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옘별 (1)
수의사 강소현은 말했다.
-각성 때는 고블린 한 마리가 나왔어요. 웨이브 1에서는 두마리가.... 단순하게 두 배씩 는다고 가정하면 아마 웨이브 2에서는 네 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준 씨는요?
그러고는 내가 대답했다.
-각성 때는 다섯 마리. 아마 네 마리가 제 몫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좀비가 된 아저씨도 하나 있었으니. 그다음은 서른 마리. 제 경우를 배수로 는다 치면 7.5배수로 늘어나네요....
그래서 추측한 '몬스터 웨이브 2'의 고블린 수는 약 225마리.
허나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2,000마리.」
200도 말이 안 되는데, 2,000이라니.
게다가 나한테 오는 놈들은 갑옷까지 입고 있지 않는가?
"옘별...."
진짜 진짜 최악의 상황에서 나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릴적 나를 키워주시던 할머니가 종종 쓰시던 말인데, '염병+별게 다있네'라는 말의 합성어다.
돌아가신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개좆됐다 싶은 상황이 오면 절로 저 소리가 튀어 나온다.
다섯 살 때부터 받은 욕설 조기 교육 덕분에 몸에 각인된 느낌이랄까?
뿌우우우우우―
고정 포탑에 앉아 멍해져 있던 차에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
"허!"
어이가 없네.
철그럭-
철그럭-
그리고 기울어진 땅 위로 하나씩 고블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웨이브 1이 '고블린 30인 부대'였다면, 웨이브 2는 '고블린 2,000 군단'이 아닐까?
위이이이잉―
고정 포탑의 존재가 조금 위안이 돼주고 있었는데.
철그럭-
철그럭-
그마저도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철소리와 담장 위로 올라온 고블린의 모습을 보고서는 사라져 버렸다.
이번 놈들은 전보다 더 버전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르르르르륵(전체 도열)!!!!!
착, 착, 착, 착!
4열종대로 골목길에 진영을 잡기 시작하는 고블린들은 기본적인 무장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녹슨 갑옷 대신 말끔한 철갑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검과 방패도 새것과 같았다.
착, 착, 착, 착!
"미친."
착실하게 4열종대로 늘어서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며 나는 고정 포탑의 핸들을 뒤로 당겼다.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탓!!!!
군대가 멀쩡하게 진영을 갖추게 둬서는 안 되니까.
이건 미필인 나도 알 수 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탓!!!!
도열하기 무섭게 흩뿌려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고블린들.
뿌우우우우우―
그리고 무너진 골목길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두 번째 뿔피리 소리.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고블린이 없어 재빨리 고정 포탑의 핸들을 앞으로 밀었다.
가열이 돼서 그런지 핸들이 너무 뜨거웠거든.
지이이이잉―
고정 포탑이 열을 식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 알게 된 사실.
고정 포탑은 10초를 쏘면 2초를 쉬어야 한다.
위이이이이잉―
포탑이 안정되자 다시 포화를 갈길 준비가 되었고, 포탈 근처에서는 이상한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둥- 둥- 두둥!
저 북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괴물이 뭔진 몰라도 보이자마자 총알 세례를 갈겨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비스듬히 내려앉은 골목길을 조준하고 있었는데―
두둥 둥 두둥!!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갑자기 거대한 머리통 하나가 빼꼼 올라왔다.
-고오오오오오!!!!!!
저건 또 뭘까?
녹색 대가리로 보아하건데 고블린은 맞는 것 같다.
다만,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쿠웅-!
비스듬한 길을 뒤흔들며 올라온 거대한 고블린.
'고블린 챔피언'이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외형이다.
철그럭-
어깨에 매단 쇠사슬.
3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몸. 그리고 그 몸의 반을 가리는 말도 안 되게 커다란 방패.
반대 손에는 검은색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가시박힌 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옘별."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자세를 잡기 전에 냅다 총부터 갈겼는데―
티딩- 팅- 티티딩-!
놈의 방패에 총알이 막혔다.
티딩- 팅-!
쿠웅-!
총알을 막으며 포탑이 열을 식히는 사이에 담장을 향해 다가온 고블린 챔피언.
쿠웅-!
고작 두 걸음에 집앞 담장까지 다가온 놈을 보자, '좆됐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지이이이잉-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안정된 포탑을 다시금 놈에게 조준했다.
투타타탓-!
노리는 곳은 머리.
티딩- 팅-!
예상했던 대로 놈이 방패를 위로 치켜들었고―
타타타타타타타탓-!
고정 포탑의 핸들을 위로 올려 총구가 발목을 노리게끔 만들었다.
푸북-!
푸우욱-!!
-고오오오오오오오!!!!
쿠우우웅-!
거대한 고블린이 담장에 부딪혀 쓰러진다.
쿠우우웅-!
-고오오오오!!!!!!
놈이 괴성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리고―
와르르르르르
기껏 지어놓은 담장이 무너져 버렸다.
쿵-!
담장은 무너졌어도 놈이 방패를 떨어트렸기 때문에 그대로 머리통이 드러났다.
투타타타타타탓!!
쿵!
즉사였는지, 담장을 부수던 고블린 챔피언의 손과 허공을 가르던 뭉개진 다리가 바닥으로 추욱 늘어졌다.
착, 착, 착, 착-!
그리고 어느새 무너진 담장으로 또 한 부대의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뿌우우우우우―
젠장.
정렬해서 진격하기는 실패했다.
거대한 고블린 챔피언 몸빵 세우기도 실패했고.
고블린들이 마지막으로 정한 전략은 더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착, 착, 착, 착-!
포화에 죽는 고블린, 그리고 쓰러진 고블린의 자리는 곧바로 다른 고블린으로 채워진다.
착, 착, 착, 착-!
그렇다.
놈들이 정한 마지막 전략은 바로 인해전술이었다.
부채꼴로 넓게 퍼져 있는 탓에 쏴도쏴도 어느 한 부분은 다시 고블린들이 내게 더 다가와 버린다.
착, 착, 착, 착-!
'투타타타-' 하는 고정 포탑의 총음을 뚫고 울려 퍼지는 고블린들의 철소리.
느리지만 착실하게 그 소리는 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1,053마리.」
체감상 만 마리는 죽인 것 같은데, 아직 천 마리도 채 줄지 않았고―
치이이익-!
내 손은 열을 식히지 못한 포탑의 열기로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포탑의 핸들을 당기고 있을 뿐인데, 몸에 힘이 없다.
담배라도 물고 싶다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다.
착, 착, 착, 착-!
