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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미노타우황청심원 (1)

심문관은 압송되었다.

그의 죄목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황태자 수색 공무에 대한 고의적 부실 수사 및 방해'라는 죄목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의 실종 사건을 날림으로 처리하려 했던 행동. 그 죄는 컸다.

"운이 나쁘면 사형, 아니면 최소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겠지요?"

"아마도 그렇지 않겠나, 허허."

"그렇겠지요. 어쨌건 뭐, 황태자 전하도 무사히 돌아오셨고, 우리는 이렇게 뙤약볕에서 땀이나 흘리고, 끄응차. 어이구, 힘들구만요."

"힘들긴 무슨. 덕분에 우리도 일거리가 생겨서 좋지 않나."

"하긴 뭐, 이렇게 큰 공사를 따낸 건 오랜만이긴 합니다."

"그렇지. 공사 거리가 생기면 우리 업자들이야 좋은 거지."

건장한 노인이 허허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시장 관저는 온통 공사판이었다. 며칠 전, 미노타우로스가 난동을 부렸던 밤. 그날 부서진 관저 건물과 정원을 복구하는 현장 곳곳에서 인부들이 자재를 나르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건설업자 노인이 말했다.

"한데 자네, 혹시 어제 부두에 나갔었나?"

"예? 아뇨. 집에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구경거리를 놓쳤구만?"

"구경거리라니요?"

"황태자 전하께서 길들여 데려오신 미노타우로스 말일세."

"아, 저도 이야기로는 들었습니다. 그거, 진짜입니까?"

"당연하지."

"어르신도 직접 보신 겁니까?"

"허허. 그것도 당연하지."

노인이 껄껄 웃었다.

"갑자기 바다가 출렁이더란 말일세. 그러더니 글쎄, 집채보다 큰 미노타우로스가 바닷물을 헤치고 확 치솟아 부두에 올라오는 게 아닌가. 한데 그 목덜미에 황태자 전하께서 앉아 계시더라, 이 말일세."

"많이 놀라셨겠군요."

"놀랐다마다. 처음엔 믿기지가 않아서 숨도 못 쉬었지. 내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구만. 게다가 그 거칠고 사납다는 미노타우로스가 황태자 전하의 말을 어찌나 고분고분 듣던지 말이야. 전하께서 눈짓하는 대로 움직이고, 철창을 부수고, 마치 수족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겠는가."

"설마... 정말로 길들이신 걸까요?"

"미노타우로스를? 전하께서?"

"예, 어르신."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아마도...."

"아마도?"

"제압하신 게 아니겠는가?"

"제압...이요?"

"그래."

"하지만 어르신."

"으음?"

"평범한 사람인 전하께서 괴수인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다니, 그게 말이 좀...."

"안 된다고 생각하나?"

"예. 그날 밤엔 미노타우로스에게 납치되셨던 전하가 아니십니까? 한데 납치된 후에 그 괴물을 제압했다니... 조금... 말도 안 되는 일인 듯해서 말입니다."

"허긴. 나 같아도 그런 의문을 가질 걸세. 그 증언을 못 들었다면 말일세."

"증언이라니요?"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이건 조금 조심스러운 이야기일세. 자네, 입을 무겁게 닫아둘 자신이 있는가?"

"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러시는 겁니까?"

"쉿. 목소리 좀 낮춰보게. 다름이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서 미노타우로스만큼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네."

"...예에?"

"어허. 목소리 낮추래도."

"아니, 무슨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세. 자네, 내 조카 알지?"

"알다마다요. 시장님 개인 범선의 선원으로 들어갔다고 그러셨지 않습니까."

"그놈이 직접 봤다고 그랬네. 그날, 미노타우로스가 날뛰던 밤에 말일세."

"...정말입니까?"

"그래.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수를 쓰셨는지 미노타우로스만큼 거대해졌다더구만. 글쎄, 미노타우로스와 대거리를 하며 등짝이며 목덜미에 커다란 가시를 푹푹 꽂아넣는 모습도 봤다고 그랬네."

"조카분이 술에 취했던 건 아니고 말입니까?"

"떼끼. 그 상황에 술 마실 틈이 있었겠나? 다른 선원들도 다 같이 봤다는데."

"...."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께서는 정말로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아서 제압하신 것 같다, 이 말일세."

"허허...."

"웃을 일이 아닐세. 생각해 보게. 미노타우로스가 어떤 괴수인가. 그 흉맹하다는 오우거도 한 수 접는다는 흉포한 놈이 아닌가 말일세. 한데, 그런 미노타우로스가 자신보다 약한 존재의 말을 듣겠는가? 심지어 고분고분하게?"

"흐음, 하긴. 들어보니 그렇군요?"

"그렇지?"

"예. 그러고 보니까 말입니다. 저도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뭔가?"

"황도에 널리 퍼진 적이 있는 소문인데... 황태자 패왕설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노인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사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주위에서 자재를 나르던 인부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근거도 뿌리도 없는데 그럴싸하게 들리는 '황태자 패왕설'이 크레모에도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그 너머의 정원 구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미노타우로스, 우루스가 꼬리를 휘휘 휘두르며 파리 떼를 쫓아냈다.

쫓겨난 파리 떼가 흩어졌다. 그중의 한 마리가 햇살을 타고 날아올랐다. 반쯤이나마 남은 시장 관저 건물의 3층 창가로 올라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가락에 맞아 추락했다.

틱-!

"한데 저 미노타우로스 말입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려던 파리를 딱밤으로 격추한 남자, 데미안이 아래쪽 정원의 우루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길들이신 겁니까?"

"길들여?"

물음을 받은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며칠이나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까닭인지 어젯밤부터 껌딱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꼬슴이와 뽀복이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길들인 적 없어. 혼자 오해를 하길래 놔뒀을 뿐이지."

"...예?"

데미안의 고개가 갸웃.

오해라니. 아리송한 말이었다. 사실 눈으로 보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리가 났던 그날 밤, 황태자를 죽이려고 그렇게도 날뛰었던 미노타우로스였다.

한데 황태자를 납치했다가 돌아온 지금은? 달라졌다. 그날의 일이 무색할 정도로 황태자를 따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길들인 걸까. 무슨 수를 썼기에 미노타우로스가 황태자를 저렇게나 추종하는 걸까. 그건 어제부터 데미안뿐만이 아닌, 이 도시의 거의 모두가 떠올리고 있는 의문이었다.

'한데 길들인 게 아니라니.'

오해라니. 대체 뭘까. 황태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날, 기억하지? 내가 갑자기 거대해졌던 거."

"...예."

그 일 또한 궁금한 점 투성이다. 라키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별거 없어. 환상종한테 먹이는 해바라기씨를 먹어서 그랬던 거고. 왜 먹었으냐고는 묻지 마. 죽지 않으려면 뭐든 해야 했던 상황이었으니까."

"...."

"어쨌건, 그렇게 커진 상태에서 녀석을 진정시켜보려고 침을 놔줬더니, 녀석의 아프던 다른 곳이 우연히도 잠깐 나았던 거야."

"예? 그럼 설마...."

"감이 오지?"

"전하가 자신을 치료해준 것으로 오해한 겁니까?"

"어. 날 은인으로 여기더라."

"...."

"뭐, 따지고 보면 애초부터 내가 녀석한테 원수였던 것도 아니잖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은 거지. 안 그래?"

"그건 그렇군요. 물론 제게도 다행스러운 일이고 말입니다."

"다행?"

"예."

데미안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받기로 했던 위험수당이 안 날아가게 됐으니까요."

"...내가 무사한 덕분에?"

"예."

"내가 월급 셔틀이야?"

"셔틀이 뭡니까?"

"막 퍼다주는 호구?"

"그런 의미라면... 정확하군요."

"헐. 이젠 돈 밝히는 거 숨기지도 않아."

"어차피 고용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어쭈. 막 뻔뻔하기까지."

라키엘이 웃으며 핀잔했다. 데미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말은 이렇듯 뻔뻔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은 씁쓸했다. 그날 밤 날뛰었던 미노타우로스. 그 앞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돈을 받을 생각은 하면서 돈값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어. 부끄러운 일이야.'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한데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특대 사이즈의 미노타우로스. 그 괴수 앞에서 자신의 검은 미력했다. 황태자를 지켜내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수치스러웠다.

'...더 훈련하자.'

앞으로 다시는 그런 굴욕을 겪지 않으리라. 황태자의 호위에 어울리는, 봉급에 어울리는 강자가 되리라. 내심 굳은 다짐을 되새기며 데미안은 화제를 돌렸다.

"제가 이렇게 뻔뻔하게 대답을 드릴 수 있는 건, 어젯밤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을 전부 처리해둔 뿌듯함 덕분이기도 합니다."

"음? 내가 지시한 일?"

"예. 어젯밤에 전하께서 제게 시키신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설마 그걸 벌써?"

"예."

"내가 일러줬던 그 많은 종류의 약재를 전부 다 준비해뒀다고? 하루 만에?"

"예. 이곳이 북부 최대의 항구이자 교역도시인 덕분이었습니다."

"후아. 그건 좀 대단하네."

라키엘은 혀를 내둘렀다.

어제 크레모로 돌아온 자신이었다. 감찰대 심문관을 압송시킨 후, 일행과 반가운 해후를 나누었더랬다. 한편으로는 데미안에게 따로 특별한 지시를 내렸었다.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들어갈 약재. 그 재료들을 준비해두라는 지시였다.

'한데 그거...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

산약, 자감초, 인삼, 포황, 신국, 서각, 대두황권, 육계, 아교, 백작약, 맥문동, 황금, 당귀, 방풍, 백출, 시호, 길경, 행인, 백복령, 천궁, 영양각, 사향, 빙편, 웅황, 백렴, 포건강, 대추, 벌꿀까지.

그야말로 한약재의 약벤저스 총출동. 몸에 좋다는 한약재는 죄다 필요한 수준이었다.

'물론 수은이 함유된 주사는 뺐지만. 그건 너무 리스크가 커서. 어쨌건, 필요한 약재 종류가 너무 많아서 최소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는데.'

한데 그것들을 하루 만에 다 구했단다. 새삼 교역도시의 위엄(?)을 느끼고 있는 도중이었다. 데미안 녀석이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소식? 뭔데?"

"황제 폐하께서 황도로 발길을 돌리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예.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전하가 무사히 귀환했다는 소식을 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황도로 턴했다는 거구만?"

"예."

"거 참. 냉정한 양반일세."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황제 아스테리온답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 아저씨, 좀 부담스럽거든.'

사실 이쪽은 그 아저씨의 아들이 아니다. 그저 아들인 라키엘의 껍데기를 덮어쓰고 있을 뿐이다. 한데 그런 사실을 숨긴 채로 부자의 정을 나누고, 관심을 받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전에 일단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잘됐어. 앞으로도 이렇게 쭈욱!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게 최고일 거야.'

꼭 그러자고 라키엘은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할 일에 대한 각오도 함께 다졌다.

"좋아. 마침 폐하도 걸음을 돌리셨고, 약재도 다 구해놨다니까 바로 시작할 수 있겠네."

"시작이라시면?"

"미노타우황청심원 조제."

라키엘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모든 재료가 마련되었다. 가장 핵심인 미노타우로스 우황도 특 S+ 급으로 확보된 판국이다. 조제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당장 관저 주방부터 비우라고 해. 약재 손질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때부터였다.

복구 중인 시장 관저 주방에서 라키엘의 요리교실(?)이 펼쳐졌다. 각종 약재를 각자에 맞는 방법으로 다듬었다. 껍질을 벗겨냈다. 말리고 뜯어냈다. 지지고 볶았다. 가루를 내고, 쪘다. 졸인 대추에 꿀을 섞어 밑재료를 만들었다.

밑재료에 나머지 재료들을 황금비율로 정확히 첨가하여 섞고, 버무렸다. 마무리로 금박을 입혀 고오급스러운 명품 브랜드 포장까지 곁들였다.

그렇게 마침내 닷새째가 되는 날.

'...완성!'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첫 시제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약이란 제대로 된 정확한 약효를 발휘해야 쓸모가 있는 법.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도? 약효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러니 테스트부터 해봐야 해.'

그는 미노타우황청심원 시제품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시제품을 노려보았다. 스킬을 발동했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선택과 동시에 옵션이 발동되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머릿속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내용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 직후.

'...음?'

미노타우황청심원의 각종 스펙. 그걸 읽어내리던 라키엘이 멈칫했다. 어느 한 부분에서 눈길이 휘둥그레졌다.

'어? 잠깐. 이거 뭐야?'

만들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부작용의 내용이....

'이거, 미쳤는데?'

라키엘은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순식간에 트리플악셀을 뛰며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과 함께, 초 대박 완판 상품 탄생의 예감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77화. 미노타우황청심원 (2)

딩동!

머릿속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동시에 머릿속을 땅, 하고 때리는 깨달음 한 조각.

'이거 미쳤는데?'

라키엘은 경악했다.

눈앞에 떠오른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성분, 스펙. 그걸 읽어내리다 보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경악이 담긴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유효성분 : 콜릭산, 빌리루빈, 비타민 D, 진세노사이드, 프로토파낙시디올, 올레아놀릭산, 파낙시놀... 이러쿵저러쿵... 쿠마린, 람놀리퀴리틴... 이거저거... 레데보우리에롤, 하마우돌... 블라블라... 시미푸진, 임페라토린 등등]

[성상 : 황금색 금박을 입힌 구형의 환제]

[효능과 효과 : 근육세포 내 칼슘이온 농도 하강을 통한 근육이완 및 혈관확장, 협심증 및 각종 심혈관계 질환과 통증 해소, 특발성 폐동맥 고혈압(idiopathic pulmonary arterial hypertension) 치료]

[용법, 용량 : 성인 1회 1환 (8~15세 2/3환, 5~7세 1/2환, 2~4세 1/3환, 1세 이하는 1/4환을 1일 1~2화 씹거나 따뜻한 물에 개어서 복용합니다.)]

[사용상의 주의사항 : 다음과 같은 사람은 이 약을 복용하기 전에 의사, 한의사, 약사와 상의할 것 - 1.고혈압 환자 2.신장장애 환자 3.부종 환자 4.고령자 5.식욕부진, 구토의 증상이 있는 환자 (증상이 악화될 수 있음)]

...여기까진 괜찮았다. 딱 나쁘지도 않고, 원래 기대하고 예상했던 청심원의 효과와 대강 들어맞았다. 한데 대박인 점은 다음에 있었다.

[부작용 : 신체에 무리가 없고, 부작용과 중독성이 없는 완벽한 꿀잠 숙면을 유발합니다.]

'허허허.'

라키엘은 그저 웃었다.

황당해서? 아니었다.

'미쳤네. 대박 맞네.'

그것도 그냥 대박이 아니었다.

초대박이었다.

'신체에 무리가 없대. 시중에 파는 수면제 같은 위험성이 없다는 뜻인 거야. 게다가 부작용과 중독성도 없어? 그럼 프로포폴도 가뿐히 제끼는 거고. 그런데 완벽한 꿀잠 숙면을 유발한다는 건... 이건 거의 혁명급인데?'

요모조모 살펴볼수록, 이리저리 분석할수록, 장난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청심원 류의 약이 원래 제공하는 몸에 좋다는 약효? 물론 그것도 좋았다. 그런데 분석하면 할수록 부작용의 메리트가 더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문득, 이와 비슷한 사례도 떠올랐다. 지구의 미국, 어느 제약 회사에서 일어났던 대박 사건이었다.

'1990년대 초였지. 어느 제약회사가 협심증 치료 약을 개발하고 있었어. 개발은 순조로웠지. 한데 결과를 분석해보니까? 뜻밖의 부작용이 발견됐다고 했어.'

원래 목적은 협심증 치료약을 개발하려던 거였다. 한데 임상시험 중에 뜬금없는 부작용이 발견됐다. 약을 복용한 임상시험 남성 참여자들의 신체에 의외의 변화가 생겨난 것이었다.

'아주... 엄청나졌지. 남자한테 참 좋은데, 아,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쨌건, 그 효과(?)는 엄청났다. 제약사는 뜻밖의 부작용에 주목했다. 오히려 부작용을 안전하게,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그렇게, 80억 인류의 밤을 바꾸고, 바다표범과 순록에 대한 밀렵과 남획을 50% 이상 감소시킨 기념비적인 역사적 약품이 개발되고, 출시되었다. 그것이 바로 전설 속 레전드로 불리는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였다.

덕분에 그걸 개발한 제약사는? 3단 분리 로켓 부스터 날개를 달고서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훗날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게 되는 회사, 화이자(Pfizer) 제약사였다.

'그러니까 오늘 이건, 비아그라 개발 사례와 비슷한 거야. 원래 의도했던 용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데 엄청나게 유용한 부작용을 발견해 버린 거.'

먹기만 하면 완벽한 꿀잠 숙면을 보장한다니. 최상급 미노타우로스 우황 덕분인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미쳤다. 미쳤어.'

우연이 이끌어낸 초대박 완판 상품 탄생의 예감. 라키엘은 절로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어쩌면 이 약이 마젠타노 제국의, 로라시아 대륙의 약품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 또한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쁜 예감에만 빠져들지 않았다.

'아직 좋아하기엔 일러. 정신 차려라, 이한!'

짝짝!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짝짝 때렸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칫국 마실 때가 아니야. 설레발 칠 단계도 아니야. 신중하게. 모든 걸 확인해야지.'

그는 냉철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성분표의 나머지 부분, 저장방법과 사용기간 등등의 항목을 확인했다. 미노타우황청심원 10알을 챙겼다.

