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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우리는 꼭두각시들을 돌파하고, 수많은 기관장치를 피하며 안을 뒤졌다.

전함의 안쪽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었고, 차라리 그 규모는 대산맥에서 보았던 금신천뢰문의 규모에 뒤지지 않았다.

심지어 흑색귀골곡엔 이런 전함이 현재 두 대는 더 있다는 것이니.

그 성세를 익히 짐작할만 했다.

바깥에서 볼 때 반파된 곳은 공간이 일그러진 것인지 아예 진입이 불가능했고, 우리는 공간이 멀쩡한 곳의 기관을 부수며, 배의 하부로 내려갔다.

싸아아아...

전함의 하층에는 귀기가 가득했다.

귀신이나 원혼은 없었지만, 그 가공할 귀기에 의식이 떨려올 정도였다.

"서 형. 조금 의식이 아려오는군요."

이곳의 귀기가 의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서란은 그 말에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작은 금빛 방울이 튀어나오더니, 한 번 흔들렸다.

딸랑-

맑은 소리와 함께 주변의 어둠이 조금 몰려가는 듯 했고.

그제야 의식에 가해지는 통증이 조금 줄어들었다.

"구마(驅魔)의 힘을 지닌 법보(法寶)로 귀기를 조금 몰아냈다. 지난 3년간 이 법보에 힘을 불어넣느라 고생했지. 하지만 통증을 완전히 없애려면 의식을 압축해서 의식에 형태를 부여하는 게 좋을 거다."

서란은 나를 보며 조언을 해 주었다.

나는 그 말에 호풍응룡변의 구결을 이용하여, 의식을 해룡과 같은 형태로 바꾸었다.

서란의 의식은 그와 완전히 같은 형태로 그를 덮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부담을 적게 받는 듯 했다.

'확실히 의식에 형이 갖추어지니 정신에 가해지는 공격에 더 잘 저항할 수가 있군.'

나는 의식을 단단하게 방비하고, 서란에게 질문하였다.

"서 형. 그런데 법보는 또 무엇입니까? 법기와 다른 것입니까?"

"별 걸 다 물어보는군. 법기는 연기기부터 축기기 수도자가 사용하는 장난감.

법보는 결단기 수도자가 사용하는 진정한 무구를 뜻하지. 결단기 수도자의 금단(金丹) 내부의 힘을 먹고, 수도자와 같이 성장하는 법구를 뜻한다."

그는 법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결단기 수도자가 아닌 축기기 이하가 사용하려면, 이렇게 몇년간 힘을 축적했다가 사용해야 하긴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음 그렇다면 서 형께서도 추후에 결단기에 상응하는 경지에 오르면 법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서란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쉽게도 요족은 원래 법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엄니와 발톱, 비늘 등이 곧 우리의 법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 이 법보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만 가끔 쓰는 것이지, 내 주력기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우리는 섭명함의 귀기를 몰아내며, 곳곳에서 달려드는 꼭두각시들과 기관장치를 부수며 더욱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나저나 섭명함은 정말 명계를 건널 수 있는 겁니까?"

"상징적인 이름이겠지. 듣기로 이건 고대의 명장이 만든 전함인데, 진선들의 선보를 본따 만들었다 하니 그 선보는 정말 명계로도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전함은 공간을 넘는 건 가능하여도 완전히 죽은 이들의 세계로 가지는 못한다 알고 있다."

"공간을 넘는 건 또 가능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막 달려드는 꼭두각시 하나를 박살내며, 그렇게 아래로 내려갔을 때였다.

"음? 이번 층은 꼭두각시가 안 달려드는군요."

조용하다.

그리고, 어둡다.

이전 층에서는 대략적인 윤곽이라도 보였다면, 이번 층은 완전히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하다.

그리고, 귀기가 넘실거렸다.

"..."

"..."

나와 서란은 아무런 의견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동시에 입을 다물고 주변을 경계했다.

요족의 지각은 예민했다.

주변의 태극의 순환이 바뀌었다.

음양이 제대로 순환하지 않고, 양기가 음기에 억눌려 있다.

이번 층에,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

그때였다.

[왠 귀신이 섭명함에 감히 흘러들었나 했더니... 요족 한 마리와 인간이잖아? 요족 놈이야 그렇다 치고, 이건 또 뭔데 살아있는 인간 주제에 혼(魂)에 죽음을 몇 겹이나 덧칠하고 있는 게야?]

오싹!

"커헉..!"

"크으욱!"

숨 쉬기가 힘들다.

몸에 절로 오한이 든다.

[귀신들이야 자기 죽음을 덧칠하고 있는 게 당연한데. 이 놈은 도대체 왜 죽음이 여러겹 덧칠된 게지? 기이히다 기이해...]

나는 이 기운을 느낀 적이 있다.

막리세가, 진씨세가, 청문세가 등에서 느낀 기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재해.

결단기(結丹期)의 기척이다.

[아주 큰 귀신이로구나. 산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귀신아... 너는 감히 어떤 용무로 이곳에 들어왔느냐?]

"크허억..! 도, 도망치자!"

번쩍!

서란의 방울에서 광채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나와 그를 압박하던 압력이 순간 사라졌다.

[이 놈, 그 법보는 설마..]

"빨리 위쪽으로...!"

서란이 절규하듯 울부짖었고, 나와 그는 미친듯이 윗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아하하, 그렇군. 해룡왕가의 사생아가 네놈이로구나. 서휼의 후예인 왕족(王族)일텐데 다들 상계로 올라갔을 시기에도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서휼이 네놈을 버린 것이겠지. 아주 큰 귀신 한 마리와 본곡의 오점(汚點)이라니. 죽은 늙은이한테도 신나는 날이 오는구나!]

쿠구구구!

밑바닥에서부터 시꺼먼 귀기가 우리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감히 네깟 놈들이 천인기 수도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성 싶으냐!]

저 존재의 목소리가 전함 곳곳을 울린다.

나는 천인기라는 말에 머릿속이 아찔해져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정신 차려라! 천인기라면 이번에 비승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 괴군에게 살해당한 천인기 수도자의 분혼쯤 될 것이야! 고작해야 결단기 수준의 힘밖에, 그것도 이 전함 안에서밖에 못 낼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해라!"

나는 서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호풍응룡변을 운용하며 바람으로 몸을 감싼채 더더욱 빠르게 위쪽으로 도망쳤다.

[감히 어딜 도망치느냐, 버러지들이!]

쿠구구!

뒤쪽에서, 음기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전야(2)

쿠구구구구!

어둠이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수천 개의 검은 손들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향해 뻗쳐온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피하며, 최적의 경로로 아슬아슬하게 모든 손들을 비껴나갔다.

산군월악비가 극성으로 발휘되며, 나는 귀수(鬼手)들에 털끝조차 닿지 않고 검은 손들에게서 탈출하였다.

그러나 서란의 경우, 그 거체를 가지고 있는 탓인지 조금 탈출은 힘겨웠다.

서란은 구마와 파사의 힘을 가진 황금방울의 힘을 빌려, 그에게 달라붙은 몇몇 손들을 태워버리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귀수들에게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우리가 박살내며 내려왔던 꼭두각시들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더니 우리에게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부웅, 붕, 붕!

"서 형. 멈추지 말고 앞만 보십시오."

나는 양손에서 검강을 뿜어내며 사방으로 휘둘렀다.

콰과광!

콰광, 콰아앙!

이기어검의 묘리에 따라, 내 검강은 허공에서 마구 궤도가 꺾이며 우리에게 날아드는 꼭두각시 부속품들을 전부 사방으로 쳐내버렸다.

촤아아아!

그러나 저 앞 전방.

마치 해일과도 같은, 우리가 망가뜨린 부속품들의 파도가 우리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파도 속에서는 강렬한 귀기가 뿜어지며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장 강력한 일격을 준비해라."

"예."

나는 장심으로 강환을 뿜어냈고, 서 형은 입가에 영력을 모았다.

"뚫는다!"

퍼엉!

콰아아아!

내 손에서 세 개의 강환이 날아가 빛의 폭풍이 되어 파도를 멈춰세웠고.

서란의 입에서 푸른 빛의 폭류가 쏟아져나와 파도를 향해 직격했다.

콰과과과광!

서란의 숨결이 파도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우리는 놓칠세라 구멍을 향해 돌진하여 파도를 벗어났다.

우리는 서둘러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시꺼멓고 질척질척한 어둠들이 우리를 잡으려 쇄도하였다.

나와 서란은 계속해서 입에서 숨결을 뿜고, 장심에서 강환을 뿜거나 하는 등 나아가며 결단기급 귀혼의 추적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보였다.

화아아악!

그렇게, 섭명함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콰아아아아!

섭명함 자체에서 수많은 검은 손들이 빠져나온다.

나는 검은 손들을 전부 피했으나, 서란은 그 거체를 전부 움직여 피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선체에서 귀수들이 튀어나온 이유 역시 있었다.

웅- 웅-

동시에, 선체가 웅웅 울리는 듯 하더니 귀혼의 목소리가 울렸다.

[잘도 도망치는구나. 감히 버러지들 주제에.. 네놈들도 섭명함에 온 이유는 그것이겠지? 괴군 그 쓰레기같은 놈처럼 본곡의 물건을 약탈하려고...!

내가 있는 한은 안 된다... 이 배는 망가져 폐기되었을지언정 한때 청색귀골곡(靑色鬼骨谷)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본곡의 신물이다..!

누구도 본곡의 물건을 탐할 수는 없어...!!!]

'청색귀골곡?'

의문을 가질 틈새도 없이, 또 다시 거대한 귀수가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나는 장심에서 강환을 날려 귀수를 폭발시켜버리고, 서란에게 다가갔다.

"서 형. 풀어드리겠.."

"됐다. 힘을 모았다, 내가 풀 수 있다!"

쿠구구구!

서란의 몸에서 급격하게 요력이 방출된다.

동시에, 황금빛 기운이 그의 몸에서 일어나 비늘 사이사이로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황금빛 호신강기로 스스로를 덮은 듯 하였다.

'아까 그 법보의 힘을 몸에 두른 것인가?'

퍼벙, 펑, 퍼엉!

그를 잡은 귀수들이 터져나가며, 서란의 몸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섭명함에서는 다시 수천개의 귀수들이 뿜어져나와 그를 잡으려 하였다.

동시에 귀혼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네 이놈! 그것은 본곡의 법보가 아니더냐! 썩 놓고 가지 못할까!]

"헛소리! 이건 내 법보다! 내 법보란 말이다!"

서란은 귀혼의 목소리에 고함을 내뱉으며 나에게 눈짓을 주었다.

콰아아아!

나는 호풍응룡변으로 바람을 일으켜 귀수들을 잘라버리고, 서란의 몸에 붙어, 그가 하늘을 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꽉 잡아라. 한 번에 결계를 빠르게 돌파할 것이다!"

"예!"

나는 양 옆에서 우리를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귀수들에 각기 강환을 날려 터트려버리곤, 서란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촤아아아악!

그의 비늘 사이사이에서 푸른 빛이 뿜어진다.

일순간, 서란의 거체가 폭발적인 힘을 내뿜더니 공간을 넘어들듯 배 근처에서 벗어나 물의 장벽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내가 슬쩍 뒤를 보자, 뒤쪽에는 수백 수천개의 검은 손이 넘실거리는 섭명함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악!

나는 다시 전신이 물에 젖어버렸고, 해무지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해무가 검게 물들며 우리를 뒤쫓았다.

서란은 우리를 쫓는 해무를 전부 따돌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안개의 끝자락을 향해 몸을 던진다.

파아아앗!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엔 상당한 저항력이 있었지만.

안에서 바깥으로 나갈 때엔 아무런 저항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촤아아아!

