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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 강호 무림.
물론 이 세상에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있고 관청도 있다.
나라의 이름은 송무(宋武) 제국.
수도는 대봉(大封), 인구가 300만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다.
태주와 연결한 당군악의 기억에 의하면 대봉 도읍지는 지구 삼한의 대도시에도 꿇리지 않았다.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외부 세력과의 전쟁.
나라가 워낙 잘 살다 보니 변방의 무수한 침략이 있었다.
특히 가장 심각했던 것이 30년 전 마교의 발호.
한때 송무 제국의 존망을 위협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강호의 무림인들이 관군과 힘을 합쳐 마교를 막아내고, 절대독마 당군악이 천마를 제거함으로써 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나 지금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리하여 송무 제국에 있어 무림 문파가 차지하는 지분은 상당히 큰 편, 송무의 황제도 무림에 대한 간섭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일단 대봉(大封)으로 가자.'
황궁이 존재하는 송무의 수도 대봉.
도읍지인 만큼 각 지역에 존재하는 무림 문파의 지부가 그곳에 다 몰려있다.
무림맹은 물론, 구파일방을 위시해서 오대 세가 같은 무림의 세가, 중대형 문파 등등, 당가의 지부도 있을 것이고.
태주가 탄 만리비검이 강호의 하늘을 질주했다.
발밑에 펼쳐진 익숙한 광경, 점점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저기로 쭉 가면···,'
수도 대봉이 나올 터.
거기서 현재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듯 하다.
태주가 기억하는 강호의 세상은 당군악이 등선하기 전까지다.
그 이후로부터는 알 수가 없다.
정보가 필요하다.
알 건 알아야 강호 관광도 더 즐겁다.
'아무튼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혹시나 또 한 번의 승천이 가능한지, 독령을 움직여봤다.
다른 건 다 가능한데 승천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힘이 약해졌나?
당연히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독령은 더더욱 커졌고, 독기와 진기, 마나의 수발도 자유롭다.
문제는 여의주, 드래곤 하트, 독령이 아직 덜 융화된 것 같다.
완전무결한 융합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지도.
처음 승천은 여의주를 품는 순간 이루어진다.
모든 용이 다 그렇게 승천했다.
그러나 자신은 실패하고 말았으니.
또 언제 승천이 이루어질까?
아마도 완전 융합 이후?
'다 왔네.'
어느덧 어둑어둑해졌지만 곳곳에 화려하게 불을 밝힌 시가지의 모습이 들어왔다.
태주는 대봉 외곽의 커다란 저택 지붕에 내렸다.
동시에 가뿐하게 밑으로 착지.
강호에서 정보를 다루는 두 집단이 있다.
거지들로 이루어진 개방(丐幇)과 도둑놈, 도박꾼, 소매치기, 불량배, 기녀, 점소이 등 밑바닥 계층의 하오문(下汚門).
당군악은 정사의 구분이 없는 편이다.
흑도나 사파의 인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하지만 그는 개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은 하지 않고 구걸만 하고 다니는 비렁뱅이 불한당.
꼴에 자존심은 높아서 의뢰하기도 더럽게 까다롭다.
당군악은 거의 모든 정보를 하오문을 통해서 얻었다.
그래서 태주의 선택도 개방보다는 하오문.
또한 개방이 싫다고해서 하오문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 하오문은 사파.
마교보다는 덜하다 해도 충분히 나쁜 새끼들이다.
'저기 있네.'
기억 속 그대로.
무협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기루의 이름.
천화루(天花樓).
바로 하오문의 분파 중 하나다.
'묘하게 재미있네.'
머릿속에 당군악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치 소설 속 인물에 빙의된 느낌.
한마디로 젊은이로 환생한 당군악을 연기하는 듯했다.
태주는 기루로 들어갔다.
점소이 한 명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아아!
기루에 출입해서 점소이도 만났다.
이게 바로 무협이지.
감격스럽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래, 춘랑이는? 위에 있지?"
"루, 루주님 말씀이십니까?"
"춘랑이가 걔 말고 또 있느냐?"
"···."
점소이는 뜨악한 표정.
새파랗게 젊은 새끼가, 그것도 희한한 옷을 입은 주제에, 감히 루주님을?
그래도 공손해야 한다.
혹시라도 명가의 자손이라면?
게다가 저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어느 가문의 누구라고 전할깝쇼?"
"알 거 없고, 슬슬 젊어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전해라."
"네?"
"노향독(老向毒) 해독하기 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고 해."
"아, 알겠습니다. 전하겠습니다."
천화루 루주 춘랑.
본명은 소춘랑.
나이는 한 30살 됐나?
하오문 기녀들만이 익히는 무공을 익혔다.
방중술의 원리를 응용한 일종의 주안술.
그러나 채양보음 같은 마공과는 거리가 멀다.
기녀들은 늙으면 그날로 영업 종료.
부엌에서 일하든지, 바깥에서 호객행위를 하든지.
그래서 노화를 늦추고 오래오래 업계에 붙어있는 것이 관건.
당군악은 춘랑이를 노향독으로 중독시켰다.
독의 효과는?
해독하지 않으면 빠르게 늙어간다.
기녀로서는 치명적인 독.
가히 절대독마 다운 손속이었다.
루주에게 보고하러 간 점소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고, 공자님!!! 모, 모시겠습니다, 이, 이리로."
태주는 위층으로 여유롭게 올라갔다.
그리고 들어간 조용한 방.
거기엔 60대 노파가 한 명 앉아있었다.
30대지만 노향독에 의해 매우 늙어버린 춘랑이.
"설마 했더니 당가의 자제분은 확실해 보이는군요."
"···무슨 근거로?"
"어르신과 많이 닮았습니다."
"아!"
어르신이면 당군악이고 그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
"그런데 대체 누구십니까? 저도 당가의 직계들을 잘 알고 있지만 공자님 같은 분이 있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꼭 알아야 해?"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넘어가면 직무유기랍니다."
"숨겨진 사생아 정도로 생각하자."
"호호호! 젊으신 분이 여유가 넘치시네요."
"너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잖아. 그냥 늙어 보일 뿐이지."
순간!
아픈 데를 건드린 듯 싸늘하게 굳어버리는 춘랑의 안색.
"···노향독을 언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했지."
"그럼 해독이 가능하단 말인가요?"
"아주 쉬운 일이야."
"노향독을 해독하려면 당가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독문 기공의 성취가 최소 7성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독문기공은 혼원무상독령공.
"그래서 어쩌라고, 해독하기 싫어?"
춘랑은 피식 웃었다.
"호호, 당연히 믿을 수가 없지요."
"왜?"
"현 당가의 가주님도 주화입마를 당해 오늘내일하고 있는데, 공자님께서 그 정도 실력을 갖추셨다고요?"
"···뭐? 무슨 말이야?"
"모르셨나요? 심산유곡에서 은거라도 하셨나? 가주님뿐이 아니죠. 당문 전체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습니다만?"
태주는 표정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가주라면 당철휘, 당군악의 아들.
갓난아기 시절부터 뒤집고, 기고, 서고, 걸음마 하는 과정을 낱낱이 기억한다.
얼마나 사랑스러웠나?
지금이야 많이 늙었지만,
"···철휘, 아니 가주와 당문이 어떻단 말이냐?"
"말씀드린 대로지요. 앞으로 며칠 안에 당문은 오대 세가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할 겁니다."
"아니 왜?"
"이 바닥이 다 그렇잖아요? 힘을 잃은 사자는 늑대들에게 먹히는 법이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신선을 배출한 가문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하나도 빼먹지 말고 모조리 말해."
"그 전에 거래를 시작해보실까요? 먼저 노향독부터···,"
바로 그때!
스아아악!
방안에 가득 찬 끔찍한 살기.
이미 태주는 당군악에 완전히 빙의한 상태.
"네가 뒈지고 싶은 모양이구나. 여기 아니면 정보를 들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게···,"
"하오문 전체를 몰살시켜주랴?"
태연하던 춘랑의 안색이 급변했다.
'으음···,'
직업상 대문파의 장문인하고도 독대해봤지만 이만한 기세는 처음.
절대독마 당군악 이후로 처음 느껴본다.
그와 얼굴도 매우 닮았고.
'진짜 누구지?'
등선한 당군악 이후로 이만한 고수가 당가에···, 가만!
춘랑은 가설 하나를 떠올렸다.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당가에선 절대독마가 등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당의 청허진인도 보증했고.
그런데 그가 모두를 속인 거라면?
즉 등선이 아니라 반로환동이라면?
춘랑은 멍하니 태주의 얼굴을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땐 닮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절대독마 본인이라고?
단신으로 수만의 마교도와 천마를 죽인 사람이 바로 당군악.
그가 하오문 전체를 몰살시키겠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춘랑은 벌벌 떨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알겠사옵니다. 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부터 그녀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 ※ ※
선계(仙界).
검선과 귀곡, 제천대성이 돌아왔다.
귀곡은 오자마자 천계 아파트 건설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구에서 배운 건설 노하우를 직접 공사에 적용해야지.
제천대성도 선계 배달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점검하러 갔다.
남은 사람은 검선뿐.
신선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찍은 CF를 상영관에서 보여줬다.
"바로 이 청소기란 말이지. 지금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요."
"원래부터 잘 팔리는 거 아닌가. 광고 때문이 아니라."
"어허! 상품 마케팅에서 광고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아시오?"
그러자 신선들이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케팅은 무슨,"
"뜻이나 알고 말하는 건가?"
"알 리가 있겠소? 어디서 주워들은 거겠지."
"집어치우고 용 잡은 이야기나 해보든가."
"에이, 용 잡은 게 뭐가 대수라고. 더 볼 것도 없네."
"시간이 아깝소. 드라마나 봅시다. 신작들이 줄줄이 올라왔다며?"
검선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첫 지구 방문 결과 보고회 당시엔 이렇지 않았는데.
'제기랄!'
이제 신선들도 웬만한 자극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또 두 번의 지구 방문으로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탓도 있고.
이럴 줄 알았다면 CF 감독의 제의대로 영화나 한 편 찍고 올 걸 그랬나?
한편.
백홍표는 선계 최고의 귀빈이 되었다.
독선이 멀티플렉스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넘겨줬다.
따라서 영화나 드라마 보는 것도 공짜.
술이나 커피, 치킨과 맥주도 공짜.
쇼핑몰도 무료 이용.
필요한 거 있으면 결제 없이 그냥 가져가도 상관없다.
잔머리 팍팍 돌아가는 신선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있나?
화선(畫仙)이 백홍표를 찾아갔다.
"백천인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어이쿠! 제가 더 영광이죠."
"내가 바로 태주 대협의 초상화를 그린 화선이요."
"아! 그러셨구나."
"마침 내가 선계와 천계, 황천계를 그린 산수화와 풍경화들이 몇 개 있는데, 한번 구경해보시겠소?"
화선이 주섬주섬 잘 표구된 그림 몇 점을 보여줬다.
"오오오."
백홍표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언뜻 보기엔 그냥 산수화지만 보면 볼수록 느껴지는 아득한 현기, 붓질 하나하나마다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실로 보물입니다."
"보물은 무슨···, 마음에 드시오?"
"들다마다요."
"지구로 돌아갈 때 꼭 챙겨 가시오."
그러나 이 귀한 그림들을 어떻게 빈손으로 받아?
"제가 답례를 해드리고 싶은데···."
"어허! 백천인! 날 뭘로 보시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오."
백홍표는 난감했다.
고매하고 청빈한 신선의 선의(善意)를 무시한 셈이 되고 말았으니.
"죄송합니다."
"알면 됐소. ···뭐, 내가 뚜벅이인지라 다리가 아파서 백두 모터스 125CC 스쿠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
"험험, 사달라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화선은 멀티플렉스 옆에 있는 탈것 전시관을 아련하게 바라봤다.
'하나 가지고 와야겠군.'
화선뿐만이 아니었다.
주선(酒仙) 태백 선인은,
"선도 300개를 농축해 만든 신선주라오."
"오! 그야말로 보물입니다."
"그래봤자 오데마피겨 로얄 블랙 스틸 손목시계만 하겠소?"
"···."
모델명을 정확하게 말하는 주선.
대목(大木) 선인도 왔다.
"신목(神木)으로 만든 의자요. 허리 건강에 이만한 것이 없지. 깔개는 환수계 영물인 빙염 산양의 털을 이용했소.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할 거요."
"이 귀한걸···."
"이 의자에 앉아 85인치 4K 큐올리드 벽걸이 TV로 드라마를 보면 얼마나 좋겠소. 그대야 지구로 가면 그 정도는 쉽게 사겠지만···,"
"그, 그렇겠죠?"
"후우, 나는 없소. 선계 쇼핑몰은 너무 비싸."
매화, 곤륜, 삼봉 무림계 대표 3신선이 우르르 몰려와서.
"백천인, 근골이 좋소이다."
"제 몸이요?"
"원래 천인의 몸이 다 그렇지. 공령지체에, 금강지체, 천무지체···, 좋은 것만 골라서 만든 몸 아니오."
"곤륜 선인의 말이 맞소. 이 좋은 근골을 두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거야말로 인생의 낭비야."
"하나씩 배워봅시다."
무공이라,
배워두면 쓸모가 있을 것 같기도.
구례에서 일어난 테러가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아이들을 지키는 데 매우 유용할 터.
백홍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삼봉 선인이 먼저,
"태극혜검 어떻소? 16인치 1TB 맥그램 게이밍 노트북, 지포수 RTS 3060 그래픽카드 장착 모델."
매화 선인은,
"자하신공을 알려드리겠소. 12인치 사과패드 태블릿 512GB, 와이파이 전용 모델로 실버 색상."
곤륜 선인도.
"신법도 익혀야 하오. 운룡대팔식이면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을 거요. 스마트 에어 워치 24시리즈, 45mm 스텐 바디."
다소 노골적이지만 저렇게 가지고 싶어 하는 데 줘야지.
무공이야 배워도 좋고, 안 배워도 그만이다.
독선 당군악도 모른 체했다.
후려치는 것도 아니고 교환조건도 그만하면 괜찮다.
백홍표는 천인.
아무리 신선이라도 감히 어디 천인에게 사기를 치나?
나중에 지구로 돌아갈 때 모조리 들고 가면 된다.
선계에 방문한 귀빈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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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제국 구례.
한때 잠깐 구례 전체가 떠들썩했다.
마수 밀집지대인 지리산 천왕봉에 일어난 이상 기후 현상.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 천둥 번개가 치더니 용오름 현상이 일어났다.
구례 전체에 이 현상이 일어났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범위가 오직 지리산 천왕봉에 한정됐다.
그래서 진짜 용이 승천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다.
뭐, 이상한 것도 없다.
신선과 제천대성도 나타난 판에 그깟 용쯤이야.
백서연은 요즘 매우 바빴다.
그녀는 착하게 살 생각.
혼자서만?
아니다.
그녀와 관계된 사람들 모두 끌어들여서.
김태주 회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시기 전에 이미 결재를 받았다.
착하게 살기 프로젝트는 회장님이 중심이 된 티제이 재단 설립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열심히, 뼈 빠지게 살고 있지만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어려움을 겪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구호 활동과 재정적 지원.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겠지만 문제없다.
드링크제를 비롯한 각종 제약품은 지금도 불티나게 팔린다.
해운업과 조선업은?
전 세계 독점이다.
흑암철을 장착한 컨테이너선들은 광활한 해양을 누볐고, 조선소에서 만들어지는 선박은 도크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계약을 마쳤다.
그렇지 않아도 세금 문제 때문에 재단을 설립할 계획이었는데, 너무 잘됐지.
백서연은 창훈이와 순철이, 그리고 동훈이를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두툼한 재단 설립 계획서를 건네면서.
"이제 티제이 길드원 전체가 재단 운영에 투입될 거야. 동훈이도 마찬가지고."
"기, 길드원 다요? 그럼 마수 사냥이나 구례 치한 임무는···,"
"너희 수준에서 마수 토벌은 일도 아니잖아. 구례 치안은 지리산 방어 군단에서 지원이 나와서 매우 안정된 상황이고."
"어음, 네, 알겠습니다."
재단 운영이야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만.
백창훈은 요즘 누나 백서연이 수상하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병실, 처음엔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더니 이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회장님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아버지를 포기한 건가?
백서연은 그런 창훈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 그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창훈아."
"네."
"걱정하지 마. 아버지는 괜찮을 거야."
"···정말요?"
"맹세할게. 곧 있으면 훨씬 더 건강해진 아버지를 뵐 수 있을 거야. 회장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
그녀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지금도 이야기해주고 싶다.
아버지께서 천계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계신다고.
하지만 그건 아버지 몫으로 남겨둬야지.
직접 오셔서 아이들에게 천계 썰을 푸는 즐거움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나저나 회장님은 어디 가셨을까?
설마 선계로 가신 건 아니겠지?
※ ※ ※
태주는 아직 천화루에 있었다.
"냐아아앙!"
잠에서 깨어 츄르를 쪽쪽 빨고 있는 일백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춘랑이 말하는 현 강호의 정세를 들었다.
