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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

천성단에 자리를 잡은지 하루, 아니 반나절은 되었을까.

근처를 순찰하는 내시들에게 바로 들켜버렸다.

"이봐라! 네놈은 누구냐!"

그러나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고 무시했다.

"이, 이 놈... 천성단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황제 폐하만이 신성한 존체로 올라가실 수 있는 제단일진데!"

스릉!

내시중 한명이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단도에 도기가 깃드는 것을 보아, 일류고수였다.

그러나 내가 손을 까딱이자, 내 장심에서 나간 장력이 내시를 부드럽게 밀쳐내어 저 멀리까지 날려버렸다.

해를 끼치려 보낸 장력이 아닌 떨쳐내기 위한 장력이었기에, 내시는 아주 부드럽게 지상에 착지할 수 있었다.

이내, 내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고함을 질렀다.

"위, 위, 위병! 천성단에 엄청난 고수가 침입했다! 위병! 위병!"

내시가 고함을 지르자, 위병들이 잔뜩 몰라와 천성단을 포위하고, 내게 창과 검 등을 내밀었다.

"이 무도한 역적 놈! 네놈이 감히 금상이 오르셔 하늘께 제를 지내야 하는 제단에 오르느냐! 썩 내려오지 못할까!"

"...하늘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라."

익숙한 곳이다.

당장 지난 40여년간은 평생을 하늘에 제의만 치루면서 보낸 나였다.

나보다 하늘에 제의를 잘 치룰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을 거다.

"...나보다 더 하늘에 제를 잘 지낼 수 있는 놈을 불러와라. 하면 물러나주지."

"역적 놈이 말이 많구나! 죽어라!"

우와아아아!

황궁의 병사들이 무기에 각자 기운을 씌우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우우웅!

"어, 어어어...!"

"아, 안돼!"

"내, 내 창이..!"

"내 검이...!"

수백 인의 무기가, 내 어검술(馭劍術)에 의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붕, 붕, 붕, 붕!

어검으로 띄워올려진 수많은 병장기들이 허공에서 회전한다.

그리고, 일순간.

파바바바박!

허공에서 회전하던 병장기들은, 모두 정확히 제 주인의 앞으로 날아가 다시 꽂혔다.

싸아아

좌중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내려앉았다.

이들 모두 알아챈 것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방금 그 순간 이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러던 중.

한 고관대작이 병사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천성단 앞까지 온 그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인. 성제국의 좌정자사를 맡고 있는 욱전이라고 합니다. 혹여, 대인께서는 수도자(修道者)이십니까...?"

아무래도 성제국 역시 고관대작이라면 수도자에 대해 잘 아는 듯.

그는 내게 한없이 공손한 기색이었다.

"내가 수도자라면 어찌 황궁에서 함부로 저런 법술을 쓰겠는가?"

"...위대한 가문의 선인 분들이시라면 황궁 안에서도 법술을 쓰는 것을 허가받았다 들었습니다. 혹여, 대인께서는 이번에 새로이 위대한 가문에서 내려오신 감찰사 님이십니까?"

아무래도 황실 감시역의 수도가문 방계를 감찰사라고 부르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네."

"그, 그럼..."

"자세히 알고 싶다면, 말했다시피 나보다 하늘에 제를 잘 지낼만한 이를 불러오게나."

고관대작은 내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내시들에게 황급히 손짓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찰사 분들을 불러오게! 어서!"

그리고 다시 얼마 후.

"이 놈, 저건 또 뭐야?"

"하하, 의식을 보아하니 수도자인데? 너 이놈. 어느 가문 놈이냐!"

"어느 가문의 인장도 없다. 혹 산수인가?"

진루세가의 방계 셋.

그리고 나머지 육대세가의 방계 여섯.

총 아홉 명의 연기기, 8, 9성 수도자들이 천성단 주변을 둘러쌌다.

"쯧, 미친 놈 같으니. 산수 주제에 황궁에 들어와서 이딴 짓을 벌여? 황궁에는 들어오면 파진부를 쓰지 않는 한, 수련을 위해 체내에서 흐르는 정도의 법력을 제외한 모든 법력과 법술이 봉인당한다는 걸 모르는게냐?"

촤악, 촥, 촥!

아홉 명의 수도자들이 일제히 품에서 부적을 꺼내더니, 발동시켰다.

번쩍!

부적이 빛을 발한다.

동시에 아홉 명의 수도자들의 주변으로, 그들의 의식 크기와 딱 맞는 크기의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그 막 안쪽에서는 법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자 죽어라, 멍청한 산수..."

콰앙!

그리고 다음 순간.

처음으로 입을 놀렸던 연기기 8성 수도자가 내가 쏘아낸 장력을 맞고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촤락!

동시에 나는 어검술로 8성 수도자가 들고 있던 부적을 내게 끌고 왔다.

'발동!'

번쩍!

이번에는 부적이 내 손에서 빛을 발하며, 내 의식의 크기와 딱 맞는 수준의 막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체내에서만 흐르던 법력이 체외로 방출되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 법술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쿠구구구!

나는 연기기 13성에 달하는 영기의 압박을 가감없이 드러냈고, 은식술로 어느 정도 감춰두었던 의식 역시 그대로 드러냈다.

다른 연기기 수도자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여, 연기기 13성...?"

"축기기 거의 직전이잖아!"

"하, 하하 잠깐. 일원일응의 단계라면 사실상 축기기 바로 전 단계 아닌가?"

"크윽... 서, 선배님! 이 후배들이 감히 무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수도자들의 얼굴에 대번에 혈색이 사라지며, 내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놀려서 어검술로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다른 파진부라는 부적들 역시 빼앗았다.

이것으로, 사망일에도 황궁 안에서 법술을 쓰지 못할 염려는 없었다.

듣자하니, 황궁 내부에서는 축기기 수도자들도 따로 법술을 쓰지 못하게 되어있었고.

그들 역시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파진부가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막상 어느 가문도 가문간의 제약 때문에 이곳에 사람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나같아도 황궁에 왠 괴한이 쳐들어왔는데, 그 괴한을 처리하겠답시고 경쟁상대 가문의 전력이 황궁에 투입되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군.'

아마 서로가 서로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정치싸움으로 발목을 잡을 터다.

뭐 어쩌면 칠대가문에서 서로 한 명씩 축기기 수도자들을 보낼 수 있었지만.

축기기 수도자를 고작해야 연기기인 나 하나 잡기위해 보낼만큼 수도가문은 한가한 집단이 아니었다.

아마 한참동안 수도가문들 사이에서 누가 날 어떻게 할 것이냐 갑론을박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여기에 앉아만 있다면 더더욱 갑론을박의 기간을 길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 사망일이 다가올 터이니.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수명을 이겨내면 이겨내는 대로.

이겨내지 못하면 이겨내지 못하는 대로 상관이 없었다.

과연 어찌될 것인가.

* * *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사망시각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고관대작과 황제를 불러, 내가 수도자임을 밝히고 근 며칠 동안은 아무도 내 주위로 다가오지 못하게 했기에, 이 근처로 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간이 나를 죽일 가능성은 이젠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진의 경우, 성제국 황궁을 뒤덮은 결계는 그런 지진 등에서 황궁을 보호하는 역할도 있다고 했다.

독사나 독충 같은 경우, 천성단 위의 내 자리까지 안 들키고 올라올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황실에는 그런 생물들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하늘이 나를 죽일 가능성은, 심장마비.

그리고 그 심장마비조차 나는 이미 충분한 내공을 준비해 두었다.

지난 삶에서 고작 하루를 겨우 버텼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내공이며, 지금은 그때처럼 지쳐서 내공이 고갈 상태도 아니었다.

충분히 그 이상 버틸 수 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쩌면 하늘이 나의 수명을 재설정해줄지도 모른다...!'

만약 살아남는다 쳐도 수도가문들에서 내게 찾아오겠지만.

수명이 늘어난다면 늘어난대로 연기기 13성 급의 후기지수인 취급을 받으며 칠대가문 중 하나를 선택해 들어갈 수 있고.

만약 죽는다 쳐도 오히려 성제국 한복판에서 이런 깽판을 쳐놓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어느 결말이든 상관은 없었다.

'와라, 하늘이여.'

준비는 다 해 놓았다.

그리고, 내 사망시각이 마침내 찾아왔다.

나를 갑자기 죽일만한 요인은 없다.

독충도 독사도 없었고.

워낙 튼튼한 석재로 지어진 제단에,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라서 무너져 내려 죽을 걱정도 없었으며.

제단 위인지라 뭔가 쓰러져서 나를 내리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지진 등이 일어나도 황궁을 뒤덮은 결계가 어느 정도 피해를 막아준다고까지 하니.

사실상 심장마비 외에는 하늘이 나를 죽일 방도 자체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별들이 떠오른다.

"...하늘이여."

나는 오랜만에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이번에도 나는 당신에게서, 내 명을 쟁취해낼 것이오."

내게 주지 않아도 상관 없다.

내가 아득바득 기어올라가, 직접 쟁취해 줄 테니!

그리고.

두근, 두근...

사망시각이 되었다.

두근, 두근, 두근....쿵!

기다렸다는 듯.

내 심장이 멈춰버렸다.

하지만.

쿠웅!

하단전의 내단에서 뿜어진 강기가, 중단전으로 올라가 그 근처의 심장을 자극한다.

동시에 내공에 의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끄으으읍!'

물론 강기로 심장을 자극하는 것은, 미칠듯이 고통스럽고 아팠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로 강기로 심장을 자극하였다.

조금 아프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오늘 죽지 않을 것이다!

쿠웅! 쿠웅! 쿠웅!

귓가가 멍멍해지며, 강기가 심장을 자극해 뛰게 하는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쿠웅!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쿠웅, 쿠웅, 쿠웅...!

별들이 빛나며 나를 내려다본다.

이 벌레가 감히 어디까지 발버둥치나 보겠다는 듯.

쿠웅, 쿠웅...!

"하, 늘이, 여..."

쿠웅!

아프다.

하지만, 나는 비록 스쳐지나가듯 지났던.

이번 같은 삶일지언정.

죽고 싶지 않았다.

주마등인지, 김영훈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가 내 제자였던 이들을 보고 어떤 인연이느냐 물었을 때.

내가 무어라 대답했는가.

'그냥, 인연들.'

이번 삶에서의 인연들은, 매우 짧았다.

40년을 등선향에서 정신 나간채로 발광하면서 지냈고.

나머지 10여년을 성제국 황궁 서고에 숨어서 쳐박힌채로 지냈다.

김영훈과, 그리고 스승님과 대면한 것도 너무나도 짧고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인연이었다.

그냥 인연일지라도, 인연이었다.

죽기 싫다.

살고 싶다.

이 인연이, 무의미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름붙일 일 없는.

보잘것 없는, 짧고 또 짧은.

그냥, 인연일지라도.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에 의해, 이 그냥 인연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나는 그것을 바랄 뿐이었다.

"으오오오오오!!"

쿠웅, 쿠웅, 쿠웅!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아프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어찌 편하기만 할까!

이를 악물고 참아내자.

동이 틀 때까지!

'이번에 살 수만 있다면, 등선향에 다시 가 보려고 해 보는 것도 좋겠군.'

그곳엔 내가 쌓아놓은 제단이 남아있겠지.

'이번에 산다면, 김 형도 오랜만에 보러가야겠어.'

자주 들르겠다 해 놓고.

지금 10년째 서고에 틀어박혀 있었다.

'산다면, 스승님께 인사를 가야지.'

나를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잊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또 산다면...'

나는 끊임없이 상념을 이어가며, 이 고통 속에서 버티고.

또 버텼다.

"산다면!"

콰드득!

내 손이 기를 머금고, 제단의 바닥을 그대로 우그러뜨렸다.

어찌나 이를 세게 악물었는지, 잇몸이 버티다 못해 피를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조금만 더 허락해준다면!"

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그렇게 외쳤다.

"이 가슴에 담아둘 인연들이! 얼마나 많아지는데!"

쿠웅!

쿠웅!

"왜 이리도 나를!"

심장은 아무리 자극해도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장을 자극하는데에 드는 강기의 필요량이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막아서지 못해 안달이십니까!!!"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기를 쏟아부었다.

단전에 있는 법력과 영맥을 도는 영력마저 전부 내단으로 보내, 내공으로 변환시켜 모든 힘을 짜낸다.

쿠구구구!

내단에서 내공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두쿵!

두쿵!

두쿵!

나 자신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산 바깥에 산 다함이 없고, 길 가운데에 길 다함이 없다고.

김영훈에게 그런 각오를 다지라고 격려했으면서, 내 자신이 어찌 끝을 너머 그 바깥을 보지 않을쏘냐!

반드시!

"이 너머를! 볼 것이다!"

실시간으로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다.

실시간으로 저 하늘의 뭇별이 나를 짓누르며 포기를 종용하는 것 같다.

저 드높은 하늘이 나를 통채로 부정하려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우우우웅!

나는 주변에 미리 깔아놓었던 진법을 발동시켰다.

쿠우웅!

진법에서 발생되는 영기의 압박이, 내 가슴께로 몰리더니 강기와 함께 내 심장을 자극했다.

쿠우우웅!

그러나 하늘이 또 다시 내게 죽을 운명을 내린 것인지.

기막히게 진법에 이상히 생기며 영기의 압박이 스무 배 이상 강해졌다.

이대로면 심장이 물리적으로 터져버릴 상황!

콰앙!

그러나 나는 호신강기를 둘러 바로 압력을 떨쳐버리고, 진을 해제해 버렸다.

그래, 계속 해 봐라!

아직 고통스러울지언정 내공은 충분하다!

뭇별들이 밤하늘을 움직이고, 점차 차가운 새벽이 지나고 있었다.

모든 내공과 법력을 심장을 뛰게 하는 데에 돌리는 탓인지.

평시에 방한작용을 하던 영맥의 영력들이 작용하지 않아 전신이 떨려왔다.

춥다.

하지만, 아침 해는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이 새벽만 견디면!

가장 추워질 때는 해가 떠오르기 직전이라든가.

점차 몸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아직 내력이야 충분하다.

그리고 이 정도 추위로는 아직 죽지 않는다!

"하늘이여... 뭇별들이여...!"

나는 하늘을 보며, 나를 내려다보는 무수한 천체(天體)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내 수명을 다시 쓰셔야 할 거요..!"

그리고, 저 멀리 해가 뜨기 시작했다.

'따뜻...하다.'

이전의 삶에도 이즈음 죽었었지.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하늘이 스스로 나의 수명을 다시 쓰게 할 것이다.

아침해는 점차 지평선 너머로 떠올랐고.

나는 아침해를 보며 희망을 다졌으며.

먹장구름이, 아침해를 가리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릉...

천거현상때 일어났던, 단순히 하늘과 나를 차단하는, 그런 조용한 먹장구름이 아니었다.

구름 사이사이로 푸른 빛을 번뜩이는, 엄니를 잔뜩 드러낸 맹수와도 같은 구름이었다.

쿠웅, 쿠웅...

나는 강기로 심장을 자극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성제의때에 얻은 하늘의 천기를 미약하게 읽어내는, 수도자의 영감.

그 영감에, 천기가 읽혔다.

나는 오늘이 죽을 날이었다.

발버둥쳐도 소용은 없다.

하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웃기지, 마라...!"

파아아앗!

장심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내게서 태어난 별빛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뭐가 소용이 없다는 거냐! 뭐가 왜 안된다는 거야! 구름이 온다면 구름째로 찢어발기겠다!"

번쩍!

강환이 폭발하며, 구름을 원형으로 찢어발겼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에는 구름이 많았고, 나는 구름에 작은 구멍을 하나 냈을 따름.

여전히 다른 구름들은 푸른 빛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내 목숨을 다시 써라!"

나는 다시금 강환을 띄워올렸다.

모든 구름을 찢어발겨서라도, 나는 오늘 죽지 않겠다!

그리고.

강환이 다시 하늘에 도달하기 전.

번쩍!

한 줄기 푸른 천뢰(天雷)가 빛의 속도로 나를 향해 내리찍혔다.

"...!!!"

호신강기가 박살난다.

준비한 방어법술이 그대로 깨져나간다.

살갗이 타서 숯이되고, 뼈가 불타 재가 된다.

하늘이여.

그냥, 인연을 소중히 여기던.

그냥, 평범했던 이 모지리가.

그냥, 조금만 더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

이리도 큰 죄였단 말입니까?

비명조차 청뢰(靑雷)에 먹혀 스러진다.

나는 빛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원(永遠)

그렇기에 일원(一元)

오롯한 하나이다.

나는 그 의지를 온 몸과 온 영혼으로 느끼며, 연기기 13성 일원일응을 완공하고.

연기기 14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사방이 암전되었다.

연기기의 극(極)에 달함과 동시에 나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나의 여덟번째 회귀(回歸)였다.

8회차의 첫날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숲내음이었다.

"...잔인도 하시지."

어찌 또 나를 계속 되살리시는가.

난 바로 수결을 맺어, 수면술로 정신을 차리려던 동료들을 바로 잠재워 버렸다.

풀썩, 풀썩, 풀썩..

나는 지난 삶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하늘이 떨어뜨린 그 천뢰를 맞고, 마지막에 일원일응에 대하여 깨달으며 연기기 14성에 도달했었다.

그 깨달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하늘은 오롯한 하나이자, 영원.

그리고 그러한 일원의 이치를 내 속에 담아낸다는 것.

수선(修仙)의 길이란, 결국 하늘을 닮아가는 길인 것일지도 몰랐다.

하늘의 이치를 내 안에 담아냈다.

이제는 연기기의 극성에 이르렀고.

14성, 무극영운(無極靈雲)을 완성한 후 축기에 도전하면 될 뿐이다.

그 때였다.

찌이잉!

"크윽...!"

코에서 갑자기 코피가 나왔다.

뚝, 뚜둑...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온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끄...으으으윽...!"

상단전이, 덜거덕 거리고 있었다!

'연기기 극성에 달했었던 상태의 의식이, 그대로 나와 함께 회귀했다.'

이대로라면 큰일이 날수도 있었다.

난 황급히 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황급히 흙째로 삼들을 퍼서 씹어 삼켰다.

와득, 와드드득!

쿠구구구!

빠르게 삼들을 복용하자 용맥기공의 내력이 전신을 일주천한다.

나는 상당한 내력을 가진 채로,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름과 동시에 환골탈태를 시작했다.

우둑, 우드드득!

전신의 근골과 근육이 뒤틀리며, 최적의 조화체를 완성한다.

상중하단전의 조화가 완벽하게 맞춰진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앗!

눈에서 정광이 흘러나오며, 상단전이 빠개질듯한 고통이 잦아들었다.

"후우우..."

나는 내친김에 아예 내단까지 만들어버리기로 결심하고, 허공에다가 강기를 응집했다.

강기가 얽히고설키며 강환이 된다.

나는 천천히 강환을 흡수하며 단전으로 안착시켰다.

동시에, 강환이 움틀거리며 단전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우우웅!

강환이 단전의 형질과 뒤섞이며, 단전에 완전히 고정되고 새로이 진화한다.

얼마 후, 나는 단전의 중앙에 자리를 잡은 내단(內丹)을 확인했다.

이전 삶과 거의 비슷한 육신을 다시 손에 넣었다.

"후우..."

비록 회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단련은 거의 되어있지 않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걸로 급한 불은 껐다.'

나는 문득, 이대로 계속 의식의 크기가 커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회귀하자마자 머리가 터져서 다시 회귀하는 사태가 되는 건 아니겠지...?'

뭔가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이건 좀 위험하다.

나는 내 의식에 대한 문제를 상기하고, 우선 지난 삶 나를 내리쳤던 천뢰를 떠올렸다.

'내가 작정하고 발버둥치자, 작정하고 죽이려는 느낌이었다.'

바보라도 알 수 있다.

하늘은, 무생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저 커다란 창궁은 무생물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하늘을 흐르는 거대한 천지영기의 흐름.

운명의 흐름이란,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과 같아서 자신을 거역하는 존재를 짓이겨 터트리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저 하늘에 맞서 계속해서 올라가야 할 터였다.

"...우선, 다른 이들부터 옮기도록 하지."

난 동료들이 이슬에 맞지 않게 그들을 하나하나 들어올려 동굴로 데리고 가 눕혔다.

* * *

매번 회귀 초반마다 벌어지는 사건은 똑같다.

내가 동료들을 재우고, 황주삼을 먹고 환골탈태를 하고.

그 다음날 여우가 찾아와서 내 팔을 맛있게 뜯는 둥.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순환이었다.

그러나.

우뚝!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은,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여우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

"예."

[흠... 기이하군. 기이해. 기묘한 냄새가 나는 놈이야.]

여우는 기절하려 하는 동료들을 무시하고 나를 쳐다보며 영언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는 그냥 보자마자 목을 뽑아 죽이려 했지만, 그냥 나를 이 숲의 주인으로 인정해 주며 예를 치뤘으니, 우선은 살려주도록 하지.]

나는 여우에게 감사 인사를 했으나, 뭔가 기묘한 어긋남을 느꼈다.

여우의 감정이, 지금까지와는 뭔가 달랐다.

[기이한 느낌을 풍기는 것아. 그럼 비켜라. 나머지 인족들에게서 팔다리를 하나 뜯어 맛보도록 하마.]

"....?"

여우가, 나를 툭 쳐서 옆으로 밀친 후.

김영훈, 오현석, 전명훈, 강민희, 오혜서, 김연 육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잠깐. 숲의 주인이시여, 제 팔을 잡수시지요!"

나야 하도 신체훼손을 많이 당해서 그러려니 하지만.

이들은 난생 처음 당하는 끔찍스러운 공포일 터였다.

그러나 여우는 나를 보며 눈을 찌푸리더니 으르렁거렸다.

[감히 숲의 일원이 숲의 주인의 말에 토를 다느냐. 아예 내 한끼 식사가 되기 싫다면 입을 닥치고 있어라. 내가 맛보고자 하는 것은 이 인족들이느니.]

