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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흑막 시점 106화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왔건만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우리 애들의 싸움은 막 끝난 모양이었다.

주변에는 망가진 안드로이드들의 파츠들이 널려 있었고, 입구 쪽에는 트롤 몇 마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내가 조금 늦었구나.'

하마터면 위험했을 뻔한 상황.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부 무사한 듯하니 다행이었다. 물론 워낙 격렬한 전투를 치른 탓에 이 이상 싸움을 계속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들이 제자리에서 쉬는 동안, 특별반 녀석들이 담당했던 구역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뭐, 원래 내가 해야 했던 일이었기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돌아와 보니 특별반 녀석들은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는지, 한곳에 모여 앉아 있었다. 그 곁에 콜로니 보안 총책임자, 조슈아 패튼도 함께 있었다.

급박한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어째서 그가 이곳에 있는 걸까,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우리 애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덕이 컸던 모양이니까.

그나저나 더 쉬게 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다들 일어나라. 돌아가야 한다."

내 지시에 네 명이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쉘터 쪽에 연락을 토벌작업이 끝났음을 알렸고, 이내 마무리 작업을 위해 처리반이 올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다.

그 소식을 전하자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던 그때, 아이리가 내게 물었다.

"이사장님."

"뭐지?"

"시엘은 어떻게 됐어요? 아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는데."

"무사하다. 지금 딥다이브를 해제하고 미유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이곳에 오기 도착하기 직전에 시엘의 보고를 받았다. 적대적인 정체불명의 프로그램과 맞서 싸운 끝에 승리하였고, 거기서 유용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다고.

그 이야기를 전해 주자, 아이리도 그제야 안심한 듯했다. 아마 나름대로 그쪽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겠지.

리더의 면모를 슬슬 갖춰 나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이제 저흰 어떡하면 될까요?"

"바로 아카데미로 이동할 예정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다들 따라오면서 듣도록 해라."

나는 아까 전 아라야와 다시금 만나며 벌어진 일들에 대하여 알려 주었고, 지금 아카데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도 전달했다.

물론 빙의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적절히 각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인간은 대체 왜 저희에게 집착하는 걸까요?"

"모른다. 종교적 신념 같은 거겠지."

"역시 그런 거려나요...."

다행히 놈이 사이비 종교 출신이다 보니, 되는 대로 이유를 붙였는데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 목표는...."

"아카데미에서의 구출 작전이다. 내가 아카데미 방어시스템을 뚫어 줄 테니, 너희가 진입해서 학우들을 구해 내면 된다. 그동안 나는 그 사이비 승려의 본체를 찾아내어 사로잡을 예정이다."

설명이 끝나자, 아이리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경찰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너희는 놈들을 믿나?"

"...아뇨."

"그런 거다."

뉴 발할라 시티 시민 중에 누가 부패 경찰의 표본인 VCPD를 신뢰하겠나. 놈들은 돈만 충분히 주면 범죄도 얼마든지 눈감아 주는 놈들인데.

뭐, 그보다는 그냥 아이리를 영웅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우선이었지만, 그렇게 둘러대자 특별반 녀석들도 별다른 의심 없이 수긍했다.

'착한 애들이라 다행이야.'

아이리, 사일런스, 미유, 시엘.

전부 원작에선 주인공의 동료였던 만큼 다들 나름대로 정의감이 강한 편이다.

지금처럼 "너희 친구들이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인간으로서 소중한 부분을 살살 건드려 주면 설득하기는 비교적 쉽다.

그렇게 나는 모든 상황 설명을 끝낸 후 특별반 세 사람 + 조슈아 패튼을 이끌고 쉘터로 복귀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아카데미로 서둘러 돌아가실 수 있도록 비행기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잘 했다. 잠시만 기다리도록."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겨 준 것은 마리아.

나는 아이리에게 팀원들을 데리고 먼저 비행기에 탑승해 있으라고 지시한 뒤, 조용한 곳으로 패튼을 불러 독대했다.

"조슈아 패튼."

"예. 부르셨습니까, 이사장님."

여전히 군기가 바짝 들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리바리한 기색.

하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일종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이번 일에 참으로 크게 이바지했군."

"아, 아닙니다. 결국 이사장님께서 생산지구 전역을 맡아서 처리하셨잖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쓸데없이 겸양 떠는 말은 생략했으면 좋겠군."

"부,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됐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원하는 게 있다면 한 가지 들어줄 테니 말해 보도록."

"ㅇ, 예?!"

패튼은 상당히 놀란 반응을 보였으나, 이 정도쯤이야 우리 애들을 구해 줬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규정을 어기고 멋대로 작전지역에 들어간 것을 눈감아주는 것으로 퉁칠 수도 있겠으나, 내 기분상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을 잘 했으면 보상을 받아야지.

"시간이 없으니 빨리 대답해라."

"저, 정말로 뭐든 상관없습니까?"

"...적당히 선은 지켰으면 좋겠군."

이 또라이 기질을 숨기고 있는 인간한테 '뭐든지'라고 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도 몰라서 다급하게 조건을 덧붙였다.

그에 패튼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품에서 꺼내어 내게 건넸다.

"받아주십시오."

"음. 이건 뭐지?"

"제 지인의 연락처가 적힌 명함입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전혀 모르시겠지만, 한때 저희 그룹에서 근무하던 유능한 인물이죠."

"그래서?"

"기억하시지 못하겠지만, 이 형님은 예전에 이사장님의 심기를 거스른 탓에 근무지에서 잘리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이놈을 다시 복귀시켜 달라?"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패튼.

이야, 당신이 억울하게 자른 인물을 다시 책임지고 데려와 달라고 면전에서 말할 수 있다니. 역시 마지막까지 또라이 기질을 숨기지 않는구나.

"...만약 본인이 원치 않는다면?"

"그럼 없었던 일로 하셔도 됩니다."

"음."

패튼이 건넨 명함을 살펴보았다.

내 시선을 인식한 디지털 명함에서 홀로그램 영상이 출력되더니 푸른색 로고와 함께 다소 의욕이 없어 보이는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 그러니까... 돈만 주시면 뭐든지 해결해 드립니다. 당신의 만능해결사, '블루코트 해결사 사무소'입니다.

뭐? 블루코트?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야 이 해결사라는 양반이 원작에서 나왔던 중요 인물 중에 하나였으니까.

한때 학생회를 설립하는 것보다도 먼저 이 양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우선순위를 고민했을 정도였다.

'이게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그'가 스팅레이 보안부 출신이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내가 자른 놈일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조슈아 패튼과 연이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그 양반을 자른 게 빙의 이전의 나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어디까지 업보를 쌓아 놓은 거냐, 아론 스팅레이....'

그렇게 속으로 불평을 하면서, 나는 명함을 품에 챙겨 넣었다. 비서인 마리아에게 넘기지 않고 내가 '직접' 접수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의미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그룹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길 바라지. 조슈아 패튼 소장."

그러면서 내가 등을 돌리려는 찰나.

"자, 잠깐만요, 이사장님."

"또 뭐지?"

"그, 그게...."

그는 내 이마 언저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나를 붙잡으러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흠."

뭔가 찝찝한 반응.

하지만 굳이 그걸 캐물을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나는 비행장 쪽에서 대기하던 경비행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발짝, 한 발짝.

계단을 올라 출입구를 지나친 다음, 기내실로 발을 들어 놓는 그 순간.

"아야!"

내 머리 위에 있던 것이 천장에 쿵 부딪히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그제야 나는 에반젤린이 아직도 내 어깨 위에 목마 상태로 올라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론! 아프잖느냐! 조심해야지!"

"마, 말했어요! 말했다구요!"

"[저거 귀신 아니었어?!]"

객실 좌석에 미리 앉아 있던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장님, 그 애 뭐예요?!"

"저, 저만 보이는 게 아니었군요오...."

"[틀림없이 유령 계열 신비 한 마리 붙이고 온 줄 알았는데.]"

"물어볼 타이밍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네요~"

각양각색의 반응.

아니, 잠깐. 그럼 뭐야.

나는 지금까지 얘를 목에 얹고 다녔던 건가? 중간부터 일이 너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잠시 뇌 속에서 존재를 지우고 있었는데...!

심지어 애가 너무 가벼워서 머리에 이고 있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왜 아무도 미리 말을 안 해 준 거냐... 라고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이유는 뻔했다.

'다들 내 눈치 보느라 입 다물고 있었구나...!'

평소에 냉혈한 이미지를 고수하던 높으신 분이, 갑자기 이계화 지역에 들어갔다 오더니 어깨 위에 꼬마애 하나 덜렁 달고 나타났는데, 심지어 본인조차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걸 보고 어디선가 살아 있는 애를 데려왔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틀림없이 저쪽에서 귀신 하나 붙여 갖고 왔다고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지.

또 하필이면 [신비] 중에서는 진짜로 동자 귀신같은 게 있어서, 종종 적응자들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때 붙여서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그걸 굳이 아는 척을 하면 자길 알아본 사람한테 옮겨붙어서 해코지하는 습성이 있는지라, 누군가 귀신을 달고 오면 다들 보여도 아무 말을 안 하는 게 일반적인 대처였다.

어차피 도시 내에서 안티레인 몇 번 맞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멸하기 마련이니까.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리아 너는 말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째려보자.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마리아.

그녀도 에반젤린이 내게 달라붙은 동자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나도 감지되니까 더 확신을 했던 모양이고.

물론 보통 동자 귀신은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에 반해, 에반젤린은 백금발에 적안이라서 조금 의심하긴 했다나보다. 하지만....

"이계화된 지역에 다녀오셨으니 유럽계 동자 귀신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할 말이 없었다.

대체 누굴 탓하겠는가.

머리 위에 어린애를 얹어 놓고도 까먹은 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내 탓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목마를 타고 있던 에반젤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특별반 학생들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에반젤린을 둘러싸기 시작했고, 천하의 에반젤린 역시 자기보다 몸집 큰 언니오빠들한테 둘러싸이니 당황한 듯했다.

"그, 그래서 이사장님! 이 귀여운 애는 누구인가요?!"

특히 크싸레이나가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에반젤린은 다급하게 나를 바라보며 구원요청을 보냈다.

"아, 아론...!"

"...."

어쩌라고, 나도 몰라.

너 알아서 해.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7화

망했다.

망했다. 이건 틀림없이 망했다.

사내는 욕설 섞인 한탄을 쏟아 내었다.

틀림없이 완벽했을 터인 계획은 또다시 볼품없이 어그러졌다. 그 남자, '아론 스팅레이'의 존재에 의해.

이건 사기다.

불공평하다.

말도 안 된다.

불평불만을 아무리 쏟아 내도 만족할 수가 없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이럴 수는 없다...!'

'인형'들을 통해 그에 대한 정보는 꾸준히 수집하고 있었을 터이다.

스팅레이 그룹의 기밀인 그의 모듈 정보는 물론, 그의 전투 방식이나 본래의 성격, 인간관계 등등 조금이라도 그를 무너뜨리는 데에 필요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악착처럼 모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예측보다도 더 강했기 때문에.

'이럴 수는 없단 말이다!!'

다시금 치솟는 분노.

포악스럽게 괴성을 내질러 이 불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털어 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려는 순간 무언가에 간섭을 받은 듯이 냉정과 평온을 되찾고 만다.

'아아....'

어째서 자신은 이런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것인가. 아직도 수행이 부족한 탓이리라.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은 채 차분한 마음으로 정진하다 보면 비로소 부처의 길로....

'아니야! 이게 아니야!'

이딴 건 자신이 아니다.

이 빌어먹을 몸뚱어리가 자꾸 의식을 앗아 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이 아닌 '아라야'의 기억만을 품은 채 다시 깨어나곤 했다.

그는 에반젤린에게서 빼앗은 마법의 힘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고 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성과는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그 효과는 떨어지고 있었고, 갈수록 '아라야'로서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으으으으윽-!"

이게 전부 다 그놈 때문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탐욕스럽게 차지해 버린 아론 스팅레이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전개하는 순간 다시금 속에서 미친 듯한 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아라야'로서의 인격이 가소롭다는 듯이 주도권을 채간다.

그렇게 그는 제자리에서 분노했다가 냉정을 되찾기를 한없이 반복했다.

마치 스위치를 켰다 끄는 것처럼, 혹은 자동차의 액셀을 밟은 채 브레이크를 밟았다 푸는 것처럼.

그의 생각 역시 나아가다가 멈추기를 되풀이했고, 두 명의 주자가 쉴 새 없이 바톤 터치를 이어 나갔다.

얼마나 그 무의미한 교대를 계속했을까. 그는 서서히 자신이 '아라야'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말단의 신경 가닥 하나하나가, 두 인격이 서서히 합일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발작처럼 지속되던 '교체'가 얼추 진정된 후에야, 그는 굉장히 차분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 했었지요? 음. 그래요.'

아론 스팅레이.

제일 방해되는 빙의자, 경쟁자, 적대자.

재력과 권력, 무력.

어느 한 부분에서조차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기껏 끌어모은 신도들은 기업들이 주도하는 '사냥' 탓에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가장 큰 희망이었던 정크칩마저 생산이 중지되고 말았다.

기업 사냥꾼들의 눈길을 피해 도망치는 와중에도 갈고닦았던 마법은, 아론이 지닌 예측 이상의 강력한 힘 앞에 한낱 재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사내를 이길 방법은 없을까요?'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는 1부 1막부터 4막까지, 모든 시나리오의 보상을 독식했다.

게다가 주요 캐릭터 대부분과의 관계 기반까지 단단히 다져 놓았으니, 앞으로 그에게서 선두 자리를 빼앗을 방법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나마 그에게 빙의한 영혼이 어리석은 자였더라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그조차 아니었다.

그는 자신 이상으로 이 세계와 구성원들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다른 빙의자들이 열심히 잔꾀를 부려 본다고 한들, 그는 금방 눈치채고선 그것을 저지하려고 들 것이다.

아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쟁자를 치워 내고 탐욕스럽게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차지해 나갈 것이다. 최악의 악역 역할에 만족하고 그쳤어야 할 그가, 사실상 주인공 자리까지 차지해 버렸듯이.

'...저는 주인공이 아니었던 거겠지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처럼 느껴졌다.

아마 이것으로 끝날 것이다.

아론 스팅레이는 이번 사건이 끝나는 대로 자신을 확실하게 처단하겠지. 용서를 구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죽음이라.'

그에 대해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온다.

이런 몸뚱이를 지닌 자신이, 온전한 자아를 유지한 채 자신으로 죽을 수나 있을까. 뭐, 아무래도 좋을 문제겠지.

다만.

마지막으로 이 몸에 남은 게 있다면.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불씨 한 조각이 있다면.

그것은 '복수심'일 것이다.

'당신 혼자 좋은 결말을 맞이하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아론 스팅레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감정.

가지지 못한 것은 부수어 버리겠다는, 그런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발상만이 진짜 '자신'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선택이 될 테지.

그래, 좋다.

바로 이거다.

"...마지막 싸움입니다, 아론 스팅레이."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그 대사를 내뱉은 순간만큼은, 자신이 정말로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 * *

내가 에반젤린의 정체가 '마녀'라는 것을 밝혔음에도, 특별반 아이들은 물론 마리아 역시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오류 개체인 시엘을 데려온 시점부터, 내 인재 픽업 기준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게 편하다는 걸 깨달은 걸지도. 잘은 몰라도 이 녀석들 머릿속에선 내가 '괴짜 수집가' 같은 칭호를 달고 있겠지.

'...조금 억울하네.'

거기서 또 추가적인 이유를 꼽자면 인간이란 외견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 생물인지라, 에반젤린의 외모도 그녀를 받아들이는 데에 크게 한몫했을 거다.

이 꼬맹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귀엽게 생겼으니까.

어쨌건 그렇게 하여.

에반젤린의 존재는 모두의 마음에 쉽게 받아들여졌다. 굳이 문제를 하나 꼽자면, 너무 깊게 받아들여졌다는 부분이겠지.

다름 아닌 레이나에게 말이다.

"에반젤린, 어서 와서 이것 좀 먹어 볼래요? 이거 무척 맛있답니다."

"에반젤린, 심심하지 않나요?"

"에반젤린, 혹시~."

에반젤린, 에반젤린, 에반젤린.

비행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되는 레이나의 호출에, 에반젤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괴성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악! 그만하거라! 저리 가!"

"어머나...."

