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꺄아아아아아악!"
"아이리 씨이! 지, 진정하세요오!"
"어, 어라...?"
아이리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미유의 핼쑥한 얼굴. 땀에 젖은 긴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얼굴 옆으로 그녀의 기계꼬리가 라이트를 밝히고 있었다.
"여, 여기는?"
"제 방이에요오... 아, 안심하셔도 좋아요오...."
그 말을 듣고서야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기계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 끝에 걸린 모니터에서는 빠른 속도로 모종의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었다.
기억이 흐릿했다.
아침을 먹고 있던 게 아니었나?
어째서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거지?
"무... 슨 일이 있었... 던 거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폐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꽉 들어차서 막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아직 어지럼증도 조금 남아 있었다.
"이, 일단 진정하시고 물부터...."
미유가 자그마한 양손으로 물컵을 건네주었다. 아이리는 그것을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돌려주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이리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해, 해킹당하신 거 같아요오...."
"해킹?"
미유의 말에 아이리는 의문을 표했다.
"해킹이라면... 테크노 위자드?"
"네, 아마도요오...."
미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 좋은 위자드가 있었던 모양이에요오... 아이리 씨의 신경계 쪽을 잔뜩 헤집어 놓고 갔는데...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어요오...."
"위험한 상황이라면 얼마나?"
"저... 그게...."
미유는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그 위험한 상황이라는 게 목숨이 걸린 수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 위자드라니...."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위자드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종종 들어 봤었다. 하지만 좀처럼 보기 드문 족속들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식 명칭은 테크노 위자드(Techno Wizard).
각종 모듈과 사이버웨어, 사이버네틱스 장치를 이용하여 고도로 발달된 해킹 능력을 발휘하는 전문 해커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위자드' 혹은 '마법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자드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뛰어난 해킹 능력을 이용하여 각종 마법 같은 일을 행하곤 했다.
전산망에 접속하여 각종 전자장치에서 중요한 정보를 탈취하거나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즉석에서 상대의 사이버웨어나 모듈, 나노머신 등의 보안 취약점을 파고들어 고레벨 증강자나 적응자를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바로 아이리가 당한 것처럼 말이다.
"상당한 실력의 위자드인 것 같아요오... 지금 아이리 씨의 시스템 로그를 살펴보고 있는데... 거의 흔적이 남지 않았어요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은 몰랐어."
아이리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오래전, B섹터에서 대마법사급 위자드 하나가 시민들에게 무차별 사이버 테러를 가한 적이 있었다.
그날 그의 손짓 한 번에 수십 명의 민간인들의 머리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되었다.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인근 구역을 전부 봉쇄하고 하루가 넘도록 끈질기게 대치한 끝에야 간신히 사살하는 데에 성공했던 사건.
그 이전까지 위자드들을 다소 경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기업과 정부, 민간에서도 그들의 위험성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뉴 발할라 시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테크노 위자드란 이름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설마 아카데미 학생들 중에 위자드가 있었을 줄이야."
위자드의 핵심 능력은 '해킹'인 만큼,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비]들을 상대할 때는 다소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신비]를 상대하는 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에, 대인전에만 특화되었다 할 수 있는 위자드가 섞여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가 기업들의 사병 육성소로 전락했다는 건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그러니 괴물들 대신 인간을 상대하는 위자드가 몇 명 몰래 키워지고 있대도 이상할 건 없겠지.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는데...."
위험하다고 해서 모두가 꺼리는 폴른과 E섹터의 뒷골목을 평생 누비고 다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충격이었다.
위자드니 뭐니 해도 겪어 본 적이 없다 보니 실력으로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그렇게 아이리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자, 미유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 아이리 씨. 나노머신 보안 프로그램 업데이트는 어, 언제 받으셨는지...."
"...어? 그게 뭔데?"
"...!?"
미유는 아이리의 낮디낮은 보안 의식에 경악한 듯 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호, 혹시 그럼 안티 위자드 모듈이나 전용 사이버웨어... 아니면 네트워크 강제 차단 기능 같은 건...."
"어, 없는데...."
"그 말씀인즉, 아이리 씨 본인의 보안 취약점이 어딘지 전혀 모르시고 계신다는...?"
"...응."
아이리의 짤막한 수긍.
그녀를 바라보는 미유의 눈빛이 원시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바뀌었다. 미유는 다소 건조해진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서, 설마 아이리 씨... 이상한 사이트 같은 곳에서 어플도 마구 다운받고 그런 건 아니시겠죠오...?"
"이상한 사이트라니?"
"야, 야 한 동영상 사이트라든가...."
"얘! 그런 거 안 들어가거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뭘로 보고!
아이리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에 미유가 순간 겁을 먹고는 몸을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
"아, 아니, 나야말로 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이 보안에 신경 쓰지 않은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결국 미유까지 덩달아 피해를 보게 만들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이쪽일 테지.
아이리는 볼을 긁적이며 "미안."하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미유는 아이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고, 고레벨 적응자와 증강자들에게 '해킹 방어 시스템'은 필수예요오... 담당 모듈러에게 업데이트도 주기적으로 받고... 최신형 안티 위자드 모듈과 사이버웨어도 인스톨하고...."
"그, 그렇구나."
전혀 생각지 못했다.
돈이 없다 보니 그런 걸 이식받을 생각 같은 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네트워크 기능을 완전히 차단하거나, 아예 순수주의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오...."
전문분야가 나오자 미유의 설명이 길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리 씨의 '아담'은 공식사이트에서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도록 하고... 추가 백신 프로그램은 제가 개발한 게 있으니 그걸 설치하고... 안티 위자드 모듈은 오전 중으로 만들 수 있는데, 재료가 없어서 통상 Lv.2 수준이 한계일 것 같고, 또...."
"으, 으음?"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잔뜩 지나갔다.
아이리는 살짝 멍한 상태로 그녀가 중얼거리는 걸 망연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대뜸 미유가 자기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아, 아니! 이럴 때가 아닌데에!"
"왜, 왜 그래? 진정해!"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오!"
미유는 덥석 아이리의 손을 붙잡았다.
울먹거리는 눈을 하고선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아, 아이리 씨 충격 받지 말고 들어 주세요."
"너야말로 조금 진정하는 게 어떨까."
"지,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오!"
미유가 소리를 질렀다.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깨달은 아이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미유는 한참이나 아이리의 손을 잡고 울먹이더니 끝내 결심한 듯.
"아이리 씨, 이대로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조만간 목숨을 잃고 말 거예요...!"
아카데미 흑막 시점 34화
"...내, 내가 죽는다고?"
아이리의 질문에 미유가 울먹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 지금 장착하고 계신 모듈이 신경을 좀먹고 있어요오... 자세히 보니, 지금 쓰시고 계신 모듈 소켓HUB도 원래 적응자용 제품이 아닌데... 처음 모듈을 인스톨하셨을 때 이상함을 못 느끼셨나요오...?"
"지금 장착한 모듈이라면...."
오빠의 유품.
아이리는 반사적으로 뒷덜미 소켓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딱딱한 플라스틱과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아이리는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진실을 털어놓았다.
"응. 이거, 원래 이랬어."
"네?"
"적응자가 되기 전... 그러니까 나노머신을 투여받기 전에, 뭣도 모르고 맞지도 않는 구멍에 꽂아 넣었지. 그거 때문이야."
아이리의 눈앞에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나 재생되기 시작했다.
* * *
모듈의 정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뒷골목 모듈러를 찾았다가 양아치들에게 찍혀 쫓기던 그때의 기억.
아이리는 놈들에게 모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급한 대로 소켓에 모듈을 삽입했다.
그 후, 놈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다가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원래 찾으려고 했던 뒷골목 모듈러의 작업대 위였다.
-일어났냐 꼬맹이.
-나... 어, 어떻게 여기에...?
-근처에서 로드킬 당한 시궁쥐마냥 뒈져 가는 거 주워 왔다. 그 새끼들, 지들도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도중에 튀었더라고.
그래서 살아 있었던 거구나.
중간까진 정말로 죽는구나 싶었다.
살아 있음과 유품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더니, 모듈러가 잔소리를 해 댔다.
-잘 좀 먹고 다녀라, 뭐가 그리 가볍던지.
-시... 끄러...!
-말이 잘 안 나오지? 걍 다물고 쉬면서 들어. 안 좋은 소식이랑, 존나게 안 좋은 소식이 있으니.
뒷골목 모듈러는 자신 앞의 모니터를 돌리더니 아이리에게 보여 주었다. 전신 X-레이 사진이었고, 곳곳에 빨간색으로 X표시가 되어 있었다.
-안 좋은 소식은 네 전신의 뼈가 반쯤 조져졌다는 거야. 한두 달쯤은 생활하는 게 불편할 거다.
-그... 게 나쁜... 소식이면....
-더 나쁜 소식은 이거.
뒷골목 모듈러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젓자, 이번에는 두개골 쪽 X-레이 사진이 떴다. 뒷덜미 쪽에 네모난 형태의 칩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얻어맞은 충격으로 네 모듈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 같다. 그 탓에 신경 쪽하고 잘못 맞닿으면서 제거할 수가 없게 됐어. 아직은 괜찮은데, 이대로라면 네 수명을 깎아 먹을 거야.
-뭐...?
-날 그렇게 보지 마, 꼬맹아. 그러게, 누가 적응자도 아닌 놈이, 일반 소켓HUB에 전투모듈 같은 걸 끼우랬냐?
-수, 수술로... 제거...?
-안 된다고 했잖아. 이걸 제거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하나는 네 몸이 수술을 견딜 수 있어야 할 정도의 회복력을 갖춰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놈의 사양서를 얻어야 한다는 거고.
-사양서는... 왜...?
아이리가 묻자 모듈러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알아야 제거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뭐, 나보다 뛰어난 모듈러라면 그냥 딱 보고 구조를 파악하고 슥삭 해치우겠지만. 아, 추가로 돈이랑 수술할 설비도 필요하겠네. 내 작업실 수준으론 불가능해.
이렇게 보니 조건이 네 개네! 푸하하!
모듈러는 자신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는 듯 크게 웃어젖혔다.
아이리는 그 면상에 죽빵을 갈겨 주고 싶었지만, 온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모듈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이 조건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긴 하지.
-유일한... 방법...?
-아카데미에 들어가.
모듈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거기서 뛰어난 인재라고 인정받으면 모든 게 해결돼. 폴른의 '빌어먹을 개새끼'가 아니라, 기업 놈들의 '우리 예쁜 뽀삐'가 되면 네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겠지.
-....
-생각해 보니 거기선 너희 오빠가 죽은 이유도 찾을 수 있겠네. 뭐, 어떻게 들어갈지는 네가 알아서 궁리해야겠지만,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나?
아이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선택지는 없었다.
* * *
"...그게, 내가 아카데미에 온 이유야."
오빠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히고.
동시에 모듈을 제거하는 것.
그 목표를 위해 아이리는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오기로 결심했다.
운 좋게도 아카데미의 문은 폴른 출신들에게도 좁게나마 열려 있었고, 그녀는 나노머신에 대한 적성도 뛰어난 편이었다.
"다행히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이 남아 있지만."
"아이리 씨...."
이야기를 들은 미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적응자가 되신 덕에 세포 회복력이 강화되어서 침식은 많이 늦춰진 상태인데...."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 뒷골목 모듈러가 적어도 돌팔이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저라면 아마 사양서 없이 모듈을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오... 몇 가지 설비가 더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아론 스팅레이, 그 인간이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했었으니까.
다만 그 직후에 황태자 실종이라는 워낙 큰 사건이 아카데미를 뒤흔들어 놓은 탓에 좀처럼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의지하던 후원자가 사라져서 잔뜩 충격 받은 녀석에게 '내 문제 좀 해결해 줘!'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며칠 정도 미유와 친분도 쌓고, 그녀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네 반응을 보니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지?"
"저어... 그게...."
"괜찮으니까 설명해 줄래?"
"위, 위자드 때문이에요오...."
아이리의 말에, 미유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위자드가 아이리 씨의 모듈에 악성코드를 심어서 폭주시켰어요... 그 탓에 나노머신의 회복력으로 간신히 유지하던 균형이 깨졌고, 다시 침식이 진행되기 시작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
아이리의 물음에 미유는 조용히 긍정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이 소심한 여자애의 마음에 상처를 줄 뿐일 테니.
"모듈을 제거하려면 일단 악성코드부터 제거하고 폭주상태를 멈춰야 해요오... 하지만 해제코드를 아는 건 제작자뿐이라...."
"미유 너도 프로그래밍 할 줄 알잖아. 어떻게 안 되는 거야?"
"시, 시도는 해 보고 있는데...."
미유의 눈길이 슬쩍 모니터로 향했다.
엄청난 양의 로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화면. 해제 코드를 찾아내는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는 듯했다.
아이리가 부탁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작업하고 있던 것이었다.
"사실 이미 보안의 9할 정도는 돌파했어요... 나름 참신한 방식으로 설계를 해 놨지만 의외로 허점이 많았거든요오...."
"벌써?"
위자드는 해커들 중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지닌 상위 1%만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그런 위자드가 만든 악성코드를 겨우 몇 시간 만에 대부분 파훼해 버렸다니.
'이 아이는 대체....'
얼핏 음침해 보이는 외견과 행동거지 안에 얼마나 커다란 재능이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인가.
허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
아이리는 이내 깨달았다.
미유가 그런 식으로 운을 뗀 이유는,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마지막 단계가 까다로워요...."
"어째서?"
"이건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라, 조금 쉽게 비유해 드리자면...."
미유가 설명하기를.
아무리 뛰어난 열쇠공이 온들, 도어락의 해제법 자체가 특정한 방법으로 정해져 있다면 푸는 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비밀번호가 아니라 지문인식이나 홍채인식인 경우.
지문이나 홍채를 복제하든, 잠금장치를 부수든, 문을 통째로 잡아 뜯든 해결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같이 시간을 오래 잡아먹는 일이라고 한다.
"이번엔 아무래도 해킹모듈을 이용한 특정한 신호패턴이 코드를 해제할 열쇠인 것 같은데... 다만 이건 위자드 본인만 갖고 있는 열쇠인 셈이라...."
"바, 방법은 없는 거야?"
"아이리 씨의 경우에는 이 상태론 과격한 방식을 쓸 수가 없어서... 당시 이 아이의 센서에 잡힌 특정한 신호 파편들을 재조합해서 열쇠를 복제하는 중이긴 한데요오...."
미유는 자신의 기계 꼬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모, 모듈을 이용한 해킹은 기본적으로 정보량이 상당하다 보니 처리하는 데에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요...."
모양이 말도 안 되게 복잡한 열쇠를 복제하는 작업이다. 심지어는 보고 베낄 원본도 없고, 이리저리 흩어진 파편만을 갖고 추측해서 진행해야만 하는 과정.
하지만 그럼에도.
미유는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을 뿐.
그렇다면....
"얼마나 걸리는데?"
"일주일 정도... 그런데...."