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태주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바로 사천 당가의 상황이었다.
당가가 위태위태하단다.
가장 큰 원인은 당군악의 등선으로 빚어진 절대 고수의 부재.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가문의 주업인 약재 유통을 방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천으로 모여드는 약재의 표물이 사라졌고, 당가의 젊은 고수들이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 가주 당철휘의 선택은?
"위기를 타개하고자 어떻게든 신공을 대성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무리하다 몸의 균형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주화입마 상태.
아마 조급함에서 비롯된 비극일 것이다.
당연히 그 책임을 그렇게 만든 외부 세력일 테고.
"당문을 뒤흔든 세력이 누구냐? 명색이 하오문인데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겠지?"
"냐앙?"
"···오대 세가입니다."
"확실해?"
"냥?"
"강호에서 너무 잘 알려진 터라, 여기 오실 필요도 없었사옵니다. 소첩이 공자님께 은거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냐고 물은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오대 세가 새끼들 말고 또 누가 있나?
원래는 사대 세가였다.
사천 당가를 비롯해 안휘의 남궁세가, 하북 팽가, 진주 언가.
제갈세가가 마교와 결탁해 멸문했기 때문에 제외됐다.
강호에서 오대 세가가 위치는 엄청나다.
무림 세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
그리하여 그 빈자리를 치고 들어온 가문이 바로 항주(杭州)의 모용세가(慕容世家).
"대봉에 사천 당가의 지부가 아직 있나?"
"소, 송구스러우나 폐쇄된 지 오래라서···,"
대봉 지부까지 사라졌다니,
사정이 얼마나 안 좋길래.
지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본진은?
"사천 당가타 상황을 말해 봐."
은은하게 화가 난 태주의 눈치를 보며 춘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근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뜸 들이지 말고!"
"냥!"
"모용세가와 황보세가의 정예 전투 부대들이 사천 당가타를 포위하고 있답니다. 가주들이 직접 나섰다고."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공격의 명분은?"
"마교 토벌 당시, 독마 어르신의 마구잡이 만천화우 공격으로 정파 무인들이 다수 희생됐다며 그 책임을 묻겠다고···,"
웃기는 새끼들.
만천화우가 눈이 먼 것처럼 무작정 떨어지는 건 줄 아나?
'아니지. 알고 있겠지.'
무인으로써 경지에 올랐다면 모를 리가 없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당문에 대한 오대 세가의 비틀린 질투심.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놈들의 최종 목적은?"
"천천히 압박을 가해 봉문을 선택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당문이 봉문을 선택하면 자연스럽게 오대 세가의 지위는 박탈당한다.
그 빈자리를 또 황보세가가 들어가기로 약속한 모양.
"언가는 가만히 있던가?"
"그쪽은 남궁가와 팽가가 단단히 외부로 나가는 길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남궁과 팽가가 언가를 막아주면, 모용과 황보가 당가를 처리한다.
황궁에선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본디 무림의 일엔 관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고, 황궁 관리들 대부분이 남궁가 등에 포섭되어 있을 테니.
'당군악의 아들 당철휘가 건재하기만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몰리진 않았을 터.
그런데 왜 당철휘는 주화입마를 당했을까?
혼원무상독령공이 최소 8성이상은 되었을 텐데.
태주는 일이삼백이를 안고 벌떡 일어났다.
한시라도 빠르게 사천으로 날아간다.
그러자 춘랑이가,
"어, 어르신, 노향독은···,"
"흐음,"
"제발 부탁입니다. 천녀의 한을 풀어주십시오."
"하나만 묻겠다. 당가의 위기에 하오문은 관련이 없나?"
"매, 맹세코 없습니다. 사천 당가에 관한 정보는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판관의 반지가 잠잠하다.
진실이라는 의미.
그렇다면?
춘랑의 맥문을 잡고 독령을 움직여,
우웅!
스스스슷!
순식간에 해독된 노향독.
아주 천천히 춘랑의 주름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완전히 해독된 건 맞다. 허나 행여 다른 생각을 품다간···,"
"제가 어찌 어르신에게, 허튼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일은···,"
"철저하게 함구하겠습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당철휘를 회복시키는 일.
다음은?
복수, 그리고 재건.
"강호에 오길 잘했지?"
"냥!"
평범한 관광보다는 스토리텔링 관광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 ※ ※
당가의 집성촌 당가타.
그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전각이 당문이다.
당가의 소가주 당영찬은 당가타를 철저하게 에워싸고 있는 모용과 황보의 무사들을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당가가 어떤 가문인가?
천마를 한 줌의 독수로 녹여버린 절대독마, 아니 등선하셨으니 절대독선 당군악 조부님을 배출한 명가 중의 명가.
하지만 그분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틈이 생기고 말았다.
약점을 보이자 사방에서 승냥이 떼들이 달려들었다.
그 중심엔 남궁세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현 태상가주인 남궁훈, 조부께서 살아계실 적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심지어 끝까지 등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궁가와 팽가, 그리고 새롭게 오대세가로 등극한 모용세가, 그리고 황보세가의 연합.
그로 인해 모든 우호 세력들이 죄다 등을 돌렸다.
조부님께서 계셨을 땐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 알랑거렸던 것들이.
황궁도 마찬가지.
황제가 단서철권까지 내려가며 치켜올려 줬었지만 지금은 중재 요청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오늘이라도 아버지께서 쾌차하시고 일어나시기만 하면···,'
막막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당가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
현재 당가타로 들어오는 길은 철저하게 봉쇄된 상황.
얼마 전 기습을 당해 식량창고마저 불에 탔고.
실질적인 전투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놈들이 요구하는 건 당문의 10년 봉문.
그럼 봉쇄를 풀겠단다.
하지만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결판을 내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당문의 무서움을 똑똑하게 각인시켜 준다.
"오라버니."
"영령이구나. 아버지께선?"
"아직···,"
동생 당영령은 굉장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아직 어린 동생인데, 안타까울 따름.
"그것보다 식량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흐음."
더는 참을 수 없다.
굶어 죽느냐, 싸우다 죽느냐, 둘 중 하나.
그리고 선택은 이미 끝났다.
"영령아."
"네."
"총관에게 전해라. 남은 식량을 모조리 풀어 가솔들에게 배불리 먹이라고."
"아! 그럼···,"
"그래, 사생결단을 보겠다."
당영령도 이빨을 악물며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당영찬은,
"전투가 시작되면 넌 가문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천을 떠나라."
"네?"
"멸문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 안 돼요. 저도 싸울래요. 도망갈 순 없어요."
"과거 조부께서도 마교 침공 당시 가솔들을 이끌고 사천을 떠나야 했다. 허나 절치부심하여 가문을 다시 일으켰지. 그때를 기억하거라."
"그, 그럴 거면 차라리 오라버니가 떠나시는 게 맞아요."
당영찬은 당영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임무는 싸우다 죽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후손을 보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
그때였다.
'어?'
소가주 당영찬의 눈에 들어온 광경.
저 앞 전각 지붕 위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에 희한한 복색의 젊은 남자, 그리고 그 옆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한 마리 흰색 고양이.
봉쇄된 저택.
문을 통해 들어왔을 리는 없고.
그럼 침입자다.
"감히!"
당영찬이 노성을 터뜨렸다.
스슷!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진 유엽비도.
츠핏!
일섬으로 펼친 암기가 괴한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턱!
아무렇지도 않게 극독이 발린 암기를 한 손으로 잡아챈 괴한.
"헉!"
당영찬과 당영령은 깜짝 놀랐다.
일섬을 저렇게 쉽게?
스팟!
태주가 지붕에서 내려왔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그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영찬이와 영령이냐?"
"냐앙?"
"···."
"괜찮아. 난 적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냥!"
"···."
당영찬은 동생을 끌어 뒤에 숨기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한 수만 보고도 알았다.
자신은 저 괴한의 상대가 아니다.
'대체 누구지?'
태주는 살짝 난감하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의 당군악의 손자 손녀인 당영찬과 당영령.
이해한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테니까.
그래도 말이라도 한번 해볼까?
"사실 난 너희 조부이신 당군악님의 지인이야. 엄청 친한 사이···,"
"개수작 부리지 마라!"
뭐,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다.
그러세요? 조부님 친구셨네요!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잘 컸네.'
자초지종을 설명한들 이해할 리 만무하고.
그럼?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스팟!
태주는 냅다 뛰었다.
열심히 달리다가.
"일백아!"
"냥?"
"휘젓고 다녀봐."
"냐앙!"
"사람들은 절대 다치게 하지 말고."
"냐아아아앙?"
"공격당하면 그냥 맞아. 몸빵만 하라고,"
"···냐, 냔?"
"괜찮아. 나중에 치료해줄게."
"···"
스파파파팟!
당영찬은 흠칫 놀랐다.
저자가 시전한 보법.
너무 잘 알고, 자신도 익힌 무공.
'···표홀질풍보?'
당가의 보법인데?
'저걸 저놈이 왜?'
그러고 보니 얼굴도 낯이 익고.
고민할 때가 아니다.
"흉수가 침입했다. 모두 나서라!!!"
우르르르!
당가 무사들이 뛰쳐나왔다.
"잡아!"
"게 섰거라!"
"생포하지 말고 죽여버려!"
피피피피핏!
암기가 비 오듯 날아들었다.
그러자,
"크르르르릉!"
백호 상태로 변한 일백이가 암기를 막아내며 무인들을 위협했다.
그래도 물거나 할퀴진 않았다.
※ ※ ※
당가에서도 가장 엄중한 비처.
현 가주 당철휘가 핏기 하나 없는 안색으로 침상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옆을 지키고 있는 남자.
허연 얼굴에 짙은 검정색 옷.
황천계에서 파견된 저승사자였다.
보통 억울하게 죽은 자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기 마련, 그러다가 악령으로 변해 인간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고.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이것이 저승사자의 임무.
'시간이 됐군.'
명부책을 편 저승사자.
당철휘의 이름 옆 생(生)이란 글자가 슬슬 흐려지기 시작했다.
곧 사(死)자로 변하겠지.
순간!
우당탕탕!
파파파팟!
쿠쿠쿠쿵!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란이야?'
벌써 전쟁이 터졌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쯧쯧, 하여간 무림인들이란,'
바로 그때!
콰직!
쿠쿵!
천정이 부서지고 누군가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찾았다."
이 새끼는 또 뭐야?
살수인가?
굳이 이러지 않아도 당철휘는 잠시 후에 죽는데.
'험한 꼴 보지 않게 지금 데리고 가야겠군.'
저승사자는 당철휘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직접 혼백을 뽑을 의도.
그런데?
덥석!
"에이, 이럼 안 되죠!"
자신의 손목을 잡아버린 남자.
'뭐야? 나, 날 만졌어?'
인간이 저승사자를 똑바로 보고 접촉도 했다고?
어떻게?
황천의 기운을 타고난 인간이거나 신선이면 몰라도···.
"안녕하세요."
"···."
"저 김태주라고 하는데, 혹시 저 아시는지?"
저승사자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처음엔 너무 황당해서 사고가 정지됐지만.
···김태주, 김태주, 김태주! 김태주???
"히이익?"
모를 리가 있나?
자신도 자주 놀러 가는 선계 멀티플렉스 벽면에 걸린 초상화와 똑같은 그 얼굴.
" ···아니! 대협이 왜 여기에?"
"어쩌다 보니."
그건 그렇고,
"호, 혹시 이자의 운명을 바꾸시려고? 아무리 태주 대협이라도 예정된 운명은···,"
태주는 무한공간에서 연초 담배 3보루를 꺼냈다.
황천계 관리들이 제일 좋아하는 니코틴, 타르 가장 많은 걸로.
슬쩍 옆구리에 찔러주자,
"험험, 뭐, 이런 걸 다."
"원래 운명은 변화하는 거 아닙니까?"
"···맞는 말씀이긴 하오."
저승사자 손에 들린 명부책 당철휘의 이름 옆.
사(死)자로 변하고 있는 글자가 순식간에 생(生)으로 바뀌었다.
너무나 선명하게 말이다.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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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영찬은 애가 타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지만 여긴 사천 당가의 중심부.
그런데 괴한이 침입한 것도 모자라 내부를 제집처럼 활보하고 다녔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제기랄!"
모욕감마저 들었다.
어쩌다 당가가 이런 처지까지 왔는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신출귀몰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
이쪽에서 출현한 놈을 무사들이 우르르 쫓아가면, 어느새 저쪽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괴한이 사용하는 보법.
표홍질풍보에 환영미리보까지.
'저걸 어디서 배웠지?'
조부께서 직접 창안하신 무공이다.
모든 무공이 다 그렇지만 특히 암기술에 있어서는 보법은 필수적인 요소, 그래서 당가의 무인이라면 무조건 익혀야 한다.
당가의 무공을 아는 자라니.
엄청나게 빠르다.
저 정도면 극성으로 익혔다 해도 무방할 만큼.
저놈뿐만이 아니다.
분명 작디작은 고양이었는데 어느새 호랑이만 한 크기로 변한 영물.
"캬악!"
당가 무인들 사이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면서 진형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진짜 영물이었어.'
설산비표나 구미영호도 저정도는 아닐 터.
얼마나 빠른지 암기술로 맞추기도 힘들었다.
용케 적중시킨 암기도 그저 튕겨 나갔고,
그때!
지붕을 훌쩍훌쩍 뛰어넘더니,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전각의 지붕 위에 놈이 서 있었다.
"저, 저긴?"
아버지가 누워계신 심처다.
설마 했는데, 결국 저자의 정체는···,
'살수.'
틀림없다.
"이, 이런!"
동시에,
뿌지끈!
괴한이 천근추로 지붕을 뚫고 밑으로 떨어졌다.
"안 돼!!!"
파파파팟!
당영찬이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당가의 장로님들과 무사들이 복도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방으로 안 들어가는 거지?'
멈칫!
그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과 무사들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
둥둥둥.
허공에 떠 올라 그들을 막아선 수백 개의 암기.
"아아!"
암기도 사용하는 자라고?
게다가 허공에 띄우기까지.
'이거 설마···,'
만천화우(滿天花雨).
혹자는 암기가 비처럼 떨어지는 수법을 만천화우라고 여기지만 그건 폭우침(暴雨針)을 잘못 알고 하는 이야기.
독령을 이용해 수만 개 암기 하나하나를 마치 수족처럼 부리는 당가의 최종 비기가 진정한 만천화우다.
바로 지금처럼.
당문엔 이런 말이 전해진다.
고도로 발달한 만천화우는 이기어검과 다를 바 없다고.
자신도 딱 한 번 견식 했다.
조부님이 아직 살아있···, 아니 인간계에 계셨을 때.
그런데 이걸 여기서 본다고?
당가의 장로들과 무사들이 방문 앞에 멈춘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비로소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괴한의 얼굴,
"허허,"
"···으음."
"미, 믿을 수가 없군."
"대체?"
"너무···, 닮았어."
"···."
당영찬은 혼란스러웠다.
뒤따라온 당영령도 마찬가지.
낯이 익다고는 생각했는데.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조부님은 이미 등선하셨다.
그렇게 넋이 나가 있던 판국에.
스르릇,
어느새 작아진 고양이가 막을 새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냐아아아!"
동시에 괴한 옆에서 기지개를 켜더니 하품을 쩍 하면서 고양이 세수를 끝마치고 엎드려 콜콜 주무신다.
이 상황에서 정말 어이없이 떠오른 생각이지만···, 정말 귀여웠다.
※ ※ ※
태주는 방으로 들어오려는 자들은 암기로 막았다.
몇몇은 점혈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제 치료에 들어가 볼까?'
저승사자에게 담배 몇 보루 찔러주면서 일단 숨은 붙여놓았다.
그러나 아직 치료한 건 아니다.
여전히 당철휘는 주화입마로 창백하게 누워있다.
무한공간에서 최상품 선도를 꺼낸 태주.
그러자 귓속으로 들려오는 전음.
- 오! 크고 실한 놈이구려.
- 괜찮죠?
저승사자는 아예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태주가 준 연초 담배를 품에 꼭 안으며.
어차피 명부책 운명이 변경됐다.
이참에 구경이나 하다 가야지.
태주는 당철휘의 굳게 다문 입을 억지로 벌려, 최상품 선도의 즙을 짜서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선기의 본질은 조화로움.
주화입마는 몸과 내공의 균형이 어긋나기에 발생한다.
무너진 균형을 바르게 하면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다.
식도 부근을 주물러 선도 즙이 위장으로 넘어가게 만들면서.
찌직!
쪼르륵!
한 개로는 부족하다.
하나 더.
찌직!
쪼르륵!
저승사자도 부러운 모양.
- 그 귀한 선도를 두 개씩이나! 주화입마 걸린 것이 차라리 행운이었군.
이제 내부의 기운을 살펴볼 때.
당철휘의 맥문을 잡아 독령을 움직였다.
느껴진다.
몸속을 타고 흐르는 선기가 뒤틀리고 막힌 혈도를 뚫고 치유하기 시작했다.
'하나 더 먹여?'
