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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쉬이익.

이곳은 깊은 땅속 16미터 지점.

햇볕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암굴에서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쳐들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불쾌하다고.

...시이잇.

두 갈래로 나뉜 혓바닥이 입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위에서 두 줄기의 안광이 서서히 눈을 떴다. 이곳 북서부 황야의 가장 위험한 몬스터이자 먹이사슬의 정점, 23미터 길이의 구렁이 기간토피스였다.

...쿵! 쿠구구구...!

기간토피스가 눈을 뜨는 순간, 예의 시끄럽고 둔중한 소음이 암굴 위쪽에서 몰려왔다. 아까부터 줄곧 이랬다. 덕분에 오랜 잠이 깨고 말았다.

기간토피스의 혀 놀림이 신경질스러워졌다. 역시나 층간소음은 구제불능의 해악이며 이 세상에서 조속히 퇴출되어야 할 만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기간토피스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점이 또 있었다.

...시잇.

인간들이 이곳에서 설치는 자체가 문제다. 여기엔 지난 97년 동안 애지중지 아껴온 긴뿌리 감초가 있으니까. 긴뿌리 감초는 지극히 예민하고 연약해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하필이면 여기서 땅에 구덩이를 파며 설친다는 것은? 확실하다. 긴뿌리 감초를 훔쳐 가려는 거다. 내게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시이이이이잇-!

마침내 상황을 온전히 깨달은 기간토피스가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몸길이만 무려 23미터. 몸통의 가장 두꺼운 지점 둘레는 거의 2미터에 육박했다. 체중은 약 7톤에 달했다. 그러한 근육 덩어리가 작정하고 움직이자, 암굴로부터 지상으로 향하는 터널이 순식간에 뚫렸다.

콰작!

10년 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가 신선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소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 놈들을 쫓아내야 한다. 기간토피스의 거대한 머리가 유령처럼 스르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적외선 시각으로 어둠을 뚫고 목표를 포착했다.

"...."

인간의 무리.

규모는 약 60.

거기에 비정상적으로 큰 미노타우로스 하나.

...맛있겠군.

기간토피스는 입맛을 다셨다. 마침 10년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덕분인지, 제법 허기도 졌다. 침입자들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기간토피스의 움직임이 더욱 은밀해지고,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목표물을 습격했다.

침입자 무리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타겟, 우루스였다.

쉬이잇-!

기간토피스가 우루스의 뒤를 덮쳤다. 때마침 우루스는 뿔로 구덩이 아래의 지면을 갈아엎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덕분에 옆구리가 완전히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기간토피스의 거대한 아가리가 우루스의 옆구리를 덥석 깨물었다.

콰작!

"...누우?"

우루스는 깜짝 놀랐다. 삽시간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한 옆구리. 두꺼운 소가죽 덕분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누우오오!"

우루스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기간토피스가 우루스의 옆구리를 깨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우루스의 다리가 땅에서 떠올랐다. 즉, 우람한 미노타우로스의 왕이 통째로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누오?"

우루스는 깜짝 놀랐다. 누군가에게 들어 올려지다니? 송아지 시절을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놀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간토피스가 우루스를 냅다 집어던졌기 때문이었다.

후우웅-!

"...!"

거대한 원심력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내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상공 수십 미터의 밤하늘. 그제야 우루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일행으로부터 100미터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함께 추락의 순간이 엄습했다.

콰자작! 콰콰각!

"누욱...!"

무거운 체중만큼 커다란 타격이 전신을 때렸다. 어디가 위이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푸르륵!"

우루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그 사이, 일행은 난리가 났다.

"무, 뭐야!"

"습격이다. 전하부터!"

우루스가 내던져지는 순간, 그 일을 저지른 기간토피스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근위대원과 특근대원들은 삽을 내던졌다. 각자의 검과 창을 들었다. 순식간에 대열을 이루며 황태자의 주위를 감쌌다.

노동 모드에서 호위 모드로. 실로 황태자의 호위 자격에 어울리는, 경이로운 속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인간 실력자의 습격이었다면 그 대응은 충분한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몸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괴수 사이즈의 구렁이였다.

시이잇-!

우루스를 내던진 기간토피스가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의 근위조장이 외쳤다.

"저지!"

그의 구령에 전열을 맡은 근위대가 검을 치켜들었다. 전원이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로 이루어진 근위대원들의 검이 희미하게 검기를 머금었다. 그러나....

콰앙-!

기간토피스의 꼬리치기 한 방에 대열이 무너졌다. 넘어지고, 날려가고, 검이 부러졌다. 후열 특근대원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라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뭐야? 웬... 용가리?'

라키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침내 긴뿌리 감초를 찾았나 싶었는데. 발굴(?)을 잘하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용가리, 아니, 20미터급의 거대 구렁이가 일행을 습격하다니. 이건 꿈에도 예상 못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루스가 한 방에 날아갔어. 이거, 실화?'

아무리 봐도 실화가 맞았다.

그래서 오금이 저렸다.

근위대와 특근대가 저 거대한 뱀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빠른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이 재빨리 외쳤다.

"다들! 흩어져! 부상자 챙기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몰살이다. 최대한 흩어져서 구렁이의 신경을 분산시켜야 모두가 살 확률이 올라간다. 싸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말이 20미터급이지, 어지간한 7~8층 빌딩 높이였다. 저런 놈과 싸운다니? 자신이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고 거대해져도 못 비비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어봐야 8미터 남짓한 키가 되니까. 그건 그냥 비율상, 지금 상태에서 6미터짜리 구렁이와 무제한급 맨몸 격투를 벌이겠다는 거랑 똑같은 미친 짓이니까.

'게다가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자신 때문에 여기까지 함께 온 수행원들이었다. 한데 여기서 다치거나 죽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건 싫었다.

"젠장. 퇴각! 퇴각! 세르지오는 우회해서 우루스 깨워서 데려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애를 썼다. 거대한 구렁이는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그래서 문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고, 내 긴뿌리 감초!'

아까웠다.

차마 수행원들을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퇴각은 하는데, 어렵사리 찾아낸 긴뿌리 감초를 내버려 두고 도망쳐야 하는 현실에 눈물이 왈칵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이번에는 진짜 답이 안 보이니까. 우루스마저 무력화된 상황이라면 진짜 위험한 거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이게 최선인 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이고오!'

겉으로는 냉철한 표정으로.

속으로는 대성통곡을 하며.

라키엘은 일행의 퇴각을 독려했다. 이 상황은 이것밖에 답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자 하나가 기간토피스의 후방에서 나타나 도약할 때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파앗.

온종일 일행의 뒤를 남몰래 따라다녔던 흑발의 사내가 땅을 박찼다. 드높이 도약했다. 검을 끌어당겼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릿결. 그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 데미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이윽고 그의 검도 번득였다.

콰아앙-!

기간토피스의 뒤통수에서 맹렬한 검격이 폭발하는 순간, 모두가 흠칫했다. 퇴각을 독려하던 라키엘도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멈칫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아, 잘하면 오늘 뱀술 담그겠구나, 라고.

185화. 감초가 힘을 숨김 (3)

콰아앙!

맹렬한 타격감. 순간적인 충격에 휩싸여 크게 출렁이는 구렁이의 뒤통수. 이내 이쪽을 돌아보는 분노에 찬 눈길. 기간토피스의 냉혹한 야성이 넘실거리는 눈동자와 시선을 얽는 순간, 데미안 카이엔은 생각했다.

황태자, 당신이 틀렸다고.

"...."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우린 이제부터 출발할 거니까, 넌 여기 남아서 아이한테 이걸 좀 먹여줘야겠다.'

...라고 황태자가 말했던가. 그러고선 자신과 아니스를 환자 곁에 남겨두고는 일행을 이끌고 황야로 떠났던가. 덕분에 자신은 황태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아야 했던가.

'난 간호사가 아닌데.'

당신의 호위인데.

언제나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당신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당신을 등 뒤에 두고서, 당신의 적과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람.

그게 나여야 할 텐데.

한데 어째서 당신은 날 그렇게 대한 걸까.

'내가 신뢰를 잃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아니스와 함께 숙소에 남아 환자를 돌보았다. 백일해에 걸린 아이라고 했다. 아이에게 황태자가 준 탕약을 먹이고, 물수건을 갈아주며 곁을 지켰다. 그러는 내내 착잡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그 기분이란.

오전 내내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간 못난 불평이나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한데 그런 이쪽의 마음을 헤아린 걸까. 수간호사 아니스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 안 들면, 가보면 되잖아요?"

"...예?"

"가보라고요. 여긴 내가 도맡을 테니까."

아니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카이엔 경이 여기 함께 있어봤자 나한테 별다른 도움이 안 되니까요. 당신, 간호사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전하 성격이 이상한 게 하루이틀이어야지."

"...."

"그냥 다녀와요. 전하나 일행 모르게. 다행히 전하께 아무 일이 없으면 당신은 먼저 돌아와서 종일 여기 있었던 체하면 되는 거고.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전하를 지켜주면 되는 거고."

"아이한테 응급상황이 생기면 어떡합니까?"

"뭘 어떡해요. 여기 사람들한테 잠시 아이 맡겨두고 내가 전하한테 알리러 뛰어가야지."

"...."

"뭐해요? 출발 안 해요? 그렇게 우중충한 표정으로 간호하는 거 환자한테도 안 좋다니깐요?"

아니스의 닦달이 고마웠다.

그런 덕분이었다.

곧바로 숙소를 나섰다. 검을 챙기고, 황야로 나왔다. 황태자 일행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흙먼지와 붉은 깃발은 너무나 쉽게 눈에 띄었으니까.

그렇게 온종일 멀찍이서 일행과 함께 움직였다. 저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그 사이, 해가 저물었다. 황태자 일행이 떠들썩해졌다. 뭔가를 찾은 걸까. 땅을 팠다. 그러다가... 거대한 구렁이의 습격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콰작!

...시이잇!

데미안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기간토피스의 뒤통수와 뒷덜미를 연달아 타격했다. 그때마다 금속성 마찰음과 불꽃이 튀었다.

그 모습을 보는 라키엘의 눈동자에서도 경악의 불똥이 팍팍 피어났다.

'데미안이 왜, 여기서 나와?'

그는 깜짝 놀랐다.

20미터급 구렁이가 감행한 불의의 습격. 그 앞에 위기에 몰린 채 퇴각을 결정하던 자신이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었다. 긴뿌리 감초는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한데 그 순간, 숙소에 남겨둔 데미안 녀석이 튀어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숙소에 남으라고 명령했으니까. 그 명령을 대놓고 어길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저 명령 불복종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 복덩이 같은 녀석!'

라키엘은 데미안을 숙소에 남겼던 자신의 판단이 실수였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한편으로는 데미안의 등장 덕분에 급변한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어쩌면 긴뿌리 감초 채집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의 눈길이 현장을 기민하게 훑었다. 그가 제일 먼저 눈길을 던진 곳은, 저 멀리 우루스가 날려간 자리였다.

서서히 걷히고 있는 흙먼지. 그 속에서 커다란 덩치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흔드는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우루스였다.

'역시.'

잠깐 타격을 받긴 했지만, 중상을 입지는 않은 듯했다. 충분히 그럴 거라고 보았다. 원래부터 튼튼한 황소니까. 고작(?) 100미터 정도를 날려갔다고 해서 엄살을 떨 녀석은 절대로 아니니까.

그러니까, 희망이 있다.

'데미안은?'

라키엘은 데미안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선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시이잇! 시잇!

거대 구렁이가 연식 쉭쉭거리며 섬뜩한 안광을 토해냈다. 고개를 흔들고, 꼬리로 공간을 헤집고 후려쳤다. 그때마다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인영이 경이로운 동작을 선보이며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녀석, 설마 리베르사 심법을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소설 마검황에 나오는 최강, 최흉의 심법. 역혈의 신공 리베르사. 그걸 쓰면 안 된다. 녀석의 각성이 진행될 테니까.

그때였다.

카앙-!

급류처럼 미끄러져 움직인 데미안이 기간토피스의 몸통 아래로 접근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배 부위에 검격을 먹이며 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녀석의 검격은 기간토피스의 비늘을 베어내지는 못했다. 단지 타격력만을 전달했을 뿐.

그걸 보자마자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역행시키고 있진 않구나.'

만약 녀석이 리베르사 심법을 쓰는 상태였다면? 저런 거대 구렁이의 비늘 따위(?)는 버터처럼 썰려 나갔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즉, 심법을 쓰지 말라던 이쪽의 당부를 녀석이 잘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좋아. 그럼....'

각이 나왔다.

이제는 반격의 시간이다.

우루스가 무력화가 됐던 잠깐의 시간. 그 위기의 타이밍을 데미안이 감당해주고 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우루스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때까지 데미안이 리베르사 심법을 일으키지 않고 버텨내면 된다.

그러자면....

덥썩!

라키엘은 삽을 집어 들었다. 뛰었다. 기간토피스를 향해? 아니었다. 그가 달려간 곳은 기간토피스와 데미안이 혈투를 벌이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곳에 채집을 하다가 중단한 긴뿌리 감초가 있었다. 라키엘은 채집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삽을 번쩍 치켜들었다. 삽머리의 날카로운 끝을 감초 뿌리를 향해 겨누었다. 당장 삽을 내리칠 듯이. 한껏 위협적인 몸짓으로.

외쳤다.

"야아아! 뱀타아앙-!"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기간토피스는 반응이 없었다. 데미안과 격하게 쿵쿵쾅쾅 싸우느라 이쪽의 목소리가 닿지 않은 듯했다. 잠시 뻘쭘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좌우의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을 돌아보며 재빨리 명령했다.

"전원, 이제부터 내가 선창하면 그 내용을 그대로 복창한다. 최대한 우렁차게!"

"우렁차게!"

라키엘의 뜻을 깨달은 수행원단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이 외치면,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의 허파가 맹렬하게 수축하며 60인분의 함성을 토해냈다.

"야아! 뱀타아앙!"

"야아아아아-! 뱀타아아아앙-!"

...멈칫!

데미안을 한입에 삼켜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던 기간토피스의 움직임이 드디어, 처음으로 멈칫했다. 놈의 쭉 찢어진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라키엘이 삽을 치켜들었다.

"계속 까불면! 이거! 찍어 버린다!"

"계속 까물며어언-! 이거어-! 찍어 버린다아아악-!"

라키엘의 목소리가 60인분의 함성으로 증폭되었다. 기간토피스의 어그로(?)를 훌륭하게 끌어냈다. 덕분에 기간토피스가 라키엘의 몸짓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의 의도를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

기간토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저 인간이? 자신의 소중한 감초를? 진짜로? 진심? 믿기지가 않았다.

그 순간, 라키엘의 치켜 들렸던 삽이 아래로 세차게 움직였다. 감초 뿌리를 찍어 버리기 직전에 가까스로 멈추었다.

...시잇!

기간토피스가 기겁하며 움찔했다. 동시에 라키엘의 입꼬리에 사악한 미소가 배어났다.

'역시!'

혹시나 했는데, 확실히 알겠다. 방금 이쪽이 건넨 협박에 대한 반응을 보니 제대로다. 저 거대한 구렁이 놈, 긴뿌리 감초를 애지중지하는 놈인 거다.

'그래서 우리 일행을 습격한 거였구만.'

문득, 가끔 옛날이야기 등에 나오는 이무기라는 존재가 떠올랐다. 혹은 무협 소설에서 본 영물이라는 존재들도 떠올랐다.

'딱 그런 거지. 영물들. 100년 묵은 복숭아니, 500년 묵은 산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먹으려고 그걸 지키는 존재. 하여간 이놈의 세상은 사람이나 몬스터나 건강식에 관심이 참 많아요.'

저 거대 구렁이도 그러하리라.

라키엘의 추측은 정확했다.

시이잇! 시잇!

기간토피스의 심장이 다급함의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날뛰었다. 1초마다 가슴이 16번씩 철렁철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긴뿌리 감초야말로, 자신이 평생을 지켜온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었다.

시잇! 시이이이이잇!

절대로 안 된다. 저건 못 건드린다. 그러면 안 된다. 이제 3년. 딱 3년밖에 안 남았는데. 3년만 더 묵히면 100년을 채우게 되는데. 그때 저걸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자신은 한낱 거대 구렁이 몬스터가 아닌, 위대한 드래곤에 근접하는 존재로 탈바꿈할 수 있는데.

그런데! 감히!

"시아아아아아악!"

기간토피스가 포효하며 돌진했다. 자신의 소중한 긴뿌리 감초를 위협하는 라키엘을 향해서였다. 그러나 그 돌진은 금방 저지되고 말았다. 라키엘의 다시금 치켜든 삽에 의해서였다.

"어허!"

...덜컥!

"더 다가오면 진짜로 찍는다?"

"...!"

미치겠다.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아아아아악-!"

돌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뭇거릴 수도 없고. 내적 갈등과 멘탈 붕괴에 빠진 기간토피스가 제자리에서 안타까운 맴돌이를 하며 애꿎은 바위를 짓뭉갰다. 그 순간, 라키엘이 버럭 외쳤다.

"데미안! 우루스! 지금!"

"데미아아안-! 우루스으! 지그으음-!"

라키엘의 선창과 60인의 함성. 그 소리에 기간토피스가 주의를 빼앗기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놈의 뒤쪽에서 또 다른 포효가 맹렬하게 터졌다.

"누오오오오-!"

우루스가 뿔을 앞세우고 돌진했다. 기간토피스의 옆구리를 거세게 들이받았다. 깜짝 놀란 기간토피스가 반사적으로 우루스의 상체를 휘감았다. 그러나 우루스는 굴하지 않았다. 기간토피스를 위로 확 던지듯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위쪽에서 데미안이 떨어져 내려왔다. 흑발 호위의 검이 서늘한 기세를 품고서 공간을 세로로 쪼갰다.

우루스가 위로 치켜드는 폭발적인 힘. 데미안이 아래로 내리 베는 예리한 기세.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버린 기간토피스.

"...시이이잇!"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거대 구렁이의 단말마가 황야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 구렁이의 사체를 어떻게 처리하실 거냐는 근위대 조장의 물음에 라키엘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흐뭇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버리냐고? 미쳤어? 담가야지."

186화. 백일해를 극복하는 법 (1)

"좀 어떠니?"

뜨겁다.

온몸이 뜨겁고, 목이 갈라질 듯이 아프다. 내쉬는 숨결에 목구멍이 찢기고, 마시는 숨결에 가슴이 통째로 뭉개진다. 그 모든 순간이 모조리 괴롭고 또 아파서, 이젠 더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저 젊은 의사 선생님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툴룬 상단주의 어린 외손녀, 네일라는 힘겹게 눈을 떴다. 대답을 할 기력은 없었다. 쉼 없이 내뱉어야 했던 기침으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 버렸으니까. 그래도 희미한 눈웃음이나마 지어 보일 수는 있었다.

괜찮아요.

전보다는.

힘겹게 지어 보인 눈웃음의 끝자락에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 침대 옆 탁자 위에 자그마한 아기 코끼리가 있었다. 이름이 코몽이라고 했던가. 저 코끼리가 오고 난 뒤로 숨 쉬는 일이 전보다는 덜 괴로워졌다. 아주 조금은. 덜.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래. 다행이구나. 조금만 더 힘을 내렴."

라키엘은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어렵사리 찾아낸 긴뿌리 감초. 그걸 손상 없이 캐는 데에만 장장 이틀이 걸렸다. 채집을 마치자마자 아이부터 살피러 달려왔다. 아이를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서둘러야 해.'

라키엘은 잠시 아이를 달래어 주었다. 그 잠깐 동안에도 끔찍하게 무거운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럴 법도 했다. 채집을 나선 뒤부터 거의 제대로 쉬질 못했으니까. 황야의 채집 현장에서 침낭에 의지해서 쪽잠을 이루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쉴 여유는 없었다.

그는 곧바로 상단 건물의 주방 하나를 차지했다. 거대 구렁이 사체를 술로 담그는 일은 데미안과 오크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긴뿌리 감초의 성분 분석부터 시작했다.

"뽀복! 뽀보보!"

긴뿌리 감초 끄트머리의 아주 일부를 떼어서 뽀복이에게 먹였다. 역시나 뽀복이는 죽었고, 부활했으며, 일기장을 빙자한 장문의 성분 분석 리포트를 썼다.

"흐음...."

라키엘은 성분 분석 내용이 적힌 뽀복이의 일기를 살펴보았다.

[오늘의 일기]

[이번에 주인이 준 뿌리 조각은 뭘까. 향긋한 냄새가 났다. 기대가 됐다. 그런데 또 속았다. 특히 뿌리에 잔뜩 들어있던 알파-글리시리진(glycyrrhizin)이 레알 싫었다. 민트초코에 탕수육을 부먹하는 기분이었다.]

'...알파-글리시리진?'