크싸레이나의 지나친 관심을 견디지 못한 에반젤린은, 결국 그녀에게 배정한 자리에서 도망치듯 내 자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그녀는 등받이를 30도 정도 눕혀 기대고 있던 나의 배 위에 뛰어들듯 올라탔다. 그러고는 나와 같은 방향으로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바라보았다.

"아론! 저 녀석 내리라고 해라!"

"헉! 저더러 죽으라는 건가요!?"

"[결국 꼬마 마녀한테 미움 받았네. 내 그럴 줄 알았지, 크흐흐.]"

"뭐라고요, 선배?"

"[크흠.]"

에반젤린의 공중낙하 지시를 받은 레이나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고, 옆에서 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깬 사일런스는 그 모습에 재미있어했다.

그러다 레이나가 흘겨보자 무안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다시 눈을 감는 사일런스.

뒷좌석에서 그런 촌극이 오가는 동안, 나는 배 위에 올라탄 에반젤린을 그대로 들어 복도 쪽에 내려놓았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 그치만...!"

"얌전히 있지 못하겠나."

슬쩍 미간을 좁히자 에반젤린은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제 맘을 알아주지 않는 게 어지간히도 속상한 모양이었다.

그 표정에 순간 나도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어떻게든 참았다. 이런 어리광을 일일이 다 받아주었다간 지금보다 더 제멋대로인 녀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던 그때, 내 바로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마리아가 에반젤린을 불렀다.

"괜찮으면 제 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 그래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여기 와서 같이 영화를 보죠."

"영화? 영화가 뭐냐?"

호기심이 동했는지 마리아 쪽으로 통통 튀듯 향하는 에반젤린.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비서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

"아무래도 도련님 근처에 있고 싶은 모양입니다. 도착할 때까지는 제가 도련님 대신 돌보겠습니다."

"너무 어리광 받아주지 마라."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마리아의 목소리에서 보기 드물게 강한 의지가 느껴왔다.

왠지 마리아의 무표정이 게○버거 비법을 마침내 훔쳐낸 플○크톤 사장의 표정과 비슷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하하, 드디어 에반젤린을 손에 넣었다!

"...알아서 해라."

나는 아까 아라야한테 [테크블레이드 진(眞)]을 사용했던 반동으로 상당히 피곤했다.

복제품과 달리 이 육체는 상당히 튼튼해서 몸이 녹아내리거나 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지만 상당히 부담이 가는 기술임은 여전했다.

뒤를 돌아보니 이미 아이리와 시엘, 미유는 피곤함에 못 이겨 뻗은 상태였다. 아까 잠시 깼던 사일런스도 지금은 다시 잠든 상태였고, 레이나는...

...아니, 왜 쟤는 잘 생각을 안 하냐. 에반젤린 옆에서 정기라도 빨아먹은 것인지 전혀 피곤해 보이질 않았다. 무서운 녀석.

어쨌건 아카데미에 도착하는 대로 곧장 다시 싸움을 시작해야 했기에, 우리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휴식을 취했다.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아라야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아이리를 영웅으로 내세워 학생회장으로 만든다.

그런 계획 하에 움직이고는 있지만, 아라야가 정확히 어떤 헛짓거리들을 벌여놨는지 파악할 수 없는 이상, 일단은 조심하는 게 옳으리라.

'아카데미 방어시스템을 무력화시킨 다음에는 애들을 아카데미에 진입시키고... 이후에는 최대한 빠르게 아라야를 찾아내서 제압하는 게 핵심이겠지.'

에반젤린의 말대로라면 아라야의 본체는 도시 쪽에 숨어 있다.

놈을 찾아내서 제압하고 나면, 앞으로는 다른 빙의자의 존재 따위 걱정하지 않고 오롯이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

그렇게 내 목표를 재확인하고 나니, 어째서인가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해 보다가 이내 답을 떠올렸다.

'난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라야라는 인간은, 어쩌면 셰이드 웰즈가 죽어 버린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 '네크로맨서'일 것이다.

놈이 만약 에반젤린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혹은 자신이 가진 힘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 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쩌면 시엘처럼 그를 동료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

놈이 에반젤린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마법적인 능력을 얻지 못했을 터. '네크로맨싱'이라는 기술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헛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와 놈은 공존할 수 없다.

놈은 살아 있는 한, 날 계속 방해할 테고.

나는 놈을 죽이지 않고선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그냥 받아들이자.'

이제 와서 감성적이 될 필요가 없지.

그렇게 마음을 굳게 다잡았고, 얼마 가지 않아 기내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5분 후, 뉴 발할라 시티 B섹터 상공으로 진입합니다.]

그 신호에 따라 특별반 멤버들은 잠에서 깼다.

휴식은 끝이었다.

이제 곧....

"도련님."

그때, 마리아가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그녀가 말했다.

"안티레인이 오고 있습니다."

"...?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아직 중요한 걸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

그렇게 되묻자.

마리아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말했다.

"에반젤린의 우비는 무슨 색으로 하실 겁니까?"

"...."

[신비]의 마나가 사람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주는 건 확실해 보였다.

...마리아까지 이상해진 걸 보면.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8화

놀랍게도(?) 마리아의 뇌는 녹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안티레인이 오고 있으면 에반젤린의 우비는 의외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얘도 [신비]였지.'

겉보기에는 그냥 귀여운 외모의 꼬마지만, 일단은 마녀.

안티레인이 일상처럼 쏟아지는 도시 내에서 계속 약품에 노출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지금 도시에는 안티레인이 뿌려지고 있는 와중인데, 그걸 그대로 뒤집어썼다간 감기에 걸려 하루 이틀 코를 훌쩍거리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터.

나를 도와 아라야의 본체를 찾아내려면 비맞이 대책은 확실하게 해야 했다.

게다가 얼굴 팔려서 좋을 건 없으니 적당한 우비를 뒤집어쓴다면 그럴 걱정도 어느 정도 덜 수 있다.

난 또, 그 침착하고 철두철미한 마리아까지 레이나의 비정상적인 수비범위에 영향을 받아서 함께 뇌가 녹아 버렸나 했네.

뭐, 어쨌건.

에반젤린에게 입힐 우비의 색은 가장 대중적인 노란색으로 결정되었다. 좀 눈에 띄는 색이긴 하지만, 내가 함께 있으면 딱히 적에게서 숨을 필요도 없었고,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머나~ 귀여워라~"

비행기가 수직 이착륙 기능으로 전환하여 상공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동안, 마리아가 에반젤린에게 우비를 입혔다.

입히고 난 후에 레이나가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딱히 호들갑은 아닌 것이,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귀여운 편이었거든.

모자를 써서 얼굴만 살짝 내놓고 노란 장화로 단단히 무장한 모습이 마치 병아리 같다.

에반젤린 본인도 새 옷을 받아서 기쁜지 옷을 입는 동안 상당히 얌전해졌다. 원래 어린애들이 우비 같은 거 좋아하지, 암암.

"준비 끝났습니다."

"그래."

나 역시 한쪽 손에 검은 장우산을 건네받은 뒤, 입구 쪽에 섰다. 객실을 돌아보자, 그 사이 기내에서 전투준비를 마친 특별반 멤버들이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묘한 고양감.

나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어차피 작전 브리핑이라면 아까 전에 다 했다.

현재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아라야의 방어시스템 교란으로 내외부 출입이 막힌 상태. 방어 포탑이 작동하여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

내가 물리적인 시스템을 일차적으로 처리하면, 그 사이에 특별반 멤버들은 249층 스팅레이 사무실의 외부 비행형 차량 주차장을 통해 아카데미로 진입한다.

그 후, 나는 아라야를 찾아 족치고, 특별반은 자신들의 학우를 구해 낸다.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다.

그러니 내가 이들에게 할 말은.

"다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너희라면 할 수 있다.

그 말에 내 후원을 받는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예!"하고 대답했고, 나는 마리아와 에반젤린 두 사람을 이끌고 비행기의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상공 10미터쯤에서 멈춰 있는 비행기.

문이 열리자 밑에서 아래쪽에 웅성거리며 우산을 쓴 채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꽤 숫자가 많았는데, 손에 카메라나 마이크 따위를 든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행기에 붙은 스팅레이 마크를 보고 몰려든 기자들인 듯했다.

고개를 들자, 정면에는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건물이 보였다. 높이 20미터는 될 거대한 담벼락과, 그 위에 설치된 철조망과 활성화된 자동 포탑들.

담벼락 인근 10미터 지점에 붉은색으로 '접근금지'라고 쓰인 홀로그램이 떠 있었는데, 그 탓에 그 안으로는 아카데미 관계자와 기자들 모두 출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지."

"네, 도련님."

내가 먼저 비행기에서 훌쩍 뛰어내렸고, 마리아가 에반젤린을 안고 따라왔다.

회색빛 우중충한 하늘은 질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또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안티레인 특유의 쏘는 듯한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마리아에게 받은 검은 장우산을 펼쳤다. 기자들은 곧장 나를 알아보고는 흥분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스팅레이 이사장님! 아카데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갑자기 방어시스템이 작동한 이유를 아십니까?!"

"아론 스팅레이 씨! 현재 아카데미 지도부 측의 입장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시민들은 진실을 원합니다!"

보아하니 정보가 어느 정도 통제되고 있는 듯했다. 그럼 귀찮게 일일이 언론 반응까지 신경 써서 대사를 짜낼 필요는 없겠다는 거겠지.

"비켜라."

"헙...!"

"네, 넵...!"

그 한마디에 내 길을 가로막던 기자들의 무리가 단숨에 반으로 갈렸다.

일단 특종을 위해 달려들긴 했지만, 내 기세를 보고서 겁먹은 거겠지. 황태자의 심기를 거슬렸다가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건 저들도 잘 알 테고.

나는 걸음을 옮겨 지금은 봉쇄된 아카데미의 정문까지 향했다.

정문 입구 위에 붙여진 라틴어 표어를 바라보자, 자동 번역 어플리케이션에 의해 해석된 문장이 증강현실로 표시되었다.

'신성(神性)조차 정복하겠다라....'

세계를 집어삼켜 인류를 변두리 도시 안쪽으로 몰아넣은 [신비]들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볼 수 있는 표어다.

본래 영웅들을 길러 내기 위한 교육의 장이 기업들의 사육장으로 전락한 지금, 라틴어로 새겨진 저 문구가 다소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겠지.

정문 쪽에는 기자들과 아카데미 경비들이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 중 파워드 수트로 무장한 채 기자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 경비대장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꽤 많은 인파가 충돌을 벌이고 있었지만, 내가 접근하자 마치 홍해 바다처럼 저절로 길이 열렸다.

"스, 스팅레이 이사장님! 여기는 어떻게...!?"

"지금 누구 명령을 받고 일하고 있지?"

"사,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으로...."

"연결해라."

"예?"

"당장."

미리 마리아를 통해 연락을 돌려 봤자 책임을 회피하면서 뺑뺑이 돌릴 게 분명했기에, 이런 식으로 현장에서부터 강행돌파를 하기로 했다.

내 지시에 따라 경비대장은 자기의 상급자인 'SD(Security Director).'에게 연락을 넣었고, 다시 내 얼굴을 확인한 SD는 곧장 아카데미 수뇌부 인사들을 단체로 불러냈다.

지난번 회의에서도 만났던 수많은 인사들의 얼굴이 시야에 떠올랐다.

이거야 원,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스, 스팅레이 이사장님? 어, 어째서 직접 연락하시지 않고...!]

[호, 혹시 지금 현장에 나가 계신 겁니까?]

진즉에 뒷방으로 물러나야 했을 늙은이들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는 소리.

책임이 어쨌다느니, 언론이 어쨌다느니. 듣기 싫어서 전부 한 귀로 흘려버린 뒤 용건만 말했다.

"직접 방어포탑을 부수고 진입하겠다."

[에, 예에?!]

"용건은 그뿐이다."

말투를 보아하니 니들, 이런 문제가 터졌는데도 학생들 구할 생각 없는 것 같은데. 과연, 원작의 안드로이드 반란 당시에도 건물 외부에선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내부에서 영웅 노릇을 할 주인공은 없고, 그의 옆에서 날뛰었던 녀석들도 저 비행기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니들이 알아서 문제 해결 안 하면, 내가 무대에 주연배우들을 풀어 놓을 거야.'

그런 의사를 표시했더니 진즉에 묫자리를 파서 묻혔어야 할 구태놈들은 또 책임이 어쩌고, 돈이 어쩌고 떠들어댔다.

그놈의 돈, 돈, 돈.

근데 이걸 어쩌나.

곧 옷 벗어야 할 당신네들은 몰라도 난 돈이 썩어 넘치게 많거든.

"아무튼 그리 알도록."

[이, 이사장님! 이사장님!]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계획을 통보하고는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는 경비대장에게 명령했다.

"옆에서 다 듣고 있었겠지?"

"예?"

"난 내 학생들을 구할 생각이다."

"아... 네에...."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어버버하는 반응.

이거야 원.

이놈도 눈치가 영 없네.

"정리할 시간 3분 주마."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카데미 경비대장은 빠르게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리 피신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경비원들은 부리나케 움직여 아카데미 주변에 몰린 인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추 그 작업이 끝나 가는 듯 보이자.

"모듈 온라인. [구름거미]."

나는 무기를 장착했다.

검은색 장갑이 내 손에 덧씌워진다.

내 뒤에 대기하던 마리아가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제 와서 묻기엔 늦지 않았나."

"그렇겠군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도련님의 의사에는 변화가 없으신지."

본래 내 정확한 스펙은 스팅레이 그룹의 기밀이다.

지난번 타이탄을 쓰러뜨렸을 때야 괴물을 피해 사람들이 다 도망치고 난 후, 그러니까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힘을 사용했다.

이후로도 나는 내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때는 항상 보는 눈이 많지 않거나, 봐도 상관없는 사람들만 모인 곳을 골라 힘을 써 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경비대가 근처에서 인파를 몰아낸다고 해도, 아마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기자 놈들은 꾸역꾸역 카메라를 들이밀고 이곳을 주시하고 있겠지.

여기서 내 힘을 보여 준다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이다. 본사 보안부 쪽에서도 난리를 피울 테고.

물론 그 정도쯤은 내가 결과로 보여 주고, 조용히 뒤처리를 한다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스스로 나서서 귀찮은 일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도 학생들을 위해서, 라는 이유로.

원래의 성질 더러운 아론 스팅레이라면 죽어도 하지 않았을 일이겠지.

근데 뭐, 상관있나?

나는 강하다.

힘을 완전히 되찾았고.

이젠 누구도 날 건들지 못할 텐데.

그렇기에 나는 담담히 답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알겠습니다."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에반젤린의 손을 잡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나는 다시금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거창한 준비동작은 필요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길 뿐.

그러자 다음 순간.

콰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

아카데미 내부로 침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수십 대의 방어포탑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키며 파괴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건물 곳곳에 내장된 방어 장치들을, 나는 단숨에 부숴 버렸다.

거대한 삼각뿔의 세로변을 따라 포탑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고, 그 라인을 따라 [구름거미]의 실을 한 차례 휘두르는 것으로 순식간에 방어시설이 무력화되었다.

"지금이다."

포탑 하나하나 신경 써서 부순 게 아닌지라, 자동수리 시스템이 작동하면 하나둘 차근차근 복구될 거다.

진입하려면 지금이 적기.

내 명령에 따라, 특별반을 태운 채 상공에 대기하고 있던 비행기가 빠르게 목표 지점으로 이동했다.

무사히 249층 내 사무실 옆 주차장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후 줄곧 얌전히 기다리던 노란 병아리를 돌아보았다.

"자, 가자."

"후훗, 드디어 이 몸이 나설 차례군!"

"추적할 수 있겠나? 비가 오는데."

"처음엔 자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상관없다. 저 커다란 건물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놈의 마력이니."

에반젤린이 아카데미 빌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놈의 마력이 지하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걸 따라 이동하면 된다!"

"그런가. 그럼 가도록 하지."

나는 비어 있는 팔로 에반젤린을 품에 끌어안았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녀오십시오."

"뒤처리를 잘 부탁하마."

"부탁하마!"

에반젤린은 내 말을 따라 했다.

남은 귀찮은 일들은 마리아가 전부 처리해 줄 것이다. 우리 주연 배우들도 무대로 무사히 들여보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

"아라야를 잡는다."

이 지긋지긋한 연을 끝낼 때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09화

"빠르게 진입한다! 뛰어! 어서!"

비행기가 주차장 위에 멈춰 서자마자, 아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서며 팀원들을 이끌었다.