잠시라도 집중력이 흐려지면 놈들이 더 가까워져 있으니까.
치이이이익-
타들어가는 손.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901마리.」
줄어가는 고블린.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836마리.」
지금부터 벌어지는 싸움은 치킨 게임이다.
내 손이 먼저 병신이 뇌느냐, 고블린들이 먼저 죽어 버리느냐 하는 그런 싸움.
뭐, 손 하나로 족하다면야 내가 이득이겠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내 손이 병신이 되면, 결국 죽게 되는 거니까.
즉, 저 괴물 집단과 나는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침공당하는 입장인 내가 더 손해지만.
치이이익―
"끄으윽…."
2,000vs1인 불리한 싸움이었기에, 결국에는 고블린 쪽으로 승기가 기울어 버렸다.
착, 착, 착!
어느새 고블린 챔피언의 시체를 넘어 대문 앞까지 다가온 고블린들.
'앞으로 손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망가진 나의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고정 포탑에서 내려와서 철봉을 들어야 할까?
이 손으로 무기를 들 수는 있을까?
발길질...은 좀 오바인 것 같고.
손에 감각이 없어진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이 머리를 맴돌고―
채앵-!!
대문과 고작 3m 떨어진 곳에서 대장격으로 보이는 고블린이 칼을 빼 들고 돌격의 함성을 외쳤다.
-고르르르르!!!!!!
착, 착, 착, 착-!
이대로라면 답이 없는 상황.
『냐아아~』
그때 들려온 로라의 목소리.
그리고 변화는 일어났다.
『핥짝, 핥짝.』
3도, 아니 4도에 준화는 화상을 입은 내 손은 표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마치 과거에 겪었던 대화재를 연상케 하는 그런 화상을 입었었는데―
『고로로로롱』
로라가 그곳을 핥아주며 골골대는 소리를 내주자 상처가 자연스럽게 치료되기 시작했다.
우웅-!
화상을 입은 부위에 금빛의 작은 구체가 생기고 마치 시간이라도 역행한 듯 손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고작 내 손바닥만 한 작은 로라는 방공호 속 상자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 높은 포탑 위로 올라와 내 손을 핥아주고 있으니....
『냐아아!!!』
상처를 치유하면서 포기하지 말라는 듯이 앙칼진 울음소리를 내는 로라.
"그래, 아빠가 더 힘낼게."
나는 '집사'다.
로라의 안전을 책임지는 아버지이자, 나와 로라의 삶의 터전을 지켜야하는 사람이다.
내 품에 들어온 작은 생명조차 나를 위하겠다며 이렇게 울어대는데, 먼저 포기할 수야 없지.
위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타타타탓!!!
나는 다시금 고정 포탑의 핸들을 잡았다.
치이익-
고블린 챔피언을 잡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열을 식힌 적이 없어 여전히 뜨거운 포탑의 핸들.
다시금 손이 타들어가지만 이제는 아프지 않다.
『냐아아!!!』
나를 응원하며 열심히 손을 핥아주는 로라가 있으니까.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401마리.」
대문 앞까지 몰려온 고블린들을 몰아냈다.
허나, 400이라는 숫자의 고블린들이 몰려오는 탓에 결국 무너진 담 너머로 놈들의 별동대가 들어와 버렸다.
"미치겠네."
대문을 향해 다가오는 고블린이 기백이요.
담장을 넘어온 놈들도 오십은 넘는다.
360도를 커버하는 포탑이라도, 수백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를 커버하기란 어려운 상황.
-고르르르륵!!
당장 내가 고른 선택은 담장 너머를 섬멸하는 것이었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탓-!
총성과 함께 담장 안의 마당이 고블린들의 살점으로 가득 뒤덮히기 시작하고―
콰직!
콰지직!
대문 밖의 고블린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에 칼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젠장."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316마리.」
콰지직-!!
쿠웅!
무너진 담을 통해 들어온 놈들은 다 해치웠다만, 결국 대문에 들러붙은 놈들에게 문이 부서져 버렸다.
바로 옆에 있는 나의 포탑을 향해 다가오는 놈들.
너무 가까운 탓에 포탑의 사격각이 나오지 않는다.
타앗-!
포탑을 멈추면 무너진 담장으로도 고블린들이 쏟아져 들어오겠지만, 당장은 코앞에 놈들을 해치우는 것이 우선이다.
철그렁-
대문 옆에 세워둔 봉을 들고 대문을 부수고 들어온 고블린들을 맞이했다.
수가 수인지라, 금세 둘러싸여 버렸지만.
파칭!
-고르르르륵!!
칼을 뽑아든 고블린들의 진격.
사방이 고블린으로 가득하다.
쿠우웅-!
거기다가 거대한 고블린 챔피언까지 담장너머로 보이기 시작했고.
'이대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냐아아아아-!』
고정 포탑 의자에 앉아 있던 로라가 갑자기 포효하듯이 울기 시작했다.
고작 20cm의 검은색 털뭉치가 토해내는 울음소리는 작고 보잘 것 없었지만, 그 효과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고블린들이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춰서 버렸고―
지이잉- 지이잉-
내 몸에서는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이잉-
알 수 없는 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온몸에 기이한 고양함과 힘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레벨이 올랐을 때와 비슷한 감각인데, 그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이대로라면 몸이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재빨리 고블린들을 향해 철봉을 휘둘렀다.
서걱-!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뛰어났다.
뭉뚝하고 조잡한 철봉을 휘둘렀을 뿐인데, 예기가 감도는 날붙이가 낼법한 소리가 들려왔다.
촤아아아아악―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블린의 수는 최소 백여 마리.
그놈들을 죽이는 데는 단 한 번의 휘두름이면 족했다.
가장 앞쪽에서 직격한 고블린들은 반으로 갈라지고 그것들을 뚫고 마치 충격파라도 발사된 듯 부채꼴로 무형의 에너지 파동이 뻗어 나갔다.
서걱-
투욱.
가로로 퍼져나가는 그 힘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고블린들을 모두 반으로 갈라 버렸다.
촤아악―
흩뿌려지는 녹색 피.
투욱, 툭.
반으로 갈라져 차례대로 쓰러지는 고블린들.
"후우욱… 후욱…."
숨이 거칠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쥐어짜여진 느낌.
"허어억…."
마치 공황이라도 올 것 같은 그런 몸 상태.
뿌우우우우우우―
허나, 쉴 시간은 없었다.
들려오는 뿔피리 소리로 보아하건데, 그새 또 놈들이 집앞으로 진격을 시작한 모양이다.
타앗-!
재빨리 포탑 위로 올라갔더니.
