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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아, 죄송해요. 아직 저도 이 스킬이 정확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거돈요.... 이런 식으로 전후사정을 몰라서 생기는 불상사도 있을 법하네요."

대화를 통해 유추해본 그녀의 스킬.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골목길'처럼 하나의 장소로 표현할 수 있는 곳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게… 그래도 나름 유용한 건데…."

유용할 수야 있겠지만, 단단히 오해를 받아버린 내 입장에서는 '뭐, 저런 병신 같은 스킬이 다 있나' 싶다.

너무 프라이버시 침해 아닌가?

"알겠으니, 로라 진료부터 봐 주시죠."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라는 내 설득으로 시작된 대화는 이제 서야 우리가 만나게 된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힐."

로라에게는 힐러로 전직한 강소현의 '힐'이 먹히지 않는다.

"레벨이랑 능력치가 올라도 힐이 안 먹히네요. 이태초에 다른 동물들은 힐이 적용됐었는데...."

로라의 특별함은 나약한 강소현의 힐로는 커버하기 힘든 모양이다.

"와, 연고 엄청 잘 발라주셨나 봐요. 힐이 안 먹혀도 연고만 잘 발라주면 금방 낫겠는데요?"

세상이 망하고 괴물들이 몰려와도 로라의 치료와 밥 챙겨주기 만큼은 칼같이 지켜줬으니.

별다른 지적이 없는 것을 보면, 고블린 군단과 싸우면서 무리했던 로라의 몸도 제대로 나은 것 같다.

"눈꼽 색도 좋고, 코에 흉터가 좀 남긴 하겠는데, 뭉개진 부분도 많이 나았어요. 회복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느낌이랄까요? 혹시 뭐 다른 치료 했어요?"

흠, 회복약이 외상의 회복도 조금 빠르게 치료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크흠, 그러면 약은?"

그래도 로라가 건강해지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연고랑 안약은 최소 일주일은 더 넣어 주세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다음 진료는 몬스터 웨이브3이 끝나고 뵙는 걸로―"

다음 진료 예약을 잡고 이대로 헤어지려고 했는데, 갑작스럽 내 말을 끊은 수의사 강소현.

"혹시... 이준 씨 집에 들렀다 가도 될까요?"

흐음.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장소는 집 앞 골목길은 너머서 있는 2차선 도로다.

"시체가 있어서, 좀… 징그러울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벅, 저벅.

"뭐, 시체 몇 개 가지고. 학교 쪽에 가니까 수의사도 의사라고 별 미친 짓을 다 시키더라고요. 저 외과 수술하고 올 뻔했잖아요."

라고 말하고는 씩씩하게 나를 지나쳐 집 앞 골목길로 들어서는 강소현.

그리고....

"내, 냄새가··· 우에에엑-!!"

예상했던 반응이 나타났다.

나야 과거 대화재 때 사람 고기 타는 냄새도 질리게 맡아본 사람이라 이런 쪽으로는 면역이 됐고, 행복 빌라 놈들은 '살인'을 전제로 온 미친놈들이라 그렇다 치는데.

"우에에엑-!"

상대적으로 평범한 강소현 그녀가 이런 쪽에 면역이 있을 리가 없다.

"우엑!"

그녀가 수차례 토를 쏟아내더니, 곧장 내게 성질을 내기 시작한다.

"시, 시체가 왜 이렇게 많아요!!! 좀, 치우기라도 하든가!"

몬스터 웨이브가 그렇게 나온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돌아가시죠. 집 앞은 더 심한데."

"하아…. 하아. 그, 그래도 바, 밥 한 끼만 먹고 가면 안 될까요?"

밥?

갑자기 밥을 달라니.

"먹고 나가다 또 토하실텐데요?"

깡마른 체형의 강소현.

'혹시 그녀가 말로만 듣던 먹토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인가?' 같은 의문이 들었는데.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거 아닙니다."

무슨 독심술이라도 익혔는지 저런 말을 하고는 강소현 수의사가 앞장서서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 또각.

진정된 강소현과 고블린 시체더미 위를 걸으면서 한 대화는 생각 이상으로 유익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식량을 징발해가는지―"

내가 준 라면 20봉지와 스팜과 햇반 10개는 이태초 캠프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모두 압수당했다고 한다.

"공산주의 국가도 아니고, 솔직히 식량이 모자라지도 않은데 쥐꼬리만큼 배식해주잖아요. 개인 재산의 권리는 어디간 건지...."

민주주의는 무너졌다.

"게다가 무슨 사냥을 나가는 사람한테만 식량을 더 준다고 하니까. 어이가 없지 않아요?"

집에 틀어박힌 나와는 달리 밖의 사람들은 '사냥'까지 다니는 모양이다.

대체 뭘 잡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아, 그리고 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데, 몰랐죠?"

인류 최고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정치인이 하나 있었는데, 정부랑 연락할 방법이 있다고 하거든요. 용산구청까지만 가면 된다던데, 몬스터 웨이브가 끝났다는 확신이 들면 출발하겠다고 지원자를 모집하더라고요. 힐러는 대우를 더 해준다는데...."

웬 사기꾼이 판치는 세상이 펼쳐졌다.

강소현 그녀는 '로라의 주치의'다.

대체할 수의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강소현 그녀만이 생후 한 달 된 어린 로라를 치료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말이고.

"그런 병신 같은 말을 믿는 건 아니죠?"

그렇기에 조금 강한 어투로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줬다.

"막말로 정부가 살아 있어도 '총'도 작동하지 않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총이 안 되니 미사일은 될 거다.'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똑똑하고 할말 다하는 사람인데, 어째 이리 귀가 얇은지....

"강소현 씨, 문명이 망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하셨죠? 발 밑을 보십쇼. 문명은 폭삭 무너졌고, 그 위에는 새로운 문명 대신 괴물들의 시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

그런데 내 말이 너무 쎘던 걸까?

주르르륵―

소리없이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한 강소현 수의사.

내게 '우는 여자를 달래본 경험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없다'라고 대답해줄 수 있다.

'여자가 울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자리를 피해 다른 곳으로 떠난다고 대답해줄 수 있고.

또각, 또각.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 * *

부글부글.

"화났습니까?"

부글부글.

"허, 어떻게 거기서 그냥 두고 갈 생각을 하죠?"

"대신, 라면 끓여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혼자 찾아와서 멋대로 울더니 라면까지 얻어먹는 사람이 왜 내게 화를 내는가?

내심 억울하기도 하고 위로 받고 싶기도 했을 그녀의 마음도 이해는 하겠다마는 위로는 '고양이'한테 받으면 되는 거다.

고양이가 없으면 혼자 꾸욱 눌러담고 살아야지.

"드시죠."

후루루룩-

밥을 먹어서 기분이 풀린 걸까?

"크으!"

라면 국물까지 싹 비운 강소현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

"그?"

"샤, 샤워 좀 하고 가도 될까요?"

어째 아까부터 힐끔힐끔 화장실을 보더라니.

"편하게 쓰시죠."

다행이도 물은 공짜다.

포탑처럼 포인트를 소모한다면 도 몰라도 물 정도는 편하게 써도 된다.

덜컥-

"와, 무슨 푸세식 변기가.... 그냥 이 위에 서서 씻으면 되는 거죠?"

"네."

1평 남짓한 좁은 크기의 땅에 지어진 '저급한 화장실'.

중앙에 푸세식 변기가 있고 그 위에는 해바라기 샤워 헤드가 달려 있다.

즉, 씻으려면 변기를 다리 사이에 두고 서서 씻어야 한다는 말이다.

쏴아아아아아아-

덜컥.

"후우, 잘 썼습니다. 옷차림은 좀… 이해 좀 해주세요. 수건이 없어서."

뚜욱. 뚝.

젖은 머리에서 물을 떨어트리며 나온 강소현은 입고 있던 옷 대신 의사 가운과 비슷하게 생긴 힐러의 방어구 '사제복'만을 입고 있었다.

너무 무방비한 것 아닌가?

"혹시 거기서도 이러고 다닙니까?"

"설마요. 이준 씨는 어딘가 좀 편하달까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 신경도 안 쓰시는 것 같고."

"그래도 내 집에 들어온 사람까지 신경 안 쓰지는 않습니다만."

"로라 주치의로서요?"

