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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076. 아가트람(2)

아직 동트기 전 새벽.

어둠 속에서 나는 조용히 움직였다.

목적지는 당연히 민간인들이 모여 있는 격리구역이다.

우리가 있는 플레이어 격리구역에서 대략 10킬로미터가 떨어진 장소에 마련된 구역.

퀘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인조 도시다.

시스템의 영향을 받기에 얼마가 파괴되든 금방 복구되는 스테이지이며, 일반적인 구조는 보통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식수나 음식은 도시 중앙에서 배급받는 식이다.

"컥!"

격리구역 근처를 순찰하던 플레이어 한 명을 기절시킨 후, 나는 능숙하게 안으로 진입했다.

이미 몇 번이나 해봤던 거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탐사 스킬이 있으면 더 편했을 텐데.'

안타깝지만 전생의 나는 탐사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시 안으로 들어온 나는 하수도를 통해 움직였다.

맨홀의 뚜껑을 살며시 열어 위치를 파악하며,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이제 민간인이 있는 구역만 하면 끝인가?'

조금 떨어진 장소에는 플레이어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다.

모두 이 퀘스트 하나를 위해 만들어진 스테이지다.

'좋아.'

나는 준비한 물건들을 도시 곳곳에 부착시켰다.

가끔 마주치는 플레이어들은 최대한 조용히 처리했고, 되도록 아가트람 길드의 길드원과는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했다.

만약 아가트람 소속의 간부가 벌써 움직이게 되면 준비가 다 끝나기도 전에 전투가 벌어질 테니까.

"후우."

지난 이틀 동안 나는 도시를 드나들며 마지막 전투를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막무가내로 쳐들어가 봐야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 때문인지 슬슬 격리구역 근방의 경계도 삼엄해졌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지.

"이제 어떡할 생각이냐?"

빛이 비치지 않는 골목에서 한숨 돌리고 있으니 이드라가 말을 걸어왔다.

언제 나타났는지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뭘 어떡해. 싸우는 거지."

"혼자서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나는 그대가 이렇게 무모한 성격인 줄을 몰랐구나."

"확실히 전에는 하지 않았을 방법이지."

최대한 몸을 숨기고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만 움직였다.

혼자서 모든 플레이어와 싸울 생각 따위는 조금도 한 적 없었다.

"왜 생각이 달라진 것이냐."

"달라지지 않았다. 단순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많았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신중한 건 좋다.

다만 지나치게 신중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약자였기에 약자로서의 싸움법밖에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난 약자가 아니었다.

분명 재능도 대단치 않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였다.

한마디로, 나도 충분히 대단하다는 거다.

"뭣보다 너를 상정하지 않았지."

"호오?"

"알다시피 나는 신의 힘을 빌리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자신의 힘이 아닌 걸 사용하는 건 스스로의 목을 죄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은 다르다는 건가?"

"아니, 실제로 목을 죄는 거지."

픽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이드라가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대체 뭐가 다르냐는 시선을 보냈다.

"목을 죄더라도 죽지만 않으면 상관없잖아?"

초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선 누군가의 하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악마의 계약자나 혹은 신의 아바타나.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초상의 존재보다 약한 건 아니다.

한계까지 목을 죈다면, 어떻게든 도달할 수는 있다.

초상의 존재는 되지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힘을 지닐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바로 신의 대리인.

전생의 나는 그걸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드라가 원했기에 마음먹는다면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냐면 이드라라는 존재는 워낙 미심쩍기도 하고 이어 나타날 존재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드라를 통해 외우주의 신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 사실을 알려준 것도 이드라 본인이었다.

그러니 녀석은 내가 거부하자 순순히 물러났었지.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어.'

왜냐면 이건 어디까지나 몽상에 불과한 세계이니까.

"이드라."

"음. 뭐냐."

멀뚱멀뚱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계속 생각했던 걸 말했다.

"너 영상 편집할 줄 아냐?"

***

지속적으로 경계를 서던 플레이어들이 피해를 입으니 아가트람을 비롯한 플레이어들도 여러 가지 대비를 했다.

하지만 상대는 무슨 짓을 할지 안다는 것처럼 그곳만을 피해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확인된 수는?"

"모르겠습니다. 이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인 걸 보면 수가 많지 않은 건 확실합니다."

천상환은 건물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하늘에서 내려다봐서는 특별히 이상한 플레이어는 눈에 띄지 않았다.

천상환의 신은 최상위 신중에서도 최고위에 위치한 신이었고, 그건 아바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인식할 수 없는 범위까지 천상환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건 이미 도시를 벗어났거나 그 이상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스킬을 지녔다는 거다.

"짜증 나네. 그냥 우리도 공격하지?"

"그사이에 습격한 누군가가 뭔가를 해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눈에 안 띈다는 건 분명 소수라는 거야. 적은 수로 해봤자 얼마나 큰일을 벌이겠어? 그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게 나아."

검은 머리칼의 여성이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수린, 아가트람의 간부 중 하나였다.

"상대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참아."

"민수호. 너 평소에는 되게 시원한 성격인 것처럼 말하더니 왜 이렇게 답답해? 쫄았어?"

"그냥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덤덤하게 말하는 민수호의 말에 이수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느낌이 안 좋기는 개뿔. 벌써 이틀째야! 이대로 내버려두면 휘둘리는 건 우리지. 이쪽이 아무것도 안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

"됐어. 나 혼자서라도 할 거다."

막무가내로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민수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뭐라도 하는 게 날지도 모른다.

어차피 스테이지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으니 잠입한 사람이 있다면 금방 발각될 테니까.

평범한 인간이면 몰라도 각종 스킬로 무장한 플레이어들의 눈을 피하는 건 무리였다.

'소심한 놈들!'

이수린은 아가트람의 미적미적한 대처에 짜증이 치밀었다.

이렇게 침입자를 찾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먼저 공격을 해야 됐다.

그렇다면 이런 퀘스트 따위 진작 끝났을 텐데.

"이렇게 몰래 숨어들어온 걸 보면 분명 잔챙이겠지."

이수린은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언제나 정면대결을 고집했고, 이런 식으로 몰래 숨어드는 방식을 가장 싫어했다.

그건 그녀의 신의 성향과는 달랐지만 그런 이수린을 신은 좋아했다.

왜냐면 이수린의 신이 좋아하던 영웅이 딱 그러했기 때문이다.

'응?'

문득 이수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분명 알 수 없는 위험이 느껴졌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이수린은 골목 쪽에서 뭔가 서늘한 느낌을 느꼈다.

"뭔가 있나 보네."

아마 침입자일 확률이 높았다.

이수린은 감이 좋았고, 그 감을 깊이 신뢰했다.

저벅, 저벅.

골목의 안은 어두웠다.

특별히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이수린은 방심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는 스킬을 수없이 많았으니까.

"저건...."

어두운 골목 안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바닥에 장착된 원통형의 무언가.

자세히 보면 최상급 마정석이 붙어 있는 이상한 장치였다.

어디로 봐도 골목에 있을 물건은 아니다.

"뭐야 이게."

최상급 마석 아래에는 유리관 같은 형태에 수상한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액체의 안에는 둥근 구슬이 둥둥 떠 있었다.

스테이지 기믹이라기엔 여태 이런 걸 본 적이 없었다.

폭탄인가?

최상급 마석을 사용한다면 상당한 마법효과가 담긴 물건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 일대를 한 번에 날려 버릴 정도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함정도 최상급 마석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역시 난 감이 좋아."

이수린은 씩 웃었다.

어떤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발견된 이상 끝이었다.

그녀의 신은 강력한 신이며 대단한 마법사이기도 했다.

당연히 그 신의 아바타인 그녀는 강력한 마법사였다.

"디스펠."

강력한 마법해주 주문. 이걸 사용하면 마법효과가 적용된 아이템이나 장비는 단번에 모든 효과를 잃고 평범한 잡동사니로 전락한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최상급 마석에서 흐르는 마력은 무언가를 발동시키기 위한 대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것이 작동하지 않도록 마력장으로 막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정지시키면 어떻게 될까.

답은 간단했다.

막고 있던 것이 해방된다는 뜻이다.

콰아아아앙!!

림프의 불이 꺼지는 동시에, 골목은 폭발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폭발은 도시 전역에 동시 다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뭐, 뭐야!"

"갑자기 이상한 연기가... 켁! 케엑!"

도시 전체가 뿌연 연기로 휩싸였다.

그것을 들이마신 민간인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플레이어들은 급히 입과 코를 막거나 해독 마법을 발동시켰다.

"연기를 마시지 마라! 마시면 죽는다!"

한 플레이어가 쓰러진 민간인을 확인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연기를 마시고 쓰러진 민간인들은 숨이 멎어 있었다.

플레이어들은 금방 대처할 수 있었지만 민간인들은 아니었다.

이 폭발로 절반에 가까운 민간인들이 한 번에 쓰러졌다.

"콜록, 콜록."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폭발에 휩쓸린 이수린은 작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폭발은 반사적으로 막았지만 연기는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 만해.'

어떤 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게 분명했다.

이수린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골목에는 아직도 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가장 먼저 발견할 줄 알았다."

그때, 연기 속에서 낮선 목소리가 들렸다.

말의 내용으로 들어볼 때 저자가 이 폭탄을 장치한 당사자인 모양이다.

"그래, 가장 먼저 발견했지.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는 이렇게 무사한데."

"너는 무사할지 몰라도 민간인들은 아니지."

"...뭐?"

"네가 방금 마법을 해지한 덕에 도시 전체에 이 연기가 휩싸여 있을 거다. 내 생각보다 위력이 죽이는 걸. 난 이 절반 정도로 예상했는데 말이야."

태연한 남자의 말에 이수린은 머리가 멍해졌다.

도시 전체가 이 연기로 뒤덮였다면 민간인의 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에게도 이정도 피해를 주는 게 민간인이 들이마신다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이 악마 같은 새끼가!"

"아, 뭔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 걸."

남자는 살기를 뿜어내는 이수린을 보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넌 여기서 끝나줘야겠어. 생각보다 너는 거슬리는 존재거든."

"뭐라고?"

"모리안이 너에게 답을 알려주기 전에 죽여주지."

"...!"

자신의 신을 알고 있었다.

이수린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여덟 겹이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진에 새겨진 룬 문자가 번쩍이는 순간, 이수린의 입에서 피가 치솟았다.

"너...!"

"환상이다."

남자는 말했다.

"처음부터 나는 네 뒤에 있었어."

몸이 멀쩡했다면 진작 눈치챘겠지만 폭발에 휩쓸리고 남자의 말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수린의 정면에 보이던 남자는 그저 환상에 불과했고 진짜는 진작 이수린의 뒤에 서 있었다.

"윽!"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자 이수린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이 서린 눈동자가 남자를 향했지만 이내 흐려졌다.

"이것도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네."

그렇게 말한 남자, 세한은 허공에 손을 뻗어 엘릭서를 꺼낸 후, 손가락에 찍어 이수린의 상처에 꼼꼼히 발랐다.

그러자 피가 흐르던 이수린의 상처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사망한 게 분명한 이수린의 상처가 치유된 것이다.

"역시 지원가부터 처리하는 게 중요하지."

이수린은 대단한 마법사다.

거기다 그녀의 신은 모리안인 탓에 계략에도 능통했다.

그러니 변수가 될 확률이 높았기에 가장 먼저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장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이수린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도 없었다. 그러니 가장 먼저 이걸 발견하게 되는 건 그녀가 될 것이라 예상했고, 그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만약 이수린이 오지 않았다면 손수 폭발시킨 후, 이수린을 따로 암습할 생각이었다.

그건 훨씬 귀찮고 고된 일이 되었으리라.

'그럼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수린을 쓰러트렸으니 반응이 올 때가 됐다.

이 근방에 있던 녀석들은 이미 파악해 둔 상태라 거리낄 것도 없었다.

"김세한──!!"

"찾았다, 이 새끼!"

'왔군.'

거친 노호성이 들리는 동시에 나는 몸을 위로 날렸다.

괜히 이곳을 싸움터로 만들어 이수린의 시체(?)에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쫓아오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질풍과 불.

저 둘과 싸우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무대가 필요했다.

# 77

077. 아가트람(3)

'내가 그때 녀석을 보내줘선 안 됐다.'

민수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세한에게 큰 악감정이 없었다.

왜냐면 그도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한 명의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때 보내지 말고 끝을 냈어야 했다.

지금도 도시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연기에 죽어가고 있었다.

천상환이 그것을 수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미 무의미했다.

이미 도시 전체에 연기는 퍼져나갔고, 플레이어들이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심지어 일부 플레이어들도 쓰러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해독 스킬도 먹히지 않고 죽어버리는 연기를 사용한 김세한에 대한 분노가 가슴을 지배했다.

'이수린까지.'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이수린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강력한 마법사인 그녀가 교전을 벌였다면 분명 큰 소란이 일어났을 텐데 그런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이수린도 폭탄에 당했거나, 세한의 암습에 쓰러졌다는 것.

거기까지 생각하자 민수호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여기서 저놈을 죽인다. 저 새끼를 내버려둬서는 안 돼!"

"동감한다."

강준식과 민수호의 눈이 마주쳤다.

의견이 자주 갈리던 그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히 일치했다.

민수호의 신은 바로 여신 마하.

빠른 발을 가졌다는 전승처럼 민수호가 받은 스킬도 속도에 관한 스킬이었다.

그거에 대단한 효과가 붙은 건 아니다.

단순히 빠르게 달릴 수 있을 뿐이다.

단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 뿐.

핑──

바람이 갈라지며 민수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빠르게, 점점 더 빠르게.

화살처럼 날아간 민수호는 인벤토리에서 긴 창을 뽑았다.

정확히는 일반적인 창이 아니다.

기병용 창인 랜스다.

랜스를 앞세운 민수호는 건물 위를 건너뛰며 도망가는 세한의 등을 겨냥했다.

일점돌파.

민수호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며 주변의 풍경이 좁혀졌다.

음속을 넘어 초음속으로.

주변을 에워싸던 연기가 뒤로 밀려나며 민수호의 신형이 날았다.

콰과과과광!!

음속을 넘는 순간 일어나는 충격파가 일어나며 주변 건물의 유리창을 깨부쉈다.

유리창뿐이 아니라 건물조차 크게 흔들리며 일부는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렸다.

"역시 빠르군."

정면에서 부딪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우선 바람을 막고, 허공에 환상을 만들었다.

그림자 질주가 있으면 편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전생의 세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도 전승 스킬이 존재했다.

허수의 공간을 다루거나, 환상을 조작하는 등, 어떠한 현상을 조작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꿈의 마녀라는 이명에 어울리는 스킬들이라 할 수 있다.

"칫!"

순식간에 분열하며 흩어지는 세한의 모습에 민수호가 이를 악물었다.

건물 위에 나타난 수십 명의 세한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민수호는 순식간에 두 명의 세한을 꿰뚫었지만 모두 가짜였다.

"잔재주 따위를 부리다니!"

하나하나 일일이 공격해야 되는 민수호와 달리 강준식은 광역 섬멸에 특화된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신은 불의 신 아그니.

당연히 강준식이 지닌 전승 스킬은 무척이나 심플했다.

전 방위를 화염으로 뒤덮는 섬멸 스킬.

"뒤져, 새끼야!!"

그의 스킬은 주변에 끼치는 피해가 막대하다.

하지만 건물 위라면 거리낄 것 없이 사용할 수 없었다.

초열의 태양이 그의 손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 바로 옆에서 새까만 공간이 열렸다.

"뭐?!"

"그런 걸 가만히 사용하게 둘 리가 없잖냐."

세한은 순간적으로 강준식이 만들어낸 붉은 구체 투명한 막으로 감쌌다.

세한이 사용한 건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단순한 구형의 쉴드를 만드는 기초적인 마법일 뿐이다.

거기에 세한은 작은 요소를 가미했다.

마녀 이드라의 스킬은 마법의 변질도 가능했다.

물론 대단한 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가벼운 '조작'은 가능했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쉴드에 마법 저항 효과를 부여한 것처럼.

세한은 그걸 자신이 아닌 허공에 나타난 작은 태양을 가뒀다.

스킬로 발동한 불길은 인공적으로 생성된 것이지만 불이다.

불은 공기가 없으면 타오를 수 없다.

그건 스킬로 만들어진 불도 마찬가지다.

단지 다른 점은 마력을 지속적으로 연소시켜 공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마법 저항 효과를 지닌 쉴드로 감싼다면 외부의 마력을 차단하는 게 가능했다.

공기의 완벽한 차단.

거기에 지속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마력의 연결은 끊어버리면 불덩이는 스스로를 태울 수밖에 없다.

"이런 미친."

쉴드에 가둬진 태양은 한 번의 반짝임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설마 이런 식으로 스킬을 원천 차단할 줄은 몰랐던 강준식은 식은땀을 흘렸다.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싶어도 자신의 태양을 만드는 것보다 쉴드를 발동시키는 속도가 빠르다.

소모되는 마력도 적었다.

'좋아, 이대로....'

세한은 그런 식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두 명을 유도했다.

이전이라면 무리였겠지만 대규모 참사와 이수린의 죽음으로 눈이 뒤집힌 두 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승 스킬만 어떻게든 차단한다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쥐새끼 같은 놈."

"피하기만 하는 것도 이제 끝이다."

세한은 적당히 넓은 공터에 내려섰다.

이정도 넓이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천상환은... 저쪽인가.'