『냐아...』
힘이 빠진 듯 의자 한구석에 축 늘어진 로라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누워 있었다.
착, 착, 착, 착.
그리고 담장 너머로는 다시 고블린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냐아...』
방금의 내 힘은 분명, 로라의 울음소리에서 나온 게 분명하다. 그리고 로라는 그 행동 때문에 이렇게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거고.
내게 왔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로라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조금만... 버텨줘."
로라를 무릎에 앉히고 포탑의 핸들을 뒤로 당겼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128마리.」
어쨌든 다시 포탑에 올라섰으니 할 일은 하나뿐.
위이이이이잉―
포탑의 핸들을 뒤로 당긴다.
투타타타타타타탓-!
그새 좀 식어서 그런지 핸들을 잡을 만했다. 게다가 고블린들도 수가 많이 줄어서 전처럼 빽빽하게 몰려오지는 않고 있었고, 고블린 챔피언도 한 번 잡아봤기에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13마리.」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더 이상 짚 앞에 보이는 고블린은 없었다. 비스듬히 무너진 도로 위도 마찬가지였고.
"하아... 저길 내려가라고?"
아마도, 직접 무너진 도로로 내려가서 남은 놈들을 때려잡아야 하는 듯한데.
『냐아...』
남은 놈들을 빨리 해치워야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로라를 데리고 수의사를 찾아갈 수 있다.
타앗-!
"조금만 버텨라."
세상이 망한 지 3일.
두려움은 이미 극복했다.
철그렁-
봉을 집고 허리춤에 도끼를 확인한 뒤 곧장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또각, 또각.
골목길 안에는 다급한 나의 구두굽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길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열세 마리의 고블린이었다.
-꼬오!!
-꼬오오!!
"옘별."
고블린은 진짜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역겨운 외모로 혐오감을 준다.
좆밥인 척하다가 거대한 고블린 챔피언을 대동한 중무장 군대로 나타나 뒤통수를 때린다.
-꼬오오!!!
-꼬오오!
마지막이 가장 가관이다.
작고 귀여운 새끼를 죽이게 만드는 잔혹함.
매끈한 피부, 로라와 비슷한 크기에 자그맣고 아기자기한 이목구비를 가진 새끼 고블린 열세 마리가 구덩이 아래에 있었다.
한... 20cm는 되려나?
새 둥지 같은 요람에 쌓여 있는 아기 고블린이 열세 마리.
-꼬!!
-꼬오!
일단, 다짜고짜 죽이자기엔 저것들은 아무리 봐도 '새끼'다.
종은 달라도....
작은 요람에 있는 아기임은 분명하니.
「몬스터 웨이브 2. 남은 고블린 13마리.」
그래도 아픈 로라를 생각하면 저놈들을 빨리 해치우는 게 맞는 판단이겠지.
직접 손으로 때려잡기에는 죄책감이 드는 외모의 아기 고블린들. 총으로 잡으면 그나마 낫겠지 싶어 요람을 옮기려고 집어 들었다.
-꼬오오!!!
요람을 들고 그 안에 싸여 있던 아기 고블린을 바라보던 순간―
-퉤에엣!!
요람 안에 있던 고블린이 내게 침을 뱉었다.
치이이이익-
"씨발!"
운 좋게 머리 대신 내 어깨에 떨어진 침은 '치이익-' 소리를 내며 집사복을 조금 녹였다.
쿠웅-
깜짝 놀라 놓친 고블린이 바닥에 떨어지고―
-퉤에엣!!!
-퉤에엣!!!!
푸직-!
이때다 싶었는지, 나머지 고블린 새끼들도 내개 침을 뱉어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돌무더기가 녹아내리는 걸 보면, 맨살에 맞으면 즉사 혹은 좀비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씹… 옘별…. 뭐, 이런 좆같은 생명체가 다...."
부우웅-
콰직, 콰직, 콰직, 콰지직-!
콰직, 콰지직.
죄책감이고 뭐고 그냥 철봉으로 냅다 후려쳐버렸다.
"고블린 새끼들...."
고블린은 어린 새끼조차도 해충 같은 존재다.
거의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충격적이었으니....
「몬스터 웨이브 2. 클리어.」
「미니맵이 개방됩니다.」
「인벤토리에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후우...."
『냐아~』
역겹고 충격적인 경험을 했지만, 로라의 울음 한 번에 그것들은 모두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고양이는 참 대단한 존재다.
정신 케어부터 시작해서 핥아주면 상처가 회복되는 능력에 집사를 강화하는 힘까지 지니고 있으니까.
『냐아.』
고작 한 달도 안 된 어린 로라가, 푸른 색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대단한 힘을 지녔어도 워낙에 몸이 약해서 그런지, 몸은 불덩이 같았고 숨소리도 약해져 있었다.
허나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만은 총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금방 수의사한테 데려가줄게."
로라를 데리고 강소현 수의사를 만났던 24시 동물병원의 잔해로 출발하려던 순간―
철그럭.
거친 쇳소리를 흩뿌리며 몇몇의 사람들이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 편의점 청년."
철그럭-
편의점 잔해를 발굴하던 '행복 빌라' 입주민들.
그들이 골목길 끝에 나타났으니.
#9. 옘별 (2)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숨겨두던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편의점을 점거하고 있던 '행복 빌라' 입주민들도 마찬가지.
"아니, 아무리 잔해를 치워도 봉지 라면이 하나도 안 보이잖아. 부탄가스도 그렇고."
핑크색 잡옷을 입고 있던 아줌마.
어디서 옷을 주워 입었는지 검은색 바지와 후드티로 옷차림이 바뀌었고.
철그럭-
무장도 더 강력해졌다.
가슴만 겨우 가리고 있던 갑옷은 어깨와 복부까지 가리는 큰 갑옷으로 변했고, 하반신에도 허벅지와 다리 사이의 Y존을 보호해주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철그럭-
애초에 '전투'를 가정하고 왔는지 왼팔에 방패를 끼고,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로라, 여기 숨어 있어."
천으로 로라를 감싸 집사복 상의에 집어넣고 포탑의 의자 위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여보, 말로해선 안 된다니까. 거, 편의점!! 사람 못 알아볼 때부터 알아 봤어. 음흉해가지고는, 쯧. 그걸 다 빼돌려?"
잘박-
"퉤엣!, 뭔 시체가 이리 많아?"
스릉-
옆에 서 있는 남편이 칼을 뽑더니 고블린 시체들을 짓밟고 집앞 골목길로 들어선다.
아내랑 같은 방어구를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둘 다 '전사' 클래스를 선택한 모양이다.