"네."

"그래서 편하게 있는 거예요. 진짜 밖에 별 미친놈들이 다 있다니까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니, 저 첫날밤에 강간당할 뻔했어요."

무슨 소설 줄거리라도 말하듯이 가벼운 말투로 한 말인데, 그 내용은 가볍지가 않았다.

"이준 씨가 능력치 사용법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저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흔한 아포칼립스의 클리셰.

멸망한 세상에서 '혼자'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래서 메이스로 고추를 확 부서 버렸죠."

허나, 현실은 클리셰를 따라가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랑 여자랑 이제 힘 차이는 없어진 것 같더라고요. 뭐, 그중에도 더 잘나고 못나고는 있겠지만, 대략적인 평균치가 그런 느낌이에요."

아포칼립스가 오고 나서야 진정한 남녀평등의 시대가 오려 하는 모양이다.

"당한 사람도 몇몇 있긴 했는데, 제가 열심히 능력치 쓰는 법을 전파해서 지금은 여자들끼리 뭉쳐서 다녀요."

역전이 될 수도 있고.

"그 남자는 죽었습니까?"

혹시 그녀도 벌써 살인을 한 것일까?라는 생각에 물어봤는데, 강소현 수의사는 살인보다 더 한 짓을 했다.

"아, 아뇨. 제가 힐러잖아요. 고자만 만들고 회복시켜 줬죠."

'힐'이라는 스킬은 상처를 회복시켜준다.

그리고 그것이 잘린 그것도 다시 자라나게 하나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절단은 못 고치더라고요. 그쪽이 뭉개져서 오래살기는 글렀을걸요. 그 썩을 놈."

힐의 성능은 나의 생각만큼 뛰어나진 않았다.

그런 범죄자라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조직 입장에서 낫지 않나 싶은데.

"아, 주류 그룹에 웬 국회의원이 리더로 있는데, 곧 죽어도 살인은 안 된다네요. 오히려 저를 막 몰아세웠다니까요."

어찌된 게 세상이 망하고부터 제대로 된 것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그, 근데...."

신나게 정보 공유를 해주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저?"

"그, 혹시 무슨 클래스로 각성하셨어요?"

조심스러운 만큼 민감한 질문을 했지만.

"집사입니다."

이미 볼 것 다 봤는데, 숨겨서 뭐하겠는가?

그냥 그녀에게 내 능력을 알려줬다.

물론, 고양이 얘기는 빼고.

"대신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아, 당연하죠. 저처럼 특이한 스킬을 얻은 사람은 봤어도, 클래스 자체가 다른 건 진짜 처음 보는데요? 저 총이 취미가 아니었다니...."

그녀가 머무르던 이태 초등학교에는 약 3,000명의 사람이 몰려 있다고 한다.

"정보 교류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 국회의원이랑 군인들 몇몇을 주축으로 해서요."

"정보 교류만 하고 질서 유지는 안 한답니까?"

"그, 나름 통제가 되고 있긴 하거든요...."

강간당할 뻔한 사람이 자신의 집단의 '질서'를 강조하는 모습이 좀 웃기기는 한데.

"다 잘 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보통은 가족단위라서.... 아, 그 스킬 시스템이 저희랑 많이 다르다고 하셨죠?"

그녀의 꿀팁을 듣기 위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기가 괜찮다는데 어쩌겠어.

"그러니까―"

그녀의 말을 토대로 다른 사람들의 상태창 시스템을 정리해 봤다.

1. 레벨당 한 개의 스킬을 얻는다.

나와는 달리 '스킬'에서 뭘 구매하거나 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레벨이 오르면서 스킬이 늘어나는 구조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당장은 그렇게 되고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나중에 개편되지 않을까 싶다.

100렙에 스킬 100개는 좀 이상하잖아?

2. 포인트로 튜토리얼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

내게는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상점에서 '장비 강화권'이나 '회복 포션', '식량' 등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일부 엄청 비싼 희귀 아이템들도 있다는데, 액수가 10만 포인트 이상이라 엄두도 못낸다고 한다.

나처럼 장비 전체가 세트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이건 딱히 별 생각이 없는데, 그래도 '식량'을 살 수 있다는 건 좀 부럽기는 하다.

"식량이라 해도 돌빵이랑 녹슨 물컵이 전부랍니다."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는데, 상점이라는 존재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 '튜토리얼'이 붙은 걸 보면 조만간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만....

3. 다수가 밀집해 있으면 몬스터 웨이브를 공유한다.

3,000여 명이 있는 초등학교에는 거대한 포탈이 하나 생겨났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이 몬스터 웨이브 3에서 처치해야 하는 고블린이 10마리다.

"완전 지옥도 그런 지옥이 따로 없었죠...."

즉, 저들은 3,000vs30,000이라는 전투를 치렀다는 것인데.

"이게, 다른 사람이 잡아도 카운트가 올라가니까 너도나도 뒤로 도망만 가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싸울 사람이 부족하니까 그런 범죄자들도 살려두려 한다니까요!!"

몬스터를 공유한다는 병신 같은 시스템 때문에 폭삭 망해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전투를 핑계로 범죄자들까지 방치되어 버렸고.

"진짜, 어린애들까지 버리고 다 뛰어가더라고요."

강소현은 그와중에 어린아이들을 챙기고 치료까지 해주었고.

"그 덕에 '회상'라는 스킬을 얻은 것 같아요."

특별 보상으로 특수 스킬을 얻게 되었다.

특정 행동을 조건으로 해서 얻는 특이한 스킬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하게 특이한 클래스로 전직한 경우도 있다고 봐야겠지.

들은 건 다 들었으니, 계속 궁금하던 것을 물어볼 차례.

"그래서, 그 행복 빌라 놈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아, 학교 사람들이 그러는데 건설 사무소 사람들이 세력을 만들고 있다네요."

건설 사무소란, 노가다꾼들에게 일감을 제공해주는 장소다. 그리고 노가다로 잔뼈가 굵은 내게는 아주 익숙한 장소이기도 하고.

"어디 있는 건설 사무소요?"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순신 건설 사무소라는데...."

"그 깡패 새끼들 어디 있는지 아세요?"

내 감은 굉장히 예리한 편이고, 불길한 쪽으로는 더더욱 맞아떨어진다.

"위치는 모르겠는데, 그 행복 빌라 남자분이랑 아는 사이 같았어요."

『캬아오오!!!!』

갑자기 무릎에서 잘 자고 있던 로라가 담장 위로 올라가더니,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캬오오!!』

건설업을 빙자한 깡패 집단 '순신 건설'.

"이미 집 주변까지 온 것 같네요."

아무래도 행복 빌라 놈들이 깡패들을 데리고 내 집을 찾아온 모양이다.

미니맵에 보이는 골목길 끝에 푸른색 점이 잔뜩 찍히기 시작했으니.

살인에 대한 고민이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장 찾아온 위협을 똑바로 마주볼 생각이다.

위이이이이잉―

"대, 대체 무슨 일인지...."

곧장 고정 포탑에 위로 올라가서 멍 하게 서있던 강소현을 보며 말했다.

"옆에 한 대 더 있으니, 편하게 앉아서 관람하시죠."

#12. 변화 (3)

"어이, 준이."

강소현을 마주칠 때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알아채지 못했는데,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파란색 점들을 보니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미니맵에 찍힌 파란 점은 총 12개.

철그럭-

"오랜만이다? 한 2년 만인가?"

늦은 밤 어둠이 깔린 골목길.

달빛에 반짝이는 갑옷과 함께 나타난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몇 안 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사람을 기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

그럼에도 잊을 수가 없는 얼굴.

"인연이 참 길어?"

건설 소장 강호식.

본사 '순신 건설' 아래에 하청업체를 두고 나같이 솔로로 뛰는 노가더들의 일당을 떼가는 쓰레기 같은 놈이다.

"그러게요. 밀린 돈은 다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나는 악착같이 다 받아냈지만.

"하하! 여전히 깡따구는 있어. 이번에는 돈 주러 온 건 아니고. 여기 이 친구가 우리 형님 육촌 동생이시다."

저벅.

"편의점 개자식."

궁수한테 모가지가 썰렸던 행복 빌라 남편 놈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그의 뒤로 나타났다.

"허...."

저게 벌써 회복이 된다고?

