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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19. 하류 (2)

그곳에 벽돌로 지은 집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은 천막이었고, 일부가 진흙을 지푸라기와 이겨 낸 흙집에서 살았다.

포장도로가 아닌 사람의 발길로 다진 흙길을 따라 좌우에 갖가지 점포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판대 위에 놓인 건, 강에서 잡은 고기나 솥 안에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기와 말라비틀어진 풀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한구석엔 창검을 팔고 가는 대장장이와 총포상도 있었다.

'제국에 이런 곳이 존재했던가.'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마을의 풍경은 그저 놀랍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낙후도나 빈곤함은 내전이 무르익은 루페르트의 치세 중반기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아직 선제의 후광이 남은 좋은 시절에 제국에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테타우의 빈민가조차 이거보다는 낫겠군.'

"말 그대로 제국의 하류, 버려진 자들의 마을이군요."

지겔슈타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탈영병, 범죄자, 이교도. 제국의 태양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지요."

지겔슈타트의 눈이 번득였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한 무리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을 저는 자, 손목이 잘려 나가 갈고리를 찬 자,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등에 둘러맨 자.

저마다 뚜렷한 개성의 인간들이다.

무슨 일일까.

적의는 보이지 않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무법자의 마을이다.

루페르트와 지겔슈타트가 경계의 빛을 내비치며 나름의 준비를 할 때였다.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베르크 란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장군!"

그만이 아니다.

다리가 하나 없지만, 목발도 없이 토끼처럼 민첩하게 뛰어다니는 사내가 대뜸 베르크 란 앞에 도약해 힘차게 포옹했다.

"란 장군!"

두 사내는 가볍게 볼을 비볐다.

전형적인 부르봉식 인사법.

지겔슈타트는 그 비제국적인 풍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베르크 란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은 끝이 없었다.

"장군! 오랜만이오. 아직도 건재하시군."

"우리 장군은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 아닌가?"

"그나저나 여기엔 무슨 일인가? 우리야 장군은 늘 환영이긴 하지만."

루페르트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군.'

상상도 못 했다.

저 베르크 란이라는 사내가 이토록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게.

그가 기억하는 베르크 란은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우며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내였다.

아무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하고, 그 또한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않는.

하지만 이 버려진 자들의 마을에서 그는 어떠한 영웅보다 뜨거운 환대를 받는다.

그 무수한 환영 인사 속에서 하나의 단어가 눈에 밟힌다.

'장군?'

사람들은 베르크 란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표정과 말에서 어떠한 빈정거림이나 조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베르크 란은 순수한 장군 그 자체였다.

그런데 왜일까.

그 장군이라는 말에 왠지 모를 오싹한 불길함이 느껴지는 건.

한스 징펠만이 멀리서 총포상과 교섭을 하는 걸 보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역시 여기로 온 건가?"

뒤에서 느닷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건을 뒤집어쓴, 하얀 수염을 기른 베르크 란에 뒤지지 않는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어느덧 루페르트 뒤에 우뚝 서 있었다.

"루돌프 님."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말했다.

하마터면 고개를 숙이며 폐하라고 부를 뻔했다.

"살아 계셨군요. 아니, 살아 계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루돌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 훌륭한 길을 고르셨군."

* * *

극빈과 무법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하나 사람이 사는 곳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개울 저편에서 들려온다.

피부가 어두운 아이와 밝은 아이가 한데 어우러져 돼지 방광으로 만든 공을 차고 놀고 있다.

오랜만에 공을 보자 루페르트는 살짝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볼까.'

하지만 옆엔 루돌프가 있다.

루페르트는 빠르게 욕망을 가라앉혔다.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동안 살얼음이 얼어붙은 개울가 옆을 걸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에게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루돌프는 담담하게 루페르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마법사의 정체가 수레를 끄는 자라니.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거기다가 제국 성인이라니."

그는 이야기를 듣는 중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루페르트의 이야기 자체에 의문을 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늘 위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풍까진 아니지만, 바람이 잦고 힘이 있어 빨랫감을 빨랫줄에서 끌어 내리거나 힘껏 나풀거리게 할 정도는 됐다.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발랄하게 날아가는 빨래를 쫓아가고 있었다.

"하브루타인이군요."

놀고 있는 아이 중에 피부가 어두운 아이들이 몇 명 섞여 있는 걸 보고 루페르트가 말했다.

하브루타인은 평판이 좋지 못하다.

생김새도 피부색도 다를뿐더러 종교마저 다르니.

하는 일도 매춘과 사기, 도둑질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성실한 제국 사람의 눈엔 눈엣가시 같은 종족이랄까.

그래도 철혈대제는 그들에게 꽤 많은 은전을 베풀었던 것 같다.

도시 안에 하브루타인을 위한 구역을 만들어 주고, 여행자 길드 같은 하브루타인들이 그나마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갈 기반을 마련해 줬다.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 저택에 있던 하브루타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여행자 길드 분사무소와 강력한 황제 후보의 장례식에 나타났던 어두운 피부의 여인을 떠올렸다.

'그 여자도 하브루타인이었지.'

루페르트가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브루타인이라고 해도 아이는 아이네요. 제국의 여느 아이와 똑같군요."

별 악의 없이 한 말이다.

솔직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특히 저 공을 등 너머로 재주 좋게 넘기는 아이의 발재간은 축구의 마스터인 루페르트의 눈에도 제법 흥미로워 보였으니.

"내 눈엔 덜 자란 시궁쥐밖엔 보이지 않는군."

루돌프가 말했다.

루페르트가 살짝 놀란 눈으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하브루타인을 좋게 보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커 봐야 사기꾼이나 납치범, 포주나 강도 같은 걸 하며 여생을 보내겠지. 그게 그들의 죽은 신이 점지한 하브루타인의 운명이니까."

루돌프의 시선이 마을 반대편으로 향했다.

거기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베르크 란이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무뚝뚝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와 환영을 거부하진 않았다.

멀리서도 그들의 들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뭔 줄 아나?"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겉으로 봐서는 상이군인?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연령대도 다들 제법 있는 편이고."

"통찰력이 있군. 실제로 그렇다네. 저들은 군인 출신이지. 하지만 평범한 군인은 아니야."

루돌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눈치챘다.

"서, 설마?"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에워싼 저마다 개성 뚜렷한 자들을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도펠죌트너...?"

루돌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도펠죌트너가 이리도 많이. 거기다 명찰을 안 달고 있군요. 이건...."

"아마 도펠죌트너 반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겠지. 한때 그들에게 무대의 주역을 뺏긴 마법사들이 악착같이 추적했지만, 저들도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지. 여기만이 아니야. 제국의 군주와 군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엔 어김없이 이런 무법자의 거처와 그 안에 기생하는 반역 도펠죌트너들이 있지."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황제 시절에도 알고 계셨군.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이 집단으로 은거하고 있다는걸.'

루돌프가 개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우데 2세로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부드러우면서도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대에게 있어 제국이란 무엇인가?"

"제 목숨과 바꿔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제국이?"

"그렇습니다."

루페르트의 꾹 다문 입술에선 타협할 수 없는 고집이 느껴졌다.

루돌프는 그런 루페르트를 두건 너머의 어둠에 반쯤 가려진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철혈대제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 회랑에서 지켜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약 10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저 선제후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제 치세에서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이를테면 망국의 암군이 된 셈이지요."

"후세의 평판이 두려운 건가?"

"후세의 평판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루페르트는 기억의 저편에 생생히 새겨진 아직 아물지 않은 상흔을 직시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거리, 울부짖는 여인과 죽어 가는 아이들, 아무렇게나 널린 시신과 그 시신을 뜯어 먹는 들개, 그 들개를 쫓으며 잡아먹으려 하는 병사들.

제국은 현실의 지옥이 되었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라는 무능한 황제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백성에 대한 연민이 그대의 동기인가?"

클라우데 2세가 마치 몰아세우듯이 물었다.

"아마 그게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겁니다. 아, 물론 약간의 공명심도 없잖아 있습니다."

"공명심?"

"네."

루페르트는 황궁을 둘러싼 크고 높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든 벽과 담장을 떠올렸다.

그 벽면엔 저마다 최고의 장인이 공을 들여 조각한 역대 황제의 모습이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영웅적으로 때로는 조야하게 저마다의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그 벽면의 가장자리엔 빈자리가 있었다.

조각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대리석 덩어리만 덩그러니 놓인 그 자리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의 자리였다.

루페르트는 조각되지 못한 황제였다.

그 미완성의 돌조각은 옆에 자리 잡은 크고 화려하며 웅장한 선제의 조각상과 대비되어 더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루페르트는 낙엽 쌓인 길모퉁이에 방치된 대리석과 텅 빈 벽을 떠올리며 고소를 머금었다.

"...제 조각상을 보고 싶었습니다."

"황제의 벽을 이야기하는 건가?"

루돌프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거기에 제 모습은 남기고 싶었습니다. 후대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말이죠."

"소박하지만 대담한 소망이군."

두건 너머 어둠에 가려진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번득이는 듯했다.

"그대의 조각이 새겨진다는 건 그대 치세에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법이니."

"...네."

"조각을 남기는 게 목적이라면 편법을 쓸 수도 있는데."

"조기 퇴위 말입니까? 하하.... 그건 예정에 없습니다. 최소한 후임 황제에게 짐을 떠맡기고 싶진 않습니다."

"내전이 벌어진다고 했나?"

루돌프가 미소를 지우며 날카롭게 물었다.

루페르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르죠."

마을 쪽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브루타인 악사들과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이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하며 무법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흙으로 뒤덮인 광장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 중심엔 베르크 란과 그의 손녀가 서 있었다.

술이 술잔에 따라졌고 화로에선 갓 구운 이름 모를 짐승의 고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고 하늘은 흐렸지만, 테이블 주변에 모여 앉은 도펠죌트너의 얼굴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장군을 위해!"

조촐하지만 떠들썩한 축제가 시작됐다.

그 모습을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나란히 지켜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루돌프 쪽이다.

"...그대의 방식도 나쁘지 않군."

"네?"

"그대가 그때 내 말을 들어 도펠죌트너를 버리고 갔다면 이곳을 찾아올 일도 없었을 터이니."

"그건 그렇겠지요."

"내 방식은 늘 조금이라도 위험한 걸 지워 가며 남은 선택지 중에 그나마 나은 걸 고르는 것이었지."

"일종의 소거법이군요."

"안정적이지만 가능성의 크기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대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더군."

"방식이랄 것도 없습니다. 생각도 안 한 부분이니까요."

루돌프가 돌아섰다.

"여기까지 온 이상 큰 위험은 없겠군. 난 이쯤에서 실례해야겠어."

"떠나시는 겁니까? 아직 황궁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잠깐이나마 여신을 안 보고 싶거든."

루돌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솔직히 지긋지긋해."

"하하...."

"아무튼 행운을 비네. 새로운 황제여."

"...폐하."

"쉿. 사람들이 들을라. 그대의 조각상. 기대하겠네.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조각될지."

루페르트 결코 조각되지 못했던 대리석 덩어리를 떠올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떠나던 루돌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의 방식. 오랫동안 보전됐으면 좋겠군."

멀어지는 선제의 모습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전에는 조각되지 못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72화 19. 하류 (3)

"...공이라."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다.

모처럼 다른 사람들이 축구를 하는 걸 보자 루페르트는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공을 못 찬 지도 참 오래됐지.'

황제 후보가 되기 전까지 루페르트의 신분은 사실상 한량이었다.

그도 비슷한 처지였던 카를 호이징거같이 노는 걸 좋아했는데, 친구도 별로 없고 돈도 별로 없는 그가 즐길 수 있는 놀이는 자연스레 돈이 안 들어가는 종류로 한정됐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놀이는 플루트와 축구였다.

어느 쪽도 좋아했지만 잘하는 건 축구였다.

하켄하임에서 루페르트의 이름이 알려진 건 그 천재적인 축구 실력 때문이었고, 곧 그는 축구 용병으로 활동했다.

피혁업자 길드, 수도회, 인근 마을 친선전까지 루페르트가 안 끼는 곳은 없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있었다.

나중엔 초월적인 실력이 소문나 출전 금지까지 될 정도였으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꼭두각시 황제 시절에도 루페르트의 축구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공을 잘 찬다는 사람과 모아 시합을 하기도 했고 거기서 자신이 나름 제국에서 공 좀 찬다는 친구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걸 확인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축구의 황제라고 할까.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데 황제라는 작자가 하층민이나 즐기는 축구 놀음이나 한다는 비판을 듣다 보니 그 좋아하는 축구도 플루트도 그만뒀다.

회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위버하임 시절엔 처참한 능력을 키우느라 놀 시간도 없었고, 선제후가 된 이후엔 위신에 손상이 갈까 봐 공을 만지지도 못했다.

그런데 모처럼 주변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공을 발견했다.

강력한 적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은 숨을 돌리고 싶은 것이 루페르트의 마음이었다.

'한 번은 괜찮지 않겠어? 나도 사람이야. 사람.'

루페르트는 그대로 외투를 벗어 던지고 아이들에게 난입했다.

"뭐예요? 아저씨?"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아이들이 격렬히 반발하자 루페르트는 품 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공 한 번만 차게 해 주지 않으련?"

제국은 예로부터 상업의 번영을 중시한 나라다.

제국에서 돈 앞에서 안 되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덩치가 큰 아이가 루페르트에게 공을 차 넘겼다.

아이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딱 봐도 어디 귀족 샌님 같은데. 공이나 한번 차 봤나 몰라."

"공 한 번 차겠다고 은화까지 주다니. 돈이 썩어 넘치나 봐."

"아빠한테 털라고 해야겠네."

"저 샌님 공 제대로 찰 수나 있을까 내기할까?"

두런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한 명의 관중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마를로네다.

손에 종류를 알 수 없는 고기 꼬치를 든 그녀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아이들 사이에 서 있는 루페르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저 사람."

