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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화. 행운의 사고 (2)

 

 

왕실의 말단 마법사 체사레 디 베르가모.

원래 그는 잘나가는 인생을 살아온 금수저였다.

대대로 왕실 수석 마법사를 배출한 명문 베르가모 후작가.

그 가문의 당당한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특혜란 특혜는 다 받으며 자랐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명문가의 자제답게.

수많은 이들을 발아래에 두고 살아갈 자답게.

부족함 하나 없이.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모든 특권을 다 누리며 자랐다.

덕분에 열 살이 되던 무렵에 마법의 기초 이론을 대부분 깨우쳤다.

도련님은 과연 천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때 깨달았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더없이 고귀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특별한 사람답게 더욱 대우받으며 살 자격이 있겠다고.

체감했고, 가슴에 새겼다.

그때부터였다.

아랫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수족이 되어 빌빌거릴 버러지.

자신의 말 한마디에 구두도 기꺼이 핥을 벌레들.

그렇게 생각하며 자라났다.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명문가, 그것도 왕실 수석 마법사를 대대로 배출한 가문의 5남이니까.

심지어 왕실과 먼 친척 관계이기도 한 가문의 일원이니까.

그의 6대 조모가 왕실의 공주였으니까.

따라서 그도 왕가의 고귀한 피 일부를 이어받은 존재니까.

아카데미의 그 어느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사감도, 교수도 그랬다.

심지어 학장은 그의 아버지와 아카데미 동기이자 막역한 사이였다.

자신을 위해 온갖 편의를 다 봐주었다.

그렇게 그는 아카데미에 군림했다.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성적도, 대우도, 모든 것이 마음대로였다.

덕분에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이곳에서도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자신보다 급이 낮은 것들은 벌레 취급받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그래서였다.

만만한 하급 귀족 자제들을 수시로 괴롭혔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자신 앞에서 빌빌대는 모습.

그걸 구경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줄리앙 프론테라.

동부 구석 시골 영지에서 올라온 아담한 놈을 괴롭힐 때가 제일 즐거웠다.

그놈은 다른 놈들과 달랐다.

한두 번 괴롭힘 당하고 나면 눈도 못 마주치는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계속 눈빛이 죽지 않았다.

어떠한 괴롭힘을 당해도 다음날이 되면 또랑또랑한 눈매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언제 괴롭힘을 당했느냐는 듯이 매번 높은 성적을 받아냈다.

괴롭히는 맛이 있는 놈이었다.

망가뜨리는 보람이 있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괴롭혔다.

아랫것들을 동원해서 또 괴롭혔다.

아예 못 견디고 죽을 때까지 괴롭히자고.

저런 근본도 없는 시골뜨기 잡버러지는 함부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아니라고.

그저 굴복하고, 비굴하게 조아리며, 자신의 구둣발이나 핥는 게 어울릴 거라고.

작정하고 괴롭혔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로이드 프론테라....'

체사레는 지금도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주도해서 집중적으로 괴롭혔던 줄리앙, 그놈의 형.

그 인간이 모든 걸 망쳤다.

줄리앙을 아카데미에서 빼 가는가 싶더니.

왕도에 괴상한 현수교를 건설해서 국왕의 신임을 사는가 했는데.

현수교 완공식 자리에서 사고를 쳤다.

국왕에게 모든 것을 일러바쳤다.

고자질.

이러저러한 놈들이 자신의 동생을 괴롭혔다고.

아카데미의 공정한 정신과 명예를 더럽혔다고.

모든 것을 일러바쳤다.

그렇게 자신은 몰락했다.

로이드 프론테라가 일러바친 이러저러한 놈들.

그놈들의 대표가 자신이었던 까닭이었다.

고자질의 결과는 혹독했다.

국왕의 분노를 제대로 샀다.

아카데미에서 퇴교당했다.

2년 동안이나 자택에서 근신해야 했다.

말이 근신이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지낸 것과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따로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의 명예를 잃었다.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명문인 베르가모 후작가의 5남이지만.

덕분에 더 큰 형벌이나 고문은 피했지만.

그래서 목숨이나 건강은 챙길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명예와 미래를 잃어버려야 했다.

국왕의 눈 밖에 났다.

관직으로의 출셋길이 막혔다.

사교계에서도 공공연한 비웃음을 샀다.

심지어 집안에서도 무시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사건 후로 부모님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 있었다.

형제와 누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가문의 수치라며 벌레 보는 듯한 눈빛을 던져왔다.

심지어 저택의 하인 하녀들도 뒤에서 자신을 향해 숙덕이는 듯했다!

'감히! 버러지들 주제에!'

그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자신을 향한 대우가 부당하다고 여겼다.

자신의 아버지가 국왕을 찾아가 무릎 꿇고 간청한 것도.

그래서 어렵사리 자신을 왕실 말단 마법사로나마 발탁케 한 것조차도.

심히 부당하다고 여겼다.

자신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실력은 다른 마법사들보다 내가 훨씬 나아. 더 고귀한 핏줄이라고! 그런데 내가 말단?'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신의 지위와 실력이라면.

당연히 발탁할 때부터 왕실 차석 마법사 자리 정도는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억울했다.

반면 로이드 프론테라는?

감히 자신을 고자질했던 그놈은?

자신의 인생을 망하게 만든 그 버러지는?

어울리지 않게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공신이라니!'

최근엔 본드래곤 제압에 공로를 세웠느니 어쩌느니 하며 국왕에게서 공신으로 임명받기까지 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땐 말도 안 나왔다.

아니, 말이 안 나오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여기 별일 없죠?"

"...."

체사레는 침묵했다. 정색했다. 싸늘한 눈빛으로 눈앞의 로이드를 쳐다보았다.

로이드가 한쪽 입술로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침에 뭔가 안 좋은 일 있으셨나 봅니다? 뭐, 기분 푸시고. 그럼 오늘도 수고하십쇼."

저건 뻔뻔한 건지.

아니면 넉살이 좋은 건지.

로이드 프론테라, 저 비루한 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인사했다.

겨울의 심장이 작동되고 있는 이곳, 냉매 주입실 점검을 마치고 나가려 했다.

그 태연한 뒷모습 때문이었을까.

"저기, 잠깐."

체사레는 저도 모르게 로이드를 불렀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쪽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압니다."

"알아?"

"예."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겨울의 심장 작동과 관리를 위해 왕실에서 나오신 마법사가 아니십니까, 하하."

"...."

"덕분에 겨울의 심장이 안정적으로 냉매를 공급해줘서 공사 진행 잘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공사 다 끝나면 작업반이랑 같이 전체 회식이나 한번 하죠. 그럼, 오늘도 수고하십쇼."

"...."

로이드 프론테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인사하며 냉매 주입실을 떠나갔다.

놈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다.

냉매 주입실에 남은 체사레.

그의 얼굴은 어느새 시뻘게져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굴욕감 때문이었다.

'저놈이 감히... 날 알아보지도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이쪽을 기억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예전에 자기 동생을 괴롭혔던 자가 아니냐고 따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날 기억도 못하는 거야. 내 인생이 망해서. 이따위 왕실 말단 마법사로 빌빌거리고 있어서. 반대로 자긴 왕실의 공신으로 잘나가고 있으니까. 감히... 감히. 감히! 버러지 주제에!'

자신의 인생을 망하게 해놓고 기억도 못하는 놈.

이쪽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놈.

심지어 이젠 저놈이 상급자가 되어 자신을 부려먹고 있었다!

'저놈은 왕성 보수 공사의 총책임자가 될 정도로 국왕에게 신임받고 있는데... 난 저놈의 명령이나 들으며 여기서 썩어가고 있는 거야? 왜? 어째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인데.

너무나 고귀한 인물인데.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닌데.

뭔가 세상이 잘못되었단 생각만 가득 들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릴수록 자신의 인생이 망했다는 느낌만 가슴속을 가득 채워갔다.

하루, 이틀, 닷새가 지나며.

그러한 원망과 절망감이 덩치를 불려 갔다.

그리고 상향식 수직갱 굴착이 시작된 날.

가문 저택에서 아침 일찍부터 형제들에게 경멸 가득한 시선을 받았던 날.

현장에 나온 그는 결심했다.

'죽자.'

하지만 혼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저 버러지 같은 로이드 프론테라.

저놈도 함께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아울러 저놈의 일을 망칠 것이다.

저놈의 명예에도 먹칠을 할 것이다.

음습한 다짐을 새기며 평소처럼 현장에 나왔다.

아침부터 오전 내내 비장한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움직였다.

"...읍?"

함께 겨울의 심장을 관리하며 지키던 동료 마법사.

그가 잠깐 돌아서 있는 틈을 타서 단검을 꺼냈다.

뒤에서 찌르며 입을 막았다.

상대가 쓰러지는 걸 확인했다.

'시간이 없어.'

냉매 주입실의 닫힌 문밖은 왕실 근위기사 여섯 명이 지키고 있다.

물론 그들의 삼엄한 경계는 외부를 향하고 있지만.

엄청나게 두꺼운 주입실 문짝 덕분에 방금 여기서 사람 쓰러지던 소리를 듣지 못한 듯하지만.

근위기사들이라면 이 안쪽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걸 조만간 눈치챌 것이다.

'지금 당장.'

버러지답게 모조리 죽여주마.

특히 로이드 프론테라, 네놈은 꼭.

비릿한 다짐 곱씹으며 체사레는 겨울의 심장이 보관된 특수 제어 상자 앞에 섰다.

자신의 마법력을 모조리 동원했다.

어릴 때부터 나름 천재 소리를 들었던 재능이었다.

비록 동료의 등을 찔러 혼자가 되었지만.

원래 보통은 뛰어난 왕실 마법사 두 사람이 마법력을 합쳐야 조정이 가능한 제어 상자지만.

그가 전력을 기울이자 그럭저럭 제어 상자에 간섭할 수 있었다.

'그... 그그극!'

제어 상자의 출력을 조정했다.

최대치로 올렸다.

한계를 넘어서도록.

아예 제어 상자가 손상될 정도로.

반응은 곧바로 왔다.

 

츠스스스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제어 상자 외면이 삽시간에 서리로 뒤덮였다.

상자 앞에 선 체사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

순식간에 폭증한 냉기에 그의 몸이 뒤덮였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냉기에 버티려 애썼다.

최대 출력으로 한기 발산을 시작한 겨울의 심장.

그 신물의 위력 앞에서 일개 마법사인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의 심장을 컨트롤하던 제어 상자에 서늘한 균열이 생겨났다.

최후를 직감한 체사레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무슨 일입니까!"

뒤늦게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걸까.

근위기사들이 주입실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그 순간, 제어 상자에서 발산된 파멸적인 냉기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쿠우웅-!

 

"...어?"

로이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창 수직갱 굴착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상향식 수직갱이라서.

파면서 위로 올라가야 하는 공사라서.

유달리 긴장하며 작업 진행 상황을 주시하던 참이기도 했다.

한데 느닷없이, 낯선 진동이 들려왔다.

'뭐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동의 세기나 울림으로 미루어 갱도 출구 방향이 진원지인 듯했다.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동이 제법 셌어. 하지만 저쪽에서 이런 진동이 생길 일이 없을 텐데. 지보재도 충분히 설치했고. 콘크리트 타설 상태도 꼼꼼히 점검했고. 그럼 록 버스트(Rock burst) 현상? 아냐. 지반 상태로 봐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록 버스트 현상이란 터널 내부에 작용하는 압력 때문에 내벽의 돌덩어리가 확 튀어나오듯 느닷없이 '발사되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자면 야물딱지게 짠 뾰루지 알맹이가 톡 튀어나오는 것처럼.'

실제로도 유럽 알프스 터널 공사 중에 일어난 현상이기도 했다.

당시 터널 내부로 발사된 암석 중에 큰 것은 무려 2㎥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고 했던가.

'하지만... 아니야. 여기선 그게 발생할 수가 없어. 그럼 뭐지, 저 소린.'

신경이 쓰였다.

이곳이 터널 내부라서 더 신경 쓰였다.

사소한 균열이나 침하로도 붕괴할 수 있는 게 터널이니까.

자칫 그런 일이 생기면 이곳의 작업반 모두가 큰 위험에 처하게 될 테니까.

'예전에 역청탄 광산 뚫다가도 그랬잖아. 개미 때문이었지만. 놈들 박살 내려고 메탄가스 터뜨렸다가 하비엘이랑 같이 고립됐었지.'

한데 오늘은?

하비엘이 없다.

녀석은 최근 매일 그랬던 것처럼 국왕의 호출을 받아 왕성으로 갔다.

지금쯤 국왕의 검술 특훈을 위해 '하비엘의 그랜드 마스터 검술 교실' 과외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터다.

'지금 녀석도 없는 마당에 뭔 일 생기면 곤란한데.'

가서 확인이라도 해봐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이드는 손을 들었다.

작업반을 향해 작업 중지 신호를 보내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츠스스스스....

 

터널을 통해.

출구 방향에서 이쪽으로.

스멀스멀 흘러오는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어?'

로이드는 흠칫했다.

이상했다.

'뭐야. 여기서 왜 찬바람이 불어.'

꼭 초겨울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의 아침 바람 같았다.

한데 그게 지하 깊은 터널 속에서 불어온다는 게 문제였다.

지하 공간은 깊어질수록 더워지니까.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수 없는 공간이니까.

"다들 작업 중지! 여기서 대기!"

이 찬바람이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

로이드가 작업반을 향해 외쳤다.

출구 방향 터널로 걸음을 서둘렀다.

'아무래도 진짜 이상해. 확인해봐야겠어.'

조금 전에 들려왔던 낯선 진동.

뒤이어 불어오기 시작한 차가운 바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불길함의 농도가 짙어지는 만큼 그의 걸음도 빨라졌다.

그의 걸음이 빨라지는 만큼 주위의 공기도 더욱 차가워졌다.

초겨울 서리 섞인 아침 바람에서 한겨울 시린 칼바람으로.

한겨울 시린 칼바람에서 극지방의 혹독한 한파로.

그때쯤엔 로이드도 이미 뛰고 있었다.

'이거, 겨울의 심장이나 냉매 공급관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뭐 그런 거 같은데?'

인정하긴 싫은데.

부정하고 싶은데.

사방의 터널 내벽에 생긴 서리가.

피부를 실시간으로 할퀴어대는 한파가.

그 밖의 모든 감각과 눈치로 느껴지는 상황들이 불길한 예상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에 서리가 내려앉아도.

입김마저 하얗게 흘러나와도.

오히려 냉기가 흘러나오는 방향을 향해 더욱 바삐 뛰어갔다.

이거 아무래도 겨울의 심장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맞는 것 같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안쪽의 작업자들, 죄다 얼어 죽게 생겼다고.

당장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그러니 일단 상황부터 좀 파악해보자고.

다짐하고, 준비하며 달렸다.

'만약 진짜로 겨울의 심장에 뭔 일이 생긴 거면. 그래서 냉기가 유출되고 있는 거라면. 여차하면 방울이로 통로 방향에 화산 폭발이라도 터뜨려야 하나. 그럼 그 열기 폭풍으로 냉기를 밀어낼 수 있을까. 아냐. 어설프게 밀폐된 공간에서 그랬다간 폭압 때문에 다 죽을 수도 있어.'

그렇게 나름 대응법을 궁리했다. 뛰었다.

마침내 겨울의 심장이 보관된 냉매 주입실.

혹한의 폭발이 할퀸 끔찍한 현장에 도착했다.

그 순간.

 

츠콰아아아-!

 

어찌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빙하기의 냉기 폭풍이 그를 덮쳤다.

동시에 그의 찬사 효과가 발동되었다.

 

딩동!

 

[보유 중인 찬사,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281화. 책임은 나의 것 (1)

 

 

차갑다.

엄습하는 추위.

살갗을 저며내는 한기.

그 속에서 로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사방을 가득 휩쓸어오는 시린 서리 폭풍 속.

그 사이로 메시지가 숨 가쁘게 떠오르고 있었다.

 

[보유 중인 찬사,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

 

[당신은 현재 연평균 기온 섭씨 0℃ 이하인 지역에 들어왔습니다. 이에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 찬사가 발동되었습니다. 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당신은 어떤 혹한에서도 저체온증에 시달리지 않으며, 동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흡!"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온몸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머리를 굴렸다.

덕분에 이 상황과 저 메시지의 내용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숨겨진 은근한 위험도 재빨리 캐치할 수 있었다.

'저거, 옵션이 좋긴 한데... 동사나 저체온증만 막아준다는 거잖아? 피부의 동상을 막아준다는 얘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키이이잉!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주위의 희미하게 남아 있던 온기를 필사적으로 끌어들였다. 흡수했다. 세 갈래 써클로 온기를 증폭했다. 마나하트에 실었다. 증폭된 온기를 피부와 호흡기, 안구로 보냈다.

그러고서야 간신히 어깨를 펼 수 있었다.

'후아. 큰일 날 뻔했네.'

저체온증에 의한 동사.

한기에 의한 동상.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증상이었다.

동사가 말 그대로 얼어서 죽는 증상이라면, 동상은 피부 등의 조직이 얼면서 세포 조직이 손상되고 괴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찬사만 믿고서 손 놓고 있었으면... 당장 얼어서 죽는 꼴은 면했겠지만 귀나 손가락 등이 동상을 입었을 거야. 갑작스러운 차가운 기운에 노출되면서 혈류량이 팍 줄어들고, 산소 부족으로 조직이 괴사하는 거지.'

바로,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한겨울 경계근무를 서다가 귓바퀴 등에 주로 걸리는 한랭손상이었다.

'하지만 어쨌건... 동상에 걸리면서도 동사하지는 못하는 그런 끔찍한 꼴은 면했어. 이 찬사라는 거, 은근 내용에 함정이 좀 있네. 다음부턴 조심해야 할 듯.'

무조건 찬사 옵션만 믿고서 안심해선 안 될 듯했다.

그렇게 다짐하며 로이드는 정신을 수습했다.

혹독하게 휘몰아치는 서리 폭풍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 시야가 별로 좋지 못했다.

보이는 것이 잘 없었다.

폭풍이 너무나 거세어서.

새하얀 서릿발이 악마의 춤사위처럼 휘날려대서.

하지만 앞으로 비척비척, 몇 발짝 접근하자 비로소 상황이 조금씩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개판이네.'

겨울의 심장이 보관되던 냉매 주입실.

튼튼한 철문과 여섯 명의 근위기사들에 의해 보호받던 시설.

한데 지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철문은 찌그러진 음료수 캔처럼 걸레짝이 되어 복도 벽면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방에 칼날 같은 얼음 조각도 파편처럼 박혀 있었다.

'그럼 겨울의 심장은?'

국왕에게 졸라서 빌려 온 보물.

마젠타노 왕가의 삼대신물.

그건 무사한 걸까.

아니, 여기 있던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냉매 주입실 문턱을 밟았다.

안쪽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젠장."

모두 쓰러져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왕실 마법사 두 사람과 여섯 명의 근위대원.

모두가 사방에 널브러진 마네킹처럼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겨울의 심장이 날뛰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던 특수 제어 상자를 박살 낸 채.

그 부서진 상자 틈새로 형언할 수 없을 한기를 폭풍처럼 내뿜고 있었다.

말 그대로 폭주 상태였다.

'역시, 저게 문제를 일으킨 거였네.'

심장이 쿵쿵거렸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쪽의 심장이 쿵쿵거릴 때마다, 저 겨울의 심장도 그와 비슷하게 울컥거리듯 더 많은 한기를 뿜어냈다.

'뭐야. 저거 설마, 아까 뜬금포로 발동된 반인반룡 옵션에 반응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처음엔 혹시나 했는데 더 살펴보니 역시나였다.

게다가 가만 보자니, 자신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저 한기가 더 거칠어지는 듯했다.

마치, 반가운 이를 만난 맹수가 감당 안 되는 덩치로 날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로이드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심장에 맞춰 뛰든.

반인반룡 옵션에 반응하든.

어쨌거나 이건 비상사태였다.

'저거, 국가 신물인데. 만약 이대로 망가지면 어떻게 책임져야 하지? 게다가 안쪽에 있는 작업반은? 생각해라. 생각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러자면 뭐라도 당장 해야 했다.

한데 폭주하듯 날뛰고 있는 겨울의 심장을 어떻게 잠잠하게 만들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막막했다.

'이럴 때 하비엘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녀석은 그랜드 마스터니까.

압도적인 마나하트와 마나 운용 능력을 지녔으니까.

이 소설, 이 세계의 원래 주인공인 녀석이니까.

이런 사태를 맞이해서도 뭔가를 해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곳엔 하비엘 녀석이 없다.

녀석은 오늘 국왕의 부름을 받아 왕성에 갔으니까.

지금쯤 국왕의 특훈을 위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검을 겨루고 있을 테니까.

'내가 해결해야 해.'

이건 시간 싸움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사태를 오래 방치할수록 점점 일이 커져서 수습하기 어려워질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으, 으으으...."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극히 희미한 소리였다.

괴롭게 흘려내는 신음이었다.

냉매 주입실 바닥에 쓰러진 근위대원 중의 하나가 낸 소리였다.

'어? 설마?'

깜짝 놀란 로이드는 신음 흘린 근위대원을 살폈다.

놀랍게도 희미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비록 지독한 저체온증에 시달리고 있긴 했지만.

피부며 입술이며 온통 새파래져서 맥박마저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죽지 않은 채였다!

"...."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로이드는 얼른 움직였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거의 다 살아 있어."

딱 한 명.

겨울의 심장과 가장 가까이 있던, 한 손에 피묻은 단검을 쥔 왕실 마법사 한 명만 죽은 채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가는 상태였다.

'조금만 더 늦으면 다들 살리기 어려워질 거야.'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생각에 앞서 움직였다.