결계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서란의 비늘 사이에서 빛나던 빛이 사라져 버렸고, 서란은 힘없이 바다로 떨어져버렸다.

'이런, 탈진한건가.'

서란의 상태는 딱 봐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눈을 뒤집고 있었으며, 숨을 헐떡이며 꿈틀대고 바다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면 다른 바다 요수들에게 습격받을 수도 있으니... 일단 옮겨야겠어.'

나는 내공을 사용해 서란의 목을 잡아들고, 호풍응룡변을 발동했다.

나와 서란은 회오리에 휩싸여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크윽, 수 속성 공법을 익혔으면 그냥 바다에 띄워놓고 헤엄쳐 가도 됐을 것 같긴 한데..."

다음부터는 수월입도결도 꼭 익혀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무거운 그를 들고 얼마나 하늘을 날았을까.

화아악!

우리는 폭풍이 불어닥치는 해역 바깥으로 나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 허억..!"

그리고 햇빛을 맞자, 서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서 형. 내려놓아도 되겠습니까?"

"끄음.. 그러거라. 나도 목이 아프구나."

풍덩!

촤아아악!

나는 서란을 바다 밑으로 떨어뜨렸고, 그는 바다로 떨어지더니 다시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호풍응룡변을 사용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려 서란을 드느라 내단 내의 공력이 빠르게 소진되었었다.

'아마 나도 계속 서 형을 들고 날아갔으면 탈진할 뻔했겠어.'

"...어쨌든, 수 번이나 내게 도움을 주고. 나를 데리고 저 해역 밖으로 나와 준 데에는 감사한다. 저 해역에는 음 계열의 신통을 수련하는 요족들이 많았는데...

내가 기절한채 바다를 떠다녔다면 분명 그들의 먹잇감이 되었겠지."

"동지를 구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감사의 말은 넣어두시지요."

"하하, 동지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라..."

얼핏 서란의 얼굴과 의식에, 서글픈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알겠다. 어쨌든 이번의 도전은 실패했구나."

"그렇다면 서 형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저 안에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그건, 내게 너무 필요한 물건이야."

그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저곳은... 결단기급의 천인기 분혼이 지키고 있잖습니까. 어디를 더 조사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서란은, 입을 벌려 황금빛 방울을 꺼냈다.

"나도 저런 존재가 남아있을줄은 몰랐어서, 기본적인 귀혼들만을 퇴치하기 위해 3년동안 법보에 힘을 모았다. 하지만 저런 존재가 남아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그가 황금빛 방울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3년 이상. 더욱 더 많은 시간을 이 법보에 투자해서, 저 악귀마저 접근할 수 없게 더더욱 힘을 모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나는 반드시 내게 필요했던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다!"

서란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은현아. 10년. 10년 후에, 나를 다시 도와줄 수는 없겠느냐. 나는 그것을 꼭 얻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내 삶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눈에서는 어떠한 광기의 집착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내게 자신의 수행을 올릴 물건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수행이 아닌, 뭔가 다른 의미를 가진 건가보군.'

얼마간 고민을 한 나는 서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서 형과, 또 해룡왕께서는 제게 은혜를 베푸신 분들이니까요."

단순히 서란에게 고마워서 도와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서휼에게 역시 많은 은혜를 입었기에, 그를 도와주고자 함이었다.

내 말에 서란은 잠시 침묵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는 내게 감사인사를 한 후,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다시 만날 것인지를 약조한 후 헤어졌다.

"후..."

나는 바다 위에서 호풍응룡변으로 떠 있는 상태로 생각을 정리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주 큰 귀신이라...'

해무 속의 수많은 귀신들.

그리고 결단기 수준의 분혼은, 나를 아주 큰 귀신이라 불렀다.

동시에 천인기 수도자의 분혼은 내가 여러 죽음을 덧칠한 영혼을 가졌다 하였다.

'죽은 자의 눈에는 그런 것이 보이는건가.'

아무래도 결단기 분혼보다도 훨씬 실력이 높아 보이는 흑색귀골곡의 원로원주, 백골귀마는 지금까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이라는 영향력이 큰 듯했다.

'그리고 또 청색귀골곡이라. 딱히 성제국 황실 서고의 문헌에서도 그런 말은 본 적이 없는데. 청색귀골곡?'

뭔가 흑색귀골곡의 비사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본 후 머리를 휘저었다.

어차피 지금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추후에 더 정보를 얻어야 할 터.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은..'

나 역시 경지를 더욱 올려야 한다.

강환의 경지 역시 더더욱 올려 등봉조극의 극한에 이르고.

연기기 14성에서 축기기로 올라갈 방법 역시 찾아야 한다.

되든 안되든, 일단 최대한 시도해보자.

나는 우선 연국땅으로 올라가, 김영훈의 근처에서 무공경험치를 받으며 축기기로 올라갈 방도를 찾기로 했다.

* * *

나는 김영훈에게 하청산수를 통해 연락을 넣어, 내가 어디에 자리를 잡을지 알려준 후.

연국 연산성 인근 산으로 가, 근처의 사파 산적들을 전부 때려잡고 자리를 잡았다.

"우선, 수월입도결도 4성 정도까지는 익혀 봐야겠어."

아무래도 10년뒤 다시 서란과 함께 흑풍해 깊은 곳에 들어가 흑색귀골곡의 섭명함을 뒤질 텐데.

그때까지 최소한 물 속성 법술을 최소한이라도 쓸 줄은 알아야 민폐가 되진 않을 터였다.

내가 산 수도공법서는 수도계에서 기초 중 기초라고 취급되는, 저잣거리 공법서인 '오월입도경'이었다.

다섯 개의 지월입도, 수월입도, 화월입도, 목월입도, 금월입도의 수도공법 구결이 적혀진 기본서로.

지금까지야 지월입도결만 익혔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다른 공법의 구결도 익힐 수가 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지월입도결 하나도 익히기 버거워 지월입도결에만 집중했을 뿐.

어차피 서란을 도와 바다에서 활동하려면 최소한의 수 속성은 필요하니, 나도 최소한 정도로만 익힐 요량이었다.

나는 인근 계곡에서 수 속성 영력을 보충하며, 수월입도결 수련에 들어갔다.

수월입도결을 익히며 느낀것은.

예상외로 '쉽다'였다.

'지월입도결로 이미 영맥을 활성화시키고 전부 길을 뚫어놓아서인가.'

그냥 수 속성 법력만 길에 맞게 쌓으면 될뿐이었다.

거기에, 스승님께 배웠던 선각후통의 가르침은 단순히 토 속성 공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오행의 차이가 있어 어느 정도는 난항을 겪었으나, 나는 금세 수월입도결의 깨달음도 체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수월입도결 역시 잘 익힐 수 있었다.

촤아아악!

내가 수결을 맺자, 계곡의 물이 허공으로 떠올라 내가 생각한 대로 형태를 취한다.

다시 수결을 맺자,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내 법력이 맺히더니 주먹만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걸로 사막에 가서도 갈증은 문제 없겠군."

나는 씨익 웃으며 체내에 자리잡은 수월입도결의 법력을 느꼈다.

1년여간 용맹정진한 결과, 수월입도결은 어느덧 연기기 2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수 속성에 대응하는 칠십이지살진언 역시 전부 익혔고, 이제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 가능했다.

원래부터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이해도가 다른 수도자들에 비해서 압도적이었기에 다른 오행속성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럼 슬슬, 다시 축기에 도전해 볼까."

수월입도결을 익히면서도 무공수련도 멈추지 않았기에, 내 강환은 어느덧 다시 개수가 늘어 4개가 되었다.

이제는 5배 이상의 사고 가속도 가능한 것이다.

우우웅-

나는 자리를 잡고, 무극영운의 단계에서, 다시 다음 단계를 향해 도약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단전에서 영기의 구름이 휘몰아치며, 영기의 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역시 이전과 같은 흔들림과 변화에, 영기의 별에 다시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꽈과과광!

"....!"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영기의 별은 다시 폭발해 버렸고, 내 수행은 다시 12성으로 떨어졌다.

"후우..."

또 다시 원점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법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지월입도결을 운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기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회복속도가... 미악하게 빨라졌다...?'

법력의 회복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져 있었다.

불가사의한 현상!

나는 잠시 고민하던 중.

이게 무슨일인지 알 수 있었다.

'수월입도결!'

그랬다.

지월입도결 말고, 최근 연기기 1성 완공까지 끌어올린 수월입도결의 수기(水氣)가 지월입도결의 지기(地氣)와 상부상조(相扶相助)하며 영력의 회복속도가 조금 빨라진 것이었다.

'아, 당초 공법서를 살 때에 들었던 설명이었지.'

수도공법서를 팔던 노인이 설명해준 것이었다.

'잘 됐군. 이렇게 되면 조금 더 다음 도전 시기가 빨라지겠어.'

법력의 회복이 빠르다는 것은, 곧 더욱 더 많이 축기기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경지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 * *

4년이 지났다.

나는 수월입도결 역시 4성까지 익히는 데에 성공했고.

강환 네 개 역시 상당히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즈음.

김영훈이 찾아왔다.

"아니, 김 형. 몇년 전에 서한을 보냈는데 이제야 찾아오시깁니까?"

나는 껄껄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김영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미안하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더구나. 몇년 전부터 성제국쪽의 수도가문들에서 막리세가가 협약을 어겼답시고 공격을 벌인 탓에, 최근에는 막리세가가 잘 나다니지도 않아서 막리세가쪽도 신경 끄고 무공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우우웅..

김영훈이 강환을 띄워올렸다.

강환이 회전하며 세 개로 쪼개지고, 세 개로 쪼개진 강환들이 다시 세 개로 쪼개져, 총 아홉 개의 강환이 김영훈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등봉조극의 극한에 도달하는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다."

그의 안색은 이젠 숫제 숯처럼 시꺼매졌다.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하고 또 했다. 도대체 뭘 어찌해야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요수공법을 연구해서 다음 경지를 연구해도 역시 부족했다. 아직도 수많은 길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그 길 중 진짜는 아무것도 없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해야하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잡다한 잡기가 늘어나긴 했지만 그딴 잡기들이 많이 늘어봤자 경지는 올라가지 않는다.

도대체 이 너머에 어떻게 가야하는거냐. 도대체.."

잠시 감정을 토해내던 김영훈은, 심호흡을 잠시 하더니 조용해졌다.

"후... 미안하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잠시 토로해 봤다. 내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등봉조극까지는 누군가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온 느낌이라면, 이후부터는 경지가 없는데 그 없는 경지를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느낌이다.

의술도 연구하고, 수도공법도 진씨세가에 부탁해 연기기 3성까지 익혀봤다. 네가 말한 요수공법도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하지만, 다음 경지를 어찌 만들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구나."

그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등봉조극 역시, 가공의 경지였지.'

삼화취정의 경지도 희귀했고.

오기조원은 전설상의 경지였다.

그리고 등봉조극은 무림의 호사가들이 그냥 '상상'한 경지에 불과했다.

오기조원보다 강한 경지는 무엇일까.

만약 그런 경지가 있다면, 이름은 무엇으로 붙일까.

시답잖은 무림 호사가들의 설정놀음으로 탄생한 경지명.

등봉조극(登峰造極).

그리고, 지금 김영훈이 딛으려는 그 경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은 경지.

호사가들조차 등봉조극을 우스꽝스러운 경지놀음으로나 알진데.

그 너머의 경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등봉조극이야 상상의 경지이기에 이름이라도 있었으나, 그 너머는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이름조차 없었다.

김영훈은, 이름 없는 곳을 향해 발버둥치는 중인 셈이었다.

"미안하군요."

하지만, 나는 그의 발버둥에 동참할 수 없었다.

나는 느리다.

