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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차원에서 온 능력자 - 황규영

1. 텔레포트

아무도 없던 현대식 화장실 한복판에 갑자기 서정우가 나타났다. 그가 나타날 때 밀려난 공기가 화장실 문을 덜컥덜컥 흔들었다.

서정우는 주변 상황부터 빠르게 확인했다.

깨끗한 화장실과 하얀 소변기, 커다란 거울이 보였다.

"어우. 놀랐네. 화장실로 텔레포트 될 줄이야. 그래도 대형 몬스터 코앞이 아닌 게 어디냐."

그는 이곳이 진짜 화장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세면대의 수도꼭지 손잡이를 위로 올렸다. 수도꼭지에서 맑은 물이 콸콸 쏟아졌다.

"그런데 여긴 어딘데 화장실에서 향기가 다 나냐."

그는 기왕 물을 튼 김에 손을 씻으며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주변 모습이 갑자기 바뀐 걸 보면 새로 각성한 스킬은 텔레포트가 확실한데."

그는 원래 두 개의 스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세 번째 스킬을 각성했다.

각성한 스킬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려면 직접 써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이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게 문제였다.

"TV에 나온 텔레포트 능력자가 이 스킬은 분명히 스킬 발동, 이동할 곳 지정, 실제 이동 3단계로 진행된다고 했는데?"

텔레포트는 희귀 스킬이라 각성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 그는 관련 정보를 TV와 인터넷에서 얻었다.

"난 왜 스킬을 발동하자마자 여기로 이동하냐. 중간 단계 다 어디 가고."

그는 1단계인 스킬 발동을 하자마자 이곳으로 이동했다.

"좌표 지정이 안 되면 꽝인가? 아니지. 위험할 때 탈출기로는 쓸 수 있겠네. 에이."

좀 아쉬웠다.

"설마 이거 화장실로만 이동하는 스킬은 아니겠지? 탈출기로 쓸 때는 그게 차라리 낫나?"

그는 원래 상황을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성격이다.

"그래. 몬스터 무리 한복판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화장실이 백 배 낫지. 암."

이번에는 좀 여유를 가지고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여기 되게 깨끗하고 좋네."

그가 화장실의 청결함에 감탄하며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그곳은 은행이었다.

"아. 은행 화장실이구나. 무슨 은행이 이렇게 화장실을 깨끗하게.... 어?"

은행 직원과 손님들이 모두 한곳에 주저앉은 채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사냥용 엽총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얼굴에 복면을 쓴 상태였다.

서정우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로 이해했다.

"은행 강도네?"

은행 강도가 그때서야 서정우를 발견하고 짜증을 냈다.

"아. 씨발! 화장실에 숨은 놈 없는지 똑바로 확인하라고 했잖아!"

서정우는 그 은행 강도의 무기가 엽총이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단발 엽총? 와. 넌 목숨이 남아도냐? 겨우 그따위 걸 가지고 은행을 털게."

서정우의 상식으로는 단발 엽총으로 은행을 터는 놈은 죽고 싶어 환장한 놈밖에 없다. 단발 엽총은 한 번에 한 명밖에 못 쏘기 때문이다. 보통은 두 번째 총탄을 엽총에 다시 넣기도 전에 은행원들의 총격에 벌집이 된다.

은행 강도는 당황했다.

"너 미쳤냐? 이거 진짜 총이야. 총! 장난감이 아니라고."

총인 건 안다.

그래도 이상했다.

"왜 이 은행 은행원들은 권총 한 자루도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은행 강도는 무기가 겨우 엽총 한 자루고, 은행원들은 전부 비무장이고."

서정우가 손님들의 무장도 확인했다. 총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열 명 있으면 총은 열 자루보다 많아야 한다. 그게 서정우의 상식이다.

서정우가 인질이 된 사람들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진짜 다들 왜? 이봐요. 아저씨 아줌마 기타 등등 여러분. 당신들은 목숨이 남아돕니까? 왜 아무도 총을 안 가지고 다녀요?"

은행 강도의 엽총이 무서워서 두 손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서정우를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이건 웬 또라이야?'

'마스크를 써서 일당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서정우는 지금 전투용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은행 강도가 서정우에게 물었다.

"총이라니?"

"집 밖에 나올 때는 허리에 권총 한 자루쯤은 차고 다녀야 하잖아. 분위기 안 좋다 싶으면 자동소총도 한 자루쯤 가지고 다니고."

그는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렇게 비무장으로 다닐 정도로 간이 큰 사람들이, 그것도 이 많은 사람이 겨우 한 놈한테 제압되면 어쩌자는 건지. 저놈은 무기도 겨우 단발 엽총 한 자루인데."

투덜대던 그가 멈칫했다. 은행 내부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어? 여긴 창구에 투명 방탄판이 하나도 없네? 진짜 이 은행 뭐지?"

인질들은 다들 당황해서 그 모습을 멍하니 있었다.

은행 강도는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데 서정우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니 짜증이 났다.

은행 강도가 손님들에게 총을 겨눈 상태로 뒤를 돌아보며 서정우를 불렀다.

"야! 헛소리 그만하고 너도 튀어와서 무릎 꿇어!"

"무릎? 이게 미쳤나."

사람들은 그 순간 깨달았다.

'일당은 아니구나.'

'근데 저 사람은 좀 미친 것 같아.'

서정우가 은행 강도에게 터벅터벅 걸어가며 물었다.

"야. 지금 상황이 쪼끔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여기 진짜 왜 이 모양이냐?"

은행 강도가 화를 벌컥 내며 엽총의 총구를 서정우 쪽으로 돌렸다.

"이 새끼가 죽으...."

엽총의 총구가 움직이는 순간, 서정우의 움직임이 변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옷에 가려져 있던 권총을 오른손으로 뽑았다. 손이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가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강도를 겨눴다. 그때 강도는 몸을 겨우 반쯤 돌린 상태였다. 당연히 총구도 엉뚱한 방향을 향했다.

'뭐야? 저거 왜 저리 느려?'

서정우는 강도 뒤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은행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불평했다.

'이 사람들아. 총구가 내 쪽으로 움직이면 그 틈에 뒤를 쳐야지 왜 구경만 해? 옷 속에 단검 정도는 다들 있을 거잖아. 그걸 던지라고.'

강도의 움직임도 한심했다.

'그렇게 느리면 고블린 몇 마리만 만나도 그냥 죽겠네.'

서정우가 그를 향해 돌아서는 강도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다 살짝 당황했다.

'뭐야? 방탄조끼도 없어? 거지새끼인가?'

이대로 방아쇠를 당기면 저 강도는 죽는다. 탱킹 스킬이라도 있으면 총알 한 발에 죽지는 않지만, 느려터진 꼴을 보면 그런 건 없어 보였다.

그가 사는 곳이 아무리 몬스터와 싸우는 세상이라도, 사람과 싸울 때는 법의 적용을 받는다. 정당방위가 넓게 인정되긴 하지만, 강도를 죽이면 일단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저런 놈은 기왕이면 산 채로 잡아야 포상금이 더 나온다. 일당이 더 있다면 그놈들도 잡아야 해서, 경찰은 기왕이면 산 채로 잡아오는 것을 선호한다.

서정우가 강도의 가슴을 조준했던 총구를 조금 위로 올려 어깨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에서 화염과 함께 9mm 철갑탄이 발사됐다. 중형 몬스터만 되도 안 통하는 작은 철갑탄이지만, 권총은 원래 하급 몬스터 대응용 기본 방어 무기다.

이제야 겨우 돌아선 강도의 어깨를 권총용 철갑탄이 깔끔하게 관통했다.

"으아악!"

은행 강도는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손에서 놓친 엽총은 공중에 붕 떠올랐다. 귀를 찢는 총성이 은행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총소리의 울림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서정우가 강도에게 한 발을 더 발사했다. 철갑탄이 강도의 다리를 뚫었다.

"아악!"

'도망 못 치게 만들어서 현상금 받아야지.'

그가 왼손을 옆으로 뻗어 떨어지는 엽총을 턱 잡았다.

서정우가 권총은 강도에게 겨눈 채로 엽총의 상태를 확인했다.

실망스러웠다.

"아. 뭐야. 개조나 강화가 하나도 안 된 그냥 엽총이네? 에이."

서정우가 일단 엽총을 어깨에 걸었다.

"이거라도 팔면 몇 푼은 되겠지."

사람들은 은행 실내를 쩌렁쩌렁 울린 총소리와 비명을 듣고 나서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앞쪽을 보았다.

은행 직원들이 서정우를 보며 속삭였다.

"우, 우리 편인가?"

"구하러 왔나?"

"경찰 복장은 아니잖아?"

"총이 있는데?"

"특수부대 요원인가 봐! 엄청 빨라!"

"맞아요. 총을 뽑는 손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갑자기 타당하고 끝났어."

사람들의 귀에는 그 두 발의 총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

서정우가 은행 강도에게 물었다.

"야. 그런 느린 움직임에 무기는 이런 엽총 하나. 너 뭐냐? 어떻게 이런 피지컬로 은행을 털 생각을.... 어? 이놈 기절했네? 맷집은 또 왜 이렇게 약해?"

서정우는 어이가 없었다.

"겨우 권총 두 방이잖아. 급소도 안 쐈는데?"

그가 갑자기 팔을 옆으로 쭉 뻗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9mm 철갑탄이 금고에서 뛰어나오던 다른 은행 강도의 어깨를 관통했다.

쏘는 김에 그놈 다리에도 한 발을 더 박아주었다.

연달아 울린 총소리가 다시 사람들의 귀를 때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은행 강도가 앞으로 처박히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서정우는 감지 스킬과 사격 스킬을 갖고 있다. 은행 강도가 뛰어나오기도 전에 감지 스킬로 살기를 감지하고, 놈이 나오자마자 사격 스킬로 어깨와 다리에 철갑탄을 박아넣었다.

서정우가 내부를 쓱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위험도 없고, 감지 스킬에 잡히는 다른 살기도 없었다.

"강도는 저놈까지 두 놈이 전부인가?"

서정우가 은행 테이블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두 번째 강도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일단 그 강도의 엽총을 확인했다.

"에이. 이것도 그냥 엽총이네."

이번에는 강도의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이 나왔다. 그는 일단 지갑을 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로비로 나와 첫 번째 강도의 주머니도 뒤졌다.

"뭐야. 이놈은 지갑도 없잖아."

그는 문득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물었다.

"왜요?"

"예? 예?"

"전리품 좀 챙기는 데 뭐 문제 있습니까?"

전리품을 챙길 권리는 대부분의 경우 몬스터를 사냥한 사람에게 있다. 은행 강도 같은 중범죄자에 대한 처리도 몬스터와 비슷하다. 범인이 소지한 일반 무기나 지갑 정도는, 제압한 헌터가 전리품으로 챙기는 게 상식이다.

서정우가 따지듯이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열심히 가로저었다.

엽총을 든 은행 강도 두 명을 총으로 쏴서 쓰러뜨린 사람이, 지갑 좀 챙기는 게 불만이냐고 물었다. 심지어 오른손에는 아직도 권총을 쥐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문제 있다고 당당히 말할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

서정우가 권총을 겉옷 속에 끼워 넣었다. 엽총 두 자루는 일단 어깨에 걸었다.

이런 성능 떨어지는 단발 엽총은 그가 단골로 거래하는 무기점에서는 매입하지 않는다. 그래도 찾아보면 이런 총이라도 매입해주는 곳은 있다.

서정우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입니까?"

어디로 텔레포트가 됐는지 궁금했다.

'일단 우리나라인 건 확실한데.'

은행 직원 중 한 명이 즉시 대답했다.

"KCT 은행 용산 지점입니다!"

"에이. 멀리 이동한 것도 아니네. 이러면 탈출기로 쓰기도 애매한데. 진짜 꽝 뽑은 건가."

그를 이 은행의 화장실로 이동시킨 스킬을 처음 사용한 곳도 용산이다.

서정우가 툴툴대며 은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크게 외쳤다.

"와아! 남산 타워다!"

그의 눈에 남산 위로 높이 솟은 서울 타워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 있던 서정우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남산 타워가 왜 남산에 있어!"

말이 되지 않았다. 서정우가 일단 눈을 껌뻑이고 다시 남산을 보았다. 남산 위에 서울 타워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저게 왜 보이냐? 나 미친 건가? 환각에 당했나? 아닌데. 내 정신 저항력이 얼마인데 겨우 환각 따위에 당해? 그건 불가능한데! 그럼 저건 뭐냐고! 어떻게 남산에 남산 타워가 있냐고!"

그는 어렸을 때 남산 타워를 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서울 타워가 아니라 남산 타워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 타워는 몬스터의 공격으로 무너졌다. 지금 남산 위에 저 자리에는 새로 지은 몬스터 방어 타워가 있어야 한다.

은행에 있던 사람들은, 서정우가 처음 전투용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을 때는 은행 강도의 일당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강도들을 총으로 쏴서 쓰러뜨리는 걸 보고 나서는 그들을 구출하러 온 경찰특공대로 착각했다.

그런데 총을 네 발이나 쏘고 강도의 지갑까지 털어 은행 밖으로 나간 사람이, 남산 타워가 왜 남산에 있냐고 소리를 질렀다. 은행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2. 다른 세상

남산 몬스터 방어 타워는 서울 방어 전략의 핵심 시설 중 하나다.

강철로 만들어진 그 탑에는 10연발 단거리 소형 대공 미사일 발사대 24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 대공 미사일의 화망을 뚫고 들어온 비행 몬스터 요격용으로 근접 방공용 20mm 개틀링 기관포 4대도 있다.

상시 발사 대기 상태인 240발의 단거리 대공 미사일과 4대의 방공 개틀링은 공격용으로 설치된 무기가 아니다. 그건 전부 다 탑을 방어하기 위한 무기다.

그 방어 시스템이 지키는 것은 강철의 탑 중간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4대의 장거리 저격 레일건 포탑과, 4대의 위상 배열 방식 게이트 감지 레이더다.

장거리 저격 레일건의 공격 목표는 자잘한 놈들이 아니라 총알이 박히지 않는 대형 몬스터다.

그 레일건보다 더 중요한 건 게이트 감지 레이더다.

그가 사는 세상의 사람들은 공간에 구멍이 생기는 현상을 게이트가 열린다고 표현한다. 몬스터는 그 게이트를 통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다.

게이트를 일찍 발견할수록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산에 강철로 만든 방어 타워를 세우고, 그 위에 게이트 감지 레이더를 달았다.

그런데 서정우의 눈에 보이는 서울 타워에는, 장거리 저격 레일건 포탑은 고사하고 단거리 대공 미사일조차 단 한 발도 보이지 않았다. 미사일 대신에 관광용 둥근 전망대가 보였다.

서정우가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아니, 잠깐. 저건 진짜 남산 타워야. 내가 텔레포트 스킬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저기엔 분명히 남산 몬스터 방어 타워가 있었는데, 그게 남산 타워로 바뀌었어."

그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한강 너머에, 이제는 기억에만 있어야 하는 금색 고층빌딩이 보였다.

"와. 진짜 미치겠네. 저것도 분명히 무너졌는데!"

그 빌딩이 무너진 여의도 방어 전투에는 서정우도 참전했다.

특수 능력 각성자도 군 입대 영장은 남들과 똑같이 나온다. 그는 훈련소도 건너뛰고 입대 당일에 각성자 특수부대에 배치됐다. 그때는 전투 능력을 각성한 병사를 훈련소에 둘 만큼 전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여의도 방어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딱 열흘 뒤에, 그는 저 빌딩이 드레이크의 공습으로 무너지는 걸 눈앞에서 직접 봐야 했다. 그때 한국은 여의도를 몬스터에게 점령당했다. 서정우는 여의도를 탈출하느라 죽을 뻔했다.

한때 저 땅은 몬스터와 싸우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지금은 여의도에서 몬스터를 물리치고 게이트도 파괴해 그곳을 수복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저 금색 빌딩 같은 고층빌딩은 짓지 않는다. 한국에 새로 짓는 건물은 모두 층수가 낮았다.

그런데 그때 무너진 저 금색 빌딩이 이곳에는 멀쩡히 서 있었다.

"와. 여기 진짜 어디냐?"

주변을 보았다. 자동차의 모습도 그가 살던 곳과 달랐다.

"세상에. 장갑판 붙인 차가 한 대도 없어. 다 얇은 철판이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에 은행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가 들어왔다.

"2018년 이벤트? 그럼 적어도 내가 과거로 간 건 아니네? 현재가 맞네?"

그런데 이곳은 그가 아는 2018년의 서울과는 너무 달랐다.

문득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여기... 평행차원인가?"

어떤 과학자들은 게이트가 열리면 몬스터의 차원과 지구가 잠시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그걸 차원 게이트 이론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다른 차원이 아니라 다른 행성과 연결되는 스타게이트라는 이론도 수두룩하게 쏟아졌다.

게이트가 열릴 때 지구와 지옥이 연결된다는 과격한 이론도 있었다.

수많은 이론이 쏟아져 나왔지만, 어느 게 진실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는 차원 게이트 이론과 스타게이트 이론이 사람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내가 새로 각성한 스킬이... 그냥 텔레포트가 아니었어? 지구의 평행차원으로 이동하는 차원 텔레포트 스킬이야?"

그는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세상에서 살았다. 그래서 평행차원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저항감도 없었다.

그가 은행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은행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강도들을 묶으려고 움직이다가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으헉!"

그들 중 일부는 서정우가 미친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은행 강도의 지갑을 빼앗고 남산 타워가 왜 남산에 있냐고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은행 지점장이 그래도 책임감 때문에 나서서 물었다.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왜, 왜 다시 오셨...."

서정우는 그들을 무시하고 은행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게이트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있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스킬을 다시 써보는 게 제일 간단하다.

돌아갈 방법은 걱정하지 않았다. 몬스터 침공 게이트에 대해 들은 이론이 생각나서다.

"몬스터 놈들의 세계와 우리 세계도 고정적으로 매번 연결되는 거니까, 여기도 내 원래 세계와 연결되어 있겠지."

게이트가 연결되는 세계는 여러 개가 있지만, 같은 종류의 몬스터는 항상 같은 세계에서 넘어온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그 세계와 지구 사이에 게이트를 열 때 쓰는 기준 좌표가 고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 이론대로라면, 그가 다시 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쓰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텔레포트 같은 특수 스킬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꽤 길어서 연속 사용이 불가능하다.

서정우가 스킬의 상태를 확인했다. 숫자로 수치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감으로 대략적인 판단이 가능했다.

"스킬 능력이 회복되는 속도가... 시간당 약 4% 정도인가?"

대충 계산해도 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다시 쓰려면 하루는 필요하다.

"이쪽 세계에서 최소한 하루는 지내야겠네."

서정우가 은행 화장실을 나왔다. 사람들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물었다.

"신고는 했습니까?"

지점장이 설명했다.

"가, 강도들이 비상벨도 부수고, 감시 카메라나 보안 장비까지 전부 박살 내는 바람에 아직...."

"휴대폰은 폼인가 보네."

"강도들이 휴대폰도 다 부숴서...."

"그럼 나가서 다른 가게 전화기로 신고하던가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하잖...."

서정우는 문득, 그의 어깨에 메고 있는 엽총 두 자루가 생각났다.

'아. 총.'

그는 강도들을 권총으로 쏴서 제압했다.

'옛날에는 총 함부로 쏘면 안 됐지.'

2000년 1월 1일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가 금지된 나라였다.

'이제야 왜 은행 강도가 겨우 엽총만 들고 강도질을 했는지 이해가 가네. 이쪽 세계는 아직 총기 소지가 금지인가 봐.'

총기 소지가 금지된 국가에서는, 강도가 공기총만 들어도 큰 위협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처한 상황도 깨달았다.

'경찰이 오면 나도 체포되겠네?'

서정우가 얼굴을 만졌다. 얼굴에는 고글과 방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좋게 보면 특수부대의 마스크와 비슷했고, 나쁘게 보면 은행 강도의 마스크와 비슷했다.

"어. 그럼... 난 이만. 수고하시고, 우린 안 만난 거로 합시다."

"예? 아. 예!"

"아. 총. 난 총이 필요 없지. 아하하하!"

서정우가 엽총 두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그가 쓰기에는 위력이 부족한 무개조 엽총이다. 원래는 이거라도 갖다 팔려고 챙겼다.

그런데 이쪽 세계는 저쪽 세계만큼 총을 쉽게 팔 수가 없다. 몇 푼 안 하는 총을 들고 가봐야 경찰의 추격만 받는다.

"총도 두고 가니까 괜히 수배 때리지 말고. 내가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여러분을 구해줬잖아요? 그치요?"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서정우가 사람들에게 손까지 흔들어주고 나서, 은행 뒷문을 통해 밖으로 사라졌다.

손님 한 명이 엽총 쪽으로 걸어갔다.

"강도가 깨어날지 모르니까 내가 총을...."

은행원 한 명이 얼른 뛰어가 엽총을 잡았다. 그는 그 손님이 강도와 일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 우리 은행 직원들이 손님들을 이 총으로.... 아니,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보호! 그렇게 뒤로 확 물러나지 마십시오!"

손님이 당황해서 외쳤다.

"당신도 방아쇠에서 손 떼! 총구도 위로 올리고! 오발 사고 난...."

은행원이 급히 총구를 위로 올리다 실수로 방아쇠를 당겼다.

엽총이 발사되면서 총성이 은행 내부를 가득 채웠다. 발사된 산탄이 천정에 설치된 전등을 박살 냈다. 천장의 석고 보드도 같이 부서졌다. 불꽃과 함께 하얀 파편이 사람들 위로 눈처럼 쏟아졌다.

은행원이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 이게 왜!"

"방아쇠에서 손 떼라고!"

* * *

서정우가 건물 밖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쪽도 CCTV는 비슷하게 생겼네."

저쪽 세계에도 CCTV는 있다. 근처에 게이트가 열리거나 강력한 전자기파를 방사하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CCTV의 센서가 타버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유용성이 너무 커서 부서질 때마다 계속 새로 설치한다.

저쪽 세계의 CCTV용 이미지 센서는 EMP 방호가 기본 사양이다. 그 처리를 하면 센서가 버틸 확률이 좀 높아진다.

서정우는 CCTV를 피해 움직였다.

그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곳도 침투하는 실력자다. 눈에 보이게 설치된 CCTV를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서정우는 골목 사이를 이동하다가 구석진 곳에서 의류수거함을 발견했다.