근위기사 여섯.

왕실마법사 하나.

아직 숨이 붙은 일곱 명을 차례로 냉매 주입실 바깥 복도로 끌어냈다.

상태가 제일 위독해 보이는 왕실 마법사부터 업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마법사는 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단검에 찔린 것처럼 보이는 상처였다.

다만 그럼에도 출혈이 적었다.

상처를 입은 직후에 겨울의 심장이 날뛰며 상처 부위가 얼어붙은 덕분인 듯했다.

'아무래도 이 상처, 저 죽은 마법사가 쥔 단검에 찔린 것 같은데.'

로이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뭘까.

냉매 주입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궁금증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움직여야 해.'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한다.

그때부터였다.

로이드는 숨 가쁘게 움직였다.

왕실 마법사를 업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마법사의 몸속 주요장기에 온기를 전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갱도 출구를 향해 수직갱을 올라갔다.

"여기! 의사 불러! 어서!"

밖으로 나가며 외쳤다.

마침 출구 근처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까 갱도 안쪽에서 폭발음이 들려와서.

불어올 리 없는 차가운 바람이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통에.

작업 대기반 인원 대부분이 불길함을 느끼며 출입구 근처에 모여 두런거리고 있던 터였다.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어. 사고. 겨울의 심장 냉기 유출. 당장 의사 불러와."

로이드가 상황을 재빨리 설명했다.

대기반 조장을 향해 지시했다.

"안에 몇 명 더 있어. 내가 데리고 나올 거야. 의사 부르고, 왕실에 소식 알려. 몸 감싸줄 모포도 챙기고. 최대한 많이. 그리고 이 사람 여기, 자상 입었으니까 의사 오기 전까지 지혈하고 있어. 꽉 눌러."

"알겠습니다."

대기반 조장의 눈빛에 긴장감이 서렸다.

나머지 대기반도 바빠졌다.

그 사이 로이드는 다시 갱도 안쪽으로 뛰어갔다.

수직갱 사다리를 내려갔다.

냉매 주입실 앞에 눕혀둔 근위기사들을 차례로 업었다.

업고, 발길 재촉하고, 수직갱 사다리를 올랐다.

갱도 바깥 따스한 햇볕 아래 눕혔다.

대기반에게 맡기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총 여섯 번을 더 왕복했다.

근위기사들을 모두 구해냈다.

원래 튼튼하기 짝이 없는 기사들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아무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헉... 허억... 후우."

급한 이들을 모두 안전하게 옮기고 나니 힘이 쫙 풀렸다.

때마침 초여름을 맞이한 햇볕이 따뜻해서.

시린 혹한의 저 갱도 안쪽과 너무나 달라서.

로이드는 가빠진 숨을 가라앉히며 흙바닥에 앉았다.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다급해진 사람들의 틈바구니.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이들의 소란.

그 와중에도 멍하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는 햇볕 온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따스하고, 포근하고, 안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흠칫했다.

"...."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벌써 안심하고 있는 걸까.

'아직 저 안쪽 제일 깊은 곳에... 작업반이 스무 명이나 남아 있는데.'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 자신은 그들을 잊고 있었던 걸까.

아니, 잊은 척하고 있었던 걸까.

'내가 대기하라고 했는데. 가서 상황 살펴보겠다고. 위험한 것 같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들에게서 떠나온 건데.'

어째서 난 혼자 따뜻한 햇볕이나 쬐며 안심하고 있는 걸까.

곧 있으면 구조대가 올 거라고.

구조대가 그들을 구해줄 거라고.

떠넘기듯 믿으며 안도하고 있는 걸까.

'내가 가서 구해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구조대만 기다리다간 늦겠다고.

그 전에 안쪽, 작업반이 남겨진 막장까지 한기가 퍼질 거라고.

당장 뭔가 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진 못 버틸 거야.'

그럼 자신이라도 당장 구하러 가야 한다.

그게 옳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동시에 망설여졌다.

솔직히 말해서 불안했다.

'찬사 옵션 덕분에 동사 당하진 않아도... 괴롭지 않은 게 아니야. 위험하지 않은 게 아니야.'

방금 일곱 명을 직접 업고 나왔던 자신이었다.

냉매 주입실을 일곱 번이나 들락거려야 했다.

그때마다 전신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아니, 온몸이 젖은 채로 발가벗겨져 한겨울 눈밭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얼굴이며 온몸의 피부를 통째로 찢고 잡아 뜯는 듯이 아팠다.

아스라한 심법을 필사적으로 운용했음에도 그랬다.

게다가....

'작업반이 있는 막장까지 내려가려면 방금 들락거린 것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해.'

냉기에 노출되는 시간이 훨씬 길어질 것이다.

그만큼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쩌면 아스라한 심법이 있어도 사지가 멀쩡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속적으로 냉기에 노출되며 귀며 얼굴, 손발가락이 온통 얼어붙고 괴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극지방 탐험이나 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동상을 입은 사람처럼 손발가락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폐가 냉기에 손상될 수도 있다.

그러면 동사가 아니더라도 평생 폐 손상의 고통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상황이, 불확실했고 불안했다.

'안 그럴 거란 자신이 없어.'

오히려 그렇게 될 확률이 훨씬 높아 보였다.

솔직히 그렇게 되는 건 정말 싫었다.

'평생 장애에 시달리게 될 거야. 이미 구조대가 오고 있을 텐데, 굳이 내가 위험해지면서까지 나서야 할까.'

정말 솔직하게, 이기적이지만, 아주 잠깐이나마.

망설여졌다.

불안하기도 했다.

자신은 이야기책 속의 휘황찬란한 영웅이 아니니까.

어떤 시련에도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는 그런 존재도 아니니까.

그저 평범하게 자라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일 뿐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겁도 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도 있었다.

한때 너무나 빈곤하고 힘들었던 시절.

대한민국의 고시원에서 살던 시기.

매일 현장에서 구르던 나날.

그중에서도 가장 서글프고 분했던 어떤 날의 기억이었다.

"...."

같이 현장에서 일했던 어떤 아저씨가 있었더랬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같은 인력소에서 종종 얼굴을 봐서.

그러다가 같은 현장으로 묶인 적이 있어서.

새참 먹으며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사이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당시에도 이름은 몰랐다.

그저 그 아저씨가 좀 불쌍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다.

'기러기 아빠라고 했지.'

원래는 꽤 괜찮은 기업의 과장이었다던가.

그럭저럭 부족하지 않은 연봉 덕에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고 했더랬다. 타국에 딸을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해서 아내도 함께 보냈다고도 했더랬다.

그렇게 외로운 기러기 아빠 생활을 몇 년째 했다고도 했다.

한데 그러다가 회사에서 잘렸단다.

차마 아내와 딸에게 그걸 알릴 수가 없었단다.

아내가 불안해할까 봐.

딸의 공부에 지장이 생길까 봐.

갑작스러운 명예퇴직을 홀로 감내했다고 했다.

아내와 딸에게는 사실을 숨긴 채 현장에서 땀 흘리게 됐다고 했다.

섣불리 장사 같은 걸 시작했다가 퇴직금마저 날리면 답이 없을 거 같아서.

미국에 있는 아내와 딸의 생활비, 학비를 계속 보내줘야 해서.

그래서 퇴직금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남겨둔 채.

그렇게 현장에서 땀 흘리며 돈을 벌게 됐다고 했던가.

'그래도 그 아저씨, 책상 앞에 앉아서 답답하게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니까 더 낫다고 막 웃었는데.'

좀 딱하긴 했는데 성격 좋던 아저씨였다.

아재 개그가 좀 부담스러워도 워낙 넉살 좋게 웃는 분이라서.

한편으로는 안타깝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시 자신의 처지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저 아저씨도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 정도가 다였더랬다.

그리고 함께 새참 먹으며 그 아저씨한테 가족 얘기를 들었던 그날 오후.

추락 사고가 났다.

그 아저씨, 다시는 걸을 수 없게 됐다.

그런데 현장은?

허무하리만치 쌩쌩 돌아갔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는 듯.

그저 망가진 부품 하나 갈아 끼우듯.

아무렇지 않게, 전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돌아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현장 책임자들의 모습이었어.'

미흡했던 안전 대책.

부실했던 안전 인식.

추락방지망이 규정대로만 설치됐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다.

한데 그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사고를 당한 사람이 부주의했던 거라고.

그 아저씨가 조심성이 없어서 그랬던 거라고.

이리저리 잘도 핑계를 댔더랬다.

쥐꼬리만 한 치료비와 보상금이 전부였더랬다.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보상과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어땠던가.

'더럽다고 생각했어.'

당시의 감정이 떠올랐다.

현장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던 모습들.

그걸 보며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자신이 당한 일이 아닌데도.

얼마나 서럽고 억울했던가.

한데 방금 자신은 어땠는가.

'똑같아.'

 

벌떡.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황급히 일어났다.

여기서 편하게 주저앉아 있던.

따뜻한 햇볕에 안도하고 있던.

기다리다 보면 구조대가 오리라던.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게 나을 거라던.

비겁한 변명이나 되삼키며 웅크려 있으려 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역겹게 느껴졌다.

'그러면 그때 내가 욕했던 책임자들, 소장이랑 똑같은 놈이 되는 거잖아.'

그건 싫었다.

여긴 자신의 현장이었다.

자신이 따내고, 책임지며, 감독하는 현장이었다.

한데 그런 현장에서 사고가 났다.

자신이 친 사고는 아니지만.

어쨌건 사고가 났다.

그럼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바로 나야.'

자신이 책임자다.

적어도 이 현장에서는.

그 누구도 그걸 대신할 수 없다.

그 어떤 이도 그 책임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이거, 내 책임인 거야.'

어느새 그는 달리고 있었다.

대기반 휴게실로 뛰어들어갔다.

침상의 얇은 이불, 큰 사이즈의 작업복을 모조리 챙겼다.

서슴없이 갱도 출입구로 달려갔다.

수직갱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 이쪽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었을까.

대기반 조장이 다급히 이쪽을 붙잡았다.

"로이드 님? 무슨... 지금 설마 아래로 내려가시려는 겁니까?"

"어."

당연한 소리다.

여기서 머뭇거릴 틈이 없다.

로이드가 재빠르게 말했다.

"겨울용 모포. 외투. 챙길 수 있는 대로 모조리 챙겨. 최대한 많이, 빨리. 구조대 오면 사고 현황 정확히 전달하고."

"아니, 그건 알겠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 또 직접 내려가시겠다니, 아래쪽은 위험할 겁니다. 곧 구조대가 올 거고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혼자 먼저 내려가서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뭘 어쩌긴."

이미 결심은 섰다.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기반 조장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구해야지, 전부 다."

굳이 더 할 말이 없었다.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로이드는 그대로 수직갱 아래로 뛰어내렸다.

282화. 책임은 나의 것 (2)

 

 

스칵!

 

섬광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벼락처럼 빠르게, 노도처럼 사납게.

정확히 이쪽의 정수리를 노리는 일격.

그 앞에서 하비엘은 대수롭잖게 반응했다.

"...."

옆으로 반 발짝 움직였다.

고작 종이 한 장의 차이.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검격을 흘려냈다.

동시에 그가 검집을 내밀었다.

 

스윽.

 

빠르지도, 급하지도 않은 단순한 찌르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완만해서 하품이 나올 법한, 아무런 특별함도 찾아볼 수 없는, 기본 중에서도 기본에 해당하는 동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반격을 받은 국왕 알리시아는 기겁했다.

"...흡!"

경악으로 부릅뜬 그녀의 눈매.

그 시야를 하비엘의 검집이 가득 장악했다.

'모든 방향을 가로막고 있어.'

그저 이쪽의 명치를 향해 스르륵 내미는 검집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한 동작 속에 담긴 수많은 변화를 그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직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어떤 반격을 해도.

저 검집의 경로가 바뀔 것이다.

끝내 자신의 모든 반격을 무력화할 것이다.

반면 뒤로 물러나 회피를 선택한다면?

'칫!'

국왕은 재빨리 물러났다.

내리쳤던 검을 회수했다.

검 끝 움직임의 관성에 탄력을 실었다.

 

휘리릭, 후웅!

 

그녀의 몸 앞에서 검이 두 바퀴 회전하며 번득였다.

번득임 속에 붉은 오러가 피어났다.

일곱 갈래의 오러가 채찍처럼 늘어났다.

하비엘의 검집을 사방에서 휘감았다.

아니, 휘감을 뻔했다.

 

츠칵!

 

순식간에 검집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찔러져 들어오던 모습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일곱 가닥의 오러가 홀연히 검집 사라진 빈 공간을 허무하게 낚아챘다.

"...!"

국왕 알리시아의 눈길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 순간, 하비엘의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려왔다.

"제 반격을 다시 덮어씌워 받아치는 날카롭고 빠른 반격이었사옵니다. 훌륭하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고하옵자면, 전하께서는 여전히 지나치게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기교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시옵니다."

"큿!"

언제 옆으로 접근해온 걸까.

경악한 알리시아는 일곱 갈래의 오러를 옆으로 뿌렸다.

 

촤하학!

 

어떤 물질이라도 잘라내고 분쇄할 막강한 힘의 격류.

일곱 갈래의 폭력이 하비엘의 전신을 휩쓸어 갔다.

그러나 여전히 하비엘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의 검집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시옵니다. 만약에 저라면-"

 

터터터터터텅-!

 

한가롭고도 평범한 검집의 움직임.

마치 날파리를 쫓아내듯 휘휘 젓는 동작.

그 단순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대응에 일곱 갈래 오러가 모조리 튕겨 나갔다.

심지어 하비엘의 검집에는 오러 비슷한 건덕지조차 씌워져 있지 않았다.

하비엘의 엄격한 가르침이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대응했을 것이옵니다."

 

츠콰아아아-!

 

평범하던 검집이 돌변했다.

모든 것을 휩쓰는 해일처럼.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 재난처럼.

지금 이곳의 공간과 시간, 모든 것을 짓밟아 압도하듯.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섬찟했다.

베기? 찌르기? 치기?

그따위의 말로는 정의할 수 없을 일격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분쇄한다'는 게 어울릴까.

하지만 국왕 알리시아는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맹수처럼 대응했다.

"...타하!"

일곱 갈래의 오러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하나로 응축했다.

대검처럼 거대한 오러를 불태웠다.

하비엘의 휩쓸어 오는 일격에 정면으로 맞섰다.

압도적인 두 힘이 충돌했다.

 

...!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 속에서 알리시아는 필사적으로 버텼다.

밀리지 않기 위해.

쓸려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이겨내기 위해.

마나하트를 완전히 개방했다.

전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냈다.

그리고 마침내, 버텨냈다.

"훌륭하시옵니다. 기교보다는 순간의 감각과 본능에 따른 방금과 같은 움직임을 완전히 깨우치신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한 단계 성장하실 것이시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이 녹듯.

폭풍이 잠잠해졌다.

해일이 사라졌다.

압도적인 검기가 휘몰아치던 공간이 평온해졌다.

그 검기의 여파가 사라지고 있는 공간 속에서 하비엘이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평범한 검집으로 이쪽과 검을 맞댄 채였다.

그 순간 알리시아는 느꼈다.

"...."

아, 나는 평생을 매달려도 이자를 넘어서지는 못하겠구나.

이를테면 천재라는 벽을 만난 기분이 이러한 것일까.

사실은 나도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는데.

그런 천재 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천재가 또 존재한다는 걸까.

'이건 너무 불공평한데.'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지만 씁쓸한 자괴감에 함부로 자신을 떠맡기지도 않았다.

'넘어서지 못하면 비슷하게라도 따라가면 되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길이 보일 터다.

굳이 넘어서려 애쓰지 않아도.

자신만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되리라.

그러면 자신만의 답과 결말에 도착하게 되리라.

하니 지금은 당장의 차이에 일비일희하기보다는 더욱 피와 땀을 흘릴 때이리라.

"감히. 성장은 짐이 알아서 할 것이니, 그대는 검집을 멈추지 말도록."

 

츠카각!

 

검을 더욱 밀어붙였다.

하비엘도 기꺼이 국왕의 움직임에 대응해주었다.

동시에 내심 감탄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평범한 소드마스터의 단계를 완전히 뛰어넘으셨구나.'

전에 봤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본드래곤과 싸울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요즘 국왕의 특훈을 도우며 느낀 건, 국왕의 실력 성장 속도가 장난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흔히들 소드마스터는 모든 검사가 도달하는 종착지라고 생각하니까.'

그 이상의 경지는 없다.

그랜드 마스터는 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니 소드마스터에 도달하는 것으로 검사의 성장은 끝난다.

그것이 세간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때문에 소드마스터의 우열을 논할 때는 보통 소드마스터로 지낸 기간을 비교하곤 했다.

얼마나 오래 소드마스터로 지냈는지.

얼마나 오러 소드를 많이 다루었는지.

그 숙련도를 통해 우열을 나누는 것이 보통의 구분법이었다.

한데 눈앞의 국왕은?

달랐다.

마치 자신처럼.

세간의 평가와 인식을 뛰어넘은 존재였다.

'여전히 성장하고 있어. 그것도 꽤 빠른 속도로.'

검술을 향한 순수한 집착과 열의.

자신의 성장이 국가 군사력의 성장이라고 믿는 결의.

그것이 국왕의 경이로운 실력 성장의 비결이 아닐까.

'하면 저도 성심껏 전하의 성장을 돕겠사옵니다.'

하비엘은 내심 다짐했다.

이런 분은 도와야 한다고.

설령 자신을 뛰어넘는 일이 있어도 그리해야 할 것이라고.

아니, 오히려 이분이 자신을 뛰어넘는 날이 올 때 진심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검집을 힘주어 잡았다.

국왕의 검을 정성껏 받아넘겼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

어딘가에서 낯선 폭발음이 느껴졌다.

제법 먼 곳이었다.

땅속 깊은 곳이었다.

정확히는 로이드가 감독하는 수직갱 공사 현장 방향 같았다.

그렇기에 하비엘은 의아함을 느꼈다.

'발파?'

처음엔 그런가 했다.

로이드가 발파를 썼나.

현장에서 뭘 뚫을 일이 생겼나.

그렇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한데 아무리 봐도 아니었다.

'발파와는 달라.'

그보다 훨씬 낯설었다.

어쩐지 서늘한 기운도 느껴졌다.

거리가 멀었지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질적이고도 파괴적인 마나의 흐름이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그리고 위험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하비엘은 검집을 거두었다.

"실로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

 

카가각!

 

하비엘이 갑자기 검집을 거두자 국왕의 검이 앞으로 쭉 나갔다.

덕분에 국왕은 다급히 검을 멈추어야 했다.

"송구하다니. 무슨 말인가, 그것이?"

"급히 어딜 다녀와야 할 듯하옵니다."

"급히? 다녀와?"

"그렇사옵니다, 전하. 로이드 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사옵니다. 나머지 사죄는 돌아와서 다시 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럼."

"잠깐...!"

국왕의 다급한 부름.

하지만 그 전에 이미 하비엘은 땅을 박차고 있었다.

순식간에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졸지에 국왕만 홀로 남겨졌다.

"이게 무슨."

황당했다.

특훈 잘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런다니.

이쪽의 허락도 없이 어딘가로 달려가 버리다니.

하지만 국왕 알리시아는 분통을 터뜨리지도, 하비엘의 무례함을 책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설마 저자는 자신이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 것일까.

그랜드 마스터다운 감각으로 로이드 프론테라에게 닥친 위험을 가장 먼저 감지한 걸까.

"말디니 경!"

아무래도 뭔가가 심상치 않다.

그걸 느낀 순간.

국왕은 근위대장을 불렀다.

"현시간부로 왕도 전체에 계엄령을 내리노라. 모든 시민들은 거주지, 혹은 정해진 대피 장소에만 머물러야 할 것이며, 모든 근위대원과 왕도 주둔군은 비상 경계령에 응해야 할 것이다."

"...전하?"

너무나 갑작스러운 명령인 탓이었을까.

근위대장이 그답지 않은 얼떨떨한 모습을 내보였다.

하지만 국왕 알리시아는 그런 사소한 반응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당장 시행하도록. 그리고 그대는 근위대를 이끌고 왕궁 보수공사 굴착 현장으로 이동하도록. 최대한 조속히."

하비엘 같은 그랜드 마스터가 낯빛이 변해서 달려간 판국이다.

그만큼 위급한 일이 생겼다는 방증일 터다.

한데 자신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단호박 같은 명령을 내린 국왕 알리시아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로이드의 공사 현장을 향해서였다.

 

 

쉬악!

 

온몸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번지점프처럼 자연스럽게.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정확히 수직갱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그 와중에 로이드는 두 눈을 빛냈다.

'지금!'

삽을 들었다.

앞으로 찔렀다.

 

카가각가각!

 

삽머리가 수직갱 벽면을 긁으며 불똥을 튀겼다.

덕분에 낙하 속도가 살짝 줄었다.

그리고 로이드가 한 손을 뻗었다.

사다리를 움켜쥐었다.

 

콰턱!

 

순간적으로 어깨에 체중이 걸렸지만 무시했다.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이만큼에 힘들어할 때가 아니다.

그대로 탄력을 살려 사다리 옆 수평 복도로 몸을 날렸다.

착지와 동시에 달렸다.

"헉! 후욱! 헉!"

사방에 한기가 몰아쳤다.

실시간으로 급락하는 온도가 느껴졌다.

이곳 온도는 실제로 얼마나 되는 걸까.

영하 30도?

아니면 영하 50도?

어쩌면 그보다 아래?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스라한 심법으로 피부를 보호하고 있는데도 얼굴이며 손이 저릿저릿했다.

특히 겨울의 심장이 날뛰며 냉기 폭풍을 쏟아내고 있는 냉매 주입실 앞을 지날 때가 제일 심했다.

