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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찾았다...."

쟈빌론은 환희를 느꼈다. 동시에 끔찍한 통증을 실감했다.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그냥 단순히 아픈 게 아니었다. 맨정신인 채로 도끼에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이었다.

양쪽 관자놀이에 꼬챙이를 찔러넣고 휙휙 돌려대는 것만 같았다. 당장에라도 안구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싶었다.

며칠 만에 겪는 고통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성자 군의관이 아침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괴상한 노래와 함께 그의 손맛을 보고 나면 온종일 아플 일이 없었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그런데, 날 버리고 도망을 쳐?'

자신을 속였다.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도망을 쳤다. 감히. 자신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몰라주고. 팽개치고. 잔혹하게 떠나갔다. 헌신짝처럼 버리려 했다.

...까드득!

이가 갈렸다.

괘씸했다.

지금, 평원 건너편에서 불길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성자 군의관이. 한때 자신이 평생 친구로 두고 싶노라 여겼던 리한 군의관이. 증오스러웠다.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너무나 소중했다. 떠나보내기 싫었다. 그 어떤 이에게도 빼앗기기 싫었다.

'그대는 내 수족이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불을 질렀다. 혹시나 하는 의혹으로. 설마 싶은 확신으로. 평원을 향해 외치고, 불을 놓았다.

덕분에 찾아냈다. 기뻤다. 가슴이 떨렸다. 이제부터 저자를 평생 잡아 둘 것을 생각하니, 환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스르릉!

쟈빌론의 검이 뽑혔다. 그가 검으로 라키엘 일행을 겨누었다.

"친위대, 출진!"

외침과 함께 박차를 가했다. 그를 태운 거대한 흑마가 거친 숨결을 토했다.

그를 따르는 친위대 300기가 투구를 눌러썼다. 정예 기병의 함성이 그를 따라 평원을 가로질렀다.

투두두두두...!

쟈빌론과 친위대의 앞길을 이글거리는 화재의 현장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쟈빌론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애마를 더욱 독촉하였다. 주인의 뜻을 깨달은 흑마의 전신 근육이 폭발적인 힘을 냈다. 속도를 높였다.

동시에 쟈빌론이 검을 뒤로 당겼다. 겨누었다. 그 눈동자에 광기 서린 광휘가 맺히는 순간.

츠핏!

찔렀다.

검이 가리킨 끝은 허공이었으되.

검이 갈라낸 것은 불길이었다.

투콱- 쿠화륵!

소드마스터의 오러가 모조리 실린 폭발적인 찌르기였다. 검이 찌른 방향의 불길이 진공의 폭풍을 만난 듯 순식간에 꺼졌다.

화염 속으로 수 미터 너비의 순간적인 터널이 생성되었다. 쟈빌론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친위대가 뒤를 따랐다.

"하! 이랴! 하!"

자신의 애마를 독려하며.

화염 속으로 길을 만들며.

쟈빌론은 잔혹한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서 도망치고 있는 성자 군의관. 그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곧 그를 붙잡고, 두 다리를 잘라, 영원히 도망칠 수 없게 만들리란 생각에 흐뭇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달리면.

이 지옥 같은 두통도 끝이다.

"...하!"

투확-!

쟈빌론의 광기 서린 기합이 화염을 갈랐다. 그와, 그를 따르는 300기의 친위대가 평원 중앙의 라키엘 일행을 향해 거침없는 돌진을 이어갔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진 평원의 동쪽 반대편. 그곳의 발루아 요새에서 왕국군이 평원의 분란을 보며 술렁이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앙부아즈의 국왕, 메로뱅거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골치가 아파지는 것 또한 실감했다.

당혹스러웠다.

상황을 목격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냥 단순히 황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맨정신인 채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당장에라도 한 번쯤 눈두덩을 거칠게 비비고 싶어졌다.

반란군이 난데없이 움직인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심지어 평원 전체에 난데없는 화재를 일으킨 형국이기에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난리를 피우고, 기병을 출진시키기까지 하면서, 고작 세 사람을 추격하고 있다고?'

국왕 메로뱅거의 시선이 평원 중앙을 향했다. 그곳에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세 사람이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체를 식별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말을 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지체 높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곁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왕좌를 보좌한 원로이자 소드마스터, 이드리스 경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워낙 연기가 자욱하여 제 시야로도 더 자세한 모습까지 식별할 수는 없사오나, 젊은 남자 셋인 듯하옵니다."

"남자 셋?"

"그러하옵니다, 전하. 수수한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평범한 백성들이겠군."

"그런 듯하옵니다, 전하."

"흐음...."

국왕 메로뱅거는 침음을 삼켰다.

난데없이 평원에 불을 질러 버린 반란군. 평원에 숨어 있다가 그 불길을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는 평민 셋. 그런 평민들을 죽일 듯이 추격하며 나선 반란군의 기병대.

이 상황을 무어라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럽군.'

설마 쫓기고 있는 평민 셋이 뜻밖의 중요한 인물들인 걸까. 그러나 심사숙고를 하여도 딱히 그럴싸한 인물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루하고 평범한 차림으로 반란군 기병대의 추격을 받을 마땅한 사람 또한 생각나는 바가 없었다.

국왕은 이드리스 경에게 물었다.

"한데 아까 불화살을 쏘기 직전에 말이야. 쟈빌론이 무어라 외치는 것 같던데. 혹시 경은 그 내용을 들었는가?"

"송구하오나, 전혀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소드마스터인 그대의 청각으로도?"

"그러하옵니다, 전하. 쟈빌론 또한 엄연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 필경 이쪽까지 외침의 내용이 전해지지 않도록 목청에 실린 마나를 정교하게 조절하였을 터이옵니다."

"...그렇군."

국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알 수 없는 반란군의 돌발적인 행동.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국왕의 생각이 바빠졌다. 그 끝에 마침내 나름의 결론을 얻었다.

"아무래도 쟈빌론, 저 반역자는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겠군."

"소장의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전하."

"경도 그렇게 보았는가?"

"예, 전하."

이드리스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고갯짓에는 어느새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쟈빌론, 저 참람된 반역자의 의도는 명명백백하옵니다. 평원에 불을 질러 우리 왕국군의 이목을 이끌어 낸 상태에서, 아무 죄 없는 평민을 사냥하듯 무참히 학살하는 모습을 보이려 함이겠지요."

"...그럴 테지. 그리하여 우리 왕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함이겠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우리로 하여금 백성이 사냥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수작일 것이옵니다. 즉, 이것은 명백하고도 저열한 기싸움이옵니다, 전하."

"하면 기싸움에 밀려선 아니 되겠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이드리스 경이 굳세게 답하였다. 국왕 메로뱅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생각도 경의 것과 같네. 하니 반역자에게 쫓기는, 저 나약하고 가련한 우리의 백성을 구출하도록 하지."

"소장이 직접 가도 되겠사옵니까?"

"아니."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언제나 내 곁을 지켜야 할 것임이야. 대신 그 아이와 짐의 근위대를 보내도록 하지."

"예? 그리하여도... 괜찮으시겠사옵니까?"

"물론."

딱 잘라 대답하는 국왕.

근위대라면 충분할 것이다. 반란군의 일개 기병대 따위는 정면으로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국왕은 자신했고, 확신했다. 물론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이 반란군의 기병대를 직접 이끌고 있음을 모르기에 품은 오판이었다.

사실 이러한 국왕의 오판은 평원 전체를 휘감은 자욱한 연기 때문이었다.

만약 평소였다면? 곁의 이드리스 경이 소드마스터 특유의 뛰어난 시각으로 친위 기병대 선두의 쟈빌론의 모습을 식별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화재 때문에 시야가 워낙 좋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국왕 메로뱅거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반란군에게 쫓기는 우리의 가련한 백성을 구하러 달려가는 친위대와, 그러한 친위대를 이끄는 이가 그 아이라면, 그 또한 제법 상징적인 모습이 될 터이지. 우리 왕국군의 사기 진작에 크나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드리스 경이 고개를 숙였다.

명령이 하달되었다.

잠시 후, 왕국군 발루아 요새의 관문이 열렸다. 총 500기의 국왕 친위대가 은빛 마갑을 번득이며 출진했다.

거침없이 서쪽으로 진격했다. 목표는 쫓기고 있는 세 명의 가련한 백성(?)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런 국왕 친위대의 선두에 왕녀, 아델린이 있었다.

"하! 이랴! 하!"

내달리는 돌격마.

그 위에서 지르는 노호성.

그렇지 않아도 반란군에게 쫓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아델린이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가련한 백성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아바마마의 명이 떨어졌다. 기뻤다. 감격스러웠다.

동시에 그녀는 다짐했다.

반드시 백성을 구하겠노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반란군의 마수로부터 백성들을 구해내어 왕국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겠노라고. 적을 격멸하여 엄준한 좌절감을 선사하겠노라고. 반드시 성공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각오했다.

"하! 하아!"

돌격마를 더욱 독려하였다. 매캐한 연기 속을 내달렸다. 다행히 이쪽이 반란군보다 백성들과 가까웠다. 기뻤다. 이쪽이 먼저 백성들과 맞닿을 수 있을 듯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달렸다.

백성들과 가까워졌다. 그 뒤편에서 추격하며 달려오는 반란군의 대열도 얼핏 보였다.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좋아. 할 수 있어.'

고삐를 틀어쥔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를 격려했다. 한편으로 문득, 은인 같은 사람의 모습도 떠올렸다.

'황태자, 당신, 보고 있나요.'

당신 덕분에 담석증이 완치된 내가, 지금, 가련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반란군과 당당히 맞서고 있답니다.

그러니 당신, 어디에 있든 날 응원해 주세요. 나도 당신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서 언제나 노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쿵쿵, 뛰는 가슴.

대지를 때리는 말발굽.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백성들의 모습.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알밤 같은 뒤통수. 이윽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뭔가 뜨끔한 표정을 짓는 저 빨간머리 통통한 남자는....

'어?'

왕녀 아델린은 흠칫했다.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번쩍 뜨였다.

'...황태자?'

당신,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나한테 그렇게 편지 쓰지 않았어? 그래서 난 당신이 담가둔 여왕벌 술통도 황도로 배송 보냈는데. 심지어 제일 비싼 특급 마차배송으로. 완전 알차게 보냈는데.

'그런데 왜 당신이 여기서 나와?'

묘하게 스멀거리는 서운함과 배신감을 만끽(?)하며, 왕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빠직 갈고 말았다.

130화. 미친놈들의 추격전 (3)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왕녀의 혼잣말이 흘렀다. 아니, 그건 이미 혼잣말이 아니었다. 거의 외침에 가까웠다.

외침이 제법 먼 거리를 돌파(?)하며 날아갔다. 마침내 라키엘의 고막을 야물딱지게 콕, 찔렀다.

라키엘이 움찔했다.

"...어?"

데미안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뛰던 그의 고개가 삐그덕.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왕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3초간 이어진 침묵.

이내 라키엘이 외쳤다.

"왕녀님! 이렇게 드디어 만나는군요!"

감격으로 떨리는 목소리. 어느새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방울을 아련하게 흩뿌리며 달려왔다. 왕녀에게 흡사 뛰어들어 안길 기세였다.

덕분에 아델린은 흠칫하고 말았다.

"무, 무슨!"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왕녀 아델린이 당황하는 사이, 라키엘이 다짜고짜 그녀의 말안장 뒤편에 올라탔다. 그녀가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뭐죠? 황태자 당신,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거죠?"

"그게 다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요? 당신, 황도로 돌아가겠노라 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서신만 보내 놓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났던 게 열흘도 더 된 일인데."

"그게 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데 본국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당신이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반란군에게 쫓기고 있는 거냐고요."

"사람 세상살이 살다 보면 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대답하지 않으시겠다?"

"대답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깁니다."

"그래도 듣고 싶은데요."

제멋대로 뒷자리에 합승(?)한 라키엘, 그를 쳐다보는 왕녀의 눈길이 째릿 날카로워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운했다. 황당했다. 단순히 라키엘이 서신 내용과 다르게 황도로 돌아가지 않아서? 자신을 속인 듯해서?

아니었다.

"어째서 당신이, 반란군의 외투를 걸치고 있는 거죠?"

라키엘이 입고 있는 방한복 외투가 문제였다. 반란군의 제식 복장이었다.

어깨에는 반란군 지휘부 소속의 부대 표식까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 외투, 지급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것이로군요. 곳곳에 이끼며 진흙이 묻어서 더러워졌지만 티가 나요. 당신, 힐링캠프를 떠나고 열흘 동안 어디에서 뭘 했던 거죠?"

어느새 라키엘을 쳐다보는 왕녀의 눈길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반란군 지휘부 표식이 새겨진 제식 외투. 심지어 지급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듯한 외투. 머릿속에 찜찜한 퍼즐이 그려졌다.

그녀가 반쯤 확신을 담아 물었다.

"설마 당신, 그동안 반란군에 몸을 담았던 것인가요? 제게 거짓말을 하고서?"

"예!"

라키엘이 대뜸 대답했다.

너무나 뻔뻔하도록 당당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왕녀 아델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사이, 라키엘의 더욱 기묘하도록 태연한 대꾸가 이어졌다.

"맞습니다. 반란군 지휘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제법 알찬 나날이었죠."

"...."

"하지만 그렇듯 반란군에 몸을 담은 건 전부 깊은 뜻이 있어서 행한 제 나름의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이요?"

"그렇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잠입! 적의 심장부를 노리는 칼날 같은 눈빛으로! 왕국군에 티끌 같은 도움이나마 되고자, 이 불행하고 서글픈 내전을 하루라도 일찍 종식시키고자, 살 떨리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무릅쓰고서, 저는 기꺼이 이번 일을 실행했던 것입니다."

"어째 변명 같은데요? 그것도 굉장히 구차한."

"들켰습니까?"

"네."

"하지만 우리,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닙니다. 혼은 나중에 날 테니, 말을 더 빨리 달리게 하시죠."

"왜죠? 저쪽에서 달려오는 반란군 때문에?"

"네."

"하지만 겨우 저까짓 놈들, 우리보다 숫자가 적은 것 같은데요. 기왕 이렇게 조우한 김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격멸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듯하고요."

왕녀 아델린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자신이 이끌고 나온 500기의 기병은 왕국군 최고의 정예였다. 비슷한 숫자라면 반란군의 어떤 부대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이쪽이 거의 2배 가까이 병력이 많아 보였다. 그러니 정면으로 격돌하면? 큰 피해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터다.

'그리고 이건 좋은 본보기가 되겠지.'

고작 백성(?) 셋을 사냥하듯 학살하려 했던 반란군 기병대. 놈들을 저지하고 백성을 구해낸 왕국의 왕녀와 근위대.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반란군 기병대마저 격멸한다면? 그 모습을 요새의 왕국군과, 평원 건너편의 반란군 모두가 지켜본다면?

왕국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지게 되리라.

'이건 기회야. 여기서 싸우고, 놈들을 격멸하는 것이 이득이야.'

왕녀는 계산을 마쳤다.

하지만 그 순간, 라키엘이 빼액 외쳤다.

"부딪치면 다 죽습니다!"

"왜죠?"

"쟈빌론이 저놈들 선두에 있으니까요!"

"...네?"

왕녀의 표정에서 색채가 빠져나갔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쟈빌론이? 직접이요?"

"네!"

"그럴 리가. 그는 반란군의 수장인데? 어째서?"

"날 잡으려고요!"

"당신을요? 왜요?"

"내가 그놈한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

당신, 지난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왕녀는 어쩐지 엄청난(?) 상상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로이 망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로 쟈빌론이 반란군 기병대를 이끌고 있다면? 절대로 부딪치면 안 된다. 그는 소드마스터니까. 이쪽이 격멸될 거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따르는 근위대를 돌아보았다. 재빠르게 명령했다.

"전군! 이탈!"

명령과 실행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왕녀가 우측으로 기수를 돌리는 것과 함께, 500기의 근위병 대열 전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유연한 기동과 함께 안장의 석궁을 꺼냈다. 장전된 볼트를 왼쪽으로 겨누었다.

"발사!"

투투투투!

이글거리는 화재의 현장. 그 속으로 500발의 볼트가 세차게 날아갔다.

하지만 왕녀와 근위대는 사격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대로 기수를 돌려 요새 방향으로 박차를 가했다.

왕녀는 그제야 다소 마음을 놓았다.

'됐어. 쟈빌론이 설령 가까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더라도 일제 사격에 주춤했을 테고, 그 사이에 우리가 가속하며 거리를 벌릴 시간을 만들었어.'

그러니 더는 추격해 오지 못할 것이다.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투확-!

"...!"

후방에서 기이한 폭음이 들려왔다. 마력탄이 터지는 소리? 혹은 공간이 쪼개지면 저런 소리가 날 법했다.

왕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탄해야 했다. 얄궂게도 불길한 예감이라는 놈들은 언제나 들어맞는 것 같다고.

'쟈빌론!'

쟈빌론이 불길 사이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니, 그가 내찌른 검에 화염이 통째로 걷혔다. 그 사이로 쟈빌론이 달려왔다.

근위대를 태운 준마? 그걸론 어림도 없었다. 왕녀 자신을 태운 국왕의 명마? 역시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니까, 쟈빌론은, 말에 타지도 않은 채로 이쪽 대열을 추격해 오고 있었다.

뒤에서? 아니, 옆에서. 이쪽의 대열과 나란히 달렸다. 보란 듯이. 이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기까지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살인미소였다.

"...."

라키엘은 직감했다.

저놈, 방금 날 보며 웃었다. 확실하다. 눈이 마주쳤으니까. 그런데 입은 웃는데 눈은 전혀 웃질 않았다.

꼬리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솜털이란 솜털이 모조리 다 곤두섰다. 사상 최악의 스토커에게 추격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그런 기분을 만끽(?)할 틈은 없었다.

타앗-!

10미터 거리에서 이쪽과 나란히 달리던 쟈빌론이 땅을 박찼다. 순간적으로 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아니, 너무나 갑작스럽게 커졌다. 가까이 다가와 버렸다!

"그대, 날 속이면서 기뻤나?"

"...!"

순식간에 다가온 쟈빌론. 어느덧 놈과의 남은 거리는 2미터. 그곳에 속삭이듯 으르렁거리는 쟈빌론의 거구가 도사리고 있었다.

성난 짐승과 딱 마주친 기분. 그러나 어찌 대응할 틈도 없었다. 어느새 놈의 검이 휘둘러지고 있었으니까.

"그대는 두 번 다시 도망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될 것이야."

쐐애액-!

위기감이 극에 달하면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원리 때문일까. 혹은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 가는 까닭일까. 돌연 시간의 흐름이 느릿하게 느껴졌다.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는 쟈빌론. 놈이 가로로 베어오는 검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보였다.

물론 보인다고 대응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놈의 검이 무엇을 노리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다리.'

놈의 검은 정확히 이쪽의 무릎이 있는 높이를 가로로 베어 오고 있었다. 말의 몸통과 이쪽의 다리를 통째로 달라 버리려는 거다.

그렇게 앉은뱅이로 만들어 평생 곁에 붙잡아 두려는 거다. 섬뜩했다.

이제라도 이쪽의 정체를 밝혀야 할까. 사실은 내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라고 외쳐볼까.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망했다는 절망적 깨달음이 머릿속을 후려쳐 왔다.

한데 그때였다.

"전하!"

날카로운 외침이 느릿해진 시간의 인식을 깨부수며 들려왔다.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뒤에서부터 사나운 기세가 폭풍처럼 몰려왔다. 쟈빌론의 검과 충돌했다.

터컹-!

충격파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온몸을 때렸다.

물을 잔뜩 채운 거대한 짐볼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 같은 둔중한 충격. 세상이 뒤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느리게 인식되던 시간의 흐름이 깨어졌다.

"커억!"

온몸이 허공에 떴다. 충격파에 밀려난 결과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전신을 둥글게 웅크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이쪽을 끌어당겼다.

콰당탕! 콰드드즉!

"...!"

온몸으로 지면과 거친 하이파이브를 감행했다. 하늘과 땅의 위치가 최소한 열 번은 뒤바뀌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형편없이 굴렀다.

전신의 관절이 모조리 제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제로라도 차려야 했다.

"눈 떠요!"

철썩!

"...!"

매서운 외침과 함께 뺨이 불을 지른 듯이 뜨거워졌다.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피를 흘리는 왕녀 아델린이 이쪽을 보며 외치고 있었다.

"일어나, 이 멍충아!"

그녀가 추락의 순간에 날 감싼 걸까. 그런 듯했다. 아델린의 온몸이 흙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왼쪽 팔은 축 늘어져 있었다. 부러진 듯했다.