그녀는 적당한 나뭇등걸 위에 허리에 두르고 있던 이불 같은 천을 끌러 자리를 만든 다음 새침하게 앉아 꼬치를 먹으며 루페르트의 꼬락서니를 지켜보았다.

"그럼 공 보낼게요!"

덩치 큰 소년이 루페르트를 향해 공을 찼다.

마를로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패스가 아닌 강력한 슛.

루페르트의 면상을 노린 악의적인 공격이었다.

순간 마를로네는 생각했다.

이런 공격으로부터도 루페르트를 지켜야 하는지 마는지.

죽기는커녕 조금 아프기만 하겠지만 그래도 룸왕 전하의 위신이 깎이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갈등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개울 너머에서 같은 갈등을 가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윽.'

지겔슈타트다.

나름 누그러졌다고 하나 저 마법사는 최악이다.

더욱 고까운 건 그 마법사 상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법사는 그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루페르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도 소년이 날린 강력한 슈팅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사냥꾼처럼 전부 불태워 죽이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을 때 건너편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뒤늦게 마를로네는 루페르트 쪽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루페르트의 발이 무용수처럼 높이 올라가 얼굴로 향하는 공을 막고 있었다.

상당한 유연함에 놀라워했지만, 진짜 쇼는 이제부터다.

루페르트는 가볍게 공의 기세를 낮춘 후 본격적으로 진정한 황제의 발재간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툭 툭 툭 툭.

무릎, 발등, 머리, 가슴, 때로는 발꿈치까지.

루페르트는 사용 가능한 모든 부위를 이용해 공을 허공에 튀기면서 바닥에 닿지 않는 묘기를 선보였다.

아이들의 적의와 시기가 관심과 선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바뀌는 평가를 피부로 느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의 평가 항목에 빠져 있지만 내 축구 실력은 마스터급이지.'

공을 튀기던 루페르트가 타이밍 좋게 허공에 있는 공을 걷어찼다.

장대 두 개를 세워 만든 조잡한 골문을 지키던 덩치 큰 소년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공을 쫓으려 해 보지만 루페르트의 공은 소년 앞에서 마술처럼 휘어지며 장대 안으로 들어갔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걸 들으며 루페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나는 축구의 황제다.'

멀리서 지켜보던 마를로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오."

남은 고기를 우물거리며 그녀는 루페르트가 보무도 당당히 마을 쪽으로 가는 걸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우리 황제 폐하. 재주 하나는 있으셨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를로네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하는 경이롭군."

신비로운 눈동자에 경의를 담으며 지겔슈타트는 멀어지는 루페르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축구까지 이렇게 잘하실 줄이야!"

지겔슈타트가 다급히 루페르트의 뒤를 따랐다.

마를로네는 마법사의 평소 같지 않은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정오의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이 지금 그녀에겐 더 소중한 행복이었다.

한껏 몸을 이완한 채 마를로네는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했다.

* * *

"전하."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뒤에서 불렀다.

루페르트가 돌아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늘 신비롭고 오만하며 무엇보다 강력한 마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루페르트는 의아함을 느꼈다.

'뭘 말하려는 거지? 설마 여기 있는 도펠죌트너를 죄다 죽이겠다는 말을 늘어놓는 건 아니겠지?'

"사실 이게 욕먹을 짓이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건 조금 윤리적인 문제가...."

"정말로 여기 사람들을 죽이려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놀란 건 지겔슈타트다.

바로 놀란 얼굴로 되물어온다.

"누굴 죽인다는 겁니까?"

"여기 사람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오해가 있었군요."

"제가 대학의 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 절차도 없이 사람을 해칠 정도로 막돼먹은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깐의 오해가 풀린 후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여전히 지겔슈타트는 주저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거지?'

곧 지겔슈타트가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루페르트를 결의에 찬 눈으로 응시했다.

"전하."

"말씀하세요."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저는 전하 바로 옆에서 전하의 말씀을 들었고 행동을 목격했습니다."

'그건 그렇겠지. 항상 내 옆에서 날 지켰으니.'

"대학의 마법사로서 정치에 관여하거나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건 금지되어 있으나, 개인적인 감상을 말할 자유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지겔슈타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전하는 따뜻한 심장의 소유자이십니다."

'또 선량하다는 칭찬인가.'

"동시에 전하는 사자의 심장을 가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

실망의 문턱에 서 있던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축구도 잘하시지요."

"역시 사각 마법사다운 뛰어난 안목이시군요."

"전하의 용단과 비할 바 없는 용기로 밑바닥에 던져진 이 요한 카델라 폰 지겔슈타트는 잃어버린 광명을 되찾았습니다."

지겔슈타트가 더할 나위 없는 경의를 담아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대학의 마법사는 대학의 의지에 구속됩니다. 위대한 오각의 마법사조차 그럴지언정 사각의 마법사에 불과한 저도 예외는 아니지요. 하지만 마법사 또한 한 명의 인간입니다. 대학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전하는 곧 황제가 되실 분입니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보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 마술적인 빛줄기가 모이며 한 장의 카드가 나타나는 것을.

'이건?'

틀림없다.

여신의 권능, 카드의 군단이다.

손에 쥐어 쥔 카드에 한 사내의 얼굴과 더불어 이름이 빛의 펜으로 쓰여졌다.

[ 지겔슈타트 ]

"아직 여정이 끝난 건 아닙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일 또한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사히 돌아가서 제국의 품에 안기고 그때 전하, 아니 폐하께서 저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언제든지, 심지어 대학이 저를 원하는 때라고 할지라도 달려가 제국 마법사의 본분을 다하고 싶습니다."

루페르트는 담담한 얼굴로 지겔슈타트와 손바닥의 카드를 번갈아 보았다.

황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 말, 기억하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영혼 동맹을 얻었다.

피리스 같은 초급 마법사와 격을 달리하는 진정한 마법사가 루페르트의 군단에 합류한 것이다.

카드를 보았다.

[ '마법사 살해자' 하인리히 지겔슈타트 ]

- 등급

S- 특징

비인가 마법사 사냥꾼 A+

영역 감지자 A+

마법보다는 학문 A+

- 영혼 동맹 효과

마법 무력화 S

'S라고.'

최상 등급의 인재다.

저 한스 징펠만마저도 뛰어넘을 정도로.

특히 영혼 동맹 효과는 말이 되지 않을 정도다.

능력 쪽을 가만히 응시하자 설명이 떠오른다.

<마법 무력화>

- 지겔슈타트보다 격이 낮은 모든 마법을 무효로 돌린다.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 파비안 아비투스가 가지고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능력이다.

'설마하니 이 정도 사람이 내 영혼 동맹으로 들어오게 될 줄이야.'

문득 루페르트는 외로움을 느꼈다.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여신님이 마음속에 직접 울리는 단아하고 청명한 목소리로 루페르트에게 해석을 해 주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여신님과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이제 아주 조금이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영혼 동맹을 굳건한 신뢰가 담긴 눈으로 응시했다.

그의 영혼 동맹 또한 더 이상 신비롭지만은 않은 푸른 눈동자로 그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 * *

막간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고어문트입니다. 선제후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고어문트라."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이 하브루타인에게 구입한 새 지도를 가만히 바라보다 곧 고어문트령 한가운데 섬처럼 뚝 떨어진 영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어문트 선제후도 좋지만, 이쪽이 좋겠군요."

"슈베린 남작령?"

"골트문트의 친척이지만 처가가 슈발츠마인 쪽입니다. 고어문트 가문 쪽에서는 급이 떨어지고 처가 쪽에서 오히려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지요. 사실상 슈발츠마인계라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루페르트의 말을 듣던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방대한 궁중 지식을 가지고 있다니.'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귀족과 군주, 가문의 파워밸런스를 한눈에 꿰뚫어 본다.

그건 루페르트 본인도 모르는 그만의 강점이었다.

10년간 꼭두각시 황제 놀음을 했다고 하지만, 그동안에 보고 듣고 경험하고 치열하게 몸부림한 흔적이 지식의 형태로 새로운 루페르트의 뇌리에 자리 잡은 것이다.

"슈베린 남작에게 여비와 소수의 호위를 받은 뒤 전력으로 디터팔츠로 넘어갑시다. 여기에도 친 슈발츠마인 군주가 있습니다. 디터팔츠에 이르면 여정은 거의 끝을 바라보겠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향하는 동안 루페르트의 시선은 오직 지도의 상단. 테타우만을 오롯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간다. 황제의 관과 황제의 의무와 황제의 싸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울러.'

루페르트는 가슴 위 허공을 자기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여신님 또한.'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의 배웅을 받으며 루페르트 일행은 무법자의 마을을 떠났다.

볼품은 없지만, 인내심 강한 말 등 위에 올라탄 루페르트 일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쾌속으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거기엔 추격자도 앞을 가로막는 군대도 없었다.

순조롭게 루페르트 일행은 슈베린 남작령에 도착했다.

73화 20. 두 개의 길 (1)

"설마하니 슈발츠마인 가문의 방문자가 룸왕 전하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미리 앞서 맞이하지 않은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환갑을 바라보는 슈베린 남작은 왜소한 체구와 움푹 들어간 볼 때문인지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지만,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황제 시절 루페르트는 슈베린 남작을 직접 알현한 적이 한 번 있다.

꼭두각시 황제라고 소문이 자자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제국의 황제였다.

소귀족에겐 여전히 하늘과 같은 존재다.

게다가 같은 슈발츠마인계이기도 하겠다 슈베린 남작은 루페르트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 사람이었다.

"속히 전하에 어울리는 침실과 편의를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일행분들에게도 응당한 편의를 제공할 작정입니다. 그 붉은 명찰을 단 분들을 포함해서요."

"남작님의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식사와 안전의 보장.

이 또한 루페르트가 슈베린 남작에게 기대한 것이지만 루페르트의 진정한 속내는 따로 있다.

루페르트와 슈베린 남작은 같은 파벌이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탄 동승자다.

"전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파벌이라는 건 손해와 이익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줄 수 있는 가짓수가 훨씬 많다.

"전하께서 호위대를 놔두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계시는 걸 보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시겠지만...."

슈베린 남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현재 테타우에선 터무니없는 반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선거를 무효로 돌리는 것 말입니까?"

"역시, 알고 계셨군요."

"누굽니까?"

루페르트가 알고 싶은 건 그것이다.

누가 반역자인가.

누가 루페르트를 붉은 산맥 아래에 잡아 두고 그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라고 해도.

은밀한 분노를 푸른 눈동자에 갈무리한 채 루페르트는 남작의 입이 열리는 걸 기다렸다.

슈베린 남작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람인가?'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어스는 한 달 전, 선제후 자격으로 임시 제국 의회를 소집을 촉구했다.

제국 의회는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의사 결정 기구.

소집권자는 제국의 황제와 선제후단 의장이나 긴급한 사안이 발생할 경우 선제후가 다른 선제후 둘의 동의를 얻어 임시 제국 의회를 소집할 수도 있다.

제국 의회의 결정이 선거 결과를 뒤집는 효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국의 크고 작은 군주가 모두 참석하는 그 자리에서 여론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다른 선제후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황제 또한 선제후단의 결정에는 구속되니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이 독단적인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선제후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했다면 임시 제국 의회 자체가 뒤로 미뤄지거나 취소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건 현재 여섯 선제후 중 루페르트를 순수하게 지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아카이아 대주교조차 방관할 줄이야. 하긴 그 노인은 내가 단지 내가 신심이 다른 선제후보다 깊어 보인다는 가벼운 이유로 표를 던졌었지.'

그 제국 의회는 3일 뒤 개최된다.

사태는 긴급을 요한다.

거기서 선거 결과가 뒤집히진 않겠지만, 더 크고 구체적인 음모의 발단이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니.

반역의 불길은 빠르게 진압해야 한다.

"제가 가진 가장 뛰어난 말들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슈베린 남작은 가문의 사람답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구간에서 가장 뛰어난 명마들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 고마움을 뭐로 표현해야 할지.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전하! 하지만 늙은 저보다는 제 아들놈을 기억해 주십시오! 크리스티안. 수줍어하지 말고 어서 룸왕 전하에게 인사드리거라! 곧 이 제국의 황제가 되실 분이다!"

슈베린 뒤에서 겨우 십 대 중반의 앳된 소년이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물론이고, 자식에게도 연줄을 대려 하는군.'

루페르트는 이에 대해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종자가 생기는 건 좋은 일이다.

루페르트는 소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름이 크리스티안이라고?"

이에 소년은 앳된 얼굴에 홍조를 붉히며 수줍게 답했다.

"네. 제가 크리스티안입니다."

슈베린 남작이 옆에서 쾌활하게 웃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전하. 크리스티안은 오래전부터 전하를 동경했으니까요."

"나를 동경한다고요?"

루페르트는 강한 어색함을 느꼈다.

동경이라니.

모두의 조롱을 받던 꼭두각시 황제와는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다.

"크리스티안은 전하의 무용담에 푹 빠졌죠. 밤새 등불을 밝히고 전하의 무용담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렇지 않느냐? 크리스티안?"

"네. 아버님."

크리스티안이 수줍음이 남은 얼굴로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감회라는 일렁거리는 파도 위에서 샛별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는 두말할 것 없는 동경의 빛 그 자체였다.

"전하의 모든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특히 리히트보덴에서의 활약은 또 읽고 읽었어요!"

'그런 것도 출판된 모양이군.'

돈에 눈이 먼 인쇄업자들이 잘 팔리지도 않는 호라교 경전 대신에 별 같잖은 가십을 팸플릿 형태로 찍어내 판다는 건 흔한 일이다.

그들의 방대하고도 조잡한 출판물 리스트에 제국 전역에 이름을 오르내리는 화제의 인물인 루페르트의 이야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보나 마나 인쇄업자 놈들 상상으로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적어 놓았겠지만, 어떤 내용인지 조금은 확인해 볼까?'

루페르트는 모처럼 장난기가 발동하는 걸 느끼며 크리스티안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 크리스티안. 그 리히트보덴 모험담 중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느냐?"

이에 크리스타인아 안 그래도 반짝이던 눈을 더욱 반짝이며 신이나 떠들었다.