느릿하고 느릿해서, 아직도 고작 강환 4개. 등봉조극 중기의 실력일 뿐이었다.

이번 생에 강환 9개를 다룰 수 있을지조차 아직 확실치 않았다.

그런 내가 어찌 등봉조극 너머를 논할 수 있는가.

"저는 아직 그 경지를 논할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김영훈도 성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런 말을 하면 보통은 분위기 환기를 위해,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실력이라고 띄워주곤 했다.

그러나 김영훈은 어두운 안색으로 내 말을 긍정할 뿐이었다.

그가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이후는 전인미답(前人未踏). 그저 장난으로 논해진적조차 없는 경지. 들어서기 위한 '기본'이 등봉조극의 극한이다. 내 재능조차도 이 경지를 위해 부서질 정도로 갈고닦지 않으면 안 되더구나..."

문득, 그 말을 하던 김영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큭, 크흐..흐하하하하하...! 너무나도 원망스럽다. 차라리 내 재능이 일천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게 아닌, 있던 경지를 밟아가기에 급급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어...

이미 있는 경지라면 얼마든지 열심히 수련할텐데. 뭘 해야할지 방향조차 모르니. 너무나도 괴롭구나. 그조차도, 오직 나만이 유일한 개척자이니, 나는 포기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조차 든다.."

나는 씁쓸하게 김영훈을 마주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김영훈이 등봉조극에 올라간지는 사실 몇 번의 삶이 지났다.

지난 삶에도.

지지난 삶에도.

지지지난 삶에도.

그는 몇 번이고 등봉조극에 올라, 아홉 개의 강환을 휘두르며 몇 번이고 등봉조극의 극한에 달했지만.

여태껏 단 한번도 그 너머의 경지가 있다는 언급도.

그 너머의 경지를 발견했다는 기쁨도 보여주지 않았다.

과연,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는 정말로 있긴 한걸까.

나는 감히 그의 절망을 위로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은 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기에.

그저, 묵묵히 그 절망을 들어준 것 외에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간 감정을 토해내던 김영훈은 조금 진정한 모습으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사실 원래는 감정을 토로하려 온 것이 아니다. 이번에 온 것은 경고를 위해서다."

"어떤 경고 말입니까?"

"네가 준 호풍응룡변을 연구하던 중.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인간이 익히면 구결을 발동하는 동안, 인간의 의식을 강제로 용의 형태로 바꾼다.

나는 그 구결을 연구하던 중. 이것은 인간이 익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확실히, 호풍응룡변은 강력했지만 신통을 펼칠 때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꽉 껴입은듯한 느낌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에 너무 큰 무리를 준다. 네가 수도공법을 익혀서 얼마나 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와는 별개로.

그 구결을 익히는 것은, 비유하자면 잠수복 없이 바다에 깊은 곳에 바로 내려가 용의 껍질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네 영혼이 받는 부담이 너무 강할 것이야.

인간이 요수의 공법을 익히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

나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쩌면, 인간에겐 인간에게 딱 알맞는 의식의 형태가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최소한 그것이 해룡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연히 느꼈다."

인간에게 딱 맞는 의식의 형태.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전야(3)

인간에게 딱 맞는 의식의 형태.

"그건 단순히 제가 익히는 요수공법에 대한 경고입니까? 아니면, 김 형께서 찾은 어떠한 화두입니까?"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저런 말을 꺼냈을 리는 없다.

김영훈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 뭔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둘 다다."

"둘 다라면, 김 형께서 이미 다음 경지의 발판을 찾은 게 아닌지요?"

"하, 내가 네게 와서 감정을 토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걸로 다음 경지의 실마리를 찾았다면 진즉 네게 알려줬겠지."

그가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어쨌든 뭔가 찾긴 찾았나보군.'

그는 거대한 바위 앞쪽으로 가 기수식을 잡더니, 느릿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아무런 내공도 실리지 않은 손.

아무리 느릿하다지만 저 손으로 바위를 친다는 건 손이 박살나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행동!

그러나 그때였다.

파아앗!

"....!"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 김영훈의 일권.

아니, 그의 '의식'을 눈여겨보았다.

그의 의식이 요동치며, 순간 김영훈의 주먹 주변의 의식영역이 찌그러지더니, '주먹'과 같은 형태로 응집된다.

저건 마치...

'요수공법...!?'

의식영역을 개변시키는 요수공법과도 닮은 면이 있었다.

그리고, 김영훈의 주먹이 기어코 바위에 닿았다.

콰드드득!

"....!!"

마치 두부를 파고들어가듯.

김영훈의 주먹은 그대로 거암을 파고들어 팔뚝까지 들어간다.

'내공도 쓰지 않았는데!?'

내가 두 눈을 비비며 다시 보았지만, 김영훈의 팔에는 내공이 들어가있지 않았다.

"봐라."

투두둑

치이이이-

김영훈이 팔을 바위에서 꺼내며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 팔을 관찰하며 김영훈이 어떤 원리로 내공도 없이 바위를 파고든 건지 알아냈다.

'내공이 아니라, 체내에 자연적으로 흐르는 기본적인 기(氣)가 극한으로 활성화되어있다! 의식영역이 순간 주먹과 일치되자 주먹의 기본적인 기운이 최대로 활성화된거야...!'

파츠츳..

얼마간 내게 팔을 보여주던 그는, 집중이 풀렸는지 다시 주먹 형태로 찌그러뜨린 의식영역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최근에 얻은 화두라서 오래는 유지 못한다. 애초에 네 호풍응룡변처럼 자연스럽게 구결에 맞춰 의식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막무가내로 의식영역을 짜그러뜨린 것이니 말이다."

난 그의 말을 들으며, 김영훈에게 물었다.

"인간에게 맞는 의식형태는, 그러니까 김 형이 보여주신 것처럼 인간의 형태로 의식영역을 바꾸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것만 보아서는 그리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김영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게... 애매하다. 미묘하다고 해야할까..."

"예?"

"분명, 나는 눈 앞에 깔린 수십 수백 수천가지의 가짜 길 중에서 고민했다. 그러던 중, 인간의 형태로 의식을 압축시켜 육신의 기운을 강화시키는 그 방법을 찾았을 때... 나는 그게 '진짜 길'중 하나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내가 찾은 그 길이, 무공(武功)이 맞는지 알수가 없더구나."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뭔가, 무(武)의 영역과 미묘하게 겹쳐져 있기는 하지만. 직감상 왠지 그 길을 걸어나가면 종래에는 무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뜬끔없는 경지에 이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그럴지라도 지금 네가 밟은 요수공법의 경지는 어쨌든 잘못된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을 알려줄 의도도 있어 어느 정도는 익혔지."

"흐음..."

"그나저나, 그 호풍응룡변 말고 다른 요수공법을 구할 수는 없는 건가?"

"예, 아무래도 구하긴 힘들겠죠."

김영훈은 난감하다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참조할만한 자료가 있었으면 좋겠다만.."

"방금 김 형께서 의식영역을 바꾸는 건 무공의 영역과는 떨어져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지금까지 네가 준 호풍응룡변 단 하나만 연구했으니 비교하거나 대조할 것이 없지 않으냐. 다른 요수공법서를 얻어 연구할 수만 있으면 훨씬 자료가 많어지고 시행착오가 줄어들 거다."

"흐음... 한번 구하려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김영훈과 의식영역에 대해서 토론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우리는 서로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다섯번째 강환에 대한 실마리를, 김영훈은 수도공법과 요수공법, 그리고 무공에 대한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한 화두를 얻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몇 시진동안 토론을 하고는 헤어졌다.

오랜만에 만나서 손속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김영훈 본인이 무엇인가 고민되는 것이 있는지 손속을 겨루는 것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 * *

그 날 내게 찾아온 이후로, 김영훈은 더더욱 내게 빈번하게 찾아왔다.

특히나 수도공법과 요수공법에 대한 나만의 깨달음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무공에 한해서는 개세제일인이었지만.

아무래도 수도공법에 한해서는 나나, 혹은 내 이하 수준의 재능을 지닌 탓인지 그의 수도공법은 변화가 없었다.

물론 진짜 수도공법의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수도공법의 깨달음을 통해서 무공에 적용시켜 무공의 다음 경지를 타파하려는 의도가 더 컸으니 그에겐 상관은 없을 터였다.

나는 선통후각의 깨달음에 의거해서 수도공법에 대한 깨달음을 알려주었고.

김영훈은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강환의 깨달음을 풀어서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 * *

촤르르르-

내 주변의 계곡.

그곳의 계곡물이 내 주변으로 날아와, 나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촤아아아아!

마치 물이 폭발하듯이 비산하더니, 다시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나를 둘러싼 커다란 물방울을 형성하였다.

그 물의 법술 속에서,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물 속이었지만, 수 속성의 영기가 나와 이어져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부글부글..

나는 얼마간 물 속에 들어있다가, 수결을 맺어 물방울을 흩어버렸다.

수월입도결 역시 이제 연기기 9성, 오행진의의 단계에 이르렀다.

연기기 9성부터는 자신이 익힌 공법의 속성이 극한으로 발현되며 제대로 속성법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슈우우우우..

"법력의 회복속도가 훨씬 빨라졌군."

'지월입도와 수월입도, 두 공법구결을 대성하면 법력의 회복속도가 얼마나 오르려나.'

모르긴 몰라도 작은 폭으로 오르진 않을 터였다.

'과연 다른 속성의 두 공법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그러나 아직까지도 법력의 회복속도가 빨라져서 더욱 더 자주 축기기에 도전할 수 있게된 것 외에는 별 다른 효용은 없었다.

'일단 공법을 대성하고 나서 봐야겠군. 어차피 수월입도에서 남은 단계는 사상이의, 삼재규일, 이의합일, 일원일응, 무극영운 다섯 단계. 그런데 어차피 사상이의, 삼재규일, 이의합일의 경지는 지월입도로 영맥을 다 뚫어놓았으니, 남은 건 법력을 쌓는 것 정도밖에 없다.'

수월입도결 역시 대성(大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며 법력을 갈무리할 때였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보아 김영훈은 아닌데.'

무공을 익힌 자는 아니었다.

발걸음의 힘을 보아 젊은 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깊은 산속을 오는 것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발소리의 무게로 보아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후기지수도, 산에 익숙한 노인도,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도 아닌데 발걸음에 두려움도 없다?'

고관대작이거나, 수도자.

둘 중 하나다.

'수도자겠군.'

고관대작이라면 고작 한 명만 올리는 없다.

사용인을 수십 명은 대동하고 올 터였다.

슈칵!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인식을 베어내서 그 자리에서 몸을 감추었다.

얼마 후.

수풀을 헤치고, 적포를 입은 청년 수도자 한명이 나타났다.

"흠, 그 범인 놈이 자주 향하던 곳이 이곳이었는데..."

진씨세가의 수도자였다.

아무래도 김영훈의 뒤를 미행해, 그가 최근 자주 오는 이곳을 찾아온 듯 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긴 싫으니 거주지를 옮기고 김 형에겐 나중에 연락을 주어야겠군.'

나는 월수궁무록으로 몸을 숨긴 채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의식영역의 크기와 기운으로 볼 때, 이 자 역시 나와 같은 연기기 14성 수도자였다.

진씨세가의 유력 후기지수 중 한명이리라.

'옛날에 지나가며 한두번 본 것도 같군.'

녀석을 무시하고 그대로 떠나려 할 때였다.

"흐흐, 빌어먹을 범인 녀석. 범인 놈이 이상한 힘을 타고났답시고 감히 외당 장로가 돼? 말도 안되는 일이지.

이 빌어먹을 녀석, 어디 한번 실컷 고생해 봐라..!"

진씨세가의 후기지수 녀석이 주변에다가 영석을 던지며, 진법을 깔기 시작했다.

