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3

* * *

"서란!!!"

나는 서란을 부르짖으며 섭명함으로 다시 날아갔다.

그러나 순간.

섭명함에서 빛이 번뜩이며, 수많은 공간 폭풍이 불어닥쳤다.

어마어마한 빛이 폭발하며, 그곳에 축적되어있던 귀기와 음기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동시에 섭명함 내부에 갇혀있던 그 귀기와 음기의 근원들.

흑색귀골곡이 저장해놓았던 수많은 원혼들이 허공으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자유다, 자유!]

[저 빌어먹을 배에서 떠난다!]

[이번엔 진짜 저승으로 가는구나!]

수많은 원혼이 하늘로 날아들며 사라진다.

나는 이를 악물며 눈물을 흘렸다.

섭명함이 완전히 붕괴되어간다.

오늘, 내 벗이 죽었다.

전야(6)

쿠과과과과광!

검은 음기가 몰아치며, 압축되어 있던 공간이 터져나왔다.

쿠구구구!

나는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섭명함 내부에 있던 내부 갑판들이 끝없이 커지며 결계를 박살냈다.

해무의 결계가 박살났고, 환영결계가 박살이 났다.

해무결계에 갇혀있던 수많은 귀신들이 허공으로 승천하며, 원혼들의 음기가 걷혀나갔다.

음기의 근원이 사라지자, 근방의 먹장구름과 폭풍이 눈 녹듯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파도가 잔해들을 뒤덮었다.

나는 금신천뢰문이 있던 대산맥의 산 하나 분량의 잔해를 보며, 말없이 내 친우를 애도하였다.

* * *

서란은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공간 폭풍에 휘말린 탓일까.

나는 며칠간 서란의 시신을 찾다가 포기하고, 결국 그를 위해 작게나마 천도제를 지내준 후 그의 처소로 갔다.

촤아아아

수월입도결로 물 위에 서서, 물살을 가르며 그의 처소로 향하며, 나는 많은 상념에 잠겼다.

서란의 죽음 말고도, 그가 알려준 여러 진실에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사람을 가축처럼 사육하고 단약을 만들어먹는 용에게 두 동료를 넘긴 건가?'

서휼은 겉으로 보아서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였다.

괴군만큼 안좋은 소문도 없었고, 가장 점잖은 이기도 했다.

'창호자 다음으로 가장 호감가는 이라고 생각했어서 동료를 맡긴 것이었는데...'

결국은 최악의 선택이 된 것이었다.

'젠장...'

내 손으로, 가장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나는 이를 악물며, 한참을 복잡한 의념 속에 잠겨있었다.

'내 무지로, 동료를 최악의 존재에게 넘겼다...'

더는 무지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 알아야 한다.

더욱 더 정보를 모아야 한다!

나는 그리 다짐하며, 서란이 지내던 수중동굴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지내던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촤아아악!

서란이 내게 준 푸른 구슬이 빛을 내며, 사방으로 빛을 퍼트렸다.

'이건...'

푸른 빛이 닿는 자리에서, 숨겨진 동굴의 입구들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숨겨진 입구들에 들어갔다.

입구는 총 세 개.

하나는 서란의 생활공간이었다.

인요 형태로 생활하던 공간이었는지, 그곳에는 단단한 침상이 놓여있고, 인간 수준의 생활기구들이 놓여있었다.

또 하나는 수많은 재료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었다.

수많은 요수들의 뼈, 가죽, 특이한 목재와 석재가 잔뜩 모여있었다.

마지막은 서고(書庫)였다.

서고 안에는 수많은, 어마어마한 분량의 요족 공법서 및 서적들이 잔뜩 꽂혀있었다.

내가 익혔던 호풍응룡변, 아니 호풍응단변 같은 노예나 가축용 공법서가 아닌, 진짜 해룡족들이 익히는 요수공법서가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요수공법서들을 살펴보며, 서란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전하였다.

'고맙습니다, 서 형...'

나는 요수공법서들을 빼냈다.

또한 요수공법서뿐이 아닌, 다른 몇 권의 서적 역시 빼내어 읽어내려갔다.

서란은 인요의 혼혈인 탓인지, 연국, 벽라국, 성제국은 물론이고 그 외의 여타 다른 인족 국가의 서적들 역시 잔뜩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서적 중 손때가 많이 묻은 서적들을 뽑아보며 읽어보았다.

그 중에는 요수공법서도, 해룡족의 역사서도, 인족 국가에 대한 서적도 있었다.

[연국의 문화]

난 서책을 읽고 다른 책을 다시 읽었다.

[성제국의 문화]

'성제국의 문화 중 성제국 산간 지역의 문화로는, 산간 지역 사람들이 1년에 한 번씩 벌이는 축제들이 있으며...'

'축제의 종류는 몇백년을 전해 내려온 쌍선무, 위뢰제, 경술제 등이 유명하고..'

나는 다음 책을 읽었다.

[벽라국의 문화]

'벽라국은 사막과 접해있어, 유리 공예품이 많이 만들어지고, 또한 죽은 이에게 유리 공예품을 바치는 문화가 있을 정도로 유리에 대한 벽라국인들의..'

또한 상계(上界)에 대한 문화를 담은 서적도 있었다.

[상계인들의 삶]

서란은 이 서적을 이 서적엔 특히 재미있게 읽은 듯 손때가 많이 타 있었다.

'상계의 선사들은 부부의 연을 맺기 전, 두 잔의 술을 서로에게 따라주고 마시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상계의 술 중에는 모령주, 계령액, 쌍화주... 그리고 백홍주라는 것이 유명하다.'

'모령주는... 계령액은... 백홍주는 백연화와 홍리화, 두 선화(仙花)를 사용하여 만든 술로 부부의 연을 상징하는 주류이다..'

'상계의 문화 중에는 또...'

승천문 너머, 저 아득한 상계의 문화와 풍습들.

나는 책장을 넘기며 상계에 대한 서적을 읽던 중, 유난히 손때가 많이 탄 한 장을 펼쳤다.

'상계에서는 가족이 모이는 행사가 있을 때, 자색(紫色)의 띠를 전부 두르고 모인다고 한다...'

가족.

유난히 그 부분은 책을 읽던 이가 많이 어루만진 것인지, 잔뜩 헤져 있었다.

서란이 책을 읽는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그는 어쩌면 수 년동안 이 곳에서 책을 읽어왔을 것이다.

그가 서고 곳곳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연상이 되었다.

해룡족에 대한 서적 역시 그의 손때가 많이 타 있었다.

특히, 해룡족과 인족의 혼혈에 대한 기록에는 어마어마한 손때가 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록의 바로 뒷면에는 서란이 쓴 듯한 문장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혼혈은 인족의 장점과 요족의 장점을 두루 갖추지만, 나는 요족의 피가 너무 진하기에 인족의 장점도 살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요족으로서의 야성도 완전하지 못한 반편이이다. 다른 해룡족원들은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래도 왕께서는 내가 해룡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왕께, 서휼 할아버님께 충성을 다할 것이다.'

"..."

아무래도 서란이 섭명함의 결계를 통과하지 못한 것은 요족의 피가 훨씬 진한 이유였던 듯 했다.

나는 서휼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문장을 보다가, 더 이상 서란이 남긴 몇몇 기록을 보지 못하고 책을 덮어버렸다.

'...부디, 저승에서는 평안하기를. 서 형.'

나는 그의 처소에서 요수공법서들을 챙겨서 나와 연국으로 향했다.

'힘이 없고, 약할 뿐인지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에 도달하겠습니다.'

김영훈은, 요수공법서들을 바탕으로 또 다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다음번 삶에는, 할 수 있는 한 그가 죽지 않게 할 것이다.

* * *

"이건...!"

김영훈은 내가 가져온 요수공법서들을 보며, 반쯤 눈이 뒤집어져 공법서들을 읽어내려갔다.

"고맙다..! 이를 기반으로 시행착오를 한참은 줄일 수 있을 것이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김영훈은 내가 가져온 공법서 무더기를 보며 얼굴에 화색이 돈 채로 그것들을 읽어내려갔다.

'이 정도라면, 김 형은 과연 이번생에... 등봉조극 너머를 볼 수 있을까?'

그는 희희낙락하며 공법서들을 들여다보고, 그가 그동안 호풍응룡변만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거쳤던 수많은 무학을 정리하였다.

* * *

나는 김영훈에게 수도공법을 수련해야 한다고 말하며, 성제국 대산맥 쇄천봉에 있겠다는 말을 한 후 쇄천봉 인근으로 갔다.

'지월입도결과 수월입도결을 대성했으니, 이제 화월입도, 금월입도, 목월입도결도 전부 대성해야겠어.'

어떻게든 다른 속성의 구결들도 구결에 익숙해지면 다음번 삶에는 더더욱 빠른 시간 안에 익힐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쇄천봉 주변에 도착했을 때였다.

'저건, 결계..!'

나는 인근에 멈춰서 결계를 살펴보았다.

얼마간 기다리니, 결계 안쪽에서 몇몇 인영이 빠져나왔다.

'제길, 하긴 생각해보면 금신천뢰문도 이제 없겠다. 성제국의 수도가문들이 금신천뢰문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나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주변을 탐색해 보았다.

쇄천봉은 단순히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었다.

금신천뢰문이 자리잡았던 전체적인 산지 대부분이 쇄천봉이라 불리웠고, 그러한 수많은 쇄천봉 중에는 영맥이 옅어 수도가문에서 차지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좋아, 저 곳에서 수련을 하면 되겠군.'

나는 영맥이 적당하나, 썩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봉우리로 가 가부좌를 틀고 수련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화월입도결을 익힐 생각이었다.

* * *

십수년이 흘렀다.

나는 십수년 끝에 화월입도결을 대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쿠구구구-

단전에서 삼색(三色)의 구름이 휘몰아친다.

'회복력이... 어마어마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말도 안되는 수준의 회복력이었다.

축기경에 도전하고 수행이 12성으로 떨어져도, 하루이틀이면 수행을 전부 회복하는 게 가능할 정도.

그러나, 남은 수명은 이제 10여년.

'아무리 익혀봤자 오행공법을 전부 대성하기는 요원하다.'

해봤자 4개가 한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 생의 시간을 바탕으로.

이번 삶의 인연을 거름으로, 다음 삶의 싹을 틔울 수 있을 테니까.

아니, 틔워야 하니까!

꾸궁!

나는 다시 한번 축기기에 도전했다.

역시 이번에도 영성의 별은 깨져 버렸고, 내 수행은 다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단전 내에서 삼색의 영기가 회전하며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이면 전부 회복된다.'

솔직히 이정도 회복력이라면, 아마 수행을 회복한 상태에선 연기기의 실력만으로도 축기기에 막 오른 축기 극초기 수도자와는 해볼만 할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

나는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영력을 관조하며, 수행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후.

나는 연기기 14성의 수행을 전부 회복하고, 멈추지 않은 채 금월입도결의 수행에 들어갔다.

시간을 허비할 틈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경지를 높여야 할 터였다.

* * *

촤아아악!

내 주변으로 백색(白色)의 금(金) 속성 영기가 퍼져나갔다.

내 수명은 거의 남지 않았다.

금월입도결은 현재 9성, 오행진의에 막 도달하였고, 단전 안에서는 네 가지 색의 영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황갈색의 지기(地氣), 흑색의 수기(水氣), 적색의 화기(火氣), 백색의 금기(金氣).

세 가지 색의 구름 사이로, 백색의 기운이 조금 휘도는 형태였으나, 그것만으로도 나는 회복력의 증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젠, 축기에 도전해서 수행이 떨어지고도 반나절만에 대성한 모든 속성의 법력을 전부 14성까지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

만약 금월입도결도 대성하면 반나절이 아니라 한두시진만에 전부 법력을 화복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이제... 얼마 안 남았..'

그 때였다.

파아앗!

"...?"

내가 김영훈에게 주었던 전음부가 하얗게 빛났다.

[지금 성제국에 와 있다. 대산맥 바깥 성제국 경주성에서 만나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전음부는 꺼져 버렸으나,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대산맥 바깥으로 나섰다.

'방금 그 목소리는, 뭔가를 각오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이지?

김영훈은 성제국 경주성의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김 형."

"일단 사람이 없는 곳에서 얘기를 좀 해볼까.."

"예, 원하신다면."

나는 김영훈과 함께 대산맥 안쪽,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계곡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간 요수공법을 연구하느라 바빴는지, 단 한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던 그였다.

반갑기도 했으나, 어쩐지 오늘 그의 안색은 조금 이상했다.

나는, 저 얼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이들에게서 봐왔던 얼굴, 그리고 그 의념의 색상.

저것은, 죽음을 앞둔 이의 것이었다.

"김...형?"

"...은현아."

김영훈이 쓰게 웃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예...?"

"아마, 10년. 20년 정도는 더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수도자가 아닌 그냥 범인일 뿐이다. 오래는 살 수 없어..."

그가 허리춤에서 도를 뽑았다.

"네가 준 요수공법들로 인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줄였음에도 여전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고.

그 시행착오를 거치며, 시간을 잡아먹었을지언정... 나는 '진짜 길'을 발견하는 것에 성공했다. 단순히 인간의 의식을 인간 형태로 바꾸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발견했어..."

"....!"

"하지만, 너무나도 늦었다."

뚝, 뚝뚝...

김영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이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정확히 이곳을 향해서 수많은 고련을 하였다면 모를까... 지금. 고작 10년, 20년 안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부족하다..!

아무리 나라도... 시간이 필요해.."

"김 형.."

김영훈의 수명은, 일단 나보다는 조금 더 길었다.

그러나 그 역시 범인이라는 틀 때문인지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도달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도달할 시간이 없어.."

그는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무공을 익히고 익혀서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꿈꿔왔다만... 전부 허망한 일이었던 모양이지.

그런 만큼. 가족에게 돌아가진 못할지언정, 이 무공만은 완성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죽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눈에는 기이한 광기(狂氣)가 서려 있었다.

"은현아, 나는 오늘 이곳에 죽으러 왔다! 이 목숨을 불살라서, 내 모든 재능을 불살라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다음 경지에 도달하고, 그리고 죽을 것이다!"

그는 품속에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그의 시행착오가 잔뜩 추가되었던 월도월무록과는 다르게, 책자의 두께는 얇았다.

책자에는 아직 제목이 없었다.

'모두, 내게서 떠나가는가...'

서란도, 김영훈도.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저 지켜봐줄 수밖에.

지켜보고, 다음의 삶에 전승할 수밖에.

휙!

그가 책자를 내게 던졌고, 나는 그 책자를 받아들었다.

"...이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월수궁무록.

조수월무록.

월수월무록...

그리고 월도월무록(越道越武錄).

수많은 김영훈들의 피가 서린 집념으로 쌓아올려진 무의 새로운 역사.

"이것은, 무엇을 담은 기록(錄)이지요?"

김영훈이 웃었다.

어쩐지 그 웃음에는 피고름이 맺혀있다고, 그렇게 느꼈다.

"기록이 아니다."

"예..?"

"무(武)... 그것은, 무학(武學)이다..!"

처억!

김영훈이 도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내가 삶을 갈아넣어, 때려 부수고 재탄생시킨 그것은..."

그의 기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김영훈의 주변으로 아홉 개의 강환이 떠올랐고,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월도입천무(越道入天武)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다음 순간.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황금빛이 주변을 밝혔다.

김영훈이, 다음 경지를 향해 목숨을 불사르며 도약하기 시작했다.

전야(7)

눈을 뜨기가 힘들다.

아니, 단순히 눈을 뜰 수 없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태양을 직시하면 눈이 아픈 것처럼, 너무나도 과다한 의념의 흐름을 마주하자, 내 상단전이 지끈거렸다.

눈뿐이 아닌, 의념의 지각이나 요족의 지각으로 보더라도, 직시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럽다.

'저건 도대체, 무슨 깨달음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 고통을 이겨내며, 기어코 김영훈의 모습을 직시하였다.

그는 황금빛 물결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단맥도법(斷脈刀法)의 무리(武理)가 김영훈의 도 끝에서 올올이 풀려나온다.

총 1초부터 17초의 단맥도법.

산을 넘고 넘어, 집에 돌아가고픈 김영훈의 마음이 만들어낸 무학.

그러나, 단맥도법의 16초와 17초는 단악검법의 23초, 24초와 그 깨달음을 공유하는 같은 오의였다.

단악검법 23초, 단맥도법 16초 산외산부진(山外山不盡).

그리고, 단악검법 24초, 단맥도법 17초.

우공이산(愚公移山).

산 바깥에 산이 다함이 없듯이.

인생에 아무리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라도.

우직하게 자신의 무를 믿고 나아가는 우공(愚公)이라면.