하지만 서로 다정하게 안부나 나누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서! 이 틈에 도망쳐요!"

그녀가 재차 외쳤다. '이 틈'이라고 말할 때 힐끔, 한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녀의 눈길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목격할 수 있었다.

터컹! 터커어엉-!

두 마리 짐승이 거칠게 얽히고 있었다.

데미안과 쟈빌론이 격돌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건 격돌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쟈빌론이 시종일관 데미안을 압도하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데미안은 간신히 죽음만을 모면하며 방어와 회피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올라가기 직전인,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원칙대로라면 데미안은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의 일검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을 터다. 그게 정상이다.

한데 놀랍게도 데미안은 버티고 있었다. 감히 견주어 보지도 못할 격차를 극복하며, 압도적 수세에 몰렸을지언정 쟈빌론을 상대하며 붙들어두고 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쟈빌론도 비슷한 놀라움을 느낀 건지,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이었다.

그때, 왕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뭐 해요! 어서 움직이자니까!"

"움직이자고요?"

"네! 당신의 호위가 시간을 벌어 주는 틈에 도망쳐야죠!"

데미안을 버리고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는 아델린.

사실 당연한 소리였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정상적인 의견이었다.

이쪽은 제국의 황태자니까. 데미안은 일개 호위에 불과하니까. 호위는 이런 때에 대신 싸우다 죽고 희생하라고 있는 존재니까. 아델린도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니다.

"안 됩니다. 버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이를 갈며 일어섰다. 아델린을 돌아보며 거절했다. 그녀의 눈빛 가득, 이해가 안 된다는 답답함이 떠올랐다.

"당장 가자니까요?"

그녀가 손을 뻗어왔다. 숫제 이쪽을 강제로라도 끌고 갈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저 의견을 따를 수는 없다. 데미안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가 단순히 소설의 주인공이라서? 세계관에서 손꼽힐 강자가 될 녀석이라서? 그런 귀한 녀석을 이곳에서 잃을 것이 아까워서? 손해가 될 듯해서?

'아니.'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소설 마검황 속 어느 장면을 떠올렸다. 왕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녀석을 버리면, 모두가 위험해질 겁니다."

"...네?"

무슨 소리냐는 듯 찡그려지는 아델린의 눈매. 하지만 방금 꺼낸 말은 사실이다. 진실이다.

데미안이 이곳에서 버림받는다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면, 그리하여 녀석이 절체절명의 순간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본질을 오롯이 깨달아 버리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당신도, 더 나아가 이 세상 전체가, 쟈빌론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위험에 빠질 테니까.'

131화. 습관이라는 이름의 약점 (1)

세상에는 굳이 일어나지 않아야 좋을 일이 있다. 때로는 모든 성장이 그저 이롭기만 한 일이 아니게 되기도 한다.

창조를 위한 파괴, 탄생을 위한 소멸 또한 마찬가지다. 흔히들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일어날 창조와 탄생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파괴되고 소멸될 당사자들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아니.'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소설 마검황 속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파괴와 창조에 대한 이야기였다. 세계의 소멸과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였다.

그 중심에 데미안이 있었다.

제국이 무너지고.

모든 질서가 파괴되고.

잿더미의 폐허 속에서 그가 성장했다. 성장하며 다시 한 번 세계를 부수었다. 모든 것의 재탄생을 이끌었다.

그것이 그가 탄생하면서부터 짊어진 숙명이었고, 그는 숙명을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그 길을 거부하고, 숱한 고난 끝에 극복했다.

그래서였다.

'데미안. 널 여기에 버리고 간다면, 그래서 끝끝내 벗어날 수 없는 위기에 몰리게 된다면....'

그 위기 속에서 너는 결국 네 본질을 깨닫게 되겠지. 최소한 그 길의 첫걸음을 떼어 놓게 되겠지.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 세상의....

"모두가 위험해질 거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왕녀 아델린의 목소리가 상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라키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아델린이 있었다. 그녀의 뒤편에선 수많은 군마가 세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왕국군의 근위대였다.

반란군의 친위대였다.

양측 최고 정예의 두 기병대가 서로를 짓뭉개기 위해 돌진했다. 충돌했다. 얽혔다. 어지럽게. 난폭하게. 창과 창이 엇갈리고, 방패가 쪼개졌다. 선혈이 튀고, 누군가의 기합과 비명이 어우러졌다.

"일단 타요!"

아델린의 손길이 뻗어왔다.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이끌리듯 말에 올라탔다. 안장 앞쪽에 앉은 그녀가 외쳤다.

"내 팔이 성하지 못하니까! 알아서 잘 잡으시고! 이랴! 하!"

그녀의 목소리에 군마가 크게 투레질을 했다. 설마 아델린은 이대로 날 데리고서 전장을 이탈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됩니다. 정말로요. 데미안을 여기에 버려두고 떠나면... 모두가 끝장이 날 겁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델린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안다. 이해한다. 무슨 소리인지 짐작도 안 가겠지.

하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선 안 되니까. 입 밖으로 진실을 꺼내는 자체만으로도 천기누설이 되니까. 자칫 그랬다간, 데미안을 이 세상에 남긴 '그 존재'가 직접 움직이는 사태가 닥칠 테니까.

'그래서... 지하 검투장에서부터 온갖 이상한 핑계를 다 대면서 데려오고 계속 옆에 잡아 두었던 건데.'

아무에게도 말해 줄 수 없었다.

데미안에게도 그랬다.

하여 그저 곁에 두었다.

데미안에게 닥쳐올, 소설 마검황에서와 같은 고난과 역경을 예방해 주려고. 녀석으로 하여금 힘겨운 위기를 겪지 않게 해 주려고. 그저 평범하기에 평온한 일상만 누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위기가 없으면 극복도 없으니까. 극복할 일이 없으면 성장도 없을 테니까. 의도적으로 녀석의 시간을 평온한 일상에 두었다. 고정시켰다. 가두었다.

온실의 화초처럼.

새장의 새처럼.

황태자의 곁에서라면, 평화로운 황궁에서라면 가능하리라 여겼다.

가끔씩은 별별 사건을 겪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 곁에 있으면 소설 원작과 같은 절망적인 고통과 역경을 겪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 두고 싶었다.

창조를 위한 파괴, 탄생을 위한 소멸 따위 없이, 세상의 모두가 평안하게 그저 흘러가도록 두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사니까.

내 삶도 안정적일 테니까.

'그래서... 크레모에서도 날 구한 녀석이 우루스와 단둘이 남았을 때, 결국엔 위기에 처했을 때, 굳이 주위의 만류를 무시하고 돌아가서 녀석을 구해 줬던 거였는데.'

한데 오늘, 녀석이 이렇게 위기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감당할 수 없을 강자와 일대일로 맞서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줄도 몰랐다.

으드득!

라키엘은 이를 갈았다.

각오가 섰다. 그때처럼, 크레모에서처럼 또 미친 짓을 벌여야 할 것 같다. 물론 두렵다. 무섭다.

하지만 데미안이 이대로 자신의 본질을 깨달아 버리면서 생겨날 일에 비하자면, 지금 잠깐 두려움을 참고서 미친 짓을 벌이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왕녀님, 이제부터 내 말 똑바로 들어요."

주위에서 살벌하게 벌어지는 근위대와 친위대의 전투. 그 악다구니 속에서 아델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마디, 한 음절, 힘을 주어 말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살리려면 당신이 중요해.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줘야 모두가 살 수 있어."

"무슨...."

"해 줄 수 있겠어요?"

"...."

이글거리는 라키엘의 눈동자.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그에게서 저런 눈빛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것은. 그 직후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를 깨달은 것은.

'나, 미친 건가.'

그냥 황태자를 데리고 이대로 전장을 이탈하면 되는 건데. 모두가 전투에 휘말린 지금이야말로 그럴 수 있는 가장 절호의 기회일 텐데.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황태자의 저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의견을 따르고 있는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좋아. 고마워요. 그럼 잘 들어요. 당신이 이제부터 해 줘야 할 일은...."

라키엘이 빠르게 설명했다.

설명을 귀에 담으며. 말고삐를 움켜잡으며. 황태자의 의도를 뒤늦게 이해하며. 아델린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경악해야 했다.

경악스럽다. 또한 경이롭다.

쐐애액-!

검날이 번득였다. 검신이 독사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날카롭고도 서늘한 기세를 싣고서 공간을 갈랐다. 지독하도록 집요하게 약점을 노리는 검격이었다.

스칵!

또 다른 검날이 움직였다. 검신이 맹수처럼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흉포하고도 격렬한 기세를 담고서 공간을 점령했다. 노골적으로 법칙을 무시하며 모든 것을 찢어 버리는 검격이었다.

터컹-!

두 기세가 충돌했다.

독사 같은 검격이 맹수의 검을 밀어냈다. 약점을 물어뜯고, 상처를 헤집었다.

그 순간, 쟈빌론의 입가에도 독사 같은 미소가 맺혔다. 그는 생각했다. 경악스럽고, 또한 경이롭다고.

'이런 자가 있었을 줄이야.'

그의 눈동자가 흥미를 담고서 상대를 주시했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맹수 같은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이쪽의 기세에 밀려 쓰러지기 직전인 채로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흥미진진했다.

'수준으로 따지면 고작... 소드 익스퍼트 중급으로 보이는데.'

사실이었다.

눈앞의 흑색 장발 사내는 기이했다. 그저 자잘한 실전 경험이 많아 보일 뿐, 잘 쳐줘도 상급은 아닌 실력이었다.

움직임도, 검을 다루는 기예도, 마나의 운용 능력을 살펴보아도 그러했다.

처음 자신의 검을 막아 냈을 때는 우연이라 여겼다.

그저 성자 군의관의 다리만 살짝 잘라내기 위해 휘둘렀던 검이었으니까. 그리 큰 힘을 싣진 않았으니까.

덕분에 이자가 자신의 검을 어렵사리 막아 낸 것이리라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기적이란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날 수 있는 법이니까. 그저, 그렇게만 여겼더랬다.

한데 계속 검을 섞어 보니 아니었다.

...스핏!

쟈빌론의 검이 섬전처럼 뻗어 갔다. 다섯 줄기의 잔상이 뒤섞였다. 데미안의 이마와 목, 어깨와 명치, 하복부를 동시에 노리며 번득였다.

보통의 소드 익스퍼트 중급 수준 실력자라면 절대 피하지도, 막지도 못할 공격이었다.

애초에 수준이 다르니까. 호랑이와 어린아이만큼이나 차이가 있으니까.

그런데 결과는 또 뜻밖이었다.

타앗!

데미안은 검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뛰쳐나왔다. 잔상을 모조리 몸으로 맞았다.

마치 처음부터 잔상을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잔상 속에 섞인 진짜 검격은 어깨로 흘려내기까지 했다.

"...크읏!"

검격에 스친 어깨. 핏방울이 튀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오히려 전진했다. 두 눈을 번득였다. 쟈빌론의 허리를 향해 검을 쓸어냈다.

쉬카악-!

"하!"

쟈빌론의 입가에 환호성 같은 미소가 맺혔다. 설마하니 이런 대응을 선보일 줄이야. 몰랐다. 뜻밖이었다. 더욱 흥미가 돋아났다.

'당할 듯하면서도 매번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내 공격을 흘려 낸다? 이게 가능한 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같은 나부랭이가 소드마스터인 자신의 공격을 몇 번이나 번번이 무마시키고, 끝끝내 반격까지 가하는 이 상황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었다.

'타고난 위기 대응 능력이 남다른 놈이로구만.'

아주 가끔, 이런 놈이 있긴 했다. 말 그대로 타고난 천재. 난놈. 될성부른 떡잎. 그리고 가만히 놔둔다면... 끝없이 성장하게 되는, 그런 놈들.

'하면 밟아야겠지.'

흥미로운 싹은 위험하다. 크도록 내버려 두면 위협이 된다. 아직 덜 자랐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짓밟아야 한다.

쟈빌론의 눈동자에 흥미만큼의 파괴적 욕구가 서렸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성자 군의관이다.

감히 자신을 속이고 도망까지 친 그자를 사로잡아야 한다. 평생 곁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그러니, 네놈은 여기서 그만 죽어라.'

흥미롭게 가지고 노는 것도 여기까지다.

끄드득!

쟈빌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검을 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츠즈즈!

그의 검이 섬뜩하도록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소드마스터의 전유물. 마나의 무한한 순환을 이루어낸 자만 피워낼 수 있다는 궁극의 파괴적 기예. 최후의 섬광.

오러였다.

스극.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예비동작조차도 없었다.

그저 쟈빌론의 검이 아주 살짝 흔들렸을 뿐이었다. 동시에 그의 전면으로 오러의 광휘가 파괴적인 선율을 그려냈다. 공간을 가르고, 물질을 잘랐다.

그 속에는 뻗어 가던 데미안의 검도 포함되어 있었다.

"...!"

검이 통째로 잘리는 순간, 데미안의 두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위험신호가 심장을 두드렸다. 동시에 그가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스칵-!

오러의 끝자락이 오른쪽 볼과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잘린 머리칼 다섯 가닥이 허공에 흩날렸다.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그다음이었다.

"놀아 주는 것도 이제 끝이구나."

"...!"

무감정한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울렸다. 순간 데미안은 보았다.

오러가 서린 검을 치켜들고 있는 쟈빌론의 모습을. 그의 검 끝이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음을.

반면에 자신은?

아직 균형을 되찾지도 못했다. 피할 방법도, 막을 방법도 없었다. 아득한 절망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이렇게 끝인 걸까. 정말로 그런 걸까. 차오르는 암담함이 시간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런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이런 곳에서 끝장이 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럴 줄은 몰랐다.

자신의 인생은 좀 더 의미가 있을 줄로만 알았다. 앞으로 해 보고 싶은 일도 많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 거라 생각하니, 그저 허무했다.

쐐애액-!

검이 찔러 들어왔다. 이제 찰나가 지나면 심장이 꿰뚫리겠지.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두근!

반항하듯.

저항하듯.

심장이 크게 뛰었다.

피할 수 없을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뛴 것일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그것은 강렬한 확신에 가까웠다.

'...뭐지.'

인생의 주마등처럼 느리게 인식되는 시간의 흐름. 그 속에서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이상했다.

당장 피할 수도 없을 검격이 심장을 노리고서 찔러 들어오고 있는데. 남은 거리가 지척에 불과한데. 호흡 한 번을 할 시간도 남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두렵지가 않았다. 불안하지도 않았다.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심장이 돌연 크게 뛰고부터였다.

무언가 알 수 없을 미지의 존재가 가슴속에서 눈을 뜨는 기분이 들었다. 착각? 아니었다.

두쿵! 쿠웅!

심장이 한층 크게 뛰었다. 도사리고 있던 미증유의 자아가 꿈틀거렸다. 웃었다. 자신을 향해. 세상 모두를 향해. 뻗어 오는 검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이.

'나는....'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두 눈의 흰자위가 모조리 검게 변해 있었다.

반대로 눈동자가 하얗게 탈색되었다. 의도치 않았던 자각이 그의 의지를 잠식했다. 아니, 잠식하려 했다.

만약, 그 순간, 뜻밖의 외침이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난데없는 커다란 그림자가 쟈빌론을 덮쳐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갓 눈을 뜬 미증유의 존재에게 모든 의지를 내맡겨야 하였을 것이었다.

"쟈빌로온-!"

"...!"

고막을 푹 찌르듯 날아온 외침.

그 소리에 데미안이 흠칫. 그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쟈빌론도 움찔. 곁눈을 들어 외침이 들려온 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내 쟈빌론은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죽은 군마 한 필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니,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날려오고 있었다.

마치 괴력을 지닌 누군가가 던진 돌멩이처럼, 혹은 투석기로 쏘아낸 포탄처럼, 이쪽을 깔아뭉갤 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쟈빌론은 어처구니를 잃어버렸다. 성가셨다. 그냥 무시할까? 일순간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저딴 것에 깔리긴 싫고.'

날아오는 말에 깔려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터다. 자신은 소드마스터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충격은 받아야 할 거다.

그럼 원래부터 욱씬거리던 두통이 잠깐이나마 더 심해지겠지. 그건 싫다.

'이놈은 저 말을 처리한 다음에 곧바로.'

꽈득!

쟈빌론은 데미안을 향해 찔러가던 검을 멈추었다. 거두었다. 거두는 기세 그대로 위쪽을 향해 휘둘렀다.

오러가 실린 섬광이 날려오던 말 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촤악-!

날려오던 군마 시체의 허리가 단숨에 잘리며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쟈빌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검풍으로 흩날리는 핏물을 흩어 버리며 검의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아래로 내리그었다. 데미안을 향해서였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쟈빌론의 주의력이 아주 잠깐 교란된 사이. 쪼개진 말의 커다란 몸통 뒤쪽에서, 뜻밖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훕!"

이 순간만을 노리고 미친 짓을 벌인 남자, 라키엘이었다.

그가 말과 함께 날려온 기세 그대로 쟈빌론을 덮쳤다.

손을 뻗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력을 실어서. 아주 찰나의 틈을 보인 쟈빌론의 뒤통수를 향해서. 맹렬하게.

휘둘렀다.

찰싹!

라키엘의 호빵 같은 손바닥이 쟈빌론의 뒤통수를 찰싹 때렸다. 쟈빌론이 움찔했다. 라키엘이 외쳤다.

"내 손으은! 약손! 에헤이이야↗!"

그 순간.

딩동!

[<내 손은 약손 (Lv.3)> 스킬이 발동됩니다.]

[환자 : 쟈빌론의 두통이 가라앉습니다.]

상큼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동시에 쟈빌론의 표정이 변했다.

"엇?"

뜻밖에 내주어 버린 빈틈. 아주 조금의 살기조차 없는 하찮은 시도였기에 오히려 감지하지 못했던 기습. 그렇게 얻어맞은 뒤통수.

한데 아프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제나 신경을 헤집는 듯하던 두통이 싸악 날아갔다.

시원했다. 상쾌했다. 후련했다. 그리웠던 감각. 성자 군의관의 손길이었다.

...그래, 이 맛이야.

쟈빌론이 무의식중에 미소 짓는 순간.

후욱...?

돌연, 그의 검에서도 오러가 싸악 걷혀 사라져 버렸다.

132화. 습관이라는 이름의 약점 (2)

"어?"

쟈빌론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보다 살짝 더 떨리는 눈동자가 힐끔 움직였다. 아래로 내리 베고 있던 자신의 검날을 향했다.

없다.

오러가 없어졌다.

검날에 찬란하게 맺혀 있던, 지금도 그래야 할 오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째서?

'...왜?'

검을 내리치던 도중에 오러가 불 꺼지듯 사라지다니. 너무나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등극한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라키엘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빙고!'

쟈빌론의 뒤통수를 찰싹 때리고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발동하고서.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 라키엘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무리한 착지 때문에 시큰거리는 무릎 도가니의 통증을 참아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공, 성공이다.'

방금 자신이 했던 짓.

내 손은 약손 스킬.

그걸로 쟈빌론의 두통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면 쟈빌론이 오러를 잃을 것이라 예상했다.

언제부터? 처음 쟈빌론을 진맥해서 편두통을 알아냈을 때부터였다.

'아마 쟈빌론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자신에게 두통이 어떤 의미인지. 태어날 때부터 달고 살아야 했던 두통이 자신의 검술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건지.'

하지만 나는 안다.

놈에게 두통이 어떤 의미인지.

'그건 바로, 루틴.'

라키엘의 눈이 번득였다. 루틴. 때론 별것 아닌 것처럼만 여겨지는, 일상의 습관. 하지만 때로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

쟈빌론의 검술에서 두통이 그런 요소였다. 처음 진맥을 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쟈빌론이 스스로 말한, 자신의 두통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쟈빌론은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이미 두통을 앓고 있었으니까. 검을 휘두르는 모든 순간에 두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마나하트를 처음 개방했을 때도, 단계별로 경지를 높여 갈 때도, 그 모든 순간에 두통을 참고 있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달고 살아야 했던 두통. 그래서 인생의 일부가 되어 버린 두통. 검술 훈련의 모든 순간에도 함께했던 두통. 그래서 언제나 악으로 깡으로 참아야 했던 통증.

그 통증이 루틴이 된 것이었다. 그걸 참으며 악을 쓰는 과정과 심리 상태 자체가 루틴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에조차도 그랬을 거야.'

그래서였다.

두통과 그것을 참는 독기.

