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중앙기사단을 본 현장 책임자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곧바로 루펠에게 경례를 하고는 허리를 굽신거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책임자가 중앙기사단을 현장으로 안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로 물든 대지가 나타났고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틀 전에 비가 내렸음에도 이렇게나 짙은 흔적이 남아 있다니.
곧 현장의 중심에 도착했다.
거대한 천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워낙 처참한 터라 시신들을 가려 놓았습니다."
"보여 주시죠."
루펠의 명령에 책임자가 무겁게 손짓했다.
병사들이 천의 모서리를 잡고는 확 젖혔다.
조각조각 박살이 난 기사의 시체들. 강력한 힘에 몸이 찢겨 나간 건지 단면이 울퉁불퉁했으며 제대로 된 형체를 이루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런 미친...."
"우욱!"
상상 이상으로 잔혹한 광경에 일부 병사들이 헛구역질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중앙기사단은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현장을 살펴봤다.
듀켈이 혀를 찼다.
"인간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떤가, 루펠?"
"아직은 모르지."
루펠이 책임자에게 물었다.
"시체 수에 비해 머리가 부족하군요. 그리고 다비르크 백작의 시체도 보이지 않고."
"그... 머리는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곧장 주변에 있는 시신들을 수습해 한곳으로 모은 터라. 그리고 백작 각하의 신체는 저기 있는 게 전부입니다."
책임자가 시신 구석에 있는 잘린 팔목 하나를 가리켰다.
두툼한 두께의, 굳은살 하나 없는 손. 찢긴 옷은 피로 물들어 있으나 자세히 보니 고급 원단임이 분명했다.
다비르크 백작이 왕성에서 출발했을 때의 복장과 일치했다.
"몸은 찾지 못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별개로 시신이 하나 더 모자랍니다. 시합의 참가자였던 루크넌이라는 남자인데, 전직 아카데미 교수로 정신 계열 마법을 전공했다고 하더군요."
루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간 시신들을 살펴본 그가 중앙기사단 마법사, 해롤드에게 명령했다.
"해롤드, '이면의 그림자'를."
"예, 루펠 님."
해롤드가 자신의 공간가방에서 오래된 램프를 꺼내 들었다.
공국의 비보, 이면의 그림자.
이 램프의 빛을 비추면 최대 한 달 전에 있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얗게 불타는 빛으로 대지를 비추자 이미 빗물에 지워져 버린, 수많은 흔적이 나타났다.
책임자가 숨을 삼켰다.
"이건...."
곳곳에 새겨져 있는 기형적인, 거대한 발자국.
전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다수 찍혀 있다.
크기는 제각각이나 형태가 비슷한 걸 보면 아마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양. 면밀하게 흔적을 살펴보던 듀켈이 말했다.
"찢겨 나간 시체와 사라진 머리들. 그리고 이 발자국은...."
"레드헷의 흔적이야."
일명 머리 수집가, 레드헷.
놈은 생물의 머리만을 섭취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강함은 병사 수십 정도는 쉽게 찢어발길 정도.
특히나 기형적인 외형 탓에 심약한 사람들은 공포를 느껴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한다.
책임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드헷이라... 익숙지 않은 이름이군요."
"영악한 괴물입니다. 마치 인간처럼 함정을 파기도 하고, 몇몇 개체는 정신을 조종하기도 하죠. 어느 모로 보나 인류에게 위험한 이형종입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루펠 님께서 과거에 보신 흔적과 비슷하다면 이미 흉수는 밝혀진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확신할 순 없습니다. 지금까지 공국에서 레드헷이 발견된 적은 고작 두 번에 불과하니. 그리고 결정적으로 놈들은 무리를 이루지 않습니다."
이형종.
단순히 흔적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일부는 상식을 벗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 원인이 레드헷이라면 곧바로 추적해야 합니다. 다비르크 백작가의 기사들을 몰살할 정도면 제가 상대했던 레드헷보다도 훨씬 강할 테니. 자칫 시간을 끌면 무의미한 희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옆에 있던 듀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인 듀켈이 직접 병사들을 통솔하며 추적 준비를 갖췄다.
베르덴은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사라진 흔적을 밝혀 주는 램프라. 저런 마법 물품도 있었나.'
덕분에 힘 하나 안 들이고 단서를 얻었다.
베르덴이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여전히 자침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으나 아까와는 반응이 사뭇 달랐다. 눈에 띄게 느려진 자침. 어쩌면 이 중에 글러트니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베르덴이 중앙기사단을 향해 몇 발자국 다가간 순간, 루펠이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응? 왜 그러지, 루펠?"
"아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군."
루펠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움직임을 멈춘 베르덴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히 중앙기사단의 단장이 아니라는 건가.'
어쩔 수 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수밖에.
나침반을 집어 넣은 베르덴이 다시금 추적을 시작했다.
* * *
해롤드가 들고 있는 이면의 그림자.
말에서 내린 그들이 이형의 발자국들을 따라 숲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들은 멈춰야만 했다.
네 방향으로 나뉜 발자국들.
이래서야 전부 같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자칫 놈들을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루펠이 이내 결단했다.
"병력을 분산하도록 하지."
도시에서 차출된 기사와 병사들을 네 개의 분대로 나눈 뒤, 각 분대마다 중앙기사단의 기사가 둘씩 붙었다. 이면의 그림자가 없어도, 그들의 실력이라면 능히 흔적을 추적할 수 있을 터.
거기다 제3중앙기사단은 특수한 교육과 훈련을 거친, 선택받은 정예다. 전력 면에서도 결코 부족하지가 않았다.
제3중앙기사단의 수는 총 여덟.
각각 2명씩 짝지어 조를 나누었다.
루펠이 모두를 바라봤다.
"신호탄은 모두 챙겼겠지?"
"예, 물론입니다."
임무를 달성했을 땐, 녹색 신호탄.
교전 및 추적 중일 때는, 주황색 신호탄.
증원이 필요할 땐, 노란색 신호탄.
위급 시엔, 붉은 신호탄.
루펠이 도시의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신호탄에 대해 설명했다.
중앙기사단원이 사망했거나 중상을 입었을 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미 전멸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 모르니.
이어 루펠의 지시에 따라 분대가 흩어졌다.
베르덴이 네 방향으로 갈라진 그들을 바라봤다.
'누굴 쫓아야 할까.'
사실 누굴 추적하든 정황상 크게 상관은 없다.
글러트니가 이 중 하나만을 노리고 움직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도 가능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으면 좋겠지.'
그래야 좀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베르덴이 몰래 첫 번째 분대에게 접근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추적용 마법진과 은폐 마법진을 합성해, 최후미에 있는 병사에게 새겨 넣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분대.
단장인 루펠이 있는 터라, 뭔가를 하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어쩔 수 없이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 분대.
여기에는 마법사가 있어 마법진을 활용하기 어렵다.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얼마 안 가 들킬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저쪽인가.'
듀켈.
대행사의 연회에서 만난 라비슈른 후작가의 자식.
둘 중 하나를 택하자면, 그나마 직급이 높은 부단장을 쫓는 게 합리적일 터.
아직 투명화의 지속 시간은 충분하다.
베르덴이 나무 위를 통해 세 번째 분대의 뒤를 쫓았다.
* * *
흔적을 살피며 앞서 이동하고 있는 듀켈.
도중 옆에 있던 젊은 기사가 자신을 힐끔거리는 걸 느꼈다.
"뭐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 그것이... 시, 실례했습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그의 말에 젊은 기사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상대는 다비르크 백작가의 기사단을 전멸한 괴물들인데, 이렇게 전력을 나눠도 되는 건가 싶어서...."
"난 또 뭐라고. 그건 걱정하지 마라. 괜히 신호탄을 준비해 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위험이 생기면 우리 단장이 구하러 올 거다. 저래 봬도 공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니까."
"네?"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작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그 정도라니. 아무리 그 유명한 후작가의 자식이라고 해도 믿기 어려웠다.
"어릴 때는 몸이 안 좋아 항상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데, 기적적으로 병이 낫고 나서 두각을 드러냈지. 아주 괴물이야. 나도 꽤나 단련했고 몇 번이나 대련을 했는데 이기기는커녕 힘 싸움에서조차 밀릴 정도니."
"허... 그게 천재라는 거겠죠?"
"천재지. 그리고 아까 봤다시피 함부로 말을 놓지 않는 데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돕기도 하고. 안 그런가, 메르크?"
"그렇습니다."
메르크.
그는 루펠의 후원 덕분에 기사가 될 수 있었던 사내였다. 이렇듯 루펠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포함해 기사 중에도 루펠을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 뭐, 그것 때문에 친구인 나는 항상 비교 대상이긴 하지만."
듀켈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질투심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를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것이 듀켈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뭔가가 비쳤다.
나무 높은 곳에 뭉툭한 흔적이 나 있었다.
"레드헷의 흔적이군. 놈의 영역에 들어온 모양이야."
듀켈이 손짓하자 모두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상대는 백작가의 기사들을 몰살할 정도의 괴물. 두렵긴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기에는 중앙기사단이 있었으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아인종과 짐승 등 머리가 없는 시체가 다수 발견되었다.
* * *
듀켈과 다른 감식관.
그리고 기사와 병사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시체들을 탐색했다. 흔적으로 보아 이틀 전 비가 온 후에 습격받은 모양.
'즉, 잘못하면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흔적이 거기서 끝이 난 것인지 듀켈이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리 듀켈이라고 해도 단서가 없으면 어쩔 수가 없는 거겠지. 게다가 여기가 레드헷의 영역권이라면 자칫 역으로 습격당할 수도 있기에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
그러던 중 베르덴이 기척을 감지했다.
감각을 곤두세우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미약한 기척. 일단 사람은 아니었다.
시선만을 옆으로 돌리자, 숲 안쪽에서 붉은 형체의 무언가가 듀켈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레드헷인가?'
이목구비가 없는 뭉개진 얼굴,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뒤틀려 얽힌 듯한 몸체. 누가 봐도 이형종이라고 할 법한 외형이었다.
아무래도 투명화를 쓴 베르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
레드헷은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르덴이 듀켈을 바라봤다.
그는 레드헷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시체 일부를 챙기고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날이 저물고 있으니 일단 약속 장소로 돌아갈 예정인 것 같았다.
'레드헷을 쫓을까.'
곧 투명화 효과도 사라질 테니.
꼬리를 잡았음에도 하염없이 일이 터지길 기다리는 건 베르덴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게 방향을 바꾸려던 그 순간.
──────퍼엉!
하늘에서 붉은빛이 터졌다.
"붉은색이라고...?"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듀켈이 서둘러 신호탄이 터진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
주변이 온통 피바다였으나 대부분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기사들 또한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고.
그들과 같이 있던 중앙기사단의 해롤드와 제론. 해롤드는 이미 사망했는지 죽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제론은 피 칠갑이 된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레드헷 하나가 제론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감히!"
듀켈이 바닥에 떨어진 창을 하나 들어 힘껏 내던졌다.
그 위력에 레드헷의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갔고, 어느새 다가간 듀켈이 놈의 목을 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이어 검을 뽑아 레드헷을 향해 내리쳤다.
콰직!
레드헷의 머리가 잘려 나갔다.
놈이 죽은 걸 확인한 듀켈이 다급하게 제론에게 달려갔다.
"괜찮나, 제론?!"
"듀, 듀켈... 님...!"
"알겠으니 일단 포션부터 마셔라."
듀켈이 끈이 잘려 나간 감식관의 가방을 열었다.
충격에 의해 포션이 담긴 병이 부서져 있었다. 듀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최고급 포션을 꺼내 제론에게 먹였다.
제론은 곧바로 혈색을 되찾으며 이내 가파른 호흡을 회복했다.
제론이 힘겹게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듀켈 님... 저곳에 이상한 레드헷이...!"
"뭐?"
듀켈과 모두의 시선이 제론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어둠 속에서 빤히 그들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검붉은 이형의 존재를.
"저게 무슨...."
그와 동시에.
푹.
제론이 숨겨 놓은 칼날이 듀켈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86화 방해 (3)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불에 덴 듯한 뜨거운 통증에 듀켈이 눈을 부릅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던 터라 너무도 무방비했다.
이어 제론이 칼날을 비틀자, 듀켈이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주저앉았다.
"제, 제론. 네가 대체 왜...!"
뻐억!
제론은 대답하지 않고 듀켈의 턱을 후려쳤다. 이어 메르크가 듀켈의 얼굴을 향해 방패를 내리찍었다. 그 충격에 듀켈의 머리가 반쯤 지면에 파고들었다.
물론 죽지는 않고 타박상으로 그쳤다.
듀켈이 워낙 튼튼한 터라 확실하게 의식을 끊어 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제론이 말했다.
"정리해."
그러자 방금까지 누워 있던 병사 몇몇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습격했다. 기사들이 재빨리 반응했으나 상대는 도저히 일반 병사라고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순식간에 태반 이상이 제압당해 바닥에 쓰러졌고 기사들이 서로의 등을 지키며 검을 세웠다.
"중, 중앙기사단이 왜 갑자기 배신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가 됐든 일단 벗어나야 한다. 서둘러 도시로 가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서로 눈빛을 나눈 기사들.
젊은 기사가 길을 뚫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목표는 제론. 놈만 제친다면 길이 열린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제론이 기사의 검을 맨손으로 붙잡아 우그러뜨리곤, 그의 목을 붙잡아 의식을 단번에 끊어 냈다. 나머지 기사들도 어찌할 도리 없이 차례대로 제압되었다.
방패를 털어 낸 메르크.
그가 죽은 해롤드의 손에서 이면의 그림자를 빼앗았다. 그리고 기절해 있는 사람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재료는 이걸로 충분하겠군."
미리 잠입해 있던 글러트니들.
이들은 오랜 시간 공국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비로소 표면으로 나타난 것이다. 글러트니의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
제론이 숲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검붉은 레드헷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저 레드헷, 슬슬 거슬리는군."
