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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벤의 천재 검사 (5)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 떨어진 이후 맞닥뜨린 최대, 최악의 위기였다.

고작 레벨 6의 능력치로 그 세 배에 달하는 레벨 18의 베테랑 용병과 맞붙어야 한다니.

심지어 상대는 검을 쥐고 있는데, 나는 고작 부서진 의자 다리를 무기랍시고 들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만 실수해도 의자 다리와 함께 내 머리통도 날아가 버릴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이었던 것!

'... 집중하자, 데미언! 못하면 그냥 여기서 뒈지는 거야!'

그야말로 충무공께서 난중일기에 언급하셨다던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의 정신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허나 그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것일까?

완전하게 싸움에 집중한 나는 '크라벤의 천재 검사'란 별명에 어울리는 기적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휘우웅! 티잉!

휘잉! 태에엥!

휘우우웅! 탱!

검성의 유산에서 기인한 초인적인 집중력의 도움으로, 흐릿했던 검의 움직임이 점차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증명하듯, 나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빌로트의 검을 모조리 쳐내며 가히 '우주 방어'를 선보이고 있었다.

티잉! 태엥! 탱! 태에엥! 타아아앙!

"와아아! 미쳤다 진짜로!"

"엄청나다! 저 녀석 나무 막대기를 들고 진짜 칼을 다 막아내고 있어!"

"저, 저게 가능한 건가?!"

"인마, 가능하니까 지금 하고 있지!"

"워어... 내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이거 꿈 아냐?"

"현실 맞아 이 자식아! 똑바로 눈 뜨고 보라고!"

"워메, 데미언이 싸움 잘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건 그냥 미쳤잖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대결에 잔뜩 흥분한 구경꾼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건장한 근육질의 사내와 작은 체구의 말라깽이 소년이 막상막하로 싸운다?

"데미언! 힘내라!"

"이 녀석아, 꼭 이겨야 해!"

"데미언! 데미언!"

"너 이 자식 내가 응원한다! 이기면 먹고 싶은 거 뭐든 사줄 테니까 꼭 이겨라!"

단순한 구경거리를 넘어 경이롭기까지 한 그 광경에, 사람들은 빌로트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나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광경을 만들어낸 당사자인 나의 상태는 그렇게 좋지 못했으니...

"후아! 흡! 커흑! 으아아아!"

태앵! 팅! 태에에에엥!!!

빌로트의 공격 하나하나를 막아낼 때마다 나는 쇠몽둥이를 받아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손을 넘어 팔 전체가 울리는 듯한 느낌!

'으아아아아! 이런 식이면 의자 다리보다 내 팔이 먼저 부러지겠네!'

무겁다.

진짜 더럽게 무거운 공격이었다.

빌로트의 공격 하나하나에 지금의 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레벨 5, 6 수준의 허접한 얼치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

의자 다리를 쥐고 있는 양손과 손목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지만, 놈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면 손목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머리통이 날아갈 지경이었기에 나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였다.

"으으으! 으아아아아아!!! 이것도 막아? 이것도? 씨발, 씨바아아알! 뒈져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자신의 공격을 빠짐없이 막아내는 내 모습에 어지간히 열이 뻗쳤는지, 뒤집힌 눈으로 괴성을 토하며 달려드는 빌로트.

있는 힘껏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던 그가 떨어지는 힘까지 더해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우우웅!

'못 막으면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동시에 온몸의 힘을 쥐어짜 손에 쥔 의자 다리를 휘둘렀다.

제발, 버텨줘!!!

태에에에에엥!!!

"?!"

"막았다! 막았어!!!"

"우와아아아아! 막았다아아!"

"데미언! 시발, 개 멋있다, 이 자식아!"

"저걸 또 막아? 진짜 미쳤다!!!"

해냈다.

빌로트가 전력을 기울여 펼쳐낸 회심의 일격을, 보잘것없는 의자 다리로 막아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우욱... 큽! 쿠에웩!"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빌로트의 공격을 받아내고 뒤로 대여섯 발자국이나 밀려난 나는 몸을 꺾으며 피를 토했다.

의자 다리 너머로 전해진 충격에 속이 진탕된 탓이다.

뿐인가, 누적된 충격으로 찢어진 손바닥에서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거기에 앞서 검에 베인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섞여들며 바닥으로 떨어지니, 이미 내 주변은 시뻘건 피바다였다.

그야말로, 만신창이.

'이런 젠장, 이 이상은 무리야...'

하긴,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와 가물거리는 의식.

한계에 다다른 체력과 점점 더 심해지는 통증이 나의 정신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으직, 털썩!

직전의 일격으로 완전히 부러져 바닥에 떨어져 버린 의자 다리.

검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교묘하게 검의 옆면을 때리는 방식으로 버텨왔으나, 누적된 충격을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흐흐, 하하하! 이제 어쩌냐? 용케 잘 버텼다만, 이제 그것도 끝이구나. 이 쥐새끼야! 으하하하하!"

의자 다리가 부러지는 걸 본 빌로트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음을 터트린다.

"자아, 이제 심판의 시간이다. 건방진 애송아. 흐흐흐!"

잔혹한 미소를 지은 빌로트가 무기를 잃고 망연자실한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퍽!

"크헉!"

나는 빌로트가 냅다 내지른 발차기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몸 상태가 엉망인 탓에 감히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아, 내 인정하마. 너 이 시발 새끼,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어지간한 용병 새끼들보다 훨씬 나아!"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 칭찬을 늘어놓던 빌로트가 바닥에 쓰러진 내 가슴팍에 발을 올렸다.

콰직!

"끄으으으..."

"근데,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계산은 제대로 해야겠지? 이 좆만 한 개새끼야, 재미 좋았냐? 응?"

하지만 몰려드는 고통과 두려움 앞에서도 나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끄흡... 조... 까, 오크... 대가리... 새끼야...!"

"허, 이 새끼가 끝까지... 그래 뭐, 네 근성도 인정해주마. 대단한 거 알았으니까 이제 끝을 내자. 흐흐흐!"

휘웅-!

섬뜩한 파공성을 내며 내 얼굴 옆으로 달라붙은 빌로트의 검.

차가운 금속이 내뿜는 특유의 한기가 내 뺨으로 느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귀 한쪽이랑 손목, 발목 한쪽씩 잘라줄게. 하! 시발, 이 정도면 진짜 많이 봐준 거야 이 새끼야. 지금까지 나한테 개겼던 새끼 치고 살아있는 놈이 없거든. 크하하하하!"

"으으으... 이 미친... 새끼가...!"

"워워, 움직이지 마. 너무 움직이면 귀가 아니라 눈깔까지 파 버리는 수가 있다. 응? 칼에는 눈이 없어요. 크흐흐!"

콱, 비어 있는 왼손으로 내 머리채를 움켜쥔 빌로트가 오른손에 든 검을 천천히 귀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자아, 이 꽉 물어라. 좀 아플 거야. 흐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리던 빌로트가 검을 든 오른손에 힘을 막 주려던 그때.

"... 거기까지. 그 이상 움직이면, 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여관 건물 앞, 구름처럼 모여든 구경꾼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함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이런 시발! 어떤 개새끼가 함부로 이 몸의 이름을 부르고 지랄...!"

내 머리채를 단단히 휘어잡은 채 거슬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던 빌로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긴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나는 느꼈다.

'...!'

내 머리채를 잡은 빌로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나타났길래?

***

처음 여관 앞에 도착했을 때, 겔베르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웬 꼬맹이를 상대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근육질 사내의 모습이었다.

참고로, 겔베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근육질 사내의 이름과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빌로트? 저 개 또라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사내의 이름은 겔베르트의 뒤를 잽싸게 따라온 엔리케의 입에서 나왔다.

더불어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번에 '개 또라이 새끼'라는 표현이 나왔다.

평소 그들이 빌로트라는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려주는 단적인 예였다.

"... 대장."

"음? 왜?"

뒤이어 여관 앞에 도착한 메이슨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겔베르트는 눈앞의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 부름에 답했다.

"빌로트랑 상대하고 있는 저 녀석... 그놈입니다."

"그놈? 그놈이 누구... 어?"

순간적으로 메이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겔베르트.

그러나 반짝이는 금발 머리와 깡마른 팔다리를 한 소년의 모습에서 낯익은 누군가를 금세 떠올렸다.

"아! 저거 길드에서 접수보는 꼬맹이? 아니, 저 녀석이 왜..."

'여기 있냐?' 따위의 말을 하려던 겔베르트였으나, 지금 그딴 이유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저 말라깽이 소년이 빌로트를 상대로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빌로트 저 새끼... 인성이 개막장이라 그렇지, 원래 좀 하는 새끼 아니냐?"

겔베르트의 물음에, 그의 옆에서 넋을 놓고 소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엔리케가 대답했다.

"예에, 맞슴돠! 빌로트 저 새끼 저거, 조만간 은패 딸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던 데요?"

엔리케의 입에서 나온 표현, 은패(銀牌).

'은(銀)으로 만들어진 용병패'라는 뜻으로, 용병의 수준을 알려주는 가장 직관적인 증거물이었다.

<로스트 킹덤> 세계관 속 용병의 등급은 총 여섯 단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은 용병패를 받지 못하는 무(無) 등급이었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갈 때마다 각각 철, 동, 은, 금, 백금으로 만들어진 용병패를 받았다.

무(無) 등급 의뢰를 총 오십 번 수행하여 실적을 인정받으면 다음 단계인 철패를 받게 되고, 다시 철패 등급 의뢰 오십 번을 수행하면 은패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식이었다.

용병패에는 그것을 제작해 발급해준 길드의 이름과 일련번호가 찍혀 있었는데, 해당 길드에선 용병패의 발급과 동시에 관련 문서 기록을 남겨두어 위조를 방지했다.

참고로, 용병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 열 중 아홉은 철패조차 만져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철패를 따낸 용병 열 명 중 아홉이 다시 동패를 따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 구경을 하게 된다.

다음 등급인 은패, 금패, 백금패 역시 거의 비슷한 생존율을 보였다.

즉, 지금 겔베르트 일행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빌로트는 살아남아 따낼 확률이 '천 분의 일'에 불과하다는 은패 등급 용병에 근접한 실력자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는 것은...

"... 그럼, 지금 저 금발 머리 꼬맹이가 은패를 따네마네 할 정도의 실력자라는 말이냐?"

"어, 으어어.. 그게 또 그렇게 되네요? 미친 거 아닙니까, 진짜?"

겔베르트의 말에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는 엔리케였다.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심지어 또래 소년들보다 체구도 작고 비쩍 마른 몸을 지닌 녀석이 은패 등급을 노리는 베테랑 용병과 비슷한 수준의 기량을 지닐 수 있다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세계의 상식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에 겔베르트의 얼굴이 절로 심각해지는데, 등 뒤에서 메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제가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린 녀석이 대단한 수준의 고급 검술을 쓴다고..."

"그래, 그랬지."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군에 있던 시절에도 저 정도 상승의 검술을 쓰는 이는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당연하고, 심지어 기사 중에서도 말입니다."

석 달 전, 처음 저 녀석의 모습을 목격하고 했었던 얘기를 다시 한번 들려주는 메이슨의 모습에 겔베르트의 눈빛이 더욱 깊어진다.

그때는 한 다리 건너 들은 이야기라 반신반의했었는데, 지금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니 더더욱 충격적인 소년의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눈부신 재능.

똑같이 무(武)의 길을 걷는 이의 한 사람으로서 순수하게 부러웠고, 미치도록 탐나는 재능이었다.

"저 녀석, 고아라고 했었지?"

"예,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뒤 봐주는 사람은 따로 없고?"

"처음 길드에 왔을 땐 후원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도 없답니다."

"흐음... 그래?"

그렇다면...

'... 내가 데려다가 함 키워봐?'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겔베르트가 나직이 말했다.

"일단, 밥이라도 한 끼 사주면서 친해져 봐야겠다. 한창 먹는 거 좋아할 녀석이 몸이 저게 뭐냐."

"예, 알겠습니다."

그리 하려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바로 그때, 겔베르트의 눈에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가는 빌로트의 모습이 보였다.

"하, 저 미친놈이 진짜..."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 주변 구경꾼들의 어깨를 양손으로 지그시 밀어내며 앞으로 나선 겔베르트가 말했다.

"... 거기까지. 그 이상 움직이면, 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

이 드넓은 왕국 내에 단 삼십여 명뿐이라는 '금패 등급'의 용병이자,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로 불리는 '푸른 방패'의 리더 겔베르트의 차가운 목소리가 폭주하던 빌로트의 광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푸른 방패 용병대 (1)

나지막한 말 한마디로 미쳐 날뛰던 빌로트를 얌전하게 만든 사나이.

구경꾼 틈에 서 있던 그가 걸어 나온다.

저벅, 저벅...

천천히 내딛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사방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끄으으..."

나는 여전히 빌로트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로 쓰러져 있었기에,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눈동자만 움직여 점점 가까워지는 그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 이 아저씨는 또 누구야?'

빌로트의 반응을 봤을 땐 서로 아는 사이 같았는데, 놈이 손을 덜덜 떠는 걸 보니 그렇게 얼굴 봐서 기분 좋을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사이 빌로트와 두어 발자국 떨어진 가까운 곳까지 다가온 사내.

빌로트도 작은 덩치는 아니었는데, 그 사내는 그 빌로트를 작아 보이게 할 정도로 체격이 좋았다.

저벅, 저벅, 턱-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그가 나직한 저음으로 점잖게 훈계하듯 말했다.

"빌로트, 오베린의 빌로트... 이름 없는 얼치기 용병도 아니고 짬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어린 애 상대로 이래서야 쓰나. 안 그래?"

하지만 빌로트는 사내의 그 점잖은 말이 어마어마한 협박처럼 들린 모양인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 음... 이, 이거 봐, 내가 사정이 좀 있었어. 그니까 그게..."

"흠, 사정이라... 뭔 대단한 사정이길래 이런 소란을 피우는 걸까?"

"드, 들어봐! 진짜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나랑 우리 애들이 이 여관 단골손님이거든. 지금부터 네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말이 내가 듣고 납득이 될 만한 이야기였으면 좋겠는데?"

"그, 그게 말이지... 컥!"

콰악!!!

빌로트의 변명은 순식간에 그의 목을 틀어쥔 사내의 행동으로 더 이어지지 못했다.

"끄윽... 커흐읍!"

"음?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놔... 놔주... 크읍!"

놀랍게도, 사내는 한 손으로만 빌로트의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나를 상대로 무지막지한 강검을 휘두르던 빌로트가 쪽도 못 쓰고 매달려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라니!

'뭐야?! 이 아저씨 힘이 얼마나 센 거야?!'

깜짝 놀란 나의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빌로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반갑다, 싸움 잘 하는 꼬맹이. 오랜만에 보네?"

"저... 저를 아십니까?"

"글쎄, 이걸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씨익, 내게 미소지은 사내가 다시 빌로트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일단, 이 새끼부터 처리하고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

"... 그래서, 내가 너무 열이 받아서! 그러면 안 되는데 흥분을 한 거지! 그, 어... 정말 미안하게 됐어.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

좀 전의 광기는 잊은 듯 더할 나위 없이 착해진 빌로트가 쩔쩔매는 표정으로 사내에게 고개를 숙였다.

놀랍도록 극적인 변화.

거듭 고개를 숙이는 빌로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놈을 이토록 예의 바르게(?) 만든 사내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 아저씨, 대체 정체가 뭐지?'

그가 빌로트에게 한 건 처음 다가와 목을 움켜쥐고 그 상태로 몇 마디 나눈 게 다였다.