그 자체가 쟈빌론이 지닌 검술과 마나심법의 일부가 되었다. 고스란히 스며들어 구성요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쟈빌론은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두통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으니까. 남들이 숨을 의식하고 쉬지 않듯이, 태어날 때부터 앓았던 두통을 참으며 지내는 것은 그에게 항상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모르고 있었을 터다. 지금에야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두통의 아픔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렇겠지?'

라키엘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쟈빌론의 당혹감이 커졌다.

'...이게, 무슨!'

그는 오러가 사라진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그의 검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러를 지니고 있었다면 상대의 방어를 가르고 육신을 찢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아앙-!

데미안이 부러진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쟈빌론의 내리친 검과 데미안의 검이 격돌하며 강렬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데미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버틸 만했다.

"흡!"

그는 충격을 흘려 냈다. 검날을 옆으로 기울였다. 쟈빌론의 검이 쇠 긁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깨를 스치고 아래로 지나갔다. 그 순간, 데미안의 검이 위로 반원을 그리며 솟구쳤다.

원래의 온전한 검이었다면 거추장스러운 길이 때문에 구사하지 못했을 초근접 상황에서의 임기응변. 하지만 지금 데미안의 검은 잘려서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했다.

스칵!

"...긋!"

반쪽짜리 검날 끄트머리가 짧은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쟈빌론의 턱끝을 스쳤다. 소드마스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채기가 났다. 자존심에는 더욱 큰 상흔이 새겨졌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지금!'

더 몰아붙여야 한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당황했을 때. 약간이라도 흔들렸을 때. 기세를 몰아서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한다. 그래야 실낱같은 생존의 희망이나마 이어 갈 수 있다.

'그래야... 전하도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카카카카카캉-!

폭풍 같은 연격!

데미안의 반쪽 검날이 쉼 없이 번득였다. 짧아진 검날이 유리할 수 있는 극단적인 초근접 거리를 유지하며. 더욱 품으로 파고들며. 거의 안길 듯이 돌진하며.

찌르고, 가르고, 베었다.

찍고, 치고, 후렸다.

걸고, 찢고, 잘랐다.

그 모든 연속 공격이 호흡 한 번을 내쉬기도 전에 모조리 이어졌다.

짐승이 사냥감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듯이,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듯이, 그렇게 몰아쳤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이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쟈빌론은 소드마스터니까. 물론 공격을 몰아친 데미안도 그걸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망치십시오!'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이 틈에 도망치라고. 당신이라도 무사해야 한다고. 그게 내 임무라고. 눈빛으로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도망치긴커녕 오히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

야 이 미친 황태자야. 내가 시간을 끌어 주고 있잖아. 그런데 왜 도망을 치질 못하니, 왜. 조금 전에도 쓸데없이 돌아와서 싸움에 끼어들더니,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건데. 혹시 갑자기 자살 마려운 거야? 그런 거야?

데미안은 눈빛으로 욕설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길은 데미안의 폭풍 같은 연격에 아주 잠깐 흔들리며 두 발짝 물러선 쟈빌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찰나에 생겨난 빈틈. 계산하고 기다리며 노렸던 균열. 탈출의 희망이 그곳에 있노라 여긴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쟈빌론은 소드마스터니까. 그런데 오러만 잠깐 잃었다고 내가, 데미안이,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당황은 잠시일 뿐. 당혹감도 아주 잠깐의 바람일 뿐. 찰나의 흔들림이 가라앉으면 쟈빌론은 금방 어마어마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게 소드마스터니까. 놈은 지금 단순히 오러만 잃었을 뿐, 그 외의 검에 대한 이해도, 마나의 운용 능력, 검술 테크닉 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테니까.

'즉, 지금 쟈빌론은 주포를 잃은 탱크와 똑같은 거지. 포를 못 쏘게 되었다고 탱크가 무력한가? 아니. 기동성과 장갑은 여전하지. 게다가 기관총도 남아 있을 거고.'

그것만으로도 탱크는 숨을 곳 없는 개활지에서 마주친 보병에게 악몽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 지금 쟈빌론도 마찬가지다.

오러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데미안을 압도할 수 있다. 놈이 당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데미안은 순식간에 짓뭉개질 것이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그래서였다.

'지금...!'

쟈빌론이 아주 잠깐 흔들린 지금.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돌진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임기응변치고도 위험한 시도니까. 뒷목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을 무사히 넘기려면 해야 한다. 각오를 다졌다. 더욱 힘껏 땅을 박찼다.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세 걸음 떨어진 거리. 쟈빌론을 향해 겨냥했다.

그리고 외쳤다.

'방출!'

딩동!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 주십시오.]

'전부 다!'

써클 슬롯을 발동했다.

슬롯에 가득 담아 두었던 물질을 모조리 쏟아내겠노라 외쳤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유독성 매연> 15리터를 방출합니다.]

키이이이잉-!

써클이 힘차게 회전했다.

슬롯에 담겨 있던 물질, '유독성 매연'이 모조리 손끝으로 모였다.

아까 화재를 피해 달아나는 내내 격하게 이어 왔던 호흡, 그러는 와중에 조금씩 들이마셔야 했던 시커먼 유독성 연기였다.

그렇듯 알차게 차곡차곡 모아둔 일산화탄소와 유독가스 덩어리가 한순간에 방출되었다. 아니, 발사되었다.

쟈빌론의 얼굴을 향해.

투퍼어어엉-!

"...!"

쟈빌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폭발적으로 방출된 시커먼 유독가스가 그 모습을 뒤덮었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그냥 매연이 아니다. 화재 때문에 생겨난 각종 유독가스 덩어리다. 그걸 기습적으로 얼굴에 덮어썼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반사적으로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

충분하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끼거나, 호흡 곤란을 겪을 테니까. 도망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될 테니까.

"왕녀님! 지금!"

라키엘은 안전한 탈출 계획의 마지막 퍼즐을 장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뛰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런 이쪽의 신호를 본 걸까.

금방 응답이 왔다.

투두두두두-!

왕녀 아델린과 근위대 기병 10여 기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미리 약속된 계획 그대로였다.

왕녀에게 죽은 군마와 자신을 던지게 하고. 쟈빌론에게 내 손 약손 스킬을 써서 오러를 없애고. 슬롯의 유독가스를 방출해서 시간을 벌고. 마침내 구조대(?)와 정확한 타이밍의 접선까지.

"설마, 이 상황을 전부 계획한 겁니까? 그 짧은 시간에?"

데미안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경악했다. 나란히 달리는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이 인간이 지닌 잔머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문득 피어난 아득한 의문에 휩싸였다.

라키엘이 힘겹게 웃으며 외쳤다.

"후, 후욱! 숨... 차서 대답... 할 힘도... 없... 후욱! 허억!"

왕녀 일행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길어야 5초?

그만큼만 더 뛰면 된다. 왕녀의 말에 올라탈 수 있겠다. 라키엘은 희망을 품었다. 바로 뒤에서 섬뜩한 물음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해서, 그토록 숨 가쁘게 날 버리고 떠나시겠다고?"

"...!"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숨결. 속삭이는 듯, 혹은 짓씹는 듯,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쟈빌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섬찟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쐐애액-!

뭔가가 날아왔다. 너무나 빨랐다. 식별할 틈도 없었다. 관자놀이를 거세게 얻어맞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뻐걱!

"...!"

팔꿈치였다.

소드마스터의 힘을 실은 팔꿈치가 날아와 무방비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세상이 휙 돌아갔다. 아니, 고개가 돌아갔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뛰던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전하!"

아득하게 먼 곳의 외침처럼 들리는 데미안의 목소리. 순식간에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기절하면 끝장인데.

진짜로 답이 없는데.

안 되는데.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절박한 위기감이 치밀었다. 한데 대응할 힘이 없었다. 암담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때였다.

- 황태자 전하? 이제부터 변장 마법을 시전하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기억의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누구? 황궁의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목소리 같은데. 아, 그럼 이건....

'황도를 떠나 앙부아즈로 올 때....'

당시에 궁정마법사가 해주었던, 바로 그 당부다.

한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 당부가 떠오르는 걸까. 의문과 상관없이 기억 속의 자네티스 경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 제가 시전하여 드릴 변장 마법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풀리지가 않을 것입니다. 하오나 단 하나의 경우만은 지극히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바로, 기절할 정도의 물리적 충격을 받는 상황입니다.

...아,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즉시 변장 마법이 해제될 것입니다. 덕분에 한 번 정도는 변장 마법이 충격을 흡수해 주며 기절하는 신세는 면하겠지만, 대신 정체가 탄로 나게 되겠지요. 그것이 득이 되든, 실이 되든 말입니다.

...맞다.

기억난다. 그런 말도 했었다.

기절할 정도의 타격이라. 듣고 보니 어쩐지 딱 지금 내 상황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변장 마법이 풀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츠즈즛...!

뒤통수에서 찌릿, 하고 감전되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따끔한 자극이었다. 흐려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극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목덜미를 지나, 등줄기를 따라, 사지로 흐르고, 다시 정수리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마침내.

...츠크팟!

섬광이 번득였다. 충격 때문에 변장 마법이 풀린 걸까.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의식이 솟구쳤다.

정신이 온전히 깨어났다. 기절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떴다.

"...어."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것은, 이쪽을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쟈빌론의 모습이었다.

왜 그런 걸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자 군의관... 그대가... 그대가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고...?"

이쪽을 향해 중얼거리는 쟈빌론. 그의 충격에 빠진 눈동자가 돈까스 망치로 라식 수술을 받은 듯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133화. 폭발적 성장 (1)

'허허. 들켰다.'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쪽을 망연자실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쟈빌론. 그의 표정을 보니 지금 상황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성자 군의관... 그대가... 그대가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고...?"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볼살. 충격을 받은 걸까. 눈꼬리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극적인 표정이라 절로 뻘쭘(?)해질 지경이었다. 마치 막장 아침 드라마의 절단신공 현장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랄까.

'변장 마법이 풀렸구나.'

재빨리 시선을 움직였다. 손부터 살폈다. 리한 군의관으로 변장하고 있는 동안 나름 익숙해졌던 통통한 손등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병약하고 새하얗게 깡마른 손등이었다.

그게 알려주는 사실은 명확했다.

방금 쟈빌론에게 맞았던 일격. 원래는 이쪽이 단박에 기절하는 것이 당연했을 일격. 그 엄청났던 충격을 이쪽 대신 변장 마법이 받아낸 거다.

소중한 택배를 보호하는 뽁뽁이처럼 충격을 흡수하며 뽁, 터져서 사라진 거다.

그러니까 변장이 풀려 원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린 거겠지.

'이젠 어떡하지? 일단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내 원래 신분을 이용해서 이 상황을 모면할 각이 있을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라는 신분. 그게 지금 쟈빌론에게 통할 것인가.

답은 알 수 없다, 였다.

'쟈빌론 이 인간, 워낙 미친놈이라서.'

잘 풀리면 다행인데. 이쪽의 신분에 쫄아서(?) 물러나 주면 참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순순히 그렇게 반응해 줄 거라는 기대가 별로 들지 않았다.

아니, 최악의 경우엔 인질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럼 기껏 균형을 유지하던 앙부아즈의 내전은 망하는 거지. 반란군이 승리할 거야. 그럼에도 마젠타노 황실이 좀처럼 개입하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펼쳐지겠지. 게다가 나는 황제의 눈 밖에 나 버릴 거고.'

제대로 민폐를 끼치는 셈이다. 황제에게 팽 당하게 될 판이다. 그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튀자.'

쟈빌론이 멘탈을 수습하기 전에 움직이자. 그 생각에 땅을 박차며 일어나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은 소드마스터의 힘이 실린 타격력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기절하지 않고 훌륭하게 버텨 내었습니다.]

'...음?'

난데없이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급박한 와중에 뭔 소리인가 싶었다. 괜히 바쁠 때 걸려온 대출 안내 스팸전화처럼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한데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그 생각을 빵긋 바꾸어야 했다.

[통상적으로 일반인의 신체는 소드마스터가 가하는 타격력을 절대로 버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신체에 걸려 있던 변장 마법의 도움을 받아, 이 타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버텨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분명 행운의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당신의 경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심장에 새겨진 아스라한 심법이 이러한 특별한 경험적 자산을 능동적으로 분석, 학습하였습니다.]

[분석과 학습 결과,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이 막대한 외부의 타격을 흡수하여 신체적 피해를 무마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아스라한 심법에 새로운 옵션 - 'HP 변환'이 개방됩니다.]

'뭐?'

HP 변환?

듣자마자 느낌이 빡 하고 왔다.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며 옵션 내용을 확인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HP 변환 - 옵션 발동 시 그동안 오장육부로부터 후원받아 비축한 HP를 당신의 실질적 생명력으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에 사용할 HP의 양은 임의로 설정할 수 있으며, HP가 생명력으로 변환되는 비율은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과 함께 효율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현재 변환 비율 = HP 10 : 생명력 1), (현재 당신의 생명력 : 210 / 300)]

"...."

미쳤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라키엘은 옵션 내용을 읽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얻은 이 옵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 어떻게 쓰일 수 있을 것인지. 그게 지금 상황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전부.

모두.

그림이 그려졌다.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어떤 대응을 하면 유리할 것인지. 자신이 지니게 된 옵션들.

선택의 폭에 들어와 있는 요소들. 그것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조합할 방법까지.

모조리 다.

그려졌다.

흐리멍덩한 대략적인 그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청사진보다도 선명한, UHD를 넘어서 8K 화질의 따귀를 왕복으로 후려칠 만큼의 선명한 그림이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더는 쟈빌론에게서 도망칠 필요가 없겠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쟈빌론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묘한 확신이 생겨났다. 확신 속에서 자신감이 태어났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다음 순간, 쟈빌론의 이글거리듯 짓씹는 목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을 때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것은.

이전과는 달리 어깨를 흠칫 움츠리지 않은 것은. 오히려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대는, 어째서 날 속였지?"

고개를 들었다.

쟈빌론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그가 악귀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단순한 노여움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성자 군의관, 아니,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그대는 왜? 어째서? 내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지?"

"...."

"말해 봐. 어째서 날 속였던 건지. 단지 날 농락하기 위해서였나? 그대에게 호의를 품고, 곁에 두어 친우로 삼으려던 내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던 것인가? 정녕, 그랬던 건가?"

"...."

가만히 보니 쟈빌론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설마 울먹이는 거?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지켜보자니 진짜였다. 적어도 이쪽을 허물없이 좋게 봐 주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던 듯했다.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는 거겠지. 친근하게 여겼던 마음의 온기만큼 화가 나고, 마침내 끔찍한 불길로 바뀌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저 장단에 맞장구를 쳐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라키엘은 태연하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불난 집에 휘발유를 드럼통째로 쏟아붓듯 대꾸했다.

"호의는 개뿔. 일개 왕국의 반란군 수괴 따위가 뭐? 황태자인 나를 상대로 호의? 곁에 두고 친우로 삼아? 미친 거 아닌가."

"...뭐?"

"이봐. 정신 차려. 아직도 내가 리한 군의관으로 보이나?"

"...."

"내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리를 잘라서라도 평생 곁에 두겠다고? 내 참.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이봐요. 당신, 그거 정신병이야. 집착증이라고."

"그건...."

이쪽의 급발진(?)에 놀란 걸까. 혹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걸까. 쟈빌론이 그답지 않게 입만 간신히 뻥긋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놈의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채워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즉, 성공이다. 이 수법이 진짜로 먹혀들어 가고 있다. 조금 전에 그렸던 그림대로 차곡차곡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부스터를 넣어 보자.

"변명은 됐고. 더 매달릴 거야?"

"...뭐요?"

"여기서 더 추해질 거냐고."

"그게 무슨...."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 괜히 급도 안 되면서 친한 척하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행여나 어디 가서 나와 이야기라도 나눠 봤다는 자랑 같은 것도 가급적 자제하고."

"...."

"그러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진심으로 생각해 줘서 하는 소리야."

"...."

쟈빌론의 이글거리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해졌다. 눈빛도 섬뜩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당연한 일이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라는 당부 뒤에 따라붙는 조언은 언제나 사람을 빡치게 하는 신묘함을 발휘하니까.

즉, 쟈빌론은 이쪽의 의도적인 도발에 풍성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딱 바라던 바였다.

이놈은 애초에 통제가 안 되는 놈이니까. 어차피 이미 서로 선을 넘어 버린 상태니까. 이쪽도, 놈도 물러날 곳이 사라진 상황이니까.

이럴 땐 차라리 예측 가능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편이 좋다.

"그대는 정말이지...."

이윽고 돌아오는 쟈빌론의 대답도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소름이 좍 돋을 정도였다.

"어리석소. 안타깝소. 우리의 결말이 이렇지는 않길 바랐는데."

스르릉!

그가 검을 늘어뜨렸다. 동시에 살벌한 위세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쪽을 보는 눈동자에는 이제 노골적인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이래서, 뒤를 감당할 수 있겠어?"

"물론."

저벅, 저벅.

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극히 차분해서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를 입꼬리에 걸었다.

"왕국군 요새에서 이 거리에 있는 그대의 얼굴을 구분할 이가 있을까? 아니. 없을 듯한데."

"...."

"왕녀 아델린? 왕국군 근위대? 전멸시키면 목격자도 없어질 테고."

"...."

"그러니 그대가 맞이할 운명은 달라지지 않을 거요. 설령 그대의 정체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라 하여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테지."

"내 다리를 자르려고?"

"물론."

"...."

"제국이 그대를 찾으려 혈안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소."

"어떤 자신?"

"그대를 내 곁에 끝까지 감추어 둘 자신. 그러다 일이 틀어질 때면 이 왕국을 넘어서 제국까지 무너뜨릴 자신."

적어도 쟈빌론의 저 말은 허세가 아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안다. 놈은 소설 마검황에서 저 말을 진짜로 실천해 버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당신, 미쳤군. 미쳤어. 정말로 그런 짓을 벌일 생각인가?"

짐짓 두 걸음을 물러났다. 약간은 질린 얼굴로 쟈빌론에게 대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연기력이 놈에게 먹혀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쟈빌론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쪽이 나약한 모습을 비치자마자 놈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노골적으로 흉험한 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의 약점을 찾아낸 맹수 같은 눈동자. 이쪽을 명백한 사냥감으로 지목한 몸짓.

놈의 검 끝이 조금 더 땅을 향해 늘어졌다. 전신의 근육이 살짝 이완되는 게 보였다. 그

것은 명백한 공격 임박의 징조였다. 예감이고 확신이었다.

확신은 곧 현실이 되었다.

쟈빌론의 검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쐐애액-!

"...!"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는 하단 베기. 소드마스터다운 깔끔한 선제공격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일부러 이끌어 낸 상황이었다.

오히려 웃었다.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쟈빌론에게 의도적인 폭언을 퍼붓는 틈에 몰래 꺼내 들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며 마나를 주입했다.

츠즈즈즈... 지이잉-!

방패, 만년설이 마나에 반응하며 전개되었다. 반투명한 한기의 방벽이 전면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라키엘은 속으로 외쳤다.

'격침불가!'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② : 격침불가를 발동합니다.]

[격침불가가 발동되었습니다. 이제부터 5분 동안, 마나써클의 굳건한 내구력이 당신의 신경계를 보호합니다. 옵션 발동이 끝나는 시점까지 당신은 어떠한 충격을 받아도 절대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지 않고서 버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격침불가 효과 종료까지 남은 시간 : 4분 59초]

콰드득!

전신의 신경계가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느낌이 왔다.

앙부아즈로 오기 전이었던가. 왕녀 아델린의 담석을 치료했던 나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담석을 없애주기 위해 무려 500번의 충격파를 맞아가며 버텨야 했던 나날이었다.

그 끝에 얻은 격침불가 옵션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5분 동안은 기절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할 수 있어!'

아까는 변장 마법 덕분에 쟈빌론의 공격에도 기절하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격침불가 옵션에 의지하리라.

라키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쇄도해 오는 충격에 대비했다.

전경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만년설 한기 방패에 체중을 실었다. 굳건해졌다. 그 순간, 쟈빌론의 하단 베기가 만년설을 강타했다.

터컹-!

"...!"

순간 온세상이 하얗게 번쩍.

시야 가득 별이 보였다.

생각보다 엄청난 충격이 의식을 후려쳐 왔다. 전신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하지만 기절하지 않았다. 맹렬한 피격의 순간 격침불가의 옵션이 신경계를 보호해 주었다. 의식을 기절의 구렁텅이로부터 건져 냈다.

물론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커억.'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눈앞에 시뻘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현재 당신의 생명력 : 130 / 300]

단 일격.

고작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며 생명력이 쑴펑 깎였다. 그러나 라키엘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또 다른 옵션을 곧바로 발동했다.

