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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8화

45장 멈추지 않는 것

"뭔가 이상한데.... 진짜 괜찮음?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전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저택에만 있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저야말로 톨라리 언니가 걱정이에요."

"나?"

"사령군과 싸우다 마력 다 쓰고 기절하셨다면서요? 그거 위험하다고 그랬잖아요. 잘못하면 후유증 오래 남는다고."

"맞아. 덕분에 르갈 친구들 떼로 몰려왔는데 침대에서 자리보전했네. 내가 몸이 약해서."

기껏 에이션트 이글의 코어를 먹었건만, 아쉽게도 그곳엔 몸이 튼튼해지는 효과는 들어 있지 않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옆에 딱 붙어서 졸라봐야겠어. 황자님 돌아오면 말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코어 말이야. 마력 말고 체력이나 힘이 강해지는 코어가 필요해. 한계까지 싸우려면 마법사도 튼튼해질 필요가 있어."

"좋은 말씀이세요. 저도 빨리 강해져서 황자님께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르네는 방긋 웃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다들 싸우는데 저만 여기 남아 있는 게 괴로워요. 앞으로 8개월만 지나면 엄청난 전쟁이 시작되는데, 그때도 절 빼놓고 싸울 것 같아 걱정돼요."

"끙...."

톨라리는 힘겹게 신음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왠 걱정? 르네야.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요?"

"너 빼먹고 싸울까 봐 걱정하지 말라고. 이거 지면 모두 끝장나는 전쟁이야. 네가 필요하면 너도 무조건 싸워야 해. 반대로 네가 필요 없으면 그게 행복한 거고."

"행복이요?"

"네가 안 싸워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거니까. 열네 살짜리를 전쟁에 밀어 넣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모두가 행복한 결말 아닐까?"

톨라리는 그렇게 말하며 르네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닿기 전에 흠칫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르네야?"

"행복은... 잘 모르겠어요."

그 순간 르네의 몸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운 한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제 목숨을 구해주신 황자님을 위해. 제게 너무 잘해주신 다른 분들도, 특히 톨라리 언니를 위해서도 말이에요."

"잠깐, 르네야, 너 지금 무슨 소리...."

"목소리가 들려요."

르네는 인형처럼 경직된 눈으로 톨라리를 바라보았다.

"제게 힘을 주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요. 처음엔 그냥 간절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리고는 품에 안은 푸른빛의 커다란 구슬, 바로 얼음의 핵을 머리 쪽으로 들어 올리며 귀를 기울였다.

"정말로 제게 힘을 줬어요."

"르네? 일단 그것부터 내려놓자. 전부터 좀 이상했어. 아무리 네가 얼음 속성이라도 하루 종일 껴안고 사는 건 말이 안 돼."

"그럴 수 없어요."

르네는 고개를 저었다.

"전 힘을 받았어요. 모두와 함께 싸울 수 있는... 모두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받았어요. 그러니 이젠 보답해야 해요."

"보답? 누구에게? 황자님"

"황자님...."

그 순간, 르네의 깨끗한 안구에 탁한 빛의 성에가 맺혔다.

파직!

"...누구? 황자님 누구?"

"루네야?"

"당신은 누구? 나는.... 나는...."

동시에 루네의 몸이 의자에서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톨라리는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다 극심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찌푸렸다.

"으, 이거 아직도...."

"목소리가 들려. 날 부르고 있어. 난 가야 해. 근원으로, 힘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해."

루네의 목소리에 모든 감정이 사라진 순간, 톨라리의 방 전체에 극한의 한기가 쏟아졌다.

"큭!"

톨라리는 급하게 바람으로 몸을 막으며 침대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득!

한순간 방 전체가 빽빽한 서릿발에 휩싸였다.

콰광!

"루네야!"

고개를 치켜들자 뻥 뚫린 천장이 보였다. 톨라리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구멍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비행마법... 아직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쟤는 속성이 얼음이라... 사실상 아크 위저드 찍어야 쓸 수 있는데...."

"톨라리님!"

그때 디디가 방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왔다.

"방금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이, 아니 이 추위는 대체 뭡니까?"

"아니, 그게 그러니까...."

"후원자의 습격입니까? 그리고 좀 전에 들어간 루네는 어디 갔습니까?"

디디는 검을 뽑아 든 채 방 이곳저곳을 빠르게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던 톨라리는 일단 비행마법으로 몸을 띄우며 말했다.

"디디? 너 설마 날 감시하고 있던 거?"

"감시가 아니라 보호입니다."

"보호?"

"제 주제에 어찌 톨라리님을 보호하겠습니까만, 황자님께서 만에 하나를 후원자가 톨라리님을 노리는 것을 대비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한밤중에 아가씨들만 있던 방문 앞을 잠복하고 있던? 아니, 당장 그게 문제가 아니라."

톨라리는 쏟아지는 두통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방금 루네가 천장 뚫고 날아갔어."

"...네?"

"항상 끌어안던 얼음의 핵 때문인 듯. 근원 어쩌고 했으니 십중팔구 정령이야."

"정령이라니, 황자님께서 소환하시는 그 정령 말입니까?"

"아마도. 얼음 계열 정령 같은데."

톨라리는 뻥 뚫린 천장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날아간 방향은 북쪽... 뭐 당연하겠지. 엄청 빠루네. 내가 따라갈 테니 황자님 오시면 말해줘."

"뭐라고 말입니까?"

"루네가 정령에 홀림. 아마도 정령왕. 얼음의 근원까지 가면 곤란하니 그전에 잡아서 데려올게. 근데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럼 안녕!"

그리고는 천장의 구멍으로 날아오르며 북쪽 하늘을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디디는 멍한 얼굴로 한참동안 구멍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큰일 났다. 잘은 모르지만 엄청 큰일 난 것 같은데...."

* * *

"몸 상태가 엉망이십니다."

다양한 신성마법으로 치료를 마친 트리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복마법으로 상처는 고칠 수 있어도 축적된 피로까지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황자님의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가능한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시길 바랍니다."

"나도 동감이야."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육체 피로뿐 아니라 정신 피로도 상당하다.

아무리 세계 종말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해도, 지금은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느긋하게 힐링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먹고 자고 놀고 자고 쉬고 자고 같은.

하지만 내 팔자에 그게 되겠냐?

"황자님. 디디입니다."

마침 무표정한 얼굴의 디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꽤 오래 보고 살아서 그런가?

이젠 군주의 눈 안 쓰고도 보인다. 저 무심한 얼굴에 무슨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어?"