"안 그래도 송곳니께서 준비가 끝나면 레드헷들을 정리하라고 하셨다. 저런 이형종 따위는 구인류보다도 못한 존재들이니."
글러트니가 바라는 세상에 저런 존재는 불필요했다.
그저 키워서 적당히 쓰고 버리는 체스 말 정도. 그 정도의 가치일 뿐이고, 놈들은 그런 가치라도 가졌음에 감사해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제론이 병사들로 위장해 있던, 글러트니의 일원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놈들이 일제히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콰자자작!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석편(石片)이 덮쳐 왔다.
휩쓸린 글러트니들은 곧바로 찢겨 나갔고 그 끝에 있던 제론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상체 일부가 갈라지며 피 분수가 쏟아졌다.
"...?"
전혀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들이 일제히 돌조각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방금까지 없었던, 짙은 녹색의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홀로 서 있었다.
베르덴. 그가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바라봤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야 할 자침이 정확이 눈앞에 있는 글러트니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가까워져야 제대로 작동되는군."
하나 배웠다.
나침반을 공간가방에 넣은 베르덴이 스태프를 들었다.
* * *
중앙기사단과 병사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글러트니.
역시 베르덴의 예상대로였다.
우드드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메르크의 몸이 크게 융기했다. 그리고 제론 또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형체를 띠기 시작하며 상처를 회복했다.
'이식자 둘. 나머지 아홉.'
힘 조절은 필요 없다.
어차피 잡아 봤자 글러트니의 조각 때문에 어떤 정보도 뽑아낼 수 없었으니까.
"산 채로 잡아라."
글러트니가 일제히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주변을 뒤흔드는 진동과 몇 번의 번쩍임.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 소리까지. 삽시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끝은 곧 찾아왔다.
사방에 널브러진, 형태조차 무너진 글러트니의 일원들.
두 이식자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피거품이 섞인 기침을 내뱉은 제론이 그제서야 베르덴에게 물었다.
"네놈, 방주인 건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 소리도 이제 지겹군."
만날 때마다 방주, 방주.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또 물어보니 짜증이 날 지경이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튕겼다.
어두운 색의 차가운 바람이 이식자들을 감쌌다. 혹한의 반지로 속성이 변질된 얼음 마법. 그 한기에 이식자들의 몸이 얼어붙음과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운마저 얼어붙었다.
비정상적인 생명력을 보여 주던 이식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죽었다. 이내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체 또한 수천 조각으로 흩어졌다.
'나쁘지 않군.'
모조품치곤 상당한 효과. 이게 고작 1할이 채 되지 않은 성능이라니. 대체 원본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뭐, 베르덴의 손에 들어올 기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베르덴이 쓰러진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듀켈을 빠르게 수습했다.
중앙기사단이 가지고 있던 포션을 사용해 듀켈을 치료한 다음, 지면 아래에 공간을 만들어 그들을 숨겼다.
이걸로 지나가던 아인종에게 개죽음을 당할 일은 없겠지. 숨구멍을 뚫어 놓았으니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알아서 빠져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챙겨 가야겠어.'
이면의 그림자.
이게 없다면 글러트니가 베르덴의 흔적을 찾아낼 일은 없을 터. 곧바로 공간가방에 수납했다.
'그럼 이쪽은 끝났는데....'
하지만 고작 이걸로 끝난 건 아니었다.
방금 전 이곳을 보고 있던 기형적인 레드헷이 남아 있었으니, 다른 분대 쪽에도 글러트니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단서를 찾을 방법은 있었다.
베르덴이 첫 번째 분대에 있는 병사의 등에 새겨 넣은 추적용 마법진.
그 잔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으니까. 글러트니가 움직였으니 다른 분대에서도 무슨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글러트니.
놈들은 철저하게 베르덴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만이 아니라 다른 곳까지 말이다.
다시금 베르덴이 움직였다.
* * *
테온.
그는 유년기 시절 고아로서 뒷골목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 납치를 당해 글러트니의 일원으로서 살게 되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가혹한 나날들. 실제로 여러 아이가 죽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체들은 글러트니에서 실험 재료로 사용했다.
여기선 죽음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기에 테온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고 그렇게 글러트니의 암살자가 되었다. 언제 죽는다 해도 금방 갈아 끼워질 부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지금도 그렇다.
테온은 살기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근데 이건 아니지.'
글러트니의 앞니를 목에 맨 테온.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방주에게 잡힌 이후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는데 설마 이런 걸 시킬 줄이야.
"시발...."
테온이 작게 욕을 내뱉으며 걸었다.
그렇게 도시에 있는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테온을 본 덩치 큰 노인과 안경 쓴 사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하고 있는 글러트니의 일원들이었다.
제 발로 글러트니의 소굴로 찾아간 테온이 그들에게 목걸이를 슬쩍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뜬 그들이 서둘러 테온에게 길을 안내했다.
몇 개나 되는 지하 통로를 거쳐 도착한 장소.
걸어온 거리와 방향으로 짐작해 보건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바깥임이 분명했다.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 속, 누군가 테온의 앞으로 걸어왔다.
목 한가운데에 이형종의 눈을 달고 있는 이식자였다. 그가 테온에게 말했다.
"살아 있었군."
한마디였지만 압박감이 숨을 죄어 왔다.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살아 있냐.
테온과 같이 움직이고 있던 글러트니는 죄다 죽었는데 어떤 이유로 살아 있냐. 분명 그런 의미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말실수를 했다간 죽는 상황.
테온은 내심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목에 걸고 있는 글러트니의 앞니를 꺼내 보였다.
"박사께서 이빨을 찾으신다."
"...."
이식자의 시선이 앞니에 고정되었다.
하루와 같은 1초가 몇 번이고 지나고 나서야, 이식자가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이식자가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테온이 곧 그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베르덴이 보낸 미끼가 서서히 글러트니의 내부에 파고들었다.
* * *
베르덴이 마법진의 잔향을 추적했다.
시시각각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어느새 위치에 도착한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없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숲과 절벽뿐. 마력감지를 넓게 펼쳐 봐도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분명 잔향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끊겼는데.... 설마 눈치채고 마법진을 통째로 제거하여 여기에 놓았을 리는 없을 테고.
베르덴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룬의 반지 엑시드로 강화되어 있는 베르덴의 감각. 그걸 감쪽같이 숨기고 있다면... 일부 이형종이 가진 특수한 능력을 제외하면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적인 은폐, 환영.
'그렇다면 절벽인가.'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를 숨기기엔 안성맞춤인 지형이다.
지면으로 내려간 베르덴이 손으로 절벽을 짚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리고 잠시 후, 베르덴의 손이 절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느껴졌다, 베르덴이 작성한 마법진의 잔향과 익숙한 마력이.
'루크넌.'
이 환영은 실종된 루크넌이 만들어 낸 것임이 분명했다.
<암시>
베르덴이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습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 동굴 안쪽에 들어서자, 공동의 중심에 전에 봤던 석관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이번엔 구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한쪽 팔이 없는 다비르크 백작의 시체와 첫 번째 분대에 속해 있는 병사 및 기사 그리고 제3중앙기사단원들의 몸이 차례대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 밑에는 석관으로 향하는 기다란 홈이 뚫려 있었고.
마지막으로 루크넌.
그는 그저 눈을 감은 채 강제적으로 환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을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다행히 늦진 않은 것 같은데....'
루펠이 이끌고 있는 두 번째 분대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직 글러트니에게 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글러트니에게 당해 이곳으로 끌려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마 그건 아니겠지.
이 공동에는 수많은 기척이 숨어 있었으니까.
쿠웅.
검붉은 레드헷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다른 레드헷까지 전부. 그와 함께 안쪽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글러트니들이 나타났다.
그중 레드헷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이식자. 입 위로는 눈과 코가 없이 붉은색의 뭉개진 입밖에 남아 있지 않은 자였다.
지금까지 만난 이식자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답지 않은 몰골이었다.
놈이 물었다.
"너느은. 누구지?"
어눌하고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
수십 마리의 괴물이 베르덴의 주위를 에워쌌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수십 배나 많은 적들을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
하지만 베르덴에겐 그간의 경험이 있었다.
베르덴은 대답 대신 스태프를 지면에 내리찍었다.
<지형조작>
그리고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87화 방해 (4)
쩌저적. 쩌저저적.
삽시간에 여러 갈래로 쪼개진 공동이 시시각각 움직였다. 마치 동굴 전체가 살아 움직이듯 말이다. 누구 하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휩쓸려 나갔다.
그들이 서 있는 세상 자체가 뒤바뀌는데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식자는 곧 직감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전부 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의 짓이라고.
"죽여라아...!"
이식자.
레드헷의 머리를 일부 이식한 그가 레드헷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다른 글러트니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베르덴의 근처에 닿기도 전에 바닥이 움직였다.
사방이 가로막히고, 위아래가 뒤집히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베르덴 자신의 감각을 적극 활용한 지형조작.
통곡의 기사를 상대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베르덴의 격차는 압도적이다. 당연히 전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빠를 수밖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있는 공간 전체를 글러트니와 멀리 떨어뜨린 뒤 가두었다. 그러곤 지형을 정렬했다.
그렇게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입구는 사라져 있었고 구석에는 석관이 자리 잡고 있다. 중심에 선 베르덴. 여전히 압도적인 숫자의 레드헷과 글러트니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식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그 마법은 뭐지? 아니, 그것보다 도망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상황은 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지그음. 이게. 무스은. 짓이지?"
"이래야 처리하기 쉬우니까."
공동을 무너뜨려 압사시킬 수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글러트니는 특히나 생명력이 끈질겼으니까.
그래서 베르덴은 확실하게 목숨 줄을 끊어 낼 생각이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전신에 넘쳐흐르는 마력.
푸른빛에 휩싸인 베르덴이 눈을 번뜩였다.
<연쇄번개>
우레 소리가 공동에 메아리쳤다.
* * *
글러트니는 조급했다.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본래라면 총 10개의 붉은 조각이 완성되어 글러트니의 송곳니에게 전달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붉은 조각의 재료가 될 샐러맨더의 심장과 붉은 조각 3개를 탈취당했다. 범인은 방주임이 분명했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하지만 부족한 양을 수급할 방법은 있었다.
다비르크 백작.
그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웨어울프의 심장을 조각해 만든 액세서리.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은 인간 수백의 것을 아득히 넘는다.
그래서 빼앗았다.
그리고 나머지 재료를 채우기 위해, 다비르크 백작의 죽음을 미끼로 삼아 영양가 높은 병사들을 이끌어 냈다.
중앙기사단과 병사 사이사이에 글러트니가 숨어 있었고 계획은 순조로웠다.
방주에서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붉은 조각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 밤 안에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본래 상정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콰과과과광!
거대한 암석이 레드헷을 짓뭉갰다. 대지에서 솟아난 가시들이 교차하며 레드헷의 몸통을 관통했다. 이어 접근한 베르덴이 땅 속성을 부여한 스태프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 무거운 일격을 버티지 못한 레드헷의 목이 뜯겨 나가며 그대로 쓰러졌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말의 딜레이도 없이 쏟아지는 마법들.
고작 거리를 절반 정도 좁혔을 뿐인데 벌써 태반 가까이 죽어 나갔다.
이대론 위험하다.
이식자는 자신의 옆에 있는 검붉은 레드헷인 '블랙헷'에게 명령했다.
"죽여라아...!"
그제서야 블랙헷이 움직였다.
전형적인 레드헷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다른 존재. 붉어야 할 몸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통상의 레드헷보다 2배 가까이 큰 거체를 지니고 있었다.
블랙헷이 베르덴을 응시했다.
정신 계열 마법을 전공한 루크넌을 압도하는 강력한 정신 조작. 그러나 당연하게도 베르덴의 정신은 조금도 파고들지 못했다.
[....]
결국 블랙헷은 사냥 방식을 바꿨다.
콰앙! 블랙헷이 채찍처럼 휘두른 팔이 순식간에 베르덴의 스태프와 부딪쳤다. 뒤로 튕겨져 나간 베르덴이 스태프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충격을 견뎌 냈다.
'이놈은 좀 다르군.'
점점 다가오는 블랙헷.
곧바로 대응했으나 육체의 강도나 움직임이 레드헷과 확연히 달랐다. 자신에게 정신 조작까지 사용한 걸 포함해서.
베르덴이 블랙헷에게 신경이 팔리자, 그 틈을 노린 레드헷과 글러트니들이 베르덴의 뒤를 노렸다.
그 순간 기류가 뒤틀렸다.
<선풍의 장막>
5위계의 원소 마법. 물리적으로 내외를 차단하는 바람의 망토.
거센 바람이 삽시간에 주위를 휩쓸었다. 그 압력에 블랙헷마저 견디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벽에 처박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겨우 줄였던 베르덴과의 거리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자.
'일회용으로 괜찮군. 도중에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거센 바람을 두루는 마법이라 베르덴의 마법이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단순히 바람 계열의 마법사가 위급 시에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마법이었다. 로브에 내재된 마법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베르덴의 선풍의 장막을 해제했다.
그러곤 마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공동 내부의 기온이 서서히 낮아지더니 이내 입에서 하얀 숨결이 흘러나왔다.
<얼음지대>
베르덴을 중심으로 서리가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단순한 얼음 마법이 아닌, 혹한의 반지(모조품)로 인해 속성이 변질된 한기.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기운을 끌어냈으나 그 기운마저 한기가 잠식했다.
전혀 저항할 수 없이 서서히 몸이 둔해지는 감각.
콰득!
그 틈에 지형을 조작한 베르덴이 놈들을 하나둘씩 꿰뚫었다.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움직임은 눈감고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느려졌으니.
설령 가까스로 피한다고 할지라도 또 다른 대지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유일하게 블랙헷만이 베르덴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변형한 두 개의 팔. 그러나 움직임은 전보다 더욱 느려진 상태다.
베르덴은 방심하지 않고 일절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세 번의 움직임에 연산을 마쳤고, 두 번의 움직임에 마력이 갖춰졌다. 이내 순간적으로 파고들며 스태프를 블랙헷의 팔에 툭 갖다 댔다.
