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4)
즈발터의 눈빛에는 감동과 믿음이 가득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성공했구나. 이런 늠름한 모습은 상상도 못 했거늘.'
"수고했다. 정말 수고 많았다."
그는 지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호메른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모여 있던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영지민들은 돌아가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지셀의 이름을 환호했다.
결국 병사들이 나서서 그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귀가한 뒤에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셀도 용병들을 주둔지로 돌려보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가 쉬려던 그를 즈발터가 뒤에서 붙잡았다.
"항복 협상은 어떻게 되었느냐? 가져온 초안을 한번 보자."
곧 논공행상을 해야 했다.
이미 공적에 따라 적당한 보상을 책정해 두었지만, 배상액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여유 금액이 달라진다.
즈발터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던진 질문에 지셀은 환하게 웃으며 시원스럽게 답했다.
"없습니다."
"협상안이 없다고? 왜?"
"죽였습니다."
즈발터는 한동안 눈을 끔뻑이며 말뜻을 해석했다.
지셀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서 혹여 제가 잘못 들은 건지 되물었다.
"뭐? 죽였어? 정말?"
"네."
즈발터가 표정을 굳혔다.
"...혹시 내 말을 잊은 거냐?"
"잊지 않았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빨리 정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빨리 정리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항복을 받아 주면 다시 이곳을 노릴 겁니다. 귀찮은 일은 미리 예방해야 하니까요."
즈발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사고를 칠까 봐 당부했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쳐도 거하게 쳤다.
그는 지셀을 꾸짖으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아들의 행색을 보고 말을 집어삼켰다.
"...."
이미 죽였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전쟁 후 쉬지도 못한 아들을 잡아 둘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일단 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즈발터는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 어깨며 등허리가 축 처져 있었다.
* * *
다음 날, 대전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였다.
"시작하라."
즈발터의 말에 따라 호메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을 튀겨 가며 이번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연설을 시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죽어 갔다.
지루한 표정들을 보고 즈발터가 호메른의 말을 냅다 끊었다.
"그쯤 하면 됐다. 이제 포상을 내리겠다."
지셀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전공을 세운 사람들과 그 공적을 정리해 두었던 터라, 시상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들부터 포상이 시작되었다.
그다음은 전쟁이 지속될 수 있게 군수와 영지의 관리를 책임진 행정관들.
이어 영지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까지, 공에 따라 적당한 돈과 직위를 받았다.
"2등 공신을 발표하겠다. 기사단장 란돌프! 무관장 윌리엄...."
지휘관들은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1등 공신이 되었을 사람들의 이름도 불렸지만,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2등 공신에 대한 포상까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기대감 섞인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남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지셀에게로 향했다.
페르디움을 승리로 이끈, 이 전쟁의 진정한 영웅.
다들 그가 얼마나 큰 포상을 받을지 궁금해했다.
"대공자 지셀은 앞으로 나오시오!"
호메른이 외치자 지셀이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영주와 대공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대전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즈발터는 그 침묵을 즐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신들의 만장일치로 1등 공신은 오직 한 명, 지셀 페르디움이다. 이번 승리는 지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셀의 활약을 전장에서 지켜보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 중 일부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대세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셀에게는 2천 골드를 하사한다."
이어진 말에 대전에는 환호가 쏟아졌다.
"와, 대단하다! 2천 골드라니 엄청나잖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야!"
"대공자님이라면 그 정도 받을 만하지!"
모든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에 다른 사람들이 받은 포상금을 모두 합해도 2천 골드가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만지지 못할 금액이었다.
그런 거금을 한 사람에게 주겠다는 말에 대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전 한쪽에 물러나 있던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
지셀은 의기양양해하는 즈발터를 보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겨우 2천 골드 가지고....
* * *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은 돈 쓰는 배포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르지 않는 지셀은 대전에서 굳이 포상금이 적다고 거부하거나 따지지는 않았다.
진짜 포상은 따로 받아 내면 되니까.
논공행상은 끝났지만, 전후 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 모였던 사람들을 물리고 주요 가신들만 모인 자리에서 즈발터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셀에게 물었다.
"굳이 디갈드 백작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겠느냐? 그들도 전쟁을 치르느라 무리했을 거고, 병력도 이미 전멸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지셀의 물음에 즈발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디갈드는 애초에 그만한 병력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손을 뻗친 거지요. 사실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로게스 백작이 오지 못했는지도 말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즈발터가 침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조작되었더라도 디갈드 백작가에는 저희를 공격할 명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으면, 실질적으로 저희를 침공한 자들이 그들을 이용해 금방 다시 침공할 겁니다. 디갈드 백작령이 아예 없어져야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또한 북부는 대부분 봉토가 아니라 독립된 백작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바로 영지를 넓힐 수 있는 기회입니다."
"크흠...."
즈발터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아들은 언제나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한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내려온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른 귀족들에게서 항의 서한이 빗발치듯 올 미래를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배상을 받거나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우리는 그곳까지 다스릴 여력이 부족하지 않으냐."
즈발터라고 영토를 넓히는 것이 싫을 리는 있겠는가.
단지 현실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가난한 페르디움인데, 거기에 가난한 디갈드가 합쳐지면 그냥 두 배로 가난해질 뿐이다.
페르디움 내부도 상태가 좋지 않아 디갈드에서 받아 낼 배상금을 기다리고만 있는 중인데, 디갈드 영지까지 관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곳을 안정시키려면 도리어 디갈드에 남은 물자를 모두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룬스톤이 남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양쪽 영지가 정상화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음, 그만한 양이 되겠느냐?"
"충분합니다."
"...좋다, 사실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디갈드를 소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강해질 테니까. 이왕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가 없으니 넘어가겠지만...."
즈발터가 근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솔직히 걱정이다. 갈수록 행동이 과격해지는구나."
"...."
"조금 자중하거라. 너도 귀족들과 다른 영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알고 있을 텐데."
효율만 추구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반발에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건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큰 손해가 된다.
기득권이란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모두를 적으로 돌릴 바에는 적당히 양보해 주는 것이 나았다.
즈발터는 그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귀족들의 습성을 알고 있는 지셀 또한 순순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미래를 모르고 있기에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것일 뿐이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끄응...."
즈발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하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제멋대로 굴 것 같았다.
하지만 호통을 치고 싶어도 이제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지셀의 능력은 이제 그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허허,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갑자기 훌쩍 커 버려서 대응하기도 어려웠다. 전광석화와 같은 변화에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다.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했다.
제 품에서 벗어나 크게 성장한 자식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 과격하긴 하지만 아직 젊어서 그런 거겠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누구보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저 아비로서 걱정되기에 잔소리를 좀 했을 뿐이다.
"걱정되어서 말했을 뿐이니 서운해하지 말거라. 어쨌든 수고 많았다. 정말 잘했다. 이제 전후 처리를 해야 하니 당분간 쉬거라. 곧 승전 연회도 열 것이다."
영지를 안정시킬 방안을 고민하던 즈발터는 문득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그렇게 되면 당장 배상을 못 받는 거잖아?'
갑자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페르디움 영지는 안타까울 정도로 돈이 없다.
애초에 포상금도 디갈드에서 배상을 받으면 그 돈으로 나눠 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디갈드의 영지가 페르디움에 귀속됐으니, 그쪽을 운영하려면 많은 돈을 빼 올 수가 없었다.
"알버트.... 우리 돈이 얼마나 남았지?"
즈발터가 묻자 재무관인 알버트는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돈 없습니다."
"없어?"
"네, 한 푼도 없습니다. 새삼 왜 그러십니까? 전쟁 때문에 그나마 있는 물자들도 다 긁어 썼는데요. 원래 우리는 항상 돈이 없었습니다."
"...그럼 포상은 어떻게 하지?"
"그거 디갈드에서 받아 낸 배상금으로 충당하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승리한 기쁨이 팍 식어 버렸다.
가신들이야 조금 나중에 줘도 되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포상금을 늦게 줄수록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헌신하면 보답해 준다는 믿음이야말로 충성심의 기틀이 된다. 전공 포상금은 대표적인 '보답' 중 하나였다.
"허어, 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해야 하지 않겠나!"
즈발터는 혀를 차며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돈 나올 구석을 생각해 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은 모두 지셀을 향해 있었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영지 최고의 부자이자 룬스톤을 주기로 약속한 사람.
그리고, 단 한 사람뿐인 1등 공신.
"크흠, 흠흠! 아, 목이 조금 아프네."
살짝 헛기침을 한 즈발터는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저기... 지셀? 룬스톤 좀 먼저 주면 안 되겠느냐?"
1등 공신에게 포상을 주기는커녕 돈부터 빌려야 할 판이었다.
86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1)
룬스톤 얘기가 나오자 다들 기대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했다.
1등 공신에게 포상금을 주기는커녕 손을 내밀다니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룬스톤을 받아야 영지의 재정에 숨통이 트인다.
창피하다고 마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룬스톤은 오롯이 지셀이 얻어 낸 것이니까.
결국 가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래로부터 내려온 방법을 쓰는 것뿐이었다. 아부나 아첨이라고도 불리는 칭찬 릴레이 말이다.
눈치를 보던 호메른이 가장 먼저 나서며 크게 외쳤다.
"대공자님의 활약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페르디움 공방전의 승리는 전적으로 대공자님의 공입니다! 대륙의 모든 음유시인이 그 업적을 칭송하며 널리 알릴 것입니다! 선대 페르디움 영주셨던 단테 페르디움 백작께서는...."
호메른의 말이 길어질 듯 보이자 알버트가 바로 말을 끊었다.
"대공자님 나이에 이만큼 활약한 전쟁 영웅은 극히 드뭅니다. 다른 영지의 누구도 대공자님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크흠, 대공자가 확실히 큰일을 해내긴 했습니다. 싸움 잘하더라고."
왠지 떨떠름한 란돌프의 칭찬까지 이어지자 나머지 가신들도 앞다투어 떠들었다.
"엄청난 전과입니다."
"영지민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온 영지에 대공자에 관한 소문이 가득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사실 소문이 너무 과장되어서 지셀의 활약을 보지 못한 가신들은 온전히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갔던 사람들은 다들 입을 모아 '대공자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칭송해 댔다.
그러니 뭐, 잘했다는 칭찬 정도야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칭찬이 끝없이 이어졌다.
미소를 지으며 실컷 칭찬을 들은 지셀이 이쯤이면 배가 부르다 만족하고 입을 열었다.
"룬스톤 지금 없는데요."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알랑거리던 가신들이 말을 멈췄다.
호메른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뭐가 없다고요?"
"룬스톤 없어요."
가신들은 대공자가 또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막상 주기 아까워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답답해진 호메른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아니, 준다면서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쟁 전에 몰래 빼돌린 거 많지 않습니까?"
"아, 그거요? 없어요."
"...왜요?"
"모르셨구나. 그거 다 터졌어요. 쾅!"
지셀이 팔을 벌리며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터져요?"
그 많은 룬스톤이 터지다니. 대체 어디다 썼기에?
머리가 좀 빨리 돌아가는 알버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함정으로 썼던 불이... 설마 그 룬스톤들로?"
지셀이 썼다는 마법의 불은 말만 들어도 엄청났다.
그 정도 위력의 마법을 어떻게 쓴 건지 궁금해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드디어 그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네, 룬스톤들을 땅 밑에 잔뜩 깔아 놨다가 터뜨렸습니다."
나무 장작 몇 개 태운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조였다.
가신들이 모두 당황해 다들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셀이 간단하게 함정의 원리를 설명하자 가신들이 비틀거렸다.
룬스톤을 겨우 함정 하나 만들겠다고 날려 버린 사례가 있을까?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기겁할 일인데, 심지어 그 엄청난 분량을 모조리 털어 썼다니.
수레 몇 대 분량의 금화를 불태워 버렸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 정도 분량이면 대영주들도 몇 년은 넉넉히 쓸 액수다.
페르디움에서는 족히 십 년 이상, 지금처럼 아껴 쓴다면 이십 년 이상도 버틸 만한 금액이었다.
아들의 기행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즈발터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호메른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외쳤다.
"아니, 그 많은 분량을 모조리 함정으로 날려요?! 차라리 절반을 레이폴드나 데스몬드에 주고 대영주들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더 현실적이었겠네요! 그 정도 룬스톤을 준다고 하면 분명 다른 영주들이 달려왔을 겁니다!"
"데스몬드에서 쳐들어온 겁니다."
"뭐라고요?"
룬스톤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이어지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디갈드처럼 가난한 영지에서 저 병력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데스몬드에서 지원해 준 겁니다."
"데스몬드 같은 대영주가 왜 우리를 노린단 말입니까?"
"룬스톤 때문이겠지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을 테고, 데스몬드가 아니라 델파인 공작이 뒤에 있지만.
지셀은 지금 당장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즈발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이냐? 정녕 데스몬드가 맞느냐?"
"맞습니다. 증거를 보여 드리지요."
지셀이 길리언에게 고갯짓했다.
잠시 후 길리언이 쇠사슬로 둘둘 묶인 세 명의 기사를 끌고 왔다.
페르디움에 잠입했다가 잡힌 데스몬드의 기사들이었다.
당시 지셀은 이들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목숨을 붙여 놓았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잠입했던 데스몬드의 기사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잃은 표정으로 매우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룬스톤으로 만든 마나 억제 수갑은 본래도 효과가 그리 좋지 않다.
강력한 자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페르디움에서 가지고 있는 건 싸구려 중의 싸구려라 기사들의 마나를 절반도 억제하지 못했다.
기사들을 제압하려면 마나 억제 도구를 여러 개 달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쇠사슬까지 꽁꽁 묶어 놓았으니, 아무리 기사라도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직접 물어보시지요."
즈발터는 짐짓 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한 기사가 바짝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데스몬드의 기사가 맞습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체 우리 영지를 왜 공격한 건지 설명해 보아라!"
진노한 즈발터의 말에 기사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아마 룬스톤 때문인 것 같다, 아직 대부분 영주가 페르디움의 룬스톤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먼저 선점하려는 거 같다....
기사는 순순히 아는 대로 말했다.
협조하면 나중에 때를 봐서 풀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기에, 그들은 그 희망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애초에 지셀이 무서워서 거짓말을 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심문이 끝나자 즈발터와 가신들은 모두 무거운 표정을 지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에서 이겼어도, 데스몬드와 같은 대영주와 척지는 건 매우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손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천천히 대전을 둘러보던 지셀이 말했다.
"앞으로 데스몬드와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 할 겁니다.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쪽에 쳐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디갈드이고."
결국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
데스몬드가 자신들의 병력을 디갈드의 병사라고 조작했으니, 다소 허점이 보이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
"다른 영주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충 눈치를 채겠죠. 그러니 데스몬드 편을 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을 겁니다."
데스몬드는 북부에서 강하기로 손꼽히는 대영주다. 데스몬드를 상대할 수 있는 영지는 레이폴드뿐이다.
하지만 레이폴드와 페르디움은 이미 최악의 관계가 된 상황.
가신들은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셀이 말을 이었다.
"룬스톤을 바쳐서 평화를 얻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리해야죠. 하지만 한번 도움을 청하면 상대방은 더 욕심낼 겁니다. 레이폴드건 데스몬드건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우리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다들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룬스톤은 새로 캐 와서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룬스톤이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다들 얼마간은 기다릴 겁니다. 영지민들에게도 곧 구호 물품을 내릴 거라 알리면 민심 또한 금방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즈발터는 조금 감탄 어린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룬스톤을 당장 못 받게 된 건 아쉽지만,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니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찌 이리도 믿음직스럽단 말인가.
가신들도 대공자의 듬직한 모습에 즈발터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호메른은 지셀의 성장이 기꺼우면서도 조금은 두려웠다.
'이제 대공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에는 대공자에게 돈 좀 달라 아쉬운 소리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벌인 활약에, 전쟁의 배후를 찾아낸 공까지 더해져 대전의 분위기가 지셀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가신 중 그 누구도 지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이번만은 틀린 말이 아니기에 호메른도 별말 없이 있었지만....
덮어놓고 지셀의 말을 따르는 분위기가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대공자가 변한 건 좋다. 하지만 왜 변했는지를 모르니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지할 수도 막을 수도 없겠구나.'
이미 지셀은 영지에 막대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대공자가 달라진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전쟁이 대공자를 삽시간에 이렇게 키운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인물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자신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
왜 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지셀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로게스 백작에게 다시 전령을 보내고 동맹을 공고히 하십시오. 데스몬드가 적인 이상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강력한 대영주가 적이라는 말에 가신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전과 다르게 이제 명확한 적이 윤곽을 드러낸 이상 영지도 변화해야만 했다.