'HP 변환!'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③ : HP 변환을 발동합니다.]

[현재 변환 비율 = HP 10 : 생명력 1]

[변환에 사용될 HP의 양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7,400]

'1,700!'

외쳤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700 HP가 변환됩니다.]

[170 생명력이 보충됩니다.]

[현재 당신의 생명력 : 300 / 300]

화아악!

온몸에 파스를 붙이는 듯한 시원한 감각. 신체 말단의 모공 하나까지 빠짐없이 탄산을 들이붓는 듯한 후련함.

어질어질하던 느낌이 한 방에 날아갔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흔들리던 눈빛도 삽시간에 맑아졌다.

"역시."

계산대로다. 그렸던 그림이 맞았다. 오늘, 어쩌면 정말로, 놈을 잡을 수도 있겠다. 확신했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후려친 쟈빌론. 놈을 향해 상큼하게 방긋, 웃었다.

"또 기절 못 시켰네? 소드마스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막상 맞아보니까 별거 아니네?"

"...!"

쟈빌론의 검 끝이 흠칫하며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134화. 폭발적 성장 (2)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다. 아무리 맞아도 죽지 않는다. 심지어 생명력이 계속 빵빵하게 유지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치트키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내 몸이.

치트키가 되었다?

"에이, 쯧. 이거 맞아 보니까 별거 아니네. 소드마스터 이런 거였네, 쯥."

"...!"

라키엘의 능청스러운 목소리. 더욱 태연한 눈동자가 빙긋 눈웃음을 그렸다.

쟈빌론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지?'

이상했다.

성자 군의관.

아니, 마젠타노의 황태자.

원래는 저놈의 다리를 단숨에 베어 버리려 했다. 마침 장소도, 상황도 적당했다. 발루아 요새와 제법 거리가 멀었다.

평원 곳곳을 휘감은 화재와 매캐한 매연 때문에 시야가 좋지 못했다. 아마도 요새의 왕국군 놈들은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관측하지 못하리라.

그러니 이 상황을 제대로 목격한 자는 황태자의 호위, 그리고 왕녀 아델린과 왕국군 근위대뿐. 그들만 제거하면 된다.

그러면 황태자건 성자 군의관이건, 자신의 전리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게 될 것이다.

'아니, 설령 안다고 해도 상관없어.'

여차하면 마젠타노 제국마저 쓸어버리리라. 자신의 조국은 강력하니까. 앙부아 민족은 위대하니까.

조국과 민족의 저력을 십분 발휘한다면 거대한 제국이라 한들 무너뜨릴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였다.

서슴없이 검을 휘둘렀다.

정말로 단칼에 두 다리를 베어 버리려 했다. 물론 황태자가 나름 방어를 시도하긴 했다.

냉기를 펼치는 마법 무구? 방패?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컷 막아 보라지. 그렇듯 애처롭게 발악해보라지. 오히려 코웃음만 나왔다.

하여 조금은 놀라야 했다.

황태자의 냉기 방패가 자신의 검격을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코웃음은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방어에 성공한 것은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였을 뿐.

'두 번의 행운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꿀꺽.

쟈빌론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그의 시선이 라키엘의 전신을 훑었다.

없다.

보이지 않는다.

지금껏 이 손에 죽어간 놈들이 숱하게 버둥거리며 보였던 일상적이고도 당연한 반응들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방금 공격을 막아내며 반드시, 분명히, 필연적으로 입었을 타격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버거워서 내뱉는 헐떡임? 없었다. 방어 후의 충격에 의한 근육의 경련? 아예 없었다.

일말의 현기증의 기색도, 고통을 참아 내려는 표정의 일그러짐도, 작은 호흡의 떨림조차도 감지되지 않았다.

즉, 그러니까, 너무나 멀쩡했다!

그래서 말이 안 됐다!

'어떻게?'

작심하고 내지른 공격이었다. 비록 자신이 까닭 모를 이유로 오러를 발현할 수 없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검의 위력은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은 소드마스터였다.

검을 다루는 기예.

검에 대한 이해도.

마나의 운용에 대한 철학.

모두가 최상급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여 있었다. 그러한 정수가 깃든 일격이었다.

한낱 말라깽이 황태자 따위가 막아내고 버틸 만한 일격이 아니었다. 막아 낸 후에 저렇듯 태연한 낯빛을 내보일 일격은 더더욱, 절대로 아니었다!

'정말로 어떻게?'

쟈빌론의 눈꼬리가 가늘어졌다. 분명히 자신이 모르는 농간이 있을 터. 그러니 저토록 태연할 수 있을 터.

"이봐, 쟈빌론 씨. 그거밖에 못 해?"

"...."

"약하잖아. 맵지가 않잖아. 소드마스터라며."

"...."

"아니, 난 또 소드마스터가 검만 휘두르면 땅을 가르고, 파도를 자르고, 절벽을 뭉개고, 그런 초인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직접 보니까 좀 아닌데? 그냥 허세였네?"

"...."

"그러니까 자아, 이번엔 실망시키지 말고 제대로 한번 가봅시다. 응? 자자. 화이팅."

탕탕!

라키엘이 보란 듯이 손바닥으로 만년설을 탕탕 쳤다. 살랑살랑 눈웃음까지 날렸다.

마치 처음 배우는 검술에 허둥거리는 신출내기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쟈빌론은 그 의도를 너무나 잘 알았다.

"...."

수준 낮은 도발이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도발에 응했다.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빡쳐서(?)였다.

'...그 잘난 주둥이를 짓뭉개 주마!'

투칵-!

생각과 돌진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마음이 검을 이끌었다. 살의가 공격 경로를 정하였다.

불과 호흡의 끝자락이 입술에 닿을 찰나에, 쟈빌론은 이미 라키엘을 덮쳐 가고 있었다.

쐐애액!

일점에 집중된 찌르기!

'온다.'

라키엘의 눈이 빛났다. 그의 오감이 극도로 확장되었다.

물론 그는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의 동작을 따라잡지도, 100% 간파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럴 역량 자체가 안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스라한 심법이 있었다.

키이이잉-!

마나써클이 포효했다. 세차게 회전했다. 주위의 마나를 끌어당겼다. 흡수하고, 증폭했다.

증폭한 마나를 전신으로 실어날랐다. 근육과 근막에 증폭된 마나가 깃들었다. 신경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시각과 촉각, 청각이 한계치까지 활성화되었다.

그토록 민감해진 감각. 덕분에 쟈빌론의 공격 시점을 대략적으로는 간파할 수 있었다. 공격 방향도 어림짐작으로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여기!'

콰가각!

왼쪽,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몸을 70도 틀었다.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 피벗턴을 했다.

그대로 자세를 낮추었다. 만년설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마나를 투입했다.

츠즈즈즈!

만년설의 냉기 실드 범위가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거의 몸 전체를 다 뒤덮을 정도로. 시간당 100mm 소나기가 쏟아져도 몸에 빗물 한 방울 튀지 않게 막을 수 있을 듯했다.

물론 쟈빌론의 찌르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콰창!

예리한 찌르기가 만년설의 냉기 실드를 때렸다. 순간 실드가 거의 깨질 뻔하다가 버텨 냈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팔을 때려 왔다. 어깨를 짓눌렀다. 그걸 느끼는 순간 뒤로 몸을 던졌다. 넘어지며 아예 굴러서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읏!'

라키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치가 콱 조이는 기분이었다.

입으로는 별거 아니네 어쩌네 도발을 했지만, 역시나 이런 찌르기 한 번을 막아 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격은 찌르기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 온다.'

투팍!

쟈빌론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내리치기?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만년설을 치켜들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공격에 곧바로 반응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았다.

'경혈 스캐닝!'

외쳤다.

쟈빌론을 주시했다.

딩동!

[진맥 스킬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을 발동합니다.]

[경혈 스캐닝 옵션이 Lock-on 대상을 포착하였습니다.]

[대상이 성공적으로 Lock-on 되었습니다.]

키이잉-!

신속한 알림음과 함께 시야가 변했다.

쇄도해 오는 쟈빌론의 몸 주위로 밝은 외곽선이 생겨났다. 그와 함께 쟈빌론의 몸속 경혈의 배치가 낱낱이 보였다.

그 속에서 흐르는 기혈의 위세와 순서, 강약, 조화까지, 전부 한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보인다!'

라키엘의 눈이 번득였다. 그 순간, 그가 만년설을 위가 아닌 정면 우측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쟈빌론의 위로 치켜들었던 검이 좌하방으로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내리치기는 페이크. 실제 공격은 좌하단에서 우상방으로 올려 베기!'

경혈 스캐닝으로 보이는 쟈빌론의 몸속 기혈의 움직임. 그 모든 흐름이 답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답을 따라 움직였다.

'이쪽!'

답을 내밀자마자 채점(?)이 이루어졌다.

콰아앙-!

1톤 포터가 와서 부딪치는 것 같은 충격!

'...거헉!'

이거다. 제대로 막아 냈다. 라키엘은 수 미터나 날려 가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일순간 이쪽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쟈빌론과 눈이 마주쳤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 이쪽이 번번이 공격을 간파하고 막아 내는 게 이해가 안 되겠지. 게다가 이렇게,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완벽하게 회복을 해 버리는 건 더더욱 이해가 안 될 테고.

'HP 변환.'

날려가는 와중에.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되뇌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③ : HP 변환을 발동합니다.]

[현재 변환 비율 = HP 10 : 생명력 1]

[변환에 사용될 HP의 양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현재 당신의 생명력 : 190 / 300]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5,700]

'1,100!'

기름 주유건, HP 변환이건 남자는 만땅!

호기롭게 외쳤다.

화아악!

[1,100 HP가 변환됩니다.]

[110 생명력이 보충됩니다.]

[현재 당신의 생명력 : 300 / 300]

온몸이 상쾌해졌다. 뼛속 가장 깊은 골수에서부터 넘치는 활력이 솟아났다.

방금 두 번의 공격을 막아 내며 입었던 데미지가 싹 날아갔다. 이쪽의 보는 쟈빌론의 눈빛에서 어처구니도 싹 날아갔다.

그 눈빛을 받으며 사뿐하게 착지했다. 갓 뚜껑을 개봉한 탄산수처럼 보글보글한 눈빛을 쟈빌론에게 던져 주었다.

이쪽은 멀쩡하다고.

그것밖에 못 하느냐고.

조금 더 분발(?)해 보라고.

진심으로 격려의 정성이 담긴 도발의 마음을 담아서, 한쪽 눈꺼풀만 찡긋.

"...!"

콰앙-!

쟈빌론이 더욱 일그러진 얼굴로 땅을 박찼다.

일반인이라면 반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속도로, 살의의 끝자락마저 읽어 내지 못할 현란한 패턴으로. 맹공을 퍼부어 왔다.

콰앙-! 투컥! 콰직! 츠컹!

'...긋! 억! 익! 긥!'

매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 냈다. 경혈 스캐닝 덕분에 현란한 기교에 속지 않았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반응속도를 올렸다.

이제 4분 남짓 남은 격침불가 옵션으로 기절하지 않고 버텨 냈다. 공격을 받은 뒤엔 HP변환 옵션으로 생명력을 빵빵하게 채웠다.

그러면서 오히려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으읏! 그윽!'

쾅! 콰텅!

숨 쉴 틈조차 없이 날아오는 공세. 그 속에 과거 기억의 편린이 얽혔다. 시위 현장이 떠올랐다.

끝부분을 여러 갈래로 쪼개놓은 대나무창. 방패와 보호구 사이를 뚫고 눈을 찌르기 위해 만들었던 악랄한 시위 도구.

그런 것들을 막아 내던 때가 떠올랐다. 날아오는 화염병을 보며 목청 높이던 때도 떠올랐다.

물론 방패를 다루던 경험만 믿고서 무작정 전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딩동! 딩동!

[당신은 극한의 전투 상황에서 아스라한 심법의 옵션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효율적으로 생명력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의 운용 수준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7]

"...!"

숨 막힐 듯이 빠른 전투의 흐름.

그 속에서 상세한 내용까지는 확인할 틈도 없었다. 다만, 그 후에 따라오는 오장육부의 환호성만은 귓가에 뚜렷하게 울렸다.

[오장육부가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을 이루며 극한의 상황을 버텨내는 당신에게 진심 가득한 환호와 성원을 보냅니다.]

[심장 : 오오! 업그레이드! 써클이 더 팍팍!]

[허파 : 허! 팍! 허! 팍!]

[대장 : 우리 몸뚱이 오늘 활약 미쳤지 말입니다?]

[간장 : 입 벌려 글리코겐 들어간다!]

[위장 : 탄수! 더 많은 탄수화물을!]

[심장이 날뛰고 있습니다.]

[허파가 더욱 많은 산소를 전달합니다.]

[소화기가 효율적인 운동능력 향상을 위해 혈류량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간에서 생성된 폭발적인 영양 에너지가 아스라한 심법으로 증폭되어 근육으로 전달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생존과 승리를 향한 강렬한 열망을 응원하며 2,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6,000]

화아악!

[아스라한 심법의 급진적 레벨업에 의하여 옵션 기능이 함께 향상됩니다!]

[<써클슬롯>의 흡수와 방출 딜레이가 줄어듭니다!]

[<격침불가>의 운용시간이 1분 연장됩니다!]

[<HP 변환>의 변환 비율이 상승합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메시지의 홍수.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HP 후원.

덕분에 계속해서 채워지는 생명력!

'...할 수 있어!'

라키엘의 눈이 번득였다.

더욱 힘껏 만년설을 들어 올렸다.

터커어엉-!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 소드마스터 쟈빌론. 신들린 듯이 방어하며 좀비처럼 버텨 내는 일반인 라키엘. 둘의 치고 막는 대결이 휘몰아쳤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계속해서 상승했다.

절세의 소드마스터를 맞이하여 내던진 도발적 시도. 그 과감한 확신과 계산 속 혈투가 라키엘의 폭발적 성장을 불러오고 있었다.

135화. 폭발적 성장 (3)

투커엉-!

반응한다. 반사적으로. 막아 낸다. 튕겨 나간다. 세상이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견뎌 낸다.

"...그읍!"

숨이 턱 막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드마스터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 냈다. 만년설의 냉기 실드가 거의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했지만, 그럼에도 팔꿈치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어깨 관절이 덜렁덜렁해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 같았다.

현기증과 함께 생명력 또한 쑥 떨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딩동!

[당신은 소드마스터의 공격을 또 한 번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신체에 가해진 물리적/마나적 충격을 아스라한 심법이 효율적으로 흡수하여 해소, 당신의 에너지로 저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유니크한 경험이 아스라한 심법의 급진적 성장을 촉진합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거듭 방어를 성공할 때마다 심장이 쿵, 쿵, 날뛰었다. 단순히 폭발적인 운동량을 소화하고 있어서? 거칠게 풀무질하듯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울릴 때마다 메시지가 울렸다. 그것은 혈투의 북소리이자 성장의 종소리였다. 심법의 진화를 알리는 웅혼한 울림이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8]

[마나 증폭률 : 230%]

[스킬 전용 옵션 : ① 써클 슬롯 / ② 격침불가 / ③ HP 변환]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3,000]

[현재 보유 중인 HP : 6,000]

쿠웅! 쿠웅!

성장을 알리듯 거듭 날뛰는 심장. 오장육부의 환호성.

[오장육부가 당신의 분투를 응원하며 1,0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7,000]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과 함께 HP 후원이 실시간으로 들어왔다. 가히 쏟아진다고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을 양이었다.

'감사! 거듭 감사!'

라키엘은 착지하며 안전하게 몸통을 보호했다. 대신 궁둥짝을 희생했다. 신체 중에서 그나마 빵빵한 부위인 궁둥이를 쿠션(?) 삼아 뒤로 굴렀다. 그렇게 오장육부의 쏟아지는 후원에 알찬 리액션으로 보답했다.

동시에 귓가로 쏟아지는 오장육부의 박수 소리. 힘이 났다. 더욱 용기를 얻어 HP를 과감하게 투자했다.

'HP 변환!'

딩동!

1200 HP를 쏟아부었다.

방금 일격을 막아 내며 쑴펑 깎였던 생명력이 가득 회복되었다. 일순간 흐려졌던 시야가 말끔해졌다. 잠깐 멍해졌던 머릿속이 맑아졌다.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만년설을 들어 올리는 팔뚝에 활력이 살아났다.

꽈악!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일어났다. 고개를 들었다. 달려오는 쟈빌론이 보였다. 아니, 돌진해 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살기.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치솟는 자신감이 소름을 압도했다.

동시에 외쳤다.

목덜미에 혈관이 돋아나도록. 돋아난 혈관 속 적혈구가 날뛰는 감각을 고스란히 담으며.

"들어와!"

쉰 목소리로 포효했다.

쟈빌론이 화답하듯 검을 치켜들었다. 만년설을 마주 치켜들었다. 마나 써클을 거세게 회전시켰다.

키이이이잉-!

혈투를 감당하며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아스라한 심법.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출력으로, 더욱 증폭된 마나를 만년설에 쏟아부었다. 정제된 마나에만 반응하는 냉기의 방패가 화답했다.

이전보다 1.2배 드넓어진 냉기 실드로.

이전과는 비교 불가의 두께로.

프츠즈즛!

"...!"

커지는 쟈빌론의 눈초리.

그 직후 엄습해 오는 격돌!

콰즈걱!

"...긋!"

감당할 만하다. 이젠 날려 가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덜 빠진다. 쟈빌론도 그런 이쪽의 성장을 알아차린 걸까. 놈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라키엘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어때! 이만하면 이제 그 집착, 버릴 때 안 됐나?"

재빨리 입을 놀렸다.

쟈빌론의 연속 공격이 이어지기 전에. 그 사이의 틈을 이용해서. 놈의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다.

물론 쟈빌론은 쉽게 낚이지 않았다. 놈은 이쪽의 외침에도 묵묵부답으로 검을 휘둘러 왔다.

콰텅!

"...!"

여전히 엄청난 일격이었다. 만년설이 더욱 튼튼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막을 때마다 0.1초 정도는 영혼이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그의 공격이 점점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이쪽에게 반격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걸까. 아예 대놓고 수십 가지 패턴을 연계하며 공격을 쏟아부어 왔다.

'이래서는 당해.'

아무리 아스라한 심법으로 기민하게 반응해도, 경혈 스캐닝으로 공격 의도를 예측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한계가 찾아오리라.

상대는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쟈빌론의 공격을 오로지 방어로만 버틴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래서였다.

'내가 방어로만 버티는 데에 한계가 오는 거라면... 쏟아지는 공격을 단순하게 만들어야겠지!'

라키엘은 그러한 일념으로 입을 멈추지 않았다. 쟈빌론의 검이 매서워질수록 그의 도발적 외침도 더욱 매서워졌다.

"그런데 그쪽! 왜 그런 거짓말을 하며 지냈지? 응?"

콰쾅-!

"으큽!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다는 날 말이야! 그때 그쪽이 내질렀다는 찌르기!"

"...."

콰작-!

"그읏, 그거! 사실은 단순한 실수였던 거 아닌가!"

"...!"

콰아앙-!

"...컥!"

이번엔 좀 셌다. 하마터면 만년설이 깨질 뻔했다. 라키엘은 재빨리 HP 변환을 사용하며 생명력을 채웠다. 고개를 들었다. 폭풍처럼 공세를 취하던 쟈빌론이 검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다시 한 번 푹.

찌르듯 물었다.

"사실은 단순한 실수였잖아. 댁이 아버지를 원망한 건 사실이었지만, 미술에 대한 꿈을 접어야 했기에 증오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잖아. 안 그래?"

"...그게, 무슨 소리지?"

"진실을 들추는 소리."

"...."

쟈빌론의 입이 다물렸다. 그만큼 눈빛은 더욱 흔들렸다. 라키엘은 소리 없이 새하얗게 웃었다. 언젠가 소설 마검황에서 보았던 쟈빌론의 회상. 후회. 실수로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스스로 짊어졌던 거짓의 멍에.

그걸 떠올렸다.

입에 담았다.

"당신은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어. 그저 처음으로 잡아 보는 검이 어색했을 뿐이지. 또한, 자신의 재능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래서 자신의 엉성한 찌르기가 얼마나 날카로울지를 몰랐던 거야.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조차도, 모두 그랬지."

"...."

"그래서 일어난 단순한 사고였어. 찌른 당신은 자신의 동작이 그렇게 깔끔하고 재빠를 줄 몰랐고, 당신의 아버지는 아들이 생전 처음 잡아 본 검으로 그런 위력의 찌르기를 구사할 줄은 예상조차 못 했고."