"...?"

숲의 일원?

갑자기 무슨 소리지?

나는 여우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가, 내가 모르는 변화라도 내게 생긴건가?

다른 사원들이 공포에 질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고.

여우는 가장 가까이 있던 오혜서 대리의 팔을 그대로 뜯어서 씹어먹었다.

"꺄아아아악!"

와드득, 와드득...!

"오 대리님!"

나는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가 수면술로 그녀를 재우고, 진통효과를 지닌 약초를 절단면에 발랐다.

[흠, 별로군. 맛도 좋지 않아. 다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이로구나. 그럼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여우는 유유히 뒤를 돌아 펄쩍펄쩍 뛰어가 버렸고, 나는 황당하게 여우를 바라보다가 오혜서 대리를 위해 진통 효과를 지닌 약재를 빻았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여우뿐이 아니었다.

스스스슷-

머리가 둘 달린 붉은 뱀.

붉은 뱀이 나를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흠... 기묘하군. 도대체 뭐지? 이건 인족 같은데... 인족이 아닌건가? 헷갈리는군...]

'인족이 아니라고?'

내가?

나는 의아함에 가득차, 붉은 뱀에게 질문했다.

"...혹. 제가 인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씀이십니까?"

[모르겠군. 너는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어. 뭐... 너는 됐고. 다른 인족 녀석들 피나 맛을 볼까.]

여우는 이전처럼 전명훈의 피를 한모금 빨고, 맛이 없다며 그대로 가버렸다.

"...뭐, 뭐냐고, 빌어먹을..."

전명훈은 뱀에게 물린 팔을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일단 약초를 캐오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나는 전명훈을 위해 약초를 캐오겠다고 하고,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 월수궁무록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저 멀리 앞서가는 뱀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이 뱀은, 축기 초기 수준이었다.

파아아앗!

콰아아앙!

장심에서 뿜어진 강환이 뱀을 향해 날아간다.

뱀이 순간 나를 흘긋 보았다가, 강환의 위력을 확인하고는 바로 온 몸을 굴려 몸을 피했다.

'의식 연동.'

강환을 하나 만든 후, 내게로 그 의식을 흡수한다.

두 개의 의식이 연동되며 사고 속도가 두 배로 증폭된다.

핏!

한 걸음을 걷자, 말 그대로 공간이 축약된 느낌이었다.

아마 뱀은 내가 갑자기 시간을 잘라내고 그의 앞에 도달한 느낌이리라.

콰아아앙!

나는 뱀의 허리를 걷어차서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

뱀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나는 다시금 월수궁무록으로 인식을 베어버린 후.

뱀이 당황하는 틈새에 접근하여 뱀의 한쪽 머리통에 무릎을 갈겨버렸다.

[크으으으으!]

"흠, 이게 끝인가."

이전에는 까마뜩해 보였던 쌍두적사가, 지금은 그리 강해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우는 아직도 무시무시했지만.

최소한 이 녀석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터억!

난 뱀의 한쪽 머리를 밟고 물었다.

"말해라. 내가 인족이 아니라면 뭣 같다는 거지?"

[시싯, 시시시싯!]

뱀은 당황하는 듯 하며, 혀를 날름거렸다.

의념의 색조로 보아 아마 단어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로서도 회귀 도중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여우와 뱀이 내게 그러는 것인지 알아내야 했기에, 저금 손속이 과격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한쪽 머리는..."

[마, 말, 말 하겠습니다!]

붉은 두 머리 뱀이 혀를 낼름거리며 공포의 질린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께선... 저희와 동족의 느낌이 납니다. 때문에 숲의 주인께서도, 저도 당신을 아무런 이유 없이 심하게 해치치 아니한 것입니다!]

동족?

그 말이 나오자 나는 어이가 없는 것을 느꼈다.

나와 이 뱀이 도대체 어딜, 뭘 봐서 동족이란 말인가?

하지만 어쨌든 뱀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았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뱀에게서 뱀 독을 조금 받고 놓아주었다.

지금껏 뱀은 게걸스럽게 늘 내 팔을 탐했던 여우와 달리.

피만 한 모금 먹고 가면 다신 안 건드리는 신사적인 녀석이었기 때문에 나 역시 녀석을 굳이 죽이지는 않았다.

'여우 역시 동족에 포함되는 것을 보아, 어쩌면 나를 '뱀'이 아닌 일종의 요괴 같은 것으로 생각한 건가?'

하지만 왜?

도대체 왜 갑자기 내가 요괴 취급을 받는단 말인가?

내가 뭘 했다고?

나는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며 다시 동굴 근처로 돌아갔다.

그후, 나는 우선 법화단전을 만들고 이후 찾아올 천인기 수도자들을 맞을 준비를 하기로 했다.

* * *

이틀이 지났다.

나는 법화단전을 전부 생성하고, 지괴진언을 읊어 영맥을 하나 활성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바로 연기기 1성에 진입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막 지괴진언 활성화에 성공했을 때였다.

번쩍!

또 다시 하늘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내려왔다.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 세 사람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기는 아직 달라진 일이 없었다.

창호자가 푸른 치유의 영력으로 오혜서 대리의 팔을 재생시켜 버렸다.

세 사람은 각각 천상금뢰지체를 가진 전명훈.

귀도음화선근을 각성한 강민희.

일문성체를 가진 오현석을 각자 자기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금벽호가 특유의 악랄한 영근 검사로 내 전신을 천지영기로 검사할 때였다.

"흠...?"

금벽호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건 또 뭐냐. 네놈, 요괴인건가?"

또다.

'도대체 왜 나를 요괴라고 하는 거지?'

의식의 크기 때문인가?

아니면 뭐 천인기 수도자들은 대상의 영혼을 볼 수 있어서, 일반인과 다른 내 정신세계가 드러났다거나 그런 건가?

하지만 금벽호, 백골귀마, 창호자 등 모두 내게는 상관 없다는 듯 나를 근처에 내려놓았다.

"흠, 흥미로운 자질이군. 하지만 우리 종문에서 데려가기엔 이미 일문성체만으로도 벅차니 내 방계의 추천권을 주마."

창호자는 내게 손가락을 튕겨 청문세가의 추천권 문양을 건냈다.

나는 정중하게 창호자의 제안을 거절한 후, 조심스레 금벽호에게 물었다.

"위대한 수도자 대인께 여쭙습니다. 저는 사실 금신천뢰문의 위명을 흠모하던 자로서. 금신천뢰문의 개파조사이신 금신자 양수진 님을 너무나도 흠모해왔습니다. 부디 금신천뢰문 태상문주께선 이 미천한 것에게 초대 조사님에 대한 기록만을 복제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실 수 있으실지요..?"

내가 성제국어로 그에게 묻자, 금벽호는 흠칫 놀라며 육성으로 성제국어를 써서 대답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가 금신자 님의 기록을 받아, 앞으로 천세만세 이 기록을 보관하여 무수한 이 곳의 생명들이 금신자 님과 금신천뢰문의 위명을 찬미하게 하겠나이다!"

"..."

금벽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짧게 대답했다.

"안 된다."

"...왜, 안되는지요?"

"흥,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말이 많구나! 하지만 좋다. 그래도 본문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놈 같으니. 정 본문의 역사가 궁금하면, 본 금신천뢰문이 있던 대산맥 쇄천봉(碎天峰)으로 가 봐라.

그곳에 몇 개의 역사가 보관된 석굴이 있으니, 찾으면 읽을 만할 게다. 그 정도만 해도 민간에 드문드문 전해진 역사서에 비하면 상당히 정교할 터다."

"...! 감사, 또 감사합니다!"

나는 엎드려 금벽호에게 절을 올렸고, 그는 나를 신경쓰지 않는 듯 하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았는지.

이번에는 괜히 번개를 떨어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잘 넘어가서 다행이군.'

금벽호와 백골귀마는 저 성격에 몸 성히 넘어가기만 하면 썩 잘 넘어간 편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다음날이 되었다.

나는 다음날이 되기 전, 곯아떨어진 김영훈의 뇌리에 이전 삶에서 넣어주었던 지식들을 다시 넣어주었다. 지난 삶의 김영훈이 추가했던 기록과 시행착오들의 월도월무록을 토함해서 말이었다.

며칠 뒤 지식이 발현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이제는 오혜서 대리를 데리러 해룡왕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해룡왕에게 김연까지 같이 맡기고, 김영훈을 다른 곳으로 보낸 후 등선향에서 10여년 정도 수련을 한 후 떠날 예정이었다.

쿠릉, 쿠르릉!

일순간 번개라 하늘을 덮었고.

나는 그 찰나 해룡왕이 어느새 동굴에 들어와 오혜서 대리를 진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본왕은 해룡왕 서휼이라 한다네. 이 처자가 천기현상을 불러일으키기에 궁금해서 왔네만... 그나저나 자네들은.."

뭔가 말하려던 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흠칫!

그리고, 그가 미간을 씰룩였다.

"...자네."

그가, 내게 다가왔다.

"흠, 신기하군. 혹시 자네는 인요(人妖)의 혼혈인가?"

"...예?"

"인족과 요족의 혼혈이냐고 물었네. 가끔 그런 존재가 있거든."

나는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멍하니 있다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째서 해룡왕께서는 제게서 요괴의 기운을 느끼신 것입니까?"

그러자 서휼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혼혈이 아니라고? 그럼 자네는 도대체 뭐지? 뱃속에 요단(妖丹)을 품고 있는 녀석이 요족이 아니라는 건가?"

"...예?"

요단(妖丹)?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폭풍(1)

요단?

'설마, 내단(內丹)을 말하는 건가?'

서휼이 말하는 단(丹)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현재로썬 내단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어째서 요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이것은..."

나는 문득.

내단에 대해서 설명하려 하다가, 이것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말문이 막혔다.

내단은 등봉조극에 오른 무공고수인 나와 김영훈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고.

오기조원조차 몇백년에 한 번 나올만한 천재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등봉조극에 이른 무림인은 아마 무림사에서 나와 김영훈 둘 정도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등봉조극의 고수만 만들 수 있는 이 내단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제가 생각해보니 견문이 짧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해룡왕께서 요단이 무엇인지에 대해 짧게나마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요단이란, 나와 같은 요수선사(妖獸仙士)들이 형성하는 영성(靈性)이며. 동시에 일반적인 요수나 요괴가 최초로 지성(知性)을 가지게 되어 수행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라네. 자네들 인족은 날때부터 지성을 타고나지만,

대부분의 짐승들은 그저 본능으로 천지영성을 흡입하다가, 어느순간 그 천지영성이 체내에 핵(核)을 형성하면 그것이 곧 요단이 되어 점차 지성을 가지게 되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네.

우리 용족을 포함해서 몇몇 기타 종족은 요단을 전승하는 것이 가능해서 아주 어릴 때부터 지성을 가지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요수나 요괴들이 형성하는 단을 요단이라 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서휼이 어째서 내단을 요단이라고 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지영성을 응집해서 지성을 얻는다면, 요수들의 요단이란 결국 요수들 자기 자신의 지성의 응집체. 내 내단은 강환이 단전의 기운과 섞이며 만들어졌다.'

그리고 강환은 결국 또 다른 나 자신의 응집체.

일종의 지성의 응집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수렴진화였다.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지만.

겉보기에 그 결과물은 비슷해보이는 양상.

그것이 내 내단과 요수들의 요단인 듯했다.

[인족은 보통 지성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지성을 따로 응집시키는 요핵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 자기 뇌를 단전에 욱여넣어서 응집시키는 인족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보통 요단, 요핵은 요수들만이 응집하거나.

요수선사와 인족의 혼혈들 정도만 드물게 응집한다네. 그런데 자네는 요단을 응집하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가 혼혈인 줄은 몰랐던 건가?]

해룡왕은 내 정체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한 것인지, 나를 어떤 요족과 인족의 혼혈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물어왔다.

[흠, 무슨 혼혈인지가 궁금하지만,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군. 승천문에 가 봐야겠어.]

얼마간 내게 몇 가지를 물어보던 해룡왕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는 김영훈을 공간 균열 너머로 밀어넣고, 내 설득에 의해 김연 주임 역시 데려가기로 한 후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인요 혼혈은 거의 천 년 만인가. 이것도 인연이니 여기, 요수공법(妖獸功法)을 수록한 요족 수도공법서라네. 본 해룡족에 전해져 내려오는 썩 쓸만한 공법 중 하나지.]

"...! 어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나는 손을 부르르 떨며 해룡왕이 품에서 꺼내 건낸 서책을 받아들었다.

서책은 왠 짐승의 가죽으로 장정되어있었고,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하나, 죄송하온데 이 글자는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그건 요족어라네. 생각해보니 자기한테 있던 게 요단인지도 모르고, 무슨 혼혈인지도 모르는 자네가 요족어를 알 리가 없지.]

"..."

그럼 어쩌라는 거지.

'지식을 전송하는 술법으로 요족어를 알려주지는 않으려나..?'

내가 그를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휼은 내 눈빛을 알아냈는지 고개를 저었다.

[요족과 인족의 의식은 그 파동이 상당히 달라서 억지로 지식을 전수하면 보통 의식이 약한 쪽이 미쳐버린다네. 안타깝지만, 자네가 요족어를 따로 배워야 할 것 같군.

어디보자... 흑풍해(黑風海)의 극란도로 가면, 서란이라는 축기 후기경의 내 후손이 있는데. 그 아이는 인족어와 요족어에 정통하니 댓가를 주고 요족어를 가르쳐달라고 하면 가르쳐 줄 걸세.]

"제가 견문이 넓지는 못하나, 인요가 다른 것이 명백한데 저를 공격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는 혼혈 요족이라니까. 요단까지 응집했는데, 지성있는 요족이라면 자네를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걸세.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그 공법서는 썩 괜찮은 요수공법이니 요수혼혈인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걸세.]

서휼은 김연과 오혜서를 안아들고, 그렇게 말한 후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얼마 후 다시 서휼이 먹구름 속을 헤치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날아가는 서휼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요수공법이라...'

문득, 나는 무공(武功)의 연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다수는 무공의 연원을 수도자들의 수도공법에게서 찾았다.

그들이 운용하는 수도선법에서부터 내공심법(內功心法)이 탄생했다고들 하였다.

하지만, 무공은 단순한 심법과 기공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초식(招式).

무림인이 그 몸을 움직이는 기(技)는 어디에서 왔는가?

'짐승들의 움직임에서 무수한 무공초식의 연원을 따 왔다.'

범의 움직임에서, 말의 뜀박질에서, 벌의 날갯짓에서, 거북이의 단단함에서.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이를 모방하며 그렇게 무공을 완성시켜 나갔다.

수도자들을 모방하여 심법을 만들고, 짐승들을 모방하여 초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기공과 초식이 합쳐지며, 수천년이 흐르고 완전히 통합되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무림인'이란 존재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내가 만든 검환(劍丸)은 기(氣)인가 기(技)인가.

기운의 덩어리라 해도 될 것이었고.

기술의 집합체라 해도 될 것이었다.

수도자들의 그것과도 닮았으나, 동시에 짐승들의 그것으로 탄생한 것.

그렇기에, 나의 내단은 요수들의 요단과도 비슷한 형질을 지닌 것일 터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어쩌면, 요수공법을 연구하여, 무공의 다음 단계를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수도자들의 수도공법은 수천, 수만, 수십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이어져 내려오며 진화했다.

요수들의 요수공법 역시 모르긴 몰라도 그 정도의 역사는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무림인의 무공은 그에 비하여 아무리 잘 쳐 주어도 그 정도의 역사를 가지진 못했다.

그렇기에 무공은 약하고, 그 경지 역시 한정적이다.

김영훈이 삶을 갈아넣으며 계속해서 새로운 경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괜히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무공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 테니까.

'만약, 내가 요족어를 배워 요수공법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것을 김영훈에게 알려준다면...'

어쩌면 그는 훨씬 빨리 그 너머의 경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일단 결심을 다졌다.

'그래, 우선 등선향에서 최대한 빨리 지난 삶의 경지를 회복한다.'

그런 후 흑풍해 극란도라는 곳에 사는 서란이라는 용족을 찾아가, 요족어를 배운다.

이것이 이번 삶의 목표였다.

* * *

연기기 7성까지의 경지를 회복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지난 삶보다도 훨씬 빨랐다.

고작해야 7년.

거의 1년에 1성씩 경지를 올린 셈이었다.

선각후통으로 경지를 올리는 것을 처음부터 몇 번을 반복하니, 점차 경지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며 경지를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칠성제의의 의식을 치뤘다.

하늘에게서 영성을 부여받는 의식.

그리고, 나는 이번에도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김없이 나타나는 천거 현상.

먹장구름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파아아앗!

빛이 터져나오며, 하늘에 구멍이 뚫린다.

하늘에 뚫린 구멍으로 별빛이 쏟아져 내려오며, 내게 천지영성을 부여하였다.

나는 굉장히 순조롭게 연기기 8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 * *

연기기 8성에서 다시 11성 삼재규일에 도달하는 데에는 약 3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최근 삼재규일의 단계에 이르러 강환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눈치챘다.

"천(天), 지(地), 인(人)..."

지난 삶에도 삼재규일의 단계를 밟을 당시 강환에 변화가 생겼었다.

하지만 그때는 느낌이 명확하지 않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느낌이 온다.

물론 아직도 필설로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우우우웅!

강환에 변화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아앗!

강환이 두 개로 쪼개졌다.

좌환을 지(地)로, 우환을 천(天)으로.

그리고 두 개의 환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을 인(人)으로.

그리하여 나를 중심으로 천지가 순환하게 한다.

웅, 웅, 웅!

두 개의 강환이 내 주변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안정화되었다.

나는 양손에 두 개의 강환을 올렸다.

'삼재의 원리가 적용되니 강환이 쪼개졌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강환에는 삼재의 원리가 이리 딱 맞게 적용되는 것일까.

붕, 붕!

나는 두 개의 강환을 한 손에 올렸다.

각각 천과 지를 대표하는 두 강환이 서로 공전하며 돌더니.

어느덧 하나의 강환으로 합쳐졌다.

'삼재의 이치란...'

난 삼재의 이치에 대해 생각하며, 다시 강환을 쪼개 보았다.

지금으로선 강환을 쪼개는 갯수는 아직까진 두 개.

거기에 제대로 된 깨달음이 아니어서인지, 두 개의 강환은 힘을 풀면 다시 하나로 합쳐져 버렸다.

난 잠시 강환을 바라본 후 다시 지월입도결 수련을 이어갔다.

그 후 약 1년.

난 연기기 12, 13성을 완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의합일과 일원일응.

파아아앗!

모든 영맥이 하나의 영맥으로 통합되고, 단전에는 하나의 영기의 점이 모였다.

연기기 14성, 무극영운(無極靈雲)의 단계를 완공하면, 이제 축기기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진다.

아니, 사실 연기기 14성 무극영운의 단계는 일원일응을 통해 축기기에 도달하기 쉽도록 만들어진.

축기기와 연기기의 중간다리 같은 느낌의 단계였다.

그러므로, 일원일응을 완공하여 14성에 진입한 나는, 사실상 연기기의 극한에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약 11여년 만에.

연기기 14성의 경지를 전부 회복했다.

쿠그그극!

내가 손을 쥐자, 수결이나 진언을 맺지 않아도 주변의 대지가 우그러지며 진도를 형성한다.

이제는 간단한 진도형성 정도는 무영창으로 바로 하는 게 가능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14성을 완공하고 축기기에 드는 것.

'하지만 축기기에 드는 건, 조금 천천히 생각해야겠어.'

당장 내 재능으로는 평생을 고련해도 안 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당초 생각했던 대로 경지를 전부 회복했으니 흑풍해에 사는 서란을 만나, 요족어를 배우고.

서휼이 주고 간 요수공법을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회귀 11년차.

나는 그렇게.

모든 경지를 회복하여, 연기기 14성에 이른 채 등선향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요수공법에 대해 알아보러 갈 시간이었다.

폭풍(2)

나는 등선향에서 내려와 며칠에 걸쳐 또 다시 벽라국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연기기 14성에 도달한 채로 충분한 법력을 가지고 빠르게 법술을 쓴 탓인지.

아니면 등선향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가지고 온 탓인지.

그도 아니면 지난번처럼 쓸데없이 금신천뢰문의 흔적을 좇지 않은 탓인지.

어찌되었든 나는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물이 없는 상황에 놓여 곤경에 처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물이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핥으며 벽라국 천색성에 들어와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지월입도결도 익히고, 수월입도결도 연기기 3, 4성 수준까지 한번 수련해 봐야겠어.'

어차피 오영근인지라 다른 속성도 전부 익힐 수 있으니.

기왕이면 사막을 건널 때 도움이 되는 수월입도결도 초반부 정도는 익혀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천색성에서 적당히 생필품과 옷가지를 구매하고 막 벽라국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잠시 멈추시게. 그대는 어느 세가의 자재이지?"

쿠구극..

은은한 영기의 압박이 느껴진다.

동시에 나보다 약간 큰 의식을 지닌 존재가 내 의식영역을 뒤덮었다.

스르르-

허공이 일렁이는 듯 하더니, 손목에 유리팔찌를 잔뜩 찬 장년인이 걸어나왔다.

백의의 장년인은 전신 곳곳에 유리 장신구를 차고 있었고, 장신구에선 전부 은은한 법력이 풍겨왔다.

'하나하나가 법기... 돈도 많나보군. 전신을 법기로 떡칠하다니.'

나는 조금 긴장을 하며 상대를 관찰했다.

법기를 전신에 둘렀단 말은, 재력이 풍부하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저 많은 법기를 전부 가동시킬 법력을 소유했다는 말도 됐다.

'축기기 수도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나는 공손하게 상대의 말에 대답했다.

"소인은 산수(散修) 서은현이라 합니다. 선배께선 어인 일이신지요?"

"산수? 소속된 가문이 없다고?"

"예, 없습니다."