"실은 새벽에 도착하시자마자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디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보고를 시작했다.

"어젯밤에 톨라리님과 루네가 실종되었습니다."

"뭐?"

"정확히는 톨라리님의 방에 있던 루네가 방 천장을 뚫고 어딘가로 날아갔습니다. 톨라리님은 그런 루네를 데려오겠다며 함께 날아가셨는데, 10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

나는 말없이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디디. 황자님이 저택에 돌아오신 지 채 네 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작 세 시간도 주무시지 못하고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깨셨단 말입니다."

그러자 트리멈이 눈살을 찌푸리며 디디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톨라리님이 알아서 잘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황자님은 휴식이 필요하십니다."

"괜찮아. 오면서 테우스 등위에서 몇 시간 잤어."

정확히는 몇 시간 기절해 있었지만, 아무튼 톨라리는 몰라도 루네가 천장을 뚫고 날아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자세히 말해봐. 애당초 루네가 왜 톨라리 방에 있었는데?"

"루네가 먼저 톨라리님의 방에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며칠 떨어져 있어서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습니다."

"그리고?"

"톨라리님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로 옮겨간 바람에, 거리가 멀어져서 그 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꽝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이 잠겨 있었어?"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문짝이 얼어붙었던 모양입니다."

"뭐?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문을 박차고 안에 들어갔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루네는 없고, 톨라리님은 루네가 천장을 뚫고 날아갔다며 쫓아가기 전에 황자님께 전언을 남겼습니다."

"전언?"

"루네가 정령에 홀렸다. 아마도 정령왕일 것이다. 얼음의 근원까지 가면 곤란하다. 그러니 그전에 데려오겠다. 다만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 안녕."

그리고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한참 동안 디디의 말을 곱씹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망할."

"황자님,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령왕이라니, 그리고 얼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트리멈이 불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게, 그게 뭘까? 솔직히 나도 제발 좀 몰랐으면 좋겠는데.

"얼음의 근원은... 대륙 최북단에서 더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섬이야. 거기에 얼음의 정령왕이 살고 있고."

물론 왜 그런 곳에 루네가 날아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날아갔다는 건 비행마법, 즉 플라이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

애당초 플라이는 아크 위저드에 필적하는 마법사만 쓸 수 있는 마법이다.

대체 루네가 언제부터 아크 위저드가 됐지?

걘 기본 속성이 바람이 아니라 진짜 아크 위저드는 되어야 사용이 가능할 텐데?

그리고 정령에 홀렸다는 건 또 무슨 소리?

내가 이쪽으로 넘어와 90년을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다. 물론 이번 10회 차 때 처음 들은 이야기가 이것뿐인 건 아니지만.

"뭐가 어찌 됐든.... 나도 쫓아가 봐야겠네."

"황자님. 어떻게든 이번 일은 톨라리님에게 맡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트리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하아...."

"그리고 수고 했어 디디. 내가 저택에 오자마자 보고하지 않은 건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려고 그런 거지?"

"바로 잠이 드셨다고 해서, 나중에 기침하시면 보고하려 했습니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결국 두 아가씨가 저택을 탈출한 한밤중부터, 다음날 정오인 지금까지 한숨도 못자고 대기하고 있었단 말이구만.

"너야말로 그만 좀 쉬는 게 좋겠다. 그리고 디디?"

"네. 황자님."

"걱정해서 고마워. 근데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누가 앞을 막아도 다 뚫고 나한테 바로 보고해 줘."

"네. 황자님."

"하아...."

트리멈의 한숨이 계속 길어졌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니아!"

"네 황자님."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녀장 라니아가 방안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우선 물부터 드시지요. 그리고 식사를 준비해 뒀습니다."

"고마워. 잘 마실게."

나는 라니아가 들고 온 쟁반 위의 물컵을 집어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밥은 힘들 거 같아. 당장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으니 가볍게 도시락 좀 싸줘."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밖에 아무도 없습니까? 지금 당장 황자님께 드릴 도시락을 준비해 주세요!"

"네. 시녀장님."

그러자 문밖이 분주해지며 시녀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며 계속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여행이 길어질지도 몰라. 테우스에 싣고 갈 테니 전처럼 보급품도 준비해 줘."

"네. 황자님. 며칠간 드실 보존식과 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설탕바도. 들고 다니던 거 다 먹었어."

"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방한복. 톨라리와 루네 입을 방한복이 필요해."

"적당한 걸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황자님께서 입으실 것도 마련할까요?"

"난 괜찮아. 코어를 많이 먹어서. 혹시 냉기 저항 영약 쟁여둔 게 좀 있나?"

"냉기 저항 영약이라면...."

라니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많이는 없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 화염 저항 영약을 양산하는 바람에. 그래도 샘플로 만들어놓은 게 서너 개쯤 있을 겁니다. 물론 명령만 내리시면 곧바로 대량 제작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럴 시간은 없고. 일단 있는 것만 가져와."

"네. 황자님.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라니아는 인사를 올리고는 즉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출출한 김에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설탕바를 꺼내 입안에 녹여 먹으며 남은 마력과 정령 쿨타임을 계산했다.

"마력은 3분의 1쯤 회복된 거 같고...."

"네?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트리멈에게 손사래를 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마력이야 테우스 타고 날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더 회복될 텐데, 문제는 이미 사용해 버린 정령들이었다.

과연 얼음의 정점까지 날아가는 데 얼마나 걸리려나?

물론 그전에 루네와 톨라리를 따라잡아 무사히 데려오는 게 베스트겠지만.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국 얼음의 정점까지 가야 하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쪽은 아예 테크트리를 올리거나 루트를 진행할 계획조차 없었는데, 이러다 자칫 오도 가도 못 하게 돼 버리는 거 아냐?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49화

46장 얼음이 모이는 곳

얼음의 정점.

대륙의 최북단에서도 한참 동안 올라가야 나오는 커다란 섬.

1년 내내 극한의 추위에 덮여 있으며, 섬 주변에 크고 작은 유빙들이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다.

섬 전체에 뿌연 안개가 드리워져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바로 이곳에 얼음의 정령왕이 있다.

그게 아마 7회 차였던가.

정상적인 루트로 정령왕과 계약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정령왕의 하위 정령부터 계약해야 한다.

다음으로 녀석에게 정령왕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살고 있는 위치라든가, 기본적으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든가.

하지만 세상에 얼음의 정령은 없었다.

