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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두쿵!

김영훈의 의지가 전달되어 왔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정신이 번뜩 드는 것을 느꼈다.

저건, 분명 내가 일전에 그를 보며 했던 생각이었다.

수도자들에게 절망하는 과거의 김영훈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났다.

하늘이 내렸든, 버렸든. 우리는 운명의 아래에서 절규하는 이들이었기에 닮아보였었다.

운명 아래에 있는 이상 닮았다면.

운명에 저항하는 의지를 가진다면 그 역시 닮지 아니하는가.

나는 김영훈의 마음을 전해들으며, 내가 지금껏 외면하던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절망했었나."

오월입도경의 비율 같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딴 건, 어느 정도만 조정한 후부터는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축기기에 도전할 자격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런데도 오월입도경의 비율을 핑계로 도전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내 재능이 부진하여, 수명이 늘어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음을 두려워했음이라.

운명의 인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단 힘뿐이 아닌, 의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어쩌면, 내 운명의 인력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고맙습니다. 영훈 형님."

나는 그의 마음을 받으며 망설임을 떨쳐냈다.

'그렇군.'

지난번 심마가 찾아왔을 때, 무가 내 삶의 일부이니 소중히 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며 심마를 쫓아냈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풀리지 않았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계속 소중히 해 왔다.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모든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 왔었다.

재능이 있든 없든 나는 노력해왔고, 그 모든 노력을 소중히 여겨왔다.

이번 삶에서 그동안 알게모르게 쌓여온 우울증이 터져나와 심마가 되어 재능에 대해 신경쓰게 만들었다.

'둔재든 천재든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삶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삶을 믿어주는지가 아닐지.

쿠구구구구!

가슴 속의 모든 그림자가 빠르게 씻겨내려갔다.

모든 망설임을 씻어내고, 나는 바로 정신을 차리며 다시금 축기기에 도전했다.

그동안 비율을 맞춘다느니 하는 핑계로 멍청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비율 같은 소리."

내가 공법에 맞출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공법이 내게 맞춰야 할 것이다.

단전 내에서 소용돌이 치는 다섯 개의 영운.

그 중에서 미묘하게 튀어나온 부분들.

나는 그 부분들을 망설이지 않고 내단에서 검강을 뿜어 잘라내어 버렸다.

후우우...

그리고 체외로 배출하여 흩어버린다.

법력이 줄어들었지만, 다섯 속성이 상부상조하며 검강에 잘려 강제로 비율이 맞춰진 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된다.

오행의 비율이 완전히 똑같아진다.

동시에, 나는 기묘한 감각과 함께 오월입도경이 완전히 통합(通合)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쿠구구구!

꾸웅!

축기기에 도전한다.

완전히 통합된 오색의 영기가 영기의 별을 만든다.

얼마 안 있어 부숴졌지만, 반 호흡도 채 지나지 않아 영운들이 다시 응결되며 영기의 별을 만든다.

꾸웅, 꾸웅, 꾸웅!

밤낮이 바뀌는 것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또 집중하였다.

그리고, 나는 문득 심장이 아픈 것을 느꼈다.

"...하, 또요?"

수명이 다 되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축기기가 코앞이건만...

"...죽여 보시오."

그러나,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읇조렸다.

"내가 축기기에 이르는 게 먼저인지, 당신이 천겁을 내리는 게 먼저인지, 확인해 보시오!"

완전히 통합된 다섯 영기가 회전하며, 그 안에서 무수한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 변화는 영기의 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변화에 대응하며 영기의 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강제로 제압하고 있었다.

축기기가 코앞이다.

두근, 두근...!

강기로 심장을 강제로 주무르며, 나는 더욱 더 의식을 집중했다.

나는, 먼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우주의 별들은 먼지구름 속에서 만들어진다.

먼지들이 모이고, 또 모여 별의 요람인 성운(星雲)이 되는 것이다.

다섯 갈래의 영운이 빛나며, 구름 속에서 몇 번이고 부숴졌던 별이 고개를 다시 드러낸다.

'간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한 탓일까.

어느새 별하늘이 지고 새벽녘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어느새 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천뢰가 내리치느냐, 내가 축기기에 도달하느냐!

일촉측발의 상황!

우릉, 우르릉..

먹구름 사이로 푸른 빛이 번뜩이며, 하늘에 뇌력(雷力)이 충천한다.

두근, 두근, 두근...

"하늘이여..."

두근, 두근!

"운명에서, 반드시 벗어날 것이오!"

파아아앗!

하늘이 파랗게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저 멀리서 내게 마음을 보내는 김영훈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그가 내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은현아, 휘둘러라. 이미 네 손에 있다."

'아.'

나는 수명의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김영훈은 가족에게 빛살과도 같이 돌아가고 싶어하여, 빛조차 공간조차 뛰어넘는 능광도에 도달하였다.

그것이 김영훈의 삶의 의미.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운명의 틀을 벗어나고 싶었다.'

몇 번이나 비참하게 운명의 아래에 깔려 발버둥쳤는가.

하늘을 새처럼 날아오르는 김영훈처럼, 저 하늘 너머로 날아가 운명을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었다.

김영훈은 귀환을 위한 마음이 무에 녹아, 그는 속도를 무공에 접목시켰다.

나는 운명에서의 탈출을 위한 마음이 무에 녹아,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기교를 무공에 접목시켰었다.

찰나.

나는 내 의식의 최적화된 형태를 찾을 수 있었다.

검(劍).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검은, 점차 검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며, 완전히 무형(無形)이 되어 검의 형상을 잃고 투명하게 의식으로 흩어졌다.

슈아아악!

어느새 내 몸에서 빠져나간 강환들이 의식과 합쳐지며 의식을 실체화시킨다.

콰르릉!

한 줄기 청뢰(靑雷)가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고, 나는 예뢰안으로 번개가 떨어질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었다.

그리고, 눈 앞의 무색(無色)의 허공을 쥔 채 그대로 하늘을 향해 휘둘렀다.

"월도입천(越道入天)."

무형(無形)의 검(劍)이 천뢰(天雷)를 사르며 나아가 그 너머의 두꺼운 구름을 그대로 쪼개 버렸다.

"무형검(無形劍)!"

하늘이 세로로 갈라지며, 그 틈새로 새벽빛이 밀려온다.

쿠궁, 꾸궁, 꾸구구궁!

단전(丹田)은 마음의 밭이라고들 하였다.

모든 망설임을 떨쳐낸 내 마음의 밭에서, 수많은 거름을 주고 심었던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길었다.

하지만 드디어, 도달한다!

축기기(築氣期) - 여기서부터 유료입니다-

오행(五行)이 완벽한 원을 그린다.

"오월입도(五越入道)!"

오행을 넘어, 진정으로 수도에 들어간다!

황, 흑, 적, 백, 청의 다섯 영기가 단전에서 회전하며 압축되기 시작하였다.

쿠구구구구!

'간다!'

영기의 별이 형성된다.

오영근에서 나오는 영기의 뒤틀림. 그 뒤틀림을, 오월입도경의 다섯 공법의 변화들이 전부 막아선다.

'제압한다!'

단전에서 회전하는 오행의 변화가 점차 범위를 늘렸다.

어느덧, 오행의 변화는 점차 커지며 오영근의 뒤틀림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내가 이뤄온 것들이, 내가 타고난 굴레를 잡아먹는다.

우우우웅!

몇천 번? 몇만 번? 몇십만 번?

셀 수 없이 축기에 도전하였다.

오행의 변화를, 전부 이해하였다!

쿠구구구!

오행의 모든 변화가 전부 내 손 위에 오르고, 오색(五色)의 별이 안정화되기 시작하였다.

파아아앗!

일원일응으로 만들어왔던 영기의 점따위와는 다른, 휘황찬란한 빛의 구체가 단전 안쪽에서 빛났다.

괴군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의 흐름을 만들어내어, 수명을 늘리는 존재...'

하나로 통합된 영맥을 통해 법력이 맴돌며, 영기의 별로 흡수된다.

그리고 영기의 별이 변압기와 같이 법력을 압축시켜 정순지력으로 만든다.

정순지력은 또 다시 전신영맥을 돌며, 전신 영맥 곳곳이 정순지력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영기의 별은 그 자체로 정순지력을 폭주하지 않게하는 역할도 겸했기에, 상단전이나 심장 등 민감한 곳으로 정순지력이 흘러도 문제가 없었다.

쿠구구구구!

몸 곳곳에 정순지력, 즉 강기(罡氣)가 흐르기 시작한다.

두근, 두근, 두근!

더 이상 억지로 심장을 강기로 압박할 필요가 없었다.

전신영맥에 강기가 절로 흐르며 수명이 늘어난다.

천기(天機)에 변화가 생겨난다.

나라는 운명의 별자리 너머에, 또 다른 자리가 생겨나며 하늘로부터 300년의 수명을 더 허락받았다.

'괴군의 말마따나 수도의 길이 별을 흉내내어 운명을 더욱 더 잇는 것이라면... 어쩌면 수도(修道)란 결국 하늘을 닮아가는 과정일지도.'

나는 동시에 수선에 대한 일말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를 통하여, 연기기 때보다 천기를 읽는 능력이 조금 더 향상되었다.

이제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커다란 길과 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시간 개념도 조금 달라지겠어.'

이후 결단기에 도달하면 300년을 더 받아 600년의 수명을.

원영기에 도달하면 600년의 수명을 더 받아 총 1200여년의 수명을 더 내려받을 터.

최초로 하늘에게 300년의 시간을 더 허락받은 지금부터는 삶의 시간이 훨씬 길어질 터였다.

우릉, 우르릉...

쇄천봉 인근에 꼈던 먹장구름들이 잦아들며,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나는 상념들을 정리하고, 봉우리 전체가 떠나가라 웃었다.

드디어.

몇 번의 삶을 거쳐 드디어!

"명(命)을 극복했다...!!!"

운명을 넘어서고, 수명을 극복했다.

주르륵...

나는 삶은 곧 기쁨이라는 김영훈의 말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하였다.

무(武)를 통해 나 자신을 다시 다지며 더 높은 깨달음을 얻었고.

수명을 극복하여 300년의 시간을 더 허락받았다.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나는 축기기(築氣期)에 이른 것을 다시 한번, 몇 번이고 확인하며 전신에서 정순지력을 뿜어내 보았다.

아직은 변압기의 일종인 영기의 별이 하나밖에 없어 실낱같은 정순지력밖에 생성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것 역시 엄연한 정순지력이었고, 체내에 강기가 흐르게 된 이상 상시 호신강기를 발동하게 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연기기 수도자까지는, 그래도 수도법술을 펼칠지언정 어느 정도는 인간 같은 느낌이었다면.

축기기 수도자부터는 정말 인간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전신 곳곳에 강기가 흐르니, 일단 무림인들의 검기나 검사 이하의 공격은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검강 역시 축기기에서의 경지를 올려 정순지력의 농도를 더 짙게 하면 먹히지 않을 터다.

'아마 강환급 공격만 아니면 솔직히 평시에만 흐르는 호신강기로 막아도 문제가 없을 터다. 거기에 정순지력이 온 몸을 돌며 생명력을 끌어올리고 있어.'

예전에 보았던 막리세가의 축기기 장로처럼, 내장이 몇 개가 뜯겨나가도 정순지력이 며칠 동안은 그 역할을 해 주기에 머리, 심장, 배 외에는 크게 다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한.

'정순지력에 예기를 씌운 것이 검강이다. 그렇다면, 이젠 솔직히 몸 곳곳에서 흐르는 정순지력을 내단으로 퍼부어서 무궁무진한 강기의 출력을 기대해도 되겠군.'

솔직히 전신에 흐르는 영기 중 아무 기운이나 원하는 만큼 퍼서 내단으로 가져다 써도 티도 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이제 축기기에 오르며, 무엇보다 의식의 크기가 더더욱 커졌다.

파스슷..

나는 무형검을 풀었다.

그러자 의식은 다시금 원래의 구체 형태로 돌아오며 나를 애워쌌다.

우우웅-

나를 중심으로 반경 3장(1장=약 3미터) 정도가 의식영역으로 뒤덮였다.

앞으로 축기기의 수행을 쌓으면 쌓을수록 의식영역은 더 커져 가리라.

'이번 삶에 축기기에 못 이르면 의식의 크기가 같아 어차피 다음 삶에 머리가 바로 터지진 않으니 상관이 없었고.

축기기에 이르면 수명이 더 주어지니 생각을 못했었다만... 이제 의식이 이 정도로 커졌는데 말이지...'

그러나 잠시 고민하며 의식을 움직여보던 나는, 월도입천의 경지에서 빠르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스르륵...

의식형태가 무형검으로 변하며, 내가 의지를 발동하자 의식이 완전히 쪼개져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건 내공이 없어도 가능하군.'

순수한 의식을 다루는 기예가, 월도입천에 달하며 어마어마하게 상승했다.

다음 삶에 눈을 뜨고, 바로 무형검을 쪼개 버리면 상단전의 과부하를 피할 수 있을 듯 했다.

'일단 한숨 덜었다...'

나는 우선 다음번 삶에 머리가 폭발해버리는 굴레에 갇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였다.

물론 계속 수도공법을 익히며 의식의 크기가 커지면 어찌될지는 몰랐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스르륵..

나는 다시 무형검을 되돌렸다.

그런 후, 앞으로 익힐 수도공법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일단 300년의 시간이 주어졌으니, 천천히 생각을 해 봐야겠어...'

지금까지는 50년이라는 수명의 제약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 번의 삶에 300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굉장히 여유롭고 평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축기기의 단계는 크게 네 개로 나뉘어졌다.

많은 이들이 초기, 중기, 후기, 대원만이라고 대충 뜻에 잘 맞지도 않게, 부르기만 편하게 대강대강 부르곤 했지만.

축기기의 4 단계에는 정식명칭이 따로 있었다.

각 단계는 연기기처럼 성(成)이 아닌 수(宿)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제1수(宿)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제2수(宿) 두루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제3수(宿) 규루위묘필자참(奎婁胃昴畢觜參)

제4수(宿)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등으로 불리웠다.

이는 성계에 존재하는 스물 여덟개의 별자리와 대응되는 경지라 하였다.

축기기 수도자는 각수성(角宿星)에 대응하는 영기의 별부터 시작하여 진수성(軫宿星)에 대응하는 영기의 별까지, 모두 스물 여덟개의 영기의 별을 단전에 만들면 축기기의 극한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축기기의 단계에서는 연기기 때에 지내놓은 칠성제의의 제사가 확실한 도움이 되었다.

칠성제의는 스물 여덟 별자리 중 일곱 별자리의 이름을 빌어 천지영성을 내려받는 것이었고,

저때 이름을 빌은 별자리의 종류에 따라 제1수때의 수행에 도움을 받기도, 제4수때의 수행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나는 이번에 각항저방심미기, 청존칠수에게 제의를 지냈으니 제1수 때의 수행에 이점을 얻을 수 있겠군.'

문득, 나는 그 사실을 떠올리자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을 떠올렸다.

일반적으로 절대 다수의 수도자들은 평생 칠성제의를 두 번 지낼 일이 없다.

뭐 시운을 잘못 잡아서 제의가 실패한다거나, 천거 현상 같은 말도 안되는 특이한 희소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애초에 칠성제의때에 축복을 받는 별자리는 일곱 별자리뿐이었고, 이 경지에서 어떤 자리를 택하느냐에 따라 축기기에서 도움을 받을 시기도 달라진다.

보통 자질이 부족한 이들은 제1수, 각항저방심미기나 제2수, 두루여허위실벽의 칠수에게 축복을 받곤 한다.

축기 초중반이라 할 수 있는 경지에서 도움을 받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은 제3수, 규루위묘필자참, 제4수 정귀유성장익진의 칠수에게 축복을 받아 칠성제의를 지낸다.

축기 초중반은 뛰어난 자질로 빨리 지나갈 수 있으니 후반을 빠르게 넘기겠다는 심산이었다.

'이거, 저주스러운 회귀 능력이 도움이 될 때도 있겠군.'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회귀할때마다 수선경지가 모조리 초기화되고, 칠성제의도 매번 다시 지내야 한다.

그렇다면 초반에는 각항저방심미기 제1수에게 축복을 받고, 그 경지에 대한 깨달음을 되새긴 후 다음 삶에는 제1수는 선각후통으로 넘기고 제2수의 축복을 받는다면...

'1수, 2수, 3수, 4수의 축복을 모두 받으면서 축기기 극한에 도달하는 것도 허황된 생각은 아니겠군.'

어쩌면, 축기기는 연기기 때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축기기에 대한 상념에 잠겨있을 때였다.

"은현아."

김영훈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근 10여년만에, 육성으로 말을 하며.

"쇄천봉에 자리를 잡은, 여러 수도가문의 수도자들이 이쪽으로 오는 듯 하는구나."

"아하, 그렇겠군요."

번개가 떨어지고, 구름이 갈려나가는 둥 여러 일이 일어났으니 이쪽으로 오는 게 당연했다.

"그럼 쇄천봉은 이제 슬..."

그리고, 내가 쇄천(碎天)이란 말을 입에 담았을 때였다.

파지직!

순간 눈 앞에서 번갯불이 튀기더니, 천지사방이 기이한 빛으로 잠겼다.

나는 순간, 내가 어딘가 기이한 장소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건 무슨..!'

나는 당황하여 경계를 하려 했으나, 나는 내 육신(育身)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의식의 상태로 이 기이한 세계에 갑자기 빨려들게 된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할 때였다.

촤아아아-

파직, 파지직...

기이한 공간이, 온갖 색상의 번개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적색, 청색, 금색, 백색, 비취색, 연분홍색, 암홍색 등등...

그리고, 번개의 세상 저 건너편.

그곳에서, 시꺼먼 그림자 같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에 긴장하며, 인영을 주시했다.

인영은 윤곽 같은 게 보이지 않았고, 전신이 시꺼먼 그림자로 된 것이 마치 귀신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신의 귀기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 기이한 허깨비 같기도 하였다.

내가 그 존재를 관찰할 때였다.

주륵...