우웅-

북중호의 목에 걸린 반지 모양 유리 법기가 맑은 청색으로 변했다.

"약령환(約聆環)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니 참이군. 다른 가문에서 공묘세가의 영역을 정탐하러 온 간자는 아닌건가.."

'법기로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건가?'

저 반지 안쪽에서 휘몰아치는 영기의 소용돌이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빠개질 정도로 아팠다.

일반적인 법기와는 뭔가 격이 다른 법기인 듯 했다.

"나이가 젊은 듯 한데, 몇 살이지?"

내 육체의 나이는 29살에 이 세상에 떨어졌고, 약 10년이 지났으니 약 40대인 셈이었다.

"불혹(不惑:40대를 이르는 말)에 이르렀습니다."

"흠, 굉장히 동안이군."

아무래도 환골탈태와 내단의 영향으로 노화가 느리다보니 나는 아직도 20대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40대에 연기기 14성이면 쓸만한 자질을 지녔단 의미인데.. 무슨 영근이지?"

"...소인은 오영근자입니다."

"오영근...? 40대에 오영근으로 연기기 14성이라고?"

백의의 축기기 수도자는 굉장히 놀란 듯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예상보다도 오성이 뛰어난 젊은이였군. 욕심이 나는걸... 본인은 공묘세가의 객경 장로 북중호(北中虎)라고 하네.

나 역시 본디 산수였었으나, 이전 공묘세가의 장로 중 한 분이 내 자질을 알아보고 나를 공묘세가의 외부 구성원으로 추천하셨지.

본 공묘세가는 재능있는 이라면 가리지 않네. 산수라면 공묘세가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아..."

아무래도 간자 판별 외에도 인재 영입을 목적으로 내게 접근한 듯 했다.

나는 일단 기본적인 경계심만을 남겨놓은 후 과도한 긴장을 풀었다.

"제안은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어떤 세가에 소속되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는지라, 안타깝게도 거절해야할 것 같습니다."

"흐음... 그것 참 안타깝구만. 잘 생각해보게. 연기기 극성인 듯 한데, 자네 실력에 공묘세가에 들어오면 축기를 위한 수행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고.

또한 축기에 오르면 나처럼 객경 장로가 될 수도 있어. 자네가 공묘세가의 데릴사위가 되는 걸 택하면 객경이 아니라 내부 장로가 되는 것도 가능하고.

또 공묘세가가 법기 제련으로 유명한 건 알지 않나? 공묘세가에 들어오면 양질의 법기를 무상으로 지원받을 수도 있다네."

"끄음...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정말로 가문에 소속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허... 뭐 정 그렇다면야..."

북중호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정 그렇다면 추후에 가문에 들어오고 싶을 때엔 공묘세가로 꼭 오게나.

외부 장로인 내가 이렇게 공묘세가를 위해 진심인 것은 그만큼 공묘세가의 생활이 훌륭하다는 게 아니겠나?

청문세가는 실력이 증명이 안 되면 끊임없이 싸워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투전판이고, 벽씨세가는 벽창호처럼 답답하고 멍청한 놈들일 뿐이네.

꼭! 추후에 산수 생활이 마음에 안 들면 공묘세가를 찾아주게나!"

"...예, 뭐 그러겠습니다."

'왜 저렇게 영입에 열중하는 거지.'

뭔가 수상할 정도로 공묘세가의 홍보에 진심이었다.

나는 북중호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고 천색성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청문세가의 영역으로 향해 지난번처럼 투도회에 참여해서 청문령을 만나려 했다.

어찌되었든 이번 생에도 어찌 지내는지 한 번은 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청문세가의 투도회 접수처에 들어갔을 때였다.

"오호라, 이게 뭐야 싱싱한 인재로구나!"

"....!"

접수처의 한 구석에서 갑자기 근육질의 거한이 튀어나왔다.

'축기기 수도자...!'

심지어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청문력신이라는 축기기 장로로, 지지난 삶 스승님의 밑에서 수학할 당시 간혹 인사를 했던 이였다.

'투선회 서열에서 스승님의 바로 밑에 있던 자...!'

내가 당황할 때, 내 바로 앞까지 뛰어온 청문력신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연기기 극성에 달한 놈이라니. 거기에 의식의 크기는 거의 축기기에 준하잖아! 엄청난 인재로다! 네놈, 청문세가에 들어오거라!

축기기에 도전할 수행자원은 얼마든지 지원해주마!"

"아, 아니 저는..."

"시끄럽다! 반항은 허락하지 않겠다! 네놈같은 인재가 흔한 줄 아느냐!"

'이런 젠장...!'

아무래도, 연기기 14성.

축기기 직전의 수도자라는 이름값은 내 생각보다 귀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사, 생각해보면 저들 눈에는 조금만 지원해주면 당장 장로급 전력이 될 후기지수가 굴러다니는 꼴이다.

"크윽, 필요 없습니다!"

나는 황급히 접수처를 뛰쳐나왔다.

원래부터 스승님과 몇몇 사람 이외에는 전부 다 호전적인 이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콰과광!

접수처의 입구가 폭발하며, 청문력신이 미친 듯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놈, 얌전히 와서 청문세가의 가원이 되지 못할까! 네놈을 본가의 데릴사위로 삼아야겠다!"

"잠깐, 잠깐! 나는 청문령님을 뵙고자 왔을 뿐입니다!"

"뭣? 령 형을 만나러 왔다고?"

움찔!

청문력신은 멈칫하며 허공에 멈춰섰다.

그러더니 턱을 쓰다듬어 보고는 호방하게 웃었다.

"하긴, 형님이 배울 게 많은 분이긴 하지! 오냐! 그렇다면 형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게로구나!"

"아니, 그런 게 아니옵고..."

"좋다! 그럼 형님의 제자가 되거나 본가의 데릴사위가 되겠단 게지!?"

나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원래 막무가내인 줄은 알고야 있었지만...'

예전에는 내가 청문령의 제자였기에 저런 탐욕은 보이지 않았으나.

연기기 극성의 산수인 나를 만나자 저런 면모를 보이는 듯 했다.

"뭐 좋다! 형님을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대신 네놈은 다른 가문한테는 못 준다! 반드시 청문세가의 데릴사위나 형님의 제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야!"

"..."

아무래도, 뭔가 잘못 걸린 것 같았다.

* * *

청문력신에 대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청문령은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청문세가의 본가 인근 영지.

그곳에서 나와 청문령의 만남이 다시 이루어졌다.

"쯧, 젊은 나이에 연기기 극성인 듯 한데. 그런 재능이 있으면 뭣하러 날 찾아온 게냐. 력신 녀석이 귀찮게 굴길래 만나 줬다만,

물어볼 게 있으면 빨리 묻고 나가거라."

여전히 변함이 없으시군요.

'아마 몇 번의 삶을 반복하더라도...'

사람은 변치 않을 것이다.

"...소인은, 오영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내 영질의 종류를 밝혔고, 청문령의 눈가에 놀라운 빛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오영질...? 오영질을 가진 놈이 그 나이에 연기기 극성...? 아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아라!"

나는 별다른 설명을 하는 대신,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내 이해도를 읊었다.

이번에는 투도회의 우승자 권한으로 스승님과 만난 것이 아니었지만.

청문력신이라는 축기기 장로가 연기기 극성의 후기지수를 위해 만들어준 장이므로, 하룻밤 정도는 청문령과 이야기를 다시 나누어도 될 것이다.

내가 칠십이지살지결에 대한 깨달음과 경험을 읊자 청문령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렇군. 그 이해도라면... 선각후통의 방식으로 길을 만든 건가. 나 말고도 이런 녀석이 있었을 줄은..."

나는 그와 다시금 온종일 이야기꽃을 피웠다.

청문령 역시 나 정도로 선각후통의 방식을 이해하는 후기지수를 만나니 즐거운 듯,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 *

다음 날이 밝았다.

"...연기기 7, 8성까지의 이해도와 깨달음이라면 나와 뒤지지 않는군. 훌륭하다. 너는 정말 다시없을 인재구나."

나는 청문령과 함께 연기기 1성부터 14성까지의 깨달음에 대해 논하였고, 그동안 몇 번이고 반복한 연기기 7, 8성까지의 깨달음은 청문령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연기기 9성부터 14성까지에 대한 깨달음과, 이전까지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도 열성적으로 질문했으며.

특히나 14성에서 축기기로 넘어가는 부분에 대한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 주로 질문을 하였고.

이제 그 원리와 이론에 대해서는 상당히 박식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는 사이 아침이 밝은 것이었다.

"네놈, 내 제자가 될 생각이 없느냐?"

이번에도 청문령은 내 선각후통의 이해도를 보고 마음에 든 것인지.

나를 제자로 삼으려 들었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드렸다.

"하루를 배웠을지라도, 평생을 스승으로 기억해야 함이 아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이미 제 스승이십니다."

"흠, 입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하루동안 스승이고 뭐고 자시고 난 네놈을 진짜 제자로 받고 싶구나. 정녕 본가에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승님께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가문에 소속되지 아니하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힘들 듯 싶습니다."

"..."

스승님이 침묵했다.

잠시 침묵하던 스승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겠다는 사람을 잡을 수도 없지. 모처럼 네놈만큼 마음에 드는 녀석이 없었건만...

됐다. 가거라! 알아서 썩 가버려라!"

나는 스승님께 절을 하고,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방을 빠져나왔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청문세가의 영지를 나서려 할 때였다.

쿵!

근육질 장년인.

청문력신이 굳은 표정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네놈, 어딜 가느냐?"

"...예?"

"어딜 가느냐고 물었다."

"청문령님께 가르침을 받고 인사를 드린 후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뭬야!!!"

쿠웅!

강력한 기파가 주변으로 뿜어진다.

"감히 령 형의 가르침을 하루 동안이나 받아놓고도. 가르침만 날름 먹어치우고 제자로서의 도리는 다하지도 않은 채 도망치려는 것이냐!"

"아, 아니..."

"이 빌어먹을 놈! 감히 대청문세가를 우습게 아는 것이로구나! 네놈 같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감히 령 형님의 제자로 삼을 수는 없으니.

네놈을 적당한 방계와 맺어 데릴사위로 삼겠다!!!"

화악!

청문력신의 손이 뻗쳐왔다.

나는 등에 오한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잡히면 진짜 강제로 혼인하게 된다...!'

파앗!

나는 그의 손길을 피해 허공을 뛰쳐올랐다.

"이놈이 감히 피해!"

쿠구구!

주변에서 흙덩이들이 솟아오르며 내게 날아든다.

흙덩이들이 하나하나가 손으로 변하며 나를 잡으려고 날아들었다.

나는 즉시 장심을 뻗어 손에서 강환을 뿜었다.

콰앙! 콰각, 콰가각!

빛나는 구체가 주변을 회전하며 나를 잡으려는 흙의 손들을 전부 터트려 버렸다.

부우웅!

나는 강환을 흡수하며 사고를 가속시켰다.

파바밧!

그리고 동시에 허공을 밟고 빠르게 영지 바깥쪽으로 몸을 놀렸다.

저 뒤쪽에서 청문력신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 * *

청문력신은 잠시 얼이 빠진 얼굴로 서은현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축기기 수도자인 내 손에서 달아나...?'

연기기 수도자들끼리도 1성 차이는 상당한 차이이다.

하나, 연기기와 축기기 사이의 차이만큼은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방금 도망간 서 씨 애송이가 연기기 극성이라고 할지라도 축기 중기인 청문력신에게 비할 바는 되지 않았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저 애송이는 청문력신의 법술에 잡혀 꽁꽁 묶인 채 청문력신의 후손 중 한명과 강제로 합방당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법술을 부수고 도망쳤다?

고작해야 연기기 극성인 애송이가?

"...축기기..."

청문력신의 입가에 찢어질듯한 미소가 서렸다.

"당장 축기기급의 전력(戰力)이다...!"

수많은 원영기 이상의 노괴(老怪)들이 쓸만한 인재란 인재는 전부 데리고 상계로 비승하며.

전 대륙에 인재가 거의 고갈이 나 버렸다.

안 그래도 결단기 윗 경지의 강자들이 전부 사라져서 사방이 혼란스러운 와중이었다.

시간과 자원만 주면 축기기에 오를 연기기 극성의 인재들은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보물 중 보물이었고.

그 중에서도 연기기 주제에 축기기 수도자와 어느 정도 견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월척이다! 흐하하! 미약을 강제로 먹여서라도 내 후손과 혼인시켜 버릴테다!"

청문력신의 눈이 돌아갔다.

그가 저물탁에서 전음부를 꺼내며 근처에 있는 몇몇 축기기 장로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런 후 그는 서은현과 이야기를 나눴던 청문령이 있는 영지 내 저택으로 들어갔다.

"령 형! 왜 저런 인재를 안 잡은 거요!"

"...본인이 할 일이 있다는데 뭘 잡겠느냐."

"이런 형님. 답답하기는! 저 놈이 내 일격을 걷어내고 도망쳤소!"

"...뭐?"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저 놈은 당장에 데려다가 써도 축기기 장로급 일인분 몫은 톡톡히 할 놈이란 말이요!

형님도 보아하니 저 놈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왜 안 잡은 거요!? 형님, 마음에 좀 솔직해 지시오. 형님도 솔직히 저런 말이 통하는 녀석을 찾고 있던 게 아니었소?"

"..."

청문력신의 말이 이어졌다.

"저 놈을 잡는 건 앞으로 혼란스러워질 정국에 대비해 인재들을 육성하라는 가주님의 말에도 부합하고.

동시에 형님이 평생 염원하던 형님의 의발을 이을 제자를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오!!

답답하기는! 언제까지 참기만 할 거요! 형님이 평생을 염원해 왔던 거잖소, 뭘 그리 아쉬워하며 앉아만 있으시오? 솔직해 지시오!"

청문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어 청문력신과 눈을 마주쳤다.

청문력신은 순간 흠칫했다.

청문령의 눈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열망!

"...그래, 네 말이 맞다."

청문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의 명에도 부합하고, 나도 내 자신에게 조금 솔직해져야겠어..."

움찔

청문력신은 강력한 영기의 압박에 전신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이런 형님의 모습은.'

청문세가의 거목(巨木)이 몸을 일으켰다.

"근육과 싸움밖에 모르는 이 집구석에서 처음으로 만난 말이 통하는 놈이다. 그래... 지금 잡아야겠어...!"

청문령의 눈에서 청광이 번뜩였다.

* * *

타다닷!

나는 허공을 박차며 청문세가의 영지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저 앞으로는 청문세가의 수호결계가 있다.

부우웅!

나는 장심을 뻗었다.

빛의 구슬이 손에서 뿜어진다.

그때.

"력신 녀석이 잡으라는 놈이 이 놈인가?"

한 명의 축기기 장로가 내게 날아왔다.

파아앗!

그가 수결을 맺자, 청문세가 영지내의 수호결계가 더더욱 강화된다.

"순순히 잡혀.."

꽈아아아앙!

난 장로의 말을 무시하고 수호결계를 향해 강환을 날렸다.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퍼지며, 영지 수호결계에 그대로 바람구멍이 났다.

"뭣...!"

축기기 장로가 경악했고, 나는 빠르게 결계를 넘어서 영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나는 문득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쿠구구구!

뒤쪽으로 어마어마한 영기의 압력 두 개가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스, 스승님!?'

스승님, 그리고 청문력신이 나를 빠른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이 놈! 게 섯거라!"

"잡히면 내 후손과 강제로 합방시켜주마!"

"무슨 망발이냐! 저놈은 내 후손과 혼인할 것이니라!"

"아무렴 어떻소! 먼저 잡는 사람이 원하는 사람과 혼인시키기로 합시다!

이 놈, 본가의 데릴사위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미친.. 왜!'

나는 다시 황급히 강환으로 사고를 가속시키며 허공을 박찼다.

파앙, 파앙, 파앙!

순식간에 둘과의 거리가 벌려졌으나, 둘이 비행법기에 오르자 다시 거리가 좁혀졌다.

'연국! 연국으로 도망쳐야 한다!'

연국 국경을 넘으면 축기기 수도자들은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동쪽을 향해 허공을 박찼다.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목 속성의 법력이 휘몰아치는 듯 하더니, 목 속성의 영기로 이뤄진 거목(巨木)이 허공에 자라난 채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못 도망간다!"

번쩍!

콰과과과!

거목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속박용 법술들이 내게 쏘아져 왔다.

'안 돼! 잡힌다!'

나는 장심에서 강환을 쏘아냈다.

의념의 세계로 나와 똑같은 분신이 나타나, 의념을 발한다.

부우우웅!

강환에 불어넣은 강기들이 빠져나오며, 허공에 수천 개의 어검의 형태로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청문력신과 스승님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신외화신(身外化神)의 술?"

콰앙, 쾅! 콰아앙!

강환을 통해 사용한 어강들과 속박 법술들이 부딪히며 파훼되었다.

"더욱 더 욕심이 나는군. 도대체 무슨 공법을 익힌 거지?"

"그런 거 궁금해할 시간 없소, 형님! 저놈 도망치잖소!"

쿠구구구!

주변의 흙이 모여들며, 청문력신의 몸을 뒤덮었다.

얼마 후 청문력신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토상(土狀)이 대지에 발을 디뎠다.

쿠웅!

[하아아압!]

쿠과광!

토상이 대지에 손바닥을 부딪히자, 대지에서 수십 개의 거대한 손바닥이 튀어나와 나를 향해 뻗쳐왔다.

[순순히 묶여서 혼인해라!]

"젠장, 저는 해야할 일이 있단 말입니다!"

나는 강기를 사방으로 쏘아댔으나, 축기기 수준의 법술은 강기 정도로는 흠도 나지 않았다.

쿠구국...

곧이어 사방이 흙의 손으로 뒤덮혀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파아앗!

그러나, 나는 이미 강환을 재생성한 후였다.

번쩍!

다시금 빛이 휘몰아치며, 내가 나갈 바람구멍을 만들어내었다.

우웅!

사고를 가속시킨다.

나는 내게 날아드는 또 다른 목 속성의 속박법술들을 피해내며, 빠르게 동쪽으로 향하였다.

나와 청문세가 장로들의 추격전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중간에 청문력신이 연락을 넣은, 한가한 다른 몇몇 장로들 역시 추격에 합류했고, 나는 수많은 법술 폭격을 받으며 도망쳐야 했다.

그렇게 도망치고 또 도망치기를 나흘째.

나는 기묘한 감각에 접어드는 것을 느꼈다.

강환을 몇 번이나 사용했을까.

등봉조극에 이르며 이토록 강환을 절실히 사용한 적이 있을까.

파아아앗!

나는 강환을 손 위로 띄우며, 어쩐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 것 같았다.

'강환은 이전부터 삼재의 이치에 반응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때는 몰랐던 이유.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 강환에는 또 다른 나 자신이 깃들어 있다.

말하자면, 강환은 한 명의 사람(人).

하나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늘(天)과 땅(地)의 은혜 아래에.

그 속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어간다.

인간은 본디 자기 자신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수많은 인연 속에서 한 존재가 이뤄지듯.

그 인연은 어쩌면 하늘과 땅 역시 포함일지도 모른다.

지난 나흘간, 스승님의 추격 속에서 느낀 것이었다.

스승의 은혜가 하늘과도 땅과도 같다면.

하늘과 땅 역시 스승의 은혜만큼 큰 뭔가를 내게 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수많은 인연이 내게 주었던 것이 지금의 나를 이룬다면.

하늘과 땅이 내게 주었던 것 역시 지금의 나를 이루는 일부가 아닐까.

우우우웅-

손 위에 떠오른 빛이 진동했다.

동시에, 나는 나 자신을 축으로.

빛의 환을 음양(陰陽)으로, 건곤(乾坤)으로, 천지(天地)로 나누었다.

사람(人)을 중심으로 천지(天地)가 순환을 시작했다.

'그런 건가...'

이제야, 등봉조극의 경지에서 어찌 나가야 하는지가 조금 보인 듯 했다.

강환이 두 개로 쪼개졌다.

파아아앗!

나는 두 개의 강환을 양옆으로 날려 터트렸다.

수많은 법술들이 일거에 지워진다.

그리고 다시 두 개의 환을 띄우자, 나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속, 3배!'

파아앗!

수많은 영기의 뿌리가 하늘과 땅을 뒤덮어, 나를 잡으려는 감옥으로 변한다.

그러나, 나는 그 찰나를 파고들어 감옥이 완성되기 직전.

일말의 틈새로 나갈 수 있었다.

"놈...!"

"더 빨라졌다!"

이제 연국의 국경이 코앞이었다.

나는 땅으로 내려가, 청문령을 향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스승의 마음을 통해 이 깨달음을 얻었다.

이전 삶과 같이 깊은 인연은 맺지 않았다.

그분과 이분은 동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나는 당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스승의 은혜가 하늘과도 땅과도 같기에.

하늘과 땅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는, 혼인을 할 수도. 가문에 묶일 수도 없습니다."

혼인을 했다가 자식이 생기면 어찌되는가.

자식이 회귀에 사라져 버리면 내 정신은 어찌되는가.

감히 상상하기 싫었다.

또한 가문에 묶이는 것 역시, 내 실력을 보여주었으니 장로급의 전력으로 취급되어 타 국가를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연국에도 들리고, 성제국으로 가 금신천뢰문의 흔적을 찾고, 남쪽 흑풍해로 가 요족어도 배워야 하는 나로서는 청문세가에 묶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저를 위해 마음을 써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나는 나를 덮쳐오는 수많은 법술들을 뒤로한 채, 빠르게 연국의 국경을 넘었다.

청문령이 진도를 짜서 용맥의 흐름을 바꾸는 듯 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연국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용맥도 변치 않았고, 청문세가의 장로들도 더는 날 쫓지 않았다.

"정말 살벌하군. 잡힐 뻔 했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산을 몇 개 더 넘어가서 몸을 추스렸다.

기분이 묘했다.