처음 보는 성분이었다. 그냥 글리시리진은 보통의 감초에 제법 함유되어 있긴 한데, 알파-글리시리진은 금시초문의 물질이었다. 한데 이어지는 일기장에 쓰인 알파-글리시리진의 기능이 의미심장했다.

[알파-글리리시진 그거 진짜 골때렸다. 먹자마자 강력한 항염, 항균 효과가 나는 건 좋은데, 가성 알도스테론 혈증(pseudoaldosteronism)도 빼박 당첨ㅋㅋ 몸속에서 나트륨이랑 칼륨이랑 손에 손잡고 개 같이 멸망의 훌라춤을 췄다. 그만하라고 말리고 싶었는데 말도 안 들었다.]

"...."

강력한 항염증 성분. 그런데 그만큼 강력한 부작용까지. 라키엘의 눈동자가 한층 바빠졌다.

[멈추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안 돼. 결국 오늘도 또 죽었다. 아마 이건 내가 아니라도 보통 사람이면 전부 예외 없이 삼도천 프리패스권 당첨에 염라대왕이랑 진로상담 면접 자동으로 예약됐을 듯. 그러니까 이걸 그냥 생으로 먹는 건 자살행위다. 아마 제일 튼튼한 오크 정도만 간신히 버텨내고 약효를 볼까 말까 할 정도?]

읽어보니 알겠다.

'긴뿌리 감초에만 들어있는 알파-글리시리진. 저게 핵심이군.'

강력한 항염 항균 작용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인체의 구원투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빡쎄다는 점이 문제로 보였다.

'보통 가성 알데스테론 혈증이 일어나려면... 감초를 진짜 무식하게 많이 섭취해야 하는 건데.'

방금 뽀복이에게 먹인 긴뿌리 감초는? 뿌리 끄트머리의 1밀리미터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로 눈곱만큼만 떼서 먹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만으로도 강력한 부작용이 날 정도라면, 그대로 약으로 쓰기엔 심각하다고 볼 수 있었다.

'쓰읍. 역시 쉽게 가질 못하는구나.'

라키엘은 혀를 찼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자고로 한방에서는 약성과 독성을 종잇장 하나 차이로 본다. 강한 약성은 독이요, 강한 독성 또한 약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긴뿌리 감초를 찾고자 결심했던 때부터, 이 정도의 독성은 이미 예상하고 각오한 바였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독성을 누그러뜨리고 다른 약재와 조화시켜 새로운 탕약을 개발하는 거겠지.'

오직 그것이 아이를 살릴 길이리라. 확신을 품고서 연구를 시작했다.

톳!

"...흡!"

검은색 K-맛 가시로 허벅지를 셀프로 찔렀다. 영혼을 마실 밖 은하계 나선팔 너머로 출타시키는 극한의 통증이 대뇌피질을 연타로 때렸다.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 후에 고통의 결실이자, 신진대사가 급가속되는 '8282 모드'가 찾아왔다.

딩동!

[당신의 신진대사가 '8282 모드'로 급가속됩니다.]

후욱-!

각성하듯 깨어나는 심장.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호흡량. 뇌혈류가 급류타기를 하듯 넘실거렸다. 뇌세포 뉴런이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생각의 속도가 12기통 슈퍼차저 바이터보 엔진을 장착한 메카닉 치타처럼 내달렸다.

그 상태에서 탕약 조제 스킬의 옵션, '약재 배합 미리보기' 옵션을 발동했다. 준비한 약재는 새로운 맥문동탕의 재료로 삼을 맥문동, 반하, 찹쌀, 대추, 인삼, 그리고 긴뿌리 감초였다.

딩동!

[정리되어 조제 준비를 마친 약재가 포착되었습니다. 해당 약재의 배합으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

응답이 곧바로 왔다.

[탕약 조제 옵션 ② : 약재 배합 미리보기를 실행합니다.]

[포착된 약재를 조합하여 만들어질 탕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계산합니다.]

[로딩 중.]

[8282 모드의 영향으로 급가속된 로딩창이 찢어집니다!]

딩동! 딩동! 딩딩동!

[22%... 39.5%... 78.1%...!]

[...100%!]

[로딩 완료]

딩동!

순식간에 결과가 떴다.

라키엘의 눈동자도 섬광처럼 움직였다.

[약재 배합 미리보기]

[샘플 번호 A001]

[예상되는 효능 : 강력한 항염 및 항생 · 항진균 작용, 마른기침의 해소 등]

[예상되는 부작용 : 장내 유익균 전멸, 급속한 가성 알도스테론 혈증으로 인한 사망 등등]

"...."

역시 그냥 맥문동탕의 레시피에 긴뿌리 감초를 섞으면 사약이 만들어지는구나. 라키엘은 결과창을 보며 반성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구나 싶었다.

'긴뿌리 감초의 성분이 너무 심하게 강력한 점이 문제야.'

본디 한방에 쓰이는 감초는 다른 약재의 독성을 중화하고, 여러 약재를 두루두루 조화시키는 역할로 쓰이곤 했다.

한데 긴뿌리 감초는 성격이 너무나 달랐다. 주위를 조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타고난 강력함으로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한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예를 들자면?

'리그 오브 라잔드를 하는데 서포터가 혼자 다 해먹는 거지. 초반부터 서포터가 설치면서 CS고 킬이고 다 줏어먹는 바람에 정작 커야 할 원딜이 폭망해 버리는 상황.'

혹은, 결혼식장에 블링블링 에메랄드빛 반짝이가 온몸에 붙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하객과 비슷한 상황이라 볼 수 있으리라.

한마디로 혼자 너무 튀어서 민폐가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 약성을 누그러뜨리고 조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해.'

그때부터였다.

톳!

"...그읍!"

고통을 참으며 8282 모드로 진입했다. 탕약 조제 스킬의 옵션을 발동했다. 급가속된 신진대사를 활용해서 초고속으로 수많은 레시피를 연구하고, 실험하고,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결과가 좋지 못했다.

딩동!

[샘플 번호 A016]

[예상되는 효능 : 강력한 항염 및 항생 작용, 혈압 강하, 간 보호 및 기능 개선 등등]

[예상되는 부작용 : 급격한 혈압 강하에 따른 쇼크 및 사망]

"...."

다시 더.

토옷!

"...긥!"

딩동!

[샘플 번호 A029]

[예상되는 효능 : 강력한 항염 및 항생 작용, 장 연동운동 활성화 등등]

[예상되는 부작용 : 지나친 장 운동 활성화에 따르는 설사 및 급격한 수분 소실에 의한 쇼크와 사망]

"...."

어째 매번 부작용에 사망이 꼭꼭 들어가냐.

라키엘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거듭 8282 모드로 진입했다. 실험을 할 때마다 매기는 샘플 번호가 계속해서 증가했다. 30, 40, 50대를 넘어서 90에 이어 100번을 돌파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매번 강력한 효능을 얻는 대신에, 부작용에는 '사망'이라는 붉은 글씨가 무조건 들어갔다.

'이거, 사실은 청산가리 뺨치는 독이 아닐까.'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온몸이 무거워졌다.

미열도 났다.

삽시간에 스멀스멀 기어오듯 전신을 점령해 오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후우... 힘들구나.'

마침내 샘플 번호가 거의 150번에 육박했을 무렵, 라키엘은 깊은 심호흡을 내뱉었다. 피곤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슥거렸다. 그럴 법도 했다.

'요즘 계속 쉬질 못했으니까.'

별궁 한의원을 출발한 이후부터 내내 그랬다. 이곳 지방까지 여정을 재촉했다. 도착한 직후부터 긴뿌리 감초를 찾으려 황야를 바삐 다녔다. 감초 뿌리 발굴에 신경을 썼고, 그걸 마치자마자 이렇듯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이 정도의 하드코어한 일정이면 몸살쯤은 보상(?)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데...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네.'

쓴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당장에라도 이불 펴고 한숨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아이가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오늘이라도 위독해질 수 있다. 안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 새로운 탕약을 개발해야 할 판국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라키엘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몰려오는 졸음을 털어냈다. 피로감을 애써 잊었다. 귓가에 들려오는 오장육부의 진심 어린 걱정을 애써 외면하며 검정색 가시를 들었다.

"후우...."

이미 수십 번은 찔렀지만, 그럼에도 검정색 가시의 통증은 영 적응이 안 된다. 다가올 통증을 각오하며 심호흡을 했다. 가시를 겨누었다.

한데 그때였다.

...핑.

귓속에 울리는 갑작스러운 이명.

몰려오는 메스꺼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세상.

'어?'

눈을 부릅떴다. 눈앞의 세상이 훅 멀어지는 듯한 어지러움이 아득하게 몰려왔다. 비로소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쓰러지고 있구나, 라고.

둔부의 둔탁한 충격은 깨달음 직후에 몰려왔다.

콰당탕!

"...읏."

다리가 풀려서 형편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의자가 밀려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 부딪힌 팔뚝이 지끈거리며 아팠다. 쓴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이고 미치겠네.'

꼴불견도 이런 꼴불견이 없다. 정작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아이는 얌전하게 누워 있는데, 아이를 살리자고 애쓰는 이쪽이 이런 꼬락서니라니.

'이래선 안 되지.'

아직은 이럴 때가 아니다. 엄살을 부릴 때도 아니다. 이쪽의 성과만을 기다리는 환자가 있다. 한데 이쪽이 먼저 무너져선 안 된다. 환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은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다.

각오하며 바닥을 짚었다. 짐짓 기운을 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딩동...!

평소보다 훨씬 낮은 음의 묵직한 알림음이 울렸다.

[WARNING!]

[당신의 체내에서 대량으로 증식된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이 감지되었습니다.]

[백일해 잠복기 종료.]

[당신은 백일해에 감염되었습니다!]

삽시간에 떠오르는 핏빛 메시지.

문득, 소름이 돋아났다.

187화. 백일해를 극복하는 법 (2)

[WARNING!]

[당신의 체내에서 대량으로 증식된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이 감지되었습니다.]

[백일해 잠복기 종료.]

[당신은 백일해에 감염되었습니다!]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이건 무슨 일일까.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덜컥 어깨를 움츠렸다.

'뭐?'

처음엔 믿기지가 않았다. 눈앞을 가득 채운 핏빛 경고 메시지를 거듭 읽어볼 때까지도 그러했다. 한데 곧,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치닫듯 몰려오기 시작했다.

"...크읍, 쿨룩!"

무의식중에 내뱉은 건조한 기침.

그것이 시작이었다.

"커훅, 쿨룩! 콜록! 그읏, 왜... 쿨룩!"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가 가슴을 통째로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목구멍이 산 채로 찢기는 기분이었다.

오장육부도 난리가 났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비상사태에 돌입합니다!]

[심장 : 이... 이게 무슨 일이냐? 응? 야 허파? 넌 또 왜 그래?!]

[허파 : 좋은 인생이었... 흐픕, 흐픗! 흐프쿠헿갸아알갸...!]

[대장 : 핫하! 똥 만드는 알바도 여기까지지 말입니닼ㅋㅋ]

[간장 : 야야 그럼 우리 이제 죽는 거야?]

[위장 : 아직 못 먹어본 간식이 너무 많은데. 원통하구만ㅋ]

[콩팥 : 마지막으로 생전 고인의 지리는 영상 한 번 만들어볼까?]

[심장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하고 싶은 것들 다 해라 다 해ㅋㅋㅋ ㅠㅠ]

[허파 : ...흐픕! 크픕! 허픕! 헢!]

[오장육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생명 연장을 기원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생존을 기원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300]

"...쿨룩! 콜록!"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기침의 연속.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서야 가까스로 기침을 붙잡아 멈출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내가 백일해에 감염됐다고? 그런데 벌써?'

라키엘은 자신이 이곳에 온 날짜를 헤아렸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잠복기가 끝났다니. 너무 빨랐다.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은 곧이어 떠오르는 또 다른 경고 메시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딩동!

[당신은 백일해균에 감염된 잠복기 기간 동안 신진대사가 가속되는 '8282 모드'에 거듭 진입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진대사 가속에 힘입어, 당신의 체내에 잠복하고 있던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의 분열과 성장 및 증식 속도 또한 폭발적으로 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잠복기가 비정상적으로 단축되었으며, 당신은 급성 백일해에 감염되었습니다.]

"...."

미친.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짓씹듯 되뇌었다. 그런데 더 미친 파멸적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다.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에 감염된 결과, 당신은 본격적인 '중병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중병 상태 돌입에 따라, 당신이 보유한 보너스 수명 카운팅이 잠정적으로 중단됩니다.]

[보너스 수명은 당신이 외부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건한 상태에서의 예상 수명입니다. 이는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에 의해 언제든 커다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쿵, 쿵!

급속도로 뛰는 심장.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 확실히 알겠다. 비상사태가 온 거다.

내가 백일해 환자가 되어 버린 거다. 그 사실을 온전히 깨달은 순간, 라키엘은 크게 심호흡부터 했다.

"후우."

마음을 다스렸다. 흔들리지 말자고. 공포에 잠식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잠깐 찾아왔던 당황이 서서히 물러났다. 그 빈자리에 냉철함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자연히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유난 떨지 말자. 어차피 새로운 탕약을 개발하던 중이었다. 개발만 하면 돼. 그것만 성공하면, 아이도 살리고 나 자신도 치료할 수 있어.'

결국 답은 그거다.

하던 연구를 마무리하면 된다. 그것만 성공하면 백일해를 치료할 수 있다. 자신도, 아이도 모두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러니 새삼 위축될 필요 없어.'

라키엘은 테이블을 짚고 일어섰다. 순간 현기증과 함께 또다시 기침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때였다.

주방 문밖에서 데미안의 물음이 날아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쪽이 넘어지는 소릴 들은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서 태연한 척 대답했다.

"어. 괜찮아."

"하지만 전하? 방금 기침하시는 듯한 소리를 들었는데...."

"괜찮으니까 그만."

"...제가 안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걱정해 주는 걸로 이미 됐어."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데미안이 들어와서 뭘 해준다 한들 딱히 도움이 되진 않는다.

녀석은 검을 쓰는 데에는 천재적이지만, 약재를 배합하고 달이는 일에는 젬병이니까. 오히려 괜히 안에 들어왔다가 이쪽에게서 백일해가 옮으면 더 큰일이겠지.

그런 이쪽의 생각이 통한 걸까.

혹은 명령에 수긍한 걸까.

"알겠습니다. 다만-"

어느새 데미안 녀석의 목소리가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에까지 다가와 있는 듯했다.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 정말로 힘드실 때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래."

"그동안 여기 있겠습니다."

"그건 호위니까 당연한 거고."

"이번에는 특별 수당을 달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거 눈물 나게 고맙구만."

말은 저렇게 해도 무척 걱정하고 있다는 마음은 알겠다.

라키엘은 기침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숨을 골랐다. 이젠 진짜로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다.

'시간이 얼마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인 수많은 종류의 약재들. 그걸 보자 조금 막막해졌다.

이제는 8282 모드를 쓸 수 없게 됐다. 그랬다간 백일해균이 순식간에 더 증식할 테니까.

'내 신진대사가 빨라지는 만큼, 병세의 진행도 함께 가속되겠지. 그랬다간 손 쓸 틈도 없이 위독해질 수도 있어.'

운이 나쁘면 정말로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그것만큼은 사양이다. 라키엘은 검정색 K-맛 가시를 내려놓았다.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억누르며,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생각의 실마리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8282 모드는 사용 불가. 그럼 남은 방법은... 직접 달여서 실험하는 수밖에 없겠군.'

탕약 조제 스킬의 옵션인 '약재 배합 미리보기'는 8282 모드가 없으면 로딩이 너무 느리다.

얼마나 느리냐면, 직접 약재를 달이는 것보다도 결과가 늦게 뜰 정도다. 그러니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후우."

점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백일해균이 호흡기를 침범하고, 그걸 감지한 신체가 격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가뜩이나 피로가 잔뜩 누적된 상태라 예후가 더욱 좋지 못했다.

그렇기에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기회가 얼마 없을 것임을.

'아마도 새로운 배합을 실험해볼 기회는... 최대한 많이 잡으면 세 번 정도.'

라키엘은 냉정한 예상을 꺼냈다.

현재 자신의 컨디션, 백일해가 진행되며 나빠질 예후, 그리고 탕약 한 번을 달이는 데에 소모되는 시간과 체력까지. 그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남은 실험 기회는 최대 3번 정도가 될 듯했다.

'어쩌면... 한 번일 수도 있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짙어졌다.

모든 병이 자신의 예상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예후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나빠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세 번의 기회가 남았다고 안도하기보다는, 지금의 시도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야 한다.

"...."

꿀꺽.

저도 모르게 목울대가 출렁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과연 배합에 성공할 수 있을까. 긴뿌리 감초의 지나치게 강력한 약성이 불러오는 부작용을 억누르고, 약효만을 효과적으로 신체에 전달할 수 있을까.

이미 150여 회에 걸쳐 실험했음에도 실패한 그걸, 지금, 단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끝이겠지.'

라키엘은 신중한 손길로 약재를 골라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분량을 조절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달리 약재를 잡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거나 약재를 놓치곤 했다. 손끝이 계속해서 미세하게 떨려서였다.

"...."

점점 오르는 열 때문인지.

문득 치닫는 현기증 때문인지.

혹은 가슴 한쪽을 물들이듯 집어삼키는 긴장과 불안감 때문인지.

'멍청아, 정신 차려.'

짝! 짜악!

양손으로 볼을 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어느샌가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나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과연,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두렵고, 불안했다.

자신이 지금 시도하려는 배합이, 약재의 비율이 과연 좋은 결과를 끌어낼 것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이 약재, 저 약재를 매만지게 됐다. 이걸 골랐다가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고, 저걸 집었다가 망설이며 또 내려놓고.

그때마다 150번 넘게 실패한 실험을 이번 한 번에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운일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 게 누구에게나 가능한 거였다면, 기적이라는 단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때였다.

"전하?"

문밖에서 다시금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라키엘은 생각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왜 또."

초조했던 터라 조금 짜증이 났다. 목소리에도 그러한 감정이 어쩔 수 없이 배어났다.

한데 문밖의 데미안 녀석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쪽의 감정을 느꼈을 텐데도, 그러했다.

"제가 들으면서 감히 추측하기로는, 뭔가를 굉장히 불안하게 망설이고 계신 듯해서 말입니다."

"...."

맞는데. 그게 뭐.

"지금 개발 중이신 탕약 말입니다. 처음 접해보는 종류의 약재로 세상에 없던 새로운 걸 개발하는 일이니까, 막막하고 불안한 건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서 말이지요."

"...."

"그러니 무엇이 정답일지 계속 불안하고 망설여지신다면, 전하께서 처음 환자를 치료하실 때 느끼셨을 막막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하고... 잠깐 생각이 들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계속 한숨을 많이 내쉬셔서. 괴로워하시는 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주제넘게 나서고 말았습니다. 그럼, 다시 침묵하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데미안 녀석은 정말로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살짝 올라왔던 짜증이 어느샌가 가라앉은 것은. 대신 녀석의 말대로 문득, 아주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

한국에서 처음 부경 한의원을 개원했던 날 오전이었던가. 그때 찾아오셨던 첫 환자를 진료했던 기억이 불현듯 뇌리에 사무쳤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관호.

그때 진료했던 환자분의 이름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 동명이인이었다. 하필이면 연배도 아버지와 비슷하셨다.

내가 고3 때 50대 중반의 나이로 돌아가셨던 아버지. 당신께서 살아계셨다면 딱 저 정도 연배가 되셨을 테니까.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칼로 허허 웃으셨을 테니까.

하지만 그 환자분이 날 더욱 당황시킨 점은 따로 있었다. 두 다리가 없으셨다.

베트남전에서 다리를 잃었노라 하셨다. 그런데 환자분의 질환을 다스리기 위해 침을 놓아야 할 자리가... 다리였다.

당혹스러웠다. 개원 첫 환자를 잘 진료해야 한다는 긴장감, 거기에 아버지와 동명이인이라는 사실이 주는 당황까지.

그런데 정작 침을 놓아야 하는 다리가 없으시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몇 초 정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을 지닌 환자분의 허허 너털웃음에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던 것도 같다.

그때 환자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던가.

다리가 없으면 다른 곳에 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괜찮다고. 책에서 배운 대로만 말고, 배웠던 것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은 자신을 보고 판단해보시라고. 그러면 없어 보이는 길도 보이지 않겠느냐고.

격려하는 듯한 말씀에 비로소 긴장이 풀렸던가. 당혹감에 휩싸여 굳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던가.

그때를 떠올리니 문득,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의 무수한 약재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어쩌면 내 생각이 편협했던 것일지도.'

그렇기에 지금껏 배운 대로만 긴뿌리 감초를 다루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지식과 경험으로 만들어낸 규격에 새로운 약재를 강요하듯 끼워 맞추던 건 아닐까.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를 놓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 깨달음의 끝자락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딩동!