"의류수거함? 여기선 옷을 막 버리나?"

그가 수거함에 손을 넣어보았다. 손에 옷이 한 벌 잡혔다. 뽑아보니 멀쩡한 옷이 나왔다.

"찢어진 것도 아닌데 왜 버렸지?"

그는 즉시 의류수거함을 털어 옷을 갈아입었다. 수거함에서 가방도 하나 나왔다. 그는 원래 입고 있던 전투복과 가면, 권총과 예비 탄창, 기타 장비를 모두 그 가방에 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었더니 겉보기에는 이쪽 세계에 사는 사람과 차이가 없어졌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로 나왔다. 그곳에서 이쪽 세계를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분석했다.

"부서진 건물도 하나도 없고, 총을 들고 있는 사람도 없고, 대피소도 없고, 모퉁이에 기관총 거치대도 없고, 차도 많고. 와. 차 정말 많다."

그를 더 감탄하게 한 건 여기저기 솟아있는 고층빌딩이다.

"저게 몇 층이냐? 몇십 층은 될 것 같은 빌딩이 왜 이리 많냐?"

저쪽 세계는 고층빌딩을 더는 짓지 않는다. 몬스터와의 전투에 휘말려 고층빌딩이 무너지면 건물주가 파산하기 때문이다.

저쪽 세계에서 높게 짓는 건축물은 남산에 있는 방어탑이나 공장의 반응탑 같은 특수 시설뿐이다.

다 세지도 못할 만큼 많은 고층빌딩을 보고 서정우는 확실히 깨달았다.

"역시 이쪽 차원은 몬스터의 침공을 받지 않았구나."

저쪽 차원은 2000년 1월 1일에 첫 게이트가 열렸다. 그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며 지구를 침공했다.

인류는 첫 침공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침공 초반에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우왕좌왕하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군대가 물량을 쏟아부어 방어해냈다.

하지만 게이트는 그 후로도 계속 열렸다. 몬스터의 침공도 멈추지 않았다.

저쪽 세계의 게이트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가 저쪽 세계로 돌아가려면 하루가 지나야 한다. 이제 겨우 한 시간 지났다.

서정우는 이쪽 세계를 구경하며 길을 걸었다.

"여긴 진짜 평화롭구...."

그가 걸음을 멈췄다. 앞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을 보고 경악했다.

"소, 소고기를 식당에서 팔아? 아니, 그 귀한 걸 식당에서!"

저쪽 세계는 축산 산업이 사라졌다. 목장 근처에 최하급 게이트만 열려도 키우던 소가 몰살당하고, 다른 곳에서 놓친 몬스터 한 마리만 침입해도 돼지 축사가 망한다.

방어 시설이 잘 갖춰진 특수한 시설에서 소 몇 마리를 키우는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그런 고기는 값이 굉장히 비싸고 귀해서 유통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일반 식당에서 소고기를 사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 가게는 소고기 한 근을 주문하면 한 근을 공짜로 더 준다고 쓰여 있다.

"이쪽 세계는 사기를 이렇게 치나?"

3. 과식

축산업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고기를 원했다. 대체재가 필요했다.

몬스터와 싸우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몬스터 자체를 연구하는 데도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연구 중에는 몬스터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지 조사하는 것도 있었다.

인간과 체형이 비슷한 이족보행 몬스터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짐승처럼 생긴 몬스터 중에는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놈이 꽤 있다. 곤충형 몬스터 중에도 고기가 조금 나오는 놈이 있지만, 그 경우는 식용 가능한 고기의 양이 너무 적다.

저쪽 세계의 사람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 대신에 짐승형 몬스터의 고기를 먹었다.

물론 맛있어서 먹는 게 아니다. 먹을 수 있어서 먹는 것뿐이다. 짐승형 몬스터를 도축해서 나온 것 외에는 고기를 구할 곳이 없다. 몬스터 고기라도 먹어야 체력을 키우고 몬스터와 싸울 힘도 얻는다.

몬스터 고기는 맛이 형편없다. 재료의 맛이 워낙 떨어지기 때문에 각종 조리법이 많이 연구되었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서정우도 어릴 때는 소고기를 먹어봤다. 그의 기억에 20세기는 평화로웠다. 그때는 집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는 호사도 부렸다.

그런데 그 귀한 소고기를 파는 식당이 있다. 옛날에 먹어본 진짜 고기 맛이 생각났다.

"어디. 속는 셈 치고."

그는 일단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때라 손님은 없었다.

점원이 물었다.

"몇 분이세요?"

"어.... 혼자입니다."

"아. 저희는 혼자 드시기는 양이...."

점원이 그렇게 말하며 벽을 가리켰다. 서정우가 벽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확인했다.

"한 근을 시키면 한 근을 공짜로 더."

식당에서 그 귀한 소고기를 파는 것도 놀라운데, 무려 근 단위로 판다.

그 옆에 가격도 보였다.

"겨우 오만 원에?"

문득 돈의 가치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급히 지갑을 꺼냈다. 은행 강도를 잡고 전리품으로 챙긴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세종대왕님은 그대로시네. 디자인은 좀 바뀌었.... 어?"

노란 돈이 한 장 보였다.

"와. 오만 원짜리가 나왔구나. 그런데 이 여자분은 누구신데 세종대왕님보다 비싼...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가격표에 적힌 가격도 오만 원. 그가 꺼낸 돈도 오만 원짜리다.

서정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혼자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예? 아. 예."

남들 몇 명이 시키는 양을 시키겠다는데 식당에서 말릴 이유는 없다.

"남기시면 싸드리겠습니다."

서정우가 가스 불판에 불을 켜고 손을 비비며 기다렸다. 곧바로 소고기가 나왔다.

이젠 의심할 수가 없다.

"와. 진짜 고기다."

몬스터 고기는 이 때깔이 안 나온다.

그는 몬스터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해 다년간 노력했다. 전장에서는 식량 대신 쓰러뜨린 몬스터의 고기를 잘라 구워 먹는 일이 흔하다.

이미 불판은 충분히 달궈졌다. 그는 실전에서 단련한 기술로 소고기를 구웠다.

고기가 구워질 때까지의 그 잠깐도 기다리기 어려웠지만, 꾹 참고 견뎠다.

드디어 소고기가 적당히 구워졌다. 그가 그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기름진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감칠맛도 같이 느껴졌다. 둘 다 몬스터 고기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맛이었다.

"아!"

서정우가 소고기를 먹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진짜 눈물 나게 맛있네."

점원이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수입 소고기를 저렇게 정성을 다해 굽는 사람도 있네요."

"그러게. 한우 꽃등심도 저렇게는 안 구울 텐데."

"한우 꽃등심 갖다 줘볼까요? 무릎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구울지도 모르잖아요."

"꽃등심값은 네 월급에서 까고?"

점원이 정색했다.

"아니요. 손님한테 음식으로 장난치면 천벌 받죠."

"근데 진짜 맛있게 먹네. 많이 먹기도 하고."

손님이 잘 먹으면 주인은 좋다.

"저렇게 고기만 먹으면 느끼할 텐데. 콜라라도 서비스로 갖다 드려."

"예."

점원이 서정우의 앞에 유리컵과 콜라를 내려놓았다.

"서비스입니.... 소, 손님?"

서정우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콜라를 노려보았다.

"이, 이건! 코, 콜라! 전설의 콜라!"

"저.... 그냥 콜라인데요?"

"진짜 전설의 콜라!"

"아니, 그냥 콜라.... 마, 맛있게 드세요."

점원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가게 주인이 물었다.

"왜 그래?"

"저 손님이요. 무슨 콜라를 한 이십 년 만에 보는 것처럼 말해요."

"그동안 탄산음료를 끊었었나 보다."

"왜 끊어요?"

"건강 생각해서?"

"아!"

서정우가 콜라를 확인했다. 그는 1999년까지는 콜라를 즐겨 마셨다.

그런데 저쪽 세상의 콜라 생산 공장은 모조리 곤충형 몬스터의 습격으로 파괴됐다. 그 후로는 콜라를 구경도 못 해봤다. 콜라 제조 비밀도 그때 사라졌다.

콜라 공장을 장악한 곤충형 몬스터의 둥지를 부수고, 그곳에 공장을 새로 지은 곳도 있다. 하지만 새 공장에서는 이제 콜라를 생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 공장에서 미사일의 추진제나 전투식량 같은 군수품을 만들었다.

저쪽 세계에서 콜라는 책에서나 나오는 전설의 음료다.

서정우가 유리컵에 콜라를 부었다. 거품이 일어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얼른 입을 대고 마셨다.

달고 짜릿한 자극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크아아아!"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그래! 이 맛이야!"

서정우가 진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이쪽 세계 진짜 마음에 드네!"

그는 소고기와 콜라 덕분에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새로 각성한 스킬은 꽝이 아니라 진짜 대박 스킬이구나."

* * *

한국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에 비상이 걸린다. 은행 강도가 총을 들고 침입하면 사건은 더 심각해진다. 그 총이 실제로 발사되면 난리가 난다.

그런데 그 사건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경찰 입장에서는 재난이 터졌다.

"상황 파악될 때까지 인터뷰부터 막아!"

"불가능합니다! 은행 손님 절반 이상이 현장을 떠났습니다!"

"다 찾아내서 막...."

"뉴, 뉴스에 피해자 인터뷰가 나온답니다!"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형사가 급히 리모컨을 눌러 TV를 켰다. 은행 강도에게 붙잡혔던 사람이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 그래서 강도가 먼저 엽총을 이렇게 휙 돌렸는데, 그 가면님이 권총을 샥 뽑아서 탕탕하고 쏘더라니까요. 진짜 빨랐어요.

- 명중했습니까?

-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지요! 두 방이 강도의 어깨하고 다리에 팍팍 꽂히는데, 와. 그리고 금고에서 튀어나온 두 번째 강도를 쏠 때도!

인터뷰하던 남자가 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 강도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권총을 옆으로 이렇게 뻗어서 탕탕 쏘는데!

- 보지도 않고? 빗나갔습니까?

- 명중했으니까 내가 살아있다고 방금도 말했는데! 그 강도 놈도 총에 맞고 그대로 엎어졌습니다.

- 아. 다행입니다. 그럼 그 신원 미상의 남자가 누구인지 혹시 아십니까?

- 모르죠. 우린 진짜 어마무시한 특수 요원이 우리를 구하려고 출동한 줄 알았다니까요. 아닌가 보죠?

- 그런 소식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 그럼 역시 미.... 아, 아닙니다.

경찰 간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었다.

"환장하겠네. 뭣들 하고 있어? 그 가면이 누군지 당장 찾아내!"

경찰 과학수사대가 현장을 조사했다. 은행 강도 사건도 큰 사건이지만, 서울 시내에서 누군가 권총을 네 발이나 쏜 것도 큰 문제다. 위에서 독촉이 심하게 쏟아졌다.

요원들은 현장에서 수집하는 정보를 차분히 분석할 시간조차 없었다. 조사 도중에 작은 결과라도 나오면 그때마다 담당 형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형사 오문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도들이 맞은 총알이 철갑탄이라고? 권총으로 쐈다면서?"

그의 파트너 이성훈이 말했다.

"예. 권총용 철갑탄이랍니다. 철갑탄이 유통되는 경로부터 조사할까요?"

"우리나라는 우리 경찰하고 군대만 권총을 쓰는데 권총용 철갑탄이 있겠냐? 유통경로를 왜 조사해? 여기가 미국이냐?"

"그럼 범인은 미국 사람일까요?"

"야. 너."

오문성이 주변을 슬쩍 둘러본 후에 이성훈을 구박했다.

"경찰이 그 사람을 범인이라고 부르는 걸 기자가 들으면 뉴스에도 나고 칭찬도 많이 받겠다. 그치?"

"아, 아니요."

"알면서 그렇게 부르냐?"

이성훈은 억울했다.

"그래도 불법 무기 소지에 실제로 네 발이나 쐈는데요?"

"어쨌든 은행 강도를 잡았잖아. 그러니까 별명은 욕 안 먹을만한 적당한... 그냥 철가면이라고 부르자."

"가면의 소재가 금속인지는 확인이 안 됐는데요?"

"그냥 그렇게 부르자고."

"예? 아. 예."

"일단 탄피부터 조사해. 그러면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총알인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이성훈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요. 없습니다."

"뭐가 없어?"

"탄피가 없습니다."

"응? 그럼 육 연발 리볼버를 썼나? 아닌데? 목격자들이 말한 권총 모양은 분명히 탄창을 쓰는 반자동 권총이었는데?"

"총 쏠 때마다 불꽃이 나와서 놀라긴 했지만, 설명대로라면 반자동 권총이 확실합니다."

"총 쏘면 원래 불꽃도 나오고 그러는 거지 놀라긴."

"그래서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혹시 원래 탄피가 없는 총이 아닐까요?"

"무탄피 소총이라는 게 있긴 있지."

"분명히 그걸로 쐈을 겁니다. 진짜 어딘가의 특수 요원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냐?"

"예?"

"무탄피 소총도 겨우 개발만 되고 실전 배치에는 실패했어. 그런데 무탄피 권총? 그런 게 있겠냐?"

"검색해보니까 옛날에 만들어진 적이 있다던데요."

이성훈이 스마트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되게 투박하고 커서 딱 봐도 양산된 총이 아니잖아. 목격자가 진술하고도 달라. 이거 아니다."

"그럼 탄피가 어디 갔을까요?"

"그걸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내야지. 가자! 목격자들부터 만나봐야겠다. 네 발이나 쐈으니까 탄피도 네 개가 나왔어야 해. 탄피 줍는 걸 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다. 하나쯤 잃어버렸기를 바라자고."

"아. 탄피 주워간 거 보면 미군이 아니라 한국군 출신인가 봅니다."

"그렇겠네."

* * *

서정우는 기어이 소고기 두 근을 혼자 다 먹었다. 먹다 보니 배가 너무 불렀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소고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무한 리필 되는 반찬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채소로 만든 반찬이 공짜라니!"

저쪽 세계에서도 채소는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몬스터는 시골이라고 안 나타나는 게 아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방어 대책은 물론이고 충분한 무장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밭이 뒤집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래서 가게에서 파는 채소는 꽤 비싸다.

보통 사람들은 집 창가나 옥상에 화분을 놓고 꽃 대신 상추를 키운다.

같은 이유로 쌀도 비싸다.

"와. 진짜 쌀이다. 합성 쌀이 아니라 진짜 쌀로 지은 하얀 밥이다!"

그는 밥도 두 공기나 시켜먹고, 된장찌개까지 먹었다.

서정우가 비틀거리며 가게를 나섰다. 사장이 활짝 웃으며 쿠폰을 주었다.

"또 오세요."

서정우가 가게 밖으로 나왔다. 너무 많이 먹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견뎌야 한다!"

이 귀한 걸 먹었는데 도로 뱉을 수는 없다.

서정우가 밖으로 나와서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보다 더 회복되어 있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은 확실히 하루가 맞아."

최소한 내일 점심때까지는 이곳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조금도 싫지 않았다.

"오늘 하루 확실히 즐기고 돌아가 주겠어! 그러려면 내가 돈이...."

은행 강도에게서 턴 돈이 4만 원 남았다. 서정우가 원래 갖고 있던 돈도 있지만, 모양이 달라서 쓸 수가 없다.

"여기 물가를 모르니 4만 원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 수가 있나."

소고기는 저쪽 세계에서 워낙 비싸게 취급돼서 비교 대상으로 쓸 수가 없다.

그는 일단 길을 걸었다. 걸어가면서 가게에 붙여놓은 가격표들을 슬쩍 확인했다.

"4만 원으로 하룻밤 숙박비가 될지 애매하네. 잠은 그냥 밖에서 잘까?"

잠잘 곳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몬스터와 싸우는 전쟁터에서는 산속에 땅을 파고 거기 숨어서 자야 할 때가 많다. 이 평화로운 서울은, 그의 기준으로는 편안하게 잠잘 곳 천지다.

그의 앞에서 보도블록을 걸어 다니는 비둘기가 보였다.

"저거 맛있는데.... 아니지. 이쪽에서는 비둘기 먹으면 안 되겠지. 남들처럼, 아주 평범한 사람처럼 아무 사고도 치지 말고 오늘 하루를 보내자."

* * *

형사 오문성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은행 CCTV에 철가면이 찍힌 게 하나도 없어?"

형사 이성훈이 CCTV를 조사하던 팀에 가서 정보를 물어왔다.

"예. 은행 내부의 CCTV는 모두 박살 나고, 보안 서버도 부서져 있었답니다."

"철가면이 그런 거냐?"

"아니요. 은행 강도 두 놈 중에 은행 내부 구조를 잘 아는 놈이 있다던데요. 그놈 짓입니다."

"외부는? 철가면이 은행을 나간 후에 찍힌 게 있을 거 아냐?"

"그게 참 신기한 게요. 어디에도 찍힌 게 없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4. 서소라

형사 이성훈이 오문성에게 말했다.

"은행 주변 CCTV 맡은 팀은 지금 교란된 시간 전후에 그 일대를 지나간 차량들을 수배하고 있답니다. 블랙박스 영상이라도 뒤져보려고요."

"그렇게 귀신같이 빠져나간 놈이 차가 다니는 도로변으로 걸어 다녔겠냐?"

"그러게 말입니다."

오문성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에휴우. 당분간 퇴근은 다 했네."

* * *

서정우가 부른 배를 두드리며 길을 걸었다. 그렇게 이쪽 세상을 구경하며 한참 걷다가 노랫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직접 부르는 것이 아니라 TV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이쪽 세계에서는 이게 요즘 인기곡인가?"

그는 흥겨운 그 노래를 조금 더 듣다가 활짝 웃었다.

"역시 우리 세계 노래가 더 좋네!"

저쪽 세계는 예산을 전투 물자 생산과 방어 시설 구축에 최우선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다 보니 돈이 많이 들어가는 문화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공사비가 대규모로 들어가는 대형 워터파크 같은 건 이미 예전에 다 파괴되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놀이를 포기한 건 아니다.

음악은 깡통을 두들겨 박자만 맞춰도 즐길 수 있다. 저쪽 세계는 음악처럼 큰돈 들이지 않고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서정우는 이쪽 세계의 평화와 풍족한 물자, 그리고 소고기와 콜라를 부러워하다가, 음악에서 자부심을 조금 되찾았다.

"확실히 우리 세계 노래가 훨씬 더 좋아."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음악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었다. 건물 모퉁이를 돌자 대형 TV를 켜놓은 가게가 나타났다.

"어...."

저쪽 세계도 TV 방송 시스템은 잘 구축되어 있다.

TV는 정보 제공 통로나 정책 홍보용으로도 쓰이지만, 부족한 문화오락을 채워주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유사시 긴급 경보 수단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는 이곳 TV를 보면서, 음악으로 되찾은 자부심이 조금 깎여나갔다.

"이쪽 분들이 더 예쁘시네."

TV에 걸그룹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저쪽 세계의 노래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이쪽 세계 걸그룹의 미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우, 눈이 부시다. 다들 너무 예쁘셔서."

노래는 곧 끝났다. 심야 음악방송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나왔다. 지금은 낮이지만, 방송은 케이블TV의 녹화방송이었다.

"와. 저 헌터도 여기 있구나."

저쪽 세계에도 지금 방송에 나오는 사회자가 있다. 그 사람은 전투 능력을 각성해 몬스터와 싸우는 헌터가 되었다. 그러면서 음악 활동도 계속했다.

"같은 사람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

그는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저 사람이 양쪽에 다 존재하면... 이쪽 세계의 나는?"

그의 원래 계획은, 24시간 동안 조용히 지내며 이쪽 세계를 즐기는 것이다. 이미 은행에서 총을 네 발이나 쐈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은 아무 사고도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려 했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정보는 다음에 다시 넘어오면 그때부터 수집하려고 했는데, 당장 내 상황이 궁금해서 안 되겠다."

그는 계획을 바꾸었다. 느긋하게 보내기 전에, 이쪽 세계 서정우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서 집까지는 멀었다. 버스 노선이 일치할 리도 없다.

"저 버스들은 왜 길 가운데로만 다니냐. 버스는 많이 바뀐 것 같지만, 그래도 지하철 노선은 그대로겠지."

서정우가 가까운 지하철역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3호선이랑 4호선이 옛날 그대로라서 다행.... 기, 길어졌다! 오이도? 4호선이 왜 오이도까지 가!"

지하철 노선이 예전에 비해 크게 확장됐다.

지하철 노선의 중심부 쪽은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모두 1999년까지 개통된 지하철이다.

그 후에 저쪽 세계는 지하철을 더 늘리지 못했다. 몬스터와 싸우면서 이미 있는 지하철을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쪽에서는 지하철을 새로 팔 돈으로 대피소를 만들었다.

서정우가 역사 내부를 확인했다. 중무장한 지하철 경비대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요금을 내는 방식도 달랐다. 표를 파는 자판기만 잔뜩 보였다.

그래도 표를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들이 하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 했다. 그의 기억에 있던 노란 종이 티켓이 아니라 카드형 티켓이 나오는 걸 보고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

서정우가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에 전철이 들어왔다.

"와. 지하철에 그 흔한 장갑판 하나 없네."

저쪽 세계의 지하철은 앞부분에 돌파형 장갑판이 붙어 있다. 기관사는 선로에 침입한 몬스터를 발견하면 그 뾰족한 뿔로 부숴버리고 지나간다. 동력도 선로에서 전기를 공급받지도 않고 자체 동력을 쓴다.

저쪽 세계의 지하철은 몬스터의 초기 침공에 많이 부서지고 선로도 무너졌다. 그걸 복구하면서 방어 시스템을 곳곳에 설치했다. 중무장한 지하철 경비대의 순찰도 잦았다.

지하철은 일단 몬스터의 습격을 당하면 피할 곳이 부족하다. 이용 요금도 굉장히 비싸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며 단순 출퇴근 목적으로 지하철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록 일반인 탑승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저쪽 세계에서 지하철은 주로 헌터 팀이나 군부대의 전술 이동, 그리고 물자 수송 목적으로 쓰인다.

그는 전철을 타고 가다가 4호선 북쪽의 전철역에서 내렸다. 역의 모습이 그가 기억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역사의 벽에는 파란 공룡 만화 캐릭터가 붙어 있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용산 쪽만큼 고층인 빌딩은 없지만 그래도 꽤 높은 빌딩이 여러 채 보였다.

"진짜 많이 바뀌었네."