딱 봐도 저 섬에 정령왕이 존재하는 게 명백한데도, 하위정령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세상을 구해야 하는 처지.

결국 위험을 각오하고 섬으로 돌진했고, 거의 죽을 만큼 크게 데였다. 아니, 얼음에 당한 거니 데였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려나?

얼음 창.

일정 거리로 접근하자마자 안개 속에서 날카로운 얼음 창들이 끝도 없이 날아왔다.

마치 수천 발의 지대공 미사일이 나 하나 노리고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당시에 이 악물고 도망쳤는데도 결국 수백 발을 얻어맞고는 마력이 고갈되어 수면에 추락했거든.

그리고 정말 죽을 뻔했다.

가까스로 드라이어드를 소환해서 녀석의 등에 올라타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아무튼 죽는 줄 알았다. 살얼음이 맺힌 바다에 빠진 공포는 정말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나중에 은신을 활용해서 몰래 섬에 진입하긴 했는데, 그때 본 내부 풍경이 진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섬에 있는 건 오직 얼음덩어리로 만들어진 정령들뿐.

얼핏 봐도 100마리도 넘는 크고 작은 정령들이 소리 없이 섬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제야 난 이 세상 어디에도 얼음의 정령을 찾아낼 수 없던 이유를 알았다. 그야 전부 다 여기 모여 있었으니까!

다만 정령왕이라 부를 만한 녀석은 찾을 수 없었다. 숨어 있거나.... 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웠겠지.

아무튼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얼음 정령들이 대공 포대처럼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은신을 쓴 채 비행하고 있는 거고.

부웅....

멀리 뒤쪽에 버려두고 온 테우스의 날갯짓이 들렸다.

이곳은 이미 위험구간이다. 녀석을 타고 진입하면 순식간에 격추되고 말겠지.

그럼 지금부터 저 섬에 진입해야 할 텐데... 음?

뒷감당을 고민하고 있을 무렵, 문득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떠다니는 작은 유빙이 보였다.

톨라리?

정말 톨라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흔적도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기어이 얼음의 정점까지 도착했었나?

나는 소리 없이 고도를 낮추며 톨라리가 앉아 있는 유빙에 착지했다.

"으으으...."

톨라리는 덜덜 떨면서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멀리 보이는 안개 가득한 섬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은신을 풀며 녀석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톨라리? 나야. 클로드."

"으악!"

순간 톨라리가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으아? 황자님? 언제 여기까지 왔어? 소리도 없이!"

"뒤로 날아왔는데 모르더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게 그러니까.... 미안해 황자님. 루네가 저 섬에 들어갔는데."

톨라리는 얼음의 정점을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

"갑자기 어, 얼음. 커다란 얼음 창이 정신없이 날아들었어. 접근도 못 하게. 너무 많아서 갑자기 대응 안 됐어. 추워서 힘들기도 했고."

불을 피워 놓고 있는데도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나는 멀리 뒤쪽을 날고 있는 금독수리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어.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뒤로 빠져서 계속하자."

* * *

톨라리는 미리 챙겨간 방한복에 냉기저항 영약, 그리고 적당한 온도로 덥힌 따뜻한 물까지 마신 뒤에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이제 살 것 같음. 고마워 황자님. 고마워 테우스."

"제법 고생했나 보군. 자네 정도의 마법사가 어떻게 된 건가?"

테우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등에 탄 톨라리는 김이 나는 물을 몇 모금 더 마시며 대답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방어에 마력을 너무 많이 써 버렸어."

"그럼 일단 돌아오지 그랬나. 오는 길에 자네가 안 보여서 황자가 많이 걱정했네."

"미안. 발이 안 떨어지더라. 루네를 앞에 두고 너무 황망해서."

"저기가 어딘진 알지?"

내가 물었다. 톨라리는 눈썹에 낀 성에를 손으로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음의 정점. 매직 길드 다닐 때 소문은 들었어. 아마도 정령왕 사는 곳.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접근하지 말라더라."

"맞아. 그런데 루네가 저 섬에 들어갔다고?"

"응."

"너보다 빠르게?"

"여기서부터는."

톨라리는 좌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육지 벗어나기 전까지는 따라잡을 수 있었어. 계속 따라붙어서 말도 걸었고. 왜 그러냐. 무슨 일이냐. 대체 왜 북쪽으로 계속 날아가는 거냐."

"그런데?"

"대답을 안 함. 그리고 바다로 빠져나간 뒤로는 내가 속도가 느려졌어."

"추워서?"

"응. 추우니까 여기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하긴 전에 나도 추워서 덜덜 떨다가 갑자기 날아오는 얼음 창 소나기에 격추됐었지.

"일단 루네는 정령에 홀린 것 같아."

"홀리다니, 디디한테도 그렇게 말했던데 대체 무슨 소리야?"

"강한 정령은 생물을 홀려."

톨라리는 조용한 눈으로 북해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 고향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야."

"너 고향이라니, 동대륙?"

"응. 여기 와서 매직 길드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고. 엘프와 드라이어드도 그렇고. 타구르 족과 하이윈드도 그렇고. 홀린다는 표현이 좀 이상한가? 그럼 그냥 강한 영향을 준다고 할게."

영향이라.

물론 정령의 서식지 근처에 살면 영향을 주고받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루네는 우리와 다 같이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타구르 족이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루네는 왜?"

"얼음의 핵이 문제 같아. 그것 때문에 얼음의 정령왕과 연결된 게 아닐까? 눈이 파랗게 변하며 온몸에서 냉기가 쏟아지더라."

"음...."

얼음의 핵이라니.

그거 그냥 땅벌레 여왕이 품고 있던 마법도구 같은 거 아니었나?

그저 루네가 냉기 속성이라, 가지고 있으면 마력이 서서히 오른다고 해서 준 것뿐인데.

'여왕? 이그니스? 내 말 들려? 이거 전에 마력 보약이라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이그니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그니스도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음의 정수가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구나.

'얼음의 정수? 아, 얼음의 핵을 원래 정수라고 불렀지?'

-반대로 얼음의 정수를 너희들이 핵이라고 부른 거다. 여하튼 미안하다. 이런 상황이 올 줄은 나도 몰랐어. 그 여자아이가 정수에 너무 깊이 감응한 모양이다.

'정수에 감응하면 정령에 홀리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다만....

이그니스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 전에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뭔데?'

-글라체스는 지금 자신의 권속을 모으려 하고 있다.

'글라체스가 얼음의 정령왕 이름이야?'