뜻밖의 알림음이 울렸다.

뒤이어, 전혀 예상치 못한, 약재들이 건네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188화. 백일해를 극복하는 법 (3)

당황스럽다.

매우 당황스럽다.

문득, 처음 허파에게서 따봉을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홰까닥 미쳤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계속 살펴보니 아니었다. 그건 진짜 따봉이었고, 진짜 RP였다.

지금도 똑같다.

- $#^$#%...??

눈앞에 떠오르는 목소리. 아니,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글자 비스므리한 이미지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라키엘은 믿기지가 않는 심정으로 손을 들었다. 제 양쪽 볼을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찰싹찰싹!

"...."

그런데도 여전히 눈앞에 흐릿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뭔가가 자꾸만 어른거렸다. 눈에 들어간 잡티? 아니었다. 단순히 잡티가 들어간 거라면, 긴뿌리 잡초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질 때만 뭔가가 눈앞에 떠오르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라키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형상을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자 어른거리던 형상의 형태가 조금씩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ㅇㅂㅇ??]

'...이모티콘?'

도대체 왜, 긴뿌리 잡초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앞에 난데없는 이모티콘이 보이는 걸까. 이모티콘이 마치 이쪽을 향해 말을 하듯이 방긋거리고 있는 걸까.

'진맥.'

라키엘은 자신의 손목을 짚으며 스킬부터 발동했다. 이윽고 맑은 알림음과 함께 셀프 검진표가 떠올랐다.

딩동!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2세]

[신장 : 176.9 Cm]

[체중 : 59.7 Kg]

[혈액형 : Rh+ O]

오랜만에 보는 셀프 검진표가 주르륵 떠올랐다. 처음 셀프 진맥을 했던 시절보다 아주 약간은 멸치를 탈출한 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쪽의 종합소견을 재빠르게 훑었다.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열악한 약골 신체입니다. 모든 장기의 기능이 허약하며, 나약한 면역력을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순환력으로 보완하며 버텨내는 중입니다. 매우 큰 주의를 요하는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이 대량으로 증식하고 있습니다. 즉각적인 치료와 안정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

허약한 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백일해에 감염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한데 종합소견 어느 부분을 살펴보아도 헛것이 보인다는 류의 언급은 없다.

그러니까, 긴뿌리 감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모티콘이 고열이나 피로 때문에 보이는 헛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대체 왜?'

이런 게 보이는 걸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딩동!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며 답을 알려주는 메시지.

[당신은 온몸의 피로도를 갈아 넣는 수많은 노력과 실험 끝에 긴뿌리 감초가 지닌 대부분의 성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차원이 아닌, 치열한 노가다의 결과로 뼈에 새겨진 산물입니다.]

[또한, 당신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이 익힌 지식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환자와 약재의 성격에 따라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과 깨달음이 당신의 탕약 조제 스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에 새로운 옵션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약재 관심법 - 당신은 유연한 마음과 재빠른 눈치로 약재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약재는 자신이 좋아하는 재료와 섞일 때, 부작용을 줄이고 약효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

라키엘은 눈을 끔벅거렸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미쳤다고.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된다.

약초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니. 그 취향에 맞춰서 재료를 배합하면 부작용을 줄이고 약효의 시너지만 살린 탕약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니.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사기적인 능력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봐도, 부릅뜨고 봐도, 심지어 뒤꿈치로 봐도 엄연한 실화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긴뿌리 감초가 있었다.

[ㅇㅂㅇ!]

"...."

긴뿌리 감초를 시야에 담자마자 증강현실처럼 떠오르는 이모티콘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라키엘은 저 이모티콘의 생성 원리(?)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마나의 흐름이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긴뿌리 감초에 깃들어 있는 마나가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어. 그게 내가 지닌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보이는 것이고.'

경혈 스캐닝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렇게 보니 이게 마냥 허황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정기가 깃들어 있으니까. 사람이나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 또한 예외가 아니겠지.'

바로 그거다.

식물에도 마나가 깃들어 있다. 물론 이름 없는 잡초나 평범한 나무에 깃든 마나는 지극히 미약하겠지. 그러나... 긴뿌리 감초 같은 영약 등급의 식물은?

'보통의 식물보다 훨씬 고농축의 마나를 담고 있는 거야. 덕분에 이렇게 형태를 이룬 마나가 보이는 거고.'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이모티콘은 말 그대로 긴뿌리 감초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마나의 배치를 조절하며 표현하는 일종의 표정 언어였다.

'그렇다면....'

라키엘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긴뿌리 감초 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른 약재에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맥문동을 향해서였다.

그러자... 긴뿌리 감초의 이모티콘이 바뀌었다!

[(>ㅂ<)♡!!]

...좋다는 거겠지? 그럴 거야.

'그럼 맥문동은 합격. 다음은....'

긴뿌리 감초를 반하에 가까이 접근시켰다. 이번에도 이모티콘이 변했다.

[-_-]

"...."

빛의 속도로 정색하는 긴뿌리 감초. 비로소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놈 이거, 감정 표현이 아주 확실하구만?'

그래도 이렇게 확실한 편이 낫다. 호불호 테스트를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모든 약재에 긴뿌리 감초를 갖다 대었다. 그때마다 감초가 표현하는 이모티콘 표정을 보며 호불호를 파악했다.

덕분에 그는 총 12가지의 약재를 추려낼 수 있었다.

맥문동, 진피, 백출, 백복령, 소맥, 생강, 오매, 멥쌀, 황련, 갈근, 전호, 대황까지. 전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조합의 약재들이었다.

"...."

이거, 괜찮을까.

배웠던 상식과 조금 다른 조합을 보자니 잠깐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긴뿌리 감초도 내가 배운 적 없는 약재야. 그러니 내 기존의 지식에만 끼워 맞추듯이 긴뿌리 감초를 다루면 실패할 수밖에 없어.'

이미 150번 넘게 실패한 실험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굳은 마음을 먹고서 신중하게 배합의 비율을 조정했다. 약재의 투입 순서 또한 긴뿌리 감초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리고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이윽고 끓기 시작하는 맑은 물.

그 속에 미리 손질한 긴뿌리 감초 조각과 나머지 약재를 차례로 투입했다. 탕약의 색깔이 변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면밀하게 살피며 불의 세기를 조절했다. 한편으로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성공해라.'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회. 놓치기 싫었다. 해내고 싶었다. 오직 그러한 마음으로 불 앞을 지켰다. 은근한 불에 달여지는 탕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탕약을 달인다 함은, 정상인 몸 상태에서도 지극한 정성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백일해 감염 초기의 증상을 보이는 몸으로는 버티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쿨룩! 콜록!"

가까스로 억눌러놓았던 기침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 압박감까지. 그 모든 것들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온몸을 짓눌러 왔다.

그때마다 짓눌린 몸에서 쥐어짜는 듯한 기침이 새어나왔다. 고통스러웠다. 목구멍이 갈래갈래 찢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기는 싫었다.

거듭 냉수를 마셨다. 아스라한 심법을 동원했다. 몰려오는 고열과 혼미한 정신 속에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주먹으로 제 허벅다리를 두드리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버티려 애를 썼다.

그때마다 몸이 허물어졌다. 매 순간마다 눈꺼풀이 무너졌다. 일분일초마다 정신이 아득해지기를 반복했다. 만약, 오장육부의 성원이 아니었다면 진즉 쓰러졌을지도 모를 순간들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정신력과 근성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심장 : 몸뚱이? 끝까지 포기 안 하려는 거야? 진심으로? 믿어봐도 돼?]

[허파 : 허어... 파하... ㅠㅠ]

[대장 : 형님들, 우리라도 믿어보지 말입니다 ㅠㅠ]

[간장 : 으으, 힘들어 죽겠... 아니지, 이런 소리 하면 부정 탄다. 안 돼. 몸뚱이도 우리 다 같이 살아보자고 이렇게 애쓰는데.]

[위장 : 돈까스 먹자고 떼 안 쓸게. 몸뚱이 힘내라 꼭.]

[콩팥 : 그래. 우리도 응원한다고!]

[오장육부가 당신의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최후의 힘을 끌어내고 있습니다.]

[오장육부가 모두의 생존을 염원하며 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1,800]

귓가를 아스라이 매만지는 목소리들. 가슴이 뛰고, 숨결이 차오르고, 뱃속에 힘이 깃들었다.

딩동!

[응원의 효과를 체감한 오장육부가 더욱 힘을 냅니다!]

[심장 : 모두 외치자! 영차! 영차!]

[허파 : 여헝...! 프하아!]

[대장 : 우리는! 산다! 꼭! 해낸다!]

[간장 : 우리는! 반드시! 늙어서! 죽는다!]

[위장 : 오래오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콩팥 : 평범하게 주름살 생기고! 머리도 하얗게 세고!]

[심장 : 할 수 있다아아-! 우리도 늙어보자!]

[오장육부가 힘찬 함성을 내지릅니다.]

[오장육부의 마음이 당신의 전신 세포를 뒤흔듭니다.]

[오장육부가 열렬한 소망을 담아 500 HP를 추가로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300]

'...그래.'

할 수 있다.

해내고 싶다.

늙는다는 것.

누군가에겐 그저 꺼려지고 싫은 일이겠지. 하지만 죽도록 아픈 사람에겐 그것만큼 절실한 소망이 또 있을까. 평범하게 나이를 먹어가고, 늙어가고, 소박한 촛불처럼 가족의 품에서 서서히 저물며 마무리하는 인생.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언젠가 먼 훗날에 자식과 손자들을 앉혀두고서 그렇게 눈을 감고 싶다. 더 나이를 먹고 싶다. 늙어보고 싶다. 해마다 불편해지는 허리와 무릎을 두드리며 투덜거려보고 싶다.

그렇듯, 평범해보고 싶다.

'그러니까....'

모두의 진심이 담긴 응원을 받으며 끝까지 눈을 부릅떴다. 달여지는 탕약의 냄새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수십 차례씩 고개 흔들어 의식의 마지막 끈을 붙들었다. 매달렸다. 장장 다섯 시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딩동!

[새로운 탕약이 완성되었습니다.]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 조제 스킬 옵션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운명을 확인할 순간이, 다가왔다.

189화. 소중한 보상 (1)

삭풍이 분다.

불어온 삭풍이 판막을 뒤흔든다.

그 가슴 시린 떨림 속에서 심장은 고개를 들었다. 반쯤 허물어진 성벽 위에 도도히 군림한 채, 아래를 굽어보았다.

다시금 불어오는 서늘한 눈보라. 희뿌연 절망의 군대가 성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의 군세가 모든 땅을 뒤덮고 있었다. 최후의 보루인 이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마침내 생명의 마지막 조각을 침탈하기 위하여.

'그렇게 둘 수는.'

절대로 없다.

심장은 비장한 마음으로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그런 이쪽의 각오를 읽은 것일까. 지금껏 말없이 곁을 지켜왔던 부관, 허파가 헛기침을 했다.

"허픕! 흐픕!"

"아직도 숨이 차는가, 나의 부관이여."

"...허퍽! 흐퍽!"

"괜찮다. 굳이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대의 각오 또한 알고 있으니. 모든 제군이 나와 같은 심정일 터."

심장이 되뇌는 순간이었다. 백일해의 군대가 성벽에 부딪혀 왔다.

- 투쾅!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던 성문이 위태롭게 온몸을 떨었다. 심장이 외쳤다. 쏴라! 그를 따르는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승리에의 집념이자, 생존에의 굳은 항거였다.

혈투가 벌어졌다. 마침내 성문이 뚫렸다. 허물어지는 방어진의 선봉에서 심장은 격한 포효를 내질렀다. 수없이 적의 목을 베고, 머리통을 쪼개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적의 수는 너무나 많았고, 그 기세 또한 더없이 맹렬하였다.

'이제 더는....'

감당치 못하리라.

심장의 가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그때였다.

...콰아아-!

성벽 주위의 새하얀 설산 너머에서부터, 강력하고도 신비로운 물결이 성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심장도, 백일해도, 전장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태였다. 이내 심장은 깨달았다.

'지원군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탕약이 체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냉혹한 설산의 눈을 녹이고, 무너진 성벽을 타고넘어, 백일해의 군대를 급류처럼 휩쓸었다.

그 속에서 심장이 포효했다. 허파가 노호성을 내질렀다.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기사회생의 함성을 토해내며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다.

반격의 서막이었다.

'...라는 내용의 개꿈을 방금 꾼 것 같은데.'

라키엘은 실눈을 살콤 떴다. 그러자마자 눈꺼풀을 비집듯 뚫고 들어오는 햇볕. 눈이 부셨다. 대낮인 걸까. 멍한 가운데 생각했다.

'그나저나, 내가 왜 잠들어 있었지?'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에 새겨진 장소는 상단 건물의 주방이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탕약 연구에 매진했다. 어찌하다 보니 탕약 조제 스킬의 새로운 옵션을 얻었다. 약재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기이한 옵션이었다.

덕분에 긴뿌리 감초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긴뿌리 감초가 원하는 레시피를 만들고, 탕약을 달였다. 거의 5시간을 버티고, 또 버텼다. 물론 힘들었다. 백일해 감염 초기의 전형적인 증상이 팍팍 올라왔으니까. 열마저도 펄펄 끓었으니까.

솔직히 까무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끝끝내 탕약을 완전히 우려냈다. 식혔다. 그러자 탕약 조제 스킬이 셀프로 조제된 탕약을 자동으로 감지했다. 성분 분석 결과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기억이 딱 거기까지다.

"...."

설마 나는 성분 분석 결과를 보기 직전에 기절한 걸까. 아닌데. 그 후에 뭐라고 더 외친 거 같기도 한데.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게 딱히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되살리려 애쓸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이윽고 라키엘은 멍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났다. 눈을 온전히 뜰 수도 있었다. 덕분에 이쪽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과 마주치게 되었다.

"...전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응, 쟈빌론."

"전하?"

"아닌가? 우루스인가?"

"...전하."

"쩝. 농담이 안 통하는구만."

"눈을 뜨시자마자 농부터 꺼내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제야 데미안 녀석이 안심한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녀석은 줄곧 내 곁을 지켜준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지?"

데미안에게 물었다.

녀석이 표정을 가다듬었다.

"큰일이 나실 뻔했습니다. 이틀간 내내 누워만 계셨으니까 말입니다."

"...이틀이나? 내가?"

"예. 혹시 기억이 안 나십니까?"

"으음, 전혀."

"이틀 전의 그날 말입니다. 주방 문을 걸어 잠그고 안쪽에서 탕약을 달이던 전하께서 돌연 저를 소리쳐 부르셨습니다."

"...."

뭐라고 외친 거 같던 기억이 맞았구나. 그런데 그 뒤론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은 데미안의 설명을 들으며 걷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저는 이미 전하께서 격한 기침을 토하며 쓰러지시던 기척을 모두 들었습니다. 하여 전하께서 소리를 치실 때는 일찌감치 문을 단숨에 부수고 있던 때였지요. 덕분에 저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발견? 뭘?"

"전하께서 바닥에 주저앉아 거의 혼절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탕약 그릇을 들고 계시더군요. 절대로 쏟으면 안 된다는 듯이 소중하게,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얼른 뛰어가서 탕약 그릇부터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전하께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시며 당부하셨습니다. 마침내 해냈다고 말입니다."

"...해냈다고?"

"예. 마침내 만들어냈노라고, 백일해를 효과적으로 치료하고 폐부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부작용은 최소한으로 억제할 탕약이 만들어졌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뭐라고 했을까.

"당장 이 탕약을 네일라에게, 아이에게 가져가서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말까지 꺼내시고는 그대로 혼절하셨지요."

"...."

비로소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절하기 직전,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던 메시지. 탕약 조제 스킬의 결과. 새로운 탕약의 내용을 보며 느꼈던 환희까지. 그리고 심장을 비롯한 오장육부가 외치던 함성까지.

[오장육부가 당신의 성과에 감격하며 함성을 내지릅니다.]

[심장 : 우워어어어어억! 해냈다아!]

[허파 : 흐... 프흐흐흑...!]

[대장 : 형님들 저 지릴 거 같지 말입니다!]

[간장 : 아서라 남자는 함부로 우는 게 아닌 법.]

[위장 : 그런데 왜 질질 짜고 있음?]

[콩팥 : 아 우는 거 아니라고ㅋㅋㅋ 눈물샘 삑사리 난 거라고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생존의 희망을 느끼며 환호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기쁨 가득 담긴 7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000]

"...."

그랬다.

탕약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자신이 바라고 또 바라던, 이상적인 백일해 치료제 그 자체였다. 그것까지 확인을 한 뒤에 완전히 혼절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났다.

한데....

"왜 내가 멀쩡한 거지?"

라키엘은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깨어나기 직전에 꾸던 꿈이 떠올랐다. 백일해와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던 심장과 오장육부. 그러던 중에 몰려오던 지원군. 새로운 탕약이 왔다고 외치던 심장의 노호성까지.

설마 그거.

"아이에게 먹이라 했던 탕약을 나한테 먹인 건 아니겠지?"

덜컥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아닙니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전하께서 건네주신 탕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니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더군요."

"그래?"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그럼 나는 어떻게?"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탕약은 한 첩이 전부였다. 그걸 아이에게 먹였다면, 이쪽은 여전히 백일해에 시달리며 기침의 지옥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아무리 봐도 백일해에 시달리며 중태에 빠진 사람의 것이 아니다. 기침이 나오지가 않았다. 몸에 기력은 다소 없을지언정, 미열은 남았을지언정, 죽을 정도로 괴롭지도 않았다.

그 답은 데미안의 대답에 있었다.

"똑같은 탕약을 추가로 달였습니다. 마침 전하께서 연구를 진행하며 남기신 기록이 있더군요."

"...."

그랬다.

모든 실험마다 내용을 꼼꼼히 기록해두었더랬다. 마지막에 혼신의 기력으로 달였던 탕약 또한 마찬가지였다. 들어간 약재의 배합, 달이는 방법과 시간까지 모든 것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한데 단지, 그 레시피만으로 탕약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어떻게?"

"아니스 양의 활약이 컸습니다. 전하께서 달이신 탕약을 아이에게 먹인 이가 아니스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예, 맞습니다. 아니스 양은 후각이 매우 뛰어나니까요."

"아이에게 탕약을 먹이면서, 그 짧은 순간에 탕약의 냄새를 정확하게 기억해둔 건가."

"예. 덕분에 몇 번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전하의 것과 거의 똑같은 탕약을 달여낼 수 있었습니다. 그걸 전하께 먹여드렸고 말입니다."

"...."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진맥을 해보니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딩동!

[종합 소견 : 모든 항목에서 열악한 약골 신체입니다. 모든 장기의 기능이 허약하며, 나약한 면역력을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순환력으로 보완하며 버텨내는 중입니다. 최근 보르데텔라 백일해균에 감염되어 중태에 빠졌으나, 매우 적절한 치료제의 도움으로 병마의 그림자가 대부분 걷혔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신체적 후유증이 남아 있습니다. 가급적 안정을 취할 것을 강력히 권장합니다.]

진맥 결과로 뜨는 종합 소견이 알려주었다. 적절한 치료제 덕분에 백일해를 극복하고 고비를 넘겼노라고.

'그럼 아이도 비슷한 걸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키엘은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신발을 신었다.

"전하?"

데미안 녀석의 당황한 목소리. 녀석에게 쓴웃음을 돌려주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나. 환자가 있는데."

"하지만...."

"잠깐이면 돼."

그냥은 못 누워 있겠다. 그 아이는 내 환자니까.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기 전에는 불안해서 편히 쉬지를 못하겠다. 그러니까 직접 가봐야겠다.

라키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었다. 데미안 녀석의 부축에 의지하고서 방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쳐, 이쪽을 보며 놀라 인사를 올리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아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에 네일라의 처음 보는 모습이 있었다. 네일라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황량하기 짝이 없는 뒤뜰의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서.

"좀 어떠니?"

아이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지만 아이는 이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제법 야윈 옆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제대로 깨어 있는 모습은 처음이구나 싶었다. 조금은 슬픔에 젖어 있는 표정도. 이내 어색하나마 미소를 그리는 입매도. 여전히 뒤뜰만 바라보며 조곤조곤 건네어 오는 되뇜 또한, 그랬다.

"뒤뜰에서 외할아버지랑 자주 놀았어요. 저기, 저쪽에서. 외할아버지가 상단 일을 마치고 오셨을 때마다요."

"...."

이럴 때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혹여나 아이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찾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래서 아이를 달랠 말을 미리 생각해두긴 했는데.

괜찮다고. 외할아버지는 건강해진 네일라의 모습에 기뻐하실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아이의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보자니, 도저히 그런 말들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라키엘은 그저 말없이 아이의 어깨를 감쌌다. 아이도 이쪽으로 몸을 기대어 왔다. 같은 병마에 시달린 이들의 체온. 더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딩동.