"201호, 뭐 해?"
"이,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저, 저 고블린들을 저 사람이 혼자서 다 죽였을 수도 있잖아요."
남편 놈이 골목 코너를 보고 말하자, 그의 뒤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행복 빌라 부부 뒤편에 선 궁수.
편의점에서 봤을 때는 반쯤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복장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커다란 활.
등에 멘 활통.
상체는 짙은 갈색의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하체에도 허벅지를 보호하는 가죽 갑옷이 둘러져 있었다.
'이 시체더미를 보고도 나한테 접근하는 걸 보면, 머리에 문제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저 사내만큼은 머리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201호, 상식적으로 생각해. 여기가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학교도 아니고, 이만한 고블린들이 튀나왔을 것 같아? 경찰서도 봤으면서 그러네."
"서, 그게 설령 아니라 해도, 같은 사람들끼리 이거는...."
"아니, 저 새끼가 식량을 다 가져간 게 맞다니까. 시비는 저놈이 먼저 건 거야! 우리 굶어 죽으라고. 괴물도, 사람이었던 좀비들도 잘 죽여 놓고 이제와 마음이 약해져?"
편의점 물품을 내가 가져간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걸로 이어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만….
"맞아, 편의점에서 저 나이 먹도록 알바나 하는 놈이 우리 식량을 다 뺏어갔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아니… 솔직히 이건 아니잖아요. 이, 이 시체들 좀 보세요."
정보 1.
저 새끼들은 나를 죽이는 걸 전재로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쫄지 마! 경찰서니 관공서니 하는 데 괴물 시체 천진 거 봤으면서 뭘 그리 놀라."
정보 2.
경찰서와 관공서에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괴물 습격이 있었고, 모종의 이유로 죄다 시체더미가 되었다.
"총각, 색시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우리 첫째가 힐러 고른 거 몰라?"
정보 3.
저 개년은 내게 구라를 쳤다. 분명 힐러가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어쨌든, 저년의 자식 중 하나는 '힐러'고 궁수의 와이프는 부상을 입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 그래도...."
정보 4.
저 활든 놈은 쫄보다.
"하, 거참. 101호 아들내미 죽는 걸 보고도 그래? 형식 씨 와이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니까?"
정보 5.
편의점 잔해에서 봤던 잼민이 셋 중 하나는 저 부부의 애가 아니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죽었고.
덜덜덜덜.
그것이 저 활잽이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주춤-
여전히 망설이는 궁수.
"허, 화살 몇 발만 쏘면 되는 걸 남자가 돼서 왜 그래? 군대 안 다녀왔어?"
"주, 죽이는 건...."
"괴물보다야 사람 죽이는 게 쉽지. 저놈 살려 뒀다가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색시 강간당하게 두고 싶어?"
아직까지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지들끼리 나를 살리고 죽이더니 급기야 강간범까지 만들어서 난리를 치고 있다.
사람을 좆으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이!!! 저 연놈들 뒤통수 까면, 힐러도 소개시켜주고 식량도 충분히 줄게!!!!"
저들은 나를 죽이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한 협상', '물자를 건네주고 보내기' 등의 행위는 제한된다.
그말인즉슨.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간질'과 '맞서 싸우기'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 선택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힐끗.
내가 정한 선택지는 이간질이었다.
세상이 망한데다가 내 고양이 로라는 지금 아프기까지 하다.
고정 포탑으로 쓸어버리면야 편하겠지만,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도 벌써부터 사람을 죽이기는 좀 그렇거든....
"어쭈?"
저들도 뇌가 있는 사람이니 쉽사리 넘어가진 않았지만, 궁수가 순간적으로 부부의 뒤통수를 바라보게 만들 수는 있었다.
"미쳤어? 왜 여길 봐?"
말이란 게 그렇다.
'저 새끼 뒤통수 때리면 100만 원 줄게!!'라고 하면 실제로 때리는 사람은 없을지 몰라도 다들 뒤통수는 한 번씩 쳐다보게 되니까.
100원을 준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이 나온다.
무조건 뒤통수는 쳐다보게 된다.
"죄, 죄송합니다."
저 궁수 새끼는 얼마나 좆밥인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쫄보다.
"와이프 냅두고 우리랑 척 지려는 건 아니지?"
"지, 지지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저 쓰레기 같은 부부의 하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궁수야!!! 진짜 힐러 소개시켜 줄게!! 솔직히 저 쓰레기 같은 부부보다는 내가 더 믿음직하지 않겠어?"
원래 싸움은 좆밥부터 패고 시작하는 거다.
"나는 너와 아픈 아내, 최소 두 명이서 한 달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제공할 수 있다!!! 저 부부처럼 뭘 요구할 생각도 없어!"
직접 때리지 않아도 '말'이라는 훌륭한 공격 수단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딱 저 병신같은 연놈들 '뒤통수'에 화살 한 발만 꽂자!!!"
골목길 끝에서 나와 대치하던 그들을 말로 열심히 팼다.
힐끗.
그리고 효과는 실로 뛰어났다.
또다시 궁수가 부부의 뒤통수를 쳐다봤기 때문.
"하아… 저 개새끼. 어이, 201호."
내 첫 마디에 언급되는 '뒤통수'.
그래고 내 말의 끝도 '뒤통수'다.
"아, 아니 진짜 그럴 생각이-."
"그래!! '뒤통수' 쳐다보지만 말고, 그냥 쏴 버려!!!"
힐끗.
"에잇, 씨이팔."
푸우욱-!
"끄윽...."
주저 없이 궁수의 배에 칼을 꽂는 남편.
"여, 여보, 그냥 죽여 버리자."
이를 부추기는 아내.
"대, 대체 왜!!"
왜긴 왜야.
사람 죽이러 온 놈들이, 뒤통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남'을 살려두겠어?
서걱-
허나 좆밥 궁수도 끝까지 좆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배를 관통한 남자의 검을 붙잡은 채 작은 단검으로 그의 목주변을 베어냈으니.
"여, 여보!!!"
"크어억…."
하필 안 좋은 곳을 베었는지 골목 끝에서 바라보는 내게도 뿜어지는 피가 선명하게 보인다.
촤아악-
"크윽…."
푸우욱-!
그가 피가 쏟아지는 목을 부여잡은 채 궁수에 배에 박힌 칼을 뽑더니 그대로 한 번 더 쑤셨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궁수.
"크으윽…."
비틀거리는 남편.
"여, 여보. 지환이, 지환이한테 빨리 가자."
그리고 그를 부축해 골목길을 빠져나가려는 아내.
