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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저 멀리, 빽빽하게 거리를 메운 빌딩 숲이 보인다.

그 너머로 느릿하게 넘어가는 붉은 해의 모습이 아련하다.

"피곤하다 피곤해..."

한 손에 믹스커피.

다른 한 손엔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 한 개비.

부스스한 머리 위로 잦아드는 노을을 바라보며 회사 옥상 난간에 멍하니 기대어 있는 사내.

김정현.

올해 나이 서른여덟이 된 나는,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 게임 업계에서 가장 '핫한' 개발사로 불리고 있는 '이터널스 스튜디오(Eternals Studio)'의 베테랑 게임 개발자였다.

"... 아니, 뭔 놈의 도로가 벌써 이렇게 막히냐."

힐끗 난간 너머로 내려다본 건물 아래엔 붉고 샛노란 불빛들이 가득했다.

널찍하니 잘 닦인 회사 건물 앞 6차선 왕복 도로를 순식간에 메워나가는 자동차들의 행렬.

세상 제일 부러운 그 이름, '퇴근'을 맞이한 이들의 모습이다.

"퇴근이라..."

후우우-

가슴 깊숙이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 대한민국에 아직도 그런 달달한 것이 남아 있기는 한가?"

영화 속 유명한 명대사를 능숙하게 읊는 내 표정엔 씁쓸함만이 가득했다.

이쪽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 나 역시 '칼 퇴근'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고 있었다.

심지어 요 몇 주간 동안은 칼 퇴근은 고사하고 그냥 '퇴근'조차 하기 힘든 극악의 일정을 소화 중이었으니...

현재 내가 총괄 디렉터(Project Director)의 포지션으로 개발 중인 신작 게임, <로스트 킹덤, Lost Kingdom>이 막바지 작업에 돌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흐으읍! 어이고!"

근육이 뭉치다 못해 아예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앓는 소리를 내본다.

이미 몇 주 전부터 내가 이끄는 <로스트 킹덤> 프로젝트 팀 전원은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하는 이른바 '크런치 모드(Crunch, 게임 출시 기한을 맞추기 위해 야근 및 주말 출근, 철야를 비롯한 강도 높은 근무 체제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업계 은어)'에 들어간 상태였다.

"이놈의 크런치는 십 년 넘게 하는데도 할 때마다 죽을 것 같네."

소속 팀원 모두가 힘들 테지만, 총괄 디렉터인 내가 체력적, 정신적 부담을 가장 많이 짊어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팀 구성원 중 나의 나이가 제일 많기도 했고.

"이번 일 마치면 안식년 신청해야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 후우..."

내 입에서 길게 뿜어진 담배 연기가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오른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젠장, 나이가 웬수지."

대체 무슨 놈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건지.

"이러다 금세 마흔 살 되고 오십 살 되겠네. 에휴, 이 나이 먹도록 결혼도 못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주중, 주말 구분도 없이 주야장천 일에만 매달려 사는 회사 지박령(?) 신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 팔자가 너무 안타깝고 기구해서, 한껏 얼굴을 구긴 채 담배를 힘껏 빨아들였다.

그 순간,

"컥! 크읍!"

왼쪽 가슴에 찾아온 격렬한 통증!

"끄으으으!!!"

달칵! 촤악-!

심장에 총을 맞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실로 눈이 뒤집히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었다.

손에서 놓쳐버린 종이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사방으로 커피를 뿌려댄다.

"아흑! 아으아... 흐읍!"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아 꺽꺽거리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왜... 어, 잠깐? 이거 혹시?!'

언젠가, 회사에서 나이 35세 이상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했었던 건강 교육 시간에 얼핏 들었던 내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 누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심장을 쥐어짜고 있는 듯한 통증을 느끼신다면, 그 즉시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병원 응급실로 가셔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1분, 1초가 목숨과 직결되는 골든타임입니다. 절대 지체하시면 안 됩니다.'

과로가 일상이 된 현대 사회 직장인들에게 갑자기 찾아와 목숨을 앗아간다는 무시무시한 질환.

심근경색(心筋梗塞).

그때는 나와 별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건성건성 흘려들었는데...

"누...! 누구 없... 살려... 크흑! 꺽! 꺼흐윽!"

철퍼덕!

빠르게 흐려지는 시야.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려고 그랬던 것인지, 하필 이 순간에 옥상에 올라와 있는 회사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이, 이렇게 죽는다고? 회사 옥상에서 담배 피다가 쓰러져서?'

밀려드는 두려움과 억울함, 참기 힘든 격통에 두 눈이 급격히 충혈되던 그 순간,

덜컹!

정면으로 보이는 옥상 출입구의 문이 열리며 몇몇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하! 아니, 그래서 내가 아트 팀 민경 씨한테 그렇게 얘기를... 어? 으어어?!!!"

옥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 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진 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온다.

"11... 119 좀 불러주...!"

털썩-!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낯익은 부하 직원의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인내의 끈을 놓아버렸다.

"PD님! PD니임-! 정신 차리세요!!!"

"119 불러! 빨리! 여기 사람 쓰러졌어!!! 빨리요!!! 지금 사람 죽는다니까?!"

정신없이 소리치는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나의 의식은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

"... 여기가 어디지?"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머릿속을 채운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꿉꿉한 냄새가 가득한 어두운 창고의 내부.

어지간히 오래된 물건인 듯, 부서지고 삭아버린 나무 상자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 어디 중세 코스프레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나 볼 법한 녹슨 도끼와 칼, 방패, 썩은 내가 풍기는 가죽 갑옷들이 잔뜩 쌓여있다.

말 그대로 낯선 것들만이 가득한 생경한 공간.

그런 장소에, 걸레짝 같은 담요를 덮은 채로 내가 누워 있었다.

"이게 뭔... 놀이공원 창고 같은 데 갇힌 건가?"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 짜내어 기껏 떠올린 생각이 고작 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대체 여기는 뭐 하는 데야... 으윽!

순간, 머릿속으로 해일처럼 밀려 들어오는 누군가의 기억.

타인의 인생을, 그가 보낸 시간과 느낀 경험들을 강제로 내 뇌 속에 때려 박는 듯한 충격에 나는 한동안 몸을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격렬했던 몸의 떨림이 멎었을 때.

"... 이런 미친!"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새로운 육신의 기억이 답을 알려주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하, 시발... 넘어질 때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고밖에 생각이 안 되는 지금의 상황.

놀랍게도,

나는 지금 내가 만들던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 속에 있었다.

녹안(綠眼)의 소년 (1)

데미언(Damien).

올해 열다섯이 된 그는 왕국 남부, 텔마르크 영지의 주도(主都)인 크라벤(Kraven)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삶은 대도시 크라벤이 품고 있는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년은, '도시의 쓰레기장'이라 불리는 빈민가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창녀였다.

돈 몇 푼에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사회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싸구려 인생.

소년의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스쳐 갔던 무수히 많은 남자 중 하나였다.

이름도, 성도 몰랐다.

다만, 어머니가 말하길 그 남자의 얼굴만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새하얀 피부를 지닌 잘생긴 미남자였고, 더러운 뒷골목 사창가에 어울리지 않는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깊은 밤 창문 너머로 전해지던 한 줌 달빛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던 사내의 금발 머리와 신비로운 올리브색 눈동자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데미언은 어머니의 기억 속 사내를 꼭 빼닮은 모습으로 자라났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비쩍 마른 팔다리와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홀쭉한 볼과 허옇게 말라붙은 입술을 하고서도 소년은 진흙 속의 진주처럼 빛났다.

이름 모를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할, 찬란한 금발 머리와 아름다운 녹안(綠眼) 때문이었다.

빈민가의 꼬질꼬질하고 더러운 아이들 틈에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색을 하고서도 홀로 반짝였던 데미언.

소년의 어머니는 자식의 그러한 특별함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늘 걱정하고 불안해했다.

그녀는 평생을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이 살아온 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더럽고 추악한 욕망이 모여드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평생을 악착같이 버텨온 사람이었다.

벼려 놓은 칼끝처럼 날카롭게 살아있는 그녀의 본능이 말했다.

그녀의 아들이 지닌 그 '분수에 맞지 않는' 특별함이, 언젠가 큰 화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나이 어리고 예쁘장한 남자아이에게 환장하는 더러운 욕망을 지닌 자들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추잡한 위협으로부터 하나뿐인 자식을 지키려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녀는 아들의 풍성했던 금발을 면도칼로 남김없이 밀어버리고, 새하얀 얼굴에 일부러 검댕을 묻혀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흙먼지가 잔뜩 묻어 옷인지 걸레짝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남루한 옷을 입혔다.

그렇게, 크라벤의 빈민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진흙 속 진주의 빛이 가려졌다.

그 진주가 더 크게 자라날 때까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숨기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

"데미언이라..."

새로 얻게 된 이름을 입안에서 천천히 되뇌며, 나는 말로 다 이르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다행히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흡수된 소년의 기억이 지금의 상황을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억이 이어졌다고 한들 감정마저 물 흐르듯 이어질 순 없는 법.

"머리론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론 도통 이 상황이 와닿질 않네. 후우..."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서른여덟 살의 술배 나온 노총각 아저씨와 게임 속 판타지 세상을 살아가던 나이 열다섯의 어린 소년.

살아가던 세상과 인종, 나이와 직업 등 모든 것이 지독히도 다른 두 개의 삶.

그 사이의 간극(間隙)이 생각 이상으로 크고 넓었기에, 여전히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아... 진짜 살다 살다 별일이 다 있다, 별일이 다 있어."

황망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연신 마른세수를 해보지만, 두근거리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나는 조상님들의 지혜가 담긴 옛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멍청하게 앉아만 있기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맞을 터였다.

"근데... 뭐부터 해야 하지?"

막상 시작하려니 머릿속에 너무 생각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이 게임 <로스트 킹덤>의 세계는 개발자였던 내가 직접 만들고 설계한 세상이었다.

그 얘기인즉, 이곳 세상의 법칙과 역사와 기타 등등의 각종 비밀을 내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 게임의 주요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원작 내용까지 모두 꿰뚫고 있으니까.'

완벽한 게임 제작을 위해 게임의 원작 소설, <로스트 킹덤: 왕홀(王笏)의 소녀>를 어림잡아 스무 번은 독파한 나였다.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원체 많으니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목표도 많을 수밖에.

하지만...

"...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문제지."

내 머릿속엔 이 세상을 뒤흔들 어마어마한 지식과 계획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열다섯 소년 데미언은 돈 없고 빽 없는 빈민가 출신의 가난뱅이 고아에 불과했다.

머릿속에 아무리 대단하고 완벽한 계획이 세워져 있다고 한들, 현실에서 이룰 능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주먹을 꼭 쥔 채로 각오를 다졌다.

"그래, 욕심내지 말자.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차분하게 해나가는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는 인생을 살고 싶거든, 실현 가능한 작은 목표부터 이뤄나가는 버릇을 들이라고.

거, 누군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한테 아주 딱 필요한 말을 해주셨네.

"그래,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일단 이 냄새 나는 창고에서 나가는 것부터 하자."

그렇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닫혀있는 창고 문을 향해 손을 뻗는데...

끼이익- 쾅!

"야, 이 새끼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처자고 있어?!"

"?!"

***

내가 있던 창고의 문을 부서질 듯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지르는 한 남자.

그는 자그마한 키에 볼품없는 얼굴을 지닌 젊은 사내였다.

"해가 중천인데 이제야 기어 나와? 네가 아직 덜 맞았지? 엉?"

원래의 나라면 저 남자가 누군지 몰랐을 거다.

하지만 열다섯 소년 데미언의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은 지금은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크라벤 용병 길드 사무소의 접수 담당 직원, 좀머(Sommer).'

올해로 스물다섯이 된 그는 이제 겨우 열다섯인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문제는, 그가 용병 길드 사무소의 막내이자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데미언을 매일 같이 괴롭히는 질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 다른 직원들이나 길드 사무소에 드나드는 용병들에겐 찍소리도 못하면서 나이 어린 데미언에게만 폭행과 폭언을 퍼붓는 놈이지.'

전형적인 '강약약강' 스타일의 찌질이.

그것이, 머릿속에 남은 데미언의 기억을 토대로 분석한 좀머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평가였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좀머가 폭언을 퍼붓기 시작한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다른 사람들 출근하기 전까지 청소 다 끝내 놓으라고! 근데 이제야 기어 나와? 늦잠이라도 처 잤냐? 어?"

안 그래도 못생긴 좀머의 얼굴이 짜증으로 잔뜩 구겨져 있다.

뒤이어 잔뜩 힘주어 들어 올린 오른손!

꼴을 보아하니 평소처럼 내 뺨을 후려치려는 심산인가 본데...

'어림 없다, 이 새끼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늘 보던 그 데미언이 아니란다.

뭐, 겉으로 보기엔 똑같겠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다르다 이거야!

'... 내가 인마, 죽기 전엔 비록 똥배 나오고 술담배에 찌든 아저씨였지만 젊었을 땐 복싱도 배우고 동네에서 한주먹 했었다고!'

전형적인 아저씨의 허세였지만, 눈앞의 좀머는 그런 허세를 부릴만한 상대였다.

딱 봐도 싸움 더럽게 못 하게 생긴 관상이거든.

'하, 데미언 이 자식은 이딴 놈한테 맨날 맞고 산 거야?'

하긴 뭐, 아직은 어린 애니까 어른이 괴롭히면 당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 위로 들어 올려졌던 좀머의 오른손이 내 뺨을 향해 날아온다.

'느리다, 느려!'

코웃음이 날 정도로 어설픈 손짓이었다.

저따위 허술한 공격 따윈 가볍게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피할 수 있다.

그 후에 가볍게 전진 스탭을 밟으면서 상대에게 다가가 텅 비어 있는 옆구리에 주먹을 꽂으...

철썩-!

"어흑!"

고개가 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눈앞에 별이 보였다.

맞았다.

그것도 정통으로.

털썩-!

턱에도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이걸 맞았다고?