아낄 필요가 있나?
독선이야 속세의 인연을 잘랐다지만 자신은 아니다.
당철휘에게 선도 몇 개를 먹인들, 전혀 아깝지 않다.
당가의 사람들도 태주의 행동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르는 큼지막한 복숭아.
즙을 내니 황홀하고 영험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꿀꺽.
참지 못한 누군가가 침을 삼켰다.
잠시 후.
"···끄응."
입에서 새어 나오는 가느다란 신음.
창백한 당철휘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저승사자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역시 깔끔하게 나았구려.
- 원래 주화입마엔 선도가 직빵이니까요.
삼한의 황제 류태현도 그랬다.
그땐 하품 선도 하나만 먹었는데도 거뜬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당철휘는 최상품 선도를 3개씩이나 먹었다.
몸속의 기운이 빠르게 안정화됐고.
눈꺼풀도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
하염없이 바라봤다.
눈을 떼지 못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기억.
어릴 적, 막 오행신공에 입문했을 때.
자상한 표정으로 구결 하나하나를 직접 풀어주시며 진기를 인도해주신 그분, 지금 눈앞에 있었다.
"···아버님."
태주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급하게 일어나려고 하지 말고 좀 더 주무세요."
"···네."
다시 잠에 빠진 당철휘.
새근새근, 규칙적인 호흡으로.
방 밖에서 둘의 대화를 귀를 기울이며 듣던 당영찬과 당영령, 당가의 식솔들은 경악했다.
이제 확실해졌다.
저분은 절대독선 당군악 태상가주님이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다 함께 바닥에 엎드리면서,
"태상 가주님!!!"
울먹이는 소리로 합창하듯 태주를 불렀다.
하지만,
"저 당군악님 아닌데요?"
"야앙?"
"···진짜 아니라니까요!"
"야아앙!"
하지만 믿는 사람이 없었다.
정황이 너무나 확실했으니까.
"태상 가주니이이님!!!"
환장하겠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고.
에라, 모르겠다.
"그만!"
"···."
"난 이 속세와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그대들 외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당가의 식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태상 가주께서는 속세와의 연을 끊고 신선이 되셨다.
보통 신선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후인의 어려움을 모른 체할 수 없어서 친히 몰래 내려오신 듯하니,
"명심하겠습니다. 태상 가주님!!!"
"···그냥 공자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네! 공자님!!!"
"자! 이제 저 당가타 밖에 있는 떨거지들부터 처리해 봅시다."
순간!
꼬르륵!
누군지 모르겠지만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다.
"···밥부터 먹고 난 후에."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진수성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먹을 걸 준비해왔어요. 당가 식솔들 모두 연무장에 모이라고 전해주세요."
"허, 허나 사람들이 많은데···,"
"괜찮아요. 치킨 파티나 하죠. 1인 1닭, 충분할 겁니다."
"···네? 치, 치킨?"
그러자,
- 태주 대협, 혹시 제 몫도···?
- 콜라까지 챙겨드릴게요.
저승사자가 엄지척을 날렸다.
태주도 몰래 손을 들어 엄지척!
"야앙!"
이백이도 앞발을 척!
근데 이놈도 저승사자가 보이나?
하긴!
선도를 그렇게 많이 처먹었는데.
※ ※ ※
황천계.
태주 때문에 올라온 지구 죄인, 후동평, 츠치다, 기무라, 그들의 영혼이 간단한 판결을 마치고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제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죄업을 치를 것이다.
그러면서 탁한 영혼이 세탁과 탈색을 거듭해, 전생의 기억마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다시 환생의 길로 들어설 터.
아직은 태주 대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영혼들만 올라올 테지만, 나중에 가서는 물밀듯이 쏟아질 것이 뻔하다..
그가 보통 사람인가?
지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아닌가.
황천계도 상황을 받아들였다.
염라를 비롯한 사자, 차사들이 지옥 넓히기 작업에 착수했다.
동시에 환생 예정인 혼백들을 꼬드겨서 저승사자로 영입해야 하고.
'어쨌거나 마계 산책으로 스트레스도 풀었겠다, 슬슬 놀러나 가볼까?'
염라는 천계 아파트 건설 현장으로 행차했다.
독선과도 이야기를 나눌 겸, 공사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눈으로도 보고.
건설 총책임자 귀곡의 지휘 아래 열심히 뚝딱뚝딱 작업하는 지옥 죄수들과 천계 신장들.
기초공사도 끝나고 지금은 층수 쌓기 작업.
벌써 8층이 넘었다.
그것도 10동이 한꺼번에 올라가고 있었다.
천계 1만 신장들, 그리고 죄업이 물이 거의 다 빠진 자들만 골라 투입한 1만의 지옥 죄인들,
숫자도 숫자지만 인간의 힘을 넘어선 작업 인부들이라 공사 진척도는 매우 빨랐다.
크레인이나 건설 장비가 필요 없을 정도.
웬만한 일은 힘으로도 충분하니까.
"흑암철 철근 촘촘하게 집어넣게. 치킨은 순살이 좋지만 천인들이 살아 갈 아파트가 순살이면 쓰나?"
"어어, 거긴 아직 마무리하지 마시오. 충격 흡수, 소음 방지 기문진을 아직 그리지 않았소. 층간소음 생기면 책임질 거요?"
"빨리빨리! 쉴 생각 말고, 작업 안전모 안 쓰냐고? 그게 필요하오? 콘크리트보다 단단한 머리통을 가졌으면서."
"자자자, 조금만 더 힘냅시다. 오늘 새참은 지구에서 배달된 불고기 쉬림프 피자와 시원한 사이다 한 캔씩이오."
이 정도면 며칠 안에 외부 공사 끝나겠는데?
인테리어 공사, 샷시, 가구와 가전제품 들이면 즉시 입주 가능.
염라도 분양 시청을 했다.
칙칙한 업화궁보다 세련된 지구 아파트가 살기엔 훨씬 좋지.
멍하니 공사 현장을 바라보는 그에게 독선이 다가왔다.
"대왕님."
"어, 독선, 수고가 많네."
"하하하, 수고야 대왕님께서 더 많으시죠. ···지구 죄인들은?"
"당연히 지옥이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와 태주 때문에···."
솔직히 미안하다.
지구의 죄인들이 황천으로 올라온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아닐세. 자네들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당군악에게 대답하는 염라.
"천지의 운행이라는 것이 어찌 몇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겠나? 영혼 연결과 물건의 공유도 그렇고, 더 큰 법칙이 작용한 거네."
"그 말씀은?"
"필요했던 거겠지. 영혼을 매개로 차원을 연결해야 할 필요가."
그럼 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순간!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한 사람.
"대왕님! 대애왕님! 대애애왕님!"
"···."
또 강림이다.
"하아···,"
깊은 탄식을 터뜨리는 염라.
'망할 놈!'
대체 이게 몇 번째인가?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은 다 저놈 호들갑으로부터 출발했다.
"저리 가! 꺼져! 새끼야!"
"···네?"
"아무 말도 하지 마! 입 열면 발설 지옥으로 처넣어버린다?"
"제, 제가 뭘 어쨌다고."
입이라도 꿰매고 싶지만 독선이 옆에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래, 지껄여봐라. 별일 아니면 각오하고."
"저, 그게 망자의 운명이 비틀렸습니다."
"응? 비틀리다니?"
"사자 하나가 혼백을 수거하러 내려갔는데 누군가가 개입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래?"
이것도 드문드문 일어나는 경우다.
인간 중엔 정해진 운명마저 바꿔버리는 신통력을 가진 이들이 꽤나 많다.
보통 황천의 기운이나 선근의 싹을 품고 있는 자들인데, 염라도 많이 경험해봤다.
"별거 아니잖아! 그것 말고는 없어?"
"당연히 더 있지요."
"너 이 새끼···,"
교활한 강림 새끼.
말하는 스타일이 늘 이런 식이다.
말의 핵심을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고 뒤로 슬쩍 빼둔다.
그러면서 나중에 빵 터뜨리고는 상대방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은근히 즐기는 식으로.
"핵심부터 이야기해라. 뒈지기 싫으면."
"어어, 그, 그게, 운명에 개입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빨리 말 안 해?"
"태주 대협입니다."
"···뭐?"
염라가 깜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뜬금없이 태주의 이름이 왜?
"혹시 그 사자가 지구에 갔냐?"
"천만에요. 강호로 갔죠. 사천 당가에."
당가?
옆에서 듣던 당군악도 놀랐다.
"아, 아니 그럼 태주가 당가에 있단 말이오?"
"넵!"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이지?
강호라니!
차라리 등선이라면 모를까.
강림은 마저 설명을 이어갔다.
현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당군악의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당가가 그런 처지였다니.
등선했더라도 천륜은 천륜이다.
사실 갓 등선한 신선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속세의 연은 질기고 또 질기기 때문에.
태주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내려갔을지도 모를 일.
"아무튼 당철휘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염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강림의 말을 받았다.
"바뀌긴! 본디 그럴 운명이었던 게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강림이 히죽 웃으며,
"흐흐, 당철휘가 눈을 뜨자마자 태주 대협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했는데?"
"아버지랍니다. 아버지."
"그렇게 여길 만하겠지."
당군악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 맞소. 태주가 나고, 내가 태주인데."
"그런가?"
순간 고개를 갸우뚱하는 염라.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건 또 뭐냐? 어디서 연초 냄새가 솔솔 나는데?"
"에, 에이 기분 탓이겠죠. 하하."
"아니야, 냄새가 나."
"···저, 전 안 나는데?"
염라는 강림을 지그시 노려봤다.
"가져와."
"···네?"
"가져오라고! 맞고 가져올래? 그냥 가져올래?"
강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연초 담배 한 보루를 꺼냈다.
"오!"
부드럽고 뒷맛 좋은 필터형 연초 담배.
매우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보물.
쇼핑몰 초기엔 필터형 연초 담배를 팔았지만 지금은 안 판다.
액상형 전자담배만 허용된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선계월드, 멀티플렉스, 천계 일대가 전부 금연구역이기에.
"이것뿐이냐?"
"···."
"왜 말을 안 해? 더 있지?"
"···."
"하! 이 새끼 봐라?"
묵묵부답의 강림.
저승사자가 들고 온 연초는 3보루.
그중 2보루를 강제로 압수했다.
그래서 하나 뺏겼지만 1보루 더 가지고 있다.
염라대왕의 이목을 속이지 못한다.
있다고 하면 또 빼앗길 테고,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들통날 테니.
강림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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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의 넓은 연무장.
식탁이 깔리고 의자가 놓였다.
식솔들과 무사, 일꾼들까지 모두 모였다.
그리고 태주가 꺼낸 아공간 가방에서 음식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허공에서 먹음직한, 게다가 아직도 식지 않아 따끈따끈 음식이 스슷, 스슷,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는 사람들.
"헛!"
"세, 세상에!"
"역시 태상 가주님께선 등선하신 신선님이셨어."
"쉿! 신선님이라 부르지 말라는 걸 잊었나?"
"아참! 공자님이시지."
연무장이 태주가 가지고 온 음식들로 가득 찼다.
치킨, 피자, 떡볶이, 빵 종류 베이커리, 그리고 콜라나 사이다, 커피 같은 시원한 캔 음료도.
"···이게 다 먹는 거라고?"
"어떻게 먹는 거지?"
"신선이 먹는 음식 같습니다."
"당연하지. 난 다 처음 보는 거야."
치킨, 피자, 떡볶이가 선계의 음식?
틀린 말도 아니다.
신선들이 주로 먹으니까 맞는 말이다.
태주가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자, 식기 전에 어서 들어요."
그러자 당가의 장로 중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태상, 아니, 공자님께서 먼저···,"
"전 많이 먹었습니다. 배가 불러서요. 빨리 드세요."
그제야 음식으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들.
치킨 상자를 열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캔 음료 따는 방법을 모를 것 같아서 직접 시범도 보여줬다.
딱, 치익!
처음엔 우물쭈물 눈치를 봤지만 누군가 닭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무는 순간!
바사사삭!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런 맛이?
그 후부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음식들이 사라졌다.
마치 거지들처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아아!
독선이 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파할까.
이게 다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 저놈들 때문이다.
모용가와 황보가 새끼들, 더불어 남궁가와 팽가도.
마교를 토벌해 강호를 구한 당가의 공적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멸문할뻔한 오대 세가를 도와줬던 은혜도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약점을 드러내니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물어뜯기에 급급했다.
진짜 이럴 수 있나?
근데 우습게도 강호에선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
정파나, 사파, 흑도도 다를 바 없다.
사실 강호 무림을 지구인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곳은 전혀 다른 사회체제, 오직 약육강식,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
약하면 잡아먹힌다.
강자들이 모든 걸 가진다.
사천 당가가 이렇게까지 몰린 것도 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보여줄 생각.
독선을 배출한, 당가가 진정 어떤 곳인지 똑똑하게.
'어떻게 처리할까?'
결정했다.
태주가 벌떡 일어나 정문 앞으로 걸어갔다.
"고, 공자님! 어딜?"
"밥도 먹었겠다, 저것들을 치워야죠."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식사나 마저 하세요. 한 식경이면 끝나는 일이니까."
일이삼백이가 어슬렁거리며 따라나섰다.
"너도 여기 있어."
"니아아!"
"중독되고 싶으면 따라나서든가."
"···니앙?"
그래서 혼자 나갔다.
삐걱,
닫힌 정문을 열고 나가니.
'많이도 왔네.'
현재 당가타 외부에 진을 치고 있는 무사만 3천 가까이.
모용가와 황보가의 전체 전력뿐 아니라 고용된 낭인들도 섞인 숫자였다.
반면 당가의 사람들은 2백 명에 못 미쳤다.
숫자가 아무리 많으면 뭘 하나?
한 번에 중독시켜버리면 그만.
당가의 독은 너무나 유명하기에 해독 방법도 널리 퍼져있다.
물론 독의 강약에 따라서 해독되는 시간이 차이가 나지만.
하지만 절대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라면?
'꼼짝도 못 하게 만들어주지.'
강호엔 산공독이라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군자산(君子散).
내공을 사라지게 하고 운기행공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절정 이상의 고수들에겐 효과가 없고, 대비만 되어있으면 당할 일도 없다.
절정 고수도 피할 수 없는 산공독으로 놈들을 중독시킬 것이다.
저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독으로.
독령이 꿈틀거렸다.
독기 생성.
지리산 변종 3줄 무늬 모기의 독을 독령으로 강화했다.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사라지지 않게 성질도 변화시켰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단전에 머물러, 지속적으로 내공과 체력을 갉아먹는 지독하고 찐득한 영구 독으로.
그리하여 지구표 변종 3줄 무늬 모기 산공독이 만들어졌다.
이제 독기 방사.
츠치치치···,
태주의 몸에서 독기가 피어올랐다.
스스스스···,
동시에 바람이 불었다.
모기 독이 바람을 타고 위로 쭉 올라갔다.
신선의 능력 중 하나인 호풍환우(呼風喚雨),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
원래는 하지 못했다.
완전하게 등선해서 신선이 되었다면 모를까, 임시 등선이라 알고 보면 태주는 반(半) 신선.
하지만 여의주를 품음으로써 호풍환우의 능력을 쓸 수 있게 됐다.
독기를 머금은 바람이 구름으로 변했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산공독이 함유된 독구름.
영어로는 포이즌 클라우드.
구름이 당가타 상공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당가의 커다란 전각들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
모용세가 가주 모용청과 황보세가 가주 황보장웅이 햇빛을 막기 위해 친 천막 안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가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최정예 무인들을 이끌고 사천으로 왔다.
사천 당가 및 당가타 봉쇄.
누구도 들어오고 나가지 못하도록 천라지망을 펼쳐 바깥으로 이어지는 대로, 소로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야심한 밤을 틈타 당가 식량 창고에 기름 단지를 던지고 불화살을 날려버렸다.
활활 불탄 식량 창고, 이젠 먹을거리도 없을 것이다.
"끈질기군. 이쯤 되면 항복하든가, 아니면 바깥으로 나와 죽을힘 다해 달려들든가."
"난 후자였으면 좋겠소. 그럼 눈치 볼 것 없이 몰살시키면 되니까."
"흐흐흐, 나도 그렇소."
모용청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무시무시한 사천 당가가 이 꼴이 되었다니.
독과 암기의 대명사 사천 당가.
자고로 당문의 사람들과는 함께 물도 마시지 말라는 말이 있다.
언제 중독당할지 모르니까.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다.
당문과 결전을 각오하고 왔는데 아무런 준비도 안 하고 왔을까?
암기를 막아 줄 철판 덧댄 등갑 방패, 독에 대비한 피독주와 해독제도 무인들에게 지급했다.
무엇보다 당가가 가진 치명적인 단점.
전황을 역전시킬 강력한 고수가 없다.
절대독마는 사라졌고, 당가 가주 당철휘는 주화입마로 오늘내일하며, 소가주 당영찬은 아직 애송이.
"황보형, 놈들이 만약 봉문을 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인지?"
"난 후환을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소이다."
모용청도 동의했다.