그는 이쪽 세계의 집을 찾아 주택가를 걸어갔다.

"여긴 그래도 길이 크게 바뀌진 않았구나."

길은 그대로지만 집은 달랐다. 담장에는 철조망이 없고, 창문에 덧씌워진 강철 창살이나 폐쇄형 장갑판도 보이지 않았다.

서정우가 옛날 주소에 도착했다. 집은 그가 기억하는 상태와 비슷했다.

"우리 가족이 아직도 여기 산다면, 나도 여기...."

대문이 덜컹 열리며 서소라가 밖으로 나왔다.

서정우는 깜짝 놀랐다.

"어?"

서소라가 인상을 확 썼다.

"뭐야? 그 눈은?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어.... 그래. 넌 20세기에 태어났지."

몬스터의 침공으로 세상이 바뀐 건 2000년 1월 1일이다. 서소라는 그 이전에 태어났다.

서정우가 조금 긴장하며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확신하냐? 어디 이상한 데 없고?"

"뭐래? 미친 거 아냐?"

그는 서소라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여기도 서정우가 있구나.'

그런데 이쪽 서소라는 저쪽 서소라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소라야. 너 지금 무슨 일 하냐?"

"일? 만년 연습생이라고 놀리냐? 엄마한테 이른다!"

"연습? 혹시 스킬을?"

"토익 스킬?"

"응?"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스킬이 아니면 뭘 연습한다는 거냐?"

서소라가 인상을 더 썼다.

"아오. 그놈의 연예인 도대체 언제 되냐고 또 놀리는 거야?"

서정우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응? 네 얼굴로?"

"난 미모보다 실력파 가수를 추구하거든? 그리고 내 얼굴 욕할 입장이 아닐 텐데? 서로 얼굴에 침 뱉지 말지?"

서정우는 대화가 자꾸 엇갈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다른 정보를 얻으려고 질문했다.

"아, 아니다. 그럼 어디 가냐?"

"학교 가거든?"

"아. 학교. 어? 설마 대학교?"

"그럼 다른 학교도 있어?"

"몇 학년?"

"삼 학년이잖아!"

이쪽 세계의 서소라는 연예인을 꿈꾸는 대학생인데, 저쪽 세계의 여동생 서소라는 저격수다.

서정우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자, 결국 서소라가 폭발했다.

"연습생 아무리 해봤자 가수 못 되니까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이나 가라며! 그래서 갔잖아! 왜 시비야!"

"어. 대견해서?"

서소라가 서정우를 째려보았다.

"아주 그냥 날을 잡고 시비를 거네? 어? 뭐야? 오빠 옷 샀어? 아침에 나갈 때하고 완전히 다른데?"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소라의 성격은 다르네. 성장 환경 탓인가? 그럴 수도 있지. 평화로운 세계에서 평생을 자란 이 아이와, 어릴 때부터 원거리 감시 스킬을 단련해 저격수가 된 내 동생. 크윽. 불쌍한 내 동생. 이렇게 편하고 풍족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서정우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얘처럼 우리 소라도 화장도 하고.... 응? 여기는 화장품이 흔한가 보네?'

저쪽 세계라고 해서 화장품이 생산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생산량이 적어서 가격이 비싸다. 화장품 공장 자리에 군수품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다.

저쪽 세계에서는 로션 대신 에틸알코올을 섞은 물에 글리세린을 타서 쓰는 사람이 많다. 에틸알코올과 글리세린은 군수품 생산 과정에 들어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다.

서소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정우를 관찰했다.

"진짜 왜 그래? 뭐야? 무슨 일이야? 옷도 잘 보니까 새 옷이 아니고. 꼭 누가 버린 옷 주워 입은 것 같은 꼴을 하고서."

서정우는 그 순간, 이쪽 세계의 서소라에게서 저쪽 세계 동생의 모습을 보았다.

'아. 얘도.'

지금 서소라가 짓고 있는 표정은, 저쪽 세계의 서소라가 몬스터의 흔적을 찾을 때 짓는 표정과 똑같았다.

'성격도 좀 다르고 말투도 다르지만, 표정은 똑같네.'

서소라가 멈칫하다가 조금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뭐야? 출근 첫날부터 오빠 괴롭혀?"

"응? 출근?"

"오늘부터 새 팀에 들어간다면서?"

서정우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는 지금 집에 없다. 그럼 출근한 곳으로 가자. 거기 가서 서정우에 대한 정보를 모으자.'

"소라야. 내가 어디로 출근했냐?"

서소라가 갑자기 대문 안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 오빠 진짜 미쳤나 봐!"

"헉!"

'이쪽 세계의 엄마?'

"엄마는 아빠랑 유럽 파견 가셨잖아. 왜 안 받아치고 놀라? 오빠 진짜 오늘 왜 그러는데? 출근하기 싫어서 막 스트레스 받고 그러나?"

"농담이야. 농담. 그러니까 내가 출근할 곳이...."

* * *

서정우는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주차장에 서서 고민했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는 직업이 경찰이구나."

수상해 하는 서소라에게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경찰서 이름도 겨우 들었다.

"그런데 이 큰 경찰서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지?"

건물에서 형사 몇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서정우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도로 건물을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온 형사 중에서 백성민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서정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서정우?"

서정우가 그쪽을 휙 돌아보았다. 모르는 얼굴이다. 그런데 상대는 그의 얼굴을 안다.

'정보를 얻을 기회다!'

"예. 제가 서정우입니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어느 부서에 근무하는지라도 알아내자.'

헝사 백성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오. 뭐? 제가 서정우입니다?"

"예?"

"1팀이 은행 강도 사건에 지원 가서 안 그래도 바빠 미치겠는데, 오늘 새로 온 막내가 지각을 했네? 오전도 아니고 오후가 돼서 나타났네? 근데 뭐?"

서정우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이곳의 서정우가 출근을 안 해?'

하필 그가 차원을 넘어온 날 출근하지 않았다. 그것도 첫 출근일이다.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왜 출근을 안 했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걸 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 그렇겠군요."

"어디서 이런 또라이를 보냈냐!"

2팀장 권병철이 말했다.

"야! 시간 없으니까 일단 막내도 차에 태워!"

형사들이 승합차에 우르르 올라탔다.

서정우는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승합차에 같이 타며 백성민에게 물었다.

"그런데 절 어떻게 아십니까?"

"오늘 처음 오는 놈을 내가 어떻게 알아!"

"첫눈에 알아보셨잖습니까?"

"사진이 먼저 왔으니까 알지. 당연한 거 아니냐?"

"아. 사진."

"아오. 이 또라이가 진짜. 복귀하자마자 너 다시 반품할 테니까 그리 알아!"

2팀장 권병철이 말했다.

"성민아. 24시간 연쇄 살인마를 24시간 내로 못 잡으면 막내만이 아니라 우리까지 다 징계야. 지금 반품에 신경 쓸 때냐? 사건에 집중해."

서정우도 아는 이름이 나왔다. 그는 깜짝 놀랐다.

"24시간 연쇄 살인마?"

백성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너 이 새끼. 그놈도 모르면서 강력계는 왜 왔냐?"

"압니다. 범인이 피해자를 납치하고 사진을 보낸 사건이잖습니까? 24시간 남았다는 글을 첨부해서요. 납치 피해자는 24시간 후에 살해당하고요. 그래서 별명이 24시간 연쇄 살인마죠."

"아는 놈이 왜 놀라?"

서정우는 몰라서 놀란 게 아니다.

'그놈은 작년에 잡혔는데?'

저쪽 세계에서는 이미 24시간 연쇄 살인마가 잡혔다.

'

5. 24시간 연쇄 살인마

서정우가 형사팀 승합차를 타고 현장으로 가는 사이에 인터넷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 오늘 용산 은행 강도 사건 때 거기 있었습니다. 질문받습니다.

곧바로 댓글이 붙었다.

- 진짜 총을 쐈습니까?

- 가면 쓴 그분이 권총을 쐈습니다. 총소리 진짜 크더군요.

- 잘 쏩니까?

- 아니요. 그냥 잘 쏘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잘 쏩니다. 총을 뽑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손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두 발씩 쐈는데 총소리가 타당하고 들릴 정도로 쏘는 간격이 짧았습니다.

- 강도는 두 명이라면서요?

- 두 번째 강도를 잡을 때가 더 대박이었습니다. 금고에 들어갔던 강도가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보지도 않고 옆으로 총을 뻗어 타당하고 쏘더군요. 그 두 발도 정확히 어깨와 다리에 명중했습니다.

그 밑에 반박 댓글이 붙었다.

- 말도 안 됩니다. 권총으로 달리는 사람을 그렇게 정확히 쏘는 건 불가능합니다.

- 제가 봤습니다.

- 제대로 조준도 안 했다면서요? 불가능하다니까요?

- 되던데요?

현장에 없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농담을 댓글로 달기도 했다.

- 총 쏘기 전에 석양 이야기는 안 했습니까? ㅋㅋㅋ

- 제가 드디어 가면남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존입니다!

- 우리 존 형을 가면남이라고 부르지 마시죠? 기왕이면 석양의 무법자라고 부르세요.

- 서부의 존을 말한 게 아닌데요? 개 키우던 존을 말한 건데요?

형사 이성훈이 스마트폰을 보며 말했다.

"형님. 목격자 한 명 더 찾았습니다."

"어디서?"

"목격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현장 목격담을 올렸네요."

"가짜 목격담 많잖아."

"댓글 다는 사람들도 잘 안 믿기는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이번에는 진짜 같습니다. 두 번째 강도가 은행 금고에서 뛰어서 나오다가 총에 맞은 것까지는 목격자 인터뷰에서 나왔지만, 어깨와 다리에 맞았다는 건 뉴스에 안 나왔잖습니까?"

"그 말을 했어? 그럼 가서 만나봐야지. 연락해봐."

정식 절차를 밟아서 찾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연락 달라고 쪽지부터 보내겠습니다."

* * *

2팀이 피해자의 집에 도착했다. 관할구역 안이라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피해자의 부모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강력팀장 권병철이 그들을 안정시키려고 큰소리를 쳤다.

"반드시 따님을 찾겠습니다!"

서정우는 그곳에 서서 기억을 떠올렸다.

'작년에 24시간 연쇄 살인마를 잡았다는 뉴스를 봤는데....'

게이트 전쟁 중인 저쪽 세계에는 살인자를 잡는 것보다 큰 뉴스가 많다. 그런데 24시간 연쇄 살인마는 죽이기 하루 전부터 미리 경고한다는 특이한 살해 수법 때문에 유명해서, 잡았다는 뉴스가 제법 크게 나왔다.

'어떻게 잡았다고 했지?'

그때는 그냥 보고 지나가서 기억에 남은 것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잡았는지는 기억났다.

'아. 감지 스킬을 가진 헌터가 범인을 찾아냈다고 했지.'

방법은 알아냈지만, 몬스터가 없는 이쪽 세계에 감지 스킬을 가진 헌터가 있을 리 없다.

'이쪽 수사 방식으론 못 찾겠네.'

그가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다. 그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하는 냉혈한이 아니다.

'그놈, 잡아야겠다.'

범인의 얼굴까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감지 스킬로 잡았다는 것만 안다.

감지 스킬은 몬스터가 사람을 노릴 때 생기는 강력한 살기를 감지해내는 스킬이다. 그래서 몬스터가 사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는 감지되지 않는다.

'사람이 감지 스킬에 걸렸다는 건, 그놈이 지독한 살기를 품고 그 헌터 쪽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야. 유명한 헌터는 아니었으니까 범인은 통상적인 감지 스킬 감지 범위 안쪽에 있었겠지.'

범인을 찾을 방법을 알아냈다. 서정우가 그 집을 벗어났다.

팀장 권병철이 피해자의 부모에게 이것저것 묻는 동안, 형사 백성민이 피해자의 방문을 열며 말했다.

"막내야. 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라. 처음엔 그냥 눈으로 보면서 배워."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막내야?"

형사 백성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정우가 보이지 않았다.

백성민이 조민석에게 물었다.

"막내 어디 갔어?"

"집 밖으로 나가던데요? 형님이 일 시킨 거 아닙니까?"

"아오. 내가 진짜 그거 반품시켜버리고 만다!"

서정우는 피해자의 집을 나와 골목길을 산책하듯이 걸었다.

서정우도 감지 스킬을 가지고 있다. 그 스킬을 각성하면 사람을 노리고 매복한 몬스터를 쉽게 찾아낸다. 그래서 헌터에게 매우 유용한 스킬이다.

그렇다고 그 스킬로 몬스터를 항상 찾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몬스터가 인간을 노리고 매복한 게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으면, 감지 스킬에 걸리지 않는다. 특수 몬스터 중에는 살기를 숨기는 놈도 있어서 그 스킬만 믿었다가는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런 때에는 감지 스킬을 액티브 모드로 전환하면 된다.

서정우는 평소에는 상시 감지 상태인 패시브 모드로 다니다가, 필요할 때는 감지 스킬을 특정 부위에 집중할 수 있는 액티브 모드로 전환해 사용한다. 액티브 모드 상태에서는 더 정확한 살기 감지가 가능해진다.

"인간의 살기는 몬스터만큼 잘 감지되지는 않고, 범인이 피해자 가족을 저격하려는 것도 아닐 테니까, 패시브 모드로는 어려워."

범인이 총으로 사람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패시브 모드로 감지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감지 스킬을 액티브 모드로 전환해 찾아야 한다.

그는 우선 아파트나 주택 창문은 제외했다.

"단서 하나 안 남길 정도로 영악한 놈이니까, 남의 집처럼 흔적이 남는 곳은 이용하지 않겠지."

살인마가 범행을 저지를 때마다 집을 사거나 빌리면 기록이 남는다. 그게 쌓이면 추적의 단서가 된다.

"이 근처는 모텔도 없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이 주변을 내려다보면 예상 지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러면 살인마도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매복한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이쪽이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대부분은 목표 지점이 잘 보이는 곳을 선호하니까.... 건물 옥상?"

조금 떨어진 건물 옥상에서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옥상에서라면 피해자의 집이 잘 보인다. 그가 그곳을 향해 감지 스킬을 집중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살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저긴 아니군."

감지 스킬은 패시브 모드로 뒀을 때는 항상 사용할 수 있지만, 집중해서 쓰는 액티브 모드는 한 번 쓰면 다시 쓸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한다. 대부분의 스킬은 그런 재사용 대기 시간이 있어서 연속 사용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재사용 대기 시간 동안에는 패시브 모드도 정지된다.

"그럼 어디에 꼭꼭 숨었나? 머리카락이 안 보이네?"

* * *

24시간 연쇄 살인마 조동식은 피해자의 집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4층 건물의 옥상에 숨어 있었다. 그는 삼각대까지 펼쳐놓고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피해자의 집을 감시했다.

그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크큭. 열심히 찾아보라고. 전에도 다들 그렇게 뛰어다녔지만, 날 찾아낸 놈은 하나도 없...."

갑자기 그의 뒤쪽 옥상 철문이 덜컹 흔들렸다.

조동식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어?"

문이 다시 흔들렸지만, 조동식이 바깥에 간단한 플라스틱 잠금장치를 붙여놔 열리지는 않았다.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간단한 접착식 장치지만, 그 정도만 해도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문이 잠긴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일부러 경비원이 없는 건물을 골랐는데? 여기 사는 사람인가? 문이 잠겨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돌아가겠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간이 잠금장치가 갑자기 쭉 늘어나다가, 뚝 끊어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열고 서정우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야. 문에 뭘 붙여놓은 거야?"

조동식은 살짝 긴장했다.

'건물주인인가? 오늘은 운이 나쁘군.'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착하게 생겼다. 착하게 생긴 얼굴로 적당히 변명하면 사람들은 그가 살인마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조동식이 손을 들며 말했다.

"아. 그냥 문이 열려 있어서 올라왔습니다. 사진이 취미라 하늘을 찍으려고...."

"지랄하네."

"뭐?"

서정우가 조동식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피해자 집에 사진 보내놓고 여기서 구경하니까 좋냐? 가족들이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게 재미있냐? 이거 진짜 변태 새끼네."

조동식은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수법이 노출되지 않게 조용히 나가려고 했더니.'

여기서 사람을 죽이면 경찰이 그의 수법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비슷한 경우에도, 일단 변명하고 빠져나간 후에,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목격자를 살해했다.

조동식이 눈알을 굴리며 서정우의 뒤를 확인했다. 따라 올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네?'

조동식이 실실 웃으며 기다란 가방에서 칼을 꺼냈다. 칼집에서 칼을 뽑자 50cm는 되는 칼날이 시퍼런 날을 드러냈다.

"너 때문에 이렇게 즐기는 건 이제 못 하겠군. 다음부터는 다른 안전한 방법을 찾아야겠어."

서정우도 의류수거함에서 가져온 가방에 손을 대며 생각했다.

'일단 총알을 두어 방 먼저 박고 시작할까?'

그 가방 안에는 권총이 들어있다.

'아니다. 이런 살인마는 살려두면 공기가 아까우니 그냥 가슴을 쏴버리는 게 더 낫겠....'

문득 다른 문제가 생각났다.

'아. 피해자부터 찾아야지. 아직 시간이 얼마 안 지났으니까 살아있겠지.'

피해자를 찾으려면 총을 쏴서는 안 된다. 살려서 잡아야 한다. 총을 쏴도 얼마든지 산 채로 잡을 자신이 있지만, 이곳은 저쪽 세계와 달라서 총부터 쏘면 문제가 생긴다.

그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너 칼은 쓸 줄 아냐?"

조동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검도 2단이다. 크큭."

저쪽 세계의 검도는 몬스터를 더 잘 베는 쪽으로 발전했다. 아예 검술 관련 스킬을 각성하는 사람도 있다. 검술 관련 스킬을 각성하지 못한 헌터라도 대부분 칼은 기본으로 쓸 줄 안다. 바짝 달라붙은 몬스터는 단검으로 찍어서라도 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서정우는 궁금했다.

"2단이면 어느 정도이려나."

그는 이번 기회에 이쪽 세계의 전투력 수준을 알아두면 좋겠다고 판단했다.

서정우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시작하지?"

"이 새끼가?"

조동식이 서정우를 향해 돌진했다. 위로 들었던 칼날이 고속으로 내리꽂혔다. 조동식은 이 일격으로 서정우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타앗!"

서정우가 그 모습을 보며 판단했다.

'뭐야. 겨우 이게 2단이야? 기준이 다른가?'

조동식의 내려치기보다 칼날 사마귀의 앞발이 훨씬 더 빠르다.

서정우가 옆으로 슬쩍 움직여 칼날을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주먹이 조동식의 가슴에 깊게 꽂혔다.

"케엑!"

조동식이 뒤로 날아가 옥상 바닥을 굴렀다. 손에서 빠져나간 칼은 옥상 구석에 떨어졌다.

서정우가 물었다.

"야. 너 진짜 2단이냐? 뻥이지?"

조동식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가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헉헉."

그가 숨을 헐떡이며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냈다.

서정우가 조동식에게 걸어갔다.

"이야. 칼날이 참 아담하다."

조동식이 칼을 허공에 휙휙 휘둘렀다.

"오지 마!"

"벌써 쫄았냐?"

거리가 가까워졌다. 조동식이 소리를 지르며 서정우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

서정우가 잭나이프를 슬쩍 피하며 다리를 걷어찼다.

"으악!"

조동식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몸이 옥상 바닥에 부딪히기도 전에 서정우가 적의 오른손을 걷어찼다.

잭나이프가 손에서 떨어져나와 조금 전에 칼이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아악!"

조동식의 오른손 뼈가 발차기에 맞아 부러졌다. 이제 그 손으로는 무기를 잡을 수가 없다.

서정우가 물었다.

"야. 피해자 어디 있냐?"

조동식의 눈에서 독기가 피어올랐다.

"씨발! 내가 말할 줄 알아?"

"어. 넌 말할 거야."

서정우가 조동식의 멱살을 잡고 옥상 구석으로 끌고 갔다. 조동식이 안 끌려가려고 발버둥 쳤다. 서정우가 옥상 구석에서 조동식을 한쪽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가 헌터라서 가능한 힘이다.

조동식이 경악으로 눈을 치떴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정우가 조동식을 옥상 난간 바깥 허공에 매달았다.

조동식이 발버둥을 쳤다. 발끝이 땅에 닿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일어났다.

"케켁!"

"이제 말하고 싶지?"

조동식은 그 와중에도 악을 썼다.

"씨발! 날 죽이면 그년은 못 찾아! 어디 있는지는 나만 알고 있으니까!"

"이거 머리가 나쁜 새끼네."

"뭐?"

"너 죽는다고 네가 누군지도 모르겠냐? 너네 집 조사하고, 네가 어디 갔는지 조사하고, 네 얼굴 사진 돌리고, 목격자 찾고. 그럼 피해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야."

"그렇게 해서 언제...."

"하루 안에 찾을 필요도 없지. 사람은 며칠쯤 아무것도 안 먹어도 안 죽으니까. 살아있을 때 찾기만 하면 돼."

조동식은 서정우가 덤덤하게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겁이 덜컥 났다.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나부터 옥상 안쪽으로 좀...."

"말부터 해."

조동식이 주소를 하나 말했다.

서정우가 물었다.

"확실하냐?"

"확실해! 내가 직접 안내할 테니까 그만 올려...."

서정우가 말했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서정우가 연쇄 살인마 조동식의 멱살을 잡은 손을 놔버렸다.

"이런 소리."

조동식이 4층 건물 옥상에서 아래로 추락했다.

"으, 으아아아악!"

6. 윤나나

서정우는 살인마 조동식을 옥상에서 던져버린 후에, 옥상 구석에 굴러다니는 칼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강화 흔적이 없고.... 이것도 그냥 칼이네."

혹시 성능이 좋은 칼이면 챙겨갈까 했지만, 이건 저쪽 세계에서는 일반인들이나 쓰는 칼이다.

카메라와 망원렌즈도 보였다.

"저거라도 챙, 아니다. 저게 다 증거물인데 내가 꿀꺽하면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곤란해지겠지."

서정우가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조동식은 땅바닥에 쓰러져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악! 이 미친 새끼야!"

4층 높이에서 떨어뜨리긴 했지만, 머리부터 떨어진 게 아니고 허공에 매달렸다가 다리부터 떨어진 거라 죽지는 않았다. 서정우는 많이 던져봐서 안 죽게 잘 떨어뜨릴 줄 안다.