"거기다 데스몬드 말고도 또 다른 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페르디움 혼자 모든 걸 막을 수 없으니 같은 편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북방에만 매달리며 뒤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에 같이 연대할 세력이 필요했다.
즈발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다시 전령을 보내고 로게스 백작과 긴히 얘기를 나눠 보마."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남은 자들의 포상은 잠시 뒤로 미루겠다. 지셀이 나머지 룬스톤을 가져오면 영지민들에게 먼저 베풀고 포상을 내리지."
기사 중 몇 명은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지금은 반대했다가는 돌로 처맞고 끌려갈 판이었다.
어차피 지셀이 룬스톤을 주지 않는 이상 포상을 내릴 돈도 없었다.
모두가 수긍하자 즈발터가 지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 2000골드를 주기로 했지만, 돈을 받고 거기서 조금 떼어서 돌려주는 꼴이 되는구나. 네게 돈은 별로 필요 없을 거 같다. 혹여 다른 필요한 게 있느냐?"
지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 생고생을 하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가족이라고는 해도, 일한 만큼 보수는 받아야 하는 게 용병이다.
겨우 2000골드의 포상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려면 필요한 것들이 참 많았다.
"일단 그 전에 하나 여쭙겠습니다. 아버지는 디갈드 백작령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즈발터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갑자기 영토가 늘어났으니 상세한 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음, 일단은 관리들을 보내 직할령으로 다스리다가 적당히 공을 세운 가신들에게 땅을 분배할 생각이다. 물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그대로 받아 줘야 할 테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보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래, 좋다. 무엇이든 말해 보거라."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는 즈발터에게 지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땅의 절반을 제가 받아야겠습니다."
즈발터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87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2)
"땅을 달라고?"
즈발터가 당황해 되물었다.
아니, 땅이야 못 줄 것도 없다.
본래도 영주가 신하들을 치하할 때는 돈이나 영토를 주곤 하니까.
페르디움에는 돈이 없으니 땅이라도 달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였다.
그래도 그렇지, 백작령의 절반을 달라니!
아무리 디갈드가 작은 영지라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백작령에 비해서다.
백작령인 이상 반절이라도 우습게 볼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다른 가신들도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당황해 눈만 끔뻑거렸다.
"들어와라."
지셀이 가볍게 신호했다. 그러자 용병 두 명이 대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호메른이 남몰래 인상을 구겼다. 이놈들은 대전이 무슨 동네 여관인 양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대공자만 아니었어도....'
그가 속으로 투덜대거나 말거나, 용병들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지도를 펼쳐 들었다.
누가 봐도 아예 작정하고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에헴,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셀은 어디선가 얇은 지휘봉까지 슬그머니 꺼내서는 지도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디갈드 백작령은 직할령을 제외하고 총 다섯 개의 남작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펜리스 남작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남쪽에 있는 남작령까지 총 세 개 영지를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설명이라더니, 어디를 가져가겠다고 시원하게 통보하고 있다.
즈발터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지셀이 말한 세 개의 영지는 디갈드 백작령의 남쪽과 동쪽에서 다른 영지와 인접한 위치였다.
즉 최전방 지역을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그곳을 원하는 이유가 있느냐?"
즈발터가 묻자 지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곳은 다른 영지들과 인접한 경계 지역이죠. 제가 이곳을 방어하겠습니다. 레이폴드가 페르디움을 공격하면 제가 따로 옆구리를 칠 수 있습니다."
지셀이 지휘봉으로 지도에 그려진 페르디움의 남쪽 영지를 툭툭 쳤다.
페르디움의 남쪽, 디갈드의 동쪽에 붙어 있는 영지에는 레이폴드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레이폴드? 갑자기 거기는 왜?"
"그쪽도 데스몬드와 별다른 거 없습니다. 룬스톤이 소문나면 눈독을 들일 게 분명합니다."
지셀은 레이폴드를 이미 적으로 상정한 상태다.
아멜리아가 결국 레이폴드를 차지할 게 뻔했으니까.
솔직히 그쪽에도 개입하고 싶지만, 더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어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레이폴드가 적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사정을 몰랐지만, 지셀의 이야기가 허황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셀이 아멜리아에게서 돈을 뜯어 온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짐바르는 레이폴드를 거쳐 가야 하니 바로 견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쪽이 쳐들어오면 이곳에서 언제든지 페르디움 쪽으로 지원을 나갈 수 있습니다."
"정식으로 군사를 키우겠다는 말이냐?"
"네, 용병들만 데리고 움직이기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즈발터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너는 어차피 이곳을 물려받을 후계자다. 디갈드까지 병합한다면 이제 페르디움은 작은 영지라 할 수 없고. 더 큰 영지에서 경험을 쌓을 생각은 없느냐?"
"그러기에는 북부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영토를 받는다면 지셀은 페르디움의 대공자인 동시에 영주인 펜리스 남작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영지의 대공자라도 영주와는 비교할 수 없다.
"영지를 다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곳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페르디움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을 것이다. 게다가 너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도 없지 않으냐? 관료들이야 몇 명은 남아 있겠지만, 기사는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다."
"괜찮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으음, 하긴 네가 순순히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지."
즈발터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싸움만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책임감과 신념, 능력까지 겸비해야 영주 자리에서 버텨 나갈 수 있다.
영지민을 착취하는 악덕 영주가 된다면야 힘들 일도 없겠지만, 지셀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기미만 보여도 즈발터가 용납하지 않을 테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디갈드 영지는 페르디움처럼 야만인과 마수의 숲을 경계해야 하는, 밑 빠진 독 같은 위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 그거면 되겠느냐?"
"네, 행정 인력이 부족하니 당장은 그 정도가 적당합니다. 남작령 세 개를 펜리스 영지 쪽으로 통합시켜 다스릴 생각입니다."
"허허, '당장은'이라니... 얼마나 욕심이 큰 게냐."
젊은 나이에 그런 큰 공을 세워 남작령을 세 개나 가져가면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저 끝없는 배포에는 정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최전방에 서겠다는 마음은 대견스럽긴 하다만.'
남작령 세 개는 작지 않은 크기였지만, 어차피 전쟁에서 이기지 않았으면 얻지도 못했을 영토였다.
지셀은 차후에 페르디움 전부를 물려받을 후계자이니 미리 영지를 다스리는 경험을 쌓아도 좋을 터였다.
거기 사는 영지민들이 조금 걱정되지만.... 즈발터는 그래도 아들을 믿었다.
설마 이제 와서 망나니처럼 굴지는 않겠지.
만약 영지 상태가 영 시원찮다면 차후에 개입하면 될 일이었다.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
가신들은 한숨만 내쉴 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다. 언제부터인지, 대공자가 하는 짓을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상의도 없이 항상 통보만 하니 의견 교류가 안 되잖아!'
'룬스톤을 쥐고 있으니 반대하고 싶어도 못 하고, 설득하고 싶어도 안 되고.'
'영주님도 사실 똑같은 심정이겠지만....'
가신들은 즈발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 아들은 말릴 수 없으니 포기하고, 가신들에게 동의라도 받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는 심정일 테다.
고민하던 호메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나섰다.
"그냥 대공자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지요."
영주로서의 재능은 모르겠지만, 전쟁에서는 충분히 능력을 보여 줬다.
여기서 반대해 봤자 반대한 사람 꼴만 우스워진다.
애초에 호메른도 놀랐을 뿐, 크게 반대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지셀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계속 지셀을 예전처럼 망나니 취급할 수는 없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지셀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사라지기도 했고.
다른 가신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공을 세웠으면 보상이 있어야 마땅하지요. 봉토를 수여하는 것도 합당하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어차피 맡아야 하는 곳입니다."
"남은 장원들의 분배만 신경 쓰면 될 거 같습니다."
"영지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 정도 보상은 과하지 않습니다."
"대공자님도 이제 예전과 같은 사고뭉치가 아니니 한번 믿어 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제멋대로에, 사고 먼저 치고 나중에 통보하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대공자의 변화에 조금이나마 믿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알버트도 나름대로 이유를 들어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대공자가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할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 역량으로는 디갈드 영지를 모두 장악할 수도 없습니다."
페르디움은 행정력이 부족한 탓에 갑자기 늘어난 땅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될 바에야 돈 많은 대공자가 알아서 하게 절반을 맡기는 게 나았다.
지셀을 가만히 보던 란돌프가 마지막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대공자의 실력은 어느 정도 검증이 됐습니다. 너무 위험하게 움직여서 문제긴 하지만요.... 아무튼 그 정도 실력이라면 대공자에게 남쪽을 맡겨 봐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데스몬드가 우리를 노리고 있어도 북방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가신들 스스로도 사실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는데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모양새라는 게 있었다.
영주인 즈발터나 가신들이 그나마 체면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지셀이 이렇게 통보하는 것도 나름대로 즈발터와 가신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이거라도 어디냐는 생각에 가신들은 잠자코 지셀의 배려를 받아먹었다.
즈발터는 어색한지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흠, 흠, 좋다. 자격도 갖추었고, 모든 가신들이 찬성했으니 지셀에게 펜리스 남작의 위를 수여하겠다."
"감사합니다."
"충성 서약은 그럼 조만간 길일을 잡아...."
"그냥 지금 대충 하시지요. 왕성도 아니고 우리끼리 굳이 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있습니까. 시간 아깝습니다."
"크흠, 거참 좋은 생각이다."
사사로이 부자지간이긴 하지만 공적으로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가 됐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지셀은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즈발터도 받는 사람이 그렇다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가신들과 기사 몇 명, 용병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급조된 작위 수여식이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즈발터는 예식용 검을 들고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니, 위대하신 국왕 폐하에게 전권을 받은 나 즈발터 페르디움이 그대에게 새로이 펜리스의 봉토와 남작의 위를 수여하노라. 그대는 불멸의 충성을 바치고 백성들과 약자들을 보호하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에 평생토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니...."
지루한 선언문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겠느냐는 질문에 지셀이 대충 대답하는 것으로 작위 수여식이 얼렁뚱땅 끝났다.
어색하고 떨떠름한 분위기 속에서 가신들은 영혼 없는 축하를 건넸다.
열린 대전의 문 너머에 어느샌가 용병들과 병사들, 사용인들까지 모두 모여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지셀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는 소문이 그새 성안에 퍼진 모양이었다.
지셀은 원하는 걸 얻자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즈발터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뒤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볼일 다 본 곳에서 미적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금 작위를 받은 놈이.'
즈발터는 헛웃음을 지었고 가신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반면 용병들은 환호하며 지셀에게 달라붙었다.
특히 벨린다는 너무 좋아하며 방방 뛰었다.
"도련니임! 어쩜 좋아! 우리 도련님이 영주님이 되다니! 역시 제 조기 교육 덕분일까요?"
"조기 교육...? 그래서 대장이 저렇게 망나니로 큰 거였구만?"
벨린다가 카오르를 째려보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콱 찔렀다.
카오르가 옆구리를 잡고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찔러? 대장 인성이 누구한테서 나왔는지 알겠네!"
"좋은 날 피 보기 싫으니까 득츠즈...?"
벨린다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살기를 읽었는지, 카오르가 비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살기를 뿜어냈다.
"누구 피를 보게 될지 한번 해보든가."
지셀은 투덕대는 두 사람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다행히 길리언이 말려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혼 좀 내라고 해야겠네, 저거.'
그사이 대전 앞은 작위 수여식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어느새 시장바닥처럼 번잡스러워졌다.
전쟁에서 지셀과 함께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하녀들마저도 드디어 철이 들었냐는 듯 감탄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쓸데없이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평가가 올라갔다.
지셀은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회한이 서린 쓴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쉬웠던 걸....'
왜 그때는 몰랐는지.
"영주님?"
그가 가만히 서 있자 길리언이 의아한 듯 불렀다.
지셀은 얼른 표정을 고쳐 얼굴에 거만한 웃음을 띠었다.
"작위를 받은 기념으로 오늘은 내가 쏜다! 우리의 승전 연회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모두 참석해라!"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호응을 유도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오오오! 대공자님이 쏜다!"
"그렇지! 급한 거 끝났으면 거하게 놀아야지! 역시 뭘 좀 아시는 분이야!"
"우리 남작 대장님이 최고다!"
"와아아! 축제다 축제! 남작님이 쏜다!"
모두가 신이 나서 주변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대전 안에 있던 가신들은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넘어갔다.
지셀은 사람들을 이끌며 크게 외쳤다.
"자, 가자!"
사람들이 신나게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따랐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라 즐거움과 친근함을 듬뿍 담은 외침이었다.
"펜리스 남작 만세!"
지셀 펜리스 남작. 곧 왕국에서 명성을 날리게 될 이름이었다.
88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3)
"우리가... 패배했다고?"
보고를 받고 해럴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한쪽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후우우우...."
해럴드는 가빠 오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억지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화상을 입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였다.
패잔병들이 오자마자 참모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받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생존자들을 직접 불렀다.
패배라니! 북부에서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던 데스몬드의 군대가 패배했다고?
그것도 페르디움의 병력 따위 가뿐히 뛰어넘을 압도적인 숫자였는데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 패배한 거냐! 불의 마법? 함정? 수천의 병사를 태울 정도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이 왕국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해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직접 당한 사람들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영지에 있던 자들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꼴을 보고 해럴드는 강한 분노를 토해 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 그 많은 병력이 전멸했는데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빅토르! 빅토르는 어떻게 됐느냐!"
일찌감치 전장에서 도망간 자들이 빅토르가 어떻게 됐는지 알 리가 없었다.
콰아앙!
여전히 이어지는 침묵에 해럴드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을 냈다.
아끼고 아껴 키웠던 빅토르마저 행방불명이 됐다.
전쟁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건, 포로로 잡혔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빅토르 정도 되는 인물을 위험하게 살려 두었을 리가 없으니,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일반병에 비해 육성하는 데 오래 걸리는 공병대를 잃은 것도 아깝지만, 병사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사들까지 수십이나 잃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빅토르라는 걸출한 인재를 잃은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해럴드는 페르디움을 확실히 밟아 버리기 위해서 전쟁 전 그들의 전력을 낱낱이 분석했다.
압도적인 병력에 마법사까지 붙여서 보냈다.
생존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분명 페르디움의 전력은 전쟁 전에 파악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물자의 양도 예측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예측을 뛰어넘을 만큼 치명적인 변수가 있었다는 뜻이다.
해럴드는 보고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 이놈들인가."
보고서에는 '검은 부대'의 활약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해럴드는 보고서에 적힌 전장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검은 부대'는 지휘관이 해럴드 자신이었더라도 당했겠다 싶을 만큼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예측할 수 없는 과감한 움직임은 숫제 야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우연이다. 우연이야, 우연.... 페르디움에 그런 인물이 있을 리가 없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지만, 해럴드는 '검은 부대'의 활약이 우연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마지막에 준비한 함정이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을 대체 어떻게....'
왕국에 단 두 명뿐인 7서클 마법사도 그런 어마어마한 마법은 시전하지 못한다.
해럴드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짜증과 분노로 깊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가면 갈수록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 갔다. 그걸 본 데스몬드의 가신들과 참모들은 백작의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해럴드는 철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평소 흥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실수한 부하를 가차 없이 죽이곤 했다.
처음 보는 모습으로 화를 내는 것도 두려웠는데, 점점 싸늘해지는 걸 보니 어쩌면 전쟁에서 진 책임을 물어 자신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해럴드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가신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실패를 만회할 생각은 안 하고 도망부터 치는 꼴들이라니.
차라리 저번에 죽였던 놈이 더 나았다.
'시간 여유만 있었다면 정말로 다 죽여 버렸을 텐데.'
해럴드는 짜증을 삼키며 가신들과 참모들에게 명령했다.
"레이폴드의 움직임에 대비해야 한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폴드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
호시탐탐 북부를 평정하려고 때만 노리는 레이폴드 백작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북부에서 수위를 다투는 데스몬드지만, 병력을 잃은 지금 당장은 레이폴드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멜리아의 반란을 앞당길 것이다. 당분간 다른 일은 모두 뒤로 미룬다. 오직 그 일에 최우선으로 전념해라."
"아, 알겠습니다."
새빨갛게 충혈된 해럴드의 눈을 보고 참모들은 고개만 숙였다.
만약 여기서 한 마디라도 반박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 테니까.
하지만 해럴드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엉망이군.'