'함정을 까는 건가?'

녀석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김영훈은 이미 요족의 지각을 깨치며 천지영기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아마 소용없을 터였다.

녀석이 뭘 하나 지켜볼 때였다.

척, 척, 척..!

녀석이, 수결을 맺기 시작한다.

그럴때마다 놈의 주변으로 염화(炎火)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기운의 변화를 지켜보던 도중,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화얼진(火蘖陣)!"

화르르르!

주변으로 염화의 기운이 가득차오르며, 불꽃이 반경 3장을 뒤덮었다.

"숨어있는 놈은 당장 나와라!"

'...아, 그렇군.'

내가 월수궁무록으로 숨기 전 수속성 법술을 펼치고 남은 영기가 채 전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를 바탕으로 주변에 누군가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했다.

"어떤 놈이냐! 썩 나오지 못할까! 그 범인 외당 장로 놈과 무슨 관계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월수궁무록의 은신을 풀고 그의 앞에 나섰다.

내가 허깨비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타나자 상당히 놀랐는지.

진가의 수도자는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내 의식의 크기와 영력의 압박을 느끼며, 내 실력을 가늠했는지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뭐라 소개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김영훈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딱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냈다.

"본인은 당신에 진가의 외당장로인 김영훈 대협이, 진가로 들어가기 전부터 그에게 기술을 사사받았던 제자로, 최근에도 그와 깨달음을 주고받고 있었소만.

지금 귀하는 무엇을 하려 하시는 거요?"

"흥,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우리 진가의 영역이오! 우리 진가에게 허락은 받고 수련을 하는 거요!?"

'딱히 영지도 아니면서 짜증나게 하는군.'

물론 녀석의 심기를 괜히 긁어서 발광하게 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 근방에는 최근 진씨세가가 황조를 찬탈하며 자리를 잡았고, 안그래도 진씨세가의 콧대가 잔쯕 높아진 현 시점에서 진씨세가와 괜히 분쟁을 만들 필요는 없다.

특히나 진씨세가에 김영훈이 의탁하고 있다면 더더욱.

난 녀석의 말을 끊고 제안을 했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기나 한번 해보지 않겠소?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이 기술을 가르쳐 드리지."

파아앗!

내가 장심에 강환을 띄우자, 수도자는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눈에 탐욕이 피어났다.

"어, 어떤 내기입..니까? 아니 잠깐. 제가 지면 어찌되는 겁니까?"

녀석은 내가 축기기급의 전력이라 인식했는지, 바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물어왔다.

"당신이 지면 내가 이 인근에서 수련했던 것은 진씨세가에 비밀로 해 주시오. 또한 김영훈은 내 스승인 동시에 벗이니 그를 괴롭히려는 생각은 그만 두시고.

어찌되었든 당신 세가의 외당 장로 아니오?"

"...예, 알겠습니다."

"내기 내용은 간단하오. 나는 순수한 연기기급의 법술만 사용해서 당신과 겨룰 것이오. 법기도 쓰지 않을 것이니, 당신은 법기와 법술을 총동원해서 나를 쓰러뜨려 보시오."

"예, 옛. 알겠습니다."

화르르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이 펼친 진도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쿠드드득!

나 역시 지월입도결을 발동해서 주변으로 진도를 펼쳤다.

'순수한 연기기 수도자로서의 싸움은, 거의 처음인가.'

이전까지는 수도공법은 거의 보조용으로만 사용해왔다.

왜냐하면 무공의 등봉조극의 경지는 거의 축기기급인데, 법술의 연기기는 그에 비하면 약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연기기 14성이 된 후에는 동급 경지의 연기기 수도자와 싸운 적 자체가 별로 없었다.

'그럼, 얼마나 힘을 쓸 수 있는지 실험 좀 해 볼까.'

연기기 14성.

무극영운의 경지에 이르르면, 단전에 영운(靈雲)이 생겨난다.

이 영운을 압축하여 영기의 별을 만들면 축기에 성공하는 것이지만.

영운은 축적하여 전투에 활용할 수도 있었다.

후우욱!

나와 녀석이 거의 동시에 입김을 불었다.

녀석의 단전에서부터 뜨거운 열기를 담고 있는 붉은 영운이, 나의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지기를 담고 있는 황갈색의 영운이 뿜어져 나왔다.

구름이 주변을 뒤덮는다.

뜨거운 구름과 황갈색의 구름이 부딪힌다.

쿠구구구!

구름의 범위 내에 있던 진도가 활발해지며, 동시에 진도 위로 수 개의 법술이 떠올랐다.

"천괴(天魁), 천강(天罡), 천기(天機), 천한(天閒), 천용(天勇).."

"지강(地强), 지암(地暗), 지보(地輔), 지회(地會).."

지계법술과 염계법술이 구름 속에서 응결되며, 마구 부딪히기 시작했다.

둘 다 수결과 자세한 진언은 생략하고 시동어만으로도 법술이 가능한 경지.

우리는 칠십이지살진언과 삼십육천강법결을 사용하며 부딪혔다.

두 구름의 사이로 화염과 흙덩이가 마구 부딪히며 폭음을 울렸다.

"염(炎), 폭(爆), 비(翡)!"

그리고, 녀석이 수결을 맺으며 고유 신통을 응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익힌 지월입도결처럼 저잣거리 기본공법이 아닌, 진씨세가의 진신공법이니만큼 공법의 고유신통이 존재하는 모양.

불꽃이 물총새의 형상으로 모여든다.

파르륵, 파륵!

불꽃의 물총새는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더니, 말 그대로 섬전처럼 내게 날아들었다.

'빠르다!'

법술의 짜임새를 보아, 직격하면 터지는 류의 법술이었다.

"지수(地囚)!"

나는 빠르게 수결을 맺어 흙의 감옥을 만들어내어 불꽃의 물총새를 가두어버렸다.

콰과광!

물총새가 감옥 안에서 폭발했지만, 감옥은 조금 그을렸을 뿐 망가지지 않았다.

"어찌... 기본법술로 고유신통을..!"

"법술이 지닌 진짜 힘을 끌어낼 수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나는 담담히 계속해서 법술을 사용하며 말을 이었다.

"선각후통으로 경지에 오른 자는, 동급 경지라면 압도할 수 있다...!"

"크윽.. 분명 내게는 법기를 사용해도 된다 하셨습니다!"

촤락!

진가 녀석은 저물법기에서 붉은 불진을 꺼내들었다.

불진에 달린 깃털은 녀석의 진도 속에서, 마치 이글이글 불타는 불꽃마냥 휘날리기 시작했다.

"십이염폭비!"

화르르르륵!

불꽃이 응결되며, 허공에 열두마리의 물총새가 떠올랐다.

"가라!"

열두 방향에서 물총새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더욱 빠르게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황갈색 구름 안쪽에서 더더욱 빠른 속도로 법결들이 응결된다.

꽈광, 꽈과광, 꽈과광!

기본법술들이 날아가 고유신통들을 박살내고, 그를 넘어 새로운 기본법술들이 계속해서 응결되기 시작했다.

"뭣, 그것보다 더 빨리 법술을 응결할 수 있다고..!"

손에서 피가 날 정도로 수결을 맺어왔다.

이 정도로는 지치지도 않는다!

황갈색 구름이, 적색의 구름을 점차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크으윽!"

진가 녀석이 법기를 계속해서 휘두르며, 그래도 밀리자 이제는 부적마저 꺼내서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법기도, 고유신통도 펼치지 않고 기본법술만으로 녀석과 팽팽하게 맞섰다.

이대로 장기전으로 간다면, 법기를 쓰거나 강력한 신통을 쓰지 않아 법력이 넘치는 내 승리였다.

녀석도 그것을 알았는지, 단기전으로 승부를 보려하며 더더욱 법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콰직-

녀석이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붉은 핏방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그의 법기에 스며들었다.

쿠구구구!

놈의 불진이 더더욱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열기를 내뿜었다.

"천열(穿熱), 비폭(翡爆)!"

열기가 한계를 뚫으며, 거대한 물총새가 봉황마냥 홰를 친다.

"나쁘지 않군."

이게 일반적인 연기기 극성 수도자들의 실력인가.

"고맙다, 덕분에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었어."

"무슨.."

나는 지금까지 맺어왔던 수결과 다른 수결을 맺기 시작했다.

"천폭(天暴)!"

동시에, 그의 뒤쪽에 있던 계곡의 물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

거대한 파도가 일어나며, 그의 뒤쪽에서 그를 덮쳐갔다.

녀석의 진도와 구름, 신통술 전체가 파도에 휩쌓였고, 순간 물기가 증발하여 수증기가 사방으로 펴져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

비록 연기기 9성 수준의 공격이었기에 연기기 14성인 녀석의 진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하나, 분명 녀석이 준비하던 법술은 위력이 대폭 낮아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 순간 열 여섯 개의 수결을 맺었다.

열 여섯 개의 법결이 응결되며 그를 향해 날아갔다.

콰앙! 콰앙, 콰아앙!

촤아악!

"끄으윽..."

녀석의 진도와 구름이 완전히 박살나고, 진가 수도자는 그대로 뒤쪽 계곡으로 밀려나가 빠져 버렸다.

"커헉! 허억.. 어, 어떻게... 어떻게 연기기 14성에 올랐는데 또 다른 속성의 법술까지, 그것도 연기가 고계 수준의 법술을, 어떻게...!"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 내가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은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한다만."

허우적거리며 계곡에서 헤엄치던 진가 수도자는 물 속에서 나와 근처 바위에 주저앉으며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어떻게... 아니, 왜? 왜 굳이 두 속성 공법을 익힌 겁니까..? 14성에 이르렀으면 폐관에 들어서 축기기에 도전하기만도 바쁠텐데..."

"축기기 도전이라."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건 계속 꾸준히 해 왔다. 몇십년 전부터 계속, 꾸준히."

내 입가에 맺힌 미소는, 너무나도 쓰디쓴 미소였다.

"그런데도 축기에 이를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자 타 속성도 익힌 거지.

재능없는 놈이 경지에 이르려면, 되는 것 안 되는 것. 인도를 져버리지 않는 선에서 다 시도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진가 수도자에겐 사실 고마운 마음이었다.

녀석과 법술대결을 격렬히 펼치며, 나는 체내의 법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그리고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를 통해서, 한 가지 발상을 떠올렸다.

'두 속성 공법을 익힌 것만으로도, 법력의 회복력이 이 정도로 빨라졌다면, 두 속성 공법을 대성하면?'

두 속성 공법이 아닌, 세 속성이라면?

세 속성이 아닌 네 속성.

아니, 그를 넘어서 오행(五行)의 모든 속성이라면?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

한 가지 속성을 익히는 데에만 수 년이 걸릴진데, 그걸 전부 대성하려면 평생을 익혀도 모자랄 터.

그러나.

'선각후통의 깨달음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시간은 이미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오행의 속성을 전부 대성한다면.

그 회복력은 과연 어느정도일까.

그 회복력을 통해서, 하루에 수십번이라도 축기기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진씨세가 수도자는 내게 감히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하며, 가문의 명예를 걸고 오늘의 일은 함구하겟다 하고는 빠르게 저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했다.'

둔재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천재의 수 배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수 배의 노력을 그냥 해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

"오월입도경을, 전부 대성한다..!"

이전부터 점점 생각해왔고, 오늘 진가의 수도자와 대련을 하며 마침내 터져나온 생각이었다.

나는 축기기에 도달하기 위해, 내 오행(五行)을 전부 채울 다짐을 하였다.

전야(4)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서란과 약조한 기일이 다가왔고, 나는 감았던 눈을 반개했다.

"후우우..."