민수호와 강준식을 믿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상황을 수습하기 바쁜 건지는 모른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세한은 자신의 좌우를 포위한 두 명을 번갈아가며 보며 말했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후우, 후우. 개소리하지 마라. 네가 쓸데없이 쫄래쫄래 돌아다닌 탓에 아주 조금 피곤해졌을 뿐이다."

한방한방의 화력이 강한 강준식은 딱 보기에도 지쳐 보였다.

그나마 민수호는 한결 나았지만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역시 상당히 체력을 소모한 거겠지.

반면 세한은 아직 괜찮았다.

애초에 최소한의 방법으로 피했던 거고 공격이라고 할 만한 건 거의 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반격으로 효율적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러냐. 어차피 이젠 피하지 않을 거다."

"하! 그럼 얌전히 맞아서 죽겠다는 거냐?"

"설마."

세한은 씩 웃으며 천천히 바닥에 손을 댔다.

"이제 피할 필요가 없을 뿐이야."

"...뭔 개소리야?"

강준식은 세한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민수호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수린의 사망으로 순간 이성을 잃었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침착한 성격이었다.

'김세한은 자신이 확실한 상황이 아니라면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유리한 상황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자신이 확실히 이길 때에만 싸운다.

그것이 플레이어 김세한의 전투방식이었다.

세간에는 그런 그를 졸렬하다거나 비겁하다고 비웃는 자도 많았지만 세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달라진 건 지난 번 민수호와의 만남 이후다.

갑자기 모습을 감추더니 이렇게 혼자 상대 진영에 쳐들어왔다.

이전의 그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다.

지금도 그렇다.

아가트람의 간부 둘을 상대로 태연히 서있는 것도 평소의 김세한이라면 결코 할 짓이 아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 느낌은 세한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는 순간 확실해졌다.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지만 그보다 세한이 빨랐다.

"이미 늦었어."

쿵!

텅 빈 공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환상으로 조작된 장소였다.

공터는 맞았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았다.

최상급 마석이 32개가 공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공터 전체에 강력한 중력 마법을 발생시켜 둘의 몸을 짓눌렀다.

당연히 내가 있는 장소는 예외다.

"너 이 새끼...! 마법은 못 쓰는 게 아니었나?!"

"내가 사용하는 건 아니지. 단순히 마법도구를 작동시켰을 뿐이야. 너희를 잡으려고 일찌감치 만들어 둔 거거든."

"시발, 고작 이런 걸로 우리를 잡아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세한은 싱긋 웃으며 손을 댄 바닥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바닥이 순식간에 물렁해지며 둘의 몸이 점차 가라앉았다.

"늪이다."

세한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중력에 눌린 채로 늪에 빠지게 되면 빠르게 달릴 수도, 불을 사용할 수도 없겠지."

거기다 그뿐이 아니었다.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몸에 점차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몸을 마비시키는 독까지 늪에 풀어둔 것이다.

"비, 비열한 새끼."

"비열하긴, 2대 1로 싸우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중력에 짓눌려, 늪에 점차 가라앉아가는 둘을 세한은 바라보았다.

늪에 빠진 몸은 빠르게 달릴 수도 없었고, 불길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강준식과 민수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무심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한을 보았다.

완벽한 자신들의 패배다.

몸을 마비시키는 독 때문인지, 아니면 늪에 빠진 탓에 호흡이 곤란해진 건지 둘의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이제 둘에겐 어떤 방도도 없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둘이 중력 마법을 해제할 수 있을 턱도 없었고, 이곳에서 빠져나올 기술을 가졌을 리도 만무했다.

'이래서 이수린을 가장 먼저 죽였구나.'

그녀라면 중력 마법을 해제할 수 있었으며 순간이동 스킬을 사용해 둘을 건져 올릴 수 있었을 테니까.

거기다 이수린의 죽음에 강준식과 민수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도 못했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애초에 놈의 손에 놀아났을 뿐이었나.'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건, 짧은 단검을 인벤토리에서 꺼내드는 세한의 모습이었다.

***

가장 거슬리는 아가트람의 간부들을 처리한 세한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도시를 들쑤시며 플레이어들과 남은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민간인들은 연기만으로 충분했지만 플레이어들은 일일이 단검으로 찔러줘야만 했다.

"저기다!"

"쫓아!"

우르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쓰러트렸음에도 아직도 플레이어들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거기다 진짜 문제는 자신을 발견한 존재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거다.

'천상환.'

전생에는 그와 죽어도 정면싸움을 피했다.

세한이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건 그가 계속된 싸움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암습을 가한 후, 집요하게 상처를 노려 그를 쓰러트렸다.

다른 아가트람의 멤버와는 달리 그에게는 뚜렷한 약점이 없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리며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조금 힘들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할 수는 있었다. 정 위험하면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다.

카앙!

반사적으로 단검을 휘둘러 뒤에서 다가온 사람을 향해 휘둘렀다.

'막아?'

허리춤을 노리고 휘둘렀건만, 상대는 능숙하게 그것을 막았다.

남은 플레이어 중에 이정도의 실력자가 있었나?

겉모습만 보자면 평범한 인상의 플레이어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도 없는 걸보면 특별한 플레이어는 아니리라.

그러니 세한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몽상의 던전이 만든 히든 캐릭터나 시스템이 관여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은 없었지만 세한은 여러 가지 수를 머릿속에서 그렸다.

그러나 이어진 플레이어의 말에 세한은 벙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저번에 내가 했던 공격의 복수야?"

"...뭐?"

"나야 나."

플레이어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한 여성으로 변했다.

검은 단발을 지닌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심심해서 도와주러 왔어. 놀랐지?"

어릿광대의 아바타이자, 탑 플레이어 중 하나.

천변(千變)이라 불리는 플레이어, 이민아가 그곳에 있었다.

# 78

078. 역주행의 마법(1)

"...왜 온 거지?"

"그냥 내가 만들어 준 것들로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거든."

이민아는 그렇게 말하며 연기로 뒤덮인 도시를 돌아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아직 수습되지 않은 민간인의 시체들.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

지옥과 같은 광경 속에서도 이민아는 그저 웃었다.

"보니까 이제 알겠네. 근데 이렇게 해서 가능한 거야?"

"게임이니까."

"게임이니까, 라."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덮치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날아갔다.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니다.

이민아의 손에서 연결된 투명한 은사가 그들의 몸을 묶어 거미줄처럼 공중에 매달았다.

단검을 주로 사용하는 이민아지만 그녀는 나처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였다.

다양한 스킬을 사용하는 만큼 그녀의 전투법은 무척 다채로웠다.

"나도 본래 이 퀘스트를 참여해야 했을 플레이어니까 도와줄게. 여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응,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신경 쓰는 건."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을 보며 좌우로 손을 펼쳤다.

"이 퀘스트의 결말이지."

그녀의 넓은 소매 속에서 단검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 개의 단검이 달려들던 플레이어의 어깨나 복부에 사정없이 박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야."

"걱정 마. 당신이 사용하는 단검이랑 똑같으니까. 그보다 당신은...."

이민아는 손가락을 들어 조금 먼 장소를 가리켰다.

"저쪽을 해결하는 게 먼저잖아?"

"...."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건 바로 아가트람의 길드장인 천상환.

하얀 광체가 번쩍이는 걸 보면 상당히 열이 받은 모양이다.

"되도록 이쪽으로 오지 않게 해줘. 올 것 같으면 난 도망친다?"

"그래.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과 민간인은...."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저기에 있는 것과 싸우러 가라.

이민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세한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이쪽을 민아가 맡아준다면 더 이상 거리낄 건 없었다.

"그럼 부탁하지."

그녀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은 플레이어들은 상당한 강자들이었지만 이민아 정도는 아니다.

거기다 작정하고 기습을 가하는 이민아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었다.

더불어 이번 일을 대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검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 대략 짐작했으니까.

아가트람 길드 간부 중에 남은 건 이제 단둘.

천상환만 쓰러트린다면 린 테일러 하나뿐이다.

'이제 이 퀘스트의 끝이 보이는군.'

몽상의 던전이 만들어낸 이 퀘스트의 끝이.

세한은 느릿하게 무릎을 굽힌 후 크게 뛰어올랐다.

이쪽으로 친히 오고 있는 아가트람의 길드장을 향해서.

***

아가트람의 길드장 천상환.

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상주의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며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인간.

나쁜 건 아니다.

그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반드시 한쪽이 무너져야 끝나는 퀘스트에서 그는 그저 유유부단한 지휘관일 뿐이다.

어떤 대책도 내놓은 것 없이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가 이런 결과가 나와 버렸다.

'내가 먼저 나섰더라면.'

그는 머리를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책임을 통감했다.

너무 여유를 부렸다.

언제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10만의 민간인뿐 아니라 플레이어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길드원들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도달한 결과가 이거다.

설마 이런 식으로 무차별 테러를 가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만약 다른 플레이어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막았으리라.

그에겐 이 격리구역 전체를 통찰하는 눈이 있었으니 수상한 자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제거할 수 있었다.

근데 눈치채지 못했다.

왜 알지 못했나.

답은 간단하다. 상대인 김세한이 그의 눈을 완벽히 피해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천상환의 신은 신들의 왕이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신의 아바타인 천상환은 어떤 플레이어보다 강했다.

그런 자신의 눈을 완벽히 피할 수 있는 신이 있나?

설령 동급의 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을 거다.

그가 숨긴 건 본인만이 아니다.

도시 전역에 설치된 폭탄이나 다양한 함정들도 모두 숨겼다.

대체 어떤 전승 스킬을 가졌기에 그런 것이 가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세하아아안!!"

천상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은 옷의 남자를 보며 울부짖었다.

반드시 저자만큼은 죽이고 말리라.

"으아아아아!!"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빈손이었던 그에게 시뻘겋게 불타는 검이 손에 쥐어졌다.

그건 단순한 아이템이나 장비가 아니었다.

검 자체가 전승 스킬.

바로 클리브 솔리스(Claimhb Solais).

스킬의 효과는, 모든 개념을 불태울 수 있는 초고열의 열선을 발산하는 것.

저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 '신의 무구'의 형태를 빌려온 매개체일 뿐이다.

붉은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가로로 크게 휘둘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건물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다.

"흥분해서 주변이 보이지도 않는 건가?"

그 광경에 세한은 혀를 내둘렀다.

열선이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사정없이 불타 사라졌다.

언제봐도 가공할 위력이다.

'정확한 스킬의 효과는 여전히 모르겠다만.'

저건 강준식에게 했던 것처럼 단순히 공기를 차단하거나 마력을 차단하는 것으로 막을 수 없다.

차단하는 순간 열선에 찢겨질 테니까.

저건 단순한 불이 아니다.

신의 불로서 '태운다.'라는 개념을 지닌 하나의 권능이다.

불태울 수 없는 것까지 태우는 신의 힘.

바로, 켈트 신화의 왕. 누아다 아케트라브의 전승 스킬이다.

수많은 전승 스킬 중에서도 공격력만 따지면 최강급 스킬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세한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너의 실수는 너무 자신의 힘을 믿었다는 거다."

"아니, 내 실수는 너무 자비로웠다는 거다. 처음부터 나섰어야만 했어."

열선을 피한 세한을 향해 천상환이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민수호에 비해선 부족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인 건 분명했다.

'우선 이곳에선 최대한 떨어지는 게 좋겠지.'

격리구역에 남은 플레이어나 민간인들은 이민아가 해결할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자신은 최대한 천상환을 유도시켜 격리구역을 최대한 벗어나는 게 좋았다.

싸우기도 그 편이 쉽고.

두 개의 격리구역 사이에는 황폐화된 평야가 있었다.

거기라면 천상환이 날뛰더라도 큰 상관이 없으리라.

"나를 유인하는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처럼 특별한 약점이 없다는 걸 알 텐데? 어떤 함정을 준비했다고 해도 소용없다."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천상환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한은 그런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아닌데?"

"뭐?"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너는 딱히 준비한 거 없다."

격리구역을 한참 벗어난 평야에 내려선 세한은 열선이 지나가 타버린 외투를 벗어서 던졌다.

은신 스킬에 보정을 해주는 외투였지만 이젠 필요 없었다.

"하, 헛소리를. 그럼 네가 나를 혼자서 이길 수 있다는 거냐? 비열한 수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네놈이?"

"어."

"...미친 놈."

천상환의 예상보다 세한이 강한 건 사실이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모든 능력치가 천상환이 월등히 높았다.

분명 그도 꽤 강한 신의 아바타인 것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으니까.

플레이어로서의 재능.

지금 당장 천상환의 공격에 전혀 대응을 못하는 것만 봐도 격차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세한은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전력을 기울여야 가능했다.

"어디 보자...."

세한은 힐끗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옵저버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천상환을 지켜보는 신의 옵저버.

다른 하나는 바로 세한의 신 이드라의 옵저버였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미 쪽지를 통해 이드라의 답변은 들은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것뿐.

"확실히 나는 너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긴 하지."

세한은 말했다.

"지닌 바 재능도, 전승 스킬도 너처럼 화려한 건 없어. 죄다 수수할 뿐이야."

이드라의 옵저버가 부르르 떨렸지만 어쩔 수 없다.

녀석이 지닌 전승 스킬 중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근데 딱 하나, 내가 너보다 나은 게 있어."

"비열함? 아니 허세인가?"

"물론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거든"

세한은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새빨간 노을로 물든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그건 직접 경험해 보는 게 빠를 거다."

전생의 자신은 차마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천상환과 정면으로 싸운다는 건 나에게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투기술은 전생의 이때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그것만으로 천상환을 이길 수는 없다.

딱 하나의 방법을 제외한다면.

"이드라."

전생의 세한은 결코 하지 않으려고 했던 방법.

그러니 지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왜냐면 환상이니까.

거기에 전생의 자신은 너무 많은 걸 두려워했다.

그리고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김세한! 너 지금 무슨 짓을...!"

새빨갛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밤이 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거대한 그림자였다.

신의 그림자.

별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마녀의 손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별 따위는 한손으로 쥐고 뭉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별을 둘러싼 반짝이는 금발이 보였다.

하늘을 가리는 검은 옷자락이 세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신의 존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게 대체...."

천상환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을 연신 더듬었다.

놀란 건 그만이 아니었다. 지구에 살아남은 모든 플레이어들이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구를 감싼 거대한 신의 모습을.

세한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지 놀란 이유가 다른 이들과 좀 달랐지만.

'화려하게 해달라고 했더니 이렇게까지 하나?'

아까 스킬이 수수한 것밖에 없다고 한 게 원인인 걸까?

조금 과하게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무리 망해가는 게임이라지만 신격을 이렇게 드러낸다면 상당한 클레임이 들어올 게 분명했다.

아무리 외우주의 신인 이드라라고 해도 전부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하기야 뒷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지.'

이 세계가 계속될 일은 없다.

그러니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막 나가는 거다.

몽상의 던전에 의해 구축된 환상.

그것을 아는 이만이 가능한 행위였다.

「플레이어 김세한, 이 꿈의 마녀 이드라가 청하마.」

언젠가 아스트리아가 루크에게 했던 것처럼, 이드라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경악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요염하게 웃었다.

「나의 대리자가 되겠느냐?」

세상 모든 인간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가 세계를 울렸다.

그 말에 모든 플레이어가, 남아 있는 신들이 모두 경악했다.

신의 대리자란, 그만큼 희소한 존재였으니까.

"그 말에 응하도록 하지."

전생에 한 번 거절했던 말.

뒷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건 세한도 마찬가지다.

다른 외우주의 신이 이 별을 관측할까 봐?

신의 대리자가 되어 생기는 문제?

아무래도 좋다.

[아우터 갓. 꿈의 마녀 이드라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세한의 귀에 알림이 들렸다.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이제 막 이드라의 대리자가 되었을 뿐이다.

진짜는 대리자가 되었을 때 얻는 스킬이었다.

[강신(降神)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

강신(降神)(SS)

신의 힘을 일시적으로 몸에 담아 사용할 수 있다.

==

설명은 딱 한 줄.

다른 스킬과 다르게 정확한 수치의 설명도 없었다.

이 스킬의 위험성을 아는 세한으로선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뒤진다고 적어는 놨어야지.'

설명처럼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다.

함부로 사용했다간 신의 힘에 잡아먹혀 파멸한다.

아주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거나, 혹은 모든 걸 견뎌낼 수 있는 재능과 육체를 지니지 않는 한.

참고로 세한은 전자였다.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라는 건, 겉치레가 아니다.

세한은 심호흡을 한 뒤, 강신 스킬을 사용했다.

쿠웅!

"큭!"

스킬을 사용하는 순간 전신에 충격이 달렸다.

강제적으로 신과 연결되며 의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을 모아 자신을 잡고 흐려지는 의식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신의 존재가 세한을 집어삼켰지만, 그럼에도 세한은 웃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하네."

차라리, 이 세계에 홀로남아 구멍이 뚫린 하늘을 보던 때가 더 끔찍했다.

쿵!

세한은 발을 내딛었다.

지면이 움푹 파이며 대지가 부서졌다.

세한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천상환을 향해 달렸다.

"아무리 네놈이 대리자라고 해도...!"

천상환은 반사적으로 클리브 솔리스를 사용했지만 모든 걸 태우는 열선은, 세한의 앞에 나타난 환상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이 세계가 아닌 꿈의 저편으로.

"헉!"

"내가 아까 말했지?"

세한의 손에는 언제 쥐어졌는지 작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겪어보면 안다고."

천상환에겐 최상급의 방어구와 수많은 방어 스킬.

그리고 강력한 전승 스킬이 있었지만.

어떤 것도 세한의 단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 79

079. 역주행의 마법(2)

"...!"