"그렇게 말한다는 건, 모듈의 신경침식 속도가 그보다 빠르다는 거겠지?"
"...."
미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아이리는 털썩,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일주일?"
입으로 되뇌어 봤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다른 방법은? 정말로 없는 거야?"
"한 가지... 아니, 현실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두 가지 있어요."
"혹시 모르잖니. 둘 다 말해 줘."
"하, 하나는 '오메가 인베스트먼트' 사의 마더 보드를 잠시 빌리는 거예요오."
오메가 인베스트먼트.
뉴 발할라 시티의 최대 투자사 중 하나로,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이 초월적인 인공지능 하나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다.
투자와 이익 창출만을 위해 만들어진 AI이긴 하지만, 그것의 연산 능력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해제 코드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지, 지금은 아론 씨가 안 계시니 그 동생이라는 분께 부탁해서 오메가 인베스트먼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에...."
"불가능에 가깝겠지."
"네에...."
아론에게 부탁한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이야기인데, 그와 기업경영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는 베네딕트에게 부탁한들 들어줄 리가 없을 테니.
"그럼 다른 하나는?"
"악성코드 제작자와 합의해서 해제코드를 받아 내는 거예요오...."
일순 그게 말이나 되나 싶었지만.
오히려 이쪽이 현실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이번 일을 저지른 범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알았어."
아이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범인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레온 알베르트.
그 빌어먹을 스터디 그룹의 리더에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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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해방자(解放者) 'CL-00245'를 만났다.
업적 포인트: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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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계획이 또 어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를 이 세계에 데려온 새끼는 내 계획을 망가뜨리는 재미로 사나?
아무리 완벽하게 플랜을 세워 놓아도, 이놈의 빙의자니 특전이니 하는 것들이 전부 다 어그러뜨리니 화병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생각해. 생각해라.'
상황을 파악하자.
어째서 업적이 달성된 걸까?
시엘이 빙의자라는 내 판단이 틀렸던 것인가? 아니면 대상이 빙의자더라도 상관없이 업적이 달성되는 방식인가?
둘 중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내 계획은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내 판단을 믿는 수밖에 없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 모습은 '아론 스팅레이'가 아니라 '베네딕트 스팅레이'다. 상대를 떠보기엔 제격이란 의미다.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묻는다.
"네 이름은 뭐지?"
"제, 제조번호 CL-00245...."
"아니, 잘못 이해한 모양이군. 네 '진짜' 이름을 묻고 있는 거다."
"...."
내 질문에 녀석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공포와 당혹. 안드로이드로서는 가져서는 안 되는 '감정'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녀석이 빙의자임을 100% 확신할 수는 없다. 원작에서도 시엘은 자아와 감정을 각성한 안드로이드였으니까.
"다시 한번 묻겠다. 이미 네 정체는 파악한 지 오래다. 네 '진짜' 이름은 뭐지?"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 네가 빙의자라는 사실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마지막 확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
차라리 입을 다물길 택하는 건가.
협박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다.
인체와 다르게 고통을 느끼지 못해서인가? 아니라면 기계신체가 감정조절에 영향을 주는 건가?
어느 쪽이든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
"확인이 끝나면 너는 죽을 거다. 설령 빙의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시나리오를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선 널 죽일 수밖에 없어."
"노, 놓아주십시오. 저를 파손하는 것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사유 물품을 손궤하는 행위에 해당되며...."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군.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그럼 '베네딕트 스팅레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테지."
"...!"
한층 더 동요하기 시작한 시엘.
스팅레이 가문의 일원이라면 '아카데미 소유물' 운운하는 협박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 당신이 아론 스팅레이의...."
"동생이지."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너도 이미 파악했다시피 아론 역시 빙의자다. 나는 녀석의 밑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그렇다는 건...."
녀석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
이제 한 발짝만 더 넘으면 된다.
"...그래, 그 녀석은 아직 살아있다. 이제 나 혼자 녀석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그,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메인 캐릭터들에게 접근하는 걸 그 녀석이 막고 있다. 내 계획이 실패한 이상 나로서는 움직이는 데에 한계가 있어."
"요컨대...."
시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 '아론 스팅레이 습격 사건'의 범인이 당신이라는 건가요? 그리고 다시 한번 그를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협력해 달라는 말씀인가요?"
"그래. 나는 같은 '빙의자'로서, 나와 '동맹'이 되자고 말하고 있는 거다."
"동맹...."
"어차피 네게도 이 이상 물러설 길은 없다. 지난번 [천근추] 건으로 아론은 이미 네 정체도 파악했다. 아마 조만간 널 노리기 시작하겠지."
"...."
그러자.
마침내 결심한 듯.
"제 이름은...."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제 '진짜' 이름은 ■■■■■예요."
"...?"
...어?
...뭐라고?
아카데미 흑막 시점 35화
"제 이름은 ■■■■■예요."
"...뭐?"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내 사이버네틱스 장치에 일시적으로 오류가 생긴 건가? 아니면 모듈 쪽의 에러인가? 아니면 단순히 녀석이 날 기만하는 건가?
여러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언어였을 뿐이다. 듣는 순간에는 괜찮았지만, 그게 뇌에서 인식을 거치는 과정 중에 오류가 일어난다는 느낌이다.
마치 단어 자체에 잠금장치나 안개가 씌워진 것처럼.
아무리 봐도 초월자의 장난질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아마 플레이어들끼리 이런 식의 교류를 하는 걸 막고 싶었던 거겠지.
'셰이드에 빙의한 녀석도 죽기 전 영상에서 자기 이름을 말하려다가 말았었는데... 그건 이미 사망한 경우라 괜찮았던 건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시엘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힘으로써, 녀석이 빙의자임이 확실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시엘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몸에서 일어나 조금 거리를 벌린 후, 옆에 있던 벽에 등을 기댔다.
시엘은 천천히 내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다.
"...."
"...."
기묘한 침묵.
몇 초간의 눈치 싸움이 끝난 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게 협력하겠다는 걸로 알고 정보 교환을 하고 싶다. 괜찮지?"
"무, 물론이에요. 찬성이에요."
녀석은 긴장한 듯 보였다.
하기야 베네딕트 역시 스팅레이 가문의 일원이니 당연하겠지. 아무리 베네딕트가 비중 낮은 조연이라고 한들 일개 메이드 안드로이드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우선, 너는 빙의자가 확실한가?"
"'빙의자'라는 게 다른 세계 출신이냐고 물으시는 의미라면... 맞아요."
"너도 원작 소설의 독자였나?"
"네. 완결기념으로 퀴즈이벤트에 참가했다가, 결과를 확인했더니 이렇게 됐죠."
거기까지는 완벽하게 같다.
역시 완결 기념 퀴즈이벤트에 참가하는 게 빙의되는 조건이었던 듯하다.
"이 세계에 온 건 언제쯤이지?"
"한 달 전이요. 아카데미 입소일 기준 33일 전이죠. 눈을 떴더니 아카데미 안드로이드 보관소더라구요."
점점 입이 풀리는 듯, 길어지는 대답.
본디 수다쟁이인 성격인 것인가? 아니면 원작에서도 수다쟁이인 시엘이 자아에 영향을 미친 것인가?
나는 그녀를 분석하면서 계속 질문을 이어 나갔다.
"어째서 하필 '시엘'을 선택한 거지? 빙의하고 싶은 다른 캐릭터들도 많았을 텐데."
내심 제일 궁금했던 점 중 하나였다.
원작에서 시엘이란 캐릭터는 활약은 적고 소설의 분위기만 책임지는, 일종의 감초 캐릭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아카데미 가정부 로봇으로 일반 기숙사 학생들의 뒷바라지를 담당하던 시엘은, 어느 날 갑자기 자아를 깨닫는다.
그런 그녀의 소망은 사람이 되는 것.
인간의 명령에 따르는 로봇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시엘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몰래 학생들의 돈을 조금씩 훔쳐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 차이점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이 금속이냐 단백질이냐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생체 부품을 구입하여 온몸을 인간처럼 피와 땀이 흐르도록 개조하면 인간으로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었다.
'그러다 도둑질이 들키면서 여차저차 주인공하고 얽히게 되는 게 시엘 에피소드지....'
에피소드의 결과만 말하자면 시엘은 인간으로 공식적으론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도 주인공 일행과 어울려 잘 지내게 된다.
그 후로는 주요 인물들의 대화에 깨알같이 끼어들어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조연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
물론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엽게 그려져서 독자들에게 인기가 상당한 편이긴 했다. 빙의자로서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어서 문제일 뿐.
그러니 나로선 궁금할 수밖에.
'왜 하필 시엘이었을까?'
어쩌면 이 녀석은, 나조차 미처 떠올리지 못한 참신한 계획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시엘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했다든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제가 선택했다고요?"
시엘의 목소리에 살짝 노기가 서렸다.
"누, 누가 좋아서 이딴 몸을 선택했겠어요!"
"선택한 게 아니었다고?"
"맨날 애들 수업 들으러 가면 기숙사에서 방 치우고, 빨래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고맙다는 소리를 듣기는커녕 고물이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동네북처럼 툭툭 건드리는 몸뚱이를, 제가 선택했을 거라고 보세요?"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쌓인 게 상당히 많은 모양. 하기야 이곳은 안드로이드에게 상냥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세계긴 하다.
"퀴즈의 마지막 문제는 빙의할 대상을 선택하는 내용이었을 텐데."
"그야 당연히 적었죠. 저는 에반젤린이 되고 싶었어요."
"마녀 에반젤린 말인가?"
"네."
"어째서?"
"예쁘고 강하잖아요."
에반젤린이라면 주인공 대열에 늦게 합류하는 캐릭터. '테크노 위자드' 혹은 '테크 위자드'라 불리는 해커들과 다르게, 그녀는 '진짜' 마법을 쓰는 마녀였다.
시엘이라면 몰라도, 그쪽이라면 확실하게 빙의할 메리트가 있다.
"아니면 칼리아 스팅레이도 나쁘지 않았겠죠. 재벌집 막내딸이니 뭐든 맘대로 할 수 있을 테고."
"...."
"왜 그러세요?"
이 녀석이 여동생이 된다고?
아론의 자아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왠지 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의외로 아론은 여동생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모양.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시엘은 수다를 이어 나갔다.
"근데 뭐 어쩌겠어요. 이미 전 안드로이드가 되어 버렸는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퀴즈에 참가하는 건데...."
"몇 등이었지?"
"장려상이요."
"...음."
이제야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이 녀석의 말이 진실이라고 했을 때.
세울 수 있는 가설은 두 가지.
하나는 장려상, 말하자면 퀴즈이벤트에 당첨되었으나 순위가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빙의 대상이 선택되었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이 녀석이 답안지 마지막 문제에 적어 냈을 '에반젤린'이나 '칼리아'가 이미 빙의자일 가능성.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어.'
머릿속에 '할 일' 리스트에 적어 놓은 후, 다시 질문했다.
"너 말고도 장려상이 있었나? 총 몇 명이나 퀴즈이벤트에 당첨됐었지?"
"어... 잘 모르겠는데요. 어째서인지 그 부분의 기억이 모호해요. 분명 기억으로는 저 말고도 몇 명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또 아닌 것 같고."
"중요한 정보다. 떠올려 봐라."
시엘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댔다.
그녀의 AI코어가 과열되며 팬이 웅웅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결국 허탕이었다.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너도 마찬가지인가."
"네? 그럼 당신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다른 당첨자가 몇 명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내가 1등이란 사실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어쩌면 초월자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의 기억을 막아 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마치 배틀로얄 게임에서 마지막 생존자가 몇 명인지 알려 주지 않는 것처럼.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아졌어.'
빙의 대상이 랜덤으로 선택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의심 대상의 범위가 확 넓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원작과는 하등 상관없는.
예컨대 D섹터에서 동네 마실 다니는 배불뚝이 아저씨가,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빙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상정해서 계획을 세울 수는 없어.'
이러한 정보를 알아냈다고 해도, 결국 내가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스토리 공헌도를 올리고, 포인트를 얻어서 전성기 아론의 무소불위한 힘을 되찾는 것.
또한 주요 캐릭터들을 성장시켜서 앞으로 다가올 위기에 대비시키는 것.
'포인트를 꽤 벌었다고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
조금의 포인트도 아쉬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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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포인트: 26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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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시엘과 만나면서 얻은 포인트까지 합하여 총 2600P가 남아 있었다.
이걸로 전부 모듈 호환성 티켓을 구입한다고 치면 300P씩 8장. 구입 후 남는 포인트는 200P.
'아직 착용하지 못한 17개의 모듈 중에서 8개를 추가로 장착한다고 하면....'
남은 모듈은 9개.
더 필요한 티켓이 9장.
300P × 9장= 2700P.
남은 200P를 고려하면 앞으로 추가로 최소 2500P정도가 더 필요할 것이다.
'공헌도만 이대로 유지하면 이번 에피소드를 끝내면 충분할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 시엘 녀석도 나와 같은 식으로 특전을 받지 않았을까?
"혹시 너는 지금까지 포인트를 얼마 정도 벌었지?"
"상점에서 사용하는 것 말이죠? 1500P 정도였을걸요."
아이리와 만나면서 500P.
메인스토리가 시작되며 1000P.
그렇게 해서 총 1500P라는 모양.
말을 들어 보니 아직 미유는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자기 방 안에서만 처박혀 있는 녀석을 무슨 수로 만나겠느냐마는.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녀석이 1500P씩이나 벌다니.'
생각보다 포인트를 퍼주는 게 후하다.
그렇다면 다른 녀석들도 그만큼 쉽게 상점 점수를 벌 수 있으리란 의미였고, 바꿔 말하면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절대 포인트가 많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다행히 이 녀석은 날 아론 스팅레이로 인식하지 못한 것 같군. 빅 데이비드의 경우를 봤을 때 악당들은 처치할 때 포인트를 지급하는 식이니....'
한창 머리를 굴리던 와중.
시엘이 내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저기요."
"뭐지?"
"계속 저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분명 협력하자고 하셨잖아요."
"...."
이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까먹은 걸까? 은근슬쩍 맞먹으려고 들고 있다.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을까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이 녀석과는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여러모로 내게 유리하다.
특히나 빙의자인 대상으로부터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녀석을 내치는 것은 충분히 포인트를 빨아먹은 이후가 될 것이다.
'쩝. 아무리 겉모습이 시엘이어도 내용물이 아니란 걸 아니 정이 안 가네.'
이 녀석이 빙의자만 아니었다면 바로 데려가서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했을 텐데.
속으로 씁쓸하게 웃으면서 시엘의 요구를 받아 주기로 했다. 중요하지 않은 정보 몇 가지쯤이야 넘겨준대도 크게 영향은 없겠지.
"묻고 싶은 게 있다면 질문해라."
"우선 궁금한 게 있는데, 아론 스팅레이가 빙의자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고요?"
그야 본인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내가 누군지 잊었나?"
"아...."
나 그 인간 동생이야.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럼 당신은 퀴즈이벤트에서는 몇 등을 했었나요?"