직접 접촉한 적이 없어서 이름도 처음 들었구만. 이그니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 녀석은 한참 전부터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권속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았지. 그곳이 바로 저 얼음의 정점이다.

'왜?'

-그건 나도 모른다.

'같은 정령왕인데도 몰라?'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모를 것이다. 녀석과 나는 상극이니까.

그야 뭐 얼음과 불이니까. 서로 친하진 않겠지.

-다만 상황을 보아하니 그 소녀를 자신의 권속으로 삼은 게 아닌가 싶다.

'권속이라니, 고대종처럼 말이야? 네가 고대 물개들을 권속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그보다는 정령이 아닐까 싶다.

'정령? 루네를 정령으로 인식했다고?'

-얼음의 정수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자세한건 나도 모른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인가? 클로드?

이그니스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냐고? 그야 당연히 루네를 구해서 데려와야지.

-아니,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바로 쳐들어가는 건 피했으면 한다.

'왜?'

-내 힘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하루는 더 필요하다.

"후...."

나는 얼굴을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겔리와 융합한 후원자를 상대한 지 겨우 이틀밖에 안 지났구나.

'시간 끌면 루네가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저 안에 얼음 정령 득시글한데?'

-얼음 녀석들은 그 아이를 같은 동료라고 인식하겠지.

'그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자칫 돌이킬 수 없게 된다던가.'

-그 아이가 정말 얼음 정령이 되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왕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서두르면 네 목숨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후...."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옆에 있던 톨라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컵을 내밀었다.

"괜찮아 황자님? 왜 자꾸 한숨만 팍팍? 물컵 하나뿐인데 내가 계속 쥐고 있어서?"

"...그럴 리가."

나는 짐가방에서 물통을 꺼냈다. 그리고는 약간의 화염마법과 함께 컵에 따르며 물었다.

"몸 상태는 어때?"

"많이 좋아졌어."

"마력은?"

"꽤 썼어. 반쯤 남았나?"

"하루정도 푹 쉬면 완전히 회복 될까?"

"거의. 황자님 내일 돌격하게?"

톨라리가 멀리 섬을 가리켰다. 나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루네의 조그만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있어. 하루만 버티고 내일 시작하자."

* * *

다음 날 오후, 우린 이그니스의 OK사인이 떨어지자마자 금독수리를 벗어나 얼음의 정점을 향한 돌진을 준비했다.

물론 혼자서 은신 쓰고 조심스럽게 잠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요란하게 돌입하는 편이 낫다. 작전을 들은 톨라리는 이리저리 몸을 풀며 서서히 마법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황자님, 내가 발사할 때까지는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 알겠지? 그냥 신호만 주고 말로만 명령해 주는 거다?"

"그래? 위급하다 싶으면 나도 도우려했는데."

"그러지 마. 임무 맡았으니 반드시 해낼게. 날 믿어."

톨라리의 얼굴에 비장감이 넘쳤나. 그러자 뜬금없이 저택에 놔두고 온 물건들이 떠올랐다.

"잘 들어 톨라리.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말이야."

"응?"

"내방 찬장에 작은 금고가 있거든. 그 안에 데스 울프 코어 네 개 있어."

"데스 울프?"

"에이션트 울프 비슷한 고대종인데 서로 코어 효과가 달라. 관절 강화해주고 정신 내성도 높여주니까 기사단 애들이랑 적당히 나눠 먹어. 너도 하나 먹어도 되고. 아, 그리고 에이션트 울프랑 에이션트 베어 코어도 하나씩 더 있어 색깔로 구분되니까 이것도 안 먹은 애들 위주로 적당히...."

"그런 소리 하지 마!

순간 톨라리가 내 몸을 와락 껴안으며 소리쳤다.

"황자님 돌아와서 직접 분배해! 난 절대 안 할 거야!"

...이런.

농담이었는데 반응이 격하구만. 나는 톨라리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반드시 루네 데리고 돌아올게."

"절대 돌아와야 해. 나 황자님 돌아오면 할 이야기 있어. 그동안 숨기고 있던 건데...."

순간 톨라리가 눈을 크게 뜨며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 좀 봐. 멍청하긴. 내가 한술 더 뜨네."

"음. 몰라.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난 고개를 저으며 눈을 감았다. 톨라리는 그대로 내 몸에 바람의 기류를 휘감으며 말했다.

"황자님? 지금부터 몸에 힘 빼."

"완전히 뺐어."

비행마법까지 풀어버린 순간, 바람이 내 몸을 완전히 휘감으며 톨라리의 등에 밀착시켰다.

"후후. 이거 포대기 같네. 황자님 아기야."

"네네. 잘 부탁합니다. 엄마."

"나만 믿어."

집중하려는 듯 손뼉을 몇 번 두드린 녀석은, 이내 저 멀리 보이는 안개 가득한 섬을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그렇게 속도를 높이려는 순간.

쐐애애애애애애액!

뿌연 안개를 뚫고, 섬 쪽으로부터 새카만 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쏟아졌다.

얼음의 창.

백 개, 아니 천 개도 넘으려나?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0화

46장 얼음이 모이는 곳

"꽉 잡아!"

순간 톨라리의 정면에 무수한 바람의 벽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우웅!

우웅!

우우우우웅!

다른 벽마법과 달리, 톨라리의 바람의 벽은 날아오는 얼음 창을 물리적으로 막지 않았다.

대신 기류를 조종해 이동 방향을 절묘하게 비틀었다. 그렇게 무수한 창끝이 톨라리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와, 역시 톨라리.

벽마법으로 이런 식의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컨트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번엔 하늘 방향으로부터 처음보다 두 배는 많은 얼음 창이 쏟아졌다.

촤륵!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얼음 창을 향해 미리 만들어 놓은 템페스트 마법을 투척했다.

"조심해!"

동시에 오른편으로 기수를 틀며 속도를 높였고, 하늘 저편에서 템페스트가 폭발을 일으켰다.

까드드드드드드드드득!

얼음의 창이 바람의 칼날에 휘말려 빙수처럼 갈려 나간다.

덕분에 온 세상에 굵은 얼음 입자들이 눈처럼 마구 쏟아졌다. 그사이 톨라리는 크게 우회하며 본격적으로 안개가 짙어지는 구간에 진입했다.

본 게임은 여기서부터다.

안개 속에서는 정면뿐이 아닌, 온 사방에서 얼음 창이 쏟아진다.

촥!

촥!

촥!

아니나 다를까,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수십 개의 얼음 창이 마구잡이로 쏟아진다.