솔직히 뒤졌거나 아직도 부상 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회복 포션이나 힐 스킬이 제법 뛰어난지 그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준이도 우리랑 일 해봐서 알잖아. 너무 원망은 말라고."

약 100m 거리를 두고 하는 대화.

그럼에도 또렷하게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저놈 옆에 계집도 하나 끼고 있는데요?"

심지어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까지 전부.

"그 뭐냐? 201호던가, 202호인가? 그년도 있는데 뭘 또 여자타령을 하냐. 여자는 많어."

"호식 형님, 왜 안 들어가시는지…?"

"이 시체 안 보여?"

'능력치'의 효과일까?

아니면 내 몸이 무언가 변한 걸까?

"이준 씨, 혹시 뭐라 하는지 다 들려요? 저는 크게 말하는 것만 들려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내게 강소현이 물었다.

"아, 앞에 깔린 고블린 시체들을 보고 좀 쫄은 모양입니다."

놈들이 골목 입구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강소현에게 놈들의 대화를 알려주기로 했다.

"지금은 저한테 죽은 궁수 놈 와이프 몸매 얘기를 하고 있네요."

"역겨운 놈들...."

"고블린을 저 혼자 해치웠을 수도 있다며, 행복 빌라 남편 놈이랑 강호식이랑 서로 다투고 있고요."

원래 깡패 새끼들이 그렇다.

옛날에야 연장들고 설쳤지, 현대의 깡패들은 사무직이나 다를 게 없다.

하는 업무라 해봐야 사설 토토 문자 돌리기, 건설업 사무소 문닫고 튀기 정도니까.

"쫄았냐!!!"

골목길 끝에 서서 쓰잘때기 없는 소리만 늘어두던 놈들이 답답하게 느껴져, 한마디를 건넸다.

"아, 아니. 왜 자극을 하고 그래요?"

그래도 나름 '불법'적인 일을 전문으로 하던 놈들이기 때문에 도발에는 매우 약하다.

"하, 저 개새끼. 준아!! 이제 경찰도 법도 없어, 진짜 뒤지는 거야."

놈들을 쫓아다니며 CCTV 앞에서 얻어맞고 받아냈던 내 월급.

깽값으로 이자까지 두둑하게 받았었지.

"퉤엣-! 씨발놈. 노가다에 편의점에서 알바나 하는 놈이,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네."

허나 이번에 받아낼 것은 월급이 아니다.

철그럭-

철그럭-

철갑옷에 방패를 든 놈 넷.

활든 놈 넷.

지팡이든 놈 둘.

아직 두 놈은 골목길 코너에서 나오지 않았다.

"혀, 형님. 저 구덩이 아래도 죄다 고블린 시체인데요?"

"마, 경찰서 봤지? 여기도 관공서나 그런 게 있었나 보지. 철두 형님도 30마리 나왔는데, 이걸 저놈 혼자서 잡았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쫄보 새꺄! 빨리 튀어 가!"

철두란 놈은 30마리가 나왔나 보지?

나는 2,000마리였는데.

"정지!"

내 집과 놈들의 거리는 약 30미터.

갑자기 놈들이 멈췄다.

우웅-!

"여, 여기 게이트가 왜 있어?"

집앞의 포탈 때문인데, 놈들은 게이트라 부르는 모양이다.

주춤-

"게이트 앞으로 가지 마!!"

깡패 새끼들 주제에 뭐 그리 조심성이 많은지.

철컥-

"너 거기 틀어박혀서 못 나오는 거구나?"

혼자서 뇌내망상을 지껄이더니, 놈이 곧장 총을 꺼내 나를 겨눴다.

"여기 포탈이 왜 열려 있는진 몰라도, 우리가 쉽게 당해줄 것 같아?"

깡패라고 설치는 새끼들치고 진짜 깡따구 있는 놈들은 없다.

철컥.

"마, 내가 군대에서도 만발로 유명했어."

작동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저들 성격에 쏴보긴 했을 테니, 저건 100% 블러핑이다.

그리고 나도 놈들에게 비슷한 짓을 하고 있다.

아직 벽 뒤에 숨은 놈들까지 끌어내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고정 포탑을 180도 돌려놨다.

즉, 저들의 각도에서는 고정 포탑이 그냥 높고 이상하게 생긴 의자로만 보인다는 말이다.

"그 망루에서 우릴 꾀어낼 생각이었나 본데, 번지수 잘못 짚었어."

실제로 잘 속아 넘어갔고.

"이, 이준 씨?"

놈들이 속아줬으니 이제는 내가 속아줄 차례.

"초, 총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순순히 의자 위로 올라가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고정 포탑을 갈겨버리고 싶다만, 아직까지 골목길 끝 코너에 숨어있던 두 놈을 불러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다.

이걸 또 살려 보내면 배로 늘어서 오지 않을까 싶으니.

"초, 총!! 꺄, 꺄아아!"

강소현 그녀도 한발 늦게 내 뜻을 눈치채고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먹을 게 많다지? 식량들 다 이쪽으로 던져. 아가씨는 거기 서 있고. 움직이면 구멍 뚫리는 거 알지?"

강소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라면 한 봉을 담 너머로 던졌다.

"아, 씨 똑바로 좀 던지지. 민철이 네가 가서 주서와."

"혀, 형님. 저기는 포탈 너먼데요?"

"어쭈?"

아직도 점 두 개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다닥.

"뭐야? 별일 없는데?"

저벅, 저벅.

민철이라는 놈이 왔다 가고도 아무 변화가 없자, 강호식도 포탈 옆의 무너진 빌라 잔해를 밟고 조금 더 나의 집을 향해 다가왔다.

"허! 준아? 이거 그냥 장식이네?"

철그럭-

"연장 들고 따라와!"

안전이 확인되자 부하들을 이끌고 다가오기 시작한 깡패 놈들.

"형수님!!! 상황 정리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야 푸른 점 두개가 코너를 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그리고 나는 고정 포탑의 핸들을 돌려 총구를 놈들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어어? 혀, 형님. 저거 기관총 아닙니까?"

"우리 준이 재밌는 거 들고 있네. 쏴 봐!"

역시, 놈들은 총이 나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나 내 고정 포탑은 일반적인 총이 아니다.

내 스킬을 통해 만들어졌고, '7mm 마탄'을 쓴다는 설명으로 보아 지구의 화기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봐, 못 쏘잖아. 저거 그냥 장식이야, 장난감같이 생겼구만. 쫄지들 말고 밀고 가!"

그때, 푸른 점 두 개도 완전히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

위이이이잉―

이제 포탑의 핸들을 당겨 쏘기만 하면 끝인데....

"형수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들 뒤로 나타난 것은 '행복 빌라의 아줌마'와 '어린아이'.

"씨발."

애새끼를 데려올 줄은 몰랐네.

피이잉-

활시위를 당기며 다가오는 강호식의 일행들.

아직 아이는 골목 끝자락에 있기에 포탑의 사격각을 벗어나 있다.

아이가 사격 범위에 들어오기 전에 놈들만이라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포탑의 핸들을 꽉 붙잡았다.

화르륵-!

다가오는 적들.

지팡이 끝에 모여드는 불꽃.

활시위가 풀리고 지팡이가 휘둘러지면 당하는 것은 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살인.

정당방위로 포장할 수야 있겠지마는 이게 살인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옘별."

대체 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서.

고민은 끝나지 않았어도 각오는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를 보고서 잠시 무너졌었다.

허나, 무너지면 안 된다.

내게는 지켜야할 작은 생명이 있으며.

나 또한 이렇게 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탓-!

짧은 순간 주마등처럼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가고, 결국 나는 포탑의 핸들을 뒤로 당겼다.

"끄아아악-!!"

맨 앞에서 다진 고기가 되어버린 이름 모를 사람.

"씨발, 저거 진짜 총인데-."

뒤돌아 도망치려다 죽어버린 이름 모를 사람.

흩뿌려진 총알은 순식간에 도합 10명의 사람을 쓰러트렸다.

아니, 죽였다.

것도 아주 잔인하게.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채로.

"마, 막아!!"

남아 있는 것은 동료를 고기방패를 세워 살아남은 강호식과.

"어, 엄마아-!!!"

골목길 끝자락에서 도망치는 어린아이다.