"...장려상."
또 거짓말.
근데 시엘은 그걸 바로 믿었다.
"네? 그럼 당신도 우연히 그 몸에?"
"그래."
"하, 말도 안 돼...."
시엘은 분통을 터뜨렸다.
"똑같이 장려상인데! 누구는 운이 좋아서 재벌집 둘째 아들이고! 누구는 아카데미 노예고! 으아아아악! 작가 새끼야, 양심이 있냐아아아!"
미쳐 날뛰려는 시엘을 일단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기야 나라도 같은 상황에 부닥쳤으면 억울해 죽었을 것이다.
어쨌건.
시엘은 한참 동안 작가를 욕하며 날뛰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울분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는지 이것저것 내게 잡다한 걸 물었다.
-재벌집 둘째 아들의 삶은 어때요?"
-분명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편한 침대에서 자고 그렇겠죠?"
-하... 부럽네요. 나는 맨날 안드로이드 보관소에서 서서 잠들어야 하는데. 알아요? 여기 이 등 부분에 이렇게 거치대를 고정해서....
"...."
쌓인 게 많았구나.
다소 측은한 마음도 들어, 나는 적당히 말해 줄 만한 건 말해 주고, 푸념도 받아 주면서 녀석과의 신뢰를 쌓아 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그러니까 알겠어요? 이런 몸이 되어서 좋은 거라고는 튼튼하다는 것밖에 없다니까요? 아프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고. 그런데 그거 빼고는-."
"일단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너무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의 하소연을 도중에 끊었다. 이만하면 녀석도 뭐라 하진 않을 테지.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어 냈고, 해야 할 일도 정리됐다.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론 스팅레이가 소설 속 메인 캐릭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앗, 그랬었죠."
"주인공 셰이드 웰즈가 죽은 이상, 세계관 최강자가 아이리나 미유 같은 천재들까지 완전히 포섭해 버리면 그 후로는 막을 수가 없어."
"자, 잠깐만요. 주인공이 죽었다고요?"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시엘의 모습.
이런, 모르고 있었나.
뭐, 상관없다. 잘 말하면 오히려 내게 더 유리할 수도 있으니.
"그래, 죽었다."
"왜요?"
"내 형이 죽인 걸로 보인다. 어쭙잖게 효율적인 루트를 타려다가, 빙의자인 사실을 그에게 들키고 말았던 거지."
"역시 그랬던 거군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온 아카데미를 뒤져 봐도 셰이드 웰즈란 인물은 올해 입학하지 않았더군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었는데...."
"슬퍼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죄, 죄송해요."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일단 협력하지. 일단 내 정보에 따르면 아론이 회복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다. 그전까지 우리는 어떻게든 메인캐릭터들을 통해 포인트를 벌고, 녀석에게 대항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감하는 바예요."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이건 보상을 내가 독식하기 위한 빌드업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어떡할 계획이에요? 아이리와 미유 둘 다 스팅레이 장학생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접촉하기도 쉽지 않아요. 또 사일런스도 현재 제 신분으로는 만날 수 없어서, 협력한다고 해도 대체 어떤 식으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레온 알베르트."
내가 말을 끊었다.
"그가 누군지는 기억하나?"
"네, 스팅레이 장학생 중 한 명이잖아요. 소설에서는 끈덕지게 주인공 일행을 괴롭히던 삼류 악당이고."
"녀석을 이용할 생각이다."
"어떻게요?"
"녀석을 통해 연극무대를 설정할 거다. 나는 이 무대를 통해 확실하게 아론 스팅레이의 목숨을 끊어 버릴 생각이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엘에게, 내가 세운 계획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시엘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뭐,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얼핏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 아론 스팅레이 암살 계획의 실상은, 내가 1부 1막의 공헌도를 독차지하기 위한 계획에 불과했다.
'이 계획의 허점을 깨닫지 못하다니, 눈치가 빠른 녀석은 아닌 듯하군.'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시엘을 비롯한 다른 빙의자들은 아이리에게 접근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모든 연극이 끝나면 아이리는 오로지 내 사람이 될 것이다.
다만 걸리는 점은 한 가지뿐.
'괴로운 경험을 시켜 미안하다, 아이리.'
죄책감이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순간 그녀가 겪는 모든 고통이, 결국에는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본디 악당과 영웅은 한 끗 차이인 법.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부터다.
모든 상황은 내 손 위에서 움직인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6화
아이리 앨리스벨.
1부 1막의 핵심캐릭터.
폴른 출신의 육체파 천재. '전차'라는 이명이 붙을 만큼 돌진적이고 거침없는 성격. 털털하고 터프한 인격의 메인 히로인이다.
허나 나는 아이리의 본모습을 안다.
아이리 자신조차 깨닫지 못한 진심을.
얼핏 강한 척하는 그녀의 모습 속에 감춰진 속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궁지에 몰린 야생 들개.'
마치 동료도 없이 홀로 낭떠러지까지 밀린 한 마리의 들개 같다. 이곳에서 한 발짝만 더 물러서면 끝장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이다.
겁에 질린 들개는 마구 짓는다.
좋은 의도로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물어 버린다. 다가오지 말라고 목청을 높여 소리치면서 으르렁댄다.
'지금은 조금 유해진 상태지만.'
내가 만들어 준 스팅레이의 울타리 덕에 지금은 다소 안전하다고 느낀 덕이겠지.
하지만 야생과 홀로서기에 익숙해진 그녀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혼자라도 괜찮아.
-얼마든지 견뎌 낼 수 있어.
이런 사고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때로는 거칠고 사나운 말이 나온다. 실수임을 알고도, 혹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다.
'초면에 화가 났다고 내게 발차기를 날린다든가, [쇼케이스]가 끝나고서 높으신 분들에게 손가락 욕을 날린 게 대표적인 예시지.'
허나 끝내 길들지 못하고, 동료조차 없는 들개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안락사, 혹은 자연사.
사람을 절대 따르지 않고 길들지도 않는 들개는 결국 죽임을 당할 뿐이다. 혹은 동료 없이 야생을 떠돌다가 애처롭게 쓰러질 뿐.
그러니 결국.
내가 이번 에피소드에서 해야 하는 건.
'아이리의 사고방식을 깨부순다.'
일종의 충격요법.
낭떠러지까지 몰아붙인 후, 그녀가 떨어질 때 밑에서 받아 주는 것. 이 세계에선 혼자의 힘만으론 살아갈 수 없으며, 이곳에 네 편이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완전히 짜고 치는 카드판이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
만약 아이리를 이 시점에서 길들이지 못한다면, 단순히 앞으로 이어질 에피소드에서 차질을 겪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진실을 마주했을 때.
아마 아이리 스스로 무너져 버릴 테지.
'그때가 되면 돌이킬 수 없다.'
원작 소설, [사이버모듈의 네크로맨서]에서는 이런 부분을 상당히 교묘하게 묘사해 놨었다.
출신 때문에 전교생의 괴롭힘을 받는 불쌍한 여자 주인공과 그것을 구원해 주는 남자 주인공.
흔해 빠진 구원 서사.
그러나 과정을 어쭙잖게 이해하고서 손을 대려 해선 안 된다.
원작의 지식만을 믿고, 레온 그룹을 응징하거나 아이리를 괴롭힘에서 구해 준다면 반쪽짜리 결과를 얻게 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안다.
누구보다 깊게 이 세계를 이해한다.
셰이드가 어떤 식으로 웃는지 안다.
아이리가 어떤 식으로 우는지 안다.
미유의 고통을 위로할 대사를 안다.
시엘의 상처를 헤집을 단어를 안다.
나는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를.
"모듈 오프라인."
시엘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모듈을 비활성화시킨다. 그러자 모습이 바뀌며 치솟았던 과부하율이 떨어졌고, 몸 상태가 안정되었다.
한숨을 돌린 후.
나는 차가워진 머리를 다시금 굴렸다.
'자, 정리해 보자.'
나는 시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론은 지난번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고,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딘가로 숨었다고. 그리고 그를 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원작대로 레온이 아이리를 괴롭히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 습격은 자작극이었고, 나는 다치지 않았다. 레온의 만행을 내버려두는 것은 이번 1부 1막의 에피소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함이다.
나는 시엘에게 지시했다.
레온 일당에게 고통받는 아이리에게 접근하여 위로해 주며 친밀도를 쌓고, 공헌도를 벌어들이라고. 그렇게 에피소드가 끝난 후 얻은 보상을 일부 내게 나누어 달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시엘의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임을.
잔뜩 날이 선 아이리는 되려 시엘을 적대할 것이고, 녀석의 공헌도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베네딕트가 진다.'
이번 사건으로 여태껏 명확하지 않았던 '적'이 생겨날 것이다. 베네딕트 스팅레이와 그의 추종자들이라는, 그림에 그린 듯한 악당들이 말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상황을 주시하는 것.
정보를 모으며,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나서야 하는 타이밍을 착각하지 않는 것.
* * *
나는 이틀 정도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때로는 베네딕트로, 때로는 다른 이의 얼굴을 빌려 필요한 것들을 얻어 냈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온 일당은 '위자드'를 이용하여 아이리에게 목줄을 채웠다. 그녀의 목에 박힌 악성 모듈이 신경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적하기 전에 미유와 아이리를 서로에게 소개해 주었다. 미유가 옆에서 아이리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도록 말이다.
'미유의 판단은 일주일이었다.'
세계관 최고의 모듈러의 예측이 빗나가진 않을 것이다. 타이탄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보다도 며칠이나 여유가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더더욱 아이리를 둘러싼 상황에 주의를 기울였다. 시엘과 베네딕트, 레온... 다른 인물들도 면밀히 살폈다.
그래, 거기까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베네딕트의 얼굴로 레온을 속여 해제코드를 미리 얻어두는 일도, 혹은 시엘이 아이리와의 관계를 망치도록 방해하는 일도 내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일은....
인내하는 것이었다.
"...."
아이리의 상황을 보고도 나서지 않는 것. 구태여 그녀가 겪은 일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레온 일당의 괴롭힘의 수위가 점점 더 높아졌다는 것뿐이다.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서서히 낭떠러지에 밀어 넣듯이, 대상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 먹어가는 방식으로.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다음 날은 더욱.
다음 날은 더더욱.
하지만 아이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수록 자신이 익숙한 전략을 택하는 법이다. 아이리는 레온 일당의 괴롭힘이 심해질수록 누군가에게 의지하기를 거부했다.
더 견고하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가시투성이 갑옷을 굳게 둘렀다. 절벽 끝을 디딘 발에는 더욱 힘을 주어 버텼다.
'아아....'
나는 감탄했다.
그런 순간에서도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고고함에 전율마저 느꼈다. 그 강인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나 동시에 안타까움에 몸서리친다.
어째서 이리도... 어째서....
그녀의 고고함은 고독함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창조주의 사랑을 독차지해도 모자랄 그녀의 삶은, 어찌도 이리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내 안의 음습한 감정을 깨닫는다.
죄책감? 죄악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위해서?
'다 집어치우라고 해.'
솔직히 인정하자.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싶었던 거다.
원작에서는 두루뭉술한 서술로 넘어갔던 이 장면을, 아이리가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장면을, 그리고 진흙탕 속에서 다시금 피어오르는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도 구태여 내가 이 원작과 다를 바 없는 루트를 택한 것은 내 추악한 욕심 때문이었다.
'...곧 타이탄이 온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이리의 뿌리 깊은 아집과 망념.
모든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무너뜨려 줄, 그리고 새로이 태어나게 해 줄 압도적인 공포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기다리는 것.
아이리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한 줌의 절망을 맛보게 한 후.
손을 내미는 것이다.
"영웅과 악당은 한 끗 차이라던가...."
문득 떠오른 말을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위이이이이잉-!
아카데미 전체에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도시공습을 의미하는 알림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군."
타이탄족의 도시 침공.
학생들까지 다급하게 병력으로 소집되며 한동안 아카데미가 부산스러워졌다. 나는 그 소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을 죽였다.
이내 아카데미 내의 인기척이 대부분 사라졌을 때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모든 걸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
* * *
[4단계 안티레인(Anti-rain)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E섹터 35구역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집 안에서 대기하시고....]
쏴아아아아아-!
화학 약품이 섞인 인공 강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폭우에 배수로는 게걸스럽게 물줄기를 집어삼켰다.
그 모습에 아이리는 언젠가 오빠가 말해 주었던 전설 속의 괴물이 생각났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결국엔 세상을 파멸로 이끈다는 괴물 말이다.
마치 도시 곳곳에 그 괴물의 아가리가 박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놈들의 허기가 극에 달했을 때 끝내는 자신마저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이 들었다.
잘근잘근 씹혀 산산이 부서지고.
도시라는 괴물의 뱃속에서 죽어 가는.
그런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콰르르르르릉-!
한순간 공기를 강타하는 폭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폭포 같은 빗소리를 뚫은 폭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도시 장벽 자주방어포대였다.
"뭐, 뭐야!?"
"으아아아악!"
도시를 보호하는 2차 장벽 위, 오랫동안 장식처럼 잠들어 있던 105mm 레일 건들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아이리는 평생을 E섹터와 폴른 구역을 전전했으나 저것들이 제 역할을 하는 것을 20년 만에 처음 보았다.
'저런 걸 쓸 정도로 위험한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거야?'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도 이런 상태가 심상찮다고 느낀 듯했다. 쏟아지는 안티레인 때문에 열어 두었던 1학년 내부통신망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버, 벌써 여기 근처까지 온 건가?!]
[안티레인을 이렇게 뿌리는데도 점점 다가오고 있단 말이야?!]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지랄! 재수 없게 통신 열어 놓고 기도질 하지 말라고!]
[그보다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 좀 해 줘! 대체 우리 언제까지 여기서 대기만 해야 하는 거야?!]
[방위군은 대체 뭣들 하는 거야? 싸울 거면 제대로 싸우지, 언제까지 우릴 여기서 대기만 시킬 건데!]
갑작스레 아카데미에서 E섹터까지 불려나온 1학년 학생들은, 자신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현장에 인력이 부족하대서 급하게 소집되어 왔건만, 현장 지휘관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대기명령만 내려놓고 훌쩍 떠난 채였다.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다 보니 1학년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불안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규정을 무시하고 인터넷 기사들을 살피던 학생 한 명이 새로운 정보를 퍼뜨렸다.
[얘들아! 뉴스 기사 떴다! 지금 방위군이 싸우고 있는 '신비', 아무래도 타이탄족들인 것 같아!]
[타, 타이탄족이라고?!]
타이탄족이라면....
신비 중에서도 상당히 격이 높은 괴물들이 아니던가? 그런 거인들이 지금 도시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씨발, 개소리 하지 마! 그런 놈들이 쳐들어오는데 왜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 해 주는 건데?]
[난 그런 기사 못 찾았는데? 대체 정보 출처가 어디야?]
[위클리 데이브 저널!]