"...."

"결국 타이밍이 어긋났지. 안 그래? 아들이 엉성하게 찌르면 그걸 막아 내는 시범을 보이려던 아버지가, 사고로 가슴을 찔려 버린 거야. 그것도 너무 깊이."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알아?"

쟈빌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경악했겠지.

소름이 돋았겠지.

혼자만의 비밀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라키엘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은 그를 이쪽으로 붙잡아 두어야 하니까. 그래야 데미안이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오직 데미안만이 쟈빌론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이 오늘 쟈빌론을 잡을 유일한 가능성이니까. 또한....

'데미안이 각성하지 않을 방법이기도 하니까.'

오로지 이쪽이 쟈빌론의 공격을 감당해야 한다. 가장 큰 위험을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 한다. 데미안이 집중공격에 노출되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지 않게 하려면, 그 위기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각성해 버리는 것을 예방하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조금 미안하지만.'

적이라지만 어린 시절의 끔찍했던 사고, 트라우마, 상처, 그걸 언급하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이쪽이 죽을 판이다. 자칫 데미안이 각성하여 세상이 불구덩이에 씹어 먹힐 판이다.

라키엘은 독한 마음을 다졌다.

입을 열었다.

"모종의 경로를 통해 알았지. 당신이 자신의 그 실수를 일부러 고의였던 것처럼 말한 사실도. 그렇게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 내려 했고, 그걸 수단으로 삼아 주위에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심어 왔다는 사실 또한."

"...그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어. 자신을 원망까지 할 필요가 없었어. 고의가 아니었으니까. 사고일 뿐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당신, 아직 늦지 않았어."

"거기까지!"

"...!"

투콰앙-!

무지막지한 검격이 날아왔다. 간신히 막아 냈다. 그러나 치켜든 만년설 뒤에서 라키엘은 시리게 웃었다.

'됐다.'

쟈빌론이 흥분했음이 느껴졌다. 검격이 강력해졌지만, 그만큼 단순해졌다.

그러니 됐다.

'이젠 데미안, 너만 다시 일어나면 되니까 서두르라고, 좀.'

자신이 방어를 전담하고, 데미안이 반격을 담당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유일한 승리 공식이리라. 라키엘은 그러한 희망으로 눈길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데미안이 있었다.

아프다.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쓰러져 있던 데미안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잠시 기절했던 건가.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정신을 잃기 직전, 황태자를 모시고 함께 탈출을 시도했더랬다. 왕녀 아델린과 왕국 근위대 기병을 향해 마주 달려가고 있었더랬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기세가 느껴졌던가.

'쟈빌론.'

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격히 쇄도해 왔다. 황태자를 노리고 있었다. 하여 자신이 먼저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뒤돌아서며 그를 막아섰다. 충격을 흘려낼 겨를조차 없었다. 결국, 한 번의 검격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것을 대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눈을 떴다.

참으로 꼴사납게도.

"하."

웃음이 나왔다.

흘러나온 웃음의 무게만큼 무력감이 엄습해 왔다. 그 무게를 가까스로 치워 내듯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보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쟈빌론도 있었다.

"...."

황태자를 연이어 후려치는 쟈빌론. 그 사나운 공세를 겨우겨우 막아 내며 버티는 황태자. 신기했다. 기이했다. 소드마스터의 공세를 연거푸 막아 내는 황태자라니. 상상한 적 없는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지극히 흉흉하고 위태로운 광경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황태자의 기적 같은 방어가 연달아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데미안에게는 아니었다.

'쟈빌론, 저자의 오러가... 조금씩 살아나려 하고 있어.'

느껴졌다.

까닭 모를 이유로 오러가 사라졌던 쟈빌론의 검. 그 속에 차츰 희미한 광휘가 깃들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오러 특유의 살기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아직은 희미하지만.

간신히 흔적만 느껴질 따름이지만.

아주 천천히,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이대로 둔다면 불과 1, 2분 이내로 오러가 완벽히 되살아날 듯했다.

그러면 황태자는 끝장이다.

만년설이 아무리 튼튼해도. 황태자가 아무리 기적 같은 방어술을 선보여도. 소드마스터의 오러는 애초에 방어가 불가능하니까. 오직 같은 오러로만 맞서고, 막아낼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움직여야 해.'

데미안은 떨리는 무릎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서 황태자를 도와야 한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새삼스러운 결의가 가슴을 채웠다.

그만큼 의문 또한 떠올랐다.

'어떻게?'

황태자를 도울 것인가. 어떻게 저 소드마스터와 대적할 것인가. 물론 답은 알고 있었다.

'그걸, 해야 할까.'

숨을 몰아쉬었다. 크레모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당하며 무력감을 맛보았던 뒤로 자신은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남몰래 뼈를 깎는 시간을 쌓았다. 그동안 얻어낸 깨달음 또한 있었다. 비약적인 강력함을 발휘할 새로운 마나 운용 기법이었다.

"...."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솔직히 망설여진다. 그러나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다. 해내지 못하면 황태자를 지켜 내지 못할 테니까. 이대로 모두가 끝장이 날 테니까.

그러니까... 하자.

까드득!

데미안의 어금니가 굳게 다물렸다.

뼈를 깎는 각오로, 마나하트를 불태우는 결의로 데미안이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 흐르던 마나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차츰 더 난폭하게, 정상적인 것과 반대인 역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크그그그그...!

라키엘이 결코 원하지 않았던, 그래서 끝까지 잠재워 두고 싶었던 소설 마검황 최강 최흉의 기법. 역혈의 신공 '리베르사 심법'이 데미안 카이엔의 가슴 속에서 탄생의 포효를 터뜨렸다.

136화. 역혈의 마공 (1)

아프다.

언제나 눈을 뜨는 순간마다 아팠다. 탄생의 몸부림. 축복의 고통. 세상 가득 쏟아지면서도 오직 내게만 비추어지지 않는 태양을 원망하듯, 그렇게 항상 아팠다.

물론 지금도, 나는 그렇다.

"...."

데미안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전신의 마나가 흐르는 모든 경로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지독한 충격의 후유증. 소드마스터의 일격을 막아 내며 온통 진탕된 마나의 흐름.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소한 후유중 따위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으드득!

'...이번에는 같은 꼴을 겪지 않아.'

이를 갈았다. 다짐했다. 크레모에서 겪었던 것과 같은 무력감. 그런 기분을 두 번 다시는 느끼지 않겠노라고. 자신을 향한 의문과 자괴감에 빠지는 경험을 하지 않겠노라고.

그래서였다.

크레모에서 미노타우로스와의 격전을 치른 뒤부터였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황도의 별궁으로 돌아간 이후부터였다. 매일 뼈를 깎는 시간을 보냈다. 지닌바 검술의 바닥을 모두 긁어냈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훈련의 나날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피를 토했다. 전신의 마나가 바닥이 날 때까지. 그러고도 한 걸음 더. 한계의 선을 찢고, 넘어서고, 남모를 혹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던가.

사고를 겪었다.

지나치게 탈진한 나머지 마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정상적으로 흐르던 마나가 일순간 역류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연했다. 마나의 역류는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니까. 처음 검을 쥐고 마나 연공법을 익히는 어린아이가 제일 먼저 지도받는 기초 상식이니까.

마나가 역류하면 안 된다.

역류하는 마나는 제어할 수 없는 힘을 불러온다. 그 힘이 스스로의 마나하트를 침범하는 순간, 마나하트는 버티지 못하고 깨어진다. 십중팔구 죽는다. 운이 아주 좋아야 살아남을 수 있되, 대신 폐인이 되어 평생 남이 떠주는 죽만 받아먹어야 한다.

자신도 그렇게 배웠다.

처음 검투장에 들어왔을 때, 검을 쥐는 법조차 제대로 몰랐던 시절, 자신에게 투박한 마나심법을 알려주었던 고참 검투사의 가르침이었다. 물론 그는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검투장 구석에서 이름 없이 쓸쓸히 죽었지만, 그가 알려준 가르침만은 아직껏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 덕분이었다.

의도치 않았던 마나의 역류를 자각한 순간, 섬뜩했다. 서둘러 마나의 흐름을 수습했다. 다행히 늦기 전에 마나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이 되었다. 후유증에 대한 염려였다.

- 이 등신 같은 애새끼야. 내가 말했지. 마나가 잠깐이라도 역류하면 안 된다고.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며칠은 앓아누워야 할 거다. 너 따위 놈이 그런 꼴이 난다고 해서 여기서 누가 챙겨 줄 줄 알어? 이런 검투장에서?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등신같이 정신줄 놓다가 뒈지지 말고.

문득 떠오르는 거친 목소리가 기억 속의 서랍을 두드렸다. 그렇다. 후유증. 잠깐이었지만 잃었던 마나의 통제력. 일순간 역류했던 마나. 그것 때문에 걱정이 들었더랬다.

요즘 황태자 전하는 앙부아즈 왕녀의 담석을 치료하느라 바쁘던데. 그만큼 곁을 잘 지켜줘야 하는데. 이대로 후유증 때문에 앓아누워 버리면 호위에 공백이 생길 텐데. 나머지 특근대원들에게 잘 부탁해야 할까.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후유증이 없었다.

조금도 없었다.

앓아눕는 일도, 현기증을 느끼는 일도, 심지어 사소한 근육통을 겪는 일마저도 없었다. 그냥,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멀쩡했다. 자신이 알던 상식과 달랐다. 이상했고, 신기했다.

그때부터였던가.

'마나의 역행....'

크그그극...!

데미안은 자신의 마나하트에 집중했다. 그 속에 담긴 마나의 도도한 흐름. 그 방향에 조금씩 간섭했다. 정상적으로 흐르려던 마나의 줄기를 붙잡았다. 되돌렸다. 천천히. 신중하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역행시키기 시작했다.

콰그극!

마나가 역행하며 증폭되기 시작했다. 아팠다. 끔찍할 정도로.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처음 실수로 마나 역행을 겪은 뒤, 아무런 후유증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던 뒤부터 매일 조금씩 시도해보았던 것처럼. 더 나아가 지금껏 시도하지 않은 단계까지.

데미안은 성큼 걸음을 내딛는 심정으로 마나의 역행을 밀어붙였다.

'괜찮을까.'

한편으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주 잠깐은 마나 역행을 시켜도 후유증을 겪지 않는 자신의 신체.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모르는 미지의 영역은 더 있었다.

'아직... 마나 역행을 완전히 한 바퀴를 돌려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저 잠깐.

아주 일순간.

눈 한 번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딱 그 정도.

그만큼의 시간이 자신이 시도해본 마나 역행의 최대 지속 시간이었다. 그 이상은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두려웠고, 불안했다. 거기서 더 오래 마나를 역행시켰을 때 생겨날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아주 잠깐의 마나 역행이면... 그 사이에 폭증하는 마나의 위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원래 자신이 내던 위력의 1.5배의 검격을 구현할 수 있었다. 놀라웠다. 이게 자신의 재능인가 싶었다. 하여 딱 그 정도에 만족했다. 아까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소드마스터와 대적하며 다시금 한계를 느끼기 전까지는, 분명.

'....'

1.5배로는 안 된다.

잠깐의 마나 역행으로는 턱도 없다.

그저 소드마스터 앞에서 간신히 버둥거리며 버틸 수만 있을 뿐. 결국엔 꼴사나운 몰골로 정신을 잃는 수모만 겪어야 했을 뿐.

'그러니까....'

끝까지 가보자.

오늘은 더 과감하게.

한계의 선을 찢으며.

데미안의 주먹이 굳게 쥐어졌다. 그의 전신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마나의 역행이 더욱 활발해졌다. 신체의 모든 마나가 순리를 역행했다. 태초의 지시를 거부했다. 진리를 깨부수고, 섭리를 짓밟았다.

이내 막을 수 없는 급류가 되었다.

...콰아아아-!

거침없이 몰아쳤다. 가로막는 관문을 깨부쉈다. 계곡을 휩쓰는 급류처럼. 평원을 집어삼키는 노도처럼. 산맥을 뒤덮는 해일처럼. 역행하는 마나의 도도한 흐름이 거대해졌다. 아득해졌다. 밀어닥쳤다.

마나하트를 향하여.

최초의 완전 역행을 완성하는 최후의 걸음을 내디뎠다.

...!

소리도 없었다.

섬광도 없었다.

그저 어두웠다.

거대한 충격과 분열.

영혼을 깨부수는 아득한 외침.

누구나 말하는 상식처럼 마나하트가 깨어지는 충격인 것인지. 순리를 역행하며 치르는 참담한 대가인지. 그 결말로 다가오는 필멸의 고통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데미안은 일순간 보아야 했다.

...두근.

태초의 끝자락처럼 어두컴컴한 심연.

그 속에서 무언가가 맥동하고 있었다.

심장?

알 수 없었다.

그저 붉고, 또 검붉었다. 한없이 느리고도 거대하게 맥동했다. 그 아득한 파동이 자신을 엿보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었다.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속삭임? 그러했다. 그것은 필연적이기에 소름 끼치는 귓속말이었다.

너는 세상에 던져진 나의 씨앗.

씨앗은 마침내 불꽃으로 자라날지니.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을 집어삼킬지니.

그날에야 나는 비로소 너를 휘두르며 환히 웃으리라.

'....'

무슨 개소리야.

데미안은 정신을 차렸다. 동시에 쓰라리게 웃고 말았다. 처음 시도해 보는 마나의 완전한 역행. 무리한 시도가 안겨 준 충격. 그 서슬에 일순간 정신을 깜빡 잃었던가 보다. 그래서 잠깐 터무니없는 개꿈을 꾸었나 보다.

'하여간 이건....'

너무 아파서 문제다. 마나가 흐르는 전신의 혈맥도, 마나하트도 당장 찢기고 깨질 듯이 아팠다. 그러나 찢기지 않았다. 깨지지도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느껴보는 미증유의 거친 파동이 온몸을 휘감아 오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힘의 예감이며 미지의 경지가 선사하는 풍경이었다.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마나의 흐름을 전신으로 느끼며, 데미안은 사납게 웃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평원의 불길도, 어지럽게 얽히는 왕국 근위대와 반란군 친위대의 격전도. 한없이 몰아치는 쟈빌론과, 그걸 힘겹게 막아 내는 황태자의 모습까지도, 모두.

그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데미안의 가슴속에서 아득한 포효가 메아리쳤다.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마나의 역행. 위태롭고도 거대한 발걸음이 탄생시킨, 새로운 심법의 탄생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크아아아!"

쟈빌론이 외쳤다.

그의 검이 세차게 움직였다. 목표물을 때렸다.

콰아앙-!

"...그읏!"

목표물이 흔들렸다. 만년설의 냉기 실드가 거의 깨질 뻔했다. 그 뒤에서 버티는 라키엘도 비틀거렸다. 어느새 그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데미안, 아직이야?'

눈길을 힐끔 움직였다. 아직 저쪽에 있는 데미안. 여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변화가 없었다. 아까 맞은 자리가 그렇게나 아팠던 걸까. 그래서 여전히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 건가.

'이러면... 나가린데!'

라키엘은 다급해졌다.

이건 계산과 조금 달랐다. 데미안이 타격을 받고 쓰러진 건 알고 있었지만, 회복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래서 난감했다. 큰일이었다. 점점 초조해졌다.

'격침불가 옵션 발동 시간이... 이제 1분도 안 남았으니까.'

그는 시야 한쪽에 떠올라 있는 타이머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표기된 시간은 27초. 아스라한 심법의 전용 옵션인 '격침불가'의 남은 발동 시간이었다.

즉, 저 시간이 끝나면?

쟈빌론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설령 만년설로 공격을 막아도 충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기절할 것이다. 그러면 끝이다. 아스라한 심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경혈 스캐닝으로 아무리 공격을 예측해도. 설령 HP 변환으로 좀비처럼 버텨도.

'기절하면... 끝이겠지.'

꿀꺽!

목울대가 초조하게 출렁였다. 다시 한 번 데미안 쪽을 살폈다. 여전했다. 가슴속 가득 암운이 드리워졌다. 이건 예상과 달랐다. 과감하게 쟈빌론의 어그로를 끌며 대결을 시도할 때 그렸던 그림과도 너무나 달랐다.

'어떡하지?'

흐르는 식은땀 속에서.

어느새 거칠어진 호흡 속에서.

라키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뒤집을 꼼수를 궁리했다. 하지만 상황이 만만하지가 않았다. 쟈빌론 또한 이쪽이 궁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디 한눈을 파는 건가!"

"...!"

투콰앙-!

쟈빌론의 검격이 더 강해졌다. 만년설도 아슬아슬하다. 간신히 버텨내는 순간, 라키엘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쟈빌론 이놈, 벌써 오러를 되찾고 있어.'

확실했다.

놈이 만년설을 후려치고는 그 반동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장검. 그 검날에 희미한 섬광이 맺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진 없던 섬광이었다. 바로, 오러의 전조였다.

'벌써?'

놈의 두통을 루틴으로 삼아 발동되던 오러. 내손 약손 스킬로 두통을 없애주며 오러도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저놈은 두통이라는 루틴이 빠진 상태에 벌써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역시 천재라는 건가.'

문득, 소설 마검황에 나왔던 어떤 언급이 떠올랐다. 모든 소드마스터는 천재라고 했던가. 애초에 천재가 아닌 자는 절대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하였던가.

당시에 그 부분을 읽으며 나름 개탄(?)했던 기억도 났다. 역시 검의 영역도 재능빨로 먹고 사는 예체능계라고.

그러니....

'당연히 쟈빌론, 이놈도 천재인 거야. 덕분에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오러를 회복하고 있는 거고.'

확실했다.

소름이 돋았다.

만약 놈이 오러를 완전히 되찾는다면, 그땐 끝장이 날 테니까.

'오러는... 만년설로도 못 막아.'

오직 같은 오러로만 막을 수 있다.

그걸 알기에 더욱 다급해졌다.

하지만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투콰학-!

"...크급!"

이번엔 찌르기였다. 어찌어찌 반사적으로 막았다. 만년설에 균열이 생겨났다. 확고하던 자신감에도 금이 갔다. 그만큼 이쪽을 보는 쟈빌론의 만면에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사나운 미소가 배어났다.

"왜 그러지? 이젠 더 못 버티겠는가!"

놈은 이제 아예 정면으로만 공격을 쏟아부어 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잘도 공격을 막아낸 것이 자존심을 건드린 건지, 아예 이쪽의 방어를 기교 없이 힘으로 짓뭉개 버릴 기세로 달려들어 왔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암담했다.

'나는....'

여기서 끝장나기 싫은데.

그냥 잘 먹고 잘살고 싶은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에 내몰린 걸까.

그 순간이었다.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② : 격침불가의 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

설상가상이다.

이제 더는 못 버틴다.

그 생각이 찬물처럼 정신을 일깨웠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소드마스터와 대결하고 있는 상황이다. 뭔가에 홀린 듯이 날뛰다가 뒤늦게 찬물을 팍 덮어쓴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이제 와서 내빼기엔 너무 늦었다!

'데미안! 좀!'

까드득!

이를 갈았다. 만년설을 치켜들었다. 쇄도해 오는 쟈빌론. 그 모습이 급격히 커졌다. 가까워졌다.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도. 광기에 젖은 미소도. 거친 숨결도 모두.

그 순간, 오히려 앞으로 튀어 나갔다.

콰악!

도망칠 수 없다면 역공으로.

'될 대로 돼라!'

...는 심정으로 내질렀다. 한데 그게 뜻밖의 효과(?)를 불러왔다.

"어엇?"

지금까지 이쪽이 오로지 방어 일변도의 거북이 좀비 모드로만 대응했기 때문인 걸까. 그래서 설마 이쪽이 과감한 역돌격을 감행하리란 예상은 못 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검을 미끄러뜨리듯 베어오던 쟈빌론이 아주 일순간, 주춤했다. 그 틈에 과감하게 돌진했다. 만년설을 강력하게 끊어치듯 내밀었다.

터컹-!

"...!"

한 방 먹였다!

만년설의 냉기 실드가 쟈빌론의 손목을 후려쳤다. 놈의 검격이 흔들렸다. 해냈다. 용기가 솟아났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같잖은 수작을!"

거칠게 터진 쟈빌론의 외침. 동시에 눈앞에서 뭔가가 번득였다. 반사적으로 눈길을 들었다. 그 순간 보아야 했다.

"...어?"

오러가 번득이고 있었다. 쟈빌론의 검이 섬뜩한 섬광에 휩싸여 있었다. 완벽하게 복구된 오러였다. 그 벼락이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나 빨랐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나....'