조동식은 목숨은 건졌지만, 대신에 다리가 부러졌다. 이미 서정우와 싸울 때 다리에 금이 간 상태라, 4층 옥상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을 다리뼈가 버티지 못했다.

서정우가 조동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야. 피해자 어디에 숨겼다고?"

"마, 말했잖아!"

"다시 말해. 조금 전에 말한 주소하고 다르면 모가지도 부러뜨려버린다."

"그건 살인이다!"

"살인마 새끼가 남 걱정은. 추락사로 위장하면 되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조동식은 서정우의 말이 다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옥상에서 떨어지고 다리까지 부러진 데다가 살해 협박까지 받자 금방 공포에 질렸다.

조동식이 급히 주소를 다시 말했다. 조금 전에 말한 곳과 같은 곳이었다.

서정우가 피식 웃었다.

"살인마 새끼도 자기 목숨은 소중한가 보네."

* * *

피해자의 집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통곡했다.

"나나야!"

피해자 윤나나의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머리를 숙인 채 계속 중얼거렸다.

"그 새끼 찾으면 내가 갈아 마셔버린다. 진짜 갈아 마신다."

강력팀장 권병철은 피해자를 금방 찾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놓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다.

'24시간 안에 찾을 수 있을까?'

진심으로 찾고 싶다. 그런데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 일어난 24시간 연쇄 살인 사건에서도 단서가 나온 적은 없다.

'연쇄 살인마의 짓이니까 피해자 주변 인물은 아니겠지. 목격자라도 찾아야 하나? 맨땅에 헤딩해서는 못 찾는데....'

앞날이 걱정됐다. 피해자의 앞날도 걱정이지만, 그의 앞날도 걱정이다.

'이 사건 분명히 뉴스에 크게 난다. 24시간 안에 피해자를 못 찾으면....'

24시간 안에 못 찾으면 윤나나는 살해당한다. 지금까지는 매번 그랬다.

'그러면 나는, 아니, 우리 팀 전체가 징계 확정이겠지.'

피해자도 살고 그도 살고 그의 팀도 살려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한다.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해볼 건 많다.

"야! 백성민! 너 그렇게 어슬렁거릴 거면 나가서 목격자도 좀 찾고, 윤나나 씨 통화 내역도 다 뽑아서 확인해! 과수대는 왜 이렇게 늦어? 빨리 튀어오라고 해!"

형사 백성민이 마당으로 쫓겨나왔다. 조민석은 마당에서 다른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 내역 조회를 대신 처리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백성민이 조민석에게 말했다.

"우리 셋은 일단 주변 탐문수사부터... 막내 아직 안 돌아왔냐?"

"예."

"아오. 이 또라이 새끼. 빠져서 첫날부터 지각이나 하고, 현장에서는 사라지고. 이래서 순경을 형사로 받으면 안 되는데. 내가 진짜 그 새끼 꼭 반품시킨다."

"막내는 차라리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낫죠. 이럴 때 우리 팀에 같이 있으면 징계도 같이 먹을 텐데."

백성민이 멈칫했다. 지금 반품이 문제가 아니다.

"넌 왜 실패할 생각부터 해? 범인 잡고 피해자 찾을 생각을 해야지!"

"저도 그러고 싶지요. 그런데 단서가 전혀 없잖습니까? 그동안 그 살인마가 저지른 사건에서, 탐문이나 통화 내역으로 성과가 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잡...."

갑자기 대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대문 쪽으로 돌아갔다.

서정우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백성민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이 새끼! 어디 갔었어!"

서정우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범인 잡으러 갔죠."

"이 또라이 새끼야! 그냥 나가서 돌아다니면 범인이 잡히냐? 잡혀?"

"잡히던데요."

"잡히긴 뭐가 잡.... 어? 뭐라고?"

백성민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서정우가 대문을 완전히 열었다. 대문 밖 리어카에 조동식이 구겨져 있었다.

백성민은 화들짝 놀랐다.

"시, 시체?"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누, 누구?"

"범인입니다."

"어? 어?"

"이놈이 24시간 연쇄 살인범입니다."

백성민은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24시간 연쇄 살인범은 그동안 경찰을 몇 번이나 농락한 흉악범이다. 그때마다 검경 합동 수사본부를 만들어 수사했지만, 지금까지 범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서정우가 잠깐 나가더니 사람 한 명을 리어카에 싣고 왔다. 그리고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 말이 바로 믿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눈에는 서정우가 또라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새끼. 설마 엉뚱한 사람을?'

조동식의 부상은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꽤 크다. 처음에는 시체인 줄 알았다.

백성민은 겁이 덜컥 났다. 진짜 엉뚱한 사람을 이 꼴로 만든 거라면, 24시간 연쇄 살인사건과 겹쳐서 크게 터진다.

'이 꼴로 만들었는데 범인이 아니면 옷 벗는 정도로 안 끝나. 이 녀석은 구속 확정이고, 우리도 징계란 징계는 다 받겠지.'

백성민이 침을 꼴깍 삼킨 후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야. 서정우. 이 시체, 아니, 사람 말이야. 진짜 범인이냐?"

"네."

"그렇게 의심한 이유가 뭐야? 그냥 얼굴 보고 찍은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200미터쯤 떨어진 건물 옥상에 숨어서, 큰 망원렌즈가 붙은 카메라로 여길 보고 있던데요?"

"여기?"

"정확히 여기였습니다."

백성민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그래? 그거 굉장히 의심스럽네."

"의심을 왜 합니까? 범인이 맞는데."

"이 답답한 놈아. 증거가 필요하잖아. 증거!"

"그 옥상에 가면 카메라에 증거가 남아 있을 겁니다."

"어? 그래? 그럼.... 응? 있을 겁니다? 이곳을 찍는 거 확인했냐? 셔터 누르는 거 봤냐고."

"아니요."

"거기 안 찍혔으면 너랑 나랑 우리 다 엿 되는 거야."

옆에서 형사 조민석이 조동식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엔 정말 시체인 줄 알았.... 헉!"

그가 화들짝 놀라며 서정우에게 물었다.

"야. 야! 이놈 다리 왜 이래? 부러졌잖아!"

"범인이 심하게 저항했거든요. 제압하려고 싸웠는데, 이놈이 옥상에서 실수로 자기 혼자 떨어지던데요."

백성민의 얼굴이 조금 더 펴졌다.

"이 사건 범인이 아니라도, 최소한 다른 사건의 범인은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 형사를 보고 심하게 저항하지. 아. 경찰 신분증은 먼저 보여줬지?"

"범인 맞아요. 자백했어요."

"이렇게 처맞고 한 자백이 법정에서 인정되겠냐?"

"피해자가 어디 있는지를 자백했는데 당연히 인정되겠죠."

"어? 뭐?"

"피해자의 현재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백성민의 얼굴이 이제 완전히 활짝 펴졌다.

"야 임마! 그 이야기를 왜 이제 해!"

백성민이 집안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팀장님! 범인 잡았습니다! 그 살인마 새끼 잡았어요!"

권병철도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진짜냐!"

"피해자, 아니, 윤나나 씨 소재도 파악했습니다!"

안에서 피해자 부모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까아악! 진짜예요?"

"진짜입니까!"

강력팀장 권병철이 바로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살인마 새끼 어디 있...."

그는 멈칫했다. 리어카에 실린 조동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도 처음에는 시체를 본 줄 알았다.

"성민아. 어떻게 된 거야!"

"막내가 잡아 왔는데요. 저도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지금은 그걸 묻고 있을 때가 아니다. 권병철이 서정우에게 급히 물었다.

"피해자 지금 어디 있어?"

당연히 살아있다는 전제로 물었다. 아직 사건이 발생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이전 사건과 비교하면 살아있을 시간이다.

서정우가 조동식에게 들은 주소를 말해주었다.

그가 바로 그곳으로 가지 못한 건, 아직 이쪽 세계 주소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쪽 세계는 게이트 전쟁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새로 지어지면서 주소가 많이 바뀌었다.

권병철은 주소를 듣자마자 거기가 어디인지 깨달았다.

"여기서 가깝잖아!"

권병철이 같이 온 형사들에게 지시했다.

"너하고 넌 여기 남아서 범인 확보해! 저거 죽으면 우리가 독박 쓰니까 119도 부르고!"

"예!"

권병철이 봉고차에 올라탔다. 조민석은 벌써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백성민도 올라탔다.

권병철이 서정우에게 외쳤다.

"넌 왜 안 타! 빨리 타!"

"아. 예."

서정우가 마지막으로 차에 탔다.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차 안에서 팀장 권병철이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했다.

"그 근처 다 수색해야 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많이 보내! 발 달리고 눈 달린 놈은 싹 다 긁어서 거기로 보내라고!"

지원요청을 한 후에, 권병철이 서정우에게 물었다.

"야. 넌 전화부터 했어야지 왜 그놈을 끌고 와?"

"전화번호를 몰라서요."

"상황실에라도 걸었어야 할 거 아냐!"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휴대폰은 이쪽 세계 통신회사에 등록된 물건이 아니라 통화가 불가능하다.

"앞으로는 그러겠습니다."

백성민이 옆자리에서 물었다.

"야. 그런데 그 리어카는 어디서 난 거냐?"

"2만 원이나 주고 빌렸죠."

그 2만 원은 조동식의 지갑에서 꺼냈다.

"2만 원 경비 처리 되죠?"

* * *

윤나나는 승용차 트렁크에 갇혀 있었다.

요즘 승용차는 트렁크 안에 비상 탈출용 손잡이가 있다. 그런데 그 손잡이는 조동식이 이미 제거했다. 설사 탈출 손잡이가 남아 있다 해도, 윤나나는 온몸을 꽁꽁 묶이고 입까지 테이프로 막혀, 잡아당길 방법이 없었다.

윤나나는 겁을 많이 먹었다.

'엄마. 무서워.'

24시간 연쇄 살인마에게 잡혔다는 건 안다. 조동식이 웃으면서 직접 이야기해줬기 때문이다.

후회되는 일이 많이 생각났다.

'엄마 아빠한테 효도할걸. 하연이랑 다연이한테 공부하라고 구박하지 말걸. 소라한테 고기 사주기로 한 약속 지킬걸. 나도 맛있는 거 많이 먹어볼걸. 연애도 해볼걸.'

아까부터 눈물이 계속 나왔다.

'꿈 포기하지 말걸.'

그때 밖에서 2팀장 권병철이 화내는 소리가 들렸다.

"정우야! 여기라면서!"

"위치는 확실합니다."

"그 집에는 아무도 없잖아!"

"이 근처 어디 있을 겁니다."

윤나나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군지는 몰라도 범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녀가 몸을 꿈틀거렸다. 워낙 꽁꽁 묶여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소리도 질렀다.

'살려주세요!'

"읍읍!"

입에 테이프가 하도 단단히 붙어 있어서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마음이 급했다. 허리를 억지로 들었다가 아래로 떨어뜨리며 엉덩이로 트렁크 바닥을 쳤다. 차가 조금 흔들렸다.

밖이 조용했다. 그녀는 더 다급해졌다.

"읍읍!"

갑자기 차를 뭔가로 내리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도블록에 맞아 찌그러진 트렁크가 덜컹 열렸다.

빛이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그녀는 겁을 먹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읍읍!"

서정우가 말했다.

"경찰입니다."

"읍!"

"범인은 잡았습니다."

그녀의 눈이 다시 커졌다. 이제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눈에, 눈 부신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서정우가 보였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서정우가 그녀의 입에서 테이프를 떼주며 말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이제 안전합니다."

그건 그가 저쪽 세계에서 몬스터를 물리치고 고립된 사람을 구했을 때 하는 말이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녀가 마음 놓고 큰 소리로 울었다.

"으아아아앙! 죽는 줄,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으아앙!"

서정우가 권병철에게 말했다.

"팀장님. 이분을 안심시키려면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셔야겠는데요."

"이미 충분히 안심한 것 같다만. 그런데 신분증? 네 거 보여주면 되잖아."

"전 안 가져와서요."

저쪽 차원에서 넘어왔는데 신분증이 있을 리가 없다.

권병철은 어이가 없었다.

"넌 무슨 경찰이 신분증을...."

이런 사소한 문제로 서정우를 구박하기에는, 그가 오늘 한 일이 너무 엄청나다.

"안 가지고 다닐 수도 있지. 첫날은 원래 그런 거야."

7. 설탕과 케이크, 그리고 초콜릿

현장에 119구급차가 도착했다. 출동 직후에 119로도 연락했기 때문에, 윤나나를 찾은 것과 119구급차가 도착한 건 거의 동시였다.

구급대원들이 윤나나를 구급차에 태웠다.

강력팀장 권병철이 승합차로 걸어가며 말했다.

"난 병원에 윤나나 씨 상태 확인하러 간다."

형사 백성민이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너도 오게?"

"예?"

"네가 오늘 한 게 뭐 있다고 따라와?"

"어.... 한 게 없긴 하죠."

"주변 조사나 해."

"예."

권병철이 서정우에게 물었다.

"넌 따라올래?"

서정우는 경찰의 조사 체계를 모른다. 괜히 따라갔다가 이상하다는 의심을 사면 손해다.

"저도 이 주변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따로."

"그럼 그래라."

형사 백성민은 서정우가 범인과 싸운 4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 건물의 위치는 윤나나를 찾으러 갈 때 다른 형사들에게 전달했다. 이미 과학수사대가 와서 현장을 조사 중이다.

백성민이 그중에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 가끔 술도 한 잔씩 하는 과학수사대 요원 이동욱이 보였다.

그가 이동욱에게 물었다.

"우리 막내가 여기 카메라에 증거가 찍혀 있을 거라더라. 뭐 좀 나왔어?"

"나왔지. 사진이 나왔지."

"윤나나 씨 집 사진?"

백성민은 처음에 살인마 조동식의 시체와 비슷한 상태를 보고, 그가 범인이라고 믿을만한 단서가 있어야 서정우가 징계를 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제는 윤나나를 구출해 확실한 목격자를 찾았지만, 그래도 아까 했던 생각이 있어서 사진부터 물어보았다.

"그 집 사진만 나온 게 아니야. 그 전부터 윤나나 씨를 찍고 있었더라고."

"스토커 새끼네. 야. 혹시 다른 사진은...."

이동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전 피해자들 사진은 없더라. 그것까지 있으면 확실히 끝장내는데."

백성민은 입맛이 씁쓸했다. 예전 피해자들은 윤나나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동욱이 물었다.

"피해자는?"

"우리가 무사히 구출했다. 아마 증언할 거야."

이동욱과 백성민이 아쉬워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나온 증거만으로는 조동식을 살인죄로 처넣지 못할 수도 있어서다. 윤나나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민이 물었다.

"그 새끼가 그 24시간 연쇄 살인마인 건 맞지? 모방범 아니지?"

"모방범이 쓸 만한 무기나 장비가 아니다. 내 느낌으로는 100% 그 연쇄 살인마다. 다만, 이전 범죄의 증거는 여기서는 못 찾았다."

"그 새끼 집하고 주변을 싹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야지."

다시 이동욱이 물었다.

"야. 그 살인마를 잡은 게 너네 막내라며?"

"어. 놀랍지? 순경이 강력계 오자마자 대박 친 거지."

"너네 막내 도대체 뭐냐?"

"초심자의 행운 같은 거야."

이동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행운? 행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모르는구나?"

"뭘?"

"그 살인마 새끼가 검도 2단인 거 모르냐고."

"그러냐?"

"이 옥상에서 칼이 두 자루나 나온 건 알고?"

백성민이 멈칫했다.

"어?"

"두 자루 다 한 사람의 지문만 나왔다. 당연히 범인의 지문이겠지. 하나는 잭나이프지만, 다른 하나는 날 길이가 50cm쯤 되는 진짜 칼이다. 칼집하고 따로 구석에서 뒹굴던 걸 보면 범인이 그 칼로 너네 막내를 베려고 한 것 같다."

"와. 정우 그거 그냥 싸웠다고 했는데, 그게 칼 든 놈하고 싸웠다는 소리였네."

"그런데 말이야. 검도 2단이 진검을 휘두를 때, 너네 막내는 뭐로 싸웠냐? 여기엔 너네 막내가 무기를 쓴 흔적이 없어."

백성민은 아까 주차장에서 늦게 출근한 서정우를 발견하고 바로 봉고차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왔다.

"어.... 걔 오늘이 우리 팀 첫 출근이라 지금 장비가 하나도 없는데. 맨손일 텐데."

이동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실력 장난 아니네. 방검복도 없이 맨손으로 칼을 든 검도 2단을 잡다니. 그것도 사람 찌르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살인마를. 그런 거 아무나 못 한다."

"어.... 걔가 좀 또라이 같은 데가 있.... 아니, 아니다."

* * *

서정우는 윤나나를 구출한 곳과 그녀의 집 주변을 간단히 조사했다.

'내가 실수로 흘린 건 없네.'

형사들은 조동식을 근처 정형외과로 끌고 가서, 뼈가 부러진 오른손과 다리에 깁스만 해주고 바로 경찰서로 끌고 갔다.

잠시 후에 서정우도 경찰서로 들어왔다.

깁스 위로 수갑을 찬 조동식이 서정우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 미친 새끼야! 저 새끼가 날 죽이려고 옥상에서 던졌다고!"

형사들이 서정우를 쳐다보았다.

서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범인이 거짓말하는 겁니다. 저놈 혼자 미끄러져서 떨어졌습니다."

"맞아! 미끄러졌다고 했어! 손이 미끄러졌다고 했다고!"

"살인마라서 그런지 누명도 잘 씌우네요."

형사 조민석이 범인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 새끼가 어디서 형사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구라를 쳐! 처음엔 널 던졌다더니 이젠 미끄러졌다고 하냐?"

"구라가 아니야! 진짜 날 던지고, 손이 미끄러지고. 씨발! 하여간 날 죽이려 했다고! 형사가 이래도 돼? 어?"

"목격자나 증거는 있냐?"

"증거! 증거 있지! 저 새끼가 옥상에서 오른손으로 날 들고 공중에 매단 채로 떨어뜨린다고 협박했단 말이야. 내 목을 봐! 이게 증거야!"

조동식이 손으로 목을 가리켰다.

그의 목에는 붉게 변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서정우가 조동식의 멱살을 잡고 공중에 매달 때 생긴 상처였다.

형사들이 다시 서정우를 쳐다보았다.

서정우가 둘러댔다.

"싸우다 보면 멱살도 잡고 그러는 거죠. 그때 생긴 상처네요."

형사 조민석이 다시 조동식의 뒤통수를 쳤다.

"이 미친 새끼. 겨우 한 손으로 널 들고 공중에 매달아? 넌 쟤가 역도 선수로 보이냐?"

서정우는 날씬한 편이다.

몬스터와 싸우는 헌터가 한 손으로 사람 하나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센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건 저쪽 세계의 상식이다. 이쪽 세계에는 몬스터도 없고 헌터도 없다. 서정우처럼 날씬한 사람이 단지 한 손만으로 조동식을 공중에 매단다는 건,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저쪽 세계였다면, 조동식이 겨우 두 군데만 부러진 채로 살아남아서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실제로 저쪽 세계의 연쇄 살인마 조동식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조동식의 말을 믿는 형사는 아무도 없었다. 서정우가 옥상에서 조동식을 던지는 모습을 직접 봤어도 덮어줄 판에, 허황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믿을 사람은 없다.

강력팀장 권병철이 상황을 정리했다.

"정우야. 저 새끼 조서 쓸 때 도망치다 옥상에서 혼자 추락했다고 써."

서정우는 살짝 당황했다. 그는 조서 쓰는 법은 고사하고 이쪽 세계 경찰의 서류 작성법 자체를 모른다.

'곤란한데.'

그때 형사과장과 경찰서장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형사들이 모두 일어섰다.

경찰서장 염기훈이 활짝 웃었다.

"으하하하! 수고했어! 진짜 수고했어!"

염기훈이 물었다.

"우리 히어로가 누구야? 어? 새 얼굴인 거 보니까 너구나?"

형사과장도 신입 형사가 온다는 것만 알지 서정우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가 강력팀장 권병철에게 눈짓했다. 권병철이 서정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부로 우리 2팀이 된 서정우입니다."

"하하하. 잘했어! 우리 서에 보물이 들어왔어! 으하하하!"

경찰서장 염기훈이 서정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오늘은 다 들어줄 테니까. 회식시켜 줄까? 소고기?"

소고기라는 말에 서정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지만 염기훈도 상식은 있다.

"아. 범인 신문하고 조서 쓰려면 오늘 회식은 무리겠네."

연쇄 살인마를 잡아놓고 겨우 회식 때문에 이후 처리를 다른 팀에 맡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서정우는 이쪽 세계의 범인 신문 방식을 모른다. 조서를 쓰는 방법도 모른다.

그래서 경찰서장에게 말했다.

"일찍 퇴근하고 싶습니다."

"음? 퇴근이라니? 벌써?"

"아까 범인과 격렬히 싸우느라 타박상을 좀 입은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가봐. 당연히 가야지! 여기서 너 가지 말라는 놈 있어? 어? 누구야!"

없다. 서정우 덕분에 그가 소속된 팀은 오늘 대박 실적을 쌓았다.

팀장 권병철이 얼른 말했다.

"정우야. 신문도 우리가 하고 조서도 우리가 다 쓸 테니까, 넌 병원 들러서 진찰부터 받아라. 칼은 안 맞았어도 속으로 골병들었을 수 있어."

"예."

그런데 서정우는 아직 이곳에서 해결할 문제가 남았다.

그가 백성민에게 물었다.

"반품은...."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백성민를 향했다. 경찰서장 염기훈까지 반품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형사 백성민의 이마에 땀이 살짝 맺혔다.

'여기서 말 잘못 하면 난 엿 된다.'

그가 급히 외쳤다.

"반품? 무슨 반품? 정우야! 네가 첫날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난 게임기 샀는데 벽돌이 택배로 와도 반품 안 하는 사람이야!"

거짓말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게임기 중고거래를 했다가 벽돌을 택배로 받은 적이 있다. 그는 그걸 반품하는 대신에 증거물로 써서 중고거래 사기꾼이 체포되도록 만들었다.

서정우는 만족했다.

'내가 정말 형사과에서 쫓겨나면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곤란해지겠지. 이 정도 해놨으면 괜찮겠지.'

서정우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는 일단 집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몬스터와 싸우려면 숨어 있는 놈을 찾는 것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매복도 잘해야 한다.