반드시 모든 산을 전부 밀어내어(移山)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산외산부진에 이어지는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의 최종오의.

우공이산에 담겨진 지난 삶의 김영훈의 의지였다.

그러나, 지금껏 김영훈은 우공(愚公)인 적은 없었다.

우공은 어리석은 둔재를 뜻하는 것이었으니.

무학의 천재인 그에게는 맞지 않는 말.

그러나, 어쩌면 단악검법과 단맥도법을 창시한 지난 삶의 김영훈은, 수도자들의 앞에서 절망을 맛보며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천재라도 우공(愚公)이 되지 않으면, 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그리고..

김영훈은 우공이 되었다.

아무리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길일지라도.

태산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전승하고 또 전승한 그 끝에, 비로소 산을 뚫는 데에 성공하였다.

푸확!

화르르륵!

김영훈의 상단전으로, 강기(罡氣)가 피어오르며 그의 상단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저것은...'

법술과 무공을 동시에 익힌 내 눈에, 저것의 흐름이 보였다.

'진씨세가의 비술(祕術)!'

이전, 내 제자들의 상단전에 친지의 원혼을 집어넣어 상단전을 각성시켜 재능을 강제로 활성화시키는 비법.

김영훈은 진씨세가의 비술을 무학(武學)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이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원혼이 아닌 자신의 강기로 상단전을 불태워, 지닌 바 무공 재능을 극한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그아아아아아!"

김영훈의 상단전부터 시작하여, 그의 상반신 전체가 강기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도법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회광반조(回光返照).

지기 전의 노을이 가장 불타오르듯이, 그는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는 그 광경을 놓칠 수 없었다.

김영훈의 무학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우우웅-

의념의 세계.

불타는 김영훈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아홉명의 김영훈들.

아홉 개의 강환들이, 빛을 발하며 변화하였다.

강환(罡丸)이, 허공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아니, 허공이 아니었다.

강환은 김영훈의 의식영역에 녹아드는 것이었다.

아홉 개의 강환이 차례대로 녹아들며, 점차 김영훈에게서 뿜어지는 황금빛은 진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피싯, 피싯-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 예기(銳氣)에 전신 곳곳이 베여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김영훈의 의식영역이 강환과 합일하여 실체화(實體化)되기 시작한다.

김영훈의 의식영역은, 완전한 황금빛으로 화하였다.

"도...달...한..다...!!"

쿠구구구구!

황금빛으로 실체화된 의식영역이, 일순간 마치 선(線)처럼 얇아졌다.

"반..드..시.."

황금빛의 선은, 그대로 김영훈의 도신(刀身)에 깃든다.

"하늘... 너머에...!!!!!"

강기에 스스로를 불태우면서도, 김영훈은 빛무리가 깃든 황금빛의 도를, 하늘로 휘둘렀다.

일순간 그의 도는, 빛살조차 넘어서(凌光) 하늘에 도달하였다.

번쩍!

하늘에 휘광(輝光)이 몰아치며 하늘을 지나던 구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아아...'

내 눈에서 나온 무엇인가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손으로 그것을 훔치니, 그것은 붉은 색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동시에 이해를 불가하는 깨달음에.

순간 상단전이 버티지 못하여 피눈물을 흘렸던 것이리라.

화르르...

그리고, 김영훈은 하늘을 향해 도를 휘두른 그 자세 그대로.

선 채로 죽었다.

그는 강기에 불타면서도, 마침내 도달했다는 듯.

비로소 이곳에 왔다는 듯.

웃고 있었다.

투둑, 툭...

솨아아아..

김영훈의 몸에서 강기들이 빠져나오며, 김영훈은 자신의 강기에 휩쓸려 그대로 산화(散華)하였다.

그는 빛무리가 되어, 그렇게 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그토록 도달코자 했던, 그곳으로.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김영훈이 있던 자리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는 무학의 한계를 다시 한번 초월(超越)한 대종사(大宗師)에 대한 예였다.

방금 전, 등봉조극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목도한 탓인지.

내 주변으로 어느덧 여섯 개의 강환이 떠올랐고, 회전하며 일곱 개로 쪼개졌다.

이제 남은 강환은 두 개.

두 개만 채우면, 등봉조극의 극한.

김영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그 너머의 경지에 도전할 자격을 충족하게 될 것이다.

나는 김영훈이 남긴, 새로운 깨달음.

월도입천무(越道入天武)의 책자를 살펴보았다.

뭔가 갈피가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다.

아마 등봉조극의 극의에 이르면 이를 통해서도 갈피를 잡을 수 있을 터.

'그곳까지.'

반드시 도달해보이겠습니다.

김영훈의 도광(刀光)이 하늘을 사른 탓일지.

저 멀리서 여러 수도가문의 사람들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토둔술을 써 흙 속으로 도망쳤다.

김영훈의 마지막 모습을 되뇌고 또 되뇌며.

* * *

죽을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숨결을 뱉었다.

후우우우..

황색, 흑색, 적색, 백색의 구름이 나타나서 내 주변을 맴돌았다.

지월입도, 수월입도, 화월입도, 금월입도.

죽기 전, 네 가지의 공법을 대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결국 목월입도는 익히지도 못하고 죽는가..'

나무(木)의 공법.

목 속성의 공법은 사실 일부로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다.

내 스승님을 떠올리게 하는 공법이었으니까.

나 자신이, 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릴 좋은 토양이 될 수 있을지 잘 몰랐으니까.

수명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곱 개의 강환도 전부 깨달음을 갈무리해서 안정화시켰다.

다음 삶에서도 10년만 용맹정진하면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리라.

일곱 개의 강환.

그리고 네 개의 오행공법.

전부 한두개씩만 남겨두고 아쉽게 완성하지 못한 것들.

'이쯤 되었으면, 나는 나무가 자랄 좋은 토양이 된 것일까...'

다음 삶에서,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지.'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내 주변에서 회전하는 구름들을 다시 빨아들였다.

서란의 희생으로.

김영훈의 산화로.

그리고 나 자신의 정진으로, 이 삶 전체를 다음으로 향하기 위한 밑받침으로 만들었다.

이 삶 전체가 다음을 위한 자양분.

'고요하군...'

나는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네 가지 색의 구름을 관조하며 생각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다.

'그래, 이번 삶은 마치 폭풍전야...!'

다음 번의 삶에, 나는 진정 폭풍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생에서 자양분이 되어준 이들에게, 부끄러울 수 없으니까!'

두근, 두근...

수명이 다 되어간다.

쿠구구구!

나는 동시에 다시 한번 축기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네 개의 구름이 휘몰아치며, 압축된다.

동시에 중심부에서 사색(四色)으로 빛나는 영기의 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축기에 도전했더라..?'

이젠 나도 몰랐다.

많이 도전했을 터였다.

쿠구구궁!

흔들리며, 부서지려는 영기의 별에 네 개의 구름이 끊임없이 회복을 가하며 별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너무 많았다.

네 가지 속성으로는 부족했다.

꾸웅!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축기기의 문턱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 때였다.

두쿵!

내 심장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작되었군.'

나는 강기를 심장으로 보내, 강제로 심장을 주무르며 수명의 끝에 저항했다.

두근, 두근, 두근...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

'아예 끝을 보지.'

김영훈은 자신의 남은 시간 안에 극한을 초월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스스로를 불태웠다.

천재조차 스스로를 불태웠는데, 어찌 감히 둔재따위가 죽음을 앞두고서 망설인단 말인가.

쿠구구구!

내단에서 공력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공력은 체내에서 강기화(罡氣化)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푸확!

화르르르르!

"끄...으으아아아아!"

강기를 제어해주고 영맥을 완결시켜줄 영기의 별이 없어서.

아직 축기기가 아닌 연기기 따위라서.

내 몸은 강기에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동시에 강기는 심장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날뛰게 했고, 하단전의 내단에서 뿜어진 강기가 중단전의 심장을 자극시키고 올라가 상단전에 도달했다.

김영훈이 펼쳤던 무공.

나 역시도 등봉조극이자 연기기 극성이었기에, 그 정도는 보고 따라할 수 있었다.

강기로 상단전을 불태워, 얼마 되지 않는 내 재능을 최대치로, 아니 그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꾸웅!

꾸웅!

꾸웅!

몇 번이고 그렇게 축기기의 벽을 두드린다.

동시에 나는 주변으로 강환을 띄우며, 여덟 번째 강환의 감각을 잡으려 의식을 집중하였다.

떠나보내기만 했던 삶.

제자도, 스승도, 벗도.

이 실패를 자양분삼아 다시는 잃지 않으리라.

쿠릉, 쿠르릉...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나는 강기 속에서 불타면서, 히죽 웃었다.

"왔...나..?"

얄궂게도, 이젠 저 먹장구름도 슬슬 정겨워지고 있었다.

감히 미물이 어디 하늘이 정해준 수명을 벗어나냐는 듯.

노한듯이 번개를 머금은 구름이, 저 하늘을 완전히 뒤덮었다.

나는 의념의 지각과 요족의 지각을 켜고, 동시에 금신천뢰문의 터에서 발견했던 예뢰안(預雷眼)의 법술을 발동했다.

천기를 보는 감각을 집중시켜 낙뢰의 위치를 예견하는 법술.

'아니, 법술이랄 것도 없고 그냥 요령이지.'

칠성제의로 얻어냈던 천기의 감각을 그냥 낙뢰에 조금 집중시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번개를 머금은 구름을 보면서도, 역시 이 법술은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번개를 예견하고 피할 수 있는 실력자면 그냥 번개를 막아버리거나 맞고 버텨도 된다.

반대로 번개를 예견해도 막을 수도 없는 잔챙이라면 어차피 피할 수도 없다.

빛의 속도로 내리치는 저걸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인가?

나는 강기의 휩싸여, 담담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꾸궁!

꾸구궁!

영기의 별은, 지금까지 내가 유지한 시간 중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네 속성의 법술을 대성한 결과.

역시나 오행을 대성하면 축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거욱 거세졌다.

그리고.

꾸과광!

영기의 별은 버티다 말고 결국 폭발해 버렸다.

동시에, 하늘에서 청뢰(靑雷)가 떨어졌다.

하늘의 벼락이 대지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떨어진다.

나는 강기에 휩싸인 채.

그대로 벼락을 맞았다.

그리고 벼락을 맞는 그 순간이었다.

내 주변에서 회전하는 일곱 개의 강환들.

나는 죽음의 순간, 하늘의 기운이 땅에 내려온 이 순간에 강환(罡丸)의 이치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하나가 천(天), 지(地), 인(人)으로 쪼개지고. 인간이 그 혼자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듯이... 하늘도, 땅도, 인간도 모두 혼자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닐지도.'

하늘도 땅도 사람도.

각각의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하늘 역시 땅, 사람, 그리고 하늘 자신의 영향을 받아 그 안에 천지인이 또 있고, 땅 역시 하늘, 사람, 땅 자신의 영향을 받아 그 안에 삼재가 있으며.

인간 역시 그 내면에 천지인이 다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아, 김영훈은 순환(循環)의 이치로 강환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지.'

인간은 자신을 낳아준 이들,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 자신이 낳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그 안에서 순환한다.

어쩌면 세상의 이치도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순환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청뢰(靑雷) 속에서 불타며, 그 찰나간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늘이 수명을 넘어서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는 것도, 결국에는 인간 역시 하늘에 영향을 미치기에 최대한 그 영향을 줄이려 하는 것일지도...'

김영훈이 내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서란이 내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내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천지인 속의 또 다른 천지인.

삼재가 다시 삼재로 쪼개진다.

강환의 갯수가, 늘어난다.

일곱, 여덟...그리고 아홉!

그 깨달음 속.

푸른 번개 속에서 재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일곱 개의 강환이 아홉 개로 늘어난 것을 확인하며,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것이, 나의 아홉번째 회귀(回歸)였다.

9회차의 첫날

번쩍!

나는 또 다시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떴다.

새로운 회차.

그리고, 동시에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격통!

"끄으으으윽!"

지난 삶을 제대로 돌아볼 틈도 없이, 머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우선 수결을 맺어 의식파동으로 사용하는 수면술을 써 주변 사람들을 다시 잠재워 버렸다.

"끄그그극!"

'젠장, 위험하다.'

나는 은식술을 써 의식의 크기를 누르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격통은 더 심해질 뿐이었다.

의식을 없애는 비술이 아닌, 지닌 바 의식을 '상단전 안으로 압축'해서 숨기는 비술이기에 도리어 상단전이 더 큰 무리를 받는다.

연기기 14성.

그것도 네 개의 공법을 대성해서 연기기 극성에 도달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분명히 지난 삶보다는 조금 의식의 크기가 커졌고, 그 조금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빠, 빨리 영약이 있는 곳으로..'

입에서 거품이 나온다.

나는 전신을 파르르 떨며, 머리를 부여잡고 거의 기어가다시피 황주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뚝, 뚝뚝...

입과 코, 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상단전이, 부푼다.

'어, 어떻게든 해야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의 곳곳을 점혈했다.

의술 공부를 할 때에 배웠던, 인체의 기를 증폭시키는 혈도.

쿠구구!

체내의 기가 순간 폭증했다.

나는 폭증한 기운을 바깥으로 내보내며, 기운에 의식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웅!

의식이 쪼개지며 강환(罡丸)이 만들어졌다.

그와 동시에 정신에 가해지는 부하가 조금 줄어들었다.

'체내의 기를 증폭해서 강환을 만들었다고 해도, 너무 기운이 적어서 금세 해체될 거다. 의식은 다시 돌아올 테니, 그 사이에 어서 영약을 찾아야해!'

나는 지끈대는 머리를 억누르며 황급히 황주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흙을 그대로 파헤쳐서 그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와드득, 와득..

영약이 흙째로 입에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빨리 삼을 씹어먹었고, 영약의 기운을 다스리며 단전으로 인도했다.

쿠구구구!

전신혈도를 기운이 일주천했다.

나는 기운을 인도하며 바로 환골탈태를 시도했다.

쿠구구구!

우득, 우드득, 우드드득!

전신이 오기조원에 알맞게 진화하며, 완벽한 조화력(調和力)이 상중하단전을 조화시켰다.

부풀어오르던 상단전이 중하단전과 조화를 맞추며 그 부담을 없애버렸다.

"후우우..."

나는 그제야 한숨을 내뱉으며 안도하였다.

'바로 머리가 터져 죽을 뻔했다.'

나는 미리 만들어둔 강환을 체내로 흡수해서 다시 내단을 만들었다.

내단이 자리를 잡으며 전신의 기의 흐름을 같이 통제해준다.

전신이 완전히 편안해졌다.

나는 주변에서 영약을 더 찾아 먹어서 내단을 완전히 꽉 채워버리고, 기운을 억지로 증폭시켜서 상한 정기를 안정시켰다.

'그나저나... 이젠 정말 이 의식을 어떻게 할 방법도 찾아야겠어.'

연기기 수준의 의식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축기기에 오르면 말 그대로 매 회차가 시작하자마자 머리가 뻥뻥 터져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끝없는 폭발의 굴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해.'

의식 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경각심을 가지며, 나는 그제야 지난 삶에서 얻은 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에, 등봉조극의 극의를 깨달았다.'

우웅!

장심으로 강환이 빠져나온다.

"하나에서 삼재가."

강환이 셋으로 쪼개진다.

"삼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순환하니, 그 순환에 집중한다면..."

세상 만물은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각각의 강환에 서로를 투영시킨다.

파아앗!

세 개의 강환이 다시 세 개로 쪼개진다.

'아...'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홉 개 중 일곱개는 안정적이었지만, 새로 얻은 두 개는 아직 조금 불안정했다.

하지만 안정화는 익숙함의 문제이니 몇 년 정도만 다루다보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 말은 즉, 나는 정말로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했다는 의미였다.

파아앗!

눈을 감았다 뜨며 의념의 세계에 진입하자, 내 주변으로 아홉 명의 내가 서 있었다.

"들어와라."

파아앗!

아홉 명의 내가, 순간 내게 다시 겹쳐졌다.

사고의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폭증하는 것이 느껴졌다.

"10배 가속."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파앙!

나는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오기조원 때처럼 공기의 흐름과 영기의 흐름 같은 걸 감지해서, 최적화 된 곳을 밟을 필요조차 없다.

어디를 밟아도 느릿느릿하니 전부 껑충껑충 뛰어다닐 수가 있어졌다.

마치 정말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좋군.'

나는 느려진 세계를 부유하며, 하늘 높이 떠올라 생각을 정리했다.

김영훈이 남긴 월도입천무.

그 구결들 역시 뭔가 갈피가 잡힐 것 같았다.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는, 강환을 의식과 일체화시켜 의식을 실체화시키는 것이 주이다.'

하지만 '어떻게' 일체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월도입천무를 떠올려보아도 조금 아리송했다.