끝장나는 건가.

뒤늦은 자각.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깨달음. 비로소 치닫는 소름. 그 속에 반사적으로 만년설을 치켜들었다. 방어할 수 없을 거라는 절망적 예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터커엉-!

별안간, 면전에서 강렬한 충돌음이 달려왔다. 그러나 치켜든 만년설에는 어떠한 충격도 전해져 오지 않았다. 이상했다. 설마 나, 충격을 느끼기도 전에 죽은 건가.

그 생각을 하며 실눈을 떴다.

덕분에 보고야 말았다.

"...."

불쑥 내밀어진 검이 있었다. 형편없이 잘려서 반쪽만 간신히 남은 검이었다. 그 초라한 검이 쟈빌론의 오러가 깃든 장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무슨...."

쟈빌론의 휘둥그레진 눈도 보였다. 놈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너무나 차분한 얼굴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쪽짜리 검을 한 손으로 쥐고서 내민 데미안이, 그곳에 있었다.

"어떻게?"

쟈빌론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오러가 평범한 검에 가로막혀 있다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오러는 오직 오러로만 막을 수 있는 것이 상식이니까.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뭔지 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소설 마검황에서 이런 거, 나왔으니까.'

떠올랐다.

기억 속 서랍에 꽁꽁 묶어두었던 내용이 뇌리를 비집고 면전에 들이밀어졌다. 그 기억이 알려주었다.

'리베르사... 심법.'

마검황 최강, 최흉의 심법.

그 심법이 지닌 첫 번째 특성.

바로, 자신이 지닌 단계를 뛰어넘어 상위 경지의 실력자를 능히 압도할 수 있는 사기적인 특성.

'...하극상.'

그걸 떠올리는 순간, 지금껏 쟈빌론에게서 느끼던 소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득한 감각이 오싹, 몰아닥쳤다.

137화. 역혈의 마공 (2)

오싹.

날이 서는 낯선 감각.

쟈빌론은 저도 모르게 오싹함을 느꼈다. 어째서?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놈.'

...뭐지.

눈앞에 나타난 흑발의 호위. 아까부터 신기할 정도로 잘 버티며 자신에게 맞서던 놈. 황태자는 놈을 데미안이라고 불렀던가.

그런데 어떻게, 이번엔 이놈이 자신의 검을 막아낸 걸까. 그것도 오러가 서린 검을.

'어떻게?'

머릿속으로 수많은 의문이 치밀었다. 당연했다. 데미안, 저놈의 검에선 오러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으니까.

심지어 반토막짜리 부러진 검이니까. 한데 그걸로 자신의 오러를 막아냈으니까.

상식이 망가지는 기분.

법칙을 부정당하는 기분.

'대체 어떻게?'

불가능하다.

오러는 오직 오러로만 막아 낼 수 있다. 맞설 수 있고, 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저놈은 그 법칙에서 벗어나 반쪽짜리 검으로 이쪽의 오러를 막아냈다. 그러고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채, 태연한 눈길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앞에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도사리고 있는 상대가 아득하게 멀리에 있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까마득한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쟈빌론은 자신이 느끼는 그러한 감정의 정체를 곧 자각해야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내가? 이따위 놈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분노했다. 그럴 리가 없다 여겼다.

'건방진!'

츠칵!

그의 검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를 담고서 데미안의 반쪽짜리 검신을 타고 올라갔다. 목표물은 검을 쥔 데미안의 엄지손가락이었다.

'손가락부터 썰어 주지!'

엄지를 베고, 손목을 가르고, 그 기세를 살려 겨드랑이를 거쳐 목을 대각선으로 잘라내어 버릴 것이다.

막을 틈도, 반응할 찰나의 기회도 없겠지. 당연히 그러하겠지. 놈은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불과하니까. 반면에....

'나는 소드마스터니까!'

...후욱!

쟈빌론의 확신에 담긴 검이 치명적인 사선을 그렸다. 올라갔다. 데미안의 엄지를 향해 섬뜩한 섬광을 토해 냈다. 그리고 튕겨 나갔다.

쩌컹-!

"...!"

순간 쟈빌론은 보았다. 자신의 검이 데미안의 엄지를 베기 직전, 데미안의 손목이 섬전처럼 반응했다.

아주 짧은 흠칫거림. 그 속에 거대한 탄력을 실어 검날을 밀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튕겨 냈다! 오러가 실린 검을!

'이게 무슨....'

쟈빌론의 두 눈이 경악으로 휩싸였다. 황태자를 노리던 검격이 막혔을 때만 해도 설마 싶었다.

그런데 두 번째였다. 거듭 오러가 없는 검으로 오러를 막아 내고, 튕겨 냈다.

그러니 확실하다.

'이놈, 오러 없이 오러에 대적하고 있다고?'

두 번은 우연이 아니다.

승부의 세계에선 더더욱 그렇다.

쟈빌론은 내심 경악하면서도 지금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유를 고민하는 것도 멈추었다.

지금은 결과만 바라보면 된다. 놈은 오러 없이 오러를 막아 내고 있다. 그것만이 사실이다. 그 사실에만 집중해야 한다.

잡념을 버리는 순간부터였다.

잠시 흔들렸던 쟈빌론의 기세가 정돈되었다. 흉험해졌다. 비로소 소드마스터로서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극.

극도로 정제된 동작.

190센티를 넘기는 쟈빌론의 거구가 표범처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낸, 검의 정점에 올라선 자다운 걸음이었다.

걸음이 몸을 이끌고, 몸이 검을 불렀다. 검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이 향하고, 몸이 향하는 곳에 걸음이 있었다.

생각과 검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오러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스카가가가각-!

찌르고, 베었다.

베는가 싶으면 후렸다. 후리다가 치고, 치는가 했더니 찍었다. 걸었다. 저며냈다. 가르고, 후벼 파고, 때리고, 당겨 베며, 양단했다.

단 한 번의 호흡.

찰나에 이루어진 경이로운 연격이었다. 아까 라키엘을 상대할 때에는 자신의 두통을 없애 줄 자를 죽게 할까 싶어 차마 드러내지 않았던 송곳니를, 지금은 마음껏 드러내었다.

한편으로 확신했다.

이겼노라고.

그리고 경악했다.

이건 잘못되었다고.

터컹-!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렸다. 수없이 쏟아진 연격. 그게 단 한 번에 가로막히며 생긴 모든 충격파가 찰나의 순간에 압축되어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 순간, 깨달아야 했다.

"...!"

막혔다. 너무나 턱없이 막혔다.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검날은커녕 오러의 끝자락조차 닿지 못하였다.

쟈빌론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모든 연격을 막아 낸 모습이었다.

그저 귀찮은 파리를 내쫓듯이, 반토막 검으로 단순하게 그려 낸 움직임으로 모든 연격을 가로막은 채였다.

그러고도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이쪽을 보는 데미안의 검은 눈동자.

그 무기질 같은 감정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혼란스러워졌다. 그때였다.

"전하. 죽일까요?"

서늘한 목소리.

데미안이 자신의 뒤에 선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황태자가 다급히 대답했다.

"아니, 생포! 일단 그냥 패!"

"알겠습니다."

비현실적인 대화가 면전에서 오갔다. 듣고 있자니 기도 차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낼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도 않았다.

쟈빌론이 발끈하기 직전, 데미안이 쟈빌론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쟈빌론의 시야 속에서 세상이 번쩍했다.

...!

소리도 없었다.

충격도 없었다.

뭔가가 번득였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컥!"

쟈빌론은 아득한 충격을 느꼈다. 뭔가 위험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반응하긴 했는데. 저도 모르게 오러가 서린 검으로 전면을 방어했는데.

그런데 깨어졌다.

무엇이?

'내 검이... 오러가... 일격에 깨졌다고?'

그는 멍해진 눈길을 들어 올렸다.

강렬한 충격을 받아 뒤로 주르륵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몸. 그리고 허공에 흩날리고 있는 쇳덩이 파편들. 한때 자신이 아끼던 보검이 박살 났다.

수십 조각의 고철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오러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마나의 완전한 순환을 이루어낸 소드마스터만 피워 낼 수 있는 찬란한 파괴적 불꽃. 섬광. 그러한 영광의 증거가 흔적도 없이 짓뭉개졌다.

단 일격에. 오러가 실리지도 않은 반토막 검을 막아 냈다는 이유로. 너무나 허망하게.

'이게... 말이 돼?'

크그그그극-!

10미터 넘게 밀려난 쟈빌론은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그뿐, 이미 그의 보검은 손잡이만 초라하게 남은 상태였다.

단 한 번의 타격에 팔뚝의 근육과 인대가 모조리 늘어났다. 검 손잡이를 간신히 움켜쥔 게 다였다. 격통과 함께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허리도, 하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떨렸다.

'미친... 미친!'

거짓말 같은 악몽이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일개(?) 소드마스터일 뿐이었다. 소설 마검황의 리베르사 심법도, 그 심법의 가장 악랄하고도 사기적인 특성인 '하극상'에 대해서도 까맣게 몰랐다.

그렇기에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나 역행의 첫 포효를 터뜨린 리베르사 심법 앞에, 미증유의 힘을 처음으로 분출하는 데미안의 기세 앞에, 데미안이 발산하는 '하극상'의 특성이 상대보다 무조건 한 단계 상위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차가운 현실 앞에. 그저 무력함만을 한껏 느껴야 하였다.

그러나 쟈빌론은 쟈빌론이었다.

'하지만... 이게 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쟈빌론이 이를 갈았다.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마스터는 단순히 검만 잘 다룬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마나의 운용과 기법에 있어서도 정점에 올라야 가능한 경지였다.

물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쟈빌론 또한 검을 다루는 기법과 별개로, 자신만의 특화된 마나 운용 심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 심법의 특성으로 비롯된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으읏!"

콰앙-!

간신히 균형을 찾으며 비틀거렸던 쟈빌론이 땅을 박찼다. 망가진 근육의 고통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손잡이만 남은 보검을 버렸다. 돌진했다. 데미안을 향해. 맨손을 뻗었다.

그저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모양새?

이판사판이라는 발악?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노리는 바가 있었다.

'이 손으로... 한 번만 붙잡으면!'

된다.

그러면 이긴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모조리 뒤엎을 수 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다. 쟈빌론은 확신했다. 한편으로 자신이 지닌 비장의 무기를 떠올렸다.

자신의 은밀한 무기.

최후의 비기.

그것은 상대와 자신의 신체에 기본적으로 깃든 순수한 마나량을 겨루는 기술이었다. 상대의 몸을 붙잡고서, 마나를 충돌시키는 기술이었다.

그러면?

서로의 순수 마나가 충돌하며 소모된다. 극한의 소모전이 펼쳐진다. 그 끝에, 순수 마나가 먼저 소진되는 쪽의 혈맥이 파괴된다.

그리고 쟈빌론은 그러한 형태의 소모전에 자신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이 지닌 신체의 순수 마나는 무조건, 신체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순수 마나인 것이지. 어떠한 심법으로도 증폭되거나 증가하지 않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신체가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순수한 마나!'

즉, 순수 마나량은 체구의 크기에 비례했다.

한데 자신은?

키가 190이 넘었다. 그게 걸맞은 체격 또한 지녔다. 자신보다 커다란 신체를 지닌 이를 거의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래서였다.

쟈빌론은 최후의 비기에 자신감이 있었다. 어떠한 조건에서건 자신보다 신체가 작은 놈은 이걸로 끝장낼 수 있노라고. 눈앞의 데미안 또한 그렇다고.

확신하며 손을 뻗었다.

'잡았다!'

활짝 펼친 손아귀.

그 맨손에 데미안은 전혀 경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 이쪽의 최후 비기를 전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손이 더욱 가까워졌다. 잡기 직전까지 뻗어 갔다. 쟈빌론의 두 눈에 승리의 열망이 피어났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워워, 스톱!"

"...!"

난데없이 끼어든 목소리. 황태자가 데미안과 자신 사이로 난입했다.

데미안을 붙잡기 직전에 팔을 불쑥 내밀었다. 데미안 대신 이쪽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쟈빌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무슨?"

놀라서 황급히 손을 움츠리려 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어느새 뻗어온 황태자의 손이 이쪽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쉽게 뿌리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망가진 인대와 근육 때문에 힘을 내기가 어려웠다. 황태자의 가느다란 손아귀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 그으읏!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다급해진 쟈빌론이 외쳤다.

이미 심법의 최후 비기를 발동하고 있던 자신이었다. 한번 발동하면 멈출 수 없는 비기였다.

한데 이대로 황태자를 붙들고 있다가는? 본의 아니게 황태자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건 싫었다.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이러는 건가!"

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황태자가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응."

"...뭐?"

"알고 있는데."

"설마, 호위 따위를 대신해서 희생하려고?"

믿기지가 않았다. 황태자가 자신의 비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허풍처럼 들렸다. 한데 하는 행동을 보니 정말로 아는 것도 같았다.

황태자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난데없는 희생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개죽음을...."

선택하는 건지 물으려 했다. 한데 황태자의 대답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희생은 개뿔."

"뭐?"

"희생이 아니라, 댁을 짓뭉개려는 거거든."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황태자가 저렇듯 의미심장하게 웃는 건지. 어째서 난데없이 빨간색 해바라기 씨를 입안에 털어 넣는 건지. 더욱 활짝 웃으며 와작 씹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라고 쟈빌론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뚜와앙-!

"...!"

자신의 190센티미터 이상의 체격에 자신감이 넘쳤던 쟈빌론은, 그래서 체격의 우위를 극대화한 비기를 사용하려던 쟈빌론은, 자신보다 무려 600센티미터 거대해진 라키엘과 졸지에 손잡고 쎄쎄쎄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138화. 내전 종결자 (1)

...까드득!

어금니 사이로 물리는 해바라기씨. 단단한 껍질을 깨는 감촉. 그 속에서 라키엘은 피식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이걸 또 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빨간 해바라기 씨앗.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환상종 전용의 음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걸 먹어야 했던 크레모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엔 우루스에게 맞아 죽지 않으려고 이걸 삼켰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이걸 안 먹으면, 이걸 안 하면, 데미안에게 죽겠지.'

확실하다.

지금 내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서 데미안이 쟈빌론의 최후 비기에 붙잡히게 된다면, 그 이후로 벌어질 일들이 너무나 확연하게 예상이 되었다.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자신의 체격을 활용한 소모전, 엘리전이니까.'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쟈빌론이 일으켰던 숙청과 대전쟁도 떠올랐다.

당시 쟈빌론이 1대 1 대결에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바로, 기존 앙부아즈 왕실에 충성했던 근위대장 이드리스 경과의 결투에서였다.

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승부였다. 장장 이틀 내내 격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에 쟈빌론이 위기에 몰렸다. 상대의 노련함에 작은 틈을 찔렸다. 그 순간, 쟈빌론이 역으로 최후의 비기를 시전했다.

'이드리스 경을 붙잡았지. 맨손으로. 물론 이드리스 경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검을 놓친 쟈빌론이 발버둥을 치려는 거라 여기고는 끝장을 내려 했지.'

그게 이드리스 경의 실수였다.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붙잡은 상대방과 자신의 체내에 있는 순수 마나를 격돌시키는, 지극히 무식하고도 원초적인 기법이었다. 일종의 마나를 활용한 엘리전인 셈이었다.

한데 그게 쟈빌론에게 엄청나게 유리했다.

'사람이 지닌 체내의 순수 마나는, 체격과 정비례하니까.'

쟈빌론의 키는 190센티가 넘었다. 현대 지구에 비해 영양 상태가 좋지 못한 이곳의 사정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구인 셈이었다. 당연히 그보다 커다란 체격의 상대는 찾기가 어려웠다.

이드리스 경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의 작은 방심 때문에 쟈빌론에게 붙잡혔고, 마나 엘리전에 걸려들었으며, 쟈빌론보다 먼저 마나가 소모되었다. 결국엔 전신의 혈맥이 파괴되어 죽었다.

그러면 지금 쟈빌론의 행동을 보자면?

'딱 그때, 이드리스 경에게 최후 비기를 걸던 때와 똑같은 상황이야.'

갑자기 엄청나게 강해진 데미안.

그런 데미안에게 처절하게 당하던 쟈빌론. 놈이 자포자기한 듯이 발악하며 내밀던 맨손. 모든 상황과 정황이 딱 들어맞았다.

'이대론 데미안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럴 거야. 지금 데미안의 상태는... 리베르사 심법을 얻은 듯하니까.'

아니, 그냥 확실하다.

저 위력, 오러조차 없이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압도하는 검격. 거기에 사뭇 파괴적인 분위기까지. 저건 발뒤꿈치로 봐도 리베르사 심법이 확실했다.

그래서였다.

조마조마했다.

데미안이 이대로 완전히 각성의 길로 접어들까 봐.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깨닫게 될까 봐. 아니, 그 전에 쟈빌론이 갑작스럽게 최후의 비기를 발동할까 봐. 정말이지,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설령 리베르사 심법을 발동하고 있더라도, 쟈빌론의 최후 비기는 그 모든 조건을 무시할 거니까. 심법에 의해 뻥튀기가 된 마나가 아닌, 체내의 순수한 마나만을 충돌시킬 거니까.'

그게 무서운 점이었다.

그러면 데미안이라도 꼼짝 못 한다. 어쩔 수 없이 엘리전에 휘말릴 거고, 결국엔 체격의 차이에 짓눌려서 죽음의 위기에 내몰릴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쟈빌론이 죽는다.

나도, 여기 있는 모두가 죽는다.

'왜냐하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위기에 몰리는 순간, 데미안이 완전히 각성해 버릴 거니까!'

그런 사태를 불러올 수는 없다. 그러니까 쟈빌론의 최후 비기를 막아야 한다. 라키엘은 결심하며 해바라기씨를 야물딱지게 씹었다. 목구멍으로 꿀떡 넘겼다. 눈앞의 쟈빌론을 마주 보며 사납게 웃었다.

"무슨...?"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쟈빌론. 이쪽의 팔뚝을 움켜쥔 놈의 손아귀에 힘이 확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눈앞에 시뻘건 경고창이 떠올랐다.

딩동!

[WARNING!]

[당신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환상종의 해바라기 씨앗을 무단으로 복용하였습니다!]

[적절한 안내 없이 본 식품을 복용하였을 시에 급격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복용 후 이상 증상 발생 시, 즉각 의사, 약사, 한의사에게 상담을 받으십시오.]

'...쓰읍, 내가 한의사라니까?'

전에도 똑같은 경고창을 봤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장육부의 난리법석 메시지도 와르르 떠올랐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분별한 식품섭취 성향에 커다란 우려를 드러냅니다.]

[심장 : 야아아! 이 인간 거대화 소리 안 나게 해라아-!]

[허파 : 허! ...프프픍ㅍ픞프핤!]

[대장 : 근데 우리 거대화하면, 제가 담은 끙까도 같이 커지는 건지 말입니다?]

[간장 : 그냥 괄약근도 커져서 못 붙잡았다 그러고 열어 버려!]

[위장 : 이거 거대화 먹방 컨셉 지르면 너튭 조회수 개꿀잼각인데 아ㅋㅋㅋ]

[오장육부가 순식간에 진행되는 거대화를 준비하며 멘탈을 부여잡습니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가 불안정한 거대화 효과를 일으킵니다.]

[당신은 환상종이 아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거대화 효과가 3분으로 제한됩니다.]

[거대화 종료 후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거대화가 끝나는 시점으로부터 120시간(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

소리도 없었다.

충격도 없었다.

모든 것이 거칠게 흔들린다고 느껴지는 순간, 세상이 작아졌다. 아니, 이쪽이 거대해졌다.

뚜와앙-!

"쿠워오!"

절로 터져 나오는 포효성!

기겁해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쟈빌론. 놈이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버둥거리고 있었다. 졸지에 허공으로 훌쩍 들어 올려진 채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쪽의 변화에 아연실색한 얼굴로.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헛숨을 삼켰다.

"...허억?"

쟈빌론은 믿을 수가 없었다. 굉장히 끔찍하고도 고약한 유형의 악몽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거... 이거 뭐야?'

자신의 최후 비기에 대신 붙잡혔던 황태자. 고작 호위 따위를 대신해서 희생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던 황태자. 그랬던 황태자가 거대해졌다. 5미터? 6미터? 그 이상은 충분히 되어 보였다!

'어떻게?'

짐작도 가지 않았다.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대응법 또한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니, 사실상 대응할 방법 자체가 없었다. 자신이 이미 최후의 비기를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놓을... 수가 없어!'