주방을 빠져나갔다. 관사 건물을 벗어났다. 정원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우루스!"

관사 정원 한쪽에서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던 미노타우로스의 왕을 불렀다. 햇볕 아래 뒹굴거리던 우루스가 고개를 들었다.

"...누우?"

내 작고 하찮은 덩치의 은인이다. 우루스의 눈가에 반가움의 기색이 떠올랐다. 라키엘이 워낭소리 돋는 미소를 만면에 떠올렸다.

"잘 쉬고 있었냐. 오늘 컨디션은 어때?"

"누우?"

"으음, 나쁘진 않아 보이네. 가슴 통증은 없었고?"

"누우우!"

"다행이야. 그럼 이거 좀 먹어볼래?"

불쑥, 라키엘이 손을 내밀었다. 미노타우황청심원 10알이 모습을 보였다.

"...누우우?"

"약이야. 원래 사람은 한 알만 먹으면 충분한데 넌 덩치가 커서, 최소 이 정도는 먹어줘야 약빨이 들 거거든."

"...누우우우?"

"이거, 먹으면 가슴 아플 일이 사라질 거야."

"누우!"

우루스의 눈이 번쩍했다. 가슴이 아픈 건 싫었다. 며칠 전에 겪었던 끔찍했던 통증도. 수시로 떠오르는 기억의 가슴 저림도. 그런데 저 약을 먹으면 그 아픔들이 사라질 거란다.

"누우우! 누우!"

우루스는 다시 한 번 은인을 믿어보기로 했다. 몸을 낮추었다. 커다란 입을 벌렸다.

"늬에에에에-"

쏙쏙!

라키엘이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우루스의 혓바닥 위로 던졌다. 우루스도 그걸 야물딱지게 받아먹었다.

"잠깐! 바로 삼키진 말고!"

"...누우?"

"혀 위에 올려둬. 그리고 천천히 녹여서 먹어볼래?"

"누으으으."

"맛없어?"

"누!"

"어쩔 수 없어. 조금만 참자. 응?"

"...누우우."

"해치웠나?"

"누!"

"그래, 삼켜."

꿀떡!

우루스의 커다란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의 두 눈이 빛났다.

'경혈 스캐닝.'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이 활성화됩니다.]

[시야 속 10미터 범위 내에 Lock-on 가능한 대상이 감지되었습니다.]

[대상 :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

[대상을 Lock-on 하시겠습니까?]

[YES / NO]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경혈 스캐닝이 발동되었다.

키이이이잉-!

방금 미노타우황청심원 10알을 녹여 삼킨 우루스. 녀석의 거대한 몸속에 흐르는 별빛이 보였다.

신체 곳곳의 경혈들. 그곳을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 그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방금 녀석이 삼킨 미노타우황청심원 성분의 흐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보인다.'

황금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기운이 감지되었다. 우루스의 기다란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게 보였다. 위장에 머물렀다.

되새김질? 그런 복잡한 과정은 다행히 없었다. 황금색 기운이 첫 번째 위에 들어가자마자 위벽을 통해 흡수되었다. 혈관을 따라 빠르게 번져갔다. 심장에 깃들었다. 심장을 둘러싼 관상동맥을 확장시켰다. 동맥 내벽에 달라붙어 있던 혈전 덩어리들을 녹여냈다.

마치 오래 벼르고 있던 대청소를 하듯이. 묵은 때를 속 시원히 싹싹 벗겨 내듯이.

"...누, 누우?"

우루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효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푸륵! 푸르륵!"

신체의 곳곳. 전신의 혈관 내벽. 온갖 부위에 조금씩 자리하고 있던 염증이 빠르게 사라졌다. 오랜 감금 생활로 망가지고 지쳐 있던 우루스의 전신에 활력을 주었다.

근육이 손에 손을 잡았다. 적혈구가 벽을 넘었다. 림프액이 자기네 사는 세상을 더욱 살기 좋게 만들었다. 아주 그냥 기쁨과 환호의 올림픽이 열렸다.

그 순간.

딩동!

라키엘의 귓가에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반가운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당신은 직접 조제한 미노타우황청심원을 환자 : 우루스에게 복용시켰습니다.]

[스킬 : 탕약조제 (Lv.1) 의 효과로 약효가 10% 증가하였습니다.]

[환자 : 우루스는 오랜 감금 생활과 학대로 인하여 안정형 협심증 및 각종 성인병, 대사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조제한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복용한 덕분에 관상동맥의 혈전이 완벽히 제거되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성인병 증상들이 다소 완화되었습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우루스는 당신의 미노타우황청심원 복용을 통해 총 79년 3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79년 3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환자 : 우루스가 인간이 아닌 관계로, 이종족 페널티가 부여됩니다.]

[정산받는 보너스 수명이 50% 삭감됩니다.]

[7.31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7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16일]

'...오옷.'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한 방에 완치라니....'

우루스가 앓고 있던 안정형 협심증이 싹 나았다. 그 밖에 약간씩 지니고 있던 성인병도 제법 호전되었다. 대성공적인 임상시험 결과였다. 거기에 보너스 수명까지 쑴펑쑴펑 퍼 받았다! 그 소식에 오장육부도 곧바로 반응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성과에 기쁨을 표현합니다.]

[심장 : 저거 hoxy, 심장에 좋은 약이야?]

[허파 : 허허... 파하학.]

[대장 : 안 그래도 요즘 몸이 찌뿌둥해서 변비 생길 거 같았는데... 저도 저거 먹으면 간만에 쾌변으로 슬럼프에서 벗어날 거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슬럼프는 평소에 잘하던 놈이 쓰는 말 아님? 넌 맨날 변비잖냐.]

[위장 : ...풉!]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6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100]

'허허? 크하하. 크하하하핫!'

라키엘은 방긋 웃었다. 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나왔다. 자신이 만든 미노타우황청심원. 확인할수록 대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대놓고 협심증 특효약이야. 성인병 완화에도 도움이 되고. 게다가 아까 봤던 부작용까지 생각하면....'

이건 어디에 내놔도 팔릴 거다. 비싸게 값을 매겨도 무조건 팔린다. 아니, 전국의 귀족들이 돈을 보자기로 싸와서라도 사려고 줄을 설 것이다. 게다가 이쪽이 오늘 얻은 성과는 더 있었다.

"누우? 누우우움...."

우루스가 하품을 쩌억 했다. 갑자기 온몸이 상큼해졌다. 한편으론 나른나른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청량한 풀밭에서 따스한 햇볕을 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두 눈을 꿈벅꿈벅. 천천히 감았다가 뜨며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고마웠다. 그 마음을 전했다.

할짝?

"...그읍읍?"

거대한 혓바닥이 라키엘의 상반신을 푹 적셨다. 라키엘은 기겁했다. 머리며 얼굴이며 옷이며, 한 큐에 미노타우로스의 침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우루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우루스가 건네는 마음을 느낀 덕분이었다.

'고마워하고 있구나....'

미노타우황청심원의 부작용인 숙면에 빠지고 있는 걸까. 그 와중에도 이쪽을 바라보는 까만 눈망울이 유독 유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어릴 때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봤던 누렁이 황소가 떠올랐다. 녀석이 할아버지를 바라볼 때면 이런 눈빛을 했었던가.

앞으로도 평생 당신을 따르겠노라고. 당신을 더더욱 충실히 지키겠노라고. 오직 당신만이 나의 친구이며 주인이라고. 그 눈빛을 받으며, 따스한 마음을 진심으로 실감하며, 라키엘도 우루스를 향해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내심 조용히 되뇌었다.

'...호구 확보!'

호구, 혹은 노예.

앞으로도 평생 널 부려먹겠노라고. 너를 더더욱 충실히 굴려먹겠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쌔근쌔근 잠드는 우루스를 향해 야물딱지게 다짐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는 곧바로 크레모 시장을 불렀다. 성공적으로 개발한 비장의 무기, 미노타우황청심원. 그 신약을 전국 각지에 각 잡고 제대로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키엘의 홍보 계획을 들은 크레모 시장. 그의 눈동자가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78화. 명의(名醫) 탄생 (1)

쿠쿠쿠쿵! 둥둥! 쿵!

북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울렸다. 부둣가에서 노닐던 갈매기 떼가 소리에 놀라 날개를 퍼덕였다. 흩어지는 날갯짓 아래로 운집한 수천의 시민들.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사람들의 눈길이 모인 곳. 부둣가 광장 한쪽에 세워진 단상. 그 위에서 라키엘은 셔츠 깃을 가다듬었다.

"흠흠."

절로 나오는 헛기침. 아까부터 목청을 몇 번이나 푼 건지.

'...후우, 떨리네.'

역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수십, 수백 명도 아닌 수천 명의 인파 앞에 서서 주목받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단상 위에 걸어둔 플랜카드가 보였다.

'크레모 시 특별훈장 수여식이라.'

그걸 보자 문득, 이틀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틀 전의 시장 관저 정원.

대낮부터 불려 온 크레모 시장이 움찔했다. 이쪽에게 들은 이야기가 놀라운 걸까. 아니면, 방금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먹고 쌔근쌔근 잠든 우루스의 모습이 부담스러운 걸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시장이 놀라지 않도록 차근차근, 이쪽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신약 홍보를 위해 훈장 수여식을 열어볼까 해서 말이지."

"훈장 수여식을... 신약 홍보를 위해서 말입니까?"

"으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다.

"여러 이유가 겹치기는 했지만, 어쨌건 크레모 시는 이번에 몸살을 앓았지. 미노타우로스, 이 녀석이 날뛴 까닭에 많은 사람이 놀랐고,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고, 힘든 복구의 시기를 맞이하게 됐어. 그래서야. 그날 밤, 날 지켜주기 위해 애쓴 사람들, 타인을 위해 헌신했던 이들, 용기와 희생의 모범을 보인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할까 해."

"전하께서 직접 말입니까?"

"으음. 명분은 충분할 거고. 훈장을 수여하면서 이걸 같이 상으로 내려볼까 싶어서."

"이건... 뭡니까?"

시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가 '이거'라면서 손바닥을 펼쳐 보인 물건. 금박이 입혀진 구슬이었다. 눈깔사탕보다 조금 작은 크기쯤 될까. 쌉싸름하면서도 알싸하고 독특한 향기가 났다. 황태자가 빙긋 웃었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예?"

"새로 개발한 약이야. 협심증을 비롯한 심장 질환의 치료에 탁월하고, 부가적인 효과로는 몸을 쾌적하게 만들어줄 완벽한 숙면을 제공하기도 하고. 여기, 이 미노타우로스가 꿀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설마 미노타우로스에게 그걸 먹이신 겁니까?"

"어."

"그럼 전하께서, 이걸 직접 만드신 겁니까?"

"으음. 만들었으니 판매해야지. 귀한 재료가 들어갔으니 아주 값비싸게. 그래서야. 훈장 수여식에서 이걸 훈장과 함께 하사하는 거."

"...아, 과연."

"내 뜻을 알겠어?"

"예, 전하."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름 반평생 넘도록 정치판에서 구르며 한 지역을 다스려온 사람이었다. 이 정도만 들어도 황태자의 의중을 대번 파악할 수 있었다.

"특별한 재난을 극복하고, 그 성과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내리는 훈장... 그것도 황태자 전하의 이름이 걸린 훈장과 함께 하사되는 약이라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약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게 되겠군요."

"그래. 바로 그거지."

척 하고 말했는데 착 하고 알아들으니 참 좋다.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황태자가 상으로 하사한 약이라니 얼마나 궁금하겠어. 말 그대로 황태자 에디션. 황태자 프리미엄 상품인 거니까."

"예,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래.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워할 귀족들이 제법 있을 거야. 혹은 유행의 조짐을 느끼고선 당장 필요가 없어도 일단 사두자 싶은 이들도 있을 거고."

그렇게만 인식이 박히면? 따로 더 알리지 않아도 된다. 알아서 돈을 싸들고 와서 사려고 들 것이다. 그게 바로 고오급 명품 브랜드의 힘이니까.

'그런 거, 한국에서 많이 봤거든. 브랜드 마크의 힘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영향을 받는지도.'

돌이켜보면 정말로 그랬다.

자동차 하면 벤처. 시계라면 롤락스. 사실 기능만 따지고 보면 다른 경쟁 브랜드보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쟁 브랜드보다 가격이 비쌌다. 엄밀하게 따지면 가성비가 떨어졌다.

한데도 더 잘 팔렸다!

'벤처만 봐도 그래. 오죽하면 삼각별 마크 자체가 천만 원짜리 옵션이라는 말이 있겠냔 말이지. 롤락스도 그렇고. 매장에서 직접 사는 성골에 성공하려고 아침 오픈 시간에 찾아가서 오픈런을 하고, 대기번호 따내고, 제발 팔아달라고 난리 부르스를 춰가며 사지. 그런데 막상 성능을 보면 비슷한 급의 다른 경쟁 브랜드보다 압도적인 건 절대로 아니거든.'

경쟁 관계인 벤처와 BWM, 아오디.

롤락스와 오미가.

차나 시계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 보기엔? 둘의 성능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아니, 실제로도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만 다를 뿐, 어느 한쪽의 성능이 확 우월한 것도 아니었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인들일수록 더더욱 한 분야의 대명사격인 브랜드만 잘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거지.'

그게 바로 브랜드의 파워였다. 이번에도 똑같다고 라키엘은 생각했다.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주 소비층이 될 귀족들... 그들이 약에 대해 빠삭하진 않을 거야. 아니, 오히려 거의 아는 바가 없겠지. 그러니까 이런 홍보 방식이 오히려 먹힐 거고. 약의 정확한 성분이나 효과를 따지기보단, 브랜드가 지닌 이름에 먼저 주목할 거니까. 거기에 더 큰 영향을 받을 소비층이니까.'

게다가 미노타우황청심원은? 브랜드빨(?)로만 밀어붙이는 거품이 아니었다. 엄연히 최상급 미노타우로스 우황으로 만든, 엄청난 약효와 더욱 엄청난 부작용(?)을 지닌 약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광고를 해야지. 넉넉한 값을 받을 수 있게. 그러기 위해 훈장 수여식이 필요한 거고."

"하면, 수여식을 최대한 성대하게 치러야겠군요."

"그런 내 마음까지 알아주니 더욱 고맙고."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전하. 하면, 곧바로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시장이 다 알겠다는 듯 말했다. 볼수록 믿음직한 아저씨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배어났다.

"그래 주면 난 더 고마워지는 거고. 이 신세는 잊지 않을 테니까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전하."

...라고 하였던가.

그것이 이틀 전의 일이었다.

실제로 크레모 시장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행사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일찍 치러내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했다. 덕분에 불과 이틀 만에 지금, 훈장 수여식이 치러지게 되었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

광장에 운집한 수천 명의 크레모 시민들이 보였다. 광장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들은 광장 주변 창문마다 옹기종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곳, 단상을 향해 몰려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후아.'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시선을 한몸에 받아본 적이 있던가. 대한민국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거기선 그저 평범한 학생, 더 나이 들어서는 평범한 동네 한의사 아저씨였을 뿐이었으니까. 남달리 주목받을 일이라곤 꿈에도 없을, 흔한 사람일 뿐이었으니까.

'물론 이곳에선... 주목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딱 한 번.

황도의 로이-하비 현수교에서 2황자와 대결했던 때였다. 지금과 비슷하게 수천 명의 인파가 대결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느낌이 달랐다.

'당장 2황자와 어떻게 대결할지 궁리하기에도 벅찼으니까. 거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거든.'

그래서 주위의 시선이고 뭐고 의식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한데 지금은? 그냥 맨정신(?)으로 저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아내게 됐다. 솔직히 좀, 아니,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쫄지 말자, 이한!'

라키엘은 스스로를 격려했다. 이제부터 잘해야 한다. 그래야 미노타우황청심원 홍보가 제대로 된다. 별궁 한의원을 괴롭히는 자금난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흠흠!"

그는 냉철함으로 무장했다. 목을 가다듬으며 앞을 보았다.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온 데미안이 이쪽을 마주하고 있었다. 모처럼 정복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의 뒤에 나란히 선 아니스, 특근대원, 근위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을 지켜주기 위해 개고생을 했던 이들. 오늘 훈장을 받을 수훈자들이었다.

이제, 쇼타임이 왔다.

"데미안 카이엔. 그 외 33인."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마법 구슬을 통해 증폭되었다. 광장 전체에 우퍼 스피커 터지듯 빵빵하게 울려 퍼졌다.

"그대들은 미노타우로스가 난동을 부리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황가의 핏줄을 지켜내고자 분투하였으니, 이에 오늘, 이 자리를 통하여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이름으로 그대들의 공적을 특별히 치하하노라."

준비된 멘트의 포문을 열었다. 데미안과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에게 다가갔다. 모두의 목에 훈장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호화로운 함을 꺼냈다.

함을 열었다.

그 안에 금박 번쩍번쩍한 미노타우황청심원 34개가 2열 횡대로 줄지어 놓여 있었다.

"또한 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그대들의 용기와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특별한 약을 만들었도다."

라키엘은 미노타우황청심원이 담긴 함을 높이 들어 올렸다. 광장의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멘트가 모두의 귓가에 숑숑 박혀 들도록, 더욱 목청에 힘을 주었다.

"그대들은 흉맹하게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에 맞서 싸운 진정한 용사이며 전사. 그렇기에! 미노타우로스의 우황으로 만든 이 특별하고도 강력한! 약을 받을 자격이 있도다."

...웅성웅성?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우황으로 만들었'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런 재료로 만든 약재가 있었나 싶은 의문. 황태자가 하사하는 약이라는 상징성. 이내 서서히 고개를 드는 호기심까지.

