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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는 실패했다.

그냥 아주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젠장, 젠장, 젠장.'

경매장을 나서며 라키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보았던 숫자를 떠올렸다.

[귀네스 데샹 : 250,000 마젠]

앙부아즈 왕국의 거상, 귀네스가 들어 올린 칠판에 적힌 숫자였다. 나름 치열한 경쟁? 그런 것도 없었다.

이쪽이 71,000 마젠을 쓰자마자였다. 귀네스가 이쪽을 보며 피식 웃더니 들어 올린 칠판. 거기에 쓰인 호가가 무려 25만 마젠이었다. 그렇게 특대 사이즈 미노타우로스가 25만 마젠에 낙찰되어 귀네스의 품(?)으로 안겼다.

하여서 이쪽은? 미노타우로스가 낙찰되어 인도되는 모습을 새 남친 생긴 전 여친 바라보듯 쓰라린 심정으로 보아야 했다. 거기에 데미안 녀석이 기름을 붓기까지 했다.

"그래도 패배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전하."

"응?"

패배해서 다행이라니? 뭔 소린가 싶었다. 데미안 녀석이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준비해 온 10만 마젠을 미노타우로스 하나에 다 들이붓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니까요."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뜻이야?"

"예, 전하. 게다가-"

"게다가?"

"그렇게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자금을 탕진하시면 제게 주실 봉급이 모자라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헐."

라키엘은 혀를 내둘렀다. 이쪽을 앞에 두고 저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데미안 이놈도 확실히 정상인은 아니구나 싶었다.

'마검황에서도 돈에 집착하는 모습이 나오긴 했는데, 실제는 더하구만.'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반문도 저절로 나왔다.

"쯧. 그럼 봉급 제때 못 받고 밀리면, 금방 때려치우고 떠나겠다?"

"예."

"...헐."

"제가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는 이유는 단 하나, 넉넉하고 안정적인 봉급 때문입니다. 한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하의 곁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진심이야?"

"예."

"그래도 내가 널 지하 검투장에서 구해줬는데, 그거에 대한 감사함은 없어?"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봉급 문제와 별개입니다."

"마음속 감사함과 돈은 따로다?"

"물론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데미안. 녀석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사실 제 실력이면 어딜 가든 지금 봉급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

라키엘은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저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이자, 진실이요, 팩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맞아. 데미안 녀석, 소설 속 마검황의 이 시기에 이미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지.'

소드 익스퍼트 중급.

대단하다면 대단한 경지이고,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황실의 근위기사가 되기 위한 커트라인. 지방의 영지에서는 최강자의 자리를 논할 수 있을 수준. 그게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위치였다.

한데 데미안은?

'그 규격에서 벗어나 있었지.'

보통의 인간을 초월하는 반사신경. 검을 다루는 천부적인 감각. 그리고 야성에 가까울 정도의 투쟁심까지. 녀석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수준임에도 한 단계 위의 강자들과 대등하게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즉, 실제로는 이 시기에 이미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은... 소드 마스터를 목전에 둔 경지이지. 인간과 초인의 경계에 선 사람들. 그게 익스퍼트 상급이라고 들었어.'

그 정도 실력이면 초대형 용병단에서도 최강자에 거론될 수준이다. 그런 S급 용병이 1년에 버는 돈은 얼마나 될까.

'엄청난 수준이지. 지금 내가 주는 봉급? 얼마든지 그 정도를 벌 수 있어. 아니, 일이 잘 풀리고 명성이 높아지면 그 이상의 수입도 바라볼 수 있을 거고.'

실제로 소설 마검황 속 초반의 데미안은 그렇게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니 녀석의 저 선언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쪽이 주는 봉급을 시원찮다고 느끼는 순간. 혹은 봉급이 조금이라도 밀리는 순간. 녀석은 미련 없이 떠나게 되리라.

'...그건 좀 곤란해.'

소설 마검황을 읽으며 응원했던 주인공, 데미안. 녀석을 곁에 두는 것만큼 이 세계에서 든든한 일이 있을까. 게다가 앞으로 보일 성장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곁에 두고 싶은 1순위의 인재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세계관 최강자가 내 호위가 되는 거니까.'

문득, 원작 마검황의 전개가 떠올랐다.

라키엘이 죽고. 황제가 쓰러지고. 2황자가 황제가 되고. 제국은 전란에 휩쓸려 몰락한다. 여기서는 그런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그러니 보험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곁에 둬야 해.'

게다가 녀석을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다. 녀석이 무조건 이쪽의 곁에서 안정적인 인생을 누려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고 안전해질 테니까.

그 사실을 떠올리며 라키엘은 내심 다짐했다. 데미안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걱정 마라. 봉급 밀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경매장에서 야비한 꼼수를 동원하셨던 걸 생각하면 그닥 신뢰가...."

"...."

"심지어 꼼수를 동원해놓고도 처절하게 패배하신 걸 보면 그닥 신뢰가...."

"...."

"그럼에도 여전히 뻔뻔하게 당당하신 걸 보면 그닥 신뢰가...."

"...크흑."

관저에 가서 잠이나 자자. 그동안 쌓인 여독이나 풀자. 경매에서 꼼수를 써놓고 진 것도 치욕스러운데. 데미안에게 팩트 폭행, 아니, 폭격까지 당하니 씁쓸함이 치솟아 역류성 식도염이 야물딱지게 도질 것 같았다.

내일 다른 미노타우로스가 매물로 올라오면 꼭 사자. 신물 섞인 눈물과 다짐을 삼키느라 라키엘은 몰랐다. 오늘, 경매에서의 패배가 전화위복이 될 것이란 사실을. 지금, 거상 귀네스가 사들인 특대급 미노타우로스에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중대하고도 위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그 변화가 오늘 밤, 자신에게 어떤 핵이득을 안겨줄지도 또한.

64화. 미노타우로스의 왕 (1)

"흐음, 가까이에서 보니 상태가 더 좋군."

어느새 깊은 밤.

앙부아즈의 거상, 귀네스는 감탄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호텔 지하로 운송되어 온 거대한 우리. 그 속에 도사린 존재를 보면 누구나 감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느우우우우...."

낮고 묵직한 소리가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상처 입은 짐승 같은 억눌린 신음. 갖가지 진정제에 절어 있는 짐승. 미노타우로스였다.

푸훅...! 푸훅!

우리 속 미노타우로스가 그의 시선을 느꼈다. 약에 취한 시선을 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거상의 입가에 자비 없는 미소가 맺혔다.

"과연 푼돈이나마 들인 보람이 있어.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이놈을 빼앗기곤 짓던 표정을 자네도 봤어야 하는 건데."

"하면, 오늘 바로 작업을 시작할까요?"

"당연하지."

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금 자신을 향해 질문을 던진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내가 자네를 특별히 부른 것이 아닌가. 크레모 최고의 박제공인 자네를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저야 보수를 넉넉히 챙겨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어떤 스타일의 박제를 원하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흠, 최대한 웅장하게."

"웅장하게,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건 내 개인 수집품이 아닐세. 국왕 전하의 생신에 맞춰 연회 자리에서 공개하고 진상할 물건이야."

"아, 그럼 공개되는 순간의 강렬한 인상을 원하시는 것이로군요. 맞습니까?"

"허허허, 바로 그걸세.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내뱉을 경탄성과 놀라움. 그것이 크면 클수록 국왕 전하의 흐뭇함도 배가되겠지. 권위 또한 드높아지실 터이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제작 목적에 맞추어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한데...."

"음? 또 뭐가 궁금한가?"

"제가 미리 준비해달라 요청드렸던 마법사 말입니다."

"아, 물론 초빙해두었네."

거상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다. 모든 준비를 갖추어두었다. 국왕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박제를 제작하여 본국까지 운송하는 데에 걸리는 기간을 감안하면, 남은 시간이 빡빡하니까.

"그런데 말일세. 요청을 받던 때부터 궁금했던 점인데, 박제를 만드는 데 마법사는 왜 필요한 건가?"

거상이 물었다.

박제공이 대답했다.

"미노타우로스를 깔끔하게 죽이기 위함입니다."

"깔끔하게?"

"예."

박제공의 대답이 이어졌다.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미노타우로스는 목숨줄이 질기기로 유명한 몬스터입니다. 여타의 몬스터라면 절명할 상처를 입고서도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죽기 일쑤이지요. 그래서입니다. 자칫 어설프게 외상을 입혀 죽이려 시도하려다간...."

"시도하려다간?"

"미노타우로스가 광포화를 일으키며 미쳐 날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심각하게 벌어지게 되지요."

"...흠, 가죽에 손상이 생긴다는 뜻인가?"

"예. 이만한 덩치의 몬스터는 가죽과 뿔, 이빨 등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립니다. 부피가 너무 커서 톱밥 등으로 속을 채우면 형상이 유지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면?"

"똑같은 크기와 모습의 조각을 만들어서 그 위에 가죽을 씌우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기에 가죽의 상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는데, 가죽에 손상이 있으면 그만큼 박제의 가치가 심각하게 떨어지게 되지요."

"그럼 독약을 써서 죽이면?"

"독약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와중에 미쳐 날뛰며 제 온몸을 긁어놓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마법사가 필요하다 했던 것이로구만?"

"예, 그렇습니다. 강력한 수면 마법과 마비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놓고 처리를 해야 합니다."

"하면, 처리는 어떻게 하나?"

"제 경험상 진공 마법이 가장 깔끔합니다."

"진공 마법?"

"예. 일정 범위 내의 공기를 희박하게 만드는 마법이지요.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기절하듯 정신을 잃고, 그대로 잠들듯이 천천히 죽습니다. 어떠한 외상도 남기지 않습니다. 박제를 제작하는 데에는 그저 그만이지요."

"흐음, 그럴듯하군."

거상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전문가를 부르길 잘했구나 싶었다. 잠시 후, 초빙된 마법사가 왔다. 마법사가 박제공에게 작업 내용을 전달받았다.

이윽고 박제 제작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거상 귀네스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작업 과정을 감상했다.

"흐흠, 흐흐흠."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보통의 미노타우로스보다 갑절은 큰 덩치. 그만큼 박제로 만들어질 결과물 또한 훌륭하리라. 저 박제를 받고 기뻐할 국왕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흐뭇해졌다. 국왕의 지원을 받아 더욱 번창할 사업을 떠올리니 실로 뿌듯해졌다. 그동안 박제 제작을 위한 도축 작업이 진행되었다.

"흐으음!"

마법사가 복잡한 수인을 맺었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짚는 위치. 순서와 배열, 교란과 조작. 그 속에 마나의 배치가 교묘하게 뒤틀렸다.

비자연적으로 뒤틀린 마나의 균형이 인위적인 흐름을 만들었다. 마나의 줄기가 계산된 경로로 움직이고, 목적을 정확히 수행했다. 수면 마법이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로 쏟아졌다.

스아아아아....

"...느우우."

그렇지 않아도 진정제에 절여져 있던 미노타우로스였다. 무방비하게 수면 마법에 맞으며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 뒤로 마비 마법이 추가되었다. 마무리로 진공 마법이 펼쳐졌다.

슈우우으으...!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노타우로스 우리 안의 공기가 희박해졌다. 기압이 쭉쭉 떨어졌다. 가장 높은 고산지대보다도 더욱 낮게. 해발고도 50킬로미터의 성층권 계면에 필적할 정도로 희박하게.

그만큼 산소도 함께 희박해졌다.

"...느우."

미노타우로스가 순식간에 저산소증에 빠졌다. 뇌로 운반되는 산소 공급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더욱 깊은 혼수상태가 미노타우로스를 잡아끌었다. 극단적인 스트레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사로잡았다.

거대한 육체가 반응하며 꿈틀거렸다. 몇 달간 이어진 감금 생활. 진정제에 절여져 누운 채로 사료를 강제로 먹어온 나날. 그렇게 비대해진 몸집. 혈관에 덕지덕지 붙은 지방과 염증. 그동안 수없이 쌓여온 스트레스와 절망, 분노.

그 모든 것들이 심장을 둘러싼 관상동맥을 막아 버렸다. 심장으로 들어가는 혈류의 흐름이 막혀 버렸다. 극도의 통증이 미노타우로스의 가슴을 옥죄었다.

수면 마법으로도.

마비 마법으로도.

미처 덜어내지 못할 협심증(angina pectoris)의 고통이 미노타우로스를 엄습했다.

"느우우...."

마지막 몸짓처럼 버둥거려 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력하게 운다. 마치, 품속에서 죽어가던 그날의 젖먹이 새끼처럼.

"...느우."

죽음을 앞두어서일까. 미처 떨치지 못한 한이 울고 있음일까. 불현듯 주마등이 비수처럼 망막에 꽂혀 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기억. 그래, 나는 산맥을 호령하던 존재. 미노타우로스의 왕. 그 시절은 행복했던가. 푸르른 들판과 언덕 가득. 무리를 이끌고서 평화로이 살았던가. 풀을 뜯으며, 때로는 영역을 지키며. 갓 태어난 송아지 같은 자식들 품으며. 행복하던 나날에 불쑥 구둣발 들이밀던 침입자들.

인간.

많은 인간.

욕심 많은 인간.

처음엔 그저 경계했더랬다. 한데 경계가 무색하였더랬다. 인간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배려하듯. 그저 평화로이 지내는 모습이었다. 석 달을 내리 그리 지내었다.

그 모습 때문이었던가. 어느샌가 마음이 풀어졌더랬다. 모든 인간이 교활한 건 아니구나. 가끔은 저런 예외도 있는 거구나.

착각이었다. 안심했던 자신이 멍청이였다. 인간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조작된 가식이었다.

갓 태어난 젖먹이 송아지. 어미의 젖을 빨 때마다 까만 눈망울을 유독 반짝이던 아기. 56번째 아들이 그 인간들의 손에 잡혀갔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은 방심을 뼈저리게 후회하였더랬다.

분노에 휩싸여 추격했다. 산과 개울, 언덕을 주파했다. 마침내 그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협곡.

비좁던 협곡.

그 가장 깊은 곳에 아기가 있었다. 다행히 멀쩡했다. 다친 곳도 없었다. 하늘과 들판의 신에게 감사했다. 아기를 안고 서둘러 협곡을 빠져나오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협곡 위의 하늘에서 바위의 벼락이 내렸다. 수십, 수백, 더욱 무수히. 떨어지고, 무수히 떨어져 내려왔다. 무자비한 낙하의 폭력이었다. 협곡 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떨어져 내려오는 무수한 바윗덩이 틈새로 협곡 꼭대기가 언뜻 보이긴 했다.

인간들이 그곳에 있었다.

평화를 위장했던 놈들. 젖먹이 새끼를 잡아간 놈들. 놈들이 바윗덩이를 쉼 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다. 버둥거리는 이쪽을 보며 웃고 떠들어댔다.

그 모습에 눈이 뒤집혔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낙석쯤, 몇 군데 다쳐가며 헤치고 나와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젖먹이 아기가 품속에 있었다. 아기를 지켜야 했다. 포효하고, 날뛰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협곡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바위가 떨어져 내려왔을 때, 이쪽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뒤였던가. 품속의 아기는 죽었다. 더는 까만 눈을 반짝이지 못했다. 아기를 감싸던 이쪽의 팔도, 다리도, 모조리 으스러졌다.

그렇게 절망처럼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인간들이 내려왔다. 드디어 생포에 성공했다고 자축하며 웃어댔다. 피눈물이 흘렀다. 미쳐서 포효했다. 그러나 으스러지고 부러진 사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포효가 전부였다.

그렇게 인간들의 소유물이 되었다.

몇 달이 지나며.

세월이 흐르며.

육신의 상처는 나았으되 그날의 치욕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이렇듯, 벌레처럼 버둥거리며 무력하게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그게. 너무나. 억울하다.

"...느우어어어어억!"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가 눈을 번쩍 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분노. 엄습해오는 협심증의 격통. 미노타우로스의 종족 특성. 죽음을 앞두고 찾아오는 파괴적 본능.

광포화가 발동되었다.

수면 마법이 깨졌다.

마비 마법이 박살 났다.

콰작!

자신을 얕보고 농락한 인간들을 비웃듯. 우루스의 팔다리를 묶어둔 마법의 사슬이 단숨에 끊어졌다.

까드득!

피곤하다.

너무나 노곤하다.

'으으, 몸살.'

라키엘은 잠결에 이를 갈았다. 시장 관저의 침실은 편안한데. 침대도, 시트도, 베개도 너무나 폭신한데. 그런데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잠을 자면서도 아파서 계속 선잠을 깰 정도였다.

'너무 무리했나....'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라키엘은 투덜거렸다. 역시 이 몸은 이게 문제다. 조금만 무리를 했다 싶으면 어김없이 몸살 당첨이라니.

저질 체력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장육부도 실시간으로 계속 아우성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리한 일정을 규탄합니다.]

[심장 : 어이? 너 왜 그렇게 막 나가냐? 안 쉬어? 무한 체력이야? 슈퍼맨이야? 너 땜에 또 허파 쟤 횡격막한테 등짝 스매싱 맞는 거 안 보이냐?]

[허파 : 허... 프프흐흑....]

[대장 : 자꾸 이러면 우리도 안 참지 말입니다ㅋ]

[간장 : 대장 형, 그냥 침대에 지려 버리자. 푸짐하게ㄱㄱ]

[위장 : 응애 나 피곤해! 야식 줘!]

"...."

이것들이 진짜.

누구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일이 있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괄약근에 힘을 꾹 주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입가엔 미소가 맺혔다.

'피곤해. 조금 움직였다고 엉망진창이야. 하지만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던 전보단 나아졌으니까.'

앞으로 조금씩 나아지겠지.

계속 보너스 수명을 얻으면, 그렇게 생명을 연장시켜 나가면. 조금씩, 천천히, 한 걸음씩, 분명 나아지겠지. 그 언젠가, 한국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며 미래를 꿈꾸었던 때처럼.

'타이x놀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잠깐 일어나서 찜질이라도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쾅쾅쾅쾅!

너무나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밖에서 침실 문을 두드렸다.

"...."

뭐야.

물어보기도 전에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황태자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큰일이 났습니다!"

벌컥!

시장 관저 경비병 둘이 황급히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데미안이 검자루에 손을 얹고서 물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소란이 아니라, 그! 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안전한 곳으로?"

데미안이 인상을 썼다. 경비병이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들을 수 없었다. 경비병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굉음이 침실 벽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아아앙-!

"...!"

공성 병기로 벽을 후려치면 이런 소리가 날까. 혹은, 덤프트럭이 건물을 들이받으면 이럴까.

침실 벽면 한쪽이 박살 났다. 벽돌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튕겨 날았다. 동시에 데미안 녀석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이쪽의 앞을 가로막았다. 녀석의 뒷모습. 검을 뽑았다. 그다음부터 보인 것은 수십 줄기의 섬광, 아니, 검광이었다.

츠카카카칵-!

날아오던 벽돌 조각과 파편들이 검광에 휩쓸려 분쇄되었다. 뒤이어 폭풍 같은 흙먼지가 훅 몰려왔다. 흙먼지 사이로 데미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전하! 뒤로 물러나십...."

투콱-!

거대한 주먹이 날아온 것은, 데미안을 후려친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터걱!

데미안이 날려갔다. 수 미터 건너편 벽에 들이박혔다. 쓰러졌다. 하지만 그걸 보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맹렬한 주먹질이 휘젓고 지나간 공간. 폭풍 같은 기세에 흩어지는 흙먼지. 그 사이로 거대한 머리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

버팔로를 닮은 머리. 폭발적으로 내쉬는 호흡.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동자. 그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노타우로스?'

확실하다. 아까, 낮에 경매장에서 놓친 그 미노타우로스다.

꿀꺽.

라키엘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요동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공포로 온몸이 굳어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긴장해서? 전부 아니었다.

너무나 갑자기 침실을 습격한 미노타우로스. 광포화를 일으켜 날뛰는 괴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무의식중에 느꼈다. 익숙한 눈빛이라고. 여러 번 본 눈빛이라고.

어디서?

한국에서.

한의원에서.

그러니까 저 눈빛 저거....

'너무 아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그렇게 진료실에 들어오는, 딱 그런 환자들 눈빛이랑... 똑같은데?'

65화. 미노타우로스의 왕 (2)

많이 본 적 있는 눈빛이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침실 벽면. 그 자욱한 흙먼지 사이로 언뜻 마주친 미노타우로스의 눈빛. 그걸 보며 익숙함을 느낀다면 내가 미친 걸까. 혹은,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은 걸까.

'그러니까 저런 눈빛, 한국에서....'

본 적이 있다.

묻어두었던 기억 한 줄기가 떠올랐다. 한의원을 개원하고 첫해였을 것이다. 팔순이 다 되어가던 할머니 환자가 계셨다.

신경통이라고 했다. 너무 아파서 잠도 못 주무신다고 했다. 그래서 안 다녀본 병원이 없노라 하셨다. 한데 어떤 병원에서도 통증의 원인을 못 찾아냈다고도 하셨더랬다.