"어이!!! 네년 아들 이름이 지환이라고?"
라면 몇 봉에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저런 쓰레기들도 제 새끼만은 끔찍하게 아끼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다.
"-히익."
"지환이, 니네 새끼 잘 숨겨 놔라!!! 내가 꼭 찾아갈 테니까!!!!"
그러니 짧고 굵게 가장 효과적인 위협을 가했다.
원래 자식새끼로 협박하는 것만큼 잘 먹히는 게 없는 법이다.
아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릇 돌아보더니, 곧장 골목길 코너를 넘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병신들."
복수?
당분간 복수는 생각도 못하고 내가 공격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살 거다.
남편 놈이 살아나더라도 당분간은 지 새끼 걱정에 제대로 잠도 못 잘 것이고.
과거, 우리 할머니가 나를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보면 100% 확신할 수 있다.
힘들수록 제 새끼만큼은 더 소중해지는 법이니까.
하물며 멸망한 세상에서는 그게 더 심해지겠지.
"하아...."
안전을 생각한다면 곧장 고정 포탑에 올라가 다 죽여 버렸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좀비로 변했다면 또 몰라도, 멀쩡한 사람을 죽이기에는 아직 내 마음이 너무 여린 모양이다.
칙, 치익.
세상이 망한 지 고작 3일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쓰으읍."
저 부부가 특이한 케이스지 보통은 나나 저기서 죽어있는 궁수처럼 벌써 '살인'을 고민하지는 않을 거다.
"후우... 그래도."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또각, 또각.
애써 담배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로라를 품속에 안은 채 골목길을 조심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끄으...."
바닥에 누워 있는 궁수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인데.
"내 말 들려?"
뭐, 저놈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마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똑같은 침략자다.
솔직히 살인에 대한 각오만 서 있었다면, 진작에 저들은 총알구멍이 뚫려 주검이 되어 있었을 거고.
"쿨럭. 내... 내 와이프. 쿨럭."
칙, 치익.
"쓰으읍. 병신도 아니고...."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 줬다.
"내가 나 죽이겠다고 온 사람을 살려줄 정도의 위인은 아니야. 쯧, 그래도 담 배 한 대는 피고 가라."
죽기 전에 담 배 한 대.
칼에 찔려 죽어가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언젠가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쓰읍.... 쿨럭, 쿨럭. 퉤엣."
비흡연잔가?
한 모금 빨자마자 기침을 하며 담배를 뱉어 버린 궁수.
"나, 죽여. 대신 와이프...."
그러고는 의미 모를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 쿨럭, 죽여.... 크으윽. 대신, 와이프."
나, 죽여, 대신, 와이프.
뭐라는 거야?
"널 죽이고 대신 네 와이프를 구해라?"
"그, 끄으…. 그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도 나의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나를 키워준 할머니가 말년에 발음이 좀 많이 샜었거든.
"내가 왜?"
"주, 죽여.... 포, 포인트."
응?
"사람을 죽이면 포인트를 준다?"
"그, 그리고, 쿨럭. 회, 회…복약."
"회복약이랑?"
"그, 그래."
씨발.
괜히 살려 보냈네.
손에 든 철봉.
허리에 찬 도끼.
허나, 나는 아직도 사람을 죽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도 저걸 두고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아픈 로라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한시가 바쁜 상황이다.
또각, 또각.
살인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고정 포탑으로 놈을 죽이고 싶긴 하다만―
『냐아...』
점점 작아지는 로라의 목소리 때문에 돌아가기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다.
부우웅-!
살인에 대한 정신적 충격을 최대한 피하고자 최대한 철봉의 끝을 붙잡고 내리쳤다.
파직-
눈을 질끈 감은 채 내리친 봉.
봉의 끝에서 무언가가 으깨지는 감각이 느껴진다.
덜덜덜덜-
생각보다 정신적인 충격은 적었으나 내 손만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수천의 고블린을 통해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적응해서 그런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망이나 다를 바 없던 궁수의 상태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다.
손은 떨리지만, 머리는 차분하다.
「첫 살인. +1,500p」
「인벤토리에 보상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보상이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내 정신은 망가지지 않았다.
"씨발. 세상 참 좆같아졌네."
『냐아아』
그새 조금 회복됐는지, 어느새 품속에서 나온 로라가 내 손을 핥아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래, 아빠가 너 보고 산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를 위로해주는 로라 덕분에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이 작은 생명이 어찌나 위안이 되는지.
『냐...』
2,000마리의 고블린과의 혈투.
살인에 대한 복잡한 생각.
살려보낸 '행복 빌라' 부부에 대한 걱정.
그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고로로로로롱-』
로라가 골골쏭을 부르며 내 손바닥 위에서 눈을 감는다.
"그래...."
내가 무너지면 안 되지.
이 작은 것과 살아남으려면, 당장 강해지는 것부터 생각해야 해.
「이준(Lv.3) 32세 / 보유 포인트: 32,30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3」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골목길을 나가기 전,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상태창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어느새 3으로 올라있는 레벨.
그리고 2,000마리나 되는 고블린을 잡은 덕분에 포인트도 엄청나게 쌓였다.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모든 스킬을 점검했는데, 추가된 것들이 몇 가지 생겨나 있었다.
[방어 설비 건설]
[고정 포탑: 100p, 1/2]
우선 설치 가능한 고정 포탑의 수가 늘었다.
[주거지 건설]
[1x1m방: 2,000p]
[바닥 건설: 50p]
[저급한 화장실: 1,500p]
그다음으로 변한 건 주거지 개선이다.
화장실을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1x1m를 기준으로 방을 지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게임과 똑같다면, 1x1m 바닥의 사각형 공간을 기준으로 내가 지정하는 구역이 하나의 '방'으로 취급된다.
당장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여도, 나중에 추가될 전력 설비나 냉난방 시스템을 위해서는 이 작업이 필수로 요구된다.
[요새화]
[이동식 요새: 5,500p]
여기에 추가된 것은 없다만, 이동식 요새를 먼저 업그레이드할 생각이다.
뭐든 기동성은 중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고양이 관리]
[키튼 사료 + 고양이 전용 우유 50p]
[긴급 회복약 5,000p]
[산책용 목걸이 5,500p]
더럽게 비싼데, 뭔가 의미 있어 보이는 아이템이 하나와 당장 로라에게 쓸 수 있는 회복 아이템이 생겨 있었다.
『냐...』
아까보다는 상태가 좋아졌어도 여전히 로라의 몸이 뜨거웠기에 재빨리 긴급 회복 키트를 구매했다.
파앗-!
