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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막내. 이제 들어오냐?"

일 없는 한량처럼(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관 앞에 죽치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엔리케가 나를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거참, 남는 시간에 운동 좀 하시라니까... 조장 지난번에 뛰는 거 보니까 숨차서 엄청 헉헉거리더만."

"야, 솔직히 내가 뛸 일이 뭐가 있다고... 별로 날쌔지도 않은 다리 놀려서 뛸 바엔 화살 하나 더 날리는 게 낫지. 안 그러냐?"

"아이고, 그러다가 언제 한번 크게 실수한다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태평합니까?"

내 입에서 쏟아지는 잔소리에 엔리케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다.

"어허! 이 자식이 하늘 같은 선배한테 어디 건방지게!"

"걱정되어서 그러죠, 걱정!"

"야, 잔소리는 그쯤 해라. 네가 뭔 우리 아빠냐?"

"아빠면 이미 엉덩이 걷어차서 운동 시켰지. 어휴..."

"됐고, 그 얘기나 좀 해봐.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평소 곁눈질로도 안보던 성당을 간 건데? 응? 꿀단지라도 숨겨 놨냐?"

"왜요, 내가 뭐 못 갈 곳이라도 갔어요? 저도 전능하신 주 아르닌의 어린 자식입니다!"

"허..."

내 입에서 나온 '전능하신 주 아르닌의 어린 자식'이란 표현에 말문이 막힌 엔리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마랑 친구 먹자고 해도 그러려니 할 놈의 입에서 나이 먹은 사제나 할 법한 말이 나오다니?

"허, 시발. 살다 보니 내가 별소릴 다 듣네. 뭐? 전능하신 아르닌? 너 뭐 잘못 먹었냐?"

"휴우, 저도 내년이면 성년 아닙니까? 어른 소리 들을 나이 되니 마음이 약해져서 믿음에 기대고 싶어지나 봅니다."

"아니 미친... 야 인마! 너 어디 아프냐? 어? 자꾸 이상한 소릴 해? 야!"

어이없어하는 엔리케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여관으로 들어온 나는 다른 선배들과 어울려 이른 저녁을 먹었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피곤해 먼저 쉬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향했다.

딸깍-

"후우..."

방문을 닫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품에 들어 있는 물건 때문에 심장이 쿵쿵 뛰고 긴장이 가시질 않은 지난 몇 시간이었다.

생각 같아선 바로 내 방으로 들어와 물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직행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일부러 동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들어왔다.

"... 뭔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주인 없는 물건 하나 주워서 가져온 건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냐... 읏차!"

품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내 손에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청동 물잔, 구원의 성배가 들려 나온다.

처음 건져냈을 땐 진흙과 이끼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더럽기 그지없었지만, 연못물에 깨끗이 닦아내어 가져왔기에 지금은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색깔은 예쁘네. 푸르스름한 게..."

처음 만들었을 땐 구릿빛이었을 이 자그마한 물잔.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청동이 산화되어 지금의 청록색(靑綠色)이 된 것이다.

"후우... 그럼 시작해볼까?"

첫 번째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지닌 힘을 흡수할 땐 검을 들어 직접 내 심장을 찔러야 했다.

직접 만들었던 괴이한 설정에 내가 내 발등을 찍는, 아니 심장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일이 없지."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의 힘을 흡수하는 방법은 아주 평범했다.

물이 되었건 술이 되었건, 마실 수 있는 무언가를 성배에 따른 후 그걸 마시면 끝이다.

나와 달리 변태적 성향(?)이 없었던 후배 개발자가 만든 설정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후배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 내가 다음 생애에서라도 만나면 꼭 은혜 갚으마. 고맙다, 윤석아."

이제 얼굴도 가물거리는 지난 생의 인연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미리 준비해둔 가죽 물통 속의 물을 바닥에 내려둔 구원의 성배에 따랐다.

쪼르르륵...

성배의 크기가 작아서 기껏해야 두세 모금 마실 정도의 물밖에 채울 수가 없었지만, 어차피 목이 말라서 하는 일이 아니니 상관은 없었다.

"오? 뭐야?"

물을 따르자마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투명했던 물 색깔이 점점 금빛으로 물들었던 것!

처음엔 지난 생에 종종 보았던 금가루 넣은 비싼 술 같은 건가 생각했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예 달랐다.

"... 물 자체가 빛을 뿜어내는데?"

말 그대로였다.

외부의 빛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구원의 성배에 담긴 물 자체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분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양초를 켜지 않아 어두웠던 방 안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어우씨, 이러다가 이단심문관한테 잡혀가겠네!"

밖은 점차 어둑해져 가는 이 시간에, 갑자기 방안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온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광경에 괜한 일에 휘말릴까 싶어 나는 황급히 창문의 커텐을 치고, 짐가방을 가져다 출입문 틈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몸을 이용해 성배의 빛을 가렸다.

이 정도면 밖으로 빛이 흘러나가진 않으리라.

"아니지...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그냥 마셔버리면 되잖아!

눈부시게 터져 나오는 이 빛을 잠재울 가장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나는 재빨리 성배를 손에 쥐었다.

그사이 성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욱 강해져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우, 눈부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꿀꺽, 꿀꺽!

나는 성배에 담겨 있던 물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

그 순간, 목구멍부터 시작되어 온몸에서 느껴지는 믿을 수 없는 청량감!

목 막히는 음식을 먹다 사이다를 마신 듯한 기분?

오랜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농구 한 게임을 뛴 뒤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그런 것 '따위'와 지금의 이 기분을 비교하는 건 너무 큰 실례다.

기분이 너무 좋아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입과 코가 뻥 뚫리며, 머릿속에 끊임없이 폭죽이 터지는 듯한 이 기분은 마치...

'... 이게, 섹스지!'

너무 좋아 눈깔(?)이 뒤집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두 번째 히든 피스 (4)

"으으음..."

눈을 떴다.

캄캄한 어둠 속, 나무로 만든 여관방 천장이 보인다.

등이 딱딱한 걸 보니 침대가 아니고 바닥에서 그냥 널브러져 잠이 든 것 같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러고 바닥에서 잤더라?

"아, 맞다."

그래, 생각났다.

에셀바흐 대성당 정원 연못 바닥을 뒤져 찾아온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

그 힘을 흡수하기 위해 성배에 따른 물을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밖이 시끌시끌한 거 보니 아침 됐나 보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걸 보니 동료들이 한창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없다.

내가 연못 바닥을 열심히 뒤져서 찾아온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사라졌다.

"...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첫 번째 히든 피스였던 '검성의 낡은 롱소드'도 내가 힘을 흡수한 이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구원의 성배 역시 마찬가지인 걸 보니, 이렇게 힘을 흡수하면 해당 히든 피스 아이템은 사라지는 듯했다.

"스으읍... 하아아!"

눈을 감고 누운 상태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본다.

"후우우우..."

다시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나의 몸 상태를 차분하게 되짚었다.

"일단 아픈 곳은 없는 것 같고..."

혹시 모르니 누운 상태에서 팔다리를 차례로 들어 올려보고, 어설프게 기억나는 요가 자세를 잡아보며 통증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 뭔데 이거."

아프긴커녕 온몸에서 힘이 펄펄 넘쳐나고 있었다!

"허... 구원의 성배. 이거 완전 보약이네, 보약."

기이할 정도로 좋은 몸 상태였다.

아마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가장 좋은 몸 상태이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숙면도 이런 숙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자고 일어난 날의 컨디션이라면 조금 이해가 쉬울까?

"... 아니지, 이건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지난 2년간 용병 일을 하며 꽤 많이 다쳤다.

칼에도 찔려봤고, 화살도 맞아보고, 몬스터 토벌 의뢰에 나갔다가 코볼트에게 물려도 보았다.

언덕에서 발을 헛디뎌 구른 적도 있고, 매복해있던 나무에서 떨어진 적도 있으며, 몰려드는 적들을 피해 건물 2층에서 뛰어내리는 경험도 해봤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수라장을 겪으면서도 장애가 남거나 생명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심한 부상을 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후유증은 많이 남았다.

몸 전체에 크고 작은 상처가 수두룩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한번 부러졌다가 붙었던 손목이 시큰거렸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부러졌던 뼈가 금세 다시 붙었지만 꽤나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언덕에서 구를 때 삐끗했던 허리도 자주 쑤시고, 조금이라도 무리한 날이면 등이며 어깨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 고사하고... 아예 새로 태어난 기분인데?"

내 느낌만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로 변화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저 누워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는 동작 하나를 한 것뿐인데도 벌써 변화가 느껴졌다.

몸을 일으킬 때의 균형감각, 굽혔던 다리를 쭉 펼 때 느껴지는 허벅지 근육의 힘, 그리고...

"... 뭐야, 왜 다 보여?"

지금 내 방은 한밤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어두웠다.

전날 구원의 성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고 방문 틈을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불빛 하나 없는 이 컴컴한 방 안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 보인다.

마치 영화나 게임 속에 나오는 특수부대의 야간투시경을 쓰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심지어 야간투시경의 시야는 진한 녹색, 혹은 푸른색의 빛깔로 보이는데, 나는 그런 게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내 본연의 시야 그 자체였다.

"아, 아니... 이게 왜 보여? 어? 왜 이러는 건데? 나 올빼미 된 거야?"

안 보여서 문제인 게 아니라 보여서 문제인 상황.

그렇게 한동안 어둠 아닌 어둠 속에서 눈을 껌벅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일단 나가보자."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섰다.

"...!"

이번에도 놀랐다.

왜냐고?

"왜... 눈이 안 부셔?"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갑자기 나온 상황이었다.

급격히 진행된 명(明)순응 과정에서 당연히 눈이 시리고 아파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뿐인가, 시력 자체도 월등히 좋아져서 여관 바닥과 벽면에 달라붙은 먼지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보였다.

"이게 무슨... 허!"

이래저래 당황스러웠지만, 나쁜 상황은 아니었으니 결과적으론 기뻐할 일이었다.

"... 이, 일단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왜인지, 다른 날보다 더욱 허기가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

"어이, 막내. 잘 잤냐?"

툭, 누군가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테이블 옆자리에 앉는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하니 우리들의 대장, 겔베르트였다.

"엇, 대장.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지. 너무 잘 자서 탈이 날 지경이다. 후우... 넌 피곤해서 어제 일찍 자겠다더니, 몸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대장, 지금 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고요!

"다행이네. 갑자기 몸 안 좋다고 해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던 겔베르트가 문득 질문을 던진다.

"근데 막내야."

"예, 대장."

"너... 원래 이렇게 피부가 좋았냐?"

"... 예?"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 아저씨가 갑자기 뭔 피부 타령?

"아니... 너 원래 잘 생긴 놈인 건 알았는데, 오늘은 좀 정도가 과한데? 거짓말 조금 보태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한다.

"어, 그러고 보니 막내 얼굴이 느낌이 좀 다른데? 피부가 되게 매끈해진 것 같아!"

"오오, 완전 도자기 피부인데?"

"데미언 이 자식 피부는 원래 좋았...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와, 피부 진짜 살벌하네! 파리가 앉았다가 미끄러지겠다 인마!"

"지금 보니 막내 이 자식 눈썹도 엄청 진해지지 않았냐? 봐봐! 내 말 맞지?"

"어제 잠 잘 잤다더니, 진짜 잘 잤나 보네. 얼굴 이목구비 자체가 좀 진해진 것 같아. 뭐지? 붓기가 빠졌나?"

"턱선도 엄청 날렵하... 아, 여긴 원래 이랬나?"

시커먼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내 얼굴을 놓고 품평하기 시작한다.

"아니, 다들 미쳤나?! 왜 이래! 아잇, 만지지 마요! 손 치우라고오!!!"

여자들이 이렇게 달려들어도 질색할 판국인데 땀내 나는 사내들이 이러니 정말이지 곤욕스러웠다.

하지만, 나의 고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응...? 잠깐, 이건 뭐... 야, 데미언! 너 인마 일어나봐! 빨리!"

"예? 아이, 저 아직 밥도 다 못 먹었는데..."

"잔말 말고 새끼야! 빨리 일어나봐, 빨리!"

갑자기 내 뒤에서 달려들더니만 자리에서 일어나라며 닦달하는 엔리케.

'하아, 이 양반은 또 왜 이러는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 같은 선배의 말을 앉은 채로 뭉갤 수는 없는 일.

삐죽 튀어나온 입술로 씨근덕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헐, 맞네. 이 새끼... 너 이거 뭐냐?"

"...?"

앞뒤 없이 질문을 던지는 엔리케의 얼굴을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데...

어라?

'응? 뭔가 이상한데?'

어떤 점이 이상하냐고?

내가 늘 바라보던 엔리케의 모습과 지금 바라보는 모습이 묘하게 달랐던 것!

'... 대체 뭐가 변한 거지? 시력이 좋아져서 그런가?'

내가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엔리케가 큰소리로 외쳤다.

"막내 너, 혹시 키 컸냐?"

"예?"

"딱 보니까 알겠는데? 너 원래 나보다 작았잖아! 근데 지금 보니까... 야, 아니다. 지금 나랑 키 대보자. 빨리!"

"예? 어어... 예."

엔리케의 말을 따라 우리는 서로 등을 지고 뒤통수를 맞댔다.

부모님 두 분이 키가 다 작으셔서 본인도 키가 작을 수밖에 없다는 엔리케.

아버지는 본 적도 없는 데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내력까진 모르겠고, 원체 못 먹고 자라서 키가 작은 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키가 더 작은 내가 용병대 내의 '최단신'을, 엔리케가 '그다음 단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 막내가 더 큰데?"

"와, 대박! 막내야 역전이다! 역전!!!"

"푸하하! 이제 조장이 꼴찌네요?"

그 순위가, 오늘부터 뒤집혀 버렸다.

"거의 뭐 새끼손톱만 한 차이이긴 한데, 막내가 더 커!"

"어디 봐. 오...! 그러네, 막내가 진짜 키가 컸나 봐!"

"확실히 막내가 어리긴 어리네. 아직도 이렇게 키가 크나?"

"에이, 당연하지! 이 자식 이제 열일곱이라고!"

"으아아아아! 이게 뭐야! 하룻밤 새에 키가 이렇게 큰다고? 이게 말이 돼? 나는? 나느은?!"

내가 키가 커지는 바람에 용병대 내 최단신의 명예(?)를 차지하게 된 엔리케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지만,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아이고, 조장! 억울해서 어떡해요? 푸흐흐!"

"아니, 애초에 키 한창 자라는 어린 애랑 비비려고 하는 게 말이 돼?"

"맞아. 막내가 무슨 자기처럼 삼십 대인 줄 아나?"

"추하다, 추해! 늙은이의 노욕!"

"추리케야, 엔하다! 푸하하!"

"너 이씨, 지금 뭐라고 했어? 너희들은 안 늙을 줄 아냐? 으아아아!"

억울해하는 엔리케의 모습을 보며 사방에서 동료들이 낄낄거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것은 엔리케 때문에 웃은 게 아니었다.

하룻밤 사이에 눈이 좋아지고, 키도 자랐다.

아직은 더 이것저것 실험해봐야겠지만, 높은 확률로 체력과 지구력, 유연성 같은 부분들도 성장했으리라.