다행히 이쪽 세계에서는 땅을 파고 숨는 매복을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집 근처 동네 카페에 들어갔다. 집으로 가려면 이 카페 앞길을 지나가야 한다. 다른 좁은 뒷길도 있지만, 서정우의 옛날 기억에 그는 꼭 이 앞길을 이용했다.

'일단 이곳에서 상황을 분석....'

작은 개인 카페에 들어선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저쪽 세계에도 카페는 있다.

몬스터와 싸우면 고기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골렘 타입의 광물형 몬스터를 잡으면 기본적으로 석재가 나오고, 금속 자원도 좀 나온다. 운이 좋으면 소량의 희귀 합금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쓰는 권총의 핵심 부품인 방열판도 그런 희귀 합금으로 만든 것이다.

식물형 몬스터의 몸통은 대부분 단단한 나무로 싸여 있다. 몬스터 종류에 따라 장미목 비슷한 목재로 된 놈도 있고, 마호가니를 몸통에 두른 놈도 있다.

그런 식물형 몬스터를 잡으면 당연히 그 목재가 손에 들어온다. 저쪽 세계에는 그런 목재가 흔하다.

목재가 흔하다고 해서 집을 나무로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저쪽 세계에서 집을 지을 때는 지붕까지 철근콘크리트로 짓는다. 그래야 소형 몬스터의 침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택의 콘크리트 벽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소형 몬스터뿐이다. 중형 이상이 돌진하면 일반 주택은 쉽게 무너진다.

저쪽 세계의 카페는 내부 인테리어에 큰돈을 쓰지는 않는다. 언제 몬스터의 습격으로 건물 자체가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부 인테리어의 수준은 저쪽이 훨씬 나았다. 이쪽에서 나무무늬 벽지나 돌 느낌의 벽지, 그리고 파티클 보드 같은 합판을 쓸 때, 저쪽 세계에서는 최상급 진짜 목재와 석재를 아낌없이 쓴다.

그가 멈칫한 건 내부 인테리어 때문이 아니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 들어있는 케이크와 각종 음료 때문이다.

'와. 케이크가 진짜 맛있어 보인다. 진짜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 거겠지?'

저쪽 세계는 축산업만 망한 게 아니다. 농업 자체가 상황이 좋지 않다. 대규모 경작지를 유지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전쟁 초반에 미국이나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밀 농장에서 용병들을 고용해 경비를 세워봤지만 소용없었다. 화염 계열 몬스터 한 마리만 놓쳐도 농작물이 다 타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쪽 세계에서 진짜 밀가루는 정말 비싸다. 물론 쌀도 비싸다.

그렇다고 저쪽 세계에 비싼 식재로만 있는 건 아니다.

인류는 수경재배에서 해답을 찾았다. 공장의 수경재배 시설에서 대량 생산한 클로렐라는 싸고 영양가도 높다. 그래서 밥을 굶는 사람은 없다.

그 클로렐라를 그냥 먹는 건 아니다. 공장에서 가공해서 합성 밀가루와 합성 쌀로 만든다. 저쪽 세계에서 쌀이나 밀가루라고 부르는 건 다 공장에서 클로렐라를 가공해 만든 제품이다. 땅에서 재배한 쌀과 밀가루를 이야기할 때는 '진짜'라는 말을 앞에 붙인다.

클로렐라는 영양이 풍부하고, 생산 비용도 쌀이나 밀보다 훨씬 저렴하며, 조건만 갖춰주면 좁은 공간에서 대량생산도 가능하다. 그래서 클로렐라로 만든 합성 밀가루와 합성 쌀은 저쪽 세계 식량 공급의 중요한 축이다.

다만 클로렐라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맛이 더럽게 없다.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가 생산되는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런 지역에서 몬스터를 막으려면 헌터를 고용해서 농장을 지켜야 한다. 그건 생산 단가의 상승을 일으킨다. 그래서 설탕도 비싸다.

저쪽 세계에서 단맛은 사카린으로 낸다.

저쪽 세계에도 제과점이 있다. 그곳에서는 합성 밀가루와 사카린으로 만든 케이크를 판다. 당연히 맛은 진짜 케이크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

진짜 밀가루로 만든 케이크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건 동네 카페에서 저렇게 진열하면서 팔지 않는다. 고급 제과점에서 미리 주문을 받아 만들어 판다. 물론 굉장히 비싸다.

개인 카페 주인 이주연이 서정우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서정우는 갈등했다. 먹고 싶은 것이 많은데 입도 하나고 배도 하나다.

"어, 저기 저.... 초코? 초코! 초콜릿으로 케이크를 만들다니!"

그가 마지막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먹어본 건 1999년 크리스마스 때다.

8. 인연

초콜릿의 핵심 원료인 카카오는 밀이나 쌀보다 훨씬 더 귀하다. 당연히 초콜릿값도 비싸다. 케이크도 비싼 음식이지만, 초콜릿은 케이크에 섞어서 팔아도 되는 가격이 아니다.

서정우가 당장 주문을 결정했다.

"초코케이크!"

이 작은 개인 카페의 사장이자 유일한 점원인 이주연이 말했다.

"네? 아, 네. 조각 초코케이크 하나."

서정우가 재빨리 가격표를 확인했다.

"조각 말고 케이크 통째로 하나!"

"아. 포장하시게요?"

"먹고 갈 겁니다."

"예? 아. 예."

이주연은 일행이 더 오나 보다 생각하며 물었다.

"음료는 뭘 주문하시겠어요?"

그의 눈에 그라인더의 투명한 통에 담긴 원두가 보였다.

"진짜 원두로 만든 커피?"

이쪽 세계의 커피는 원재료인 생두가 꽤 저렴한 편이다. 커피 생두가 저렴한 이유는 산지의 노동력을 지나칠 정도로 싸게 쓰기 때문이다. 커피가 한국이나 미국 한복판에서 생산된다면 인건비 때문에 지금 가격이 될 수가 없다.

저쪽 세계에서는 커피 농사를 지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몬스터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커피는 원래 고지대 산간지방에서 재배하는데, 그런 외진 곳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농부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집 근처나 앞산에 커피나무가 자란다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나라는 군대가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다. 살고 싶으면 좁은 지역에 뭉쳐서 방어선을 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좁은 땅에 심을 수 있는 커피나무는 몇 그루 안 된다.

그래서 저쪽에서 커피 생두를 입수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20세기에 커피 농장이었던 곳에 팀을 짜서 들어가, 방치된 커피나무에 자연상태로 열린 커피를 수확하는 것이다.

수확 비용이 워낙 많이 들고 생산량은 적다 보니 당연히 커피 가격은 비싸다. 저쪽 세계에서 진짜 커피는 대단히 비싼 기호품이다. 서정우가 마지막으로 진짜 커피를 마셔본 건, 두 달 전 그가 몬스터 게이트 근처에서 구출한 사람들이 고맙다며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을 때다.

대부분의 저쪽 세계 사람들은 인공 커피 향에 합성 카페인을 섞은 음료를 커피라고 부르며 마신다. 그 맛은 진짜 커피보다 못하다. 저쪽 세계에도 카페는 있지만, 그런 합성 커피보다는 차가 더 잘 팔린다.

"진짜 커피!"

"네. 어떤 커피...."

"진짜 아메리카노!"

"연하게 진하게...."

"당연히 진하게! 어? 헉! 에스프레소도 판다!"

인공 커피 향으로 만든 합성 커피는 보통 물에 희석해서 마신다. 원액 그대로 마시면 커피가 아니라 다른 안 좋은 맛이 느껴지기 때문에 꼭 물에 타서 마셔야 한다. 그래서 합성 커피로는 에스프레소를 만들 수 없다.

그 귀한 진짜 커피를 양이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 에스프레소로 마시는 건 엄청난 사치다.

서정우도 커피를 에스프레소로 마시는 사람은 TV 드라마에서만 봤다.

"에스프레소도 한 잔!"

"아. 네."

이주연은 서정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오빠 오늘 좀 이상하네.'

서정우는 이 작은 개인 카페의 단골이다. 주문할 때는 서로 미소를 짓는다. 가끔 지갑 사이에서 보이는 신분증 덕분에 그녀는 서정우가 경찰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경계하지 않고 서로 가벼운 농담도 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 본 서정우는 평소와 달랐다. 그는 이주연은 보지도 않고 커피와 케이크에만 집중했다.

'설마 케이크 하나를 다 먹진 않겠지?'

서정우가 포크를 숟가락처럼 잡고 케이크를 푹 떠서 입에 넣었다. 쌉싸름하면서도 진한 초콜릿 맛과 케이크의 단맛이 그의 입안에서 확 터졌다.

"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눈물 나게 맛있다."

진짜 맛있었다.

"사카린이 아니라 진짜 설탕 맛이네."

단맛은 저쪽에서도 귀한 맛은 아니다. 설탕의 300배나 되는 단맛을 가진 사카린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카린의 단맛은 설탕의 단맛만큼 맛있지 않다.

그는 커피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진한 커피 맛이 느껴졌다.

'진짜 커피다. 진하다!'

두 달 전에 마셔본 그 커피보다 더 맛있었다.

이런 맛있는 커피가 겨우 3천 원이라니.'

"진심으로 이 세계에 눌러앉고 싶다."

마음은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돌아갈 때는 아마 출발점으로 가겠지만....'

텔레포트 자체는 위험하지 않은 스킬이다. 이동할 곳에 이미 어떤 물체가 있다면 둘 중 한 가지 현상이 일어났다. 공기 같은 가벼운 것이 있다면 공기가 밀려 나가고, 무거운 물체가 있다면 사람이 그 옆으로 밀려나 안전한 곳에 나타난다.

과학자들은 각성자의 잠재의식이 본능적으로 안전한 좌표를 지정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서정우는 그가 사용한 평행차원 이동 스킬도 일종의 텔레포트 스킬이라고 판단했다. 방송에서 본 차원 이론을 근거로, 양쪽 세계가 고정된 좌표로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다만, 저쪽 세계로 갔다가 이쪽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100%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가 처음 이쪽 세계로 올 때는, 스킬을 시험하려고 쓴 순간 좌표를 지정할 틈도 없이 바로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그런데 저쪽 세계와 게이트로 연결되는 몬스터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돌아가서 스킬을 다시 썼을 때도 이쪽 세계로 온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새로운 세계와 새로 연결되는 방식이라면 이쪽 세계로는 못 돌아올 수도 있단 말이야.'

그렇다고 여기 눌러앉을 수는 없다. 저쪽 세계에는 그의 가족이 있다. 그가 아는 사람들도 저쪽 세계에 있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고민한다고 답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서정우가 케이크를 다시 잘랐다.

'기회 있을 때 실컷 먹자.'

서정우는 케이크 하나를 혼자 다 먹고 커피도 석 잔이나 마셨다. 에스프레소에는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는 그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서소라였다.

그녀가 카페에 혼자 있는 서정우를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커피잔이 많네? 누구랑 있었던 거야?"

"아니. 혼자인데?"

"밤에 잠자기 싫어? 케이크는 또 뭐야? 이걸 혼자 다 먹은 거야?"

"맛있더라."

그녀는 저쪽 세계의 서소라가 몬스터를 찾을 때 짓던 표정으로 서정우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빠. 진짜 오늘 이상하네? 첫날이라고 직장에서 스트레스 많이 줘? 그래서 막 먹는 거야? 원래 먹어서 푸는 성격은 아닌데 왜 이래?"

설명할 방법은 없다.

"그냥."

"그만 먹고 집에 가자."

서정우는 계획을 바꾸었다.

'집안을 조사하는 것도 방법이지.'

그가 일어나며 케이크가 올려진 판을 들었다.

"이걸 싸가려면...."

"미쳤어? 케이크에 난도질해놓고 어떻게 가져가려고? 남들이 이상하게 볼 거야."

아까웠지만, 이상하게 보이는 건 곤란하다.

"농담이다."

서소라가 집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엄마 아빠는 유럽 파견이 체질에 맞나 봐. 아. 나도 따라가고 싶다."

서정우는 저쪽 세계에서 어머니를 본 지 꽤 오래됐다. 그녀는 몬스터 분석 스킬을 각성해 정부의 몬스터 대응 부대에서 일한다. 그 부대는 대전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도 정부 소속으로 대전에서 일한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전화 통화만 했다.

그런데 이쪽 세계의 부모는 아예 유럽에 가 있다.

'부모님 상황은 양쪽이 비슷하구나.'

서소라가 가방을 던져놓고 소파 위에 몸을 털썩 던졌다. 그녀가 소파에 누운 채로 오른손으로는 TV 리모컨을 누르고 왼손으로는 먹다 남긴 과자 봉지를 열었다.

"출근 첫날은 어땠어?"

서정우는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얘는 이게 천성이구나.'

저쪽 세계의 서소라는 저격수다. 전장에 나가면 날카롭고 빈틈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바로 늘어진다. 그 늘어지는 모습이 서로 똑같았다.

'과자 좋아하는 것도 똑같겠다.'

저쪽 세계의 서소라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과자를 먹어본 적이 없다.

서소라가 물었다.

"일 어땠냐니까? 엄청 힘들어?"

서정우가 상념을 멈추고 대답했다.

"아니. 별일 없었어."

"몸조심하고 다녀. 범인 잡는다고 괜히 나서지 말고. 그러다 다쳐."

"네가 엄마냐?"

"저녁 케이크로 때우지 말고. 아니, 왜 케이크로 저녁을 먹어? 미친 거야? 기왕 밥 대신 먹을 거면 과일 케이크라도 먹지, 초코가 뭐야! 초코가!"

서소라의 잔소리는 TV에서 나오는 뉴스 속보 때문에 멈췄다.

24시간 연쇄 살인범이 잡혔다는 뉴스였다.

서소라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뉴스에 집중했다.

"어머. 그 나쁜 놈이 드디어 잡혔네! 오빠 넌 저런 놈 만나면 가까이 가지 마. 다른 형사들에게 맡겨."

"어. 그래."

"아니다. 그냥 총으로 쏴버려."

"그러려고 했...."

"응?"

"는데 저놈이 그냥 잡혔네."

서소라가 TV를 보면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대박! 범인을 잡은 곳이 우리 동네 경찰서래!"

서정우는 서소라의 스마트폰을 힐끗 보았다.

'어?'

그가 이쪽 세계로 넘어온 때부터 아직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 사람들이 전화기를 보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지만, 뭘 보는지까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너 뭐 보는 거냐?"

서소라가 스마트폰을 돌려 서정우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봐봐. 우리 동네 경찰서면... 오빠네 경찰서네?"

"그렇지."

"어머! 뭐야. 다른 형사들은 저 살인마를 잡았는데, 오빠는 왜 집에 있어?"

"이미 잡았잖아."

"선배들이 저 살인마를 잡을 때 오빠도 옆에서 심부름이라도 해야지! 그래야 상 받을 때 숟가락이라도 얹을 거 아냐!"

서정우에게는 지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스마트폰이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설마 휴대폰으로 인터넷이 되는 건가?'

저쪽 세계의 휴대폰은 그런 기능이 없다. 스마트폰처럼 생긴 사각형 휴대폰을 쓰는 사람은 많지만, 그건 단지 넓은 화면을 가진 일반 휴대폰이다.

'전술용 무선 PDA라면 가능은 하지만....'

그 PDA는 스마트폰보다 크기가 훨씬 크다. 가격도 비싸서 서소라 같은 일반인이 쓰기는 어렵다.

그가 집안을 둘러보았다. 전체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TV가 저쪽 세계보다 크고 얇다.

'양쪽 세계의 기술이 좀 다르구나. 지난 18년간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거겠지.'

저쪽 세계는 몬스터와 싸울 군사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이쪽 세계와는 기술 개발 방향이 다르다.

스마트폰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저 얇고 작은 휴대폰에 저렇게 선명한 화면이 나오다니.'

언뜻 보면 화면을 종이에 인쇄해 스티커처럼 붙여놓은 것으로 보일 정도다. 저쪽 세상의 휴대폰 화면은 이렇게 해상도가 높지 않다.

서소라가 다시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피해자는 무사히 구출됐대. 와! 경찰이 오늘 일 좀 했네!"

그녀는 뉴스를 뒤지다 피해자의 이름이 공개된 기사를 찾아냈다. 피해자 주변 주민과의 인터뷰에서 이름이 나왔다.

"어? 피해자 이름이 나나야? 설마 우리 나나는 아니겠지?"

서정우는 멈칫했다.

"우리? 그게 무슨 소리냐?"

서소라가 바로 통화목록에서 윤나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우웅. 전화기가 꺼져 있네."

서정우는 문득, 이 집이 윤나나와 같은 동네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아니길 바라면서 물었다.

"혹시 윤나나하고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

"아니. 같은 학교 아닌데?"

서정우가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다. 흔한 이름이니까 동명이인....'

서소라가 물었다.

"오빠. 근데 윤나나라니? 윤 씨야?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서정우가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나도 그 경찰서 형사니까 알지."

서소라가 초조해했다.

"진짜 우리 나나면 안 되는데."

"같은 학교 아니라며?"

"같은 연습생인데, 동네가 같아서 친해졌어. 회사에서 몇 년 동안 포기 안 하고 버틴 건 우리 네 명뿐이라서 더 친해졌고."

서정우가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내가 네 친구 윤나나를 만난 적 있냐?"

"오빠한테 우리 애들 보여주면 소개해 달라고 할 게 뻔한데 내가 보여주겠냐?"

"어. 잘했다."

"오빠 오늘 진짜 이상하네. 반응이 왜 그래? 우리 나나 얼굴 보면 그 자리에서 자녀계획까지 순식간에 다 짤 사람이?"

"내가?"

"양심이 있으면 아니라고 하지 마."

서소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메신저 창을 열어 윤나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 읽네."

초조해진 서소라가 서정우에게 부탁했다.

"오빠. 오빠가 저 나나가 우리 나나인지 좀 알아봐 주면 안 돼?"

서정우는 이미 알고 있다. 윤나나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

"응. 안 돼."

"아 진짜!"

"원래 수사 정보 같은 건 남한테 말하면 안 될걸?"

"난 남이 아니라 동생이잖아!"

"난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경찰이다."

서정우는 더 이야기하면 정체를 들킬까 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가 어릴 때 이 집에서 쓰던 방의 문고리를 잡았다.

서소라가 바로 외쳤다.

"내 방은 왜 들어가게!"

서정우는 깨달았다.

'아. 내 방을 쟤한테 빼앗겼구나.'

"손잡이에 뭐가 묻은 거 같아서."

그는 곧바로 다른 방의 문을 열었다.

'딱 봐도 이 방이 내 방이네.'

9. ES엔터테인먼트

서정우는 방 안에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켜고 문부터 잠갔다.

그는 이쪽 세계에서 살던 서정우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방안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혹시 몰라 침대 밑까지 확인했다.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놀라운 일이 또 일어났다. 컴퓨터가 겨우 몇 초 만에 켜졌다.

"와. 무슨 부팅이 이렇게 빨라?"

그가 마우스를 움직여 웹 브라우저를 띄웠다. 곧바로 인터넷 창이 나타났다.

"인터넷도 장난 아니게 빠르네."

저쪽 세계의 가정용 인터넷은 무선망으로 구축되어 있다.

몬스터를 잡으려면 치열한 전투는 기본이다. 그 전투에 휘말리면 전봇대 위의 전선 따위는 토막토막 끊어진다.

전봇대를 없애고 땅속에 선을 까는 건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전투 현장의 땅이 파이는 경우는 흔한데, 어디가 끊어졌는지 확인해서 수리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렇게 땅을 팔 예산이 있으면 총알을 더 만들고 몬스터 방어탑을 더 세우는 게 저쪽 세계의 방식이다.

무선으로 인터넷망을 깔면 일이 좀 간단해진다. 비록 인터넷 속도는 떨어질망정, 수리해야 하는 대상이 확 줄어든다. 중계기가 부서지면 그것만 교체하면 된다.

중계기 사이의 연결은 레이저 광통신으로 해결했다. 어차피 고층건물이 없어서 중계탑만 적당히 높이 세우면 레이저 광통신을 연결하는 건 쉬웠다.

다만 무선 방식은 인터넷이 느리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이쪽 세계의 집집마다 광케이블이나 동축케이블로 직접 연결되는 인터넷을 접했다.

신세계였다.

그는 잠시 정신을 놓고 인터넷 링크를 연달아 클릭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아. 이것부터 확인해야지."

그는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어떤 내용을 검색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가장 최근 관심사겠지.'

웹서핑 방식은 양쪽 세계가 비슷했다. 검색창에 이전 검색 목록이 나오는 것도 같았다. 설정을 좀 더 확인했더니 이전에 방문한 사이트 목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그가 예상 못 한 결과가 그곳에 나타났다.

검색어 중에 초능력과 관련된 항목이 많았다. 이전에 방문한 사이트도 초능력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곳이었다.

검색창을 내리고 컴퓨터서 가장 최근에 작성한 문서를 찾았다.

그 문서에는 간단한 분석과 추측, 감상 등이 적혀 있었다.

그중 몇 문장을 보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 내가 미친 게 아니면, 아무래도 난 초능력자가 된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초능력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도 스킬을 각성했구나."

- 어떤 능력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 능력으로 나쁜 놈들을 싹 다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도 적혀 있었다.

"혹시 이쪽 세계에도 스킬을 각성한 사람이 더 있는 건가?"

그는 인터넷에서 초능력 각성이나 헌터, 몬스터에 대해 검색했다. 당장 검색되어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소설이나 영화, 만화, 그 외 가상의 상황에 대한 것뿐이다.

"이쪽에는 초능력자가 없어."

그건 확실해 보였다.

"그런데도 서정우는 각성했어."

왜 이쪽 세계 70억이 넘는 사람 중에서 서정우만 각성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그래도 짐작되는 건 하나 있었다.

"평행차원의 내가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스킬을 각성한 것과 관계가 있겠지."

서정우가 저쪽 세계에서 초능력을 각성한 시기와,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각성한 시기가 일치했다. 우연일 리가 없다.

"이 특별한 스킬을 각성할 때, 나와 평행차원의 서정우가 연결된 건가? 그래서 이쪽 서정우도 같은 스킬을 각성한 건가?"

추측일 뿐이다. 정보가 부족하다.

서정우가 왜 오늘 온종일 안 보이는지도 깨달았다.

"나처럼 스킬을 쓰는 순간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겠지."

그 차원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내가 있던 세계로 갔을 수도, 아니면 다른 차원으로 갔을 수도."