인벤토리에서 있는 긴급 회복약을 꺼냈더니, 조그마한 알약이 하나 나왔다.
"로라야, 약 먹자."
힘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단박에 로라가 알약을 받아먹었고―
우우웅-!
로라가 푸른빛에 휩싸이고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거칠었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고,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냐아아!!』
자기는 이제 괜찮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는지 큰 소리로 울어주는 로라.
당장 위기는 넘겼어도 내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젠장, 고칠 거면 다 고쳐주든가.
외상.
허피스로 인해 뭉개진 코와 찡그리게 뜬 눈만은 고쳐지지 않았다.
이러면 수의사를 만나기는 해야겠네.
열은 내려도 외상은 못 고치는 주제에 뭔놈에 회복약인지.
그래도 로라가 호전되면서 시간은 좀 벌었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골목길을 나가 수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단단히 정비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또각, 또각.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서 상태창을 살폈다.
우선은 [고양이 관리]탭에 있는 목걸이부터 확인했다.
'산책용 목걸이'라니....
우리 로라보고 산책냥이가 되라는 말인가?
아니, 생후 1개월짜리 고양이가 산책냥이가 될 수는 있는 건가?
『냐아아!!』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손바닥 위에 있던 로라가 울음소리를 냈다.
"좋다고...?"
우리 로라는 천재다.
저 모습을 보면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냐아-』
누가봐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말하는 모양새니까....
참고로 산책냥이는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고양이를 뜻하는 말이고, 외출냥이는 자발적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고양이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그래도 너는 너무 어리니까.... 외출냥이는 허락할 수 없다."
결코 외출냥이를 허락해줄 수 없다.
설령 그녀가 원하더라도.
아직 중성화도 안 했고, 1개월밖에 안 된 고양이가 외출냥이는 못하지 않겠냐 싶겠지만.
『냐아!』
저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모습을 보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안전을 위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휴우…."
외출냥이를 하지 않겠다는 로라의 확언을 받은 뒤에는 할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무너진 담 재건.
고정 포탑 한 대 추가.
치워둔 땅 일부에 바닥 건설.
방공호 옆에 '저급한 화장실' 건설.
로라의 '외출용 목걸이'는 나중에 구매할 예정이니.
당장 남은 일은 '이동식 요새'로 집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이동식 요새로 업그레이드 중...]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거대한 굉음과 함께 '내 집의 대지면적'만큼의 땅이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0. 변화 (1)
쿠구구구구궁-!!
『냐아아아!!!』
"지, 진정해! 로라."
지진과 같은 땅울림이 일며 집이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쿠구구궁-!
푸스스스―
미처 치우지 못한 담장 외곽의 잔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의 집은 계속해서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쿠구궁-!
한 10m쯤 떠올랐을까?
구구궁!
흔들리던 땅이 멈추기 시작하고―
위이이이잉-!
이상한 기계음과 함께 푸른색 큐브들이 허공에 떠오른다.
우우웅-
우웅-
큐브들이 집의 현관이 있던 자리에 모여들고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것이 끝났을 때 집의 현관이 있던 장소에는 조종대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허, 이게 뭔...."
'아포칼립스 속 집사' 게임 속에서는 업그레이드를 하면 '집 자체'가 움직이고 끝이었는데, 현실에서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기기기긱―
공중에 뜬 내 집은 이상한 기계음을 내는 거미 다리 같은 것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로 집을 움직이라고?"
무슨 자동차 기어봉보다 작은 막대기 하나가 현관에 솟아나 있었다.
머릿속에 흘러 들어온 사용법에 따르면, 저것은 분명 조종 스틱이다.
허나, 15cm도 안 되어 보이는 작고 얇은 막대기가 대지면적 100평의 땅을 움직인다는 것에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요.
조종대 뒤에는 현관을 바라보게 앉을 수 있는 각도로 의자도 하나 생겨 있었기에 나는 그곳에 앉았다.
누르면 하강.
한 번 더 누르면 상승.
전후좌우는 이 스틱을 밀면 되는 거고.
띠딕-
「요새의 이동을 위해서는 전력을 필요로 합니다.」
띠딕-
「요새의 이동을 위해서는 전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게 뭔…."
어째 이상하더라니....
게임과 뒤죽박죽으로 섞인 순서 때문에 어이가 없다 못해 미쳐버릴 지경이다.
'아속집'에서는 '집'의 업글이 다 끝나야 '이동식 요새'와 관련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아니었다.
허나, 내부 기믹이나 작동 방식에 대한 것들은 게임과 똑같이 적용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상하 이동만은 공짜로 된다니,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것도 전력을 요구했다면, 나는 이제부터 10m 높이를 걸어 내려가야 할 테니까.
쿠구구구구궁-!
위에서 보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내 집을 지탱하는 거미다리는 윗부분의 넓은 다리 속으로 아랫부분이 들어가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 같다.
쿠구궁-!
쿠궁-!
로라도 금세 적응됐는지, 내려갈 때는 나와 같이 아래를 구경하고 있었다.
겁도 없이 거미다리에 올라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조금 걱정이다만.
"로라, 조심! 떨어질라."
타앗-!
『캬아오!!』
마치 쓸데없는 걱정이란 듯이, 로라가 거친 울음소리를 한 번 내고는 곧장 담장 위로 올라왔다.
말이라도 잘 들어주니 다행이지.
쿵-!
집이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동이 불가능하단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다음 일을 할 차례.
'미니맵.'
파앗-!
몬스터 웨이브 2의 보상인 미니맵.
그것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중앙에 있는 나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그려진 지도.
또각, 또각.
조금 돌아다녀 보니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지도가 바뀌는 방식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뭐지?"
이상한 검은 점이 집 주변에 수두룩하게 있었다.
"무너진 빌라. 무너진 주택. 무너진 아파트."
점들이 뭉친 지점들.
아마, 시체가 아닐까 싶다.
저 건너편 아파트 자리가 새까만 걸 보면.
"진짜 세상이 망하긴 했구나."
내가 직접적인 죽음을 목도한 것은 '옆 빌라 아저씨'과 '허접한 궁수' 둘뿐이다.
허나, 미니맵은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죽음을 빼곡한 검은 점으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또각, 또각.
내가 겪은 대화재 또한 저런 점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멸망한 세상에서 청승맞게 감상에 젖어 있는 것도 사치라면 사치지.
'인벤토리.'
세상이 어떻든지, 당장은 내가 할 일부터 끝내두는 게 맞다.