<스테이시스>
4위계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난도의 마법.
닿은 부분부터 냉기가 블랙헷의 전신에 퍼져 나가더니 이내 꽁꽁 얼어붙었다. 가볍게 스태프로 후려치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레드헷과 함께 백작가의 기사들을 몰살한 이형종의 최후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자는, 레드헷들을 조종하던 이식자 단 하나.
베르덴이 한 발짝 다가갔다.
추위에 떨던 이식자가 저항했으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콰직.
* * *
이걸로 글러트니와 레드헷을 전부 몰살했다.
지형조작으로 사체들을 깊은 땅속에 숨기고 공동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뻔한지도 모른 채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루크넌까지. 기력이 쇠한 듯 보이나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운이 좋군.'
베르덴이 다비르크 백작에게 다가갔다.
이미 생명력이 빠져나갔는지 거의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베르덴이 그의 목 부근을 들췄다.
'역시 목걸이가 목적이었나.'
웨어울프의 심장으로 만든 목걸이.
예상했던 대로 생명력을 위해 빼앗은 모양이다. 그래서 다비르크 백작을 목표로 삼았던 거겠지.
그렇게 자랑하고 다니더니.
하긴 기사단에게 호위를 받는 백작이 이렇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리라고는 본인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글러트니의 계획을 거의 다 망쳤으니 이제 마무리를 할 단계였다. 기절해 있는 중앙기사단원의 가방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그리고 석관에 다가갔다.
콰아앙!
강한 충격에 석관이 박살 났다. 기다란 홈마저 완전히 지워 없앴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이 부근에서는 붉은 조각을 만들지 못할 테지.
바깥으로 나선 베르덴이 하늘을 향해 적색과 노란색 신호탄을 터뜨렸다.
* * *
신호탄이 터진 걸 목격한 두 번째 분대.
루펠이 이끄는 분대가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절벽 동굴에서 하나둘씩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중앙기사단원이 루펠을 보곤 서둘러 다가갔다.
"루펠 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게...."
수색 도중 레드헷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어찌저찌하여 버티고는 있었는데, 검붉은 레드헷에 의해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그러곤 이 동굴 안에서 눈을 떴습니다."
"그럼 신호탄은 누가 터뜨린 거지?"
"예? 신호탄이요?"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신호탄이 사라진 걸 인지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루펠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내부. 듬성등성 걸려 있는 횃불에 비친 공동, 그 중심에는 손쓸 새도 없이 부서진 석관만이 남아 있었다.
"이건...."
"루펠 님, 듀켈 님께서 오셨습니다."
루펠이 바깥에서 듀켈과 만났다.
그의 옷은 일부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표정은 심각했다.
"...자네도 습격당한 건가?"
"습격이라고 해야 할지... 제론에게 당했다. 거기다 메르크하고 몇몇 병사가 갑자기 공격해 오더군. 방심한 터라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전부 당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상처는 포션으로 회복이 진행되고 있었고, 몸이 땅 아래에 묻혀 있었다. 숨구멍이 뚫린 상태로.
배신자였던 제론 일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해롤드는 어떻게 됐지?"
"내가 갔을 땐 이미 죽어 있었다. 그리고 이면의 그림자까지 사라졌더군. 분명 제론이 가져간 거겠지."
듀켈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돼. 갑자기 제론이 배신을 왜 했는지, 그런데 왜 나를 죽이지 않은 건지.... 그러다가 여기서 신호탄이 터진 걸 봤다. 이미 오면서 증원을 요청할 사람을 보내 놨지."
"증원이라...."
루펠이 검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그 순간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루펠이 몇몇 병사와 기사 그리고 부하와 차례대로 눈을 마주했다.
"루펠?"
정적을 깨는 듀켈의 목소리.
표정을 굳히고 있던 루펠이 이내 검에서 손을 떼었다.
"본래의 목적대로 다비르크 백작의 시체는 확보했다. 그러니 일단 수색은 여기서 끝내고, 당장 도시로 돌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주님들에게 보고하도록 하지. 그래... 그게 좋겠어."
루펠 일행은 곧바로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베르덴도 이내 자취를 감췄다.
* * *
순조롭게 글러트니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코헨으로 돌아갔다.
이른 아침에 성문을 통과하고 여관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그리고 점심이 지날 즈음 일어나자 마침 리스너가 찾아왔다.
여관의 종업원으로 위장한 리스너가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애셔 님. 무사하신 걸 보니 기쁘군요."
"테온은 어떻게 됐지?"
"문제없이 잠입한 뒤 멀쩡히 살아 나왔습니다. 글러트니의 송곳니가 누군지는 아직 보지 못한 모양이지만, 송곳니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글러트니의 앞니, 박사의 징표.
글러트니 내에서 박사는 독보적인 존재이니 당연히 시선이 모일 수밖에.
아무리 경계심이 많다고 해도 소용없다.
설마 박사가 이미 죽어서 잿더미로 변했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베르덴이 글러트니의 입장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난데없이 방주도 아니고 전혀 연고도 없는 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위치는?"
"사흘 뒤, '어두운 호수' 근처에 있는 오두막입니다."
"어두운 호수?"
"가드란 후작 영지에 있는 큰 호수입니다. 언제나 안개에 휩싸여 있고, 호수 바닥이 검은색에 가까운 터라 어두운 호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실제론 깨끗한 물이지만요. 일단 오두막에서 접촉한 후에 송곳니에게 안내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걸로 준비는 전부 갖춰졌다.
이제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식별하여 처리하면, 그 지긋지긋하고 역겨운 놈들을 공국에서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지.
먹잇감이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낚시줄을 당길 차례.
그 역할은 온전히 베르덴의 것이었다.
88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1)
"...."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낡은 오두막.
그 안에서 테온이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베르덴을 몰래 흘겨봤다. 의자에 앉은 베르덴이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니.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되나 해서...."
테온은 베르덴이 시킨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글러트니의 이식자를 능숙하게 속여 넘겼고, 자신조차 본 적 없는 송곳니를 밝혀낼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 냈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 했으면 살려 줄 만하지 않나?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만...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하필 이 미친 마법사와 함께 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을 텐데.
그러자 베르덴이 시선을 돌렸다.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테온이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송곳니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는 당연히 따라와야지. 네가 글러트니와 짜고 함정을 팠을 가능성도 있고."
함정 따위 없다.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나.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테온이 겨우 억눌렀다.
"함정이 아니라면?"
"바로 방주에게 보내 주지. 방해만 될 테니까."
"...만약 함정이라면?"
"그러면 죽는 거지."
이미 상대가 알아차린 이상 송곳니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미끼였던 테온의 가치는 사라진다. 더군다나 자신을 배신한 적을, 베르덴은 살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대로 데리고 있어 봤자 눈에 거슬리거나 또다시 배신당할 테니까.
테온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함정은 아닌데 송곳니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박사가 만나러 왔는데 오지 않는다라. 그럼 저쪽에서 눈치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글러트니에서 박사란 존재는 유일하다.
방주, 테온 그리고 글러트니와 대면하면서 그 사실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박사의 징표를 확인하고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건 계획이 실패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 책임은 누가 지느냐. 당연히 테온이 지겠지. 그가 글러트니와 접촉해 만남을 주선했으니.
"...."
테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안 좋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듯했다. 그저 조용히 송곳니가 나타나길 바라는 수밖에.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될까.'
테온이 문득 궁금해졌다.
이 냉혈한 마법사가 죽을지, 송곳니가 죽을지.
테온은 송곳니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지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어렸을 때부터 피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인간도, 아인종, 단순한 이형종도 아닌, 고대에 존재했던 글러트니의 장기를 이식받고 죽지 않은 특별한 존재.
그 존재감은 테온의 머리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애셔. 이 마법사 또한 괴물이다.
누가 그를 보고 5위계에 이르지 못한 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식자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몰살하는 광경은 잊을 수가 없었다.
천재 마법사가 있다면 이게 그야말로 천재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
누가 이길지는 모른다. 둘 다 테온의 생각을 벗어난 자들이니.
하지만 결과는 아마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애셔가 패배한다고 해도 쉽게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그가 죽기 전에 주변 일대를 포위한 방주가 개입을 할 테니.
요점은 하나다.
송곳니가 있는지 없는지.
그에 따라 이야기는 결정된다.
"왔군."
베르덴이 향한 바깥.
짙은 안개 속에서 두 명의 인영이 다가왔다.
* * *
"파르간이라 합니다."
"발첸. 입니다...."
글러트니에서 찾아온 두 명이 베르덴에게 인사했다.
겉으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제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이식자이며, 이제까지 만난 이식자들 중에서도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최측근 같은 건가.'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고.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르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두 명에게 차례대로 고개를 향했다.
박사는 급진적인 인물로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수틀리면 부하를 실험으로 쓰거나 글러트니를 박차고 잠적하는 등. 그렇기에 그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건 테온에게 확답까지 받은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사실인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놈들은 전혀 베르덴을 의심하지 않았다.
베르덴이 테온에게 손짓했다.
테온이 앞으로 나서서 말을 대신했다.
"송곳니는 어디에 있지?"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배를 타고 호수 위를...."
베르덴은 말도 다 듣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둘을 지나쳤다.
당장 안내하라는 무언의 압박. 파르간이 입을 다물고 길을 앞장섰다. 그런 베르덴의 거침없는 행동에 테온이 눈을 깜빡였다.
'...진짜 박사 같네.'
싸가지 없고 오만하며 독선적인 태도.
박사가 살아 있었다면 저렇게 행동했겠지. 아니면 왜 미리 말을 안 했냐고 유리 플라스크를 내던지거나.
그만큼 박사는 괴팍했기에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어 테온이 그 뒤를 따랐고, 남은 발첸의 최후미를 따랐다.
* * *
발첸이 양옆으로 노를 저었다.
어두운 호수 위를 나아가는 작은 나룻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더욱 짙어진 안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음산한 분위가 흘렀다.
오직 환한 램프만이 주변을 비췄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개 속에서 갑자기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위적인 건 아니었다.
베르덴이 느낀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현상으로 보인다.
거대한 호수 위에 감춰진 섬이라.
'이 정도는 되어야 방주에게서 숨을 수 있는 건가.'
어두운 호수답게 당연히 인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이런 데서 누가 뭘 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지레 겁먹고 도망칠 것이다. 겨우 스무 걸음 밖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섬에 근접하자 여러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모를 불청객을 감시하는 글러트니의 일원들. 누군가 접근했다간 당장이라도 살해할 정도로 흉흉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물론 그게 베르덴과 테온에게 향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박사에게 위해가 될 만한 것을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이윽고 나룻배가 섬에 닿았다.
섬에 내리고 길을 따라 걷자 거대한 저택이 나타났다. 창문은 오직 3층에 있는 것 하나가 전부였으며 나머지는 전부 벽이었다.
베르덴은 난생처음이었다.
이렇게 살기 싫어 보이는 건축물을 보는 건.
'취향 참 글러트니답군.'
아주 역겨운 예술 감각이었다.
"들어오시죠."
파르간이 저택의 문을 열었다.
밝은 분위기와 여러 가구로 꾸며져 있었지만, 인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근거지치곤 생각보다 놈들의 숫자가 훨씬 적은 것 같은데.'
뭐,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베르덴이 죽인 이식자만 해도 두 자리에 가깝고 전체로 치면 두 자릿수를 아득히 넘었으니. 어쩌면 손실이 큰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함정이거나.
베르덴이 감각을 끌어 올리며 테온에게 고개를 향했다.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테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테온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택에 들어온 것은 베르덴 그리고 이식자인 파르간과 발첸, 이 셋이 전부. 계단을 올라 3층 중심에 있는 방에 도착했다.
'창문이 있던 방인가.'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란 식탁 위에, 양옆으로 깨끗한 접시와 식기들이 1인 분씩 차려져 있었다.
베르덴이 한쪽에 앉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송곳니께서 오실 겁니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꾸벅 허리를 숙인 둘이 바깥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베르덴.
그가 공간가방에서 블랙 아워의 나침반을 꺼냈다.
여기는 글러트니의 근거지.
놈들과 거리가 가까운 만큼 자침의 반응이 강렬했다.
그러던 순간.
휙 하고 움직인 자침이 문 바깥을 가리켰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낯선 발소리를 따라 자침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림과 동시에 자침이 멈췄다.
어떤 진동도 없이 정확히 목표를 가리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사. 글러트니의 다섯 번째 송곳니,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정중한 태도, 겸손이 가득한 목소리.
베르덴의 정반대에 마주 앉은 사내는 이미 알고 있는 자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 본 얼굴이니까.
'귀족이라곤 들었지만 설마 후작가일 줄이야.'
그것도 가신 같은 것도 아닌, 하나뿐인 가문의 독자.
루펠 레인스 디 가드란.
제3중앙기사단을 이끌던 귀족이었다.
* * *
"뭘 좋아하실지 몰라 전부 준비해 봤습니다. 뭐든 말만 하시면 곧바로 준비해 드리죠."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식사들.
순서가 전혀 없이, 스테이크, 파스타, 해산물, 빵 등 다양한 요리가 두서없이 놓였다. 어느새 한 접시를 비운 루펠이 와인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베르덴이 물었다.
"왜 날 찾았지?"
변조되지 않은 베르덴 본래의 목소리. 박사의 나이와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루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사가 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얼굴은 물론이고 목소리를 비롯한 신체까지 바꿀 수 있었으니.
글러트니에서도 가장 선구적인 존재로, 수많은 인체 실험을 해 왔기에 가능한 신기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루펠이 미소 지었다.
"세상이든, 글러트니든 박사께서 떠나신 수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저희는 마침내 글러트니의 숭고한 염원을 이룰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염원?'
루펠이 붉은 조각을 하나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이건 생명력 그 자체를 응축한 결정. 이것 하나에 일정 생명력 이상을 가진, 수천이 넘는 생명을 희생시켰습니다."
짐승, 마수, 아인종, 이형종.