톨라리는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날아오는 얼음 창을 어떻게 막아낼까?

녀석은 막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

대신 몸을 감싼 기류를 몇 배로 부풀린 다음, 이번에도 쏟아지는 창날을 물결처럼 이리저리 흘려보냈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그저 기류에 닿는 감각만을 의존해서 극한의 컨트롤을 하는 것이다.

마치 폭우 속을 걸어가는데 비 한 방울 몸에 묻지 않는 기분.

"황자님 말대로야! 온 사방에서 쏟아지네!"

신명나게 소리치던 톨라리는, 어느 순간 갑자기 급가속으로 위치를 이동했다.

우웅!

한순간 쏟아지는 창날들의 틈으로 파고들며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와 어지러워. 이 급가속만큼은 정말 나도 배워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정면 방향에서 대량의 마력이 눈에 들어왔다.

"톨라리! 정면!"

이것은 미리 정해놓은 신호다. 톨라리는 대꾸도 없이 정면 방향으로 새 템페스트를 날린 다음.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득!

곧바로 갈려나가는 얼음 파편을 피해 기수를 위로 꺾었다.

"위! 템페스트 늦었으니 급가속으로!"

"톨라리! 우측!"

"왼편으로 완만하게 날아!"

"급강하! 수면에 닿기 직전에 왼쪽으로 틀어!"

군주의 눈으로 마법이 몰리는 곳을 미리 확인, 즉석에서 정보를 전달한다.

물론 최단거리로 섬을 향해 돌파도 가능하지만.... 일부러 이리저리 우회하며 상대의 마법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작전.

"으, 눈이 빙빙 돌아...."

얼마나 격렬한 공중전을 치렀는지, 톨라리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 여기까지, 황자님? 안에서 잘해! 발사!"

그 순간, 톨라리와 날 묶어주고 있던 바람의 포대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새로운 기류가 발 쪽에 뭉치더니, 한순간 폭발적으로 가속을 일으키며 정면을 향해 쏘아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엄청난 가속.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실드 오브 라이트를 만들어 몸을 감싸며 간헐적으로 스치는 얼음 창을 막아냈다.

팍!

파직!

파직!

그렇게 한순간에 안개 지대를 돌파.

비행 마법으로 컨트롤을 하며 눈앞에 보이는 얼어붙은 땅에 착지했다.

"후우...."

숨을 내뱉자 한순간에 얼어붙으며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이곳이 바로 얼음의 정점.

전에 왔을 때와 분위기가 완전히 똑같다.

차이가 있다면 사방에 가득한 얼음 정령들이 모두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는 것.

쿵.

쿵.

쿠궁....

수백 마리에 달하는 크고 작은 얼음덩어리들이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이거 무시무시하구만...."

나는 슬며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얼음의 정령왕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이 녀석들을 몽땅 이 안에 모아놓은 걸까?

테라직 역시 자신이 살던 대지의 틈에 무수한 바위정령들을 모아 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외부에 다른 정령이 없던 건 아니다. 룩카르도 있고 드라이어드도 있고.

하지만 얼음 계열 정령들은 몽땅 다 이 안에 있다.

음....

위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거북이도 몇 마리 보인다. 저거 혹시 에이션트 터틀인가? 전에 왔을 때는 이 섬에 거북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는데.

풍덩!

거북이들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곧장 바다에 뛰어들었다. 전에 왔을 때도 바다에 들어가 있어서 못 봤던 걸까?

그 사이, 수십 마리의 얼음 정령들이 내가 서 있던 장소까지 모여들었다.

"...."

"...."

"...."

녀석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삭막한 얼굴로 날 올려다볼 뿐이었다.

제일 작은 녀석은 키가 대충 2미터 정도. 아마도 하급 정령이겠지.

숫자가 가장 많은 건 정확히 룩카르 사이즈인 얼음 덩어리들이고, 개중에는 룩카르보다 훨씬 큰 대형 개체도 존재한다. 숫자는 가장 적지만.

쿵!

쿵!

녀석들이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군주의 눈으로 보니 정령마다 마력의 흐름이 대폭 줄어들어 있는 게 보인다.

작전 성공!

톨라리를 고생시킨 보람이 있구만. 일부러 섬 주위를 빙빙 돌며 녀석들의 마력을 고갈시키려 했는데 완전히 맞아떨어졌다.

"니들 어차피 힘 다 떨어졌잖아? 그러니 좋게 좋게 가자. 난 우리 편 한 명만 구해서 돌아가면 돼. 너희들 건드릴 생각 전혀 없으니...."

그때 거구의 얼음 정령들을 뚫고, 새로운 정령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조그만 정령이라고 생각했는데....

"...루네!"

그것은 바로 루네였다.

군주의 눈을 계속 열고 있었으면 끝까지 정령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본질의 흐름이 인간을 벗어나 있었다. 가장 끔찍한 건 지금도 품에 안고 있는 저 강력한 마력 덩어리, 바로 얼음의 정수와 육체가 동화되고 있다는 것.

으, 안 되겠다. 나는 억지로 군주의 눈을 닫으며 루네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조금만 참아!"

그리고는 녀석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팔을 집어넣고 다시 날아오르려는 순간.

푸확!

한순간 엄청난 냉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컥!"

얼마나 차가운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 나는 급하게 원래 있던 하늘로 돌아 날아가며 소리쳤다.

"루네야! 나야! 클로드! 정신 차려!"

"...."

루네는 내 목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얼음이 낀 것 같은 뿌연 눈으로 하늘을 보며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아이스 미티어!"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내 위치보다 더 높은 하늘에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다섯 개.

"와.... 루네야. 너 언제 이렇게...."

강해진 거니?

이건 거의 아크 위저드급 아닌가? 아니, 어지간한 아크 위저드도 한순간에 저렇게 거대한 아이스 미티어를 다섯 발이나 만들진 못할 거 같은데?

문제는 저런 루네를 상대로 싸울 수가 없다는 것.

자칫 오버했다간 루네가 죽는다. 어떻게든 기절시키고 둘러멘 다음 여길 탈출하는 게 최선일 텐데....

-멈춰라.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섬 전체에서 쏟아지는 듯한 목소리다. 누가 말하는 거지? 목소리가 전 방향에서 동시에 들리는데?

-멈춰라, 내 권속들아. 지금부터는 나의 시간이다.

동시에 섬 주변을 휘감은 안개들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아니, 걷히는 게 아니라 섬 중심부로 모여들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이익!