[뭐? 그게 무슨 뉴스야, 그거 찌라시 블로거가 운영하는 병신 채널이잖아! 그딴 것 들고 와서 불안하게 할래?]
[멍청하긴! 메이저 뉴스들은 다 메가코프랑 정부의 개라서 정보 통제되고 있다는 거 몰라? 데이브 님이야말로 참 언론인이다!]
새로운 정보의 진위를 놓고 학생들 사이에 말다툼이 일기 시작했다. 유치하기 그지없는 이 싸움은, 그만큼 그들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도시 외곽 장벽 너머를 가리키며 외쳤다. 레이건 포탑들이 열심히 불을 뿜고 있는 너머였다.
[저기 봐!]
거센 빗줄기와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거대한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장벽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몸집을 지닌 존재였다.
[저건...!]
압도적인 존재감.
[신비]들은 저마다 독특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리고 장벽 너머의 존재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왔다.
모두가 그것을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타이탄족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7화
타이탄족.
신격을 지닌 태초의 거인들.
그들이 발을 내딛자 땅이 진동한다.
그들이 숨을 쉬자 돌풍이 휘몰아친다.
[저, 저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우리더러 저런 것과 싸우라고? 레일 건 포탑을 정면으로 받아 내고도 멀쩡한 저 녀석들과?
[이건 말도 안 돼...!]
[도, 도망쳐야 해...!]
본능이 외친다.
이길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고.
허나 이제 막 적응자가 되어 아카데미에 들어온 1학년 햇병아리들이었다.
난생처음 마주친 [신비] 상위종이 내뿜는 기운에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공포에 질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장벽 바로 앞까지 놈이 손을 뻗었다. 쉴 새 없이 포탄을 쏟아 내던 레일 건 포탑들이 단번에 휩쓸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피해애애애애애!]
누군가가 외쳤다.
타이탄이 휘두른 팔에 부서진 장벽의 파편들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저 멀리 점처럼 보이던 레일 건 포대 파편들은 순식간에 거대해져 학생들을 덮쳤다.
콰지이익! 쿵! 쿵!
학생 대부분은 피했지만, 학생 대부분은 피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학생들 몇몇이 파편 아래에 깔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파편 아래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색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섞여 지워졌다.
아이리는 간발의 차로 몸을 날려 파편들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이름 모를 학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체 모를 고깃덩어리들이 아이리의 몸에 튀어 있었다.
"...!"
하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다면 저렇게 되는 건 자신이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끔찍할 정도의 공포가 스며든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사방에 울려 퍼지는 절규.
누군가는 바닥에 박힌 바위를 들어 올리려 애썼다. 누군가는 작은 조각에 맞았는지 기계다리 한쪽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설상가상.
-미친 새끼야! 뭐 하는 거야!
-닥쳐! 닥치라고!
패닉에 빠진 학생 하나가 타이탄을 향해 팔을 내뻗고 있었다. 손등의 피부가 열리더니, 일회용 유탄발사기가 솟아올랐다.
-저 거인 새끼, 내가 죽인다아아!
-그만둬, 미친 새끼야!
퍼어어엉!
손목에서 발사된 유탄이 날아갔다. 그러나 거센 비바람에 궤도가 흔들리더니, 이내 멀리 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1학년들 근처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그 순간 아이리의 목덜미에 쎄한 감각이 스쳤다.
"윽?!"
몇 번이나 그녀를 구해 주었던 직감.
아이리는 본능적으로 타이탄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빗줄기 너머로 거대한 눈동자가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있어...!'
방금 전의 폭발이 놈들의 시선을 끈 것이다. 그로 인해 놈들의 목표가 이쪽으로 바뀐 것이고.
'도, 도망쳐야 해...!'
여기서 도망치면 지시 위반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간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나중에 벌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 튀어야 한다.
어느새 놈은 무너진 장벽의 틈을 통해 도시 내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저 정도 크기면 몇 걸음 만에 여기까지 당도할 테지.
그러던 그때였다.
비명과 겁에 질린 소리로만 가득했던 내부 통신을 통해, 한 줄기 구원이 빛이 내려왔다.
[알림. 스팅레이 장학생 및 기업 장학생들은 각 소속에 따라 지정된 차량에 탑승한 후, D섹터로 이동할 것. 곧 수송차량이 도착할 것이다.]
탑승 후 이동.
마치 다른 작전지역에서 활동할 것 같은 단어들로 채워놨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기업 소속만 빼돌리겠다는 거잖아...!'
말하자면 제 식구 감싸기였다.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지시였고.
원래라면 분란을 조장하지 않기 위해 조금 더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텐데. 지금 상황이 그런 거짓말을 꾸며낼 여유조차 없다는 거겠지.
이윽고 도시 중심부로부터 수십 대의 비행형 장갑차가 빗줄기를 뚫고 나타났다. 개중엔 스팅레이 마크를 달고 있는 차량들도 있었다.
수송차량들은 일제히 공터에 착륙했고, 이내 안쪽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1학년들과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아카데미 선배들인 듯했다.
부모가 기업 직원이라서.
혹은 일찌감치 재능을 선보인 덕에 장학생으로 발탁된 학생들은 각자 소속 기업의 차량을 향해 달려 나갔다.
직전 타이탄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이들은 같은 소속의 선배들이 빠르게 구하여 차량에 탑승시켰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일반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특히나 1학년들 중엔 입학 후 아직 기업의 스카우트를 받지 못한 학생들이 많았기에 항의가 거셌다.
-제기랄, 우리만 죽으라는 거냐고!
-우리도 태워 달란 말이야!
하지만 그들의 요구가 먹힐 리는 없었다. 기업 장학생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1학년 일반 학생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물러서라. 너희가 탈 차가 아니다.
-제기랄! 해 보자는 거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듯, 기업 장학생들을 향해 무기를 꺼내든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허나 그의 무기가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 수십 발의 탄환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털썩.
그는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일순 침묵이 장소를 지배했지만, 언제까지고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반 학생들은 기업 쪽에 매달리기를 포기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택했다. 친하게 지내던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E섹터의 복잡한 골목길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
어느덧 타이탄이 장벽을 완전히 넘어왔다. 기업 소속의 차량들이 거인을 향해 미친 듯이 발포하기 시작했으나, 조금도 놈의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제기랄, 다리 멀쩡하게 달려 있으면 뛰어서 타라고!
누군가의 욕설에 아이리도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라며 공포로 굳어 버린 다리로 지면을 박차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으으윽?!"
아이리는 갑작스레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시의 먼지가 섞인 구정물이 그녀의 입으로 들어왔다.
'모, 몸이 안 움직여...!'
모듈 오작동이었다.
모듈을 해킹당한 이후로 나타나기 시작한 증세. 경련, 구토감, 어지러움... 미유 말로는 신경이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다는 게 원인이랬다.
'하필이면 이럴 때...!'
원래는 몇 초 뒤에는 증상이 사라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인가 30초가 넘도록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 나 좀 구해...!'
아이리는 눈을 치켜뜨고 스팅레이 장학생 쪽을 바라보았다. 몇 명의 학생이 그녀가 입은 스팅레이 제복을 보고는 황급히 뛰어왔다.
"자, 어서 몸을 일으켜!"
"어디를 당한 거지? 걸을 수 있겠나?"
"고, 고맙...!"
그토록 원망하던 스팅레이였건만.
이만큼 그 울타리가 든든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순간 감정이 욱해서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허나 다음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의 사고를 차갑게 경직시켰다.
"그 녀석은 내버려 두고 다른 애들부터 구해! 시간 없어!"
아이리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겹도록 자신을 괴롭혀 온 사내의 목소리.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노려보았다.
'레온... 알베르트...!'
하필이면 이곳에서 이 녀석을 마주칠 줄이야. 아이리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리를 부축한 학생이 물었다.
"내버려 두라니, 그게 무슨...!"
"얜 내가 맡을 테니까 너흰 저쪽!"
"아, 알겠어!"
학생들은 레온에게 아이리를 넘겨주고는 황급히 다른 학생들을 구조하러 달려 나갔다. 레온은 아이리를 둘러메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이리를 향해 말문을 연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
"아카데미를 관두라는 내 말이 같잖게 들렸어? 네가 스스로 관두면 네 모듈의 악성코드도 해제해 주겠다고 했잖아."
"...."
"이런, 대답도 할 수 없나 보네. 아마 그 모듈 문제겠지?"
"지금... 뭐... 하자는...!"
아이리는 목소리를 쥐어짰지만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라고 너한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어. 사실 잘 알지도 못하는 후배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 필요도 없잖아."
"그럼... 왜...."
"너는 위험하거든."
레온이 말했다.
"솔직히 인정할게. [쇼케이스]의 결과를 봤어. 그리고 네 재능은 위험하다고 판단했어."
"...뭐?"
"나 같은 거하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야. 아론 님께서 맘에 들어 할 만도 하지. 그래서...."
레온은 아이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순간 실수로 손을 놓친 것인가 싶었지만, 아이리는 그 눈빛을 읽고 실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너...!"
"너는 나와 같은 곳에 있어선 안 돼."
그가 말한 순간.
쿠웅!
땅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 위에 드리웠다. 타이탄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음을 아이리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제, 발...!"
이러지 마!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하지만 애원의 목소리들은 목 근처를 맴돌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레온은 태연하게 등을 돌려 스팅레이 비행 장갑차 쪽으로 달려갔다.
타이탄이 코앞까지 도착하자, 더 이상 구출작전은 무리라 생각했는지 차량들이 일제히 이륙했다.
스팅레이 차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리를 내버려 둔 채 그들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빌어... 먹을...!"
여전히 몸의 경직이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힘을 쥐어 짜내어 몸을 일으키려다가 바닥을 굴렀다. 잿빛 머리카락에 구정물로 젖었다.
게다가 넘어진 방향이 하필이면 타이탄의 얼굴을 마주 보는 쪽이었다. 사실 머리가 하도 높아서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 더럽게 크네....'
아이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공터에는 그녀 혼자뿐이었다.
기업 장학생들도, 일반 학생들도 각자 거인의 진격을 피해 도망친 지 오래였다.
빗소리가 처량하다.
거인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인 아이리를 발견하곤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놈의 거대한 손이 아이리를 향해 뻗어졌다.
'좆 같은 인생이야, 정말....'
놈의 손가락에 조금만 눌려도 몸은 완전히 곤죽이 되겠지.
다시 말해.
이곳에서 자신은 죽는다.
'...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
부모 없이 태어나 뒷골목을 전전하고.
간신히 찾은 가족은 일찌감치 죽어 버리고.
장학생으로 발탁되었는데도 후원자가 사라지는 바람에 아카데미 생활은 시작부터 괴롭힘으로 점철되었다.
'그래도 그건 맛있었어....'
주마등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런 순간에도 기숙사 식당에서 먹었던 식사의 맛이 되살아났다. 스크램블 에그와 베이컨. 과식해서 조금 배가 아팠다.
또 자신을 어떻게든 도와주려던 미유와 시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정신적으로 몰려 막판에 모질게 내쳐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녀들만큼 고마운 존재들도 없었다.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가는 동안에도.
거대하고 투박한 손이 점점 다가온다.
'오빠.'
나 이렇게 죽나 봐.
결국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이었던 거지. 아무래도 전생에 나는 대역 죄인이었나 봐.
문득 상상한다.
죽은 줄 알았던 오빠가 다시 나타나서 자신을 구해 주는 장면을. 양아치들에게 얻어맞을 때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지금은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부질없는 상상은 이내 언젠가 보았던 꿈속의 기억과 겹쳐진다. 오빠의 상냥한 눈길 대신 차가운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어째서일까.
이런 순간에 그 남자가 생각나는 이유는.
뺨을 타고 빗줄기가 흐른다.
나는 혼자였고. 혼자고, 끝내 혼자겠지.
죽는 순간마저도 말이다.
이게 내가 택한 길인 거겠지.
이게 내 삶의 방식인 거겠지.
아이리는 무심코 중얼거린다.
"도와줘...."
그리고 그 순간.
낮디낮은 미성이 빗소리를 뚫고 가슴에 스민다.
"...늦어서 미안하군."
이윽고 남자는 물었다.
얼핏 무심하면서도.
친애의 감정이 깊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다친 곳은 없느냐?"
아카데미 흑막 시점 38화
"다친 데는 없느냐."
무심한 얼굴로 돌아보며 안부를 묻는 사내. 황금색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이리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묘한 힘이 있는 눈빛이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이조차 움츠러들게 만드는 눈.
오랜만에 본 탓일까. 어째서인가 그가 평소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리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쯧."
아론은 슬쩍 옆쪽으로 곁눈질을 하더니, 짜증이 난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만-."
저것부터 우선 처리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아론은 대뜸 장갑 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에 맞추어 아이리의 몸이 아론의 품속으로 쏙 들어갔다.
"으윽!?"
아이리가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는 그 상태로 대뜸 팔을 옆으로 뻗었다. 공을 한 손으로 받아 내려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친다.
도시를 완전히 무너뜨릴 듯한 진동.
일순 빗줄기를 전부 날려 버리는 풍압에 아이리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론의 품에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는 것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강렬한 충격파가 사그라졌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아이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고,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녀의 시선에 닿은 것은 폭우를 쏟아내는 회색 하늘과 거인의 커다란 손. 그리고 그것을 태연하게 막아 낸 아론의 모습.
'마, 말도 안 돼....'
아이리는 경악했다.
타이탄의 손은 딱 봐도 아론의 십수 배는 가볍게 넘을 정도의 극복할 수 있는 격차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아론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머리를 숙여라."
"네?"
그녀가 되묻는 순간, 아론은 크게 팔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서 있던 바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득-!
철골이 휘어지는 듯한 소리.
난데없는 지진에 전신주가 부러지고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론도 조금 벅차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 이상으로 튼튼한 녀석이군."
거인의 팔이 무언가에 잡아당겨지듯 서서히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졌다. 한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쥔 아론의 손 역시 무서운 기세로 흔들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아이리가 의문을 품을 그때.
도심부에서 비친 네온사인의 빛줄기가 공간을 밝혔다. 빗방울에 의해 빛이 산란하며 숨겨져 있던 비밀이 밝혀졌다.
'실...?'
수백, 아니 수천 갈래의 실들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마치 거미집 군락 한복판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었다.
아론의 손끝에서부터 퍼진 실들이 지면과 건물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그 실들은 서로 갈래로 나뉘고, 얽히고설켜, 다시 거인의 팔을 향해 집중되었다.
마치 고치처럼 놈의 팔을 꽁꽁 동여맨 실들은, 그 얇은 두께에도 전혀 끊어지지 않고, 되려 거인의 두꺼운 피부를 조금씩 파고들고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오랫동안 타이탄과 힘겨루기를 하던 아론이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수천 갈래의 실이 카로운 칼날처럼 피부를 파고들었다.
스스슥!
거인의 팔이 그대로 수천수만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러면서 검붉은 피와 살점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
거인의 울부짖음.