앞서 V7에서의 경험이 그녀를 리더로서 빠르게 성장시킨 탓일까, 그녀의 지휘는 한층 더 능숙해져 있었다.

249층 스팅레이 사무실.

특별반 멤버들에게도 익숙한 장소였기에 활동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누가 블랙기업 아니랄까. 주말임에도 사무실에서 업무를 하던 이들이 많았는지, 꽤 많은 수의 스팅레이 직원들이 고립된 채 남아 있었다.

대뜸 주차장 쪽에서 학생들이 나타나니, 그들과 안면이 있는 직원들이 놀라며 그들을 반겼다.

"너, 너희들...!?"

"걱정하지 마세요. 구하러 왔어요."

"여긴 대체 무슨 수로 온 거니? 분명 포탑 때문에 하늘길도 막혀 있었을 텐데?"

듣자하니 이미 동료 몇 명이 주차장에서 비행형 차량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아카데미 방어 시스템에 격추당해 떨어졌다고 한다.

그 탓에 나갈 시도조차 못 했다고.

아이리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아론 이사장님이 외부 포탑들을 전부 망가뜨려 주셨어요."

"아아, 그럼 아까 전에 났던 그 큰 소리가...?"

"네, 포탑이 폭발하면서 났던 거예요."

"그, 그렇구나. 이사장님이 와 주셨다니 이제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그런데 이사장님은 어디에 계시니?"

"저희와 함께 오시진 않았어요.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이번 사태를 일으킨 범인을 잡으러 가셨어요."

아이리는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했고, 이제 포탑이 전부 무력화됐으니 하늘길을 통해서 빠져나가면 될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다만 자동수리 시스템 때문에 포탑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 지금 빨리 나가야 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알겠다. 지금 바로 갈게."

"차량이 없으신 분은 동료분과 함께 타시거나, 저희가 타고 온 비행기에 타고 가시면 돼요."

아이리는 직원들에게 매끄럽게 상황을 전파했고, 그들의 탈출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내부에서 그간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 사이 다른 팀원들은 작전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시엘은 미유를 도와 아카데미 내부 네트워크에 뛰어들 수 있도록 딥다이브 포트를 설치했고, 직원들이 주차장으로 빠져나갈 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게 스팅레이 직원 전원이 무사히 빠져나가며, 작전의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끼워졌다. 그리고 아이리는 다음 작전을 진행하기 전, 팀원들에게 직원들로부터 얻어 낸 정보를 공유했다.

"아, 안드로이드 폭주요?"

"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V7 콜로니에서 싸웠던 '그것'들인 것 같아."

"[그 검은 종양 달린 안드로이드들 말이지. 골치 아프게 됐군.]"

"아, 아뇨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미유는 콜로니 쪽에서 싸웠던 것과 같은 방식의 적이라면, 이번에는 훨씬 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정확한 이유를 묻자, 시엘이 대신 대답했다.

"지금 저희에겐 그쪽 네트워크를 잠식하던 프로그램을 쓰러뜨리면서 뽑아낸 데이터들이 있어요~. 마법과 네트워크 기술을 결합한 독특한 형태의 바이러스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이라면 백신을 이용해서 훨씬 더 쉽게 무찌를 수 있어요."

그러면서 전투원 세 사람이 본 그 '검은 종양' 같은 것이 컴퓨터 바이러스와 마법이 합쳐져 나타난 형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법과 기술을 섞었다고? 마법인 줄은 알았지만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일 줄은 몰랐네.]"

"사, 사실 신비모듈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원리는 비슷한 거니까요오...."

"어쨌거나 시엘이 네트워크상에서 '그 프로그램'을 쓰러뜨리면, 여기 현실에서 안드로이드들한테 붙은 것들도 죽을 거란 소리지?"

"네, 맞아요~"

하지만 적도 생각이라는 게 있다면 콜로니 쪽에 심어 놨던 프로그램보다 더 강력한 걸 심어 놓았을 터.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시엘은 첨언했다.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골자를 이루는 코드는 파악했지만, 직접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저희가 준비한 백신이 잘 먹힐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만약 안 먹힌다면 그만큼 더 오래 걸릴 거고요~."

"[그렇다면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겠군. 그동안에도 로봇들은 미쳐 날뛸 거고, 더 큰 피해가 발생할 거다.]"

"아이리, 어떡할 건가요?"

레이나가 자신들의 리더를 돌아보며 물었고, 아이리는 고민에 빠졌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위자드팀이 프로그램을 무력화하기만을 기다릴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위험에 빠진 학우들을 구하러 다닐지.

그녀가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해는 어떻게든 최소화해야겠지."

아이리는 곧장 팀원들에게 지시했다.

"스팅레이 직원분들처럼 학원 곳곳으로 도망쳐서 고립된 분들이 많을 거야. 우리는 그 사람들을 구해 내야 해."

"[아까처럼 움직이자는 건가?]"

"맞아. 콜로니 쪽에서 했던 거랑 같은 방식으로 가자. 시엘은 해킹을 준비하고, 미유를 시엘을 보조해 줘. 선배랑 레이나는 나와 같이 교무동이랑 과기동을 탐색하고."

교무동과 과기동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술교전부 소속의 적응자 학생들이라면 다들 무력이 있는 편이니 제 몸 하나쯤은 건사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적응자가 아닌 학생과 교직원들이 모여 있는 학생교무동과 과학기술동이다. 아마 인명 피해가 생긴다면 그쪽에서 날 가능성이 훨씬 컸다.

아이리가 그렇게 지시하자, 레이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이 큰 건물을 저희 세 사람이서만 전부 훑겠다는 건가요?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요...."

"아니. 모든 사람을 구해 낼 순 없어."

아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사태이니만큼 사람들끼리 모여서 농성을 벌이는 곳이 있을 거야. 강의실이나 훈련실이나 식당 같은 곳. 그리고 그런 곳 입구에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안드로이드들이 모여 있겠지."

안드로이드들의 신호가 많이 몰려 있는 위치를 파악하여 집중적으로 공략하자는 말. 지금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는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이리의 지시에 팀원 모두가 동의했고, 그에 따라 그녀는 구체적인 이동 경로를 그려 가며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오늘은 주말이지. 당장 사람들이 모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되는 곳은 여기 기숙사랑, 여기 다목적 레크레이션 룸. 이곳들을 중심으로 가장 효율적인 이동 경로를 생각해 보면...."

"여기에 있는 안드로이드 보관소를 조심해야 할 거야. 보아하니 그놈들은 멀쩡한 부품만 있으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으니."

"아카데미에서 가장 수가 많은 건 메이드형 안드로이드야. 아마 콜로니에서 마주쳤던 것만큼 튼튼하지 않을 테지."

"시엘은 절대 여기서 나오면 안 돼. 같은 모델의 메이드형 안드로이드들과 헷갈려서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정확하게 구상한 작전을 설명해 나가는 아이리.

사람이 이렇게나 순식간에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역시 이사장이 처음부터 그녀를 리더로 지목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며, 그런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팀원들은 속으로 몰래 감탄했다.

그렇게 작전이 결정되었고,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가자."

사람들을 구하러.

* * *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소설, 영화, 만화, 드라마.

장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액션도 좋고, 판타지도 좋고, SF도 좋다. 달콤쌉싸름한 멜로 장르도 좋고, 청춘물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었다.

음, 재난영화나 아포칼립스, 전쟁물은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 악랄할 정도로 지루하고, 평범한 세상보다는 말이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어서 보이는 모든 것이 회색으로 빛바래 보일 지경의 삶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썩은 좀비의 뇌를 뜯어먹는 삶을 살아가야 할지라도, 아니면 세상의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마왕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할지라도, 그 끝이 해피엔딩이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뭐, 사실 그냥 하는 말일 뿐이다.

사실 누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겠는가. 그럴 바에는 그냥 이대로 살고 말지. 다만 이 가슴속에 담긴 울분을 조금 과장하여 표현했을 뿐이다.

요컨대 특별해지고 싶었다.

다양한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특별한 능력으로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끝끝내 승리를 쟁취하고 행복해지는, 그런 찬란한 빛으로 채워진 삶을 살고 싶었다.

생각해 봐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평범한 직장에 다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늙어가다가, 평범하게 병에 걸려서, 평범하게 앓다가, 평범하게 죽는 삶이라니.

너무나도 구역질이 나오지 않는가?

한 번뿐인 인생인데, 그렇게 남들과 똑같이만 살다 간다면 너무나도 억울하고 아깝지 않은가?

그랬기에.

처음에는 재능을 찾아내려고 했다.

예술적 재능이든, 학문적 재능이든, 육체적인 재능이든.

무언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해 줄 만한 천재적인 능력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여러 활동을 해 보았다.

결과는 실패였다.

자신에게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물론 몇몇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세상을 뒤집을 만한 압도적인 재능과 그를 통해 남들은 얻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색깔의 삶이었다.

그저 그런 수준의 능력으론, 그저 남들과 비슷하게 그런 수준의 삶을 살 뿐일 테니까.

그다음에는 이상한 짓들을 했다.

다른 세계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든가, 도시 괴담에 나오는 금기사항들을 어겨 본다든가, 달려오는 트럭에 뛰어들어 본다든가.

하지만 그마저도 전부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마음속에는 지독한 실망감과 허무함만이 남았다.

억울했다.

책 한 권만 펼쳐도 저리도 다채로운 삶을 지닌 자들이 있는데, 어째서 자신은 이곳에서 이런 '평범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왜 신은 나를 불러 주지 않는가.

왜 내게 재능을 내려 주지 않는가.

왜 재밌는 사건을 만들어 주지 않는가.

왜 다른 세계로-

'어라?'

그 기도를 신이 들어 준 것일까.

결국 성공했다.

우연히 참가한 퀴즈이벤트에 당첨되면서 그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특별함'을 손에 넣었다. 물론 자신이 바랐던 대로 주인공 캐릭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뭐 어떤가.

다른 수많은 작품에서도, 엑스트라에 빙의한 주제에 원작 주인공 이상으로 활개 치고 다니는 주인공들이 많으니까.

그는 들뜬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가진 소설적 지식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상을 요리할 수 있을까.

수많은 고민 끝에 나온 계획을 그는 실행에 옮겼고, 그 길이 틀림없이 자신을 꿈꾸던 삶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었다.

자신 이외에도 이 세계에 빙의한 자들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그가 품었던 희망의 빛은 급속도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그가 세웠던 계획은 꼬이고, 다른 빙의자에게 방해를 받으면서 이제는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신이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해야 하는데.

히로인들을 쟁취하고 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어째서? 어째서 다 빼앗긴 걸까.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될 텐데.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을....

"여기에 있었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나지막한 미성이 그에게는 한없이 가증스럽고 역겹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자신의 완벽했던 계획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었으니까.

치트 캐릭터.

어쩌다 운이 좋아, 치트와 다름없는 캐릭터의 몸에 빙의하고, 그 덕에 기연과 이벤트를 제멋대로 독식하고 있는 천하의 욕심쟁이.

아론 스팅레이.

한때는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었으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만큼 본래의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나마 아직은 이런 위화감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조만간 언제 그랬냐는 듯 '아라야'의 생각은 곧 '자신'의 생각이 되며 구분 짓는 게 의미 없어지겠지.

아라야는 고개를 들었다.

그에 따라 고귀한 생김새의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저 몸이 나의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운을 뗀다.

"...오셨군요."

마침내.

그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아라야의 마음속에 남은 마지막 번뇌 혹은 자아라고 불러야 할 그것이.

작게.

하지만 확실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0화

"이쪽이니라."

에반젤린이 처음으로 나를 인도한 곳은 아카데미의 지하, 정확히는 하수도였다.

우리 꼬마 마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나의 끈'이라는 것이 하수시설을 통해 아카데미와 아라야의 본체가 있는 곳을 연결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꼭 여기로 들어가야만 하나?"

"이 몸도 들어가기 싫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찾기 힘드니라."

"...."

그러면서 아카데미 인근에 있는 맨홀 뚜껑을 가리키는 에반젤린.

아론의 결벽증적인 자아는 사라졌을 테지만, 그냥 들어가기 싫었다.

지금 안티레인이 오고 있어서 다소 묽어졌다고 해도, 저기를 흐르는 게 1급 청정수는 아닐 것 아닌가? 아니, 오히려 안티레인 특유의 약품 냄새와 섞이면서 더 끔찍한 냄새가 날 가능성도 있었다.

들어가기 싫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냥 아라야 찾지 말까? 그래, 원래 좋은 녀석일지도 모르고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일이니까....

"시간이 없느니라. 이쪽에서 끈을 더듬어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잠시만 기다려 봐라."

잠시 현실도피를 하려고 했지만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나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놓았다.

제기랄.

똥물이 흐르는 곳으로 들어가기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 하다못해 이 비싼 양복을 더럽히지 않을 다른 방법, 무언가 획기적인 발상이....

"...잠깐."

"왜 그러느냐?"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어졌다."

"서, 설마 이 몸만 저 안으로 던져 넣겠다는 것인가? 아론, 어찌 그리 악랄한 발상을...!"

뭐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사탄도 울고 갈 방식을 사용할 인간으로 보이나.

만약 정말로 에반젤린만 집어넣었다간 마리아랑 레이나가 회까닥 돌아서 내게 등짝 스매시를 선물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게 아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냐?"

"그래."

자자, 냉정해지자.

나도 지금 왠지 클라이맥스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직접 놈을 찾아내서 처리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하수구의 맨홀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깨달았다.

"에반젤린, 나는 돈이 많다."

"...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어느 정도로도 중요하냐면, 별표 세 개를 치고 형광펜으로 무진장 강조 표시를 해 놔야 할 만큼 중요한 사실이었다.

나의 느닷없는 부자 선언에 에반젤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인간이 지금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아직 애가 어려서 돈의 가치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잘 듣도록, 에반젤린."

돈은 아주 중요하단다.

돈만 있으면 이 도시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사람의 목숨을 살 수도 있고, 우리 대신 저 사악한 지옥의 냄새가 흘러나오는 맨홀 아래로 대신 들어가 줄 사람도 구할 수 있지.

아아, 이렇게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사실을 깨우치게 만들어 주다니.

어쩌면 자신을 돌이켜 보는 데에는 책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맨홀 뚜껑을 바라보는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여튼.

"대신 들어갈 사람을 구하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자 에반젤린은 조금 흥이 식은 듯한 표정과 함께....

"그대는 정말 천재인 것 같다."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해 주었다.

역시 들어가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 * *

결과적으로 급하게 인력을 구하거나 장비를 구매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아시타교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조직된 팀이 있었기에, 그들에게 대신 일을 맡기면 되었다.

나는 에반젤린의 눈만큼이나 정확한 고성능의 마나 탐지기(비쌈)만 새로 구하여 추적 팀에게 들려주었다.

거기다 보너스도 두둑하게 챙겨 주니 추적 팀은 의욕에 불타올랐고, 얼마 가지 않아 좋은 소식을 받아볼 수 있었다.

[차, 찾은 것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표시한 위치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카데미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는데, 지상에는 그냥 평범한 상업용 빌딩이 서 있었다. 누가 사이버펑크 세계관 아니랄까 성인용 가게가 떡하니 1층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에반젤린이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렸다.

건물 옆쪽에 나 있는 정체불명의 문을 열어젖혔고, 위에 있는 빌딩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나는 에반젤린과 함께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고, 미리 하수도를 통해 이 장소를 발견한 대원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 커다란 여닫이문이 있었다.

"에반젤린, 여기가 맞나?"

"그래. 틀림없다."

정답인 듯했기에 나는 대원들의 노고를 충분히 치하한 후에 돌려보냈다.

그 후 문을 열어젖히자, 원래의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커다란 지하광장이 나왔다.

그리고 그 중앙에 아라야가 있었다.

"여기에 있었군."

나는 그에게 다가가며 주변에 함정 같은 게 없는지 살폈다. 에반젤린 역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것이 마력의 흐름을 체크하는 듯했다.

하지만 함정 같은 건 없는 듯했고, 그 대신 아라야의 중심으로 놓인 수많은 시체들만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저 복장은... 아시타교 신자들이군.'

신자들의 시체는 아라야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놓여 있는 방식이 하나같이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냥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요가 자세 같은 것을 취하고 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시체들의 밑에는 불교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문양이 신자들의 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라야는 그 중심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조심하거라, 아론. '우물'이 열렸다. 역시 우물을 열지 않고선 이 몸에게서 빼앗은 힘만으론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우물?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도 전.