'미노타우로스의 뭔가를 넣었으면... 엄청 좋은 약인 건가?'

'아무래도 그럴 거 같은데?'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과연 저걸 먹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 미노타우로스처럼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걸까. 그런 모두의 흥미와 기대감 속에 라키엘의 혓바닥이 더욱 현란한 춤을 추었다.

"이걸 먹는 즉시 그대들의 심장은 한층 강해질 것이다. 혈전이 제거될 것이고, 미노타우로스처럼 지치지 않는 불굴의 체력을 얻게 될 것이다. 타우린을 비롯한 콜릭산, 비타민 D, 진세노사이드, 프로토파낙시디올이 그대들의 혈관에 활력을 주고,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웅성? 웅성?

사람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타우린? 콜릭산?'

'비타민 D가 뭐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한데 그래서 어쩐지 더욱 그럴듯하게 들렸다!

'좋은 건가?'

'엄청나게 좋은 거 같은데?'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뽑아낸 마법의 기운이 아닐까?'

모두의 귀가 쫑긋쫑긋 열렸다. 분위기를 탄 라키엘의 혓바닥이 풀악셀을 밟았다.

"그뿐일까. 지치고 잠들지 못하던 육체에 더없는 휴식과 숙면을 안겨줄 것이다. 그렇게 기운을 차린 그대들은 더더욱 용맹한 영혼으로 거듭날 것이다. 마치 지치지 않는 미노타우로스처럼! 이 약을 먹는 즉시! 그대들은 한층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웅성웅성?

먹으면 용맹해진단다. 끝없는 힘이 치솟고, 지친 몸에 활력까지 생겨난단다.

그러나 라키엘의 멘트 폭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서 멍하니 티브이 틀어놓을 때 나오곤 하던 홈쇼핑 방송 진행자의 멘트를 떠올렸다. 한층 교묘한 멘트를 연타석으로 뻥뻥 날려댔다.

"그렇기에, 오늘 그대들이 이 자리에 오른 사실이 참으로 기쁘도다. 더없이 충실하고 충직한 그대들 덕분에 제국의 시민들에게 이 약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되어 더더욱 기쁘도다. 왜냐. 바로 오늘부터 단 1개월! 1개월 동안만! 이 약을 황태자 수여 에디션이라는 알찬 구성과 착한 가격으로! 시민들을 향한 판매의 문을 열어둘 것이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황태자 수여 에디션? 저토록 특별한 약을 판매할 거라고? 쫑긋해진 시민들의 귓구멍으로 라키엘의 멘트가 쇽쇽 박혀 들었다.

"단돈 9,999마젠! 한정 수량 특가판! 완판 매진 소식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절호의 가격으로! 오직 지금부터 한 달 동안만! 앞으로 다시는 없을 최대 구성으로! 판매할 특별한 상품을! 그대들에게는! 공짜로, 수여하노라."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알릴 것만 딱 알렸다. 상큼하게 멘트를 마쳤다. 그 순간.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려... 9,999마젠이라고?'

'한정 특가판으로 싸게 내놓는 가격이 저렇게 비싸다고?'

'그럼 원래 가격은 얼마나 더 비싼 거야?'

'진짜로 좋은 거 맞나 봐. 그러니까 저렇게 비싸지.'

'그 정도로 좋고 귀하니까... 황태자께서 수훈자들에게 하사하시는 거겠지?'

'당연하지!'

'저런 약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비슷한 생각들.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없을 진귀한 물건. 구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변에 자랑할 수 있을, 선망의 대상이 될 엄청난 명품. 말 그대로 황태자 특별 에디션!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탐욕이 서려갔다.

'아....'

'갖고 싶다.'

'지르고 싶어라.'

마치 홈쇼핑 채널을 돌리다가. 혹은 폰으로 쇼핑 페이지를 둘러보다가. 지름신에 덕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눈빛처럼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그 시선들을 보며 라키엘은 확신했다.

'됐다.'

오늘의 수훈식이, 방금 날린 멘트가, 모두 제대로 먹혔다. 덕분에 행복한 완판 예감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약 홍보만 하고 수여식 행사를 마친다? 그건 너무 아쉬울 터였다. 그의 계획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기왕 행사를 열었으면 뽕을 뽑아야지!'

오늘 챙길 건 다 챙기리라. 못 챙길 것도 주머니에 쑤셔 담으리라. 야물딱진 일념으로 시민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그려둔 계획의 다음 단계를 혓바닥에 올렸다. 힘차게 발사했다.

79화. 명의(名醫) 탄생 (2)

소문은 무섭다.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퍼지는 소식. 그 소식의 진위나 진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 소문이 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현명하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그렇다. 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게 된다.

소문이 첫인상을 만들고, 이후의 이미지를 결정한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때로는 그런 극단적인 예시를 온몸으로 직접 겪는 이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지.'

라키엘은 회한과 한숨이 섞인 탄식을 삼켰다. 떠올릴수록 아픈 기억이 쑴펑쑴펑 돋아났다.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일이었다.

'동네 아파트 단지 카페에... 우리 한의원에 코로나 환자가 다녀갔다는 소문이 쫙 퍼져가지고... 그것도 두 번이나... 어오 씨.'

생각만 해도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다가도 PTSD가 올 것 같았다. 지금도 억울했다.

확진자가 그냥 다녀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두 번 모두, 한의원의 누구도 감염되지 않았다. 격리와 소독, 방역도 철저하게 했다. 말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선 달랐다.

'동네방네 퍼진 소문이 이미지를 만들었지. 코로나 한의원이라는 이미지. 저기 갔다간 코로나 걸릴지도 모른다고. 재수 없으면 감염된다고. 저기 갈 바엔 차라리 약간 더 멀어도 다른 델 가겠다고....'

이미 그걸로 끝이었다.

한번 그렇게 인상이 박히니까. 최악의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니까. 수습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만회는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 빈 한의원. 간판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남았던 저녁. 혼자 소주를 병째 마시며 얼마나 울었던지.

덕분에 그는 소문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소문이라는 게, 홍보라는 게 어떤 영향으로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너무나 잘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어. 그냥? 아니. 오직 내 연설을 듣기 위해서.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황태자의 얼굴을 보겠다고 이렇게나 많이 모였지. 그러니까... 이건 대놓고 깔린 멍석이란 말씀이거든.'

라키엘은 눈길을 들어 광장에 모인 수천의 군중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모두가 조용해진 광장. 황태자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느낄 수도 있었다.

'아마 감동적인 연설을 기다리고 있겠지. 황실은 항구도시 크레모의 번영에 큰 힘을 얻고 있다고. 이러한 번영을 이끌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시장의 노고에 감사하고, 더 나아가 항구와 도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준 그대 시민들의 공로에 가장 크게 고마워하고 있다고. 또한, 뜻밖의 재난 앞에서도 끝끝내 일어서 복구에 매진하는 그대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다고, 어쩌고저쩌고, 여러분이 최고, 블라블라... 뭐, 이런 판에 박힌 정석 멘트들 말이지.'

아마도 그게 연설의 정석이리라. 모두가 그런 연설을 예상하고 있으리라.

덕분에 빙긋, 절로 웃음이 나왔다. 라키엘은 입맛을 촵촵 다셨다. 음성증폭 마법이 걸린 수정구를 잡았다. 이쪽의 연설을 기다리는 광장의 시민들. 그들을 향해 차곡차곡 준비된 멘트를 조정간 연발로 발사했다.

"반갑습니다, 크레모의 시민 여러분. 다들 아시다시피 저는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그리고 또한, 황도에서 성업 중인 별궁 한의원의 원장이기도 하지요."

...술렁술렁?

이쪽의 인사가 예상과 달라서였을까. 모두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라키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오늘 이처럼 대놓고 깔린 멍석. 별궁 한의원을 알리기 위한 최고의 멍석.

'...한의원 홍보는 못 참지!'

이런 기회를 그냥 보낼 순 없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그건 바보다.

모름지기 모든 영업에는 홍보와 광고가 기본이자 핵심인 법. 하다못해 동네에서 오픈한 식당도 알바생까지 써가며 전단지를 돌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노력하는 법.

한데 그런 홍보를 수천 명을 대상으로, 공짜로, 일방적으로 할 기회가 생겼다. 이런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최후의 국물 한 방울까지 뽕을 뽑아야 한다. 모름지기 그게 강호(?)의 도리다.

그러한 일념으로 그는 욕망의 정주행에 피치를 올렸다. 전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 구상하고 달달 외운 멘트를 노골적으로 톡톡 던졌다.

"그렇기에 이렇듯, 모처럼의 자리가 마련된 김에 홍보를 좀 하겠습니다. 황도의 별궁 한의원은 설립된 역사가 깊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각종 탕약과 침, 뜸, 부항 등의 요법으로 다양한 병증을 치료하고, 면역력을 키워 병마에 대항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그래서 혹시나 말입니다. 이곳에 계신 분 중에 별궁 한의원의 소식을 접해본 분이 있을까요?"

운집한 시민들을 향해 뻔뻔하게 물었다. 처음엔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돌아보기만 할 뿐. 그러다가 조금씩, 한 사람씩, 드문드문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교역도시답다. 라키엘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생각보다 제법 있군요. 다행입니다. 혹시나 유명하지도 않은 주제에 이런 말들을 꺼낸 거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별궁 한의원의 원장인 제가 직접 여기까지 왔으니, 그냥 이대로 입만 놀리는 홍보만 하다가 돌아가면 섭섭하겠지요?"

...웅성웅성?

사람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온다.

반응이 온다.

'이쯤에서 낚싯대를 살살.'

흔들어주자. 매혹적으로, 귀가 솔깃해지도록, 떡밥을 살포시.

"그렇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곳 크레모가 어떤 곳입니까? 북해의 가장 아름다운 중심 교역도시, 제국 북부의 심장 같은 곳 아니겠습니까? 한데 그런 이곳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이가 누구일까요? 이곳을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도시로 만드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해야 크레모가 더욱 번영합니다. 크레모가 번영해야 제국이 부강해집니다. 즉, 여러분이 건강해야 제국이 강성해진다는 뜻이고! 여러분의 건강이 제국의 국력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목소리를 교묘하게 드높였다. 때로는 은근슬쩍 낮추었다. 앞줄에 있는 시민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었다.

"저는 여러분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꼭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묻겠습니다. 혹시 여기 모인 분들 중에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아픈 분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주세요. 심한 질환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감기, 몸살, 두통, 치통, 근육통, 신경통, 산후 몸조리 중인데 자꾸 아프신 분, 관절통과 관절염, 상습적으로 배가 더부룩하고 불편한 소화장애까지. 전부 제가, 별궁 한의원 원장인 제가 살펴보아 드리겠습니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술렁임이 한층 커졌다. 저마다 옆 사람을 돌아보았다. 각자가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나 아픈 곳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까 우리 엄마, 요즘 무릎이 시원찮으신데. 고작 그런 걸로 황태자께 진료해달라고 나서도 되는 걸까.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 덕분이었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백만 송이의 장미로 피어났다.

'아이고, 내 복덩이... 아니, 보너스 수명 고객님들.'

고객님들이 고민에 빠져 있다. 그러니 이제는? 슬슬 결정타를 꽂아넣을 때다. 라키엘은 혓바닥에 침을 촵촵 적셨다. 고민하며 망설이던 사람들을 향해 결정적인 멘트를 꽂아넣었다.

"지금 나오시는 분들께는... 100명 한정으로 무료 진료권 쿠폰을 드릴 겁니다."

"...?"

"공짜, 선착순, 시작."

"...!"

그렇게, 완벽한 멍석을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활용한 덕분이었다. 연설을 빙자한 라키엘의 한의원 즉석 홍보와 영업질.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대박. 이게 바로 대박인 거지, 후후 룰루루!'

절로 쾌재가 나온다.

이곳, 항구도시 크레모. 여기에 와선 모든 결과가 대박의 연속이다. 뜻밖에도 공짜(?)로 미노타우로스의 왕을 손에 넣었다. 최고 등급의 미노타우로스 우황도 계속 얻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한의원 홍보 대박까지.

절로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줄 좀 섭시다, 줄!"

"거기! 새치기는 하지 마시고!"

온통 소란스러운 광장.

수많은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흡사 수타박스 카페의 시즌 신상 텀블러나 피크닉 세트가 나왔을 때, 혹은 아이펑 신모델 첫 판매일 아침에 줄을 선 사람들 같았다. 혹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트 1+10 행사를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릴까.

라키엘은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쪽과 마주앉은 사람이 보였다. 크레모의 이름 모를 할머니였다.

"어르신?"

"예, 예에, 황태자 전하."

"소화력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예? 맞습니다, 맞아요. 아이구 용하셔라."

"그건 조금 전에 할머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건데."

"...."

"어쨌건, 이렇게 연세가 들면서 떨어진 소화력을 다시 끌어올리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음식을 되도록 꼭꼭 씹어서 드시고, 식사 전후에 주무시는 건 자제하시고요."

"아이고, 전하의 분부라면 아무렴요."

"그리고 돼지고기, 소고기보다는 해산물과 닭고기를 많이 드세요."

"예에? 그건 왜...."

"그게 체질에 맞으실 겁니다."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방금 해준 말은 사실이었다. 진맥을 해본 결과, 할머니의 체질은 붉은 육류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아마도 미약한 지연성 알러지가 생기며 염증 반응도 생겼을 터다. 덕분에 먹을 때마다 체한 기분이 들었겠지.

거기다가....

"아마 종종 목덜미나 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나며 가려움증이 올라왔을 겁니다. 맞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거, 히스타민이 많은 음식을 계속 먹으면 생기는 알러지 반응이거든요. 숙성된 돼지고기는 되도록 멀리하세요. 아보카도나 바나나, 토마토 같은 후숙 과일이나 채소도 멀리하시면 됩니다. 아, 고등어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덜 먹으면 가려움증이 사라지는 겁니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이건... 뭡니까, 전하?"

"쿠폰입니다."

"예에?"

더욱 동그래지는 할머니의 눈.

라키엘은 겸연쩍게 웃었다.

"오늘 이렇게 즉석에서 진료를 봐 드리느라 그저 진단만 하게 됐지 않습니까. 제가 황도에서 따로 약재를 챙겨온 것도 아니고. 변변한 처방전을 써드리지도 못하게 됐고. 그래서입니다."

할머니의 눈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이 마음이 할머니에게 통하길. 이 진심이 투명하게 닿길.

"이 쿠폰을 가지고 황도의 별궁 한의원에 오시면, 제대로 체질개선 약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공짜로 말입니다. 여기서 황도까지 오가는 교통비, 숙박비까지 전부 지원해드릴 거고요."

"...!"

공짜.

이 세상 어떤 이의 가슴이라도 단번에 촉촉하게 적셔줄 마성의 단어. 할머니의 눈동자도 감동의 물결로 반짝였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이 할머니에게 통했구나. 내 진심이 투명하게 닿았구나.

'영업 성공!'

내심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들었다.

"네, 다음 환자분!"

아니스가 외쳤다. 차착, 할머니가 물러난 자리에 선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앉았다. 사내의 맥을 짚고,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경혈 스캐닝 옵션도 활용했다.

"어깨 관절이 안 좋으시네요? 이만큼, 더 위로 들어 올릴 때마다 이쪽에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오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하?"

선원 사내의 눈도 똥그래졌다. 라키엘의 눈가에 눈웃음이 배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럴 때는... 어쩌고저쩌고해서... 블라블라 하니까, 여기, 이거 받으시죠. 쿠폰입니다."

"...예에?"

스으윽.

진료의 마지막은 언제나 쿠폰으로 장식했다. 즉석에서 수십 수백 명을 빠르게 진료하려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두에게 먹일 어마어마한 양의 탕약 재료를 맞춤으로 마련하기도, 탕약을 달여주기도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침술은 시간이 걸리니 곤란했다.

그렇기에 오늘은 진단만.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싶으면 쿠폰 가지고 별궁 한의원으로 오세요. 대신 황도행 왕복으로 교통비까지 묶어서 서비스 드림. 그러한 영업 전략으로 접근했다.

수많은 시민들을 진맥했다. 정말로 별궁 한의원 방문 진료가 필요해 보이는 이들을 100명까지 선별해서 쿠폰을 지급했다. 그렇게 저녁노을이 질 무렵까지 무려 481명의 시민을 진료해냈다.

실로 쿠폰이 웅장해지는 성과였다.

'좋아. 딱 좋아. 무료 쿠폰을 100장이나 돌렸어. 그러니 저들 중에 10퍼센트만 별궁 한의원에 와주기만 해도? 환자 10명은 확보한 셈인 거야.'

성과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오늘의 무료 진료 행사 덕분에 크레모 시에서 별궁 한의원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다. 한데 이곳 크레모 항구는 북부 최고의 교역도시. 교역도시답게 사람의 왕래가 더없이 활발했다.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리라.

'소문이 배 타고 말 타고 사방팔방으로 번지겠지. 최소 한 달 이내에 제국 북부 전체로 퍼질 거야. 황태자가 운영하는 별궁 한의원. 그걸 모르면 외국 첩자 소리까지 들을걸.'

일단은 무조건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모인다. 성과가 나온다. 기업들이 광고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그래서다.

"후우."

라키엘은 숨을 돌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려 9시간 동안의 폭풍 같은 진료였다.

'너무 무리했나.'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눈이 뻑뻑하고 현기증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오장육부도 온통 아우성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합니다.]

[심장 : 야! 우린 대체 언제 쉬냐?]

[허파 : 허... 파하학... ㅠㅠ]

[대장 : 9시간 무휴식 연속 진료라니, 이 인간 진심 미쳤지 말입니다.]