이내 눈앞 가득 떠오르는 아이의 완치 알림과 보상 메시지. 그러나 이번만큼은 메시지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오후 내내 아이와 나란히 기대어 고요한 추모의 시간을 보냈다. 노을이 질 무렵, 아이가 기댄 셔츠 옷자락 한쪽이 젖어 왔다. 그때까지 아이는 눈가를 훔치지 않았다.

190화. 소중한 보상 (2)

'보상, 보상을 보자!'

밤이 깊었다. 외할아버지를 잃은 아이의 눈물을 달래어주고, 숙소로 돌아오고, 자신을 호위하는 이들마저 잠들거나 문밖으로 물러나는 시간이 왔다.

라키엘은 마침내 혼자가 되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탈압박(?)에 성공하자마자 허겁지겁 시스템 창부터 열었다.

'보상! 내 보너스 수명!'

간식을 원하며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힘차게 외쳤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태세 전환을 매우 비웃습니다.]

[심장 : 아니 아까는 보상 메시지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며?]

[허파 : 허허허... 파하하하핳... ㄹㅇㅋㅋ]

[대장 : 형님들? 새삼 느끼는 건데, 이 인간 원래부터 이랬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러게. 아까는 뭐? 아이와 나란히 기대어 추모의 시간? 뭐 이러더니ㅋㅋㅋ 앀ㅋㅋ]

[위장 : 아 요즘은 연기력이 받쳐줘야 보상도 뻥튀기가 되는 거라니까 아ㅋㅋㅋ]

[콩팥 : 인성 지렸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치졸함을 새삼 실감하며 혀를 내두릅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에게 옜다 이거나 먹어라, 라며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3,100]

"...."

뭐, 비난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아이를 달래주는 건 달래주는 거고. 보상은 또 다른 문제 아닌가? 다들 안 그래?'

라키엘은 오히려 뻔뻔하게 받아쳤다. 사실이었다. 인간적인 감동을 보듬는 일과, 실질적인 이득을 챙기는 일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니까!

'그렇다고 우는 아이 달래는 와중에 보상 메시지 흘끔거리는 것도 이상하잖냐. 어쨌건 보상 메시지!'

우기듯 외쳤다.

그제야 기다리던 보상 메시지가 툭 떠올랐다.

딩동!

[당신은 긴뿌리 감초로 새로이 개발한 탕약, '천일해소탕'을 활용하여 환자 : 네일라의 백일해 질환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병마를 극복하였으며, 향후 적절한 안정을 취할시 무난하게 건강을 되찾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본인의 위급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환자에게 탕약을 먼저 내어주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당신의 모든 수행원들, 툴룬 상단의 관계자들이 당신을 향한 진심 어린 존경과 갈채,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진료 보상에 '찬사 보너스' 효력이 추가됩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의 효과가 1.5배로 적용됩니다.]

'...이거지!'

라키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찬사 보너스. 솔직히 의도한 건 아니었다. 새로운 탕약을 개발한 직후엔 자신도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그런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그야말로 본능적으로 아이에게 먼저 탕약을 먹이라고 명령했던 거였으니까.

어쨌건 그런 행동이 모두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의 쓰나미를 일으켰을 것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여 기대했고, 과연 기대가 들어맞았다.

'후후, 흐흐흐.'

라키엘은 입꼬리 가득 사악한 미소를 진열하며 이어지는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환자 : 네일라는 '천일해소탕' 처방을 통하여 71년 5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71년 5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13.18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보상에 찬사 보너스 효력이 추가됩니다.]

[당신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수명이 1.5배 증가하였습니다.]

[총 23.732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24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351일]

'이게 보상이지. 껄껄껄.'

라키엘의 입꼬리가 귀를 넘어서 아예 관자놀이에 걸렸다. 한 큐에 무려 24일의 수명을 얻어냈다. 기대 이상의 수확이었다. 물론 라키엘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음 날, 그는 눈을 뜨자마자 오크 부족장 브라쉬를 찾아갔다.

"이봐, 족장?"

"...예, 꾸익?"

"나 보니까 뭐 생각나는 거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꾸익?"

"감초 거래!"

"...."

"설마 기억 안 나?"

"...났습니다, 꾸익!"

"쯧."

"그러잖아도 낮에 직접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제 친우의 유일한 혈육인 아이를 살려주셨는데, 제가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꾸익?"

"낮에 찾아오려고 했다고?"

"예, 꾸익."

"보통 그 정도로 감사하면 아침에 날이 밝자마자 찾아오고, 뭐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꾸익."

"어째서?"

"아침은 하체 조지는 시간입니다, 꾸익."

"...."

"아침 먹고 하체 조지고! 점심 먹고 등가슴 조지고! 저녁 먹고 또 어깨 조지고, 꾸익!"

"...."

"그렇게 아침 점심 저녁으로 3분할을 조져야 제대로 된 오크의 보람찬 하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꾸익?"

"그럼 일상생활은 언제 해?"

"방금 말씀드린 게 일상생활인데 말입니다, 꾸익?"

"...."

됐다. 말을 말자.

뭔 당연한 걸 그렇게 물어보느냐는 오크 족장의 순진무구(?)한 눈빛에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그는 족장을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뭐, 어딜 조지건 말건 그건 잘 알겠고. 어쨌건 나와 약속한 일은 기억하고 있겠지?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를 살려주면, 그 아이를 통해서 감초 거래를 재개하겠노라고. 맞지?"

"예. 맞습니다, 꾸익."

"한데 거기에 한 가지 일을 더 추가하고 싶은데."

"예에, 꾸익?"

왕방울만 한 눈을 끔벅거리는 족장. 그를 향해 라키엘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전에 족장이 말했지, 아마? 이곳 지방에선 백일해가 드물지 않은 병이라고. 이 지방의 어린아이들은 자라는 과정에서 거의 모두 한 번쯤은 백일해를 앓곤 한다고. 맞나?"

"맞습니다. 그걸 견뎌내야 강인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꾸익!"

"그래서야. 이곳에 임시 의료원을 열고 싶은데."

"...예, 꾸익?"

"아픈 아이들이 있고, 내겐 그런 아이들을 치료할 방법이 있지. 그러니 임시 의료원을 열고 아이들을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당연...한 일이라구요, 꾸익?"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치료할 탕약이 있다. 그런데 이걸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아이들은 인류의 미래이자 보배... 아니, 보너스 수명의 노다지니까!'

그러하다. 일찌감치 예상은 했지만, 네일라에게서 보너스 수명 보상을 받으며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이들은 남은 인생이 기니까. 이들을 살려주면 당연히 더 많은 보너스 수명이 정산된다. 매우 심플하고도 명확한 계산이었다.

'그러니까 모조리 살려야지!'

절대로 두고 갈 수는 없다. 땡길(?)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땡겨먹을 거다. 그러한 일념으로 라키엘은 혓바닥 가득 풀악셀을 넣었다.

"아픈 아이들이 이곳에 있다. 이곳이 비록 자치령이라 하지만 엄연한 제국의 영토이며, 그 아이들 또한 제국의 백성이고 미래가 아니겠는가."

"...."

"그런데 황태자인 내가 그런 아이들의 고통을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 어찌 그들을 저버릴 수 있을까. 하여 생각했지.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발길을 돌려선 아니 된다고."

라키엘의 진중한 목소리가 족장의 고막을 촉촉하게 적셨다. 반응은 금방 돌아왔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꾸익?"

"음?"

"당신은 진정한 군주이십니다, 꾸익!"

"...어?"

난데없는 족장의 외침에 라키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족장 브라쉬가 눈물을 잔뜩 글썽이며 이쪽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저는 감동받았습니다, 꾸익!"

"어, 그, 그래."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 헌신과 자비, 꾸익!"

"으, 응, 그거 참 좋지."

"뭐든지 믿고 따르겠습니다, 꾸익!"

"그, 그래, 고맙군."

라키엘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브라쉬의 감동받은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식으로 감격한 게 아니구나.'

고마워하는 진심이 느껴졌다. 어째서 저토록 감동받은 건지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이곳 지방의 풍토병인 백일해. 그것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이 안타깝게 사라졌을까. 족장도 그걸 이겨내야 훌륭한 어른이 된다고는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열악한 상황을 포장하는 말에 불과했던 거지. 내심 절망스럽고 개탄스러웠던 거겠지. 매년, 매달마다 아이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현실이.'

아마도 그랬으리라.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저 감내하고 있던 것이리라.

"그래. 족장이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다면 나도 고맙겠군."

도움이라면 언제든 대환영이다.

라키엘은 족장의 오해(?)를 그대로 두었다. 이쪽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면 무조건 이득이니까. 덕분에 임시 의료원이 툴룬 상단 본부에 순식간에 세워졌다. 진료를 위한 천막을 두르고, 도시 구석구석 소식을 알렸다.

제국의 황태자께서 아이들을 직접 보살피러 오셨노라고. 툴룬 상단장의 외손녀가 황태자께 진료를 받고서 병마를 훌륭히 이겨내었노라고.

소문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임시 의료원이 순식간에 북적북적해졌다. 라키엘도 덩달아 바빠졌다.

"백일해? 음, 맞군. 처방 받아가서 설명 그대로 복용하도록. 다음!"

환자의 대부분이 백일해를 앓는 어린이였다. 덕분에 진맥과 진단도 초스피드로 진행되었다. 처방 또한 대부분 동일했다. 긴뿌리 감초를 베이스로 하여 미리 대량으로 달여둔 '천일해소탕'을 지급했다.

다행히 천일해소탕에 들어가는 긴뿌리 감초의 양은 매우매우 적었다. 워낙 약성이 강력한 재료인 터라, 조금만 양이 많아도 오히려 부작용이 심해지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천일해소탕을 받아갔지만, 긴뿌리 감초의 소모량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거기에 라키엘은 아이들에게 복용시키는 탕약의 종류도 세심하게 조절했다. 천일해소탕은 성분이 너무 강력해서, 매일 복용하면 오히려 탈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첫날만 천일해소탕을, 그걸로 백일해의 증상이 누그러지는 이틀째부터는 일반적인 맥문동탕으로.'

병세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진료를 받은 아이들의 숫자가 150명이 넘었다.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지만, 매우 척박한 황무지 변경 도시의 인구를 생각하면 현재진행형으로 증상을 앓고 있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왔다고 보아야 할 숫자였다.

그다음부터는? 보너스 수명 보상 쇼타임(?)이 알차게 펼쳐졌다.

딩동! 딩동동! 딩동!

밥을 먹다가도, 탕약을 달이다가도, 심지어 잠을 자는 도중에도 쉼 없이 메시지가 와르르 떠올랐다. 누구누구네 아이가 백일해에서 완치되었다는 둥, 어디어디네 아이가 건강을 찾았다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이거, 보상이 쏟아지는 건 좋긴 한데, 좀 심하구만!'

너무 수시로 보상 메시지가 울리는 통에 잠을 설쳐야 했다. 스팸문자,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에게 전화번호가 털리면 이런 일이 생길까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키엘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당연했다.

실로 입이 쩍 벌어지는 보너스 수명을 연달아 퍼 받은 덕분이었다.

딩동! 딩동동!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282일]

무려 900일이 넘는 수명이 증가했다. 덕분에 기대수명이 3년 반을 돌파하게 됐다.

'이거, 실화냐.'

보고 또 봐도 믿기지가 않아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물론 남들에게는 3년가량이라고 해봤자 인생을 통틀어보면 크게 길지는 않은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금덩이처럼 느껴졌다.

'감개무량해지는구만.'

처음 이 몸에 들어왔던 때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랬다. 당시엔 100일도 못 사는 몸뚱이였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더 긴 인생을 이어나갈 희망을 다져두게 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봐, 족장? 혹시 말이야. 꿀 빠는 농장 비즈니스 하나쯤 맡아볼 생각 없어?"

그것은 라키엘이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다음 계획, 본격 긴뿌리 감초 농장 사업 플랜이었다.

191화. 소중한 보상 (3)

또다.

또 황태자가 뭔가를 꾸미려 한다.

'이번엔 뭘까, 대체.'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은 내심 마른침을 꿀꺼덕 삼켰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살폈다. 혹시 누군가가 자신의 기척을 감지하진 않았을까. 지금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크 족장의 감각이 예상보다 민감한 건 아닐까.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여전히 자신의 은신을 알아차린 이는 없다.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황태자의 호위인 데미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괜찮다. 오늘의 관찰 임무도 안전하다.

지붕 아래쪽에서는 여전히 황태자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봐, 족장? 혹시 말이야. 꿀 빠는 농장 비즈니스 하나쯤 맡아볼 생각 없어?"

"...."

저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3호 요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또 이곳 도시의 사람들을 위한 뭔가를 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까지 황태자가 줄곧 보인 행보를 돌이켜보자면 충분히 그럴듯했다. 황도에서 별궁 한의원을 열어서 사람들을 무상으로 치료해 주었듯이, 여기서도 임시 의료원을 열어서 아이들을 치료했으니까.

그럼에도 어떠한 대가나 보상도 챙겨 받지 않은 황태자였다. 실로 감탄이 나왔다. 자신이 관찰하는 황태자가 이런 인격자일 줄은 몰랐다. 마젠타노 황가의 역대 황족 중에 과연 저런 인물이 있었던가 싶을 지경이었다.

'가장 위대한 지배자이자 성군이라 불리는 샤를로트 여제도 저 정도는 아니셨을 거야.'

보면 볼수록 자연스럽게 존경심이 쑴펑쑴펑 솟구쳤다. 물론, 훈훈해지는 가슴과 별개로, 냉철한 머리 한쪽에서는 의아함 또한 들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태자가 예전과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심할 정도로, 극적으로.

'전엔... 시종과 시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행동일 지경이었는데 말이지.'

정말로 그랬다. 불과 1년 하고 조금 더 전까지만 해도, 황태자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골골거리던 신세였다. 그러다가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시종과 시녀들에게 끔찍할 정도로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한데 갑자기 달라졌다. 하루아침에 싹 바뀌었다.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의심이 아주 가끔씩,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과연, 같은 사람이 맞을까?'

또다.

또 이런 생각이다.

3호 요원은 내심 당황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자신은 보고 들은 것을 상부에 보고하는 사람이지, 스스로 판단을 하면 안 되는 이다. 그러니 일에 감정이나 사견을 담으면 안 된다.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도, 이성적으로 의심하는 마음도, 모두 그렇다.

그러니....

'내 걱정이나 하자, 후우.'

결혼기념일을 코앞에 두고 이렇게 장기 출장을 나오고 말았다. 출장 소식을 알리던 저녁의 와이프의 눈빛과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사실은 황태자를 관찰하여 황제한테 직통으로 보고하는 특수 정보조직의 요원이야'라고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내는 자신을 평범한 황실 말단 공무원으로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그 비밀은 무덤까지 지켜나가야 할 테지. 그러니 이번 출장이 끝나고 돌아가면 한동안 끔찍한 바가지에 시달려야 할 테지.

'어휴. 그 생각은 하지 말자.'

3호 요원은 잠시 떠오르는 비애감(?)을 털어냈다. 그리고 문득, 얼마 전에 상부로부터 입수한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앙부아즈의 반란군 사령관, 쟈빌론에 대한 소식이었다.

'그 무지막지한 작자가 기어이 마법 실험실에서 탈출했다지? 탈출에 성공하는 순간에도 '리한 군의과아아안-!'이라고 악에 받쳐서 외치며 어딘가로 달려갔다던데. 설마 여기까지 황태자를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다. 그런 일이 실현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감히 생겨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계속 임무에만 집중하자. 황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계속해서 관찰하자. 그래야 장기 출장 수당이 제대로 나올 테니까. 집에 돌아가는 날에 와이프의 바가지를 무마할, 뒤늦은 결혼기념일 선물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때였다.

황태자의 이어지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농장이냐고? 그건 바로...."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은 팝콘을 씹는 기분으로 귀를 더욱 쫑긋 기울였다.

"그건 바로...."

"바로, 꾸익?"

"긴뿌리 감초 농장이지."

뻥, 하고 터지는 팝콘처럼 휘둥그레지는 오크 족장 브라쉬의 눈매. 그 부리부리한 눈을 흡족하게 마주 보며 라키엘이 말했다.

"얼마 전에 우리가 함께 채집했던 긴뿌리 감초 있잖아. 그거, 뿌리에 잔털이 굵직하게 좀 많더라고? 당연히 그걸 헛되이 버릴 수는 없지 않겠어? 심어서 키워야지. 새 긴뿌리 감초로 자라나도록."

"하지만, 꾸익!"

"하지만 뭐?"

"잔뿌리 그거 맛있습니다, 꾸익!"

"맛있어도 안 돼."

"세상에 없는 별미라고 했습니다, 꾸익!"

"응.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럼 안 먹어도 미련 없겠지?"

"...."

"어쨌건 잔뿌리를 골라내서 심을 거야. 산삼 묘근으로 장뇌삼을 만들듯이."

"장뇌삼이... 뭡니까, 꾸익?"

"그런 게 있어. 야생에서 자라는 산삼 씨앗이나 묘근을 의도적으로 심어서 키운 거."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장뇌삼을 키우는 분들이 쓰는 방법이 그러했다. '심봤다!'를 외치며 채집한 산삼의 씨앗을, 터를 고른 산자락에 심는 분들이 제법 있었다. 터의 잡초 등등을 제거하고 정리한 후에, 산삼이 잘 자라는 적당히 그늘진 환경에서 씨앗이나 묘근을 심곤 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정성 들여 산삼을 키웠다.

"그걸 세상 사람들은 장뇌삼이라고 부르지. 실제로 산삼보다 효능이 많이 떨어지지는 않으면서, 의도적으로 양산해서 키워 팔 수 있으니 파는 쪽도 이득이 되고."

그러하다. 그것이 바로 양산화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산삼과 장뇌삼의 관계가 딱 그렇다. 혹은, 모터쇼에 출품되는 콘셉트카와 그걸 베이스로 제작되어 본격 판매되는 양산차의 경우가 그렇다.

산삼과 장뇌삼.

콘셉트카와 양산차.

그것이 바로 긴뿌리 감초를 채집하던 순간부터 떠올리고 키워온, 이번 계획의 모티브였다.

"마침 긴뿌리 감초에도 묘근으로 쓰일 잔뿌리가 많이 있으니까 그걸 키워보면 좋겠지. 가능하다면 본격적으로. 대량으로 양산을 해서, 야생종보다 생장과 발육이 더 빠르도록 키우면 더 좋을 거고."

성공만 한다면? 원래의 순수 야생종보다는 약효가 다소 떨어지지만, 일반적인 보통 감초보다는 훨씬 우월한 상위호환의 감초를 꾸준히,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별궁 한의원에서 제조되는 탕약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가 되는 셈이다.

'그럼 환자의 완치율도 올라가겠지. 천일건강탕을 만들면서 느낀 바로는 긴뿌리 감초의 가장 주요한 성분과 효능이 항균, 항생 작용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천연 항생제나 마찬가지니까.'

페니실린을 대체할 항생제의 지속적인 확보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당연했다.

인류 의학의 발전은 페니실린, 항생제의 발견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니까.

'실제 페니실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유사품 정도의 역할은 어느 정도 해줄 수 있을 거야. 그거면 돼. 그것만으로도 예전엔 못 살리던 환자를 절반 이상은 살릴 수 있을 테니.'

행복한 상상의 나래가 제멋대로 김칫국을 연달아 퍼마셨다.

한데 그때였다.

"꾸익? 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꾸익."

족장 브라쉬가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툭, 덧붙였다.

"긴뿌리 감초는 수백 년에 걸쳐서 뿌리에 양분을 저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농장에서 키워서 수확하려다간 농부들이 먼저 늙어 죽을 거 같습니다, 꾸익."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브라쉬가 걱정하는 바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농장의 장점이 무엇이겠는가.

"성장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면 돼. 토양과 온도, 영양까지 전부 딱 맞춰 주면 야생종보다 훨씬 빠르게 자랄 거야. 게다가 야생종만큼 양분이 저장되기까지 기다릴 생각도 없고. 적당히 약효를 볼 정도만 키우면 바로 수확할 거니까."

실제로 장뇌삼도 비슷했다.

원래 산삼의 씨앗은 생으로 파종을 하면 싹이 트는 데에만 무려 2년이 걸리곤 했다. 그래서 장뇌삼을 키우는 분들은 종자를 채취하는 즉시 과육을 제거하여 깨끗한 물에 씻고 정선하는 등의 '개갑'이라는 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러면 2년이고 뭐고 없이 그냥 물속에서 다이렉트로 씨앗이 발아되어 버린다. 그걸 그대로 땅에 심는 것만으로도 2년이라는 시간을 앞당겨 절약하는 셈이다.

긴뿌리 감초 재배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장뇌삼 심마니 아재들이 쓰는 방법을 응용하면 할 수 있어. 일단 긴뿌리 감초의 잔뿌리가 제법 많으니까, 그것들로 생장 실험부터 해보는 거야.'