온갖 사진을 다 찍어보고 검사를 받아봤지만. 큰 병원 작은 병원 전부 다녀봤지만. 그럼에도 신경통이 왜 생기는지를 알아낼 수 없었노라 하셨다. 당연히 제대로 된 치료 또한 받지 못했노라고도 하셨다.

'그 할머니가 처음 내 한의원에 오셨을 때. 그때가 딱....'

저런 눈빛이셨다. 아픈데 기댈 곳 없는 사람의 눈빛. 막막함이 울분으로 쌓인, 그런 사람의 눈빛.

'그런데 왜 미노타우로스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그 전에 더욱 근본적인 의문도 함께 떠올랐다.

'왜 미노타우로스가 여기서 나와?'

궁금했다. 진심으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쪽은 그저 며칠간의 여정 동안 쌓인 피로에 떡실신이 되어 있었을 뿐이다. 몸살기 때문에 끙끙대고 있었을 따름이다.

한데 난데없이 쾅.

침실 벽면이 부서지고 난리가 났다. 미노타우로스가 커다란 머리를 들이밀고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어쩐지 모를 절박하고 막막한 분노로 핏발을 시뻘겋게 세우고서.

"...푸륵!"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가 콧김을 거세게 뿜어냈다. 사실은 우루스도 지금, 라키엘을 보며 의문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놈이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내게 해코지를 하려던 비쩍 마른 노인을 추격해 왔을 뿐인데.

고통과 분노로 물들어 혼탁해진 의식. 그 사이로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까 죽어가던 자신. 그리고 시작된 광포화. 그 직후에 겪었던 일들의 단편적인 기억이었다.

"푸륵! 푸르...륵!"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다 죽이겠노라고. 그렇게 자신의 울분과, 비명에 간 젖먹이의 한을 풀겠노라고.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눈이 뒤집혔더랬다. 전신을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더랬다.

단숨에 부서지던 우리. 비명을 지르던 인간들. 그들 중에 가장 눈에 띄던 놈. 날 사들이고서 거들먹거리던 늙은 인간. 인간들 사이에서 거상이니 뭐니 하고 불리던 그놈. 그놈부터 죽이고 싶었다.

포효하며 돌진했다. 한데 그놈이 일찌감치 도망쳤다. 호위병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단숨에 후려치고 날렸다.

추격했다. 거상이 도망쳤다. 집요하게 쫓아갔다. 놈도 허겁지겁 말에 올라 내달렸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은 경비병이 있는 곳으로. 이 도시에서 가장 방비가 튼튼한 건물로. 그렇게 놈이 선택한 도피처가 바로 이곳이었다.

놈을 끝까지 추격했다. 놈이 피신한 이곳,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의 정원에 난입하고, 날뛰었다. 하지만 결국엔 놈을 놓쳤다. 더욱 화가 났다. 다 부수자고 결심했다. 가까이에 있던 건물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반드시 죽이리라 다짐했던 늙은 거상, 그놈과 다른 또 하나의 목표를.

"...푸르륵!"

라키엘을 노려보는 미노타우로스의 눈에 핏발이 짙어졌다. 쳐다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눈에 익은 놈이다. 언제? 아까 낮에.어디서? 경매장에서. 늙은 거상 놈과 경쟁하며 나를 사들이려 애쓰던 젊은 인간. 날 사들이지 못했음을 대놓고 아쉬워했던 놈. 그러니까 저놈도 똑같은 놈이다. 늙은 거상과 같은 부류다. 즉, 쳐죽여야 하는 놈이다.

"...누워오옥!"

흉성이 터졌다.

후와아아악-!

주먹을 휘둘렀다.

아까 후려쳤던 그놈처럼 만들어주리라. 단숨에 온몸을 으스러뜨려 버리리라. 다짐하고, 확신했다. 동시에 라키엘의 동공도 급격히 확장되었다.

'미친!'

맹렬하게 날아오는 주먹. 그냥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먹의 크기부터가 헬스장에 있는 짐볼만 했다. 어지간한 2층 건물 옥상과 눈높이가 비슷한, 신장 7미터 괴수의 체중이 실린 주먹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멍하니 저걸 맞아줄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죽을 거 같냐!'

힘껏 알뜰살뜰 챙겨온 목숨이었다. 그걸 여기서 한 큐에 삭제(?)당하긴 싫었다.

타앗!

옆으로 몸을 날렸다. 어떻게든 주먹질을 피해 보려 했다. 한데 주먹질이 너무나 빨랐다. 그에 비해 이쪽의 회피 기동은 답답하도록 느렸다.

'...망했다.'

이건 못 피한다. 아무리 봐도 후려 맞는 각이다. 그러면 이쪽은 어떻게 될까. 스쳐도 전신 골절 당첨일 거 같은데. 운이 좋아 봤자 내장 파열은 세트 메뉴일 거 같고

'파리채에 맞아 죽는 똥파리가...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아득해지는 기분. 그 속에서 얼핏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 한데 그 순간이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기 직전, 뭔가가 옆구리를 강하게 밀어쳤다.

뻐억!

"...꾸엑!"

몸이 기역자로 휘었다. 왼쪽 갈빗대가 오손도손 우수수 부러진 건 아닐까. 숨이 턱 막히는 충격과 함께 몸이 옆으로 날려갔다.

그 직후.

후우우웅-!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이 이쪽이 있던 공간을 휘저으며 지나갔다. 마치 최고 속도로 달리는 KTX 열차가 코앞으로 지나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였다. 허공을 가르는 미노타우로스의 주먹. 그 너머에 데미안이 있었다. 한쪽 다리를 들고 있었다. 마치 옆차기를 한 듯한 자세였다. 그걸 보자 뒤늦은 깨달음이 전두엽을 땡 하고 쳤다.

아하, 저놈이 날 걷어찼구나, 라고.

"커윽!"

콰탕당!

지면이 이쪽을 거칠게 받아냈다. 하지만 아프다고 엄살을 부릴 틈은 없었다.

"구르십시오!"

데미안의 외침. 그걸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굴렸다. 그 직후 다시금.

콰아앙-!

위에서 떨어져 내려온 주먹질이 방금까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내리쳤다.

'으으악!'

어째서인 걸까. 왜, 어쩐지 저 미노타우로스가 날 집중적으로 노리는 기분이 드는 걸까.

데굴데굴 구르자마자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데미안에게 걷어차인 옆구리가 콱 쑤셨다. 하지만 그딴 통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달렸다.

침실 출입문 쪽으로 뛰었다.

뒤쪽에서 거친 포효가 터졌다.

"누워오오오오!"

후우우웅-!

거대한 덩어리가 날아오는 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

이쪽의 몸통만 한 돌덩이가 날아오고 있었다. 정확히 이쪽을 조준하고 있었다.

'으아아 진짜!'

황급히 넘어지듯 또 굴렀다. 머리 위로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질풍처럼 스쳐 갔다.

콰아앙-!

돌덩이가 문을 뭉갰다. 벽면이 무너졌다. 무너진 돌 더미에 유일한 출입구가 막혔다.

'설마?'

이걸 노리고 돌덩이를 던진 걸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전하와 저, 여기 갇히게 된 듯합니다."

검을 앞세우고 이쪽을 지키듯 막아선 데미안. 녀석이 등으로 숨을 골랐다. 살기 섞인 기세를 발산하며,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며, 광포한 몬스터와 대치했다. 그런 녀석의 말을 냉큼 받았다.

"어, 거기에 미노타우로스 일행도 한 마리 추가해서."

농담처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실없는 농담이라도 나누지 않으면, 대신 비명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생각해보니 기도 차지 않았다. 도망칠 출입구가 무너져 고립됐다. 덕분에 오밤중에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와 이 좁은 곳에서 피 튀기는 짝짜꿍을 하게 생겼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식은땀이 나며 손끝과 입술이 차가워졌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데미안도 이쪽과 비슷한 심정인 걸까. 녀석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들려왔다.

"오늘 이 사태를 무사히 넘기면-"

"넘기면?"

"특별수당 지급, 부탁드립니다."

"...뭐?"

"이렇게 긴박하고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이겨내고 전하를 지켜내면 말입니다. 그 정도 보수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특별수당을 달라고?"

"예."

"안 주면?"

"저 혼자 도망갈 겁니다."

"...."

와, 이, 씨.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쪽이 욕하는 것보다 데미안이 먼저 잽싸게 말했다.

"그러니 제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하십시오. 셋을 세면 제가 미노타우로스를 공격할 겁니다. 그러면 놈에게 틈이 생길 테니, 그때 여길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빠져나가라니, 어디로?"

"놈이 부순 저 벽면 말입니다."

데미안이 힐끗 눈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탈출구가 하나 남아 있었다. 미노타우로스가 부순 침실 외벽. 그 밖으로 밤하늘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여기 2층인데?"

"상관없습니다. 그냥 뛰어내리십시오."

"다리가 부러지면?"

"여기서 으스러져 죽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이미 외벽 아래에 경비병들이 모여들어 있습니다. 미노타우로스의 다리를 공격하는 중입니다. 전혀 효과는 없지만 말입니다."

"...설령 내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더라도 그들이 날 구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줄 거다?"

"지금은 그게 유일한 탈출법인 듯해서 말입니다."

"...."

이쪽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짓는 데미안. 녀석의 말이 맞았다. 그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 데미안의 기세를 경계하며 빈틈을 노리던 미노타우로스가 움직였다.

"...푸후욱! 느오!"

콰콰콱! 콰작!

미노타우로스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왔다. 침실 바닥 일부가 으스러졌다. 거대한 두 팔이 뻗어왔다. 동시에 데미안이 재빨리 외쳤다.

"하나, 둘, 셋! 지금입니다!"

"...!"

카운트가 너무 빠르잖아!

항의할 틈은 없었다. 위기를 감지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타앗!

어느새 이쪽은 데미안의 뒤를 따라 뛰고 있었다. 앞서 돌진하는 데미안. 녀석의 뒷모습이 순간 흐릿하게 잔상만 남았다.

츠카카카카칵-!

좌우로 흐트러지는 잔영. 잔영을 따라 허공을 수놓는 검광. 달빛 속에 수십 줄기의 검광이 질주했다. 미노타우로스 팔뚝과 손목의 가죽을 베고, 저며냈다. 물론 미노타우로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크워억!"

따끔한 통증에 더욱 분노했다. 거대한 머리를 휘저었다. 위협적인 뿔이 데미안을 꿰뚫을 듯 찔러져 들어갔다. 데미안이 마주 검을 내리쳤다.

터커어엉-!

검과 뿔이 부딪치는 순간, 맹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졌다. 데미안이 몇 미터나 뒤로 밀려났다.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도 뒤로 크게 젖혀졌다.

'지금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고개가 젖혀진 지금이, 자세가 크게 흐트러진 바로 지금이, 아까 데미안이 말했던 '빈틈'이었다.

타앗!

달렸다.

미노타우로스의 곁을 지나쳤다. 바로 앞에 뻥 뚫린 벽면이 보였다. 저기로 몸을 날리면 된다. 그러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 확신하며 바닥을 박찼다. 유일한 탈출구를 향하여. 허공에 몸을 띄웠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푸르륵!"

미노타우로스의 콧김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찾아온 어지러움을 털어내려는 걸까. 별안간, 놈이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몸통과 팔뚝도 함께 흔들었다. 그 팔뚝이 눈앞을 확 가로막았다.

피할 수가 없었다. 이쪽은 이미 땅을 박차고 허공에 몸을 날린 상태였으니까.

'으어어엇!'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팔뚝 털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그 결과, 미쳐 날뛰는 소머리 괴물의 팔뚝을 찰싹 끌어안은 매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으읏!"

당장 놓고 뛰어내려야 한다. 미노타우로스가 이걸 애정과 우호의 프리허그로 여기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황급히 손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딩동!

난데없는 알림음이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응급상태의 환자와 신체접촉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지닌 진맥 스킬이 응급 환자의 바이탈 시그널(Vital signal)에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진맥을 시작합니다.]

'...어?'

응급 환자?

진맥을 시작해?

'무슨?'

이런 상황에서, 사람도 아닌 미노타우로스를 대상으로 뜨리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는 황당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쪽의 의사는 상관없었다. 정말로 진맥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되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이내, 정말로 미노타우로스의 종합검진표가 떠올랐다. 비로소 라키엘은 이 사태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66화. 한밤의 로데오 (1)

딩동!

거침없이 귓가에 울리는 소리. 종합검진표가 시야 한쪽을 차지하며 떠올랐다. 이런 순간에 볼 거라는 생각도 못했던 결과물. 미노타우로스의 종합검진표였다.

'이게 무슨.'

날뛰고 있는 미노타우로스가 응급 환자란다. 그 응급 바이탈 시그널에 이쪽의 진맥 스킬이 자동으로 반응했단다. 그래서 진맥 스킬이 발동한 거란다.

'한데 이건....'

라키엘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미노타우로스의 종합검진표를 빠르게 훑었다.

[초급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

[종족 : 미노타우로스]

[성별 : 남자]

[연령 : 48세]

[신장 : 7,120cm]

[체중 : 14,923kg]

[혈액형 : C2]

"...."

딱 숫자로만 봐도 우량함(?)이 팍팍 느껴지는 신체 스펙. 한데 그 아래에 뜨는 각종 지표가 이상했다. 특히, 그중에서 심장에 적신호가 떠올라 있었다.

[심장기능 : F]

'...어?'

다른 오장육부는 큰 이상까지는 없었다. 한데 심장이 '심각함'을 나타내는 최악의 F 등급이었다. 라키엘의 눈이 아래쪽의 종합 소견을 재빠르게 살폈다.

[종합 소견 : 오랜 감금 생활과 진정제 투여, 다량의 강제적인 곡물 섭취로 신체 밸런스가 흐트러져 있습니다. 복부 비만이 감지됩니다. 이상지혈증(hyperlipidamia)이 감지됩니다. 혈관 내 콜레스테롤 수치가 위험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심각한 스트레스로 인한 높은 염증 반응과 대사 기능 저하가 우려됩니다. 응급상태 리포트가 <1건> 있습니다.]

[응급상태 리포트를 펼치려면 이곳을 주시하십시오.]

종합 소견란의 마지막에 처음 보는 문구가 있었다.

'응급상태 리포트?'

안내문에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곧이어 심장의 빽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 : 야 비상! 응급환자 떴다!]

'어?'

[심장 : 어, 는 무슨? 방금 진맥한 환자 있잖아? 쟤 심장 장난 아닌데?]

'장난이 아니라니?'

[심장 : 협심증이야. 안정형 협심증(Stable Angina Pectoris) 흉통이 제대로 도졌다고. 관상동맥(coronaty artery)에 혈전 생겼고, 죽상경화증(atherosclerosis) 대환장 파티 상태임. 이거 계속 놔두면 빼박 심근경색 각인데?]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라면 심각한 증상이다.

'협심증이라면, 심장 혈관이 반쯤 막힌 거잖아.'

자칫 심근경색으로 진행될 수 있는 증상. 심한 경우엔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태. 말 그대로, 한국이었다면 당장 119를 부르고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상황이었다. 비로소 라키엘은 미노타우로스가 날뛰는 원인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협심증의 흉통은 엄청나다지. 자동차가 가슴을 뭉개고 지나가는 것 같다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이놈도 그런 거구나. 아파서 날뛰는 거였어.'

끔찍한 고통이 트리거가 되었을 것이다. 오랜 감금 생활 등의 스트레스가 더해져 폭발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너도 사연이 있었겠다고.

정말로 안됐다고.

애석하다고.

'쯧쯧.... 하지만 지금은 내가 널 어떻게 치료해줄 상황은 아닌 거 같다? 왜냐면, 지금 당장은 너보단 내가 더 안타깝거드으으응으악-!'

부후우우우웅-!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가 왼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그 팔뚝에 매달린 라키엘도 덩달아 힘차게 휘둘러졌다.

'...그, 그와아아아악!'

엄청난 중력가속도가 온몸을 사로잡았다.

바이킹?

청룡열차?

그것들보다 몇 배는 더한 메슥거림이 위장을 콱, 쥐어짰다. 전신의 피가 발가락으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떨어질 수는 없었다.

'이렇게 휘둘러지는 와중에 이걸 놓치면... 그래서 날려 가면... 어디에 부딪히더라도 온몸이 박살 날 거니까!'

풀스윙으로 벽에 내던진 딸기 꼴이 날 것이다. 철퍼덕, 혹은, 와그작. 그런 식으로 죽기는 싫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냈다. 우루스의 팔뚝 털을 움켜쥐었다. 필사적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루스가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져갔다. 설상가상으로 우루스가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

"푸륵!"

이쪽이 아연실색 얼어붙는 순간. 놈이 거친 콧김을 내뿜는 순간. 우루스의 오른손이 치켜 들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세차게 떨어져 내려왔다.

콰아아-!

"...!"

사람 팔뚝에 달라붙어 있다가 손바닥 내려치기에 찍-하고 끔살당하는 모기 1인칭 시점이 이런 걸까. 이쪽의 키만큼 커다란 손바닥이 떨어져 내려왔다. 모든 시야를 뒤덮으며. 도망칠 생각조차 지워 버리며.

'미친.'

눈이라도 감아야 할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스칵-!

새하얀 섬광이 번득였다. 우루스의 뿔을 거칠게 때렸다.

카가각-!

뿔에서 튀는 맹렬한 불꽃.

너무나 쏜살같이 뻗어온 검격이었다. 불시의 검격에 이쪽을 내리치려던 우루스가 멈칫했다. 검격이 날아온 곳을 향해 충혈된 시선을 던졌다. 이윽고 미노타우로스의 왕은 발견할 수 있었다.

"쯧!"

내뻗었던 검을 회수하는 데미안. 그가 아쉬움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원래는 뿔이 아니라 눈을 노렸던 건데. 황태자를 구하려 급히 검기를 뻗느라 자세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상관없다. 일단은 미노타우로스의 손을 멈추게 했으니까.

그러니까....

"전하, 조금만 버티십시오. 구해드릴 테니!"

재빠르게 외쳤다. 더욱 빠르게 미노타우로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데미안의 두 눈이 거칠게 번득였다.

'옆구리, 그리고 겨드랑이.'

두 부위를 재빠르게 벤다. 깊게 베지 못해도 괜찮다. 놈이 주춤하기만 하면 된다. 그 틈에 놈의 팔뚝에 매달린 황태자를 구해낸다.

순식간에 전투 계획이 만들어졌다. 내딛는 걸음과 도약. 당기는 검의 호흡과 미노타우로스의 반응. 그 모든 요소를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으로 이용했다.

타탓! 스칵!

두 번의 검광이 번득였다. 우루스가 주춤하며 포효했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였다. 단 하나.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황태자의 나약한 손아귀 힘만 제외한다면.

"...어크억! 사람, 살!"

부우웅-!

검격의 따끔함에 우루스가 두 팔을 휘두르는 순간. 이제껏 간신히 버티고 버티던 라키엘의 손아귀 힘이 한계에 달했다.

더는 원심력을 버텨낼 수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풀렸다. 움켜쥐고 있던 우루스의 털을 놓쳤다. 그대로 전신이 허공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후웅!

"...려어억!"

라키엘은 다급하게 외쳤다. 우루스의 팔뚝을 놓치는 순간. 온몸이 원심력에서 시원하게 해방되었다. 그리고 더욱 시원하게 침실 밖, 시장관저 정원을 향해 훨훨 날아가게 되었다.

'허, 허억?'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현실감이 없었다. 온몸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밤하늘의 달이 보였다가. 정원 가득한 조경물이 보였다가. 다시 밤하늘의 달과 별이 반짝이며 인사하고. 다음엔 정원의 무성한 나무와 풀이 손짓했다.

즉, 지금 자신은? 15미터 높이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빙글빙글 날아가는 중이었다!

'미친!'

맹렬하게 날아가는 홈런 타구가 이런 기분인 걸까. 그럼 이 포물선의 끝은 어디가 되는 걸까.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지럽게 교차하는 시야 속 하늘과 땅. 그 와중에 땅이 점점 가까워졌다. 연못이나 분수대? 그따위 희망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맨땅이었다. 맨땅이 이쪽을 반기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졌다.

더욱 가까워졌다.

삽시간에 와락.

가까워졌다.

수십 미터의 자유낙하 비행. 그 끝에 이쪽을 으스러뜨릴 지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거친 충격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터걱-!

"...그억!"

숨이 턱 막히는 감각. 척추가 쌍쌍바처럼 두 줄로 재편성되는 기분. 한데 이상하게도, 그게 끝이었다. 의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지면에 떨어졌다면 의식이고 나발이고 즉사 당첨이었을 텐데.

'설마 나뭇가지에라도 걸렸나?'

생각하며 눈을 떴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크르릉, 헥헥헥!"

늑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보자마자 혀를 내밀며 반갑게 헥헥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라키엘은 멍하니 물었다.

"...아니스?"

"헥헥!"

늑대인간 상태의 아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라키엘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면에 추락하기 직전에... 아니스가 달려와서 날 받아냈구나.'

과연 살펴보니 자신은 아니스의 두 팔에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려 있었다. 살았구나 싶었다. 뒤늦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근위기사와 특근대원들이 곁으로 달려왔다.

