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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 *

살려달라는 말.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르메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말이었다.

'칼리안이 살기 위해 찾은 것이 일면식도 없는 마법사가 아니라 아버지였어야 마땅하다'고 앨런이 그리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지금 내밀어진 저 손을 르메인이 대체 무슨 말로 거절하겠으며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결국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밖에 없었다. 칼리안이 바라는대로 다가오는 생일에 맞추어 특별한 선물을 해주겠노라고.

'부디 조심하거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조심은 할 테니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방문 잠금장치 두 명을 좀 거둬가 주실 수는 없을지 물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르메인과의 만남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미 저무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저무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되네."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칼리안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참 짧고도 길었던 탓이다.

멀리 보이는 빌헬름 관의 불이 꺼져 있었다.

헤이시아 궁을 지키기로 한 몇몇의 발칸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갔을 터였다. 물론 아무도 다가가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시간의 축의 존재를 감추기는 해야 했으니까.

히나와 얀은 이미 체르밀에 돌아갔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빌헬름을 향해 발을 옮겼다.

체르밀의 수련장에는 키리에가 있을테니 키리에를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금쯤 혼자 있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랬는데.

- 타앗!

불도 켜지지 않은 빌헬름 관의 실내 훈련장에서 들려오는 이 소리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 부우웅!

무거운 쇳덩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대충 짐작한 칼리안이 피식 웃는 얼굴로 훈련장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창문 틀에 조각난 달빛이 비추는 훈련장 안에 어둠을 품은 검이 저 혼자 춤을 춘다. 검은 밝게 비춰지는 달빛을 하나도 반사하지 않았으나 칼리안이 그 움직임을 좇는 것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검을 든 손의 주인은 어둠 속에 잠겨든 칼리안을 발견하지 못한 듯 했다. 때문에 칼리안은 조용히 선 채로 놈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을 알 때의 검과 그렇지 않을 때의 검은 또 다르므로.

- 부웅!

둥글게 가로새겨지는 검의 끝을 따라 예리한 기운이 물씬 흘러나온다. 쏘아내듯 찌르는 첨예한 날붙이에는 어느새 흔들림이 사라져 있었다. 휘둘러지고 내리치는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많이 늘었다.

잠시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던 놈이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조금 다른 자세를 취하며 검을 움직였다. 확연히 다른 속도와 확연히 다른 가벼움이 검 끝에 매달린다.

- 쉬익!

브리센의 검은, 좋게 말하면 적당하고 나쁘게 말하면 애매하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겁지만 그렇기에 속공을 하기도 어렵고 타격에 따른 피해도 덜 입힌다. 칼리안과 드미레아의 검을 모두 받아낼 수는 있지만 치명타를 주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저 검으로 칼리안의 것을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조금 더 빠른 공격을 하고자 하여. 아마 드미레아로부터도 분명 무언가를 배워냈을 터였다.

플란츠니까.

끝이 나뉘어지듯 뻗어나오는 플란츠의 검을 보며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깨 망가집니다."

플란츠의 검은 모두 확인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을 모두 펼쳐낸 뒤 칼리안의 가벼운 검술을 시도하려는 것을 막았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플란츠의 움직임이 조용히 멈췄다. 검을 늘어뜨린 채 가만히 훈련장의 입구를 쳐다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뭐야."

칼리안의 것을 시도하려다 들켰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애초에 그것이 부끄러울 놈이었으면 칼리안의 앞에서 태연히 고양이를 쓰다듬지도 못했을 것이다.

숨어서 쳐다보고 있던 것에 대한 불쾌감이겠지.

"지금 시도하실 수 있을 속도 아닙니다. 몇 번은 괜찮아도 오래 쓰실 수는 없습니다."

불쾌하건 말건 상관 없다는 듯 이어진 말.

잠시 가만히 서 있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쓸 데 없는 부끄러움도 없지만 쓸데없는 고집도 없는 성격이니까.

곧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고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대로 체르밀에 돌아가려는 것 같았으므로 칼리안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이 됐다. 쓰지 못할 기술을 버렸으니 쓸 만한 기술을 배우려 들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칼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련 한 번 하시겠습니까."

"됐어."

단박에 거절이 돌아온다.

"당장 주무셔야 할 상태같은데."

전날 앨런과 대련을 마치고 들어왔던 칼리안의 상태를 아직 신경쓰는 말.

베른으로, 그리고 옛 칼리안으로.

많은 과거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낸 칼리안이 그런 플란츠를 향해 말했다.

"그럼 식사나 하시죠. 형님."

"귀찮아."

저래놓고 또 풀이나 뜯겠지. 삶은 완두콩.

"그러다 키 안 큽니다."

"짖지 좀 말라고."

칼리안이 씩 웃었다.

오늘도 하루 한 번 짖기 했으니까.

제27장. 지금이었다면 (3)

초상화 속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니 오히려 초상화보다 더 실물 같은 조각이다.

"대단하군."

르메인은 짧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꺼냈다.

시스파니안이 남겨둔 방이 발견된 지 정확히 2주 만에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위험한 요소가 있는지 미리 확인 중에 있으니 조금 뒤에 걸음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되도록 르메인에게 시간의 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앨런이 이와 같은 핑계로 르메인의 방문을 늦췄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축의 파편을 꺼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파편을 꺼내는 것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석벽에는 양신전쟁의 과정이 조각되어 있었다.

악신을 봉인하기 위해 8명의 영웅이 모인 것 그들이 어떤 싸움을 벌였고 누가 어떤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한 내용, 마지막 전투에서 악신을 봉인하며 함께 잠든 주신 세렌티에 대한 묘사가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르메인은 마지막 장면 악신이 봉인되고 난 직후의 모습 앞에 선 채였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네 명인 초대왕 하츠아라와 고룡 시스파니안, 퀴트로스 혼 지그프리드, 그리고 세크리티아 대왕의 모습이 보였다.

- 우리는 분명 이루었고 지켜냈으나 잃어버렸다.

다른 조각들에는 별다른 글귀가 없었으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의 말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각 속 세크리티아 대왕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영웅들 중 최후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알려져 있던 기사 네리아드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시스파니안도 세크리티아 대왕의 뜻을 존중했던 것인지 '죽기 전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지우라 했다'는 기록을 제외한 다른 흔적이 없는 세크리티아 대왕의 얼굴은 이 조각에서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상실감과 절망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망각하지 않는 시스파니안이 직접 보고 겪었던 기억을 옮겨 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그 빈 얼굴을 잠시 보던 르메인이 앨런을 향해 물었다.

"이 외에 발견된 것은 저 고리 하나 뿐인가."

그리고는 이렇게 돔 형태의 방 한 가운데 놓인 시간의 축의 파편을 보며 물었다. 곁에 서 있던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전하.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리를 옮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일이군. 그 때문에 시스파니안께서 직접 남기신 기록까지 숨기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카이리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발견이 아닌가. 그저 이 장소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왕실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기회였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방의 한가운데 놓인 금빛 고리 때문이었다. 칼리안을 습격한 이들과 관련이 있는 물건인듯 하니 이 장소 자체를 공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앨런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고리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당연하겠지만 그 고리가 무엇의 일부인지와 그것이 벽의 조각 따위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은 숨긴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향후에 공개하면 되는 일이니 너무 그리 아쉬워는 마시지요."

"칼리안의 청을 허락한 뒤로 걱정이 되고 안달이 나니 어찌하겠나."

지금 르메인은 프레이야의 왕비 추숭에 대한 일 때문에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르메인의 자리가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져야 칼리안에게 탈이 생길 일도 줄어들텐데 그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이번 발견을 알릴 수 없게 된 상황이 안타깝다는 말이었다.

"이후의 일은 왕자님께서 감당하실 몫입니다. 알아서 잘 대처하실 터이니."

앨런이라 하여 걱정되는 마음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앨런은 르메인과 달리 칼리안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까지도 얼추 예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말한대로 그것은 칼리안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섣불리 나서서 돕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리센을 상대하겠다는 그 속내에 대해 르메인의 백 배 쯤은 될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있었는지 없었는지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못 찾을 왕권 아닙니까. 이제와서 개구리 코딱지만큼 강해져봐야 달라질 것도 없으니 너무 그리 아쉬워하지도 마시지요."

르메인은 다시 한 번 고개만 끄덕였다.

목숨줄 연명시켜주고 있는 마법사의 저런 말이 그냥 평범한 안부인사 정도로 들리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그냥 그러려니 해버리고 마는 단계도 초월한 것이다.

밖에 비가 오는 것도 르메인 탓이라 할 마당에 이 정도 쯤이야.

괜스레 헛헛해지는 마음에 저녁에는 란델을 좀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만나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 * *

- 쏴아아아······.

갑작스레 쏟아져내리는 빗줄기가 테라스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시원스럽다 못해 눈 앞이 부옇게 흐려질 정도로 내리는 갑작스러운 비는 때때로 반갑다. 이 말은 이런 비를 반겨하지 않거나 아주 난처한 눈으로 빗줄기를 볼 일이 더 많이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그 '때때로'에 속하리라는 사실은 칼리안에게 있어 퍽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칼리안은 실내에 있었고 오늘 하루는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물론 비에 젖는 것을 심하게 꺼려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비에 밖에 나가는 것을 기꺼워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칼리안은 매우 평화로운 마음으로 빗소리를 즐기며 접시에 남은 마지막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의 맛이 아주 좋았다.

"애오옹!"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긴 창문을 타고 또르륵 굴러내리는 빗물이 신기했던지,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창문 이곳 저곳에 발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빗물을 잡으려는 행동인 것 같아서 고양이를 본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눈에 보여도 그건 못 잡아."

그리고 이렇게 고양이를 향해 말을 건넸다.

"애옹, 애옹!"

그것이 꽤 억울했던지 고양이는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이내 우다다다 소리를 내며 달려가 칼리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플란츠의 무릎 위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이제 익숙해진, 테이블과 플란츠의 무릎 사이의 어두운 곳에 몸을 말고 누웠다.

칼리안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와인에 재워 잡내를 없애고 약간의 후추와 소금만으로 밑간을 한 뒤 핏물 하나 안 배어 나오도록 완전히 익힌 스테이크를 씹어 삼킨 플란츠가 자세를 조금 바꿨다. 고양이 눕기 편하도록.

오래지 않아 식사가 끝나고 테이블 위에는 식기 대신 차와 디저트가 놓였다. 비 오는 날에 딱 어울릴 말린 사과와 오렌지를 함께 우려낸 차였다.

"아일란, 비버리안, 요른, 트리필드, 벨리."

소리 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플란츠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이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앞 뒤도 없고 맥락도 없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단어조차 아닌 말을 하는 경우는 아마 처음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물을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크리온, 퍼드, 셀틱, 채프먼, 메이어, 리갈."

플란츠는 한 번 더 이상한 소리를 했다.

"꽤 많네요."

물론 칼리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커녕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까지 했다.

"많은가."

"새 국왕이 즉위하고 나서 사라진 가문이 서른 곳 가량 되는데, 셋에 한 곳이면 많은 편이죠."

그리고 이렇게 세상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대화가 어김없이 이어졌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간의 축을 마주한 그날. 칼리안은 바로 그 날부터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세운 것으로 모자라 이틀 내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종이와 펜을 들고 씨름을 했다.

정보를 모두 외운 뒤 태워버렸던 텐실의 자료를 다시 써낸 것이다. 오로지 펜을 잡기 위해 손가락에 오러를 두르는 경험까지 해 가며 날이 더 지나기 전에 플란츠에게 자료를 넘기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란델이 지닌 맹세의 인과 관련되었을 세력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플란츠에게 맡겨버린 것이다. 다른 고민거리도 많았으니 굳이 칼리안까지 이중으로 고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닷새에 걸쳐 외운 그 자료를 나흘만에 머리에 새겼다. 그 뒤 다시 일주일이 지났고 플란츠는 자료에 적힌 내용 중 집중해서 확인해보아야 할 가문들을 추려냈다. 얼결에 같이 묶여 잘려나간 곁가지를 제외한 굵직한 가지에 해당되는 가문들. 그 이름을 칼리안에게 전한 것이었다.

"즉위하기가 무섭게 이런 짓을 하고도 잘도 사셨군, 란델 형님은."

란델이 즉위한 뒤 사라진 가문이 삼십여 개.

일반적인 경우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 어떤 귀족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국왕을, 그것도 별다른 기반도 없는 국왕을 그대로 두고 목을 내어 놓겠는가.

그러니 플란츠는 란델이 반란도 야기하지 않고 그 많은 귀족들을 숙청해낸 것을 신기하다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직접 손대신 것이 아니겠죠. 모르셨지 않을 텐데요."

드러내지 않고 휘두르는 칼.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도록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직접적인 손을 쓰지 않고 진행한 숙청일 터였다. 당하는 이들조차 그것이 누구의 안배인지 알 수 없도록 하면서.

"의외라서."

칼리안의 말대로 플란츠 역시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던 란델이 그런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나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계획을 무사히 성공시킨 것에 대해 새삼 놀랐을 뿐이었다.

"열 곳에서 더 줄여보는 것은 어려우시겠습니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그것도 '과거'의 체이스가 아닌 지금의 체이스가 기억해낸 내용을 토대로 전해진 정보였다. 그러니 중간중간 빠진 내용도 많았고 당시의 세작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정황도 많이 있을 터였다.

그 가운데에서 그나마 셋에 하나를 추려낸 것이 대견하다 할 일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그 열 개의 가문을 모두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때문에 물어오는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텐실 왕세자 쪽 정보도 필요할 것 같은데. 텐실과 대사막이 손을 잡았던 것에 왕세자가 연관되어 있다 했으니까."

당연히 르메인의 세작들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매우 유능한 자신만의 정보조직 보스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세이렌 경이 돌아오면 협회 쪽으로 부탁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형님께서도 그 때까지는 다른 일이 많으실테니."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에우리아 외의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 있을 일도 아닌데다가 아르센의 부재로 플란츠도 꽤 바쁠 터였다. 아르센과 똑같은 직위의 부군단장이 아닌가.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찻잔에 손을 가져가려던 칼리안을 향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이 내 발을 자꾸 막던데. 내 아우님 짓일까."

지금 발칸의 마법사들이 플란츠의 발을 막아설 곳은 헤이시아 궁 뿐이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칼리안이 거짓말 못하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앨런일 테고 그 다음으로 잘 아는 사람이 플란츠일 것이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히 대답했다.

"왜."

"그걸 말씀드릴 수 있으면 들여보내 드렸겠죠."

그리고 플란츠는 칼리안이 자신에게 꽤 순순히 대답을 내어놓는다는 바로 그 점까지도 잘 알았다.

"잔해 다 치웠고 길목이 막혔으면 뭔가 나왔다는 건데."

정확한 추측에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조차 그 계단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을 다른 이도 아닌 플란츠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브리센이나 형님의 어머니와 관련된 일 아닙니다."

"그렇다면 시스파니안이겠군."

2주 동안 고작 텐실에 대한 일 하나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던 플란츠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뒤에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곧바로 시스파니안이 튀어나오느냐는 표정이 된 칼리안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말해."

제27장. 지금이었다면 (4)

얌전한 고양이는 잠을 자고, 하나도 안 얌전한데다 형님의 똑똑함을 잠깐 잊어버리기까지 한 칼리안이 비밀 공유를 종용받고 있던 그 시간. 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빌헬름 관에는 마법사가 수두룩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앳된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멍 든 거잖아. 피 나면 와."

마법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히나가 발칸에 오기 훨씬 전부터 빌헬름관에 드나들던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는 앨런이 이곳에 있었던 탓에 모든 마법사와 안면이 있었다. 물론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레이첼도 빌헬름에 있었어야 했으나 이동 마법진 구축을 위해 대체로 카이리시스를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았다.

어찌됐건 베로니카는 실로 비범한 할아버지를 둔 탓에 사람의 나이는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너무 잘 깨달으면서 자랐다. 그래서 빌헬름에 처음 온 이후 딱 일주일동안 발칸의 온 마법사들과 전부 안면을 튼 뒤 쉰 명의 마법사 전원과 반말도 텄다.

이제 친해졌으니 서로 말을 놓아도 된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귀여움이 9할 그리고 설득력이 1할 쯤 섞인 그 주장을 들은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딱 그 때까지만 귀여웠다는 게 사소한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랬다.

"피 멎었네. 약 바르면 돼."

앨런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베로니카는 지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주 신이 나 있었다. 마법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도 그냥 빌헬름에 있을 만큼 신이 났다.

"감기면 그냥 레몬차 마셔. 열 나서 쓰러지면 와. 약 줄게."