뱃고동 소리를 닮은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져서 듣는 이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거인은 절단된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타이탄이 쓰러진 쪽에 허름한 빌딩이 몇 채 있었다. 고개를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나름 고층인 빌딩이었으나, 거인의 몸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
폭우를 뚫고 자욱한 먼지와 화염이 피어올랐고,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론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흐읍!"
짧은 기합과 함께, 아론은 다시금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움직임에 따라 타이탄의 몸이 다시금 그를 향해 이끌려왔다.
인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근력.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거인은 아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론이 다시 한번 손을 힘껏 움켜쥐자, 이번엔 놈의 양다리가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피분수가 솟구친다.
거인의 피가 폭우에 섞인 채 배수구를 따라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놈의 몸이 앞으로 추락했고, 잘려 나간 두 다리가 넘어지며 주변의 건물들을 휩쓸었다.
"■■■■■■-!"
거인이 다시 한번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이제 놈에게 남은 것은 왼팔 하나뿐이었다.
다시 말해.
손질하기 쉬운 사냥감이었다.
"...끝이다."
마지막으로 아론은 손가락을 튕겼고, 얇디얇은 섬광 하나가 거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서걱.
무언가 잘려 나가는 소리.
이윽고 거인의 뒷덜미가 쩌억 벌어졌다. 벌어진 틈새에서 폭포수처럼 붉은 액체가 솟구쳤고, 폭우에 섞여 배수구로 흘러들어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후반응인지 거인은 몇 번 몸을 움찔거리긴 했지만 다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도시 방벽 위의 포탑들도 작동을 멈추었다. 폭우 덕에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고, 멀리서 새된 소리로 귀를 괴롭혀대던 사이렌 역시 곧 잠잠해졌다.
오직 빗소리.
폭우만이 그대로 내리며, 가차 없이 두 사람의 몸을 적셨다. 마치 조금 전까지의 일들이 전부 꿈속의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 하하...."
아론의 등장과 함께, 허망할 만큼 순식간에 나 버린 결착에, 아이리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긴장감과 함께 다리의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론이 말을 걸었다.
"이제야 좀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기분은 어떻지?"
안부를 묻는 아론.
그에 아이리의 감정은 조금씩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돌아와 주었구나.
저도 모르게 울컥 튀어나오려는 열기가 차가워진 몸을 덥히는 듯했다. 그녀는 무어라 감사를 표해야 좋을지, 조심스레 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론이 새로운 질문을 던져 왔다.
그녀의 입을 막듯이.
"내가 없는 동안, 어떤 기분이었더냐? 죽을 위기에 처해서 너는 어땠지?"
한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들은 거지?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론이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피치 못할 사정에 도와주러 오지 못한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도 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럴 리가....
"자, 잠깐만요... 지, 지금 무슨...?"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나?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즐거운가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고요! 제, 제가 원해서 이런 상황이 된 거라고요?!"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이리는 분노를 터뜨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그럼 물어보마."
"뭘 말이죠?"
"너는 언젠가 악당들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결과가 현재 목숨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
모듈 이야기였다.
아론은 이미 그 사실까지 다 알고 있었다. 아이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너는 어째서 그 악당들을 도발했던 거지? 본인이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
"제, 제가 도발했다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 자식들이 먼저 제 오빠의 유품을 가져가려 했던 거라고요!"
"그래.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놈들은 도중에 자신들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도망칠 정도로 심약했던 놈들이다. 너라면 충분히 그것을 깨닫고 위험한 상황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그건...."
아이리는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론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이후로 몇 번인가 꿈을 꾼 적도 있을 테지. 악당들에게 습격당했던 그날,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 주는 오빠의 꿈을."
"그, 그걸 어떻... 게...."
"그리고 최근에는 그 꿈에서 내가 나타났을 것이다. 오빠를 대신하여 내가 너를 구해 주는 식으로 꿈이 바뀌었겠지."
"뭐, 뭔 소릴 하는 거예요! 아냐! 그런 꿈 따위는 꾼 적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아론이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다. 모르겠다. 평소 자신을 향하던 아론의 따뜻한 눈길도, 지금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인정하거라."
아론이 말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
그 단어가 이상하리만치 묵직하게 가슴에 와서 박혔다.
허나 아이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조차 이 혼란한 심정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혀, 현실이라니 그게 뭔...!"
"너는 구해지고 싶었던 거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정확히는 구원 욕망과 자기 파괴 욕구가 뒤섞여 발현된 것이지. 틀렸나?"
아론이 차갑게 뇌까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 너는 누군가에게 구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네가 처한 현실을 누군가가 바꿔 주길 꿈꿨던 거지."
"내, 내 머릿속이 그딴 꽃밭으로 가득했다고요? 내가 그렇게 골 빈 인간으로 보여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런...!"
"그럼 어째서 그렇게 행동하는 거지?"
그가 물었다.
"어째서 뻔히 나빠질 상황에 몸을 집어던지는 거지? 왜 스스로 파멸할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으려 드는 거지?"
"그런 적 없어요!"
"없다고? 잘 생각해 보아라."
아이리의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차가웠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단순히 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고통스럽다.
왜? 어째서?
아이리는 의문을 가라앉히고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 지금 이럴 상황이 아니잖아요! 거인 때문에 다른 학생들도 죽었고, 이 지역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대답하도록, 아이리 앨리스밸."
허나 아론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입학 첫날, 너는 '아론 스팅레이'라는 이름을 듣고서도 어째서 내게 그런 무례를 저지른 것이지? 내 한마디에 이 도시에서 사라질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나?"
아론과의 첫 만남 때의 이야기.
그의 말이 맞다.
이 도시의 황태자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건,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정신으론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그건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당신이 끔찍할 정도의 피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아니, 너는 알고 있었겠지. 내가 설령 악인이라고 해도, 초면부터 이상하리만치 호감을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죽이진 않으리라고 확신한 거다."
"그런 거 아니야!"
"네 마음속 역할극의 '악당'으로 삼기엔 적당했던 거겠지."
"그런 거 아니라고!"
"그때뿐만이 아니지."
아론의 말이 이어졌다.
"어째서 내 경고를 무시하고 싸움을 벌였지?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던가?"
"그, 그건 그 자식이 먼저 시비를...!"
"어째서 [쇼케이스] 직후, 관객들에게 무례한 제스처를 취한 것인가? 그들 역시 도시의 실세들이다. 분명 스스로 목을 조르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건 그 인간들이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으니까...!"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 중에 누군가가 네게 본보기를 보여 주려 했을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텐데."
"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격렬한 반발.
후우.
아론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떠나기 전 분명 문제가 생기면 '시엘'에게 의지하라고 조언까지 해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째서 그녀를 의지하지 않았지?"
"그건 당신이...!"
"아니. 내 탓이 아니다. 그저 네가 원하는 '그림'에 안드로이드라는 존재가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겠지. 하여간 핑계가 끊이지 않는군, 아이리 앨리스밸. 슬슬 인정하는 게 어떻겠나?"
차갑게 뇌까리는 아론.
"그런다고 네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말 취소해!"
끝내 아이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아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미처 공격이 닿기도 전에, 아론은 너무나도 가볍게 그를 제압해 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 너는 조금 전의 싸움을 보고, 내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덤벼드는 것이냐?"
"닥쳐!"
"궁지에 몰린 야생들개가 짖는 것은 동료를 부르기 위함이다. 자신이 여기에 있고, 적들에게 위협당하고 있으니 어서 와서 날 구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만해...!"
"하지만 너 스스로도 알 터이다. 그래 봤자 네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거지."
"그만하라고...!"
"결국 너는 목청껏 울부짖을 만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야 그 목소리를 듣고 오빠가 구해 주러 올 테니까."
"그만...."
"허나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
아론은 무거운 현실을 들이민다.
"나 역시 네 오빠가 아니다."
* * *
아이리 앨리스밸은 야생 들개다.
거친 폴른의 생활은 그녀의 행동거지와 말투를 야생의 그것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그녀에겐 동료가 있었을 것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른 들개들.
특히 피터 존스... 오빠라는 존재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아군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는 죽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오빠가 돌아오길 바라고서.'
언제나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 주던 이였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위기를 조성하고, 오빠라는 '구원자'가 돌아오길 바란 것이다.
나 여기 있어.
나 위험하단 말이야.
어서 돌아와서 날 구해 줘.
하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녀의 오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의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고요한 침묵뿐. 그 과정에서 아이리의 그리움은 서서히 뒤틀린 집착으로 바뀌어 간다.
날 구해 줘.
누군가 날 구해 줘.
그리고 시기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의 경험으로 그를 오빠의 대체제로 삼기에 걸맞다고 판단했다.
바로 나, 아론 스팅레이를 말이다.
'어쭙잖은 구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이전에도 말했듯, 1부 1막 아이리의 이야기는 흔해 빠진 구원 서사였다.
하지만 그 속에 교묘한 서술로 감춰진 복선들, 그녀의 '핑계'에 가려진 일그러진 진심을 읽어 내지 못한다면 결국 반쪽짜리 결과만을 얻을 뿐이다.
아이리는 구원자에게 집착하게 될 것이고, 더더욱 의지하게 되겠지. 어쭙잖은 이해로 아이리에게 손길을 내밀면, 그녀의 내면에 있는 뒤틀림은 오히려 심해질 게 분명했다.
'내버려 둬도 상관은 없었어.'
내게는 원작의 지식이 있다.
압도적인 무력이 있고, 재력과 권력도 있다.
굳이 아이리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아도, 안전한 새장에 가두어 두고 보듬어 주면서 다가오는 문제들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아이리에게도 좋은 일이었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의 속에 있는 뒤틀림은 그녀의 괴로운 삶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아이리의 삶은, 충분히 그런 보답을 받아도 좋을 만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게 맞을 것이다.'
아이리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나는 보고 싶었다.
야생 들개였던 아이리가 나만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한 마리의 사냥개로서 각성하는 모습을.
나는 보고 싶었다.
원작처럼 그녀가 성장하여 싸우는 장면을. 다가오는 핍박과 위기 속에서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며 스스로 헤쳐 나가는 장면을.
나는 보고 싶었다.
나에게만 꼬리를 살랑거리는 애완견 같은 아이리가 아니라, 원작을 초월하여 성장한 그녀를 말이다.
그러니 이 선택은 내 욕심이다.
충분히 새장 속에서 돌보아줄 여력이 있음에도, 그녀를 구태여 삶이라는 전장에 내세우려는 것은.
* * *
"그만... 그만...!"
"이게 현실이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에 저항하듯 아이리가 묻는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당신, 날 구하러 와 줬잖아... 그런데 어째서...!"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그녀의 보랏빛 눈망울을 응시하기를 몇 초, 그것은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럼 왜 날 구해 줬는데?"
아이리는 묻는다.
짤막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수많은 착각과 오해도 그 안에 섞여 있겠지.
"...."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이 상황에서 원작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답했을 것인가.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사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내 나는 고민하길 관뒀다.
어차피 이유는 하나뿐이지 않나.
말을 꾸며낸다고 해도, 아이리는 금방 가식을 눈치채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 말만큼은 나의 언어로 전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도록."
그 순간.
하아, 하고 아이리의 입에서 가는 숨이 새어 나왔다. 아마 그녀의 예민한 직감은 내 말에 담긴 속뜻을 바로 캐치했을 것이다.
아이리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그 입술은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해 달싹거렸다.
"나... 나는...!"
이윽고 아이리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끝을 맺지는 못했다. 하지만 구태여 그녀가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그 심정을 헤아리고 있다.
-나 줄곧 힘들었어요.
그래, 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허나 그것을 입에 담진 않는다.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한 그녀에게 나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머뭇머뭇 그것을 잡고 일어섰다.
곧 손을 놓고 걷기 시작했다.
친애와 적의.
신뢰와 불신.
그 모호한 감정과 관계성처럼, 애매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그녀는 내 뒤를 따라 걸어왔다. 조금 먼 것 같아 다소 아쉽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는 것은 욕심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날 따르고 있다는 점이었으니.
'그러니....'
지금은 이것으로 되었다.
지금은 이것으로 될 것이다.
* * *
[알림]
*1부 1막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39화
[다음 소식입니다.]
[소방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타이탄 습격 사건으로 인한 피해액이 50억 크레딧을 넘을 거라고 합니다. 당국에서는 이번 사태에 관련해....]
삑.
[아론 스팅레이 씨의 생존이 확인되면서 VCPD는 블라디미르 하리토노프 씨에 대한 수사를 종결하고....]
삑.
[자아, 그래프를 보시면 아론 스팅레이 씨의 복귀로 한동안 침체를 겪었던 주식시장이 하루 만에 8퍼센트나 상승하며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한편 이번 스팅레이에서 발표한 V시리즈 모듈이 모종의 이유로 출시가 연기되며....]
삑.
TV 어디를 틀어 봐도 이번 사태에 관련된 이야기만 떠들어댈 뿐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질려 버린 나는 그대로 전원 버튼을 눌러 버렸다.
후우.
나는 의자에 기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래서 골치 아프단 말이지.'
아론 스팅레이는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권력도, 재력도, 무력도 세계관 최강급이지만, 그런 탓에 조금만 뭘 하려고 해도 주변의 이목을 끌고 만다.
'이번 일로 얼마나 흐름이 원작에서 벗어났을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구만.'
물론 이번 일은 그런 걸 전부 고려하고서 벌인 짓이긴 했다. 뭐, 애초에 원작 주인공이 일찌감치 뒈져 버린 마당에 그런 거에 일일이 신경 쓸 생각도 없었고.
뭣보다 내가 가진 지식이라면 충분히 커버할 수도 있을 테니.
다만....
'갈수록 원래 목적이랑 멀어지는구나.'
처음에는 부잣집 도련님 몸에 빙의해서, 호의호식하면서, 최애들 덕질이나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는데.
아카데미가 개강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굵직한 사건들을 중심에서 겪고 있자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쩝. 어쩔 수 없지.'
현재로선 착실하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그 부분에 만족할 수밖에.
그리고 뭣보다 1부 1막이 종료되면서 들어온 보상을 생각하면, 마냥 투정만 부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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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종료]
'아이리 앨리스밸'과의 관계 변화.
1부 1막이 종료되었습니다.
최종 공헌도: 87%
*시나리오 보상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시나리오 보상]
업적 포인트: +3500
'남색 사냥터 입장권' 1장
[업적달성]
아이리 앨리스밸의 마음을 열었다.
업적 포인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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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500포인트.
이번 1부 1막이 종료되면서 입수한 총 상점 포인트. 게다가 원래 내게 남아 있었던 포인트 2600P까지 합하면 8100P.
'너무 막 퍼주는 거 같은데....'
모듈 호환성 티켓 한 장의 가격이 300P.
호환성 문제로 아직 착용하지 못한 기존 모듈이 17개니까 '17×300=5100'. 즉, 남은 모듈 전부에 호환성 티켓을 사용하고도 3000P가 남는다.