아이가 어미를 불러 보지만, 아이의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새 내 포탑 사격이 숙련되었는지, 골목길 끝자락에 있는 행복 빌라 아내만을 맞혀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이까지 죽이기는 싫었기에, 어린아이가 골목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그냥 바라만 봤다.

덜덜덜덜-

그래도 죽인 게 사람이다.

손이 떨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이준 씨 괜찮아요?"

그런 나를 강소현이 위로한다.

그녀도 비슷한 경험을 하긴 했지.

고자로 만들고 살려줬으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살인보다 더한 짓일지도 모른다.

"하하, 좆같은데, 생각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진창으로 내려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냐아-!!!』

게다가 로라가 전하는 메시지까지 있으니.

로라는 나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저 나를 묵묵히 바라보며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보일 뿐.

미니맵에는 푸른 점이 하나 남아 있다.

아마도 강호식 그놈이겠지.

위이이이잉―

확실히 끝내기 위해 포탑의 시동을 거는 순간.

쿠구구구구궁-!!!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캬아오!!!』

내 어깨에 앉아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로라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사방에 퍼트린다.

『캬아아오!!!』

"이준 씨!!"

고정 포탑에 앉아 있던 강소현도 놀라 소리쳤다.

쿠구구구궁―

쿠구구궁―

쿠쿵-!

무너질 듯이 흔들리던 세상이 멈추고.

파앗-!

「몬스터 웨이브 3. 168:00」

파앗-!

「망자들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차례대로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이, 이준 씨, 이 메시지들 보여요?"

잘 보인다.

그런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준 씨?"

"빨리! 포, 포탑 핸들 잡으세요!"

"무섭게 왜 그래요?"

미니맵을 보라고 하고 싶은데, 그녀가 이걸 확인하고도 전의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냥 하란대로 해주십쇼."

집 주변에 있던 검은 점.

그리고 건너편 아파트의 거대한 검은 원.

미니맵에 보이는 모든 검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쿠궁-!

"이, 이게 뭐야?"

쿵!

집 앞 골목길의 무너진 건물들이 들썩이더니―

-크르르라라락!!!!

그 위로 기이하게 뒤틀린 좀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니맵을 까맣게 뒤덮기 시작한 검은 점.

옆 빌라도, 옆옆 빌라도, 그 옆옆옆 빌라에서도 검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다.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수십 마리의 좀비가 강호식이 죽은 척 숨어있던 시체 더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좀비들이 강호식과 그 일행들의 시체를 둘러싸고는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강호식을 원형으로 둘러싼 좀비들.

시체 아래에 숨어 있는 그는 여전히 미니맵에서 푸른색 점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좀비들에게 미니맵이 있을 리는 없으니, 좀비들은 생명체를 알아채는 힘을 지닌 것 같다.

-크르르르르.

나의 집으로 가기 전에, 강호식을 먼저 해치우고자 하는지 좀비들은 더 이상 골목길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퉤에엣!

-퉤엣!

-퉤에엣!

-퉷!!!

-퉤에엣!!!

그러고는 얼마 안 가 강호식이 있는 자리를 향해 침을 뱉어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동료의 시체를 밀치고 일어난 강호식.

치이익―

"끄아아아악!!!"

치이이익―

쓰레기 같은 놈.

평생을 남 등쳐먹고 살더니.

세상이 망하고 나서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것도 어린아이까지 끌어 들여서.

"사, 살려줘!!!!"

강호식의 몸이 녹아내리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좀비들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칙, 치익―

"쓰으읍."

"이 상황에 담배가 피고 싶어요?"

그런 내 감상을 깨는 강소현의 잔소리.

"후우... 강호식, 저놈 죽고 나면 이제 우리 차례니, 마음의 준비부터 하시죠. 잔소리할 시간에 미니맵이나 한 번 보시고."

나도 저 정도 수의 좀비를 보면 마음이 심란하긴 하단 말이지. 담배라도 펴야지, 뭐 어쩌겠어.

"이, 이 검은 점이 다 좀비예요?"

라는 말과 함께 고장나버린 강소현 수의사.

"어, 어떡해...."

어쩌긴 뭘 어째.

고정 포탑으로 다 조져야지.

"일단은 좀 쉬고 계시죠."

미니맵의 파란색 점이 사라지고 나서 얘기다만.

아직도 살아있는지 하나의 파란색 점이 내 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치이이익.

"커어억! 주, 준이!!!"

대문 앞까지 뛰쳐온 강호식.

뭐라도 얻었는지, 좀비의 침에 당해 녹아내리던 그의 상처가 치유되고 있었다.

-퉤에엣!!

치이익!

치유되자마자 다시 녹아내리고 있다만.

"살려줘!"

놈한테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한 고생을 생각하면 직접 고정 포탑으로 '1,500p+물약'이라도 받아내야겠지만, 저런 놈을 편하게 보내줄 순 없는 노릇.

근본부터 쓰레기인 강호식에게는 좀비에게 뜯어 먹히는 죽음이 가장 잘 어울린다.

-크르라라락!!

"야이 개새끼야!!!! 그런다고 너는 살 것 같―"

-퉤엣!

"끄아아아악!"

난 그의 마지막을 묵묵히 바라만 봤다.

콰득!

까드득!

강호식, 그가 타들어가고 물리고 골목길을 빽빽이 매운 좀비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미니맵에 비추는 파란색 점에 검은색 점들이 달라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검은색 점으로 바뀌었다.

쓰레기에게 어울리는 말로다.

묘비에 문구라도 새겨주고 싶은 심정.

[깡패 양아치 강호식, 좀비에 녹아 죽다.]

라고.

"좀 진정되셨습니까?"

정신이라도 나간 듯 멍하게 좀비 무리를 바라보던 강소현에게 물었다.

"네…? 아니요."

진정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정신 붙잡고 핸들 당길 준비하십쇼."

더 이상 미니맵에 보이는 파란색 점은 나와 강소현뿐이다.

-크라라라락!

-크르라락!

더 이상 뜯어먹을 사람이 없어져서 그런지 좀비들이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담장 앞으로 달려들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작동하기 시작한 고정 포탑.

"핸들 뒤로 당기세요!!"

죽어간 자들은 묻어둔 채 이제는 좀비와 싸울 시간이다.

#13. 변화 (4)

이 작은 골목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 건물이 몇 개나 있더라?

이쪽 라인에 빌라 넷.

건너편에 빌라 셋 주택 하나.

가장 안쪽에 있는 나의 집.

빌라 높이를 5층, 각 층마다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크니까 4인 가구 2개씩으로 계산해 본다면....

못해도 200명은 넘는구나.

어느새 골목길을 빽빽하게 채운 좀비들을 보면서 순간 '버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수를 가늠해보니 이해가 갔다.

바퀴벌레도 아니고 사람이 뭐 이리 많은지.

우리집 골목만 해도 200이 넘는데, 다른 곳의 좀비들까지 몰려왔다고 생각하면....

"옘별."

"뭐라고요? 총소리가 너무 커서 잘 안 들려요!!!"

투타타타타타타타타-!!

"별말 아닙니다!"

치이이이익―

"이, 이준 씨 손이 타고 있는데요?"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또다시 화상을 입은 모양이다.

치이익-

손이 타들어간다는 것은 이제 교대할 시간이 됐다는 걸 의미한다.

"교대!!!"

위이이이잉―

강소현이 탄 포탑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핸들이 안 당겨지는데요?"

파앗-!

「포탑 2. 탑승자 강소현」

「사용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승인 / 거부」

당장 손이 병신이 되게 생겼는데 누르라는 것은 아닐테니.

"승인!"

투타타타타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한 두 번째 고정 포탑.

"꺄아!!!"

갑작스럽게 작동한 탓에 강소현이 핸들을 고정하지 못했고 총구가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똑바로 조준하세요!"

타타타타타타탓-!!

"노, 놀라서 그런 거예요!"

그녀도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허투루 살아남은 건 아닌지, 곧장 포탑을 밀어 집 담장을 향해 다가오는 좀비들에게 총알을 퍼붓기 시작했다.

타앗-!

『냐아~!』

그사이 어깨에서 내려온 로라가 내 손을 치유해주려 혓바닥을 들이밀었지만―

"떽!"

이를 저지했다.