본격적으로 히나를 돕기 시작한 베로니카가 하고 있는 가장 비중 있는 일은 히나를 찾아오는 마법사들을 모조리 퇴짜 놓는 것이었다. 전부 다 꾀병인 것이 눈에 보여서였다.

신물을 사용하는 신관의 치유는 마법사의 서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때문에 이 마법사들은 지금껏 치유술이라는 것을 받아 본 적이 없다. 헌데 히나의 치유술은 서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랬으니.

호기심 많은 놈들이 2주 째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히나를 찾아올 수밖에. 새로운 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못 견디는 놈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는 가짜 환자들은 베로니카에게 전부 다 쫓겨나고 있었다.

- 멍 든 것도, 치료, 할 수 있어. 전부 거절하지는, 않아도 돼.

덕분에 2주 동안 그다지 하는 일 없이 베로니카에게 수어나 알려주며 지냈던 히나는 결국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올 것 같아서 고양이도 두고 왔는데 고양이 밥 주는 일까지 사라져버리니 할 일이 더 없어진 까닭이었다.

히나의 말을 본 베로니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아무 상처나 전부 다 치유해달라고 하는 것도 버릇 돼. 잘못 든 버릇은 개한테도 못 주는 거라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

대체 앨런이 어린 손녀한테 뭘 가르친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베로니카는 이렇게 말했다. 히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 힘든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칼리안이나 플란츠의 상처를 치료할 때에 비하면 마법사들의 상처는 정말 솜털같이 가벼운 것이었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피도 없고 깊이 베여 벌어진 피부 사이를 들여다보게 될 일도 없으니까.

그런 히나를 보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직 몰라서 그래. 내가 왜 그랬는지 언니도 곧 알게 될 거야."

훈련장에 모여있을 마법사들이 '한 명을 대표로 뽑아서 마흔 아홉 대를 맞은 뒤에 찾아가보면 어떨까' 라거나 '칼리안 왕자님 이름 걸고 기사들이랑 한 바탕 싸워보면 치료 받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따위의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리라는 것을 히나가 언제쯤 알게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면서.

"고양이는 오늘 안 왔어?"

그리고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의 안부를 물었다.

- 비 맞으면 아플까봐, 두고 왔어.

"2왕자님이 봐주시는 거야?"

아르센을 대신해 바빠야 할 플란츠가 왜 아직 오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란츠가 아직 안 왔으니 고양이도 플란츠 방에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지금쯤 플란츠의 방에서 고롱고롱 자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히나가 대답했다.

- 아마 그럴 거야.

사람 좋아하는 고양이는 베로니카도 잘 따르는 편이었다.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안되는 녀석을 생각하던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고양이 이름은 계속 안 지어 줄거야?"

그 말에 히나는 언젠가 드미레아에게 이야기했던 설명을 한 번 더 해주었다. 칼리안이 왜 고양이 이름을 짓지 않는지에 대해서.

"아니야. 그래도 이름은 있어야지. 안 그러면 그 고양이는 평생동안 그냥 고양이인거잖아."

그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이렇게 말했다.

"평생을 그냥 고양이로 살다 죽을텐데 그 후에 그 고양이가 보고싶어지면 어떻게 불러보려고 그래. 이름이 없으면 그냥 사라지는 거잖아. 그러면 안돼."

아, 하고.

히나가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베로니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사람은 늘 떠나보낸 이후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지만 그것을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 보여서였다.

- 알았어. 꼭 지어달라고, 말씀드릴게.

다른 사람들이 조금 불편해도 수어를 배우고 히나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히나가 조금 불편해도 고양이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 일이니까.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 * *

툭, 투둑.

빗물이 창문을 두드린다.

'멍청하게.'

칼리안이 잘못했다.

답지 않게 플란츠의 유도질문에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발칸의 마법사들이 궁의 입구를 막았다.

무언가 숨겨야 할 것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칼리안은 그것이 브리센이나 실리케와는 연관이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답이 나왔다.

칼리안이 입을 열 생각을 않자 의자에 등을 묻은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에 숨겨진 것이 있었을테고."

잔해가 남아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잔해 속에서 발견된 물건을 숨기려 했으리라는 의심을 해보겠으나 마법사들은 분명 잔해가 모두 치워진 이후에 움직였다. 그래서 플란츠는 건물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은 곳, 즉 지하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으리라는 가정을 했다.

"······ 헤이시아에는 지하가 없고."

아무리 실리케와 가깝지 않았다지만 플란츠도 헤이시아 궁에 가보기는 했다. 지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만큼은 가봤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헤이시아는 단 한번도 개축된 적 없었다. 그러니 건물을 건축할 당시 뭔가를 숨겼다는 소리가 된다.

"내 아우님께서 나서서 나를 막을 정도의 일과는 연관이 있고."

더불어 칼리안이 마법사들을 움직여서 굳이 플란츠의 접근을 통제할 정도가 되려면 플란츠가 알아서는 안될 중요한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일 터였다.

이를테면, '새 좋아하는 놈이 다스리던 나라에서 시퍼런 귤이나 까드시던 연세 모를 미친놈이 어쩌다보니 내 동생이 되어서는 맨날 짖다 가끔 무는' 그런 일 말이다.

그런 일에 관련될 수 있으면서 헤이시아 궁의 아래에 무언가를 숨길 만한 이는 단 한 명 뿐이지 않나.

시스파니안.

"시스파니안이 뭔가를 숨겨놨고 이번에 발견됐다는 건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플란츠 성격 상 알아내려 마음 먹은 일은 어떻게든 알아낼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것을 꼭 들어야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꽤 많은 말을 한 플란츠는 더는 입 열기 귀찮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적당히 둘러대서 납득할 놈이 아님을 안다.

그곳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를 알면 그것이 어떤 물건인지 전부 다 알려고 들 것이다.

관심 가지지 말라는 의미로 '브리센이나 실리케와 관련이 없다'고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이미 정답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 없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긴 한숨을 뱉었다. 그 끝에 진심 가득한 말이 듬뿍 묻어나왔다.

"아무래도 내 형님께서는 축복을 머리로 받으신 것 같은데······."

"짖는 거 말고. 말."

대충 넘어가려 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에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희멀건 놈이 '과거'의 자신이 시간의 축 뺏겠다고 전쟁냈다는 사실을 알면 또 절인 양배추같은 낯짝이 될까봐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의 축은 발칸과는 달랐다.

발칸이 강했는지 묻고 강했다고 대답해주고. 그것과는 달랐다. 적어도 칼리안에게 있어서 시간의 축은 그 자체로 베른이었다. 베른의 생이었다.

"······ 그것 참."

칼리안이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떼어 창 밖을 쳐다봤다. 빗물에 번진 창문으로 가려진 탓에 바깥의 모습이 일렁이듯 아른거린다. 그것이 꼭 베른에 대한 기억과도 같았다.

밖을 보려 창을 열면 비가 들이치고 몸이 다시 젖을 터였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언뜻 보이기만 하는대로 그렇게 창문을 닫아 두었다. 눈에 보여도 잡을 수 없으니 그냥 흘러내려가 어느새 잊혀지도록.

지워진 이름처럼 그냥 그렇게, 닳아가도록.

그리 해 두고 있었는데.

"내 형님께서는 왜."

칼리안의 붉은 눈이 다시 맞은편의 플란츠를 향했다. 향하다가 이내 아래로 떨구어졌다. 테이블로, 찻잔으로, 그 아래 어딘가 있을 칼리안의 밑바닥으로.

마치 빗물에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 밖 풍경처럼,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만 굳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살짝 감춰 둔 기억.

지금의 칼리안이 아닌 베른의 마지막 날이 담긴 곳으로.

"······ 잘 닫아 둔 것을 기어코 열어보려 하시는지."

그리고 이렇게 물어봤다.

왜 그렇게 확인하려 하느냐고. 그 때의 당신과 같은 사람이 아닌 것도 이제 알면서.

"부수는 것이나 여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물끄러미 영롱하게 빛나던 헤이시아 궁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리케가 있던 그림자를 부서뜨려버린 칼리안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단 하나 남은 흔적까지 없애버리고 기어코 살게 만든 것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 때와 똑같다는 말을 하고 있을 뿐.

"그대로 두면 썩는 것도 똑같을 텐데."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어코 살고 있는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잃어버렸다며."

칼리안은 지금 이 말이 '온 생을 잃었다' 했던 자신의 말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했다.

지금 플란츠가 똑같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똑같이 일방적이고 이기적으로 내미는 손임을 알아보았다. 비가 들이치든 말든, 비에 젖든 말든, 춥든 말든, 아프든 말든. 창문 밖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알려달라고.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그 원망, 한 번 쯤은 들어줄 테니까."

칼리안이 시선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자신을 보는 연두색 눈을 쳐다봤다.

그 날.

먼 곳에서 지켜보던, 이미 시들어버린 눈과는 완전히 다른 눈을.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런 뒤에야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친놈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하라는 원망은 안하고 욕만 했다.

같은 놈도 아닌데 원망을 왜 하나. 이 참에 욕이나 해야지.

이 정도면 됐지.

그리고는 자신을 딱 마법사 보듯 쳐다보는 플란츠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시스파니안을 만났을 때 칼리안이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판이 크다고. 그러니 아직까지는 섣부르게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해서 못 엽니다. 내 형님께서 아직도 되게 여리고 약하셔서."

"내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두시겠지."

또 이렇게 사람 복장 터뜨리는 소리를 지껄인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원망 끝났으면 됐고 궁금한 것은 여전히 알아야겠는데. 위험해지면 그 때의 되게 강한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놓으실테니 지금의 아우님께서는 걱정말고. 말해."

칼리안이 뭐 이딴 놈이 다 있느냐는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보다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일어나시죠. 보여드릴테니까."

결국 비를 맞게 생겼다.

허락의 말을 꺼낸 칼리안이 조용히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어떡하지.

실수로 죽여버릴 뻔 했을 때 그냥 죽여버릴 걸 그랬나봐.

제27장. 지금이었다면 (5)

잿빛 비둘기 한 마리가 창가로 날아왔다.

그리 특별할 것 없을 외형을 가진 비둘기의 부리가 톡톡 하고 창문을 쪼았다.

오래지 않아 창문이 열리며 햇빛에 그을리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조심스레 새를 감싸잡았다. 신기하게도 새는 도망가지 않고 얌전히 그 손에 잡혀들었다.

부작용이 크고 그 성격이 잔인한 흑마법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 시스파니안의 의지에 따라 대륙에서의 사용이 전면 금지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만 흑마법 중 하나인 '테이밍'만은 위험요소를 배제한 일반 마법으로 변형 개선된 뒤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사용이 허락되고 있었다.

지금 막 창문을 두드렸던 새에게 바로 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주인의 위치를 인지하거나 날아가야 할 곳의 좌표를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전서구인 것이다.

"조금 늦었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날아온 전서구를 안아든 기사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차 한 잔을 들고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이가 이렇게 말했다.

밤새 무슨 고민을 그리 했는지 몰라도 새벽이 되어 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막 씻고 나온 뒤인지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청은발에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는 여정을 함께 할 수행원에 시종과 시녀를 한 명도 포함하지 않았다. 기사는 자신의 주인이 시종들을 왜 데려가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짐작을 했다. 카이리스 왕궁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닐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짧게 잘라버린 그의 머리카락을 잠시 쳐다보던 기사 테일란이 대답했다.

"날이 좋지 않아 도착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새가 날기에 좋지 않은 날씨이기는 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전날 밤부터 내렸던 비 때문에 세크리티아로 돌아가던 발이 잠시 묶였으니 말이다.

"하긴 그렇지."

그렇게 대답한 체이스가 손을 내밀자, 테일란이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 있던 편지를 건넸다. 곧 보랏빛 눈으로 편지에 적힌 내용을 스치듯 읽어낸 체이스가 테이블에 놓인 향초의 불에 쪽지를 태웠다.

- 한낮의 사신, 늑대 사냥꾼, 둥지 떠남. 새끼 그리핀 혹은 방울뱀 소굴 방향. 말쥐 심부름꾼 40마리 떨어뜨림. 말쥐 발자국 없음.

그것이 언제든 짙은 먹구름을 불러와 죽음을 선고하는 에우리아. 스승과 함께 대사막을 누비다 충돌했던 대사막의 전사들을 학살한 아르센. 세크리티아 세작들이 그들 나름의 존중을 담아 지어 준 별명이었는데, 그 이름들이 이 쪽지에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쪽지는 에우리아와 아르센이 카이리시스를 떠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령 혹은 텐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던 중 '그들'의 하수인 마흔 명을 죽였으며 '그들'이 속한 단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다른 단서는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다 죽여버렸다니."

언제나 부드럽던 체이스의 눈매가 차가운 빛을 내며 가라앉았다.

세크리티아의 새들은 지금 그 단체에 대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잔당을 쫓은 결과를 보내야 했으나 그 대신 에우리아의 개입으로 무산되었음을 담은 연락을 보내 온 것이다.

찬 기운과는 어울리지 않을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들이 생각보다 더 덩치가 컸나본데. 마법사들은 생각만큼 강하고."

체이스는 에우리아가 '검은 돌'에 대해 조사를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단체가 무엇 때문에 에우리아와 충돌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마흔 명이나 되는 하수인을 부릴 수 있다는 것에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으며 미지의 힘을 이용하고 있을 이들 마흔 명을 두 명의 마법사가 모두 죽였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힘에 대해서는 직접 겪어본 기억도 있었으니까.

"간신히 잡은 꼬리인데 놓친 셈이 되나."

그리고는 이렇게 조금 아쉬워하는 말을 꺼냈다.

단체의 하수인들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그들의 뒤를 쫓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단 두 명의 마법사에게 모조리 죽은데다 다른 단서까지 없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보라색 눈을 내리 뜬 채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두드리던 체이스가 테일란을 향해 말했다.

"협회장 뒤는 쫓지 말고 수도로 돌아가서 다른 단서 없는지 다시 조사하라고 전해줘. 자칫하다간 협회장 손에 내 새들도 다치겠네."

"알겠습니다, 저하."

그렇게 대답한 테일란이 그대로 서 있었다. 보통은 할 말이 끝나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체이스의 뒤를 지키거나 밖으로 나가던 테일란이었으므로 체이스는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얘기해."

"카이리시스의 새들이 많이 줄었는데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테일란은 그저 '많이' 라고 이야기했으나 사실 카이리시스에 심어두었던 세작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태였다.

체이스의 명을 받은 테일란의 검이 휘둘러진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정황을 보이는 것이 체이스의 눈에 띈 새들이 전부 테일란의 손에 죽었다. 미세한 의구심 하나 넘어가지 않고 가차없이 구분지어 모조리 죽였다.

칼리안이 체이스를 찾았을 때나 플란츠가 체이스와 만났을 때 테일란이 함께 없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새장에서 벗어난 새들이 새장 밖에 무엇이 있는지 채 알기도 전에 전부 없애버린 것이었다.

제 손으로 키워냈던 새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어들인 체이스가 낮은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장은 늘리지 않으려고."

카이리스 국왕이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 이상 곧바로 수를 채워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체이스는 무시하기 어려울 타격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감안하고 새들을 죽였다. 그러니 이제 와 아쉬워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언제든지 보낼 수 있게 돌아가는대로 준비는 해둬."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일란의 발이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찻잔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채였던 체이스의 눈동자가 그 발 끝을 따라 움직였다.

조금 전의 눈빛 만큼 차가워진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 곳에서의 일, 전하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하는데."

거부한다면 테일란 역시 버리겠다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 평온한 말투였으나 테일란은 결코 거역할 수 없을 명령이었다.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테일란은 알겠다 답하는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것만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카이리시스의 세작들이 조사하던 것을 멋대로 바꾸고, 세작들을 멋대로 움직이고, 은거지를 바꾸고, 세작들의 존재를 카이리스 국왕에게 알리고, 세작들을 죽여 없애고.

데블란이 알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일.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 가며 카이리스의 왕자 한 명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심지어 대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로.

체이스의 고개가 곁에 서 있던 테일란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잔잔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깊은 숲을 담은 눈으로 테일란을 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냥. 잃어버린 동생 찾은 것 같아서."

말도 안되는 진실. 거짓보다 믿기 어려운 진실. 그러니 절대로 의심받지 않을 진실.

오로지 진실 뿐인 대답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임을 결코 알지 못할 테일란이 체이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카이리스 3왕자에 대한 첫인상이 어지간히도 좋았나보다 하는 얼굴이었다.

왕위에 오르기에 부족함 없던 3왕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향후 양국 관계를 위해 그렇게 도왔던 것이겠지.