모두가 재료였기에 닥치는 대로 사냥했다. 후에는 숫자가 부족해 방주에게 걸릴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들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방주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저희도 꽤 큰 타격을 받았죠. 결국 본래 상정했던 조각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루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 부하들을 사용했습니다."
부족한 수만큼 부하들을 갈아 버렸다.
이 섬에 글러트니가 몇 없는 것이 바로 이 이유였다. 아깝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획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 목숨을 좋은 일에 사용한 것이니.
의미가 있는 희생이었다.
"시간이 있었다면 좀 더 차분히 움직였겠지만, 아쉽게도 이 붉은 조각은 완성된 게 아닙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붕괴되는 데다가 실질적인 결과도 부족하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직접 움직인 겁니다, 단기간 내에 유의미한 성과를 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박사를 찾기 위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박사께서 연구하고 계시는 신인류를 말이죠."
모체는 신인류.
장기는 글러트니.
생명력은 붉은 조각.
글러트니의 이빨들은 위 세 가지가 어우러진다면 오랜 시간 동안 염원하던 글러트니를 부활시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구인류의 잠재력을 아득히 넘어선 박사의 '신인류'. 그리고 세상을 집어삼키는 '글러트니의 장기'. 마지막으로 유한을 넘어선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완성된 붉은 조각'. 물론 서로 간의 조율이 필요하긴 하나, 단언컨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머지않았다.
부활한 글러트니가 구인류를 멸종시키고, 그 세상에 신인류가 군림하는 순간이. 나약한 과거를 벗어던지고 종족의 정점이 될 그때가.
"그런데...."
루펠이 베르덴 앞에 놓여 있는 나침반에 시선을 향했다.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던 건데... 그 자침이 묘하게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나침반은 대체 무엇입니까?"
"아, 이거 말인가?"
베르덴이 나침반을 잡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검은 마석을 꺼내 식탁 위에 툭 하고 던졌다. 루펠이 만들었던, 글러트니의 조각과 같은 기운이 남긴 마석.
루펠이 미간을 좁혔다.
"마석? 박사, 이건 뭡니까?"
"뭐긴."
베르덴이 로브를 뒤로 젖혔다.
회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 그 외형. 본래라면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루펠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인간에 대한 소문을 최근에 들은 적이 있었다.
소울 트리 토벌자이자 대행사의 시합에서 1위를 한 젊은 마법사.
"애셔...?"
당황을 숨기지 못한 루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베르덴이 나이프를 움직여, 루펠의 목 정중앙을 꿰뚫었다.
89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2)
"커윽... 크르륵...!"
루펠을 관통한 나이프가 벽을 뚫고 들어갔다.
곧바로 루펠이 목을 부여잡았으나 그 정도로 출혈이 멈출 리가 없었다. 피 끓는 가래 소리가 목 안에서 새어 나왔다.
루펠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스태프를 꺼내 든 베르덴이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때, 곧바로 파르간과 발첸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상황을 본능적으로 이해한 그들이 살기를 드러내며 베르덴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황 판단 하나는 빠르군.'
염력으로 식탁을 움직여 강하게 내던졌다.
잠시 동안 가려진 시야. 베르덴은 감각적으로 두 명의 위치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돌조각이 식탁을 관통했다.
정확히 무릎과 골반을 피격당한 둘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거렸고, 베르덴이 손을 쥐었다.
<그라운드 메이든>
"커헉!"
파르간의 몸이 수십 개의 가시에 꿰뚫렸다.
비정상적인 생명력 덕분에 죽지는 않았으나 위계에 걸맞지 않은 위력에 무릎을 꿇었다. 가까스로 마법을 피한 발첸이 바닥을 부수며 비늘 덮인 손을 베르덴에게 향했다.
'이번엔 파충류인가. 하긴 이형종도 이식하는데 안 될 건 없겠지.'
콰앙!
베르덴과 발첸이 부딪쳤다. 힘에서는 베르덴이 확연히 밀렸지만 그는 엄연히 마법사. 마력이 그를 둘러싸며 불길이 휘감겼다.
거센 열기에 발첸이 거리를 벌리며 파충류와 같은 동공을 부라렸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마법에서 탈출한 파르간이 합류했다.
역시 이 둘은 다른 이식자들과 달랐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베르덴이 스태프를 루펠에게 향했다.
눈을 크게 뜬 발첸과 파르간이 서둘러 루펠에게 몸을 던졌다.
<아웃버스트>
응축된 바람이 폭발했다.
그대로 직격당한 두 명이 튕겨져 날아갔다. 한 명은 창문 밖으로, 남은 하나는 문밖 계단 아래로. 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곧바로 올라오지는 못할 터.
"그런데 언제까지 자는 척하고 있을 셈이지?"
<락 페이탈>
날카로운 석편이 루펠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맞지 않았다. 한쪽 팔을 든 그가 파편을 맨손으로 잡아챘다. 충격에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갔지만 비명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고개를 든 루펠.
그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베르덴에게 물었다.
"박사는 어디에 있지?"
* * *
저택 3층에서 들려오는 소란.
섬에 있던 글러트니가 소란을 듣고 모이기 시작했다.
테온이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진짜 송곳니가 있었던 건가...!'
다행이다.
이걸로 마법사의 손에 죽지 않아도 될 테니.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테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딴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급선무.
여기 있다간 개죽음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던 그때 폭음이 들려오며 누군가 창문을 깨고 추락했다.
이식자 발첸.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저택에 모인 시선들이 일제히 발첸에게 향했다.
'지금이다!'
몸을 낮추고, 재빠르게 섬 끝으로 달려간 테온이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물이 튀는 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저택의 일 때문에 다행히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수 아래로 잠영한 테온.
그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호수 바깥을 향해 전력으로 다리를 저었다.
테온.
그렇게 그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 * *
박사가 어떻게 되었냐라.
베르덴이 목에 걸고 있는 글러트니의 앞니를 가리켰다.
"보면 모르나?"
박사는 죽었다.
시체도 찾을 수 없다.
그가 평생을 이룩해 만든 연구 일지도 불타 사라졌다.
어떻게... 라는 말은 무의미했다.
베르덴이 가지고 있는 앞니는 확실한 진품이며 테온 또한 박사를 따르던 글러트니의 일원 중 하나였으니.
이미 루펠이 확인한 사항이다. 이제 와 의문을 제기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루펠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대지의 창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럼에도 루펠의 눈은 여전히 베르덴을 주시하고 있다.
'이식자와는 다르다.'
놈들은 고통에 반응은 둔해도 치명상을 입으면 죽었다.
그런데 루펠은 아니었다. 마치 죽음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 확실히 송곳니라는 존재답게 다른 놈들처럼 간단하게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루펠이 말했다.
"애셔, 이름은 들었는데... 방주일 줄이야."
분노가 담긴 음성.
제3중앙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보였던 모습은 이미 벗어던졌다. 그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너였군, 내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한 자가. 그리고 이번 다비르크 백작 건에서도. 이면의 그림자를 훔친 것도, 내게서 붉은 조각을 훔친 것도."
"...."
방주가 아니라고 해도 또 같은 말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랬다. 베르덴이 방주가 아니라고 한 걸 들은 글러트니는 죄다 죽었으니.
가볍게 한숨을 내쉰 베르덴이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상대는 인체 실험을 즐겨 하는 쓰레기. 베르덴이 특히나 혐오하는 족속.
지금부터 이 섬에 있는 글러트니는 남김없이 처리할 생각이다. 루펠과 더 얘기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그때, 루펠이 바깥을 슬쩍 쳐다봤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것 같은데... 혼자 온 건가?"
"더 필요한가?"
"하하, 훌륭한 자신감이시군. 뭐, 보아하니 시간을 끌고 방주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
저택 내부의 기류가 달라졌다.
피부를 찌르는 오싹함. 베르덴이 본능적으로 <뇌격>을 날렸다. 자신에게 육박하는 번개를 바라보던 루펠의 흰자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너는 이미 죽고 없을 테니까."
루펠에게서 뻗어 나온 암흑.
그 어둠이 세상을 잠식했다.
* * *
베르덴이 주위를 둘러봤다.
저택은 어디 갔는지 사라졌으며 주변에는 그저 어둠만이 존재했다. 마치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들어온 듯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베르덴의 모습은 훤히 보였다.
암시를 쓰지 않았는데도, 빛이 없는데 사물이 보인다라... 이건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마법적인 것도 전혀 아니다.'
마력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미처 저항할 새도 없이 뒤바뀐 공간. 감각과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리며 경계하고 있자, 멀리서 기척이 느껴졌다.
상처뿐만 아니라 복장마저 회복한 루펠. 그가 양팔을 벌리며 이 어둠을 가리켰다.
"어떤가, 여기는. 참으로 아늑하지 않나?"
"이건 뭐지?"
루펠이 웃으며 답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유약하게 태어났지. 잦은 병치레는 물론이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독립할 당시 어머니를 잃었다. 가문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나는 그저 죽음만을 기다렸지. 그러던 그때, 희망이 내게 찾아오더군."
글러트니.
그들이 루펠에게 접근했고, 그의 몸을 고쳐 준다고 속삭였다. 너무도 달콤했다. 전혀 살아날 방법이 없던 상황이었기에 제안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령 실패할 확률이 더없이 높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보란 듯이 성공했다.
"글러트니의 장기를 이식받은 존재는 전과 다른 육체를 얻게 된다. 근력, 재생력 등 구인류 따위의 나약한 한계를 아득히 벗어난 신체를 말이지. 그렇게 나는 병약한 과거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을 얻었다."
루펠은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남다른 신체 능력은 재능이었으며, 내재되어 있던 잠재력을 일깨웠다. 마침내 가드란 후작가의 독자로서 걸맞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 무의미한 희생을 당하지 않게 만들었다. 루펠을 아는 기사들은 대부분 그를 존경했다.
루펠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업적을 말했다.
베르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체 실험이나 하는 놈이 잘도 말하는군."
"인체 실험이라. 그럼 묻지. 그게 나쁜 건가?"
루펠이 코웃음 쳤다.
"너의 말대로 우리 글러트니는 구인류를 재료로 삼아 지금에 이르렀다. 뭐, 구인류 입장에서는 악한 일이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선이다. 본디 선악이란 건 주관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수많은 사람의 삶을 구해 줬다는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무의미한 죽음을 당하는 대신, 글러트니의 미래를 위해 유의미하게 쓰기 위함이었지만... 구인류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신들을 위해 가축을 키우고 도살하는 것처럼."
인간은 열등하다.
뭉치지 않으면 그대로 사멸하는 게 인간이다. 그리고 뭉쳐서 살아남은들 위험이 사라지면 금세 흩어져서 저들끼리 목숨을 빼앗는다.
자신들보다 열등한 종족들을 희생양 겸 발판으로 삼는다.
비난하는 건 아니다.
그게 본디 인간이 가진 습성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글러트니는 옳았다.
열등한 구인류를 지워 없애고 신인류로 다시금 인간을 재정의하는 것. 인간이 지금까지 해 왔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희생양이 될 열등한 종족이 가축에서 구인류가 된 것뿐이다.
루펠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애셔, 너는 왜 글러트니와 적대하는 거지? 단순히 방주에 속해 있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구인류를 지키기 위해서? 시답잖은 정의감 같은 거라도 갖고 있는 건가?"
정의라니.
그런 거창한 단어가 붙을 이유도 없다.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에 안 든다고? 그거 참 날것 그대로의 이유로군. 뭐, 좋겠지. 구인류의 사상이라는 게 대개 그런 법이니까. 언제나 그럴듯한 논리와 윤리를 내세우면서, 막상 자신이 대상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변명을 하며 회피하지. 아, 그리고 나에게 물었었나? 이 공간이 대체 무엇이냐고."
루펠이 자신의 명치를 쓰다듬었다.
"이곳은 '글러트니의 위장'. 내가 이식받은 장기의 힘으로 만든, 세계를 뒤덮고도 남을 무한한 공간 그 자체다. 얼마 전까지의 나였다면 곧장 생명력이 고갈되어 죽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지."
루펠이 붉은 조각을 꺼내 명치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복부가 열리더니 무수한 이빨이 나와 조각을 집어삼켰다. 이걸로 루펠이 섭취한 붉은 조각의 수는 총 10개.
콰드드득!
거대한 대지의 창이 날아가 루펠을 덮쳤다.
그러나 육체가 절반 가까이 찢겨 나갔음에도 죽기는커녕 몇 초 후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힘은 이 공간만이 전부가 아니다."
루펠이 베르덴에게 걸어갔다.
"나는 이 공간에선 불사이며 불멸. 그리고 신."
루펠이 손짓했다.
바닥을 이루고 있는 어둠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하얀 눈과 찢어진 입을 가진, 사람만 한 검은색의 괴물. 형태로 보아 이형종임이 분명했다.
"이들은 글러트니의 위장에서 서식하는 존재. 고대에서 칭하길 '스위퍼(Sweeper)'라고 하더군. 청소부라고 보면 될 거다."
개체 하나만으로 보면 약하다.
하지만 스위퍼의 특징은 숫자다. 이 끝없는 공간을 청소하는 존재.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스위퍼들이 하나둘씩 어둠에서 솟아났다.
베르덴을 크게 둘러싼 그 숫자는 세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이 공간의 지배자인 나와 무한에 가까운 스위퍼들. 고작 4위계 마법사 따위가 어찌할 수가 없는 전력 차이지. 애셔, 너는 어떻게 할 건가?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자진해서 글러트니를 위한 재료가 된다면 편안한 죽음을 약속하지. 그리고 도움을 바랄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이곳에는 어떤 구인류도 들어올 수 없으니까."
네 자리를 아득하게 넘는 숫자.
지금까지 이렇게나 많은 적을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전력은 베르덴이 확실히 불리했다.
그때, 베르덴이 물었다.
"이 공간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고?"
"그래."
외부와 차단되었다라.
그러나 베르덴은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작게 웃었다.
"그거 잘됐군."
"뭐? 그게 무슨...."
화아아악!