『냐아??』

"둘만 있을 때 부탁할게."

강소현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직 로라의 특별함을 타인에게 공유하고 싶지는 않다.

'인벤토리.'

파앗-!

인벤토리에 있는 '하급 포션'.

강호식과 어린아이를 제외한 10명을 죽여서 포션의 수가 20개로 늘어 있었다.

첫 살인에만 '10개'를 주고 그 뒤엔, 사람 하나당 1개의 포션이 주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행복 빌라 남편 놈은 이것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목에서 피가 그렇게 나는데 아들내미가 있던 빌라까지 갔을 리는 없으니.

또옥-!

『캬오오!!!』

작은 호리병 형태의 유리병 속에 든 붉은 액체.

코르크 마개 같은 뚜껑을 따니 코를 찌르는 썩은 내와 시큼한 암모니아 내음이 섞여 온다.

"미친…."

이딴 냄새가 나는 걸 먹으라고 줬을 리는 없겠지.

주르르륵-

상처 부위에 흘렸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아...."

로라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갔을 정도의 악취.

"미친. 이딴 걸 먹으라고?"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그래도....

코를 막고 먹으면 마실 만하지 않을까?

벌컥, 벌―

"푸으읍…. 씹...."

코를 막고 마셨음에도 느껴지는 끔찍한 맛.

찐득하고 입안 곳곳에 들러붙는 불쾌한 식감의 액체.

우우웅-!

그렇게 반쯤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손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우웅-!

'하급'이 붙은 포션인데 성능이 제법이다.

화상을 입은 손이 순식간에 회복되었으니.

"너, 너무 뜨거운데요?"

10초당 2초를 식혀 줘야하는 고정 포탑.

연달아 30초 이상을 쐈으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뜨거울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세요!!!"

나는 그녀를 약하게 키울 생각이 없다.

타앗-!

"어, 어디 가요!!!"

그녀의 시야가 좁은 건지 내가 예리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마는 집 뒤편의 담장에도 검은색 점이 두 개 생겨나 있었으니까.

철그렁-

고정 포탑 아래에 세워둔 철봉을 들고 집 뒤편을 향해 뛰었다.

"자힐 하면서 좀 버텨 봐요!!!"

미니맵을 유심히 보고 있던 나다.

저 검은 점 두개가 갑자기 생겨난 것도 이상한데, 이상한 느낌이 엄청 들기 시작했으니.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뛰는 것과 걷는 것에 상관없이 균일하게 울려 퍼지는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담장.

달그락-

달그라락-

"...."

그곳에서 본 것들은 욕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달그락-

"해골?"

완전한 순백색 해골 두 개.

아마, 스켈레톤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부우웅-!

느리고 무기도 없는 스켈레톤.

콰직-!

부웅-

콰직-!

좆밥같은 외견에 걸맞게 두 마리 모두 봉질 한 방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안도할 수 없었다.

또각, 또각.

왜냐고?

또각, 또각.

백골이 일어난다는 말은....

아포칼립스가 오기 전에 죽었던 놈들까지 죄다 일어난다는 뜻이니까.

"좆됐네."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고.

치이이익―

"왜,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아파서 죽을 뻔했잖아요!!!"

강소현의 미래는 밝아지고 있다.

"거, 자힐로 잘 버티고 있으면서 뭘 그리 엄살을 부립니까?"

고통과 싸움에 익숙해져야 아포칼립스 속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탓-!!

* * *

깡패 놈들과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지진.

그리고 망자들의 밤이 찾아왔다.

칙, 치익-

"쓰으읍."

어린아이를 포함한 12명의 약탈자 집단.

한 명의 어린아이가 골목길 밖으로 도망갔지만, 저 좀비 떼 사이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심 어린아이만은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후우우...."

세상이 망하고 어차피 좀비한테 죽을 아이를 내가 죽이지 않는다고 뭐가 바뀌겠냐 싶겠지마는.

"쓰으읍."

적어도 마음은 편하다.

"후우우...."

뭐, 어린아이까지 죽였다면 포션 1개와 약간의 포인트를 얻기야 했겠지만, 내가 죽인 어린아이 때문에 내 마음만큼은 한없이 무거워 졌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다.

나는 이 망한 세상 속에서도 적어도 내 손으로 어린아이만큼은 죽이고 싶지 않다.

무법의 시대가 왔더라도 나만의 기준은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쓰으읍."

"아이 씨!!! 작작 펴요. 작작!! 힘들어 죽겠는데, 담배 냄새로 자꾸 사람 짜증나게 만들고 있어."

그런 내 생각을 깨부수는 강소현의 일갈.

"내...."

'내 집에서 내가 담배 피우는데 꼬우면 나가시든가.'를 시전하려고 했는데, 녹초가 되어 고정 포탑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니 그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나도 녹초가 된 건 마찬가지다만, 그녀는 초심자다.

「이준(Lv.3) 32세 / 보유 포인트: 201,50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3」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30포인트를 주는 좀비.

획득한 포인트만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좀비들을 족히 6,666마리 이상은 잡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고블린 2,000마리로도 죽을 뻔한 나이기에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안다.

"내? '내' 뭐요? 내 집에서 어쩌구 하려던 건 아니죠?"

전부터 느끼는데, 강소현은 독심술이라도 익힌 건가 싶을 정도로 내 말을 잘 알아맞춘다.

"내 집처럼 편하게 계시라고 하려 했습니다만."

"퍽이나."

담장 너머로 대충 던져버린 담배꽁초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

"혹시 레벨 안 올랐습니까?"

더 이상 이 화제로 떠들고 싶지 않아 다른 화두를 던져 봤다.

"아니요."

"포인트는요?"

곧장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해버렸지만.

그냥 닥치고 있을걸.

"어? 포인트도 하나도 안 올라갔네요…. 좀비는 30포인트를 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타인이 내 포탑으로 몬스터를 잡아도 포인트는 내게 주어지는 듯하다.

"이, 이게 왜?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그리고 그것이 강소현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하게 느껴지는 모양이고.

"이, 이준 씨는요?"

그래서 그런지 내게 선택지를 요구하기 시작한 그녀.

1.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경우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만 꿀 빨고 끝난다. 허나 훗날 이 사실을 들켰을 경우에는 로라의 중성화 수술이 물 건너갈지도 모른다.

2. 사실대로 말한다.

그녀 몫의 포인트만큼 귀찮은 것들을 내게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가령 얹혀살고 싶어 한다든가, 지속적인 물자를 요구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고로로로롱』

때마침 무릎 위에서 들려오는 로라의 골골쏭.

고양이는 기분이 아주 좋으면 골골대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런 귀여운 로라가 발정기로 인해 고통받는 모습을 볼 생각은 없으니―

"제게 포인트가 몰빵된 것 같습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2번뿐이 없다.

"아, 아니 그걸 다!! 상점에서 사려던 것들도 있었는데...."

애초에 2번을 골라서 그녀가 내게 강짜를 부린다 해도 해결할 자신이 있으니까 고른 거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럴 때일수록 세게 나가야 하는 법이다.

"그... 책임지시죠."

"무슨 책임을요?"

"제 포인트요!!!"

나는 그녀에게 포인트를 빚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숨을 구해줬더니 포인트까지 내 놓으라 이 말입니까?"

나는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거든.

"아니, 그쪽이 왜 제 목숨을 구해준 게 돼요?"

"제 능력 없이 그 좀비떼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 그건 아닌데.... 애초에 학교에 있었으면―"

"3,000명이 있는 학교에서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말이죠? 그 주변에 아파트 단지만 몇 갠데."

"...."

거 봐라.

"포인트로 생색내지 맙시다."

"...따지고 보니 그렇네요."

입술을 꽉 깨물고 부들부들 거리는 강소현.

"대신, 가끔 놀러 오시면 샤워는 하게 해드리죠."

그녀가 고생한 것도 사실이긴 하니, 나름의 절충안을 제시했다.

"저, 저보고 다시 나가라는 말이예요?"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하긴, 그녀도 이제 미니맵을 신경 쓰기 시작했을 테니 쉽게 납득이 가진 않을 것이다.

미니맵은 집앞 골목 너머의 2차선 도로까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검은 점들이 어느 한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당장은 아닌데, 조금 안정되고 나서는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좌측 대각선으로 가는 걸로 보아서는 '학교'나 '대형 마트'가 있는 부근으로 추측되는 좀비들의 움직임.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될까요?"