"알겠습니다. 전하께는 함구하겠습니다."

알아서 판단하고 넘긴 테일란의 대답에 오랜 시간 말 없이 앉아있던 체이스가 비에 젖은 얼굴로 웃었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민트의 향이 코 끝을 스쳤다.

* * *

예상했던 것처럼 비를 맞았다.

헤이시아 궁을 향해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시간의 축이 있는곳을 향해 한 발을 더 다가갈 때마다, 조금씩 더 많은 비를 맞았다.

비가 오는 것을 알았고 비를 막을 우산을 가지고 나섰으나, 몰아세우듯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비를 맞았다.

- 내 어머니가 그리 애써가며 걸어간 길에. 그것 말고 다른 끝이······ 있기는 할까.

문득. 정말 문득.

뒤따라 오고 있는 플란츠의 말이 생각났다. 발이 향하는 곳이 헤이시아였기 때문일지 다른 상념이 들었던 까닭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각났다.

그날 칼리안이 플란츠의 손을 잡지 않았거나 혹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늘의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떠올랐을 수도 있겠다고, 칼리안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문득 떠올랐던 말이 시작이 되었다. 헤이시아 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 때마다 한 마디씩. 놈이 했던 말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 기억은 하나보지.

사람의 걸음에는 늘 끝이 있는 법이라.

칼리안의 걸음도 마찬가지였다. 되짚어 올라가던 걸음과 헤이시아로 향하던 걸음이 모두 멈췄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물에 빠진 완두콩이 보였다.

칼리안의 뒤를 따라 온 플란츠라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플란츠 역시 같은 비를 맞았다. 맞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지 못했다.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다시 발을 옮겼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닫아두었던 창문이 있던 방을 향해서.

- 너. 누구냐고.

그리고 이렇게 떠오르는 말들을 되짚어가며 칼리안은 조금씩 자신의 밑바닥을 향해 고요하게 잠겨들어갔다.

멀리 빗소리가 멀어져가고, 숨 막히는 정적 속에 두 왕자의 발소리만 고요히 울려퍼졌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며 옷이며 칼리안은 그냥 내버려 뒀다. 플란츠에게 괜한 친절을 베풀 생각도 하지 않았다.

-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결국 누구도 온전히 불러주지 않고 누구의 기억에도 온전히 남지 않게 된 이름을 스스로 떠올리기에도 벅찼던 탓이다.

탁.

그 방.

감춰진 것을 다시 숨겨둔 그 방 앞에 도착한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던 플란츠의 얼굴이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그 연두색 눈을 응시하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베른에 가까워진 만큼 달라진 목소리.

버거울만큼 무겁고 놓고 싶을 만큼 괴롭고 외면하고 싶을 만큼 아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체이스가 그러했듯이.

만약 기억이 돌아오는 방법이 시간의 축을 마주하는 것이라면, 플란츠 역시.

"기억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칼리안조차 알 수 없는 일.

빼앗는 것 싫어하는 플란츠가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킬 만큼 망가진 이유. 혹은 무언가를 빼앗아야 할 만큼 절박했던 이유. 어쩌면 그것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저 안에 있는 것을 마주하면 형님께서도 '과거'의 일을 기억하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똑같은 악몽을 겪게 될지 모릅니다. 저조차 알 수 없는 일을 떠올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는 체이스가 어떻게 칼리안의 본모습을 알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확실치는 않겠지만, 체이스 역시 안에 든 무언가를 접했고 그로 인해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칼리안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의 얼굴을 마주 응시했다.

무겁고 괴롭고 아픈 단지 그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표정의 칼리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열어. 같이 봐줄 테니까."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돌아온 체이스를 잠시 형제로 대했던 것처럼 기억이 돌아온 플란츠를 적으로 대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그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서서 플란츠로부터 등을 보였다.

"네."

그것이 고민에 대한 답이자 칼리안의 결정이었다.

타인으로부터든, 과거의 그림자로부터든, 지켜내면 될 일이니 어려울 것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마쳤다.

- 그르릉······.

작은 소리와 함께, 비로소 문이 열렸다.

제27장. 지금이었다면 (6)

두 번째로 찾은 시스파니안의 공간은 한층 서글프다.

괜스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동행한 이가 달라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칼리안은 잠시 앨런을 생각하려 애썼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뒤따르던 플란츠를 향해 이런 당연한 사실을 담백하게 입에 올린 뒤 뚜벅 뚜벅 걸어가 시간의 축 파편 앞에 섰다. 말 없이 걸어 온 플란츠가 칼리안의 옆에서 발을 멈췄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잠시 축의 파편을 훑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플란츠로부터 시선을 돌린 칼리안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베른.

이제는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유일하게 온전한 기억. 그것을 담아두었던 깊은 곳의 창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평생을 돌아서 살았던, 지키며 살고 지키려 싸웠던, 끝내 지키지 못하고 죽었던 베른이 되어 눈을 떴다.

그 눈으로 앞에 놓인 황금빛의 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시간의 축."

그것이 칼리안에게 그리고 플란츠에게 독이 될지. 아니면 약이 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채로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본래 세크리티아에 있었고 '지금'의 시간대에도 작년까지는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라졌다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 이 곳에서 이렇게 일부분만 남은 채 발견됐습니다."

문득 꺼내놓는 누군가의 옛날 이야기처럼, 오늘 아침에 들은 부풀려진 경험담처럼, 꽤 그럴싸한 책 속의 설화처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이 이어졌다.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물건입니다. 신물이 아닐까 여겼으나 정확히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베른이 어울리지 않을 붉은 눈을 돌려 플란츠를 향해 섰다. 그런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원망은 아니었지만 조금쯤 궁금해하는 얼굴을 한 채였다.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을.

"어느 날 이것을 사이에 두고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베른과 체이스가 플란츠로부터 이것을 지키려 했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말해서 상처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누군가가 겪었던,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참극이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그저 두 나라의 전쟁일 뿐이다. 원인도 결과도 분명한 단순한 전쟁. 언제나 있어왔던 그런 전쟁 말이다.

누군가는 이겼고 누군가는 패했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단지 그 뿐임을 지금의 베른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플란츠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단어를 골랐다. 그것이 베른이 내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식 같기도 혹은 자조어린 비웃음같기도 한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플란츠는 똑똑했다.

베른이 내어준 배려를 무시하고 굳이 한 발 가까운 곳까지 걸어와 베른의 말을 들었다. 언젠가의 플란츠가 저것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음을,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참상을 겪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고작."

이 곳에 숨겨진 것.

플란츠가 함께 알고 있기를 종용한 비밀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 그것까지는 플란츠도 가늠해내지 못했을 터였다.

"고작 저것을 빼앗자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흔들린다.

플란츠는 이곳에 숨겨진 것이 베른의 비밀과 관련된 어떤 물건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칼리안이 꾹꾹 눌러담고 있는 베른의 일들에 대해 함께 알고자 했으리라고. 베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베른의 죽음과 세크리티아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야기한 원인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네. 고작 이것을."

이렇게 대꾸한 베른이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여전히 숨을 쉰다. 플란츠 역시 숨을 쉬고 있으니 둘 모두 아직은 살만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랜 생각을 하도록 두느니 다른 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 테니까.

"사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매 한 마리의 발목에 묶인 편지에 쓰여 있더군요.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을 달라고. 이유조차 제대로 적혀있지 않은 요구였고,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베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는 짧은 서신이었다. 그것을 돌이켜보니 지극히 플란츠다운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말 귀찮아하는 플란츠라면 그런 편지를 보내고도 남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에, 잠깐 웃었다.

참 아프게도 웃었다.

처음으로 앨런에게 베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날. 앨런은 '시간의 축과 관련된 일로 체이스와 베른 모두 나를 찾았으니 둘이 형제는 형제인가보다'라고 말했었다.

그 때 꺼내졌던 앨런의 말에 지어보였던 것 같이 비슷하지만 또 많이 다른 의미가 담긴 아픈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었다면. 당신의 그 짧은 말을 내가 알아봤을까."

지금이었다면, 미친 왕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한다 여기기 전에 무슨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지 알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글자로 적히지 않은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뭐 어쨌거나 이미 늦었으니까. 그건 됐고. 아무튼."

편지 내용을 다시 떠올려 곱씹어보지는 않았다.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봐. 그것이 우습고 무서워서.

말 없이 서 있는 플란츠에게서 축의 파편으로 시선을 돌린 베른이 고리의 테두리에 적힌 알 수 없는 문자를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새를 되돌려보낸 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란츠의 고개가 베른을 향해 돌아왔다. 베른은 말 없이 잠시 서 있었고 플란츠가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

확실히 이상하다.

카이리시스와 세크리티아는 그 정도로 가깝지 않다. 그런데 새가 다시 날아가고 한 달이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지다니.

"당신도 이상하다 여기는데. 우리는 오죽했을까."

그 예고 없는 전쟁 앞에서 오죽 놀라고 오죽 당황하고 오죽 절망했을까 라는 말 대신, 베른은 그냥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농담처럼 가볍게 대꾸했다.

"카이리시스에서 세크리티아까지 거리가 있는데도, 그렇게나 빨리 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다.

국경 인근에서 수많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 많은 군인이 국경을 향해 다가오는데 수많은 세작들은 그 어떤 정보도 전달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그들이 세크리티아를 배반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베른이 기억하는 한 그들은 충성스러운 새들일 뿐이었으니까.

"새들이 다 죽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비밀리에 준비를 해 두었을 수도 있고."

세작들의 배반, 세작들의 죽음, 혹은 이동 마법진, 등등.

이제와서는 가정들일 뿐이지만 세작들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전달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수 있다 한들 이미 많은 것이 틀어져 소용 없는 상태가 아닌가.

베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발발했습니다."

당시에는 더더욱 그랬다. 무슨 이유였는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군대를 확인했을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더 많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났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대로 발칸은 강했으니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영지는 건드리지도 않고 곧장 세크레타로 진입하더군요. 좀 쉬엄쉬엄 왔어도 좋았을 것을 어찌나 한결같은지."

그 말의 끝에 베른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 베른이 플란츠를 향해 얼마나 많은 욕을 했는지 플란츠는 죽어도 모를 거다.

"세크리티아의 기사단이 전멸했습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스승님, 기사 테일란 카스트린. 그가 발칸의 진입을 사흘 미뤘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마지막 준비를 했고 나를 뺀 모두가······ 죽었습니다. 나도 꽤 오래 버텼는데 밤이 몇 번 갔는지 아침이 몇 번 왔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아마 스승님께 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 발칸의 군단장이라는 이가 나섰고."

이름 물어보더니 공격하던 미친 마법사 한 명을 떠올린 베른이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결과는 이미 아시는대로, 이렇게."

그렇게 말한 베른이 자신의 몸을 툭 쳐 보였다.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됐다.

그런 의미를 담은 채였다.

거기까지가 베른의 기억이었다. 굳이 그날 본 플란츠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플란츠에게 있어 확실한 독일 뿐이니 입 밖으로 꺼낼 이유가 없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베른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한껏 흐트러진 기억을 다시 보듬었다. 손에 모인 것을 그러모아 칼리안의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다시 두었다.

그렇게 추스른 뒤 다시 칼리안으로 되돌아와 눈을 떴다.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는 플란츠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안의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드렸듯이 시간은 한 번 밖에 되돌리지 못한다 하였고 제가 온 그 날에 세크리티아에 온전히 있던 시간의 축도 사라졌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이렇게 다시 찾게 됐네요. 두 번 다시는 못 쓰도록 부숴버리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칼리안이 발을 뻗어 눈 앞의 허공에 발 끝을 몇 번 가져다 댔다. 툭툭 하고 무언가에 발이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플란츠가 원망하라고 기껏 내어줬던 자리를 굳이 마다하고 욕만 했던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모든 말을 들은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런 감상도 들어있지 않은 말이었으므로 칼리안이 묘한 미소를 띄워올리며 말했다.

"모으신다면 사용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게 되면 시간의 축을 다시 원하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플란츠가 가장 후회하는 것들을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고, 만약 '과거'의 플란츠가 그것을 원했던 이유를 기억해내면 다시 되돌리고 싶어질지 모른다는 말이기도 했다.

"말 끝나니 바로 짖네."

플란츠가 곧바로 대꾸했다.

"어떻게 해야 없어지는데."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며 물었다.

그것이 더는 기회도 아니며 축복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없애버릴 방법을 알려달라는 의미였다.

"아직이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시스파니안을 만나러 갈 생각인데."

시스파니안을 만난다는 말에 플란츠의 눈이 다시 가늘게 변했으나 칼리안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베른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 했지 칼리안에 대한 것까지 털어놓겠다고는 안 했다.

"일단 급한 것 먼저 해결해놓고 가려고요."

'급한 것'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임을 잘 알고 있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 칼리안이 석벽의 조각들을 한 번 쭉 둘러본 뒤 계단 쪽으로 발을 돌렸다.

"잠깐만."

그런 칼리안의 발걸음을 플란츠가 불러세웠다.

아직 물어볼 것이 있었다.

이제 막 나가려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네 이름. 뭔데."

칼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로 고개를 되돌린 뒤 밖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봤다. 베른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잠시 멍해져서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기억하는 것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알려달라고."

이왕이면 연세도 같이 알려주면 좋고.

플란츠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선 채로 가만히 있던 칼리안이 웃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속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속에 담아 둔 베른을 다 꺼내 보여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칼리안입니다, 형님."

그리고는 남은 감정 다 씻어낼 비 맞으러 곧은 걸음을 뗐다.

이번에도 연세는 알려주지 않은 채였다.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1)

비 오는 밤.

달은 분명 밝을 터였다. 다만 대지와 하늘 사이를 가린 저 먹구름에 가려 제 빛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안다.

언제나와 같이 밝을 것이 분명한 달조차 보이지 않는 비 오는 밤이란 또 얼마나 운치있는지. 그러니 분명 누구든 그 비 오는 밤이 참 기껍다 느껴지던 어느 날이 한 번 쯤은 꼭 있으리라.

물론 지금 잠자리를 마련한 곳이 야외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야외만 아니라면 기꺼웠을 터였다. 비와 함께 흘러내리는 어울리지도 않을 감수성에 마음껏 젖어든 채, 맥주든 혹은 카이리스에서 가장 독하기로 이름난 히몰리카든 아니면 무엇이어도 좋을 한 잔의 술을 손에 들고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떨어지는 빗물을 보며 애진작에 때려친 다른 속성의 마법에 대한 씁쓸한 추억이나 한 점 되새겨 보았을 터였다.

- 그 때 태워먹은 집이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았겠구나······. 하, 세월이란 어찌나 허망한지.

따위의 되새김 말이다.

"도무지 그칠 생각을 안 하네."

봄을 보내기 위한 비일지 아니면 여름을 부르기 위한 비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계속 비가 내렸다.

하지만 당장은 감상에 젖어들 수 있을 창문도 없었고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줄 지붕도 없었다. 지금 있는 곳이 따뜻한 실내가 아니라는 사실도 불만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손에 들릴 술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불만이었다.

"아. 술 마시고 싶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이렇게 본능에 충실한 한 마디를 꺼내드는 것으로 불만을 조금 털어냈다.

- 타닥, 타닥.

마치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내어놓듯.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티 하나가 허공으로 비산하다 어느새 꺼져 사라졌다. 가망 없는 희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서 에우리아는 더욱 커진 불만을 가득 담은 눈으로 빛이 사라진 곳을 좇았다.

곧 에우리아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했다.

"나도 참 사서 고생이지."

그 말 그대로였다.

동행하고 있는 아르센이야 칼리안의 명 때문에 가야 할 길이라지만 에우리아는 아니었다. 심지어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이곳에 왜 왔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남들 몰래 핑계를 대가며 이 자리까지 온 것은 그저 에우리아 스스로가 자처한 고생이 맞았다.

"알고는 계셔서 다행입니다."

누군가가 에우리아의 말에 말대꾸를 했다. 당연하겠지만 아르센이었다.

"여기 이렇게 사지도 않은 고생 하는 사람도 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십시오."

녹지 않을 얼음막을 만들어 지붕 삼고 비에 젖은 땅과 장작을 마법으로 말리고 쉬이 꺼지지 않을 불꽃을 일으켜 장작에 붙였다.

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부려지는 아르센이 혼자 했다. 그러니 불만이 잔뜩 쌓여 있을 밖에.

"뭐, 그럼 내가 해?"

아르센의 말을 들은 에우리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내가 너보다 더 세고 내가 너보다 더 감성적인데. 왜 그걸 내가 하냐. 내리는 비 감상하기도 바쁜데.