"...!"

그림자의 얼굴 부분.

눈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원통한 원혼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본좌는 금신천뢰문의 초대 문주 양수진. 그가 남겨놓은 운명의 잔영(殘影). 다음 대(隊)의 종명자(終命者)여.

이 공간에 그대가 들어왔다는 것은 내가 설정해 놓은 조건을 기적과 같은 확률로 달성했다는 것일 터.

아직 자신의 명(命)을 깨치지 못했을 때에 쇄천봉에 들어와서 천뢰(天雷)를 맞고 살아남아, 입 밖으로 쇄천(碎天)을 내뱉는다는, 말도 안되는 기적 같은 확률을 뚫은 종명자는 모두 이곳에 올 수가 있다.]

'양수진!?'

[종명자를 쇄천봉까지 끌어들이는 것까지는, 본좌가 쇄천봉에 종명자를 부르는 운명의 인력을 만들어 놓았기에, 종명자라면 언제가 되었든 한 번은 쇄천봉에 올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하지만 자신의 명을 깨치기도 전의 벌레만도 못한 종명자가 하필 이곳에서 천뢰를 맞고, 기적과도 같이 살아남아 쇄천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기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기적이 아니라면 그것의 눈길을 피할 장소를 만들 수 없노라.

그렇기에 본좌는, 오직 기적의 가능성에 기대어 이곳에 후대를 위한 경고를 남기노라.]

파직, 파지직...

양수진의 잔영이라 소개한 인영의 주변으로.

사방을 둘러싼 번개들이, 점차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후대여, 다음 대의 종명자일지, 다다음 대의 종명자일지, 수천, 수억 대 후의 종명자일지 모르는 후대여.

절대로, 네가 부여받은 운명을 누설(漏泄) 하지 말아라. 네가 어떤 선물을 받았을지 모르나, 무슨 일이 있어도 입 밖으로 그것을 누설하면 아니된다.

네가 삼천세계 어디를 가든, 그것이 네가 무엇을 받았는지 알아챌 것이다.

그것에게 네 운명을 비밀로 하는 것만이 그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다.]

파지지지직!

천지사방 곳곳이 피처럼 시뻘건 번개로 채워졌다.

양수진의 잔영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그림자의 눈에서는, 더더욱 많은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혹여라도 이미 네 비밀을 누설한 적이 있다면. 후대여, 그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모조리 사라진 것이니.

그대는 고향에 돌아갈 생각도, 운명의 저주를 벗을 생각도 말라.

그냥 수선에 대한 생각을 접어버리고, 적당히 범인들과 섞여 살다가 적당히 죽어라. 고향 따위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스스로의 운명을 누설해버린 종명자가 가장 행복해질 유일한 방법이니라.]

주륵, 주르륵...

그의 그림자 곳곳에서 피와 같은 것이 번지더니, 시뻘건 번갯불 속으로 그의 형상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운명을 살아가는 이는 모두가 자신의 운명을 누설하는 것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으며.

종명자는 더욱 더 심할 터이지만, 그리하여도 자신의 운명을 가벼이 생각하고 발설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노라.

본좌 역시 운명을 한 번 누설하여 이리 되었으니, 후대여. 부디 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

누설하지 아니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노릴진데, 누설해버린다면 그것에게 저항할 방도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후대여, 나의 경고를 절대로 경시하지 말아라. 절대로...]

파지지직...

결국, 시뻘건 번갯불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버린 그는 결국 사라져 버렸다.

파아앗!

다음 순간.

"...슬슬 떠야겠군..요."

나는 어느덧 현실 세계에 돌아와 있었고, 김영훈이 내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기이한 세계에서 있었던 일은, 1초도 안 되는 찰나 안쪽에서 일어났던 것이었다.

'종명자? 그것? 들켜? 뭘 누설하지 말라는 거지?'

"그래, 그런데... 괜찮은 것이냐? 안색이 안 좋은데..."

"아, 아닙니다. 아무래도 축기기에 오르며 조금 무리한 모양인가 보지요. 그나저나..."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이미 포위당한 것 같습니다만."

그랬다.

나와 김영훈이 자리를 잡은 쇄천봉의 주위로, 수십 명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각자 법기들을 들고 비행법기에 올라타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인데 성제국 수도가문들의 공동 영지로 선정된 쇄천봉에 있느냐!

무엇을 꾸미던 것이냐, 당장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나이가 있어 보이는 축기기 수도자 중 한명이 불진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나는 그들의 앞에 나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 모로 막 경지에 오른 축기기 산수입니다. 방금 전의 일은 제가 특이한 공법을 수련하느라 일어난 기현상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땅은 금신천뢰문의 것인 줄로만 알았고, 성제국 수도가문 연합의 땅인 줄은 몰랐는지라 실수를 범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다신 대산맥에 발도 들이지 않겠습니다."

"흠, 얼마 전에 답천사막 인근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200년 후에 일어난다는 대전쟁 때문에 전 대륙이 혼란스럽거늘.

네 이놈들. 수상한 놈들이구나! 그리고 지금 같은 시대에 축기기급 수도자가 고작 산수라니! 안 되겠군, 네놈들을 연행해 가겠다!"

"정녕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축기기를 막 돌파했을 뿐이고, 방금의 현상도 특수한 공법을 익혀서였을 뿐입니다."

대표로 보이는 축기기 수도자는 그 말에 콧웃음을 치며 불진의 법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말은 더 이상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얌전히 연행되어라!"

"...후우."

나는 김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는군요."

"흠,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이 중에 결단기는 없는 것 같으니, 이왕 이리 된 거 몸이나 풀자꾸나. 너도 월도입천에 익숙해져야 하니."

"그도 그렇긴 합니다."

우리의 대화에, 불진을 든 수도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축기 1수인 놈과 연기기 3, 4성 정도 되어보이는 놈들 둘이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다음 순간.

김영훈이 도를 잡았다.

"헛..!"

그리고, 장내에 모여있던 축기기 수도자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저들도 칠성제의를 지내어 천기를 읽는 능력을 지녔다면, 전부 느꼈을 것이다.

자신들의 앞에 대흉(大凶)의 운명이 나타났을 테니까.

파아아앗!

김영훈의 의식형태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강환이 떠올랐다.

내 의식형태 역시 나를 둘러싼 거검(巨劍)의 형상으로 변화하였고, 주변으로 아홉 개의 강환이 떠올랐다.

"이, 이 놈들 괴상망측한 술법을 쓰는구나! 하지만 고작 둘이서 우리를 전부 이길 수 있을 듯 싶으냐!"

"다, 당주님. 처음 보는 괴상망측한 술수입니다. 혹시 결단기 선배님들은 아닐까요?"

"무슨 소리! 결단기 선배님들의 의식 크기가 아니지 않으냐! 전원 법기를 꺼내라!"

다음 순간.

김영훈의 황금빛 의식이 그의 도신에 깃들며 실체화됐고,

내 무색(無色)의 의식은 검의 형태에서 벗어나며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더니 실체화 되었다.

김영훈은 황금빛의 도(刀)를 움켜잡았고, 나는 무형의 허공을 바르쥐었다.

월도입천에 오른 탓인지, 김영훈의 의념이 훨씬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들려온다.

나와 그의 의념이 교차한다.

[월도입천.]

[월도입천.]

"능광도(凌光刀)."

"무형검(無形劍)."

우리는 등을 맞대고, 우리를 포위한 축기기 수도자들을 향해 각기 광도(光刀)와 무검(無劍)을 휘둘렀다.

월도입천

찰나, 황금빛 광휘가 누구도 반응할 수 없을만치 후방을 휩쓸었다.

찰나, 무색의 무언가가 휘둘러지며 누구도 막지 못할 힘으로 전방을 휩쓸었다.

콰과과과광!

"크아아악!"

"이런 미친, 이, 이게 뭐야!"

"추, 축기기 수도자가 아니잖아!"

내 전방에 있던 구릉 하나가 거칠게 뜯겨나갔고, 후방에 있던 봉우리 하나가 대각선으로 깔끔히 절단되었다.

단악검법, 유릉!

나는 허공을 쥔 채 부드럽게 무형검강(無形劍罡)을 찔러들어갔다.

쿠구구구구!

전방에 있는 산맥의 산등성이가 부드럽게 깎여나가며 축기기 수도자들을 노렸고, 축기기 수도자들은 혼신을 다해서 무형검강을 피해냈다.

단순히 강환 아홉 개로 낼 수 있던 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강환 아홉을 합친 것보다 더욱 더 압도적인 힘이 내 손에서 펼쳐진다.

무형검강은 완전히 자유로운 형태로, 내 의지에 따라 한참을 늘어나기도 했고, 검법을 펼칠 때마다 그 초식에 가장 잘 들어맞는 형태로 형을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강환들을 녹여넣어 탄생시킨 경지인 탓인지, 무형검과 접촉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만큼 사고를 가속시킬 수 있었다.

강환은 사라졌지만, 10배 가속의 효과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 선배님. 실례를 범했습니다. 진노를 가라앉혀 주십시오!"

오연하게 불진을 들고 우리를 노렸던 대표 축기기 수도자가, 무형검강을 피하느라 산발이 된 머리로 내게 비명을 지르듯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나는 어차피 이 수도자들을 싹 죽여버리는 게 목적이 아닌, 겁을 줘서 전부 쫓아내는 게 목적이었기에 오히려 더욱 더 가감없이 무형검을 휘둘렀다.

"흐아아아아!"

"결단기 선배님이 노하셨다!"

"도, 도망쳐!"

나는 무형검을 휘두르면서도, 굳이 사상자를 만들지는 않았다.

이 놈들이 가문에 가서 결단기 가주나 원로를 불러오면 상당히 귀찮아질 테니까.

사상자가 없다면 결단기 수도자들 역시 바쁜데 굳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무형검을 휘두르다 보니 이거... 굳이 손을 휘둘러야 할 필요도 없으려나.'

모든 초식과 기수식의 한계와 틀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의 검.

그것이 무형검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형의 검강을 잡고 휘두르며, 계속해서 기수식을 펼쳤다.

비록 손을 놀릴 필요 없더라도, 기수식을 잡을 필요 없더라도, 이것의 본질은 검(劍)이었다.

검은 검사의 손에 있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었다.

콰과과광!

월악의 초식이 펼쳐지며, 눈 앞의 봉우리를 잘라내 버렸다.

방금 전까지 그곳에 있다가 아슬아슬하게 피한 축기기 수도자는 사색이 된 채 비행법기를 타고 멀리 도망쳐 버렸다.

'이런 느낌이군.'

월도입천의 경지란...

나는 무형검을 다시 의식으로 회수하며, 김영훈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김영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김영훈의 월도입천은 속도에 특화된 경지이다 보니, 그저 황금빛이 번뜩일 뿐.

무형검을 잡고서 사고를 가속시켜 봐도 힐끗힐끗 잔영만이 보일 뿐이었다.

쿠과과광!

황금의 빛살이 마지막 남은 축기기 수도자의 방어법술과 호신강기를 일격에 박살내 버렸고, 축기기 수도자는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김영훈이 힘조절을 한 덕인지, 축기기 수도자는 일격에 졸도하지 않고 저물법기에서 비행법기를 꺼내 황급히 도망칠 수 있었다.

파앗!

빛살이 번뜩이더니, 김영훈은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제대로 반응하기도 어렵군.'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떠냐, 이 경지에서 힘을 휘둘러 보니."

나는 그의 말에, 무형검을 휘두를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기본(基本)에 더 신경써야 하는 경지입니다."

너무 강력한 힘을 휘두르다, 되레 이 힘에 잡아먹혀 무의 초심을 잊기 쉬운 경지였다.

틀에서 벗어나는 경지였지만, 나는 도리어 그 경계가 없는 힘에 더욱 더 틀을 두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초식이나 기수식이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일부러 무형검을 기수식에 맞게 휘둘렀었던 것이었다.

나름 500년 동안이나 무공을 수련해온 무인인 내 직관으로 느낀 사실이었다.

김영훈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구나. 새로운 영역에 올랐지만 결국 이 영역의 근간은 무학(武學)! 무의 근간을 잃으면 아예 무너져버리게 되어 있다.

네 말대로, 지금까지의 그 어떤 단계보다 발목을 다지는 것에 신경써야 하는 경지이지."

그는 말을 하며, 혀를 찼다.

"그 정도로 무에 대한 통찰도 있으면서, 재능 없단 소리나 지껄였단 거냐. 재능 없다는 소리로 스스로를 억누르고만 있는 걸 보고 있자니, 그동안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

"그나저나, 그것 말고 또 따로 본 것은 없느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무형검에 대한 감을 잡는 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볼 여유는 없었습니다."

"하긴, 그 난전에서 세세하게 놈들에게 집중할 틈도 없었겠지."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삼화취정에 이르면 의념의 색을 보기 시작하지. 그리고, 월도입천에 이르면 그 능력은 더욱 더 심화되어, 상대의 심상(心想) 그 자체를 읽는 게 가능하다."

나는 김영훈의 설명대로 의념의 흐름에 집중했고, 얼마 후.

김영훈의 몸 안쪽. 그곳에서 의념의 흐름을 내뿜는 그의 혼(魂)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혼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의념의 흐름에 집중하였고, 곧이어 나는 김영훈의 본질을 볼 수 있었다.

황금빛!

황금빛 광휘가 흐르는 거대한 강(江)!

'아니, 강이 아닌가.'

저것은 뭔가의 일부였다.

무수한 강의 흐름이 얽혀, 황금빛의 거대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것은 붕조(鵬鳥)였다.

황금빛의 강으로 이뤄진 붕조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이 김영훈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그의 무학의 근간이자, 동시에 김영훈이라는 사람의 본질이었다.

"심상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 네 심상으로 타인의 심상에 접근하여 무의식을 자극하거나 도야시키는 게 가능하다.

그리고 전음이나 의식의 대화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심어(心語)를 보낼 수 있지. 이렇게."

김영훈의 심상에 변화가 생겼다. 황금의 붕조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김영훈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느끼는 것, 내게 전하려는 말에 대해 언어를 넘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김영훈에게 월도입천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몇 가지를 더 배웠다.

"다 배운 것 같군. 그리고 한번, 네 자신의 심상도 돌아보는 게 좋을 거다."

"제 자신의 심상은 무형검이 아닙니까?"

"그럼 내 심상은 능광도더냐? 황금빛 물결로 이뤄진 붕조였지. 심상과 네 경지는 분명 연결이 되어있지만 차이가 있다.

너 자신에 대해 알아볼 겸, 심상을 탐구해 보는 게 좋을 거다."

나는 김영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고 내 심상을 관조했다.

나 자신의 의념을 관찰하며 심상을 좇기를 얼마나 했을까.

파아아앗!

눈 앞에, 내 심상이 나타났다.

내 심상, 내 무의식의 깊은 곳.

푸콱!

푸콱, 푸콱!

"아..."

내 심상세계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내 하반신이 날카로운 뭔가에 벌집처럼 꿰뚫린 것을 느꼈다.

실제로 육신이 뚫린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심상세계에 들어선 내 의식이 상처를 입었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생생하군.'

나는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내 심상세계를 바라보았다.

'이게 내 심상인가...'

저벅, 저벅...

푸콱, 푸콱!

나는 심상 세계를 거닐었고, 심상 세계를 거닐 때마다 팔과 다리 곳곳에 상처가 났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닐었다.

고통은 생생했지만, 익숙한 고통이었다.

이미 내 마음 곳곳에 스며든 고통이었기에 평안하게 심상을 거닐 수 있었다.

내 심상은 산(山)이었다.

거대하고 또 거대한 태산(太山)이었다.

그리고, 그 태산에는 도저히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한 도검(刀劍)들이 역으로 꽂혀 있었다.

웃기게도, 그 도검들은 전부 한없이 투명(透明)한 무색(無色)이었다.

검들의 표면은 유리처럼 맑아, 쳐다보면 내가 고스란히 비쳐보였다.

도산(刀山)!

한없이 깨끗하고 맑은 도산(刀山)의 지옥!

그것이, 나의 심상세계였다.

무수한 삶을 살아오며, 고통받고 또 고통받았다.

한없이 위를 궁구해왔고, 그를 위해 늘상 삶을 갈아넣으며 칼밭을 걷는 듯한 고통을 느껴왔다.

그러면서도, 나는 인간의 도리를 지켜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티없이 맑고 깨끗하여, 그 속이 전부 들여다보이지만, 정작 그 안을 거니는 자기 자신은 미친 듯이 고통받는 도산지옥.

"이게, 나인가."

나는 계속해서 긁히고 상처입으면서도 도산지옥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투명한 지옥의 꼭대기는 아무리 걸어가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군. 이 심상은 내가 평소에 세상에 대해 느끼고 있던 것들이 표현된 건가...'

사방에서 전신에 칼이 박히는 듯한 고통.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목표가 까마득해 보이지 않는 아득함.

그러면서도, 내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았다는, 투명한 긍지.

"하하하..."

나는 웃었다.

그리고, 심상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김영훈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떻더냐."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 더 알 것 같습니다."

방금 본, 그 맑은 지옥이 내 무형검의 근간.

운명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이 마음의 동력.

그 산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심상 그 자체였고, 동시에 내 자신의 손으로 쌓아올린 산이기도 했다.

고통과 노력으로 쌓아올린 나 자신의 그 모든 생애.

그랬다.

그 산이 곧 나의 검이었다.

"...고맙습니다. 여러 가르침을 주셔서."

김영훈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웃었다.

"고마우면 부탁이나 들어다오."

"말씀하십시오."

그가, 도를 뽑았다.

"한 판 붙자."

"..."

어쩐지 가장 그다운 부탁인 것 같았다.

"지난 10년간. 내가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아느냐. 심어를 보내서 무의식을 도야시켜 줘도 재능에 대한 웃기지도 않는 열등감에 들어먹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말 월도입천에 감을 못 잡은 것도 아니고, 이미 도달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춰놓고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자니...

그런데 또 네가 쌓아온 것들을 깨닫기만 하면 바로 도달할 수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도달을 못 하고 있고."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향해 도신을 쳐들었다.