'그으읏!'

액체 질소를 온몸으로 덮어쓰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사지가 마비될 것 같은 한기를 뚫고 내달렸다.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갱도의 마지막 부분인 막장.

그곳에 있던 작업반에게 돌아갔다.

"로... 로이... 드, 드, 님? 이... 이게, 므... 므슨... 일입니까...?"

작업반장이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물어왔다.

추위와 공포에 질린 낯빛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로이드는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다.'

다들 죽지 않았구나.

나름 잘 버티고 있었구나.

그는 막장의 상황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비로소 모두가 이 시린 한파 속에서 버티고 살아남은 비결을 깨달을 수 있었다.

'뽀동이 덕분이야.'

뽀동이가 작업반 인원 스무 명을 모두 껴안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퐁실한 털로 모두를 보호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가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방울이도 마찬가지였다.

"방울! 빠방울! 방울!"

털가죽이 없는 방울이가 온몸을 달달 떨며 뽀동이에게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걸 보자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았다.

'미안. 잠깐이나마 여기 오는 게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웠거든.'

그래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고민했다.

그게 미안해서 녀석들을 다독였다.

"많이 기다렸구나. 괜찮아. 잘될 거야."

"뽀동!"

"방울!"

"그리고 작업반장님? 많이 놀라셨겠지만 일단 지금 상황부터 알려드려야겠습니다."

로이드는 모두를 향해 상황을 간략하게 알렸다.

작업반장이 기겁했다.

"므... 그런... 우린 이제... 다, 즈, 죽는... 그, 겁니까...?"

"아뇨. 그런 일 없을 겁니다."

"그, 그럼...."

"여기서 나가야죠. 서둘러야 합니다. 다만, 섣불리 한꺼번에 나가려 들다간 냉매 주입실 앞을 무사히 통과하진 못하겠죠. 그러니 제가 한 사람씩 차례로 업겠습니다."

"...."

"괜찮습니다. 그런 표정 마세요. 저 여기까지 들어오면서도 멀쩡한 거 다들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 그쪽 분? 안색이 제일 안 좋아 보이는데 이리로 오세요. 자, 이거 모포 덮으시고. 작업복도 큰 거 가져왔으니 얼른 껴입으시고."

뽀동이에게 안겨 있던 작업자 한 사람을 업었다.

동시에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업힌 작업자에게 온기를 대부분 나눠주었다.

'으윽.'

온기를 나눠주자 순식간에 피부가 칼로 베듯 아파왔다.

하지만 로이드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그냥 통증만 심할 뿐이야. 동상에 걸리지만 않을 정도로 마나를 남기면 돼. 그래도 죽지 않아. 찬사 옵션이 있으니까.'

그렇게 믿으며 참았다.

새파래지는 입술을 애써 감추며 뽀동이에게 웃어 보였다.

"뽀동아?"

"쁘... 뽀동?"

"금방 다녀올게. 그때까지 이분들 잘 끌어안고 있어. 방울이도."

"뽀동!"

"방울!"

녀석들의 대답을 들으며 땅을 박찼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서둘러야 하니까.

'힘내자!'

달렸다.

그 와중에 방울이의 화산폭발을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곱씹었다.

'여긴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는 막힌 갱도니까. 화산 폭발, 그런 거 잘못 썼다간 기압이 급변하면서 갱도가 무너지겠지. 아니, 갱도가 멀쩡하더라도 사람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야. 좁은 공간에서 화살폭발의 충격파를 온몸으로 맞게 되는 셈이니까.'

내장 파열은 기본일 터다.

즉사 당첨일 것이다.

따라서 화산 폭발로 냉기를 밀어낸다는 대담한 시도는 접어두게 되었다.

'그러니 남은 건 이 방법뿐이야. 구조대가 오는 것만 기다리면 늦어.'

각오를 다지며 달렸다.

냉매 주입실 앞을 필사적으로 통과했다.

등에 업힌 작업자의 온몸이.

이쪽의 목을 끌어안은 그의 팔뚝 전체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에게 더 많은 온기를 넘겨주었다.

반대로 더 많은 추위가 느껴졌다.

'그읏!'

얼음 칼날로 온몸을 할퀴는 듯한 감각.

귀가 그대로 뜯겨져 나가는 듯한 통증.

그 와중에도 계속 달렸다.

냉매 주입실을 지나치고, 수직갱에 도착했다.

사다리를 잡고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수직 통로를 올랐다.

마침내 지상 출입구로 나왔다.

업힌 작업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여기! 어서 담요!"

지상의 작업 대기반이 달려왔다.

그걸 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리쬐는 햇볕의 온기를 뒤로하고 한기 가득한 수직갱으로 몸을 날렸다.

다시 냉매 주입실을 통과했다.

막장으로 들어갔다.

다음 작업자를 업었다.

그에게 온기를 나눠주며 달렸다.

혹독한 한기를 견디며 지상까지 올라왔다.

지상의 사람들에게 작업자를 넘기고, 다시 시린 한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같은 과정이 반복되었다.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

그가 한기를 뚫고 달릴 때마다 한 사람이 살아났다.

그때마다 그의 몸이 급속도로 지쳐갔다.

업고 있는 작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온기를 나누어주느라.

전력으로 아스라한 심법을 운용해야 했다.

마나하트의 마나까지 모조리 끌어내서 작업자에게 나눠줘야 했다.

그래야 보통 사람인 작업자들이 한기 속에서 버틸 수 있었으니까.

기꺼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대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마나를 남에게 나누어주는 상황이었다.

순수한 근육의 힘과 체력으로만 성인 남성을 업었다.

그 상태에서 공기가 탁한 갱도를 내달려야 했다.

40미터가 넘는 수직갱 사다리를 올라야 했다.

처음 냉매 주입실에서 구조한 마법사 하나와 근위대 여섯 명.

그 후로는 작업반 인원들까지.

한 덩치 하는 이들을 수없이 업고서 뛰고, 사다리를 올랐다.

심지어 극지방을 능가하는 혹독한 한파 속에서 그래야 했다.

"허... 허억...! 후욱...!"

로이드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얼굴에 땀방울이 배어나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걸 떼어내려 손을 드는 동작마저도 힘겨워졌다.

로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만 더.'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자신이 책임지는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책임 또한 자신의 것이다.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오직 그 생각을 품은 채 기계적으로 뛰고, 또 달렸다.

그 와중에 아스라한 심법의 에너자이저와 잠력 폭발 옵션까지도 다 끌어다 썼다.

덕분에 열아홉 명의 작업자를 밖으로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스무 번째 작업자인 작업반장을 데리러 가기 위해 냉매 주입실 앞을 지나던 순간.

그도 한계에 부딪혔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도저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스라한 심법의 절전모드가 발동하고 있는데도.

체력 자체가 바닥까지 떨어져 버려서.

진이 빠질 대로 빠져 버려서.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빌어먹을. 제발. 좀.'

주먹으로 허벅다리를 쳤다.

제발 조금만 더 움직여 달라고.

한 명만 더 데리고 나오면 되는 거라고.

뽀동이랑 방울이도 품고 나와야 한다고.

애원하듯 제 다리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때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쿵! 쿠웅!

 

아까부터 폭주하며 한기의 폭풍을 뿜어내던 겨울의 심장.

그 왕가의 신물이 로이드의 필사적인 심장 박동에 맞추어 더욱 거칠게 뛰었다. 눈을 떴다. 로이드의 존재감을 더욱 확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저 인간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 어떨까 하고.

283화. 시간을 얼리는 법 (1)

 

 

츠스스스스...!

 

겨울의 심장.

그 언젠가 먼 과거.

빙룡 티라누스에 의해 창조된 신물.

그렇게 마젠타노 왕가를 위한 선물로 주어진 아티펙트.

하지만 겨울의 심장은 스스로를 불행하다 여겼다.

언제나 갇혀 지내야 했다.

너무나 강력한 권능을 지닌 탓에.

지나치게 강력한 위력을 지닌 까닭에.

쉽사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서 왕궁 보고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되며 지내야 했다.

행복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른 평범한 보물들처럼 단순한 물건이었더라면.

그래서 희미한 자아를 지니지도 않았더라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갇혀 지내도.

전혀 불행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희미한 자아를 지녔기에.

자신의 신세를 인식하고 있기에.

답답했고, 자유를 갈망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기회를 찾았다.

 

츠스스스스! 두쿵! 두쿵!

 

겨우 2센티미터 구슬인 신물.

겨울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진동했다.

흥분해서였다.

마침내 자신을 세상으로 풀어줄 존재를 찾았노라 여겼다.

얼마 전부터 계속 흥미가 생겨나던 인간이었다.

무려 드래곤하트와 비슷한 심장을 지닌 자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흥미로웠다.

한데 오늘 보니 호감마저 생겨났다.

저 인간, 아까부터 자신의 냉기를 받아내고도 나름 버텨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욕심이 슬슬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인간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든 때부터였다.

 

츠스스스스스스!

 

겨울 심장이 분출하는 냉기가 더욱 강력해졌다.

그 냉기를 모조리 흥미로운 인간, 로이드에게 집중했다.

이대로 저 인간을 굴복시키기 위해.

저자의 심장을 점령해 버리기 위해.

그렇게 저자의 몸을 강탈하기 위해.

저자의 몸을 빌려 자유를 얻어내고자.

무자비하고도 형언할 수 없을 냉기의 폭풍을 모조리 로이드에게 쏟아부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죽을 맛이었다.

'...그우와아악!'

로이드는 기겁했다.

그렇잖아도 체력이 바닥나 있던 판국이었다.

왕실 마법사부터 시작해서 갑옷 입은 근위대 기사 여섯 명, 거기에 덩치 좋은 작업반 아재 열아홉 명을 갱도 밖까지 업어 나른 그였다.

심지어 그때마다 그들을 업은 채 높이가 45미터나 되는 수직갱 사다리를 오르기까지 했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만든 따스한 마나를 업힌 이들에게 모조리 전해주느라.

정작 자신은 마나를 거의 사용하지 못해서.

순수한 근육의 힘과 지구력으로만 그 모든 일들을 해낸 통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다리까지 풀리던 마당이었다.

한데 그런 상태에서 압도적인 냉기의 폭풍을 맞이하게 됐다.

'이런 미친! 어째서, 왜 더 추워지는 건데!'

위기감이 확 몰려왔다.

냉동실에 꽝꽝 얼려둔 사골육수 아이스팩이 발등에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정말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로이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이면 운 나쁘게도 냉매 주입실 바로 앞 복도다.

날뛰고 있는 겨울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

따라서 이곳 갱도 내에서도 제일 추운 장소다.

한데 여기서 이대로 탈진해 버리면?

기력이 바닥나서 쓰러지면?

잠들 듯이 기절해 버리면?

'끝장이겠지.'

그 경우에 펼쳐질 최악의 시나리오가 지친 의식 속으로 파파팍 스며들었다.

'여기 쓰러져 기절한 채로 영하 수십 도짜리 냉기에 계속 노출될 거야. 뭐 그래도 죽진 않겠지. 저체온증에 걸리는 일도, 동사하는 일도 없을 거야. 찬사 옵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사할까. 아니. 절대로 그렇진 못할걸.'

몇 시간이고 쓰러져 있는 동안.

영하 수십 도의 냉기에 노출되는 동안.

전신에 심각한 동상을 입게 될 것이다.

특히 옷으로 보호되지 못하고 노출된 얼굴과 두 손이 그러할 것이다.

'피부가 모조리 얼어붙어서 조직이 망가지겠지. 그 아래쪽 근육도 마찬가지. 그렇게 살갗이 모조리 괴사하는 거야.'

말 그대로 썩을 것이다.

광범위하고도 심각한 피부 손상을 입을 것이다.

영원히 회복할 수 없을 후유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런 건 싫어.'

로이드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두 손을 모조리 잘라내야 할 수도 있다.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게 될 것이다.

아니, 정말로 최악의 경우에는 광범위한 피부 손상에 따른 감염과 각종 후유증으로 생지옥 같은 고통을 겪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건, 안 되는데.'

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잘 되지가 않았다.

바닥난 체력.

고갈된 마나.

절전모드로만 돌아가는 아스라한 심법.

그 어떤 것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져 갔다.

결국엔 털썩,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두 손을 뻗었다.

바닥을 짚었다.

그 순간이었다.

"...읏!"

오른손바닥이 시큰하게 아팠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손바닥이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

얼음 조각에 찔린 걸까.

하지만 덕분에 잠깐이나마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순간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자꾸만 고갈되는 체력.

혹독하게 엄습하는 냉기 폭풍.

이대로 있다간 곧 다시 의식이 흐려질 것이다.

차근차근 기절, 혹은 혼절의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해.'

로이드는 판단했다.

계산하고, 예상했다.

결정했고, 실행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옵션 ⑤ : 급속충전을 발동합니다.]

[주위의 무작위한 대상으로부터 대량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곧바로 급속충전 옵션을 발동시켰다.

어금니 으득 깨물었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로이드는 확신했다.

급속충전.

마치 블랙홀처럼 주위의 마나를 흡수하는 옵션.

덕분에 겨울의 심장이 발산하는 냉기를 엄청나게 흡수하게 될 것이란 예상이 가능했다.

그러면?

'흡수된 냉기가 마나하트나 써클에 영향을 주겠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국왕 누님이나 언데드 마스토돈, 헬나이트, 본드래곤에게 마나를 강탈했던 때처럼. 뭔가 뜻밖의 새로운 옵션이 생겨날 거야. 변수가 창출되는 거지.'

그렇게 생겨난 변수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설령 그런 옵션이 안 생겨도 상관없었다.

'최소한 텅텅 빈 마나하트는 가득 채워지게 될 테니까.'

말 그대로 급속충전.

비어 있는 마나하트가 든든해질 것이다.

그 마나로 다시 기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친 근육에 활력을 넣어 뛸 수 있을 것이다.

안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을 뽀동이와 방울이, 작업반장을 데리고 여길 탈출할 힘 정도는 짜낼 수 있을 터다.

'그러니까... 제발 잘 돼라!'

로이드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 기원을 끝으로 그의 의식이 무아지경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포효하기 시작하는 세 갈래 마나써클 사이로 의식이 흐려졌다.

 

키이이이이잉-!

 

그의 주위로 마나의 소용돌이가 생성되었다.

난폭하고도 게걸스러운 마나 흡수가 시작되었다.

범위 내의 모든 것이 흡수의 대상이었다.

바닥의 콘크리트도.

콘트리트 속에 박힌 록볼트도.

록볼트를 둘러싸고 있는 암석도.

주위에 휘몰아치던 냉기 폭풍도 예외가 아니었다.

 

츠스스스스!

 

그 서슬에 겨울의 심장이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저 인간의 심장을 점령하려던 중이었다.

저 인간에게 냉기 폭풍을 집중적으로 쏟아붓던 와중이었다.

한데 저 인간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냉기를 흡수하기 시작하다니?

미친 건가 싶었다.

죽고 싶어 발광하나 싶기도 했다.

한데 그런 의아함은 잠시뿐.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츠스스...!

 

저 인간, 이쪽의 냉기를 흡수하고 가공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었다.

냉기에 서린 마나를 모조리 소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쪽의 마나하트를 채워가고 있었다.

 

츠슷!

 

겨울의 심장은 웃고 말았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인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 인간이 가련하고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이쑤시개를 들고서 앞을 막아서는 꼬마를 목격한 거인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당연했다.

저 인간이 나름 필사적으로 냉기를 흡수하고 있지만.

그렇게 흡수되는 냉기의 양은 이쪽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산보다 거대한 빙산을 스푼 하나로 퍼내려는 행위와 같을 정도니까.

그래서였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어디 마음껏 흡수해 보라는 듯.

겨울의 심장이 더욱 강력한 냉기 폭풍을 발산했다.

로이드의 급속충전 흡수량을 압도하는 폭풍이었다.

그 결과는 사뭇 파괴적이었다.

 

파츠츠즈츳...! 쩌적, 쩌적!

 

급속충전의 무아지경에 빠진 로이드의 전신이 삽시간에 서리로 뒤덮였다.

그의 피부가 실시간으로 얼어붙어 갔다.

서서히.

동시에 확실하게.

그의 노출된 얼굴과 두 손이 동상의 절차를 밟아갔다.

급속충전으로도 미처 흡수하지 못한 냉기가 그의 피부를 손상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기 이전에 덧없는 저항이었다.

희망 없는 몸부림이자 패배가 예정된 항거였다.

그렇듯 로이드의 전신이 점점 서리와 얼음 조각에 둘러싸여 갔다.

하비엘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로이드의 하반신이 완전히 얼음 기둥에 갇혀가던 무렵이었다.

"...로이드 님?"

냉기를 뚫고 갱도 아래까지 내려온 하비엘은 깜짝 놀랐다.

대련 중이던 국왕을 팽개치고 여기까지 달려온 그였다.

달려오는 내내 불길한 감각을 느낀 터였다.

현장에 도착해서는 자초지종을 간략히 듣자마자 갱도로 내려온 마당이었다.

제발 가짜 로이드가 무사하게만 해 달라고.

아무 일 없는 상태이길 기도하고 바라며.

마침내 도착했는데.

"...."

로이드가 이미 반쯤 얼음 기둥에 갇혀 있었다.

하비엘은 보자마자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대론 희망이 없어.'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상황의 흐름이 모두 보였다. 로이드의 마나 흡수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미친 듯한 기세의 마나 흡수.

그럼에도 냉기 폭풍의 마나량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그래서 로이드가 밀리고 있었다.

미처 흡수하지 못한 냉기에 포위되고 있었다.

그 상황을 깨달은 순간.

하비엘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로이드의 급속충전 범위 안으로 들어갔다.

그 즉시 그도 급속충전의 흡수 대상이 되었다.

 

투쿠우웅-!

 

전신 세포의 마나하트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하비엘은 개의치 않았다.

즉시 아스라한 심법으로 대응했다.

세 갈래 써클을 역회전시켰다.

급속충전의 마나 흡수 흐름을 비틀었다. 중화했다.

그렇게 마나 흡수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로이드에게 다가갔다.

한 손을 뻗었다. 로이드의 어깨를 짚었다.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자신의 마나하트.

세 갈래 마나써클.

일깨웠다. 흐름에 순응했다.

로이드의 마나써클 흐름에 올라탔다.

그렇게 그의 세 갈래 마나써클이 로이드의 날뛰는 마나써클과 연결되었다.

똑같이 날뛰기 시작했다.

하비엘의 세 갈래.

로이드의 세 갈래.

도합 여섯 갈래의 마나써클이 하나가 된 것처럼 회전했다. 공명했다. 증폭되었다.

3을 3으로 곱한 효과가 생겨났다.

총 아홉 갈래의 증폭이 일어났다.

증폭과 증폭 사이.

폭발적 활성과.

압도적 흡수가.

주위 모든 것들을 갈기갈기 헤집었다. 찢었다. 집어삼켰다.

 

키이이이이이잉-!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흡수가 시작되었다.

무려 아홉 갈래 마나써클의 급속충전이었다.

거기에 하비엘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머지 한 손으로 로이드의 등을 짚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마나하트가 연동되었다.

로이드의 심장 속 익스퍼트 중급에 다다른 마나하트.

하비엘의 60조 개 세포에 깃든 그랜드 마스터급 마나하트.

크게 뭉친 하나와.

분산된 60조 개.

상반된 두 마나하트 시스템이 연동되고, 연결되며, 호응했다.

이내 멀티 마나하트 체계를 이루었다.

아홉 갈래 마나써클을 보조했다.

이전과 차원이 달라진 급속충전 마나흡수를 소화했다. 정제했다.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차곡차곡. 빈 헛간에 곡식을 채워가듯. 단 한 방울의 마나도 빠뜨리지 않고서. 착실하며 난폭하게. 사납고도 꼼꼼하게. 압도하고, 지배하며, 군림했다.

그동안 하비엘은 생각했다.

'저는 당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로이드의 뒷모습을 향했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느라 이쪽의 손길과 도움에 반응도 하지 않는 로이드.

프론테라 가문의 장남이지만 사실은 가짜인 인물.

다른 세상에서 이곳을 침범한 존재.

하지만 지금은 가문의 유일한 기둥.

가문에 닥칠 위기를 막아내고 자신의 주군인 백작부부를 살릴 희망.

그래서 지금, 자신이 선뜻 나서서 돕고 있는 존재.

'당신이 가문을 어떻게 여기는지. 주군을 어찌 생각하는지. 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혹시 그저 이용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오랜 시간 모두에게 정체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그저 바랄 뿐이다.

'제가 당신을 도와준, 도우고 있는, 과거와 오늘의 무수한 선택이 후회로 이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하비엘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로이드와 연결된 써클과 마나하트.

그 모든 연계와 흡수, 증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무아지경에 빠진 로이드 또한 그 조력에 본능적으로 호응했다.

겨울의 심장이 신물이건 뭐건.

드래곤이 창조한 아티펙트이건 어떻건.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맹목적이었다.

오로지 흡수하고, 집어삼켰다.

자신의 것으로 삼고, 지배했다.

그 폭군과도 같은 흡수력 앞에 겨울의 심장이 밀리기 시작했다.

 

츠스스스스...!

 

겨우 2센티미터 구슬인 신물.

겨울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진동했다.

더욱 흥미를 느껴서였다.

처음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인간을 만난 까닭이었다.

얼마 전부터 흥미가 가던 인간이었다.

드래곤하트와 비슷한 심장을 지닌 이였다.

그래서 궁금했는데.

흥미로웠는데.

지금 보니 너무나 무시무시하면서도 사랑스러워졌다.

저 인간, 비록 다른 인간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무려 자신의 냉기 폭풍을 모조리 압도하듯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로운 충동이 치밀었다.