'... 보약 따위가 아니라 무협지에 나오는 공청석유였네. 으하하하!'

이것이 바로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

신체강화(身體强化).

지난 몇 년간 나를 괴롭혔던 신체적 약점을 완전히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

며칠 후,

"그래, 다들 모였냐?"

이른 아침부터 대장 겔베르트의 부름을 받아 여관 1층 식당에 모인 푸른 방패의 대원들.

다들 무슨 이유로 모이게 되었는지 알고 있기에, 평소처럼 정신없이 떠들며 잡담하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

평소엔 나사 몇 개 빠진 놈들처럼 헛소리하느라 바쁜 놈들이었지만, '일' 앞에선 세상 진지한 게 푸른 방패의 사나이들이다.

"짐은 다 챙겼지?"

"예, 빠뜨리는 것 없도록 두 번, 세 번 확인 시켰습니다."

"좋네."

푸른 방패의 서열 2위, 부대장 메이슨의 보고를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하들의 얼굴을 쭉 둘러본다.

"뭐... 따로 할 말 있는 놈 있냐?"

"없습니다!"

"그래, 이 상황에 따로 할 말이 있을 놈이면 어젯밤에 튀었겠지. 안 그래?"

"아, 맞네! 그냥 어제 튈걸... 에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따라가야겠다! 시발!"

"푸흐흐!"

"아, 진짜... 엔리케 조장 똘끼는 대단해!"

동료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해가며 농담을 던지는 엔리케.

그 노력이 아주 의미 없지 않았는지, 대원들 모두 굳었던 얼굴을 풀며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물론, 그 중엔 나도 있었고.

"어이, 막내야."

"예, 대장."

"너 영지전에 정식으로 합류해서 싸우는 건 처음 아니냐? 기분 어때?"

겔베르트의 시선이 이번엔 나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 모든 대원들이 나를 바라본다.

우려와 기대, 걱정과 믿음의 감정이 골고루 드러나는 그들의 눈빛.

그 모든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완벽하게 달라진 육체만큼이나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저, 컨디션 최곱니다. 다들 기대하셔도 좋아요. 하하하!"

나이트 슬레이어 (1)

브렌도르프 영지 남부, 멘하우 요새 근방의 너른 평원.

수비 측인 브렌도르프 군 주둔지의 한 가운데 세워진 지휘 막사에 주요 지휘관들이 모여 있었다.

"후우... 현재 병력 상황은?"

회의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피곤한 얼굴로 병력 상황을 묻는 중년 사내.

그가 바로 브렌도르프의 영주인 라이너 클루게(Rainer Kluge) 남작이었다.

"뭘 기다리나? 빨리 보고하라니까!"

"예, 옛!"

브렌도르프 영지의 주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기사이기도 한 클루게 남작.

떡 벌어진 어깨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그는 영지의 명운을 건 전쟁에 최고 지휘관의 신분으로 직접 참전해 싸우고 있었다.

"예! 우리 영지군 병력이 삼백이십팔 명, 불러모은 용병이 이백삼십삼 명으로 도합 오백육십일 명입니다."

"잠깐, 용병이 이백삼십삼?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용병 삼백이 넘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이..."

격분한 남작의 반응에 병력 현황을 보고하던 군 지휘관이 식은땀을 흘린다.

"가, 간밤에 탈영한 병력이 있었습니다. 용병이란 놈들 자체가 워낙 근본이 없는지라..."

"탈영?"

"예, 그... 전투 중에 대장이 전사한 용병대 소속 인원들 몇 명이 그냥 도망쳐버린 것 같습니다."

"뭐? 몇 명? 지금 몇 명이라고 했나?"

콰앙!

격분한 남작이 주먹으로 회의 테이블을 후려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하룻밤 사이에 칠십이 넘는 병력이 사라지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걸 두고 '몇 명'이라고 표현을 해? 지금 정신이 나간 건가? 어?"

"제, 제가 말이 헛나왔습니다! 용서를..."

"애초에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을 데려다가 계약을 맺은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전쟁터에서 도망이라니! 지옥 불구덩이에 빠져 죽어도 모자랄 놈들이! 내 이놈들을 당장!!!"

주변에 앉아 있던 지휘관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격노한 영주를 달랬다.

"여, 영주님 고정하십시오!"

"어차피 용병 놈들이야 있어봤자 숫자 불리는 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갈 놈들이면, 있어봤자 도움이 안 되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영주님! 그깟 용병 놈들 있으나 없으나 큰 의미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겐 용맹한 브렌도르프 병력이 삼백 넘게 남아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끓어오른 남작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아, 우리 브렌도르프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단 말인가! 한낱 용병 놈들마저 우릴 업신여기는 꼴이라니!"

"..."

침통한 남작의 모습에 덩달아 고개를 떨구는 브렌도르프 군의 지휘관들.

벨가르트에게 전쟁의 주도권을 내어준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의 잘못인 것만 같아 뭐라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털썩-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남작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 지난 겨울 몬스터 토벌로 영지군을 너무 많이 잃은 게 패착이었어."

"영주님..."

"내가... 그때 내가 몬스터 토벌을 말리던 자네들의 의견을 들었어야 해. 영주랍시고 이 자리에 앉아서 어리석은 고집을 부린 게야."

어딘가 넋이 나간듯한 그의 목소리에 크게 놀란 지휘관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아닙니다, 영주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영지민들의 안전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몬스터를 토벌하고자 했던 그 마음을 저희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맞습니다, 영주님! 자책하지 마십시오!"

"잘못이라면 벨가르트 놈들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저희가 몬스터 토벌로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치고 들어오다니... 어찌 이리 간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라앉은 남작의 기분을 달래려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지휘관들.

침울했던 지휘 막사의 분위기가 다시금 달아오르던 그때,

"저, 영주님."

"... 무슨 일이냐."

지휘 막사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근위병 하나가 조심스럽게 상관들의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주둔지 경계를 서던 병사가 보고 드릴 일이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어찌합니까?"

"주둔지 경계병이?"

근위병이 전한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는 남작.

주둔지 경계에서 전할 소식은 보통 적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런 남작을 대신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휘관 하나가 입구 쪽으로 걸어나가며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인지 먼저 알아보고 정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영주님."

"음... 그렇게 하라."

"예, 영주님!"

잠시 후, 막사 안으로 돌아온 그가 남작에게 보고를 올린다.

우려했던 일은 아닌 듯, 조금은 밝은 목소리였다.

"영주님, 다름이 아니라... 웬 용병대 하나가 우리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우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 용병대가?"

"허어!"

"오오, 사실인가?"

용병대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회의실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반가움을 담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패색 짙은 전황에 기존 계약한 용병들은 물론 영지군 병사들까지 야반도주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 발로 여길 찾아와 브렌도르프 측에 합류하겠다는 용병대의 소식을 들었으니 놀랄 수밖에.

"... 그래. 찾아왔다는 용병대의 이름이 뭔가?"

침착한 얼굴로 찾아온 용병대의 이름을 묻는 남작.

그런 그에게, 병사의 보고를 전한 지휘관이 대답했다.

"예, 영주님. 본인들을 텔마르크에서 온 푸른 방패 용병대라고 소개했습니다!"

***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작 각하. 용병대 푸른 방패를 이끄는 겔베르트라고 합니다."

브렌도르프 군의 지휘 막사를 찾아온 겔베르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자세로 꿇어앉아 귀족에 대한 예를 표했다.

영주인 클루게 남작을 비롯해 브렌도르프 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기에, 출입을 허락받은 건 오로지 겔베르트 한 사람뿐이었다.

"그래,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네. 고개를 들게나."

"예, 각하."

'고귀한 푸른 피'라 불리는 귀족의 입장에서 천한 용병 놈을 만나 반가울 일이 뭐가 있겠냐 만은, 지금 겔베르트에게 건넨 남작의 말은 진심이 묻어 있었다.

이미 남작은 자신의 지휘 막사를 찾아온 이 사나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를 기다리며 여기 있는 케러 경에게 지난 얘기를 들었네. 두 사람은 구면이지?"

겔베르트가 슬쩍 시선을 돌려 남작의 곁에 서 있는 인물,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 그간의 고생을 짐작하게 했다.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건넨 겔베르트가 남작에게 대답한다.

"예, 각하. 케러 경을 멘하우 요새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 멘하우 요새가 고립되어 있을 때 텔마르크 영지의 의뢰를 받아 군수 물자를 전달해준 것이 푸른 방패라지?"

"예, 그렇습니다."

"자네들의 수고가 무색하게 요새는 벨가르트 놈들의 손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지난 일에 대한 감사의 인사는 해야겠지. 고생했고, 고마웠네."

"그저 용병으로서 맡은바 의뢰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존귀하신 분께서 그리 말씀해주실 정도의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지난 일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남작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겸양을 표하는 겔베르트.

그런 그의 모습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던 남작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자네는 보통의 용병대장과 좀 다르군?"

"..."

"마치 귀족의 예법을 배운 이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지금 용병대장이랑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기사랑 대화 중인지 헷갈릴 정도야."

"... 과찬이십니다."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담담하게 대답하는 겔베르트.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남작이 턱을 쓸어내린다.

"그래,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나 보군. 그 얘기는 우리가 좀 더 친분을 쌓은 뒤에 나눠보도록 하고..."

탁,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가볍게 내리치며 분위기를 바꾼 남작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용병이 전쟁터를 찾아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참전 계약을 원하나?"

"예, 그렇습니다.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울 영광을 얻길 바랍니다, 각하."

"우리로서도 환영할 일이지. 다만,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이야."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남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겔베르트에게 묻는다.

"... 케러 경이 참전 제안을 했을 땐 왜 거절했던 건가?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한데?"

겔베르트는 남작의 목소리에 담긴 서늘함을 읽었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사실상 '그때는 발 빼고 도망쳤던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온 거냐?'라는 의미가 담겨 있던 것.

대답에 따라 눈앞의 남작이 크게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겔베르트는 당황은커녕 가벼운 미소까지 띠며 대답했다.

"각하, 저희 푸른 방패는 질 싸움에 목을 걸지 않습니다."

"...!"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남작의 눈이 커진다.

그의 말이 지닌 의미는 명확했다.

'멘하우 요새는 지킬 수 없었지만, 이 전쟁은 결국 브렌도르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하하하하!"

그저 일개 용병의 의견일 뿐이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썩 마음에 들었던 남작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나 라이너 클루게는 푸른 방패 용병대가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서 싸울 것을 허락한다! 가장 위급한 순간 찾아와 우리 곁에 선 그대들의 헌신을 브렌도르프는 잊지 않을 것이다!"

구구절절 흡족한 남작의 말을 들으며, 겔베르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누가 감히 나와 맞서겠느냐!!!"

흑색의 갈기를 휘날리며 전장을 휘젓던 벨가르트의 기사, 브란트가 천둥 같은 외침을 토해냈다.

적의 기사를 붙잡아 두둑한 몸값을 벌 생각에 눈이 먼 브렌도르프 측 용병 몇 명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다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목이 날아간 직후의 상황이었다.

"또 저놈이냐! 이런 빌어먹을!"

멀리 언덕 위에서 전황을 살피던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이 발을 구르며 분노했다.

요한 브란트는 명실공히 벨가르트 영지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자.

그는 벨가르트 영주가 매우 아끼는 인물로 열흘 전 지원군과 함께 전장에 도착했는데, 그의 참전 이후부터 브렌도르프 군은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브란트의 검에 죽거나 다친 브렌도르프의 고위급 지휘관이 한둘이 아니었고, 심지어 그 중엔 기사도 둘씩이나 섞여 있었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 내 갑옷과 말을 끌고 와라, 어서!"

"여, 영주님! 참으십시오!"

"안 됩니다, 영주님! 부디 침착하십시오!"

"어찌 코볼트 잡는데 오우거 잡는 칼을 쓰려 하십니까! 절대 안 됩니다!"

성질을 못 이겨 뛰쳐나가려는 클루게 남작과 그를 말리는 부하들.

젊었을 적 한가락 했다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전장에서 검 휘두를 나이는 지나버린 남작이었다.

장담컨대 지금의 남작이 저 눈앞의 기사 놈과 검을 겨룬다면, 채 열 합도 나누기 전에 남작은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리라.

"이익, 놔라! 저놈이 우리 영지를 모욕하는 꼴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직접 검을 들고 나아가 저놈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

"귀하신 몸이 어찌 위험한 곳으로 가시려 하십니까! 영주님, 고정하십시오!"

허나, 그 소동을 보고도 브렌도르프 측에선 브란트를 상대하겠다는 이가 나오질 않았다.

이미 지난 열흘간의 전투로 그가 얼마나 무서운 실력을 지닌 자인지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진정 아무도 없는 것이냐? 저 건방진 놈을 무릎 꿇려 내 앞에 데려올 이가 없냐는 말이다!"

여전히 반응 없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에 분통이 터진 남작이 호통을 치려던 그때,

"어?"

"저게 누구냐?"

"아니, 저, 저...!"

검 한 자루를 어깨 위에 걸친 채 천천히 브란트를 향해 걷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머리는 본디 찬란한 금발이었으나, 적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터라 지금은 시뻘건 적발이 되어 있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전장은 묘한 고요함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수세에 몰렸던 브렌도르프 군이 서둘러 뒤로 물러났고, 기사 브란트의 활약을 기대한 벨가르트 군이 둥글게 비어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저절로 만들어진 대결의 무대, 말 위에 올라탄 브란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검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네 놈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브란트의 말과 행동은 실로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듯 당당하고 늠름한 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 새끼 더럽게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나 바빠, 빨리 끝내자. 참고로 난 용병이다."

"... 이, 이 무례한 놈!"

상대의 대답에 분노한 브란트가 그 즉시 말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이이잉!!!

주인의 분노를 알아챈 군마가 크게 포효하며 대지를 박찼다.

기사씩이나 되는 인물을 등에 태우고 다니는 녀석이었다. 내달리는 속도, 땅을 박차는 힘이 여느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콰콰콰콰콰콰콰!!!

말발굽에 패여 나간 흙덩이가 브란트의 뒤쪽으로 무섭게 흩날렸다.

원래도 그리 멀지 않았던 서로의 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다.

"죽어라!!!"

분노 가득한 브란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하늘 높이 치솟았던 그의 검이 번개가 쏘아지듯 떨어졌다.

감히 기사를 능멸한 용병의 머리통이 보기 좋게 쪼개지리라 생각하던 그 순간,

푸화아아아악!!!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붉은색의 안개.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별안간 떠올랐다가 추락하는 무언가.

털썩-!

모두의 시선이 땅바닥에 떨어진 그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

"헐... 저게..."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머, 머리가 잘렸다고?"

피범벅이 되어 땅을 구른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 브란트의 머리였다.

나이트 슬레이어 (2)

전장에 뛰어들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벨가르트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썰어 넘겼다.

몇 명이나 상대한 걸까.

열? 열다섯? 아니면 서른?

모르겠다.

하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적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느낀 바가 있었다.

'... 다르다, 몸이 완전히 달라졌어!'

검에 실리는 힘이 다르고, 생각에 반응하는 몸의 속도가 달라졌다.