저쪽 세계에서는 몬스터가 게이트를 통해 쳐들어온다. 그 게이트는 그 몬스터가 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몬스터가 사는 세계가 다른 행성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단 하나 확실한 건, 한 곳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차원으로 갔든, 부디 안전한 곳으로 갔기를. 기왕이면 평화로운 엘프 마을 한복판에 떨어졌기를. 적어도 몬스터가 득실대는 험지는 아니기를. 그리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서정우가 진심으로 기원해준 후에, 인터넷 창을 다시 띄웠다.

"그럼 난 안심하고 이쪽 세계의 정보나 수집하자."

그는 인터넷으로 지난 18년 동안 양쪽 세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사했다.

그렇다고 인터넷을 하면서 밤을 꼴딱 새우지는 않았다. 헌터에게 컨디션 관리는 기본 소양이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서정우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집 밖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쪽 환경을 눈으로 확인했다.

도로변에는 기관총 거치대가 단 하나도 없었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주차 감시 CCTV가 있었다.

아침부터 차들이 빠르게 지나다녔다. 장갑판을 붙이고 다니는 차는 없었다. 모두 몬스터 발톱에 걸리면 가볍게 찢겨 나갈 것 같은 얇은 철판만 두르고 다녔다.

저쪽 세계의 차는 장애물 돌파를 위해 차고를 높게 만드는데, 이쪽 세계의 차들은 도로에 바짝 붙어 다녔다. 당연히 차의 지붕에는 기관총 거치대가 없었다.

가정집의 모습도 달랐다. 어느 집도 창문에 강철 창살을 달지 않았다. 기껏해야 알루미늄 방범창이 고작이었다.

걷다 보니 편의점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갔다. 식품과 음료, 그 외 여러 상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쪽에도 가게 진열대에 상품을 넉넉히 쌓아 두고 판다.

다만 상품의 종류가 달랐다.

저쪽 세계라면 몬스터 고기를 가공해 만든 보존식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참치통조림이 있었다. 개인화기용 철갑탄이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어야 하는 자리엔 세탁용 세제가 있었다.

그리고 저쪽 세계에서는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콜라가 흔했다.

"아. 콜라."

그가 콜라 한 병을 들고 점원에게 다가갔다. 점원의 허리에는 권총이 없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온 후에 콜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맛있었다.

멀리서 아침에 일어난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이쪽 세계, 진짜 좋다."

그는 정보 수집을 겸해서 동네를 산책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서소라가 하품하며 방에서 나오다 물었다.

"아침부터 어딜 돌아다녀?"

"동네가 참 평화롭다 싶어서."

"뭐래."

"우리 아침은 어떻게 먹냐?"

"알아서 먹지 뭘 어떻게 먹어?"

서정우가 찬장을 열어보았다. 라면과 즉석밥, 스팸, 참치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헉!"

"왜? 봉지라도 터졌어?"

"아니. 많아서."

라면은 저쪽 세계에도 있다. 당연히 합성 밀가루로 만든 라면이다. 합성 쌀로 만든 즉석밥도 똑같이 있다.

그는 라면에 손을 뻗다가, 즉석밥을 잡았다.

서정우는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차렸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즉석밥을 밥알 하나까지 정성을 다해 그릇에 옮겨 담았다.

'흰 쌀밥이다. 합성 쌀이 아니라 진짜 쌀이다.'

저쪽 세계의 쌀은 합성 쌀이 기본이다. 합성이라고 하지만 화학약품으로 만든 건 아니다. 클로렐라를 가공해 만든다. 맛은 더럽게 없지만,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의 균형은 잘 맞춰져 있다.

'그것도 하얀 쌀밥이다. 집에 하얀 쌀밥이 쌓여 있다니.'

진짜 쌀도 값이 비싸서 그렇지 있긴 있다. 그런데 거의 다 현미다. 하얀 쌀은 현미의 표면을 깎아내 만드는데, 그러면 당연히 크기가 줄어든다. 그 깎아낸 가루조차 버리지 않고 쓰긴 하지만, 비싼 쌀의 표면을 깎아내는 건 진짜 부자가 아니면 하지 못한다.

냉장고에 국이 남아 있었다.

'미역국이네.'

미역국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미역이나 파래처럼 물에서 재배 가능한 해조류는 저쪽 세계에도 많다. 도시 밖 농경지를 몬스터로부터 지키는 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도시 안에서 수경 재배하는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식량 생산 시설에서는 클로렐라만 만드는 게 아니라 미역이나 파래 같은 해조류도 생산한다.

'미역은 평소에 많이 먹어서 좀 그렇....'

"어? 미역국에 고기가!"

이쪽 세계에 싸구려 몬스터 고기가 있을 리 없다.

"설마 이건 소고기!"

서소라가 말했다.

"뭐래? 자기가 사와 놓고."

"내가 사 왔어?"

"지구대에서 송별회 할 때 정육식당에서 아주 술을 퍼마신 거 기억 안 나? 그때 소고기 사 왔잖아. 무슨 소고기를 세 근이나 사? 그거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고 한 근이나 미역국에 넣었으면서!"

"그랬지!"

기억 날 리 없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고 넘어갔다.

냉장고에는 다른 기본 반찬도 많았다. 모두 저쪽 세계에서는 귀한 것들이다.

서정우가 밥과 국, 반찬을 식탁에 잔뜩 차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입 가득히 밥을 넣은 채로 말했다.

"아. 맛있다."

진짜 맛있었다.

서소라의 밥그릇도 있었다.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투덜댔다.

"남이 보면 며칠 굶긴 줄 알겠네."

* * *

서정우는 아침을 먹고 나서 경찰서로 출근했다.

평행차원 텔레포트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몇 시간 뒤면 끝난다. 그때까지 다른 곳을 돌아다녀도 되지만, 일단은 경찰서로 갔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일단 핑계는 만들어놓자."

그가 형사과에 들어갔다.

형사 조민석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어. 막내!"

"서정우입니다."

"그래. 정우야."

조민석이 자기 옆 빈 책상의 의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여기가 네 자리야."

강력팀장 권병철이 물었다.

"정우야. 부상은?"

"의사가 하루 정도는 더 안정을 취하라고 하던데요."

물론 진단서는 없다.

권병철이 걱정했다.

"어디 다쳤냐?"

"아니요. 다치진 않았는데, 의사가 볼 때는 몸이 무리한 것 같으니 그러라고 하네요."

"어차피 넌 맡은 일이 따로 없으니 하루쯤 더 쉬는 건 상관없지만, 안 아쉽냐?"

"예? 뭐가요?"

"네가 잡은 연쇄 살인마 말이야. 경찰 검찰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자기네가 쫓고 있던 놈이라고 제발 같이 조사하자고 난리다. 우리도 버텨는 보는데, 증거만 확보하고 내일 당장 어딘가로 넘길 수도 있다. 네가 잡았으니까 너도 신문 하고 싶을 텐데?"

저쪽 세계의 서정우에겐 그냥 흔한 살인마 한 놈 잡은 것뿐이다. 게다가 그는 이쪽 세계의 경찰 업무 방식을 모른다. 신문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모른다.

'오늘 근무하겠다고 했으면 진짜 곤란할 뻔했네.'

"전 괜찮습니다."

형사 조민석도 말렸다.

"야. 기자들 만나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래야지. 신문하고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올 기회인데."

"음. 형사가 얼굴 팔려서 좋을 게 있을까 싶은데요."

"잠복할 땐 안 좋지. 대신에 승진할 때 좋잖아."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잉? 형사가 낯을 가린다고?"

형사 백성민이 사무실에 들어오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

"야. 막내 승진을 왜 걱정해? 24시간 연쇄 살인마를 잡았는데 당연히 특진이지. 순경 딱지 떼고 경장 되는 건 당연하잖아."

조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팀장 권병철이 서정우에게 말했다.

"연차 처리해줄 테니까 하루 푹 쉬고 내일 나와. 범인 신문이야 내일 오전에라도 하면 되지."

"고맙습니다."

서정우가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팀장 권병철은 서정우가 보이지 않게 되자 조금 걱정했다.

"저 녀석 말이야. 공중파와 케이블 8시 뉴스, 9시 뉴스에 다 나올 기회인데 그걸 낯을 가린다고 포기하다니. 형사를 하기에는 소심한 거 아닐까?"

형사 백성민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와놔. 팀장님. 쟤가 소심해요?"

"낯을 가린다잖아."

"쟤가 그 살인마 새끼를 어떻게 잡았는지 못 들으셨어요? 검도 2단이 진검을 휘두르는데 그걸 맨손으로 때려잡았습니다. 간이 배보다 큰 녀석이에요. 저 같으면 바로 뒤로 빠져서 지원 불렀을 텐데."

"그럼 왜 저렇게 빼?"

"똘끼가 충만한 녀석 속을 누가 알겠어요?"

* * *

ES 엔터테인먼트 사장 오동철이 한숨을 푹 쉬었다.

"휴우우. 적자가 점점 커지네. 진짜 여기서 접어야 하나?"

ES 엔터테인먼트는 망해가는 연예 기획사다. 잘나갈 때는 그래도 소속 가수와 배우가 열 명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저런 일로 모두 떠나고, 이제 남은 건 걸그룹 연습생 네 명뿐이다.

"접을 때 접더라도 걔들 데뷔는 시켜 주고 접고 싶은데. 자꾸 일이 터져서 몇 년이나 지연됐는데, 데뷔는 시켜 주는 게 사람의 도리지."

직원도 다 나가고 남은 사람은 매니저 김형진 한 명뿐이다. 그런데 활동하는 연예인이 없다. 김형진은 실제로는 회사의 모든 잡무를 다 처리한다.

김형진이 물었다.

"사장님. 무슨 돈으로요?"

"여기 사무실 보증금으로?"

"빚이 보증금 넘은 지가 언제인데요."

"걔들이 데뷔해서 뜨면 다 갚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 걸그룹이 몇백 개는 될 텐데, 사람들이 이름이라도 아는 건 다 합쳐도 몇십 그룹뿐입니다."

"우리 애들이 실력이 나쁜 건 아니잖아. 홍보를 잘 해주면 어떻게 안 될까?"

"홍보 그거 다 돈인 거 아시잖습니까? 그러다가 딱 하나 남은 집까지 날리실 겁니까? 아. 그 집도 담보 잡혀 있죠. 팔아도 얼마 안 남겠네요."

"그럼 어쩌라고. 이대로 문 닫으라고?"

김형진도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아닌데요. 방법이 없네요. 방법이."

한쪽에 켜진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할 일이 없어서 TV나 보던 중이다.

김형진이 말했다.

"지금 모든 뉴스가 저 24시간 연쇄 살인마 체포 소식에 집중돼 있습니다. 이럴 때 데뷔하면 진짜 쫄딱 망하죠. 아마 데뷔 준비 중인 데가 있어도 좀 잠잠해질 때까지 미룰 겁니다."

"누가 지금 하자고 했냐. 좀 있다가.... 아! 피해자 이름 나왔.... 어?"

"예. 나왔.... 어어? 윤나나?"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형진아. 저 살인마가 잡힌 곳이...."

"나나네 동네인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오동철이 급히 스마트폰을 꺼냈다. 너무 서두르다가 폰이 손에서 툭 미끄러져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오동철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스마트폰을 겨우 잡았다.

그는 곧바로 윤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아!"

이번에는 김형진이 전화를 걸었다.

윤나나한테 건 건 아니다.

"어. 소라야. 나나 말이야. 어? 너도 뉴스 봤구나. 어젯밤부터 안 받았다고? 혹시...."

오동철이 김형진의 통화를 들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아. 그래? 너도 모른다는 거지?"

오동철은 당장 시무룩해졌다.

김형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뭐! 너네 오빠가 그 경찰서의 형사라고!"

10. 오빠 나부랭이

매니저 김형진이 서소라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럼 방송에 나온 나나가 우리 나나인지 알아봤어? 뭐? 오빠가 수사 정보라고 안 알려줘? 어. 알았다."

김형진이 전화를 끊었다.

오동철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래? 뭐래?"

"소라도 모른다고는 합니다. 그런데 나나하고 연락이 전혀 안 된다네요. 제 촉으로는 저 구출된 피해자가 나나가 확실합니다."

"뉴스에서 피해자는 무사히 구출됐다고 했잖아."

"경찰의 신속한 구출 덕분에 다친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행이다."

"그리고 소라의 오빠가 그 경찰서 형사라는데요?"

"어? 가만. 방금 뉴스에서 서 형사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둘이 서로를 마주 보다가, 오동철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캐비닛을 뒤졌다.

"서소라 가족 관계 서류! 가족 관계! 여기 있다!"

김형진는 뉴스를 재빨리 검색했다. 그가 찾는 건 범인을 체포한 형사의 이름이다. 워낙 대형 사건이라, 형사의 이름이 나온 기사도 있었다.

김형진이 재빨리 기사를 읽었다.

"범인을 체포한 서정우 형사는.... 형사 이름이 서정우입니다!"

오동철이 가족 관계 서류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다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우와아아아!"

"맞습니까?"

"서소라 오빠가 서정우야!"

김형진도 벌떡 일어나 같이 함성을 질렀다.

"크와아아아!"

"형진아!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이건 기회야!"

"연쇄 살인마에게 납치된 비련의 소녀! 알고 보니 신곡을 낸 가수! 이것만 해도 신곡 홍보가 되는데!"

"범인을 체포하고 그 소녀를 구출한 형사가 알고 보니 동료 걸그룹 멤버의 친오빠!"

"이거 이야기가 됩니다! 돈을 얼마를 쓰든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홍보가 될 순 없습니다!"

"당장 디지털 싱글이라도 내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뉴스가 내려가기 전에 내야 합니다. 당장...."

김형진이 멈칫했다.

"우리는 곡이 하나도 없는데요?"

오동철은 의욕에 넘쳤다.

"사와야지! 내가 지금 가서 작곡가 바짓단을 잡고서라도 받아올 테니까 애들한테 연락 돌려!"

망해가는 ES 엔터테인먼트에는 이제 연예인은 없고 연습생만 딱 네 명 남았다.

"네 명 다요? 나나가 지금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상태일까요?"

"나나가 빠지면 홍보가 되겠냐!"

"아직 병원에 있을 텐데요."

"내가 나나 부모님한테 연락해서 나나를 만나볼게. 문병은 가야지!"

"그럼 같이 가시죠!"

* * *

서정우는 경찰서를 나온 후에 차원 텔레포트 스킬의 상태를 확인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세 시간쯤 남았네? 아. 이 평화롭고 풍족한 세상에 더 있고 싶다."

세 시간은 있어야 스킬을 다시 쓸 수 있다는 거지, 세 시간 후에 꼭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빨리 돌아가야지. 소라가 내 걱정 많이 할 테니까."

그는 두 시간 동안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차이를 비교했다. 물자도 풍족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방비하게 다녔다.

그러다 약국을 발견했다.

"아차. 약!"

그가 약국으로 들어갔다. 벽에 다양한 약이 진열되어 있었다.

약은 저쪽에도 많다.

저쪽 세계의 약학자들은 전투와 관련된 약의 연구를 많이 한다. 특히 상처 치료약 쪽은 지난 18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정 몬스터에서 특수한 성분을 추출하고 그것을 다시 인류의 과학기술로 처리하면, 상처 치료에 굉장히 효과가 좋은 약이 나온다.

그런 상처 치료제가 한 가지 제품만 있는 건 아니다. 여러 회사가 다양한 제조 비법을 가지고 있다. 원재료의 성분과 함량도 달라서 약효와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의 특수 성분을 가공한 상처 치료제 중에서, 희귀 성분을 농축해 가공한 빨간색 액체 형태의 약이 있다. 그 약의 상품명은 몇 가지가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약을 보통 레드 포션이라고 부른다.

'이쪽 세계의 연고나 소독약이 아무리 좋아도, 레드 포션의 기적 같은 상처 치료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가 약국에 들어온 건 다른 약을 찾기 위해서다.

저쪽 세계의 약은 상처 치료나 해독에 집중되어 있다. 그쪽에 연구가 집중된 대신에, 상처가 아니라 병이 났을 때 쓰는 약은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정우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은행 강도와 살인마의 지갑을 털어 챙긴 돈 삼만 원이 잡혔다. 원래는 돈이 더 많았지만, 소고기와 케이크, 커피 등을 사 먹어서 이제 남은 돈은 삼만 원뿐이다.

서정우가 약사에게 말했다.

"이 약국에서 제일 강력한 항생제 알약 삼만 원어치만 주십시오. 2000년 이후에 개발된 신제품으로."

몬스터의 특수 성분을 가공해 만든 상처 치료제를 쓰면 감염 위험이 대폭 낮아진다. 저쪽 세계는 2000년 이후에는 항생제 개발에 큰 투자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쪽 세계는 제약산업에 돈을 쏟아붓는다.

약사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처방전은요?"

"예?"

"그런 약은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드리죠."

저쪽 세계에서는 처방전이 없어도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있다.

"어. 그냥은 못삽니까?"

"의약분업 된 지가 벌써 몇 년인데요. 그동안 약을 한 번도 안 사보셨나 봐요?"

"아. 제가 좀 건강해서요."

서정우는 빈손으로 약국을 나왔다.

"약을 확보하려면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하군. 다른 방법으로 얻으려면...."

저쪽 세계의 방식이 생각났다.

"의사를 협박하는 건 내 방식이 아니고,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약은 얼마 못 구할 거. 제약회사의 창고를 터는 건.... 이쪽 세계에서 그건 진짜 대형 사고겠지."

방법이 하나 생각나기는 했다.

"제약회사를 통째로 사서 사장이 되면 항생제를 대량으로 빼돌릴 수 있을까? 그거 진짜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3만 원이 있었다.

"3만 원으로 제약회사를 어떻게 사나."

* * *

서정우는 두 시간 동안 이쪽 세계를 더 구경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텔레포트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니 서소라가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아. 오빠 왔어?"

원래라면 그렇게 반갑게 서정우를 맞아주지는 않는데, 지금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서 저절로 인사가 나왔다.

서정우가 물었다.

"뭐냐. 그 쓰레기 같은 노래는?"

서소라가 인상을 확 썼다.

"어제부터 오빠 상태가 영 이상해서 어디 아픈가 했더니,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네. 평소의 서정우로 돌아왔어."

그녀가 격렬하게 항의했다.

"내 데뷔곡을 보고 쓰레기라니!"

"쓰레기 맞잖아. 그것도 노래라고."

"하긴. 오빠 나부랭이가 음악에 대해서 뭘 알겠냐."

서소라가 종이를 펄럭거렸다. 그 종이에는 악보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회사에서 이메일로 악보 보내줬어. 우리 이 노래로 데뷔할 거야. 회사에서 바로 디지털 싱글부터 낸대. 그러니까 회사에서 인정한 명곡을 보고 쓰레기라고 하는 그 미천한 귀와 입을 당장 막으라!"

"우리?"

"아!"

서소라가 악보를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뉴스에 나온 피해자가 우리 나나 맞대. 나 지금 병원에 문병 가야 해. 나나 퇴원하면 바로 디지털 싱글로 음반 내기로 했어. 우리 드디어 데뷔하는 거라고!"

"그런 쓰레기로 데뷔해봤자 망...."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시작도 하기 전에 초를 쳐!"

서소라가 집을 나간 후에, 서정우가 탁자 위에 놓인 악보를 보았다. 악보 전체를 다 봐도, 서정우의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곡이 쓰레기 맞네. 이런 걸 들고 데뷔하면 광속으로 쫄딱 망하겠어."

저쪽 세계의 기준으로는 망할 게 뻔했다.

그는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일단 찬장에서 라면이나 참치통조림 등을 꺼내 가방에 쓸어담았다. 햇반도 전부 다 챙겼다. 냉장고도 열었다.

"반찬. 반찬. 맛있는 반찬."

그는 냉장고의 밀폐용기도 가방에 옮겼다.

그러고 나서 가장 중요한 소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소고기가 아직 1kg이나 남아 있었다.

그걸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화장품도 하나 꺼냈다.

"위장크림이 화장품 회사에서 나오는 게 있을 줄이야. 이걸 쓰면 피부에 좀 좋으려나."

이건 강도와 살인마를 잡고 생긴 돈으로 샀다.

"이건 우리 소라한테 선물, 어, 여기도 소라가 있으니까 좀 헷갈리긴 한다. 둘이 성격이 저렇게 다른데도 자꾸 겹쳐 보이...."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다른 건 몰라도 둘이 피부 특성은 똑같겠네? 그럼 이쪽 소라가 쓰는 화장품은, 우리 소라의 피부에 가장 잘 맞는 거겠지?"

저쪽의 화장품은 이쪽 기준으로는 싸구려 로션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비싸서 글리세린과 물, 에틸알코올을 섞어 직접 만들어 쓰는 사람이 많다. 저쪽 서소라도 싸구려 로션과 글리세린을 주로 쓴다.

서정우가 서소라의 방문을 살그머니 열어보았다. 화장대 위에 가득 쌓여 있는 화장품이 보였다.

"와! 연예인이 되고 싶다더니 화장품이 진짜 많구나."

그는 현관이 확실히 닫혀 있는지 확인한 후에, 가방을 열었다.

"이쪽 소라가 쓰는 화장품이니까, 우리 소라에게도 잘 맞을 거야."

그는 가방에 서소라의 화장품을 쓸어담았다.

"소라야. 미안하다. 넌 새로 사면 되잖아. 저쪽에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한다고. 거기엔 이런 게 아예 없으니까."

서소라가 놀라지 않게 거울에 메모도 한 장 붙여놓았다.

그가 가방을 메고 방을 나섰다. 탁자 위에 올려진 악보가 보였다.

묵직한 가방이 죄책감을 조금 일으켰다.

"어. 못 돌아올 수도 있는데 화장품만 털고 그냥 가면 좀 그렇지?"

저쪽 세계에서 다시 텔레포트를 썼을 때 이쪽 세계로 정확히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전혀 엉뚱한 세계로 날아갈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서정우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이쪽 세계에서는 통화가 되지 않는 휴대폰이다.

"MP3도 들을 수 있는 고성능 폰이라고 자랑했는데, 여기서는 줘도 안 갖는 구닥다리 폰일 줄이야. 스마트폰이 스포츠카면 이건 리어카네."

그가 버튼을 눌러 메뉴를 열었다. 곡이 여럿 나왔다. 그중에서 한 곡을 찾았다.

"여기 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면'은 저쪽 세계에서 몇 년 전에 히트했던 노래다.