이전까지는 나를 별 신경도 안 썼던 이들이, 연기기 극성에 이르자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는 것을 보자 기이한 기분이었다.

'속이 좀 울렁이는군..'

어쩌면 허공답보를 통해 계속 하늘에 떠 있다가 안정적으로 대지를 밟으니 육지 멀미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기분도 이상하고, 속도 좋지 않다.

나는 문득, 땅을 바라보고서야 내 눈에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기분이 이상한 이유도, 속이 울렁이는 이유도 알겠다.

나는 잡히고 싶었었다.

청문세가가 좋은 가문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를 살벌하게 잡으려 했던 장로들도 호인인 것은 알고 있다.

투전판이라고도 하지만, 그만큼 실력과 자부심이 있는 곳이 청문세가라는 것도 안다.

어쩌면 그곳에서 혼인을 해서, 데릴사위가 되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장로님들과 교류하며 행복하게 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나는 분명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욱, 우윽..."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되는가.

"끄으윽..."

모든 것이 사라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허무(虛無)가 되어 잊혀진다.

지금도 스승님을, 제자들을 다시 볼 때마다 이전 삶에서의 인연과 다르단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데.

살을 섞고, 자식을 낳고, 인연 속에 잠긴다면.

나는 어떤 고통을 맛봐야 하는 것인가.

방금 얻었던 깨달음.

인간은 그 자신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 속에서, 하늘의 인연 속에서, 땅의 인연 속에서.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의 존재건만.

그 모든 인연이 결국 무너지고 없어질 존재라면.

그 존재의 삶에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울렁이는 기분을 삼키며, 다시 스승님이 있던 방향으로 절을 올렸다.

언젠가.

정말 멀고 먼 저 훗날에.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된 그 후에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나는, 김영훈을 찾아갔다.

폭풍(3)

지난 삶에서는 생애의 막바지에서야 겨우 등선향에서 나와 김영훈을 찾았었다.

그 때 당시 김영훈은 등봉조극의 극한에서 벌써 그 너머를 추구하고 있었었다.

그렇다면, 약 10여년차인 지금의 김영훈은 어떤 경지일까.

'흠, 아직까진 보아하니 막리세가가 황조를 잡고 있나보군.'

아무래도 아직 진씨세가와 김영훈이 황조를 찬탈하진 않은 듯 했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황제와 황태자가 왠 괴인에게 참살당했다고 했다.

그것은 김영훈일 터였다.

'아직 보아하니 김영훈은 진씨세가와 접촉하진 않았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진씨세가에는 멀쩡한 방법으론 못 들어갈 것 같다.

'그래도 어쨌든 녀석들 얼굴은 봐야지.'

나는 진씨세가의 영지를 찾아가, 강환을 날렸다.

꽈아아앙!

아무것도 없는 허공.

그곳에 펼쳐져 있던 진법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나는 월수궁무록과 은식술로 존재감을 완전히 없애버린 후 그 안쪽에 들어갔다.

경보가 울렸는지 진씨세가의 수도자들이 사방으로 튀어나와서 경계를 하는 중이었지만, 나를 발견하는 이들은 없었다.

나는 수도자들을 뒤로하고, 제자들이 훈련하던 훈련장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군.'

훈련장은 물론이고, 제자들의 숙소 역시 아무도 없이 먼지만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황제와 황태자가 죽으니 진씨세가에서 암살부대를 운용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기억을 되살려 지난 삶 제자들이 영지내에서 살던 곳을 찾아갔다.

아니나다를까.

제자들은 영지 곳곳에서 범인들의 일을 배우고 있었다.

이전 삶보다는 확연히 젊은 얼굴들.

풋풋한 청년들의 모습을 한 녀석들이 곳곳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얼마간 하염없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본 후.

작게 웃은 후 신법을 펼쳐 다시 들어왔던 구멍으로 나가 버렸다.

* * *

진씨세가를 나온 나는, 우선 김영훈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영훈의 성격. 막리세가의 추적. 연국의 지리적 특성을 생각하면...'

나는 지난 삶의 정보들을 종합해, 김영훈이 현재 숨어있을만한 후보지를 좁혀나갔다.

얼마 후, 나는 김영훈이 숨어있을 후보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연국 박주성 인근 산릉곡.

그곳에 있는 산채에 숨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탓, 타닷!

나는 산릉곡에 있는 교룡채가 있는 방향으로 허공답보를 밟으며 갔다.

웅장한 산세가 드러나고, 저 아래에서 꼬물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역시, 여기 있었군.'

나는 안력을 높이며 꼬물거리는 사람들이 뭘 하는지를 알아보곤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전부 익숙함이 느껴지는 무공들이었다.

단악검법이나 단맥도법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김영훈의 냄새가 묻어나는 무공들.

내가 천상제를 시전하며 저 아래를 내려다볼 때였다.

파아아앗!

빛살이 허공에 번져나가며 내게 쇄도해온다.

토옹-

그러나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빛살은 그대로 분해되어서 사라져 버렸다.

'이건...'

나를 중심으로 상, 하, 전, 후, 좌, 우 천지육합에서 허공이 강기(罡氣)로 물든다.

'어검이군.'

나는 손 위로 강환을 띄워올렸다.

그리고 강환에 깃든 또 다른 나 자신의 의식을 내게 쇄도하는 빛무리들에게 그대로 옮긴다.

강기들의 통제권을 빼앗는다.

우우우웅!

허공에 맺힌 강기들이 내 의지 아래에 움직이며 도열한다.

그리고, 그 찰나 분명히 느껴진다.

내 의식영역을 은밀하게 베어가르며 내 인지를 베는 무공이.

나는 의식영역을 더욱 더 촘촘하고 오밀조밀하게 응집시키며 은밀하게 다가오는 이를 향해 빼앗은 강기를 날렸다.

콰과광!

허공에서 한 명의 신형이 허깨비처럼 튀어나오며 내가 날린 강기다발들을 쳐냈다.

"뭣, 네놈 정체가 뭐냐! 수도자 놈들이 어떻게 내 강기를..."

"하하, 수도자라니. 섭한 말입니다."

아직까지 딱히 수도공법의 신통 같은 건 쓰지도 않았건만..

"순수한 무(武)의 기예였습니다만."

우우웅!

내가 손 위로 수천 개의 강기다발을 응집하여 강환을 만들자, 그의 눈이 커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부장님."

"너, 너는...!"

그리고, 그제야 내 얼굴이 기억이 난 것인지 김영훈의 눈이 커졌다.

"서 대리..?"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다.

그러나 나는 호칭보다는 김영훈의 시선에 더 집중했다.

과연, 이 시점의 김영훈은 어느 시야에 도달했는가.

과연 어느 경지에 왔는가.

'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할 것이다.

부우웅!

손 위의 강환이 두 자락으로 쪼개진다.

나는 하나를 흡수해서 사고를 가속하고, 하나를 손 끝에 올렸다.

파앙!

그대로 허공을 찢어발기며 김영훈에게 도달해 강환을 올린 손을 내민다.

그리고, 김영훈은 내 손 끝이 거의 닿기 직전에서야 황급히 반응을 하며 간신히 내 공격을 피해냈다.

사고를 가속하지 못한다.

부웅, 부웅, 부웅!

허공에 강기가 덧입혀진다.

하지만 잡다하다.

우우웅!

내 강환을 중심으로 강력한 통제력이 일어나며 김영훈의 강기들의 통제력을 완전히 빼앗아버린다.

허공에 씌워진 수천 자락의 강기들이 전부 내 의지하에 움직인다.

"뭣...!"

수천 개의 어검술이 내 의지 하에 일사분란하게 상하전후좌우 천지육합을 봉쇄하며 김영훈을 압박한다.

김영훈은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내가 빼앗은 강기들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끊임없이 의념을 입력했다.

동시에 내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건지, 조금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강기를 늘려 휘둘렀다.

'전투감각은 훌륭하군.'

만나서 겨룬지 10여초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등봉조극 강자와의 전투에 익숙해지고 요령을 깨닫고 있었다.

거기에 강기의 통제권을 되찾으려 계속 다양한 시도를 하며 의념의 운용 역시 점차 완숙해진다.

하지만.

파아앙!

허공이 찢어진다.

파공성이 울리며, 나는 어느새 김영훈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경지 차이는 어쩔 수 없군요."

파아앗!

강환을 담은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김영훈은 이번에는 황급히 피하지 않고 물 흐르듯 움직이며 내 공격을 피하고 내게 반격을 가해왔다.

'저 움직임은...'

체계가 잡혀 있다.

그런데 또 못 보던 움직임이다.

답은 하나였다.

'방금 나를 상대하기 위해 무공을 만들어냈다.'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무공을 익힌지 두세달도 되지 않았을 때 단악검법을 보고 단맥도법을 창시한 자가 김영훈이다.

산군월악비도 나와 대련하는 도중에 즉석으로 내게 짜맞춰서 만든 무공이다.

김영훈이라면 정말로 상황에 맞는 무공을 바로 창시해서 내게 대적할 수도 있었다.

흥이 나기 시작한다.

나는 새하얗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장심을 뻗었다.

'이래야 김영훈이지...!'

그러나 이번 역시 갑자기 김영훈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가속되더니 내 속도에 반응하여, 내 강환이 아닌 내 손목을 쳐내어 공격을 튕겨냈다.

"허!"

등봉조극에 이른 내 눈에는 대강 어떻게 한 건지 원리가 짐작되었다.

순간적으로 체내 내공심법의 흐름을 가속시켜서 움직임을 흐름에 맞게 최적화시켜 짧은 찰나 순간반응속도를 올린 것이다.

그런 무공을 그 찰나 만들어내서 내게 써먹은 것.

'첫 초수에는 피하기 급급했다가, 두 번째에는 물 흐르듯이 피하고, 세 번째에는 내 팔을 쳐냈다.'

1초식을 교환할 때마다 성장하고 있다.

찌릿, 찌릿...

전신에 오싹한 감각이 맴돈다.

김영훈의 경지는 짐작이 갔다.

10년 정도인 지금은 오기조원의 경지.

아직은 등봉조극인 내게 경험치로도 순수한 실력으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 정신 나간 재능은 나와 부딪히며 나에 대적할 무공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저...

"절로 찬탄이 나오는군요."

김영훈이 찰나 두어개의 무공을 섞어서 내게 쇄도해왔다.

역시 못 본 무공이다. 동시에 나를 노리고 만들어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역시 방금 만든 것일 터.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한 이를 몰아넣기 위한 준비가 훌륭히 된 무공이었다.

하나.

콰앙!

나는 강환으로 사고를 가속시키지 않고, 양 옆에 두 개의 강환을 띄워놓고 김영훈에게 달려들어, 순수한 기(技)로 김영훈의 무공을 파훼해 버렸다.

그런 후 김영훈의 머리에 손을 뻗어 잡은 후.

그대로 무릎을 올려찍었다.

김영훈은 짧은 찰나 턱에 호신강기를 펼쳐 충격을 막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균형을 잃은 틈새를 이용해 그대로 그를 엎어서 아래로 던진 후, 천근추를 이용해 떨어져 내리며 김영훈의 윗쪽에서 그를 밀어붙였다.

우리 둘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김영훈은 허공에서 움직이며 나를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나는 끈덕지게 김영훈의 위쪽을 점했다.

김영훈이 수도를 휘두르자 톱날 모양의 강기가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그가 허공에서 순간 가속을 하며 세 번을 회전한다.

얇은 실의 형태로 강기가 뿜어지며 허공에서 은밀하게 나를 노린다.

전부 못 보던 무공들.

그리고 전부 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티가 나는 무공들.

김영훈은 실시간으로 무공을 만들어내며 나를 떨쳐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지상이 가까워진다.

저 아래 산채에서 무공을 수련하던 산적들이, 떨어지고 있는 우리 둘을 보며 혼비백산하는 것이 보였다.

"하아아앗!"

짧은 찰나, 그가 또 다시 만들어낸 무학이 발동된다.

김영훈의 강기가 일점으로 모이며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보였다.

강환은 아니었고, 원리도 전혀 다르며 형태만 비슷한 일종의 모조품.

그러나 그 폭발력에 나는 잠시 김영훈에게서 떨어졌다.

그 사이, 김영훈은 몸을 회전시키며 빠르게 가속하더니 월수궁무록과 함께 허깨비가 사라지듯 허공으로 녹아든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김영훈이 내 위쪽을 점하고 내 옷가지를 잡았다.

지상이 코앞!

나를 그대로 지상에 처박으려는 심산.

하지만 순간.

나는 김영훈의 체내에 흐르는 기의 흐름을 전부 읽어낸 후 그대로 흐름을 이용해서 역전(逆轉)시켰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김영훈이 나를 땅바닥에 처박으려던 형세는 반대로 뒤집혀 다시 내가 그를 처박으려는 형국이 됐다.

동시에.

꽈아아아앙!

흙먼지가 비산하며 사방이 흔들린다.

고요한 산골에 산새들이 우수수 날아오르고,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찌릿!

나는 김영훈을 잡고 있던 손에 저릿한 통증이 이는 걸 보고 입가를 씰룩였다.

오기조원의 고수인지라 호신강기로 보호할 건 알고 있어서 땅에 처박은 거였지만.

그 짧은 순간에 하강의 충격을 내게 일부 전달할 수 있는 무공을 만들어 그 순간에도 내게 썩 저릿한 반격을 한 것이었다.

'이런 미친 재능이니 이전에 고작 오기조원의 경지에서도 축기기 수도자를 기습해서 죽이곤 했던 거겠지.'

순간순간 어떤 상대를 상대하기 위해 최적화된 무공을 창시해낸다.

괴물 같다, 말도 안된다, 경이롭다 등의 수식어를 넘어서 그냥 다른 차원의 재능이었다.

'이전에 천년, 이후에 천년 다시없을 재능이라고?'

헛소리다.

이전에 만년, 이후에 만년.

김영훈의 재능을 뛰어넘을 무재 따윈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못 나올 것이다.

나는 김영훈의 위에서 내려와 손을 툭툭 털었다.

"일어 나시지요, 부장님. 대련하면서 얻은 건 많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대련? 그게 대련이었나? 죽으라고 공격을 퍼부어댄 게 아니라? 난 죽기 싫어서 미친 듯이 발악한 거였다만."

"하하, 원래는 적당히 대련 느낌 나게 상대해 드리려 했습니다만. 워낙에 재능이 말이 안 되셔서 몇 수 정도는 진심을 넣긴 했습니다."

김영훈은 허리를 두들기며 콧웃음을 치고 일어났다.

"진심을 넣긴 무슨. 마지막에는 그 덩어리를 흡수해서 가속하는 것도 안 하고 순수한 기(技)로 나를 몰아붙였으면서.

날 놀리는 거냐."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주변으로 도망쳤던 산적 녀석들이 하나둘 빼꼼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김영훈이 얼굴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 놈들아! 손님이 오셨는데 뭘 미적거리고 있느냐! 썩 손님 맞을 준비를 해라!!"

"예, 예! 두령!"

"흠, 저것들은 뭡니까?"

"별 거 아니다. 근처에서 숨어살던 와중에 내가 숨어지내던 마을에 내려와서 약탈을 하려 하길래, 전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서 갱생시키고 부려먹는 중이다."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우리는 서로 잡담을 나누며, 10년만에 만난 회포를 천천히 풀었다.

* * *

며칠이 지났다.

나는 며칠동안 김영훈에게 무공 지도를 해 주고, 등봉조극으로 올라가는 열쇠를 알려주었다.

'이 속도로 가면 반년 내에 등봉조극에 오르겠군.'

아무리 봐도 정신 나간 성장속도다.

거기에 아직 10년차.

내가 죽을 때까지 대략 40년은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동안, 과연 이번 삶에는 월도월무록을 넘어설수 있을까.

'...그래, 김영훈에게 도움을 주자.'

나는 김영훈의 재능을 보며, 요수공법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더 굳혔다.

인간의 무공이라는 것이 요괴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어쩌면 우리가 올라설 경지도 요수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무공초식을 짐승들에게서 배웠던 것과 같이.

이 앞의 경지도 요수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지 아는가.

어차피 등봉조극의 깨달음과 실마리는 전부 넘겨주었다.

그의 재능이라면 이젠 내 지도가 없어도 알아서 반년 내에 등봉조극에 오르고 내단을 만들어낼 터.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끄음, 내가 등봉조극에 이르는 건 안 보고 갈 게냐?"

김영훈도 같이 데려갈까 생각도 했으나, 김영훈은 오히려 등봉조극에 제대로 들어가서 깨달음을 갈무리하고 싶다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어차피 김 형의 재능이면 반드시 도달할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전 등봉조극 너머의 경지에 대해 정보를 얻고자 다른 곳으로 가보려 합니다.

추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다음에 뵀을 땐..."

난 포권을 하며 김영훈에게 웃어보였다.

"오히려 김 형이 제게 가르침을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래. 다음 번엔 반드시 너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 주마."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나는 짧고도 강렬했던 김영훈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서휼이 말했던 흑풍해(黑風海)를 찾아갔다.

* * *

흑풍해(黑風海) 극란도(棘蘭島)

흑풍해는 성제국, 연국, 벽라국의 남쪽에 위치한 바다로써, 정말 시시때때로 폭풍이 불어닥치고, 깊은 곳에는 수많은 요수떼가 서식하는 흉악한 바다였다.

수많은 요족의 터전이라고도 불리우며, 흑색귀골곡의 본거지가 흑풍해 인근에 자리했다고도 했다.

흑풍해에는 수많은 섬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극란도를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해룡(海龍)이 지배하는 섬.

극란도는 해룡의 지배로 유명한 섬 중 하나였다.

나는 극란도에 선박을 타고 와 극란도 현지 주민들에게 해룡, 서란(瑞蘭)에 대해 물어보았다.

서란은 일종의 섬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신봉되는 모양이었으며, 매해마다 적당한 공물을 받고 선박을 폭풍으로부터 지켜주거나 요수 무리로부터 섬을 보호해주는 모양이었다.

'선량한 해룡인 것 같군.'

애초에 공물이라고 해도 그냥 극란도에서 바치는 음식 몇 점이 다였다.

처녀 제물을 요구하는 사악한 요괴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섬의 수호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극란도는 가시나무밖에 없던, 사람 살기는 별로 안 좋은 땅이었슈. 원래 이름도 극란도가 아니라 극요도(棘妖島)였고. 근디 수호신께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선조분들을 불쌍히 여겨서 땅을 개척해 주신 것이구.

그래서 이후로는 수호신님의 이름을 따서 극요도가 아닌 극란도(棘蘭島)라고 부르는 게유. 솔직히 이 섬 어디에 난(蘭) 같은 게 나서 극란도라 부르겠슈?"

극란도의 촌로 중 한 명이 극란도의 이름의 유래를 말해주며 수호신 서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서란은 10장 크기의 거대한 해룡이었으며.

인간의 문화에 관심이 많고 그 언어에 박식한 지혜로운 용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를 보려면 극란도 서쪽.

매 해 공물을 바치는 서제단(瑞祭壇)에서 며칠을 기다리면 간혹 저 바다 너머로 서란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혹시 수호신님을 뵐 때 주의해야 할 게 있습니까?"

"음, 주의해야 할 건... 수호신께선 날붙이를 안 좋아하셔서 그 앞에 검 같은 걸 패용하고 가면 안 된다네."

"감사합니다."

나는 촌로의 말을 듣고, 극란도의 서쪽 서제단이라는 곳을 향해 갔다.

서제단은 극란도의 서쪽 절벽 위에 있는 곳이었는데, 삼 장 높이의 절벽 위에 새워진 소박한 제단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서란을 볼 수 있다는 거지.'

그를 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서휼이 보내서 왔다?

그러나, 채 잡생각을 다 끝마치기도 전.

촤아아아아!

거대한 그림자가 내 머리 위로 드리웠다.

파아아앗!

동시에 내 품 속에 있던.

서휼이 내게 준 요수공법서가 푸른 물 속성의 영기를 내뱉으며 진동했다.

동시에, 의식을 통해 서란의 영언이 울려왔다.

[너는 뭐냐. 뭐길래 인족의 모습을 하고 요족의 품 안에서만 반응을 보이는 해리수(海璃獸)의 가죽을 가지고 있는 게지?]

그는 푸른색 비늘을 가진, 길쭉한 몸체를 지녔으며, 은청색의 뿔을 가졌고, 바다거품 같은 새하얀 수염을 지닌 용(龍)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공법서를 꺼내며 내 소개를 했다.

"저는 서은현이라는 놈이고, 해룡왕께서 저를 인요의 혼혈이라 하시며 서란님께 가서 요족어를 배워 요수공법을 익혀보라 하시더군요."

이제 요수공법에 대해 공부할 시간이다.

"위대한 해룡왕의 후예께서 제게 가르침을 주옵소서."

그리고, 서란이 기이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왕께서 너를 인요의 혼혈이라 하셨다고...?]

"예, 그렇습니다만."

[이상하군. 왜 내 눈에는 네가 인족의 모습으로 둔갑한 요괴처럼 보이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서란의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요족의 피가 진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넌 그냥 요괴 그 자체가 아니더냐?]

폭풍(4)

"요괴...?"

나는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제게 요단이 있다는 건 해룡왕께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선 저를 인요의 혼혈이라 하셨습니다만. 어째서 제가 둔갑한 요괴라는 것인지..."

[내가 말하는 것은 육(肉)의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적인 부분이지. 신식(神識)에 대한 부분에서 너를 요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의식영역이?'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기에, 난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이군. 일단 의식영역의 눈으로 내 의식을 한번 보거라. 영통이 뚫렸으면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예, 그 정도야."

우웅-

나는 의념의 세계로 진입해 서란의 의식을 보았다.

그리고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의식영역의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

서휼 같은 경우야 의식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의식영역의 형태 같은 건 확인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서란의 경우에는 의식영역이 구체의 형태가 아닌 본인의 몸 위쪽에 본인과 같은 현상으로 얇게 둘러져 있었다.

'저 무슨...!'