[간장 : 잔업 수당은? 야근 수당은?]

[위장 : 있겠냐ㅋㅋㅋㅋㅋㅋㅋ 일 시키려면 밥이라도 좀 주라고 아ㅋㅋㅋ]

"...."

사실 이쪽도 힘들다.

말이 9시간 진료지, 저질 체력에겐 엄청난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라키엘은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홍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진료도 끝냈어. 칠 건 다 쳤으니까 이젠 칼 같이 빠져야지.'

그래야 할 타이밍이다.

쿨하게 자리를 떠야 한다. 그래야 홍보의 마무리 인상까지 완벽해진다. 라키엘은 그러한 일념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한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어어?"

...!

역시 무리를 한 탓일까.

일순간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헛구역질이 느껴지며 어지러워졌다. 마음과 상관없이 다리가 풀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끝까지 쿨하게 보여야 하는데. 그러니까 쓰러지는 따위의 모습, 보여선 안 되는데.

하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쿠당!

"...으읏!"

다리가 풀려 쓰러지고 말았다. 꼴사납게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순간, 라키엘은 입술을 와락 깨물었다.

'망했다.'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쌔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다 잘해놓고 마지막에 스스로 재를 뿌리다니.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건강이, 저질 체력인 몸뚱이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뜻밖의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더욱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불과 한나절 사이에 수많은 환자를 성심껏 진료하였습니다. 그 결과, 당신은 과로와 탈력 상태에 빠졌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크레모의 시민들에게 목격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진료해준 끝에 탈진하여 쓰러진 황태자의 모습이 크레모 시민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당신의 진심을 느낍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당신에게 열광합니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의 감동과 추앙, 찬사가 계기가 되어, 당신의 한의술 능력에 새로운 힘이 부여됩니다.]

[명의 포인트 (GDP : Great Doctor Point)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80화. 명의(名醫) 탄생 (3)

[명의 포인트 (GDP : Great Doctor Point) 시스템이 개방됩니다.]

'...어?'

라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온종일 사람들을 진료해준 마당이었다. 그렇듯 멋지게 퇴장하려다가 현기증이 온 상황이었다. 결국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어 버린, 생생한 흑역사 탄생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걸 사람들이 다 보고 말았다.

다 된 밥에 스스로 재를 뿌렸다고. 쿨하고 멋지게 물러나긴 틀렸다고. 그냥 망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한데 이런 뜻밖의 메시지라니.

'명의 포인트?'

이쪽의 의문에 답이라도 주듯, 추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딩동!

[명의 포인트(GDP)는 일종의 명성 수치 개념입니다.]

[명의 포인트(GDP)는 당신이 의료행위를 통해 사회적 명성을 쌓거나, 큰 존경을 얻거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거나, 의료계의 역사에 남을 업적을 쌓을 때만 특별하게 쌓이는 포인트입니다.]

'명성 포인트?'

문득, RPG류의 게임이 떠올랐다. 저런 명성 시스템을 채용한 게임들이 종종 있었다. 명의 포인트도 비슷한 개념인 듯했다.

[오늘, 당신은 한나절에 걸쳐 수많은 환자를 성심성의껏 진료하고 보살폈습니다. 그 와중에 당신은 한 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 과로와 탈력 상태에 빠져 쓰러졌습니다.]

[크레모의 수많은 시민들이 당신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잔잔한 감동을 느낍니다.]

[크레모의 시민들이 진심으로 당신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선행은 앞으로 소문의 힘을 타고 더욱 널리 퍼져 당신의 명망을 드높일 것입니다.]

[101 GDP 를 획득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101]

'101 포인트? GDP?'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인트를 준다니 일단은 기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도 생겨났다.

'명예 포인트라는 거, 좋긴 한데... 그럼 이걸 어디에 써먹는 거지?'

설마 그냥 쌓이기만 하는 생색내기용 포인트인 건가. 그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써먹을 곳이 있어야 제대로 된 포인트지!'

포인트라는 게 그런 법이다. 하다못해 동네 슈퍼나 마트에서 적립하는 포인트도 그렇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알뜰살뜰 쌓아서, 언젠간 원기옥(?) 터뜨리듯 포인트를 쓰는 맛! 그렇게 공짜 아닌 공짜로 먹는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는 얼마나 맛있는지!

'그러니까, 명의 포인트인지 GDP인지 하는 이건 용도가 뭐냐, 대체.'

설마 진짜 생색내기 포인트인 건 아니겠지. 라키엘이 의혹과 불안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딩동!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GDP의 사용법이 안내되었다.

[유능한 의료인은 때로 본심을 숨길 수도 있어야 하는 법! 환자의 고통과 절박함, 그를 통해 느끼는 서글픔과 동정의 마음을 애써 누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할 때도 있는 법!]

[당신은 개방된 GDP 포인트를 활용하여 <거짓말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거짓말 이용권?

이건 또 뭘까.

라키엘은 눈동자를 샤샤샥 굴렸다. 아래쪽에 뜨는 추가 메시지를 재빠르게 읽어내려 갔다.

[거짓말 이용권은 100 GDP로 1장의 수량을 구매할 수 있는 쿠폰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을 사용할 시, 대상은 당신이 꺼내는 하나의 거짓말을 무조건적으로, 영구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은 1회용입니다.]

[거짓말 이용권을 사용할 시, 당신은 이용권의 효과를 받을 대상을 지정해야 합니다.]

[거짓말 이용권으로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은 1회당 1명으로 제한됩니다.]

[거짓말 이용권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짓말은 1회당 한 가지의 거짓말입니다.]

[사용 시 주의사항 : 대상이 신화적 존재, 혹은 그에 근접한 존재일 경우 당신의 이용권 사용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

미친.

이거 사긴데?

보자마자 절로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솔직히 좀 뻥이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진짜였다. 메시지 창에 당당히 떠올라 있는 마지막 내용 때문이었다.

[현재 보유 중인 GDP로 구매할 수 있는 거짓말 이용권 수량 : 1장]

'...진짜네.'

메시지 창은, 시스템 창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건 진짜라고 보아야 한다. 덕분에 입꼬리가 절로 씰룩씰룩 팝핀댄스를 추려 했다.

'대박.'

한 번에 하나의 대상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무조건, 진실로 믿게 할 수 있단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케 해주는 이용권이란다.

'상대방이 신화적 존재만 아니면 돼. 그런데 내가 그런 존재를 만날 일이 없으니까 그런 단점은 패스하고. 이거, 잘만 쓰면... 세상살이 엄청 편해지겠는데?'

잠깐 생각해봐도 그런 결론이 딱 나왔다. 머리를 굴리기에 따라 활용법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잘만 하면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온갖 기행을 벌이고도 무사할 것이다.

'미친 이용권이네, 이거.'

마음 같아선 이게 얼마나 효과를 발휘하는지, 당장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참자. 이용권 한 장밖에 못 사잖아. 그러니까 아껴야지. 어차피 써야 할 순간이 오면 효과도 확인해볼 수 있을 거니까.'

라키엘은 생각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데미안이 이쪽을 부축하며 물어왔다. 갑작스레 풀썩 쓰러진 이쪽 때문인 걸까. 물어오는 목소리 가득 근심이 배어 있었다. 녀석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안 괜찮으면 업고 뛰게?"

"예."

"어디로 뛸 건데?"

"의사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지만... 이렇게 되물으시는 전하의 모습을 보니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예. 다행히."

녀석이 손을 내밀어 왔다. 그 억센 손을 맞잡았다. 천천히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그런데 넌 왜 내가 넘어질 때 안 잡아줬냐?"

"못 잡은 겁니다."

"정말로?"

"예. 너무 갑자기 풀썩 넘어지셔서."

"쓰읍. 아닌 거 같은데."

"정말입니까?"

"어. 못 잡아준 사람 치곤 제법 태연한 기색이라서."

"...들킨 겁니까."

"어. 왜 안 잡아줬냐?"

"더 극적인 홍보를 하실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데미안 녀석이 뻔뻔하게 대꾸했다. 덕분에 어처구니가 증발했다.

"...뭐어?"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또한, 넘어지던 자세와 각도가 제법 안정적이기도 하셨고 말입니다. 전하의 궁둥짝이 은근히 빵빵한 편이셔서. 별반 다치실 일은 없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

"혹시, 어딘가 다치셨습니까?"

"어."

"어딜 다치셨습니까?"

"내 마음."

"...."

"후우. 내가 이런 놈을 호위라고."

"그래도 전하께서 진짜 위험에 노출되셨을 때는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차라리 안정적인 봉급줄을 지키려 노력한다고 하지 왜."

"그건 당연한 거고 말입니다."

"...."

"어쨌건 결과적으로는 지켜드릴 거니까."

"허허."

이놈 보소.

하지만 라키엘은 데미안은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녀석의 대꾸에 웃음만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뭐, 말은 저렇게 능청스럽게 하지만...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 줄 녀석이니까.'

그날 밤이 그랬다. 우루스의 습격을 받았던 날 그러했다. 자신이 어떤 위험에 빠져도, 설령 다치는 일이 있어도, 이쪽부터 지켜주려 들었던 녀석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녀석의 능청스러운 대꾸에도 웃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매운 반격까지 감행(?)할 수 있었다.

"쓰읍. 감히 황족을 면전에서 능멸해?"

"혹시 사형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어."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왜."

"제가 없으면 누가 전하를 지켜드립니까?"

"아니스, 세르지오, 그 밖에도 특근대원들도 있고. 근위기사들 많잖아."

"...."

"너 특별한 거 아니거든. 착각하지 말고. 자만하지도 말고. 어? 좀 분발하자?"

"...."

데미안의 표정이 썩어갔다. 라키엘의 눈웃음이 흐뭇해졌다. 그렇게 녀석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을 내려왔다. 단상 아래에는 어느새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출발하시려는 겁니까, 전하?"

마차 옆에서 기다리던 크레모 시장이 물어왔다. 시장 역시나 이쪽이 염려스러운 기색이었다.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겸연쩍게 웃고 말았다.

"잠깐 다리가 꼬여서 엉덩방아를 찧은 거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

"하오나 전하? 그래도 가급적 하룻밤 정도는 푹 쉬고 출발하심이...."

"괜찮아. 가는 동안 마차에서 자면 돼."

"침대보단 덜 편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한텐 똑같아."

정말이다.

학생 때부터 전철, 버스에서 자던 습관이 있으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풀숙면 모드로 자다가도 내릴 정거장을 앞두면 자동으로 눈이 번쩍 떠지는 그런 패시브 스킬 같은 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으니까.

"마차에서 자는 게 얼마나 편한데. 어쨌건 여기서 머무르는 동안 신세 많았어. 오늘 수여식 행사도 좋았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여전히 이쪽을 걱정하면서 배웅하는 크레모 시장.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물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차에 올랐다. 그제야 쌓인 피로가 한숨처럼 훅 흘러나왔다.

"...후아."

덜컹덜컹 출발하는 마차. 그 뒤를 다각다각 따르는 특근대와 근위대. 다시 그 뒤를 쿠쿵쿠쿵 따르는 우루스까지.

일행이 출발했다. 광장을 벗어났다. 크레모의 명물이라는, 어쩐지 야비한 인상의 로이드 프론테라 동상을 지나쳤다. 관문을 통과하고, 도시를 떠났다. 다사다난했던 여정을 매듭짓는 출발이었다.

그렇게 덜컹덜컹, 다각다각, 쿠쿵쿠쿵. 순조롭게 이동하는 동안 라키엘은 마차에서 풀 숙면을 취했다. 일행을 스쳐 가는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을 지나. 풀숲 우거진 아침 가랑비를 헤치고. 시원하게 흐르는 강과 다리를 건너. 밤이슬 떨어지는 들판을 거닐듯 내달려. 여덟 번의 떠오르는 해와 석양을 눈썹달 가득 담았다. 한밤의 별빛 아래 은하수보다 환히 빛나는 불야성의 도시에 도착했다.

황도 마젠타로의 귀환.

크레모에서 출발한 지 여드레만의 도착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황도에 도착했으되, 별궁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귀환 소식을 듣고 달려나온 황도 관문의 당직 장교가 전한 황명 때문이었다.

"결전! 황도 방위군 6보병연대 2대대 1중대장, 미카르도 중위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처척, 중위가 절도 있는 경례를 했다. 이쪽 일행에 끼어 있는 우루스를 보며 긴장하면서도, 선뜻 황금색 봉투를 내밀어 왔다.

"이건?"

"황제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황명입니다, 전하."

"폐하께서?"

"예, 그렇습니다!"

"...."

황제 그 양반.

이쪽이 돌아오자마자 뭔가를 시키려는 건가. 그래서 관문에 이런 황명을 맡겨둔 건가.

'쓰읍. 찜찜한데.'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황명이 담긴 봉투를 받았다. 황명은 심플했다.

[황태자는 황도에 돌아오는 즉시 입궁하여 짐을 찾아올 것. 이상.]

"...."

더 찜찜해졌다. 황도에 오자마자 자길 찾아오라니.

'쌔한데.'

황제는 결코 호락호락한 양반이 아니다. 속에 사자 갈기 휘날리는 능구렁이 백만 마리를 품은 자다. 한데 그런 황제가 이쪽을 부른다는 건?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다.

'그냥 얼굴이나 보자고 부를 양반은 아니지.'

하지만 황명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 라키엘은 마차를 황궁으로 돌렸다. 그리고 내심 다짐했다. 황제가 이상한 걸 시키거나 선을 넘으면?

...거짓말 이용권, 확 써 버릴 테다, 라고.

81화. 황제라는 이름의 아버지 (1)

문득, 옛 생각이 난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 때문에? 마법으로 밝힌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때문에? 그 사이를 지나치는 덜컹거림이. 약간은 서늘하면서도 눅눅한 밤 공기가. 긴 하루를 마치고 어딘가로 돌아가는 조금은 노곤한 기분이. 그런 모든 감각이 기억의 한 자락을 자꾸만 간질여서?

모르겠다.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잠깐 졸았나.'

아무래도 크레모에서 황도까지 돌아오는 긴 여정이 피곤했던 건가 보다. 여드레 내내 마차에서 지겹도록 잠을 잤는데. 또 졸았던 건가 보다. 마치, 그 시절처럼.

'고3 때 생각나네.'

원래는 학교 근처에 집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그랬었다. 한데 3학년 1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집이 이사를 했다. 부산 대연동에서 해운대로. 당시 그쪽엔 전철도 안 뚫려 있었다.

버스로는? 지금도 기억 속 생생한 40번, 109번 버스. 그걸 타고 등교하는 데에만 무려 1시간 반이 걸렸다. 하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야자를 마치자마자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밤 12시가 다 되어 있곤 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굴러가던 버스 바퀴 소리. 밤거리를 밝히던 누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그 사이를 내달리던 덜컹거림이. 약간은 서늘하면서도 눅눅하던 밤 공기가.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나날의 노곤함이.

매일이었다.

피곤했다.

그땐 그게 참 지겨웠다.

'그래서 거짓말... 많이 했지.'

선생님한테는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늦어진다고, 학원이 집 근처에 있다고, 야자를 다 하고 가면 학원에 늦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부모님께도 거짓말을 했다. 야자 잘 하고 있다고. 그거 마치고 오니까 이렇게 늦는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야자를 빼먹었다. 야자시간만큼 놀다가 집에 가곤 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날도, 그랬다. 그래서 연락을 늦게 받고 말았다.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느라고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그래서였다. 뒤늦게 연락을 받았을 땐, 모든 게 너무 늦은 뒤였다.

"...쯧."

그만 생각하자.

라키엘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황제가 이쪽을 부른 마당이다. 그 깐깐하고 까칠한 양반이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른다. 그러니 괜히 우울해지는 상념에 빠지지 말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전투태세를 갖추자.

나름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입궁을 마쳤다. 마차에서 내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하. 이쪽으로."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시종장의 뒤를 따라갔다. 수많은 복도와 계단, 모퉁이를 지나쳐 알현실에 도착했다. 한밤의 알현실은 비어 있었다.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겨우 2, 3분쯤 있었을까. 알현실의 반대편 문이 열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러나 자주 마주치고는 싶지 않은 장년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황제였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자 지배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습니다."

"...."

얼굴을 보자마자 기계적으로 예를 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화답은 없었다. 황제는 대꾸조차 없이 이쪽의 앞을 쌩하니 지나쳤다. 상석에 앉아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았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해보라는 눈빛.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무감정한 눈동자.

꿀꺽.

절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난감하고, 곤혹스러웠다.

'저 양반, 또 이런 식이네.'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사람을 다짜고짜 불러놓고선. 그래놓고 할 말이 있으면 먼저 해보라는 저런 태도라니.

'보통은 부른 쪽이 용건을 꺼내는 게 정상 아닌가?'

막말로 이쪽은 황제가 무슨 용건으로 부른 건지 감도 안 왔다. 그런데 다짜고짜 저러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해졌다.

일부러 기를 죽이려고 저러는 거겠지. 라키엘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상황이 애매할 때는 일단 지켜보는 게 상책. 그렇게 판단하며 황제의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결국,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짐이 하나 묻자꾸나. 크레모에서의 너는 어찌하여 그토록 무책임하고 무능한 대응으로 수행원들로 하여금 고초를 겪게 하였느냐?"

"...."

역시 이거였구나.

크레모에서의 일을 추궁하려고 부른 거구나. 그런데, 무책임하고 무능했던 대응이라니. 그날의 어떤 행동을 가리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

황제의 날카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느냐. 미노타우로스가 시장 관저를 습격하였노라 들었다. 맞느냐?"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 네가 그 상황에 휘말려 목숨이 경각에 달하였다고도 들었다. 그것 또한 맞느냐?"