쟈빌론은 이를 갈았다. 황태자의 거대해진 팔뚝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자신의 손아귀. 놓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발동하고 있는 최후의 비기가 흡입력을 발휘하는 탓이었다. 마치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이익! 이이익!"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식은땀이 콸, 콸, 솟아났다. 절망적인 예감이 3번 경추를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끝이다. 이대로는. 망한다!

'아, 안 돼!'

그는 자신의 최후의 비기를 떠올렸다. 체내의 순수 마나를 겨루는 기법. 체격에 정비례하는 승부의 방향. 그런데 지금 황태자는 오우거보다 거대해진 채로 자신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저 의미심장한 웃음의 뜻은 명확했다.

'망했....'

암울한 깨달음이 그의 후두부를 탁 치는 순간, 최후의 비기가 브레이크 박살 난 기관차처럼 바닥을 탁 치며 본격적으로 급발진을 시전했다.

콰아아아아-!

체내의 순수 마나가 모조리 활성화되었다. 동원되었다. 상대, 황태자의 몸을 향해 돌격했다. 그러자 황태자의 체내에 있는 순수 마나도 반응하며 마주 달려왔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쪽보다 몇 배는 거대한 기세로.

콰앙-!

"...!"

바위에 부딪히는 계란이 이런 기분일까. 문틀에 전력으로 충돌 당하는 새끼발가락이 이런 느낌을 받으며 살았던 거구나. 그는 형벌을 감내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반성했다. 셀프 묵념을 헌사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신은 끝이라고.

그 순간 다시 한 번.

콰아앙-!

"...그억!"

왈칵!

벌어진 입에서 핏물 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확실하다. 고작 두 번의 충돌만으로 혈맥이 망가지고 있다. 체내의 순수 마나가 모조리 압살당하고 있다. 이젠 진짜로 한계다. 끝이다.

'나는....'

이루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 나라, 민족을 더욱 영광스러운 자리로 올려놓고 싶었는데. 그 아름다운 선구자의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지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런 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그랬는데.

'후후, 후흐흐.'

웃음이 나왔다. 허망했다. 후련함?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생에 대한 집착이 더욱 타올랐다. 이글거리는 눈길을 들었다. 자신을 대롱대롱 들고 있는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원념 어린 눈길로 쏘아보았다.

라키엘도 그의 눈빛을 느꼈다. 덕분에 잠깐 고민했다.

'쓰읍. 이대로 죽여?'

문득, 마검황 속 스토리가 떠올랐다. 쟈빌론의 최후. 데미안과의 대결에서도 사용했던 최후의 비기. 그러나 데미안이 기지를 발휘하였던가. 덕분에 쟈빌론은 데미안 대신 전투마를 붙잡아 버리고는 최후의 비기를 발동하게 되었던가.

'덕분에 졸지에 이름도 모를 말 한 마리와 순수 마나를 겨루게 됐지. 결과는 물론, 말보다 체급이 작아서 패배했고.'

그렇게 전신의 혈맥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자신의 완수하지 못한 운명을 저주하며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쟈빌론을 계속 붙잡아 둔다면? 놈은 반드시 죽게 될 거다. 소설 마검황에서보다 더욱 확실하게.

'하지만... 쓰읍. 그럴 수가 없겠네.'

마음만큼은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끝장을 내 주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느새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56초]

"...."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 버렸다.

그런데 쟈빌론은 아직도 죽지 않고서 버티고 있었다. 한데 만약 확실하게 끝장을 내겠노라며 놈을 더 붙들고 욕심을 부리다간? 자칫 역공을 당할 각이 보였다.

'만약 놈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놈을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거대화가 풀리면, 내가 당하겠지. 그땐 내가 놈보다 체급이 한참 작아질 거니까.'

심지어 혼절해서 의식마저 잃어버릴 거다.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건 곤란하다. 욕심을 부리다가 어리석게 당하는 건 사양이다.

'뭐, 어차피 벌써 반쯤 폐인이 됐으니까. 이쯤에서 놔줘도 나머지는 데미안이나 왕국군이 알아서 처리할 거고.'

라키엘은 결심했다.

쟈빌론을 떼어놓기 위해 다른 손으로 놈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가 않았다?

"...어?"

떼어지지가 않았다. 놈이 발동하고 있는 최후 비기의 흡착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마치 순간접착제로 붙여놓은 듯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어오, 씨. 큰일 났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51초]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가고.

놈은 끈질기게 안 죽고.

살짝 다급해졌다.

그래서였다.

'떨어져라. 좀 떨어지라고!'

라키엘이 팔을 세차게 들어 올렸다. 더욱 강력하게 내리 휘둘렀다. 팔에 달라붙은 쟈빌론이 휙 딸려 올라갔다. 아래쪽 바닥으로 확 패대기쳐졌다.

콰앙-!

"...커억!"

그러나 놈은 강력하게 패대기만 쳐졌을 뿐, 도통 떨어질 줄을 몰랐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47초]

'어오, 좀! 떨어지라고!'

더욱 다급해진 라키엘의 움직임이 격해졌다. 옆으로 흔들고, 위로 흔들고, 아래로 훅훅 패대기를 치고.

그때마다 쟈빌론의 190센티 가녀린(?) 육신도 옆으로 트위스트를 추었다. 위로 홰까닥 흩날렸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며 온몸으로 멸망의 탭댄스를 추었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떨어져라."

"...컥! 긕! 억!"

쾅! 콰앙! 콰쾅!

"아 좀 떨어지라고."

"그허억...!"

콰콰앙-!

어느새 주위가 조용해져 있었다. 아니, 평원 전체가 조용해졌다.

왕국군 근위대와 반란군 친위대도, 데미안도, 왕녀 아델린마저도, 멍하니 전투를 멈추어 버렸다. 발루아 요새의 왕국군도, 평원 반대편의 반란군도, 모두가 아연실색 망연자실한 눈으로 뜻밖의 참상(?)을 구경했다.

7.9미터 크기로 거대해진 라키엘. 그래서 우뚝 선 광고탑처럼 얼굴이며 표정이며 모든 것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게 된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반란군의 수장이자 극강의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한겨울 북어 먼지 털듯이 나풀나풀 패대기치는 광경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지극히 압도적이고, 또한 초월적인 광경이었다.

139화. 내전 종결자 (2)

"떨어져라. 떨어져. 좀 떨어지라고."

"...큽! 걱! 옯!"

쾅! 콰쾅! 쾅!

패대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귀찮은 듯, 손끝에 묻은 코딱지를 털어 내듯, 그런데 생각만큼 잘 털어지지가 않아서 더 세차게 흔들어 보듯, 그렇게 라키엘의 거대한 팔이 휘적휘적 세차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팔에 찰싹 달라붙은 쟈빌론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땅바닥으로 팍팍 내리꽂혔다. 그럼에도 좀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물론 쟈빌론의 자의는 아니긴 했지만.

'나... 나는... 커억...!'

억울하다.

그저 최후의 비기를 발동했을 뿐인데. 그걸로 흑발 호위를 끝장내려고 했을 뿐인데. 그러다가 난데없이 끼어든 황태자를 잘못 붙잡은 건데. 그래서 떨어질 수 없는 건데. 단지 그뿐인데.

'왜 내가... 이런 꼴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눈물은 눈꼬리에 맺히기도 전에 강력한 원심력과 중력가속도의 가호(?)를 받았다. 방울방울 공중으로 흩날렸다. 그리고 몸뚱이와 함께 바닥으로.

콰아앙-!

"...커허억!"

숨이 콱 막혔다. 뼈가 부러진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전신이 다 아파서 어디가 부러진 건지 도저히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정신적 여유 또한 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황태자의 거대한 팔이 인정사정없이 홱 치켜들렸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당장 죽여...!'

콰앙!

"...줘그헉!"

비참했다. 이런 꼴이 되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나 싶었다. 수많은 이들과 경쟁하고, 암투를 벌이고, 그들 대부분을 제거하고,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나 싶었다. 반란을 일으키고, 더욱 많은 목숨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나 싶었다.

허망했다.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지금까지 자신의 손에 죽어간 이들은 뭐였을까. 자신의 꿈에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알 수가 없다. 다만 실없는 웃음만 흘러나올 뿐.

'흐흐... 흐흐흐...!'

문득, 황태자가 성자 군의관으로 위장하고 있던 때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당시에 자신은 성자 군의관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고, 성자 군의관은 뜻밖의 대답을 꺼내 놓았더랬다.

'오직 누군가의 유혈과 희생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게... 그게... 나라냐고.'

당시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 했다. 너무나 뜻밖이어서. 허를 찔린 듯해서. 내심 당황스러운 심정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대답할 수 있겠다.

이 꼴이 되어 보니까.

막상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으려니까.

이제는, 알겠다.

'원래... 나라라는 게 그런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희생하고 있는 거다. 이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역사에 반역자로 새겨짐으로써,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불명예의 상징이 되는 것으로써.

그렇게 이 목숨을 핏값으로 바치고 있는 거다. 이 나라와 민족에 하나의 이야기를 남겨 주는 거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해석되건 간에 말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쟈빌론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이 향하는 곳. 그곳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자신의 경쟁자가 있었다.

앙부아즈 왕실의 제1 왕위계승자.

왕녀 아델린이었다.

그녀는 경악에 찬 시선으로 라키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믿기지가 않았다. 황태자가 갑자기 저렇듯 거대해진 상황도.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장난감 다루듯이 바닥에 연거푸 패대기치고 있는 저 모습도. 마치, 가장 엉뚱하고도 기이한 취향의 꿈을 꾸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였다.

"...이봐."

툭툭.

그녀가 다치지 않은 쪽 팔을 들었다. 옆에 있던 사람을 툭툭 쳤다. 그녀의 손길에 반란군 친위대 기사가 움찔, 놀라며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왕녀가 반란군 친위대 기사에게 물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거, 진짜가 맞아?"

"그런 것 같은데 말입니다...."

반란군 기사가 얼결에 대답했다. 왕녀가 반란군 기사를 쳐다보았다. 반란군 기사도 왕녀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과 강철 건틀렛을 부딪치며 죽일 듯이 싸우던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싸움이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다.

"내가 보고 있는 저 모습이 정녕코 사실이라면, 이제 다 끝난 듯한데."

"...동감입니다."

반란군 기사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철그렁! 요란하고도 나직한 소리와 함께 기사의 장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스스로 검을 놓은 것이었다.

그 소리가 평원의 나머지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을 일깨웠다.

"...."

철그렁, 철겅.

쟈빌론이 당하는 참상(?)을 멍하니 보던 반란군 기사들이 하나둘, 스스로 검을 놓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내뿜던 말을 진정시키며 말에서 내렸다.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뜻은 명확했다.

더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몸짓, 항복의 의사였다.

왕녀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라키엘의 한쪽 손이 거대한 딱밤을 장전(?)했다. 아무리 흔들고 패대기를 쳐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쟈빌론을 겨냥했다.

'그래. 운전하면서 신호 받을 때, 정차 중에 생각 없이 코 파다가 코딱지가 손가락에 붙어 버릴 때가 있잖아? 그땐 손을 아무리 흔들어도 코딱지가 떨어지지가 않았지. 그럴 땐 이게 최고였거든.'

창문 슬쩍 내리고, 반대편 손 딱밤으로 때려서 코딱지 날리기!

라키엘은 한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쟈빌론이 축 늘어진 채로 함께 딸려 올라왔다. 그런 쟈빌론을 인정사정없이 겨누었다. 딱밤을 장전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끝까지, 힘을 응축시키고, 모으고, 영혼까지 압축했다. 그동안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이 재깍재깍 줄어갔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31초]

'떨어져라, 좀!'

주문을 외우듯 외쳤다.

한계까지 응축한 딱밤의 힘을 개방했다. 아니, 발사했다.

투콰앙-!

"...궵!"

그걸로 끝이었다.

옆구리에 딱밤을 맞은 쟈빌론이 팔에서 똑 떨어졌다. 웅장한 트위스트를 추며 허공을 나풀나풀 날아갔다. 약 30미터 비거리의 아름다운 비행 끝에 1,580도 앞구르기를 선보이며 널브러졌다. 흙먼지가 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쟈빌론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망가진 레고처럼, 혹은 현대미술품 같은 자세로 혼절해 버렸을 뿐이었다.

강대한 소드마스터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그 모습에 발루아 요새의 왕국군이 술렁거렸다. 특히, 요새 관문 감시탑에서 평원의 사태를 지켜보던 국왕 메로뱅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보고 있는 저것이... 정녕 현실이란 말인가...?"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뭔가 잘못되었나 싶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로 사실이었다.

주름진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를 비비고 보아도 그러했다.

'어찌 저런....'

흙먼지 속에 널브러진 남자. 아까 추격전이 시작될 때까지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멀리서도 그가 밝혀내던 오러의 빛은 너무나 찬란했으니까. 그런 오러를 발산할 수 있는 존재는 반란군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쟈빌론.'

감히 자신에게 검을 겨눈 반역자. 그러나 쉽게 꺾을 수는 없었던 소드마스터. 그랬던 쟈빌론이 너무나 무력한 꼴이 되어 쓰러졌다. 심지어, 너무나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인간에 의해서.

국왕의 곁을 지키던 소드마스터, 이드리스 경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믿기진 않사오나, 적어도 환영 마법이나 눈속임은 아닌 듯하옵니다, 전하."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더욱 현실 같지가 않아."

국왕의 목소리도 떨렸다.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인간이 반란군의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을 쥐 잡듯이 패대기쳐서 잡아 버린 이 상황을, 누가 현실적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만약, 한 시간 전쯤에 누군가가 와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라며 감옥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진짜였다.

게다가 저 거대한 인간이... 마젠타노의 황태자처럼 보였다! 그게 제일 문제였다!

'대체 왜?'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걸까. 언제 온 걸까. 무얼 목적으로 저러는 걸까.

머릿속 가득 의문이 백만 가지쯤 떠올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하나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서였다.

국왕 메로뱅거는 지금 확실한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전군, 출진을 준비하라!"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거대해졌건 어떻건 상관없다. 황태자가 왜 저런 모습으로 여기에 나타난 건지도 상관없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밝혀도 된다.

반면, 내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만 끝낼 수 있다. 반란군의 수장이 무너진 지금이 찬스다. 이걸 놓치면 바보다.

"관문을 열라!"

굳게 닫혀 있던 발루아 요새 관문이 열렸다. 진군의 북소리가 울렸다. 그때마다 라키엘의 가슴도 쿵, 쿵, 뛰었다.

"하, 하하...."

해냈다.

곳곳에서 항복의 뜻을 드러내는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 진군을 준비하는 왕국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반란군... 이제 무너지겠구나.'

널브러진 쟈빌론의 모습이 보였다. 강력했던 소드마스터가 허망하게 무너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문득, 소설 마검황 속 설정이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소드마스터는 절대적인 비대칭 전력이었지, 아마.'

그랬다.

현대의 지구로 따지자면 핵무기와 같은 위상을 지닌 존재가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는 오직 소드마스터로만 대적할 수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만약 두 국가가 전쟁을 치르는데 한쪽에 소드마스터가 없다면? 그걸로 그 전쟁은 끝이다. 한쪽의 소드마스터가 상대국의 지휘부에 난입해서 칼춤만 추면 그날부로 지휘부가 몰살될 거니까.

그렇기에 전쟁을 억제하려면 소드마스터를 보유해야 한다.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다. 한데 반란군은 방금,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소드마스터를 잃었다. 반면 왕국군에는 아직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제, 승부의 추가 확연히 기울었다. 그걸 알기에 반란군 친위대 기사들도 항복을 하는 거겠지. 평원 반대편의 반란군도 크게 술렁이는 것일 테지.

"...하아."

한숨이 나왔다. 쌓였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훅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 한쪽의 경고창에서는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이 차곡차곡 줄어들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요란한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오고 있기도 했다.

딩동!

[당신은 소드마스터와 체내의 순수 마나를 겨루는 진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그 진귀한 소모전의 끝에 기적 같은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당신의 마나써클에 특별한 히스토리로 새겨져, 폭발적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더블 써클 Lv.1]

[마나 증폭률 : 400%]

...키이이이잉-!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심장을 둘러싸고 있던 한 줄기의 마나써클이 세차게 회전했다. 포효했다. 두 줄기로 분열했다. X자를 그리듯 교차하며 심장을 둘러쌌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미증유의 강대한 힘이 심장 둘레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힘을 더는 만끽할 수가 없었다. 추가로 떠오르는 축하 메시지도, 보상 알림도, 오장육부의 환호성도,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검붉은 경고 메시지가 다른 알림을 뒤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딩동!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0분 0초]

머릿속에 울리는 경고음.

시야를 온통 점령하는 경고성 메시지.

[거대화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는 인간이 아닌, 환상종 전용의 보조 식품입니다.]

[거대화가 종료되며 당신의 신체에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현재 시점으로부터 향후 120시간(5일) 동안, 당신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굿나잇?]

덜컥!

"...!"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감각.

동시에 전신에서 힘이 풀리는 느낌.

급속도로 세상이 흐리게 보였다. 진군을 준비하는 왕국군의 군단도. 선두에 얼핏 보이는 국왕 메로뱅거의 모습도. 황급히 이쪽을 부축하는 데미안과 왕녀의 손길도. 거기까지 눈에 담았다. 고개가 떨어졌다. 버틸 수가 없었다. 무릎이 꺾였다. 의식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하지만... 괜찮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저 보너스 수명만 벌어 보려 참여했던 내전에서, 이런 식의 활약을 해 버릴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닷새나 기절해 있어야 할 신세가 될 줄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다.

내전은 끝났다.

140화. 내전 종결자 (3)

달그락.

새하얀 접시가 테이블에 놓였다. 접시 위에는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방패 만년설이 놓여 있었다. 먹음직한 향기가 알싸하게 후각 중추를 자극해 왔다.

만년설을 서빙한 시종이 말했다.

"저쪽 신사분께서 계산하신 겁니다."

시종이 가리키는 건너편 테이블. 그곳에 거구의 사내, 쟈빌론이 앉아 있었다. 이쪽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내가 개꿈을 꾸고 있구나.'

그러니까 난 여전히 혼절한 상태인 거다. 거대화의 후유증으로 120시간짜리 풀타임 꿀잠을 즐기는 중이겠지. 그 와중에 이런 개꿈을 만끽하는 것일 테고.

'이게 자각몽, 루시드 드림이란 건가.'

나는 시선을 돌렸다. 묘하게 일렁거리는 꿈속 풍경을 구경했다. 건너편 테이블의 쟈빌론은 가관이었다. 상의는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 하의는 핑크색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런데 머리에는 우주복 헬멧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쟈빌론은 약과에 불과했다.

콰아아아아아-!

별안간 파티장에 헬리콥터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코끼리 사이즈의 거대 말벌, 베르파로스 여왕이 정지비행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등에 탑승한 누군가가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왕녀 아델린이었다.

그녀가 다가오더니 내 뺨을 아침 드라마 스타일로 쫙! 때렸다.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을 감축하는 축하빵이랍니다. 더블 써클 등극을 축하드려요."

"...헐."

"그리고 이건 계산서."

"...."

그녀가 내미는 10미터 길이의 계산서에 실시간으로 글씨가 주르륵 떠올랐다. 한데 그 내용이 범상치가 않았다.

바로, 아스라한 심법의 제대로 된 설명이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더블 써클 Lv.1]

[마나 증폭률 : 400%]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 스킬 등급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등급 상승에 따라 써클 슬롯이 강화됩니다.]

'...뭐?'

꿈속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안내문이 이어졌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써클 슬롯이 강화되었습니다.]

[당신의 마나써클은 독자적인 성장 히스토리에 의한 슬롯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의 써클이 2개로 늘어남에 따라, 슬롯의 개수 또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2번 슬롯>이 개방됩니다.]

[2번 슬롯의 개방에 의해, <슬롯 융합> 기능이 추가됩니다.]

'슬롯 융합?'

처음 들어보는 기능이다.

뭘까.

두근거리는 사이, 설명이 좌르륵 떠올랐다.

[<슬롯 융합>은 각각의 슬롯에 담긴 물질을 섞을 수 있는 기능입니다.]

[예시) '1번 슬롯의 물' + '2번 슬롯의 소금' = '소금물']

[당신도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 도전하세요. 얍얍촵촵 세계 최고의 칵테일 창조자!]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슬롯 융합이라니. 1번과 2번 슬롯의 물질을 자유롭게 섞을 수 있다니. 이건 그야말로....

'사긴데?'

잘만 써먹으면 극강의 사기적인 활용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새로 얻은 옵션 기능에 감탄만 하고 있을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어깨를 턱, 하고 짚어왔기 때문이었다.