입김을 내뿜자, 단전에서부터 지월입도결의 영운이 올라왔다.

황갈색의 구름이 주변을 덮는다.

하지만 동시에.

싸아아아아-

새카만 구름이 황갈색 구름에 섞여들며, 쌍색(雙色)의 구름이 내 주변을 맴돈다.

검은 구름과 황색의 구름.

검은 구름은 수월입도결의 수기(水氣)와 음기(陰氣)가 형상화된 기운이었다.

후우웁-

다시 숨을 들이쉬자, 두 구름이 내 코와 입으로 다시 빨려들어왔다.

"수월입도결, 연기기 14성 무극영운(無極靈雲) 등극."

당초 지월입도결로 영맥을 전부 뚫어놓았기에 전신혈맥을 추가로 뚫는 과정은 필요 없이, 그저 법력을 쌓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에 추가로 선각후통으로 각 단계에서의 깨달음은 전부 꿰고 있으니 그저 오행의 차이만을 생각하며 천천히 뚫으면 될 뿐.

'물론 그것조차도 굉장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야 그냥 체질에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차이라 생각해야 할 듯 했다.

'하지만 계속 이 속도라면 결국... 이번 생에서 오행공법을 전부 익히지는 못하겠어.'

어쩌면 다음 생까지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우우웅-

나는 눈을 뜨며, 장심으로 강환을 뿜어냈다.

강환은 허공에서 다섯개로 쪼개지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제야 강환도 다섯 개...'

깨닫기야 예전에 깨달아 다섯 개의 강환을 다룰 수 있게 됐지만, 다섯 개의 강환이 완전히 안정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이번 생 안에 김 형처럼 9개의 강환을 다룰 수나 있으려나.'

다음 강환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강환을 파고들고.

또 다시 강환을 겨우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강환을 다시 안정화시킨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해서 겨우겨우 5개의 강환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김영훈은 한두개의 강환을 만들어내는데에 길면 1년, 짧으면 몇달.

그 안에 내가 거쳐온 과정들을 전부 거치고 강환을 안정화시켜 얻었다.

'아직도 이 정도 속도인데.'

김영훈을 따라잡으려면 멀었다.

그는 매우 힘들어하고, 또 등봉조극이 무의 끝이라고, 인간의 한계라고 말은 했으나.

'어차피 그라면 또 다시 경지를 개척해 낼 것이다.'

등봉조극의 다음은 무엇일까.

나 역시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내가 그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나 있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강환을 9개 다루어서 등봉조극의 극한에 이르면, 또 다시 아득한 벽을 느낄 터.

"김 형.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리라 믿습니다."

나는 김영훈을 쫓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저 김영훈의 앞날을 축원해줄 뿐.

난 법술을 써 김영훈에게 남기는 서한을 쓰고는, 서란을 만나기 위해 흑풍해로 향했다.

* * *

촤아아-

흑풍해의 물살은 그 어느때보다 잔잔하고 투명했다.

특히나 서란의 처소 쪽으로 갈수록 더욱 더 바다가 잔잔해지고 고요해졌으며, 청명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서란의 처소쪽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영기의 밀집에 기함해야만 했다.

'도대체, 이 힘은!'

말 그대로 섬 하나쯤은 작살내버릴 수 있을듯한 힘이었다.

'축기 후기경의 존재가 10년동안 축적한 힘이라면...'

촤악!

나는 물 속으로 들어가 서란의 처소를 향해 헤엄쳤다.

수월입도결을 대성한 탓인지, 물 속에서 움직이기가 한결 편했다.

그리고, 나는 저 아래쪽에서 피어나는 황금빛 잔향을 볼 수 있었다.

황금빛 기운이 서란의 처소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름답군..'

차라리 신성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기운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월입도결이 없었다면 아마 공기가 다 빠져나가 익사했으리라.

나는 서란의 처소로 들어갔다.

촤악!

그의 처소로 들어가, 공동에 들어가니, 말 그대로 황금빛 천지였다.

그리고 그 황금빛 광휘의 중심에, 서란의 방울이 있었고 서란이 그 방울 아래에서 기운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파아아앗!

내가 들어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서란은 기운을 불어넣는 것을 중단하고 방울을 삼켰다.

그러자 방울에서 뿜어지던 황금빛 서광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왔느냐?"

"예, 서 형.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힘이로군요.."

"어마어마하기는.."

서란이 자조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잡스런 귀신이야 쫓아낼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 존재의 본거지인 섭명함 내부에서 싸워야 한다. 거기다가 결단기급 귀신이라면, 아무리 법보에 힘을 축적했어도 잠시 발을 묶어놓는 것 외엔 방법이 없겠지."

그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깃들었다.

"...하지만, 나는 꼭 그 안에 있는 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너 하나쯤은 탈출시킬 비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서 형.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함께하기로 했으면 나가도 같이 나가는 거지요."

내 말에, 서란이 잠시 미묘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의념의 색상은 너무 복잡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복잡한 기분인가 보군... 그런데 나한테 왜 저런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지...'

차라리 뚜렷한 감정이면 그의 의도를 알 수라도 있겠지만.

저건 당최 읽기가 힘들어 그가 내게 호의를 보이는건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보이는 건지 알기가 힘들었다.

'뭐, 호의면 어떠하고 아니면 어떠하리.'

해룡왕의 후의를 갚는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함께하자.

"...그래. 네 말이 맞다. 함께하기로 했으면 같이 나가야겠지."

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후, 처소의 입구로 향했다.

"나가자꾸나."

* * *

나와 서란은 이전처럼 흑색귀골곡의 결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만 이전까지와는 달리, 나는 그의 목에 타는 것이 아닌 내가 수 속성 법결을 맺어 물 위에 떠서 빠르게 이동하였다.

"그 사이에 수 속성 법술도 익히다니. 엄청난 재능이로군.."

"하하, 아닙니다. 시간을 쏟아부었을 뿐인데요."

촤아아아!

어느새 우리는 다시 폭풍이 치는 해역에 진입하였고, 저 멀리 영기의 비틀림을 통해 결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내 목에 붙어라."

"예."

촤아악!

내가 그의 목에 붙자, 서란은 다시금 날아올랐고, 결계를 관통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뿌연 해무가 우리를 둘러쌌다.

익숙한 귀곡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란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그의 체내에서부터 황금빛 서광이 빛을 발하였다.

그가 체내에 보관하던 법보가, 미약한 힘을 뿜어낸다.

번쩍!

끼아아아아!

싫어! 싫어!

저 빛을 알아! 저 빛을 알아!

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쳤고, 우리가 나아가는 진행방향으로 거대한 통로가 뚫렸다.

촤아아악!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두 번째 결계를 완전히 돌파했다.

그리고 또 다시 섭명함이 있는 지대에 진입하였다.

'여전하군.'

섭명함은 우리가 막 떠났을 당시와 완전히 똑같은 기색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시커먼 색의 을씨년스러운 폐함.

나와 서란은 천천히 폐함에 가까이 갔다.

아직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전함 위로 올라갈 때까지, 섭명함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조용하군요."

서란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귀신들은 본인들의 한이나 귀기, 혹은 특정 사물에 매달려 황천에 가지 않고 버티는 것이기에 힘을 아끼기 위해 오랜시간 수면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 어쩌면 그 천인기 분혼도 수면에 빠졌을지도.."

우리는 머뭇거리다가 섭명함 내부로 들어갔다.

여전히 어둡고 거대한 전함.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다시 그 층에 내려가도 반응이 없기를 바라야지..."

솨아아아..

서란이 끌고들어온 약간의 해류가 서란의 몸을 띄우며, 섭명함의 내부에서 그가 미끄러지듯 헤엄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그의 발걸음소리는 아예 나지 않았다.

나는 보법과 귀식대법을 쓰며 완전히 걸음소리를 죽이고 그를 따라갔다.

전함의 상층부는 이미 지난번에 왔을 때 서란과 전부 조사했으니, 오늘은 저층부까지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조용하게 섭명함 저층부로 향하였다.

* * *

지난번 들어갔던 그 층.

여전히 지난번과 다를바 없이 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섭명함의 저층부인 해당 층에 진입하였다.

우리는 서로와 눈짓으로 뜻을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후우우우-

음풍이 불어오더니, 우리가 내려온 층의 출구를 완전히 귀기로 틀어막아버렸다.

"...!"

"...!!"

[섭명함에 네놈들이 발을 들일 때부터 깨어있었다. 본좌는 현재 섭명함의 귀기와 음기에 빌어 황천의 흡입력을 견디는 것이니... 섭명함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지.]

다시금 귀기섞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다시 올 줄 알았다. 이 놈들... 그리고 너, 사생아 놈이 섭명함에 도대체 뭘 찾으러 왔을까 그것을 고민해 보았고, 결국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

딸랑-

저 멀리에서,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딸랑, 딸랑..

어둠 속.

그 허공에, 새빨갛게 잔뜩 녹이 슬어버린 방울 하나가 떠올라 울리고 있었다.

우웅-

동시에, 그 방울 옆으로 한 권의 옥간(玉簡)이 떠올랐다.

옥간이란, 수도자들의 의식으로만 읽을 수 있는 특수한 옥으로 된 책자를 뜻했다.

의식이 깊고 클수록 더욱 더 빨리 옥간을 읽고 옥간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옥간과 방울을 본 서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옥간에서는 일전 서란이 내게 기억하라면서 알려준 기운이 묻어있었다.

[내 친히 네가 찾던 것을 찾아서 준비해 놓았으니, 이 어찌 고맙지 아니하느냐. 옥간을 읽어보니 정말 눈물 없이는 못 읽을 사연이더군. 하하하하...]

콰드드득!

그리고, 목소리가 울리던 곳에서 하나의 귀수가 뻗어져 나와 옥간을 박살내어 버렸다.

옥간의 부스러기가 땅에 떨어져 굴렀다.

[자, 이제 어쩔 거냐. 이제 네놈이 여기에 온 이유가 없어졌군. 흐하하...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라. 어떠냐? 응?]

서란의 의념의 색상이 변화하였다.

새빨갛게 그의 의념이 달아오른다.

그가 분노하고 있었다.

"서 형. 침착하시지요. 저 존재는 서 형이 가져온 법보의 기척을 느끼고 서 형을 동요시키기 위해 저러는 것입니다."

귀신이었지만, 그 역시 의념에 색상이 있었다.

나는 그 색상을 읽어내고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서란을 비웃으며 농락하려는 것 같았으나, 서란을 향해 어마어마한 경계심을 발산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심경을 찌르자, 어둠 속에서 시뻘건 광망이 떠올랐다.

두 개의 새빨간 눈동자, 그 안에서 타오르는 귀화가, 나를 향해 타닥거렸다.

[이 놈, 의식을 분석하는 특수한 공법을 익힌 게냐..? 괴군 그 놈처럼..?]

나는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법력과 내공을 끌어올릴 뿐이었다.

"...그래. 알겠다."

서란은 분노를 꾹 눌러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오히려... 고맙군. 내가 찾던 것을 미리 찾아주어서."

그가 입을 벌리자, 녹슨 방울과 똑같은 형태의 황금빛 방울이 그의 체내에서 튀어나왔다.

"네놈만 없애버리면, 당장 내가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로구나!!"

번쩍!

황금빛 서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동시에 귀기와 어둠에 가려져있던 섭명함 저층부가 환하게 밝아지며, 함내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간압축 법술에 의해 광활한 함내의 공간이 눈에 띄었다.

함내의 이곳 저곳에는 박살난 귀신 석상들과 공간균열이 보였고, 이전에는 기관괴뢰였을 것 같은 부스러기들이 이곳 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공간의 중심부.

새카만 돌로 만든 옥좌 위에, 시커먼 장포를 쓴 하얀 두개골 하나가 앉아있었다.