천상환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던 순간, 세한의 등을 노리고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인지라 세한은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지만 등에 긴 자상을 입고 말았다.

"큭!"

급히 물러선 세한은 천상환이 제대로 쓰러진 걸 확인 한 후, 자신을 기습한 상대를 보았다.

'린 테일러.'

역시 왔구나.

세한은 냉정이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평정을 잃는 순간 스킬에 잡아먹힌다.

'전생에도 비슷했지.'

그때는 천상환을 기습으로 쓰러트린 직후였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그때는 세한도 상처를 많이 입은 터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칫."

린을 혀를 차며 나를 향해 덤벼들었다.

천상환처럼 강력한 전승 스킬 따위는 지니지 못한 린이지만 공격은 제법 매서웠다.

다른 아가트람 간부들의 공격방식을 닮아 있었는데 아마 그들의 공격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리라.

'이때였지.'

세한이 린의 재능을 인지한 것도 이때였다.

제법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초월적인 재능을 지닌 존재라는 건 이때 알았다.

아마 아가트람의 간부들도 린이 재능이 있는 건 알았겠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을 거다.

아니, 린 본인조차 모를 거다.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재능의 편린.

오직 세한만이 그것을 오롯이 보고 있었다.

린의 공격을 피하며 세한은 슬쩍 하늘을 보았다.

'아직 멀었나?'

하늘에는 옵저버의 수가 조금 늘어나 있었다.

제대로 '커뮤니티'에 영상이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해야겠지.'

천상환과 싸우는 것 정도로는 크게 시선을 끌지 못한다.

강력한 플레이어, 강력한 신.

분명 천상환은 눈에 띄는 존재였지만 '딱' 그 정도다.

강한 플레이어가 강한 스킬을 난사하는 건 그다지 재미가 없다.

신의 왕 누아다의 스킬은 강력하지만 플레이어면 몰라도 신들이 보기엔 화려한 불꽃놀이일 뿐이다.

그러니 일발 역전을 노리기엔 부족하다.

지금 이 세계에서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

그리고 그것을 빛나게 만들 수 있는 건 신의 대리인인 세한 한 명뿐.

대리인이 된 세한은 신들에게도 특이한 존재였다.

정확히는 지금 망해가는 게임의 플레이어를 대리인으로 선택한 이드라가 특이한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 덕에 옵저버의 수가 늘어나는 건 분명했다.

커뮤니티를 타고,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으리라.

이제 남은 건 한 방뿐.

"하아, 하아."

린은 계속 공격했지만 세한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분함에 눈에는 눈물마저 맺혀있었다.

그럼에도 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모습은 퍽 애처로웠다.

동정을 사기 딱 좋은 광경이다.

아버지를 죽인 상대를 복수하려는 소녀.

이야기의 주인공에 걸맞지 않은가.

상대는 무려 아우터 갓의 대리인이자, 10만의 민간인과 수많은 플레이어를 학살한 학살자다.

그런 강력무비한 적을 상대하는 아름다운 소녀라니.

황도 12궁 황소자리 알데바란을 죽인 영웅의 딸과 그 영웅을 죽인 악당.

신들이 좋아하는 서사시와 같다.

허나 린도 알 거다.

신의 대리인이 된 세한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심지어 본인의 재능조차 완벽히 인지하지 못한 그녀로선 더더욱 그렇겠지.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덤볐다.

그 이유를 전생에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루크의 복수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린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다를지도 모른다.

전생에는 그 말을 온전히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를 죽이려고 하지? 그때 루크 씨를 죽인 것에 대한 원한인가?"

"...."

린은 그런 말을 한 세한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루크를 죽인 세한을 린이 원망하여 죽이려고 한다는 걸.

확실히 그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분명 원망도 있었다.

"...조금은 그럴지 몰라요."

처음으로 린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 가혹해요."

"가혹하다?"

푸르게 타오르는 눈동자에는 확연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스스로에게도, 주변에게도.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도 남지 않을 거예요."

"우습군.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본 네가 할 말인가?"

"알아요. 제가 우습다는 거. 하지만 당신이라면, 아저씨라면 분명 더 나은 방법을 찾았어요. 하지만 아집에 사로잡혀 하나밖에 보지 못했어요."

그건 천상환과 비슷한 말이기도 했다.

이상적인 말.

하지만 린은 달랐다.

이상적인 상황을 바라는 게 아니라, 세한이라면 분명 그걸 찾을 수 있었으리라 고했다.

그건 그녀의 초월적인 감이 말하는 진실이었다.

"이번 일은 전조에 불과해요. 분명 아저씨는 계속 살아남겠죠. 하지만 분명 후회할 거예요."

린은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방금 전까지 흔들렸던 모습은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 루크 테일러의 딸로서 반드시 막겠습니다. 아버지도 분명 그러기를 바랄 테니까요."

이거다.

세한은 린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술렁이는 걸 느꼈다.

지금 린이 한 말은 1회차 린 테일러의 유언이기도 했다.

죽어가는 린이 말하던 마지막 말.

그것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기에 이런 상황을 유도했음에도 가슴의 쓰라림을 느꼈다.

그녀는 분명 세한을 원망했지만, 미안한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세한은 루크를 좋아했다. 그런 그가 루크를 죽였다.

그것에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랐을지 린은 알지 못했다.

폭주한 아버지를 막아야 하는 건 딸인 자신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린은 하지 못했고, 그것을 세한이 대신했다.

아버지 역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세한에게 사과했었다.

미안하다고.

그러니 린은 지금까지 계속 기다렸다.

이 순간만을.

"여신이여.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여."

대리자가 된 세한을 린은 이기지 못한다.

아니,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런 그와 동등하게 맞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간단하다.

같은 대리인이 되면 된다.

플레이어서의 경험도. 지금까지 쌓아온 능력도.

모든 게 뒤처지지만 린은 자신이 느낀 스스로의 재능.

그 작은 조각을 믿었다.

"감히 제가 당신에게 대리자가 되길 청합니다."

보통 대리자가 되는 경우는 신이 선택할 때뿐이다.

그조차 하나의 게임에서 한 번 나오기도 힘든 일이다.

심지어 아스트라이아는 이미 루크를 한 번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루크는 알데바란과의 싸움에서 죽었고, 대리인이 죽은 아스트라이아는 큰 타격을 받아 잠적했다.

대리자를 삼을 수 있는 건 동시에 하나뿐.

아바타의 경우엔 동시에 두세 명도 가능하지만 대리인은 하나뿐이다.

루크가 죽은 지금, 아스트라이아는 대리자를 다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대리자를 잃었던 그녀가 한번 더 대리자를 만들지는 미지수였다.

보통의 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이었으니까.

그러나 린은 그녀의 여신을 믿었다.

계속 자신을 지켜봐 주었기를.

아버지에게 그랬듯, 그녀의 정의를 자신에게 내어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런 린의 생각은 정확했다.

***

신들의 커뮤니티.

그곳에는 시스템을 통해 여럿의 별을 게임으로 만들어 즐기는 존재들이 있었다.

무릇 게임이 그렇듯 흥하는 게임이 있으면 망하는 게임도 있다.

한번 관심이 멀어진 게임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접근하지 않으며 새로운 게임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말이다.

"심심해라."

한 여성이 허공을 두드리며 하품을 했다.

허공에 나타난 여럿의 웹사이트들을 둘러봤지만 마땅히 끌리는 게임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게임을 플레이했던 것도 1년 전이다.

그녀가 있는 북유럽의 신계는 특별히 할 것도 없어서 매일매일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장난도 별로 땡기지가 않았다.

그야 라그나로크 이후 자숙한 지가 수천 년이 되니 그럴 만도 했다.

'남신으로 변해서 여신들이나 꼬시러 다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그녀는 문득 신들의 웹사이트, 그중 동영상을 올려두는 사이트에서 한창 핫한 영상을 발견했다.

"이건...."

동영상을 게시한 건 어떤 신이다.

익숙한 닉네임은 아니었다.

아마 웹사이트를 자주 이용하는 신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 신이 올린 영상은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신의 대리인이 두 명?!"

보통 하나의 게임에서 보기도 힘든 존재가 둘.

게임에 신생(神生)을 판 존재가 둘이나 존재할 줄이야!

평상시의 그녀라면 그런 둘을 보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스트라이아와... 이건."

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신.

외우주의 신격이다.

이런 존재의 아바타와 아스트라이아의 아바타가 싸우는 건가?

심지어 배경도 익숙했다.

고작 1년 전에 플레이했던 게임이니 그녀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인간에겐 길다면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나 신인 그녀에게 1년은 찰나나 마찬가지다.

방금 전에 게임을 끄고 한숨 자다 온 정도다.

물론, 이 영상을 못 봤다면 1년이 아니라 영원이 되었겠지만.

'격으로 치면 개미와 코끼리의 싸움.'

아스트라이아는 황도 12궁에 속해 있는 여신이다.

그렇지만 딱히 인지도가 있지는 않다.

그녀가 가진 무기도 같은 황도 12궁에 속해 있지만, 무기로서는 대단할지 몰라도 신으로서 별자리는 대단한 격을 나타내지 못한다.

도리어 별자리에 속한 신은 격이 낮은 경우가 부지기수.

실제로 아스트라이아는 중위 신격에 불과했다.

지금 이 영상을 보고 있는 그녀보다도 아득히 낮은 존재였다.

그런 존재의 아바타가 싸우는 건 외우주의 신.

꿈의 마녀 이드라.

아우터 갓이라 불리는 최상위 신격.

정확히는 최상위 신격이라기도 뭣하다.

그 단위는 이쪽 우주에만 통용되는 단위니까.

아무튼 아스트라이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격을 지닌 존재인 건 분명했다.

그러니 아바타로서도 상대가 되지 않을 터인데....

"대단하네."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인간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쓴 게 대체 언제였을까.

신들은 본디 영웅을 좋아했다.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불합리한 강자를 상대로 필사적으로 맞서는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건.

심지어 그 약자가 누구보다도 고결한 영웅이라면.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을 가진 원석이라면.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볼 수 없었던 영웅의 심장을 지닌 자.

물론 영웅이 빛날 수 있는 건 적이 강대하기 때문이다.

아스트라이아의 아바타가 선전하고 있었지만 분명 적이 더 강했다.

그건 단순히 강한 신의 아바타라서가 아니다.

애초에 '강신' 스킬을 사용하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부터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아스트라이아의 아바타는 눈부시게 빛나는 재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솔직히 빛나는 재능을 지니진 못했다.

강신 스킬을 사용해 뻥튀기된 능력치가 저 정도라면 본래의 능력치도 그렇게 높지는 않다는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지닌 재능도 썩 대단치는 않다는 거다.

그럼에도 신의 대리인으로서 싸우고 있다면, 그는 대체 얼마나 강한 정신력을 지닌 건가.

조금 소름이 돋았다. 저런 '격'을 유지하며 인격을 유지하는 게 인간으로서 가능한가?

'솔직히 신격만 얻으면 바로 신이 될 수 있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거기다 그의 공격은 강자의 품격이 있었다.

정말 아리송한 존재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신의 격을 견디며.

능력치 이상의 싸움법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어디로 봐도 이레귤러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저 둘이 모두 이레귤러다.

최근에 오픈한 어떤 게임에서도 볼 수 없는 존재들.

"으음."

문득 자신의 아바타가 잘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1년 전 그녀는 이상한 산골에 처박혀 있었었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퀘스트를 진행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포기했던 게 떠올랐다.

"어라?"

그런데 두 명의 대리자의 싸움이 나오는 영상에서 익숙한 존재가 보였다.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경천동지할 싸움에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자신의 아바타도 있었다.

산골이 아니라 왜 저기에 있는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한번 접속해 볼까?"

공교롭게도 지금 그런 생각을 한 신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 80

080. 역주행의 마법(3)

「와하하!」

귓가에 이드라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한은 저놈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은 지금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데 가볍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영상 편집에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보라, 하늘에 나타나는 옵저버의 수를!」

신나서 떠드는 이드라는 아무래도 본인이 올린 영상이 관심을 받기 시작하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커뮤니티에 접속할 수 없는 세한으로선 이드라가 어떤 식으로 영상을 올렸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응을 보니 확실히 관심을 받도록 올리긴 한 모양이다.

「진작 이런 걸 업로드해 볼 걸 그랬군. 뒤늦게 알게 되다니 아쉬운 일이로다. 그렇지! 몽상의 던전을 나가면 그쪽의 내게도 이걸 알려줬으면 한다.」

'싫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몽상의 던전에서야 친근하게 대화를 했지만 본래 그녀와 자신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이 세계는 꿈이기에 세한도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본래 세상이라면 달랐다.

그래도 이드라가 자신을 생각보다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다만 그건 이 세계의 이드라지 본래 세계의 그녀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매정하구나.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영상을 편집하도록 하지. 신의 영역에 이른 편집 기술로 말이다.」

그야 그렇겠지.

본인이 신이니 신의 영역에 이른 편집기술인 게 당연했다.

이드라는 하고 싶은 말이 다 끝났는지 깔끔히 물러났다.

이제야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세한은 눈앞의 린을 보았다.

'역시 너는 온전히 대리자가 될 수 있었구나.'

금빛으로 빛나는 린의 모습을 보니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스트라이아의 대리자는 루크 테일러가 아닌 린이 되었어야 했다.

이 재능을 조금만 더 빠르게 파악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으리라.

'그렇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유리하다고 방심하면 죽는다.

상대는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는 괴물이니까.

딱!

세한은 오른손을 위로 들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검은 공간 두 개가 열렸다.

이드라의 전승 스킬, 허수공간이 열리며 세한이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두 개의 검이 린을 향해 쏘아졌다.

하나하나가 초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간 검이지만 린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두 개의 검을 내쳤다.

카앙!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린의 주변을 구의 형태로 에워싸며 수십 개의 검은 공간이 허공에 나타났다. 린은 그것을 보았다.

허공에 나타나는 수십 개의 세계의 틈새.

허수의 세계로 연결되는 구멍.

콰콰쾅!!!

새까만 검은 기둥과도 같은 물체가 구멍에서 린을 향해 떨어졌다.

그것들은 근처 던전에 묻혀 있던 금속 광맥에서 가져온 대량의 금속이었다.

이드라의 스킬로 허수공간으로 집어삼킨 후, 내부에서 '변질' 스킬로 모습을 변화시켜 린을 향해 쏘아낸 것이다.

쿵쿵쿵!! 카앙!

린은 그것을 모조리 회피하거나 나아가 그것을 검으로 베어냈다. 360도. 인간이 대응할 수 없는 사각에서 쏘아지는 공격조차 모조리 막으며 전진했다.

빠르게, 더욱 빠르게.

린의 금빛 머리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세한을 뒤를 쫓아 금빛의 궤적이 수놓아졌다.

그 속도는 초음속에 도달했던 민수호보다도 빨랐다.

세한조차 잔상밖에 볼 수 없을 정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실선이 그어지며 공기가 밀려나 거센 충격파가 세한을 덮쳤다.

폭풍에 휩쓸린 것 같았던 세한의 모습은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어느새 하늘에는 수십 명의 세한이 서서 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

린이 주변에 있던 공간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비틀렸다.

금빛의 궤적을 쫓아 비틀어지는 공간.

세한은 그 궤적의 끝을 쫓아 린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손에 쥔 검을 휘둘러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쿠웅!!

하늘을 날듯이 움직이던 린의 몸이 지상으로 추락하자 반구형의 거대한 구멍이 만들어지며 대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떨어진 린을 향해 세한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하늘에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구멍이 열리며 직사각형의 거대한 물체가 떨어졌다.

흔히 만년한철이라 불리는 물건이다.

어마어마한 강도와 무게를 자랑하는 금속,

근처 던전에 매몰되어 있던 만년한철 광맥을 그대로 허수 공간으로 옮겨 그곳에서 뭉쳐 만든 거대한 인조 운석.

직경 수십 미터가 넘어가는 만년한철 운석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라면 그대로 압사했을 거다.

네모난 만년한철의 정가운대가 반으로 갈라지며 빛이 뿜어졌다.

반으로 갈라진 만년한철 운석의 전신에 미세한 실선이 생기며 점차 빛이 흘러나왔다.

콰아앙!!

떨어지던 거대한 덩어리가 수십, 수백 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나갔다.

가장 단단한 금속 중 하나로 꼽히는 만년한철이 과자처럼 부서져나가며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세한은 부서져 나가는 파편을 자신의 주위로 모았다.

그 파편들로 자신의 등을 공격하는 린의 공격을 받아쳤다.

그리고 활짝 펼치고 있던 오른손을 린을 향하게 한 뒤, 콱 주먹으로 움켜쥐었다.

"윽!"

나머지 파편들이 일제히 린의 몸에 달라붙었다.

만년한철의 파편뿐이 아니다.

이드라의 '변질' 스킬을 이용해 린의 주변에 거대한 자석의 성질을 부여하여, 일대 전체의 금속을 그녀에게 향하도록 한 것이다.

당연히 가만히 당하고 있을 린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한층 강해졌다.

푸르던 눈동자는 더욱 푸르게 타오르며 도리어 세한을 향해 질주했다.

날아들던 온갖 금속과 만년한철을 피하고 튕겨내며 달렸다.

린은 검을 쥐었다.

금색의 빛이 단번에 린의 손에 응집됐다.

"아아아──!!"

일섬(一閃)

응축된 빛이 해방 되며 검을 휘두르자 금빛의 궤적이 그려졌다.

이미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던 격리구역의 건물들이 절반으로 잘려져 나갔다.