'뭐, 그것도 엄청난 장면이긴 했지.'

하지만 그러기 전, 사내가 구경꾼들 틈에서 등장한 순간부터 빌로트는 고양이 앞의 쥐, 아니...

'... 호랑이 앞의 쥐 같았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런 표현을 할 정도로 빌로트는 사내의 존재감에 꼼짝 못 하는 모습이었다.

"그, 그리고 앞으로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게! 그러니까... 어, 음... 이만 나는 가봐도 될까?"

사내의 눈치를 보며 비 쫄딱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묻는 빌로트.

하지만 사내는 까슬하게 자라난 자신의 턱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 뭔가 되게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지 않아?"

"응...? 어, 어떤?"

"여기, 이 녀석한테 사과를 안 했잖아. 정작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쪽이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사내의 시선이 아래위 할 것 없이 골고루 얻어터져 엉망이 된 나에게로 향한다.

그 시선을 따라 나를 바라보는 빌로트.

일그러진 놈의 표정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얻어터진 건 난데...'

나 역시 독기 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그를 마주 쏘아보았고, 거기에 가시 돋친 한 마디를 얻었다.

"거, 말 나온 김에 얼른 사과하시죠? 제가 '누구와는 달리' 넓은 마음으로 받아 줄 테니까."

"...!"

짧은 말 한마디로 속을 뒤집는 나의 행동에 이를 악물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빌로트.

어지간히 열이 받는지,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에 살기가 들끓었다.

'나중에 만나면 바로 죽여버린다, 이 좆만 한 새끼야!'

'뭐, 네가 째려보면 어쩔 건데? 털 없는 오크 대가리 주제에.'

짧은 순간, 대충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이 우리 사이에 오갔던 것 같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눈앞에 선 사내의 존재가 어지간히 두려웠던 건지, 빌로트는 잠깐의 머뭇거림 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후우우... 내가 미안하다, 꼬맹아. 아까 함부로 손을 쓴 거, 죽인다 어쩐다, 마지막에 귀 자른다고 협박한 거, 다 잘못했다. 진짜 미안하다!"

"... 뭐, 저도 어른한테 건방지게 굴었던 거, 사과드립니다."

빌로트의 사과를 들으며 나도 점잖게 몇 마디를 답해주었다.

생각 같아선 '진짜로 미안하면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지나가 봐라, 이 개 호로 새끼야!'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더 뻗대다간 나도 눈앞의 사내에게 혼이 날 것 같아서 이쯤 하기로 했다.

"하하, 서로 이렇게 화해하니 보기 좋네! 음?"

짝-

나와 빌로트가 서로 사과 아닌 사과를 나누는 모습을 본 사내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자, 그럼 빌로트?"

"어, 음... 예?"

사내의 부름에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어정쩡한 말투로 대답하는 빌로트.

그런 녀석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사내가 별안간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말한다.

"이제 꺼져, 이 새끼야."

"...!"

"그리고 당분간 내 눈에 띄지 마라. 아! 참고로 우리 애들도 너랑 썩 얼굴 맞대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기왕 꺼지는 김에 아예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걸 추천한다. 우리 애들, 일하다 몇 번 만나봐서 성질 더러운 거 알지?"

그가 턱 끝으로 가리킨 방향엔 부러진 앞니를 보이며 음산하게 웃고 있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와 무뚝뚝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는 장발의 흑인 사내가 있었다.

'응? 그러고 보니 저 머리 긴 흑형?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내가 팔짱 낀 흑형(?)을 어디서 봤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빌로트는 사내와 그 부하들의 눈을 피해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나와 식당 손님들 앞에선 그토록 안하무인으로 굴던 녀석이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조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데, 데미언! 괜찮으니? 응? 어이고, 이 피 나는 것 좀 봐!"

빌로트가 도망치자마자 내게 달려온 후고 아저씨가 내 몸에 난 상처를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이구, 자기도 얻어맞아서 코며 입술이며 다 터졌으면서 내 걱정부터 하다니... 이거야 원.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아저씨 몸부터 챙기세요. 아까 맞은 데는 괜찮으세요?"

"아, 이거? 아휴, 괜찮아! 멀쩡해! 장사하면서 저런 미친놈들 만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 줄 아니?"

내가 걱정할까 봐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후고 아저씨였다.

바로 그때, 빌로트를 쫓아버린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후고 아저씨에게 물었다.

"주인장, 저놈한테 맞았습니까?"

"응? 아이고, 우리 용병대장님이셨구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꽤 친분이 있는 사이로 보였다.

'여관 단골손님이라는 말이 정말이었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건네 들은 사내가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돌려 부하를 호출했다.

"엔리케."

"예, 대장."

"너, 지금 바로 저 새끼 따라가서..."

"죽일까요?"

빌로트를 따라가라는 사내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살벌한 말을 늘어놓는 구릿빛 피부의 사내, 엔리케였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에이, 뭐야! 좋다 말았네."

하지만, 대장 사내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깔끔하게, 오른팔만 하나 잘라.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서 함부로 우리 주인장 얼굴에 손을 대?"

"... 헙!"

"헐!"

대장 사내의 명령을 듣고 놀란 후고 아저씨와 나의 입에서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닙니다, 주인장. 저런 새끼는 한번 조질 때 제대로 조져야 버릇을 고쳐요. 저대로 놔두면 나중에 저희 없을 때 와서 어떻게든 행패를 부릴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걱정스러운 얼굴의 후고 아저씨를 다독이며, 대장 사내가 재차 명령을 내린다.

"뭐해? 빨리 갔다 와."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야, 너랑 너. 따라와."

엔리케가 밑의 부하 두 명을 지목해 함께 자리를 떠난 후, 다시 웃는 낯으로 변한 대장 사내가 후고 아저씨를 보며 말을 걸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평한 목소리였다.

"자자, 이제 장사하셔야죠? 저희 배고파 죽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눈 떠서 종일 걷기만 했더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라..."

"예, 어서 들어가시죠. 제가 오늘은 특별히 음식값 안 받겠습니다."

"그래요? 어허, 그럼 오늘 이 집 기둥뿌리 뽑힐지도 모르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저희 여관 기둥이 튼튼해서요."

후고 아저씨와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나누던 대장 사내가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아, 그리고... 용감한 꼬맹이?"

"예?"

바짝 긴장한 내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그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지? 같이 먹자. 들어가서 그 상처도 좀 봐줄게."

***

"빌로트 그 새끼, 영지 북쪽에 있는 오베린(Oberin) 출신이거든. 들어봤지?"

"예."

여관으로 들어와 간단한 상처 치료를 마친 뒤, 사내는 나를 자신의 맞은편에 앉혀놓고 빌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오베린의 빌로트라고 부르지. 기사 놈들이 자기 이름 말할 때 출신 지역 붙이듯이... 어, 이거 되게 맛있네?"

테이블 위, 후고 아저씨가 정성껏 만든 닭요리를 맛보던 대장 사내가 작게 감탄했다.

"자, 이건 네가 먹어라. 너도 알지? 닭다리는 아무한테나 안 주는 거."

"아, 예. 잘 먹겠습니다."

"그, 아까 네가 그랬지? 경비대 얘기를 꺼냈더니 빌로트 그 새끼가 갑자기 눈깔 뒤집혀서 칼을 뽑았다고."

"음... 예! 그랬습니다."

우물우물, 나는 사내가 내 접시에 놓아준 큼지막한 닭다리를 열심히 씹어먹으며 대답했다.

"그 자식, 원래 오베린 도시 경비대에서 일하던 새끼였거든. 근데 뭐 맨날 도박하고 술 처먹고 사고 엔간히 치다가 경비대에서 잘린 모양이야."

"아..."

"경비대에서 일할 때 공금 슬쩍했던 것도 걸려서 상관한테 뒤지게 처맞고 옷까지 홀랑 벗겨져서 쫓겨났다지 아마? 그래서 경비대 얘기하면 발작하는 거야."

"음... 그냥 쓰레기였네요."

"뭐? 푸하하하!"

나의 깔끔한 정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내가 먹던 음식마저 내려놓은 채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너 이 자식! 점점 더 마음에 드는데? 싸움도 잘하는데 입심도 만만치 않구나."

"흐음, 제 생각도 그래요."

자신을 상대로 전혀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이 이어나가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지, 대장 사내는 식사하던 것도 잊은 채 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정식으로 통성명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눈 끝에,

"데미언,"

"예?"

"너 내 밑에서 용병 일 배워볼 생각 없냐? 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이 바닥에서 좀 하는 사람이거든. 너한테도 손해 보는 제안 아닐 거야. 어때?"

'대장 사내' 겔베르트의 입에서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 좋아요. 하겠습니다."

당연히, 승낙이었다.

왜냐고?

'크, 여기서 이 양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상태창을 통해 파악한 상대의 정체.

푸른 방패 용병대의 대장 겔베르트.

그는 게임의 원작 소설인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의 초반부에 등장해 이웃 영지와의 전쟁에 휘말린 주인공을 지키다 부하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 인물이었다.

즉, 겔베르트의 용병대에 합류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거대한 세계관의 중심인 '주인공'을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좋아! 이 자식, 입담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하구나! 환영한다!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막내야!"

"옙,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얼굴 가득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손을 내미는 겔베르트.

콰악!

거친 굳은살로 가득한 그 손을 힘껏 마주 잡으며,

나는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푸른 방패'의 막내 대원이 되었다.

푸른 방패 용병대 (2)

2년 후,

신성력(神聖歷) 782년,

펠리노어 왕국 남부, 텔마르크의 주도(主都) 크라벤(Kraven)_

시설은 다소 허름하지만, 주인장의 푸근한 인심과 맛좋은 음식들로 인기가 많은 여관 '친절한 당나귀'.

그 여관 건물 앞쪽 공터에 몰려든 한 무더기의 사내들의 무언가를 지켜보며 열심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흔여섯... 아... 아흔일곱... 크으으으!"

"야야, 막내야! 이제 세 개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와이씨, 저 미친놈! 진짜로 백 개를 채운다고?"

"푸흐흐! 내가 말 했지? 막내 저 새끼, 생긴 것만 곱상하지 아주 지독한 놈이라니까?"

"저 자식 지독한 거 누가 모르냐? 근데 이건 다른 문제 아냐!"

"흐으읍, 아흐은... 여덟...!"

"아자차! 이제 두 개 남았다!"

"씨발, 조졌네... 하아!"

"아흐은... 아호옵...!"

"막내야, 마지막이다! 마지막! 으하하하!"

"딱 한 개만 더! 가즈아아아아아!"

상의를 벗어 던진 채로 바닥에 엎드려 쉬지 않고 팔굽혀 펴기를 하는 금발 머리의 소년.

소년에 등 위엔 한눈에 보아도 무거워 보이는 큼지막한 돌덩이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을 둘러싸고 마치 도박장에 모여든 꾼들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열광하는 사내들.

이들은 바로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었다.

"으아아아아... 배-애액!"

금발 머리 소년의 입에서 백 번째 팔굽혀펴기를 알리는 외침이 터져 나오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의 표정이 두 패로 갈린다.

"이야아아아아아!!!"

"야, 봤지? 봤지! 내가 저 새끼 백 번 한다고 했잖아!"

"아오, 시발! 망했네! 나 진짜 이번 달에 쓸 돈 거덜 났는데!"

"푸훗! 그러게 신중했어야지!"

"그러게. 인마! 너는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말도 모르냐?"

"허이구, 개소리하네. 맨날 도박장 가면 돈 잃는 새끼가..."

"자자! 잔말 말고 돈이나 내놔, 이 새끼들아. 막내가 못 할 거라는 쪽에 걸었던 놈들 5실버씩 내놓으시고!"

"크흠, 맞다. 나 아까 대장이 뭐 시킨 게 있었는데 깜빡하고 있..."

"에헤이! 조장! 갈 거면 돈 내놓고 가요! 누굴 지금 호구로 보시나..."

"알았어, 인마! 이 새끼들이 진짜 누굴 돈 떼어먹는 그런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고... 에이!"

쩔그렁-

소중하게 쥐고 있던 은화 다섯 개를 돈 내놓으라며 닦달하는 부하에게 넘겨준 엔리케.

"아오, 짜증 나! 오늘 술값 날렸네!"

씨근덕거리며 고개를 돌린 그가 땀범벅이 되어 바닥에 엎어진 소년을 붙잡아 일으킨다.

"야, 이씨! 넌 진짜 뭐 하는 놈이냐?"

"후우... 예에? 무슨 말이에요?"

선배의 볼멘소리를 들은 소년이 땀에 젖은 금발 머리를 쓸어올리며 밝게 웃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소년의 머리칼을 흔들고, 맑은 날의 햇빛이 그 위로 부서져 내리며 말로 다 설명 못 할 반짝임을 만들었다.

그 아래로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아름다운 녹안(綠眼)이 보였다.

머금은 그 눈빛이 해가 갈수록 더욱 진해져 오묘한 신비스러움을 풍겼다.

원래도 높았던 콧날과 날렵한 턱선엔 조금씩 남자다움이 묻어나기 시작하고, 몰라보게 살이 오르고 탄탄해진 몸은 이제 소년이 남자가 되어 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성년을 한 해 앞둔 나이, 열일곱.

푸른 방패의 막내 데미언이 얼굴 가득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쓸어내며 불퉁거리는 선배의 말을 경청한다.

"아니, 너 팔굽혀펴기 평소에 잘 안 하지 않아? 왜 이렇게 잘 하는데? 심지어 더럽게 무거운 돌덩이까지 올리고!"

"하아... 하아... 저 원래 다른 훈련 안하고 팔굽혀펴기만 하면 한 이백오십 개까지는... 후우! 그냥 해요. 평소엔... 아이고, 숨 차! 다른 훈련 할 게 많아서... 하! 체력 아끼려고 굳이 안 하는 거지. 후우... 아, 근데 돌덩이 지고 하니까 확실히 빡세긴 하네요."

"이런 미친... 뭐, 하긴. 네가 평소에 하는 훈련이 좀 빡세야지."

헐떡이는 숨을 참아가며 대답하는 데미언의 모습을 보며, 엔리케가 새삼스럽다는 듯 말한다.

2년 전, 우연한 기회로 푸른 방패 용병대에 들어오게 된 막내 데미언.

처음 들어왔을 때도 열다섯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지막지한 검술 실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던 녀석이다.

그러나 빈민가 출신의 고아답게 제대로 못 먹고 자라서인지, 체력과 힘이 약해 지닌 검술의 위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데미언에게선 깡 말랐던 그때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너 처음 용병대 들어왔을 때 생각하면 같은 놈이 맞나 싶다. 그땐 진짜 비쩍 꼴아 가지고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은 뭐... 어휴!"

숨을 헐떡일 때마다 그림을 그린 듯 선명하게 드러나는 데미언의 복근을 보며 엔리케가 작게 감탄을 터트린다.

"에이, 몸은 조장도 좋으시잖아요."

"아니야, 인마. 나 요즘 술배 나와서 큰일이야."

"그러게 술 좀 적당히 드시지... 그리고 저랑 같이 오전 훈련하자니까요? 딱 훈련하고 점심 먹으면 상쾌하고 좋잖아요."

"야, 이씨! 그런 건 너나 해! 너는 어려서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너처럼 하면 바로 골병든다."

오전 훈련을 같이하자는 말에 엔리케가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옆에서 지켜본 그가 생각하기에, 데미언이 하는 훈련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달궈준다.