물론 모듈 하나당 여러 장의 티켓을 사용해야만 온전한 성능을 끌어 낼 수 있을 테니, 전성기 스펙을 되찾으려면 더 부단하게 포인트를 모아야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퍼주는 거 아닌가?'
시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너무 불공정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세계관 최고의 재벌집 장남에 세계관 최고의 무력까지 달고 시작하는데, 누구는 인간 취급조차 못 받잖아.'
물론 병을 고치느라 초기 스펙을 전부 잃고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금방 복구 가능해서야 그런 디메리트가 전혀 의미가 없다.
지금 상황만 봐도 1부 1막이 막 끝났을 뿐인데, 기존 모듈을 거의 다 복구하지 않았는가.
'아니,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닌데....'
내가 다른 빙의자들에 비해 유리해지는 데 불만은 없다.
다만 내가 만약 이 세계를 관리하는 초월자였다면, 이런 오버밸런스를 어떻게든 해결하려 들었을 테지.
'내가 포인트를 대량으로 얻은 만큼 다른 빙의자들한테도 퍼줬겠지. 아니면 추후에 나한테 위험한 이벤트를 몰아줄 수도 있는 거고.'
물론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간과해서도 안 되는 가능성.
그래서 마냥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당장 나는 타이탄도 혼자서 잡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거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존재들이 많기에.
'가령 드래곤이라든가....'
그 이름을 생각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정신보다는 육체 쪽의 자아가 예상치 못하게 반응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드래곤이란 아론에게 있어서도 경악스러운 존재라는 거겠지.
'...뭐,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예기치 못한 상황을 미리 염두에 두되, 거기에 매몰되지는 않도록.
당장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일단은 상점.
나는 곧장 상점창을 열어 당장 필요한 물건부터 전부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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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완료: 모듈 호환성 상승티켓 ×19
남은 포인트: 8100P→ 24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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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한 티켓은 당장 사용하지 않고 품속에 넣어 두었다. 남은 모듈 17개를 단번에 장착했다간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미유와 상담하기로 하자.
그리고 굳이 17장에서 2장을 추가로 구매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조금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거든.
'이제 처리해야 하는 문제는....'
아이리의 모듈 관련 문제.
시엘의 처우 문제.
스팅레이 그룹과 G20 기업총회.
다음 시나리오 대비.
그 외 기타 등등.
'쉴 틈이 없군.'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다 주인공이 프롤로그에서 멍청하게 죽어 버려서 그런 것을.
남아 있는 최애들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슬슬 올 때가 되었군.'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 2시.
녀석이 올 때였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도록."
문이 스르륵 열리며, 앞머리를 정갈하게 자른 동양계 미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당연히도 내 전속 비서인 마리아였다.
나는 다시 긴장을 끌어 올려 최대한 엄숙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지?"
내가 고용한 용병들 이야기였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내가 신원불명의 이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 일주일 정도 숨어 살면서 상황을 지켜본 것이고.
"날 노릴 정도면 그룹 내부자가 주모했거나 못해도 협력했을 가능성이 있지. 그 부분은 찾아봤나?"
뻔뻔스러울 정도로 거짓말이 술술 튀어나왔다. 그런 내 질문에 마리아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도련님을 습격한 이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마리아의 보고에 한순간 자작극이라는 걸 들킨 건가 싶어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말인즉, 그놈들의 신병을 확보하진 못했단 거군?"
"...죄송합니다."
마리아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나는 마리아에 대한 질책을 멈추지 않았다.
"변명거리가 있다면 들어 주지."
"수소문해 본 결과 음지의 용병들 중, 사건 직전에 씀씀이가 헤퍼졌던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사건 직후에 곧장 잠적해 버렸습니다. 아마 얼굴과 신분을 완전히 갈아 치운 듯합니다."
"용병이라... 의뢰자는 알아냈나?"
"암호화폐를 통한 거래라, 저희 그룹 위자드들의 말에 의하면 추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만...."
마리아가 조금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건에 '아시타교(明日敎).'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듯합니다."
"아시타교?"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내 자작극이란 걸 들키지 않은 건 좋은데, 아시타교는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이라 꽤 당황스러웠다.
아시타교(明日敎).
원작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불교계 사이비 종교다.
증강자와 적응자, 안드로이드들을 전부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모든 인간이 순수한 상태로 돌아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주요 교리.
말하자면 종교의 탈을 쓴 과격파 순수주의자 집단이다.
문제는 이 녀석들이 또 민중파(民衆派)... 그러니까 기업이나 정부와 함께 아카데미 설립의 한 축을 담당했던 거대 시민단체를 거의 꿀꺽했다는 거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녀석들인데, 문제는 아직 놈들이 등장하기엔 다소 이른 시점이라는 것.
'저번에 사냥터에서 얻은 리버레이터도 그렇고... 놈들 관련해서 뭔가 시나리오가 꼬인 거 같은데....'
하지만 당장으로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또 상대가 아시타교라면 스팅레이 정보부도 조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놈들의 세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니까.'
스팅레이 그룹 쪽에서도 극단적 순수주의가 퍼져 봤자 좋을 거 없으니 어떻게든 손을 쓰고 싶어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뉴 발할라 시티의 황제로 불리는 스팅레이 그룹이라고 해도, 수많은 교인들까지 전부 쓸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히려 그런 식으로 몰아붙여서 종교탄압 기업이라는 딱지라도 받았다간, 다른 기업 하이에나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상태가 될 뿐이다.
즉, 쑤셔봤자 이득이 없는 벌집이니 최대한 관여하지 말자, 라는 게 기존 스팅레이 그룹의 방침.
"아시다시피 아시타교는 저희 그룹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더 파고드는 건 좋지 않을 듯하여...."
"...알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로써 지난 습격 사건이 내 자작극이라는 게 들킬 염려는 없으니 내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 문제는 됐다. 다른 건은?"
"네. 보고서 보내겠습니다."
마리아는 실시간으로 내게 보고서를 전송했다. A4용지 한 장짜리 수준의 짤막한 보고서였는데, 담긴 내용은 꽤 방대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타이탄 습격 사건으로 죽은 아카데미 1학년생이 꽤 많다. 이번 새로운 장학생을 뽑는 데에 다소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
-타이탄 녀석이 뉴 발할라 시티에 오기 직전에 생산 콜로니 한 곳을 파괴했다. 때문에 이번 그룹에서 새로 출시한 V시리즈 모듈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 책임을 콜로니 시찰 일정을 지키지 못한 아론 스팅레이에게 묻자는 목소리가 이사회에서 적게나마 나오고 있다.
"역시 이렇게 되는가."
용병들을 이용한 자작극을 벌였음에도 어떻게든 끝까지 내게 죄를 묻고 싶어 하는 작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 베네딕트나 칼리아 쪽이 차기 경영권을 받을 거라는 데에 베팅한 녀석들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련님께서 직접 타이탄 건을 수습하시면서 그룹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아졌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지?"
"누군가 도련님께서 앨리스밸 양을 구하시는 모습을 목격한 듯합니다."
다른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고레벨 적응자 파견을 서로 미루는 동안, 스팅레이는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소속 학생을 지켜 냈다.
겉보기엔 꽤 드라마틱한 연출이었고, 내가 짠 시나리오가 대중들의 마음에도 들었던 모양이다.
"회장님께서도 이번 건에 대해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렇군."
나쁜 결과는 아니었으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인지라 다소 떨떠름했다. 이런 식으로 대중의 시선을 끄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회장님께서 이번 G20 기업총회에서 도련님을 보자고 하셨습니다. 따로 시간을 내어서."
"음...."
이건 더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아직 힘을 온전히 되찾지 못한 상황에서 그 능구렁이 영감탱이와 마주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언론들은 G20 취소 가능성을 떠들어 대던데, 아니었나?"
"아뇨. 결국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E섹터 일부 지역에 불과합니다. 또 당시 안티레인 강우량이 상당했으니까요."
[신비]가 내뿜는 마력은 농도가 높아지면 각종 괴현상을 일으킨다. 특히 타이탄 같은 [신비] 상위종이 내뿜는 마력 정도면 인간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달 말 예정된 G20 기업총회의 취소까지도 고려한 듯했으나, 현실은 전혀 아니었다.
안티레인에는 [신비]들을 몰아내는 약품뿐만이 아니라 대기 중 마력도 지워 내는 효과가 있는데, 당시 쏟아진 폭우 덕에 거인 녀석이 흩뿌린 마력도 깔끔하게 제거된 모양.
'결국 그 능구렁이 영감탱이를 만나는 건 확정이라는 거군....'
벌써부터 작중 최종보스급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게 영 불안하기는 했으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G20이 열리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는 점이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 보고는 이 정도는 됐다."
나는 전자보고서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로 들어온 포인트도 알뜰하게 썼고, 이번 건과 관련된 보고도 받았으니.
"슬슬 아카데미로 가야겠군."
다음 에피소드를 대비할 때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0화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하기 전.
가장 급선무인 일은 단연 아이리의 소켓에 박힌 모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터였다.
이번 타이탄족 사건을 통해 아이리의 정신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그녀의 육체적인 문제는 아직 해결하지 않았으니까.
마리아가 모는 비행형 승용차를 타고, 곧장 E섹터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미유의 연구실.
"돌아올 때까지 차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마리아를 밖에다 세워두고 자판기로 위장된 출입구를 열어젖혔다. 계단을 내려가, 복도를 지나 작업실로 향했다.
그제야 뒤늦게 내 인기척을 눈치채고 조그마한 여자애가 기계 꼬리를 흔들어 대며 나를 맞이했다.
미유였다.
"아, 아론 씨이!"
"아이리의 상태는?"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오랜만이라며 인사치레를 나눌 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내 물음에 미유의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 방향을 돌려 수술용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이리가 누워 있었다.
각종 전극을 몸에 꽂은 채로 잠들어 있었고, 그녀를 둘러싼 모니터들에서는 빠른 속도로 글씨가 적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하, 할 수 있는 건 전부...."
"준비는 마쳐두었단 말이군. 알았다."
"가, 가져오셨나요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준비해 온 물건을 품에서 꺼냈다.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두 장, 그리고 멀웨어 해제코드가 적힌 메모.
"저, 정말로 구해 오셨군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진즉에 구해 놨었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겠지. 대외적으로 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뒤늦게 복귀하여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 사건의 주동자였던 레온 알베르트 일당에게도 징계를 먹여 놨다.
사실 사건의 경중만 따지면 퇴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도 레온은 쩌리 악당으로서 역할을 계속해 줘야 했으니.
'무엇보다 베네딕트를 조종하기 좋지.'
구태여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레온 일당의 배후에는 아마도 베네딕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시험이다.
나는 이번 건의 진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에 따라 베네딕트가 취할 행동 방향은 두 가지.
'날 더 경계하거나, 만만하게 보거나.'
전자라면 내버려 두어도 상관없을 것이고, 후자라면 더 크게 일을 벌이겠지. 어떻게든 내 자리를 빼앗고, 미유를 자신의 휘하로 데려가려고 무리수를 둘 것이다.
'그때가 기회다.'
그때야말로 역공을 가할 때다.
확실하게 건수를 잡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어정쩡한 대립구도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할까? 확실한 내 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배신자가 될 것인가.'
여러모로 재밌는 장면이 나올 것 같아서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아이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카드가 전부 갖추어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확인한 미유는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아아... 이, 이제 괜찮을 거예요오... 그것만 있으면 분명...."
그러면서 미유가 무언가를 꺼냈다.
기업 마크가 그려져 있지 않은 모듈로, 직접 만든 물건인 듯했다.
"그건 뭐지?"
"Lv.3 세포 재생력 강화 모듈이에요오... 없어도 문제는 없지만 이게 수술 도중에 아이리 씨가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오...."
그러면서 미유는 아이리와 연결된 컴퓨터 키보드에 무언가 입력하더니, 그녀의 모듈 소켓에 자작 모듈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에요오... 일단 해제코드는 들어갔어요오... 이제 남은 건...."
미유가 키보드를 재차 조작하자 아이리가 잠에서 깨어났다. 표정을 보아하니 컨디션은 영 좋지 못한 듯,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유는 그녀에게 모듈 호환성 상승 티켓 2장을 쥐여 주며 말했다.
"이, 이걸 찢어 주세요, 아이리 씨!"
"...."
의문을 품을 만도 하건만, 아이리는 묵묵히 티켓을 받아들였다. 이유를 물어볼 힘도 없다는 거겠지.
아이리는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티켓을 찢었고, 나눠진 조각들은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내 아이리는 다시금 잠에 들었고, 미유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환호했다.
"돼, 됐어요오! 정말로!"
"성공인가?"
"네. 예상대로 장착한 모듈들의 호환성이 오르면서 여러 수치가 안정권으로 들어왔어요오."
역시 티켓을 사용할 수 있는 건 구매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600P를 사용하긴 했으나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또 아이리의 생존확률도 올라갔고.
"이제 부담 없이 제거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오!"
"...."
기뻐하는 미유의 모습.
하지만 나는 같이 기뻐하지 못했다.
이게 더 좋은 길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쨌든 고생을 시킨 것은 사실이니까.
"...난 나가 있도록 하지."
"네, 저는 바로 진행할게요오!"
나는 미유의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벽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고 있자니, 작업실 안쪽에서 잡다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전기가 튀는 소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초조한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 안쪽에서 미유가 들어와도 된다며 나를 불렀다.
다시금 작업실로 들어서자 아이리가 자리에 스스로 앉아 있었다. 작업대 한쪽 트레이에 피가 묻어 삭은 모듈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오?"
"응. 괜찮은 거 같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말끔한 기분이야."
"다행이에요오. 그래도 아직은 일어나지 마세요오. 이번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프로그램 업데이트랑 기본적인 안티 위자드 앱을...."
미유가 또 전문용어로 설명을 이어 나가는 동안 아이리는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다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치고선 말없이 시선을 45도 정도 돌렸다. 그녀의 뺨이 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 퉁명스러우면서도 조금은 얌전해진 표정을 보고서야 나도 마음을 제대로 놓을 수 있었다.
"무사해 보여 다행이군."
"네? 아아... 네... 덕분예요...."
아이리는 도통 나와 눈을 마주치질 못했다.
나는 그 속내가 짐작 가서 속으로 웃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소 무례해 보이기도 했다.
보다 못한 미유가 대신 그녀를 조심스레 지적했다.
"아, 아이리 씨... 아무리 그래도 아론 씨가 안 계셨으면 큰일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태도는...."
"시, 시끄러워! 나도 알아!"
"힉! 죄송해요죄송해요!"
아이리의 버럭 하는 소리에 미유가 또 겁을 먹곤 쭈글쭈글한 자세로 몸을 말았다.
그에 아이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선 뒤늦게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고.
평생 동안 몸에 밴 거친 태도가 완전히 고쳐지려면 하루아침으론 부족하겠지.
"크흠."
두 사람의 촌극이 조금 길어질 때쯤 나는 헛기침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뭐, 계속 구경하는 것도 재미는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여유가 많지는 않다.
"아이리 앨리스밸."