"나라고 10년이나 사내놈 쫓아다니면서 눈 아프게 쳐다보고 있던 게 좋아서 그랬겠느냐. 닿을락 말락 하니까 미쳐버릴 것 같아서 계속 그러고 있던 거지."

우웅-

그의 눈에서 황금빛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나는 어쩐지 그 빛에, 광기가 섞여있다고 느꼈다.

"10년이나 답답함 속에서 속이 터져라 기다렸다. 동급 경지에 이르기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좀이 쑤셨는지 모르겠다.

자, 서은현. 한 판 붙자. 나를 재밌게 해 다오...!"

김영훈의 무공광 기질이 튀어나오며, 그의 기세가 끓어올랐다.

"후우..."

나는 한숨을 쉬며 의식을 다시 실체화 시켰다.

'쉴 틈도 없군.'

월도입천경에 대해 가르쳐 주자마자 바로 붙자고 하니, 도무지 숨 돌릴 틈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 역시 환영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무인(武人)인가..'

"그럼 일단 김 형과 내공과 의식을 똑같이 맞춘 상태로.."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내 말에, 김영훈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등봉조극 때에는 네 수도법술이고 뭐고 다 써서 나와 붙지 않았냐.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너보다 10년이나 먼저 이 경지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 정도 관용은 보여줘야지."

"...그래서는 순수한 무공대결이 안 되지 않습니까? 연기기 때에 법술 몇 개나 깔짝거렸던 그걸 생각하시면 안 될 겁니다만..."

"하하, 시끄럽다. 그 정도도 극복 못 할 것 같으냐?"

나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의식을 실체화시켰다.

김영훈 역시 동시에 의식을 실체화시키기 시작했다.

"일단, 붙기 전에 여쭙겠습니다만..."

쿠구구구구!

김영훈은 수도법술을 익히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의식의 크기는 오기조원 시절 얻은 그대로였고, 반경 3장을 뒤덮는 내 의식의 크기와 비교하면, 거의 10분의 1정도로 차이가 났다.

"동급 경지라는 가정 하에, 김 형이 속도 외에 저보다 뭐가 앞섭니까?"

경험은 세월에서 막히고,

출력은 축기기의 정순지력에서 막히고,

체급은 의식의 크기에서 막히며,

세밀함과 자유도는 애초에 내 무형검이 더 특화된 분야다.

심지어 이제는 재능마저 점차 영향이 줄어드는 경지였다.

경지를 개척한 것은 개척한 것이고, 나를 지도해 준 게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었지만.

현실적인 건 현실적인 것이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전신에서 강기를 피워올렸다.

"제가 전력을 다하면, 이미 저와 김 형은 동급이 아닙니다만."

순수한 의식의 체급 그 자체에서 오는 기세를 받으며, 김영훈은 흥분과 긴장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걸 극복하고 이기는 게, 진짜 무(武)가 아니겠느냐!"

나는 그 말에 허공을 바르쥐며, 새하얗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역시, 이것이 김영훈이다.

다음 순간, 금빛의 섬광과 무색의 검형이 부딪혔다.

무인(武人)

김영훈은, 서은현이 늘 아니꼬왔다.

"저는 재능이 없는 놈입니다."

언제였더라.

김영훈이 등봉조극에 오르고 서은현과 다시 만나 무공대련을 한 직후 한 말이었다.

확실히, 김영훈이 느끼기에 서은현은 무공의 흐름을 읽거나 창의적으로 흐름을 타파하는 둥 재능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무공 부분에서는 그보다 못했다.

하지만, 웃긴 것은 김영훈보다 서은현이 먼저 등봉조극에 올라있었단 것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서은현은 괴물같은 천인기 수도자들과 뭐라뭐라 대화를 하기도 했다.

그 역시 꼽추 노인이 공간 균열을 열고 연국에서 눈을 뜬 이후엔, 머릿속에 여러 무공구결 및 언어지식들이 들어있어서 서은현 역시 대충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서은현은 무공지식만 가지고 그보다 더 빠르게 오기조원에 이르렀다.

그리고 김영훈에게 무공을 가르쳐주며 그를 끌어올리기도 했고.

그의 동료들이 무슨 엄청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고, 그 자신 역시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사실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등봉조극의 경지, 그 극한에 자랑스레 이르고 난 후 찾아가보니, 서은현 역시 등봉조극의 극한에 몸을 담고 있었다.

김영훈은 서은현이 그와 방향성은 다르지만 역시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은현과 붙은 이후 그가 한 말은 가관이었다.

재능이 없다.

'네놈이 재능이 없는 놈이라면, 나는 뭐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라 썩어빠진 거냐?'

순간 울컥해서 그렇게 말할 뻔한 것을 참았다.

심지어, 서은현은 수도공법 역시 무공과 동시에 익히고 있었다.

그것도 오영근으로 한 속성만 익히는 게 아닌 오행 속성을 전부 다!

또 수도공법을 익히는 속도도 그가 진씨세가에 잠시 몸을 담았던 시절, 진씨세가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들이 공법을 익히던 속도와 비슷했다.

하지만 그 후기지수들조차 수도공법을 저렇게 여러 개 동시에 익히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 후기지수들은 경지에 이르면 막리세가의 축기단을 약탈해와 복용하고 축기기로 넘어갔으니까.

서은현은 연기기 기초공법의 오행을 전부 익혀, 그 힘으로 억지로 경지를 뚫으려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수도공법 수련과 무공 수련 역시 계속 병행하였다.

김영훈도 새벽같이 일어나고, 달이 중천에 뜬 다음에야 잠을 잤지만.

서은현은 수도법술을 사용해서 억지로 정신을 각성시켜 열흘씩 잠을 안 자고는 했다.

김영훈도 서은현이 쓰는 법술을 걸어달라고 해서 며칠씩 잠을 안 자 봤으나, 법술의 효과가 풀리자 그 이후 며칠간은 완전히 폐인처럼 굴러다녀야 했다.

일반적인 의지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서은현은 분명 김영훈과 같은 무공의 감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김영훈과는 다른 뭔가가. 김영훈에게는 없는 뭔가가.

"내가 해 온 모든 것은 결국 내 삶의 일부. 천지인이 서로 영향을 받듯이, 내가 해온 것 역시 내 삶에 영향을 받았겠지요.

내 삶에 대해 깨달았다면, 그는 곧 김 형의 무에 녹아들 겁니다."

서은현과 대련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던 어느 날.

김영훈과 문답을 주고받던 서은현이 한 말이었다.

그는 문득, 그보다 어리지만 조금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던 서은현이, 그보다 훨씬 오랜 삶을 산 노인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김영훈은 서은현이 해준 말을 통해 다음 경지에 대해 잡은 실마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 *

'이대론 안 된다.'

김영훈은 도를 쥐었다.

처음에 무공을 익힐 때는, 언제라도 무극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고.

모든 경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재능이 있었으니까!

어쩐지 본능적으로 꺼려져,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무공재능 역시 그가 이 세계에 온 날에 처음 눈을 떴던 어떠한 '감각'에서 기인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감각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언제고 반드시 극한에 이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등봉조극에 오르고 몇십 년.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를 기술한 월도입천무가 논하는 길을 따라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아직도, 벽은 너무도 두텁고 두터웠다.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냐...'

이 재능으로도 다음 벽은 너무도 높고 거칠었다.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늦은 밤, 김영훈은 도를 휘두르고 휘두르다, 문득 서은현이 수련을 하던 동굴에서 특이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등봉조극의 경지에 올라 내단까지 갖춘 그의 청력은 수십 장 바깥에 있는 서은현의 동굴에서 일어나는 일도 들을 수 있었다.

평소처럼 서은현이 한밤중에도 잠을 안 자고 무공을 수련하거나 수도공법을 수련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끄르럭..꺽...

뭔가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

김영훈은 뭔가 일이 생겼나 하며 서은현이 수련하던 쇄천봉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 녀석, 또 그 정신을 각성시키는 법술을 쓰고 수련한 건가.'

서은현이 법술로 잠을 몰아내고 며칠동안 수련하다가 가끔 기절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물론 기절을 했다가도, 서은현은 금세 다시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가 기절을 했단 걸 깨달으면 그 때는 제대로 잠을 자고 몸을 회복시켰다.

'이번에는 좀 오래 기절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서은현은 최근에 몸을 더 혹사시키긴 했다.

수도자는 자신의 수명을 알 수 있다면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그는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서은현을 찾았다.

그리고, 김영훈은 검을 뽑은 채 선 채로 기절해있는 서은현을 발견했다.

'또 이 꼴이냐.'

서은현은 입에서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은 채, 그렇게 수련하다가 기절해 있었다.

"쯧, 적당히 좀 할 것이지."

김영훈이 서은현을 흔들어 깨우려 할 때였다.

꿈틀

"아, 일어났.."

부웅!

기절한 그가, 검을 휘둘렀다.

부웅, 붕, 붕!

기절한 채로, 그대로 몸을 움직이면서.

서은현은 단악검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다듬은 후, 다시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로 수도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같은 짓을 반복해 댄 건지.

기절한 채로도 평소에 수련하던 일정을 전부 소화해 낸다.

몸이, 서은현의 생명이, 그의 기운이 기억하는 것이었다.

김영훈은 기절한 채로 수련하는 서은현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서은현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기절한 채로 수련을 반복했다.

아침해를 맞고서야, 김영훈은 정신을 퍼뜩 차리며 서은현을 깨웠다.

"은현아, 또 기절했다. 일어나라."

"...아, 아어아! 허억!"

서은현은 정신을 차리며 심장을 부여잡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김 형. 아무래도 몸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은현아."

김영훈은 서은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수련하는거냐. 너무 몸을 혹사시키는 게 아니냐?"

그 말에, 서은현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 재능이 없으니까요. 재능이 없는 놈이 높은 곳에 오르려면, 오늘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이라도 가져야지요."

"..."

오늘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마음가짐.

서은현은 말을 한 직후 기절해 버리듯 침소로 가 쓰러졌지만, 김영훈은 머리를 한 대 두드려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뭘 해온 거지?'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다음 경지를 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노력했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은 그저 자기만족이었던 게 아닌가.'

죽을 각오조차 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 너머를 볼 생각을 했던 건가?

김영훈은 도를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월도입천무의 창시자조차도, 죽음을 각오하고서야 경지에 올랐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뭘 해왔던 거지?'

억울했다.

지금까지 낭비해온 시간이 아까웠다.

'무인(武人)으로서, 죽음조차 각오하지 않고 다음 경지의 무(武)에 도달하려 했단 말인가...?'

스스로가 부끄러워 얼굴조차 들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수련장으로 돌아가, 도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래, 죽자."

죽을 각오를 다지고서, 뛰어넘자.

지금까지는 입으로만 깨달음을 떠들어댔다.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생사의 경계에 들어설 각오를 하고, 제대로 노력할 것이다!

그날부터, 김영훈은 잠을 자지 않았다.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극한으로 집중하며, 오직 도(刀) 하나에만 집중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고, 고통의 감각조차 잊고, 비로소 무(武)를 수련하는 기쁨 외에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때.

그는 월도입천(越道入天)에 도달하였다.

월도입천 능광도(凌光刀).

능광(凌光)이란 이름은 빛보다도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지금껏 김영훈의 마음속에 태산만큼 거대하게 자리잡은 한 사람을 능가하겠다는 의미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서은현이었다.

* * *

김영훈은 비로소 제대로 자신이 쌓아올린 것을 뽑아들고, 그 앞에 당당히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재능이 없다고?'

그 말이, 그보다 아래에 있던 이들에게 얼마나 큰 기만이었는지, 그가 알기나 할까.

'너는 노력해왔다, 서은현.'

김영훈 자신이 상상도 못할만큼.

처음 그의 심상을 관찰하고, 얼마나 소스라쳤는가.

오늘 저녁에 죽어도 좋을 정도로 노력한다.

김영훈은 서은현에게 자극받아 50일을 노력하며 생각했던 그 심상이, 서은현에겐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재능이 설령 진짜로 없을지라도, 그 정도로 노력을 했다면 너는 너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아니, 자신감을 가져야 맞다.

그것이, 그 자리에 도달한 자가 아래 경지에게 보일 수 있는 경의인 셈이니까.

그러므로, 김영훈은 서은현이 무형검을 얻고 그를 깔보는 발언을 하자 오히려 반가웠다.

'속도밖에 앞서는 게 없다고?'

맞다.

서은현은 그래도 된다.

그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으니까.

그만큼, 보는 사람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노력했으니까.

'하지만, 서은현.'

김영훈이 자세를 잡고 도를 쥐었다.

'속도밖에 앞서는 게 없을지라도, 이번 기회에 너를 넘고자 한다.'

서은현의 무공을.

서은현의 의지를.

그가 가진 그 노력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것이, 무인(武人)이니까!

"간다!"

찰나가 쪼개졌다.

황금빛 광휘가 휘몰아치며, 김영훈의 도가 서은현의 목을 향했다.

'무형검이 반응할 틈새를 주면 안된다!'

선발제인(先發制人)!

그리고 다음 순간, 의식의 안으로 서은현의 의념이 울려퍼졌다.

그가 사용하는 절학명이 무형검과 함께 뻗어나온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무형의 검기(劍技)가 사방팔방으로 가시처럼 뻗쳐나간다.

형태에 제약이 없는 자유의 검형!

서은현은 그 주변으로 무색의 가시철조망을 두른 듯한 형태가 되었다.

'찢긴다!'

김영훈은 황급히 다시 뒤로 물러섰다.

촤악!

접근했다가 뒤로 빠진 것만으로 벌써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났다.

다시금 서은현의 의념이 울린다.

단악검법, 산수화

무형의 강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치며 주변을 난도질한다.

반경 삼 장, 직경 육 장(약 18미터) 크기의 의식으로 이뤄진 무형검이, 때때로 더더욱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하며 궤도를 알 수 없이 주변으로 파괴를 흩뿌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서은현의 절기가 계속 이어졌다.

단악검법, 능곡지변, 산중호걸

지반 아래로 쏟아진 무형검기가 다시 올라오며 지형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사방으로 뻗쳤던 검기들이 김영훈을 향해 일점집중된다.

김영훈은 능광도와 동화되며 일순간 빛살이 되어 무형의 검강들을 전부 피한 후.

지반이 멀쩡한 곳으로 물러나 서은현을 노려보았다.

서은현은 기본기를 더 중시해야 하는 경지라고 말했지만, 무형검으로 마구 흩뿌려지는 단악검법 중 어느 것 하나 무리(武理)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하나하나가 단악검법의 기본과 요체에 충실했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콰과과과!

서은현이 무형검을 사용하며 김영훈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무형검강이 종횡무진하며 김영훈에게 달려든다.

'피하면 안 된다.'

파고들어야 한다.

단맥도, 산새!

다시금 김영훈의 몸이 빛살이 되었다.

빠르다는 것은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이점이었다.

서은현이 김영훈을 도발하긴 했지만, 능광도의 공능이 제대로 발현된다면 무형검보다 훨씬 무시무할 수도 있었다.

능광도의 본질이 찰나(刹那)라면, 무형검의 본질은 궤적(軌跡)이었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내리꽂히는 무색의 궤적은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힐만큼 변화무쌍한 것이었다.

'하지만 변화한다는 것은 필히 강약이 나뉘는 법이지.'

강한 부분이 있다면, 무조건 약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영훈이 집중했다.

저 무형의 궤적을 찰나동안 분석해서 약한 부분을 흘리며 서은현에게 접근해야 한다.

안 그래도 원거리면 의식의 크기가 큰 서은현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어떻게든 접근해야 승산이 있었다.

파아앗!

단맥도 산새의 초식이 펼쳐지며, 김영훈은 황금빛 도기와 함께 춤을 추었다.

경쾌하다.

경쾌하디 경쾌한 발놀림으로, 빛살과 같이 무형검의 궤적 중에서 가장 약한 흐름을 쳐낸다.

콰아아앙!

그리고, 무형검의 궤적 중 가장 약한 흐름과 김영훈의 능광도가 부딪혔을 때.

"....!"

김영훈은 내상을 입을 뻔했다.

'미친, 이게 가장 약한 부분이라고?'

심지어 정면에서 받아친 것도 아니고 흘려서 궤적을 비껴가게 한 것이었다.

체급이, 출력이 다르다.

'연기기에서 축기기가 된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서은현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기(罡氣)들이 허공으로 뿜어지며 무형검에 끝없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괴물딱지 같은 놈!'

그러나 김영훈은 산새의 초식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서은현의 검기를 흘리며 그에게 날아갔다.

마치 한 마리 황금빛 봉황이 춤추는 듯 하다.

봉황은 무형의 폭풍우를 뚫고 마침내 폭풍의 핵과 마주쳤다.

단맥도, 산바람!

피웅!

빛살이 최속의 초식과 함께 쏘아진다.

그리고,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방으로 흩뿌려진 형태였을 터인 무형검이, 일순간 다시 변화하였다.

단악검법, 공곡전성

무형검이 마치 진짜 폭풍처럼 회전하며 빛살을 움켜잡았다.

능광도의 궤도가 무형검에 붙잡히며 한 바퀴를 회전하고, 다시 김영훈에게 쏘아진다.

김영훈은 가까스로 서은현이 되친 스스로의 공격을 피하며 서은현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서은현이 되친 빛살이 김영훈이 있던 자리를 지나, 그 뒤쪽 절벽에 닿았을 때였다.

콰과과과광!

절벽 전체에 거미줄같은 금이 가며 폭음이 울렸다.

오싹!

김영훈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원래라면 절대로 저런 위력은 못 나오는데...'

서은현이 되치며 섞은 힘이 합쳐지자 저딴 위력으로 변모한 것이다.

김영훈은 마치 홀몸으로 폭풍에 맞서싸우는 기분이 들었다.

'단맥도만으론, 못 이긴다.'

그의 재능을 총동원해야 한다.

지금 당장, 찰나 안에 성장하지 못하면 필패다!

김영훈의 머리가 익을 듯이 빠르게 회전하며, 다음 순간 새로운 무공을 창조해냈다.