체력도 좋아졌다. 계속해서 격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너끈하다는 듯 평온한 심장의 모습이 너무나 든든했다.

"이 개새끼야! 뒤져라아아!"

휘웅!

벨가르트의 병사 하나가 뒤쪽에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뒤에도 눈이 달린 사람처럼 재빠르게 옆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 공격을 피해냈고,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었다.

내가 해놓고도 놀랄 만큼 대단히 빠른 반격이었다.

"... 끄르륵!"

잘린 목을 틀어쥔 채 맥없이 쓰러지는 벨가르트의 병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대박이네, 뒤에서 덤벼드는 게 다 느껴지잖아?'

접근한 상대가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나는 위험을 간파했다.

등 뒤에서 뿜어지는 맹렬한 살기(殺氣)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검성의 진전을 이은 후 안 그래도 예민했던 감각이 구원의 성배를 얻은 이후 훨씬 더 날카로워졌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 정도면 눈을 감고도 싸울 수 있겠는데?'

물론,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이었던 검성(劍聖)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내 수준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하지만 그건 비교 기준을 검성에 두었기에 그런 것이지, 지금의 내 수준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절대 모자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한 후 육체적인 능력 자체가 서너 배 가까이 뛰어오른 느낌.

그런 나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준 것이 바로 벨가르트 영지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요한 브란트와의 대결이었다.

"나는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다. 네 놈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기사 두 명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브렌도르프의 군 지휘관들을 쓰러뜨린 브란트.

그를 상징하는 깃발이 전장에 등장하면, 용맹하게 잘 싸우던 브렌도르프 병사들도 칼을 거꾸로 잡은 채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만큼이나 브란트가 보여준 실력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아, 새끼 더럽게 말 많네. 아가리로 싸우냐? 나 바빠, 빨리 끝내자. 참고로 난 용병이다."

"... 이, 이 무례한 놈!"

하지만 그런 브란트조차 구원의 성배를 집어먹고(정확히는 성배에 담겼던 물을 마시고) 신체 능력이 몇 배나 뛰어오른 나의 검을 막지 못했다.

물론, 일부러 놈의 속을 긁는 도발적 발언으로 방심을 유도하긴 했다.

근데 누가 그런 말에 흥분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전쟁터에선 부모 욕, 자식 욕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다.

애초에 서로 죽이자고 칼 들고 뛰쳐나온 판국에 무슨 말인 듯 못할까.

거기에 눈 돌아가서 평정심을 잃으면, 그저 제 명줄만 짧게 할 뿐이다.

방금 내 검에 머리가 날아간 브란트처럼 말이지.

"어, 으어어..."

땅바닥을 나뒹구는 브란트의 머리통을 본 벨가르트 병사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다.

자신들의 영지를 대표하는 최강의 기사가 한낱 용병에게 목이 떨어졌다.

그 자체로도 너무나 충격이었는데, 이제 그 용병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불쑥 솟아오른 두려움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시발! 뒤, 뒤로 빠져! 저리 비키라고 이 새끼야!!!"

누군가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야이, 시발! 뒤로 가라고 빨리!"

"도망치지 마라! 전원 자리를 지켜라!!!"

"이 개새끼야, 너나 지켜! 난 갈 거야!"

"그럼 네가 저 괴물이랑 싸우던가! 난 못해, 못 한다고!"

"이런 미친 새끼들이! 정신 차려라, 정신! 적과 싸워라!"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병사들과 용병, 그런 그들을 말리는 지휘관의 고함이 뒤섞여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단하게 전열을 유지하며 브렌도르프 군을 몰아붙이던 벨가르트 군이었는데, 내가 칼질 한 방에 브란트의 목을 날리는 것을 보고선 다들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자기들끼리 서로 밀고 밀치며 알아서 전열을 무너뜨리는 꼴이 참으로 한심했다.

"어딜 도망가냐, 이 새끼들아!"

이 천우신조의 기회를 그냥 보고 넘길 내가 아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앞으로 세워 든 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익! 오지마아아아!"

휘웅! 훙!

나에게 따라잡힌 벨가르트의 병사 하나가 들고 있던 창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잔뜩 겁에 질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창 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카앙!

눈앞으로 휘둘러진 창을 검으로 막아낸 뒤 그대로 창대를 따라 검날을 밀었다.

스르르르르르르릉!

검날이 창대를 타고 흐르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으으! 으아아아아!"

푸화악!

마치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창대를 타고 쏘아진 내 검이 울부짖던 병사의 얼굴을 반으로 쪼개버린다.

분수처럼 솟구치는 붉은 핏물을 유연한 몸동작으로 피해내며 두어 걸음을 전진한 내가 뻗었던 검을 잡아당겨 몸 왼편에 수직으로 세웠다.

카아앙!

내 옆구리를 베어낼 생각으로 휘둘러졌던 적의 칼날이 미리 버티고 서 있던 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상대의 공격이 그리 올 줄 알았던 것처럼, 나는 검을 세워둔 것이다.

"큭!"

내 검을 투박한 펄션으로 후려친 벨가르트의 용병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무거운 충격에 한껏 얼굴을 구긴다.

누가 봐도 자신의 펄션이 내 검에 비해 두껍고 묵직한 무기였다.

하지만 튕겨 나가는 것은 자신의 무기였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하다.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그대로 비어 있는 놈의 목을 찔렀다.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번개 같은 찌르기였다.

푹, 촤악-!

검이 빠져나오자마자 쏟아지는 붉은 피.

"커흑! 크으읍!!!"

왈칵 쏟아져나오는 피를 막으려 들고 있던 무기까지 집어 던지고 목을 틀어막아 보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퍼억!

꺽꺽거리는 놈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차 멀리 날려버린 후, 다음 사냥감을 물색했다.

하지만 이미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는 벨가르트의 병사들은 나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 도망치고 있었다.

"하, 이 새끼들... 빠르네."

이미 내 손이 닿지 않는 먼 거리까지 도망친 적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필사적으로 도망가는지, 순간적으로 달려가 잡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잊을 정도였다.

하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도망치는 게 당연한가?

"후, 오늘 장사는 여기까지만 해야겠네."

뭘 팔았길래 장사 소리를 하느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 멀리 언덕 위에 모여 선 브렌도르프 군의 수뇌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용병대 푸른 방패의 쇼케이스 현장이었습니다. 하하하!"

***

"오오오! 그 브란트를 일격에 쓰러뜨리다니!"

"어찌 일개 용병이 저 정도의 실력을..."

"저자가 진정 용병이 맞습니까?"

"허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주 아르닌이시여!"

모두가 난리였다.

지난 열흘간 브렌도르프 군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란 브란트.

자타공인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그가 무명(無名)의 용병과 겨루어 단 일 합에 목이 떨어졌다.

충격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저 용병이, 브렌도르프의 쟁쟁한 기사들보다도 강하단 말인가?

영주인 클루게 남작을 포함해 브렌도르프 군 수뇌부 모두가 눈 앞에 펼쳐진 충격적 광경에 넋을 놓고 있는데, 홀로 돌아가는 전황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던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가 힘주어 소리쳤다.

"영주님, 기회입니다! 적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 이 상황을 놓치지 마소서!"

"...!"

바로 옆에서 들려온 케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이 발을 구르며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기병대를 출격시켜라! 퇴각하는 벨가르트 놈들의 뒤통수를 들이쳐라!"

"예, 알겠습니다!"

뿌우우우우우-

영주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브렌도르프의 기병대 전력이 득달같이 달려나갔다.

전쟁 기간 내내 명성 자자한 벨가르트의 기병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했던 그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가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 상황에서까지 주눅이 들어 있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모조리 죽여라! 포로를 잡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라!"

"와아아아아아아!"

"기병대 돌격! 벨가르트 놈들을 잡아 죽여라아아아아!!!"

그동안 쌓였던 설움을 폭발시키듯, 맹렬하게 돌진한 브렌도르프의 기병들이 벨가르트 병사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

"으아, 피곤해 죽겠다!"

"야, 우리 중에 혹시 죽은 놈 있냐?"

"미친... 죽은 놈이 대답을 어떻게 해?"

"다행히 없슴돠, 제가 아까 인원 확인했어요!"

"아오, 나 이쪽 팔 조금 베였는데..."

"그거 살짝 베인 것 가지고 뭔 엄살을... 야, 때려쳐!"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 처음으로 참여한 전투였다.

결과는 대승(大勝).

승리의 나팔 소리를 들으며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우리는 용병 주둔 구역에 배정된 우리 용병대의 막사에 들어섰다.

"어? 뭐야, 여기 우리 막사 맞아?"

"미친, 대박!!!"

"와, 이게 다 뭐냐? 어?"

한껏 들뜬 엔리케의 목소리.

뭔가 해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니, 큼지막한 테이블 위에 술과 음식이 한가득 마련되어 있는 게 보였다.

"헐, 이게 웬 거야? 술도 있네?"

"와, 이씨! 고기에서 김 올라오는 거 봐! 방금 요리한 건가 본데?"

"술도 그냥 술이 아니야! 이거 포도주라고! 으와아아아!"

"이야, 브렌도르프 영주님 성격 화끈하시네! 이렇게 보상이 바로바로 나오나? 하하하하!"

어젯밤까지도 볼 수 없었던 아니,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

한낱 용병에게 귀한 술과 고기를 챙겨준다니?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용병대 모두는 이 같은 브렌도르프 측의 대접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야, 막내야! 네 덕분에 우리가 호강한다! 으하하하!"

"근데 대접 진짜 대단하네, 이렇게까지 해주나?"

"야, 그럴 만하지, 그 벨가르트 기사 놈 때문에 브렌도르프 애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냐? 근데 그놈 머리통을 한 칼질에 날렸으니, 속이 얼마나 시원하겠어?"

"으하핫! 아무튼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막내! 덕분에 잘 먹으마!"

"아우, 내가 차린 것도 아닌데 왜 다들 나한테... 됐어요, 알아서들 드세요!"

쏟아지는 선배들의 목소리에 대충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한 나는 막사 한쪽 구석에 놓인 큼지막한 물통으로 다가갔다.

이 역시도 우리를 위해 브렌도르프 측에서 준비해준 것으로, 보통은 주둔지 근처 물가에서 알아서 물을 길어다가 써야 했다.

특히나 물을 길어다 놓는 것은 용병대 막내인 나의 몫이었기에, 브렌도르프 측의 배려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푸우우..."

촤르륵...

적의 피로 물든 얼굴과 머리를 물로 깨끗이 씻어낸다.

주변 다른 사람들은 전투로 허기진 배에 술과 음식을 채워 넣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아주 꼼꼼하고 확실하게 얼굴과 머리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배고프지 않냐고?

'하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네...'

당연히, 배고팠다.

오전 일찍부터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전투, 배가 고픈 게 당연할 수밖에.

하지만 지금의 나는 먹는 것보다 씻는 것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왜?

"어이! 막내야, 준비 끝났냐? 안 끝났어도 빨리 나와! 늦으면 안 돼!"

막사 바깥에서 들려오는 대장의 목소리.

"예, 거의 다 됐습니다!"

그의 말에 힘주어 대답한 나는 젖은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낸 후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연회를 연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나이트 슬레이어 (3)

브렌도르프 영주, 클루게 남작의 연회 초청을 받아 지휘 막사로 향하는 길.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함께 걷던 겔베르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근데, 전쟁이 아예 끝난 것도 아니고 고작 오늘 하루 승전한 거 가지고 연회를 여는 건 좀..."

"왜? 너무 설레발 떠는 거 같아?"

"... 예."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겔베르트의 말에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오늘의 승리 자체가 브렌도르프 군에겐 그 정도로 간절했다는 의미 아니겠냐?"

"음..."

"더구나 오늘은 브렌도르프 측이 그토록 원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의 머리를 얻은 날 아니냐. 수뇌부 측에선 더더욱 오늘의 승리를 축하할 필요가 있어. 그동안 브란트의 존재감에 짓눌렸던 브렌도르프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아하."

"연회 자리에 너를 초청한 것만 봐도 영주가 오늘의 승리를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 수 있지. 영주가 벌이는 연회에 초대받는 건 용병대장인 나도 지금껏 몇 번 경험한 적 없는 자리거든. 그리고 아마 오늘 연회는..."

거기까지 말을 마친 겔베르트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눈빛을 하는 거지?

"크흠, 아니다. 여기서 그런 말 해서 뭐하냐."

"예? 아니, 지금 뭔 소리..."

"아무튼, 오늘 정말 고생 많았다. 진짜 고생 많았고... 다른 놈도 아니고 데미언 너야 영특하고 눈치가 워낙 빠르니 내가 큰 걱정은 안 한다. 다만 이거 하나만 명심해라."

"어떤 겁니까."

"우리가 가는 연회, 마냥 하하호호 웃으며 떠들 수 있는 자리는 아닐 거다."

"...!"

"브렌도르프의 주인인 영주를 비롯해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신하들이 모인 자리다. 그들이야 자신들의 집 안방이니 뭘 하든 괜찮겠지만, 우리는 아니야. 너나 나나 귀족인 영주의 눈엔 그저 돈 받고 칼을 빌려주는 천한 용병일 뿐이야. 귀족의 말 한마디면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지."

"... 권력자들과 함께하는 자리인 만큼 행동과 말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시죠? 꼭 명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가 흡족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 요 신기한 새끼. 진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니까? 크하하하!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났지?"

그의 목소리엔 부하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관으로서의 마음과 제자의 성장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스승으로서의 마음이 모두 담겨있었다.

"어디서 나타나긴요. 대장님이 절 발견했고, 푸른 방패로 데려왔고, 지금까지 잘 키우셨죠.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겁니다."

그가 나를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나도 그를 믿고, 의지하며, 존경했기에 저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크흠! 거 참, 새끼가... 나이도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가지고... 후우우, 아! 날이 참 덥네! 땀이 절로 난다, 절로 나!"

뜬금없이 날씨 타령을 하며 손 부채질을 하는 겔베르트.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열일곱 소년일 뿐 속은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영혼인 나는, 겔베르트의 그 부채질이 땀을 식히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았다.

'남자가 나이 먹으면 소녀 감성에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크흠!'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는 겔베르트를 보며,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는 나였다.

***

겔베르트와 내가 지휘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한 손에 술잔을 든 클루게 남작이 반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왔구려! 자, 다들 박수를 보냅시다! 우리 브렌도르프의 자존심을 세워준 사나이에게 이 자리의 영광을!"

짝짝짝짝짝짝짝짝!!!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먼저 말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인물들이 내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이야! 정말 감탄했네!"

"크으, 어린 나이에 대체 어떻게 그런 실력을 갖게 된 건가? 검을 가르친 스승이 따로 있는가?"

"브란트 놈의 머리가 솟구칠 때 나도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네! 정말 고맙네, 정말 고마워!"

"이제 나이 열일곱이라고? 허, 내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나이에 어찌 그리 강할 수가 있는지?"

"자자, 내 잔부터 받게나. 이리 오시게!"

"어허!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친구에게 술은 무슨 술인가!"

"아직 성년이 아니라지만 이토록 대단한 영웅에게 그깟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슬며시 뒤로 빠진다.