"전하! 무사하십니까!"

"이럴 때가 아니네. 어서 저쪽으로! 전하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달려!"

"크르릉! 헥헥헥!"

라키엘을 안은 아니스가 정원을 질주했다. 말에 탄 근위기사들과 특근대원들이 그 곁을 호위하듯 나란히 달렸다. 그렇게, 황태자 일행이 순식간에 정원 건너편으로 도주했다. 멀어졌다. 사라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망연자실한 시선을 받으며.

"...푸르륵!"

우루스의 콧김이 거칠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매장에서 자신을 사들이려 했던 인간 놈. 저놈을 보란 듯이 패대기쳐서 죽이려 했다. 한데 이렇듯 황당하게 놓칠 줄은 몰랐다. 어이가 없어서 더욱 화가 났다. 눈이 뒤집혔다.

"누오오오오! 푸르륵! 푸륵!"

한층 충혈된 우루스의 눈길이 광포하게 움직였다. 목표를 어이없게 놓친 분노. 그 분노를 풀 새로운 대상을 물색했다. 그러자니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인간이 보였다.

검은 머리칼. 감히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놈. 아까부터 이쪽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놈.

"...이거, 위험수당 꼭 받아야겠는데."

우루스의 거친 시선을 받은 데미안이 쓴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황태자를 무사히 피신시켰다. 그러니 이제는 이쪽이 빠져나갈 차례다.

'잘 될까.'

침실의 유일한 탈출구를 미노타우로스가 막고 있는 상황. 즉, 여길 빠져나가려면 놈을 뚫어야 한다.

'해보자.'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오늘치 위험수당을 받아내려면 어쨌건 살아남아야 하니까.

그 순간이었다.

"누오오오-!"

콰아아아-!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주먹이 날아왔다. 데미안의 눈에 섬광이 떠올랐다.

타닷!

옆으로 재빨리 스텝을 옮겼다. 뻗어오는 주먹의 경로에서 반걸음 비켜섰다. 그대로 검을 옆으로 눕혔다. 내밀었다. 놈의 손목부터 팔뚝까지 일자로 그어 버리려는 동작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츠팟!

뻗어오는 듯하던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이 멈칫했다. 순식간에 물러났다.

'페이크?'

데미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머리가 휘둘러졌다.

카아앙-!

"...!"

간신히 뿔을 쳐냈다. 전신이 들썩이며 뒤로 밀려났다. 진짜 주먹이 그제야 날아왔다.

콰아아-!

"...크읏!"

그때부터였다.

데미안의 검이 사납게 공간을 저며냈다. 우루스의 주먹과 팔뚝, 뿔이 공간을 파괴했다. 각자의 검과 뿔이 얽혔다.

서로를 치고, 밀어냈다. 찍고, 찌르고, 베었다. 저며내고, 후려쳤다. 검이 백 번 번득이고. 뿔이 열 번 날뛰었다.

카카카카카카캉-!

숨 쉴 틈도 없는 연격! 미노타우로스의 왕과 데미안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런 둘의 승부를 가른 것은 사소한 차이였다.

쩌저적...!

둘의 맹렬한 연속 격돌. 충격파를 버티지 못한 침실 천장에 금이 갔다. 금이 급격하게 벌어졌다. 확장되었다.

콰드득!

천장이 무너졌다. 목재와 돌 더미가 떨어졌다. 우루스와 데미안을 덮쳤다.

"푸륵!"

우루스는 돌 더미를 머리와 어깨로 받아냈다. 제법 큰 충격이 가해졌지만, 돌 더미라 봤자 우루스의 체중에 비하면 그리 심하게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평범한(?) 인간인 데미안에겐 달랐다.

"...크읏?"

황급히 뒤로 뛰었다. 그러나 눈앞의 우루스와의 격돌에만 집중하던 와중에 천장 전체가 무너져 버리니, 피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위로 검격을 날릴 여유도 없었다. 결국, 천장 구조물이 그대로 데미안을 덮쳤다.

"...!"

콰그자작-!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었다. 그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데미안은 돌 더미에 깔린 자신의 한쪽 다리를 목격해야 했다.

"...크읍."

부러진 걸까. 아니면 접질린 걸까. 커다란 해머로 정강이를 내려친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돌 더미에 낀 다리가 빠지질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미노타우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놈이 머리와 어깨에 얹어진 돌 더미를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

나,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데미안은 검을 움켜쥐었다. 설령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싸우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느워오오오오-!"

미노타우로스가 포효하며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이쪽을 내리찍으려는 걸까. 두 주먹이 만든 그림자가 이쪽의 얼굴을 뒤덮어 왔다. 이윽고 공성추 같은 주먹이 떨어져 내려왔다.

콰우우우우-!

"...!"

검을 치켜들었다.

막아내리라. 어떻게든 싸워보리라. 가슴 가득 드리우는 위기감. 그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주먹이 전신을 뒤덮으며 쇄도해 왔다. 심장 속에서 미증유의 기묘한 두근거림이 날뛰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꼬슴아! 몸통박치기!"

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 들려올 거라곤 생각한 적 없던, 황태자의 외침이었다. 그와 동시에 뭔가 거대한 물체가 맹렬히 날아왔다.

"꼬슴-!"

그 순간.

데미안은 뜻밖의 광경을 직관해야 했다. 그것은 5미터 크기로 거대해진 환상종, 꼬슴이가 미노타우로스의 등짝에 몸통박치기 밤송이 어택을 작렬시키는 광경이었다.

67화. 한밤의 로데오 (2)

"꼬슴-!"

야물딱진 외침이 울렸다. 동시에 5미터 크기의 물체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날았다.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의 튼실한 등짝에 충돌했다.

아니, 꽂혔다.

뾱!

"...누오!"

밤하늘 가득 울려 퍼지는 미노타우로스의 외침. 그걸 듣는 순간, 데미안은 깨달아야 했다.

'꼬슴 경?'

미노타우로스의 등짝에 날아와 꽂힌 덩어리. 그건 분명 환상종 꼬슴 경이었다. 밤송이처럼 동글동글 삐죽삐죽.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크기만 5미터에 육박하도록 거대해졌을 뿐.

'꼬슴 경에게... 저런 능력이 있었나?'

그저 찔림 방지용 가죽 주머니에 담겨 다니는 환상종인 줄 알았는데. 황태자의 침술에 가시를 제공해주는, 그게 다인 녀석인 줄 알았는데.

'한데 꼬슴 경이 왜 여기에? 그럼, 전하는?'

순간 떠오른 의문.

설마 하는 생각.

데미안의 눈길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너진 외벽 너머를 향했다. 관저 정원을 신속히 훑었다.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뭔가를 던진 자세를 하고 있는 황태자 라키엘의 모습이었다.

'저 인간이 왜 저기에 있어?'

순간 울컥,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탈출시켜줬더니.'

그랬으면 멀리 도망가기나 할 것이지. 뭘 어쩌자고 여기까지 돌아와서 저러고 있는 걸까.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동시에, 데미안과 눈이 마주친 라키엘도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이스! 명중!'

혹시나 했다.

잘 될까 싶었다.

환상종을 소환하며 받은 빨간 해바라기씨. 먹이면 환상종의 덩치가 비약적으로 거대해진다고 했다. 꼬슴이가 직접 보증했다. 믿고 꼬슴이에게 먹였다. 먹이자마자 전력으로 던졌다. 마치, 안전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을 던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날아가며 꼬슴이가 거대해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등에 제대로 명중했다.

'다행이다. 늦지 않아서.'

문득,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니스에게 안겨 도망치던 중이었다. 침실에 남겨진 데미안 생각이 계속해서 났다. 솔직히 말해서, 걱정이 됐다.

'데미안이 강하긴 하지만... 미노타우로스, 그것도 보통의 미노타우로스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될 놈에게 가로막혀 고립되었으니까.'

아무리 데미안이라도 그건 못 이길 듯했다. 그래서였다.

'이대로 녀석을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녀석이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그새 인간적인 정이 들어서? 모두 아니었다. 녀석은 여기서 잃기엔 너무나 유능한 호위였다. 녀석을 얻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을 생각하면 두고 가기 싫었다.

'녀석이 안전하게 살아남아야 내 안락한 노후와 미래도 지켜질 거니까!'

삼국지의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가 있듯이. 바르셀로나 FC에 리오넬 메시가 있(었)듯이. 전성기 시카고 불스에 마이클 조던이 건재했듯이. 월드컵 경기 시청에 치킨이 필요하고, 소개팅 날에 잘생김과 예쁨을 챙겨야 하듯이.

자신에게도 반드시 데미안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꼬슴이 가시 잡아! 얼른!"

외쳤다.

외침이 닿았다.

데미안의 손이 검을 쥐었다.

내리쳤다.

콰작!

다리를 짓누르고 있던 바위가 반쯤 쪼개졌다. 다시 내리쳤다. 또 내리쳤다. 콱, 콰작, 바위와 목재 더미가 갈라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다. 마침내 끼어 있던 다리에 해방감이 찾아왔다. 고통과 함께였다.

"으윽."

접질린 걸까.

아니면 부러진 걸까.

종아리와 발목이 말을 듣질 알았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통증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에선 미노타우로스가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누오오오오오오-!"

허리를 활짝 펼친 미노타우로스가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등 뒤에 박힌 꼬슴이를 붙잡았다. 등에서 뽑아냈다.

뽁-!

두꺼운 소가죽 덕분일까. 피는 거의 나지 않았다. 꼬슴이를 붙든 우루스의 두 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생각보다 따끔해서 제대로 붙잡을 수가 없었을 뿐.

"...느오오!"

분노에 휩싸여 너무 꽉 틀어쥔 까닭일까. 맨손으로 밤송이 짐볼을 꽉 안은 것처럼 손바닥과 팔뚝, 가슴이 온통 따끔 화끈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덕분에 놓치고 말았다. 꼬슴이가 바닥으로 데구르르 떨어졌다.

"꼬슴! 꼬스슴!"

떨어지자마자 데미안을 향해 굴러가며 외쳤다. 그 의도를 알아챈 데미안이 손을 뻗었다. 꼬슴이의 가시 하나를 잡았다.

그 순간, 꼬슴이가 밤송이 모드(?)를 풀었다. 데미안을 등 가시 사이에 끼워 넣은 채, 네 다리를 드러내고서 도도도도 달렸다. 무너진 외벽 바깥으로 쏙 빠져나갔다. 보기보다 빠른 속도였다. 덕분에 우루스는 그 전격적인 도주에 미처 반응하지를 못했다.

"...누오?"

우루스의 수난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꼬슴이가 외벽 바깥으로 몸을 날리는 순간. 등에 탑승해 있던 데미안이 검을 당겼다. 뿌렸다. 혼신의 힘을 실었다. 강렬한 검기가 형성되었다. 뻗었다. 시장관저 3층 외벽을 후려쳤다.

투컥-!

미노타우로스의 난동에 의해 이미 반쯤 무너지고 있던 건물이었다. 거기에 혼신의 힘을 실은 검기가 작렬했다. 약해진 건물이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 결과는 본격적인 붕괴였다.

콰드득! 콰드드드-!

"...누으!"

5층 건물 한쪽이 통째로 무너지며 우루스를 덮쳤다. 제아무리 공룡 급의 신체 스펙을 지닌 우루스라도, 무너져 내려오는 수십 톤 이상의 무게 앞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비명과 함께 깔렸다.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그 사이, 꼬슴이가 정원 지면에 착지했다. 그대로 달려 일행에게 합류했다. 라키엘이 꼬슴이와 데미안을 반겼다.

"잘했어, 꼬슴아."

"꼬슴!"

"그리고 데미안, 넌 멀쩡하냐?"

"...물론입니다."

"다리는 안 멀쩡한 거 같은데?"

"그래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움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럼 됐어.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서 다리 봐줄 테니 도망치자. 미노타우로스 저거, 안 죽었을 거야."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지금껏 날뛰던 모양새로 보아, 고작(?) 5층 건물에 깔렸다고 쉽게 죽을 놈은 아닐 듯했다.

'뭐, 놔두면 협심증이 심해져서 죽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좀 아깝네. 우황은 산 채로 뱉어낸 생황이 최곤데. 쯧. 저 녀석 죽으면 아까운데. 진짜로 그러면 배라도 갈라서 꺼내야 하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듯 엄청난 미노타우로스라면 품고 있는 우황도 최상품일 텐데. 그걸 생황으로 얻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아까운가.

'하지만... 무리하지 말자.'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욕심을 낼 때가 아니다. 어설픈 영웅놀이를 할 때도 아니다. 까닥 잘못하다간 우황은커녕 이쪽이 삼도천 너머 염라대왕과 진로상담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니 오늘 분의 용기는 여기까지.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고."

"알겠습니다."

그때부터였다. 시장 관저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시장 일행과 마주쳤다.

"전하아! 무사하십니까아!"

잠옷 바람에 머리가 산발이 된 크레모 시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쪽의 안위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갈 생각입니다, 전하."

"가장 안전한 곳?"

"예, 전하. 바다이옵니다."

"바다라면...."

"제 배에 오르소서. 그리하여 배를 항구 앞바다에 띄우면 저 미노타우로스가 아무리 흉악하게 날뛴다 하더라도 전하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대피라. 들어보니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움직이지요."

"예, 전하!"

시장 일행을 따라 움직였다. 관저를 완전히 벗어났다.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혼란에 빠진 시가지를 지나쳤다. 부두에 도착하니, 출항 준비를 서두르는 범선 한 척이 보였다.

"저 배이옵니다, 전하!"

범선에 올랐다. 한데 어쩐 일인지 시장은 배에 오르지 않았다. 왜일까.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부두에 남은 시장이 이쪽을 올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어째서?"

"이곳은 제가 책임지는 도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번영과 안전이 제 어깨에 달려 있는 곳이지요. 한데 어찌, 오늘 같은 사태를 맞이하여 저만 홀로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니 전하는 피신하십시오. 저는 여기에 남아 경비대를 지휘하겠습니다."

여전히 잠옷 차림에 산발인 크레모 시장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슬리퍼는 한 짝만 신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 사람이 잠깐 멋져 보인 건, 저 올곧은 생각과 행동 때문이겠지. 그리고 내가 잠깐 뜨끔함을 느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겠지.'

잠깐이지만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도시의 시장인 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겠다는데. 제국의 황태자인 나는 혼자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것 아닌가. 이거, 이래도 되는 걸까.

잠깐 말문이 막혔다. 부두에 남는 시장을 격려하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양심 없는 짓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데 그때였다.

"어서 출항해야 합니다, 전하."

옆에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데미안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죄책감을 가지실 일이 아닙니다, 전하."

데미안이 이쪽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요."

"...."

그런 건가.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장에겐 이 도시를 책임져야 하는 역할이. 데미안과 근위대, 특근대에겐 이쪽을 보호해야 하는 역할이.

그리고 내겐....

'살아남아 황가를 책임져야 할 역할이 있다는 거겠지.'

황태자. 그리고 황가. 어쩌다가 졸지에 떠맡아 버린 이 역할이 솔직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지금은 데미안의 말이 맞다.

"...그래, 알았다."

데미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부두의 시장을 향해 엄지를 들어주었다. 시장이 비장하고 뿌듯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닻줄 올려!"

어느 선원의 외침.

닻이 올려지고, 배를 부두에서 밀어냈다. 부두가 차근차근 멀어졌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중에는 확실하게. 그렇듯 어느새 작아지는 부두의 광경을 보자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살았구나.'

다리가 살짝 풀리는 기분이었다. 뒤늦게 아까부터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부서진 침실 외벽. 이쪽을 덮치던 미노타우로스. 간발의 차이로 죽음을 피해낸 순간들.

'후우.'

이거 자칫 PTSD 생기는 건 아닐까. 셀프로 기혈치료라도 해야 하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던 무렵이었다.

"...어어?"

선원 중의 누군가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한데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저거, 뭐야?"

그 옆의 선원도.

심지어 근위기사도.

누군가는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며, 멀어지는 부두를 쳐다보았다.

'뭐지?'

다들 뭘 봤기에 저러는 걸까.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따라 부두로 시선을 던졌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아니, 그 전에 들어야 했다.

"누오오오오!"

"...!"

익숙한 소리가 부두에서 들려왔다. 선명해져 왔다. 이윽고 더욱 익숙한 실루엣이 부두에서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누오오-!"

투콰콰콰콰-!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익숙한 덩치. 공룡 급의 스펙을 자랑하는 저 엄청난 육체. 초대형 미노타우로스가 질주하고 있었다. 한데 질주의 방향이 이쪽이었다. 그러니까, 즉, 육지에서, 부두를 지나, 바다를 향해....

"누오!"

콰아앙-!

도약했다. 밤하늘로 뛰어올랐다. 상식을 초월하는 속도와 높이로. 일순간 밤하늘의 달을 통째로 가리며.

솟구쳤다가.

내리꽂히듯.

투콰각-!

이쪽의 범선 갑판에 착지했다. 아니, 착함했다.

"...!"

크게 요동치는 범선. 무어라 외치는 선원들. 부서져 흩날리는 갑판 목재 파편들. 그 사이에서 거대한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드는 우루스. 놈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놈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한 놈만 팬다, 라고.

'그러니까, 지금, 그 한 놈이 나라는 거지?'

어째서?

왜?

저놈이 저러는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대신, 오싹 돋는 소름과 함께 선명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오늘 밤.

저놈과 나.

둘 중의 하나는 끝장을 봐야 하는 거구나.

68화. 한밤의 로데오 (3)

오늘밤. 저놈과 나.

둘 중의 하나는 끝장이 날 것 같다. 아니, 그래야만 이 밤의 끝이 보일 것 같다. 오싹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이가 갈렸다.

'저놈, 대체 왜 나만 노리는 건데?'

나름 머리를 굴려봤다. 하지만 짐작되는 곳이 없었다. 그럴 법한 이유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해가 안 됐다. 그 순간, 미노타우로스가 포효했다.

"누우워어어어어어-!"

우루스는 온몸을 떨었다.

곳곳에 상처 입은 육체. 끔찍한 통증이 엄습해 오는 가슴. 마치 못이 비죽비죽 튀어나온 수십 톤 무게의 철탑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루스의 광포한 정신을 더욱 일깨우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목표를 선명하게 새겨주고 있었다.

이곳의 인간들을 박살 내겠다고.

이건 전쟁이라고.

"...푸르륵! 푸륵!"

시시각각 충혈되는 시야 속에서 우루스는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보편적인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으뜸은 적 병력을 몰살하는 것. 혹은 적장을 잡아 죽이는 것. 그런데 지금은? 그 적장이 눈앞에 있었다. 그게 바로 라키엘이었다.

"누우우! 푸르륵!"

그래. 저 비리비리한 모습의 인간. 바로 저놈이다. 확실하다. 짐승의 본능으로 알 수 있다. 아까부터 주변의 모든 인간들이 저놈을 지키려고 애를 썼으니까. 그 모습들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저놈이 이 도시 인간 무리의 우두머리다. 그러니까, 저놈을 잡아 죽이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푸르륵!"

우루스가 콧김을 뿜어냈다. 거대한 팔을 뻗었다.범선의 주돛, 메인 마스트 기둥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꺾었다.

콰자작-!

아름드리나무보다 튼튼한 메인 마스트 기둥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반쯤 펼쳐져 있던 거대한 돛이 우루스의 두 팔에 대형 부채처럼 들렸다. 우루스의 양어깨와 팔뚝에 아나콘다 같은 힘줄이 와락 일어났다.

"누오오오오!"

후우우우웅-!

메인 마스트를 통째로 휘둘렀다. 그 순간, 라키엘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들 엎드려!"

그 외침에 모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억!"

"엎드려!"

모두가 앞다투어 몸을 날렸다. 갑판에 엎드렸다. 그 직후, 머리 위로 태풍이 지나갔다.

콰자작! 쿠콱-!

"...!"

2번, 3번 마스트가 휘둘러진 돛대에 맞아 박살이 났다. 범선 뒤편의 선미루도 무사하지 못했다. 선미루와 위의 구조물이 와르르 뭉개졌다. 그 구조물 중에는 배를 조종하는 타륜도 있었다.

콰작-!

단 3초.

우루스가 돛대를 들고 휘두른 단 하나의 동작. 그 일격에 범선 갑판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쿨럭! 쿨룩! 으윽!"

라키엘은 먼지 속에서 기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넘어진 2번 돛대의 돛이 갑판을 온통 뒤덮어 버린 까닭이었다. 물론, 이쪽도 그 돛에 덮여 버렸다.

'미친.'

이가 갈렸다. 설마하니 저 미노타우로스가 배 위로 뛰어들 줄은 몰랐는데.

'어떡하지?'

머리를 굴렸다. 일단 살 궁리부터 했다. 한데 뚜렷하게 떠오르는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도망이 최선책일 텐데. 도망칠 방법이 없어.'

자신은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도망을 쳐보겠답시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간? 맥주병 신세가 되어 꼬르륵, 익사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데미안이나 다른 이들에게 날 데리고 헤엄쳐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엔 부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100미터 이상 멀어졌으니까. 게다가 저 미노타우로스가 헤엄을 쳐서 쫓아오면? 오히려 금방 붙잡히겠지.'