라키엘은 확신을 품고서 족장 브라쉬를 돌아보았다.

"그러니 농장 설립, 그대에게 맡겨보고 싶은데."

"저 말입니까, 꾸익?"

"어. 내가 직접 할 수는 없잖아. 언제까지고 여기 계속 머무르지도 않을 건데."

"하지만 인간의 황태자께서는... 꾸익."

"전사로 인정받지 못했지. 알아. 그래서 사업체를 꾸리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래서 네일라를 대리인으로 내세울 거다."

"...."

"전사로 인정받은 툴룬 상단장의 혈육인 네일라라면 그대 오크들의 영역인 이곳에서 사업체를 꾸려나갈 자격이 있겠지. 그러니 그 아이를 이곳에 세울 농장의 현지 법인 대표로 내세울 거야. 어떤가.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

"이봐?"

"예, 꾸익!"

"내가 한 말을 알아는 들었나?"

"...예, 꾸익!"

"쯧. 하나도 못 알아들었구만."

"...."

"자, 그럼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지. 이제부터 잘 들어봐."

라키엘이 종이와 깃털 펜을 착착 꺼냈다. 오크 족장 브라쉬의 얼굴 가득, 미분 적분 수업을 덜컥 받게 된 유치원생의 표정이 내걸렸다.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긴뿌리 감초 농장 운영을 위한 현지 법인 설립이 추진되었다. 물론 라키엘은 복잡한 행정 서류 업무는 모조리 근위대 지휘관에게 맡겼다. 교양 넘치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졸지에 서류 더미에 파묻히게 된 근위대 지휘관이 울상이 되었다.

그 사이, 라키엘은 화분 수십 개를 놓고서 실험을 시작했다. 긴뿌리 감초의 잔뿌리를 묘근으로 삼아 화분에 심었다. 각각의 화분의 생장 조건을 모두 다르게 하였다.

10가지 종류의 토양을 수집하여 배합을 다양하게 나누었다. 투입하는 영양과 물, 일조량, 온도와 습도도 모두 다르게 하였다.

그리고 생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저 중에 빠르게 자라는 놈이 있겠지!'

...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허탕이었다.

8일이 지나는 동안, 어떤 화분의 묘근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어째서?'

당황스러웠다.

다시 실험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화분의 긴뿌리 감초 묘근이 마치 짜고서 파업이라도 한 듯, 어떤 녀석도 싹을 틔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연 라키엘의 미간 주름이 종일 힘차게 찡그려졌다.

'왜지? 뭔가 생장을 위한 특별한 영양이나 조건이 필요한 건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어떤 조건이 필요한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고민이 깊어졌다. 그 끝에 결론이 나왔다. 식물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식물 덕후는... 엘프지!'

덕후를 넘어선 광적인 식물 애호가. 마침 그런 엘프 하나가 아직 황도의 별궁에 식객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였다.

"데미안? 당장 전서구 띄워."

별궁으로 전서구를 날렸다. 실비아에게 보내는 서신을 담았다. 물론 그녀가 눈이 뒤집혀서 이곳으로 뛰어올 만한 내용을 낭낭하게 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실비아 양? 당신 나이보다 더 연식이 오래된 초 희귀 식물이 발견됐는데, 구경 한번 오실래요?

추신) 한 달 안에 안 오시면 이거 데쳐서 밥에 비벼 먹을 예정임.

...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내놓고 보니 국밥처럼 든든(?)했다. 이건 무조건 온다. 확신을 품고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며 긴뿌리 감초 생장 실험에 매진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열흘의 시간이 잘도 흘렀다. 한편으로는 임시 의료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진료했다. 풍토병이나 다름없던 백일해의 뿌리가 팍팍 뽑혀 나갔다.

덕분에 변방 도시 크라노스의 외곽에 자리한 어느 동굴에서는, 한 네크로맨서가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지는 초조함과 당혹감에 젖어들게 되었다.

"...왜? 어째서? 요즘 크라노스에서 기침병으로 죽는 사람이... 확 줄어든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192화. 망자의 속사정 (1)

"왜? 어째서? 요즘 크라노스에서 기침병으로 죽는 사람이 확 줄어든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이곳은 변방 도시 크라노스의 외곽. 드넓은 황무지 으슥한 구석에 자리한 동굴 안쪽. 그곳에서 네크로맨서, 카르투는 당혹감에 젖어 중얼거렸다.

"어째서지?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펄럭!

그는 신경질적으로 방풍의를 벗어던졌다. 오늘도 허탕이다. 벌써 열흘째다. 온 황야를 뒤졌지만, 풍장을 위해 놓인 시체를 한 구도 건지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그렇지 않나?"

그가 이를 갈며 물었다. 물론 그의 물음에 대답할 사람은 이곳 동굴에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사람은, 없었다.

"...구르륵!"

언젠가는 사람이었던 좀비들이 대답 비슷한 소리를 냈다. 배가 고픈 걸까. 혹은 지성이 사라진 채 본능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대화를 나눌 방법이 없으니까. 카르투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큰일이야. 큰일. 이대로는 안 돼. 벌써 열흘째 이러면 곤란해진다고. 알아?"

"...구륵!"

말을 걸 때마다 철장 속에서 반응하는 좀비들. 철장 하나마다 약 100구의 좀비가 닭장 속의 닭처럼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런 철장이 30개는 되었다. 물경 3천 구에 달하는 좀비의 군단. 모두가 그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카르투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3천 구? 이걸로는 부족하다. 턱도 없다. 최소한 6천 구는 모아야 한다. 그래야 대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제국의 토벌군과 겨루어볼 수 있을 테니까.'

카르투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불현듯, 십수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당시 받았던 습격. 제국 황실의 토벌군. 그것이 자신이 흑마법사로서 경험한 첫 박해였다.

그때부터였다. 스승을 잃고, 함께 배우던 동문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악착같이 신분을 숨기고서 떠돌며 살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독학으로 실력을 키웠다. 가슴속에 품은 야심도 함께 키웠다.

흑마법사가 박해받지 않는, 흑마법사에 의한, 흑마법사를 위한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사람 시체 좀 쓰는 게 어때서? 어차피 죽은 고깃덩이 아닌가? 그걸 유용하게 재활용하는 것이 흑마법의 본질인데, 그게 왜 박해를 받아야 하는 거지?'

카르투는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체는 말 그대로 시체일 뿐이다. 한때 살아서 사랑하며 웃었다 한들, 죽고 나서는 그저 한 덩어리의 썩어가는 고깃덩이가 될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그는 시체를 활용하는 흑마법에 매력을 느꼈다. 흑마법이야말로 합리적인 마법이라 여겼다. 이를 잘만 활용하면, 인간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적이고도 고질적인 문제점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체를 활용하면 된다.

모든 경작지와 일터. 심지어 전쟁터까지. 살아 있는 사람 대신에 시체를 활용하면 된다. 그러면 살아 있는 사람이 고생하며 피와 땀을 흘릴 필요가 없어진다.

시체가 해주는 일을 통해 생산되는 식량과 자원을 공평하게 배급받으면 된다. 갖가지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 필요도 없게 된다. 전쟁 또한 시체가 대신 수행할 테니까.

즉, 그가 세우고 싶은 제국은 시체의 노동력으로 굴러가는 이상적인 평등 국가였다. 그 국가의 시민이 되려면? 죽은 후에 자신의 시신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서약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살아 있는 모두가 낙원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멍청한 인간들은 기분 탓을 하며 그 합리적인 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

생각할수록 비웃음이 나왔다.

당장 눈앞에 낙원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는데.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이 있는데.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감정적인 이유로 그걸 거부하며 살아가는 우매하고 덜떨어진 인간들 같으니라고.

카르투는 그런 인간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자신이 독학으로 연마한 지식과 기술을 활용했다. 3천 구에 달하는 좀비 군단을 양성했다.

때마침 이곳, 크라노스는 좀비 군단 양성에 너무나 최적인 환경이었다. 변경 지역이기에 숨어서 세력을 키우기에 적합했다. 풍토병으로 나도는 기침병이 항상 일정량 이상의 사망자를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지방 특유의 '풍장 풍습'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덕분에 시체를 훔치기에도 너무나 편했지.'

이곳 지방의 사람들은 시신을 화장하거나 땅에 묻지 않았다. 대신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면 시신을 황야로 가져왔다. 황야의 이름 모를 벌판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바람과 새와 자연에게 시신을 돌려주는 풍장, 그것이 이곳의 전통적인 장례문화였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황야에 내려놓은 시신을 절대로 돌아보거나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유족이 시신을 보러 오면, 망자가 이승에 미련이 남는다고 여겼다. 그렇게 미련이 남은 망자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지상을 떠도는 망령이 된다고도 믿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시체를 훔치기가 너무나 편했다. 아무도 시체를 다시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마치, 자신의 좀비 군단 양성을 위해 만들어진 풍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었지. 그런데... 며칠 전부터 도통 시체가 보이질 않아.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온종일 황야를 돌아다녀도 시체를 찾을 수가 없게 됐다. 결국, 열흘 동안 건진 것이라곤 늙어서 죽은 시체 서너 구가 다였다.

처음엔 의아했다.

그냥 우연이겠거니 하고 여겼다.

한데 곱씹을수록 아닌 듯했다. 이건 뭔가 이유가 있다. 그러지 않고는 열흘이나 기침병으로 죽은 시체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

카르투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거기, 너."

그가 좀비 철장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 가장 최근에 만들어서 비교적 싱싱한(?) 좀비가 있었다.

그가 좀비를 철장 밖으로 꺼냈다. 커다란 거적과 낡은 모자를 좀비에게 씌웠다. 그러자 좀비의 몰골이 그럭저럭 집 없이 떠도는 걸인, 혹은 부랑자의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네가 나 대신 도시로 가서 눈과 귀가 되어줘야겠구나."

"...구르륵?"

카르투의 눈에 기이한 녹색의 빛이 서리는 순간, 좀비가 그의 꼭두각시로 화하였다.

"전하, 저는 안전한 상자 속에 모셔지는 꼭두각시나 장난감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데미안이 대뜸 대담한 소리를 꺼낸 것은, 긴뿌리 감초 농장의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 시내를 돌아다니던 도중이었다.

"그게 뭔 소리야."

라키엘은 마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데미안 녀석의 이쪽을 보는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작심한 듯 말했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전하. 저는 검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 검을 전하를 지켜드리기 위해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 전하의 곁에 있는 것입니다. 한데 어째서, 요즘 전하께서는 저로 하여금 전하를 지켜드릴 수 없는 곳에 놓아두려 하십니까?"

"...."

데미안의 눈길은 더없이 부리부리했다. 제대로 작정했구나 싶었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쯧. 놈이 눈치를 챘구만.'

라키엘은 내심 혀를 찼다. 녀석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야 녀석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 테니까. 녀석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끔찍한 존재가 눈을 뜨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 멸망의 위험을 맞이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녀석을 온실의 화초로 놓아두려 했다. 애초부터 녀석을 호위로 삼은 목적도 그것이었다. 황태자의 곁은 험난한 바깥세상보다 비교적 안전할 테니까 말이다.

한데 녀석이 벌써 그런 이쪽의 의도를 눈치챘다니. 이래선 곤란하다. 자칫 녀석이 불만을 품고서 사표를 던지고 휙,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묘한 위기감을 느낀 라키엘은 재빨리 대꾸했다.

"쓰읍. 내가 너를 일부러 별 볼 일 없는 곳에 박아두려 군다, 뭐 그런 불평을 하는 건가 설마?"

"불평이 아닌 항의이고, 요청입니다."

"너를 더 귀한 곳에 중요하게 써달라?"

"예, 전하."

"흐음. 착각이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예?"

흠칫하는 데미안. 녀석을 향해 준비한 대사를 뻔뻔하게 읊어주었다.

"네 임무가 뭐냐. 날 호위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만 날 지키나?"

"그건...."

"아니지?"

"...."

"근위대가 있고, 특근대도 있어. 넌 그런 특근대원 중의 한 명이고. 맞지?"

"맞...습니다."

"그런데 왜 너만 혼자 다 하려고 그러냐?"

"저만 혼자 하려는 게 아니라...."

"뭐가 아니야. 맞는데."

"...."

"나라고 내가 덜 안전해지고 싶을까? 내가 변태야?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그러니까 나는 근위대와 특근대 전체 인원의 가장 효율적인 배치와 활용을 추구하는 거야. 그 와중에 네가 잠깐 나와 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지? 맞지?"

"...예. 저기, 하지만."

"하지만 뭐?"

"얼마 전에 말입니다. 긴뿌리 감초를 채집하시다가 거대 구렁이의 습격을 받으셨을 때, 제가 전하가 계신 곳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더 큰 위험에 처하셨을 텐데요."

"아, 그건 인정. 내가 실수했던 거 맞아."

"...."

"그래서 네가 저지른 명령불복종의 책임을 묻지 않았잖아?"

"하지만!"

"또 뭐."

"이따금씩 제가,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말입니다."

"...."

어, 정답.

라키엘은 음흉한 본심을 꼭꼭 숨기며 빙긋 웃었다.

"야 부럽다. 나도 온실 속의 화초 해보고 싶은데."

"전하. 저는 진지합니다."

"알아. 나도 진지해."

라키엘은 마차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맞은편 자리 데미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호위 임무에서 배제될 때마다 느끼는 불만과 소외감, 잘 알겠다. 앞으로 참고하지. 그리고 하나 약속하지."

"약속이라니요?"

"내가 먼저 너를 저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

조금은 놀란 걸까.

아주 잠깐 녀석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내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그 잠깐의 당황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거면 됐다.

최소한 당분간은 괜찮겠지. 또 불만을 품지는 않겠지. 그러니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앞으로도 녀석이 종종 불만을 품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녀석을 위험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방법을 생각 좀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어?'

무심결에 마차 창밖을 보던 라키엘은 흠칫했다. 이상한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을 본 순간, 보여선 안 될 비정상적인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정지. 마차 세워."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미안 녀석의 물음에 긴장감이 서렸다. 대답 대신 마차에서 내렸다. 방금 본 길가의 사람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그곳에 걸인이 있었다.

전형적인 부랑자의 모습이었다. 길가 구석진 곳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었다. 몸에는 거적을 덮어썼고, 푹 눌러쓴 낡은 모자 틈새로 떡진 머리칼이 삐져나왔다. 그런 걸인의 앞에는 동전 두어 닢이 담긴 찌그러진 깡통도 놓였다.

걸인의 정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지만 라키엘은 걸인의 겉모습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걸인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하나 묻지. 내가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특이한 심법을 지니고 있어서 감지하기 싫어도 감지해 버린 건데 말이야, 그쪽...."

"...."

여전히 움츠리고 있는 걸인.

그런 걸인을 향해 라키엘은 거의 확신이 담긴 족집게 눈빛을 던졌다.

"그쪽,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

"딱 걸렸네?"

"...."

움찔!

걸인, 아니, 좀비의 어깨가 당혹감의 바운스를 찰지게 그렸다.

193화. 망자의 속사정 (2)

30분 전.

변방 도시 크라노스의 외곽. 드넓은 황무지 으슥한 구석에 자리한 동굴 안쪽에서, 네크로맨서 카르투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으으음.'

보인다.

마나의 집중과 연결. 위대한 흑마술이 선사하는 선물. 자신의 피조물과의 감각의 공유.

덕분에 그는 좀비와 완전히 감각이 연결되었다. 아까 거적과 낡은 모자를 씌워서 은신처 밖으로 내보낸 좀비였다. 온종일 크라노스로 걸어가게 하였다. 한밤의 으슥한 시간을 골라 도시로 침투시켰다.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좀비를 조종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뜸한 새벽 무렵, 광장 어름에 자리를 잡게 했다. 길가 구석에 널브러지듯 앉혔다. 도시를 둘러보는 와중에 운 좋게 챙긴 찌그러진 깡통과 동전 두 닢도 앞에 세웠다.

완벽했다.

'이건 누가 봐도 평범하고도 정석적인 걸인의 모습이야.'

카르투는 자신이 연출해낸 좀비의 모습에 크게 만족했다. 너무나 전형적인 걸인의 모습이었다. 길가 구석에 널브러지듯 앉은 자세와 각도, 성의 없게 덮어쓴 거적, 비뚤하게 푹 눌러쓴 낡은 모자까지.

심지어 이 좀비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놈이었다. 덕분에 좀비에게서 나는 특유의 지독한 시취도 거의 없었다. 물론 약간의 악취야 나긴 했지만, 그 정도 냄새쯤은 걸인의 정도를 걷는 이에겐 기본 소양이 아니겠는가.

어쨌건, 덕분에 침투를 무사히 마쳤다. 그때부터였다. 카르투는 걸인으로 위장시킨 좀비의 눈과 귀를 활짝 열었다.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 노력했다.

온갖 수다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귓가를 콕콕 찔러왔다.

누구누구네 아들이 사고를 쳤고. 그런데도 뻔뻔하게 굴어서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며 둘의 결혼을 허락하고야 말았고.

어떤 집의 암소가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아서 경사가 났고. 잔치가 열린 와중에 술에 취한 아무개가 암소 꼬리에 불을 붙이려다가 뒷발에 차였고. 결국엔 임시 의료원으로 실려가 황태자 전하께 치료를 받았고 등등.

'...황태자?'

카르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태자라니. 임시 의료원이라니. 이런 곳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단어의 조합이고, 내용이었다.

'어째서 황태자가 이런 곳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곳 크라노스는 변경 중에서도 변경이다. 얼마나 외진 곳이냐면, 아예 오크족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마젠타노 제국 황실의 간접적인 지배만을 받는 지역이란 뜻이었다.

그런 이곳에 황태자가 올 일이 있을까. 아니, 황태자는커녕 역대 황실의 어떤 황족조차도 온 적이 없는 곳이 이곳이었다.

'게다가... 임시 의료원?'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의료원이었다. 물론 소문으로야 황태자가 기괴한 취미를 지니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했다. 병원 놀이 비슷한 것을 한다고 하였던가.

'한데 그걸, 이런 변경에 와서까지? 굳이?'

혹시 미친 걸까.

그래서 기행을 벌이는 걸까.

카르투는 호기심을 느끼며 좀비와 연결된 청각에 더욱 집중했다. 덕분에 들려오는 다음 내용에 경악해야 했다.

"그래서, 그 술 취한 바보는 어떻게 됐답니까? 황태자께서 그 바보도 치료를 해주셨습니까?"

"물론이죠. 전하께서는 못 고치는 병이 없다잖아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우리 아이도 전하께서 고쳐주셨는걸요."

길가에서 청년과 아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이 물었다.

"엇, 부인의 아드님도 전하께 갔었습니까?"

"네에. 그날은 뭐랄까. 사실 저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거든요. 우리 아이 기침이 도저히 멎을 생각을 하질 않아서. 얼굴에 열꽃이 피더니 기침에 피까지 섞여 나와서."

"아드님의 상세가 많이 심각했군요. 심려가 많으셨겠습니다."

"말도 마세요. 앞이 막막했어요. 그러다가 이웃 육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죠. 빨리 아이를 업고 임시 의료원에 가보라는 이야길 말이죠."

"전하의 임시 의료원 말입니까?"

"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애를 업고 뛰어갔죠. 정말로 황태자 전하께서 계시더라구요. 덕분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선뜻 손을 내미시며 아이를 보살펴 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아드님은요?"

"나았죠. 말끔하게."

"기침병이 말입니까? 아, 저도 소문을 제법 듣긴 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접해보질 못한 터라. 대체 전하께서는 어떻게 기침병을 잡으신 겁니까?"

"물약이었어요. 숯을 탄 것처럼 시커먼 색깔의 뜨끈한 물약이요."

"물약 말입니까?"

"네에. 듣기로는 귀한 약초들이 이것저것 들어간 거라고 했는데, 그걸 직접 마셔본 아이의 말로는...."

"어땠답니까?"

"고릴라 배꼽 맛이 난다고...."

"...."

"흠흠! 어쨌건 그 약을 먹으니까 거짓말처럼 열과 기침이 잠잠해졌죠. 그 뒤로 며칠 더 약을 타와서 마셨구요."

"그럼 아이는?"

"아, 저기 오네요. 얘야! 엄마가 길에서 앞 안 보고 뛰지 말랬지!"

...라는 대화였다.

'이게 무슨.'

흑마법사 카르투는 경악했다. 방금 좀비의 귀를 통해 들은 이야기가 믿기지가 않았다. 기침병을 단숨에 가라앉히는 물약이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계속하여 들려오는 이야기는 그 물약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글쎄, 전하께서 건네주신 물약을 마셨더니...."

"아이고, 말도 마요. 용하다니까."

"다 죽어가던 아이가 지금은 쌩쌩해졌대도?"

"우리 아버님도 기운을 차리셨어요."