나에게로 향한 저들의 관심과 찬사를 온전히 내가 누릴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함이리라.

참나, 나는 왜 이런 게 다 보이지?

아무래도 지난 생에 사회생활을 너무 열심히 했나 보다.

"어허, 이 사람들이! 아무리 그래도 왕국의 법도가 있거늘! 영주인 나를 제쳐놓고 젊은 영웅과 먼저 연을 만들려 하는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웃음 띤 얼굴로 지켜보던 클루게 남작이 짐짓 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분이 좋은 와중에 나온 짓궂은 농담이었다.

"어이쿠, 이런! 저희가 이런 결례를...! 죄송합니다, 영주님!"

"하하하! 우리 브렌도르프를 구한 젊은 영웅에게 몰래 줄을 대보려 했는데... 과연 영주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데미언이라고 했지? 자자, 이쪽으로 앉게나. 자네는 여기 앉을 자격이 있네!"

당연히 연회장의 말석(末席)에 놓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자리가 놀랍게도 영주의 바로 옆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겔베르트의 자리는 연회장 가장 구석, 출입문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내 입장에선 너무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리 배치.

민망함 담은 시선으로 겔베르트를 바라보는데,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저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겔베르트의 끄덕임이었다.

어차피 내가 앉기 싫다고 해서 다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짜인 상황에 내 몸을 맞추기로 했다.

"예. 그럼, 감사히..."

영주를 비롯해 여러 군 지휘관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영주의 혼잣말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

연회 자리가 한껏 무르익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지휘 막사 안으로 전해지는 술과 음식들.

술이 불콰하게 취한 영주와 군 지휘관들이 즐겁게 먹고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 가관이네, 정말.'

하지만 그 정신없는 연회의 한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난 그저 불편하고 피곤할 뿐이었다.

'고기를 이렇게 처먹을 거면 병사들이나 좀 챙겨줄 것이지. 지휘관이라는 것들이... 에휴!'

이 세계에 산 지 2년이 넘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대장은...'

지휘 막사 저 구석, 가장 후미진 곳에 처박혀 있는 우리 대장, 겔베르트.

제대로 된 대접은커녕 영주와 말 한마디 섞지 못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는 겔베르트.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내 시선에 그가 피식 미소를 보인다.

'나 괜찮아, 인마'

뭐 이런 느낌의 미소랄까?

"그때 이 친구가 어깨에 검을 탁 올리고 천천히 걸어나가는데... 느낌이 딱! 오더구만. 일을 내겠구나, 저 어린 친구가 우리 브렌도르프를 위해 중한 일을 해주겠구나!"

"하하하! 맞습니다!"

"영주님께서도 그러셨습니까? 저도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자자, 우리 브렌도르프를 구해낸 젊은 영웅을 위해 다시 한번 건배!"

"건배에-!"

그 와중에 내 옆자리에 앉은 영주와 브렌도르프 군 지휘관들은 쉬지 않고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연회가 시작된 이후 계속해서 이런 흐름이었다.

내가 정말로 열일곱 먹은 어린 애였으면 이 분위기에 취해서 헤헤거리며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으스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새끼들 뭔 꿍꿍이로 이렇게 이빨을 까는 거지?'

지난 생애 회사 고위 임원들을 모시고 수십, 수백 번 불편한 회식 자리를 가졌던 나는 이런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회생활의 관록으로 따진다면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인 내가 아니던가?

본능적으로 피어오르는 위기감에 오히려 더 정신이 멀쩡해지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주접들을 떠는지, 내 한번 지켜봐 주지.'

***

하인이 내온 와인을 천천히 들이키며 클루게 남작은 옆자리에 앞은 데미언을 바라보았다.

'후후후...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다, 이 하찮은 어린놈아.'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라고 했다.

짬도 얼마 되지 않은 비루한 용병 놈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봤을 것인가?

연회가 열리는 장소가 조금 허름했을 뿐, 내어오는 음식이나 술 모두 귀족인 자신의 취향에 맞춰진 훌륭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음식의 맛과 술의 향취에 정신이 녹아나고 있을 터.

'자, 슬슬 시작해볼까?'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클루게 남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주변의 군 지휘관들이 은근한 목소리로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으흠, 큼! 이보게 데미언,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친구가 한낱 용병 일을 하는 건... 이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야. 그렇지 않은가?"

"하! 이 친구가 간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구만! 나도 같은 생각이네."

"자네 같은 친구는 큰물에서 놀아야지. 그런 실력으로 용병 일을 한다? 이건 시장 바닥 아낙네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걸세."

"그 대단했던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를 일수에 꺾은 영웅 아닌가! 그 정도면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다녀도 모자람이 없을 실력이고 말고, 암!"

"..."

쏟아지는 사람들의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아무 말이 없는 데미언의 모습을 보며 클루게 남작은 슬슬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자, 밖에 누구 없느냐? 젊은 영웅을 위해 준비한 그 선물을 가져오너라!"

오늘 이 연회 자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선물'이 등장할 시간이다.

***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이 연회가 열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나 꼬시려고 만든 자리구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칭찬을 퍼부어 대는데, 내가 등신 호구 새끼도 아니고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장이 아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가?'

이 연회 자리에 오는 길에, 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겔베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이미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다.

'전투에서 귀족의 눈에 띄어 기사로 등용된다... 모든 용병들에게 꿈만 같은 상황이지.'

그 사실을 알기에, 겔베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낱 남작 나부랭이(?) 밑에서 허드렛일 하기엔, 내 꿈이 좀 크단 말이지.'

애초부터 내 목적은 겔베르트를 따라 운명의 흐름대로 움직이다 '그 녀석'을 만나는 거였다.

원작 소설에서 그닥 언급도 되지 않는 브렌도르프 영지의 기사 자리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라는 얘기다.

'남작의 면이 상하지 않도록 적당히 거절할 수 있는 핑계를 찾아봐야겠는데... 흐음, 뭐가 좋을까?'

내가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남작이 별안간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자, 밖에 누구 없느냐? 젊은 영웅을 위해 준비한 그 선물을 가져오너라!"

선물?

'어허, 그런 것까지 준비했어?'

클루게 남작 이 양반, 그래도 꽤 성의가 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긴 하지만, 뭔 선물을 준비했는지 구경이나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

지휘 막사 밖에 있던 근위병의 두 손에 곱게 들려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선물의 정체는...

팟-!

『 타마르쿠스 롱소드(희귀 등급)

: 대륙 최고 품질로 유명한 타마르쿠스 지역의 철광석을 이용해 벼려낸 롱소드. 보통의 강철 롱소드와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강도를 지녔다. 』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처음 보는 희귀 등급(Rare) 아이템이 등장한 것이다!

'허, 클루게 남작 이 아저씨...'

... 나한테 완전 진심이었구나?

나이트 슬레이어 (4)

타마르쿠스 강철(Tamarcus Steel).

어딘가 낯익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스트 킹덤> 속 타마르쿠스 강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금속 중 하나인 다마스쿠스 강철(Damascus Steel)에서 모티브를 따 만들어졌다.

역사 속 다마스쿠스 강철과 마찬가지로 게임 속의 타마르쿠스 강철은 보통의 강철과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견고함을 지니고 있었다.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무기는 일반 강철제 무기를 내구성 면에서 압도했다.

한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나면 이가 빠지고 실금이 가는 일반 강철제 무기와 달리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무기는 내리 일주일을 싸워도 날이 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토록 대단한 강철의 산지(産地), 타마르쿠스는 멀리 왕국 동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베니라이 강(Venirai River) 너머에 있는 지역이었다.

문제는, 그곳이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쿠르페리안 제국의 영토라는 것.

펠리노어 왕국과 제국은 지난 수백 년간 창칼을 맞대고 싸워온 사이였다.

영토 분쟁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제국은 주(主) 아르닌을 믿지 않는 간악한 이교도들의 국가였다.

같은 하늘 아래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던 것.

이런 사정으로 인해 왕국 소속의 상단은 타마르쿠스 지역에 출입할 수 없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으로 물건을 구할 경로가 막혀버린 상황.

왕국 내에서 타마르쿠스 강철이나 타마르쿠스 강철제 무기를 구하려면, 제국과의 국경에서 목숨 걸고 밀수를 하거나 전쟁터에서 흘러나온 전리품을 사 모으는 방법뿐이었다.

'... 괜히 아이템 등급에 희귀(Rare)란 단어가 붙은 게 아니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은 더럽게 비싸니까.'

찾는 사람은 수없이 많은데, 파는 물건의 숫자는 한 줌이었다.

수요와 공급의 말도 안 되는 불균형에, 물건의 가격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을 수밖에.

"여기 있습니다, 영주님."

"그래, 수고했다. 이만 나가보거라."

근위병이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친 검을 남작이 검집째로 들어 올린다.

외관 자체는 평범한 검이었지만, 상태창을 통해 아이템의 진면목을 확인한 내 입장에선 그 평범한 모습마저 비범하게만 보였다.

'후우... 저건 대체 얼마나 하려나?'

얼마 전 내가 큰맘 먹고 구매한 고급(Advanced) 등급 롱소드의 가격이 90실버였다.

내 첫 무기였던 일반 등급의 숏소드가 8실버(깎아서 6실버에 샀지만)였던 것을 생각하면, 무려 10배가 넘는 가격.

고작(?) 고급 등급의 무기도 가격이 이럴진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희귀 등급의 무기는 대체 얼마나 더 비쌀 것인가?

"오, 세상에!"

"여, 영주님! 그 검은..."

"타마르쿠스 강철로 만든 롱소드! 그 귀한 것을 정녕 내주시는 겁니까?!"

"영주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검일진대...!"

남작의 손에 들린 검을 알아본 브렌도르프 군 지휘관들이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을 보인다.

연회 시작 후 지금까지 그들이 보여준 대부분의 반응은 사전에 남작과 상의하여 준비된 것이었지만, 지금의 반응은 아니었다.

저들은 정말로 지금의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고, 나는 그들의 반응에서 남작의 진심을 읽었다.

'남작이 기사 출신이라더니... 확실히 무인(武人)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네.'

이토록 귀한 검을 내주면서까지 인재를 얻으려 하다니.

대충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주절거리다가 '너,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 없냐?' 따위의 헬조선 식(?) 엔딩을 예상했던 내게 이 같은 남작의 행보는 실로 파격적이라 할만한 수준이었다.

"몇 년을 투자해서 어렵게 구한 물건이지. 순수하게 검의 가격만 해도 250골드를 주었으니... 허허!"

"...!"

검의 가격이 250골드라는 남작의 말을 듣고 살짝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250골드면, 25000실버? 미친... 칼 한 자루에 그 돈을 꼬라박는다고?'

<로스트 킹덤> 속의 화폐 가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대략 1실버가 1만 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보면 될 것이다.

즉, 남작의 손에 들린 저 검의 가격이 지구의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뭔 놈의 칼 한 자루가 페라리 가격이냐?!'

지난 생의 경제 감각을 아직 온전히 떨쳐내지 못한 내 입장에선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귀족의 돈 씀씀이였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산 검을 나에게 주려고 준비했다는 건데...'

물론 공짜로 주려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저런 어마어마한 상품(?)을 준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배포였다.

"... 데미언."

"예, 남작님."

별안간 목소리를 착 깔며 내 이름을 부르는 클루게 남작.

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 역시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 간악한 벨가르트의 기사를 꺾고 '나이트 슬레이어(Knight Slayer)'의 위명을 떨친 자여! 그대는 나 브렌도르프 남작, 라이너 클루게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오라. 와서, 너의 검을 잡아라!"

"...!"

아니,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저 대사는 뭐란 말인가?

'게다가 이 분위기는 또 뭐고...?'

남작의 웅장한 대사(?)가 읊어지기 무섭게 흥겨웠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 부동자세를 취했던 것!

심지어 연회장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조용히 술을 들이켜던 겔베르트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대열에 동참했다.

말 그대로 '발을 뺄 수가 없게' 되어버린 분위기였다.

"큼, 크흠! 데미언! 그대는 무엇을 망설이는가? 어서 검을 잡고 모두의 앞에서 맹세하라아아아! '나이트 슬레이어'의 이름을 가진 자여! 비록 그대는 비루한 용병이었으나, 영광된 브렌도르프의 깃발 아래 한 명의 위대한 기사로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아아!"

내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자 남작이 조금 당황한 듯 목소리가 커지는 게 보였다.

더 꾸물대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이걸 어떻게 한다?'

***

'흐흐흐, 그렇지. 제깟 놈이 이런 분위기에 안 나오고 배겨?'

검을 손에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브렌도르프의 영주, 라이너 클루게.

그는 쭈뼛거리며 일어나 자신의 앞으로 걸어오는 데미언의 모습을 보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 열일곱에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몇 년 후엔 왕도에서도 탐낼 정도의 어마어마한 놈이 될 거야.'

그 자신이 검을 들었던 기사 출신이기에, 클루게 남작은 데미언이 지닌 무지막지한 잠재력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특히 벨가르트의 기사 요한 브란트를 베어낼 때 보여준 한 수는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어마어마하다는 말도 모자라.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조차 하기가 힘든 수준이야!'

검 쓰는 실력과는 별개로 아직 성년도 안 된 어린 애였다.

저렇게 똥오줌 못 가리는 나이일 때 정신없이 몰아쳐 발목에 족쇄를 걸어놔야 했다.

'영주인 내가 직접 이리 나서서 분위기를 잡는데, 감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을 거다. 흐흐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장의 한 수로 아끼고 아끼던 타마르쿠스 롱소드까지 꺼냈다.

무려 250골드짜리 희귀 등급의 무기로, 그 자신조차 아까워서 실전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던 검이었다.

'... 앞으로 족히 30년은 써먹을 수 있을 재목이다. 나는 물론이고, 후대에까지 우리 브렌도르프의 기둥이 되어 줄 거야.'

영지의 미래를 좌우할 30년짜리 투자라고 생각하니 250골드의 무게가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남작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사이, 그의 앞으로 다가온 데미언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모든 상황이 생각대로 흘렀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 된 남작이, 천천히 준비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 데미언. 앞으로 그대는 브렌도르프의 기사로서 언제나 정의로울 것이며..."

"각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는 이 검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 뭣?!"

***

남작의 손에 들린 타마르쿠스 롱소드가 너무 아까워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브렌도르프에 발이 묶여서는 안 된다.

게임의 원작 소설인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의 스토리가 시작되는 시점이 단 5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는 상황.

그 전에 난 푸른 방패 용병대와 함께 펠리노어 왕국 남동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작은 영지, 리트베르크(Rittberg)로 가야 했다.

'지금 여기서 코 꿰면 앞으로의 계획이 틀어진다. 거절해야 해.'

문제는 어떻게 남작의 제안을 '뒤탈 없이' 거절하느냐는 것.

아직 성년도 안 된 열일곱 살짜리 용병 나부랭이에게 무려 희귀 등급의 검까지 내어주며 등용을 제안한 상황이었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귀족인 클루게 남작의 면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명백한 신분의 격차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푸른 피의 귀족과 그런 식으로 원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할 일!

'남작의 면을 세워줄 만한 적당한 명분이 뭐가 있을... 아, 그렇지!'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이, 이... 이놈이 감히!"