베르덴의 주위로 방대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그와 함께 베르덴의 오른쪽 눈동자에 역천의 마법진이 떠오르며 마안이 발동됐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막대한 양의 마력에 루펠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흐르는 별, 유성.
베르덴의 첫 번째 별이 루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90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3)
현재 베르덴이 시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위력이 막강하나 조절할 수 없기에 지금까지 자제해 왔다. 범위를 착각하기라도 하면 너무도 피해가 컸으니까.
그런데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손수 마련해 줄 줄이야. 그런 기회를 놓칠 베르덴이 아니었다.
콰과과과과과!
전조도 없이 허공에 나타난 푸른빛의 유성이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피할 수도 없다. 막을 수도 없었다.
이질적인 공간이기에 지형이 바뀌거나 산맥 하나가 무너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고도를 낮게 설정하여 최대 위력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충격과 열기에 단번에 사멸당한 수천에 가까운 스위퍼.
그 중심에 있던 루펠은 사라져 있었다. 하기야 유성에 직격당하고도 멀쩡할 리가 없겠지.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베르덴이 추측하기에 이 공간의 구심점은 루펠.
그리고 그 힘은 붉은 조각에서 비롯된 생명력으로 이뤄진 것일 터. 놈이 죽었다면 이 공간에도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한데 너무도 고요하다.
놈은 살아 있다.
그러니 준비해야 한다.
베르덴이 자신의 전력을 가늠했다.
'지형조작은 쓸 수 없다. 거기다 비행까지.'
이 공간 탓이다.
마력이 어둠에 스며들지 않아 지형을 조작할 수 없고, 비행을 하는 순간 마력이 흐트러진다. 원리는 모르겠다. 아니, 원리가 있을 리가 없겠지.
루펠의 말대로라면 이곳은 고대에 존재했던 이형종의 배 속. 상식을 벗어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
전반적인 신체 능력을 강화하며 보호막을 둘렀다.
그리고 일 대 다수인 만큼 광범위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번개 속성을 부여했다. 푸른 전류가 번쩍이는 스태프를 휘두르며 자세를 잡은 순간.
어둠 속에서 직전의 모습을 되찾은 루펠이 나타났다.
흑자 위에 빛나는 녹색의 동공. 그의 손에는 어두운 도신을 지닌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루펠이 미소 지었다.
"솔직히 놀───"
<락 페이탈>
카앙!
머리로 날아오는 파편을 루펠이 검으로 쳐 냈다. 도중에 말이 끊겼다. 시선의 끝에서, 베르덴이 스태프를 까딱였다.
"말이 많군."
가벼운 도발이었으나, 성공적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마법에 날아간 육체. 곧바로 재생을 했지만 상당한 생명력이 소모되었다. 만약 루펠이 글러트니의 이빨 중 하나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심 당혹스러웠는데, 그런 와중에 저런 말까지 듣다니.
더 이상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감히...."
뿌드득.
루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검 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네놈의 몸, 산 채로 잡아 글러트리를 위해 써 주마."
[카아아아아악!]
[키아아악!]
루펠을 따라 스위퍼들이 베르덴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스위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물 샐 틈조차 보이지 않는 숫자.
마치 개미 떼가 사방에서 달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베르덴이 마력을 번뜩였다.
<풍랑>
솟아오른 파도가 바람에 부서지며 전방위로 퍼져 나갔다.
거센 물살에 스위퍼의 돌진이 잠시 멈추었고 일대가 물에 뒤덮였다. 스태프의 끝에서 강렬한 우레 소리가 메아리쳤다.
트리플 캐스팅.
<연쇄번개>
파지지지직!
스위퍼를 불태우고 사방으로 갈라진 세 줄기의 번개. 수십을 넘어서 수백에 가까운 스위퍼가 그 일격에 스러졌다.
아무래도 맷집 자체는 약한 모양. 그래도 쉽게 접근을 허용할 생각은 없다.
저 강철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이빨과 손톱이라면, 베르덴의 보호막과 보호의 목걸이의 마력방벽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
화아아악!
베르덴의 마력이 전에 없을 정도로 들끓었다.
모든 사고가 마법에 집중되었고, 전신의 감각이 적에게 향했다. 건물, 지형, 사람 등 주위를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그야말로 전력.
[카아아아아악...!]
[크가아아악!]
스위퍼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력의 빛이 번뜩이는 순간 적게는 수십, 많게는 세 자릿수가 쓸려 나갔다. 막을 방법은 없었다. 설령 운 좋게 피해 낸다고 해도 다음 마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베르덴은 숫자에 압도되지 않았다. 오히려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적은 스위퍼들만이 아니다. 이형종의 군세에서 나타난 루펠이 베르덴에게 돌진했다. 곧바로 화염의 벽을 세웠으나 루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과 스태프가 부딪쳤다.
카앙! 캉! 카앙!
불꽃이 튀었고 베르덴이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베르덴의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역시 근접전은 상대가 안 되나.'
고작 세 번의 충격에 스태프가 손상되었다. 거기다 충격이 내장까지 닿는다.
루펠의 검붉은 검기는 염동력으로 궤도를 비틀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빨랐다.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신경이 느슨해지면 단칼에 죽을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마법사다. 마법사로서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쉽사리 거리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마법이 직격해도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무시하고 달려드니.
<뇌격>
번개가 루펠을 덮쳤다.
순간 움직임이 주춤하긴 했지만 루펠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내 검으로 마법을 부순 루펠이 지척에 다가왔다.
스태프로 겨우 검을 흘렸으나 상대는 애초에 공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다. 글러트니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지금은 그 이상일 터.
검격이 팔과 옆구리의 마력방벽을 스쳤고, 루펠의 손이 베르덴의 목을 노렸다. 곧바로 고개를 뒤로 뺐으나, 그 직후 복부에 뒤차기가 작렬했다.
충격을 흡수하던 보호막이 이내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깨져 버렸다. 바닥을 구른 베르덴이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그런데 목이 허전했다.
"보호의 목걸이라. 쓸모없는 걸 갖고 있군."
콰직!
루펠이 목걸이를 부쉈다.
어차피 지금의 상황에서 있으나 마나 하기에 별 영향은 없다.
루펠이 이죽거리며 여유롭게 걸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 베르덴의 사고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상대의 신체 능력, 움직임, 재생력, 공간 등. 계산은 곧바로 끝이 났다.
'루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생명력이 응축된 붉은 조각은 루펠의 재생력과 글러트의 위장을 유지하는 근간.
즉, 루펠이 재생에 생명력을 쓸 수 없게 하는 것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공략법이다. 방법은 있다. 애초에 그런 비장의 수단 하나 없었다면 단신으로 이곳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준비가 필요하다.
루펠의 움직임을 막고, 정신을 집중할 시간이.
콰앙!
베르덴과 루펠이 다시금 부딪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와 다리가 베였다.
강화된 감각으로 치명상은 흘려 냈으나 스태프가 견디지 못했다. 미스릴이 첨가된 무기인데도 이렇게 간단히 금이 갈 줄이야.
그런 열세 속에서 베르덴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흩날리는 피. 검기와 마법이 교차했다.
대지의 창이 루펠의 복부를 뚫었으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인지는 가능하나 미처 피할 수 없는 속도. 로브 위로 피가 번졌고, 이내 목 근처에 상흔이 하나 새겨졌다.
하나 치명상은 아니다.
그 틈에 손을 내뻗은 베르덴이 루펠의 무릎을 날려 버렸다. 이어 루펠의 시야를 불태움과 동시에 충격파로 루펠의 몸체를 멀리 날려 버렸다.
'지금이다.'
비어 있는 왼손에 맺힌 벼락.
그리고 이내 붉게 물들며 어둠 속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열뢰>
콰과과과!
베르덴이 마법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번개의 전도성과 화염의 열기를 동시에 품은 합성 마법. 삽시간에 원형으로 뻗어 나가는 번개 줄기에 다가오던 스위퍼들이 타올랐다.
"발버둥을 치는군."
루펠은 애써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재생하면 그뿐이니까. 그것이 루펠의 오만이었다.
신체가 타오르며 언제나 그랬듯 루펠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그사이 베르덴이 병렬적으로 마력을 움직였다. 스태프에는 또 다른 합성 마법과 단일 마법을 연산했고, 왼손으로는 마법진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혹한의 반지를 최대한으로 활성화했다.
원본의 13%.
<빙뢰격>
<얼음지대>
"...!"
차가운 벼락에 루펠의 몸이 얼어붙었고, 주위 일대가 한기에 뒤덮였다.
베르덴이 염력으로 스태프를 내던져 루펠의 앞에 정지시켰다. 스태프에 있는 마석이 발광하며 마법진이 발동했다.
구속 마법진, 디테인(Detain).
마력으로 된 사슬들이 루펠의 몸을 휘감았다.
고급 마석을 가공해 만든 보석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곧바로 빠져나올 수는 없을 터.
루펠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죽일 수 없으니 발목이라도 묶겠다는 건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고작해야 시간 끌기.
하지만 베르덴의 눈빛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보여 주지."
베르덴의 마안이 발동했다.
내부에서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바깥으로 넘쳐흘렀고, 손에 맺힌 회색의 마력이 서로 공명하며 새로운 별자리를 그렸다.
유성, 그에 필적할 정도의 마력량. 전신을 엄습하는 압력에 루펠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저게... 뭐지?'
베르덴의 손에 맺힌 어둠의 구체.
그 안에 자그마한 빛이 가득했다. 마치 은하수처럼.
성신 속성.
하르칸이 만든 다섯 개의 별.
첫 번째 별은, 유성.
하늘에 흐르는 별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베르덴이 새롭게 깨달은 별.
그것은 하늘의 급류이며 밤하늘에 남기는 잔상으로, 고대에는 재앙의 징조이기도 했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별을 하르칸은 이렇게 이름 지었다.
혜성, 라레니아(Rarenia).
휘몰아치는 마력.
은하수의 격류가 루펠을 향해 쏟아졌다.
* * *
은하수의 줄기가 일자로 뻗어 나가며 무지막지한 압력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기운이 가득했다.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파괴력이 강한 마법만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위험하다.'
루펠은 다급하게 스위퍼들을 고기 방패를 세웠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아아아아악!]
궤적에 있던 스위퍼들이 일제히 소멸했다.
말 그대로 수백이 지워졌으나 약간의 시간 벌이조차 되지 못했다. 압력에 스태프가 날아가며 마법진이 풀렸다. 하나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혜성이 루펠에게 직격했다.
"...!"
엄청난 압력에 전신이 짓이겨졌다.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조차 묻혀 사라졌다. 튕겨져 나간 루펠의 몸에서 피가 가득 흘렀다. 하지만 이 정도는 금방 재생할 수 있다.
검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그런데.
"왜, 왜 재생이...!"
회복이 안 된다.
상처의 단면을 바라보니, 어두운 별무리 같은 것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건... 네놈, 대체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별의 잔흔(殘痕).
혜성의 격류는 흐름을 거스른다. 루펠의 재생력 또한 마찬가지. 흔적이 지속되는 이상, 루펠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
이윽고 루펠의 무릎이 무너졌다.
고통과 더불어 탈력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생명력을 쏟아부어도 재생이 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자, 베르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야 죽일 수 있겠군."
스태프를 회수한 베르덴이 성큼 발을 디뎠다.
연이은 성신 마법과 합성 마법에 마력이 많이 소모되었고, 마안에 무리가 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지금의 루펠을 처리할 여력은 남아 있다.
점차 다가오는 베르덴.
식은땀이 루펠의 볼을 타고 턱 끝에 맺혔다.
지금 상태에서 또다시 치명상을 입는다면....
'죽는다.'
병약했을 어릴 적에 느꼈던,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죽음의 공포.
루펠이 뒤로 몸을 끌며 스위퍼들을 움직였다. 그러나 역시 막을 수 없었다. 전보다는 마법의 위력이 덜했으나 기껏해야 천이 조금 넘게 남은 숫자론 부족했다.
말도 안 된다.
마도사도 아닌데, 그것도 고작 4위계에 이른 마법사가 어떻게 이런 힘을. 부정해 봤으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제서야 루펠은 인정해야 했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고.
그러던 순간, 루펠이 바깥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군."
루펠이 남은 생명력의 대부분을 소모하여 억지로 공간의 일부를 허물었다.
그 틈새로 수십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루펠의 아버지, 가드란 후작.
그의 뒤에는 이식자와 기사를 비롯한 글러트니의 일원이 뒤따랐다. 상황을 잠시 바라보던 가드란 후작이 이내 베르덴과 눈을 마주쳤다.
"대행사 이후로 처음이군.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고."
"...."
"상황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네. 자네와 같은 유망한 사내에게 칼끝을 세우는 건 참담한 심정이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군. 얼마든지 원망해도 좋으니... 부디 죽어 주게."
내 아들을 위해서.
전신 무장을 한 가드란 후작.
그가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자, 강맹한 살기가 느껴졌다. 기세만으로 따지면 루펠에 필적할 정도. 마력과 체력을 많이 소모한 베르덴이 명확하게 불리했다.
루펠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인정하지. 너는 확실히 구인류라고 볼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마법사다. 하지만 너는 혼자다. 이것이 구인류와 신인류의 차이지."
한데 뭉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구인류가 가진 한계였다.
"다만, 특별히 제안하겠다. 애셔, 우리와 함께해라. 그렇게 하면 박사의 죽음은 묵인해 주고, 그 재능에 걸맞은 육체를 만들어 주마."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했다. 그렇게 보면 베르덴이 가진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만약 그가 구인류의 한계를 벗어나면 박사에 준하는, 아니 그 이상의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 육체를 활용하면 글러트니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터.
베르덴이 즉답했다.
"꺼져."
베르덴의 육체는 이미 완벽하다.
스스로 이뤄 낸, 한계가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집약체. 루펠의 제안을 받을 이유는 일절 없었다. 더군다나 대놓고 인체 실험을 하겠다고 말하는 놈에겐.
혐오감이 담긴 목소리에 루펠이 검을 들었다.