그럼 구명보트는?

라키엘은 찢어진 돛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난장판이 된 갑판 너머. 두 동강이 나서 처박혀 있는 구명보트가 그곳에 있었다.

"...."

도망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선미루 위의 타륜마저 박살 났다. 덕분에 범선이 제멋대로 표류하게 됐다. 한데 그렇게 흘러가는 방향이... 부두와 반대 방향이다. 즉, 오히려 육지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상황을 파악할수록 암담해졌다. 오장육부도 비슷한 것 같았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위기감을 느끼며 동요하고 있습니다.]

[심장 : 어이? 도망칠 방법 좀 생각해보지? 뇌는 뒀다가 뭐하냐?]

[허파 : 뇌에 산소... 사... 산소 공급... 허... 파학!]

[대장 : 형님들? 저,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쉿, 이 몸뚱인 겉이 더 안 좋아!]

[위장 : 히히히 최후의 만찬 츄릅.]

"...."

오장육부에게도 딱히 답이 없는 듯하다. 저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도망칠 방법도 없고. 화해(?)할 방법은 더더욱 안 보이고. 그러니까 결론은....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거네.'

그때였다. 옆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뻗어왔다. 이쪽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쉿. 몸을 계속 낮추고 계십시오."

"...!"

깜짝이야.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데미안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속삭였다.

"돛이 넘어져서 오히려 잘됐습니다. 저쪽으로 기어가십시오. 그리고 선미루 잔해 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러면 눈에 띄지 않으실 겁니다."

"숨어 있으라고?"

"예. 지금은 그게 최선일 테지요."

"그럼 넌?"

"저는 오늘 밤 전하께 받을 것이 많이 생겼습니다."

"...뭐?"

"위험수당 말입니다. 거기에 다리까지 다쳤으니, 이건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인 겁니다. 명백히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는 부상이니, 그만한 위로금도 충분히 받아야겠지요."

"그러니까, 네가 그 돈을 다 챙겨 받으려면 고용주인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그럼."

"...엇?"

타앗!

데미안의 손길이 이쪽을 거칠게 밀었다.

"제가 눈길을 끌 테니 그 틈에 움직이십시오. 얼른."

"...."

녀석과 잠시 나눈 눈길. 말은 농담처럼 하고 있지만, 차갑고 비장하다. 녀석은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그 눈길 앞에 사족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저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최선이었을 뿐.

'제발. 무리하지만 마라.'

거대한 이불처럼 갑판을 덮은 돛. 그 아래에 바싹 엎드렸다. 그 순간, 데미안이 돛을 찢고 일어섰다. 갑판 반대편으로 절뚝거리며 뛰었다.

"푸르륵!"

우루스의 눈길이 데미안을 향해 꽂혔다. 동시에 이쪽도 움직였다. 데미안이 가리킨 방향으로 열심히 기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턱 아래까지 거칠어지는 숨결. 마침내 선미루 잔해에 도착했다. 그곳 구석에 몸을 숨겼다. 돛의 찢어진 구멍을 통해 갑판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모두가 싸우고 있었다.

데미안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늑대인간 상태인 아니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도약하고 있었다. 근위기사들이 대열을 짜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특근대원들이 그 빈틈을 메꾸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꼬슴이마저 가시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모두의 투지와 함성. 그 앞에 미노타우로스가 절망의 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모두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아니, 우습게 튕겨내고 흘려냈다.

"푸르륵! 푸륵!"

황소처럼 거친 투레질. 거대한 머리가 육중한 무게를 싣고서 휘둘러졌다. 그 끝에 장대하게 휘어진 한 쌍의 뿔이 있었다.

종횡무진.

뿔이 불도저처럼 돌진했다. 근위대원 다섯의 방패를 부쉈다. 특근대원 여섯의 검을 박살 냈다.

"...커억!"

단 한 번의 돌격에 근위대원 다섯과 특근대원 여섯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아니스가 다급하게 뛰었다.

"크르릉!"

미노타우로스의 등으로 뛰어올랐다. 송곳니를 세웠다. 등을 깨물었다.

와그득!

섬뜩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아니스의 송곳니는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노타우로스의 가죽이 특급 소가죽 이상으로 두꺼운 까닭이었다. 하지만 아니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크릉!"

송곳니가 안 된다면 손톱으로!

더욱 야성을 터뜨리며 손을 휘둘렀다. 미노타우로스의 등판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새겼다. 하지만 그때였다.

덥썩!

미노타우로스의 손아귀가 뒤로 움직였다. 아니스의 꼬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휘둘러 패대기쳤다.

후웅, 콰앙-!

"...깨갱!"

갑판에 패대기쳐진 아니스가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헐떡이며 거품을 물더니 혼절했다. 미노타우로스가 그 위에 군림하듯 우뚝 섰다.

"푸르륵...! 푸륵!"

이제 이 배에 자신의 적수가 없음을 놈이 확신한 걸까. 그러고 보니 모두가 만신창이었다. 기절한 아니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리를 다친 데미안은 움직임이 정상이 아니었다. 꼬슴이와 근위기사, 특근대원들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 모두를 무시하듯, 미노타우로스가 갑판 이곳저곳을 쓸어보고 있었다. 뭔가를 찾는 듯한 몸짓이었다.

'날 찾고 있구나.'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긁으며 내려갔다. 그때였다. 미노타우로스가 한쪽 다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콰아앙-!

갑판 한쪽을 찍듯이 짓밟았다. 돛으로 덮여 있는, 뭔가가 있던 자리였다.

"...!"

설마.

가슴이 쿵, 뛰었다.

그 사이, 미노타우로스가 자신이 짓밟은 자리의 돛을 부욱 찢었다. 납작하게 박살 난 상자가 그 아래에 있었다. 우루스의 콧김이 거칠어졌다.

"푸륵!"

그걸 보자 확실해졌다.

'저놈, 돛에 덮여 조금이라도 불룩하게 튀어나온 곳이 있으면 전부 짓밟으며 확인할 생각인 거야.'

날 찾기 위해서.

짓밟아 죽이기 위해서.

오싹.

소름 돋는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 사이, 미노타우로스의 거친 몸짓이 이어졌다.

"누으우-! 푸르륵! 푸륵!"

쾅! 콰작! 뻐걱! 콰드걱!

거친 발길질로 돛에 덮인 갑판 이곳저곳을 짓밟아대기 시작했다. 세심하게 살피고 뭐고도 없었다. 갑판이 온통 내려앉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파괴의 현장이었다.

'제, 젠장!'

저러면 여기 숨고 뭐고도 의미가 없게 된다. 어차피 공간이 한정된 범선 갑판이다. 언젠가는 들키고, 짓밟혀 죽게 되리라.

'선실로.'

숨어야 산다.

깨달음과 동시에 몸을 낮추었다. 무너진 선미루 앞쪽에 선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통로를 찾고자 필사적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데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숨어 있던 다른 선원들도 비슷한 심정인지,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노타우로스의 파괴적 짓밟기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푸르륵! 누오오오-!"

콰거걱! 콰작!

"...!"

너무나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그런 놈을 저지하기 위해 검을 흩뿌리는 데미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탓에 검이 무뎌진 까닭일까. 미노타우로스는 데미안의 검격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미친! 미친! 으아아!'

죽기 싫다. 이런 데서 압사 엔딩을 맞이하려고 지금까지 아등바등 살아온 게 아니다. 그러나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의 난동에는 자비가 없었다.

"누우우!"

광포한 포효가 바로 위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걸 깨달은 순간.

"...!"

생각하고 자시고도 없었다.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 직후.

쿠쾅!

방금까지 엎드려 있던 자리가 거대한 발굽에 짓밟혀 뭉개졌다.

"...그읏!"

살아야 한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돛 아래를 필사적으로 기고, 굴렀다. 그런 이쪽을 마치 추격해 오듯, 광포한 짓밟기가 따라왔다.

콰작! 콰그덕! 쿠콱-!

"...긋, 으읏! 엇!"

한밤중에 주방에서 마주친 인간을 피해 전력으로 도망치는 바퀴벌레의 심정이 이런 걸까. 계속해서 돛 아래를 구르고, 기고, 숨었다. 하지만 무작정 정신을 놓고 피하기만 하진 않았다.

'그러면... 죽어!'

확신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이성을 놓으면 안 된다. 공포에 사로잡혀 맹목적으로 도주하면 안 된다. 그러면 움직임이 단순해진다. 저도 모르게 일정한 패턴이 생겨난다.

그 패턴이 간파되는 순간, 단숨에 끝장날 거다. 그러긴 싫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공포와 본능보다는 냉철한 이성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최대한 파악하고.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단 하나의 빈틈도 놓치지 말고. 작은 기회라도 악착같이 활용해야 한다.

'눈 똑바로 떠, 이한!'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고막이 먹먹해지는 파괴의 소음과 포효. 그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으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두 눈을 부릅떴다. 이쪽을 덮은 두꺼운 돛. 그 건너편에 우뚝 서 있을 미노타우로스. 놈의 다음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주시했다.

순간순간 달빛을 가리는 거대한 실루엣. 그 희미한 실루엣이 움직이는 방향. 포효가 향하는 방위. 놈의 거친 호흡. 그 모든 단서를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이쪽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게 되었다. 그 역량 중에는 아스라한 심법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나써클이 최대치로 회전했다. 주위의 공기에 퍼져 있는 마나. 근방에서 격렬하게 활동하는 마나까지.

그 모든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고, 분석하게 되었다. 덕분에 조금씩 보였다.

딩동!

[당신은 전례 없는 위험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당신은 살아남기 위한 본능과 냉철한 이성으로 마나써클의 모든 활용 역량을 마나 감지에 쏟아부었습니다.]

[이러한 극한의 경험이 당신이 기존에 활용하던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을 극적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의 능력이 확장됩니다.]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당신이 지닌 스킬, <진맥>의 공식 옵션으로 진화합니다.]

[<진맥> 스킬에 옵션 기능이 탑재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 - 10미터 이내의 범위에서, 대상의 신체 내부에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 한정 / 한 번에 Lock-on 가능한 대상의 숫자 : 1)]

"...!"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동시에 돛 건너편에서 날뛰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의 모든 경혈과 기의 순환, 예상되는 움직임이 낱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맵핵이라도 띄운 것처럼.

69화. 총력전 (1)

보인다.

모든 것이 보인다.

마치 사기성 맵핵이라도 띄워놓은 것처럼. 그렇게, 상대의 모든 것을 낱낱이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듯.

'이게 되네....'

처음 든 생각은 의구심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이런 곳에서 압사 엔딩을 맞이하곤 싶진 않아서. 그런 비참한 꼴로 죽기 싫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기었을 뿐이었다. 그렇듯 미노타우로스의 미친 듯한 파괴적 폭력을 피하려 애를 썼을 뿐이었다.

한데 그런 간절함이 닿은 건지. 혹은 우연과 필연이 묘하게 겹친 건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경혈 스캐닝?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이... 진맥 스킬의 공식 옵션으로 진화했다고?'

라키엘은 재빨리 메시지를 훑었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 - 10미터 이내의 범위에서, 대상의 신체 내부에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파악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 한정 / Lock-on 가능한 대상의 숫자 : 1)]

그는 눈길을 들었다.

이불처럼 이쪽을 뒤덮은 두꺼운 돛 너머. 시야 위쪽에 <Lock-on>이라는 초록색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 아래로 초록색 외곽선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거대한 형상이 보였다.

그래, 저 미노타우로스. 건강검진표에 뜬 이름이 우루스라고 했나.

"...."

우루스의 움직임이 다 보였다. 근육과 관절의 움직임은 기본이었다. 그 내부에 자리한 기혈의 움직임까지 보였다.

마나가 어느 경로를 거쳐 어느 경혈에 머물렀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렇게 흘러간 마나가 어떤 작용을 하여 어느 신경을 자극하고, 어느 부위의 힘줄과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지. 혹은 호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심장과 허파.

소장과 대장.

위장과 간장.

그 모든 오장육부의 조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조화가 어떤 방식으로 신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모조리, 훤히, 들여다보였다.

'미친. 이거 사기 아냐?'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누오오오옥!"

위쪽에서 우루스의 포효가 들려왔다. 놈의 척추 신경을 따라 흐르는 기혈이 보였다. 위쪽 등 부위, 일곱째 등뼈(T7) 가시돌기 아래의 오목한 곳. 인간으로 치면 지양혈(至陽穴)이 위치한 곳이 밝게 빛났다.

빛이 전류처럼 흘렀다. 아홉째 등뼈(T9)의 근축혈(筋縮穴)을 거쳤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오른 허벅다리 바깥쪽의 풍시혈(風市穴)로 깃들었다. 그와 동시에 놈이 오른 다리를 치켜들었다.

'짓밟는다!'

우루스의 종아리뼈 최상단, 무릎과 종아리뼈 머리가 만나는 외곽의 오목한 곳. 그곳의 양릉천혈(陽陵泉穴)이 환하게 빛나는 순간. 놈의 오른 발굽이 어디를 짓밟을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근육이 움직이는 각도.

내리찍는 시점과 위치.

그 모든 것이 계산하지 않았음에도 훤히 보였다.

"...후웁!"

몸을 왼쪽으로 두 바퀴 굴렸다. 그 직후, 우루스의 오른 발굽이 이쪽이 있던 지점의 갑판을 짓뭉갰다. 예측 그대로의 타이밍이었다.

투콰즉-!

"...."

이젠 알겠다. 경혈 스캐닝이라는 옵션, 이거.

'사기적인데, 진짜야!'

이건 진짜다.

결코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다.

'미친 기능이잖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급박한 순간들. 그 틈새에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아스라한 심법을 응용해서 해왔던 마나 감지와는 기능의 차원이 다른 까닭이었다.

'전에도 환자의 마나를 감지할 수는 있었지. 조르쥬의 뇌전증을 치료할 때도, 아니스의 꼬리를 시술해줄 때도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했으니까.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덕분에 환자의 기혈에 흐르는 마나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었으니까. 한데 지금 이 경혈 스캐닝 옵션은? 그거랑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 그것이 진화한 형태인 경혈 스캐닝. 체감되는 둘의 차이는 엄청났다.

아스라한 정밀 진단법은 가만히 누워 있는 대상만 탐지할 수 있었다. 탐지 범위가 거의 1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용하려면?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야 했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수능시험 치듯이 마나 탐지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 집중력을 유지해야만 비로소 마나 탐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상당히 고된 노동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집중하지 않아도 돼. 아니, 그냥 옵션만 켜고 있으니까 자동으로 알아서 마나를 탐지해주고 있잖아?'

덕분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를 수 있었다. 이렇게 딴생각을 하면서도 탐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게다가 범위도 10미터. 저렇게 날뛰고 있는 대상의 기혈도 모조리 분석할 수 있어. 이건... 엄청난 차이야.'

말 그대로의 폭발적인 진화였다. 덕분에, 자신감에 희미한 불씨가 붙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피할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어.'

콰앙! 콰자작! 콰그덕!

"누오오오오-!"

발굽이 떨어져 내려온다. 주먹이 바닥을 후려친다. 뿔이 갑판을 가르며 쇄도한다.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놈이 어디를 공격할지.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그다음에 이어지는 동작이 어떠할지. 모조리, 낱낱이 들여다보며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그럴수록 우루스의 포효가 더욱 거칠어졌다.

'후, 후욱! 저놈은... 지치지도 않나?'

라키엘은 우루스의 심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협심증이 있다더니, 과연 심장 어름의 기혈 움직임이 헝클어진 게 보였다. 한데 원체 튼튼한 놈이다 보니, 그런 상태에서도 잘만 버티고 있었다. 아니, 잘도 날뛰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절로 초조해졌다.

'이래선 안 돼.'

문득, 피하기만 하다간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여긴 도망칠 곳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공간이 별로 없으니까. 배 밖으로 뛰쳐나가는 게 아닌 바에야, 결국 이 안에서만 계속 놈을 피해야 하니까. 한데...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벌써 숨이 가빠지는 중이었다. 한데 저 미노타우로스의 왕은? 여전히 잘만 날뛰고 있었다.

'협심증? 그래 봤자 내가 더 약골이야. 내가 훨씬 먼저 지칠 거야. 그렇게 체력이 고갈되고 나면 경혈 스캐닝이고 움직임을 예측하고 뭐고도 전부 소용없어지겠지.'

예측을 아무리 잘해도? 그 예측에 따라 몸을 움직일 체력이 있어야 한다. 몸이 퍼져서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회피고 뭐고 전부 말짱 꽝이 된다. 그렇게 한 방만 스치면 이쪽은 치명타.

'인생 종치는 거지. 그건 안 돼.'

그러니 그 전에, 이쪽의 체력이 고갈되기 전에, 뭐라도 수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오, 미친.'

생각나는 유일한 방법. 그나마 해볼 수 있을 방법. 그걸 떠올리자 절로 치가 떨렸다.

'한국에서도 이런 짓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돛이 찢어진 틈새를 향해 기었다. 그 사이에도 우루스의 주먹이 갑판을 두 차례나 콰직, 콱. 아슬아슬하게 구르고 피해내며 돛 틈새에 도착했다.

틈새 사이로 몸을 일으켰다. 시원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 사이로 우뚝 선 우루스도 보였다.

"...푸르륵!"

이쪽의 모습을 확인한 우루스가 격한 콧김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 인사에 화답해줄 생각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놈을 무시하고 달렸다. 그곳에 꼬슴이가 있었다.

"꼬슴아! 가시 하나!"

선수 방향을 향해 뛰었다. 그곳에 있는 꼬슴이를 향해 외쳤다. 이쪽의 외침이 제대로 닿은 걸까. 꼬슴이가 몸을 웅크리며 등짝에 부르르 힘을 주는 게 보였다.

"꼬슴!"

뾱!

녀석의 등에서 가시 하나가 뽑혀 나왔다.

"이리 던져!"

"...꼬슴!"

꼬슴이가 가시를 던졌다. 거대화 상태에서 뽑아낸 덕분에 제법 컸다. 재빨리 받아내며 살펴보니, 길이가 거의 1.5미터는 될 듯했다.

'딱 좋아.'

가시 중간 부분을 움켜쥐었다. 창 한 자루를 쥔 기분이었다. 나머지 손을 품속으로 가져갔다. 안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작은 원판을 꺼냈다. 예전에 얻었던 냉기의 방패, 만년설이었다. 만년설을 꺼내자마자 마나를 주입했다.

반응이 즉각 돌아왔다.

파츠스스!

납작한 중앙부에서 터져 나오는 스산한 소리. 동시에 드라이아이스 같은 새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름 1.2미터의 냉기 실드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카가가각!

달리던 기세 그대로 멈춰 섰다. 180도 몸을 돌렸다. 우루스를 마주 보았다. 만년설을 앞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 틈새로 거대 가시를 조준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스파르타 전사 같은 자세였다.

'이로써 오늘 날뛰는 환자분 시침 준비 완료!'

계속 피하기만 하다간 답이 없으리라. 차라리 이쪽의 체력이 남아 있을 때, 그 체력으로 끝장을 보리라. 경혈 스캐닝 옵션을 활용하리라. 놈의 경혈을 공략해서 근육을 하나하나 마비시키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우루스가 이쪽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푸르륵! 누우우우우-!"

콰쾅콰콰콰-!

고개를 바짝 낮춘 모습. 거대한 뿔 한 쌍을 앞세운 기세. 화물칸을 꽉꽉 채우고서 질주하는 덤프트럭과 정면으로 맞서면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이내 스스로를 독려했다.

'보여. 예측할 수 있어. 그러니까... 피할 수 있어!'

스페인의 투우사를 떠올렸다.

너무 성급하지 않게. 공포에 질려 미리 피해 버리면 황소도 이쪽을 손쉽게 추격해오니까. 그러니까 황소가 반응할 수 없는 거리에서. 이쪽의 안전이 최소로 담보되는 타이밍에.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는 찰나의 순간에.

'...바로 지금!'

타닷!

경혈 스캐닝으로 보이는 놈의 움직임. 덕분에 예측되는 공격 지점과 타이밍. 사각지대가 엿보였다. 사각지대로 두 걸음을 뛰었다.

후우웅-!

한쪽 뿔이 무지막지한 기세로 머리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 허리를 확 숙였다.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으앗!'

쿠쿠쿵! 쿵쿵!

우루스의 거대한 머리와 목덜미가, 그리고 불끈거리는 가슴 근육과 겨드랑이가 바로 위쪽을 급행열차처럼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다음 순간, 몸을 일으키자마자 뒤로 돌아섰다.

콰가가가각-!

뿔로 갑판 바닥을 밭 갈듯이 갈아 버리는 우루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쪽이 자신의 공격을 피한 줄 모르는 걸까. 맹목적으로 돌진하며 머리를 휘젓고 있었다.

덕분에 보였다.

몸을 숙이고 있는 놈의 허리 어름.

'비수혈(脾兪穴). 열한째 등뼈(T11) 가시돌기 모서리 옆쪽. 즉, 척추기립근이 있는 라인!'