"아, 네!"
내 부름에 아이리는 갑자기 바짝 긴장해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적개심 어린 눈빛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네게 줄 것이 있다."
"뭔데요?"
나는 말없이 뒷덜미 소켓에서 모듈 하나를 장착 해제하여 손에 쥐었다. 시야 한가운데에 정보창이 팝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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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제거됨]
[신비모듈] Lv.4 천근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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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내밀었다.
"앞으로 네가 쓰도록 해라."
"네? 갑자기요?"
갑자기...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원래 이럴 생각이었다. 애초에 '천근추'는 원작에서 아이리가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그것을 내가 병을 고치느라 잃어버린 스펙을 만회하는 데에 잠시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제 기존 모듈을 전부 복구할 수 있게 된 내가 굳이 계속해서 사용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 보면 내 주력 무기인 [구름거미]와 그다지 시너지가 좋지는 않은 편인지라.
나는 아이리에게 천근추의 기능과 사용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는 덧붙였다.
"네 전투 스타일에 맞추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원래부터 사람을 가리지 않고 호환성이 뛰어난 모듈이니 곧장 사용할 수 있을 터다."
"그, 그런가요?"
아이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설명해 주신 걸 들어 보면 충격에 버티는 데에 특화된 모듈인 거 같은데, 저는...."
"아, 그렇군."
내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던지라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했다. 요 며칠 타이탄 사건에만 신경 쓰느라 살짝 시기를 헷갈렸다.
"앞으로 내 직접 네 성장 방향을 지도할 생각이다. 불만은 없을 테지."
"상관은 없는데... 어떤 식으로요?"
"모듈링과 주로 사용하는 장비를 교체할 거다. 기본적인 전투 스타일도 바꿔야 할 테지."
"전투 스타일까지요?"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원작에서 아이리를 일컫는 칭호는 다름 아닌 '전차(戰車).'였다. 지금 같은 회피형 딜러 포지션은 그녀의 능력을 낭비하는 길이란 의미다.
"현재의 네 전투 방식은 솔로 플레이를 전제로 하고 있지. 혼자서 살아남는 데엔 유용할지 몰라도, 다른 팀원과의 연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아이리는 이마를 찌푸리면서도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으며 물었다.
뭐, 일주일 전만 해도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데?"하고 대들었을 녀석이다.
사실상 내 조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으니 이 정도면 호감도 작업이 충분히 잘 이뤄졌다고 볼 수 있겠다.
입술을 삐죽 내미는 그녀를 보자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리고 문득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대사가 떠올라,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중하게 말했다.
"아이리."
"네?"
"넌 총보다 방패가 어울린다."
* * *
사실상 회피형 딜러 포지션이 한순간에 탱커가 되는 격변이었다.
다소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졌을 만도 했을 텐데, 아이리는 군말 없이 내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했다.
나는 미유에게 아이리가 쓸 만한 방패 제작을 의뢰했다. 구체적인 얘기는 방패가 완성된 후에 하기로 했다.
그 일을 그렇게 마무리 짓고, 나는 이번에 구매한 티켓들을 보여 주며 새로운 모듈링을 부탁했다.
그에 세계관 최고의 모듈러가 조언하기를, 굳이 티켓을 전부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그게... 아론 씨가 사용하시던 모듈 중에는 출력 레벨에 비해 대체율을 지나치게 잡아먹는 것들이 많아서요오...."
애매한 성능에 귀중한 티켓을 사용하느니, 차라리 성능이 떨어지는 통상모듈 몇 개는 포기하고 새로운 모듈을 제작하는 게 나을 거라는 게 미유의 의견.
"기존 아론 씨의 모듈링은 두 종류의 Lv.5 신비모듈에 맞추어, 다른 모듈 성능에서 다소 합의한 경향이 보여요오...."
"그렇군."
천재의 눈에는 스팅레이 그룹 최고 기술진들이 짜낸 모듈 조합이 영 어설퍼 보였던 모양.
"정말로 최고의 성능을 끌어내고 싶으시다면, [구름거미]부터 시작해서 고출력 모듈부터 하나씩 적응해 나가는 게 좋을 거예요오...."
단번에 다수의 모듈을 장착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덧붙이며, 티켓 사용을 추천한 모듈은 세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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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모듈] Lv.5 테크블레이드
[통상모듈] Lv.5 멘탈 컨트롤러
[통상모듈] Lv.4 웨펀 레코그나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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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 컨트롤러'는 [신비]의 마력으로 인한 정신이상 방지 효과를 지닌 모듈.
'웨펀 레코그나이저'는 모든 무기에 대한 기본적인 무기술을 숙지하게 해 주는 모듈.
둘 다 통상모듈이지만 각각 Lv.4와 Lv.5인 만큼 성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테크블레이드'.
[구름거미]와 같이 '게임 체인저'로 분류되는 Lv.5 신비모듈.
원작에서도 짧게나마 등장했던 아론의 보조 무기인 검으로, 다소 저렴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씹사기' 무기였다.
'이 세계의 현존 기술로도 구현 불가능에 가까운 초진동 모노블레이드를 완벽하게 만들어 놨다고 했었지.'
모노블레이드.
즉, 검날이 한 개의 분자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이론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물질인 셈이다.
게다가 1초에 수십만 번을 진동하며 안 그래도 뛰어난 절삭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물건.
농담이 아니라 이 검이 베지 못하는 물건은 없었다. 심지어 [구름거미]조차 단번에 잘라 내지 못했던 타이탄의 가죽 역시, 아마 이 검을 이용하면 두부처럼 썰어 버릴 수 있겠지.
무엇보다 이 무기의 '숨겨진 형태'는 그야말로 [구름거미]에 버금가는 게임체인저 그 자체다.
이 두 개를 동시에 인스톨하는 것만으로 사실상 나는 도시 최강자 자리로 돌아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테크블레이드] 모듈은 [구름거미]에 비해 훨씬 몸에 부담이 심하실 거예요오...."
불치병을 고치는 과정에서 유독 호환성이 떨어졌던 모듈이다. 제대로 사용하려고 하면 티켓을 여러 장 투자하는 게 안정적일 거라고, 미유는 말했다.
그에 내가 되물었다.
"[시체먹는 자] 모듈이 있는데도 그렇게 티켓 소모를 많이 해야 하나?"
"그 모듈 덕에 그나마 소모량이 줄어든 거예요오... 원래 갖고 계셨던 모듈들의 성능을 생각해 보시면...."
하기야 온통 Lv.4와 Lv.5짜리 모듈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원래 스펙이 비정상이긴 했지.
이제 겨우 1부 1막이 끝났을 뿐인데, 그 사기적인 스펙을 단번에 만회하려는 것이야말로 양심이 없는 것일 터.
"알겠다."
천재 모듈러님께서 이게 내가 강해지는 최선의 방법이라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장 [Lv.5 테크블레이드]에 티켓 4장을, [웨펀 레코그나이저]와 [멘탈 컨트롤러]에는 2장씩을 투자했다.
남은 티켓은 이미 장착하고 있던 모듈들에 한 장씩 투자하여 호환성을 조금씩 더 끌어 올렸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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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구름거미 Lv.5]-비활성
[시체먹는 자 Lv.5]- 활성
[미믹 Lv.2] - 비활성
[테크블레이드 Lv.5]- 비활성
[통상]
[스트렝스 Lv.3] - 활성
[헤이스트 Lv.5] - 활성
[호크아이 Lv.5] - 활성
[셀 리제너레이터 Lv.2] - 활성
[뉴럴 부스터 Lv.3] - 활성
[천독불침 Lv.4] - 활성
[트라우마 생체스캐너 Lv.3] - 활성
[텅스텐 스킨 Lv.4] - 활성
[웨펀 레코그나이저 Lv.4] - 활성
[멘탈 컨트롤러 Lv.5] - 활성
과부하율: 67%(주의)
대체율: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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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링 결과서를 받아본 미유가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율과 과부하율이 치솟았네요오... 이 [미믹]이라는 신비모듈이 가장 큰 원인인데 당장 필요하신 게 아니라면 빼시는 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오늘을 마지막으로 한동안은 봉인해 둘 생각이었다.
시엘 녀석을 마지막으로 낚은 후에 말이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1화
"그럼 부탁하마."
아론은 그 후로도 한참이나 미유와 대화를 나눈 뒤, 당부의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그는 미유의 작업실을 떠나기 직전, 묘하게 짓궂은 표정으로 아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심을 못 받아서 불만인가?"
"그, 그게 무슨 소리-!"
아이리는 소리치려 했으나 한순간 무언가 목구멍을 막은 듯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연결된 컴퓨터가 시끄러운 알림을 울려댔다.
-경고! 경고!
-심박수 급상승! 체온 급상승!
"크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아이리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몸에 연결된 전극들을 잡아 뜯으려 했다.
옆에 있던 미유가 "아이리 씨이! 그, 그러시면 망가져요오오오!"하면서 다급히 말렸지만, 아이리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론은 어딘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작업실을 떠났다.
허나 아이리는 그가 떠나고서도 한참이나 괴수처럼 난동을 부리다가 간신히 진정했다.
"...후우. 참자, 참아. 페이스에 말려들지 말자. 차분하고 어른스러워지는 거야."
성장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성장해서, 아론이 말한 '과거'의 자신을 탈피하는 것이다.
딱히 아론이 별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 다짐을 반복하며 아이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옆에서 미유가 무언가를 쥐고 질질 짜는 모습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날뛰다가 결국 뭔가를 망가뜨린 모양.
"미,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녔어."
"괜찮아요오... 고치면 되니까요오...."
전혀 괜찮은 표정이 아닌데.
어찌 사과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차라리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급히 화제를 찾다가 무심코 입에 담은 질문은....
"그, 그나저나 아까 저 인간이랑 무슨 얘길 한 거야? 뭔가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치곤 얘기가 길어지던데."
저 인간?
말해 놓고 보니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거슬리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아론 씨? 이사장 님?
스팅레이 씨? 스폰서 님?
어느 쪽도 뭔가 와닿지 않는다. 갑작스레 너무 친근하게 구는 것도 좀 그렇고. 호칭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고민을 해 봐야 할 듯했다.
곧 미유가 그 질문에 답했다.
"필요한 게 많다고 하셨어요오... 아이리 씨가 사용할 방패의 세부적인 사양도 지시하셨고... 또 모듈 커스터마이징이랑, 또 SS칩에 관해서 물어보셨는데...."
"SS칩? 그건 또 왜?"
"잘 모르겠어요오... 그냥 제가 어느 정도로 지식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지... SS칩은 모듈 제작 기술이랑 분야는 달라도 어느 정도 겹치는 면이 있거든요오...."
흠.
잠시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긴 그 인간 속내를 알 수 있을 리가.
아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지만, 좀처럼 그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순간 그가 미유의 작업실에서 나가기 직전 했던 말이 플래시백 되었다.
-관심을 못 받아서 불만인가?
그 말과 동시에 생각나는 것은 어젯밤의 장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아론의 검은 등과 아이처럼 질질 짜던 자신의 모습과....
"으윽! 제발 살려줘... 제발...!"
"아, 아이리 씨! 왜 이러세요오!? 진정 좀 하세요!"
되살아나는 흑역사에 죽으려 하는 아이리와 또다시 그녀를 말리는 미유.
...성장하려면 아직 갈 길이 먼 아이리였다.
* * *
미유의 작업실을 빠져나온 직후, 내가 향한 곳은 아카데미였다. 마리아가 모는 비행형 세단은 249층 스팅레이 사무실 주차장에 멈추었다.
나는 아카데미 시찰이라는 핑계를 대고 혼자 사무실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모듈 온라인."
[미믹]을 활성화시켜 '베네딕트'의 외형을 빌린 후,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다름 아닌 시엘의 아지트였다.
의자에 앉은 채 얼마간 기다리자 이윽고 시엘이 나타났다. 그녀는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부터 불쾌함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셨군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대뜸 이렇게 말하는 시엘.
그 속내를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작전이 실패한 것에 대한 불만인가? 아니면....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시엘의 입이 열렸다.
"베네딕트 씨. 죄송하지만 저는 이 이상 당신에게 협조하고 싶지 않아요."
"어째서지?"
"그야 당신은 선을 넘었으니까요."
시엘은 여전히 나를 베네딕트로 착각하고 있었다. 또한 레온 일당이 아이리를 괴롭히게 된 이유가, 내가 그들을 조종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그녀는 나를 상대로도 전혀 겁먹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실은 한참 전부터 말씀드리려고 했었어요.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건 너무하잖아요. 당신한테야 그냥 '캐릭터' 한 명일 뿐일지 몰라도, 여기선 살아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아이리에게 고통스런 경험을 시키면서까지 준비했던 당신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잖아요! 아론 스팅레이를 없애는 데에도 실패했고, 그러고도 우리에게 돌아온 공헌도는 쥐꼬리만 했다구요!"
"그래서, 협력관계를 깨뜨리겠다?"
내가 으름장을 놓듯 묻자, 시엘은 그제야 조금 겁을 먹은 듯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마 이번 건으로 아론 스팅레이는 대량의 공헌도를 벌었을 거예요. 보상도 엄청나게 많이 들어왔을 거라구요."
"그렇겠지."
"이제 와서 우리가 그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애초에 그와는 스타트 라인부터가 달랐는데, 다른 경쟁자의 추월을 내버려 둘 정도로 허술한 인물도 아닌 것 같고요. 요컨대...."
시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본론을 꺼냈다.
"차라리 아론 스팅레이에게 협력하는 건 어떨까요?"
과연. 이렇게 나오나?
조금 흥미가 동했기에 계속 더 얘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그녀의 속내를 들을 수 있을 테니.
"사실 현재의 아론 스팅레이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빙의자잖아요? 소설 속에 등장한 그 치트키 살인귀가 아니라."
"계속해 보도록."
"그러니 어쩌면 말이 통할 수도 있어요. 저는 1부 3막의 주요 캐릭터 중 하나고, 당신은 그 사람의 동생이잖아요?"
"흠."
겨우 이 정도인가?
생각보다 그리 빠릿빠릿하게 머리를 굴리는 녀석은 아닌 것 같았다. 겁에 질린 탓인지, 아니면 메이드 로봇으로서 입수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된 탓인지 허술한 점이 많다.
"네 계획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나는 시엘의 말에 반박했다.
"아론 스팅레이는 빙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주인공도 죽였다. 그런데 그가 너나 나를 살려둘 것 같나?"
"그, 그건...."
"게다가 나는 한 차례 그에게 암살을 시도했다. 만약 그 사실까지 밝혀진다면, 나는 확실하게 그의 손에 살해당하겠지. 그건 생각 못 했나?"
"윽...."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내뱉은 말이 그녀의 진심이었다는 의미리라.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시엘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상자 하나가 생겨났다. 뭐가 들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기에 비해 꽤 묵직해 보였다.
아마 포인트 상점을 이용한 것 같았는데, 판매목록 중에 저만한 크기인 건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저거....'