특히 사천 당가는 남녀노소,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몰살시켜야 한다.
끈질긴 놈들이다,
마교의 공세로 멸문 당할 처치에서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나 가문을 일으킨 저력을 전 강호에 보여줬지 않나?
봉문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설령 손을 들고나온다 해도 싹 죽여버릴 작정.
"헌데, 모용형, 독마 그놈이 정말 등선했다고 생각하시오?"
"황보형은 그걸 믿소? 등선은 개뿔! 뒈진 거지."
"하긴, 도가의 진인도 아니고,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주제에···,"
순간!
우당탕탕!
당가 저택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군. 당문 내부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
"냅두시오. 내분이라도 일어난 모양이지."
"알만하오. 싸우자는 놈들과 항복하자는 놈들로 서로 갈렸을 터."
"흐흐흐, 누가 이기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시간이 흐르자 소란은 곧 잠잠해졌다.
그런데?
"음?"
황보장웅이 코를 씰룩이며 말했다.
"무슨 냄새가 나지 않소? ···기름지고 고소한 냄새 같은데,"
잔치라도 열렸나?
최후의 만찬 같은 거 말이다.
"이거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하겠군. 모용형,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야겠소."
"쯧쯧, 왜 어려운 길을 가려 하시오? 가만히 있으면 자멸할 터인데,"
"아니오. 낌새가 좋지 않아. 저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도 그렇고."
"아마 허장성세일 거요. 우릴 당가 안으로 유인하기 위한, 그러니 지금 들어가는 건 좋지 않소. 놈들을 우리 싸움터로 끌어내야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당가타 전체를 포위해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식량 창고도 불태웠으니 굶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
포위만 하고 당가로 직접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
분명 철저한 방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평야가 아닌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장소는 암기를 쓰는 놈들에게 유리하다.
"섣불리 소굴로 들어갔다간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 하오."
"흠, 모용형이 정 그렇다면야."
그래서 계속해서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어두워지는 하늘.
"벌써 해가 지나?"
"그냥 날이 흐려진 것 같은데···."
그때였다.
투둑, 툭! 투둑, 툭, 툭···,
천막 위로 떨어지는 비.
빗소리가 제법 운치를 자아냈다.
"이렇게 천막 아래서 비를 맞으니 기분이 묘하구려."
"모용형도 낭만을 아는군."
"비도 오고 하니 술이나 한잔합시다."
"흐흐, 나는 옆에서 술 따라주는 계집이 없으면 술맛이 나지 않는 몸이라,"
"기녀가 필요하시오?"
"닳고 닳은 년들은 싫소. 당가 여식인 당영령이 그렇게 미색이 뛰어나다 하더이다."
"껄껄걸, 곧 옆에 두게 될 거요."
순간!
털썩!
"으응?"
비를 맞으며 저 앞에서 당가의 동태를 감시하던 무사 하나가 픽! 하고 쓰러졌다.
가만히 보니 낭인.
"쯧쯧, 허약하기는,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더니."
"뭐, 칼받이로 데려왔잖소."
황보장웅이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저거,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
우르르,
무사들이 붙었다.
팔과 다리를 끌고 끌어가려는데.
털썩!
또 하나.
"···어?"
다음부터는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털썩···.
"끄윽!"
"···왜?"
"히, 힘이?"
"내공이 이어지지 않···,"
.
.
.
여기서 털썩, 저기서 털썩.
그 많던 무사들이 다 쓰러졌다.
삼류든, 이류든, 일류든, 심지어 절정 고수든 가리지 않았다.
체력마저 없애버리는 독령 강화 산공독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로지 두 발로 서 있는 자들은 천막 안에 있는 모용청과 황보장웅.
"대, 대체 무슨?"
"설마 이 비가···?"
투툭! 투투툭! 툭! 툭! 툭!
평범한 비였다.
그런데 고작 빗방울에 적셔졌다고 무기력하게 쓰러져?
모용청, 황보장웅은 세가의 가주이자 화경의 고수.
하지만 이들도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한 남자.
"저자는 누구···,"
왜 아무렇지도 않지?
바로 그때!
쐐애애액!
무시무시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헉!"
펄럭!
날아가는 천막.
동시에 두 사람에게 집중되는 비.
미처 호신강기를 일으킬 새도 없이 그대로 비를 맞아야 했다.
후두두두두둑!
전신이 흠뻑 젖었다.
"으윽."
"제, 젠장!"
비를 맞아보니 알겠다.
몸 안에 진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뭉텅뭉텅 없어졌다.
'산공독이였구나.'
그래도 그들은 쓰러지진 않았다.
나름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으니까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남자.
흐릿하지만 누군가의 얼굴과 매우 비슷하다.
아니, 똑같다.
그 사람이 반로환동으로 젊어졌다면 바로 이 모습일 터.
"···절대독마?"
"아, 아니야! 그, 그럴 리가!"
모용청은 무릎이 후들거렸다.
황보 장웅도 입을 떡 벌린 채 뒷걸음질 쳤다.
절대독마다.
그가 여기에 있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하늘도 맑게 개였다.
하지만!
슈슈슈슈슈슈슈슛!
또 다시 만들어진 구름.
"마, 맙소사!"
"···아아아아!"
수십만 개의 암기로 이루어진 구름.
이걸 어떻게 모를까?
만천화우.
과거 수십 만의 마교도들을 학살했던 절대독마 당군악의 독문무공.
마교를 상대할 땐 든든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을 겨누고 있다.
밀려드는 절망감, 그리고 공포.
만천화우를 어떻게 감당해?
태주는 그저 한마디만 읊조렸다.
"꿇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털썩, 털썩!
모용청과 황보장웅은 재빨리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제발! 모, 목숨만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당가의 식솔들.
끊어졌다고 생각한 당문의 비기 만천화우가 당가타 하늘에서 펼쳐졌다.
절대독마, 아니 절대독선의 재림.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 ※
선계(仙界)에서 소문이 쫙 퍼졌다.
"뭐라고? 태주 대협이 강호 무림에?"
"저승사자가 연초 필터담배까지 선물로 받아왔다더군."
"오오오! 그 귀한걸?"
가격이 문제가 아니다.
쇼핑몰에서 팔지 않기에 희귀한 것이다.
이런 물건들이 많이 있다.
지구에서 배송되어 왔지만 독선이 무한공간에 넣어두고 절대 풀지 않는 것들.
그러나 좀생이 독선과는 달리 태주 대협은 마음이 대해와 같이 넓은 사람.
눈만 마주쳐도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 게임에서 간간이 나오는 황금 고블린.
그 사람이 강호에 있단다.
거기도 가기 힘든 곳이지만 최소한 지구보다는 쉽지 않나?
"우리도 갑시다."
"어떻게?"
"황천계로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지."
"맞소. 가만히 있으면 안 되오."
"결국 염라가 다 독차지 할거요. 저승사자를 강호로 보내 태주 대협에게 갖은 알랑방귀를 다 떨면서."
"제기랄! 그럴 순 없지!"
신선들이 우르르, 황천계로 통하는 문을 건너갔다.
한편,
필터담배의 비닐을 벗기고 한 개비 꺼내,
딸각,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깊게 빨아들이는 염라.
참 오랜만이다.
'역시 연초가 전자담배보다 타격감이 뛰어나.'
그나마 남아있던 스트레스가 쫙 풀리는 기분.
그런데 바로 그때!
"염라! 어디 있소이까? 염라!"
"거, 혼자만 태주 대협 만나서 선물이나 쏙쏙 빼먹고 말이야!"
"그러다 지옥 가!"
"우리도 보내주시오!"
"문부터 열어봅시다."
신선들이었다.
'하아! 망할 놈들이!'
미치겠다.
또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진짜 마음 같아선 신선 지옥이라도 만들어 다 처넣고 싶다.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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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의 지시에 따라 당가의 무인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모용, 황보의 가주와 핵심 인물들은 혈도를 점하고 꽁꽁 묶어 뇌옥에 가뒀다.
산공독이 지독하긴 해도 시간이 지나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독성이 약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내공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단전을 폐한 것과 같은 효과.
무공을 배우지 않은 일반인이 될 터.
돈에 팔려 온 낭인들은 추방했다.
그나마 자비를 베푼 셈.
제발 독을 해독해 달라고 빌어왔지만 절대 해주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공자님!"
"네, 무슨 일이죠?"
"가주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아하, 제가 가볼게요."
그 시각,
당철휘가 투병 생활을 하고 있던 침전.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아들이자 소가주 당영찬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들었다.
"그래, 알겠다. 넌 그만 나가보거라. 할 일이 많을 터이니."
당영찬이 나가고 잠시 생각에 빠진 당철휘.
솔직히 꿈인 줄 알았다.
죽기 직전에 꾸는 주마등 말이다.
어릴 적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데 꿈이 아니었다.
'아무튼 주화입마는 극복한 것 같군.'
몸을 일으켰다.
가뿐하다.
당장 뛸 수도 있겠다.
진기도 움직여봤다.
오행신공을 대성한 당가의 직계들이 익힐 수 있는 혼원무상독령공.
"허허,"
원래는 8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9성으로 뛰어올랐다.
'대체 어떻게···,'
주화입마로 상처 입은 혈맥과 단전이 말끔하게 나은 것도 놀라운데, 경지까지 상승했다니.
이럴 수 있는 일인가?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으로도 불가능하다.
주화입마는 영단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에 빠진 참에.
삐걱,
젊은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아버님.'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속세의 연을 끊고 등선하신 분이시다.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으니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
"괜찮으세요? 다 나으셨는지."
"네, 다 나았습니다. 또한 독공의 경지도 올랐습니다."
"오! 그거 축하할 일이네요. 그럼 혼원무상독령공이 9성?"
"···기연을 내려주셔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태주는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고, 알아야 할 건 알아야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혼원무상독령공이 고작 운공으로 입마에 들 만큼 불안정한 기공도 아닐 텐데."
맞다.
아무리 무리했다 치더라도 주화입마?
"후우,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흉수가 있었습니다."
"···흉수?"
"남궁세가 태상 가주 남궁훈, 그놈입니다."
뭐?
이런 개새끼가.
"그날도 여느 때처럼 혼원무상독령공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당철휘의 증언은 이랬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운기행공 도중의 기습.
검을 사용하면 들통날까 봐 남궁훈은 평범한 장법을 사용했단다.
심지어.
"아버님께서 등선하실 때 남기신 보패, 절대장포를 훔쳐 갔습니다."
도둑질까지.
"분명 절대장포가 주목적이었을 겁니다. 제가 쓰러지자마자 입고 있던 장포를 벗겨내 사라졌으니까요."
"···."
태주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남궁 세가의 태상 가주라는 작자가 운공 도중에 기습하고 보패를 훔쳐 가?
'네놈만은 죽여주지.'
강호에 와서 살인은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은 외지인이니까.
그래서 모용청과 황보장웅도 금제만 가하고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훈, 이 새끼는 아니다.
태주도 놈에 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과거, 마교를 토벌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쳤을 때, 남궁훈에게 얼마나 많은 영약을 먹였나?
함께 싸워줄 고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질투 가득 찬 눈빛만 보내왔을 뿐.
태생이 이기적이고 치졸한 놈.
그놈을 살려둔 것이 당군악의 실수.
강호를 떠나기 전에 바로잡아 줘야지.
'최대한 빨리 서두르자.'
슬슬 느낌이 온다.
강호가 자신을 밀어내는 느낌.
신선들이 이런 느낌이었나?
자신도 세상의 법칙을 뒤틀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 신선, 따라서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다.
당철휘에게도 뜻을 전했다.
"가주님도 일어나셨으니, 전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어, 언제 떠날 생각이신지?"
"지금요."
"며, 며칠만이라도 더 계셔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도 그러고 싶지만 바빠서요."
"아아!"
실의에 빠진 듯, 시무룩한 표정의 당철휘, 어리광이라도 부리는 것 같다.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야지.
※ ※ ※
연무장에 당가 전체 소집령이 내렸다.
당가의 구성원이라면 빠짐없이 모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타난 태주와 당철휘.
실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로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당영찬과 당영령을 비롯한 젊은 무사들은 대놓고 눈물을 흘렸다.
조금 전까진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기적이란 말로도 모자랐다.
당철휘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당가의 식솔들을 향해.
"아쉽지만 공자님을 떠나 보내드려야 한다."
그러자.
"네?"
"아,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아직 제대로 대접도 못 해 드렸습니다."
"이렇게 가시면···,"
모두가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만!!!"
무공이 다 회복되어 웅혼한 목소리로 외치는 당철휘.
"이미 결정하셨다. 떠나시는 공자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마라."
태주도 나와서 말했다.
"허락된 시간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여유가 많이 없어서요.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
"모두 잊지 마세요. 사천 당가는 신선을 배출한 가문입니다."
슈슈슈슈슛!
무한공간에서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언제나 협의를 잊지 말고, 불쌍하고 약한 이들을 도와주며···,"
촤라라라락!
은빛 강기로 빛나는 암기들.
"강호의 명문 세가로서 영원히 우뚝 서길 바랍니다."
피피피피핏!
은빛 꽃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연무장에 내리는 만천화우.
위협적이지 않았다.
살기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따사롭고 조화로운 기운.
독령에 섞여 있는 영험한 선기.
선기의 비가 내렸다.
수만 개의 빛무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당가 식솔들의 주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샤아아아앗!
연무장이 빛으로 가득 찼다.
암기 하나하나가 신묘한 기운을 내뿜었다.
사람들의 몸을 파고 들어가 혈맥과 단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만천화우는 끔찍한 대량 살상의 무공.
그러나 지금 보는 만천화우는 만물의 조화를 보여주는 듯한 신비한 술법.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유엽비도가 일섬(一閃)으로 날았다.
혈접은 나풀나풀 날았고, 이화정과 철환이 전방에서 비폭(飛瀑)을 시전했다.
당가의 각종 암기술이 하늘을 스크린 삼아 영화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아아아!
신선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신다.
당철휘가 먼저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다음으로 장로들, 그리고 소가주 당영찬과 당영령, 직계 무사들···,
가지고 있는 무공의 경지에 따라 정도가 다르겠지만 아무튼 연무장의 사람들은 눈을 반개하면서 태주가 주는 깨달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태주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 ※ ※
남궁 세가는 지금도 강호에서 가장 강성한 가문이다.
무력은 물론 재력과 인맥까지.
강호 곳곳에 존재하는 남궁 세가의 사업장.
토지와 농장, 각종 수공업 공방, 어음을 발행해주는 전장, 대형 상단, 표물을 운송하는 표국···,
그 남궁 세가의 지배자가 제왕신검 남궁훈.
강호 무림 최고의 권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궁훈은 알고 보면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그 대상이 바로 절대독마 당군악, 마교의 발호를 물리치고 단신으로 천마를 죽인 강호 최고의 고수.
무공이야 그렇다 치자.
그가 강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도 그에 못지 않다.
하지만 등선이라니.
도가의 진인들도 엄두를 못 내는 것이 바로 등선이다.
그런데 독과 암기를 이용해 그렇게 사람을 많이 쳐죽인 독마 새끼가 신선이 됐다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등선했다손 치더라도 놈은 가짜 신선이다.
무릇 신선(神仙)이라 함은 고아하고 근엄한 풍모로 검을 타고 노니는 신선이 진짜가 아니던가?
즉, 검선(劍仙).
검을 쓰는 자라면 누구나 도달하고 싶은 경지.
남궁훈이 간절히 바라는 진정한 신선의 상.
물론 검선께서 이미 존재하고 계신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검선 여동빈의 이름으로 강호의 오래된 설화나 전설에서 종종 등장하셨으니까.
남궁훈은 차세대 검선이 되고 싶었다.
선계로 올라가 그분께 치하를 받고 싶었다.
'검선님···.'
그와 만난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기다려 주십시오. 후인이 곧 가겠습니다.'
함께 검을 타고 노닐고,
서로 논검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검선께선 독이나 암기 따위의 잡술을 쓰는 당군악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독마 새끼가 검선님과 겸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선계에서 버러지처럼 따돌림이나 당하고 있겠지.
그래서 제왕신검 남궁훈도 등선을 마음먹었다.
당군악, 그놈도 했는데 자신이라고 왜 못해?
반드시 등선하고야 만다.
검선 여동빈의 후인으로서 자리매김한다.
등선 작업의 시작.
선기의 뿌리, 선근(仙根) 만들기.
첫 번째로 당가를 몰래 찾아가 당군악이 남긴, 선기의 기운이 진하게 남아있는 신선의 보패인 붉은색 장포를 탈취했다.
아쉬운 건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던 당철휘가 주화입마로 누워있다는 사실.
절대 깨어나지 못하겠지만 만일을 대비에 남궁가와 오대 세가에 사천 당가의 멸문을 지시했다.
증거도 남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로 황산(皇山)으로 왔다.
황산은 신선의 산으로 유명하다.
번잡한 도심지보다는 신령한 곳으로 소문난 황산에서 수련하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될 터.
황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선기가 가득한 붉은 장포를 입고 참오에 들어간 남궁훈.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한 달, 두 달···, 수련엔 인내심이 필요하다.