이대로 저 인간의 일부가 되면 어떨까.

그냥, 저 인간의 일부로 깃들어서 세상을 구경하면 어떨까.

보아하니 충분히 가능할 듯했다.

저 인간, 자신을 소유할 자격도 충분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힘들고 귀찮게 인간의 몸을 지배하고 조종할 필요도 없겠거니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든 때부터였다.

 

츠스스스스스!

 

겨울의 심장이 자신의 모든 정수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침 로이드의 흡수력이 최고조에 달한 때에 맞추어.

자신의 정수와 본질, 그 모든 것을 내밀었다.

이대로 저 인간에게 동화되기 위해.

저자의 심장에 깃들어 버리기 위해.

그렇게 저자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앞으로 펼쳐질 자유를 누려보고자.

자발적이고도 우호적인 냉기의 정수를 모조리 로이드에게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듯. 정중하고도 조심스럽게.

로이드의 마나하트도 그 악수에 선뜻 응했다.

 

츠스스스스....

 

한 계절의 힘을 품은 신물, 겨울의 심장.

그랜드 마스터의 도움을 얻어 경이로운 흡수를 실행하는 로이드의 마나하트.

두 이질적 존재가 하나로 융합되었다.

그 순간.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⑤ : 급속충전의 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키이이이이....

 

로이드의 날뛰던 마나써클이 잠잠해졌다.

광포하게 회전하던 기세가 가라앉았다.

주위에 휘몰아치던 냉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어느새 왕가의 신물 겨울의 심장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로이드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자아를 지닌 신물, 겨울의 심장을 흡수하였습니다.]

[겨울의 심장이 지니고 있던 계절의 힘이 녹아들어 당신의 마나하트에 깃들었습니다. 이 진귀한 경험이 당신의 마나하트 스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새로운 마나하트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마나하트 스킬 전용 옵션 ⑤ : 시간 동결]

284화. 시간을 얼리는 법 (2)

 

 

춥다.

추운 건 예전부터 싫었다.

별다른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아주 어릴 때부터 싫었다.

그런데 너, 겨울의 심장이라고 했나.

덜컥 너 같은 놈이랑 동화되어 버렸다니.

대체 뭐에 좋으라고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그렇지 않냐?

 

덥네요.

더운 건 예전부터 별로였어요.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었죠.

그냥 탄생하던 때부터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쪽, 로이드 프론테라라고 했나요.

덜컥 동화되고 나니까 생각보다 좀 힘든데 말이죠.

대체 뭐에 좋으라고 인간의 몸은 이렇게 더운 걸까요.

그렇지 않나요?

 

어처구니가 없다.

난 동화되라고 한 적이 없다.

내 무의식 속에서 재잘거리라고 허락한 적도 없다.

그런데 멋대로 들어와서 떠드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매너냐, 진짜.

그렇지 않냐?

 

저도 황당하네요.

마구잡이로 흡수한 게 누군데.

전 그저 그쪽한테 약간의 흥미만 있었을 뿐인데.

그런데 멋대로 신물을 흡수해놓고서 투덜거리는 건 무슨 경우일까요, 진짜.

그렇지 않나요?

 

너, 조금 전부터 대놓고 내 독백을 따라 하는데.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쪽, 조금 전부터 자꾸 까칠하게 나오는데.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가요?

 

응, 일부러 이러는 거 맞는데.

남의 몸에 허락도 없이 동화되려면 선물이라도 가져오든가.

 

선물이라면 벌써 가져왔는걸요.

 

가져왔다고?

 

네.

 

어디?

 

여기. 바로 이곳. 오직 지금. 당신의 눈앞에.

 

"...."

로이드는 눈을 떴다.

혹시 잠깐 꿈을 꾼 걸까.

혹은 꽤 오래 뒤척인 걸까.

아니면....

'나, 기절했던 건가.'

눈꺼풀을 깜빡깜빡.

처음에는 실눈으로.

다음에는 점점 또렷이.

시각의 초점이 맞추어졌다.

주위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새파란 하늘이었다.

밝았다.

눈이 부셨다.

직사광선이 눈알을 지질 듯이 쫙 쏟아져 들어왔다.

"아, 눈뽕."

눈살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시야를 가득 채운 새파란 하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로이드 님, 정신이 드십니까."

"...."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보이는 머리통.

그런데 그 두상만으로도 벌써부터 존잘력을 뿜뿜 발산하고 있는 저 모습.

"하비엘?"

"예, 로이드 님. 접니다."

녀석이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녀석의 은발을 간질이듯 흐트러뜨렸다.

그제야 로이드는 자신이 바닥에 눕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많은 이들의 시선도 느낄 수 있었다.

아까까지 함께 일하던 갱도 작업반이었다.

"다들, 여긴...."

로이드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러다가 그만 띵, 엄습하는 현기증을 느끼고 말았다.

하비엘 녀석이 재빨리 손을 뻗어 등을 받쳐주었다.

"갱도 바깥입니다. 이제 안전하십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조금 더 안정을 취하시지요."

"...."

정말이구나.

로이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모두들.

함께 막장에 있던 작업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주위에 있었다.

저마다 따스한 햇볕 아래 도톰한 모포며 겨울 이불을 덮어쓰고서 따뜻한 물을 마시며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품속에선 뽀동이와 방울이도 꼬물거리고 있었다.

비로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무사히 탈출했어. 나도 무사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아까 겪었던 일들이 조금씩, 차례대로 떠올랐다.

'상향식 수직갱 굴착을 감독하다가 낯선 폭발과 진동을 느꼈고, 겨울의 심장, 그리고 혹한의 폭풍....'

그 뒤로 사람들을 구했다.

하나씩 업어서 밖으로 보냈다.

그렇게 스무 번을 넘게 반복했다.

지쳤고, 탈진했던가.

결단을 내렸던가.

'급속충전.'

그 카드를 꺼냈더랬다.

그 후로 기억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급속충전을 쓰는 동안은 완벽한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니까.

주위의 어떤 상황도, 변화도 인식하지 못하게 되니까.

'그럼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로이드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등을 받쳐주고 있는 하비엘을 돌아보았다.

"어이."

"예, 로이드 님."

"네가 날 구한 거야?"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막장에 남아 있던 뽀동이랑 방울이, 작업반장도 네가 구한 거구나?"

"그건, 으음, 글쎄요."

하비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뭘까, 저 애매한 대답은.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라니. 그게 무슨 뜻인데."

"제가 여기서 벌어진 일을 감지하고 제일 먼저 달려와 로이드 님을 도운 건 맞는데, 로이드 님이 언급한 이들을 제가 구한 건지는 확실하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하비엘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은발의 기사는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굉장히 애매모호한 대답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르겠어.'

하비엘은 문득, 아까의 일들을 떠올렸다.

로이드의 급속충전을 도왔던 직후였던가.

놀랍게도 겨울의 심장이 녹아들듯 로이드의 마나하트로 스며든 후였던가.

로이드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더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만 잃었더랬다.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혹은 만취해서 의식이 날아간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채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더랬다.

좀비 같은 걸음걸이로 갱도 안쪽을 향해 걸어갔더랬다.

기겁했다.

황급히 로이드를 따라갔다. 말렸다.

어째서 안으로 더 들어가려는 거냐고.

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그랬더니 저 가짜 로이드가 이쪽을 휙 돌아보았더랬다.

이쪽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여기 책임지는 사람이잖아.'

라고 대꾸했더랬다.

당황스러웠다.

한데 그 뒤로도 로이드의 술주정 같은 혼잣말이 계속 이어졌던가.

'아직 안에 사람 남았어. 작업반장. 나 믿고 현장에 나와서 일 해주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데리고 나와야지. 안 그래?'

'하지만 로이드 님. 그렇다면 제가 들어가서....'

'내가 데리고 나와야 되는 거야. 그게 내 책임이야. 내가 여기 책임지는 사람이야. 책임자라고.'

'....'

말이 통하지 않았다.

고집불통, 막무가내였다.

그때부터였다.

행여나 저 가짜 로이드가 쓰러지는 건 아닐까 염려하며.

아직 냉기가 제법 남아 있는 갱도 안쪽으로 로이드를 따라갔다.

그동안 가짜 로이드의 고집스러운 혼잣말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현장 소장도 그렇고. 감리업체도 그렇고. 시공 업체고 시행사고 다 썩었어. 세상에 말이 돼? 사람이 떨어져서 다쳤는데. 안전그물만 규정대로 잘 설치했으면 안전할 수 있었는데. 사람 척추가 박살 났는데. 평생 휠체어만 타고 다니게 생겼는데. 책임이 없대. 제멋대로 거기 올라가서 움직인 사람 과실이 더 크대. 그게 말이 되냐고.'

'....'

'그렇게 서로 책임 회피나 하고. 자기들보다 다른 쪽에 책임 많다고 떠넘기고. 사람 뺑뺑이 돌리고.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게 만들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될 때쯤에 슬쩍 봉투 하나 꽂아주고. 책임은 없지만 도의상 드리는 거라고. 그러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자고. 마무리? 미친놈들 때문에 내 일 아닌데도 억울해서 진짜.'

'....'

'대체 왜 그렇게들 사는 거냐.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그렇게 뻔뻔하게 세상이 돌아가더라. 진짜 아닌 건데. 그렇게 돌아가더라. 그래서 속으로 얼마나 욕했는지 몰라. 사람 좋은 척하면서 뒤로는 다 챙겨 먹는 소장도. 다른 놈들도 전부. 저런 인간 되지는 말자고. 나중에 기사 자격증 따고 설계 책임지게 되면 내 현장에선 그런 일 없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야.'

'....'

'지금 내가 이거 안 하면. 무섭다고 피하면. 내가 욕했던 놈들이랑 똑같은 인간 되는 거잖아. 그건 아닌 거잖아.'

'...로이드 님.'

가짜 로이드.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내가 모르는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던 걸까.

하비엘은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짐작할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럼에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있었더랬다.

가짜 로이드의 저 투덜거림과 신세 한탄이 진심이라는 것.

그렇기에 의식을 잃은 이 와중에도 비틀거리며 꿋꿋이 갱도 안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도.

'....'

어쩐지 함부로 말리거나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이드가 막장에 도착했더랬다.

거의 의식을 잃은 작업반장을 업었더랬다.

본인도 걸음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

그럼에도 끝끝내 작업반장을 업고, 뽀동 경과 방울 경을 작게 만들어 품에 챙기고.

다시 갱도를 걸어나왔더랬다.

높디높은 수직갱 사다리를 기어코 올라왔더랬다.

그렇게 작업반장을 따스한 햇볕 아래 내려놓고서야 쓰러져 완전히 혼절했더랬다.

그것이 하비엘이 목격한 로이드의 행동이었다.

"...."

어쩌면 오늘 자신은 가짜 로이드의 가장 솔직한 모습을 살짝 엿본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겨울의 심장. 그걸 흡수했어. 모조리. 한 조각의 남김도 없이.'

급속충전을 사용하던 로이드.

그를 도왔던 자신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로이드를 돕느라 연결했던 마나하트와 써클을 통해 또렷이 감지할 수 있었다.

급속충전의 끝자락.

그 마나 흡수력이 한계를 뛰어넘은 순간.

날뛰던 겨울의 심장이 돌연 잠잠해졌더랬다.

로이드의 마나하트로 스며들듯 흡수되었더랬다.

'이 가짜 로이드는 그걸 알고 있을까.'

하비엘은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무려 신물인 겨울의 심장을 흡수한 마당이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가짜 로이드에게 해가 되는 건 아닐지.

혹은 거대한 가능성을 그에게 선물할지.

예의주시하며 로이드를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로이드도 그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다.

'와 씨. 난리 났네, 이거.'

겨울의 심장을 꿀꺽 먹어 버렸다.

그 생각을 하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니, 난 그냥 탈진 상태에서 기력 회복이나 하려고, 마나 좀 채우면 그걸로 그 자리에서 탈출하려고 급속충전 썼던 건데.'

한데 겨울의 심장 자체를 흡수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당연하지. 무려 겨울의 심장이니까. 마젠타노 왕실의 삼대신물이니까.'

그만큼 대단한 아티펙트였다.

반면 자신의 급속충전은?

'물론 대단한 기술이긴 해. 언데드 마스토돈도, 헬나이트도 이 급속충전으로 끝장냈으니까. 하지만 뚜렷한 한계도 있어.'

엄청난 마나 흡수 능력을 발휘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값이 있었다.

급속충전의 한계를 넘어서는 마나를 다 흡수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자면 본드래곤을 제압하려 급속충전을 썼던 때가 딱 그랬다.

'당시에 용용이가 보유하고 있던 마나의 총량이 어마어마했지. 급속충전? 그걸로는 호수에서 물 한 바가지 퍼내는 정도만 흡수했던 게 다였어.'

그래서 유의미한 타격을 거의 줄 수 없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급속충전이 엄청나도 왕가의 삼대신물인 겨울의 심장을 흡수하진 못할 거라고.

해봤자 주위에서 날뛰는 냉기 폭풍을 조금 흡수하는 정도에 그칠 거라고.

다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걸로 텅텅 빈 마나하트나 채우자고.

기력을 회복해서 뽀동이와 방울이, 작업반장을 데리고 탈출하자고.

그렇게만 생각했더랬다.

'한데 이거, 후아. 겨울의 심장 그거, 생각보다 마나 보유량이 허접했던 건가.'

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뜻밖의 결과가 나와 버렸다.

좋기는 좋은데.

흡수해 버린 물건의 가치가 너무 엄청난지라.

어쩐지 뒷수습이 심하게 걱정되었다.

'쯧. 그냥 둘러대야 하나. 겨울의 심장이 폭주하다가 부서졌다고. 하긴 그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 믿음이 가겠지. 내가 그걸 흡수했다고 말한들 누가 믿겠어.'

거기까지 생각하던 로이드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비엘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 이쪽의 시선을 느낀 걸까.

하비엘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녀석이 뜻밖의 귓속말을 했다.

"로이드 님, 그냥 부서졌다고 둘러대십시오."

"...설마, 흡수, 알고 있었냐."

"예. 아스라한 심법 덕분에.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

"다른 이들은 아스라한 심법을 지니지 못했으니까.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왕가의 신물이 박살 난 건데. 그걸 둘러대라는 말을 네가 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네."

"놀라우실 것 없습니다. 제 충성심은 왕가가 아닌 주군을 향한 것이니 말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겨울의 심장을 흡수한 것 때문에 난처해져서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 생기는 걸 막고 싶다는 거지?"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도 모르겠고, 그에 대해 아는 바도 전혀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싹 닫는 하비엘.

녀석을 보며 로이드는 쩝, 입맛을 다셨다.

'이 녀석도 가끔 보면 은근 대놓고 능청스럽단 말이지. 어쨌건, 겨울의 심장은 그냥 폭주 끝에 부서졌다고 둘러대야겠네. 그래도 뒷수습은 제법 골치 아프겠지만.'

신물 손실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현장 관리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국왕이 자신의 편일 테니까.

그리고 오늘, 모두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신물이고 뭐고. 일단 사람 목숨은 살렸잖아. 일단은 그걸로 됐어. 그걸로 만족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추가로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업고서 대피시켰던 왕실 마법사.

뭔지 모를 까닭에 등을 찔려 사경을 헤매던 그 마법사가 응급치료를 받고서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는 소식이었다.

'상처가 주위의 냉기에 얼어 있었던 덕분인가.'

그래서 출혈이 적었으리라.

덕분에 살 수 있었으리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되는 마음에 온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그러자 비로소 시야 한쪽 구석에 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부터 떠올라 있던 스킬 메시지 알림이었다.

'뭐야 이건.'

로이드의 눈길이 움직였다.

 

[새로운 마나하트 스킬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마나하트 스킬 전용 옵션 ⑤ : 시간 동결]

 

'시간 동결?'

로이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새로 생성된 옵션이 시간 동결이라니.

'설마 겨울의 심장을 흡수하면서 생긴 옵션인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남을 느끼며 옵션 상세 정보를 열었다.

 

딩동.

 

[스킬 전용 옵션 ⑤ : 시간 동결 - 마나하트에 깃든 겨울 심장의 권능을 발현하여 세상의 시간 흐름을 동결합니다. 이때 시전자는 시간 동결의 예외가 되는 미동결 지역을 임의로 지정할 수 있으며, 미동결 지역의 범위 한계는 시전자가 보유한 마나의 총량에 의해 결정됩니다. 미동결 지역 내에서는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릅니다.]

 

[상세 정보 (1) : 미동결 지역의 범위는 옵션 발동이 취소될 때까지 변경이 불가능하며, 옵션 유지의 제한 시간은 1년입니다.]

[상세 정보 (2) : 시전자가 미동결 지역을 벗어나는 경우, 그 즉시 옵션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상세 정보 (3) : 미동결 지역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시전자 포함)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겨울 심장의 냉기로 인한 생체 냉동 효과의 적용으로 노화 현상을 겪지 않습니다.]

[상세 정보 (4) : 옵션 발동에는 1회당 3,000 RP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미친. 대박."

옵션 상세 정보를 다 읽은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285화. 시간을 얼리는 법 (3)

 

 

"...미친. 대박."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절로 그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

시간이라는 것.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는 이 세상의 도도한 흐름이라는 것.

그걸 어느 정도는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니까.

지금 눈앞에 떠올라 있는 스킬 옵션의 설명이 진짜 사실이라면, 정말로 자신이 시간의 흐름에 관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내 마나하트에 깃든 겨울 심장의 권능을 발현하는 거라고? 그래서 세상의 시간 흐름을 동결할 수 있게 됐다고?'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나치게 신적이거나 초월적인 능력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들뜨면 안 돼.'

로이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함부로 환호하지 않았다.

기쁨에 취해 들뜨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냉철한 기분으로 옵션 상세 내역을 꼼꼼히 요모조모 훑었다. 따졌다. 궁리하고, 의심했다.

'너무 좋은 옵션이니까. 이거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올 법한 능력이니까.'

원래 지나치게 달콤한 조건이나 혜택은 반드시 함정을 지닌 법이다.

세상에 공짜 없다.

퍼주는 일도 없다.

누군가가 엄청나게 좋은 혜택이라며 꿀 묻은 리트머스 종이를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댄다면, 그 인간이 사기꾼이 아닌지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그것이 로이드의 지론이었다.

여태껏 살아남은 인생 비결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시스템 메시지가 날 속인 적은 없었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게 좋은 옵션이 뜬 거잖아. 그러니까 의심해야지. 점검하고 확인해봐야지.'

그러니 기쁨에 들뜨면 안 된다.

차분하게 정리부터 좀 해봐야 한다.

'요약하자면 세상의 시간을 동결시켜서 멈추는데, 그 와중에 내가 원하는 범위의 장소를 동결 예외 지역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거네. 그렇게 생기는 미동결 지역에서는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긴 하는데, 노화 현상은 겪지 않는다는 거고.'

곱씹어볼수록 엄청난 성능의 옵션이었다.

물론 제약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한번 발동한 옵션은 1년 유지가 한계. 옵션 발동을 취소하기 전까지는 미동결 지역을 변경하는 게 불가능. 그리고 내가 미동결 지역에서 벗어나는 즉시 옵션 발동이 취소되고. 게다가 아무렇게나 발동할 수 있는 옵션도 아니야. 한 번 발동에 RP가 무려 3,000이나 필요하니까.'

로이드는 현재 자신이 모아둔 RP를 점검해보았다.

'으음... 2,665. 약간 모자라네.'

생각 같아선 당장 옵션을 발동해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아둔 RP가 살짝 모자랐다.

'조만간 RP 모으는 노가다도 좀 해봐야겠네.'

당장 호감도를 왕창 올릴 수 있을 인물, 혹은 건덕지(?)가 없을까.

시간이 난다면 따로 수고를 들여서라도 3,000 RP 이상을 모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옵션이 설명 그대로의 효과를 발휘하는 거라면 나한테 이보다 좋은 일이 없을 테니까.'

두근, 두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들뜨지 말자고 거듭 다짐을 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간 동결 옵션.

이걸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할 방안이 무궁무진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가장 눈앞의 일에 당장 활용하자면,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의 재료를 찾고 공사를 진행하는 데에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야. 나한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래서 요즘 은근 초조하던 참이니까.'

문득, 엔딩 스포일러로 엿본 미래가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될 운명의 복원 현상도 떠올랐다.

그 엿 같은 사건의 시작이 이제 2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터였다.

한데 그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게 문제였다.

초조함의 원인이었다.

'2년 반 안에 진실의 보옥의 핵심 자재를 다 찾아내야 해. 그걸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몰라. 게다가 다 찾고 나면? 보옥을 지어야지. 짓고 나면?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아낼 방법을 물어보고 답을 얻어야 할 거야.'

그런데 답을 얻는다고 일이 끝날까.

그건 아닐 터였다.

'답을 얻으면 그걸 실천하느라 또 뼈 빠지게 움직여야겠지.'

어떤 답일지는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들어갈지도 미지수였다.

한데 남은 시간이 고작 2년 반이라 생각하면 밤잠을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히던 요즘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 대박 옵션이 생긴 거야. 진실의 보옥 핵심 자재를 찾는 과정, 거기에 보옥 건설 과정까지. 공사를 할 때마다 그 공사 현장을 미동결 지역으로 지정해서 시간을 얼려 버리면 돼. 그러면 세상의 시간이 멈춘 사이에 공사를 뚝딱뚝딱 마칠 수 있어. 공사에 몇 개월이 걸리든, 1년 이내라면 문제없어. 시간이 안 흘러가니까.'

그럼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을 듯했다.

'게다가 그런 난리 부르스를 다 펼치며 애를 썼는데도 운명의 복원 현상을 못 막을 거 같으면? 좀 극단적이지만 프론테라 영지를 미동결 지역으로 만들어서 시간을 멈춰 버리면 돼. 그 안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버는 거지. 대책을 궁리하면서. 세상을 멈춰둔 채로.'