설마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던 남작의 입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던 찰나,

철퍼덕!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자세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내가 지휘 막사 바깥까지 다 들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각하! 저는 이미... 충성을 바칠 대상을 정하였나이다!"

"...?!"

내 입에 나온 충격적인 선언에 지휘 막사의 분위기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충성을 바칠 대상이 있다니?

이미 누군가에게 등용된 채로 용병 생활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내가 소속된 용병대 푸른 방패의 대장, 겔베르트에게 향한다.

"..."

하지만 겔베르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크으, 역시 우리 대장...!'

솔직히 감탄했다.

겔베르트 역시 지금 내가 꺼낸 말에 크게 당황했을 텐데, 겉으로 보기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

'그 믿음에 충실히 보답해드리겠습니다, 대장.'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숨긴 채, 나는 다시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검을 팔아 먹고사는 비루한 용병에 불과하다고는 하나, 사내의 몸으로 어찌 두 주군을 섬기겠나이까? 저의 하늘엔 오로지 하나의 태양만 떠 있을 뿐입니다, 각하!"

"..."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선 채로 잠시 말이 없던 남작.

그가 간신히 입술 떼어 내게 물었다.

"자네의 주군이 누군가? 저기 있는 용병대장은 아닐 것이고, 혹시... 그게 텔마르크 남작인가?"

푸른 방패의 주요 활동지가 텔마르크 영지였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린 추측이었다.

"아닙니다, 각하."

"그럼 대체 누군가? 누가 자네의 검을 샀단 말인가!"

조금은 격앙된 남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저의 충성을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 전능하신 주 아르닌이십니다."

"...?!"

나이트 슬레이어 (5)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나의 대답에 지휘 막사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충성을 바친 대상이 주 아르닌이라니?

이 무슨 성당의 사제나 할 법한 대답이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준비해두었던 대사를 청산유수로 읊기 시작했다.

"저는 텔마르크 남부의 화전민 마을 출신입니다. 너무나 추웠던 겨울의 어느 날, 먹이를 찾아 내려온 버니언 산맥의 몬스터들이 마을을 습격했고 그 날 제 부모님을 비롯한 마을 사람 모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 나이 아홉 살의 일입니다."

"..."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에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끔찍한 비극의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한 목소리로 꺼내놓고 있었다.

남작을 비롯한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저는 마을 창고로 쓰던 허름한 초가집에 숨어 모든 걸 지켜봤습니다. 제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피바다였습니다. 유독 저에게 친절했던 나무꾼 폴 아저씨도, 몸에 좋은 거라며 늘 제게 알 수 없는 풀을 챙겨주시던 약초꾼 한스 할아버지도 모두 놈들에게 죽었습니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몸을 잘게 찢어 게걸스럽게 먹던 그 괴물 놈들의 모습이 아직도 꿈에... 흐으윽!"

나에게 이 정도로 배우의 재능이 있었던가?

술술 나오는 거짓말도 모자라 눈물까지 터져 나오자 장내의 모두가 안타까운 한숨을 터트렸다.

"어허,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겪었구만..."

"버니언 산맥의 몬스터들의 흉폭함이야 워낙 유명하지 않은가?"

"헌데, 저 친구는 어찌 그 아수라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아홉 살짜리 꼬맹이의 몸으로 말이야."

모두가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가운데, 내가 무엇엔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로 그때, 그분이 나타났습니다. 눈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은 채 홀연히 마을 입구에 나타난 그분의 정체는..."

"성기사! 성기사가 나타났구나!"

'눈처럼 새하얀 갑옷'을 입었다는 말에, 누군가가 비명처럼 그 이름을 외쳤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주 아르닌의 뜻을 따르는 성스러운 전사들... 그분은 성기사였습니다!"

나는 깍지 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신실한 아르닌 교도로서의 모습으로 보일 만큼, 완벽한 기도 자세였다.

"그분께선 우리 마을을 습격한 몬스터들을 모두 물리친 후, 저를 텔마르크의 주도 크라벤의 용병 길드로 데려다주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자신의 지인에게 저를 맡기며 양육비로 적지 않은 돈까지 내어주셨지요. 그리곤...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아르닌께서 나를 보내 너를 구원하도록 이르셨다'라고..."

"허어!"

"오오, 주 아르닌이시여!"

지휘 막사에 모여 있던 사람 중 믿음이 깊은 몇 명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슬쩍 감았던 눈을 떠 남작을 바라보니, 그 역시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듯 오히려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무려 신(神)의 이름이 나왔다.

이보다 확실하고, 그럴듯한 거절의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 그래서, 성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품은 것인가? 주 아르닌의 빛을 수호하는 전사가 되기 위해, 나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각하. 저기 있는 저희 용병대의 대장도 저의 사연을 알고 있습니다. 성년이 되면 용병대를 떠나 신성교국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남작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우... 내가, 하마터면 크나큰 불경을 저지를 뻔했군. 감히 주 아르닌을 따르는 성기사의 재목을 가로채려 했으니 말이야. 아니 그런가? 하하하하!"

"마, 맞습니다! 영주님!"

"오히려 영주님과 저희 모두가 저 친구에게 그토록 반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아르닌께서 점지하실 정도의 재능이었으니, 저희가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가? 역시! 우리 눈이 틀리지 않았던 거구만, 하하하하!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하는 남작과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멘트를 날리는 부하들.

그렇게 한참 동안 뻔한 말들이 오갔고, 마침내 남작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말이 떨어졌다.

"아쉽지만... 그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군. 신의 것은, 신의 곁으로 보내주는 것이 맞겠지."

"예, 각하.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

"어허, 당치도 않은 말! 더는 이 일을 언급하지 말게나. 세상 모든 일은 아르닌께서 정하신 순리대로 흐르기 마련인 것. 자, 모두 잔을 들어라!"

손을 휘휘 저으며 내 말을 틀어막은 클루게 남작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놀라운 재능을 신을 위해 쓰기로 한 데미언을 위해 건배하도록 하지. 자아, 모두 잔을 들게나. 우리의 용맹한 '나이트 슬레이어'를 위하여!"

"위하여어어!!!"

***

연회를 마치고 용병대 막사로 돌아가는 길.

한참을 말없이 걷던 겔베르트가 내게 물었다.

"야, 막내야. 너 정말이냐?"

"예? 뭐가요?"

"아까 말했던 그 얘기들... 화전민 마을 출신에, 몬스터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그런 얘기들 말이야."

"아, 그거..."

푸른 방패에 합류해 겔베르트와 연을 맺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서로의 개인적인 사연은 잘 알지 못했다.

용병이란 애초에 워낙 사연 많은 인간들이었고, 그 사연이란 게 보통은 상처로 남아 있는 부분이기에 굳이 후벼 파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겔베르트는 내가 고아였고, 어쩌다 용병 길드에 맡겨져 그곳에서 생활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사연은 알지 몰랐다.

그런데 오늘 그토록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으니 놀랄 수밖에.

물론, 그게 다...

"뻥인데요?"

"뭐?"

"뻥이라고요, 뻥! 화전민 마을은 무슨... 저 용병대 들어오기 전까진 평생 크라벤 도시 성벽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어요."

"그, 그럼 아까 클루게 남작한테 했던 얘기는 뭐야?"

"아, 그거야 뭐... 어떻게 해야 그 불편한 상황을 그럴듯하게 잘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막 굴리다 보니 저절로 그럴듯한 사연이 나오던데요? 하하하! 저도 놀랐어요. 용병일 하지 말고 음유시인이나 연극배우 같은 걸 할 걸 그랬나?"

"너 그럼, 원래 성기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는 것도..."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겔베르트에게, 나는 넉살 좋은 웃음으로 답했다.

"에이, 성기사는 무슨... 저처럼 믿음 없는 놈이 그런 거 한다고 나서면 신께서도 마음 불편해하실걸요?"

"허..."

옮기던 걸음마저 멈추고 넋이 나간 얼굴을 하는 겔베르트.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말이 없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왜 남작의 제안을 거절했던 거냐? 귀족의 눈에 들어 기사 자리를 받는 건 모든 용병들의 꿈일텐데... 더구나 남작이 그 귀한 검까지 내어주면서 제안을 했잖아?"

"기사 자리가 뭐 그리 대수라고 부모, 형제 같은 사람들까지 버리고 떠나겠습니까? 됐습니다, 그런 거."

"...!"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을 들은 겔베르트의 눈이 크게 떠진다.

짐작하건대, '부모'라는 표현 때문이겠지.

"뭐해요, 안 와요?"

혼자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겔베르트가 따라오질 않고 있었다.

어딘가 굳은 표정이 되어 서 있는 그에게, 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솔직히, 그 타마르쿠스 롱소드 못 받은 건 진짜 아깝긴 하네요. 그러니까, 앞으로 대장이 돈 많이 벌어서 그런 거 하나 사주세요. 그래야 내가 푸른 방패에 남은 보람이 있지 않겠어요?"

"막내 이 새끼..."

그제야 굳어 있던 발을 뗀 겔베르트가 내게 걸어오며 대답한다.

"그걸로 되겠냐? '자식'한테 줄 선물인데, 더 좋은 걸 사줘야지."

"하하하! 지금 하신 말, 저 기억합니다? 까먹지 마세요!"

"그래, 인마. 안 잊어먹게 어디 적어두고 나중에 꼭 사달라고 해라. 하하하!"

단순한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닌,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지내온 겔베르트와 나.

그랬던 우리가, 사제(師弟)간의 정을 넘어 이번 생엔 결코 느끼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따뜻한 부자(父子)의 정을 느끼게 된 날이었다.

***

3주 뒤,

벨가르트 북부에 위치한 요새 울름바흐(Ulmbach).

울름바흐는 남쪽에 위치한 벨가르트의 주도 벨리움(Bellium)과 사흘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사실상 벨가르트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바로 그 울름바흐의 성벽 위에, 벨가르트가 아닌 다른 영지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브렌도르프으으으! 우리가 승리했다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

성벽 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이 우렁찬 목소리로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승리 선언에 요새 성벽 아래 집결한 수백의 군사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쁨, 이제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터져 나오는 환호성이었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요."

기뻐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시원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워낙 많았던지라 아쉬운 마음이 조금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 이건 뭐 전쟁광도 아니고... 전쟁이 끝난 걸 두고 아쉬워하면 안 되지. 크흠!'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리는데, 옆에 있던 겔베르트가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생 많았다. 네 덕분에 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에이, 그건 진짜 과언인데요?"

"하하하! 민망하냐? 그럼 우리 용병대 모두의 활약이라고 하자."

"오, 그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그래. 오전에 벨가르트의 사신이 와서 무조건 항복하겠다고 했다더라. 걔들 입장에선 답이 없으니까 뭐."

겔베르트의 말처럼,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브렌도르프 측에 납작 엎드린 벨가르트였다.

지난 3주간 패퇴만을 거듭한 벨가르트에겐 더는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 중반까지 우수한 기병대의 기동력을 앞세워 전쟁의 승기를 잡았던 벨가르트.

하지만 직접 전장에 나선 브렌도르프 영주 이하 군 지휘관들의 분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푸른 방패 용병대의 활약이 더해지며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벨가르트 최강의 기사라 불리던 요한 브란트를 포함해 지난 3주간 내 손에 죽거나 사로잡힌 기사의 수가 무려 여섯이나 됐다.

참고로 전쟁 시작 전 벨가르트가 보유했던 기사의 수는 총 아홉 명이었다.

헌데 그 절반이 넘는 수가 내 손에 박살이 났으니, 제대로 된 전쟁 수행이 될 리가 없었다.

"처음 전쟁을 시작한 건 벨가르트였지만, 끝을 낼 권리는 브렌도르프가 잡았으니 이제 털릴 일만 남은 거지."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구리광산의 소유권은 브렌도르프 쪽으로 가겠네요."

"당연하지. 그리고 전쟁 배상금도 엄청날 거다. 아무리 못해도 5만 골드는 될걸?"

"5만 골드라..."

대강 오백억 정도 된다는 소리였으니, 앞으로 벨가르트 영지는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이다.

"후우... 전쟁은 돈으로 한다더니, 그 말이 진짜네요."

"그래. 영주들이 칼 들고 싸우는 게 무서워서 전쟁을 안 하는 게 아니야. 그 뒤에 날아올 청구서가 무서워서 전쟁을 안 하는 거지."

거기까지 말을 마친 겔베르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영주한테 용병 대금 돈 받으면, 곧바로 떠날 거야. 너도 준비해라."

"예, 대장 텔마르크로 돌아가는 거죠?"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다. 너 때문에."

"...?"

의아해하는 나의 표정을 보며 겔베르트가 싱긋 웃는다.

"너 인마, 이번에 너무 잘 싸웠어. 한동안 이 주변 지역의 영주들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려고 말이지."

"저는 이미 성기사가 될 거라고 소문을 냈는데요?"

"소문은 그렇게 났지. 근데, 귀족들이란 게 자기가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거든. 만약에 갖지 못한다면... 그냥 부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놈들도 있어."

"...!"

"그래서 한동안 영주들의 눈에서 피해 있으려는 거다. 그러려면, 별 탈 없이 조용한 동네에 가 있는 게 좋겠지? 어차피 이번에 돈 많이 벌어서, 한 두어 달은 쉬어도 될 거야."

"그럼 어디로 가실 계획인지..."

조심스럽게 묻는 나의 질문에, 겔베르트가 시원스럽게 답한다.

"최대한 먼 곳으로 가보자. 저 멀리, 남쪽 끝 리트베르크(Rittberg)로."

리트베르크를 향해 (1)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끝나고,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리트베르크(Rittberg) 영지로 향하는 길.

나와 겔베르트, 그리고 푸른 방패의 동료들은 지금 막 벨가르트의 남부 국경선 너머에 발을 디뎠다.

"아으, 이제 끝이네! 염병할 벨가르트, 정말 지긋지긋했다!"

가장 먼저 일행의 앞으로 나선 엔리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엔리케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기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벨가르트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 용병대는 영지민들의 적의(敵意)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이길 거라 믿었던 브렌도르프와의 영지전.

그 전쟁의 승패를 뒤바꾼 것이 바로 우리 용병대였기 때문이다.

패배한 그들의 입장에선 원수와 다름없는 놈들이었으니, 죽일 듯이 노려볼 수밖에.

"참나, 우리는 그냥 받은 돈값하려고 열심히 싸운 것뿐인데! 뭘 그렇게 죽일 놈처럼 쳐다보는지... 원망을 하려면 전쟁을 먼저 일으킨 벨가르트 영주를 원망했어야지! 그게 맞는 거 아닌가?"

툴툴거리며 걷는 엔리케에게 내가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벨가르트 영주... 이름이 스벤 모라벡(Sven Moravec) 남작이었나요? 그 양반이 필사적으로 소문을 냈을 거예요. '푸른 방패 용병대, 그 망할 놈들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 이렇게요."

내 대답을 들은 엔리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굳이 왜 그래야 하지? 그래 봤자 우리 명성만 올려주는 거 아닌가?"

"명성이라... 악명(惡名)도 명성의 일종이긴 하죠."

"악명?"