"그나저나 저 짹짹이들은 이 빗속에 밥은 챙겨 먹고 다니나 모르겠네."

에우리아가 모닥불에서 튀어오르는 불티들을 계속 눈으로 따라가며 말했다. 인근까지 마나를 확장시켜 체이스의 세작들이 여전히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본 뒤였다.

"밥이라도 챙겨주시려고 그러십니까?"

"겁대가리."

"네 다시 찾아왔습니다."

뭐 한 마디 할 틈을 안 준다.

가히 학살이라 해야 할 광경을 자아내며 마흔 명을 나란히 저승길로 보내더니 어울리지 않게 남의 끼니 걱정이나 하고 있는 에우리아를 슬쩍 쳐다본 아르센이 물었다.

"놈들이 왜 따라붙는 것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어 몰라."

그렇게 대답한 에우리아가 약간의 화를 담아 입을 열었다.

"하루만 더 따라오면 다 잡아버려야지."

새들이 따라붙는 것을 알고 이리저리 경로를 바꿔가며 오는 통에 일정만 지연됐다. 덕분에 비 오는 날 술도 못마신다. 그러니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그 말에 사지도 않은 고생에 이제는 도가 튼 아르센이 열심히 멧돼지 고기를 뒤집어 익혔다. 혹시라도 새 대신 파란 머리 마법사 잡으려 들까봐서였다.

고기는 씹는 맛이 제일이라는 에우리아의 말 때문에 안그래도 근육질 가득한데 두툼하게 썰기까지 한 고기가 쉬이 익지 않았다. 심지어 고기는 익히는 사람의 정성만큼 맛있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은근슬쩍 마법으로 익히려던 것까지 포기했다.

그래서 멍한 눈으로 고기가 느릿느릿 익어가는 것을 보던 아르센이 화제를 바꾸려 다른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는 정말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지금 어디로 왜 가시는지요."

"위험하니까 너는 꺼져있으라고 예쁘게 말씀하실 것 뻔한데 뭐하러."

물론 예의범절 중시하는 칼리안은 그렇게 말 한 적 없었다. 그냥 의미가 그렇다는 소리다.

아무튼 에우리아는 칼리안이 지닌 검은 빛의 돌에 대해 조사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명의 학자가 '신물을 만들 수 있다' 주장한 기록을 보았고 그 자가 마지막으로 살았다고 알려진 연구실에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칼리안을 습격했던 단체의 놈들을 만났다. 그래서 다 죽였다. 그 뒤로 따라 붙은 것은 재밌게도 놈들이 아니라 체이스의 새들이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지금 놈들도 죽여버릴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세크리티아의 왕세자도 같은 것을 조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고기 탄다."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니라 진짜 탔다.

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에우리아는 고기만 걱정했다. 관심 두는 것 외에는 눈 돌리지 않는 소신있는 모습. 이 얼마나 실력있는 마법사다운 면이란 말인가.

멧돼지 잡아 왔을 때의 마음을 담아 정확히 열 여덟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고기를 서둘러 뒤적거린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쳐다봤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지. 그 왕세자가 왜 우리 왕자님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알 수가 없어.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면 잘 지내보려 도와주는 것 아닐까 싶다가도 도와주는 티도 안 내는 걸 보면 그도 아닌 것 같고."

일반적으로 대가를 바라고 도움을 줄 땐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중에 이 정도는 해라' 하고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체이스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에우리아가 이상하다 여기는 것이었다.

"티내는 것 하나 없이 그냥 신경을 써. 심지어 마나실 백작님은 그걸 당연하게 여긴단 말이지."

"군단장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아르센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은 왕자님을 도와 마땅하다고 여기는 분이 바로 마나실 군단장님 아닙니까. 그러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자님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체이스의 도움을 그 칼리안이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사소한 것 하나 대가 없이 받지 않는 것이 칼리안 아닌가. 그런데 체이스의 도움만은 주섬주섬 잘도 받았다.

"그런 왕자님이 도움을 그냥 받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속 모를 도움 받으시는 분 아니니 그냥 두십시오."

아르피아 궁 앞에서 마주했던 체이스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고기를 뒤적거렸다.

궁금한 것 못 참는 마법사가 이렇게 말을 한다. 다 이유가 있을테니 그냥 믿고 넘기라고.

놈들과의 두 번째 싸움이 있던 날. 체이스에게 앨런을 보내고 칼리안에게 기사 테일란을 보냈던 둘을 생각한 에우리아가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입술을 오므려 닫았다.

"그나저나, 협회장님 혼자 가시기에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칼리안에게 그리 큰 해를 입힌 것은 소드마스터에 가까운 검술을 지닌 이였다고 했다. 상대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음에도 칼리안이 당했다는 뜻이다. 만약 지금 에우리아가 쫓아가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라도 그런 실력을 지닌 이가 있다면 에우리아 역시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너 데리고 갈 거잖아."

아르센은 그래도 꽤 여러번 칼리안과 대련을 했다. 게다가 그 동안 상대해왔던 이들도 대체로 검을 쓰는 이들이었다. 그러니 움직임 빠르고 제대로 검술 사용할 줄 아는 기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아르센이 나을 때가 많았다.

이미 자신을 데리고 목적지로 갈 생각을 했다는 말에 아르센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할 일 있습니다."

"어. 거기 나도 같이 가려고. 나도 도와줄테니까 꼬맹이 너도 도우면 되겠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변경백령의 불빛을 보며 아르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변경백령에도 할 일 있지만 발칸에도 일이 쌓였을 겁니다. 놈들 분명히 제멋대로 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플란츠 부군단장님이 제 일 도와줄 위인도 아니고 말입니다. 게다가 수도에 노는 마법사 많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에우리아는 화를 내는 대신 곱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한 마디를 꺼냈다.

"이동 마법진 거의 다 완성되고 있어. 도와주면 태워줄게."

이동 마법진 따위로 꼬시려 들다니.

아무리 이동 마법진을 한 번도 이용해본 적 없다지만 사람을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니냔 말이다.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다 익은 고기가 가지런히 놓인 접시를 에우리아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협회장님. 저만 믿으십시오."

이것 참.

마법사들이란.

* * *

칼리안은 늘 그랬다.

굳이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미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칼리안이 베른을 꺼내든 날에는 검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늘 그랬다는 것을 플란츠는 알고 있었다.

"형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빌헬름."

그래서 플란츠는 계단을 모두 올라온 뒤 헤이시아 궁을 나서려다 말고 물어오는 칼리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한 바퀴 하고도 절반은 더 돌아버린 것 같은 또 다른 부군단장이 남겨놓고 간 일을 처리해야 했던 탓도 있었고 체르밀로 돌아가면 그 어두운 방에서 또 생각이 이어질 것 같아서였기도 했다.

그렇게 할 일이 끝나고 나면 수련장에 가서 키리에를 붙들어 볼까.

어쩐지 오늘이라면 살기등등한 그 검을 제대로 받아봐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빌헬름 관. 훈련장으로."

대련을 하자는 소리였다.

무슨 생각인지 묻는 눈으로 쳐다보니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쯤 전하께서 체르밀에 계실 겁니다. 오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마주치기에는, 죄송하지만 조금 피곤하네요."

르메인이 온다는 이야기는 당연하겠지만 플란츠 역시 들었다. 다만 란델을 만나러 온다 했었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피곤하다면서 대련을 하자니."

르메인을 마주치기엔 피곤해서 대련을 하자는 말이 앞 뒤가 안맞는다. 하여튼 거짓말을 할 줄 알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놈이다.

그렇게 되나, 하고 피식 웃은 칼리안이 다시 대답했다.

"사실 딱히 갈 곳도 없고요. 이런 꼴로 어딜 가면 전부 걱정을 해서."

얀에게 가면 얀이 걱정을 하고 앨런에게 가면 앨런이 걱정을 한다. 심지어 레이븐까지 걱정을 하니 숲에도 못 간단다.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흰 고양이를 안고 다니면서도 당당하게 검은 옷만 입는 놈 아니던가. 물에 들어갔다 나온 꼬락서니는 놈의 주문 한 마디면 곧바로 멀쩡하게 바뀌는 것을 안다.

그러니 지금 저 말은 어줍잖게 둘러대는 두 번째 핑계일 터였다. 제 걱정 해 줄 사람 가득한 이 궁 안에서 아무도 걱정 안 해줄 플란츠가 신경쓰여서.

"······ 내 아우님께선 마음이 어찌나 넓으신지."

"그것을 이제야 아셨습니까. 똑똑하신 만큼 눈치도 빠르신 줄 알았는데요."

"짖지, 또."

한 소리를 했더니 한 술을 더 뜬다. 조금 전 시간의 축을 보던 그 표정을 고스란히 지켜본 사람을 향해서.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 하."

더는 할 말도 없어진 플란츠가 이렇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던지."

결국 또 이렇게 칼리안이 하자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은 정말로 동생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있겠나 싶어서였다.

그렇게 감추려던 것을 굳이 들춰내 헤집어 놓은 것은 플란츠인데 정작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칼리안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고 있으니 짜증나는 것을 참아 줄 밖에.

이런 플란츠를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뒤로 돌아 헤이시아 궁 밖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멈췄다.

방금 전 걸어나온 시스파니안의 방 안에서 무언가 느껴진 까닭이다. 곁을 돌아보니 플란츠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지키던 마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기운을 오로지 칼리안만 느끼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가시겠습니까."

"왜."

"만나러 가려 했더니 찾아오셨네요. 아무래도 저를 부르시는 것 같은데······."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느낀 것임을 눈치챈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더 숨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헤이시아의 주인 말입니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고, 칼리안의 입에는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2)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인데.

길을 나서면 비가 내리고 손에 쥐고 나면 놓게 되고 간신히 벗어나 올라오니 다시 내려오라 부른다.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운명이 잘못된 것인지.

하기사.

그토록 증오하던 놈까지 굳이 살리고자 살고 있으니, 틀어질대로 틀어진 삶을 두고 무언가를 탓하겠다 말하기도 힘겹다.

"하······."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한숨만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미련 없이 돌아섰던 헤이시아 궁의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그래도 베른을 떠올리며 잠겨드는 기분을 또 느낀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 생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 닫혀 있던 석문이 열려 있었다.

항상 잠시동안만 열렸다가 곧 닫히던 문이었는데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초대한 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니 이제는 익숙해진 듯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닫혔다.

칼리안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이 곳의 주인이 찾아와 있다는 것을.

문 앞에 선 칼리안이 내딛으려던 발을 멈췄다. 그리고 말 없이 앞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다.

날갯짓.

이 비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한 생명의 가느다란 날갯짓.

- 팔랑.

나비였다.

작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팔랑 팔랑 날갯짓을 해 가며 방 안의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다. 석벽의 조각을 제멋대로 둘러보듯이, 하지만 뒤따르는 눈길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날고 있었다.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다 사라지는 까만 빛무리에 시선이 머무른다. 만약 저 하늘 어딘가에 검은 별이 있다면, 그 별의 발자국을 흩뿌리는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팔랑, 팔랑.

곧 검은 나비는 날아다니는 것이 진부해진 것처럼 굴었다. 그리하여 그 날갯짓이 조금 느려진 것이 확연히 눈에 뜨일 때 쯤, 나비는 방향을 돌려 축의 파편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못했던 벽을 쉬이 지나 파편의 위에 보란듯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나비의 날갯짓같은 가느다란 호선을 입가에 그려냈다.

"검은 나비는."

그 작고 검은 나비를 향해 이렇게 말을 건넸다. 고작 나비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꺼내진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한 목소리였다.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나비가 날개를 한 번 팔락였다.

그러자 지금껏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던 검은빛의 입자가 나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나비를 중심으로 작은 우주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새를 냈다.

밤을 담은 색이 어찌 저리도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까!

칼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을 한 채 칠흑의 반짝임을 잠시 지켜봤다. 조금씩 모여든 빛무리가 어느새 작은 나비의 몸을 가릴 만큼 늘어나더니 점점 더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그리고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형태를 빚어나갔다.

인간의 것에 비견되지 않을 존귀함을 지닌 이의 모습으로 변화해갔다.

"그러니 오직 너에게만은 환영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의 끝에 그 반짝임이 잠시 머물다 천천히 사라져 갈 때 쯤. 나비이기도 했고 밤하늘이 담긴 빛이기도 했으며 스스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한 시스파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칼리안의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칼리안은 깊은 미소를 드리운 채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자신이라면 죽음을 반겨주리라는 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의 앞에 다시 한 번 나선 태고의 고룡,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말 없이 칼리안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해하고자 했다. 하여 다시 너를 불렀다."

지금 시스파니안은 그 존재 자체를 드높일 피어를 전혀 내보내고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고개 숙이고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스스로의 목을 졸라야 할 것 같은 그 대단한 공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감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 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래서 칼리안 홀로 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칼리안은 잠깐 고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살던 궁을 부숴버린 이유를 변명해서 이해시켜 드려야 할지, 혹은 시스파니안이 지나치게 사려깊어서 축복의 힘이 너무 약하다 욕했던 점을 사죄하는 것으로 이해시켜 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무엇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십니까."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봤다.

칼리안은 이제 막 방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은 발을 옮겨 마지막 조각이 새겨진 벽화 앞에 선 채로 대답했다. 둘의 거리가 꽤 멀었으나 마치 칼리안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었다.

"무엇이어도 좋겠지."

아······.

초대왕 하츠아라시여.

도대체 저런 분이 어디가 좋아서 청혼을 하셨습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한 분인데요.

이쯤되니 알겠다. 말이 짧은 것은 유전임이 분명하다. 르메인도 말이 길지 않고 란델은 아예 말이 없다. 심지어 나머지 한 놈은 삶은 완두콩이다. 놈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고 말해봐야 공기가 아깝다.

그런 칼리안을 본 시스파니안이 조금 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 칼리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시스파니안은 자신이 살던 옛 궁을 시원하게 없애버린 것을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다.

"재앙의 파편이 있는 곳에 걸음을 해도 될 이를 구분하지 않더구나."

재앙의 파편.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의 파편을 그렇게 불렀다. 시간의 축을 재앙이라 이름했다.

그것이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서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그 후에 시스파니안이 꺼낸 말의 뜻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지금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이 이 곳에 플란츠를 데려온 것을 질책하는 말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뒤얽힘과 무관한 이에게 사실을 알리고 시간의 축을 보여준 일에 대해서. 그 행동의 경솔함에 대해서.

"제게는 치유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느냐고.

"아무도 모를 칼날을 끌어안아 상처입고 짓무르고 곪아서. 썩은 것을 도려내고 도려내어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그리 살아야 할까요. 저는. 그래야 합니까."

원망.

그래 원망하였다. 화풀이를 하였다.

많은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시스파니안에게, 사실은 시스파니안의 귀를 빌려 세렌티에게. 화풀이 같은 원망을 전했다. 이미 잘 알고 이해하고 결정하여 받아들인 것임에도 그렇게 말했다.

- 사락······.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몸을 돌려 섰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 끝이 석벽을 스쳤다. 그 작은 소리가 심장 박동만큼 크게 들렸다.

시스파니안은 생명의 힘이 가득 담긴 듯한 그 붉은 눈으로 칼리안의 핏빛 눈을 쳐다봤다. 결국 자신과 같은 색의 그 눈을 깊이 내려다보다 고요한 바람결에 떨구어진 나뭇잎 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해하였다."

그렇게만 대답했다.

자신의 질책에 대한 칼리안의 대답을 이해했다고. 다 짓이겨지도록 힘껏 품어두었던 속마음을 이해했다고.

-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야 조금 전 플란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이 있는 곳에 재앙이 있는 곳에 플란츠를 데리고 들어온 칼리안을 보았다. 그 속내마저도 함께 보고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와주었다. 그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할 원망과 화풀이를 들어주려고.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려 깊은 고룡이 이 곳에 왜 왔는지를 이제야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 *

마법사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신기해서, 제 손으로 우산을 든 것이 조금쯤 어색했던 플란츠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이 형제의 미친짓에 겁을 먹기를 그만두었다던 말을 집어던지듯이 건네고 사라진 앨런이었다. 그 후로 이렇게 맞닥뜨린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물론 그동안 발칸의 일로 몇 번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 때마다 정신머리가 온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마법사 한 명이 꼭 끼어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플란츠 왕자님. 이런 곳에 홀로 무슨 일이신지요."

플란츠를 본 앨런이 예를 보이더니 곧바로 질문을 했다.

카이리스에서는 왕족이 예를 받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 수 없었고 리베른에서는 아니었다. 다만 앨런이 그 정도의 예법을 혼돈해서 이렇게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것일 뿐.