"무능한 도펠죌트너가 겁을 집어먹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자 전하께서 대로하셔서 홀로 스크라엘링 무리에 뛰어 들어가 수십 마리를 썩은 짚단처럼 베어 내신 부분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멀찌감치 서 있는 베르크 란 조손을 자기도 모르게 응시했다.

마를로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렇구나."

"정말인가요? 그 이야기가?"

"과장이 심한 거 같구나."

루페르트는 미소 지은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시간 나면 다른 판본들도 살펴봐야겠어. 대체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았는지 궁금해.'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오히려 약간의 놀라움 섞인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늘 조롱받고 천대받던 그가 이제는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영웅처럼 묘사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 모든 건 결국 여신님 덕분이겠지.'

루페르트는 즉시 떠날 채비를 했다.

마음 같아선 하루 이틀 더 묵으며 루페르트 자신의 모험담을 보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그럼, 대관식에서 뵙겠습니다."

루페르트는 자신을 둘러싼 슈베린 남작 가문의 일원을 흐뭇한 얼굴로 돌아보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기꺼이!"

힘찬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다섯 필의 말이 테타우를 향해 출발했다.

남은 시간은 3일.

정확히는 이틀하고도 약 10시간 정도이다.

슈베린에서 테타우까지는 통상 속도로 3일, 서두를 경우엔 이틀이 걸린다.

대단히 촉박한 여정이다.

'시간 싸움이라는 건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별 위험은....'

위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루페르트는 갑자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위기 감지가 발동한 것이다.

루페르트는 조건반사적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콰쾅!

굉음이 울리며 슈베린 남작의 저택 쪽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창가에서 붉은 불길이 혀를 날름거리는 가운데 검은 연기를 하늘 전체를 가릴 기세로 솟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적자가 따라온 것 같군요."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말했다.

지겔슈타트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추적자는 저의 감지 범위를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쪽을 노리는 게 아니다.

날카로운 비명이 저택 쪽에서 울려 퍼졌다.

"저런 저주받을 사람들!"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짤막하게 보고했다.

"추적자들이 남작 일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추적자가 뭘 노리는지 알아차렸다.

'우리를 부르고 있군.'

추적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지겔슈타트가 있는 루페르트 일행을 건드릴 수 없으니 대신 발목을 잡고자 남작 일가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 녀석도 있군."

베르크 란이 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더욱 진한 불길이 타올랐다.

그의 동공의 중심엔 불타는 검을 들고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 앞에 도도하게 선 염소 가면의 도펠죌트너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불길의 잔상만이 허공에 새겨졌다.

일방적인 도륙.

하급 군주의 병사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남작과 그 일가가 저택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농성할 작정인데...."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버티긴 어렵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남작 일가를 구하느냐, 이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가느냐.

그걸 결정하는 건 루페르트의 몫이다.

"...."

정답은 정해져 있다.

무시하고 그대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쪽이 시간을 벌 수도 있고 불필요한 전투를 피할 수도 있다.

'철혈대제라면 약간의 고민도 하지 않고 그들을 버렸겠지.'

루페르트도 남작 일가를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루페르트의 눈앞에 자신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크리스티안이라는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년과 루페르트는 어떤 관계도 아니다.

그들이 슈발츠마인계에 가깝다고 하나 형식적으로는 고어문트 계열이며, 소년과 루페르트는 오늘 만나기 전까진 일면식도 없었다.

애당초 남작의 도움도 서로의 이익을 원한 것이지 이타심이나 충성심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일개 소군주 같은 건 쉽게 버려도 되는 패다.

그런데 왜일까.

자꾸 이 쉬운 길에 회의가 드는 것은.

"잠깐."

루페르트가 고삐를 잡아 말을 세웠다.

군주가 멈춰서자 그를 따르던 수행원 또한 일제히 말을 멈췄다.

푸레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루페르트가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갑시다."

시선들이 루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그 대부분의 색채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의 무게를 마음속 깊이 느끼며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쉰 후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들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양심으로부터 잠시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허나."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쉬운 길만을 가지 않겠다."

모두가 루페르트의 결정에 의문을 품었다.

오직 단 한 명, 마를로네를 제외하고는.

'저 사람.'

그녀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조부를 닮은 암녹색 눈동자에 늘 서려 있던 안개가 걷혔다.

루페르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칠칠치 못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놈의 슈발츠마인 가문 소속만 아니라면.

그래도 선은 분명히 그었다.

그 남자, 루페르트 가우저는 권력자다.

권력자의 속성은 그녀가 보기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갖가지 감언이설이니 꾸며 낸 위엄, 그럴듯한 대의명분으로 무장했지만 결국 그들이 원하는 건 눈앞의 이익이다.

루페르트 또한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편견은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함께한 시간이 길수록, 함께 경험한 수라장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 사내가 막강한 전사와 마법사 사이에 서서 그야말로 한 명의 군주로서 명하고 있다.

"나는 선제보다 야망은 크지 않을지 몰라도 욕심만큼은 많은 모양이다. 제국 의회의 소집도 막을 것이고 나를 지지해 준 남작 일가 또한 지킬 것이다."

루페르트가 앞장서서 저택으로 말을 내달렸다.

군주의 선택이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말없이 뒤를 따랐다.

습격자들은 승냥이처럼 교활하고 비열했다.

저택을 포위하고 사로잡은 병사와 하인을 재미 삼아 고문하고 살해하던 그들은 루페르트가 돌아오자마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루페르트가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남작이 문을 활짝 열고 후다닥 달려 나왔다.

"페하! 오! 황제 폐하!!! 저 같은 하찮은 귀족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백발의 슈베린 남작 뒤에 창백한 소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건조하고 뒤틀린 마음에 약간의 안식이 찾아오는 감각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두 명을 남기겠다."

모두의 놀란 시선이 루페르트를 향했다.

여기서 두 명을 남기겠다니.

"지겔슈타트 법사와 징펠만 총사."

입을 닫고 있던 지겔슈타트가 열국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여기 남는다면...."

"걱정 마십시오."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남은 두 명을 돌아보았다.

"이들은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믿을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저에겐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

"피차 서로 가진 말의 속도는 대체로 비슷하다."

"그 말씀은?"

지겔슈타트는 루페르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둘은 이제 영혼 동맹이다.

설명 따윈 필요 없다.

지겔슈타트, 한스 징펠만과 루페르트는 단순한 신뢰를 넘어선 영혼으로 묶인 동맹 관계니까.

루페르트 일행이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74화 20. 두 개의 길 (2)

추적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들로선 쉬이 움직일 수 없다.

남작 앞에 우뚝 선 사각의 마법사를 본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귀찮게 됐군. 사각의 마법사를 남겨 두다니. 거기다 그 무자비한 살인마 한스 징펠만까지."

'매잡이' 호겔 프리츠가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 옆에 우뚝 선 염소 가면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본 실력을 드러내는 건 어떨까? 그대가 전력을 다한다면 죽일 수 있지 않나? 저 마법사조차."

"...."

염소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면의 좁은 눈구멍 속의 그의 시야가 향하는 곳은 마법사가 아니다.

그는 멀리 달아나는 루페르트의 양옆을 지킨 도펠죌트너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택을 우회한다."

염소 가면이 말했다.

불만의 눈빛들이 염소 가면을 향했지만, 감히 그에게 불만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포로 지배하는 자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흉조의 힘으로.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멀찌감치 숲을 따라 우회하는 추격자들을 바라보다 나란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디 무사하시길."

* * *

황제 시절 루페르트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도 점점 깊어지는 제국의 내란에 위기와 책임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든 진화하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꼭두각시 황제의 한계를 깨닫고 포기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 짧고 허무했던 격동기 속에도 교훈은 있다.

"도망자와 추격자, 둘 모두가 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추격자가 도망자를 따라잡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지. 더 빠른 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더 쌩쌩한 말을 가지고 있거나."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망해 가는 황궁에 도둑이 든 일이 있었다.

도둑은 그나마 남아 있던 보석을 싹싹 긁어 황궁 밖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이쪽이 추격대를 보냈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도둑을 놓쳤다.

성벽 위에서 마음을 졸이며 그 장면을 봐서 잘 안다.

동등한 말을 가지고 있을 때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중요한 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지."

베르크 란이 힐끗 루페르트 쪽을 쳐다보았고 마를로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참, 대담한 작전이네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이 지치면 그땐 어떻게 하죠?"

"우리 말이 지친다면 그들의 말도 지치겠지. 거기다 우리의 말은 얼마 전까지 마구간에 있었지만 적의 말은 이미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 어느 쪽이 쌩쌩할는지는 자명하겠지?"

"그렇군요."

마를로네는 고삐를 움직여 그녀의 할아버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루페르트 눈치를 보며 베르크 란 정도가 간신히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속삭였다.

"우리 황제 폐하가 또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말하고 있는데?"

"인정한다."

"어떡하지? 할아버지 그 염소 이길 수 있어?"

"아마 내가 이기겠지."

"정말?"

"...내가 이긴다. 하지만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

"왜? 이긴다며?"

"그자에게 동료가 있다는 걸 잊은 거냐? 애당초 네가 조금만 더 도움이 됐더라면...."

"우리 더 좋은 방법은 없어?"

"글쎄다."

베르크 란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란 애송이가 황제에 근접할수록 보이는 게 있다.

바로 선제의 모습이다.

'선제라면 남작 일가를 버리는 것도 모자라 남작 일가 본인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선제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겠지.'

루페르트는 그가 모시던 철혈대제에 비해 지나치게 유약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모를까 당장 테타우에서 반역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저렇게 물렁한 모습을 자꾸 보인다는 건 적어도 베르크 란의 눈엔 무능력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장 위기를 자초했어. 그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도 어처구니가 없고. 거리를 유지한다니?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말보다 빠른 걸 구하기 어려운 건 맞지만 상대방을 앞지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이를테면 대단히 민첩한 하나를 보내 앞길을 막는다거나, 지름길로 거리를 좁힌다든가.

아니면 연기나 깃발 같은 걸로 가까이 있는 동료에게 신호를 보내 협공할 수도 있다.

루페르트가 제시한 빈약한 근거 따윈 가볍게 지르밟을 위험이 가득하다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날 무렵 지평선 끝에 불온한 점들이 나타났다.

"추격자가 시야에 나타났네요."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이 빌려준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낭랑하게 말했다.

"내버려 둬라. 거리만 유지해. 놈들이 뛰면 우리도 뛰고, 놈들이 걸으면 우리도 걷고."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베르크 란에게 접근했다.

"무슨 생각일까?"

"글쎄다."

정말이지 단순하고 안일한 발상이다.

상대방이 누군가.

일개 보병연대의 호위를 받는 룸왕을 묶어 두려던 자다.

그 철두철미함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권능과 힘은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강적을 상대로 이런 안일한 작전이라니.

선제라면, 철혈대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법이다.

하지만 저 사내, 루페르트는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엉성한 계획이 통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자연스러운 몸짓과 웃는 듯한 입매에서 느껴졌다.

'선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베르크 란은 마를로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총 쏘는 놈을 죽일 수 있겠느냐?"

"글쎄. 쉽진 않겠던데. 그가 콧수염 아저씨랑 비슷한 실력이라면."

"내가 시선을 끌겠다."

"할아버지가 그래 준다면야."

이미 베르크 란의 머릿속에 작전은 실패했다.

그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명의 병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한.

그런데.

"...."

반나절이 지났다.

베르크 란은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적은 여전히 지평선 가까운 것에 점의 형태로 존재한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루페르트의 그 엉성한 계획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게 통하는 거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손 패를 내려놓는 악수를 저질렀는데도 왜 이런 수가 통하고 있느냐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긴 마를로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사고는 그녀의 조부보다는 좀 더 유연했다.

"사실 저 사람들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거 아닐까? 저 사람들도 엄청 준비하고 퍼부었잖아? 자부아에서부터 시작해 에반하우젠까지. 그러니까 우리를 쫓아오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저들도 신은 아닐 거 아냐?"

"...."

손녀의 말에 베르크 란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적들의 궁색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살아 있는 증거 그 자체였으니.

그런데 루페르트에겐 또 다른 하나가 있었다.

"슈발츠마인의 사람이다."

그것은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권력 지도다.

이질적인 선제후의 영토 안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가문이 지배하는 영역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세 필의 말과 식량을 빠르게 준비해다오. 사유는 말할 수 없으나, 이 사례는 테타우에서 하겠다고 전해라."

루페르트는 자신의 인장을 경비병에게 맡겼다.

루페르트의 풍모와 복장, 그 말씨가 예사롭지 않은 걸 발견한 경비병은 기민하게 인장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곧 경비병이 나왔다.

"후작께서 환영할 준비를 하셨다고...."

"시급을 요하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경비병이 세 필의 말을 내왔다.

"추격자가 영지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인근 영주에 지원을 요청하고 총병을 위주로 방비를 단단히 구축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새로운 말을 구하는 동안 추격자가 가까이 접근했으나 새로운 말을 얻어 탄 루페르트는 활기찬 질주로 좁혀진 거리를 단숨에 벌렸다.

루페르트를 바라보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운 좋은 시골 촌놈이 아니다.

머리도 나쁘고 지략도 평범하고 전투력도 일개 병사 수준이지만 제국의 권력 지도와 귀족을 다루는 솜씨는 평범한 자의 것이 아니다.

그 수많은 귀족과 군주 중에서도 대단히 높은, 이를테면 선제후급에서나 가능한 관록을 저 시골 출신 젊은이가 가뿐히 해내고 있다.

너무도 빠르고 쉽게 보급을 끝마치자 추격자의 기세는 급격히 떨어졌다.

지평선 끝에 어른거릴 정도의 거리로 따라오던 추격자들은 상부 디터팔츠 부근부터 슬슬 포기하는 기색이 보이더니 슈발츠마인 접경부턴 아예 자취를 감췄다.

추격자가 추격을 포기한 것이다.

루페르트의 단순한 발상이 추격자의 교활한 콧대를 꺾어 버렸다.