"예. 생각해보세요. 전쟁의 승리로 벨가르트가 구리 광산의 소유권을 얻고, 전쟁배상금을 타낸다 한들 그게 평범한 영지민들과 관련이 있을까요?"

"어... 그다지?"

"그렇죠. 전혀 상관없죠. 영주가 전쟁배상금 타서 영지민들한테 나눠 줄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그저 전쟁터에 끌려간 자신들의 아버지와 아들, 남편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뿐이에요."

"음..."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전쟁에서 이기는 게 좋겠죠? 이겨야, 가족이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확률이 커질 테니까. 근데 벨가르트는 전쟁에서 졌어요. 그럼 그 원망이 어디로 갈까요?"

여기까지 설명하자, 엔리케도 대강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네 말은, 벨가르트 영주가 이 전쟁으로 인한 영지민들의 원망을 우리에게 돌리려고 한다는 거지?"

"그렇죠. 아마 우리 용병대는 벨가르트 영지민들 사이에서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쓰레기로 소문이 나 있을 거예요. 전쟁 패배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달래기 위한 영주의 술책이랄까?"

"그 술책을 일컬어 다른 말로, 정치(政治)라고 하지."

마지막 말을 한 건 뒤쪽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겔베르트였다.

그 말을 꺼낸 직후 겔베르트는 감탄한 어조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 그나저나... 데미언 너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칼로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 머리로 싸우는 것도 우리 용병대 최고가 되겠어."

"으음? 지금도 거의 최고 수준인 거 같은데요? 대장이랑 메이슨 정도만 빼면?"

나의 너스레에 반응한 것은, 의외로 엔리케였다.

"어어? 막내 너 이 새끼, 우리 멍청하다고 까는 거지 지금?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아아아!"

"어후, 이럴 땐 또 눈치 빠르시네?"

"야이씨!"

늘 그렇듯 한바탕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

우리는 델멘부르크(Delmenburg) 영지에 도착했다.

***

델멘부르크 영지는 가진 돈이 너무 많아 이른바 '황금백(黃金伯)'이라 불리는 바덴하임(Badenheim) 백작의 봉신 중 하나인 로베르트 페르반(Robert Pervan) 남작의 영지였다.

영지의 크기 자체는 작았지만 너른 평야 지대가 많았고, 온화한 왕국 남부 지방 특유의 날씨 덕에 농업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 그래서, 영지 크기에 비해 인구가 많은 편이지. 델멘부르크에 살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말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니까?"

야영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사냥을 잡은 토끼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차였다.

델멘부르크 출신인 용병대 동료의 고향 자랑(?)을 듣고 있는데, 문득 허전해진 빈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석 달가량 진행되었던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의 전쟁.

그동안 양측 병력을 모두 합쳐 총 이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서로 죽고 죽이기 위한 수라장에 내던져졌다.

그 전쟁에서, 우리 푸른 방패는 총 네 명의 동료를 잃었다.

거기에 더해, 일곱 명의 동료가 더는 용병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브렌도르프 영지 측에게 용병 대금을 받은 대장 겔베르트는 다른 대원들의 의견을 모은 후, 부상으로 은퇴를 결정한 동료들에게 본래 받을 몫보다 5할의 돈을 더 챙겨주었다.

은퇴한 동료들이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남은 생을 잘 건사하길 바라는 의미였다.

"... 다들 고향엔 잘 도착했으려나?"

"잘 도착했겠지. 대장이 마차 타고 가라고 따로 돈도 챙겨줬잖아."

헤어진 동료들의 생각을 나만 했던 것은 아닌지, 여기저기서 그들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지전에서의 활약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용병대의 규모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 허전함은 모두의 가슴 속에 상처를 남겼고, 여전히 쓰라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에이, 야! 우울한 소리들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자자, 잔을 채워!"

낮에 지나온 마을에서 산 벌꿀주 통을 들어 올린 엔리케가 직접 걸어 다니며 동료들의 잔을 채웠다.

아, 참고로 나는 술을 받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 술을 안 마시냐고?

'... 차라리 그런 거면 좋겠네.'

씁쓸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모두에게 말했다.

"자, 그럼... 막내인 저는 불침번 경계 가겠습니다. 재밌게 노십쇼, 선배님들."

죽상을 하고 일어서는 내 얼굴 본 엔리케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야, 막내야! 조금만 더 고생해라! 리트베르크 가면 대장이 신입 뽑아준댔어. 그때까지만 뺑이치자, 알았지?"

"예, 예, 알겠슴돠아!"

떠들썩한 모닥불 곁을 빠져나온 나는 불침번 경계 장소로 점찍어둔 커다란 바위 위에 올랐다.

높이가 꽤 되어서, 우리 용병대의 야영 텐트는 물론 주변 지역까지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참... 별은 언제 봐도 많네."

이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 있다면, 바로 쏟아질 듯이 많은 별을 품은 밤하늘의 풍경이었다.

대기 오염으로 얼룩져 기껏해야 한두 개의 별빛밖에 볼 수 없었던 지난 생의 밤하늘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였다.

"크흠, 어디 보자... 상태창."

그렇게 멍하니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 내가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우주를 꺼내 보았다.

팟-!

『 데미언 / Lv. 43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 무골지체(武骨之體)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오크 가죽 갑옷(고급 등급) 』

브렌도르프-벨가르트 영지전에 참전하기 전과 비교해 놀라울 정도로 치솟은 레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벨가르트의 기사를 비롯해 고위급 지휘관들을 여럿 때려잡았고, 거기서 경험치를 많이 얻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성장의 가장 큰 요인 뭐니뭐니해도...

'... 구원의 성배 덕이겠지. 크, 히든 피스 효과 달달하다!'

성지(聖地) 에셀바흐에서 얻은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하면서, 나의 성장 속도는 가히 폭발적인 수준으로 변했다.

'기본적으로 몸 자체가 효율이 달라졌으니, 당연한 결과지.'

구원의 성배가 지닌 가장 위대한 권능은 바로 '신체강화(身體强化)'였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물론, 지금도 어리긴 했다), 부실한 영양 섭취를 통해 나약한 신체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나다.

첫 번째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를 통해 4백 년 전 대륙 최강의 무인이었던 검성(劍聖)의 경지를 이어받았지만, 부실한 신체 탓에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원의 성배를 통해 신체강화를 이룬 뒤, 내 성장의 효율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상태창에도 표기된 나의 새로운 고유특성, '무골지체(武骨之體)'였다.

무골지체, 쉽게 표현하면 '싸우기 위해 태어난 몸뚱이' 정도 되려나?

그 전에는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근육 붙는 속도가 더뎠는데, 요즘은 조금만 땀을 흘려도 근육이 쫙쫙 갈라지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 한 번 확인을 해볼까?"

상태창을 조작해 간단한 신체 현황 정보를 불러왔다.

어차피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에 어려울 것은 없었다.

팟-!

『 데미언 / 신체 현황

신장: 179cm

체중: 78kg

시력: 좌 8.0 / 우 8.0

골격근율: 40%

부상 여부: 없음 』

'... 이건 뭐, 그냥 괴수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한 지 고작 두 달가량이 지났는데, 전반적인 신체 능력의 지표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했다.

이제 내 키는 용병대 내에서도 평균 이상에 속했고(이 부분에서 엔리케한테 괜히 미안했다), 체중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무서운 점은 그 불어나는 체중이 단순히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순수한 근육의 증가 때문이라는 점.

팔, 다리, 어깨, 등, 배,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강철 같은 근육이 들어찬 탓에, 이제 단순한 주먹질만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박살내어 주저앉힐 수 있게 되었다.

'근데 다른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영역인데, 시력은 대체...'

이게 정녕 사람의 시력인가?

왼쪽 눈 8.0에 오른쪽 눈 8.0이라는 괴랄한 수치는 평생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흔히 눈 좋은 사람을 일컬어 '매의 눈'이라고 하는데, 그 잘난 매도 이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야간투시 능력도 생겼으니... 이정도면 6백만 불 아니, 6백억 불의 사나이쯤 되겠네.'

아재가 아니면 절대 알 수 없을, 옛날 옛적 외화 시리즈의 제목을 떠올리며 홀로 낄낄거리던 그때,

"...!"

사방에 거미줄처럼 뻗어진 나의 감각이 위험 신호를 울렸다.

'서쪽!'

내 온몸을 찌릿하게 만드는 그 감각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을, 저 먼 거리에 솟은 산속 깊은 곳에서 우르르 떼로 몰려나오는 무언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나의 입술이 흥미롭게 비틀린다.

"저 새끼들... 오크잖아?"

리트베르크를 향해 (2)

겔베르트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부하들과 오랜만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는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곳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려오는 비명과 창칼의 소음에 시달리고, 잘려나간 팔다리와 더운 김이 솟는 붉은 피 웅덩이가 사방에 가득한, 인세의 지옥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니, 꽤 많이 달랐다.

"아니, 새끼야! 내 말 좀 들어봐! 진짜 그 애가 날 마음에 두고 있는 눈치였다니까?"

"아, 예, 예! 물론 그러시겠죠."

"어라 시발? 이 새끼 이거 사람 말을 안 믿네? 진짜라니까? 내가 고백만 하면 바로 넘어올 분위기였다고!"

"아니 대체 그 분위기의 기준은 뭡니까? 예? 조장 혼자만의 착각 아니고요?"

"와아, 진짜 환장하겠네! 이 고독한 크라벤의 늑대, 엔리케 님의 매력을 의심하는 거냐 지금? 으아아!"

"고독한 늑대는 무슨... 그냥 못생긴 똥강아지 같구만."

"뭐? 너 이 새끼 말 다했냐아아아!"

지금 겔베르트의 곁엔 가족처럼 아끼는 (얼간이) 부하들의 웃음소리와 찌르륵거리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잔혹한 죽음의 냄새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달콤한 한여름 밤의 여유였다.

"... 좋네."

그는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부하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소금 뿌려 잘 구운 토끼 고기의 맛이 좋았고, 델멘부르크 산 밀알을 양껏 넣어 든든하게 끓여낸 죽도 먹을 만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얼마 마시지도 않은 싸구려 벌꿀주에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다.

있지도 않은 술을 더 마시겠다며 징징거리는 부하들을 (주먹으로) 설득해 잠자리로 보낸 겔베르트가 자신의 야영 텐트에 몸을 뉘었다.

누운 상태에서 위를 바라보니, 이곳저곳 찢어진 자리에 천을 덧대 기운 허름한 텐트 천정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의 모습을 잃고 엉망이 된 듯 보였으나, 그래도 자신의 몫을 어떻게든 해내는 모습이었다.

'하, 꼭 내 인생 같네.'

그것은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져 버린 옛이야기.

세상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리라 믿었던 치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명성 높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자신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입이 마르도록 그의 실력과 인품을 칭송했고, 과연 드높은 가문의 명성에 어울리는 인재라는 평이 자자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지금껏 그러했듯, 앞으로도 장밋빛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날들.

하지만 그 행복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찰나였다.

"... 시발, 늙긴 늙었나 보네. 오라는 잠은 안 오고 별 거지 같은 생각만 떠오르는 걸 보니..."

마치 떠오르는 생각의 끈을 잘라내듯, 겔베르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부스럭-

'...!'

텐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오랜 용병 생활로 배어버린 본능은 곤히 잠들었던 그의 몸을 벼락처럼 깨웠다.

"... 누구냐."

그렇게 묻는 겔베르트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지 않았다.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은 것을 보아, 부하 중의 한 명일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장, 데미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텐트 밖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겔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남짓이 된 막내.

그러나 어느새 대원 모두가 가장 의지하게 되어버린 녀석.

데미언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영리했으며, 빼어난 실력까지 갖춘 진짜배기 재능이었다.

"무슨 일이냐."

겔베르트의 물음에, 텐트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크가 나타났습니다. 숫자는 열둘, 야영지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의 거리에서 접근 중입니다."

"... 산에서 내려온 놈들이군."

짤막하게 대답한 겔베르트가 곁에 풀어두었던 자신의 무기를 챙기며 텐트 밖으로 향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해져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달빛도 옅어진 이 깊은 밤에 그 먼 거리에 있는 오크를 대체 어떻게 발견한 걸까?

하지만, 겔베르트는 이내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의문을 지웠다.

'하긴, 이 녀석이 말도 안 되는 걸 보여준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피식,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웃음을 잠시 지었던 겔베르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딱딱히 굳어진 표정으로 야영지의 한 가운데로 향한다.

뒤이어, 그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 푸른 방패, 모두 기상.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온 것 같다."

***

"도, 도망쳐! 무조건 달려어어!"

"제, 제발... 크헉!"

"뛰어, 빨리 뛰어! 멈추면 안 돼! 계속 뛰어어어어!"

"으아아아!"

"살려주세요! 꺄아아악!"

남녀노소, 약 오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

길을 알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었다.

"크롸아아아악!"

그런 그들의 뒤에서 기세 좋게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은 녹색의 근육질 피부를 가진 포악한 몬스터, 오크(Orc)였다.

"아르닌이시여! 그대의 어린 양을 구해주소서!"

자신의 늙은 몸으로는 오크의 추격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노인 하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노인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크롸아아악!"

노인의 목숨을 노리고 있던 오크 역시, 그가 믿는 신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어린 양'이라는 사실이었다.

휘우우웅- 콰직!

달려온 기세를 담아 힘껏 내리친 오크의 도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던 노인의 머리에 틀어박혔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잘익은 수박처럼 갈라진 노인의 머리에서 시뻘건 피와 허연 뇌수가 튀었다.

"크륵! 크롸롸!"

도끼날의 묻은 피를 혀로 핥은 오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산속 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오크들에게 인간이란 가끔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늘 맛볼 수 있는 산짐승들과 달리 훨씬 여리고 부드러운 식감을 지닌 인간의 고기.

오랜만에 맛보게 된 별미(別味)에 오크는 기쁨의 함성을 내지른다.

"크롸아아아아아!"

***

"아니, 저 인간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위험하게 산 옆에다가 야영지를 깐다고? 그것도 불까지 피워가면서?"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오크들에게 학살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엔리케가 분노와 착잡함이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산이나 깊은 숲 옆엔 야영지를 설치하지 않는다.

두 지형 모두 몬스터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몬스터가 없다 하더라도 늑대나 곰, 들개 따위의 야생 동물과 마주칠 확률이 높기에, 야영의 경험이 많은 이들은 가능한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 자리를 잡고 밤을 보냈다.

"... 대강 복장들을 보아하니, 신성교국으로 가는 성지순례객이군."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던 겔베르트의 말이었다.

"대장,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크 열두 마리면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언제나 진중하고 침착한 사나이, 부대장 메이슨이 특유의 저음으로 물었다.

"오크 열둘이라... 확실히 쉽지 않긴 하네."

우리 용병 업계의 기준으로, 오크 한 마리를 문제없이 상대하려면 은패 용병 정도의 실력은 되어야 했다.

지난 브렌도르프-벨가르트 영지전 참여로 열한 명의 동료를 잃은 우리 용병대의 현재 전력은 총 열넷.

그중 은패 이상의 실력을 지닌 사람의 수는 모두 다섯이었다.