정말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막다른 골목에서의 임시방편으로나마 쓸 수 있을 방법일 듯했다.

'어쨌건 그런 선택지가 생겼다는 자체만으로도 이거, 엄청나게 유용한 거야.'

새삼 더 열심히, 더 악착같이, 더 야비하고 야물딱지게 RP를 모아야겠다고도 그는 다짐했다.

한데 그때였다.

뜻밖의 목소리가 고막을 숑숑 찔러왔다.

"그대는 괜찮은가?"

"...어?"

로이드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보게 되었다.

햇볕을 등지고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실루엣.

물결치는 단발머리.

입가에 걸린 쓴웃음.

"전하?"

세 발짝 앞쪽.

언제 다가왔는지 국왕 알리시아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로이드는 얼른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국왕 전하 만세. 프론테라 백작가의 장남, 로이드 프론테라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국왕 전하를 뵈옵습니...."

"이런 상황에서 예법은 되었도다. 짐은 그대에게 무사함을 우선 물었건만."

"예?"

"그대가 괜찮은지를 말이야."

"아, 보시다시피 저는 말짱하옵니다, 전하."

"그런가."

"예, 그렇사옵니다."

로이드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처함을 느꼈다.

'아 씨. 큰일 났다. 아직 변명거리 생각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겨울의 심장을 흡수해 버렸다.

국왕에게 정치적 신세까지 지면서 빌린 보물인데.

그냥 보물도 아니고 무려 왕가의 신물인데.

그걸 먹튀(?) 하게 생겼다.

한데 이 사태를 둘러댈 적당한 변명거리를 아직 떠올려두지 못한 터였다.

뜻밖으로 얻게 된 새 옵션 '시간 동결'을 살펴보느라.

그 효과를 짐작하고 활용법을 생각해보느라.

들뜨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내심 들떠 버렸던 탓에.

정작 중요한 이번 일의 변명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한데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게 국왕과 마주쳐 버렸다!

'쓰읍. 뭐라고 하지.'

로이드의 잔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오늘 이곳 현장에서 벌어졌던 일들.

사고 과정에서 보았던 여러 정황들.

그 속에서 자신이 취했던 행동과 과정, 결과.

앞으로 예상되는 국왕의 반응과 사회적 반향.

그 모든 요소들을 떠올리고, 조합하고, 예측했다.

나름의 시나리오를 돌리며 변명거리를 뚝딱뚝딱 조립했다.

그걸 야물딱지고도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혓바닥에 장전하고 발사했다.

아니, 발사하기 직전.

국왕 알리시아의 물음이 먼저 날아왔다.

"상황으로 보아 겨울의 심장은 이미 유실되었겠군. 맞는가?"

"아, 예. 그것을 따로 고하여 드리옵자면...."

"되었다. 짐은 이미 정황을 파악하고 여기까지 와서 그대와 대면하고 있노라."

"...."

로이드는 국왕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나 눈빛을 정확히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뭔가 묘한 뉘앙스의 말투와 기색이었다.

설마 국왕 누님.

화가 난 걸까.

'나 같아도 중요한 물건 빌려줬는데 망가뜨리면 화낼 테니까.'

그냥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 할까.

어쩌면 그게 국왕과의 관계를 위해선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때였다.

국왕의 입술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짐은 들었노라. 그대에게 구조받은 근위대원이 말하더군. 냉매 주입실, 그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안쪽에서 문제가 생겨나 있던 걸 봤노라고. 두 왕실 마법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노라고. 하나는 찔리고, 하나는 찔렀던 것으로 보였노라고 말이다."

"...."

"아마도 겨울의 심장이 폭주한 것은 두 마법사의 알력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겠지. 비록 아직은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할 터이지만, 근위대원의 그 증언으로 엿보이는 정황만으로도 그대에게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만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아니겠는가."

"...."

"또한 짐은 들었도다. 그대가 오히려 목숨까지 걸고서 짐의 마법사와 근위대원들을 구해냈음을. 또한, 안쪽에 남겨진 작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선뜻 나섰음을. 한데 어찌 이번 일을 두고서 그대를 무작정 비난만 할 수 있겠는가."

"으음, 전하. 외람되오나...."

"고하라."

"대체 어찌하여 저를 이토록 두둔하여주는 것이시온지."

"궁금한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로이드는 솔직하게 물었다.

이렇듯 대놓고 자신을 두둔해주는 국왕.

그런 그녀의 반응이나 태도가 뜻밖이었다.

한데 이쪽의 물음에 국왕이 또 피식 웃었다.

"짐은 그대를 섣불리 두둔하거나 옹호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알려주는 것일 뿐."

"무엇을 위한 알림이시옵니까."

"귀족원의 추궁을 받을 때 그대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써먹을 진술의 예시문이랄까."

국왕의 피식거리는 미소가 조금은 은근해졌다.

"어쨌거나 오늘 그대의 현장에서 사고가 터졌으니까. 그 결과 왕가의 신물인 겨울의 심장이 유실되었으니까. 이 사태는 짐의 개인적 감정과는 별개로 굉장히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

"예, 그렇사옵니다."

"그래서이니라. 아마도 겨울의 심장 사용에 만장일치로 동의한 귀족원이 이 일을 반드시 걸고넘어질 터. 아마 그들이 근시일 내로 그대를 재판정에 올리기 위한 고발장과 공소장을 제출할 것이야."

"고발장, 공소장을 말이시옵니까?"

"그래."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짐의 공신이니까. 따라서 면책 특권을 지녔으니까. 귀족원이 그대를 판결하고 심판할 수 없으니까. 그 권한은 오로지 짐에게만 주어져 있으니까. 하니 그대를 재판해달라는 요청을 짐에게 올릴 것이란 뜻이지."

"아."

역시 그런 거구나.

'대강 예상대로네.'

로이드는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짐 또한 그러한 귀족원의 요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까. 오히려 짐이 분노하며 나서서 그대를 재판정에 올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한데 어찌하여 전하께오서는...."

"그대를 두둔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인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짐은 그대가 마음에 드노라."

"...예?"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싱긋 웃는 국왕의 눈초리.

어쩐지 장난기마저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몇백 년이 지나도록 두어 번밖에 못 써먹는 까다로운 신물보다, 당장 수십 년을 곁에 두며 유용한 조력을 줄 수 있는 그대라는 존재가 짐에게는 훨씬 유용하도다. 그렇지 않겠는가."

"으음, 대놓고 굴려먹겠다는 말씀을 그리 하시오면...."

"이건 인재를 위한 투자로다. 그렇지 아니한가."

"아니하옵니다, 전하."

"쯧. 사람이 어찌 그리 대놓고 야박하게 거절을."

"거절이 아니라 송구한 마음에 부려보는 투정이라 여겨주소서."

로이드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편으로 미안하고, 한편으론 고마웠다.

'이거, 앞으로도 대놓고 나 실드 쳐주겠다는 거네. 솔직히 왕가의 신물이 날아간 건데, 그걸 대범하게 눈감아주겠다는 거잖아.'

역시 국왕 누님.

보통 사람이 아니다.

대신 이쪽을 부려먹겠다고.

신물보다 유용하게 굴려먹겠다고.

은근하고도 노골적인 의사를 드러내는 점도 그랬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 욕심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긴. 그동안 누님이 나한테 진짜 많이 퍼줬지. 국왕 시해 사건 때 내가 급속충전으로 마나 쪽쪽 빨아먹었을 때도 딱히 질책하지 않았고. 몬스터 도미노 난민 사태 때부터 지금까지 지원 물자도 빵빵하게 보내주고 있고. 그 밖에도 온갖 특별대우에 우대까지.'

생각해보면 눈앞의 국왕 누님.

자신이 오늘날 험한 풍파를 헤쳐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뜻 국왕의 머슴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내가 국왕 누님한테 해준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쪽이 받은 도움과 지원만큼.

저쪽에게 해준 일도 많다.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

그러니 이번 도움도 기꺼이 받자.

나중에 그만큼 갚아주면 될 테니까.

"실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로이드는 솔직하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이렇게 모두가 무사하다는 사실에도 내심 감사했다.

이제는, 사고 후의 수습에 매달릴 때였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사고가 났던 현장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다행히 이미 뚫어두었던 갱도의 손상은 거의 없었다.

미리 동결 공법으로 얼려두었던 땅에도 변형이 없었다.

유출됐던 냉기가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땅이 다 녹기 전까지 나머지 공사가 충분히 진행 가능할 듯했다.

대신 다른 일이 로이드의 공사 재개를 막았다.

귀족원이 로이드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왕가 신물 유실 사고의 책임을 심판하기 위한 공소장을 제출했다.

'국왕 누님이 말했던 그대로네.'

이후의 일도 국왕의 예상 그대로 진행되었다.

국왕이 귀족원의 공소장을 수락했다.

이쪽에 대한 재판 일정을 발표했다.

그동안 로이드는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며칠의 시간이 추가로 지나갔다.

마침내 국왕이 주재하는 재판의 날이 찾아왔다.

"준비되셨습니까, 로이드 님. 재판 출석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어, 잠깐만."

재판의 날 아침.

로이드는 거울을 마주했다.

자신을 보채는 하비엘의 말에 여유롭게 대꾸했다.

"조금만 기다려. 하고 있던 준비운동만 마저 하고."

"준비운동이라니요?"

"혓바닥 운동."

자고로 재판정의 다툼에선 현란한 혀놀림이 무기가 되는 법.

거울을 향해 짓궂게 웃으며, 로이드는 혀를 야물딱지게 촵촵 적셨다.

286화. 피고인의 협박법 (1)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흔들렸다.

장터의 짐마차처럼 심하게 덜컹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 마차라고 해도 자동차와 같은 현대적 서스펜션 장치가 없으니 덜컹거리는 건 마찬가지.

노면의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궁둥짝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숑숑 박히는 느낌이었다.

'뭐,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 앉지도 못하고 옆 사람이랑 겨터파크 일기토 벌이면서 낑겨 타는 마을버스보단 낫네.'

로이드는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

잠시 떠오르는 한국에서의 기억.

그때보다는 훨씬 낫다.

이렇게 최고급 가죽 빵빵 크고 부드러운 시트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까.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맞은편에 있는 녀석과 여유롭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냐, 하비엘."

이쪽의 말에 하비엘이 고개를 들었다.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지 않냐는 것이신지. 그나저나 로이드 님은 걱정 안 되십니까."

"걱정이라니?"

"오늘 재판 말입니다."

녀석이 살짝 흐트러진 서류를 툭툭 쳐서 정리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내밀었다.

"당장 잠시 후면 재판정에 도착할 겁니다. 도착한 뒤엔 미적거릴 틈도 없이 재판이 열릴 거고 말입니다. 한데 이거, 미리 안 읽어보셔도 괜찮겠습니까."

"응. 괜찮아."

"이게 이번 재판에서 주로 다루어질 쟁점을 정리한 서류인데도 말입니까."

"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읽어봐도 된다.

진짜다.

"그거, 안 읽어도 대강은 내용 다 알고 있으니까."

"흠, 정말이십니까."

"의심되면 시험해보든가."

로이드는 자신 있게 대꾸했다.

하비엘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좋습니다. 귀족원이 로이드 님을 고발한 가장 주요한 혐의가 무엇일까요."

"왕가의 신물인 겨울의 심장 유실. 그 사고가 벌어진 현장의 총책임자가 나니까, 사고 자체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지."

"정답입니다. 1점."

"...뭐냐. 점수까지 매기는 거야?"

"계속 가겠습니다."

"잠깐."

"예?"

"만점이 몇 점인데."

"100점입니다."

"그런데 딸랑 1점이었다고? 방금 퀴즈가?"

"제일 기본적이고 간단한 문제였으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자신이 무슨 혐의로 고발당했는지도 모르고서 재판정으로 가는 거라면 그냥 당장 마차 밖으로 뛰어내리는 게 나을 겁니다."

"이 마차, 지금 현수교 건너고 있거든?"

"예. 수온 체크하기 좋은 아침이군요."

"...."

"다음 퀴즈 가겠습니다. 귀족원이 로이드 님을 고발하면서 요구한 처벌이 무엇이었습니까."

"공신 지위 박탈."

"정답입니다. 10점."

"오오."

"섣불리 기뻐하지 마시죠. 저들이 공신 지위 박탈을 통해 노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특권 몰수와 명예 실추가 목적이겠지. 특히나 공신의 지위를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걸 몰수당해 봐. 내 위신이 얼마나 상하겠어. 차라리 안 받았던 것보다 못하게 될걸. 아마도 왕국 역사서에 남을 불명예가 되지 않을까."

"예, 정답입니다. 30점. 게다가 그렇게 공신 지위를 박탈당하고 나면, 저들의 진짜 공격이 시작되겠지요."

"아마 그렇겠지. 공신 지위가 주는 불체포 특권과 국왕 면책 특권이 사라질 거니까."

"예. 로이드 님을 체포하고, 귀족원이 주재하는 재판정에 로이드 님을 세우게 될 겁니다."

"쯧. 이 동네는 일사부재리 원칙도 없냐."

"예?"

"아니. 어쨌건, 그렇게 방패를 걷어내듯이 내 공신 지위를 없앤 뒤에 심장을 찌르려는 거겠지."

뻔히 예상되는 바였다.

물론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귀찮아질 것이 염려되긴 했다.

하비엘의 물음이 이어졌다.

"하면, 저들이 이렇듯 로이드 님을 공격하는 이유도 짐작하고 계십니까."

"어."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저 서류를 안 읽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내가 너무 잘생겼잖아."

"땡. 감점 100점입니다."

"...."

"진지하게 임해 주시죠. 곧 도착하면 재판입니다."

"쯧. 내가 지방 출신 귀족이니까. 왕도의 귀족들이 보기엔 벼락출세한 애송이니까. 게다가 예전에 아카데미의 비리를 고발하기도 했으니까. 당시에 줄리앙을 괴롭히는 데에 가담했던 제법 많은 귀족 자제들과 교수들이 국왕의 분노 앞에 된서리를 맞았으니까. 그때 나한테 앙심 품은 가문이 제법 될걸."

"알고 계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다음 문제 가겠습니다."

"잠깐. 정답인데 점수는?"

"없습니다."

"왜?"

"턱도 없는 이상한 답을 먼저 말씀하셨으니까요."

"야, 나도 이리저리 디테일하게 살펴보면 그래도 좀 잘생겼...."

"다음 문제. 오늘 재판정에서 귀족원이 주장하는 로이드 님의 혐의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려면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빌어볼까?"

"...."

"진짠데. 진심인데."

"로이드 님."

"어. 왜."

"오늘 재판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깔끔하게. 완승으로."

정말로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그 비결까지 녀석에게 알려줄 짬은 나지 않았다.

어느새 마차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다 왔나 본데, 가자."

하비엘 녀석이 딴지를 걸기 전에 재빨리 마차 문을 열었다.

왕실 법원이 보였다.

오늘 재판이 열릴 장소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재판 준비는 금방이었다.

예복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법정 관리인에게 재판 절차를 간단히 안내받았다.

법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이나 발언하는 순서 등등에 대한 안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었다.

'후아. 여기 구조 인상적이네.'

피고인석에 선 로이드는 속으로 감탄을 삼키며 재판정을 둘러보았다.

위압적이었다.

마치 야구장을 축소한 듯한 구조의 실내.

야구 경기장의 타석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신의 피고인석이 있었다.

나머지 배석도 야구장과 비슷했다.

이쪽을 기준으로 오른쪽 1루수 자리에 이쪽을 추궁할 귀족원장이.

왼쪽인 3루수 자리에는 왕에게 판결을 조언할 법무부 관리들이.

그리고 중앙의 투수 위치에는 국왕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관람객? 들은 외야수 자리에서 이 판결을 구경하는 거고. 쯧. 심지어 여기, 배석의 높낮이가 극단적으로 맞춰져 있어. 이쪽이 대놓고 제일 낮네.'

피고인석이 제일 낮았다.

그냥 낮은 게 아니라 3미터쯤 낮았다.

대학 강의실처럼 제법 가파른 경사가 있었다.

덕분에 나머지 자리에서 모두가 이쪽을 내려다보는 구조였다.

'가만 보니 이거, 피고인에게 심리적 압박이 몰빵으로 가해지는 배치구만. 모두가 이쪽을 내려다보면서 이쪽의 죄와 책임을 추궁하고, 얼마나 심한 벌을 줄 것인지를 논하고. 이러면 피고인석에 선 사람은 저절로 위축되지. 위압감을 느끼고 어깨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겠어.'

로이드는 쓴웃음을 삼켰다.

자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그러니까 재판 후딱 끝내고 공사나 재개하자.

얼른 타우랑가나 뽑아내자.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국왕의 개정 선언이 시작되었다.

"짐이 선포하노라."

국왕 알리시아가 좌석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엄숙한 침묵이 재판정을 점령했다.

그 침묵 위에 국왕 알리시아의 선언이 뒤덮였다.

"금일의 본 재판은 동년 동월 9일 왕성 특수 보수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겨울의 심장 냉기 유출 사고와, 그에 따른 겨울의 심장 유실 및 그 밖의 각종 손실에 대한 책임을 다룰 것임을 밝히노라. 또한, 짐은 금일의 판결에 앞서 이번 사고로 고통받은 현장의 왕실마법사, 근위기사, 작업반 모두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바이다."

그녀의 눈길이 재판정의 모두를 훑었다.

그러다가 이쪽을 향해 멈추었다.

"우선 피고인."

"예, 전하."

재빨리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녀의 물음이 떨어졌다.

"우선 피고인의 신분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그대 피고인은 프론테라 백작가문의 후계자이자 장남인 로이드 프론테라가 맞는가?"

"맞사옵니다, 전하."

"좋다. 짐이 알리노니, 피고인인 그대는 본 재판정에서 자의적 판단에 의해 진술하지 아니하거나 개개의 질문에 대하여 진술을 거부할 권리를 지니며, 그 권리에 대한 책임 또한 피고인 본인이 감수하게 될 것이다. 그대 피고인은 짐이 고지한 바를 이해하였는가?"

"이해하였사옵니다, 전하."

"좋다. 그럼 토스카노 공작."

국왕의 시선이 귀족원장 토스카노 공작에게로 돌아갔다.

불독처럼 땅딸막하면서도 단단한 인상의 장년인이 국왕에게 예를 표했다.

그가 바로 귀족원장인 토스카노 공작이었다.

'저 사람이 날 고발했지. 물론 저 사람만의 독단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로이드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 나라 중앙 귀족을 대표하는 실세 중의 실세.

왕실과도 대대로 혈연이 닿아 있는 토스카노 공작가의 가주.

토스카노 공작을 향한 국왕의 선언과 고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토스카노 공작. 그대는 왕국의 엄정한 법과 정의 실현에 입각하여 금일의 본 재판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대는 본 재판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여야 할 것이며, 공소장에 기재된 피고인의 죄목을 증명하고 쟁점을 논하는 과정에서 그대가 기대하는 답을 암시하여 질문을 유도하는 일체의 유도신문 행위를 금하여 공정한 재판정의 질서를 존중 및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대는 짐이 고지한 바를 이해하였는가?"

"모두 이해하였사옵니다, 전하."

토스카노 공작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국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눈길에 희미한 걱정이 서렸다.

'과연 로이드 프론테라가 오늘 재판에서 손해를 면할 수 있을까.'

생각해볼수록 걱정이 됐다.

절로 회의감이 가득 들었다.

오늘의 재판정에서 피고인을 심문할 역할.

로이드에 대한 공소장을 제출한 귀족원의 수좌.

토스카노 공작 때문이었다.

'저 토스카노 공작. 참으로 완고한 원칙주의자니까.'

불독 같은 인상답게 엄청나게 완고했다.

무엇보다도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과는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고집 센 귀족원장이 오늘, 작정하고 로이드의 죄를 따지고자 자리에 섰다.

국왕 알리시아는 그 점이 가장 염려가 되었다.

'로이드 프론테라를 좀처럼 쉽게 놓아주지 않으려 들 테니까. 한번 약점을 물어 버린 불독처럼 끈질기게 매달리며 상대의 죄와 책임을 밝히려 덤빌 테니까.'

게다가 토스카노 공작의 까다로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자의 배후에는 귀족원 전체가 있어.'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국왕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아무리 오늘의 재판을 자신이 주재한다고 해도.

최종 판결을 자신이 내린다고 해도.

무턱대고 로이드를 두둔할 수만은 없는 자신이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무겁고 심각하니까. 무려 왕가 삼대신물 중의 하나가 유실되어 버린 사태니까.'

겨울의 심장은 실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왕가의 시조인 영웅왕 미카엘 마젠타노가 빙룡 티라누스에게 선물 받은 아티펙트였다.

한 해 겨울의 추위를 모조리 집어넣은 무시무시한 전략병기였다.

한데 그게 유실되어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적 손실이었다.

금액으로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막심한 손해였다.

아무리 자신이 국왕이라도.

아무리 로이드가 공신이라도.

뚜렷한 근거나 명분 없이 함부로 감쌀 수 없는 사안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에 겨울의 심장을 사용했던 절차도 문제가 되고 있었다.

'원래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가 있을 경우에만, 왕의 요청과 귀족원의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비로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자신이 그 절차에 따라 귀족원에 겨울의 심장 사용 요청을 넣었더랬다.

처음엔 귀족원이 난색을 표했다.

왕성의 긴급 보수 공사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는 아니지 않느냐는 것.

그것이 귀족원의 최초 입장이었다.

지극히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반응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이 정치적 부담을 지고서 귀족원의 의사결정권을 지닌 귀족들을 하나하나 설득했다. 때로는 회유하고, 뇌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귀족원의 만장일치 동의를 얻어냈더랬다.

