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베른을 처음 만났을 그때.
텐실에는 큰 홍수가 났었다. 이제 막 봄이 오는 시기에 일어난 재해였다.
밀은 넉넉했고 소금이 부족했다.
귀족들을 위한 밀은 본래 비쌌다. 소금은 더 비쌌다.
밀과 소금을 구하지 못할 가난한 이들의 몸은 썩어들어갔다.
그것을 버티지 못한 이들은 국경을 넘었다.
병력이 넘쳐나는 카이리스보다는 세크리티아에 숨어드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세크리티아는 난민을 무조건 사형시키진 않았으니까.
물론 그것은 난민들의 사정이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국경을 넘어오는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전염병을 옮겨올 수 있었고 범죄가 늘어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정착을 전부 지원해주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어찌하라 하십니까?"
귀족들이나 데블란이 앞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베른은 데블란을 꼭 '아버지'라 불렀다.
친근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인륜을 배반할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그만큼 데블란을 증오했다.
그런 베른을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도 체이스는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겉보기와 달리 체이스 역시 데블란과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니었던 탓도 있었고 베른의 성정을 잘 알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살펴보고 결정하자꾸나."
"아버지가 난민에 대한 문제를 형님에게 일임하셨습니까?"
"그래. 그리 말하시더구나. 그러니 직접 보고 결정할까 한다."
데블란이 수백 혹은 그 이상에 이를지 모를 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이제 막 열 아홉이 된 왕세자에게 넘겼다. 그로 인해 텐실과 세크리티아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태로.
"저는 호위나 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베른이 슬쩍 웃었다.
데블란이 왕세자에게 내어 준 첫 시험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살펴보고 결정하자'며 베른과 함께 문제를 풀 의중을 보였던 체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서다 붙들린 이들이 있는 곳에 왕세자와 왕자가 발을 디뎠다.
천막 하나 없는 너른 공터에 모여있는 난민의 수는 딱 생각한 만큼 많았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들을 쭉 둘러보던 베른의 눈이 한 곳에서 멈췄다. 연보랏빛의 날카로운 눈이 수많은 난민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명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 저거."
체이스가 낸 문제를 마주했을 때.
상대하기 버거운 적을 만났을 때.
죽여버려야 할 세력을 찾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흥미가 동하는 무언가를 앞에 대했을 때 짓곤 하던 표정이 베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난민 아닌데."
물빛 머리의 소년을 보며, 베른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체이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러니 베른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물론 그들은 왕족이었으니 나이 차이가 사람의 위 아래를 바꿔놓지는 않았다.
"열 여덟이라고."
베른의 연보랏빛 눈에 짙은 호기심이 돌았다.
왜 텐실의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을까.
왜 세크리티아로 오려 했을까.
왜 카이리스를 떠나왔을까.
고작 열 여덟인데 왜.
저렇게 짙은 피냄새를 풍길까.
나만큼.
"그렇습니다."
서로 다른 두 색의 눈동자가 베른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본 베른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이 새끼, 눈이 돌았는데."
그것도 나만큼.
그것이 키리에에 대한 베른의 첫 인상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고 훗날 언젠가의 술 취한 베른이 그렇게 말했었다.
눈이 돌아 있어서.
"칼 쓰나? 아니면 주먹 쓰나."
"다 씁니다."
"그래."
그 말과 동시에 은색의 긴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와 키리에의 앞에 던져졌다. 베른의 검이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베른의 입이 열렸다.
"써 봐."
주변의 기사들이 잠시 긴장하는 눈빛을 했다.
베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난민 앞에서 어린 소년을 베어 죽일 셈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기사들을 슥 훑은 베른이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 새끼 이런 데서 죽을 새끼 아니야."
- 타앗!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베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키리에의 몸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그대로 베른을 향해 내질렀다.
베른이 제 자리에 선 채로 몸을 틀었다.
맥락 없이 곁눈질로 배운 검은 베른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리고 베른은 발을 내밀어 그대로 키리에를 걷어찼다.
- 쿠당탕!
그러더니,
"거봐."
하고.
멀찍이 나가 떨어진 키리에를 향해 씩 웃었다.
* * *
"이름."
"키리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베른이 피식 웃었다.
"이름 한 번 거창하네."
키리에는 베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었다. 더는 무릎 꿇리지 말라는 베른의 명 때문이었다.
왕자를 공격하려 했음에도 체포되지 않았다. 베른은 키리에에게 씻을 물을 내어주고 새 옷을 주고 밥을 먹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앉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 참이었다.
분명 씻고 나온 꼴은 맞았다.
그럼에도 풀풀 풍겨오는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았다.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약했으나 베른에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른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카이리스를 왜 도망쳤는지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 기사가 되고 싶은가?"
서로 다른 색의 두 눈.
키리에의 두 눈이 처음으로 생기를 찾았다.
어쩌면 열망이라 불러야 할.
"검입니다."
검이라.
베른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키리에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데블란마저 마주보기를 꺼려하는 살기어린 눈동자를 앞에 둔 채 키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검이 될 것입니다."
그 검이 사람을 베는 검일지 사람을 지키는 검일지. 이런 고리타분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베른은 그런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좋아."
해봐, 하는 말과 함께 베른이 씩 웃었다.
"내가 만들어주지."
* * *
- 안 궁금해? 네 이름 무슨 뜻인지.
- 궁금합니다.
- 이름은 짧은데 뜻은 좀 길어.
- 무슨 뜻이기에 길다 하십니까.
- 안 가르쳐 줄 건데. 평생.
- ······ 왜 안 알려 주십니까.
- 그럴듯 하다고 했지 좋다고는 안 했어.
- 네.
- 뭐야. 뭐가 안 좋은지는 안 궁금해?
- 어차피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맞습니다.
- 그런가.
그럼, 내 이름도 안 맞으려나.
* * *
"또 내기를 하셨습니까."
"아아. 했지."
"얼마 전에는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를 두고 내기를 하셨지 않습니까."
조금쯤 타박하는 말투의 키리에를 향해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것은 좀 장기적인 내기였어. 한 3년쯤 전에 했나."
조금 장기적인 내기여서 내깃돈도 컸던 모양이다. 뿌듯한 얼굴로 체이스에게 받아낸 금화 한 개를 튕기며 베른이 웃었다.
"공돈 생겼다. 술 먹으러 가자."
베른은 유일하게 키리에에게만 왕자 시절의 말투를 그대로 썼다.
그리고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러면서도 늘 '나보단 네가 더 술을 좋아하지.' 하고 키리에 핑계를 댔다.
술집은 잘 안 갔다.
베른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술집 공기가 딱딱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런 역할을 자처했으니 어쩔 수 있겠냐만은 술에 취한 베른은 그런 분위기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술에 취한 베른은 그렇게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 베른의 진짜 모습임을, 함께 취했던 키리에만 알았다.
왕궁의 주류 창고에서 온갖 술을 죄 꺼낸 뒤 빈 자리에 금화 하나를 올려 둔 베른이 씩 웃었다.
"이 정도만 꺼내면 형님께 안 혼나겠지."
그리고는 왕궁 첨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세크리티아의 수도 세크레타.
그곳은 온 세크레타가 전부 보이는 유일한 곳이었다. 베른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런 곳에 올라간 뒤 취하도록 술을 퍼마셨다.
종류도 따지지 않았다. 안주 같은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기분이 나빠서 마셨다.
취기를 흩어낼 수 있으면서도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 꼭대기까지 술에 취해서는 항상 키리에의 등에 업혀 첨탑을 내려왔다.
"무슨 내기 했는지 안 궁금해?"
키리에의 등에 업힌 채 혀 꼬인 발음으로 베른이 물었다.
"궁금합니다."
"그럼 물어봐야지."
키리에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먼저 묻는 법이 잘 없었다. 베른은 늘 그것이 답답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무슨 내기를 하셨습니까."
"네 키가 얼마나 자랄지."
기사 수련실 문을 지날 때 네가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키가 자랄지 그렇지 않을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네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겼지.
이렇게 중얼거리는 말에 키리에가 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일국의 국왕과 왕제가,
비가 올까 오지 않을까 하며 은화 한 개를 걸고.
수하의 키가 얼마나 클까 하며 금화 한 개를 걸고.
그런 내기를 하다 결국은 티격태격 해버리는 곳.
세크리티아는 그런 곳이었다.
언제까지고
그런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 * *
마지막 날.
베른이 그리도 좋아했던 첨탑 위에서.
'··· 키리에.'
체이스가 흘려보낸 말은.
어느 누군가의 이름이었으나
그 누군가의 이름인 것만은 아니었다.
키리에, 그것은.
잠든 신의 자비를 청하는
세렌티를 향한 기도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 * *
잊혀지지 않을 영웅.
이 세크리티아의 마지막 영웅. 체이스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영웅. 모든 것을 포기했던 키리에에게 생을 준 영웅.
베른.
왕의 곁을 지켜야 할 베른이 성문을 나섰다.
이미 늦었음을 안다. 베른을 포함한 모두가 알았다. 알면서도 검을 쥐었다. 알았기 때문에 검을 쥐었다.
그들은 모두 왕의 검이었으니.
- 플란츠 루 룬 카이리스가 시간의 축을 요구했다.
- 세크리티아는 거절했다.
갑작스러운 전쟁 앞에서 세크리티아는 강인했으며 나약했다. 저들이 내세운 마법사들, 그 새하얀 악마들의 손길 앞에 마지막까지 제 목숨을 불태웠다. 불길이 치솟은 몸뚱이로 마법사를 끌어안고 죽었다.