격리구역만이 아니다. 한참 떨어져 있던 산이 반으로 갈라졌고 윗부분은 그대로 분해되며 사라졌다.

콰콰콰!!

수십 킬로미터 이상 뻗어나간 빛의 줄기에 이 싸움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는 민아도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지나치게 현실감 없는 싸움에 뺨을 꼬집었다.

신의 왕 누아다의 힘을 지니고 있던 천상환도 강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런 것과 같은 선에서 둘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신의 대리자.

말로 듣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이게 과연 같은 게임을 해온 자가 맞는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허공에서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공간과 공간에서 날아오는 물체들.

아마 그것을 소환하는 건 세한이겠지.

거기에 그것을 모조리 막아내며 빛과 같이 날아다니는 린 테일러.

방금의 공격으로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던 산의 반쪽이 사라졌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섰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둘 것이 있었다.

세한은 이미 한번 인류의 끝을 보았던 플레이어라는 것.

이드라의 스킬은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면에 부담을 준다.

세한이 굳이 육체적인 능력보다 스킬에 의존하여 린을 공격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육체적인 스펙으로는 지금의 린과 싸울 수 없었다.

미래의 세한이 가진 것 중에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건 단련된 정신뿐.

그것을 백분 활용하여 이드라의 스킬로 린과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린도 린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녀가 강한 건 재능도 있었지만 그 재능을 일순간에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불타는 밧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의식이라도 잃는 순간 린은 그대로 생명을 잃으리라.

린은 여기서 세한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리고 이 퀘스트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

싸움을 지켜보던 민아는 문득 주위의 시선이 세한과 린의 싸움만이 아닌 하늘로도 향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에 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올려보자 그곳에는 무수한 옵저버가 있었다.

GM이 아닌 신들 개인이 조종하는 공용 옵저버.

이렇게 많은 옵저버의 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게임 초창기, 많은 신들의 관심이 쏠렸을 때가 이랬다.

플레이어들이 넋을 잃고 보는 것도 이해가 됐다.

왜냐면 개중에선 연락이 끊겼던 신도 있을 테니까.

'설마.'

민아는 그제야 세한이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았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네."

아마 그가 노린 건 단순한 퀘스트의 클리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

세한은 사방으로 몰아치는 금빛의 검광(劍光)을 피하며 생각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옵저버의 수도 충분히 늘었다.

거기다 더 이상 대리자로서 강신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왔다.

분명 그건 세한뿐이 아니다.

아직 전부 재능을 개화하지 못한 그녀가 더 위험했다.

어떻게 버티고 있지만 언제 폭주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송시우가 만들고, 거기에 이민아가 만들어낸 특별한 '독'을 넣은 단검.

이걸 무구에 변질 시켜서 담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이템의 효과'는 변질로 흉내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린을 단검으로 찌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순수한 육체적인 능력치는 지금 린이 세한을 압도할 터.

'연출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세한은 침착하게 린의 공격을 바라보았다.

금빛의 빛무리가 자신에게 쏘아진 순간 손가락으로 튕겨 허수 공간으로 보냈다.

그걸 예상했다는 것처럼 린의 몸은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세한의 옆을 노렸다.

일순간, 린의 푸른 눈과 세한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계속된 교전으로 이가 빠진 검으로 세한의 가슴을 노리는 린과 그런 린을 향해 손을 뻗는 세한.

'여기서 막으면 곧바로 좌측으로 이동해서 목을 노린다.'

린은 여태까지처럼 세한이 공격을 막으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린의 생각을 세한은 읽었다.

반쯤은 허수로 던진 린의 일격, 그것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내었다.

푸욱!

"어?"

가슴을 꿰뚫는 감촉에 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굳었다.

일순간 일어난 완벽한 경직.

환상이나 가슴에 공간을 열어 흘린 것도 아니었다.

피육을 가르는 감촉이 손에서 느껴졌기에 린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크윽!'

세한은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굳어 있는 린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찔렀다.

아무리 빠른 린이라고 해도, 놀라서 멈춰 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단검으로 찌를 수 있었다.

"아저씨?"

세한은 동귀어진 같은 걸 할 성격이 아니다.

자신이 살든지, 혹은 상대가 죽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인간이다.

동귀어진 같은 바보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린의 가슴에 박힌 단검은 현실이었다.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하는 세한을 보며 린이 주춤 물러섰다.

어째서인지 단검에 찔린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그저 의식이 흐려질 뿐이다.

털썩.

점차 바닥으로 무너지는 린의 모습을 세한은 똑똑히 보았다.

전신을 감싸던 금빛이 사라지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쓰러졌다.

그런 둘의 모습에 옵저버들이 크게 술렁였다.

싸움의 끝이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천살성이랑 재생 스킬이 그립군.'

그럼 이렇게 심장에 검을 찔린 정도로 죽지 않을 텐데.

가슴에 박힌 검에는 손도 댈 수 없었다.

이것을 뽑는 순간 그는 죽으리라.

정신을 잃지 않은 건 초인적인 세한의 정신력 덕이었다.

'엘릭서를 꺼내야 되는데.'

엘릭서를 꺼내기 위해 인벤토리를 여는 순간, 허공에 익숙한 팡파레가 울렸다.

바로 퀘스트가 클리어 됐다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고통도 잊고 세한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되잖아.

퀘스트가 끝났다. 점점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플레이어들의 환호가 들렸다.

성공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세한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하늘에는 수많은 옵저버가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들은 다시 떠날 것이다.

대부분은 린을 응원했겠지.

세한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결말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엘릭서를 쓸 시간은 없나.'

세한은 엘릭서를 뒤지던 손을 멈췄다.

대신 다른 물건을 꺼냈다.

그건 둥근 구슬이었다.

세한은 그 구슬을 모든 옵저버가 볼 수 있도록 하늘로 들어올렸다.

퀘스트가 끝났다면 이제, 더 이상 이걸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갑작스런 그의 이상한 행동에 옵저버들도 의문을 가졌다.

그건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저 구슬을 만든 이민아만이 이유를 알고 있었다.

"큭!"

구슬을 쥔 손에 힘을 넣자 통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세한은 온 힘을 다해 구슬을 깨트렸다.

그건, 망해가는 게임을 역주행시키는 하나의 마법이었다.

# 81

081. 역주행의 마법(4)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빛이 사라졌던 린 테일러의 눈에서 선명한 푸른빛이 맴돌기 시작했으니까.

"으윽!"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야 단검에 찔렸으니 당연했다. 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수많은 옵저버들이 지켜봤다.

방금 전에 분명 죽었던 소녀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건 비단 린만이 아니었다.

민아가 마지막 한 명까지 쓰러트렸던 격리구역의 플레이어들.

그리고 세한이 퍼트린 독무에 쓰러졌던 민간인들도 눈을 떴다.

10만의 민간인과 천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

세한의 손에 쓰러졌던 이들이 눈을 떴다.

"이, 이게 대체."

린도 그 사실을 느꼈다.

격리구역에서 살아나는 생명의 기척을.

"어떤 아이템이 있어."

그런 그녀의 궁금증에 답해주듯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쓰러진 세한의 가슴에 약을 바르고 있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상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붉은 피가 묻어 있는 세한의 가슴을 검지로 쓸었다.

"연기를 맡은 인간을 가사 상태로 만드는 물건이지. 몬스터에게도 통해서, 게임 초창기에는 이용하는 이들이 간혹 있었어. 물론 이런 트랩류 아이템은 아는 사람만 아는 물건이었지."

이민아도 알고는 있었던 아이템이다.

하지만 직접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면 일정수준 이상의 플레이어나 몬스터에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서히 잊히고 사장된 아이템이었다.

세한도 그것을 떠올린 건 악마의 계약자, 신자운과 싸우게 되었던 때였다.

흑천회의 지하, 아이들이 죽었던 장소에서 발견된 구슬.

당시 아이들은 구슬에서 나온 연기로 숨이 멎어있었다.

가사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신기한 점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슬픔을 빨아먹어야 할 비탄의 가면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아이템으로 빠진 가사 상태는 사망 판정이 되는 것이다.

다시 살아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한은 거기서 생각했다.

이걸 이용하면 플레이어가 죽어야만 하는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번의 실험을 걸친 결과 세한은 자신이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이 아이템으로 가사 상태에 빠지면 일시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시스템이 그렇게 인지하는 것이다.

퀘스트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도 시스템이니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강한 플레이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많은 민간인에게 사용하기엔 구슬의 위력이 심히 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세한은 구슬을 개량하고자 이민아의 도움을 받았다.

이민아는 뛰어난 마법사이며, 어떤 플레이어보다 대단한 연금술사.

어떤 플레이어라도 상대할 수 있도록 수많은 재료를 가지고 있던 세한은 민아에게 부탁하여 구슬을 개량한다. 연기가 더 많이 확산될 수 있도록 개량한 설치형 폭탄과, 구슬의 연기를 액체로 만들어 농도를 올린 가사의 물약을.

송시우에게 부탁하여 단검에 특수한 장치를 마련하여 물약을 손잡이 안에 넣었다.

찌르는 순간 플레이어의 내부로 물약이 들어갈 수 있도록.

약한 플레이어는 폭탄으로 충분히 가능했지만 아가트람의 길드원 같은 최상위 플레이어들은 단검을 이용해 직접 찌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템이라 이드라의 스킬로 변질할 수도 없고 자칫 먼저 사용해서 상대가 조심하게 되면 힘들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고된 작업이었다.

사실 보통이라면 불가능했을 방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민간인이나 플레이어들이 격리구역이라는 밀폐 공간 내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연기의 확산을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세한은 식수에도 이 약을 타두었다.

플레이어들의 이동경로나 대기 위치도 대부분 알고 있던 터라 대부분은 그걸로 정리할 수 있었다.

폭탄으로 처리하지 못한 소수의 플레이어들은 직접 처리했으며, 미처 쓰러트리지 못한 이들은 민아가 처리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민간인과 플레이어를 가사 상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그랬다면 차라리 저희에게 말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았나요?"

"그럴 수도 있긴 했지. 그럼 퀘스트는 딱 해결되고 끝났을 거야. 하지만."

이민아는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가 바란 건, 그냥 퀘스트를 끝내는 게 아니었나 봐."

수없이 많은 옵저버들이 하늘에 있었다.

처음 이 게임이 오픈했을 때 몰려들었던 광경처럼 많은 옵저버들이 하늘에 있었다.

신들은 지금 보고 있었다.

하나의 퀘스트가 끝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방식이 놀라웠던 것이다.

거기다 린과 세한의 싸움도 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기엔 충분했다.

영웅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신을 매료시키는 단어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모양이네요."

린의 눈가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세한이 루크의 죽음으로 강박관념에 시달린다고 느꼈다.

희생 없이는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마지막까지 갈 수 있겠지.

그러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한 고독이 그를 기다리리라, 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이번 일이 가장 끔찍한 기억으로서 그에게 트라우마가 된다면, 그가 방식을 바꾸지 않을까 생각했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며 게임을 공략하게 되길 그렇게 바랐다.

그러나 달랐다.

그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린은 정신을 잃은 세한은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물처럼, 다른 플레이어들도 기쁨의 환호를 질렸다.

퀘스트가 클리어 됐다는 것에, 그리고 신들이 다시 자신을 찾았다는 것에.

그런 그들을 이민아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아, 뭔가 감상적이게 되는 것 같아. 그렇지?"

이민아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한 옵저버를 보았다.

1년 만에 만나는 자신의 신.

"어릿광대, 아니...."

어쩌면 자신도 너무 먼 곳에서 사태를 관망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번 세한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다시 게임에 참여하고 싶어졌다.

"로키."

그녀의 신과 함께.

***

"마치 하나의 희극과 같구나."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이드라는 옵저버와 플레이어들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죽지 않았고, 신들이 돌아왔다.

망해가던 게임은 살아날 것이며 전과는 다른 엔딩이 그들을 기다리게 되겠지.

커뮤니티에서 한창 역주행중인 게임 순위를 확인한 이드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결과를 만들었지만 결국 한낱 꿈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리 필사적으로 했어야 했더냐?"

이걸로 새로운 결과를 만들었으니 분명 몽상의 던전은 만족했을 것이다.

세한이 눈을 떴을 때는 분명 몽상의 던전 밖에 있겠지.

던전의 보상인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도 분명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딱 그 정도이겠지.

그는 이런 대단한 결과를 만들고도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거다.

이런 대단한 업적.

감히 누가 할 수 있을까.

한번 신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게임을 되살렸다.

수많은 이가 죽었어야 할 퀘스트를 누구도 죽이지 않고 클리어했다.

어느 쪽이나 굉장했다.

허나 그런 굉장함은 해변의 모래성처럼 부스러져 파도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시스템마저 조롱한 그의 업적이.

"과연 인류 최후의 플레이어라는 건가. 대단하구나, 나의 아바타는 말이야."

강신 스킬을 사용한 탓에 이드라는 세한의 기억을 읽었다.

그가 어째서 미래를 아는지, 그럼에도 몽상의 던전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인지.

"...싱글 플레이어라."

그것도 2회차.

재미난 말이다.

이번 일로 세한이 자신을 다시 보게 된 것도 알았다.

그렇지만 계약을 맺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래선 '문'을 열 수 없으니까.

열쇠는 린 테일러겠지.

그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세한은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플레이어답게 세한은 많은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하나 세한이 모르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자여. 열쇠는 두 개가 필요하다."

준비된 열쇠는 하나.

하지만 필요한 건 두 개다.

어차피 그라면 나중에 알게 되겠지.

모든 걸 아는 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드라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감고 있는 세한을 바라보았다.

영웅이 된 세한은 수많은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여 안전한 장소로 이동되고 있었다.

"몽상의 던전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야."

한낱 기억에 불과할지 몰라도 이렇게 완벽히 복사하다니.

환상에 불과하니 보통이라면 상관없을 테지.

그러나 이드라는 꿈과 환상을 다루는 신이었다.

몽상(夢想). 그건 이드라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다 세한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란, 불합리한 법이라고."

이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건 결국 세한 한 명이 될 것이다.

원하는 보상을 그가 얻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가 만족한다 해도.

이드라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이런 훌륭한 결과를 만든 계약자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고 싶었다.

또한 이번 퀘스트에 열심히 노력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이런 멋진 기억을 잊고 싶지 않은 건 이드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딱.

이드라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이 한 인간의 몽상을 장식하는 마지막 소리였다.

***

"끙...."

세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지독히도 어두웠다. 눈을 가늘게 뜨자 겨우겨우 내부가 보였다.

"아, 그렇군. 돌아온 건가."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되니 씁쓸했다.

능력치가 낮아진 것도 확연히 느껴졌다.

아마 지금 이곳은 던전의 안.

몽상이 사라진 던전이란 결국 이런 거겠지.

"사실 본다면 그 이후를 보고 싶었는데."

분명 신들은 게임에 다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와 그리고 린 테일러를 통해서.

이후에는 전과는 다른 전개가 흘러가게 됐겠지.

아카터스에 대한 대비도 수월하게 이루어질 테고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이젠 아무래도 좋나."

세한은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건 작은 모래시계였다.

황금으로 빛나는 모래가 들어있는 시계.

화려한 장식으로 양각된 이것이 S랭크 아이템인 '라플라스의 모래시계'다.

단 한 번. 한 인간의 미래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는 물건.

당연히 사용한 당사자의 시간밖에 불러오지 못한다.

간단히 설명해서 시계를 사용한 사람이 나라면 나의 미래밖에 가져오지 못한다.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이것이 현재 내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럼 슬슬 나가볼까."

백설이나 지수는 아마 돌아갔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문을 여는 순간, 귓가에 이상한 알림이 들렸다.

[업적. '대리자(였던 것)'을 달성하셨습니다.]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누군가의 개입으로 대단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뭐?"

이게 무슨 소리야. 대리자였던 것은 또 뭔데?

그거 그냥 몽상의 던전에 있었던 환상에 불과한 거 아니야?

'그리고 대단한 보상?'

이어진 문장을 보면 스킬을 습득한 것 같다.

보통 스킬명이 표시가 되어야 정상인데 뭔가 이상했다.

어째 뭔가 얼렁뚱땅 일이 진행된 것 같은....

"세한 오빠, 문을 열고 뭐하세요?"

"어?"

"왜 나오다가 마는지 궁금해서요."

문을 열자 보이는 장소는 몽상의 던전의 입구였다.

당연히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던 지수와 백설이는 그곳에 서 있었다.

"한참 기다리지 않았어?"

적어도 내가 던전에서 체감한 시간은 꽤 길었다.

지수는 내 질문에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백설이를 바라보았다.

백설이 역시 지수의 시선에 흠칫 놀랐지만 차분하게 답했다.

"정확히 일곱 시간 22분이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엄청 짧네."

현실과 몽상의 던전의 시간은 다르다더니 진짜인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일곱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하니 조금 미안했다.

"그럼 돌아가서 쉬자. 기다리느라 고생했어."

"아니에요."

무슨 스킬을 익혔는지 궁금했지만 그건 돌아가서 차분히 봐도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은 던전 내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직 감정이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세계는 확실히 새로운 미래로 이끌었지만 그곳에는 지수가 없었다.

게임이 시작할 때 죽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도 충분히 바꿀 수 있어.'

나는 그걸 몽상의 던전에서 확인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발은 씁쓸한 마음과는 달리 제법 가벼웠다.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미처 알지 못했다.

느릿하게 뒤에서 따라오는 지수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바로 작은 모래시계를.

***

"흐음."

몽상의 던전을 나가는 세 명의 일행을 한 여성이 지켜보고 있었다.

금발에 금안.