'아니, 시발... 이딴 것도 못 피해?'

분명 머리로는 피했는데, 몸이 그걸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니, 단순히 따라가지 못한 수준이 아니었다.

'허, 이게 무슨... 뭐야, 스턴이라도 걸린 거야?'

충격적이게도,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얌전히 선 채로 좀머의 손찌검에 일격을 허용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동안 이 자식한테 무기력하게 당했던 경험 때문에!'

영혼은 바뀌었으나, 그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인 데미언의 육체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발생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 몸 자체가 너무 허약해. 손이 날아오는 걸 뻔히 보고도 반응하질 못하잖아!'

이해 못 할 사정은 아니었다.

데미언은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난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기는커녕 굶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삶을 살았다.

그런 녀석의 몸이 제대로 성장했을 리 만무했다.

근육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깡마른 팔다리와 옷 위로도 갈비뼈의 형체가 보일 정도의 얇은 몸통.

한마디로 '매가리 없는' 몸뚱이 그 자체였던 것.

몸 상태가 이 모양이니, 좀머의 그 어설픈 손짓도 보고도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던 거다.

"아으..."

얼얼한 뺨을 부여잡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데, 머리 위로 좀머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쏟아졌다.

"하, 이 새끼 봐라? 고작 그거 맞았다고 주저앉아? 엄살 그만 부리고 빨리 일어나 새끼야!"

탁! 탁! 탁! 탁!

대뜸 뺨을 후려갈기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좀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내 머리를 들고 있던 종이뭉치로 계속 때리기 시작했다.

종이뭉치가 꽤 두툼했기에 아프기도 아팠지만, 무엇보다 맞은 부위가 머리였기에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니, 이 개새끼가 근데...!'

뺨 때리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머리까지 건드려?

다른 곳도 아니고 남자의 자존심인 머리를?

'으아아... 참자, 참아!'

하지만,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난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양아치의 폭력에도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자고로 성질내는 것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

지금의 내겐 훗날을 기약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빡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바짝 엎드려 있자.'

확 들이받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나는 한껏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너무 피곤해서 조금 늦게 일어났습니다!"

"피곤? 시발, 네가 뭘 했다고 피곤해? 기껏해야 바닥에 걸레질이나 몇 번 한 주제에."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

"어? 그리고 이 새끼야, 어디서 윗사람이랑 얘기하는데 눈을 똑바로 뜨고 꼬나 봐? 눈 안 깔아? 어?"

이제는 하다하다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지랄을 하기 시작하는 좀머.

하지만...

"허, 이 새끼 봐라? 야, 내 말 씹냐? 눈 안 깔아?! 눈, 깔, 아!!!"

"..."

이번만큼은 그의 지랄에 장단을 맞춰 줄 수가 없었다.

왜냐고?

'... 이건 또 뭐야?'

씩씩거리는 좀머의 머리 위에 나타난 '무언가'가, 나의 시선을 잡아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녹안(綠眼)의 소년 (2)

[스킬 '창조주의 눈'을 사용합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내 정면에 선 좀머의 머리 위에서 '그것'이 나타났다.

팟-!

『 좀머 / Lv. 2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사무원

고유 특성:

- 없음

보유 스킬:

- 없음

보유 아이템:

- 싸구려 깃털 펜(일반 등급) 』

그것은, 푸르스름한 색깔을 띤 반투명의 화면이었다.

마치 지난 생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때마다 보았던 팝업 광고창과도 같은 모습.

'이게 대체...?!'

그 묘한 기시감에 눈을 끔벅이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어어어? 잠깐, 이거 혹시... 그건가?!'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내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단어.

게임은 물론이고 다양한 장르의 웹소설 속에 왕왕 등장해 주인공이 살아가는 삶의 난이도를 현격히 줄여주는 그것.

상태창, 아니...

갓.태.창!

'그래, 빙의물엔 상태창이 나와 줘야지! 으하하하!'

스킬 '창조주의 눈'이라는 멋들어진 이름으로 내 앞에 나타난 상태창을 보며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연고 하나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험한 세상의 등불이 되어줄 감사한 기적이 등장한 것이다.

"이, 이, 이 새끼가? 이, 인마! 눈 안 깔아! 눈 깔라니까!!!"

그 와중에 상태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자신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오해한 좀머가 꽥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평소엔 자신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던 내가 안 하던 행동을 하자 놀란 모양이었다.

'뭐 이런 쫄보 새끼가...'

좀머의 과민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래 뭐, 눈 까는 것 정도야 해줄 수 있지. 어차피 이딴 짓거리 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이 새끼야.'

상태창이라는 놀라운 이능(異能)의 존재를 확인했기 때문일까?

양아치 좀머를 대하는 마음이 전과 달리 한껏 푸근해진 나였다.

냉큼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뒤, 거듭 허리를 꺾으며 흥분한 좀머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순간적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느라... 잠깐 정신을 놨나 봅니다. 잘못했습니다!"

"...!"

지극히 공손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것일까?

주춤주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좀머가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며 내게 말한다.

"크흠, 큼! 이 새끼가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아무튼! 빨리 튀어나와서 일 시작해! 곧 길드장님 출근 시간이라고!"

"옙! 알겠습니다!"

***

세상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였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데미언은 혼자가 되었다.

떠난 어미를 그리워할 새도 없이, 당장 오늘을 살아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열두 살의 고아 소년.

그런 소년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왜인지 낯이 익은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근육질에 덩치가 컸고, 얼굴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어색한 손길로 어미 잃은 소년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어준 사내.

그의 두툼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거친 느낌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 따라와라."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을 데리고 길을 나선 사내는 용병 길드 사무소로 향했고, 그곳에 어린 데미언을 맡겼다.

알다시피 용병 길드 사무소는 부모 잃은 고아를 맡아 길러주는 일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용병 길드 측에선 별말 없이 데미언을 받아주었고, 건물 뒤편에 딸린 허름한 창고에서 소년이 지내도록 허락해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데미언의 어머니를 자주 찾았던 단골손님 중 하나였다.

데미언을 맡아주는 대가로 사내가 용병 길드 측에 꽤 많은 돈을 냈다는 것 역시 그로부터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

"거참... 순정파 아저씨였네."

본디 내 것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나의 것이 되어버린 데미언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이제 한 달 차.

오늘도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창고로 돌아와 허름한 이부자리에 눈을 감고 누웠다.

처음엔 창고에서 나는 냄새가 심해 잠도 오지 않았었는데, 한 달 내내 여기서 살다 보니 이젠 적응이 됐는지 포근하기까지 했다.

"참, 사람 적응력이라는 게 무섭네."

지난 한 달간, 나는 크라벤 용병 길드 사무소의 막내 직원 데미언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창고로 돌아와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 기억을 토대로 지난 삶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머릿속엔 생생히 남아 있으나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던 일들.

그 기억을 되새기며 소년 데미언의 삶에 더욱 깊이 몰입하기 위해서였다.

오늘 복기한 것은 데미언이 용병 길드 사무소에 살게 된 과정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린 데미언은 몰랐겠지만, 지난 생에서 살 만큼 살아봤던 나는 그 몇 안 되는 기억만으로도 중년 사내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아마도 그 아저씨는, 데미언의 어머니를 마음에 두었던 거겠지.'

그녀가 죽은 이후 제 자식도 아닌 데미언을 찾아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살 곳을 구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데미언을 용병 길드에 맡긴 뒤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 일하다 죽었겠지, 아마도.'

근육질에 커다란 덩치, 얼굴 가득한 크고 작은 상처.

더불어 도시 내의 수많은 곳 중 용병 길드에 어린아이를 맡겼다는 사실로 나는 그의 직업을 추측할 수 있었다.

중년 사내는 십중팔구 용병(傭兵)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을 하는 이들이 바로 용병이었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더럽고, 위험하고, 잔인한 일을 하며 목숨값을 받는 이들.

비록 창녀와 손님으로 만난 사이였지만, 데미언의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그 중년의 용병은 그녀의 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했다.

"... 먼 훗날에 저 세상 가서 뵙게 되면 그때라도 감사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름 모를 아저씨."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기억 속에 선연히 남아 있는 나의 은인(恩人)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크흠, 아무튼. 이걸로 데미언이 용병 길드 창고에서 살게 된 이유는 확실히 알겠네."

그렇게 크라벤 용병 길드에서 먹고 자며 일한 것이 벌써 3년째.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가 되었던 열두 살 꼬마는 이제 열다섯 소년이 되었다.

하지만 나이만 몇 살 더 먹었을 뿐 또래보다 작은 키, 깡마른 팔다리와 힘없이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하아, 빨리 자자. 1분이라도 더 자야 내일 일어나기 편하지."

열다섯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관록(?)을 지닌 단단한 영혼이 소년의 육신에 깃들었다는 사실이었다.

***

다음날 아침.

"아... 홉! 여... 흐으윽, 어어얼!"

오늘도 새벽닭이 우는 시간에 맞춰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정해진 루틴에 맞춰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뭐 그리 대단한 운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팔굽혀 펴기와 스쿼트, 달리기 정도가 내가 하는 것의 전부였다.

하지만 데미언은 내가 빙의(?)하기 전까진 생전 운동이란 걸 해본 적 없던 나약한 소년.

팔굽혀펴기 열 개를 채우는데 꼬박 2주가 걸렸고, 달리기 몇 분 뛰고 구토를 했을 정도이니 데미언의 몸이 얼마나 저질(?)이었는지 알만했다.

"허윽...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 같아선 몸이 아주 녹초가 될 정도로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조절해서, 길드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만 해야 했다.

"흐아아... 자아,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시작해볼까?"

용병 길드 사무소 막내 업무의 시작은 청소였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고, 물을 담은 양동이에 걸레를 빨아가며 건물 곳곳의 먼지를 닦아낸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하다 보니 학창시절에 하던 기억이 되살아나 익숙하게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해도 이놈의 청소가 끝이 나질 않는다는 것.

이유야 뻔했다.

내가 쉬는 꼴을 보면 큰일이 날 것처럼 생지랄(?)을 떠는 좀비... 아니, 좀머 새끼 때문이었다.

"야! 야, 이 새끼야! 저기 먼지 묻은 거 안 보여? 빨리 튀어가서 닦아!"

"눈깔은 장식이냐? 여기서도 더러운 게 뻔히 보이는 데 저게 안 보인다고?"

"청소 대충 할 생각 마 이 새끼야! 남들은 고아 새끼라고 불쌍해서 대충 넘어가 줄지 몰라도 나는 공사 구분이 분명한 사람이야, 제대로 하라고!"

길드 의뢰 접수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좀머가 애지중지하는 싸구려 깃털 펜을 전설의 보검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휘두르며 내게 개소리를 해댄다.

'이 미친 새끼가... 방금 여기 한참 동안 걸레질한 거 봤으면서!'

무슨 군대 훈련소에서 청소 상태 가지고 갑질하는 조교도 아니고.

손님들 앞에선 사근사근 입안의 혀처럼 구는 놈이 보는 사람만 없으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냉큼 대답했다.

"예, 선배님! 알겠습니다!"

좀머가 나를 괴롭히려고 억지를 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더 밝게 행동했다.

'여기서 뭐라고 말대꾸하면 그거 핑계로 생지랄을 하겠지.'

말 같지도 않은 트집을 잡으며 억지로 시비를 거는 건 남 괴롭히는 걸 즐기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었다.

그 시커먼 속이 뻔히 보이는데 멍청하게 당할 수야 없지.

"에이, 시발... 재수 없는 고아 새끼."

등 뒤에서 좀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개가 짖을 때마다 사람이 일일이 반응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크흠... 저 새끼는 이제 신경 쓰고, 내 상태나 한 번 더 확인해볼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자, 곧바로 눈앞에 나의 현재 능력치를 보여주는 상태창이 떠올랐다.

팟-!

『 데미언 / Lv. 1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청소부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보유 아이템:

- 손때 묻은 빗자루(일반 등급)

- 낡은 대걸레(일반 등급) 』

그야말로 처참한 능력치였다.

직업(클래스)은 청소부, 레벨은 찌질이 좀머보다도 낮은 1의 최약체였고,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라고는 청소할 때 쓰는 빗자루와 대걸레가 전부.

초라하다는 표현조차도 과분할 지경인 지금의 나였다.

사람은커녕 시장 바닥에 쏘다니는 똥개 한 마리도 못 때려잡을 비루한 스펙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상태창을 통해 상대의 레벨과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스킬 '창조주의 눈'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나저나 고유 특성 창조주... 이건 대체 뭐냐.'

내가 지닌 고유 특성을 알게 된 지도 벌써 몇 주가 흘렀지만, 딱히 더 알게 된 정보가 없었다.

'레벨 변화가 없어서 그런가? 알아낸 게 없으니 답답하네.'

'창조주(創造主)'라는 단어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내가 이 <로스트 킹덤>을 창조한 게임 개발자이기에 주어진 특성 같았다.

더불어 내가 지닌 유일한 스킬인 '창조주의 눈' 역시 이 고유 특성과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창조주... 뭔가 대단한 특성 같기는 한데 말이지.'

이런 무시무시한 이름의 특성이 그저 말뿐일 리가 있겠는가?

뭔진 몰라도 분명 엄청난 능력이 주어질 터!

하지만...

"... 진정하자, 진정해. 레벨 1따리 허접에 어울리는 겸손함을 지녀야지."

붕붕 들뜨던 마음을 냉철한 자기 분석으로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지금의 나는 떨어지는 낙엽에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에도 방심하지 않고 긴장해야 하는 레벨 1따리의 뉴비 신세.

조바심을 버리고, 공든 탑을 조금씩 쌓아 올리듯 꾸준하고 성실하게 힘을 길러야 했다.

"문제는, 이 되먹지 않은 몸으로 깔짝깔짝 운동해서 어느 세월에 레벨을 올리냐는 건데..."

기본 바탕이 워낙 형편없으니 남들보다 낫긴커녕 그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도 힘들었다.