나는 서란의 의식영역의 기이한 형태를 확인하며, 동시에 그의 몸 곳곳에서 나타나는 색조를 보았다.

그의 뿔은 자긍심을 상징하는 색조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뒷다리는 어째선지 조금 슬픔의 색조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그의 의식과 색조를 관찰할 때였다.

[역시, 그 '눈'. 넌 일반적인 인족 수도자 놈들과 완전히 다른 시야를 가지고 있구나. 인족 수도자 녀석들은 그저 내 의식의 형태를 보고 놀라는 것으로 끝이건만.

너는 역시 뭔가 다른 것을 보는 게야. 그러하지 않으냐?]

"...예. 그렇습니다만.."

[너는 내가 평소부터 가장 신경쓰고 있던 부위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종족에 따라 시야에는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으로 요족은 인족 수도자와 의식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지.]

서란의 설명이 이어졌다.

[요족과 인족이 가지는 신식(神識)의 차이는 주로 건곤(乾坤)의 차이라고 하지.

너희 인족은 하늘의 영성을 내려받아, 하늘을 보면 자신의 수명이나 기본적인 천기현상 등을 읽을 수 있다고 들었다. 운명에 대한 것 역시 어느 정도 조금씩 읽어낼 수 있고.

하지만 우리 요족은 하늘을 본다고 해서 운명 같은 건 읽을 수 없지. 가끔 특이한 요족 중에는 인족처럼 자신들에게 꼭 맞는 제사법을 찾아내서 천명을 읽는 놈들도 있다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절대 다수가 하늘을 읽지 못하고, 대신 이 땅 위에 흐르는 영력(靈力)을 읽는다.]

'영력?'

[요족은 그 안에서도 수많은 종족이 나뉘니 전부 똑같지는 않지만. 요족은 전부 기본적으로 영력의 음양(陰陽)을 읽어낸다.]

서란의 설명이 이어졌다.

[인족처럼 천기는 읽지 못하지만, 천지영기는 끝없이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순환하고 있지. 우리는 그 음양의 순환을 시각화해서 보고 있지 않으냐? 그 음양의 순환을 읽어내고 읽어내다 보면 인족과는 또 다른 정보를 얻어낼 수 있지.

일반적으로 짐승들이 흉함을 감지하고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것 역시 이런 이유이고. 인족보다 거대한 흐름을 읽는 능력은 떨어지겠지만, 직관적인 면에서는 음양을 시각화하는 이 시야가 요족과 인족의 의식에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지.]

'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나는 서란이 말하는 광경 같은 건 보고있지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건 일곱가지 색채를 기반으로 한 무수한 색채들.

무수한 존재의 의(意)를 시각화해서 보고 있었다.

서란이 말하는 영력의 순환 같은 건 시각화해서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둔갑한 요괴라 판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네가 가진 그 의식의 특유한 기질(氣質)은 우리 요수선사들이 음양의 순환을 감지할 때에만 나타나는 기질이다. 음양의 이치에 맞추어 나타나는 그 특유의 의식파동이 네 의식에 존재하는군...]

도대체 뭘까.

내가 진입한 이 칠채(七債)의 세계가 서란이 말하는 영력의 순환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광경은 아무리 보아도 음양(陰陽)의 순환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어 보였다.

[어째서 왕께서는 너를 혼혈이라 판단하였을까. 네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고, 왕께서 잘못 보셨을 리가 없는데... 인요의 혼혈은 보통 인간의 신식을 따라가기에 음양의 흐름이 아닌 천기현상을 읽는 데에 특화되거늘.]

서란의 말대로라면 어째서 해룡왕이 나를 인요의 혼혈로 판단했을까.

보자마자 서란처럼 나를 둔갑한 요괴 쯤으로 봤어야 정상이 아닌가?

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휼과 만났을 때는... 내 의식이 일반적인 인족과 같아서?'

어쩌면, 서휼과 만난 '이후'에 내 의식에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의식에 그나마 가장 큰 변화를 주었던 것.

그것은...

음양(陰陽), 건곤(乾坤), 천지(天地)...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삼재(三才)의 이치를 깨달아 만들어낸... 검환(劍丸)의 분리!'

그것이 이번 삶에서 그나마 가장 크게 내 의식에 변화를 주었던 사건!

나는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놓치지 않고 바로 검환을 쪼개던 그 감각에 집중했다.

검환은 만들지 않은 채, 나를 축으로 천지가 순환하던 그 감각!

찌이이잉!

그 감각에 일정 이상 집중하자 머리가 깨질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오오, 본인의 정체성을 몰랐던 건가. 정체성을 알려주니 바로 의식의 기질이 더욱 확립이 되는군.]

머리가 아파왔으나, 서란의 말에 나는 내가 옳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더욱 더 그 감각에 집중했다.

뭔가 막혀 있으나, 그걸 억지로 뚫는 느낌.

하지만, 이런 감각 같은 것은.

'절정경에 도착할때도, 오기조원에 도달할 때도 한번 뚫어본 감각이다!'

뚫려라!

뚫려라!

나를 인(人)으로.

그리고 두 개의 강환을 각각 천(天)과 지(地)로.

그렇게 천지가 순환한다는 것을 깨닫던 그 때.

나는 강환을 안정적으로 쪼갤 수 있게 되었었다.

그때의 감각을, 조금 더.

"흐아아아아아!"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꾹 참아내고 더더욱 그 감각에 집중했다.

코와 눈에서 피가 떨어진다.

귀가 멍멍하다.

오감이 멀어진 듯 하다.

그리고.

뻐엉!

절정에 이르러 의념을 감지했던 그 감각.

오기조원에 이르러 천지영기와 통했던 그 감각.

그 감각들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새로운 감각이, 완전히 자리잡았다.

아니, 자리잡은 게 아니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감각을 제대로 깨웠다 해야 할 것이다.

'아아...'

천지(天地)가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아니, 음양이라고 해야 할까. 건곤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태극(太極)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천지영력이 수많은 곳에서 태극을 그리며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나뭇잎에서도, 물방울에서도, 서란의 몸체에서도.

곳곳에서 음양이 순환하며 천지를 안정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장심에서 강환이 떠오른다.

그리고, 강환은 천지에서 순환하는 음양의 순환과 같은 이치로 둘로 분리가 되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음양의 순환일진데, 어째서 나는 삼재의 이치에 의해 강환을 진화시켰었나.

천지를 순환하는 음양의 태극들.

그 태극들은 전부 일정한 형태가 아니었다.

간혹 음양이 순환하며 원형이 아닌 타원형으로, 넓적한 모습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그렇게 도저히 알 수 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영력을 지닌 '존재'들에게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왜 내 깨달음이 삼재와 이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에는 천지와 음양이 있으나, 그 속에서 태어나 천지를 변화시키는 존재.

그것이 인(人)의 이치.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나는 모든 존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 그 자체로 천과 지, 음과 양에 순환인 것이다.

파아아앗!

두 개의 강환이 꼬리를 물고 회전하던 때.

그 회전 사이로 희미한 빛무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두 개의 강환에서 한 개의 덩어리가 더 쪼개졌다.

세 개의 강환이 천지인의 이치에 따라 내 장심 위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등봉조극의 경지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치이이-

동시에, 나는 음양의 순환을 보던 그 감각에 더 이상 매달려 있지 못하고 그 감각에서 빠져나왔다.

의념의 세계를 처음 인지했던 그 당시와 같이, 더 이상 이 세계에 빠져있으면 뇌가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내 뇌를 압박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던 덕인지 손 위에서 회전하는 세 개의 강환은 여전했다.

서란은 강환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호오, 그건 뭐지? 네 종족 특성인가?]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인간 중에서도 등봉조극에 이른 이는 무림사상 나와 김영훈이 최초일 테니 그냥 그렇다고 치기로 했다.

"서란님께서 확실히 정체성을 알려주신 덕에 더욱 더 확실히 건곤의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하, 되었다. 왕께서 보낸 녀석이면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지금 모습을 보니 왕과 만났을 때는 요족의 의식을 완전히 각성하지 못했나보군. 이제는 정말 요족과 의식에 차이가 없어졌구나. 헌데 기이하군. 인요의 혼혈이 어찌 인족의 의식이 아닌 요족의 의식을 지닌 게지? 그런 경우는 정말 없어서 모르겠군.]

"...흠 그게 절대적인 법칙 같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절대적인 법칙이 맞다. 인족의 의식이 천명을 읽을 수 있는 건, 인족이 자신들에게 맞는 제사법을 발견해내어 하늘과 소통하는 종족이 되었다는 걸 의미하지.

너희 인족 수도자들의 식이 천(天)에 맞추어져 있다면, 요수선사들의 식은 영력의 순환을 보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는 지(地)를 상징하지. 천(天)이 지(地)를 누르기 때문에 인요의 혼혈은 무조건 인족의 신식을 타고난다.

그런데 네놈은 뭐 천지가 거꾸로 된 놈인 것이냐? 어떻게 혼혈이 요족의 의식을 개화했지?]

"아하..."

나는 서란의 설명을 듣던 중, 한 가지를 또 다시 알아냈다.

'본디 수도자들은 하늘의 천기를 읽는 의식에 특화되었고. 요족은 영력의 순환을 읽는 의식에 특화되었다. 그런데, 오기조원에 달한 이들은 칠채의 의념을 기반으로 의(意)를 시각화한다.

그리고, 서란의 말에 의하면. 내가 지금까지 봐온 칠채의 세계는 인족 수도자와도, 요족 수도자와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것이란 뜻이다.'

도대체 내가 인지하는 그 의식의 형태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람(人)? 그냥 단순히 인간이 가지는 종족 특성인건가?'

하지만 아니라면? 삼재에 이치에 따라 인(人)의 시야라면?

그러나, 천지인이라는 삼재는 굉장히 인간중심적으로 세워진 이치이다.

천지와 인이라니.

인간 따위가 무슨 하늘과 땅에 비할만한 존재라는 건가.

이 땅에는 인간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거늘.

'...모르겠군.'

일단은 인간의 종족 특성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추후에 다른 사실을 발견하더라도, 지금으로선 이 시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강환을 없애버린 후 서란에게 포권을 했다.

"우선 눈을 뜨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헛소리를. 내 말을 듣고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네가 아니더냐. 왜 감사인사를 하는거냐. 자기가 눈을 부벼서 떠놓고 남에게 감사인사를 하다니.

...그리고 어쨌든 왕께서 네놈을 내게 보냈단 것은, 날 더러 네게 요족어를 가르치란 뜻이겠지. 인족의 문화와 언어에 정통한 것은 나이니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너는 요족과 완전히 같은 의식을 개화했으니 훨씬 요족어를 가르치기가 편하겠군. 인요의 혼혈은 요족어를 배우려면 따로 특수한 신통을 익혀야 하거늘.]

"...?"

언어를 익히는 데에 신통씩이나 익혀야 한다고?

[일단, 따라와라. 계속 서제단에 나와있으니 극란도민들이 이쪽으로 오려는 것이 느껴지는군. 괜히 나를 보면 또 공물을 바친다 할 테니, 우선 내 처소로 같이 가지.]

촤아아아!

서란은 그대로 등을 돌려 헤엄쳐서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서제단이 있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촤악, 촤악, 촤악!

그리고, 나는 수상비(水上飛)를 펼치며 서란을 계속해서 쫓아갔다.

얼마나 서란의 뒤를 따라 바다를 가로질렀을까.

[내 처소는 바다 아래에 있다. 따라 내려오거라.]

촤아악!

서란은 수면에서 헤엄치던 것을 멈추고, 저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렸다.

"..."

나는 시커먼 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다음 삶 부터는 수월입도결도 몇 성까지는 조금 익혀놔야겠어.'

난 숨을 크게 들이쉰다음, 그대로 바다 아래로 뛰어들었다.

허공의 결을 느끼고 허공에서 거닐었던 것과 같이, 물살의 결을 느끼며 가장 빠르게 서란을 쫓아갈 수 있는 결을 따라 그를 향해 헤엄쳤다.

서란은 내가 쫓아오도록 천천히 가고 있는 듯 했지만, 물 속에서는 사실 그조차도 쫓아가기가 힘들긴 했다.

얼마나 점차 강해지는 수압을 느끼며 아래로 내려갔을까.

저 아래 무수한 산호밭이 보였다.

마치 바다 속의 정원 같은 양상.

그리고, 그 산호의 정원의 한쪽 틈새.

그곳에 한 수중동굴이 보였다.

서란은 그 수중동굴로 들어갔고, 나 역시 서란을 따라 수중동굴로 들어갔다.

수중동굴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구조였는데, 얼마간 수중동굴에서 헤엄치며 올라갔을까.

촤아아아-

"파하!"

나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쉴 수 있었다.

'청량하다?'

나는 수중동굴 안쪽의 땅으로 올라가며 내공을 일으켜 물기를 증발시켰다.

그러면서 굉장히 공기가 청량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처소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내 처소에는 청호(淸瑚)라는 특수한 산호가 있어 늘 공기를 맑게 해 주지. 평범한 육상생물도 이곳에서는 지낼만 할 게다.]

"과연 공기가 어지간한 산골만큼 좋은 것 같군요."

우웅-

서란이 영력을 일으키자, 천장에 박혀있던 둥근 영석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서란의 동굴은 굉장히 크고 넓었으며, 또 이곳저곳에 다른 장소와 통하는 듯한 동굴이 나 있었다.

그는 그 거체를 공동에 뉘이며 말했다.

[왕께서 네게 나를 찾아가라고 명을 했다면, 나 역시 편하게 빨리 말을 알려주는 게 좋겠지. 거기다가 너는 요족의 의식을 지녔으니 내가 말한 특수한 신통을 익힐 필요도 없다. 우선, 요족의 언어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해 주어야겠군.]

나는 서란의 설명을 경청했다.

[너희 인족은 성대란 것으로 소리를 내고, 그 파동을 통해 공기를 격하여 상대에게 말을 전달하고, 그것을 언어로 삼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우리 요족도 육성으로 소리를 낼 순 있다. 하지만 요족은 대부분 짐승이었던 존재들이 수련을 통해 영성을 얻는 이들. 그렇기에 각기 짐승이었을 시절 소리로 대화를 해 봤자 다른 종족들은 아무리 말해먹어도 못 알아듣지.

하지만, 다른 종족들일지언정 우리 요족들이 '요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이는 건 분명 우리들간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요족들에게만 있는 요단(妖丹). 그리고 음양의 순환을 인지하는 의식.]

우우웅!

서란이 앞발을 들자, 그의 앞발 위로 영력이 휘몰아쳤다.

난 그가 뭔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깨닫고 아까의 감각을 다시 깨웠다.

머리가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나는 다시금 천지를 순환하는 태극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서란의 앞발 위에서, 음양이기의 영력이 순환하고 있었다.

[수많은 요족들이 그 공통점을 통해 합의했지. 요족들의 공통 언어는 앞으로, 이 의식에 기대어서 하자고.]

우우우웅!

서란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영력이 뿜어지며, 허공에 수많은 태극의 문양을 그렸다.

내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영력을 통한 어떤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냥 입으로 영력을 조금 내뿜는 행위.

그러나, 내 눈에는 보였다.

영력이 휘몰아치면서 어떤 형태로 변한다.

'그런가, 인간의 말은 공기를 매질로 전달된다면. 요족들의 말은 영력을 매질로 전달된다는 거군.'

영력의 순환을 보는 감각에 더욱 더 집중을 하자, 귀에도 그 영력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아니, 애초에 시각화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지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애초에 시각화는 아니었다.

"*&%%^^$^&#..."

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통해 서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충 알아들은 거 같군. 이제 요족어의 단어나 조금 가르치면 문제없겠어.]

서란은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을 알자 씨익 웃으며 내게 요족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 * *

반년이 지났다.

나는 수많은 요족어의 단어와 어휘, 그리고 요족어를 말하는 방법.

그리고, 음양의 순환을 보는 그 감각에 완전히 익숙해 지는데에 성공했다.

"이젠 책 한권 정도는 문제없이 읽을 수 있겠군."

"고맙소. 서 형 덕분이오."

나는 내게 목소리로 말을 전하는 서란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막 서란이 준 요족의 기본적인 문화에 대한 서책을 전부 읽은 참이었다.

"이제 왕께서 네게 주신 공법서도 문제없이 읽을 수 있겠지. 더 이상 헷갈리는 어휘도 없을 테니 안전하게 공법서를 읽어도 될 거다."

"감사드리오."

"하하, 아니다. 나도 왕께서 한 부탁을 들어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잠시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러던 중, 서란이 내게 입을 열었다.

"...사실, 왕의 부탁을 들어드린 것은 왕의 부탁이기도 하지만.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혹시 너는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느냐?"

"음, 요족어를 가르쳐준 서 형의 부탁이라면 할 수 있는 한에서 들어드리겠소."

"고맙군. 사실 어쩌면 왕께서도 내가 현재 고민하는 것 때문에 너를 내게 보냈을지도 모르겠어... 사실 나는 30여년 전. 흑풍해 깊숙한 곳에 있는 커다란 결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결계 내부에 내 수행에 필요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하지만 그 결계는 인족과 요족이 힘을 합쳐야 깰 수 있는 것으로, 지금껏 믿을만한 인족 수도자를 만나지 못해 도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정중하게 부탁을 해 왔다.

"네가 왕께 받은 공법을 익히는 것에 도움을 줄 테니 부디 나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어쨌든 네 혈통은 분명 인족의 것도 있으니 결계를 부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려야겠지요. 저도 서 형께 받은 가르침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쁩니다."

"좋구나. 고맙다. 그렇다면 공법을 바로 익혀볼 테냐?"

나는 해룡왕 서휼에게 받은 공법서를 꺼내들었다.

공법서는 어떤 짐승의 가죽으로 장정되어 있었다.

서란의 말에 의하면 해리수라는 짐승이라는 듯 했다.

나는 이 요수공법서의 제목을 읽어내려갔다.

공법서의 이름은 호풍응룡변(呼風應龍變)이었다.

폭풍(5)

호풍응룡변?

나는 요수공법서를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했다

중간중간 이해가 되지 않는 요족어의 어휘는 서란에게 물어 질문했고, 그를 통해 공법서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아예, 인족들이 익히는 수도공법서와는 근간부터 다르군.'

인족들처럼 오행을 근간으로 하지 않고.

요족들이 가지는 본연의 야성을 근간으로 공법이 이뤄져 있다.

천지영기에 담긴 속성을 정확하게 분류해서 그 속성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천지영기를 무작정 흡입하고, 무작정 흡입한 혼탁한 정기를 체내에서 격발시켜 강제로 정순하게 만든 후 요족의 야성에 의지하여 다루는 것.

그것이 요족 공법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천지영기를 무작정 흡입하는 구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마치...'

내공심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말 그대로였다.

혼탁한 천지영기를 흡입한다는 점에서는 마치 무림인의 내공심법과 요족공법은 차이가 없었다.

다만, 추후에 그 기운을 격발시켜 정순하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뿐.

'만약 무림인도 내공을 격발시켜서 정순하게 만든다면... 요족처럼 요수공법을 익히는 게 가능한가?'

아닐 것이다.

요수공법과 직결되는 깨달음인, 지(地)의 감각.

음과 양의 세계.

일반적으로는 그런 것을 볼 수 있는 무림인이 없었으며.

동시에 무림인의 체내에서 그런 기의 격발이 일어난다면, 무림인은 말 그대로 몸이 갈갈이 찢겨서 죽을 것이다.

'위험하군.'

말 그대로 죽기 딱 좋은 시도다.

'하지만, 익힐 가치는 있겠어.'

마침, 체내에서 기를 격발시킬 도화선 역시 충분했다.

'연기기 13성, 일원일응을 응집했다.'

이제 그것을 기반으로 연기기 14성 무극영운에 다다르고.

무극영운에서 또 다시 축기기로의 도전을 시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연기기 12성인 이의합일을 완료해 체내의 영맥을 모두 하나로 이으면, 그 순간부터 축기에 들 준비를 완료했다고들 한다.

왜냐하면 연기기 13성부터는 일종의, 축기로 들어가는 준비단계이기 때문이었다.

"서 형. 나는 구결을 익히러 잠시 근처에서 폐관을 하겠습니다."

"그래, 나도 결계를 깨려면 준비가 필요하니 3년 안에만 돌아오거라."

나는 준비를 위해 서란의 동굴에서 나와, 근처 해역의 적당한 암초섬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곳에 방해받지 않도록 굴을 파고 들어간 후.

호풍응룡변과 더불어, 최초의 축기기 도전을 시작하였다.

연기기 13성 일원일응.

체내 영맥에서 생성되는 영력이 단전에 점의 형태로 맺힌 단계.

일원일응의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인 무극영운에 도달하려면, 단전에 맺힌 점 형태의 영력을 격발시켜, 단전 안쪽에 영기의 구름(雲)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일원일응의 점을, 격발시킨다!'

꾸구웅!

단전 속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떨림과 함께.

꽈과광!

영기의 점이 격발된다.

그 폭발 속에서, 단전의 중심에 자리한 내단 속의 공력이 정순하게 변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되지.'

영기의 점이 격발되고, 동시에 영기의 점이 폭발한 자리에서 영력의 구름이 흘러나왔다.

우우웅-

연기기 14성.

무극영운(無極靈雲)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 구름을 통해...'

쿠구구구구-

응축시킨다.

구름을 응축시키고 또 응축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구름이 한계에 달했을 때.

'축기기에 도전한다!'

번쩍!

단전 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그대로 구름들이 수축한다.

그리고, 구름의 수축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였다.

꽈과과광!

다시금 우레 울리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때리더니.

단전 안쪽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전보다도 훨씬 강력한 폭발!

자칫하면 단전이 터져서 죽어버릴 정도의 위력!

그러나, 나는 내단에서 기운을 뽑아 그 폭발력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막았다.

그 덕에 폭발력은 임계치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고, 내단의 기운에 의해 단전이 폭발해서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후우... 이게 끝인가."