지옥.
그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곳이리라.
플란츠의 발칸은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국왕과 왕제가 은화 한 닢을 두고 내기를 하던 세크리티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테일란이 죽었다 했다.
베른은 울지 않았다.
"멈추지······ 마십시오."
울며 막아서는 체이스를 밀어내고 성문 앞에 나섰다.
"보은을······."
마흔 여덟의 기사가 앞서 죽어나갔다.
"······ 고작 이것 뿐이지만······."
핏물 가득한 키리에의 말이 멈췄을 때.
베른은 비로소 오열했다.
제 앞을 막아서고 화살에 꿰여 죽어간 키리에를 보며 울었다. 이제 막 검의 길에 들어서려던 그 웃음이 떠올라서 울었다. 내기 좀 그만하라며 정색하던 얼굴이 우스워서 울었다. 술에 취한 베른을 업고 내려오려 항상 남겨두었던 마지막 잔이 생각나서 울었다.
제 동생을 보고싶어하던 눈이 안타까워 울었다.
고작 이렇게 가려고. 이렇게 가려고.
충성이랍시고 바쳐진 그 목숨이 아까워 울었다.
그 목숨이 서러워 울었다.
이것이 모두의 마지막임을 알아서 울었다.
* * *
그러니 세렌티시여.
부디 자비를 내리소서.
나의 생을 다하여
보은할지니.
[키리에]
제24장. 이해의 초석 (7)
서류 너머로 들리던 르메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독이 든 차 때문에 죽어가는 몸을 추스르며 앨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왕자의 정복을 처음 입은 날이기도 했다.
플란츠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지 않기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심장이 뜯겨나가는 기분을 참아내며 버티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르메인과 플란츠를 살려놓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게 되리라는 것을 그 때의 칼리안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때문에 한 번 이해를 해보려는 것이었다. 란델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지 몰라도 나중에는 란델을 살려놓으려 애를 쓰게 될까봐서.
'내가 이러는 것을 아시면 체이스 왕세자님께서 꽤 놀라실 것 같은데.'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에 칼리안이 쓰게 웃었다.
말보다 검이 빨랐던 베른이 아니던가.
물론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지만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부리게 될 줄이야.
"조금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이렇게 말을 건넸다.
스치듯 지나간 분노의 감정을 어느새 사그라뜨린 푸른 눈을 향해서였다.
"장미를 건드렸을 때조차 란델 형님의 표정이 바뀌지 않을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아끼시는 것이 남은 듯하니."
칼리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잘려 떨어진 장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고약하게 구는 것은 분노하는 것이 가장 쉽기 때문이었다. 감춰 둔 감정 중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분노임을 베른의 삶을 겪으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르메인을 만나고 온 뒤 왕자의 정복도 벗지 않은 채로 장미 나무를 손질하던 란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장미라면 그것을 건드려 란델의 속내를 끄집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 그것을 빼앗으면 화를 내지 않을까.
화를 내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하고.
"이유가 무엇이냐."
"왜 장미를 꺾었는지를 물으시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하며 나와 마주보려는 이유를 말함이니라."
"궁금해서요. 무엇을 알고 계시는지. 또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지."
가벼운 어투로 답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화라는 것을 한 번 주고 받아 보고 싶어서요."
대화를 하고 란델이 숨긴 것이 힘이든 혹은 속마음이든. 이제는 좀 들춰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화를 하자는 것이냐. 나와 네가."
"어렵겠습니까. 욕심내고 협박하고 그런 어려운 것 말고 얘기나 잠깐 하는 것이."
란델의 시선이 잠시 칼리안의 손 끝을 따라 내려갔다. 그 끝에 떨어져 있던 장미를 한참 쳐다보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또 그리하지는 말거라."
그것이 대화의 시작이었다.
같은 것을 잠시 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벗어난 장미는 전부 잘라내시면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아까우십니까. 어디에 피었든 어차피 다 같은 장미인데요."
"쓸모가 없어지지 않았느냐."
그 말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웃는 얼굴을 했다.
베른도 란델과 마찬가지로 가지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치기에 쓰였다 해야겠지만.
데블란에게 해가 될 이들의 생명을 수도 없이 끊어냈다. 나이 성별 상관 없이 모두 끊었다. 물론 체이스는 모르는 일이다.
그것이 장미 나무가 아닌 정말로 생명을 가졌고 피를 뿜어대는 사람이었을 뿐. 베른이 했던 일도 어찌됐건 가지치기에 속했다. 원해서 했던 적도 있고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어차피 그것은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니.
아무튼 같은 짓을 해 봤으니 저 말이 조금 이해가 된다.
"쓸모는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장미를 주워 들었다. 그 칙칙한 방에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사실 장미라면 조금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아무튼 물에 꽂아 두면 필 테니까.
"지금 제가 란델 형님의 쓸모를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말한 칼리안의 눈에 잠시 날이 섰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대화의 우위는 항상 란델이 가져갔다. 칼리안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 했으니까. 때문에 이번에는 칼리안이 위에 서야 했다.
란델이 웃었다.
지난 번의 그 때만큼 감정이 없던 것은 맞았으나 한 번 겪고 나니 좀 익숙해졌다.
때문에 칼리안이 마주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형님의 힘, 무엇입니까.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란델의 웃음이 그쳤다. 그리고 답했다.
"너무 미약하여 느끼지 못하는 것이더냐."
그렇게 말하는 란델의 목소리에 두 번째의 감정이 들어섰다.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아마 '아쉬움' 정도가 되지 않을까.
란델의 얼굴에 스치듯 나타난 그 의외의 감정을 보던 칼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 뒤 잠시동안 란델을 살피던 칼리안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 빌어먹을."
그려내듯 만들어진 웃음과 어울리지 않을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막말을 꺼내놓는 막내를 보면서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맹세의 인.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언젠가의 약속. 그 약속의 힘이 심장을 묶고 있음을 이제야 눈치챈 것에 대해서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텐실입니까."
"그래."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말씀 못하십니까."
"그래."
맹세의 인을 나눴다는 말조차 먼저 꺼낼 수 없을 계약. 에반 브리센 후작보다는 똑똑한 것 같은 누군가와 아주 자세한 계약.
텐실은 란델에게 힘을 주고 아마도 란델은 그런 텐실을 돕고.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칼리안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둘째 형이 덥썩 받아 온 속박도 머리가 아픈데 첫째 형까지 난리다.
다시 한참동안 란델을 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브리센 때문입니까. 신성기사로 하여금 브리센을 공격하려 하셨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브리센을 없애기 위해 계약을 한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칼리안은 지금 브리센을 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란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온갖 것이 뒤섞인 감정의 흔적이 그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설마. 그 원한의 끝이 전하께 닿아 있습니까."
르메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텐실과 맹세의 인을 나누고, 똑같이 어미를 잃었던 칼리안의 검을 필요로 했느냐고.
"그것도 말씀 못하십니까."
심연 가득한 푸른 눈이 생명인지 죽음인지 알 수 없을 붉은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피곤하구나."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 뒤 그 길로 체르밀을 향해 걸어갔다. 그 걸음을 좇던 칼리안의 시선 끝에 길고 긴 한숨이 매달렸다.
* * *
이거. 아무래도.
플란츠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검을 맞대고 있는 키리에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 까닭이다.
애석하다 여겨야 할지 아니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몰라도 아무튼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이 오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투기도 아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키리에의 검을 힘 주어 올려 친 플란츠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
잠시 말 없이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던 키리에가 검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살기였다.
저도 모르게 살기를 보낸 키리에를 가만히 쳐다보던 플란츠가 검을 집어넣었다.
대련이 너무 길었다.
플란츠는 키리에의 움직임을 읽고 다음을 예측하는 것이 빨랐고 키리에는 일반적인 감각을 뛰어넘어 플란츠의 검을 짚어 낼 수 있었다.
실전에서야 키리에를 이길 수 없을 테지만 키리에가 몇 수를 접고 벌이는 대련이었으니 검을 마주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다 키리에로부터 살기가 흘러나왔다.
대련에 심취한 키리에가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 들었던 이유를 플란츠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아우님이 숨긴 것을 너도 알고 있던 건가."
"······ 죄송합니다."
칼리안이 독을 마셨던 날 찾아온 시종.
체이스가 오고, 칼리안이 흔들린 것을 안 뒤로 하게 된 첫 대련.
그리고, 살기.
무슨 관계였을까.
저 시종은 '아는' 것일까, 아니면 '들은' 것일까.
특별히 의식해서 떠올렸다기 보다는 단순한 호기심과도 같은 생각이 이어졌다.
- 거기까지만 생각하십시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목소리에 플란츠는 생각을 접고 한 발을 더 뒤로 물렸다. 그런 플란츠의 행동을 보던 키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분간 대련은 왕자님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우려하는 듯 보였으므로 플란츠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말을 이었다.
"왕자님께서는 플란츠 왕자님을 탓하지 않고 계십니다. 오해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플란츠에게 말을 하는 것인지 플란츠에게 살기를 내비친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는 것인지.
조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살기등등한 검을 떠올린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내 아우님이 나를 탓하지 않는 건 나도 아는데. 정작 너는 아니군."
키리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귀가 밝습니다. 제가 플란츠 왕자님에 대해서 눈치채게 된 것은 왕자님도 모르십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칼리안은 키리에에게 플란츠와 관련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칼리안이 플란츠와 대화를 나눴던 날이 많았고 키리에가 밖에서 다 들었을 뿐.