반란을 앞당길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급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모든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획이 하나하나 다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에 해럴드는 찜찜함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공작가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암살 건은 애초에 영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았고, 실패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많았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영지전에서 페르디움에 지고, 병력까지 크게 잃은 것은 해럴드의 능력을 의심받을 만한 큰 실수였다.
자신만 한 인재도 드무니 실수 한 번에 바로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이전보다 위험한 처지에 놓인 건 확실했다.
델파인 공작은 무도할 정도로 잔인하니까.
그리고 매번 홀연히 나타나 공작을 도와주는 자들도.
'공작도 문제지만, 특히 그놈들이....'
왕국을 전복시키는 계획은 다 그놈들이 나타난 뒤부터 시작됐다.
이번 일에 실패하면 그들도 손해를 입을 터.
그렇다면 손해를 본 놈들은 자신을....
'아니, 아니지.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무슨 짓을 해서 대영주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설득해야 한다. 아직 레이폴드가 남았다고, 그 일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하면 된다.
'전쟁에서 이겼다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었을 텐데. 빅토르만 있었어도....'
해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냐앙.
아멜리아는 마차에 앉아 강아지풀을 흔들며 바스테트와 놀아 주고 있었다.
바스테트는 강아지풀을 잡겠다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좀 지루하네."
페르디움에서도 전령을 보내기를 포기했는지 더 이상 나타나는 자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아멜리아는 여전히 페르디움으로 드나드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딱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런저런 사교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라, 본래도 성에 머무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자유로운 행동을 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쌓아 온 이미지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강아지풀을 무료하게 흔들다 말고 아멜리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정도 전력이면 이미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는 건 좀 이상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
그녀는 디갈드 보급 부대를 기습한 게 지셀이라고 확신하자마자 전장에 사람을 보냈다.
그 미친놈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기 위해서.
그때, 베르나프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세작들이 돌아왔습니다."
베르나프의 뒤로 몇 사람이 머뭇머뭇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초췌하고 꾀죄죄한 몰골로 그만큼 지저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오면서 급하게 작성한 보고서라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삐뚤거렸다.
아멜리아는 정리된 문서로 보고받는 걸 좋아하기에 부랴부랴 작성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보고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너저분한 종잇장을 보고 인상을 잠깐 찌푸렸지만, 별말 없이 보고서를 넘겨받아 읽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이 몇 번이나 멈췄다.
이내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세작들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손짓, 발짓 다 하며 전쟁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베르나프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화내는 것도 예쁘지만.... 나한테 화내는 건 싫으니까 피해야지.'
아멜리아는 지셀에게 돈을 뜯긴 이후로 그에 관한 일에는 과할 정도로 화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바스테트도 베르나프의 움직임과 아멜리아의 분위기를 보고 눈치껏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흐음.... 그래?"
그런데 베르나프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베르나프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함정을 만들었을까? 병사 수천 명을 단번에 집어삼킬 정도의 마법 말이야.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었어? 애초에 페르디움이 그럴 만한 여력이 있던가?"
"7서클 마법사라도 힘듭니다. 그들이 이 정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7서클 마법사를 확보하자마자 델파인 공작이 왕국을 뒤집었을 겁니다. 그 정도 위력을 내려면 최소 8서클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왕궁 마법사도 이런 일은 못 할 거야. 그럼 누가 이런 엄청난 마법을 쓴 거지?"
"단신으로 그런 게 가능한 자는... 역시 '세계수의 수호자'나 '망자들의 주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멜리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확실히 그들이라면 단신으로 그런 이적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들이 페르디움을 도와줬을 리가 없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살아가는 그들이 뭐 하러 이런 촌구석 영지에 나타나겠는가.
그때, 아멜리아의 입가에 돌연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알겠다."
"뭘요?"
"페르디움 따위가 그런 대단한 마법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었는지 말이야.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게 뭔데요? 어? 설마...."
"룬스톤이야. 룬스톤을 잔뜩 쓴다면 가능할 거야. 땅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니, 미리 룬스톤을 묻어 놨겠지."
베르나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폭발이라면 룬스톤을 어마어마하게 썼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그만한 양이면 페르디움의 수십 년 치 예산과 맞먹습니다. 그걸 함정에 다 쏟아붓다니요."
황당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지셀은 상식을 벗어난 짓을 거리낌 없이 하는 놈 아닌가.
"아니,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지, 그래야지. 이제 그 정도의 손해는 감당할 만하다는 거지?"
아멜리아는 자신보다 지셀을 잘 파악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지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상식에 맞춰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보고서를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던 그녀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빠르게 부대를 훈련시키고 움직였다고? 그 망나니한테도 이런 능력이 다 있었네. 아니면 다른 조언자나 인물이 있는 건가? 어쩌면 내가 좋은 남자를 놓친 걸지도 모르겠어."
베르나프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아멜리아는 가볍게 무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확신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조금 더 정보를 수집하고 지켜봐야 했다.
"돌아가자.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애들 당장 다 모아서 대기시켜."
뜬금없는 명령에 베르나프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병력을 모으라고요? 어째서입니까?"
"데스몬드가 개작살이 났는데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 멍청하고 욕심만 많은 늙은이가 그럴 리 없잖아."
"...."
"분명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꼬투리를 잡아서 데스몬드를 치려고 할걸? 우리의 동맹인 페르디움을 건들다니! 내가 조금 늦게 알았지만, 지금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뭐 그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야."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있던 베르나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랑 우리 애들 모으는 거랑 무슨 상관이...."
"베르나프, 내가 항상 생각을 하라고 했지? 해럴드의 병력이 날아갔잖아. 그것도 상당수가. 지금 아빠가 군사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어?"
베르나프가 멀뚱히 있자,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걸 해럴드가 모를까? 해럴드는 음흉하지만 멍청한 인간은 아니야. 그렇다면 해럴드가 어떻게 하겠냐고."
"공작가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까요?"
"아니지. 지금 공작이 왕실을 압박하는 중이잖아. 공작가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왕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아. 일이 너무 커지게 돼."
"어, 그러면?"
"그래, 내 반란을 더 빨리 진행하겠지. 걔네는 이제 남은 방법이 없거든. 덕분에 나는 반쪽짜리 레이폴드를 얻겠군."
반란이 급히 진행되면 영지의 피해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 온전한 영지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아멜리아는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폴드가 망가지는 것도 아쉽지만, 지금 더 속이 끓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셀, 이번에는 정말 죽을 줄 알았는데 결국 또 살아남았구나. 이 정도면 이제 운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네. 징그러운 새끼."
자존심 때문에 부정해 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침착하게 굴려고 애썼다.
상대가 강할수록 그녀도 더욱더 냉정해진다.
이게 바로 지셀이 경계하던 아멜리아의 진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은 시간을 꽤 번 셈이네. 데스몬드는 기세가 꺾였고, 공작은 더 중요한 일로 바쁘니까 당장 지셀을 건들지 못할 거야."
"역시 전쟁 전에 치는 게 나았을까요?"
"글쎄...."
베르나프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때는 확신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레이폴드부터 차지하고 생각해 봐야겠어."
"그냥 이제 신경 끄고 내버려 두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페르디움은 공작가가 나중에 처리할 거 같은데요."
아멜리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셀을 반드시 죽이고 싶긴 하지만, 다른 해야 할 일이 많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일단은 내버려 둬. 해럴드와 델파인 공작에게 찍혔으니 어차피 죽겠지.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한다."
레이폴드 백작 자리가 끝이 아니다. 그건 시작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더 큰 야망과 목표가 있었다.
"물론 기회가 오면 반드시 내가 작살내 버릴 거야."
마지막 말을 내뱉는 아멜리아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
89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4)
"으하하하! 부어라! 마셔라!"
"잘생긴 리카르도! 여기 좀 봐 줘요!"
"대공자님! 아니, 남작님 만세!"
"페르디움의 승리를 위하여!"
모두가 신이 나서 술에 취해 떠들어 댔다.
힘들었던 전쟁의 피로를 달래 주는 건 역시 술과 음식이 최고다.
미소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지셀은 몸을 돌려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건 고생한 자들에게 당연한 몫이지만....'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희생자들의 가족이었다.
적군의 규모에 비해 페르디움의 피해는 적었지만 어쨌든 죽은 자들이 있었다.
그 가족들은 지금 당장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셀은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손을 붙잡고 위로를 건넸다. 또한 막대한 보상금까지 약속했다.
본래 영주가 해야 할 일이고, 즈발터라면 기꺼이 나서겠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고 직접 움직였다.
'내 책임도 있을 테니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러지 않았다면 결국 페르디움은 멸망했을 것이고, 영지민들은 모두 죽거나 고통 속에 살아야 했을 테니까.
그러나 지셀 때문에 희생자가 생긴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을 앞당긴 것도, 규모를 키운 것도 자신이다.
모두를 지키려 시작한 전쟁이니, 희생자들은 마땅히 충분한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했다.
지셀은 벨린다와 길리언, 두 사람만을 대동하고 희생자의 가족들을 찾아다녔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페르디움을 떠나기 전, 고향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위로하고 그들의 희생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지셀이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곳까지 찾아와 잊지 않고 위로를 건넨, 영지의 후계자에게.
그들도 알고는 있다. 전쟁에서 패했으면 더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걸.
하지만 가족이 죽은 슬픔을 금방 추스릴 수는 없었다.
길리언은 묵묵하게 지셀의 뒤를 따르며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효율만 챙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기 사람을 잘 챙기는 건 알았지만 영지민들에게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어차피 지셀은 곧 페르디움을 떠날 것이다.
이런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없는데도 지셀은 자처해서 유가족들을 만나고 있었다.
"흑."
"뭐야, 벨린다. 울어?"
"아니요? 제가 언제요!"
벨린다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그녀에게도 영지의 병사들은 친구나 마찬가지였기에 슬픔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헛웃음을 지으며 벨린다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자."
그는 성으로 돌아와서도 바로 연회장으로 가지 않고 부상자들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바네사를 찾아갔다.
"바네사, 좀 괜찮아?"
"아.... 공자님."
지셀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바네사를 만류하고 옆에 앉았다.
"정말 잘했어. 네 덕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어."
따뜻한 눈빛에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쁜 건, 드디어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옆에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염병.... 나는 안 보이냐...?"
알포이가 헐떡거리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지셀은 부러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포이, 너도 있었냐? 그래, 너도 수고했어. 잘했다."
"으으, 망할 자식...."
알포이는 이를 갈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누구 덕에 마력을 모조리 빨려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저런 천연덕스러운 태도라니.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궁금증이 더 컸다.
"너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저 여자가 어떻게 마법을.... 그것도 그런 고위 마법을."
거대한 불기둥이 폭발하던 모습은 마탑 출신인 알포이도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땅에 묻어 두었던 룬스톤을 폭발시켰다는 건 바네사를 추궁해 알아냈지만, 도대체 그녀가 어떻게 마법을 썼는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섯 명의 마력을 모두 끌어갔으니 마력의 양이야 어마어마했겠지만, 알포이가 아는 바네사는 1서클 마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
"애초에 마나를 쓰지 못하는 체질이었는데, 언제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바네사는 지셀이 강제로 마나를 느끼게 해 줬다고 말했지만 알포이는 믿지 않았다.
마탑에서도 못 했던 일을 고작 시골 영지의 망나니가 해냈다고?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알포이는 자신이 그 비밀을 알아낸다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다 죽어 가는 상태로도 욕망에 빛나는 눈빛을 보며 지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만 아는 방법이 있지. 알고 싶으면 영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그러면 하나 정도는 알려 줄지도 모르잖아."
"뭐, 뭐라고? 네놈.... 으... 내가 마탑에만 돌아가면...."
그러자 지셀이 말을 끊고 웃었다.
"아, 마탑? 그렇지 않아도 곧 갈 생각인데, 네 얘기는 잘 전해 줄게. 어쩌면 마탑주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하게 굳힐지도?"
잘 말해 준다는 말에 알포이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음을 흘렸다.
"흠흠, 그건 고마운데... 마탑에는 왜 가? 아직 계약 기간 남았잖아."
"제안할 게 있거든. 너한테도 좋은 일일 거야."
"...?"
알포이는 지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끔뻑였다.
하지만 지셀은 더 이상 설명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잘 쉬고 있어. 갔다 오면 더 많은 걸 알려 주마."
바네사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잠깐! 무슨 말인지 설명하고 가! 야!"
뒤에서 알포이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지셀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 * *
다음 날, 연회가 끝나자마자 지셀은 용병들을 데리고 마수의 숲에 다시 들어갔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목책과 도로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지셀은 룬스톤을 잔뜩 캐 와 절반을 호메른에게 넘겼다.
돈이 생겼으니 페르디움 영지도 빠르게 안정될 것이다.
'일단 페르디움은 이 정도면 될 거고.'
적들도 당분간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바빠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빨리 세력을 키우고 다음을 대비해야 해.'
상당한 시간을 벌었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게 있을 수는 없었다.
이 틈을 타 역으로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기회를 노려야 한다.
'자금, 전력, 식량, 연대할 세력....'
준비할 게 너무나 많았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쉴 시간은 없다.
지셀은 성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탑으로 간다."
"마탑이요? 또 룬스톤을 파시려고요?"
벨린다의 물음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룬스톤은 아직 남아 있지만, 이걸 마탑에 팔 생각은 없었다.
"마탑과 상의할 일이 있거든."
"펜리스 영지로는 언제 가시게요?"
"이 일부터 처리하고."
영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둬서는 안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마탑을 찾아가는 게 더 급했다.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앞으로의 일이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지셀은 펜리스 남작령을 받자마자 카오르와 일부 용병들을 보냈다.
잠깐 정도는 영지가 개판이 되지 않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벨린다는 펜리스 영지가 걱정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잠자코 지셀을 따라 적염의 마탑으로 향했다.
* * *
며칠을 달려 마탑 도시에 도착했다.
벨린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새삼스레 감탄을 내뱉었다.
"와, 여기는 여전히 깨끗하네요. 우리 영지도 얼른 이렇게 되면 좋겠어요."
지셀과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언제 봐도 정말 깨끗하고 멋진 도시다.
"아이고!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문지기는 이전의 뻣뻣한 태도가 무색하게도 지셀을 보자마자 냉큼 문을 열어 주었다.
로비를 지키고 있던 실뱅 역시 지셀을 보자마자 허리를 180도 숙였다.
"또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바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실뱅은 허겁지겁 지셀을 마탑주에게로 안내했다.
마탑주 휴베르트는 부러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지셀을 맞이했다.
"어이쿠! 어서 오게! 전쟁은 이겼는가? 아니, 이겼으니까 여기 왔겠지. 어떻게 된 건가?"
파견된 마법사들도 있지만, 룬스톤이 걸려 있는 문제다.
휴베르트는 나름의 정보통을 통해 꾸준히 페르디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덕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비교적 빨리 들었다.
전쟁 결과나 상세한 과정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지셀이 직접 찾아오니 한시름 놓았다.
과한 환영 인사에 지셀도 장난스럽게 웃었다.
"저를 애타게 기다리신 거 같습니다."
"이 사람아. 우리가 걸릴까 봐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아는가? 설마 이렇게 빨리 전쟁이 터질 줄은 몰랐네."
"영주들의 욕심을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그 말에 휴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그렇게 쉽게 나겠냐 생각했는데, 마치 그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듯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 면에서 이 애송이의 통찰력은 높이 사 줄 만했다.
"그래, 일단 앉아 보게. 룬스톤을 팔러 온 건가? 수레는 없다던데.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이긴 겐가? 얘기해 보게."
지셀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뜸을 들였다.
휴베르트는 엉덩이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양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지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캐 두었던 룬스톤을 전부 땅에 박아 넣고 터뜨렸습니다."
"...뭐라고?"
휴베르트는 충격적인 말에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곧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휴베르트가 경악해서 외쳤다.
"이런 미친!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 정도의 양이면 정말 자신들이 우르르 가서... 도와주지는 못해도 다른 방법을 반드시 찾아 줬을 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한테 다 넘기지 그랬나. 그러면 마법사들을 이끌고 갔을 텐데!"
저번 거래 당시 수레 가득 실려 있던 룬스톤을 떠올리며 휴베르트가 한탄했다.
지셀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정말 마법사들을 보내 주실 생각이셨습니까?"
휴베르트는 잠깐 멈칫했다가 곧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든 도와줬지! 그렇고말고!"
어차피 전쟁이 끝났는데 무슨 말을 못 하랴.