두개골의 눈두덩이에서는 시뻘건 귀화가 흐르고 있었고, 나머지 몸체는 전부 귀기로 이루어져 있는지 일렁일렁거리는 중이었다.

[이 반편이 용 따위가 감히... 청색귀골곡의 신물 내에서 함부로 제귀령(制鬼鈴)을 발동시켜? 본곡의 제자들도 감히 그런 짓을 하면 한달간 귀곡산의 형장에서 노역을 하는 중벌을 받았거늘...

이 반편이 따위가!]

흑색귀골곡의 결단기급 원로 귀신은 황금빛 방울이 못마땅한지 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귀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미 괴군에게 다 박살난 폐함 따위가 신물이라니, 웃긴 소리로군."

그리고, 서란의 말이 원로 귀혼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그의 주변의 귀기가 마구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괴군의!!! 그 일을 입에 담지 마라!!!]

쿠구구구!

황금빛으로 밝아졌던 함의 내부가, 귀기가 휘몰아치며 다시 어둡게 변하였다.

[죽여 버리겠다!!!]

그의 귀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황금빛 방울의 빛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란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방울에 의식을 집중하였다.

"걱정 마라. 10년간 힘을 축적했다. 황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망가진 섭명함의 힘이나 빌어 겨우겨우 연명하는 잔혼 따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쿠구구구구!

황금빛 방울에서 더욱 더 거친 황금의 서광이 밀어닥치며, 원로 귀혼을 향해 뿜어져갔다.

[기껏해야 축기경 버러지들이 결단기 수사의 법보를 다루려 하느냐!]

귀혼의 귀기가 순간 황금빛 파도를 몰아내는 듯 했으나, 서란이 피식 웃었다.

"허세부리지 마라! 이 늙은 귀물아. 제귀령은 너희 흑색귀골곡에서 직접 만든,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법보가 아니더냐!

너희가 직접 만든 법보인만큼 귀물에 효과적인 법보는 없다!"

[끄으으윽!]

방울에서 뿜어져나오는 폭발적인 빛에, 귀혼은 눈을 뜨지 못했다.

"이때다, 상극의 법보에 밀려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테니 공격하자꾸나!"

나와 서란은 그 자리에서 반대방향으로 갈라졌고, 각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촤아아아!

서란이 입을 벌리자, 그의 입에서 청색의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퍼엉!

푸른 빛이 번뜩이며, 원로 귀혼이 신음을 흘렸다.

파츳, 파츠츠츳..

허공에 떠 있던 황금빛 방울이 점차 귀혼의 위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황금빛 태양이 움직이며, 정오에 맞춰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번쩍!

황금빛 방울은 귀혼의 위쪽으로 이동하여 더더욱 밝은 빛을 뿜어냈고,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딸랑-

방울에서 소리가 울리자 원로 귀물은 더더욱 힘이 약해진 모습이었다.

마치 황금빛 결계가 그를 가두고 힘을 제약하는 듯 했다.

"됐다, 몰아붙이면 이길 수 있어!"

서란이 다시 입으로 기운을 모을 때였다.

[이... 버러지들이...]

쿠구구구구!

방울의 빛을 직격으로 쬐며, 귀혼이 몸을 일으켰다.

[이런 몸이라 제귀령에는 손을 댈 수가 없어 당해주는 것이, 우스워보이느냐..?]

찌릿, 찌릿..

[네놈들 따위가 감히 결단기급인 나를 넘봐? 네놈들 따위가..?]

황천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힘을 쓰며, 그 상태로 상극인 법보의 기운에 맞서면서도.

그가 귀기를 일으키자, 시커먼 귀기의 구름이 퍼져나가며 주변을 물들였다.

[헛된 꿈을 접어라...!]

쿠과과광!

검은 구름 사이에서 시꺼먼 귀조(鬼爪)가 튀어나와 나와 서란을 휘쓸었다.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귀조를 피했다.

'빠르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어 공기저항을 받지 않는 탓인지, 귀조의 속도는 기함할 정도였다.

꽈광, 꽈과과과광!

사방으로 시꺼먼 귀기가 흩날린다.

꿈틀, 꿈틀..

동시에 먹장구름 안쪽에서 검은 촉수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강기..!'

아니, 정순지력이라 하는 것일 터.

그런 것이, 수천 줄기가 뻗어나오더니 귀수(鬼手)의 형태로 맺혀, 우리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가속, 6배.'

파앙!

주변의 사물이 느리게 보이며 움직임이 더욱 더 빨라졌다.

나는 허공을 걷어차며 수많은 귀수들을 전부 피해냈다.

'공격은 들어가나.'

붕, 붕, 붕!

카아앙!

나는 허공에서 세 번 회전하며 수도로 검강을 뿜어 귀수 하나와 부딪혔다.

'저릿저릿하군.'

내 검강은 크게 상했으나, 귀수에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서 형! 큰 일격을 준비하십시오!"

나는 기수식을 잡으며 수결을 맺었다.

쌍색의 영운이 뿜어지며, 그 안에서 수 개의 법결들이 맺혔다.

나는 체내에서 강환을 하나 분리한 다음, 허공에 강기를 씌우고 그 강기와 강환을 연결했다.

'강환을 더 분리할 수는 없다.'

귀수들은 물론이고, 귀조가 너무 빨라서 맞을 수 있었다.

서란이야 비늘이 단단한 탓인지 몇 번 맞아도 죽지 않았으나, 나는 호신강기고 뭐고 바로 반으로 쪼개져 죽을 게 분명했다.

단악검법, 이십삼초, 산외산부진!

나는 월악(越岳)의 태세로 기수식을 잡고 강기와 이어진 강환을 휘둘렀다.

콰앙!

강환과 부딪힌 귀수가 박살이 나며 쪼개졌다.

십일초, 단애(斷崖)!

촤아악!

강환이 바닥을 긁으며 귀수들 안쪽에 있는 먹장구름을 갈랐다.

먹장구름 중심에서 법결을 맺던 귀혼과 내 눈이 마주쳤다.

쩌억!

귀혼이 두개골의 입을 벌리자, 커다란 적색(赤色)의 해골 형태의 법술이 내게 날아왔다.

나는 다시 월악의 자세로 돌아가며 기운을 거두어들여 낭비를 없앤 후, 극하단세로 전환하여 입산의 초식을 펼쳤다.

촤악!

해골의 아래쪽으로 내 검강이 늘어나더니, 귀혼을 노렸다.

[흥!]

쿠웅, 쿠웅, 쿠웅!

그러나 허공에서 귀기가 뭉치며, 시커먼 비석을 응결하더니 비석들이 떨어져 내리며 내 강기를 막아냈다.

[이까짓 장난질로 감히 나와 겨루겠다는 게냐!]

쿠구구구구!

귀혼이 법결을 완성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잿빛의 두개골들 수천개가 떠올랐다.

'하나하나가 강환과 동급의 위력!'

끼야아아아!

귀곡성이 울리며 잿빛의 두개골들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한대만 직격해도 죽는다.

'침착하자, 나는 산외산부진의 초식으로, 몸이 버티는 한 끊임없이 초식을 쓸 수 있다.'

거기에 강환과 검강을 연결했으니, 나와 연결된 강환 역시 몇 번을 부딪혀도 기의 소모도가 없이 계속해서 유지될 터.

'두 개 이상의 백골을 동시에 마주하면 안 된다.'

한 번에 하나씩 쳐서 없애버려야 한다.

수천개의 두개골들.

수천개의 강환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귀혼은 뒤쪽에서 또 다시 수결을 맺고 있다.

저만한 법술을 연이어서 쓸 요량인 듯 했다.

'놈이 법술을 완성하기 전에, 두개골들을 전부 하나씩 쳐서 박살낸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전방에서 3체, 상방에서 16체, 아랫쪽에서 22체의 두개골들이 입을 벌린다.

산외산부진을 유지한 상태로, 월수궁무록을 사용해 순간 인지를 자르고 백골들의 앞에서 사라졌다.

백골들이 멈칫한 찰나의 틈새, 나는 순간의 세계에서 등맥, 입산, 단애, 용맥, 유릉의 초식으로 전방 3체의 백골, 상방과 하단에서 각각 1개씩의 백골들을 박살냈다.

'내단이 흐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내단이 힘을 써 주니 산외산부진의 흐름이 예전만큼 부담스럽지 않았다.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월악, 첩첩산중, 능곡지변의 검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백골들과 하나하나 부딪힌다.

수십개의 검기가 휘날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내가 찰나의 세계에서 백골들을 하나하나 쳐내며 바스라뜨리는 중이었다.

월악, 능곡지변, 산명곡응, 유릉, 입산, 단애, 등맥, 용맥, 칠십이광일출봉..

수십 개의 절초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그 흐름에 거대한 힘이 담긴다.

이십일초, 천지(天池)!

하늘을 비추는 못처럼, 내 강환이 이 거대한 흐름을 전부 담아내었다.

강환 하나에 그 수 배에 달하는 힘이 모여들었다.

본래 단악검법 오의, 단악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어 검에 담고, 그 힘을 일점으로 집중시켜 본래는 낼 수 없는 위력의 초식을 사용하는 절초였다.

하지만, 등봉조극에 이른 나는 단악의 초식을 역(逆)으로 돌리는 법 역시 체득하였다.

일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잔뜩 모인 힘을 사방팔방으로 난사(亂射)한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

강환이 품고 있던 것의 수십, 수백에 달하는 거대한 힘이 사방팔방으로 쏘아지며, 정확히 두개골들에게 직격했다.

수백의 해골들이 일거에 박살나며 사라졌다.

나는 귀곡성을 무시하며 다시 월악의 태세로 돌아왔고, 빠져나가려는 힘을 산외산부진으로 억지로 부여잡으며 기수식을 유지했다.

'강환의 힘이 조금 상했군.'

아무리 산외산부진을 유지했다지만, 동급의 공격을 거의 천여개에 가깝게 박살냈다.

이상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나는 검강을 잡고 기운을 일으켰다.

황갈색과 흑색의 구름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쌍색의 구름은 나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 안에서 지계 법술과 수계 법술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응결되어 쏘아져 나갔다.

하나하나는 백골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했으나, 백골 하나당 수십개에 달하는 법술을 쏘아서 기세를 죽이고, 기세가 죽은 백골을 강환으로 바스라트린다.

그리고, 다시 수 개의 해골들을 향해 그 행위를 반복한다.

* * *

귀혼은 법결을 맺으며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어리석기는, 연기기 수도자 주제에 어찌 축기기급의 일격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축기기 수도자도 감히 내게는 댈 수 없을진데 내 앞에서 감히 시간을 끌 생각을 하다니.]

이미 다음 법술도 전부 완성되었다.

서은현은 아직도 그가 날린 해골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기를 모으고 있는 서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해룡족의 숨결은 무섭긴 하다만, 결단기급인 내게 상처라도 입힐려면 훨씬 더 기운을 모아야 할 거다!]

그가 새로운 법결을 완성했다.

시커먼 귀기가 뭉치더니, 수만 마리의 귀충(鬼蟲) 무리를 토해내었다.

귀충들이 귀곡성을 내며 서란에게 날아갔다.

마치 검은 구름이 그에게 이동하는 모양새!

그때였다.

'잠시만.'

귀혼의 시선이 서은현에게 향했다.

'저놈이, 원래 저렇게 빨랐나?'

원래부터 일반적인 축기기 수도자는 커녕, 결단기 수도자의 기초 비둔술(飛遁術)에 버금가는 속도로 해골들을 쳐내던 서은현의 움직임이,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그리고.

콰아앙!

빛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서은현의 주변에 있던 해골들이 전부 박살이 났다.

귀혼 역시 그 장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놓쳤다.