그래도 될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사실 플란츠 역시 예법을 잘 지키고 있다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랬다면 얇은 가디건 차림으로 밖에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서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에 맞을지언정 제 손에 들린 것 하나 없이 늘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 왕족이 아닌가.

플란츠는 앨런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빗속에 멀뚱이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같이 오다 훌쩍 가버린 동생놈 덕분에 어디로 가야할까를 다시 결정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갑자기 왕궁을 찾아온 전설 속의 조상님이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살아 숨쉬고 계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깊이 고민중이었다 해야 할지.

"당신은."

그래서 그냥 이렇게 되물었다. 왕자니까. 대답 쯤이야 안 하고 넘겨도 무방한 것이다.

예법을 챙길 때에야 왕족이 아닌 것이 좋지만 또 이럴 땐 왕족인 것만큼 편한 위치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꼬락서니를 보던 앨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뭐 하냐 묻는 말에 그러는 너는 뭐 하냐 되묻고 그에 대해 실례한다고 대답했으니 아무튼 지금 서로 할 말만 하고 있는 상황이 맞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런은 실례하겠다 말했으니 하고자 한 일을 계속 했다. 애초에 지금 하려는 일에 허락을 구할 생각으로 꺼낸 말도 아니었다. 플란츠가 왕자라면, 앨런은 앨런 마나실이니까.

- 딱!

경쾌한 소리가 앨런의 손 끝에서 나오자 비에 쫄딱 젖어있던 플란츠의 머리와 옷이 일순간에 마르며 깨끗해졌다.

그러고보니 칼리안은 끝끝내 플란츠의 옷을 말려놓지 않고 내려가버렸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건 됐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곧 다시 젖겠지만 잠시 찾아온 쾌적함이 영 싫지는 않았다.

"마법사.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쾌적해진 마음을 담아서 조금 더 정확한 질문을 해 줬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했지 않나. 그러니 앨런이 시스파니안의 기운을 느끼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닐 터였다. 만약 그랬다면 앨런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도 못했으리라.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그냥 좀 오래된 조상님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잠시 둘러보고자 왔습니다."

플란츠의 생각이 맞았는지 앨런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 플란츠가 이미 보았음을 몰랐으므로 '벽에 조각된 것을 다시 꼼꼼히 둘러보려 한다'는 방문 사유를 정확히 말하지 않은 채였다.

"나중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

가디건 끝이 다시 젖어드는지 조금씩 묵직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긴 것을 입고 나오지 말 걸 그랬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먼저 둘러보고 계시는 중이라."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이 곳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다 '아래' 무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안다는 듯한 반응이다. 때문에 앨런은 복잡해진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었어. 시간의 축. 내가 뭘 했는지도."

어차피 앨런은 칼리안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확실하게 알렸다.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누어 드셨다더니, 정말이었나 봅니다."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났던 날 사제간에 오고갔던 수많은 이야기 중 플란츠에 대한 말이 나왔었다. 체이스가 가져온 신 귤을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표정이 된 플란츠가 같이 먹었다는 말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앨런의 말 뜻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눠 먹은 게 하도 많아서 대체 뭘 말하는지도 몰랐지만 내새끼한테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은 앨런의 얼굴이 딱 짜증난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저보다 세 배는 넘는 세월을 산 대마법사에게 짖지 말라는 말을 할 만큼 위아래 없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그대로 입만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지요."

앨런은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뭐가 됐건 칼리안이 이미 지하에서 무언가를 확인중에 있고 플란츠가 방해하지 말아달라 얘기하고 있으니 굳이 아래로 내려가 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앨런은 바로 돌아가는 대신 잠시동안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당부하듯 말했다.

"혹여 나중에 악몽을 보시더라도, 그것을 감당하겠다며 스스로 쌓지도 않은 탑에 갇혀 지내지는 마시지요."

현명한 마법사는 제 자식같은 칼리안이 지금 무엇을 가장 걱정하고 있을지 잘 알았으니까.

"탓하고 책임 지우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살려놓기 위한 길을 홀로 걷는 분이니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세크리티아든 카이리스든 체이스든 플란츠든. 이유가 있어 망가져간 것을 전부 되돌려놓겠다며 끌어안고 있는 이가 아니던가.

"알아. 나도."

플란츠가 짧게 대답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면, 알아준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덕분에 앨런은 다시 한 번 내새끼 친구 보듯 플란츠를 쳐다보게 되었고, 덕분에 플란츠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 * *

검은 돌이 누군가 만든 신물인지 물었다.

시스파니안은 누군가 만든 것은 맞다고 답했다.

"이면의 힘을 담았으니 세렌티의 손길이 닿은 것은 아니다."

세렌티의 신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다만 또 한 번 늘어난 수수께끼 같은 말. 이면의 힘.

"너를 믿는 아이들이 나섰다. 때가 되면 너 역시 알 수 있겠구나."

시스파니안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못한다는 말을 대신해 이렇게 일러주었다.

믿는 아이들이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문득 에우리아가 떠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여전히 그것을 조사하는 중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축의 파편은 혹시 당신께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상에 나타난 것을 내가 이 곳에 두었다."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칼리안은 그 고갯짓을 따라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조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이것을 찾아와 이런 곳에 두셨습니까."

시스파니안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네가 직접 거두어야 할 물건이 되었으니."

칼리안이 이 재앙을 사용하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부서뜨려 없애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것만은 알려주지 않은 채.

마지막 조각이 새겨진 석벽 앞에 한동안 머무르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곁을 스쳐 날아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3)

칼리안이 생각에 잠기면 앞을 안 본다.

플란츠가 생각에 잠기면 시간 가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계단을 올라온 칼리안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던 플란츠를 못 보고 그대로 지나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방금 지나온 자리에 풀 냄새 날 듯한 익숙한 뒷통수가 있었음을 깨닫고 뒤를 돌아봤을 때 자신이 세워뒀던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는 희멀건한 놈을 본 칼리안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다.

그래도 칼리안은 앨런과는 조금 달라서 플란츠가 지금 왜 여기 서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잠시 발을 멈춘 채 플란츠를 향해 멀뚱히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람을 못 보고 지나친 것에 대한 사과가 먼저라는 상식이 있는 놈이었으면, 예의라는 것은 화염구 만들 불쏘시개로 삼은 듯한 그 파란 마법사를 부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애진작에 포기한 플란츠는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냐'는 표정만 짓고 말았다.

플란츠의 이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리안은 짧은 한숨을 쉬듯 실소하며 말했다.

"대련 말고 그냥 체르밀로 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속이 좀 헝클어져서."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시스파니안을 만나 심각한 대화를 한 것 같았다.

"배고프네요."

······ 그래서 배고프단다.

속이 헝클어져서 배가 고프시단다.

미친놈이.

숨겨놨던 밑바닥 보여주고 심장이 짓눌릴 것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태고의 고룡을 만나서 가볍지 않은 대화를 한 탓에 배가 고프다는 놈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그래. 허기가 들었겠지.

"하."

"드릴 말씀도 생겼고요."

그냥 밥만 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밥 먹으면서 할 말까지 있단다.

하기사. 속이 헝클어졌으니 일단은 다 잊고 좀 쉬어야겠다는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놈이었으면 헤이시아 궁을 이렇게 허허벌판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 체르밀."

때문에 포기한 듯 대답한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 앞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칼리안이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비 그쳤네요."

그 말대로 어느새 비가 그쳤다.

먹구름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방금 전에."

그것이 마치 시스파니안이 두고 간 또 다른 선물 같아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검은 나비의 모습을 한 채로 오셨습니다."

사실 플란츠도 플란츠지만 칼리안도 칼리안이다. 앞 뒤 없는 말을 하는 것이나 뜬금없는 말을 하는 것이나 도긴개긴 아니겠나. 그래서인지 몰라도 플란츠는 그게 무슨 짖는 소리냐 되묻는 대신 조용히 대답했다.

"하필 왜 죽음을."

앞에서 걷고 있으니 플란츠가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칼리안은 자신도 같은 생각을 했었음을 알려주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라면 환영하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대답은 못 드렸습니다."

"······ 그래."

잠시 말이 없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라져 잊히는 것 말고 죽는 것.

살다가 죽는 것.

칼리안은 자신이 사라진 이후의 부재가 무섭다 했으나 플란츠는 그 사라짐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안다.

죽음조차 잊혀지는 누군가의 부재조차 잊혀지는 그런 사라짐을 무서워 하고 있음을 안다.

플란츠는 이름도 듣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빈 자리. 그런 빈 자리가 또 생길까 무섭다며 플란츠를 온전히 살려두겠노라 하는 칼리안이 아닌가. 완벽히 사라진 한 명의 부재를, 그 부조화를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빈 자리를 채워 놓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똑똑하고 눈치 빠른 플란츠밖에 없을 것 같아서.

"너라면 그렇겠지."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를 잊혀짐까지 준비하는 칼리안에게 사라지는 것 아닌 온전한 죽음만큼 절실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러니 그것은 사려깊은 고룡이 오로지 칼리안만을 위해 건네준 기원이며 축복이자 위로였으리라. 부디 이번 생의 끝에는 사라지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그 뜻을 알아들었으니 칼리안은 결코 부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칼리안은 그러한 죽음이 지금의 생보다 안온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고자 하고 있으니 선뜻 긍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장의 안식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시스파니안은 그 소리 없는 대답을 알아서 다 이해했을 터였다. 같은 것을 이해한 플란츠는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계속 걸어갔다.

밥 먹으러.

* * *

꽃잎에 맺힌 빗방울은 여전히 투명하다.

장미의 짙붉은 빛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가도 툭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는 장미 가지의 초록색을 품고 바닥에 놓이면 젖은 흙의 갈색을 다시 품는다. 마지막에는 정원을 밝힌 마법 등불의 빛으로 잠시 반짝이다가 이윽고 흘러내려가 사라졌다.

빗방울은 정말로 투명하여 제 주변의 것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그 많은 색을 이미 전부 품고 있어 투명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담긴 것이 없어 공허한 것인지, 담긴 것이 너무 많아 공허해 보이는 것인지. 그것을 쉬이 알아낼 수 없을 짙푸른 눈이 저와 꼭 닮은 짙붉은 물방울을 잠시 바라봤다.

"이야기만 들어왔는데 정말 좋은 곳이구나."

그런 란델을 향해 르메인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석찬을 마치자마자 찾아 온 길이었다. 왕자의 것과 비견되지 않을만큼 불편한 길고 검은 망토까지 두른 채로 곧장 체르밀 궁에 왔다.

그 뒤에는 잠시 산책이라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며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넓은 방에서 란델을 꺼냈다.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란델은 그저 묵묵히 뒤를 따라왔다.

"이런 곳을 꾸려냈다니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장미 정원을 칭찬하는 말에 란델이 짧게 대답했다.

과찬이라는 말도, 아직 부족하다는 말도, 당신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르메인의 칭찬에 대해 스스로의 생각은 완전히 배제한 채 감사하다는 말만 전했다.

"그래."

아비가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현명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그래서 평생에 걸쳐 잘못만 해왔던 르메인이다.

그나마 배운 것이라고는 전부 다 르메인이 잘못했다는 것 뿐 과묵한 아버지가 더 과묵한 아들과 무슨 대화를 나눠봐야 하는지는 앨런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곳에는 붉은 장미만 있구나."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말하고 되는대로 질문을 했다. 무작정 이 곳으로 찾아 온 것처럼 무작정 물었다. 사실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것이 이제 와 너무 많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고작해야 붉지 않은 장미도 키우고 있는지, 장미는 언제 피고 언제 지는지, 가지는 어떻게 잘라내는지 따위의 쓸데 없고 소소한 질문들이었다.

"가시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려무나."

그 말을 들은 란델이 아주 잠시 발을 멈칫했다. 언젠가 이 곳에서 마주쳤던 이방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떠올라서였다.

그 왕세자가 말했던대로 결국은 가시에 찔렸다. 그래서 그 장미에 시선을 두었다. 상처를 입은 것이 문득 생소하여 가시 가득한 장미를 버리지 않고 옆에 두기로 했다.

그러니 그 이방인이 걱정한 것은.

상처 입을 손이었을까, 상처 입힐 장미였을까.

"왜 장미를 키우는지 궁금하구나. 왜 좋아하는지."

자신의 말에 란델이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소 같은 르메인은 이렇게 또 다른 것을 물어왔다.

다음에 다시 오면 질문할 거리가 하나도 없을텐데도 그냥 전부 다 끄집어내어 물었다. 잠시 떠올랐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와 함께 떠오른 칼리안에 대한 생각을 미뤄둔 란델이 조용히 대답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소소한 질문에 대해 돌아오는 것이라 하기에는 결코 소소하지 않은 답이었다. 그리하여 르메인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조차 잊어버리고 살게 된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아서. 그런 란델이 이제 고작 열 여덟이라는 것을, 오늘이 아닌 다른 날에는 더 많이 어렸으리라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그래. 혹여 생각이 난다면 언제든지 알려주면 좋겠구나."

그런 르메인을 가만히 응시하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전하."

처음으로 란델이 르메인을 먼저 불렀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말이 이어졌다.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기억을 되돌리는 것.

이 관계를 되돌리는 것.

그 밖에 다른 모든 것들 역시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말이었다.

되돌리고자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쌓아올리고자 온 것이었으나, 르메인은 그런 속내를 말하지 못했다. 르메인에게 있어서는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겠지만 란델에게는 이미 수도 없이 홀로 쌓아 올리다 결국은 무너진 관계임을 알았으니까.

"그래. 되돌리려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마음을 접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란델 쪽으로 무리해서 걷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비였으니.

여전히 사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 번에는 마주보았고 오늘은 조금이지만 같이 걷고. 지금 당장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 결코 란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같이 걷고 나머지는 또 다른 언젠가 어느날에 찾아오기로. 그런 생각에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비가 그치니 바람이 부는구나."

르메인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르메인의 긴 망토가 펄럭였다.

바람에 날린 망토 자락이 장미 가시에 걸렸다.

소 같은 르메인은 그것도 몰랐다.

"이만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란델이 그것을 눈치 챘을 땐 너무 늦었고, 르메인은 이미 늦은 뒤에 눈치를 챘다.

- 뚜둑!

비가 그치니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망토에 담겨서. 장미에는 가시가 있어서. 르메인은 소 같아서.

그래서 몇 송이의 장미가 제멋대로 꺾여 바닥을 나뒹굴었다.

란델의 푸른 눈이 떨어진 장미를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소 같은 르메인을 쳐다봤다.

한참동안 말도 없이 그렇게 르메인을 쳐다봤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한 눈빛을 감추지도 못한 채 르메인을 쳐다봤다.

"······ 죄송합니다, 전하. 먼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여전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모두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르메인은 란델을 마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예를 보인 란델이 뚜벅뚜벅 체르밀 궁으로 돌아갔다.

"아······."

란델의 뭔가가 달라지긴 했는데 뭐가 달라진 줄은 모르는 르메인이 뭘 잘못했는지는 안다는 얼굴로 입을 열어 뭔소린지 모를 소리를 냈다.

붉은 장미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 * *

잠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던 칼리안이 웃었다.

생각지 않게 플란츠의 방에서 하루종일 뒹굴거리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였다.

옆에 놓인 긴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뇨, 그냥. 소 뒷걸음질에 뭐가 잡힌 것을 봐서."

만약 이 말까지 플란츠가 이해했다면 칼리안은 오늘 또 한 번 놀랐겠으나 다행히 플란츠는 미간을 찌푸렸다.

칼리안은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전하의 멋모르는 걸음 때문에 란델 형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아마 다음에 만날 때에는 그래도 지금 보다는 낫겠네요. 전하의 손으로는 절대로 열지 못하셨을 문이 바람결에 열린 셈이라 해야 하나."

르메인이 뭔가를 했고 란델이 화를 냈고 다음에는 둘이 조금 나은 대화를 할 것 같다. 플란츠는 이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넘겼다. 그리고 얇게 저민 소고기를 여러 겹 겹쳐 튀겨낸 뒤 라즈베리 소스를 살짝 얹은 요리를 입에 넣었다. 튀겨낸 고기 속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피망의 향기를 애써 무시하면서.

그것을 시작으로 실로 우아한 형제간의 식사가 이어졌다.

언제나와 같은 하얀 빵과 짜지 않은 치즈가 올려진 아스파라거스 구이, 토마토 소스에 조린 닭고기, 양파 없는 샐러드 등등. 플란츠가 먹은 것의 네 배는 될 양을 먹어치운 칼리안이 플란츠보다 조금 늦게 식사를 마쳤다.