선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그런데?
"냐아아앙!"
고즈넉한 수련 분위기를 깨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망할!"
남궁훈은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
황산 꼭대기에 무슨 잡스러운 짐승이?
그런데?
"호오!"
남궁훈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예사롭지 않은 짐승이다.
게다가 놈에게서 풍기는 기운.
'···선기?'
확실하다.
저 고양이의 기운이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장포의 선기와 느낌이 똑같다.
'잡아야겠군.'
천지신명이 자신에게 선기를 지닌 영물을 보내준 것이 틀림없다.
'저 영물의 내단을 뽑아서 복용하면?'
아마 등선할지도.
스르릉,
천천히 검이 뽑혔다.
남궁가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제왕검형.
일종의 공간검.
검의 영역에 들어오는 어떤 대상도 지배하고 제압할 수 있다.
"얌전히 내단을 꺼내놓거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그러나,
"캬악!"
순식간에 몸이 커져 무시무시한 발톱으로 공격해오는 영물,
채앵!
남궁훈은 여유롭게 검을 들어 막았다.
"오호!"
영물 중에서도 꽤 강한 놈이다.
"제법이구나. 허나 반항하지 말라. 내 너를 어여삐 여겨 고통없이 끝내줄 테니."
바로 그 순간!
스윽!
"응?"
황산 봉우리에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도둑놈 새끼, 장포를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우리 일백이 내단까지 뽑겠다고?"
태주였다.
당군악과의 영혼 연결로 남궁훈의 신상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추적부의 발동 요건은 차고 넘쳤다.
남궁훈은 눈을 부릅떴다.
잘못 본 건가?
앞에 서 있는 젊은 놈의 얼굴이···,
"다, 당군악?"
"아니다, 이 새끼야!"
스우우우웅!
수만의 암기가 황산의 봉우리로 솟구쳐 올랐다.
남궁훈이 고개를 들어 암기의 구름을 목격했다.
아니기는!
"마, 만천화우, 그럴 줄 알았다! 넌 등선한 것이 아니었어. 반로환동했구나."
"하아, 뭐, 마음대로 생각하고, 이 개자식아! 그동안의 은혜에 보답하기는 커녕! 당가의 가주를 기습하고 보패를 도둑질해?"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나를 뭘로 보고?"
웃기고 있네.
지금 거짓말하는 게 누군데?.
태주는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약간의 의심이라도 있었다면 대화를 통해 확인해보면 되지만, 판관의 반지 반응도 그렇고, 입고 있는 장포도 그렇고, 놈의 잘못은 명백하다.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남궁훈은 검을 움켜잡았다.
만천화우도 대단하지만 제왕검형도 만만치 않다.
최근엔 깨달음도 얻었다.
공간을 지배하는 최고의 검.
그깟 암기?
어디 한번 해보자.
"지옥에 가면 깊이 뉘우치도록!"
"흐흐흐, 같아 가자꾸나. 네가 저지른 살업도 만만치···,"
그때였다.
지이잉!
갑자기 황산의 봉우리에서 문이 열렸다.
"어?"
"어?"
문을 통해 나온 저승사자.
당가에서 본 그 저승사자였다.
"태, 태주 대협?"
"왜 또 여기에···,"
"죽을 놈이 있어서 데려가려고요."
"아!"
죽을 놈이 누군지 알겠다.
남궁훈도 대경실색했다.
저승사자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검정색 관모와 도포를 입고 하얀 얼굴과 붉은색 입술, 세간에 떠도는 저승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째서 내 눈에 보이지?'
죽을 때가 되면 저승사자가 보인다는 말을 들었긴 했는데,
'그럼 설마?'
얼빠진 남궁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저승사자는 환한 표정으로 태주에게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요?"
"잘 됐습니다. 어서 빨리 황천계로 가시죠."
"지금?"
"염라대왕님께서 사자들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빨리 대협을 모셔오라고요."
"왜···,"
"신선들이 업화궁에서 시위하고 난리 났습니다. 태주 대협을 만날 거라면서 인간계 문을 열어달랍니다."
"···."
벌써 소문이 다 퍼진 모양이다.
그러나 염라대왕님이 순순히 문을 열어 줄까?
신선들이 어떤 분들인지 뻔히 아는 판에.
인간계 전체가 떠들썩해질 것이 뻔하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이놈만 죽이고."
"에이,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인데요. 명부책 보십시오. 사(死)자가 진하게 쓰여 있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어차피 이놈은 죽을 겁니다. 대협께서 굳이 손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꾸 더러운 거 만지면 좋지 않아요."
저승사자가 말렸지만,
"그래도 남겨두고 가면 이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요, 잠깐이면 끝납니다."
"뭘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이놈은 제가 황천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산 채로! 여기서 뒈지든 지옥에서 뒈지든, 그게 그거 아닙니까."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애초 목적이 선계로 가는 거였으니까.
"알았어요. 갈게요. 이 문 통과하면 되죠?"
"넵!"
암기들을 다시 무한공간에 넣고,
태주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백아!"
"냥?"
"가자."
"냐아!"
일백이가 태주의 품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황천으로 통하는 문을 넘었다.
태주가 간 걸 확인한 저승사자도 남궁훈을 노려보면서.
"너 이리 와!"
"···저, 저승사자 주제에 감히 날!"
"뭐래? 약해빠진 새끼가?"
덥석!
"억!"
남궁훈의 머리채를 틀어잡았다.
반항을 해봤지만 몸에서 진기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안돼!"
대체 이게 무슨 영문이지?
갑자기 저승사자가 왜?
그리고 당군악을 보고 태주 대협이라니?
남궁훈은 알 도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지옥에서 네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
저승사자도 남궁훈을 산 채로 질질 끌고 황천의 문을 넘었다.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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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계 업화궁.
신선들의 억지 시위로 난장판이 된 내부.
사자, 차사 판관보다 신선 숫자가 더 많다.
군데군데 분신체 원숭이들도 보였다.
시위대의 규모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죄다 이마에 단결투쟁 머리띠를 두르고.
"염라대왕은···,"
부적 만드는 단주 선인이 선창하자.
"각성하라! 각성하라!"
신선들이 한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우리를 강호 무림으로···,"
"보내달라! 보내달라!"
염라를 비롯한 황천계 관리로선 환장할 노릇.
업화궁을 점거하고 데모하는 신선이라니.
지구 문화 유입의 순기능인가? 아니면 역기능인가?
싹 묶어서 지옥에 처넣고 싶지만 만만치 않다.
한두 놈이면 모를까, 저렇게 같이 뭉치면 상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검선 놈은 영혼의 단짝이 된 제천대성까지 데리고 왔다.
뭐, 진짜 잘못한 거라면 받아들일 용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억지 아닌가?
"문을 통해 태주 대협과 거래하다니, 밀수나 다름없소."
"맞소. 무릇 독선의 공유 창고를 통해서만 지구 물건이 유통되어야 하거늘."
"저승사자 파견 내역과 상납받은 물건 종류와 수량, 다 밝히시오."
"몇 명이, 어디로 갔소? 편법으로 막 내려보냈을 거야. 혼백은 데리고 왔나?"
"황천계, 자알 돌아간다."
"우리도 인간계로 보내주면 눈 감아 주리다."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의 염라.
태연하게 담배 하나 꺼내 불을 붙인 후.
"그래서 뭐?"
신선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가 없네?"
"아니, 왜 저렇게 떳떳해? 상납받은 담배를 보란 듯이 피우다니."
"수사도 자기가 하고, 판결도 자기가 내리니, 무서운 것 없다는 거겠지."
"이렇게 된 이상 청문회로 갑시다."
"황수처를 만드는 게 어떻소? 황천계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처 말이오."
"그렇군. 견제 기관이라도 있어야지."
염라는 솔직히 대응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많은 수의 신선들을 어떻게 인간계로 보내?
자기들도 안 되는 줄 안다.
그래서 천계로 안 가고 만만한 황천계로 왔지.
예전에 이와 비슷한 시위를 해서 태상노군을 괴롭혔던 전력도 있다.
시위도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놀이.
미친 신선 놈들은 영화나 TV에서 보던 걸 그대로 흉내를 내보고 싶었던 거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염라도 대응책을 마련해뒀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신선은 신선으로 잡는다.
순간!
저벅저벅, 업화궁 안으로 들어오는 한 명.
다른 신선들이 화들짝 놀랐다.
"어?"
"누가 말했어."
"고, 공사 중이라 바쁠 텐데,"
"···비겁하오! 염라!"
독선이었다.
"후우,"
오자마자 한숨을 푹 쉬며,
"다들 지금 정신이 있소, 없소?"
찔끔!
고개를 숙이며 눈을 피하는 신선들.
"할 일이 없으면 아파트 공사 현장에 와서 콘크리트 거푸집 작업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철장 공방에서 철근이나 뽑던가, 그것도 못 하겠으면 벽돌이라도 나르던가."
검선이 슬며시 이마에 두른 단결투쟁 머리띠를 풀었다.
당군악이 인상을 찌푸리며 빈정댔다.
"그건 왜 푸시오? 잘 어울리는데 계속 차고 다니지."
"···아, 아니, 이마에 땀이 나서 찬 것뿐이오."
"시위를 주동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시는 게···,"
"주동이라니! 저기 단주 선인이 주동자요."
주동자로 몰린 단주 선인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나, 난 떠밀렸을 뿐인데? 내가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다고 앞으로 나설 신선은 나 하나뿐이라고."
"누가?"
"···곤륜 선인이."
독선이 곤륜 선인을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아, 아니, 주선이 단주 선인을 살살 간질여서 추켜 주면 앞으로 나설 거라고 하여···, 진짜요! 칵테일 한잔에 넘어갔소이다."
물론 주선(酒仙)도 딱 잡아뗐다.
"사실 배후가 따로 있소. 검선이요. 그가 시켰소이다. 황금 고블린, 아니 태주 대협은 달라는 대로 주니까 코인 아낄 기회라면서···, 인간계 유람이나 하면서 거하게 놀아보자고."
돌고 돌아 검선에게.
"검선은 할 말 없소?"
"사실 여기 이 원숭이가···,"
"내가 언제! 날 끌고 온 이가 누군데!"
"쉿!"
그럴 줄 알았다.
선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먼저 검선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건 사고의 시발점은 바로 검선에게서 나온다는 의미.
"선계 암중 흑막 검선이라, 어울리는군. 이참에 선명(仙名)도 흑선으로 바꾸지, 그랬소."
"으음, 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쯧쯧, 한때 선계 도로를 홀로 건설하는 그 열정은 다 어디로 갔는지."
"···."
당군악은 제천대성도 추궁했다.
"요즘 검선과 죽이 척척 맞아 보이오. 사업도 내팽개치고."
"가, 가끔 휴식도 필요한지라···."
"그럼 편하게 놀게 해 드릴까?"
"무, 무슨?"
"그렇지 않아도 배달 사업이 독점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소. 환수계 미호 선자가 자기도 배달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해서 들어줄 참이오."
"어어···,"
제천대성이 당군악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면서 사정했다.
"내, 내가 생각이 짧았소. 다신 한눈팔지 않고 건실한 사업가로서···,"
그때였다.
지이잉!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치지지직, 치직! 치지지직!
빛으로 된 사슬이 당군악을 옭아맸다.
"응?"
"···오!"
"이, 이 현상은?"
같은 영혼이 가까운 공간에 같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
그렇다면?
"···태주 대협?"
"쩝, 한발 늦었어."
"에이, 조금만 늦게 오지."
"하필 독선이 있는 곳에서."
"그래도 뭐 하나 달라고 해볼까?"
"독선이 노려보는 거 안 보이시오?"
"끄응!"
태주는 신선들의 실망 섞인 푸념을 듣고 머쓱한 표정,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어떤 상황인지 감은 잡았지만.
뒤를 이어 나온 저승사자.
붉은 장포를 입은 어떤 인간의 머리채를 잡고서.
"저 새끼는 또 뭐야?"
"죄인 놈이겠지. 사자에게 머리채 잡혔잖소."
"···살았는데?"
"그러네, 왜 산채로 끌고 왔어?"
치지지직, 치직! 치지지직!
빛의 사슬은 태주와 당군악 두 사람 사이를 오고 갔다.
서로를 맹렬한 힘으로 끌어당겼지만 둘은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저 둘은 이젠 끌려가지도 않는군."
"뭐, 지금부터 딱 붙어 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겠어."
"어허! 그러다 합치면 큰일 나."
눈과 눈이 마주친 태주와 당군악.
심지어,
'음?'
'오!'
서로 간의 영혼 연결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동안에 겪었던 기억과 경험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지구의 일, 선계의 일, 무림의 일, 등등.
그 와중에 깨달은 사실.
영혼 합쳐짐 부작용에 따른 폭발, 잘만하면 극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폭발 없이 당군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
당군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조건 할 수 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말이다.
만약 진짜 하나가 된다면?
엄청난 힘을 얻을 것이다.
각자 가지고 있던 힘, 더불어 폭발적인 에너지까지 싹 흡수하여 하나가 되는 셈이니까.
'이게 가능했구나.'
만약 다중우주에 같은 영혼들이 다수 존재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순조롭게 단 하나의 영혼으로 합쳐진다면?
'아마 신(神)이 되는 길일지도.'
하지만 문제는···,
'누가 주가 되지?'
태주가 중심이 되어 당군악을 흡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군악이 중심이 되어 태주를 흡수할 것인가?
'···웃기네.'
이런 고민 할 필요 있나?
어차피 안 할 건데.
'합쳐짐은 개뿔!'
영혼은 같아도 독립적인 존재로 남아야 한다.
독선 당군악도 그런가 보다.
그저 씨익, 웃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 뿐이다.
어쨌거나.
"어서 오게. 여의주와 드래곤 하트에 그런 공능이 있었다니."
"그러게요."
"···고마워. 당가를 보살펴줘서."
"그게 제 일인데요."
영혼이 연결됐기에 자세한건 물을 필요도 없다.
"먼저 선계로 가 있게. 백천인은 선계월드에 있을 거야."
"하하하, 네, 오랜만에 얼굴이나 봐야겠습니다."
사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남궁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모습은 대체?
'다, 당군악이 2명이라고?'
젊은 당군악, 늙은 당군악.
누가 진짜 당군악인가, 늙은 쪽인 것 같았지만.
사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
남궁훈이 늘 상상해왔던 고풍스럽고 점잖은 풍모의 신선들 말이다.
'저 중에서 누가 검선님이지?'
태주는 남궁훈을 힐끗 보고 난 후, 선계로 통하는 문을 넘어갔다.
신선들도 태주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슬슬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험험! 이만 가볼까?"
"멀티플렉스를 너무 오래 비웠군."
"아참! 내가 에어컨을 끄고 나왔나?"
"오! 택배 도착 메시지가 왔군. 받으러 가야겠어."
하지만,
"모두 멈추시오. 매듭은 짓고 가야 하지 않겠소?"
독선이 단호한 태도로 제지했다.
"다들 염라대왕께 사죄하시오,"
당연히 신선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주동자가 누구인지 밝혀졌잖소."
"맞아. 검선, 검선이었지."
"우린 죄가 없소."
"검선이 충동질만 안 했어도.···"
"책임지시오. 검선!"
그러나 검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다.
"내가 언제 충동질 했다고? 증거 있소?"
남궁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검선? 진짜 검선이라고?
'그럼 저분이···,'
감격스러웠다.
꿈에도 그리던 분을 만났다.
그래서 남궁훈은 저승사자의 손아귀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냅다 뿌리치고는.
"검선님! 마, 만나고 싶었습니다.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검선의 손을 덥석 잡았다.
"···누구?"
"남궁훈이라고 하옵니다. 대대로 검을 익혀온 남궁가 출신으로 창궁무애검와 제왕검형을 주무공으로 삼고 있고요."
"오호! 검을 수련한단 말인가?"
"네, 부끄럽지만 검선님의 후인이 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하하하, 검을 쓴다면 내 후인이 맞지."
신선들을 보며 으스대는 듯한 검선.
봐라, 내가 이런 사람이다! 라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남궁가라면?
"그럼 갓 등선한 독선도 알겠군. 속세에선 절대독마라고 불렀다던데."
"하! 저놈 말이옵니까? 독과 암기를 쓰는 교활한 놈입니다. 저딴 건 무인도 아니지요. 실로 어떻게 등선했는지 모를 정도로. 지금도 건방지게 검선님께 누명을 씌워서 간계를 부리는 걸 보면···,"
뭐야?
이 새끼 왜 이래?
검선은 당황했다.
그리고 신선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와! 지옥의 죄인이 검선 후인이었군."
"내 이럴 줄 알았다. 칼부림하는 걸 자랑으로 삼는 놈들이 다 그렇지."
"허어! 나도 무당산에서 검으로 도를 깨우쳤지만 저런 후인 따윈 없소."
"검 쓰는 사람을 매도하지 마시오. 다 검선 같은 줄 아나?"
"저 새끼, 독선과 안면이 있나 본데, 어떻소? 잘 아시오?"