"저는 로라 하나로 충분합니다."

"아니, 제가 안 괜찮다니까요!!"

"저는 괜찮은데요?"

"이준 씨 포탑도 엄청 대단하고, 이 집도 안정적인데.... 부탁할게요."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기 시작한 강소현 수의사.

허나 그녀는 나와 함께할 수 없다.

"미니맵 보다가 조금 안정되면, 같이 나가죠. 제가 학교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내 클래스는 '집사'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는 그 능력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고.

그말인즉슨.

내게는 정보원이 하나 필요하다는 말이다.

"대, 대체 왜요!!!"

"제 생각에 몬스터 웨이브는 못해도 두세 번 정도 더 나오고 끝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는 밖에서 정보원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미친…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 그러면 그 뒤에는요?"

고민하다가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은 강소현이 내게 물었고.

"강소현 씨 전용 방을 만들든가 제집 옆에 집을 하나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녀가 만족할만한 답변을 내주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안전해졌다 싶을 때 나갈 겁니다."

"지, 진짜죠?"

내가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미니맵에서 검은색 물결이 몰아치는 와중에 그녀를 내쫓을 리가 없지 않는가?

"왜 대답을 안 해요!!!"

허나, 그녀에게는 내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 * *

「몬스터 웨이브 3. 96:00」

168시간, 7일 이라는 시간을 준 몬스터 웨이브 3의 카운트는 어느덧 96까지 줄었고, 강소현은 여전히 나의 집에 눌러 앉아 있다.

"이준 씨!! 교대!!!"

미니맵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검은 점이 제법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집앞 골목길로 들어오는 놈들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로 떠날 기회가 나지 않고 있다.

위이이이잉―

지금은 그녀가 눌러앉게 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혼자 있었다면 잠도 못자고 포탑 위에서 3일을 보냈어야 했을 테니.

나름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좀비들에 대해 알아낸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삼삼오오 골목길 앞에 모이기 시작한 검은 점들.

좀비들은 최소 30마리가 모이기 전까지는 어딘가를 침공하진 않는다.

그리고 미니맵에 28개의 점이 찍여 있으니, 슬슬 포탑을 쏠 준비를 해야 한다.

투타타타타타탓-!!

좀비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만, 지금 당면한 문제는 좀비들이 아니다.

"끄윽…."

담 너머로 올라오는 구역질나는 악취.

좀비, 고블린, 사람 할 것 없이 뒤섞인 고깃덩어리들이 잔뜩 쌓여버린 골목길은 대화재에서조차 맡아보지 못한 끔찍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칙, 치익-

쌓인 포인트를 이용해 담을 두 겹 세 겹으로 두르고 시야를 잡아줄 구멍만 냅둔 채 확보한 자제를 이용해 2m 높이로 개조했다.

그 덕분에 집 안까지는 냄새가 들어오지는 않지만, 대문 옆 포탑에 앉아 있을 때만은 이 악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쓰으읍. 퉤엣-!"

악취 때문에 담배맛도 더럽게 없고.

바사사사삭-!

『키야오!!!』

취이이이익.

"쓰읍! 냄새 때문에 죽겠는데 너까지 이럴래?"

이제는 로라의 오줌질 때문에 집 안에서도 냄새에 시달릴 판이다.

"에휴, 또… 이준 씨! 로라 모래 어디서 구한 거예요?"

"여기 화단에 있던건데...."

"손으로 덮어서 알려주고 그런 건 다 아시죠?"

오랫동안 고양이를 좋아해온 나다.

"이론적인 건 빠삭합니다. 이미 다 해왔던 거고요. 어미가 알려줘야 할 것들은 제가 다 알려주고 있습니다만."

"근데 실전이 부족하시네요."

로라가 돌아다닐 정도로 회복되었을 때부터 모래 교육을 시작했다.

"아직 어려서 모래에 싸는 걸 이해 못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얘 똑똑한 거 보면 이해를 못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러는 거죠?"

"모래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요?"

생후 한 달이 조금 넘은 로라다.

"처음 써보는 건데 마음에 들고 말고가 어딨습니까?"

"보통은 그런데, 고양이마다 다 달라서 로라 같은 경우도 있어요. 사람 애들도 뭘 먹어봐서 편식하는 게 아니잖아요?"

너무도 적절한 그녀의 비유에 말문이 막힌다.

"먼지 풀풀 날리는 이런 싸구려 모래 말고 먼지 적은 벤토나이트로 써 보시면 어떨지...."

강소현은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는지 말끝을 흐린 채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흘러갔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벤토나이트 모래를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병원 잔해를 뒤졌을 때 챙겨왔을 것을.

그때는 모래라는 게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넘어갔었는데....

"당장 해 뜨면 소현 씨 근무하던 병원으로 가시죠. 모래부터 구합시다."

허나, 이런 실수는 '파밍' 한 번으로 쉽게 만회할 수 있는 법.

"네?"

식량은 충분하다.

물도 공짜다.

이제 고양이 모래만 있다면 내 집은 완벽해진다.

#14. 변화 (5)

「몬스터 웨이브 3. 72:00」

7일 중 4일이 지나갔고 더 이상 몰려오는 좀비는 없었다.

대신 깊은 구덩이에서 올라온 듯한 느낌의 스켈레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스켈레톤들은 가장 처음에 나타났던 빡대가리 고블린만도 못한 놈들이었다.

투타탓-!

총알 한 발에 연달아 너덧이 박살나버리니까.

고작 10p밖에 주지 않는 놈들이라 포탑을 0.1초 단위로 끊어서 쏘고 있다.

돈도 안 되고 약해빠진 놈들이 나타난다는 말은 슬슬 우리가 움직여도 좋을 때가 왔다는 의미기도 하다.

'굳이 안전한 집을 벗어나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집사'다.

각성의 직업적으로도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 전용 모래를 구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거다.

"자, 이제 내려가시죠."

"아니, 저는 그래도 힐런데, 꼭 해야 돼요?"

고양이 모래는 전문용어로는 벤토나이트라 부르는데, 이것을 파밍하러 가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힐러는 몬스터가 피해간답니까?"

바로 강소현의 무력증진.

"고, 고블린은 잘만 잡았는데요?"

"밖에도 무슨 변화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약해빠진 것들 몇 마리 잡았다고 유세 부리지 말고 빨리 내려가세요!"

고정 포탑의 사기성을 맛봐버린 그녀가 쉽사리 이를 받아들이려 들지는 않았다만.

"아, 그, 저...."

"강소현 씨 전용 방 혹은 집. 필요 없어요?"

"하아...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는 것도 생각해보면 좀 그렇네요."

불편한 동거를 벗어나고 싶은 건 그녀도 매한가지.

"대신 밖이 위험하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타앗-!

포탑에서 뛰어 내려가 대문을 열고 나간 강소현.

그녀가 메이스를 꺼내 들고 스켈레톤을 향해 다가간다.

달그락-

"대체 백골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콰직-!

하기 싫은 것처럼 빼더니 막상 전투 자체는 훌륭했다.

메이스로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내리치며 여러가지 의문을 내뱉는 그녀.

달그락-

"뭐야? 이거 왜 안 부서져?"

전투는 훌륭했으나 그 위력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허나, 그녀는 내 기대 이상으로 터프했다.

"-이이익!!!"

콰직-!

콰직-!

악을 쓰며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내려치지만, 그 결과는 고작 두개골 조금을 함몰시키는 데 그쳤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팔을 휘두른다.

"능력치 사용하시는 거 맞아요?"

보고만 있기 뭐해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네. 얘네 너무 단단한데요?"

"비켜봐요. 로라는 여기 있어!"

『냐아?』

로라를 고정 포탑 의자에 내려두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달그락-

뼈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느릿느릿 다가오는 스켈레톤.

달르락-

철봉에 힘을 담아서 내리쳤는데....

부우웅-!

콰직-!

"이게 어찌...."

"왜요? 잘만 죽여 놓고."

"자, 잠시만요."

부우웅-

콰직-!

아무리 봐도 손맛이 이상하다.

"로라, 일로 와 봐!"

『냐아!』

타앗-!

로라의 전용 좌석인 집사복 어깨에 달린 안장.