"...아깝군. 그래도 그 몸은 글러트니를 위해 잘 써 주마."
남은 스위퍼들과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베르덴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펠과 가드란 후작을 비롯한 글러트니의 일원들이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동이 서서히 커져 갔고,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꽤나 늦었군."
콰아아앙!
공간이 깨지며 생겨난 틈새. 그 안에서 배 한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91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4)
글러트니의 위장에 집어삼켜지는 순간.
베르덴은 곧장 리스너가 준 수정을 깨뜨렸다. 마력의 파장이 확산되었으나, 곧바로 방주가 나타날 수는 없었다.
좌표가 왜곡되어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열세에 몰린 루펠이 스스로 그 차단막을 허물었고, 갇혀 있던 마력 파장이 바깥으로 나오며 방주에게 감지되었다.
방주는 곧장 공간 이동을 기동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갑판 위에 선 노인과 사내가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을 바라봤다.
"불쾌한 공간이군요."
"글러트니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니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이능인 것 같군. 허, 설마 글러트니가 여기까지 이뤄 낼 줄이야...."
글러트니의 장기를 이식받은, 다섯 개의 이빨.
그들은 여타 이식자와는 차원이 다른 재생력과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고대의 이형종, 글러트니가 가진 힘을 재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 사실을 늦게 깨닫고 대응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가히 상상도 하기 싫어졌다.
그래, 만약 한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사내가 아래로 시선을 향했다.
방주로 향해 있는 무수한 시선. 사방에는 숱한 이형종의 잔해가 널려 있었고, 글러트니의 이빨로 추정되는 루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행동을 보아 나이에 맞지 않게 오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만한 수를 상대로 홀로 맞서고 있을 줄이야. 도대체 어떻게 4위계 마법사가 이런 힘을 갖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노인이 베르덴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리스너가 말했었지, 지금까지 봐 온 누구보다 천재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마법사라고. 하지만 직접 보니 그 이상이군."
노인의 눈에는 어렴풋이 보였다.
베르덴 안에 담겨 있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가.
저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마력량이다.
아직 수준에 오르지 않아 저 마력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노인은 확신했다. 저건 100년... 아니, 천 년 혹은 역사상 유례없이 탄생한 존재라고.
이어 노인은 시선을 돌려 사내에게 향했다.
"그런데 설마 가드란 후작가가 글러트니와 손을 잡았을 줄이야. 그것도 공국에서도 가장 촉망받는 기사인, 제3중앙기사단의 단장이 글러트니의 이빨이라니."
"...."
"직접 할 텐가?"
"장로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오랜 친구로서의 도리이니.
"그렇다면 그리하시게."
"감사합니다.
노인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소년이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로크, 준비하거라."
"네! 스승님!"
방주로서, 옛 배신자인 글러트니를 처단할 시간이다.
* * *
'설마 공간 이동이 가능한 비행정을 보게 될 줄이야.'
베르덴이 방주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크기가 작긴 하다만 그 기능 하나만으로, 베르덴이 탔던 공국의 리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방주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비행정이었다.
그때, 방주에서 총 세 명의 인영이 떨어지더니 지면에 착지했다.
처음 보는 노인과 방주의 후보, 로크. 그리고 세련된 장검을 어깨에 멘 사내는, 공국의 연회장에서 봤던 라비슈른 후작이었다.
'그래서 공국의 기밀들을 쉽게 알 수 있었던 건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나저나 가드란 후작은 글러트니고, 라비슈른 후작은 방주라.
아마 서로 모르고 있었겠지.
진즉에 알았다면 이미 사달이 났을 테니까.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로크가 다가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애셔 형님!"
형님?
뭐, 호칭은 그렇다 치고.
"생각보다 늦었군."
"아 그게, 좌표가 왜곡되는 바람에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워서.... 그래도 타이밍 좋게 온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긴 한데...."
수가 많이 모자란 것 아닌가?
그러자 로크가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제가 스승님을 모셔왔거든요."
스승님?
리스너의 시선을 따라갔다.
언제 다가왔는지, 노인이 로크의 뒤에 선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칠흑의 정복을 입고 하얀색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언뜻 인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마치 철옹성과도 같은 굳건함이 느껴졌다.
노인이 말했다.
"로크의 스승이자, 방주의 장로인 렌 발하그네. 자네가 제자를 대신해 글러트니의 이식자들을 처리한 마법사로군."
"애셔라고 합니다."
"본래 스승님은 일선에 잘 나서지 않는 분이신데, 형님에 대해 이야기하니 흔쾌히 도우러 오셨어요."
방주의 장로라....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기세.
지금 무방비한 상태임에도 스위퍼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할 정도다.
명백한 강자 중의 강자.
저런 존재에겐 단순한 숫자 놀음은 무의미할 터.
"그리고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어두운 호수 주변을 완전히 봉쇄했어요. 오늘 이곳에 있는 글러트니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라고 리스너가 전해 달래요."
"그렇군. 그럼 여긴 맡기지."
렌 발하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많이 지치신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지치긴 했으나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베르덴은 다 잡은 먹잇감을 남에게 넘겨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이자, 렌 발하그가 곧바로 수긍했다.
"좋은 기백이군. 알겠네. 그럼 이곳은 우리에게 맡기게."
"감사합니다."
렌 발하그가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발을 옮겼다.
그리고 갑자기 모습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글러트니의 이식자 중 하나에게 다가섰다.
"어?"
콰지직!
아차 하는 사이, 파공음이 터져 나오며 일격에 이식자의 머리가 사라졌다. 산산이 조각난 파편이 스위퍼들에게 쏟아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악!]
들려오는 거친 울음소리.
멈춰진 전투가 재개되었다.
* * *
다시금 혼란해진 전장, 그 중심.
가드란 후작과 라비슈른 후작.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쥔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행사가 끝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가드란."
"나도 같은 마음이네. 이렇게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지. 우린 언제나 같은 적을 상대로 같이 검을 겨누었으니까."
둘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가문명으로 불렀다.
이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내려온 습관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라비슈른 후작이었다.
"...왜 그랬나?"
"...."
"자네는 언제나 정이 많았지. 영지민들을 진심으로 다스렸고, 불의에 분노하며, 선을 베풀었어. 수많은 국민을 제 손으로 희생시킨 에스티리아 왕국을 향해 칼날을 세우기도 했지. 그런데 왜 글러트니 따위에게 넘어간 건가?"
가드란 후작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가드란 후작의 아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유약했다.
잔병치레로 몸져눕기 일쑤였고, 마차를 타고 멀리 여행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건강하게 아들을 낳았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는 행복했었다.
그러던 중 벨디른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어쩔 수 없이 가드란 후작은 직접 전장으로 향해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렇게 2년쯤 흘렀을까. 겨우 영지로 돌아갈 시간이 생겼지. 나는 곧장 아내가 있는 자택으로 향했고, 나는 마주했네. 불과 한 달 전에도 나에게 편지를 보냈던 아내의 무덤을."
"그건...."
"뭐, 이건 자네도 아는 얘기니 넘어가겠네. 어쨌든 그 후로 당시 리비안트 공작 전하를 따라 왕국에 반기를 일으켰고, 리비안트 공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지. 그런데... 비극은 또다시 여지없이 찾아오더군."
아내가 남긴 아들, 루펠.
그는 아내의 유전자를 받았는지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다. 아내보다도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병약했다.
가드란 후작은 절망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곧장 아들의 몸을 낫게 하기 위해 후작가의 전력을 총동원했다. 오랜 친우이기도 공왕과 라비슈른 후작 그리고 여러 귀족과 상인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소용없었지. 공왕 전하께서 어렵게 루아스교의 추기경을 데려왔지만 선천적인 건 어찌할 수가 없다더군. 죽은 자도 살리는 성녀가 아닌 이상은.... 아,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네. 성녀는 결단코 사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지. 그게 한 국가의 귀족이라면 더더욱.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하지만.
"내 마음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더군."
솔직한 심정으로 전쟁이라도 일으켜 성녀를 납치하고 싶었다.
물론 그게 무리라는 건 알고 있다. 루아스교의 본산인 루아스 교국과 마찰을 빚는 순간 공국은 그대로 끝장이다.
거기다 설령 운 좋게 성녀를 데려온다고 해도, 그녀에게 치료할 생각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감정과 이성이 충돌했다.
그토록 희생했음에도 아들을 구해 주지 못하는 공국이 원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공국을 이해했다.
죽어 가는 아들을 보며 속이 썩어들어 갔다.
하늘이,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저주하는 것 같았다.
"그때, 글러트니가 내게 찾아와 손을 내밀었네. 그리고 나는... 잡았지."
"놈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었나?"
"내 아들에게 이형종의 장기를 이식한다더군.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절박했고, 내 눈으로 직접 그 과정을 지켜봤지. 실패하면 그 자리에서 전부를 죽이고 나도 자결할 셈이었네. 그런데 이식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물론 이식 전과 이식 후의 아들이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네. 누가 뭐라 하든 내 아들이니까."
가드란 후작이 눈을 떴다.
"라비슈른, 자네가 방주에 몸담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럴 만해. 자네는 언제나 대의를 추구했으니까. 만약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
"가드란...."
"하지만. 난 더 이상 잃지 않을 거다."
설령 모두가 악마라고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죽어서 영원히 저주받는다고 해도.
모든 걸 바쳐서라도 아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을 지킬 것이다.
"그게 내 선택이다. 자세를 잡아라, 라비슈른."
가드란 후작이 검을 세웠다.
이미 길은 갈라졌다. 그것이 선택의 결과였다.
라비슈른 후작이 말없이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오랜 친우. 이제부터 그를 죽여야 한다. 후회는 있었으나 망설임은 없다. 그래야만 많은 사람이 살 것이고, 잘못된 길을 걷게 된 그를 구할 수 있을 테니.
"...미안하네."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
공국의 두 기둥이 지면을 박찼다.
* * *
루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저자가 오다니....'
방주의 세 장로 중 하나, 렌 발하그.
그는 한때 방주를 이끄는 선장으로, 글러트니를 척살하는 데 앞장섰던 존재였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선에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었는데.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다.'
특히 저 애셔라는 마법사. 어떻게든 스위퍼들을 움직여 방해했지만 놈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마력량인지, 저건 이해가 가능한 범주를 넘어섰다.
저건 그저 재능의 영역이 아니다.
마법사 중에서도, 최정상에 오른 마탑주라고 해도 4위계 마법사였던 시절에 저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도망쳐야 한다.
공국에서 쌓은 기반은 사라지겠지만, 붉은 조각으로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능력을 재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다.
루펠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움직였다. 시선이 팔린 지금이 적기였다. 그러던 그때, 로크가 달려오더니 루펠의 앞길을 막았다.
날카로운 앞차기에 루펠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어딜 도망가려고?"
방해다. 시간이 없다.
루펠이 핏대를 세우며 힘을 끌어모았다.
"비켜라!"
루펠이 로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검속. 로크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했으나 손바닥과 팔꿈치로 칼날을 가까스로 흘려 내는 게 전부였다.
이윽고 루펠이 검 손잡이로 로크를 후려쳤다.
무지막지한 힘에 로크가 나가떨어졌다.
고개를 든 로크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방금의 일격에 팔에 금이 갔다. 미리 움직여 충격을 흡수했는데도.
이게 글러트니의 송곳니인가?
어떻게 애셔 형님은 이런 괴물을, 그리고 저 많은 수를 상대로 혼자 압도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로크가 베르덴에게 감탄한 사이, 루펠이 따끔한 시선을 느꼈다.
어느새 베르덴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표정을 구긴 루펠이 서둘러 공간을 열고, 그 밖으로 몸을 던졌다.
* * *
"허억, 허억...."
섬으로 나온 루펠이 바닥에 쓰러졌다.
상처에 일렁이던 별 무리는 사라졌으나 치명상을 회복할 생명력이 부족했다. 연이어 공간을 허무는 바람에 붉은 조각에 담긴 생명력을 거의 소진했다.
'고작 마법 하나에 이렇게 되다니....'
루펠의 손가락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아니,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다.
곧 있으면 글러트니의 위장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의 루펠에겐 장로를 상대할 힘이 없다. 당장 어두운 호수를 빠져나가야 한다.
이미 호수 주변을 방주에서 감시하고 있을 터.
하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지금, 자욱한 안개를 이용하면 나갈 수 있다. 재생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루펠은 여전히 강자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기엔 아직 일렀다.
<어스 자벨린>
"커억?!"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대지의 창이 루펠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근처에 있던 바위와 부딪쳤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루펠이 마법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자.
"말도 안 돼...."
베르덴.
그가 루펠이 닫아 놓았던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92화 글러트니의 송곳니 (5)
글러트니의 위장은 완벽한 폐쇄 공간이었다.
잠시 입구가 열린 사이, 방주가 공간 이동으로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긴 했으나 그건 극히 예외였다. 정확한 좌표와 타이밍.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불가능했을 우연이었다.
글러트니의 이능은 구인류에게 허락되지 않은 지고한 힘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런데 그걸 베르덴은 보란 듯이 무시했다.
루펠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설마 몸에 글러트니의 조각을 품고 있었던 건가? 아니,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루펠이 글러트니의 송곳니 중 하나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마도에 이르지 않았음에도, 듣도 보도 못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한 것.
도저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방대한 마력량.
모든 원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원소 마법사로서의 정점에 가까운 재능.
그 의심은 베르덴이 글러트니의 위장을 단신으로 빠져나온 것으로 확신으로 변했다.
신인류.
글러트니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루펠의 관점에서 봤을 때 베르덴은 구인류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였다.
그걸 인식하자 루펠의 눈에 새로운 게 비쳤다. 베르덴의 푸른 눈동자 안에 숨어 있는 짙은 증오와 분노가.
그것이 증명한다. 그가 초월한 한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결과임을.
상처를 손아귀로 틀어막은 루펠이 비틀거렸다.
가쁜 호흡을 내쉬며 베르덴에게 말했다.
"...너는 글러트니가 악으로 보이나?"