"역시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기에 이렇듯 묻는 것이다. 너는 그날, 왜, 더 신속하게 도망치지 못하여 너를 지키려던 수행원들을 쓸데없는 위험과 고초에 시달리게 하였느냐."

"그건...."

"나름 최선을 다하여 피신하였노라 변명하고 싶겠지. 하지만 틀렸도다. 너는 위험이 닥치기 전에 미리 몸을 피했어야 했다. 그 위험조차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였어야 했다. 모든 환경이 안전한 황도를 떠나 미지의 장소에 가 있는 처지라면, 자신이 지닌 황태자위의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었더라면, 만사에 그러한 대비를 마땅히 하였어야 했도다."

"...."

"하지만 너는 그렇지 못했지. 황도에서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마음가짐으로 타지의 생활에 임하였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위험을 예견하지 못하였고, 미리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너를 수행하는 이들을 크나큰 고난과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었다."

"...."

이 아저씨,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런데 정작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해주는구나. 조금은 억울했다. 뭐라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의 날카로운 꾸중과 설교가 먼저 이어졌다.

"너는 장차 짐의 자리를 물려받아 수백만의 제국 백성을 보듬고, 이끌고, 품으며,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한데 일신의 사소한 대비를 소홀히 하여 고작 수십 명도 되지 않는 수행원을 쉽사리 위험과 고난에 빠뜨렸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느냐."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굉장히, 억울하다. 한데 어쩐지, 반박할 말이 딱히 없다. 듣고 보면 황제의 꾸중이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이번의 일을 깊이 반성하고, 너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를 스스로 돌이켜 앞으로의 양분으로 삼거라. 그리하여 이후 다시는, 같은 실책을 반복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폐하."

"더 할 말은?"

"있습니다."

냉큼 대답했다. 황제의 말이 전부 맞는 말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렇게 순순히 숙이고만 끝내긴 싫었다. 뭐라도 맞딜(?)을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될 거니까.'

원래 기세 싸움이라는 것이 그렇다. 한번 고분고분 숙여 버리면? 그걸로 관계가 고정된다. 한번 고정된 관계나 힘의 균형은? 흔들거나 바꾸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하물며 그 상대가 황제라면 더할 것이다.

'계속 일방적으로 질질 끌려다니기 십상이겠지. 그러면 안 돼. 조금이라도 받아치는 모습을 보여야 해.'

그래야 앞으로가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리라. 라키엘은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의 의표를 찔렀다.

"폐하의 말씀을 새겨듣겠습니다. 하여 저도 감히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여쭙고 싶은 일?"

"그렇습니다."

"말하도록."

"예, 폐하. 감히 여쭙건대, 혹여 제가 일전에 당부드렸던 연초 끊기에는 성공을 하시었는지요?"

"...뭐?"

황제의 눈썹이 꿈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 연초를 끊으시었는지 감히 여쭈었습니다."

"...."

이번엔 황제의 입이 다물렸다.

뜻밖의 의표를 찔린 걸까. 그렇다면 더 흔들자. 라키엘은 반격(?)에 박차를 가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초는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 하시어야 보다 건강하게 국사를 돌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조금 전에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폐하께서야말로 수백만의 제국 백성들을 보듬고, 이끌고, 품으며, 책임지고 계시지 아니하겠사옵니까?"

"허어. 그건...."

"하오니 연초만큼은 무조건! 멀리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건강이 곧 황가의 안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다. 괜히 기세 싸움을 하겠다고만 하는 소리 또한 아니다.

'실제로 황제는... 지나친 흡연과 스트레스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니까.'

문득, 원작 마검황 속의 스토리가 떠올랐다. 황태자 라키엘이 죽은 후였을 것이다. 황제의 흡연이 한층 늘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검을 손에서 놓고, 종일 연초를 찾곤 했다. 그리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래서였다.

'무조건 금연을 시켜야 해.'

금연에만 성공해도 뇌졸중이 생길 확률이 엄청나게 내려간다. 내가 고3이었던 그날 쓰러지셨던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그렇게 허물어졌던 우리 집처럼 되지 않으려면. 황제가 무조건 연초를 끊어야 한다.

그래야 제국이 다가올 전란에 휩쓸리지 않는다. 황가가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편해진다. 라키엘은 그러한 일념으로 충언을 이어갔다.

"흔히들 흡연이 가정을 흔들고 사회를 무너지게 한다고 호들갑을 떨곤 합니다. 지금 드리는 제 말씀도 그렇게 들리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호들갑이 아닙니다. 과장도 아닙니다. 폐하께서 쓰러지시면 황가가 흔들리고, 제국이 무너질 것입니다. 이는 명백히 실질적으로 닥쳐올 수 있을 미래이며, 현실입니다."

"...."

"하오니 연초, 반드시 끊으시어야 합니다, 폐하."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그 순간, 황제가 뜻 모를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연초라면 이미 진즉 끊었다만."

"예?"

"진즉 끊었노라 하였다."

"...정말이시옵니까?"

"당연하지."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전의 그날, 네가 감히 잔소리를 하였던 날부터 끊었도다."

"...."

"하면 다른 할 말은?"

"...없습니다."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찼다.

역시나 황제 이 양반,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금연에 성공하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행여나 또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하오면, 더 내리실 말씀이 없으시면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한데 말이다."

"예?"

"마법이 깃든 환상종의 먹이를 함부로 먹지는 말거라. 그토록 삽시간에 덩치가 커지는 것이 결코 몸에 좋을 리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

설마 이쪽이 빨간 해바라기 씨를 먹은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러면 둘러댈 여지도 없겠구나. 그나마 또 다른 책망을 듣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라키엘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알현실에서 물러났다.

그가 떠난 알현실이 고요해졌다. 그곳에서 황제 아스테리온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허허... 허허허."

흐뭇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아들의 모습이 뿌듯했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의 꾸중 앞에 감히 아무런 대답도 못 하였을 아들이, 숨도 마음대로 못 쉬었을 아들이, 이제는 연초를 끊었느냐며 감히 고개를 빳빳하게 들던 모습이라니.

'너는 이 아비가 그렇게도 염려가 되었던 것이더냐. 허허, 허허허!'

흡족했다.

더없이 대견했다.

크레모에서 느닷없이 위험에 맞서야 했던 아들의 행적이. 그 끝에 괴수인 미노타우로스를 길들였다는 성과도. 무엇보다, 저렇듯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더없이 흐뭇하고, 뿌듯하고, 행복했다. 이것이 황제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소소한 기쁨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더 응원해주고 싶었다. 아들의 등에 더욱 튼튼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하면, 저 아이가 개발한 신약에 대한 건은?"

황제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잠시 후, 알현실 한쪽의 그늘 속에서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명하신 대로 황가의 정보 역량을 총동원하여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소문을 널리 전파하는 중이옵니다."

"결과는?"

"제국 영토의 가장 변두리에 자리한 귀족이라도,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게 될 것이옵니다."

"좋군, 좋아."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

그의 미소가 더욱 흐뭇해졌다.

82화. 황제라는 이름의 아버지 (2)

흐뭇해진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 오랜만에 반겨주는 목소리.

"...즈어어어언하아-!"

가르딘 경이 오열하며 뛰어나왔다. 심지어 구두 한쪽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그런 사실도 모르고서 양말 바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라니.

"워워. 뚝! 정지!"

설마하니 저 기세 그대로 뛰어와서 와락,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소름 끼치는 상황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재빨리 가르딘 경을 말렸다.

다행히(?) 경에게도 이성의 끈이 흔적이나마 남아 있었던 걸까. 이쪽과의 거리를 1미터 남겨두고서 급브레이크를 밟듯 멈춰 섰다.

그리고 또 절절히 외쳤다.

"즈어어어언하아아-!"

"...어오, 귀 터지겠다."

"저어어언하아!"

"누가 들으면 나 죽은 줄 알겠네."

"하지만, 저어언하!"

"그렇게 내가 반가워?"

"아뇨!"

"...."

가르딘 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데 그 몰골(?)이 참으로 초췌했다. 잠깐 3주쯤 못 본 것뿐인데, 잘생긴 얼굴이 홀쭉해졌다. 눈가엔 다크써클이 덕지덕지였다.

"가르딘 경?"

"예, 전하!"

"혹시 뭐 잘못 먹었어? 안색이 왜 그렇게 어두워?"

"일이 너어어무 보람차서 말입니다!"

"보람?"

"예!"

"어떤 보람?"

"전하께서! 한의원의 저 많은 입원환자들을 저한테만 홀라당! 다 맡기고 가셨거든요! 어허허허허!"

"...."

아 참. 그랬지.

그래도 가르딘 경은 나름 자신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던 듯했다. 아니,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노력했던 것인지도.

라키엘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서 그동안 혼자 고생이 많았겠구만?"

"그럼요!"

"그래서 내가 돌아온 게 반가워?"

"예, 전하!"

"이제부터 탱자탱자 쉴 수 있는 꿀 같은 나날이 펼쳐질 거 같고. 막 희망의 분수가 쑴펑쑴펑 솟구치고. 그런 거야?"

"아무렴요!"

"정말?"

"...."

"진짜?"

"...크흑!"

다시금 터지는 가르딘 경의 눈물보. 하지만 저 모습이 가식이라는 걸 안다. 그저 반가워서. 이쪽이 무사히 돌아와 줘서. 그 사실이 다만 기쁘고 즐거워서. 한데 그걸 말하자니 조금은 쑥스러워서. 일부러 저러고 있음이 느껴지는 걸 어찌할까.

라키엘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쨌건, 내가 없는 동안 자리를 잘 지켜줘서 고맙고."

"...예, 전하."

"과로 때문에 원기가 상한 것 같으니까 이따 약이나 한 첩 지어줄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하."

"쯧. 괜찮긴. 볼이 쑥 들어갔구만. 그나저나, 크레모에서의 일은 들었지?"

"예, 전하.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그런데 어떡하나."

"예?"

"이젠 더 놀라게 될 거 같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르딘 경.

그 순간이었다.

"...누우?"

돌연,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과 가르딘 경을 뒤덮었다. 경에게 재빠르게 접근했다. 커다란 혓바닥을 내밀었다.

할짝?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넙데데한 혓바닥이 가르딘 경의 상의를 홈빡 적셨다. 하지만 가르딘 경은 놀라지 않았다. 기겁하거나 자지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우루스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갸웃.

"...전하?"

"어."

"저, 혹시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까?"

"응? 왜?"

"이상하게 헛것이 보여서 말입니다. 그것도 엄청 실감나게."

"아, 그거 헛것 아닌데."

"헛것이 아니라구요?"

"응."

"저게요?"

"어."

"진짜로 말입니까?"

"당연히. 인사해. 얘 이름은 우루스고, 안 물어."

"...끼야아앙갸아!"

"쯧. 별로 안 놀랐으면서 호들갑은."

"들켰습니까?"

"어. 티 나잖아. 내가 미노타우로스를 길들여서 데리고 온다는 소식도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던데. 그거 다 들었을 거면서. 그나저나, 내가 없던 사이에 별다른 일은 없었나?"

"별일 없었습니다. 다행히 응급환자나 중환자도 없었고 말입니다. 아, 하나 있긴 합니다."

가르딘 경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최근, 그러니까 어제쯤부터 말입니다. 별궁 한의원에 이상한 문의가 자꾸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상한 문의?"

"예, 전하. 자꾸 있지도 않은 약을 사겠다고... 귀족들이 난리가 났지 뭡니까."

"약이라면?"

설마.

라키엘은 미간을 좁혔다. 혹시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벌써? 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가르딘 경이 말했다.

"예, 미노타우황청심원 말입니다. 전하께서 개발해서 팔겠노라 일찍이 밝히셨던 새로운 약 말이지요. 한데 그거, 어떻게 만드셨길래 벌써 전국 각지에 소문이 쫙 퍼진 겁니까?"

"전국에? 소문이?"

"예, 전하."

"쫙 퍼졌다고? 벌써?"

"예."

"...허허, 허허허."

이거 실화인가.

이쪽이 크레모에서 훈장 수여식을 벌인 게 겨우 8일 전인데. 설마하니 고작 그 사이에,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소문이 제국 구석까지 싹싹 퍼졌다고?

'그게 가능해?'

라키엘은 믿기지가 않았다.

나름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서 수여식까지 벌이긴 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소문이 슬금슬금 퍼지게 될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물론....

'그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소문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퍼진 듯했다. 얼떨떨해질 지경이었다. 한데 확인해보니 사실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의원 원장실의 책상이 온통 전국 각지에서 전서구에 실려온 문의 편지로 점령(?)되어 있었다. 미노타우황청심원을 구매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경쟁적으로 보낸 편지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의원에 돌아온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별궁 앞이 북적북적해졌다.

"...저게 전부 귀족가에서 보낸 심부름꾼들이라고?"

"예, 전하."

"그러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 있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전하."

"후아."

아닌 게 아니라, 별궁 관문 밖에 줄이 가득했다. 그걸 보자 실감이 확 났다. 짜릿한 보람 또한 쑴펑쑴펑 샘솟았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 서는 맛집 사장 기분이 이런 건가.'

대한민국에서 한의원을 할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여기에 와서야 비로소 영업 대박의 하루를 체험해보는구나.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줄 선 순서대로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때부터였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예약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구매를 희망하는 고객은 대부분이 귀족이었다. 혹은 부유한 평민 상인도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비싸게 파는 물건이니까.'

미노타우황청심원. 이건 싸게 박리다매를 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우루스가 뱉어준 최상급 우황으로 만들 수 있는 약재의 수량에 한계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그걸로 판매를 하면서 버텨야 하니까.'

다음 우황이 만들어지고, 그걸 우루스가 뱉어줄 때까지는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1년 동안 판매할 수 있는 수량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한정적인 수량을 최대한 비싸게 팔 꼼수를 발휘했다. 그것은 고급 패키지화였다. 올해 1년 동안 판매될 미노타우황청심원 제품만의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본격적인 패키지화를 시도했다.

[미노타우황청심원 - 황태자 Edition (제국력 987년산 / First Year Special)]

...이라는 이름 아래, 꿀에 절인 당절임 홍삼 세트와 자잘한 약재 이것저것을 덧붙였다.

'물론 그냥 파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포장도 퍼스트 이어 스페셜답게 은박 금박 빵빵하게 입혀서!'

원래 패키지라는 것이 그렇다. 특별 한정판이 그렇다. 명절 선물세트만 봐도 뻔하다. 마트에서 따로 평범하게 사면 몇천 원밖에 안 될 물건들이, 설날 추석 선물세트로 묶이는 순간 가격이 배로 뛰어오르는 기적(?)을 선보이곤 한다.

하지만 팔린다. 이상하게도, 진짜로 팔린다. 그때에만 팔리는 물건이니까. 구색을 갖추기 위해 사는 품목이니까. 게다가 이건 다른 것도 아닌 퍼스트 이어 스페셜. 즉, 브랜드의 론칭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첫해 한정판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통한다는 거지!'

라키엘은 확신했다. 그 확신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예약이 말 그대로 폭주했다. 겨우 이틀 만에 1년 치 판매 예약분이 전부 완판되었다!

'...실화냐!'

진짜로 실화였다.

한정판이 주는 위력이었을까. 귀족들이 더욱 열성적으로 구매 경쟁을 벌였다. 황태자가 직접 만들어서 파는 약이라는 상징성. 고급 명품 한정판이라는 이미지. 그런 명품을 제때에 갖추지 못하면 유행에 뒤떨어질 거라는 조바심까지.

덕분에 라키엘의 입이 귀에 걸렸다.

'돈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는 신이 나서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제조했다. 다만, 예약을 받은 물량을 한꺼번에 모조리 제조하진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별궁 한의원의 입원 환자, 내방 환자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쉬는 시간을 줄여가며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만들었다. 자연히 생산량이 감질맛(?)나게 조절되었다. 한데 그게 또 의도치 않은 대박을 불러왔다.

"저기, 전하?"

"음?"

"또다시 귀족들의 문의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문의? 무슨 문의?"

별궁 오전 진료를 마치고 모처럼 한숨을 돌리려던 때였다. 가르딘 경이 헐레벌떡 뜻밖의 사실을 알려왔다.

"그러니까, 으음, 미노타우황청심원에 대한 문의입니다."

"그거 이미 1년 치 예약 끝났잖아. 다음 시즌 예약 때 접수하라고 해."

"아,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이미 예약해서 대기번호를 받아놓은 귀족들의 문의가 계속 들어오는 중입니다."

"...무슨 문의길래."

"그게, 웃돈을 드릴 테니 예약번호를 앞당겨줄 수 없느냐는 문의가 대부분이지 말입니다."

"허허?"

이어지는 가르딘 경의 말은 이러했다. 지금 황도의 귀족들 사이에 난리가 났단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예약을 걸어놓고도 곧바로 약을 받지 못하니, 귀족들의 조바심이 아주 천장을 뚫을 기세란다.

"게다가 빠른 순번으로 약을 받은 몇몇 귀족들의 체험담이 입소문으로 퍼지는 중입니다."

"입소문? 뭐라고 퍼지고 있길래?"

"이틀 전에 귀족원의 트레카 후작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는데, 미노타우황청심원을 먹고서 기력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허허, 협심증이 해결된 건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약을 먹은 이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단잠을 이루었노라고, 평생 그렇게 개운하게 잠을 잔 적은 처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퍼뜨린다고 합니다."

그런 덕분이었다.