'황천에 저항하느라 의식을 분산시키고, 제귀령에 저항하는 중이라지만, 이 내가 놓쳐!?'

그리고 찰나.

서은현의 신형이 사라졌고, 귀충떼를 맞닥드린 서란의 앞에 나타났다.

비록 개체 하나하나가 방금 날린 백골의 법술보다는 훨씬 약했으나, 그 물량은 백 배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개체 하나하나가 정순지력으로 펼치는 법술 하나에 맞먹는 비술!

분명 귀충 무리에게 뜯어먹혀 죽으리라!

그리 예상했을 때였다.

붕, 붕, 붕붕붕!

서은현이 한 손으로 검강을 뿜으며,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그의 검강 하나가 귀충 한 마리와 부딪히며 귀충을 소멸시킨다.

[하하하, 아무리 네놈이 빠르더라도 수만개의 비술을 전부...]

그리고, 서은현의 주변으로 쌍색의 구름이 회전한다.

흑색과 황색의 구름.

구름 속에서 수천 개의 기초법술들이 튀어나오며 사방팔방으로 난사된다.

기초법술들은 귀충보다는 조금 약했지만, 귀충을 유의미할 정도로 약화시켰고, 약화된 귀충들을 서은현의 검강이 쓸고 지나간다.

귀충 한 마리, 또 한 마리를 계속 쳐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서은현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더니. 마치 빛의 폭풍처럼 변화하였다.

[이런...미친.]

귀혼은 턱뼈를 벌리며 어이없는 눈으로 서은현을 바라보았다.

수만개의 귀충무리를, 전부 쳐내서 없애버린 것이었다.

[이... 요괴 같은 놈...! 이제보니 네놈이 반편이 용보다 강하구나! 기껏해야 축기경 벌레 주제에 도대체 어찌 그런... 네놈은 무슨 요괴냐! 무슨 요괴냔 말이다!]

귀혼이 발광을 했고, 서은현은 원래의 자세로 돌아오며 그를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우우웅!

그의 주변으로 빛 덩어리, 강환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강환의 갯수는, 여섯 개였다.

"...역시, 무인(武人)은 생사(生死)의 경계를 넘어야 성장하는 법이지."

푸콱!

동시에 서은현이 유지하던 산외산부진이 풀렸고, 그 반동으로 서은현의 눈, 코, 입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 * *

털썩!

단전의 법력과 내단 속의 내공을 전부 소모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져 죽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새로 쪼개는 데에 성공한 여섯 개의 강환을 움직였다.

번쩍!

여섯 개의 공격이 날아갔으나, 귀혼이 손을 휘두르자 내 강환은 그대로 스러져 버렸다.

기껏해야 축기경 수도자의 일격급.

그에게 제대로 먹히진 않으리라.

하지만...

"서 형. 시간은 벌어드렸소."

인간의 공격이 아니라, 용(龍)의 공격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입가에 푸른 빛의 영력을 잔뜩 모은 서란이 안광을 번뜩였다.

서란이 입을 벌렸다.

푸른 섬광이 그의 입에서 뻗어나왔다.

전야(5)

푸른 섬광이 전함 내부를 물들였다.

일순간 법보가 뿜는 황금빛 기운도 서란의 숨결에 그 빛을 잃었을 정도였다.

사방이 푸른 빛으로 물든다.

-----!

가공할 폭음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비산하였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공력으로 귀를 보호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는 시뻘건 의식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안 쓰러졌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귀혼의 상태가 육안으로도 드러난다.

[흐, 흐흐흐...]

귀혼의 장포는 완전히 헤져 있었고, 일렁이는 귀체는 더더욱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는 작은 실금이 잔뜩 가 있었다.

[흐..하하하, 이번 공격은, 꽤 짜릿했다...]

후욱, 훅...

귀혼이 두개골의 턱을 벌릴 때마다, 검은 귀기가 한 움큼씩 튀어나왔다.

'제대로 맞았다, 무사하진 않아...!'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공력과 법력을 끌어모으며 몸을 회복하였다.

무사하진 않지만, 저 상태라면 언제든지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

그 때였다.

쿠구구구...

귀혼의 두개골, 그 눈두덩이에서부터 시커먼 귀기가 잔뜩 쏟아지며 주변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상성으로 우위를 점했다곤 하나, 그저 축기경 애송이들이라 무시한 것은 사과하지... 나도 이제부터, 시한부인 명(命)이나마 걸겠다...!]

"이런...!"

서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서 일어나라! 저 노귀가, 황천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예...?"

"지금까지 황천에 저항하며 분산시키던 귀력과 음기를 전부 끌어올려 싸운다는 것이야..!"

"화, 황천에 저항을 포기했다면 버티기만 한다면 사후 세계로 간다는 게 아닙니까?"

"일반적인 귀혼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저 노귀라면 정신력으로 황천에 저항하며 우리를 잡아죽이려 할 거다..! 우리를 빨리 죽인 후 다시 법력을 황천에 저항하는 것에 돌리면 죽지 않을 테니까..!"

쿠구구구구!

그리고, 시커먼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귀물(鬼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놈, 들... 아, 무, 도...]

'젠장... 더 강해졌잖아...!'

저것이, 결단기 수준의 존재.

살아 움직이는 자연재해의 힘.

[누, 구, 도... 본, 문, 의, 것, 을... 못, 가, 져...간..다...!]

어쩐지 아까보다 정신이 불안정해진 것인지, 귀혼은 말을 끊어 말하며 손을 뻗었다.

촤아악!

귀혼의 손에서 귀조가 뻗어나왔다.

'젠장!'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몸을 굴렸다.

슈캉!

가공할 속도로 내가 있던 자리를 귀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빼앗...을, 수...없다...!]

"크으읍...!"

나는 억지로 기운을 끌어올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대한 귀물의 양손에 또 다시 귀조가 돋아났다.

[괴, 군...! 넌, 본문의,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귀물화를 사용하며 정신이 혼미스러워진 것인지, 그는 우리를 보며 괴군을 부르짖었다.

[내가, 있는, 한...!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피웅!

콰아앙!

"커헉!"

'죽을 뻔했다!'

억지로 강환을 뽑아 사고를 가속해 겨우겨우 피했다.

귀물은 사방팔방으로 귀조를 날리며 마구 날뛰었다.

나는 그의 의식영역 바깥으로 물러나, 의념을 읽어내며 간신히 공격을 피해야 했다.

'서 형은..!'

서란은 나처럼 빠르지 못하여, 귀조에 몇 번을 맞았는지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아까 전보다 귀조의 속도도, 위력도 올라갔다.'

서란조차 한번 맞을 때마다 그의 비늘이 뭉텅이로 잘려나가며 피를 쏟았다.

"서 형!"

나는 귀조들을 간신히 피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망칩시다! 이길 수 없습니다!"

"안... 된다..! 우리가 지금 가면, 저 노귀가 내가 찾던 저것을 어찌할지 알수 없다.. 옥간도 다시 맞추기만 한다면 읽을 수 있을 것이야..!"

"젠장할...!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단 말입니까!"

잠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상황을 보던 서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소중하다."

나는 그의 의념을 읽었다.

그의 심정은 현재 너무 복잡하여 읽기 힘들었지만, 저것이 정말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정말인 듯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귀물의 아래에 있는 저것들을 주워오겠습니다. 그럼 도망치는 겁니다!"

"뭣.. 가능하겠느냐!"

"가능하게 해야지요."

나는 기운을 끌어올리며 의식을 집중했다.

의념을 보는 지각과, 요족의 지각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동시에 내단을 쥐어짜내며 사고를 극한으로 가속하였다.

'한 번이라도 맞으면 죽는다.'

귀조의 위력은 강환조차 뛰어넘는다.

정면으로 막을 생각조차 하지 말고, 오직 피하면서 가까이 접근해 저것들을 주워올 생각만 하자.

"엄호해 주십시오!"

나는 서란에게 외친 후, 극한의 집중력 속에서 발을 내디뎠다.

이전, 결단경 수준의 삼미호의 영역에서 월수궁무록을 사용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실수하면 죽는다.

죽음.

나는 죽음에서 해방된 자였지만,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한 번 죽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보았던 모든 인연들이 그대로 끊겨나간다는 것이니까.

한 번의 죽음은 정말로 죽음과 다름없다.

비록 시간을 기만하여 다시 눈을 뜬다지만.

그렇게 다시 얻은 삶은 이전의 삶과는 무조건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만나는 이들이,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닐 테니까.

산군월악비를 펼친다.

산군무와 월악보를 합친 경신법.

산군월악비의 전체적인 흐름은 마치 범을 닮아있었다.

거대한 범이 산을 넘듯이 가볍고 날래게 움직인다.

범이 사냥꾼의 화살을 피하듯, 나는 귀조를 피하며 점차 가까이 다가갔다.

서란이 원하던 방울과 옥간 조각까지 남은 거리는 20여장.

'충분히 가능하다.'

귀물은 제정신이 아닌지, 나를 특정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귀조를 날리는 중인지라 월수궁무록은 소용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의념의 흐름을 보기가 더욱 더 쉬웠다.

'본다.'

의념의 흐름이, 음양의 흐름이.

내 눈에 그대로 비춰진다.

그리고, 사고를 가속시키며 귀물의 공격을 피해낸다.

5장을 이동했다.

남은 거리는 15장.

귀물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귀조의 예기에, 귀조가 내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내 몸 곳곳을 베어갔다.

분명히 피했건만 베였다.

'깊지 않다.'

그러나 이정도면 버틸 수 있다.

물론 버틸 수 있다는 것이지, 쉽다는 것은 아니었다.

폭풍 속으로 발을 옮기며, 빗방울을 한 방울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 차라리 이보단 더 쉬우리라.

'더 빨라져야 한다.'

깊이 들어갈수록 귀조가 흩뿌려지는 빈도가 높아진다.

휘이이이-

주변으로 바람이 몰려든다.

내 의식이 해룡의 형태로 변하며, 몸이 가벼워졌다.

호풍응룡변!

파앗!

내단이 박살날 듯이 덜거덕거렸지만, 나는 공력을 쥐어짜내며 더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용호(龍虎)와도 같은 기세로 귀조들을 피하며, 그렇게 다시 10장을 접근한다.

남은 것은 5장.

약 15보!

앞으로 세 개의 귀조가 스치고 온다.

귀물의 의식영역 안쪽이라 의념을 읽을 수도 없다.

그저 요족의 지각으로 음양의 흐름을 읽어 예측해야 할 뿐.

슈칵!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고, 등 위로 귀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세 개의 귀조를 피하고 세 발자국을 움직였다.

12보!

여덟개의 귀조가 마구 휘몰아친다.

몸을 비틀어 세 개를 피하고, 고개를 숙여 세 개를 피했다.

그러나 열 십자로 날아오는 두 개의 귀조는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퍼어엉!

푸른 섬광이 나오더니 귀조를 터트려 버렸다.

서란의 지원이었다.

서란은 귀물의 영역 밖에서 피를 흘리며 복잡한 의념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앞발에는 처음 보는 묵빛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따로 가져온 법보인 듯 했다.

그러나 왠지 묵빛 구슬을 보는 서란의 의념은 전체적으로 어두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무슨 심경이지? 아니, 집중하자.'

서 형을 믿자.

그가 뒤를 받쳐줄 것이다.

나는 일곱 보를 걸어갔다.

남은 것은 다섯 보!

'이 이전에는 귀조들 때문에 간섭하기가 어려웠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파아앗!

나는 의념을 던져, 어검(馭劍)의 원리로 옥간조각들과 방울을 조작해 떠오르게 만들었다.

촤아악!

방울과 옥간조각들이 내 품에 들어왔다.