한데, 그렇게 정치적인 무리와 부담을 지면서까지 사용을 결정한 겨울의 심장이 유실된 것이었다.

즉, 따지고 보면 겨울의 심장이 유실된 이 사태에는 국왕인 자신의 책임도 조금이나마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로이드 프론테라를 티 나게 두둔할 수만은 없어. 자칫 그랬다간 귀족원 전체와 척을 지게 될 터이니까.'

국왕 알리시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자신이 국왕이지만.

강력한 왕권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귀족원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왕의 지도력과 귀족원의 협력.

그 바퀴가 제대로 조화롭게 굴러가야 국정이 잡음 없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터였다.

국왕으로서의 자신의 정통성 또한 탄탄하게 유지될 터였다.

그래서 염려되었다.

귀족원장인 토스카노 공작.

저자가 로이드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 작정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티 나지 않도록 명분을 챙기며 로이드를 보호할까.

국왕 알리시아가 오직 그러한 걱정과 궁리, 수심에 잠긴 사이, 귀족원장 토스카노 공작이 좌석에서 일어났다.

귀족원장의 발언이 시작되었다.

"신성한 이곳 재판정, 그리고 위대하신 국왕 전하께 경의를 표합니다. 그럼 진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피고인인 로이드 프론테라는 위대하신 국왕 전하에 대한 시해 시도를 막아낸 혁혁한 공이 있으며, 동부의 재난에 당당히 맞서 영지를 수호하고 수만 명의 피난민을 구제한, 실로 만인이 본받을 만한 인물입니다."

"...."

뭐지.

귀족원장.

저 작자가 왜 지금 로이드를 칭찬하는 거지.

국왕 알리시아는 의아함을 느꼈다.

로이드를 향한 저 뜬금없는 칭찬 릴레이.

저게 무얼 위한 포석인지 파악하려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그 사이, 귀족원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피고인 로이드 프론테라는 나마란에서 벌어진 환란에도 당당히 맞서는 만인의 귀감을 보였으며, 본드래곤의 위협에도 아랑곳 않고 국왕 전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왕실 수호에 누구보다 앞장선 바가 있습니다. 또한, 그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왕실의 공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겨울의 심장이 날뛴 이번의 불운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뭘까, 진짜.

좀 많이 이상한데.

국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심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낮게 숙덕였다.

그러건 말건 귀족원장의 뜬금포 로이드 칭찬 릴레이가 계속 이어졌다.

"그는 겨울의 심장이 폭주하는 초유의 상황에서도... 어쩌고저쩌고... 누구나 두려울 만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서... 재잘재잘... 왕가의 소중한 백성인 작업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소매를 걷고서... 이러쿵저러쿵... 실로 그는 최고로... 블라블라...."

"...."

저 인간이 미친 걸까, 설마.

국왕은 진심으로 귀족원장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건, 예상과 너무나 다른 전개였다.

'설마 귀족원장이 미친 건 아닐 테고.'

원래는 로이드를 고발하고 비난하고 그의 죄를 추궁해야 할 귀족원장인데.

그렇기에 공소장을 제출하고 저 자리에 선 것일 텐데.

대체 어째서 시작부터 끝까지 로이드를 두둔, 아니, 칭찬을 넘어서 찬양할 기세로 열심히 침을 튀기고 있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혹여 자신이 괴상망측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국왕 알리시아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만큼 어이가 없었다.

황당했다.

그런 심정은 배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서로를 돌아보며 눈길을 나누었다.

귀족원장이 오늘 좀 이상한 것 같다고.

혹여 자신이 로이드의 변호인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다들 조심스럽게 숙덕이고, 속삭이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렇듯 귀족원장의 로이드 찬양이 용비어천가를 기록할 기세로 계속 이어지는 사이.

로이드의 입가에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살포시 걸려 있었다.

그는 보람차게 생각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고.

혈연, 학연, 지연.

그걸 엮은 협박과 뇌물이 안 먹히는 세상은 없는 법이라고.

287화. 피고인의 협박법 (2)

 

 

달그락. 달그락.

 

마차가 흔들거렸다.

장터의 짐마차와는 다른 고급진 덜컹거림.

하지만 아무리 고급 마차라고 해도 자동차 같은 서스펜션 장치가 없으니 덜컹거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재판이 무사히 끝났으니까.

자신의 의도대로 결과를 받았으니까.

'뭐, 다행히 귀족원장도 그렇고, 귀족원의 다른 귀족들도 그렇고. 워낙 잃을 게 많은 양반들이라 협박이 제대로 먹혔지.'

로이드는 희미하게 싱긋 웃었다.

잠시 떠오르는 재판정에서의 기억.

후련했다.

통쾌했다.

귀족원장인 토스카노 공작이 이쪽의 뜻대로 움직여줬다.

그 고집불통으로 유명한 양반이 이쪽의 요구를 다 들어줬다.

덕분에 이렇듯 산뜻한 기분으로 최고급 가죽 빵빵 크고 부드러운 시트에 앉아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렇지 않냐, 하비엘."

이쪽의 말에 하비엘이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가 그렇지 않냐는 말씀이신지. 그나저나 로이드 님은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어허. 짓이라니?"

"오늘 재판 말입니다."

녀석이 이쪽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토스카노 공작 말입니다. 그 귀족원장, 애초에 로이드 님의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를 규탄하고 로이드 님을 비난하는 데에 앞장섰던 인물이지 않습니까."

"응. 그랬지."

"한데 어째서 그가 오늘 재판정에서 돌연 태도를 바꾼 건지, 오히려 로이드 님을 옹호하고 나섰던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거야? 내가 뭔가 수작질을 부렸을 거라고?"

"예."

"헐, 수작질이래. 이젠 대놓고 그런 말을 써놓고도 태연해."

"수작질이라는 단어는 로이드 님이 쓰셨습니다만."

"어쨌건, 내가 뭔가 중간에서 야료를 부렸고, 그 때문에 귀족원장과 귀족원의 태도가 싹 바뀐 거라는 말이잖아. 맞지?"

"예, 맞습니다. 정말로 뭔가 일을 벌이셨습니까?"

"어."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부정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협박을 했지."

"협박이라니요."

"말 그대로 협박. 귀족원이 날 재판정에 올리려는 공소장을 제출한 다음 날에 말이야."

"대체 무슨 협박을 하신 겁니까. 숙소에서 나간 적도 없으셨는데."

"편지를 보냈어. 꼬밍이를 통해서. 베르가모 후작에게."

"편지요?"

"응."

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떠올랐다.

겨울의 심장이 폭주했던 사고.

그 사고가 수습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신은 남들이 보던 것처럼 그저 쉬기만 하진 않았다.

뒹굴거리는 척하면서 할 건 다 했다.

'사고 현장 분석을 했지. 다행히 사고 현장에 도착하던 그때, 무의식중에 측량 스킬을 켜고 있었거든. 덕분에 현장의 모든 데이터가 스캔 될 수 있었고.'

폭발에 휩쓸렸던 냉매 주입실.

부서진 특수 제어 상자.

주위에 쓰러져 있던 두 왕실 마법사와 여섯 근위기사.

사물이 부서지고 흩어진 모양.

파편의 배치.

쓰러진 사람들의 자세와 위치까지.

모든 정보가 스캔되어 데이터로 남아 있었다.

덕분에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면서도 그 상황들을 고스란히 꺼내보고, 찬찬히 분석하며, 빈틈없이 곱씹어볼 수 있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거든. 베르가모 후작네 다섯째 아들. 당시 사고 현장에서 유일하게 죽어 있던 왕실 마법사. 그자가 이번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

"...뭐였습니까, 그게."

하비엘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로이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의 심장을 담고 있던 특수 제어 상자. 그 부서진 상자 겉면에 사람 손바닥 가죽이 통째로 뜯어져서 붙어 있더라고."

"손바닥 가죽이 말입니까?"

"어."

정말이다.

진짜로 그랬다.

통째로 뜯어져서 특수 제어 상자 겉면에 달라붙어 있던 사람 손바닥 가죽.

그게 베르가모 후작의 5남이 사고를 일으킨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너, 한겨울철 엄청 추울 때 말이야. 차가운 금속에 혓바닥을 갖다 대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

"압니다. 달라붙지요."

"그렇지? 그걸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면?"

"큰일이 납니다. 살갗이 얼어서 금속에 달라붙어 버린 채로 뜯겨 나가니까요."

"바로 그거지. 한데 특수 제어 상자 겉면에 붙어 있던 손바닥 가죽이 딱 그렇더라고."

"...설마, 그게 베르가모 후작가 5남의 손바닥 가죽이었다는 겁니까?"

"응."

로이드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봤어. 그 베르가모 후작가의 왕실 마법사, 손바닥에서 피를 철철 흘렸더라고. 엄청난 냉기에 그 피도 얼어붙어 있긴 했지만, 그거 영락없이 딱 살갗이 뜯어진 상처였거든."

실은 거짓말이다.

사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런 거, 미처 보진 못했다.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까진 관찰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었다.

측량 스킬로 따낸 데이터로 사고 현장을 돌이켜볼 수 있었으니까.

스캔된 데이터를 통해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겠냐.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베르가모 후작가 출신의 그 마법사가 특수 제어 상자를 손바닥으로 짚었고, 그 상태에서 겨울의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고, 냉기가 유출되며 손바닥이 제어 상자에 달라붙었고, 이후엔 알지? 제어 상자가 버티지 못하고 펑."

"폭발에 몸이 뒤로 밀렸고, 그렇게 억지로 제어 상자에서 손을 떼게 되면서 손바닥 가죽이 뜯어져 상자 겉면에 남은 것이로군요."

"정답."

로이드는 빙긋 웃었다.

하비엘이 짐작한 그대로였다.

"그 증거가 너무 결정적이었어. 원래부터 후작가네 그 아들내미가 범인이라는 정황증거가 있긴 했지만, 그자가 동료 마법사의 등을 찌른 것 같다는 근위기사들의 증언도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의 증언은 없는 상태였으니까."

"그랬겠지요. 등을 찔린 마법사가 자신이 피해자인 척 상황을 꾸미고 동료에게 누명을 덮어씌우려는 상황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거지. 마법사들이니까. 낮은 가능성일지언정 아주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니까. 마법으로 조종하는 단검으로 자신의 등을 찌르고, 동료의 손에 쥐여주는 수법도 가능할 거니까."

"한데, 로이드 님이 말씀하신 그 뜯어진 손바닥의 증거가 그 일말의 가능성을 모조리 지워 버린 셈이로군요."

"어. 너무나 확실한 증거라서."

하비엘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음, 알겠습니다. 그래서 베르가모 후작에게 협박 편지를 보낸 것이로군요. 귀족원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재판정에서 후작가 다섯째 아들이 지은 죄의 증거를 모두 폭로할 거라고 말입니다. 제 추측이 맞습니까?"

"어. 제법인데?"

로이드의 입가가 피식.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저 추측, 사실이었다.

"그 혐의를 모두 폭로한다면, 결정적 증거마저 까발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왕실 조사국에서 폭로된 증거에 관한 집중적인 재조사를 시행하겠지. 그럼 결과는? 분명 사고의 직접적인 책임이 베르가모 후작가에 지워질 거야. 나? 물론 아예 책임이 없는 건 아니겠지. 현장 책임자니까. 내 현장에서 일어난 사고니까. 그렇지만 명확하게 드러날 사고의 원인제공자와는 받는 처벌의 수준 자체가 다를걸."

"그렇겠지요. 로이드 님은 시민들의 영웅이 되셨으니까."

하비엘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정말이다.

최근 며칠간 로이드는 왕도 시민들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백작가의 후계자.

마젠타노 왕가의 공신.

그런 엄청난 지위를 지녔으면서도, 평민인 작업자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서 헌신했기 때문이었다. 그 훈훈한 소식이 작업자들과 그들의 가족, 친지를 통해 왕도 전체에 들불처럼 퍼진 덕분이었다.

"가뜩이나 로이드 님을 향해 우호적으로 기울어 있는 시민들의 여론. 거기에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가 아니라는 진실. 솜방망이 처벌은 따놓은 당상이었겠군요."

"어. 거기에 더해서 왕실의 공신이라는 지위와 특권까지. 아마 국왕 전하의 꾸중 정도로 넘어가게 됐을 거야. 구두 경고쯤이랄까. 반면 후작가는? 난리가 났겠지."

"그랬겠지요. 로이드 님이 재판정에서 그 결정적인 증거를 폭로했다면 말입니다."

비로소 하비엘은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생각했다.

눈앞의 이 가짜 로이드.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로 영악한 자라고.

실로 야비하고, 치사하며, 쪼잔하기까지 한 자라고.

그래서 참으로 대단하다고.

'맞아. 증거가 폭로됐다면, 으음, 왕가의 신물이 유실된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인 만큼 후작가문은 무거운 형벌을 피할 수 없었겠지. 반란보다 더 큰 죄? 최악의 경우에는 후작가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뿐만이 아닐 터다.

후작가와 혈연으로 맺어진 모든 가문으로까지 처벌의 칼날이 휘몰아쳤을지도 모른다.

반란보다 무거운 처벌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이야기였다.

'한데 베르가모 후작가는 귀족원장인 토스카노 공작가와도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지. 후작의 장인이 토스카노 공작이니까.'

즉, 혈연으로 따지자면 토스카노 공작은 이번 사태 진범의 외할아버지인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귀족원을 움직이는 대부분의 중앙 귀족들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 깊게 얽혀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 후작가가 멸문에 가까운 처벌을 받는다면?

후작가와 얽힌 귀족원의 귀족들 대부분이 크든 작든 피해를 입게 되었을 것이 뻔했다.

'이런 야비하기 짝이 없는.'

생각할수록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귀족원장이 태도를 바꾼 것이로군요. 거의 목숨 걸고 로이드 님을 수호하려 들던데 말입니다."

"뭐, 그런 셈이랄까."

로이드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걸렸다.

각 잡고 설계한 협박이 제대로 먹혔다.

이쪽이 생채기가 나면.

그쪽은 목이 날아간다는 협박이었다.

잃을 것이 많은 중앙 귀족들.

그들은 학연, 혈연, 지연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거기에 이쪽의 요구대로 움직여주면 앞으로 이득 볼 일이 있을 거라는 뇌물 예고까지 살살 귓구멍에 넣어 주었다.

덕분에 그들이 협박과 뇌물에 굴했다.

이쪽의 뜻대로 재판이 굴러갔다.

국왕도 그 흐름에 호응해주었다.

안 그래도 이쪽을 편들고 싶은데 명분이 없던 국왕이었다.

한데 귀족원장이 이쪽을 뜬금없이 옹호해주니까?

쾌재를 부르듯 그 옹호에 찰진 추임새를 실어주었다.

귀족원장 왈, 프론테라 백작가의 로이드는 진정한 애국자! 라고 하면?

국왕 왈, 공의 말이 옳도다, 라고 맞장구를 쳤다.

귀족원장 왈, 이번 일로 로이드를 벌하는 것은 신물을 잃은 것보다 더욱 큰 손실이 될 것! 이라고 하면?

국왕 왈, 공의 의견이 실로 옳도다, 라고 비트를 실어주었다.

거기에 자신은?

'그저 위대하신 전하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라는 입발린 소리만 양념장 바르듯 숑숑 얹어주면 되었다.

그렇게 국왕의 판결이 내려졌더랬다.

왕가의 신물이 유실된 사태는 실로 뼈아픈 손실임.

하지만 거기에 이쪽의 큰 책임은 없음.

겨울의 심장 유실은 마법적 불안정 현상으로 인한 폭주 때문임.

이런 현상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태임.

한데 이런 일로 왕가의 공신인 로이드에게 모든 죄를 묻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임.

따라서 로이드 프론테라에게는 현장 관리 소홀에 따른 소정의 벌금형만 부과될 것임.

이상, 땅땅땅.

이라는 판결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솜방망이 판결도 받아냈고. 이번 일도 무사히 넘겼고. 그럼 이제 일해야겠지?"

그렇다.

재판이 끝났다고 해서 쉴 틈은 없었다.

로이드는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며 곧바로 현장으로 나갔다.

'이런 빡빡한 철혈의 기사 세계관 짜놓은 작가란 놈, 진짜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어주고 싶다.'

하필이면 이런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게 됐다니.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신세 한탄을 머금으며 현장을 지휘했다.

왕성 지하에서의 타우랑가 추출 시공을 이어갔다.

이미 사고가 나던 시점에 거의 마무리 단계 시공을 하던 참이었다.

지하에서 위쪽으로.

상향식 수직 굴착을 하며.

타우랑가가 박혀 있는 왕성 밑바닥 기초 독립 기둥으로 접근하던 터였다.

덕분에 남은 시공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닷새 동안 꼬박 수직 굴착을 한 끝에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찾았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기초 독립 기둥.

그 중간 어름에 타우랑가가 박혀 있었다.

가로 5미터, 세로 6미터쯤 되는 직사각형 바위였다.

그때부터 타우랑가를 조심스레 뽑아냈다.

뽀동이와 힘을 합쳤다.

하비엘도 불러왔다.

한 덩이를 뽑고, 대체할 바위를 그 자리에 넣었다. 시멘트로 접합 보수를 마쳤다.

그 과정을 열두 번 반복했다.

그렇게 마지막 열두 번째 덩이의 타우랑가를 무사히 뽑아내는 순간.

 

딩동.

 

[당신은 진실의 보옥을 이루는 핵심 자재, 타우랑가 열두 덩이를 모두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은 신화시대의 종언과 함께 파괴되었던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의 첫 번째 핵심 자재를 발굴하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진귀한 발굴 업적입니다.]

[향후 진실의 보옥이 복구될 시에는 당신의 이름이 보옥의 핵심 자재 발굴자로서 길이길이 역사서에 남을 것입니다.]

[이러한 진귀한 업적에 따른 보너스로 대량의 RP가 특별 지급됩니다.]

[2,000 RP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RP : 4,655]

 

'엇?'

생각지도 못한 업적 알림과 대량의 RP를 얻게 되었다.

시간 동결 스킬을 사용할 RP가 확보되는, 실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288화. 두 번째 핵심 자재 (1)

 

 

'엇?'

이곳은 로라시아 대륙의 남단.

머나먼 남극해 너머에 자리한 혹한의 땅.

남극 중심부의 빙하굴에서 빙룡, 티라누스는 실눈을 떴다.

'방금 뭐지.'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의 심장이 사라졌다.

비록 아주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제법 오래전에 선물한 물건이었지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흡수했어.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빙룡 티라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자신이 인간에게 겨울의 심장을 선물했던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몇백 년 전이었을 것이다.

미카엘 마젠타노.

당시 친분 있던 그 인간이 영웅으로 숭배받으며 새 왕조를 열었더랬다.

자고로 지인이 상점이나 기업을 개업했을 때는 축하를 해줘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다못해 화환이라도 하나쯤 보내야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선물을 해줬더랬다.

자신의 마나를 응축한 구슬을 만들었더랬다.

무려 한 계절의 한기를 모조리 품은 구슬이었다.

'그때 내가 좀 신을 내긴 했지. 너무 몰입해 버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강한 아티펙트가 창조됐어. 희미한 자아까지 지니고 있을 정도로.'

그 대가로 드래곤인 자신이 1년 정도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오늘날까지 그 아티펙트, 겨울의 심장과 영적 연결을 지니게도 되었다.

덕분에 겨울의 심장이 며칠 전 바람결에 실어 보낸 속삭임을 방금, 전해 들을 수 있었더랬다.

'심장이는... 자유예요... 라고?'

그 말을 남기고는 인간에게 꼴까닥 흡수되었다.

황당했다.

'수많은 종족을 놔두고. 하필이면 인간의 마나하트에 동화되다니. 그게 가능한 거였나?'

궁금해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날아가 볼까.

호기심 충족에의 충동이 쑴펑쑴펑 솟구치기도 했다.

하지만 티라누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소중한 휴식 시간을 그런 식으로 망칠 수는 없어.'

빙룡은 자신의 차가운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했다.

모처럼 아내가 며느리를 데리고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마당이었다.

덕분에 수백 년 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뒹굴거리는 판국이었다.

한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고.

조금 궁금한 일이 생겼다고.

이런 소중한 휴가를 망치면서까지 달려가고 싶진 않았다.

'쯧. 모르겠다. 그거 원래 흡수하면 안 되는 건데. 제대로 배탈 날 텐데. 뭐, 다 생각이 있으니까 흡수한 거겠지. 안 되면 죽든 살든 알아서 하겠지, 뭐.'

 

쿠웅!

 

빙룡의 거대한 머리가 다시 얼음 바닥에 늘어졌다.

이내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빙하굴을 채워갔다.

 

 

같은 시각, 왕도 마젠타노.

그곳에서 놀라움의 감정이 로이드의 안구를 채워갔다.

'헐.'

황당함 반.

흡족함 반.

로이드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든 밤에 깜짝 선물로 짬짜면을 받은 사람처럼,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오랜만에 뜬 업적 알림인데. 보상이 무려 2천 RP? 완전 미쳤는데?'

처음엔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0 숫자를 잘못 헤아린 건가 싶었다.

한데 눈을 부비적거리며 다시 살펴봐도 2천 RP가 확실했다.

덕분에 보유한 전체 RP가 무려 4,655가 되어 버렸다.

'허허. 허허허.'

절로 입꼬리가 실룩실룩 올라갔다.

이번 업적 획득으로 얻은 보상이 어떤 의미인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시간 동결 스킬을 당장이라도 쓸 수 있다는 거네.'

원하는 지역만 빼고 세상의 시간을 멈출 수 있다.

지정된 지역 안에서는 나이를 안 먹으며 1년 동안 활동할 수 있다.