명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경쟁적 환상. 거기에 실제로 약빨(?)을 체험한 이들의 극찬까지. 덕분에 예약이 완판됐는데도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인기가 더욱 치솟았다.

그런데 생산량은 여전히 적었다. 그래서 뜻밖의 이미지가 붙었다. 오래 기다려서라도 구매하는 약. 딱, 그런 식의 프리미엄 이미지였다.

'이거, 완전 허니빠다칩이네.'

문득, 한국에서 한때 광풍을 몰고 왔던 과자가 떠올랐다. 기다려서라도 사는 제품. 그것만으로도 인지도가 쑥쑥 올라가는 그런 제품. 그게 지금 미노타우황청심원이 받고 있는 효과였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케이스가 더 있긴 했지. 1년이나 대기를 해야 받을 수 있다는, 자동차계의 허니빠다칩인 뽈보라든가. 혹은 매장 오픈하자마자 달려가서 대기번호 받아야 한다는 롤락스 시계라든가.'

어쨌건 좋은 현상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완판남의 기분을 만끽하는 며칠을 보냈다. 한의원의 자금이 차츰 빵빵해져 갔다. 환자들의 진료도 순조로웠다. 보너스 수명도 쏠쏠하게 챙겼다. 모든 것이 완벽한 며칠이었다. 절로 행복해지는 시간이었다.

이대로만 모든 것이 흘러가면 좋겠다고. 황태자로서의 꿀 빠는 삶을 만끽하게 되리라고. 희망찬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한데 그렇게 지낸 지 열흘째. 뜻밖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것은 바로 가르딘 경이 전해 온, 황제의 부름이었다.

"뭐? 또 입궁하라고?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쯧."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렸다. 아침부터 대뜸 입궁을 하라는 황제의 전언이라니. 덕분에 계획했던 하루 스케쥴이 시작부터 다 꼬이게 생겼다. 하지만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마차 준비시켜줘."

진료용 가운을 벗었다. 알현을 위한 정복을 갖추었다. 마차에 몸을 싣고 황궁으로 들어갔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알현실로 갔다. 그동안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이번엔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부르는 걸까.'

황제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조금만 실수해도 그걸로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자다. 그러니 매사에 철저하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각오를 다지며 걸었다.

한데....

'이쪽은 알현실이 아닌데?'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시종장이 안내하는 복도가 평소와 달랐다. 익숙한 알현실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황궁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뭐지.

진짜 제대로 뭔가 탈탈 털어보려고 각 잡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라키엘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기다리는 곳에 도달했다.

"이쪽입니다, 전하."

천천히 열리는 문. 저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황제. 그 양반은 오늘 어떤 까칠한 태도로 곤혹스러움을 안겨줄까. 마음의 각오를 새기려던 순간.

"...어?"

라키엘은 멈칫하고 말았다.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열린 문 안쪽.

그곳에 황제가 누워 있었다. 새하얀 시트에 감싸인 모습으로. 한쪽 얼굴 근육이 온통 뒤틀어진 모습으로.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서 무력하게. 그러니까 저건, 너무나 전형적인....

'...뇌졸중?'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83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1)

'뇌졸중이... 뭔데요?'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앉던 순간, 십수 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왔는데. 이제는 세월이 흘러 희미해졌노라고. 그때의 상처는 흐려진 흔적으로만 남았노라고. 그러니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더는 그때가 괴롭지 않다고.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속여왔는데.

지금, 이렇듯, 어찌할 도리조차 없이, 그날의 기억이 강제로 떠오르고 말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던 날. 그 연락을 뒤늦게 받았던 순간. 그날의 한심했던 내 모습. 너무나 후회되는 내 행동. 잔인하도록 선명하게, 그렇기에 하염없이.

'젠장.'

그때가 생각났다.

엄마한테 전화가 몇 통이나 왔었던가. 하지만 몰랐다.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날의 피씨방이 유독 소란했던 탓도 있었다. 그날 어쩐지 게임이 너무 잘 됐던 탓도 있었다. 아니, 그보단 내가 한심한 탓이 제일 컸다.

뒤늦게야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자하느라 몰랐다고. 폰을 무음으로 해뒀었다고. 전화가 와도 알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준비하고서 전화를 걸었던가.

하지만 엄마가 전화를 받았던 그 순간. 낯설게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 차곡차곡 준비했던 새빨간 거짓말이 새하얗게 흩어지고 말았더랬다.

아빠가 쓰러지셨다고. 지금 병원이라고. 뇌졸중이라고. 그래서 무심결에 엄마에게 되물었던 첫 마디가 저거였다.

뇌졸중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는 뛰고 있었다.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한테 뭐라고 대답했는지. 택시를 어떻게 잡고 뭐라고 말을 했는지. 지금도 잘 생각이 나지가 않았다.

다만 아직껏 확실한 기억이 하나 있다. 새하얀 병원 침상에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한데 그 모습이, 마치, 꼭.

'뭔데. 황제 당신, 어째서 그때 우리 아버지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라키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입술을 독하게 깨물었다. 저릿한 통증이 과거의 기억을 몰아냈다. 기억이 던져주는 더욱 저릿한 후회를 걷어냈다.

'정신 차려, 등신아. 지금이 옛날 기억이나 떠올리며 질질 짜고 있을 때냐.'

스스로를 다그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러자 비로소 상황이 제대로 보였다.

황제가 쓰러졌다.

한눈에 봐도 원인을 알겠다. 황제의 한쪽 얼굴 근육이 온통 뒤틀어져 있다. 의식조차 차리지 못하고서 무력하게 누워 있다. 몸의 자세도 어딘가 균형이 맞질 않고 부자연스럽다. 몸의 근육도, 근육을 잡아주는 신경 신호도 죄다 틀어졌다는 뜻이다.

'뇌졸중. 중풍(中風).'

라키엘은 시종장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건, 이쪽이 대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하옵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러나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장년인 하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장년인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의 주치의, 파사로가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지금은 복잡한 인사보다는 상황부터. 폐하께서 쓰러지신 지는 얼마나 됐지?"

"그게,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뭐?"

라키엘은 멈칫했다.

하룻밤이나?

"그럼, 원인은?"

"그것이...."

"원인은?"

"그것이... 어제저녁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폐하께서 이상하도록 술에 많이 취하셨습니다."

"술에 취해? 이상하도록? 그게 무슨 말이지?"

"폐하께서는 와인 한 잔을 마셨을 뿐이셨습니다. 한데 만취한 모습을 보이셨지요. 혀가 꼬인 듯 말이 어눌해지고, 걸음을 비틀거리셨습니다. 하여 일찍 휴식을 취하실 것을 권하여드렸습니다."

"...."

"그렇게 폐하께서는 침소에 드셨습니다. 한데 오늘 아침에 보니...."

"이렇게 되어 계셨다고?"

"예, 전하."

"...."

라키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들어보니 알겠다. 아무 이유 없이 만취한 듯한 증상. 말이 어눌해지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전형적인 뇌졸중 증상이잖아.'

한데 이 주치의는 그걸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황제의 컨디션이 나빠진 탓이리라고. 넘겨짚으며 휴식을 권했다. 그렇게 황제가 침소에 든 사이. 뇌졸중 초기에 대처할 수 있을 생명 같은 골든아워가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은 화를 낼 시간조차도 아까운 때다. 문제의 해결이 우선이다. 그는 재차 물었다.

"하면, 아침에 황제 폐하를 발견한 뒤로는 어떤 조치를 하였지?"

"우선 폐하의 상태를 진단하였습니다."

"진단 결과는?"

"극심한 두통에 따른 심각한 마비 증상이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 하여 제가 지닌 약을 조합하여 처방을 하였습니다."

"어떤 처방?"

"주로 두통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약을 조합하고, 근육의 마비증 해소에 탁월한 효과를 지닌 약초를 혼합하였습니다."

"그게 끝인가?"

"물론 더 있습니다, 전하. 뜨거운 물을 적신 수건으로 폐하의 팔다리 근육을 찜질하였습니다. 그런 덕분인 듯합니다."

"덕분이라니?"

"폐하의 얼굴 뒤틀림이 심해지던 것이 차차 멈추었고, 더 악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처방과 조치로는 부족하다. 너무나 많이 부족하다. 한데 저 주치의는 자신의 대처가 부족한 줄을 모르고 있다.

'미치겠네.'

만약 어젯밤 황제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았을 터다. 황제의 상태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황제는 연초를 끊었노라 했는데. 다시 검을 잡고 건강관리를 한다고도 들었는데. 한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이러면 마검황의 전개와 달라지는 게 없는 거잖아.'

문득, 원작 소설 마검황의 전개가 떠올랐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는 황제. 황위를 물려받는 2황자. 제국을 덮이는 전란. 무너지는 황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물론 지금은 황제가 죽더라도 원작 그대로의 전개가 되진 않을 것이다.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다. 이쪽이 황제가 되겠지. 하지만 그건 절대로 실현되면 안 되는 일이다.

'당연하지. 그러면 나도 오래 못 버티고 죽을 거니까.'

라키엘은 입술을 꾹 닫았다. 머릿속에서 가파른 계산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대강 예상되었다.

'황제가 이대로 죽으면? 아마도 내가 황위를 물려받겠지. 황태자니까. 2황자와의 대결에서 이겼으니까. 그렇게 자격을 증명해 버렸으니까. 한데 지금 시점에서 내가 황위를 물려받는 게 이득일까? 아니. 절대로. 오히려 그건 내 목숨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거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황제라는 자리는 결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온종일, 눈코 뜰 새도 없이 정무에 시달려야 하는 자리다.

국내외의 수많은 정치 사안. 주변 왕국들과의 외교 현안. 자잘한 정책과 귀족들 사이의 알력까지. 그 모든 것들을 조율하는 데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수백 수천만 인구가 몸담은 제국이라는 항공모함의 선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황제가 급사하고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제대로 된 인수인계 절차도 없이 덜컥 황위에 앉게 되는 거지. 그러면 내가 떠맡게 될 업무량은? 엄청나다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많을 거야.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뒷수습하는 일부터, 그로 인해 생겨나는 국내외의 각종 갈등과 현안들을 몰빵으로 처리해야 할 거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국내의 귀족들은? 새로운 권력 구도가 시작되는 판국에 치열한 눈치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황위에 앉은 이쪽에게 끈을 대려는 자. 그 끈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자. 알력을 조장하며 주도권을 쥐려는 자까지. 수많은 이들이 이쪽의 정치력을 시험하며 각자의 이득을 꾀하려 들 것이다.

'외국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제국을 둘러싼 수많은 왕국이 이쪽을 간보려 할 것이다. 국제적이고도 은근한 기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새 황제의 역량을 시험하려 들 것이다.

조심해야 할 존재인지.

만만하게 볼 상대인지.

끊임없이 이쪽을 툭툭 건드리겠지.

'그런 일더미 폭탄에 치여 살 수는 없어. 그러다간 내가 얼마 못 버티고 죽을 거야.'

라키엘은 심각함을 느꼈다. 이건 그냥 일하기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진지하게 목숨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난 아직 건강하지 못하니까. 이 몸은 여전히 허약하고 병약하니까.'

그래서다.

아직 기대 수명이 200일도 안 되는 처지다.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근근이 얻는 보너스 수명으로 연명하는 처지다.

한데 지금 덜컥 황제가 되면?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업무에 치이게 되면? 환자를 돌볼 시간 따위를 낼 수 있을까?

'아니, 전혀.'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환자를 돌볼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보너스 수명을 얻지도 못하게 된다. 기대수명을 늘릴 수 없게 된다.

죽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그렇게 끝장이 나는 거지.'

꿀꺽.

계산을 마쳤다.

견적을 뽑았다.

결론이 나왔다.

'황제가 죽으면 나도 죽어.'

그러니까, 살린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 라키엘은 다짐하며 황제의 침상에 다가섰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나써클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심장을 둘러싼 마나의 고리를 회전시켰다. 동시에 경혈 스캐닝 옵션을 발동했다.

'우선은 진단부터.'

츠츠츠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대상. 누워 있는 황제의 모습만을 주시했다.

'뇌졸중의 원인이 제일 중요해. 제발. 뇌출혈만 아니기를.'

라키엘은 내심 간절히 빌었다.

뇌졸중(stroke)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뇌혈관의 파열 등으로 인한 뇌출혈, 즉 출혈성(hemorrhagic)이다.

다른 하나는 혈전증(thrombosis)과 죽상경화증(ath-erosclerosis)으로 인해 혈관이 막히고 뇌에 혈액과 산소 공급이 중단되는 허혈성(ischemic)이다.

그중에서 사망률이 더 높은 건? 대체로 출혈성 뇌졸중이 한층 위험하다 볼 수 있을 것이리라.

'제발. 제발.'

라키엘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황제의 머릿속을 꼼꼼히 살폈다. 마치 CT를 찍듯. MRI로 검사하듯. 두개골 내부의 모든 부위를 탐색했다. 별다른 출혈 부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 결론은 허혈성 뇌졸중인가.'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어느 부위 혈관이 막혔는지. 그래서 뇌의 어느 부위에 산소 공급이 끊겨 뇌 손상, 즉, 뇌경색(cerebral infarction)을 일으켰는지, 그걸 밝혀내야 한다. 하여야 회생 가능성과 치료 방향을 잡을 수 있다.

라키엘은 한층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껏 전례가 없을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안구가 뻐근해지도록.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모세혈관 하나의 단서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각오했다.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한층 더. 끝까지. 한계까지. 그 너머까지.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발견했다.

'뭐지. 이건... 자연적으로 발생한 혈전이 아닌데?'

깨달음과 함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84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2)

혈전(thrombus).

혈관 속에서 피가 굳어진 덩어리. 어떤 사람이건, 몸에 어느 정도의 미세한 혈전은 있다.

하지만 혈류가 느려진다든가. 응고 과다 현상이 일어난다든가. 혈관이 손상된다거나 해서 혈전이 과도하게 생성되면?

거의 반드시,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혈관을 틀어막는다. 혈류의 흐름을 방해한다. 만약 그 방해를 받는 부위가 두뇌라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황제처럼.

'...뭐야 이거.'

라키엘은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뒷목이 뻐근해질 만큼 극한으로 끌어올린 집중력. 덕분에 황제의 머릿속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침내 혈전으로 막혀 뇌경색이 일어난 부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아래소뇌동맥영역 뇌경색(anterior inferior cerebellar artery territory infarcyion)....'

두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소뇌(cerebellum). 그곳의 중간 소뇌 다리(middle cerebellar peduncle)와 외측 다리뇌(lateral pons)가 손상된 게 보였다.

원래는 그곳을 활발하게 물들여야 할 마나의 흐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뇌신경(cranial nerve) 손상의 징후였다.

'이러면... 같은 방향의 얼굴신경마비(facial palsy), 삼차 신경 감각장애(trigeminal sensory loss), 청각장애(hear-ing loss), 이명(tinnitus), 사지 조화운동불능(limb ataxia)이 동반되겠지.'

문득, 학부생 시절에 배웠던 내용이 떠올랐다.

흔히들 한의대생이면 침술과 경맥 등의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달랐다. 각종 병리학, 의역학, 생리학, 해부학, 조직학, 미생물학, 면역학, 의학 진단학, 세포생물학, 응급의학, 진단검사의학, 신경정신의학 등등.

그 밖에도 수많은 현대적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했다. 그런 덕분이었다. 황제를 진단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뇌경색 발생 부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소뇌에 뇌경색이 발생했다는 점이 더욱 안 좋았다.

'뇌경색의 크기가 아슬아슬해. 여기서 더 커지면 부종이 뇌간을 압박(herni-ation)하거나 뇌실(ventricle)을 폐색하면서 수두증(hydro-cephalus)을 유발할 수 있어. 그러면 호흡장애까지 올지도 모르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라키엘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그의 눈길이 황제의 소뇌를 향했다. 소뇌로 흘러들어 가는 앞아래소뇌동맥을 향했다. 그곳을 틀어막고 있는 혈전 덩어리를 주시했다. 혈전의 모양이 이상했다.

'도대체 왜... 혈전에서 잔선이 안 보이지?'

잔선(lines of Zahn).

그것은 혈전의 나이테 같은 흔적이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혈액의 흐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혈전이 생겨나니까. 한순간에 확, 하고 생기는 게 아니니까. 차츰 생겨나니까. 그래서 잔선이 생기지. 혈액이 흐르는 와중에 혈전이 불어나던 과정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인 층으로 새겨지는 거야. 그런데 왜... 이 혈전에는 잔선이 없지?'

잔선이 없는 혈전. 그건 사람이 죽은 후에 혈관 속에서 생성되는 핏덩이(postmortem clot)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황제의 혈전이 그러했다. 잔선이 전혀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상식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이건, 뭔가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혈전이 아니야.'

외력에 의한 것이든. 약물에 의한 것이든. 혹은 또 다른 농간에 의한 것이든. 지금 황제의 뇌혈관을 가로막은 혈전은 절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

누가?

무엇을 위해?

'혹시 여기 있는 이들 중의 하나일까.'

시종장, 근위기사단장, 주치의까지. 황제의 가장 최측근에서 움직이는 이들. 설마 이들 중에 누군가가 황제에게 은밀하게 손을 쓴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의심에만 매달려 있진 않았다. 지금은 치료가 우선이다. 의심은 황제를 살린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

"혹시 아침에 폐하께 처방했다는 약재를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주치의에게 물었다. 나름 자신이 있는 걸까. 주치의가 의기양양한 투로 대답했다.

"예, 전하. 이것이옵니다."

이내 주치의가 가져온 것은....

"아로니아 잎을 말려서 쪄낸 것이옵니다."