그곳의 혈자리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곳을 향해 달렸다. 모든 힘을 실었다. 아까부터 마셔두었던 호흡마저 증폭했다.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주십시오.]

'전부 다!'

그 순간, 써클 슬롯이 전력으로 역회전했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공기 12리터를 방출합니다.]

방출력을 발끝에 실었다.

그 순간, 갑판을 박찼다.

퍼어엉-!

발끝에서 공기 폭탄이 터졌다. 에어 로켓처럼 전신을 도약시켰다. 그렇게 허공에 몸을 띄우는 순간, 박차를 가하며 가시창을 당겼다. 조준했다. 삽시간에 가까워지는 비수혈. 그곳에 비수처럼 가시창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가로막혔다.

쿠욱-?

"...어?"

분명히 온몸을 내던졌는데. 체중까지 다 실어가며 가시창으로 찔렀는데. 타이밍이 완벽했는데. 그런데 가시창이 살가죽을 뚫지 못했다. 경혈을 효과적으로 찌르긴커녕, 질긴 소가죽에 흠집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어어억?"

투웅-!

한껏 찌른 반동이 가시창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짐볼을 향해 100미터 달리기로 뛰다가 튕겨져 날아가면 이런 꼴이 되는 걸까.

"...크으긋!"

쿠당탕! 콰당!

형편없이 날려가 갑판에 추락했다. 세 바퀴나 데굴데굴 굴렀다. 가시창을 놓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빠, 빨리....'

어지러움을 무릅쓰고 황급히 일어났다. 가시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바로 머리 위에서, 거친 콧김이 들려왔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이쪽을 뒤덮었다.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주먹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

예측? 경혈 스캐닝? 모두 보이긴 했다. 하지만 피하기엔 너무....

'늦었어!'

깨닫자마자 만년설을 들었다. 만년설로 전면을 방어했다. 몸을 웅크리며 뒤로 뛰었다.그 순간, 덤프트럭에 치이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

굉음도.

타격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나, 맞은 건가. 아니, 방어는 한 것 같은데. 멍한 눈길을 들었다. 사방에 냉기 조각이 반짝반짝. 밤하늘의 예쁜 별처럼 빛나며 흩어지고 있었다.

'만년설....'

일격에 깨졌구나.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만년설 조각이 멀어졌다. 주위의 풍경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온통 부서진 갑판 위로 훨훨. 내가 날고 있었다. 아니, 날려가고 있었다. 경악한 눈길로 이쪽을 보는 선원들. 반쯤 쓰러진 자세로 무어라 외치는 데미안.

이윽고 삽시간에 다가오는 추락.

터그컥! 콰가각-!

"...!"

비명을 지를 힘도 없었다. 실 끊어진 연처럼 갑판에 떨어졌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그 끝에 어떤 자세로 널브러졌는지. 그저 멍한 정신 가운데 헛웃음만 나왔다.

'살아는... 있는 건가.'

엎드린 채 눈길만 간신히 들었다. 손가락이 꿈틀꿈틀, 떨렸다. 그걸 보니 알겠다. 일단 살아는 있다. 만년설이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이겠지.

하지만 이제는 곧 죽을 것 같다. 온몸이 으스러지듯 아프다. 아니, 아픈 건 둘째 치고.

쿠웅... 쿵....

이쪽으로 다가오는 육중한 발걸음. 한편으로 내뱉는 흥분된 콧김. 승리를 직감한 괴수의 실루엣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놈은, 날 본보기로 죽일 생각인가 보다.

'그렇게... 끝이라고?'

강렬한 실감.

소름이 돋았다.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싫다. 이런 곳에서 죽는 건.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는 건. 그건 싫다.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뭐라도. 어떤 짓이건.

'그, 그읏!'

일어나려 애썼다. 부들거리는 두 손을 억지로 움직여 바닥을 짚었다. 부서진 나뭇조각 파편에 손바닥을 찔렸다.

"으읏!"

시릿한 통증이 일깨우는 감각. 손바닥을 파고든 파편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데 느껴지는 건 파편뿐만이 아니었다. 뭔가가 손에 잡혔다.

'가죽... 주머니?'

항상 지니고 다니던 주머니였다. 어느새 한쪽이 풀리고 찢겨 있었다. 찢긴 틈으로 내용물이 흘러나온 게 보였다. 환상종을 소환하며 받았던 것들. 환상종의 덩치를 키울 수 있는 마법의 씨앗.

'해바라기씨....'

붉은색 해바라기씨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그 순간, 문득,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혹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짓.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

평소였다면 미친 생각이라 치부했겠지. 무슨 그런 짓을 하겠느냐 웃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푸르륵!"

머리 위에서 주먹을 치켜드는 우루스. 그걸 피할 힘도 없는 지금의 나. 뭐라도. 어떤 짓이건. 해야 하는 지금이라면.

끄득!

씨를 움켜쥐었다. 입으로 가져왔다. 털어 넣고, 씹었다. 간절히 기원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가능성이건. 이루어질 리 없는 헛된 희망이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 달라고.

'제발.'

그 순간.

...화아악!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미노타우로스와 이쪽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70화. 총력전 (2)

기적이란 무엇일까.

간절히 바라는 순간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결과물일까. 혹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건져내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까.

딩동!

머릿속에 세차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숨 가쁜 메시지. 하지만 메시지를 읽을 여유 따윈 없었다.

"누우오오오-!"

괴성.

파공성.

떨어져 내려오는 거대한 주먹.

"...!"

끝인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막아냈다.

뻐걱-!

"...그읏?"

팔뚝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하마터면 어깨 관절이 빠질 뻔했다. 마치 커다란 몽둥이를 팔뚝으로 막아낸 기분이었다. 운이 나쁘면 부러지거나 최소한 멍이 들게 되는, 딱 그런 정도의 통증과 충격.

"...."

그런데 잠깐. 나, 방금 미노타우로스가 내리치는 주먹을 막은 건데?

'설마 벌써 죽은 건가.'

한 방에 죽는 바람에 감각의 혼동을 느끼고 있는 걸까. 혹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환각에 빠진 걸까.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콧김이 크게 터져 나왔다. 뜨거운 바람이 볼에 훅 와 닿았다. 얼결에 얼굴을 찡그렸다. 감았던 눈을 떴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어?"

우루스의 거대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놈이 이쪽을 노려보며 거친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금, 콧김이 확 와 닿았다.

'우윽, 냄새.'

엄청난 누린내가 확 끼쳤다. 그 감각은 결코 환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푸르륵! 푸륵!"

꾸드득! 드득!

우루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두 주먹을 내리눌렀다.

"으읏!"

치켜든 팔뚝을 엄청난 무게가 짓눌러 왔다. 마치,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감각. 한데 이쪽이 팔뚝으로 떠받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어?"

우루스의 주먹이었다. 그러니까, 이쪽이, 우루스의 주먹을 팔뚝으로 막고 있다. 한데 더욱 이상한 점이 따로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이놈, 작아졌어?'

아까는 주먹이 바위만큼 컸는데. 분명 이쪽 몸통보다 컸는데. 지금은 그냥 잘 익은 멜론 크기로 보였다.

주먹뿐만이 아니었다. 7미터의 압도적인 거구? 아니었다. 그냥 이쪽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클 뿐이다. 그저 이쪽보다 등빨(?)이 조금 우람할 뿐이다.

그러니까, 즉....

'크기 차이가... 없어졌잖아.'

어떻게 된 걸까. 이쪽은 그저 뭐라도 해보려고, 살아보려고 발악했을 뿐인데. 그러다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환상종 전용인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었을 뿐인 건데.

'그런데 날 죽이려던 미노타우로스의 덩치가 나랑 비슷하게 줄어들었다고? 그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멍해진 이쪽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든 걸까.

"푸르륵! 누우우우-!"

우루스가 주먹을 풀었다. 손아귀를 와락 뻗어왔다. 어찌해볼 틈도 없이, 이쪽의 멱살을 붙잡았다. 끌어올렸다. 내동댕이쳤다.

"...으어엇!"

콰콰쾅-!

그저 이쪽은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뿐인데, 덤프트럭이 전복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쯤이나마 온전히 남아 있던 범선 선미루가, 이쪽의 등짝에 깔려 완전히 짓뭉개져 버렸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졸지에 이쪽과 사이즈가 비슷해진 우루스. 한데 넘어지고 보니 이쪽이 범선 선미루를 등짝으로 깔아뭉갰다. 그러니까 이건, 즉....

'내가 커진 거라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달이 떠오른 밤하늘. 쿠쿵, 쿵, 다가오는 우루스.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경고성 메시지.

"...."

그러고 보니 아까 '딩동' 하고 알림음이 울렸었지.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메시지 내용을 훑었다.

[WARNING!]

[당신은 환상종 전용의 빨간 해바라기씨를 무단으로 복용하였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는 인간의 신체에 극단적이고 급격한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으니, 복용하였을 경우 의사, 약사, 한의사의 진단을 받으십시오.]

'...내가 한의산데?'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그 와중에도 계속 시선을 움직였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가 불안정한 거대화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당신은 환상종이 아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거대화 효과가 3분으로 제한됩니다.]

[거대화 종료 후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거대화가 끝난 시점으로부터 120시간(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2분 37초]

"...."

잠깐.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빨간 해바라기씨 덕분에 우루스와 비슷한 덩치로 커졌고....

콰앙-!

"그억!"

주먹질이 날아왔다. 안면을 찍듯 후려쳤다. 눈앞에 별이 빡 하고 보였다. 그 사이로 시야 한쪽을 붉게 차지한 메시지도 보였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2분 34초]

"...으그읏!"

확실해졌다. 지금껏 메시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커진 거야. 빨간 해바라기씨 덕분에. 앞으로 2분 30초 정도는 이 미노타우로스와 비슷한 덩치가 유지될 거란 소리고, 그 시간이 종료되면... 120시간, 5일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거지?'

깨달음이 대뇌피질에 팍 꽂혔다.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앞으로 2분 30초. 그 안에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와 결판을 봐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5일짜리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 난리 통에, 완벽히 무력한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즉, 100% 사망 당첨일 거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그아아앗!"

깨달음이 행동을 불러왔다.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방금 맞은 얼굴이 아팠지만 참을만했다. 거대해진 덩치 덕분인 듯했다.

'아파. 하지만 이 정도로 죽진 않아!'

아까까진 스쳐도 전신 골절이나 사망 확정이었을 우루스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맞아도 죽진 않는다. 그저 더럽게 아플 뿐.

'고등학교 때 생각나잖아!'

한 번은 일진한테 대든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느냐고. 대차게 개긴 적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복날 개 맞듯이 맞았다. 지금 우루스와 맞서는 이 순간의 느낌이 딱 그때 당시의 추억(?)을 강제로 소환시켜주었다.

'PTSD 오겠네, 진짜!'

"푸르륵! 푸륵!"

우루스와 대치하듯 마주 섰다. 비슷해진 눈높이에 미노타우로스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엿보이는 놈의 기혈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금!'

머뭇거릴 틈이 없다. 이제 남은 시간은 2분 20초 남짓. 재빨리 움직였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몸을 숙이며 바닥에 손을 뻗었다. 아까 떨어뜨린 꼬슴이의 가시를 집어들었다. 우루스가 이쪽의 돌진에 반응했다.

"-누우우우!"

놈이 몸을 낮추며 뿔을 들이밀었다. 그 반응과, 기혈의 움직임으로 놈의 동작을 예측할 수 있었다.

'박치기!'

소싸움을 하듯 이쪽과 박치기를 하려는 거겠지. 그걸 깨달은 즉시 갑판을 박찼다.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콰앙-!

부서지는 갑판 파편.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뿔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우루스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놈의 꼬리를 잡았다.

터컹!

착지와 동시에 뒤에서 놈의 허리를 껴안았다. 곧바로 놈의 팔꿈치가 날아왔다.

"누우-!"

뻐걱!

"...그악!"

눈앞이 번쩍. 팔꿈치에 코를 맞았다. 인중이 확 뜨거워지며 찝찝한 맛이 느껴졌다.

'코피?'

아무래도 쌍코피가 터진 듯했다. 하지만 코피 따위를 닦을 틈도 없었다.

'남은 시간은... 2분 10초!'

날뛰는 우루스를 뒤에서 붙들고 늘어졌다. 그리고 가시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푹!

덩치가 커지고 체중이 늘어난 덕분일까. 가시가 질긴 소가죽을 뚫어냈다! 덕분에 목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목빗근(sternocleidomastoid muscle) 뒤쪽의 오목한 곳, 목덜미 옆쪽의 천유혈(天牖穴)에 정통으로 꽂혔다.

"푸르륵!"

...하지만 얕았다.

우루스의 천유혈을 지나는 마나의 흐름이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였다. 가시의 끝이 그 흐름에 닿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오, 이 저질 체력!'

이쪽의 힘이 징그럽도록 약한 탓이다. 덩치가 커지고 체중이 늘어났음에도, 태생적으로 약한 근력 때문에 충분한 깊이까지 가시를 찔러넣을 수가 없었다.

"누우우우!"

설상가상으로 우루스가 격하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따끔한 탓이겠지. 물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쪽도 목숨이 걸렸으니까.

'우아아아!'

아예 놈의 등에 어부바하듯 올라탔다. 다리로 놈의 허리를 감았다. 매미처럼 촵 매달렸다.

"데미아안!"

지금 상황을 도와줄 수 있을 유일한 능력자. 이쪽의 외침에 녀석이 퍼뜩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녀석을 향해 재빨리 외쳤다.

"와서! 우어업! 이 가시! 뒷부분! 쳐!"

미친 황소처럼 날뛰는 우루스. 그 등에 로데오 하듯 매달린 이쪽. 여전히 가시를 놈의 천유혈에 갖다댄 채 외쳤다.

그런 이쪽의 의도를 깨달은 걸까. 데미안이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몸을 날렸다.

파앗!

녀석의 손에 들린 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쪽이 쥔 가시 뒤편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텅-!

망치로 못을 치듯, 검으로 가시를 쳤다. 효과(?)는 확실했다.

뾱?

두꺼운 소가죽 겉면에만 간신히 박혀 있던 가시가 10센티쯤 푹 들어갔다! 마침내 우루스의 천유혈을 제대로 찔렀다!

"...누오!"

따끔한 걸까.

우루스의 몸부림이 더욱 격해졌다. 하지만 시술을 멈춰줄 생각은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우루스의 난동을 멈춰야 하니까. 그러자면 일단 이놈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이놈을 무력화시켜야 해. 죽이는 거? 아니. 그건 나한텐 불가능할 거야. 덩치는 비슷해졌지만 난 여전히 약골이니까. 이놈이 나보다 힘이 세니까. 지금도 가시로 가죽만 간신히 뚫었잖아.'

그러니 죽이는 건 힘들 거다. 특히, 2분 남짓한 시간에 이놈을 죽이는 건 절대 불가능이다. 하니 남은 방법은?

'얌전하게 만들어줘야지. 마비? 아니. 워낙 흥분한 채 날뛰고 있어서 불가능해. 아니스 꼬리를 시술할 때 썼던 독약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놈의 흥분상태를 가라앉히고 광포화를 끝내는 거야. 그럼 승산이 있어. 내가 혼절하더라도, 남은 데미안과 나머지 근위기사들이 어떻게 맞서볼 수 있겠지.'

냉철한 계산을 거듭했다. 그러자니 각이 보였다. 지금 저쪽에서 경악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데미안과 근위기사들, 특근대원들. 이쪽이 우루스와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타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이었다.

저 정도면 된다.

우루스를 진정시키면, 광포화를 끝내주기만 하면, 그러면 뒤처리는 저들이 해줄 수 있을 거다.

'신경계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 교감신경의 흥분성을 감소시키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하자.'

결론이 나왔다.

방법도 명확했다.

"꼬슴아! 가시!"

우루스를 붙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꼬슴이가 때맞춰 호응했다.

"꼬슴!"

표표푝!

녀석이 가시를 연달아 뽑아냈다. 이쪽을 향해 하나씩 던졌다. 그걸 받는 대로 우루스의 몸에 팍팍 꽂았다.

"천료혈(天髎穴)!"

어깨뼈 가장 위쪽의 각이 진 자리. 어깨뼈위각(superior angle of the scapula)의 오목한 곳에 가시가 살짝 꽂혔다.

"데미안!"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데미안이 움직였다. 높이 뛰어올라 검을 내리쳤다.

콰턱-!

망치처럼 가시를 내리치는 검. 덕분에 질긴 소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가시.

"누오!"

우루스가 더욱 날뛰었다. 하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계맥혈(瘈脈穴)! 데미안!"

콰칵!

사람으로 치면 귓바퀴 뒤쪽으로 대각선 아래. 그곳에 가시가 인정사정없이 꽂혔다. 놈의 계맥혈이 순간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 빛이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경혈 흐름을 따라 번졌다. 번지는 그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가시를 꽂았다.

"예풍(翳風)!"

쾅!

계맥혈에서 조금 아래에 가시 하나. 다음 차례는 귓바퀴 꼭대기(auricular apex) 바로 위쪽이었다.

"각손(角孫)!"

콰텅!

"누오!"

이쪽이 뭔가를 한다는 걸 느낀 걸까. 우루스의 날뜀이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이쪽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세뇌하듯 되뇌었다.

'이놈은 환자다. 침 맞기 싫어서 떼쓰는 어린이 환자다. 그런데 그 어린이가 좀 심하게 많이 건장해. 단지 그뿐인 거야!'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니 자신감이 치솟았다. 제압(?)할 수 있겠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솟구쳤다.

"얌전히 맞으면 사탕 준다아!"

푹!

마지막은 이문혈(耳門穴)이었다.

귀에서 얼굴 방향. 사람으로 치면 귀 주름 두 개가 만나며 골짜기를 이루는 귀구슬위패임(supratragic notch) 바로 앞쪽 오목한 곳. 가시를 세차게 찔러 넣었다. 데미안이 말뚝 박듯 검으로 가시를 때리고 찍어 넣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누우!"

우루스의 난동이 딱 멎었다. 붉게 충혈되었던 안구의 실핏줄이 가라앉았다. 급격하게 날뛰던 호흡과 근육, 오장육부의 움직임이 평온해졌다. 심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쿵-! 두쿵! 두쿵....

혈전으로 일부가 막혀 버렸던 우루스의 심장혈관. 그 관상동맥이 이완되며 확장되었다. 정체되던 심근 혈류가 향상되었다. 심근의 산소 요구량이 극적으로 낮아졌다. 지금껏 심장을 옥죄던 끔찍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광포하게 이글거리던 우루스의 눈동자가 평온해졌다.

"...누, 누우?"

지금껏 원수 보듯 라키엘을 노려보던 우루스의 시선. 그 시선이 서서히, 그러나 조금씩 확실하게, '자신을 치료해준 은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뀌어 갔다.

71화. 은혜 갚는 누렁이 (1)

"...누우?"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가슴이 쿵.

진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 인간에게서 받을 거라는 상상도 못 해봤던 그런 기분. 따스한 감동이었다.

"헉...! 후어억!"

라키엘이 비틀비틀 우루스에게서 물러났다. 우루스는 그런 라키엘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전에 없던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우....'

조금 전까지 자신이 그토록 죽이려 했던 인간이었다. 저놈이 이 도시에서 가장 우두머리인 인간이라고. 그러니 저놈을 죽이면? 나머지 인간들도 모조리 꼬리를 말게 될 거라고. 그렇게 이 도시를 부수고, 자신의 울분을 토해낼 거라고.

그토록 다짐하며 집요하게 저 인간을 죽이려 노력했더랬다. 한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누우우....'

아프던 가슴이 씻은 듯이 나아졌다. 거대한 쇳덩이로 짓이기는 듯하던 통증이 싹 사라졌다. 어떻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인간이 커다란 가시로 등이며 뒷목이며 곳곳을 찌른 뒤부터 아프던 게 사라졌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저 인간이다. 저 인간이 가시로 콕콕 찔러서 날 낫게 해준 거다. 내 아프던 곳을 고쳐주고 도와준 거다. 그러니까 저 인간이... 내 은인이다.

"푸르르! 누, 누우우...!"

우루스의 커다란 콧구멍이 파르르 떨렸다. 크고 새까만 눈망울이 삽시간에 젖어들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자신은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데. 저 인간은 얻어맞아 가면서도 이쪽을 도와주려 애썼다니.

그때였다. 거대해진 인간이 이쪽을 흡족한 눈으로 보았다. 온통 땀을 뻘뻘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후, 후우...! 흉통, 가라앉았나? 다행이네."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 사심 없는 웃음이 우루스의 가슴에 감동의 레일건이 되어 직격으로 꽂혔다.

"누... 누우우!"

쿠웅!

우루스가 무릎을 꿇었다. 라키엘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도감이 쑴펑쑴펑 피어난 덕분이었다.

'...후아, 살았다!'

라키엘은 내심 안도했다. 미쳐 날뛰던 미노타우로스였다. 놈을 진정시키고자 목숨 걸고 매달리며 시침을 했더랬다.

한데 그 결과가?

대성공인 듯했다.