플란츠가 실소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칼리안이 자신의 비밀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흘리고 다닌 건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체이스를 마주했을 때 생각한 것처럼 정말로 비밀을 모르는 이들을 세는 것이 빠를 지경이 아닌가.
"칼 겨눌 생각이면 지금 해."
이번에는 절대로 칼을 막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표정을 한 채로 플란츠가 말했다. 그것을 본 키리에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자님께서 원하실 때 하겠습니다."
플란츠의 입가에 다시 한번 비웃음이 걸렸다.
"그러던지."
그리고는 수련장 한 가운데 키리에를 남겨 둔 채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갔다.
* * *
기사들이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체르밀 궁의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이었다. 칼리안의 앞을 꼿꼿하게 막아선 채로 한 명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는 이 곳에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란델이 체르밀 궁으로 들어간 뒤.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던 칼리안이 장미 정원에서 나와 향한 곳은 체르밀 궁이 아닌 정문이었다. 체르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당황한 얀이 빠르게 뒤로 따라 붙었으나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화가 났거나 당황했거나 놀란 표정을 한 것이 아니라 생각에 깊이 빠진 얼굴이라는 것을 얀이 알아봤다. 때문에 얀은 일단 아무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라왔다.
"나가야 해."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기사들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막아. 그럼."
막을 수 있겠으면.
그런 의미가 담긴 칼리안의 눈에 미약한 살기가 어렸다.
다행인 것은 칼리안을 마주한 기사들이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서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는 실수도 하지 않았다.
"비켜. 전하께는 내가 말씀 드릴테니까."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을 더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움직이지 않자 뒤에 있던 얀이 입을 열었다.
"왕궁 밖으로는 나가시지 않게 할 테니 비켜주세요."
그리고는 칼리안의 뒤에 선 채로 자신의 머리 위에 손가락 뿔을 만들어 보였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심기가 많이 불편하시니 사달 나기 전에 적당히 비켜달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뒤에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사들이 양 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 미안."
그들을 향해 짧은 말을 남긴 칼리안이 다시 서둘러 발을 옮겼다.
"왕자님. 마나실 백작에게 가시는 겁니까?"
이제야 비로소 칼리안의 행선지를 묻는 얀의 목소리에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한 속도로 발을 재촉하는 그의 뒤로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루비아 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그리고 별관에 머물고 있는 체이스를 만나기 위해 발을 놀렸다.
제 24장. 이해의 초석 (8)
주변의 시종들과 시녀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흐트러짐 없으나 빠른 걸음으로 루비아의 별관에 들어선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췄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크기를 늘려가는 사념 때문에 제자리에 선 칼리안이 잠시 이마를 짚었다. 루비아 본관에서 기다리도록 얀을 떼어둔 것이 다행이다.
발을 놀리려니 머리가 빙글거리고 머리를 움직이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끌어안고 있던 짐은 가문비나무 앞에 전부 내려뒀다.
그 날 내려놓은 짐의 무게만큼 숨이 찼다.
너무 미안해서.
'정신차리자.'
바로 전날 옛 칼리안에게 '나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치 '어디 한번 살아봐라' 라는 대답을 전하듯 이렇게 또 하나의 숙제가 쌓였다.
란델이 지닌 붉은 빛의 힘. 그것을 알아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어 퍼즐 조각을 얻어 내야 했다. 란델의 입을 열려면 속박을 풀어야 했다. 머릿속이 꼬이고 꼬여서 풀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왔다. 체이스에게로.
"하."
만나야지.
어디 한번 살아보라 하는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이마에 가져갔던 손을 떼고 다시 발을 옮겼다. 더 멈추지 않고 그 길로 체이스가 머문다 했던 곳까지 왔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 테일란은 아마 방 안에 있거나 혹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칼리안이 하얗게 변해 있던 손을 들었다. 칼리안의 몸을 얻은 뒤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노크'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오세요."
그런데 칼리안의 손 끝이 문에 닿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 왕자."
이번에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음에 실소한 칼리안이 짧은 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기사 테일란은 안에 없었다. 체이스만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호위를 물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이 곳에 오는 동안 마주친 것은 오로지 카이리스 왕궁의 사람들 뿐이었다. 이 별관에 머무는 것이 체이스 외에는 없다지만 호위 하나 없이 혼자 있다니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창가에 서 있던 체이스가 담담하게 웃었다. 아마 저 창문으로 칼리안이 이 곳에 오고 있는 것을 보았던 듯 했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체이스의 손이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제야 왕세자에 대한 예도 생략한 채 먼저 말을 걸었음을 깨달은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 체이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으니 앉아요."
칼리안은 죄송하다는 말 대신 고개만 살짝 숙여보인 뒤 자리로 가 앉았다. 그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던 체이스가 손수 내린 커피 두 잔을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커피.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다.
베른은 커피를 즐겼다. 체이스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꺼려했다.
그래서 웃음이 난다.
"감사합니다."
다만 다른 말 없이 이렇게만 이야기 한 칼리안은 이 곳에 있는 누구도 즐기지 않는 향 좋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을텐데 커피를 마셔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베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굳이 감추지 않는다. 차라리 그 편이 칼리안에게도 편하리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큰 이상은 없었고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동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귤, 잘 먹었습니다."
습격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해하지 않았다. 카이리스에서 세크리티아 세작을 마음대로 부리고 테일란을 칼리안에게 보내고. 그런 도움을 감사해하면 다음에 또 무모하게 굴까봐.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입에도 대지 못할 그 신 귤에 대해서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에 나온 말이든 아니든 다 알아들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신 것 싫어할텐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날 플란츠가 귤을 먹었었는데, 하고.
속으로 잠시 웃은 칼리안이 체이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어 왔습니다."
"네. 얘기해요."
곧 칼리안이 란델과 관련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조금 전 정원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 전부 다 체이스의 앞에 풀어냈다.
"제가 텐실에 대해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시 체이스 왕세자께서 기억을 하고 계시는 것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묵묵히 칼리안의 말을 모두 들은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조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있었는지 혹은 미래가 바뀐 것인지도 알아내지 못했고."
그것은 칼리안 역시 짐작하는 바였다.
플란츠나 아르센의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 한 아무리 체이스라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면 과거에 이미 알았어야 하니까.
"다만 텐실이라면."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련된 내용들을 떠올려보는 것에 시간이 필요했다.
"란델 왕자가 어떻게 그 곳의 왕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마차 축이 부러진 사고 말씀이시군요."
그 말에 체이스가 잠시 웃었다.
앨런에게 이야기를 전해달라 했는데 아마 아직 듣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만 체이스는 앨런이 중간에서 묶어 둔 말이 있었음을 알리지 않았다. 앨런이 아직 칼리안을 만나지 못했거나 말을 전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곧 체이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사고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달칵.
테이블의 커피를 다시 집어들려던 칼리안이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말 없이 눈을 내리떴다. 여전한 버릇이 튀어나오자 체이스가 눈으로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체이스가 이 말을 전하고자 한 이유는 간단했다.
란델이 그저 숨죽여 지내다 텐실로 도망친 것이 아니니 주의하라는 뜻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일이 언제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번에도 대답은 조금 느리게 나왔다.
"내년 9월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플란츠가 왕세자위에 오르는 것은 내년 11월, 18세의 생일을 지낸 뒤였다. 그리고 6년 후 르메인이 의문사하며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가늠해보던 칼리안이 말했다.
"란델 형님이 있었다 해도 세자위는 당연히 플란츠 형님에게 갔을 겁니다. 실리케가 왕궁 안의 병력을, 브리센 후작이 왕궁 밖의 병력을 붙들고 있었고, 상권은 레넌이 틀어쥔 데다 주요 변경백 세력은 그레이를 중심으로 단합되어 있었으니까요."
특히 지금 그레이가 수비하고 있는 곳은 텐실과의 접경지역이다. 그말은 곧 란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텐실에서 곧바로 군사를 보낼 수 없다는 뜻과 같았다. 그레이가 막을 테니까.
그랬으니 란델은 절대로 카이리스의 왕세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란델 형님께서는. 텐실의 왕이 되고 싶었거나, 맹세의 인을 나누었다는 모종의 인물이 원했거나. 아니면······."
"죽고 싶지 않았거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란델 형님은 제 앞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
두 칸, 세 칸의 계단으로 그 뜻을 보였다. 그러니 왕이 될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저를 손에 넣을 것'을 염두에 둔 지금의 란델 형님에게 주어진 선택지입니다. 아마도 과거의 란델 형님은 왕이 될 생각을 진작에 접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브리센이 있는 한 절대 이루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네. 칼리안 왕자의 생각이 맞으리라 여깁니다."
"란델 형님의 즉위 이후 카이리스와 텐실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아이샤 전 왕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으리라 생각했고요.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란델 형님은 아이샤 전왕비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과거에서도 알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란델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고 그 일에 칼리안의 변화가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과거의 란델 역시 실리케가 아이샤를 해쳤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란델 형님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맹세의 인을 나눌 만큼 감정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지독할 만큼 이성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아이샤 전왕비가 죽은 원인을 알면서도 카이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 단순하게 보여지질 않습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마치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잠시 체이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체이스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텐실의 왕이 된다 하더라도 카이리스에 복수할 수 없음을 아는 란델 형님이 굳이 그 곳까지 가서 왕위를 잇기를 원했을까. 그것이 어떤 나라든 상관 없이 '왕'이면 족하다 여겼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 결과 제가 낸 답은 '아니다' 였습니다. 란델 형님은 왕위 때문에 직접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요."