"어이, 황태자."

엄청나게 익숙한 목소리. 그런데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 말투. 돌아보니 내 어깨를 짚은 가르딘 경이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턱을 슬쩍 치켜들고선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태자 씨? 왜 대답이 없어?"

"...가르딘 경, 뭐 잘못 먹었어?"

"쯧쯧! 말이 짧다?"

"...."

"내가 잘못 먹긴 뭘 잘못 먹어. 지금 야자타임인 거 기억 안 나시나?"

"...."

"그러니까 자아, 이마빡 대시고."

딱콩!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가르딘 경의 딱밤이 이마를 강타해 왔다. 꿈인 걸 아는데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뭐라 반격(?)할 기회는 없었다.

어느새 가르딘 경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데미안."

이쪽을 보는 데미안은 웃지 않는다.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을 삭제한 영혼은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걸까. 혹은, 절대적 어둠의 존재가 세상에 심은 악의의 씨앗은 저렇게 우는 걸까.

피눈물을 뚝, 뚝.

붉어진 눈동자로 나를 노려본다. 이내 입술을 짓씹듯 나직하게.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 세계에 무슨 짓거리를 한 거냐고."

"...."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

나는 여전히 대답할 수가 없다.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온통 꿰매져 버렸다. 어느새 옆에 나타난 가르딘 경이 봉합용 바늘을 번득이며 웃고 있다. 쟈빌론이 내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고 있다. 왕녀 아델린이 입술로만 새하얗게 웃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피눈물로 나를 응시했다.

"말해 봐. 알고 있었어?"

"...."

이제는 알겠다.

지금 나를 응시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저 눈동자는 데미안의 것이 아니다. 데미안의 내면에 심어진 '그것'이다. 그러니 내게 따지고 있는 거다. 자신을 어떻게 하려는 거냐고. 왜 억누르고 있는 거냐고. 무슨 의도인 거냐고.

'내 의도는 당연히....'

나는 대답하려 했다. 입술을 봉합한 실밥을 뜯어내려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감각. 세상이 기우뚱 기울었다. 아니, 내 목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뒤늦게 뻐끔뻐끔, 입을 열어 보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볼 뿐. 내 목을 자른 상대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마침내 '그것'을 일깨운 데미안이 시리게 울었다. 나도 울었다. 꿈속 세상이 무너졌다. 가장 커다란 벽돌이 떨어져 왔다. 잘린 내 머리를 짓뭉갰다.

"...흐으아악!"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 직후 이마빡에 강렬한 충격을 만끽해야 했다.

빠악!

"어윽!"

"크윽!"

눈앞에 별이 번쩍. 라키엘은 이마를 붙잡고 벌러덩 넘어졌다. 푹신한 침대 시트가 온몸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마가 얼얼한 와중에도 귀를 쫑긋거렸다. 방금, 이쪽과 충돌한 상대 쪽에서 나온 신음 소리가 무척 익숙했는데.

눈동자를 데루룩 굴린 라키엘은 상대를 발견했다.

"...데미안?"

이쪽과 마찬가지로 이마를 감싸 쥔 데미안이 보였다. 방금 이쪽이 갑작스럽게 확 몸을 일으킨 바람에 박치기를 했던 걸까.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이마를 감싸 쥔 손길 사이로 녀석이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어 오고 있었다.

"...."

그 모습에 잠깐 흠칫.

방금까지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스산했던 순간들. 동시에 혼절하기 전의 일들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래, 맞아. 나는 쟈빌론의 최후 비기를 막아내려고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었고, 커졌고, 그 뒤에 기절했지. 그런데 데미안은....'

리베르사 심법을 일깨워 버린 상태였다. 역혈의 마공 리베르사. 소설 마검황 최강 최흉의, 데미안만의 독보적인 심법이자 각성의 첫 단계인 심법이었다.

그럼 지금....

'이 녀석, 설마 각성한 상태인 건 아니겠지?'

이쪽을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는 데미안의 눈빛. 그 눈빛에 아까 꿈에서 보았던 핏빛 눈동자가 겹쳐 보였다.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위험을 감지한 오감이 오싹오싹 깨어났다. 확인을 해봐야 할까.

그때였다.

"으읏, 일부러 이러신 겁니까?"

"응?"

데미안이 원망스러운 듯 물어왔다.

"방금 난데없었던 박치기 말입니다."

"...."

"전 그냥 잠든 전하를 간호하고 있었을 뿐인데, 혹시 저한테 불만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뭐였습니까?"

"어, 그게...."

라키엘은 잠깐 망설이다가 반문했다.

"질문 하나를 하지.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실수로 널 다치게 했다고 쳐. 지금처럼 말이야. 그럼 넌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리 테스트랄까."

"...."

"1번, 상대의 실수건 뭐건 상관없이, 상대를 원망하며 일단 반격부터 하고 싶어진다. 2번, 상해에 따른 보상금을 낭낭하게 뜯어낸다."

"둘 중에 고르란 겁니까?"

"어."

"당연히 2번이지요."

"그래?"

"예."

"다행이다."

"예?"

데미안이 미간을 찡그렸다. 반대로 라키엘은 활짝 웃었다. 반격보다 돈을 뜯어낼 생각부터 한다니. 아직 녀석이 각성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한가롭게(?) 안심만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즈어어어언하아-!"

데미안과 반대편, 그러니까 침대 왼쪽에서 웅장한 바리톤 음계의 외침이 묵직하게 달려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콧구멍으로 들어도 단박에 알 수 있는, 가르딘 경의 외침이었다.

"이렇게 깨어나시다니! 실로 다행입니다, 전흐아아아!"

아예 이쪽을 와락 끌어안을 기세였다. 그럼에도 가르딘 경답게 선을 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쪽이 기절해 있는 동안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한 걸까.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사이에 얼굴 살이 눈에 띄게 빠져 있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라키엘은 쑥스러운 고민을 잠깐 깨물었다. 이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친 데는 없고?"

"예, 전하!"

"그래. 다행이야. 그럼 보고부터 좀 듣고 싶은데."

"예에?"

울먹이던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르딘 경. 그 모습을 보며 차마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이건 내 진심이라고,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오글거릴 것만 같았다. 대신 일부러 피식 웃으며 톡 쏘듯 말했다.

"내가 한 닷새쯤 누워 있었지?"

"아,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래서야. 내가 지금 누워 있는 침실이 어디인지. 누가 우리 일행에게 이런 장소를 제공해 줬는지. 내가 기절한 후로 쟈빌론과 반란군은 어떻게 됐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달라고."

"지금, 제가 말입니까?"

"그럼 굳이 다른 사람을 시킬까?"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해서."

"예, 옙."

가르딘 경이 눈가를 황급히 훔쳤다. 데미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덕분에 용기(?)를 얻은 걸까. 경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보고드리겠습니다. 흠흠! 우선, 내전은 5일 전에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쟈빌론은 반역 혐의로 수감되었고, 반란군은 즉시 항복을 선언했으며, 반란군에 가담했던 각급 영주들과 장교, 기사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예정입니다."

"반란군 병사들은?"

"병사들에게는 따로이 죄를 물을 생각이 없소. 그들은 그저 징집되어 자유의지조차 없이 전장으로 내몰렸을 뿐이니까."

마지막 대답은 가르딘 경이 아닌, 다른 이가 대신했다. 낮고 나직하면서도 힘이 있는 음성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화려한 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보자마자 노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을 뵙습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를 반기오."

느낌으로 찍었는데 역시나 국왕이 맞았다. 앙부아즈의 국왕, 메로뱅거가 좌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짓에 좌우에 있던 근위기사들, 그리고 왕녀 아델린이 물러났다. 국왕이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꿀꺽.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이불을 꾹 움켜쥐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덜컥 마주하게 되어 버린 앙부아즈의 국왕.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짐작이 되지가 않았다. 솔직히, 조금 켕기면서 불안한 면도 있었다.

'쓰읍. 쌔한데.'

불현듯, 제법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왕녀 아델린의 담석을 치료하기 위해 앙부아즈에 서신을 보냈던 때였던가. 그때 앙부아즈의 국왕을 낚기 위해 자신이 서신에 써 갈겼던 내용이 뭐였더라.

- 장인어른,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고 썼더랬지, 아마.

'어오, 씨.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오한이 좌악 돋아났다. 민망했다. 아무 곳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었다. 그땐 그냥 무조건 왕녀 아델린을 황도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미친 척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앙부아즈의 국왕과 딱 마주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그 서신, 거짓말 이용권을 써먹은 거였는데.'

덕분에 앙부아즈의 국왕은 지금도 저 서신의 내용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전신의 모공에서 농염하게 농축된 식은땀이 마구잡이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전두엽 대뇌피질이 풀가동되었다.

'떠올려라. 그때 보냈던 서신 내용, 그거 수습할 말을 떠올려!'

이대로면 어떤 책망을 들을지 모른다. 책임을 지라는 말을 꺼내려는 걸까. 이쪽으로 다가오는 국왕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니 과연 그럴 것 같다. 그럼 뭐라고 대답할까. 떠오르지가 않는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상황, 앙부아즈의 내전에 타국의 황족인 이쪽이 제멋대로 끼어들어 개입해 버린 내정간섭의 시추에이션이 아닌가 말이다.

'망했....'

전에 보냈던 거짓말 이용권 서신. 거기에 앙부아즈의 내전에 개입했다가 딱 걸린 상황. 변명으로 수습해야 할 포인트가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였다. 켕기는 게 많아지는 만큼 더욱 조마조마해졌다.

한데 그런 이쪽의 심정(?)도 모르는지, 앙부아즈 국왕은 너무나 서슴없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침대 옆에 우뚝 섰다. 여전한 굳은 눈길로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옙?"

덕쿵! 덕쿵!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는 순간.

국왕이 몸을 낮추었다. 한쪽 무릎을 굽히며 이쪽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쪽의 손을 정중하게 감싸 쥐었다.

"우리 앙부아즈의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던 무도한 반역자를 그대가 응징하여 준 것에 대하여, 나는 진심으로, 본 왕실을 대표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바이오."

국왕의 정중한 목소리가 귓가로 톡, 날아왔다. 동시에 상큼한 알림음도 고막을 콕, 찔러왔다.

딩동!

[당신은 희생을 마다치 않는 활약을 통하여 로라시아 대륙의 역사서에 새겨질 '앙부아즈 내전'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당신의 이러한 업적에 앙부아즈의 왕실이 공식적인 감사의 의사를 표현하였습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축하 파티를 열었습니다.]

[심장이 덩실덩실 트월킹을 시전합니다.]

[허파가 들숨날숨 비트를 넣습니다.]

[대장이 괄약근으로 현란한 현악 5중주를 선보입니다.]

[간장이 알코올 해독 처리반을 호출합니다.]

[위장이 라면을 찾으며 현기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집니다.]

[위장이 쓰러지며 작은 소란이 벌어집니다.]

[소란이 불러온 토극수(土剋水)의 층간소음에 의하여 새로운 장기가 눈을 뜹니다.]

[봉장지본(封藏之本)의 장기, 콩팥이 탄생의 외침을 터뜨립니다.]

[콩팥 : ...지렸다!]

141화. 나를 반기는 사람들 (1)

[콩팥 : ...지렸다!]

'허?'

라키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 타이밍에 오장육부의 새 멤버가 눈을 뜰 줄은 몰랐다. 그 사이, 알찬 보상 메시지가 시각중추를 야물딱지게 찔러왔다.

[콩팥이 셀프 생일축하 파티를 개최합니다.]

[파티에 참석한 오장육부가 세력 확장(?)을 자축하며 당신에게 1,000 HP를 후원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700]

좋다.

일단 보상 세트의 기본인 HP는 챙겼고.

딩동!

[당신은 새로운 오장육부 멤버 : 콩팥(을/를) 획득하였습니다.]

[따라서 향후 진맥 스킬 사용 시, 진맥 대상에 대한 오장육부의 상담형 진단 범위가 확장됩니다.]

[콩팥이 환자의 콩팥과 상담 및 소통하여 질환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이거지!'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새로운 오장육부가 생길 때마다 점점 후원받는 HP의 규모가 늘어났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거기에 이제는 콩팥이 환자의 콩팥과 직접 상담을 할 수 있게 됐다. 정밀한 진료 범위가 확 늘어난 셈이었다.

'그냥 진맥으로는 종합 소견을 통한 대략적인 병증만 파악할 수 있으니까.'

반면 오장육부가 직접 상담을 하면? 진맥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디테일한 부분까지 진단이 가능하다. 오진 확률이 비약적으로 낮아지는 셈이다.

'별궁 한의원에 돌아가면 바로 써먹을 수 있겠어.'

황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환자들을 떠올리니 절로 가슴이 바운스 바운스 콩닥거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설마 또 다른 보상이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이었다.

[당신은 콩팥을 일깨움으로써, 오장(五臟)의 수집 완료까지 단 하나의 장기인 비장만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오장에 해당하는 장기를 모두 일깨울 시, 그에 걸맞은 수집 퀘스트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육부(六腑)의 장기를 모두 일깨울 시 또한, 수집 특별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당신의 오장 / 육부 수집 현황]

[오장 (4/5) : 심장(☆), 간장(☆), 폐장(☆), 콩팥(☆), 비장(X)]

[육부 (2/6) : 대장(☆), 위장(☆), 소장(X), 쓸개(X), 방광(X), 삼초(X)]

[수집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그 끝에는 찬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화이팅♡]

"...."

이건 또 뭐야.

라키엘은 잠시 멍해지는 기분으로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금방 깨달았다. 이건 바로....

'수집 퀘스트?'

한국에서 즐기던 게임에서 봤던 그런 거 같은데. 아무래도 맞는 듯했다.

'설마 오장과 육부를 다 완성하면 새로운 능력이 생기고 그런 건가.'

제발 그런 거면 좋겠다. 기대감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하지만 아직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차근차근 비장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열심히 할 일을 하는 수밖에.

그렇게 다짐하며 라키엘은 시선을 돌렸다. 보상은 보상이고, 그보다는 당장 눈앞에 골치 아픈 존재가 떡하니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앙부아즈 국왕.'

그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 화려한 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앙부아즈의 국왕이었다. 이쪽을 향해 감사의 예를 표하고서는, 정중한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탐색의 눈빛이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일단은 무난하게.'

라키엘은 싱긋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저야말로 앙부아즈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국왕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와 행운 덕분에, 부족한 제가 귀국에 작고도 소소한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어... 저 또한 무척 기쁜 마음입니다."

"허허허, 그렇소?"

"물론이지요."

제발, 제가 지난번에 보낸 편지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 주세요. 장인어른 어쩌고 날려 보냈던 드립 이야기도 언급하지 말아 주십쇼.

라키엘은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이쪽을 보는 앙부아즈 국왕이 더욱 훈훈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쪽의 간절한 바람을 한 큐에 깨부쉈다.

"그나저나, 황태자께서 지난번에 보내셨던 서신 말이오."

"...."

으아, 제발.

"그때 황태자께서 서신을 통하여 이쪽을 지칭하시길...."

"...."

으아아, 그만.

"장인어...."

"어흠흠!"

재빨리 헛기침으로 말을 끊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더욱 재빨리 말했다.

"죄송합니다. 당시에는 제가 너무 성급하여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

"당시에는 나름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왕녀와 직접 만나고 소통하며, 친분을 위한 사이로만 남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리라는 현명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소?"

"예."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서신으로 보냈던 장인어른 드립을 국왕이 언급해 버렸으니, 차라리 정면돌파를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러면 의도치 않게 코를 꿰일 수도 있으니까.'

자신도.

왕녀 쪽도.

모두가 오해 속에 코를 꿰이는 수가 있다.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왕녀 아델린에게 아무런 사심이 없다. 그런데 상대의 아버지를 오해와 헛된 기대감의 도가니에 가두어 두는 것은 몹쓸 짓이다. 민폐다.

다른 일도 아니고 혼사를 가지고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셈이 되니까. 그래선 안 된다.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넘어가야 한다.

결심한 라키엘은 비장하게 말했다.

"실로 죄송합니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엔 제가 섣부르고 치기 어린 마음에 크나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섣부른 실수였다는 말이오? 나를 장인어른이라 지칭한 것이?"

"예.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면, 내 딸을 황도까지 불렀던 것도 의미 없는 일이 된 셈이겠구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은 댁의 따님을 살려 준 거라고. 담석의 위험을 제거해 준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괜한 변명을 구차하게 덧붙이긴 싫었다. 그래서였다. 차라리 쌍욕을 먹고 말자고 다짐하며 나름 각오를 다졌다.

한데 돌아오는 국왕의 반응은....

"허, 허허허. 허허."

"...."

"허허허허허."

"...."

혹시 쌍욕을 장전하며 빡쳐서 웃는 걸까. 잠깐 움찔했지만, 아니었다. 이어지는 국왕의 말은 예상과 달리 지극히 온화한 것이었다.

"역시 젊음이란 게 좋구려."

"...예?"

"나도 그랬소. 쉽게 불타오르고, 쉽게 꺼졌지. 특히 이성을 대할 때면 말이오. 원래 젊음이라는 것이 그런 법이니, 딱히 원망을 하지는 않겠소. 다만-"

국왕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어 왔다.

"황태자, 그대의 쉬운 변심에 내 딸이 결례를 범하였을까 싶어 오히려 염려가 되오."

"결례를 말입니까?"

"그렇소."

"예를 드시자면?"

"내 딸의 성정이 워낙 괄괄한 터라, 혹시 남몰래 폭행을 당하진 않으셨소?"

"당했습니다."

냉큼 말했다.

"딱 500대쯤 맞았습니다."

정말이었다. 담석을 없애 주기 위해 매일 충격파를 맞아 줘야 했으니까. 한데 국왕은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허허허, 그렇게나 얻어터지고도 멀쩡하시다니. 황태자께선 소문과 달리 무척 튼튼하신 듯하오."

"예, 저도 무척 다행인 점으로 생각 중입니다. 그나저나-"

다행히(?) 서신으로 저지른 장인어른 호칭에 대한 일은 그럭저럭 무마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니 이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탈압박(?)을 시전할 때다. 타이밍을 감지한 라키엘은 입술에 침을 촵촵 발랐다.

"혹시, 제가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들으셨습니까?"

"물론."

국왕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아이에게 들었소. 내전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참전을 결정해 주셨다고?"

"예."

"그 또한 고맙게 생각하오. 일부러 정체를 감추고서 우리 측 부상병들을 긍휼히 보살펴 준 것을 말이오. 또한, 황도로 귀국하던 중에 쟈빌론, 그자에게 피랍되어 고초를 겪은 일에는 심심한 위로를 드리오."

"별말씀을. 그럼 쟈빌론, 그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험 재료로 쓰일 예정이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탈압박을 겸한 화제 돌리기를 시전하는 김에 제일 궁금했던 쟈빌론의 근황을 물었는데, 상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자는 반역자외다. 자고로 반역자에게는 용서도, 영광스러운 죽음도 허락할 수 없는 법이 아니겠소? 또한, 그는 귀하디귀한 소드마스터이기도 하오."

"설마."

"눈치채셨소?"

"어떻게든 그자에게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안겨줌이 대외에 모양새가 좋을 것이지만, 단순히 처형을 하기엔 아까운 존재라는 뜻이시로군요. 맞습니까?"

혹시나 하고 떠오른 가능성을 말했다.

국왕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정확하오. 소드마스터의 강인한 신체와 마나에 대한 감응력은 갖가지 마법 실험에 지극히 유용하게 쓰일 것이오."

"그렇군요...."

"어차피 불쌍하게 여길 필요도 없는 자요. 실험 도구로 비참하게 맞이할 최후가 그자에게 어울릴 테니까."

"...."

문득, 이쪽에게 매달리듯 집착하던 쟈빌론이 떠올랐다. 국가와 민족을 위대하게 만들겠다고 포부를 말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적이었지만 잠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쯧, 하여간 예술학교 입학시험이 문제라니까.'

그것만 합격했어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텐데. 이쪽 세상이나 지구나 입시 시험이 문제다. 그런 생각에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요."

"허허. 어차피 슬슬 일어나려던 마당이외다."

...이로써 탈압박 마무리까지 성공.

앙부아즈 국왕이 흔쾌히 물러난 후, 라키엘은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화려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황도를 떠나온 이후 몇 개월 만에 구경하는, 텐트 아닌 제대로 된 건축물 실내의 천장이었다.

비로소 조금씩 실감이 났다.

'내전, 진짜로 끝났구나.'

정말로 황도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절로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