'다행이다. 놈의 흥분이 가라앉은 건 둘째 치고... 딱 타이밍 맞춰서 협심증 통증도 끝이 났어.'

경혈 스캐닝 옵션 덕분에 보였다.

놈의 가슴. 심장 어름의 관상동맥. 그곳의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던 기혈의 순환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게 뚜렷이 보였다. 하지만 사실 협심증 통증이 가라앉은 것은 침술 덕분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이었다.

그저 행운이었다.

딱 시침이 끝나는 타이밍에 우연히 협심증 통증도 가라앉은 까닭이었다.

'원래 안정형 협심증이 그렇거든.'

죽을 듯이 아프다가도 슬그머니 통증이 사라진다. 119 앰뷸런스에 실려왔다가도?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와 만날 때가 되면 통증이 가라앉은 상태이기 일쑤였다.

'사실 그래서 안정형 협심증이 무서운 거기도 하고.'

안 아프니까 괜찮아졌구나 하기도 한다. 검사하고 진단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증상이 잠깐 사라졌다고 병이 사라진 게 아니다. 반드시 의사의 말을 듣고 제대로 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지금 우루스의 상태가 그런 듯했다.

'어쨌건... 다행히 타이밍 좋게 협심증 통증이 가라앉으면서, 내가 자길 치료해준 걸로 오해한 건가.'

우루스의 태도로 보아선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나름 행운이라면 행운인 셈이었다.

'그나저나... 힘들어 죽겠네! 후으, 후!'

라키엘은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와 실랑이를 벌인 여파(?)는 좀처럼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목구멍에서 쌕쌕 소리까지 났다. 오랜만에 천식기가 도진 걸까.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극심한 컨디션 변화에 동요합니다.]

[심장 : 뭐냐. 뭘 먹었는데 몸뚱이가 이렇게 커진 건데? 게다가 이거, 혈류 흐름 이상한데? 호흡도 이상한데? 곧 기절할 삘인데?]

[허파 : 허... 파하학....]

[대장 : 몸이 커지니까 제가 품은 끙까도 같이 커졌지 말입니다?]

[간장 :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위장 : 난 지금... 위대해졌어....]

"...."

아주 난리다.

남은 거대화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곤란했다. 데미안을 비롯한 일행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씨흑...! 후욱!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일행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잠시 후에 내가, 콜록! 쿨룩! 다시, 원래 크기로 작아지면...."

그때였다.

딩동!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0분 0초]

머릿속에 청명한 알림음이 울렸다. 단호박처럼 단호한 메시지가 눈앞에 주르륵 떠올랐다.

[거대화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는 인간이 아닌, 환상종 전용의 보조 식품입니다.]

[거대화가 종료되며 당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현재 시점으로부터 향후 120시간(5일) 동안, 당신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굿나잇-?]

'...!'

그걸로 끝이었다. 마지막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 순간. 시야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좁아졌다. 눈이 감겼다.

'늦었....'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질 거라고. 잘못된 거 아니니까 놀라지도, 호들갑 떨지도 말라고. 미노타우로스도 적개심을 풀었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그거, 전부 말해줘야 하는데.'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이 제멋대로 스르륵 감겼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디로 닿는지 알 수도 없었다.

...터엉!

뭔가가 부딪치는 소리. 아니, 머릿속을 울리는 아득한 진동. 혹시 풀썩 쓰러진 걸까. 이렇게 나, 잠드는 걸까.

그게 마지막이었다.

"드르렁, 퓌유으...."

순식간에 원래 크기로 돌아온 라키엘이 갑판에 쓰러지듯 널브러졌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고롱고롱 코를 골기 시작했다.

"...."

갑판 위에 괴괴한 적막이 깔렸다.

방금까지 라키엘과 호흡을 맞추어 검을 휘둘렀던 데미안도. 라키엘에게 열심히 가시를 뽑아서 던져주던 꼬슴이도. 패대기쳐져 기절했다가 간신히 깨어나던 아니스도. 비틀비틀 몸을 추스르던 근위기사들도. 그들을 부축하던 특근대원들도. 그 밖의 선원들도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리고 다들 비슷한 생각을 떠올려야 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믿기지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에게 내몰려 당장에라도 죽을 것 같던 황태자. 뭔 짓을 했는지 갑자기 미노타우로스만큼 커졌더랬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와 실랑이를 벌였다. 미노타우로스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원래 크기로 돌아오며 정신을 잃고 뻗어 버렸다.

'마법...인가?'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황태자가 따로 마법을 익힌 적은 없을 텐데. 아니, 애초에 저런 류의 거대화 마법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는데.

'이상해.'

그러나 의문을 계속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잠깐 잠잠해졌던 미노타우로스가 움직이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누, 누오오!"

우루스가 포효했다. 다시 분노를 느껴서? 인간들을 다 박살 내겠다는 다짐을 새삼 떠올려서?

모두 아니었다.

우루스의 이번 포효는 경악과 걱정을 담고 있었다. 바로, 라키엘을 향한 걱정이었다.

"누오오! 누우!"

환하게 웃던 은인이 갑자기 작아지더니 쓰러졌다. 쓰러지더니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걱정이 왕창 될 일이었다.

한데 설상가상으로....

콰르르르! 콰득, 쿨렁쿨렁-!

배 아래쪽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량의 바닷물이 배 아래쪽으로 침수되어 들어오는 소리였다. 갑판 아래, 선실 쪽에서는 선원들의 다급한 외침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물 빨리 퍼내! 더! 어서!"

"으으으! 하고 있습니다, 항해사님!"

"더 빨리 움직이라고!"

"후욱, 후우욱! 여기서 어떻게... 더 빨리 합니까아!"

"그래도 움직여, 인마! 거기! 좀 더 틀어막아 봐!"

"여기도... 안 됩니다! 틈새가 너무 벌어졌습니, 우풉! 컥!"

"항해사님! 침수가 너무 심합니다!"

"이건 못 막습니다!"

"빨리 갑판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 여기서 다 죽습니다!"

"야! 위에선 괴물이 날뛰고 있다고!"

"여기서 죽으나 위에서 죽으나 똑같이 죽는 거면, 물귀신이 되느니 위에서 죽겠습니다!"

"다들 거기 서! 내 말 안 들리나! 내려오라고!"

...라는 외침이었다.

즉, 이 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자신 때문이었다.

'누우...!'

우루스의 콧김이 다급해졌다. 내가 날뛰어서 배가 가라앉게 됐다. 한데 가라앉는 배 위에 은인이 쓰러져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럼 앞으론 어떻게 될까.

'누우! 누우우!'

지금껏 내가 본 인간들은 전부 이기적이고 잔혹한 놈들이었지. 한데 그런 놈들이,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정신을 잃은 은인을 챙겨줄까?

아니.

안 그럴 거 같다.

자신만 살려고 들겠지. 그 과정에서 내 은인은 버림받겠지. 그럼 결국, 침몰하는 배와 함께 바다에 빠져 죽겠지.

그건... 안 된다. 은인을 죽게 버려둘 순 없다. 남들이 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구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를 갚으리라!

"누우우우우! 푸륵!"

결론이 나왔다. 우루스가 더욱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거대한 손을 불쑥 뻗었다. 쓰러진 라키엘을 집어들었다.

행여나 잘못 쥐어서 다칠까. 혹시나 힘을 주어서 상하게 할까. 깃털 붙잡듯 살며시 조심조심 집어서 품에 보듬었다. 그랬더니 주위의 인간들이 난리가 났다.

"황태자 전하아-!"

"감히 전하를!"

"막아!"

채채챙! 스릉!

순식간에 인간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저마다 검이며 창이며 방패를 들어 이쪽을 겨누었다. 그 모습에 우루스의 눈빛이 새삼 거칠어졌다. 옛 아픈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었다.

"...누우우!"

사냥꾼들의 함정에 빠진 날도 이랬더랬다. 구해내고자 품에 안았던 젖먹이 송아지. 그 까만 눈망울을 지켜주려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한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그 어찌나 잔혹하던지.

결국 젖먹이를 지켜내지 못했더랬다. 인간들의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하였더랬다.

'누우...!'

어쩐지, 오늘의 이 상황이, 묘하게 그날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구해내고자 품에 보듬어 안은 은인. 쌔근거리는 숨결을 지켜주려 애쓰고 싶다. 한데 인간이라는 족속은 이 어찌나 교활한지. 은혜를 갚으려는 이쪽을 기어코 막아서는 저 가증스러운 꼬락서니라니.

"누우우우! 누우! 푸륵!"

오늘은 다를 것이다.

그날처럼 원통하게 당하지 않으리라. 어떤 일이 있어도 은인을 지켜내리라. 다짐하고, 각오했다. 그리고 돌진했다.

"누우우!"

쿠쿠쿠쿠콰콰-!

갑판을 박찼다. 한 쌍의 뿔을 앞세우며 황소처럼 돌격했다. 그 앞을 감히 막아설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크어억!"

근위기사의 검과 갈빗대가 단숨에 부러졌다. 특근대원의 방패가 쪼개지고, 쇄골에 금이 갔다. 마지막으로 우루스를 막아선 이는 데미안이었다.

"흐읍!"

쐐애액-!

다친 다리를 무릅쓰고 섬광처럼 움직였다. 돌진하는 우루스의 하체를 향해 회심의 검격을 뿌렸다. 아니, 뿌리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우루스의 돌진이 예상보다 아주 조금, 더 빠른 까닭이었다.

터컹-!

"...!"

삽시간에 쇄도한 거대한 뿔! 그 일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데미안이 주르륵 밀려났다.

"크읏!"

자세를 바로잡았다.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타이밍을 얻지 못했다. 최후의 방어선을 돌파한 우루스가 데미안을 지나쳐 그대로 내달렸기 때문이었다.

"누우우!"

쿵쿵텅쿵쿵!

인간 무리(?)의 방어선을 뚫고서. 자유를 위해. 은인의 안전을 위하여! 우루스가 라키엘을 안은 채 뛰어올랐다. 범선 난간 너머, 바다를 향해서였다.

철푸확-!

우루스가 장대한 배치기를 선보이며 바닷물에 다이빙을 했다. 하지만 우루스는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금방 수면으로 떠올랐다.

떡 벌어진 역삼각형 몸통으로 넉넉한 부력을 얻었다. 풍성하다 못해 빽빽한 털이 공기 방울을 듬뿍 머금어 몸을 파도 위로 동동 떠올렸다.

그렇게 바다로 뛰어든 우루스는 살아 있는 뗏목, 아니, 항공모함 같은 위용을 뽐내며 1우력(?)의 막강한 힘으로 물살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누우! 푸르륵! 푸륵!"

행여나 라키엘이 물에 빠질까. 혹시나 라키엘이 물을 마실까. 아예 자신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서 본격적인 개헤엄, 아니, 소헤엄을 선보이며 파도를 헤쳐나갔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먼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쭉쭉 나아갔다. 삽시간에 도주했다. 멀어졌다.

그 순간, 배에 남겨진 모든 이들은 이마를 탁 치며 깨달아야 했다. 방금, 마젠타노 황가의 황태자가 미노타우로스에게 납치당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을.

72화. 은혜 갚는 누렁이 (2)

꿈이다.

이건 꿈이다.

고개를 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꿈속의 라키엘은, 아니 이한은 저도 모르게 허허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네.'

한밤의 어느 교차로. 깜빡이는 신호등. 신호를 무시하고 쌩쌩 달리는 택시들. 그런 택시를 잡으려 손을 내미는 취객들. 시끌벅적하게 적막한 사람들. 그 사이를 걷는 나.

터덜터덜.

지친 발을 끌며 집으로, 집을 향해. 조금만 더 걸으면 도착한다고. 도착하면 편히 쉴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내딛는 걸음.

그 시절과 똑같았다.

'나 새내기 때. 매일 이랬는데.'

돈이 필요했다.

물론 아버지가 모은 재산마저 없던 건 아니었다. 당신께서 떠나시며 남겨주신 보험금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어머니의 투병생활에 썼더랬다. 그렇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신 후였던가. 혼자 남은 세상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장학금?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도움은 됐다. 하지만 그걸로만 살 수는 없었다. 생활비가 언제나 모자랐다. 과외 교습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대신 학교 앞 호프집에서 알바를 했더랬다.

'덕분에 매일 지겹게 걸었지. 지금처럼.'

알바를 마치면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 전철? 당연히 없었다. 집까지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사장님이 주는 택시비를 덜컥 쓰자니 너무 아까웠다. 차라리 모아서 생활비에 보태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 걸었다.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에 돌아갔다. 익숙하고 그리워서 지긋지긋한 밤거리. 매일 밤 지친 걸음을 옮기던 그 사거리. 그걸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꿈속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거친 소리가 한밤의 사거리를 흔들었다. 교차로 위에 매달린 신호등이 춤을 추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택시가 저만치 날아갔다. 취객들이 넘어지고, 횡단보도에 쩌저적 금이 갔다. 아스팔트의 균열 속에서 아침 해가 떠올랐다.

그 후광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너무나 그리웠던 실루엣.

'...엄마?'

고등학교 시절의 엄마가 다가왔다. 매일 아침 밥 먹으러 나오라는 목소리로 깨워주시던 그 시절의 엄마가 인자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누우우우우-!"

"...와악!"

이한, 아니, 라키엘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눈을 번쩍 떴다. 덕분에 보고 말았다.

"누우?"

"...."

커다란 버팔로, 아니, 황소가 왜 코앞에 있는 걸까. 까만 코를 반들반들하게 반짝이며, 그보다 더 반짝이는 눈매로 이쪽을 쳐다보며, 뭔가 알 수 없는 의미의 미소 비슷한 걸 짓더니.

할짝?

기다란 혀로 셀프 코파기를 시전했다!

'으, 더러!'

혹시 난 아직 꿈을 꾸는 중인 걸까. 설마 저 혀로 날 핥는 건 아니겠지? 라키엘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다가.

철벅.

뒤로 짚은 손에 뭔가가 닿았다. 차갑고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손에 닿은 물체는....

'미역?'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뭉개진 미역 덩어리가 보였다. 마치 공업용 프레스나 압착기로 꽉 짓누른 듯한 모양새. 한데 그런 미역 덩어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라키엘의 시선이 점점 분주해졌다. 주위를 바쁘게 훑었다. 돌바닥. 눅눅하고 어두운 동굴. 그리고 아스라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

'바닷가 동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누우우? 누우?"

셀프 코파기를 선보였던 황소가 움직였다. 한쪽에 놓여 있던 미역 뭉치를 집었다. 미역을 둘둘 말았다. 꽉 찌그러뜨렸다. 거기서 나오는 즙을 후르륵 마셨다. 그리고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우?"

알겠느냐는 듯한 눈치. 마치 이쪽에게 설명을 해주는 듯한 기색이었다. 녀석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누우, 누우우!"

이번엔 두 손을 나란히 모았다. 손바닥을 둥글게 펴서 바가지처럼 만들었다. 위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 마치 빗물을 받는 듯한 동작. 그리고 그걸 이쪽의 입으로 따라주는 듯한....

'빗물을 받아서 떠먹여 준 건가? 나한테? 그리고 미역즙을 짜서 먹여주고, 그랬던 거야?'

비로소 라키엘은 황소가 전하려는 뜻을 대강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눈앞에 있는 황소(?)의 정체 또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나저나 이 황소, 아니, 미노타우로스. 이놈 이거....'

우루스잖아.

"...."

덜 깨었던 잠이 확 달아났다. 잠깐 내려놓고 있던 기억들이 훅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래. 기억이 났다.

한밤의 난리. 무너지던 시장관저. 범선에 뛰어들던 우루스. 살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던 순간들. 빨간 해바라기씨. 그리고 거대화. 혼절하던 순간까지.

"...여긴 어디야?"

일단 범선은 아니다. 데미안과 일행도 보이지 않는다. 환상종 꼬슴이와 뽀복이도 품속에 없다. 해안가 동굴에 있는 이라곤 자신과 우루스뿐.

"내가 혼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물었다. 대답이 돌아올 거란 기대는 딱히 하지 않았다. 한데 뜻밖에도, 우루스가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누우우! 누우!"

우루스가 벌떡 일어나며 웅장한 몸짓을 선보였다.

"누우? 푸르륵! 누우!"

녀석이 두 손바닥을 모았다. 그걸 흔들더니 바닥으로 훅 가라앉는 몸짓을 보였다. 처음엔 뭔가 싶었다. 그러다가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배? 가라앉았다고?"

"누우!"

끄덕끄덕!

우루스가 거대한 머리를 끄덕이더니 몸짓을 이어갔다.

"누! 드르렁!"

녀석이 이쪽을 가리키며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이쪽을 집어들어 품에 안는 자세를 했다. 그리고 어딘가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치는 흉내를 냈다. 그 뜻은 즉....

"날 데리고 헤엄쳤다는 거야? 여기까지?"

"누우! 푸륵!"

우루스의 콧구멍이 연신 벌렁. 우렁찬 콧김이 의기양양하게 뿜어졌다. 비로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 침몰하는 범선에서 날 구해내겠다며 여기로 데려온 거구만.'

문득, 혼절하기 직전에 봤던 상황이 떠올랐다. 이쪽이 녀석을 얌전하게 만들기 위해 시술해주었던 침술. 그 끝에 녀석의 협심증 통증이 타이밍 좋게 멎었더랬다. 덕분에 이쪽을 고마운 눈길로 바라보던 녀석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자신을 고쳐주었다고 여긴 거겠지. 그래서 설마... 날 은인으로 인식한 건가?'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이쪽을 안고 바다를 헤엄쳐 온 것도. 혼절한 이쪽을 정성껏 보살펴준 것도. 전부 이쪽을 은인으로 오해(?)해서 벌인 일인 듯했다.

"허허. 허허허."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공교로워도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노타우로스의 은인이 되다니.'

물론 녀석의 일방적인 오해였다. 하지만 그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오해를 확실히 굳혀 버려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당연하지. 이건 기회니까!'

이런 오해는 땡큐다. 그러니 오해가 더 강화되도록, 계속 유지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그러면 경매를 해서라도 그렇게나 갖고 싶었던 미노타우로스가... 공짜로 날 따르게 될 거거든!'

라키엘의 입가 가득 사악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자고로 공짜는 뭐든지 반가운 법이다. 공짜 라면. 공짜 쿠키. 공짜 사은품까지. 이 세상에 나쁜 공짜는 없다.

하물며 갖고 싶어서 찜했는데 품절(?)됐던 미노타우로스를 공짜로 득템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반가운 상황이 어디 있을까.

라키엘은 환희의 트월킹이라도 찰지게 추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우루스의 워낭소리 까만 눈망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선, 고마워."

"...누우!"

우루스의 콧김이 의기양양해졌다. 표표푝 튀어 오는 콧물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

"넌 내가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날 구해주고, 보살펴줬어.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 그래서 나도 널 좀 도와주고 싶거든."

"누우?"

"네 가슴 말이야."

톡톡.

녀석의 심장 어름을 가리켰다.

"그때 많이 아팠지?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엔 어땠어? 또 아프진 않았어?"

"누우? 누우우!"

도리도리.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한 가지 알려줘야 할 일이 있어. 네 가슴 아프던 거, 사실 다 낫진 않았어."

"...누우우?"

"지금은 잠깐 통증이 가라앉은 상태일 뿐인 거야. 이대로 그냥 둔다면 언제고 그때처럼 또 엄청나게 아파질걸."

"...누우우우?"

"그래서야. 제대로 진단을 해서 치료할 방법을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내가 널 좀 진맥해봐도 될까?"

"...누우우우우?"

"우린 친구잖아. 안 그래?"

"누우!"

자신을 도와주었던 은인이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우루스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입술을 푸르르 떨며 웃었다. 반면, 라키엘의 입가에는 자본주의적 미소가 듬뿍 맺혔다.

'좋아, 앞으로 이놈을 주구장창 써먹으려면 건강 관리 잘 해줘야지. 안 죽게 해야지. 그래야 최고급 우황을 꾸준히 얻을 수 있을 거니까.'

자고로 우황 중에 최고는 살아 있는 소가 뱉어내는 생황이다. 그러니 우루스가 죽으면 안 된다. 건강이 나빠져도 곤란해진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우황을 팍팍 뱉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넌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이거지.'

허락 없이는 아프지도 못하게 하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강제로라도 건강하게 만들어 버리리라. 그렇게 알차도록 이기적인 다짐을 되새기며 라키엘은 정신을 집중했다.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동시에 마나써클을 회전시켰다.

딩동!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이 발동됩니다.]

[진맥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온 세상이 어두운 톤으로 물들었다. 오직 우루스의 거대한 몸체에만 밝은 형광 연두색의 외곽선이 덧씌워졌다.

동시에 보였다.

우루스의 신체 내부. 그 속을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 어떤 순서로 흐르고 있는지. 어느 곳이 원활한지. 흐름이 난잡한 곳은 어디인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일목요연하게.

라키엘은 그중에서 특히 우루스의 심장과 그 주위 관상동맥의 상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직 협심증 진행이 많이 되진 않았네.'

관상동맥 내의 기혈 흐름이 둔하긴 했다. 아무래도 혈전이 쌓인 까닭인 듯했다. 하지만 심각한 단계까진 아니었다.