건물 공사로 비유한다면 땅 다지는 지반 공사에만 한세월이 걸리는 꼴이랄까?

"... 몸 만드는 건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기술(?)부터 배워야겠다. 그게 더 빠르겠어."

내가 시간이 많지 않았다.

팔굽혀펴기 열 개 하는데 2주나 걸리는 저질 몸을 믿느니, 어떻게든 다른 살길을 찾아보는 게 옳았다.

다행히도, 나에겐 다른 이들은 절대 따라 하지 못할 비장의 한 수가 존재했다.

"내가 만든 걸 이렇게 게임 속에 들어와서 직접 써먹게 될 줄은 몰랐네. 인생이란 게 참..."

돈 없고 빽 없는 빈민가의 가난뱅이 고아 소년의 고된 가시밭길 인생을 단숨에 화려한 꽃길로 바꾸어 줄 마법(魔法)의 이름.

바로, '히든 피스(Hidden Piece)'였다.

녹안(綠眼)의 소년 (3)

'히든 피스(Hidden Piece)'란 무엇인가?

게임에서 말하는 히든 피스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말 그대로 게임 속에 '숨겨진(Hidden)' 직업이나 아이템, 스킬 등을 의미한다.

보통 히든 피스는 정석적인 플레이 방식으로는 얻을 수가 없고, 특별하고 변칙적인 플레이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었다.

지도상에 표시되지 않는 비밀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거나, 꼬박 몇 시간을 투자해 지루한 단순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해 그런 막대한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히든 피스가 지닌 어마어마한 가치 때문이었다.

특히나 <로스트 킹덤> 속의 히든 피스들은 그중 하나만 얻어도 게임의 전체적인 난이도를 뚝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질문 하나.

<로스트 킹덤>의 게임 개발진들은 굳이 왜 작품의 밸런스를 해칠 정도의 위험 요소를 만들어 게임 속에 집어넣은 것일까??

그 개발진의 리더였던 나는,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 애초에 정식 출시용으로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랬다.

<로스트 킹덤> 속 히든 피스들은, 게임의 정식 콘텐츠로 만든 게 아니라 그냥 게임 개발진 내부에서만 쓸 용도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개발 단계에서 우리끼리만 장난삼아 갖고 놀다가, 게임 정식 출시 전에 삭제하려고 했던 것.

문제는, 그 삭제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내가 게임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인데...

'...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문제였던 게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네?'

이런 걸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이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는 히든 피스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 얘기인즉,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독차지할 수 있다는 얘기지.'

하나만 있어도 게임의 밸런스를 크게 뒤흔들 수 있는 규격 외의 보물들.

히든 피스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년 데미언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동네 적응도 어느 정도 했으니..."

슬슬, '보물찾기'를 시작해봐야겠다.

***

"나 먼저 들어갈 테니까, 여기 바닥 더러운 거 싹 다 치워놓고 퇴근해라. 내 말 알아들었냐?"

"네, 알겠습니다."

"입만 털지 말고 이 새끼야. 내일 아침에 제대로 확인할 테니까, 농땡이 피울 생각하지 마."

언제나 그렇듯, 한껏 재수 없는 말투로 사무소 청소를 지시하며 퇴근하는 좀머.

그 때려주고 싶은 못생긴 면상(?)을 향해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걱정마십쇼!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하이고, 지랄하네. 재수 없는 고아 새끼가 어디서 감히 선배니 뭐니 들러붙고... 아, 됐다. 관두자."

그냥 가도 될 것을 꼭 마지막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좀머였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의 경험으로 좀머의 양아치 기질에 충분히 적응한 나는 이제 그런 말을 듣고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후우... 바닥이 더럽긴 하네, 진짜."

좀머를 마지막으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퇴근한 용병 길드 사무소.

자고로 용병 길드란 돈벌이를 찾는 험상궂은 용병들과 그런 용병들에게 잘 보여서 어떻게든 업계에 발 좀 걸쳐볼까 싶은 동네 불량배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들락거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대개 그런 이들은 고급스러운 비단옷에 깔끔한 구두보단 피와 먼지가 엉겨 붙은 갑옷 차림에 흙먼지투성이의 더러운 부츠를 신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필 비가 내려가지고... 젠장!"

아침까진 깨끗했던 바닥이 사람들이 묻히고 들어온 진흙으로 개판이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길드 막내인 나의 퇴근은 좀 더 늦춰지게 되었다.

"하긴 뭐, 애초에 여기서 살고 있으니 퇴근이랄 것도 없는 건가? 허허..."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이놈의 회사(?) 지박령 팔자는 변함이 없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 얼른 끝내고 움직여야지."

물에 흠뻑 적신 대걸레 자루를 힘껏 움켜쥐며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

"엉? 데미언이냐? 이 시간에 어쩐 일로?"

크라벤 도시 서편에 자리 잡은 커다란 시장의 가장 번화한 골목.

그곳에서 슬슬 가게 문 닫을 준비를 하던 무기상점 '크라벤 아머(Kraven Armor)'의 주인 한스가 낯익은 얼굴의 소년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아... 하아...! 사장님, 아직 문 안 닫으셨죠?"

어지간히 급히 달려온 것인지, 허리를 꺾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금발의 소년.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성실한 막내, 데미언을 보며 한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크흠, 이제 해 떨어질 시간 되어서 슬슬 문 닫으려고 하긴 했다만... 우리 데미언이 왔으니, 장사를 좀 더 해야겠지? 하하!"

"하아... 하아... 감사합니다...! 하아-!"

"허이고, 숨넘어가겠다 이 녀석아! 숨부터 고르고 천천히 말해라. 어디 도망 안 갈 테니까. 하하하!"

시장 상인들에게 데미언의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못 먹어 비쩍 마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잘생긴 얼굴에 반짝이는 금발을 지닌 소년이 밝은 인사성까지 갖췄다.

어른들의 입장에서 예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

하지만 시장 상인들에겐 그것 말고도 데미언을 예뻐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데미언이 용병 길드라는 중요 거래처(?)와의 연결 고리라는 점이었다.

특히나 무기상인 한스의 경우 용병 길드가 자신의 최대 고객 중 하나였기에 데미언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허헛! 갑자기 뭔 일이 있길래... 뭐, 길드장님이 급하게 주문을 하신 게냐? 뭐가 필요하냐? 화살? 아니면 투척용 단검? 하하! 마침 오늘 아침에 좋은 물건이 들어왔..."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후우..."

가까스로 가쁜 숨을 진정시킨 데미언이 굽혀졌던 어깨를 펴며 한스에게 말했다.

"오늘은 길드 일 때문에 온 게 아니고요, 제가 쓸 물건 좀 사려고요."

"으응? 데미언 네가?"

데미언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스.

지난 3년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무기상을 찾아와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간 데미언이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쓰려 물건을 사간 적은 없었다.

애초에 한스의 가게는 창칼과 갑옷 따위를 파는 무기상이었기에, 청소 등의 잡무를 하는 어린 소년이 들려 뭔가를 살만한 곳이 아니긴 했다.

"아니, 데미언, 네가 쓰려고 한다니? 대체... 뭘 사려는 거냐?"

"검이요."

"검?!"

놀라 묻는 한스를 보며, 데미언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검술을 배우려고요."

"어허..."

데미언이 검술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들은 한스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눈앞의 소년이 혹시라도 용병이 되려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이 순진한 녀석이 결국 헛바람이 들어서... 저 앙상한 몸으로 그 험한 일을 어떻게 하겠다고!'

한스는 무기상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직업상 용병들을 자주 만나는 사람이기에, 한스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거칠고 힘들며, 위험한지 잘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생각하기에 용병이란 직업과 눈앞의 깡마른 소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데미언. 이 아저씨가 너를 아들처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그 용병 일이라는 게 말이다,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멋있기만 한 게 아니야. 엄청 고되고, 위험하고, 또..."

하지만 그런 한스의 생각을 눈치챈 데미언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

"저, 영업용으로 조금씩 검술을 배워보려고요."

"여... 영업용?"

"예. 제가 명색이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그래도 칼 잡는 방법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 찾아오는 손님들이랑 말도 더 잘 통하죠."

내 설명을 들은 한스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편다.

"아, 그런 거야? 아이고, 난 또 데미언 네가 용병이 되겠느니 어쩌니 그런 헛바람 들어간 소리를 할까 봐 걱정했다. 하하하!"

"어휴, 제가 이렇게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 어떻게 용병이 되겠어요? 지금 하는 일이 저한테는 딱이에요."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인석아!"

내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두른 한스가 자신 있게 말한다.

"자자, 안으로 들어가자. 이 아저씨가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주마! 돈은 딱 반값만 받으마.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안 그러냐? 하하하!"

"옙, 감사합니다."

***

가게 안으로 들어온 한스가 나를 제일 구석에 있는 진열대 앞으로 안내했다.

"자, 데미언! 이쪽에서 하나 골라봐라. 여기 있는 것들이 좀 오래되긴 했어도, 아주 못 쓸 물건들은 아니거든. 하핫!"

좋은 물건들은 가게 입구 쪽에 있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리로?

"흐음..."

눈앞의 물건들을 살피며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깊은 탄식.

'... 내 이럴 줄 알았다.'

갑자기 물건을 반값으로 준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 이거, 그냥 안 팔리는 물건들이네.'

물건 위에 내려앉아 있는 뽀얀 먼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스가 보여준 물건들은 모두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악성 재고 상품이었다.

'그럼 그렇지, 장사꾼 말은 믿는 게 아니지.'

먼지 쌓인 물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갑자기 한스가 과장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잉? 아, 하하하하! 요 며칠 공기가 영 안 좋더니 뭔 놈의 먼지가 이렇게... 후! 후후! 후우우우!"

입바람을 열심히 불어보지만, 몇 년 묵은 먼지가 그렇게 쉽게 떨어질 리 없었다.

하도 입바람을 세게 불어서 어지러운지 조금 휘청거리는 한스.

그 모습을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아저씨 말처럼 진짜 오래된 물건들이긴 한가 보네요. 먼지가 무슨..."

"에이! 이거 먼지만 좀 쌓였다뿐이지 완전 새거야, 새거! 이봐, 날이 멀쩡하게 살아 있잖아!"

급하게 검 하나를 집어 든 한스가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 검날에 가져다 대었다.

투둑-!

"자, 자자! 봤지? 검 가져다 대자마자 머리카락 끊어지는 거!"

"... 그거 그냥 아저씨가 힘줘서 끊어낸 거잖아요. 저도 눈 있어요."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검의 손잡이와 검날 부근의 결합이 헐겁다던가, 손잡이에 감은 가죽이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슬슬 삭아서 부서지고 있다던가...

왜 이 물건들이 안 팔리고 여태까지 가게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지 알만했다.

"... 혹시, 저희 길드에 넘겨주시는 물건도 다 상태가 이런 건 아니죠? 그럼 완전 계약 위반인데..."

길드와의 계약을 걸고넘어지는 내 말에 놀란 한스가 펄쩍 뛰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잇! 그게 무슨 소리냐, 데미언! 이 아저씨 섭섭하다! 너희 길드에 납품하는 물건은 내가 하나하나 꼼꼼하 검수해서 넘기는 거야! 여기 있는 것들은 몇 년 전에 내가 근처 상단 망했을 때 헐값으로 받아온 거라 상태가 이런... 헙!"

결국, 말이 길어지다 제 발등을 찍고만 한스였다.

"흐음, 망한 상단에게 헐값으로 받아온 물건이라... 그런 걸 저한테 팔려고 하신 거군요? 아까는 아들 같으니 뭐니 하시더니만... 하긴, 아들 같은 거지 제가 진짜 아저씨 아들은 아니니까요."

"그, 데미언! 그게 아니라...!"

"생각해보니 선물로 주신다고 넙죽 받으려고 했던 저도 참 나쁜 놈이죠. 제가 진짜 아들도 아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 저, 내 말 좀 들어 봐라 데미언!"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저씨. 정당하게 물건값 치를 테니까, 이제 좀 쓸 만한 걸 보여주세요."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픈 곳을 쿡쿡 찌르는 내 모습에 당황한 한스가 진땀을 흘렸다.

'거, 아저씨. 말로만 하지 말고 물질적인 성의를 좀 보여달라고!'

그런 내 속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잽싸게 가게 입구 쪽으로 달려가 무기 진열대를 뒤적거리던 한스가 뭔가를 들고 다급히 돌아왔다.

"자자, 데미언! 이건 진짜다. 너도 방금 봤지? 가게 앞쪽 진열대에서 꺼내온 거?"

"흠, 어디...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그래, 그래. 자, 마음껏 살펴봐!"

아까와는 달리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 한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시퍼렇게 날이 잘 살아있는, 한 자루의 검(劍)이었다.

첫 번째 히든 피스 (1)

'뭐, 나쁘진 않네.'

이번엔 허세가 아니었는지, 한스가 새로 가져온 검의 상태는 꽤 괜찮았다.

그렇다고 뭐 전설의 보검 수준이란 얘기는 아니고.

그저 나 같은 초심자에게 추천할 만한, '저렴한 가격에 막 써도 아깝지 않은' 보급형 검 치고 품질이 나쁘지 않다는 소리였다.

"흔히 '숏소드(Short Sword)'라고 부르는 한손검이다. 뭐, 검 배우는 사람이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선택하는 무기지."

"숏소드... 확실히 길이가 짧네요."

"그래. 특히 데미언 너 같은 경우엔 나이가 어려서 아직 몸이 완전히 자라지 않았으니, 더더욱 이걸로 검을 배워야 할 거야. 어쭙잖은 애들이나 멋 부린다고 롱소드 들고 설치지."

"음..."

한스의 설명을 들으며 검을 꼼꼼히 살펴보는데, 만듦새에선 딱히 불량의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 다행히 양품을 뽑았네. 복불복 성공이다.'

휙- 휙-!

시험 삼아 허공에 대고 검을 몇 번 휘둘러 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았다.

'이번엔 이렇게...'

이번엔 좀 더 격한 동작으로 검을 휘둘러 보았다.