"그럼 이제, 기침병으로 사람 죽어나갈 일은 없어진 거로구만요?"

"어? 그런가? 그렇군, 허헛, 허허허헛!"

'....'

사실이다.

거짓이라면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저렇듯 당연하게 떠들 리가 없다. 비로소 카르투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황태자, 그놈 때문에....'

내 시체 확보에 차질이 생긴 것이었구나. 그놈이 감히 내 일에 끼어들어 기침병을 치료한 덕에 죽는 사람들이 확 줄어든 것이었구나.

카르투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잘 굴러가던 자신의 계획이 걸림돌을 만났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이런 변방에까지 황태자가 와서 훼방을 놓는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야."

카르투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니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니 걱정도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황태자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겠지.'

그럴 것이다. 길어봐야 서너 달 후면 황도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된다. 황태자가 돌아간 후에, 황태자가 운영한다는 긴뿌리 감초인지 뭔지 하는 농장을 박살 내면 된다.

그러면 다시 크라노스를 비롯한 이곳 지방에 기침병을 널리 일으킬 수 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죽어갈 것이고, 자신은 편하게 시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야.'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단지 서너 달 계획이 늦춰졌을 뿐이다. 개가 짖어도 톱니바퀴는 굴러간다. 어차피 자신의 대업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실례지만 하나 묻지. 내가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특이한 심법을 지니고 있어서 감지하기 싫어도 감지해 버린 건데 말이야, 그쪽...."

"...어?"

생각에 잠겨 있던 와중이었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걸인 좀비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어째서? 왜? 무슨 용건으로? 카르투는 흠칫 놀라며 좀비의 시야를 빌렸다.

그러자 보였다.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 편안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보이는 최상급 옷감으로 도배된 전신. 약간은 마른 체격과 얼굴, 은발의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은발 남자 주위로 늘어선 십수 명의 호위도 보였다.

그런데 호위들의 어깨에 달린 견장은....

'황실... 근위대?'

카르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순간, 좀비에게 다가온 은발 남자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져 왔다.

"그쪽,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

어떻게 알았지.

"딱 걸렸네?"

"...!"

움찔!

그냥 넘겨짚는 게 아니다. 확신을 담은 물음이다. 카르투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와 감각이 연결된 좀비도 어깨 가득 당혹감이 실린 바운스를 그렸다.

카르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들켰다!'

도망쳐야 한다.

저 황태자에게서!

'젠장, 어째서 여기에 황태자가? 게다가 어떻게 내 좀비를 알아봤지?'

그는 황급히 좀비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콰당탕!

걸인, 아니, 좀비가 당황한 몸짓으로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내심 무릎을 탁 쳤다.

'역시.'

맞다.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딱 보는 순간 쌔하게 느껴지더라고.'

조금 전이었던가. 마차를 타며 창밖을 보던 중이었다. 흘러가는 거리의 풍경 속에서 우연히, 걸인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엔 그저 평범한 걸인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어쩐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 덕분이었다.

'평소에도 기력 회복을 위해 아스라한 심법을 미약하게 계속 발동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주위의 마나 흐름을 어느 정도는 대강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고.'

마나의 흡수와 증폭, 발출에 최적화된 심법이 아스라한 심법이었다. 자연히 심법을 발동할 때면 주위 마나의 흐름에 민감해지곤 했다.

방금 전, 걸인을 볼 때가 그랬다.

걸인을 보자마자 아스라한 심법을 통해 느껴지던 수상한 마나의 흐름. 호흡의 패턴이 이상했다. 걸인의 주위를 흐르는 마나의 기운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덕분에 처음엔 특이한 병을 지닌 환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차를 세웠고, 가까이 다가갔다. 경혈 스캐닝을 켰다. 그 순간, 걸인의 몸속 마나의 흐름을 환히 비춰볼 수 있었다.

비로소 깨달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산 사람의 마나 흐름이 아니다. 저건 걸어 다니는 시체다.

즉....

'좀비라는 거지.'

...꿀꺽.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책이나 영화에선 지겹도록 본 좀비지만, 여기서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현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시신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소설 마검황 속 내용이 불현듯 떠오른 까닭이었다.

'좀비가 있다는 건, 근처에 흑마법사도 있다는 뜻이거든.'

자신이 긴뿌리 감초 농장을 설립하려는 지방에 흑마법사가 횡행한다, 라. 그건 안 될 소리였다. 자칫 공들여 추진한 사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는가.

라키엘은 재빨리 명령했다.

"데미안, 저거 생포해. 사람들이 못 알아채도록 일단 골목으로 몰아서. 안 물리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걸인 좀비가 당황해서 움찔거릴 때부터 이미 검 손잡이를 쥐고 있던 데미안과 근위대, 특근대원들이었다. 라키엘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검집 씌운 검을 들고서 나섰다.

"...크워욱!"

데미안 등의 압박에 좀비가 일어나서 뒷걸음쳤다. 데미안이 천천히 전진했다. 좀비가 더욱 뒤로 물러났다. 골목으로 내몰렸다. 마침내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데미안의 검집 씌운 검이 가볍게 움직였다.

빠악!

"구웍?"

낮게 휘둘러진 데미안의 검이 좀비의 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렸다. 그 직후, 특근대원과 근위대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넘어진 좀비의 팔다리를 꽉 붙들고서 포획했다.

"...그욱! 그웍!"

좀비가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그 서슬에 머리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낡은 모자가 벗겨졌다. 창백한 시체 특유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한데 좀비의 맨얼굴을 본 순간,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기억의 조각 하나가 의식을 푹 찔러왔다.

저 좀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언제?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날. 어디서? 상단장의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상단장의 영전에 세워진 초상화를 통해.

그러니까 저 좀비는....

"...툴룬 상단장?"

194화. 좀비도 때로는 환자가 된다 (1)

진짜다.

이건 진짜다.

아무리 봐도 그렇다.

그렇기에, 혼란스럽다.

"...자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응, 꾸익?"

복잡해진 머릿속으로 오크 족장 브라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당황한 목소리다. 그렇겠지. 이쪽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당혹감을 느끼고 있겠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족장 브라쉬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족장의 눈빛은 이쪽이 아닌, 온몸이 묶여 꿈틀거리는 좀비에게로 향해 있었다.

"말해보게, 툴룬. 내가 인정한 역전의 전사여. 어쩌다가 자네가 이런 꼴을 겪게 된 건가, 꾸익?"

떨리는 브라쉬의 말꼬리.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허망했다.

"...구르륵! 구윽!"

좀비, 아니, 한때 툴룬 상단장이라 불렸던 존재의 입에서 지성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괴성만 흘러나왔다. 눈동자는 아예 없었다. 그저 흐리멍덩한 회백색 흰자위만 번들거리며 본능적인 사나움만 내보일 뿐이었다.

라키엘은 브라쉬를 향해 물었다.

"어떤가. 그대가 아는 툴룬 상단장이 확실한가?"

"맞습니다, 꾸익."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브라쉬. 역시나. 이쪽의 눈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차라리 내 착각이기를 바랐는데.'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혹시나 해서 확인을 위해 좀비를 생포하여 숙소로 데려왔다. 족장 브라쉬와 대면시켰다. 브라쉬는 이쪽의 믿음에 정확하게 부응했다. 바라지 않던 방향으로.

"저도 믿기 싫지만 확실합니다. 툴룬 상단장이 맞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흉터가 보이십니까, 꾸익?"

브라쉬가 좀비의 오른쪽 눈가를 가리켰다. 과연 그 손길을 따라 살펴보니, 좀비의 눈가에 새겨진 푹 파인 흉터가 보였다.

"이 친구는 욕심이 많았지요. 쇠질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무리해서 무게를 치곤 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쳤는데 무리하지 말라는 주위의 만류를 무시하고서 평소보다 오히려 무거운 덤벨로 숄더 프레스를 치다가 그만 덤벨을 놓치고 말았지요, 꾸익."

"그래서 덤벨에 얼굴을 찍힌 건가?"

"아닙니다, 꾸익."

"그럼?"

"제가 깜짝 놀라서 덤벨을 받아주려고 재빨리 손을 뻗었습니다, 꾸익."

"설마 그 손에 맞은 거?"

"예, 타격감이 시원하더군요, 꾸익."

"...."

추억치곤 참 디테일하게 살벌하구만.

브라쉬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건, 그때 제 손에 얻어맞아서 터진 상처입니다. 이 좀비, 툴룬 그 친구가 확실합니다, 꾸익."

족장의 목소리는 더없는 착잡함과 충격, 회한에 젖어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이 인정하고 교분을 나누었던 친구가, 그러다가 먼저 죽은 친우가 좀비가 되어 나타났으니 정신적 충격에 휩싸일 법도 했다.

충격을 받기는 라키엘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쉬의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충격이기는 했지만.

'쯧. 이거 난리 났네.'

툴룬 상단장.

최근에 죽었던 이다. 그런 이가 좀비가 되어 도시 내부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흑마법사가 근처에 있다는 소리지.'

그는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속 설정을 따르자면, 좀비는 절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시체로 좀비를 만들어서 인형처럼 부리는 부두술, 강령술, 흑마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즉, 최근에 죽은 툴룬 상단장을 좀비로 만든 놈이 근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소리다.

'게다가 이거, 평범한 흑마법사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라키엘의 눈이 툴룬 상단장 좀비를 훑어보았다. 면면을 꼼꼼히 살펴볼수록 놀라웠다. 좀비로서의 완성도가 상당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실력이야.'

일찍이 마검황에서 언급된 바 있는, 좀비의 완성 단계들이 떠올랐다. 마검황에서는 좀비의 수준을 상, 중, 하급으로 나누었다.

가장 먼저 하급은, 좀비를 만들기는 하되, 움직임이 매우 부자연스럽다고 했다. 관절이 거의 뻣뻣하게 굳어서 절뚝절뚝 느릿느릿 기는 속도로 걷는 것이 전부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중급은, 걷거나 움직이는 몸의 동작이 자연스러워진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표정을 지을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상급은?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얼굴의 표정마저도 다양해지면서 생동감이 생겨난다고 했지. 뭐, 대체로 흉포한 표정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라키엘의 시선이 툴룬 상단장 좀비를 향했다. 브라쉬를 향해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처음 정체를 들켰을 때는 어떠했던가. 나름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일순간 내보이기도 했다.

그 뜻은 명확하다.

'상급의 좀비를 만들 정도의 실력 있는 흑마법사라는 거지. 그리고 마검황의 세계에서 지금 시기에 상급 좀비를 만들 수 있는 흑마법사는... 카르투, 그놈밖에 없어.'

소설 속 내용이 기억의 서랍에서 연달아 흘러나왔다.

카르투.

당대 최강, 최악의 흑마법사.

동시에 희대의 사이코패스.

놈은 좀비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것이 합리적인 세상이라 여기며 언데드 군단을 양성했다. 끝끝내 미드가르트 지방에서 재난을 일으켰다. 무려 도시 3개를 집어삼키며 맹위를 떨쳤다.

그것이 약 7년 후의 미래에 펼쳐질 일이다.

'쯧. 그래서 몇 년쯤 지난 뒤부터 미드가르트 지방에 신경을 쓰려고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그놈이 미드가르트와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여기서 설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처음엔 다른 놈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었다. 상급 좀비 제조술은 오직 카르투, 그놈만이 지닌 독보적인 흑마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놈이 몰래 힘을 키운 장소가 이곳 크라노스크 지방이었다는 뜻인가.'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긴. 소설에서도 그놈이 언데드 군단을 양성한 방법이나 시기, 장소는 특별히 언급된 적이 없었으니까.'

역시 소설에 나오지 않은 부분들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던 거구나. 라키엘은 새삼 이곳 세상이 마검황의 세계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한편으로는, 소설을 읽은 자신이라도 알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점을 인정했다.

'어쨌건 그렇다면 막아야지. 이건 기회니까.'

훗날의 재앙을 미리 예방할 기회다. 게다가 자신이 기대를 걸고 있는 긴뿌리 감초 농장의 평화(?)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긴뿌리 감초가 원활하게 공급되어야 별궁 한의원이 더욱 발전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라키엘이 말했다.

"어쨌건 알겠다. 이 좀비가 툴룬 상단장이 확실하다면, 근처에 토벌해야 할 흑마법사가 존재한다는 뜻이겠군."

"예. 전사들을 준비시킬까요, 꾸익?"

족장 브라쉬는 이미 대흉근을 불끈거리며 거친 콧김을 풍풍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친우를 좀비로 만들어 모욕한 흑마법사의 모가지를 당장에라도 뽑아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말고."

"예, 꾸익?"

"일단은 그 흑마법사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부터 찾아내야겠지. 놈의 흔적과 단서를 캐는 것이 우선이다. 전사들과 별개로 황도에 기별도 넣어둘 것이고."

"기별이라시면, 꾸익?"

"토벌군 요청."

라키엘이 칼로 자르듯 말했다.

"그대의 전사들이 용맹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황실에서 파견된 토벌군이 가세한다면 더욱 확실하게 흑마법사 놈의 뚝배... 아니, 머리통을 쪼개 버릴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역시! 현명하십니다! 그럼 당장 전사들을 준비시킬까요, 꾸익?"

"응? 아니, 지금은 말고. 정보 수집이 먼저라니까."

"예, 그럼 정보 수집을 위해 당장 전사들을 집합시킬까요, 꾸익!"

"...."

"저희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꾸익!"

"...어, 그래."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브라쉬의 의욕은 알겠는데, 전사들을 동원해서 황야를 헤집는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위험을 감지한 흑마법사 놈이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릴 테니까.

'게다가 놈도 자신이 들켰다는 걸 이미 알았겠지.'

분명히 그럴 것이다. 조종하던 좀비가 생포됐으니까. 아마 지금쯤 이미 꼬리를 자르고서 은신처를 옮기지 않았을까.

'그러니 무작정 황야를 수색하거나, 시체를 미끼 삼아 던져놓는 방식의 단순한 방법은 안 통할 거고.'

그럼 어떻게 놈의 정보를 캐낼 수 있을까. 놈의 은신처를 알아낼 수 있을까. 라키엘의 미간에 고민의 깊이만큼 선명한 주름이 파였다.

'차라리 저 좀비한테 물어보고 싶을 지경이구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저 상단장 좀비가 자신이 어디서 제조(?)되었는지를 스스로 술술 불어주면 참 좋겠다.

...라는 생각을 머금던 참이었다.

마치 이쪽의 생각에 화답이라도 하듯, 상단장 좀비가 격하게 몸을 뒤흔들었다.

"구워어어어억-!"

묶인 채 괴성을 지르는 좀비. 동시에 희미하고도 기이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까 처음 좀비를 발견하던 때에도 감지했던 예의 그 마나였다.

그런데....

"...."

잠깐만.

라키엘은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득이는 것을 느꼈다. 아주 잠깐,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경혈 스캐닝을 켰다. 상단장 좀비의 몸을 살폈다.

그 순간.

"...궈어어억!"

상단장 좀비가 재차 괴성을 질렀다. 동시에 또다시 감지되는 뒤틀린 마나의 흐름. 이번에는 경혈 스캐닝 덕분에 보다 상세하게 보였다.

'좀비의 신체 곳곳에... 뭔가가 새겨져 있는데?'

아주 작은 마법진?

혹은 주술의 흔적?

호박씨 크기의 마나 알맹이들이 상단장 좀비의 신체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뒤틀린 마나를 발산하고, 상단장의 죽은 육신을 강제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나의 흐름이 마치....

'경혈의 흐름 같잖아.'

너무나 흡사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경혈의 흐름. 저게 시체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죽은 이의 시신에도 조건만 맞으면 경혈의 흐름이 생겨날 수 있는 거다.

그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꼬슴아, 가시 좀."

새로운 가능성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지만. 미친 발상 같지만. 한편으로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품으며 꼬슴이표 하얀 가시를 들었다. 상단장 좀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서슴없이.

톳!

꿈틀대는 상단장 좀비의 목덜미를 찔렀다. 목덜미 옆쪽, 목빗근(sternocleidomastoid muscle) 뒤편의 오목한 자리.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천유혈(天牖穴)이었다.

"...그욱!"

시침을 하고서 경혈 스캐닝으로 반응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가시를 찌른 천유혈에서는 어떠한 마나의 흐름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라키엘은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꼬슴아, 이번엔 갈색."

"꼬슴!"

갈색 가시를 받아들었다. 또 한 번.

툿!

이번에는 귓바퀴 꼭대기 바로 위쪽의 각손혈(角孫穴)을 찔렀다. 경혈 스캐닝으로 살폈다. 역시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무얼 하시는 겁니까, 꾸익?"

브라쉬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이쪽이 난데없이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 좀비에게 시침을 시작했으니 뜨악할 법도 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대답 대신 다음 가시를 꺼냈다.

"꼬슴아, 검정색."

K맛 가시를 받아들었다. 상단장 좀비를 겨누는 라키엘의 눈빛이 번득 빛났다.

'갈색으로도 자극이 약했다면, 이건 어떨까.'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죽었음에도 경혈이 자극에 반응해 주기만 한다면. 그렇게 인위적으로 경혈의 흐름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뇌 조직에 저장된 기억의 일부를, 좀비가 된 동안에 겪은 기억의 일부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흑마법사의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무나 허황한 일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희미한 가능성이나마 확인 정도는 해보아야겠다.

톳-!

검정색 K맛 가시로 상단장 좀비의 정수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정문일침하였다.

그 순간.

"...아야!"

상단장 좀비에게서 무지성의 구웍거림이 아닌, 모처럼의 인간다운(?) 반응이 터져 나왔다.

195화. 좀비도 때로는 환자가 된다 (2)

"...아얏!"

이곳은 크라노스크 지방과 멀리 떨어진 황도 마젠타. 2황자궁 연무장에서 누군가의 놀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따라오는 타박도 함께였다.

"이게 아픈가?"

"아, 으읏, 네."

"쓰읍. 이 정도로 아프면 안 되는데."

"...."

"원래 인간이라는 족속은 이렇게 나약한 건가?"

"...."

마젠타노 황실의 2황자,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방금 태연하게 인류를 디스(?)한 엘프 여인을 향해 열심히 항변했다.

"하지만 실비아님? 이건 인간이 아니라 누구라도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너 같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나 그런 거겠지."

"저, 성인입니다."

"나한텐 핏덩이인데?"

"...."

"알겠으니까 다시 손 내밀어봐."

테오도르는 뭐라고 더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 항변의 멘트들은 끝끝내 입속에서만 소리 없는 웅얼거림으로 스러지고 말았다. 대신 그는 엘프 여인의 말에 따라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말입니까?"

"그래. 일단 자세는 안정적이군.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기본기가 제법 탄탄하단 말이지."

"가, 감사합니다."

"칭찬 아닌데. 기본기 빼고는 아무것도 볼 것 없이 형편없다는 뜻인데."

"...그 정도입니까?"

"당연하지. 이렇게."

"...!"

타닷!

느긋하게 대꾸하던 실비아의 모습이 일순간 흐릿해졌다. 테오도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엘프 여인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자신의 품속을 파고들었음을. 자신이 내밀고 있던 팔을 붙잡아 낚아채고 있음을.

"크읏!"

넋 놓고 있다가는 당한다. 그의 눈동자에 위기감이 서렸다. 또 아까처럼 형편없이 업어치기에 당해서 나가떨어질 수는 없다.

'그럼... 나는 이렇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가슴 쪽으로 확 달라붙어 오는 엘프 여인의 어깨를 밀었다. 반 뼘. 그녀와 자신 사이에 반 뼘의 공간만 만들어두면 된다. 그러면 그녀가 반동이나 탄력을 이용해서 자신을 업어칠 수 없을 테니까!

...라는 생각은 그만의 판타지 속 망상이 되고야 말았다.

터억!

"어?"

두 발이 공중으로 붕 떴다.

몸이 허공에서 거꾸로 뒤집혔다.

이윽고 다가오는 추락의 순간.

머리가 땅에 부딪히기 직전.

터턱!

엘프 여인의 손길이 다가와 뒷목을 받쳐주었다. 덕분에 허겁지겁 낙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뒤이어 둔탁한 충격이 어깨와 등판을 때려왔다.

쿠웅!

"...그읏!"

낙법을 썼음에도 모래밭에 메다꽂히는 순간은 아프다. 숨이 턱 막힌다. 게다가 이번에는....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형편없이 당한 주제에."

"...!"

이쪽을 넘어뜨린 엘프 여인이 가슴 위로 올라타 왔다. 어깨에 관절기를 걸어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체중과 체취가 확 끼쳐왔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자, 잠깐만...."

"실전엔 잠깐이 없는 법이란다, 애송이."

꽈득!

"...걱!"

어깨가 반쯤 돌아가려다가 말았다. 그제야 테오도르는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를 못했다.

"뭐야. 왜 그래. 많이 아팠어?"

"...."

"고개 좀 들어보지?"

"그, 으음, 그게...."