보법, 칠채필보!

파앗!

김영훈의 움직임이 변화했다.

그리고 황금빛의 능광도가 변화하며 칠채색으로 변화했다.

다음 순간, 김영훈의 신형이 일곱 명으로 분화(分化)하며 서은현의 상, 하, 사방.

그리고 무형검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단악검법, 괴암!

무형검이 덩어리지듯 서은현의 주변으로 뭉치며 회전한다.

공방이 일체되었고, 무형검의 크기 자체로 인해 사방팔방으로 폭풍이 몰아치는 듯 했다.

김영훈의 신형 중 여섯 개가 단박에 터져나갔고, 사각을 파고든 그의 신형이 서은현에게 도를 휘둘렀다.

'이 일격으론 어림없다.'

다음 순간 무형검이 변화하며 서은현을 보호할 것이다.

무형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베어낼 터지만, 능광도의 공격력으론 무형검의 가장 약한 부분마저 베기 힘들다.

'다음 무공!'

김영훈의 얼굴이 익어갈듯 시뻘개졌다.

뇌로 피가 몰린다.

새로운 무공이 만들어진다.

능광도의 속도에 맞추어 일순간 능광도 자체의 공격력을 넘어설 무공.

사십사일곤(四十四一丨)

찰나의 순간 마흔 네 번의 참격이 휘둘러지며 첩첩산중, 아니 그 이상의 효율로 일점집중되었다.

참격이 겹쳐지며 힘의 상승폭이 어마어마하게 치솟는다.

그리고, 서은현은 방어하는 대신 맞찌르기를 선택했다.

단악검법, 유릉

무형검이 다시 변화하며 부드럽게 김영훈의 새 무공을 찔러갔다.

원래라면 유릉은 부드러운 기색으로 상대를 찔러 방어가 어렵게 만드는 초식이지, 공격력이 강한 초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 능광도의 공격력에서 수십 배는 강해진 사십사일곤의 무학이 유릉과 맞부딪혔고, 김영훈은 그대로 피를 왈칵 토하며 반대편으로 튕겨나가버렸다.

파앙!

허공으로 튕겨나가는 도중 허공을 박차 자세를 잡으며, 김영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힘을 흘리는 무공을 만들어내서 최소 3할은 위력을 흘려버렸는데도 이 꼴이다.'

스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전신의 뼈가 박살날지도 몰랐다.

'무형검의 변화폭은 거의 무한이다.'

김영훈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서은현의 상상력은 무한이 아니지.'

거기에다가 서은현의 무형검은 단악검법에 맞춰진 상태로 그 이치에 한해서만 변화했다.

'단악검법을 상대하기 위한 무공을 창조해야 한다!'

파아아앗!

'어디, 놀아보자!'

황금빛이 움직이며, 찰나 동안 서은현에게 쏘아졌고, 서은현과 김영훈이 1초에 수백 수천번의 일격을 주고받았다.

사방으로 참격과 검흔, 도흔들이 난무한다.

서은현이 한 번의 단악검법을 사용될 때마다, 김영훈은 몇 개의 무공을 즉석에서 참조해내며 그의 힘을 막아냈고, 둘은 한동안 팽팽히 겨루었다.

김영훈의 상처가 늘어만 갔다.

반면, 서은현은 여전히 상처 한 올 없다.

김영훈은 숨을 몰아쉬며, 그러면서도 웃었다.

"역시..."

압도적인 패색.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태산!

그것이, 그의 눈 앞에 있는 사내였다.

"최고다!"

그는 서은현이 아니꼬왔다.

이 영역에 도달한 자가, 어찌 재능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믿지 않았단 말인가!

파아아앗!

김영훈의 머리가 과부하될듯이 팽팽히 돌았고, 그의 코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세 개의 무공을 동시에 창조하며, 김영훈은 다시금 서은현에게 접근했다.

서은현과 김영훈의 눈이 마주쳤다.

서은현 역시 웃고 있었다.

500년.

500년 동안 김영훈을 진정으로 넘어선 적은 없었다.

특히나 50년을 넘어선 시점에서는, 김영훈은 항상 괴물이 되어있었기에 더욱이나!

둘은 현재 똑같은 심정이었다.

"제가!"

"내가!"

두 무인(武人)이 동시에 외쳤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단맥도 변형기, 산지진

응용무공 산도깨비

창조무공 허공 찢기

창조무공 십이광류참

빛살과 허공이 빛을 발한다.

"이깁니다!"

"넘어선다!"

다음 순간, 무형검이 일곱 배 이상 거대해졌고 능광도가 서은현의 사각을 완전히 점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빛이 폭발했다.

임종(臨終)(1)

무형검의 기세만으로도, 김영훈이 창조한 대다수의 무공들이 박살난다.

하지만 새로운 무공을 제물삼아, 김영훈의 도가 찰나를 꿰뚫고 서은현의 인지를 베어가르며 그의 목을 노린다.

반대로 서은현의 무형검은 흉맹하긴 했으나 아직도 내려오려면 반의 반호흡씩이나 필요했다.

'내가 이긴다!'

김영훈이 입이 찢어져라 웃을 때였다.

서은현의 왼손 위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칠십이지살진언 중, 지형(地刑) 진언의 법술이 오행영력으로 구현된다.

'법결을 외지 않고, 무영창으로 법력의 흐름을 조작해서 만든 건가?'

빠르게 생겨나는 걸 보니 아까부터 준비하던 법술이 지금 막 완성된 듯싶었다.

법력이 허공에서 굳으며, 단단하게 응결되었다.

아마 영력을 응결시켜 폭발시키는 법술의 일종!

'상관 없다, 어차피 못 맞춰.'

서은현이 법술을 완성시키고, 다시 법술을 김영훈에게 날리는 데까지의 시간은 눈을 한 번씩이나 깜빡일 시간.

그 정도의 시간이면 이미 김영훈의 도는 서은현의 목에 닿는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콰악!

서은현은, 왼손의 법력을 분사해 법술을 발사하지 않았다.

대신, 정순지력을 머금은 그 손으로 법술을 움켜쥔 다음, 김영훈을 쳐다보았다.

서은현의 의념과 함께 절학명이 울려퍼진다.

투괴암기술, 직사(直蛇)

분명 김영훈에게 내리꽂힐 듯 했던 무형검은 어느새 형태를 바꾸어 서은현의 왼손에 깃들어 있었다.

법술이 무형검에 덧씌워져 김영훈에게 쏘아져 왔다.

이대로라면 맞찌르기가 된다.

'그리고 맞찌르기라면, 혈관에 강기가 흐르게 된 이 괴물딱지 같은 놈이 이기겠지.'

정순지력이 몸을 돌며 생명력을 곳곳에 퍼뜨리기에, 목을 반쯤 잘라도 척수가 끊어지지 않으면 아마 안 죽을 거다.

김영훈의 판정패였다.

'아니.'

쿠구구구구!

김영훈은 전신의 기운을 짜냈다.

'서은현처럼, 죽을 각오를 다진다!'

마치 상단전이 폭발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김영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그의 재능을, 그가 이 세계에 오고 눈을 뜬 그 감각을 불살랐다.

무(武)를 수련하는 기쁨.

그것 외에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잊는다.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김영훈은 무공을 창조했다.

새로운 무공은 단순히 몸재간을 놀리거나, 참격을 쏟아붓는 무공이 아니었다.

정지된 세계.

그 안쪽에서, 김영훈의 전신 곳곳에서 황금빛의 실들이 뿜어졌다.

실들은 빛과 같은 속도로 정지된 세상을 움직이며, 김영훈의 팔 주변으로 몰리고, 그의 손아귀로, 그가 쥔 능광도로 이어지며, 능광도를 완전히 감싸안았다.

능광도의 위로, 무(武)의 위쪽으로 얇은 실선들이 깔리며 혈관(血管)이, 경락(經絡)이 깔린다.

그는 무공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궁구했다.

내공도 초식도 의지도.

모두가 무공의 일부.

그리고, 내단(內丹)은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이으며 무공이 평형을 이루게 해 주는 것이었다.

문득, 김영훈은 그것을 떠올리며, 내단의 존재에 대해 궁리하였다.

'내단은 뭐지?'

내단이란 기본적으로 강환이 단전에 안착하여, 단전의 힘과 섞이며 새로운 형태가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단전이란 무엇일까.

왜 바깥으로 뿜어 쓰는 강환은 기운을 다하면 소모되지만, 단전은 힘을 회복할까.

김영훈의 감각은, 그가 의문을 갖자 그를 바로 해답으로 이끌었다.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단전은 전신의 혈맥과 경락과 이어져 있다.

진짜 생명과 이어져 있다.

그렇기에 생명력에 힘입어 계속해서 대기중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활력을 가지고 내공을 품는 것이다.

강환은 의식이 들어가있을지언정, 진정 생명력이 이어져 있지는 않았기에 계속해서 소모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짧은 찰나 김영훈의 재능은 그를 새로운 발상으로 이끌었다.

체외로 기운을 뿜어 인위적으로 경락과 혈맥을 만들고, 강환에 생명력을 이으면, 그 강환은 체외(體外)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단이 되는 게 아닌가?

기가 잘 소모되지 않는 걸 너머, 생명력이 이어져 있기에 스스로 힘을 꾸준히 회복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새로운 힘의 원천(源泉)이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김영훈의 능광도는 아홉 개나 되는 강환과 그의 의식영역의 합일(合一)이었다.

'간다.'

능광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몸 바깥에 새로운 단전을 만든다.

능광도가 더욱 더 찬란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정지된 그 찰나의 순간, 능광도는 완전히 정지한 세계에서, 모든 인지와 인식을 넘어 서은현이 쏘아낸 법술을 잘라낸 후 서은현의 목으로 쏘아졌다.

서은현의 법술에 깃들어 있던 무형검이 일순간 다시 급하게 변화하며 김영훈을 노렸지만, 급하게 변화하는 탓인지 어깻죽지로 향할 뿐이었다.

촤악!

콰아아아앙!

뒤늦게 파공성과 함께 소리가 터져나가며 주변으로 피어올랐던 흙먼지들이 원형으로 밀려나갔다.

김영훈의 능광도는 서은현의 목에 닿아있었고, 서은현의 무형검은 김영훈의 어깻죽지에 닿아있었다.

"내가..."

김영훈의 승리였다.

"이겼다!"

주륵, 왈칵!

김영훈의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급격히 재능을 활성화시키느라 상단전을 무리시켰다.

또한 김영훈의 내단은 텅텅 비어있었고, 능광도의 빛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다.

그러나, 서은현은 한숨을 쉬었다.

"...실전이었으면 죽었겠지요. 예, 제 패배입니다."

"흐, 흐하, 흐하하하하...!"

김영훈은 피칠갑을 한 채 웃었다.

기어이 그를 넘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파츠츠...

김영훈의 도에 깃든 황금빛이 회수되며 김영훈의 의식영역으로 돌아갔고, 서은현의 무형검 역시 다시 돌아갔다.

"그나저나, 그건 뭐였습니까? 마지막에 그거 말입니다."

"강환을 내단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정하고, 단전과 같이 체외로 경락과 혈맥을 이어 강환으로 만든 능광도에 이었다.

체외에 힘의 원천을 하나 더 만들고, 그걸 이용해서 능광도를 한계치 이상으로 순간 강화했지."

"허어..."

서은현은 뜨악한 표정으로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런 무공을... 방금 전투 속에서 만든 겁니까?"

"발상만 된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무학이다. 아마 너도, 아니 너는 더욱 더 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넌 기를 체외로 배출해서 법술을 부리는..."

문득, 김영훈은 서은현과 말을 하며 주변을 흘끗 쳐다보았다.

제대로 신경쓸 겨를이 없어 몰랐었다.

"수도자이기도 하니... 무리없이..."

사방이 망가지고, 지형이 패였다고만 생각했지.

원래의 지형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배울 수 있을 거다."

서은현이 무형검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바꾼 지형은, 진도(陣圖)를 그리고 있었다.

진도에는 주술문자가 검흔(劍痕)으로 새겨져 있었고, 서은현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진도가 겹쳐져 있는 상태였다.

그가 법력을 불어넣기만 했다면 오행(五行)의 진도가 발동되며 이 인근 전체가 서은현의 영역이 되었을 터였다.

"..."

오싹, 오싹!

김영훈은 문득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투가 장기전으로 가서, 서은현이 법진을 발동시키기 시작했으면...'

김영훈의 필패(必敗)였을 터.

'수도자와는, 장기전이 거의 불가능한 건가.'

단기전에 끝내기를 잘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영훈은 한숨을 들이쉬었다.

"...그나저나, 음...!"

그리고, 김영훈은 문득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 탈진(脫盡)했군.'

의식이 어느덧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은현아. 나 좀 부탁.."

그리고,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

김영훈은 서은현이 너무 멀쩡하단 걸 느꼈다.

전신 곳곳이 찢어지고 옷이 피칠갑이 되었으며, 내상을 입고 기운이 모조리 빠져 탈진을 한 그였다.

무형검의 기세에 스쳐서 다친 곳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은현은, 조금 호흡이 빨라진 걸 제외하면 아무 상처도, 먼지가 묻은 곳조차 없었다.

김영훈이 마지막에 도를 가져다 대서 살짝 자국이 난 목 부근을 제외하면, 어떤 곳도 다치지 않았다.

분명 실전이었다면 김영훈의 도는 서은현의 목을 잘라버리고, 서은현의 무형검은 김영훈의 한쪽 팔만을 가져갔을 터.

엄밀히 말하면 김영훈의 승리가 맞았고, 양쪽 다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김영훈은 정신을 잃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거, 이긴 게 맞긴 한가.'

이긴 쪽은 죽을려 하고 있는데, 진 쪽은 멀쩡하다.

김영훈은 헛웃음을 삼키며 그렇게 기절하였다.

'이런 젠장...'

* * *

"후우..."

나는 쓰러진 김영훈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솔직히 싸우는 도중에, 그것도 1초조차도 되지 않는 그 찰나 찰나에 무공을 계속 찍어내듯이 만들며 내게 덤비는 그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들었던 그 무공.

'체외에 단전을 만들어 무공의 출력을 올린다고?'

획기적인 동시에 천재인 그이기에 만들 수 있는 무학이었다.

김영훈의 재능이 이 정도로 말도 안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수한 무(武)의 영역에서는 당연히 내 패배였고, 실전이었으면 이번 삶을 끝낼 뻔했으니 전투력 면에서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몇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도를 발동시키고 주변 영역을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김영훈은 1초보다도 훨씬 찰나의 세계에서 움직였다.

무형검을 움직여 반응을 한 것조차 나로서도 간신히 간신히 반응한 것이었다.

'시간을 주지 않고 쫓아와 버렸군.'

나는 피칠갑이 된 채 기절한 김영훈을 바라보며 김영훈을 들쳐업었다.

"대단도 하십니다."

김영훈의 수명이 얼마 남았는지는 몰랐다.

또한, 그가 심장마비를 극복하고, 천뢰를 극복하면 수명을 극복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남은 시간 안에 또 얼마나 성장할까.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도 이번 삶에는, 당신의 성장을 전부 볼 수 있겠군요."

오래, 아주 오래.

새로운 수명을 부여받은 만큼.

만약 그가 수명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을만큼.

아주 오래.

나는 김영훈을 데리고 쇄천봉을 떠났다.

원하던 것도 전부 얻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을 찾아가 볼 때였다.

* * *

나는 성제국에서 나와 다시 연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연국의 바닷가 성 중 하나에, 작은 저택을 얻고 김영훈을 치료했다.

김영훈이 새로 창조했다는 그 체외 내단 형성의 무공은 정기(精氣)를 상하게 하는 무공이었다. 아무래도 즉석으로 만든 무공이었기에 미완성인 것일 터였다.

또한, 김영훈은 나와 몇 번을 무식하게 부딪히며 한껏 기혈이 뒤틀렸기에 오랜 시간 치료가 필요했다.

난 김영훈을 치료하며, 월도입천의 깨달음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앞으로 축기기의 일에 대해 고민해 보기로 했다.

'일단 지금까지 연기기 시절 익혔던 건 기초공법이다.'

수선의 시작은 사실상 축기기부터다.

본격적으로 수명이 늘어나는 경지도, 본격적으로 탈인간이 되어가는 경지도 축기기부터.

그러므로 연기기 1성부터 14성까지의 모든 공법은 사실상 기초나 다름없었다.

체내에 영맥이라는 공장을 깔고, 정순지력이라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

이제는 제품을 만들었으니 그 제품을 판매해 주변에 영향력을 미칠 준비를 해야한다.

제대로 된 수도공법을 익혀, 축기기에서의 경지도 높여가야 한다.

'축기공법(築氣功法)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 공법서를 얻을까.

일단 축기기에 이른 지금이라면 어떤 세가를 가더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 터였다.

'뭐 공법을 얻는 건 추후에 생각해 보고...'

사실상 지금 나는 결단기급 전력이니, 공법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물론 '마음에 드는' 공법을 찾는 거야 다른 일이겠지만.

나는 공법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쇄천봉에서 보았던 환영에 대한 생각을 하였다.

'운명을 누설하지 말라고? 종명자? 선물?'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양수진이 천거 현상을 일으켰다는 기록,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수상한 기록들.

그리고 그가 나를 '후대 종명자'라는 것으로 부른 것을 보아.

'그는 어쩌면... 우리처럼 이 세상에 떨어진 사람일지도.'

그렇다면 종명자는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왜 종명자라고 불리는지 추측은 할 수 있어도 사실인지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경고한 것은 분명 나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에 대한 것일 터였다.

'내 회귀 능력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건가?'

일단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를 말한 적은 없었다.

일단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도 같았고.

설령 믿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뭘 할 수 있는가. 괜히 서로만 괴로울 뿐이라고 생각하여 입을 닫고 있었다.

'그리고... 또 왠지 본능적으로 꺼려진 것도 있긴 했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누설하는 걸 본능적으로 꺼려한다. 특히나 종명자는 더더욱.

그 그림자가, 스스로를 양수진이라 칭한 존재가 한 말이었다.