말이 '아침 일찍'이지, 거의 새벽닭이 울 때쯤 일어나는 거라 엔리케처럼 술 좋아하고 아침잠 많은 사람은 따라 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달리기로 몸을 풀어준 후엔 여관 근처 공터에 가져다 둔 커다란 바윗돌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가 다시 바닥으로 던지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한다.

엔리케도 궁금함에 몇 번 따라 해본 적이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힘든 훈련이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처음엔 꼬맹이 머리통만 한 걸 들고 하더니... 요즘엔 아예 호박만 한 돌을 가져다 놨더라?"

"아, 예. 이제 그 정도는 되어야 운동이 되니까요."

데미언이 만들어낸(?) 훈련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엔 굵직한 밧줄 두 개를 가져다가 쇠말뚝에 묶은 뒤 반대편에서 밧줄 끝을 잡고 아래위로 물결치듯 계속해서 흔드는 기묘한 훈련을 만들었는데, 이것 역시도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 두 가지 신기한 훈련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데미언은 검을 잡았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찌르기 같은 기본적인 동작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연습하고, 그 후엔 각각의 동작을 연계해서 펼쳐내는 식으로 또다시 수십 번을 반복한다.

여기까지가 데미언이 말하는 소위 '오전 훈련'의 일정이었다.

"너 근데 점심 먹고 또 훈련하잖아. 안 힘드냐?"

"힘들죠. 힘든데...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일하다가 안 죽으려면."

엔리케의 말처럼, 데미언은 오후에도 치열하게 훈련에 몰입했다.

오전이 기본기에 충실한 시간이라면, 오후는 기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시간이었다.

처음 용병대에 들어올 때부터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정체 모를 검술을 열심히 갈고 닦았고, 이후엔 대장 겔베르트 혹은 부대장 메이슨을 찾아가 대련 시간을 가졌다.

용병대의 서열 1위와 2위가 번갈아 가며 막내의 훈련을 돕는 실로 희귀한 그림.

이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두 사람을 제외하면 푸른 방패 용병대 내에서 검으로 데미언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너 인마, 혹시 내 자리 노리는 거 아니지? 응? 그럼 아주 배신이야, 배신!"

툭, 후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엔리케가 농담 반, 진담 반의 짓궂은 장난을 걸어온다.

그러자 데미언이 손사래를 치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진짜 아닙니다! 저 같은 초짜가 무슨... 그깟 칼질 좀 한다고 조장 될 수 있으면 개나 소나 다 하게요? 조장 달려면 기본적으로 경험이랑 인성이 받쳐줘야죠.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더 바닥에서 굴러야죠, 선배님들 모시면서."

"크으, 막내 이 새끼! 너는 진짜 칼 쓰는 솜씨보다 혓바닥 굴리는 게 더 예술이라니까?"

"에헤이, 혓바닥을 굴리다뇨! 평소 생각하던 걸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아이고, 알았어 인마! 자, 들어가자! 오늘은 특별히 내가 우리 이쁜 막내한테 소시지 쏜다!"

"하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

"대장, 뭐하십니까?"

"음? 아... 머저리들이 머저리 짓 하는 거 보고 있었지."

여관 '친절한 당나귀'의 2층 객실.

열린 방 창문을 통해 부하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겔베르트에게 메이슨이 찾아왔다.

"그나저나 막내 저놈, 대단하네. 바윗돌 등에 지고 팔굽혀펴기 백 개를 쉬지도 않고 했어."

"음... 확실히,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대단하긴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땐 뭐 전체적으로 다 부족했으니."

"음... 확실히,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대단하긴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땐 뭐 백 개는커녕 서른 개도 겨우 하는 정도였는데..."

무성하게 자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겔베르트가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저 자식 훈련하는 거 보면 진짜... 어우, 난 죽어도 못 해."

"아무래도 나이가 어려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워낙 회복력이 좋을 나이니..."

"아니, 그 반대지. 나이가 어리니까 저렇게 할 수가 없는 거라고. 난 저 나이 때 저렇게 빡세게 훈련 안 했어."

"하긴... 한창 하고 싶은 거 많고 끈기가 부족할 나이니까요. 그때 군에 처음 입대했던 저도 저렇게는 안 했습니다."

"내 말이 그거야. 으아, 저 독한 놈... 일 없을 때 오전 오후 나눠서 두 번 훈련하는 거, 그거 2년 내내 했지?"

"예. 심지어 비 오는 날엔 실내에서 맨몸 운동도 했습니다."

"후우... 참, 내가 꼬셔서 우리 용병대 데리고 왔다만 진짜 이 정도로 대단한 놈인지는 몰랐지. 징그럽다, 징그러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겔베르트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누가 뭐래도 데미언은 겔베르트 그의 자랑스러운 제자였기 때문이다.

"쓰읍, 저러다 너무 무리해서 다치는 건 아닌지 몰라."

"의외로 철저하게 휴식 시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저렇게 훈련하면, 다음날은 오전에 달리기만 하고 푹 쉬더군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체계적이고 철저합니다."

"흐음... 참, 신기해."

"뭐가 말입니까?"

메이슨의 궁금한 눈빛을 받은 겔베르트가 피식 웃는다.

"메이슨, 너 말이야. 막내 얘기할 때 말 엄청 많아지는 거 알아? 원래는 하루에 몇 마디도 안 하는 녀석이."

"... 크흠, 그렇습니까."

겔베르트의 지적에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는 메이슨이었다.

"뭐, 스승의 영광은 엄연히 내 것이다만 메이슨 너 정도면 '수석 조교' 자리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 사양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침에 다녀오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평소라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자다 일어나 엔리케를 비롯한 부하들을 갈구며 하루를 시작했을 겔베르트.

하지만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을 해야 했다.

겔베르트가 이끄는 푸른 방패 용병대를 상대로 '지명 의뢰'를 해온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아침에 길드 들러서 길드장이랑 얘기하고 왔다. 의뢰 내용이 개떡 같으면 대충 얘기 들어주다가 깔 생각이었는데..."

"...?"

"막상 가보니까, 의뢰를 받을 수밖에 없더라고. 우리가 의뢰를 받고 자시고 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대였다."

"예? 대체 누가 의뢰를 했기에...?"

겔베르트가 꺼낸 말에 절로 심각한 얼굴이 된 메이슨이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카림 다보르... 그 자식이, 이번 임무의 의뢰인이야."

멘하우 요새 공방전 (1)

총 스물세 명으로 이루어진 푸른 방패 용병대의 모든 인원이 모인 자리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부하들이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대장 겔베르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번 의뢰는 지명 의뢰다. 근데, '거절할 수가 없는' 의뢰야."

쓰읍, 그 말을 하면서 쓴 입맛을 다시는 겔베르트.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이 의뢰를 제안한 상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왕국 내에 서른 남짓한 금패 용병이자 텔마르크 영지 최강의 용병대라 불리는 푸른 방패의 리더인 그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상대라면...?

"그, 대장님 표정이 왜... 누가 의뢰를 넣었길래 그러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엔리케가 모두를 대신해 질문을 던지자, 미리 대답을 준비하고 있던 겔베르트가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의뢰인은 '카림 다보르'다. 너네처럼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없는 멍청이들도 그 이름 정도는 알겠지."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대원들이 눈에 띄게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카림... 다보르?"

"어? 나 들어본 적 있어!"

"아씨, 누구더라? 왜 익숙하지?"

"그... 뭐야, 우리 영지에서... 엄청 높은 사람 아닙니까? 예?"

"어, 맞아! 맨날 영주 움직일 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사람이잖아?"

"이 등신들아! 그냥 높은 사람 아니고, 텔마르크 영지 재무관이잖아!"

누군가가 꺼내놓은 답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영지 재무관이라면, 그야말로 영지 내의 돈줄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요직 중의 요직.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요직(要職)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영지 내에선 '절대자'라 부를 수 있는 영주의 신뢰를 받는 자리라는 뜻이다.

"아니, 재무관이 직접 우리한테 의뢰를 줬다고요? 어디 전쟁이라도 한답니까?"

늘 능글맞던 엔리케가 평상시의 장난기를 싹 지워내며 물었다.

그의 말처럼 영지 재무관씩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나서서 특정 용병대를 지명해 의뢰를 맡기는 데 단순한 심부름일 리가 없지 않겠는가?

"전쟁까진 아니다만... 뭐, 비슷하지. 의뢰받은 내용은 호위 임무다. 일주일 후 크라벤을 출발하는 짐 마차를 호위해 무사히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게 우리의 목표다."

"엥? 짐 마차 호위요?"

"뭐, 그 정도면 평범한 임무 아닙니까?"

"그러게. 난 또 뭐 엄청난 게 있는 줄 알았네..."

"뭐야, 대장! 왜 괜히 무게를 잡고 그래요! 놀랬잖아요!"

생각보다 별 것 없는 의뢰의 내용에 분위기가 흐트러지려던 그 순간,

"참고로 마차의 목적지는... 브렌도르프 영지 남부에 있는 멘하우(Menhau) 요새다."

"...!"

겔베르트의 입에서 나온 의뢰 목적지를 들은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다.

멘하우 요새가 있는 브렌도르프 영지는 현재 이웃한 벨가르트 영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두 영지의 경계에서 발견된 구리 광산의 소유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는데, 전황은 재빠르게 선제공격을 감행한 벨가르트 측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었다.

"텔마르크의 영주 라이만 남작과 브렌도르프의 영주 클루게 남작, 둘 다 그뢰네마이어 백작의 봉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 그래서 텔마르크가 브렌도르프를 지원하기로 한 겁니까?"

"그래. 우리가 호위할 마차엔 멘하우 요새의 병사들이 먹을 식량과 무기들이 실려있다."

"군수 물자 수송이라... 젠장, 벨가르트 놈들이 눈이 뒤집혀서 우릴 잡아 죽이려 하겠군요."

이번 임무에서 겪게 될 어려움의 이유를 정확하게 꼬집는 엔리케의 말에 겔베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텔마르크 영지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브렌도르프로 들어가는 순간 놈들의 표적이 될 거다."

"하..."

진하게 풍겨오는 위험의 냄새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린다.

이렇게 특정 목표를 호위해가며 싸우는 것이 대놓고 전투 목적으로 투입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임무였기 때문이다.

"출발은 일주일 후다. 그 기간 내에 각자 필요한 거 빠짐없이 준비하고. 특히 방어구는 확실하게 손봐라."

"옙, 알겠습니다!"

"좋아, 전달 사항 끝. 해산!"

***

짧았던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술 먹자고 꼬시는(참고로, 나는 아직 미성년자다) 조장 엔리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올라온 여관 2층의 내 방.

어두운 방을 밝히는 양초 하나를 피운 뒤,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브렌도르프라..."

텔마르크의 북쪽에 위치한 남작령 브렌도르프(Brendorf).

영지 전체에 숲이 무성해 좋은 목재를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브렌도르프는 다른 쪽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브렌도르프... 성지가 있는 곳이지."

성지(聖地) 에셀바흐(Esselbach).

에셀바흐는 대륙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의 절반이 믿고 따른다는 아르닌 교의 여러 성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땅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백여 년 전, 아르닌 교의 창시자인 '선지자(先知者)' 하인델(Heindel)이 그의 생애 처음으로 기적을 행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곳엔...

"이번 기회 아니면 그 근처 갈 일이 없을텐데... 무조건 가야지, 무조건!"

지금의 나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 줄 두 번째 히든 피스,

'구원의 성배(聖杯)'가 있었다.

***

일주일 후,

브렌도르프 남부의 한 평원_

사방이 막혀 있던 숲을 벗어나 탁 트인 평원으로 나오자 멀리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저기 슬슬 보이는 거 같습니다, 대장."

반가움이 묻어나는 엔리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한참 더 걸어가야 닿을 거리였지만, 일단 목적지가 눈에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피로했던 다리에 힘이 붙는 기분이었다.

"흐음... 반나절 정도 더 걸어가면 도착하겠네."

눈으로 보이는 거리를 대충 가늠한 겔베르트가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금패 용병인 그의 말이니,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다들 상태 어떠냐? 어디 불편한 곳 없지?"

"옙, 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몸 상태를 묻는 겔베르트의 질문에 모두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텔마르크 영지의 주도(主都) 크라벤을 출발해 브렌도르프의 멘하우 요새로 향하는 길.

출발한 지 닷새째가 되는 날이었지만, 지금까지는 텔마르크 영지 내에서만 이동했기에 별달리 문제 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영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숲을 넘어 브렌도르프 땅으로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전원 정지, 여기서 잠시 정비 시간을 갖는다."

"전원 정지이이이이!"

선두에 서 있던 겔베르트의 말을 옆에 있던 부하가 큰 목소리로 복창했고, 그 순간 용병대와 짐 마차를 끄는 수행원을 포함한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 메이슨."

"예, 대장."

"저 앞에 정찰 나가 있는 애들 이제 들어오라고 해. 그런 다음에 네가 직접 애들 둘 데리고 나서 주변 돌아봐."

"알겠습니다."

"정찰 범위는 두 배로 늘린다. 더 멀리, 더 넓게 돌아보면서 멘하우 요새로 가는 길에 위험 요소는 없는지 살펴봐"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겔베르트의 지시를 받은 메이슨이 서둘러 무리를 빠져나간다.

용병대 서열 2위인 메이슨을 직접 정찰에 투입하는 모습에서, 모두가 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흐음... 엔리케."

"예, 대장."

메이슨을 정찰 임무에 투입한 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것일까?

겔베르트가 이번엔 엔리케를 호출한다.

"저기, 오른쪽에 있는 언덕 보이냐?"

"... 예, 보입니다."

"저리로 올라가서 동쪽에 있는 숲 감시해. 혹시라도 숲에서 벨가르트 놈들 튀어나오면 바로 신호 보내고. 효시(嚆矢, 화살촉을 피리 구조로 만든 화살. 아군에게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쓴다) 챙겨 왔지?"

"옙, 챙겼습니다."

"그래. 언덕 위에서 계속 감시하다가, 적당할 때 뒤에 따라붙어. 혹시 모르니 짝으로 막내 데려가고. 움직여."

"알겠습니다. 막내, 가자!"

"예!"

***

꽤 경사가 있었지만, 나와 엔리케는 숨 한번 거칠어지지 않고 단숨에 언덕을 뛰어올랐다.

"후! 위치 좋다, 잘 보이네."

언덕 위 큼지막한 바위 곁에 바짝 엎드린 엔리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숲을 관찰한다.

용병대 최고의 활잡이답게, 엔리케는 눈이 정말 좋았다.

과장을 조금 섞어 날아다니는 매나 독수리와도 겨뤄 볼 만하다는 농담을 우리끼리 할 정도였으니...

"조장, 뭐 좀 보여요?"

나의 물음에, 심각한 표정이 된 엔리케가 숲의 어딘가를 응시한다.

"아직은 뭐가 안 보이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숲을 감시하던 엔리케.

별안간 그가 엎드려 있던 자세를 바꿔 벌떡 일어서더니, 등에 매여 있던 효시 한 발을 꺼내 들었다.

"막내야, 벨가르트 놈들 떴다!"

"?!"

엔리케의 말을 듣고 바로 숲을 바라보았지만, 아직 내 눈엔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두두두두두두!

"헉!"

무성한 수풀을 해치며 모습을 드러낸 한 떼의 기병들!

거리가 멀어 놈들의 소속을 정확한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우리 용병대가 이끄는 짐 마차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들이 어떤 깃발 아래서 싸우는 이들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거 쏘면 바로 뛰어 내려가자! 철수 준비해!"

"옙!"

투웅-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익-!

엔리케의 손끝에서 풀려난 효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른다.