이윽고 뭉친 덩어리들이 거대한 얼음 구름으로 부풀며, 덩치가 수십 미터는 되는 부정형의 무언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노인?"

얼음으로 만들어진 긴 수염을 가진, 눈매가 날카로운 거대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 인간이 들어온 건 두 번째군."

노인은 커다란 눈으로 날 주시하며 말했다.

"수백 년 전에 한 인간이 이곳에 도달했지. 지금 내 모습이 바로 그 인간이다. 그리고 지금은...."

녀석은 한순간에 형태를 바꿔, 눈 밑이 퀭하고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

저거 나야? 지금 내 모습을 비율 그대로 20미터 정도로 확대하면 저렇게 끔찍한 모습이 되는 건가?

"네가 새로운 역사가 되었다. 네 이름은 무엇인가?"

"...클로드."

"그래 클로드. 나는 글라체스다."

녀석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공중에 떠 있던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세상을 이루는 힘의 근원 중 하나를 맡고 있다. 모든 얼음의 정령 위에 군림하는 왕이다."

얼음의 정령왕이란 소리를 거창하게도 하는구만. 나는 정령왕 옆에 멍하니 서 있는 루네를 돌아보며 곧바로 요구했다.

"글라체스?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난 그저 지금 당장 저 아이를...."

"이곳은 얼음의 정점이다. 인간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지."

녀석은 내 말을 끊으며 허공에 대고 말을 늘어놓았다.

"정령과의 계약을 원하겠지? 가장 낮은 '글루'를 원하나? 아니면 중간에 있는 '글루체?' 그도 아니면 저기 커다란 '글라루'와?"

"아니, 글라글라 뭐시기 필요 없어. 정령 계약은 나중에 시간 나면 생각해 볼게. 당장은 루네를 데리고 얼른 여기서 떠나야...."

"딴소리를 하는군."

순간 주변의 기압이 쭉 떨어지며 귀가 먹먹해졌다.

"그래. 이해한다. 너 정도의 기량을 가진 존재라면, 당연히 정령왕인 나 글라체스를 원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금 이 별은...."

"아니래도!"

나는 버럭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루네를 가리켰다.

"네놈 필요 없어! 당장 루네 내놔! 아직 인간일 때 빨리 여길 나가야 해! 아직도 품에 안고 있는 저 얼음의 정수 떼어 놔야 한다고!"

"...."

그 순간, 정령왕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저것을 원한다고?"

"그래. 그리고 저거 아니라 루네야. 원래 내가 데리고 있던 우리 집 식구라고."

"지금은 나의 권속이다.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권속이 생겼지."

녀석은 루네를 내려 보며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권속을 다시 돌려놓는 건 불가하다. 이것은 이유가 있다."

"이유?"

나는 테라직과 이그니스를 동시에 준비시키며 말했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 난 무조건 저 애를 데려갈 거야."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라."

정령왕은 나와 똑같은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 세상에 있어, 나의 근원이 되는 힘은 영향력이 매우 약하다."

"뭐?"

"세상을 지배하는 것들은 냉기를 싫어하지. 우리의 영역은 계속 좁아지고, 점점 근원이 위치한 곳으로 위축될 뿐이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다른 것도 비슷하지 않나? 세상에 번개를 좋아하는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불은?"

"생물은 온기를 좋아하지.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너 역시 그러하지 않나?"

"그야...."

그 말 자체는 반박하기 힘들었다. 녀석은 몸을 웅크리며 서릿발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세계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건...."

뭐야, 이 녀석도 알고 있었어? 곧 다른 차원의 공격이 시작되고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거?

"세계의 주기가 변하며, 세계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별의 온도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이 대로면 나의 권속들이 모든 힘을 잃고, 이 별에 극지방조차 녹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뭐?"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온도?

"그렇게 되면 우린 물론이고 너희 생명들에게도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힘을 발휘하기 위해, 흩어졌던 모두를 이곳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아니...."

"이곳에서 앞으로 계속 힘을 모아, 결정적인 순간에 극지방으로 넘어갈 것이다. 우리 모두 그곳에 자리를 잡고 빙하가 녹는 것을 방지하여...."

"아니, 아니아니 잠깐."

이거 이야기가 이상하잖아? 나는 정령왕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게 언제인데?"

"무슨 소리지?"

"그 북극인지 남극인지 빙하 다 녹는 게 언제냐고."

"빠르면 300년 안이다."

"...."

300년? 지금 이놈이 300년이라고 말한 거야?

"너 지금.... 당장 몇 개월 뒤에 이 세계가 소멸할지 모르는데, 그건 상관없고 300년 후에 올지도 모르는 지구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고 한 거야?"

"가볍게 넘기지 마라. 이것은 세계의 모든 흐름을 뒤집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다."

거대한 사건 좋아하시네.

그 거대한 사건도 이 세계가 남아 있어야 오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어느새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몰려온다. 그래. 처음부터 대놓고 얼음 창 쏟아부을 때부터 이런 놈인지 알아봤지.

"...그래. 아무튼 알았어."

"오, 알아주는 건가?"

"니들이 왜 여기 모여서 똘똘 뭉쳐 있는지 알았다고. 그래. 열심히 해.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어차피 날 도와줄 생각도 없겠지?"

"그렇다. 우리에겐 임무가 있다. 그러니 나는 물론이고, 나의 권속들과의 계약도 불허한다."

"알았으니까 르네만 내놔. 더는 귀찮게 안 하고 르네만 데리고 냉큼 돌아갈 테니까."

"말했다시피 그것도 안 된다."

"왜?"

"이미 저것은 나의 권속이다. 정령계에 속한 얼음의 정령. 그러니 다른 권속과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다."

"...야."

최대한 참아주려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전에 고대 늑대들도 그렇고, 왜 이 세상엔 이렇게 자기들만 아는 놈이 가득 한 거지?

이제 곧 세상이, 차원 자체가 소멸한다.

그런데 그거 막으려고 발악하는 나한테 왜 이렇게 태클을 거는 걸까?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여? 내가 하는 짓이 그렇게 쓸데없어 보이냐?

나는 만반의 준비를 끝낸 채 정령왕에게 통보했다.

"야, 글라체스. 이게 마지막 경고야."

"경고?"

"당장 루네 돌려놔. 정령이고 뭐고 원래대로 돌려. 안 그러면 내가 네놈 포함해서 여기 있는 정령들 싹 다 갈아버릴 테니까."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1화

47장 군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얼음의 정령왕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미소를 지었다.