'크레모로 돌아가서 치료를 시작해도 무방하겠고. 그럼 쓸개는 어떨까.'

라키엘의 시선이 우루스의 명치 오른쪽을 향했다. 그곳에 있을 쓸개를 살폈다. 이내 라키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기 있잖아."

"누우?"

"너 말이야. 최근 2년 사이쯤부터 되새김질을 할 때마다 여기, 명치 부근이 더부룩하진 않았어?"

"누, 누우우? 누우!"

끄덕끄덕!

우루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깜짝 놀란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증상이었다. 사나이는 그런 더부룩함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당연한 듯이 여기며 그냥저냥 감내해왔던 불편함이었다.

한데 은인은 그걸 한 번에 알아맞혔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인의 말이 이어졌다.

"여기 속에 뭔가가 잔뜩 생겨서 그래. 그걸 꺼내면 더부룩한 거, 사라질 거야."

"누우?"

정말?

되물었다.

은인이 빙긋 웃었다.

"지금 당장 빼도록 해줄게."

"...누우우?"

지금? 여기서? 조금은 무서워졌다. 설마 배를 가르고 빼겠다는 건 아니겠지? 한데 그런 이쪽의 심정을 짐작한 걸까. 은인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아파. 안 죽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누우?"

"자, 손가락 두 개를 세우고."

"누!"

"여길 꽉 눌러."

"누우!"

"더 세게 꽉."

"...느우우!"

"그래, 좋아. 그럼 이번엔 이쪽."

"누!"

꽉꽉! 쿠곽!

우루스는 라키엘의 지시대로 자신의 몸 곳곳을 강하게 짓눌렀다. 물론 우루스는 자신이 누르는 곳들이 어떤 경혈인지 꿈에도 몰랐다.

중간 겨드랑선(midaxillary line) 위쪽, 넷째 갈빗대 사이의 연액혈(淵腋穴). 앞가슴 부위, 일곱째 갈비 사이의 일월혈(日月穴). 아랫배, 배꼽 중심에서 아래로 3촌, 위앞 엉덩뼈가시(anterior superior spine) 안쪽에 자리한 오추혈(五樞穴).

그리고 넓적다리의 바깥면, 엉덩이 정강 근막띠(iliotibial band) 바로 뒤쪽에 있는 중독혈(中瀆穴)까지. 족소양담경(足少陽膽經)의 주요 경혈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례로 지압하게 되었다.

말이 지압이지, 최소 수 톤의 힘이 실린 압력이었다. 그 압력이 기혈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향이 변화로 이어졌다. 라키엘은 그 변화를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훤히 볼 수 있었다.

"좋아. 다음은 여기."

그의 손길이 우루스의 이마를 가리켰다. 눈썹 중앙에서 이마로 올라온 곳. 양백혈(陽白穴)이었다.

"누우!"

우루스의 두 손이 이마 양쪽의 양백혈을 꽉 눌렀다. 그 순간이었다.

"...누우? 딸꾹? 딸꾹!"

우루스가 격렬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 당황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라키엘은 오히려 흡족하게 웃었다. 성공이 가까워져 왔다. 확신을 담고서 우루스를 격려했다.

"자, 이제 마지막 한 군데만 남았다. 여기!"

우루스의 명치를 가리켰다.

주먹을 쥐어 보였다.

"주먹 쥐고, 최대한 강하게 쳐. 지금!"

"...누, 딸꾹! 누우!"

잠깐 망설인 우루스였다. 하지만 은인을 믿기로 했다. 각오(?)를 다졌다. 공성추에 버금가는 크기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셀프 명치샷을 강력하게 때렸다.

콰아앙-!

그 순간.

"누우웁?"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왔다. 뭔가 커다란 덩어리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위장과 식도를 타고 역주행을 하며 올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애애액."

푸확!

게워냈다. 싯누런 색깔의, 피라미드 모양의 정사면체 덩어리가 나왔다. 그 순간, 라키엘이 손을 뻗었다.

텁!

덩어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았다. 그의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맺혔다.

'...됐다!'

방금 우루스가 게워낸 덩어리. 덩어리를 보는 라키엘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미친. 대박.'

그야말로 이견의 여지가 없는 최고 등급. 특 S+급 미노타우로스 우황을 득템하는 순간이었다.

73화. 나를 증명하는 사람들 (1)

역시 이기적으로 살 걸 그랬다. 이러니까 돈만 밝히며 살아야 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인가.'

낡은 하수도. 썩어가는 나무판자. 그 사이를 부산하게 움직이는 생쥐. 그런 생쥐를 내쫓으려 휘두르던 손길. 그 손을 휘두르고 있던 나.

휘적휘적.

앙상한 손을 흔들며. 화를 내고, 인상을 쓰며. 저놈들만 쫓아내면 될 거라고. 그러면 편히 잘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향해 내뱉는 거짓말의 향연.

그 시절과 똑같았다.

'어린 시절, 매일 이랬지.'

하수구가 자신의 집이었다. 자신과 어머니, 둘만의 보금자리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정확히는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말로는 존귀한 분이라 하였다. 더없이 드높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분이라 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그분을 꼭 찾아가라 하셨다. 하지만 그 당부가 가슴에 와 닿은 적은 없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현실만이 가득했다.

어머니가 구걸해서 가져오는 빵조각?

운 좋게 길에서 주운 동전?

그걸로만 살 수는 없었다. 먹을 것이 언제나 모자랐다. 어머니의 약값도 필요했다. 온통 썩어가는 하수구 막이 판자 같은 인생. 그런 구차함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삶이었다.

돈이 필요했다. 도둑질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구걸을 다녀야 했더랬다.

'덕분에 매일 지겹게 손을 흔들어대야 했지. 지금처럼.'

구걸을 하다 보면 매를 맞기도 일쑤였다. 구둣발을 막으려 머리를 감싸다 보면? 언제나 다치는 건 손이었다.

붕대?

연고?

당연히 없었다. 손등이며 손가락엔 항상 피딱지가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치료받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니, 깨끗한 천 조각으로 손을 감싸는 것조차도 사치인 형편이었다.

그래서 매일 울었다. 울며 상처를 감싼 채 하수도에 몸을 뉘었다. 익숙하고 그리워서 지긋지긋한 하수구 냄새. 매일 밤 피딱지에 몰려들던 징그러운 생쥐 떼. 그걸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꿈속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한데 그때였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눅눅한 하수도를 흔들었다. 썩어가는 하수구 막이 판자가 춤을 추었다. 지긋지긋하게 모여들던 쥐 떼가 저만치 달아났다. 파리 떼가 추락하고, 오물 섞인 물에 보글보글 거품이 일었다.

거품 속에서 시린 초승달이 떠올랐다. 초승달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왔다. 익숙한 실루엣. 너무나 그리웠던 실루엣.

'...어머니?'

그 시절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매일 저녁 누더기로나마 따스하게 온몸을 감싸주시던 그 시절의 어머니가 지친 표정으로 웃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이 상황에서도 잠을 자는 꼬락서니라니. 뻔뻔한 건지, 대범한 건지 모르겠군."

"...."

데미안은 서늘한 눈동자를 빛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립고도 서글펐던 꿈에 대한 아쉬움? 당연히 없었다. 대신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빼빼 마른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심문관. 사흘 전, 황도에서 이곳 크레모로 파견된 감찰 심문관이었다. 심문관의 무감정한, 아니, 도마 위 생선을 보는 듯한 눈길과 마주하며 데미안은 생각했다.

역시 이기적으로 살 걸 그랬다. 이러니까 돈만 밝히며 살아야 했다.

"내 심문관 생활 20년이 넘도록 이런 친구는 처음 보는구만. 잠깐 목을 축이러 나갔다 오는 사이에 꾸벅꾸벅 졸아? 의자에 몸이 묶인 채로? 하."

감찰 심문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물어왔다.

"데미안 카이엔이랬나. 자네는 아직 이 상황이 실감이 안 되나?"

"됩니다."

"돼?"

"...."

"황태자 전하께서 미노타우로스에게 납치되어 생사가 불분명하고, 그 책임과 혐의를 추궁받는 이 상황이 실감이 된다는 자가, 태평하게 꾸벅꾸벅 졸 수도 있나 보구만? 음?"

"...."

그야 댁들이 사흘이 넘도록 재우지 않았으니까. 이 눅눅한 지하감옥에 가둬두고서 심문이랍시고 똑같은 질문만 던져대고 있으니까. 데미안은 속으로 묵묵히 되뇌었다.

심문관이 눈썹을 찡그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괴물의 손에 끌려가신 것이 벌써 엿새 전이네. 그 소식이 황도에 전해지기까지 하루,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오는 데에 이틀. 그렇게 총 3일 동안, 이곳 시장과 자네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나름 수색을 벌인답시며 귀한 시간을 허비했지. 전하를 찾지도 못했어. 아니, 그 흔한 단서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다."

"...."

"미노타우로스가 어디로 헤엄쳐서 도망쳤는지. 무슨 목적을 지니고 그런 난리를 벌인 건지. 그날, 경매장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사들였던 앙부아즈의 귀네스 데샹이 난리 후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어떤 단서조차 발견하지 못하였단 말이야, 자네들은."

"...."

"한데도 변명할 거리가 있나? 혹은, 나름 최선을 다하였노라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노라고 항변하고 싶은 건가? 아니. 내가 보기엔 달라. 단서를 못 찾은 것이 아니라, 방치한 것이겠지. 혹은 은폐한 것이겠지. 황태자 전하를 해하기 위해서."

"...."

"그렇지 않나?"

심문관이 상체를 내밀어 왔다. 얼굴을 바싹 들이밀며 차가운 시선을 던져왔다. 또다. 지난 사흘 동안 받았던 질문. 이제는 아예 외워 버리게 된 저 질문. 데미안은 되물었다.

"저와 이곳 크레모 시장, 그리고 황태자 전하를 수행했던 인원 전부가... 한낱 괴물인 미노타우로스와 공모하여 황태자 전하를 납치하고 해코지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고 싶은 겁니까?"

"그런 결론을 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밝혀내고 싶은 것이지. 명백한 자백과 함께."

"...."

"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나?"

"그야 당연히...."

"물론 나도 말이 안 된다는 건 안다네. 하지만 말이야. 세상은 때론 말이 안 되는 결론일지언정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답을 원하곤 한다네. 이를테면 책임과 분노를 덮어쓸 존재가 필요하다든가 하는 상황일 때 말일세."

"...."

"지금이 바로 그래. 황태자 전하께서 괴물에게 납치당하셨네. 생사가 불분명하시지. 그럼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도시의 안전을 관리하지 못한 크레모 시장, 그리고 전하를 곁에서 수행하였으나 안전하게 지켜내지 못한 자네를 비롯한 수행원들. 자네들이야. 바로 자네들이, 이번 일의 책임과 죄를 덮어써 주어야 뒤처리가 깔끔해질 거란 말일세."

"...."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겠지. 하지만 말일세, 굳이 자네가 자백하지 않아도 자백을 받을 곳은 많아. 크레모 시장, 혹은 그 가족, 아니면 황태자 전하를 수행하던 그 많은 인원들. 그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자백을 받으면 되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게. 죄를 순순히 자백하는 자에게는 최소한의 자비나마 주어질 테니까."

"자비?"

"편안하고 신속한 죽음이 주어질 거란 말이네."

"...."

"끝까지 입을 다물고 버틴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죽음의 과정이 주어지겠지. 지옥의 변두리 구석에서조차 그 시체를 온전히 찾을 수 없게 될 것이야. 정녕, 자네는 그런 죽음을 맞이하고 싶나?"

"당연히 그런 죽음은 싫습니다만."

"허허. 하면, 죄를 자백할 준비가 되었나?"

"...."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개소리다.

'미노타우로스와 공모? 그렇게 해서 고의로 황태자를 납치? 그런 죄를 덮어써 줘야 일처리가 깔끔해진다고?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미 사흘 내내 반박을 했으니까. 하지만 저 심문관은 그 반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으니까.

'저 인간은 그저, 이 사건을 복잡하지 않게 마무리하려는 것이겠지. 그 과정에서 죄인을 밝혀냈다는 자신의 공적을 세우고 싶은 거겠지.'

후회가 되었다. 역시 이기적으로 살 걸 그랬다. 이러니까 돈만 밝히며 살아야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황태자가 납치되자마자 그냥 도망칠 것을 그랬다. 황도에서 급파됐다는 감찰대가 왔을 때, 협조를 바란다는 말에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 '협조'라는 것이, 이토록 답 없는 몰아가기 식의 취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순진했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자백은 모르겠고, 사실을 말해줄 준비는 된 것 같습니다."

"오. 사실이라. 말해보게."

심문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모습에 이쪽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제가 말해줄 사실은 이렇습니다. 지금 그쪽은 취조를 한다는 명목하에 실종된 황태자 전하에 대한 수색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습니다."

"...뭐?"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황태자 전하를 모시던 근위대와 특근대도, 모두 황태자 전하를 찾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큽니다. 그분의 무사함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장 저를 풀어주십시오. 황태자 전하를 수색하는 인원에 포함시켜주십시오."

"하, 그러니까 죄를 씻어낼 기회를 달라?"

"어떻게 해석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장담이라. 무엇을?"

"저를 풀어주신다면, 누구보다 더 빠르게 황태자 전하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심문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심문관이 빙긋 웃었다.

"이 친구, 보자 하니 잔머리를 굴리는구만?"

"...."

"수색대에 포함시켜주면, 그대로 도망치려는 속셈이겠지?"

"...."

들켰다. 정곡을 찔린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심문관이 코웃음을 쳤다.

"뭐, 좋구만. 이런 식으로는 죄를 자백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하니. 지금부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문답을 나눠봐야겠군. 여봐라, 죄인을 끌어내도록!"

심문관이 손짓했다.

감찰대가 다가왔다.

철그럭!

사슬에 묶인 이쪽을, 의자째로 들어 올렸다. 지하실 밖으로 끌어냈다. 그렇게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반쯤 무너진 시장 관저 앞으로 끌려나왔다.

"...."

사흘 만에 보는 햇살이 눈부셨다. 그 햇볕 아래 짐수레가 있었다. 짐수레에 실린 커다란 정육면체 철창이 보였다. 동물 우리 같은 모양새. 그 철창 안에 의자째로 던져졌다.

콰당탕!

"...크읏!"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데미안은 이를 갈며 심문관을 노려보았다. 심문관이 빙그레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나. 자네의 동료들도 함께일 테니."

그렇게 심문관이 가리키는 방향. 그곳에 똑같은 모양의 철창과 수레들이 보였다.

'아니스, 세르지오 씨, 그리고....'

특근대원들과 근위기사들이 모조리 각각의 철창에 짐승처럼 갇혀 있었다. 비장한 표정의 크레모 시장도 갇혀 있었다. 모두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심문관이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모두와 함께 구워지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려나?"

"무슨...."

"옮기도록!"

반문할 틈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짐수레가 움직였다. 언덕을 내려가고, 시가지를 지나, 부두에 다다랐다.

그곳에 장작더미가 쌓여 있었다. 장작더미 옆으로는 낚싯대를 닮은 거대한 기둥과, 낚싯줄 같은 쇠사슬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부두의 선박에 커다란 짐을 실을 때 쓰는 특수 기중기였다.

"시작은 저 친구부터."

심문관이 이쪽을 가리켰다. 감찰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쪽을 가둔 철창을 기중기 옆으로 옮겼다. 기중기 쇠사슬 고리에 철창을 걸었다. 그리고 도르레를 움직였다.

끼릭! 끼리릭!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쇠사슬이 감겼다. 이쪽을 걸어둔 철창이 통째로 허공에 대롱대롱 들렸다. 마치 낚싯줄에 걸린 미끼처럼.

"...."

데미안은 상황을 깨달았다.

허공에 들어 올린 철창. 그 속에 갇힌 나. 한데 아래쪽엔? 장작이 쌓여 있다. 장작더미에선 기름 냄새가 났다.

'산 채로 태우려는 거구나.'

까득!

깨달음과 함께 이가 갈렸다. 심문관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알아챘나? 좋아. 멍청하지는 않은 친구야. 그러니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도 잘 알겠지? 나는 자네를 구울 걸세. 철창 안에 갇힌 자네가 비명을 지르며 구슬프게 울부짖는 꼴을 볼 걸세. 그 비명과 울부짖음이 자비를 바라며 죄를 시인하는 외침으로 변할 때까지, 불을 꺼뜨리지 않을 것이네."

"...."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말하게. 미노타우로스와 공모하여 전하를 해칠 계획을 꾸몄던 것이었노라고. 죄를 자백하여 자비를 구하게."

'미친.'

데미안은 치를 떨었다.

역시 이기적으로 살 걸 그랬다. 이러니까 돈만 밝히며 살아야 했다. 잡혀가 버린 황태자를 걱정하지 말아야 했다. 그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노심초사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그냥 도망칠까.

뒷감당이 어떻게 되든. 제국 전체에서 수배자가 되든. 남겨진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든. 이 사슬을 끊고, 철창을 부수고, 도망쳐서 다시는 돌아오지도 말고, 황태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지도 말고, 황태자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말고서.

그렇게 달아나야 할까.

데미안은 번민했다. 사실 결론은 뻔했다. 이런 곳에서 의미 없이 타죽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결심했다.

사슬, 끊자.

손목에 힘을 주려는 순간. 심문관의 눈짓을 받은 감찰대원이 횃불을 장작더미에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누우우우우-!"

너무나 난데없이, 혹은 더없이 절묘한 타이밍으로, 익숙한(?) 괴성이 불쑥 들려왔다. 앞바다를 헤치며 급속도로 다가왔다. 거대한 덩어리가 파도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푸확-!

"...!"

부서지는 파도와 바닷물 알갱이. 파도를 헤치고 솟구쳐 도약하며 부둣가에 올라서는 거대한 괴수.

쿠콰아앙-!

'...미노, 타우로스?'

데미안은 멈칫했다.

감찰대원이 기겁했다. 심문관은 더욱 경악했다. 부둣가에 모여 있던 모두가 굳어 버렸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혹은 지나치게 놀라 버려서. 모두가 괴괴한 당혹과 적막에 휩싸여 버렸다.

그 사이로 미노타우로스가 걸음을 옮겼다. 쿵, 쿠웅, 심장 철렁하는 소리로 다시금, 쿠웅.

"누우!"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손을 뻗었다. 데미안이 갇힌 철창을 두 손으로 잡았다. 콰직, 기중기에 연결된 사슬을 떼어내 버렸다. 이윽고 미노타우로스의 목덜미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냐? 이거 뭔데. 날 지켜주려고 제일 아등바등 애쓴 네가 왜 이따위 취급을 받고 있는 건데?"

"...."

그 순간, 데미안은 보고야 말았다. 동시에 가슴 한편으로 깨달았다. 역시 이기적으로 살지 않길 잘했다고. 적어도 이번만큼은, 돈만 밝히지 않고 남길 잘했노라고.

미노타우로스의 목덜미 위쪽. 그곳에서 워낭소리 충만한 자세와 눈빛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남자가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이었다.

74화. 나를 증명하는 사람들 (2)

햇살 속에 우뚝 선 미노타우로스. 그 목덜미 위에 워낭소리 충만한 자세로 올라탄 남자. 라키엘은 어처구니가 없는 심정으로 크레모 부둣가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철창에 갇힌 데미안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서둘러서 돌아오길 잘했네.'

절로 흘러나오는 헛웃음. 그 사이로 하루 전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미친. 대박.'

햇살을 등지고 우뚝 선 미노타우로스. 그 거대한 덩치와 마주한 라키엘은 가까스로 환호성을 참았다. 방금 우루스가 토해낸 정사면체 덩어리. 우황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이건 진짜다. 완전 제대로 된 생황이야.'

그는 우황에 대한 지식을 떠올렸다.

우황. 소의 쓸개에 생겨나는 결석. 그런 우황 중에 최고는 소가 즉석에서 딸꾹질을 하며 토해낸 것이라 하였던가.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이 그러했다. 심지어 이건? 사이즈마저 X라지급 특대였다.

'보통 우황은 아무리 커도 5센티를 못 넘기는데 이건... 최소 20센티는 되겠어.'

말 그대로 배구공만 했다. 이게 어떻게 담관을 지나서 나왔는지. 인체, 아니, 우체(?)의 신비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등급? 당연히 S급 이상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등급을 매기는 자체가 죄송할 정도로 최상품이야.'

라키엘은 우황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크기에 비해서는 가벼웠다. 알싸하고 맑은 향이 났다.

'맛은 어떨까.'

손가락으로 표면을 슬쩍 문대어보았다. 표면층이 쉽게 부스러졌다. 가루를 혀에 댔다. 처음엔 쌉싸름한 맛이 났다. 반면, 뒤에 남는 끝맛은 달고 청량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딩동!

[당신은 최상급 우황을 섭취하였습니다.]

[우황에 함유된 소량의 타우린(taurine)이 혈압 강하 및 진정 효과를 촉진합니다. 콜릭산(cholic acid)과 엘고스테롤(ergosterol)이 심장의 열을 내려주는 청심(淸心), 화담(化痰)작용을 불러옵니다.]