동시에 우리는 땅을 박차며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장, 저 새끼들 우리 본 것 같은데요?"

"어, 나도 봤어!"

하늘을 뒤덮은 효시의 울림은 적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무섭게 달려나가던 적의 무리 중 몇 놈이 우리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하나, 둘, 셋.

총 3기의 적 기병이 본대를 이탈해 우리에게 달려온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놈들과 우리의 거리만큼 가슴 속의 긴장감도 차오르기 시작했다.

촤앙! 촤앙! 촤앙-!!!

검을 뽑아 들며 본격적인 공격 태세에 들어가는 녀석들.

다행인 것은, 놈들 역시 정찰대였는지 무장 상태가 가벼웠다는 것.

묵직한 사슬 갑옷이나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중기병과 달리 가벼운 천 갑옷을 입은 경기병이었다.

그 얘기인즉, 방어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투우웅-!!!

쐐애액-! 퍼억!

"쿠엑-!!!"

엔리케가 쏘아낸 화살에 적중당한 적 기병 하나가 목을 움켜잡으며 말 아래로 떨어진다.

우지직, 목뼈가 부러지는 음산한 소리는 지척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묻혀 사라져 버린다.

이로써 2 대 3의 대결은 순식간에 2 대 2의 구도로 바뀐다.

"활 든 놈을 조심해! 산개!"

엔리케가 보여준 귀신 같은 활 솜씨에 한순간에 동료를 잃은 적들이 깜짝 놀라며 대형을 널찍하게 바꾼다.

하지만 이미 예열이 끝난 엔리케의 활은 자비 없이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니...

퉁-! 퉁-!

거의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가는 두 대의 화살.

퍽-! 퍽-!

한 대의 화살은 정확하게 말의 머리통을 맞췄고, 뒤이어 날아온 화살은 그 위에 올라탄 기수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끼후우우우우!!!"

"끄아악-!"

머리통에 화살을 얻어맞은 말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몸을 뒤집으며 쓰러지고, 가슴팍에 화살을 꽂은 기수는 말 등에서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에서 머리부터 떨어졌으니 그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절명(絶命).

우세했던 적의 전력이 순식간에 열세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야, 막내야! 내가 두 놈 치웠다아!"

"예, 남은 놈을 저한테 맡기세요!"

엔리케의 말에 대답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다.

스릉, 촤아아앙-!

완벽의 경지에 다다른 발검(拔劍).

검을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감탄을 금치 못할 그 광경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상대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 테지만, 이미 늦었다.

"흐아아아앗!!!"

힘찬 함성과 함께, 나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멘하우 요새 공방전 (2)

"이야, 이 미친놈! 허으! 허억! 너는 어떻게 사람이랑 말을 통째로 베냐? 그게 가능해?"

"후우! 후우! 가능하니까, 했겠죠?"

나와 엔리케는 우리를 노리고 달려온 3기의 적 기병을 순식간에 처리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본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평소 행실은 망나니(?) 그 자체였지만, 활 솜씨만큼은 귀신 같기로 유명한 엔리케가 가볍게 화살 세 대로 두 명의 적(과 한 마리의 말)을 처리했고, 나는 단 한 번의 칼질로 내게 달려들던 말과 사람을 동시에 베어버리는 절정의 기예를 선보였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힘으로,

정확한 위치를 벤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해내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그 일을 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해냈다.

검성(劍星)이라 불리던 사나이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후우! 그나저나, 본대는 괜찮겠죠?"

"괜찮을 거야. 신호 보내자마자 본대 쪽에서 깃발... 하이고, 힘들어! 흔드는 거, 봤거든!"

그렇다면 걱정할 게 없었다.

깃발을 흔들었다는 건 우리의 신호를 확인했다는 뜻.

이런 상황을 대비해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더구나 현재 본대를 이끄는 이는 대장 겔베르트.

텔마르크 영지 최강 용병대의 대장 자리는 도박장에서 딴 것이 아님을 증명해낼 것이다.

"그래도... 허억! 혹시, 모르니까! 빨리! 가보자고!"

"알겠습니다! 흐아아아!"

"가, 같이 가! 이 새끼야!!!"

***

"조장! 저기 보입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부하의 외침에, 무리를 이끌던 벨가르트의 경기병 정찰조장이 눈을 빛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가도를 따라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이동 중인 넉 대의 짐 마차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사방을 경계하며 걷는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첩보수집을 통해 알려진 텔마르크 측의 지원 물자가 분명했다.

"조장! 어떻게 합니까? 공격합니까?!"

"어서 명령을!"

부하들의 물음에 잠시 망설였지만, 정찰조장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이대로 들이친다! 모두 공격 준비!"

"공격 준비이이이이이!"

촤앙! 촤앙! 촤앙! 촤앙! 촤아앙!

총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벨가르트의 경기병 정찰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무장 상태는 그리 특출나 보이지 않았지만, 적의 숫자는 얼핏 보아도 아군의 두 배 이상,

하지만 힘차게 말을 달리는 그들의 눈에선 일말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기병(騎兵)이었다.

감히 인간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덩치와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 말 위에 올라타 적과 싸우는 이들.

무장 상태가 가벼운 정찰 목적의 경기병들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기병의 전투력은 보병의 몇 배에 달했기에 두 배 정도의 숫자 차이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뒤늦게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린 짐 마차 주변의 용병들이 혼비백산하며 전투 대형을 갖추는 게 보였다.

"하하하! 이미 늦었다, 이 새끼들아!"

"우아아아아아아!"

호쾌한 함성을 터트리며 적에게 돌입하는 벨가르트의 기병대.

달려온 속도 그대로, 폭풍처럼 돌진해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의도였으나...

"지금이다, 모두 무기 들엇!!!"

그 지나친 자신감이, 이 순간 독(毒)이 되었다.

***

멀리 언덕 위에서 엔리케가 제대로 경고해준 덕에 겔베르트가 이끄는 본대는 제대로 준비를 한 상태에서 적 정찰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야, 준비했던 거 다 꺼내!"

"알겠슴돠아!"

푸른 방패의 대원들은 마차에 미리 실어두었던 대(對) 기병용 장창과 큼지막한 방패를 꺼내 길옆의 수풀에 숨겼다.

언제든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번 임무가 시작되기 전 겔베르트가 가려 뽑은 대원 다섯 명은 장창과 방패 대신 준비했던 활과 화살을 마차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활 잘 쏘기로 영지 내에 이름 높은 엔리케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 준수한 활 솜씨를 지닌 대원들이었다.

"다들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깝치지 마라, 알았냐?"

"어휴, 대장! 말 좀 이쁘게 해요! 깝치지 말라는 게 뭡니까?"

"알아들었으면 됐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뒤질래?"

"쳇, 하여간 성격 더러운 건 진짜..."

"대장! 슬슬 옵니다!"

"전원 아가리 다물어! 지금부터 나 말고는 입도 뻥긋하지 마, 이 새끼들아!"

"...!"

순식간에 찾아온 침묵.

평소엔 대장에게 깐족거릴 기회만 노리는 하이에나들이었지만, 실전 상황엔 둘도 없이 충성스러운 늑대들로 변하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득의양양 미소를 지은 채 달려오는 벨가르트의 기병들.

"으, 으아아!"

"기병이다, 기병!"

"시발! 도망쳐!"

"야야, 같이 가!!!"

겔베르트와 그의 부하들은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며 다져온 내공의 깊이를 보여주듯, 혼란에 빠진 삼류 용병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그 모습을 본 적들은 더욱 방심할 수밖에 없었고.

"하하하! 이미 늦었다, 이 새끼들아!"

"우아아아아아아!"

신이 난 벨가르트 기병대의 목소리가 대원들에게 들릴 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지금이다, 모두 무기 들엇!!!"

겔베르트의 성난 외침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텅! 텅! 터텅! 텅! 텅! 텅! 터터텅!

수풀 속에 숨겨져 있던 큼지막한 방패가 들어 올려져 바닥에 힘껏 내리꽂힌다.

차르르르르르르륵!

그리고 그 방패 위로 마치 가시가 돋아나듯 기다란 장창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시에 마차 위로 뛰어오른 다섯 명의 사수가 준비했던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다.

"이런 씨발!!!"

순식간에 완성된 대(對) 기병용 방진을 본 벨가르트의 정찰조장이 기겁하며 욕설을 내뱉었지만, 말머리를 돌리기엔 이미 너무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푸푸푸푸푸푹!

"끄아아악!"

"쿠웨엑!"

"끼후후후후훙!"

가장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던 적들의 몸에 검붉은 색깔의 꽃이 수두룩하게 피어난다.

어떤 창은 사람을, 어떤 창은 말의 몸통을 찔렀다.

작정하고 준비된 창날의 날카로움은 사람과 말, 그 모두를 단번에 꿰뚫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이 개새... 커흡!"

슈슈슈슛! 퍽! 퍼퍽! 퍽!

용케 말 머리를 돌려 창날의 벽을 피한 이들은 마차 위에서 쏘아진 화살의 제물이 되었다.

아무리 엔리케만 못한 활 솜씨라지만, 지척까지 다가와 허둥대는 먹잇감을 놓칠 만큼 바보는 아니었던 마차 위의 대원들.

그들이 착실하게 쏘아붙인 화살들이 혼란에 빠진 벨가르트 기병들의 몸통에 실수 없이 꽂히기 시작했다.

"그물 던져! 이 시발 새끼들, 다 떨어뜨려!!!"

장창 방진으로 기병대의 1차 돌진을 저지한 겔베르트가 준비했던 다음 작전을 꺼내 들었다.

휭! 휭! 휭!

곧, 끝에 금속 추를 달아 무게를 더한 그물 여러 개가 아직 말 위에서 버티고 있던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흑! 이, 이런 젠장!"

"이런 시발! 개 같은 새끼들... 으윽!"

온몸을 덮은 그물에 팔다리가 엉켜 허우적대는 적들.

"자, 당겨어어어어!"

"흐아아아아!"

상대가 그물에 완전히 걸려든 것을 확인한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 있는 힘껏 그물을 잡아당겨 적을 낙마시킨다.

"으와아아아아!"

"야, 조져!"

"뒈져, 이 새끼들아!"

말 위에서 떨어진 기병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더구나 상대는 정신없는 난전(亂戰)에 특화된 베테랑 용병들이 아니던가?

"사, 살려주... 컥!"

"살려주긴 시발, 여기 놀러 왔냐? 잔말 말고 뒤져 이 새끼야!"

푹! 스걱! 촤아악!

말에서 떨어진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적들을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 줍듯 손쉽게 처리하는 푸른 방패의 대원들이다.

"흐랏차!"

휘우우우웅, 콰직!!!

벼락처럼 떨어진 검에 얻어맞은 상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단숨에 머리통이 쪼개졌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푸화아아악!

사방으로 뿜어진 피 분수가 망자(亡者)의 비명을 대신했다.

"한 새끼도 놓치지 마! 빠져나가는 놈 있으면 골치 아파진다!"

방금 검을 휘둘러 적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쪼갠 겔베르트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처럼, 여기서 빠져나가는 놈이 생긴다면 벨가르트의 후속 부대가 몰려와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어잇, 씨발! 대장! 저기요, 저기! 한 새끼 튑니다!"

"뭐? 이런 젠장!"

부하가 손가락질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겔베르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운 좋게 탈출에 성공한 적 하나가 말을 타고 냅다 도망치고 있었다.

"야! 저 새끼 쏴! 놓치면 안 돼! 우리 다 뒤진다!!!"

퉁! 투퉁! 퉁! 투웅-!

겔베르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차 위에서 날아가는 다섯 발의 화살.

그러나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상대를 먼 거리에서 맞추는 것은 그야말로 활의 달인이나 가능한 일.

쏘아진 다섯 발의 화살 모두가 맥없이 빗나가 버리고, 재차 시위에 화살을 걸었을 땐 이미 상대가 활의 사정거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흐으으읍!"

투우웅-!

다급해진 그가 부하에게 활을 건네받아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겨보았지만, 날아간 화살은 적에게 닿지 못하고 애먼 곳에만 꽂힐 뿐이었다.

"하, 시발... 좆 됐네."

싸우다 팔이 잘린 것인지, 피 뿌리는 팔꿈치를 덜렁거리며 빠르게 멀어지는 적의 모습에 겔베르트가 이를 악문다.

기병으로 유명한 벨가르트의 기수답게 남은 왼손 하나만으로도 능숙하게 말을 몰아가는 모습이 실로 대단했지만, 푸른 방패 용병대의 모두는 감탄 대신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빨리 짐 싣고 튀자! 저 새끼가 가서 다른 새끼들 데려오기 전에!"

"짐 챙겨 빨리! 해 떨어지기 전에 멘하우 요새에 들어간다!"

"아, 알겠습니다!"

"방패부터 빨리 실으라고 새끼들아!"

"인마, 저기 물통 떨어졌잖아! 빨리 주워!"

"끄으응... 어우, 씨! 야, 무겁다! 같이 좀 들자!"

"재깍재깍 움직여! 벨가르트 새끼들 뛰어오는 소리 벌써 들린다!"

겔베르트 이하 모든 대원이 정신없이 악을 쓰며 출발 준비를 하던 바로 그때,

"야! 빨리빨리 움직... 응?"

입으로 부하들을 닦달하며 멀어지는 적의 모습을 바라보던 겔베르트의 표정에 황당함이 떠오른다.

저 멀리, 잘 도망가던 적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대에 머리를 얻어맞고 말에서 떨어지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 저거..."

그리고 겔베르트는,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상대의 머리를 정확하게 맞출 정도로 대단한 활 솜씨를 지닌 이를 한 명 알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봤냐? 봤어! 신이 내린 이 몸의 활 솜씨를! 아이고, 겔베르트 씨? 나 없으면 어쩌려고 맨날 이러십니까? 크하하하하핫!"

반짝이는 금발 머리의 소년과 함께 길게 자란 수풀 속에서 나타난 부러진 앞니의 사내.

막내 데미언과 함께 언덕 위로 정찰 임무를 나갔던 푸른 방패 용병대의 제 2조장, 엔리케였다.

"허..."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반가운 그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 겔베르트.

주변 가까운 부하들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가 혼잣말을 내뱉는다.

"... 진작 좀 오지. 에이, 시발놈."

멘하우 요새 공방전 (3)

브렌도르프 남부,

멘하우 요새_

"대장님, 영주님이 보낸 지원은 아직입니까?"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말하는 부하들의 눈빛이 간절하다.

하지만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Dirk Kehrer)는 부하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곧 도착할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보자."

"젠장! 벌써 사흘째 건더기 없는 멀건 죽만 먹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이제 하루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판국이라구요!"

얼굴 이곳저곳에 피딱지가 말라붙은 백인대장 하나가 버럭 성질을 내며 말했다.

평상시라면 그 태도의 불손함을 물어 크게 나무랐을 테지만, 케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악전고투를 거듭 중인 부하들의 울분을 받아내는 것 또한 지휘관의 의무였으니까.

"다들 힘들다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지원은 반드시 올 거다."

"... 알겠습니다."

낙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부하들.

잠시 후,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은 케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빌어먹을!"

얼굴을 감싸 쥔 그의 두 손 사이로 나지막한 욕설이 새어 나온다.

제대로 준비가 되기도 전에 시작된 전쟁이었다.

기병으로 유명한 벨가르트답게 놈들은 개전 초기 기동력의 우위를 살려 영지 경계선 부근의 마을 이곳저곳을 동시에 타격했다.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긴 브렌도르프는 적이 강요한 전장으로 끌려다니며 패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2백여 명의 상비 전력이 있었던 멘하우 요새.