"...오셨군요."

아라야가 눈을 뜨며 나를 마주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의 동공이 움직이는 방식을 통해, 그 눈이 기계안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 안구스캐너를 통해 보이는 정보들은 그의 신체 파츠 하나하나가 전부 기계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팔과 다리, 내장과 근육과 뼈.

심지어는 뇌까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도 안드로이드였나."

"바로 알아채시는군요. 제 신자들은 죽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알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네 신도라...."

"저는 아시타 교의 간부였습니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인물.

녀석도 엑스트라에 빙의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반기계주의, 반기술주의를 교의로 내세우는 아시타 교의 간부 자리에 저리 버젓이 안드로이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용케도 정체를 들키지 않았군."

"소승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아라야가 말하기를.

자신의 몸의 원래 주인은 굉장히 덕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자아를 얻은 오류개체였던 그는, 아시타교에 우연히 귀의하여 공부하면서 영혼의 격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계기로 더욱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열정적으로 수양했으며, 그 덕분에 단체 내에서의 지위가 계속 높아졌다.

그렇게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신자를 안드로이드라고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그걸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설마 그 장면에 나온 녀석이었나.'

원작에서도 아시타교는 사이비로 낙인이 찍힌 뒤 몰락의 길을 걷는다. 교주는 자신들을 이런 꼴로 만든 주인공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마지막 발악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죽고 다쳤다. 주인공은 신전 곳곳에 흩어진 시체를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이 거지 같고 의지할 것 없는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것을 잘못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현실이 그에게는 아프게 다가왔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시선이 사로잡는 시체가 있었다. 기도실에서 신자들에게 절을 받으며 가부좌를 튼 채 기능이 완전 정지한 안드로이드 신자의 모습.

지나가듯 스쳤던 장면의 안드로이드.

아마 그것이 지금 아라야가 빙의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아라야와 달리, 원작 속의 아라야는 정말로 덕이 높은 스님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가장 종교답지 않은 종교에서, 가장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가장 깨달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관심 없다."

나름대로 재미있는 이야기긴 했다.

원작에서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 불과했지만, 어쩌면 작가는 나름대로 아라야라는 캐릭터를 공들여서 설계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아무리 덕이 높은 스님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아라야가 되기 전의 이야기.

지금의 내가 살인귀로서의 아론 스팅레이를 벗어났듯이, 지금의 아라야는 덕이 높은 안드로이드 스님 따위가 아니었다.

현재의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악의도 품지 않았던 에반젤린을 죽인 살인자였으며, 도시 곳곳에 위험한 정크칩을 퍼뜨린 범죄자였고, 무엇보다 내 앞길을 가로막으려 드는 적에 불과했으니까.

설령 그가 1부 4막의 나처럼 육체의 영향을 받아 '빙의자'보다는 '아라야'로서의 에고가 강해졌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짓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더 악질이로군.'

아라야가 정말로 선한 캐릭터였다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들은 오롯이 그 육체를 빼앗은 자의 의지로만 이뤄진 일들이라는 의미니까.

"너와 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다."

"소승도 그러합니다."

아라야는 가부좌를 튼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기운이 그의 등 뒤로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그의 주변에 있던 신자들의 시체가 늪에 빠진 것처럼 바닥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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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경고. 마나 수치 급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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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설치된 모듈이 경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구름거미]와 [테크블레이드]를 활성화하여 꺼내 들었을 뿐, 곧장 반격하지 않고 에반젤린을 향해 물었다.

"에반젤린, 내가 공격해도 되나?"

"...이 몸이 말하기도 전에 깨닫다니, 역시 그대는 대단하구나. 그래, 아직 술식을 다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아마 함정일 것이다."

아까 '우물' 어쩌고 하는 게 신경 쓰여 섣불리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게 정답이었던 모양.

"놈은 조금 전의 시체들을 매개로 하여 '강'과 이어지는 커다란 '우물'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인간의 혼을 마법지팡이처럼 이용해 억지로 통로를 만든 셈이니라."

"쉽게."

"...바로 죽여선 안 되느니라."

요컨대 아라야는 불안정한 상태다.

지금 그를 죽이면 간신히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난다고 한다.

"자세히."

"마나의 재앙이 이곳에서 재현되겠지."

마나의 재앙.

그것은 200년도 더 전, 인류를 지구 변방의 도시로 몰아낸 [신비]의 출현을 의미했다.

역시 에반젤린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이런 마법적인 부분에서 함정을 펴놓으면 나로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걸릴 수밖에 없으니까.

"방법은?"

"이 몸이 술식을 해제하겠노라. 그때까지 그대가 시간을 벌어 주면 좋겠다."

"알겠다."

그거야 뭐 쉬운 일이지.

요컨대.

바로 죽이지 말고 티배깅 하란 소리잖아?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1화

끼리릭. 끼리리릭.

플라스틱 관절이 부딪치며 나는 음산한 소리.

고막 속으로 파고드는 그 소리는 마치 공포영화 속 홀로 움직이는 흔들의자의 소리 같기도 했다.

[저기 있다. 다들 보여요?]

[그래, 보인다.]

쿵! 쿵! 쿵!

검은 종양을 달고 있는 안드로이드들이 강의실의 문을 마구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리의 수는 대략 서른. 메이드형 안드로이드와 청소부 안드로이드가 뒤섞여 있었다. 안드로이드뿐만이 아니라, 드럼통 형태의 보안용 순찰로봇도 같이 종양을 단 채 굳게 잠긴 강의실에 몸통박치기를 해 댔다.

[제기랄, 시엘이랑 얼굴 똑같잖아.]

[어딜 봐서 닮았어요? 전혀 다른데요. 화장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고, 표정 짓는 것도 전혀 다른데.]

[아니, 똑같이 생긴 건 팩트잖냐. 같은 공장에서 찍어 냈을 거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냥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신경 쓰여서 어떻게 싸워요? 똑같이 생겼어도, '에이, 전혀 안 닮았네.'하고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안 찝찝하죠.]

[둘 다 집중해.]

사일런스와 레이나의 잡담을 아이리가 끊었다.

복도 끝 코너에 숨어 안드로이드들의 움직임을 몰래 살피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방패 손잡이를 불끈 쥐었다. 그리고 이내 타이밍을 재기 시작한다.

심호흡 후, 하나, 둘, 셋.

[지금이야!]

아이리는 중앙으로 뛰쳐나가며 [천근추]를 발동시켰다. 한 놈을 대상으로 바로 앞에까지 끌어당긴다.

[천근추]의 인력에 붙잡힌 안드로이드 한 기가 20m도 더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끌려와 그녀의 발 앞에 넘어진다.

좋은 위치에 머리가 놓이고.

쿠우웅!

그 머리를 발로 내려찍는다.

그녀가 신은 군화가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머리를 박살 냈다. 역시 보안용이 아닌지라 콜로니에서 마주쳤던 놈들보다는 훨씬 더 물렁물렁했다

"가자!"

육성으로 목소리를 낸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안드로이드 무리를 향해 나아갔다. 왼쪽 손에는 방패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샷건을 든 채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사격에는 영 자신이 없는 그녀였지만, 다수가 뭉쳐 있는 표적을 대상으로 쏘는 산탄마저 빗나가게 할 정도로 절망적인 실력은 아니었다.

대충 견착만 한 채로 마구잡이로 쏴도, 넓게 흩뿌려진 탄환은 안드로이드 두세 기의 몸체 정도는 가볍게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그사이 반대편 복도에서도 대기하고 있던 사일런스와 레이나도 사격을 시작했다. 레이나는 미니건의 버튼을 짧게 연타하며 총알을 끊어 쏘았고, 사일런스는 권총으로 정확히 하나하나를 명중시켰다.

세 사람에게 포위당한 채 일제사격을 받은 안드로이드 무리는 채 10여 초도 되지 않아 셀 수 없이 많은 파편 조각으로 변모했다.

끼리릭. 끼리릭.

안드로이드들에게서 검은 종양들이 떨어져 나온다. 망가져 버린 숙주 대신 멀쩡한 파츠들을 모아 새로운 몸을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도망가지 못하게 확실하게 처리하죠."

이미 세 사람은 놈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겪어 보았다. 그들은 바닥을 꿀렁꿀렁 기어 다니는 살덩어리들을 향해 가차 없이 총을 쏘았다.

끼이이이이익!

총에 맞은 종양들은 발성기관이 없을 텐데도 기묘한 소리를 내며 죽어 갔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전투의 마무리였고, 아이리는 남은 탄약과 팀원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몸의 방향을 틀었다.

안드로이드들이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던 강의실이었다. 어찌나 들이박았는지 굳게 잠겨 있던 철문이 안쪽으로 크게 휘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나중에 빠져나올 수나 있을까.

'안쪽에서도 충분히 총성은 들렸을 테고.'

아마 자신들을 노리던 폭주 로봇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눈치챘겠지.

아이리는 망설임 없이 강의실의 문을 쿵쿵 두드리며 소리쳤다.

"안에 사람 있나요! 구하러 왔어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쪽에서 다급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문을 열려는 것인지 안쪽에 가로막아뒀던 임시 바리케이드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고리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아니나 다를까 문이 휘어지면서 열리질 않았다.

"비키세요! 문 차서 열게요!"

아이리는 문 바로 너머의 인기척이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온 힘을 실어 문을 걷어찼다.

콰앙!

소리와 함께 이미 반쯤 너덜거리던 문이 강의실 안쪽으로 날아갔다.

옆에서 사일런스가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어 대는 것에 살짝 눈치를 주고는 레이나를 앞세웠다.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은 서투른 그녀였기에.

그 의도를 읽은 레이나는 강의실 안쪽으로 들어서며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무사하신가요? 전술교전부 소속 1학년 레이나 알톤입니다! 구하러 왔습니다!"

강의실 안쪽으로 들어서자 5명이나 되는 젊은 남녀가 모여 있었다. 하얀색 가운을 걸친 모습을 보아 아마도 과학 기술부 학생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전술교전부 소속 적응자들임을 알고 표정이 밝아졌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문이 부서졌을 거예요."

"여기는 위험해요. 일단 저희가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안전한 곳이요?"

"249층 후원기업 사무실을 임시 쉘터로 쓰고 있어요.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주차장에서 비행차량을 타고 빠져나갈...."

레이나가 말을 하던 도중.

아이리는 과기부 여학생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나머지 학생들은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었으나, 그 여학생과는 안면이 있었다.

"너는...."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레온 알베르트의 스터디그룹 멤버 중 한 명이었음은 기억하고 있다. 스팅레이 장학생이기도 해서, 식당에서 몇 번 멀리서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

아이리는 여학생을 응시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학생도 아이리를 괴롭혔던 데에 대한 죄책감은 있는 것인지, 그녀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느낀 레이나가 말을 멈추었다. 다른 학생들도 의아해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

"...."

침묵이 길게 계속되었고.

아이리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조용히 눈꺼풀에 의해 가려졌고, 이내 그녀가 "후."하고 짧게 한숨을 내뱉는 순간.

"자,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당황한 듯 손을 모으며 빌기 시작하는 여학생.

이런 상황에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리라. 여학생이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이유를 얼추 짐작하는 것은 레이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당사자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아이리는 그런 여학생을 향해 짤막한 대사만을 던질 뿐이었다.

"잘 따라오기나 해."

"어?"

"중간에 잡히면 안 구해 준다."

그렇게 말하고선 쿨하게 돌아서선 강의실을 나서는 아이리. 질끈 묶은 그녀의 은발 머리칼 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이나가 슬쩍 사일런스를 불렀다.

"선배님."

"[왜?]"

"방금 아이리, 누구 좀 비슷하지 않았어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군.]"

구체적인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같은 사람을 떠올렸음을 알 수 있었다.

뒤돌아서는 아이리의 그 등은.

어째서인가 아론의 등을 닮아 있었다.

* * *

이후로도 구조작업은 계속되었다.

세 사람은 학생교무동과 과기동을 중점적으로 돌면서 학생들을 위협하는 안드로이드들을 처치하고, 그들을 구하여 안전을 확보한 곳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서 아이리는 과기부 여학생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했지만, 전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세 사람이 구한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무소속인 학생들이 제일 많았으나, 다른 기업 장학생들의 수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전술교전부 소속 적응자 학생들도 꽤 있었다.

아이리는 전술교전부 소속 적응자 학생의 수가 어느 정도 모였을 때쯤, 새로운 구조팀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자신들 세 사람만 이 넓은 건물들을 전부 돌아다니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거니와, 적응자 학생들 스스로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간에 구해 낸 전술교전부 학생 6명을 구조대에 편성하여 B팀과 C팀을 만들었고, 각자 구역을 나뉘어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학우들을 구해 내기로 했다.

참으로 우스웠던 부분은, 아이리 일행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도 다른 학우들을 구하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저 아는 지인들이나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모여 공격해 오는 안드로이드들에게서 무사히 도망칠 생각만 했을 뿐, 다른 그룹과 합류하여 힙을 합칠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이게 우리 아카데미지.'

철저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기업들의 모판에서 자라나며 길들어진 사고방식이었다.

아무리 아카데미 내부에 안드로이드들과 로봇이 많다고 해도, 대부분은 비전투용 개체들이었다.

학생들이 침착하게 모여서 일치단결해서 싸웠다면, 이런 상황까지 안 오지 않았을까.

'전술교전부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저마다 전투를 치를 뿐, 다른 학우들이나 아카데미 전체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수 없지.'

원래 과기동과 교무동만 돌려고 했었지만, 확실하게 이 상황을 끝내려면 전투인력이 더 필요했다. 시엘과 미유가 네트워크 세상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듯하니, 자신들이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획을 변경하여 아이리는 전술교전동도 공략범위에 포함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곳으로 가서 확인해 본 바 아이리가 예측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뿔뿔이 흩어진 소규모 그룹들.

각자의 안전만 확보한 채 다른 이들 따위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상위권 실력자들.

비록 전술교전동 쪽에 더 강한 보안용 안드로이드들이 훨씬 몰렸던 탓에 전투 난이도가 올라갔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 이번 사태의 피해가 커진 것은 뿌리부터 썩어 있는 학생들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 사실에 못내 씁쓸함을 느낀 특별반 일행이었으나,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있을 틈은 없었다. 그들은 계속 이동하여 다른 학생들을 구해 냈고 그룹을 더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리를 따돌리던 같은 반 학생들도 만났고, 스팅레이와는 앙숙인 밀레테크 소속 적응자들, 특히 한때 아이리를 죽이려고 들었던 레온이나 도노반 같은 개자식들과도 마주쳤다.

그러나 아이리는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지 않고 그들을 학생 대열에 합류시켰다. 상대방들 역시 가장 큰 학생 그룹에 합류하는 게 좋으리라 판단했는지 순순히 아이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며 학생과 교직원들을 구한 결과, 상당한 수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그래요, 아이리. 이제 저도 탄약이 다 떨어졌어요. 무리하지 말고 쉘터 쪽으로 돌아가죠."

물론 중간에 구하지 못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몇몇 교실에는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훼손된 그들의 시체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최선을 다한 것이리라. 아마 피해는 더 커지지 않을 테고, 남은 것은 자동수리 시스템에 의해 복구된 포탑을 시엘이 무력화시키는 대로 이 지옥에서 다 함께 빠져나가는 것뿐.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팀들에게도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임시 쉘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는 스팅레이 사무실이 쉘터 역할을 했었으나, 인원이 꽤 많아져서 홀로그램 인공공원으로 쉘터를 옮겼다.

아이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상황전달을 마치는 대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실내 공원 쪽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이게 뭐야."

그곳에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2화

"제기랄, 너희들이 앞에서 밍기적대는 바람에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쳤잖아! 포탑이 복구되어 버렸다고! 빌어먹을 스팅레이 가오리 새끼들!"

"포탑이 되살아나기 전까지 긴급하게 치료가 필요하거나 싸울 수 없는 사람부터 보내기로 합의했었다! 왜 이제 와서 불평하는 거지? 밀레테크는 애새끼들만 모아놨나?"

친 스팅레이 기업 소속과 친 밀레테크 기업 소속 간의 싸움.

"기업 소속만 먼저 빠져나가려는 속셈이었던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 타이탄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어, 빌어먹을 기업 새끼들아!"

"꼬우면 실력을 키워서 계약을 했었어야지, 안 그래? 여기서 한번 붙어서 이긴 놈이 먼저 나가는 걸로 해 볼까?"