속이 어떻게 헝클어지면 저렇게 잘 먹어대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결국 얻은 것은 없고 의문만 늘어난 것 아닌가."

식기가 치워지고 따뜻한 홍차가 놓였다.

시종들이 모두 나가기를 기다려 지그프리드 영지와 헤이시아 궁에서 만난 시스파니안과의 대화를 모두 전한 칼리안을 향해, 플란츠가 이렇게 짧은 감상을 전했다. 결국 얻은 것이 없다고.

은은한 과일 향이 맴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시스파니안은 말에 제약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사람이 꼭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서. 아 사람은 아니지만요."

시스파니안이 보고 있던 석벽.

마지막 조각이 새겨져 있던 석벽을 떠올렸다.

"저를 만났을 때, 유난히 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에 시스파니안이 떠난 뒤 가보았는데."

죽은 기사를 끌어안고 있던 세크리티아 대왕.

그런 대왕의 모습이 아주 잠시동안 바뀌었다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선 채로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조각이 조금 달라져 있더군요. 무언가를 이렇게 손에 든 것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자신의 팔을 조금 벌려 둥근 것을 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취해 보였다. 시스파니안의 방, 그 석실 한 가운데 놓여 있던 고리 정도의 크기를 지닌 것을.

"그것을 보니 마지막 전투에서 시간을 돌렸을 리는 없을텐데. 왜 시간의 축을 지니고 마지막 전투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무언가를 조금 더 생각하듯 눈을 내리떴다. 그리고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을 제가 거두어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그것을 가진 뒤 시간을 다시 한 번 되돌리거나 파괴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라."

같은 언어가 씌여져 있던 검은 돌.

란델의 힘이 닿은 장미의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했던 검은 돌이 떠올랐다.

그것이 만약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무언가를 흉내낸 힘을 담아 만든 것이라면. 그 무언가가 시간의 축이라면.

"그것으로 아마도 '그들'이 사용하는 비정상적인 힘에 대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리안이 거두어야 한다던 시간의 축에는 어쩌면 칼리안이 가질 수 있는 다른 힘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칼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4)

아르센의 파란 눈은 서늘한 빛을 띤다.

아르센의 눈 역시 르메인이나 란델처럼 푸른 색이지만 또 조금 달랐다. 두 왕족의 눈이 깊고 어두운 심해를 담았다면, 아르센의 눈은 어느 맑은 겨울날의 새벽 어스름을 담은 서늘한 파란 빛이었다.

그런 아르센의 눈이 앞에 서 있는 멍청이를 응시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변경백님."

칼리안의 검 키리에. 국왕 친위대 카에라의 기사단장 렌 아드리안. 카이리스의 유일한 공작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 칼리안을 따르는 기사가문 연합의 대표, 백작 아이즌 에이프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검을 다루는 이들이라는 것. 그리고 아르센의 기준 상 평범한 인간 혹은 평범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의 머리를 지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똑똑한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소리다.

"왜 그런 얼굴로 보기는. 왜 나를 찾았는지, 그 진위를 물었지 않나."

"방금 전에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그레이 브리센은 그냥 칼 쓰는 멍청한 생물이다. 그래도 에반보다는 조금 나은가 싶긴 한데 그래봐야 머리카락 두께 차이다.

칼리안의 둘째 형이 이들과 같은 핏줄이 정말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물론 그 머리색과 눈을 보면 틀림 없는 에반 브리센 후작의 핏줄이 맞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될 정도로, 브리센의 나머지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했다.

'원래 기사들은 다 멍청해. 꼬맹이 네 주변이 이상한거지.'

변경백의 저택 앞에서 잠시 헤어진 에우리아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기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럭저럭 똑똑하면서 검까지 잘 다루는 칼리안의 측근들이 이상한 것이지, 일반적인 기사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을 배워 먹고 살 수 있는데 글을 배워 무엇하고 머리를 써서 무엇하겠는가.

브리센 역시, 굳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지나치게 덩치가 큰 가문이었으니 그들의 지능을 전부 카이리스의 둘째 왕자에게 넘겨주고 마음껏 멍청해져도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 이해는 한다.

때문에 아르센은 조금 전에 했다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꺼냈다.

"집이 좁고 불편하기에, 조금 넓은 터전이 있을지 둘러보려 왔다고 말입니다."

알아듣기 어려울 말도 아니었다. 칼리안의 품을 떠나 브리센과 손을 잡아도 될지 그것을 가늠해보러 왔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예 그냥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그런데 못 알아 듣는다. 아니, 적당히 알아는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르센은 답답하다는 얼굴을 쉬이 숨기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레이가 이 정도로 머리를 못 쓰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화가 이뤄지질 않는 것은, 맞은편에 앉은 아르센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진한 술 냄새가 원인일 터였다. 한 마디로 어젯 밤 퍼마신 술이 아직 안 깬 것이다. 전날의 비 오는 밤, 술이 생각난 것이 비단 에우리아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매일 퍼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성함 뒤에 변경백 말고 조금 더 큰 것을 달 생각은 없으신지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변경백님."

그래서 아르센은 숙취 해소에 딱 좋을 만한 말을 했다. 돌려말하기도 아니고 귀족들이 나누는 고상한 언어도 아니고 그냥 직접적인 말로.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 말고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 될 생각은 없는지에 대해서.

'경이 마음을 바꿀 것처럼. 변경백이 수도에 올 생각이 있는지 알아봐줘요. 혹시 아직도 란델 형님과 연락을 하는 상태인지 확인해주면 더 좋고.'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으니, 지금 아르센은 혼신을 담은 연기를 펼치는 중이었다. 다행히 그런 속내를 꿰뚫어보지는 못한 그레이가 가늘게 변한 눈을 하며 대꾸했다.

"조금 더 큰 것이라니······."

내가 가질 수 있는 작위 중에 변경백보다 조금 더 큰 것이라면 후작 뿐이지 않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레이가 말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와 면담을 요청한 발칸의 부군단장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이제야 눈치챈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레이가 아르센을 노려봤다.

"무슨 말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지금의 자리보다 큰 것을 원한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레이는 이렇게 발뺌을 했다. 당장 아르센의 말에 반색하며 달려들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일 도와주면 후작위 주겠다던 실리케의 말에 넘어가서 카이리시스로 오던 중에 허리 부러지고, 여기로 다시 실려오셨던 것 아닙니까?"

돌려말하기를 때려치니 단어 그대로 뼈 아픈 소리가 줄줄 나온다.

"그래서 요양이나 하다가 시키는대로 하면 후작위를 넘겨주겠다는 1왕자님의 말에 또 넘어가셨던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남몰래 수도로 왔다가 들켜서 다시 여기로 돌아오셨고. 그러니 묻는 겁니다. 더 큰 자리에 정말로 욕심이 없으신지를."

이 말에, 그레이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기는 했으나 단 두 번 카이리시스로 발을 옮겼던 것이 모두 후작위를 탐냈기 때문이 맞았으니까.

다만 아직 그것을 입 밖에 내어 인정하지는 않았으므로, 아르센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아니면 혹시, 여전히 장미 향에 취해 있느라 새끼 늑대 쪽으로는 눈을 안 두시는 겁니까?"

아직 란델과 손을 잡고 있는지. 그래서 플란츠 쪽에 발을 둘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르센의 말을 들은 그레이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실리케와 브리센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사람들은 플란츠를 새끼 사자라 불렀다. 왕세자라는 날개만 얻으면 제대로 된 그리핀이 될 새끼 사자.

그리핀이란 그리핀을 가문의 문장으로 쓰고 있는 브리센을 뜻했으니, 사람들의 이 말은 플란츠가 세자위를 받으면 브리센 가문에 무한한 힘을 안겨 줄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리라는 기대 혹은 조롱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리케가 실각하고 브리센이 휘청이게 되면서, 왕궁에 홀로 남은 플란츠는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에반 브리센과 손을 잡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호 이득을 위한 관계일 뿐. 실리케라는 매개체가 없는 플란츠를 브리센의 온전한 꼭두각시로 부리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귀족들의 평가였다.

브리센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에 더불어, 오히려 에반 브리센이 플란츠에게 휘둘린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으니. 혼자서도 제 살 길을 제대로 찾을 줄 아는 맹수라는 의미를 담은 새로운 별명이 생긴 것이다.

"새끼 늑대라니."

늑대, 라고.

간혹 대사막의 전사들을 늑대라 칭하는 것을 안다. 스스로가 '늑대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지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레이가 말한 늑대가 대사막의 늑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플란츠를 지칭한다는 것은 더더욱 잘 알고 있었다.

"네놈이 3왕자의 최측근임을 내가 모르지 않는데, 어째서 새끼 늑대를······."

"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지."

입에 담기만 해도 뱃속이 허하고 허리가 아린 이름, 3왕자 칼리안. 그 칼리안이 수족처럼 부리는 것이 아르센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아르센이 말한 것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것을 묻는데 아르센이 그레이의 말을 잘랐다.

"지금 상황에서 올라갈 곳 없기로는 변경백님이나 저나 같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수도에서 후작 소리 들으며 흥청망청 사는 것이 그레이의 목표임을 아르센이 잘 안다. 사실 그것이 누구든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란델이 어떻게 그레이를 이용해먹을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에반 브리센 후작은 소드마스터다.

모르긴 몰라도 긴긴 세월 무병장수 할 것이라는 소리다. 에반이 살아있는 한 그레이는 절대로 후작이 되지 못한다. 운이 좋으면 그레이의 아들이 후작위에 오를까 말까. 절대로 그레이에게 순서가 오지는 않을 터였다.

"그분께서 카밀론에 가시면, 제 앞길은 여기서 막힙니다."

칼리안이 세자위에 오르면 평생이 가도 발칸의 군단장은 앨런의 것이다. 안 그래도 강한데다 남들보다 나이 먹는 것까지 느리니, 아르센이 부군단장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레이가 후작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의 말은, 그레이나 아르센이나 같은 처지라는 소리였다. 오래오래 사는 윗사람 덕에 평생 2인자 자리나 하기는 싫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다가 변경백님과 제가 손을 잡으면 도와주게 되는 쪽은 저 아닙니까. 그러니 같은 처지에 같은 술 좀 마시자는데, 왜 그렇게 경계를 하십니까."

이렇게 말한 아르센이 플란츠의 것과 완벽히 똑같은 비웃음을 만들어다 붙였다. 언젠가 칼리안이 그랬던 것처럼.

"아······ 허리 부러져봐서 무서우신가. 아니면 찢어진 것 때문에 무서우신가. 어느 쪽입니까."

사람 심기 비트는 데에는 플란츠의 비웃음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칼리안만큼 잘 아는 아르센이 아니던가.

그레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더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것을 아르센이 알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당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있었던 탓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져봤던 기대가 일순 무너져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센의 말이 이어졌다.

"마법사들 움직이면 소드마스터 한 명 사라지는 것쯤은 일도 아닐텐데, 뭐가 그리 무서우신지 몰라도 몸 사리는 것은 그만하고 제대로 대화나 해보시죠."

그것은 협박이기도, 자신의 힘에 대한 증명이기도 했다.

플란츠 왕자를 제대로 지지해서 세자위에 올릴 만한 힘이 있다는 것. 에반의 목 없애버리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는 것. 그레이에게 있어 누구보다 든든한 동맹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말이었다.

"그렇게 강한데 왜 굳이 나와 손을 잡는지 모르겠군."

"쓸모가 있는 것은 변경백님이 아니라 브리센이라는 이름입니다."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아르센이 다시 한번 플란츠식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저도 넓은 품에 들어가서 안락한 생활을 누려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변경백님께서는 후작 위에 올라서 제 뒷배경 노릇이나 해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어려울 것 없을 것 같습니다만."

거기까지 들은 그레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반을 죽이고 후작 작위를 줄 테니 플란츠를 왕세자위에 앉힌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라는 소리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듣자듣자 하니 네 놈이 참 건방지게 구는구나."

여기에서 밀리면 만약 아르센과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아르센이 말하는 것처럼 뒷방에 처박혀 지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나눠 가질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르센에게 밀리면 안되는 것이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것을 보는 아르센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변방에서 숨죽이고 사시느라 잊으신 듯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기가 몰아쳤다.

아르센과 그레이의 사이에 놓인 탁자에 새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곧 그것은 새하얀 실 같은 얼음의 가닥을 사방으로 펼쳐나갔다.

- 쩌적, 쩌적.

매우 불안한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워가며 값비싼 테이블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음 가닥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테이블 다리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모조리 얼렸다.

똑같은 한기가 어린 목소리가 그레이의 귀를 찌르듯 흘러나왔다.

"저는 발칸의 부군단장, 아르센 헤르츠입니다. 변경백님."

그렇게 말한 아르센이 손가락 하나를 펼쳐 그레이의 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으로 찻잔의 끝을 툭 건드렸다.

- 와장창!

테이블이 부서졌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테이블, 얼어붙어있던 찻잔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그레이를 쳐다봤다. 어느새 세뉴강같이 고요하게 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하시면, 안 참습니다. 저는 손을 잡자고 온 것이지 누구 따까리 하겠다고 온 것 아니라서요."

물론 그 내용까지 고요하지는 않았다.

* * *

또 한 번 살기가 피어 올랐다.

누가 칼리안의 검이 아니랄까봐. 이번에도 여지 없이 저렇게 살기가 피어오른다.

다만 이번의 플란츠는 '그만' 이라고 말하는 대신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을 보며 똑같은 기운을 내보냈다.

살기.

단 한 번도 제 손에 다른 사람의 피를 묻혀본 적 없었으나, 반드시 살인을 해보아야 살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칼리안의 것처럼 극한에 닿은 공포감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키리에의 것처럼 노골적인 살의를 담은 것도 아니었으나, 예리하고 날카롭게 심장을 찔러오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키리에를 향했다.

멀찍이 수련장 벽에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칼리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오늘도, 제법.'

지는 것을 확실히 싫어한다.

배우는 것이 확실히 빠르다.

- 카아앙!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검을 내뻗자 플란츠를 향해 달려들던 키리에의 검이 막혔다.

뭉클, 하고 키리에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플란츠는 날카롭게 잠겨든 눈으로 그런 키리에의 검 끝을 쳐다봤다.

곧 키리에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플란츠는 이번에도 제 자리에 멈춰 선 채 키리에의 움직임을 눈으로 잠시 좇았다. 그리고 발을 박찼다.

키리에의 검은 플란츠의 것보다 가볍기 때문에 방향 전환이 빨랐다.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올려치듯 막은 키리에가, 튕겨올라간 검을 회수하기 직전인 플란츠를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플란츠는 그것을 보기도 전에 이미 몸을 한 발자국 뒤로 물렸다.

키리에의 검이 어떤 움직임을 가지는지 이미 파악했으니, 틈새를 노릴 것임을 예상하고 미리 피한 것이다.

- 타앗!

그 사이 검을 회수한 플란츠가 앞으로 도약하며 키리에를 향한 긴 곡선을 그려냈다.

'부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 카앙!

높이 도약하여 떨어지는 힘까지 모두 실어낸 플란츠의 검이 키리에에게 막혔다. 실려있는 힘이 이전에 비해 많이 묵직해졌는지, 키리에의 검이 살짝 뒤로 밀렸다. 키리에는 버티지 않고 검을 내려 플란츠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자칫 중심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플란츠는 검이 미끄러지는 궤적을 따라 몸을 함께 회전시키며 다시 한번 공격을 가했다.

- 카강! 카아앙!

흥미로운 볼거리를 찾았다는 정도의 얼굴을 한 칼리안을 무시한 채로 둘의 공방이 계속됐다.

무게를 실은 공격을 어떤 식으로 흘려내는지, 속도를 가한 공격을 어떻게 되받아치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키리에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플란츠의 검을 막고 다시 공격했다.

확실히 키리에는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빠른 검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어 가장 적합한 대련 상대였다.

다만 지나치게 살기등등하여 칼리안이 있을 때에만 대련이 가능했으나 그것은 그리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어차피 실전에서는 모두가 목숨을 내어놓고 검을 들지 않던가.

- 카앙! 카가강!

플란츠의 허리로 내뻗은 검을 비틀어 올려치자, 급하게 검의 경로를 튼 플란츠가 그것을 막아냈다. 검 끝을 아래로 내린 채 가까스로 막아낸 공격에 플란츠의 눈이 사나운 빛을 냈다.

진짜, 죽일 셈이군.

이제는 숨길 필요 없는 살기가 다시 한 번 강하게 몰아치며 키리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키리에가 다시 한 번 바닥을 박찼다. 플란츠 역시 그것을 마주보며 검을 내질렀다.