그 노래의 작곡가는 박철우라는 헌터다.

박철우의 가족은 몬스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그때부터 복수를 맹세하고 많은 작전에서 위험한 임무를 도맡으며 몬스터를 죽였다. 서정우도 박철우와 여러 전장에서 같이 싸웠다.

"철우 아저씨는 진짜 몸 좀 사려가면서 싸우라니까. 그러다 훅 가는 사람 많이 봤는데."

그가 곡의 악보를 열었다. 박철우는 이 노래를 누구나 부를 수 있게 무료로 공개했다. 그래서 이 곡을 리메이크해서 부른 가수도 많았다.

박철우는 돈이나 명예에는 별 관심이 없고 복수에만 매달렸다. 저쪽 세계 헌터 중에는 그런 사람이 종종 있었다.

"이 노래는 많은 사람이 들어주면 그걸로 됐다고 했으니까 뭐. 조만간 만나서 밥이나 한번 사야겠다."

저쪽 세계에서는 음악처럼 돈이 별로 없어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그의 휴대폰에 들어있는 음악 중에는 가사와 악보가 같이 제공된 것도 많았다.

서정우는 서소라가 놔두고 간 악보를 뒤집었다. A4지 뒷면은 하얀 백지였다. 그는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볼펜으로 종이에 악보를 옮겨 그렸다. 큼직하게 그리다 보니 종이가 모자랐다. 옆에 족발집 광고지가 보였다. 그걸 뒤집자 거기도 하얀 백지였다.

그는 악보를 그 광고지 뒷면에 계속 그렸다.

가사까지 모두 옮겨적은 후에, 제일 아래에 글을 한 줄을 남겼다.

- 음악을 모르는 오빠 나부랭이가 그냥 한 번 긁적거려봤다.

서정우가 낄낄대며 종이를 도로 뒤집어, 그가 쓰레기라고 평가한 원래 악보가 위로 보이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방에 들어간 후에, 옷장에 숨겨뒀던 저쪽 세계의 옷을 꺼내 입었다. 권총도 제자리에 장착하고, 나머지 장비도 모두 챙겼다.

그는 일단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다시 쓰기 전에, 집을 한 번 돌아보았다. 작은 마당이 있는 이 단독주택은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다.

옛날에 평화롭던 시절 생각이 났다. 그리운 감정을 느끼다가, 현실을 깨달았다.

"아. 여기는 지금도 평화롭지. 괜히 감상에 빠졌네."

이제 가야 할 때다.

그가 스킬을 사용했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단독주택이 사라졌다. 대신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공기가 밀려나며 작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공터의 모습이 익숙했다.

"돌아왔구나."

갑자기 근처에서 이빨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그 개구리는 큰 개 만한 덩치에 톱날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빨로 물고 턱을 좌우로 비틀면, 물린 사람은 팔다리가 끊어진다.

이빨 개구리가 그 큰 입을 쩍 벌리며 서정우를 향해 펄쩍 뛰었다.

서정우가 권총을 뽑으며 말했다.

"개구리네?"

11. 개구리

서정우의 집이 있던 곳은 이미 여러 해 전에 박살 났다. 몬스터가 그런 것이 아니라, 포병이 몬스터를 잡으려고 쏜 포탄이 이곳에 떨어져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쪽 세계는 그렇게 집이 무너지는 일이 흔하다. 그렇게 무너지면 보통은 몬스터를 물리치고 나서 집을 다시 짓는다.

하지만 이 구역에는 사람들이 집을 짓지 않았다. 여기는 소형 몬스터 게이트가 여러 번 열린 곳인데, 사람들은 그런 땅은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돈을 들여 다시 집을 짓는 사람도 없고, 땅이 팔리지도 않는다.

그가 이쪽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이빨 개구리가 튀어나왔다. 평소라면 저런 놈이 뛰기 전에 감지 스킬에 먼저 걸리는데, 그가 갑자기 나타난 걸 보고 개구리가 반사적으로 공격한 거라서 미리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하급 몬스터인 이빨 개구리가 날아오는 것보다 그가 권총을 뽑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서정우가 이빨 개구리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철갑탄이 총구를 빠져나갔다. 초음속으로 공기를 찢으며 날아간 쇠로 된 총탄이 이빨 개구리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관통력 상승을 목적으로 만든 철갑탄답게 몬스터의 질긴 가죽을 뚫는 건 성공했다. 하지만 이빨 개구리의 머리뼈는 하도 단단해서 권총의 철갑탄으로는 뚫리지 않았다.

그는 권총탄으로는 머리뼈를 뚫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머리에 쏘았다. 그건 제압이 아니라 견제를 위한 사격이다.

펄쩍 뛰었던 개구리가 총에 맞은 충격으로 뒤로 밀려났다.

몬스터는 원래 잘 안 죽는다. 단단해서 총알이 안 박히는 놈, 덩치가 커서 총알을 맞아도 큰 타격을 못 주는 놈. 워낙 빨라서 명중하기 어려운 놈들이 많다.

이빨 개구리는 움직임이 빠르고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도 뛰기 때문에 총으로 맞히기 어려운 놈이다.

겨우 권총 한 발에 죽어주는 몬스터는 거의 없다. 하급 몬스터인 이빨 개구리만 해도 단단한 머리뼈는 권총 철갑탄을 충분히 버틴다.

권총은 휴대가 간편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기본 방어 무기이지, 주력 공격 무기가 아니다.

공중에서 뒤로 밀려나 바닥에 떨어졌던 이빨 개구리가, 언제 총에 맞았냐는 듯이 하늘로 펄쩍 뛰어올랐다. 위로 높이 떴다가 내리꽂히면서 사람의 머리를 덥석 무는 건 이빨 개구리의 공격 방식 중 하나다.

서정우는 위로 뛰어오르는 이빨 개구리를 따라 권총을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조준선에 개구리가 들어왔다.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뼈와 달리 몸통에는 총알이 잘 박혔다. 철갑탄이 이빨 개구리의 질긴 가죽을 뚫고 내부 장기에 꽂혔다. 그 충격으로 공중에 있던 개구리의 몸이 더 위로 밀려났다.

서정우가 권총을 점점 위로 올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철갑탄 다섯 발이 공중에 떠 있는 이빨 개구리의 몸통에 박혔다.

이빨 개구리는 철갑탄이 꽂힐 때마다 공중에서 뒤로 툭툭 밀려났다. 서정우가 사격을 멈추자, 그때서야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일단 소형 몬스터 한 마리는 확실히 잡았다. 견제를 위해 머리뼈에 박았던 처음 한 발은 제외해도, 철갑탄 다섯 발이 몸통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 정도면 개구리 한 마리 잡는 데는 충분하다.

그래도 서정우는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 이빨 개구리가 한 마리만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의 감지 스킬에 살기 하나가 잡혔다.

'있네.'

갑자기 풀숲에 숨어 있던 이빨 개구리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왔다. 조금 전 놈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더 낮은 각도로 뛰었다. 이빨 개구리는 위로 솟은 게 아니라 서정우의 다리를 노리고 낮게 날았다. 마치 화살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서정우는 이미 권총의 발사 모드를 연사로 돌려놓은 상태다.

그가 날아오는 이빨 개구리를 향해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철갑탄이 드르륵 발사됐다.

날아오던 이빨 개구리가 철갑탄을 연속으로 두들겨 맞으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서정우는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총알이 위에서 아래로 계속 꽂혔다. 이빨 개구리가 철갑탄 연사를 맞아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탄창이 비었다. 권총의 격발장치가 뒤로 철컥 젖혀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권총의 탄창 제거 버튼을 누르며 왼손으로 새 탄창을 꺼냈다. 빈 탄창이 빠져나오자마자 새 탄창을 재빨리 끼워 넣고, 곧바로 권총 격발장치를 원래 위치로 밀었다.

쇠로 된 부품들이 서로 물리는 소리가 나며 새 철갑탄이 약실에 들어갔다.

그는 발사 모드를 단발로 바꾼 후에 처음 잡았던 이빨 개구리에게 철갑탄을 세 발 더 쏘았다. 총알 몇 발 아끼는 것보다 몬스터를 확실히 죽이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감지 스킬에 걸리는 놈은 없었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접근했다.

서정우가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다섯 명의 군인이 주변을 경계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다섯 명 모두 군복을 입었다. 군복 자체가 방어 효과가 있는 질긴 소재로 되어 있고, 거기다 방검조끼, 팔다리 보호대, 전투용 보호 가면에, 투명 고글까지 썼다.

고글의 색이 투명한 건, 눈과 그 주변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인간형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라는 걸 알릴 수 있다. 그 고글에는 빛을 차단하는 선글라스를 추가로 덮을 수 있다. 헬멧에는 야시경 장착용 슬롯도 있지만, 지금은 낮이라 야시경은 장착하지 않았다.

서정우가 그들의 무장을 확인했다.

'소총수 둘. 경기관총 사수 하나. 유탄 사수 하나. 산탄 사수 하나.'

자동소총에는 50발짜리 대용량 탄창이 끼워져 있었다. 경기관총의 탄창은 100발짜리인데, 철갑탄의 위력이 소총보다 강했다. 유탄 사수는 40mm 6연발 유탄발사기를 들고 있었고, 산탄 사수는 12연발 자동 산탄총을 썼다.

다섯 명 모두 등에는 길이 63cm짜리 소형 로켓탄 발사기를 하나씩 매고 있었다.

'육군의 하급 몬스터 토벌팀 편성 중 하나군.'

그는 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다시 쓰면 출발한 원래 세계로 돌아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기존 게이트 관련 이론이 그대로 적용됐을 때의 이야기다. 엉뚱한 세계로 날아갈 가능성도 조금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지금 보는 군인들의 편성은 그에게 아주 익숙한 형태다.

군인 다섯 명 중에서 세 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두 명만 그에게 다가왔다. 병장 계급장을 단 군인이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근처에서 하급 소형 게이트가 열려서 이빨 개구리들이 튀어나왔습니다. 기본 토벌 작전은 끝났고 게이트도 폐쇄했습니다. 현재 저희 소대가 잔존 몬스터를 소탕 중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주변을 수색 중인 토벌팀이 여럿 보였다.

서정우가 혀를 찼다.

"이 근처에 게이트가 또 열렸네요. 이러니 이 땅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그런데 누구십니까?"

"이 자리에 원래 있던 집에 살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이 땅 주인이고요."

정확히는 땅 주인의 아들이다.

"아."

병장은 바로 납득했다. 지금은 게이트가 열려서 군 토벌 작전이 진행 중이지만, 여기는 평소에는 접근 금지 구역이 아니다. 토벌 작전 중에는 민간인 통제가 기본이긴 하지만, 상대가 그 통제에 걸리지 않은 이유를 안다.

"그런데 혹시 텔레포트 능력자십니까? 갑자기 나타나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가 각성한 건 평행차원을 오가는 스킬이다. 일반적인 텔레포트와는 격이 다르다.

서정우는 그 스킬이 남들 눈에는 텔레포트로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와아!"

병장이 감탄했다.

텔레포트는 희귀 스킬이다.

텔레포트는 전투 상황이 아니라도 쓸모가 많다. 그 스킬이 있으면 장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짧다면 일반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할 필요도 없고, 순간 이동 거리 안쪽 영역을 앞마당처럼 쓸 수 있다.

전투 상황에서의 효용가치는 더 크다.

병장이 물었다.

"그런데 사냥하신 이빨 개구리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몬스터는 사냥한 사람에게 기본 권리가 있다. 군의 토벌 작전 중이긴 하지만, 텔레포트 스킬 사용자라면 통제선을 고의로 어기고 들어왔다고 보기 어렵다.

이빨 개구리는 비싸게 팔리는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하급 몬스터다. 희귀 스킬 사용자가 일부러 군 통제선을 넘어서까지 잡을 가치는 없다.

고의성이 없고 전투 과정에서 다른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사냥한 사람의 권리는 평소처럼 인정된다.

서정우가 벌집으로 만들어놓은 이빨 개구리를 힐끗 보았다. 몸통에 총알을 집중적으로 박아넣어서 다리는 멀쩡했다.

이빨 개구리 고기는 다리 쪽이 식용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지금은 저런 고기에 관심이 없다. 하루 동안 온갖 음식을 잘 먹고 왔고, 가방에도 소고기와 다른 먹을 게 많다. 맛없는 몬스터 고기 따위는 먹고 싶지 않다.

"가져요. 아니다. 아예 이 팀에서 사냥한 것으로 실적에 올려요."

병장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군 생활 하느라 고생하는데, 위문품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군대에서 고생하던 때가 생각나서."

"잘 먹겠습니다!"

서정우는 각성자 특수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기 때문에 이 병사들보다 더 위험한 싸움을 많이 했지만, 군대는 어디 있든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다.

서정우가 그곳을 떠난 후에, 상병이 병장에게 말했다.

"와. 총 쏘는 거 보셨습니까? 저 아저씨 사격 스킬이 있나 본데요?"

병장이 이빨 개구리를 가리켰다.

"날아오는 개구리한테 권총을 연사 모드로 갈겼는데도 총알 박힌 거 봐라. 다 몸통에 꽂히고 다리에 박힌 건 하나도 없잖아. 당연히 사격 스킬이지. 훈련만 해선 절대로 이렇게 정확히 못 쏴."

"희귀 스킬인 텔레포트에 사격 스킬까지. 더블 스킬이라니. 와아."

"트리플일지도."

"예?"

"첫 번째 개구리는 거리라도 떨어져 있었지. 두 번째 개구리는 근거리에서 기습했는데 놀라지도 않고 바로 갈겼잖아. 몬스터의 살기를 감지하고 대비했겠지. 분명히 감지 스킬도 있을 거다."

상병은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우와. 트리플 스킬이라니. 우린 스킬 하나도 각성 못 했는데."

"그냥 트리플이 아니다. 희귀 스킬인 텔레포트에, 전투 전용인 각성과 사격 스킬 조합이잖아. 조합 진짜 쩐다."

"쩌는 겁니까?"

"공격과 탈출이 다 되는 조합이니까. 사격 스킬이 있으니 몬스터도 잘 잡고, 감지 스킬이 있으니 기습도 잘 안 당하고, 포위라도 당해서 위험해지면 텔레포트를 써서 안전한 후방으로 빠져나오겠지."

"와. 듣고 보니 진짜 쩝니다."

병장이 서정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아쉬워했다.

"스킬 조합이 완전 네임드 레벨이네. 누군지 이름 물어보고 사인이라도 받아둘걸."

* * *

서정우가 걸어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권에 들어왔다는 표시로 화면에 안테나가 떠 있었다.

그가 서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 오빠! 현재 상황은요?

"안전해. 통화가 안 되는 곳까지 텔레포트 되어서 연락 못 했다."

- 네? 지금은 통화 잘 되는데요?

"그냥 내가 가서 이야기할게. 전화로 할 말은 아니다."

- 현재 위치가 어디인데요?

"우리 옛날 집."

- 거기는 통화가 되는 곳인데요? 근처에 교란 몬스터라도 나타난 건가요?

"그것도 만나서 설명할게. 그런데 내가 연락이 끊긴 지 얼마나 지났지?"

- 3분 27초 지났어요.

"응? 24시간이 아니라?"

- 네?

그가 시간을 계산했다.

"3분 27초면."

그는 이쪽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이빨 개구리 잡고, 군인들과 대화하고, 다시 조금 걸어왔다.

"대충 3, 4분 정도 시간이 흐르긴 했네."

그런데 그는 저쪽 세계에서 24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일단 전화 끊어. 가서 이야기할게."

그가 전화를 끊은 후 현재 상황을 다시 점검했다.

"3차원 공간은 좌표 변경이 그대로 반영됐어. 그러니까 옛날 집이 있던 곳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시간은 흐른 만큼 반영이 안 됐네? 출발 시점으로 바로 돌아왔네?"

2000년 1월 1일에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쳐들어온 이후로, 천체물리학은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이제는 천체물리학이나 차원 이론에 대한 설명이 아침방송이나 드라마에도 나온다. 이쪽 세계에서 기초 천체물리학은 상식이다.

"그럼 공간 좌표만 변수고 시간은 상수로 사용된다는 뜻인데."

서정우에게는 상수인 좌표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했다.

"좌표에 상수가 존재하니까, 다시 스킬을 쓰면 그 평행차원으로 돌아가겠네."

아직 확실한 건 없다. 짐작으로는 그렇지만, 확인하려면 다시 스킬을 써봐야 한다. 하지만 재사용 대기 시간은 아직 24시간이나 남았다. 그 세계로 다시 가려면 적어도 하루는 지나야 한다.

"내일이 오면 확실해지겠지."

12. 평행차원 분기 이론

서정우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하철은 전술 이동용으로 주로 쓰이는 데다가 요금도 비싸다.

고층 아파트는 몬스터의 공격으로 무너진 것이 많고 새로 짓는 건 없다. 아직 남아 있는 고층 아파트도 꽤 있지만 인기는 없다.

이제는 건물을 짓더라도 5층을 넘기는 경우는 잘 없다. 더 높게 지었다가 무너지면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서정우와 서소라가 사는 집은 단층주택이다.

그가 두꺼운 철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서소라가 다락에서 내려왔다.

"미행은 없었어요."

서정우가 조금 전까지 봤던 저쪽 세계의 서소라를 생각했다. 지금 보는 서소라와 얼굴은 똑같은데, 복장은 완전히 달랐다. 서소라는 지금 전투복을 입고 있다.

서정우가 한숨을 살짝 쉬었다.

'우리 소라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미행당할 상황은 아니야."

"오빠 스킬에 뭔가 특이점이 있죠? 전화상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못 하는 걸 보고 눈치챘어요."

"특이점은 너만 눈치챘어. 남들 눈에는 텔레포트 스킬로 보이니까."

"네? 텔레포트가 아닌가요?"

서정우가 새로 각성한 스킬을 사용하자마자 서소라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몇 분 뒤에 예전 집 위치에 있다고 연락이 왔다. 서소라의 상식으로 그런 스킬은 딱 한 가지, 텔레포트뿐이다.

"나도 처음에는 텔레포트인 줄 알았는데, 조금 달라. 일단 좌표를 지정할 수 없어. 스킬 발동과 동시에 이동해."

"그건 알아요. 그래서 준비도 없이 사라진 거잖아요."

스킬을 각성해도 어떤 능력인지 저절로 아는 건 아니다. 그건 자기가 직접 써보고 확인해야 한다.

서소라가 위로했다.

"오빠. 괜찮아요. 좌표 입력을 못 해도 꽝은 아니에요. 고립됐을 때 탈출용으로는 쓸 수 있잖아요."

"꽝이 아니야. 대박이야."

"네?"

서정우가 가방을 열고 짐을 꺼냈다.

서소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이건.... 진짜 고기?"

"소고기다."

"네? 그 비싼 소고기를 이렇게 많이요?"

가방에서 다음 것도 꺼냈다.

"즉석밥이네요? 어머. 진짜 쌀? 그것도 백미? 이 비싼 걸 즉석밥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네요?"

서정우가 가방에서 계속 음식을 꺼냈다. 저쪽 세계의 집에서 찬장과 냉장고를 털어온 음식들이다.

참치통조림과 스팸, 3분 요리까지 나왔다.

서소라가 바짝 긴장했다.

"오빠. 텔레포트 된 곳이 어디 재벌 저택 식량창고였어요? 거길 턴 거예요? 오빠. 그런 데서 도둑질을 하면 안 돼요! 추적당한단 말이에요! 이래서 전화로는 설명을 못 한 거군요!"

그녀가 저격총을 들고 다락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미행하는 놈이 있는지 다시 확인할게요!"

"그런 거 아니야. 안전한 음식이다. 남의 집에서 훔친 게 아니야."

"말도 안 돼요. 그럼 이런 비싼 음식이 다 어디서 나와요?"

"우리 집."

"네?"

"평행차원의 우리 집에서 가져온 거야."

서소라가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내 스킬 말이야. 그냥 공간이동 스킬이 아니더라. 평행차원의 지구로 넘어가는 스킬이더라."

"네?"

"진짜야. 여기서는 연락이 잠깐 끊어졌지? 그런데 난 거기서 지난 24시간 동안 지내다 돌아왔다. 내 생각에, 돌아올 때는 출발한 시간축 좌표를 그대로 쓰는 것 같아. 거기서는 24시간을 보냈지만, 여기로 올 때는 스킬을 사용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오는 거지."

"아...."

서소라도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쳐들어오는 세계에 살다 보니 그런 이론을 상식 수준으로는 알고 있다.

그녀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른 쪽에 관심을 가졌다.

"오빠. 그럼 그 세계에는요. 이런 음식이 얼마나 있어요?"

"넘쳐나더라."

"네?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평행차원의 21세기에는, 게이트도 열리지 않았고, 몬스터도 쳐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아!"

그녀는 진짜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그럼 거긴 안 위험하겠네요?"

"어. 사람들이 권총 한 자루 안 갖고 다녀."

"안 불안하대요?"

"전혀."

"아. 그런 곳으로 갔었구나. 다행이다."

그녀가 마음을 놓았다. 마음이 놓이자 군침이 돌았다.

"우리 밥부터 먹어요!"

전자레인지는 이쪽 세계에서도 필수품이다.

그들은 합성 쌀이 아니라 하얀 쌀로 만든 즉석밥을 데우고, 스팸을 하나 따서 팬에 구웠다.

스팸은 이쪽 세계에도 있다. 전투 중에 먹기 편하고 열량도 높아서 많이 생산된다.

다만, 몬스터 고기로 만들면 스팸도 맛이 없다.

서소라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쌀밥을 한 입 먹었다. 맛있었다.

문득, 아주 어렸을 때 이런 밥을 먹어본 기억이 났다. 여기서도 쌀밥을 먹을 기회가 몇 년에 한 번은 있지만, 그건 현미밥이다.

백미는 맛이 아예 달랐다.

그녀가 스팸도 하나 집어 한 입 깨물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기름지고 짭조름하고 감칠맛 나는 맛있는 스팸은 처음 먹어본다.

그녀가 밥과 스팸을 한 번씩 먹고 나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맛있어요. 너무 맛있어요."

"진짜 돼지고기로 만든 스팸은 원래 맛있어."

서정우가 저쪽 세계의 냉장고를 싹 털어서 가져온 반찬통을 전부 다 열었다.

"반찬도 먹으면서 먹자. 이것도 다 맛있어."

"네!"

소고기는 아직 굽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 음식 맛을 보여주려고 보통 식사를 먼저 했다.