찌릿-!

'... 젠장.'

바로 어깨에 반응이 온다.

그렇게 엄청나게 힘을 실어 휘두른 것도 아닌데, 부실한 어깨에 부담이 갔는지 살짝 통증이 느껴졌다.

'아오, 이 죽일 놈의 몸뚱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이길래 고작 이 정도의 동작만으로도 어깨가 아픈 것인지.

'... 나쁜 의미로 역대급이네.'

씁쓸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나는 들고 있던 검을 한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아저씨. 이걸로 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원래는 8실버에 파는 물건인데, 내가 아까 실수한 것도 있고 하니까 특별히 1실버 깎아주마. 하하하! 좋지?"

"..."

한스의 너스레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녹색의 눈동자를 들어 물끄러미 한스의 눈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 아저씨, 끝까지 이런 식으로 한다고?

"아니, 그..."

"..."

침묵의 시선이 길어질수록, 무너져가는 한스의 표정.

결국,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하아! 그래, 아까는 아저씨가 정말 미안했다! 그러니까, 그... 6실버! 6실버에 주마! 이러면 진짜 남는 것도 없어!"

"..."

진심을 담은 눈빛 한 방으로 물건 가격을 1실버나 추가로 깎았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원래의 데미언이라면 모를까, 나는 고작 물건값 2실버 깎은 거 정도로 신이 날 만큼 물렁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까짓 연습용 숏소드 따위를 사려고 여기 온 것도 아니었다.

"... 아까는 뭐 반값에 주시겠다더니?"

"아니, 그건 이 검이 아니었고..."

"아, 헐값에 사 온 싸구려 칼은 반값에 줘도 제대로 된 건 아까워서 그렇게 못 주시겠다?"

"그... 그게 아니라!"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더 하면 어른을 상대로 괜히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았기에 이쯤 하기로 한다.

"됐어요, 아저씨. 농담이었어요."

"...?"

"그냥 제값 주고 살게요. 장인이 피땀 흘려 만든 작품을 막 후려쳐서 사려고 들면 안 되죠. 자, 여기요. 돈 받으세요."

짤랑-

한스의 손바닥 위에 반짝이는 은화 여덟 개를 내려놓았다.

8실버.

일주일 치 봉급으로 겨우 은화 열 닢을 받는 나에겐 꽤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나는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스가 보여준 숏소드가 마음에 들어서?

아니지.

내가 이깟 평범한 숏소드의 가격으로 은화 8닢을 흔쾌히 내어놓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신요, 아저씨. 이 숏소드에 저거 하나 덤으로 끼워주세요."

"엥? 저걸 말이냐?"

"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것'을 본 한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처음 가게에 들어와 확인한 먼지 쌓인 무기 중에서도 가장 낡고 볼품없는 물건이었다.

진열대에 올려져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던 낡은 검 한 자루.

대체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 건지 검집은 아예 있지도 않았고, 잔뜩 이가 빠진 검날은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실전은커녕 연습용으로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을 지경인, 사실상 '고철'에 불과할 물건.

하지만 그 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나에겐,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보검이었으니...

'... 첫 번째 보물, 찾았다.'

내가 <로스트 킹덤>의 세계에서 찾아낸 첫 번째 히든 피스.

지금으로 4백여 년 전 활약했던 왕국 역사상 최강의 검사, '검성(劍聖)' 울리히 리히테나워의 낡은 롱소드가 내 눈앞에 있었다.

***

"후우..."

아늑하고 냄새나는(?) 나의 보금자리.

용병 길드 창고로 돌아온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바닥에 놓인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둘 중 하나만 바라본 것이었지만.

"이게 바로 검성의 롱소드란 말이지..."

정식 명칭은 '검성의 낡은 롱소드'.

내 눈앞에 놓인 이 검은, <로스트 킹덤>에 존재하는 여러 히든 피스 중에서도 최초로 만들어진 보물이었다.

특히, 나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능력치와 외관 디자인은 물론 검에 얽힌 역사적 설정에 이르기까지.

검에 관한 모든 것이 개발팀의 리더였던 나의 뜻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 이거 기분 참 묘하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기분이었다.

평생 마주친 적 없었던, 그리고 마주칠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자식을 만나게 된 느낌이랄까?

"자식은커녕 결혼도 못 해봤지만..."

... 뭐, 어쨌든. 그런 비슷한 느낌일 것 같다는 얘기다.

팟-!

『 보유 아이템:

- 손때 묻은 빗자루(일반 등급)

- 낡은 대걸레(일반 등급)

- 검성(劍聖)의 낡은 롱소드(전설 등급) 』

상태창을 열어보자 보유 아이템 리스트에 검성의 롱소드가 새로 등록된 것이 보였다.

무려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다.

검 자체의 능력은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검을 쥐고 휘둘렀던 인물 자체가 워낙 특별해 전설의 이름을 갖게 된 케이스였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검성' 울리히 리히테나워가 무인(武人)으로써 쌓아온 평생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아 만들어낸 검술 '리히테나워 류(流)'.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는 그 위대한 검술 리히테나워 류를 완성한 검이었으며, 검성이 세상을 떠나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유일한 벗이기도 했다.

'... 이 검의 힘을 흡수한 이는 검성이 만들어낸 검술, 리히테나워 류를 펼쳐낼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한 모든 것이 게임 개발자였던 내가 직접 만들고 부여한 이 검의 고유한 설정이자, 서사(敍事)였다.

하지만...

"하아, 다 알고 있는데도 긴장돼 미치겠네..."

이 검의 힘을 흡수하기 위해선, 검의 주인이 된 이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직접' 찔러넣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조건이 달려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렇게 내 발등을 내가 찍는구나. 으..."

아니, 차라리 발등을 찍는 정도면 나았을 것이다.

내 심장을 내가 찔러야 한다니,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설정이란 말인가!

"무슨 마왕이 들고 다니는 마검(魔劍)도 아니고 이게..."

하지만, 그 설정 또한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니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후우, 한번 해보자. 죽지는 않을 테니까..."

롱소드의 검날 부분이 원체 긴 탓에, 역방향으로 손잡이를 잡으면 가슴을 찌를 각도가 나오질 않았다.

해서 어쩔 수 없이 검날 중간 부분을 잡고 가슴을 찔러야 했는데, 맨손으로 날을 잡으면 손을 베일 것이 뻔한지라 미리 준비해두었던 헝겊을 검날에 여러 겹 감았다.

"자, 준비는 다 됐고..."

후우우, 긴장으로 가득한 숨을 내쉰다.

애써 침착해보려 했지만 두려운 마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 무서운 게 당연한 거지.'

이 검으로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조그만 문구용 칼로 손끝만 살짝 베여도 그렇게 아픈데, 이 길쭉한 검이 심장을 찌르면 대체...

'에이, 시발! 모르겠다!'

시간 끌어봤자 안 좋은 생각만 자꾸 드는 것 같아서, 나는 저질러 버리기로 했다.

"자, 가즈아아아아아아-!!!"

양손으로 검을 단단히 붙잡고, 심장 부근을 힘껏 찔렀다.

푸우욱-!!!

"꺼흐으윽...!"

차가운 검날이 피육(皮肉)을 가르는 섬뜩한 느낌!

동시에 나는 마음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존나 아프잖아아아아아아악!!!'

그것이, 정신을 잃기 전 내가 떠올린 마지막 생각이었다.

***

눈을 떴다.

"...?"

허름한 창고의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줄기가 보였다.

그 빛의 밝기와 각도로 볼 때, 출근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난 게 분명했다.

"... 아이씨, 출근 늦었네."

이 와중에 출근 걱정이라니, 아직도 직장인 시절의 노예 근성(?)를 떨쳐내지 못한 나였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대신, 누운 자세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 왼쪽 가슴께를 쓸어보았다.

두려움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가슴에 찔러넣었던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없다.

세워두면 내 허리 어름까지 올 만큼이나 길었던 검.

그 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진짜로 없어졌네. 허, 알고 있었는데도 신기하긴 하다."

달랑 한 벌 있는 옷에 구멍이 날까 봐 일부러 상의를 벗은 채로 검을 찔러 넣었었다.

하지만, 지금 확인해본 내 가슴팍엔 그 어떤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핏방울 하나, 작은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는 새하얀 피부.

스스로 심장에 검을 찔렀던 그 엄청난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후으음..."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갈비뼈의 윤곽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앙상한 몸이 들숨으로 부풀어 오른다.

늘 보던 모습이다.

비쩍 마른 몸에 이어진 가녀린 팔다리도 그대로였다.

<로스트 킹덤>의 세계가 품은 최초의 히든 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지닌 힘을 흡수했건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확실히 이루어져 있었다.

"... 창조주의 눈."

팟-!

『 데미언 / Lv. 1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청소부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평범한 숏소드(일반 등급)

- 손때 묻은 빗자루(일반 등급)

- 낡은 대걸레(일반 등급) 』

한눈에 보이는 상태창의 변화.

보유 아이템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사라지고, 고유 특성 '검성(劍聖)'과 스킬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가 추가되었다.

여기서 문득 든 생각.

검술도 스킬로 분류가 되는 건가?

'하긴... 검 쓰는 기술(Skill)이니 스킬이 맞긴 하지.'

일단 상태창이 알려준 내용으로 봤을 땐, 검의 능력을 흡수하겠다는 내 계획은 생각대로 잘 진행된 것 같았다.

하지만,

"... 확인은 해봐야겠지."

다행히도 그 확인 작업을 도와줄 감사한 희생양(?)이, 지금 막 도착한 듯했다.

끼이익- 콰앙-!

"야! 이 빌어먹을 고아 새끼가... 네가 죽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지? 이 새끼가 존나 빠져 가지고!"

나의 재수 없는 직장 상사, 좀머가 창고 문을 박차고 들어와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첫 번째 히든 피스 (2)

좀머(Sommer)는 크라벤 용병 길드에서 5년째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상단에서 짐 나르던 말단 직원이었는데, 일하던 상단이 망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찾다가 용병 길드로 흘러들어온 경우였다.

그는 업무는 접수 담당으로, 일거리를 찾아 길드에 들른 용병들의 실력에 맞는 적당한 의뢰를 소개해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성격이 거칠었다.

아니, 말이 좋아 거친 것이지 사실 보통 사람에 비하면 '개차반'이라 불러도 무방할 놈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런 용병들도 길드에 방문하면 평소와 달리 행동을 조심했는데,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보통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몇십 년씩 업계에서 구르다 현직에서 은퇴한 전직 용병인 경우가 많았다.

그 험한 용병 바닥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은퇴까지 했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업적이었다.

용병 길드란 그런 닳고 닳은 베테랑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곳.

아무리 개념을 밥 말아 먹은 용병 놈들이라고 한들, 그런 곳에서까지 함부로 굴 수는 없었다.

그건 평생 용병으로서의 험한 길을 걸어온 선배들에 대한 예우였고, 앞으로 자신들이 걸어갈 길에 대한 대비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용병 출신이 아닌 좀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게 문제였다.

"에이, 이런 거 말고. 착수금 더 챙겨주는 그런 일 없어요? 이건 주는 돈이 너무 적잖아!"

"어이, 아저씨. 지금 이딴 걸 의뢰라고 알려줍니까? 아이, 시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애들 소꿉장난 해?"

"참나, 이거... 용병 일 안 해본 티가 나네.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리 하는 건지, 이해는 하쇼?"

"으잉? 얘네 지난번에 간단한 상단 호위 업무라고 해놓고 몬스터 득시글거리는 숲길 지나가서 뒤질뻔하게 만든 그 새끼들 아냐? 야! 이 새끼가 지금 누굴 좆 되게 하려고... 너 미쳤냐? 어?"

기본적으로 용병들은 좀머를 우습게 생각했다. 용병 출신이 아닌 데다, 일단 생긴 것 자체도 허접한 동네 양아치 같은 인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이가 많건 적건, 용병들은 좀머를 함부로 대했다.

반말 툭툭 내뱉는 정도는 양반이었다.

어떤 놈은 거기에 욕까지 섞었고, 심하면 대낮부터 술을 처먹고 와 손찌검을 하는 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상대로 좀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왜 반말하냐고 따져봤자 사과를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용병이란 놈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보다 '센 놈'에게만 상식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놈들이었고, 좀머는 그런 용병들에게 한주먹 거리에 불과한 '약한 놈'이었다.

그러니, 그냥 참아야 했다.

그렇게 일하다 쌓인 분노와 짜증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 참으며 살던 어느 날,

"어이, 일 열심히 하고 있나?"

"허업! 안녕하십니까!"

평소엔 거의 얼굴 볼 일도 없던 길드의 중간 간부 하나가 웬 꼬맹이를 데리고 사무소에 들렀다.

"오늘부터 네가 얘 좀 맡아서 일 가르쳐라. 그리고 우리 길드 창고 있지? 거기 대충 치워서 얘한테 자리 좀 내어 주고. 갈 곳이 없다네?"

"예?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아직 나이도 어리고, 빈민가 출신이라 글을 못 배워서 서류 작업 같은 건 못해. 그러니, 창고 정리나 청소 같은 일 위주로 시켜라. 시장에 심부름 갈 일 있으면 대신 좀 보내고. 내 말 알아들었지?"

"예? 아, 예에..."

길드와 오랜 인연이 있다는 한 용병의 부탁으로 길드에 들어오게 된 고아 소년, 데미언.

처음엔 소년의 후원자라던 용병의 존재가 두려워 잘 챙겨주는 척했던 좀머였지만, 그 용병이 몬스터 토벌 의뢰를 나갔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데미언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하! 이 병신 같은 고아 새끼가... 애비, 애미 없이 자란 티 내냐? 시발, 제대로 안 해?"

"묻는 말에 대답하라고 대답! 귓구멍이 막혔냐? 어?"

"부모 없이 살 거면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지! 어휴, 어디서 이딴 게 기어들어 와서..."

좀머는 부모 없이 자란 소년의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길드 내에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해줄 존재가 생겼다는 것에 신이 났을 뿐이었다.

