁니까?"

나는 그들이 숨을 돌린 것 같자 그 중 한 사람을 다시 잡고 물었다.

"넌 무슨..."

그때였다.

쿠구구구!

옥빛의 문 뒤로, 혈광(血光)이 번뜩인다.

그 모습에, 장내의 결단기 수도자들의 모습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노, 노괴가 문을 두드리고 있소!"

"뚫, 뚫리는 건 아니겠지...?"

"빨리! 전원 문에 법력을 불어넣어 버티시오! 봉명성이 다시 허공간에 진입할 때까지만 버티면 노괴도 허공간까지 쫓아오진 못할 터!"

콰과과광!

그러나, 다시 한번 혈광이 문 뒤쪽에서 번뜩이자, 옥빛의 대문이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문이 열릴 듯 했다.

"흐, 흐아아아아!"

"이런 미친, 저게 저 노괴의 힘이란 건가.."

"모, 모두 모이시오! 모두 힘을 합쳐 문을 막으면..."

"나, 난 싫어! 다 죽을 거야!"

"봉명성으로 흩어지자! 성 안쪽에 숨어있으면 노괴도 굳이 다 찾아 죽이진 않겠지..!?"

흰 수염의 백의 노인이 결단기 수도자들을 규합하려 했으나, 결단기 수도자들은 사색이 된 채 봉명성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돌아와! 힘을 합치면 막을 수 있다고! 힘을 합치면..."

그리고, 다음 순간.

꽈아아앙!

혈광이 폭발하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콱!

결단기 노인은 한줌 혈수가 되어 터져나갔고, 옥빛의 문 너머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우선 은식술과 월수궁무록으로 허깨비처럼 허공에 녹아들었다.

그가 새하얗게 웃으며 뇌까린다.

"폐급 놈들. 다 같이 힘을 합쳐 본좌를 막진 못할망정, 다 봉명성에 숨어버린 건가. 큭큭... 깊은 곳에 숨으면 못 찾을 것 같았나보지.

어리석긴..."

싸아아아-

코가 마비될 정도의 피비린내가 자욱하다.

동시에, 나는 구토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월도입천에 오르면서 볼 수 있게 된 타인의 심상.

저 자의 심상은, 그야말로 토악질이 나오는 역겨운 심상이었다.

"지금부터 봉명성을 다 때려부술 예정이거늘. 무얼 숨느냐."

저벅, 저벅...

나는 월수궁무록과 은식술, 그리고 귀식대법과 은신술법을 잔뜩 펼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자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찌릿, 찌릿!

'뭐냐, 이 압박감은...!'

숨이 턱 막힐 정도다.

'이 힘은, 결단기 따위가 아니다.'

저벅, 저벅...

그 자는 나를 지나쳐 수목원 방향으로 향하였다.

'이 자, 분명...'

그리고, 다음 순간.

"그나저나, 네놈은 상당히 독특한 법술을 쓰는구나."

우득!

그 자가 목을 정반대로 꺾어 나를 돌아보았다.

'원영기(元靈期) 수도자다...!'

"놈, 도망도 안 치고 얼굴도 균형잡히게 반반한 게 마음에 드는군. 내 제자가 되지 않으려냐?"

화아아악!

혈의(血衣) 장포를 입은 자가 손짓을 하자, 월수궁무록과 기타 은신술들이 전부 풀려버렸다.

동시에, 나는 그 자에게서 느껴지는 역겨운 심상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구토를 했다.

"왜에에에엑! 우욱!"

'원영기 수도자, 그것도, 지금껏 어마어마한 사람을 잡아먹어온 괴물이다...!!!'

눈 앞의 존재가 내 추태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이 보였다.

생화(3)

"이... 더러운 놈. 됐다. 그냥 죽어라."

원영기 수도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짓을 했다.

나는 의념의 지각, 요족의 지각을 전부 일으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뒤로 물러섰다.

시뻘건 영기 덩어리가 내가 있던 자리를 스친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희미한 감탄의 빛이 맴돌았다.

'아니, 얼굴이 맞긴 한가.'

원영기 수도자는 속이 비쳐 보이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은 마치 안개 같기도, 꿈틀거리는 액체 같기도 했는데, 그 안쪽으로는 원영기 수도자의 얼굴의 윤곽만 보일 뿐 제대로 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난 그의 의념만을 보고 그의 기분을 맞춰야 했다.

"이거, 놀랍군. 피하라고 날린 게 아닌데... 어떻게 피한 거지? 축기기 수준으론 감지 자체가 안 됐을텐데..."

그가 검은 가면 너머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의 눈에 순간 혈광(血光)이 번뜩였다.

'또 온다!'

나는 다시 한번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다시 한 번 핏빛의 뭔가가 내가 있던 자리를 쓸고 갔고, 원영기 수도자가 입을 벌렸다.

"허어, 요행으로 피한 게 아니었어. 네 눈, 끝까지 내 법술을 '보고'있더군. 그래, 일반적인 눈이 아니구나. 뭔가 특이한 영안(靈眼) 신통을 익힌 게냐? 축기기 수준에서 내 법술을 보고 피할 수 있는 영안 신통이라... 그런 게 뭐가 있었더라..."

그는 가면 너머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머리칼을 쓸었다.

반투명한 새카만 가면, 그리고 가면 바깥으로 드러난 새카만 장발.

시체처럼 창백한 손, 피처럼 빨간 혈의(血衣).

슈왁, 슈왁, 슈왁!

기묘한 분위기의 원영기 수도자는 말을 하면서도 나를 반드시 잡겠다는 듯, 나를 향해 쉴새 없이 예의 핏빛 법술을 쏘아냈다.

'육안으로는 확실히 감지가 안 된다. 일반적인 의식영역에서도 잡히지 않고.'

의념의 색상, 그리고 요족의 지각으로만 법술을 알아차리는 게 가능하다.

'어떻게 의식영역에도 안 잡히는 법술이 있지?'

이게 원영기 수도자의 법술인건가?

몇 번을 피해 다녔을까, 그가 두 손을 맞부딪혔다.

짝짝짝짝

"훌륭하군. 마치 원숭이처럼 잘 도망다니는구나. 축기기 주제에 굉장히 빠르고 독특한 신통을 익혔어. 결정했다. 너는 잡아서 내 혈시(血屍)로 제련하겠다."

촤아악!

그의 손 위로 시뻘건 핏빛의 정순지력이 모인다.

정순지력은 마치 진짜 피처럼 출렁거리더니, 커다란 혈조(血爪)의 형상이 되었다.

촤아아앗!

그가 손을 까딱하자, 혈조가 내게 쏘아져 왔다.

'젠장!'

나는 이를 악물고 무형검을 꺼내 잡았다.

꽈아아앙!

공간이 울린다.

내 손이 벌벌 떨렸다.

"끄윽..."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 전신의 뼈가 마구 울렸다.

축기 중기에 오르며 의식의 크기도 커졌기에, 출력도 한창 올랐건만.

그럼에도 원영기 수도자가 장난처럼 내쏜 일격을 막는 것조차 버거웠다.

"호오... 너."

그리고, 무형검을 꺼내든 것은 오히려 그의 호기심을 북돋웠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뭐냐, 그 법술은? 900여년을 살아왔건만 난생 처음 보는 법술이로군. 일반적인 축기기가 아니었구나. 결단경의 애송이였어.

그런데 결단기 수도자의 금단(金丹)은 정작 형성하지 못한 것 같고... 하하하하!"

그가 흑색의 반투명한 가면을 잡고 웃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여자의 것 같기도, 남자의 것 같기도 한 괴기한 목소리였다.

백골귀마와도 달랐다.

그가 남자와 여자, 그 어느쪽도 아닌 중간 같은 느낌이었다면, 저 자는 남성과 여성이 마구 뒤섞인 혼잡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래, 정했다. 너 같은 놈을 혈시 따위로 제련하는 건 아깝지. 너를 내 혈종(血從)으로 삼겠다. 사실상의 제자 제안인데, 이래도 계속 도망다닐 것이냐?

내가 큰 인심을 써 내 앞에서 구토를 하는 무례를 저지른 네놈을 내 제자와 같은 혈종으로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츠아아아-

원영기 수도자의 주변으로 시뻘건 피안개가 퍼져나가며, 주변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안개는 어느덧 봉명성의 대문을 틀어막고, 내가 도망갈 퇴로를 아예 막아버렸다.

'제길...'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 미천한 후배가 선배님의 밑에 들어갔다, 선배님께 폐를 끼칠까 우려가 됩니다.

저 같은 잡것을 거두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에 누가 되면 아니 되지 않습니까?"

"흐하하, 내 존성대명이 뭔지는 알고?"

"..."

"쯧쯧, 신기한 일이로고. 딱 봐도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인데, 여기에 와 있고, 여기에 있었으면서 또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있던 것이냐."

그는 혀를 차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 허공에 흩뿌렸다.

츄와아아악!

흠칫!

수천개의 핏빛 깃발이, 봉명성 1층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진법 깃발?'

수많은 시뻘건 빛무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저 자가, 봉명성의 1층에 진법을 깔려 하고 있었다.

"일단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혈목자(血木者), 원립(禐立)이다."

원립이 자신의 반투명한 가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

"...후배가 지식이 없어..."

"못 들어봤겠지. 걱정 마라. 내가 수백년 동안이나 일부러 내 정체를 숨기고 살았으니. 거기에 나는 일개 산수일 뿐이라 네가 나를 모르는 게 사실 정상이다.

나와 맞서겠다고 지금 전쟁을 벌이는 수많은 수도가문의 잡것들도, 나를 그동안 사막 한 가운데 살던 결단기 산수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나에 대해 아는 이들은 지금은 가고 없는 천인기 수도자 몇몇 뿐이니까."

원립이 음충맞게 웃었다.

나는 그가 봉명성 1층에 깔고 있는 진법을 경계하며, 빠져나갈 틈을 보았다.

'봉명성의 벽에 구멍을 뚫고 나가야 하나? 아니, 봉명성의 금제를 뚫으려면 서란이 만들어 왔던 금제를 뚫는 족자가 필요하다.

족자의 내용은 전부 기억하고 있어서 만들 순 있지만, 시간이 조금 필요해.'

"...선배님께서 이 후배에게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말했지 않느냐. 내 혈종이 되라고. 설명했듯이, 나에 대해 아는 이들은 없다. 하나 내가 어떤 자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해줄 수 있노라."

그가 자신의 가슴을 짚으며 기분 좋다는 듯이 뇌까렸다.

"천인기 수도자들이 해룡왕의 주도 아래, 전 대륙의 원영기 이상, 그리고 원영기에 도달할 자질을 가진 결단기, 특이 체질을 가진 축기기, 연기기 놈들을 싹 쓸어갈 때에도 이 사막에 몸을 숨기고 있던 원영기 수도자.

그것이 나이다. 하하, 용의 꼬리가 될 바에야 뱀의 머리가 되기를 바라며 수백년 동안이나 숨을 죽이고 있었고, 이제야 용들이 전부 승천했으니.

이제 내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수도자이다. 나를 따르면 온갖 부와 명예, 그리고 수많은 영약과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어다. 내 혈종이 되거라."

그가 반투명한 가면 너머로 눈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머리가 어지러워 진다. 갑자기 혈목자 원립이 위대해 보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어진다.

"답천사막 서쪽의 세 수도가문이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북쪽 초원의 네 부족이 내 앞에 조아렸으며, 동쪽 국가의 다섯 군주들이 나를 따르겠노라 천명하였다.

자, 원영기에 이른 이 혈목자가 너를 종으로 거두어주겠다. 내 혈종이 되어라. 내 너를 귀히 쓰겠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었다.

----!

시커먼 저주문이 내 입에서 나와, 내 자신에게 꽂혔다.

"끄으으읍!"

저릿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하며, 뿌옇던 머리가 맑아졌다.

"끄흑, 끄으읍... 선배님께서, 어찌 저 같은 모자란 후배를 얻으려 그리 애쓰시며 미혼술까지 쓰십니까."

부웅, 붕!

나는 무형검을 휘둘러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그림자 같은 것들을 잘라버리고, 다시 한 번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흠..."

기류가 바뀌었다.

원립의 의념이 짜증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적당히 알아서 노예가 되었으면 편했을 것을. 특이한 능력을 많이 가진 놈이길래 내 혈체(血體)에 산 채로 합성시켜 보려 했더니만, 자꾸 반항을 하는구나."

오싹!

방금 전처럼 따뜻한 목소리가 아닌, 싸늘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내게 미혹술 같은 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쿠구구구!

그리고, 순식간에 봉명성의 1층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봉명성 1층에 흐르던 수많은 영맥이 갑작스레 날뛰기 시작한다.

"뭐, 됐다. 적당히 혈종으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삶을 만끽하게 해 주려 하였거늘... 혈쇄진(血碎陣)에 갈려 죽어라."

"뭣...!"

다음 순간, 봉명성의 1층 전체의 영력이 끓어오르는 듯 하더니 핏빛이 천지사방을 덮었다.