대장 겔베르트, 부대장 겸 1조장인 메이슨, 2조장 엔리케, 거기에 나와 한 명의 선배를 더한 숫자였다.

이 기준대로라면 은패 이상의 실력을 지닌 우리 다섯이 각각 오크 한 마리씩을 상대하고, 남은 오크 일곱 마리를 나머지 대원 아홉이 상대하는 그림이 된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상당히 아슬아슬한 그림이었고, 얼마 전 많은 동료를 잃었던 우리에겐 상당히 심적인 부담이 되는 구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아... 데미언?"

"예, 대장."

내 이름을 부르는 겔베르트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불안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오크 한 마리를 문제없이 상대 가능한 멤버 다섯 명 중에, 홀로 열 마리 이상을 잡아낼 수 있는 기사 급의 실력자가 둘씩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둘 중의 하나는, 당연히 나였다.

"너 먼저 가서 딱 절반만 조져 놔. 그 이상은 무리할 필요 없다. 나도 밥값은 해야지."

"하하, 알겠습니다."

"나머진 나를 따라온다. 우측면에 보이는 큰 나무를 끼고 돌아갈 거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의 명령에 대답하는 동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차게 땅을 박찼다.

파파파파팍!

캄캄한 어둠 속, 나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려 퍼진다.

상관없다.

지금 나는 누구를 암살하려 조심스럽게 잠입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의 움직임은 명백한 돌격(突擊)의 자세.

맹렬한 기세로 들이닥쳐 적을 분쇄하는 과정에 은밀함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크롹?"

"크와아아아아!"

나의 접근을 알아차린 오크 몇 마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기괴한 울음을 토해낸다.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울음소리엔 자신보다 약한 생명체의 움직임을 제압하는 기운이 담겨있다.

흔히 판타지 세계를 다룬 소설과 게임 속에 등장하는 '피어(Fear)'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워 이 돼지 새끼들아!!!"

오크 따위의 어설픈 외침에 제압당하기엔, 나의 정신력이 너무나 강했다.

푸화악-!

달려온 기세를 담아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오크의 상체를 쪼갰다.

내게 도끼를 내리치려던 자세 그대로, 수직으로 곧게 갈라지며 뒤로 넘어가는 오크.

힘이 풀린 놈의 손아귀에서 녹슨 도끼 한 자루가 떨어져 나온다.

터억-

바닥으로 떨어지는 도끼를 왼손으로 잡아낸 후 그대로 정면을 향해 투척했다.

평소 던지던 투척용 손도끼와 달리 큼지막한 도끼의 무게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후웅- 후웅- 후웅- 퍼억!!!

"크르륵!"

내가 던진 도끼에 가슴팍을 얻어맞은 오크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뒤통수를 처박는다.

도끼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런지 확실히 적에게 주는 데미지 자체가 달랐다.

"자, 두 마리 잡았고!"

눈 깜짝할 새에 동료 둘을 잃은 오크들이 성지순례객들을 사냥하던 걸 중단하고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좋았다.

"크롸아아악!"

슈웅-!!!

오크가 있는 힘껏 휘두른 도끼가 내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남들이 보기엔 가슴이 철렁한 순간이겠지만, 검성에게 이어받은 초인적인 감각으로 딱 필요한 만큼의 회피 동작을 한 내 입장에선 전혀 불안할 일이 아니었다.

"흐읍!"

공격을 피한 후 등 뒤로 돌아가 훤히 열린 놈의 후방을 공격한다.

촥, 촤악, 푸화아악!!!

양쪽 무릎 뒤의 힘줄을 끊어 놈을 주저앉힌 뒤 깔끔하게 목을 베어냈다.

이어,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떨어지는 오크의 머리통을 붙잡아 측면에서 덤벼드는 다른 놈에게 집어 던졌다.

"크롸악! 칵!"

갑자기 눈앞으로 동료의 머리통이 날아오자 놀란 놈이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시야를 가리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콰지직!

마치 복싱에서 어퍼컷을 때리듯, 가려진 시야 아래에서 솟구친 나의 검이 놈의 목울대를 뚫고 들어가 뒤통수로 튀어나왔다.

"케륵, 컥컥...!"

머리통이 꿰뚫린 상황에서도 본능은 남아 있는 것인지, 허우적거리며 검을 뽑아내려는 오크.

하지만,

으득, 으지직!

나는, 놈의 목에 꽂혀 있던 검을 측면으로 힘껏 돌려 목뼈 자체를 부숴버렸다.

"다음 돼지는 어딨냐! 덤벼, 이 새끼들아!"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오크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 넘어뜨린 뒤, 나는 남아 있는 오크를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리트베르크를 향해 (3)

우리가 성지순례객 야영지를 덮친 오크 열두 마리를 도륙 내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차 한잔 마실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나 혼자서 오크 아홉 마리를 잡았고, 후방으로 돌아간 대장과 메이슨, 엔리케가 각각 한 마리씩을 잡아 체면치레를 했다.

"고생했다, 데미언."

"아닙니다. 고생은요."

겸손한 척한다고 꺼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이제 나에게 있어 홀로 오크 아홉 마리의 멱을 따는 일 정도는 그다지 고생스러울 것도 없는 수준의 '잡무'가 되어버렸으니까.

'고유특성 무골지체(武骨之體)... 이름값 제대로 하네.'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가 지닌 힘을 흡수해 신체강화를 이뤄냈고, 그 결과 부실했던 약골의 몸을 '싸우기 위해 태어난 몸', 무골지체로 벼려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검에 실리는 힘이 달랐다. 예전 같으면 머리통만 쪼개고 말았을 공격이 오크 몸뚱이 전체를 과일 자르듯 쫙쫙 베어냈다.

체력도 몰라보게 늘었다. 오크씩이나 되는 괴물을 아홉 마리나 상대하는데 숨이 거칠어지는 정도로 끝났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힘들어서 목에서 쇠 맛이 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을 덴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체력 회복 자체도 빨라진 것 같네.'

헉헉거리던 숨이 빠르게 잦아들고, 지쳐버린 몸에 산소를 공급하려 쉴 새 없이 부풀었던 가슴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추가로 체력 관련 히든 피스를 얻으면 어떻게 될까?

'... 잠깐, 그게 왕도에 있었던가?'

히든 피스의 주인이 된 이에게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선사하는 '그 물건'의 위치를 떠올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지는 나였다.

한편, 오크들의 습격으로 얼이 빠진 성지순례객들을 이끌어 안전한 우리 용병대의 야영지로 데려온 겔베르트가 누군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그런 겔베르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니, 그 상대는 나 역시도 계속 신경을 쓰고 있던 인물이었다.

"저, 신부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겔베르트의 질문을 받은 이는, 성지순례객 행렬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한 사내.

입고 있는 복장과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만 보아도 알 수 있듯, 그는 아르닌 교의 성직자였다.

그는 얼핏 봐도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강 추측건대, 한 스물 대여섯 정도?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제 고작 열일곱인 나랑 비교하면 한참 어른이라 불릴 나이긴 했다.

"아, 저는 다행히 다친 곳 없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딘가 민망한 얼굴을 한 어린 얼굴의 성직자가 겔베르트에게 재차 입을 열었다.

"... 저는 아직 신부가 아닙니다. 부족하나마 부제(副祭)의 신분으로 신의 뜻을 따르는 니콜라오라고 합니다."

"어쩐지, 앳된 얼굴을 하고 계시더니만... 부제님이였군요. 실례했습니다."

부제(副祭)란 교회에서 주교와 신부, 즉 사제(司祭)들을 보조하는 성직자를 이르는 말.

그 말인즉, 이 성지순례객 행렬을 이끄는 책임자는 따로 있을 것이란 얘기였다.

못해도 오십 명은 될 법한(물론, 오크 떼의 습격으로 그 숫자는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다) 성지순례객 행렬의 지도를 나이 어린 부제에게 맡길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함께 오신 분이 계시겠군요. 어디에 계신지...?"

"아, 그게... 사실, 제가 모시고 온 신부님이 계셨는데..."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로 시선을 보내는 니콜라오.

그 끝에, 천을 얼굴에 덮은 채로 누워있는 시신 한 구가 보였다.

오크의 도끼에 맞아 머리가 쪼개진 중년의 사내였는데, 아마도 그가 니콜라오가 따르던 신부(神父)였던 모양이다.

"아이고, 이런... 이거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이 또한 주 아르닌의 뜻이겠지요. 후우..."

존경하고 따르던 신부의 죽음에 슬픈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부제.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본 겔베르트가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였다.

"주 아르닌께서 신부님을 당신의 곁에 두고 중히 쓰시기 위해 남보다 조금 일찍 천상으로 불러들이신 걸 겁니다... 간절한 마음을 다해, 고인에게 주의 축복을 바라겠습니다."

"...?!"

슬쩍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간 내가 깍지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내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는 겔베르트.

저 양반, 지난번 클루게 남작의 연회가 끝나고 나왔을 때도 저런 표정으로 나를 봤었다.

하긴 뭐, 평소 신앙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놈의 입에서 신실한 교인이나 할 법한 대사가 술술 나오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얼굴을 확인한 부제가 어두웠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아, 가장 먼저 달려와서 저희를 구해주셨던 그분이시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 부제님. 저는 푸른 방패 용병대의 데미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감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송할 뿐입니다."

"죄송하다뇨?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희가 조금 더 빨리 왔다면 희생자가 줄었을 텐데... 그렇지 못해 너무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스러울 뿐입니다."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내 모습을 보며 니콜라오 부제가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데미언 형제님과 동료 분들 덕에 나머지 순례객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문득,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나의 얼굴을 확인한 부제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데미언 형제님께선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

"아,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내 나이를 들은 부제가 입을 벌리며 놀라는 게 보인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감정 표현이 참 솔직하네, 이 친구.

"예, 내년에 성년이 됩니다."

"허... 제가 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보통 형제님 나이에 오크를 잡아내는 것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그 잡아내기 힘든 오크를 홀로 아홉 마리나 쓰러뜨렸다.

검에 문외한인 부제가 보더라도 확실히 평범한 수준은 아니게 보일 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무리 운이 좋은 이라고 한들 주의 품을 벗어난 흉폭한 마수들을 아홉이나 홀로 상대할 순 없을 겁니다. 데미언 형제님께서 저희를 구하셨습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대장님을 비롯해 저희 용병대 동료 전원이 함께한 결과였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르닌의 자식으로서, 그의 어린 양을 구하는 일에 어찌 주저함이 있겠습니까?"

"하아..."

내 입에 쏟아져나오는 대답을 들은 니콜라오 사제가 진심 어린 감탄을 터트린다.

"데미언 형제님께선 매서운 검술 실력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마음의 땅까지 단단하게 다지셨군요. 이토록 어린 나이에 어찌 이런 성취를... 거듭 놀라울 뿐입니다."

"성취랄게 있겠습니까? 그저 주 아르닌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 그의 첫 번째 종이었던 '선지자' 하인델 님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옆에 있는 겔베르트의 입이 점점 더 벌어지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애써 그 모습을 모른 척했다.

"오늘 데미언 형제님께서 오크를 쓰러뜨리시는 모습은 마치 성기사(聖騎士)들의 영광된 검을 보는 듯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성기사라니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말씀이십니다. 저의 부족한 실력이 어찌 성스러운 아르닌의 검에 비하겠습니까? 감당하기 어려우신 말씀입니다."

오크를 잡아낸 나의 활약을 성기사에 비유하는 부제에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성기사에 비견될만한 대단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는, 어린 나이의 검사(劍士).

심지어 그런 이가 성직자조차 감탄할 만큼 신실한 믿음을 지녔다.

이건 뭐 영웅 신화에나 나올법한 그런 인물의 이야기 아닌가!

'크으, 진짜 내가 생각해도 개 멋있는 캐릭터다!'

스스로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에 나조차 취해있던 그때, 내가 하는 꼴(?)을 어이없이 지켜보고 있던 겔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 부제님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다친 분이 워낙 많아서, 이대로 순례를 계속하시긴 힘들 것 같은데..."

"아, 그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고민하고 있던 니콜라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겔베르트에게 물었다.

"으음... 사실 제가 이 지역 지리를 잘 몰라서,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혹시 조언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질문을 던지는 니콜라오의 목소리에서 지금껏 보여준 성직자로서의 엄숙함 대신 도움을 바라는 이의 간절함만이 느껴졌다.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모습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고, 이후 부제가 되어 성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니콜라오.

하지만 신실한 성직자로서의 경험을 빼놓고 본다면, 아직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성지순례 행렬 도중 오크 떼의 습격이란 갑작스러운 횡액을 당했다.

그로 인해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신부를 잃고, 서른 남짓 남아 있는 성지순례객들을 이끌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질 상황.

그러던 중 자신들을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베테랑 용병대장의 존재는 실로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의 불빛 같았으리라.

"음... 일단은 다친 분들을 치료하고 이런저런 상황을 챙겨야 하니, 가까운 마을에 들러 재정비를 하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어, 그렇다면 어디로...?"

"여기서 남동쪽으로 두어 시간 이동하면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델멘부르크 영지의 주도인 민슈타트(Minstadt)와 가장 가까운 마을인데, 규모가 꽤 커서 다친 순례객들이 충분히 치료받고 쉴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날이 밝는대로 움직이시죠."

"아, 그럼 혹시... 저, 그..."

무슨 말을 하려는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니콜라오 부제.

그 모습을 지켜본 나와 겔베르트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 이거, 받아야겠지?'

'받으세요. 어차피 가는 길 아닙니까?'

'좋아.'

찰나의 의견 교환 후, 겔베르트는 니콜라오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성지순례라고 하셨으니, 당연히 리트베르크 영지를 거쳐 신성교국으로 향할 계획이셨겠지요?"

"아! 예예, 맞습니다."

"마침 저희도 리트베르크 영지에 일이 있어서 그리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기왕 이리된 거... 저희 용병대와 동행하시죠. 그러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그,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저희야 너무 감사하지만..."

겔베르트의 반색하던 니콜라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다시 어두워진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용병대의 보호를 받으며 리트베르크로 가는 건 너무나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용병들은 절대 공짜로 자신들의 능력을 빌려주지 않는 이들 아닌가?

요컨대, 지금 니콜라오의 표정을 어둡게 만든 건 돈 문제였다.

하지만 겔베르트는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일반적인 용병과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땅 위에서 종교가 지닌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혹시, 용병 대금에 대한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부제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

평소엔 보기 힘든, 무척이나 인자하고 신실한 미소를 지으며 겔베르트가 말했다.

"성지(聖地)로 향하는 주 아르닌의 어린 양을 돌보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어찌 대가를 바라겠습니까?"

"오오! 감사합니다, 대장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푸른 방패 용병대에게 신의 가호가 내릴 것입니다!"

감격한 니콜라오가 겔베르트의 손을 잡으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별말씀을. 하하하!"

그리고 그런 니콜라오의 인사를 받는 겔베르트의 얼굴엔, 어딘가 나를 닮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그로부터 열흘 후,

"... 하아, 드디어 왔네."

우리는 신성교국과 맞닿아 있는 왕국 최남단의 영지,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Rittren)에 도착했다.

모든 것의 시작 (1)

리트베르크(Rittberg).