"이게 마비에 효험이 있다는 약초?"

"예, 전하. 손발의 경련과 근육의 저림을 풀어주는 데에 탁월한 효과가 있사옵니다. 이는 제가 경험적으로 12년째 사용하며 여러 환자를 치료한 배합으로서...."

"그만. 거기까지."

"...예?"

"안타깝지만, 이걸론 안 돼."

라키엘은 자르듯이 말했다.

어림도 없다. 지금 황제는 근육이 문제가 아니다. 막힌 혈류 때문에 뇌조직이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중이다. 한데 주치의는 그걸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선 안 되겠어.'

아무래도 황제를 별궁 한의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곳에서 집중치료를 받는 쪽이 나을 듯했다.

한데 그때였다. 침실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새하얀 옷의 노인이 들어왔다. 시종장이 노인을 보며 반색했다.

"아. 대주교님, 잘 오셨습니다."

...대주교?

저 노인이?

라키엘이 쳐다보는 사이, 대주교가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리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신의 품에서 모두가 평안하길. 대주교 베르토나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입니다. 혹시, 폐하를 치료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을 때부터 제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걸음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폐하이실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대주교가 황제의 침상으로 다가갔다. 법복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기도를 하는 걸까. 혹은 소설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던 신성 축원을 시도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라키엘은 한 발짝 물러섰다. 대주교의 기도와 축원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한편으로 내심 기대했다.

'제발. 신성력이든 뭐든 어떤 거라도 좋으니까.'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황제의 상태가 호전되면 정말 좋겠다. 바라고 기원하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한편으로 경혈 스캐닝 옵션을 유지했다. 고위 성직자의 축원. 그 기도가 어떤 치료 효과를 발휘하는지 직접 관찰했다.

키이이잉-!

안구가 뻐근해지는 감각.

대주교의 축원이 이어졌다.

"...."

무어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대주교. 눈을 감고서 한 손을 황제의 머리에 올려두고 있었다. 그 이상의 거창한 동작은 없었다. 그저 온몸으로 진땀을 뻘뻘 흘렸다. 차츰, 황제의 몸속에서 변화가 생겨났다.

츠즈즈....

뇌경색으로 망가져 있던 황제의 소뇌. 혈류가 통하지 않아 죽어가고 있던 뇌세포. 그 치밀하고도 복잡한 조직들이....

'되살아나고 있어?'

라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착각을 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세포가 재생하고 있어.'

죽어가며 마나가 끊어져 있던 황제의 뇌세포였다. 마나의 광채가 깃들지 못해 시커멓게만 보이던 부위였다. 한데 그 세포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미약한 마나의 광채가 깃들고 있었다!

"...."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믿기지가 않았다.

'원래 뇌세포는 한번 망가지면 재생이 거의 불가능한 기관인데....'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문득, 희망이 피어났다.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이게 대주교의 신성력이라는 걸까. 소설에서 몇 번 언급된 건 봤는데, 실제로 관찰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의학이 그냥 찌그러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황제만 살면 돼!'

라키엘은 열심히 응원봉을 휘두르는 심정으로 대주교를 응원했다. 신성 축원이 약빨(?)을 200% 발휘해주길. 그래서 황제가 완전히 치유되길.

바라고, 기원했다.

원하고, 기도했다.

마침내 신성축원이 끝났다.

"...후! 후우!"

대주교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황제에게서 손을 뗐다. 온통 땀투성이가 되어 주저앉았다. 신성 축원을 내리기 위해 엄청난 기력을 소모한 듯했다.

'그럼 황제는?'

라키엘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경혈 스캐닝으로 뇌경색 부위를 관찰했다.

츠즈... 즈즛... 즛....

대주교의 신성 축원을 받아 재생에 성공한 세포 조직이 보였다. 희망 가득 밝은 마나가 깃들어 있었다. 되살아나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다.

즈즛... 즈....

살아났나 싶었던 뇌세포 조직이 급속도로 활기를 잃었다. 환하게 깃들었던 마나의 광채가 사라져 갔다. 라키엘은 그 원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혈전이 제거되지 않았어. 여전히 혈관을 막고 있어. 저렇게 혈류 공급이 여전히 끊겨 있으니까... 뇌세포 조직이 되살아났다가도 다시 죽어 버리는 거야.'

라키엘은 혀를 찼다.

대주교의 신성 축원은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죽었던 뇌세포 조직을 되살려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뇌졸중의 원인은 제거하지 못했다.

'혈관을 틀어막고 있는 저 혈전. 저것부터 없애야 해.'

라키엘의 눈길이 혈전을 향했다. 이제는 명확해졌다. 저 혈전을 제거해야 한다. 무조건 그게 우선이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

라키엘은 기억 속 지식을 되짚었다. 한의학과 시절 장학금을 위해 코피 터지도록 외우고 익혔던 병리학과 각종 의학적 지식을 떠올렸다.

그걸 이곳에서 어떻게 활용할지. 현대적 약물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임기응변을 동원할지. 그 과정에서 재관류손상(reperfusion injury)은 어떻게 막아낼지.

고민을 거듭했다.

두뇌를 혹사했다.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내 떠올렸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따라주면 좋겠는데."

대주교와 시종장.

근위대장과 주치의.

모두를 향해 말했다.

"궁정 마법사 자네티스를 불러줘."

"...예? 자네티스 경을 말입니까?"

"어."

되물어 오는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힘주어 말했다.

"지금 폐하를 후유증 없이 치료하려면 그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해."

"그의 능력이라시면...?"

"마법."

"저기, 하지만 전하? 자네티스 경이 구사하는 마법은 사람을 치료하는 일과는 그리 연관이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마법이 필요한 거고."

"어떤... 마법을 말씀이십니까?"

"빙결 마법."

"예?"

"일단 폐하를 꽁꽁 얼려볼 생각이라서."

"...예에에?"

경악으로 물드는 모두의 시선. 그걸 태연하게 받아내며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85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3)

혈관이 막혔을 땐 뚫으면 되는 줄 안다. 다시 피가 통하면 괜찮아지는 줄 안다. 대부분은 그렇게들 알곤 한다. 자신도 예전엔, 관련 수업을 받기 전엔 막연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냥 혈관을 뚫으면? 오히려 큰일이 난다. 더 심각한 조직 손상이 스플래시 대미지로 뻥뻥 터진다.

'재관류손상 때문이지.'

라키엘은 기억을 되짚었다.

재관류손상. 그건 혈액의 공급이 장시간 끊겼던 조직에 갑자기 혈류가 재개통될 때 일어나는 광범위한 손상이었다.

'세포 내에 칼슘과잉(calcium overload) 증상이 일어나지. 그래서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가 망가지고. 대량으로 생성되는 하이드록실 라디칼(hydroxyl radical) 같은 활성산소종이 염증을 일으키며 백혈구를 과도하게 집합시켜. 한마디로 세포 단위에서부터 차곡차곡, 디테일하게 조직을 박살 내는 거지.'

비유하자면?

10일 굶은 사람에게 치킨 100인분 먹이기. 10년 금주하던 사람에게 보드카 100리터 원샷 시키기. 혹은 10년 동안 누워만 있던 중증 근손실 환자에게 100킬로그램 스쿼트 시키기.

...등등과 비슷한 행위일 것이다.

'한마디로, 섣불리 하면 안 될 짓이라는 거지. 재관류손상이 딱 그래.'

그러니 그냥 혈전을 뚫으면 안 된다. 황제를 살리고 뭐고 그냥 망하는 거다. 재관류손상을 막을 확실한 대책을 세워두고 뚫어야 한다. 그러한 일념으로 라키엘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제부터 나는 폐하의 마비 증상을 풀어볼까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해야 할 부분이 있어. 그게 바로 빙결 마법이야."

그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마비를 풀기 전에 체온을 낮춰야 하니까 말이지."

그래야 한다.

그게 최선이다.

재관류손상의 피해를 막으려면? 신체의 신진대사율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세포 내의 급격한 변화가 줄어드니까. 그만큼 재관류손상에 의한 조직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고. 그러려면 안전한 범위 안에서 체온을 낮추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어.'

저체온 요법. 그건 실제로 재관류손상이 예상되는 환자에게 대학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처치법이었다. 라키엘은 심플한 설명을 그럴듯하게 덧붙였다.

"폐하께선 어젯밤부터 전신이 마비되어 계셨지. 그런데 갑자기 그 마비가 풀리면? 근육이 갑작스럽게 놀라며 손상을 입게 될 거야. 심각한 후유증이나 장애가 남을지도 모르고. 그래서야. 빙결 마법으로 체온을 낮춘 상태에서 우선 마비부터 풀고, 그 후에 몸을 따뜻하게 해주며 근육을 달래주는 건."

"아...."

혈전이니 뇌졸중이니, 재관류손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괜한 소리들을 해보았자 이해 못 할 테니까. 지식의 출처에 대한 의문과 의구심만 살 테니까.

라키엘은 사람을 보냈다.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을 긴급히 호출했다. 그리고 대주교를 돌아보았다.

"대주교님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예. 하문하소서, 전하."

대주교가 숨을 골라내며 대답했다. 라키엘이 물었다.

"조금 전에 사용했던 신성 축원 마법 말입니다."

"예, 전하."

"혹시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써줄 수 있습니까? 지금 많이 지쳐 보이긴 하는데."

"아, 그건...."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빙결 마법의 보조를 받아 혈전을 제거한 직후에 신성 축원으로 조직을 재생시키면? 어쩌면 후유증 없이 황제를 치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질문을 받은 대주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실로 송구하지만 전하, 그건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신성 축원은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아쉬웠다. 저 말을 듣고 나니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쯧. 미리 알았으면 그 기회, 아껴두는 건데.'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일단 혈전부터 제거하고, 한 달간 재활치료에 주력해야겠네. 그렇게 상태를 최대한 호전시킨 후에 신성축원으로 손상된 뇌조직을 재생시키면 될 거고.'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자.

라키엘은 다짐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또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제가 신성 축원을 배울 수도 있습니까?"

"아, 혹시 신앙에 귀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신앙에 귀의?

피곤으로 가득하던 대주교의 눈이 독실한 포교 정신으로 급 초롱초롱해졌다.

"좋은 질문이십니다, 전하. 사실 신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와 같은 고귀한 혈통을 지닌 분께도 물론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성스럽고 한편으로는 어렵게도, 멀게도 느껴지는 신성 축원도 사실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독실한 마음과, 그걸 행하는 의지만 있다면 말입니다."

"독실한 마음과 행하는 의지 말입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다. 배우기는 까다로울 거다. 하지만 일단 익히기만 하면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한의술과 신성 축원을 합치면... 보너스 수명 얻는 것도 훨씬 쉬워질 거야. 아니, 그 전에 내 몸을 치료할 수도 있을 거고.'

기대감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두근거리는 심정을 안고서 물었다.

"그럼 제가 그걸 어떻게 익힐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전하."

대주교가 사람 좋게 웃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이성을 멀리하면 됩니다. 육체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손도 잡지 않으면 됩니다. 거기에 일체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3초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되십니다. 그리고 3분 이상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같은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되십니다. 그렇듯 이성에게 쏟을 관심과 사랑마저 신앙에 바치면 되십니다."

"...."

"그걸 30년만 실천하면 되십니다, 전하."

"예에?"

"고작 30년입니다. 신앙의 이름 앞에선 그리 긴 시간도 아니지요. 그것만 실천하시면 신성 축원의 축복을 얻게 되실 겁니다. 어떻습니까? 실로 쉽지 않습니까?"

"...."

퍽이나!

아니, 설령 쉽다고 해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이었다.

"폐하, 신, 자네티스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당도하였사옵니다."

문앞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자네티스 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모습을 보더니 경악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에게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러이러해서 황제가 위급하다고. 하니 치료를 시작할 거라고. 그 치료에 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폐하께 빙결 마법을 사용하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전하?"

"어. 바로 그거지."

"정말로 빙결... 마법을 말입니까?"

"응. 안 죽을 정도의 범위 안에서 최대한 차갑게."

"...."

"전에 나랑 같이 일해봤지? 뇌전증 아이 치료할 때. 그때랑 비슷해. 그땐 경이 내가 안 죽을 정도로 조절된 전격마법을 사용해줬잖아?"

"하지만 그건...."

"그때와 똑같아. 원래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마법이지. 빙결 마법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경이니까 조절할 수 있을 거잖아. 사람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하게."

"...."

"그러니 경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그 도움이 없으면 폐하께서 더욱 위독해지실 거고."

"그 말씀이 정말이십니까?"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할까."

"...."

자네티스 경은 황태자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처음엔 솔직히 일말의 의심도 들었다.

만약 황제가 지금 죽으면? 황태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황태자가 혹여나 삿된 권력욕을 품은 건 아닐까. 황위에 대한 욕망으로 혈육의 정마저 저버리려 드는 것은 아닐까. 그 욕망을 위해 이쪽의 손을 빌려 황제를 해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의구심은 잠시 후 말끔히 날아갔다. 최근까지 황태자가 보였던 정치적 행보를 떠올린 덕분이었다.

'하긴, 전하의 행동은... 권력욕을 지닌 사람의 것이라 보기엔 어려운 행보였지.'

돌이켜볼수록 독특한 행보였다. 별궁에서 주구장창 환자들만 돌보았다. 황도의 그 어떤 주요 귀족과도 교류를 나누지 않았다.

자신을 지지해달라거나. 2황자와 연을 끊고 자신의 줄을 잡으라거나. 훗날 자신이 황위에 앉게 되면 어떠어떠한 감투를 주겠노라 약속한다거나. 하는 등등의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욕심이 아예 없는 사람. 혹은, 자신이 황위에 앉을 일이 없으리라 여기는 사람 같은 행보였다. 그런 점이 참으로 이상했다.

'당연하지. 그저 황위를 물려받는다고 권력이 생기는 게 아니니까.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가 있어야 정치적 정통성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한데 황태자는 그런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어. 아무런 안배도, 준비도 하지 않았지. 그러니... 지금은 저 괴상한 명령을 믿어볼 만하겠구나.'

자네티스 경은 내심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전하."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빙결마법을 사용할 날이 올 줄은 몰랐지만. 그걸 '안 죽을 정도로' 조절하는 임무를 떠맡을 줄도 몰랐지만. 그래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믿어줘서 고맙군."

라키엘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어쨌건, 이제 해볼 수 있겠어.'

즉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행히 혈전 제거에 필요한 약품과 도구는 모두 지니고 있었다. 상비약으로 항상 가지고 다니던 미노타우황청심원을 꺼냈다. 미지근한 물에 정성껏 녹였다.

'이거면 가능할 거야. 혈전 용해작용을 해주니까. 병원에서 쓰는 t-PA(tissue-plasminogen activator)만큼의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이미 협심증 혈전 치료를 통해 성능이 검증된 미노타우황청심원이었다. 거기에 더해 꼬슴이의 도움도 받았다.

"꼬슴아? 오늘도 가시 좀 빌릴까 하는데. 괜찮겠어?"

"꼬슴!"

뾰뵤뽁-!

꼬슴이가 찡긋 윙크를 하며 온몸을 뽀르르 떨었다. 작고 토실한 궁디에 힘을 주니 하얀 가시가 뾰뾱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침술을 위한 준비도 갖추어졌다.

"자네티스 경?"

"저도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네티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도로 절제된 마력이 새하얀 서리가 되어 그의 손끝에서 넘실거렸다. 황제의 머릿속에 생겨난 혈전. 그걸 안전하게 녹일 준비가 갖추어졌다. 이제는 망설일 필요도, 기다릴 이유도 없다.

"시작하지."

라키엘이 황제의 상의를 벗겼다.

모두가 초조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자네티스 경의 조절된 빙결 마법이 황제에게 뿌려졌다.

샤아아아아...!

새하얀 서리의 커튼이 황제의 전신을 덮었다.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을 발동하며 상황을 꼼꼼히 관찰했다. 황제의 피부가 서서히 창백해졌다. 혈맥 속을 거닐던 마나의 흐름이 느려졌다. 체온이 떨어지며 전신의 신진대사가 완만해졌다.

심박수가 내려갔다. 호흡이 늘어졌다. 내부 장기의 움직임이 둔화되었다. 머릿속 혈전과 그 주위 마나의 흐름도 느릿해졌다. 그렇게 황제의 상태가 반쯤 가사상태에 접어든 순간.

"그만. 이제부터는 유지."

자네티스 경이 급히 빙결마법의 출력을 낮추었다. 라키엘이 황제의 상체를 받쳐 올렸다. 물에 개어 녹인 미노타우황청심원을 조심스럽게 먹였다.

천천히.

한 방울의 남김도 없이.

모조리 안전하게 섭취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얀 가시를 들었다. 황제의 몸을 조준했다.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는 1밀리미터의 오차도 있어선 안 돼.'

경혈 스캐닝을 통해 낱낱이 보였다. 미노타우황청심원 성분이 황제의 위장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 성분과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가고 있었다. 뇌혈관을 가로막은 혈전에도 닿았다.

혈전이 녹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녹아내리는 혈전. 그 이후에 생겨날 재관류손상. 치명적인 2차 피해를 막기 위하여. 자칫 생겨날 혈액-뇌 장벽(blood-brain barrier) 손상에 따른 뇌출혈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라키엘의 손이 섬광처럼 움직였다. 가시를 찔렀다. 연달아. 거침없이.

툿! 투투툿! 투툿!

그렇게, 뇌세포 조직의 재관류손상과 뇌출혈 부작용을 막기 위한 라키엘의 소리 없는 시술, 아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86화. 재관류손상을 막는 법 (4)

감정을 죽인다.