* * *

핏빛이 잦아들었다.

"커헉...! 허억..."

나는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무형검을 잡고 간신히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봉명성 1층, 여러 구획을 구분짓던 벽과 결계들이 무너져, 1층이 전부 통합되었고, 1층의 천장이 싹 무너져 2층과 1층이 훤히 뚫려 버렸다.

이곳 저곳에, 1층 곳곳에 숨어있던 결단기 수도자들의 시체.

그 잔해로 보이는 손, 발, 살점 등이 튀어 있었다.

"꺼헉, 끄윽..."

나는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허, 이거 물건인데. 혈쇄진을 버텨?"

무형검으로 사방에서 끓어오르는 진법의 기운을 전부 흘리고, 쳐내고, 산외산부진을 유지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쳐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나는 지금 무너져가는 중이었다.

저벅, 저벅...

원립이 내게 걸어왔다.

'젠...장.'

저항할 기력이 없었다.

"정했다. 네놈은 내 제자로 삼겠다. 처음에 구토를 했던 것쯤이야 혈쇄진을 한번 버틴 걸로 넘어가 주지."

부들 부들...

털썩!

원립이 내게 다가올수록,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박이 짙어졌다.

나는 결국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콰악!

원립이 내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들어올렸다.

촤악!

그의 왼손에, 반투명한 깃발 같은 것이 쥐어졌다.

깃발은 은은한 법력과 의식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깃발에는 귀신 같이 생긴 것이 새겨져 있었다.

콰악!

"끄..으아아아아아아!!"

원립은 그대로 깃발을 쥐고, 깃발을 내 머리에 박아넣었다.

깃발은 영체인듯, 내 머리를 관통해서 내 상단전 안쪽, 나의 의식영역의 중앙, 내 혼백(魂魄)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내 혈주번의 술법을 박아넣었으니, 앞으로 나에게 반항하려 하면 혼백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니라.

일반적인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니, 역심을 갖지 않는 것을 권하지."

따악!

원립이 손가락을 튕긴다.

동시에, 내 혼백에 박힌 그의 법술이 발동하며, 극악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

"끄..으아하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꿈틀대었다.

동시에 혼백에 꽂힌 그의 법술이 내 전신에 녹아들며, 내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 느껴졌다.

따악!

그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고통이 가라앉았다. 원립은 그대로 내 머리채를 잡은 채, 나를 질질 끌고 어딘가로 향하였다.

나는 겨우겨우 정신을 다잡으며, 어지러운 정신을 집중했다.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얼마 후, 땅 아래에 풀과 흙이 느껴졌다.

'여긴, 수목원?'

아까 그 진법에 박살이 나지 않았던 것인가?

"흐음, 배가 불러터진 욕심쟁이 천인기 놈들. 역시나 좋은 건 다 따 갔군.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음? 오..."

점차 익숙한 영력이 느껴졌다.

"하하, 어린 수원목이 하나 남아있었나? 거기다 장생과도 거의 열려있는데..."

휙!

툭!

그는 나를 근처에 던져둔 후, 법결을 맺었다.

츄와아아악!

봉명성 1층, 1층 구석구석에 숨어들었던 결단기 수도자들의 잔해.

그곳에서, 새하얀 빛무리가 뽑혀나왔다.

쿠구구구!

빛무리들은 사방에서 모여, 원립의 위쪽에서 빛의 강이 되어 흘렀다.

'생명력...?'

그는 혈쇄진으로 죽인 결단기 수도자들의 시체에 남은 생명력을 뽑아 모으고 있었다.

"피어나라."

촤아아악!

이윽고, 그가 손짓을 하자 생명력의 강은 그대로 장생과에 흡수되었다.

촤아아아악!

'...하.'

내가 몇십년 동안이나 법력을 쏟아넣었던 것이 무색하게, 혈목자가 죽인 결단기 수도자들의 생명력을 무더기로 부어넣자, 장생과는 빠르게 맺혔다.

그리고 장생과 옆에 있던 다른 꽃봉우리들 역시 빠르게 부풀어 오르더니 장생과로 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를 먹여 나무를 성장시키고 있었다.

'마도(魔道) 공법은, 편리하군.'

남의 것을 빼앗아 저렇게 들이 붓기만 해도 결과가 빠르게 나온다.

본래 자신이 가진 힘 이상의 것조차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원립이 하는 짓을 보며, 뭔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했던 짓은, 의미가 있는가.'

그때였다.

원립이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대강 정신이 들었느냐. 걱정 마라. 장생과가 이렇게 많이 맺혔는데, 하나쯤은 네놈을 주마."

"...아, 니."

"음?"

"먹지, 않, 겠습니다."

나는 안 움직이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말했다.

"남을, 희생시켜, 만든... 열매는, 입에 대지, 않을, 것입니다."

"흠... 웃기는 놈이로군. 좋든 싫든 네 입에 집어 넣을 것이니까 그리 알아라. 그리고 뭐, 남을 희생시켜?"

큭큭큭...

원립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틀렸다. 남을 희생시킨 게 아니라, 강한 자로서 약한 자를 잡아먹은 것이다. 약육강식은 이 세상의 진리이고, 진실이다. 강자로서 약자를 잡아먹는 게 뭐가 잘못됐단 말이냐?"

"...세상은, 강자와 약자로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우득, 우드득...

나는 손가락을 꿈지럭 거렸다.

원립의 의지가 내 혼백을, 전신을 제압했다. 그가 내 혼백에 꽂은 법술이 움직이며, 내 혼백을 찢어발기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러나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으로 이뤄져있고, 사람이 같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강자와 약자를 떠나 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허, 그걸 이겨내?"

그러나 원립은 매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오히려 내가 그의 법술을 이겨내고 움직이는 게 더 신기한 듯 했다.

"놀랍군. 혼백이 갈갈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서 있단 말이냐..."

그리고.

푸콱!

그가 다시 하나의 깃발을 더 형성한 후, 내 머리에 박아넣었다.

"끄으으읍!"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통은 두 배가 아니라, 제곱으로 늘어난다.

"놀라운 정신력이로구나. 절로 찬탄이 나오는군. 뭐, 사람과 사람 어쩌구 하는 네놈 개똥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약육강식은 진리이며, 당장 현실이니까. 봐라, 지금 현실에서 증명이 되고 있잖으냐."

쿠구구구!

그가 사방에 흩뿌렸던 진법 깃발들이, 봉명성 1층에서, 뻥 뚫린 천장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혈쇄진, 개(開)!"

쿠구구구구!

다시금 봉명성의 2층이 핏빛에 휩싸이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2층에 숨어있던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한줌 육편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혈목자의 손짓에, 진법 깃발들은 다시 3층으로 향했다.

그는 봉명성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있었다.

수많은 육편과 혈우가 떨어졌고, 그때마다 원립은 육편들에 남은 생명력을 뽑아 그의 머리 위에 모았다.

"왜...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그에게 물었다.

전신이 또 다시 금제에 제약당했지만, 기력을 조금 더 모으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을 벌자.'

원립은 생명력을 모아 자신의 앞에 모으며 읊조렸다.

"봉명성을 얻기 위해서지."

"...봉명성을...?"

이게, 누군가가 얻을 수 있는 유물이었단 말인가?

'그럼 천인기 수도자들이 봉명성을 통채로 안 가져간 이유가 뭔가 있나?'

그가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봉명성의 구조를 혹시 알고 있느냐?

봉명성의 1층은 목(木)을 상징하는 청존칠수, 각항저방심미기에 대응되고,

2층은 수(水)를 상징하는 음존칠수, 두우여허위실벽. 3층은 백존칠수 규루위묘필자참, 4층은 양존칠수 정귀유성장익진에 대응되는 층이다."

원립은 알고 있는 지식을 떠들고 싶었는지, 묻지도 않았던 것까지 계속 떠벌리기 시작했다.

"5층은 태미원, 6층은 자미원, 7층은 천시원에 대응되지.

하늘의 분야도에 대응되는 봉명성의 구조가, 뭘 상징하는 것 같으냐."

"...수도자의 경지에 대응되는 겁니까?

태미원 자미원 천시원이라면 결단기의 경지이기도 했다.

28수의 대응되는 것이 축기기였고, 3원에 대응되는 것이 결단기였으니.

봉명성이란 어쩌면 수도자의 수선과 관련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원립은 고개를 저었다.

"뭐,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틀렸다. 봉명성을 만든 제작자는 그냥 '하늘'을 구현해놓은 것이야."

'하늘?'

"28수, 3원, 그 너머의 하늘에는 뭐가 있지?"

"해, 달, 또 다른 별이 있지 않겠습니까?"

"틀렸다. 하늘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어. 공허(空虛)... 애초에 봉명성이 허공간을 떠다니는 이유 자체도 그와 관련되어있지.

아무것도 없는 허망한 하늘. 그것이 봉명성의 제작자가 말하고팠던 것이야."

콰과과과광!

이윽고, 봉명성의 1층부터 7층이 전부 무너져내렸다.

봉명성의 모든 층이 통합(通合)된다.

"봉명성의 전층을 통합하고, 공허를 재현하면, 숨겨진 '진짜' 봉명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통합된 거대한 봉명성의 중앙.

그 중심에서, 푸른 빛이 뿜어지며, 찬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저게 진짜 봉명성이다. 아니 정확히는 봉명인(奉命印)이라고 해야겠지."

원립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푸른 빛이 원립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작은 봉명성 형태의 모형이었다.

옥으로 된 그것은, 마치 장난감 같아 보이기도 했다.

"대륙의 운명(運命)을 상징하는 봉명인을 손에 넣었다! 하하하! 전 대륙의 천운이 내게 떨어졌어!"

나는 그 빛에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또 뭡니까. 그런 보물이 있었다면, 어째서 천인기 수도자들은 그런 것을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가져가지 않은 게 아니라, 가져갈 필요가 없던 거지. 봉명인은 이 세계와 강력한 운명의 인력으로 매여있으니까.

봉명인은 비승 전에 축복(祝福)을 받는 용도의 것이지, 괜히 비승 때에 가져가면 봉명인에 담긴 운명의 인력에 끌려 비승에 실패해버리니까 말이다..."

"축복...?"

"그나저나, 아까부터 말이 많아졌구나."

원립이 나를 흘겨보았다.

우득, 우드득...

나는 다시금 기력을 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어떻게 되먹은 정신력이냐? 자기 의식의 크기조차 초월한 의지력이 아니면 그 고통을 못 버틸텐데..."

"...선배님께는 죄송스럽지만."

나는 혈목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을 갈아 피운 그 열매를 먹을 생각이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찌보면 꽃과 같다고, 수원목과 통하면서 그리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삶은 곧 하나의 꽃(生花)이었다.

"멋대로, 사람의 삶을 꺾어대는 당신을 따를 생각도 없습니다."

처억!

나는 기수식을 잡고 혈목자를 노려보았다.

"나를 죽이십시오."

"봉명인을 얻고, 끝없는 의지력을 가진 기이한 제자도 얻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쁜 날이 아니랴..."

촤악!

그의 손에 혈주번이라는 깃발이 다시 형성되었다.

"과연 봉명인을 얻으면 천운을 얻는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렸다..!"

원립이 법술을 일으켰다.

나는 무형검을 들고 원립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파아앗!

그대로 빠르게 원립을 지나쳐, 저 멀리, 봉명성의 외벽을 향해 날아갔다.

번쩍!

손 안에서, 그 사이에 몰래 만들어두었던 봉명성의 금제를 해금시킬 수 있는 해주진이 떠올랐다.

콰아앙!

무형검이 봉명성의 외벽을 파고들어 구멍을 냈고, 해주진이 외벽 너머의 금제를 흩으며 탈출구를 만들어 내었다.

생화(4)

콰아아앙!

봉명성의 외벽이 터져나간다.

봉명성의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건조한 사막의 공기와 모래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오히려 봉명성 안쪽의 피비린내에 비하면 향긋하게 느껴졌다.

촤아아아아!

내가 뚫고 나온 봉명성의 외벽 금제 구멍으로, 시뻘건 피안개가 새어나왔다

피안개의 중심.

그곳에서 원립이 걸어나온다.

"당돌하군. 감히 네가 내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파아아앗!

핏빛이 원립을 뒤덮는다. 그가 비둔술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무형검을 잡고 의식을 가속시켰다.

축기 중기에 이르러 기반이 되는 의식의 크기가 더더욱 커진만큼, 가속되는 의식 역시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파바바밧!

나는 허공을 박차며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일반적인 결단기 수도자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

그러나, 핏빛에 뒤덮힌 원립은 느릿하게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원영기 수도자!'

나는 이를 악물며 전신의 기력을 짜내어 더욱 더 빨리 허공을 질주했다.

* * *

원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영 중기경의 이 내가, 아무리 전력이 아니라지만 비둔술로 단박에 놈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껴지는 저 애송이의 수행은 기껏해야 축기 중기, 2수 정도였다.