그리고, 영기의 점을 폭발시켜 생겨났던 영기의 구름은 전부 힘을 잃고 소멸되어 있었다.

한순간 연기기 14성까지 치솟았던 수행은, 다시 연기기 12성 완공 수준으로 돌아가 있었다.

추후에 운기를 반복하면 다시 일원일응을 응집시키고 연기기 13성 수준으로 돌아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썬 그냥 수행이 떨어진 것이었다.

첫 축기기 도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우우웅!

단전의 중심.

그곳에서 내 내단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경지를 뚫을 때 나오는 어마어마한 두 차례의 격발로 인해, 내단의 기운은 연화되어서 굉장히 정순해져 있었다.

'정순해진 기운을 통해, 요수공법의 구결을 운용한다...'

내단이 진동한다.

동시에 의식이 그 진동에 맞춰 같이 떨리기 시작했다.

'공법의 구결에 따라.. 내 의식을 공법에서 말하는 야성(野性)에 맞춘다.'

꾸구국...

의식이 변화한다.

서란의 의식이 서란과 같은 형태로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것과 같이.

나를 원구 형태로 뒤덮고 있던 내 의식이, 마치 용(龍)의 형상처럼 변모하기 시작했다.

'조금 괴롭군.'

어찌되었든 인간이 요족의 공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서휼이 얼마나 신경을 썼든 부조화가 있을 수밖엔 없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야...'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의식을 용의 야성과 같이 맞춘 후.

그에 따라 기운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영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요족의 공법은 알맞은 방법으로 영맥을 차례차례 활성화시키며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공법의 완성형이 가리키는 곳으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간다.

공법의 완성형을 향해, 공법을 익히는 수련자의 체질이 변화해야 한다.

꾸구구국!

바깥으로 뿜어지며 휘몰아치는 영기의 흐름에, 체내의 영맥들이 점차 그에 적응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러한 변화가 끝나면, 호풍응룡변에 수록된 몇몇 신통을 사용이 가능할 터.

나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끄으으으윽!'

미친듯이 아프다!

원래 인간이 익히라고 만든 게 아닌 탓인지.

영맥이 강제로 호풍응룡변에 적응할 때마다 영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콰드득!

암초섬의 굴 안쪽.

내가 그곳에서 손을 우그러뜨리자, 동굴에 손자국이 패인다.

나는 이를 악물며, 계속해서 공법을 계속 운용했다.

'다음, 길을, 찾아낼... 것이다!'

무공의 다음 경지도.

재능 없는 내가 축기기에 오를 수 있는 방법도.

반드시 찾아내고 말리라!

* * *

1년이 지났다.

흑풍해의 바다 위.

어느 암초섬.

고요한 암초섬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드득, 드드득...

암초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암초섬에서 뿜어지는 진동은 점차 강해졌고, 뒤이어.

콰드드드득!

암초섬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암초섬이 박살나며, 용오름이 시작되었다.

암초섬 내부에서부터 강력한 회오리가 불어닥치며 암초섬을 내부에서부터 갈아올린다.

쿠구구구구구!

검은 바위들이 갈려나가며,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라 사방팔방으로 휘날린다.

해역의 한 가운데.

그곳에서, 작은 규모의 회오리가 불어닥쳤다.

쿠오오오!

그리고, 회오리의 중심에는 무언가 거뭇거뭇한 형체가 존재했다.

그 존재로부터 회오리가 불어닥치며 흑풍해의 물을 천공으로 끌어올려 사방팔방으로 비를 흩뿌린다.

회오리의 중심.

그 안의 거뭇거뭇한 형체는 얼마간 바람을 끌어모으더니, 근처의 암초 위로 회오리를 옮겼다.

점차 바람은 잦아들었고, 그 안쪽에 있던 형체는 바람을 타고 암초로 발을 옮겼다.

* * *

나는 나를 암초에 내려놓는 바람결을 느끼며 의식을 움직였다.

마치 해룡과도 같은 형태로 변한 의식영역이 다시 원구의 형태로 돌아왔다.

"이것이... 호풍응룡변."

말 그대로, 바람을 부르는(呼風) 요수공법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방금 펼쳤던 신통을 떠올리며, 하나의 익숙한 기억을 떠올렸다.

방금의 신통을 펼치기 전부터.

이 공법을 익혀올 동안 줄곧 느껴온 기시감이, 방금의 신통을 펼치며 완전히 폭증해버렸다.

이것은 마치.

"막리세가의 것과 같지 않은가?"

막리세가에서 펼치는 풍계 법술.

그것과, 너무나도 기시감이 날 정도로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막리세가의 바람결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기(魔氣)와 달리.

호풍응룡변은 바람결에서 야수의 흉성(凶性)이 느껴진다는 것 정도.

그것이 호풍응룡변과 막리세가의 풍계 신통의 차이였다.

'생각해보면... 막리세가의 신통은 전부 용(龍)과 관련된 것이 많았지.'

이전에는 막리세가의 신통이 음(陰) 계열의 신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막리세가에서 쓰는 신통들은 전부.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는 강.

풍룡과 풍봉이 나타나는 회오리.

하늘을 음으로 뒤덮어 비를 내리게 하는 법술 등.

물과 바람에 관련되어 있었다.

물과 바람.

그것은 폭풍(暴風)과 관련된 힘이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용족은 폭풍의 종족이라고 불리어 왔다.

특히나 바다의 폭풍을 상징하는 해룡족은 더더욱.

'마도 가문인 막리세가와, 해룡족은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

또한 호풍응룡변은 막리세가의 마공(魔功)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 요수공법 역시 마공의 일종이 아닌가?

'아니, 마공은 아니다.'

마공을 익힌 자들.

특히나 막리세가의 가원들로부터 나타나는, 그 기분나쁜 마기는 없다.

그러나 나는 호풍응룡변이 막리세가와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어떠한 거부감이 들었다.

'분명 위력은 출중하다...'

거기에 또한 나와 잘 맞는 건지, 지월입도결 등과 달리 훨씬 성취가 빨랐다.

하지만 여전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불편함은 다름없이 존재했고.

막리세가와의 관계성 때문에 불길함이 증폭되었다.

'...모르겠군.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터. 그냥 추후에 서란에게 속시원하게 물어보는 게 낫겠어.'

나는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친 후.

잠시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서란의 처소로 갈지.

아니면 다시 육지로 갈지.

'어차피 서란은 3년 안에만 돌아오면 된다고 하였다. 아직 호풍응룡변의 기본신통만 막 익혔을 뿐이니, 서란의 곁에 가서 그의 지도를 받으며 더더욱 공법의 성취를 끌어올릴 것인가.

아니면 육지로 가서, 남은 시간 동안 성제국 서쪽 대산맥의 금신천뢰문의 흔적을 찾을 것인가?'

금벽호의 말에 의하면, 성제국 서쪽 대산맥에는 그들이 남겨놓은 금신천뢰문에 대한 몇몇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아마 가서 찾으면 찾을 수 있을 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얼마간 고민한 후.

남은 2년여의 시간동안 어느 곳에 시간을 쏟을지를 고민했다.

'그래, 육지 쪽으로 가 보지.'

나는 고민을 해본 후.

성제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란은 내가 그와 함께 깨야 하는 결계가 안전할 것이라 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고, 나는 혹시 모를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생각하며 일단 이번 삶에서 정보를 조금 더 얻기로 했다.

휘오오오오!

다시금 호풍응룡변을 발동하자, 내단이 반응하며 기운을 내뿜었다.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며 나를 허공으로 떠올렸다.

나는 흑풍해에서 성제국을 향해 북쪽으로 날아갔다.

* * *

성제국은 수많은 수도가문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수많은 수도가문들끼리 정한 수많은 규약들이 성제국 전체에 뿌리내려 있었고.

나는 그런 수많은 규약 중 하나에 붙잡혀야만 했다.

성제국 서주성.

서쪽 대산맥 인근에 있는 성 중 하나.

나는 그곳에 있는 한 세가의 영지에서, 몇 명의 연기기 고계 수도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비행 금지라니, 무슨 말이오?"

"흥, 성제국에 오면서 성제국 법도 모르오? 그게 말이 되는 게요? 성제국 곳곳에선 여러 수도가문 가원들의 대규모 전투를 막기 위해 곳곳의 성에서 법술을 통한 비행을 금지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어겼으니, 벌금으로 당장 영석 100개를 지불해야 하오."

"..."

나는 깐깐하게 생긴 녹포 사내를 보며 되물었다.

"형장, 내가 알기로 내가 비행한 곳은 귀 가문의 영지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소. 그런데도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오?"

"흥! 무슨 소리. 당신이 비행한 곳은 분명 가문의 영지 위쪽이었소. 영석을 내지 않는다면 본 가문의 영지내 감옥에서 역살이를 하셔야 하니 그리 아시오."

'이 무슨 억지가...'

나라고 성제국의 법을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 삶에 성제국에 와 봤었는데 완전히 모를 리가 있나.

비행 금지가 된 지역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가 난 곳은 금지지역의 경계에서 약간 벗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이 녹포 사내는 지금 내가 외국에서 온 산수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내게 억지로 벌금을 매기려 하는 것이었다.

'당장 영석은 하나도 없는데...'

아니, 수도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그 흔한 저물법기도 없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까.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지급은 불가능하고. 내 가문 앞에다가 달아둔다 하면 가능하외까?"

"가문?"

내 말에 녹포 사내와 다른 수도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산수 아니었소?"

"아니오. 나는 가문이 있는 사람이외다."

"흠, 어느 가문이지?"

나는 씨익 웃으며 나의 '가문'을 소개해 주었다.

"막리세가."

내 말에, 좌중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 무슨 개... 막리세가의 가원들은 하나같이 청포를 입고 다니는데?"

"음, 비밀리에 성제국에 온 것이라 어쩔 수 없었소."

"비밀리에? 막리세가에서 성제국에 무슨 일로 비밀로 온 거지?"

"말할 수 없소. 가문의 기밀이오."

"이 놈. 볼수록 수상한 놈이로구나. 자기를 막리가문이라 사칭하지를 않나.."

"사칭?"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걸 보고도 사칭이란 말이 나오느냐?"

쿠구구구구구!

나는 호풍응룡변을 발동시키며, 바람을 끌어모았다.

"내가 바로 막리세가의... 장로다!"

쿠과과과!

회오리가 주변으로 불어닥치며, 녹포 수도자들을 휩쓸었다.

"이익, 이 놈이! 우리를 공격해!"

"저, 저건 막리세가의 법술이 맞다!"

"막리세가 놈이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름 성제국의 법칙을 집행하는 이들인 탓인지.

연기기 고계의 실력으로 호풍응룡변의 바람 속에서도 나름 버텼고, 점차 다른 법술로 반격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어차피 이건 눈속임이다.

부웅!

회오리가 주변을 뒤덮어 시야를 가린 사이.

나는 장심에서 강환을 뿜어냈다.

강환이 자전하더니, 어느덧 세 개로 쪼개져 손 위에서 회전하였다.

"들어라, 나는 막리세가의 장로 막리현이다! 아무도 내 앞을 막지 마라!"

쿠과과광!

먼지바람이 사방의 시야를 가린 와중.

세 개의 강환이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녹포 수도자들에게 날아갔고.

콰앙, 콰앙, 콰아앙!

그들이 죽지 않을 선에서 그들의 방어법술과 법기를 박살내고 수도자들에게 충격을 입혔다.

"끄아아악...!"

"이, 이 위력..."

"축기기 수도자급.. 자, 장로다!"

녹포 수도자 중 한 명이 황급히 부적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전음부인듯한 부적을 향해, 녹포 수도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막리세가의 축기기 장로가.. 국경을 넘어 성제국에 잠입했습니다! 연국 막리세가 놈들이 규약을 위반했습니다!!"

콰아앙!

나는 바람을 이용해 수도자들을 떨쳐내고, 빠르게 서쪽 대산맥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규, 규약 위반이오! 본 성제국의 수도가문들은 막리세가에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오!!"

'항의하든지.'

나는 뒤쪽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녹포 수도자들을 뒤로하고 허공을 날았다.

어차피 대산맥이 곧이다.

저 안쪽으로만 들어가면 결코 쉬이 나를 잡지 못할 터고.

막리세가에 항의해봤자,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파아앗!

파앗, 파앗

녹포 수도자의 전음부가 효력을 발휘한 것인지.

저 아래에서 녹빛의 빛살들이 보이며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저 가문의 연기기 수도자들.

그들이 내 아래쪽으로 몰리며 기이한 형태로 진을 짜기 시작했다.

진의 태세로 보아, 만만한 진은 아니었다.

'축기기 수도자용 진법인가.'

등봉조극의 경지를 빌어 축기기인 척 했지만, 연기기 극성일 뿐인 내가 걸리면 상당히 성가실 터.

'걸리면 안 되겠어.'

우우웅!

장심에서 강환이 빠져나왔다.

강환은 세 개로 쪼개졌고, 그 상태에서 다시 내게 흡수되었다.

'세 배 가속.'

파아아앗!

해룡의 형태로 변한 의식영역이 더욱 더 해룡과 비슷한 기세를 풍기우며.

동시에 호풍응룡변의 바람이 더더욱 거세졌다.

파아아앗!

나는 더욱 강한 바람으로 몸을 감싸고.

대산맥을 향해 더더욱 빨리 날아갔다.

어느새 연기기 수도자들이 펼치는 진의 범위에서도 벗어났다.

'저 앞이 대산맥인가.'

나는 대산맥의 광경을 눈에 담으며, 슬슬 숨을 준비를 하였다.

그 때.

쿠구구구구!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저건...'

손발이 찌릿거리는 감각.

축기기 수도자다.

아직은 저 멀리, 점의 형태였지만 나는 저 점이 얼마나 빠르게 가까워질지 알고 있었다.

"쯧, 조금 무리를 해야겠군."

쿠구구구구!

풍속을 높인다.

나를 감싼 회오리가 점차 거대해지며, 일순간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함을 드러낸다.

주륵-

입가로 피가 흘렀다.

하나 나는 아랑곳 않고 호풍응룡변을 더더욱 크게 펼쳤다.

축기기 수도자급의 회오리!

거대한 용오름이, 주변의 흙먼지를 흡수하며 사방을 뿌옇게 물들인다.

푸확!

나는 용오름 바깥으로 빠져나와 결인을 맺었다.

"하압!"

쿠구구구구!

회오리가 움직인다.

잿빛의 회오리는 나를 쫓아오는 축기기 수도자와 녹포 수도자들을 향해, 그렇게 날아간다.

축기기 수도자가 대경하며 황급히 대응할 법술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가에 피를 닦으며 의식을 집중했다.

연기기 극성 수준에서 너무 무리하게 법력을 쥐어짜냈다.

이런 공격은 한 번밖에 못 쓰고, 그렇다고 강환을 썼다간 괜히 연국에서 활동 중인 김영훈이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 공격으로 교란을 시키고, 그대로 도망친다.

슈칵!

내 수도가 허공을 가르며 인식을 베어냈고, 내 의식이 은식술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파아아앗!

나는 빠르게 대산맥 아래로 떨어지며 수결을 맺었다.

"지월입도!"

쿠구국!

대지가 나를 향해 품을 벌린다.

나는 그대로 대산맥 아래의 땅 아래로 토둔술을 써 떨어졌다.

대산맥에 흐르는 땅의 정기가 내 토둔술을 극대화해 줄 것이다.

또한.

"크윽! 이 막리세가 놈! 다들 놈을 추적해라! 막리세가 놈이라면 하늘로 도망쳤을 거다!"

막리세가에 대한 저들의 선입견은, 땅 밑으로 숨은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나는 땅 밑에 숨어서, 내 회오리를 박살내버리고 엉뚱한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녹포 축기기 수도자를 보며 입가의 피를 마저 닦았다.

"...이제, 금신천뢰문의 기록을 찾아가 볼까."

* * *

몇 달 후.

나는 대산맥 쇄천봉에서, 금벽호가 말한 금신천뢰문의 기록이 남아있는 서고를 찾을 수 있었다.

과연, 금신천뢰문은 승천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 문파인가.

끼이익-

나는 서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폭풍(6)

서고 내부는 어둑어둑했다.

동시에 주변 곳곳에 감각을 흐리게 하는 진법의 영향이 흐르고 있어, 어디가 어디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당장 나조차도 금벽호가 내게 준 단서들이 아니었다면 고작 몇달만에 금신천뢰문의 서고를 찾지는 못했을 터였다.

나는 주변으로 의식영역과 기감을 뻗치며, 진법의 방해를 피해 차분히 서고의 구조를 파악했다.

얼마 후, 나는 서고로 진입하여 서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뭐가 남아있는 것도 없군."

나는 혀를 찼다.

말 그대로였다.

금신천뢰문이 상계로 통채로 비승하며 종문에 있는 중요한 물건을 전부 가지고 간 탓인지.

서고에도 서책은 몇 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자, 금신자 양수진에 대한 기록서..."

그래도 내가 찾던 것은 남아있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서책을 잡고 읽기 시작했다.

금신천뢰문의 개파사조인 금신자 양수진.

그에 대한 것은 성제국 황실 서고에서 찾아읽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세한 부분에서 조금 구체적이거나 차이가 있었지만.

큰 부분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아주 정확하게 기술되어있는 충격적인 사실들도 존재하긴 했다.

"...하, 상계로 비승했다가, 정말로 허공을 찢고 다시 이 세계에 내려온 거로군."

양수진이 개천력 몇 년에 비승하고, 몇 년에 다시 허공을 찢고 이 세계에 강림했는지.

그러한 것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서책의 기록에 의하면, 대략 삼천년의 시간이 걸려 비승했다가 다시 내려온 모양이었다.

'삼천년...'

12만년 전의 역사라서 짧아보였지만, 당장 지구의 서기조차도 이천년이다.

도대체 삼천년이라는 건 무슨 시간개념일까.

'여하튼 승천문은 양수진이 만든 게 확실하군.'

양수진에 대한 기록서에서도, 승천문은 '개파사조께서 만드셨다'라고 명확하게 기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승천문이 열린 공간 자체는 원래 공간균열이 간혹 생기는 둥 공간이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명확하게 상계로 가는 통로가 생긴 것은 처음이라 하였다.

'승천문...에 대한 기록을 읽고 싶은데, 이 이후로는 그냥 승천문을 열고 어떻게 금신천뢰문을 세우고 어떻게 통치했는지 그런 기록들인가.'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서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양수진은 말년에... 실종?'

문파 내 서고에, 자기네 문파 개파사조가 실종되었다는 말이 이렇게 당당하게 써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추론만 잔뜩 적어놓은 야사집보다야 깔끔한 게 낫긴 한데...'

실종이라니.

천인기에 도달해서 비승했던 수도자가.

훨씬 높은 경지에 이르러서 허공을 찢고 이 세계에 강림했는데, 그냥 실종?

나는 서책을 더 넘겨 보았으나, 금신천뢰문이 전 대륙과 전 바다를 전부 뒤져보아도 시조에 대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서책을 다시 덮고, 다른 서책을 꺼내왔다.

다른 서책은 금신천뢰문의 역대 문주와 배분관계 등을 기술한 서책이었다.

나는 뭔가 도움되는 게 있을까 싶어 서책을 주르륵 읽어보았으나, 도움되는 것이 없어 다시 덮어버리고, 다음 서책을 꺼냈다.

그 역시 마찬가지여서, 역대 문주들의 유언 같은 게 적힌 서책이었다.

'말 그대로 쓸모있거나 문파의 기밀이 되는 문서들은 전부 가져가고... 다른 이들이 봐도 되는 문서만 여기 놔둔 거군.'

나는 조금 짜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그래도 혹시라도 뭔가 도움이 되는 게 없을까 하고 서책을 넘겼다.

'역대 금신천뢰문 문주의 유언집? 이런 걸 내가 봐서...'

문득, 서책을 넘기던 와중 나는 손을 멈칫했다.

금신천뢰문 개파조사인 양수진은 실종되었기에 유언이 없었으나, 그가 실종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서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고향보다 좋은 곳은 없다. 종문의 제자들은 마음의 고향이 있는가?

'고향...'

실종되기 전에 한 연설 중의 일부였다.

나는 어쩐지 연설의 첫 문장. '고향보다 좋은 곳은 없다' 라는 문장에 눈이 갔다.

그리고, 나는 그가 한 연설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은 모두 각자가 마음의 고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마음의 고향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고향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양수진은 며칠 후 실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고향을, 찾으러 간 건가?'

나는 얼마간 그 문장들을 들여다보다가, 서책을 덮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다음 서책을 꺼냈다.

이 역시 역대 문주들의 유언집과 비슷한 것이었다.

다만 유언이 아닌, 각 문주들이 후대들을 위해 남긴 어록이나 조심해야 할 경고문 같은 느낌의 모음집이었다.

그리고, 나는 금신천뢰문 초대 문주 양수진이 후대를 위하여 남긴 경고문을 읽었다.

-후대는 허공문에 도전하여 상계로 가기 전. 본 문주가 허공문 앞에 세운 비석을 읽어 필히 지켜야 한다. 이는 추후 금신천뢰문의 역대 비승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수칙이니, 명심, 꼭 명심하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허공문은 승천문을 뜻하는 듯 했다.

'승천문 앞의 비석이라면...'

-..후대들을 위해 남겨놓고, 마음을 내려놓고 비승하라. 이를 지키지 아니하는 자, 재앙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글귀가 써진, 뇌운의 벼락을 흡수하며 허공에 떠 있던 비석이었다.

'그런데 정작 '뭘' 남겨놓으라는 건지는 윗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알 수가 없는 비석인데 말이지...'

나는 작게 혀를 차며, 그게 뭐가 되었든 양수진의 경고는 잘 지켜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림짐작했다.

'아무래도 후대들을 위해 준비한 뭔가였나 본데... 이번엔 아예 문파 전체가 상계로 비승했으니 상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12만년 전의 일인데 지금까지 잘 지켜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비석의 원본은 무엇이었을지 몰랐지만, 어쨌든 잘 되었으리라.