"유목민이 된 기분이네요. 말 위에서 먹고 자고."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아무 일도 없겠죠?"

그녀의 물음에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어슴푸레 잠겨 드는 농경지와 벌판,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아직 하나가 남았어."

"하나가 더 남았어요?"

마를로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걱정 마.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루페르트가 하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은 그들의 고용주의 뒷모습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응시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베르크 란이 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고용한 사내의 이름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기이하게도 베르크 란은 그 울림에서 야릇한 운명을 느꼈다.

도처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널브러진 셀 수 없는 시신,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약 연기와 위태롭게 휘날리는 군기의 모습을.

그 이름에선 전쟁의 맛이 났다.

* * *

제국 수도 테타우. 동 제국 의회 대강당.

거기엔 저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권력을 뽐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단상의 중앙에 서 있는,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녹색 빛을 띤 안색을 한 죽어 가는 남자였다.

"안젤리나 대황후의 표가 과연 효력이 있는가? 그걸 따지는 게 그리 불경한 것인가?"

불길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입에서 나는 끔찍한 구취와 달리 그의 목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유언에 의한 의사 표시라고 하나 그 의사 표시가 정상적인 의사 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악의를 품은 누군가가 사경을 헤매는 대황후를 기망하여 그녀의 결심을 비열하게 바꾼 것이 아닐까?"

그 사내는 골트문트도 레벤호스트도 게오르크 아르님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다.

죽어 간다는 소문과 달리 사자의 포효 같은 그의 웅변을 들으며 자리를 차지한 제국 의회의 군주와 귀족들은 서서히 마음이 기울어 가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시선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바로 앞에 배석한 다섯 명의 선제후를 향하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저 죽어 가는 사내의 웅변을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권력과 권한이 있음에도.

"그렇다면 그 표는 효력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사자후는 이제 종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군주들은 수군거렸다.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는 차기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디에 있는지.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병사들이 앞을 막았으나 그가 내민 인장을 보고 황송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열어 주었다.

군주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거기엔 검은 톤의 의복을 입은 젊다기보다는 앳된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단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군주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루, 룸왕이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그럴 리가?! 그는 자부아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웅성거림 속에서 루페르트 가우저는 단상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병든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왜? 내가 나타난 게 그리도 놀라울 일인가?"

루페르트가 불타는 눈동자로 선제후를 노려보며 엄중하게 물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룸왕으로서 묻겠다."

루페르트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죽어 가는 자의 얼굴을 꿰뚫을 듯 직시했다.

"내 자격에 의문을 품는 건가?"

서릿발 같은 음성에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주춤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나면서부터 고귀했고 특별했던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가 불과 2년 전만 해도 하켄하임에서 시답잖은 일을 하던 시골 청년에게 압도당한 것이다.

"가, 가능성을 제기해 본 겁니다."

선제후가 시선을 피했다.

다른 선제후들이 루페르트를 바라본다.

흥미, 놀라움, 불쾌함, 무관심.

겉으로 드러난 감정은 다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울리는 생각은 하나이리라.

황제가 돌아왔다.

75화 20. 두 개의 길 (3)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꼿꼿하게 앉아 있는 3명의 사내를 턱을 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들은 황제가 되실 룸왕 전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힘이 되어 드리려 합니다."

갑작스레 루페르트의 측근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루페르트가 산봉우리에 내리치는 벼락처럼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쫓아내듯 제국 의회장에서 쫓아낸 직후의 일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제국 기사 요하네스, 쿠름바하 남작 오토 브라에, 카를로비 남작 베르너.

총 세 명이다.

이들을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시선은 싸늘했다.

'내 측근이 되겠다면 최소한 선제후가 됐던 시점부터 찾아오든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이제 와서 오면 어쩌라는 건지. 가문의 연줄로 날로 먹겠다는 건가?'

첫 번째 장벽은 시기다.

어려울 때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 황제가 되려 하니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모양새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두 번째 장벽은 그들의 출신이다.

'슈발츠마인이라. 내 가문이고 선제후 가문 중에 제일 세가 강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별로 인물은 없는 거 같던데.'

당장 가문 일원 모임에서 이 사람이다! 할 만한 인재는 없었다.

게다가 슈발츠마인 출신 중엔 프리드리히 헤첸이라는 유쾌한 친구가 있었다.

황제 선거에서 무조건 승리를 보장하겠다고 큰소리 떵떵 쳐 놓고는 한 표도 얻지 못한 그 무능한 친구 말이다.

세 번째 장벽은 이들의 젊음이다.

가장 나이가 많다는 오토 브라에조차 서른을 채 넘지 않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은 나이는 반드시 단점과 연결되지만, 너무 어린 나이는 자격 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요소다.

'내 황제 시절에 자칭 수많은 천재를 봤지만, 진짜 천재는 하나도 없었지. 결국 사람의 능력이란 건 경험을 필요로 해.'

마음 같아선 당장 돌려보내고 싶다.

특히 시기가 안 좋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물러났다고 하나 그 죽어 가는 인간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을뿐더러 루페르트는 무엇보다 리프니에와 재회하고 싶다.

'빨리 여신님을 만나고 싶은데, 참.'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마디 정도는 들어 줘야 할 것 같다.

남도 아니고 슈발츠마인 사람들이니.

적당히 상대하다 빨리 쫓아내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굳히고는 루페르트는 턱을 괸 채 당돌한 방문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그런데 루페르트의 의심은 첫 한마디부터 산산이 부서졌다.

"안젤리나 대황후의 명령입니다."

가장 연장자인 오토 브라에가 말했다.

"안젤리나 대황후?"

오랫동안 잊고 있던 조력자의 이름을 듣자 루페르트는 턱을 괸 자세에서 손을 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황후가? 그녀는 분명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터인데. 어쩌면 지금쯤 죽었을 수도 있고.'

"그게 정말인가?"

곧 황제가 될 사람다운 위엄을 내비치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황후께서 저희를 보냈습니다. 대황후께서 서거하신 이후에 룸왕 전하 혹은 황제 폐하를 찾아뵈라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루페르트의 물음에 세 사내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황후는 전하께서 룸왕의 의례를 치르고 있으실 때 유명을 다하셨습니다."

"...그런가."

안젤리나의 죽음은 이미 예상된 일이다.

마지막 만났을 때 그녀는 사실상 망자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영혼이 쇠약한 육체를 떠났다.

루페르트는 잠시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숙연한 시간이 지난 후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앉은 세 명의 젊은 귀족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겉모습은 평범하나 안젤리나 본인이 직접 천거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엉터리와는 급이 다르리라.

그들의 능력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긴 하지만 사실 루페르트에겐 아직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은 썩 빼어나지 않다.

정치 공작 쪽이나 정계에 관한 사정엔 밝지만, 실질적인 업무 능력이나 보좌력을 알아보는 재주는 부족하다.

그러니 프리드리히 헤첸 같은 엉터리를 측근으로 기용한 것이지만.

그런데 루페르트에겐 비장의 한 수가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쓰겠냐.'

모처럼 루페르트는 통찰의 만화경을 사용했다.

적당한 방 안에 한 명씩 몰아넣고 루페르트 본인은 불경한 빛이 보이지 않을 장소에 숨어 그들 하나하나를 여신의 권능으로 뜯어 보는 것이다.

최초의 통찰 대상은 오토 브라에였다.

< "쿠름바하의 가난한 남작" 오토 브라에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중앙 제국인

분류: 수재

성별: 남성

연령: 28세

명성: 일부에게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살림 잘하는 노총각 영주: B-

인심 좋은 인육 배급자: C+

제국의 유능한 총신: A

3. 특기사항

- 낮은 단계의 인간성 결여

4. 등급

A

"...."

능력 자체는 대단히 뛰어나다.

전사도, 사냥꾼도 마법사도 아닌 관료로서 A등급 이상을 받은 건 이 사람이 처음이다.

황제가 될 루페르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그런데 결점 또한 뚜렷하다.

'인심 좋은 인육 배급자라니. 여신님다운 표현이군. 거기다 인간성 결여...?'

그런데 운명의 실타래는 무조건 실현되는 미래는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 브라에라는 이름을 기억했다.

합격.

다음은 최연소자인 요하네스다.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불경한 녹색 빛이 어른거렸다.< "주판을 든 기사" 요하네스 폰 리터 하임멜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천재

성별: 남성

연령: 22세

명성: 거의 알려지지 않음

신체상의 특징: 불면증

2. 운명의 실타래

악명높은 "요하네스 사기"의 창시자: A-

제국의 적: A

제국을 떠받치는 황금 기둥: A+

3. 특기사항

- 중간 단계의 양심 결여

4. 등급

A+

'뭐, 뭐냐. 이놈은?!'

능력 하나만은 입이 떡 벌어진다.

루페르트의 가장 우수한 영혼 동맹인 한스 징펠만과 같은 등급.

무려 재정 관료로 제국을 떠받드는 황금 기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관료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제국에서 문관으로 이 정도 찬사를 듣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 친구, 극도로 위험하다.

'제국의 적이라니. 최악의 범죄자나 대역죄인에게 붙이는 칭호 아닌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게다가 악명 높은 요하네스 사기는 뭐냐? 이 친구.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드는데.'

특징이 보인다.

이 요하네스라는 친구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지만 또한 극도로 위험하다.

양날의 검이라고 할까.

하지만 잘만 쓸 수만 있다면 요하네스는 어떤 관료보다 루페르트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전쟁에 문외한이라고 하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라는 것을 루페르트도 모르진 않으니 말이다.

슈발츠마인의 재정이 윤택하고 루페르트 본인 또한 리히트보덴에서 올라오는 부유한 수입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이라는 건 상상 이상의 돈을 요구한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저 골트문트조차 3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파산에 몰아넣는 것이 전쟁이다.

유능한 재정 책임자는 내전기를 대비해야 하는 루페르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다.

합격.

루페르트는 요하네스라는 이름 또한 기억에 새겼다.

남은 건 하나다.

앞선 둘을 보며 루페르트는 안젤리나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인재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걸까. 통찰의 만화경을 보면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인데. 역시 안젤리나 대황후는 대단한 사람이었어. 통찰의 만화경이 없음에도 이런 인재들을 발굴하는 걸 보면.'

궁금한 게 있다.

왜 이런 인재를 발굴하고도 그녀가 죽은 이후에 루페르트를 찾아오라고 한 것일까.

그건 마지막 후보의 능력을 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불경한 빛이 서렸다.< "카를로비의 완고한 남작" 베르너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중앙 제국인

분류: 범재

성별: 남성

연령: 25세

명성: 일부에게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없음

2. 운명의 실타래

무명의 군주: B-

오크에게 매달린 시체: C-

제국의 총신: B

3. 특기사항

- 흔들리지 않음

4. 등급

B

두 사람이 지나치게 색채가 강해서일까.

베르너 남작은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등급도 그렇고 운명의 실타래도 그렇다.

특출난 구석은 없다.

하지만 특기사항이 눈에 걸린다.

'흔들리지 않음이라. 정신적인 면을 말하는 건가.'

오토 브라에와 요하네스는 저마다 정신이나 마음에 문제를 노출했다.

하지만 베르너의 경우엔 정신적인 문제는커녕 오히려 강인한 정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특징마저 있다.

루페르트는 앞선 두 사람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올곧은 눈빛을 가진 베르너라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황후가 아무 이유 없이 평범한 자를 선택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분은 이 사람의 내면의 강인함을 보고 선택했을지도.'

합격.

루페르트는 마지막 후보인 베르너 또한 선택했다.

다시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관식에 참석하라. 그대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

오토 브라에, 요하네스, 베르너 삼 인은 루페르트에게 예를 표했다.

이제 한 가지가 남았다.

왜 안젤리나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 루페르트를 찾아가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베르너가 봉인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전하께서 이유를 물을 때 대비해 저에게 편지를 남기셨습니다."

루페르트는 베르너에게서 서찰을 받아 들었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조촐한 편지에선 은은한 장미 향이 피어 나왔다.

루페르트는 편지의 겉봉을 단단하게 조여 맨 붉은 봉인을 응시했다.

편지는 개봉된 적이 없다.

루페르트는 베르너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의 강직한 면을 믿고 편지를 맡긴 것이군.'

편지를 개봉했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진한 장미 향이 실내 전체를 채울 것처럼 화려하게 퍼져 나갔다.

안젤리나의 처소를 항상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장미들을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안젤리나의 마지막 메시지를 눈으로 읽어 나갔다.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선제와 함께 있겠지.

내 보아하니 그대 주변에 함께 전장에 서 줄 사람은 몇 있으나 궁정에서 세울 인재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선제 이전의 천둥제도, 선제도 유능한 총신을 궁정 안에 남겨 두고 제국 전역을 동분서주하며 제국 전체를 태워 버릴 법한 불길을 수습했다.

내가 준비한 3인은 가능성을 가진 뛰어난 젊은이다.

잘만 쓸 수 있다면 그대의 으뜸가는 총신이 될 것이다.

허나 그들에게도 단점은 있다.

특히 요하네스는 가장 뛰어나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이다.

그의 심장엔 제국이 없다.

그대의 시대가 선제의 시기보다 더 어려우리라는 건 명약관화하다.

일견 모든 문제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부분은 미봉책이며 시간이 지나면 곪거나 터질 성격의 문제니까.

선택은 그대의 몫이다.

안정을 원한다면 베르너 하나만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완벽한 인선이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토록 위험한 화약을 왜 군대가 고수하는지 생각해 보라.

추신. 내 그대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독인지 약인지는 그대가 결정할 일.

새로운 황제 폐하의 앞길에 영광이 있기를.

아울러 살아생전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한 무심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를.

안젤리나.

편지를 움켜쥔 루페르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안젤리나 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루페르트는 세 사람을 내보낸 뒤에도 한참 동안 서재에 남은 채 짙은 여운에 잠겨 있었다.

* * *

"전하!"

"아니, 전하께서?!"