신성교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펠리노어 왕국 최남단의 영지.

영지의 크기 자체도 작은 편이었고, 구리나 철, 금이나 은 같은 이렇다 할 광물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리트베르크는 늘 부유한 살림을 유지해온 영지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 리트베르크는 왕국에서 육로를 통해 신성교국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돈이 되는 조건이죠."

일행의 중간에서 리트베르크 영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겔베르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버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니콜라오 부제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겔베르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보였다.

존댓말을 쓰는 겔베르트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애초에 이 이야기는 그에게 들려주기 위한 설명이었다.

'... 어이구, 뭔 할아버지한테 옛날이야기 듣는 손자 같은 표정이네.'

니콜라오의 저런 표정이 이해는 갔다.

지금껏 아르닌 교의 울타리 내에서 신(神)에 대한 이야기만 주야장천 듣고 살았으니,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거다.

'... 신부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위치까지 가려면, 신앙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지.'

세상 모든 조직이란 게 다 그렇지만,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선 정치력과 금력(金力)이 필요한 법.

지금 겔베르트가 해주는 이야기 속엔 왕국 남부의 보잘것없던 작은 영지 리트베르크가 어떻게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땅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듣는 니콜라오에게 달린 것이겠지.

아무튼, 겔베르트는 저 멀리서부터 조금씩 가까워지는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매년, 아니 매달 왕국 각지에서 출발한 성지순례객들이 신성교국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듭니다. 하지만, 과거 리트베르크의 영주들은 그걸 보고도 별생각을 하지 못했죠. 뭐, 사실은 조금은 귀찮아했을 겁니다."

"귀찮... 아 했다고요?"

성지순례객들을 '귀찮아'했다는 표현에 놀란 니콜라오 부제가 눈을 크게 치뜨며 되물었다.

마치 대단한 신성모독이라도 들을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의 얼굴을 본 겔베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성직자가 듣기엔 조금 거북한 표현일 수 있겠군요. 하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입장에서 성지순례객이란 너무나 신경이 쓰이는 존재죠. 영지민도 아닌 자들이 성지순례라는 무시할 수 없는 명분을 가지고 내 땅을 함부로 돌아다니니까요."

"아..."

"그래서, 과거 리트베르크의 영주들은 아예 성지순례객들을 도시 안으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이 땅에 머물지 않고 지나갈 목적인 사람들이니까요. 대신, 도시 바깥에 임시로 천막을 세워주고 그곳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신성교국 측에게 밉보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그 관례를 깬 사람이 나타났죠. 그가 바로 리트베르크의 전전대 영주, 데틀레프 아르펜 남작입니다."

갑자기 자신의 얘기에 끼어든 나를 보고 겔베르트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말을 자른 것에 대한 짜증보다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라는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 왜요?"

"아, 아니... 데미언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어떻게 알다뇨?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인 것도 아니고... 이런 건 책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얘기잖아요? 왕국 남부 지역에서 밥 벌어먹고 사는데, 이런 기본 상식은 챙겨둬야죠."

내 입에서 나온 '기본 상식'이라는 표현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겔베르트였다.

상식이란, 보통의 용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으니까.

"내 용병대 부하 놈 중에 상식을 따지는 놈이 나올 줄이야... 상식, 상식이라... 허허!"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혼잣말을 중언부언 떠드는 겔베르트를 뒤로 하고, 나는 눈을 빛내고 있는 '학생' 니콜라오를 위해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남작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매일 같이 자신의 땅으로 몰려오는 성지순례객들을 '손님'으로 대하면 어떨까?"

"손님이요?"

"예. 데틀레프 이전의 영주들은 성지순례객들을 그저 말 안 듣는 불청객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어요. 그는 성지순례객들을 신성교국이라는 '여행지'로 향하는 길에 리트베르크라는 '여관'에 들린 손님으로 생각한 거죠."

"아..."

"생각의 전환은 완전히 다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성지순례객들을 불청객이 아닌 손님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이 땅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생겨났죠. 바로..."

스윽, 니콜라오를 바라보던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자연스럽게 니콜라오도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델멘부르크나 노이베른 등 주변의 다른 영지들과 비교해 작은 넓이를 지닌 리트베르크.

하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저 도시는 델멘부르크의 주도 민슈타트(Minstadt)나 노이베른의 주도인 토르비스(Torbis)에 비해 훨씬 큰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 저기 보이는 저 도시, 리트베르크의 주도 리트렌이 바로 그 가능성의 상징 같은 곳입니다."

"어, 어떤 일이 있었죠?"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니콜라오.

한참 동생뻘인 나에게 답을 구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 뭐, 사실 저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 계속 아는 척하는 게 좀 민망한데... 원래는 저 도시가 있던 자리에 순례객들을 위한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네요."

"와아..."

내 말을 들은 니콜라오의 입에서 감탄이 터진다.

"데틀레프 아르펜 남작이 발상의 전환을 한 후 30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성지순례객들을 위한 천막이 세워져 있던 그 땅에 리트베르크 최대의 도시가 들어서게 되었죠. 도시의 성장을 가속하기 위해 전대 영주인 막스 아르펜 남작은 아예 영주성을 리트렌으로 옮기기까지 했다네요."

"아하? 그럼, 원래 리트렌이 영지의 주도가 아니었다는 소리네요?"

"네. 예전의 주도는 좀 더 북쪽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니콜라오와 내가 리트렌의 역사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우리 일행은 도시 성문에 도착했다.

성문 앞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이미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이나 복잡했는데, 가죽 갑옷에 기다란 할버드를 손에 쥔 병사들이 2인 1조로 늘어서서 도시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우, 저거 또 기다리려면 한나절 걸리겠네. 경비병 새끼들 빨리빨리 일처리 안 하나?"

길게 늘어선 줄을 본 엔리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투정이 이해는 간다.

한시라도 빨리 여관에 들러 오랜 야영 생활에 지친 몸을 누이고 싶겠지.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짜증을 내다가 경비병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아주 고달픈 신세가 될 텐데...

"... 입 다물어라.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일행 전체 엿 먹이지 말고."

아니나 다를까, 엔리케의 뒤에 서 있던 부대장 메이슨이 묵직한 목소리로 경고를 전했다.

"아, 알겠슴돠... 크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메이슨의 말이다 보니 금세 찌그러드는 엔리케였다.

"후우,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 같은데... 그전에 들어갈 수 있을... 엥?"

메이슨에게 한 소리를 듣고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엔리케의 눈에, 성문 앞 경비병 쪽으로 힘차게 걸어가는 니콜라오 부제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대장! 저 양반 말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예? 저러다가 경비병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그런 엔리케의 걱정과 달리 니콜라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겔베르트의 얼굴은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 겔베르트를 대신해서 내가 나섰다.

"아이참, 조장!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니콜라오 부제가 그동안 우리한테 신세 진 거 갚겠다고 저렇게 나섰는데, 그걸 눈치 없이..."

"잉? 신세를 갚아? 아니, 이제 처음 이 동네 와본 양반이 뭘 안다고 저렇게 나서? 괜히 큰일만 치르는 거 아냐?"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속해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아는 사람이죠."

"음? 그게 뭔 소리야?"

말 대신 직접 보라는 의미로, 나는 멀리 니콜라오 부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과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 음? 경비병들 표정이 나쁘지 않은데?"

"아마 니콜라오 부제는 자기가 성지순례객들을 인솔해온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을 겁니다. 리트렌은 기본적으로 성지순례객들에게 친절한 도시이니, 경비병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을 수밖에요. 거기에 니콜라오 부제가 교에서 서품을 받은 정식 성직자이니, 운이 좋으면 그와 함께 온 일행에 대한 신원 확인 절차도 간소화될 수 있을 겁니다."

나의 침착한 설명을 들은 엔리케가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막내 너는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보자마자 하냐? 진짜 똑똑한 것 같아."

"제가 똑똑한 게 아니라 조장이 좀 모자라는 거 아닐까요?"

"뭐? 아니, 이 새끼가!"

나에게 놀림을 받은 엔리케가 버럭 하려던 차,

"허억, 허억! 됐습니다! 경비병이 저희를 들여보내 주겠다네요! 저를 따라오시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리 곁으로 돌아온 니콜라오 부제가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와아, 여긴 무슨 여관이 이렇게 많냐?"

도시 안으로 들어선 우리의 시선을 가장 먼저 잡아끈 것은, 거리 양쪽으로 가득한 여관들의 간판이었다.

'신성한 맥주', '성전(聖戰)의 다락방', '축복의 이부자리', '신탁의 보금자리'...

누가 성지순례객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여관들 아니랄까 봐 죄다 이름에서 종교적 색채가 느껴졌다.

그중에서 우리 용병대의 선택을 받은 곳은 '축복의 이부자리'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잠자리가 고팠던 우리의 소망을 반영한 선택이었다.

"자, 그럼... 우리는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리트렌에 도착한 이후, 우리는 함께 온 성지순례객들과 자연스럽게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감사의 눈물을 보이며 우리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액수나마 성의로 받아달라며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감사의 인사말을 제외한 그 어떤 돈이나 물품도 받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 받아 챙기느니 푸른 방패 용병대의 좋은 이미지를 가져가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온 모든 성지순례객을 떠나보낸 이후 우리는 니콜라오 부제와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부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경험을 발판 삼아 더욱 훌륭한 성직자가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겔베르트 대장님. 푸른 방패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절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여기저기 소문 좀 내어 주십시오. 용병대 푸른 방패가 신실하고 정의롭다는 얘기로요."

"물론입니다. 교에도 이번 일을 보고하여 푸른 방패의 선행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하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겔베르트가 진심 어린 웃음을 터트린다.

한편, 나는 여관 '축복의 이부자리'에 짐을 풀고 주변 구경을 하러 거리로 나와 있었는데...

"... 음?"

여관 근처에 자리한 도시 광장 분수대 주변에서 내 눈길을 확 잡아끄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혹시 저 꼬맹이..."

나와 비슷한 금빛의 머리칼을 지닌 작은 여자아이.

그저 뒷모습만 바라보았을 뿐인데, 나는 그 아이에게서 운명과도 같은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 (2)

"아가씨, 곧 해가 질 겁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시지요. 너무 늦으면 영주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칫! 또 그 얘기 하는 거야? 이제 그런 속임수는 안 통한다고 내가 지난번에 분명 말했을 텐데?"

리트베르크 영주성 앞에 만들어진 도시 광장의 한 가운데.

쉬지 않고 맑은 물을 뿜어내는 대리석 분수대에 걸터앉아 입술을 비쭉 내미는 소녀가 있다.

예쁘고, 아름답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미(美)를 묘사하는 세상 모든 수식어를 다 가져다 늘어놓아도 과하지 않을 외모를 지닌 소녀였다.

아직 여인이라 부르기엔 한참은 어린 나이임에도,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고 끌어들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뾰로통한 모습을 코앞에서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엔 빈틈없는 단호함이 떠올라 있을 뿐이다.

"속임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이곳이 영주성 코앞이라고는 하지만 집 밖에 나간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시는 겁니까."

소년은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깊고 진한 검은 눈동자엔 총명함이 깃들어 있고, 탄탄한 근육이 올라붙은 길쭉한 팔다리에 훤칠한 키가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모습이다.

소년의 이름은 아드리안(Adrian).

올해 열여섯이 된 그는, 리트베르크 영지의 군사적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관(軍務官)인 데론 베르켈의 종자이자...

"아무튼 싫어! 영주성은 답답하단 말이야. 밖에 나오면 이렇게 경치도 좋고 재미난 것도 많은데..."

분수대 위에 걸터앉아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떼를 쓰고 있는 영주의 열두 살 난 외동딸, 니나 아르펜의 호위를 담당하는 이였다.

사실, 정식으로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한낱 종자에게 영주의 천금이라 할 수 있는 외동딸의 호위를 맡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리트베르크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영지 최강의 기사, 데론 베르켈이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소년.

아직 설익고 부족한 면이 분명 있었지만, 소년은 그 남다른 재능을 인정받아 지금의 임무를 해나가고 있었다.

방금과 달리 조금은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아드리안이 니나에게 말한다.

"리트렌 거리 곳곳에 영주성 안에서 느끼지 못할 새로운 즐거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애초에 전 이 거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아, 맞네! 아드리안은 베르켈 경의 종자가 되기 전엔 영주성 밖에 살았지?"

"예.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영주성에 들어왔고, 그 전까진 도시 서쪽의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엄청 춥고, 늘 배고팠던 시절이죠."

"아..."

아드리안의 입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소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미안한 감정이 차오른다.

"그, 미안해. 아드리안.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평소엔 또래 꼬마들과 다를 바 없이 떼를 쓰고, 말을 안 듣는 일이 잦은 소녀 니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소녀.

그런 니나의 모습에 아드리안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제 다 지난 일인 걸요. 아무튼... 도시의 거리는 재밌고 신나는 일들로만 가득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험하고, 잔인하고, 무서운 일들이 언제건 벌어질 수 있지요. 그걸 알고 계시기에 영주님께서도 늘 걱정하시는 거고요."

"우웅..."

"저를 비롯해 믿음직한 호위병들이 늘 곁에서 아가씨를 지키고 있지만, 위험은 예측할 수 없기에 위험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언제든지 제가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아가씨도 꼭 아셨으면 합니다."

"응, 아드리안. 고집부려서 미안해."

"아닙니다, 아가씨. 그럼... 이제 영주성으로 돌아가실까요?"

"응! 얼른 가자."

언제 말을 안 들었냐는 듯, 걸터앉아 있던 분수대에서 내려와 영주성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하는 니나.

바로 그때,

'... 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묘한 시선.

아드리안은 급히 니나의 등 뒤에서 그녀의 몸을 가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

돌아선 아드리안의 눈에,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명의 소년이 보였다.

자신의 등 뒤에 선 소녀, 니나의 머리칼과 비슷한 금빛의 머리를 지닌 소년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살짝 갈색빛이 도는 니나의 금발과 달리 눈앞의 소년은 눈부실 정도의 진한 금빛 머리를 가졌다는 것.

뉘엿뉘엿 성벽 너머로 넘어가는 해가 한낮의 환한 빛을 잃었음에도, 소년의 머리는 그 한풀 꺾인 노을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용병 같은데...'

소년은 잘 손질된 가죽 갑옷 차림에 팔꿈치 보호대를 하고 허벅지 부근에 검은 묵빛의 단검을 꽂고 있었다.

기다란 장검이나 도끼 같은 위협적인 날붙이는 아니었지만, 세상엔 단검 한 자루로 한 무더기의 사람을 쓰러뜨리는 실력자도 존재한다.

혹시 저자가 영주의 딸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접근한 자라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벤다!'

본디 호위의 기본이란 아주 작은 위험의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검이 매여진 허리춤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간 아드리안이, 큰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물으려던 그때...

"... 어?"

무언가를 발견한 아드리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든다.

'가, 갑자기 저게 무슨...'

허리춤으로 향하던 아드리안의 손을 멈추게 할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 벌어졌다.

'... 우, 울어? 뜬금없이?'

그랬다.

아드리안의 시선 끝, 찬란한 금빛의 머리를 한 정체불명의 소년.

그 소년의 신비로운 녹색 빛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