물론 란델에 대한 예상이 한 번 빗나가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틀리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차라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카이리스에 남아서 기회를 엿보다 플란츠의 심장을 노릴지언정 힘 없는 나라의 왕위를 탐내서 텐실의 국왕을 해칠 방법을 계획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계획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텐실까지 가서 직접 수행해 줄 만한 인사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칼리안이 잠시 놓친 것이 있다는 얼굴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그런데 왜 사고가 아닐 것이라 말씀하신겁니까."
"그 때 그 일을 알아보던 새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당연히 베른은 모르는 일이다.
텐실에 대한 정보는 체이스가 관리했으니까.
한동안 말 없이 앉아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맹세의 인을 파기하려면 계약 당사자가 사라져야 합니다."
"네. 나도 알고 있습니다."
실리케가 죽는 순간 심장에 묶인 속박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이 맹세의 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칼리안이 선택해야 할 방법은 둘이다.
"맹세의 인과 관련된 놈들을 찾아서 다 죽여버리거나 란델 형님에게 비밀 듣기를 포기하거나, 결국은 둘 중 하나를 해야 되겠네요."
"지금 텐실을 이끄는 국왕과 반대되는 세력이 있을 겁니다. 란델 왕자가 카이리스에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회유한 뒤 텐실의 왕이 된 란델 왕자를 수족처럼 부리려는 이가 있을 테니까요. 마치 카이리스의 브리센 같은 이들."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소파 옆의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내 칼리안에게 내밀었다.
화려하지 않은,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글씨체.
체이스가 직접 쓴 것이었다.
"텐실은 카이리스와 달라서 세력이 꽤 여러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필요하면 참고하세요."
종이를 잠시 넘겨보던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바로 란델이 즉위한 이후 하나씩 사라진 귀족 세력의 정보였다.
칼리안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 가지치기."
혈혈단신으로 텐실에 망명해 곧바로 즉위한 란델. 그런 란델이 귀족 세력을 숙청했다.
"누군가 란델 형님을 도왔다는 말이군요."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이 도왔거나, 맹세의 인을 나눈 대상을 죽이기 위해 란델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았거나. 그것도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새로 맞춰 봐야 할 퍼즐을 받은 얼굴로 칼리안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칼리안을 가만히 쳐다보던 체이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일 돌아갈 겁니다."
확인하고자 했던 것을 알았고 도울 수 있을 것을 도왔다.
이 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리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듯 아닌 듯 갑작스럽게 꺼내진 체이스의 말에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칼리안을 보며 체이스가 다시 말했다.
"내년 초에 마법사들을 모을까 합니다. 나도."
갑자기 내일 당장 카이리스를 떠나겠다는 말도 놀라웠지만 지금의 말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칼리안이 아는 체이스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체이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찾아와서는 한 짐 더 얹어놓지 말라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고 갔는데. 칼리안 왕자는 모르는 일이었나 보군요."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플란츠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한참 동안' 잔소리를 하는 플란츠가 잠시 상상이 되지 않아서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런 칼리안에게 체이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칼리안 왕자. 혹여 같은 일이 되풀이됐을 때, 세크리티아는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그것은, 형이자 왕이었던 이가 내려준 베른에 대한 면죄였다.
제24장. 이해의 초석 (9)
짙은 갈색 혹은 옅은 검은색.
무엇이라 해도 좋을 커피에서는 쓴 맛이 났다.
나중에야 그 맛을 즐기게 됐었다지만 어린 시절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을 때에는 향기와 다른 그 쓴 맛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단 향이 나면 단 맛이 나고 쓴 향이 나면 쓴 맛이 나야지, 그렇게 고소한 향을 내면서 시큼하고 씁쓸한 맛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 이미 충분히 하였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아르센 역시 그 날의 베른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의미가 같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체이스로부터 다시 듣게 되었다.
체이스의 말이 코로 맡으면 향기롭고 입에 머금으면 쓰기만 한 커피 같이 느껴진 까닭에,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 감사합니다."
체이스가 무엇을 위해 그리 말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기 때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기 때문에 다른 말 없이 체이스의 뜻을 받았다.
이미 충분하다.
귀로 듣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말.
마음에 담는 순간 심장을 조각내는 말.
어떻게 충분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하였든 오로지 비극만 남기고 끝나버린 것을. 참극인 것을.
그것을 어찌 충분하다 하겠는가.
칼리안은 이미 잊혀진 이가 홀로 즐기던 커피를 한 모금 더 삼켜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봤다. 속절 없이 올랐다 떨어지는 분수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입을 열었다.
"혹시 배 안고프십니까?"
떠올려 보니 아침도 안 먹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나 속이 쓰린 것은 방금 들은 말 때문이 아니라 빈 속에 마신 커피 때문일 것이라고. 짧은 머리가 유난히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냥 속이 비어서 그런 것이라고.
체이스를 언제 다시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르니 어울리지도 않게 감상적인 사람인 척 하지 말고 밥이나 먹자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전히 뜬금없이 건네오는 말에 체이스가 웃었다.
* * *
르메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겠다."
시종을 먼저 보내지도 않고 갑작스레 찾아와서는 참으로 담백하게 본론만 꺼내놓은 플란츠를 향해서였다.
예상한대로, 르메인은 왕실 내 기사단을 플란츠의 손 아래 두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헌데······."
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르메인이 이렇게 다시 입을 열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이 두 기사단의 통솔권을 흔쾌히 내어주었을 리 없다 여긴 까닭이었다.
- 똑똑
그런데 이렇게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르메인의 말을 막았다.
시종장 라울일 터였다. 플란츠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문을 두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리라. 때문에 르메인은 플란츠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길을 준 뒤 라울을 들여보냈다.
라울의 손에는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플란츠를 앞에 두고 말로 전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던 까닭이다.
잠시 라울이 전해 준 것을 본 르메인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칼리안이 루비아 관에 걸음했다 하는구나. 아직 그리해도 될 날이 아니거늘."
그 목소리와 표정에 참으로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르메인이 최선을 다해 좋게 풀어 말했으나 플란츠의 눈에는 '이 망할 막내놈이 또 도망갔단다' 정도의 말로 바뀌어 보였다. 때문에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올라갔다.
아침에 예상했던대로 칼리안과 란델이 만났음을 안다. 장미 정원에서 나오는 란델과 정원에 홀로 남아 우두커니 서 있던 칼리안의 모습도 보았다.
그러니 두 번 다시 안 만날 것처럼 굴던 체이스를 칼리안이 찾아갔다면 이유가 있으리라.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플란츠는 이렇게 말했다.
찾아간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르메인이 칼리안과 체이스를 연관짓기보다는 그 기사에게 용건이 있다 생각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그것을 굳이 왜 오늘 찾아갔는지 궁금해하면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잠시 플란츠의 말을 곱씹어 본 르메인이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 내일 떠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나 보구나."
슬레이만을 계속 보아왔기 때문에 칼잡는 놈들의 성향을 얼추 아는 르메인이었다.
세리에를 만나 결혼한 뒤 그래도 꽤 머리를 굴리게 된 슬레이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련이나 하겠다며 타국의 기사를 발칸의 훈련장에 데려가지 않았던가. 발칸이 얼마나 중요한 이들인지 모를 리 없으면서도.
그래서 칼리안이 검술에 막히는 것이 있어 테일란을 찾아갔다는 것에도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만 하다 여긴 것이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리 제멋대로 구는지. 이번에는 제대로 혼을 내야 겠구나."
"세크리티아의 왕세자가 내일 돌아가기로 했습니까."
플란츠는 그런 르메인의 말을 못 들은 척 물었다. 말을 돌리려 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어제 그리 전해오더구나."
그런데 이렇게 답하는 르메인은 조금 당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플란츠가 먼저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다.
르메인이 다음 말을 바로 꺼내들지 못한 탓에 집무실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서둘러 원래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린 르메인은 어느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조금 전에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브리센 후작이 그것을 순순히 내어줬을 리는 없을 터인데. 어떻게 그것을 받게 되었는지 알고싶구나."
플란츠의 얼굴에 아주 잠시 의외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르메인은 보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놀라움'이었다. 생각은 많지만 눈치가 없는 소 같은 르메인이 꽤 예리한 것을 짚어냈으니까.
플란츠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맹세의 인입니다. 걱정하실 만한 계약은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인 르메인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아직도 반성할 일이 많이 있음을 되새겨 보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이미 매일매일을 반성하며 사는 것 같기는 했지만 플란츠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여전히 멀었으니까.
플란츠의 대답에 르메인의 표정이 식었다. 손을 잠시 말아 쥐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한 번 맺은 맹세의 계약은 깰 수 없다. 그렇다 해서 무턱대고 심장을 건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걸 것이 없던 칼리안이 제 목숨을 걸고 독차를 마신 것처럼 플란츠도 같은 선택을 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얻어내려 제 것을 걸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래. 가진 것이 목숨 뿐이니 목숨을 걸었을테지······ 내 탓이 크구나."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까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 말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미안하다 하기가 미안해서 못했다.
살짝 눈을 감았다 뜬 플란츠가 작게 말했다.
"하셔도 됩니다. 사과."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르메인은 해야 할 말을 잃어버렸다.
플란츠가 어느새 자랐다. 너무 많이 자랐다.
예전에는 허리춤에 왔었던 손녀가 지금은 더 많이 자랐을 것이라던 앨런의 말이 생각났다.