내게는 지켜야할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
「조잡한 강화권 x 1」
「아이템을 강화해 준다. 성공 확률 100%」
「수리권 x 50」
「아이템 손상을 수리해준다.」
「하급 포션 x 10」
「상처를 회복시켜준다.」
장비 관련 아이템들은 몬스터 웨이브 2의 보상일 것이고, 하급 포션은 '살인'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하급 포션이 얼마나 대단한 성능을 지녔을지는 모르겠다마는....
"옘별."
살인의 대가가 '상처의 회복 10회 + 1,500p'임을 생각해본다면, 세상은 지금 이상으로 끔찍하게 변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스템' 같은 놈이 인간들에게 마냥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남들보다 수십 배는 많은 몬스터들을 나한테 몰아주는 것도 그렇고.
고블린 2,000마리로도 진짜 뒈지기 직전까지 갔는데, 몬스터 웨이브 3은 어떨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아직까지 '몬스터 웨이브 3'이라는 메시지가 없어도 느낌상 100%로 3은 나타날 것이다.
"에휴, 생각만 해서 뭐하냐."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는 행동을 통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우웅!
언제나 행동이 생각을 이기는 법이니까.
「조잡한 집사복 세트」
「방어력 +20, 집사 능력을 더 강화한다.」
그래서 강화권을 집사복에 가져다 대었고 그 직후 푸른빛이 내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우웅!
빛무리가 끝난 뒤 집사복은 새것처럼 변했고 그 성능과 외견상의 디테일도 바뀌어 있었다.
민무늬 플라스틱 단추들은 죄다 은으로 도금된 단추로 바뀌었고, 그 위에는 작은 고양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빽구두 위에도 아이보리색 고양이 자수가 박혀 있었고.
젠장, 이러면 더 이상해지는데....
타앗-!
『냐아!』
그래도 유용한 것도 두 개가 있었으니.
첫번째는 오른쪽 어깨에 안장 같은 것이 생긴 건데, 그 용도는 로라가 올라와 앉음으로써 확인되었다.
이로써 로라를 데리고 외출하는 것도 안심이 된다.
두 번째는 허리에 다양한 도구를 꽂을 수 있는 넓은 벨트가 생긴 것이다.
안 그래도 이런 벨트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굉장히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거기다 방어력 +20에 집사의 능력을 '더' 강화한다고 설명이 변하기까지 했으니.
조금 창피할 수도 있는 고양이 문양들을 감안해도 그 성능만큼은 뛰어나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이준(Lv.3) 32세 / 보유 포인트: 12,805p」
「클래스: 집사 / 능력치: 3」
「스킬: [방어 설비 건설], [주거지 건설], [요새화], [고양이 관리]」
로라 목걸이.
포인트는 충분하다.
[산책용 목걸이 5,500p]
파앗-!
목걸이를 구매하자 시스템 화면 위로 순백색의 얇은 가죽 목걸이가 튀어나왔다.
로라의 목걸이는 고급스러운 가죽을 베이스로 깔끔한 무지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가 명품 같달까?
「산책용 목걸이」
「1일 1회 주인과 지정 장소로 텔레포트한다. 소지한 아이템 및 장비는 그대로 유지된다. 신체 접촉 중인 물건과 함께 이동한다.」
그리고 그 목걸이는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지정장소로 텔포라니.
어떤 면에서 보면 '고정 포탑'보다 저게 더 사기적인 성능을 지니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야....
작정하고 쓴다면 별짓을 다 할 수 있으니까.
공격용으로 쓴다면, '행복 빌라'의 빌런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튈 수 있다.
파밍용으로 쓴다면, 말도 안 되게 무거운 것들도 손만 댄다면 지정 장소로 가지고 올 수 있다.
그 외에도 사용법은 무궁무진할테니....
"흐음."
새 옷도 생긴 김에 몸도 씻고 싶어져서 방공호 옆에 건설된 '저급한 샤워실'에 들어가서 생각을 마저 이어 나갔다.
끼이이익-
낡은 수도꼭지를 돌리자 어중간하게 미지근한 물이 내 머리를 적신다.
쏴아아아아아-
이쯤 되니 드는 생각이 몇 개 있다.
1. 과연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내 추측으로는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는 나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례가 나 하나뿐이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마는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기준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강아지 보호', '고래 보호' 같은 것에 앞장 선 사람들이 강해져 있다거나 할 수도 있으니.
2. 세상이 이렇게 멸망한 이유가 뭘까?
몬스터 웨이브 1과 2를 클리어하면 주어지는 보상.
그것은 지구인들에게 '클래스 선택'이나 '미니맵' 개방과 같은 능력을 주어 마치 게임과 같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3. 진짜 정부와 군대는 망했을까?
내 감은 대한민국은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핵폭탄' 같은 무기를 지닌 강대국들도 같을지는 잘 모르겠다.
4. 원전과 각종 설비들이 폭파하진 않을까?
세상이 폭삭 무너질 정도의 대지진을 겪었건만, 3일이 지났음에도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거나 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지구의 신' 같은 정체불명의 힘이 지구인들을 지켜주고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을 망하게 한 '시스템'을 견제하고 있다거나.
뭐, 대부분이 다 추측일 뿐.
끼이익-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접고자 샤워기를 끄고 대충 몸을 털어 말렸다.
그러고는 화장실 앞에 곱게 개뒀던 '조잡한 집사복'을 다시 입었다.
생각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특히 위급상황일수록 더.
『냐아아!!』
"그래, 아빠랑 같이 산책가자."
차악-
딱 맞게 로라의 목에 감기는 목걸이.
『냐아!』
수의사를 만나기 위해서 어깨에 달린 안장에 로라를 태우고 무장을 단단히 챙긴 뒤에 집을 나섰다.
또각, 또각.
골목길 끄트머리에 핏자국과 조각난 사람의 조각들이 보인다.
아까 죽은 궁수의 시체다.
칙, 치익-
장례는 못 치러줘도 짧게나마 담배를 태우며 애도의 마음을 가졌다.
"쓰으읍."
앞으로는 질리게 볼 타인의 죽음.
허나, 처음만큼은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후우우...."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지는 가슴 속의 무거움.
계속해서 '살인'에 대한 각오를 다져왔어도 쉽지 않았는데, 궁수를 애도하면서 무언가 내 마음이 변한 듯하다.
"그래. 이 정도 고민했으면 됐지."
또각, 또각.
저걸 치우기에는 이미 집 앞에 시체들이 너무 많다.
고블린, 좀비, 그리고 사람 하나.
앞으로 얼마나 늘어갈지는 몰라도, 이제는 익숙해져야만 한다. 그래야 내 생존에 유리할 테니까.
또각.