물론 실제 실력은 결단기, 그것도 일반적인 결단기 수도자와는 굉장히 판이한 신통을 익히고 있었지만.

아무리 잘 쳐줘야 결단기였다.

'그런데 어찌 결단기 놈이 나와 이 정도로 추격을 벌여?'

거기다가 특별한 비둔술을 쓰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공기를 박차면서 달리고 있었다.

'비둔술은 못 쓰는 것이, 정상적으로 금단을 맺어 결단기에 도달한 놈은 아니다. 한데, 저 놈이 금단까지 맺어 결단기에 오른다면...'

원립이 가면 안쪽의 미간을 찌푸렸다.

'성가신 놈이 되겠어. 거기다가 혈주번을 두 개나 박았는데 내 통제에서 벗어나는 저 의지력... 오행혈주번(五行血呪幡) 중 네 개 정도는 박아둬야 통제할 수 있겠군.'

"큭큭... 무릎꿇린 수도가문과 부족장, 군주란 놈들도 오행혈주번 한 개 정도만 머리에 박혀도 살려달라며 울부짖었건만, 두 개가 박히고도 저리 팔팔하다니. 저 혼백을 제련하면 뭘 만들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반드시 내 제자로 삼아주마..!"

원립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법결을 맺었다.

* * *

쿠구구구!

뒤쪽에서 소름끼치는 영기의 파동이 울렸다.

피안개가 뒤쪽의 사막을 뒤덮었다.

마치, 핏빛의 모래폭풍이 사막을 뒤덮는 듯 했다.

'피해야, 아니, 숨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월수궁무록조차 통하지 않았다.

'월수궁무록이, '왜' 통하지 않았지?'

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월수궁무록은 의식영역을 자르고 그 틈새에 숨어 달아나는 무학이었다.

그런데도 발각당했다.

'잠깐, 애초에 저 원영기 수도자는 '의식영역에 걸리지 않는' 법술로 나를 노렸다.'

그리고 그 법술은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으로야 겨우겨우 눈치챌 수 있었었다.

'원영기가 되면, 의식영역을 벗어나는 뭔가를 손에 넣는단 건가? 하지만, 의식영역은 벗어났을지언정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은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고민했다.

그리고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결론을 도출해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월수궁무록으로 '다른'것까지 베어내 보자.'

나는 무형검을 쥐고 의식을 집중했다.

보인다.

원립의 의식영역이.

그리고 천지영기에 흐르는 음양의 흐름이.

의념의 색상들이.

후우우-

의식영역말은 가르던 검.

그 검의 영역을 넓힌다.

천지영기를 가르고, 의념의 색마저 가른다.

그리고.

그 틈새로 숨는다!

파아아앗!

월수궁무록의 극한을 초월해낸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쳐낸, 월수궁무록을 넘어선 무학.

그리고, 그 틈새로 숨어들었을 때였다.

멈칫!

원립이, 그 자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됐다!'

아까와 같이 바로 나를 알아차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통한다!'

천지영기와 의념의 색상마저 모조리 잘라버리면, 과연 원영기 수도자의 눈마저 속일 수 있는 듯 했다.

"오호, 이건 또 뭐냐. 부릴 수 있는 재주가 많군.'

그러나, 나는 내 운명의 앞날에 흉함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쿠구구구구!

원립의 뒤쪽에서 피어나던, 사막을 뒤덮던 피안개가 사방으로 깔린다.

월수궁무록은 상대의 빈틈을 잘라내고 사각을 만들어 그 안에 숨는 것이지, 공간을 이동하는 무학이 아니었기에.

나는 썩은 표정으로 원립이 피안개의 중심에서 법결을 맺는 것을 쳐다보았다.

"몸을 숨긴 모양이다만. 그럼, 어디 이 폭발에서 도망쳐 봐라."

파아아앗!

피안개가 핏빛을 발하며 부풀어 오른다.

* * *

혈목자 원립은 법술의 위력이 잦아들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경 3리가 그대로 날아갔고, 사막 한 가운데에 거대한 구덩이가 패였다.

그리고, 서은현은 보이지 않았다.

원립은 반투명한 가면 안쪽으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더욱 더 가지고 싶어졌군. 이걸 피해서 도망쳤다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반투명한 공간 균열이 나 있었다.

* * *

"그아아아...!"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상단전이 불탄다.

강기가 전신에 흐르는 것과 별개로, 상단전을 강제로 옥죄 불태워 재능을 격발시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진씨세가가 왜 재능을 향상시키는 그 좋은 비술을 자기들한테 안 사용하고 범인들한테나 썼겠는가.

상단전을 건드리는 건, 어찌되었든 극악한 위험을 동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단전이 불타는 것을 느끼며,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파앗!

뭔가를 몸이 관통한다.

전신이 더더욱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았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잡히면 죽음이나 다름없다.

'내가, 뭘 어떻게 했더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음을 각오하고서, 나는 '뭔가'를 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그래.'

영훈 형님이 나를 도와주었다.

피안개가 폭발하는 순간.

영훈 형님이 나타나며 내 옆에서 검무를 추었고, 내 앞에는 그가 남긴 발자국들이 보였었다.

나는 그 발자국들을 따라밟으며, 김영훈을 따라 검을 휘둘렀고, 잠시 이상한 공간에 진입했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어, 어어?'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미친듯이 머리를 굴렸다.

'이 실마리만 잡으면...'

그래, 분명 이 실마리만 잡으면 어쩌면.

내가 강기로 상단전을 태우며 '그것'을 떠올리려 할 때였다.

"...어?"

눈 앞에.

봉명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분명, 줄곧 봉명성의 반대방향으로 도망쳤는데.'

의문을 가라앉히기도 전.

핏빛 혈광이 내 뒤쪽에서 번뜩였다.

"뭣..."

꽈앙!

혈조가 나를 후려친다.

나는 무형검으로 방어를 했으나, 그대로 혈조에 맞은 채 다시 봉명성.

정확히 내가 뚫고 나왔던 구멍으로 들어갔다.

"커억! 거헉!"

내가 피를 토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할 때였다.

어느새 내 앞에 다가온 원립이, 반투명한 핏빛 깃발을 들어올렸다.

콰아악!

"끄아아악!"

혈주번이 내 상단전을 파고들어가며, 상단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을 강제로 억누른다.

강기로 불타던 상단전의 작용이 다시 정상화된다.

"크헉, 거어억!"

그러나 나는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놀랍군. 방금 전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어찌 결단경 따위가 원영기 수도자의 전이술을 흉내낸 거지?"

뭔가, 뭔가 닿을 것 같았는데...!

나는 이를 악물며 무형검을 더욱 거세게 쥐었다.

그리고, 무형검의 색상이 황금빛으로 화하며, 능광도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영훈 형님이 사용하던, 그가 추구하던 길을...'

그리고.

푸콱!

"크아아악!"

또 하나의 깃발이 상단전에 틀어박혔다.

고통이 깨달음을 흩어버린다.

무형검이 흩어진다.

원립은 어쩐지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행혈주번은 본디 천인기 수도자의 의식을 제약하고 도망치기 위해 고안된 법술이며, 천인기 수도자조차도 직접 틀어박히면 고통에 정신을 못 차리건만. 고작 축기기 따위가 천인기 수도자의 의지력을 뛰어넘었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악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네 개의 법술이 내 혼백에 박혀 영혼을 압박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법술보다는 다른 것이 더욱 더 괴로웠다.

'깨달음을, 놓쳤어!'

또 다시!

비록 외압에 의해서라지만, 너무나도 그것이 분하고 안타까웠다.

"왜... 나는 다시 봉명성에 돌아온 거지?"

"흠, 네가 무작위 전이를 하지 않았느냐?"

"...?"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공간 균열을 열고 생각없이 뛰어드는 멍청한 짓... 천인기 수도자 급이 대강이라도 좌표를 잡아주지 않는다면, 본래는 공간 기류에 휘말려 몸이 갈려버리는 미친 짓. 그게 네가 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확률로만 다시 이 세계에 돌아올 수 있는 행위. 하지만, 너는 봉명인을 가진 내 앞에서 도박을 저질렀다."

"...?"

원립이 히죽 웃으며, 품에서 푸른 빛의 옥으로 된 봉명성의 모형을 꺼내들었다.

"운명에는 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느냐? 운명은 존재를 끌어당기지.

그리고 봉명인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중 첫번째가 소지자에게 천운을 부여하는 것이다. 봉명인의 소지자는 강력한 운명을 얻고, 소지자가 원하는 것은 운명의 인력에 의해 소지자의 주변으로 끌려들지.

그것이 네가 내게 도망칠 수 없던 이유이다."

"..허, 허허."

저건 또 무슨 미친 기물이란 말인가?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물건이오..?"

"존재 '해야만'하는 기물이다. 사실 봉명인의 첫 번째 기능은, 제작자가 두 번째 기능을 만들다가 겸사겸사 넣어진 기능이라 하더군."

원립이 탐스러운 눈빛으로 봉명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봉명인은, 본디 축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이다. 먼 옛적, 금신자 양수진이 승천문을 만들기 전에는 수도자들이 어떻게 비승했다고 생각하느냐?"

우웅!

그가 봉명인을 쓰다듬자, 봉명인이 오색의 빛을 뿜어냈다.

"승천문이 없던 예전에는 그냥 전해져 내려오는 상계의 좌표를 외워서, 천인기 후기들이 자살하듯이 공간균열에 몸을 던지는 식으로 비승을 했다 하지.

이 봉명인은 그런 이들에게 축복을 주어, 수도자들에게 상계와 연결된 운명의 인력을 부여하여 '상계와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했다."

"....!?"

"상계의 운명의 인력을 부여하는 축복을 내리는 와중, 소지자의 운명의 인력을 강화시켜 천운을 부여하는 부가기능이 생긴 엄청난 선보. 그것이 이 봉명인이다."

나는 그 말도 안되는 설명에 잠시 입을 벌렸다.

'고작 물건에, 운명을 부여하는 기능이 들어있다고?'

문득, 양수진의 잔영이 생겨났다.

그는 종명자들을 끌어들이는 운명의 인력을 쇄천봉에 부여했다고 했다.

그것도 고작 잔영 주제에!

그 말대로라면, 어쩌면 일정 경지에 이른 존재들은 운명의 인력을 조정하는 신적 존재로 승화하는지도 몰랐다.

오싹!

'수도의 끝에 도달하여 진선이 되면,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는 거지?'

그러나 잡념이 생기기도 전.

봉명인에서 뿜어지던 오색의 빛이 나와 원립에게 흘러들어갔다.

"흐흐, 축복이 흘러 넘치는군. 이번 천인기 수도자들은 봉명인의 축복을 안 받고 비승한 탓인가..!?"

그가 흡족한 듯이 봉명인을 바라보았다.

"...?"

상계와의 거리를 좁히는 축복을, 이번 천인기 수도자들은 안 받았다고?

내가 의아해 할 때였다.

그가 내 뒷덜미를 잡고 수목원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자, 그럼 수명을 늘리러 가 볼까..."

나는 비참하게 그에게 끌려가며 자조섞인 미소를 지었다.

삶은 곧 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화(生花)는 본디 산 채로 꺾인 꽃.

누군가에게 꺾이기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꺾이기만 할 지라도...'

우득, 우드득...

'할 수 있는 한...'

몸을, 움직인다.

'뿌리를 딛고, 하늘을 쳐다볼 것이다...!'

모든 나무와 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형해 솟듯이.

나 역시, 내가 뿌리내린 역사가 존재하는 한.

결코 쉬이 이 마음을 꺾지 못하게 하리라..!

우드득!

"뭣..."

콰과광!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법결을 맺었다.

"음혼귀주!"

수 개의 저주문이 뻗어나오며 원립을 향한다.

"쯧, 귀찮은 놈!"

파앙!

원립이 콧김을 뿜자 스러졌지만, 나는 미소를 쥐며 다시금 무형검을 잡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 * *

원립은 눈 앞에서 발광을 하는 서은현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오행혈주번 중 벌써 네 개를 박아넣었다.

다섯개를 박아넣어 오행혈주의 주법을 완성시킨다면, 저 기묘한 녀석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수십 배가 될 터.

하지만, 오행혈주번의 신통은 다섯 개를 박아 오행혈주를 상대의 혼백에 박는다면, 상대가 오행혈주의 금제를 연화시킬 시 오행혈주의 신통이 그대로 상대에게 넘어간다는 단점이 있었다

애당초 오행혈주번의 신통은, 전수자가 혈주번 다섯 개를 100분의 1로 약화시킨 상태에서 피전수자에게 박아넣음으로서 전수된다.

피전수자가 100분의 1로 약화된 혈주번 5개를 받아들이고, 연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에 성공하면 오행혈주번의 전수가 완료된 것이었다.

'저 놈이, 오행혈주번을 5개나 꽂았는데도 통제가 되지 않고 그 고통을 이겨내면 어찌하지...?'

문득, 원립은 스스로가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괜한 생각이다. 사주번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오주번은 살아있는 인간의 정신으로 버틸 수 없다.'