기업 장학생과 무소속 학생 간의 싸움.

"당신네 적응자들은 모듈도 있고, 애초에 치유력 자체가 달라요! 그 정도 상처쯤이야 얼마든지 나을 수도 있고요! 일반인부터 먼저 치료해야 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싸울 수 있는 사람한테 자원을 몰아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언제 다시 탈출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와중에, 비전투인원한테 낭비할 자원이 있다고요?!"

적응자와 일반인 간의 싸움.

아카데미 150층 사이버 공원에 모인 수백 명의 학생과 교직원들. 그들은 제각기 작은 그룹으로 쪼개어져 립하고 있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너무나도 파편화된 그룹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며 소리치는 탓에 사이버 공원 내부는 시장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아마도 외부 방어 포탑들이 자동으로 수복되면서 탈출이 다시금 막혀 버린 탓에 불안함이 증폭되고,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몇몇 교직원들이 앞장서서 그 혼란을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볍게 무시당하고 말았다.

애초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교직원들부터가 저들끼리 어떻게 해야 한다면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제대로 규율이 잡힐 리가 없었다.

"...."

이 상황은 좋지 않다.

아이리는 점점 분위기가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논쟁의 수위는 점점 올라갔다. 욕설이 섞이는 횟수도 갈수록 빈번해졌다.

농담이 아니라 사이버공원 내부가 점점 불 위에 올라간 압력솥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서로에 대한 적의감이 팽창하고 있었고, 조금만 계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누가 책임질 거냐고!

-너희 때문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마!

점점 통제불능이 되어 간다.

사일런스와 레이나가 아이리의 눈치를 살폈다. 이걸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아이리 역시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획기적인 방법 따위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당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으므로.

'이 사람들을 전부 한 자리에 모은 것이 잘못일지도 몰라.'

원래부터 아카데미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이긴 했다.

크게는 장학생이냐 아니냐부터, 기업 장학생들 간에는 친 스팅레이냐 친 밀레테크냐 중립파냐 하는 이유로 갈렸다.

또 같은 친 스팅레이 기업들 내에서도 파벌이 나뉘었고, 어떤 줄을 잡았냐에 따라 또 서로 언성을 높여댔다.

그런 이들을 소속이나 파벌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 모아놨으니 싸움이 일어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서, 설마 나 때문이야, 이거...?'

그저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여럿이서 힘을 합쳐서 이 위기를 빠져나가야겠다는 계획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잘못되었던 걸까?

차라리 아카데미 건물 내부에 각각 뿔뿔이 흩어진 채 농성을 이어 나가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하는 걸까?

그냥 버티기만 했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일까?

잠시 그런 후회가 밀려왔으나.

'...아니.'

아이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이만큼의 사람을 구해 내는 와중에도, 그녀와 일행들은 수많은 희생자를 목격했다.

안드로이드들에게 사정없이 짓밟힌 채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꼴로 죽어 간 학생들의 시체들도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예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지금도 그때의 충격에 빠져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상처를 치료받지 못해 창백한 얼굴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런 자들을 전부 내버려두었어야 했단 말인가? 그랬다면 전부 죽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든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변했지?'

언제부터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이리도 신경 쓰게 되었던가.

폴른에서 좀도둑질로 연명해 나가던 그 시절에는, 어제까지 하하호호 웃으며 함께 일하던 동료가 어떻게 되었다고 한들, '나만 아니면 돼'라며 시큰둥하게 넘기지 않았던가.

언제부터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타이탄이 날린 콘크리트 덩어리에 옆에 있던 학우가 깔려 죽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사고방식은 아니었다.

무엇이 자신을 바뀌게 했을까.

언제부터 바뀌었을까.

그 의문을 품는 것과 동시에, 명확한 정답 대신 누군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대중의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든 기색 없이, 오히려 그들을 압도하는 사내의 이미지.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며, 자신의 사람에게는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헤퍼지는 면모를 지닌 그 남자.

황태자.

아니, 차기 황제로서.

사람을 앞서 이끌어가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경심을 품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그가 아카데미의 노괴들을 향해 그 황금색 시선을 향하며 일갈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내 사람들과, 내 사람이 될 사람들을 지킬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미 나의 편이 된 사람들.

그것을 넘어 내 편이 될 사람들까지.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이 굽어살펴야 하는 백성들처럼 칭하며 언성을 높이던 그의 모습은, '황태자'가 아니라 '차기 황제'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모두에게 천시 받는 폴른 구역의 들개가 아니라, 모두에게 찬사 받는 압도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 그가 말했었다.

-압도적인 존재가 되어라.

타인을 압도할 수 있다면, 비로소 그들이 네 목소리를 들어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해결해 보이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그 순간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다-!

갑작스레 옆에서 터지는 총성.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레이나가 미니건의 총구를 허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총을 난사한 것이었다.

뭐 하는 거냐고 묻지 않아도, 아이리는 그녀의 눈빛을 통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원에 모여 있는 이들이 전부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난잡하게 얽히던 그 감정들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전부 정지한 상태였다.

이런 거였구나.

고마워, 레이나.

판을 만들어 줘서.

속으로 감사를 표하고, 아이리는 입을 열었다.

"다들, 내 말을 들어 주세요."

그 한마디에 수많은 이들의 감정이 또다시 어지러이 얽힌다.

무시, 괄시, 호기심, 기대, 분노, 슬픔.

아마 내버려두면 이번에는 이쪽으로 불만이 폭발하겠지. 그다지 임팩트 있지 못한 대사였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나의 충격요법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사람들의 틈에서 슬금슬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아이리 역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미처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적절한 말을 찾아냈다.

저들을 압도할 만한 대사.

자신의 말을 따르게 만들 한마디.

아론이 그랬던 것처럼 뭔가 그럴듯하고 대중적인 연설이 떠올랐으면 좋으련만, 그게 그리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긴장 때문에 그녀의 입은 얼어붙은 상태로 조금도 움직이질 못했다.

그러나 그 순간.

쿠웅! 쿠웅! 쿠웅!

-가, 갑자기 이거 무슨 소리야?

-조용해지니까 들리기 시작했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멀리서부터 다가오고 있는 듯한 소리.

소음은 일정한 리듬을 반복하며 더더욱 커져 갔고, 아이리의 직감이 경고신호를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리는 떠올렸다.

이들의 입을 전부 다물게 하고.

자신의 말에 따르게 할 방법을.

"총원."

철컥.

그녀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등을 돌려 입구를 노려봤다.

"전투 준비."

나지막이 중얼거린 그녀의 짤막한 대사는, 이상하리만치 모두의 귀에 똑똑하게 박혔다. 그에 따라 전술교전부 적응자 학생들이 일제히 무기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콰아아아아앙-!

곧 그것은 출입구를 박살 내며 나타났다. 귀청을 찢을 듯한 울부짖음와 함께.

"■■■■■―!"

그것의 정체는.

거대한 시체 골렘이었다.

* * *

같은 시각.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아라야'를 처리하기 위해 아론과 함께 지하로 향한 에반젤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 저게 무엇이더냐...!"

그녀는 예상했다.

이번 싸움은 아론의 일방적인 승리가 되리라고.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아론이 지닌 힘을 곁에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손짓 한 번에 수십, 수백에 달하는 괴물들이 일제히 손톱보다 작은 고기조각으로 전락해 버리고, 그가 가볍게 휘두른 검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 버렸으니까.

그에 비해 아라야는 빼앗은 마법에 독특한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며 독특한 술식을 구사했으나, 그뿐이었다.

강제로 열어젖힌 우물을 통해 힘을 빌린다고 해도 그가 휘두를 수 있도록 허락된 마나의 양은 한계가 있을 테니까.

아마 아론이 이기겠지.

자신이 우물을 닫기만 하면, 아론이 멋지게 무기를 휘둘러 저 아라야라는 괴승을 순식간에 제압해 버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가 측정을 잘못한 요소는 두 가지.

하나는 아라야의 힘.

그가 만들어 낸 오리지널 술식은 상상 이상으로 골치가 아팠고, 귀찮았다.

다른 하나는 아론의 힘.

그토록 강하고도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던 남자는,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이젠 됐으니 제발 그만해라, 아론!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다 죽어 버린단 말이다! 이제는 위험하다. 이제는 되었으니 그만 뒤로 물러나서...!"

"...필요 없다."

하아, 어찌 저리 고집불통일꼬.

에반젤린은 자신의 간청을 무시하고 멋대로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남자에게 분노마저 느꼈다. 아, 물론 그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반젤린의 예측이 빗나갔던 부분.

그것은 아론 스팅레이라는 남자가.

상상 이상으로 훨씬.

훠어어어어어얼씬 강했다는 점이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했거늘! 그러다 저 사내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이더냐!"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다만."

"그러니까 말이다! 아니, 세상에 손가락 딱밤으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이냐! 진짜 그러다 죽으니까 그만해라!"

'무기를 들고', '멋지게' 제압해?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니, 아론은 무기조차 들지 않았다.

뭣보다 별로 멋진 싸움이 되지도 않았다. 너무 일방적인 싸움이었던 탓에 오히려 아라야가 안쓰러워질 지경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걸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누가 보더라도 아론은 지금, 그냥 일방적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5분.

아라야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론의 딱밤에 의해.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3화

치직. 치지지직.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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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재가동 시작...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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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푸른색으로 점멸하며 새로운 로그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뒷머리쪽에 달린 냉각용 모터팬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리 안에 대뇌 대신 들어 있는 구형 AI코어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천천히 재작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시각부터 차츰차츰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머지 감각 제어 프로그램이 돌아오기까지는 한참 로딩이 남아 있는 듯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겁니까?'

오른쪽 눈이 완전히 망가진 모양인지 아무런 시각 정보도 들어오지 않았다. 깨진 LED 화면처럼 까맣게 물든 시야에 간간이 붉은색 도트만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그나마 살아 있는 왼쪽도 멀쩡하지 않기는 마찬가지. 안구를 살짝 움직일 때마다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원치 않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왼쪽 눈은 노이즈도 심각해서 정상적인 시야의 반이 가려졌다. 사실상 그는 시야의 4분의 3을 잃은 셈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AI코어와 연동된 기억 장치가 쇼크를 먹었는지 저장되어 있던 정보가 상당수 깨지거나 날아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데이터 복구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죽어 버렸던 기억 데이터가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 세계에서의 이름이 '아라야'였다는 정보도 되찾았다.

...차라리 안 떠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허, 허억...!'

기억에서 가장 먼저 되살아난 장면은 아론 스팅레이와의 전투가 개시되는 부분이었다.

아라야는 주변의 넘실대는 마나를 끌어모았다. '우물'을 열어젖혔기에 힘은 충분했다.

그가 시전했던 것은 '네크로맨싱' 마법의 일종인 [시체밭].

주변의 일대를 장악하고 상대의 체내 장치들을 해킹, 무선 신호들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해킹된 장치들이 독(毒)을 발산하도록 만드는 마법이었다.

네크로맨싱 마법이라고는 했지만, 원작 주인공이 사용한 적은 없었다.

원작 소설에서 등장했던 마법이라면 아론에게 손쉽게 간파되어 버릴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는 다양한 종류의 '오리지널' 기술들을 고안해 내었다.

[시체밭]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그가 '아라야'가 되기 이전 세계에서 접했던 수많은 판타지 작품들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하고 이름 붙인 마법이었다.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시체밭]은 일종의 결계와 같은 것이라, 범위 내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제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막아 낼 수가 없으니까.

유일한 파훼법은 마법이 시전되기 이전에 막는 것이었으나, '우물'이 열려 있는 한 아론은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꼬마의 모습으로 변한 에반젤린 역시 자신의 오리지널 마법의 술식을 그리 쉽게 깨뜨리지는 못하리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틀렸습니다....'

일단 마법이 시전되기는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론은 [시체밭]의 효과가 적용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아라야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눈을 잠시 깜빡이는 사이, 그는 수십 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접근했다. 마치 오래된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시야 앞에 드리워지는 검은 손.

그 손은 엄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고리를 만들고, 나머지 손가락은 곧게 펴고 있었다. 이른바 '딱밤 자세'라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순간 떠오른 의문이 채 답을 내리기도 전에 그의 이마를 거대한 충격이 덮쳤다. 트럭에 치인 것처럼 그의 몸은 멀리 나가떨어졌고, 그의 AI코어가 쇼트(short)를 일으키며 일시적으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껌껌해진 시야.

1초 정도 기절했을까, 다시금 정신을 차린 아라야는 다급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세를 추스르려 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AI코어가 순간적인 논리연산을 통해 결론을 내놓았고, 그는 재빨리 반격을 위해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마법, [마탄(魔彈)]을 시전하려 했었다.

허나 소용없었다.

또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아론이 앞에 나타났다.

그에 대한 시각 정보가 전기신호로 치환되어 전자회로를 타고 AI코어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충격이 덮쳤다.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뒤에 이어지는 것은 그 과정의 무수한 반복이었다. 아라야가 어떤 식으로든 전투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할 때마다, 아론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날아와 딱밤을 갈겼다.

사실 '딱밤'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괴물 같은 물리량을 지닌 공격이었다.

분명 자신의 몸은 구세대 안드로인드인지라 불필요할 정도로 튼튼한 소재를 썼을 텐데도, 아론이 날리는 딱밤에 맞을 때마다 반드시 어디 한 곳이 망가졌다.

처음에 얻어맞은 이마는 안쪽으로 휘어지는 바람에 콧대가 기묘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양쪽 눈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오게 된 것은 덤이었다.

그가 팔에 손가락을 튕기면 팔이 꺾여서 못 쓰게 되었고, 허벅지에 튕기면 허벅지가 산산조각이 나며 날아가 버렸다.

아마 처음 타격으로 머리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냥 아론이 힘 조절을 했기 때문인 모양.

'모든 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렇게나 무력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물론 그에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패배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자신이 준비해 온 비장의 수단들이 먹히지 않더라도 분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했다. 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쪽은 최선을 다해, 마지막 순간에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모든 것들을 준비해 왔음에도, 아론 스팅레이라는 사내에게는 한낱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무기를 들기는커녕, 혹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날리기는커녕, 그는 어린애들끼리 장난이라도 하듯 손가락을 조금 놀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목숨줄을 갖고 놀았다.

이 어찌나 비참한 싸움인가.

이 얼마나 무참한 말로인가.

'이제 끝이군요.'

확실히 판단이 섰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이 목숨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채로는.

"아론... 스팅레이...."

자신은 그에게 이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 목숨을 바쳐 그가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

그렇게 각오를 다졌고.

그는 아론을 노려보며 스스로의 AI코어를 작동 정지시켰다. 아니, 정지시키려 했다.

그러나-

"누구 멋대로 죽어도 좋다고 했지?"

제기랄.

아론은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크억!?"

아론의 딱밤에 아라야의 AI코어가 다시 쇼트를 일으켰고.

그는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 * *

"제, 제발 그만하거라! 아직 우물을 닫으려면 한참 시간이 걸린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전에 죽여 버리면 안 된다고 분명 말했거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군."

"무엇을 말이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녀석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번 아라야의 머리에 딱밤을 갈기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으로 끝내 놈의 덜렁거리던 눈이 아예 빠져나와 덜렁거렸다. 놈의 귀와 코에서 안드로이드 특유의 푸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꽤 끔찍한 모습이었다.

상대가 로봇임을 알기에 이럴 수 있는 거지, 인간이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일을 그르치기 전에 계속 기절시키려는 거다."

"그, 그치만 기절만 시키려는 것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에반젤린,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다. 평범한 인간과 달리 이 정도 충격으론 죽지도 않고, 기절시키기도 쉽지 않지."

"엥? 그, 그런 것이냐?"

에반젤린은 '안드로이드'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른다.

영화가 뭔지도 잘 모르던 녀석이 안드로이드랑 인간을 구분할 수 있을까? 그냥 내가 평범한 인간을 후드려 패서 반쯤 죽여 놨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애초에 죽일 생각이 있었으면 이렇게 질질 끌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라야가 안드로이드임을 알고 있기에 적당히 충격을 주어서 쇼트상태를 반복적으로 일으키려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설명해 주자, 에반젤린은 입을 다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뭣도 모르고 내게 언성을 높인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미, 미안하구나. 이 몸은 그런 것인 줄도 모르고 그대에게 큰 소리를...."

"실수를 깨달았다면 어서 하던 일부터 빠르게 마치도록."