천재냐 둔재냐, 경험이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김영훈에게만' 적용되는 사례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김영훈의 주관성이 짙었다.

'이건 추후에 김영훈을 등봉조극으로 끌어올린 후에 물어봐야하는가...'

어차피 이번 삶에는 오행공법을 전부 대성해야 하기도 하니, 그가 등봉조극까지 오르는 시간은 기다려줄 수 있었다.

'흠, 좋아 그러면 월도입천무에 대해서는 너무 티가 나지 않는 선에서 김영훈의 느낌을 빼고 다시 그에게 전승시켜주면 될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허공을 부유할 때였다.

찌릿!

"음?"

의념의 세상.

한 줄기 붉은 의념의 선이 내게 와닿았다.

적의(敵意)!

의념의 선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 아래 숲 속.

백색의 거체(巨體)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오싹!

'여우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호신강기로 전신을 뒤덮었고, 다음 순간.

여우가 내 앞에 나타나 허공에서 회전하며 꼬리를 내리쳤다.

꾸광!

파공성이 울리며, 나는 극속으로 땅 아래에 처박혔다.

[이 놈. 왠 놈이길래 감히 내 영역에 침입했느냐. 내가 이 숲의 주인임을 모르느냐? 내 허락 없이 감히 이 숲에 들어왔느냐?]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서란에게 배운 요족어로 여우에게 대답했고, 여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족어를 하는 걸 보니, 역시 요괴놈이 맞군. 같은 요족으로서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내 영역에 들어오다니, 죽을 준비는 한 것이겠지!"

'이런 젠장.'

"숲의 주인이여, 전부 오해입니다. 저는 등선향의 공간균열에 휘말려서 이곳에 떨어졌을 뿐입니다!"

"오호, 좋은 변명이군. 하지만 이걸 어쩌나, 등선향의 중심부 말고 이 인근은 공간이 안정적인데? 내 흔적을 맡고도 내 영역에 허락없이 감히 들어왔다고 변명을 하는 게냐?"

'날 같은 요괴로 인식하는 건가?'

아무래도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 인간이 그의 영역에 들어온 것과.

같은 요괴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것은 다른 문제인 듯 싶었다.

"일단 제가 요족으로서 견문이 짧아 숲의 주인의 흔적을 잘 몰랐습니다. 그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축기경 극한에 인접한 영성(靈性)을 요단에 품어놓고 그따위 거짓말로 나를 농락하려 드느냐?"

여우가 허공을 밟으며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죽어라, 침입자 놈!"

파아앗!

완전히 새하얀 빛이 된 요호(妖狐)가 내게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나는 이를 악물며 요호의 공격을 피하고, 우선 동료들이 있는 곳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괜히 나와 요호의 싸움에 말려들면, 아직까진 범인에 불과한 동료들은 말 그대로 갈려나갈 터였다.

우우웅!

여우가 의식영역을 퍼뜨렸다.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거대한 의식영역이 느껴졌다.

여우가,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파아앗!

동시에 여우의 의식영역이 압축되며 여우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의식영역이 여우와 겹쳐지며, 여우가 다시 한번 새하얗게 백열한다.

번쩍!

마치 하얀 빛 그자체로 변한 듯 하다.

여우는 10배로 가속한 내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오며 앞발을 내리쳤다.

'빠르다!'

나는 황급히 여우의 앞발을 피하며 저 멀리 있는 작은 구릉을 넘어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번쩍!

꾸구구구!

백색의 빛이 폭발하며 작은 구릉 하나가 통째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여우 형태의 백색 광망들이 내게 날아왔다.

작은 산을 통째로 없애버리고도 상대를 노리는 힘!

'결단경 여우 녀석이다.. 정면으로 붙으면 죽는다.'

나는 여우의 공격을 피하고, 계속해서 도망쳤다.

파아앗!

여우가 또 다시 백색의 빛살처럼 변해 나를 쫓아온다.

'한 순간, 틈을 노린다!'

파공성이 터지며 여우가 내 앞에 당도한다.

녀석의 입이 벌어진다.

나는 자세를 잡고 장심에서 강환을 하나 뿜어낸다.

가속률이 떨어졌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환에 강기를 연결한 다음 휘둘렀다.

월악!

꽈과광!

빛이 폭발하며, 여우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약간의 흔적만이 남았을 뿐.

여우는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다.

강환은 분명 기습을 한다면 아무 대비도 하지 않는 인족 결단기 수도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가능했으나.

열이 잔뜩 받은 채 기운을 한껏 끌어올린 결단경 요족에게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여우는 내 강환을 한대 맞고 더욱 짜증이 났는지, 기운을 더 크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네 이놈. 죽여버릴테다!"

파아앗!

백광이 비춰지며, 여우의 주변으로 여우와 닮은 수 개의 분신들이 늘어선다.

집채만한 여우의 분신들이 일제히 백열하며 한줄기 빛살이 되었다.

꽈광, 꽈과과광!

등선향의 강과 작은 호수가 증발한다.

구릉 두어개가 무너지고, 폭음이 사방을 울렸다.

나는 미친 듯이 여우의 공격을 피하며 등선향의 끝자락으로 달렸다.

'젠장, 인족보다 육체의 강도도 단단하고, 대비도 하고 있어서 강환조차 안 먹힌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나마 가속을 하면 연기기 극성을 넘어선 수준의 의식을 가진 나는, 김영훈보다도 훨씬 가속의 효율이 좋았기에, 결단경 여우의 속도를 따라서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다.

'속도 말고는 아무것도 안 통한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최대한 도망치는 게 상책.

심지어 그마저도 여우가 괴상한 요술을 쓰면 가끔 따라잡힐 뻔하기도 한다.

"등선향 바깥으로 떨어뜨려주마, 침입자 놈!"

"이런 제길, 오해라고 말했.."

꾸과과광!

여우가 입을 벌리자 백색의 빛이 튀어나오며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망할 여우 놈 같으니...'

어쨌든 슬슬 동료들한테서는 충분할 만큼 떨어졌다.

여우가 나를 찾겠다고 광분하며 날뛰어도 동료들이 죽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여우를 보며, 허공을 향해 수도를 그었다.

"월수궁무록."

슈칵!

인지가 베여나가며, 나는 여우의 의식의 사각에 진입했다.

여우의 입장에서는 내가 갑자기 허깨비처럼 사라진 모양이니, 당환한 듯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월수궁무록은 의식을 잘라내어 숨고 도망치는 방법.

조수월무록은 자신의 의식을 잘라내어 어검에 입력하는 법.

월수월무록은 어검에 의식을 입력해서 의념의 화신으로 이루는 방법 등에 대해 기술되어 있었다.

월도월무록이야 월수월무록에 시행착오가 추가된 것이었고.

월수궁무록과 기타 무학서들은 경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었다.

'아니, 김 형이 만든 무학은 대부분 경지에 상관없이 요긴하게 쓸 수 있지.'

그 점은 언제 생각해도 대단한 듯 했다.

"이 침입자 놈! 당장 나오지 못하겠느냐!"

여우의 음성이 영기를 타고 진동한다.

여우는 그의 사각을 파고들어가 숨어있는 나를 찾으며 날뛰었다.

'너무 깊게만 파고들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터.'

지금의 내 실력이라면 여우의 목전에 걸어들어가지 않는 이상 월수궁무록으로 며칠을 버틸 수 있었다.

'젠장, 이번 삶을 시작하자마자 여우 놈한테 도망치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만...'

너무 경솔했다.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한 상태에서 너무 흥분했다.

'내단만 만들고 얌전히 박혀있었어야 했는데... 나머지 동료들은.. 사흘 정도는 그래도 잘 버티겠지..? 아니면 월수궁무록으로 몸을 숨기고 돌아가면..'

그 때였다.

"어디 주변을 초토화시키고도 안 나오나 보자!"

여우가 다시 요술을 쓰기 시작했다.

여우의 몸이 백열하더니, 여우의 주변으로 날카로운 백색의 가시 같은 것이 수천 개가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강환과 맞먹는 공격.

그 무수한 가시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푸드드드득!

촤아아악!

끼룩끼룩끼룩!

연기기급의 기운을 가진 요수들, 새들, 벌레들이 음양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을 감지한 것인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새들과 벌레떼들이 날아오르며 범위 바깥으로 도망친다.

'망할 여우 놈..!'

지난 삶의 귀혼이 그랬던 것처럼, 전부 내게 날아오는 것이라면 쳐낼 수라도 있겠지만, 저건 그냥 무작위로 한 번이라도 걸리라는 식으로 지상에 내려꽂는 요술이 분명했다.

백색의 가시들이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파아앗!

쿠구구구구궁!

새하얀 비가 쏟아져내렸다.

나는 사고를 가속한 상태에서 미친 듯이 산군월악비를 밟으며 가시들을 피했다.

인근의 숲이 삽시간에 초토화된다.

'동료들한테서 떨어져서 다행이군...'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미친 듯이 나를 찾아 발광하는 여우의 앞에 다시 나타났다.

동료들과 떨어져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더 떨어뜨려 놓아야 할 것 같았다.

* * *

사흘이 지났다.

나는 여우에게서 사흘동안 쉬지않고 도망다녔다.

누가 결단경 괴물이 아니랄까봐, 여우는 사흘동안 나를 찾으려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음에도 하나도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제 슬슬 지쳤을 텐데, 썩 나오지 못하겠느냐?"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몸을 숨긴 채 숨을 골랐다.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도망다니느라, 내단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빌어먹을 괴물딱지..'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속으로 여우를 욕했다.

여우의 의념은 황금빛이 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침입자인 나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가 가득했지만, 며칠 사이에 슬슬 월수궁무록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이제 여우는 나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마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제대로 된 일격을 꽂아서 끝장을 낼 터였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숨을 골랐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다.'

"당장 나오너라, 정체모를 요족 녀석아. 지금 나오면 사지를 뜯는 것으로 내 영역을 멋대로 침범한 무례는 봐 줄 것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월수궁무록을 해제하고 여우의 앞에 섰다.

"오호, 드디어 포기한 거냐?"

"아니, 음양의 흐름을 잘 봐라. 주변의 영기가 흔들리고 있지 않으냐?"

"이 놈이 무슨.."

나를 보며 으르렁거리려던 여우가, 멈칫하며 눈을 부릅떴다.

천지영기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너무 약했을 때는 몰랐지만, 오히려 강해지니 더욱 더 잘 와닿는다.

천지영기와 음양의 흐름이 떨리며 비틀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것만으로 산천초목이 몸을 떤다.

"아, 아아아..."

여우가 침을 질질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천인(天人)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히, 히익...!"

여우는 공포에 떨며 달아나려고 했으나, 흑색의 마의를 입은 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크아아악!"

여우의 혼백(魂魄)이 그대로 마의인의 소매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쿠르릉!

하늘에서 한 줄기 금빛의 번개가 내리치며, 여우의 육신을 불살랐다.

여우의 뼈와, 요단으로 보이는 영롱한 구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금색 장포를 입은 이가 손짓을 하자 여우의 요단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런, 한 발 늦었군. 그럼 이건 내가 챙기지."

우웅!

청갑을 입은 거한이 허리춤의 저물법기를 열자, 여우의 뼈가 저물법기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나저나... 이건 뭐지? 아까 멀리서 볼 때 여우한테서 도망치고 있던데."

"흠, 법력이 안 느껴지는데... 또 의식은 축기기 초반 급이고, 뭔가 특수한 공법을 익힌 놈인가?"

"흠흠, 그런데 그 요단 나 주면 안되나?"

금벽호와 백골귀마, 창호자였다.

금벽호와 백골귀마는 나를 보며 두런거렸고, 창호자는 금벽호에게 요단을 요청했다.

"시끄럽네, 청문선우. 그나저나 저 놈 단전에 요단 같은 게 느껴지는데, 인간인가 요괴인가?"

"혼혈이라면 요괴의 특징도 일부 드러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원영기 수준이라서 완전히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요괴라기엔 결단경 잡것한테 쫓기고 있었는데... 정말 이건 뭐지?"

"이보게 금 도우. 정말 이러긴가? 그 요단이 내 제자 중 하나에게 잘 맞는 기운을 가지고 있단 말이네."

창호자는 나를 신경쓰지 않고 끊임없이 금벽호에게 매달렸으며, 참다 못한 금벽호가 고함을 질렀다.

"시끄럽다고 했지 않나! 창호자라는 명성에 맞게 좀 행동하게!"

콰르릉!

그가 분노한 것만으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며 창호자를 지졌다.

"이 녀석이, 갑자기 또 난리로군..!"

쿠과광!

창호자 역시 참지 않는 성격인지 주먹을 뻗어 금벽호를 후려쳤고, 백골귀마는 둘을 말리려는 듯 하다가 갑자기 싸움에 휘말려 셋이 싸우게 됐다.

쿠구구구!

천지영기가 마구 어그러지며, 주변으로 폭풍이 불어닥치는 듯 했다.

'이런 젠장..!'

내가 싸움의 폭풍에 휘말려 날아갈 때였다.

"아, 잠시만. 저 놈이 있었지."

창호자가 나를 떠올렸다는 듯 허공으로 날아가던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의 천지영기가 움직이며 나를 자연스레 그의 앞으로 데리고 갔다.

"자자, 싸움은 그만하지. 새파란 후배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창호자는 태연한 얼굴로 내 뒷덜미를 잡고 껄껄 웃었고, 얼마 후 백골귀마와 금벽호 역시 짜증이 난 기색으로 싸움을 멈췄다.

"네 놈이 먼저 시작해 놓고서는...!"

"무슨 소리, 자네가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나를 벼락으로 때렸지 않나?"

셋은 서로 싸우면서도 진심으로 적의는 드러내지 않는 듯 했다.

'원래 막역한 사이였나.'

[그나저나, 너는 그래서 정체가 뭐냐? 인족이냐, 요족이냐. 어떻게, 왜 등선향에 왔지?]

창호자가 의식을 통해 내게 물어왔고, 나는 벽라국어를 써서 대답해 주었다.

"저는 조금 특이한 체질을 지닌 인족이고, 특이한 체질일 뿐 혼혈은 아닙니다. 동료들과 어디를 가던 중 공간 균열에 휘말려서 등선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오호, 벽라국어를 할 줄 아는군. 그래, 특이한 체질이라. 확실히 자세히 관찰해 보니 요단하고는 기운이 미묘하게 다르긴 하군. 거기에 축기경급 요수의 영성이 서렸을 뿐 진짜 축기경급 기운의 농도는 아니야."

"예 그렇습니다."

"혼혈이 아닌데 요단을 가진 인간이라, 도대체 이건 무슨 체질..."

창호자가 나를 살펴볼 때였다.

흠칫!

창호자, 금벽호, 백골귀마 세 천인이 한쪽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이, 이 기운은!"

"잘못 느낀 게 아니겠지!?"

"일단 너와는 나중에 말하지. 가 보자!"

파아앗!

세 천인기 수도자들이 나를 데리고 한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였다.

순간 빛이 번쩍 하는 듯 하더니, 나는 내가 처음 눈을 뜬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머리가 두 개인 뱀에게 피를 빨아먹히며 죽어가고 있는 직장 동료들이 있었다.

[허, 헛..!]

머리가 두 개인 붉은 뱀이 몸을 흠칫 떨며 위를 올려다 보았고, 그 순간 벼락이 떨어지며 붉은 뱀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흠, 이 녀석들이군. 이 녀석들에게서 그 기운이 느껴졌어..!"

창호자가 내 뒷덜미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몸에서 푸른 빛의 기운이 뿜어지며, 동료들에게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뱀에게 피를 빨린 채 죽어가던 동료들은 모든 상처가 사라지며 완전히 살아나 버렸다.

그리고 예의 선별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명훈 과장, 강민희 대리, 오현석 차장이 각각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에게 잡혔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괴군도, 서휼도 못 믿는다.'

물론 이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금신천뢰문의 기록을 읽었을 때, 그들은 자기 제자는 소중히 여긴다고 나왔고.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에 남아있던 그 천인기 분혼 역시 자기 종문에 관련한 것을 지키려 하다가 고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창호자는 그냥 인품이 좋고...'

서휼과 괴군이 남은 이들을 차지하게 둘 수 없었다.

"선배님들, 부디 후배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평소부터 금신천뢰문을 흠모해 왔고..."

나는 성제국어로 금벽호를 쳐다보며 말했고.

"청색귀골곡 역시 그 명성을 들어 존경해 왔습니다."

흑풍해의 섬들에서 쓰이는 언어로 백골귀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천인기 분혼이 흑색귀골곡을 청색귀골곡이라 칭했던 것을 기억하며 청색귀골곡이라 칭하였다.