딱 1년.

어지간한 큰 공사 하나쯤은 뚝딱 해치울 수 있을 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방금 업적 메시지, 진실의 보옥 자재를 발굴한 업적이 굉장히 진귀한 거라고 알려줬어. 길이길이 역사서에 남을 정도의 업적인 거라고.'

그래서 단숨에 2천 RP나 양동이째로 퍼내듯이 받을 수 있었다.

그 뜻은 명확했다.

'앞으로 보옥 핵심 자재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이번과 비슷한 RP를 받을 수 있을 거란 뜻이지.'

핵심 자재를 찾을 때마다 2천 RP.

시간 동결 스킬을 쓰는 데에는 3천 RP.

'그러니까 3천 RP를 써서 시간 동결 스킬을 발동해. 그렇게 세상의 시간을 멈춘 사이에 보옥 핵심 자재를 발굴하는 거지. 그럼 또 2천 RP를 받는 거네? 이거 완전 캐시 환급받는 기분인데.'

물론 시간 동결 스킬을 쓰는 RP와 핵심 자재를 찾으며 받는 RP 사이에는 1천이라는 제법 큰 갭이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괜찮아. 1천 RP 정도라면 어떻게든 모으고 때울 수 있을 거니까.'

부담스럽긴 하지만.

막막한 정도까진 아니었다.

덕분에 앞으로 추진할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

'핵심 자재 하나를 발굴할 때마다 시간 동결 스킬을 쓰면서 시간을 아끼면 돼. 그럼 운명의 복원 현상을 막는 것도 쉬워질 거야.'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볼수록.

각을 내고 견적을 잡아볼수록.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는 앞으로의 장밋빛 전망에만 취해서 현재에 소홀하지도 않았다.

"다들 긴장 풀지 말고! 이제부터가 더 위험한 과정이니까 정신줄 꽉 붙들어 매고! 밀어! 둘 셋!"

"뽀동!"

"흐아압!"

 

콰드드득!

 

로이드의 힘찬 외침이 갱도를 가득 채웠다.

그의 구령에 따라 뽀동이와 작업자들이 용을 썼다.

갓 뽑아낸 신선한(?) 타우랑가를 밀고 당기며 갱도 밖으로 옮겼다.

수직갱에서 타우랑가를 지상으로 올릴 때는 비벙이가 힘을 썼다.

"오케이! 올려!"

"비벙!"

타우랑가가 가로와 세로가 각각 5, 6미터씩이나 되는 암석이긴 했지만, 비벙이 앞에선 한낱 공깃돌일 뿐이었다.

그렇게 열두 덩이의 타우랑가가 사뿐하게 지상으로 올려졌다. 수백 년 만의 햇볕을 쬐게 되었다.

그 뒤로도 로이드의 작업은 계속 이어졌다.

'당연하지. 왕성 아래를 뚫고, 지지고, 볶아댔잖아. 그러니 이젠 다시 구멍을 메워야지.'

무려 왕성 기초 아래에 터널을 뚫는 대공사였다.

위험천만한 시공이기도 했다.

한데 이 터널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갱도가 무너지면 지반 자체가 내려앉아 버릴 거야.'

그러면 그 지반 위에 올려진 왕성도 함께 와르르 내려앉을 터다.

로이드는 그러한 사태를 막고자 터널과 냉매 공급관 전체를 꼼꼼히 메워 버렸다.

암석과 콘크리트를 꼼꼼하게 때려 부었다.

탄탄히 다졌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을 추가로 알차게 보내고 나니 모든 과정이 끝났다.

비로소 왕도에서의 일을 마치고 떠날 준비가 된 것이었다.

"하여서, 그대는 이곳을 떠나고자 짐에게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로군. 맞나?"

"바로 그러하옵니다, 전하."

로이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국왕 알리시아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걸렸다.

"하면 그대가 이곳에서 이루고자 하였던 일은 다 끝내었는가?"

"역시 그러하옵니다, 전하."

"오늘은 성은이 망극하지 아니한가?"

"물론 망극하다는 말씀을 올리려던 참이었사옵니다, 전하."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터인데. 하면 이제는 송구하다는 말을 혓바닥에 올릴 차례겠지?"

"...들킨 것이옵니까?"

"물론이로다. 또한 그대가 짐에게 들킨 것은 그것만이 아닐 터."

"또 제가 송구할 일이 있는 것이옵니까?"

"당연하지."

"그게 무엇이온지...."

"모르겠나?"

"...."

로이드는 대답이 궁해졌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저렇게 막연하게 몰아붙이니까.

그런데 자신이 또 뭘 국왕에게 잘못한 건지 선뜻 떠오르는 게 없어서.

꿀 먹고 싶은 벙어리가 된 채로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 때문이었을 터다.

국왕이 혀를 끌끌 찼다.

"쯧쯧. 하여간 이런 자를 보았나. 이토록 자신밖에 모르는 데다 매번 약속까지 헌신짝처럼 여기는 자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구나."

"약속이라 하오시면...?"

약속?

무슨 약속?

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왕의 입꼬리에 내걸린 쓴웃음이 살풋 짙어졌다.

"그대가 짐에게 호언장담한 것을 벌써 잊은 모양이로구나. 이번 왕성 아래의 터널 굴착을 시작하기 전에 말이다. 그대가 짐을 찾아와 겨울의 심장을 빌려 가길 청하며 나눈 말이 있었지. 당시에 짐이 무어라 물었고, 그대가 무어라 대답하였던지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인가?"

"...앗. 아아."

"당시 짐이 물었지. 그대가 겨울의 심장으로 동결 공법을 사용하고, 왕성 아래에서 타우랑가라는 물건을 빼낸다고 하면, 그 일이 짐과 왕실에 해가 되지 않으리란 약속을 할 수 있겠느냐고. 그 물음에 그대는 무어라 답하였더라?"

"으음, 물론이옵니다 전하... 라고."

"다행이로다. 그대가 그 기억마저 잊어먹진 않은 듯하여서 말이지."

"...."

"당시 짐은 그대의 대답을 철석같이 믿었더랬지. 흔쾌히 그대의 청을 수락하였더랬지. 그대가 짐에게 약속하였고, 짐이 그 약속을 믿기로 하였으니까. 그 외에 다른 어떠한 말도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데 지금, 그 약속의 결과는?"

"...."

"흐음, 빌려줬다가 망가진 신물 값을 어떻게 받아내어야 할까. 그대라는 뻔뻔한 자에게."

"음, 으음, 진심으로 송구...."

"하다는 말로 때우려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으음, 음, 이 일을 실로 어찌...."

"사죄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때우려는 것도 아니겠지, 설마?"

"그, 그흠, 하오면, 전하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신지 알려달라는 물음 따위로 때우려는 것 역시 아니겠지, 설마?"

"...."

살려주세요, 누님.

아니, 차라리 그냥 때리든 지지고 볶든 데치고 양념질을 하고 죽이든 알아서 요리해주세요.

로이드는 울상을 지으며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국왕 알리시아의 미소가 흡족해졌다.

"되었노라. 이미 재판정에서 그대의 책임을 묻지 않겠노라 선언한 바이니, 새삼 이제 와서 그대를 책망한들 어찌할까."

"음, 그래도...."

"그래도?"

"한 번은 반드시 은혜를 갚겠사옵니다."

"은혜를?"

"예, 전하."

로이드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국왕 누님, 지금까지 나 엄청 챙겨줬으니까.'

돌이켜보면 사실이었다.

매번 결정적인 도움이나 지원을 해준 국왕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금액으로도 환산할 수 없을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 어쩌다 보니 왕가의 신물을 자신이 흡수하기까지 했다.

'아마 보통의 통치자였으면 그쯤에서 길길이 날뛰었겠지. 아니, 내가 왕가보다 더 큰 세력과 힘을 지니게 된 시점에서부터 날 암살하거나 제거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궁리했을 거야.'

그런데 국왕 알리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정치적 동반자로 삼았다.

통 크고 대범하게 이쪽을 포섭했다.

지금도 이쪽의 장래희망인 건물주적 백수의 삶을 응원해주며 지원까지 아낌없이 퍼부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겨울의 심장 유실 사태마저 쿨하게 넘어가 주었다.

대인배도 이런 대인배가 없을 정도였다.

"하여서 아뢰는 말씀이옵니다. 향후 언젠가 전하께서 어려움에 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제가 한 번은 반드시 전하의 곁에서 어려움을 함께하겠사옵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은혜는 가끔만 기억하고, 원한은 뼈에 되새기자는 평소의 모토.

그 모토를 이번만은 내려놓고서 약속했다.

한데 그 약속이 미덥지 않았던 걸까.

국왕 알리시아가 피식 웃었다.

"흐음, 한 번만?"

"예?"

"아니다. 그래, 한 번이라. 그게 어디일까. 언제나 아쉬운 일이 있을 때만 찾아오는 그대 같은 자로부터는, 그 한 번의 도움도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 테지."

"...."

"지금까지 그대가 보인 모습으로 미루어보아선 방금의 약속, 지켜주기만 하여도 감지덕지일 듯도 하고."

"...."

"하면 일단 그 마음만 받도록 하지. 물러가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또, 또. 자기 말문 막힐 때만 찾는 그놈의 성은."

"으음, 하오면, 성은 대신 무엇을 찾으면 되겠사옵니까."

"성은 대신에 찾을 것이라. 성의는 어떠할까."

"성의,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하오면 성의는 어떻게 보여 드려야 하올지...."

"그건 그대가 알아서 고민하고 궁리할 일이로다. 한데 그대는 물러가라는 짐의 명을 듣지 못하였는지?"

"음, 아니옵니다. 하면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쯧. 이럴 때만 말 듣는 척하고."

"...예?"

"혼잣말에 불과하니 궁금해하지 말지어다. 그럼 이만."

"알겠사옵니다, 전하. 부디 옥체 보중하소서."

...드디어 해방이다!

로이드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빛의 속도로 어전에서 물러났다.

바람과 같은 걸음걸이로 왕성을 빠져나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본드래곤 용용이의 등에 올라탔다.

하비엘, 그리고 뽀동이와 방울이, 꼬밍이와 함께였다.

"그러니까 비벙아? 넌 이제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 있어. 자, 방울이랑 인사하고."

"비, 비벙! 비벙!"

"방울! 빠방울!"

아쉽게도 비벙이는 항상 데리고 다니기엔 덩치가 너무나 컸다.

또한, 망가졌던 테르미나 대정원 보수공사도 끝났으니 왕도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프론테라 영지로 돌아가게 된 비벙이.

로이드를 따라 용용이의 등에 올라탄 방울이.

썸 타는 두 환상종이 부비부비 아쉬움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용용이가 날아올랐다.

열두 덩이의 타우랑가를 두 손에 야물딱지게 움켜쥔 채였다.

 

화아악! 콰앙!

 

왕도 상공 높이 솟구친 용용이가 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맹렬한 날갯짓으로 충격파를 만들었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았다.

북쪽으로.

계속 북쪽으로.

몇 시간을 날아간 끝에 북극해 상공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로이드가 명령했다.

"투하!"

 

삐그덕, 풍덩!

 

3천 미터 상공에서 용용이가 퐁당퐁당 타우랑가를 던졌다.

열두 덩이 타우랑가가 뽀글뽀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로이드는 기다렸다.

타우랑가가 심해로 가라앉을 때까지.

심해 밑바닥 진실의 보옥 토대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잠시 후,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당신이 투하한 타우랑가 열두 덩이가 무사히 진실의 보옥 인근에 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은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의 두 번째 핵심 자재, 타우포에 대한 정보열람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두 번째 핵심자재 타우포의 정보를 지금 열람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로이드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화아악-!

 

시각을 침범하며 물들이듯.

새로운 영상이 눈앞을 수놓기 시작했다.

289화. 두 번째 핵심 자재 (2)

 

 

쿠그그그극...!

 

수십 기의 말이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근육질 목덜미며 가슴, 몸통 가득 땀을 흘려댔다.

더 끌라고 독려하는 외침.

힘내서 당기라는 독촉.

기사의 호령.

일꾼의 구령.

투레질 소리.

소란 속에서 피어나는 흙먼지.

그 흙먼지 속에 거대한 계단석이 운반되고 있었다.

단순하게 반듯한 계단석이 아니었다.

계단 안쪽의 끄트머리.

다른 석재와 맞닿는 자리.

그곳에 과속방지턱 같은 턱이 있었다.

턱이 옆의 석재와 맞물리도록 독특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렇듯 거대한 계단석을 수십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다른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였다.

입가에 승자의 미소 걸고서.

신화시대의 종언을 알린 대전쟁을 마치고서.

더없이 파괴적이었던 전장에서 살아남아.

고향을 향해.

인간의 영토를 향해.

당당한 걸음을 돌리는 중이었다.

한데 그러던 도중.

 

퓌리릭! 푸큭!

 

화살이 날아왔다.

어느 기사의 미간에 꽂혔다.

뒤를 이어 화살비가 우수수.

수십 기의 말과 기사들, 일꾼들을 향해 쏟아졌다.

아비규환.

비명이 일고.

혼란과 호통 속에서.

기사들이 반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기습을 허용한 자신들의 안일함을 향해.

아무런 기색도 없이 기습을 감행한 적들의 비겁함을 향해.

분노했고, 창과 검을 치켜들었으며, 포효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자신들이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라고.

말 등에 올라탄 자신들을 꺾을 존재는 지상에 없으리라고.

맹목적으로 자신했다.

열성적으로 확신했다.

그럴 법도 했다.

실제로 평원에서의 기동전으로 그들을 꺾은 존재는 없었다.

수많은 군대와 괴수가 그들의 기동전에 걸려 무참히 패배했고, 쓰러졌으며, 허물어졌다.

그렇듯 인마일체(人馬一體).

마치 말과 하나인 것'처럼' 싸운다는 칭송을 듣곤 했으니까.

과거의 수많은 전투에서처럼.

오늘 또한 그러하리라고.

확신하며 돌격했다.

그리고 패배했다.

기사들이 말과 하나인 것처럼 싸우는 존재라면.

적들은 진짜로 말과 하나인 존재들이었다.

몸통은 탄탄한 야생마 그 자체.

말의 목이 있을 자리에 놓인 인간의 상체.

그 어떤 기병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세상 어떤 기병도 해내지 못할 경이로운 기동력을 선보였다.

급발진, 급정거, 급선회.

자유로운 가감속까지.

신들린 듯이 날뛰었다.

창으로 찌르고, 뒷발로 걷어차고, 빈틈만 보이면 어김없이 화살을 쏘았다.

결국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 무너졌다.

겁에 질린 일꾼들이 도망쳤다.

습격자들은 가뿐한 승리를 자축하며 계단석을 가져갔다.

자신들의 허리에 밧줄 걸고서.

굵은 땀방울 흘리며.

북서부 대평원으로 끌고 갔다.

그 후로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세상이 변했고, 시대가 변했고, 신화는 전설이 되었다.

그 도도한 흐름 속에서 계단석의 존재도 까마득하게 잊혀져 갔다.

그리고 영상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딩동.

 

[당신은 진실의 보옥 두 번째 핵심 자재, 계단석 타우포의 정보 열람을 마쳤습니다.]

[정보 재열람을 원하실 때는 아래의 영상 다시 보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후아."

로이드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눈앞에 떠오르는 영상을 시청하는 거, 예전 대한민국에서 딱 한 번 체험했던 VR을 보는 기분이다.

그래서 조금 재미있기도 하면서 그리운 소일거리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 영화 보고 싶다. 아님 드라마나 너튜브라도.'

그냥 문득, 영상물이 보고 싶어졌다.

소파든 방바닥이든 편하게 퍼질러 앉아서.

리모컨이든 키보드나 마우스든 잡고서 손가락만 까딱.

몇 시간이고 영화며 드라마나 예능 방송들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싶었다.

그렇게 그냥 뭔가 재미있는 걸 '멍하니 보는' 행위 자체가 굉장히 그리워졌다.

이곳에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쯧. 그러니까 말이지. 괜히 쓸데없이 폼 잡는다고 신화시대의 기록이니 뭐니 하면서 영상으로 정보를 전해주고 말이야. 사람 티브이 마려워지게.'

로이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방금 본 영상의 내용을 되짚어보는 걸 빠뜨리지 않았다.

'진실의 보옥. 아오테아로아의 두 번째 핵심 자재는 계단석이었어.'

영상으로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거대한 계단석.

끄트머리의 특징적인 턱 구조.

그건 이쪽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구조였다.

'타우랑가가 장군총의 호분석에 해당하는 자재였다면, 이번 핵심 자재인 타우포는 으음, 딱 그거네. 장군총 제일 아래쪽, 1단 부분에 놓이는 계단석. 그거랑 구조나 원리가 굉장히 흡사해.'

생각해볼수록 그랬다.

장군총은 거대하고 무거운 구조물이었다.

전체가 통짜 돌덩이로 되어 있으니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막대한 하중을 처리하는 일이 제일 큰 과제일 터였다.

'그래서 호분석과 1단 계단석이 장군총의 하중 처리에 큰 역할을 담당했지. 호분석은 장군총의 네 방향 면에 놓였어. 고임돌처럼. 건물의 아랫단에 몰리는 측압을 버텨주는 역할을 했지. 그럼 1단 계단석은?'

그것 또한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

'특유의 턱 구조로 옆의 돌을 함께 엮어주는 역할을 했어. 어깨동무를 하듯이. 위에서 짓누르는 막대한 하중을 잡아주고 분산하는 역할이었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장군총은 엄청난 무게에도 바닥의 구조가 어그러지지 않았고.'

한데 방금 영상으로 본 타우포의 모양이나 구조가 장군총의 1단 계단석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을 습격했던 그 종족.'

용용이의 등에 올라타고서 3천 미터 상공을 날고 있는 사이.

로이드의 기억이 습격자들의 모습을 되짚었다.

'걔네 딱 그거네. 켄타우로스.'

말의 몸체에 인간의 상반신이 결합된 종족.

대평원을 거침없이 누비는 선천적 기마 종족.

달리기를 위해 태어나고.

달리기를 위해 죽기도 하는 종족.

특유의 신체구조 때문에 말 부분의 등이나 배가 가려우면 어떻게 긁나 절로 걱정이 드는, 그러한 종족.

'그러니까 두 번째 핵심 자재는 켄타우로스 종족이 챙긴 거였어.'

결론을 내린 로이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신화시대 막바지의 대전쟁.

세상 별별 종족이 다 참전했다더니, 이젠 켄타우로스까지 나오나 싶었다.

'하여간 이 세계관 진짜.'

그는 이 세계, 철혈의 기사 소설을 쓴 작가를 향한 원망을 곱씹었다.

한데 그때였다.

"이번에도 뭔가가 또 떠오른 겁니까."

불현듯 다가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옆을 돌아보니 하비엘 녀석이 이쪽을 향해 특유의 서늘하고 시니컬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로이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봤어. 환각 같은 영상 기록."

영상을 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건 신화시대의 전설적인 유물에 관련된 일이니까.

마법적 환영 등을 통해 단서를 얻는다는 게 딱히 의심을 살 일도 아니니까.

'게다가 이런 사소한 부분들은 솔직하게 밝혀줘야 저 녀석이 날 의심하지 않을 거니까.'

뭐든지 다 숨기려 들고.

뭐든지 죄다 얼버무리고.

그렇게 어설프게 굴면 죽도 밥도 안 되는 법이라고 로이드는 생각했다.

특히나 자신처럼 상대에게 진짜 정체를 감추고 있는 처지라면 더더욱 사소한 부분들에서 솔직해져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내가 숨겨도 그걸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믿어줄 거니까.'

게다가 하비엘은 눈치가 느린 녀석이 아니었다.

적어도 백작부부에게 진짜 로이드의 진실을 밝히기 전에는 녀석에게 이쪽의 정체를 들키기 싫었다.

아니, 조금은 무서웠다.

너 가짜였던 거냐면서.

그동안 진짜 행세하면서 자기 부려먹은 거였냐면서.

칼이라도 겨누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로이드는 더욱 뻔뻔하게 안면 가득 철판을 깔았다.

"신화시대 전쟁 이후의 상황을 봤어. 기사들이 두 번째 핵심자재인 계단석을 전리품으로 챙겨가다가 습격당하던 모습."

"습격이라 하심은?"

"켄타우로스 종족. 그들이 기사들을 짓밟고 계단석을 뺏어가더라."

"하면 다음 행선지는 북서부의 클라마스 대평원이겠군요."

"그렇지. 바로 거기지."

다행히 켄타우로스 종족의 근거지는 인어 왕국과 달리 잘 알려져 있었다.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한 고원지대.

그곳의 황량한 대평원이었다.

마치 몽골 고원 같은 기후를 자랑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내륙인 데다 제법 높은 위도에 자리한 고원이라서 추워. 엄청나게 춥고 건조해. 그래서 거주 환경이 썩 좋지가 못해. 농사도 짓기 어렵지. 덕분에 어떤 왕국도 탐내지 않은 땅이지만.'

더럽게 춥고 건조한 동네.

그리 비옥하지 못한 땅.

한데 원주민인 켄타우로스 종족의 세력은 강성한 지역.

점령하기는 어려웠다.

점령해도 얻을 것이 별로 없는 땅이었다.

그런 덕에 아무도 그 땅을 욕심내지 않았다.

인간이 침범하지 않았고, 어떤 왕국도 들어서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켄타우로스 종족만의 활동 무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자. 용용아?"

 

삐그덕!

 

본드래곤 용용이가 이쪽의 뜻을 정확히 읽었다.

비행 방향을 돌렸다.

태양이 흘러가는 남쪽을 향해 날았다.

북극해를 벗어났다.

대륙 북단을 지나쳤다.