그저, 저 특이한 녀석의 정신이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생긴 기우일 뿐이다.

원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섯번째 혈주번을 들고 서은현에게 다가갔다.

'오주번까지 꽂아넣고, 이 놈이 부리는 신통이 뭔지, 이 놈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되먹은 건지 뇌를 한번 열어봐야겠어.'

푸콱!

서은현의 무형검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간 원립이, 다섯 번째 오행혈주번을 박아넣었다.

파아아앗!

서은현의 혼백 안쪽, 다섯 개의 핏빛 깃발이 오행의 이치에 따라 상부상조하며, 정신을 금제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작용을 수십 배 이상 증폭시켰다.

"아아아아-..!"

결국 머리를 부여잡던 서은현은 거품을 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흐음... 역시, 인간이라면, 아니 생명체라면 이 고통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지."

원립은 눈 앞의 기이한 결단경 애송이의 혼백이 그의 통제에 들어왔음을 인식하며 미소지었다.

"자아, 일단 이 놈은 추후에 성으로 돌아가 뜯어보도록 하고, 장생과나..."

그리고, 원립이 뒤를 돌았을 때였다.

오싹!

'뭣...'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반투명한 흑색 가면 뒤로, 경악의 눈길이 서렸다.

비틀, 비틀..

서은현은, 입에서 침을 흘리면서, 눈이 반쯤 풀린 상태에서, 그렇게 그의 통제에 저항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무언가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원립이 평정을 잃었다.

'그걸 버틴다고? 천인기 수도자한테도 직접 꽂으면 어느 정도 통하는 법술이다! 해룡왕한테도 시험해보고 그의 인정까지 받았단 말이다..!'

"이, 이 놈..!"

그는 더 이상 눈앞의 애송이를 통제해서 데리고 다닐 생각을 접었다.

오행혈주번은 그가 아는 최고의 정신금제 법술이었다.

이게 안 통한다면, 더는 어떤 금제도 통하지 않는다!

"안 되겠군. 안타깝지만 능력을 연구하는 건 포기해야겠어. 그냥 시신만 내 혈체에 합성해서 반응을 보는 게 낫겠구나..!"

위험했다.

오행혈주를 정신에 남겼으니, 저걸 살려두면 언제고 오행혈주번을 연화해서 자신의 법술로 만들고, 그에게 덤벼올 터였다.

"죽어라!"

그리고, 서은현이 맺던 법결이 완성되었다.

"음(陰), 혼(魂), 귀(鬼), 주(呪)."

촤아악!

서은현은 폭발했다.

혈목자 원립의 본명신통, 혈목(血木)이 그에게 직격했고, 서은현은 폭발하면서 그의 피륙이 한 그루의 혈목이 되어 뿌리내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시뻘건 나무가 자리했다.

나무에는 서은현의 법력과 생명력이 맺힌 한 송이의 생화(生花)가 피어났다.

"...괴물같은 놈."

원립은 그의 가면을 쓸어내리며, 서은현의 가공할 정신력에 혀를 내둘렀다.

"저런 놈이 더 오래 살아남아 성장하기 전에 삭초제근해서 다행이군. 이제 신경쓸 필요 없겠지. 장생과나.."

그리고, 그가 장생과 나무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뭣..."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수원목에 맺힌 장생과들.

그가 수많은 이들의 생명력을 갈아넣어 피워올린, 수많은 과실들이, 새카만 저주문에 뒤덮혀 모두 썩어있었다.

'마지막에 그 법술... 이 놈!'

그는 시뻘개진 얼굴로 뒤를 돌았다.

'혼백은 고이 황천에 보내주려 했더니만... 감히 이따위 짓을 해..!!'

그리고, 원립의 안색이 변했다.

"어...?"

그가,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분명히, 아, 아니지. 당신은 누구십.."

푸콱!

다음 순간.

원립은 그대로 터져나가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한 송이 생화가 피어났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 번째 회귀(回歸)였다.

10회차의 첫날

깜빡!

나는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숲내음이었다.

'...죽었군.'

뭐 어차피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된 타격은 하나도 입히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나마 마지막에 저주로 장생과를 못 먹게 한 게 최후의 발악이었나...'

나는 혀를 찼다.

'그게 원영기 수도자의 힘인가...'

나는 원립이 법술을 쓰자, 피안개가 모래폭풍마냥 사막 전체를 뒤덮건 것을 떠올렸다.

'결단기가 자연재해라고? 웃기고 있군.'

재해란, '그런 것'이 진짜 재해일 터였다.

결단기는 그저 재해를 흉내낼 뿐인 경지였다.

동료들이 주변에서 차츰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의식을 열어 수면술을 써서 동료들을 전부 재웠다.

그리고, 난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왜... 상단전이 안 아프지..?'

무형검으로 의식을 분리해서 의식의 크기를 조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상단전은 멀쩡했다.

부풀어오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슨..끄으으윽!'

"끄허어억...!"

난 갑작스레 터져나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기었다.

"꺼억, 꺼허억..!"

혼백이 마치 찢어지는 듯 했다!

아프다!

너무 아파!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의식영역의 중앙.

내 혼백이 있는 곳.

그곳에, 다섯 개의 핏빛 깃발이 박혀 있었다.

"끄으아아아아악..!"

원립이 남긴 오행혈주번.

그것이, 혼백에 남아 회귀를 따라온 것이었다.

"어억, 어억...!"

그러나 다행히도, 얼마간 미쳐 날뛰며 내 혼백을 마구 헤집던 오행혈주번은 점차 진동이 멎으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후우, 후우..."

오행혈주번의 발작이 완전히 멎었고,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나는 문득 등골로 섬칫함이 기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회귀는 무적이 아니었다.

내 의식영역과 정신이 회귀할때마다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에서 알아차렸어야 했다.

내 의식과 혼백에 연결된 금제는, 내 의식과 함께 회귀한다!

'지금까지 너무 안일했던가...'

고계 수도자가 작정하고 나를 세뇌하거나 의식에 금제를 씌우면, 그 금제는 회귀 이후까지 이어진다.

이 말은즉슨, 한번 고계 수도자에게 잘못 걸리면 나는 영원토록 회귀 내내 그 수도자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단 소리였다.

'일단, 이 오행혈주번은 어떻게 하지..?'

만약 나와 같이 회귀한 오행혈주번이 원립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지금쯤 답천사막에 위치한 원립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일단, 며칠 정도는 안전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립은 원영기 수도자일지언정,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를 기다려 숨여있다가 늦게서야 나타나는 녀석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이 세상에 천인기 수도자들이 바글거릴 이 시점에서는 궁금한 게 있더라도 얼굴도 못 내밀 터였다.

'그렇다면, 등선향을 찾아올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한번 봐달라고 할까..?'

창호자에게 한번 봐달라고 하면, 그의 인품으로 봐서 한 번쯤 확인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나는 희망을 가지며, 우선 주변에 있는 황주삼을 찾아 환골탈태를 했다.

우득, 우드득...

상중하단전에 조화력이 서리며, 육신이 큰 의식도 무리없이 담을 수 있게 진화하였다.

'이제 그나마 조금 지끈거리던 것도 사라졌군.'

나는 의식과 상단전을 다시한번 관조했다.

'그나저나, 이 오행혈주번. 원립의 정신금제만 아니라면 회귀 초기에 상당히 유용할 것 같은데.'

오행혈주번이 의식을 억압해 잡아두며, 상단전이 부풀지 않게 억누른다.

그 덕에 회귀 초반에 굳이 의식을 분리하지 않아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무형검과 오행혈주번만 있다면 의식으로 인한 상단전의 과부하가 완전히 해결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

나는 우선 동료들을 들쳐업고 동굴에다가 데려다주었다.

그런 후 수면술을 더욱 강하게 펼친 후, 의식을 관조했다.

의식 깊숙한 곳.

혼백 안쪽.

그곳에 꽂힌 다섯 개의 핏빛 깃발.

나는 요족의 지각과 의념의 색상을 보았다.

다섯 개의 깃발에서 흐르는 음양의 영기는, 서로가 상부상조하며 내 의식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양의 영기가 다른 먼 곳과 연결되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의념이 흐르고는 있었으나, 그 타인의 의념은 점차 흩어지고 있었고 딱히 외부와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일단, 현재 확인했을 때는 원립과 연결되어있진 않다.'

거기다가 미약하게 남은 그의 의념 역시 흩어지는 중이었고, 그의 의념이 흩어진 자리로 내 의념이 대신 흐르고 있었다.

"이거 그런데, 원립의 의념이 전부 흩어지면 사라지긴 하려나."

흩어지는 속도로 보아 얼마 후면 전부 흩어질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는 혈주번의 금제에, '내 의념이' 흐르는 것을 보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 의념인데, 내 말을 안 듣는다.'

금제의 위를 지나는 의념들은 내 의지에 따르지 않고, 금제의 순리대로 움직이며 내 의념이 스스로의 의식을 억누르는 데에 일조하였다.

우우웅!

내가 의식을 움직여 이기어검을 조종해 보려 하자, 오행혈주번이 떨리며 의식을 압박했다.

"크윽.."

여기서 더 의식을 움직이면 다시금 혼백이 찢기는 그 고통이 엄습할 것 같았다.

'의식을 크게 움직이면 혈주번이 제약을 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삶의 마지막.

원립의 앞에 있을 때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제약을 받았으나, 지금은 원립의 의념이 흩어진 탓인지 의식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 고통은 없었다.

'일단 금제를 완화라도 시켜야 한다.'

금제의 흐름을 관찰하며, 원립의 의념이 전부 흩어지기를 기다렸다.

그의 흔적이 전부 사라진 후에야 나는 금제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이건..'

나는 금제를 뜯어보며, 얼마 후에야 금제를 이루는 근간이치를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의식을 오행(五行)으로 해석한 금제군.'

삼화취정에서 의념의 색을 분석해 오기조원에 이르고, 오행 기초공법을 전부 대성한 내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금제의 근간을 알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허, 재밌군."

물론 영기와 의식, 혼백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에 오행공법을 대성해서, 오행영력의 이치를 어느 정도 꿴 나라고 해도 금제를 단숨에 해체할 순 없었다.

'그래도, 오행을 인간의 의식에 대응시키는 그 방식만 이해하면...'

그렇게 오행혈주번의 부호들을 해석해 가던 중이었다.

'엇, 잠깐 이건.'

나는 문득, 이 부호들이 굉장히 내게 익숙한 부호들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 오행혈주번의 근간을 다시 깨달았다.

"저주신통..."

남의 고통을 극대화시키고 상대를 제압하는 신통술.

이 부호들은 음혼귀주문의 저주부호들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그렇군.'

인간의 정신을 오행으로 해석하고, 오행이 각각 인간의 정신에 가할 수 있는 고통을 찾아낸 신통술.

그것이 오행혈주(五行血呪)의 신통이었다.

촤라라락!

오행혈주번의 근간에 대해 이해하자, 나는 내가 의식으로 내 혼백에 꽂힌 오행혈주번에 간섭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정신은 오행. 내가 강환을 깨달을 때에 얻었던, 나는 나 자신으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과, 오행이 서로서로로 이뤄져 있듯 그 정신도 각각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는 깨달음은 맞닿는 부붐이 있구나...'

우우웅!

내 의념이 조금씩 움직이며, 오행혈주번을 움직였다.

혼백 깊숙히 박혀있던 오행혈주번이 움직이며, 점차 혼백 위로 조금씩 부상하기 시작했다.

'밀어낸다...!'

파아아앗!

의식이 점차 돌아온다.

예전 의식의 크기가 점차 돌아오며, 다시금 의식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있었다.

"아아.."

나는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던 몸이 기지개를 펴듯, 불편하게 오행혈주번에 압박당하던 의식을 일으켰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덜걱!

의식은 몸을 일으키던 중 다시금 오행혈주번의 금제에 걸려버렸고, 의식의 7할 정도만이 움직임을 되찾은 상태에서, 나는 눈을 떴다.

"완전히 금제를 풀려면 뭔가 더 해야 하는건가."

7할 이상 의식을 찾았기에 불편함은 거의 없었고, 남은 3할 역시 고통을 감수하면 움직일 수야 있었기에 걱정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오행혈주번을 더 밀어내려 해봐도 뭐가 부족한 건지, 오행혈주번은 사라지지 않았다.

'젠장, 혈목자. 귀찮은 걸 남겼군.'

나는 이 즈음에서 금제를 연구하는 것을 멈추고, 나머지는 창호자 등에게 조금 맡기기로 했다.

'창호자도 안 되면, 섭명함에 남아있는 송진의 유언을 들어준 후 그에게 부탁해봐야겠어.'

어쨌든 그도 천인기 수도자의 잔혼이었기에 아는 것은 많으니 분명히 해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우우웅!

나는 의식을 가라앉히고 눈을 떴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곤히 자는 동료들을 바라본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命)이란 건, 뭐지..?"

쇄천봉에서 얻은 양수진의 잔영이 말한 명.