"또한 창호자 님의 후예인 청문세가는 그야말로 투도를 숭앙하는 위대한 가문 중 하나로 알고 있지요.

세 천인들께서 저를 보셨고, 천상금뢰지체와 귀도음화선근, 일문성체 등의 특이한 체질을 가진 셋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본래 헤어진 제 동료들이고, 여기 있는 나머지 역시 상당히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자질이 부족한 바, 선배님들께 뽑힐 것은 기대하지 않으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여기 나머지 둘의 자질도 보아 주십시오!"

내 말에, 세 천인은 서로를 쳐다보더니 각자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흠, 예의를 아는 놈이니 함부로 내 앞에서 입을 놀린 건 용서하마. 하지만 자질이고 뭐고, 네놈의 나머지 동료라는 놈들은 아예 영질이 없다만?"

금벽호가 콧웃음을 치며 말했다.

"차라리 저것들의 자질을 검사할 바에야 결단경 여우한테서 도망치던 네놈의 자질을 검사하는 게 낫겠지."

화악!

천지영기가 움직이며, 나를 금벽호의 앞으로 끌고갔다.

얼마 후 금벽호의 의지에 따라 천지영기가 내 몸 곳곳을 헤집었고, 금벽호는 혀를 찼다.

"뭐야, 오행영질이잖아? 특수한 능력은 쓸만해 보이지만 수련 속도가 너무 느리겠군... 안타깝지만 네놈은 필요 없다."

오행영질이라는 말에, 내게 관심을 보였던 백골귀마와 창호자 역시 약간 흥이 식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결단경 여우한테서 도망치던 것은 인상깊었으니, 청문세가에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추천권을 주마. 네 실력이라면 남아있는 내 방계 가문에서 장로직은 받을 수 있을 거다."

백골귀마는 내게서 관심을 껐고, 창호자는 푸른 낙인을 내 손등에 그려주며 이전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안 돼, 절대로 남은 동료들을 서휼과 괴군, 두 작자한테 보낼 순 없다.'

"존귀하신 세 천인께, 제 동료들이 지닌 바 자질을 설명해드리려 합니다."

"자꾸 헛소리하지 말아라. 네 동료들은 자질이고 뭐고 영질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금벽호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절박한 목소리로 세 천인 앞에서 김연 주임과 오혜서 대리의 자질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세 천인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허어, 그게 정말이냐? 허황된 거짓말이 아니라?"

"네 이놈. 그 무슨 소설 같은..."

"너무 허황된 말이다만... 뭐 좋다."

창호자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뱃속에 요단을 품은 순혈 인간도 만나고, 말도 안되는 신화속 자질의 인물을 셋이나 만났는데, 어디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보지. 이보게 허곽."

창호자가 백골귀마를 보며 오혜서와 김연을 가리켰다.

"우리 중 의식공법에 제일 정통한 사람은 자네니 자네가 한번 저 여자부터 검사해 보게나."

"흥, 말도 안되는. 천지를 뒤덮을 의식? 그런 게 있었다면 저 범인은 진즉 머리가 폭발했을 것이거늘."

백골귀마는 불신이 어린 눈빛으로 김 주임에게 다가갔고, 김연 주임은 뒷걸음질을 칠려 했으나,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거뭇거뭇한 그림자들이 그녀를 잡고 고정하였다.

김 주임은 검은 그림자들이 보이지 않는지, 그냥 몸이 안 움직인다고만 생각하여 마구 비명을 질렀고, 백골귀마가 김 주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순간 백골귀마의 손 끝에서 귀기(鬼氣)가 일더니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저 흐름은..'

진씨세가의 비술과 큰 틀이 비슷했다.

아무래도 진씨세가의 비술은 흑색귀골곡에서 영향을 받은 듯 했다.

다음 순간.

"아아아아악!"

김 주임의 눈, 코, 입에서 피가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파아아앗!

퍼엉!

그녀의 상단전에서 미약한 영기가 터져나오더니, 천지사방(天地四方)으로 실선 같은 의식이 뻗쳐나갔다.

그 의식의 크기는 천인기 수도자들의 의식의 범위를 벗어났고, 말 그대로 온누리를 다 메우는 듯 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골귀마, 금벽호, 창호자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마구 그녀를 흔들었다.

[본 금신천뢰문에 들어오면 내 직전제자 자리를 주마!]

[본곡 역시 마찬가지다! 내 제자가 되면 배분은 현 장문인과 같은 배분이 된다!]

[다 필요 없다! 영근이 생기는 영약은 얼마든지 먹여줄테니 창천개벽문에 들어와라! 장문인 자리도 넘겨주마!]

파아앗!

백골귀마가 귀기를 조작하자, 부풀어 오르며 터질 것 같던 그녀의 상단전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이제 김 주임의 자질을 확인했으니, 오 대리의 자질도 무조건 확인하려 들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최소한 서휼과 괴군의 손에 떨어지진 않으리라.

'금신천뢰문도, 흑색귀골곡도, 창천개벽문도...'

최소한 자기 사람은 챙기는 종문이었다.

서휼처럼 계교를 부리진 않고, 괴군처럼 미치광이도 아니었다.

'서휼과 괴군은 내일 나타나니까, 이들이 데려간다면..'

그리고, 그 때였다.

휙, 휙, 휙!

김 주임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세 천인이, 승천문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작은 점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뭣..."

나는 그 점의 정체를 확인하고 평정심을 잃었다.

'내일 나타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괴군(怪君!)]

금벽호가 비명을 지르듯이 그를 불렀다.

쿠우웅!

그리고, 삽시간에 이곳으로 거대한 괴뢰가 도착했다. 그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곱사등이 노인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상계의 선사가 강림한 줄 알았건만. 작은 범인이었을 줄이야. 말도 안되는 재능이군. 내 제자로 삼아야겠어.]

명(命)(1)

[오호라, 그나저나 이건 또 누구야? 그 삼인방이 아닌가? 자네들 원영기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컸군!]

[괴군!!!!!!]

백골귀마가 눈을 뒤집으며 시커먼 귀기를 흩뿌렸다.

그의 일갈에 사방천지에서 귀곡성이 들끓으며 천지가 진동하였다.

[네놈, 네놈...!!!]

"참게, 비승 전에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건가?"

"어차피 저 늙은이도 비승 전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고 싶진 않을 거야."

발작하려는 백골귀마를, 금벽호와 창호자가 어깨를 잡고 말렸다.

괴군은 그런 그들을 보며 끌끌 웃더니 괴뢰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우리 앞에 내려섰다.

[맞는 말이지. 하늘길이 열리는 지금같은 상서로운 시기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고 싶진 않다. 그러니 저 범인을 내게 준다면 본로는 그냥 물러가도록 하지.]

그 말에 세 천인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금벽호가 괴군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상상을 뛰어넘는 재능인지라 넘겨주긴 힘들겠군."

"욕심은 그만 부리시지, 늙은이. 본곡의 섭명함, 그 핵심까지 뽑아갔으면서 뭘 더 탐내는 건가?"

그 말을 듣던 괴군은 클클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 그렇지. 자네들 배에서 가져온 동력장치 말인데, 성능 확실하더군. 개조해서 [그녀]의 심장으로 달아놨다네. 덕분에 [그녀]가 한층 완성되었어. 자네들 흑색귀골곡한테는 늘 고마운 마음일세.]

창백하던 백골귀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섭명함의 동력원을 고작 꼭두각시 하나에 박아놨다고..! 대형 종문 하나의 영맥을 전부 합친 것보다 강한 그것을 고작 꼭두각시에..!"

[고작 꼭두각시..?]

그리고, 괴군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시 말해봐라. [그녀]가 고작 꼭두각시라고..? [그녀]는 살아있다. [그녀]는 완전해질 존재다. [그녀]는 내 인생의 전부다..! 네놈, 나머지 섭명함도 다 박살내달라는 게냐..!]

쿠웅!

괴군이 품 속에서 나무상자를 꺼내 던지자, 나무상자의 크기가 커지며 괴군만한 크기로 변했다.

괴군이 커다란 나무상자의 뚜껑에 손을 얹었다.

'저물법기인가..?'

저물법기들에서 나던 영력파동과 똑같은 파동이 상자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일반적인 저물법기보다 훨씬 많은 것이 들어있는 듯 훨씬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덜걱-

괴군이 나무상자의 뚜껑을 들어올리려 할 때였다.

"그걸 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괴군..!"

촤아악!

백골귀마가 허리춤에 있던 저물법기를 열자, 시커먼 어둠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뭔가를 뿜어냈다.

쿠과아앙!

거대한 뭔가는 허공에서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약 십 장 크기의 거대한 문(門)으로 변해서 우리의 뒷편에 떨어졌다.

문의 문짝에는 거대한 귀왕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끼이이익!

귀왕의 문이 열렸다. 그 문의 안쪽에는 시커먼 어둠이 가득했으며, 어쩐지 바닷바람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찰랑, 찰랑..

동시에 문 뒤쪽에는 물들이 가득 차있는 공간인듯,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안력을 돋워서 문 안쪽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문의 안쪽에는, 살이 애릴 듯한 귀기와 음기를 내뿜는, 거대한 전함(戰艦) 두 대가 시커먼 암해(暗海) 위쪽으로 떠올라 있었다.

'섭명함..!'

비록 문 안쪽에 있는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았으나, 저 섭명함 두 대에서 느껴지는 귀기는 지난 삶에 보았던 다 박살난 섭명함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저 배 두 척 안쪽에서는 어쩐지 백골귀마와 비슷한 정도의 기세를 가진 존재들도 몇몇이 느껴졌다.

'자기 종문을 압축해서 가지고 왔단 말이 정말이었군..'

백골귀마는 두 대의 섭명함을 내보이며 괴군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걸 열면 여기서 다시 전쟁을 하겠단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경고하건데, 그걸 열지 마라..!"

[흐음..]

끼이익..

그러나 괴군은 백골귀마를 의미심정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상자의 뚜껑을 조금 더 열었다.

그러자 창호자와 금벽호의 안색 역시 굳었다.

"괴군, 금신천뢰문 역시 경고컨데, 그걸 열지 마시오. 아무리 당신이 일인군단(一人軍團)이라지만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소?"

"나 창호자도 경고하겠소. 그것들을 꺼낸다면 나 역시 좌시할 수 없소! 정녕 등선향을 지워버릴 작정이오!?"

파지지직!

금벽호가 양손을 모으자, 뇌기가 모이는 듯 하더니 뇌기 속에서 작은 모형 전각(殿閣)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 전각 안쪽에서는 굉장히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창호자 역시 허리춤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펼쳤다.

두루마리는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저절로 펼쳐졌고, 두루마리 안쪽에는 하나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산수화 안쪽에서도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괴군이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흐으으으음.....]

끼이이익...

상자의 뚜껑이 더 들어올려졌다.

[네 이놈..! 정말 우리와 전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군!]

[너무 우리를 얕보는 게 아닌가!]

쿠릉, 쿠르르릉...

맑던 하늘에 먹장구름이 끼며, 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 천인이 영력을 끌어올리며 괴군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괴군은 그들의 기세를 받아내면서도 태연한 기색이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으냐고? 당연히 아깝지 않지. 이미 한참 전에 내 마음이 죽어버렸는데, 더 살아서 무얼 한다는 말인가? 네놈들이야말로 내 심기를 더 건드리지 말고, 그 범인을 남겨둔 채 빨리 승천문으로 꺼지는 게 좋을 거다.]

[흐, 본 곡과 싸울때도 겨우겨우 섭명함 한대를 박살내고 도망친 주제에... 금신천뢰문과 창천개벽문까지 합세한 지금 상황에서 우리 세 종문이 네게 밀린다는 게냐?]

[흐하, 그때 네놈들을 아예 망문(亡門)시키지 않고 조금만 손봐준 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는 걸 모르는게냐? 그리고 그나마 네놈들과 싸운 직후가 내가 제일 약해졌을 때였다. 나를 상대하려면 그때 합심해서 상대했어야지.

지금은 [그녀]의 심장도 완성됐기에 오히려 그때보다 상대하기 힘들 게다... 잘 생각하거라.]

끼이이익..

괴군이 상자의 뚜껑을 더 열었다.

동시에 상자의 틈 사이로 수많은 속성의 영기(靈氣)가 뿜어졌고, 세 천인이 더욱 더 긴장을 끌어올리며 괴군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쏴아아아-

주변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억.. 헉.."

동시에, 오혜서 대리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쓰러졌다.

쿠릉, 쿠르릉..

원래부터 천인들과 괴군의 기세싸움에 먹장구름이 있었으나, 더욱 더 먹장구름의 흐름이 빨라졌다.

'뭣, 오늘 힘을 각성했다고..?'

나는 그녀가 뭣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 짐작을 하며 흠칫 놀랐다.

이 역시 예정보다 하루는 빠른 일이었다.

동시에 세 천인과 괴군의 눈길이 오혜서 대리에게 향했다.

[호오, 저건 또 뭔가.. 신기한 혈맥인걸?]

괴군이 눈빛을 번뜩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세 천인 역시 오 대리를 보며 눈을 빛냈다.

[내 생체괴뢰들의 기운에 반응하는 건가..? 아, 그렇군. 해룡족 왕족들로 만든 괴뢰도 있었는데 그 영수(靈獸)의 혈통에 반응하는 것이로구나? 하하, 이거 해부해보고 싶어지는 걸?]

괴군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오혜서 대리에게 성큼 다가갔고, 세 천인이 기세를 끌어올리머 앞을 막아섰다.

[이 자리에 있는 놈들 중 누구 하나라도 네놈에게 넘겨줄 것 같으냐, 괴군!]

[비키지 않으면 전부 죽여 생체 괴뢰로 보충시켜주마.]

끼이이익...

괴군이 상자의 뚜껑을 더욱 들어올럈고, 세 천인의 얼굴이 더더욱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들의 기세만으로 천지가 부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콰르르릉!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이더니, 어느새 장내에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푸른 장포를 입은 푸른 머리의 청년.

이마에는 작은 뿔이 돋아나 있었고, 점잖은 기운이 느껴지는 이였다.

[이거, 천지가 비틀리며 뭔가가 내 혈맥을 부르길래 예정보다 서둘러 와봤소만. 익숙한 얼굴들이 있을 줄이야..]

해룡왕 서휼.

결국 저 자까지 지난 삶과는 다른 시간에 나타나버렸다.

[오랜만이시구려, 금 태상문주. 허 원로원주. 청문 문주. 그리고...]

서휼은 눈웃음을 지으며 괴군에게도 인사를 했다.

[괴군 노야께서도 와 있으셨구려. 멀리서 급히 오면서 바람결에 듣자하니, 노야와 세 분들께서 갈등이 있으신 듯 한데... 본 왕이 중재를 해도 되겠소?

다들 이 상서로운 시기에 이 등선향에서 싸우다니, 서로 원하진 않을 게 아니외까. 특히 노야께서는 등선향을 부수려 하시지 말고 그것을 닫아 주시지요.]

서휼의 등장에, 괴군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세 천인은 반색하였다.

[하하, 점잖은 서 용왕께서 말하신다면 믿을만하지.]

[그래, 서 용왕께서 지금껏 얼마나 많은 분쟁을 중재하고 갈등을 평화로이 해결하셨소이까. 저 늙은이에게 정도를 지키라고 얘기를 해 주셨으면 하외다.]

[나 역시 서 용왕이라면 믿을만 하오.]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는 서휼을 반기며 그에게 신뢰를 보냈다.

그러나, 괴군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푸흑, 푸큭큭큭.. 푸키킥.. 뭐? 저 놈이 분쟁을 중재하고 평화롭게 해결을 해? 저 놈은 그동안 분란의 씨앗을 퍼트리고 갖은 계교와 모략으로 전 대륙에 수많은 전화를 불러일으킨 놈이건만. 네놈들은 뇌가 없는 것이냐?]

그 말에 금벽호가 말했다.

[괜히 서 용왕을 음해하지 마시오, 괴군! 인망이 없는 당신과는 다르게 서 용왕은 지금껏 수많은 갈등 사이에서 중재를 해 왔소.]

[푸흐하하하하! 하나같이 다들 자기 문파에만 틀어박혀 업무만 보니 저 놈의 본질을 모르지. 나처럼 자유로이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다녀야 눈이 트이는 법이다.

저 놈이 선하고 인망이 많으며 점잖은 놈 같더냐! 저놈은 마음이 망가진 놈이다.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을만큼 두꺼운 가면을 얼굴에 박아놓고, 속내를 숨기는 놈이다.]

[흥, 누구나 자기 속내는 어느 정도 숨기는 게 당연한 게 아니오?]