검고 붉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

그녀는 앞서 가는 세 명.

그중에서도 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상의 던전에서의 일 때문에 씁쓸함이 엿보였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썩 대견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마치 깜짝 상자를 선물한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즐겁게 웃었다.

# 82

082. 악마를 찾는 자(1)

내가 스킬을 확인한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몽상의 던전에서 나와 길드에 돌아온 이후, 몰려온 피로에 바로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야 확인하게 된 건데....

"이게 뭐야."

능력치 창에 익숙한 스킬이 있었다.

새롭게 익힌 스킬이지만 익숙한 스킬이다.

'명확한 스킬명도 없이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 스킬을 익혔을 줄은 몰랐다.

왜냐면 지금 내가 새롭게 익힌 스킬은 일반적으로는 절대 익힐 수 없는 스킬이었으니까.

"허수공간이라니."

그것은 내가 전생에 지니고 있었던 스킬이다.

그리고 몽상의 던전에서도 방금 잘 사용하고 온 스킬이다.

이드라의 전승 스킬 「허수공간」.

간단히 설명하자면 허공에 공간을 여는 스킬이다.

일시적으로 본디 존재하는 공간을 만들어 여는 것이라고 할까.

다만 이 허수공간을 내 인벤토리와 연결시켜서 사용한다거나, 상대방의 원거리 공격을 허수 공간을 열어 막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응용이 가능하다.

몽상의 던전에서는 제법 화려하게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리자의 강신 스킬을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다.

본질은 전에 말했듯 굉장히 수수한 능력이지.

그저 허공에 공간을 열고 닫을 뿐인 능력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히 좋은 스킬이긴 하다만.'

웬만한 원거리 공격은 전부 막아낼 수 있는데다 변칙적인 응용이 가능한 스킬이니까.

만약 생명체의 몸 일부에 공간을 열고 닫을 수만 있었다면 사기 스킬이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생명체나 일정 이상의 질량을 가진 물질이 입구에 있으면 애초에 열리지 않거나 닫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왜 내게 이 스킬이 생긴 거지?

몽상의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

전승 스킬을 던전 보상으로 얻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신의 상징이자 권위와도 같은 힘을 던전 보상으로 뿌려뒀을 리가 있나.

거기다 신경 쓰이는 건 허수공간만이 아니다.

대리자(였던 것)라는 업적도 신경 쓰인다.

이거 분명 이드라와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

'...직접 물어봐야 하나?'

쪽지를 보낸다면 바로 말을 걸 수는 있다.

하지만 영 꺼려졌다.

몽상의 던전에서야 한낱 꿈이니까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현실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으음."

나는 쪽지창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굳이 먼저 연락을 할 필요는 없겠지.

본인의 전승 스킬을 내가 가지게 됐다는 걸 녀석이 모를 리 없다.

필요하다면 먼저 그쪽에서 연락을 해올 것이다.

'조금 찜찜하기는 하지만 허수공간은 그걸 감안할 정도의 스킬이니까.'

내가 2회차를 시작하고 가장 아쉬웠던 스킬 중 하나가 허수공간이다.

변질 스킬이나 환상 조작 스킬도 좋은 스킬인 건 분명했지만 내가 가장 즐겨 사용하던 건 허수공간 스킬이었다.

"우와, 이거 뭐야. 새로운 스킬?"

수련장에서 허수공간 스킬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언제 왔는지 민아가 말을 걸었다.

몽상의 던전에서 봤던 미래의 이민아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인지라 조금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몽상의 던전의 이민아가 약간 시니컬한 성격이라면 이민아는 딱 또래 여고생 같은 모습이니까. 뭐, 본인의 말에 따르면 본래는 이런 밝은 성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솔직히 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회차나 2회차나 내가 본 이민아는 대체로 이런 성격이었으니까.

그녀의 말대로 게임이 시작되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우와, 우와 거리는 민아의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내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민아가 시선을 돌렸다.

"응? 뭐야?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니다. 근데 너도 어디 가냐?"

"응. 잠깐 산책 좀 하고 오려고."

간단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지만 민아는 늘 그렇듯 교복차림이었다.

평소라면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춰 입으라고 해줬겠지만 사정을 알고 나니 차마 그렇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산책이라는 게 친구를 찾는 거였군.'

그간 별 신경 쓰지 않았던 민아의 행동이 그런 속내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말을 해봐야 좋을 거 없지.

"그래, 괜히 이상한 녀석들이랑은 엮이지 말고."

"걱정 마셔. 내 성격 알잖아? 난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튄다니까?"

그렇게 말한 민아는 내 반응이 조금 이상했는지 나를 빤히 보았다.

"근데 오빠, 오늘따라 반응이 뭔가 이상하네. 하긴 어제 던전 다녀오고서부터 그렇긴 했지. 그 던전이 꽤 힘들었나 봐?"

"조금 힘들긴 했다. 넌 절대 가지 마라."

"어차피 얻는 아이템도 별거 아니던데 뭘. 난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아."

민아는 그렇게 말한 후, 빙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된 거 민아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몰랐다면 상관없겠지만 민아의 사정을 안 이상 내버려둘 수 없었다.

단순히 오지랖이 아니라, 이러다 미래의 이민아처럼 천안으로 떠나버리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의 이민아에서 알 수 있듯, 민아는 탑 플레이어 중에서도 중요한 존재다.

마법도 수준급이고 연금술은 물론 신에게서 받은 다양한 전승 스킬을 지녔다.

유틸 능력만 치면 어떤 플레이어도 따라오기 힘들겠지.

그런 녀석이 친구의 죽음에 실의에 빠져 잠적해 버리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여태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개인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악마와 관련이 있다고 했었지.'

흑천회가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내가 흑천회를 제외한 다른 악마 관련 조직을 거의 모른다는 점이다.

악마 관련 조직은 민수호를 비롯한 아가트람 길드원들이 처리해 버린 터라 내가 나설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더 씬과 엮인 경우가 많았지.

나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까마귀들의 숫자를 늘려야겠어."

정보가 없다면 모으면 그만이다.

***

지수는 세한의 방 앞을 서성이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파티원의 위치를 알 수 있음에도 지수는 굳이 세한의 방을 찾아오곤 했다.

"세한 오빠."

세한의 방을 두드려봤지만 역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오늘도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하아."

그의 말로는 다음 메인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바쁘다고 했지만 지수로서는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급박했던 게임 초기가 그리웠다.

적어도 그때는 자신과 세한밖에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게임이 궤도에 오르며 잠시 휴식기에 들어선 것이었지만 지수는 이런 휴식기가 오히려 불편했다.

"뭔가 할 거 없나...."

린이나 백설이랑 놀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그 두 명은 자신이 다가가면 오들오들 떨었기 때문에 놀아준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지수는 뾰루퉁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몽상의 던전에서 조금 부탁을 한 적이 있지만 특별히 협박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지수는 부탁만 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지.'

과연 세한의 말대로 몽상의 던전은 여태까지의 던전과는 다른 장소였다.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재연한 장소.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갔었다.

아마 자신의 트라우마를 구체화한 것 같은 악몽 같던 기억.

왜 그것이 던전으로 형상화한 것일까.

애초에 던전은 맞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간 던전 안에 있으면서 깨달았다.

아, 이 던전은 과거에 자신이 후회했던 일을 바로잡아야 하는 구나.

그걸 깨달으니 답은 간단했다.

거부감이 있었지만 시원함도 있었다.

끝내 끝까지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던전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한 모양인지 퀘스트는 클리어 되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왔을 때는 손에 모래시계가 쥐어져 있었다.

미래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다는 모래시계가.

'세한 오빠가 알면 화낼까?'

이 모래시계를 얻은 건 반쯤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왜냐면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한지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 것인가.

지수는 최근 자신이 점차 평범함과는 동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세한의 말처럼 '천살성'의 영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점점 흘러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지수는 그것을 굳이 참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참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잡아줄 상대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다만 궁금했다.

만약 이것을 자신에게 사용한다면 10년 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미래에는 평범한 한지수로 돌아가 있을까?

아니면....

"모르겠다."

지수는 눈을 감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다른 길드원들과 달리 딱히 할 일이 없는 지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 던전 레이스에서 재미난 정보를 들었었다.

그믐달의 조직원들을 죽이던 도중이었던가.

'암천' 길드에서 온 악마의 계약자냐고 그랬었지.

나중에 찾아보고 안 사실이지만 암천 길드는 강북 쪽에서 한창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길드라는 모양이다.

그 길드장이 악마의 계약자라고 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지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내일 거기나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

서울 시 외각.

두 명의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신장의 남자와, 부서진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 기이한 남자였다.

작은 신장의 남자는 가면의 남자를 바라보며 연신 땀을 훔쳤다.

'흑천회는 괴멸됐다고 하더니 살아 있었네.'

그의 이름은 송수근.

뒷세계의 정보망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자였다.

본래는 흑천회가 주 거래대상이었지만 흑천회가 사라진 이후에는 그믐달이나 암천과 같은 길드에게 정보를 팔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인물이 바로 연락을 해왔다.

바로 눈앞의 신자운이다.

"근데, 암천 길드의 정보를 말입니까?"

"대단한 건 필요 없다, 위치만 알면 충분해."

그의 말에 송수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신자운에 대한 정보는 뒷세계에서 꽤 가치가 있는 정보다.

'설마 암천 길드를 적대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믐달 수준의 거대 길드는 아니어도 한창 세력이 늘어나고 있는 길드다.

신자운이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 어찌해 볼 수 있는 길드는 아니었다.

아무튼 행동파로 알려진 신자운이 위치를 묻고 있다는 건 암천 길드에 볼일이 있긴 하다는 거다.

송수근은 우선 위치를 말하기로 했다.

애초에 위치에 관한 정보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신자운이 살아있으며 암천 길드를 노린다는 게 훨씬 중요한 정보였다.

대략적인 위치를 말하자 자운의 머리가 끄덕여졌다.

"알겠다."

"예, 그럼 저는...."

"가도 좋다. 몇 포인트를 주면 되지?"

송수근은 얼마를 받아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값비싼 정보도 아니었고 괜히 높여 부르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 오히려 지금의 대화가 훨씬 값비싼 '정보'였다.

"천 포인트면 충분합니다."

"싸군."

"예. 그다지 대단한 정보는 아니라서...."

자운은 손가락을 튕겨 송수근에게 포인트를 전달했다.

천 포인트 정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또 이용해 주십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외치며 허둥지둥 사리지는 송수근의 모습을 자운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왜 알고 있는 정보를 굳이 물어본 거야?"

언제 나타났는지 아자젤이 양산을 접으며 물었다.

"내가 찾고 있다는 걸 녀석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아하, 저 입 싼 인간이 암천인가 하는 애들에게 정보를 말할 테니까?"

"그래."

자신이 찾아갔을 때 마침 박도영이 없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곤란하다.

기왕 간 김에 싹 털어버리는 편이 마음에 편했다.

목적은 민수아의 오빠인 민수호를 구출하러 가는 것이지만, 단순히 구출만 했다가는 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나는 제법 이름값이 있거든."

신자운은 뒷세계에서 상당히 네임벨류가 높았다.

악마의 계약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평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무력에 집착하는 박도영이라면 분명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감 넘치네. 혼자서 다 상대할 수 있어?"

"네가 볼 때는 어떻지?"

무심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운의 시선에 아자젤은 설핏 웃었다.

정말 귀염성이 없는 계약자다.

"하긴 괜한 걸 물었네."

현재 신자운은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네비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7대 악마 중 하나인 아자젤과 재계약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치가 낮아진 아자젤과 실전형식의 대련은 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천재였다.

자운의 싸움을 지켜보며 한눈에 흠을 잡아줄 수준이 되었다.

'내일 찾아가면 될 것 같군.'

송수근이라면 분명 지금 당장 암천 길드로 달려갈 것이다.

그럼 내일쯤 암천 길드에 가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지.

'간만에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어.'

자운은 세한과 싸운 이후, 제대로 된 싸움다운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와는 교전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냥일 뿐.

자운은 플레이어와 싸우는 쪽이 취향이었다.

그야 전직 격투기 선수이니 당연할 수밖에.

세한과의 전투는 자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지긴 했지만 또 그와 같은 강자와 싸워보고 싶었다.

무력으로 이름난 철마 박도영이라면 분명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터.

'부디 기대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군.'

민수호를 구하는 것도 구하는 거였지만, 사실 자운은 그쪽에도 관심이 있었다.

# 83

083. 악마를 찾는 자(2)

"좋아, 찾았다."

나는 불과 며칠 만에 민아의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었다.

아무리 뒷세계의 조직이라고 해도 악마와 관련된 조직은 그다지 많지 않은 법.

정보상을 탈탈 털다보면 금방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법이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으니 금방이지.'

거기다 흔치 않은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더더욱.

문제는 악마와의 계약을 어떻게 파기하냐는 건데....

'DLC 상점을 뒤져보면 뭔가 나오지 않으려나?'

신자운 녀석처럼 악마의 유물을 파괴시킨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보통 근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조차 1회차, 2회차를 통틀어 딱 한 번밖에 못 본 일이니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악마쪽에서 얌전히 계약을 파기시켜주는 거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아, 오셨어요?"

"어. 다른 사람들은?"

한동안 바쁘게 돌아다닌 터라 피로가 몰려왔다.

크게 하품을 하며 길드 건물로 들어가자 백설이와 놀고 있던 린이 나를 반겨왔다.

"아마 다들 포인트 얻으러 갔을 걸요? 민아 언니는 산책 간다고 했고."

"그래? 지수도?"

창우나 루크라면 능력치를 올리느라 바쁠 테니 그렇다 쳐도 지수는 지금 한가할 텐데?

"지수 언니도 산책 간다고 하시던데요?"

"지수가?"

걔는 특별히 산책 같은 걸 하는 성격이 아닌데.

대학시절에도 공부만 했고, 이런 세상이 된 이후에는 몬스터를 잡거나 나와 대련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건 좋아하지 않는 녀석이다.

"그러고 보니, 겸사겸사 어떤 길드도 다녀온다고 한 것 같은데...."

린의 말에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왜냐면 지수는 어떤 길드에 다녀온다고 말할 만큼 특별히 아는 길드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길드간의 교섭은 내가 도맡아서 했고, 지수가 나선 일은 아예 없었다.

그런 지수가 아는 길드라고 한다면 딱 하나의 경우뿐.

한참을 고민하던 린은 이내 생각났는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암천 길드라고 하던데요? 아저씨, 혹시 아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들어온 방향으로 다시 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서 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암천 길드로 가지 않으면 대형사고가 터질 게 분명했으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지수가 아는 길드는 걔가 살생부에 올려둔 길드뿐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중에 암천 길드가 있을 줄이야.

거기다 최근에는 얌전히 있어서 방심했다.

한동안 내가 바빠서 상대해 주지 않았더니 욕구불만이라도 생긴 건가?

'그래도 지수가 보는 눈은 있으니 민아의 친구는 죽이지 않겠지.'

악마와 관련되면 다 죽이는 것 같지만 엄연히 하나하나 구분해서 죽이는 지수다.

상대가 악에 물들었는지, 아니면 억지로 하고 있는지 최소한의 구분은 했다.

...아마.

***

"신자운이 우릴 찾고 있다는 건 분명 사실이겠지?"

"예. 어제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흠, 그렇단 말이지...."

송수근의 말에 철마 박도영은 턱을 괴었다.

어제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준비를 시작하긴 했지만 신자운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 흑천회의 분파였던 암천 길드를 먹으려는 건가?

'그럴 리가. 그놈은 그렇게 권력욕이 있는 놈이 아니었다.'

만약 그럴 생각이었으면 진작 덤비고도 남을 놈이다.

어쨌든 악마의 계약자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의 괴물이니까.

"마침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신자운과는 한번 싸워보고 싶던 차였다.

녀석을 꺾으면 가장 강한 악마의 계약자라는 타이틀도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그 계집애도 어서 찾아야 되는데.'

최강의 계약자라는 타이틀과 미래를 보는 계집애만 있다면 일대 전체, 아니 서울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박도영은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암천 길드는 신흥 세력 중 최고라 불릴 정도로 급격하게 세가 커져가고 있었다.

미래를 보는 소녀, 민수아의 말을 토대로 움직여 어느 정도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본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는 타이밍에 민수아가 도망쳐 버렸다는 거다.

'만약 되찾지 못하면 죽여 버려야 해.'

미래를 본다는 건 미래를 지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만약 자신이 차지하지 못한다면 죽여서라도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야만 했다.

물론 되도록 생포할 생각이다.

그 힘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길드가 다른 이들을 압도하며 치고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신자운을 처리하자마자 다시 애들을 풀어야겠어."

박도영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창밖으로 비친 도시의 모습을 보았다.

이 도시가 언젠가 전부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에 짜릿함이 느껴졌다.

'제2의 흑천회, 아니. 제1의 암천 길드가 된다.'

그의 야망은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

암천 길드가 있는 장소는 저번에 민수아가 도망쳤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공단에서 가까이에 있는 도시에 바로 암천 길드의 본 거지가 있었다.

신자운은 바이크를 적당히 세워둔 뒤 주변을 살폈다.

"너는 왜 따라온 거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운은 수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바이크를 몇 번을 타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조, 조금 불안해져서요."

"네가 따라오는 쪽이 더 불안하다만."

"저는 미래를 볼 수 있어요. 적어도 오늘 저에게 위험은 없었어요."

수아는 당당하게 가슴을 피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오늘 봤던 미래 중에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은 없었다.

대신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오빠의 미래가 계속 변한다는 점.'