비위나 좀 맞춰 주고 룬스톤이나 계속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감 넘치는 말에 지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셀은 뱀처럼 간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탑주의 마음 씀씀이에 정말 감동했습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참 든든하군요."
"커험, 뭘 이런 걸 가지고. 우리가 나름 거래도 튼 사이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내 섭섭하지. 안 그런가?"
"과연 적염의 마탑주다운 배포이십니다. 이렇게 존경스러운 분이었다니, 아무래도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동안 무례하게 행동한 점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거래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지셀이 입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매끈한 말을 쏟아냈다.
휴베르트는 민망한 듯 괜히 헛기침을 했다.
지셀 기분이나 좋으라고 빈말을 던졌는데, 도리어 자신을 띄워 주고 있지 않은가.
그때, 지셀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이렇게 이해심이 넓으시니, 제가 마음 편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곤란했는데.... 서로 마음이 통해서 참 다행입니다."
휴베르트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괜히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손해를 봤던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왜 온 거지?'
마탑과의 계약은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설마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랑하러 온 걸까?
'아니야.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일로 여기까지 올 놈은 아니다.'
저번 거래에서도 느꼈다.
지셀 페르디움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놈이다.
돈도 안 되는 일에 며칠이나 허비하며 수다나 떨고 앉아 있을 놈이 아니란 것이다.
휴베르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뭔가?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건데?"
"아무래도 룬스톤을 더 판매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그 말에 휴베르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90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5)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룬스톤을 못 팔겠다니! 애초 약속하고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왜 부담까지 지면서 마법사들을 파견했는데! 시세의 세 배까지 쳐주지 않았는가?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그러자 지셀은 자신도 매우 곤란한 처지라고 강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다시피 이번에 정말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앞으로도 룬스톤을 노리는 영주들이 많아질 겁니다."
휴베르트는 지셀을 죽어라 노려보았지만,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소문이 난다면 노리는 영주들이 늘어날 수 있겠지."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부족합니다. 룬스톤을 팔면 돈이야 많이 벌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한정된 자원이지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한테 팔라니까? 정 그렇다면 내 시세의 다섯 배로 쳐주지!"
휴베르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지셀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확보해도 병력을 키우고 물자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사이에 누군가가 또 쳐들어오면요?"
"...또 전쟁이겠지."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하기엔, 이미 전쟁이 한번 예상보다 빠르게 터졌다.
휴베르트는 그 어떤 미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셀은 휴베르트의 반응을 확인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래서 책상물림들이란.
"전쟁이 일어나면 룬스톤을 또 터뜨려야겠죠. 대군을 막으려면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
휴베르트의 눈이 뒤집혔다.
"미쳤나? 룬스톤을 또 터뜨린다고? 그렇게 써 대다가는 금세 바닥나고 말 걸세!"
"어쩔 수 없습니다. 저라고 안 아깝겠습니까? 그 돈이면 병사도 키우고 시설도 더 좋게 만들고 영지를 엄청나게 발전시킬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전쟁에서 지면 다 헛일이죠. 도리가 없습니다."
"아,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게!"
"제가 룬스톤을 팔아서 영지가 멸망하는 건 말이 되고요?"
"이이익...."
휴베르트는 대꾸할 말이 없어 이만 악물었다.
지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영지의 존망이 걸려 있는데 돈이나 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룬스톤이 없다면 적염의 마탑도 망하고 말 테니까.
"그럼 룬스톤을 판 돈으로 병력을 마련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대답했지만, 지셀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 탑주님. 어느 세월에 수천의 병력을 모은단 말입니까? 병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영지는 인구도 적다고요."
"용병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나."
"제가 저번에 룬스톤 판 돈으로 북부를 죄다 돌며 용병을 고용했는데, 그게 고작 삼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전에도 이미 이백 명 가까이 고용해서 지금 용병은 씨가 말랐어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죠. 이번에도 수천 명이 쳐들어왔었는데요."
"...."
지셀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돈 좋아하고, 이거 다 팔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거래 이어 가고 싶다고요. 그런데 영지가 멸망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휴베르트는 눈앞이 다 아득해졌다.
그렇다고 영지를 팔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면, 어딜 가든 불명예스러운 자들이라 손가락질당할 터였다.
아니, 그 이전에 페르디움을 떠나면 룬스톤도 사라진다.
"우, 우리가 보증을 서고 최대한 도와주겠네! 룬스톤을 왕실에 상납하고 보호받는 건 어떤가?"
휴베르트가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해결책을 늘어 놓았다.
"아니면 다른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연계하는 건? 신전과 붙는 것도 괜찮고. 델파인 공작의 봉신이 되어도 안전할 거야!"
지셀은 마지막 말에 반사적으로 코웃음을 치려다 참았다.
그들이 적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면 마탑도 바로 태도를 바꿀 테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다른 영주들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긴 뒤 룬스톤을 바치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말리려 들겠습니까."
지셀이 부러 씁쓸한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정말 많이 고민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어차피 계속 벌어질 전쟁, 쳐들어올 때마다 룬스톤을 터트리는 수밖에요."
결국 휴베르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마법사! 마법사들을 더 보내 주겠네! 왕실도, 다른 영주도, 신전도 다 싫으면 우리가 도와줄게!"
그 순간, 지셀은 저절로 치솟는 입꼬리를 손으로 황급히 가렸다. 연기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아....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적염의 마탑에서 강력한 마법사들을 보내 준다면 안심이지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이미 마법사들을 파견했으니, 한배를 탄 상황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언젠가 소문이 나면 결국 영주들도 알게 될 거고."
"그래도 아직 안 걸리지 않았습니까?"
휴베르트가 지셀을 쏘아봤다.
"소문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나?"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지셀이 억울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휴베르트의 매서운 눈초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룬스톤을 폭발시키려면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페르디움 같은 마법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데서 그런 폭발이 일어났으니, 여기에 마법사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분명 파고드는 사람이 나올 거고, 그렇게 되면 언제 마법사들의 정체가 걸릴지 모른다.
핑계를 대면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휴베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룬스톤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뭔가 이놈하고 엮일수록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지셀이 그를 안심시키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절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도 적염의 마탑과 오래오래 같이 가고 싶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지셀이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사들을 더 보내 주신다니, 마탑주의 결단에 감동했습니다."
"크흠, 그러면 룬스톤은 예정대로 파는 건가?"
그러자 지셀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이왕 위험을 부담하시는 거, 조금 더 쓰시죠?"
"뭐? 뭘 더 써?"
휴베르트가 반문하자 지셀은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우리 영지에 마탑의 지부를 세우시는 거죠."
"뭐? 지부?"
휴베르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지부 같은 걸 세우지 않네. 아니, 대륙의 모든 마탑이 그렇지. 마탑뿐만 아니라 초월의 경지를 엿보는 모든 단체가 그렇네. 그 정도는 귀족인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비전을 공유한 자들이 한곳에 모여 서로 도우며 수련해야 경지를 더 빨리 높일 수 있다.
세력을 키우겠다고 여기저기 흩어져 버리면 오히려 더 약해질지도 모른다.
자신들만의 비전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마법사들을 추가로 더 파견해 주신다면 아예 지부를 세우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식으로 지부를 세우는 건 마탑의 설립 의도에 어긋나는...."
"마법사들을 파견한 게 소문날까 봐 불안하시잖습니까. 지부를 세우면 그런 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뭐?"
"마탑이 있는 영지라 교류하는 거고, 보호한다는데 다른 자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휴베르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기에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네. 룬스톤도 가까이서 받을 수 있고 .... 적당히 몇 명 보내서 지부인 척 꾸미면 될 거 같은데?'
지부를 세우면 되는 것을, 왜 그동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경지를 올리는 것에만 정진한다.
처음 마탑을 세웠던 자의 뜻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오면서 불문율이 되었다.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들과 손을 잡으려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옳은 일이라고 모든 상황에서 옳은 건 아니지 않은가?'
전통과 관습이라는 말은 종종 사람을 얽매는 고정 관념이 되곤 한다.
그런데 지셀 페르디움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풀어 버리고, 제 편한 대로 밀어붙인다.
좋게 말하면 깨어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습을 무시하는 짐승 새끼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적염의 마탑을 되살리려면 지셀처럼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전통과 관습을 지키려다 고사당하느니, 뻔뻔하다고 욕 좀 들을지언정 살아남는 편이 훨씬 낫다.
휴베르트는 상념을 이어 가다 상대방의 말소리에 금세 정신을 차렸다.
"싫으시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력을 키우고 안전해졌을 때 룬스톤이 남아 있으면 다시 찾아오죠."
지셀이 돌아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휴베르트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냉큼 일어나 문을 가리고 섰다.
"에이, 지금까지 그랬다는 거지. 탑주인 내가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거야. 어차피 몇 명 더 보내는 거, 전에 보낸 놈들까지 해서 지부를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알포이 녀석 후계자 수업도 시킬 겸."
마법사들은 마탑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의 성취를 우선하는 족속들이다.
룬스톤 공급을 계속 못 받으면 마탑이 망할 텐데, 그렇게 되면 선대의 뜻이고 지랄이고 무슨 소용인가.
이 부분을 설득하면, 장로들이나 일반 마법사들도 군말 없이 동의할 게 당연했다.
"너그러운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지셀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목적은 이뤘군.'
마법사들을 영입하면 영지를 보호하고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도 용병인 것처럼 속여 고용했던 때와는 달리, 당당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마법사는 기사보다 더 육성하기 힘든 인재다.
지셀이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직접 마법사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마탑을 찾아온 것이다.
'룬스톤을 터트리긴, 아깝게 내가 그걸 왜 또 터뜨리냐?'
앞으로 그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룬스톤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함정에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거고.
"크흠, 일단 지부를 세우는 건 처음이라 좀 알아보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네."
"그거야 당연하지요. 알겠습니다."
"페르디움에 적당한 땅은 있는가? 아무리 지부라 해도 마탑이 생기면 사람이 몰릴 걸세. 넓고 교통이 좋고 산수도 좋고 땅도 좋아야 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마탑의 주변 환경은 마탑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자리로 드리죠. 그런데 페르디움이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 영지로 오라더니 페르디움이 아니라고?
이놈이랑 대화하면 도무지 어느 쪽으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디로 오라는 말인가?"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펜리스 남작령. 제가 영주로 있는 곳입니다."
"영주? 자네가 영주우?"
이놈이 영주라니, 왕국이 망할 징조인가?
휴베르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91화 그게 오늘이었어? (1)
휴베르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정말? 진짜 자네가 영주...가 됐다고?"
"네, 이번 전쟁을 통해 페르디움이 디갈드 백작령을 차지했고, 그 공으로 펜리스 남작령을 봉토로 받았습니다. 남작령 세 개를 통합해 백작령의 절반에 달하는 크기입니다."
"허, 정말 자네가 영주라니...."
마탑주쯤 되면 남작 정도야 우습게 볼 정도로 대우받지만, 어쨌든 상대가 영토와 작위를 얻어 귀족이 되었다면 당연히 예우를 갖춰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로 막 지내던 사이에 갑자기 예의를 차리려니 조금 민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작위가 있는 상태로 만났다면 모를까, 갑자기 예우를 갖추려니 꼴이 우스워진 것이다.
"크흠, 어쨌든 축하하네."
당황하긴 했지만, 마탑주는 백작위와 동급의 대우를 받는 위치다.
휴베르트는 꿀릴 게 없으니 그냥 평소처럼 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걸 모른 척하고 있을 지셀이 아니다.
그는 다리를 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됐지만,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대해 주셔도 됩니다. 제가 뭐 백작 같은 고위 귀족도 아니고, 나이도 젊지 않습니까? 그 전까지는 그냥 하시던 대로 하셔도 됩니다."
백작이 된 뒤에도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휴베르트는 입술을 비죽 내밀며 답했다.
"그래, 편하게 지내자고. 지금까지처럼."
제발 남작에서 끝나고 더 이상 지셀의 작위가 올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쨌든 이제 진정으로 한배를 타게 생겼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내린 결정,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휴베르트와 지셀이 손을 내밀고 악수했다.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적염의 마탑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말라 죽느니 차라리 이 젊은 친구에게 한번 걸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본인 입으로 말한 거라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대범한 전략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는가?
아까운 룬스톤을 폭발시킨 건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놀라웠다.
지셀은 원하는 걸 얻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준비가 다 되면 연락을 주시지요."
"알겠네. 우리도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 조심해서 가시게."
마탑을 벗어나며 지셀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게 적염의 마탑이 살아날 유일한 길입니다.'
전생에 적염의 마탑은 진홍의 마탑이 부린 수작에 걸려 망했다.
결국 델파인 공작의 손에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홍의 마탑주 델무드를 키운 건 델파인 공작가니까.
* * *
지셀은 페르디움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짐을 챙기고 자기 사람들을 빠짐없이 모았다.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바네사와 마법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며 빠르게 말했다.
"길리언, 사람들을 이끌고 먼저 펜리스로 가 있어. 영지 운영은 기존 행정관에게 그대로 맡기고, 카오르와 함께 치안에 신경 쓰도록."
이제 드디어 펜리스 영지로 떠날 거라 예상하고 있던 사람들은 예상과 다른 명령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자님... 아니, 영주님께서는 같이 안 가십니까?"
"응, 나는 잠깐 들를 곳이 있어. 호위로 용병들 몇 명만 데리고 갔다 올 거야."
"또 어디를 가시려고요? 영지는 아예 내팽개치시는 거예요?"
"영지를 운영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야. 일단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지."
"어디로 가실 건데요?"
"세이론 왕국의 오스턴 영지."
세이론은 루타니아의 서쪽에 붙어 있는 왕국이다.
디갈드에서 길게 내려온 산맥을 피해 남서쪽으로 국경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나라.
그러나 오스턴 영지는 변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이론의 수도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벨린다는 뜬금없는 말에 팔짱을 끼고 지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라는 영지는 안 가고 이번에는 외국을 간다니,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벨린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짧게 외쳤다.
"아, 오스턴 영지면 도박으로 유명한 도시잖아요! 설마 도련님 도박하러 가시는 거예요? 예전에 도박 좋아하셨잖아요."
도박이라는 말이 나오자 용병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경멸하며 혀를 찼다.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야. 아는 사람을 좀 데리고 오려고 가는 거야."
"누군데요?"
"영지의 행정을 맡길 사람. 아주 머리가 좋은 놈이 있거든."
"영지 행정을 외부 사람한테 맡긴다고요?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응, 아주 잘 아는 놈."
그렇게 말하는 지셀의 눈빛에는 왠지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벨린다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지셀이 외국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정말, 무슨 일을 하든 수상스러운 사람이었다.
"영주님, 전에 로웰이란 자를 감옥에 가두지 않았습니까. 영지의 행정에 관해 묻는다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놈은 감옥에서 조금 더 고생하라고 내버려 둬. 죗값을 치러야지. 나중에 직접 보고 꺼내든지 할 생각이야."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오스턴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예전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애들 관리해야지."
"토란에게 맡기면 괜찮을 겁니다."
토란은 마수의 숲 때부터 따라다녔던 나이가 좀 있는 용병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연배가 비슷하군.'
전쟁을 겪으며 두 사람이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길리언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러면 길리언하고 몇 명만 같이 가자. 여럿이 몰려가면 국경에서부터 막힐 거야."
"저요! 도련님, 저도 해외여행 갈래요!"
"놀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도련님이 노는지 감시하러 갈래요!"
벨린다는 짐을 챙겨야겠다며 얼른 자리를 떴다.
지셀은 혀를 차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벨린다가 저러기 시작하면 말릴 수가 없다.
길리언의 지시를 받은 토란도 용병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지셀이 바네사를 붙잡고 말했다.
"누가 괴롭히면 꼭 말해라. 마음에 담아 두면 안 돼. 알겠지?"
"네, 네. 알겠습니다."
바네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사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알포이마저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다.
"자, 그럼 며칠 뒤에 보자고."
"영지에서 뵙겠습니다."
지셀은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넘기고 바로 말을 박찼다.
짐을 챙기던 벨린다가 화들짝 놀라 그의 곁에 붙었다.
"아니, 뭐가 그렇게 급해요? 약속이라도 잡아 두셨던 거예요?"
"그놈이 손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만나야 하거든. 사정이 좀 있는 놈이야."
"손모가지요...?"
"응. 도박장에 사는 놈이라 언제 잘릴지 몰라."
벨린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행정 맡기실 거라면서요. 영지 걸고 도박하면 어쩌시려고 도박쟁이를 찾아가세요?"