[크흐, 네놈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 거냐. 아니면 우리처럼 마음이 망가지지 않아서 그런 거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마음이 망가진 이들끼리만 통하는 게 있다. 나 역시 마음이 망가졌기에, 썩어들어갔기에 동류를 잘 알지! 저 놈은 나와 같은, 아니 나 이상으로 마음이 비틀리고 썩은 괴물이다!

서휼아, 네가 가면을 아무리 쓰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그 속내를 못 들여다볼 것 같았느냐? 나는 볼 수 있다. 나는 네놈과 같이 마음이 망가진 사람이니 말이다.]

[...]

서휼은 괴군의 말에 답하지 않고 점잖게 웃을 뿐이었다.

[서휼아, 서휼아. 이미 썩고 죽은 마음이라고 해서 그렇게 가면 속에 가둬놓으면 더욱 더 마음의 병이 도질 뿐이다. 차라리 나처럼 시원하게 가면을 벗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게 낫지 않으냐.]

[...하하, 본 왕은 평생 마음 가는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마음 가는대로 했음에도 거리끼며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이 어찌 감사한 삶이 아닙니까.]

[흐흐, 그 많은 분쟁과 고통을 낳은 게 네가 마음가는 대로 한 거라... 정녕 괴물이 되어가는구나. 네 사정이야 잘 모르지만 잘 선택하거라.]

서휼은 말없이 싱긋 웃으며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그에게 말하였다.

[충고 고맙소이다, 노야.]

[나보다 나이도 많은 게 노야는. 가식적이기도 하구나.]

[배울 게 있는 분이라면 누구든지 삶의 선배로 삼는 게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백골귀마가 혀를 찼다.

[서 용왕께서 고생이 많소이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저 노망난 괴물이 음해하다니. 마음의 병은 무슨 병! 오히려 저 미치광이 늙은이가 마음에 병이 난 거겠지.

저만 아는 미친 논리로 멀쩡한 인간들을 괴뢰로나 만들어 다니는 미치광이가 누구를 욕한단 말이오!]

[나만 아는 미친 논리가 아니다 멍청한 놈. 나는 세상의 이치 중 하나를 깨달았고, 그를 실현시키려 다른 이들을 진화시켜준 것이니라!]

백골귀마는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더 상대하지 않고 서휼을 바라보았다.

[저딴 미친 늙은이와는 더 싸우고 싶지 않군. 해룡왕께 중재를 부탁드리오.]

[알겠소이다. 노야, 그리고 세 분이 다투시는 근본적인 사유가 저 인족들 때문이지요?]

[그렇소. 저들은 우리가 분명 먼저 발견했고, 제자로 삼아도 우리에게 우선권이 있소. 그런데 저 막되먹은 늙은이는 무조건 우리에게 꺼지라고 하고 있소이다!]

[흐, 네놈들이 저 녀석들을 가르치면 얼마나 잘 가르칠 수 있울 것 같으냐. 저 녀석은, 특히 저 의식을 가진 녀석은 내가 제일 잘 가르칠 수 있다. 내 안목으로 볼때 해룡족의 혈맥을 빌려 호풍환우를 부린 저 여자는 영수인 네가 제일 잘 가르치겠지.]

괴군은 김 주임을 가르키며 다시 자신을 가르켰고, 오 대리를 가리키며 다시 서휼을 가리켰다.

[무슨 미친 소리! 우리 청색귀골곡에는 없는 속성 공법이 없다. 본곡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

[네놈 흑색귀골곡이 얼마나 늙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공법이야 썩어터질 정도로 많은 건 안다만 제대로 가르칠 스승이나 있냔 말이다. 특히나 나는 의식에 관련된 공법을 많이, 다방면으로 익히고 있어 의식을 통제하는 신통은 훨씬 많이 가르칠 수 있다만?]

서휼은 둘을 보며, 찬찬히 입을 열었다.

[일단. 세 분께 먼저 묻고자 합니다.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세 분께서는 현재 두 명씩이나 더 추가해서 데려가시면 공간 압력을 버티실 수 있으십니까?]

그 말에, 세 천인의 안색이 굳었다.

서휼이 말을 이었다.

[아마 세 분도 이번에 문파를 비승시키기 위해 총력을 다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현재 각 문파의 건물이나 전함 안쪽에서, 문파에서 선별하고 선별한 최중요 제자들이 각자 문파 원로들의 인솔에 따라 공간압력에 대항할 진법을 펼치고 있을 것으로 압니다만.]

[...맞소.]

세 천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한명 정도를 추가하는 거야 본인이 한명분의 압력을 더 견디면 되니 문제가 없겠지만, 두 명 이상씩이나 추가를 한다면 아예 진법이 흐트러질테고, 비승에 실패할 확률도 올라가지요.

게다가 이번에는 승천문이 가장 크고 넓게 열리는 시기를 골라 문파의 명운을 걸고 비승에 도전하는 것이니, 절대로 실패하면 아니되지 않습니까.]

서휼의 차분한 설명에 세 천인들의 얼굴에 아깝다는 빛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분명 세 분께서 이 인족들을 먼저 발견하신 것도 맞지요. 노야께서도 그 점은 인정하시지요? 노야의 논리가 일반적인 범주와는 다르다는 건 알지만, 그 논리 속에서 시간의 서순마저 바뀌진 않는 것으로 압니다.]

괴군은 서휼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맞다고 해 두지.]

[하면, 노야께서는 세 분께 합당한 보상을 해 드리는 게 맞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노야께서는 세 분이 발견한 보물을 무턱대고 가로채려는 것이니, 세 분께서도 마땅한 보상을 받으시면 납득하실 것입니다.]

그 말에 세 천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역시 서 용왕께선 명판관이시오!]

[참으로 훌륭한 답이신 것 같소.]

[해룡족의 미래가 밝소이다.]

그러나 괴군이 눈을 희번뜩하게 뜨며 상자의 뚜껑을 더욱 들어올렸다.

[그런데, 내가 싫다면?]

그 말에, 해룡왕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렷고, 세 천인 역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나는 소속된 곳도, 데리고 갈 생명체도 없는 산수인지라 내가 부담해야 하는 압력도 거의 없으니만큼. 네놈들을 전부 이 자리에서 등선향과 같이 박살내 버리고, 아예 네놈들이 고른 그 특이체질 녀석들도 다 잡아가, 전부 해부하고 '진화'시켜서 내 세계에 들이고 싶은 심정인데, 내가 왜 협상 따위를 해야 하는 거지?]

그 말에, 해룡왕이 깊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쿠웅!

그의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본 왕은 최선의 제안을 해 드렸소. 자꾸 이리 본왕의 제의를 무시한다면, 본왕과 해룡족 역시 세 문파에 가세하여 노야를 공격하고, 지난날 노야가 납치했던 본왕의 혈족들의 시체를 다시 받아갈 것이오.]

[흐, 제 혈족도 장기말로 아는 놈이 괜히 혈족을 아끼는 척은. 네놈 혈족을 운운하며 명분을 확보하려는 밑밥이 아니더냐?]

얼마간 서휼과 괴군이 눈싸움을 하였고, 잠시 후.

괴군이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덮었다.

[그래. 오늘은 조금 양보해주지. 셋이면 몰라도 그 해룡왕까지 끼어든다면 본노가 질 수도 있겠어. 이번에 상계로 올라가 [그녀]를 완성시켜야 하니, 오늘은 네 제안에 따라주마.]

그는 한 발 물러서며 김연 주임을 가리켰다.

[저건 내가 제자로 데려가마. 배상은 추후에 하지. [그녀]의 앞에서 맹세하마.]

통통통-

괴군은 나무 상자를 통통 두들겼고, 그 표면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들었느냐? [그녀]도 내 맹세를 증언했다.]

세 천인은 그런 괴군의 모습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무슨... 꼭두각시가 무슨 말을 했다고..]

서휼은 한숨을 쉬며 세 천인에게 말했다.

[노야의 논리가 일반적인 논리와 다른 것은 알지 않소. 하지만 본왕이 관찰한 바로, 노야의 [그녀]의 앞에 맹세한 맹세는 전부 지켜졌소. 그건 본왕이 보증할테니 믿어주시오.]

그 말에 세 천인은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녀석은 내가 제자로 데려가고 추후에 배상을 논의할 것이고... 저 녀석은 어찌할까.]

괴군이 오 대리를 가리켰다.

[본노의 통찰로 볼 때 서휼 놈이 제일 저 녀석의 잠재력을 잘 끌어낼 것 같긴 하다만. 본노가 보기에 한참 어린 범인이 서휼 놈한테 못된 놈만 배울까봐 걱정이구나. 저 녀석도 본노가 데려가는 게 어떠냐?]

그 말에 서휼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회복한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오혜서 대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세 천인 분께서도 두 명을 데려가시는 건 현실적으로 너무 부담스러우시고, 그렇다고 노야에게 두 명씩이나 맡기는 것은 마음에 안 드실 듯 한데.

이 여인은 제가 데려가게 허락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 역시 제 명예를 걸고 추후에 배상을 하겠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세 천인은 괴군을 노려보며 말했다.

[해룡왕께서 중재도 해 주셨는데, 그렇게 하시지요.]

그들은 괴군이 더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서휼이 오 대리에게 다가간다.

동시에, 나는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그들에게 김 주임의 재능을 각성시켜달라고 하고, 김 주임의 재능을 느낀 괴군이 날아와 세 천인과 으르렁대며 싸울 준비를 하고.

괴군이 꺼낸 상자의 틈 속으로, 해룡족 왕족의 생체 괴뢰들이 뿜은 기운에 오 대리가 각성하고.

오 대리의 능력을 느낀 서휼이 예정보다 빠르게 날아와 그들을 중재하고, 원래대로 인원을 배분해서 가져갔다.

원래대로.

모든 것이, 기묘할 정도로 원래 그랬어야 할 역사대로 딱딱 흘러간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배님들께, 부디 말씀을 올립니다. 사실 이들은 제 동료들입니다. 제 동료들을 그냥 저와 함께 있게 해 주실 수 없으십니까?"

그 말에, 괴군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네놈은 뭐냐. 왜 인족 주제에 뱃속에 요단을 품고 있지? 이런 건 또 처음보는데... 네놈도 해부해보고 싶군.]

뿌드드득!

"끄..으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내 단전 안쪽의 내단이 뽑혀나갈듯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괴군의 의지에 따라 내 내단이 바깥쪽으로 뽑히려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배가 찢어질 것 같다!

그때였다.

파아앗!

부드러운 기운이 나와 괴군 사이로 밀려들더니 괴군의 기운을 막았다.

놀랍게도, 기운의 주인은 서휼이었다.

[어찌 노야께서는 힘없는 생령을 괴롭히시오. 상서로운 시기에 그런된 짓은 자제하는 게 어떨지요.]

[...흥! 가식적인 놈 같으니. 좋다. 어차피 축기경 정도 영성을 지닌 요단이니 연구해봤자 별 도움도 안 되겠지. 더 안 건드리마.]

"쯧쯧, 미치광이에게 걸려 고생이 많군."

창호자가 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그의 손길에, 괴군에게 내상을 입었던 내 단전이 깨끗이 치유되었다.

서휼은 괴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간 이후에도 이 힘없고 불쌍한 이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

[...뭐? 서휼 네놈 미쳐버린 거냐?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지금처럼 상서로운 시기에 굳이 힘없는 이들을 괴롭혀 부정을 탈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서휼을 바라보던 괴군이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하! 역겹고 역겹고 또 역겹구나. 다들 제 문파에 틀어박혀 있느라 서휼이 벌여온 참극을 모르는 게 아쉬울 지경이야. 너무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올 듯 하군.

좋다! 네놈의 역겨움에 감탄하여 더 안 건드린다고 맹세하지. [그녀]도 네 역겨움에 대해 반박하느니, 그냥 적당히 공감하고 넘기라고 하는구나.]

괴군은 [그녀]라는 것에게 맹세하며 더 이상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후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서휼은 나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준 후, 세 천인에게도 말했다.

[오면서 세 분께서도 등선향의 생령을 많이 해한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상서로운 시기에 부정을 타지 않게 자중하여 주십시오.]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룡왕의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자중하지요.]

[어찌 그리 의로우시오, 서 용왕.]

서휼은 허허 웃으며 그들과 덕담을 주고받은 후, 오 대리를 들쳐업고 단전의 고통을 다스리던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짚어주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인요의 혈통을 타고난 게 틀림없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혹시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무엇, 입니까?"

서휼이 품에서 묵빛 구슬을 꺼냈다.

[이번에 이 여인의 기운을 느끼고 급하게 온 것인지라 사실 못 처리하고 온 게 있다네. 원래는 바다에 남아있을 내 후손 중 하나에게 이 구슬까지 전부 전달하고 왔어야 하는데 못 전해주었네.

혹여 극란도 인근에 사는 서란이라는 내 후예에게 이 구슬을 전달해줄 수 있는가?]

"..."

[만약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보상으로, 자네같은 인요 혈통이 익힐 수 있는 좋은 공법서도 하나 선물로 주겠네.]

서휼은 품에서 한 권의 요수 가죽으로 장정된 공법서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공법서의 제목은 호풍응룡변이었다.

'아, 이럴려고 나를 구해준 거군.'

서휼의 의도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역겨움이 치솟는 속마음을 가리고, 서휼의 앞에서 가면을 쓰며 감사하다는 듯 그가 준 것들을 받았다.

"해, 해룡왕..선배께서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네. 참 그리고...]

쿠구구구!

그의 눈빛이 세로로 찢어졌다.

[아까와 같이 의견을 피력하는 건 용기이기도 하지만, 만용이기도 하네. 부디 자네보다 높은 이 앞에서 처신을 잘하기를 바라네.

그리고. 자네의 말에 답을 해 주자면, 자네와 저 자는 자질이 애매해서 데려갈 수 없고. 그렇다고 자네 동료들을 남겨두면, 자네 동료들은 그 신화적 재능에 스스로 잡아먹혀 죽어버릴 확률이 높네.

자네에게 그 자질들을 억누를 방법이 있다면 좋은 의견이지만, 방법이 없다면 조용히 있는 게 좋으니 알아두게나.]

쿠구구구!

그의 기세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해룡왕은 내게 담담히 충고를 한 후 용으로 변해서 승천문으로 날아갔고, 나머지 천인들 역시 동료들을 데리고 승천문으로 날아갔다.

장내에 남은 것은 도망치려는 김연 주임을 기절시킨 괴군과, 나와 김영훈 뿐이었다.

나는 망연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모든 것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나와 김영훈을 바라보던 괴군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공간균열이 열렸다.

[쯧, 가식적인 용 같으니. 그런 말을 지껄일 거면 등선향 바깥으로 내보내라도 줄 것이지..]

"하, 하..."

지난 삶에 기지를 발휘하여 서휼의 손으로 김영훈을 내보냈지만.

이번 삶에선 고무줄에 묶인 공이 돌아오듯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마, 괴군은 나와 김영훈을 또 다시.

똑같이.

연국으로 보낼 것이다.

"선배님."

나는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며 괴군에게 물었다.

"운명(運命)이란 것이 실재합니까?"

내 물음에, 괴군은 흥미로운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실재하지. 네가 특이한 공법을 익힌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만. 연기기 칠성제의를 치루면 모두가 천명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가 하늘을 가리켰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일어난다. 그것이 천명이지.]

"...그렇다면,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겁니까?"

그 말에, 괴군이 히죽 웃었다.

[운명의 구조가 이해되지 않나보군. 그렇지 않다. 모든 생령은 운명을 바꿀 수 있어.]

"...예?"

[너, 지금까지 의문을 가져본적이 있느냐? 왜 수도자들의 경지의 칠십이지살, 삼십육천강, 칠성제. 그리고 축기기 때에 만드는 영기의 별 등. 하늘의 별들을 담은 이치를 익혀가는지.]

그의 손가락이 허공 끝을 찔렀다.

[수도자들이 '왜' 역천의 존재인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느냐?]

"그건... 그냥 당연한 게 아닙니까?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거스르니까..'

[그럼 '왜' 수도자들은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운명을 거스를 수 있지?]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괴군이 손가락으로정순지력을 뿜으며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가여운 네놈에게, 위대한 이 몸께서 운명의 구조에 대해서 특별히 설명해 주지. [그녀]도 그러라고 하니까 말이야.]

명(命)(2)

[운명(運命)은 곧 인력(引力)이다.]

괴군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예시로 들면, 인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이라는 운명의 인력을 향해 끊임없이 끌려가게 되는 것이지.]

괴군이 허공에 두 개의 점을 그리고, 그 점 사이로 선을 그었다.

[이게 기본적인 삶의 골자이다. 이곳에서 시작해, 저곳에서 끝나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들의 수명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에서부터 운명에 변혁이 생기지.]

괴군은 두 개의 점을 이어 그린 선 위쪽과 아랫쪽에 몇 개의 선을 더 그었다.