나는 서책을 읽고, 다음 서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 이번 서책이 마지막이군."

정말로 금신천뢰문에서 필요한 것은 전부 가지고 간 탓인지.

서고엔 책이 정말 없었다.

나는 마지막 서책을 잡고 읽어보았다.

마지막 서책은 놀랍게도 금신천뢰문의 신통술이 담긴 서책이었다!

금신천뢰문의 신통술은 예뢰안(豫雷眼)이라는 안법으로.

천기를 읽는 감각에 의지해서, 내일 날씨가 어떨지.

번개가 얼마나 어떻게, 어디로 칠지를 예상하는 신통술이었다.

"...이걸 어디다가 써먹으라는 거지."

금신천뢰문 측에서도 서책을 보고 이건 정말 쓰레기다 싶어서 놔두었다는 것이 팍팍 느껴진다.

날씨를 아는 것 정도야 수도자는 물론이고 요괴수도자들도 알 수 있는 정보였으며.

요괴들이 가진 지의 감각을 사용하면 예뢰안 같은 신통술 없어도 번개가 칠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영통이 민감한 수도자들이라면 영기의 흐름만 가지고도 낙뢰의 위치쯤은 계산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아니지.'

애초에 조금 영통이 둔감한 수도자들이 영기의 흐름을 계산해서 낙뢰의 위치를 계산하라고 만들어진 신통으로 보였다.

딱 저계 수도자를 위해 만들어진.

애매한 신통술.

"..."

난 잠시 서책을 보다가, 빠르게 한 번 훑고 머릿속에만 넣어 두었다.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애초에 낙뢰를 살면서 맞을 일이 얼마나 된다고.

설사 맞는다 치더라도, 그걸 신통술을 써서 위치를 알고 피할 실력자면 스스로 실력으로 방어를 하면 되고.

신통술을 못 사용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이라면 어차피 벼락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나는 마지막 서책을 덮은 후 서고를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역시나, 남은 것은 없었다.

"...나름 몇 년은 걸릴 줄 알고 비장하게 찾아왔는데."

하루도 걸리지 않아 서고의 모든 서책을 다 읽어버렸다.

모든 서책이래봤자 열 권도 안 넘지만.

이래서야 뭘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승천문에 대한 건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그냥 금신자 양수진에 대한 찜찜하고 기묘한 추측만 생겨났을 뿐이었다.

나는 서고에서 나와 쇄천봉 이곳 저곳을 더 살펴보았다.

거대한 종문이 있었다는 것이 느껴지고, 수많은 이들의 생활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쇄천봉 전체가 비어있었으며, 원래 건물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은 자리들마저 건물의 흔적만 남아있고, 건물의 주춧돌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파 전체를 압축해서 함께 비승한다더니, 건물들도 싸그리 뽑아서 가져간 듯싶었다.

볼 것도 없었다.

"휴우.."

나는 쇄천봉 끝자락.

건물이 있었던 터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면, 그냥 서란에게 가는 게 나을려나.'

원래는 남은 2년여의 시간동안 금신천뢰문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려고 대산맥에 온 것인데.

이 정도로 소득이 없이 빨리 끝날 줄은 몰랐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나는, 문득 이 쇄천봉 정상의 영기가 굉장히 농밀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면, 초거대 종문이 있었던 장소인데 영기가 적을 리 없지.'

청문세가 본가보다도 수 배는 영기가 진했다.

'이 좋은 수련터를 놔두고, 생각해보면 굳이 서란에게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어차피 서란이 준비에는 3년여가 걸린다 해서 금신천뢰문이 있었다는 곳에 온 것이다.

지금 서란에게 가도 그저 수련을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란의 처소보다도 영기가 농밀한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 이런 곳이라면 축기에 도전하기도 조금 더 쉬울 것 같군.'

나는 연기기 14성으로 회복된 법력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단전 안에서 영운(靈雲)이 휘몰아친다.

결단은 빨랐다.

나는 인근 금신천뢰문 제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석굴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었다.

'지난 1년간은 호풍응룡변을 익히느라 시간을 썼지. 남은 시간 동안은, 축기에 도전이나 해 보면서 내가 과연 축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 봐야겠어.'

단전에서 영운이 움직였다.

축기기에 오르는 것은, 영운을 응집해서 하나의 영성(靈星).

법력을 별(星)의 형태로 응집하여야 비로소 축기에 올랐다고 할 수 있었다.

영운은 점차 회전하더니, 내 의지에 따라 일점으로 응집되기 시작하였다.

쿠구구구구-

영운이 단전 중심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집중되며, 하나의 별이 되기 위해 압착된다!

꾸그극!

의지력에 의해 영운이 압축되며, 그 중심부에서 영운의 온도가 올라갔다.

동시에 뭉실뭉실한 영운이 서로 융합(融合)을 시작했다.

단전 내부에 있는 영운의 융합이 전부 끝나고, 별이 안정적으로 탄생하면 축기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쩌적, 쩌적...

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

파아아앗!

순간, 단전 안에서 휘광이 이는 듯 하더니 생성되어 가던 별이 폭발했다.

꽈과과광!

"크윽!"

나는 안간힘을 다해 단전히 폭발하지 않도록 힘을 억눌렀다.

그 덕에 내단의 공력은 다시금 정순해져 있었으나, 내 얼굴은 왕창 일그러져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다.'

별이 탄생하려는 순간의 그 미약한 변화를 포착해서 안정시켜야 하건만.

나는 오영근을 지닌 탓인지, 체내의 영기가 혼잡해서 그 '미약한 변화'의 가짓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너무나도 변화가 많다 보니까 차마 전부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단전의 상태를 살폈다.

영운이 전부 소모되고, 다시 연기기 12성 완공으로 수준이 떨어졌다.

'답답하군.'

축기단의 도움을 빌리면 축기기에 이르는 난이도가 대폭 낮아진다.

축기단에 들어있는 정순한 생명력이 영기의 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영기의 별을 대폭 안정화시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축기단에 들어있는 '생명력'의 정체가 뭔지 아는 나로서는 참 먹기가 꺼려졌다.

'아니, 꺼려지는 정도가 아니다.'

그건 그냥 사람이라면 입에 대선 안 되는 게 맞는거다.

그리고 그 생각을 되새기자, 나는 그제야 내가 어떤 길을 걸으려는 건지 실감이 나 헛웃음이 나왔다.

축기단 없이, 오영근자 주제에 축기기에 도전하려는 미치광이.

천영근자가 아닌 이상, 어떤 수도자가 축기단을 복용하지 않고 축기기에 오른단 말인가?

영근이 두 개 이상만 되어도 거기에서 오는 미약한 변화의 가짓수 때문에 영력의 별이 미친듯이 흔들리기에, 진영근자도 어지간하면 축기단을 복용하건만.

영근의 가짓수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동반되는 변화의 가짓수는 제곱씩 불어났다.

오영근인 나는 이영근자의 네제곱에 달하는 변화의 가짓수를 전부 통제하지 않으면 영력의 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젠장할.'

나는 이를 짓씹으며 손을 꽉 쥐었다.

이럴 줄을 알았기에 일부러 호풍응룡변 등 요수공법까지 익혀서 길을 뚫어보려고까지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요족공법을 막상 익히고 나니 알게 된 사실은.

내단에서 이뤄지는 요수공법과, 내단 밖의 단전에서 일어나는 축기는 별 관계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로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따로 논다.

소가 닭 보듯이, 두 기운은 아예 상관이 없이 흘렀다.

추후에 다른 깨달음을 얻으면 뭔가 상관관계가 생길지도 몰랐지만, 지금으로써는 별 상관이 없는 듯 했다.

'별 수 없군.'

그나마 위안인 것은 축기에 시도할때마다 일어나는 폭발로 인해 그나마 내단의 공력이 정순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연기기 12성에서 일원일응의 점을 응집하기 시작했다.

* * *

몇 개월이 지났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축기기에 들기 위해 시도를 했다.

수 번이나 단전에 폭발이 일어나고, 고통에 신음했다.

영기가 밀집된 지역의 좋은 점은.

깨달음만 있다면 언제든 12성에서 13성, 14성까지 연기기의 수행을 회복해 몇 번이고 축기에 도전할 수 있단 것이었다.

우우웅!

영력의 별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가짓수는, 얼핏 보아도 수만개가 넘었다.

그 수만개의 변화를 전부 안정시키고 영운이 융합을 유지하도록 안정화를 완료하면 영력의 별이 하나 탄생한다.

그것이 축기기.

그러나 나는 당장 그 무시무시한 변화를 파악하기는 커녕 변화를 놓치지 않기조차 너무 버거웠다.

모래알보다도 더 작고 희미한 영력의 변화 수만가닥을 일일히 잡아내서 파악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킨 후.

그를 기반으로 영운의 융합마저 안정화시켜야 영력의 별이 탄생하는 것.

'제길, 너무 난이도가 높다.'

천영근자라면 아마 단일속성에서 오는 한두개의 변화만 제압하고 안정화를 시켜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영근자부터 변화의 가짓수는 제곱되고 나는 그 끝판왕이나 다름없는 오영근자.

강환을 사용해서 사고를 세 배 네 배 가속시켜도 간신히 놓치지 않고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다였다.

'그나마 가망이 있는 건... 강환의 개수를 늘려서 사고를 더 가속시키는 것 밖에는 없는건가.'

내 의식의 크기는 연기기 극성에 이르며, 차라리 축기기에 약간 못 미칠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그 의식의 크기에 더불어 사고를 가속시키면, 그 가속률이 훨씬 뛰어났다.

수도공법을 익히지 않은 김영훈보다도 더더욱!

'어쩌면, 김 형처럼 아홉 개의 강환을 다루게 되면 조금 희망이 있을지도.'

꽈과광!

영운의 융합이 실패하고, 폭발이 일어나며 내 단전이 아려왔다.

쿨럭!

나는 피를 한 움큼 내뱉고, 운기요상으로 내상을 다스렸다.

이번에도 역시 실패.

실패를 반복할수록, 나는 무공의 경지 역시 높여 사고를 가속시키는 쪽에 생각이 쏠렸다.

그리고 또한, 무공과 더불어 요수공법에 대한 생각 역시 다시 하게 되었다.

'무공은, 분명 요족들의 공법과 닮아있다.'

물론 닮아있다 뿐.

엄연히 다른 속성의 것이었다.

곤충의 날개와 새의 날개처럼, 완전히 다른 것 두 개가 수렴진화한 것일 뿐인 것.

그러나, 분명히 그로 인해 나오는 결과는 비슷했다.

'그러므로 참고가 가능하지.'

요수공법과 수도공법은 완전히 서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자질 없는 이가 다음 경지로의 도약을 시도하려면, 무공과의 상부상조가 필요하고.

무공은 요수공법과 닮아있다.

우우웅!

장심에서 강환이 떠올랐다.

나는 동시의 요수들이 느끼는 지(地)의 감각을 일으켰다.

이제는 요수들의 감각 역시 익숙해져 이제는 일으켜도 머리가 조금 아플 뿐.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이 역시 의념을 처음 지각했을 때와 비슷했다.

천지의 영기.

그 음양과 태극의 순환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천지 곳곳에서 태극(太極)이 순환하는 것이 보인다.

아니,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모든 천지영력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음양이 회전하고 있었다.

음양을 천지로, 음양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으로 해석하여 세 개의 강환을 다루는 것에는 성공했다.

우우웅!

천지의 영기와 같이, 강환이 건곤으로 쪼개지고, 건곤 사이에서 생명력이 탄생하며 인을 상징하는 강환이 되었다.

'강환 아홉 개는, 도대체 뭘 깨달아야 도달하는 거지.'

나는 지난 삶의 김영훈들이 도달했던, 등봉조극의 극한(極限)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그저 대단한가보다 하고 감탄했을 뿐.

그 원리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강환을 다루는 단계에 오니,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한 건지 감도 안 잡혔다.

'심지어...'

김영훈은 나처럼 요족의 조언을 들어 요수의 감각을 깨친 것도 아닐텐데.

'그냥 재능만으로 삼재의 이치를 강환에 담아 강환을 아홉 개나 휘둘렀다는 건가?'

이렇게 다시금 보니 정말 정신 나간 재능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을 다잡았다.

재능은 그저 빨리 깨닫는 자질.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나 역시 그를 따라할 수 있다!

"...결정했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일원일응의 영력을 응집시키고 연기기 13성에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시간낭비하지 말고, 김 형에게 가야겠어."

그에게 정식으로 요족의 감각을 가르쳐주고, 호풍응룡변에 대해 설명해주며, 그가 영감을 받도록 해줄 요량이었다.

타닷!

나는 쇄천봉 석굴에서 나가, 하늘을 박차고 연국 방향으로 달렸다.

* * *

연국에 와서 김영훈을 만나는 데엔 지난번처럼 진씨세가의 하청산수를 이용했다.

하청산수를 통해 김영훈에게 연락을 넣자, 그는 하루만에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하하, 이게 얼마만이냐!"

"오랜만입니다. 그간 또 출세하셨더군요."

김영훈은 그 사이 지난번처럼 진씨세가와 손을 잡고 막리황조를 완전히 무너뜨린채였다.

"그래, 네 덕에 등봉조극에 오르는 데에 성공했지. 덕분에 출세도 하고... 그런데, '또'라는 건 무슨 소리냐?"

그는 나를 반겨주다가, 문득 내 말에서 뭔가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내게 되물었다.

나는 그 말에 흠칫 놀랐으나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답해주었다.

"아, 그러니까... 김 형은 원래도 부장님이셨는데 이 세계에서도 또 출세하셨다 뭐 그런 말입니다. 하하.."

"으하하! 중견기업 부장인데 뭘 그러느냐."

"하하.."

나는 의념을 통제하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무의식적으로 지난 삶과 조금 혼동했어.'

아무래도 기억이 쌓여가다 보니까 가끔 이렇게 헷갈리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나저나.."

나는 의념을 정련하며 되물었다.

"조금 실력은 나아지셨습니까?"

나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살면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할 날이 오리라곤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김영훈은 가타부타 말을 하기보단, 갑자기 내게 장심을 뻗어왔다.

나 역시 씨익 웃으며 마주 장심을 뻗었다.

번쩍!

빛이 폭발한다.

주변의 소리가 날아간다.

무음(無音)의 공간에서 두 사람이 순간 부딪혔다.

'시작해 볼까.'

2배 가속.

파아앗!

나는 김영훈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수도를 찔러들어갔다.

그러나, 김영훈 역시 내게 즉시 반응해서 내 수도를 튕기고 반격에 들어온다.

'가속을 깨우쳤나. 하면...'

어디까지 성장했나 볼까.

파앗!

나는 그와 합을 마주치며 점차 속도를 올려갔다.

내가 기본적으로 기교를 중시한다면, 김영훈은 속도를 중시했다.

그렇기에 내 단악검법은 보통 정밀도가 높은 초식 위주였고, 단맥도법은 경쾌하고 빠른 초식이 주를 이뤘었다.

3배 가속.

2개의 강환을 사용한 가속에 들어간다.

김영훈 역시 여기까지 무난하게 따라오는 모습을 보였다.

촌각에 수십 초의 격돌이 일어난다.

사방으로, 강기가 아닌 단순 충격파 때문에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간다.

나는 점차 속력을 올려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김영훈은 이후부터는 천부적인 본능을 이용해 내 공격에 맞설 뿐.

더 이상 속도가 높아지지 않았다.

속도를 주특기로 삼았던 이가 속도가 사라지자, 내 눈에 허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십 합의 격돌 속.

꽈아아앙!

나는 결국 그의 간합을 뚫고 그의 가슴에 장인을 박아넣는 데에 성공했다.

"커헉! 크윽.."

김영훈은 헛구역질을 하며 한바퀴 허공에서 회전하며 나가떨어졌다.

"정말, 기가 차는 성장 속도군요."

그 짧은 사이에 등봉조극에 오르리란 것 자체는 사실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강환 2개를 다루고 있을 줄이야.

우웅!

김영훈이 웃으며 장심에서 강환을 뿜어냈고, 그의 강환은 점차 자전하더니 두 개로 쪼개져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하, 몇년 후면 너도 넘어서 주마. 긴장하거라!"

"아무렴, 그러셔야죠. 그나저나... 김 형은 도대체 어떻게 강환을 쪼개셨습니까?"

"음?"

내 말에 김영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쪼개고 있잖느냐."

"왠지 저와 김 형이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닌듯하여 말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무의 경지에서 개개인이 깨달음을 얻는 방식이 다를지언정, 얻는 깨달음이 다르단 말이냐?"

나 역시 그처럼 장심 위로 강환을 띄우고, 그처럼 두 개로만 강환을 쪼갰다.

그리고는 요족의 감각을 일으킨 상태로, 천지영력의 음양의 순환에 정확히 맞춰 강환을 회전시켰다.

그가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면, 절대로 못 알아볼 리가 없는 회전.

그러나, 김영훈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강환이 회전하는데 뭐 어쩌라는 것이냔 듯한 표정.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오히려 너무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강환을 쪼갠 거지?'

"김 형. 알려주십시오. 도대체 무슨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까?"

폭풍(7)

"무슨 깨달음이냐니, 음. 생각해보면 등봉조극에 이른 건 무림사상 어차피 너와 내가 유이할테니 뭐라 말할수가 없군."

그는 난감해하는 듯 하더니 손바닥 위에 강환을 띄워놓고 말을 이었다.

그의 손 위에선 두 개의 강환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일단, 강환에 '자기 자신'을 불어넣은 건 너도 마찬가지겠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또 다른 내 의식의 일부를 불어넣었기에, 의념의 세계에서 강환은 마치 분신처럼 보이고. 강환을 흡수하며 사고를 가속하는 것도 가능하지. 너도 강환을 쪼갠 시점에서 아는 것일 테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꼭 자기 자신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

'뭐지? 여기까지는 똑같다.'

그러나, 바로 다음 김영훈의 설명부터, 나와의 차이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타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이라는 것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결국 강환의 깨달음은 관계라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하겠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관계는 무엇이겠느냐."

우우웅!

그의 손 위에 올라간 강환들이 진동했다.

나는 어쩐지, 그 빛무리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온다고 느꼈다.

"부모(父母)."

어쩐지,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향수가 깃들어 있었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준 가장 직접적인 원인...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으니, 나는 그제서야 태어났고. 그분들로부터 삶을 받았다. 나는, 단지 나로만 이뤄진 것이 아닌 내 어버이로도 이뤄져 있더구나."

우우웅-

깨달음을 입으로 정리하며 뭔가 더 얻은건지.

아니면 나와의 전투에서 뭔가를 얻은건지, 그도 아니면 계속 내 손 위에 올라가 있는 세 개의 강환을 관찰한 것인지.

저 천무(天武)의 화신의 강환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시어, 나를 낳고..."

파아앗!

두 개의 강환이 회전하며, 그 회전 속에서 세 번째 강환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나는 삶을 살아가며, 마누라를 만나고. 또 자식들을 보겠지. 어쩌면 손주손녀도 볼 것이고.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무수한 인연과 관계들이...

그 중 가장 소중한 것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삼재(三才)의 이치로 강환을 해석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땅의 수도공법을 익힌 내게는 하늘과 땅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영훈의 이치는 가족(家族)이었던 모양이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김영훈은 등봉조극에 오를 때마다, 거의 항상 9개의 강환을 다루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립고 또 그리운 이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 때문이었을지도...

꽈악...

세 개의 강환.

놀라운 성취이자 깨달음이었지만, 김영훈은 주먹을 쥐어서 강환을 없애버리고는,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이런 무공 따위, 필요도 없다. 그냥, 내 가족만... 다시, 보고 싶구나."

"..."

우리는 둘 다 강환을 흩어버리고,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나도 그도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김영훈이 쓴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됐다. 여기서 이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느냐. 미안하다. 무공 얘기나 해보자꾸나."

그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강환을 띄워올렸다.

"여하튼, 나는 가장 소중한 관계를 떠올리며, 그 관계를 가진 이들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강환과 의념 역시 끊임없는 교류와 순환 속에서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

'끊임없는 순환'. 그것이 내가 찾은 이치였다."

"그렇습니까..."

나 역시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다.

끊임없는 순환.

그것은 내가 보는 태극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의미였다.

어찌되었든 세계의 음과 양은 끊임없이 순환하고 교류하고 있었으니까.

그와 나의 깨달음의 방향은 다르지만, 상통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의념의 순환을.

나는 영기의 태극을.

하지만,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우리의 것은 분명 다른 깨달음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서로의 깨달음으로, 보완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김 형. 이제는 제 깨달음을 알려드리지요. 우선... 정신을 집중하고, 태극이 움직이는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음, 했다."

"그 상태에서, 의념의 흐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느껴지는 천지원기의 흐름에 집중하십시오."

나는 김영훈에게 천천히 지(地)의 감각.

요족의 감각을 가르쳤고, 얼마 후.

김영훈이 눈을 부릅떴다.

"....!!!"

그 역시 나와 같은 시야에 진입하였다.

천지 곳곳을 흐르는 음양과 태극들.

끊임없이 순환하는 힘.

그리고 물질의 반응에 의해 형태가 찌그러지기도, 기이하게 변하기도 하는 태극들.

건과 곤.

그리고 인.

세 가지 이치가 담긴 삼라만상의 새로운 풍경에, 김영훈은 넋이 나간 듯 얼마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김 형. 괜찮습니까?"

나는 그가 계속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본래라면 새로운 감각을 깨친지 얼마 되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그러나 김영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새로운 감각을 깨치고서도, 그냥 아무런 고통도 없는건가. 나와는 잠재력 그 자체가 다르단 거군.'

그는 이 감각에도 어느 정도의 재능이 원래부터 있었던 듯 했다.

얼마간 허공을 바라보던 김영훈의 주변으로, 자연스레 세 개의 강환이 떠올랐다.