김영훈이 깨쳤다고 한 명.

원립이 봉명인을 얻은 후 설명한 명.

괴군은, 운명이란 것이 실제한다고 하였다.

또한 수선의 극한에 이르면 운명에 어느 정도 간섭하기 시작하는 게 가능한 듯 했다.

'그리고, 종명자란 건...'

양수진의 잔영을 봤던 것이 바로 지난 삶이었다.

'수선을 해서, 운명에 간섭이 가능한 존재가 된 양수진조차 그 꼴로 만들어버린 뭔가가, 삼천세계 전체를 주시하고 있단 건가? 종명자란 걸 찾기 위해...?'

종명자는 또 뭐고, 이 세계는 뭐란 말인가.

나는 문득, 노을이 지고 별들이 떠오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저 별들이 이 지상을 관찰하는 눈 같다는 느낌을 받아 흠칫했다.

'젠장, 과한 생각이다.'

별들 하나하나가 눈이라니, 그만큼 소름끼치는 상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삶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축기기에 오르고, 월도입천을 깨닫고, 서란과 함께 송진을 잡은 후 그의 임종을 지켜주고, 섭명함 조종법을 알게 되고, 봉명성의 존재에 대해 알고.

김영훈이 월도입천 너머를 보고 죽고.

봉명성 안쪽에서 몇백년을 지내다가, 원영기 수도자 원립에게 살해당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면서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정신이 불안정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자고 있는 김영훈을 돌아보았다.

지난 삶의 그가 떠올랐다.

'조금 사람답게 살라고 하셨지요.'

그래, 어쩌면 이번 삶에는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

'봉명성이니 운명이니 종명자니, 다 때려치우고 조금 안정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무래도 지난 삶의 마지막.

원립에게 의식을 고문당했던 것 때문에 더더욱 휴식에 대한 생각이 간절한 듯 했다.

'이번 삶에는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오행혈주번에 대한 해법을 듣고, 조금 쉬엄쉬엄 지내면서 정신을 회복시켜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밤공기와 함께 천천히, 느릿느릿 내공을 운용했다.

우우웅!

점차 단전에는 내단이 형성되었다.

전신이 찌릿거리며, 기분 좋은 용트림을 뱉는다.

그리고.

쿠웅, 쿵!

내단을 형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숲 너머에서 새하얀 거체가 다가왔다.

나는 사색의 시간을 방해한 그것을 보며 살짝 눈을 찌푸렸다.

쿵, 쿵, 쿵!

[이 놈... 네놈은 어떤 요족인데 감히 내 숲에 들어와 있느냐?]

"...숲의 주인이시여."

등선향에 사는 결단경 여우 요족.

나는 녀석을 보며, 일단은 예를 갖춰 말을 올렸다.

"저는 공간 균열에 휘말려 우연찮게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어찌되었든, 지금껏 신사적(?)으로 늘 팔을 하나씩만 먹고 예의만 차리면 그 정도에서 물러가 주었다.

"부디 자비를 베푸셔서 이 숲에 며칠만 머무르게 햐 주시지요."

그러니 나도 끝까지 예의를 차려줄 것이다.

[이 놈, 헛소리 하지 말아라. 내 숲에 머물고 싶다면 사지를 뜯어 바쳐야 할 것이다.]

"...숲의 주인이여, 간청드리나이다. 머물게 해 주시지요."

[감히 같은 요족 주제에 상대의 영역에 멋대로 들어오고 자비를 바라느냐?]

"숲의 주인이여,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간청하니, 부디..."

[시끄럽다! 요단을 내놓아라 침입자 놈!]

콰아앙!

여우가, 앞발을 들어 나를 내리쳤다.

파앙!

[뭣...]

그리고, 나는 무형검을 들어 앞발을 쳐냈다.

"후우... 세 번이나 간청했다. 참을 인도 세 번이나 하면 충분하지 않나?"

사실 조금 걱정도 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예상외로 신사적으로 물러나면 왠지 조금 억울할 것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복날이다, 이 똥개 놈아."

나는 여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새하얗게 웃었다.

내 무형검의 기세를 느낀 듯, 여우가 움찔거린다.

어쩌면, 나는 줄곧 이 날만을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여우사냥을 시작해 볼까..."

쿠구구구!

나는 동료들을 수면술로 더욱 곤히 재우며, 여우를 향해 한 발을 디뎠다.

오늘 밤은 길 것이다.

여우 사냥

휘이이이-

나뭇잎 한장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진다.

그리고, 내가 먼저 움직였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무형검이 일순간 커지며 여우의 머리 위로 내리꽂힌다.

찰나간 나와 놈의 눈빛이 오고갔다.

붉은 의념이 사방팔방에서 나를 노린다.

새하얀 발톱들이 의념에 잇따라 나를 향해 쇄도했다.

하나라도 직격당하면, 축기기에서 일반인 수준까지 떨어져 내린 지금의 육체로선 몸이 그대로 갈려버리는 일격들.

그러나.

부웅, 붕, 붕!

무형검을 쥔 채로, 형태없는 궤적과 함께 보법을 밟는다.

산군월악비!

꽈과과광

내 무형검이 여우에게 내리꽂히고, 여우의 공격들이 주변으로 흩뿌려진다.

먼지구름이 일어났고, 그 중앙에서 뜨거운 바람이 밀려나오며 먼지구름을 흩어버렸다.

"이..노오옴!"

등짝에 검흔(劍痕)이 남은 여우가, 티끌조차 스치지 않은 나를 향해 노기를 드러냈다.

궤적이 전부 눈에 보이는데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여우의 분노에 대답하는 대신 무형검을 거두어들이고 단맥도의 기수식을 잡았다.

수도자가 주변의 공간을 법술로 장악하여, 주변 환경을 '자신을 위한 환경'으로 치환시켜 싸운다면.

무인(武人)은 주변의 공간을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환경에 맞춰 변화시킨다.

주변의 나무들.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들.

자고 있는 동료들의 숨소리들.

심장 박동 소리들.

여우에게서 느껴지는 영력, 힘, 심장소리, 근육 사이사이에서 들리는 기음들.

'더 집중한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들.

나와 여우의 첫 격돌에 떨어지는 새벽 이슬방울들.

녀석의 경계심이 깃든 숨소리, 내 심장 박동 소리.

그 모든 정보들을 파악하고, 그 사이에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어, 내 무형검을 최적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단맥도, 산바람!

무형검은 일순간 바람이 되어, 여우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반응이 불가능한 극속의 공격!

파아앗!

나와 여우의 경로 사이사이에서 떨어지던 나뭇잎들이 전부 베여나간다.

나뭇잎들을 베어낸 무형의 검은 그대로 여우의 가슴에 닿았다.

찰나, 여우의 의식형태가 여우와 똑같은 형태로 압축되며 녀석의 전신이 백색의 빛살에 휩싸였다.

쿠과과광!

'못 뚫었나.'

무형검은 여우를 뚫지 못했다. 결단경 요수의 거죽은 과연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요수 특유의 기이한 요술이 발동되니 방어력은 더욱 더 상승되었다.

하지만 여우는 무형검 자체의 힘은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무형검에 밀려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앙!

나는 허공을 박차고 여우의 앞으로 올라가 무형검을 치켜들었다.

아우우우우!

여우가 울부짖는다.

녀석의 주변으로 수천 개의 여우불이 나타나더니, 백색의 여우와 똑같은 분신으로 변하였다.

수백수천마리의 삼미호가 나를 둘러싸고, 일제히 달려든다.

"쓸데없긴."

나는 괜히 힘을 낭비하지 않고, 의념의 흐름과 요족의 지각을 사용해서 본체를 찾아낸 다음 본체를 향해 무형검을 휘둘렀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산명곡응, 구산팔해

무형검이 뻗어나가며 수천 개의 가시처럼 뻗어나가 여우의 본체를 휘감았고, 파장의 형태로 변화하며 여우의 전실을 때리고, 그 다음 바로 사방팔방을 베어낸다.

여우의 분신들이 달려들었으나, 나는 수많은 흐름 속에서 최적의 경로를 읽어내며 분신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분신들은 서로서로 나를 노리다가 결국 힘이 다하여 사라졌고, 내 무형검에 두들겨 맞던 여우가 다음 요술을 사용한다.

키잉!

어느 순간 섬광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눈 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새하얀 빛무리 속, 사방에서 교성과 달뜬 숨소리가 들려왔고, 내 육체에 열락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환술인가."

그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허공을 바르쥐었다.

"잡스럽군."

콰악!

무형검의 본질에 접속한다.

내 심상이 느껴졌다.

그 심상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고통.

전신이 투명한 칼에 파묻히는 듯한 그 아릿함.

그 고통이 정신을 각성시켰고, 환술은 제대로 펼쳐지기도 전에 박살나 버렸다.

그러나 그 틈새에 요술로 몸을 숨긴듯, 여우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단악검법, 산수화

촤아아아!

사방팔방으로 무형검이 뻗어나가며 주변을 헤집는다.

그리고 되도않게 은신술을 펼치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여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드러내며 다시금 요술을 펼치려 한다.

단악검법, 유릉!

꾸광!

나는 득달처럼 달려들어 여우를 부드럽게 찔러들어갔다.

파아앗!

여우의 입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나오며 내게 맞선다.

나는 즉시 자세를 바꿨다.

무형검 역시 초식이 펼쳐지던 도중 궤적이 변화하였다.

단악검법, 등맥

콰아앙!

무형검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여우의 턱을 후려친다.

콰아아앙!

새하얀 광선은 여우의 입 안에서 폭발해 버렸고, 녀석의 머리통이 섬광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러고도 큰 타격을 입은 건 아닌지, 여우가 세 개의 꼬리에 빛을 두르고 나를 향해 휘둘렀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나는 무형검의 흐름을 주변으로 두르며 여우의 공격을 잡아채, 그 힘을 여우에게로 되쳐버렸다.

꽈아앙!

다시금 폭음이 울리며 여우가 나가떨어졌다.

크아아아아!

녀석이 분노에 찬 듯, 나가 떨어지며 마구 울부짖었다.

백색의 섬광이 사방으로 난무하며, 주변 지형을 붕괴시킨다.

그리고 녀석의 의식형태가 더더욱 자신과 똑같이 압축되었다.

"이제 조금 열받았나 보군."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볼까?"

수백 수천의 자유로운 궤적을 주변에 두른 채, 나는 여우를 노려보았고, 여우도 나를 노려보았다.

여우가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며 내게 돌진한다.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 급의 속도!

아니, 요수인 여우 본연의 속도가 합쳐져, 어지간한 결단기 수도자보다 훨씬 빠르고 흉맹한 속도였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수천개의 종횡하는 무형의 궤적이 여우를 막아선다.

여우가 울부짖자 수천개의 여우불이 주변을 다시금 메운다.

이번에는 방금과는 다르다는 듯, 여우불의 궤적은 아까보다 훨씬 빠르고 복잡하게 내게 쇄도하였다.

단악검법, 괴암

무형검이 나를 둘러싸며 공방일체로 주변을 갈아버린다.

단악검법, 유릉

나는 무형검을 쥔 채 수많은 의념의 간격을 넘어 여우에게 다가가 검을 찔렀다.

녀석이 분노에 찬 듯, 나를 잡으려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녀석의 앞발에 앞쪽의 산 하나가 그대로 함몰되었고, 녀석의 꼬리에서 뿜어진 백색의 기운에 뒤쪽의 강이 증발한다.

단악검법, 능곡지변

무형검을 땅 아래로 쏘아보내 주변 지형을 일그러뜨린다. 지형이 내 의지에 의해 변화하며, 여우를 깊은 구덩이에 떨어뜨려 버렸다.

츠아아아!

여우가 기운을 늘어뜨린다. 수십 개의 백색의 창이 여우의 주변에 늘어서더니, 구덩이 안쪽에서 위쪽을 향해 쏘아졌다.

단악검법, 백팔광일출봉, 첩첩산중

무형검이 백팔 갈래로 쪼개지며, 첩첩산중의 초식이 겹쳐져, 구덩이 안쪽으로 백팔개의 무색의 가시덤불이 나타나 여우의 요술을 모조리 찢어버린다.

단악검법, 산중호걸

무색의 가시덤불을 만들었던 무형검들이 다시 일순간 일점집중되며 여우에게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구덩이 아래에서 폭음이 울렸다.

그러나 먼지구름 사이로, 새하얀 백광이 터져나오며 여우가 발악하였다.

크오오오!

백색의 빛이 뭉치며, 수십 장 크기의 여우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산만큼 거대한 여우가 구덩이 아래에서 고개를 들며 나를 향해 입을 벌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저것이 여우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술임을 짐작했다.

"이게 끝이냐."

그리고, 나는 싸늘한 얼굴로 여우를 보며 냉소했다.

"원영기 노괴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군."

파아아앗!

여우의 형상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 안쪽의 기운이 끓어오른다. 저게 폭발하면 직격당하든 피하든 어지간한 결단기 수도자조차 뼈도 못 추릴 터였다.