"싹 다 갈아버린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나? 고작해야 인간 주제에?"

"왜, 겁나?"

순간 주위에 있던 수백 마리의 정령들이 항의하듯 꿈틀거렸다.

-감히 네놈이 우리의 왕께 무례를!

-처단하라! 저 무례한 인간을 당장 처단하라!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분노와 응징의 감정들.

너희들은 방금 마구잡이로 힘을 낭비했지? 반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든 힘을 보존했고.

그리고 시비는 너희 보스가 먼저 털었단다. 르네만 강제로 끌고 오지 않았어도 이 지경 까지는 안 왔을 텐데.

그때 머릿속에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또다시 녀석 싸우는 날이 올 줄이야. 클로드? 넌 역시 날 즐겁게 해주는구나. 혹시 빙의가 부담스러우면 그냥 소환해도 좋다. 이번에도 직접 녀석과 자웅을 겨루는 것도 재밌겠지.

처음엔 목소리였는데, 나중엔 생각 자체가 내 안으로 직접 넘어왔다.

뭐지 이건?

아직 빙의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겹쳐?

그런데 또다시? 예전에도 싸워 본 적이 있단 소린가?

-클로드여. 나도 준비가 끝났다. 당장이라도 불러다오. 저 꽉 막힌 녀석에게 대지의 분노를 먹여 주겠다.

동시에 테라직의 생각도 내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겹친다. 들끓는 마음과 차분한 바탕이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그러자 얼음의 정령왕이 내민 상체를 쭉 뒤로 당겼다.

"이것은... 또 다른 힘의 정점.... 다른 정령왕과 계약했었나?"

"그걸 이제 알았냐? 세상에 정령왕이 너밖에 없는 게 아니잖아?"

부하들 싹 다 모아놓고 이런데 처박혀 있으니 그렇지. 고이면 썩는다는 말도 모르냐?

"그런가.... 그래서 그토록 자신이 있었군. 정령왕, 그것도 둘이나."

글라체스는 가뜩이나 거대한 자신의 몸을 더욱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이곳은 나의 본거지다. 얼음의 정점. 네가 그 어떤 재주를 부리더라도 나를 이곳에서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니 썩 꺼져라. 너의 땅으로 물러나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라!"

휘이이이이이이이익!

한순간 얼음 폭풍이 섬 전체를 휘몰아쳤다.

하지만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그걸 위협이라고 한 건가? 고작 이걸?

나는 머릿속으로 전투 상황을 시뮬레이션 했다.

어떤 정령을 소환하고, 어떤 정령과 빙의 하는 게 최선일까?

온 전력을 집중해서 우선 저 커다란 녀석부터 제거할까?

아니면 다른 자잘한 정령들을 모조리 박살내 놓고 서서히 압박을 줄까?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이 섬은 난장판이 될 텐데, 그 와중에 루네의 안전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생각이... 무시무시하군. 동조는 위험하다."

녀석은 순간 내 모습을 풀며 기존의 노인의 형태로 외모를 바꿨다.

"나랑 같은 얼굴을 하면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거야?"

"완전히는 아니지만.... 동조는 가능하다. 물러날 생각은 결코 없는 것 같군."

녀석은 어째 겁을 먹은 듯 한발 뒤로 물러났다.

"만에 하나 네놈이 우릴 꺾는다 해도 이곳은 힘의 정점이다. 그저 며칠만 지나면 모두가 다시 이곳에 부활한다. 하지만 너는 한번 죽으면 끝장인 인간...."

"여길 날려 버릴 거야."

문득 이그니스 같은 말이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내가 품은 모든 불을 총 동원해 섬을 덮은 얼음을 전부 다 날려 버릴게. 기대해도 좋아. 끝내주는 광경이 펼쳐질 테니까."

"그것은.... 여긴 빙하가 아니라 섬이다. 얼음을 날려버려도 내부에 땅이 존재한다."

"그럼 땅도 날려버리면 된다."

이번엔 테라직의 심정으로 말이 쏟아졌다.

"대지의 분노를 지면에 먹여 섬 자체를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한 번에 안 되면 여러 번 해서라도. 반드시. 지도에서 이 섬을 깨끗이 지워 버리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뭐가 걱정이야? 여기 있는 얼음 놈들 싹 다 제거하고 섬까지 날려 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러자 정령왕의 투명한 얼음 같던 안색이 탁한 흰색으로 돌변했다.

"진심인가 보군."

"진심이지. 너 같으면 농담으로 이런 소리 하겠냐?"

나는 칼끝으로 정령왕을 가리켰다.

"자꾸 내 신경을 거슬리는 것들이 있어. 몇 달 뒤에 다른 차원의 침공이 시작 되고, 내가 앞장서지 않으면 다 끝장인데도 말이야."

"그것은...."

"아니면 네가 할래? 네가 이계의 게이트 열리면 나 대신 다 막아줄 거야? 그럴 각오가 되어 있어?"

물론 난 있다.

내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는 한, 절대 물러서지 않고 버텨낼 각오가 있다.

동시에 혈관이 들끓으며 열기가 넘친다. 와봐. 모두 다 덤벼보라고. 내가 싹 다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줄 테니까.

"넌 나한테서 르네를 빼앗지 말았어야 했어. 그래서 오늘 죽는 거야."

"...너는 이미 힘의 근원과 동조되어 가고 있군."

순간 글라체스가 부풀렸던 몸을 가라앉혔다.

"동조?"

"클로드. 너 스스로가 그들과 비슷하게 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내 앞에 있는 건 인간인가? 아니면 새로운 힘의 정점인가?"

"...뭐?"

이건 또 무슨 반응이지? 내가 정령왕과 비슷해지고 있다고? 아직 빙의도 안 했는데?

그 와중에 녀석은 계속 뒷걸음을 치다, 순간 걸음을 멈추며 그 사실에 경악했다.

"이럴 수가. 내가 뒷걸음을, 한낱 인간을 상대로...."

진짜 겁먹은 건가?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싸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떠볼까? 나는 양 손에 퓨어 매직을 만들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보니 섬을 날려버릴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그것은... 설마 스펠 브레이커?"

"맞아. 퓨어 매직이라고도 부르고."

"퓨어 매직...."

"마법과 관련된 거라면 싹 다 갈아버리는 마법이야. 그러고 보니 이걸 정령에게 써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네. 정령왕인지 뭔진 몰라도, 암튼 너도 마법 생물 비슷한 거니까. 이거 맞고 소멸하면 다시는 부활 못 할지도?"