느닷없는 루페르트의 귀환에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하인들이 더럽혀진 망토를 푸는 가운데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문의 경비병이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감히 도펠죌트너 따위가 선제후의 사적 영역에 들어오는 걸 용납하지 않으려는 눈치.

루페르트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물러서라."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시선이 일제히 루페르트를 향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흐르는 건 만성적인 의구심과 회의.

여전히 그들은 루페르트를 신뢰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가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리라.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페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해라."

베르크 란이 고개를 숙이고 마를로네가 활짝 웃는다.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재회가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루페르트의 심장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을 때부터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여신님...!!'

저 너머 화려한 문 너머에 소라고둥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모든 걸 주고 현재를 있게 한 만변의 제공자.

리프니에가.

문을 열고 루페르트는 제단 위에 우뚝 서 있는 소라고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신님. 돌아왔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그런데.

"음?"

소라고둥이 말이 없다.

"여신님? 주무세요?"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어 쓰다듬어 보기도 했고 감히 불경을 무릅쓰고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머, 어딜 보는 거예요. 파렴치하게."

등 뒤에서 영원히 잊을 없는 싱그럽고 발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신님?!"

루페르트의 눈이 핏발이 설 정도로 커졌다.

틀림없다.

뒤에서 들려온 건 틀림없는 그의 여신의 음성이다.

그런데.

'뭐, 뭐냐? 이건?'

그의 뒤에 서 있는 건 소라고둥도 신적인 광휘 같은 것도 아니었다.

"루페르트 여기예요 여기!"

그것은 조각상이었다.

안젤리나의 어릴 적 모습을 참고했다는 피어나기 전의 장미의 꽃봉우리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녀의 조각상이다.

그 대리석으로 빚은 조각상의 눈동자엔 있어서는 기묘한 광채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어때 보여요?"

조각상이 움직였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 이건...."

"저예요. 저! 리프니에."

"!!"

조각상이 활짝 웃었다.

"당신의 여신님이죠."

루페르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핵심 퀘스트(중요!) ]

"!!"

그 아래의 행을 본 순간 루페르트의 얼굴은 핏기가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76화 20. 두 개의 길 (4)

"...."

미약한 신음을 흘리며 루페르트는 뒷걸음질 쳤다.

마치 그 문자로부터 도망치듯이.

조각상이 다가오며 그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퀘스트를 하나 주겠다고 했었죠?"

"여, 여신님. 이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 가련한 안젤리나는 자신도 모르는 부정한 저주로 오염된 상태예요. 이대로 놔두면 그녀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겠지요. 제국을 위해서 그녀의 영혼을 위해서 시신에 새겨진 저주를 제거할 필요가 있어요.

안젤리나의 시신을 가지고 오세요! 그것이 더 부패하기 전에! ]

"이건...."

루페르트의 손이 의지와 관계없이 떨기 시작했다.

의도는 좋다.

필요성도 알겠다.

하지만 이건 묘를 파헤치고 시체를 끄집어내는 행위 아닌가.

그것도 모르는 타인도 아닌 누구보다 큰 은혜를 진 안젤리나를.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손만큼이나 떨리는 눈동자로 조각상을 바라보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네!"

조각상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 *

슈발츠마인 선제후의 뒤편, 사람의 발길이 여간해서 미치지 않는 그늘 진 영역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

그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 가우저.

이 저택의 주인이자 3일 뒤 황제가 될 고귀한 그 옆엔 시종 하나 호위 하나조차 없었다.

반쯤 열린 문 안에 마련된 조촐한 골방 안엔 고약한 타는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문 너머엔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는 건장하고 비열해 보이는 사내가 환각 성분을 일으키는 잎을 둥글게 말아 피우고 있었다.

허리를 잔뜩 젖힌 채 앉아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곧 출입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허리를 세워 침입자를 응시했다.

"오. 선제후님."

사내가 미소 지었다.

그의 이름은 린넨부르그.

슈발츠마인 저택 안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여행자 길드의 파견인이다.

그는 루페르트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하시러 오신 겁니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각 탓인지 아니면 잘려 나간 무릎 아래에 엉성하게 장착한 의족 탓인지 그는 크게 한 번 몸을 휘청였다.

루페르트는 겨울의 안개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린넨부르그가 루페르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려 나간 손가락뼈였다.

상하지 않도록 약품으로 처리한 그 뼈의 중간 마디 즈음엔 빛을 잃은 호박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걸 가지고 테타우의 '회차로'로 가십시오."

루페르트는 말없이 뼈를 받아들고 돌아섰다.

린넨부르그가 떠나려는 루페르트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선제께서 그리했듯이 혼자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계심이 많은 친구들이라서요."

루페르트는 밤의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회차로라 불리는 곳은 테타우 안에서 이교도인, 특히 하브루타인이 모여 사는 구역이다.

법으로 정한 건 없지만 테타우에서 살아가는 하브루타인은 예외 없이 접고 어두운 골목과 기형적으로 높이 쌓은 위태로운 건물이 밀집한 마치 흰개미 집 같은 영역 안에 둥지를 튼다.

'여기가 회차로인가.'

하브루타인 구역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갈 일도 없었고 볼 일도 없었다.

하브루타인 구역 같은 혐오시설은 황제의 발코니에서 보이지 않는 위치에 가려 있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3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손에 예외 없이 이국적인 날이 초승달처럼 휜 단검이 들린 걸 보았다.

하브루타인이다.

루페르트는 그들에게 다가가 빛바랜 호박 반지를 낀 손가락 뼈를 보여 주었다.

하브루타인들이 뼈를 보고는 일제히 검을 검집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한 사내가 희미한 빛이 드리운 영역에 나타나 입을 벌려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혀가 없다.

아마 모두 혀가 없고 말을 못 한다는 걸 알리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잠자코 있으니 삼인조는 루페르트를 좁고 어둡고 악취 나는 골목으로 안내했다.

깊은 밤이지만 창문은 열려 있었고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루페르트 일행이 지나가자 말소리는 그치고 창문이 서둘러 닫혔다.

대신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는 쥐새끼 같은 경계와 두려움, 시기로 가득 찬 시선들이.

"이쪽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내들은 루페르트는 지하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매음굴이었다.

싸구려 분 냄새와 역겨운 욕정의 냄새로 가득 찬 홀은 세 개의 원료를 알 수 없는 연료를 태우는 화로가 밝히고 있었다.

칠흑 같은 통로 쪽에서 곧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저 여자는?'

틀림없다.

카를 호이징거의 장례식에 나타나 루돌프에게 고개를 숙이던 바로 그 여인이다.

치렁치렁한 옷을 걸쳤음에도 본능을 자극하는 육감적인 선과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사막을 닮은 눈동자를 가진 아찔한 미녀였다.

그녀가 루돌프에게 했던 것처럼 정중하고도 고혹적인 몸놀림으로 인사했다.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귀인을 배알합니다."

여성의 입가에 고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매음굴의 주인입니다."

"이름이 뭔가?"

"말하는 꽃에게 이름은 의미가 없지요. 굳이 이름으로 불러 주시겠다면 록산느. 록산느가 좋겠네요."

"부르봉 출신인가?"

"아니오. 제가 직접 지은 거랍니다."

"직접?"

"저는 부모에게 이름을 지음 받지 못했어요."

록산느가 잿빛의 옷소매를 올려 손목에 새긴 문신을 보여 주었다.

[ 8134 ]

"나면서부터 상속, 매매, 증여의 대상이었죠."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며 록산느가 미소 지었다.

뭇 남성을 홀리고도 남을 정도의 미소건만 루페르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험한 여자다. 울피아나와 또 다른 의미로.'

남성의 본능 그 자체를 폭력적으로 잡아끄는 고혹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단지 그것뿐, 루페르트는 실체가 없는 연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자신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루페르트는 딱딱하게 용건을 말했다.

"어떻게 봉사하면 될까요? 고귀하신 분이여."

"무덤에 묻힌 시체 한 구를 꺼내 줘야겠다."

"어떤 시체인가요?"

"...."

"가릴 거 없어요. 저희들은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분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 부디 기탄없이 말해 주세요. 형제들의 입속을 보지 않으셨나요?"

"안젤리나 대황후. 그 시체를 묘에서 파내 집무실에 몰래 가지고 와 줬으면 한다."

록산느의 사막 빛 눈동자에 강렬한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양이류 맹수가 발톱을 수납하듯 본심을 숨기고 훈련된 미소로 위장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언제가 좋을까요?"

그 기분 나쁠 정도의 유연함에 루페르트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철혈대제라 불렸던 선제의 모습을 말이다.

'역시 선제의 사람인가.'

마음에 선이 그어지지 않은 듯한 사람.

루페르트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두 개의 왕관을 쓸 때까지."

"곧 소식이 있을 거예요."

루페르트가 돌아섰다.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려던 루페르트는 살짝 몸을 돌린 채 손에 쥔 손가락뼈를 록산느에게 보였다.

"이건 누구의 뼈지?"

흐릿한 어둠 속에 반쯤 잠겨 있던 록산느가 긴 담뱃대를 꺼내 붙을 붙이고는 한 모금 깊게 흡입하고는 연기와 함께 말을 토해 냈다.

"열병의 메아불린."

"...."

"믿기 어렵지만 제국 성인의 것이라고들 하더군요."

* * *

"거기 빨간 명찰 둘."

반짝이는 은빛 투구를 쓴 기병대 장교가 투구만큼이나 우아한 백마를 이쪽으로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하게 석조 포도 위를 걸으며 리듬감 있는 소리를 내는 4개의 다리를 보며 마를로네는 쓰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그녀 옆엔 베르크 란이 언제나처럼 꺼질지 모르는 분노를 녹색 눈동자 안에 갈무리한 채 다가오는 장교를 노려보았다.

장교는 그들을 힐끔 내려다보다 이내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을 짓고는 보지도 않은 채 무언가를 베르크 란에게 던졌다.

마를로네가 비단 천에 싼 것을 낚아채고는 내용물을 열었다.

"와."

마를로네가 내용물을 베르크 란에게 보여 주었다.

강보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두둑한 전표였다.

"할아버지! 이거 좀 봐! 10,000탈러가 넘겠는데?"

마를로네는 막대한 금액을 보고 기뻐했지만, 베르크 란의 얼굴엔 일말의 기쁨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를로네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지는 가운데 베르크 란이 장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이게 전부요?"

"이게 전부다."

"사면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

"불만이냐? 빨간 명찰."

"...아무 불만도 없소."

베르크 란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남에게 보이지 마라. 도펠죌트너! 혹 시기심 많은 이웃에게 신고를 당하기라도 하면 써 보지도 못하게 몰수당하게 될 테니까!"

장교가 사라졌고 공터엔 둘만 남았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베르크 란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무너진 석조포도가 직사각형 형태로 넓은 면적을 차지했고 그 너머엔 관리되지 않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버려진 정원이 흉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 너머 높게 솟은 담장 위엔 그보다 더 아찔하게 솟은 종탑과 황궁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이곳은 우리의 연병장이었지."

한숨을 토해 내며 베르크 란이 입을 열었다.

무거운 한마디였지만, 그 심정이 손녀에게까진 와닿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어떻게 할까?"

마를로네가 전표가 든 보자기를 내밀며 물었다.

"당연히 챙겨 둬야지. 우리를 기다리는 형제들도 있을 터이니...."

베르크 란은 그대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진한 피로가 주름진 얼굴 위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번 여정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마법사도 어려운 상대였고 전설 속의 설인은 평생을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술안주가 되고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짓누른 건 염소 가면을 쓴 남자다.

'그 녀석.'

베르크 란은 알고 있다.

그 염소 가면이 자신과 같은 검술을 사용하고 있다는걸.

어쩌면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딴 것보다 수천 배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 염소 가면은 자신의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 나는 황제의 챔피언이다.'

베르크 란의 시선이 버려진 공터 정북 쪽에 반쯤 무너진 채 서 있는 단상을 향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색채조차 떠오르지 않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는 그 단상 위에 서 있었다.

그가 주저앉은 공터엔 번쩍이는 검과 군청색의 제복을 입은 도펠죌트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과 오를 맞추어 도열해 있었고 그들의 머리 위엔 죽어 가는 사자가 수놓아진 군기가 휘날렸다.

검은 연대.

최소 다섯 번 이상의 전투에서 적 전열에 뛰어든 검증된 도펠죌트너만이 들어갈 수 있는 현존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

그들을 통솔하는 단상 위에 서 있던 다름 아닌 젊은 날의 자신이었다.

"...."

베르크 란은 바닥을 움켜쥐었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살폈다.

굳은살로 가득 찬 거칠고 큰 손.

흉터 하나 없는 것이 평생의 자랑이었다.

그 손에 작은 흉터가 새겨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상처지만 그건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한 사내에게 강렬한 박탈감을 주었다.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그의 손녀가 퀭한 눈으로 응시했다.

전표를 낡은 가방에 챙기면서 여전히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부의 허망한 욕망을 지켜보았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모자를 푹 눌러써 지저분한 주걱턱만을 드러낸 그 사내가 다가오자 마를로네가 전표 하나를 던졌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결투를 준비한다더군."

마를로네가 조부를 대신해서 물었다.

"어떤 결투?"

전표를 받아 든 사내의 턱이 움직여 씨익 웃는 미소를 만들어 냈다.

"유서 깊은 부족 간 대리 결투를 말이야."

베르크 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지도 않은 채 그는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흉측한 정원의 바람과 가지를 떨게 하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바람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아니, 베르크 란은 알아보려조차 하지 않았다.

77화 21. 죄악 (1)

황제 대관일까지 앞으로 일주일.

테타우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테타우로 통하는 도로는 제국 각지에서 올라온 군주와 귀족의 마차로 정체됐고, 여관은 새로운 황제를 보려고 올라온 수많은 여행자로 가득 찼다.

꽃들이 거리에 뿌려졌고, 제국 전역에서 모여든 떠돌이 악단과 곡마단이 광장을 차지하여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도시 전체가 들썩이는 활기 속에서 두 사내가 긴 여행을 마치고 루페르트의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한스 징펠만과 지겔슈타트였다.