'발설하면, '뭔가'가 알아차린다고 했다. 삼천세계 어디에 있든. 그 말은, 무언가...'

나는 하늘, 저 멀리를 내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굉장히 거대하고 강력한 존재가, 그저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 삼천세계라는, 거대한 개념 전체를 조사할 수 있는 존재가... 지금도 우리, 종명자란 존재들을 찾고 있다는 건가?'

오늘의 하늘은 맑았다.

티없이 푸르렀고, 하늘이 높아 보이며 그 너머가 아득하게 보였다.

오싹!

나는 어쩐지 소름끼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게 낫겠지... 그건 그렇고. 운명에 대해 누설하지 말라는 건...'

나는 앞서 천인들에게 잡혀간 동료들.

천인들에 의해 바로 재능을 까발려진 동료들을 떠올렸다.

'타인에게 까발려진 이들은 어떻게 한다는 거지? 이미 그가 말한 뭔가에 들킨 건가?'

나는 눈을 작게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됐다. 나중에 생각해 보지. 지금은 고민해봤자 어차피 정보가 부족해서 알 수 있는 게 없다.'

슬슬, 김영훈의 치료도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김영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도를 휘둘렀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축기기 수도자씩이나 되었으니, 어디 가문에 장로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겠구나."

"장로라... 그 역시 좋긴 하겠지만."

나는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만나야 할 친구가 있어서 말이지요."

"만나야 할 친구? 그건 또 누구냐?"

"아, 그 외 오 대리 잡아간 용 같은 놈 있잖습니까. 그 놈이 저한테 일을 시키지 뭡니까."

나는 서란에 대해 적당히 설명해 주고, 그에게 말했다.

"자기 후손 도와서 결단기급 귀신 한 마리 좀 때려잡아달라는 것 같은데, 한번 해 주려고 말입니다."

"음, 결단기급 귀신이라."

김영훈은 내가 요약한 상황을 전달받고는, 씨익 웃었다.

"재밌겠구나. 나도 한번 같이 좀 때려잡아 보자꾸나."

"좋지요, 그럼 우선 그 용가리 놈의 후손 좀 만나러 가 볼까요?"

나와 김영훈은 흑풍해를 건너, 서란의 거처로 향했다.

* * *

토옹, 토옹!

나와 김영훈은 허공을 박차며 서란의 거처에 도착했다.

이전과 같이 호풍응룡변을 썼다면 날아올 수도 있었지만, 서휼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것은 익혀서는 안 되는 선택지가 되어있었다.

"이 아래냐?"

"그렇습니다."

"그럼 헤엄이나 쳐 볼까..."

김영훈이 숨을 참으려 할 때였다.

나는 김영훈을 말리며, 무형검을 꺼내들었다.

"뭣하러 헤엄을 칩니까. 집주인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주인더러 나오라고 하지요."

"음?"

쿠구구구구!

서란에게는 미안했지만, 난동 좀 부려야 할 것 같았다.

무형검!

콰아아아아!

일격에 바다가 갈라진다.

서란의 거처 바로 위까지의 해수면이 무형검에 의해 그대로 파헤쳐졌고, 우리의 앞으로 그의 처소까지 물길이 나타났다.

"집주인 계시오?"

나는 요족어를 써서 영기를 진동시켜 소리쳤고, 얼마 후.

서란이 그의 거처에서 용형을 한 상태로 기어나왔다.

"...선배님들께선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나와 김영훈을 잔뜩 경계한채 쳐다보았다.

촤아아아!

갈라졌던 바다가 다시 합쳐졌고, 서란이 물 위로 빠져나와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서란에게 서휼에게 받은 호풍응룡변을 보여주며 말했다.

"해룡왕 서휼께서 날 더러, 후손인 당신을 도와 흑색귀골곡의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우라 하셨소. 그 호풍응룡변 공법서는 그 증표요.

어떠시오, 도움을 받으시겠소?"

잠시 나와 공법서를 쳐다보던 서란의 안색이 환해졌다.

"서, 선배님들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들께선 인족이실텐데 요족이신 저를 믿을 수 있으..신 겁니까?"

"...해룡왕께 미리 다 들었소. 당신의 출신에 대해서도."

나는 서란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서란은 고개를 숙이며 옅게 한숨을 쉬더니 빛을 뿜었다.

그가 비늘과 꼬리가 돋아난 반요의 형태로 변하였다.

"...처음부터 본모습으로 맞이하지 않아 송구합니다. 그 사실까지 알고 계시다니, 정말 왕께 부탁받은 것이 맞군요."

서란은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선배님들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전의 벗이 나를 선배라 부르는 이 기분은 뭔가가 좀 묘하다.

이번 생에는, 어쩌면 벗이 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죽게 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도록 하지. 결계로 안내하시오."

서란은 나와 김영훈과 함께,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이 숨어있는 해역으로 향하였다.

* * *

촤아아아!

"허어, 장엄하구만."

흑색귀골곡이 쳐놓은 환상결계와 귀무결계를 돌파한 후, 거대한 물의 장벽 안쪽 중심에 놓인 섭명함을 보며.

김영훈은 그 광경에 압도되어 탄성을 내뱉었다.

"저 결계입니다."

서란은 나와 김영훈에게, 섭명함을 둘러싼 결계를 가리켰다.

결계 안쪽에 있는 진법깃발 여덟 개를 뽑으면 풀리게 되는 결계.

하지만 정작 순수한 인간의 혈통을 지닌 자는 쉽게 받아들여 문제가 없는 결계였다.

나와 김영훈은 결계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전 삶처럼 그냥 들어가서 결계를 뽑으면 될 것이다.

"이 결계를 돌파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알겠소, 그럼..."

그리고, 그 때였다.

콰아아아앙!

결계의 일면으로, 황금빛 도광이 번뜩였다.

김영훈이 능광도로 섭명함을 둘러싼 결계를 후려친 것이었다.

결계가 마구 흔들리며 일렁였다.

"아, 아니 선배님. 그 결계는 굳이 그런 식으로 때려부술 필요가 없습니다..!"

서란이 당황한듯 김영훈에게 말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아, 뭐 나는 술법이니 뭐니는 잘 몰라서 말이오. 그래서 한 번 후려쳐 봤다만... 그런데 이거."

김영훈의 능광도가 황금빛을 뿜기 시작했다.

"때려부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귀찮게 해체해야 하는 거요?"

콰아아앙!

그가 다시금 능광도를 휘둘렀고, 결계가 다시금 출렁였다.

"아, 아니.."

서란은 예상외의 일에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김영훈이 한다면, 나도 질 수는 없다.

꽈아아아앙!

나는 무형검을 꺼내들어, 김영훈처럼 결계를 두들겼다.

결계가 미친듯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파츠츠츳!

내 일격에, 결계가 출렁이며 미약한 실금이 갔다.

임종(臨終)(2)

폭음이 울리고 사방이 진동한다.

콰아아앙!

황금빛 빛살이 번뜩이자, 결계가 출렁이며 미친 듯이 흔들린다.

꽈아아앙!!!

무형의 검강이 휘둘러지자, 출렁이던 결계가 점차 버티지 못하고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나와 김영훈은 질새라 서로 무형검과 능광도를 휘두르며 결계를 때려 부쉈다.

서란은 옆에서 아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들어가셔서 깃발만 뽑으면 되는데.."

그러나,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할 필요 없는 법이다.

꽈아아아앙!

나와 김영훈이 동시에 무형검과 능광도를 내리쳤다.

그리고, 결계에 균열이 일며 결국 완전히 박살나 버린다.

파캉!

결계 내부에 있던 진법 깃발들이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다.

나와 김영훈은 결계 너머로 들어갔고, 서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리를 따라왔다.

"이 정도면 된 거요?"

"예, 예... 그렇습니다. 선배님. 한데 선배님께서는..."

서란은 계속 요족어로 대답을 하는 나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선배님께서도 반요... 이신 겁니까?"

요족어는 영기에 흐르는 음양의 이치를 볼 수 있는 요족만이 익히고 배울 수 있었다.

의미를 전달하는 구조가 공기를 진동시켜 말을 하는 인족과 완전히 달랐기에, 요족어를 쓴다는 것은 요족이란 말과 다를 바 없었다.

"흠, 반요는 아니고 그냥 좀... 특이한 인족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이 정도 특이성은 있어야 해룡왕께 인정받아서 당신을 도우라 명을 받은 것이지."

"아, 그렇군요... 그럼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결계는 돌파했으니, 이후부터는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추후 제 거처로 오시면 배상도 따로 해 드릴테니.."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도 같이 가 드리지."

"예?"

"나도 역시 명성이 자자한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어서 말이오."

"아..."

서란은 명백한 결단기급 전력으로 보이는 나와 김영훈이 같이 가겠다고 하자, 조금 부담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와 함께 섭명함으로 향했다.

부담스러운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리고, 나와 김영훈.

서란이 흑색귀골곡 섭명함의 갑판에 막 올라갔을 때였다.

쉬이이이-

"...?"

"무슨..."

갚판의 귀기와 음기가,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섭명함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귀력이 잦아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서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나는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김영훈에게 심어(心語)를 보내어 상황을 설명했다.

김영훈은 내 말을 알아듣고, 도신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우리는 섭명함의 내부로 들어갔다.

역시나.

섭명함의 내부 역시 지난 삶의 왔었을 때와 달리 귀기와 음기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뭐 어찌되었든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귀기와 음기가 심하지 않다면 안쪽을 살펴보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 터입니다."

"...흠. 이보시오, 서 도우."

나는 서란을 보며 말했다.

"일단 바로 섭명함의 하층으로 가 봤으면 좋겠소만."

"하층부터 내려가서 탐색을 시작하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아무래도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군. 섭명함의 귀기가 옅어진 이유가 하층에 있을 것 같소."

"음, 선배님들이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앞서나가며 그들을 섭명함의 하층부로 데리고 갔다.

지난 삶에는 하층부로 내려갈수록 귀기가 짙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하층부로 내려가도 귀기가 짙어지지 않았고, 도리어 옅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나는 지난 삶에 도착했던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섭명함의 저층부.

그곳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귀기가 넘실거렸던 이전 층과는 달리, 완전히 귀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긴장어린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뒤늦게 따라온 김영훈도 긴장을 끌어올리며 능광도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서, 선배님들 무슨... 헛!"

주변에는 귀기가 옅었다.

그러나, 귀기는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섭명함의 저층부에 붙박힌 지박령이, 섭명함의 귀기를 빨아들이고 먹어치워 꾹꾹 눌러담은 것이었다.

쿠구구구구!

흑색의 옥좌 위.

그곳에, 완전히 시커먼 어둠으로 물든 존재가 앉아 있었다.

이전에는 두개골의 윤곽이라도 드러나 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어둠으로 휩싸여 그림자 그 자체가 된 듯한 존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결단기 수도자가 둘씩이나 쳐들어왔나 싶었는데... 축기기 둘에 연기기 하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섭명함의 보호결계를 박살내려면 최소 결단기는 와야하니. 뭔가 특이한 공법을 익혔나 보구나.]

시꺼먼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파츠츳...

그림자의 눈두덩이에서는, 청색(靑色)의 귀화(鬼火)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떤 놈이건 상관은 없다. 승천문이 열릴 시기에 붙어서 따라가지도 못했을 쓰레기놈들 따위가, 감히 청색귀골곡의 귀도법술을 받아낼 수 있을 듯싶으냐.]

찌릿, 찌릿..

나는 귀혼에게서 풍겨지는 기세에 침을 삼켰다.

지난번에 느꼈던, 어줍짢은 기세가 아니었다.

우리의 전력을 눈치채고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다.

[네놈들이 뭘 원해서 섭명함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청색귀골곡에서 그 무엇도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킬 것이다!]

쿠구구구!

끼야아아아-

까아아-

끄아아아아아-

귀혼의 몸에서부터 귀기가 끓어오르며, 그 그림자 안쪽에서 수십 수백의 귀곡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귀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벅, 저벅

그가 옥좌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동시에, 옥좌와 그 사이에 미묘하게 있던 어떠한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 보였다.

'섭명함에서 공급받던 귀기를 끊었다?'

그러나 오히려 섭명함에 남은 귀기를 잔뜩 빨아서 저 상태가 되었다.

더 이상 귀기를 공급받을 이유도 없었고, 또한 귀기를 공급받느라 옥좌에 앉아서 수동적으로 공격에 대응하던 약점도 사라졌다.

지난 삶보다 훨씬,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것이다.

다음 순간.

귀혼이 손을 움직이는 가 싶더니, 칠 장 크기의 거대한 귀조(鬼爪)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왔다.

콰과광!

귀조는 내가 휘두른 무형검에 맞고 상쇄되었고, 김영훈이 앞으로 나섰다.

파앗!

황금빛이 번뜩였고.

콰아앙!

김영훈의 도가 귀혼의 목을 후려치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뚝 끊겨버린 듯한 속도!

귀혼은 김영훈의 속도에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으나, 김영훈의 능광도도 귀혼의 목을 자르지 못했다.

귀혼이 능광도를 맞고 튕겨나갔다.

그리고 귀혼이 법결을 맺자, 귀혼에게서 무수한 귀수(鬼手)들이 뿜어져 나와 김영훈을 노린다.

파앗!

다시 한번 금빛이 번뜩였고, 김영훈은 내 옆으로 돌아와 있었다.

"흠, 아까 그 귀조처럼 특수한 몇몇 술법의 속도는 네 무형검과 비슷하지만, 저 놈 본인이 특수한 술법의 속도에 못 따라간다.

한 마디로 우리보다 한참은 느려. 다만 능광도의 출력으론 결단기급 저 귀혼의 귀력을 뚫을 수가 없다."

그가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내가 주의를 끌마. 네가 정면에서 놈과 맞서며 놈을 공략해라."

"예."

"저는 저 귀물에게 효과가 있을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격을 하려면 기(氣)를 끌어모아야 하니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서란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나와 김영훈은 서로 고개를 끄덕였고, 서란 역시 우리의 뜻을 전달받고는 인요 형태에서 용형(龍形)으로 변화하였다.

파아아앗!

서란의 입속에서 금빛 방울이 튀어나왔고, 서란은 입을 벌린 채로 금빛 방울에 기운을 끌어모았다.

콰과과과!

다시금 귀조가 몇 개씩이나 날아온다.

지난 삶에서는 피하기에 급급했던 무시무시한 공격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서며 무형검을 휘둘러 귀조들을 잘라내어 버렸다.

콰아앙, 콰아아앙!

빛이 번뜩이며 귀조들이 터져나갔고, 다시 한번 황금빛이 번뜩였다.

파앗!

김영훈이 빛살이 되어 다시금 귀혼의 어깨 아래쪽에서 나타났다.

막 법결을 맺으려던 귀혼의 한쪽 팔을 타격하며, 그가 맺던 중인 법술을 무효화시킨다.

[이 놈...!]

촤아아아!

다시 수십개의 귀수들이 김영훈을 쫓았으나, 귀수들은 김영훈을 따라가지 못했다.

촤아악!

귀혼은 아예 귀수들로 자신을 뒤덮었으며 그 안에서 법술을 맺기 시작했다.

저렇게 하면 김영훈으로서도 역시 안으로 파고들기 힘들 터.

그러나, 나는 자세를 잡고 무형검을 일으켰다.

단맥도, 산바람!

피우웅!

무형검을 잡은 채로 사고를 극한까지 가속시키며 귀혼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 상태에서 가속을 한 상태로 무형검의 공능으로 바로 초식을 바꾼다.

단악검법, 유릉!

직선으로 쏘아지던 산바람이 구불구불하게 휘며, 귀수들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모든 귀수들을 자연스레 피해내며 그 가운데에 있던 목표물에 제대로 명중했다.

콰아아앙!

파공성과 폭음이 울리며 귀수들이 일거에 터져나갔고, 귀기 너머로 내 무형검이 가슴에 박힌 귀혼이 눈에 들어왔다.

귀혼은 괴로운 듯 했으나, 맺고 있던 수결을 계속 맺었다.

'이미 죽은 몸이라 이걸로는 안 죽나?'

아무래도 일반적인 육신이 아닌 귀체(鬼體)이기에 심장에 구멍 하나 뚫린 건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찢어발긴다.'

물론, 모조리 갈갈이 찢어버리면 될 뿐. 문제는 없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촤아아악!

귀혼의 가슴에 꽂힌 무형검이 변화하며,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가시처럼 뻗어나간다.

그 인근으로 무색의 가시철조망이 공간을 뒤덮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귀혼이 수결을 완성하였다.

[비둔(飛遁).]

촤아아악!

그 찰나.

귀혼은 묵광(墨光)으로 변하여 한 줄기 빛이 되어 무형검의 변화 속에서 빠져나갔다.

촤아악!

물론 무형검에서 일어나는 수천수만가지의 변화를 전부 피하지는 못했는지 상당히 귀체가 찢겨나가긴 했지만, 어쨌든 귀혼은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이로군.'

결단기 수도자쯤 되면 단전에 형성한 별빛들을 이용하여 둔광(遁光)에 몸을 숨겨 이동하는 비둔술이라는 것을 쓸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비둔술은 장거리 이동용이었으며, 그 속도는 축기기 이하의 존재들은 쫓아갈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다고 했다.

아주 예전.

스승님의 밑에서 죽을 당시, 막리세가의 막리운련이 결단기 수도자의 비둔술을 몇 번 쓸 수 있게 해주는 구명법기를 통해 한참을 나와 김영훈의 추격에서 도망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는 무형검을 회수해서 다시 손에 쥐며 귀체를 수습하는 귀혼을 쳐다보았다.

"그게 끝이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사고를 가속시켰다.

"당신이 쏜 귀조보다도 속도는 약간 떨어지는데..."

저 정도라면, 무형검으로 충분히 쫓아갈 수 있는 속도였다.

"아마 제대로 반응이라도 하려면 그걸 계속 발동해야 할 거요."

단악검법, 입산!

나는 다시 무형검을 휘둘렀다.

무형검이 허공에 뜬 귀혼에게로 올라가며 그를 노린다.