"괜찮아, 그래도 나름대로 착한 놈이거든."
벨린다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도박 빼고 다 잘하는 놈이니 두고 봐. 도박만 못해, 도박만."
지셀은 낄낄대며 단언했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간 급한 일들 때문에 영입을 뒤로 미뤘지만, 이제는 꼭 데려와야 할 인재였다.
'곧 보겠구나, 클로드.'
클로드는 전생에 그의 참모를 맡았던 자였다.
용병왕 휘하의 용병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을 모두 이끌고 보살피던 놈이니, 그 이상 믿고 행정을 맡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뿐인가, 전쟁 때는 신출귀몰한 전략을 펼쳐 적진에서도 탐내는 참모 중의 참모였다.
싸움도 못하면서 거친 용병들에게 독설을 아끼지 않고, 심지어 지셀에게도 사사건건 덤볐던 성질 더러운 놈.
그래도 그 덕분에 일개 용병단은 왕국과 일 년이나 전쟁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전생에는 녀석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지.'
아무리 뛰어난 전술, 전략을 짜낸들 근거지도 없는 용병단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다르다. 영토도 얻었고 세력도 키울 참이었다.
그런 팍팍한 환경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던 클로드다. 이번에는 훨씬 더 크게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이번 생은 도박으로 허무하게 인생을 날리지 마라.'
전생에 클로드는 용병단에 합류했을 때 이미 손 하나가 없었고, 한쪽 발목의 힘줄까지 끊어져 있었다.
그 꼴이 되고서도 도박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전생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클로드가 다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 * *
며칠을 달려 오스턴에 도착하자마자 지셀은 오스턴에서 가장 큰 도박장을 찾았다.
설명도 없이 일단 행동하고 보는 지셀에게 익숙해진 일행들도 별다른 말 없이 뒤를 따랐다.
[크라켄 게임장]
간판에 달린 커다란 문어가 번쩍거렸다.
겨우 간판에다 비싼 마법 등을 잔뜩 달아 놓은 것만 봐도 이 도박장이 얼마나 돈을 쓸어 담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도박 도시 오스턴의 중심이었다.
벨린다와 용병들이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치장된 도박장 주위에 주점들이 즐비하다.
"도련님! 여기 정말 대단한데요? 완전 놀기 좋아 보여요!"
도박 도시라는 말에 혹해 따라온 고든도 손을 비비며 웃음을 지었다.
"후훗, 이거 도박장을 보니 피가 끓는군요. 오랜만에 실력을 좀 발휘해 볼까요?"
지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서라.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여기서 안 통해. 죄다 사기꾼들이거든."
"도련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와 봤어요?"
"뭐, 예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지."
"영지에만 있었잖아요. 대체 언제 와 본 거예요?"
"있어. 아주 예전에."
전생에도 클로드의 문제를 해결해 주러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이미 잃은 손은 못 찾아 주지만, 그 원인이라도 해결해 주려고.
이왕 온 김에 휴식도 취할 겸 도박을 즐겼는데....
그날 크라켄 도박장은 멸망했다.
대륙 7강, 용병왕에게 사기를 치다가 박살 났으니 누가 감히 항의나 할 수 있을까.
세이론 왕국에서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그놈을 찾아 보자."
벨린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인상착의는 아세요? 저번에 길리언 아저씨 찾을 때도 얼굴을 몰라서 한참 찾았잖아요."
"그냥 저기서 기다리면 돼. 아마 지금도 저 안에 있을지도?"
전생에 클로드는 매일 크라켄 도박장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대필이나 글 선생 노릇을 하며 푼돈을 벌고, 조금 돈이 생기면 다시 도박장에서 잃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용병단에 가입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으니, 주변에서 좀 기다리면 나타날 것이다.
지셀 일행은 도박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곳곳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흠, 뭐 싸움이라도 났나?"
지셀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직원인 듯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귀빈실로 가시겠습니까?"
직원은 지셀의 복장과 호위들을 보고 바로 귀족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도박장 직원답게 눈썰미가 좋았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별로인데 무슨 일이 있나?"
"별일 아닙니다. 소란이 좀 있었습니다. 도박장에서야 흔한 일이죠."
"그야 그렇지."
돈 가지고 노는 곳이니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지셀이 그러려니 넘어가려는 순간, 옆자리에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클로드 그 새끼, 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손목 하나는 잘리겠지?"
"당연하지. 상대를 잘못 골랐어. 다른 건 몰라도 배포 하나는 인정해 줘야지. 으하하핫!"
"그래도 클로드가 손장난 칠 놈은 아니었는데. 나름 배운 놈이잖아?"
"에이,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배운 놈이라도 도박에 빠지면 다 그렇게 돼."
찾으러 온 사람과 같은 이름이 나오자 지셀은 굳은 표정으로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사고 쳤다는 사람이 클로드야? 머리 좋게 생겼는데 눈은 썩은 생선 같은 놈."
직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맞습니다. 안면이 있으십니까?"
"무슨 사고를 쳤는데?"
"이 동네에서 유명한 뒷골목 패의 두목에게 손장난을 치다가 걸려서 지금 끌려갔습니다."
"혹시... 그 두목 이름이?"
"크랭크라 불리는 자입니다."
두목의 이름을 듣자마자 지셀은 황당해하며 내뱉었다.
"그게 오늘이었어?"
92화 그게 오늘이었어? (2)
지셀은 크랭크란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클로드가 술을 마실 때마다 자기 손목 자른 놈을 욕해 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그날일 줄이야!
"급한 상황이니 당장 크랭크란 놈한테 안내해라.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그러자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안내는 다른 분을 찾아 보시...."
"어이, 귀족 나리. 보아하니 다른 동네에서 온 모양인데, 우리 두목은 왜 찾으쇼?"
그때, 옆자리에서 들려온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직원의 말을 끊었다.
지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건달 세 명이 테이블에 건들거리며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주변을 정리하던 놈들이었다.
그는 건달들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당장 너희 두목을 좀 만나야겠다."
"나리가 누군지 알고 두목한테 함부로 안내합니까? 정체도 모르는데."
"급하다. 사례는 충분히 하지."
"뭐, 그렇게 급하시다면야.... 심부름 값부터 먼저 치러 주시면 어떻게 될 것도 같고요. 여기 풍습이 그렇습니다요."
셋 중 가운데 앉은 사내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흔들었다.
지셀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던졌다.
"빨리 움직여라."
그의 눈에 조금씩 살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사내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어휴, 이왕 쓰신 거 조금만 더 쓰시지요. 이 동네는 물가가 좀 높습니다."
양옆에 앉아 있는 다른 놈들이 맞장구를 치듯 킥킥 웃었다.
스각!
"어?"
그 순간, 무언가 스쳐 지나간다 싶더니 사내의 손목이 순식간에 잘려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고, 테이블 위는 피범벅이 되었다.
"장난은 때를 가려서 해야지."
지셀이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제야 양옆에 있던 자들이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지만, 용병들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콰아앙!
두 사람은 목덜미를 눌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다, 당신들 지금 무슨...."
손목이 잘린 사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셀이 그의 목을 낚아챘다.
"크윽!"
"클로드는 어디로 데리고 갔지?"
"도, 도축 창고로 끌고 갔습니다! 오스턴 외곽에 있습니다. 끌려간 지 얼마 안 됐습니다!"
푸욱!
지셀은 사내의 어깨에 검을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안내해라. 늦어서 클로드의 손목이 잘리면 너희 모두 다 나한테 죽는다."
지셀은 놈의 목을 움켜쥔 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사내가 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곧장 걷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빈민가나 다름없는 지저분한 외곽 지역에 들어섰다.
관광객들이 복닥거리는 번화가와 달리 싸구려 술집과 험상궂은 자들이 가득한 곳.
그중에서도 유독 큰 건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지셀에게 잡혀 있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적이야! 적! 살려 줘!"
건물 앞에는 험상궂은 사내들 십수 명이 모여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벌떡 일어나 무기를 틀어쥐었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일단 조져!"
건달들이 달려들자, 지셀은 길잡이로 삼았던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길리언, 전부 제압해 둬. 안의 상황을 보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용병들과 건달들이 맞붙은 사이 지셀은 빠르게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 * *
도축 창고 곳곳에 동물의 사체들이 걸려 있었다.
짐승 특유의 누린내와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했다.
건달 두목 크랭크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도끼질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 앞에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초췌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행색이지만 그 얼굴에서만큼은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오스턴 주변에서 '도박장의 꼴통 현자'로 불리는 인물. 바로 지셀이 찾고 있던 클로드였다.
꽁꽁 묶인 채 도끼질을 당할 상황임에도, 클로드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아닌 피곤함만이 가득했다.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권태롭고 갈라진 목소리가 창고에 울렸다.
"누가 시켰지?"
"시키긴 누가 뭘 시켜? 손장난을 치다가 걸린 건 너잖아. 난 그냥 법도대로 네 손목을 자르는 것뿐이지."
그러자 클로드는 가당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난 사기 친 적 없어. 뒷골목에서는 왕 노릇 하는 것치고는 시시한 놈이네. 사실을 밝힐 배짱은 없나 보지?"
"이 새끼가...."
크랭크는 이를 악물었다.
말을 더 섞어 봤자 짜증만 나니 빠르게 작업하고 갖다 버리는 게 낫겠다.
"야, 도끼 가져와."
곁에 있던 수하가 손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크랭크는 클로드의 손목을 가리켰다.
"적당히 잘라 봐."
"어디를요?"
"어디겠냐.... 됐다, 내놔."
크랭크는 수하의 손에서 도끼를 휙 뺏어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손가락 정도로 봐주마."
하지만 클로드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다.
도리어 크랭크를 짜증스럽게 노려보며 내뱉었다.
"자를 거면 빨리 잘라. 너 같은 놈하고 대거리하기도 귀찮다."
"그래, 어디 한 군데 잘려 보면 더는 그 주둥아리도 못 놀릴 거다!"
입술을 실룩거린 크랭크가 도끼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 적이야! 적! 살려 줘!
그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크랭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창고 입구를 돌아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나가서 확인해 봐."
근처에 있던 수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콰아앙!
문이 박살 나며 지셀이 창고 안으로 짓쳐들어왔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지셀은 크랭크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 움직이면 죽는다. 그대로 있어라."
건달 하나가 지셀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이 새끼야!"
건달이 단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런 어설픈 칼질에 당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지셀은 무심히 손을 뻗어 단검을 움켜잡았다.
콰직!
단검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자 건달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반칙이지! 누가 맨손으로 칼을 부숴!"
"그런 사람 여기 있네. 귀찮으니까 좀 자라."
콰아앙!
지셀이 벌레 쫓듯 대충 손을 휘둘렀다.
건달은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코와 이빨이 모두 박살이 난 채로.
크랭크가 다급하게 외쳤다.
"뭐 해, 이 새끼들아! 한꺼번에 쳐!"
창고에 있던 십여 명의 건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지셀은 그들을 노려보며 손을 뻗었다.
하나하나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끌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덜컥!
마나의 실이 건달들을 묶었다.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우드득!
"끄아아아악!"
지셀이 주먹을 쥐자, 건달들은 모조리 팔다리가 꺾여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뭐, 뭐야!"
크랭크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그도 별별 험한 꼴 다 보고 살았지만, 이런 괴상한 현상은 난생처음 보았다.
"마, 마법사인가?"
직접 주먹질하는 걸 보면 기사 같지만, 기사가 이런 기괴한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표정을 굳히고 있던 클로드도 눈을 크게 떴다.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많이 봤지만, 저런 기술을 쓰는 자는 없었다.
클로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날 구하러 온 건가?"
"그래."
"대체 왜? 나하고 모르는 사이잖아."
"이제부터 알아 갈 사이라고 해 두자."
클로드가 미친놈을 다 봤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지셀이 낄낄 웃으며 클로드를 의자에서 풀어 주었다.
"루타니아 왕국의 지셀 펜리스 남작이다. 편하게 지셀이라고 불러."
그때, 멍청히 보고 있던 크랭크가 뒤늦게 떠듬거리며 끼어들었다.
"타, 타국의 귀족이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아무리 귀족이라도 이렇게 마음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말하는 크랭크 자신도 과연 이자가 말을 들어줄지 의심스러웠다.
오스턴에서 향락을 즐기는 건 비단 평민들만이 아니다.
괜히 놀이터를 잃을 수 있으니 소란을 일으키지 말자는, 귀족들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자는 그런 건 아랑곳없다는 듯 다짜고짜 쳐들어왔다.
그런 자가 말한다고 순순히 물러날까?
크랭크의 생각대로였다.
지셀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클로드를 데리고 가겠다."
"그, 그놈은 손장난을 쳤습니다. 그런 놈은 손목을 자르는 게 이곳의 법입니다."
"까불지 마라.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왔을 거 같냐?"
억울하게 손발이 잘렸다는 클로드의 한탄을 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크랭크는 곁눈질로 박살 난 문밖을 훔쳐보았다.
수하들이 죄다 쓰러지거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지셀이 다가와 어깨를 지그시 잡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이만 돌아갈게. 클로드의 손목이 아직 붙어 있으니 너희 목도 붙여 놔 주지. 이 정도면 대가로 충분하지 않냐?"
뱀 같은 시선이 크랭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 알겠습니다."
크랭크는 몸을 떨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많은 사람의 피를 보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놈은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눈치가 빨라서 좋네."
지셀이 히죽 웃으며 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크랭크의 손에 쥐여 줬다.
"부하들 치료비야. 남은 건 술도 마시고 해."
"...감사합니다."
크랭크는 겁에 질려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지셀은 그대로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크랭크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왜, 왜 또 그러십니까!"
지셀이 새파랗게 질린 크랭크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감시도 그만둬. 곧 떠날 사람이니까."
살기 어린 목소리에 크랭크는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지셀은 멱살을 놓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다시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 많아. 수고해라."
"사, 살펴 가십시오."
클로드는 지셀을 뒤따라가며 크랭크를 힐끔거렸다.
크랭크가 저렇게 겁을 먹은 건 처음 봤다.
뒷골목 패거리 중에서도 가장 강한 놈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지셀을 바짝 뒤쫓아 갔다.
지금도 손이 잘릴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는데, 괜히 이상한 일에 얽히는 건 사양이었다.
바깥의 시원한 공기를 맡으니 풀려난 게 실감이 났다.
클로드는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구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 같은 놈을 뭐 하러 구해 준 거지? 굳이 힘써 줄 가치도 없는 놈인데."
자조적인 말에 지셀은 클로드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퀭하니 죽은 눈, 초췌하고 힘이 없는 표정.
썩은 나무 같은 몰골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잃은 인간이라는 게 여실히 보였다.
지셀은 길리언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 길리언도 딱 이런 얼굴이었다.
지셀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아니, 이유야 뭐든 상관없겠지. 이왕 이리된 거.... 술 한잔 사 줄 수 있어?"
93화 그게 오늘이었어? (3)
구해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대충 하고 술 좀 사 달란다.
길리언은 그 뻔뻔한 행동에 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예의를 지켜라. 이분은 루타니아 왕국의 펜리스 남작님이시다."
그러자 클로드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 원래 이런 꼴로 사는 놈인데. 마음에 안 들면 죽이든가."
길리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배 째라고 달려드는 태도가 묘하게 익숙했다.
지셀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도 저런 눈빛이었으리라.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지셀은 클로드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클로드가 왜 저러는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굳이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은 대답 없이 히죽 웃기만 했다.
하지만 지셀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지셀을 따르는 자들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손목 잘릴 뻔한 사람을 구해 줬으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감사한 줄 모르고 뻗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장은 저런 놈을 뭐 하러 만나러 온 거지? 그냥 도박 중독자 같은데.'
'구해 준 사람한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지셀은 그 기색을 읽고 클로드를 옹호했다.
"이 친구가 지금 좀 힘들어서 그래. 큰일이 있었거든. 얘 많이 아파."
그러자 클로드는 도리어 표정이 굳었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안다고? 대체 너 누구야?"
"뭐, 그냥 소문을 들었을 뿐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소문을 들었다는 말에 클로드는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라 해 봐야 글 선생, 아니면 도박 중독자라는 것 정도다.
그런데 지셀은 클로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에헤이, 긴장하지 말라니까. 술 마시고 싶어? 그럼 내가 좋은 걸로 한잔 사 줄게."
지셀이 괜히 친한 척하며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클로드는 얼굴을 구겼다.