죄책감? 그런 건 없었다.

미안한 거로 따지면 자신에게 함부로 구는 용병 놈들이 몇 배는 더 미안해야 했다.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뭐. 약한 놈은 먹히고, 센 놈은 잡아먹고 그런 거 아니겠어?'

괴롭힘을 당하는 당사자인 데미언이 싫은 티를 내거나 뭐라 반항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늘 무기력한 눈빛에 심약한 모습으로 있으니 괴롭혀도 별다른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좀머에겐 데미언을 괴롭히는 것이 그냥 숨 쉬듯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저 새끼가 이상해진 게 얼마나 됐더라?'

한 달쯤 되었나?

죽은 생선 눈깔 같던 데미언의 눈동자에 전에 없던 알 수 없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 죽어가는 늙은 말처럼 느릿하던 움직임이 먹이를 채 가는 날짐승처럼 빠릿빠릿해졌고, 예전엔 그렇게 자주 하던 지각도 이제 하질 않았다.

뿐인가, 이전엔 자신이 뭐라 말을 걸면 기가 죽어 흠칫흠칫 놀라고 겁먹기 일쑤였던 녀석이 이제는 느물거리는 말투로 슬쩍슬쩍 말대답까지 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시발, 갑자기 뭔 연줄이라도 생겼나...? 아니야, 애비애미 다 뒤진 고아 새끼가 연줄은 무슨!'

그렇게 묘하게 달라진 데미언의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며 한 번 제대로 밟아줄 기회만 노리고 있던 좀머.

드디어 오늘, 그 기회가 왔다.

실로 오랜만에 데미언이 지각을 한 것!

'잘 걸렸다, 이 건방진 고아 새끼!'

한 달 내내 별러왔던 순간이 온 만큼, 창고로 향하는 좀머의 얼굴엔 환희가 가득했다.

끼이익- 콰앙-!

데미언이 있을 길드 창고 문짝을 있는 힘껏 걷어차고 들어가며 소리를 지르는 좀머.

"야! 이 빌어먹을 고아 새끼가... 네가 죽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했지? 이 새끼가 존나 빠져 가지고!"

대체 뭔 짓을 했는지 윗옷까지 훌렁 벗어 던지고 멍하니 서 있는 데미언을 향해, 좀머는 미리 준비해서 들고 간 빗자루를 내리쳤다.

***

쉬이잉-!

좀머의 손에 들린 빗자루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이 미친 새끼가?!'

남의 집(사실 창고였지만) 문을 걷어차고 들어와서 냅다 육두문자 갈기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다짜고짜 빗자루를 휘두른다?

그것도 위험하게 머리를 노리고?

'이 양아치 새끼가 선을 넘네?!'

하지만, 한껏 열 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왜?

'... 보인다, 다 보여!'

그것은, 마치 평생 모르고 지냈던 새로운 영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듯한 기분이었다.

'미쳤네, 진짜!'

온몸 가득히 느껴지는 이 짜릿한 감각.

그 덕분에, 나는 내 머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빗자루의 나아갈 궤적을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런 게 가능해지다니!'

미쳤다는 말로도 부족할 이 상황.

이는, 히든 피스를 통해 왕국 역사상 최강의 무인이라 불렸던 '검성(劍聖)'의 심득을 얻은 결과였다.

"흡!"

아주 살짝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내 머리를 노리던 빗자루를 가볍게 피해낸다.

상대와 나의 간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부릴 수 있는 과감한 여유였다.

"어흣?!"

내가 자신의 공격을 피할 것이란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던 좀머가 몸의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린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꾸욱- 퍽!

휘청이는 좀머의 측면으로 다가서며 놈의 한쪽 발을 지그시 밟고, 동시에 어깨빵(?)을 갈겼다.

"으헉!"

쿠당탕-!!!

발을 밟힌 상태에서 어깨를 가격당한 좀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발은 바닥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상체는 뒤로 밀려나는 꼴이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으... 아..."

바닥에 뒤통수를 강하게 부딪친 좀머가 그 충격에 침을 질질 흘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난밤에 벗어두었던 윗옷을 천천히 걸치고 전날 시장에서 사 온 숏소드를 검집째로 집어 들었다.

'... 판 벌인 김에 서열 정리나 제대로 하자.'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작정하고 칼춤 한번 춰 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좀머에게 '죽음의 공포' 정도까지는 느끼게 해줘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도 기어오를 생각을 못 하지 않겠는가?

"어으, 으..."

뒤로 넘어진 충격에 아직도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던 좀머.

그런 그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냅다 걷어찼다.

퍼억-!

"허으억!"

"야, 엄살 그만 떨고 일어나."

"으으으... 너, 너 이 새끼! 나한테 이러고도 괜찮을 것 같..."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헛소리를 하는 좀머에게 다시 한번 징벌의 발차기를 먹였다.

퍽-!

"쿠엑-!!!"

"자, 말로 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다음엔 말로 안 하고 이걸로 할 거야."

툭툭, 손에 들고 있던 검집으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좀머의 머리통을 건드렸다.

처음엔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신경 쓰느라 자신의 머리를 건드리는 물건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좀머.

그러다 자신의 머리를 건드린 게 내가 들고 있는 검집의 끝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다.

"너, 너, 너! 지... 지금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칼이지. 용병 길드에서 오래 일한 놈이 칼도 못 알아보나?"

"그, 그게 아니라 네가 왜 칼을 들고..."

"네 생각엔 왜일 것 같은데? 응?"

촤아아앙-!!!

대답과 동시에 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내가 해놓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깔끔한 발검(拔劍)!

"히이이익!"

눈앞에 시퍼런 검날이 보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나를 대하는 말투부터 바뀐다.

"데, 데, 데, 데미언! 어, 음... 지, 지금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그거 아니야, 아니야아! 일단 이 카, 칼부터 좀 치우고..."

두려움에 양 볼을 바르르 떨며 말하는 좀머.

장장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머리 위에서 왕처럼 굴던 놈이 순식간에 비루먹은 개새끼가 되었다.

그 극적인 변화에, 나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오해? 오해는 무슨 오해? 뭐, 네가 아침 댓바람부터 쌍욕 하면서 들어와서 빗자루로 내 머리통 깨려고 한 거?"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어? 그건... 그건! 그냥 내가 발을 삐끗해서 그랬던 거야! 원래는 빗자루를 이렇게 잡고서..."

개도 안 믿을 변명을 늘어놓으며 옆에 굴러다니는 빗자루에 손을 뻗는 좀머.

하지만,

슈아악-!

내 손끝에서 검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좀머가 잡으려던 빗자루가 순식간에 토막 나 사방으로 흩어진다.

왕국이 낳은 가장 위대했던 무인, 울리히 리히테나워가 평생의 경험으로 빚어낸 단 하나의 검술, 리히테나워 류(流).

되먹지 못한 육신의 부족함 탓에, 지금으로선 그 위대한 검술이 지닌 위력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흉내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좀머 같은 양아치를 다스릴 목적이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 아니, 충분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칠 정도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속으로 삼킨 채, 나는 좀머의 턱밑에다 검을 가져다 대었다.

툭-

"흐이익!"

턱밑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검의 느낌에 좀머가 질겁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내, 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데미언! 어... 그, 내가 미쳤었다! 내가 다 잘못한 거고! 어? 앞으로 저, 절대로, 절대로 너한테 함부로 하지 않으마! 그러니까... 한 번만 살려줘라! 제발! 제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내게 사죄하는 좀머.

하지만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과 달리 그 말을 듣는 내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철퍼덕-!

"데미언! 우리, 우리... 3년 동안 같이 일했잖아? 응? 둘이서 손발도 잘 맞았고! 어?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다들 놀랄 거야! 그, 그럼 너한테도 좋을 거 없잖아! 흐으으윽! 살려줘! 제발!"

급기야 녀석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같잖은 헛소리를 열심히 주워섬기는 좀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현실을 알려주었다.

"손발이 잘 맞긴 개뿔... 너 접수처에 종일 앉아 있는 동안 난 청소하고 짐 나르고 허드렛일만 했는데, 무슨 손발?"

"그, 그... 그건!"

"그리고, 상식적으로 너 같은 말단 직원 하나 없어진다고 길드에 놀랄 사람이 있을 것 같냐? 이 새끼 이거 순진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여기 과일 가게 아니고 용병 길드야, 새끼야. 돈 받고 사람 죽이던 일 하는 살벌한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데라고."

"...!"

내 말을 들은 좀머가 엎드린 자세에서 몸을 벌벌 떨더니만,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오열하기 시작한다.

"어흐으윽!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라... 아니! 살려주십시오, 데미언님! 으흐흑!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아! 살려주시기만 한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뭐가 됐든지 다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바알-!!!"

저러다 손금이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양 손바닥을 싹싹 빌며 읍소하는 좀머였다.

"살려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예, 예! 뭐가 되었건,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흐음..."

나는 창고 바닥에 이마를 쿵쿵 처박으며 살려달라 사정하는 좀머를 묵묵히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해보자고."

크라벤의 천재 검사 (1)

푸르스름한 새벽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이른 아침.

계절은 이제 깊은 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후우... 춥다, 추워!"

하지만, 오늘도 난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새벽 일찍 일어나 크라벤의 뒷골목을 달렸다.

"허억... 허억... 허억...!"

한 20분 정도 그렇게 뛰었을까?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에선 쉴 새 없이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목에선 진한 피 맛이 났다.

"아이고 죽겠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달래기 위해 양쪽 무릎에 두 손을 짚은 채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온몸에서 모락모락 더운 김이 올라온다.

여전히 눈앞이 핑핑 돌 만큼 힘들지만, 이젠 그 힘든 느낌마저 익숙해진 요즘이었다.

"후우우... 크흡! 이제 다 왔네."

내 오전 훈련의 종착지인 빈민가 중심의 작은 우물가에 도착했다.

이미 우물가엔 이른 시간부터 부지런히 물을 뜨러 나온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야, 데미언! 오늘도 열심이구나?"

물을 뜨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이들 중 나를 아는 몇몇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도 추운데 옷을 그렇게만 입고... 괜찮아? 그러다 감기든다!"

"하하, 운동해서 오히려 더워요. 괜찮습니다!"

다들 빈민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이들로, 데미언이 어린 아기일 때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었다.

"보기 좋구나, 데미언.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예전에 비쩍 말라서 안쓰러웠는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요즘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요."

"자자, 목마르지? 물 한 모금 해라. 방금 뜬 거야."

"아, 예. 감사합니다!"

꿀꺽, 꿀꺽-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우물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크으, 이거지!'

격렬한 운동 후에 마시는 냉수 한 잔의 시원함이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다.

"잘 마셨습니다, 아저씨."

"허허, 그래. 내일 또 보자, 데미언!"

물 한잔의 호의를 베푸신 동네 아저씨에게 공손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발걸음을 돌려 용병 길드 건물로 향했다.

데엥... 데엥... 데엥...

멀리, 시간을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종이 일곱 번 울렸으니, 아침 7시란 얘기다.

예전엔 이 시간까지 길드에 출근해 청소를 시작해야 했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다.

"고작 출근 한 시간 늦춰졌을 뿐인데, 세상 편하네."

슬슬 밝아지는 아침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석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전.

히든 피스 '검성(劍聖)의 낡은 롱소드'가 지닌 힘을 흡수한 후 양아치 좀머를 상대로 서열 정리를 했던 날.

목숨만 살려주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빌던 좀머에게 나는 서로의 업무를 바꾸자는 제안(이라고 쓰고 협박이라 읽는다)을 건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좀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나는 원래 하던 청소 및 잡일을 때려치우고, 좀머가 하던 용병 길드 접수처 업무를 맡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접수처 업무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좀머.

그러나, 서류 몇 번 훑어보는 것으로 업무 파악을 마친 내가 더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선 절망 어린 표정이 되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이건 뭐 서류 작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네. 쉽다, 쉬워!'

인류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던 지난 생의 지식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나였다.

인간의 언어를 배운 것도 모자라 기계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와 코드로 대화를 나누던 내게 좀머가 만지작거리던 서류 쪼가리는 정도는 하품 나올 정도로 쉬운 일거리일 수밖에.

'애초에 접수처 업무가 복잡할 리도 없고 말이지...'

나와 좀머의 담당 업무가 바뀌며 자연스럽게 출근 시간도 변했다.

좀머는 아침 7시까지 길드에 나와 청소를 시작하고 나는 한 시간 늦은 8시까지 여유롭게 출근하게 된 것.

나는 새롭게 얻어진 그 한 시간의 여유를 그대로 오전 훈련에 투자했고, 그 결과...

팟-!

『 데미언 / Lv. 3

소속: 크라벤 용병 길드

클래스: 사무원

고유 특성:

- 창조주(創造主)

- 검성(劍聖)

보유 스킬:

- 창조주의 눈(신화 등급)

- 리히테나워 류(전설 등급)

보유 아이템:

- 평범한 숏소드(일반 등급)

- 싸구려 깃털 펜(일반 등급) 』

드디어, 비루한 레벨 1의 신세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 근데 석 달을 죽어라 굴렀는데 겨우 레벨 3인 건 너무 심하다, 진짜."

쏟은 노력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효율이었다.

마구잡이로 무식하게 운동한 것도 아니고, 지난 생을 통해 쌓아온 현대인의 지식을 최대한 동원해 근력 운동과 유산소, 철저한 휴식을 병행하며 열심히 훈련했다.

뿐인가, 좀머에게 간간이 뜯어낸 용돈(?)으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시장 근처 여관에 들러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영양 보충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나의 답 없는 육신은 이토록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약한 수준의 발전만을 보여주었다.

"이건 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아니고... 하!"

그래도 이젠 검 몇 번 휘둘렀다고 어깨가 아픈 수준은 넘어섰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약골 중의 약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레벨 3이라면 내 또래의 평범한 소년들과 비슷한 능력치.