독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모를 리가! 저놈이 입은 옷이 내가 남긴 보패요. 쯧쯧, 염치도 없이 도둑질했군. 때문에 내 자식이 죽을 뻔했으며, 속세에서 당가를 멸문시키려고 수작도 부렸고."
태주와의 영혼 연결을 통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당군악.
"저! 저! 저···, 악독한 놈이로다."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똘똘 뭉쳤군."
"역시 관상은 과학이야."
"검선과 닮았군. 속세에 만들어둔 인연인가?"
"아마 그럴지도,"
"이참에 제자로 거두지."
화들짝 놀란 검선이 남궁훈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당군악에게 달려갔다.
그야말로 대위기였다.
자칫하다간 저놈과 엮일지도 모른다.
속세에서 독선의 집안과 원수지간인 듯 한데,
이러다 큰일 난다.
멀티플렉스 입장 금지나 쇼핑몰 강제 이용정지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독선! 이, 이게 다 오해인 줄 알고 계시리라 믿소. 난 저런 새끼와는 그 어떤 인연도 없소."
"흐음, 오해라고 보기엔 정황이···,"
"아니! 날 어떻게 보고! 내, 겨, 결백을 믿어주시오."
그 모습에 남궁훈은 황당할 따름.
꿈에도 만나기를 고대했던 검선이었다.
검의 종주.
검술의 신.
검을 사용하는 무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과 생각이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검선이 독마 새끼에게 저렇게 낮은 자세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쩔쩔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검선은 저런 분이 아니다.
그래서 처절하게 외쳤다.
"검선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어찌 저 흉악한 독물에게 머리를 조아···,"
순간!
스팟!
검선이 날았다.
일단 따귀라도 후려쳐서 저놈 입부터 틀어막을 생각으로.
매우 다급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이 지옥의 죄인과 한 패거리가 될 터.
그래서 힘이 과하게 실렸다.
선계의 최강자 검선, 제천대성과 힘을 나란히 하고, 이계의 용신급 드래곤마저도 한칼에 썰어버렸던 무위를 가진 그.
"닥쳐라! 이놈아!"
츠핏!
남궁훈이 아무리 인간계 최고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있는 힘을 다해 후려친 검선의 따귀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쫘아아악!
꽈드드득!
"케엑!"
따귀 한방에 목등뼈가 부러졌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궁훈.
"으음."
너무 힘이 강했나?
검선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남궁훈의 몸에서 붉은색 장포를 벗겨 독선에게 내밀었다.
"여기···,"
"···."
바로 그때!
스으윽!
시체에서 빠져나오는 남궁훈의 혼백.
그 모습에 신선들이 감탄했다.
"산 채로 지옥에 끌려와서 바로 혼백을 뽑혀버렸군."
"저걸 산지직송이라 부르나?"
"산지직송이라, 그건 좀 아닌 것 같소. 저놈이 무슨 양식장 생선도 아니고."
"아무튼 염라대왕, 검선은 지옥으로 가는 거요?"
염라대왕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지옥행은 아니야. 나도 검선을 지옥에 처넣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어차피 저놈은 죄인, 여기서 죽을 운명이기도 했어."
신선들도 아쉽다는 표정.
"아까비."
"지옥에 끌려가는 최초의 신선을 볼 수 있었는데."
"뭐,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찌릿!
신선들을 매섭게 노려보는 검선이었다.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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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는 황천계에서 선계로 넘어왔다.
품속에 있는 일이삼백이를 땅에 내려놓고.
"당분간 여기서 있다가 갈 거야."
"냐앙?"
낯선 세상이라 그런지, 연신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일이삼백이.
"저기 가면 환수계라는 곳이 있는데, 영수들이 많이 살고 있대."
"냐아아아아···,"
"인사 삼아 한번 갔다 와라."
"냥!"
"뉴비가 인사하러 가는데 그냥 가긴 뭐하니까···,"
태주는 영수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과 음식들을 따로 챙겨 아공간 가방에 넣어 일이삼백이 입에 물려줬다.
"이거 가져가."
"냐앙."
그리고 선계월드로 가서 백홍표를 만났다.
영상을 통해 본 모습 그대로.
'이게 천인의 육체인가?'
육신 교체, 완전한 바디체인지.
환골탈태는 이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무공을 익히면 단번에 절정으로 오를 만큼 근골도 좋고, 과연 천인들만이 가지는 육체라 할만하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지구의 현실 세계도 이러면 좋겠다.
착한 자는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는,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치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세상 말이다.
"서연이는 내가 천계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네, 서연씨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모르고, 그래서 언제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세요?"
잠시 고민하는 백홍표.
"···행복 마을은 별일 없는지 모르겠네."
"서연씨와 아이들이 잘 보살피고 있습니다."
뿐인가?
복지 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착하게 살아보겠단다.
"혹시 여기서 눌러사시려고요? 뭐, 그래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천만에! 가긴 가야지. 다만 여기도 정이 많이 들어서···, 조금만 더 있다가."
"하하, 원하는 대로, 언제라도 마음 내킬 때 지구로 돌아오세요."
"천계 아파트가 완공되면 가는 걸로 하지."
그러고 보니 천계 아파트 공사 현장에도 가보고 싶다.
진척 상황은 알고 있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니까.
순간!
"태주니이이임!!!!"
저쪽에서 누군가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달려왔다.
백홍표가 깜짝 놀라며 일어서서 외쳤다.
"어어어, 해, 해맑 선녀, 뛰지 마시고 천천히! 그러다 넘어져요!"
아니나 다를까.
"아이코오!"
앞으로 넘어져서 앞구르기를 통해 굴러오는 해맑 선녀.
데굴데굴···,
"이, 이런!"
"괜찮아요?"
하지만.
"읏차!"
해맑은 씩씩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몸을 툭툭 털고, 흐트러진 머리의 꽃도 바로 잡으면서.
"태주님!"
"···네네."
"상제 할아버지가 만나보고 싶대요오!"
"저를요?"
"넵!"
옥황상제.
천계의 지배자.
천지신명의 대리인.
전에 임시 등선했을 땐 만나지 못했다.
마침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것도 있고.
"그래요. 가보죠. ···여기서 멀어요?"
"뛰어가면 금방 가요오."
뛰다가 또 넘어질라.
해맑도 천인이라 백번을 넘어진들 생채기도 안 나겠지만.
"차 타고 갑시다."
"엥? 저 차 안 가지고 왔는데에."
"제가 있어요."
어떤 걸 꺼낼까?
경차? 준중형차? SUV? 아니면···,
'빠른 걸로.'
태주는 훼라리 슈퍼카를 꺼냈다.
"와! 못 보던 차다아!"
"옆자리에 타세요."
"···으음, 음, 음음음음."
해맑은 초롱초롱 눈빛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귀엽다.
너무나 순수한 눈빛.
진짜 이럴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려 미칠 지경이다.
심쿵사라는 말이 있다는데, 진짜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직접 운전하고 싶어요?"
끄덕끄덕.
연신 고개를 아래위로 흔드는 해맑.
"할 수 있어요?"
끄덕끄덕.
하는 수 없다.
맡겨보자.
태주와 해맑은 자동차에 함께 올라탔다.
"안전 벨트요오!"
맬 필요도 없겠지만,
"네."
찰칵!
위잉!
훼라리 전기 슈퍼카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간다.
태주가 깜빡한 것이 하나 있다.
해맑은 천계에서 소문난 베스트 드라이버, 또 운전을 미니카 자동차 경주로 처음 배웠다는 사실.
도로엔 자동차도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제로백 1초.
삐이이이잉!!!
3초가 지나니 시속 200km.
"···어어."
안전벨트 매길 잘했다.
태주는 슬며시 손을 위로 올려 안전 손잡이를 잡았다.
머리에 꽃을 단 천계 드라이버 해맑.
상체를 운전석 가까이 바짝 붙이고, 가늘게 뜬 눈으로 재빠르게 핸들을 돌리며, 수동 기어를 자유자재로 바꿔가면서.
삐이이잉!
쐐애애액!
'미, 미친!'
분명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인데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속도뿐만이 아니다.
커브 길에선 드리프트도.
파파팟!
"···와!"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갑자기!
끼익!
급정거하는 슈퍼카
"헉! 왜, 왜요?"
"빨간 불이요오. 신호등은 지켜야죠오!"
"···."
속도는?
그건 무시해도 되나?
아무튼 천계는 금방이었다.
차창 너머로 무섭게 올라가는 아파트도 보인다.
'진짜 대단하구나.'
독선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시멘트를 왕창 쓸어가더니.
이제 한 번 더 와서 내장재나 인테리어 자재만 가져가면 될 듯하다.
끼이익!
어느새 자미궁 앞에 차가 섰다.
"다 왔어요오!"
지구에 가서 F1 경기에 참여해도 되겠네.
"이 차는 선물로 드릴게요."
"네에? 저도 차는 있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꼭 안전 운전하시고."
"감사요오!"
해맑은 해맑 선녀가 다시 기어를 넣었다.
삐융!
슈퍼카가 천계 도로를 날았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고는 안 나겠지?
※ ※ ※
천계 자미궁.
미리 마중 나온 탁탑 신장.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안으로 들어가니,
"어서 오시게."
"하하하,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군."
두 사람이 태주를 맞이했다.
"내가 천계를 관리하는 상제라고 하네."
그럼 또 한 사람은?
"난 바다를 관리하는 용왕이야."
상제와 용왕이 함께 있었다.
"반갑습니다. 지구에서 온 김태주라고 합니다."
"만나보고 싶었어. 그대가 왔다는 걸 알고 용왕도 불렀네."
"아, 네."
대화가 시작됐다.
주제는 지구의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또한 변화하는 상위계, 그리고 그 두 세상이 서서히 연결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이런 차원 교류가 부작용은 없겠죠?"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다지 크진 않을 거야. 문제가 있다면 벌써 터졌겠지. 그리고 부작용보다는 좋은 점이 더 많고,"
"내 생각도 그렇소. 단지 우리 용궁이 늦게 합류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오. 에잉! 여의주를 빨리 팔아치웠어야 했는데."
태주도 동의했다.
세상과 세상이 연결되면서 나빠진 점은 별로 없다.
여러 신약과 해독제, MRC,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됐고, 신선들의 도움으로 외계의 괴수들과 비욘드 마수도 소탕됐다.
"어떤가? 지구도 많이 좋아졌지?"
"몰라보게요."
"우리도 그래."
그래도 의문점이 있다.
"영혼 연결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요? 저 말고도 영혼 연결자들이 더 있는 걸 보면 어떤 엄청난 힘이 작용한 것처럼 보이는데."
태주의 의문에 상제가 말했다.
"먼저 물어볼 것이 있네. 지구에 신이 있을까, 없을까?"
"글쎄요."
"아마 있을 걸세. 느끼지 못하고 있거나 인간들이 상상을 넘어서는 무언가거나."
"흐음."
사실 생각은 해봤다.
강호 무림에도 상위계가 존재하듯, 지구도 그 비슷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
당장 각성 시스템만 해도 그렇다.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우린 신이 아니야."
"네?"
"천지신명이 진정한 신(神)이지. 이 세상을 운행하고 규정짓는 법칙, 나나, 여기 용왕이나, 염라나, 다 천지신명의 대리자일 뿐이고."
상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천지신명은 실체가 없네. 단지 의지만이 있을 뿐이지."
"···의지?"
"세상의 방향을 결정하는 차원의 의지, 그 의지에 의해 우리와 자네 세상이 연결되었을 거라 믿네."
"아!"
차원의 의지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는 의미.
상제의 말이 맞는지, 틀렸는지 알 수는 없다.
"아마 지구가 위기에 빠진 적이 있을 거야. 세상이 완전히 멸망할 만큼의 위기."
맞다.
멸망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마나의 침범이 그 서막이었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겹쳐 피해는 더 극심했다.
비단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 살던 모든 생명체가 멸종의 위기에 처했다.
선계와 연결된 후에도 위협은 계속됐다.
언데드를 일으켰던 드렉 카락스, 이계의 게이트를 열어 파괴 본능의 끔찍한 괴수를 소환한 빈센트 모레티, 그리고 옛 중국 땅 무한의 용신.
다 지구를 망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다 해결됐지만.
"차원의 의지가 세상과 세상의 연결을 필요로 했다는 말이군요."
납득이 된다.
"맞아. 그래서 나도 의지에 따라 행동할 거야. 내 의지가 곧 천지신명의 의지니까."
"뭘요?"
"지금도 느끼고 있지? 이 세상이 자넬 밀어내고 있다는 걸."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곧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게 자넬 부른 용건이지."
"네? 어떻게···,"
"김태주, 그대를 우리 인간계의 주민으로 인정하겠네."
상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으으읏!
몸 안에서 무언가가 변화했다.
밀어내는 느낌이 완전하게 사라졌다.
"이제부터 원하는 대로 이곳 인간계와 상위계에 체류할 수 있을 거네."
"아!"
그럼 신선들처럼 갑자기 사라질 일은 없어진 건가?
"자! 이제 나하고 얘기 좀 하세."
용왕도 할 말이 있나 보다.
"듣기론 순수한 여의주만 품은 것이 아니라면서? 그 뭐더라, 이계의 용이 가졌던···,"
"드래곤 하트입니다."
"그렇지, 드래곤 뭐시기, 쯧쯧, 그런 잡스러운 기운이 섞여서, 내가 없애줄까?"
"그게···,"
용왕의 입장에선 드래곤 하트가 잡스러운 것이 맞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강호 무림으로 넘어오게 됐다.
그래서 태주는 용왕에게 드래곤 하트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 설명했다.
"오! 그렇게 된 거군. 그것도 어쨌든 여의주란 말이지? ···내가 잠시 살펴봐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용왕은 태주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잠시 후.
"쯧쯧, 역시 불안정해."
"위험한가요?"
"그건 아닌데, 여의주의 기운과 드래곤 하트가 제대로 섞이지 않았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셈이 되어버린 거지."
"그래도 차원 이동은 했습니다만."
"그럼 또 할 수 있나?"
"···아뇨, 지금으로선 힘드네요."
용왕이 맞다.
승천도 안 되고, 다시 게이트를 열 수도 없다.
"정리가 필요해. 결합된 걸 다시 분리해서 재결합시켜보자고. 그럼 제대로 쓸 수 있을 거야."
"제대로 쓴다는 말은?"
"차원 이동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
진짜?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 발생기 없이도, 언제든 지구에서 강호, 강호에서 선계, 선계에서 지구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제가 문을 막 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서로 다른 세상인데."
태주의 질문에 상제가 슬며시 귓속말로 대답했다.
"사실 열 수 있는 자가 이미 있어."
"네?"
"지구와 상위계의 직접 차원 이동 조건이 충족되었단 말이지."
이게 무슨?
"자네와의 인연으로 천인과 악인의 혼백이 넘어왔지 않나."
"아! 혹시 염라대왕님···?"
"맞네. 이건 비밀이지만 그가 열었네. 내가 확인했고."
결국 이렇게 됐다.
그럼 뭐,
"부탁드립니다."
"맡겨주게. 깨끗하게 정리해줌세."
그저 고마울 따름.
강호의 주민으로 인정받은 것도 그렇고, 용왕의 제안도 그렇고.
"감사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사례라도···."
상제와 용왕이 손사래를 쳤다.
"어허! 사례라니! 괜찮네."
"까짓거 무슨 은혜라고."
"···뭐, 선계 코인이 좀 있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나도 그래. 맨날 물건 사려면 해맑이 코인을 빌려야 하니."
"상제께선 그래도 낫소. 해맑이 코인이야 나중에 갚으면 되지만 난 빌릴 데도 없어."
"마이너스 결제하면 되지."
"대출 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시오?"
코인이야 나중에 독선에게 부탁해서 입금해주면 된다.
"자! 그럼 시작해보세."
"여기서요? 지금?"
"기다릴 필요 있나? 바로 해치우지."
정말 차원 게이트를 열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시술이 끝나면 확인할 수 있겠지.
※ ※ ※
황천계의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신선들이 멀티플렉스에 모였다.
시끌벅적한 1층 주점.
검선에게 맞아 죽은 남궁훈과 독선의 속세 인연으로 떠들썩했다.
"갓 등선하면 이게 문제야. 속세의 인연들이 멀쩡히 살아있어서."
"나도 그랬소. 깔끔하게 정리가 안 되더라고, 한 2백 년 정도 지나니 인연에서 홀가분해졌지만."
"2백 년 가지고는 턱도 없소. 한 5백 년은 흘러야···,"
그러자 하선고가,
"독선아! 내가 점을 쳐 줄까? 1년 후에 사천 당가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흐음,"
"이게 선기가 많이 들어. 천기누설의 대가도 치러야 하고, 3백만 코인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매화 선인도.
"속세의 화산 장문인 꿈에 나타나서 당가를 부탁한다고 말해줄 수도 있소. 2백만 코인이면···,"
하지만 당군악은 단칼에 거절했다.
"필요 없소. 차라리 내가 내려가면 되지. 태주도 있고."