그 선들은 최초의 선과 위치가 조금씩 달랐다.

[이 선 하나를 삶이라 쳤을 때, 다른 선들의 삶이 끝나는 이 때가 이 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은 인력을 가지고 있고, 그 인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운명들 역시 조금씩 끌려가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운명은 삶에서 죽음까지 평탄하게 직선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삶의 운명에 끌어당겨지며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최초의 선은 다른 선들이 끝나는 점에 맞춰서 조금씩 삐뚤빼뚤 해졌다.

[우리는 이것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또는 인연(因緣)이라고도 한다. 이 인연과 운명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결정되고, 일어날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지.]

"...일어날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말은 즉.."

[친한 벗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벗은 나와 다른 수명과 운명을 지니고 있어, 나보다 일찍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는다. 그 운명은 나와 밀접하게 붙어있고, 또한 인력을 갖고 있기에 벗의 죽음에 나 역시 무조건 휘말리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일어날 일은 '반드시'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면, 죽음과 관계되지 않은 사건 역시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니, 이 세상에 생멸(生滅)과 관계되지 않은 사건은 없다. 우리가 숨을 쉬는 이 공기 중에도, 찰나 안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나고 죽는지 아느냐? 나는 편하게 선 몇개로 운명을 설명했지만, 운명에서 일어나는 생멸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끝이 없어 절대 간단히 표현할 수 없다.]

"그렇군요..."

[삼라만상 모든 존재는 생명과 동시에 죽음을 품고 있으니, 기실 그 존재들이 벌이는 모든 사건에는 결국 인력(引力)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괴군이 허공에 나 있는 선들을 지워버리고, 허공에 마구 점을 찍었다.

[이 삶에 존재하는 인력을 따라, 모든 존재는 길고도 짧은 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괴군은 최초의 점부터 시작해, 점들을 하나하나 잇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점들이 다 이어졌고,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한 궤적의 그림이 탄생하였다.,

[어떠냐, 이걸 보면 뭐가 생각나느냐?]

'어린 아이가 마구 그린 낙서?'

나는 올라오려던 말을 삼키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미욱해 잘 모르겠습니다."

[점과 점이 인력을 뻗고, 그 인력을 향해 선이 이어진다...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 같지 않으냐?]

"아..."

총, 총, 총, 총...

괴군은 선으로 이어진 곳 외에도 계속 정순지력으로 점을 찍었다.

정말로 그 모습은 밤하늘의 별과도 같아 보였다.

[나는 밤하늘의 별들이 존재한다는 성계(星界)에는 도달해본 적이 없지만, 먼 옛적 성계를 돌아다녔다는 고대 수도자들의 문헌을 보면, 밤하늘의 별들 역시 인력을 발휘한다는군.]

괴군이 턱을 쓰다듬으며 설명을 이었다.

[마치 별들은 운명 같지 않느냐? 아니, 그 문헌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운명이 별자리를 닮은 것이겠지. 운명은 별자리를 닮았다.

삶이란 이렇듯, 자신에게 가까운 운명의 인력들을 찾아서 별들의 바다를 헤엄치는 여정인 게지...

그리고,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건. 그러한 운명의 인력에 잡혀서 그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고...]

뭔가를 떠올린 것인지, 괴군은 씁쓸한 기색이었다.

[...어쨌든. 운명을 별자리로 보고, 삶이 별바다를 헤엄치는 여정이라고 할 때.

수도자들이 천기를 보고 자신의 명을 읽는 원리는 대략 그런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운명의 인력을 감지하는 것이지.

또한 수도자들이 운명의 인력을 벗어나는 법 역시 간단하다. 일반적인 삶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라 할 때.]

괴군이 허공의 점을 이었다.

점을 이어 그린 별자리는, 어느 지점에서 끝이 났다.

다음 점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선은 더 이어지지 못할 것 같았다.

[이 별과 별 사이에, 적당한 별을 하나 더 만들어서 다음의 별을 향하는 것이지.

수도자들의 경지에 칠십이지살, 삼십육천강, 칠성제의, 축기기의 영기의 별, 결단기의 별의 영역 등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체내에 별과 비슷한 것을 만들어, 그것으로 인위적인 운명의 흐름을 만들어내어서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더 늘리는 것이지.

이것이 수도자들이 수명을 늘리는 방식이며, 수도자들이 역천의 존재라 불리는 이유이다.]

괴군이 히죽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그렇다면 운명은 반드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운명을 벗어나려면 어찌하는가? 이 운명의 궤적을 벗어나려면 어찌하는가? 간단하다.]

괴군은 별자리를 다시 그렸다.

[이 운명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이 다음 운명이지만, 삶의 주인이 그 운명이 아닌 다른 운명을 원한다면...]

그는 별에서 별로 이어지는 선을 그으며, 그 선이 원래 이어지려던 별자리가 아닌, 다른 별자리로 이어지려 하는 모습을 그렸다.

[다음 운명의 인력이 존재를 빨아들이기에 쉬이 다른 운명으로 갈 수 없지.]

선은 다른 별자리로 가려 했으나, 정해진 운명의 인력에 붙잡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운명의 인력을 벗어나면 된다.]

포옹!

선은 정해진 별자리의 인력을 벗어나, 그대로 다른 별자리에 안착했다.

"...그걸 어떻게 하는 겁니까?"

[뭘 어떻게 하느냐. 힘! 인력을 벗어날 힘이 있으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지!]

그가 주먹을 쥐자, 그가 허공에 그동안 그려왔던 모든 별자리와 그림들이 단박에 사라졌다.

[운명을 못 바꾸면 내가 나약하다는 증거다. 운명의 인력을 벗어날 압도적인 힘! 그리고 인력을 벗어날 뼈를 깎는 노력! 두 가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정해진 운명이 아닌 다른 운명에 도달할 수 있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존재의 노력에 따라 그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에 내가, 혹은 우리가 고통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괴군은 설명을 이어가면서 어쩐지 흥분한 모양인지, 그의 눈은 광기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운명이 나를 괴롭힌다면 운명보다 강해지면 된다! 이만큼 단순명쾌한 해결책이 어디 있느냐! 나 역시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했다...]

괴군은 옆의 상자를 꼭 껴안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와 만날 수 없다는 운명에서 벗어나, 그녀와 다시 만나고 말 것이야. 반드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반드시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그녀와...]

괴군은 희번뜩한 눈으로 상자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아아,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오. 제발 제발 다시 나와 함께 말을 하고 부채를 들고 그때의 춤사위를 같이. 당신을 못 본다는 건 내가 원하는 운명이 아니야.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내 모든 운명을 내팽개치고 힘을 모아 다른 운명으로 도약하겠어. 당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그러니 제발...]

그는 상자를 마구 긁으며 정신 나간 듯이 상자 안쪽의 뭔가를 향해 읇조렸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군.'

나는 괴군에 의해 기절한 김 주임을 바라보았다.

'힘...'

운명을 벗어날 힘.

그리고 노력.

그렇다.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부족할 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내 힘으로 바꿀 능력이 없는 것 뿐이었다.

그렇기에 일어날 일이 반드시 일어나며, 동료들을 미치광이와 위선자들에게 넘어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하는 것이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운명이란 것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한 느낌이었다.

'그래, 운명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바꿀 수는 있다.'

이번 생에는.

누구도 여우에게 팔을 뜯기지 않았다.

내가 여우의 주의를 끌고, 며칠간 여우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기 때문.

'더 강해진다면, 여우 따위는 패대기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다면. 아예 여우라는 운명의 인력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해지자.

더욱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수련을 통하여 수명을 늘려, 모든 운명에서 벗어날 별자리를 만들자.

'언젠가는, 천인기 수도자들의 손아귀에서마저 벗어날만큼 강해지면, 그때는 정말 모든 운명을 다 벗어날 수 있겠지...'

얼마간 상자를 벅벅 긁으며 발작하던 괴군은, 나와 김영훈을 번갈아보며 손을 까딱였다.

"오늘 가르침에 정말 감사드리고, 또 몇 가지 질문드릴 게 있습.."

[이쯤 하면 충분히 답해줬다. 이만 가 봐라. [그녀]가 나를 부르고 있다. 그녀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관절에 기름칠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그녀가 날 부른다, 그녀가..]

휘이이익!

나와 김영훈은 뭐라 반응할 틈새도 없이, 괴군의 손짓에 공간균열로 떠밀려 가 버렸다.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상반신을 그대로 상자 안쪽으로 파묻는 괴군을 마지막으로 어둠 속에 잠겼다.

* * *

이번에도 역시 우리는 연국에 떨어졌다.

'운명의 인력이라...'

운명에 정말로 인력이라는 것이 있다면, 괴군이 우리를 아무리 무작위로 보낸들 연국에 떨어지는 것 역시 인력이 우리를 끌어당기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괴군의 말을 곱씹으며 운명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의 말로 인해 축기기의 영기의 별에 대한 감도 얼핏얼핏 떠오를 것만 같았다.

나는 김영훈이 일어나기 전, 법술로 그의 머릿속에 지식을 전승시켜 주었다.

그리고 김영훈이 일어나서 머릿속의 지식에 혼란스러워하며, 내가 천인들과 대화를 나눴던 것에 대해 묻자, 나 역시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있었어서 그것으로 천인들과 대화를 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김영훈을 적당히 설득시키고, 그를 연국에 자리잡게 해준 후, 그를 삼화취정까지 끌어올려준 후 월도입천무의 존재와 기타 월수궁무록 등을 가르쳐주며 그가 언젠가 등봉조극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안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응원하며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진씨세가에 몰래 숨어들어가 제자들의 삶을 살폈고, 스승님 역시 이번에도 먼발치에서 한 번 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흑풍해로 향하였다.

* * *

"흠..."

흑풍해에 있는 서란의 처소로 향하기 전, 나는 서휼이 내게 준 묵빛 구슬을 바라보았다.

지난 삶, 서란과 함께 자폭하며 섭명함을 완전히 파괴시켰던 구슬.

"전달 같은 소리 하는군."

나는 피식 웃으며 묵빛 구슬을 바다 속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구슬은 심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다.

"서란은 당신을 좋은 왕이자 시조로 기억할 것이오."

자신을 섭명함과 공멸시키려 한 인면수심의 악인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잠시 호풍응룡변 공법서도 쳐다보다가, 이 정도는 서란을 만날 때의 증표 정도로 쓰기로 하였다.

'어찌할까. 서 형을 바로 만나러 갈까.'

나는 흑풍해를 앞에 두고 고민하였다.

내가 지금 가면, 서란은 내게 호풍응룡변을 익히라 권하며 몇 년 후에 섭명함에 다시 도전하자고 할 터였다.

"...안 되겠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섭명함에 있는 결단기급의 분혼은, 우리 둘로는 절대 못 이긴다.

'아마 서 형은 내가 그를 찾아가지 못하면, 섭명함을 지키는 마지막 결계를 뚫지 못하니 몇 년이고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그는 찾아가지 말자.

'모든 것이 부족하다.'

서란의 죽음이 운명이라면, 그를 막을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운명을 바꿀 힘을 얻은 후에 찾아가자.'

몇 년이 걸리든.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든.

"축기기에 들고, 서 형을 찾아간다."

나는 그렇게 정하고, 성제국 대산맥 쇄천봉.

금신천뢰문이 있던, 영맥이 좋은 봉우리로 향했다.

* * *

회귀 후 5년이 지났다.

쿠그그극...

"후우..."

황갈색 구름이 내 주변에서 회전하더니, 내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왔다.

선각후통으로 깨달음을 얻고, 매 생마다 깨달음을 반복하며 익숙해지니, 점차 지월입도결에 대한 이해도가 늘어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매 삶마다 지월입도결을 익히는 속도도 상승하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5년만에 대성했군.'

그리고 지난 삶에 대성했던 수월입도, 화월입도, 금월입도결은 깨달음을 생각해보면, 각각 약 8년정도 걸릴 것이다.

이 기세라면 30년 안에 네 공법을 대성하고, 목월입도결도 10년 정도 걸린다 치면, 40년이면 오월입도경을 전부 대성할 수 있었다.

'가능하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정말로 축기기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우우우웅-

나는 눈을 뜨고, 강환을 뿜어냈다.

이젠 아홉 개의 강환도 안정화되어, 안정적으로 아홉 강환을 다루는 것에 성공했다.

"등봉조극 극한에 완숙해졌군..."

이제는 이 너머로 가야할 시간.

하지만, 여전히 의식을 실체화시키는 일은 난감했다.

'강환을 의식에 녹여내는 건, 그때의 흐름을 떠올려 흉내는 낼 수 있다.'

우우웅-

내 주변에서 회전하던 강환들이 의식에 녹아든다.

그러나 의식은 강환들의 기와 의를 잡아두지 못했고, 얼마 후 강환에 담겨있던 공력들은 그냥 의식영역 속에서 증발해 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강환의 힘을 의식 속에 잡아둬서 실체화 시킬 수 있는거지...?'

월도입천무를 되뇌고 되뇌도, 너무나 복잡하고 김영훈의 주관성이 짙어서 어려웠다.

나는 월도입천무를 연구하고, 수월입도를 익히며 세월을 보냈다.

* * *

8년이 지났다.

나는 다시 수월입도결을 대성했다.

하지만 아직도 월도입천무는 깨치지 못했다.

김영훈의 시행착오들을 떠올리면서도 월도입천무를 연구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쯤.

김영훈이 쇄천봉에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나는 그의 성장속도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대체, 등봉조극의 끝에 벌써 오른 겁니까?"

말도 안된다.

이제 회귀 13년차인데.

벌써 그 사이에 오기조원을 넘고, 등봉조극에 도달해, 그 끝에 도달했다고?

내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묻자, 김영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등봉조극의 끝에 이르고, 진씨세가라는 수도가문을 도와 막리세가라는 마도 가문을 연국의 양지에서 쫓아냈다. 모든 걸 다 얻은 줄 알았지만... 등봉조극의 극한에서야 깨달았다. 이곳에 안주하고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그가 진중한 기색을 지었다.

"그래서 진씨세가의 장로 자리고 뭐고 전부 때려치우고 네게 왔다. 너와 함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 월도입천무에 대해 토론하며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하여."

"..."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이상 타고난 재능만을 믿고 나댈 수 없다는 것을. 피를 깎고 몇십년간 고련에 고련을 해야, 간신히 얻을만한 경지라는 것을... 월도입천무를 제작한 제작자가 느낀, 그 피고름 섞인 고통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주변으로 아홉 개의 강환을 띄웠다.

"극한에 이르렀지만, 다음 경지로 어떻게 가야할지 솔직히 엄두도 안 난다. 선인(先人)이 월도입천무라는 길을 피를 깎아서 만들어두었지만, 나 혼자서는 도저히 그 길을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암울한 기색이 떠올랐다.

"수십 년간 고련해야 한다. 아무리 나라도! 그러니, 나와 함께 길을 걸어다오... 나와 함께 이 경지에 도달해다오."

그러나, 그는 암울한 와중에도 포기 따위는 생각도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 형...'

인간이 운명을 바꾸려면, 운명의 인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피를 깎는 노력과, 그럴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인간을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힘보다는 그 의지가 아닐까.

"...알겠습니다."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이번 생의 의지를 다시금 다졌다.

"우리 함께, 명(命)을 뛰어넘어 보지요."

그날부터, 나와 김영훈은 쇄천봉에서 동시에 수련을 시작했다.

* * *

"....허억!"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의 꿈인가.'

김영훈과 쇄천봉에서 함께 수련하기로 했던 날의 꿈이었었다.

나는 고개를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꿈까지 꿀 정도로 기절했었군.'

툭, 툭..

나는 몸에 묻은 흙먼지와 돌가루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쇄천봉 인근은 난장판이었다.

이곳 저곳에 검흔과 도흔들이 난무해 있었고, 강환의 흔적들로 인한 구덩이들이 사방팔방에 패여 있었다.

쿨럭, 쿨럭!

나는 장풍으로 주변의 흙먼지를 날리며 김영훈을 찾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수련 도중 나와 김영훈이 서로를 후려치고 서로 반대편으로 날아갔을 터였다.

나는 김영훈의 수도에 맞고, 잠깐 정신을 잃고 예전 꿈을 꾼 것으로 끝났지만.

김영훈은 내 발차기는 물론이고 수도법술들 역시 수십 격은 맞았기에, 상태가 어떨지 몰랐다.

"김 형! 김.. 허억!"

나는 김영훈을 찾던 와중, 저 아래쪽 계곡에 상반신이 쳐박혀 있는 김영훈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젠장, 그러게 처음부터 무공 대 무공만으로 대결했으면 나름 안전했을 것을...'