"걱정 말거라. 그대 때문에 어찌나 놀랐는지 아느냐? 어떻게든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빠르게 '우물 닫기' 술식을 구축했다."

"얼마나 남았지?"

"덕분에 이제 마무리 단계이니라. 아마 이 몸의 생애 중에 이리도 빠르게 술식을 짜본 적은 처음일 것이다."

그렇게 떠들어 대고선 작업 속도가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고? 솔직히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지만.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겠지?"

"이런 중요한 작업에 실수 같은 걸 할 리가 있겠느냐! 이제 곧 끝나니 그대는 마지막까지 놈이 깨어나지 못하게만 해 주거라."

전문가가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을 끝마치고 돌아갈 수 있겠다. 조금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뭔가 더 있지는 않을까?'

정크칩이라든가, 이번 사태라든가.

내가 짜증날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왔던 녀석이 이리도 쉽게 무너져 버리자, 영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게 정말로 끝인가? 강제로 그 우물이라는 걸 열어서, 자기를 죽이면 폭주가 일어나게 만드는 것. 그런 일차원적인 함정을 파두는 게 전부였다고?'

나는 계속 고민해 봤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 녀석은 원작의 셰이드가 썼던 네크로맨싱을 독자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킨 것 같은데, 그런 탓에 내가 그 능력을 파악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뭔가 단서는 없을까? 무언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았다.

아카데미. 마나의 끈. 우물.

환각사건과 시전되지 않은 소환마법.

조이 베넷과 폭주한 안드로이드.

그 모든 요소들이 정말로 맥거핀이 되어 버린 채, 그냥 이렇게 끝나 버린다고?

그냥 내 신경과민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는 머릿속 한쪽 구석에서 불안감과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놓친 걸까.

내가 대체 무엇을....

"후우. 이제 다 끝났느니라, 아론. 무사히 우물을 닫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이놈을 처리하는 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느니라."

그때, 에반젤린이 이마의 땀을 훔쳐 내며 말했다. 그러다 내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왜 그러느냐?"

"...잠깐 생각 중이다."

"무엇을 말이냐?"

머릿속에서 강렬하게 울려 대는 경종.

그리고 이내 뭔가 뇌리를 스쳤다.

"소환마법, 설마 그거인가...."

"응? 소환마법?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에반젤린이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에반젤린. 지난번 이 녀석의 꼭두각시가 사용하려 했던 게 소환마법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 그렇다만?"

"그게 정말로 상위 악마나 정령종을 소환하는 마법이었나? 확실한가?"

"그렇게 묻는다면... 아니다."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소환마법은 대체로 술식의 구조가 비슷하다. 전체적인 모양과 놈이 소모한 마나의 양을 보고 그리 짐작한 것일 뿐, 무엇을 소환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만...."

"그럼 마나의 끈. 어째서 녀석은 이곳에서 우물을 열었던 주제에, 나를 상대로 사용하지 않고 아카데미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지?"

"모, 모르겠다. 이 몸이 확인했을 때 그 커다란 건물엔 아무 술식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느니라. 그냥 방대한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었을 뿐."

"그걸로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려고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 가령 그곳에 다른 술사가 있었다면 그 방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 상태로는...."

"...있었다. 다른 술사가."

"그게 무슨 소리더냐?"

내가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이내 그녀도 깨달은 듯했다.

"서, 설마 거기도 꼭두각시가...?"

"그래."

콰직!

나는 쓰러진 아라야의 본체를 완전히 밟아 으스러뜨리며 말했다. 안드로이드의 푸른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트롤러 자식.'

이 자식이 이판사판 모든 무대를 뒤집어 버리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은 알고 있다.

다만 위치를 잘못 생각했다.

'우물'이니 '마나의 재앙'이니 하는 것들은, 일시적으로 내 발을 묶어두기 위함에 불과했다.

알고 있었을 텐데.

한쪽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른 곳을 공략하는 것이 아라야라는 놈의 방식임을.

놈이 무너뜨리고 싶었던 것은 '세상'도 '나'도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생각보다 더 유치하고도 자그마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야겠군."

그가 목표로 했던 것.

그것은 '아카데미'라는 무대 자체였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4화

아라야는 죽었다.

하지만 놈이 남긴 거대한 불씨는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향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내 정원을 향해 말이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곧장 마리아에게 연락을 걸어 지시를 내렸다. 이쯤 되면 학생회고 자시고 신경 쓸 겨를 따위 없다.

"나다, 마리아. 지금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전부 소집해서 아카데미로...."

"안 되느니라!"

옆에서 통화를 듣던 에반젤린이 대뜸 나를 막았다. 의아해하며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에 그대가 말했잖느냐. 놈이 환각마법을 통해 한 차례 그대들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놈이 소환하려던 것이 뭐였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놈은 당시에 그대들이 느꼈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모아서 '아래에 있는 것'을 불러오려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것...."

원작에서도 본 적 있는 표현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그 존재에게 '아우터 갓(Outer God).'이라는 거창한 표현까지 붙였더랬다.

"'강'이 [신비]가 태어나는 무의식의 용광로라면, '그것'은 용광로 가장 밑바닥에 눌어붙은 존재다! '강'의 가장 깊은 곳에서 뒤틀림과 뒤틀림이 한없이 겹쳐지며 뭉쳐진 놈이지! 그것을 끌어 올리려면...."

"부정적인 감정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본래는 '규율'에 의해 그것이 이쪽 세상으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할 터. 그런데 대체 어떤 방식을 쓴 것인지...."

"설명이라면 그 정도면 되었다."

그 뒤의 내용은 듣지 않아도 충분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최후반부에 다룰 수 있게 된 괴물이었다.

네크로맨싱은 본래 '마법'과 '해킹 기술'의 결합으로 태어난 새로운 종류의 마법이었다.

네크로맨서인 주인공은 작품 내 파워 인플레이션이 미쳐 날뛰기 시작할 즈음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섭리', 그 자체를 해킹하고 입맛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게 된다.

그렇게 하여 불러낸 것이 아우터 갓.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이차원의 괴물인 것이다.

'평범한 적응자로는 처리 못 한다.'

나와 같은 기업들의 최강 카드들, 혹은 도시정부로부터 특수기호를 부여받은 최상위 해결사들만이 처리할 수 있는 놈들이다. 어쭙잖은 적응자들은 방해만 될 뿐.

그 말인즉.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겠군.'

정말이지, 아라야 이 개 같은 자식.

빌어먹도록 치명적인 트롤짓을 선사해 주고 가는구만.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 * *

-시체 골렘!? 저게 왜 여기에!?

-안 그래도 깡통 새끼들 때문에 골치 아픈데 왜 저런 것까지 여기서 나타나는 건데!?

사이버 공원 전역으로 지독한 악취가 퍼지기 시작한다.

냄새만 맡고서 토를 쏟아 내는 학생도 있었다. 흉측한 외모에 전의를 상실하는 이도 있었다. 아이리의 옆에 있던 레이나가 그중 하나였고, 사일런스가 패닉에 빠진 그녀를 챙겼다.

"...!"

아이리 역시 충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녀는 내성이 있어서 견딜 만했다.

E섹터 뒷골목이나 폴른 구역에서 시체라는 것은 굉장히 흔한 것이었으므로.

거기선 시체를 처리할 돈이 없어 대충 약품을 뿌려 녹이는 것으로 장례를 치르는 일이 많은데, 그에 비하면야 시체 골렘 쪽은 훨씬 더 귀엽게 비칠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시체 골렘의 모습을 다른 이들보다 더 확실히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시체 골렘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형태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인간이 아닌 부품도 끼어 있어...!'

시체 골렘은 본래 인간과 짐승의 시신이 떡처럼 뭉쳐진 형태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들의 앞에 나타난 녀석들의 구성 성분은 조금 달라 보였다.

안드로이드의 팔과 다리, 인간의 몸통,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타르 덩어리.

'저건....'

아이리는 그 검은 덩어리의 정체가, 아까 안드로이드들을 폭주시키던 검은 종양과 같은 부류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분석은 거기까지.

계속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들 쏴서 날려 버려!"

아이리의 외침에 따라 총기를 꺼내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시체 골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아이리와 사일런스, 레이나 역시 제자리에서 총격을 가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

무수히 많은 탄환이 시체 골렘의 몸을 헤집고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녀석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탄창에 여유가 있을 동안에는.

그러던 그때였다.

[아이리! 들리세요!?]

"시엘? 무슨 일이야?"

[설명할 시간 없어요! 이것 보세요!]

한창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시엘이 갑작스레 연락을 취해 왔다.

그녀는 대뜸 실시간 영상을 하나 보내왔는데, 아카데미 외부에서 본 건물 쪽을 찍은 영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찍혀 있었다.

"자, 잠깐. 저게 뭐야!?"

[모르겠어요...!]

아카데미 외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니, 그 형태 때문에 일순 식물이라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촉수'였다.

"으윽...!"

[왜 그러세요, 아이리!?]

그 형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누군가가 송곳으로 자신의 머리를 쿡쿡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오염의 증상 중 하나였다.

"나, 나는 괜찮아...!"

영상 너머로 그 모습을 관측하는 것만으로 이 정도의 정신오염을 일으킬 정도라니.

타이탄과 직접 마주했을 때도 약간의 패닉 증상만 일으키는 게 전부였는데, 저 괴물은 대체 얼마나 위험한 놈이란 소리인가.

"이, 이거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인 거야?"

[진짜예요.]

영상 속의 촉수는 250층에 달하는 아카데미 건물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었다.

이 어찌나 비현실적인 장면인지.

타이탄마저 작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촉수와, 그 옆에 서 있는 아카데미 건물. 그리고 저 안에 있는 것은 자신들....

지하에 뿌리를 박고서 무서운 기세로 올라온 그것은, 몸을 비틀어 아카데미 건물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난데없는 진동에 학생들 다수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아마 촉수가 아카데미 빌딩을 건드리며 일어난 충격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뒤늦게 현실감이 확 몰려왔다.

그리고 그때, 영상 속의 촉수는 갑작스레 가시를 뿜어냈다. 매끈한 몸체가 순식간에 고슴도치와 같은 형태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앙-!

150층 사이버공원의 벽면을 뚫고 무언가가 침입했다. 그 충격파에 수많은 학생이 휩쓸렸고, 온갖 곳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뭐야!? 갑자기 뭐냐고!

-씨발! 내 다리! 누가 좀...!

외벽을 부순 그것은 틀림없이 촉수의 가시였다. 영상 속에서 보았을 때는 그냥 작고 예리한 가시였지만, 직접 보니까 가시 하나가 어지간한 대형 파이프보다 더 굵고 거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갑작스런 사태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가시의 끝 부분이 열리더니 꿀렁꿀렁 무언가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슬라임이었다.

타르 덩어리로 만들어진 듯한 슬라임은 가시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학생들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일단 상대에게 대응했다.

하지만.

-씨발! 이건 또 뭐냐고!

-왜 총이 안 통하는 건데!

정확히는 통했다.

총탄에 맞을 때마다 슬라임이 괴로워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커다란 슬라임의 몸집에 비해 총알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았을 뿐이다.

'자, 잠깐, 저거....'

슬라임의 모습을 어디선가 많이 보았다 했더니, 안드로이드의 몸체에 붙어 있던 종양 덩어리와 형태가 매우 흡사했다. 크기가 말도 안 되게 컸을 뿐.

그렇다는 의미는.

'전부 이어져 있던 거였어...!'

아카데미의 시스템을 장악한 바이러스도, 안드로이드들에 붙어 있던 종양 덩어리도, 난데없이 나타난 시체 골렘도, 전부 이어져 있다는 의미다.

그 말인즉.

"시엘! 아직 멀었어!?"

V7 콜로니에서와 마찬가지로, 저 거대한 촉수와 슬라임들을 조종하는 것은 가상공간에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것을 없앨 수만 있다면 이 사태를 해결....

그런 아이리의 생각이 전해진 것일까.

시엘 역시 다급하게 대답했다.

[조, 조금만 버텨 주세요! 어떻게든 해 볼게요!]

현실 쪽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듯하기에 시엘 쪽의 승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선은 이곳 150층의 상황.

갑작스레 들이닥친 괴물들의 존재로 인해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멀쩡히 전투력을 유지하는 학생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남은 학생들도 대부분 패닉에 빠져 정상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예 전선을 이탈해서 혼자 살겠답시고 도망치려는 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혼란을 잠재우고 힘을 합쳐 대항하지 않는 이상, 시엘이 작업을 완수하더라도 피해는 엄청날 것이다.

둘째로는....

"선배, 레이나! 두 사람은 249층으로!"

"[미유랑 시엘 말이지? 알겠다!]"

원래 쉘터로 사용됐던 249층에도 어느 정도 적응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곳 분위기를 봐선 그쪽도 멀쩡히 돌아갈 것 같진 않았다.

미유와 시엘이 혼란에 휘말리기 전에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어 보호해야겠지.

"둘 다 어서 움직여요!"

"아이리, 당신은요?"

"난 여기서 버틸 거야!"

눈앞의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조금이라도 혼란을 수습하고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싸워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그녀의 말에 머뭇거리는 두 사람.

"난 괜찮으니까 어서 빨리 움직여요!"

아이리의 호통에, 두 사람은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분명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까지는 빛나는 미래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이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 됐냐고...!'

밀레테크 보안부 고위 간부의 아들.

태어났을 때부터 뛰어난 신체 능력과 나노머신 적성을 갖고 있었다. 여러 번의 투여도 필요 없이 단 한 번의 나노머신 투여만으로 적응자가 되었고, 어지간한 모듈들 대부분에 높은 호환성을 보였다.

탄탄대로를 걸어야 할 인생이었다.

그런데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후, 갑자기 그 빛나던 도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폴른 출신과 벌인 [쇼케이스]에서 패배한 이후, 부모님의 관심이 급속도로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밀레테크 장학생 계약이 끊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디미르 이사장은 예전만큼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듯했다.

그나마 중간고사 이후에 나름 괜찮은 성적으로 재기하나 싶었으나, 또 이런 꼴이다.

갑작스런 안드로이드들의 폭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의 침공에.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도노반은 패닉에 빠져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타다다다다다-!

괴물에게 포위당해 도망칠 구석도 없어진 그는 마구잡이로 총을 쏴댔다. 그렇게 쏴댔다간 아군도 맞는다며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총알을 있는 대로 다 쏟아붓고는, 그것이 다 떨어지자 비장의 무기인 [화장포] 모듈을 활성화시켰다.

그의 손목이 열리며 강렬한 에너지포가 전방의 적들을 휩쓴다.

몇몇인가 괴물이 아니라 사람도 휩쓸린 것 같았지만 그런 것 알 바인가.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그는 쉴 새 없이 화장포를 괴물들을 향해 쏘아 댔고, 무리한 모듈 사용으로 과부하율이 치솟았다. 지나치게 올라간 체온이 피부를 익게 만들었지만, 식힐 틈도 없이 다시금 모듈 무장을 혹사시켰다.

그럼에도 괴물들은 끊임없이 몰려왔고, 결국 [화장포] 모듈이 망가지며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옆에 있던 누군가가 외쳤다.

-여기다! 제발 여기 좀 도와줘!

그가 외치는 방향으로 돌아보니 다른 그룹의 학생들이 괴물들의 포위를 뚫고 사이버공원 밖으로 도망치려는 중이었다. 도노반 역시 옆에 있던 학생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애타게 불렀으나.

"미안하다!"

"자,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그들은 도노반 일행을 도리어 미끼로 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등에 욕설을 퍼부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때 다함께 힘을 합쳐 싸우기 위해 모였던 이들은,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 같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테지만, 누군가 한 명의 이기적인 판단에 의해 힘의 균형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명이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자, 그를 본 다른 이들도 따라 도망치고. 화력이 약해지자 괴물들이 점점 다가왔고, 남은 이들은 또다시 겁을 먹고 도망치고.

악순환.

이제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아직 많은 수의 학생들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긴 했지만, 그보다는 도망치는 놈들이 더 많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녀석이 얼마나 될까.

'나도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던 그때였다.

-저기 좀 봐.

누군가가 말했다.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도노반에게도 꽤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아이리 앨리스밸.

폴른 출신 주제에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 부러운 자식. 그녀는 괴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5화

아비규환.

갑작스레 괴물이 나타난 직후, 지금 상황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도노반의 머릿속에서도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이리 앨리스밸, 그 폴른의 들개녀를 중심으로 무척이나 신기한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딱히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패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지원하는 것. 어쩌면 적응자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었다.