그러자 실망한 표정의 몇몇 신선들.
이번엔 독선이 들고 있는 붉은색 장포로 관심을 돌렸다.
"이게 독선이 등선하면서 남긴 보패요?"
"그렇소."
"쯧쯧, 허접하구나, 허접해."
"···."
그리하여 갑자기 보패 품평회가 열렸다.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야. 보패의 기능이 고작 무한 주머니라니."
"맞소. 비행술도 없고, 강기막, 수화불침도 없고."
"용량이나 크면 말도 안 해. 무한 주머니라더니 고작 아공간 가방 크기만 하잖소."
"어디 가서 보패라 말하지 마시오."
일단 무자비하게 혹평한 후에.
검선이 먼저 슬쩍 운을 띄웠다.
"5만 코인이면 비행술 새겨줄 수도 있는데."
"난 2만 코인에 호신강기 보호막 추가."
"수화불침에 3만 코인."
"인심 썼다. 1만 코인만 주시오. 절대 훔쳐 가지 못하도록 귀속 술법진을 새겨주지."
당군악도 귀가 솔깃하다.
"그럼 해보든가."
"오오오! 당장 해드리리다. 선불이요."
"어림도 없소, 확인 후 후불."
"콜!"
이 정도면 괜찮은 가격.
'철휘가 입으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겠군.'
끝
ⓒ 꾸찌꾸찌
=======================================
천계 자미궁.
간이 침상에 누운 태주.
용왕이 신중한 태도로 시술을 시작했다.
"메스!"
"···."
"네?"
용왕의 말에 무슨 헛소리냐는 듯 벙찐 상제.
태주도 그랬다.
외과 수술도 아니고.
"해보고 싶었소. 드라마에서 나오길래."
"···닥터 용이라 불러드릴까?"
"마음대로."
시술의 첫 단계는 여의주와 드래곤 하트의 분리, 마구잡이로 섞였기에 개별 특색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비빔밥에 생크림 케이크 으깨서 비비는 것과 똑같소. 영양분이야 다를 바 없겠지만 그걸 누가 먹어?"
"···맛있겠는데? 본 식사와 디저트를 한 방에 해결할 수도 있고."
"진심이오?"
"농담이지."
다시 분리해야 한다.
섞는 게 아니라, 비빔밥은 비빔밥대로, 생크림 케이크는 케이크대로, 따로 담아서.
두 번째 단계는 여의주와 드래곤 하트를 태주의 독령과 따로 완전하게 결합하는 작업.
"둘 다 용족만이 품을 수 있는 물건이오. 인간이 품기에 적당하지 않지. 처음부터 몸 안에서 여의주와 하트의 힘을 키워왔다면 모를까,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오."
"얼마나?"
"최소 백 년. 하지만 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 내가 달리 용왕이겠소?"
"자랑은 그만하고, 빨리 시술이나 합시다."
자신만만한 용왕.
하지만 첫 번째 단계부터 문제가 생겼다.
용왕의 안색이 점점 찌푸려졌다.
"이런!"
"왜 그러시오? 큰소리 떵떵 치더니."
태주도 깨어있었기에 다 듣고 있다.
문제라도 생긴 건가?
"융합이 매우 빠르게 진척됐어. 상당히 많이 녹아버려서, 이거 분리하기 힘들겠군."
"어허, 약한 소리 말고 최선을 다해보시오."
"하고는 있지만···, 쯧! 너무 늦게 왔어. 조금만 빨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것도 드라마에서 많이 듣던 대사인데."
"드라마 흉내가 아니오."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태주.
"분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평범한 내단을 품는 거나 다를 바 없게 되는 거지."
"아!"
"좀 전에 말했듯이 영양분만 살아있는 생크림 케이크 비빔밥처럼. "
무슨 뜻인지 알겠다.
여의주와 드래곤 하트, 둘의 개성은 사라지고 그냥 영물의 내단처럼 기운으로만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
"자칫하다간 차원 게이트 마법을 쓰지 못할 수도 있네."
살짝 실망감이 들었지만,
뭐, 그러면 어때?
"괜찮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맞다.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 발생기가 있지 않나.
"아무튼 있는 힘을 다해 살려볼 테니, 잘 안되더라도 원망하지는 말게나."
"원망이라뇨! 이렇게 봐주신 것도 고마운 노릇인데."
"하하하! 역시 듣던 대로 마음이 넓어."
다시 태주의 몸에 손을 얹고 시술에 집중하는 용왕.
몸속에서 기운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끼리, 다른 것은 다른 것끼리.
시간이 꽤 흘러도 용왕의 시술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윽고,
"후우! 끝났군."
"어떻게 됐소? 빨리 말해 보시오."
"최대한 분리해서 각각의 특색을 살려봤소."
"그럼?"
"여의주의 힘은 많이 살렸으나 드래곤 하트는···, 그래서 차원 이동은 장담할 수 없어. 아마 실패할 수도."
태주가 침상에서 일어나 말했다.
"뭐, 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지."
드래곤 하트를 인식하자, 그것의 사용 방법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졌다.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원 게이트를 열어보자.
드래곤 하트의 힘을 끌어내려면 그에 맞는 특정한 힘이 있어야 한다.
즉, 마나 말이다.
"해보겠습니다."
마법 시전은 간단하다.
자신이 가본 세상을 떠올린 후, 마나를 이용해 능력을 사용하면 된다.
'어디에다가 차원 게이트를 열까?'
당연히 지구에 열 생각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구례 자택 지하수련실이 좋겠네.'
태주는 정신을 집중했다.
독령에서 마나를 뽑아서,
우우우우웅!
기운이 한점으로 모인다.
그러더니,
찌이잉!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렸나?'
그런데?
"으음,"
"실패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실패?
이상하다.
분명 무언가 찌이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게이트를 유지하기 위해선 마나가 필요하다.
지금도 그 마나가 조금씩 소모되고 있었다.
'그럼 열린 게 맞는데···,'
순간!
"어?"
"응?"
"무슨 일인가?"
태주는 멍하니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왜 거길···, 헉!"
"엥?"
그가 가리킨 곳에 차원 게이트가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작디작은 게이트가 말이다.
"여, 열리긴 열렸군."
"너무 작아서 하마터면 밟을 뻔했어."
겨우 골프공만 한 크기였다.
저걸 차원 게이트라 부를 수 있나?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 못 하겠다.
"···다시 해볼게요."
"하하, 그래, 처음이라 그럴 거야. 아무래도 힘이 모자랐던 모양이지."
이번엔 독령에 깃든 마나를 모조리 뽑아냈다.
한 점으로 모이는 기운.
그러자,
찌이이이잉!
"···."
"···."
"···."
다들 말이 없었다.
'이건 뭐,'
처음과 똑같은 크기.
차원 게이트가 아니라 차원 구멍.
민망하다.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이거 열린 게 맞긴 하나?
그냥 구멍만 낸 건 아닐까?
"잠시만요."
태주는 선계 전용 스마트폰으로 독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태주] : 혹시 어디 계세요?
띠링!
[독선] : 황천계에 있네. 인간계 볼 일 때문에 내려갈 수 없을까 해서 염라와 이야기 중이야.
황천계라, 마침 잘 됐다.
거기는 저승.
천계, 인간계, 선계와도 분리된 차원.
오직 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는 곳.
[태주] : 제가 차원 게이트를 여는 능력을 얻었거든요.
[독선] : 아! 드래곤 하트에 새겨진 그거 말인가?
독선도 태주와의 영혼 연결로 그가 어떻게 인간계에서 지구로 왔는지 잘 알고 있다.
[태주] : 네, 혹시 황천계에도 열리는지 알고 싶어서, 확인 좀 해주세요.
[독선] : 그래, 열어보게.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찌이이잉!
[태주] : 열었습니다. 보이세요?
[독선] : 응? 아무것도 안 보이네만.
[태주] :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독선] : 바닥이라니.
잠시 후.
[독선] : 혹시 이 쪼끄만 구멍 말하나?
[태주] : 네, 그겁니다.
[독선] : 이게 차원 게이트라고?
어휴,
쪽팔려 죽겠네.
어쨌거나.
[태주] : 물건 하나 보내볼게요.
태주는 무한공간을 열어 눈깔사탕 하나를 꺼내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독선] : 왔군. 사탕 보냈지?
[태주] : 네.
[독선] : 차원 게이트가 맞긴 해. 비록 크기는 작지만.
크기만 작을 뿐이었다.
차원을 건너가는 건 된다.
하지만 이걸 얻다 써?
[태주] : 아직 황천계에 계시죠? 제가 갈게요.
[독선] : 올 때 신선들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게. 눈에 불을 켜고 자넬 찾아다니고 있어.
[태주] : 그럴게요.
그래도 실망은 하지 않았다.
언젠간 크기를 키울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 ※ ※
상제와 용왕에게 간단하게 인사한 후, 태주는 자미궁을 빠져나와 황천계 업화궁으로 갔다.
염라와 이야기 중인 독선.
치지지지직!
빛의 사슬 때문에 적당한 거리로 다가가서 염라에게 목례를 한 후,
"아직 열려있나요?"
"자네가 오기 직전에 사라졌어. 10초도 안 됐지."
열려있는 시간은 꽤 긴 편.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건가?"
왜 이런 변변찮은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을 해주자.
"쯧쯧, 용왕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기대감만 부풀게 해놓고선···,"
"그래도 열긴 열었잖습니까."
"눈깔사탕이나 보내게?"
"뭐, 언젠간 크기를 키울 기회가 있겠죠."
독선은 불만이 가득했다.
용신이면서, 이계의 드래곤만도 못하나?
물론 세상과 세상의 발전 방향이 서로 달라, 비슷한 용족이라 하더라도 가진 능력이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 쳐도.
"헌데 상제는 아무것도 안 주던가?"
"아! 절 인간계 주민으로 인정해주셨어요. 이곳에 계속 있어도 지구로 강제 귀환 당하지 않게."
"쫓겨나지 않는단 말이군. 뭐, 그건 괜찮은 일이긴 하지만···, 음."
갑자기 말을 멈추고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는 독선.
그러더니 점점 안색이 창백해진다.
"으음, 이거, 어, 어떻게?"
"왜요?"
"강제 귀환이 안 된다고?"
"네."
"그럼 자넨 어떻게 돌아가나?"
"···어?"
가만히 생각하니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네요."
애초에 목적으로 했던 차원 이동 게이트 생성 마법 습득은 실패.
저 골프공 크기의 구멍으로 태주가 어떻게 들어가?
변신 술법을 가진 종리 선인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 발생기도 안 된다.
독선과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차원에 있어야 발동되는 장치.
"이거 큰일 났군."
당군악은 발을 동동 굴렀다.
중대한 사안이다.
태주가 지구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가 이룬 모든 것이 지구에 있는데.
그러나 태주는 태연했다.
왜 돌아갈 수 없어?
해결해줄 사람이 바로 앞에 있다.
"방법이 있습니다."
"있다고?"
태주가 염라를 보며 물었다.
"그쵸?"
"응?"
"대왕님은 열 수 있지 않습니까?"
"뭘···,"
"지구로 가는 문이오."
"아니, 그걸 어떻게?"
"상제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끄응, 그 양반 입도 싸지."
독선의 안색이 활짝 퍼졌다.
그리고 동시에 심각해졌다.
"대왕께서 지구 문을 열 수 있다는 걸 신선들이 알면 안 되는데."
"오히려 내가 부탁하는 바일세. 절대 떠들고 다니면 안 돼."
"그럼요!"
또 시위하러 몰려들라.
아무튼 꼼짝없이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열 수 있을까요?"
"알았네. 열어봄세."
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신을 집중하고 손을 뻗어 허공을 가리켰다.
"열려라!"
순간!
치직! 치지지직!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어?"
칙! 프식, 프시식!
금방 사라진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염라.
"왜 안 되지?"
한 번 더.
치직! 치지지직!
칙! 프식, 프시식!
"이, 이런!"
그 모습에 독선은 애가 탔다.
큰일이다.
염라까지 실패하면 태주가 돌아갈 방법이 없다.
"제발 좀 제대로 해보십시오!!!"
"아, 알겠네."
굳은 얼굴로 크게 심호흡하는 염라.
그러고는.
치직! 치치치치, 치치치치칙!
지이이···,
기어코 문이 열렸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불안정하다.
치칙! 치치칙! 지이, 지이이,
사라질 듯 말 듯, 일그러졌다, 흐려졌다···,
"빠, 빨리 들어가게. 이러다 닫힐라."
"지금요?"
"또 열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자네도 겪었잖아. 상제도 그렇고, 용왕도 그렇고, 염라대왕도···, 누굴 믿겠나? 열렸으니 바로 넘어가."
"참! 일이삼백이도 데리고 왔는데···."
"그놈은 내가 알아서 잘 보살피지. 나중에 게이트 발생기로 백천인과 함께 보내면 돼. 빨리!"
"네네, 그럼 다음에···,"
쑤욱!
태주는 게이트를 넘었다.
도착한 곳은 첫 출발 지점이었던 지리산 천왕봉이었다.
※ ※ ※
태주는 구례 자택으로 돌아왔다.
상위계에서 일어났던 소동.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자칫하면 다른 세상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정신이 없네.'
그래도 결국 돌아오긴 했다.
실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차원 게이트를 아무나 여나?'
세상과 세상을 넘는 권능.
그걸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자체가 잘못됐다.
다른 세상 상위계에서도 오직 염라만이 그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염라.
세상과 세상의 문을 여는 자.
저승사자와 차사들이 그의 힘을 받아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망자를 데리고 온다.
하루에만 열리는 문이 대체 몇 개인가?
동시에 수백 수천 개도 충분히 열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사라지지 않는 상시적인 문 개방 권능도 갖추고 있다.
그 문 덕택에 상위계가 하나의 통신 네트워크로 묶였다.
문을 통해 광케이블을 연결하고 무선 와이파이 신호를 만들어 각각의 계에서 스마트폰으로 소통할 수 있다.
이것이 다 염라 덕분에 가능했던 일.
골프공만 한 차원 구멍을 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
그것도 엄청난 능력.
의외로 쓰임새가 많을 것 같다.
마나만 충분하면 태주 또한 상시적인 차원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어떻게?
해답은 바로 최근 당군악과 영혼 연결을 통해 습득한 지식.
귀곡과 갈홍 선인이 독선을 밤잠 못 자게 굴려 가며 꾸역꾸역 머리에 채워 넣었던, 대마공학자 빈센트 모레티와 자크 델루안의 마도 공학.
마도 공학의 회로도를 이용해 자신이 만든 차원 게이트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하면 얼마든지 상시 개방이 가능하다.
그 구멍을 통해 돌돌 말린 종이로 편지 교환도 하고, 작은 물건도 보내고, 전화선 같은 걸 집어넣어···, 어?
갑자기 번뜩 든 생각.
'어어? 어어어어···?'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태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전화선을 넣는 게 아니라 인터넷 광케이블 랜선이라면?'
염라가 상위계에 만든 것처럼 항상 열려있는 차원 게이트를 통해 지구와의 통신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미친! 오히려 작아서 더 좋잖아.'
드래곤 하트가 가진 게이트 개방 능력.
그건 마나로 작동한다.
게이트 크기가 컸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나를 기하급수적으로 잡아먹기 때문에 상시 유지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열어도 금방 닫히겠지.
차원 구멍은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모되는 마나의 양도 적다.
닫히는 일 없이 상시 유지될지도.
마침 에너지원도 널렸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엘리트와 비욘드 결정체 말이다.
실험해봐야 알겠지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닫히지 않는 차원 구멍.
그것을 통한 지구와 상위계의 인터넷 연결.
네트워크로 하나의 세상이 된다.
'화상 통화로 독선과 만나고, 해맑 선녀와도 이야기하고, 검선이 선계에서 직접 라이브 방송도 하고, 신선 혹은 천인들과 함께 게임도 하고···,'
굳이 넘어갈 필요 없이 지구에서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다.
'네트워크 기반은 이미 선계에 갖춰져 있잖아.'
LTE 데이터 통신 기지국을 선계에 만들어 보자.
구멍을 통한 광케이블로 지구의 통신회사와 선계 기지국을 연결하면?
데이터 송수신은 물론 전화, 메시지까지 다 된다.
'설비 장치와 통신회사의 협조가 필요하겠지만 그거야 아무것도 아니고.'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당장 해 봐야지.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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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삼한제국 구례 태주의 자택 지하수련실.
즉시 실험에 돌입했다.
마음이 급하다.
골프공 크기의 구멍이라도 명색이 차원을 연결하는 게이트.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충분한 마나 공급은 필수다.
그래서 먼저 마나를 공급하는 장치부터.
새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마침 개조해서 쓸만한 것이 있다.
강호로 가기 직전에 배송된 영혼 매개 차원 게이트 발생기.
원래는 백홍표를 데리고 오기 위해 독선이 미리 보내준 것, 만일에 대비해 여분으로 3개나 받았다.
게이트 발생기는 직육면체의 은빛 합금으로 되어 있다.