"잠깐. 기다려라."

글라체스는 정말 겁을 먹은 듯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녀석의 얼굴에 손을 겨누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경고야. 르네 돌려줘. 아니면 나랑 여기서 끝장을 보던가."

이건 허풍이 아니다.

최후의 협상이 결렬될 것을 대비, 나는 녀석이 회피하거나 방어할 다양한 루트를 전부 예상해 작전을 짜 놓고 있었다.

그림자 잠입을 활용한 집요한 배후 기습.

이그니스를 소환해서 녀석과 붙여 놓고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퓨어 매직 저격.

테라직과 빙의, 선 자세로 모든 공격을 받아내며 녀석이 못 피할 때까지 퓨어 매직 포격....

기타 등등.

내 머릿속에는 이미 글라체스의 저 거대한 몸뚱이가 수백 번은 분해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만."

순간 글라체스가 몸서리를 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만 해라 인간. 너의 상상이 날 두렵게 만들고 있다."

뭐야 이 녀석, 외모도 원래대로 바꿨는데 아직도 나한테 동조하고 있었어?

"상상이 아니야. 모두 현실이 될 수 있어."

"믿을 수 없다.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인데, 이토록 많은 힘과 가능성이 깃들어 있을 수 있는가? 두렵다. 나는 너무도 두렵다."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쿵...

"날 두렵게 만드는 존재. 그것이 나와 계약하는 조건이었다."

"...응?"

"날 두렵게 만들 것."

녀석은 얼굴을 가린 손을 풀었다. 그곳엔 다시 나와 같은 얼굴이 돌아와 있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스펠 브레이커뿐. 허나 인간은 스펠 브레이커를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넌 이렇게 만들었고."

그게 조건이었어? 이쪽루트는 아예 처음이라 조건 같은 건 생각도 못 해봤네.

"아니면 날 두렵게 만드는 유일한 힘의 정점, 바로 이그니스를 소환하거나."

오, 해결 방식이 두 개였구나. 하긴 퓨어 매직은 정상적인 인간의 뇌 구조로는 완성이 불가능하니까....

"퓨어 매직뿐만 아니다. 둘 다 인간에겐 불가능한 조건이다. 헌데 너는 둘 다 만족시켰다."

"그래서, 항복하는 거야? 순순히 르네 내 놓을 거야?"

"이 새로운 권속을 풀어주는 건 이제 일도 아니다."

녀석은 자신의 옆에 멍하니 서있는 르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건을 달성했으니 나는 너와 계약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계약?

거기까진 생각도 안 했는데.... 근데 왜 해야 한다면서 못 한대?

"네가 불의 정령왕과 먼저 계약했기 때문이다."

"이그니스?"

"그렇다. 불의 근원과 얼음의 근원. 우린 둘과 모두 계약하는 건 법칙에서 벗어난다. 너 또한 견딜 수 없고."

응? 내가 왜 못 견뎌?

"우리는 자연이 품은 유일한 상성이다. 아래 권속은 상관없지만, 정점에 있는 근원 둘을 동시에 계약하는 것은 계약자의 파멸을 의미한다."

꿀꺽.

나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켰다. 글라체스가 내 마음과 동조해 생각을 읽어내듯, 나 역시 녀석의 마음에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를 읽을 수 있었다.

폭발.

내 조그만 몸이 두 상극의 힘을 견디지 못한 채, 어느 순간 폭죽처럼 터지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모습.

"대신 네게 나의 권한을 넘겨주마."

콰직!

녀석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찔러 넣은 다음, 그 안에서 반짝이는 소금 결정 같은 것을 끄집어냈다.

"이것이 나의 마력 결정이다."

"마력 결정? 설마 그거...."

리치의 마력 결정? 그러고 보니 생긴 게 비슷하네?

"근본은 같다. 내가 이곳에 권속들을 모아 놓고 힘을 모은 이유기도 하지. 정점에 집중된 힘을 내게 모아, 마력 결정을 하나씩 늘려 나가며 그 힘을 통해 훗날 세계의 파멸을 막아내려 했다."

"먼 훗날의 파멸 말이지? 300년 뒤?"

"그렇다."

"근데 이걸 나한테 준다고?"

나는 눈앞까지 내려온 정령왕의 마력 결정을 주시했다. 녀석은 주변에 있는 온갖 얼음 정령들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너는 나의 모든 권속을 한 번에 소환할 수 있다."

"...뭐?"

"그 정도면 나와의 계약을 대신 할 수 있겠지. 단 하나씩 따로따로 소환은 안 된다. 무조건 한 번에 모두를 소환하게 된다."

아니 잠깐.

여기 있는 백 마리도 넘는 얼음 정령들을 한방에 다 소환한다고?

"그러니까.... 이거 한방에 너 빼고 얼음 정령 전체와 계약이 된다는 뜻?"

"계약이 아니라 복종이다."

글라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마력 결정을 가리켰다.

"이것을 가진다는 것은, 나 글라체스의 모든 권한을 대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는 나를 대신해 나의 모든 권속을 지배한다. 물론 네가 데려가려 했던 저 새로운 정령 르네도."

"르네!"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 마력 결정이 순식간에 내 몸 속으로 쑥 들어왔다.

"윽...."

거대하다.

새로운 마력결정은, 이미 내가 가진 세 개의 마력 결정을 합쳐 놓은 만큼의 사이즈를 가지고 있었다.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수한 느낌의 힘.

마치 스스로는 아무 의지도 없는 커다란 두뇌가 내 머릿속에 추가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으.... 이거 좀.... 많이 큰데...."

눈앞이 어질 거리며 다리가 휘청댄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동시에 사방에 있는 모든 정령들의 무언가가 내 머릿속으로 넘어왔다.

소유권.

정령들을 나의 권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소유권과 같은 복잡한 계약의 흐름들이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온다.

잠깐! 아니 이거 많아도 너무 많아!

백 개도 넘는 면접서가 동시에 머릿속에 펼쳐진 기분이다.

"...."

순간 코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건 위험하다. 내가 아무리 아크 위저드급의 두뇌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 모든 정보를 보관과 동시에 머릿속에 띄워 놓을 수는 없다!

"으...."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외부 저장장치가 존재한다.

한순간 기존에 있던 세 개의 마력 결정은 물론, 새로 받아들인 정령왕의 마력 결정에 모든 소유권을 분산해 떠넘겼다.

이계 황자는 세상을 구하고 싶다 152화

47장 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