그곳에 로라가 올라왔고, 나는 다시 힘을 담아 철봉을 가로로 넓게 휘둘렀다.

지이이잉―

부우우웅-!

콰자자자자자작!!

"와... 이준 씨 스킬만 강한 게 아니네요. 저는 보고도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암, 그렇고말고.

"이게 다 로라 덕분입니다."

『고로로로로롱』

그간 정신이 없어 정확히 테스트해보지 못했던 나의 힘에 대한 의문.

그것이 조금 풀린 기분이다.

「방어력 +20, 집사 능력을 더 강화한다.」

조잡한 등급으로 강화된 집사복의 옵션.

그리고 집사라는 나의 직업을 고려해보면, 내 힘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조건 1.

내가 정신적으로 '집사'임을 강하게 자각한다.

조건 2.

집 안에 있거나, 고양이와 함께한다.

조건 3.

로라의 함성이나 응원이 동반된다.

물론 이 경우에는 로라의 컨디션이 나빠지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피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 조건들은 하나의 전제를 달고 있다.

'로라와 함께' 혹은 '집이라는 공간에 있을 것'.

그말인즉슨.

나는 무조건 외부 파밍에 로라를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아포칼립스를 돌아다닌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짓이다만, '산책용 목걸이'의 옵션을 생각해보면....

"이번 외출에는 로라도 같이 갑니다."

마냥 미친 짓은 아닐 것이다.

* * *

아포칼립스의 핵심은 물자 파밍이다.

무너진 식료품 창고를 뒤지고 대형 마트를 털어 남들보다 한발 앞서나가는 게 핵심이고.

허나, 내가 파밍하려는 것은 식량도, 겨울을 이겨내게 해줄 따듯한 의복도, 안전을 지켜줄 무기도 아니다.

바로 고양이 모래 '벤토나이트'.

"근데 진짜 추위가 안 느껴지지 않아요?"

휘오오오오오―

강소현의 훈련을 마치고 골목길을 나가는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한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그러게요."

사실, 강소현이 말해서 알아챈 거지 추위를 느낀 적이 없어서 지금의 계절이 겨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옷 때문일까요? 아니면 각성해서 그런 걸까요?"

"샤워할 때도 괜찮았던 걸 보면, 아무래도 각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각성'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바꿔놨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몇 개 있었다.

"피부가 단단해졌죠."

"그쵸. 아, 저는 더 좋아진 것도 같은데요? 피부가 예민해서 환경이 좀만 더러워도 접촉성 피부염이 일곤 했는데.... 이 더러운 환경에서도 피부가 깨끗한 걸 보면요."

강소현의 TMI를 들으며 정리한 정보에 따르면 각성의 효과는 실로 뛰어났다.

우선, 단단해지고 매끈해진 피부.

"아, 제가 수족냉증이 심해서 겨울에는 손발이 차고 막 그랬었는데.... 아마 혈관 문제도 개선되지 않았나 싶네요."

수족냉증이 무슨 증상인지는 안다.

수의사도 의사라 그런지 이것이 '혈관'을 개선해줬다는 것을 알게 해준 강소현.

"아, 이준 씨 거북목 완전히 사라지신 거 알아요?"

자신의 TMI뿐만 아니라 남의 TMI까지 말하고 드는 게 조금 불만스럽긴 하다마는―

"키가 크셔서 그렇게 근육이랑 뼈가 굳지 않았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까 아무래도 전반적인 골격이나 뼈도 개선된 것 같아요."

유익한 정보를 계속 뿌려대는 탓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게, '각성'에 대한 의료인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기회 아닌가?

"혹시 탈모는 없었나요?"

어째 점점 질문이 이상해지고 있지만.

"네. 저는 날 때부터 풍성했습니다만."

"그래요? 모근이나 모질 변화는 아직 잘 모르겠고. 아, 참고로 저도 머리숱이 많은 편이에요. 모질이 조금 가늘긴 한데... 유의미한 변화는 없네요."

흠, 탈모는 해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인류를 초능력자로 만들어준 '각성'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질병이 '탈모'라는 게 되는군.

"혹시, 탈모가 전염도 됩니까?"

"네? 미쳤어요? 어디가서 그런 말 하면 클나요. 탈모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도 그럴게, 수족냉증이니 자세 교정까지 해내는 '각성'이 탈모는 고치지 못했다는 게 좀 걱정되지 않습니까?"

"흐음… 뭐, 일리는 있는 지적인데. 그럴 가능성은 100% 없습니다."

내 키는 188cm다.

어지간하면 다 나보다 작다.

그래서 편돌이를 하면서 질리게 본 것이 남의 두피이기도 하니.

그런 내가 이런 걱정을 할 수도 있는 거다.

"아, 그거 알아요? 손톱 발톱도 단단해진 거?"

콰득-!

"허어.... 인간이 어찌 되려 하는지."

강소현이 바닥에 있던 건물 잔해를 손톱으로 찍자 그대로 손톱이 박혔다.

"좋게 말하면 진화라고 봐야겠죠?"

그런 우리의 유익한 대화 시간은 골목길 끝에 다다르면서 끝나게 되었다.

타앗-!

로라가 갑작스럽게 어깨에서 뛰쳐 내려갔기 때문인데.

어깨에서 뛰쳐 내려간 로라가 달려간 곳은 좀비 시체 위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좀비 위에 드랍된 '물컵과 빵'의 앞이었다.

「녹슨 물컵x1, 딱딱한 돌빵x1」

생후 4주가 조금 넘은 로라가 녹이 잔뜩 쓴 물컵과 돌같이 딱딱한 빵이 먹고 싶은 것은 아닐 테니, 로라의 저 행동은 순전히 재미일 것이다.

"떼엑!! 로라!"

그래서 혼을 내려 했는데.

『키야오오-!!』

갑작스럽게 로라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것도 좀비 시체 위에서.

그리고 분명, 아주 미세하지만 로라의 몸에서 금빛 가루 같은 것들이 흩어져 나온 것이 느껴졌다.

"이, 이준 씨, 보셨어요?"

강소현도 금빛 가루를 봤나 싶었는데.

"빠, 빵이랑 물컵이 사라졌어요."

그녀는 다른 것을 봤다.

나는 로라에게 집중하느라 빵과 물컵이 사라진 것은 보지 못했는데, 강소현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좀비 위에 있던 빵과 물컵이 사라져 있었다.

어차피 먹지도 않을 것이니 그깟 빵과 물컵 따위는 없어져도 상관이 없다마는.

"로라?"

그래도 로라의 보호자로서, 무슨 영문인지는 알아야겠다 싶어 로라에게 연유를 물었는데.

『냐아? 냐, 냐냐!』

로라가 솜방방이처럼 귀여운 앞발을 열심히 흔들며 설명을 해주었다.

"보, 본능이라고?"

알아먹지 못할 설명이었다만.

아무튼 본능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니 나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줬다.

야생성이 남아 있는 고양이인 만큼 본능의 영역을 존중해 줄 줄 알아야 하니까.

『키야오오-!!』

빵과 물컵의 앞에 가서 포효한다.

그러면 빵과 물컵이 사라진다.

집앞의 좀비는 수천이었다.

즉, 빵과 물컵도 수천이 드랍되었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빵과 물컵을 어딘가로 없애버린 건 아니었고, 백 개 정도를 그렇게 만들고는 로라는 내 어깨 위로 돌아왔다.

몸이 좀 뜨겁고 바로 잠든 게 이상해서 강소현 수의사에게도 보여봤는데.

"흐음, 고양이 체온이 원래 인간보다 높아요. 진짜 열이 나는 건 아니고, 그냥 잠든 것 같네요."

라는 처방이 내려왔다.

대관절 저게 무슨 행동인가 싶은데, 이상행동을 하고 잠든 아기고양이를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묵묵히 골목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강소현과 나는 또다시 이해 가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이게 뭔...."

"그러게요."

깔끔한 도로.

무너진 건물과 바닥, 부러진 전신주 등은 그대로인데 길거리에 시체가 단 하나도 있지 않았다.

다른 좀비들이 청소라도 해 준 모양인데....

"씨발."

왜 내 집 앞은 안 해준 거지?

빵과 물컵 따위는 로라가 어딘가로 보내버렸다만, 시체는 그대로다.