그러나 사방에서 빗발치는 구원 요청에 응하느라 그 절반에 달하는 병력이 요새를 빠져나갔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벨가르트의 본대가 총 5백의 병력으로 멘하우 요새를 들이쳤다.

그렇게 시작된 1백 대 5백의 싸움.

성벽의 단단함에 기대 압도적인 병력의 열세를 어찌어찌 극복해나가고 있다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요새 안에 비축되어 있던 물자가 바닥을 보이면서 수비군의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던 것.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외부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전달된 척후조의 보고는 케러가 붙잡고 있던 마지막 한 가닥 희망까지 무너뜨리고 말았다.

[벨가르트 군이 브레스덴에서 멘하우로 향하는 가도를 점거 중. 현재로선 브레스덴으로부터의 이른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 다른 방향으로의 활로 모색이 필요]

브렌도르프의 주도(主都) 브레스덴과 이어지는 가도를 적이 점거하고 있어 지원이 어려울 것이라는 척후조의 보고.

요새를 포위한 적의 병력은 다섯 배, 식량은 다 떨어진 데다 지원은 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이대로는 무리다. 하루나 버틸 수 있을지..."

슬며시 머릿속에 '항복'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하던 그때,

쿠당탕!

"대, 대장님!!!"

부서질 듯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의 부름에, 케러는 얼굴을 감싸 쥐었던 손을 떼었다.

"... 무슨 일이냐."

"전령이 왔습니다! 보급 물자가 요새 근처에 당도했다는 소식입니다!"

"보급 물자? 그게 무슨... 브레스덴에서 오는 보급로는 죄다 막혔을 텐데?"

병사가 전한 보고를 들은 케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병사의 말엔 케러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텔마르크입니다! 텔마르크 영지에서 우리에게 보급 물자를 보냈습니다!"

***

전령 도착 몇 시간 전,

멘하우 요새 근방의 숲_

"... 벨가르트 놈들이 이미 요새를 포위 중이라고?"

우리는 정찰 임무를 마치고 본대로 복귀한 메이슨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들어야 했다.

"예. 요새로 이어지는 주요한 도로는 모두 틀어막혔고,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경계조가 수시로 요새 근방 정찰을 돌고 있습니다."

"젠장, 일이 골 때리게 돌아가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생각에 빠진 겔베르트.

오랜 고민 끝에, 일단 우리의 존재를 요새 안의 브렌도르프 군에게 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선 누군가가 벨가르트 군의 시선을 피해 요새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근데, 누가 침투합니까?"

"..."

이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기에, 누구도 선뜻 손을 들며 나서질 않았다.

적의 감시를 피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뛰어난 은신 능력과 혹시 모를 전투 상황에서 적을 단시간에 제압할 수 있는 막강한 무력, 요새 내부로 들어간 후 브렌도르프 군에게 우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언변 능력까지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능력자들이 많은 우리 용병대였지만, 이 모든 능력 두루 갖춘 인물은 흔치 않았다.

"... 내가 직접 간다."

하여, 대장인 겔베르트가 직접 이 임무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후우...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잘 다녀오십쇼."

"지금 바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대장, 검 이리 주십쇼. 제가 검댕 칠해 놓겠습니다. 아주 꼼꼼하게."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등 떠밀어 내보내려는 부하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겔베르트였다.

"... 뭐야, 안 말려? 대장이 직접 험한 일 하러 불구덩이로 들어가겠다는데 말려야지 이 새끼들아!"

"...엥? 왜 그래야 합니까?"

"말리긴 뭘 말립니까? 그나마 제일 가능성 있는 사람이 대장님인데."

"그건 맞지... 그리고 애초에 대장님이 내놓은 작전이잖습니까? 그럼 본인이 해결하셔야죠!"

"근데, 대장 침투하다가 벨가르트 놈들한테 걸려서 죽으면 메이슨 부대장이 바로 대장 되는 건가?"

"오호, 그럼 엔리케 조장님은 부대장으로 승진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순번상 그렇게 되겠지? 으헤헤헤!"

"... 이런 배은망덕한 새끼들."

늘 그렇듯 훈훈한(?) 대화가 오간 끝에 겔베르트의 (자가)투입이 결정되는 듯 했지만...

"대장, 제가 가겠습니다."

"?!"

"...!"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나선 나의 목소리에 모두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잇... 야! 막내! 안 돼 인마!"

"그래, 이건 너무 위험해."

"이 자식이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구분을 못하고... 손 안 내릴래?"

"아직 성년도 안 지난 놈이 벌써부터 뒈질 자리를 찾아가네? 정신 차려 인마!"

저마다 한 마디씩을 거들며 나의 임무 지원을 만류하는 선배들.

이미 실력 면에서 용병대 내 1, 2위를 다투는 나였지만, 선배들의 눈에는 여전히 챙겨주고 싶은 막내일 뿐이었다.

"너무 어려운 임무다. 아직 너에겐 무리야."

심지어 부대장 메이슨까지도 굳은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 대장 겔베르트만은 말없이 나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으니...

"... 막내, 자신 있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모두가 펄쩍 뛰며 난리를 피웠다.

"예?!"

"대장!"

"아이씨, 미쳤어요? 막내를 어떻게 보냅니까!"

"대장, 아무리 막내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이건 무립니다."

하지만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겔베르트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엔 한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신 있습니다."

"... 좋아."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겔베르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전령 임무엔 데미언을 투입한다. 해가 떨어지면 바로 움직이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인원은 언제든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이상!"

잠시 후,

야간 은폐를 위해 얼굴 가득 검댕을 바른 나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

"후우우..."

해가 떨어진 봄날의 숲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내 몸 이곳저곳에선 식은땀이 연신 흐르고 있었다.

늘 곁을 지켜주던 든든한 동료들이 곁에 없다는 생각이 나를 경험한 적 없는 긴장 속으로 내몰았던 탓이다.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숲의 경계선에 닿은 나는 몸을 바짝 웅크린 채 요새로 향하는 길을 살폈다.

지금까지는 숲속의 무성한 수풀들이 나의 모습을 가려주었으나, 이제부터는 너른 평원을 가로질러 요새로 접근해야 하는 상황.

적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나는 주변 정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단 보이는 놈은 없는 것 같고."

정말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달빛이 어두워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에 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적들도 나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는 초생달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천천히 흘러 들어가는 구름의 모습.

저 구름이 달을 가리는 순간, 그 어둠에 기대어 몸을 움직일 것이다.

"... 어디 보자."

구름이 움직이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잠시 상태창을 소환했다.

팟-!

『 데미언 / Lv. 19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잘 만들어진 단검(고급 등급)

- 단단한 가죽 갑옷(일반 등급) 』

"흐음..."

나로서도 상당히 오랜만에 열어보는 상태창이었다.

"이제 레벨 19..."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수치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 세상에 떨어진 후 지금까지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깡말랐던 고아 소년이 불과 2년 남짓한 시간에 은패 용병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누가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같은 기간에 레벨 21이었던 엔리케가 겨우 두 단계 오른 레벨 23이 된 것을 생각하면, 내 발전 속도가 얼마나 규격 외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지."

그래, 아직 멀었다.

내 몸속에 잠들어 있는 드높은 검성의 경지를 생각하면, 고작 레벨 19 정도로는 성이 차질 않는다.

"더 열심히 하자, 그 녀석 만나게 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내가 기억하는 역사의 흐름대로 흘러간다면, 나는 앞으로 반년 안에 이 거대한 세계관의 '주인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첫 만남의 순간, 주인공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더 나아가 나란 사람의 가치를 키우기 위해선 시간이 있을 때 한 뼘이라도 더 성장해야 했다.

"... 슬슬 시작해볼까?"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

"하아,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 데 경계는 뭔 놈의 경계야... 시발."

일행의 중간 즈음 선 사내가 불만스럽다는 듯 씨근덕거렸다.

그는 현재 멘하우 요새를 공격 중인 벨가르트 군의 십인장(百人長)으로, 직속 상관인 백인대장에게 요새 근방의 야간 경계 임무를 지시받았다.

그를 포함해 총 여덟 명의 경계조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둘은 활을 들었고 나머지는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조장님, 이제 슬슬 돌아가시죠? 조장님 말마따나 어두워서 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어차피 이쪽으로 오는 도로들 외곽에서 다 틀어막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장의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야간 수색에 지친 부하들이 슬슬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하들의 말을 들은 경계조장이 버럭 성질을 냈다.

"이런 시발 새끼들이... 지금 돌아가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 백인대장 그 씹새끼가 왜 이렇게 일찍 기어들어 왔냐고 지랄할 게 뻔한데 지금 들어가자는 말이 나오냐?"

"헙... 죄송함다."

"시정 하겠습니다."

"하여간 시발... 위에 있는 새끼들이나 아래 있는 새끼들이나 대가리에 똥만 차서 아무 생각이 없지. 어휴, 내가 왜 이딴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 그냥 아버지 말 듣고 고향에서 농사나 지을걸!"

끓어오르는 짜증을 애먼 부하들에게 풀던 경계조장이 발길을 돌려 근처에 보이는 강가로 다가간다.

"어어, 조장님 어디 가십니까?"

"목 좀 축이려고 그런다! 니들 지껄이는 소리 듣고 있으니 시발 목이 절로 타들어 가네. 아오!"

"제 수통에 물 남았는데 좀 드립니까?"

부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경계조장은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옆에 뻔히 맑은 물이 있는데, 그 구질구질한 수통에 담겨 있는 걸 먹고 싶겠냐?"

"... 알겠슴다."

보통 군에서 지급되는 수통은 돼지나 소, 염소, 양 같은 가축의 위장에 가죽을 덧대어 만들었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지급 받는 수통의 품질에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기사나 백인대장 정도의 고위 군인들이 쓰는 수통은 깨끗한 위장에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말단 병사들이나 조장급 인원이 사용하는 수통은 제대로 손질도 안 된 위장에 싸구려 가죽을 대충 엮어 만든 것이라 심한 악취가 났다.

경계조장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리가 없는 부하는 고개를 떨구며 몰래 입 모양 만으로 욕을 할 뿐이었다.

찰박-

"으, 차갑다."

강물에 손을 담근 경계조장이 뼛속까지 밀려오는 차가운 기운에 몸을 떨었다.

땀에 찌든 얼굴을 대충 물로 씻어내고, 엎드린 자세로 물을 퍼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 꿀꺽-

냄새나는 수통에 담긴 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원하고 청량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야간 수색에 잔뜩 짜증 난 기분마저 좋아지게 만드는 물맛이었다.

"크으, 좋다! 브렌도르프에 숲이 많아 그런가, 물맛도 좋..."

홀로 감탄하던 경계조장이 별안간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하던 말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누, 누구...?!"

턱!

강가 수풀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순식간에 엎드려 있던 경계조장의 뒷머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슁- 푸욱!

"컥! 끄흑...!"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던 경계조장의 목에 시퍼런 단검이 꽂힌다.

날카로운 칼날이 목울대 부근을 완전히 베고 지나갔기에, 경계조장은 부글부글 피거품만을 토해낼 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끄륵, 끄르르르..."

철퍽-!

물을 마시려 엎드려 있던 그 자세 그대로, 강물에 머리를 처박은 경계조장.

그의 잘려나간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맑았던 강물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구름에 가린 달빛은 아무 말이 없었다.

멘하우 요새 공방전 (4)

"뭐야, 왜 이렇게 안 와?"

강가 근처에 서서 물을 마시러 간 경계조장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친 새끼, 지 혼자 강물 다 처마시려고 하나..."

"워워, 목소리 들리겠다 이 새끼야."

"들리라고 해! 뭔 말끝마다 시발시발 거리기나 하고. 아오, 물 처먹다 콱 뒤져버렸으면 좋겠네!"

병사들이 수군대는 말의 내용만 들어도 경계조장이 얼마나 부하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근데, 너무 늦는 거 아냐?"

"그러게... 뭔 일 났나?"

물 마시러 갔다는 사람이 꽤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자 슬슬 불안해진 병사들.

"야, 한 번 가봐."

"내가? 내가 왜?"

"미친놈아, 네가 군번 제일 느리잖아! 너 9월 군번 아냐?"

"야, 시발... 겨우 한 달 차이 가지고 유세냐?"

"한 달이고 하루고 빠른 건 빠른 거지. 지랄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

"아, 씹... 그래. 간다, 가!"

군번이 느리다는 이유로 등 떠밀려 나선 병사 하나가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이며 경계조장을 찾아 나섰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 음?"

무성하게 자란 수풀을 헤치며 강가로 다가간 병사의 눈에 바닥에 엎드려 물을 마시는 경계조장의 모습이 보였다.

"뭔 물을 저렇게 처먹고... 목 말라서 뒤진 귀신이 붙었나."

자기만 들을 정도의 목소리로 씨근덕거린 그가 엎드린 경계조장에게 다가선다.

"저, 조장님? 이제 슬슬 가셔야...?"

뒤에서 말을 걸던 병사의 말끝이 흐려진다.

바닥에 엎드린 경계조장의 머리가 강물 깊숙이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런 씨..."

턱! 콰직!

"끅! 끄흐으으...!"

그 순간, 수풀 속에서 달려온 누군가가 병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그의 가슴팍에 깊숙이 틀어박히는 단검!

앞서 목이 베인 채 강물 속으로 얼굴을 처박았던 경계조장처럼, 단검에 폐가 찢겨나간 병사 역시 비명도 못 지른 채 숨이 끊어졌다.

스르륵, 털썩!

숨이 끊겨 늘어지는 병사의 시신을 수풀 속에 숨긴 습격자가 단검에 묻은 피를 강물에 담가 씻어낸다.

"후우, 이제 두 놈 정리했고..."

새하얀 얼굴엔 검댕을 바르고, 시커먼 두건을 머리에 둘러 반짝이는 금발을 가린 어둠 속의 습격자.

데미언이 참았던 숨을 천천히 토해내며 말했다.

"... 나머지도 빨리 처리하자."

깨끗이 닦아낸 단검을 허벅지의 검집으로 돌려보낸 후, 데미언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벨가르트의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새끼는 왜 또 안 와?"

"뻔하지, 조장 새끼가 또 지랄 떠는 거 받아주고 있겠지."

"받아주긴 뭘 받아줘? 혹시 뒷구멍으로 다른 거 받아주고 있는 거 아냐?"

"푸흐흣! 이 미친 새끼!"

나는 큼지막한 바위 뒤에 숨어서 놈들의 숫자를 세어보았다.

'칼 든 놈이 하나, 둘, 셋, 넷... 활 든 놈은 둘, 합이 여섯.'

여섯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니, 치밀하게 동선을 짜야 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두 번의 기회는 없다.

검을 뽑은 순간 모조리 죽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까.

"야, 근데 조장이 엎드리라고 하면 너넨 엎드릴 거야? 응?"

"아우, 씨발! 생각만 해도 토 나오네!"

"야, 어차피 해야 하는 거면 내가 공격을 해야지, 조장 새끼 엎어 놓고 말이야. 이렇게, 팍! 팍! 푸하하하!"

돌아오지 않는 경계조장과 동료를 두고 저급한 농담을 던지는 병사들.

하지만, 그중 한 녀석이 얼굴을 굳히며 풀어진 분위기를 다잡았다.

"조용, 그만 떠들고 가서 확인 좀 해보자.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뭔가 좀 이상한데..."

"크흠, 그럴까?"

"예, 알겠습니다."

하는 말을 볼 때 그나마 제정신이 박힌 놈인 듯했고, 다른 병사들도 그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는 걸 보니 무리에서 선임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 저 새끼부터 딴다.'