귀혼은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비둔술을 사용했다.

파아앗!

귀혼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무형검을 피했지만, 다음 순간 다시 그의 곁에 나타난 능광도에는 미쳐 반응하지 못했다.

콰앙!

황금빛이 부채꼴처럼 퍼지며 귀혼을 후려친다.

콰아아앙!

[이 놈들... 내가 법보와 제귀(制鬼)만 멀쩡했어도...!]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김영훈의 능광도는 다시금 그의 전, 후, 좌, 우, 상, 하에 나타나며 그를 도합 서른 여섯번 후려쳤다.

"잘 잡고 있으십시오..!"

단번에 쪼갠다.

단악검법, 기산심천!

쿠구구구!

무형검의 기세가 더욱 더 흉폭해졌고, 나는 용맥의 초식과 함께 섞어 그대로 무형검을 내려베었다.

사방에서 귀혼을 몰아붙이며 발목을 잡던 김영훈은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물러났고, 귀혼은 한껏 부풀어 오른 내 무형검을 보며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귀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의 귀골(鬼骨)이 내 무형검을 막아섰다.

"이걸 막아?"

내가 찬탄을 터트릴 때, 귀혼은 황급히 다시 법결을 맺었다.

[다 죽여주마!]

쿠구구구!

귀혼의 주변으로, 하나하나가 강환급인 수천개의 두개골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수많은 귀수가 뿜어져 나왔고, 귀충(鬼蟲) 무리들이 주변을 휩쓴다.

'시간 끌기로군.'

그러나 나는 귀혼이 저 수많은 법술 가운데에서 귀력을 끌어올리며, 더 큰 법술을 준비하는 것을 알아챘다.

쿠구구구!

나는 무형검을 손에 쥔 채 천변만화 시켰다.

단악검법, 월악!

무형검이 단악검법의 수많은 무리(武理)들을 구현하며 가로로 휘둘러졌다.

일격!

촤아아아!

단 일격에, 내 앞을 가리던 무수한 두개골들과 귀충 무리가 전부 파도처럼 쓸려나가 버렸다.

남은 것은 귀혼을 둘러싼 귀수들.

단악검법, 괴암!

무형검이 나를 휘감는다.

무형검은 사방을 둘러싸며 마치 작은 폭풍과도 같이 되었고, 나는 공방일체의 기세로 귀수들을 파고들었다.

무형검이 회전하며 귀수들을 찢어발기고 안쪽으로 진입한다.

촤악!

마치 폭풍의 핵과 같이, 귀수들의 중심은 고요했고, 그 정중앙에서 귀혼이 법결을 완성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귀혼의 눈에서 타오르던 푸른 귀화는 한창 약해진 상태였다.

동시에, 귀혼의 손 위에는 희미한 청백색(靑白色)의 두개골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두개골은 당장이라도 허공으로 흩어질 듯 일렁이며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안쪽에 담겨있는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고, 저것을 맞으면 절대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단악검법, 첩첩산중!

무형검강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며 쪼개진다.

다시금 일대를 무색의 가시철조망이 뒤덮었다.

퍼어엉!

귀수들이 모조리 찢겨나갔고, 중심에 있던 귀혼 역시 무형검에 전신이 꿰뚫리며 벌집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귀혼은 법결에 법력을 불어넣으며 법술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단악검법, 산중호걸

나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무형검을 일점으로 집중시켰고, 가시철조망이 걷혀나감과 동시에 그 너머로 황금빛 능광도가 들어왔다.

"하아아아압!"

김영훈은 지난번에 보여준 체외 내단을 구현시키며 능광도를 휘둘렀고, 내 무형검의 위력이 일점으로 집중되며 폭발한다.

번쩍!

새하얀 빛이 터져나가며, 귀기가 폭발했고, 나는 귀혼의 귀체 중 8할 이상이 찢겨나가는 것을 확인하였다.

솨아아...

빛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청백색의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왔다.

[완성... 했다.]

오싹!

전신이 넝마가 되어 당장이라도 흩어질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귀혼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이제 귀혼의 안광은 더 이상 청색의 귀화로 불타지 않았다.

일반적인 귀신들처럼 적색의 안광을 흘리고 있었다.

[같이... 가자!]

'동귀어진!'

나와 김영훈은 귀혼의 의념을 읽어내며 안색을 굳혔다.

청백색 두개골이 부풀어 올랐다.

저 안쪽에 담긴 가공할 죽음의 힘에, 섭명함의 해당 층 전체가 얼어붙을 듯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서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하십시오, 선배님들.]

"...!"

나와 김영훈의 얼굴에 희색이 맴돌았다.

서란은 금빛 방울을 물고, 입 안쪽에 어마어마한 기운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서란이 입을 벌렸다.

번쩍!

제귀령의 힘이 서란의 숨결과 합쳐진다. 청색이 아닌, 황금빛의 광휘가 쏘아지며,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쿠구구구구!

[으오오오오!]

귀혼이 청백색 두개골을 폭발시키려 했으나, 그는 두개골과 함께 동채로 황금빛 숨결에 갇혀버렸다.

귀력이 제귀령의 힘에 제압당하며, 자폭의 힘이 깎여나갔고, 푸른 빛의 폭발은 황금빛의 광선 안쪽에서만 힘을 발휘하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었던 폭발은, 황금빛 광휘 안에서 점차 깎여나가며 힘을 잃고 있었다.

"허, 저게 용족인가?"

김영훈은 법보의 힘을 빌어 광휘를 토해내는 서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런 공격을 매 번 할 수 있는건가? 그런 거라면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아마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서 형.. 아니, 서 도우는 아까부터 계속 힘을 모으고 있었잖습니까."

"쩝..."

그때였다.

파아아앗...

황금빛의 빛줄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서란의 힘이 약해진다.

그리고, 결단기급 귀혼이 힘을 잔뜩 모아 부풀린 청색의 폭발은, 기세가 한참 꺾였을지언정 아직도 무시무시한 힘을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 도우의 힘만으론 안 되는 듯 합니다. 그래도 저 정도면 기세가 많이 꺾였으니..."

"그래, 우리가 해 보지."

촌각 후면 서란의 힘이 다할 터였고, 폭발이 다시 빠져나올 것이다.

나와 김영훈은 각자 귀혼의 양옆으로 이동하며 자세를 잡았다.

각자가 무형검과 능광도를 붙잡는다.

다음 순간.

서란의 숨결이 완전히 꺼졌고, 서란은 탈진한 듯 바닥으로 엎어져 켁켁거렸다.

푸른 광휘가 금빛의 감옥을 넘어 폭발하였다.

그리고, 광도와 무검이 휘둘러졌다.

단악검법 1초, 월악

단맥도법 1초, 뫼얼

우리는 각기 반대방향에서 폭발을 향해 각자의 무공을 휘둘렀다.

입산, 등맥, 유릉..

산지기, 산능성이, 산바람..

무형의 검이 천변만화하며 초식의 위력을 극대화시켰고,

휘광의 도가 극속으로 찰나를 토막치며 빛을 터트렸다.

무형의 폭풍과 황금의 폭풍이 푸른 빛을 양쪽에서 잡아먹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각자의 무공, 그 오의(奧意)가 펼쳐진다.

공곡전성, 구산팔해, 천지...

대간, 월산, 환향...

파아아앗!

단악검, 오의(奧意)

단맥도, 오의(奧意)

[단악(斷岳).]

[도묘(刀墓).]

무형검의 천변만화가 일검에 담기며 산마저 끊어낼 일격을 날렸고.

능광도의 극속이 일격에 담기며 빛조차 도 아래에 묻어버린다.

콰아아아앙!

금광과 무광이, 청색의 폭화(爆花)를 잡아먹으며, 중심에서 법술을 유지하던 귀혼의 잔해를 완전히 갈아버렸다.

촤아아아...

우리는 마지막 초식을 뻗어낸 후, 무형검과 능광도를 회수하며, 빛무리 사이를 노려보았다.

빛이 잦아들었고, 그 안쪽에서 한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아직도 안 죽었군요."

"끈질긴 놈 같으니. 한번 뒈졌으면 얌전히 황천에나 갈 것이지..."

김영훈이 혀를 차며 다시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내 빛무리가 걷히며 그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흠칫 놀랐다.

눈 앞에 있는 것은 방금 전의 악귀같던 귀혼이 아닌, 반투명한 상태의 흑포 장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흑포 장년인은 양 손에 검푸른 귀화를 풀어올리며 법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남은 귀력으로 보아, 저 법술이 그의 마지막 법술 같아 보였다.

[암혼빙의대법(暗魂憑依大法)!]

파아앗!

검푸른 귀화가 귀혼을 뒤덮었고, 검푸른 불꽃을 두른 그가 내게 쇄도해 왔다.

[본곡의 것을 탐하려 들어온 죄를 알아라!]

슈아악!

무형검으로 베어내려 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무형검마저 그를 관통했고, 귀혼이 내 상단전으로 빨려들어왔다.

시커먼 악의가 내 영혼을 물들인다.

영혼이 잠식된다.

귀혼은 내 상단전을 들어가, 혼백에 닿았고, 혼백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나말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의식의 안쪽으로, 그가 파고들어왔다.

삽시간에 그가 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고, 나와 그의 심상이 서로 얽혔다.

그가 살아오며 느낀 감정과 그의 의식이 내게 들어오고, 역으로 내 감정과 의식 역시 그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크아아아아악!]

내 영혼 속에 들어온 귀혼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흐으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내, 내보내 줘! 그만!]

[끄아이아아아악!]

[제발, 제발!]

하지만, 나는 되리어 내 의식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그를 의지력으로 더욱 더 꽉 옥죄었다.

[흐아아아! 뭐냐, 뭐냐 네놈은! 왜, 왜 인간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있는 거냐! 너는, 너는...]

공포와 절망에 잠식된 목소리로, 귀혼이 흐느꼈다.

[너는, 인간이 맞는 거냐..?]

* * *

귀혼이 암혼빙의대법을 이용해 서은현의 의식에 침투했을 때만 해도, 그는 썩 자신만만했다.

흑색귀골곡의 귀물들이 사용하는 회심의 한 수!

상대의 의지력과 자신의 의지력, 살아온 삶을 정면으로 겨루어 상대의 몸을 차지하는 비술.

심지어 심상공간에서는 귀도공법을 익힌 그가 훨씬 유리했다.

상대의 정신 깊숙한 곳의 심상을 제압하기만 하면 끝난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은현의 영혼 깊숙한 곳, 그의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심상을 건드렸을 때였다.

파아아앗!

맑은 빛살이 그를 둘러쌌고, 다음 순간.

귀혼은 기이한 공간에 진입해 있었다.

[어...?]

푸콱!

그리고, 귀혼의 전신이 삽시간에 벌집이 되었다.

[아, 아아...]

맑고 투명한 검신(劍身)들이 역으로 꽂혀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하게 꽂힌 무색의 검들이, 바닥에서 그를 빽빽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

그가 비명을 질렀다.

맑고도 투명한, 무색의 검들이, 천지사방에 빽빽히 꽂혀있다.

검들은, 저 멀리 하나의 거대한 산(山)을 이루고 있었다.

투명한 도산지옥!

그것이, 그가 도달한 심상세계였다.

[이, 이게 뭐야... 사람이, 이런 정신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수도자든 요수든, 정신의 핵이 되는 심상은 크기가 작았다.

어떤 이의 심상은 어린아이이기도, 어떤 이의 심상은 작은 풀이기도, 어떤 이의 심상은 바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상은 기본적으로 객체(客體)였다.

대상이 평소에 골몰하는 물체일수도, 대상이 생각하는 이상일수도 있는 객체이자 단일개체.

일반적으로 그것이 정상적인 심상이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세계(世界)...?]

심상이 이렇게 거대하고 뚜렷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것은 듣도보도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시무시한것은.

[설령 세계가 이 자의 심상이라 할지라도, 왜 이 자는 이리도 고통스러운 세계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전신이 바닥에 빽빽히 돋아난 무색의 검들에 꿰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무색의 검들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통증을 야기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잃기만 했던 삶.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거부당하고 불허당했다.

-이 삶의 모든 것이 결국 스러진다.

-나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검들에선 서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하나하나가 서은현의 삶이었다.

[너는, 인간이 맞는 거냐..?]

삶을 상징하는 검들.

그 검들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귀혼은 공포에 떨며 외쳤다.

[너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이럴 수 없다... 너는, 망인(亡人)이다! 이미 죽은 나보다도 더 죽음에 가까운 놈이다!

어찌, 어찌 인간이 이런 정신세계를 가지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쿠구구구!

그리고, 도산검림이 움틀거렸다.

그리고 귀혼은 자신이 맑은 검들의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서은현이 자신의 심상을 조작하여, 그를 가두고 있다.

귀혼은 그 말도 안되는 광경을 보며 미친듯이 웃고, 또 웃을 뿐이었다.

* * *

"은현아,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나는 무의식의 한켠에 귀혼을 완전히 가둬버리고 말했다.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후우우...

내가 법결을 맺으며, 입에서 영기를 뿜어냈다.

영기 속에는 내 의지에 갇힌 귀혼의 얼굴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네놈들은, 뭐냐?]

"그냥 사람이지. 뭐겠소?"

[흐... 너 같은 게 사람이라.]

귀혼은 클클 웃었다.

"어쨌든 정말 끈질겼소. 이제 귀력도 전부 떨어졌을 테니 이대로 놓아주면 알아서 황천으로 가겠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귀혼을 묶은 의식을 풀려 할 때였다.

[잠깐...]

"흠? 뭐요?"

[...네놈들이 강하다는 걸 알겠다. 발악해봤자 못 막는다는 것도, 내가 패배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니 승자의 자비로 부디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가?]

스아아-

내 의식에 잡혀있던 귀혼이 모습을 바꾸었다.

아까 보았던 반투명한 흑포 장년인의 모습.

장년인은 굉장히 씁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다. 만약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해 보고 싶은 게 있다. 부디 승자의 자비로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다오.]

나와 김영훈은 잠시 그를 쳐다보며 그의 심상을 읽어냈다.

거짓말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우리에게 자비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에겐 더는 전의가 남아있지 않았다.

"흠, 다 좋다만. 우리가 왜 그래야 하오? 난 당신을 이대로 얌전히 황천에 보내주는 것도 상당한 자비라 보는데."

[...확실히 그렇겠지. 그렇기에 너희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 역시 너희에게 보상을 해 주마.]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괴군에게 살해당하고 잔혼인 상태가 되었지만 본디 청색귀골곡의 천인기 원로였으며, 공법서고를 지키는 서고지기였기에 온갖 공법을 알고 있었지.

원영기 공법, 결단기 공법, 축기기 공법... 오행속성 어떤 것이든 원하는 건 다 말해봐라.

내 부탁만 들어준다면 한둘쯤 보상으로 주마.]

우리는 그의 심상을 읽었다.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내 임종(臨終)에 관한 부탁을 들어준다면, 알고 싶은 건 전부 알려주겠다.]

임종(臨終)(3)

축기공법.

연기기 기초공법 등은 수도자들 사이에서 영석만 있다면 쉬이 구할 수 있었으나, 수도가문의 장로급부터 익히는 축기공법부터는 구하는 난이도가 훨씬 높아졌다.

축기공법보다 뛰어난 결단공법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연기기 기초공법 같은 경우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오월입도경에 수록된 5가지 공법과 청문세가의 지주원법 여섯 가지였다.

심지어 다른 수도자들한테 연기기 기초공법을 더 구매하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당장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축기공법은 스승님이 내게 지식으로 불어넣어준 목 속성 공법 하나밖에 없었다.

목 속성 공법, 천린수해성(千璘樹海成)

이론상 축기기부터 결단기의 경지를 지나 원영기까지 이를 수 있는 공법서였다.

물론 선각후통에 치중되어있었으며, 공법구결을 익히기가 어렵고 이해의 난이도가 상당하여 청문세가에서도 스승님 외엔 익힌 이가 없는 공법구결이었다.

'천린수해성도 훌륭하긴 하지만, 그래도 원하는 공법은 다 준다라...'

특히나 흑색귀골곡은 역사가 깊으며 없는 속성 공법이 없다고도 하였다.

'일단 축기기 공법도 최대한 많이 구하면 나쁠 건 없겠지. 그리고 추후에 결단, 원영기에서 쓸 수 있는 공법도 미리 다 구할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당신이 주는 공법서가 멀쩡한 공법서라는 걸 어떻게 믿소?"

당장 서휼에게 호풍응룡변으로 사기를 당한 전적이 있는 나로선 쉬이 공법서를 준다는 제안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놈, 감히 대청색귀골곡의 원로였던 나를 의심하는 게냐?]

"원로고 뭐고 당신은 이제 그냥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로서는 너무 걸린 게 많아서 말이오."

[끄음, 무엄한 놈... 좋다. 약조를 하마.]

그가 섭명함의 벽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섭명함(涉冥艦)의 앞에 나 대청색귀골곡의 원로 송진(淞津)이 대고 맹세하니. 대청색귀골곡의 이름의 명예를 걸고 공법서에 대하여 거짓을 읊지 아니할 것을 약조한다.]

우웅!

섭명함의 벽면이 미약하게 진동하였고, 그 진동과 함께 귀혼, 송진과 섭명함 사이에 어떠한 주술적인 연계가 생기는 듯 하였다.

나는 그의 심상과 의념을 들여다보며 진위여부를 판단하였다.

확실히 꿍꿍이가 있긴 했지만, 최소한 공법서를 가지고 장난질을 치진 않는단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뭐 좋아. 작은 꿍꿍이 정도야...'

김영훈 역시 그의 심상을 읽었는지 내게 심어를 보내왔다.

괜찮겠느냐는 의미의 심어.

나 역시 심어를 보내어 괜찮다고 답해 주었다.

"좋소, 그럼 하려는 부탁이 무엇인지나 들어보겠소. 만약 무리한 부탁이라면 들어주지 않겠소."

[무리한 부탁은 아닐 거다. 너희에게 섭명함의 조작법을 가르쳐 줄 테니, 섭명함을 끌고 바다로 나아가다오.]