"그럼 아닌가?"
"천만에. 글러트니의 이념은 필연이고 숙명이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고기를 먹음으로써 근육이 붙고, 채소를 먹음으로써 부족한 영양분을 얻지.
섭식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이며 본능을 표방한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잘 먹는다고 해도 그저 한계 내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다. 평범한 사람은 뭘 먹든 간에 곰보다 강한 힘을 얻을 수 없듯이.
인간의 진화는 그 한계를 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글러트니가 하는 것은 그 한계를 깨뜨리는 일이고.
인류는 나약하다.
병으로 죽고, 살해당하고, 수명도 짧다. 그래서 인류는 섞일 수 없다. 그래서 약소 종족이다
하지만 글러트니의 이상이 이뤄지면 달라진다.
병으로 죽지 않고, 군림하며, 수명도 길어진다. 인류는 뒤섞인다.
선천적으로 유약한 몸을 가졌던 루펠.
언제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에 떨었던 그였기에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글러트니와 함께했다. 그런 죽음의 공포를 더는 겪고 싶지 않았기에, 더 나아가 그런 죽음의 공포를 겪는 인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셔, 너도 잘 알 거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눈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
맞는 말이다.
태생적인 베르덴의 한계는 1위계였고, 그로 인해 마탑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베르덴은 루펠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고난 운명을 비틀었고 하늘을 거슬렀다.
베르덴이 스태프를 들었다.
"그만 끝내지."
마력이 술렁이자, 루펠이 어금니를 깨물며 전력으로 검을 내던졌다.
염동력으로 비틀었으나 부족했다. 칼날이 베르덴의 허벅지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있던 다용도로 쓰던 단검을 움직여 루펠에게 던졌다.
루펠이 쳐 내며 박살 냈지만, 그것이 베르덴의 노림수였다. 단검의 파편이 잠시나마 루펠의 시야를 빼앗았다.
<투명화>
"크윽...!"
루펠이 곧바로 눈을 떴으나 이미 베르덴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잠깐의 당혹감. 그 기회를 베르덴이 놓칠 리가 없었다.
비행을 쓴 베르덴이 사각에서 루펠을 향해 스태프를 강하게 내질렀다.
콰아앙!
충격에 투명화가 풀렸다. 베르덴이 스태프로 루펠의 가슴을 밀어내고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짓눌렀다. 가슴뼈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베르덴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혹한의 반지와 마안을 발동했다.
<스테이시스>
오른쪽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혹한의 얼음이 루펠을 뒤덮기 시작했다. 루펠이 스태프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남은 기운을 전력으로 끌어모아 마법에 저항했다.
죽이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서로가 전력을 다했다.
우직직!
스태프가 부러졌다.
아직이다.
곧장 부러진 스태프를 루펠의 심장에 찔러 넣고, 그의 목을 움켜잡아 마법을 이어 갔다. 순식간에 얼어붙어 가는 시야.
죽음을 직감한 루펠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살... 려...!"
쩌저저적.
루펠의 몸이 얼어붙으며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의 위장. 아마도 글러트니의 장기로 보이는 것이 허공에 흩어지며 사라졌다.
남은 건 글러트니의 징표인 이빨 하나뿐.
더 이상 루펠은 재생하지 못했다.
루펠은 죽었다.
"후우...."
베르덴이 한숨을 털어 내며 근처 나무에 기대앉았다.
마안을 과하게 사용한 터라 머리와 눈이 심하게 지끈거렸고, 막대한 양의 마력을 사용한 터라 정신이 나른했다. 일부 상처에서의 출혈도 심했다.
루펠은 강적이었다.
특히나 그 재생력은 가히 불사에 가까웠다.
베르덴이 쌓아 온 노력, 시간 그리고 운.
어느 하나가 부족했더라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넘어섰다.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두 개의 유리병을 꺼냈다.
"아껴 두길 잘했군."
샐러맨더의 심장으로 만든 활력제 그리고 최상급 포션.
둘을 차례대로 마시자 포션의 효과가 증폭되었다. 그와 더해 리커버리 팔찌를 기동했다.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출혈이 멈췄다.
당연히 마력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다.
오른쪽 눈을 깜빡였다.
시야도 멀쩡했고 아프지도 않았다. 다행히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
그러던 중, 안개 속에서 기척을 느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만히 주시하고 있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귀티가 나는 얼굴을 보아 평범한 신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딘가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애셔."
"방주의 일원입니까?"
"그렇습니다. 어두운 호수 일대를 통제하는 지휘관 역할을 맡았죠."
사내가 루펠이 있었던 흔적에 시선을 향했다.
"다행히 송곳니의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모양이군요.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분명 공국에 큰 혼란이 찾아왔을 겁니다. 따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만... 아무래도 지금은 때가 아닌 모양이군요."
근처 공간이 일렁였다.
루펠이 죽음으로써 글러트니의 위장이 붕괴된 것이리라.
잠시 후, 공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글러트니의 일원들은 전부 사망했다. 심지어 스위퍼들까지.
렌 발하그가 시체 더미 위에 피에 젖은 장갑을 던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로크가 바닥에 누워 가파른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부상은 있었으나 생명에 큰 지장은 없었다.
'음, 조급해지니 기술에만 의존하는군. 신체 능력을 더 키워야겠어.'
늘그막에 들인 제자를 어떻게 키울지 생각하며 시선을 공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두 후작이 있었다.
"하아, 하아...."
쿨럭, 쿨럭!
후두둑.
피를 쏟아 낸 가드란 후작이 무릎 꿇었다. 검은 이미 부러진 지 오래였다. 그는 글러트니의 조각을 몸에 품고 있었으나 이식자는 아니었기에 재생력 따위는 없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친우인 라비슈른 후작을 상대했다. 서로 배운 검술은 달라도 실력은 비등했고, 신체 능력도 그러했다.
그런데 이기지 못했다.
스스로 옳은 길을 걷는 자.
잘못됨을 알면서도 걸어야만 했었던 자.
패인은 그 마음의 차이였다.
글러트니의 위장이 사라져 간다.
사체들이 공간과 함께 모습을 감췄고 살아남은 자만이 섬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가드란 후작의 눈에 베르덴이 비쳤다.
공간을 벗어나 루펠을 쫓아갔었던 마법사. 그가 살아남았다는 건 자신의 아들이 죽었음을 의미했다.
"하하...."
결국 전부 잃었다.
가드란 후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끝나 버렸군.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모든 걸 내던졌는데도...."
후회는 없었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자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러면 어땠을까, 저러면 어땠을까. 수많은 과거의 선택이 아른거렸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뭔가 후련했다.
스스로 인간답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본래의 자신으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드란 후작이 고개를 들었다.
라비슈른의 검이 가드란의 목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
가드란 후작이 답했다.
"가문의 하인들과 봉신 가문들은 부디 살려 주게. 그들은 글러트니와 전혀 무관하니."
라비슈른 후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서걱!
빛이 번쩍이자 가드란 후작의 목이 떨어졌다. 곧바로 신경을 끊은 터라 많은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친우의 목을 베는 감각. 그건 꽤나 사무치는 일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쉰 라비슈른 후작이 검을 납도했다.
피는 닦지 않았다.
안개 속을 비추는 태양 빛.
공국에 아침이 밝아 왔다.
* * *
가드란 후작가의 멸문.
공국의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진 여파는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방주... 정확히는 방주의 일원인 라비슈른 후작이 직접 사태를 수습했다.
그동안 베르덴은 라비슈른 후작가의 별장에서 요양했다.
후작가에서 직접 손상된 유자의 로브와 마흐바트의 가죽옷을 수리해 주었다. 베르덴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마력을 회복했다.
'목걸이하고 스태프가 없으니 좀 허전한데.'
사실 지금 기준에서 그리 귀한 것들은 아니다. 약간 애착이 갔을 뿐이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았다. 미스릴을 첨가한 스태프가 몇 달도 안 되어서 박살 난 걸 보면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단 뜻이니까.
달리 말해서 험하게 다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새로 하나 구해야겠어."
그래도 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큰 전투를 끝냈으니 당장 어디 가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을 터. 페일에게 의뢰가 와도 안 받으면 그만이다.
휴양도시 브리엔테, 3위계 마법사였을 때 약 5천만 엘크를 주고 스태프를 구했으니. 4위계 상위인 지금은 더 성능이 높은 스태프를 구해야 한다.
지금 베르덴이 가진 재산은 약 10억 엘크.
틈틈이 쓰면서 모아 둔 게 이 정도. 고작 1년도 안 된 사이에 번 것치고는 엄청난 수익이었다.
베르덴은 고민했다.
일단 적당히 쓸 무기를 구한 뒤, 돈을 더 모을지.
아니면 뛰어난 마법 물품 제작 장인을 찾아 오브(Orb)를 사용한 스태프를 제작할지.
전자를 택하기엔 후자가 아른거렸고.
후자를 택하기엔 모아 둔 돈이 애매했다. 그리고 장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기가 없다고 해도 베르덴의 전력은 건재하지만 굳이 전투 방식의 가짓수를 줄일 생각은 없었다.
'흐음....'
생각이 길어졌다.
만약 적당히 쓸 스태프를 구한다고 한다면 얼마 정도가 좋을까. 적당히 3~4억 정도면 괜찮은 스태프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애셔 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베르덴이 곧장 방을 나서서 후작의 방에 찾아갔다. 마침 전달할 것도 있었기에 공간가방도 챙겨 갔다.
안쪽에서 허락이 들려왔다.
사용인이 문을 열자, 두 명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명은 라비슈른 후작, 다른 하나는 귀태가 어린 사내. 어두운 호수의 섬에서 베르덴과 마주했던 사람이었다.
"앉게나, 애셔. 그리고 자네는 차 좀 하나 더 내오고."
"예, 가주님."
하인이 물러가고 베르덴이 의자에 앉았다.
라비슈른 후작이 베르덴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인사하게. 이분은...."
"다시 인사드립니다, 애셔."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리비안트 공국의 2왕자, 벨폰스 뤼인 디 리비안트입니다."
...누구?
93화 갖가지 보상 (1)
'설마 2왕자였다니.'
라비슈른 후작가와 2왕자.
공국에 대한, 방주의 정보망이 어떻게 그리 뛰어났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베르덴이 2왕자의 손을 마주 잡았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는 2왕자가 방긋 웃었다.
"루아스교의 진찰을 거부하셨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상처는 전부 회복하신 모양이시군요. 출혈이 꽤 있었던 것 같았는데."
확실히 꽤 깊긴 했다.
당시 허벅지의 근육이 끊어지고, 마안도 과사용한 터라 정신이 어지러웠을 정도니. 그래도 곧바로 활력제와 포션을 복용한 덕에 후유증은 전혀 없었다. 거기다 리커버리 팔찌로 지속적으로 회복하기도 했고.
라비슈른 후작이 루아스교의 사제를 데려와 치료해 준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함부로 남에게 몸을 보일 순 없지.'
베르덴의 몸에는 여전히 역천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문신 같은 걸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마법진이라고 단박에 알아챌 것이다.
육체에 직접 새겨진 마법진.
그 뜻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마법사 본인의 신체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것이니. 거기다 베르덴이 창조한 역천의 마법진은 마력회로를 인위적으로 건드는 금기에 해당된다.
만에 하나 바깥으로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건 좋지 않다.
'어차피 내 몸은 멀쩡하다.'
룬의 반지, 엑시드로 강화된 감각.
베르덴은 누구보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베르덴이 답했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공간가방에서 꺼낸 이면의 그림자. 전에 글러트니에게서 빼앗은 공국의 비보였다.
혹시나 글러트니의 송곳니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면의 그림자라면 글러트니가 남긴 흔적을 따라 추적을 이어 갈 수 있을 테니. 뭐, 결국 쓸 기회는 오지 않았지만.
2왕자가 조심히 등불을 건네받았다.
"글러트니 토벌도 모자라 공국의 비보까지... 당신이 없었다면 공국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후작?"
"그렇습니다, 저하."
라비슈른 후작이 베르덴에게 고개를 향했다.
"애셔, 자네를 부른 건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토벌한 이후의 상황을 말해 주기 위해서네. 그리고 겸사겸사 자네에게 줄 선물도 있고."
선물?
"...그쪽이 더 궁금한가 보군. 좋아, 먼저 이것부터 전달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후작이 녹색 장갑 한 짝을 꺼냈다.
"마수 카멜리오스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네. 착용하면 피부의 색과 동화되어 겉으로 보면 맨손이나 다름없어지지. 착용감 면에서도 그렇고. 워낙 질겨서 강철 검을 맨손으로 잡아도 멀쩡할 걸세. 물론 검기를 둘러싼 칼날을 잡는다면... 음, 손가락이 멀쩡할 거라고 장담은 하지 못하겠군."
베르덴이 장갑을 착용했다.
손을 쥐락펴락하자 이내 녹색이 살구색으로 물들었다. 피부에 쫙 달라붙어서 그런지 촉감은 멀쩡하게 느껴졌다.
'느낌이 괜찮은데.'
이거라면 스태프를 다루는 데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는 내가 아닌 렌 발하그 장로께 하게. 로크를 구해 준 보답으로 주신 것이니."
음, 보답이라.
딱히 구해 줬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공국의 현 상황에 대해 말해 주지. 뭐, 이건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가능한 충격을 줄이려고 대비는 했다만 왕성이 발칵 뒤집혔지."
하루아침에 공국의 기둥이 무너졌다.
이 사실은 후작가의 사용인을 비롯해, 후작가 휘하에 있던 영지의 귀족들마저 왕성의 기사단들이 들이닥치고 나서야 인지했다.
가드란 후작과 그 아들인 루펠.
글러트니에 대한 건 완전히 배제하고, 납치와 살해, 인신매매 그리고 다비르크 백작의 살해 등 바깥으로 드러난 죄에 대해서만 알렸다.
그리고 체포하려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고.
베르덴이 물었다.
"왕성이 그걸로 납득하겠습니까?"