자연스럽게, 내 공격의 첫 목표가 결정되었다.

슈융- 슈웅- 슈웅!

내 손에서 출발한 자그마한 손도끼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날아간다.

슈웅- 퍼걱!

화살처럼 날아간 손도끼가 정확하게 목표에 안착했다.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적의 머리통.

쪼개진 틈으로 시뻘건 피와 허연 뇌수가 줄줄 흘러나온다.

코앞에서 그 살풍경을 목격한 놈들은 다리가 풀린 것인지 기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뭐야?!"

"으아악! 피, 피잖아!!!"

어둠 속에서 별안간 날아온 도끼가 동료의 머리통을 쪼갰다.

그런데 도끼를 던진 적의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밀어닥치는 혼란, 치밀어오르는 공포!

"시발, 어디야? 어디냐고?!"

"스, 습격이야! 습격!"

"입 닥치고 이리로 모여! 병신들아, 이리 오라고!"

슈웅- 슈웅-!!!

그 순간,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퍽, 으지직!

"끄아아아아!"

내가 던진 손도끼에 가슴팍이 찍힌 한 녀석이 죽는다고 꽥꽥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이제 남은 건 네 명!'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부대장 메이슨을 졸라서 배운 손도끼 투척술이었는데, 오늘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쪽! 저쪽이야!!!"

동료 둘이 죽고 나서야 뒤늦게 나의 위치를 파악한 한 녀석이 들고 있던 검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래도 나름 군인들이라고 체계가 잡혀있던 것인지, 내 위치를 알아채자마자 활을 든 놈들은 뒤로 빠지고 칼 든 놈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 씨발 새끼! 넌 뒤졌다!!!"

타타탁!

검을 머리 위로 번쩍 치켜든 병사 한 놈이 땅을 박차며 내게 달려온다.

방어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는, 공격일변도의 자세.

코앞에서 동료가 죽어 넘어가는 꼴을 본 탓에 눈이 뒤집힌 탓이었다.

'... 이러면 나야 고맙지.'

상대가 냉정을 잃으면, 공략법은 간단해진다.

"으어흣!"

나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어설프게 뒷걸음질을 쳤는데, 잔뜩 흥분한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근데, 이 새끼가 속아주려나?'

잠깐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눈깔이 돌아간 상대의 모습을 보니 괜한 걱정이었구나 싶다.

"뒈져라, 이 새끼야!!!"

후우웅!!!

앞뒤 안 가리고 달려 들어온 상대가 단박에 내 머리통을 쪼개려는 심산으로 검을 내리친다.

정확하게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걸렸다, 이 새끼야!"

파팍!

힘차게 바닥을 박찬 내가 검을 내리치는 상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검을 내리치는 와중에 품으로 뛰어들었으니, 상대의 팔 안쪽을 내 어깨로 받아내는 모양새가 되었다.

"컥!!!"

어깨로 팔을 받아내며 동시에 왼쪽 주먹으로 상대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가려는 상대를 따라붙으며 허리춤에서 마지막 손도끼를 뽑아냈다.

콰직! 퍼억! 퍽!

그 짧은 순간 놈의 옆구리를 세 번이나 손도끼로 찍었다.

"으아아아악!"

살덩이가 푹 패여 나가고, 갈비뼈가 쪼개졌으며, 찢어진 내장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동료의 죽음을 보고 흥분해 달려든 대가치고 무척이나 잔혹했지만, 어쩌겠나?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

이게 전쟁의 본질인 것을.

"저, 저, 저 씨발!"

"야, 도망가자! 우리가 못 이겨!"

"튀어! 빨리 튀자고!!!"

남은 세 놈은 내게 덤벼든 동료가 도끼에 찍혀 잔혹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둘 내가 아니다.

슈웅- 슈웅- 슈웅- 퍼억!

"끄에엑!"

앞 녀석의 옆구리를 찍던 손도끼를 던져 가장 먼저 도망치던 놈의 뒤통수에 꽂았다.

제일 앞에서 뛰던 놈이 머리에 도끼를 맞고 죽자, 그걸 본 나머지 두 놈이 기겁하여 그 자리에 멈춰섰다.

혹시나 자신도 도끼를 맞고 죽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지닌 투척용 손도끼는 세 개뿐이었고, 방금 게 마지막이었다.

물론, 놈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겠지만 말이지.

촤아아앙-!

내 허리춤에 있던 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왔다.

발검(拔劍)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원래부터 손에 들고 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으아아아! 이 개새끼야아아!!!"

도망치기가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남은 두 놈 중 하나가 악을 쓰며 나에게 덤벼들었다.

슁!

가슴을 노리고 휘두른 검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피하고,

쉬잉!

다리를 향해 휘두른 검은 슬쩍 오른발을 들어 올려 피해낸다.

손가락 한 마디 만큼의 거리를 두고 스쳐 지나가는 시퍼런 칼날.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내 몸속에 잠재된 검성의 감각의 믿었고, 그 믿음은 확실하게 보상받았다.

쉬이잉, 촤악!!!

적이 시도한 두 번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뒤, 벼락같이 검을 떨쳐내어 놈의 가슴을 갈랐다.

"끄아악!"

푸화아악!

쩍 벌어진 놈의 가슴에서 시뻘건 피 분수가 뿜어졌다.

검날의 진행을 막아서는 갈비뼈까지 깨끗이 베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심장까지 반 토막을 냈다.

이번 의뢰를 앞두고 그동안 열심히 모은 돈을 투자해 산 고급(Advanced) 등급의 롱소드가 제대로 돈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털썩-!

"사, 살려... 살려줘! 난 진짜로... 그게 아니라... 어흐흐윽!"

홀로 남은 벨가르트 병사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저앉아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총원 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경계조 하나가 차 한잔 마실 시간에 도륙당했다.

그 악몽 같은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빠각, 털썩!

이미 정신 나간 놈 죽여봤자 뭔 의미가 있나 싶어 머리를 걷어 차 기절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는 알림 소리.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호...? 경험치 달달하네?"

본래 레벨이 19였으니, 이제 20이 되었겠군.

예상치 못한 희소식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기절한 놈의 옷자락을 찢어 손목과 발목을 꽁꽁 묶고 눈까지 가린 뒤 수풀 속에 처박았다.

"이 정도면 해 뜰 때까진 발견 못 하겠지?"

그렇게, 대충 현장 수습을 마무리 지은 나는 멘하우 요새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

푸른 방패의 리더, 겔베르트는 무성한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로 뚫어져라 멘하우 요새의 동쪽 방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

"음?"

그런 그에게, 역시 같은 방향을 응시하며 대기 중이던 엔리케가 물었다.

"막내, 잘 들어갔겠죠?"

"... 잘 들어갔을 거다."

겔베르트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를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으리라.

"뭐, 저도 막내가 요새까진 잘 갔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사실 그 다음이죠."

"... 나도 같은 생각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벨가르트 군의 감시를 뚫고 멘하우 요새에 진입한다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데미언의 실력을 믿었다.

불가사의할 만큼 강한 검술 실력은 물론이고, 열일곱이란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상황 판단력과 침착함까지 갖춘 녀석이었다.

대체 어린놈이 어디서 그런 경험을 쌓았는지, 가끔 말하다 보면 이놈이 삼, 사십 먹은 아저씨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믿자, 그냥 믿고 있자고. 어차피 그거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입술을 축인 엔리케가 뒤이어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와아아아아아아-!

멀리, 멘하우 요새의 동문 방면에서 여러 사람이 내지르는 큰 함성과 함께 붉고 노란 불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저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리 없는 엔리케가 격정이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을 받은 겔베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푸른 방패, 지금부터 멘하우 요새 서문을 향해 전력으로 이동한다. 자, 빨리 가자 이 새끼들아!"

멘하우 요새 공방전 (5)

"처음 뵙겠습니다, 케러 경. 저는 용병대 푸른 방패를 이끄는 겔베르트라고 합니다."

멘하우 요새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 앞에 선 겔베르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너무 비굴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건방져 보이지도 않는 딱 적당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겔베르트를 보는 케러의 눈은 이미 상대에 대한 고마움과 호감의 감정으로 가득했으니...

"정말 반갑네, 겔베르트. 자네와 자네의 대원들이 우리를 살렸어!"

턱-

한달음에 겔베르트의 앞으로 다가온 케러가 그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감사를 표한다.

지난 열흘간 진행되었던 벨가르트 군의 포위 공격.

식량은 사흘 전에 이미 다 떨어졌고, 기다리던 지원은 오지 않았다.

모든 희망이 무너지고 있던 그때, 이웃 영지인 텔마르크에서 보낸 구원의 손길이 도착한 것이다.

"저희가 수송해온 물자는 총 마차 네 대 분량입니다. 마차 한 대엔 무기가, 나머지 세 대의 마차엔 식량이 실려 있습니다."

"음, 식량 구성은 어떻게 되나?"

"두 대의 마차엔 호밀가루가, 남은 한 대에는 바짝 말린 육포와 옥수수, 소금이 실려 있습니다."

겔베르트의 설명을 듣던 주변 브렌도르프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식량이 다 떨어져 먹을 게 없으니 군마라도 잡아서 나눠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 식량을 가득 실은 마차가 나타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자네들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후우..."

너무나 힘들었던 지난 며칠의 기억을 떠올리며 케러가 한숨을 내쉰다.

"... 굶주려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하고, 당장이라도 요새가 적의 손에 떨어질 상황이었어. 결과적으로 푸른 방패가 이 멘하우 요새를 구해낸 것이나 다름없네."

"감당하기 힘든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받은 의뢰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케러의 감사 인사를 들은 겔베르트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겸손한 태도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케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어제 전령으로 미리 보내온 친구 말이야. 그 녹색 눈동자를 지닌..."

"데미언 말씀이시군요."

"아, 그래! 데미언! 그 친구가 그럼 푸른 방패 내에서 자네 다음 서열인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럴 것이란 믿음이 느껴지는 케러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돌아온 겔베르트의 대답은 그런 케러를 비롯해 주변 멘하우 요새의 주요 인물들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데미언 말씀이십니까? 그 녀석, 이쪽 일 시작한 지 2년밖에 안 된 저희 용병대 막내입니다만...?"

"?!"

"!!!"

***

멘하우 요새에서 보내게 된 첫날 밤이었다.

본래 이백 명에 달하는 병력이 상시 주둔하는 멘하우 요새였으나, 현재는 그 절반 가까운 인원이 비어 있는 상태였기에, 우리 용병대가 머물 공간은 넘치도록 충분했다.

"이쪽부터 저쪽 복도 끝까지, 양옆에 있는 방들 모두 쓰셔도 됩니다. 방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지만, 우리 병사들이 얼마 전까지 쓰던 곳인 만큼 주무시는데 불편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숙소를 안내해준 브렌도르프의 병사가 돌아간 뒤,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아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참고로, 막내인 나는 선배들이 다 고르고 남는 곳을 골랐기에 화장실에서 제일 가까운(그래서 냄새가 조금 나는) 방에 묵어야 했다.

"후우... 그래도,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아무리 화장실 근처의 냄새 나는 방이라고 한들 야전에서 모포 한 장 깔고 자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밤이슬을 막아줄 지붕이 있고, 딱딱한 나무 재질이긴 하나 바닥의 한기를 막아줄 침대도 있었다.

이 정도면 5성급 호텔도 부러울 것이 없...

"... 는 건 좀 오버인가? 그래도 여관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뭐, 아무튼 좋다는 얘기였다.

그나저나 아까 레벨 올랐다는 알림이 한 번 더 떴던 거 같은데...

"... 확인해봐야겠다."

팟-!

『 데미언 / Lv. 21

소속: 푸른 방패 용병대

클래스: 용병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빼어난 롱소드(고급 등급)

- 단단한 가죽 갑옷(일반 등급) 』

놀랍게도, 레벨 수치가 21이 되어 있었다.

"하룻밤 만에 레벨이 2나 올랐네? 이게 말이 되나?"

어떤 요인 때문에 이렇게 레벨이 오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지난 하루를 돌이켜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오늘 얻은 전투 경험치의 양이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보급 마차와 용병대 동료들이 숨어 있던 숲속을 출발해 멘하우 요새에 도착하기까지 홀로 잡아낸 적병의 수가 무려 열세 명.

그 중엔 평범한 병사가 아닌 십인장 급 실력을 지닌 적도 여럿 있었다.

숲에서 출발할 때 레벨 19의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내가 멘하우 요새의 문턱을 넘을 때 레벨 20이 된 이유가 있었던 것.

뿐인가, 요새에 도착한 후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를 설득해 벨가르트 군을 상대로 야습(夜襲)을 감행했다.

보급 마차를 끌고 움직이는 동료들을 위해 이른바 '어그로'를 끌었던 거다.

"그럼 야습하는 과정에서 레벨이 하나 올랐다는 건데... 거참, 운이 좋았던 건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야습 과정에서 내가 베어 넘긴 적 중에 꽤 이름 높은 벨가르트의 기사가 있었다.

양측 다 제대로 준비를 한 상태에서 정면승부를 벌였다면 대단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밤중 자다가 깬 상태로 허겁지겁 튀어나와 말에도 오르지 못한 상태로 싸우다 보니 내가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십인장, 백인대장 등 전투 경험치를 듬뿍 안겨줄 상대를 여럿 잡아낸 덕분에 레벨이 상승했던 거다.

"확실히 자잘한 산적 놈들이나 들개 몇 마리 때려잡는 거랑은 효율이 비교가 안 되네..."

이래서 용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찾아다니는 건가?

앞으로 이런 경험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하면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레벨을 몇 차례 더 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피곤하네, 슬슬 자야겠다. 내일도 경험치 빨아먹으려면 흐흐!"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되고 치열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복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푸른 방패 용병대의 리더 겔베르트의 방.

고된 하루에 지친 부하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었지만, 아직 그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쪼르르륵...

"오늘 진짜 고생 많았다."

크라벤에서 출발하기 전 보급 마차에 미리 실어두었던 독한 브랜디가 자그마한 술잔에 채워진다.

겔베르트가 따르는 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 사내.

그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나이, 푸른 방패의 부대장 메이슨이다.

보통 작전 수행 중엔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그였는데, 지금 겔베르트가 따라주는 술을 흔쾌히 받는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가 얼마나 고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 들어와서야 안 거지만 확실히 브렌도르프 애들 상태가 많이 안 좋더군요. 병사들 사기가 말이 아닌 듯 보였습니다."

"그럴만하지. 다른 건 둘째치고 밥을 제대로 못 먹었으니 칼 휘두를 힘이 있겠나."

"예, 맞습니다."

"대신 그만큼 식량을 얻어냈을 때 사기가 오르는 효과도 크겠지. 아까 우리가 끌고 온 마차에 호밀가루랑 옥수수 실려 있다는 말 듣고 애들 표정 변하는 거 봤냐?"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는 사람 없으면 울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더군요."

"푸흐흐... 그렇지. 아무리 맛대가리 없는 호밀빵이라도 해도 굶는 거랑 비할 수야 있나."

그렇게 낄낄대던 겔베르트가 문득 표정을 굳히며 본론을 꺼내놓는다.

"아까 수비대장이 할 말이 있다면서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더라."

"으음... 예."

아직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메이슨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대강 짐작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길래,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라고...?"

"우리가 텔마르크로부터 받은 의뢰 내용은 '보급 마차를 멘하우 요새까지 무사히 운반하는 것'까지라고 말했지. 그 이상은 계약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도 했고."

"역시... 대장님 말씀 듣고 수비대장이 뭐라고 하던가요?"