아이리가 했던 일.

그것은 학생들 집단이 사분오열되는 와중에, 일부러 괴물들의 틈바구니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부러 자신에게 괴물들의 시선을 돌리고, 방패로 그것들의 공격을 막아 내며 잠시의 시간을 벌어 주는 것. 그들이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다시 쥘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그녀가 한 일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뿐이었다.

다만.

다른 점 한 가지가 있었다면.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안위를 조금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움직였다.

혼자였다면 얼마든지 이 아비규환의 공간에서 도망쳐서 목숨을 영위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째서...?'

재차 말하건대.

그것이 결코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냉정하게 말하자면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나름대로 퓨어스펙이 뛰어난 녀석인 건 인정하지만, 아카데미 전체로 따지면 그렇게까지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제 아카데미에 들어와 겨우 몇 개월 훈련과 교육을 받았을 뿐인 1학년.

뛰어난 재능을 개화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완전히 만발하게 하기에는 어려운 시기.

심지어 어째서인가 그녀의 후원자는 아직 그녀의 대체율을 높여 주지도 않은 듯했다.

구체적으로 모듈링 상태를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몸놀림이나 피부의 질감 같은 것만 보아도 그녀의 대체율은 1학년 중에서도 낮은 편에 속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속과 플라스틱보다는 단백질로 이루어진 신체비율이 훨씬 더 높다는 의미였다.

기본적인 재능은 뛰어날지라도 아직 모듈링이 끝나지 않았기에, 아카데미에는 아이리보다 강한 이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마 그들이 나섰다면 아이리보다도 훨씬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 냈을 테지.

허나 분명 그럴 텐데도.

아이리는 그다지 한 게 없을 텐데도.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이리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가볍게 내민 손길을 붙잡은 이들이.

아이리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홀로 도망쳐서 살아남을 생각으로만 가득하여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이, 갑자기 한자리에 모여 방어선을 세우고, 화력을 집중하고, 전선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아이리가 방패를 내밀고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동안, 그들은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한 전우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신뢰를 보내며 괴물에 맞서 무기를 휘둘렀다.

'대체 뭐지?'

대체 저 여자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갑자기 저렇게 따르기 시작한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도노반의 기계안이 갑작스레 오류라도 일으킨 것인지, 대뜸 아이리의 모습을 확대하며, 그녀의 모습을 생생히 담아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이리의 꼴은 형편없었다.

얼마나 움직였는지,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하나로 질끈 묶었던 머리칼은 어느새 풀려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뿐이랴.

비 오듯 흐르는 땀에 탄연이나 먼지 따위가 달라붙으며 새하얬던 피부가 거뭇거뭇해졌다. 유일한 장점이었던 외모가 완전히 볼품없어졌다.

몸은 또 어떤가.

미처 막지 못한 공격에 방어구가 파괴되며 걸레짝처럼 너덜거렸다. 그 안에 있는 그녀의 연약한 단백질 살갗이 찢어지면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정말 꼴불견이었다.

영웅? 아니, 그런 것과는 전혀 달랐다.

아마 밖을 지나가면서 저런 모습을 한 사람을 마주쳤다면, 코웃음을 쳐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체 뭘까.

대체 뭐냐는 말이다.

이 뱃속 깊은 곳에서, 울컥 솟아올라오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은.

"...!"

도노반은 전혀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죽고 싶지 않다'라며 발버둥 쳤던 기억과 감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쥔 채,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채 '폴른의 들개'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아이리를 중심으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른 학생들보다 압도적으로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지휘력이 빼어나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이기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득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그뿐.

"...제길."

욱신.

다시 한번 도노반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온다. 그 감정이 짜증인지, 분노인지, 다른 무언가인지는 그조차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줄곧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그제야 맑아진 머리로, 도노반은 판단을 내렸다.

"여기다! 여기 좀 지원해 줘!"

도노반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이리를 향해 외쳤다. 그 외침이 닿았는지, 아이리와 그녀의 주변 동료들은 곧장 방향을 틀어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괴물의 앞을 막아서며 방패를 들어 올렸고, 놈들의 공격을 받아 내는 동안 다른 이들이 괴물들을 처리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간신히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 도노반의 그룹은, 재빨리 재정비를 마치고 자신들을 노리던 괴물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탄약이 전부 떨어지고 자랑하던 화장포도 쓰지 못하게 된 도노반은, 대신 앞으로 달려가 주먹질을 갈겨댔다.

"으랴아아아아아아아!"

그의 본래 포지션은 거너지만, 각종 모듈로 인해 강화된 신체 스펙 덕분에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도노반은 앞으로 나아가 아이리의 옆에서 계속 주먹을 휘둘러댔고, 꿈틀거리는 살덩어리들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 거다!"

"그딴 건...!"

아이리는 괴물을 향해 방패를 밀치며 대답했다.

"너한테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렇구만!"

그렇게 그들은 포위망을 뚫어내며 나아갔고, 아이리가 모은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간신히 합류했다.

그제야 간신히 여유가 생긴 도노반은 아이리를 돌아보았다. 아이리는 또다시 자리를 박차고, 다른 이들을 구하려 나서려는 중이었다.

도노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야, 폴른!"

"...꺼져."

"제기랄. 잠깐 기다리라고, 앨리스밸!"

폴른이라고 불렀더니 무시하고 뛰쳐나가려 하기에, 이름을 고쳐 불러야 했다.

그제야 도노반을 돌아보는 아이리.

"저번에 내가 할 말 있다고 했었지?"

"기억 안 나."

"갑자기 네 여자 친구가 나타나는 바람에 말하려다가 못했던 적이 있었잖아."

"여자 친구 아니야."

"버, 벌써 헤어졌냐?"

"애초부터 사귀던 거 아니라고!"

"그, 그러냐...."

아니, 이 얘길 하려던 게 아닌데.

"아, 아무튼 그거 진짜로 중요한 얘기거든!? 그러니까 이번 일 끝나면 나 좀 보자고!"

"뭔 소릴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기엔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도노반은 입술을 한 차례 깨물고는 아이리를 향해 말했다.

"...뒈지지 말라고. 기분 더러워지니까."

그에 아이리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너보단 일찍 안 뒈져."

"이게, 걱정해 줬더니 말하는 꼴이...!"

"흥."

그러고선 훌쩍 뛰쳐나가는 아이리였다.

"...역시 저년하곤 친해지긴 글렀군."

그렇게 투덜거리며.

도노반은 다가오는 괴물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적어도 저 들개보다는 오래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나, 라고 생각하면서.

* * *

현실의 아카데미에서도 모두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틀렸어요! 새로운 거!"

[5초만 버텨 주세요오!]

시엘이 데이터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동안, 적대적인 무리가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콜로니에서 보았던 검은 괴물이었다.

다만 그 수는 3배로 불어 있었고, 이번에는 같은 방식의 무기(코드)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콜로니에서 쓰러뜨린 프로그램이 내뱉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 온 백신은 도통 그 힘을 쓰지 못했다.

그에 따라 시엘과 미유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초부터 다시금 괴물들을 공략해 나가는 중이었다.

콜로니에서도 간신히 쓰러뜨린 괴물이 3배로 불어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의외로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과학기술부 소속 학생들 중 코딩과 해킹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 합류했다는 점이었다.

[공격 코드 설계 완료!]

[디버깅까지 3초, 2초, 1초... 종료!]

[전송한다!]

그 순간 시엘의 몸체가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녀의 몸 위로 두터운 장갑의 파워드 아머가 씌워졌다. 그 어깨에 달린 150mm 레일 건 주포나 대구경 발칸포는 덤이었다.

굳이 그것을 구성하는 데이터를 일일이 뜯어보지 않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닌 코드인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천재적인 기술자인 미유일지라도 그녀 혼자만의 힘으론 이렇게까지 빠르게 코드를 짜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합류한 학생들이 미유를 보조하여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공격용 프로그램을 설계해 낸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위자드의 역할을 맡은 녀석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에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똑같은 모델의 로봇에게 공격을 당했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미유를 도와 가상공간 속에서 시엘이 싸우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좋았어요! 이거면 될 거예요!"

새로운 무기를 보자마자 사용법을 익힌 시엘은 곧장 등을 돌려 모든 화력을 검은 괴물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

그녀가 쏘아낸 탄환이 적대적 프로그램의 취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괴물들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시엘은 마무리로 가장 앞에 있던 녀석에게 레일 건을 쏘아냈다.

퍼어어어어어엉-!

그녀가 쏜 포탄은 순식간에 한 녀석의 몸체를 관통했고, 다른 두 녀석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주는 데에 성공했다.

"됐다! 한 마리 잡았어요!"

[아카데미 방어시스템을 장악했던 녀석이야! 포탑부터 다시 탈취해!]

죽어 버린 괴물은 대뜸 열쇠 하나를 내뱉었다.

시엘은 그것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였고, 이내 제어권을 가져온 그녀의 시야에 방어포탑들의 카메라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250층에 달하는 삼각뿔 형태의 아카데미 건물과, 그것을 뱀처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촉수.

시엘은 포탑들을 이용하여 촉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백 대의 자동포탑이 일제히 불을 뿜어내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괴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혀 안 먹혀요!"

[제기랄, 화력이 얼만데 꼼짝도 안 하는 거... 우웨에에엑!]

공유된 영상을 보던 학생 하나가 말을 하다가 거하게 토악질을 해 댔다. 촉수가 지닌 강렬한 기운이 그에게 정신오염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상을 본 다른 학생들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시엘은 상태가 조금 나았다.

안드로이드에다가 빙의자였던 덕분일까. 아니면 가상공간에만 있었기 때문일까. 다른 일반인 학생들보다는 내성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데미지는 조금씩, 허나 확실하게 누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적된 데미지는.

최악의 타이밍에 터지고 말았다.

"윽!? 으으으아아아아!?"

[시엘! 시엘 왜 그래요오!?]

시엘은 자신의 정신이.

정확히는 이 몸에 빙의된 자신의 '영혼'이 찢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토하거나 공포에 빠져 실성하거나 했겠지만, 빙의자였던 그녀는 시엘의 AI코어에 담겨 있던 '영혼'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

시엘의 공격에 입은 타격을 복구한 나머지 프로그램들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촉수를 뻗기 시작했다.

'이, 이런...!'

그 사실을 알아도 시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가상세계에 있는 것은 그녀의 정신이었고, 정신이 불안정해지자 데이터로 이루어진 그녀의 아바타 역시 극도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 제발...!'

시엘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도망치려 했으나 역시 무리였다.

결국 그녀의 몸은 괴물들에게 붙잡히고 말았고, 그녀가 되찾았던 아카데미 방어시스템의 권한 역시 빼앗기고 말았다.

'아, 안 돼...!'

시엘은 괴물들이 빼앗아 가는 '열쇠'를 향해 손을 내뻗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정신마저 서서히 괴물들에게 먹히고 있음을 느꼈다.

이건 진짜 위험하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죽음은 일반적인 위자드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단백질 기반 육체를 지닌 일반적인 위자드들도 운이 아주 좋아야 몇 달간 기절하는 것으로 끝났다. 대부분의 경우는 죽거나 뇌사판정을 받고는 했다.

하물며 대뇌 대신 AI코어를 지닌 그녀는 어떨까. 잘은 몰라도 일반적인 위자드가 겪는 것보다는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겠지.

'제발, 아론 님...!'

슬슬 나타나실 때가 됐잖아요!

이 정도 위기는 당신도 예상치 못했을 거 아닌가요. 이러다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으니, 제발 좀 나와서 그 먼치킨 같은 능력으로 뭐라도 해 보란 말이에요!

속으로 그렇게 외친 그때였다.

치지지지지직, 지직.

대뜸 시엘의 몸을 붙잡고 있던 괴물들이 형체를 일그러뜨리며, 그녀의 몸을 놓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아카데미 외부를 촬영한 영상이 시엘의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는데.

"마, 말도 안 돼...!"

아카데미를 휘감고 있던 거대한 촉수의 끝 부분이, 갑자기 잘려 나가며 대량의 검은 피를 흩뿌려 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는 명백했다.

카메라를 돌려서 확대하자.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아카데미 빌딩의 벽면을 수직으로 타고 달려 올라가는 양복 차림의 남성이 비쳤다.

"하, 하하...."

시엘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하여간 타이밍은 진짜 잘 맞추셔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6화

줄곧 궁금했었다.

나는 얼마나 강한가.

빌어먹을 불치병을 고치고, 거의 모든 모듈을 복구 완료한 내 스펙은 과연 어디까지 넘볼 수 있을까.

세계관 최강자, 아론 스팅레이.

그 압도적인 강함을 되찾은 후, 나는 단 한 번도 전력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내가 손가락 한 번 튕기면, 혹은 가볍게 검 한 번 휘두르면 먼지 조각으로 변해 버릴 수준의 약해 빠진 적들만 상대해 왔을 뿐.

그런 면에서는 아라야에게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내가 가진 힘을 시험해 보기에 안성맞춤인 상대를 준비해 주었다는 사실이.

묘한 고양감.

내가 쓰러뜨려야 할 적을 마주하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덥히기 시작한다.

아론의 인격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못하지만, 아직도 파편으로 남아 내 양분이 되어 주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삼키려 드는 거대한 촉수괴물의 모습이 보인다.

뱀처럼 휘감아 건물을 올라가려는 녀석의 모습은 마치 승천하려고 발버둥 치는 이무기를 연상시켰다.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이라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2단계 수준의 안티레인으론 저런 거대한 괴물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새 발의 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수준이다. 자칫하면 왜곡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내가 쓰러뜨려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놈이 모습을 응시하자.

'보인다.'

내 원래의 두 눈 대신 박혀 있는 기계안이 그 거대한 육신을 포착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과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괴롭히려 들었지만, 내게 장착된 전투 모듈들이 가볍게 그 증상을 막아주었다.

아드레날린을 비롯한 전투 호르몬이 강제로 분비되고, 체내에 파고드는 마나의 입자들을 희석시킨다. 마나로 인해 손상된 세포들은 나노머신이 빠르게 회복시켜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게 장착된 모듈들이 보조연산장치의 도움을 받아 적의 약점을 완벽하게 분석해 냈다. 내 스펙에 맞추어 최적화된 이동 경로와 공격 수단, 타이밍까지 시뮬레이션 되어 내게 적을 죽일 방식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에 화룡점정을 찍는.

'아론 스팅레이의 선천적인 전투센스.'

내게 남아 있는 아론의 기억 파편이 싸우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싸워 왔고, 어떻게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지를 목청껏 어필하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말단 하나하나까지 각성한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듈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선천적인 전투본능에, 싸우고 싶다는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저, 정말로 저런 걸 해치울 수 있겠느냐? 아무리 그대라고 해도...."

"걱정 말고, 얌전히 기다리도록."

옆에서 칭얼대듯 말하는 에반젤린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준 후.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출근하는 아버지가 된 기분으로.

"다녀오마."

그렇게 가볍게 말하며, 나는 자리를 박찼다.

놈과의 거리는 꽤나 멀었으나, 나는 도약 한 번으로 아카데미의 담장을 넘어 빌딩 1층 외벽까지 도달했다.

아카데미의 방어 포탑들이 갑자기 빌딩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날 노리려나 했더니, 내가 아니라 거대 촉수를 향해 무수한 포탄들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시엘이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군.'

하지만 역시나 인간침입자를 막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다 보니 괴물을 상대론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했다.

역시 직접 죽여야겠지.

'우선은 머리부터.'

엄밀히 따지자면 머리가 아니라 말단 부분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몸체 부분은 너무 두꺼운 탓에 [테크블레이드]나 [구름거미]로 잘라 내기 어려웠다. 물론 못할 것은 없긴 한데 효율이 매우 나쁘다.

'뭣보다 저런 게 통째로 쓰러져 버리면 주변의 피해가 너무 크겠지.'

그래서 제일 윗부분부터 조금씩 제거할 생각이었다. 우선 [구름거미]의 실을 뻗어 아카데미 빌딩의 최상부에 박아 넣는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잡아당겨 순식간에 괴물의 머리가 있는 100층 너머까지 날아올랐다. 괴물의 머리까지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공중에서 몸을 뒤집은 채 괴물을 향해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한다.

이 각도에서 [테크블레이드 진(眞)]은 사용하지 않는다. 몸에 부담도 크고, 그랬다가는 아카데미 건물까지 통째로 썰려나갈 위험이 있으므로.

서거어어어어억-!