"그게 뭐?"

"아닙니다."

테오도르의 고개가 더욱 깊이 숙여졌다. 차마 얼굴을 들지를 못하겠다. 한데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다.

'왜 얼굴이 계속 화끈거리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오로지 얼굴에만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한편으로는 방금 겪은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신의 품속으로 파고들던 실비아의 얼굴. 그 순간 볼을 스치던 그녀의 머릿결. 짧은 틈새에 벌어진 포지션 공방전. 몸에 와 닿던 감촉들.

'...이건 패배 때문에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야. 분명 그런 거다.'

그러니 더 성장해야 한다.

더 실력을 키워야 한다.

기본적인 맨몸을 쓰는 법에서부터 보법, 다음에는 검술까지. 조금이라도 형님과 황실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역량을 키워야 한다.

"죄송합니다. 잠시 집중력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부탁드립니다."

테오도르는 각오를 다지듯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런 그의 전신은 온통 흙투성이 땀투성이였다. 이내 그의 눈빛 속에 배어 있던 잡념이 사라져 갔다. 실비아의 눈동자에도 사납고도 흐뭇한 기세가 피어났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 줘야 나도 덜 심심하지."

"그읏!"

2황자궁의 연무장에서 젊은 2황자와 노련한 엘프 집행자가 다시금 어우러졌다. 그런 둘을 향해, 머나먼 서북방에서부터 출발한 황태자의 전서구가 날아들고 있었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2황자의 곡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아야!"

이곳은 황도 마젠타와 멀리 떨어진 크라노스크 지방. 툴룬 상단본부 건물 한쪽에서 누군가의 기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따라오는 놀란 외침도 함께였다.

"헛? 정말... 아파하는 건가?"

"그아악!"

"쓰읍. 이거 진짜 같은데."

"거억!"

"원래 좀비라는 게, 아파서 엄살을 부릴 수도 있는 건가?"

"...긔이입!"

마젠타노 황실의 황태자, 라키엘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방금 애절하게 고통을 표현한 상단장 좀비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진짜로 아파하는 거 같은데?'

혹시나 하는 가능성을 느꼈던 자신이었다. 애초부터 흑마법사의 흑마술에 의해 움직이는 상단장 좀비였다. 덕분에 뒤틀린 종류의 마나가 상단장 좀비의 전신에 미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본 순간 혹시나 싶었다.

흑마술에 의해 흐르는 마나도 결국엔 경혈을 흐르는 마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였다. 침술을 활용해서 저 흑마술 마나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시로 찔러보았다.

처음엔 하얀 가시. 다음엔 따끔한 갈색 가시.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너무 순한(?) 맛이라서 그런가 싶었다. 하여 작정하고 검정색 K맛 가시를 정수리에 찔러본 건데....

"...으아악! 그와악!"

좀비가 온몸을 뒤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온몸을 꽁꽁 묶은 밧줄을 모조리 풀어내고 이쪽에게 항의하며 싸다구라도 날릴 기세였다.

즉, 좀비는 진짜로 '아파하고' 있다.

라키엘은 그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K맛 가시가 죽을 정도로 아파서, 죽은 좀비까지도 아파하고 있는 거구만!'

바로 그러했다.

따로 복잡한 이유가 없었다.

진짜로 죽을 만큼 아파서. 죽도록 아파서. 죽은 사람마저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게 만드는 K맛 가시의 위용!

하지만 라키엘은 섣불리 단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다른 원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확인해보자.'

그는 새로운 검정색 가시를 들었다. 겨누었다. 상단장 좀비의 위팔 앞쪽의 천천혈(天泉穴)을 향해 가시를 겨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묘하게도, 아직 가시를 찌르지도 않았는데도 상단장 좀비가 반응을 보였다.

움찔!

다가올 거대하고 파멸적인 죽빵(?)을 예감한 듯, 검정색 가시를 보자마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어깨를 움츠리며 엄살을 부리는 좀비!

하지만 라키엘에겐 피도 눈물도 자비도 없었다.

톳!

좀비의 팔뚝을 야물딱지게 파고든 K맛 가시!

역시나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으아아악! 젠자앙-!"

혹시 좀비한테 쌍욕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제는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비로소 라키엘은 확신했다.

'이거 실화네.'

진짜다.

아무리 좀비라고 해도 검정색 K맛 가시에는 반응을 한다. 고통이라는 감각을 느끼고, 본능적인 것이라 할지언정 리액션을 보인다.

체내의 반응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혈 스캐닝을 통해 훤히 보였다.

가시를 찌르자마자 찔린 부위를 중심으로 경혈이 크게 요동쳤다. 마치 물을 담은 대야에 커다란 돌을 던진 듯, 경혈 속의 마나가 출렁거렸다. 출렁이던 마나 일부가 대야 밖으로 넘치듯 흘러나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나의 흐름이 주위로 살짝 번지다가 사라졌다.

경맥이 움직이고 기혈이 흐른 것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미친. 이게 되네.'

라키엘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기혈이 움직였다는 말은? 조금만 더 섬세하게, 정확하게 침술을 구사하면 좀비의 몸속 기혈 전체를 의도적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데미안? 이 사람... 아니, 좀비 좀 꽉 붙잡아."

"예?"

라키엘이 명령했다.

데미안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은 그렇지 않아도 눈앞에서 벌어지던 상황에 내심 뜨악하던 데미안이었다. 황태자가 난데없이 좀비에게 시침을 하다니. 그런데 좀비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다니.

'이게 가능한 건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그렇다.

애초에 좀비는 죽은 사람이니까. 말 그대로 시체니까. 어떠한 감각도, 감정의 조각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좀비가 아닌가 말이다.

사실 그것이 좀비의 가장 두렵고도 강력한 점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치고 때려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 설령 머리가 부서져도 스멀스멀 다가오는 상대. 실제로 그런 상대와 싸운다는 상상을 해보면... 절로 소름이 돋지 않겠는가.

상단장 좀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런데 아니다. 황태자가 가시를 꽂자마자 아파서 엉엉 울 듯이 비명을 질러댄다.

'좀비가... 맞나?'

싶을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데 이제는 더 나아가 황태자가 아예 팔뚝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다. 심지어 좀비를 꽉 붙잡으란다.

"설마 시침을 하시려는 겁니까? 환자에게 하듯이요?"

"어. 정답."

라키엘의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데미안에게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이야 우리 데미안. 날 제법 따라다니더니 이제는 치료 절차도 좌악 꿰게 됐네? 매우 좋아. 긍정적이고 훌륭한 방향으로의 발전이야."

"...."

이게 긍정적인 발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 당신이 뭘 하려는 건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데미안은 스멀스멀 피어나는 의문에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황태자의 명령은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상단장 좀비가 몸부림치지 못하도록 꽉 붙잡았다. 눈치를 살피던 특근대원 서넛이 더 나섰다. 그러한 특근대 프레스(?) 덕분에 상단장 좀비는 안면근육 빼고는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좋아. 아주 좋아."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제대로 작정한 그는 꼬슴이에게서 검정색 K맛 가시를 아예 수십 줄기나 받아냈다.

"그럼 이제부터, 좀비의 지성을 잠깐이나마 되살려서 흑마법사의 소굴을 알아내보자고."

톳!

그렇게, 악독한 흑마법사마저도 진심을 담아 엄마 없냐고 외칠 법한, 라키엘의 잔혹무도(?)한 흑마술 뒤틀기 시침 시술이 시작되었다.

196화. 좀비도 때로는 환자가 된다 (3)

톳!

"...으아아악!"

토옷!

"그긔읽잇잉!"

라키엘의 검정색 K맛 가시가 춤을 추었다. 상단장 좀비의 몸 곳곳에 살포시 박혀들었다. 그때마다 상단장 좀비가 따끔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트위스트를 추...려다가 실패했다. 좀비의 온몸을 꽉 붙잡은 데미안과 특근대 프레스(?) 덕분이었다.

"더 꽉 좀 붙잡아. 흔들린다."

"예엡!"

"으아압!"

라키엘의 명령에 특근대가 더욱 분발했다. 덕분에 온몸의 지방자치 근육을 활성화시키려던 상단장 좀비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라키엘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그는 경혈 스캐닝을 통해 상단장 좀비의 경혈 움직임을 세세히 관찰하였다.

검정색 K맛 가시에 자극을 받은 경혈에서 마나가 미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원래는 죽은 이의 몸이기에, 존재할 수 없는 마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흑마술사가 시신을 좀비로 만드는 과정에서 곳곳에 심어둔 흑마술 덕분이었다.

'신체 구석구석 흑마술이 새겨져 있어. 이게 마치 생체 배터리처럼 자체적으로 미약한 마나를 생성하고 있고.'

그 마나가 전신을 흐르며 죽은 시체를 움직이게 해주고 있다. 즉, 몸에 새겨진 흑마술이 좀비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 생체 배터리가 되어 주는 셈이었다.

그래서였다.

'저 마나의 흐름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뒤틀어 보면 어떨까. 예를 들자면... 좀비의 중추신경이 살아나고 뇌 활동이 재개되는 방향으로.'

할 수 있을 듯했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어쩌면, 좀비가 지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약간이나마 생전과 사후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걸 말해줄 수도 있으리라.

그러면 된다.

좀비의 단편적인 기억으로나마 흑마술사의 단서를 얻을 테니까. 흑마술사가 좀비를 제작한 과정, 목적, 어쩌면 소굴의 위치까지도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박이지. 안 그렇습니까?'

그는 상단장 좀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비답지 않게(?) 창백해져 있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식은땀도 약간씩 흘리고 있었다. 검정색 K맛 가시가 진짜 아프긴 아픈가 보다.

'하긴. 그 고통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라키엘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배어났다. 그놈의 웬수 같은 '8282 모드'를 사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검정색 K맛 가시를 셀프로 허벅지에 꽂아넣어야 했던가. 새삼 비분강개의 심정이 쑴펑쑴펑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라키엘은 첫 정식 시침 자리를 신중하게 골랐다.

'오늘의 환자는 좀비. 이성과 지성을 모두 잃은 심신상실 상태. 즉, 이건 일종의 극심한 광증(狂症)으로 보는 것이 옳겠지. 그렇다면....'

광증을 치료할 때는 어떤 부위에 시침을 하면 좋을까.

'시침 시뮬레이션.'

딩동!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침술 스킬의 옵션을 불러왔다. 상단장 좀비의 경혈 스캐닝 데이터를 불러왔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① : 시침 시뮬레이션의 발동에 실패하였습니다.]

[시침 시뮬레이션은 대상이 살아 있는 '생명체'일 때에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안 되는구나.

그럼 어쩔 수가 없겠다.

'상단장, 당신이 고생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시뮬레이션 없이 상세를 실시간으로 봐가면서 생으로 찌르는 수밖에 없겠다. 상단장 좀비를 바라보는 라키엘의 눈빛에 약간의 미안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법.

'첫 시침 자리는 기해혈(氣海穴).'

라키엘이 지식의 서랍을 뒤적인 끝에 정한 시침의 첫 폭격(?) 지점은 기해혈이었다. 대저, 기해란 임맥의 혈자리 중의 하나이며, 외부의 기를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다는 뜻에서 기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리였다.

'다른 말로는 흔히 단전(丹田)이라고도 말하지.'

즉, 인체의 기가 호흡과 함께 들고 나는 부위다. 특히 기해를 통하여 인체를 드나드는 기에는 원기(元氣)와 종기(宗氣), 위기(衛氣)와 영기(營氣)가 있는바, 기해는 이러한 모든 기가 어우러지며 인체를 두드리는 대문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무변무제(無邊無際)하게 드넓고, 때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지. 그만큼 많은 기를 담을 수 있는 자리이고, 생명을 가장 먼저 좌우하는 주요 기혈 중의 하나야.'

그러니 뒤틀린 흑마술에 의해 움직이는 좀비를 고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해혈부터 다스림이 급선무라고 라키엘은 판단하였다.

'그만큼 신중하게.'

키이잉-!

라키엘이 눈에 힘을 주었다.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이는 상단장 좀비의 기해혈 부위를 더욱 확대해서 살폈다. 그러자 기해혈에 깃든 흑마술의 조각이 보였다. 작은 구슬 모양의 뒤틀린 마나 덩어리가 울컥, 울컥, 어둡고 음습한 성질의 마나를 배출하고 있었다.

'진단 완료.'

상단장 좀비의 기해혈에는 오로지 극단적인 음허(陰)의 성질을 지닌 마나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옛말에 따르자면, 인체는 독양불장(獨陽不長)에 고음불생(孤陰不生)하다는 말이 있다. 해석하자면, 사람은 양기만으로는 생장하지 못하고, 음기만으로는 생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일단은 기해혈의 수화음양(水火陰陽), 음기와 양기의 밸런스 패치부터 해볼까.'

라키엘은 검정색 K맛 가시를 들었다. 상단장 좀비의 상의를 훌러덩 깠(?)다. 기해혈, 단전 부위의 생기 없는 피부에 서슴없이 가시를 꽂았다.

역시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으워아앙악!"

가시가 꽂히자마자 새끼 발가락으로 문지방에 싸커킥을 날린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는 상단장 좀비!

그러나 라키엘은 그런 리액션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시침한 기해혈의 반응을 관찰했다. 이내 깨달았다.

'된다!'

아까 검정색 가시를 찌른 다른 경혈처럼, 기해혈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기해혈에 뭉쳐 있던 음습하고 뒤틀린 흑마술의 마나가 풍덩, 바위가 던져진 우물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즉, 빈틈이 생겨났다.

아주 잠깐의 흔들림과 빈틈.

라키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시 백회혈과 임맥 세트 메뉴로!'

톳! 토독! 톡! 톳!

아예 3, 3, 7 박수 리듬으로 연달아 파파팍 꽂히는 검정색 K맛 가시의 폭격!

"...끱!"

정수리의 백회혈에 꽂힌 가시가 외부의 정상적인 마나가 들어오는 통로를 열어젖혔다. 앞쪽 목덜미, 턱과 목이 접히며 만나는 지점의 염천혈(廉泉穴)이 정상적인 마나를 미사일 배송하듯 아래로 쭈욱 당겼다.

앞가슴의 단중혈(膻中穴), 옥당혈(玉堂穴), 구미혈(鳩尾穴)에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검정색 K맛 가시의 인도를 받은 정상적인 마나가 명치 어름의 중정혈(中庭穴)을 지나쳐 배꼽 아래의 음교혈(陰交穴)을 무정차로 통과했다.

그리고 바로 아래의 신궐혈(神闕穴)을 하이패스로 뚫어 버리고는 기해혈, 단전에 내리꽂혔다.

...투쾅!

소리 없는 폭발.

사나운 어우러짐.

흑마술의 음습하고 뒤틀린 마나가 잠시 흔들렸던 기해혈에, 라키엘이 백회혈에서부터 끌어당겨 온 정상적인 마나가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뒤섞였다.

음습하게 뒤틀린 마나.

팔팔하게 올곧은 마나.

두 상반된 기운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서로를 찌르고, 베고, 찍었다. 그걸 감지한 순간, 라키엘의 손이 또 자비 없이 움직였다.

'마무리는 관원혈(關元穴)!'

빛의 속도로 공간을 돌파한 검정색 K맛 가시가 기해혈에서 정중앙 아래쪽에 있는 혈자리, 관원혈에 정통으로 꽂혔다.

토옷-!

"...끄아아아아↗ 뿌다아아아알갸아-!"

관원혈은 임맥에 위치해 있으며, 동시에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의 모혈(募穴)이기도 했다. 또한,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과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이 모두 교차하는 교회혈(交會穴)이었다.

즉, 인체를 순환하는 주요 경맥들이 서로 얽히는 일종의 로터리, 교차로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관원혈은 그냥 평범한 사거리도 아니지. 거의 육망성 교차로 급이거든!'

그만큼 많은 혈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 관원혈이었다. 그런 곳에, 벙커버스터에 버금가는 검정색 K맛 가시가 정통으로 꽂혔다.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앞서 기해혈에서 뒤섞이던 두 가지 상반된 성격의 마나가 관원혈로 확 당겨지듯 몰려왔다. 교차로에 진입했다.

그 순간, 라키엘이 데미안에게 외쳤다.

"발바닥 보이게 다리 들어!"

"...!"

데미안이 상단장 좀비의 왼쪽 다리를 확 들어 올렸다. 발을 감싸고 있는 넝마에 가까운 양말을 벗겼다. 야들야들한 좀비 발바닥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키엘의 검정색 K맛 가시는 사냥감(?)의 상태를 가리지 않았다.

토오옷-!

인체의 360개 혈자리 중에서 유일하게 발바닥에 자리한 경혈, 용천혈(湧泉穴). 상단장 좀비의 여리디여린 발바닥 중앙에 검정색 K맛 가시가 깊숙이 꽂혔다.

사실 그냥 평범한 가시로 찔러도 아픈 곳이었다. 심지어 고양이 털이 꽂혀도 아픈 곳이었다. 그런 곳에 동양의학의 정수(?)를 담은 전술핵을 피도, 눈물도, 자비도, 망설임도 없이 크리티컬로 찔렀다.

이번엔 상단장 좀비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본디 비명이라는 것도 적당히 아파야 나오는 것이 세상의 진리. 상단장 좀비 또한 그러한 사람의 법도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웃었다.

"...끄으아학학핳ㅎㅎ핳핫학!"

사람이 너무 아파서 정신이 나가면 오히려 광소를 터뜨리고는 한다. 지금 상단장 좀비가 그러했다. 동시에 검정색 K맛 가시가 꽂힌 용천혈이, 자신의 잠재력(?)을 풀코스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인체 경혈의 커다란 교차로인 관원혈에 모여든 뒤섞인 마나가 신체 가장 아래쪽의 용천혈로 확 내려갔다.

흔히 의사들이 말하기를 발바닥에 달린 2번째 심장이라는 부위! 그곳 발바닥에 마나가 확 몰리자마자 라키엘이 검정색 K맛 가시를 쑥 뽑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풀스윙 싸대기를 날렸다.

"기야 팍팍! 돌아라!"

철썩-! 철써덕!

자고로 고장난 가전제품은 때려야 고쳐지는 법. 좀비도 마찬가지였다. 발바닥의 용천혈에 응축된 마나가 라키엘의 타격에 의해 제2의 심장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즉, 저장한 마나를 전신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마침내....

"...그, 그만! 그마안!"

상단장 좀비가 빌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렸다. 희뿌연 흰자위만 가득하던 눈에 서서히, 까만 눈동자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불현듯 울리는 맑은 알림음.

이윽고,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 가득 떠올랐다.

[당신은 풍부한 지식과 현장 경험, 번득이는 판단력과 직감을 통하여 좀비에게 시침 시술을 성공하는 전무후무한 미친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당신의 시침 덕분에 좀비 : 툴룬의 신체에 새겨져 있던 흑마술의 기능이 변화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좀비 : 툴룬은 잠시나마 흑마술사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 좀비의 신체를 지니고서 이성과 지성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좀비 : 툴론에게 새겨둔 흑마술의 힘이 강대하여, 좀비 : 툴룬이 이성과 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을 것입니다.]

[좀비 : 툴룬에게 남은 지성 발현 시간 - 5초]

"...."

5초?

장난해?

라키엘이 잃어버린 어처구니를 찾으려 투덜거리려던 때였다.

딩동!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그리고....

[그러나 당신에게는 좀비 : 툴룬의 지성 발현 시간을 비약적으로 늘릴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은 좀비에게 시침 시술을 성공시키는 미친 종류의 업적을 이룩하였으며, 이에 따라 침술 스킬의 새로운 옵션을 개방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② : 정신이 번쩍 - 당신은 특정한 조건을 갖춘 좀비에게 시침을 하여, 좀비의 신체에 새겨진 흑마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시술을 받는 좀비는 생전과 사후의 기억을 모두 보존한 채로 영구히 이성과 지성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옵션 발동 조건 1. 흑마술사에 의해 제조된 좀비일 것. / 2. 사망 시점으로부터 49일이 지나지 않은 좀비일 것.]

[주의사항 : 이 옵션은 하늘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술이므로, 시전자의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바치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197화. 정신이 번쩍 (1)

"...."

미쳤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이게 말이 돼?'

라키엘은 경악으로 벌어진 눈꺼풀을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파르르 떨며 눈길을 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메시지를 꼼꼼하게 훑었다.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② : 정신이 번쩍 - 당신은 특정한 조건을 갖춘 좀비에게 시침을 하여, 좀비의 신체에 새겨진 흑마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시술을 받는 좀비는 생전의 기억을 모두 보존한 채로 이성과 지성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옵션 발동 조건 1. 흑마술에 의해 제조된 좀비일 것. / 2. 사망 시점으로부터 49일이 지나지 않은 좀비일 것.]

"...."

좀비를 지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단다. 몸만 좀비지, 그냥 아예 살아 있던 때로 부활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다.