이성을 살린다.

눈앞에 누워 있는 사람은 황제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다. 일단 살리고 본다. 그 생각에만 집중한다.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는 차갑게, 손길은 냉정하게. 익혀온 기예는 생각이 아닌 숙련된 본능으로.

툿! 투툿! 툿!

가시를 찔렀다. 가장 먼저 찌른 자리는 황제의 승읍혈(承泣穴)이었다.

"엇!"

시종장의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읍혈은 눈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 눈두덩이 아래 중앙을 더듬으면 만져지는 뼈 가장자리. 그곳에 커다란 가시를 푹푹 찔러넣었으니까.

'일단 이곳의 기혈 움직임부터 다스려야 해.'

이곳 승읍혈은 12경맥 중에서 일명, 위족양명지맥(胃足陽明之脈)이라고도 불리는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이 시작하는 기시혈이다. 즉, 한 경맥의 시작을 알리는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자리다.

그러니 여기부터 다스려야 한다. 상세가 위중한 환자일수록 그렇다. 이제부터 기혈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꿀 거라고. 기시혈에 신호를 넣어야 경맥의 나머지 경혈들이 준비가 된다. 그러지 않고 다짜고짜 쇠약한 환자의 가장 중요한 맥부터 건드려 버리면?

'난리가 나지. 자다가 방금 깨자마자 100미터 달리기를 뛰면서 라면에 삼겹살 한 사발을 원샷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한겨울철에 자동차 시동을 걸자마자 RPM을 레드존까지 풀악셀로 밟아서 엔진 망가뜨리는 것과도 비슷할 거고.'

결국, 경맥 전체가 놀라게 된다. 경맥의 기혈 흐름이 들뜬다. 진정이 되지 않고 들쭉날쭉. 그렇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야. 아무리 침을 잘 놓아도 소용없어. 한번 들뜬 기혈은 시간이 지나서 자연적으로 가라앉기 전까지는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게 불가능해지니까.'

즉, 침으로 경맥을 자극하여 인위적으로 경혈의 흐름을 통제하는 침술의 효과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괜히 애먼 환자만 침으로 푹푹 찔러대는 고문만 되어 버린다. 라키엘은 그걸 명심하며 호흡을 골랐다.

천천히, 깊게.

다섯 번을 마시고.

다섯 번을 내쉬었다.

승읍혈을 통해 전달한 기혈의 변화가 족양명위경 전체로 번질 때까지, 경맥 전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 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시침을 시작했다. 다시 가시를 든 그가 찌른 경혈은 승읍혈에서 손가락 반 마디 아래에 있는 사백혈(四白穴)이었다.

톳!

눈두덩이 아래. 솟아올랐던 뼈가 살짝 오목해지는 자리. 황제의 눈확아래 구멍(infraorbital foramen)에 2푼 깊이로 가시가 들어갔다. 라키엘의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툿! 토톳!

팔자주름 바깥면에 있는 거료혈(巨髎穴). 입꼬리 옆에 자리한 지창혈(地倉穴). 아래턱에 자리한 대영혈(大迎穴)과 협거혈(頰車穴)까지. 레이저 포인터로 콕콕 찍듯 정확한 자리에 가시를 꽂아갔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황제의 머릿속 혈전이 생긴 자리, 앞아래소뇌동맥.

'그곳으로 향하는 혈류를 제어해야 해.'

한꺼번에 너무 많은 혈류가 흐르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그랬다간 혈전이 녹는 순간, 뇌졸중이 왔던 손상 부위에 너무 많은 혈액이 한꺼번에 왈칵 들이닥치게 된다.

'그러면 재관류손상 당첨이지. 그것뿐일까. 이미 장시간 혈액 공급이 끊겨서 혈관-뇌 장벽의 손상도 심한 상태일 텐데, 거기에 갑자기 혈류가 몰아닥치면? 그 자리, 무조건 터져. 둑 무너지듯이 뇌출혈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겠지.'

그러면 끝이다.

후유증이 문제가 아니게 된다. 생명 유지를 걱정해야 할 단계가 되어 버린다. 라키엘은 그런 최악의 상황만큼은 절대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 과정은 무조건 철저해야 해.'

톳! 토돗!

의식은 긴장하며.

시선은 여유롭게.

손끝은 정확하게.

광대뼈 아래쪽 모서리의 하관혈(下關穴)을 찔렀다. 이마 머리카락선 가장자리의 바로 위쪽 두유혈(頭維穴)도 찔렀다.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변화를 관찰했다.

덕분에 보였다.

츠즈즈즈...!

자극을 받은 경혈의 마나가 반응했다. 반응하며, 요동쳤다. 작은 파문을 생성했다.

파문이 족양명위경의 경맥을 따라 흘렀다. 목덜미 앞쪽, 경동맥이 지나가는 자리의 인영혈(人迎穴)에 닿았다. 인영혈로 흘러든 파문이 경동맥을 두드렸다. 경동맥의 혈류 흐름에 간섭했다.

혈류의 흐름이 다소 느려졌다.

심장의 박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됐다.'

라키엘은 주먹을 쥐었다. 혈류의 흐름이 약 2할(20%) 가량 느려진 것이 보였다.

'좋아. 자네티스 경의 빙결 마법도 딱 적당하고.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저체온이 유지되고 있어. 거기에 혈류의 흐름도 성공적으로 제어했다. 이 정도면 희망이 있어.'

할 만큼 했다. 해볼 만하다. 이쯤이면 최소한의 가능성을 희망해볼 정도는... 될까.

'부디 그렇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재관류손상을 예방하기 위해 저체온 요법과 침술을 썼고, 혈전을 녹일 미노타우황청심원도 복용시켰다. 나머지는 운명과 황제의 생명력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잊고만 싶은 그날의 순간들처럼.

"...."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추억의 조각을 애써 눌러 넣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황제의 곁을 지켰다.

아침을 지나 오후가 되도록. 마침내 해가 기울고, 달이 뜰 때까지. 모두를 물러나게 한 고요한 공간. 그 속에서 황제의 상세를 살폈다.

이따금 시침을 하였다. 혈류가 과해지지 않도록. 황제의 몸에 욕창이 생겨나지 않도록. 행여나 변화의 조짐이 보일까. 혹시나 위중한 상황이 닥칠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초조한 심정으로. 온종일 곁에 붙어 호흡 한 줄기의 기색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자정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에는 천둥 번개가 울었다. 맑게 갠 새벽 빛 속에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깨었다. 이내 황제의 상세를 살피고는 안도하였다. 길고도 소리 없이 고된 전쟁이었고, 사투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피로에 찌들어 멍해질 때도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더랬다. 밤새 곁을 지켰더랬다. 어쩌면 눈을 뜨실지도 모른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씨익 웃으실 거라고. 그러면 나도 평소처럼 용돈 달라는 말부터 해볼 거라고.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애써 기원하며 곁을 지켰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눈을 뜨지 못하셨다. 이쪽을 보며 씨익 웃지도, 실없는 농담을 꺼내지도 못하게 되셨더랬다.

처음엔 멍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삼일 상을 치르는 내내 그랬다.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화장을 마친 뒤. 아버지의 유골이 담긴 함을 받았던 때였던가.

유골 담긴 나무 함이 따뜻했다. 그럴 거라는 상상도 못했는데. 마음의 준비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제야 저도 모르게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

그런 건 싫다. 다시는 그런 걸 겪고 싶지 않다. 몸이 힘겨울 때마다, 졸음이 몰려오고 의식이 흐려지려 할 때마다, 스스로를 향해 짓씹듯 다짐했다. 채찍질하듯 되뇌었다.

이번만큼은 오장육부의 걱정 가득한 아우성도 무시했다. 시종장 등의 만류와 우려도 귓등으로 흘렸다. 그저 버티고, 또 버텼다.

마침내 아침이 밝고.

다시금 해가 떠올라.

정오를 환히 밝히다.

서쪽 하늘로 스몄다.

황제에게서 첫 회생의 조짐이 보인 것은, 눈썹달 자락이 낯선 별자리 곁을 간질이던 새벽 무렵이었다.

"으음...."

문득 귓가에 들려온 낯선 소리.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키엘은 멈칫했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으, 으음...."

"어?"

라키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는 볼 수 있었다.

'됐다.'

경혈 스캐닝으로 엿보이는 마나의 세상. 황제의 뇌혈관을 틀어막고 있던 혈전이 사라져 있었다. 그 주위의 조직은? 추가 손상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재관류손상을 거의 막아낸 것이었다.

마치 그걸 증명해주는 걸까. 황제의 얼굴에 변화가 찾아왔다. 마비된 근육으로 뒤틀려 있던 얼굴이. 허물어졌던 표정이. 어긋났던 안색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차츰차츰, 천천히.

한편으로 확실하게.

희망의 빛을 비추듯.

한 걸음씩 펼쳐졌다.

한때 짓던 미소처럼. 어느 날 그리던 웃음처럼. 어느덧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내 희미하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

황제는 문득 생각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짐은 어찌하여 이토록 기운이 없는가.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답을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아스라한 심법 덕분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기분이었다. 멍한 의식과 흐릿한 시야. 온통 뿌연 세상. 실루엣으로만 간신히 보이는 주위 사람들. 한데 그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유독 환하게 보였다.

어느새 두 손으로 이쪽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녀석. 나약하게 자라나 언제고 세상의 풍파에 무너질 것만 같았던 녀석. 하여 평생을 걱정하게 만들었던 아들.

라키엘이었다.

"...."

너로구나.

네가 오늘 나를 살렸구나.

손길과 체온을 느끼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눈을 뜨기 전까지 자신은 악몽에 빠져 있었더랬다.

온통 시커먼 눈밭이었다.

눈밭에서 길을 잃었다.

막막했다.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옆에 나란히 섰던가. 까마득하게 시커먼 눈밭을 홀로 헤치고 다가왔더랬다. 그저 말없이, 묵묵히, 이쪽의 곁을 지켜주었더랬다.

아침을 지나 오후가 되도록. 해가 기울고, 달이 뜰 때까지. 비 내리는 자정을 지나. 천둥 우짖는 새벽 너머. 맑게 갠 새벽빛 속에서도. 스미는 노을 아래에서마저. 마침내 눈썹달 자락이 낯선 별자리 곁을 간질이던 때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 덕분이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절망의 눈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마침내 눈을 떴고, 지금에 이르렀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누군가가 라키엘이었음을. 언제나 걱정만 안겨주던 큰아들이었음을. 녀석이 손을 내밀어 자신을 끌어올려 준 것임을.

"...."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녀석이 무언가를 해주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고마웠다.

미안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네가 이 아비에게 해준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놀랍고 부끄럽노라고. 어느덧 너는 이 아비가 생각하였던 것보다 한결 나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노라고. 한데 오직 이 아비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고.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구나.'

실낱처럼 뜬 눈으로나마 아들만을 바라보았다. 아들과 맞잡은 손에 나름의 힘을 주었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일지언정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세요."

라키엘의 나직한 목소리. 그걸 귀에 담고서야 놓이는 마음. 비로소 황제는 나른한 안도감을 느꼈다. 서서히, 편안한 숙면에 접어들었다.

"후우."

라키엘의 입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는 황제의 손을 얼른 놓았다. 한편으로 오소소 돋은 소름도 털어냈다.

'...난 당신 아들이 아닌데.'

그런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과 미소였다. 그래서였다. 닭살이 돋았다. 그는 애써 웃었다.

'괜히 죄책감 드네. 그나저나... 병상에 누운 아저씨의 촉촉한 미소라니. 싫다, 싫어. 으으.'

자다가도 떠오를 것 같으니까 생각하지 말자. 황제를 성공적으로 살려낸 성과만 기뻐하자.

라키엘은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조한 목소리로 시종장을 불렀다. 고비를 넘기셨다고. 이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주며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솔직히 말해서, 그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닭살이 돋고 소름이 돋아서. 자다가도 떠오를 거 같아서. 아니, 이미 십수 년 전 그날의 후회가 자꾸만 떠올라서.

'....'

그날 내가 조금만 빨리 뛰었더라면.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연락을 받았더라면. 만약 그날, 내가 조금만 더 제때 도착했더라면. 늦지 않고 아버지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당신께서 가신 마지막 걸음을 배웅해드릴 수 있었더라면.

"...하."

더는 못 견디겠다.

도망치듯 복도로 나왔다.

고개를 들었다. 애꿎은 천장만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어쩐지 콧잔등만 자꾸 시큰해졌다. 천장도 있고 벽도 있는 복도인데. 이상하게도 빗방울이 떨어졌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87화. 앙부아즈를 홀려라 (1)

"...후우."

라키엘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렵사리 감정의 동요를 털어냈다. 고개도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안 되지. 안 돼. 정신 차려, 이한. 이런 식으로 냉철함을 잃으면 큰일 나지.'

그는 정신을 다잡았다.

냉철함이 의료인의 필수 덕목이라 믿는 그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어선 안 된다고 여겼다. 당연한 소리였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과는 별개인 거야. 의료인이라면 언제나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해. 그게 기본이고, 환자를 위한 책임이야.'

그래야 어떠한 응급상황에서도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과 대응을 할 수 있다. 즉, 의료인의 침착한 대처 유무가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셈이다. 하물며 지금 자신의 환자는 누구인가.

황제였다.

'이제 겨우 큰 고비만 넘겼을 뿐이야. 앞으로가 더 문제지. 아직 넘을 산이 많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2차, 3차 문제가 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후유장애가 얼마나 오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그에 따라 재활 계획도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한 달만 버티면 돼. 그 후에 대주교를 다시 불러서 신성축원을 써주면 완치도 가능할 거고.'

라키엘은 앞으로의 계획을 꾸렸다. 잠깐 동요되었던 마음을 추슬렀다. 과거의 일은 가슴 깊이 묻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반가운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당신은 저체온요법과 정확한 침술, 효과적인 미노타우황청심원의 사용과 헌신적인 보살핌을 통하여 환자를 치료하였습니다. 덕분에 환자 :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고비를 넘기고 위독한 상태에서 벗어났으며, 재활과 회복의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치료의 과정에서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상 최초로 '재관류손상'의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당신이 제시한 재관류손상의 개념이 후세의 의학 전공서에 새겨지게 됩니다.]

[후세의 의학도 꿈나무들이 늘어난 시험 범위에 절망하며 당신을 원망하게 됩니다.]

[당신은 로라시아 대륙의 의학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명의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121 GDP가 적립됩니다.]

[현재 보유 중인 명의 포인트(GDP) = 222]

[현재 구매 가능한 거짓말 이용권 = 2장]

'...허허?'

라키엘의 입꼬리가 귀에 빵긋 걸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보상이었다. 덕분에 거짓말 이용권을 2장이나 살 수 있게 됐다. 아직 쓸 곳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언제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자원이리라.

라키엘은 본인 명의의 아파트 가격이 2배로 쑴펑 뛰는 듯한 행복감을 느끼며 황제에게 돌아갔다. 황제는 여전히 숙면에 빠져 있었다.

"전하, 전하께서 폐하를 살리셨습니다."

시종장이 다가왔다.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폐하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오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해낸 것이신지... 폐하께서도 분명 전하를 자랑스러워하실 테지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오늘, 전하께서 폐하와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시종장에 이어 주치의도 냉큼 다가왔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하께서 구하셨습니다. 아니, 폐하와 저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무능한 의사였는지, 제가 얼마나 자만하며 안일함에 빠져 있었던 것인지... 이번 일을 통해...."

"절감했나?"

"예, 전하."

"그럼 그 책임도 함께 절감해주면 좋겠는데."

"...예?"

멍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주치의. 그를 향해 애석하다는 듯 말해주었다.

"폐하께서 돌아가실 뻔하셨지. 한데 그쪽은? 원인이 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적절한 처방과 대처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내 말이 틀렸나?"

"그건...."

"무능한 거 맞아. 안일했던 것도 맞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임을 져야겠지?"

"전하?"

"변명은 그만. 일단 근신부터 하도록. 오늘부터 당분간 폐하는 내가 직접 보살펴드릴 테니까."

"저, 전하...?"

"더 할 말이 있나?"

"...."

주치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이 작자, 너무 무능해.'

황제의 뇌졸중 전조증상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그걸 파악하기만 했더라면? 어젯밤,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뇌졸중의 진행을 막아내거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 주치의는 그중에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골든아워가 지난 후까지도 뇌졸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두통약과 근육마비 완화제를 먹인 것이 다였다.

한심했다.

'그대로 있었다면... 황제는 백 퍼센트 죽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런 자가 황제의 주치의라니. 게다가 이자를 내쳐야 할 이유는 더 있었다.

'능력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다른 쪽으로도 신뢰할 수가 없어.'

아까 보았던 혈전이 떠올랐다. 잔선이 없는 비정상적인 혈전이었다. 그건 누군가가 황제에게 손을 썼다는 뜻이다. 독약이든 다른 수단이든. 인위적으로 급격하고도 비정상적인 혈전 생성을 유도한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주치의, 그리고 시종장. 둘을 우선적으로 의심해봐야겠어.'

아무래도 곁에 있는 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의심하자. 증거를 찾아보자. 라키엘은 내심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주치의 파사로 경. 그대는 우선 근신하며 이번 실책을 반성하도록. 시종장? 그대는 폐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단속에 신경 쓰고. 나머지는 모두 물러나도록. 폐하께선 절대안정을 취하셔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모두가 차례로 물러났다. 라키엘만 황제의 곁에 홀로 남았다.

"후우...."

곤히 잠든 황제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재활치료는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범인을 어떻게 색출할 것인지. 많은 생각과 고민으로 하루가 훌쩍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