부우웅!

세 개의 강환이 회전한다.

'완전히 안정되었다.'

방금 막 세 번째 강환을 만들어냈을 때엔 세 번째의 강환은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불안정한 모습은 전부 사라졌고, 안정적인 형태의 세 강환이 그의 주변을 회전할 뿐이었다.

심지어, 강환이 더욱 쪼개질 듯한 낌새마저 느껴진다.

어쩐지 당장이라도 강환이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로 더 쪼개질 것 같다.

그러나.

"허억... 허억..."

김영훈은 정신을 차린건지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돌던 세 개의 강환을 흩어버렸다.

그는 매우 놀란 표정이었다.

"그렇군... 너는 의념의 순환이 아니라. 저 음양과 태극 속에서 건곤과 인간의 이치를 깨달았던 거로구나."

"...그걸 바로 맞추시는군요. 저는 아직 의념의 순환이 무엇인지 감도 안 잡히는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듯한 김영훈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예?"

"최초로 의념의 순환을 느꼈던 그 날. 나는 어렴풋이 강환의 한계가 느껴졌다. 아마정확하진 않지만,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강환의 수는 8~10개 사이가 끝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의념의 순환만을 깊게 파는 것으로도 충분히 그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느껴졌으니, 너 역시 네가 깨달은 그... 태극의 감각? 그것을 꾸준히 파면 그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야."

그는 지의 감각을 일으킨 채 허공에서 순환하는 태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당연히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닌지라, 그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8~10개가 인간의 한계이니. 서로의 깨달음을 공유해도 그 갯수가 81개로 곱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깨달음이 많으면 더더욱 그곳에 빨리 도달할지언정, 뭔가 강환이 더 강해지거나 하진 않을 터..."

"...그런 걸 어찌 아십니까? 김 형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을 텐데."

저런 사실은 월도월무록에도 수록되지 않았었다.

"천재의 직감이다."

"..."

할 말이 없군.

하지만 무(武)에 한해서 김영훈의 말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아마 맞을 터였다.

'매 삶마다 김 형의 강환 갯수가 9개에서 끝난 건, 그게 인간의 끝이었어서였단 말인가.'

인간의 끝.

나는 그 말을 듣자 어째선지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저 말은 즉슨, 무인(武人)의 끝은 축기기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인으로서 조금 안타까웠다.

"어쨌든 좋은 깨달음 정말 고맙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더더욱 빨리 성장해 보이마. 네가 알려준 것은 내게 엄청난 영감을 가져다줄 것이야."

영감이라.

무인으로서의 안타까움.

김영훈의 언급.

그리고, 약간의 오기.

나는 가슴 속에서 그러한 것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김 형. 만약 영감이 있다면, 월도월무록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음?"

그는 눈을 찌푸렸다.

월도월무록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만나서 며칠간 이야기를 나눴을 당시 했었다.

누군가 자신의 머릿속에 그런 무공구결을 집어넣었다고 말하는 김영훈에게, 나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고, 우리는 월도월무록에 대해서도 토론을 나누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에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저는 그동안 지내며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월도월무록을 생각하며. 그 구결을 넘어설 수는 없는걸까. 등봉조극의 너머로 갈 수는 없는걸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며 요족(妖族)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방금 보여드린 태극의 감각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저는 인간의 무공이 요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만약 김 형이 원한다면, 제가 배운 요족 공법을 알려드리고, 연구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이어졌다.

"만약. 이렇게 해서 제가 돌아다니며 얻은 깨달음과 정보를 드린다면... 당신은 월도월무록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월도월무록.

그 무학서는 월수월무록이던 시절에서, 틀은 변하지 않은 채 시행착오의 경험만 추가된 무학서였다.

그렇다면.

이번 삶의 김영훈은 과연, 이 월도월무록을 넘어설 수 있는가.

월수궁무록이 조수월무록으로.

조수월무록이 월수월무록으로.

세 번의 커다란 진화 이후, 월수월무록에서 시행착오만 추가될 뿐이었던 월도월무록을.

다시 한번 진화시킬 수 있는가?

내 물음에, 김영훈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 했다.

"...장담은 못 하겠구나. 하지만!"

그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네가 말한대로 인간의 무공이 요괴에게서 파생된 것이라 하면. 원류라 할 수 있는 요족공법을 연구하는 것은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고, 어마어마한 시행착오를 줄여줄 것이다."

"...그렇습니까."

시행착오를 줄여준다.

어쩌면, 그것이면 족할지도...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호풍응룡변의 구결과 요족 공법의 전반적인 특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남은 시간동안 김영훈에게 호풍응룡변과 요족공법의 특징에 대해 가르쳤다.

* * *

시간이 되었다.

서란과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김 형.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없습니까?"

"없다. 구결에 대해서는 다 이해했고, 나도 한번 최대한 연구해 보마."

"알겠습니다. 김 형만 믿겠습니다."

김영훈은 요족공법을 보고, 또한 요족의 감각을 깨우치면서 훨씬 가파른 속도로 강환의 갯수를 늘려갔다.

현재 그의 강환은 총 7개.

지난 삶에 거의 근접해가고 있었다.

'김 형의 무학을 따라가며, 등봉조극의 극한으로 무공 경지를 올리고. 10배 이상의 사고 가속을 통해... 축기기에 도전한다.'

그렇기에, 김영훈이 더더욱 빠르게.

더더욱 높이 날아올랐으면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운을 빌어주며, 그렇게 헤어졌다.

* * *

촤아아아!

나는 서란의 처소 위쪽으로 날아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서란은 바로 고개를 드러내며 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서 형이 말씀한 결계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우선 결계쪽으로 가면서 설명하지. 아 그래. 내 목 위에 올라타거라. 이제부터 갈 해역은 굉장히 비바람이 거세니 꽉 잡는 게 좋을 거다."

"예."

나는 서란의 목 위로 올라가 앉고, 그의 목을 붙잡았다.

"내가 말하는 그 결계는, 왕께서도 나에게 은밀히 진입해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계 내부에 우리 해룡족에게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

"결계가 둘러싸고 있는 건 정확히 무엇입니까?"

촤아아아!

그가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바다의 한 곳을 향해 헤엄친다.

저 멀리, 해류가 급격히 변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스산한 귀기(鬼氣)가 느껴지는 듯 했고.

저 멀리 먹장구름이 우릉거리며 바다를 어둡게 가리고 있었다.

"인족의 수도종문 중. 흑색귀골곡(黑色鬼骨谷)의 폐기된 신물(神物)."

쿠구구구!

저 멀리 거대한 파도가 치고 있다.

"명계도 건널 수 있다는 전함. 섭명함(涉冥艦)이다."

우리는 폭풍이 불어닥치는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전야(1)

먹장구름 밑으로 들어가고, 바다를 헤쳐나가길 수 시진.

얼마 후, 나와 서란의 시야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저건, 결계?'

일반적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일반적인 해역과 다를 것 없이 파도가 치는 대해.

그러나 요족의 지각으로 음양의 흐름을 보자 저 멀리 넓은 해역의 흐름이 주변과 다르게 기이하게 비틀려 있다.

"저 결계입니까?"

"아니, 저건 그냥 환상결계일 뿐이다. 물론 흑색귀골곡의 진법사들이 공간을 꼬아 놓아서 저 인근으로 들어가면 반대편으로 나오긴 하지만... 저 정도야 진즉에 파훼법은 찾아냈다.

저 안쪽에도 몇 겹의 결계가 더 쳐져 있으니 그 모든 결계를 전부 돌파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촤아아아!

바다를 헤엄치던 서란이, 순간 요력을 뿜어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꽉 잡아라!"

파아앗!

서란의 뿔에서 비취색 빛이 뿜어지며 사방을 물들였다.

꽈과광!

동시에, 나는 거대한 파공음을 들으며 호신강기로 충격파를 방어했다.

촤아악!

나와 서란이 보이지 않던 기묘한 영력의 흐름을 통과하는 것이 느껴졌고, 나는 점차 눈을 떴다.

'이곳은..'

안개.

해무(海霧)가 사방천지를 뒤덮고 있다.

그러나 순간, 나는 전신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아니, 해무가 아니다.'

가공할 음기(陰氣).

꿀꺽

'귀혼(鬼魂)들...!'

"너는 입을 열지 말아라. 이것은 두 번째 결계이다. 살아있는 인간의 소리가 울리면 저것들이 네게 달려들테니. 나는 해룡족이고, 해룡족은 기본적으로 음(陰)의 힘도 다룰 수 있으니 내게는 달려들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문제가 없지만 넌 최대한 기척도 죽이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란은 다시 허공에서 내려와 물로 들어가며 주변을 살폈다.

"흑색귀골곡에서 풀어놓은 원혼들이다. 이만한 규모의 원혼들이 모여있고, 흑색귀골곡의 결계가 주변을 뒤덮으니 이 해역에는 늘 폭풍이 불어닥치지."

'원혼은 비바람을 부르는 건가?'

확실히 원혼이나 귀신, 그런 것들이 모여서 같은 음한 성질을 가진 먹구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럴듯 했다.

잡생각을 하며 서란의 목을 붙잡고 있을 때였다.

아아아아-

끼야아아아!

아아아!

"....?"

서란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어째 멀리서 울려오는 듯한 귀곡성이 울려퍼졌다.

"걱정 마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섭명함의 영향을 받아 특이한 귀신들이 많아 저런 것이니..."

그때였다.

[귀신이다...!]

[아주 큰 귀신이야!]

[아주 큰 귀신이 해역에 들어왔다!]

[찾아라! 아주 큰 귀신을 찾아!]

쿠구구구!

해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뭣...! 이런 적은 없었는데!?"

서란이 당황하며, 기척을 죽이고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악!]

[큰 귀신이 우리를 다 잡아먹으려 온 게 분명하다!]

[끼아아아악! 귀신이다! 아주 큰 귀신을 잡아라! 아주 큰 귀신이 들어왔다!]

그저 뿌옇기만 하던 해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싸아아아-

해무가 시커멓게 물든다.

동시에, 그 시꺼먼 안개 속으로 수천, 수만개의 붉은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무슨,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거지!"

서란이 당황하며 더더욱 빠르게 헤엄쳤다.

쿠구구구!

검은 안개 속에서, 붉은 빛들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크윽, 꽉 잡아라. 다시 한번 날아오를 것이다!"

서란의 몸에서 다시금 영기가 뿜어졌다.

'서휼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던 것 같은데, 서란은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긴 힘든 건가.'

하긴 이 거체를 생각하면 오히려 원하는대로 날아다녔던 서휼이 대단한 것이었다.

촤아악!

그가 물에서 나와 허공으로 도약한다.

나는 서란의 갈기를 잡고, 최대한 숨을 참으며 귀신들의 눈을 피했다.

얼마나 허공을 날았을까.

"두 번째 결계를 돌파하겠다!"

촤아아악!

나는 이번에는 갑자기 전방에 나타난 물의 장벽을 뚫고, 전신이 흠뻑 젖은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

거대한 물의 장벽!

이 주변의 몇백 리가 물이 존재하지 않았고, 중력의 영향을 무시하는 듯, 바닷물들이 물의 장벽을 만들어 거대한 하나의 우물을 만들고 있었다.

그 '바다의 우물'의 중심.

그곳에, 몇십리를 다 뒤덮을만큼 거대한 반투명한 결계가 보였고.

그 결계 안쪽, 강력한 귀기를 뿜어내는 전함이 하나 보였다.

"이제 말을 해도 된다. 귀신들은 이 결계 안쪽으론 못 들어오니까."

"휴우... 저게 섭명함입니까?"

"그래."

촤아아아!

서란은 물의 장벽을 타고 미끄러지며 바다의 우물 밑으로 내려갔다.

"이제 내려라. 이 앞에서부턴 딱히 네게 위험한 건 없으니까."

나는 서란의 목에서 떨어져, 허공을 밟고 저 결계를 향해 다가갔다.

결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결계 안쪽의 전함의 모습이 자세히 보였다.

전함은 처참히 부서져, 거의 형태만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쪽에서 강력한 귀기와 음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결계는 범인들과 일반 짐승들을 막기 위한 결계. 두 번째 귀신들의 해무는 인족 수도자들을 막기 위한 결계. 그리고 이 마지막 결계는 나 같은 요족을 막기 위한 결계이다."

서란의 설명이 이어졌다.

"뭐, 방금 전의 귀신들은 의식을 가진 존재들이라 기이한 돌발현상이 일어난 것이지만, 이 결계는 딱히 살아있지 않으니 돌발상황은 안 일으킬 터."

그가 꼬리를 들어, 결계에 조금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파츠츠츳!

파앙!

빛이 터지며 서란이 뒤로 물러났다.

그의 꼬리에는 녹색의 귀화(鬼火)가 붙어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서란이 영력을 집중시키자 그제야 꺼져버렸다.

"요족인 나는 이런 반응이지만. 인족의 혈통을 가진 너는 다를 터. 한번 손을 가져다 대어 보거라."

나는 조심스럽게, 내단의 기운을 최대한 제약한 채로 결계에 손을 가져대 댔다.

그리고.

치지직!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내 손이 결계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음, 정말 들어가지는군요."

"그래, 말 그대로 요족만을 막기 위한 결계니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결계 안쪽으로 들어갔다.

촤악!

내단 부근이 조금 아릿했지만, 나는 무난하게 바로 결계를 통과할 수 있었다.

너무 쉬워서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서 형. 너무 난이도가 낮은 것 같습니다만..."

"맞다. 인족의 혈통을 지닌 네게는 난이도가 낮은 게 맞지. 이제 나도 들어갈 수 있게 결계를 발동시키고 있는 섭명함 인근의 깃발 여덟 개를 전부 뽑아주면 된다."

서란이 결계 너머에서 발톱으로 어딘가를 가리키자, 그곳에는 귀신 얼굴이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런 깃발은 전함을 중심으로 총 여덟 개가 물 위에 꼿꼿히 서 있었다.

나는 빠르게 움직여 전함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덟 개의 깃발을 전부 뽑아버렸다.

그리고, 섭명함을 둘러싼 결계가 빛을 잃으며 서란이 내게 다가왔다.

"뭐랄까... 굉장히 난이도가 낮은 게 아닙니까?"

"뭐, 여기까지는 분명 난이도가 낮은 게 맞다. 애초에 신물이라고는 해도 폐기된 신물. 신물이라는 상징성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고물덩이를 위해 흑색귀골곡에서 그렇게 엄청난 경비를 세웠을 리가 없지 않으냐."

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전까지 제일 성가신 것은,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해무의 결계에 진입하면 귀신들이 흑색귀골곡에 신호를 보내게 되어있던 것이다. 그럼 흑색귀골곡에선 결단기 수도자를 보내서 나 같은 요수들을 사냥해버리곤 했지.

어찌어찌 여기까지 진입해도, 원래는 흑색귀골곡에선 이 곳에 축기기 내당제자들을 몇몇씩 배속해 두어서 사냥당했겠지만... 이젠 흑색귀골곡이 상계로 통채로 사라졌으니, 솔직히 더 난도가 높은 것도 이상한 거다."

"그렇군요."

"어쨌든 진짜는 저 안에 들어간 후부터다. 저 안쪽에서 나와 함께 뭔가를 찾는 것을 도와다오."

"예."

애초에 결계보다는 사람을 보내서 지키게 했던 것이었던 듯 했다.

지금은 그 지킬 사람이 전부 상계로 올라가 버려서 쉽게쉽게 담을 넘은 것이고.

"그나저나, 폐기된 신물이라도 이렇게 큰 규모의 결계로 지키고, 내당제자도 한둘쯤 와서 지켰다는 걸 보면 원래는 상당한 신물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저렇게 된 겁니까?"

나는 서란과 함께 전함으로 다가가며 질문했다.

전함은 한켠이 그대로 박살나 있는, 반파된 상태였다.

멀쩡한 곳도 몇몇 있어 보였지만 많지 않았다.

"...흐. 인족들끼리의 전쟁에 저리 되었지."

"무슨 전쟁이 있었던 겁니까?"

"아마 너는 태어나기 이전일 테니 모를 터다. 괴군(怪君)이라는 인족 수도자가 하나 있지.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만, 괴군이 섭명함의 내부 부속품 중 하나를 뜯어가겠다고 어느날 갑자기 난리를 쳤고.

흑색귀골곡은 당연히 미친 소리하지 말라며 무시했으나, 괴군의 난리에 의해 흑색귀골곡의 천인기 원로 둘이 살해당했다. 그에 흑색귀골곡 역시 눈이 돌아가서 종문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괴군을 잡으려 했다.

괴군은 도망치지 않고 흑색귀골곡과 단신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흑색귀골곡의 단 세 대밖에 없는 섭명함이 작살이 났고, 흑색귀골곡의 3분의 1이 궤멸했다."

"..."

"결국 괴군은 기어코 섭명함 한대를 박살내버리고, 안으로 들어가 핵심 부품을 뜯어내고 가 버렸다. 흑색귀골곡의 누구도 그 미치광이 수도자를 못 막았더랬지."

도대체 뭐지, 그 어마어마한 전적은?

'괴군이라면 그 곱사등이 노인... 그 자가 그 정도로 말도 안되는 힘을 가졌단 말인가?'

하기사, 그냥 미친놈이라면 다른 천인기 수도자들.

심지어 점잖던 해룡왕까지 질색을 하며 부르르 떨 리가 없었다.

미친놈이 말도 안되는 힘까지 가졌기에 그렇게 질색하는 것이리라.

"괴군과 싸우기 전까지, 흑색귀골곡은 세 대의 섭명함을 타고 대해를 누리며 무시무시한 위세를 떨쳤던 종문이었지만. 괴군과 전쟁을 치룬 후에는 한 해역에 쳐박혀서 얌전히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흐. 솔직히 바다에 살던 수많은 요족들은 상당히 그때 일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뭔가 흑색귀골곡에 안 좋은 감정이 있던 것인지.

서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와 함께 섭명함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섭명함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굉장히 단단하고 광택이 돌았다.

동시에 갑판에서 상당한 음기와 귀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들어가보지."

서란은 갑판을 따라, 배 안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화아악!

"...!"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문을 열었을 뿐인데도 가공할 음기와 귀기가 뿜어져나왔다.

동시에 그 안쪽은 완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란도 조금 긴장이 되는지, 문 앞에서 그 거체를 잠시 빳빳하게 곤두세웠다.

"...그런데 서 형. 서 형이 들어가기엔 이 안쪽이 조금 좁을 것 같은데..."

"...그건 걱정 말아라. 일단 들어가 보지."

스르륵

서란은 말을 하며 그대로 안쪽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긴장을 곤두세우며 서란을 따라 들어갔다.

화아악!

그리고, 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밖보다 안이 넓다...!'

어마어마한 공간!

밖에서 보았던 것 이상의, 수천배 넓이의 통로가 내 앞에 존재했다.

서란은 그 통로에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흑색귀골곡은 섭명함 세 대를 타고다니며 전 대해를 지배했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섭명함 자체가 곧 말도 안되는 배율의 공간이 압축되어있는 신물(神物)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섭명함은, 흑색귀골곡의 본산(本山)이나 다름없는 전함이야. 아니, 그들의 본산인 귀곡(鬼谷) 역시 섭명함을 정박해두기 위한 항구에 불과했으니. 사실상 섭명함이 곧 흑색귀골곡이라 표현하는 게 맞을 터다."

"허어..."

나는 이 거대한 규모에 압도되어서 잠시 말을 잃었다.

"듣기로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고대의 장인 중 하나가 진선들의 선보(仙寶)를 모방해서 만들어낸 법기라 하더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통로를 지나고, 우리는 거대한 공동에 도착하였다.

공동 곳곳에는 귀신 조각상이 나뒹굴고 있었고, 곳곳에 꽤 크기가 큰 목조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함 내부의 방이나 건물들에 전부 들어가서, 혹여 이런 기운을 내뿜는 것이 있는지 보아줄 수 있느냐?"

우웅!

서란이 앞발을 뻗자, 그 위로 해룡족의 기운이 진하게.느껴지는 손톱만한 구슬 같은 것이 떠올랐다.

"형태가 아니라 기운을 잘 기억하거라. 이 기운을 내뿜는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내게 말해다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찾아볼까요?"

나는 그가 내뿜은 기운을 기억하고 4, 5층 크기의 누각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저 거대한 게 전부 들어가고도 아직 까마득하게 공간이 남는 크기... 그 크기의 공간이 고작 전함 한 대에 압축되어있다니.'

이 정도는 되어야 거대 수도종문의 신물이라 불릴만 한 것인가?

내가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저벅-

피잉!

발을 내디뎠을 때.

극속으로 뭔가가 내게 날아온다.

"....!"

카앙!

나는 황급히 강기를 뿜어 그것을 쳐내버렸다.

'이건..!'

그것의 정체는 작은 비도였다.

자세히 보니, 한쪽 벽에 구멍이 열리며, 그곳에 숨겨져 있던 기관장치가 날아온 것이었다.

'기관장치?'

그리고 그때.

까드득, 까드드득..

목조건물 안쪽에서 뭔가가 맞춰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안쪽에서 뭔가가 걸어나왔다.

까드득, 까득..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꼭두각시들이었다.

꼭두각시들은 잠시 어색한 움직임으로 움찔거리는 듯 하더니,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흥!"

콰앙! 콰아앙!

나는 망설이지 않고 장심에서 강환을 뿜어, 꼭두각시들을 완전히 갈아버렸다.

"서 형. 이것들은.."

"듣기로는, 괴군이 섭명함에 들어와서 남긴 기관장치라 하더군. 어떻게 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괴군은 앉은자리에서 한 시진만 있으면 그 일대를 자신의 기관장치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인간이라 들었으니.."

그때였다.

까드득, 까드드득...

저 멀리서, 또 다른 꼭두각시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서란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거체를 움직였다.

"그래... 어디 같이 돌파해 볼까?"

"그러지요."

서란과 나는 우리에게 달려드는 꼭두각시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