그간 열다섯 나이에 걸맞지 않은 부실한 신체 능력 때문에 고생했었는데, 그나마 평균 수준엔 도달한 것 같았다.

"보자,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출근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나는 검술 훈련장으로 애용 중인 용병 길드 근처 공터를 찾았다.

"후우..."

공터의 중앙에 선 나는 지난 석 달간의 수련으로 이제 꽤 손에 익은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장에서 산 6실버 짜리 숏소드.

말 그대로 이제 막 검을 잡기 시작한 초짜들이나 사용하는 저가의 보급형 철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으로 그려내는 것은 낡은 롱소드 한 자루로 세상을 발밑에 두었던 검성(劍聖)이란 거인의 세계.

슈웅- 슈아아아악!!!

날카로운 검 끝이 바람을 가르고, 공간을 찢는다.

지금의 내 경지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위력의 검격이 연달아 펼쳐진다.

휘웅! 슈아아앙! 휭! 후아앙!

그렇게, 나는 단 한 번의 쉼도 없이 리히테나워 류의 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펼쳐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순식간에 밀려오는 탈력감에 눈앞이 아찔하고,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와아,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하아아!"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한참을 허리를 꺾은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아직도 멀었네."

분명 겉으로 보기엔 나쁘지 않은, 아니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아도 부족함이 없을 검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직접 검을 휘두른 나는 알 수 있다.

방금 내가 펼쳐낸 검술은 제대로 된 검의(劍意)를 담지 못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냥 형태만 따라 하기에도 벅차네. 후우우... 빡세다, 빡세!"

힘과 체력이 부족한 탓에, 아직 검성의 검술을 제대로 펼쳐낼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딘 성취에 자연스럽게 걱정과 초조함이 밀려들었지만, 나는 최대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말자.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아자아자! 할 수 있다!"

조급함을 버리기 위해 주문처럼 구호를 외친 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움직여 공터를 벗어났다.

아니, 벗어나려고 했다.

"음?"

히든피스 '검성의 낡은 롱소드'가 지닌 힘을 흡수한 뒤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의 감각이 무언가를 감지해냈다.

"...!"

재빨리 고개를 돌려 수상한 느낌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허름한 빈민가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에 우두커니 선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 뭐야, 저 자식?"

상대는 내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음을 깨달았는지, 금세 골목 틈으로 사라져버렸다.

관찰한 시간도 짧았고,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지라 정확한 인상착의는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나를 지켜보고 있던 수수께끼의 인물은, 긴 장발에 검은 피부를 지닌 사내였다.

***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다녀와?"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막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검은 피부의 사내에게 물었다.

"... 몸이 좀 찌뿌둥해서, 가볍게 주변 산책 좀 했습니다."

"크으, 너는 보면 참 부지런해. 부하 놈이지만 참 멋있다, 존경스러워!"

앉은 자리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부하의 성실함을 칭찬한 덩치 큰 사내가 술 냄새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는 주변의 다른 부하들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야! 너희들도 저런 모습은 좀 따라서 배워라, 이 새끼들아. 휴가라고 맨날 여관에 죽치고 앉아서 술만 처먹지 말고. 그러니 맨날 술배가 나오지."

덩치 큰 사내의 핀잔에 주변에 앉아 있던 몇몇 사내가 불만이 있는 듯 입술을 삐죽거린다.

"참나, 저희랑 부대장이랑 같습니까? 저쪽은 이십 년 가까이 군대 짬밥 먹으면서 근면 성실이 몸에 배어버린 양반 아닙니까. 우리랑은 아예 종이 다른 인간이라고요!"

"맞습니다. 명색이 용병인데 어떻게 휴가 기간 내내 술 한잔도 입에 안 대고... 와, 진짜 독하다, 독해!"

그들의 말을 들은 검은 피부의 사내가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했다.

"... 술은 근육을 녹이고 정신을 해이하게 만든다. 장기간의 휴가라면 모를까, 당장 내일 투입될 의뢰가 잡혀 있는데 몸 관리를 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럼, 구구절절 맞는 소리다! 들었냐 이 새끼들아? 3일 휴가 중에 이틀을 술 처먹다 날 새는 너희 같은 삼류 양아치 용병들이랑은 아예 그릇이 달라."

"뭐래, 대장님도 휴가 첫날엔 우리랑 술 먹고 카드 치면서 날밤 까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날 술도 자기가 제일 많이 마셨으면서..."

"아, 시끄럽네. 난 그래도 돼 이 새끼들아."

"뭐야,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아아! 불공평합니다!!!"

"배신자! 애초에 술판 벌이자고 꼬신 것도 대장이잖아요!"

테이블 탕탕 내리치며 대장이라 불리는 덩치 큰 사내의 말에 반발하는 부하들.

하지만 이어진 대장 사내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입 다물어, 이 삼류 용병 나부랭이 새끼들아! 술 처먹고 날밤을 까도 내가 우리 중에 싸움 제일 잘 해! 억울해? 그러면 지금 밖에 가서 나랑 한판 뜨던가. 평생 술은커녕 부서진 턱주가리로 묽은 죽만 처먹게 만들어 줄게!"

"... 크흠! 뭐 그렇게 말씀을 살벌하게 하신대."

"어후, 저게 용병대장인지 깡패두목인지..."

"뭐 이 새끼야?"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했슴돠!"

스스로의 호언장담처럼, 대장 사내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금세 꼬리를 말며 찌그러지는 부하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지닌 대장 사내가 진지하게 명령한다.

"아무튼, 메이슨 말대로 내일은 다시 일하러 가야 하니까 오늘은 술들 처먹지 마라. 얌전하게 몸 관리하면서 장비들이나 챙겨놔."

"... 알겠습니다."

"허이구, 대답은 넙죽넙죽 잘 하지. 암튼 몰래 술 처먹다가 걸리기만 해라. 특히 엔리케 너! 그 자리에서 남아 있는 앞니 하나도 뽑아버릴 테니까."

"허읍! 알겠슴돠!"

대장 사내의 으름장을 들은 한 부하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헛바람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부하를 상대로 협박(?)을 마친 대장 사내는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아침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검은 피부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어이, 메이슨."

"예, 대장."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아침에 산책하다가 뭐 못 볼 거라도 봤어? 응?"

별생각 없이 농담조로 건넨 말이었다.

헌데 그 말을 들은 검은 피부의 사내, 메이슨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예, 못 볼 걸 본 것 같습니다."

"... 뭐?"

크라벤의 천재 검사 (2)

"못 볼 것을 봤다니, 갑자기 그게 뭔..."

예상치 못한 부하의 답변에 대장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가 아는 메이슨은 농담 따위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먼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깨달은 대장 사내가 삐딱하던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천천히, 알아듣게 설명해봐."

"예. 실은... 제가 아침에 주변 산책을 하다가 요 근처 빈민가 공터에서 용병 길드 막내를 봤습니다."

"용병 길드 막내?"

"예."

메이슨의 말을 들은 대장 사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다.

"길드 막내라면... 그, 접수처 업무 보는 꼬맹이 말하는 건가? 머리 금발에 삐쩍 마른 녀석 맞지?"

"예,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 바닥 닦고 있던 놈이 몇 달 전부턴 접수 일을 보던데...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낯익은 소년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짓던 대장 사내.

그러다 문득 얼굴을 굳히며 메이슨에게 묻는다.

"근데, 갑자기 그 녀석이 왜?"

"그 꼬맹이, 혼자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더군요."

메이슨의 대답을 들은 대장 사내가 맥이 탁 풀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 난 또 뭐라고... 용병 길드에서 일하는 애들이 헛바람 들어서 칼질 배우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더구나 그 녀석은 나이도 어리니, 더 그렇겠지."

무슨 일인가 싶어 잔뜩 긴장했던 대장 사내가 별 것 아닌 내용에 바로 세웠던 허리를 구부정하게 되돌린다.

하지만, 무너졌던 그의 자세는 이어진 메이슨의 말에 다시 꼿꼿하게 세워졌다.

"저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대단한 수준의 고급 검술이었습니다."

"...!"

"물론, 대장님 말씀처럼 녀석이 아직 나이가 어린 터라 힘도 체력도 부족해 그 검술의 위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는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 하지만?"

"좀 더 나이가 먹고 몸이 성장해 그 검술의 제대로 위력을 발휘한다면, '최소' 기사 급의 전력이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

대장 사내의 얼굴빛이 변한다.

다른 사람이 이런 얘길 했다면 거짓말을 한다거나 과장된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야기를 전한 이는 다름 아닌 메이슨.

알게 된 지 만으로 4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농담하는 메이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드르륵-

방금의 이야기로 식욕이 싹 달아난 대장 사내가 테이블 위의 접시들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한다.

"... 방금 한 얘기, 좀 더 자세히 들어볼까?"

***

"하! 이 새끼가 진짜... 야! 너 나 누군지 몰라? 어이가 없네, 진짜!"

쾅! 쾅! 쾅!

한껏 인상을 찌푸린 남자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지금 자신의 심기가 무척 불쾌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행동인 것 같은데...

'... 이 새끼가 미쳤나?'

접수대 맞은 편에서 그를 상대하던 내가 보기엔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는 짓거리였다.

"어이, 꼬맹아! 너 말고, 네 위에 있는 다른 직원 데려오라고! 어린 새끼랑 일 얘기 하려니까 뭔 말이 안 통하네. 씨발!"

"..."

나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상대방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쯤 되었을까?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숨기려 하지만 눈매와 목소리에서 어린 티가 역력히 느껴진다.

키도 꽤 크고, 덩치는 확실히 좋았다. 딱 봐도 힘 좀 쓰게 생긴 스타일.

하지만...

'낡기만 했지 전혀 손질되지 않은 가죽 갑옷, 창검에 베인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손과 팔뚝의 피부, 거기에 우리 도시에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까지.'

결정적으로, 스킬 '창조주의 눈'을 통해 살핀 상대의 레벨이 너무 낮았다.

'레벨 6이라...'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바닥에서 칼밥 좀 먹었다 싶은 용병들은 아무리 못해도 레벨 10 이상의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잡놈'은 고작 레벨 6.

이 모든 특징을 조합해보면, 단 하나의 결론이 도출된다.

'... 이 새끼, 완전 초짜네.'

행패 부리던 상대가 초짜인 것을 확인하자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씨, 괜히 쫄았네.'

상대의 능력치가 내 두 배라지만, 그래 봤자 레벨 3 vs. 레벨 6으로 도토리 키재기였다.

'애초에 레벨의 절대 값이 낮으니... 이 정도 차이는 무시할 수 있지.'

더불어, 내 몸에 깃든 검성(劍聖)의 지고한 경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 격차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 새끼가 사람 말을 씹네? 야! 뭘 멀뚱멀뚱 서서 쳐다보고 있어? 네 윗사람 데려오라고 인마!!!"

그새를 못 참고 버럭 성질을 부리는 용병 놈.

하지만 마주 바라본 녀석의 눈빛에는 당황함이 깃들어 있었다.

'초짜 새끼, 네 생각대로 상황이 안 돌아가니까 당황스럽지?'

저 어설픈 모습만 봐도 딱 견적이 나온다.

건장한 몸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 힘깨나 쓴다는 소릴 듣고 자랐을 거고, 동네에서 자경단 완장 차고 어설프게 칼질도 몇 번 해봤을 거다.

그러다 눈먼 칼질로 들짐승 몇 마리 썰어 넘기다 보면 '내가 검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거다.

'... 제법 휘둘러서 손에 익은 싸구려 검 한 자루에 가죽 갑옷까지 걸치고 나면 베테랑 용병이라도 된 것 같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나는 눈앞의 얼치기에게 냉정한 세상의 법도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저, 손님? 저희 길드의 의뢰 접수 담당은 접니다. 다른 사람은 없어요. 저랑 얘기하시죠."

"하! 이 새끼가 근데 아까부터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처하고, 어린 놈의 새끼가 뒤지고 싶나... 야! 이거 안 보여? 이거!"

나의 대답을 듣고 기분이 더욱 언짢아진 사내가 자신의 왼쪽 허리에 매인 검에 손을 가져가며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내를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어디서 줘도 안 가질 싸구려 칼 가지고 자랑은..."

"뭐?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냐?"

갑자기 불량스럽게 변한 나의 말투에 놀란 사내의 눈이 커진다.

그러던가 말던가, 나는 하려던 말을 이어나간다.

"그럼 여기 나랑 얘기하는 사람이 아저씨 말고 또 있어요? 당연히 그쪽이죠."

"뭐? 그, 그쪽?"

"보아하니 이쪽 일 시작하신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은데, 실력에 안 맞는 고액 의뢰를 넘보면 안 되죠. 그러다 제 명에 못 살아요! 젊은 나이에 칼 맞고 객사하고 싶으신가..."

"이, 이...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내가 한참 인생 선배라도 된 것처럼 훈계를 늘어놓자 열 받은 사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검 손잡이를 힘껏 잡았는데, 만듦새가 허술한 싸구려 검답게 아직 뽑지도 않은 검에서 '덜그럭'하는 쇳소리가 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설픈 꼴을 보고 있으려니 헛웃음이 나왔다.

"얼라? 아저씨, 여기서 칼 뽑으려고요?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그거 뽑으면 별로 좋은 꼴 못 봐요."

"이런 미친 새끼가 끝까지...!"

스릉, 덜커덕! 촤앙-!

내 친절한 충고(?)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사내가 기어이 검을 뽑고 말았다.

그 와중에 검을 한 번에 뽑아내지 못하고 검집에 걸려 버벅거리다 겨우겨우 뽑아내는 꼴이 우스웠다.

'... 어떤 놈한테 샀는지 몰라도, 어지간히 싸구려를 산 모양이네.'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낸 채, 나는 사내를 마주 본다.

"뽀, 뽑았다, 이 새끼야! 네가 뭘 어쩔 건데, 어? 또 지껄여봐! 아까처럼 짖어 보라고!"

검을 뽑아 든 사내가 잔뜩 화가 난 어조로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을 움직였다.

휘우웅-!