나사를 풀어 덮개를 열면 어지럽게 구성된 마도 공학 인챈트 마법 술식이 눈에 들어온다.
열심히 마도 공학을 공부한 당군악과 지식을 공유한 터라 어떻게 할지 다 알고 있다.
영혼 연결이 이래서 좋다.
배운 지식이 한 번에 공유되니까.
'필요 없는 부분은 삭제하고.'
대부분이 게이트를 여는 기능, 발동 스위치 회로, 크기 제한 회로, 위치 규정 회로···, 모두 없애버렸다.
딱 하나!
마나 공급 회로만 남겼다.
하지만 그것도 보완이 필요하다.
발생기를 작동할 때 열리는 게이트는 사람이 쉽게 드나들 정도로 큰 크기.
반면 태주가 열 수 있는 차원 구멍의 크기는 그것의 100분의 1수준.
마나 공급량도 100분의 1로 줄여야 한다.
어렵지 않다.
마도 공학 기초 편만 통달하면 누구나 다 한다.
또한 배터리 잔여량 표시처럼 잔여 마나량 표시 회로도 있어야 한다.
잔여량을 수치로 표현하는 건 필수적인 요소.
자칫 마나가 모자라 차원 구멍이 닫히면 안 되니까.
한땀 한땀 회로도를 새기고.
잘 작동되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됐어.'
마나 공급장치 완성.
그다음으로,
'차원 구멍은 어디다 열지?'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 데나 열면 찾기 어려울 것 같고.
'멀티플렉스?'
신선들이 볼지도 모른다.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나으니까···,
'황천계 업화궁이 좋겠어.'
염라가 먼저 보면?
그는 알아도 된다.
어디 가서 소문낼 정도로 입이 싼 분이 아니니.
구멍으로 넣을 수 있게 미리 편지도 써두자.
혹시 염라가 먼저 볼지 모르니 독선에게 전해달라면서.
태주는 업화궁 염라의 집무실을 상상하면서 차원 구멍을 열었다.
찌이잉!
'열렸구나.'
그리고 그 옆에 마나 공급장치를 활성화해 두니.
우우웅.
넘실거리며 구멍으로 전달되지는 마나.
과연 어느 정도까지 유지될까?
1년은 무조건 넘을 것 같은데.
일단 편지부터 넣어보자.
노끈에 묶어서,
쑤욱!
잠시 기다리자 노끈이 안으로 딸려갔다.
"오!"
읽었나 보다.
그런데 편지만 달랑 보내면 쓰나.
염라에게 차원 구멍 자릿세, 즉 임대료도 줘야지.
생각보다 오래 열어둬야 하니까.
※ ※ ※
태주가 게이트를 통해 지구로 돌아간 후, 당군악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십년감수했습니다."
"많이 놀랐나 보군."
"당연하지요. 태주의 집은 여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노릇인데···,"
선계라는 감옥에 말이다.
"아무튼 돌아갔으니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보게. 인간계 강호로 넘어가고 싶다고?"
"잠깐이면 됩니다.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뭔가?"
"전에 남궁훈이란 죄인이 입고 있던 붉은색 장포 기억나십니까?"
"아! 검선이 놈을 쳐죽이고 자네에게 갖다줬던 그 옷?"
"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오려고요.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야 굳이 상제에게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겠군."
"그럼 열어주시는 겁니까?"
"흐음, 조건이 있네만."
이럴 것 같았다.
어차피 공짜로 요구할 생각도 없었다.
"뭘 원하십니까?"
"코인으로도 살 수 없는 물건이 있어서 말이야."
"무슨?"
"연초 필터담배."
"···그건 판매금지입니다."
"제발 융통성 좀! 선계와 천계는 금연 지역이지만 황천계는 아니잖아! 여기서만 피울 테니 나한테만 팔아."
하지만 당군악으로서도 그것만은 물러설 수 없다.
"흡연하는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지요. 흡연 구역에서만 피우겠다, 허나 판매 초기에 선계월드에서 발견된 꽁초만 몇 개인지 아십니까?"
"진짜 여기서만 피울 거라니까. 코인은 얼마든지 줄 테니 팔게!"
"사실 팔고 싶어도 못 팝니다. 제겐 없는 물건입니다."
"어, 없다니?"
"그나마 있던 것도 요마계 불구덩이로 던져 폐기처분 했습니다."
"허어···,"
염라는 느낄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대신 신상 전담 액상은 많이 챙겨드리죠."
"쩝, 니코틴도 별로 없는걸···, 알았네. 저승사자 하나 붙여줄 테니 다녀오게."
염라는 밖에서 저승사자를 호출했다.
"여봐라!"
"부르셨습니까, 대왕님."
"독선 모시고 인간계로 다녀오너라."
"네."
당군악도 염라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난 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반나절 이상 걸려도 되니 천천히 일 보게."
원래는 이렇게 열어주면 안 된다.
독선이야 다른 신선들처럼 밖에서 사고치고 다니진 않을 것 같아서 보내주는 것.
그런데?
한 10분이나 지났을까?
"···벌써 왔나?"
"옷 하나 전해주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요."
독선의 강호행은 진짜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황천계로 돌아왔다.
"그래도 대화라도 나누고 오지 그랬어."
"괜찮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강제로 잠을 재우고 옷만 입혀줬습니다. 처리할 일도 있고 해서."
"허허허."
가히 바른 신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독선.
모든 신선이 다 독선 같았으면 정말 좋을 텐데.
"처리할 일이 뭔데 이리 빨리 돌아왔어?"
"태주가 데리고 다니는 영수를 찾아보려고요."
"아! 머리가 3개 달린 영물?"
"네. 혼자 남겨져서 불안해할지도 모르니까···,"
바로 그때!
찌이잉!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
'응? 이건···,'
문이 열리는 소리인데.
"대왕, 혹시 지금 문을 여셨습니까?"
"아니? 열지 않았네만."
그럼 설마?
당군악은 고개를 숙여 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염라의 눈도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바닥에 또 열린 차원 구멍,
"구멍이네?"
"네, 그러네요. 지구에서 열었나 봅니다."
"쯧, 자꾸 열면 안 되는데."
연 것만이 아니다.
안에서 꾸물꾸물 뭔가가 뱀처럼 기어 나왔다.
"빨랫줄인가? 앞에 종이 같은 것도 묶여 있군."
종이라면 편지?
태주가 보낸 모양.
줄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풀어 읽어보는 독선.
그러더니 점점 표정이 변하면서,
"하하하하! 이렇게 영민할 데가, 크기가 작은 구멍이라 오히려 더 좋구나."
"무슨 내용인가?"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앞으로 지구와 상위계가 더 가까워질 것 같습니다."
"어어? 그, 그럼 안 되는데? 무, 무슨 일이길래?"
"자세한 건 천천히 말씀드리지요."
당군악은 즉시 펜과 종이를 꺼내 태주에게 답장을 써서 구멍 안으로 넣었다.
독선의 말에 염라는 심히 불안하다.
지구와 상위계가 더 가까워질 거라니.
대체 어떤 이유로?
"대왕님."
"으응? 왜?"
"이 차원 구멍을 계속 열어둬도 될는지."
"···언제까지?"
"태주가 지구에서 간단한 실험 중입니다. 실험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곤란한 얼굴의 염라.
비록 작은 구멍이라 하더라도 지구와 연결된 게이트다.
계속 열어두면 지구와의 연결이 점점 가속화될 텐데.
그럼 더 많은 지구 혼백들이 황천계로 올 텐데.
죄인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아직은 그들을 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반대할 수밖에 없다.
"안돼! 여기 말고 다른 곳에다 열어. 지금이라도 닫아야···,"
순간!
꾸물꾸물.
차원 구멍에서 나오는 물건.
"엉?"
리본으로 동그랗게 함께 묶인 담배 10개비였다.
그것도 구하기 힘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인 연초 필터담배.
'구멍에서 담배가 나와?'
일단 염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표정 관리 중이다.
속으론 당장이라도 한 대 뽑아서 불을 붙이고 싶다.
"흠."
"태주가 보낸 모양이군요."
"그, 그렇군."
"앞으로 또 나올지도."
"···험험"
"구멍을 닫을까요?"
"···."
"다른 데다 열면 되죠. 제가 사는 집도 있고."
미쳤나?
이걸 왜 닫아!
"그대로···, 둬보세. 태주 대협이 실험 중이라는데 황천계가 당연히 협조해야지."
"오! 감사합니다."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가서 일 봐. 바쁜 일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럼 믿고 가겠습니다."
당군악이 떠난 후,
염라는 담배 하나를 빼서 급하게 불을 붙였다.
"후우,"
구수하다.
전자 담배는 비교도 안 될 정도.
또 나올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때!
꾸물꾸물.
또 담배 10개비가 리본에 묶여 나왔다.
"오오오!"
희희낙락,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차원 구멍이 아니라 담배 구멍이다.
진짜로 그랬다.
쑤욱!
'또? 좋구나, 좋아.'
염라는 구멍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의 눈이 구멍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귀한 연초 필터담배가 줄지어 나오는 화수분.
'자리를 비우면 안 돼.'
지구와 황천계 연결 가속화가 걱정되지 않냐고?
뭐, 어차피 연결됐는데,
조금 빨라져도 그게 그거지.
쑤욱, 쑤욱, 쑤욱.
계속 나오는 담배들.
"흐흐흐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때!
"응? 대왕님, 거기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뭐 하십니까? 관절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만."
강림이었다.
서둘러 몸으로 담배 구멍을 가리고.
"이 새끼가! 내가 염란데 무슨 관절 건강이야? 너 오늘 업무 다 끝났어?"
"네? 그렇지 않아도 업무보고 드리려고,"
"필요 없어! 저리 꺼져!"
"아, 아니 갑자기 다짜고짜···,"
"시끄럽고, 오늘부터 여긴 금지 구역이야!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
"···."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 ※ ※
미호 선자는 환수계 최고의 인싸 영수였다.
꼬리 아홉 개를 달자마자 서왕모에게 발탁되어 도화궁 선자 직위를 맡아 모든 영수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미호 선자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제천대성이 독점으로 운영하는 선계 배달 사업에 진출하는 것.
요즘 세상에 독점이 말이 되나?
경쟁 업체가 있어야 배달의 질도 좋아지고, 배달비도 내려가면서 소비자들이 혜택도 보는 거지.
제천대성에게 분신들이 있다면 미호에겐 영수들이 있다.
그들을 직원으로 고용해서 독선에게 사업권을 따낸다.
먼저 영수들을 꾀어야 한다.
그래서 미호는 환수계로 왔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아마도 볕이 잘 드는 양지에서 잠이나 자고 있겠지.
영수도 신선만큼 게으른 놈들이다.
인간계에서 고된 수련을 마치고 환수계로 올라온 터라,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해서 그런지, 일하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가끔 선계월드로 가서 놀이기구 관리 알바를 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
미호의 눈에 들어 온 영수 한 마리.
어디서 많이 본 가방도 하나 입에 물고 있었다.
'음?'
못 보던 놈이다.
막 올라왔나?
또한 특이한 놈이다.
겉으로 보면 한 마리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자아가 무려 3개.
즉 3마리가 하나로 합쳐진 놈.
"어이, 거기!"
"냥?"
"너 이리 와."
"캬악!"
"어쭈? 반항해?"
일이삼백이는 바짝 긴장했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존재.
딱 봐도 인간이 아니다.
자신과 같은 과였다.
게다가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다.
본체로 변신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아. 안 때릴게. 누나하고 이야기나 하자고."
"···냐아앙?"
"진짜라니까? 못 믿어? 나 미호야, 미호! 꼬리 아홉 개 여우, 내 이야기 못 들어봤니?"
"냐아!"
"못 들어봤다고? 이상하네. 너 어디서 왔는데?"
"냐아, 냐아아아, 냐앙."
"···뭐?"
미호는 깜짝 놀랐다.
"지, 진짜? 지구에서 태주 대협과 같이 올라왔다고?"
"냥!"
"으음···,"
정말이었다.
이게 웬 떡인가?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만나다니.
퐁!
청바지를 입은 미호 선자의 엉덩이에서 꼬리 9개가 솟아났다.
동시에 선풍기처럼 정신없이 빙빙 돌아갔다.
"아유! 얘는, 처음부터 말을 하지!"
"···냐냔?"
"나 태주 대협하고 엄청 친해!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 볼래?"
"냐앙."
선계 전용 스마트폰을 꺼내 일이삼백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미호.
"냥!"
"잘 나왔지? 아무튼 너 이름이 뭐니?"
"냐앙, 야옹, 니앙."
"일백이, 이백이, 삼백이라고? 하긴 셋이니까···."
일이삼백이도 이제 안심이 됐는지, 미호의 발치에 물고 온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이건 뭐야?"
"야아아아아아···,"
"어머? 태주 대협님이 영수들과 나눠 먹으라고 준 거란 말이지?"
"앙!"
미호 선자는 가방을 열어 입구를 밑으로 향하고 냅다 흔들었다.
후두두두두두둑!
"우와아아!"
각종 습식, 건식 사료와 간식들이 가방에서 쏟아졌다.
끝도 없이 수북하게 쌓였다.
코인으로 치면 얼마인가?
어마어마하다.
"···이, 이거 진짜 다 먹어도 돼?"
"야앙."
"넌 많이 먹었다고? 좋겠다."
황홀한 눈빛의 미호 선자.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일이삼백이에게 물었다.
"근데 너 왜 인간으로 변신 안 해?"
"야옹?"
"못 한다고? 쯧쯧, 그러니 인간 말도 배우지 못하지. ···내가 가르쳐 줄까?"
"앙!"
"알았어. 이거 몇 개 먹고 나서 같이 연습해보자."
딱!
캔 하나를 따고 간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당군악이었다.
"야앙?"
"어머머! 독선님?"
당군악은 미호 선자와 함께 있는 일이삼백이에게 다가갔다.
"잘 놀고 있느냐?"
"야아아,"
"미안하지만 태주는 먼저 지구로 돌아갔다."
"···양?"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어서."
당황한 일이삼백이.
"야, 야아아아앙?"
"걱정하지 마라. 여기서 놀다가 나중에 백홍표 천인과 함께 돌아가면 되니."
일이삼백이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헤벌쭉 웃었다.
"야우우우우···,"
그러고 나서 미호 선자에게.
"우리 일이삼백이와 놀아줘서 고맙소."
"아, 아뇨. 뭐, 아직 어린놈이라 불쌍해서."
"앞으로도 부탁하오. 친구들도 소개시켜 주고."
그냥 부탁하진 않았다.
무한공간에서 차넬 신상 백을 꺼내서,
"이거면 되겠소?"
미호 선자의 아홉 개 꼬리가 폭풍처럼 돌아갔다.
"아유, 뭐 이런걸···,"
재빠르게 받아들고.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보살필게요."
"부탁하오."
그럼 이제 귀곡과 만나볼까?
당군악은 조만간에 귀곡과 갈홍을 지구로 파견 보낼 생각.
거기서 기지국 장비와 통신 설비 설치하는 걸 배워오면 된다.
둘 다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익혀오겠지.
또 이 사실은 지구와 선계 네트워크가 완성되기 전까진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
아니면 빨리 만들라는 신선들의 등쌀에 매우 귀찮아질 테니.
또한 요금제도 논의해야 한다.
지구에서 태주가 요금을 지불할 테고, 선계에선 따로 받아야지.
※ ※ ※
강호 사천 당가.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을 자던 당철휘가 슬며시 눈을 떴다.
"응? 내가 왜···,"
피곤했나?
그럴 리 없다.
혼원무상독령공 대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신, 육체의 피곤함이야 운기 한 번이면 가뿐해지는데.
지금도 활력이 넘친다.
슬슬 움직여보자.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헉!"
뭐지?
어느새 자신의 몸에 입혀진 옷, 붉은색 장포.
이게 왜 입혀져 있지?
남궁훈에게 도둑맞은 건데.
'···아아아!'
알 것 같다.
몰래 내려오셔서 입혀주고 가신 것이 틀림없다.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구나.'
못난 아들과 가문 때문에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강요한 셈이니.
'그럼 남궁훈은?'
그놈이 스스로 보패를 갖다 바치지는 않았을 테니.
'아버지께서 손을 쓰셨겠지.'
부끄럽다.
"후우,"
당가의 복수는 자신과 가솔들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다.
속세를 떠나신 그분이 관여해선 안 된다.
당가도 이미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흐트러진 당가의 전력을 수습하는 절차에 착수했다.
그러고 나서 철저하게 되갚아줄 생각.
당가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깨닫게 해준다.
은밀하고, 지독하게, 저항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아서.
당씨 성을 가진 이와는 밥도, 술도, 물도 함께 먹지 말라는 강호의 격언이 어떤 의미인지 절절하게 깨닫게 해줄 생각.
오대 세가는 물론, 사태를 방조한 무림맹, 쥐새끼처럼 정보를 판 개방의 거지, 심지어 황궁까지.
강호를 피로 물들일 것이다.
그리고 만천하에 선언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사천 당가라고.
끝
ⓒ 꾸찌꾸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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