그녀 본인의 전투력은 미비하기 그지없기에 자운을 따라올 생각은 본래 없었다.

하지만 자운이 출발하기 직전 미래가 연속해서 변경된 탓에 황급히 쫓아온 것이다.

'그런 걸 봐버리면 어쩔 수 없는걸.'

분명 불길한 뭔가가 있다.

계속 미래를 봐온 수아이기에 느낄 수 있다.

미래가 계속 변동되고 있다는 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이번 일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건 자신이나 자운만이 아니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뭔가가 있었다.

붉은 눈을 지닌 어떤 불길한 존재가.

"저 건물이군."

"네, 맞아요."

자운은 느긋하게 건물로 다가갔다.

건물의 높이는 대략 7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다.

당연히 포인트로 구매한 건물은 아니다.

대충 남아 있는 건물을 멋대로 점거한 거겠지.

우르르 몰려온 플레이어들을 막을 존재는 없으니까.

'이상하군.'

자운은 암천 길드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송수근이 박도영에게 정보를 팔지 않았나?'

아니, 그렇다 쳐도 근처에 암천 길드의 길드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했다.

근처에 있는 발자국이나 흔적들을 보면 더더욱.

"들어가 보면 알겠지."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운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면을 다루게 되며 마인화(魔人化) 스킬이 더욱 발전한 덕이다.

보통의 마인화 스킬은 신체능력을 올려줄 뿐이지만 자운의 마인화는 거기에 몸의 강도도 올려준다. 피부가 검게 물드는 것도 그런 이유.

그것이 아자젤과 계약하고, 가면의 힘을 다루게 되며 증폭값이 배로 뛰었다.

덕분에 자운의 마인화는 전승스킬 정도의 효율을 내고 있었다.

덜컹.

"...음."

반투명한 유리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암천 길드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1층은 평범한 휴식 공간인지 별다른 건 없었다.

누군가 있었을 안내 데스크도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뭐지?"

분명 들어가자마자 물밀 듯이 덤벼 오리라 생각했지만 놀랍도록 조용했다.

자운은 신중하게 주변을 살피며 귀의 감각을 집중했다.

'위층인가?'

적어도 1층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밖도 조용하더니 안도 조용하다.

이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오빠는 지하에 있는 감금실에 있어요."

"지하? 그걸 어떻게 알지?"

"예전에 저도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본래 민수아도 자신의 오빠와 함께 이곳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잠시 다른 지부에 갈 일이 생겼고 그 틈을 노려서 탈출했던 것이다.

"지하라."

그러고 보면 흑천회도 아이들을 잡아 지하에 가두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지하에 두는 편이 빠져나가기도 힘들고 관리도 편하기 때문이다.

"가지."

자운은 지하를 향한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몇 명쯤 지키고 있을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음?'

지하 1층, 2층을 넘어 3층까지 왔을 무렵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암천 길드의 길드원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들려온 건 여성의 목소리였다.

"여기 숨어 있으면 괜찮아?"

"몰라, 지금 위에 난리가 난 거 같던데. 그냥 여기 있자."

숙덕거리는 목소리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거기에 약간 앳된 구석이 있었다.

자운은 의문을 느꼈지만 큰 위협을 느끼진 못했다.

굳이 숨어 있는 상대를 뒤져가며 죽이는 취미는 없었다.

자운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덤비는 이들을 먼저 죽였다.

"저기, 저기로 먼저 가시는 게 어때요?"

"저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둘이다. 거기에 너희 오빠는 없다."

"네, 저도 알아요. 근데 들렸다가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신중하게 말하는 수아의 말에 자운은 인상을 살며시 찡그렸다.

'또 미래로 뭔가를 본 모양이군.'

미래에 끌려 다니는 건 질색이지만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다, 속닥거리는 목소리들도 거슬리긴 했다. 거기다 잠시 들렸다가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쿵!

"히익!"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안에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안은 여러 비품이 모여 있는 창고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비품 사이로 무언가가 꼼지락 거리는 게 보였다.

마치 머리만 감추고 숨어 있는 것 같은 강아지의 모습에 자운은 내심 황당해졌다.

자운은 성큼성큼 다가가 비품 틈에 숨어있는 두 여성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뭐냐."

"딸꾹."

목덜미를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두 명의 여성은 아직 앳된 인상이었다.

옷은 제법 갖춰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어디로 봐도 1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왜 애들이 여기에 있지?"

풍기는 기운이 악마의 하수인이었다.

악마와 계약되어 있다는 건 엄연히 암천 길드 소속의 길드원이라는 것.

"삼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애들을 조직원으로 쓸 정도라니. 쯧."

"꺅!"

자운은 혀를 차며 하얗게 얼어있는 두 여성을 바닥으로 던졌다.

제대로 낙법조차 하지 못한 채 구르는 두 명을 보며 자운은 혀를 찼다.

반면 그런 자운의 행동에 두 여성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자운이 암천 길드로 온다는 정보는 이미 있었기에 그의 외모는 모든 길드원들이 알고 있었다.

당연히 두 소녀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사내가 오늘 자신들의 길드로 온다던 악마의 계약자라는 걸 안 순간 기절할 것 같았다.

'아까 올라오라고 한 일이 저 사람 때문이 아니었어? 싸우기 싫어서 숨어 있던 거였는데!'

이렇게 나타난 걸 보면 다른 길드원들이 다 당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선과 혜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저, 저기. 사,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덜덜 떨면서 말하는 두 명의 모습에 자운은 앞머리를 거칠게 위로 넘겼다.

그리곤 잠자코 서있는 수아를 돌아보았다.

"이걸 알고 오자고 한 거냐?"

"얘, 뭐."

"성가시게 하는군. 이것들도 같이 데려가 달라는 거냐?"

"예? 아뇨."

혹여나 애들이니 함께 데리고 나가달라는 말인가 싶어 물으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왜 이곳으로 오자고 한 거지?'

이 두 명에게 뭔가 있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두 여성은 좋게 쳐줘도 평범한 플레이어였고 악마의 계약자도 아닌 하수인일 뿐이다.

"이제 어서 저희 오빠를 구하러 가요! 시간이 없어요!"

"어차피 근처에 조직원들은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서둘러요!"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묻고 싶은 게 한 가득이었지만 어차피 곧 알게 될 게 뻔했으므로 묻지 않았다.

왜냐면 대략 짐작 가는 게 있었으니까.

'소리가 점점 커지는군.'

그건 '무언가'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 84

084. 악마를 찾는 자(3)

"왜 나를 따라오는 거지?"

자운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 뒤에서 따라오던 여성 두 명이 움찔거렸다.

"그게..., 저희도 어쩌다보니 여기에 오게 된 거거든요? 혹시 오빠랑 같이 가면 나갈 수 있을까 해서...."

어쩐지 암천 길드에 어울리지 않더니 휩쓸렸던 모양이다.

"아, 그리고 저랑 얘 이름은 혜미랑 지선이에요. 이혜미, 박지선."

"안 물어봤다."

아까 쫄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말을 늘어놓는 두 여성,

지선과 혜미의 모습에 자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마 한 명은 긴장한 얼굴로 떠듬떠듬 내뱉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적응이 빨랐다.

'이런 녀석들이 자발적으로 암천 길드에 들어왔을 리 없지.'

악마의 하수인을 늘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플레이어들을 잡거나 혹은 신의 아바타가 되게 해준다고 꼬시는 경우가 있었다.

후자는 아바타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다면 통하지 않는 수단이었지만, 아마 이 여자애들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길드에 들어온 플레이어들이겠지.

물론 그것과 자신을 따라오는 건 별개였다.

"너희."

"수호 오빠!"

자운이 뭐라 입을 열던 순간 수아가 소리치며 다다다 뛰어갔다.

녹슨 문을 열자 철창에 갇혀 있는 10대 후반의 남성이 보였다.

지금 자운의 뒤를 따라오던 두 명, 지선과 혜미와 비슷한 또래다.

"...이 녀석이 너의 오빠인가?"

"네. 맞아요. 오빠예요!"

민수호는 옅은 숨을 내쉬며 정신을 잃고 있었다.

자운은 철창을 구부리며 안으로 들어가 수호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이 심하군.'

몸 상태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내버려 두면 딱 보기에도 위험했다.

'우선 밖으로 나가야겠군.'

민수호의 상태를 보니 우선 한번 밖으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수아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자신은 암천 길드를 뒷정리할 생각이었다.

괜히 성가신 것들을 남겨놔서 좋을 것 없었다.

자운은 정신을 잃은 민수호를 적당히 들고 1층으로 올라왔다.

혹시나 덮쳐오는 길드원이 있을까 싶었지만 역시 1층으로 돌아올 때까지 특별한 기척은 없었다.

'역시 이상한데.'

아무리 그래도 지나치게 사람이 없다.

자신이 온다고 미리 전했는데 단체로 소풍을 나갔을 리는 없고.

설마 이 나사 빠진 여자애들이 조직원의 전부일리는 없지 않은가.

쿠웅.

쿠우웅.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할 무렵, 아까 들었던 이상한 소리가 재차 울렸다.

무언가가 내려오는 것 같은 소리.

그다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피해요!"

"응? 왜?"

갑자기 민수아가 소리쳤다.

그런 수아의 말에 지선과 혜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운의 행동은 빨랐다.

자운도 느꼈던 것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꺅!"

자운은 들고 있던 민수호를 어느새 멀찍이 대기하는 수아에게 던진 뒤, 다른 두 명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당겼다. 갑작스런 자운의 행동에 지선과 혜미는 인형처럼 입구 쪽으로 붕 날아갔다.

수아는 그래도 플레이어는 플레이어인지라 날아온 민수호를 무사히 받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른 두 명은 입구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씨잉, 갑자기 뭐야?"

그래도 몸은 제법 튼튼해서 다친 곳은 없었다.

지선은 부딪친 머리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던지다니 너무해!'

아무리 자신들이 갑자기 따라왔지만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다니.

악마의 계약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건 더 강한 악마뿐이다. 자운과 계약한 악마라면 분명 철마 박도영보다 강한 악마이리라 생각하고 쫓아온 거였다.

당연히 자신들의 취급이 좋지 않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냅다 던져버릴 줄이야!

"저기 이게 무슨 짓...!"

콰아아앙!!

1층의 천장을 부수며 무언가가 떨어졌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두둑.

부서진 천장에서 핏물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한 방울 두 방울, 계속해서 떨어졌다.

"...."

너무 놀라면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던가.

그것을 지선과 혜미는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천장을 뚫고 떨어진 건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자였다.

문제는 남자쪽은 지선과 혜미가 아주 잘 아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길드장 박도영 아냐?'

지선과 혜미는 말단 중에 말단이었지만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걸 곁눈질로 봤기 때문이다.

강인한 턱선과 떡 벌어진 어깨.

근육질이 잡힌 몸은 어디로 봐도 박도영이었다.

그런 그의 머리가 하얗고 작은 손에 잡혀 들려 있었다.

철마(鐵魔)라는 이명을 가진 만큼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는 그의 몸이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비틀려 있었다.

여성은 박도영의 머리를 왼손으로 잡은 채, 바닥에 쿵쿵쿵 찍었다.

그때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다란 구멍이 난 천장에서 떨어지는 핏방울과 박도영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 때문에 바닥에는 금방 시뻘건 웅덩이가 고였다.

"죽었나."

여성은 몇 번을 더 내리치다가 상대가 미동이 없자 가볍게 손을 놨다.

털썩, 박도영은 쓰러져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암천 길드의 길드장이자 철마 박도영이라 불리던 상위 플레이어의 최후라기엔 심히 끔찍했다.

"응?"

여성은 뒤늦게 이쪽의 시선을 깨달은 듯 시선을 돌렸다.

입구에 있는 지선과 혜미를 훑고, 민수아와 민수호를 바라본 뒤, 마지막에 신자운을 보았다.

그를 확인한 여성의 붉은 동공이 조금이지만 커졌다.

그리고 머리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마찬가지다."

여성, 지수는 눈을 살며시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왼손을 한번 쥐락펴락한 뒤, 오른손에 든 둔기를 붕붕 휘둘렀다.

'특별히 지친 거 같지는 않으니.'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운 역시 그런 지수의 모습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주먹이 단번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왜 싸우는지에 대해선 굳이 말하지 않았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많은 이유가 있었으니까.

쿠웅!

먼저 움직인 건 지수였다.

쿵쿵쿵! 둔기의 무게 때문에 지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큰 충격이 울렸다.

강력한 각력에 대리석이 부서졌다.

'이번엔 제대로 무기를 들고 있군.'

그런 지수를 보며 자운은 몸을 긴장시켰다.

이전에는 맨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검붉은 거대한 둔기.

뾰족뾰족한 날붙이가 튀어나온 기괴한 형태의 둔기에는 인간의 살점이 붙어 있었다.

저것에는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리라.

자운은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둔기를 숙여서 피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지수의 턱을 노렸다.

팡!

지수의 왼손이 자운의 손을 쳐낸 후, 달려온 가속으로 그대로 몸을 들이받았다.

콰아앙!

"큭!!"

무슨 이런 무대포가!

이렇게 터프하게 공격을 하는 타입은 흔치 않다.

몸을 사리지 않고 덤벼드는 광전사와도 같은 타입.

두두두!

튕겨 날아가는 와중에도 자운의 양손이 지수의 몸을 두드렸다.

하지만 지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자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 턱으로 휘둘러지는 주먹을 막았던 건, 뇌에 타격이 오면 행동에 방해가 되었기에 막았던 것이다. 그 증거로 다른 장소로 가해지는 공격은 전혀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굳이 막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수의 재생 스킬은 B랭크에 이르렀다.

천살성과 B랭크에 이른 회복능력은 그녀에게 멈추지 않는 체력과 가공할 재생능력을 주었다.

"...!!"

재차 휘둘러지는 둔기의 모습에 자운이 양팔을 들고 비껴 막았다.

마인화로 인해 극도로 경화된 자운의 피부가 찢겨지며 검은 핏방울이 흩어졌다.

'단 한 방인가.'

한 방만 제대로 맞으면 죽는다.

자운은 철마 박도영의 시체를 보았다. 사지가 뒤틀린 모습.

아마 그도 저 둔기를 막으려고 했던 거겠지.

그래도 사지가 무사히 붙어 있는 걸 보면 그가 왜 철마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죽었지만 자운은 그가 생각보다 강한 적수였다는 걸 깨달았다.

"저, 저게 악마야?"

"그, 그런 거 아닐까?"

지수와 혜미는 덜덜 떨면서 그런 둘의 싸움을 보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탓에 건물 안에도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또한 지수가 전등을 죄다 날뛰며 부수는 탓에 더더욱 어두워졌다.

그럴수록 또렷하게 보였다.

어둠에서 그어지는 붉은빛이.

지수의 붉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자운은 지수의 강함을 느꼈다.

단순히 능력치적으로 강해진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싸움법을 익히고 대응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런 단시일 내에 이 정도로 할 수 있다니.

솔직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콰콰쾅!!

지수가 휘두른 둔기에 건물의 철골과 벽이 뜯겨져 나갔다.

마치 거대한 괴수가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건물이 통째로 부서졌다.

'성가시게 됐군.'

역시 이 여자와 싸우는 건 손해다.

그렇다고 몸을 빼기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고, 입구에 있는 녀석들이 마음에 걸렸다.

저들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고, 심지어 둘은 악마의 하수인이다.

이 여자가 여태 다른 악마의 하수인들을 죽였던 걸 생각하면 무사하긴 힘들겠지.

결국 자운은 단번에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한 발 정도라면.'

가면의 마력을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른팔에 집중해서 카운터를 노린다.

단 한방에 저 여자를 침묵시키지 못한다면 지는 건 자신이었다.

시뻘건 안광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지수는 둔기를 휘둘러 재차 건물을 부쉈다.

휘어져 날아가는 철근과,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더미.

그중 가장 커다란 걸 왼팔로 받치고 달리며 자운을 향해 던졌다.

쾅! 콰앙!

주먹을 휘둘러 그것을 부순다.

그 빈틈을 노려 거대한 둔기가 자운을 향해 낙하했다.

완벽한 시간차를 노린 공격.

그건, 자운 역시 바라던 바였다.

자운의 전신을 감싸던 검은색 빛이 옅어지며 오른팔에 모였다.

지수의 둔기를 미끄러지듯 피하며 파고들었다.

자운의 장기인 카운터.

그것을 지수의 얼굴을 향해 정확히 휘둘렀다.

단순한 타격이라면 지수에게 무의미.

그러니 모든 마력을 끌어 모아 한쪽 팔의 근력을 극도로 상승시킨다.

기본적으로 높은 자운의 근력수치가 카운터 스톱 수치로 돌입하며 지수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아무리 지수라도 그것을 막지는 못할 터.

자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자운의 생각은 맞았다.

지수는 그걸 막을 생각이 없었다.

'뭐?!'

붉은 눈동자가 자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신의 얼굴로 휘둘러지는 주먹 따위는 보지도 않았다.

왜냐면 어차피 피하지 못하니까.

그러니 지수는 도리어 공격을 했다.

콘크리트 더미를 던졌던 왼손에는 길쭉한 철근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몽둥이처럼 자운을 향해 휘둘렀다.

자운보다 분명 출발이 늦은 공격이었지만 그것은 동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운의 몸을 향해 휘둘러졌다.

콰아아앙!!

충격과 함께 지수와 자운의 몸이 튕겨져 날아갔다.

"커억!"

건물 더미에 처박힌 자운은 몸의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계약자가 아니었으면 분명 죽었다.