사내가 검을 뽑아 들던 그 순간, 나는 접수대 옆에 세워두었던 기다란 나무 몽둥이를 집어 들어 그대로 휘둘렀다.

지금처럼 어설픈 실력으로 어깃장을 놓는 초짜 용병들을 다져줄(?) 용도로 미리 준비해 놓은 물건이었다.

퍼억-!

"으아악!!!"

내가 힘껏 휘두른 몽둥이에 검을 쥔 오른손을 얻어맞은 사내가 비명을 토한다.

만약 내 손에 들린 것이 몽둥이가 아니라 검이었다면 단번에 손이 잘려 날아갔을 정도의 매서운 일격이었다.

탱그렁-!

사내가 놓친 검이 멀리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손 한대 얻어맞았다고 바로 검을 놓치는 꼴이 과연 어설픈 초짜다웠다.

"이 건방진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검을 뽑아!"

단 일격으로 상대의 무장을 해제시킨 나는 단숨에 몸을 날려 접수대를 뛰어넘었다.

지난 석 달 내내 아침마다 크라벤의 뒷골목을 달리며 충실하게 다져온 다리 근육이 이 순간 진가를 발휘했다.

"어, 으! 어으어어!!!"

빠르게 가까워지는 상대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봐주진 않는다.

빠각-!!!

몸을 띄운 상태에서 횡으로 휘두른 몽둥이가 상대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어차피 내 팔 힘이 부족한 탓에 단박에 머리통이 깨지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끄아아..."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내의 눈이 대번에 풀린다.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휘청, 술 취한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치는데, 내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는 그런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매타작을 이어나갔다.

퍼억! 퍽! 빠각-! 퍼어억!

"으악! 억! 크어억! 꺽!"

다채로운 타격음과 다양한 비명이 어우러져 살벌한 화음을 이뤘다.

얼핏 보기엔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나의 몽둥이질에는 검성(劍聖)의 심득을 담아낸 검술, 리히테나워 류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평소엔 혼자서 벽보고 연습하던 검술을 이렇게 실전으로 펼쳐내니, 확실히 느껴지는 손맛(?)이 달랐다.

"여기가! 너 같은! 동네! 양아치가! 함부로! 설치는! 곳인 줄! 아냐? 어? 어? 이 새끼야!"

뻑! 퍼억! 퍽! 퍽-! 빠각-!

내 근력이 부족해서 몽둥이질에 죽거나 불구가 될 정도의 힘이 실리진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아플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 그만! 그마안-! 커억!"

"뭘 그만이야, 이 새끼야! 닥치고 더 맞아!!!"

어설프게 때리다 그만둘 생각은 애초에 하질 않았다.

이렇게 천지분간 못하고 설치는 놈들은 제대로 버릇을 고쳐줘야 했다.

'이런 놈들은 한 번 기강 잡을 때 내 얼굴만 봐도 똥 지릴 정도로 패줘야 뒤탈이 없지.'

더불어, 지금의 내 행동은 주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다른 놈들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처맞기 싫으면 용병 길드 내에서 함부로 깝치지 마라'는 메시지였던 것!

'오늘 일이 여기저기 퍼지면 당분간은 좀 조용하겠지?'

걸레짝이 되어 널브러진 초짜 용병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크라벤의 천재 검사 (3)

그 뒤로도 나는 예의 없이 행동하는 초짜 용병들을 상대로 몇 번이나 '쇼 타임'을 펼쳐주었다.

감히 길드에서 선 넘는 짓거리를 벌인 얼치기들을 상대로 한 화려한 몽둥이 찜질 쇼!

내 빼빼 마른 몸뚱이를 우습게 보고 덤벼들던 녀석들은 모두 예외 없이 너절한 빨랫감(?) 신세가 되어 바닥을 기어 다녀야 했다.

"하, 이 새끼들은 이게 무슨 동네 아줌마들 빨래 몽둥이질인 줄 아나..."

내가 하는 몽둥이질엔 4백 년 전 낡은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 두었던 검성의 드높은 경지가 담겨 있었다.

그런 나를 상대로 어디 근본도 없는 걸 검술이랍시고 배워와 휘적거리고 있으니, 냅다 처맞을 수밖에.

"와, 진짜로 몽둥이 휘두르는 게 너무 빨라서 보이질 않더라니까?"

"그것도 그건데, 나는 상대방이 칼 휘두르는 걸 정확하게 몽둥이로 쳐내는 게 더 대단하더라."

"엥? 그게 되나? 그 몽둥이 나무 깎아서 만든 거 아냐?"

"어, 되더라고. 이게 칼날 쪽으로 맞으면 몽둥이가 잘릴 텐데, 정확하게 칼을 면 쪽으로 때리니까 안 잘리고 버티는 거야!"

"오, 그러네! 그럼, 그 자식은 그걸 정확하게 보고 칼 옆면만 쳐낸다는 거야?"

"아니... 그게 되나?"

"야,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이 자식이 사람 말을 못 믿어?"

"데미언 그놈 말이야, 비리비리 말라깽이에다가 키도 작은 녀석이 대체 어디서 그런 대단한 검술을 배운 걸까?"

"뭐, 길드에서 일하니까 친하게 지내는 용병이 가르쳐줬겠지?"

"근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녀석 검술은커녕 주먹질도 못 하지 않았어?"

"어... 그러네?"

"알고 보니 타고난 검술 천재였던 것 아닐까? 지금까지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지! 일부러 약한 척하면서!

... 무슨 힘숨찐이냐, 내가.

뭐, 어쨌든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한 소문은 싸움을 목격한 이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말을 전하는 중간중간 살이 붙어서 내가 건방 떨던 용병 놈의 머리통을 단박에 깨버렸다느니, 대뜸 팔다리를 한 짝씩 잘라버렸다느니 하는 무서운 얘기로 와전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크라벤 용병 길드에 얼치기 초짜 놈들을 몽둥이 하나로 박살 내버리는 싸움의 천재가 있다!'

'싸움의 천재'라고 불리기엔 상대가 많이 허접했지만, 퍼져나간 소문의 뉘앙스 자체는 내가 원했던 게 맞았다.

문제는, 그 소문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나는 이 소문을 통해 실력도 안 되는 얼치기들이 길드에 얼씬거리지 않기를 바랐다.

착각이었다.

용병이란 기본적으로 호전적(好戰的)인 성격을 지닌 이들.

소문들 듣고 몸을 사리는 이들보다 '나도 한번 그놈이랑 싸워봐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놈들이 훨씬 더 많았던 거다.

"야!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고? 밖으로 나와 봐! 나랑 한 판 뜨자!"

"참나, 그 자식은 이런 비리비리한 애새끼한테 처맞았다는 거야? 아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야! 나도 한 번 때려봐! 때려보라고!"

"어이, 네가 겁대가리 없이 우리 길드 막내 건드렸다는 그 미친 꼬맹이냐? 엉?"

"밖으로 나와 인마! 길드 사무실 안에 숨어있지 말고 밖으로 튀어나왓!"

"지난번엔 내가 방심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를 거다! 정정당당하게 붙어보자!"

매일 같이 길드 앞으로 찾아와 한 판 붙어보자며 개소리를 늘어놓는 놈이 어찌나 많던지.

일거리 찾아온 길드 손님들 상대하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얼치기 놈들 밟아주랴 아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아, 피곤해 죽겠네..."

처음 몽둥이를 휘둘렀던 날엔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뭐, 덕분에 알차게 경험치를 쌓고 있긴 하다만..."

출근 전의 체력 단련, 업무 시간엔 초짜 용병들을 상대로 한 실전 비무, 퇴근 후엔 하루 동안의 배움을 되돌아보는 명상 시간까지.

요즘의 내 생활은 그야말로 치열한 수련의 연속이었다.

타고난 육신의 부족함 탓에 발전의 속도는 매우 더뎠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어우, 싸움질에 미친 놈들이 왜 이렇게 많냐. 뭔 야인시대도 아니고... 길드 간판을 종로 우미관으로 바꿔 달든가 해야지, 에이!"

몽둥이질로 뻐근한 어깨 근육을 연신 주무르며, 퇴근 준비를 서두르는 나였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뒷정리 잘 하시고, 내일 봬요."

"어어, 그래! 자, 잘 들어가 데미언! 내일 보자!"

'서열 정리의 그 날' 이후 눈에 띄게 착해진(?) 된 좀머의 작별인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길드를 나섰다.

***

퇴근 후 나는 시장 근처에 자리한 여관 '친절한 당나귀'에 들렀다.

정확히는, 여관 1층에 있는 식당에 들른 거였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값이 비싸 평소에는 감히 먹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고기를 '영양 보충'의 개념으로 챙겨 먹는 날이었다.

현대 문명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게 단백질을 먹어야 근육이 붙는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었으니까.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 데미언 왔구나! 가만, 오늘이 벌써 금요일이었나?"

인심 좋기로 유명한 여관 주인, 후고(Hugo)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준다.

나에게 온갖 생색을 다 내며 싸구려 칼을 팔아먹으려 했던 무기상의 한스와 달리, 후고 아저씨는 정말로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었다.

여관과 식당을 운영해 번 돈으로 빈민가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거리의 천사!

나(정확히는 데미언의 기억이었지만) 역시 어렸을 적 후고 아저씨가 선물한 빵을 먹고 자란 기억이 있었다.

물론 그 나눠준 음식이란 게 돌처럼 딱딱해서 물에 불려 먹지 않으면 도저히 씹을 수가 없는 딱딱한 호밀빵에 불과했지만, 빈민가엔 그마저도 먹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돈 많은 사람이 기부하는 것보다 없는 살림 쪼개서 가난한 애들 돕는 사람이 더 힘들고 대단한 거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아저씨, 야채 스튜 한 접시랑 삶은 닭고기 하나 부탁드려요."

"그래, 얼른 준비해줄게. 조금만 기다려라!"

내 음식 주문을 받고 돌아선 후고 아저씨가 부엌으로 막 들어서려던 그때,

끼익, 콰앙!!!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식당 문이 거칠게 열렸다.

"뭐, 뭐야?"

"누가 문을 저렇게 세게 열고..."

"발로 찬 거 같은데?"

"어이구, 밖에 무슨 일 났나? 응?"

나를 비롯해 앉아 있던 손님 모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놀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듯 받아내며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누군가.

"에이, 시발! 먹던 밥이나 열심히 처먹지 뭘 그렇게들 쳐다봐? 식당 오는 사람 처음 보냐? 어?"

"...!"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커다란 덩치를 지닌 근육질의 민머리 사내였다.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난폭함에 겁을 먹은 손님들이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딱 한 사람.

나를 제외하고 말이지.

"응? 넌 뭐야? 뭘 그렇게 꼬나봐, 이 새끼야."

모두가 자신을 두려워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는 와중에 내가 홀로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자 심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대번에 험악한 말을 늘어놓으며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는 사내.

그 반짝이는 민머리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아재, 생긴 것만 봤을 때는 찐인데...'

수많은 상처가 새겨진 근육질의 팔뚝과 그간의 모진 풍파를 상징하는 듯한 거칠고 험악한 인상.

거기에 진득한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위협적이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듯한 쭉정이일 수도 있으니, 제대로 된 확인이 필요했다.

'... 창조주의 눈.'

팟-!

사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몇 초간 마주친 덕에 상대의 능력치를 알아낼 수 있는 나의 신화급 스킬, '창조주의 눈'이 발동되었다.

그렇게 확인한 상대의 레벨은...

『 빌로트 / Lv. 18

소속: 없음

클래스: 용병 』

'이런 씨...!'

씨팔.

아니, 18!

상대는 무려 레벨 18을 찍은 진짜배기 베테랑 용병이었다.

지금껏 상대했던 용병 놈들이 죄다 레벨 10 이하의 잔챙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눈앞의 사내는 아예 격이 다른 수준의 실력자.

지난 몇 달간 미친 듯이 노력해 겨우 만든 지금의 내 레벨이 6이었으니, 단순 계산상으로도 나보다 무려 세 배의 강함을 지닌 상대였다.

'레벨 18이라... 어지간한 도시의 경비대 조장 정도는 갖고 놀 수준이네.'

상대의 레벨을 확인한 뒤 끓어오르는 긴장으로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한다.

애써 태연한 척을 해보지만, 이미 뒷덜미와 등판은 솟아난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젠장, 나도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눈 깔고 있을 걸...'

이러다가 저놈이랑 시비가 생겨 한 판 붙게 된다면?

머릿속으로 다급하게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내가 얻은 검성의 유산, 리히테나워 류(流)는 명실상부 <로스트 킹덤> 세계관 최강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평범한 성인 수준에 불과한 나의 신체 능력으로는 제대로 된 검술의 위력을 선보일 수 없었다.

레벨 10 이하의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할 땐 부족한 신체 조건의 단점을 압도적인 기술의 격(格)으로 보완하며 싸울 수 있겠지만 상대가 레벨 18의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이라면?

'... 아니야, 이건 안 돼.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싸우면 무조건 진다!'

심지어 지금은 내 주 무기인 나무 몽둥이는커녕 젓가락 한 짝도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 검성의 검술이고 나발이고, 이건 안 돼. 일단,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보자.'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나는 일부러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문이 쾅! 하고 열리는 바람에, 놀라서 쳐다보다가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한껏 겁먹은 아이(내 나이는 열다섯이었지만, 체구가 작아 실제보다 더 어리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를 연기하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 정도면 대강 상황을 마무리 짓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는데...

"죄송은 시발, 말로만 하면 끝이냐? 쥐새끼 좆만 한 새끼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네? 그 혓바닥 끝을 뚝 잘라서 보여주면 좀 더 싸가지가 생기려나? 응?"

... 이 새끼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놈이라는 게 문제였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쿵!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마음에 실수인 척 테이블에 머리까지 박아가며 격한 사과 인사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눈앞의 미친놈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턱!

"크흡! 끄으으...!"

그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서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론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빠른 손놀림이었다.

"끄으... 이거... 놔 주..."