건달 놈들한테서 겨우 풀려났는데, 이번에는 웬 이상한 귀족 놈이 달라붙었다.
빠져나가려고 시도해 봤지만, 맨손으로 검을 부러트리는 사람에게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클로드는 우거지상을 한 채 지셀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용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그 뒤를 따랐다.
지셀이 나서서 클로드를 옹호하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단 한 사람, 벨린다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어디서 저렇게 특이한 사람들만 찾아내는지.'
지셀이 영입한 사람들은 전부 다 뭔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일부러 하자 있는 사람들만 찾아다녀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다 하다 이제는 도박 중독자야?'
벨린다는 지셀이 주변에 모아 놓은 사람들의 면모를 하나씩 떠올리다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도련님 주변에 정상은 나밖에 없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셀 뒤를 종종 쫓아갔다.
자신도 절대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은 깔끔히 무시한 채.
* * *
지셀은 클로드를 이끌고 화려하게 꾸며진 술집으로 들어갔다.
"다들 편하게 앉아서 한잔들 해. 나는 이 친구와 따로 얘기 좀 하지."
용병들은 희희낙락하며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길리언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바로 조를 나눠 경계를 세우고, 취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용병들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길리언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클로드를 잡아끌어 구석에 앉혔다.
고급술과 안주가 잔뜩 나오자 클로드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직접 보니 상태가 더 안 좋군.'
지셀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클로드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손목이 잘릴 뻔했는데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겨우 술 하나에 격하게 반응한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손목도 무사하고, 이런 고급술까지 얻어먹다니 오늘 내가 복이 터진 모양이야. 잘 마실게."
클로드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술을 들이켰다.
지셀도 그와 속도를 맞추어 말없이 잔을 비웠다.
그들은 술이 떨어질 때마다 다시 주문해 가며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마나를 다룰 줄도 모르고 체력도 약한 클로드가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불콰해진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술을 잘 마시는군. 눈을 보면 술을 즐기는 성격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시는 정도지. 그래도 비싼 와인은 꽤 좋아해. 레드 드래곤 같은 거 말이야."
"하, 왕도 마시기 힘든 걸 좋아한다고? 허세는.... 뭐 어쨌든 할 말이 있어서 구해 주기까지 한 거 아닌가? 왜 아무 말도 없어?"
지셀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클로드가 투덜거렸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도박이라도 알려 줘?"
"도박도 잘하는 사람한테 배워야지. 너한테 배우고 싶지는 않아."
"제기랄, 반박할 수가 없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꺼져. 왜 나를 찾아와서 구해 준 거지?"
지셀은 자세를 고쳐 앉고 클로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빙빙 돌리는 대화는 좋아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한테 영지의 행정을 맡기고 싶다."
클로드는 제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하듯 잠시 눈만 깜박이다, 곧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 도박 중독에다 술에 절어 사는 나한테 영지를 맡기겠다고?"
"그래."
"와, 나도 미친놈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쪽은 더 심각하네. 농담이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내 용건이다.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은 네 몫이다."
지셀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황당해하던 클로드는 술을 몇 잔 더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솔직히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어.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거든."
"...."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꿈도 없고 희망도 없지."
클로드가 술잔을 벌컥 비우고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나도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었지.... 하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이제는 돈도, 건강도, 지식도 모두 잃었어.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클로드의 눈빛이 점점 더 죽어 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의욕마저 사라진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를 따라가서 영지를 맡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일자리도 얻고.... 거기다 제법 높은 자리잖아? 나 같은 놈이 감히 거절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
"그런데 나는 여기를 못 떠나. 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거든.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내가 그 족쇄를 끊어 주지."
잠자코 클로드의 넋두리를 들어 주던 지셀이 툭 내뱉었다.
일말의 고민조차 없는 지셀의 태도에 클로드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세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야. 그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아직 모르나 보네."
지셀은 술잔을 탁 내려놓고 클로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심유한 눈빛이었다.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룬다. 설사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그 외에는 생각할 필요 없지."
클로드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지껄이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할 뿐이야. 좋아, 내가 널 따라가면 뭘 해 줄 수 있지?"
"원하는 걸 말해 봐."
"돈. 아주 많이 필요해. 돈 많다는 귀족들도 부담스러워하는 금액이지."
그러자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돈이면 돼? 그건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인데. 더 필요한 건 없고? 누구 좀 죽여 달라든가."
"까불지 마라."
클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 문제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해결하지 못한다면 돈이 부족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통 이 말은 턱이 빠질 만큼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클로드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애송이가 부리는 허세겠지.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이성과는 달리 클로드의 눈빛은 점점 기이한 열망에 물들고 있었다.
모든 걸 잃고 나락까지 떨어진 인간의 눈앞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설령 그게 가짜더라도 한 번쯤은 붙잡으려고 시도해 볼 것이다.
클로드가 조금 빈정대듯 물었다.
"펜리스 남작이랬나?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영지가 부자인가 본데.... 남작이 돈이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어. 돈이 쉬운 문제라고 했지? 그렇게 돈이 많으면 나한테 좀 빌려줘. 아니, 내 몸값은 아주 비싼데 살 마음이 있어?"
옆 테이블에서 대화를 훔쳐 듣던 벨린다가 눈을 찌푸렸다.
사람도 구해 줘, 술도 사 줘, 영지 행정까지 맡긴다는데 거기다 돈부터 내놓으라니!
그것도 제 입으로 몸값이 비싸다고 뻔뻔하게 지껄인다.
보나 마나 뻔했다. 수작을 부려서 돈을 뜯어내고는 술과 도박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겠지.
벨린다는 당연히 지셀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지셀은 호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약혼녀에게도 2만 골드를 뜯어내는 사람이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지셀의 답변은 전혀 딴판이었다.
"좋아. 나는 네 생각보다도 돈이 많은 사람이거든. 얼마나 필요하지?"
아버지와 가신들이 그렇게 돈을 달라고 해도 쉽사리 주지 않았던 도련님이 저렇게 흔쾌히 대답하다니.
'그냥 적선하는 셈 치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벨린다는 화를 삭이며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튀어나온 말은 더 놀라웠다.
"2천 골드가 필요해. 그만큼 줄 수 있어? 남작령이라면 만만치 않은 금액일 텐데?"
벨린다가 휙 두 사람 쪽을 돌아보았다.
지셀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란해하는 듯도, 한심해하는 듯도 한 표정이었다.
클로드는 그 표정을 보고는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왜. 한 20골드 정도일 줄 알았어? 내가 너같이 허세 가득한 귀족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표정 보니 빤하네, 지금 머리 복잡하지?"
벨린다는 더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지금 장난해요? 한 몇 골드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얼마요? 2천 골드으?"
앞서 호언장담한 게 있으니 지셀 본인이 못 주겠다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체면을 깎아 먹는 일이니까.
벨린다는 지셀에게 거절할 핑계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색하게도, 지셀의 입에서는 그가 한 말이라 믿을 수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5천이 아니라 2천 골드? 뭐야, 얼마 안 하네."
94화 그게 오늘이었어? (4)
클로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장난하지 마라! 사람을 이따위로 희롱해?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냐!"
하지만 지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준다는데 왜 그래? 난 그냥 생각보다 금액이 적어서 놀랐을 뿐이야."
전생에 클로드에게 몇 번이나 들었으니 확실했다. 그때는 분명 5천 골드였다.
'하긴, 시간이 꽤 흐른 뒤였으니까. 가격이 다를 수도 있겠네.'
"금액이 적다고? 이게 끝까지...."
클로드는 이를 악물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무슨 심보로 이따위 장난을 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좋아, 자신만만하군그래. 그러면 지금 당장 내놔."
클로드가 비아냥거렸지만, 지셀은 기분 상한 티 하나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 그거면 되나?"
'끝을 모르네. 집요한 놈.'
클로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지셀의 장난질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2천 골드가 적어? 그럼 5백 골드만 더 줘. 이 몸이 일해 주는 값으로 그 정도면 싸지."
벨린다는 갈수록 뻔뻔해지는 요구에 인상을 쓰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예의도 없고, 양심도 없고. 손목이 아니라 목을 잘라도 시원치 않은 인간이었네."
정말로 클로드의 목에다 단검을 꽂을 기세였다. 지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해, 벨린다. 앞으로 우리 영지에 필요한 사람이니까."
"아니, 도련님! 저런 자를 그냥 봐주시려고요?"
벨린다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성질을 냈다.
"그만."
묵직한 지셀의 목소리에 벨린다는 입을 앙다물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벨린다가 저리 화를 내니 심부름을 보내기도 어려웠다.
지셀은 쓴웃음을 지으며 길리언을 불렀다.
"길리언, 오스턴에서 가장 큰 상단에 가서 사람을 데리고 와. 신용장을 발행하겠다고 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런 인물에게 그런 큰돈을 줘도 되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지금껏 어지간하면 토 달지 않고 지셀이 하라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번에는 그가 봐도 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길리언,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어땠지? 길리언이 지금 이 친구와 다를 게 있었나?"
그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길리언은 더 심각했다.
도박장이라도 나다니는 클로드에 비해, 길리언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셀의 가장 큰 힘이고, 없어서는 안 될 수하가 되었다.
그 말뜻을 이해한 길리언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자신의 주군은 단 하나도 허투루 행동하는 법이 없었다.
분명 저 도박쟁이에게서도 자신들이 못 보는 무언가를 봤으리라.
벨린다 역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났다.
'저 아저씨는 그래도 체격이라도 좋았잖아. 도련님은 대체 뭘 보고 저놈을 이렇게 믿는 거지?'
클로드는 팔짱을 낀 채 어수선해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화가 나는 걸 넘어서 기가 막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망신을 줘야 속이 좀 풀릴 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리언이 한 사람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클로드는 술집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알아보고 흠칫 놀랐다.
'어? 저 사람은?'
남자는 오스턴에서 가장 큰 상단의 부단주였다.
액수가 크니 부단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움직인 것이다.
'이 새끼들이 무슨 장난을 이렇게....'
장난치고는 스케일이 상당히 크다. 저만한 인물을 데리고 오다니.
'이 뒤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지셀이 세이론 왕국의 귀족이었다면 아무 조건 없이 신용장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체면 때문에라도 상단의 돈을 떼먹을 염려는 적으니까.
하지만 타국의 귀족은 사정이 다르다.
담보도 없이 신용장을 발부해 줄 정도로 상단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뭘 맡기려고? 어지간한 보석도 2천5백 골드는 안 되는데.'
그가 보기에 지셀은 그리 부유해 보이진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은 깔끔했지만 그리 고급스러운 재질도 아니고, 비싼 장신구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놈도 그런데, 그 수하라는 자들이야 볼 것도 없었다.
아마 상단 부단주는 담보가 없으면 곤란하다며 그대로 돌아가 버리겠지.
클로드는 망신당할 지셀을 상상하며 속으로 낄낄댔다.
그때였다.
'어?'
용병 하나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테이블 위에 웬 돌덩이 하나를 턱 올려놓았다.
돌은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푸른 빛을 눈에 담았다.
상단의 부단주는 룬스톤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
"오오, 이거 정말 상급의 룬스톤이군요. 혹시 더 없으십니까? 가격은 시세보다 잘 쳐 드리겠습니다. 오스턴만이 아니라 이 주변에서는 저희 상단이 최고입니다."
'어?'
클로드는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부단주의 눈빛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갖 물건을 다루어 봤을 그가 저 정도로 탐을 낸다는 건, 그만큼 지셀이 내놓은 룬스톤의 품질이 좋다는 뜻이었다.
'지, 진짜인가?'
그때 지셀이 귀찮은 듯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더 팔 생각은 없으니까 빨리 일이나 마무리해라."
"그러지 마시고.... 제가 정말 가격 잘 쳐 드리겠습니다. 다른 상단 가셔도 저희만큼 비싸게 사 주진 않을 겁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애타는 얼굴로 지셀을 집요하게 잡고 늘어지던 부단주는 용병들이 무기를 꺼내자 그제야 혀를 차며 가방을 열었다.
신용장을 써 내려가는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 표정을 보고 클로드가 외쳤다.
"자, 잠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클로드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 거면 2천 골드랑 5백 골드, 두 장으로 해 줘. 가능해?"
벨린다는 입술을 비죽거렸고 부단주는 지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도 되냐는 물음이었다.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줘."
"이게 마법 처리가 된 종이라 본래는 그렇게 안 해 드리는데.... 큰 금액을 거래해 주시니 추가금 없이 해 드리겠습니다."
부단주는 혹시나 지셀과 거래를 틀 수 있을지 기대하며 선선히 클로드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최대한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음에 꼭 저희 상단을 찾아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지셀에게 허리를 숙이며 아부를 떨었다.
결국 용병들이 참다못해 노려보고 나서야 부단주는 자리를 떴다.
무려 2천5백 골드나 되는 신용장을 남겨 두고.
"가져가라."
지셀이 탁자 위에 놓인 신용장 쪽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클로드는 눈을 크게 뜨고 지셀과 신용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돈을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말로 돈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셀은 그런 큰돈이 왜 필요한지 묻지도, 어떻게 갚을 건지 따지지도 않았다.
클로드는 손을 벌벌 떨었다.
'내, 내가 몇 년 동안 그렇게 바라던 일이 이렇게 쉽게... 이뤄졌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부단주까지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2천 골드면 평범한 사람이 평생 놀고먹으며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다.
아무리 부유한 귀족이라도 쉽게 내밀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애송이는 한낱 도박쟁이에게 그 큰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넨 것이다.
클로드는 이 돈을 어떻게든 마련하기 위해 몇 년을 도박장에서 살았다.
그렇게 노력해도 이루지 못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경악으로 가득 찼던 마음속에 서서히 허무감이 차올랐다.
멍하니 서 있던 클로드가 퍼뜩 놀라 고개를 저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려 했던 돈을 드디어 구했는데 자존심이 대수랴.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클로드는 신용장을 덥석 집어 품에 쑤셔 넣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문 앞까지 다가간 그는 지셀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술집을 박차고 나갔다.
마치 도망가는 것처럼.
반신반의하며 그를 지켜보던 용병들이 벌떡 일어났다.
"저놈 잡아라! 도둑이야!"
벨린다가 기겁하며 따라가려 했지만, 지셀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왜 잡아요! 저놈이 돈만 들고 튀잖아!"
"괜찮아. 어디로 갈지 알고 있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벨린다와 용병들이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갔는지 아신다고요? 아, 도박장이에요?"
"아니, 이번에는 다른 곳이다."
지셀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저놈이 혼자 처리할 수는 없을 테니 따라가자."
클로드는 지금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제대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힘없는 자가 그런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술집을 나섰다.
이미 거리에서 클로드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지셀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일행은 오스턴 영주의 성 앞에 멈춰 섰다.
"도련님, 여기는?"
"그래, 오스턴 남작의 성이다."
지셀이 예상한 대로, 클로드는 성 앞을 지키는 경비병과 실랑이 중이었다.
"약속대로 돈을 가지고 왔다고! 영주를 만나게 해 줘!"
"아니, 영주님이 네 친구냐? 다짜고짜 들어가겠다고 하면 들여보내 줄 것 같아?"
"영주가 내건 약속이야! 당장 전하라고!"
"알겠으니까, 얌전히 기다려."
영주는 만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미리 이야기된 바가 있었는지, 클로드는 당당하게 악을 쓰고 있었다.
경비병 하나가 소식을 전하러 들어간 뒤에도 클로드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셀을 발견하자 몸을 잔뜩 움츠리며 외쳤다.
"왜 왔어!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뭐 하는지 궁금해서."
"내 일이야! 일만 처리하면 찾아갈 텐데 뭐 하러 따라왔냐고!"
지셀 대신 벨린다가 짜증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당신 같은 도박쟁이를 뭘 믿고 기다려! 당장 설명 안 하면 뺏어 버린다?"
"누가 도망간대? 그냥 기다리라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던 경비병이 지셀에게 물었다.
"댁은 뉘슈?"
지셀은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아, 나는 이 녀석의 친구다. 같이 영주님을 만나러 왔지."
"친구는 무슨...."
클로드가 반박하기도 전에 지셀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정신 안 차려? 지금 그 큰돈을 들고 혼자 들어가겠다고? 오스턴 남작은 욕심 많기로 유명한 놈이잖아."
그제야 클로드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생의 목표를 이뤘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다.
술과 도박에 빠져 사는 동안 머리가 완전히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여기까지 이 큰돈을 들고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었으니까.
클로드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젓고 입술을 깨물었다.