"...그것 뿐이오?"

[그것 뿐이다.]

그때, 서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섭명함은 더 움직일 수 없는 게 아닙니까?"

[흥, 주요 기능의 대다수와 동력원을 상실했을 뿐이지 섭명함에 남은 잔여혼력으로는 예닐곱번 정도 더 항해할 수 있다. 다 망가졌지만... 한 번 정도 더 항해하는 건 일도 아니야.]

송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섭명함을 어루만졌다.

[섭명함은... 더 날 수 있다.]

나는 송진의 심상을 읽었다.

그는, 이 섭명함과 함께 최후를 맞고 싶은 듯 했다.

'원하던 곳에서, 원하던 순간에 최후를 맞이하고픈 기분이라...'

나는 어쩐지 그에게 공감이 가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는 이 노귀의 부탁을 들어드리려 합니다만. 김 형은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하거라. 다만 나는 섭명함 조작이니 그런 건 못 한다."

"서 도우는 어떻습니까?"

"저는..."

서란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송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귀골곡의 원로께서, 제 어머니가 남긴 것을 찾는 것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서란의 말에, 송진이 얼굴을 팍 찌푸렸다.

[아까부터 신경쓰이긴 했다만, 그래 역시 네놈이었군. 본곡의 오점, 반편이 인요. 흐, 듣자하니 인요혈통인데도 요족의 피가 짙어 칠성제의를 통해 천기를 읽을 수도 없고 일족에서 반편이 취급받았다지?]

송진은 서란을 노려보았다.

[네놈의 어미는 촉망받는 청색귀골곡의 대제자였다. 너를 낳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는 충분히 지원을 받아 원영기 장로가 될 수 있었거늘.

너라는 오점이 생겨 지원이 끊기고 해룡족과 붙어먹었다는 불명예를 사 평제자로 신분이 하락했다!

네 놈이 지금 내게 무슨 염치로 어미의 유품을 찾아달라는 거냐?]

"..."

송진은 마뜩찮다는 얼굴로 서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찾고 싶으면 네놈이 알아서 찾아라. 난 그런 것은 돕지 않겠다.]

나는 송진을 압박해 서란을 돕게 할까 생각을 했으나, 송진의 완고한 심상을 보곤 포기했다.

아무리 압박할지라도, 그는 흑색귀골곡의 명예와 직결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양보할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서 도우, 내가 찾는 건 도와드리지. 같이 찾으면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건 그리 하고... 일단 정말로 섭명함을 끌고 바다로 나가주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래. 난 그것이면 족한다. 섭명함의 조작법을 알려줄테니 따라와라.]

난 송진을 따라 섭명함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섭명함은 애당초 배 자체에 충전되어 있는 귀력과 혼력으로 움직이는 배이다. 괴군 놈이 동력원을 빼가기 전에는 혼력과 귀력이 반무한으로 차올랐지만, 지금은 몇 번 쓰면 혼력이 싸그리 동나겠지.]

그는 내게 섭명함의 조작법 등을 가르쳤다.

나는 동시에 서란에게는 섭명함의 저층부를 찾아보라 일러주고 내가 섭명함의 상층부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물론 지난 생에 섭명함의 상층부는 이미 찾아봤어서 없었으니 그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한 배려였다.

나는 송진에게 며칠간 섭명함의 조작법 등에 대해 배웠고, 서란은 섭명함의 저층부를 샅샅이 찾아다녔으며.

김영훈은 능광도를 수련하였다.

약 보름의 시간이 지났다.

[대충 능숙해진 것 같군.]

송진은 내가 섭명함의 조타륜의 곳곳에 의식을 붙이고 섭명함 곳곳을 장악한 것을 보며 말했다.

본래 이 말도 안되게 거대한 공간이 압축된 배가 움직이려면,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절대 안 되었고 수십 명의 인원이 달라붙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망가진 배를 대강대강 움직이게 하는 데엔 나 한 사람만 있어도 상관없는 듯 했다.

사실 수도자들이야 의식의 힘으로 한 사람이 수십 인분은 하는 게 가능했으니 대강대강 움직이게 하는 것 정도는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때쯔음.

서란의 저층부 탐색도 거의 끝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방 세 개 정도만 탐색하면 끝입니다. 그 중에는 어머니의 유품이 있겠지요."

서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진은 어쩐지 그런 서란을 복잡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란이 그의 어머니의 유품을 찾은 것은 이틀 후였다.

"찾았소?"

"예, 선배님. 덕분에 어머님의 유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란의 손에는 한 권의 옥간이 들려있었다.

"읽어보았소?"

"아직 읽지는 않았습니다. 추후에 처소로 돌아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을 예정입니다."

"그렇구려."

그때, 우리를 바라보던 송진이 말했다.

[이제 섭명함에서 볼 일도 다들 대강 본 듯 하니, 내 부탁을 들어줄 때도 된 것 같군.]

"뭐, 그러도록 하지. 섭명함을 조작해서 나가보겠소."

나는 섭명함의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갑판 위쪽, 조타륜.

나는 조타륜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일반적인 배와는 구조나 체계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파아아앗!

조타륜에 의식을 불어넣자, 섭명함의 현재 상태와 배 곳곳의 구조가 뇌리로 흘러들어온다.

[그 상태로 섭명함 곳곳의 부속동력부에 의식을 보내라.]

쿠구구구!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섭명함의 현 상태와 구조.

나는 그 구조도의 곳곳으로 의식을 보내 자극하였다.

그러자 섭명함이 떨리며 귀기를 더욱 더 뿜어내기 시작했다.

[섭명함(涉冥艦), 시동(始動)!]

"섭명함, 시동!"

쿠오오오!

섭명함의 하부에서 음풍(陰風)이 불어닥친다.

동시에, 섭명함이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허어..."

김영훈은 섭명함의 갚판 끄트머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서란 역시 긴장과 기대가 섞인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출항(出港)!]

쿠우우우!

내 의지와 조작에 따라 섭명함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송진의 조언에 따라 이곳 저곳으로 법력을 배분하며 섭명함을 조종했다.

[에잇, 조작의 속도가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냐? 네놈 결단기가 아니었나? 결단기라면 정순지력의 출력이 이것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서 조작 속도가 훨씬 빨라야 하는데...]

그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나는 딱히 상대하지 않고, 묵묵히 섭명함을 몰았다.

철퍽, 철퍽!

섭명함에서 부숴져 덜렁거리던 조각이나 부스러기들이 아래쪽으로 떨어진다.

이미 상당히 망가진 배인지라,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부스러기는 굉장히 많았다.

촤아아아!

섭명함이 바다에 펼쳐진 진법과 결계를 꿰뚫는다.

중심이 되는 섭명함이 자리를 이탈하자, 결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우물이 바닷물로 메워진다.

-끼아아아

-섭명함이다

-도망쳐! 배에 잡아먹힌다!

그 너머의 해무결계에 있는 귀신들은 섭명함을 보자 비명을 지르며 길을 터 주었다.

해무결계 역시 중간 쯤 지나자, 결계가 무너지며, 귀무 속의 귀신들이 모조리 승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꽈과과광!

환영결계를 그대로 박살내버리고, 제대로 된 해역에 진입했을 때였다.

솨아아아!

귀신들이 풀려나며, 해역 전체에 들끓던 음기와 귀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먹장구름이 녹아내리고, 그 틈새로 햇빛이 들어왔다.

촤아아아!

그리고, 그동안 잠시 허공을 날았던 섭명함이 바다에 떨어졌다.

섭명함은 마치 유령선처럼 다 망가진 채로, 겨우겨우 바다 위에 떠서 바다를 활주하였다.

송진은 말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얼마간 그것을 바라보던 송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지금 다 물어봐라. 난 곳 성불할 것 같으니. 지금 물어보는 건 다 답해주마.]

"공법서에 대한 게 아니어도 말이오?"

[그래.]

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한 후 질문했다.

"나는 귀곡의 이름을 흑색귀골곡이라 알고 있는데, 왜 당신은 청색귀골곡이라 부르는 것이오?"

[그거야 간단하지. 본곡의 주요 공법은 귀신을 다루는 귀도공법이다. 그리고 귀도공법은 기본적으로 흑색의 기운을 띄지.

하지만, 전해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귀도공법을 대성한 자는 청색(靑色)의 빛을 띄는 기운을 가진다고 한다.]

나는 그의 귀화에서 보이던 청색의 빛과, 그가 불러낸 청백색의 자폭용 기술을 떠올렸다.

[나 역시도 천인기에 올라 어느 정도 귀도공법의 이치를 깨달아서 기운의 일부를 청색으로 물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귀도공법의 극의를 본 이는 전신이 청색의 기운으로 뒤덮힌다 하더군.

청색귀골곡이란, 우리 흑색귀골곡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다.

나나 몇몇 원로들은 흑색귀골곡이 언젠가는 그 이상향에 도달할 것이라 굳게 믿어의심치 않기에 청색귀골곡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지.]

나는 그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했다.

"승천문은 1000년에 한 번 열린다 했지요. 승천문이 열릴 때마다 원래 이렇게 모든 대륙의 모든 종문이 전부 다 비승하는 겁니까?"

내 말에 송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번 시기가 특이한 것도 있지.]

"...?"

[이번 승천문이 열릴 시기, 그 시기에는 전 대륙이 완전히 과열되어, 터지기 직전의 폭약고 같았다.

그 어떤 세대를 가더라도 이번만큼 천인기 수도자가 많았던 시기가 없었을 것이야.

천인기 수도자도 그렇고, 원영기 수도자도 그랬지.]

송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 많은 수도자들 중, 본곡의 원로원주, 금신천뢰문의 전대 문주, 창천개벽문을 창시한 개파사조. 정도선파 연합의 수장, 마도선파 연합의 수장. 요족의 대표, 성붕왕, 해룡왕, 거호왕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해룡왕 서휼이 회의를 주도했고, 회의 결과, 이대로 가다가는 전 대륙과 전 바다의 영맥이 수많은 대형 세력의 수련과 경쟁에 의해 싸그리 고갈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그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듯 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영맥이 고갈되고 전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는 것을 방지하려면, 이번 승천문이 열릴 때 모든 천인기 수도자가 힘을 합쳐 함께, 자신들의 종문과 세력과 다 같이 비승하자는 의견이 나왔지.

모두 함께 비승하면 공간압력에 서로를 지지해주며 비승할 확률도 높았고, 또 비승하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지만 종문과 함께 비승하면 나름 든든한 지지세력이 함께하는 것이며,

종문의 제자들에게도 압도적으로 뛰어난 세계로 가 수련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 모두가 좋은 의견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 수많은 천인기 수도자들이 비승을 하게 된 겁니까?"

[그래. 또한 이번 비승에는 원영기 이상의 존재들은 무조건 데려가고, 원영기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 역시 전부 데려가기로 했다.

초대형 종문과 천인기 수도자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원영기 수도자들이 온갖 난장판을 치며 천인기 수도자들의 후예 수도가문 내지는 그들이 이곳에 남겨놓을 세력을 휘어잡을 게 눈에 훤했으니까.

때문에 원영기 수도자들 역시 원하든 원치 않든 전부 반강제로 이번 비승에 참여하게 되었다.

흑색귀골곡, 금신천뢰문, 창천개벽문, 정도, 마도연합. 삼대 요족들이 손을 잡고 안 올라가겠다는 놈들을 싸그리 척살하고, 원영기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재능있는 결단기 녀석들도 싹 다 잡아서 자기들 세력에 넣어 데려가기로 했지.]

송진이 클클 웃었다.

[때문에 승천문이 닫힌 이후엔,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나 같은 결단경 잡귀 내지는, 원영기에 오를 가망이 없는 처참한 자질의 결단기 수도자.

혹은 결단 대원만이지만 수명이 거의 안 남아 죽기 직전의 골골거리는 늙은이들만 전 대륙에 남았다. 대륙에 원영기 수도자가 나타나려면 최소 6, 700년은 있어야할 테지. 클클...]

나는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승에 관련된 여러 사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막리세가에서 승천문이 닫힌 이후부터 더 많은 단약 제조에 착수한 이유도, 결단 후기 수도자들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라고 했었던가?'

결단 대원만의 수도자들이 원영기에 도달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수명을 늘릴 단약을 만드는 데에 더더욱 힘을 썼던 것이리라.

그리고 진씨세가는 막리세가에서 원영기 수도자가 탄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막리세가의 단약공방을 습격하고, 그들을 방해하려 온 힘을 썼던 것이고.

원영기 이상, 혹은 원영기에 도달할 자질을 지닌 젊은 결단기 수도자는 죄 비승했으니.

자질이 높지 못해 다 늙을 때까지 원영기에 도달치 못했던 노괴들이 수명을 늘리려 애쓰는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원영기에 도달하면, 결단기밖에 없는 주변 상황상 자신들의 세력이 인근에서 최강이 될 테니까.

나는 승천문과, 승천문에 얽힌 수도가문들의 이해관계를 이해했다.

어느덧 송진의 모습은 썩 투명해져 있었다.

[더 할 질문은 없느냐?]

"뭐, 일단은 이 정도군. 이제 원하는 공법을 말해도 되오?"

[흠, 좋다. 그 전에 잠시만...]

송진은 서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반편이 용 놈아. 네가 찾은 네 어미의 옥간을 펼쳐봐라.]

"예, 예?"

[나도 그 내용을 봐야겠다. 네 어미가 왜 흑색귀골곡의 불명예를 뒤집어쓰면서도 그 놈과 혼인하여 너를 낳았는지, 나도 알아야겠군.]

서란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옥간을 펼쳤다.

송진은 서란의 뒤로 이동하여 서란과 함께 옥간을 읽어내렸다.

얼마 후.

서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아버지..."

서란과 함께 옥간을 읽던 송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아마 내 힘이 멀쩡했으면, 본곡의 오점인 네놈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진은 서란을 보며 말했다.

[네 어미, 그 아이는. 내가 섭명함에서 그 아이가 태어나 아장거리며 말을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아온 아이다.

내 제자도 혈육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고지기인 내게 자주 찾아와 선술에 대해 자주 질문하는 기특한 아이였지.]

송진은 옥간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본곡의 제자의 삶을 망친 그 해룡족 놈팡이 놈, 그리고 본곡의 오점인 네놈을 혐오했다.

하지만, 네 어미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자식이었나 보군.]

송진은 서란에게서 등을 돌리고 내게 다시 걸어왔다.

[...섭명함의 3번 부수동력원에 의식을 불어넣고 있나?]

"그렇소만."

[의식을 불어넣는 걸 중지해라. 3번 동력원에 일정 이상 자극이 가면 섭명함이 자폭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뭣...!"

나는 황급히 의식을 불어넣는 걸 중지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송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네놈들 모두 나와 길동무로 삼으려 했다. 어차피 섭명함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고, 이미 죽은 몸 아쉬울 것도 없었으니까.

너희 모두 본곡의 제자의 자비에 감사하거라. 본곡의 제자는, 자기 아들이 살았으면 했으니까... 그랬기에 나 역시 마음을 조금 바꿔 이대로 나 혼자만 가기로 했다.]

"이..."

하마타면 그대로 섭명함의 자폭에 휘말려 다 죽을 뻔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이 잡귀 놈을 노려보았다.

[걱정 마라. 이젠 정말 꿍꿍이고 뭐고 없으니까. 원하는 공법이나 말해봐라. 그걸 주고 성불할 생각이니, 어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후."

나는 송진을 보며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참았다.

어찌되었든 공법서는 얻어야 할 게 아닌가.

"...일단, 축기기부터 익힐 수 있는 것. 마공이 아닌 것. 선각후통의 원리에 입각해서 익힐 수 있는 것. 굳이 귀한 재료나 단약, 영근자질이 필요치 않은 것 등의 공법으로 부탁드리오."

[이런, 뭐 그리 까다로우냐. 그것보다 마도 종문인 본곡에 마공이 아닌 공법이라니? 그리고 선각후통? 그 고리타분한 원리를 누가 익힌다는 건지. 거기에 귀한 재료나 영근자질이 필요치 않은 공법?]

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하나같이 까다롭기만 한 걸로 요구해대는군. 일단 마공이 아닌 것이라면, 마기(魔氣)나 사기(邪氣), 귀기(鬼氣)를 사용하지 않는 걸 말하는 거냐?]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익히는 데에 남의 희생이 필요한 공법은 전부 빼 주시오."

[범위도 넓군. 빌어먹을...]

그는 짜증을 내며 고심하는 듯 하더니, 내게 말했다.

[네놈이 말하는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하는 공법은 세 개가 있다.

음혼귀주문(陰魂鬼呪文), 군마용갱권(群魔俑坑卷), 규토장성공(珪土長城功). 셋 중 뭘 선택하겠느냐.]

"...어쩨 셋 중 둘은 이름만 들어서는 마공 같습니다만."

음혼과 군마라니.

딱 봐도 사악해 보이는 이름이 아닌가.

송진이 공법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흐흐, 그렇게 생각할 법 하지. 하지만 아니다.

음혼귀주문은 수련자가 자기 자신의 고통과 원독을 이해하는 공법이다. 사악한 기운을 수련하는 것도 아니요, 남을 희생하지 않고 스스로가 고통을 이해할수록 수련이 빨리 진행되니. 마공도 아니며 선각후통 그 자체로다.

군마용갱권은 이름이 그렇지만, 법보(法寶)를 지닌 수도자가 익히기 가장 좋은 공법이다. 법보의 성질에 대해 이해할수록 법보와 연계되며 수행을 빠르게 이어나가는 공법이지.

규토장성공은 대지의 용맥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더더욱 빠르게 수련할 수 있는 공법이다. 같은 장소에 오래 붙박혀 대지를 이해할수록 수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지.]

송진은 공법에 대한 일련의 설명을 한 후, 나를 보며 말했다.

[솔직히 내가 제일 추천하는 건 음혼귀주문이다.]

"어째서입니까?"