'녀석은...?'

뿌연 연기가 내려앉자 자운은 지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수는 자운의 반대편에 쓰러져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는 180도로 돌아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팔과 다리도 미묘하게 꺾여 있었다. 충격파로 부러진 모양이다.

'...이걸로 끝났겠지.'

자운은 지수의 모습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목이 완전히 부러진 지수의 모습에 조금 씁쓸함이 느껴졌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자운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수아가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어, 저 괜찮아요?!"

"저, 저 사람은 죽은 거예요?"

"아마."

호들갑 떨며 말하는 혜미와 지선의 말에 자운은 신음처럼 대답했다.

솔직히 걷는 것도 힘들었다. 당장 쓰러져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그런데요."

지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사람 움직이는데요?"

"뭐?"

설마 말도 안 된다.

목뼈가 완전히 부러져 머리가 180도 돌아간 인간이 살아 있을 턱이 없다.

거기에 움직인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목이 부러진 인간이 움직일 수 있을 리가.

덜그럭.

자운은 황급히 지수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런데 정말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손가락이, 그다음은 팔과 다리의 관절이.

마치 구체관절인형처럼 덜그럭 덜그럭 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체가 일어나고 다리가 움직이며 몸을 일으켜 대지에 섰다.

처음엔 비틀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또렷하게 몸을 세우고 자운이 있는 장소로 몸을 돌렸다.

머리가 거꾸로 돌아가 앞을 볼 수 없음에도.

"미친...."

이번만큼은 자운조차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수의 오른팔이 삐걱삐걱 움직이며 거꾸로 돌아간 머리를 잡았다.

현재 지수의 얼굴은 그녀의 등 쪽으로 향해 있었다.

인간의 목이 움직일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하지만.

우두둑. 인간의 뼈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지수는 자신의 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등 쪽으로 향해있던 지수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아왔다.

지수의 얼굴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눈을 감고 잠든 여성의 아름다운 얼굴.

뚜두둑, 소리가 나고 목뼈가 완전히 맞춰지며 지수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자운을 향하며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 85

085. 악마를 찾는 자(4)

"딱 예상한 정도의 충격이네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풀었다.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었다. 자운에게 맞는 시점에서 대략 어느 정도의 데미지가 들어올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데미지가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없었으리라.

왜냐면 자운의 주먹에 얻어맞는 순간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비켜 맞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조금 날아가며 다른 부분이 부러지긴 했지만, 전혀 문제없었다.

왜냐면 그 정도는 이미 나았으니까.

저벅, 저벅.

지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 지수의 모습을 본 자운은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이젠 방도가 없었다.

마력은 남아 있었지만 육신의 부담이 너무 컸다.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싸워봤자 지수를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숨겨져 있던 힘 따위는 없다.

남겨둔 비장의 수도 없다.

자운은 자신의 등 뒤에 있던 혜미와 지선도 숨을 죽이며 떨고 있다는 걸 느꼈다.

선명하게 다가온 죽음의 공포.

새빨간 눈동자가 자운을 비롯한 일행들을 보았다.

지극히 무심한 눈이다. 길가의 돌멩이를 보는 것 같이 가치 없는 것을 보는 시선.

자운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에게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가치 없는 돌멩이.

얼마든지 죽여도 하등 상관이 없는 존재.

솔직히 악마의 계약자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직 순수한 광기.

그것의 결정체와도 같은 여성.

"그럼...."

검은 둔기가 높이 치켜 올라갔다.

가까이 다가온 지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며 자운을 향했다.

'끝인가.'

저번에는 아자젤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런 기적을 바라긴 힘들었다.

아무리 아자젤이라도 두 번이나 인간에게 봉사할 리는 없으니까.

부웅!

바람을 가르며 지수의 둔기가 휘둘러졌다.

자운은 각오했다. 막는다는 방법도, 피한다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툭.

"...?"

딱딱한 것이 이마에 살짝 닿았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핏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적어도 둔기에 얻어맞은 느낌은 아니었다.

"뭐냐."

자운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지수를 향해 말했다.

둔기는 그의 이마 앞에 멈춰 있었다.

당연히 그대로 찍어 부수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이겼네요."

"뭐?"

"제가 이겼다고요. 더 해볼래요?"

지금 지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 자운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겼다니?

'설마 저번의 일을 말하는 건가?'

일행을 습격했던 당시의 일.

그렇다면 오히려 자신을 죽여야 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때 아무도 죽이지 않았던 걸로 알아요. 그럴 수 있었음에도 말이죠. 뭐, 솔직히 전 죽이고 싶은데요. 뒤에 있는 사람도 있고...."

지수의 시선이 우측 상단으로 올라갔다.

암천 길드의 건물 옆에 있는 빌딩의 위로.

거기다 쪽지도 하나 와 있었다.

세한으로부터 온 쪽지다.

자운을 죽이지 말라는 쪽지.

"아무래도 그러길 바라는 것 같지 않아서요."

"우리를 안 죽이겠다는 건가?"

자운의 말에 지수는 인상을 살며시 찡그렸다.

그건 여태까지의 살벌한 표정이 아닌 심통이 난 여성의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살인마인가? 아무나 막 죽이는 줄 알아."

"...그런가."

"전 악의에 민감해요. 적어도 지금 당신에게서는 죽일 정도의 악의는 보이지 않네요."

지수는 그렇게 말한 후, 둔기를 인벤토리로 던져 넣었다.

죽일 마음이 사라진 건 자운이 보호하는 세 명의 여성을 본 후다.

덜덜 떨고 있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여성들.

대략 민아의 또래로 보이는 그녀들에겐 조금의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우연히 악마의 길드에 들어오게 됐으리라.

지수는 자운이 그런 그녀들을 구출하던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면 두 여성은 자운을 자신과 싸울 때 응원하는 눈치였고 자발적으로 따라 붙었으니까.

그러니 지수는 자운을 죽이려던 마음을 접었다.

여기서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럼 저 여자애들을 보호해 줄 존재가 사라지니까.

뭣보다 세한이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아마 이 남자가 보호해 주길 바라는 거겠지.'

적어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세한이 알 테니 지수는 관심을 끊었다.

"근데 당신도 적의가 상당히 옅네요. 전에는 복수하러 오지 않았었나?"

"형님을 죽인 건 네가 아니니까."

"그 사람의 동료인데요."

"동료와 당사자는 다르지. 만약 내 앞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 그자였다면 나는 다시 덤볐을 거다. 네 말처럼 악의를 가졌을지도 모르지."

"그럼 전과 같은 짓을 하겠다는 말?"

지수의 말에 자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때의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다. 굳이 찾아가서 싸움을 걸 생각은 없군. 현격한 실력 차가 나는 상대를 습격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다. 그래도 마주친다면 싸우겠지만."

"이상한 곳에서 고지식하네요."

지수는 자운을 이상한 사람이라 결론을 내렸다.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하려 했던 주제에 한 번의 승부로 끝내다니.

지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계속 죽이려 했을 텐데.

"전 당신이 그냥 평범한 악마의 계약자였으면 좋았어요. 그냥 죽이면 되니까. 근데 우선은 보내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새치름한 눈으로 재차 건물 위를 보았다.

역시 조금 심통이 났다.

분명 자신은 구분을 한다고 했는데 설마 다 죽이리라 생각한 건가?

다시 말하지만 자신은 살인마가 아니다.

악의를 품은 인간만을 죽인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천살성을 가진 지수는 인간의 살의나 악의에 민감하니까.

"이해할 수 없군."

"어차피 적의를 보이면 그때 가서 죽이면 되니까요."

마치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태도다.

그리고 자운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여자도, 그리고 건물 위에 있는 누군가도.

'분명 그자겠지.'

까마귀, 라고 하던가.

그때보다 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아자젤이 보면 얼마나 비웃을는지.

"빚으로 생각하세요. 제가 당신 목숨 살려준 걸로."

"...알겠다."

애초에 먼저 싸움을 건 당사자는 지수였지만 자운은 여기서 차마 고개를 흔들 수 없었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괴물이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이렇게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너는 왜 그를 따라다니는 거지? 혼자서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을 텐데?"

"그?"

"까마귀 말이다. 그가 강한 건 맞지만 너 역시 특출하게 강하지. 그런데 넌 그에게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인 것 같군."

"그래요?"

"그렇다. 적어도 나는 죽일 수 있음에도 그의 눈치를 보며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그렇지."

"흐음."

지수는 자운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그 뒤에 있는 여성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신장이 작은 꼬마.

저 아이에게선 뭔가 있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비밀이에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자운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볼 일은 끝났다.

암천 길드도 청소하면서 기분전환도 했으니 디어사이드의 본거지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다.

"하아."

지수는 천천히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이상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가슴.

방금 자운의 말이 자신의 가슴 속에 내제된 뭔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이다라....'

겨우 그것만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다니.

감이 좋다고 할지, 예민하다고 말해야 할지.

근데 틀린 말은 아니다.

지수는 여태 세한의 말에 특별한 반박을 한 적은 없었다.

이 세계가 갑자기 게임으로 되어버렸을 때부터 지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갑자기 바뀐 세계에 빠르게 적응했던 게 아니다.

단지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기실 지수에게 세계의 변화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혹여 그가 의심할까 봐 최소한의 지적만 했을 뿐이다.

그가 무엇을 하자고 했을 때 부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면, 인간은 순종적인 존재를 버리지 않으니까.

지수는 그것을 부모에게서 배웠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버려지는 건 싫다.

이런 세상이 되고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챙겨줬다.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언제 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순종적으로 숨을 죽이고 기다릴 거다.

자신이 강해질 때를.

지금의 자신은 아직 '그'보다 약하지만, 언젠가 강해지게 된다면.

그가 도망치려고 해도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럼 좋을 텐데."

지수는 황홀하게 웃었다.

어쩐지 자운의 말에 여태 억눌러뒀던 뭔가가 조금 비어져 나온 것 같았다.

그건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지수의 이면(裏面)이었다.

***

멀리서 지수가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내심 안도했다.

순순히 물러선 걸 보면 녀석의 말처럼 나름 구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쪽지도 확인해 준 것 같고.

"후우."

나는 한숨을 쉬며 자운에게 몰려든 두 명의 여성을 보았다.

민아와는 달리 교복차림은 아니었지만 분명 내가 몽상의 던전에서 보았던 영정 사진.

당시 죽어 있던 민아의 친구 두 명이 확실했다. 얼굴이 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허공에 열었던 허수 공간을 닫은 뒤,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사람, 아니 악마가 서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

나는 이 소녀를 알고 있다.

"아자젤, 네가 신자운이 계약한 악마였군."

나태의 악마 아자젤,

마계의 7대 악마 중 세 번째 자리에 앉아있는 대악마.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내심 긴장했다.

신으로 치면 최상위 신격에 위치한 존재다.

한번 대화를 했던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이아보다 아득히 윗선이다.

나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지구가 아니었다.

마계에서 멀찍이 본 게 전부였지.

'이 녀석은 분명 전생에 계약자를 정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미래가 달라져 신자운을 계약했다는 것이 된다.

더불어 전생의 신자운은 어떤 이유든 아자젤과 만나기 전에 일찍 죽었다는 것이 되겠고.

저 정도의 녀석이 아자젤과 계약하고 소리 소문 없이 죽었을 리는 없다.

신자운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자젤은 너무 거물이었으니까.

'마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악마가 가지는 자리.'

그것이 나태의 위(位)다.

전대 나태의 악마 벨페고르의 딸이자, 나태의 위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계승한 악마.

그 자리를 아자젤은 수천 년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아자젤이 계약자를 고르다니.

녀석은 분명 나태의 자리에 있는 만큼 상당히 게으른 성격이었을 텐데?

"놀라워라. 아직 자기소개도 안했는데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다 아는 법이 있지."

"그래, 아는 법은 많지. 미래를 볼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한 키워드를 알 수 있는 스킬을 지녔을 수도 있고. 애초에 이 세계는 의미 불명의 것들이 워낙 많으니까."

그래서 둘러대기도 쉽다.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런 모습만 보면 그저 가녀린 소녀 같다.

"그나저나... 솔직히 난 네가 내 계약자를 죽이려 할 줄 알았어."

"그럴 수도 있었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지?"

"저 두 아이를 살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신자운과 함께 있는 민아의 친구 두 명을 가리켰다.

저 둘이 만약 죽는다면 민아는 고향으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얽히게 된 것도 인연이니 굳이 죽게 내버려둘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계약 때문이구나."

"그래. 이미 악마와 계약한 아이들이다. 더 상위의 악마의 계약만이 그것을 덮을 수 있지."

철마 박도영과 계약한 악마는 상당히 급수가 높은 악마다.

그런 악마보다 급이 높은 악마는 찾기 힘들뿐더러 그 계약자는 더더욱 드물다.

그런 점에서 신자운은 꽤 괜찮은 상대역이지.

본인도 악마의 계약자치고는 이상하게 성실한 놈이니까.

저 두 아이들의 보호자로선 적당한 위치다.

아자젤의 계약자보다 든든한 보호자는 찾기 힘드니.

마음 같아선 디어사이드 길드로 데려오는 방법도 있지만 내가 관리하기도 힘들뿐더러 다른 적당한 악마의 계약자를 찾기도 어렵다.

"좋아. 이번엔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아도 되니 나도 편하지. 하수인 한둘이 늘어난다한들 내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마침 시녀 같은 애가 필요하기도 했어."

아자젤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꽤나 쉽게 승낙하는걸."

"너란 존재도 꽤 흥미로우니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악마는 쾌락주의가 대부분이잖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힐끗 내 머리 위를 보았다.

"물론, 흥미를 가진 건 나만이 아닌 것 같지만."

"...으음."

"너도 참 귀찮은 것에게 관심을 받고 있구나."

내 머리 위에는 수많은 옵저버가 있었지만 아자젤이 말하는 건 그런 단순한 신들이 아닐 것이다.

저들 틈에 끼어있는 이드라의 옵저버를 말하는 거겠지.

내게 특별히 말을 거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녀석의 존재감을 선명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전승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 알 텐데, 왜 말을 걸지 않는 거지?'

덕분에 이상한 건 나였다.

솔직히 너무 궁금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녀석에게 말을 걸어봐야 하나 고민할 정도다.

아자젤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슬슬 나도 계약자에게 돌아가 봐야겠네. 그럼 잘 있어, 까마귀. 또 봐?"

싱긋 웃으면서 말한 아자젤은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애초에 나는 녀석에게 조금 흥미로운 존재일 뿐이니까.

"그다지 또 보고 싶지는 않은데."

태연하게 대화했지만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아무리 지구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해도 초상의 존재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진다.

'우선 자운 쪽으로 까마귀를 한 마리 붙여뒀으니.'

만약의 일은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자젤도 그 사실을 알면서 내버려 둔 걸 보면 상관없는 것 같고.

'어차피 당분간은 만날 일이 없겠지.'

아마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된 다면 꽤 시일이 흐른 후일 것이다.

마계에서 열리는 강자들의 축제.

마계무투제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

# 86

086. 이벤트 퀘스트(1)

마계.

색욕의 궁.

그곳에 들어선 한 명의 존재가 있었다.

인간이라기엔 거대한 신체와, 인간과 닮았지만 이마에 박힌 보석이 인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카터스.

현재 지구 대한민국 서버를 운영하는 GM이었다.

'망할 새끼.'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궁의 문을 열었다.

아카터스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명의 플레이어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김세한.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 망할 놈.

같이 다니는 플레이어들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아서 더더욱 껄끄러운 놈.

거기다 운도 좋은지 궁기 건도 걸려서 한참 동안 자숙을 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신들이 거기서 클레임을 걸어올 줄이야.

'하필 지구의 신들은 쓸데없이 신격이 높아서.'

작은 별치고는 지나치게 강한 신격이 많았다.

애초에 황도 12궁도 지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위치 아닌가.

문명권이 형성된 다른 별에도 신은 있었지만, 지구 출신의 신들은 지나치게 신격이 높았다.

다행인 점은 이미 지구의 인간들에 대한 애정이 많이 사라진 터라 무슨 짓을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점이 편했다.

다른 별의 경우에는 신들이 항의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허나 지구의 경우에는 몇 명의 신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지구 출신 신의 숫자가 무척 많다는 걸 생각하면 거의 반발이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면 대부분의 신들은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신들을 져버린 인간을 괘씸하게 봤기 때문이다.

신들은 영웅을 좋아한다.

또한 자신의 신도를 모으고 숭배받는 걸 즐긴다.

그러나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영웅들은 사라졌으며 신들을 향한 숭배도 사라졌다.

물론 살아남은 종교도 있었지만 그 수는 극히 희박했다.

그런 상황에서 '게임'은 꽤 재미난 오락이었다.

인간은 다시 신들을 찾았고, 그들의 은총을 갈구했다.

그 속에서 영웅의 탄생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카터스는 그런 신들을 보며 생각했다.

'성격파탄자들.'

아카터스는 게임을 운영하는 운영자의 입장이지만 지구의 신들은 영 껄끄러웠다.

비위를 맞추기 보통 힘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퍼블려셔와 같이 게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최고의 고객이다.

신격이 높은 신들인지라 포인트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많은 포인트를 벌어들일 수 있었고, 자신들의 신앙이 형성된 고향이나 마찬가지인지라 관심도도 최고조였다.

말 그대로 최고의 고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화려한 궁전이야.'

취향은 아니었지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을 지배하는 건 바로 대악마다.

그것도 마계 서열 제6위의 악마.

신으로 치자면 최상위 신격에 위치한 존재다.