하지만 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기수식을 잡고 백광을 마주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

쿠구구구!

단악검법의 오의가 발하며 무형검을 통해 1초부터 20초까지의 초식이 순식간에 터져나온다.

그리고 21초 천지에 의해 힘이 모이며 20초까지 모아온 초식의 힘이 모조리 여우의 요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백광과 무광이 폭발한다.

그리고, 빛이 잦아들었다.

쉬이이이-

그리고, 저 너머에서 여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다시 자세를 잡고 월악의 태세로 돌아갔다.

단악검법 23초, 산외산부진.

소모되었던 기력이 돌아오며, 다시금 절초를 펼칠 수 있게 기력이 회복된다.

여우는 내 기세를 알아차렸는지, 그 눈에 당황이 서려있었다.

"크, 크윽...!"

여우가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백색의 섬광들이 사방에서 일어나며 나를 향해 쏘아져 왔으나, 그 수와 위력은 이전보다 한참은 부족한 것이었다.

단악검법

월악, 입산, 등맥, 유릉...

공곡전성, 구산팔해, 천지...

단악(斷岳)!

다시 한번 단악검법의 오의가 무형검을 통해 펼쳐졌고, 여우는 기겁하며 단악의 초식에 모인 힘 덩어리를 피했다.

"네, 네놈. 어떻게 그만한 기술을 연속해서..."

나는 말없이 산외산부진을 유지하며 다시 힘을 끌어모았다.

총 서른여덟 번.

그것이 내가 산외산부진을 통해 단악검법 오의를 펼칠 수 있는 숫자였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몸이 무리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물론 산외산부진을 펼친 이상 하루이틀 앓아눕는 건 이미 확정이지만.

그것을 감안하면, 나는 지금 결단경 요수가 전력을 다해 펼친 필살의 일격을 38번은 연속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콰과과과광!

단악(斷岳)!

산이 쪼개진다.

여우가 나가떨어진다.

무형검을 통해 펼쳐지는 단악검법은, 어느새 그 이름에 딱 알맞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말 그대로, 산을 끊고 쪼개는 검법이었다.

"이, 이 놈. 떨어져라!"

세 번의 단악을 받아낸 여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발을 빼며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파아앗!

다시금 수많은 여우불이 허공에 떠올랐고, 나는 무형검으로 여우불들을 모조리 쳐내며 여우에게 달려갔다.

백색과 무색의 궤적들이 폭발하는 와중, 나는 무수한 흐름과 폭광을 넘어, 여우에게 다시금 단악을 펼쳤다.

꽈아아앙!

섬광이 비산하며, 여우의 뒤쪽에 있는 구릉 하나가 그대로 두 쪽이 나 갈라진다.

단악을 간신히 피한 여우가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지난 삶의 김영훈으로부터 배운 무공기법을 응용해, 내 팔에 무형검을 그대로 동화시켰다.

그리고 그 상태로 여우를 쫓아가, 녀석의 꼬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형검과 동화된 팔로, 꼬리를 잡은 채 그대로 휘둘렀다.

쿠우우우!

집채만한 여우의 거체가 떠오른다.

콰아아앙!!!

나는 그대로 여우를 잡아 저 멀리 있는 산에 패대기쳤다.

산봉우리 세 개를 그대로 관통하며, 여우가 비명을 질렀다.

"케에에엑!"

콰앙!

퍼억!

나는 다시금 무형검과 일순간 동화하여 날아가, 여우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그 충격파에 여우가 눈을 까뒤집었고, 녀석의 뒤쪽에 있던 산봉우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쳐졌다.

"쉬잇..."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케, 케켁..."

"숲의 주인 앞에서,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게냐."

나는 여우의 머리를 움켜쥔 채 말했다.

녀석이 공포에 떨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대로 그 머리통을 무형검의 힘과 함께 땅에 쳐박아 버렸다.

"이제 내가 숲의 주인이다. 입을 닫고 예를 취하라."

쿠광, 쿠과과광!

몇 번을 여우의 머리를 잡고 땅에 처박는다.

그때마다 지축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일어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 결단경 요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과연 엄청난 생명력이었다.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해내게 해 주지."

여우의 뒷덜미를 잡고, 다시 한번 여우를 들어올려, 내가 산을 쪼개버려 생겨난 계곡에 던져버렸다.

콰과과광!

계곡 사이에 여우를 던지고, 다시금 따라가 무형검으로 녀석을 후려쳐 계곡에 아예 박아버렸다.

"크에에에엑!"

"조용히 하래도."

콰악!

다시금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자, 그럼..."

"케, 켁...사, 살려..."

"어디 여우구슬이란 게 정말 있나 볼까."

우우웅!

무형검을 쥔 채,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

여우는 기겁을 하며 울부짖었다.

"이, 이익... 주, 죽을까보냐!"

화르르륵!

그리고, 여우의 꼬리가 밝은 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진원을 끌어쓰는 비술인 듯, 녀석의 기세가 다시 올라간다.

하지만 나는 들어올렸던 무형검을 덤덤하게 다시 내리쳤다.

꾸콰과과광!!

다시금 계곡이 흔들리며, 여우가 땅 아래로 쳐박힌다.

그러나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우에게서 빛이 터져나오며, 여우가 있던 자리에 흰색의 여우털 한 가닥만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요술을 써 몸을 순간 바꿔쳤다.'

기이한 요술이었다.

그러나 멀리 도망치진 못한 듯, 저 멀리 백색의 빛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형검을 잡고, 꼬리를 태우며 달아나는 여우를 쫓아갔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나는 가속을 더욱 더 높이며 여우를 추격했다.

점차 녀석과 내 거리가 가까워진다.

여우가 나를 돌아보며 공포에 질린 눈으로 소리쳤다.

"히, 히엑, 쪼, 쫓아오지 마라! 저리가라, 이 괴물!"

"누굴 더러 괴물이란 거냐."

콰아아앙!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고, 여우는 사색이 된 채로 가까스로 다시 무형검을 피해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이 괴물 여우가."

"저리 가라! 저리 가!"

쿠구구구!

여우가 피한 자리에 작은 계곡이 생겨났다.

여우는 이를 악물며 더욱 더 빠르게 내게서 달아났고, 나는 여우를 뒤쫓았다.

지난 삶과는 반대의 결과였다.

저번에는 여우가 나를 쫓았다면, 이번에는 내가 여우를 쫓아가며 여우를 사냥하고 있었다.

쿠궁, 쿠궁, 쿠구구궁!

내가 무형검을 날리자 몇 개의 구릉이 날아갔고, 여우는 미친 듯이 무형검들을 피하며 발을 놀렸다.

수많은 산과 강이 우리를 스쳐지나갔고, 우리는 추격전을 벌이며 등선향의 사분지 일을 주파했다.

몇 번 내게 잡히기도 했으나, 여우는 꼬리를 태우는 그 기이한 요술을 사용해서 몇 번이나 위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됐을까, 여우의 꼬리에서 불타던 백색의 빛도 옅어졌다.

어느 작은 호수의 위쪽.

그곳에서 여우는 그제서야 멈춰섰고, 숨을 몰아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형검을 쥐고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 그만! 그만 해 주시오. 용서를 구하오!"

여우가 내게 사정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몇 번의 삶동안 저 놈에게 팔을 뜯겼더라.

욱씬!

내 팔이 문득 통증을 호소했다.

산외산부진의 영향도 있었지만, 여우로부터 얻은 안좋은 추억 덕분이기도 했다.

"...살려, 살려만 주신다면 숲의 주인으로 당신을 인정하고 복종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여우는 비굴하게 내게 머리를 박으며 목숨을 구걸했고,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배를 한 번 걷어찼다.

"케에엑!"

다시금 놈이 비명과 함께 피를 토해내며 나가떨어졌다.

이제 놈은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피칠갑은 커녕 옷 한 올 베이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덧 나는 여우를 사냥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선 것이었다.

"사, 살려..."

"..."

나는 무덤덤하게 애처롭게 목숨을 구걸하는 여우를 내려다 보았다.

여우는 지금껏 내게 숲에서 머물고 싶다면 사지를 잘라 바치라고 했다.

"...내 숲에 산 채로 머물고 싶느냐?"

"..."

"요단을 토해내라. 그리하면 살려주지."

"끄...으..."

여우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무표정한 기색으로 놈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쨌든 이 녀석 때문에 늘상 고통을 겪었지만, 직접적으로 살해당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그에 대한 자비였다.

한참을 고통스럽게 끙끙거리던 여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벌렸다.

커억, 컥!

파아아앗!

여우가 몇 번 헛구역질을 했고, 곧이어 여우의 입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주먹만한 구슬이 뽑혀나왔다.

여우의 영성(靈性)과 영력이 한껏 모여있는 여우의 요핵.

녀석을 일반 짐승에서 요족으로 남아있게 해 줄 수 있던 물건.

나는 허공에 떠오른 여우의 요핵을 잡아챘다.

그러자 요핵에 영성이 집약된 여우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동시에 여우의 체구가 작아졌다.

결단경의 의식을 지녔던 여우의 의식이 작아지더니, 녀석의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우는 요핵을 토해내고 다시 일반적인 짐승인 여우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꼬리가 세 개인 건 신체가 아예 변형된 것인 탓인지 변화가 없었으나, 여우는 이제 일반적인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멍청한 눈으로 나를 보던 여우는 내 손에 들린 요단을 탐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깨갱 거리며 동네 개새끼처럼 몸을 움츠리고 저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제 10번의 삶동안 내 팔을 뜯어갔던 괴물 여우는 없었다.

꼬리가 세 개인 특이한 변종의 작은 여우 한 마리만이 남아, 이지를 잃고 도망칠 뿐이었다.

나는 내게서 도망치는 조그마한 여우를 잠시 쳐다보다가, 여우의 요단을 쥐고 다시 동료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또 하나의 운명을 극복했다.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동료들을 향해 허공답보를 펼쳤다.

"하, 하하...하하하하...!"

열 번의 삶을 거쳐서, 드디어 생애 초반.

나를 위협하던 여우를 이길 수 있는 무력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아직도 내 수면술로 곤히 잠자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제 동료들을 데리고 등선향 바깥을 나갈 수 있을지도.'

천인기 수도자들한테 발각되지 않고, 나가기만 한다면 어쩌면...

'동료들과 어쩌면, 다 같이 이번 삶을 살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웃음을 지으며, 몸을 주물렀다.

산외산부진을 사용하느라 전신이 욱신거렸다.

'의식의 7할만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서도 산외산부진을 사용하니, 여우 정도는 충분히 잡는군.'

오행혈주번을 다 해결하고, 언젠가 의식을 10할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산외산부진을 사용치 않고, 무리없이 여우 놈을 잡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축기기의 실력을 바로 회복할 수만 있다면, 출력을 더욱 더 높여서 단박에 여우를 잡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지...'

혈관에 강기가 흐르는 채로 이백여년을 지냈다.

이젠 혈관에 피밖에 흐르지 않는 이 육신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일단 몸을 회복하고, 경지를 천천히 회복해 보고, 여우의 요단에 담긴 힘을 어떻게 흡수할 수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나는 우선 약초를 사용해서 산외산부진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몸을 달래주기로 생각하고, 동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약초를 찾으려 했을 때였다.

화아악!

거칠고 주름이 진 손이 내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해 죽겠군. 이건 도대체 뭐지?]

등이 굽은 곱사등이 노인이, 광기가 가득 찬 눈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내 머리통을 움켜쥔 채 웃고 있었다.

연(1)

오싹!

나는 몸이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전신의 기(氣)가 딱딱하게 굳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힘을 잃었다.

[보자, 보자, 보자... 맑고 투명한 놈이로다. 그리고 그 맑은 심상이 바깥으로 삐져나왔어. 그걸 휘둘러서 결단경 요족을 족친 건가.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정신금제?]

괴군.

미치광이 노인이, 내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너무 신기하군. 어떻게 이런 족속이 있는 거지? 네놈 뭐냐. 인간이 맞느냐? 아니면 인간 형상의 특수한 요족이냐?

의식의 특이함으로 결단경 요족을 사냥하긴 했는데, 정작 본인은 결단경은 아니야. 아무 법력도 없는 범인에 불과한데... 또 의식은 축기 후기급이고.]

그는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나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제길, 왜 이 자가 벌써 나타난 거지?'

나는 원인을 고민해보았다.

'생각해보면 천인기 수도자들 셋과,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 해룡왕 등은 전부 다른 방향에서 온 반면. 괴군은 늘 승천문 방향에서 날아왔지.'

어쩌면, 괴군은 다른 어떤 천인기 수도자들보다도 빨리 승천문에 도착해 있다가, 나중에 김 주임이 의식을 각성하고서야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 회귀 초반에는 등선향에 아예 이 자가 붙어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건가...'

아마 여우와 내 싸움의 여파를 느끼고 우리를 구경하다가, 특이한 의식형태를 지닌 나를 관찰하다가 온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음?'

문득, 괴군의 의념을 읽던 중, 나는 그의 심상을 엿볼 수 있었다.