촉수에 직접 칼날을 박아 넣어 힘껏 그어 버리자, 놈의 살점이 갈라지며 검은 체엑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끼이이이이이이익-!

발성기관도 없을 터인 놈이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화들짝 놀라며 온몸에서 뽑아냈던 가시를 거두는 것은 덤이었다.

그제야 나를 위협적인 적으로 인식했는지, 놈은 본격적으로 나를 노리기 시작했다.

몸체를 꿀렁꿀렁 움직여 달라붙어 있던 아카데미 빌딩에서 떨어졌다.

그러곤 머리끝 부분을 공중에 떠 있는 상태인 내게 정확히 겨냥했다.

나는 전투 보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녀석이 어떤 공격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

[오류. 계산에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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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안타깝게도 놈이 평범한 [신비]가 아닌지라 전투보조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질 못했다. 이거야 원, 조만간 미유한테 다른 프로그램으로 교체해 달라고 하든지 해야겠군.

그나마 몸에 각인된 아론의 기억 파편은 자연스럽게 최적화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실을 아카데미 건물에 부착하여 순간 잡아당겼고-

쌔애애애애애액-!

거대 촉수는 무서운 기세로 몸집을 늘리더니, 내게 가시를 찌르려 했다. 눈도 없고 저렇게 커다란 몸집을 지닌 녀석이 어떻게 저리 정확하게 나를 노릴 수 있는지는 참으로 의문이었다.

순식간에 쏘아진 가시가 간발의 차이로 내 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날아온 강렬한 풍압이 나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놈이 일으킨 강렬한 풍압에 아카데미 외벽의 장갑판이 일제히 찌그러졌다. 아마 내 몸도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풍압으로 인해 그냥 날아가는 게 아니라 대포에 맞은 것처럼 갈기갈기 찢겼겠지.

'역시 정면으로 받아 내지 않길 잘했군.'

녀석 덕분에 맨몸으로 250층짜리 아카데미보다도 더 높은 상공을 비행한다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이제는 내가 갚아 줄 차례겠지.'

낙하산도 뭣도 없기에 그대로 자유낙하. 공기저항을 줄이고 최대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점점 떨어진다.

멀게만 보였던 지면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머릿속으로 타이밍을 계산한다.

'바닥에 부딪치기까지 셋, 둘, 하나... 지금.'

촤르르륵!

순간적으로 다시 한번 실을 쏘아내어 수직 낙하하던 방향을 비튼다. 중력가속도를 그대로 살려, 시계방향으로 아카데미 벽면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나는 순식간에 다시금 적의 머리가 있는 곳으로 도달할 수 있었고, 녀석은 내 빠른 움직임을 제대로 좇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끝이다.'

나는 그대로 놈의 머리에 달라붙으며 검을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테크블레이드]의 출력을 높인다.

절삭력이 끝까지 올라간 칼날은 놈의 몸체를 두부처럼 갈라 버렸다. 나는 그대로 속도를 살려 놈의 몸체를 사정없이 베어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촤르르르르륵-!

일순 검이 아니라 붓을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촉수괴물의 몸체를 베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대로 순식간에 다시금 1층, 놈의 뿌리가 솟아 올라온 지면까지 검로가 끊기지 않도록 공격을 이어 나가며 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치이이이이익-!

잔뜩 달궈진 [테크블레이드]의 칼날이 무섭도록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그것에 맞닿으며 순식간에 증발했다.

모듈 사용으로 과부하율이 치솟은 내 몸에서도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뒤늦게 체내 냉각장치가 발동하며 한계까지 쌓인 열기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도련님."

"마리아."

어디선가 나타난 마리아가 내게 불쑥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녀의 우산을 든 반대쪽 손에는 병아리 같은 옷차림을 한 에반젤린이 손을 잡고 서 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

내가 우산을 받아 들자, 마리아는 에반젤린이 들고 있던 새로운 장우산을 펼치고는 비에 젖은 내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반젤린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끄, 끝났다니? 저기 저렇게 놈이 멀쩡하게 살아 있지...."

에반젤린이 말을 마치기도 전.

이윽고.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비가 아니라, 놈의 몸이 갈라지며 체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원래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녀석이, 이내 내가 그린 검로를 따라 수백, 수천, 수만 개의 육편으로 나뉘며 사정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능한 아카데미에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잘게 잘랐으나, 그러지 못한 큼직한 조각 몇몇 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지면에 작은 크레이터를 만들어 냈다.

"어, 엄마아아아아아-!"

에반젤린은 그 광경에 겁에 질려서 비명을 질러 댔다. 마리아가 그런 에반젤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나는 하늘에서 검은 살덩어리의 비가 내리는 광경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마리아에게 지시했다.

"이것들, 전부 회수할 수 있겠나?"

그러자 마리아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유능한 비서의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다른 기업이나 민간인들의 손에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있겠다."

거대 촉수... '아우터 갓'은 상당히 높은 격을 지닌 [신비]였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만날 수조차 없으니, 연구할 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하수인으로 부렸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할 테니. 놈의 시체에서 정수를 추출하여 모듈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이만 돌아가지. 피곤하군."

"아카데미 쪽은 어떡하시겠습니까?"

"학생들 쪽은...."

대답을 하던 중.

누군가 내게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시엘이었다.

[아론 님~!]

"무사했군, 시엘. 다른 녀석들은?"

[전부 괜찮아요~!]

영상 너머 그녀의 몰골은 꽤 초췌해 보였지만, 적어도 목숨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론 님 덕분에 살았어요!]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럼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때마침 아론 님이 나타나시더라구요~?]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후후, 하고 웃는 시엘.

[그리고 '저쪽'도 무사히 계획대로 이뤄졌어요~!]

그러면서 시엘이 내게 비춰 주는 장면은, 아카데미 150층 사이버 공원 내부를 찍고 있는 카메라의 영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난장판이 되어 버린 실내공원.

여기저기 전투의 상흔이 남아 있었으나, 살아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학생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이리가 있었다.

본래 아이리를 폴른 출신이라며 괄시하던 그들이, 아이리를 둘러싸고 저마다 그녀의 노고를 치하했다. 아이리는 그 반응이 뭔가 어색한 듯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을 쳤고.

누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덥석 잡아들더니 번쩍 위로 던져 올렸다. 그에 따라 다른 학생들도 헹가래에 동참해서 아이리를 던졌다 놨다 반복했다.

참으로.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카데미 흑막 시점 117화

우리는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승리는 피와 상처로 얼룩진 승리였고, 아카데미에 씻어 낼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말았다.

우선은 사람 목숨보다 돈이 중요한 이런 세계이니만큼 돈 이야기부터 해 보자. 아라야의 테러로 인해 아카데미가 얼마나 큰 손해를 입었는가?

최소 100억 크레딧 이상.

농담이 아니라 진짜 중견 메가코프를 휘청거리게 만들 정도의 돈이 이번 전투로 인해 증발해 버렸다.

망가진 방어포탑의 수리.

보안프로그램의 재설치.

아우터 갓이 망가뜨린 하수 시스템과 지면, 아카데미 외벽의 수리.

수천 대에 달하는 안드로이드와 보안 로봇 재구매.

무너진 내부 인테리어 보수.

손실된 각종 연구 장비 복구 등.

스팅레이의 황태자로서,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나조차 억 소리 나는 금액이었다.

후원기업들은 당연히 정부 예산으로만 피해 복구 비용을 충당하고 싶어 했고, 기업들의 충견인 정부 역시 별다른 이견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번 사건에 있어서 기업 측은 책임질 요소가 하나도 없으니까.

다만 큰 이익을 거머쥘 수도 있는 이번 아카데미 복구 사업에 어떻게든 머리를 들이밀려는 기업들이 많아서 그 부분에서는 조금 논란이 생겼다.

잘은 몰라도 우리 스팅레이 그룹 쪽에서도 정치인이나 관련 고위 공직자들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면서 사업을 수주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쪽의 경쟁이 과열되다 보니 중간에 개소리도 좀 나왔다.

-방어 포탑은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이 망가뜨린 것 아닙니까? 그쪽에서 책임지고 비용을 충당해야 합니다!

아, 그러셔.

그러면 건물 통째로 무너질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네? 250층짜리 건물 통째로 무너뜨리고 새로 지으면 아예 싸게 먹혔을 텐데, 그치?

어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찍찍 내뱉고 자빠졌어. 나는 그런 헛소리를 내뱉은 정치인 한 명을 그대로 매장시켜 버렸다.

그 인간이 처자식을 두고도 동성애자 연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점이라든가, 다른 기업들에게 뒷돈 받은 정황을 그대로 우리 그룹 쪽 언론사를 통해 터뜨려 버렸다.

아마 몇 달 후면 아예 거주지를 A섹터에서 D섹터쯤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황태자에게 헛소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정계 인사들은 발언을 조심하기 시작했다. 아니, 애초에 지금 분위기 속에서 나를 건드렸던 그놈이 어지간히 시류를 읽지 못하던 놈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도 그럴 것이.

[아론 스팅레이, 아카데미 위기 속 영웅적 행동으로 빛나다!]

[스팅레이 재단 이사장, 아카데미 테러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나섰다!]

[자신의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신들린 듯한 전투를 보여 준 구원자!]

[영웅이자 이사장, 사이비 종교로부터 아카데미를 구하다!]

그 사건 이후, 내가 싸우는 장면을 지켜보았던 기자들이 연일 내게 긍정적인 기사를 뽑아 댔다.

물론 그들에게 내가 좋은 기사 부탁드린다며 자그마한 선물을 뿌리기도 했다. 허나 선물을 보내지 않은 곳에서도 그런 기사들을 써대는 걸 보면 뉴 발할라 시티 전체가 내 행보를 상당히 좋게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기자정신들 참 대단하다니까.'

'아우터 갓'은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데미지가 상당했을 텐데, 구역질과 두통을 참아가면서 꾸역꾸역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녀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건.

그런 점에서 내가 포탑을 망가뜨린 점이라든가, 전투 과정 중에서 생긴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결국 아카데미 복구 비용은 대부분 혈세로 감당하는 것으로 결정. 땅땅땅.

자, 돈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되었고.

둘째로 새로운 학원장.

이번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시타교와 커넥션을 갖고 있던 민중파 출신 학원장 '조이 베넷'임이 알려지면서 대중은 다시 한번 큰 충격에 휩싸였다.

미친 안드로이드 마법사와 결탁하여(사실은 조종당하여) 학원에 그런 괴물을 풀어 놨으니, 당연히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발견 당시 이미 생명력을 대부분 소진한 상태였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인은 두개골 파열로 인한 과출혈.

어째서 쇠약사가 아니냐 하면, 병원의 보안이 '우연히' 느슨해져 있는 틈을 타서,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하여 둔기로 머리를 깨부숴 놨기 때문이었다.

'우연히는 개뿔.'

따로 조사해 보니, 이번 사건으로 사망한 학생의 학부모가 그에게 복수하고자 킬러를 고용했다더라.

그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그들의 죄가 밝혀지지 않도록 슬그머니 덮어 주었다.

사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나부터 그를 묻어 버릴 생각이었기에, 그것은 내가 할 일을 대신 해 준 데에 대한 감사 표시이기도 했다.

하여튼 학원장 자리에 공석이 하나 생기면서, 새로운 학원장을 선출하기 위한 시민투표가 진행되었다.

본래라면 으레 그래 왔듯이 도시 내 가장 큰 시민단체인 '민중파' 쪽에서 새로운 학원장을 후보로 내세워서 당선되었겠지.

하지만 나는 원작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투표 타이밍에 맞추어 민중파 수뇌부가 이번 일의 원흉인 아시타교와 짝짜꿍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터뜨렸다.

곧바로 민중파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가 들어갔고, 간부 대부분이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연히 민중파는 선거에서 별달리 힘을 쓰지 못하고 다른 후보의 당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당선된 것은 최근 TV방송 출연으로 인기를 끌던 대학 입시 전문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싶었지만, 원래 내가 있던 세계에서도 개그맨이 대통령이 되거나 영화배우가 미국 주지사도 했었으니까. 안 될 건 뭐가 있겠나.

다만 내가 놀랐던 것은 그 결과가 '원작대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분명 과정과 시기 전부 달랐으니 다른 결과가 나왔어야 할 텐데도.

'이번에도 세계의 의지가 작용했나.'

빙의자 나비효과로 인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들이 마구 벌어지기는 해도, 굵직굵직한 이벤트들이 정사대로 흘러가는 걸 보면 묘한 법칙 같은 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카데미 학생들과 학생회.

이번 아라야가 일으킨 테러로 인해 꽤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다. 워낙에 건물 자체가 크고 비밀스러운 공간이 많은 곳이다 보니 그들의 시신을 완전히 수습하는 데에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일주일 정도만에 대부분 수습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자꾸 예상치 못한 곳에서 썩어가는 시체가 수업 중 발견된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서 아예 실종자의 시체를 전부 찾을 때까지 아카데미가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렇게 한 달여 정도 상당한 인력을 투입하여 마지막 실종자까지 찾아낸 다음에는 합동 장례식을 다시 한번 치렀다.

당연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니 올해 기말고사는 그대로 생략.

대신 여름 방학 기간을 단축하고 늦춰진 진도를 따라잡는다는 계획을 세우고서 다시금 학원의 문을 열었으나.

그러자마자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학생들의 목숨은 값어치가 없나요?]

[아카데미의 책임! 공론화하라!]

[시스템 개선,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안전하지 않은 학원, 이젠 변화해야 한다!]

이번 사태로 인해 학원 측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고, 그것은 시위와 수업에 대한 단체 보이콧 행동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내용은 학생회 설립과 복지시설 증대. 그리고 아카데미의 보안 강화.

재미있게도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내가 이전 회의 때 주장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시위 중간 중간에 내가 찍힌 영상을 갖고 와서는 재생시키기도 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영상을 내리게 만들었지만 누가 미리 다운받아 놓았던 모양.

아무래도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참교육자'로서의 이미지가 붙어 버린 듯했다.

나를 새로운 학원장 자리에 앉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조금 나오기는 했으나, 그건 헛소리였으니 얼마 가지 못하고 묻혀 버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그러리라 계산하고서 했던 행동이긴 하다만....'

너무 원했던 대로 딱딱 맞춰서 돌아가니 도리어 불안할 정도였다.

하여튼 일이 점점 커지자 아카데미와 기업 측에서 대응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강경하게 그들의 의견을 묵살한다든가, 학생들을 적당히 이간질해서 그들끼리 싸우게 한다든가 했겠지만.

'...이번 사건이 너무 컸지.'

지난번 타이탄 습격 당시에도 학생들이 죽었고, 이번 사태에서도 적지 않은 희생자가 있었다.

여태까지 쌓여왔던 불만과 두 개의 큰 사건이 합쳐지며 불이 붙은 폭탄은 갈라치기로 어떻게 해결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원래 기업의 충실한 시종 역할을 자처하던 교직원들도 이딴 곳에서는 일 못 해먹겠다면서 은근히 학생들을 지원하고 나섰으니 말 다 했다.

결국 아카데미와 기업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저들도 자신들의 책임을 어느 정도 느껴서... 라기보다는, 안 그래도 여러모로 시끄러운데 그냥 적당히 요구를 들어주는 게 차라리 싸게 먹히리라는 판단 때문이었겠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면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될 즈음, 학생들은 학원 측으로부터 학생회 설립과 다양한 시설 증대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6월 셋째 주.

기온이 점점 올라갈 시기에 학생회장과 전술교전부장, 과학기술부장 선출을 위한 선거 활동이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입후보자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학생회장 후보는 4명.

전술교전부장 후보는 3명.

과학기술부장 후보는 단 2명.

학생회장 후보 중 한 명은 우리 아이리 앨리스밸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스스로 입후보 하겠다는 의사를 내게 밝혔고, 나는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나는 선거운동을 도와줄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혼자 해 보겠다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주변에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나 뭐라나.

중요한 것은.

그녀는 이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7월 첫째 주.

이 온종일 비가 내리는 어두침침한 도시에도 본격적으로 여름의 향기가 맴돌기 시작할 즈음, 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권은 1인 1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가 투표율에 상관없이 당선되고, 당선된 학생회장이 부회장, 서기, 회계 및 필요한 학생회 인원들을 직접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현재 학생들 기준으로는 처음 실시되는 선거이니만큼 투표율은 95%로 굉장히 높았다.

그리고 반수 이상의 지지를 받아.

아이리 앨리스밸이 당당히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