사실 말이 최상급 신격이지 대악마라 불릴 수 있는 일곱 악마는 일반적인 최상위 신격보다 윗선이다.

단지 신격을 나타낼 때 단위가 최상위가 끝이기 때문에 최상위 신격으로 취급할 뿐이다.

물론, 그건 신들도 마찬가지다.

대악마와 동급의 힘을 가진 신은 각 신화의 정점에 이른 신들밖에 없었다.

그만큼 퍼블리셔도 설설 길 만한 위치에 있는 악마이니 아카터스도 표정 관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재미난 방문객이로군."

고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

길게 흘러내린 은발이 빛났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기 힘들 얼굴이었지만 놀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다.

가슴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자인 건 확실했지만 여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게임을 재밌게 즐기고 있네. 아카터스."

"영광입니다."

"후후후."

고상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아카터스는 순간 머리가 찡하고 울리는 걸 느꼈다.

순간적으로 매혹에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그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예."

아카터스는 신중하게 말하며 악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나쁜 기색은 없었다.

"무엇인지 말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색욕의 악마라면 앞으로 있을 퀘스트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놈은 죄 없는 플레이어들을 죽이지 않으니까.

"색욕의 악마, 마라 파피야스 님."

그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들이 진행하는 게임에는 그의 계약자가 존재했다.

색욕의 악마이자 마군(魔軍), 마구니(魔仇尼) 혹은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라 불리는 강대한 존재.

그런 악마의 계약자라면 분명 강력한 우군이 되리라.

***

[스킬 '정신약체 내성(A)(성장형)'을 습득하셨습니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알람을 보며 나는 만족했다.

익히기 가장 어려운 스킬 중 하나인 정신약체 내성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

정신약체 내성(A)(성장형)

정신에 피해를 주는 대부분의 효과에 저항한다.

B급 이하의 정신공격은 완전히 무효화.

A급 이상의 공격 시 피해를 완화한다.

==

"A급 스킬 선택권이 좋긴 좋네."

어떤 스킬을 익힐지 정하고 사용하니 바로 습득되었다.

보통 A급 스킬 정도가 되면 노가다로 익히기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보통은 퀘스트 보상으로 얻거나 그런 스킬이 붙은 장비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혹은 몬스터가 아주 희박한 확률로 떨구는 A급 그리모어를 사용하거나.

정신약체 내성은 그중에서도 어려운 편이다.

왜냐면 스킬을 발생시키는 행동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스킬 발생 확률이 올라가는데 정신약체 내성은 그 행동 자체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신공격을 가하는 몬스터 자체가 극히 드물다.

그렇다보니 게임의 후반을 가서도 정신약체 내성 스킬을 익힌 플레이어는 드물었다.

'독 내성을 익힐지도 고민했지만.'

독은 그래도 엘릭서나 해독 마법 같은 대체 수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신을 보호하는 스킬은 지속시간도 짧을뿐더러 이미 발생한 이후에는 대처가 힘들다.

내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당사자가 당해 버리면 속수무책으로 나머지도 당하게 되니까.

거기다 무려 성장형.

정신약체 내성은 처음 습득할 시 D랭크다.

거기서 A까지 올리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A급 스킬 선택권으로 A급 정신약체 내성을 받았으니 노가다가 필요 없어졌다.

심지어 정신약체 내성은 S급까지 올릴 수 있다.

보통 성장형 스킬 중 A급 스킬이 끝인 경우도 다수 있지만 정신약체 내성은 S급까지 가능하다.

아마 S급이 되면 A급 이하의 정신공격을 완벽히 무효화하겠지.

그 정도면 사실상 정신공격은 면역이라고 봐야했다.

나는 새롭게 익힌 정신약체 내성 스킬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시작하겠지.'

바로 이벤트 퀘스트.

메인 퀘스트나 서브 퀘스트와는 다르다.

왜냐면 그 둘은 하나의 서버 내에서 일정 스테이지에 한정해 진행된다.

또한 모든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퀘스트다.

하지만 이벤트 퀘스트는 다르다.

모든 서버, 즉 전 세계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참여하게 되며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수도 한정된다.

'한국에서 아마 100명이었지.'

아마 디어사이드 길드원들은 대부분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여태 습득한 포인트 양에 따라 참여 여부가 갈리니까.

만약 부족한 사람을 찾자면 루크 정도.

최근 던전 순회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평균적인 위치에 있던 플레이어다보니 100위 안에 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생에도 참여하지 못했었지?'

물론 나도 참여하지 못해서 말로만 들은 퀘스트다.

당시의 나는 상당히 위로 치고 올라온 상태이긴 했지만 한국 서버 100위 안에 들지는 못했다.

'지금은 당연히 1위겠지.'

물론 아직 랭킹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순위는 알 수 없다.

당시에도 마찬가지라 그때의 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기 힘들었지만 대략 200위쯤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중이다.

당시의 나는 꽤 위로 치고 올라간 상태였으니.

아무튼 정신약체 내성은 그 이벤트 퀘스트에 필요하다.

정확히는 그곳에서 만날 사람에게 줄 스킬이다.

'세 번째 파티원.'

내가 처음 멀티플레이 패키지를 얻었을 때부터 생각해 뒀던 인물.

아서.

성은 모른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아서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니까.

본명은 맞는 것 같다.

스스로 영웅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한다고 했었으니까.

아무튼 그는 반드시 파티원으로 얻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럼 이제... 퀘스트가 시작하기 전까지 노가다나 해볼까."

장비는 대부분 당장 만들 수 있는 건 전부 만들었다.

특별히 얻을 스킬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남는 시간 동안 이번에 익힌 정신약체 내성을 S급까지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아까 말했듯 정신약체 내성은 익히기도 등급을 올리기도 힘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공격 스킬'을 사용하는 대상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정신공격 마법을 익힌 플레이어도 극히 드무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답은 간단하다.

"한지수."

"네?"

"잠깐 좀 도와줄 수 있어?"

나는 수련실에 있던 지수를 불렀다.

"뭘 도와주면 되는데요?"

지수는 자신의 무기를 닦고 있었다.

에스더와 미스릴, 그리고 소량의 오리하르콘과 소량의 만년한철이 들어간 무기다.

되도록 오리하르콘으로 떡칠을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 각인시킨 던전에서도 워낙 조금밖에 얻지 못한 터라 소량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에스더를 사용하고 거기에 S급 소재인 흉성의 암옥을 박아 만든 무기는 상상 이상의 흉악함을 자랑했다.

무려 현존하는 유일무이한 S급 무기였으니까.

'흉성의 학살자'

물론 S급 무기에 턱걸이를 한 상태였지만, 그건 나중에 추가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하면 될 일이다. 얼마든지 강화할 여력을 남겨뒀다고 시우도 말했으니까.

아무튼 지수의 무기는 거대한 둔기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잘하게 튀어나온 요철이 많았다. 상대의 몸에 스치더라도 최대한 상처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거기다 무기도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위력이 증가하는 스킬이 붙어 있어, 천살성 스킬에 최적화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기의 구조상 살점이나 핏덩이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자주 청소해 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여기에 앉아봐."

"그냥 앉아 있으면 돼요?"

언제나 그렇듯 지수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어, 그 다음에 나를 가만히 봐봐."

"네? 오빠를요? 그냥 이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지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눈을 살며시 피했다.

아무래도 거리가 좀 가까웠던지라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 내가 지수에게 부탁할 것은 부끄러운 요소가 조금도 없다.

"아니, 그냥 보진 말고, 천살성 살기 방출할 수 있어?"

"...네?"

"네가 악마 쪽 애들 족칠 때 하던 것처럼 해봐."

내 말에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곤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또 뭐라고. 보나마나 이상한 스킬을 익혔나 보네요."

"비슷하지."

"하아, 알겠어요."

지수는 답지 않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오우.'

새빨개진 지수의 눈이 향해진 순간 전신에 엄청난 압박감이 가해졌다.

평소 대련 때보다 훨씬 강하다. 아마 그것도 악마의 계약자나 하수인을 죽일 때에 비하면 억제하고 있었던 거겠지.

[정신약체 내성 스킬이 발동합니다.]

천살성의 살기가 몸에 닿기 무섭게 스킬이 발동했다.

정신약체 내성 스킬은 자동 발동이라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상관없어. 혹시 더 강하게도 가능해?"

"네, 아마."

지수가 그렇게 답하기 무섭게 붉은 눈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붉은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달아오르며 은은한 빛을 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지만 어둠속이라면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확연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정신약체 내성 스킬이 없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순간 몸을 움츠릴 정도의 살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 쪽에는 강한 내성을 지닌 나다.

스킬 없이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정도.

그런데도 이 정도면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으리라.

'예상대로 천살성의 살기는 그 자체로 정신공격 취급이군.'

덕분에 정신약체 내성이 열일을 하는 중이다.

이렇게 며칠 간 살기를 쐰다면 S급으로 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대략 세 시간 정도를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지 않았다면 계속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혹시 지수는 뭔가 부탁하고 싶은 거 없어? 매번 나만 부탁하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아니요, 괜찮아요. 귀한 무기도 이미 주셨으니 그걸로 퉁치죠."

가만히 앉아만 있었던 나와 달리 계속 살기를 쏴야 했던 지수는 피곤할 텐데도 무척 쌩쌩한 기색이었다. 도리어 뭔가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건 내가 예전에 무기를 주기로 했으니까 준 거고. 거기다 이거 당분간 계속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당분간이요?"

"어, 대략 일주일 정도?"

일주일이라는 말에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무리 지수라도 일주일간 이런 일을 하는 건 무리겠지.

그러니 나도 대충 일수를 나눠서 지수의 시간이 되는 대로 부탁할 생각이었다.

"알겠어요."

"나도 무리인거 알아, 그러니... 뭐?"

"알겠다고 했는데요."

"그러니까 나눠서 하자는 거지?"

"아뇨, 전 매일 해도 상관없어요.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지수는 무척이나 기꺼운 눈치였다.

얼굴도 묘하게 상기된 게 간만에 보는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저번 신자운의 일로 조금 심통이 났던 이후로는 처음이다.

"아, 대신 저도 하나 부탁해도 되요?"

"...물론."

환한 얼굴로 웃는 지수의 모습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수련실이 아니라 세한 오빠 방이나 제 방에서 단둘이 하도록 해요."

"왜? 아, 다른 애들이 오면 피해를 볼까 봐?"

"비슷해요."

지수의 살기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자칫 잘못해서 백설이나 린이 살기를 받았다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오늘은 아무 일이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알겠어, 근데 그건 특별히 부탁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나?"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그걸로 좋아요."

지수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어쩐지 지수의 눈이 여전히 붉었지만 계속 살기를 쏜 영향인가 싶어 넘어갔다.

하지만 뭔가 미묘한 열기가 담겨 있는 건 분명했다.

어째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지수가 이 상황을 반기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럼 내일부터 하도록 해요. 방에서 기다릴게요. 아니면 제가 오빠 방으로 가거나."

그렇게 나와 지수는 정신약체 내성을 올리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지수의 방에서 하거나, 혹은 내 방에서.

특별한 일은 없었다. 오늘 있었던 것처럼 몇 시간 동안 서로 마주보는 것뿐.

그렇게 일주일 후.

나는 정신약체 내성 스킬을 S급으로 올릴 수 있었다.

# 87

087. 이벤트 퀘스트(2)

다섯 번째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거의 두 달이 넘게 지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갑작스러운 공백에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거나, 던전을 돌며 자신의 능력치를 올리거나.

퀘스트가 시작되면 던전을 돌 여유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무렵, 퀘스트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그토록 플레이어들이 기다리던 퀘스트였지만 알람을 확인한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메인 퀘스트가 아닌 '이벤트 퀘스트'였기 때문이다.

==

이벤트 퀘스트: 서버 대항전

각 서버마다 100인의 대표가 선발되어 특정한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벤트입니다.

이번에 주어진 퀘스트는 보물찾기입니다.

추가적인 설명은 이벤트 장소에서 GM을 통해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벤트 장소는 랜덤한 하나의 서버로 결정되며, 퀘스트 종료 시 본인의 서버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벤트의 기간은 총 2주입니다.

그럼 선택되신 분들은 모두 힘내주시길 바랍니다.

==

평소 나타나는 메인 퀘스트의 내용과는 달랐다.

어조가 좀 더 정중했고, 내용도 비교적 자세했다.

그건 시스템이 직접 관여하는 메인 퀘스트나 서브 퀘스트와는 달리 이벤트 퀘스트는 퍼블리셔가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퀘스트 내용에 'GM이 안내한다'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장소는 분명....'

랜덤하게 결정되는 서버로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플레이어들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경쟁을 하며 퀘스트를 진행하게 되지.

그리고 이 이벤트에는 전에 말했듯 아서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확히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글라스톤베리에 아서라 불리는 절름발이 플레이어가 있었다는 목격담을 들었으니까.

"슬슬 시작될 것 같은데."

공지가 뜨고 이틀의 유예가 있었다.

이제 대략 1분 정도가 있으면 정확히 48시간.

그러면 각 서버 대표 100인은 자신의 서버를 떠나 영국 서버의 특정한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참고로 이동되어 떨어지는 위치는 제각각이다.

그래봐야 특정 스테이지 내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으, 긴장된다. 근데 나 100위 안에 드는 거 맞아?"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민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100위 안에 드냐?"

"아, 근데 난 이런 이벤트 굳이 참여하기 싫은데. 혜미나 지선이는 100위에 들지 않았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는 민아는 진심으로 이벤트 참여가 꺼려지는 모양이다.

그야 퀘스트에 참여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거기다 최근에야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으니 더 그렇겠지.'

자운과 함께 간 두 명은 뒤늦게 민아와 연락이 닿았다.

물론 내가 우연을 가장해서 연결시켜 준 거지만.

덕분에 민아는 한결 밝아진 얼굴이었다.

친구를 찾은 이후에도 늘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본인 말로는 이제 익숙해져서 이게 편하다나.

"우선 떨어지면 서로 모이는 방향으로 가는 건가요?"

"아니. 그건 퀘스트 내용을 보고 생각하자."

"알겠어요."

지수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옆에 앉아있었다.

그나마 지수는 민아에 비하면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얘가 긴장하는 모습을 본 건 첫 번째 메인 퀘스트 말고는 없는 것 같다만.

"지수 씨는 태연하군요. 전 상당히 긴장되는데 말입니다."

"형도 분명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장비도 만들어 줬잖아."

"하하...."

도리어 창우의 얼굴이 창백했다.

시우가 계속 옆에서 뭐라 말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반응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여간 긴장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창우라면 걱정 없다.

100위 안에도 분명 너끈히 들겠지. 내가 최근 몰아서 준 포인트가 얼만데.

지수가 심각하게 강해서 인지를 못하는 모양이지만 창우도 충분히 대단한 실력자다.

'그럼 대충 이동될 만한 인원은 나, 지수, 민아. 창우. 이렇게 네 명인가?'

네 명도 충분히 많긴 했다.

물론 대형 길드의 경우에는 그 숫자가 좀 더 많을 수도 있겠지.

대형 길드일수록 아바타의 수도 많고, 포인트를 얻기도 용이하니까.

'아이들만 남기는 게 좀 불안하긴 하지만.'

그나마 루크가 남으니 괜찮겠지.

본인은 포인트가 미묘하게 부족한 탓에 시무룩하긴 하지만 말이야.

[지금부터 서버 대항전 이벤트가 시작합니다. 플레이어분들은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가만히 있어주세요.]

부우우──

이제야 시작인가.

귓가에 들리는 알림과 함께 공기가 떨리며 주변이 빛나기 시작했다.

플레이어들 전체가 이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 느껴도 그다지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다.

몸이 붕 뜨며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

"도착했나."

새하얀 빛 때문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풍경이 변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디어사이드의 건물이 아닌 넓은 풀밭이다.

나는 부드러운 능선으로 감싸인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영국, 글라스톤베리."

영국 잉글랜드 남서부 서머싯 카운티에 위치한 소읍이다.

본래부터 인구는 그다지 없는 마을이었던지라 이 세계가 게임으로 바뀌며 깔끔하게 쓸려나간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이번 이벤트의 주요 스테이지다.

"...저기."

언덕 위에서 속속히 나타나는 플레이어들이 보고 있으니 누군가가 뒤에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바람에 너울거리는 상아빛 머리칼과 길쭉한 뿔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왜 여기 있는 거죠."

멍한 얼굴로 백설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너 왜 여기 있냐."

"린과 놀고 있었는데 여기로 와버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설이는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녀석이 이 정도로 감정을 내비칠 정도면 보통 당황한 게 아닌 모양이다.

"미치겠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백설이가 이곳으로 이동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백설이는 내가 기린의 알로 탄생시킨 펫이었으니까.

인간의 모습이라 펫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게임 상에서는 펫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이다.

'우선은 최대한 보호하는 쪽으로 가야겠군.'

이벤트 처음엔 따로 움직이려 했지만, 우선 민아나 지수를 찾은 뒤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피슝!

동시에 내 귓불을 스치며 새하얀 광선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면 머리가 사라진 몬스터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보통 몬스터가 아니다.

무려 '트롤'이라 불리는 괴물이었다.

강력한 재생 능력과 오크보다 강한 신체 능력을 지닌 몬스터.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덩치를 보아하니 트롤 중에서는 하위에 속하는 녀석이었지만 단 한 방에 이승에서 작별시켜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나서...."

"...그래."

"근데 뭔가 하실 말이 있습니까?"

"있었는데, 없어졌다."

그래. 백설이도 실전 경험을 한번 할 때가 되긴 했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