"추격자는 모두 떠났고 매복의 징조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음모를 분쇄했다는 걸 안 이상 그들이 애꿎은 소귀족을 공격할 이유는 없겠지요."

루페르트는 기꺼이 문 앞까지 나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이번에 정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살아서 여기에 도착할 수 없었으리라.

루페르트는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을 준비했지만 지겔슈타트도 한스 징펠만도 그다지 재물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는 이만 대학으로 돌아가 이번 일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설인부터 시작해서 저의 스승은 물론이고 오각의 마법사마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이야기가 가득하거든요."

여전히 신비롭지만 동시에 친근해진 시선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지겔슈타트는 고개를 숙이고 이별을 고했다.

루페르트는 그에게서 전과는 다른 끈끈한 줄이 둘 사이에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단 그 끈끈함은 영혼 동맹의 효과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겔슈타트가 떠난 후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을 응시했다.

루페르트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한스 징펠만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 약간의 금전적 보상은 필요할 거 같군요. 장비를 적잖이 잃어버렸으니. 아, 그리고 신선한 우유를 한 잔 청하고 싶군요. 가급적 거품이 없는 녀석으로."

한스 징펠만은 하녀가 내온 우유를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한 후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루페르트에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그 도펠죌트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썩 친하지도 살갑게 지낸 것도 아니지만 한스 징펠만은 두 번이나 함께 싸운 그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일단 적절한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더 해 주고 싶은 게 있지만, 그건 황제가 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아서요."

"더 해 주고 싶다 함은...?"

한스 징펠만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루페르트는 언제나 그를 지켜 주던 두 조손의 모습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습니다."

"자유라....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군요."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펠죌트너에 대한 차별 정책을 만든 게 저 철혈대제다.

차별에 관한 칙령 전체를 뒤집을 것인지, 개개인에 대한 사면이 가능한 것인지 법적 요소를 파고들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선제후와 궁정 귀족들의 의견들을 살펴야 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베르크 란 일행에겐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괜히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가는 루페르트의 발목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이건 누구의 생각도 아닌, 궁정 암투에 닳도록 닳은 루페르트 개인의 판단이다.

'그들은 작은 꼬투리 하나를 잡고 그걸 물고 늘어지며 작은 걸 큰 것으로 꾸며 내 말하지. 애당초 건수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겐 말씀하셨습니까?"

한스 징펠만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니요. 아직은."

여유가 없었다.

대관식 준비도 준비이거니와 갑자기 숙적으로 떠오른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동향도 파악해야 했고, 거기다 한술 더 떠 리프니에의 무리한 요구까지 있었다.

"후우."

루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식 준비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아무래도 좋지만, 안젤리나의 무덤을 파헤치는 건 정말로 못 할 일이다.

아무리 그것이 좋은 의도라고 해도 안젤리나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본다는 것이.

"마를로네라는 여성분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더군요."

한스 징펠만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루페르트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런가요?"

루페르트는 가문의 숲에서 짜증을 내던 마를로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직 짜증 내는 모습을 못 보셨군.'

"무엇보다 행동이 빠른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것도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유형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몸도 동시에 움직이는 유형이라고 할까요. 보기 드문 재능입니다."

"움직임이 빠르다는 말엔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녀의 조부인 베르크 란이라는 분은 시야가 좁아 보이더군요. 인내심도 썩 훌륭하다고 볼 수도 없고."

한스 징펠만의 얼굴에 선명한 걱정이 떠올랐다.

'베르크 란 때문에 말을 꺼낸 건가. 내가 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정작 사람이 좋은 건 이 사람이겠지.'

"그가 원하는 건 금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보이던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 쪽에서 그들과 접촉해 전하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시종이 들어와 양해를 구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붉은 명찰을 단 두 사람이 전하의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붉은 명찰을 단 두 사람?"

"네. 전하를 따라 룸까지 수행했던 그 도펠죌트너입니다."

루페르트와 한스 징펠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루페르트가 시종에게 그들을 들라 명했다.

곧 응접실에 붉은 명찰을 단 두 남녀가 나타났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차례대로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있는 쪽은 역시 베르크 란이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오는 대관식에서 대리 결투를 준비 중이라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첩보를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만."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결투를 신청한다고 하더라도 받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황제가 되면 즉시 죄를 물어 룸과 자부아, 제국 영내에 있었던 모든 진상을 파헤칠 것이니.

렌타이어마르크는 가난한 땅이다.

한때 금광으로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다 옛말.

주기적인 역병과 갱생이 불가능한 늪지, 우울한 기후로 일곱 선제후령 중 가장 가난한 땅이라 불리는 곳이다.

회귀 전 루페르트의 치세에 렌타이어마르크가 이름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건 중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땅 자체가 워낙 가난하고 볼품이 없기에 아예 무대로 뛰어들 생각을 못 한 것이다.

그 렌타이어마르크가 감히 루페르트에게 도전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당장 현재 보유한 슈발츠마인의 세입만으로 렌타이어마르크의 하찮은 수입의 8배를 상회할 것이다.

거기다 황제가 되면 황제의 직할 영지인 카렐리아 왕국이 루페르트의 손안에 들어온다.

지금은 고어문트와 슈발츠마인에 밀려 3위로 밀려났지만 카렐리아 왕국은 제국과 연방되기 전부터 대륙 중앙에서 가장 부유한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슈발츠마인 주와 카렐리아 왕국 두 곳을 동시에 거느린다면 렌타이어마르크 주와의 격차는 최소 15배를 상회할 것이다.

애당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라는 소리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대리 결투를 받아 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루페르트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대리 결투를 추진한다는 첩보를 들었을 때도 일소에 부쳤다.

그런데 그 소문을 뒤늦게 베르크 란이 듣고 찾아온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언제나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치 없는 정보를 물고 기회를 얻기 위해 찾아온 건가.'

아마 그가 원하는 건 하나일 것이다.

대리 결투에서 또 다른 공훈을 세워 인정받는 것.

그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

그의 의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루페르트에겐 걸 것이 없다.

"대단히...."

거절의 말을 막 시작하려 할 때였다.

그의 머릿속에 실로 오랜만에 청명한 목소리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목에 걸고 있던 소라고둥이 실로 오랜만에 움직였다.

'여신님이? 지금은 조각상에 깃든 게 아닌가?'

루페르트는 말을 멈추었다.

[ 수락하는 게 어떤가요? ]

"네?"

루페르트는 양해를 구하고 별실로 들어갔다.

"제 상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므로 잃을 게 없는 그 사람의 제의를 굳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왜요?"

소라고둥이 루페르트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왜라니요...?"

"재밌잖아요? 혹시 절 두고 다녀서 저의 권능이 뭔지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여신님."

"일단 수락해 보세요. 당신에겐 시간의 책갈피도 있잖아요?"

"으음."

딱히 내키는 건 아니지만 리프니에의 말도 일리가 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잃을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잃을 게 없는 건 루페르트다.

모든 걸 건다고 해 봤자 결과가 나쁘면 회귀하면 그만이니.

애당초 그의 챔피언은 약해빠진 마를로네도 아닌 선제의 챔피언이었던 베르크 란이다.

그가 지는 그림은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대리 결투에서 이긴다면, 단순히 전쟁을 하는 것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좋은 조건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루페르트는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신님."

"드디어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네요!"

"그런가요?"

"네. 시간 나면 통찰의 만화경으로 당신의 능력을 살펴보세요. 요즘 등한시한 거 같은데."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 돼서 그런지 저 자신을 살펴볼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신의 본분을 이해하고 있다니, 정말로 지켜보는 저로서는 흐뭇할 따름이네요. 처음엔 뭐든 혼자서 하려고 하시더니. 그래도 타인을 부리려면 최소한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죠?"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이며 루페르트의 가슴팍을 툭툭 건드렸다.

갑작스런 여신의 애교에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그동안 리프니에에게 가졌던 나쁜 생각들이 너무나도 쉽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여신님은 나쁘지 않아. 역시 나를 이해해 주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건 늘 여신님뿐이야. 선제가 왜 그토록 여신님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지만, 필경 오해가 있었겠지.'

그래도 안젤리나의 시신을 파헤치는 건 역시 꺼림칙했다.

심리적 장벽의 한계라고 할까.

'그, 그건 좀 아닌 거 같지만 의도는 좋잖아. 안젤리나 님이 걸린 병도 어쩌면 사악한 저주 때문일지도 모르지.'

가까스로 합리화하며 루페르트는 방을 나섰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그 강렬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루페르트가 말했다.

"베르크 란."

베르크 란이 절도 있게 두 발을 모아 군화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턱을 들었다.

전형적인 제국 보병대의 무언 복창.

그 칼날처럼 엄정한 모습에 루페르트는 왠지 모를 가슴 벅참을 느끼며 엄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대리 결투를 자청한다면...."

루페르트가 검을 뽑았다.

스르릉.

번쩍이는 검이 향하는 곳은 베르크 란의 어깨.

"그대를 나의 챔피언으로 임명하겠다."

78화 21. 죄악 (2)

낙조가 드리운 제도의 밤은 고요하다기보다는 조용하다.

돌아가는 수레바퀴 소리와 말발굽, 귀가를 재촉하는 발걸음마저도 아침과 다른 정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창가를 통해 모로 비치는 햇살을 얼굴에 반쯤 받은 채 루페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루페르트의 침실이다.

룸왕이자 선제후의 방답게 무모할 정도로 넓은 방이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루페르트 하나다.

하지만 혼자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목엔 소라고둥이 걸려 있고 입구 쪽엔 소녀의 조각상이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그가 거울 앞에 서자 조각상이 고개를 돌려 동공 없는 대리석의 눈으로 그쪽을 바라본다.

루페르트의 왼쪽 눈에 불경한 녹색 빛이 일렁거렸고 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떠올랐다.

< 루페르트 가우저에 관한 보고 >

1. 개요

종족: 인간 - 남부 제국인

분류: 범인

성별: 남성

연령: 20세(누적 35세)

명성: 대단히 높음

2. 일반 평가

무력: B-

마법: E+

군략: E-

경영: D-

지식: C+

기예: C+

3. 능력치

- 의미 없음

4. 축복과 가호

-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

- 아티팩트 "통찰의 만화경"

- 아티팩트 "카드의 군단"

- 아티팩트 "시간의 책갈피"

5. 영혼 동맹

- 한스 징펠만 A+ / 위기 감지 A

- 피리스 홀리바레스 A / 마법사의 후각 A

- 아서 픽튼 A / 북부의 힘 A

- 하인리히 폰 지겔슈타트 S / 마법 무력화 S

5. 총평

- 초보 군주

"오."

루페르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벌레, 농부, 기타 갖가지 혐오스러운 표현으로 가득 찬 총평 항목에 드디어 군주라는 칭호가 등장한 것이다.

"여신님."

루페르트가 웃으며 소라고둥을 더듬었다.

"지금은 그쪽이 아니잖아요."

조각상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페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 조각상을 응시했다.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아. 저 모습은. 석상이 움직인다니. 아무리 내가 조각상에 미련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건 싫어.'

싫고 좋고를 떠나서 여신님이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정자세로 서서 기꺼이 여신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어떤가요? 당신의 진보가?"

"놀랍습니다. 솔직히 능력치 쪽은 별로 오른 거 같진 않지만."

"당연하죠. 군주의 무력이란 건 자기 한 몸만을 지키면 충분하고 군주의 지식이란 건 신하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정도면 충분하며 군주의 지혜는 그 자리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을 알아보는 정도면 충분하답니다."

군주는 홀로 모든 걸 하는 존재가 아닌 사람을 부리는 자다.

리프니에가 몇 번이고 거듭해서 강조했던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상이다.

루페르트도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물론 반례를 들자면 최초의 황제 노예제 티그리트, 선제 클라우데 2세, 그보다 앞선 천둥제 등 불세출의 명군이라 불리는 군주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예외적인 존재다.

당장 루페르트가 직접 겪은 클라우데 2세만 하더라도 범접하기 어려운 지혜와 안목, 그리고 루페르트가 아마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냉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될 순 없다.

철혈대제의 말대로 루페르트는 평범한 자니까.

"미안해요. 루페르트 가우저."

갑자기 조각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과 행동은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

루페르트는 인간과 닮았지만, 인간과 명백히 다른 존재가 인간 흉내를 내는 걸 보고 있자니 강한 거부감이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여신님. 여신님은 제게 사과할 게...."

조각상이 고개를 떨군 상태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여정. 제 예상과 달리 대단한 어려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리 대단치도 않았던 여정이었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손을 잡았다.

대리석의 차가움과 단단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거기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신님의 권능은 대단하지만 호라처럼 모든 걸 본다는 전지의 능력까진 가지고 있지 않으신 모양이군. 하긴 여신께서 날 지켜봐 주셨다면 그 숱한 위기 속에서 날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겠지.'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룸왕의 의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꽃이 뿌려진 길을 따라 붉은 산맥을 넘어 룸에 도달하고 거기서 파비안 아비투스라는 사내와 만난 일, 반란 폭도가 성을 포위한 일, 루돌프와의 재회, 설인의 습격, 베르크 란의 연기와 염소 가면에 관한 이야기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각상이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큰일이었겠어요."

"아닙니다. 여신님께서 주신 권능만으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이건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다.

여신이 없었고 여신에 의한 권능과 단련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그 하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여정은 루페르트에게도 많은 시사점과 자부심을 남겼다.

여신의 권능 없이도 이겨 낸 첫 위기니까.

심지어 가장 강한 동료를 영혼 동맹으로 영입하기까지 했다.

통찰의 만화경에 나타난 진보는 허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회랑의 그분을 다시 만났다고 했죠?"

여신이 뒷짐을 진 채 복도를 돌이 맞부딪치는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었다.

다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는 인간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루페르트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이질감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분이 뭐라고 하던가요?"

"별말은 안 했습니다. 단지."

"단지?"

"저보고 평범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볼 때 당신은 평범한가요?"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전 아니라고 봐요."