골목길을 나서기 전에 벽 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주위를 살폈다.
'행복 빌라'의 트롤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인데.
"꺄아아아악!!!"
하필 그 타이밍에 로라의 전문의 강소현을 마주쳐버렸다.
것도, 내가 머리만 내미는 순간에.
"다, 다짜고짜 머리부터 들이밀면 어떡해요!! 사람 놀라게시리."
놀란 것도 놀란 거다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분명, 내가 병원으로 간다고 했을 텐데.
"아, 죄송합니다.... 좀 신중하게 확인한다고 그런 거라."
일단 예민한 티는 내지 않는다.
그리고 젠틀한 태도를 유지한다.
"하아, 진짜 여기에만 박혀 있으니 주변 상황을 하나도 모르죠. 이럴 줄 알고 제가 바로 온 거예요."
키워드 몇 개가 뇌리에 박힌다.
주변 상황이 뭔가 변했나?
군부대를 부수던 괴물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는데, 그걸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무슨 일이 있나요?"
추측만으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너무도 적기에 다이렉트로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 대답이 내 상상을 뛰어 넘었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 답변은 '행복 빌라 빌런들'이나 '사람을 죽이면 보상을 준대요.'와 같은 것들이었는데―
"군대가 있어요!"
그녀의 답변은 보다 더 고차원적인 정보를 담고 있었다.
군대가 남아 있다니....
"저, 정규군은 아니어도. 군인들이 있어요."
신뢰성이 좀 떨어지고 있지만.
"정규군이 아닌 군대가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 그...."
"그?"
"휴가 나온 군인들이랑 용산 군부대 소속 군인들이 초등학교를 전담해서―"
'군대가 있다'는 말로 시작한 그녀의 발언은 '군대 비스끄므리'한 것까지 떨어졌고, 이윽고 휴가 나오고 집에서 쉬던 몇몇 군인들까지 전락해버렸다.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든 수준이라 단박에 말을 끊고 그녀를 꾸짖었다.
"거, 진료는 잘 보면서 정보 전달에는 문제가 참 많으신데. 휴가 나온 군인 몇 명이 군대입니까?"
"아, 아니....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서 이태 초등학교는 제대로 잘 통제되고 있습니까?"
"그, 그건 아닌데...."
"그런데 무슨 군대 타령을 해요."
'정부와 군대는 망했다.'라는 일전의 내 발언을 생각해서 저런 소리를 했겠지.
이런 말장난으로 뭘 이겨 먹겠다고....
저벅-
강소현, 그녀는 담력도 장난이 아니었는데 자존심도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미안해요. 내가 좀 오바했네요."
이걸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걸 보면.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자가 '자존심'으로는 정점을 찍을 수 있다는데, 그녀는 그런 부류인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나도 질 수 없어 대인배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아, 그… 옷이 좀 많이 바뀌셨네요? 취향이 참, 그 뭐랄까? 취존하긴 하는데, 세상이 이 꼴인데도.... 푸흡."
그녀와 달리 나는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지만.
"하아, 그냥 넘어가줍시다. 좀."
이렇게 짜증이 올라오는 걸 보면, 대인배는 되지 못할 팔잔가 보다.
"푸흐흡. 알겠어요. 이준 씨, 혹시 행복 빌라 사람들 보셨어요?"
웃음기가 빠지지 않은 그녀의 질문.
허나, 나는 웃음에 '웃'자도 꺼낼 수 없이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요? 그 새끼들 어디 갔어요?"
"아, 애들 데리고 질 나쁜 사람들이랑 같이 가는 것 같던데...."
몬스터 웨이브 2가 끝난지 약 12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질 나쁜 사람들'을 언제 또 만났단 말인가?
혹시, 강소현 그녀가 첩자는 아닐까?
같은 고민을 알았는지, 그녀가 먼저 변명을 시작했다.
"아, 제가 얻은 특수 스킬 때문에 알게 된 거예요. 해당 장소에서 일어난 가장 최근 사건을 보여주는 건데...."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은 그야말로 나를 '고장'나게 만들어 버렸다.
"말보단 직접 봐야 믿겠죠? 사실 저도 써보기 전까지는 안 믿었어요. 여기서 이걸 쓰면...."
파앗-!
그녀의 앞에 작은 화면이 떠오른다.
"이게, 다른 사람한테 공유하는 것도 설정할 수 있는데.... 와, 집사복 입고 담배 피시는 거 장난 아니네요. 진짜 컨셉충의 극한을 보는 것 같달까?"
영상 속에서는 집사복을 입은 채 골목길 걷는 내가 나오고 있었다.
"소리가 안 들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의 상황을 보여주는… 어? 이거 행복 빌라 집단에 있던 남자랑 이준 씨 아니에요? 저분은 좀 다친 것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어어…?"
주춤-
길쭉한 철봉의 끝을 붙잡고 궁수의 머리통을 내리찍는 내가 나와 있었다.
#11. 변화 (2)
나를 만나자마자 특수 스킬을 얻었다며 자랑을 시작한 강소현 수의사.
외부 상황에 대한 정보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지닌 나이기에 '특수 스킬'이라는 단어가 썩 반갑게 느껴졌었다.
"...저, 저 사람은 행복 빌라에 있던 사람인데."
하지만 그 스킬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또각.
"아니, 그게―"
자칫하면 로라의 주치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해주고자 한 걸음 다가갔을 뿐인데.
콰당-!
강소현은 그런 나를 보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 버렸다.
부웅-!!
"오, 오지 마!!"
부웅-!
그러고는 허공에 메이스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아...."
부웅-!
바닥에 누워서 휘두르는 메이스에 맞을 리가 있나.
또각, 또각.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더니.
"-이이이익!!!"
그녀가 분하다는 듯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메이스를 내게 집어 던진다.
쿵-!
거, 좀 안 풀린다고 냅다 무기를 버리다니.
어떻게 살아남으려 그러는지....
칙, 치익-
"쓰으읍, 저기요. 강소현 씨."
"-이이익!!!"
"이봐요."
씨익, 씨익.
거친 숨을 내쉬며 악을 쓰더니, 뒤로 넘어진 상태 그대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강소현.
"후우… 아니, 진짜 오해입니다. 침착하게 설명 좀 들어 보시죠."
『냐아아!!』
로라가 강소현을 바라보며 내 설득에 힘을 실어 준다.
그리고....
"하아, 하아. 뒤, 뒤로 물러나세요. 얘기는 그 뒤에."
또각.
한 발 뒤로.
스윽-
두 손은 하늘 위로.
아포칼립스가 온 세상에서 여자를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