- 사아아······!

그와 동시에.

키리에에게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방이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칼리안과의 대련에서 일깨웠던 감각이 한 번 더 확장됐다.

검만큼 머리를 쓰고 있는 저 상대가 앞으로 어디로 올지, 검을 휘두를지 찌를지 내리칠지, 그 후에는 어떻게 움직일지. 마치 하나의 궤적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 순서가 그려지는 것처럼.

'어디를 베어야 할지.'

어디를 얼만큼 베어야 상대방이 죽을지.

그것을 누군가 알려주는 것처럼.

사방이 온통 흑백으로 바뀐 듯한 그 공간에, 붉은 혈선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다. 저 곳을 베어내는 것이 정답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키리에는 바로 그 혈선을 따라 검을 움직였다.

키리에의 검이 일순간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 쌔애액!

형태를 잊은 검이 공기를 찢어내는 소리가 들렸고, 그와 동시에.

- 카아아앙!

그 어느때보다 날카로운 소리가 수련장 안을 뒤흔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뒤에야 키리에가 앞을 쳐다봤다. 붉은 혈선을 향해 내리그었던 검 끝이 어디를 향했는지 알게 됐다.

키리에의 앞에 플란츠가 서 있었다.

검과, 검이 맞닿아 있었다.

"축하해. 키리에."

검과, 플란츠의 심장 사이를 검붉은 기운을 가득 담은 검이 막고 있었다.

멀찍이서 둘의 대련을 보고 있던 칼리안이 어느새 플란츠의 앞을 막아선 채로. 그렇게 키리에의 검을 막아선 채로.

"그런데 내 형님 심장은 안 돼."

또 한 번의 성장을 한 키리에를 축하하며 씩 웃었다.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5)

카이리스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다.

하츠아라는, 눈 좋아하는 시스파니안을 위해 그 큰 대륙의 북쪽에 도시를 세웠다. 이쯤되면 시스파니안이 인간 남자 한 명을 아주 호구로 삼은 악독한 드래곤이라 보여질 수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름답다는 말을 한 번 했을 뿐이고, 그것을 기억해내어 카이리스 북쪽의 추운 지역을 수도로 삼은 것은 하츠아라였다. 인간 사는 곳이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너랑은 절대 결혼 안할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왕궁을 그렇게 거대하게 지은 위인이니 오죽했을까.

아무튼.

그렇게 추운 곳이 바로 카이리시스다. 그러니 한 겨울의 세뉴강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는다.

그런 세뉴강을 '툭' 건드리면, 과연 파열되는가.

언 바위를 밟는다 해서 그것이 깨지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아무리 카이리시스가 춥다고 해도 얼어붙은 강과 바위가 조각날 만큼 급속도로, 그리고 극저온으로 얼어붙지 않으니까.

"이, 이게 대체······."

산산조각난 대리석 테이블을 보며 저도 모르게 경악한 말을 꺼냈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놀란 소리를 꺼내봐야 스스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게 대체 얼마 짜리인 줄 알고 부숴놨단 말이냐!"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러운 척 말을 돌렸다. 겁을 먹는 놈보단 물건 아끼는 속 좁은 놈 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르센의 참담한 눈빛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

"대답 해주십시오, 변경백님."

아르센은 대리석 테이블과 한눈에 보아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던 범상치 않은 고급 찻잔 값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의 따까리를 자처하고 있을 때에나 칼리안의 이름도 팔고 급여도 팔았지, 지금의 일은 칼리안이 감당해줄 수 있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1플로린으로 내려간 급여에서 뭘 더 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마차를 폭발시켰을 때부터 정상적인 놈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그레이가 침음을 흘렸다. 아무 말 없이 그레이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오래지 않아 1왕자님께서 스무 살이 되실 테니까요."

오래지 않아 세자위가 결정되는데, 이대로 두면 누가 세자가 되든 그레이에게 돌아올 것이 전혀 없었다.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른다 해도 에반이 좋을 일이지 그레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숟가락 하나 얹어놔야 수도로 갈 길이 생기는 것이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겠다."

실리케나 란델이 불렀을 때에도 족히 사흘은 고민을 했던 그레이였다. 멍청해서 그렇지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살지는 않았었다. 칼리안을 마주했을 때에도 나름대로 꽤 인내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사흘이면 되겠군."

그레이는 이전에 고민했던 시간과 똑같이 사흘을 달라 말했다. 아르센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 무엇이든 그레이의 요구를 따라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주도권은 무조건 아르센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뭐, 마법사들 성격 급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그레이가 이해해야지 별 수 있겠나. 언제든지 테이블 대신 그레이를 얼릴 수 있는 마법사를 앞에 두면 없던 이해심도 무럭무럭 생기는 법이니까 괜찮다.

물론 아르센의 입장에서 괜찮다는 소리였으니, 그다지 괜찮지 않은 그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흘을 달라고 했지 않나."

"시간 낭비할 것 있겠습니까. 어차피 결론은 난 것 같은데요."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그레이는 아르센의 말을 절대로 거절 할 수 없을 터였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그레이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대화가 끝났으니 이만 나가도 좋다는 허락같은 것은 구하지도 않은 채였다.

* * *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진다.

그것이 검이며, 그래야 하는 것이 검이다.

키리에와 플란츠의 사이에 끼어든 검붉은 검이 살짝 비틀어졌다. 크지 않은 동작이었으나, 키리에의 검은 칼리안이 의도한 방향으로 미끄러져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플란츠는 말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의 일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달랐는데.'

키리에의 눈빛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그 뒤 플란츠가 따르지 못할 속도로 검이 쇄도했고 막으려 했을 땐 이미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서 있었다.

아마 칼리안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을 찔렸겠으나 방금 전 죽을 뻔했다는 것에 대한 대단한 감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칼리안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든 어련히 알아서 살려뒀겠나 싶어서였다. 실제로도 안 죽었으니 그것이 과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플란츠는 키리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대련 중 키리에의 무언가가 변했고 칼리안이 축하한다는 말을 했으니, 분명 한 단계 성장을 이룬 것이리라는 정도로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키리에."

그런데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칼리안의 농담 섞인 말에도 키리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개입할 정도로 플란츠에게 살의를 느낀 것에 대한 사과는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칼리안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놈이 아닌데 너무 조용했다.

게다가 대련이 끝났음에도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무엇보다, 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 스윽

플란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리안이 살짝 더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조금 더 옆으로 움직여 플란츠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는 소리다.

그 말은 곧 키리에가 아직은 위험한 상태라는 뜻일 터였다.

'내가 어지간히도 싫었나보군.'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칼리안은 여전히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른 칼리안이 잠시 말 없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검으로 키리에의 검을 툭 쳤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앞을 보고 있으나 또 다른 무언가를 함께 보고 있던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키리에."

"네."

그제야 대답이 돌아온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축하한다고 했어. 내가 너한테."

"아······."

대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키리에의 얼굴에는, 믿기 어려운 것을 본 듯도 하고 또 어딘가 다른 생각이 많은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한참이 지난 뒤에야 뒤늦은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칼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키리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뭐가 보이는지 알아."

베른이 검의 길에 오르기 전에 겪었던 현상이었으나 누구나 그것을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른의 설명을 들은 체이스는 그것에 '가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반드시 목숨을 끊어낼 수 있을, 생과 사를 가르는 선이니 그리 부르자 했다.

과거의 키리에는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가름을 보았었다. 그러니 지금 그에 비해 훨씬 빠른 시기에 그것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지금 당연히 뛸 듯이 기뻤으나 마냥 축하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순간인지를 알았으니까.

"우선 검을 집어넣었으면 좋겠는데, 키리에."

칼리안은, 늘어뜨린 채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검을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살기를 지우지 못하는 키리에를 향해서.

"······ 죄송합니다."

그제야 짧게 사과한 키리에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 과정을 칼리안의 눈이 조용히 지켜봤다. 탁, 하고 검집에 검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본 칼리안의 손에서도 비로소 검이 사라졌다.

플란츠는 아직 몰랐으나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지금 저 살기가 비단 플란츠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앞에 플란츠가 있었을 뿐, 칼리안이 플란츠를 가로막은 뒤에는 칼리안에게도 같은 기운이 닿았다. 그러니 조금 전 키리에는 상대를 구분하지 않은 채 죽음을 내리려 했던 것이었다.

"검, 이리줘. 키리에."

칼리안이 키리에의 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내렸던 검을 돌려달라고 말한 것. 검사에게 검을 빼앗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키리에가 모르지 않았다. 검을 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네."

그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검집에 든 검을 건넸다. 아무런 망설임도 의문도 없는 행동이었다. 칼리안이 돌려달라 했으니 돌려주었다.

"잠깐 어디 좀 가자."

검을 받아든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기어코 에우리아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맥주 네 잔.

아니 어떻게 사람이 맥주 네 잔을 마시고 취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큰 잔이면 이해나 하지, 물컵보다 조금 클까말까한 맥주 네 잔에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얼음 마법사를 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술 찾을 때 알아봤어야 했지."

아르센이 술 약한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랬으면서도, 그레이를 만나고 나와서는 입이 썩을 것 같다느니 혀에 뭐가 난 것 같다는 말을 해 가며 결국 술을 먹자 했을 때 말리지 못한 에우리아가 잘못했다.

상급 히몰리카 한 병을 비우고도 멀쩡한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야, 꼬맹이."

"저어는요, 협회장님."

에우리아의 부름에 반쯤 혀 꼬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시작됐다.

"저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왕자님이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 놈이 너무 싫었거든요, 협회장님. 그런데 그 놈 앞에서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편에 서자고 한 게요, 협회장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그래도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런 말 한 게 딱 너무 싫어서요, 협회장님."

"어, 그래."

아르센은 에우리아의 성의 없는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르센이 안주로 시켜둔 감자 튀김을 손에 댔다. 그러자 그 손에 닿은 감자튀김이 살짝 얼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에우리아는 참았다.

아직 얼지 않은 감자튀김이 남아있었다.

"그런데요 협회장님."

"어, 그래."

얼지 않은 감자튀김을 잡으려는 손이 계속 새로운 감자튀김을 얼려댔다. 에우리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늘어난 만큼 언 감자도 늘어났다.

"생각해보면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이 저런 집안 놈들이랑 얽혀있는게 또 괜히 짜증나서요, 협회장님. 부군단장님이 그래도 영 나쁜 새끼가 아닌 것은 저도 아는데 자꾸 우리 왕자님이 부군단장님 챙겨주시는게요, 협회장님. 그게 부군단장님 탓이 아닌건 아는데 그래도 짜증나고 싫어서요."

"뭔소리야."

"아, 다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아르센이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먹을 수 있는 감자튀김이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그게 다 저 망할 집안 탓인데요, 협회장님. 우리 왕자님이요 얼마나 좋은 분이시냐면요, 협회장님. 아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협회장님. 마차 태웠더니 잘했다 하시고 건물 부쉈더니 급여 올려주신 분이거든요, 협회장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아닌데요. 스승님만큼 좋은 사람 맞는데요."

여기까지 들어주고 그냥 포기했다.

사일런트 켜놓고 아르센의 주절거림을 듣다듣다 못하겠어서, 에우리아는 그냥 사일런트 끄고 슬립만 걸었다.

- 풀썩!

그제야 좀 조용해졌다.

나무 테이블에 코 박고 잠든 아르센의 고개를 돌려 죽지만 않게 해둔 에우리아가, 술주정에 죄 얼려버린 감자튀김 하나를 들어올려 씹어보려다 포기하고 집어치웠다.

시퍼런 마법사 옆에 얼어붙은 감자튀김 다 밀어놓은 에우리아는 테이블에 엎어져 잠든 아르센을 잠깐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무튼 비는 그쳤고 창 밖에 달이 밝았다. 옆에는 술 약한 얼음 마법사가 잠들어 있고, 테이블 앞에는 얼어버린 감자튀김만 가득했으니 어찌하겠나.

"여기 히몰리카 한 병이랑 닭 튀김 하나요."

검은 돌이고 붉은 힘이고 정치고 뭐고.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셔야지.

* * *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가 감자튀김을 얼리고 있을 그 무렵.

칼리안과 키리에를 태운 두 마리의 말이 숲으로 들어섰다.

가는 동안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키리에 역시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도 비가 많이 왔던 탓에, 숲에서는 여전히 비 비린내가 났다. 그 좋은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때?"

조금 전보다는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듯한 키리에가 조용히 대답했다.

"평화로운 곳입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달빛을 가득 받은 바위가 있는 곳까지 들어선 키리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파헤쳐진 흙, 잘려 베어나간 나무와 자잘한 바위들, 불에 그을린 것이 분명한 흔적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 난장판이 자신 때문에 생긴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네가 배운 것이 내 검이라서 그런 것을 본 거야."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져야 하는, 검.

검의 무게가 버겁지 않을 만큼 검에 익숙해질수록 검이라는 것이 결국 무언가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언젠가 드미레아가 말했던 것처럼 검이란 결국 살인을 위한 도구이니, 검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결국 살인의 방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검을 드는 것이 가벼워지게 될 수록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물건인지를 느껴야 했다.

그런데 베른에게 있어 검이란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가벼운 만큼 더 가벼운 것이었다.

지키고자 배운 검으로, 누군가를 지켜내기도 전에 하염없이 생명을 끊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한없이 가벼워졌다. 검에 얹혀진 생명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벼워진 검으로 검을 수련하다 가름을 봤다.

상대방의 목숨을 반드시 끊어낼 수 있을 길이 보였다. 지극히 베른다운, 베른의 검에 딱 어울리는 깨우침이었다.

"지금도 안 없어지는 것 알아."

그런데 문제는.

처음 마주한 그 세상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내 위로도 보일 거야."

상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과거 체이스의 위에 나타난 혈선이 보였던 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칼리안을 향한 붉은 선이 그려지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했을 키리에를 조용히 바라봤다.

"당분간 푹 쉬면 괜찮아질거야. 네 검은, 가름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다시 돌려줄게."

그렇게 키리에를 안심시킨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베른의 검을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베른과 비슷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시켰던 일들 때문에 그 많은 피를 묻혀서, 그래서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미리 신경 못 써서 미안."

사람을 베어내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잊고 살아서.

"네 속도 이곳 같은 줄 내가 모르고 있었네."

할 수 있느냐는 말에 할 수 있다는 대답이 오기에, 늘 평화로운 겉모습을 보여주기에, 괜찮으리라고만 생각해서. 키리에 속도 이 숲처럼, 칼리안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을 줄을 몰라서.

"미안, 키리에."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너무 큰 짐을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축하의 말 뒤에 칼리안은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외전] 검은 나비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반갑고, 기쁘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련하고, 우울하고, 슬프다.

그 뒤에는······.

* * *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렸고 기분은 좋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날에 눈을 떴을까.

그것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얼만큼을 잠들어 있었는지도 가늠해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섰다.

- 너를 내가 불렀어.

궁금증에 대답해주듯 목소리가 들린다. 기억나지 않는 긴 시간을 살아낸 뒤에 만났던 이의 목소리.

때로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기도, 또 때로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변덕 심한 어느 날에는 붉은 새의 모습이기도 한, 하나이자 전부인 존재의 목소리였다.

"왜 이런 날에. 싫어하는 것 알면서."

비오는 날은 싫다.

내가 이런 날을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 안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이였으니 알아야만 했다.

- 생겼어. 모르는 것. 이상한 것. 그래서 불렀어.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세렌티에게도, 나를 만든 신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 뿐이었다.

그것이 시작인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할 이 역시 몰랐으니 나라고 알았을까. 물론 그것에 위안을 삼기에는 지나치게 큰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양신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게 될 그 일은 그렇게, 비 오던 어느 날 잠든 나를 깨워낸 세렌티의 작은 부름으로부터 시작됐다.

- 시스파니안. 돕도록 해, 나를.

거꾸로 되었다.

누군가에게 늘 도움을 구걸받던 세렌티가 나에게 도움을 구걸했다. 거부하지 못할 신의 언어였으나 그것은 분명 구걸이었다. 그 어느때보다 절박한 목소리였으니까.

"말 해."

그 부름으로부터 마주하게 된 현실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악신,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힘들 이가 눈을 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가 세렌티의 눈을 가리고 생명을 취했다.

섣불리 개입한 나의 동족들은 허망하게 죽었고 나는 어린 동족을 숨겼다. 대륙이 나뉘어 멀어지고 남은 대륙의 절반은 아름다움을 잃은 채 삭막하게 바뀌었다. 여러 종족이 사라져 전설이 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악신의 가장 마지막 먹이가 된 것은 가장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것을 막겠다며 가장 강하다는 인간 몇몇이 모였다. 그래보아야 나약할 뿐이었다.