스윽-

뒤를 돌아 집앞 골목길을 바라본 강소현.

"그러게요. 기운내요. 강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그녀가 '씨발' 두 글자에서 뭘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의 위로를 해주었다.

이 힘의 대가가 역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들이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그냥 좀 좆같을뿐이지.

또각, 또각.

시체가 보이지 않는 길은 오히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또각, 또각.

대화가 멈추고 구두굽 울려 퍼지는 소리만 들려오던 있던 와중에―

"야, 저쪽에는 뭐 없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무슨 편의점에 남은 게 하나도 없냐?"

그 좀비떼를 겪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제법 있나 보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자 셋과 여자 둘.

변화한 세상에 제법 적응했는지 잔해 밖에 서있던 두 명은 무구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경계조랑 파밍조를 나눈 건가?

또각, 또각.

"거기! 어어? 옷차림이? 그 고양이는 또 뭐고...."

코너를 넘어 나타난 나와 강소현을 보고 다소 당황한 듯 말하는 한 남자.

"오, 오빠! 이상한 사람 같은데 그냥 무시하자."

리더가 아닐까 싶다.

"아영아, 싸우자는 게 아니야. 우리 권리를 지키려는 거지."

그리고 이와중에도 여자한테 잘 보이려 구는 것 같고.

한껏 거드럼을 피우며 삐딱한 자세로 내게 검집의 끝을 겨누는 20대 초반의 남성.

"...."

강소현은 멀뚱멀뚱 나와 그 사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이내 그자리에 멈춰 섰다.

힐끗.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턱짓으로 편의점 잔해를 뒤지던 무리를 가리킨다.

아마도....

나보고 해결하라는 말인 듯한데?

스릉―

저벅, 저벅.

칼을 뽑아 들고 내게 다가오는 남자.

"그, 변태 아저씨. 여기는 우리가 먼저 왔어. 그러니까―"

행복 빌라 것들도 그렇고 이놈들도 그렇고 이미 다 털린 편의점 잔해에서 뭐 대단한 걸 발견하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그래도 나름 불쾌하긴 했으니 단칼에 놈의 말을 자르고 꾸짖기 시작했다.

"거, 관심도 없는데.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뭐?"

"근처 대학생들 같은데 거길 뒤지든 뭘 하든 알아서 하고 신경 끄라고."

"오, 오빠. 그, 그냥 있자! 나, 나 느낌이 이상해…."

"그 스킬?"

저 여자는 느낌이 이상해지는 스킬이 있나 보군.

"아, 죄송합니다. 초면인데 제가 조금 예민하게 군 것 같네요...."

것도 주제 모르고 설치던 놈을 바로 머리 박고 사과하게 만들 정도의 스킬이.

또각, 또각.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기도 하니, 90도로 머리를 박은 놈을 내버려둔 채 길 건너 동물병원의 잔해로 걸어갔다.

"와아, 태세변환 뭐래요?"

제법 거리가 벌어지고 나서야 입을 연 강소현.

"아무래도 저 여자애 스킬이 육감 같은 그런 종류인 것 같죠?"

내게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 뭘 그리 신나하는지 모르겠다.

"하아, 대체 왜 구경만 한 겁니까? 저도 시덥잖은 언쟁은 싫어하는데."

"이준 씨 옷차림. 어깨에 고양이. 우리가 시비가 걸리면 100% 그것 때문일텐데요? 그러니 책임지시는 게 맞지 않나요?"

"...그렇군요."

그녀를 말로 이겨 먹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고.

"여기도 사람이 좀 있네요."

도착한 24시 동물 병원의 잔해.

언덕진 잔해 너머에도 사람이 있었다.

"고, 고양이?"

그리고 내 어깨에서 자고 있는 로라를 보고.

"옷이 왜…?"

내 옷을 한 번 보더니.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칙, 치익-

또다시 귀찮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담배에 불을 붙였는데―

"이준 씨!! 같이 좀 가요. 맨날 두고가! 어어? 설아!!!!"

뒤따라 병원 잔해 위로 올라온 강소현이 반갑다는 목소리로 건너편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어, 언니?"

나이를 높게 쳐도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 어린 여자도 강소현을 알아본다.

"잘 지냈어?"

고작 며칠 사이에 잘지내고 자시고가 어딨겠나 싶지만, 그들의 재회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저, 저 이상한 남자랑 아는 사이예요?"

일단 저 여자가 바라보는 나는 디폴트값이 '이상한 남자'다.

"이상한 사람은 맞는데, 나쁜 사람은 아니야."

강소현 수의사에게도 비슷한 인식인 모양.

"와아... 세상이 망해도 고양이 밥은 줘야 한다더니. 진짜 그런가 보네요?"

강소현이 해준 나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경계를 푼 여자가 제 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설이 왜 혼자 있어?"

"아, 저 돌 밑에 물건들을 모아 놔서 제가 지키고 있었어요. 다른 언니들은 대로 건너편에 들렀다 온대요. 진통제가 필요하다는데...."

"누가 아퍼?"

"좀비들 때문에...."

좀비 때문에 누가 다쳤나 보군.

콰앙-!

그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잔해 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쿠우웅!

누가 한 차례 더 헤집어 놨는지, 잔해의 형태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 언니는 뭐 가지러 오셨어요?"

"그… 내가 아니라 이준 씨가 필요한 게 있다 해서 온 거야."

"뭔데요?"

"아… 그, 모래."

"모래요? 설마…."

강소현의 지인 설.

그녀가 도로가에 떨어져 반쯤 부서져 있는 간판을 바라본다.

[이태24시동물병원]

그러고는 나와 내 어깨에 앉아 있는 로라를 바라봤다.

"고, 고양이 모래를 찾는다고요?"

"그렇다네."

쿠우웅-!

마치 남 일이라는 듯이 말하는 강소현.

'내가 창피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 옷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가 간다.

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발언은 '로라의 생필품 파밍이 창피하다.'라는 것까지 이어진다.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는 쌓아두고 넘어가는 일 따위는 필요 없다.

또각, 또각.

"강소현 씨."

"네에?"

"고양이 모래 구하러 '같이' 왔다는 게 창피합니까?"

"아, 아니...."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

"강소현 씨는 로라 주치의입니다. 직업에 자긍심을 가지셔야죠!"

부끄럽겠지.

그 뭐시기냐 의사들이 한다는 선서도 있지 않나?

수의사도 비슷한 걸 했을 거고.

"아니! 그쪽이―"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어린 소녀.

"설아!!! 떽!!"

그리고 그런 소녀를 막는 강소현.

"미안해요, 이준 씨. 불쾌하실 줄은 몰랐어요."

"앞으로 주의합시다."

또각, 또각.

"이제 학교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어요?"

다시금 잔해를 치우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 이준 씨랑 일만 마무리되면 나도 학교로 돌아갈 거야."

"다행이다. 언니 없다고 다들 되게 걱정했어요. 고추 분쇄자가 없어지니까 남자들이 다시 음흉하게 굴고 있거든요."

아포칼립스에 각성한 인류.

이것도 나름 판타지라고 본다면 판타지의 국룰인 '이명(異名')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

"아, 아니 그걸 말하면 어떡해!!!"

그리고 강소현의 이명은 '고추 분쇄자'다.

'아, 시스템 업데이트 같은 게 돼서 머리 위에 이명이 뜨면 참 좋겠다.' 같은 생각을 하던 중.

콰아아아앙-!!

대로 건너편부더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 설아!! 어? 소현 언니!!"

"미진아...."

대로를 건너와 다가온 여성은 둘.

그리고 그들 뒤에는 이상한 괴물이 있었다.

콰아아앙-!!

좀비랑 해골을 뭉쳐 만든 거대한 거인.

콰아앙-!!!

벤토나이트도 얻었겠다.

'강소현을 데리고 튀자!'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캬아오오오!!!!』

어깨 위에서 자던 로라가 깨어나더니 그 거대한 괴물을 보며 하악질을 시작했다.

"어, 언니! 나중에 봐요!!!"

이미 강소현의 지인들은 튀었고.

쿠우웅-!

괴물은 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아, 안 튀어요?"

그런 내게 강소현이 묻는다.

"로라가, 저놈을 사냥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내 고양이가 '사냥'을 하고 싶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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