김영훈이 쓸데없이 생사를 건 사투속에서 깨달음을 얻겠답시고 고집을 부리며, 나더러 수도법술까지 같이 써서 붙자고만 안 했어도 이렇게는 안 됐을 터였다.

"김 형, 김 형!"

나는 계곡으로 허공답보를 써서 내려가, 상반신이 박혀있는 김영훈을 뽑아냈다.

"커헉, 쿨럭..."

계곡에 박히는 순간 호신강기를 쓴 것인지, 김영훈은 머리부터 쳐박혔음에도 다행히 중상은 아닌 듯싶었다.

"쿨럭, 꺼르륵.."

피거품을 토하기는 했지만, 일단 머리부터 박살이 나서 죽지는 않았으니 어디인가.

"기다리십시오, 일단 응급처치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대련 전에 준비해놓았던 약초들과 침통을 가져와서 김영훈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톡, 톡, 토옥, 톡...

나는 김영훈의 몸에 침을 꽂으며 그의 생명력을 활성화시켰다.

얼마 후, 김영훈이 의식을 차렸다.

"김 형, 괜찮으십니까? 이게 몇 개로 보이지요?"

"...두 개.."

"...상태가 안 좋군."

나는 검지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며 혀를 찼다.

"일단 처치를 해 놓고, 수도자들의 시장에 가서 치유 부적이라도 사오겠습니다. 일단..."

"아니, 두 개란 말이다."

김영훈이, 몽롱한 목소리에서 깨어나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 얻은 깨달음이 두 개란 소리였다..."

뿌드득...

김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쿨럭, 쿨럭..

그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생사의 경계에서 다음 경지에 대한 실마리. 월도입천무의 깨달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가 입가의 피를 닦으며 씨익 웃었다.

"일단 한 가지. 월도입천무는, 월도입천무를 만든 이의 주관성이 짙은 무학이다. 그 이유는, 월도입천무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경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예...?"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부터는, 각자 다른 깨달음으로 도달하는 경지란 소리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무기와 무공의 종류만으로 갈렸다면, 이 너머부터는 그 '사람'에 따라서 갈린다는 의미다."

나는 김영훈이 얻었다는 깨달음을 들으며 점차 입을 벌렸다.

회귀 35년차.

김영훈이, 월도입천무를 통해 다음 단계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시작했다.

명(命)(3)

"경지가, 사람마다 다르단 말씀입니까?"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했다.

김영훈은 피를 닦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히는, 의식을 실체화하는 것은 똑같지만 '무엇을' 실체화할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나도 그냥 실마리만을 잡은 것이라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월도입천무에서는 꾸준히 누군가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의 삶에 대해 말하여서 도달하는 것이 이 너머의 경지라면.

인간의 삶은 모두가 다른 법이니, 이 너머의 경지에는 삶마다 다른 무학이 존재치 않겠느냐."

"삶마다 다른 무학..."

나는 어쩐지 그 말에, 가슴 한켠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가 등봉조극 너머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깨달음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아, 그건 그냥 개인적인 깨달음이다."

김영훈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지금껏 무공을 수련해왔던 동력(動力)이,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임을 알았다."

그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 고통을 잊고자 미친 듯이 무를 수련하고, 그 목표를 이루고자 손아귀가 찢어져라 도를 휘둘렀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김영훈은 아련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흠, 미안하구나. 이건 무학의 깨달음이라 하기에도 뭣한데."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를 때 느꼈던 것.

"내가 해 온 모든 것은 결국 내 삶의 일부. 천지인이 서로에게 영향을 받듯이, 내가 해 온 것 역시 내 삶에 영향을 받았겠지요.

내 삶에 대해 깨달았다면, 그는 곧 김 형의 무(武)에 녹아들 겁니다."

"...가끔 너와 얘기하면 한참 나이먹은 노인과 얘기하는 것 같다. 무학(武學)에 있어서는 분명 내 재능이 낫지만, 네겐 내게 없는 것이 있어..."

그는 나를 아리송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너 역시 나와 비슷한 속도로 이 너머에 도달할지 모르겠구나."

"하하, 그럴 리가요. 김 형의 재능에 제가 어찌 비합니까."

"너도 굉장히 빠르게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하지 않았느냐? 그 정도면 재능은 충분하지. 물론 나보단 못하다는 건 알겠지만... 여하튼. 너보다 뛰어난 내 재능으로 너를 관찰했을 때, 내가 새라면, 너는 화산(火山)이다."

화산?

"화산이 어떻게 폭발하는지 대충 아느냐? 뭐 나도 주워들은 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화산 밑의 용암이 계속 올라오며, 쌓이고 또 쌓여 결국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이 폭발하는 것이라더군.

나는 원래부터 날도록 태어난 새라서 빠르게 하늘을 올라온 느낌이라면, 너는 원래부터 높은 산이었고, 그마저도 그 안에 잔뜩 용암이 쌓여있어, 폭발을 시작하면 어떤 새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으로 높은 하늘에 닿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그가 웃으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네 삶에 대해서 잘 참오해 보거라. 어쩌면 네가 그냥 지나친 것들이 쌓이고 쌓여, 너도 모르는 잠재력을 만들었을지 어찌 아느냐."

'나도 모르게 쌓여온 것들이라.'

내가 쌓은 것은, 그저 세월(歲月)밖에 없거늘.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김 형 치료나 좀 더 제대로 하지요."

나는 김영훈을 데리고 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김영훈이 말한 화두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 * *

세월은 흐르고 또 흘렀다.

어느덧, 지월입도, 수월입도, 화월입도, 금월입도 네 공법을 전부 대성하고, 목월입도결 역시 지금껏 쌓아온 기반에 뿌리를 내렸다.

'목월입도가 가장 쉽군...'

이미 다른 오행(五行)의 힘이 제대로 지반을 받쳐줘서일까.

목월입도결은 오행의 상부상조에 따라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법력을 쌓아갔다.

순탄하다.

이제 목월입도결은 연기기 13성. 일원일응.

조금만 더 있으면 대성(大成)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곧 오월입도경 전체를 대성하는 것이었다.

'물론, 축기기에 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이번 생에 축기기에 못 들수도 있었다.

'그리고 김 형은 내게 잠재력이 있다곤 했지만...'

나는 둔재였다.

어쩌면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더.

이번 생에 축기기에 들어 수명을 늘리지 못하면, 등봉조극 너머는 꿈도 못 꿀지도 몰랐다.

김영훈이 월도입천무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지도 어느덧 5년차에 거의 가까워졌다.

그는 매일같이 손아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월도입천무를 궁구하며, 등봉조극 너머의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뭔가.

수도공법을 수련하면서도 끊임없이 틈날때마다 무공을 수련했다.

단 한 순간도 게을리 지내지 않으며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등봉조극에 올라 검이 필요 없게 되었어도 항상 칼같은 기세를 유지하며, 검법을 수련하던 그 감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지난 40년동안 단순히 수도공법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지난 삶에도.

또 지지난 삶에도...

문득,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벌써 몇 번째 삶을 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홉 번째? 열 번째? 아, 회귀 자체는 9번 했군.'

그리고 회귀동안, 몇 년을 살았지?

'아니, 안 돼. 떠올리지 마라.'

몇 년 동안 무(武)를 수련하고, 몇 년 동안 수도공법을 수련했지?

'심마(心魔)의 초기증상이다. 더 떠올리면 안 돼!'

9번 회귀를 하며 각 삶마다 거의 50년에 가깝게 살아왔다.

조금 더 빨리 죽은 회차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감안해도, 지금껏 산 삶을 계산해 본다면...

'안 돼!'

500년.

약, 500년의 삶이었다.

"꺼헉, 끄헉.."

왈칵!

기혈이 뒤틀리며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500년이나 무공을 수련했는데도 이 너머는 감도 안 잡힌다.

강환이 멋대로 체내에서 빠져나오며, 아홉 조각으로 쪼개졌다.

의념의 세계에, 아홉 명의 내가 나를 둘러싸고 음울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무공에서 손을 놓는 건 어떤가.

-어차피 오기조원에 이르며 영통을 뚫는다는 초기 목표는 이뤘다.

-이젠 여우한테서 도망치며 팔도 뜯기지 않을 정도니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무공은 내 재능이 아니다. 억지로 되지도 않는 걸 붙잡을 바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

내가 정신 분열에 걸린 게 아니었다.

전부, 나였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솔직히, 김영훈이 내게 한 충고 중, 몇 마디나 알아들었지?

왈칵!

나는 심상을 다스리려 했으나, 다시 한번 피를 토해내야 했다.

-김영훈 같은 이전에 만년, 이후에 만년 다시없을 천재마저도 몇 번의 삶동안 등봉조극의 극한에 머물렀다.

-겨우겨우 지식과 깨달음을 전승시키며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그건 김영훈의 이야기이지.

-재능없는 내가 김영훈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몇 년을 수련해야 하지? 500년은 더 수련해야 하나?

끄흑, 끄으윽...

나는 피를 조금 더 흘리고는 내상을 다스렸다.

-말해보자. 나는 500년동안 대체 뭘 이뤘지? 허송세월만 보내지 않았나?

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몰아치는 상념들.

지금 강환분신들이 내뱉는 말들은, 전부 지금 당장 떠오르는 암울한 상념들이 실체화된 것이었다.

-왜, 무공을 수련하는 거지?

그리고, 문득 머릿속에서 그런 질문이 들려왔다.

"...힘이, 필요하니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폭풍처럼 몰려들던 잡념들이 어느 정도 걷혔다.

"...간단하잖나."

괴군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의 인력은, 인력을 넘어서는 힘으로 넘어서면 된다고.

"그냥, 할 수 있는 걸 다 했을 뿐이다. 날 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거냐..."

인도(人道)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운명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뿐이었다.

"나도 알고 있다. 어쩌면 이번 생 안에 축기기에 들 수 있다는 것도 내 희망일 뿐이고. 축기기에 들어서 몇백년을 수련하더라도 등봉조극 너머에는 발도 디디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쯤은.

나는, 이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 먼지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나는 그냥, 벌레같더라도, 먼지같더라도, 이 삶 하나 하나를 소중히 여기고자..."

말을 내뱉으며 내 입장을 정리하자, 조금씩 머릿속의 구름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이미 삶과 하나가 된 무(武) 역시 소중히 여겼을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게 차가운 말을 내뱉던 의념분신은 사라지고, 눈 앞에는 강기의 구체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강환들을 흩어버리며 주먹을 쥐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나는 내 삶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 언젠가 모든 것이 돌아가더라도 내게 남아있는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뿐이니까."

기혈이 안정된다.

큰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심마는 막아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조금 가슴 한켠이 답답한 느낌이었다.

'뭔가 깨달을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를 깨닫지 못한 것도 내게 재능이 없어서일 터.

'어쩔 수 없지. 세월을 쏟아서 더더욱 나아갈 수밖에.'

기혈이 가라앉자, 몇년동안 수련해왔던 법력들이 움틀거렸다.

'그래도, 세월을 쏟으며 결국 도달하였다...'

쿠구구구구!

목 속성 법력이 몰려들며, 영기의 점을 생성한다.

그리고, 결국 폭발한다.

콰아앙!

단전에서 충격이 일며, 목 속성의 영기, 청색(靑色)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황색, 흑색, 적색, 백색, 청색.

'오월입도경을, 대성했다...!'

후우우...

숨을 내뱉자, 주변으로 오색의 구름이 피어오르며 내 주변을 회전하였다.

"축기기에, 도전해볼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오행이 전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회복력이 올라갔다.

과연, 이번에 축기기에 도전하면 어찌될지...

쿠구구구!

나는 오색의 구름을 빨아들여, 단전을 한가득 채웠다.

오색의 구름은 단전 안에서 회전하며 점차 중앙으로 몰려들었다.

'간다!'

꾸웅!

둔재가 세월을 쌓아올려 가장 무식한 방법으로 올라왔다.

축기기의 벽이 얼마나 두껍든, 감히 이 세월 앞에 비할 수 있을 듯 싶은가.

꽈앙!

체내에서 오색(五色)의 별이 빛났다.

하지만 오색의 별은 여전히 오영근인 내 자질에서 오는 미세한 변화에 계속 진동하더니, 다시 별에 금이 가버렸다.

파직, 피싯!

꽈아아앙!

결국 다시 폭발이 일어나며 별이 폭발해 버렸고, 축기기 도전을 위해 쌓아올렸던 영운들이 전부 소멸해 버렸다.

연기기 14성까지 쌓아올렸던 경지가 다시 12성으로 돌아갔다.

"후우..."

이번에도 실패였다.

그러나.

"후우, 후우..."

약 스무 번의 호흡을 했을 때였다.

쿠구구구구-

단전에, 다시 법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개의 공법을 대성했을 때, 이미 법력의 회복 속도는 반나절만에 모든 경지를 회복할 정도였다.

오행공법을 모두 대성한 지금, 법력의 회복속도는 호흡 스무 번을 할 시간에 연기기 14성의 수행이 전부 회복될 정도로 빨라졌다.

"다시 간다."

쿠구구구!

삽시간에 오색의 영운을 회복한 나는, 다시금 축기에 도전하였다.

쿠웅, 쿠웅, 쿠웅!

한 번 별이 터질 때마다, 나는 오행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었다.

오행의 변화가 내가 이룬 오행공법에 대응되며 정확히 관측된다.

한 번 실패할 때마다, 확실한 실패의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하기만 해온 인생.

그 썩은 실패의 거름들이 쌓여서, 언젠간 싹을 틔울 것이었다.

동시에, 오행의 흐름을 관측할 때마다 체내에 자리잡은 오월입도경의 법력들이 조금씩 균형을 맞춰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익혀온 공법 중, 지월입도결의 법력이 다른 법력들보다 조금 더 많았고, 익힌 순서대로 조금씩 법력에 차이가 있었다.

차이라고 하기에도 미약한 정도였으나, 그 미세한 차이들이 점차 메워지며 완벽한 균형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미약한 틈새가 메워질 때마다, 나는 회복력이 여기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스무 호흡 정도에서, 열아홉하고도 반 호흡.

'더 간다.'

꾸웅!

나는 단전에 집중을 하며 수련을 계속했다.

'남은 시간은 10여년.'

그 시간 안에, 반드시 뚫는다!

나는 쇄천봉 안쪽 동굴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축기기에 도전하며, 오월입도결의 미세한 법력의 비율을 조정했다.

김영훈 역시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깨달음을 잡으며 수련을 하는 중인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렀을 때였다.

"은현아, 나와보거라."

"예, 김 형. 무슨.. 헛!"

나는 김영훈의 몰골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삐쩍 말라 있었으며, 눈 밑에는 검은 기미가 잔뜩 내려앉아 완전히 살아있는 해골바가지 같은 모습이었다.

또한 그의 손에는 피딱지가 잔뜩 눌어붙어 있었고, 그 상태로 도를 쥐고 있어, 피딱지가 도에 붙어 마치 손과 도가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50여일간, 내단의 기(氣)만으로 생존하며 미친 듯이 도를 휘둘렀다. 그리고, 은현아..."

주륵...

김영훈의 삐쩍 마른 얼굴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40년을 고련한 끝에... 드디어, 드디어 닿았다."

"..."

수도공법을 수련하느라, 김영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었다.

"지금부터, 도약을 시작할 것이다. 네게 보여주기 위해 찾아왔다."

"...예."

나는 공법의 수련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영훈을 따라갔다.

우리는 쇄천봉의 아래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 앞쪽으로 갔다.

김영훈은 비쩍 마른 몰골로 도를 들어올렸다.

"천천히, 설명해주마. 이 너머의 경지에 대해..."

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이 너머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요한 것은,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의식의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다.

월도입천무의 창시자는 인간의 의식형태를 요족공법과 같이, 인간과 똑같은 형상으로 바꿔보려다가 무공의 길이 아니라 느껴서 포기했다 했지.

하지만 그는 요족 공법을 참조하면서, 요수들이 자신의 종과 똑같은 의식 형태로 의식을 바꾸는 이유를 궁구했다.

그 이유는 요족 본연의 야성을 끌어올리며 기운을 그에 반응케 해, 육신을 극한으로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지."

그는 설명을 하며,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단맥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끈-

점차, 그의 의식의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상단전이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어째서 월도입천무의 창시자는, 그것이 인간 본연의 의식형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는가. 나는 그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던 중, 월도입천무가 그의 주관성이 깊은 이유를 파고들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부웅, 부웅, 부웅!

점차, 느릿하던 그의 춤사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인간은, 모두가 본디 유일(唯一)한 존재라는 것이었지. 요족들은 본래 지성이 없던 이들이 영성을 얻어 지성을 얻기에, 그러한 삶, 그 자체에 고민할 이유가 없어 야성을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겠지만.