더 어릴 적의 플란츠가 어땠는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 르메인은 사과를 할 수가 없었다.
"고맙구나."
그래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과임을 불쑥 자란 플란츠는 알아들었다.
* * *
세크리티아에서는 주방장이 음식을 데워 왔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지만 칼리안과 체이스는 그런 것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음식이 전부 식을 만큼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대화가 많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던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즉위식, 미리 축하드립니다."
체이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칼리안은 데블란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가서 축하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나라의 왕위가 계승되는 자리였다.
때문에 타국의 왕족이 축하사절단과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체이스가 즉위했을 때에는 왕족이 오지 않았었다. 텐실에서 하나 뿐인 왕세자를 세크리티아에 보낼 리 만무했고 리베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이리스는 왕자가 둘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방문하지 않았다. 세자위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이 누구든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매년 돌아오는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체이스가 이 곳에 온 행동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 데블란을 어떻게 설득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아요. 고맙습니다."
체이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접시 위에 올려둔 음식에 시선을 둔 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체이스를 쳐다봤다.
체이스의 말은 그 후로 한참 뒤에 나왔다.
"이 곳이 많이 변해가고 있음을 압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테고."
그것이 전부 칼리안의 손 끝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제 할 말만 꺼내놓던 플란츠와 칼리안에 대한 굳은 신의를 보였던 아르센. 노력하기 시작한 르메인.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장미 사이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던 란델까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 체이스가 말을 이었다.
"혹여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오히려 다칠까. 그것이 걱정되어서."
발칸에 속한 저 마법사 한 명 한 명이 세크리티아를 태워낸 불길이다. 그러니 플란츠가 아니더라도 아르센이 아니더라도.
결국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른에게는 칼날이다.
그들을 다 끌어안느라 생긴 상처가 얼마나 될는지.
얼마나 덧나고 얼마나 곪았을지. 얼마나 아플지. 가늠하는 것조차 어려워서.
칼리안은 차분한 빛의 붉은 눈으로 뒷말을 잇지 못하는 체이스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의 시간이 지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히나."
히나.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키리에의 동생 이름이 히나입니다. 귀가 길었는데 잘랐고 말을 못하지만 수어로 혼을 내고 새도 좋아하고 강아지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잘 돌보는데 특히 고양이 목줄에 글씨를 잘 씁니다. 아이스크림을 잘 먹고. 그리고······ 잘 웃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그조차도 아까워서 체이스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 살아있어요."
죽어가는 몸으로 무모하고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를 찾았다. 히나가 함께 있었다.
살아있었다.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빛이었다.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치유였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괜찮다니.
더는 연보랏빛도 아니고 또 돌아있지도 않은 붉은 눈을 본 체이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는 말은 괜찮아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켜낸 그 '빛'을 보며 잘 버티고 있다는 말일 뿐이니.
"내가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칼리안 왕자."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혹여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 때는 스스로를 지켰으면 하는데. 과한 부탁일까요."
베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오로지 지키는 것만 해왔기 때문에 할 줄 아는 것도 생의 목적도 무언가를 지키는 것 외에는 없으리라고. 그러니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지면 멈추지 않던 두 발이 향할 곳을 잃게 되리라고. 베른은 그런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붉은 눈이 보라색 눈을 응시했다. 베른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얼굴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과연 제가 지켜야 할 것이 없어질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살고 싶다 하고 살겠다 하면서 정작 살 생각은 하나도 없는 얼굴로 풀만 처먹는 놈을 계속 살려놓기로 했으니까.
그런 놈이 그런 짓을 한 이유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맨날 애꿎은 장미만 들여다보고 있는 속 모를 놈도 살려놔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과거의 형제든 지금의 형제든 전부 다 지켜내야 하니까.
"사실 제가 체이스 왕세자님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말하지 못한 것이 하나 뿐이겠나 싶지만, 아무튼.
"커피, 싫어합니다. 콩 볶은 냄새가 아니라 르니에리 향기가 나는 것 같아서."
또 언제 보게 될지 모를 체이스의 두 눈을 머릿속에 꾹꾹 담은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커피 좋아하던 베른 말고, 커피 싫어하는 칼리안은 지킬 것이 없어져도 잘 걸어갈 겁니다."
분수대의 물 줄기가 부서져 흩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언젠가의 체이스는 그것이 소슬하다 느꼈으나 이제는 더 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 튀어오른 물방울에 얽힌 햇빛이 무지개를 띄우는 것을 깨닫는다.
체이스는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베른이 아닌 칼리안을 향해 웃었다.
"다음에는 다른 것을 대접하겠습니다. 칼리안 왕자는 무엇을 좋아합니까."
"민트차요. 그러니 다음에 볼 땐 민트차 주세요."
또, 잊어버리지 마시고요.
제24장. 이해의 초석 (10)
칼리안은 없거나 한 번.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 쯤 될 것이다.
한 번에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똑같지는 않겠지만 대충 따져본다면 그 쯤 될 터였다.
"갑자기 왜 오지 말라 하시는 겁니까?"
하, 하는 토막난 숨이 플란츠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뭐 하나 한 번에 '네' 하는 법이 없는 놈 때문이었다.
말 한번 더럽게 안 듣는 저 미친 마법사를 정말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일단 한 번 참았다.
"너. 마법사."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플란츠가 잠깐 눈을 꾹 감았다. 두 번째로 참는다.
참는 김에 상식과 이성을 토대로 생각을 해 본다.
그래. 저 미친 마법사가 하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놈도 발칸의 부군단장이고 플란츠도 발칸의 부군단장이 맞다. 그런데 플란츠는 누구나 익히 다 알고 있는 대로.
왕자다.
속으로 조용히 덧셈을 해 본다.
아르센 저 놈은 그냥 부군단장이다. 플란츠는 부군단장에 더해 왕자다. 플란츠를 지칭하는 말이 더 길다.
이제 반대로 뺄셈을 해 본다.
놈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쥐뿔도 없다. 플란츠에게서 부군단장을 빼면 왕자가 남는다. 시스파니안의 혈통을 가진 고결한 왕족이다.
"여기가 빌헬름관이던가."
르메인의 집무실에서 나와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내려오던 플란츠. 그리고 앨런의 집무실에 가려고 아르피아 궁의 계단을 올라가던 아르센. 이 둘이 만났다.
그러므로 이 곳은 분명 아르피아 궁이었다.
빌헬름관이 아니었으니 플란츠는 발칸의 부군단장이기 전에 왕자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발칸의 일로 만나자 하신 일을 오지 말라 하실 때에는 부군단장으로서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르센은 이렇게 말대꾸를 했다.
칼리안은 발칸의 일원이 아니다. 그냥 아르센을 부리는 왕자였다. 불러서 할 말이 발칸과 관련된 일이었든 아니든 어쨌거나 칼리안은 아르센을 '그냥' 불렀다.
그런데 칼리안이 부른 것을 플란츠가 오지 말라 한다고 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어가며 이렇게 대서는 것이다. 저 미친 마법사가!
아무튼.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 본다. 세 번 참았다.
플란츠의 악다문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게 대단하신 내 아우님께 오늘 심기 불편한 일이 생겼으니 오지 말라고. 내가 그 대단하신 내 아우님 시간 되실 때 잘 모시고 빌헬름관으로 가겠다는데. 대체 왜, 넌."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면 플란츠는 열 여섯 살이다.
즉, 아르센은 플란츠보다 열 세 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싸움이 가능한 이유는 둘 중 한 명의 정신연령이 지나치게 높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낮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이렇게 플란츠가 가진 세 개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는 플란츠의 얼굴에 아이같이 예쁜 미소가 그려졌다.
"부군단장, 너. 계속 그렇게 오늘만 짖고 영영 꺼질 것처럼 구는데."
여기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폭발 지점 하나는 기차게 알고 있는 아르센이 급격히 정중해진 말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계속 외근중이어서 자리에 없을 수 있으니 빌헬름 관에 오셔서 부르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도 괜찮겠습니까."
외근이란다.
헤이시아 궁의 잔해를 청소하는 벌을 참 듣기 좋게 포장해 내보인 아르센이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그 꼴을 보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은 플란츠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눈 뜨기 전에 빨리 사라지라는 의미였다. 그 모습을 보며 씩 웃은 아르센이 앨런의 집무실을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 하."
칼리안은 참지 않거나 한 번 쯤 참는다.
그리고 플란츠는 세 번까지는 참는다.
그 참을성이 끝났을 때 칼리안은 칼이나 몽둥이를 꺼낸다. 그리고 플란츠는 눈을 감는다.
레이븐과 아르센, 이 두 마리가 무조건적으로 칼리안을 따르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임을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이 되어서 동생 놈처럼 짖고 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플란츠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르피아 궁 쪽으로 걸어오는 체이스를 보게 되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플란츠와 체이스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하필, 지금.'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다시 나왔다.
이미 체르밀로 돌아갔는지 칼리안은 없었다.
아르센을 석찬에 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 칼리안 때문인 것은 맞았다. 내일 간다는 체이스를 만나고 온 뒤 플란츠와 아르센을 쌍으로 앞에 두고도 괜찮으면 그야말로 미친놈이니까.
그래서 억지를 부려가며 아르센을 못 오게 했다.
궁까지 부숴가며 밥 챙겨 준 것에 대해 값은 치러야 하지 않겠나.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값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체이스를 마주쳤다.