[뻔하지 않으냐. 내가 네 정신세계를 엿보았다는 걸 잊은 게냐? 너만큼 '고통'에 대해 잘 이해하는 놈이 얼마나 있을까. 네가 음혼귀주문을 익힌다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수련을 할 수 있을 터다.]

"흠.."

고통이라.

나는 잠시 속으로 고민해 보았다.

'군마용갱권은 법보는 커녕 법기조차 아예 없는 내가 익힐만한 것이 아니다. 규토장성공 역시 계속 한 자리에 붙박혀 있지 않다면 쓸모가 없지. 내가 한 자리에 계속 붙박혀 있을 수 있단 보장도 없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규토장성공은 탐이 난다.

그러나 동시에 음혼귀주문 역시 그의 말대로 고통에 대해 이해할수록 진도가 빨라진다면 역시 좋은 선택일 듯 했다.

물론 이름만 봤을 땐 제일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흠, 정 그렇다면 다음 생도 있으니...'

"음혼귀주문으로 주십시오."

어차피 셋 다 언젠가는 내 손에 들어올 것이라면, 일단 제일 위험해 보이는 것부터 익혀보고, 다음 번엔 더 나은 것을 택하면 될 것이다.

[좋은 선택이다. 네 정신상태라면 빠르게 대성할 것이다.]

말을 마친 송진은 근처에 떨어져 있는 섭명함의 잔해에, 자신의 의식을 새겨넣었다.

잔해 위로 빼곡하게 구결들이 들어선다.

[청색귀골곡의 이름에 대고 수작은 안 부렸다. 마음껏 익히면 될 거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뒤를 돌았다.

그는 섭명함의 뱃머리로 향하였다.

[청색귀골곡의 수도자는, 6할 이상이 섭명함에서 태어나 섭명함에서 죽는다. 나 역시 이 배 위에서 태어났고, 이 배를 지키려다가 죽었다.]

점차, 그의 모습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잘 들어라, 반룡 녀석아. 너는 분명 본곡의 '오점'이지만. '본곡'의 오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 네 어미의, 본곡의 누가 되지 않도록 성장하고 살아남아라.]

파스스-

[네 피의 절반은 본곡의 제자의 것이다.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종문의 어른된 자로서 제자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 없이 갈 수는 없지.]

파츠츳!

서란이 쥔 옥간 위로 어떠한 글자들이 더 새겨졌다.

[그것의 가치는 너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난 네가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래도 문파의 어른된 자로서 불명예를 안으면서까지 너를 사랑했던 제자를 위한 마지막 의무이니, 너는 네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송진은 섭명함의 뱃머리 위로 올라가, 푸른 바다를 활주하는 섭명함을 돌아보았다.

그가 우리를 천천히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서란을 쳐다보았다.

그의 의념이 들려온다.

그는 서란을 통해 누군가를 겹쳐보는 듯 했다.

[...그리고, 고맙다. 내 임종을 바라봐 주어서.]

말을 마친 송진은 그렇게, 바닷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서란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보고는, 인사를 올렸다.

나 역시 어찌되었든 죽은 이를 위한 명복을 짧게 빌어주었다.

* * *

송진의 임종을 봐준 후.

나는 조타륜을 돌려 서란의 거처로 방향을 잡았다.

서란은 송진이 그에게 남긴 것을 해석하기 시작했고,

나는 자리에 앉아, 스승님이 준 천린수해(千璘樹海)의 공법과 송진이 준 음혼귀주(陰魂鬼呪)의 공법서를 비교하며 읽기 시작했다.

해결해야 할 연은 전부 해결했으니, 제대로 축기공법을 익혀도 될 터였다.

"음혼귀주의 공법은..."

음혼귀주의 지식이 뇌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임종(臨終)(4)

음혼귀주문은 단 한 마디로 설명이 가능한 수도공법이었다.

저주공법

그랬다.

법술의 주체 그 자신이 고통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공법이라 했던가?

음혼귀주는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만큼 저주문(詛呪文)을 생성해서 흩뿌리고 온갖 상태이상과 약체화를 시키는 법술이 주를 이뤘다.

'상태이상과 약체화가 이 공법의 주로군.'

특별히 물리적인 법술 같은 건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공법이었다.

'보통은 마공에 보조해서 익히는 공법인가.'

하지만 웃기게도, 공법서의 창시자로 보이는 이도 딱히 공법을 대성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었다.

공법을 대성할 정도로 고통에 대해 이해가 높다는 건 그만큼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고.

일반적인 생명체는 그 정도로 고통을 받으면 진즉 죽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나같은 망인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나는 공법서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공서는 아니다만. 굉장히 마두의 길로 빠지기 쉬운 공법서로군.'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기도 했지만.

고통을 가했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므로 고통에 대해 이해하려 하다가 결국 사이한 길로 빠질 가능성도 있어보였다.

'고통이라...'

음혼귀주문에서는 하나의 고통을 이해할 때마다 저주문 하나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형성된 저주문을 법력으로 돌릴 수도, 법술로 돌려서 저주로 쓸 수도 있었다.

'공법의 창시자는 108개의 저주문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다 하는군.'

사용자의 고통의 이해도에 따라 한번에 다룰 수 있는 저주문의 갯수도 다르다 하였다.

'창시자도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대성한다고 하면 미친 듯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법이 될 거라 적어놓았는데...'

확실히 저주문으로 상대를 계속 약체화시키는 방법으로, 108개 이상의 저주를 퍼붓는다면 끝없이 약해지기만 하는 상대로선 굉장히 성가시고 짜증이 날 만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공법을 끝까지 읽으며 혀를 찼다.

'약점은 명확하군.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만한 방법이 거의 없다.'

공법서 자체에 애당초 마공의 보조공법으로 많이 익혀진다고 쓰여 있었다.

흉맹한 마공과 함께 쓰면 말 그대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내게는 큰 해당사항이 없었다.

'아무래도, 음혼귀주문과 다른 공법을 병행해서 익혀야 할 듯 한데...'

그리고 병행해서 익힐만한 공법은, 지금 시점에선 하나밖에 없었다.

스승님이 주셨던 천린수해성(千璘樹海成).

기본적으로 선각후통의 묘리에 치중된 공법으로, 익히기가 까다로왔으나 그 위력 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선보였다.

'음혼귀주로 고통을 이해하며 축기기의 경지를 뚫고, 그 경지를 밟아가며 천린수해성을 익히는 게 가장 좋겠어.'

음혼귀주로 길을 뚫고 거름을 주어, 그 땅에 천린수해의 싹을 틔운다.

그게 가장 적당한 방법일 듯 했다.

내가 음혼귀주와 천린수해의 공법을 읽고 비교하며, 앞으로의 수련 계획을 세울 때였다.

서란이, 송진이 남겨준 것을 해독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선배님들. 잠시 와 주시지요.

촤아아아!

그리고 그 때쯔음.

섭명함은 어느덧 서란의 거처에 도달했고, 우리는 서란의 처소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누었다.

바닷속이라 음한 기운이 조금 있기는 해도, 시종일관 귀기가 넘치는 섭명함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이었다.

우웅!

서란이 허공에 정순지력으로 수를 놓자, 송진이 주고 갔던 법결이 허공에 새겨진다.

동시에, 서란이 법결들에 의식을 불어넣자, 법결들이 작동하며 터져나왔다.

파아앗!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지도였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하나의 붉은 점이 깜빡이며 어딘가로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혹시 선배님께서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지도는 봉명성(奉命城)의 좌표를 나타내는 지도입니다."

"봉명성..?"

"아,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서란이 본인의 서고로 가 한 권의 서책을 가져왔다.

그가 서책을 펴자, 서책에는 한 장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었다.

옥빛의 기와를 얹은 순백의 거성(巨城).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전각처럼 네모난 양식이 아닌, 둥그란 양식의 특이한 성채였다.

삽화의 아래에는 '봉명성(奉命城)'이란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먼 옛날. 섭명함의 원본이 되는 명계를 건너는 선보를 만들었던 선계의 장인이, 아직 인간이었을 시절 만들어낸 걸작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 안쪽에는 섭명함 수준의 공간 압축이 시행되어 있으며, 압축된 공간 안쪽에는 온갖 기화요초와 영물이 돋아나는 영지는 물론이고,

온갖 선보와 기물이 잔뜩 있는 창고도 있다 합니다. 옛 선인의 흔적이 잔뜩 남아있는 보물창고란 이야기지요."

"음!"

서란이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과연 천인기 수도자의 잔혼입니다. 결단기는 물론이고 원영기 수도자들조차 봉명성의 좌표를 찾지 못해, 봉명성이 가끔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려야 하건만.

천인기 수도자쯤 되면 봉명성 안쪽에 좌표를 남겨놓고 원할 때마다 탐지할 수 있는 법술을 만든 모양입니다."

그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서 도우의 말대로라면, 봉명성이란 건 '모습을 드러낼' 때와 안 드러낼 때가 따로 있다는 건데.

지금 서 도우가 추적하는 위치는 모습을 안 드러낼 때의 위치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봉명성은 공간의 외곽을 부유하며 움직이니만큼, 수백년에 한 번 정도만 이 세계에 진입해서 수많은 수도자들이 찾을 수 있게 몸을 드러내지요."

"그럼 이 지도는 무슨 소용이오? 어차피 공간의 외곽이면 실시간으로 좌표를 추적해봤자 갈 도리가 없는데."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서란이 씨익 웃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다 망가져 몇 번 밖에 더 쓸 수 없지만. 어쨌든 섭명함이 있지 않습니까."

서란의 설명이 이어졌다.

"섭명함의 원본이 되는 선보는 명계조차 건널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섭명함 역시 그러한 성질을 어느 정도는 갖췄기에 공간을 뛰어넘는 신통 역시 부리는 게 가능하다고 합니다."

"호오, 정말이오?"

"사실일 거라 봅니다. 예전 멀리서 흑색귀골곡의 전투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흑색귀골곡은 불리해지자 섭명함을 이끌고 공간을 넘어 홀연히 사라지더군요. 그게 공간을 넘은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여, 제 제안은 선배님들께서 저와 함께 봉명성에 함께 가 주셨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아직 축기경인 제가 혼자 도전하기엔 턱없이 힘들고.

섭명함의 공간지력이 있어야 도달이라도 할 수 있을테니까요."

"음..."

그러나 나는 오히려 고민이 되었다.

'영약과 기화요초가 가득하다라...'

나한테는 솔직히 그렇게 큰 매력은 아니었다.

어차피 선각후통과 시간을 쏟아부어 경지를 올리는 게 내 방식이었으니까.

외물(外物)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

내가 거절할까 생각할 때였다.

"들리는 말로는, 봉명성 안에는 수명을 100년이나 늘려주는 선과(仙果)인 장생과(長生果)도 열린다고 합니다."

"....!"

나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오..?"

"예, 해룡족의 어른들도 간혹 봉명성이 출현할 때 도전하시고, 장생과를 따 온 적이 있으십니다."

"호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김영훈을 흘긋 보았다.

그의 수명은 내가 알기로 10년 남짓.

천뢰는 벨 수 있다지만, 과연 천뢰를 베는 것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니, 수명을 늘릴 방법이 있다면 찾아보는 게 옳을 터.

어쩌면, 김영훈의 수명을 조금 더 늘리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 * *

쿠구구구구!

나와 서란, 김영훈은 섭명함을 타고 어느 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송진이 남긴 좌표가 번뜩이는 곳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공간을 넘을 수는 있는 거겠지?'

확실히 송진이 알려준 방법 중에는 진법을 돌파하거나, 공간을 뛰어넘는 조작법도 있었다.

애당초 나갈 때부터 결계를 몇 개나 돌파해야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만.

여하튼 그런 식으로 공간을 돌파하는 법 역시 배워두었고, 좌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공간을 돌파하면 봉명성이라는 곳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이 쯤입니다."

"그렇군. 그럼 돌파하겠소."

나는 섭명함의 조타륜을 잡고 의식을 불어넣었다.

쿠구구구!

섭명함이 순간 귀기에 휩싸이는 듯 하더니,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돌파하였다.

파아앗!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와 기운이 사라지고, 우리는 완전히 캄캄한 세상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그 캄캄한 세상 속.

나와 서란, 김영훈은 '그것'을 발견하였다.

옥빛의 기와, 백옥같은 몸체, 그리고 둥그런 원통형의 성채.

봉명성이었다.

봉명성에는 옥빛의 대문이 커다랗게 있었으나, 열릴 시기가 아닌 탓인지 꾹 닫혀 있었다.

또한, 성 전체가 어떤 금제에 잠겨있는 듯, 대문 외에 다른 곳으로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끄음, 이것 참..."

서란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금제가 약한 곳을 찾고, 그곳의 금제를 해석하고 파훼해야 들어갈 수 있을 듯 싶군요."

"흠, 이건 안 부숴지려나."

콰앙!

김영훈이 능광도를 날리며 금제를 후려쳤다.

폭음이 울리고 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파직, 파지직..

금제는 약간의 불똥만을 튀겼을 뿐, 출렁이지조차 않았다.

'폐기된 섭명함을 지키던 결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단 건가...'

나 역시 무형검으로 금제 곳곳을 후려쳐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최소 원영기 수도자는 되어야 이 금제에 힘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을 듯 싶었다.

'쯧, 정말 방법이 없나...'

쿠웅, 쿠웅!

나는 몇 군데를 더 두들겨 봤으나, 매한가지였다.

물론 금제의 반응을 보아, 어떤 곳이 조금 더 약한 곳이겠구나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섭명함을 금제에 들이박고 자폭시키면 어떻게 되려나?'

문득 그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섭명함을 자폭시키려면 섭명함 안쪽에서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

나와 서란, 김영훈은 봉명성의 곳곳의 금제를 두들기고 관찰하는 둥.

한참을 조사한 후에 다시 섭명함을 타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친한 요족 중에 진법에 정통한 이가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물론 요족 중에 그런 이는 굉장히 희소하고 또 그런 희소한 자들은 이번 비승에 대부분 잡혀가긴 했지만..."

서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이를 악물었다.

진법을 공부한 적이 있는 나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저 금제는 한두사람이 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초일류의 진법사와 금제사들이 모여 몇 년은 매달려야 할 문제였다.

서란이 떠나고, 내가 섭명함을 인근 계곡에 세운 후 내려와서 우울해 할 때였다.

김영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그나저나 은현아. 왜 그리 우울해하는 거냐?"

"...김 형은 수도공법을 익혀 축기기에 이르지 못했으니, 곧 있으면 죽겠지요."

"음..."

그 말에, 김영훈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은현아. 사람은... 원래 죽는 게 당연한 거잖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뭐가 그리 죽상이냐."

"...제 수명은 이제 300년이 더 늘어났습니다. 김 형이 가면, 저는 남은 300년을 홀로 지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겠군."

김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뭐 어떠냐."

"아니..."

"나는 평생을 궁구하던 경지에 닿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한 것을 깨달았다.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능광도를 얻은 후부터 어쩐지 내 명(命)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

"운명이 내게 속삭이는 느낌이다. 내가 왜 살아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마치, 운명이 나를 지지하는 느낌이야.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왠지 내 명을 깨친 것 같단 기분이 든다. 하하, 천하의 현자라도 제 명을 모르건만. 나 같은 놈이 뭐라고 이딴 소리를 하는지..."

문득, 눈 앞으로 어떠한 환영이 스쳐지나갔다.

-다음 대의 종명자여.

-이 공간에 그대가 들어왔다는 것은 내가 설정해놓은 조건을 기적과 같은 확률로 달성했다는 것일 터.

-아직 자신의 명(命)을 깨치지 못했을 때에 쇄천봉에 들어와서...

명을 깨친다.

어째서 양수진의 잔영이 말했던 그 조건 중 하나와, 김영훈이 말하는 명을 깨친다라는 말이 연관이 있는 것 같을까.

명을 깨친다라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김영훈이 깨쳤다는 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절대로, 네가 부여받은 운명을 누설하지 말아라.

나는 감히 묻지 못하였다.

그저 김영훈이 기쁜 듯이 무공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경청할 뿐이었다.

"이 명대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괜찮다. 외로워 하지 말고 너 역시 정진하려무나. 언젠가 너 역시 네 명을 깨칠 수 있도록."

그는 씨익 웃으며, 도를 들어올렸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또 한 번 겨뤄볼까?"

"...그거 좋지요. 이번에는 김 형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번에도 이길 수 있지!"

"지난번에 너무 봐 드렸던 것 같군요."

나와 김영훈은 무형검과 능광도를 쥐고서, 주변의 계곡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뛰놀았다.

그렇게.

17년이 흘렀다.

* * *

김영훈의 기세는 이전과 달라졌다.

능광도를 얻고 17년 새.

그는 이미 순수한 무공 경지로는 나를 한참 뛰어 넘었다.

물론, 나 역시 축기기의 출력에 점차 익숙해지며 김영훈에게 쉽게 패배하지는 않았다.

2054전 2039무 9승 6패.

이것이 김영훈이 나와 겨루며 현재까지 쌓은 전적이었다.

우웅-

김영훈의 안광에서 형형한 기색이 맴돌았다.

그는 요족의 지각 역시 감각하여 천지의 흐름을 보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로 인해 운명을 예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신에게 닥칠 일을 예견할 수는 있었다.

"...오늘이, 내 수명이 다하는 날 같구나."

그가 씨익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죽상 말아라. 번개는 충분히 자를 자신 있으니까. 심장도 강기로 잘 주무를 자신 있고. 하하, 설마 나 정도 되는 자가 수명을 극복 못하겠느냐?"

김영훈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며 도를 잡아올렸다.

나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17년동안, 봉명성의 금제를 뚫으려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서란은 금제를 뚫으려면 최소 50년은 더 금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걱정 말아라. 하늘도 나를 막지 못해. 아니, 막지 않을 거다. 이렇게 피부에 생생하게 운명이 내 편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어찌 내가 죽겠느냐?"

그가 싱긋 웃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김 형...'

나는 500년동안 살아오면서 뼈져리게 느꼈던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운명은 누구의 편도 아니란 것이었다.

과연 김영훈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의 무는 하늘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렇게, 김영훈의 수명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임종(臨終)(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