'크윽...'

나는 그의 심상에서 느껴지는 어둠에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심상은 다 썩어버린 고목(枯木)이었다.

시커멓게 썩은 고목은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다.

고목에서는 오직 실같은 연분홍빛의 생기만이 남아 겨우겨우 고목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고목은 수시로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목이 무너져 내리려 할 때마다 괴군의 눈빛에 서린 광증이 도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목에서 느껴지는 어둠과 음습함, 그리고 그 고통은 나조차도 눈쌀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혈목자 원립보다 역겨움은 덜했지만, 암담한 어둠만은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다 썩어버린 마음이군.'

괴군의 심상을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나는 괴군의 시선을 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내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자, 문득 괴군 역시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뭣... 네놈.]

그의 눈빛에 당황이 어렸다.

내 몸을 붙잡던 그의 기운이 풀려나갔고, 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 제 심상을 읽지 않았습니까?"

[네놈, 내 심상을 읽은 거냐?]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던 와중.

갑자기 괴군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이 놈... 보이는구나. 무슨 짓을 해서 도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심상을 읽을 수 있군. 그렇지?]

'무슨...'

나는 황당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괴군이 월도입천에 도달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괴군의 행동거지를 몇 번이고 관찰했었다.

그에게선 무공을 익힌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월도입천에 도달할 때까지, 수백 년을 무공을 익혀왔다.

절대로 짧은 시간 동안 무를 연마하지 않았기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괴군은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무인도 아니었고, 무를 연마하지도 않았다.

[크흐흐흐, 놀랍군. 정말 놀라워. 나와 같은 시야를 각성한 놈이 이 세계에 또 있다니. 최소한 상계로 올라가야 있을 줄 알았는데... 아주 기분이 좋구나!]

콰악!

그가 갑작스레 내 머리통을 잡았다.

무공수법이 아니라, 그냥 천인기 특유의 천지원기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내 몸을 조종해서 한 짓이었다.

그리고, 괴군의 의식이 내 의식을 침투했다.

'이런 젠장...!'

[너무 마음에 드는군. 너도 내 세계에 받아들여, 더욱 더 우월한 존재로 진화시켜 주마. 너를 연구하면 그녀와의 재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겠지...!]

오싹!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자는 지금, 나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개조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천인기 수도자의, 광증이 서린 의식이 내 의식으로 침투한다.

전신의 통제권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파아아앗!

상단전 안쪽.

혼백 깊숙한 곳에서, 핏빛이 일더니, 오행혈주번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오행의 변화를 담은 핏빛이, 괴군의 의식을 몰아낸다.

"끄으으으윽!"

아득한 고통이 내 정신을 휘감았지만, 고통과 함께 내 정신이 또렷하게 유지된다.

오행혈주번은 내 의식을 금제하는 동시에, 내 의식을 보호하였다.

[흐음?]

괴군이 눈쌀을 찌푸리더니, 나를 놓아주었다.

[오호, 그 법술 어디서 본 법술인데... 어디서 봤었지..? 아, 그래. 사막의 그 결단기 뱀 같은 녀석이 쓰던 법술이었지?]

그는 내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너, 답천사막의 결단기 녀석과는 무슨 관계냐.]

"그건.."

[아니, 아니다.]

괴군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내 머리통을 다시 잡더니 히죽히죽거렸다.

[내가 알아보면 되지. 우월한 존재로 진화하지도 못한 놈과 무슨 대화를 할꼬.]

콰드드득!

다시금 그의 의식이 내 뇌리를 침투했다.

동시에 오행혈주번이 일어나며 자극된다.

".....!"

아득한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괴군이 무언가 법술을 발동했다.

파츳, 파츠츳...

허공에 새파란 주술문자가 새겨지더니, 갑자기 등선향 바깥.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저건, 저주문?'

음혼귀주문을 익혔었던 나는 저 주술문의 종류를 눈치챘다.

괴군은 내 오행혈주문을 자극시켜 나온 그 기운을 역추적해서, 그곳으로 저주문을 날린 것이었다.

[흐음, 그 결단기 애송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닌건가? 뿌리는 같지만 반응이 세지는 않군. 아, 그래. 그 결단기 애송이와 같은 사문이라거나 그런 놈이로구나.

크하하, 역시 이 몸은 천재야. 그렇지, 당신?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괴군은 혼자고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손을 뻗고, 소중한 연인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

뭔가 있나 했지만, 요족의 지각, 의념의 흐름, 영혼의 존재를 감지해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냥 괴군의 상상 속 인물인 듯 했다.

'빌어먹을, 미치광이 늙은이에게 잡혔다.'

이대로 잡혀가야 하는 건가.

나는 광증이 도져서 허공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미치광이의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는 화두가 있었다.

"선배님, 후배가 올릴 말이 있습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결단기 애송이... 혈목자 원립이라는 놈은, 실은 정체를 숨긴 원영기입니다.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하기를 기다렸다가 이 세상을 삼킬 생각을 하고 있는 야심에 찬 녀석일진데, 그런 이를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 네놈 서휼 놈 주최로 맺은 조약을 말하는 거냐.]

괴군은 정신을 차렸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어쩌라는 거냐. 그 놈 심상이 더럽긴 해도, 서휼 놈이나 다른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선배님께서 비승하시고, 선배님의 친지나 가문이 그 혈목자 놈에게 유린당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 가문?]

킥킥...

괴군이 히죽 웃더니 말했다.

[그거, 수백년쯤 전에 내 손으로 다 몰살시켰다만. 내가 왜 걱정해야 하느냐?]

'뭣...'

나는 당황에서 할 말을 잃었다.

가문을 얘기하는 괴군의 눈은, 어쩐지 분노에 차 있었다.

분노에 찬 그의 눈빛은 오히려 광증이 가시고 또렷해 보였다.

[내게 의미있는 존재는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를 죽인 가문은 이 대지에 남아있지 않느니라. 그런데 내가 뭘 하러 그런 것을 걱정하느냐.]

나는 괴군의 심상을 보았다.

그의 심상에 남은 어둠이 더욱 더 짙어지며, 살아있는 듯 끓어올랐다.

[그래도 고맙군. 오랜만에 그 씹어먹을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어서.]

툭, 툭...

그는 자신의 머리를 몇 번 톡톡 두들겼다.

그의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차서 오히려 광증이 가셔 있었다.

[그나저나, 그 결단기 놈과 네가 같은 법술을 가지고 있단 건... 그 녀석도 뭔가 뜯어보면 너와 비슷한 게 있다는 말인가?]

괴군은 턱을 쓰다듬더니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파츠츳!

허공에 푸른 불빛이 일더니, 그가 방금 쏘아올렸던 저주문이 떠올랐다.

동시에.

파아아앗!

저주문이 빛났다.

[그래, 일단 그 놈도 혼백을 뽑아와서 연구 좀 해 봐야겠어. 생각해보면 그 녀석 결단기 주제에 의식의 크기가 상당히 크기는 했지...]

우드득...

그가 허공을 틀어쥐었다.

푸른 저주문이, 피에 물들듯 점차 붉게 변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음?]

괴군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릉, 우르릉...

허공에 먹장구름이 끼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괴군의 시선이 오혜서 대리에게 향했다.

[이건 또 뭐야. 호풍환우는 해룡왕의 권능인데... 왜 저 녀석이 발하는 거지?그리고...]

번쩍!

쿠르릉!

한 줄기 푸른 벼락이 울렸고, 어느새 장내에는 푸른 장포를 입고, 선한 미소를 띈 점잖은 기색의 미청년이 들어와 있었다.

[이게 누구야. 사갈(蛇蝎)왕 서휼이 아닌가? 흐하하, 늦게 출발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허겁지겁 미친 듯이 달려온 거지?]

"하하, 괴 노야. 늦게 출발하려던 이유는 저희 일족 중 하계에 남는 아이가 있어, 그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서였습니다만.

대화를 나눠보니 충분히 자기 앞길을 헤쳐나갈 아이라 생각되어..."

[시끄럽고, 본론을 말 해라.]

콰드득!

괴군이 허공을 더욱 거세게 틀어쥐었다.

그가 띄워올린 저주문이 더욱 더 시뻘겋게 물들었다.

서휼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괴 노야. 새파란 후배들을 겁박하지 마시지요. 지금 틀어쥔 후배의 목을 그만 놓아주시고, 지금 괴롭히는 이들도 조금 풀어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 그렇군. 네놈이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이유가, 사막의 애송이 놈이 죽으려 하니 달려온 것이로구나. 너, 뭘 꾸미는 게야? 이 사갈 같은 놈.]

"괴 노야. 선배된 입장으로서 약자를 그리 괴롭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만 하시고 이제 그 자를 놓아주시지요."

우웅!

서휼 역시 손을 뻗어 허공을 틀어쥐었고, 시뻘겋게 변모했던 저주문이 점차 다시 푸른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원립은 지금, 난데없이 천인기 수도자들의 손아귀에 잡혀 목을 졸리는 중인 건가.'

아무리 등선향이 답천사막 위에 있다고는 해도, 등선향과 원립이 있을 흑색의 성은 수백 리는 되는 거리인데, 그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서 그를 가지고 둘이 싸우는 것이었다.

'이게 천인기 수도자...'

"이미 난데없이 재액을 맞아 내상도 입었을 터인데, 그만 하시는 게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우우웅..

괴군이 내보인 저주문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명백히 괴군이 서휼에게 밀리는 모습이었다.

괴군은 히죽 웃더니 허리춤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냈다.

쿠웅!

나무상자는 커다랗게 변하다니, 괴군의 옆으로 떨어졌다.

[이 놈이, 내 본신의 힘이 네놈보다 떨어진다고 나를 무시하는구나. 좋아, 한번 해 보려느냐?]

"..."

서휼의 안색이 살짝 굳었으나, 이내 돌아왔다.

"괴 노야.. 우리 그런 재미없는 얘기는 비승을 한 후에 하는 게 어떤지요? 승천문이 며칠 후면 열릴텐데,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어찌 그런 짓을 하려 하십니까.

그런 상서롭지 못할 일 보다는, 여기 재능있는 이들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서휼이 인자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는 오혜서 대리를,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우욱-

먹은 게 없는 탓인지, 뭐가 올라오진 않아서 참을 순 있었지만.

그래도 역겹다.

아니, 역겨운 것 뿐이 아닌, 그 어둠조차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미친, 이게... 정상적인 존재가 가지는 심상인 건가?'

괴군의 심상도 시커먼 어둠 속에 쌓여있는 고목이었으나.

월도입천에 이른 후 보게 된 서휼의 심상은 그것보다 더했다.

괴군의 고목에, 마치 실 같은 생기가 있었다면, 서휼의 심상에는 그런 희망적인 것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이 어둡고 칙칙하며, 역겹고 더럽다.

인면수심, 철면피 같은 것을 넘어, 그냥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심상.

악(惡)

그는 끝없는 악의(惡意) 그 자체였다.

원립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

그것이, 서휼이었다.

"저런, 괴 노야. 보십시오. 후배들이 천인기 수도자들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 하잖습니까..."

서휼은 딱한 눈으로 비틀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괴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괴군은 오히려 내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았는지 클클거리며 웃었다.

[흐흐, 이거 걸작이군. 저 놈이 비틀거리는 게 우리 기세 때문이라고? 어쩌면 너무 역겨운 걸 봐서 속이 메스꺼운 걸지도 모르지. 나도 네 얼굴을 볼때마다 토가 마려운데 네가 말하는 연약한 후배들은 어떻겠느냐. 이 마음이 망가져 버린 괴물아.]

"늘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여하튼, 이 후배가 괴 노야의 마음에 드는 듯 하니 괴 노야의 제자로 삼는 건 어떻습니까? 저는 저 처자가 제 혈맥에 공명하며 특이한 권능을 부리기에 해룡족원으로 맞이하려 합니다만."

[이 사갈 같은 놈이. 자꾸 말을 돌리는구나. 사막의 애송이 놈으로 또 뭘 꾸미는 거냐 물었다, 오물같은 놈...!]

끼이이익...

괴군이 상자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주변에 천인기 수도자들도 없고, 해룡왕과 단신으로 맞서는 탓인지, 그는 뚜껑을 드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괴군, 당신 정말 등선향을 무너뜨릴 요량이오...!?"

[등선향 하나 사라지고 오물을 치울 수 있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지. 정 승천문에 문제가 생기면 봉명인의 축복도 있는데 뭐가 문제겠느냐...?]

끼이익, 철컥!

그리고, 괴군의 상자가 완전히 열렸다.

다음 순간.

괴군의 상자에서 뭔가, '많은 것들'이 튀어나왔고.

해룡왕이 다급한 기색으로 요술을 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어?'

꿀렁, 꿀렁...

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변을 마구 둘러보았다.

물.

물이었다.

등선향 전체가, 갑자기 물에 뒤덮혀 있었다.

나도, 다른 동료들도, 갑자기 등선향을 뒤덮은 물살에 눈을 뜨고 꼬르륵 대며 허우적 대고 있었다.