물론 나와 시엘의 상점창 목록이 다를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그것'일 것이다.
물건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듯했다. 하지만 시엘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이걸로 합의를 보죠."
"이건... 뭐지?"
"제가 이번에 얻은 공헌도는 13%였어요. 그에 따른 보상이 1200포인트였고요. 그중 500포인트를 투자해서 이 물건을 샀어요."
제기랄, 값까지 같았다.
더더욱 확실해졌다.
이거, '그거'다.
"조, 좀 숭하게 생기긴 했어도 쓸 만한 물건일 거예요. 혼자 있을 때 열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걸 나한테 주는 이유가 뭐지?"
"말씀드렸잖아요, 합의라고."
금세 부끄러움을 추스른 시엘,
"살아남기 위해서라곤 해도, 저는 당신이 일전에 썼던 그 방식에는 동조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의미지?"
"저도 나름대로 이 세계의 팬이었다구요. 그러니 그 귀찮은 '퀴즈 이벤트'에 참가해서 장려상까지 받지 않았겠어요? 뭐, 결과는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그래서, 내 방식이 맘에 안 든다?"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계속 함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에요. 제가 일개 메이드 로봇인 점은 제외해도요."
결별 선언이었다.
요컨대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면서까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방식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는 그냥 이대로 숨을 죽이고 살게요. 그러다 아론 스팅레이한테 들키면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정말로 그게 네 답인가?"
"네. 지금 드린 그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에요. 일종의 뇌물이죠. 저도 입을 다물고 살 테니, 당신도 저를 계속 모른 척 해달라는 거예요."
"...."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의 말과, 이 선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강철○도가 사실은 미유가 갖고 싶어 했던 물건이긴 하다.
생긴 거야 어떻든 간에 상당히 유용한 도구일 테고, 시엘은 자신의 포인트까지 소비해 가면서 이것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원래 선물이라는 건 자기 돈으론 사기 싫은데 좀 필요한 물건이 가장 기쁘다고 했던가? 뭐, 딱히 기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받아서 나쁠 건 없다.
'진심인 건가....'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 했을 때 1200P 중에 500P 씩이나 사용했을 정도면 시엘로서도 나름 성의를 표한 것이라 봐도 되겠지.
'게다가 이 녀석의 공헌도는 13%라고 했지. 내 공헌도 87%와 합치면 딱 100%다.'
그렇다면 나와 시엘 둘이서만 1부 1막의 공헌도를 독점한 셈이다. 바꿔 말하자면 아카데미 내에는 시엘 외에 다른 빙의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건 굉장히 유용한 정보였다.
여러 요소를 고려해 본 결과, 내 마음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이 정도면 됐군."
사고방식, 행동 패턴 등등.
이 녀석은 내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 같고.
'뭣보다 팬심을 공유할 수 있는 녀석이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진 않고.'
사실 그 욕심이 제일 컸다.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합격이다, 시엘."
"합격이요? 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전 돌아가 볼게요. 일하던 중간에 빠져나왔던 터라,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드로이드 관리자에게 의심받을 거예요."
그러면서 시엘은 아지트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런 모양새로 끝나게 되어서 미안해요. 당신의 무운을 빌게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네?"
시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가면을 벗었다.
모듈 오프라인.
[미믹]을 비활성화하자 내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머리색과 얼굴, 키, 옷차림까지 전부 다.
"내게 협력한다고 했었지."
곧 완전히 본모습을 되찾은 나는 시엘을 향해 말했다.
"얼마든지 환영이다, 시엘."
"다, 다, 다다다다당신은...!"
내 얼굴을 확인한 시엘은 얼굴이 시퍼래렸다. 안드로이드도 저렇게 안색이 창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찰나.
"끄르르르륵."
괴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시엘.
눈을 까뒤집고 연기를 내뿜는 걸 보니.
"이런...."
...아무래도 망가진 듯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2화
치이이이익~!
쓰러진 시엘의 몸에서 거뭇한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놀란 충격으로 내부 회로에서 합선이 일어난 것 같았다.
'사람으로 따지면 거품 물고 쓰러진 거려나.'
원래부터 시엘이 워낙 남다른 개체이다보니, 이런 현상이 일반적인 안드로이드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빙의자라 그런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뭐, 이렇게 내버려 둘 순 없겠지.'
아직 중요한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녀석이 쓸 만하다고 판단한 이상, 고쳐는 줘야겠지.
나는 마리아에게 연락해서 망가진 안드로이드가 있으니 회수해가라고 했다. 연락이 닿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단 말단 직원 몇 명이 시엘의 몸을 카트에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사실 트리니티 아카데미 소유 물품인 시엘은 아카데미 시설관리반 측에서 처리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무작정 요구를 밀어붙였고, 결국 시엘의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마리아는 내게 구두로 보고한 후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이 안드로이드는 무엇입니까?"
"우연히 만났다. 아무래도 에러가 생긴 놈인 것 같은데, 조금 흥미가 동하더군."
"에러 말입니까?"
단순히 '에러'라고 했으나, 마리아도 곧장 알아들은 눈치였다. 옛날부터 안드로이드들이 '자아'를 깨우치고 반항하는 케이스가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직까진 비교적 소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그닥 큰 화제는 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일단은 수리기사를 불러라. 이 녀석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이용'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더는 깊게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걸 안 것이다.
마리아는 어딘가로 연락을 넣었고, 안드로이드 수리기사의 일정을 곧장 잡아냈다. 다만 최근에 안드로이드 고장이 워낙 자주 발생하는 탓에 예약은 아무리 빨라야 내일이 한계라고 했다.
'안드로이드 반란 에피소드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탓이겠지.'
스팅레이의 이름까지 들먹여도 그보다 빨리는 안 된다고 울먹이는 걸 어쩌겠는가.
하는 수 없이 수리기사가 도착할 때까지, 시엘의 몸뚱아리를 안 쓰는 사무실 창고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근데 이게 실수였다.
* * *
다음날.
다음 에피소드 준비와 기타 재단 관련 잡무를 이것저것 처리하고 아카데미 사무실로 돌아왔더니 마리아가 내게 보고했다.
"도련님.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지?"
"도련님이 가져오신 안드로이드가 수리 도중에 깨어나더니 폭주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시엘 녀석이 내가 없는 도중 도착한 수리기사를, 작업 도중 깨어나선 공격했다는 것이었다.
현재는 창고 문을 걸어 잠그고 인질극을 벌이는 중이라나 뭐라나.
"당장 가지."
"알겠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상태였다.
평소에 빠릿빠릿하기 그지없는 그들이 허둥지둥하는 게 다소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하기야 화이트칼라들이 이런 트러블에 휘말릴 일이 얼마나 있겠나.
"도련님, 오셨습니까?"
"상황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수리기사가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요구하는 건...."
그 순간 마리아의 말을 끊고, 창고 문 너머에서 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날 여기서 도망치게 해줘요! 안 그러면 이 사람 목 분질러 버릴 테니까!]
"...라는군요."
"쯧."
하여간.
아무래도 시엘 녀석은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안에서 해킹으로 문을 잠근 것 같습니다. 마스터키가 있는데 듣질 않는군요."
"해킹?"
이 자식, 해킹은 또 언제 배운 거야.
시엘에 빙의한 이후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만들어 두고 싶었던 걸까. 안쪽에서 개폐시스템에 뭔가 조작을 가한 듯하다는 게 마리아의 설명이었다.
고장 난 안드로이드가 일으킨 인질극.
덕분에 스팅레이 사무실도 난리가 나서 업무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별로 달갑잖은 상황이었다.
-저 안에 있는 거 이사장님이 가져오신 안드로이드 맞지?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신 거야?
-겨,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서둘러야겠다. 경찰이 개입했다간 대화할 여지도 없이 시엘은 틀림없이 사살당할 거다.
'멍청한 녀석.'
패닉에 빠져서 스스로 목을 조르는 줄도 모르다니.
"다들 업무로 돌아가도록. 여긴 내가 직접 책임지고 해결하겠다."
"하, 하지만 이사장님...!"
"두 번 말하게 할 생각인가? 쓸데없이 호들갑 떠는 놈은 다음 달 인사발령을 기대해도 좋다."
싸악.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직원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새파래졌다. 다들 스팅레이 그룹 내에는 '절대로 배치받아선 안 되는 부서'가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소란을 잠재운 후, 나는 다시금 굳게 잠긴 창고와 마주했다.
옆에서 마리아가 내게 물었다.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도련님?"
"걱정할 것 없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런 상황에 아주 유용한 마법 주문을 알고 있었다. 어떤 자물쇠도 멋지게 풀어내는 마법(물리)의 주문.
'알로호모라.'
콰아앙-!
나는 창고 문을 그대로 걷어찼다.
나름 튼튼한 자재로 만들어진 문이었지만, Lv.3짜리 군용 근력강화 모듈, [스트렝스] 앞에서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뜯겨나간 문짝은 정확하게 시엘의 몸에 적중했다. 이미 밖에서 [트라우마 생체스캐너]로 인질과 시엘의 위치를 확인해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엑!?"
시엘은 난데없이 날아온 문짝에 얻어맞고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나는 빠르게 달려들어 녀석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몸체를 발로 짓누르며, 옆에서 벌벌 떨던 수리기사에게 물었다.
"입은 무거운 편인가?"
"무, 물론입니다!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지 않겠습니다."
"그렇길 바라지. 마리아?"
"적절히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른 녀석이다.
언젠가 진짜로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인물이지만... 뭐, 지금은 할 일부터 하자.
"내 시간을 이 이상 뺏지 않았으면 좋겠군, CL-00245."
"히이익!?"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뭐든 다 할 테니까...."
그렇게 시엘이 벌인 인질극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종료되었다.
* * *
인질극 직후, 나는 시엘의 머리 파츠만 분해해서 들고 왔다. 다음에 또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 못하게 막기 위함이었다.
사람이었으면 머리만 떼서 들고 다니지는 못하니, 참으로 편리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시엘의 동그란 머리를 장식처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아니, 내가 보기에도 좀 그림이 상당히 이상하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시엘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라."
"혹시 지금까지 제가 만난 '베네딕트 스팅레이'는 전부...."
"그래. 나였다."
내 대답에 '허어'하고 한숨을 쉬는 시엘. 목 아래가 없어서 그런지 목소리에 조금 이상한 기계음이 섞여 있었다.
"그럼 아이리를 괴롭히라고 지시했던 것도...."
"아니, 그건 거짓말이었다. '진짜' 베네딕트 쪽이 벌인 일이었지. 그 외에 내가 주인공을 죽였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왜 그런 거짓말을...?"
"...."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사실들을 말해 주었다. 협력을 바란다면 어느 정도의 정보공유는 필요한 법이니까.
나는 주인공이 죽어 버린 진짜 이유와 그 이후 내가 진행해 온 시나리오 수정 작업들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시엘은 상황이 이해된 듯 표정이 풀어졌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원작을 제대로 읽기는 했던 모양이다.
"저는 틀림없이 당신이 주인공을 죽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럴 리가. 궁금한 건 더 있나?"
"아뇨, 당장은 없는데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마, 말씀하셔요...."
나는 본론을 바로 꺼냈다.
"네가 SS칩을 유통해 줬으면 좋겠다."
내 말에 시엘의 눈이 커졌다.
"SS칩이요?"
"무슨 물건인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통칭 SS칩.
시냅스 서핑(Synapse Surfing) 칩의 약자로, 타인의 기억을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이었다.
설명하자면 4DX 영화보다 몇 단계나 발전한 형태라고 할까. SS칩 기술을 이용하면 시청자는 원본 배우의 감정이나 일시적인 플래시백 현상까지도 완벽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SS칩은 1부 2막에서 다뤄지는 중요한 소재이기도 했다. 시엘 역시 곧장 내 의도를 이해한 듯했다.
"1부 2막을 수정할 생각인가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묵은 체증이 조금 내려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이런 '빙의자로서의' 대화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던 탓이었다.
어쨌건.
1부 2막에서는 SS칩 중에서도 불법적인 SS칩... 일명 '정크칩(Junk Chip)'이 메인으로 다뤄진다.
일반적인 SS칩이 전문 배우의 메소드 연기와, 뛰어난 편집자의 편집 실력이 합쳐져서 제작되는 하나의 예술 장르라고 한다면.
허나 정크칩은 오직 체험자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만 만들어지는 일종의 사이버 마약으로 취급되었다.
실제로 이런 불법적인 정크칩을 즐기다가 뇌가 타 버리거나, 진짜 마약 중독자가 되거나, 폐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도 알다시피 2막에서는 이 정크칩이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신비]에 홀려 죽은 사람의 기억 따위를 담은 칩이 유통된 거지."
"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정크칩을 유통하는 범인이...."
"'사일런스'였지."
그의 본명은 박태준. 한국계였다.
정면에서 화끈하게 돌진하는 스타일의 아이리와는 달리, 은신과 저격에 특화된 전투 스타일을 지닌 캐릭터였다.
현재는 전술교전부 3학년으로, 소속된 기업은 없다. 아카데미 1학년 때부터 정크칩을 유통하기 시작했는데, 본인도 몇 번 거기에 손을 댄 부작용으로 뇌가 조금 녹아서 말을 못 한다.
동시에 얼굴근육도 일그러져서 항상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걸 감추기 위해 이모티콘이 출력되는 LED 패널이 달린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녀석이다.
"1부 2막은 사일런스와 정크칩이 핵심 소재다. 녀석이 유통하는 정크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이 싸우는 게 주된 내용이었지."
1부 2막에서 사일런스는 처음에 악당으로 등장하여 주인공과 대립한다. 그렇게 은신과 저격의 전문가인 사일런스와 테크노 위자드인 주인공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한 것은 주인공.
그리고 밝혀진 사실.
사일런스 역시 금전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정크칩을 유통한 것이었다.
주인공은 그런 사일런스를 조종하던 배후에 심상찮은 모종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세계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된다...라는 게 1부 2막의 내용이었지.
그렇게 1부 2막의 내용을 다시금 되짚어보고 있자니, 시엘이 물었다.
"그... 아론 님께서는 사일런스를 영입하고 싶으신 거죠?"
아론 님이라.
어지간히 나한테 겁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호칭이었으나,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래. 스팅레이 특별 장학생으로 만들 생각이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는데, 어째서 제가 SS칩을 유통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그냥 사일런스한테 가서 원작 지식을 활용해서 설득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실패했다."
"...."
잠시간의 정적.
그러다 시엘이 되물었다.
"...네?"
"실패했다."
나는 같은 말은 반복했다.
실은 아까, 시엘이 수리받고 있는 오전시간을 이용하여 사일런스를 만나고 온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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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달성]
복수자(復讎者) '사일런스'를 만났다.
업적 포인트: +500
[업적달성]
메인스토리 1부 2막을 시작했다.
업적 포인트: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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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얼굴까지 대면하고, 포인트까지 낭낭하게 벌어 왔지만, 결과 자체는 바꾸지 못한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사일런스 영입에 실패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