플란츠는 체이스가 이미 아르센을 만났음을 몰랐다. 대신 체이스와 아르센이 어떤 악연일지 정도는 대충 눈치를 챘다. 그래서 앨런의 집무실에 이미 누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는 정도로는 이야기를 해주려 했다.
때문에 열렸던 입을 플란츠는 도로 꾹 다물었다.
체이스 역시 이런 시점에 플란츠를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덕분에 체이스가 미처 가리지 못한 것이 플란츠의 앞에 드러났다.
그것을 봐서 입을 다문 것이었다.
그 보라색 눈에 비춰지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플란츠의 눈꼬리가 가늘게 변했다.
* * *
단 하나도 잊히지 않는다.
피 웅덩이를 고스란히 짓밟으며 똑바로 걸어오던 모습.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얼굴. 마주한 이의 목을 틀어쥔 것 같은 낮고 차가운 목소리.
애통하여 온 뼈가 다 부스러지는 기분으로, 절망하여 온 살이 다 저며드는 기분으로, 끝끝내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 문드러지는 기분으로 마주했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체이스는 그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 미쳐버린 왕.
모두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이유를 곧바로 알았다.
그 눈.
마치 사방으로 금이 간 유리구슬 같았다. 어디든 살짝만 건드려도 산산이 조각나 깨어질 것 같은 연두색의 유리구슬.
이제 막 생명을 머금은 풀잎 같은 색의 눈에 어떻게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을까.
그 비통한 가운데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우습게도.
* * *
스치듯 지나친 눈빛.
아르센의 창이 심장을 꿰뚫으며 끝난 마지막 기억. 그 직전에 마주보았던 플란츠의 눈. 그 기억이 채 막을 새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튀어 나왔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이의 눈을 보며 문득 치미는 기억을 떠올려버린 체이스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말했다.
"잠시만."
지금껏 의연하게 플란츠를 대했으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동요했다. 과거의 환시가 앞에 서 있는 플란츠와 겹쳐졌다.
칼리안과 오랜 이야기를 나눈 뒤였기 때문이다.
칼리안이 걸어갈 길을 염려하느라 베른이 지키려던 것을 떠올리느라 베른이 채 지키지 못하고 떠난 이후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만나면 항상 말을 많이 하거나 많이 걷게 만들던 체이스의 이런 모습에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보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뒤 손을 내린 체이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또 보는군요. 플란츠 왕자."
"······ 왕자를 본 게 아닌데."
인사에 대한 화답이 아니었다.
정확한 지적에 어느새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체이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많은 것도 이미 알았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오늘 조금 시끄러웠어서. 괜찮습니다."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은지 아닌지는 플란츠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괜찮다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얼굴을 해 보일 수밖에.
"내 아우님을 만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만났습니다. 다시 돌아갔고."
체르밀 궁으로.
그리고 칼리안으로.
돌아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도 플란츠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체르밀 궁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마나실 백작은 이따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체이스가 내일 출발하는 것은 안다.
르메인과의 조찬이 있겠지만 르메인이 굳이 왕자들을 동석시키지는 않을 터였다. 이 어마어마한 집안의 혈기왕성한 세 아들이 전부 다 사고를 쳐서 전부 다 근신 중이 아니던가.
그러니 플란츠 역시 오늘이 지나면 당분간 체이스와 이야기 할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런에 대한 내용만 전한 채 돌아가려 한 것은 묻고 싶은 말이 생길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참으로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졌다면, 플란츠는 참으로 오지랖 넓은 죄책감을 가졌으니까.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발을 놀림인지 놀라움인지 모를 말이 붙들어 잡았다.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체이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 왕자는 플란츠 왕자가 나를 찾아왔었던 일을 모르더군요."
젠장.
호칭이 또 바뀌었다.
한여름 카이리스의 날씨만큼 변덕을 부리는 저 호칭에 플란츠는 또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플란츠 왕자가 칼리안 왕자를 그렇게까지 해 가며 도우려 한 것도 의외였고 칼리안 왕자가 그 일을 모르는 것도 의외였고."
"······ 그다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굳이 알려가며 움직일 필요도 못 느꼈다. 어차피 서로 모르는 일이 한 둘도 아닌데 의외일 것 까지야.
이런 의미를 담은 세 글자의 대답을 내 놓은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체이스는 칼리안이 아니었으니 아마 제대로 못알아 들었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별로."
그래서 이렇게 덧붙여줬다. 별로 대단할 것 없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대충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별다른 인사 없이 체르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체이스의 말이 플란츠의 걸음을 또 붙들었다.
체이스의 기억 속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붙들지 못할 것 같던 무감정한 걸음이 너무 쉽게 돌아선다.
"또, 뭐."
귀찮아하는 기색이 가득하지만 사려 깊은 목소리.
살짝 웃은 체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차피 이 부분은······ 칼리안 왕자가 모르는 일이라서."
이렇게 말한 체이스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어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나에게 준비를 하라 했을 때. 당신이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던데."
시선을 돌려 플란츠의 눈을 본 체이스가 말했다.
"아마 맞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현재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이스가 지금 베른이 겪었던 그 시간에서 플란츠와 만난 적이 있었다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플란츠의 고개가 살짝 올라갔다.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혹은 듣기 싫다는 듯한 반응을 보여도 체이스가 그에 대해 실망할 수는 없을 일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플란츠는 지금껏 보여준 모습 중 가장 집중하는 모습으로 체이스를 쳐다봤다.
"이유가 있으리라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던 탓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었고."
아쉽게도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는 없었다.
고갯짓.
연두색의 눈이 감기며 내저어진 고갯짓 한 번.
그와 함께 걸어 나온 발칸의 군단장.
조용히 건네진 미안하다는 말.
그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왜 해주는데."
"플란츠 왕자의 행동이 돕는 것인지 갚는 것인지 모르겠어서 해주는 말입니다."
칼리안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지 아니면 칼리안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인지.
"갚지 말고 도와달라고."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갚는 것처럼 보였나."
"글쎄요. 돕기로 해서인지 갚기로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제멋대로 독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아무래도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구명줄이 되지 못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그 날의 플란츠를 입에 담는 것이 플란츠에게 약이 될지 혹은 독이 될지 체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려주는 것은 만약 이 이야기가 플란츠에게 독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에 비해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 날의 플란츠는 베른에게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플란츠가 스스로를 이해할 이유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체이스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플란츠는 듣기만 했고 체이스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플란츠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래······ 새겨 듣지."
체이스가 이 말을 왜 꺼냈는지 플란츠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플란츠는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온 얼굴로 이렇게만 말했다. 체이스는 그런 플란츠를 향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루비아 관 쪽으로 걸어갔다. 앨런은 잠시 뒤에 만나러 오기로 한 채였다.
만나서 반가웠다거나 다음에 또 보자거나.
그런 말을 나눌 만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인사는 먼 훗날 언젠가 하면 될 테니.
제24장. 이해의 초석 (11)
잠시 잊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식사용 나이프를 돌려줬을 때. 우아하기 짝이 없는 그 특유의 말투로 그레이의 허리를 부러뜨린게 자신이었다고 말했을 때. 그리고 헤이시아 궁을 무슨 이유로 무너뜨렸는지 눈치챘을 때.
이미 생각했었지 않나.
내 동생 놈이 좀 미친 것 같다고.
"이것 참······."
그 동생 놈, 칼리안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짜증난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칼리안을 쳐다봤다.
플란츠는 분명 체이스를 만난 칼리안이 플란츠 자신과 아르센을 보기 어려워 할 것이라 여겼다. 둘을 앞에 놓고도 괜찮으면 그게 바로 미친놈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했다.
미친놈이 맞다는 것을 상기했어야 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가 형님의 과묵함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배려심에 놀라야 할지."
조용히 웃으며 꺼내진 칼리안의 말.
그 붉은 눈에 '기특하긴 한데 안 어울리게 왜 그랬니' 정도의 말이 담겨있음을 안 플란츠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다 동생 놈보다 조금 더 많이 미친 것 같은 그 마법사 때문이다.
분명 플란츠는 오늘 아르센을 만나 석찬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세 번의 인내심을 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플란츠가 간과한 두 가지 문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칼리안이 저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짖을 거면 입 닫아."
플란츠가 간과한 것 하나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르센을 못 오게 했다는 것을 어디에든 알렸어야 했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주방장은 3인분의 저녁 만찬을 착실하게 준비했고 칼리안도 석찬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플란츠의 배려를 받기에는 칼리안의 사고체계가 다소 정상적이지 않은 범주에 속해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르센을 굳이 다시 부르겠다 말했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만약 석찬이 취소된 것을 매우 아쉬워 한 아르센이 칼리안이 건넸던 돈을 들고 발칸의 마법사들과 술판을 벌이러 나가지 않았다면 칼리안은 기어코 아르센을 다시 불러왔을 터였다.
이런 이유로 플란츠의 심기는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그런 플란츠로부터 또 한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늘 그랬듯 한 귀로 흘린 칼리안은 그냥 계속 짖었다.
"형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제 속이 좁지는 않습니다. 오늘 헤르츠 경을 만나지 못할 이유도 없고요."
"속이 넓고 좁음으로 따질 문제였던가."
안 그래도 말 없는 플란츠는 더더욱 할 말을 잃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결국 플란츠는 칼리안이 뭔 소리를 하든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의 칼리안이 아르센을 꺼려해야 할 서른 가지 쯤의 이유가 동시에 떠오르는 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슬며시 웃는 얼굴을 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형님께서 이렇게나 신경을 써 주시니."