"허어, 이 새끼 봐라?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주둥이를 나불대네? 확 그냥 모가지를 꺾어주랴?"

내 옷깃을 단단히 틀어쥔 상대의 손에서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진다.

제대로 힘을 쓰면 사람 목 정도는 우습게 꺾어 버릴 정도의 대단한 악력이었다.

"끄윽... 큭!"

"이런 시장바닥에서 혼자 싸돌아다니는 거 보면 잘 사는 집 자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새끼가 뭘 믿고 이렇게 눈깔을 싸가지 없게 뜨나? 그 눈깔 확 뽑아줄까? 엉?"

처음 식당 문을 냅다 발로 걷어차며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이 새끼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놈이었다.

'크윽! 어떡하지? 그냥 한판 붙어야 하나?'

내가 사내에게 멱살을 잡힌 채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아이고, 손님! 진정하세요! 이, 일단 그 손 놓고 얘기하시죠!"

부엌 앞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후고 아저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와 내 멱살을 틀어쥔 상대의 팔을 붙잡았다.

아마도 내가 다칠까 봐 말리려 그러셨던 모양인데, 그게 상대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이런 시발 새끼가 어디다 손을 함부로 올려!"

사내는 내 멱살을 잡았던 손을 그대로 휘둘러 손등으로 후고 아저씨의 얼굴을 쳐버렸다.

철썩-!

"컥!!!"

손등이 아니라 숫제 주먹으로 후려친 것 같은 충격음이 들리고,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한 후고 아저씨가 맥없이 뒤로 쓰러진다.

"끄흐윽..."

바닥에 쓰러진 아저씨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저씨의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흘러나오는 붉은 피.

코피가 터지고, 입술도 터졌다.

그리고...

"이런 애미 없는 개 호로 새끼가 진짜!!!"

지금으로선 도저히 싸울 수 없는 강한 상대를 앞에 두고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나의 인내심도 터져버렸다.

크라벤의 천재 검사 (4)

"뭐?! 이 좆만 한 새끼가 미쳤나?!"

갑작스러운 나의 급발진에 놀란 민머리 사내, 빌로트가 쌍욕을 퍼부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번엔 내가 더 빨랐다.

퍼억-!

"큽!"

내가 전력으로 휘두른 팔꿈치에 명치 부근을 얻어맞은 빌로트가 짧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굽힌다.

숨이 턱 막히지, 이 새끼야?

"흐아앗!"

뒤이어, 나는 눈앞에 보이는 놈의 머리를 향해 시원한 발차기를 먹였다.

빠각!

"크헉!"

내 발차기에 머리를 걷어차인 빌로트가 크게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진다.

"우와아아!"

"와아, 대박!"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들이 보기엔, 갑자기 식당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안하무인으로 행패를 부리던 나쁜 놈을 상대로 자그마한 소년이 정의의 심판을 가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미친! 이걸 버틴다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상대의 머리를 걷어찼는데, 빌로트는 옆으로 쓰러지기만 했을 뿐 목이 꺾이질 않았다.

무식하리만큼 단련된 그의 목 근육이 충격을 버텨냈기 때문이었다.

"크흐으읍! 이런 씹어 처먹을 새끼가!!!"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바닥에 쓰러졌던 빌로트가 순식간에 몸의 중심을 회복하고 일어섰다는 것!

"이런 젠장!"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휘우우웅!!!

거의 종이 한 장 차이의 아슬아슬한 차이를 두고 빌로트의 주먹이 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다.

'크흡! 위험했다!'

한 대만 맞아도 곧장 바닥에 드러눕게 될 듯한,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는 주먹이었다.

"하! 이 새끼 봐라? 이걸 피해?"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은 빌로트가 연달아 두 번의 주먹을 날렸다.

후우웅! 훙!

하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두 번의 주먹을 모두 피해냈다.

나의 몸속에 녹아들어 있는 검성의 초인(超人)적인 감각이 그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

"후아아!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사람을 죽이려고 그러네?!"

어차피 막장으로 치닫게 된 상황, 나는 거리낌 없이 상대에게 욕을 퍼부었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멘탈을 흔들어 방심을 유도하려는 생각이었으나...

"하하핫! 재밌네, 재밌어! 요리조리 잘 도망치는 게 잡아 죽이는 맛이 일품이겠구나!"

"이런 미친 또라이 새끼!!!"

얼굴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근처 식당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나무 쟁반을 집어 들었다.

콰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는 나무 쟁반.

무거운 음식을 한가득 올려도 너끈히 버텨낼 만큼 단단한 쟁반이었는데, 녀석의 주먹에 걸리니 무슨 종잇장 찢어지듯 허무하게 박살이 났다.

"크윽!"

빌로트의 주먹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나는 부서져 흩날리는 쟁반 조각들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허윽, 후우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충격으로 얼얼한 양손을 거칠게 털어내며 생각했다.

'... 이러다간 결국 잡힌다! 넓은 곳으로 나가야 해!'

이렇게 사방이 막혀 있는 식당 안에서 도망만 다니는 건 한계가 있다.

건물 밖의 넓은 공간에서 싸워야, 조금이라도 나에게 승산이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후, 나는 뒤로 훌쩍 뛰어 빌로트와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말했다.

아주 큰 목소리로.

"야, 이 머리털도 제대로 안 자란 흉악한 오크 대가리 새끼야!"

"?!"

"남의 영업장에서 개지랄 그만 떨고 밖에 나가서 제대로 한 판 붙자! 쫄리면 계속 여기 있던가! 그 나이 처먹고 어린 애들이나 괴롭히는 좆 같은 새끼! 에이, 더럽다! 퉤퉤퉤!"

"..."

어린 내가 쏟아낸 살벌한 욕설에 정신적인 타격(?)을 받은 것인지, 잠시 멈칫한 빌로트.

하지만, 그 잠깐의 정적 뒤 빌로트는 더할 나위 없이 흉악한 표정이 되어 내게 말했다.

"애새끼라 적당히 놀아주다가 그만하려고 했는데... 오늘, 내가 개 한 마리 잡는다!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온몸의 관절 하나하나를 잘근잘근 밟아서 부숴주마!!!"

***

"에엥? 뭐야, 저거?"

일행의 선두에 서서 휘적거리며 걷던 구릿빛 피부의 사내, 엔리케가 무엇을 봤는지 바쁘게 놀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억!"

"크흡!"

"아이씨, 뭐야!"

그 바람에 뒤에서 따라오며 골목을 돌던 사내 몇몇이 앞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그 갑작스러운 접촉사고(?)의 피해자가 된 동료 몇몇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갑자기 왜 멈춰!"

"아오, 조장! 일부러 그런 거죠!"

뒤에서 들려오는 동료들의 볼멘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 엔리케가 무리의 한 가운데에서 걸어오던 덩치 큰 남자에게 말했다.

"대장님, 저기 여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어디 보자."

엔리케의 말을 들은 덩치 큰 사내가 시선을 돌려 일행의 목적지인 여관 쪽을 바라본다.

슬슬 어둠이 번져가는 초저녁의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이 여관 건물 앞쪽에 모여 웅성웅성 소란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봐선 무슨 일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광경.

하여 덩치 큰 사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의 조언을 구하기로 한다.

"... 메이슨."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긴 장발 머리를 끈으로 단단하게 묶어 올린 검은 피부의 사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한다.

"예, 대장."

"저게 뭔 지랄인 거 같냐?"

"음..."

"혹시... 경비대 놈들이나 지역 길드 놈들이 나와서 설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애초에 그놈들이 나왔으면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서 태평하게 구경하고 있지 못할 겁니다."

"아하, 그렇긴 하네."

일리가 있는 메이슨의 말에 대장 사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 생각엔... 싸움이 난 것 같습니다."

"싸움?"

"예. 애초에 이런 시장바닥에서 사람들이 떼로 모여 소리 지르며 구경할 만한 일이 싸움 구경 아니면 불 구경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전자겠군. 일단 불 난 곳은 없어 보이니."

"예, 그렇습니다."

논리적인 메이슨의 말에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말이 없었던 대장 사내, 겔베르트(Gelwert)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래, 어떤 놈이 저렇게 관중을 많이 모아놓고 주먹질을 하는지, 가서 확인해보자. 따라와."

"으앗! 대장 같이 가요!"

***

"이런 씨이...!"

원래 '씨이' 뒤에 더 갖다 붙일 말이 있었다.

허나 상황이 너무 급하다 보니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젖혀 주먹을 피하자마자 내 발목을 노리고 뻗어진 빌로트의 발차기.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그 발차기를 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내 몸속에 녹아있는 검성의 감각은 그 불가능한 일을 또다시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쿠당탕!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여관 앞 시장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이른바 무협지에서 말하는 '나려타곤'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던 것!

무협지에선 이 나려타곤으로 상대 공격을 피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불명예로 묘사하지만, 나는 지킬 명예가 쥐뿔도 없는 사람 아니던가?

'애초에 빈민가 출신 고아 소년한테 지킬 명예가 어디 있겠냐!'

그저 안 맞는 게 중요할 뿐인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바닥을 굴렀고, 그 덕에 기습적으로 들어온 빌로트의 발차기를 피해낼 수 있었다.

"으으으! 으으! 이 빌어먹을 새끼! 죽여버린다아아아아!!!"

식당 밖으로 나와서도 여전히 나를 붙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짜증이 났는지, 빌로트가 발을 구르며 욕설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마주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이 시장 한복판에서 사람 죽인다는 얘기를 함부로 하네? 왜, 아주 칼도 뽑지 그러냐? 이 개새끼야! 도시 경비대! 경비대 여기 없습니까? 여기 웬 미친놈이 사람 죽인다아아아아!!!"

"...!"

바락바락 마주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을 보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빌로트.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끝을 모르는 진득한 분노였고, 거기서 나는 뭔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표정이 왜 저래?'

내가 도시 경비대를 언급하며 소리를 지른 것은, 눈앞의 미친놈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도시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도시 경비대의 이름값을 빌려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생각이었는데...

"이 개새끼야! 모가지를 썰어주마!!!"

슈카앙-!!!

순식간에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롱소드.

빌로트의 막강한 실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발검(拔劍) 동작이었다.

대체 뭔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도시 경비대를 언급한 게 놈의 '발작 버튼'을 누른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휘웅-! 휘우웅-!!!

방금까지 주먹과 발이 난무하던 장소에 별안간 시퍼런 검광이 번뜩인다.

"흡! 허읍! 흐아앗!"

살기를 줄줄 흘리는 빌로트의 검이 나의 목을 노리며 사방에서 날아들었고, 나는 헛바람 집어삼키며 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우웅!!!

"저, 저, 저 자식 칼을 뽑았어?!"

"으아앗! 조심해요!!!"

"위, 위험해!!!"

"뒤로 가! 빨리 뒤로 가라고!"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어찌나 섬뜩한지, 우리의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에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이! 크흐읍!'

맨손으로 싸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워진 놈의 움직임.

그리고 숨통을 조여오는 이 무지막지한 기세까지!

빌로트는 맨손으로 싸울 때도 위협적인 사내였지만, 검을 들었을 때는 그보다 훨씬 더 완성된 전사였다.

촤아악!

"크윽!!!"

결국, 나는 빌로트와의 싸움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주르륵-

검에 베인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새빨간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린다.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물드는 옷.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이어질 후속 공격에 대비하며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 젠장!"

팔을 움직이는데 이상이 없는 걸 봐선 근육이나 뼈에 손상을 줄 정도로 깊게 베인 것은 아닌 듯하나, 어마어마한 통증에 정신이 아찔했다.

"하하! 드디어 걸렸구나 이 쥐새끼야!"

낼름, 자신의 검날에 묻은 나의 피를 혀로 핥으며 희열에 찬 미소를 보여주는 빌로트.

그 역겨운 미소를 보며 섬뜩함을 느낀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기요, 누구 검이나 막대기 같은 거 있으면 좀 던져주세요! 제발!!!"

놈이 지닌 막강한 기량을 생각했을 때, 검을 들었다 하더라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지금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터!

"여기다, 데미언! 이걸 써!"

바로 그때, 누군가가 던진 나무 막대기 하나가 내 발밑으로 떨어졌다.

대충 모양이 부서진 의자 다리 같았는데, 날아온 방향을 슬쩍 바라보니 흐르는 코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후고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콱-

손을 뻗어 아저씨가 전해준 의자 다리를 힘껏 붙잡았다.

검은 아니었지만, 검의 역할을 대신해줄 무언가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했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고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진다.

천천히 의자 다리를 들어 올린다.

아니,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이것은 한 자루의 검(劍)이 된다.

"푸흐흐, 그까짓 나무 막대기 하나 들었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응?"

의자 다리를 마치 검처럼 쥐고 자세를 잡는 나를 보고 비웃는 빌로트.

동시에 그는 바닥을 크게 박차며 달려와 검을 휘둘렀다.

"뒈져라, 이 새끼야!!!"

휘우우우웅!

단숨에 내 머리통을 쪼개 버릴 기세로 떨어지는 빌로트의 검.

"아, 안돼에에에에!"

"으아아아!"

곧 펼쳐질 끔찍한 광경을 예상한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태에에에엥!!!

"뭣?!"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쇳소리와 함께 목표에 다다르지 못하고 옆으로 빗겨나가는 빌로트의 검.

내가 떨어지는 검의 끝부분을 후려쳐 궤도를 틀어버린 결과였다.

"와아아아!!!"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검이 아닌 부러진 의자 다리로 만들어낸 놀라운 광경에 구경꾼들의 함성이 터진다.

"이런 시발 새끼가!"

자신의 검이 그깟 부서진 의자 다리에 밀려났다는 사실에 더욱 분노한 빌로트가 숨 쉴 틈 없이 공격을 몰아쳤다.

하지만 나 역시 방금의 한 수로 기세를 탄 상태!

'침착하게, 욕심내지 말고 공격을 쳐내는 것에만 집중하자!'

곧, 검술 리히테나워 류의 드높은 경지를 증명하는 움직임이 내 손끝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