조각상이 돌아서서 미소 지었다.

"당신은 충분히 특별한 사람이에요. 루페르트 가우저. 그러니 자신을 믿으세요."

"...여신님."

조각상이 원래 서 있던 입구 쪽으로 돌아가더니 처음처럼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채 옆을 돌아보는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여신의 유희가 드디어 끝난 모양이다.

'목욕이나 하고 잠이나 잘까.'

목욕 전에 가볍게 한잔을 걸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목에 건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였다.

"저기, 루페르트 가우저."

"앗. 여신님."

"설인을 만났다고 했죠?"

"네."

"설인이 뭐라고 말하지 않던가요?"

"설인이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인이 자신을 덮친 건 사실이다.

일곱, 어쩌면 여덟 개의 수정체 같은 눈동자마다 자신의 모습이 가득 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설인이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기억나는 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설봉 사이를 떨쳐 울리는 오싹한 포효뿐이다.

"아니요. 설인은 단지 저를 죽이려 했을 뿐입니다. 마를로네가 절 구했고요."

"마를로네? 아, 그 금발 계집애 말이죠?"

"그렇습니다."

"아무튼, 루페르트 가우저. 언제쯤 안젤리나의 시신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소라고둥이 다시금 움직였다.

이번엔 진동이 전보다 강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원하는 모양.

루페르트는 표정 관리를 하며 잘 떼 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떼며 힘겹게 한마디를 토해 냈다.

"...최대한 빠르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신은 이곳, 황궁에 자리 잡은 당신의 침실 안에 놓도록 하세요."

"선제후 저택이 아닌 이 침실에 말입니까?"

"제국 안에서 곧 황제가 될 룸왕의 침소보다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어요?"

"하오나, 그 시신을 여기에 끌고 오는 것이...."

루페르트의 말에 리프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할 말을 다 했고 이제 이 세상에서 잠시 시선을 거둔 모양이다.

'시신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쉽지 않은 일인데, 거기다 이곳 테타우 황궁 안에 시신을 가지고 오라니. 그건 제아무리 하브루타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루페르트는 린넨부르그를 찾아갔다.

"준비는 전부 끝났다고 합니다. 남은 건, 박해자의 뼈를 가지신 분의 결단뿐입니다."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새로운 요구 조건을 말했다.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린넨부르그는 단언했다.

"황궁은 전하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경계가 삼엄한 곳입니다. 아무리 우리 길드라고 해도 눈에 띄지 않고 그것을 테타우에 자리 잡은 룸왕의 방에 가져다 놓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최대한 경비를 치운다면?"

"최소 인원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루페르트는 자신의 계획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린넨부르그에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린넨부르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의외로 쉽게 처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제후 저택을 나서며 루페르트는 시종에게 명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라. 대관식 전에 제국 의회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모든 사태를 해명하지 않는다면...."

아주 잠깐 루페르트는 망설였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흔들림은 찰나에서 그쳤다.

"...황제의 분노가 있을 거라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라고 할지라도.

* * *

최초의 황제 노예제 티그리트는 살아생전 많은 문제를 고대의 방식, 결투로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수많은 전사가 자신의 힘과 기량을 믿고 도전했지만 룸 제국 최강의 검투사였던 티그리트를 꺾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천하의 티그리트도 흘러가는 세월 앞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코 검을 놓지 않았던 손아귀의 힘줄은 느슨해지고 종일을 달려도 지치지 않던 사자의 심장은 쇠락했으며 당당하던 허리는 말려 들어가는 나무껍질처럼 쪼그라들었다.

황제가 전처럼 결투를 통한 해결을 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지자 반항적인 선제후-부족장들이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때 티그리트는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위해 대신 싸워 줄 전사를 내세웠다.

이른바 황제의 챔피언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 단지 백인면상(百人面上)으로 알려진 자가 최초의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티그리트의 챔피언은 그의 주군처럼 수많은 결투에서 승리, 갓 탄생한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리 결투는 야만 시대의 잔재 취급을 받아 점점 그 명맥이 끊어졌다.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역사 속에 파묻힌 대리 결투를 재현하려는 자가 나타났다.

"선제에게 감사해야겠군."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내를 흐뭇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계열의 군복, 군복 위에 휘장처럼 두른 12개의 탄환과 화약을 종이에 싼 탄약대, 손잡이와 칼날받이만으로 사치스러움을 능히 예단할 수 있는 짧은 기병도.

그는 가면을 썼다.

꽤 먼 곳에서 썩어 가는 피의 악취를 맡을 수 있는 말라비틀어진 염소의 두상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말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그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최고의 전사를 내게 내려 줬으니 말이야."

쩍 벌린 선제후의 입 안에선 썩어 가는 선창에서 날 법한 악취가 새어 나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시종은 그에게 움직일 때마다 번들거리는 은 가면을 대령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그 가면을 손수 염소 가면에게 내밀었다.

염소 가면은 말없이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소문과 달리 상당한 미남자군. 젊지 않은 나이에도."

"...."

가면을 벗은 사내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은 가면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천년도 전에 룸 제국이 자랑하는 상승 무패의 군단 기수(旗手)가 쓰던 그 가면은 마치 그를 위해 만든 것처럼 유격도 낌도 없이 부드럽게 사내의 얼굴을 감쌌다.

"그래, 렌타이어마르크의 챔피언이여. 그대가 이길 수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었지?"

"붉은 산맥에서 선제의 챔피언과 겨뤘습니다."

"선제의 챔피언? 아, 안젤리나의 장난감이 됐다는 그 중늙은이 말인가?"

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됐지?"

"어리고 미숙할 땐 알지 못했지만 이제 겨뤄 보니 확실히 알 거 같더군요. 그가 전쟁 신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숭배가 금지된 전쟁의 신, 미르미도스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쟁 신의 가호를 받는 자를 이길 수 있겠는가?"

선제후의 물음에 은 가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주먹을 내밀어 자신의 가슴을 절도 있게 두드렸다.

"그는 저에게 미치진 못합니다."

은 가면 너머에서 불길한 기류가 꿈틀거렸다.

선제후의 죽어 가는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저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니까요."

마치 주변이 불타는 듯한 보이지 않는 불꽃이 사내를 감싸고 있었다.

"융커스 베샤문트."

선제후가 그의 이름을 말했다.

경의와 공포를 담아.

79화 21. 죄악 (3)

이른 아침부터 한 사내가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카를로비의 남작 베르너다.

그가 루페르트를 찾은 이유는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에 대해 조언은 물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룸왕 전하가 제아무리 용맹한 탐험가이자 수완이 뛰어난 책략가라고 해도 궁정 생활엔 아직 익숙지 않으실 것이다. 궁정의 공기는 바깥의 공기와 같지 않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베르너는 부친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기 전 궁정에서 여러 사무직을 전전하며 제국 권력의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절차, 법도를 익혔다.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어련히 보좌진을 보내겠지만, 베르너가 보기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그들보다는 자신이 좀 더 진정성 있는 역할을 수행하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도 욕망은 있다.

황제의 총신으로 제국이라는 대륙 최강국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역사에 이름을 새기고 그에 걸맞은 명성과 부를 누리는 것, 아울러 자신의 가문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

그 모든 걸 위한 포석이다.

그의 주군 루페르트는 황궁 안에 마련된 집무실 안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있었다.

시종이 그의 예방을 알리자 루페르트가 고개를 들어 베르너 쪽을 조금은 졸린 눈으로 응시했다.

베르너를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마침 잘 왔군."

루페르트가 말했다.

그는 다짜고짜 베르너에게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이건...?"

"렌타이어마르크 건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작성해 봤어. 이런 서류 꾸미는 건 익숙지 않아서 대충 가안만 적었는데, 한번 검토하고 보충할 게 있으면 알려 줘. 이쪽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여기서 검토해도 관계없어. 기다리지."

서류를 받아든 베르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벌써 가안을 짰다고?'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오히려 가공되지 않은 가안을 본다는 것이 더 구미가 당긴다.

새로운 황제의 가공 없는 생각과 식견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니 말이다.

'그럼 어디 한번 감상해 볼까. 새로운 황제 폐하의 솜씨를.'

베르너는 회의용 탁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처음에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은 검토되는 서류가 늘어갈수록 옅어졌고,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기한이 붙은 해명 요구를 했군. 일견 유약해 보이는 태도지만 대관식 전날 제국 의회 및 선제후 회의를 동시에 소집했어. 의제는 추후 지정이지만 어차피 대관식에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겠지. 새로운 황제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으니.'

베르너는 시종이 갓 내온 차를 마시는 루페르트를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았다.

'대관식을 전후해 한 번에 몰아치겠다는 건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큰 흐름을 따라 자연스레 자신의 적을 공격하는 방식.

그것은 베르너가 루페르트에게 권하려던 방식과 놀랄 정도로 흡사했다.

비록 표현 방식과 절차적 미비는 보완해야 할 문제겠지만, 사실 그런 지엽적인 문제는 황제의 일이 아니다.

"어떤가? 베르너?"

루페르트가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눈 주변을 닦으며 물었다.

"전하의 생각은 저의 생각과 일치합니다."

"다행이군."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 피로가 루페르트의 얼굴에 떠올랐다.

"대단히 피로해 보이십니다만."

"밤을 새웠거든."

"의견 하나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

"전하의 안은 큰 틀에서 선제후를 몰아넣기에 최적의 안입니다. 황제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해결하는 대신 제국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책임을 묻는 방안이니까요. 하지만 이 방식의 위험성은 선제후의 눈에도 확실히 보이겠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도 바보는 아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금과 달리 준수하고 쾌활한 성격에 명민한 구석이 있는 훌륭한 군주였다.

"선제후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쪽의 계획을 무산할 방안을 찾으려 할 겁니다."

"발악을 한다는 건가?"

"네, 그런 느낌입니다."

베르너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지. 예상되는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베르너도 자신이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루페르트처럼 밤을 새우진 않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서 선제후의 반격에 대응할 방법을 고민했다.

다른 선제후와 밀약을 통한 외교적 방법, 여론을 통한 압박, 화해와 용서를 통한 원만한 해결, 최악의 경우엔 군사적 방법까지.

과연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떤 방안을 생각했을까.

같은 해답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도 생각지 못한 신묘한 방안을 생각해 냈을까.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말을 기다렸다.

루페르트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가볍게 말했다.

"발악하라지."

순간 베르너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발악하라니. 그런 무책임한....'

"그가 발악하는 게 내가 원하는 바야."

루페르트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빙그레 웃었다.

베르너는 그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볼 뿐 주군의 생각까진 헤아리지 못했다.

"내 가안을 보완해 주고 즉시 실행할 수 있게 해 주게."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오지."

루페르트가 자리에 떠난 이후에도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생각이 뭔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알 수가 없다.

그는 루페르트의 집무실을 나서 황궁 안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가문을 위한 별실에 노닥거리고 있는 자신의 동료를 찾아갔다.

오토 브라에 그리고 요하네스.

그들은 브라에와 달랐다.

베르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로를 마주 보며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의 새로운 황제는 생각보다 정치에 능하신 분이군."

"시골 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브라에가 둘을 보며 물었다.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나?"

요하네스가 오토 브라에에게 눈짓하자 오토 브라에가 헛기침을 한 차례 하고는 입을 열었다.

"새로운 황제 폐하는 선제후의 술수를 이미 알고 계신 모양이야."

"알고 있다고? 그게 뭔지 아나?"

"그건 몰라. 우리가 무슨 정보가 있겠어. 하지만 전하의 의도는 명확하잖아? 발악을 하든가, 아니면 가만히 매를 맞든가."

요하네스가 손톱을 다듬으며 덧붙였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는 대리 결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대리 결투?!"

"882년만인가. 제국 역사에 대리 결투라는 고대의 해결 방식이 등장하는 건."

요하네스가 빙그레 웃었다.

"기대되지 않습니까?"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엔 약간의 걱정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루페르트의 운명이 자신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룸왕이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에게 그가 룸왕의 의례 중 있었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한 소명을 요구했다.

기한은 정하지 않았지만, 선제후는 현재 룸왕과 함께 테타우에 머물러 있다.

거리를 핑계로 답변을 미룰 수 없다.

거기다 룸왕은 오는 대관식을 전후하여 새로운 제국 의회와 선제후 회의를 소집했다.

의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룸왕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를 공개적인 자리에 끌어내 책임을 묻는다.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군대가 직접 룸왕을 공격한 적은 없지만, 그의 사주로 보이는 일련의 공격 행위가 있었으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룸왕은 전설에 나오는 설인과 마주치기도 했다는 소문이 테타우는 물론 제국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점점 뜨거워지는 관심 속에서 모두의 시선은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향했다.

궁지에 몰린 선제후가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머문 황궁 안의 독수리궁으로 향하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려 하고 있었다.

"이들은 글도 모르고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록산느가 인부들에게 입을 열라 지시했다.

루페르트는 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핍을 보는 건 두렵지 않지만, 록산느를 비롯한 하브루타인의 기이한 행동 양식을 보는 건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동기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과 일하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이쪽으로."

빠르게 끝내리라.

안젤리나의 묘는 황궁 옆에 자리 잡은 슈발츠마인 가문 소유의 장미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저택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문 소유라고 하나 안젤리나 개인 전용으로 쓰인 탓에 주인이 죽은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쓸쓸한 정적이 흐르는 집안을 지키는 건 안젤리나의 시종을 들던 시녀를 비롯한 소수의 관리인뿐이다.

지켜야 할 대상이 없기에 경비 자체는 허술하다.

바로 옆에 황궁 근위대의 초소가 있기도 하거니와 저택 자체의 검소함과 안젤리나라는 주인의 상실이 이 저택을 황궁 주변에서 덜 중요한 곳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 저택 안에서 가지고 갈 건 아무도 없다.

안젤리나의 시녀, 55세의 아마리에 폰 카셀부르그가 이 저택에 계속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반평생 자신을 위해 봉사한 그녀를 위해 안젤리나가 베푼 은혜니까.