본래부터 지성이 있는 우리는 고민하는 존재다. 고민하며 삶을 사는 존재라면, 그 각각의 고민이 전부 다를 수밖에 없고, 각각의 삶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우우웅-

그의 의식이,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의식의 형태란. 그 인간이 삶에서 가장 궁구(窮究)하였던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황금빛이었다.

이전 삶의 김영훈은 그저 재능을 불사르는 식으로 스스로를 태워 도약하였으나,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평생을 궁구한 김영훈은, 훨씬 더 안정적으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 황금빛 의념 너머에서, 어쩐지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던.

그 모든 시절.

김영훈의 주변으로, 아홉 명의 김영훈이 나타났다.

아홉 개의 강환이 김영훈의 주변에서 회전한다.

그리고, 점차 그의 의식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내가 평생을 무공을 수련하며 가장 바라고 원했던 것은. 빛살처럼 빠르게 하늘을 넘어 가족에게 다시 가는 것이었다.

은현아, 너는 삶이 무에 녹아드는 것이라 하였지. 그 말이 맞더구나. 내 무공의 특징이 쾌속(快速)이었던 것은 더욱 더 빨리, 가족에게 가고픈 마음이 녹아있던 것이었어..."

'아아...'

그의 의식이 실체화되며, 압축되었다.

이전에는 그의 의식이 실선이 되어 도신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의 의식은 한 자루의 도(刀)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김영훈에게 가장 잘 맞는 의식의 형태는, 황금빛의 도였다.

의식의 도가, 김영훈이 쥐고 있던 도신에 깃들었다.

김영훈이 펼치던 단맥도법의 마지막 초식이 끝났다.

강환으로 사고를 가속시키며, 찰나조차 놓치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관찰하였다.

찰나의 세계.

황금빛으로 불타오르는, 황금빛의 광도(光刀)를 잡은 김영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곳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찰나의 세상에서 나와 그의 의념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무엇일 것 같으냐.]

[알려주십시오.]

[고민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명쾌했다.]

그가 싱긋 웃었다.

[이 경지는, 월도입천무를 창시한 창시자의 피고름으로 쌓아올려진 경지. 나는 창시자의 피고름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이 경지가 개척되기까지 어떤 고통과 역사가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

월수궁무록부터 시작해, 월도입천무에 도달하는.

김영훈의 피로 이뤄진 무(武)의 새로운 역사(歷史).

[등봉조극이 가상의 경지였다지만, 이는 가상조차도 넘어선 경지. 그렇다면 마땅히, 최초로 개척한 이에게 그 이름을 지을 권한이 있겠지. 나에겐 이름을 지을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이 경지는 그 창시자의 의지를 따...]

황금빛 의식의 도신과, 김영훈의 피고름이 맺힌 도신이 합일했듯이.

지난 삶의 김영훈의 모습이, 어쩐지 지금의 김영훈에게 겹쳐보였다.

아니, 지난 모든 삶의 김영훈들의 시체가, 그의 뒤에 있었다.

김영훈의 피로 쌓아올려진, 그가 만들어낸 무공의 역사가, 새로운 경지와 하나가 된다.

[월도입천(越道入天)이라 불릴 것이다.]

다음 순간.

찰나의 세계에서, 빛의 도신은 사고를 10배로 가속한 내가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휘둘러지며, 천지사방을 황금빛으로 밝혔다.

"월도입천(越道入天), 능광도(凌光刀)!!!"

빛살이 공간을 넘어서며, 눈 앞의 봉우리를 그대로 반으로 쪼개버렸다.

소리가 폭음을 늦게 따라오며, 잠시 후 폭음이 울렸다.

"...이것이, 내가 도달한 나만의 삶의 길."

김영훈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삶은 곧, 기쁨인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무수한 선인(先人)들. 그리고 가족, 그리고 이 삶 그 자체에게, 감사한다."

봉우리가 무너지며 생긴 그 먼지구름 속에서, 김영훈은 웃고, 또 웃었다.

명(命)(4) -여기까지 무료-

'아아...'

아름답다.

너무나도 눈부시다.

나는 말없이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빛난다.

김영훈은 너무나도 빛나고 있었다.

"...대단, 하시군요."

평소대로라면,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줄 터였다.

아니면 존경의 뜻을 담아 절이라도 올리거나.

그러나, 나는 그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만 그의 업적에 찬탄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빛과 같았다.

그러나, 지난 번의 심마가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에 비하여, 나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한 것 같아 보였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그는 나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그대로 쓰러졌다.

풀썩-

"아..."

그랬다.

그는 몇 달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정신 나간 듯이 도만 휘두른 끝에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나는 황급히 김영훈을 데려다가 눕히고 그를 치료했다.

나는 잠든 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감정은 질투인가.

아니, 아니었다.

나 자신의 재능에 대한 박탈감, 그리고 약간의 허망함, 그리고 초라함이었다.

그는 볼수록 새로운 재능을 개화하며 앞으로 나아가건만, 나는 그와 같은 거리를 가려면 말 그대로 수 배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빛을 보자, 내 마음속의 그림자가 더욱 더 드리운 것인지.

나는 오히려 더 희망이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남은 시간 안에, 축기기에는 들 수 있을까.'

솔직히 그조차도 잘 모르겠다.

균형은 갈수록 완벽해지고, 호흡도 짧아졌으나,

나는 아직도 축기기에 들지 못했다.

거기다가 축기기에 계속 도전하며 오월입도경의 비율을 조정하는 것 역시, 점차 그 미묘한 비율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이 어려워졌다.

'...수도공법도, 무공도.'

마치 하늘이 억지로 거부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운명에 인력이란 것이 있다면, 내 운명에는 도대체 무슨 인력이 있기에 나를 이리도 다음 경지로 갈 수 없도록 묶어놓는 것일까.

'다음 경지의 벽을, 정말로 이 생 안에 넘을 수 있을까...'

나는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며칠동안 김영훈의 원기를 되살려 주었다.

며칠 후, 김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형,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는 일어나자, 얼마간 나를 바라보았다.

"김 형?"

내가 되묻자, 김영훈은 그제야 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곳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기 힘든 겁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젓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뭐지..?'

김영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를 잡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하늘을 보며 잠시 미소를 짓더니, 근처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 앉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나를 관찰하는 듯 했다.

나는 김영훈의 의념을 읽어보았다.

그의 의념은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으로 차 있었다.

'기대감... 설마.'

그의 직감으로는 내가 자신과 비슷하게 경지에 이르리라고 느꼈다 한다.

그는 어쩌면, 내가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기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김 형.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재능이 없습니다."

그러나 김영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관찰할 뿐이었다.

"..."

나는 잠시 김영훈을 보다가 한숨을 쉬고, 들어가서 따로 수도공법을 조정하고, 무공을 수련했다.

그 날부터, 김영훈의 기행은 계속 이어졌다.

월도입천의 경지에 도달하고 다시 깨어난 날로부터, 김영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가끔 생필품을 사러갈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입을 열어 말을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럴 때도 나와는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으며, 항상 호기심과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으면, 한참 멀리 떨어진 봉우리로 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멀리 떨어져도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담스럽군.'

마치, 언제쯤 내가 다음 경지에 이를지 궁금해하는 듯 했다.

아니, 그런 듯이 아니라 그런 기색이 맞았다.

가끔 그에게 무공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러 가거나, 월도입천의 무예를 견식하고자 찾아가도 그는 나와 대화하는 걸 피했고, 더 이상 내게 가르침을 주지도 않았다.

내게, 어떠한 의도를 내비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으나, 어쩔 수 없이 그의 위치를 수긍하고 나 스스로 무공을 수련하고 오월입도경을 조정해갔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김영훈은 인내심 있게 내 근처를 맴돌며, 기묘한 관조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했다.

'미쳐버릴 것 같군.'

무슨 의사를 내비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머리가 이상해진 것도 아니며 실어증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게 아무런 가르침도, 조언도, 말동무조차도 해 주지 않는다.

그저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뿐.

내가 언젠가 반드시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듯이, 상당한 기대감을 품으며.

* * *

몇 년째였지.

그리고, 몇 번째였지.

'또 실패했다.'

실패의 실패를 거듭하며 오행의 변화를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그 결과 약 7할 이상의 변화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축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마 나머지 3할의 변화도 파악할 수 있다면, 축기기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이젠 정말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한 달, 두, 세 달 남았던가.'

내 수명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퀭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무공도 수도공법도,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나는 먼지나 다름없다.

그러나, 김영훈은 먼지와도 같은 이 나를 여전히 저 멀리서 기대감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저벅, 저벅..

나는 김영훈의 앞으로 가, 그에게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제가 말했지요. 저는 이제 슬슬 수명이 다 되어 갑니다. 수도자이기도 하여 제 수명은 제가 잘 알 수 있으니까요."

"..."

"월도입천에 드신 후, 도대체 왜 제게 입을 열지 않는지는,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이쯤 됐으면 제가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뭔가 알려주실 수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옅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됐습니다. 저는 곧 죽습니다. 도와주시지도, 충고해주시지도 않겠지요. 그저... 작별인사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이번에 축기기에 들지 못하면, 나는 정말로 죽는다.

"김 형이 도대체 왜, 무슨 묵언수행을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당신이 월도입천에 이른 후 갑자기 입을 닫은 이유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고, 답답해 미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대종사입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을 존경하겠습니다. 새로운 광경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김영훈에게 절을 하고, 천천히 쇄천봉의 한 곳으로 향했다.

* * *

서은현의 작별인사를 받은 김영훈은, 저 멀리 멀어지는 서은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모르는거냐. 은현아."

어쩌면, 시야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김영훈의 눈에는 보였다.

"이미 너는 완성되었다. 무기를 완성한 수준을 넘어서, 이미 무기를 뽑아서 손에 들고 있는 수준이다.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데... 왜 휘두르지 않는 것이야.."

서은현은 김영훈이 입을 닫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김영훈은 지금껏 누구보다도 시끄럽게 서은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월도입천의 경지에서 서은현의 무의식을 끊임없이 자극시키고 옆에서 도야시키고 있었다.

육성으로 말을 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육성으로 말을 전해보았자 괜히 깨달음의 본질이 흐리게 전달될 뿐이었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서은현을 자극시키고 점차 각성시키는 중이었으나, 서은현은 도무지 반응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했던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월도입천에 달하고, 기절한 후 다시 일어나 서은현을 보았을 때.

김영훈은 너무도 놀라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월도입천의 경지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으나.

서은현의 '그것'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그것도 김영훈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드높고, 단단하게.

당장 서은현이 휘두르기만 하면 될 정도.

김영훈은 그것을 본 이후, 끊임없이 서은현의 무의식에 있는 그것에 말을 걸며 그것을 자극시키고 도야시켰다.

육성으로 주는 가르침도, 무기를 부딪혀 주는 가르침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괜히 그런 가르침은 본질을 흐릴 것을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제 죽을 날이 다가와버렸다.

'지금이라도, 말을 해 주어야 하는가.'

너는 완성되어 있다고.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하면, 지금이라도 깨우칠 수 있는가.

김영훈은 저 멀리서 수도공법을 수련하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문득, 서은현의 '그것'에 김영훈 자신의 모습이 비춰보였다.

"...됐다."

김영훈은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냥, 하던 대로 옆에서 끊임없이 무의식을 자극시켜 주기로 하였다.

"녀석을 믿어보지."

아니, 믿지 않을 수 없다.

누구라도, 저런 것을 본다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 힘들어하면, 한 번 정도만 보여주면 되겠지."

김영훈은 자신의 감을, 그리고 자신이 본 서은현의 내면을 믿기로 하였다.

* * *

아무리 거름을 주어도 싹을 볼 수 없는 기분을 아는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실패라는 거름을 주며 대지를 보듬어 왔지만, 도무지 싹은 날 생각을 않는다.

쿠웅, 쿠웅, 쿠웅!

축기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별들이 깨지고, 오행이 조정되고, 그리고 다시 실패한다.

후우우...

스무 호흡의 회복력이었던 것이, 이제는 다섯 호흡의 회복력으로 줄어 있었다.

한없이 완벽에 가깝다.

그러나, 마치 무리수의 끝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끝없이 미세하게 조정해야 할 부분이 눈에 띈다.

아무리 조정해도 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냐...'

아무리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꾸구궁!

다시 한번 영기의 별이 폭발한다.

'왜 매번 폭발하는 것인가...'

솔직히 오월입도경을 대성하고, 여기까지 극한으로 비율을 조정했으면 됐지 않은가.

도대체 여기서 뭘 더 바란단 말인가..!

'도대체 뭘...!'

심마가 절로 치솟아 오르며, 울혈이 터져나올 듯 했다.

"뭘 더 하란 말이냐.."

그리고, 그 때였다.

"...음?"

나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저 먼 곳을 보았다.

"...저건."

김영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랬다.

검무(劍舞)였다.

그것은 단악검법이었다.

1초부터 24초까지의 초식이 허공을 휩쓸었고, 김영훈은 모든 초식이 끝난 후 다시 도를 칼집에 넣어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내게, 뭔가를 말하려 한 것인가?'

뭘 말한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은 무공에 대한 고민도 아니고, 수도공법에 대한 고민을 하던 것인데.

하지만, 나는 어쩐지 김영훈이 보여주었던 단악검법의 그 짧은 춤사위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단악검법을 보여줬지?'

내게 깨달음을 줄 것이라면 월도입천의 경지에 이른, 그 능광도를 보여주어 상단전을 자극이라도 시켜주는 게 낫지 않은가?

'아니, 하수가 고수의 뜻을 이해하려 해봤자지... 그렇다면, 뭔가 그가 내게 단악검법을 보여주려 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인데...'

기이하게도 김영훈의 검법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그가 펼친 것은 단순한 단악검법이 아니었다.

'내' 단악검법이었다.

내가 평소에 쓰던 자세, 몸짓, 습관, 의념의 향방, 기의 완급 등을 모조리 똑같이 흉내낸, '내' 단악검법.

그랬기에 나는 김영훈을 통해서 나의 검세를 보고 그것을 인상깊게 여겼던 것이리라.

'왜 내 단악검법을 보여준 거지?'

나는 내 검법에 있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 김영훈이 보여준 검법을 떠올려 보았다.

"문제가... 없는데?"

썩어도 나는 등봉조극의 극한에 이른 고수였다.

그가 보여준 내 단악검법에는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어떤 빈틈도 없었고 모든 흐름이 완벽하고 안정적이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잠재되어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천재의 눈으로 보는, 월도입천에 도달한 김영훈의 시야라면 나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잘 생각해보자.

분명 그가 내게 저것을 보여준 이유는...

...

"...없다."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고민 속에서 김영훈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내게, 문제가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나를, 격려하기 위해?

"...내가 완벽하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나보다 윗 단계의 고수였고,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의 무공천재였다.

내 빈틈이 안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보다 윗 단계인 김영훈이 보기에 문제가 없다면, 정말로 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어쩌면, 내 무(武)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게 아닐까?

지잉-

완성.

어쩐지 그 생각이 들자, 가슴 한켠에서 뭔가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 느낌은 일전, 김영훈에게서 사람의 삶에 따라 월도입천의 경지가 나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와 같았다.

무언가, 가슴이 울린다.

지잉-

뭔가가, 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이 느낌의 정체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던 와중, 난 이 간질간질한 느낌을 기억해내었다.

제자들의 의념의 색을 보며 그들의 삶을 관찰했을 때.

스승님과 함께 수학하며, 그분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김영훈이 월도입천에 이르던 것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때.

'이 느낌은...'

삶(生)을 가까이에서 느꼈을 때에 느낀 것이었다.

"아아!"

그랬다.

가슴 속에서 뭔가를 두드리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아아...!"

나는 문득,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완성이라는 말에, 삶이라는 말에 마음이 반응했던 이유.

그것은 어쩌면, 지난 내 삶들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가슴의 떨림으로 느껴지던 어떤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하고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아아..."

화가 난다.

억울하다.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단 말인가.

각국의 언어를, 요족의 언어를, 새로운 감각을 여러 개 익혔으면 뭘 하는가.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김영훈은 끊임없이 내게 말하고, 내 무의식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나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나는 재능이 없습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눈물을 흘렸다.

* * *

"재능?"

김영훈은 쇄천봉의 봉우리 위에 앉아, 반대편 봉우리에서 눈물을 쏟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피식-

"여기까지 왔는데, 재능이 무슨 상관이냐.

설령 내가 하늘이 내린 재능이고, 네가 하늘이 버린 재능일지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재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아니다.

삶의 의미를 찾은 자와, 찾으려 하는 자이지. 나는 의미를 찾았다. 네 의미는 뭐지? 너는 내게 없는 것이 있다. 너는 분명 네 삶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월도입천의 공능에 의해 김영훈의 의지에 따라 그의 말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