'이건 무슨 드래x볼도 아니고.'

문득, 어릴 때 봤던 만화책이 떠올랐다. 구슬을 모아서 죽을 사람을 살리는 내용이 있던가. 그런데 자신이 침술로 그런 짓(?)을 비슷하게나마 저지를 수 있게 됐다니. 일단 잘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옵션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가... 너무 엄청났다.

[주의사항 : 이 옵션은 하늘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술이므로, 시전자의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바치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꿀꺽.

라키엘의 목울대가 트월킹을 추며 흔들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을 100일이나 바쳐야 한단다.

그 안내문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감정은, 격렬한 거부감이었다.

'내가 미쳤어?'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람을 완전히 살리는 일도 아니고, 그저 좀비의 이성을 일깨우는 일에 이쪽의 기대수명을 100일이나 바쳐야 한단다. 생각만 해도 사촌이 강남 한강 뷰 아파트 30채를 사들였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이나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모은 보너스 수명인데!'

상상의 끝자락에 발가락만 콕 찍먹(?)해봐도 억울했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던 때가 떠올랐다. 기대수명이 100일도 안 남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왔다. 설명을 하자면 A4 용지 100장이 있어도 모자랄 장대하고 버라이어티한 개고생을 헤쳐왔다. 그 끝에 마침내 예상 기대수명 1,200일을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얼마나 뿌듯했던가.

요즘은 자다가도 문득 깨어나서 일부러 시스템창을 열어 보곤 했다. 3년 넘게 쌓인 기대수명을 볼 때마다 빈속인데 배가 불렀다. 마치 통장에 10억쯤 꽂혀 있는 잔고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100일이나 뭉텅 잘라줘야 한단다. 고작 좀비의 기억과 이성을 살리기 위해서!

"...."

진짜 싫은데.

라키엘은 무의식중에 한 발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에, 검정색 K맛 가시 시침을 받으며 잠깐 제정신(?)이 돌아오려던 상단장 좀비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쿠워어억! 구워억!"

흐릿하게나마 생겨나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이내 희뿌연 흰자위만 남았다. 사람다운 표정이 사라지고, 온통 흉포한 흉성만이 남아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다시금 맹렬한 고민이 전두엽을 들쑤셔 왔다.

"하아."

미치겠다.

감정으로만 따지면 진짜로 안 내킨다. 피와 살보다 더 소중한 보너스 수명을 내어주는 게 너무나 싫다.

반면, 이성적으로 계산하자면?

'이 옵션, 사용해야 해.'

애초에 자신이 제일 먼저 엿본 가능성이었다. 흑마법사가 좀비의 신체에 심어둔 흑마술의 마나.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신경계를 활성화시킬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최소한 아주 약간의 기억이나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시도했다.

한데, 너무 심하게 성공하고 말았다.

일부 단서나 기억을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좀비 하나를 완전한 지성체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됐다. 그것 자체만 따지면 정말로 잘된 일이다. 일이 너무나 잘 풀렸다.

"...."

수명 100일을 포기하고 흑마법사의 단서를 보따리째로 얻을 것인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민 끝에 오장육부를 향해 물었다.

'후우. 이거 진짜 모르겠어서 그러는 건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반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질문에 앞다투어 대답합니다.]

[심장 : 좀비를 살려? 당연히 질러야지!]

[허파 : 허? 파하학?]

[대장 : 심장 형님? 이 새ㄲ... 아니, 허파 형님이 웃는데요?]

[간장 : 냅둬ㅋ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보지.]

[위장 : 근데 나도 허파랑 똑같이 반댄데? 우리 소중한 수명을 왜 100일이나 내주면서 맛있는 거 더 많이 먹을 기회를 날려야 함?]

[콩팥 : 나도 더 오래 살아서 오줌 많이 만들 거야!]

[오장육부의 의견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쫙 갈렸습니다.]

[오장육부가 격렬한 의견대립을 겪으며 찬성파와 반대파의 내전에 돌입합니다!]

"...."

괜히 물어봤다.

라키엘은 가슴 깊이 후회했다. 한편으로는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휴. 내 팔자야.'

여기까지 왔는데 안 지를 수가 없다. 제국의 앞날에 분탕을 쳐댈 흑마법사의 싹을 미리 자를 기회를 잡았는데, 이걸 그냥 놓을 수는 없겠다. 게다가....

'흑마법사 그놈이 이곳 지방에서 계속 힘을 키우면서 기생하면... 내 긴뿌리 감초 농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거잖아?'

만약, 여기서 그놈을 모른 척하고 방치하면 펼쳐질 시나리오가 술술 떠올랐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미래였다.

'아마도 그놈은 이곳 지방에 백일해가 다시금 좌악 퍼지길 바라겠지. 그래야 시체를 쉽게 확보하고, 좀비 군단의 숫자를 편하게 늘릴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긴뿌리 감초라는 존재 자체가 놈에게 엄청난 방해물로 여겨질 거야.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겠지. 없애고 싶겠지. 아마도 내가 황도로 돌아가면 놈의 첫 번째 타겟이 긴뿌리 감초 농장이 될 거고.'

긴뿌리 감초는 자신이 개발한 백일해 치료 탕약, '천일건강탕'의 핵심 약재였다.

그러니 백일해가 다시 퍼지길 바라는 놈에게는 긴뿌리 감초가 가장 거슬리는 걸림돌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였다.

이제는 놈을 놓아둘 수가 없게 됐다. 긴뿌리 감초 농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놈을 먼저 쳐야 한다.

'내... 보너스 수명....'

라키엘은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이유 참. 좋은 날이구만. 좋은 날이야.'

끝내 결심했다.

옵션창을 켰다.

딩동!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② : <정신이 번쩍> 사용 여부를 선택합니다.]

[주의사항 : 이 옵션은 하늘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술이므로, 시전자의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바치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273일]

[혹시 당신은 누군가의 권유나 협박에 의하여 옵션 사용을 결정하려는 것입니까?]

[YES / NO]

"...."

잠깐, 은행 계좌이체를 하던 한국에서의 향수병이 떠오를 뻔했다. 라키엘은 보이스피싱 주의 안내문을 상대하듯 'NO'를 선택했다.

[<정신이 번쩍> 옵션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이미 내친걸음이다. 그는 눈을 딱 감고 'YES'를 선택했다.

딩동!

[옵션이 발동됩니다.]

[옵션을 적용할 대상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안내문에 따라 눈길을 돌렸다. 특근대원들에게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상단장 좀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당신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현재 보유 중인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차감합니다.]

...화아악!

'거억?'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가슴 한쪽이 콱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위장과 십이지장, 대장이 다 함께 손을 잡고서 파멸의 강강수월래 비트박스를 불어댔다. 그런가 하면 간과 콩팥이 서로 멱살을 잡고서 번지점프를 감행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피로감!

그 순간, 라키엘은 볼 수 있었다.

움찔!

"...거억?"

짐승의 신음일까.

인간의 놀람일까.

상단장 좀비의 온몸이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한데 그 표정의 느낌이 이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그저 짐승이나 야수가 아파하거나 포효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월요일 아침에 출근 생각하면서 일어나는 사람 같은 표정인데?'

딱 그거다.

그걸 보니 어쩐지, 느낌이 왔다.

"다들, 이 사람 놔줘."

라키엘이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흠칫했다.

"어서."

"...."

황태자의 명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동안 상단장 좀비를 꼼짝 못 하게 꽉 붙잡고 있던 특근대원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상단장 좀비를 놓지 못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데미안. 너도."

"하지만 전하."

"괜찮다."

"...."

"날 믿어라."

"...알겠습니다."

데미안마저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비로소 상단장 좀비가 약간의 자유를 되찾았다. 라키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밧줄도 풀어주고."

"포박을... 풀라는 말씀이십니까?"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가 기겁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전부 다."

"...."

미쳤다.

황태자는 미쳤다.

세르지오는 잠깐이나마 황태자의 정신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보인 황태자의 기행도 마찬가지였다.

'좀비에게 침술을 펼치시다니, 그런데 그걸 맞으면서 아파하는 좀비라니....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전하는... 무얼 위해 이런 짓을 벌이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원래 황태자가 평소부터 갖가지 기행을 즐겨(?) 저지르는 편이라지만, 이번만큼은 그 행동이 선사해 주는 아리송함이 평소와 차원이 달랐다.

'설마 좀비를 치료하시겠다는 건 아닐 거고.'

그건 불가능하다.

하늘의 섭리라는 것이 있는 거니까.

설령 가장 지독한 흑마법사라도 좀비를 그저 걸어 다니는 흉포한 시체로 만드는 것이 다인데, 아무리 황태자의 의술이 뛰어나다 한들 좀비를 사람으로 바꿀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상단장 좀비의 포박을 풀어주는 내내, 세르지오는 온통 의문에 휩싸였다. 그 사이, 마침내 포박에서 풀려난 상단장 좀비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그윽!"

운신이 자유로워지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는 상단장 좀비. 짐승처럼 온몸을 떨었다.

헉헉 거칠고도 불규칙한 숨을 내뱉었다. 덕분에 데미안과 세르지오를 포함한 특근대원, 근위대원 전체가 검자루에 손을 얹고서 긴장해야 했다.

한데 그때였다.

"어떤가. 좀 괜찮은가?"

황태자가 난데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말릴 겨를조차 없이, 상단장 좀비에게 불쑥 다가갔다. 심지어 손을 내밀어 좀비의 어깨를 짚어주기까지 했다!

"...!"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데미안과 세르지오였다. 두 사람이 상상조차 못 했던 황태자의 돌발행동에 기겁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손을 뻗었다. 황태자를 잡아끌어 좀비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상단장 좀비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간의 말을 꺼냈다.

"...제 아이... 네일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 무사합니까?"

어느새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는 상단장 좀비, 툴룬의 떨리는 눈동자. 그것은 좀비가 아닌 사람의 눈빛이었다.

198화. 정신이 번쩍 (2)

"제 아이... 네일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 무사합니까?"

조심스럽게, 그러나 명확한 뜻을 담고서 떨리는 목소리. 황태자를 보는 상단장 좀비, 툴룬의 떨리는 눈빛과 눈꼬리.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인간적인. 순수하게 절박하고 초조하여, 더 사람처럼 느껴지는 표정까지.

그걸 보며 모두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날 수 없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섭리이다. 그걸 거스를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물론 거기서 예외인 존재가 있다. 흑마법사는 금지된 주술로 좀비를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좀비를 과연 되살아난 존재라 여겨야 할까?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저... 금지된 사술에 의해 걸어 다니게 된 시체에 불과하니까.'

그것이 좀비다.

즉,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 시체로 만든 좀비는 아무런 이성이나 인간적인 감정을 바랄 수 없는 끔찍한 존재일 뿐이다. 그저 걸어 다니는 시체일 따름이다.

그게 진리이며, 상식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제발, 제발 좀 알려 주십시오. 제 손녀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 괜찮습니까? 예?"

"...."

상단장 좀비, 툴룬이 황태자에게 매달리듯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아예 애원하듯 대답을 갈구하였다.

그 모습에 모두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두 가지나 느꼈다.

하나는 상단장이 여전히 좀비의 모습이라는 것. 그럼에도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말을 하고, 애원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좀비의 몸을 지닌 채로 기억과 이성을 찾았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좀비인 상태에서도 손녀부터 걱정하는 건가.'

라키엘은 가슴속 한쪽이 아려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것이 혈육의 정이라는 걸까. 그는 자신을 향해 절박하게 애원하는 상단장 좀비, 툴룬을 바라보았다.

옵션 사용은 성공적이었다.

툴룬은 여전히 좀비의 몸을 유지하고 있되, 기억과 이성을 모두 되찾은 듯했다. 이쪽을 향해 보내는 눈빛과 표정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환호하지 않았다. 가볍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상단장 좀비, 툴룬의 어깨를 툭툭 짚어 주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서 말해주었다.

"괜찮아. 그대의 손녀 네일라, 그 아이는 건강을 되찾았으니까."

"저, 정말입니까?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그래."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툴룬이 기억과 이성을 되찾자마자 외손녀의 안위부터 걱정하는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툴룬이 사망하던 시점엔 네일라가 여전히 백일해에 고통받으며 투병 중이었으니까. 이 사내, 외손녀가 위독하던 모습만 보다가 죽었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거야. 죽은 후에도 그 걱정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고 있던 거야.'

그러니 이성이 살아나자마자 외손녀 걱정부터 하는 것이리라. 라키엘은 그런 툴룬의 심정을 헤아리듯, 혹은 토닥이듯 말했다.

"사실일 수밖에. 내가 직접 그 아이를 진료했으니까."

"그게 무슨...."

"세세하게 설명하자면 제법 긴데. 그래도 들어볼 텐가?"

"예, 예. 부탁드립니다."

꼭 듣고 싶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단장 좀비, 툴룬. 그 모습에 다시금 희미한 미소가 절로 맺혔다.

"그래, 그렇다면야."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자신이 이곳 크라노스크 지방에 왔던 때부터의 일들을 찬찬히 말해주었다.

상단장의 장례식, 위독하던 네일라, 거대 구렁이 사냥과 긴뿌리 감초, 백일해 치료약의 개발과 성공까지.

그동안 툴룬은 탄식하고, 감탄하고, 끝끝내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다.

"감사... 감사합니다. 제 손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툴룬이 연신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닦았다. 덕분에 라키엘은 기겁했다.

"어어, 조심. 그러면 눈가 피부 쓸려서 벗겨질 텐데?"

"엇? 예에?"

"자네는 좀비야. 스스로도 알고 있을 텐데. 기억과 이성을 되찾았지만, 육체는 좀비인 상태 그대로라는 거."

"아...."

"그러니 피부 관리를 조심해야 해. 한 번 상하면 회복이 안 되니까."

"그럼, 아기 피부처럼 소중하게 다뤄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지."

"그럼... 운동은...."

"미안. 해도 소용이 없을 거야. 아무리 쇠질을 열심히 해도 근육 회복과 성장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서."

"...."

툴룬의 표정이 단숨에 침울해졌다.

"그, 그렇습니까."

"응."

"그럼 저, 외손녀를 볼 수는 없는 거겠지요?"

"으음, 당분간은? 방법을 좀 고민해보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덜컥 모습을 보였다가는 아이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테니."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자네는 반갑구만, 브라쉬."

잠깐의 우울감(?)을 털어낸 좀비, 툴룬이 눈길을 돌렸다. 그의 반가운 인사가 향한 곳. 그곳에 오크 족장 브라쉬가 있었다.

한데 브라쉬의 반응은....

"상한 고기가 말을 한다, 꾸이익!"

"...."

"미안, 꾸익."

"후우. 친우만 아니었어도 그냥."

"그래도 좋지 않나? 나는 자네와 이렇게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네. 인간의 황태자께서 대체 자네에게 무슨 일을 해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꾸익."

"뭐 그건, 차차 말해줌세. 허허."

좀비 툴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정신적으로나마 되살아난 자신의 모습이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족장 브라쉬도 커다란 송곳니를 드러내며 기쁘게 웃었다.

덕분에...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멘탈이 살짝 이 세상의 끝자락을 찍먹하고 오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뭐야. 진짜로 살아난 거야? 좀비가?'

'좀비의 정신을... 되살렸다고?'

특근대원 둘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로 상대방의 바운스 바운스 흔들리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런데 좀비의 정신을 되살리는 그 미친 짓거리를... 거창한 마법이나 주술도 아닌 침술로 해낸 거라고?'

'가시로 몇 번 찔러서 좀비를 정신 차리게 만드는 일이 가능한 거였어?'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해야 한다. 그게 엄연히 보편타당한 상식이다.

한데 지금 황태자는 그런 상식을 너무나 간단하게 깨부숴 버린 무지막지한 위업(?)을 저지르고 말았다.

특근대원 두 사람의 눈짓이 더욱 바쁘게 오갔다.

'기적이다. 기적이군, 이건.'

'흑마술사의 흑마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전하의 침술에 비하면.'

믿기지가 않았다.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았다.

매일 황태자를 곁에서 모시고 있던 까닭에, 어느 순간부터는 황태자의 의술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의 의술이 종종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죽은 좀비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전하의 솜씨라니!'

이런 황태자를 모시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워졌다.

황도에 돌아가면 이걸 어떻게 소문낼까.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조금 더 극적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끌어낼 수 있을까. 각자의 머릿속에서 방금 목격한 기적이 야물딱지게 각색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라키엘이 좀비 툴룬의 상태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그나저나 괜찮나? 의식을 찾은 느낌은 어떻지?"

"그게... 아픕니다."

"아파? 어디가?"

"전하의 가시에 찔린 자리들이 말입니다. 아직도 욱신거리고 아픕니다."

"...."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심으로."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차라리 영원히 눈을 감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미안."

"괜찮습니다. 절 위한 행동이었음 또한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렇게 제 눈을 뜨게 해주셔서, 제 손녀의 무사함을 알 수 있을 기회를 주셔서 말입니다."

"그런가. 어쨌건, 그럼 좀비 상태였던 때의 기억도 지니고 있다는 뜻이겠지?"

"맞습니다."

좀비 툴룬이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억합니다. 제가 살아 있던 때의 기억은 물론이고, 좀비가 된 이후의 일들을 모두 말입니다."

"그 말은, 좀비가 되기 전의 평범한 시체였던 때의 기억만 없다는 뜻이겠군. 맞나?"

"정확하십니다, 전하. 죽은 직후의 기억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죽은 상태였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흑마법사의 주술이 제 눈을 뜨게 한 시점부터는...."

"말해보도록.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바로 이거다.

이걸 듣기 위해서 툴룬의 의식을 되살렸고, 기대수명 100일을 바쳤다. 라키엘은 귀를 쫑긋 열었다. 좀비 툴룬이 말했다.

"죽은 뒤부터의 제 첫 기억은, 흑마법사 놈의 얼굴이었습니다."

"얼굴?"

"예. 차가운 물에 빠졌던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습니다. 피로하고, 괴로웠지요. 그 상태에서 눈을 떴습니다. 바로 앞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더군요. 음침하고, 깡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지요. 보자마자 좀비로서 지닌 본능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이 사악한 주술로 나를 일깨운 거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 당시에도 감정을 느낄 수 있었나?"

"희미하게는 가능했습니다."

좀비 툴룬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감정과 생각에 불과했지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랄까,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주위의 것들을 막연하게나마 파악하고 느낄 수는 있는데, 그게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 몽롱한 느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흑마법사에게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들어? 그가 대화를 걸던가?"

"비슷했지요. 놈에겐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좀비 툴룬은 기억을 더듬었다.

"놈은 혼자 지낸 시간이 무척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주위의 좀비들에게 말을 걸면서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었지요.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어제는 황야를 온종일 찾아다녔는데 시체 하나 못 건져서 기분이 나쁘다. 요즘 들어서 입맛이 없다.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없었나?"

"물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물 좀 마셔도 되겠습니까? 목이 너무 칼칼해서."

"어. 여기."

라키엘은 물잔을 건넸다. 좀비 툴룬이 물을 벌컥 마셨다. 그제야 라키엘은 내심 아차 싶은 기분을 느꼈다.

'좀비가 물을 마셔도 되나?'

하도 자연스럽게 물을 달라고 하는 통에,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물을 건네고 말았다.

뒤늦은 걱정이 덜컥 들었다. 아무리 이성과 지성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툴룬의 육신은 여전히 좀비 상태니까.

'소화기관이 물을... 처리하진 못할 것 같은데.'

스멀스멀 피어나는 염려!

이내 그 염려가 현실이 되었다.

"...우웁?"

물을 원샷하고 시원해하던 것도 잠시, 좀비 툴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딱 봐도 알겠다. 토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쯧. 일단 여기에라도."

실내 바닥에 토하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뒷간으로 달려가게 둘 수도 없었다.

라키엘은 재빨리 손을 뻗어서 화분 하나를 집었다. 긴뿌리 감초 생장 실험을 위해 감초 뿌리조각 샘플을 심어둔 화분이었다.

"가, 감사합니... 오애액-"

좀비 툴룬이 마셨던 물을 모조리 화분에 게워냈다. 그의 낯빛이 송구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으음, 이제부턴 마시지는 말고 입만 헹구도록, 입 안쪽만."

"...알겠습니다. 그럼 드리던 이야기를 마저."

"그래. 나도 어서 듣고 싶군. 우선 흑마법사의 소굴 위치부터."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 지도를 지닌 분?"

좀비 툴룬이 지도를 찾았다.

근위대원 하나가 지역 지도를 건넸다. 그때부터 툴룬이 자신의 기억을 짚으며 흑마법사의 소굴로 가는 길을 지도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사이, 방금 좀비 툴룬이 게워낸 물을 받은 긴뿌리 감초 화분 속에서는....

...꼬득?

그동안 라키엘이 별별 짓을 다 해도 자라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긴뿌리 감초 샘플이, 마침내 성장의 은밀한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