'손에 넣었다!'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시 집중을 하며 산군월악비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비틀-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어?'

내단이, 문자 그대로 텅텅 비었다.

내공이 정말로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억지로 내 근육을 움직이던 내공이 사라지자,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눈 앞으로, 귀조가 다가온다.

그것이, 나의 아홉번째 회귀인줄 알았다.

촤아악!

눈 앞에서 피가 튀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막아섰다.

서란이었다.

"...고맙다."

그는 내 품 속의 옥간과 방울을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나 나는 다급히 외쳤다.

"빠, 빨리 피.."

촤악, 촤악 촤악!

그러나 수 개의 귀조가 다시 서란을 때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했다.

'치명상이다..!'

그때였다.

단전으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기 시작했다.

호풍응룡변으로 요족의 기운에 익숙해진 내단이, 서란의 기운을 마구 흡수하기 시작했다.

"서.. 형, 무슨, 짓입니까...! 어서.."

"명에 따라, 내 피를 먹고 힘을 발하라. 제귀령!"

파아아앗!

서란의 육신에서 붉은 혈기가 빠져나가더니, 귀물의 힘을 억누르던 황금빛 방울에게 흡수되었다.

황금빛 방울에서 황금빛 포승줄이 튀어나오더니, 귀물을 억눌렀다.

[크아아아아아!]

귀물은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지르며, 더 이상 귀조를 휘두르지 못하고 발버둥칠 뿐이었다.

"자, 잠깐.. 무슨 짓입니까! 서 형!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알고..있다."

그러나 서란은 계속해서 혈기를 방울에 전달시킬 뿐이었다.

"당장 멈추십.."

"멈추면 바로 귀물이 난동을 부릴 테고, 우리는 둘 다 죽겠지."

파아앗!

서란의 몸에서 푸른 청광이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청광에 휩싸인 서란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뭣.."

서란은 푸른 머리를 한, 어쩐지 서휼과 조금 닮은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의 피부 곳곳에는 비늘이 나 있었고, 엉덩이에는 꼬리가 돋아나 있었다.

그는 다 헤진 청색의 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안색이 위험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본디, 요족은 원영기에 도달하기 전에는 인간형으로 둔갑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즉 이건, 내 원래 모습이다."

"원래... 모습..?"

서란이 빙긋 웃었다.

"위대한 해룡의 왕족과, 흑색귀골곡의 제자 중 한명이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지. 아이는 해룡족에서는 사생아 취급을, 흑색귀골곡에서는 더러운 요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오점 취급을 받으며 사냥 대상이 되었다."

"서 형,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바로 나갑시다.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왔으니 서 형을 업고 제가.."

"아니. 내 상처는 내가 안다. 한참 전에 상처를 입었을 때 나는 죽을 운명이었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업고 간다 해도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다. 인요 형태로 돌아왔어도 해룡 형태와 몸무게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 빨리 너 혼자라도 도망쳐라."

"무슨 개 같은 소리입니까! 분명 함께 나가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서란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의 왕은 이런 나조차도 자신의 후손이라며 받아들여 주었지. 어찌되었든 나는 그분에게 감사했고, 그를 내 친부처럼 여겼다."

"서 형!"

나는 서란을 끌고 나가기 위해 그에게 다가갔다.

서란이 내게 나눠준 기운이 내단 속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우뚝-

'뭐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태어날때부터 눈치를 봐온 탓인지. 왕의 눈치 역시 자연스레 자주 보게 되었고. 눈치를 봐오며, 나는 왕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은현아. 본족의 왕, 시조님은 가히 짐작할 수 없이 음험(陰險)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네게 준 호풍응룡변의 진짜 이름은 호풍응단변(呼風凝丹變).

깊게 익힐수록 단전이나 요단이 해룡족의 수행과 회복에 도움이 되는 단약으로 변화하며, 공법을 익힌 이를 해룡족의 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예로 만드는 마공(魔功)의 일종이다."

"...!!"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실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서휼이... 내게 주었던 공법서가...?'

"아무런... 마기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충격 받은 채로 멍하게 말하였다.

"하하... 어찌 마기를 쌓아야만 마공이겠느냐. 희생으로 힘을 쌓는 것은 모조리 마공이다. 너는 너 자신을 우리가 먹기 좋은 단약으로 희생시키던 중이었으니 그 어찌 마공이 아니겠느냐.."

그가 허공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해룡족은, 수 세대 전에는 왕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남을 희생시키는 공법을 익혔다고 하더구나. 수많은 종족을 가축처럼 사육하며 호풍응단변과 비슷한 부류의 공법을 익히게 하고 단전을 갈라 단약을 먹어 수련을 이어나가곤 했지.

어느 날 괴군이 사육장에 쳐들어와 사육장을 박살내버리고, 사육장을 관리하던 왕족 셋을 생체 괴뢰로 개조했다. 그때 혼란이 일어났고 수많은 가축들이 탈출했지.

내가 아는 역사가 맞다면, 현재 비승하지 않고 남아있는 인족 수도가문 중 막리세가란 세가가 해룡족이 사육하던 가축들의 후예일 거다."

나는 아연한 역사의 진실에 입을 벌렸다.

범인들을 가축 취급하며 잡아먹던 막리세가가, 실은 해룡족이 사육하던 가축 가문이었다니.

"듣기로는 그때 훔쳐간 공법을 진짜 마공으로 개조하여 우리 해룡족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에 성공했다 하는데, 정말인지는 모르겠군.. 어쨌든. 해룡족은 한때 왕의 주도로 그런 단약을 만들어 종족의 전체적인 실력을 끌어올렸지.."

서란은 자조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왕께서는, 인요인 나를 생각한답시고 같은 인요 혼혈인 너를 내게 보낸 것이겠지. 같은 인요의 혼혈로 만든 단약이라면,내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 당장도 네 요단을 먹으면 나는 대부분의 상처를 회복하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을 내게 말해주는 겁니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네가 망설임 없이 내 부탁을 따라 내 어머님의 유품을 주우러 가는 것을 보며, 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너는 내 벗이다!

세상 그 누가 자기 벗의 배를 갈라 저만 살겠다고 희생을 시킬 수 있겠느냐?"

"..."

서란이 나를 보며 웃었다.

"미안하다. 네게 그동안 이 안에 내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왕을 포함하여 나까지 네게 계속해서 거짓만을 일삼았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사실을 고백하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다오."

"...해룡왕께서는 늘 웃는 얼굴이시길래. 저는 그분이 좋은 분인 줄 알았습니다."

"왕께서는 늘 웃는 얼굴에 점잖은 얼굴이시지. 하지만 그분은 두꺼운 가면을 수십 겹 쓰고 계시며, 지니기는 벌레조차도 어찌 이용할지 늘 고심하는 분이시다."

"당신 역시 성의성심껏 제게 공법을 가르쳐주시기에, 좋은 이인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구나."

"당신은 좋은 이가 아닙니다."

나는 그를 보며 웃어보였다.

"당신은 단순한 좋은 이가 아닌, 진실로 나의 벗입니다."

서란이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의념을 계속 흘려대는데, 모를 리가.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꿍꿍이를 택하지 않고 나와의 의를 택하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의에는 의로 답해주어야겠지..'

"어찌, 벗으로서 벗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득, 우드득..

나는 서란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며, 내 단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죽는 것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 삶은 분명 여러 번이고, 서란의 삶은 한 번이다.

그러니 내 삶 중 하나를 희생하여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벗을 살릴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서란이 수결을 맺었다.

"아니."

콰드득..!

서란이 내게 준 기운이 전신 곳곳으로 뻗어나가며, 내 움직임을 완전히 통제했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살면 나는 기쁠 것 같으냐. 어차피 , 나는 이곳에서 죽어야 하는 몸임을 알았다."

그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아까 그가 한참을 보던 묵빛 구슬이었다.

"왕께서는 내게 어머니의 유품을 찾고, 이 법보를 통하여 섭명함을 완전히 부수라고 명하셨지. 이 법보가 섭명함의 공간법술을 전부 파훼하며, 없애버릴 것이라고.

그리하여 섭명함의 내부에 갇혀있는 수많은 귀혼들. 우리 해룡족의 원혼들도 전부 풀려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오늘 들어와서 법보를 발동시킬 준비를 하며 알았다. 이 법보를 발동하면, 나는 필히 죽는다. 왕께서는 아마 일족의 사생아인 나 역시 이번 기회에 처리하여 오점을 없애려 하셨던 것이겠지.."

서란은 눈물을 흘리며, 그러면서도 웃었다.

"당신께서 정말, 잔인하고 음험한 분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을 뿐이다. 은현아. 나는 어머니의 유품과 함께 죽을 테니, 너는 부디 살아다오."

"서.. 형! 서휼의 임무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지껏 오로지 왕의 자비로 해룡족에 붙어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 자비조차도 실은 꾸며진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살고 싶지 않구나..."

파앗!

그가 품에서 푸른 빛의 구슬을 던져, 법술을 써 내 품 속으로 넣었다.

"보상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내 처소에 있는 비밀창고의 열쇠다. 내 처소와 그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네가 가지거라."

"서 형..!"

"잘 가라, 내 친구."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호풍응룡변을 발동했다.

바람이 주변으로 모이며, 나는 강제로 바깥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 * *

서란은 서은현의 호풍응단변을 조작하여 그를 강제로 바깥으로 내보내며, 체내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제귀령이 생기를 흡입하고 있었고, 귀조의 손톱에 치명상을 입어 과다출혈이 왔다.

"...서휼 할아버님. 저는 당신처럼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서휼을 따랐다.

그가 비록 끝모를 가면을 쓰고, 음험한 계교와 흉계를 꾸미며 수많은 종족간의 평화를 이간질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가 점잖은 얼굴로 서란의 쓰임새를 찾을 때도, 서란의 자질이 그의 기준에 닿지 못하자 망설임없이 그를 데려가지 않고 버려두기로 결정했을 때도.

서란이 그토록 찾아왔던 그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등선향으로 가기 전날에 알려주며, 어머니의 유품을 찾을 겸 섭명함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섭명함 내 해룡족 전사들의 영혼을 해방시키라는 임무를 주었을 때도.

서란은 서휼을 따르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서휼.

그의 먼 시조 할아버님이자, 해룡족의 왕.

그 존재는 마음이 없는 존재였다.

혹은, 있었는데 망가진 존재이거나.

"벗을 잡아먹고 살 바에, 그냥 이곳에서 죽겠나이다. 당신은 어쩌면 이것까지 계산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몰랐던 서휼의 태도들과, 서휼이 점잖은 가면을 쓰고 행했던 수많은 잔악무도한 짓들이 서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결국, 해룡족도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지.'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서란은 천천히 그의 어머니의 것일 것이 분명한 옥간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자박, 자박

동시에 그는 파공주(破空珠)를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그래도 당신에 대한 마지막 예의로 당신의 임무는 완수하고 가지요.'

묵빛의 구슬이 떨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서란의 생기는 점차 떨어져 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서란은 옥간을 전부 다시 맞추는 데에 성공했고, 옥간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부우우웅!

파공주가 빛을 뿜는다.

서란의 생기를 먹어치워 귀물을 잡아두던 제귀령 역시 힘을 잃었고, 시커먼 귀조가 서란을 노렸다.

서란은 마지막 순간, 옥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가."

공간이 무너지며, 수많은 검은 폭풍이 서란을 뒤덮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어머니와는 생이별해서 지금껏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껏 그를 웃으며 대해주던 이는 서휼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서휼마저도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하기만 했던 삶.

하지만, 서란은 옥간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또 웃었다.

"내게도, 가족이 있었구나..."

새하얀 빛과 함께, 서란은 옥간의 내용을 하염없이 읽으며, 그렇게 스러졌다.

"어머니..아버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