무슨 말이 나올지 안다. 고맙다는 말이 나올 차례였다.
여지없이 플란츠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치워."
"네."
칼 같은 거절에 칼리안은 칼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집어치웠다.
곧 칼리안은 주방장과 시종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자리를 비켜달라 말했다. 그렇게 주변을 물린 뒤에는 여유로운 태도로 3인분의 만찬에 손을 가져갔다. 이 중 2.5인분 정도는 아마 칼리안의 몫이 될 테니 주방장이 애써 만든 음식이 남을 염려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석찬이었던 탓에 저녁 식단이 '플란츠 맞춤'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샤프란 향이 가득한 오리 고기 스튜, 바질을 태운 연기에 훈연한 송아지 고기, 계피와 사과를 졸인 소스를 뿌린 돼지 안심 구이, 후추 향이 진한 양고기 등.
음식들을 대충 훑어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고기를 뜯어 먹을 성격으로 알려진 카이리스 2왕자가 알고보면 편식을 넘어 거식에 가까운 식성을 가졌다는 것을 주방장한테 알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플란츠는 향신료 범벅의 고기 요리 사이에서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에게 나눠줘도 될 것 같은 무미건조한 닭가슴살 샐러드를 용케 찾아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드시면 키리에는 절대 못 이기실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깨작거리는 것을 멈출 줄 알았다.
그런데 키리에의 이름을 들은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음식에서 시선을 뗀 플란츠가 칼리안의 눈을 직시하며 대꾸했다.
"그 전에 죽겠던데. 내가."
키리에가 대련 중 살기를 내비친 일을 칼리안은 아직 몰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아주 오랜만에 플란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 됐다.
"내 아우님의 귀 밝은 시종이 화가 많으시다고."
그제야 칼리안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난처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과 플란츠의 난해한 대화를 조각조각 모은 키리에가 결국은 과거의 일을 짐작하게 되었나보다.
평소 조용한 키리에라지만 칼리안과 관련된 일에 어떤 변화를 보일지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키리에도 그랬으니까. 키리에는 분명 대련과 실전을 구분하지 않았을 터였다.
칼리안은 그 일에 대해 키리에를 혼내거나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기억 없이 추측만 할 뿐이라 해도 과거의 일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칼리안이 가장 잘 알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절대 강제할 수 없다는 것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제가 나가겠습니다."
때문에 칼리안이 키리에를 대신해 뭐라 말하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됐어. 설명이든 사과든."
키리에가 내용을 알았다는 것을 전해주고 대련 상대를 바꾸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 키리에를 이해하지 못해 꺼낸 말이 아니었다.
"네."
그래서 칼리안은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사과든 감사든 참 열심히 거절하는 모습 때문이다.
"웃음이 잘도 나오지."
"체이스 왕세자님을 만나고, 이런 날을 보냈다 해서 웃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미가 있으니 웃어야죠."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호수와 그 뒤의 장미 정원에 시선을 둔 채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루비아 관에는 왜 갔는데."
"란델 형님께도 하나 있습니다."
칼리안은 마치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는 하얀 손가락 끝이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플란츠의 가슴께를 가리켜보이고 있었다.
붉은 눈에 형제들을 향한 질책이 그득하다.
"······ 그거."
"내 아우님이 구명하실 것이 하나 늘겠군."
"네. 덕분에 여기가 좀 더 바빠졌고요."
칼리안은 플란츠의 심장을 가리켜보이던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아무튼 란델 형님의 인은 제가 풀 문제라서.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플란츠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언제나와 같이 나른한 한숨 같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도 않을 말은 왜 꺼내셨는지."
"저리 구시는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넘기시면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란델 형님 마주쳤을 때 괜히 시비거실까봐 걱정되서요. 두 분 사이 안좋잖아요. 많이."
"또 짖지."
하루에 두 번 짖기를 성공한 칼리안이 웃었다.
"저는 미래의 일에 대해 스승님 외의 다른 이들에게 알린 적 없었습니다. 그럴 권리까지 저에게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란델 형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체이스 왕세자께서 건네 준 정보를 활용해야 하는데, 그건 지금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님께 말씀 못드립니다."
칼리안이 이렇게 솔직한 이유를 덧붙였다.
"또 눈치 채실 것 같아서. 이번에는 그러지 마시라고."
플란츠가 그 일을 궁금해하면 눈치를 챈다.
그냥 두면 플란츠의 저 똑똑한 머리로 어떤 사고를 통해 어떤 결론을 내게 될 지 칼리안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칼리안의 말을 들은 플란츠가 물잔을 손에 쥐었다.
다만 그것을 들어올려 마시지는 않았고 차가운 유리잔 겉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잔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 끝을 따라 지워지는 것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텐실의 권력은 꽤 복잡하게 나뉘어 있을텐데."
"······ 생각하지 말랬더니."
란델이 맹세의 인을 맺었다는 소리 하나에 저만큼을 따라왔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잠시 응시했다. 오래지 않아 칼리안의 입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났다.
"내 형님께서 말을 너무 안들으시네."
"내 아우님은 버릇이 너무 없으신데."
말은 그렇게 귀찮아하면서 한 마디를 안 지려고 든다.
왜 말을 못해주는지 그 이유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플란츠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알려고 든다.
"말씀 안 드릴 겁니다."
"뭘 하려는 건지는 말을 해도 되지 않나."
"이해해보겠다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해를 해 볼 준비를 하는 겁니다. 화목한 형제 관계를 위한 이해의 초석을 다진다고 해야 할지. 제가 제대로 이해를 해야 납득을 하고, 납득을 해야 해결을 해 볼테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란델 형님이든, 카이리스든, 세렌티든. 일단 이해부터 해보려고요."
"대체 왜. 상관도 없는데."
"상관 있어서 하는 짓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칼리안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어렸다.
오지랖 넓은 죄책감 가진 애증하는 형제를 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튼 제 말은 무작정 걷지 마시라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 길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가십니까. 겁도 없이. 끼어들지 말라 하니 기어코 끼어들고 확신하지 말라 하니 어떻게든 확신하고. 아무튼 지긋지긋하게 말을 안 들으시네요."
"많이 짖는데. 오늘."
"제대로 살펴보고 다 알게 된 뒤에 움직이셔도 됩니다. 모두 확인하고 나서도 괜찮겠다 싶으면 그때 걸으셔도 안 늦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식사하십시오. 골고루."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닭가슴살 샐러드 사이에 있는 피망 빼지 말라는 소리였다.
* * *
온전한 내 편.
그 짧은 사이 칼리안의 편이 참 많이 생겼다.
그 많은 이들 중에서도 무조건 기댈 수 있고 부끄러움 없이 의지할 수 있으며 흔쾌히 도움을 주고 그에 대한 값을 받아낼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온 팔로 가득 안아주며 반겨 줄 사람. 아득히 먼 훗날의 언젠가에도 반드시 곁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사람.
그런 이가 있을까 할 때 고민 없이 곧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
"아······."
앨런 마나실.
"스승님."
새벽까지 뒤척이다 잠이 들었고 얀의 종 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 너머로 둘이 보였다.
소파 위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는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있었고 그 옆에 앨런이 앉아 있었다.
칼리안의 목소리에 앨런의 다리에 편한대로 기대어 엎드린 채 기분 좋은 게으름을 피우고 있던 고양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언제 고롱고롱 소리를 냈었냐는 듯 문 밖으로 우다다다 달려 나갔다. 지금껏 기대고 있던 다리의 주인부터 챙기는 칼리안 대신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가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다 앨런을 향해 고개를 돌린 칼리안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폈다.
"오셨습니까."
유난히 반갑다.
항상 반갑지만 정말 유난히 반갑다.
커튼에 가려져 칼리안이 웃는 것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앨런은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또 멋대로 와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스승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정말 언제든 앨런이라면 무조건 좋다.
이렇게나 환영받는 앨런은 자신을 반겨하는 칼리안의 목소리 끝에 맥이 풀려 있음을 알아 들었다. 사실 그것을 알아들으려고 찾아온 길이지만.
얀에게 차를 부탁한 칼리안이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잠시 후 시녀들이 모두 나가자 제자 걱정 가득한 얼굴의 앨런이 입을 열었다. 속이 좀 어떤지는 물어 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너무 눌러두지는 마시지요."
첫인사를 주고 받기가 무섭게 위로부터 해주는 스승을 보며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잠깐 바람이나 쐐요, 스승님."
체르밀에서 왕궁 정문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과 함께 테라스로 나간 칼리안이 의자에 앉았다.
오래지 않아 얀이 민트차와 밀크티를 내려놓고 나갔다. 칼리안이 커피를 싫어하게 된 이후 얀은 칼리안의 차를 되도록 직접 준비하려 했다. 새끼코끼리가 온갖 정성을 다해 우려낸 차는 언제나 맛이 달랐다. 그래서 늘 맛있었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칼리안과 나란히 앉은 앨런이 손가락을 튕겼다. 훈훈한 온기가 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칼리안은 겨울의 대사막에 발을 디뎌도 추위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따뜻하다고 느꼈다.
칼리안은 얀의 앞에서 언제나 꽃같은 왕자였고, 앨런의 앞에서 그저 어여쁜 제자였다. 늘 그것이 좋았다.
"손가락 굳이 안 튕기셔도 되잖아요."
웃은 것이 괜스레 민망해진 칼리안이 이렇게 물었다. 항상 궁금했지만 매번 묻지 못했었다. 왜 항상 마법을 쓸 때 저 경쾌한 소리를 내는지 말이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테라스 너머의 호수를 봤다.