그녀는 그녀의 주인처럼 이 장미 생울타리가 있는 저택에서 죽을 때까지 안젤리나가 좋아하던 장미들을 가꾸며 살아갈 것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룸인들의 왕이시여."

시녀라고 하나 안젤리나를 옆에서 오래 모신 경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루페르트의 방문에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은은하지만 확연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누추한 곳엔 어찌하여 오셨습니까? 전하 같은 고귀한 분께서 찾아 주실 정도로 대단한 곳이 아닙니다."

"대황후의 묘가 여기 있다고 들었다. 그분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세를 졌지. 그대가 본 것처럼."

과거를 바라보는 우울한 눈동자에 담긴 감정의 대부분은 진실이다.

여전히 안젤리나는 루페르트의 마음 한구석에 위풍당당하게 눈을 가리는 검은 가면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거인처럼 헤아릴 수 없는 장미 덤불을 뒤로한 채 우뚝 서 있다.

"황제가 되기 전에 꼭 찾아서 그녀의 명복을 직접 빌어 주고 싶다. 그대도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황제가 된 이후엔 시간이 그다지 나지 않을 게 분명하니."

방 안은 고요하다 못해 정적 비슷한 답답함이 흐르고 있었지만 루페르트는 돌과 돌이 갈리고 쇠가 부식되어 부러지는 듯한 기묘한 파공음을 들었다.

실제로 소리가 난 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는 자가 그 일을 저지를 때 나는.

"...."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호흡과 안색에 영향을 주려 한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물리적으로 마모시켰다.

'참아라. 루페르트 가우저. 여기선 참아야 한다.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 잊지 마라. 나는 악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제국을 구하기 위해, 오직 제국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꼭두각시 황제 시절 어쩔 수 없이 익혀야 했던 표정 관리의 마술이 시공을 넘어 이 자리에서 빛을 발했다.

상대방은 자신을 쥐락펴락하던 선제후 대신 일개 시녀로 변했지만, 그 중요성의 농도는 그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안젤리나의 시녀가 루페르트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다 곧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시녀의 시선이 루페르트가 데리고 온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사내들을 향했다.

"그런데 이분들은?"

피부색이 다르고 이국적인 용모를 하고 있다.

하브루타인이다.

제국의 밑바닥에서 매춘, 사기, 사기 점술, 소매치기 등 갖가지 더럽고 비열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안젤리나의 신성한 묘역에 발을 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비천한 존재다.

"이들은 나의 개인 호위다. 잃을 게 없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성적으로 싸우는 자들이지. 이들 덕분에 몇 번이고 목숨을 건졌지."

시녀가 장미 생울타리를 지나 저택의 뒤편으로 안내했다.

장미 덤불 이외엔 거의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작은 정원 중앙에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루페르트는 비석을 향해 고개 숙였다.

'안젤리나 님....'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이 짓을 하면 그의 마음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일그러짐이 있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루페르트는 뒤에 서 있는 하브루타인에게 손짓했다.

안젤리나의 묘를 파헤치고 그 시신을 꺼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80화 22. 결투 (1)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긴 칩거를 끝내고 움직인 날은 대관식이 있기 불과 3일 전의 일이었다.

이미 테타우 시내는 제국 전역에서 올라온 제국 의회의 구성원, 선제후와 그 수행단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바라는 축제 또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혼란과 환희의 절정 속에서 선제후가 꺼낸 카드는 가장 큰 축제의 예고였다.

[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별지에 첨부한 사안의 해결을 고대의 관습법에 의한 결투로 처리하고자 한다. 룸인들의 왕이자 슈발츠마인 선제후 루페르트의 빠른 답변을 요구한다. ]

결투.

현재에도 귀족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군주급 이상의 귀족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심지어 선제후 간의 결투는 지난 수백 년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 수백 년의 공백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보란 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루페르트에게 공개 결투를 제의했다.

물론 죽어 가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직접 싸울 일은 없을 것이고 고대의 방식에 따라 챔피언을 내세울 것이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침실의 조각상이 입을 열었다.

조각상 안에 깃든 리프니에는 대단히 즐거워 보였다.

"이제 안젤리나의 시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계획은 한 번에 이루어진다.

루페르트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챔피언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결투를 하는 동안 록산느의 하브루타인들이 재빠르게 시신을 묘에서 꺼내 황궁 안에 자리 잡은 루페르트의 처소-사자궁의 침실에 시신을 갖다 놓는다.

계획의 핵심은 대리 결투 그 자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도전에 대해서 루페르트는 기타 현안을 정하기도 전에 장소부터 정했다.

역대 황제의 조각상이 새겨진 황궁의 입구 광장이다.

그곳은 황궁 외부, 테타우의 삼십만 시민과 테타우에 방문한 무수히 많은 외부인들이 몰려들 것이다.

황궁 근위대로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군중을 통제하며 내일 대관식을 치를 황제와 선제후들을 지켜야 하니까 황궁의 경비는 자연스레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선제후용으로 마련한 별궁의 경비가 대단히 한산해질 것이다.

그 선제후가 축제의 한가운데에 있다면 더더욱.

* * *

대관식 전날.

황궁의 정문, 이른바 선제의 벽 앞.

구름 같은 인파가 황궁 아래 모여들었다.

"들었어? 황제 폐하가 선제후와 결투를 한다던데?"

"황제가 직접 하는 게 아니야. 대리인을 세우는 거지."

"아직 황제가 아니잖아. 룸왕이라고 불러야지. 하여간 무식한 인간들이란."

"누가 이길까? 아니 뭘 걸고 싸우는 걸까?"

수많은 군중의 두런거림 속에서 황궁 안에서 위풍당당한 행렬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귀족이다.

영지를 갖지 못한 군주의 자식이나 형제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나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자로 대부분 군주 가문의 가신으로 평생을 보내나 상당수가 결혼이나 군인의 길로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하곤 한다.

다음에 나타난 건 군주의 행렬이다.

군주는 말 그대로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다스리는 자로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와 그에 걸맞은 크기나 인구의 영지를 가진 자를 의미하나 실질적인 구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분할 상속으로 인한 공작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곱 선제후가 차지한 커다란 땅덩어리 사이사이를 지배하는 그들은 제국 지배 계층의 등뼈이자 제국 의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군주 다음에 나타난 건 높은 우관을 쓴 성직자의 행렬이다.

호라교단으로 알려진 그들은 상명하복의 엄격한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강력하고 단일한 조직으로 제국인의 신앙을 관리하고 지배하며 그로부터 군주와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을 누린다.

유일한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의 선제후령이 다른 선제후령에 비해 크기도 작고 소출도 작다지만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다음은 일곱 선제후의 등장이다.

성직자 집단 이후 조용히 나타났지만,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결투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점하고 그들의 수준에 맞는 경호원을 보란 듯이 좌우에 포진시켰다.

군주들은 시기로, 백성들은 선망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일곱 선제후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두 명은 다름 아닌 결투의 당사자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슈발츠마인 선제후이자 룸인의 왕 루페르트.

둘 옆엔 그들을 대표하는 챔피언이 그들의 군주만큼이나 높은 주목을 받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건 렌타이어마르크 측의 챔피언이었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체구도 체구지만 번쩍이는 은 가면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에 맞서는 자도 만만치 않았다.

제국 곳곳에 서식하는 흉포한 불곰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 머리를 두건으로 삼고 몸통을 망토 삼아 두른 거구의 전사가 그의 덩치에 걸맞은 대검을 짚은 채 영웅의 동상처럼 고고히 서 있었다.

중재를 맡은 건 선제후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아카이아 대주교였다.

다만 그는 이 결투에 대해 탐탁지 않은 태도를 보였기에 자기 대신 카렐리아 주교에게 중재 및 진행을 맡겼다.

곧 루페르트의 것이 될 카렐리아 왕국의 주교는 제국인과 차이가 느껴지는 이질적인 억양으로 말했다.

"두 당사자는 이 결투에 무엇을 걸 것인지, 각자 제시하시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병든 기색이 완연한 어두운 얼굴에 한껏 미소를 머금으며 루페르트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내가 원하는 건 제국 의회에서 의제에 올려놓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페르트가 말했다.

"내 직을 걸겠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얼굴에 선명한 경악이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페르트의 말을 들은 모든 고귀한 자와 평범한 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루페르트의 얼굴과 옆 모습, 등 뒤를 바라보았다.

수만 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루페르트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울러 내일 내가 쓰게 될 두 개의 관 또한 걸겠다."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황궁 앞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 모습은 마치 시간 그 자체가 멈춰 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저마다의 말을 쏟아 냈다.

"조용히 하시오!"

"정숙!"

기병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일반인의 입을 닫게 하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높고 견고한 벽면에 부조된 선제들이 내려다보는 황궁 앞엔 노도와 같은 언어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일의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가 모든 걸 이 무익해 보이는 결투에 걸었기 때문이다.

저 결투에서 지면 그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시골 청년에서 선제후, 선제후에서 황제가 될 제국에서 제일가는 출세자가 한 번에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비상식적이군."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가 중얼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런 친구였나?"

노르드마르크 선제후도.

"상당히 무모하구만."

디터팔츠의 선제후도.

"...."

고어문트의 선제후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님."

골트문트의 딸, 울피아나가 얼굴을 가린 베일을 살짝 열어 저 앞에 자신의 챔피언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는 검은 제복의 사내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룸왕께서 언젠가 저에게 구혼했다고 하셨죠?"

루페르트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울피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골트문트는 곁눈질로 외동딸의 모습을 훔쳐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시작인가.'

"왜 거절하신 건가요? 저런 제국의 영걸을 사위로 맞이할 기회를?"

부드럽게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부친이자 선제후마저 옭아매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으로 일찍이 소문이 났지만,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한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결코 시들지 않는 그 소름 끼치는 집요함에.

골트문트는 애써 딸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모한 도박에 모든 걸 거는 건 영걸이 아니다. 필부나 하는 짓이야."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건 지켜볼 일이지."

골트문트는 턱을 괸 채 루페르트 앞에 은 가면을 쓴 챔피언 옆에 앉아 있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의심이 깃든 눈으로 노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도 그렇지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저자가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지? 아내를 잃고 병을 얻고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아니면 소문대로 진짜 사교에 빠져 이성마저 저버린 것인가?'

원인을 제공한 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다.

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도 없는 사안으로 루페르트가 부재중에 선거를 무효로 할 기회를 노렸다.

대체 루페르트를 떨어뜨려서 그가 얻게 될 이득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가 후보를 내세운들 그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본인이 입후보해도 결과는 같다.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은 오로지 루페르트를 떨어뜨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루페르트가 그와 가문의 원수인 것처럼.

그 선제후가 루페르트에게 응답했다.

"동등한 가치일지 모르겠지만 저 또한 직을 걸겠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아카이아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판단의 시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시선이 늙은 성직 선제후의 입을 향했다.

중재자가 무슨 의견을 내놓을 것인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동안 황궁의 뒤편에선 한 무리의 괴한이 텅 빈 거리를 소리 없이 속보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사막을 닮은 눈동자 색과 피부색을 가진 그들은 어두운 계열의 두건과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장미 덤불로 만든 산울타리로 벽을 만든 작고 아담한 저택이었다.

한때 테타우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던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지켜야 할 주인이 사라지고 그녀의 하인만이 남은 사실상 빈 쭉정이 같은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남자라고는 늙은 정원사 하나뿐인 이 저택에 현재 남은 사람은 전 주인과 함께 늙어 가던 시녀 한 명뿐이었다.

사막을 닮은 눈동자를 지닌 괴한들은 그녀가 못 보고 지나치길 바랐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들이 침입할 때 뒤뜰 정원에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주인이 묻힌 묘역 앞에.

일말의 자비도 없는 삽이 그녀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사막을 닮은 눈빛을 한 괴한들은 능숙하게 전 주인의 묘를 파헤쳤다.

곧 검게 칠한 목재 관이 나타났다.

괴한들은 관을 열어젖혔다.

장미 향과 부패하는 시신의 썩은 향이 뒤섞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관 안에 가지런히 누운 건 다름 아닌 안젤리나의 시신이었다.

늙고 병들고 죽어 가던 얼굴을 처녀처럼 한껏 치장하고 얼굴이 하얗게 보이도록 화장시켰지만 젊은 시절 칭송받던 그 여신 같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혈대제의 천상의 배필이라 불리며 한때 가장 고귀했던 여인의 시신은 존경도 경의도 없이 더러운 마대에 담겼다.

비어 있는 관엔 아직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시녀가 던져졌다.

또 한 번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녀의 숨통이 끊겼고 관이 닫혔다.

사막 위에 새겨진 흔적이 유사(流沙)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묘역 또한 원래의 형태대로 돌아갔다.

하브루타인들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숨겨진 뒷길과 울타리를 따라.

원래는 경비병이 상시 순찰을 돌고 어둠에 반쯤 가린 망루 위에 서 있는 근위대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는 구역이지만 그들이 벽을 넘고 황궁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들을 제지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하브루타인은 때로는 고양이처럼 때로는 쥐새끼처럼 사자궁이라 불리는 별궁 안을 능숙하게 나아가며 한 방에 도달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오늘의 룸왕이자 내일의 황제인 루페르트의 침실.

약조대로 그들은 침실 뒤편, 리넨과 자단목으로 만든 가림막으로 구분된 루페르트의 사적 공간에 마대 자루를 놔두었다.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하브루타인 하나가 순간 공포에 부릅뜬 눈으로 어둠 속을 보았다.

거기엔 대리석으로 만든 소녀의 석상이 서 있었다.

평범한 대리석 석상임에도 사내가 놀란 건 그가 시체를 내려놓는 순간 석상이 미소 지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발밑부터 젖어 들어가는 섬뜩한 공포감 속에서 하브루타인들은 부리나케 침실을 빠져나왔다.

"어머."

조각상이 웃으며 마대 자루를 바라보며 돌로 된 손으로 자루를 열었다.

분칠을 한 시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차가운 볼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지며 리프니에가 말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도 쓸모가 있네요."

81화 22. 결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