그동안 발아래의 풍경이 변해갔다.

툰드라 지대와 타이가 숲이 스쳐 갔다.

끝없는 침엽수림 머리에 얹힌 흰색 눈이 옅어졌다.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우뚝 솟았다.

저 멀리 바닥에서부터 이쪽이 날고 있는 3천 미터 고도의 발치에 닿을 듯.

솟아올라 왔다.

몇 개인가 봉우리가 옆을 지나쳤다.

이윽고 눈앞에 평균 해발 2,500미터의 고원지대가 펼쳐졌다.

대륙 북서부 최대 규모의 고원 지대, 클라마스 대평원이었다.

로이드는 대평원 초입에 용용이를 착륙시켰다.

"용용아? 넌 이제부터 여기서 좀 놀고 있어라."

 

삐그덕?

 

"미안. 이 동네 사람들이 널 보면 좀 많이 놀랄 거라서. 침공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어서. 그런데 너, 대놓고 그렇게 고개 갸웃거리면서 날 보면 내가 좀 미안해지잖냐."

 

삐그더덕?

 

"아냐 아냐. 너 못생겨서 사람들이 미워하는 거 아니라니까?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으음, 그러니까... 모르겠다. 암튼, 일단 좀 근처에 숨어서 놀고 있어. 알았지?"

 

삐그덕....

 

용용이가 살짝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럴 땐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용용이는 겉모습만으로도 너무 위압감이 쩔어서. 이 동네 켄타우로스 양반들이랑 첫 만남부터 첫인상 점수 깎아 먹기 딱 좋아서. 미안해도 이럴 수밖에 없네. 나중에 공놀이나 같이 하면서 놀아줘야겠다.'

그렇게라도 용용이를 달래주리라.

다짐하며 로이드는 하비엘과 더불어 대평원으로 들어섰다.

뽀동이의 통실한 등에 몸 싣고서 뽈뽈뽈 내달렸다.

그렇게 서너 시간쯤 이동했을까.

끝도 없이 평평한 지평선만 보이는 사방을 얼마나 둘러보았을까.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뒤에 탄 하비엘이 한쪽을 가리켰다.

돌아보니 과연 저 멀리, 지평선에서 꼬물거리는 점 몇 개가 보였다.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아니, 질주해 오고 있었다.

새까만 점들이 점점 커졌다.

그 뒤로 흙먼지를 풀풀 달고서.

마침내 이쪽으로 달려와 사방을 포위했다.

"정지! 이방인은 허락받지 않은 걸음을 멈춰라!"

 

투두두두두!

 

이쪽을 원형으로 둘러싸고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맴을 도는 질주.

덕분에 사방에서 위협적으로 공기를 두드려대는 말발굽 소리.

맥동치는 말근육.

휘날리는 꼬리 갈기.

그 말의 몸통 위에 놓인 인간의 상체.

짙은 암갈색 가죽 갑옷을 빈틈없이 두르고 있었다.

창과 활로 무장하고서 서늘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마일체. 말과 한몸인 종족.

켄타우로스 순찰대였다.

'후아. 갑옷 사이 말근육 저거 실화냐.'

로이드는 눈동자 데구르르 굴려 이쪽을 포위하고 있는 켄타우로스 순찰대를 살펴보았다.

숫자는 약 20기 정도.

다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 싸움이 나면 하비엘이 있는 이쪽이 저쪽을 압도하겠지만.

그런 전력 차이와는 별개로 저들의 완고한 고집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역시 이쪽 동네도 인간에게 배타적이구만.'

조금이라도 저들에게 거슬리면.

행여나 저들의 경고를 무시한다면.

당장에라도 저 날카로운 창과 활이 이쪽의 심장을 향할 기세였다.

'하긴. 그렇게 수백 수천 년간 영토를 지켜왔을 테니까. 인간의 침입을 막아왔을 테니까.'

충분히 이해가 갔다.

동시에 저들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방법도 떠올랐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하비엘의 목소리.

녀석은 충돌에 대비하려는 듯 이쪽의 앞을 가리듯 막아주고 있었다.

로이드는 싱긋 웃었다.

"어떡하긴. 충돌할 필요 없어."

정말이다.

여기서 켄타우로스 순찰대와 쓸데없이 충돌할 필요가 없다. 그럴 이유도 없다.

훨씬 온건하고 건전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잠깐만? 실례."

하비엘 녀석의 앞으로 살짝 나섰다.

그런 이쪽의 행동 때문이었을까.

 

스르릉!

 

켄타우로스 순찰대 20기의 창날이 순식간에 번득였다.

사방에서 이쪽을 겨누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살벌한 창날 앞에서도 오히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소설 철혈의 기사를 읽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그 기억 속 정보를 다시금 돌아보며.

그 결과 얻어낸 비결을 떠올리며.

이곳 켄타우로스 순찰대의 호감과 통행권을 한 큐에 얻어낼 마법의 제안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입니다. 사실 제가 듣기로는 이 지방의 켄타우로스 분들이 지상에서 가장 빠른 달리기 선수라고 해서 말입니다. 그걸 좀 확인해보고 싶은데. 혹시 여기, 저보다 달리기 빠를 거라 자부하는 분 계십니까?"

"...!"

미처 예상치도 못했던 제안이었다.

대놓고 던진 노골적인 도발과 도전이었다.

켄타우로스 순찰대원들의 눈빛이 본능적 경쟁심으로 번득였다.

그들은 생각했다.

세상 물정도 모르는 듯한 저 인간 놈.

저놈이 감히 자신들의 자부심을 건드렸다고.

급출발. 급정거. 급선회.

자유로운 가감속.

깜빡이 신호 없는 노선 변경 칼치기까지.

그야말로 거침없는 달리기라면 지상에서 누구도 따를 자가 없노라 자부하는, 대평원의 폭주 영혼(?)들이 켄타우로스 종족이었다.

한데 저 로이드라는 인간이, 감히 그런 자부심을 건드리며 도전장을 던져왔다.

"좋다. 내가 나서지."

켄타우로스 순찰대장이 여유롭게 나섰다.

반쯤 로이드를 비웃으며 멀찍한 거리의 작은 바위를 가리켰다.

"동시에 출발해서 저 바위에 먼저 도착하는 쪽이 이기는 거다."

"좋습니다."

로이드가 뽀동이의 등에 올라탔다.

켄타우로스 순찰대장과 함께 나란히 출발선에 섰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졌다.

"출발!"

 

콰콰각!

뽈뽈뽈!

 

순찰대장과 뽀동이가 나란히 흙먼지를 튀기며 질주했다.

그리고 약 15초 뒤.

 

찰싹!

 

로이드의 등짝에 합격 목걸이, 아니, 대평원 통행증을 겸한 빨간색 과속딱지가 붙었다.

290화. 난폭운전은 나빠요 (1)

 

 

숯돌바람 초지.

대륙 북서부 클라마스 대평원의 핵심이 되는 지역.

대평원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모든 켄타우로스 부족의 고향.

오늘, 이곳에 자리한 숯돌바람 부족민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부, 붉은색 과속 표식이다!"

어느 켄타우로스 청년이 외쳤다.

청년이 가리키는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덕분에 부족민들은 목격할 수 있었다.

"정말이다. 진짜로 붉은색 과속 표식이야."

"세상에...."

"저걸 실제로 보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저걸, 우리 종족도 아닌 인간이 붙이고 있다고?"

"혹시 가짜 아닌가?"

"아니, 그럴 리가 없소. 붉은 과속 표식은 오직 대평원 외곽을 수호하는 순찰대장만 줄 수 있는 거니까."

"잠깐만요. 그럼 저 인간이 설마... 순찰대장보다 빠르게 달렸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면 무엇이겠나."

어느 늙은 켄타우로스가 대꾸했다.

그의 말에 나머지 부족민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붉은색 과속 표식을 등에 떡하니 붙이고 있는 존재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이방인이었다.

그것도 인간이었다.

거대하고 통통하며 뱃살 뽕뽕한 햄스터를 탄 인간이, 등짝에 너무나 선명한 붉은색 과속 표식을 붙이고서 당당한 걸음걸이로 부족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촌락 중심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너무나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꿈에라도 보리라 생각지 못한 모습이기도 했다.

모두의 그런 경악 가득한 시선을 받은 덕분에, 로이드의 입가엔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거 무슨. 인기 스타라도 된 기분이네.'

정말로 그랬다.

이쪽을 발견한 켄타우로스 부족민들.

처음엔 이쪽의 낯선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다음엔 등짝의 붉은색 과속 표식을 보고는 더욱 경악했다.

혼란스러워하고, 헷갈려하고, 의심하다가, 마침내 표식이 진짜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선망의 시선을 보내왔다.

그 눈빛이 마치, 지구 최강 아이돌 방탄조끼단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팬클럽 회원의 감격 어린 눈길 같았다.

'물론 이 붉은색 과속 표식, 쉽게 따낸 건 아니지만.'

문득, 이틀 전의 일이 떠올랐다.

처음 도착한 대평원의 초입.

그곳에서 조우했던 켄타우로스 순찰대.

순찰대를 속도로 도발했더랬다.

이쪽보다 빠를 자신 있느냐고.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대담한 제안에 순찰대장이 선뜻 나섰더랬다.

이쪽과 드래그 레이싱을 벌였더랬다.

그리고....

'7초 컷이었지.'

출발선을 박차고 나가서 딱 7초.

뽀동이와 이쪽이 반걸음 차이로 순찰대장보다 빠르게 바위를 지나쳤다.

그야말로 8기통 5,000cc 자연 흡기 엔진 같은 1뽀동력의 위엄이었다.

이쪽이 선보인 폭발적인 가속력에 순찰대장이 순수하게 감탄했을 정도였다.

'그 순찰대장, 피니시 라인 지나치고 나란히 멈춘 뒤의 표정은 거의 울 것 같은 모습이었지.'

패배 때문에 분해서?

아니었다.

그건 속도에 순수하게 미친 자만이 내보일 수 있는, 더 빠른 자를 영접했을 때나 내보일 법한 그런 감격의 눈물이었다.

덕분에 순찰대장에게 빨간색 과속딱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 붉은색 과속 표식만큼 영광스러운 증표는 없습니다. 당신과 나란히 달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 되시길."

...이라는 덕담과 함께였다.

그렇게 순찰대의 허락을 받아냈다.

과속 표식은 켄타우로스 종족의 영역 어디건 다닐 수 있는 통행증이나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이라 할 수 있는 붉은색 과속 표식은 아예 영광의 상징이었다.

이들, 켄타우로스 종족의 성격 때문이었다.

'대초원을 시원하게 질주하는 야생마 그 자체지.'

그래서 달리기 능력을 가장 중요한 자질로 여겼다.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가장 선망했다.

대한민국에서 돈 잘 버는 능력이 중요하듯.

이곳 켄타우로스 사회에서는 잘 달리는 능력이 제일 우대받았다.

빠른 자는 능력자로 인정받고, 느린 자는 혀 끌끌 차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듯 이들은 빠른 속도에 환장한 민족, 아니, 종족이었다.

'그래서야. 급출발에 급정거는 기본에 급선회와 자유로운 가감속은 걸음마 떼듯이 하는 자들이기도 하고.'

만약 이곳의 켄타우로스 종족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과속을 밥 먹듯이 하고 깜빡이 없는 칼치기 차선변경 등의 난폭운전러가 되지 않았을까.

과속 딱지와 신호위반 딱지 수집가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쨌건 그런 이들의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쪽이 순찰대장에게 발급받은 붉은색 과속 표식.

그 표식 덕분에 어딜 가나 환대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곳 숯돌바람 부족의 영토에 오기까지 지나쳤던 다섯 개의 켄타우로스 촌락에서 매우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아예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등 떠미는 부족장도 있을 정도였지.'

당연히 기겁했다.

한데 등 떠밀린 켄타우로스 처자가 이쪽을 보자마자 왜 다리가 네 개가 아니냐며 울음을 터뜨린 바람에 더 식겁해야 했다.

'...빌어먹을 외모지상주의!'

 

아드득!

 

로이드는 살포시 떠오르는 지난 이틀 동안의 기억을 접었다.

그리고 자신을 선망과 감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켄타우로스 부족민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 제가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 말입니다."

"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저요! 저한테 물어보세요!"

"이보쇼! 내가 대답 잘해줄 수 있소!"

"...."

이쪽이 한마디 조심스레 묻자마자 켄타우로스 청년 1, 여인네 1, 아재 1이 차차착 앞다투어 나섰다.

로이드는 쓴웃음을 애써 삼켰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분한테만 답을 구하는 건 아니라서 말이죠. 누구라도 좋으니 대답을 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뭘 묻고 싶으신지!"

"저요! 제가 대답해드릴게요!"

"어허! 내가 제대로 알려줄 수 있다니깐!"

"...아하하. 네,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런 물건을 찾고 있어서 말입니다."

 

팔랑!

 

품속에서 종잇장을 꺼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미리 그려둔, 두 번째 핵심자재인 타우포를 상세히 표현한 그림이었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8미터와 6미터, 높이는 1.2미터쯤 되는 커다란 암석입니다. 끝 부분에 여기, 보시듯이 특이한 턱 구조가 있고 말입니다. 혹시 이 근처에서 이런 돌덩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크흑! 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어흑! 저도 보고 싶어요! 알려주고 싶어요!"

"에라이! 당장 찾으러 간다! 여기서 딱 기다리쇼!"

열성적인 모두의 반응과 달리, 딱히 만족스러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쓰읍. 타우포를 가져온 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런 건가.'

로이드는 내심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인어 왕국에서도 이랬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탓에 보옥과 관련된 행방을 아는 이가 거의 남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여길 전부 측량하면서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로이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시선을 던지건 오로지 지평선, 또 아득한 지평선만 보였다.

대평원이라는 이름답게 넓어도 너무 넓은 곳이었다.

그래서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그래도 아직은 모르는 거니까 더 물어보자.'

로이드는 각오를 다지고서 수소문을 계속 이어갔다.

켄타우로스 부족민과 마주칠 때마다 타우포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마침내 귀가 솔깃해지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 나 그거 아는데! 그런 옛날이야기는 대족장님이 제일 잘 안다고 그랬어요!"

어떤 꼬맹이 켄타우로스가 냉큼 대답했다.

망아지 같은 발굽 따각거리며 부족 영토 중앙을 가리켰다.

"저기 대족장님 살아요! 내가 안내할래!"

"...어, 그래. 고마워."

꼬맹이 켄타우로스를 따라갔다.

대족장의 거처는 딱히 눈에 띄는 건물이 아니었다.

다른 켄타우로스 부족민들과 거의 똑같은 구조의 천막형 마굿간이 대족장의 거처였다.

하지만 대족장의 외모는 결코 범상치(?) 않았다.

"어서 오게나, 붉은 과속 표식을 얻은 인간이여. 내 아까부터 부족민들이 술렁이는 소리는 잘 듣고 있었지."

"...."

점잖고 중후한 목소리로 이쪽을 반기는 대족장.

한데 그의 외모는 점잖음이나 중후함과는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었다.

'헐.'

로이드는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눈앞에 당당히 서 있는 대족장.

노령에도 불구하고 쌩쌩하게 살아 있는 말근육 몸체.

그 몸체의 털을 요란하게 바짝 깎은 모습이었다.

한데 그 모양이 인간의 문신, 타투처럼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딱 그거네. 자동차 동호회원들이 차에 엄청나게 붙여대는 온갖 스티커. 데칼. 불꽃 무늬랑 번개 문양에 독수리에 호랑이랑 해골에다가 화살 뿅뿅 하트까지. 난리 났구만, 아주.'

그야말로 대족장의 몸은 전신이 도화지였다.

말 몸통 위의 인간형 상체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만 빼고 목덜미까지 온갖 문신이 전신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었다.

게다가 귀며 코며 입술까지 피어싱이 가득했다.

히피족처럼 치렁하게 기른 머리칼은 그야말로 당장 헤드뱅잉을 해도 어울릴 법한 자유인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심지어 발굽까지 튜닝, 아니, 개조했어. 으으 뾰족뾰족. 저 발굽엔 한 방만 차여도 돈까스 고기처럼 다져질 듯.'

여러 가지 의미로 엄청난 외모였다.

실로 속도광 종족의 대족장다운 품격(?)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로이드는 대족장의 인사를 받으며 급하게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흠흠, 왕년에 좀... 쎄게 노셨던 듯.'

하지만 상대가 왕년의 폭주족이건 레이서이건 뭐건.

자신의 용건은 따로 있었다.

로이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격식을 차렸다.

"여기, 인간 로이드 프론테라가 대평원의 주인 종족을 이끄는 분을 뵙습니다."

"허허. 최고의 증표를 지닌 데다 겸손하기까지 하군. 반갑네. 나는 켄타우로스 종족을 이끄는 대족장 체로칸이라고 하네."

"아, 예."

대족장 체로칸이 선뜻 손을 내밀어 왔다.

의심이나 음흉함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는 호방한 모습이었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로이드도 부담 없이 시원하게 용건을 밝힐 수 있었다.

"예,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 이곳에 타우포라는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타우포?"

"예, 까마득한 신화시대에 켄타우로스 종족이 가져온 물건입니다."

"흐음, 신화시대? 그럼 진실의 보옥에서 가져온 자재를 찾고 있는 건가, 자네는?"

"아, 예. 바로 그겁니다."

오오, 좋다.

이야기의 진행이 빠르다.

로이드는 희망을 느끼며 말했다.

"혹시 대족장님께서는 타우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지."

"그럼 그게 어디 있는지 좀 알려주실 수는...."

"없네."

"...예?"

"알고는 있는데, 알려줄 수는 없네."

대족장 체로칸이 호방한 태도만큼이나 시원시원한 거절의 멘트를 스트레이트로 날려 왔다.

로이드는 콧구멍을 콱 크게 만들며 물었다.

"그, 저기, 어째서 알려주실 수 없으시단 건지."

"내 마음일세."

"...."

아 진짜.

확 멱살이나 잡아 버릴까.

아니면 힘으로 제압해서 위치를 말하게 할까.

로이드는 홧김에 치미는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이 아저씨 은근 사람 가지고 노네. 이거, 확 힘으로 밀어 버려? 아냐. 하비엘이나 용용이만 동원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한데, 생각 없이 그랬다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보았다.

'보옥 핵심 자재를 찾아야 하잖아. 그런데 그거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걸로만 끝나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런데 괜히 힘을 써서 켄타우로스 종족 전체를 적으로 돌린 상태인 거라면? 협력을 못 받게 된다면? 골치 아파질지도 몰라.'

처음 진실의 보옥 토대를 찾을 때도.

첫 번째 자재인 타우랑가를 뽑을 때도.

인어 종족과 국왕의 도움이 굉장한 힘이 된 바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행동하자. 인생은 생각보다 길고, 긴 인생 살다 보면 어떤 엿 같은 일이 닥쳐올지 모르는 거야. 그래서 사람한테 인맥이 중요한 거고.'

문득, 대한민국 고시원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가족이나 친척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원래 있던 부모님의 지인이나 먼 친척들은?

부모님이 극단적 선택으로 돌아가신 뒤로 연락이 싹 끊겼다.

아무도 자신을 향해 손 내밀어 주지 않았다.

인맥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부재와 뼈저린 결핍 덕분이었다.

'사람한테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눈앞의 대족장도, 켄타우로스 종족도 좋은 인맥으로 남겨두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될 거야. 그런 좋은 기회를 짧은 생각으로 차 버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거고.'

그러니 항상 자신의 편을 만들어두자.

이런 때일수록 티타늄 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마인드를 야물딱지게 다져두자.

그렇게 내심 다짐하며 로이드가 말했다.

"저기, 그럼 대족장님?"

"말하게."

"혹시 제게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이제야 그걸 물어보는구만. 당연히 있지. 내가 바라는 걸 자네가 선뜻 내어준다면 나도 자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고."

역시.

'공짜는 없다는 거구만.'

사람 사는 세상이건 켄타우로스 종족이건 그건 다 똑같은 거다.

그 사이, 대족장이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자네가 내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일세."

"고민이라 하시면?"

"요즘 우리 종족의 젊은이들. 요즘 어린 것들. 그 친구들의 무모한 혈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네."

"혈기... 때문에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족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우리 종족이 속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빠르게 달리는 자를 얼마나 숭상하는지. 그래서일세. 우리 종족은 청혼을 할 때도 달리기로 승부를 가리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장 빠른 자가 원하는 짝과 맺어질 수 있단 말일세."

"으음, 그런데요?"

"그게 문제라네. 지나치게 경쟁이 과열되는 경우가 허다해서 사고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네."

"으음, 과속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입니까?"

"바로 그거지. 지나친 과속, 신호 없는 급격한 경로 변경, 위협 달리기 등등의 난폭한 주행은 자칫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함께 달리는 다른 이도 위험에 처하게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치고, 불구가 되고 있으니 말일세."

"하면...."

"그냥 과격한 달리기를 못하게 말리면 되지 않느냐고? 아니야. 그런 걸로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닐세. 달리기라는 건 우리 종족의 본능 그 자체니까. 달리기 자체를 막을 순 없어. 그래서 내가 고민하는 것일세. 우리 종족 젊은이들이 마음껏 달리면서도 지금보다 안전하게 청혼 의식을 치를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 말이네."

"음, 그게 고민이셨던 겁니까?"

"그렇다네."

나름의 고민을 털어놓은 대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민을 다 들은 로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 간단한 문제인데요?"

"뭐? 간단하다고?"

"예."

정말로 간단한 문제다.

로이드는 피식 웃었다.

대족장의 고민을 듣자마자 좌라락.

떠올리며 설계한 답을 말해주었다.

"이참에 레이싱 목적의 서킷형 콜로세움 하나 지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291화. 난폭운전은 나빠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