"크흠, 뭐.... 뻔한 소리지."

의뢰 수행을 위해 크라벤을 떠난 이후 면도를 하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손으로 쓸어낸 겔베르트가 재차 입을 연다.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과 함께 싸워달란 제안을 하더라. 값은 넉넉하게 쳐주겠다고 했는데..."

"거절... 하셨습니까?"

메이슨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지금 이 상황에서 두 영지 간의 싸움에 잘못 끼어들면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꼴 나는 거야."

"맞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근데... 수비 대장이 뭐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게까지 옹졸한 사람은 아니더라. 안 도와줄 거면 당장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하룻밤 자고 내일 가라고 하더군."

"그건 다행이군요."

"그래. 사정이 안타깝긴 하지만 가망 없는 싸움에 우리 목까지 걸 필요는 없는 거니까..."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하들과 함께 요새를 떠날 준비를 하던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수비대장이 보낸 병사가 찾아왔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자신의 방에서 잠시 보자는 얘기였다.

감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는다)에 겔베르트는 현장 지휘를 부대장 메이슨에게 맡기고 병사의 뒤를 따랐다.

"오! 왔나? 어떻게 잠은 잘 잤고?"

겔베르트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 있던 수비대장 디르크 케러가 밝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요새가 포위되었던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당최 즐거울 일이 없었는데, 눈앞의 있는 사내과 그의 부하들이 모처럼 웃을 일을 만들어 주었다.

전쟁 상황만 아니었다면 술과 고기가 가득 차려진 연회를 열어 제대로 대접했을 것이다.

"경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병사들이 쓰던 숙소라 상태가 썩 좋지 못했을 텐데,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네. 자, 일단 앉게나."

"예."

군 지휘관인 요새 수비대장의 집무실답게, 방 안의 풍경은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이 썰렁하기만 했다.

칙칙한 색감의 벽돌과 무채색의 커튼, 미적인 부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투박한 디자인의 의자와 테이블까지.

그야말로 실용적인 면만을 고려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던 것.

하지만 손님인 겔베르트 역시 평생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인물이었기에, 이처럼 삭막한 방안의 풍경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크흠, 날 불러다 뭔 말을 하려고...'

그저,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바짝 긴장의 날을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예. 저희가 오래 있어봤자 요새 분위기만 어수선하게 만들 것 같아 일찍 떠나려 합니다."

어차피 푸른 방패 용병대는 더는 이 전쟁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

요새에 죽치고 있어봤자 병사들에겐 도움도 안 되는 주제에 밥만 축내는 놈들도 보일 뿐이었다.

"그래, 뭐... 이제 떠난다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떼써서 될 문제는 아니지."

"...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닐세. 내가 자네 입장이어도 밑에 부하들 생각해서 거절했을 거야. 지금 우리 요새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으니 말이야. 뻔히 보이는 불구덩이에 부하들을 밀어 넣을 순 없겠지. 이해하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얘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인지.

수비대장의 앞에선 겔베르트는 초조함에 입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요새를 떠나는 것 자체는 더 언급하지 않겠네. 하지만..."

"...?"

"이걸, 한 번만 봐줄 수 있겠나? 그 후에 좀 더 얘기를 나눠보세."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로 수비대장이 내어놓은 서류 한 장.

"...!"

그 내용을 확인한 겔베르트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두 번째 히든 피스 (1)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인 우리는 멘하우 요새에서 북동쪽으로 한참을 이동해 나온 어느 평원에서 야영 준비를 서둘렀다.

"야야! 말뚝 더 깊이 박아! 애들 소꿉놀이하냐 지금? 이걸로 될 거 같아?"

"오늘 불침번 순번 정한다. 일단 너랑 너, 둘이 초번을 서고..."

"어? 저기 사슴 몇 마리 보이는데? 저거 잡아다 오늘 저녁 먹을까?"

야영지 마련을 위한 각자의 임무 수행을 위해 움직이는 대원들.

막내인 나 역시 식사 준비를 위해 근처 시냇가를 찾아 물을 길어오고, 땔감을 모으는 등 열심이었다.

밤새도록 불을 피워도 너끈히 버틸 만큼 넉넉히 땔감을 마련한 후에야 나는 휴식을 취했다.

"후우..."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어낸 지난 며칠이었다.

레벨도 두 단계나 올렸고, 그 과정에서 얻어낸 경험도 많았다.

왕국 남부에서 정예로 이름 높은 벨가르트의 기병대와 싸웠고, 평소 용병 의뢰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막강한 적들을 상대했다.

야습 때 상대했던 벨가르트 영지군 백인대장은 길바닥에서 여행객들 주머니나 노리는 도적놈들 열 놈을 상대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를 주었다.

백인대장이 그 정도였으니, 그보다 훨씬 윗급의 괴수(?)인 기사를 잡고 얻은 경험치의 대단함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새로 산 물건 성능 확인도 확실히 했고..."

내 허리에 매여있는 기다란 롱소드 한 자루.

일전에 한 번 언급했듯, 이번 의뢰 시작을 앞두고 그동안 모았던 돈을 탈탈 털어 장만한 고급 등급의 무기였다.

무려 80실버 짜리 검이었는데, 내가 처음 용병 일을 시작할 때 썼던 일반 등급의 숏소드가 6실버였다는 걸 생각하면 열 배 이상의 가격을 가진 무기였다.

"근데... 확실히 비싼 게 더 좋긴 하네."

한 마디로 '돈값'을 하는 무기였다.

똑같은 힘으로 똑같은 검술을 펼치는 데 체력이 남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검의 무게 중심 배분이 좋고, 검날의 날카로움과 강도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고급 등급이 이 정도인데... 그 윗등급은 얼마나 좋을지 감도 안 잡히네."

<로스트 킹덤> 세계관의 무기는 총 여섯 단계로 나뉜다.

일반(Normal), 고급(Advanced), 희귀(Rare), 유일(Unique), 전설(Legendary) 그리고 신화(Mythic) 등급까지.

이중 일반적인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건 희귀 등급까지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유일 등급의 무기들은 이름 높은 장인들이 왕이나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전설 등급은 말 그대로 오래된 옛 역사에나 등장하는 무기였으며, 신화 등급은 애초부터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수준이었으니까.

"... 뭐,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하나 쓸만한 거 얻을 날이 오겠지. 무기가 대수냐, 쓰는 사람이 중요하지."

본래, 장인은 도구를 안 가리는 법이다.

***

"아니 그래서, 그 수비대장 양반이 자기 방으로 대장 불러서 보여준 게 뭐였는데요? 예?"

"보채지 좀 마라, 이 새끼야. 안 그래도 애들 다 모이면 말하려고 했어. 야, 물 끓어 넘치잖아! 빨리 육포나 집어넣어!"

야영지 한가운데, 큼지막한 솥을 걸고 저녁을 준비하는 엔리케와 그 옆에서 뭐라 잔소리를 하는 대장 겔베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아침 일찍 멘하우 요새를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근처 가도를 봉쇄 중이던 벨가르트 군에게 붙잡히는 상황이 있었다.

하지만 험악했던 분위기와 달리 우리가 주어진 의뢰를 마치고 빠져나가는 중립 세력임을 확인하자 별다른 제지 없이 우리를 놓아 보내주었다.

브렌도르프 군 측의 참전 의뢰를 받았지만, 가망 없는 전황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빠져나왔다는 겔베르트의 설명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벨가르트의 입장에선 적의 전력을 힘들이지 않고 덜어내는 상황이니, 구태여 우리를 공격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더니, 수비대장이 나한테 뭔 종이 쪼가리 하나를 보여줬다. 그 내용이 뭐였냐면..."

내가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대원들을 한자리에 모은 겔베르트는 아침에 있었던 수비대장과의 대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브렌도르프 군이 멘하우 요새로 향하는 가도를 점거하던 벨가르트 군을 격파했다'는 보고였다."

"...!"

"?!"

"이제 브렌도르프 군은 수복한 가도를 따라 멘하우 요새를 구원하러 달려올 것이고, 벨가르트 놈들은 요새에 웅크린 수비군과 곧 몰려올 등 뒤의 지원군을 동시에 상대하게 되겠지."

"그, 그럼... 이제 브렌도르프 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된 거 아닙니까?"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대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래. 수비대장도 나한테 똑같은 얘길 했다. 이제 전황은 브렌도르프 쪽에 유리해졌으니, 부담 갖지 말고 도와달라고. 영지전이 마무리되면 영주에게 말해서 넉넉하게 보상금을 챙겨주겠다고 했지."

"아니, 너무 좋은 기회 아닌가? 대체 왜 거절하신 겁니까?"

"지, 지금이라도 브렌도르프 쪽에 붙어서 싸우는 게... 처음에야 적의 봉쇄가 언제 풀릴지도 모를 어려운 상황이니 참전 제안을 거절했다지만, 이제는 아니잖습니까?"

"맞슴돠! 적당히 분위기 타서 들어가면 손쉽게 한몫 건질 수 있을 분위기인데... 아오, 아까워!"

얼핏 듣기엔 타당한 주장.

하지만, 겔베르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되지."

"예?"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뭔..."

"아이씨, 알아듣게 좀 말해요!"

자신들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겔베르트의 말에 속이 탄 대원들이 볼멘소리를 퍼붓는다.

하지만 동시에 겔베르트의 얼굴에도 답답함이란 감정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대체 이 자식들은 싸움질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뭐, 이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절로 흘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겔베르트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실낱같은 기대를 담은 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특유의 녹안(綠眼)을 반짝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리멍덩한 다른 대원들의 눈빛과는 확연히 다른 눈빛 내 눈빛을 확인한 것일까?

겔베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 데미언."

"예, 대장."

"네가 한번 말해봐라. 내가 왜 수비대장의 제안을 거절한 것 같으냐?"

"음..."

그의 질문에 담긴 의도가 느껴졌다.

용병대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자신과 대등한 실력을 지닐 정도의 강자로 떠오른 무서운 막내.

심지어 나이는 아직 성년도 지나지 않은 열일곱이었다.

용병 바닥은 물론이거니와 그 비교의 범위를 업계 밖으로 넓힌다 해도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재능.

하지만, 지금 겔베르트가 묻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문제였다.

검(劍)을 들지 않은 너는, 과연 어느 정도의 그릇을 가지고 있느냐?

이 대답을 잘 해낸다면, 푸른 방패 내에서 나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 그리고, 그 높아진 영향력은 앞으로의 내 계획에 도움이 되겠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비대장의 첫 번째 참전 제안을 거절하신 것, 그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다들 궁금하신 건 대장이 두 번째 참전 제안을 왜 거절했냐는 거잖아요?"

"그래, 네가 좀 말해봐라. 대장이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발로 걷어찬 거냐? 노망이지? 이거 노망 난 거 맞잖아?"

끝까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엔리케를 용케 무시하며 나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수비대장은 브렌도르프 군이 가도를 점거하던 벨가르트 군을 격파했다는 중요한 정보를 대장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불리했던 전황이 이제 브렌도르프 군에게 유리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대장에게 알려준 것이죠. 일단 이 부분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이제 전황이 유리해졌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들의 편에 합류하라는 의도에서 말해준 거라고 수비대장이 직접 얘기했잖아?"

앞서 들었던 겔베르트와 수비대장의 대화 내용을 기억해낸 대원의 대답.

하지만 데미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말 그대로 수비대장의 '의도'일 뿐입니다."

"엥? 그게 뭔 소리야?"

"브렌도르프 영지 전체의 상황은 좋아진 게 맞지만, 범위를 멘하우 요새로만 좁혀 생각하면 전황은 더욱 안 좋아진 거거든요."

"아니 왜...?"

"다들 생각해보세요. 하루 이틀 안으로 브렌도르프의 지원군이 도착할 상황입니다. 벨가르트 입장에선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요새를 함락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

데미언의 대답을 들은 대원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허, 그런..."

"그래... 빨리 요새를 점령한 다음에 성벽에 기대서 몰려올 지원군을 상대하는 게 맞지."

"가뜩이나 벨가르트의 병력이 훨씬 많았다고 했으니, 피 보는 거 감수하고 미친 듯이 몰아치면 멘하우는 하루 만에 떨어질 거야."

"그래서, 안 봐도 뻔할 그 개판 상황에 돈 주고 산 우리부터 밀어 넣겠다? 이 시발..."

"썅! 브렌도르프 이 개새끼들이!"

이제야 수비대장의 참전 제안이 뭘 뜻하는지 깨달은 대원들이 불같이 화를 냈다.

"대장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브렌도르프 군의 '고기 방패'로 쓰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참전 제안을 거부한 거겠죠. 제 해석이 맞습니까?"

데미언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며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푸흐흐... 진짜, 데미언 너는 뭘 하든 늘 내 예상을 넘어서는구나. 정확하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야."

"그럼, 굳이 텔마르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오신 것도 제가 생각한 이유 때문일까요?"

이번엔 질문자와 답변자가 바뀌었다.

내가 물었고, 겔베르트가 그에 답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는지, 겔베르트가 만면에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 근처에서 계속 머물면서 브렌도르프와 벨가르트의 전쟁 상황을 살필 생각이다. 이 전쟁, 아무리 생각해도 금세 끝날 것 같지가 않아."

"금세 끝날 것 같지 않다... 그건, 돈 벌 기회가 남아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시죠?"

확신이 담긴 데미언의 눈빛에, 겔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막내 이 새끼... 진짜 귀신이네? 맞아. 타이밍 보다가 우리 몸값 제일 비싸게 부를 수 있을 때쯤 도박판에 뛰어들 생각이다. 집에서 멀리 나왔는데, 돈 많이 벌어가야지?"

"오오오!"

겔베르트의 대답을 들은 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성을 올렸다.

'역시, 우리 대장은 똑똑해!', '젠장, 믿고 있었다고!' 따위의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지.

"아니, 근데 대장? 아무리 우리가 중립 세력이라도 해도 이 근처에서 알짱거리면 브렌도르프건 벨가르트건 우리를 곱게 안 볼 것 같은데요?"

"그치. 자기네들은 한창 피 터지게 싸우는 중인데, 옆에서 용병대가 양쪽 간 보면서 기웃거리면 확 죽여버리고 싶을걸?"

부하들의 합당한 지적이 이어졌지만, 이미 그에 대한 계획도 세워놓은 겔베르트였다.

"그러니까 어디 안 보이는데 잘 숨어 있어야지. 멘하우 요새랑 거리는 가까운데, 전쟁의 불길엔 전혀 휩싸일 걱정이 없는 그런 곳에."

"아니, 대체 그런 데가 어디... 아!"

이번에는, 엔리케도 아는 답이었다.

"성지(聖地) 에셀바흐! 맞죠, 대장?"

실로 오랜만에 나온 엔리케의 똑똑한 모습에, 겔베르트가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우리는 지금 에셀바흐로 간다."

두 번째 히든 피스 (2)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겔베르트와 나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리가 멘하우 요새를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두 영지 간 전쟁의 승패는 안개 속에 있었다.

벨가르트 군에게 함락되었던 멘하우 요새를 다시 브렌도르프 군이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멘하우 요새의 성벽엔 다시 벨가르트 군의 깃발이 휘날렸다.

이틀 걸러 요새의 주인이 바뀌고 있는 상황.

푸른 방패의 모두가 저 지옥 같은 전장에 자신들이 껴 있지 않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대장, 그거 들으셨습니까?"

성지(聖地) 에셀바흐에 위치한 여관 '구원의 노새'.

성지라는 지역적 특성답게,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감도는 거리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내가 있었다.