- 그들이 기회라는 걸 나는 알아.

세렌티는 인간을 마지막 기회라 불렀다. 그들에게 힘을 내렸다.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인간. 그리고 내가 악신의 발을 묶었다. 조촐하되 창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

우리와 함께 했던 세렌티가 의지를 드러냈다. 모두 죽는 것보단 세렌티가 사라지는 것이 낫다 하였다. 우리는 반대하지 못했고 세렌티는 악신과 함께 잠들었다.

넷이 살았다.

아니, 넷이 죽었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세렌티가 잠들었음을 모두가 알았다.

신을 잃은 생명들의 혼란은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 나는 차마 다시 잠들지 못했다.

* *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우리는 영웅이라 불렸다.

인간들은 죽은 영웅의 이름 위에 희생이라는 글자를 덧붙였다. 결국은 죽어 사라졌을 뿐임에도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나 멋드러지게 포장되었다.

그리고 잊혀졌다. 인간들은 살아남은 영웅을 찬양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리며 슬퍼하기에는 사라진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것을 모두 슬퍼하려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시스파니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살아남은 영웅은 죽은 영웅처럼 잊혀져야 마땅했으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섰고 살아남은 이를 모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묻고 삶을 격려했다.

"비는 싫고 눈은 좋아해요?"

그리고 나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누군가에게 분명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 그 어떤 인간보다 날카로운 검을 지녔던 인간. 말 한 마디로 다른 인간들을 부릴 수 있는 인간. 가장 강인했던 인간.

그런 그가 나를 쫓아다녔다.

결국 인간인 그가 인간 아닌 나를 끊임없이 쫓아다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해요?"

이렇게 물어오는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켜낸 세상을 보며 아름답다 하기에, 나는 지금 내려오는 눈이 더 아름답다고 말했을 뿐. 비가 싫다는 말도 눈이 좋다는 말도 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게 물어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느냐고.

"너."

그런 그가, 싫었다.

* * *

세렌티는 알고 있었을까.

그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내가 어떻게 변할지를, 나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그것이 내 생의 서막이자 종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몰랐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 * *

"나비를 좋아해요."

관심 없었다.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에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멋대로 와서는 제멋대로 주절거리고 제멋대로 돌아갔다.

"좋잖아요. 꽃이 피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 언제든 봄이 오는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해요."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영웅 네리아드.

네리아드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고 떠났던 그녀의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그는 또 무턱대고 나를 찾아와서는 봄같은 얘기를 했다. 꽃이 필 것 같은 얘기를 했다.

"세크리티아. 그런 이름으로 지었대요."

비밀을 간직한.

이런 의미를 가진 새로운 나라, 세크리티아.

그녀가 그런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며 좋아했다. 그녀를 감싸고 죽어간 네리아드가 끝끝내 보고싶어 하던 바다를 곁에 둔, 분명 아름다울 나라를 만들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그 소식이 나비같아서 좋았어요. 꽃이 핀 것 같아서. 다행히도."

그녀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사람들을 모으고 나라를 만들어 다시 일어났으니 다행이라고. 그것이 꽃이라고.

그리 말했다.

"시스파니안. 당신은 뭘 좋아해요?"

"너 가는 것."

"내가 아는거 말고 다른 거요."

"너 안 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귀찮게 굴었다.

제멋대로 충성스러운 퀴트로스 지그프리드와는 너무나 다르게, 제멋대로 말을 안 들었다.

"아무튼. 나도 퀴트로스 데리고 나라 하나 만들까봐요."

그리고 이렇게 개국선언을 했다.

* * *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잘 지켰다.

앞으로 나서겠다 하더니 정말 사람들을 모았다.

세상을 구하겠다 하더니 정말 모두를 살렸다.

나라를 세우겠다 하더니 정말 만들어냈다.

카이리스.

봄이 오는 곳.

그에게 딱 어울리는, 그가 지었을 수 밖에 없을 그런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웠다. 다 무너진 옛 왕국과 망가진 옛 영토 위에 새로운 영웅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나 당신 좋아하는데요. 시스파니안.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요."

그리고는 이렇게 나를 붙들었다.

나는 유희중인 고룡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흉내내며 지독하리만치 긴 세월의 한 조각을 흘려보내던 중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 역시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나는 아니야."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 없었고, 제대로 된 말 한 번 해준 적 없었다. 나는 그저 세렌티를 대신해 인간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을 뿐.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잠든 세렌티를 되찾아올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어린 동족이 죽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너무 비좁고, 답답해."

너무 비좁고 답답하다. 게다가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린다. 비좁고 답답하고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리는 곳에서 산다. 인간은 그런 곳에서 산다.

그런 곳에서 너무 짧은 생을 산다.

"그래서 너랑은 절대로 결혼 안 해."

싫었다.

당장 둥지로 돌아가 백 년 쯤 잠들고 싶을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을 만큼 싫었다.

"음. 알겠어요."

항상 말을 안 듣던 그가 어쩐 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을 하나 크기의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세상을 구한 영웅을 죽여버릴 뻔했다.

* * *

대부분의 인간은 편협하고 자만했으며 나약했다.

그는 편협하지 않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강인했다. 자상하고 생각이 깊고 잘 웃었고 말을 예쁘게 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결국 너는 떠날테고, 결국 나는 남겨질텐데."

그렇게 끝날 것을 이미 다 알면서 왜 그렇게 나를 붙드는지 물었다.

"나에겐 생의 전부라서. 내가 당신 생애의 일부라도 되었으면 해서. 이기적이라 해도 그랬으면 해서."

내가 절대로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불렀다. 기억하지 말고 추억해달라며 나를 불렀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언젠가 눈이 내리면 어느날 당신을 귀찮게 했던 내가 생각나서 인상을 찌푸리고, 바다를 볼 때 당신을 쫓아와 시끄럽게 굴던 내가 생각나서 짜증이 나고. 나비를 볼 때 꽃이 필 것 같아 좋다고 했던 내가 생각나서 웃고. 그냥 기억하는 것 말고 그런거요."

그런 것이 추억이라고, 그리 말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해서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지독함에 사무쳐 떠나려는 나를 붙들어 잡았다.

"대체 내가 너를 얼마나 더······."

"사랑해요."

그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끝끝내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미,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나 역시 그러했으므로.

* * *

"시스."

"안돼."

"파니."

"아니야."

새로 만든 나라에서 새로운 왕의 왕비가 되었다. 인간들은 기뻐했고 그는 행복해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그는 이름짓는 것에 정말로,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나라 이름을 짓고 수도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굴었다.

"베른."

"싫어."

잊혀지지 않는 영웅.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싫다 하였다.

인간의 생은 너무나 짧고 또 짧으니 결국 그는 나를 떠날 것임을 알았다. 결국 영웅은 잊혀지고 지워질 뿐이니, 모두가 잊은 뒤에도 나 홀로 기억할 것을 알았다. 그런 이름을 내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카밀론."

나비.

좋아한다고 했던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툭 나왔다.

"좋아."

"아, 드디어 정했다."

그가 웃었다.

내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을 떠올렸을텐데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해주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아이 이름을 정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의 검은 머리와 그의 녹빛 눈을 그대로 닮은 것이 신기해서, 작은 축복을 주었다.

아이가 말을 하고 키가 크고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흘러갔다.

그는 그만큼의 세월 속에 묻혀갔다.

시간을 묶어둘 수 없는 나는 나약했다.

시간은, 세월은.

세렌티가 내려준 인간의 날은 짧았다.

세어보지 못할 시간을 살아낸 나에게, 그 날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 * *

하츠아라. 가지 마.

사랑해.

그는 웃었다.

나는 울었다.

* * *

나를 위해 지은 왕궁은 그리도 컸는데.

그를 위해 지은 무덤은 너무나 작았다.

매일같이 그 곳을 찾았다.

더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찾아갔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지 않아서 찾아갔다.

혹시 올까.

혹시 볼까.

나비가 되어 그를 찾아갔다.

우리의 아이도 떠나고 그 아이의 아이가 떠나도록 나는.

검은 나비가 되어 그의 곁을 찾아갔다.

죽은 왕의 곁을 맴도는 검은 나비.

그것이 나였음을 잊은 이들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것도 모르는 채 나는.

봄이 오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 * *

그리하여 여전히 나는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여전히 반갑고, 여전히 기쁘고, 여전히 행복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련하고, 여전히 우울하고, 여전히 슬프다.

그 뒤에는 여전히 아프다.

망각을 모르는 기억 때문에, 그것이 추억임을 이제는 아는 탓에.

나 홀로 그리움에 남겨졌음에.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1)

맥주 세 잔.

거기까지는 기억이 난단다. 그리고 네 잔 째의 술을 한 모금 마신 그 순간부터 기억이 안난단다.

"어. 딱 그때부터 감자튀김을 얼렸어."

잠깐씩 겁대가리 내려놓는 것이 일이던 마법사가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실수는 안 했습니까?"

"감자튀김을 얼렸지."

감자튀김을 얼렸고 말을 조금 많이 하기는 했다.

아르센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칼리안 부탁받고 이 곳에 온다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었다. 힘든 것은 잘 해도 하기 싫은 것 못하는 마법사가 무슨 마음을 먹고 왔던 것인지는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다.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기억이 정말 안나?"

"네 정말 안 납니다. 제가 매번 세 잔만 마시는데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맥주 세 잔만 마시고 귀가하는 아르센의 대답에 에우리아는 결국 피식 웃었다.

아르센 스스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칼리안의 부탁이니 하고 싶은 일. 그래서 거절하지 않고 이 곳에 와서 그레이와 얘기를 나눴지만 사실은 정말 싫었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고 싶었을 일.

하기 싫은데 하고 싶은 그 모순된 마음의 사이에 껴서 결국은 술을 마셨으니 취해서 나온 진담이 어디 실수겠는가. 감자튀김 얼린 것은 용서 못할 실수였지만 징징거린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른 실수 안 했어. 닭은 안 얼렸으니까."

"닭 드셨습니까? 혼자서?"

"혼자 먹지, 그럼. 너 잤잖아."

정확히는 재운 것이지만 중요한 차이는 아니니까.

과한 술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아르센의 앞에 코코넛 과육이 가득 들어간 주스가 놓였다. 숙취 해소하라며 에우리아가 주문해 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갈증이 심했던 탓에 그것을 한 입에 비운 아르센이 말했다.

"저 술 냄새 납니까?"

"안 나. 맥주 네 잔 마시고 술 냄새 나면 그게 사람인가."

바로 앞에 히몰리카 두 병을 싹싹 비우고도 술 기운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멀끔한 마법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못미더웠는지 이미 두 번 클린 마법을 썼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마력을 낭비했다.

그레이를 다시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보던 에우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몇 시에 간다고 했어?"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어차피 속이 쓰려서 다른 것은 못 먹겠다 싶은 마음에 그냥 지금 다녀올 생각을 한 아르센이 대답했다.

"그냥 오늘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밥이나 먹어."

일어나려는 아르센을 도로 앉힌 에우리아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천천히 가도 돼. 그게 낫기도 하고."

분명 칼자루는 아르센이 쥐고 있는 상황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속이 타는 것은 그레이일 터였다.

"꼬맹이 네가 꿀릴 게 없다는 걸 알텐데 뭐하러 빨리 가. 늦게 가는 만큼 그놈 요구조건이 줄어들테니 그냥 더 놀다가 가."

빨리 가면 아르센 역시 그레이와 손을 잡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밖에 안 된다. 그러니 그냥 천천히 가서 '나는 너랑 손을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쓸데 없는 욕심을 안 부릴 터였다.

"아. 그게 낫겠네요.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당분간 나한테 협회장님이라고 안 해도 될 것 같아. 귀에 딱지가 좀 앉아서."

구운 감자에 버터를 삭삭 펴바르며 대꾸한 에우리아가 보들보들한 감자 속을 한 스푼 떴다. 영문 모를 아르센의 눈빛이 스푼을 따라 에우리아를 향했다.

"그래. 감자는 뜨거워야지. 언 건 못먹겠더라."

잠깐 딴 소리를 하며 호호 하는 입으로 감자를 씹어 삼킨 에우리아가 여전히 들어가지 않는 아르센의 의문에 대한 느긋한 대답을 덧붙였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 말이 끝남과 함께 점원이 다시 둘을 찾았다. 그리고 양배추와 소고기를 넣고 매콤하게 끓여낸 스튜를 아르센의 앞에 놓았다. 특별히 그것이 아르센을 위해 주문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점원은 알아서 척척 요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히몰리카 두 병을 혼자 해치운 다음날 버터 바른 감자나 먹고 있는 여자 쪽보다는 맥주 네 잔 먹고 잠들어있다 실려간 뒤 다음날 비척비척 걸어와 앉아 오만상을 쓰고 있는 남자에게 필요한 음식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점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에우리아가 스푼 끝으로 스튜를 가리켜보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거나 먹어. 먹고 쉬다가 나랑 같이 가."

"브리센 변경백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브리센 놈들 멍청해서 싫다는 에우리아 아니던가. 그래서 전날 만날 때도 아르센이 혼자 그레이를 만났었다. 그러던 에우리아가 변덕을 부리니 묻는 소리였다.

"어. 심심해서. 오늘은 내가 얘기하지 뭐. 어차피 더 나눌 말도 없겠지만."

후배 마법사가 하기 싫어하는 일 또 하게 두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의외로 섬세하게 챙겨주는 협회장의 말에, 아르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분명 어제 술 취해서 말 실수를 한 것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에우리아가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나.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꼴을 보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의 스튜에서 제일 큰 고기 하나를 뺏어먹으며 웃었다.

* * *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돌아있는 건 알았는데 정말 다 돌아있었구나."

그 웃음소리에 찻잔 두 개를 내려놓던 얀이 칼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발칸의 마법사를 입에 올리면서 웃는 것이 진짜 웃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래서 얀은 안심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 웃을 일이, 아니에요. 정말로, 마흔 아홉 대를, 맞고 왔어요.

보무도 당당한 마법사 한 명이 여기저기 얻어터진 얼굴로 찾아왔을 때 히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칼리안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이긴 놈이 맞았을 거야. 괜찮아."

마주 앉아있던 히나가 결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상한 왕자님도 결국은 마법사구나 해서.

체리와 딸기로 만든 청을 넣은 차에서 좋은 향이 났다. 정확히 히나가 좋아할 만한 달달한 향기와 맛의 차였다.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우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달려와 히나의 팔을 탁 건드렸다. 반가운 마음에 안기려 한 듯 했다.

'찻물······!'

덕분에 몇 방울의 빨간 차가 새하얀 로브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들며 말했다.

"사람 좋다고 그렇게 달려오다 다친다, 너."

"애옹!"

또 대든다.

어느새 좀 컸다고 말대꾸를 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입을 열어 빨간 얼룩이 진 히나의 로브를 깨끗하게 돌려놓은 뒤 아직 마시지 않은 자신의 차를 히나 쪽으로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히나. 당분간 키리에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빨간 얼룩이 진 것을 지워준 것과 쏟아진 차 대신 새 잔을 건네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렸다. 그래서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 무슨 일이, 있어요?

지금의 키리에는 누구를 보아도 가름이 함께 보일 것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무조건 혼자 있는 것이 나았다. 칼리안 자신은 물론 심지어 히나까지 되도록 키리에의 앞에 나서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미안."

이유가 있을 테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은 채 대신 이렇게 사과만 했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 잘은 몰라도, 자상한 왕자님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실 일이면. 오빠도 똑같이 잘못을 했을거예요.

정확히는 몰라도 그럴 것이라고.

- 그러니까, 왕자님 탓으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히나는 그렇게 말해주며 웃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 고양이 이름. 지어주세요.

키리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정작 칼리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칼리안도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다른 고민할 거리를 건네주는 것이다.

미안해하는 마음을 잠시 접어둔 칼리안이 물었다.

"네가 불편하지 않겠어?"

이 말에 히나가 생긋 웃었다.

정말로 히나가 생각한 이유 때문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 맞았음을 확인한 탓이다. 이 다정하고 자상한 왕자를 향해 히나가 포근한 얼굴로 대답했다.

-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히나는 그 똑똑하고 멋있는 말에게 칼리안이 지어준 이름이 겨우 검은색 혹은 커다란 까마귀라는 뜻임을 아직 몰랐다. 그랬으니 마음 편히 칼리안에게 부탁을 한 것이리라.

"알았어. 고민해볼게."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