'폐인 생활을 너무 오래 했군. 그래도 귀족과 같이 들어가면 그나마 좀 낫겠지.'
애써 표정을 덤덤하게 고친 클로드가 말했다.
"그래, 친구 맞아. 같이 들어갈 생각이야."
경비병은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사람을 불러 클로드에게 일행이 있다는 소식을 추가로 알렸다.
얼마 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무기를 맡긴 용병들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클로드와 지셀만이 영주를 알현하도록 허락받았다.
오스턴 남작의 생김새는 탐욕스러운 성격을 그대로 빚어낸 듯했다.
눈빛이 탁하고 볼에는 살이 투덕투덕 붙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건조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놈이 정말 돈을 마련했다고?"
지셀 앞에서는 쇠꼬챙이처럼 뻣뻣하게 굴던 클로드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비굴하게 외쳤다.
"정말로 돈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제발 돌려주십시오!"
95화 그게 오늘이었어? (5)
클로드가 목소리를 덜덜 떨며 애원했다.
인생을 포기한 듯 시건방진 모습을 보이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지셀은 그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스턴 남작은 의심스러워하며 클로드에게 손짓했다.
"어디 한번 보자."
클로드는 무릎걸음으로 주춤주춤 다가가 2천 골드짜리 신용장을 건넸다.
보증 상단의 이름과 액수를 확인한 오스턴 남작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이놈이 이런 큰돈을 어디서 구한 거지?'
남작은 클로드 옆에 서 있는 멀쑥하게 생긴 젊은이를 흘깃 보았다.
누군지는 제대로 소개를 듣지 못했지만, 이 돈과 연관이 있는 자인 게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오스턴 남작은 신용장을 다시 클로드에게 던졌다.
"돌려줄 수 없다."
"무슨 소리입니까! 분명 2천 골드를 마련해 왔지 않습니까!"
클로드의 비명 같은 절규에도 오스턴 남작은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2천 골드인 줄 알아?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몰라? 3천 골드는 받아야겠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무슨 물건입니까! 물가랑 무슨 상관입니까!"
"내 상품의 가격은 내가 정한다. 네놈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야."
솔직히 과하게 부른 감은 있었다.
오스턴 남작으로서는 사실 2천 골드만 받아도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조금 더 쥐어짜면 더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2천 골드만 받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으니까.
'아니지. 저 돈도 몰래 뺏으면 되잖아?'
그러면 저 2천 골드도, 클로드가 다시 구해 올 3천 골드도 모조리 삼켜 버릴 수 있을 것이다.
'크큭, 그래. 그게 낫겠군.'
그때, 클로드는 울먹이며 품에서 신용장을 한 장 더 꺼냈다.
"5백 골드를 더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호오, 역시 돈이 더 있었군."
오스턴 남작이 음습하게 웃으며 물었다.
"너, 이 큰돈이 어디서 난 거지?"
"그냥 일을 좀 해 주기로 하고 받았습니다."
오스턴 남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푼돈이면 몰라도, 이런 큰돈을 주면서 네놈을 쓸 사람은 이 왕국에 없다. 똑바로 말해라."
"루타니아 왕국으로 떠날 겁니다.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뭐?"
오스턴 남작은 예상치 못한 말에 흠칫했다.
타국으로 떠난다니 생각도 못 했다.
"좋아, 떠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지. 어쨌든 이 금액으로는 안 되니까 돌아가라. 돈을 마련하면 다시 와."
"약속을 지키십시오!"
"가격이 올랐다니까. 그나저나 옆에 있는 자가 너에게 돈을 준 사람이냐? 무슨 관계지? 같이 지내고 있나?"
클로드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오스턴 남작의 속셈을 알아차린 것이다.
잠자코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지셀이 앞으로 나섰다.
"역겨워서 못 봐 주겠네. 어이, 오스턴 남작. 적당히 좀 하지 그래?"
지셀이 내뿜는 강렬한 기세가 순식간에 사방을 옥죄었다.
오스턴 남작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기겁하며 검을 뽑았다.
그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기세만으로 주변을 이렇게 압박하는 건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고작 남작령의 기사에 불과한 이들이었지만, 실력 차이를 깨닫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영주 앞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갈 수는 없는 법.
기사들은 검으로 지셀을 겨누었다.
보통 같았으면 당장 달려가서 무릎을 꿇렸겠지만,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았다.
"네 이놈! 무슨 망발이냐!"
"감히 영주님께 그따위로 행동하다니!"
"죽여 버리겠다!"
기사들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멍청한 오스턴 남작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기세등등해서 지셀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뭐냐? 감히 내 앞에서 건방지게 굴다니."
"알아서 뭐 하게?"
오스턴 남작의 눈이 욕심으로 희번덕거렸다.
귀족 모독죄를 물어 돈을 뜯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지셀은 그 눈빛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네놈 같은 놈들은 꼭 몸으로 겪어야 정신을 차리지."
"뭐?"
"아니다, 됐다. 이젠 설명하기도 귀찮다."
오스턴 남작은 불길한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파아악!
지셀의 눈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2단계의 코어를 개방한 지셀이 손을 뻗었다. 마나의 실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크윽!"
목표는 조금 전 지셀을 죽여 버리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던 기사였다.
그는 갑자기 자신을 당기는 힘을 느끼고 마나를 끌어올리며 저항했다.
"오, 제법?"
역시 마나를 다루는 기사라 그런지 쉽게 끌려오지 않는다.
지셀은 혀를 차며 3단계 코어를 개방했다.
콰아아아아!
그의 손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뻗어 나가, 마나의 실을 타고 올라갔다.
기사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끌려와 지셀의 손에 붙잡혔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기술에 다른 기사들은 놀라 움직이지 못했다.
"검은 잠시 내려놓고."
지셀이 남은 한 손으로 기사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우드득!
"크아악!"
기사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검을 떨어트렸다.
지셀은 붉게 타오르는 눈으로 오스턴 남작을 노려보았다.
"검을 뽑았다는 건 한번 해보자는 거지? 잘 생각해, 난 나한테 덤빈 놈은 절대 안 봐줘. 이 성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 주지."
허언이 아니었다.
지셀과 용병들이라면 순식간에 이 성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척살할 수 있었다.
기사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젠장,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고!'
'마나만 써서 기사를 끌고 가는 게 말이 되나?'
맨손으로 기사를 순식간에 제압한 자다.
성에 있는 기사들이 모두 모여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오스턴 남작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 새끼들이 죄다 겁먹었구나.'
옴짝달싹하지도 못하는 기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그는 이를 악물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귀족을 이렇게 모욕하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웃기는 새끼네. 뭐 어쩔 건데? 해 봐."
기세 좋게 윽박지른 것까진 좋았으나, 오스턴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몬스터를 앞에 두면 이러할까?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시렸다.
지셀은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살고 싶으면 눈치가 있어야지. 내 걱정할 시간에 네놈이 무사할지 어쩔지나 고민하는 게 나을걸."
"지, 지금이라도 내 기사를 놓아주고 용서를 빌면 없었던 일로 해 주마."
"싫은데?"
"네가 이 성의 기사와 병사들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으냐!"
"궁금하면 해 보라니까. 나야 언제든지 환영이야. 가장 쉬운 방식이거든."
지셀은 진심이었다. 오스턴이 선을 넘어 주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나, 나에게 위해를 가하면 왕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고위 귀족도 아닌 네놈 따위를 왕국에서 신경 쓸 거 같으냐? 고작 술집이랑 도박장 굴려서 영지를 운영하는 놈을 누가 신경 쓴다고."
"이, 이놈이...."
지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점이 없었다.
왕국의 다른 귀족들은 술이나 도박으로 돈을 버는 건 천박하다며 오스턴 남작을 은근히 무시했다.
같은 귀족으로 여기지 않으니, 그가 죽는다 해도 큰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지셀은 계속해서 오스턴의 아픈 구석을 찔러 댔다.
"설사 신경 쓴다 해도 어쩔 건데? 내가 지금 성에 있는 자들 모조리 죽여 버리고 잠적하면 끝이야."
"이 영지에는 병사가 오백 명이나 있다! 날 죽이면 그들이 널 추적할 거다!"
지셀은 코웃음을 쳤다.
'남작령치고는 많네. 역시 돈이 많은 게 최고라니까.'
하지만 그 정도에 겁먹을 지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추적이고 뭐고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누가 말려?"
"...."
오스턴 영지의 병력이 생각보다 많긴 하지만, 마음먹고 도망간다면 그쯤이야 따돌리지 못할 게 없다.
아니, 역으로 전멸시키면 그만이었다.
지셀의 표정을 가늠하던 오스턴 남작은 결국 이를 갈며 한발 물러섰다.
"...어쩌자는 거냐. 원하는 게 뭐지?"
"뭐겠냐? 머리가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지셀이 쯧쯧 혀를 찼다. 오스턴 남작은 이를 갈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담력도 없는 이였다.
그저 상대방이 겁을 먹고 물러나기를 바랐을 뿐.
하지만 지셀에게 그런 웃기지도 않는 협박이 통할 리 있겠는가.
오스턴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좋아, 2천 골드만 받겠다. 꺼져라."
지셀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몸을 풀 기회였는데 아쉽네.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이놈은 어떻게 할래?"
"뭐?"
지셀은 아직 제 손에 잡혀 있는 기사를 올려다보며 비웃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려면, 자기가 당할 각오도 했어야지."
지셀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끄으윽!"
숨이 막힌 기사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지셀이 조금만 더 힘을 세게 준다면 바로 목이 꺾여 죽을 것이다.
오스턴 남작은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짓이냐! 이미 거래는 끝나지 않았느냐!"
"끝나긴 뭐가 끝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놈을 살리고 싶다면 3천 골드를 내놔. 그러면 살려 주겠다."
"3천 골드라니! 억지 부리지 마라!"
"억지는 네가 먼저 부렸지. 기사 하나 키우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3천 골드면 싸잖아? 아, 아니면 얘가 그 정도 가치가 안 되나?"
"개, 개소리를...."
오스턴 남작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3천 골드면 지금 지셀에게 잡혀 있는 자보다 훨씬 더 실력 좋은 기사를 영입할 수 있다.
당연히 거절하고 싶지만... 보는 눈이 너무나 많았다.
만약 거절해서 저 기사가 죽는다면 다른 기사들마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다.
충성에 가격을 매겨 손익을 따지는 자를 주군으로 모실 자는 아무도 없다.
지셀은 그런 부분까지 노리고 제안을 던진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악마 같은 외통수.
결국 오스턴 남작은 이를 갈며 지셀의 제안을 수락했다.
"2천 골드는 받은 셈 치지. 부족한 금액은 따로 채워 주마."
"돌려받을 것도 받아야겠지?"
그러자 오스턴 남작이 옆의 기사에게 씹어뱉듯이 말했다.
"데리고 와라."
기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지셀은 성큼성큼 클로드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쥐고 휙 일으켜 세웠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2천 골드짜리 신용장을 집어 자신의 품에 집어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클로드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지셀이 씨익 웃었다.
"내 거 맞잖아?"
남은 5백 골드도 뺏길까 봐 클로드는 잽싸게 집어 자신의 품에 넣었다.
지셀은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5백 골드는 기사 몸값에 포함된 게 아니기도 하고, 클로드에게 왜 저 돈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지셀은 얼굴색이 퍼렇게 죽은 오스턴 남작에게 툭 내뱉었다.
"우린 성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물건은 잘 챙겨서 보내. 여기 오래 있고 싶진 않거든. 너도 내 얼굴 보기 싫지?"
"...알겠다."
지셀은 클로드를 끌고 알현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나서기 전, 그가 오스턴 남작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혹시 불만 있으면 루타니아 왕국의 펜리스 영지로 찾아와. 손님 대접은 해 준다, 내가."
96화 그게 오늘이었어? (6)
"...뭐?"
오스턴 남작이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지셀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그래도 그렇게 절망적으로 멍청한 놈은 아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닫힌 문 너머에서 짜증스러운 고함이 들려왔다.
지셀이 루타니아의 귀족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지셀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용병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섰다.
안내하는 기사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걸 느낀 벨린다가 지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뭐예요? 뭐 일이 잘 안 풀렸어요?"
"아니, 잘 풀렸어. 조금 기다리면 돼."
"그런데 쟤는 왜 저렇게 죽을상이에요?"
"그러게, 배탈이라도 났나?"
벨린다가 어이없어하며 지셀을 흘겨보았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한 젊은 여자가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나타났다.
여자는 옷도 허름하고 상당히 초췌해 보였다.
기사들을 흘끔대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를 끌고 온 기사 중 한 사람이 짜증을 참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제 자유다. 저놈들이 몸값을 냈다."
"누, 누가?"
여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2천 골드나 되는 큰돈을 도대체 누가 냈다는 말인가?
자신을 위해 그런 돈을 쓸 사람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돌아본 곳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초라해진 모습이지만, 몸을 떨며 울먹이는 남자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때 사랑했던,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자신의 약혼자였다.
"클로드!"
"안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목놓아 울었다.
"왜! 왜! 왜 그랬어!"
"미, 미안.... 너무 늦었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벨린다는 입술만 삐죽였다.
'연인인가? 아니면 가족? 설마 도련님은 이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룬스톤을 챙긴 것부터 이상하다.
여비로 그런 비싼 물건을 챙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늦으면 손목이 잘린다는 말도 했었어.'
거기다 도착하자마자 손목이 잘릴 뻔한 클로드를 찾더니, 이유도 묻지 않고 돈을 내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부 다 알고 준비해 둔 것 같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벨린다가 물었다.
"도련님은 이렇게 될 걸 다 알고 있었어요?"
"뭐, 대충은."
"어떻게요?"
"그냥, 이런저런 조사를 좀 해 뒀지."
수긍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다. 대체 언제 그런 조사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일 뿐.
벨린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이리저리 뜯어보았지만, 그의 비밀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저 두 사람 관계도 아세요?"
"응, 연인 사이야."
"어머, 잡혀간 연인을 구하는 클리셰인가요. 로맨틱하네요."
벨린다는 눈물을 흘리며 말도 잇지 못하는 클로드와 안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팔려 간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니 클로드를 조금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약혼자를 구한답시고 도박을 한 것만은 어떻게 봐도 포장해 줄 수 없지만.
"저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지셀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클로드 저놈 때문에 클로드의 스승이 죽었거든."
"네?"
"근데 저 여자는 그 스승의 딸이고."
"네?"
벨린다는 물론, 곁에서 훔쳐 듣고 있던 다른 용병들도 황당해서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연인 사이라면서요? 근데 연인의 아버지를 죽여요?"
"쟤가 죽인 게 아니라, 쟤 때문에 죽었다고."
"그 말이 그 말이잖아요!"
"전혀 다르지."
지셀은 팔짱을 낀 채 잠시 말을 골랐다.
"저놈 스승은 혁명단과 엮였어."
"혁명단이요?!"
벨린다와 용병들이 놀라 펄쩍 뛰었다. 이 이상 놀랄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있었다.
혁명단은 평등과 공유를 기조로 내세우는, 대륙에서 유명한 과격 무장단체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초반에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지금은 대륙급 산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 그런데 저 둘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죠?"
기존 체제를 뒤엎는 것이 혁명단의 목표다.
그러니 혁명단에 관련된 사람을 왕국에서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그들과 엮인 사람은 모조리 사형이었다.
지셀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정확히는 혁명단과 엮였다고 누명을 쓴 거지. 클로드의 스승은 세이론 왕립 아카데미의 학장이었거든."
클로드의 스승은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높은 대학자였다.
그와 반대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그를 성가셔했고, 그가 혁명단과 교류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어 누명을 뒤집어씌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증거를 스승에게 전달한 게 클로드였다.
"아니, 스승을 배신한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앞날이 창창한 놈이 뭐 하러 그런 데 끼겠어? 그냥 속은 거지. 저놈이 공부만 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랐거든."
순진했던 클로드는 적대 파벌의 수작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요한 편지라는 말만 듣고 그대로 스승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는 클로드의 스승이 혁명단에 참여했다는 증거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 외에도 더 복잡한 술수와 계략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스승이 누명을 쓰는 발단을 제공한 건 클로드였다.
'그것 때문에 죄책감에 휩싸여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었지.'
지셀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파벌 싸움에서 밀린 스승이 순순히 죽는 대가로 두 사람은 겨우 살아남았어. 안나는 직계 가족이다 보니 몸값을 추가로 내야 했는데, 그걸 못 내서 여기까지 팔려 온 거고."
"어휴...."