"뭐, 인마. 뜬구름 잡지 말고 그냥 본론을 말해."

"참나, 뜬구름 잡는 건 대장 전문이고요."

"어, 난 그래도 돼. 대장이니까. 억울하면 너도 대장 하든가."

"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 엔리케였다.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음? 어, 그 뭐냐, 아침에 밥 먹다가 옆 테이블 상단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각 영지에서 출발한 지원 병력이 멘하우 요새 근방의 평원으로 집결 중이랍니다. 한판 크게 붙을 것 같던데요?"

"흐음, 지원 병력이라면... 영지군은 애초부터 박박 긁어다 투입했으니 돈으로 산 용병들이겠네."

"맞습니다. 지금 브렌도르프랑 벨가르트 양쪽에서 용병들 몸값이 막 치솟고 있다네요. 으흐흐흐!"

그 말을 전하는 엔리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본 겔베르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서 우리도 가자고?"

"예? 아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재미도 없는 동네에서 일주일이나 짱박혀 있던 거잖아요. 용병들 몸값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고!"

"어허, 이 새끼가... 어디서 불경스럽게 성지(聖地)를 두고 '재미없는 동네'라고 지껄여? 너 이단심문관한테 끌려가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 봐야 정신 차리지?"

"헙!"

겔베르트의 살벌한 말에 기겁한 엔리케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주 아르닌의 전능함을 믿지 않는 간교하고 사악한 자'들을 찾아내 교화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이단심문관.

하지만 그 '교화(敎化)'라는 것이 대개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굉장히 거친' 방법으로 이루어지곤 했기에, 보통 사람들은 살면서 이단심문관을 만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크흠, 대장은 뭘 또 농담한 걸 가지고 그렇게..."

"내 앞에서나 농담이지, 이 동네에선 잘못 걸리면 '이단의 간교한 혓바닥' 취급받는 거야. 여기 어딘지 몰라?"

"아, 알죠... 너무 잘 알죠."

겔베르트의 말을 들은 엔리케가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성지(聖地) 에셀바흐.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 대부분이 신실한 아르닌의 종을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신(神)을 상대로 입 한번 잘못 놀리면 그 즉시 패가망신을 경험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재미없는 동네'니 뭐니 불경한 말을 지껄였으니, 겔베르트가 경고를 할 만도 했다.

"어째 너는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드냐... 막내 하는 거 보고 좀 배워라 인마."

"쩝, 데미언 그 자식은 뱃속에 노인네가 서너 명은 들어앉은 놈이잖습니까. 저랑 비교하면 안 되죠."

"하긴, 가끔은 나도 그 자식이랑 얘기하다가 놀란다. 나보다도 윗사람 같은... 아니? 그러고 보니 막내는 어디 갔냐? 여기 와서도 맨날 개인 훈련한다고 푸닥거리던 놈이 오늘은 통 안 보이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데미언의 모습을 찾는 겔베르트.

그런 그에게, 엔리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데미언 그 자식 기도한다고 아침 일찍부터 성당 갔습니다."

"성당? 그 자식이 성당을 갔다고? 눈앞에 신이 있어도 콧방귀 뀌면서 훈련이나 할 놈이?"

엔리케의 말을 들은 겔베르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아는 데미언은 '신실함'과는 꽤 거리가 먼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궁금함 가득한 겔베르트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성당 건물로 향한다.

"... 대체 이 자식은 무슨 꿍꿍이야?"

***

그것은 근 8백여 년 전에 해당하는 머나먼 옛날의 일이었다.

어느 깊은 숲속, 오랜 굶주림에 지친 한 남자가 들짐승에게 물려 상처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우연히 그 숲을 지나다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 한 사람.

그는 다름 아닌 먼 훗날 아르닌 교의 창시자요, '선지자(先知者)'로 불릴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하인델(Heindel)이었다.

그는 늘 가지고 다니던 행낭 속 황금(黃金) 물잔에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흘러나온 피를 담았다.

그리곤 쓰러진 남자의 입에 그 피를 흘려 넣어 주었는데, 그러자 남자의 온몸에 가득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고 꺼져가던 눈빛이 살아났다.

평생토록 선지자 하인델이 행하게 될 아흔아홉 가지 기적(奇蹟) 중 첫 번째로 기록된 일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내는 눈물을 흘리며 하인델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영원한 종복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가 바로 하인델을 따른 최초의 사도(師徒)이자 훗날 아르닌 교의 초대 교황 안테로 1세가 되는 루트 숄(Ruth Scholl)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교황이 된 그는 자신이 하인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던 그 장소에 기적의 증명으로서 작은 성당을 세웠다.

그리고 그 성당에 하인델의 성혈(聖血)을 담아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황금 물잔, 이른바 '구원의 성배'를 보관토록 지시했으니...

***

"... 여기가 바로 초대 교황의 목숨을 구원한 성배(聖杯)를 보관하고 있는 그곳, 에셀바흐 대성당이라네. 허허허!"

곁에 선 노인의 흐뭇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앞의 웅장한 건축물을 올려다보았다.

에셀바흐 대성당(Basilica Esselbach).

같은 이름을 공유하고 있는 도시보다도 더욱 오래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건축물.

더불어, 대륙 전체를 통틀어 단 네 곳에만 허용된 '대성당(大聖堂)'의 이름을 지닌 종교 건축물이기도 했다.

"자네, 여기 와본 게 처음이라고 했지?"

"예, 어르신. 이번에 다른 일로 에셀바흐에 들렀다가 이렇게 성당에 발걸음을 하게 됐습니다."

"흘흘, 그렇구만."

나는 노인의 물음에 미소 띤 얼굴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에셀바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었는데, 가는 방향이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지게 되었다.

"어르신은 에셀바흐에 사시는 분인가요?"

"나? 허허, 아닐세. 우리 집은 저 멀리 영지 북쪽에 있다네. 프라바크 마을이라고... 멋진 숲과 맑은 호수를 끼고 있는 작고 예쁜 산골 마을이지."

"영지 북쪽이라... 그럼 여기서 꽤 거리가 될 텐데, 어르신 혼자 어떻게 오셨어요?"

"나 혼자? 허허, 길바닥에서 객사할 일 있나? 그러진 못하지."

"그럼 어떻게... 같이 오신 일행도 없으신 것 같은데?"

"그, 우리 마을에 달마다 들르는 상단이 있거든. 그 친구들 따라서 브레스덴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성지 순례객들이랑 합류해서 같이 움직이는 거야."

"아..."

"그런 식으로 매해 성지 순례를 온다네. 벌써 스물일곱 해가 됐지."

"어휴, 정말 대단하시네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나이도 적지 않으신 양반이 그 먼 거리를 걸어서 온다니?

'그것도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년 말이지...'

참, 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뭔지.

그런 건 개뿔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어 이곳을 찾아온 내가 봤을 땐 경이롭기까지 한 노인의 신앙심이었다.

'... 하긴, 이 세계에서 아르닌 교가 지닌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닌가?'

<로스트 킹덤> 세계관 속 아르닌 교의 위상은 중세 유럽의 로마 가톨릭 이상 가는 수준이었다.

그 점을 고려하면 노인이 보여주는 신앙심이 그리 특별한 게 아니긴 했다.

"보자... 자네도 구원의 성배를 보러 온 게지?"

"예, 뭐... 그렇죠."

"참 부럽구만, 부러워. 자네처럼 젊은 나이에 구원의 성배를 눈에 담을 수 있다니..."

말을 마친 노인의 눈빛이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해진다.

그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 본인의 입으로 언급한 아르닌 교의 성스러운 보물, 구원의 성배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어이구, 무슨 뽕 맞은 표정을 다 지으시고... 하긴, 그게 무진장 대단한 물건이긴 하지.'

주 아르닌을 믿는 신실한 교인들 사이엔 구원의 성배가 내뿜는 찬란한 황금빛을 두 눈에 담기만 해도 아픈 곳이 씻은 듯 나으며, 아이를 갖지 못하던 이들은 임신의 축복을 얻고, 남은 생의 액운을 쫓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

혹자는 그게 다 아르닌 교에서 퍼트린 미신일 뿐이라며, 어리석은 기대를 품는 사람들을 조롱하기도 했지만...

'... 구원의 성배가 가진 권능으로 모든 상태 이상과 질병의 회복, 거기에 신체 강화까지 이뤄낼 수 있지. 임신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구원의 성배에 부여된 역사적 설정을 직접 만들었고, 히든 피스 아이템으로서의 권능을 부여했으며, 게임 내 필드에 배치까지 한 나에겐 비과학적 미신이 아니라 확실한 가치를 지닌 진짜 보물이었다.

"허허허, 그럼 같이 들어가세나. 서두르지 않으면 순례객들이 몰려서 입구에 들어가지도 못할..."

"아, 저는 괜찮습니다. 에셀바흐 대성당에 처음 와 봐서, 주변 구경부터 천천히 하고 성배는 이따가 보려고요."

"으흠? 그런가? 하긴... 대성당을 처음 본다면 그럴 만도 하지. 나도 처음 여길 왔을 땐 성당 건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었다네. 어찌나 아름답고, 또 웅장하던지..."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허헛, 이 늙은 노인네가 바쁜 젊은이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구만. 미안하이, 우리 손주 생각이 나서..."

"아닙니다, 어르신. 저도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랑 대화하는 것 같았어요."

그 고향이 다른 차원이라는 건 함정이었지만, 노인과 보낸 짧은 시간이 꽤 푸근한 감정을 일깨워 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 잘 가게. 우리 모두 아르닌의 품 안에서 사는 아이들이니,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겠지. 허허허!"

"저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어르신!"

서로 가는 방향이 달랐던 나와 노인은 에셀바흐 대성당 입구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노인은 대성당 안에 전시된 '구원의 성배'를 보기 위해 입구 쪽으로 향했고, 나는 대성당 건물 옆으로 조성된 자그마한 정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대성당 주변 구경을 하기 위해서?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어디 보자, 대성당 건물 옆에 정원이 있고 거기에 연못이... 그렇지, 저기 있네."

마침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그마한 연못.

바로 이곳에 내가 노리는 <로스트 킹덤>의 두 번째 히든 피스,

'진짜' 구원의 성배가 잠들어 있다.

두 번째 히든 피스 (3)

뎅그렁... 뎅그렁...

정오를 알리는 열두 번의 종소리가 대성당 종탑 안에서 힘차게 울려 퍼졌다.

대륙에 단 네 곳밖에 없는 대성당의 칭호를 받은 종교 건축물답게, 종소리마저도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아이고... 여름이 왔긴 왔나 보다. 해가 뜨거운 걸 보니."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걸까?

정원의 나무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머리 위로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진다.

눈부심을 참아내며 슬쩍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세워진 지 수백 년이 흐른 탓에 때가 타고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견실해 보이는 성당의 벽면이 보인다.

둥근 모양의 창문이 여럿 나 있는 그 두꺼운 벽 위로 돔 형태의 커다란 지붕이 얹혀 있고, 다시 그 지붕 위로 길쭉한 기둥이 솟아올라 종탑을 이룬다.

그 종탑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건,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십자가.

실로, 없던 신앙심이 절로 솟아나는 광경...

'... 까지는 아니고.'

대단히 멋있긴 한데, 대대로 무교 집안에서 자라 과학 문명의 세계에서 살다 온 나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까진 아니다.

솔직히, 내 눈엔 대학생 때 친구들과 배낭여행으로 갔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좀 더 멋있는 것 같다.

"하긴 뭐, 건설 기술력이 비교가 안 되니까..."

대성당의 모습을 눈으로 훑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셀바흐 대성당 정원에 자리한 자그마한 연못.

이곳은 에셀바흐 대성당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백여 년간 그 어떤 가뭄이 들어도 바닥을 드러낸 적 없는 신비한 전설로 유명한 연못이었다.

"그래서, '영원의 샘'이라는 이름이 붙었지. 뭐, 샘물 마신다고 수명이 늘거나 하지는 않지만... 읏차!"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에 보이는 연못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엉덩이가, 뜨끈했다.

"어휴... 무슨 엉따라도 틀어놓은 것 같네."

햇살을 받아 뜨뜻하게 달아오른 바위의 열기가 엉덩이로 전해지는 게 느껴졌다.

봄 정도만 되었어도 따뜻하고 좋았을 텐데, 날이 덥다 보니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설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그대로 앉은 채 천천히 연못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조용하구만.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영원의 샘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나름 유명한 곳이었지만, 구원의 성배가 워낙 압도적인 이름값을 가진 탓인지 다 그쪽으로 몰려가고 여길 구경하러 온 사람은 없었다.

대신 성당에서 키우는 녀석인지, 아니면 동네에서 떠도는 놈인지 모를 멍멍이 한 마리만 연못가 근처 그늘에 배를 까고 누워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끼이잉... 쩝쩝..."

"저놈이... 뭔 맛있는 거 먹는 꿈이라도 꾸나?"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휴식을 마친 나는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 히든 피스를 찾기 위해서였다.

"흐음... 보기보다 수심이 더 깊네...? 안 빠지게 조심해야겠다."

연못은 꽤 깊었다. 하지만 워낙 물이 맑은 탓에 바닥을 노니는 물고기들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맑은 물엔 고기가 살지 않는다던데, 그 얘기가 꼭 맞는 건 아닌가 보다.

"쩝, 물고기 보니 갑자기 회 먹고 싶네..."

이 세계에선 생선을 날로 먹지 않으니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이참에 회 뜨는 거나 연습해볼까?

"보자, 대충 기억 속 풍경이랑 여기서 보는 각도가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연못이 작다고는 해도 내가 지금 머무는 여관방 서너 개 정도는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기에,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저기다."

세심한 관찰 끝에 내 눈에 들어온 연못의 한 지점.

붉고 노란 꽃들이 주변에 피어있고, 마치 웅크린 늑대 같은 모습을 한 바윗돌 옆에 개구리밥이 잔뜩 떠 있는 곳.

"허, 진짜 똑같네. 게임 속이랑."

사무실 내 책상 위에 놓인 32인치 모니터로 수십, 수백 번을 지켜봤던 바로 그 풍경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제발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를..."

웅크린 늑대의 모습을 꼭 빼닮은 바위 곁,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위 아래 연못물 속으로 손을 뻗었다.

첨벙!

내 왼팔 전체를 집어삼킨 연못물의 차가움이 찌르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으, 차가워..."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놀란 물고기들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몸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야, 물고기 친구들아. 그렇게 도망가지만 말고 나 좀 도와줄래?

잠시 머릿속을 스친 실없는 생각을 금세 털어버리고 다시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본다.

"끄흥... 이건 그냥 돌이고... 이건 진흙 덩어리 뭉친 거고... 하씨, 어딨지?"

이렇게 연못 바닥을 뒤지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면 골치 아픈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함이 커진다.

바로 그때.

'...!'

턱, 손가락 끝에 잡힌 무언가.

미끄덩거리는 물이끼의 느낌이 소름을 돋게 한다.

하지만 그 아래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

바닥을 계속 뒤적거린 탓에 흙탕물이 올라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손끝의 감각을 이용해 그 형태를 파악해본다.

'... 이거다!'

확신이 든 나는 침착하게 연못 바닥을 긁어내었고, 흙 속에 반쯤 묻혀 있던 물건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촤아악!

마침내,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물건의 정체.

그것은 오래되어 녹슨 청동 특유의 푸르스름한 빛깔이 가득한 작은 물잔이었다.

"후우... 겨우 찾았네. 하하하!"

물잔을 바라보는 내 얼굴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내 손에 들린 이것이 바로, '진본(眞本)' 구원의 성배였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