그것이 언젠가의 칼리안에게는 안네루시아 띄운 세뉴강이었으니 앨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떠난 이를 생각하며 바라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시동어 없애기를 연습할 적에 이렇게 해보라고 누가 그랬습니다. 시동어도 대신하고 멋도 있어 보이니 좋지 않겠냐 하였지요. 그것이 버릇이 되어 이렇습니다."
그런 앨런의 얼굴에는 그리움 가득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그가 누구였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웃음을 짓는 법을 칼리안도 배웠으니까.
"누군지 아주 잘 알려드렸네요. 멋있습니다."
대신 칼리안은 이렇게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자 했던 칼리안의 깡마른 손이 르메인이 아닌 앨런을 붙들었던 그 날. 르메인의 아들일 수도 없고 데블란의 아들일 수도 없는 칼리안을 앨런이 보듬어 안았다.
그러니 칼리안은 분명 앨런의 아들이었다.
이제는 앨런도 칼리안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칼리안을 찾아온 앨런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지워지질 않았다. 때문에 앨런을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 다음에는 좀 덜 신 귤을 보내달라고 말해두었습니다. 또 한 번에 다 드실 것이 분명하니."
"왜 그러셨어요. 귤은 셔야 맛있는데요."
"늙은이랑 좀 나눠드시지요. 그리 신 것을 다 가져와서는 혼자 욕심을 내십니까."
그것이 귤이든, 혹은 시디 신 서러움이든.
혼자 다 차지하지 말고 나눠주라는 마법사의 말에 칼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런두런.
르메인과 조찬을 마치고 나온 체이스가 멀리 보이는 체르밀 궁을 잠시 바라보는 동안. 체이스를 태운 말이 왕궁의 정문을 지나 왕도에 오르도록. 광장을 벗어난 체이스가 카이리시스 외성을 나설 때까지.
입담 좋은 스승과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제자의 소소한 대화가 계속 계속 이어졌다.
두런두런.
제25장. 있어야 할 곳 (1)
하얗고 긴 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모였다.
그 손에 쥐는 검이 이 세계의 어떤 명검보다 특별했던 까닭인지 아니면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그런 곳에까지 영향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흰 손에는 흉터는 물론 굳은살조차 없었다.
진득한 피는 물론이고 흙탕물에도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손이 조용히 올라갔다. 스스로는 핏빛이라 여기고 남들은 루비의 색이라 말하는 붉은 눈이 손 아래 감춰졌다. 그렇게 칼리안은, 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잠시 덮었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가 잠시 들썩이더니 흐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크게 움직였다. 그 후에는 참아내지 못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결국은 웃음보가 터졌다.
앨런의 집에 갔을 때 꾸물꾸물하는 꽃 모양의 석상이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터졌었는데. 이번에도 한결같다.
"아, 마법사들이란."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다시 들여다봤다.
[우리는 왜 가게를 부쉈나?]
[내 이성이 지극히 감성적이었던 시간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의문. 우리는 왜 멀쩡한가.]
이런 제목이 적힌 종이들, 정확히는 보고서 형식의 무언가를 손에 든 채로 칼리안은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다 돌았나봐."
그리고는 정말 간신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칼리안이 손에 쥔 이것은 마법사들의 경위서, 정확히 말하자면 반성문이다.
전날 술 마시러 나갔던 발칸의 마법사 몇몇과 일단의 무리 사이에 시비가 붙었단다. 그것이 말싸움이 됐고, 하나같이 입심 좋은 마법사들이 이겼다. 그것에 분개한 무리가 친구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대화의 장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마법으로 사람을 팼다.
사람만 팬 게 아니라 가게도 팼다.
가게는 왜 팼냐고 물어보니 기억이 안난다 했단다.
"술은 왜 처먹은거야? 이미 돌았는데."
아.
이미 돌아서 마시기도 하지.
"돌아서 마실 만큼 심하게 돌아있는 놈은 없었는데."
이렇게, 얀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칼리안이 경위서를 다시 쳐다봤다.
경위서 제목이 이따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물론 칼리안을 우습게 봤다거나 놀리려는 마음에서 저런 식으로 쓴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웃었다.
누군가 작성한 [집중 탐구 : 술기운과 폭력성의 상관관계] 라는 제목의 경위서가 가장 위에 있었다. 이번 일의 책임자라서 혹은 그들 중 가장 윗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나마 가장 '진지해보이는' 제목이라서 맨 위에 올려두었을 터였다.
자신들도 아는 것이다.
마법사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족속들인지.
그동안 마법사들의 보고서는 앨런과 에우리아가 전해주는 것만 받아왔던 칼리안이었다. 그러니 진짜 마법사들이 보고서를 어떻게 쓰는지 지금 처음 봤다.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제목보다 더 했다.
"왕자님, 말씀을······."
꽃 같은 왕자의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져 나오자 옆에 서 있던 얀이 잠시 주의를 주려다 멈췄다. 분명 웃었고, 웃는 눈이었고, 웃는 입이었으나 분위기가 달랐다.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얀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을 느낀 칼리안은 경위서를 향한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시선만 돌렸다. 그리고는 굳어있는 얀을 향해 표정을 풀며 말했다.
"눈치 보지 마. 안 그래도 돼."
얀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을 좀 곱게 해라'라는 소리를 다시 꺼내놓지는 않았다.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쉰 칼리안이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안 다쳤대?"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싸움 한 놈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마법사들은 빌헬름 관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가게가 좀 부서졌고, 다친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헤르츠 경은 말리지 않고 뭘 했다는데? 함께 나서서 싸움을 하지는 않았을 것 아냐."
전해진 경위서에 아르센과 관련된 이야기가 없기도 했고, 아르센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는 않았으리라 믿었다.
"싸움 시작되기 전에 집에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르센은 술 좋아하고 술 약한 마법사였다.
그런데 뭐가 좋다고 술을 처먹으러 나간 거야. 술도 못 처먹는 놈이 왜 술을 처먹다 먼저 처들어가서 일을 만드느냐고.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면 새끼코끼리가 또 무어라 염려하는 소리를 할 테니, 칼리안은 얌전히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한 경위서를 대충 훑어 본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보상부터 해주고, 헤르츠 경 불러줘."
치안대에 붙들려 간 마법사들은 이 일이 발칸이나 왕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치안대에서는 이에 대해 곧바로 왕궁에 알렸다.
그날 앨런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 칼리안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급히 전해진 보고는 칼리안이 함께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앨런은 이 일에 대한 뒷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칼리안의 의견을 물었다.
르메인이 아닌 칼리안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어차피 놈들이 '발칸이 아닌 개개인'으로 사고를 쳤다 말했으니까.
해서 칼리안은 잠시 생각을 해보겠다 말하고 앨런을 먼저 돌려보냈다. 마법사들이 스스로 제 무덤을 팠으니 굳이 나서지 않고 지켜 보기만 할 이유가 없었다.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아니다. 잠깐만."
마음을 바꾼 칼리안이 생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포크를 움직이던 플란츠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 무릎에 누워있던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가 털을 세우며 낮게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둘 모두 식사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미미한 살기를 느낀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새끼코끼리를 향해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간다고 해."
첫 실수.
일이 일어난 김에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실수한 것인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 * *
시종장 라울이 올려두고 간 쿠키를 한 입 먹어본 앨런이 흡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린느가 보낸 것입니까?"
보존 마법 덕에 코코넛 특유의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쿠키였다. 리베른의 국왕 엘린느의 식사를 담당하는 요리사가 직접 만든 그 쿠키는 리베른에 머물 당시 앨런이 가장 즐겨 먹던 것이기도 했다.
발칸의 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르메인이 그런 앨런을 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왕궁에 무슨 일이 있든 칼리안과 연관된 일만 아니라면 크게 신경쓰지 않는 앨런임을 상기한 것이다.
그리고 앨런이 저렇게 태평하게 구는 것에는 항상 믿는 구석이 있음을 알았다. 때문에 르메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네."
체이스가 칼리안을 위한 귤을 르메인에게 주었다면, 엘린느는 앨런을 위한 쿠키를 르메인에게 보냈다.
그것을 르메인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재밌기도 하고 괜히 미안하기도 해서 앨런이 잠시 웃었다.
"그리 큰 일은 아닙니다. 심려 마시지요."
"왕궁의 정예 병력이 왕궁 밖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렸는데 그것을 어떻게 심려하지 않겠나."
"두 왕자님께서 그리 큰 일이 안 되게 잘 해결할 터이니 괜찮을겁니다."
"그런 일을 왕자들에게 맡겨뒀다는 말인가."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에 한 입을 먹고 남은 반 쪽의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군대를 훈련시키는 것과 그들이 벌인 사고의 뒷수습을 하는 것은 다소 차이가 있지 않겠나."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누구보다 잘 하실 겁니다. 지금껏 왕자님들께서 해 온 일이 그것 아닙니까."
쿠키를 입에 넣은 채 이렇게 대꾸한 앨런이 그것을 모두 삼킨 뒤 느긋한 대답을 꺼내놨다.
르메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아서였다. 때문에 거기까지만 말해도 잘 알아들었다 하려는데, 앨런의 입은 닫아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벌인 일의 뒷감당."
그래.
전부 내 탓이다.
발칸의 마법사가 술 먹고 싸움질을 한 일을 얘기하다 또 한 소리를 들은 르메인이 포기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