"아무튼 그래서 클로드는 스승하고 자기 약혼자한테 죄책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면 도박장에서 산 이유도...."
"아무도 저놈을 써 주지 않으니까. 누가 스승을 죽이고 반역에 연루된 놈을 써 주겠어."
용병 중 몇몇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구해야 하는데 큰돈을 마련할 방법은 없고. 그러니까 그냥 인생을 포기한 거지. 그저 한 줄기 요행을 바라면서 말이야."
"사람 맛 가는 거 한순간이네요."
"세상 무서운 거 깨달은 대가치고는 너무 비쌌지. 스승과 빛나는 미래, 사랑하는 사람까지 모두 잃었으니까."
"쩝...."
벨린다는 입안이 껄끄러워졌다.
궁금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막상 얘기를 들으니 영 기분이 찝찝했다.
도박쟁이를 영입한다기에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저런 과거가 있을 줄이야.
두 사람은 겨우 눈물이 그치고 나자 묘하게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스승이 죽은 건 클로드의 잘못이 아니다. 안나도 마냥 클로드를 원망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재앙이 닥쳤을 때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어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
클로드를 바라보는 안나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원망이 동시에 묻어났다.
"그런데 클로드, 이분들은 누구야?"
"이분은... 몸값을 대신 내 주신 귀족분이야."
클로드는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도 지셀이 누구인지, 왜 자신을 도와주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서?
그런 큰돈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자신을 영입할 것 없이 더 나은 사람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서도 클로드는 지셀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난처해하는 표정을 본 안나는 클로드가 구태여 말하지 않은, 무슨 조건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어떤 조건을 내세웠든, 그런 큰돈을 선뜻 내어 주는 것은 분명 호의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안나는 마치 죄인처럼 끊임없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지셀은 그녀를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 안나는 지셀이 클로드에게 감당 못 할 조건을 걸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왕국에서는 그 누구도 클로드를 써 주지 않는다. 간접적으로나마 반역에 연루된 사람이니까.
만약 고용해 준다 해도, 위험을 감수해 주는 대신 자신들 쪽에 유리한 조건을 붙이는 사람이 대부분일 터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오스턴에게 잡혀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지셀은 굳이 오해를 풀어 주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든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할 게 뻔히 보였다.
* * *
지셀 일행은 지체할 것 없이 두 사람을 이끌고 여관으로 향했다.
용병들의 짐가방은 오스턴이 준 1천 골드로 아주 묵직해져 있었다.
여비도 넉넉하겠다, 지셀 일행은 크라켄 게임장 옆에 있는 가장 큰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을 잡고 나서야 클로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안나에게 말했다.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겠지만... 내일 얘기하자. 지금은 이분과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알겠어. 내일 꼭 얘기해."
그녀는 불안해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도 경계를 서거나 휴식을 취하러 흩어지고, 넓은 귀빈실에 지셀, 클로드, 벨린다와 길리언만 남았을 때였다.
"후...."
클로드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이 순간만큼은 거짓으로 둘러대고 싶지 않았다.
"너한테 빚이 있으니까."
"저는 남작님을 이번에 처음 봤습니다."
"아, 그야 그렇지. 그래도 내가 빚이 있다면 있는 거야."
아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도련님이 또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며 벨린다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셀은 진심이었다.
클로드는 복수에 미친 지셀을 마지막까지 도와주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런 친구에게 돈 몇 푼이 아까울까.
"너를 영입하려 했던 건 진심이다. 하지만 싫다면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라. 돈은 갚지 않아도 돼."
"...장난치지 마십시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 진심이라니까."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그저 어떻게든 클로드를 끌고 갈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클로드의 얼굴을 보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 이놈도 정말 열심히 일했지.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클로드로서는 할 만큼 했다.'
이번 생에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강제로 묶어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자신을 위해 목숨 바친 클로드에게 못 할 짓이었다.
보고 싶었던 얼굴도 보고, 손목 잘리는 것도 막았으니 되었다. 그렇게 바라던 안나도 구해 줬고.
이제 클로드는 평온하게 살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지셀의 복수는 실패했고 클로드는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전생의 클로드는 적어도 자의로 지셀을 도왔다.
클로드를 강제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과 함께하지 않더라도, 전생의 친구가 이번 생에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거면 충분했다.
"물론 나도 포기한 건 아니다. 이 동네에서 글 선생을 하며 사는 것도 좋겠지만.... 만약 더 큰물에서 네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지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루타니아의 펜리스 영지로 와라. 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 줄 테니."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족들이 흔히 보이는 변덕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저 따뜻하고 친근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클로드는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곧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안나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더 이상 절망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결심한 듯 표정은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셀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이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말은 잘하지.... 사실은 안나와 함께 살고 싶을 텐데?"
클로드는 정곡을 찔린 듯 눈을 내리깔았다.
"5백 골드면 두 사람이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거야."
"그 큰돈을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드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마음을 정리했군."
"네. 이게 최선입니다."
벨린다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냥 둘이 함께 펜리스 영지로 오면 되잖아?'
그녀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에 대한 대답이 클로드의 입에서 나왔다.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나를 세이론 왕립 아카데미까지 안전하게 보내 주십시오. 저는 영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97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1)
다음 날 아침, 안나는 여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는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5백 골드짜리 신용장을 손에 쥔 채, 울상이 되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 옆에는 고든과 다섯 명의 용병이 서 있었다.
안나는 고든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더니 그의 팔을 잡고 주저앉았다.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고든은 계속 고개만 저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벨린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냥 같이 가면 안 돼요? 저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데."
클로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조하듯 대답했다.
"사실 안나도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모두가 피해자니까요."
"그러니까, 앞으로 둘이 잘 살면 되잖아요! 우리 영지가 공기도 좋고 물도 좋아요."
클로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아픈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마 안나도 그렇겠죠."
"안나도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설사 안나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스승님을 죽게 한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 곁에 머물겠습니까."
"어쩔 수 없었잖아요? 그건 그냥 그쪽이 멍청해서.... 앗차, 죄송."
무심코 나온 본심에 말한 벨린다도 놀라서 입을 가렸다.
클로드는 화내지 않고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전 항상 멍청했죠. 스승님은 제가 살아서 왕국의 큰 학자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막상 저는 폐인에 도박 중독자가 되었으니까요."
"그치만 이러면 결국 도망치는 거잖아요. 앞으로 잘하는 게 낫지."
벨린다의 비난에도 클로드는 고개를 숙이며 옅은 숨만 내뱉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냥 서로를 추억에 묻고.... 그렇게 살다 보면.... 그 아픔에도 담담해질 때가 오겠죠. 안나도 그러기를 바랄 뿐입니다."
벨린다는 못마땅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안나가 여전히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클로드가 하는 말도 이해는 갔다.
아무리 사랑해도 아버지를 죽게 한 남자와 평생 얼굴을 보며 함께 살 수 있을까?
괜찮다 생각해도 문득 원망스러운 마음이 치미는 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클로드 역시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짐작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래서 더 이상 비난할 수가 없었다.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던 지셀이 물었다.
"후회하나?"
"그럼요, 다시는 멍청하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밤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런 얄팍한 계략에 당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나도 그랬거든."
"영주님도 그런 적 있으신가 보군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모양이죠? 관상이 딱 그렇습니다."
"뭐, 지금은 그 후회를 바로잡고 있지. 최선을 다해서 말이야."
클로드는 언제 씁쓸해했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처졌군요. 사실 저 그렇게 분위기 망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셀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불평불만도 많은 놈이지. 그만큼 일도 잘하고. 앞으로 기대하지."
"뭘 믿고 그렇게 기대하는지 모르겠군요. 나중에 무르라고 해도 못 무릅니다. 저 돈 없어요."
"걱정하지 마라. 뽑아 먹을 방법은 많으니까."
"무섭네, 무서워."
클로드는 피식 웃으며 안나와 용병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나는 세이론 왕국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일생을 바칠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던 사람의 유지이기도 했다.
원래는 클로드도 함께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는 스승을 존경하던 교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안나를 잘 지켜 줄 것이다.
"홀가분하군요. 이제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클로드는 멀어지는 안나의 뒷모습을 일별하고 돌아섰다.
그녀가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며, 자신이 잊히기를 바라며.
그간의 추억과 후회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 * *
안나가 떠나자마자 지셀 일행도 바로 펜리스 영지로 출발했다.
영지를 비워 놓은 지 오래되었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영지를 정비해야 했다.
클로드는 앞으로 지낼 영지에 대해 상상하며 우울한 마음을 추슬렀다.
'수천 골드를 턱턱 내놓을 정도면 상당히 잘사는 집안 출신이다.'
그는 앞서가는 지셀의 뒤통수를 흘끔 훔쳐보았다.
'게다가 저 젊은 나이에 영주 자리에 올랐어. 가문 영지를 떼어 준 걸 텐데, 그렇다면 영주님 아버지는 최소한 백작급 이상일 거야. 어쩌면 공작일지도?'
공작은 아니더라도 대영주쯤 되는 건 틀림없었다.
클로드는 루타니아의 고위 귀족 중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을 꼽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럽긴 하군. 그런 대단한 가문이라면 인재들도 많을 텐데 말이야.'
조금 걱정되기도 했지만, 클로드는 겁먹지 않았다.
비록 도박장에서 폐인처럼 지내며 인생을 다소 낭비했지만, 이제는 모든 족쇄에서 해방된 상태다.
앞으로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상황.
벌써부터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클로드는 조금이라도 미리 알아 두겠다고 영지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지셀은 가 보면 안다며 딴청을 피웠다.
은근슬쩍 벨린다에게도 물었지만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아, 그냥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고요."
"조금만 더 자세히 알려 주십쇼. 영지가 얼마나 훌륭한지 기대됩니다."
"으음, 가서 직접 보세요. 저도 잘 몰라요."
자꾸 캐묻는 게 불편했는지 벨린다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클로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긴 뭘 몰라? 보아하니 잘사는 영지를 보고 깜짝 놀라기를 기대하는 모양인데.... 내가 시골 촌놈인 줄 아나 보지?'
뻔한 짓이다. 촌놈이 크고 부유한 영지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싶어서 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자신감이 대단들 하시네. 어디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보자.'
클로드는 주먹을 불끈 쥐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훔쳐보던 벨린다가 조용히 지셀에게 물었다.
"저 사람 영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내버려 둬. 은근히 성깔 있는 놈이니까 괜히 자극하지는 말고."
"귀족에게도 죽여 보라고 대드는 인간이니 오죽하겠어요."
벨린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근데 진짜 괜찮아요? 영지 상태 보고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몰라."
"성깔 있는 놈이라고 했잖아. 자존심 좀 긁어 주면 발끈해서 달려들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지셀이 낄낄대며 속삭였다.
벨린다는 웃음기 어린 눈빛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르고 의욕을 불태우는 클로드가 조금 불쌍해졌다.
* * *
며칠이나 말을 타고 달린 끝에 드디어 루타니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로드는 별생각이 없었다.
'강국이라도 변방은 별거 없구나.'
딱히 세이론 왕국의 변방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국경 인근은 원래 낙후된 지역이 많으니 클로드도 그러려니 넘겼다.
하지만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조금씩 의문이 커져 갔다.
'뭔가 이상하네. 왜 자꾸 북쪽으로 가는 거 같지? 거기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뭔가 없어 보이고.'
클로드는 펜리스 영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실상은 이미 지셀의 영지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지만, 그저 거쳐 가는 영지라고 생각했다.
가는 길에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마을들은 오스턴의 빈민가보다 더 가난해 보였다.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와, 이렇게 가난한 영지가 다 있다니. 도대체 영주가 어떻게 다스리는 거야? 아니지, 이건 다스린 게 아니라 뜯어먹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
클로드는 안쓰러워하며 주변 마을을 둘러보다가 지셀에게 말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이곳을 점령해도 괜찮겠습니다."
"뭐?"
전생에도 클로드는 말에 거침이 없기로 유명했다.
지셀도 눈치 보지 않고 대놓고 의견을 내는 그를 아주 좋아했지만....
"이곳 영주는 쓰레기입니다. 진짜 얼굴을 보면 침이라도 뱉고 싶을 정도군요."
"...."
"영지민들이 이렇게나 가난하다니, 영주가 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당연히 군사력도 약할 거고.... 시설이랄 게 없고, 있는 것도 낙후되었으니 먹어 봐야 남는 건 없겠지만요. 빈 땅이 많으니 점령해서 후방의 병참 기지 같은 용도로 쓰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그래?"
"물론 생활 수준도 조금씩 끌어올려야겠죠. 당장은 돈도 많이 들고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게 이득입니다."
"어, 음.... 그렇지. 나와 생각이 비슷하네."
"다행이군요. 기회를 봐서 여기 영주의 목을 베시죠."
"아, 그건 좀."
클로드가 눈을 빛내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자르라는 그 목, 내 목이거든?
"영주님이야 부유한 영지에서 귀하게 자라신 분이니 이런 가난한 영지는 눈에 안 차시겠죠. 하지만 대영주라면 모름지기 벼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고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부유하고 귀하게 자란 건 아닌데."
지셀이 반박했지만, 클로드는 자기 할 말만 하기에 바빴다.
지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전쟁 명분은 제가 어떻게든 만들어 내겠습니다."
클로드는 강력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지만, 지셀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 그래.... 기대할게."
지셀이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니 클로드는 애가 닳았다.
그는 영지의 주인을 실컷 욕하며 지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때, 벨린다가 기지개를 켜며 속 시원하다는 듯 외쳤다.
"와, 이제 다 왔네요!"
침까지 튀기며 떠들던 클로드가 목이 꺾일 듯한 기세로 그녀를 휙 돌아보았다.
"뭘 다 와요?"
벨린다가 의아해하며 답했다.
"이제 곧 영주성에 도착한다는 말이죠. 국경 넘어서부터 계속 우리 영지였는데, 몰랐어요? 하긴, 남작령 세 개를 합친 거라 좀 넓긴 하죠."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라고?"
벨린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클로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여기가 우리 영지라서 우리 영지라고 하는데 왜냐고 물으시면...."
잔뜩 울상이 된 클로드가 지셀을 돌아보았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아니, 여기 내 영지 맞는데."
지셀이 히죽 웃었다.
그 얄미운 표정에 클로드가 버럭 고함을 쳤다.
"아, 말이 안 되잖아요!"
"뭐가?"
"영지가 이렇게 가난한데 영주님이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아요? 설마 영지민들 쥐어짠 사람이 영주님이에요?"
"아니, 그건 아니고."
클로드는 다급하게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벨린다도, 길리언도, 용병들도 모두 제자리에 서서 멀뚱멀뚱 자신만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을 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저기... 영주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세요?"
"우리 아버지는 여기보다 더 북쪽 페르디움의 변경백이시지."
클로드는 조금 안심했다.
변경백이면 후작 대우를 받는 고위 귀족이다.
변경백들은 대부분 다른 영주보다 강력한 군사권과 자치권을 쥐고 있었다.
"변경백... 그럼 페르디움은 이 영지보다는 발전되었겠군요?"
지셀이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여기보다야 낫지만, 거기도 가난하기로 유명하지. 마수의 숲하고 야만인들 때문에 발전하기가 힘들거든."
클로드는 그제야 벨린다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 아, 그냥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라고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연히 물도 좋고 공기도 좋겠지!'
클로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영지가 부유하다고 착각한 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좀 창피하긴 하지만, 착각할 만했지.
다만 그렇게 착각한 탓에, 본인 앞에서 악덕 영주니 목을 베자느니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 문제였다.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세상 무서운 걸 충분히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수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클로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이럴 때는 그냥 튀는 게 최고다. 여기보다는 도박장이 나을 거야. 안나, 기다려! 곧 돌아갈게!'
지셀은 그의 속셈을 눈치채고 씨익 웃었다.
영지가 망했다는 둥, 영주를 죽이자는 둥 버릇없는 말을 들었지만 그다지 화는 나지 않았다.
여기가 정말 거지 같다는 데는 그도 공감하니까.
'하지만 도망치는 건 용서 못 하지.'
지셀이 손짓하자, 용병들이 슬그머니 움직여 클로드를 포위했다.
왼쪽으로 빠지려고 하면 길리언이 막아서고, 살짝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번에는 벨린다가 막아선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도망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셀이 건들건들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네 생각은 잘 들었어. 의욕이 넘치는 게 아주 마음에 드네. 앞으로 잘해 보자고."
악마의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클로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 했는데. 보고 싶다, 안나.'
98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