"소고기는 저녁때 구워야지."

두 사람은 즉석밥을 각자 세 개씩 뜯으며 배가 부를 때까지 먹었다.

서소라가 배를 통통 두드렸다.

"더는 못 먹어요. 더 먹음 죽어요."

서정우가 콜라를 한 병 따서 컵에 따라주었다. 검은색 액체에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마셔봐."

서소라가 별 의심 없이 콜라를 마셨다.

그녀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오빠. 무슨 음료가 이렇게 맛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에요?"

서정우가 실실 웃었다.

"버그 몬스터가 없는 세계에서만 마실 수 있는, 평화의 맛. 콜라."

"아. 이게 소설에 나오는 그 콜라에요? 와아!"

"많이 마셔. 또 가져오면 되니까."

서소라는 멈칫했다.

"그 평행차원으로 다시 갈 수 있어요?"

"가능할 것 같은데 확인은 해봐야지. 재사용 대기 시간이 24시간쯤 되니까 내일 알 수 있겠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날아갈 수도 있잖아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게 무서워서 확인도 안 해보기에는, 이 스킬의 가치가 너무 커."

"그래도...."

서정우가 큰소리를 쳤다.

"걱정하지 마. 시간축 좌표가 상수로 사용됐잖아. 거기다 무사히 이 세계로 돌아온 것까지 생각하면, 평행차원과의 연결은 고정됐다고 봐야지. 바뀌는 건 3차원 공간 좌표뿐이야."

"그럼.... 이번에는 제대로 무장하고 넘어가요. 저번에는 무장이 너무 약했어요."

"그거야 무슨 스킬인지 알아보려다가 휙 넘어가서 그런 거고. 걱정하지 마."

그가 가방에서 새로운 선물을 꺼냈다.

"자. 이건 화장품."

"어머. 병이 되게 고급이다."

가방에서 화장품이 줄줄이 나왔다.

"와. 뭐가 이렇게 많아요?"

"나도 잘 모르는데, 그래도 네 피부에 딱 맞을 거야. 저쪽 세계의 네가 쓰던 거니까."

"네?"

"저쪽 세계에도 서소라가 있더라고."

"아. 평행차원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막 가져와도 돼요?"

"없으면 새로 사겠지. 저쪽은 화장품도 풍족하더라."

그녀가 방긋 웃었다.

"친구들이 부러워하겠어요."

"화장품 병은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는 거 알지?"

"물론이죠. 집에서만 쓸 거예요. 밖에 나갈 때는 따로 덜어가고요"이쪽 세계에도 좋은 화장품은 있지만, 수제품이라 물량도 적고 가격도 굉장히 비싸다.

친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서정우가 물었다.

"혹시 네 친구 중에 윤나나라고 있냐?"

"없는데요?"

"하긴."

"네?"

"학교가 같은 게 아니라 같은 동네 사는 연습생이라서 친해진 거니까. 그 동네는 부서져서 다 다시 지었으니까 이쪽 세계의 윤나나는 이사 갔겠지."

더 나쁜 상황도 있지만, 기왕이면 이쪽 세계의 윤나나도 잘 살아있기를 바랐다.

"오빠. 누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쪽 세계에 있는 서소라의 친구."

저녁은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서소라는 서정우가 처음에 그랬듯이, 1kg의 소고기를 정성을 다해 구워, 전부 다 먹었다.

서정우는 고기를 먹으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서소라와 의논했다.

서소라가 말했다.

"엄마하고 아빠한테는 당분간 오빠 능력을 말 안 하는 게 좋겠어요."

"너 부모님 못 믿냐?"

"믿죠. 믿는데, 두 분이 마시는 술은 못 믿어요."

그들의 어머니는 정부의 몬스터 대응 부서 소속이다. 그들의 아버지도 정부 소속인 건 마찬가지다. 지금은 둘 다 서울이 아니라 대전에서 활동한다.

이 세계에도 술은 흔하다.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한 게 아니라 에틸알코올을 물에 타고 인공 향을 첨가한 술이지만, 마시면 취하는 건 마찬가지다. 회식자리에서 취해서 말실수라도 하면, 정부 쪽에 그의 능력이 알려질 수 있다.

몬스터와 전쟁 중이라고 해서 권력 싸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음모가 없는 것도 아니다. 주먹이 나갈 일에 총부터 쏘는 경우도 많다. 서정우만 해도 적과 싸울 때는 총알부터 박아넣는다.

그는 그가 가진 능력을 일단 비밀로 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건 실수로라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여동생뿐이다.

서정우가 동의했다.

"어차피 두 분 다 활동 지역이 다른 도시라 여기는 안 오시니까, 우리가 설명 안 하면 눈치 못 채시겠지."

서정우는 그날 밤새도록 이쪽 세계의 평행차원 이론을 조사했다. 인터넷이 저쪽보다 느리지만, 정보를 검색할 수는 있었다.

게이트가 처음 열린 서기 2000년 1월 1일 이후로 수많은 이론이 쏟아져나왔다.

새벽쯤에 그는 지금 상황을 설명 가능한 이론을 하나 찾아냈다.

"김 교수라... 내일 찾아가겠다."

서정우가 만난 대학교수는 학교 안에서도 허리에 권총을 차고 다녔다. 그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알지도 못하는 대학교수를 찾아가서 상담하려면 상담료를 내야 한다. 그게 이쪽 세계의 상식이다.

서정우는 상담료를 넉넉히 내놓았다. 그 대학교수도 친절하게 그의 이론을 설명했다.

서정우는 그 교수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오늘 들은 이야기를 생각했다.

"하나의 차원이 특정 시점에서 두 개의 평행차원으로 갈라진다는 이론."

그 이론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그가 경험한 상황과 완전히 맞아떨어졌다.

"그 이론대로라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둘로 갈라진 건 2000년 1월 1일, 몬스터 침공 게이트가 처음 열린 날이란 말이야."

그런데 서소라가 태어난 건 그때보다 몇 년 전이다. 그 이론대로라면, 저쪽 세계의 연예인 연습생이자 대학생인 서소라는, 1999년 12월 31일까지 그와 같이 살던 바로 그 여동생 서소라다.

2000년 1월 1일에 세계가 둘로 분열되면서 여동생도 두 명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저쪽 세계의 오빠 알기를 나부랭이로 아는 서소라도 내 여동생인 거네. 18년 만에 만난, 잃어버린 여동생.'

* * *

교수를 만나고 돌아온 서정우는, 짐을 챙겨서 버스를 타고 집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그곳은 저쪽 세계의 집 근처였다.

서소라가 물었다.

"이 좌표가 정확해요?"

"확실해. 저쪽 세계에서는 여기에 사람이 없더라."

차원을 넘어가면 사람이 텅 빈 곳에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이쪽 세계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면 텔레포트 능력자가 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저쪽 세계에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는 건, 기겁할 일이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기 전에 안전한 좌표를 확보했다.

저쪽 세계의 이 장소에는 공사가 중단된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은 몇 년째 방치된 상태라 사람이 오지 않는다.

서정우가 여행용 가방처럼 생긴 무장 캐리어를 열어 내부를 다시 확인했다. 캐리어 내부는 길이가 짧은 기관단총, 분해된 자동소총, 권총, 탄약, 수류탄에 폭파용 폭약까지 온갖 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소라가 아쉬워했다.

"무장 캐리어 하나 더 가져가면 좋은데."

"이렇게 큰 걸 두 개나 끌고 다니면 의심받아."

"오빠. 조심해요."

"거긴 하도 안전한 세계라서, 내가 위험할 일이 전혀 없다."

서정우가 씩 웃어준 후에, 캐리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었다.

텔레포트를 할 때 뭔가 물건을 옮기려면, 그 물건을 몸에 착용하거나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대부분의 스킬은 사람마다 효과가 조금씩 다르다. 텔레포트 스킬도 각자의 스킬 특성에 따라 자잘한 차이가 생긴다. 그래도 공통점은 하나 있다. 어떤 텔레포트도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갔다 올게."

그가 스킬을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시야가 휙 바뀌었다.

눈앞에 나타난 건 공사가 중단된 건물의 회색 시멘트벽이다. 그를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몰아쳤다.

"돌아왔네."

회색 시멘트벽에 그가 직접 써 놓은 글씨가 보였다. 비슷한 세계가 아니라 확실히 그 세계로 돌아왔다는 증거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우우우. 혹시 아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차원 좌표는 확실히 고정이야. 이제 시간 좌표를 확인하자."

그가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지금 날짜와 시간을 물었다.

그가 떠났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저쪽에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든, 이쪽 시간 좌표는 변하지 않네. 여기서도 변수로 사용되는 건 3차원 공간 좌표뿐이야."

테스트는 끝났다.

이제 양쪽 세계를 오갈 때 다른 변수는 없다.

두 차원의 연결이 고정되었다.

13. 첫 악보

서정우는 몬스터와 전쟁 중인 세계와 몬스터가 없는 세계를 왕복한 후에, 두 차원의 연결이 고정됐다는 걸 확인했다. 이제 그는 양쪽 차원을 매일 오갈 수 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하나 생각났다.

"가만. 난 돌아올 땐 떠난 시점의 시간 좌표로 돌아오는데."

한쪽 세계에서만 서정우의 평행차원 이동을 관찰하면, 사라지자마자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저쪽 세계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 후에 돌아오면 3차원 좌표가 바뀌어 텔레포트 같은 이동 효과가 생긴다.

"이쪽 세계에 있던 서정우는 왜 안 돌아오는 거지?"

똑같은 규칙이 적용된다면, 이쪽 세계의 서정우도 다른 차원으로 떠나자마자 돌아온 것처럼 보여야 한다.

"일단 내가 있던 차원으로 간 건 아니야. 나와 똑같은 스킬이라면 시간대가 겹쳐."

저쪽 세계의 천체물리학 이론에 의하면, 두 사람이 서로의 세계를 시간대가 겹친 상태로 오갈 수는 없다.

두 세계가 마지막으로 연결된 시간 좌표보다 과거 좌표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데, 시간대가 겹친다는 건 바로 그 과거와 연결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가 온 곳과는 다른 평행세계나, 아니면 아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겠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가장 나쁜 건 사고를 당해서 못 돌아온다는 것이지만, 더 나은 가정도 있다.

"나처럼 출발 시점의 시간축 좌표를 쓰는 게 아니라, 좀 떨어진 좌표를 쓰나?"

차원 텔레포트 스킬을 쓰는 그조차도 3차원 공간 좌표 이외의 좌표는 인지하지 못한다. 이쪽 세계의 서정우는 자기도 모르게 더 멀리 떨어진 시간축 좌표를 쓸 수도 있다.

"그런 거겠지."

진짜 그게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고가 나서 못 돌아온다는 것보다는, 나중에라도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낫기 때문이다.

문제는 돌아올 때 얼마나 멀리 떨어진 시간 좌표를 사용하냐이다. 몇백 년이나 몇천 년 뒤에 돌아올 수도 있다.

아니면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하루가 아니라 몇백 년짜리라서 못 돌아올 수도 있다.

서정우가 진심으로 기원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전에도 기원했지만, 어디 평화로운 엘프 마을 한복판에라도 떨어져서 잘 먹고 잘살고 있기를.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 속에 떨어져서 고생하지 않기를. 행운을 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서정우."

평행차원 이동 스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 하지만 지금 궁리해봤자 답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그는 그 고민에 시간을 쓰는 대신에, 이 세계의 정보를 더 알아내는 쪽을 택했다.

"이쪽 세계에 더 잘 적응할 궁리나 하자. 내 행동이 어색해 보이면 간첩으로 의심받을라."

그는 일단 무기가 가득 든 캐리어를 건설이 중단된 건물 구석에 잘 숨겨두었다.

* * *

서소라는 윤나나를 만나러 병원으로 찾아갔다.

병원 앞은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저 많은 기자가 다 나나 때문에 온 건가?"

그녀는 저 앞에서 자기가 윤나나의 친구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문병 온 척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을 찾는 건 쉬웠지만, 정복 경찰이 병실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경찰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 나나 친구인데요. 문병 왔는데요."

경찰이 그녀를 쓱 보다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윤나나 씨와 친구라고 주장한 기자를 몇 명이나 본 줄 압니까? 안 됩니다."

"진짜 친구인데...."

뒤에서 윤나나의 어머니가 그녀를 불렀다.

"어머. 소라야?"

"아줌마!"

경찰은 그녀가 진짜 친구라는 걸 확인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서소라가 병실 문을 열며 걱정했다.

'나나를 어떻게 위로해 주지? 그 나쁜 놈한테 납치됐었으니까 되게 겁 많이 먹었....'

그녀가 멈칫했다.

윤나나는 창가에 앉아서 병원 밖에 있는 기자들을 구경하며 아이스크림을 통으로 퍼먹고 있었다.

윤나나가 서소라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라야!"

서소라는 그녀의 환한 웃음을 보고 깨달았다.

"아. 맞다. 우리 집에만 똘끼가 있는 게 아니지. 쟤도 똘끼 하나는 남부럽지 않지."

윤나나에게 트라우마의 흔적은 적어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자기가 본 신기한 경험을 자랑하기 바빴다.

물론 납치 자체를 자랑한 건 아니다.

"사람 머리 뒤로 후광이 비치는 거 나 진짜 처음 봤어."

"우리 나나가 다른 덴 다 괜찮은데 머리가 아프구나.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약 먹으면 돼."

"진짜야. 어둠 속에 빛이 확 들어오는데, 형사님이 '경찰입니다.' 하는 거야. 그분 뒤로 빛이 진짜 눈부시게 빛났어."

"약 많이 먹어야겠다."

"그 형사님이 '우리가 왔으니까, 이제 안전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마음이 탁 놓이는 거 있지."

"그거 다른 경찰도 다들 하는 말 아닐까?"

"아닌데. 진짜 목소리까지도 고귀한 느낌이었는데."

"그 고귀하신 형사님 얼굴은 봤고?"

"아니. 그분 후광이 너무 강해서."

"그거 후광 아니라 햇빛이라니까."

윤나나가 아이스크림을 푹 떠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웅. 진짠데."

의사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윤나나를 보고 당황했다.

"아니. 곧 검사 들어가야 하는데 왜 아이스크림을.... 그거 도대체 어디서 났습니까!"

서소라가 쫓겨났다.

서소라는 집으로 털레털레 돌아왔다. 어차피 갈 곳도 없었다.

"아. 배고파. 너무 빨리 쫓겨나서 주스 한 잔 못 얻어먹었네. 밥이나 먹어야겠다."

그녀가 냉장고를 열었다.

"응?"

그녀가 눈을 껌뻑이고 다시 안을 보았다. 냉장고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반찬 다 어디 갔어!"

반찬만 없어진 게 아니다. 두 근은 남아 있어야 할 소고기도 없어졌다.

"누구 짓이야!"

누구 짓인지는 뻔했다.

서소라가 씩씩댔지만 그런다고 사라진 반찬이 돌아오진 않는다.

"에이. 간장에 밥이라도 비벼 먹어야겠다."

그녀가 찬장을 열었다.

"어라?"

찬장이 휑했다. 잔뜩 쌓여 있어야 하는 즉석밥, 참치통조림, 스팸 등이 싹 다 사라졌다.

"도둑이... 들었을 리가 없지. 무슨 도둑이 냉장고 반찬하고 즉석밥을 훔쳐가?"

당장 먹을 것이 없었다.

"우이씨. 나가서 사와야겠다."

그녀가 나가기 전에 방문을 열었다.

뭔가 이상했다. 방안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침대 그대로고, 옷장 그대로고, 화장...."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 화장품 다 어디 갔어!"

화장대 위가 텅텅 비어 있었다. 거울 위에 붙은 메모지가 보였다.

그녀가 식식대며 화장대 거울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뗐다.

거기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었다.

- 넌 새로 사.

음식을 다 털어간 범인이 누군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 물증도 나왔다.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오빠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아아!"

그녀는 서정우의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당연히 서정우는 보이지 않았다.

"튀었어! 내 손에 잡히면 죽을 걸 아니까 밥이랑 반찬도 다 가지고 튀었겠지!"

그녀가 식식거리며 서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정우의 휴대폰은 저쪽 세계의 것이다.

이쪽 세계의 휴대폰도 통화가 되려면 먼저 단말기 고유 번호가 통신사에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저쪽 세계에서 만들어진 휴대폰이 등록되어 있을 리 없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그녀가 전화를 끊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오. 언제 또 사고 치나 했다! 내 화장품 그게 다 얼마짜린데!"

ES 엔터테인먼트는 망하기 직전의 기획사라 이젠 연습실도 없다. 작은 사무실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윤나나는 그 사무실 근처에 있는 방음 잘 되는 럭셔리 노래방에서 연습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서 피부 관리에 신경 쓰고, 적어도 화장품만은 고급 제품을 쓴다.

그런데 하나씩 겨우 사 모은 화장품이 싹 다 사라졌다.

"돌아오기만 해. 죽었어!"

소파 앞 탁자 위에 악보가 보였다.

"아. 맞다. 이거. 아까도 오빠가 괜히 말 시켜서 이걸 놓고 가는 바람에, 버스에서 가사도 못 외웠네."

그녀가 악보가 프린트된 종이를 들었다. 그런데 종이에 뭔가가 비쳐 보였다.

그녀가 종이를 뒤집었다.

악보가 볼펜으로 무성의하게 찍찍 그려져 있었다.

이 집에 외부인이 들어왔을 리는 없다.

"그 인간이 작곡? 얼씨구? 작사까지? 어디서 보고 베꼈는지 몰라도 이게 내 화장품값이냐!"

원래라면 종이를 구겨버려야 하지만, 이 종이에는 그녀의 데뷔곡도 프린트돼 있다.

그녀가 별생각 없이 서정우가 그린 악보의 앞 몇 마디를 흥얼거려보았다. 가사를 따라 부르지도 않고 그냥 음만 흥얼거렸다.

"나나나나나...."

그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콧노래로 조금 더 불러보았다.

"나나나, 나나, 나. 와. 멜로디 진짜 좋다."

그녀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배에 힘을 빡 주고 가사를 제대로 붙이며 똑바로 노래를 불렀다. 처음 불러보는 노래라 박자도 놓치고 실수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노래가 참 좋았다.

그러다 그 종이에 그려진 악보가 끝났다.

그녀는 아쉬웠다.

"가사만 봐도 이 노래가 이렇게 끝날 리 없는데."

그녀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족발집 광고지가 보였다.

그녀는 혹시나 싶어 광고지를 뒤집었다. 하얀 부분에 나머지 곡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뒷부분을 마저 불렀다. 뒷부분은 앞부분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좀 더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왔다.

그녀는 노래를 어설프게나마 끝까지 부르고 나서, 감상에 젖어 눈을 감았다.

"좋다. 정말 좋다. 신나면서도 뭔가 아련해."

잠시 그러고 있다가 눈을 다시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뭐야?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오빠 나부랭이가 이런 걸 작곡했을 리가...."

종이의 마지막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음악을 모르는 오빠 나부랭이가 그냥 한 번 긁적거려봤다.

"있네?"

그녀는 그 글 한 줄만 보고 이 곡을 서정우가 썼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서정우가 평소에 신뢰를 너무 많이 잃었다.

그녀가 얼른 서정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당연히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

"전화기 꺼놓을 거면 왜 가지고 다니냐고! 이런 좋은 노래를 작곡.... 작곡? 우리 오빠가? 작사까지?"

당연히 의심이 점점 커졌다.

"우리 오빠 따위가 이런 노래를 만들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는데. 이 좋은 노래를 난 처음 들어보는데."

그녀가 급히 스마트폰으로 가사를 검색해보았다.

"이렇게 좋은 노래의 가사라면, 당연히 인터넷에 있을 거야. 당연히 있.... 없네?"

혹시 남이 지은 시를 갖다 쓴 건가 싶어서 좀 더 검색했지만, 가사와 일치하는 건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급히 악보 위에 적힌 제목을 검색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번에는 같은 이름의 노래가 나왔다.

그녀는 크게 실망했다.

"에이. 그러면 그렇지. 역시 있네."

그녀가 링크를 눌렀다. 노래 가사가 나왔다.

"어머?"

가사가 달랐다. 혹시나 하고 그 노래의 앞부분을 들어봤지만, 제목만 같을 뿐 이 악보와는 완전히 다른 노래다.

"진짜 없네? 없어! 이런 노래는 어디에도 없어! 우리 오빠가 이런 명곡을 작곡할 줄 알 리가 없는데, 날 놀리려고 어디서 베낀 거여야 하는데, 왜 없지?"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머리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가슴은 기대감으로 터질 것 같았다.

"이거 진짜로 진짜면 좋겠다."

서정우는 전화를 받지 않아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볼 수도 없다. 그녀 혼자 이 노래의 출처를 확인하는 건 무리다.

"사장님! 사장님은 알아볼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가 악보를 챙겨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사장 오동철은 불안했다.

"형진아. 새 노래, 아니, 우리 마지막 승부수인 이 노래, 성공할까?"

매니저 김형진의 얼굴도 밝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구해오신 이 곡 말입니다. 너무 평범합니다."

"이것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구해온 거야."

"인기 가수가 불러도 될까 말까 한데, 연습만 하던 우리 애들이 불러야 합니다. 걔들이 또 그냥 연습생입니까? 학교 다니다 남는 시간에만 연습하는 애들입니다."

"연습 좀 더 시키면 되잖아. 처음에 걔들을 뽑을 땐 그래도 노래 잘하고 외모도 되니까 뽑은 건데."

"소라나 나나는 내년이면 졸업반이니까 취업준비 때문에 연습생 때려치울 걸요? 상황이 이렇게 총체적 난국인데 이런 곡으로 도대체 어떻게 뜹니까? 하늘이 도와줘도 될까 말까입니다."

"하늘은 이미 한 번 도와줬잖아."

"언제요?"

"나나가 살인마에게 납치됐다가 구출된 뉴스가 하루 종일 나오잖아. 신곡 홍보할 돈도 없는데 하늘이 도운 거지."

"나나 부모님이 그 말을 들었으면 사장님을 때릴 거 같은데요."

"너도 아까는 같이 만세 부르면서 좋아했으면서 왜 나만 나쁜 놈 만드냐?"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동철은 방금 말실수한 게 들켰나 싶어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제가 한 말 아닙니다! 저 녀석이 그랬습니다!"

서소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악보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사장님! 이것 좀.... 네? 뭘 그랬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