쿠우우우!

거기에, 물은 그냥 존재만 하지 않았다.

물 속에서도 수류가 존재하여, 나와 동료들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게 무슨...'

괴군이 상자를 열었고, 서휼이 뭔가를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이렇게 되었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할 때였다.

[흐하하하하하!]

천지영기가 울리며, 괴군의 음성이 물 속 곳곳까지 퍼져나간다.

[물이 없는 곳에서 이 정도의 수계법술이라니. 과연 해룡왕이로구나. 등선향이 무너지는 걸 보호하려 함이냐.

아직 천인기 급 괴뢰도 절반밖에 안 꺼냈고, [그녀]는 심지어 팔밖에 안 꺼냈는데, 과연 해룡족 전원이 덤벼도 나와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 성 싶으냐?]

쿠구구구구!

정신을 잃을 것 같다.

천지영기가 저절로 들끓으며, 괴군과 서휼의 힘에 반응한다.

'지금, 등선향 전체가 서휼의 요술에 뒤덮힌 건가?'

천공도라고는 하지만, 등선향은 절대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연국의 성 몇 개를 합친 것과 같은 거대한 영토였다.

나는 서휼이 꺼내든 요술의 규모에 기함하면서도, 어째선지 지금 서휼이 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그녀]가 어깨까지 나왔다. 천인기 해룡족을 다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저 하늘 너머.

어딘지 보이지도 않을 그곳에서, 서휼과 괴군이 일전을 벌이고 있다.

그 와중에도 서휼의 법술에 의해 등선향이 물에 뒤덮혀 사방이 어지러웠다.

'일단 동료들을 찾아야 해.'

나는 물 속에서 무형검을 뻗어 중심을 잡고는, 동료들을 탐색했다.

'김영훈, 저기 있고. 전명훈도 찾았다.'

나는 차례대로 강민희, 오현석, 김연, 오혜서까지 전부 찾아냈다.

그 중 오혜서 대리는 해룡왕의 권능에 뭔가 영향을 받는 것인지, 칠규에서 피눈물을 좔좔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제길, 이게 무슨 꼴인지.'

나는 물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동료들을 끌어모아, 혈을 눌러 일단 물 속에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하고, 내공으로 폐에 찬 물을 억지로 빼냈다.

'버텨야 한다.'

저 괴물같은 작자들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우릉, 우르릉...

물에 뒤덮힌 등선향.

저 먹장구름이 덮힌 하늘 위의 어딘가.

그곳에, 괴군과 서휼 말고도, 뭔가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더 여럿 모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기척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등선향의 이변을 감지하고 저 위쪽에 더욱 더 많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촤아아아아!

등선향 전체를 뒤덮은 물이 싹 빠지고, 먹구름이 증발되어 버렸다.

파직, 파지지지직!

먹장구름의 중심에서는 금색 장포를 입은 금벽호가, 금빛의 번개를 뿌리며 마치 태양처럼 먹구름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얼마 후, 익숙한 얼굴들이 하늘 너머로 보였다.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은 괴군을 중심으로.

해룡왕 서휼, 금신천뢰문 태상문주 금벽호, 흑색귀골곡 백골귀마 허곽, 창천개벽문 창호자 청문선우.

그리고 전체적으로 퉁퉁한 배불뚝이 백의여인, 바싹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갈의 중년인.

사자의 갈기처럼 수염을 기른 험상궂게 생긴 녹의 거한, 해골처럼 마르고, 손톱을 잔뜩 기른 흑의 여인 등이 괴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천뢰문, 귀골곡, 개벽문, 해룡족, 거호족, 성붕족, 정도선파 연합, 마도선파 연합의 장들이 이 늙은이 하나 둘러싸고 있다니. 영광이구만 그래.]

괴군은 히죽히죽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하나씩 입을 열었다.

[선을 넘지 마시오, 괴군! 등선향이 무너지면 승천문이 어찌될지도 모르는데 어찌 그리 교만하단 말이오!]

[도대체 왜 그리 천방지축이오! 해룡왕이 아니었으면 등선향이 무너지고 승천문이 무너져,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의 꿈이 좌절될 뻔 했단 걸 모르는 거요!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거요!]

[이 미친 늙은이, 상서로운 시기라 그냥 놔두려 했다만, 등선향에서 '그걸' 꺼내들어? 우리가 다 모이면 네놈이라고 무사할 것 같나?]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의 중심에서도, 괴군은 히죽거리며 상자에 다시 손을 얹을 뿐이었다.

그러자, 하늘에 모인 모든 천인기 수도자들이 일제히 몸을 움찔거렸다.

[물론 이 정도 세력들이 전부 연합한다면 못 이기겠지. 하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언제라도 자폭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네놈들은 이 정도 각오가 있느냐?]

[이익, 헛것이나 보는 정신나간 늙은이가...!]

얼마간 괴군과 천인기 수도자 무리는 대치를 이어갔고, 그러던 중 해룡왕이 웃는 얼굴로 중재를 시작했다.

[모두들 이러시지 마시지요, 이런 상서로운 시기에 이래봤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괴 노야께서도 당신의 연인을 위해서라면 상계로 비승하는 게 이득이 맞지 않습니까?]

해룡왕은 천인기 수도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들을 중재했고, 얼마 후 그들은 서로 합의를 하고 괴군과 어떠한 불가침조약을 맺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때였다.

금벽호가 문득 이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문득 전명훈과 눈이 마주쳤다.

[뭣, 잠깐... 이건...]

그리고 금벽호를 비롯해서 백골귀마, 창호자 역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고, 이전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서휼과 괴군 외에도 정도선파 연합의 수장,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 거호족, 성붕족의 수장으로 보이는 천인기 수도자들도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동료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탐을 내는 모습이었다.

[허허, 정말 금신천뢰문 개파설화에 나오는 천상금뢰지체란 말인가? 금신자 양수진이 지녔다는? 우리도 조금 탐이 나는데...]

[귀도음화선근이라니, 꼭 흑색귀골곡에 들어가는 것보다, 내 제자로 들어와도 잘 가르쳐줄 수 있는데...]

정도,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들이 각각 전명훈과 강민희를 보며 입맛을 다셨고, 성붕족과 거호족의 수장들 역시 오현석 차장에게 군침을 흘리는 모습이었다.

[인족이 일문성체를 타고나? 허 참...]

[거호족의 진원진혈을 주어 거호족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러나, 금벽호가 으르렁거리며 전명훈을 잡고 말했다.

[오합지졸들 모임의 대장이랍시고 꺼드럭거리는 놈들이... 감히 본문의 예비 제자를 빼앗아 가겠다고..? 심지어 개파시조님과 같은 체질이란 걸 알면서도? 이 놈들이 정녕 본문과 척을 지고 싶단 건가?]

[험, 금 태상장문인. 그런 것이 아니라...]

[당장 꺼져라. 얌전히 승천문 앞에서 승천문이 열리기 전까지 대기나 하고 있으시지.]

백골귀마 역시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강민희 대리를 노리는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을 보았다.

[이 아이는 본곡에서 데리고 가기로 했소만.]

[아니, 하지만 꼭 재능있는 자를 흑색귀골곡에서만 데려가라는 법이...]

[섭명함 맛 좀 보고싶소?]

[이익... 개 같은 귀골곡 놈들. 됐소, 알아서 하시오!]

정도,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은 금벽호와 백골귀마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거호왕과 성붕왕은 오 차장에게 눈독을 들였으나, 창호자가 헛기침을 하자 둘은 창호자의 눈을 피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청문 수사를 화나게 할 수는 없지.]

[암, 창호자 대협이라면 잘 키워줄 걸세.]

그러나 성붕왕과 거호왕은 다시 오혜서 대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칠규에서 피를 흘리며, 호풍환우뿐이 아닌 뭔가 다른 현상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성붕왕과 거호왕의 눈빛에 탐욕이 깃든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여인은 선수(仙獸) 혈통의 권능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것 같은데...]

[우리 요족들에겐 어쩌면 굉장한 자질인 듯 싶소만...]

둘은 오혜서 대리에게 다가갔고, 그런 그 둘을 서휼이 은근슬쩍 막아서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서휼이 무어라 입을 달싹이자, 둘은 잠시 서휼의 말을 듣는 것 같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서 용왕이 그러하다면야...]

[아무래도 서 용왕의 성품이라면 훨씬 더 기품있게 저 여인이 가진 선수의 자질을 끌어낼 수 있겠지요.]

결국,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다시 흘러갔다.

모든 동료가 각자에게 해당된 천인기 수도자들에게로 딸려갔고.

이번에 비승을 하는 천인기 수도자들의 대표 중 약한 이들은 그저 손가락만 빨며 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 나눠먹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인원들이 배분되자, 남은 이들의 시선이 나와 김영훈, 김연 주임에게 향하였다.

[그나저나 저기 남은 녀석들은 혹시 뭐 다른 자질이 없으려나...]

[일단 저 인족 놈은 뱃속에 인족 주제에 요핵을 품었는데...]

[반요인가? 일단 하나하나 다 뜯어보지요. 뭔가 엄청난 재능이 발견될지도 모르니...]

이윽고 천인기 수도자들은 우리에게 손을 뻗었고, 나를 비롯해서 김영훈, 김연은 천지영력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마구 비명을 질렀다.

그 중 김연 주임은 그 와중 의식을 각성해서 정도선파 수장이라는 퉁퉁한 백의여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나와 김영훈은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에 의해 마구 쥐어짜이고, 의식을 압박당하는 둥 온갖 궂은 일들을 당했다.

그러나, 검사 결과.

나는 그냥 조금 특이한 체질일 뿐 아무 자질도 없다는 판정이 나왔고, 김영훈은 특이한 체질도 뭣도 없는 일반인이라는 판정이 났다.

창호자가 우리를 치료해주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솔직히 별 기대할만한 자질은 없는 듯하니, 그냥 버리고 가야겠군요.]

[이 특이체질은 조금 연구해보고 싶긴 한데... 어떻게 인족 뱃속에 요핵이 든 건지...]

[됐소. 그래봤자 이 녀석은 상식범위 안의 특이체질이고, 굳이 데려갈 만큼의 신화적인 자질은 아니외다. 그냥 가는 게 낫겠지.]

천인기 수도자들은 두런두런 떠들며, 이내 다시 승천문으로 날아갈 채비를 하였다.

'제길, 이번 생은 시작부터 모든 게 혼란스럽군.'

나는 머리를 살짝 부여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잊으면 안 되는 게 있지...'

나는 답천사막에 숨어있는 혈목자 원립에 대해 말하려 했다.

"선배님들께 아룁니다. 혹여, 답천사막에 사는 혈목..."

툭-

그때였다.

해룡왕이 다가와 친근하게 내 어깨를 두들겼다.

"본왕도 그 자를 알지. 인족임에도 불구하고 열의가 있고 재밌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더군. 본왕도 법술을 하나 배우기도 했고... 자네 역시 그 법술을 전수받은 듯 한데."

오싹!

나는 문득, 전신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혈목자에 대해 말하면, 지금 해룡왕에게 살해당한다.

그의 눈빛에선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직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이, 불길함을 경고하고 있었다.

꿀꺽...

해룡왕은 선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곤 일어섰다.

"자네 같은 반요 혈통이라면 어쨌든 본왕도 무시할 순 없지. 받게. 반요들이 익히기에 적합한 요수공법서이네. 그리고 공법서를 주는 대가로, 혹시 간단한 심부름을 하나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나?"

서휼은 호풍응룡변과 파공주를 내밀며 내게 선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묵묵히 그에게서 공법서와 법보, 심부름을 전달받았다.

모든 것이 운명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고, 동료들은 모두 예정된 이들에게 잡혀갔다.

김 주임은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백의 여인에게 잡혀갔지만, 괴군은 수시로 퉁퉁한 백의 여인과 김연 주임 쪽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고.

나는 어쩐지 정도선파 연합의 수장이란 저 여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괴군은 나를 보면서도 살짝 입맛을 다셨지만, 그는 이번에는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에게 포위되어 얌전히 승천문 방향으로 함께 날아갔다.

휘이이이-

한차례의 폭풍이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그래도, 변한 게 있군.'

이번에는, 누구도 나와 김영훈을 공간균열을 열고 어딘가로 보내주지 않았다.

또한, 여우의 요단은 그대로 내 손에 들려있었다.

마도연합의 천인기 수도자가 내 요단을 뺏으려 하자, 창호자가 왜 후배 것을 갈취하냐며 눈치를 준 탓이었다.

나와 김영훈이 등선향에 버려지고, 내게 여우의 요핵이 남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운명대로 흘러갔다.

나는 뭐가 뭔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김영훈을 잠시 다시 재운 후, 손에 든 요핵을 바라보았다.

요핵 안쪽에는 어마어마한 천지영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결단경 요족이 모아온 영성과 천지영기이니만큼, 안의 영기를 흡수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영력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요핵을 손에 들고 요핵의 흡수를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