[단, 섭취한 우황의 양이 적고, 정제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그 효과는 미미합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우황 간식에 눈을 번쩍 뜹니다.]

[심장 : 힘... 힘이... 솟는다!]

[허파 : 허? 파학!]

[대장 : 아드레날린... 팍팍!]

[간장 : 활력도... 슉슉!]

[위장 : 후우. 몸에 좋다는 것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한결같이 맛대가리가 없는 걸까.]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500]

'허허허?'

결국, 라키엘은 찐으로 흘러나오는 행복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의 오장육부 인증(?)을 따냈다. 우루스의 반응 덕분에 더욱 흡족해졌다.

"누우우? 푸르륵! 누우!"

쿵쿵! 텅텅텅!

우루스가 킹콩처럼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쳐댔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시원해하고 있어.'

우루스의 눈빛과 헤 벌어진 입매. 고개를 흔드는 몸짓과 푸륵거리는 콧구멍. 그 모두가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마치 온종일 어금니 사이에 끼어 있던 팽이버섯 조각을 빼내는 데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다. 혹은, 며칠 만에 쾌변에 성공한 중증 변비 환자를 보는 듯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당연하지. 이만한 담석이 뱃속에 있었는데 얼마나 답답했을까.'

항상 체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다. 온종일 더부룩해서 헛트림을 연거푸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뱉어내니까 시원하고 후련하지? 완전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지?"

"누우!"

쿵쿵! 쿵텅쿵!

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춤을 추었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성공이라고.

'이제 넌 내 거야.'

우황도 얻고 미노타우로스도 얻었다. 그러니 이제는 할 일을 할 때다. 그는 만면에 짓던 웃음을 수습했다. 우루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좋아. 더부룩하던 곳이 나았다니 나도 기쁘구만. 축하해. 그런데 우리, 이제는 좀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누우?"

"크레모로 돌아가자."

"...누우우?"

"네가 날뛰었던 그 항구도시 말이야. 사실 이건 내 개인적인 예상이긴 한데, 지금쯤 거기 남겨진 내 일행들이 제법 고초를 겪고 있을 것 같아서."

"...누우우우?"

"내 일행, 알고 보면 나쁜 사람들 아니야. 해치지 않아요."

"누우우...."

"괜찮아. 진짜로. 나랑 같이 돌아가면 아무도 너 안 괴롭힐 거야. 아니, 못 괴롭혀."

"누우우?"

"정말이야."

"누우?"

"약속."

"누!"

처음엔 망설이는 듯하던 우루스였다. 하지만 꾸준히 설득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믿겠다는 뜻인 걸까. 녀석이 거대한 등짝을 내밀었다. 그 등짝에 올라탔다.

"누우우! 푸르륵!"

마치 꽉 잡으라는 듯, 녀석이 호기롭게 콧김을 뿜어냈다. 그리고 질주를 시작했다.

쿠쿠콰콰콰-!

"...!"

오픈카로 만들어진 덤프트럭을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과속방지턱을 박살 내며 질주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둡고 눅눅하던 동굴을 순식간에 벗어났다. 시원한 바람이 콧구멍으로 들어올 틈도 없이 우루스가 도약했다.

"누우!"

투확-!

"...!"

녀석이 도약한 지점은 해안가의 끄트머리. 해안 절벽이었다. 그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덕분에 졸지에 30미터 높이 해안 절벽 다이빙 체험을 만끽해야 했다.

'...그, 그와아아악?'

쿵콰풍덩!

거친 북녘의 바다에 장렬한 배치기로 입수! 그때부터였다. 우루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부지런한 항해(?)를 시작했다.

"누우! 누우우! 훅훅훅!"

우루스의 체력은 엄청났다.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 소헤엄을 선보였다. 덤으로 헤엄치는 와중에 물고기를 잡아주기도 했다. 무려 탱글탱글 싱싱한 다랑어였다.

'...아, 초장이랑 쏘주 마렵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맵고 얼큰한 맛을 본 지도 좀 됐다. 이런 상태로 1년만 더 있으면 한국인 약정(?)이 만료되는 건 아닐까. 나름의 걱정을 하면서도 부지런히 배를 채웠다.

바다를 헤엄치는 공룡 사이즈의 소 등짝 위에서 즐기는 즉석 다랑어회! 덕분에 굶주림을 겪지 않고 항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마나써클에 담아둔 담수 덕분에 목마름도 없었다. 온종일, 밤낮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 지금. 마침내 크레모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서둘러서 돌아오길 잘했네.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니.'

라키엘은 크레모 부둣가를 슥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갑옷을 걸친 병력도 보였다. 기사와 병사들. 크레모의 경비대가 아니었다. 라키엘은 그들의 뒤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황제 직속 감찰대구만.'

다행히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로 본 기억이 났다. 직속 감찰대. 오직 황제의 명에 의해 움직이는 내부 감찰기관이라 하였던가.

'그래. 황태자인 내가 실종된 상황이었으니까. 저들이 와서 사고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겠지. 그리고... 애꿎은 내 사람들이 고초를 겪었을 거고.'

곳곳에 쌓인 장작더미가 보였다. 스무 개가 넘는 철창들이 보였다. 철창 안에 갇힌 얼굴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데미안, 아니스, 세르지오, 그리고 모두들.'

특근대원과 근위기사들. 자신의 수행원들이었다. 크레모 시장의 모습도 보였다.

'쯧.'

감찰대인지 뭔지. 일 처리를 뭔 이따위로 하는 건지.

'향수병 치미네. 어째 사고 수습하는 모양새가 딱 대한민국스러운데.'

문득, 대한민국식 사고 수습의 절망편 버전이 떠올랐다. 뉴스에 오르내릴 사고가 났을 때 가장 피를 보는 건 누굴까. 책임을 덮어씌우기 만만한 이가 타겟이 된다. 가장 추리와 고민을 적게 했을 때 딱 제일 먼저 떠오르는, 죄인일 것 같은 대상. 일단 그들부터 족치는 거다.

제대로 된 조사?

그것보다는 실적이 중요한 거다. 범인을 잡았다고. 죽일 놈을 찾았다고. 대대적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고. 증거와 증언보다는 여론의 분위기에 기대어 만만한 대상을 매장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인 거다.

'마녀사냥이 그랬지. 인터넷 세상의 사이버 렉카도 그렇고.'

한데 여기도 똑같구나. 보고 있자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광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 책임자는 누구지?"

이쪽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둣가는 괴괴한 침묵과 혼란에 휘감겨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다들 혼이 나갔구만.'

아마도 이쪽과 우루스 때문일 거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귀환한 황태자. 그런데 미노타우로스가 세트메뉴(?)로 딸려왔다. 덕분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의 뇌세포가 단체로 정전 사태를 맞이한 것이겠지.

그러면 어쩔 수가 없겠다.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우루스에게 말했다.

"사람들 정신 좀 들게 해주자. 철창 내려놓고 소리 한 번만 질러줄래?"

"푸륵!"

지시와 실행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우루스가 데미안이 갇힌 철창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두의 사람들을 향해 워낭소리 터지도록 포효했다.

"누워어어어어어억-!"

"...!"

누군가는 깜짝 놀라고, 누군가는 얼굴이 해쓱해졌다. 감찰대 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검자루를 붙잡았다. 그 모두를 향해 다시 물었다.

"재차 묻겠는데,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우루스가 한바탕 화들짝 놀라게 해준 덕분이었을까. 그제야 감찰대 심문관으로 보이는 이가 나섰다.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반문해 왔다.

"...책임자를 찾는 거라면, 나요."

"나요?"

"그렇소."

"...."

저 심문관이라는 자, 어쩐지 말이 짧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이었다. 심문관이 굳은 눈길로 오히려 물음을 던져 왔다.

"미노타우로스를 이끌고 온, 황태자 전하를 꼭 빼닮은 자여. 당신은 누구요?"

"나?"

"그렇소."

심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타우로스의 위세가 신경이 쓰이는지, 먼발치에서 더 다가오지는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우리의 황태자 전하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납치되셨고,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이시오. 한데 댁은 그 미노타우로스를 수하처럼 부리며 이곳에 나타났소. 그러니 내 입장에선 댁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허. 내가 가짜인 주제에 황태자 흉내를 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말인가?"

"그렇소. 황태자 전하께서 실종되신 지금이 더없이 위급하고 특수한 상황이며, 이런 상황을 악용하여 황가에 해를 입히려는 이들이 얼마든지 준동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그렇소."

심문관이 굳은 눈길을 보내어 왔다. 그 눈길을 마주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저 작자. 마음에 안 드네.'

심문관이 자신을 함부로 의심해서? 그건 아니었다. 사실 심문관의 의심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타당했다. 이쪽이 반대 입장이라도 똑같은 의심을 한 번은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심문관이 자신을 의심하건 말건, 신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건 말건, 그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편의점에서 민증 까는 거랑 별반 차이도 없으니까. 다만-'

저 작자가 데미안과 자신의 수행원들을 대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문관을 보는 라키엘의 눈빛이 까칠해졌다.

"좋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말이지?"

"그렇소."

"한데 어찌하여, 저들이 누구인지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

"뭐요?"

"저들 말이다."

라키엘의 더없이 굳은 목소리. 그의 손길이 철창 속의 데미안을 가리켰다. 아니스를 가리켰다. 특근대장 세르지오와, 근위기사를, 크레모 시장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대는 왜, 저들이 보인 희생과 고초, 헌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지?"

"무슨...."

심문관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괘념치 않았다. 우루스의 등에서 내려섰다. 철창 앞으로 다가갔다. 안에 갇힌 데미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데미안 카이엔. 그대는 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지키기 위하여 온몸을 던졌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에 맞아 죽을 뻔했던 나를 밀어내고, 대신 잔해에 깔려 다리를 다쳤지. 또한, 그대는 내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단신으로 미노타우로스에 맞서 싸우는 용맹과 헌신을 보였도다."

"...."

라키엘의 고요한 눈길. 데미안의 일렁이는 눈동자. 두 눈길이 철창을 사이에 두고 얽혔다.

그 순간.

콰작-!

우루스의 손이 철창 창살을 부수고 벌렸다. 심문관이 움찔하며 무어라 외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외칠 수 없었다.

"...."

어느새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라키엘의 눈빛 때문이었다.

"다음. 하신토의 딸 아니스."

라키엘의 걸음이 아니스를 가둔 철창으로 향했다. 심문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75화. 나를 증명하는 사람들 (3)

"다음. 하신토의 딸 아니스."

부둣가에 울리는 라키엘의 준엄한 목소리.

죄인 심문을 구경하러 나왔던 시민들도. 장내를 통제하던 감찰대 기사와 병사들도. 그들을 이끌던 심문관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주위를 훑어보는 라키엘의 눈동자. 그 앞에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라키엘의 뒤에 우뚝 선 미노타우로스 때문에? 잘못 나섰다가 괴수의 분노를 덮어쓸까 봐?

아니었다.

괴수가 주는 압박감보다 라키엘의 존재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까닭 없이 쌔했다. 자칫 토를 달았다간? 제대로 경을 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키엘의 목소리가 너무나 당당하여. 말하는 내용이 더없이 자세하기에. 감히 황태자임을 의심하기가 불안해졌다.

"아니스여. 나의 웨어울프 수간호사인 그대는, 그날 밤 미노타우로스의 팔에 매달려 있던 내가 시장 관사 밖으로 날려가고 있을 때, 온몸을 던져 나를 받아내었지. 그대의 발 빠른 대처와 과감한 행동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온몸이 으스러진 시체가 되어 땅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대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붙잡혀 범선 갑판에 내던져지는 고초와 고통 또한 겪었지. 그 또한, 나를 위한 더없이 큰 용기와 희생이었도다."

라키엘이 나직하게 말했다. 철창 속 아니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마주치는 눈길.

정말로 고마웠다고. 네 덕분에 살았다고. 나 없는 동안 고생 많았노라고. 말없이 다독이고 격려하였다.

콰작-!

우루스의 손아귀가 철창을 부수었다. 데미안에 이어 아니스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감찰대 기사도 감히 제지하려 나서지 못했다.

라키엘의 걸음이 이어졌다.

그의 선언 또한 이어졌다.

"세르지오. 나의 특근대장. 그날 밤, 그대는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피신하던 나를 호위하였지. 그뿐이었을까. 미노타우로스가 범선에 난입하여 돌진하였을 때는 가장 앞에서 검을 맞세웠다. 그리하여 검을 잃고, 이곳, 어깨를 심하게 다치며 쓰러졌더랬지. 그러한 용맹과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무사할 수 있었을까."

"...전하."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가 울먹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캉-!

철창이 부서졌다.

세르지오가 풀려났다.

라키엘의 걸음이 계속되었다. 그의 나직하고도 진솔한 치하 또한 부두에 낭랑하게 퍼졌다. 나머지 특근대원들이, 충실한 근위기사들이, 차례로 라키엘의 치하를 받았다.

"몬테로와 페드로. 충실한 쌍둥이 특근대원이여. 그대들은 미노타우로스와 맞서는 과정에서 각각 오른팔과 왼팔이 부러졌지. 몬테로는 뿔을 막아내다가 날려가며. 페드로는 그런 형을 잡아주려다가 깔려서. 둘 다 괜찮은가?"

카앙-!

쌍둥이 검투사가 자유를 얻었다.

"리카르도. 그대가 나에게 날아오던 파편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무릎을 다치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도다. 또한, 기사 프란델 경이여. 경은 쓰러진 특근대원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공세 앞에 가장 끈질기게 버티다가 혼절하며 근위기사의 명예와 모범을 선보였지."

"저, 전하...."

"나는 해밀턴 경의 공적 또한 잊을 수가 없다. 경은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에 허리를 다친 상태에서도 또 일어나며 계속 맞서 싸워 나를 지켜주려 하였지. 검을 잃고, 방패가 부서져도, 나무막대를 들고서라도 싸우겠다는 투지를 보였어. 그날 밤 보여준 그대의 모습은 진정 용맹한 근위기사의 표상이었도다."

"전하아...."

특근대원들.

그리고 근위기사들.

라키엘을 수행했던 이들이 하나씩 차례대로 풀려났다. 자유를 얻었다. 명예를 되찾았다. 라키엘 곁에 당당히 섰다.

그 모습에 크레모의 시민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황태자가 나직하게 꺼내는 말들. 그걸 듣다 보니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진짜라고.

"...아무래도 저분, 정말로 황태자 전하가 맞으신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신 거지?"

"게다가 미노타우로스는 어떻게 길들이신 거람?"

웅성웅성.

고요하던 부둣가에 술렁임이 생겨났다. 덕분에 황제 직속 감찰대의 심문관은 졸지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무슨... 분위기가 이렇게....'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처음 라키엘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었다.

'설마 살아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괴수도 아닌, 미노타우로스에게 잡혀간 황태자였다. 그렇게 행방불명이 된 지가 벌써 엿새째였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진즉 미노타우로스에게 잡아먹혔을 거라고. 아무리 노력한들 온전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고. 이 도시에 도착하던 때부터 확신했었더랬다.

하여 황태자의 수행원들에게 책임과 죄를 덮어씌웠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당연한 절차였으니까. 황제가 병으로 죽으면 주치의를 사형시키듯. 존귀한 신분의 죽음과 비명횡사에는 누군가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 책임을 질 대상을 지목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임무이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이 했는데....'

죄를 덮어쓰는 대상이 억울하건 말건 상관치 않았다. 그저 고민 없이 편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좋았다. 그렇게 자신의 공적을 챙기는 것이 좋았다.

이런 방식은 실제로도 지금까지 이득이 되어 주었다. 매번 신속하고 깔끔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자. 상관들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고속승진에 따른 성공가도는 덤이었다. 하여 이번에도 그렇게 했을 뿐이었다.

한데 이렇듯, 일이 꼬였다.

'왜? 어째서 황태자가 살아서 돌아온 거지?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잡아간 미노타우로스와 함께라니,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누군가가 악몽이라고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저, 전하!"

다급해진 심문관이 외쳤다.

이제 전하의 신분이 확인되었노라고. 그만하면 충분하시다고. 저는 그저 절차상 확인을 하려 하였을 뿐이었노라고. 그렇게 항변하려 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 다급한 외침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일개 심문관 따위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 굳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심문관의 외침을 무시하고서 태연히 다음 철창으로 다가갔다.

"제르망. 특근대의 막내 검투사. 그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려 끝끝내 용기를 잃지 않았지. 미노타우로스의 돌격에 나가떨어지며 어깨가 탈구되는 고통 속에도 다시 일어나려 애쓰는 모습을 나는 보았도다. 비록... 그날 밤 내내 다리를 좀 심하게 후들거리긴 하였지만 말이다."

"...저, 전하?"

"괜찮다. 배가 흔들려서 그랬던 것이야. 맞지?"

"맞습니다악!"

특근대의 막내 검투사, 제르망이 시뻘게진 얼굴로 외쳤다. 그런 그의 귓가에 라키엘이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때 바지 적셨던 건 말 안 했다?"

"가, 감사합니다, 전하."

철컹-!

철창이 부서졌다. 특근대의 막내까지 자유를 얻었다. 그걸 본 심문관의 표정이 더욱 다급해졌다.

"전하! 전하!"

그가 아예 달려왔다. 라키엘 앞에 무릎을 꿇고 길을 막았다.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대며 외쳤다.

"전하, 감히 전하의 신분확인을 요구한 죄를 비나이다!"

일단 지금은 빌어야 한다. 그런 예감과 확신이 들었다. 황태자의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대로 뻗대고 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빌어서라도 황태자의 기분을 달래줘야 하리라.

심문관은 그러한 일념으로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전하, 지금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하옵니다."

하지만 그의 대처는 통하지 않았다.

라키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심문관을 쓱 지나쳐 갔다. 그런 라키엘의 걸음이 향한 곳. 그곳에 마지막 철창이 있었다.

"이 도시의 시장, 아이젤 크레모. 설마하니 그대까지 이런 고초를 겪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날 밤, 그대는 숱한 위험과 고난 앞에서도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서 도시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지. 나를 범선에 태워 피신시키면서도, 자신의 도시와 시민을 저버릴 수는 없노라며 끝까지 부두에 남기를 택하였어. 그것은 자신의 책무에 모든 것을 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고결하고 뜻깊은 귀족의 모범이었도다."

"저, 전하아...."

크레모 시장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철컹-!

마지막 철창이 부서졌다. 그제야 라키엘의 시선이 심문관을 향해 떨어졌다.

"감찰대 심문관. 그대는...."

"예, 전하! 저는 전하의 수행원들을 사사로이 미워하여 투옥하고 심문한 것이 아니옵니다!"

"감히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끊는 것인가?"

"...예?"

"방금 내 말을 끊은 것이었는지를 물었도다."

"...."

심문관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모르게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송연해진 모골 위로 라키엘의 선고 같은 말이 내리꽂혔다.

"아까, 그대는 나에게 스스로 신분을 증명하라 하였지."

"...."

"하지만 나를 증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내 곁을 지켜준 이들이, 나를 위하여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주는 사람들이다."

"...."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겠는가?"

"저, 전하...."

"또한!"

"...."

"그대는 방금 말하였지. 내 수행원들을 미워하여 투옥하고 심문한 것이 아니었노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지만 책임과 죄를 뒤집어씌우기 편한 상대이기에 투옥하고 심문한 것은 맞지."

"...예?"

"변명할 생각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들은 나를 모시던 사람들이라고, 한데 나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그러니 그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렇게 항변하고 싶은 것이겠지, 그대는."

"마, 맞사옵니다!"

"맞아?"

"예, 전하!"

심문관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닌 것 같은데?"

"...예?"

"사실은 아까 내가 들었거든. 그대가 말하는 걸."

"무슨...."

"흠흠!"

라키엘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심문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말하게. 미노타우로스와 공모하여 전하를 해칠 계획을 꾸몄던 것이었노라고. 죄를 자백하여 자비를 구하게."

"...."

심문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방금 황태자가 읊조린 저 말. 저건....

'아까 내가... 데미안이라는 저놈에게 자백을 종용하며 했던 말인데... 설마 그걸...?'

심문관이 떨리는 눈길로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라키엘의 눈빛은 냉랭했다.

"저 말, 그냥 책임자에게 죄를 묻는 말이 아니던데. 내가 잘못 들었나?"

"...."

"편리하게 죄인을 만들고, 모든 책임과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죄인을 죽이고, 골치 아플 것 같은 사건을 단순하고 신속하게 종결하려 했던 것, 아닌가?"

"...."

"그대는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가 피랍되어 실종된 사건을 그렇게 날림으로 처리하려 들었던 건가? 정녕?"

"...."

"내가 아까 물었지. 이곳의 책임자가 누구냐고. 그리하여 나선 것이 그대였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그, 그것은...."

"책임자는 무릇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그대는, 지금껏 행하였던 날림 수사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것이다."

"...."

라키엘의 냉랭한 선고가 떨어졌다.

그 순간 심문관은 직감했다.

아.

나는 끝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