"아니, 당연히 아니지. 루펠의 친구였던 내 아들도 아직 믿지 못하고 있는데 공왕 전하는 오죽하시겠나? 결코 납득할 리가 없지. 오랜 친우인 가드란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믿으셨으니까. 나도 그랬듯이... 그래서 공왕 전하께는 이렇게 말했지. 가드란이 저지른 악행은 모두 병약했던 루펠을 위해서 그런 거라고."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하는 것.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다. 실제로 고위 흑마법에도 있었고, 이형종 중 하나인 악마에게서도 볼 수 있었으니.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자 공왕 또한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일부 사실이기도 했고.
"물론 이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는 않을 거다. 공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건 차치하고, 자칫 루아스교에서 문제 삼는다면 사태는 공국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질 테니."
"일이 이 정도에서 끝난 건 전부 애셔 님 덕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직접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유라면...."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토벌함으로써 공국의 글러트니를 거의 완전히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자의적으로 행한 일이긴 하나 그렇다고 결과가 퇴색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공국의 비보를 회수하기까지. 단적으로 말해, 저는 방주의 일원으로서도 공국의 2왕자로서도 단지 감사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2왕자가 차로 목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시련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다.
그 덕에 마핵을 얻게 되었으니.
"맞습니다. 시련, 그에 따른 보상. 방주는 그러한 메커니즘으로 인류를 이끌, 선장이 될 후보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후보가 아님에도 시련을 이겨 내셨고, 더 나아가 글러트니... 방주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러니 보상 또한 주어지는 것이 도리. 본래라면 리스너의 역할이지만 이번만큼은 제가 그 역할을 대행하겠습니다."
2왕자가 의자 아래에서 금속으로 된 기다란 가방을 꺼냈다.
잠금장치를 열자 그 안에서 스태프 하나가 나타났다. 둥그런 하늘색 크리스털을 회색 금속이 나무뿌리처럼 감싸고 있었다.
"'오큘러스(Oculrus)'. 고등 룬 중 하나인 '충격(Impact)'이 새겨져 있는 스태프입니다. 집중한 마력에 비례하여 강력한 충격파를 만들어 내죠. 뼈대도 흑요석이 첨가되어 있는 터라 내구성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근접전도 중시하는 당신에겐 전의 스태프보다 훨씬 뛰어난 무기일 겁니다."
상자를 베르덴 쪽으로 밀었다.
"저번에 무기가 부러지신 걸 보고 준비해 봤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베르덴이 조심스레 스태프를 들었다.
금속의 차가운 질감. 마력을 작게 불어 넣자 크리스탈에 푸른빛이 맺혔다. 무기가 없는 그에겐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다.
'적당한 무기가 생겼군.'
베르덴은 미소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마음에 듭니다."
"하하, 무엇을 드릴지 논의했는데 리스너가 이걸 강력히 추천하더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앞으로 저희 방주와의 관계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왕자가 말을 덧붙였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애셔, 당신이 어떤 집단에 속하기를 싫어한다는 것. 하지만 시련과 보상은 아주 매력적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앞으로 또는 위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저희 방주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저희도 당신에게 도움을 받겠죠, 이번처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족쇄를 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당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을 다지고 싶을 뿐입니다."
방주인 자신들을 이용해라.
베르덴은 의아했다. 아무리 적합한 후보라고 해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
다만 2왕자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베르덴이 당장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결정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방주가 도움이 된다고 해도, 어떤 집단에 들어가는 것에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든지. 추후에 리스너를 보내겠습니다."
2왕자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용건도 마쳤으니 이만.... 아, 그 전에 이 말을 깜빡했군요. 곧 왕성에서 당신에게 연락이 갈 겁니다."
"왕성에서 말입니까?"
"아마 이번 사건에 대해 포상을 내리시려는 걸 테죠. 당신이 토벌한 소울 트리보다도 더한 사건이니. 제 아버지는 공국을 위해 힘써 준 사람에게는 포상을 아끼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그럼 다음에는 부디 방주에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 2왕자는 떠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2왕자의 말대로 왕성에서 연락이 왔다.
* * *
수도 리드론에서 멀리 떨어진 눈 덮인 작은 언덕
그 아래를 단장인 발칸을 포함한 바스티오 기사단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한 사내가 홀로 언덕 위에 서서 저 먼 하늘을 바라봤다.
새하얀 눈이 내리며 저 멀리 보이는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하늘. 어릴 적 보았던 풍경과 변함이 없었다.
사박. 사박.
뒤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왔군, 애셔."
"공왕 전하를 뵙습니다."
"쓸데없는 격식 차리지 말고 옆으로 오게. 나는 지금 여기에 비공식적으로 자네를 만나러 온 거니까."
공왕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베르덴은 그의 옆에 다가섰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공왕이 입을 열었다.
"...공국이 자네에게 빚을 졌군."
공왕은 글러트니에 대해 모른다.
그저 가드란 후작가가 벌인 죄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그를 추적해 파헤친 것이 베르덴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공왕은 방주가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아니긴 무슨... 라비슈른 후작에게 전부 다 들었는데. 하지만 이거 하나는 차마 묻지 못하겠더군."
공왕이 물었다.
"가드란의 마지막은 어땠나?"
베르덴이 떠올렸다.
목이 잘리기 직전, 유언을 남기며 죽음을 받아들인 그 얼굴을.
"후련해 보였습니다."
"후련했다라... 그래, 그랬던가."
공왕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저 멀리 공국의 수도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내가 리비안트 공국을 건국했는지 알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그 진상을 제대로 아는 건 몇 되지 않으니. 내가 전쟁 중에 독립을 선언한 이유는 하나였네. 그게 옳았으니까."
26년 전, 왕국의 횡포로 벨디른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며 국가가 휘청거렸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국은 대응조차 힘겨워 했으며, 공화국은 후방에 지원국이 있었다.
당시 공작이었던 공왕과 그의 봉신 가문들인 가드란 후작가와 라비슈른 후작가가 이를 악물고 막지 않았다면 진즉에 국토의 절반이 날아갔을 것이다.
물론 시간문제였다. 왕국은 연이은 패배로 열세에 몰렸다.
"그러던 중 왕가에서 신임 재상을 등용하더니, 정체 모를 마법사들을 전쟁에 투입하더군. 그걸로 전황이 뒤바뀌었다."
듣도 보도 못한 마법에 의해 공화국은 대응하지 못했다.
단번에 열세를 뒤집고 왕국군이 공화국을 역으로 침공할 정도.
"하지만 그건 대가 없이 주어진 게 아니었다. 진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어 버렸지."
마법사들은 왕국의 국민들을 몰래 납치해 마법의 재료로 사용했다. 수십 개의 마을이 사라지고, 도시의 피난민들이 사라졌다. 사로잡은 공화국의 인질들도 마찬가지.
그걸 알게 된 리비안트 공작은 분개하며 단번에 마법사의 목을 잘라 왕가로 보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하나였다. 허락한 사안이니 내버려 두라고.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것인데.
에스티리아 왕국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희생시켰다.
"말 그대로 왕국은 사람을 갈아 넣고 전쟁을 지속했다. 멈출 수 있음에도 멈추지 않았지. 승리를 맛보니 욕심이 생겼던 거야."
공화국을 점령한다.
당시에 왕국은 그야말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병사들조차 적국의 병사도 아닌 사람들을 거림낌 없이 죽여 나갔다.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사들을 고용했던 왕국의 재상이 사망했다. 심지어 마법사들까지 사라졌더군. 나는 그 혼란을 틈타 검을 들었지."
왕국으로부터의 독립 선언.
그와 함께 그의 봉신 가문 및 주변에 있던 영지의 영주들마저 포섭했다.
최전방에 있던 그가 반기를 들자 왕국은 전쟁을 지속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3년하고도 2개월 만에 평화 협정을 맺었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것이 리비안트 공국의 기원이었다.
"가드란은 라비슈른과 함께 언제나 내 곁을 지탱해 주었지. 전장에서 목숨을 구원받은 적도 있었다. 그 둘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공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애초에 독립조차도 실패했겠지. 가드란은 내게 있어 친우이자 은인이다."
언제나 우직하고 올곧으며 정이 많은 가드란.
뭐가 그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아마 아내의 죽음이 그를 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어 가는 아들을 보며 절망했겠지.
돕고 싶었지만 도울 수 없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찾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펠이 건강을 회복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문이 들었으나 공왕은 애써 무시했다. 굳어 있던 친우의 얼굴에 참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피었으니.
그것이 수많은 사람을 희생해서 얻은 것이란 걸 진즉에 알았다면... 아니, 이건 변명이다. 공국을 위한다면서, 친우의 마음은 알아보지 못한 그의 잘못이었다.
"...그래도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공왕이 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검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에 반사된 빛이 무지개를 띠고 있었다.
아티팩트 '삼원색의 중심'.
공왕이 아티팩트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자네에게 위험하다고 못 준다고 했었지. 그 말도 맞긴 하다만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네. 사실 이건 젊은 시절, 왕국의 경매장에서 라비슈른과 가드란과 함께 구한, 소중한 기억이 담긴 물건이지."
다시는 오지 않을 과거.
"하지만 이제 그만 추억을 떠나보내야 할 차례인 것 같군."
"...."
"어서 받게, 팔 아프니."
베르덴이 아티팩트를 받았다.
"자네와 같은 원소 마법사라면 분명 이 아티팩트를 다룰 수 있을 걸세.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가 됐든. 암. 한 국가의 후작가를 상대해 승리한, 역사상 유례없는 4위계 마법사에겐 간단한 일이겠지."
하하하.
공왕이 농담을 하며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었다. 하아, 하얀 입김을 털어 내며 답답한 가슴을 풀었다.
"고마웠네."
그것이 베르덴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94화 갖가지 보상 (2)
★ 삼원색의 중심
⦁ 혼돈(混沌) 부여
세 종류 이상의 원소의 합성과 정반대의 속성도 결합할 수 있는 효과를 지닌 혼돈. 감정을 마친 베르덴이 아티팩트를 착용했다.
기묘한 감각이 마력회로를 휘감았다.
'설마 아티팩트를 받을 줄이야.'
지금도 믿기 어려웠다.
그만큼 공왕에겐 이번 일이 중요했다는 뜻이겠지. 그 심정은 어렴풋이 이해가 가나 베르덴이 깊게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아티팩트에다가 룬 무기라.
굳이 보상을 바라고 한 건 아니었으나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걸 이렇게 둘이나 얻게 되다니.
공국에 온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너무 많은 걸 얻었다.
베르덴은 잠시 후작가의 별장을 떠나 넓은 초원을 찾았다.
새로운 장비를 얻었으니 당연히 시험해 볼 수밖에. 우선 오큘러스라 불리는 스태프부터였다.
마력을 집중했다.
하늘색 크리스털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막이 형성되었다. 그대로 휘두르자 충격파가 터지며 허공을 강타했다.
고등 룬 문자라 그런지, 가볍게 다뤘음에도 2위계 마법인 충격파보다도 위력이 높다.
그렇다면 최대 위력은 어떨까.
베르덴이 오큘러스가 허용하는 한계치까지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크리스탈이 울리며 베르덴의 마력회로와 공명했다.
양손으로 스태프를 잡고 앞으로 내질렀다.
─────콰과과과!
순간 대기가 일그러지며 일직선으로 지면이 깊게 파였다.
엉망이 된 초원을 바라보며 베르덴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생각 이상인데."
단순히 위력만 따지자면 5위계 중위 마법에 필적한다. 그러면서도 착용자인 베르덴에겐 어떠한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마안의 적용 범위 밖이라 시간이 오래 걸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만족한다.
오큘러스 하나만으로 베르덴의 근접전은 전보다도 두 단계 이상 오른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다음은 삼원색의 중심인가.'
이건 오큘러스와 달리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공왕이 경고했던 대로 세 속성 이상의 원소를 합성하는 것과 반대되는 속성을 결합하는 건 위험한 일이니.
'아티팩트를 이해하는 게 우선이다.'
가장 낮은 위계인 1위계부터 천천히.
그래야 혹여 실패한다 해도 충격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매개체가 될 대지 화살을 시전했다.
그리고 작은 화염을 덧씌웠다.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합성 마법이다. 그리고 친화적인 속성인 바람 마법을 곁들였다.
그 순간.
콰앙!
폭발이 베르덴을 덮쳤다.
곧바로 염동력으로 막을 둘러 충격을 분산했다.
명확한 실패다.
하지만 베르덴은 그 과정 속에서 힌트를 찾아냈다. 그동안 쌓아 온 마법 이론과 마법 실험 등에서 얻은, 본능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원소는 서로 퍼즐처럼 맞물리지 않는다.'
그것이 기본적인 바탕이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원소와 원소 마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낙뢰.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벼락은 물리력이 없으나, 마력으로 만들어진 벼락은 물리력을 동반한다.
원소 마법은 마력이라는 요인이 있기에 보다 다채로워질 수 있다.
합성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현상을 마력을 조작해 가능케 하는 것이다. 불꽃을 품은 벼락이나, 얼음 속성을 띤 뇌격처럼.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지.'
원소 마법 간의 상성.
화염은 물 또는 얼음과 합성될 수 없으며, 번개는 대지에 깃들 수 없다. 그것이 세계의 법칙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마력 이외의 또 다른 외부 요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삼원색의 중심은 어떠한 작용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애초에 아티팩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
그걸 깨닫는 순간, 베르덴의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래, 이것밖에 없었다.
베르덴이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베르덴의 손끝에는 반투명한 화살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면을 향해 쏘아 보내자, 순식간에 화살이 깊게 박히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염의 열기.
대지의 단단함.
바람의 자유로움.
실체는 없으나 충격이 존재하며 불꽃을 품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 없는 마법. 그야말로 혼돈(混沌) 그 자체. 베르덴은 이제야 아티팩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원소를 합성하는 게 아니다. 각 원소 마법의 특징을 추출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내는 거지.'
애초에 전제가 틀렸으니 실패할 수밖에.
대부분의 마법사라면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통상적인 마법사의 뇌리에 마법을 분해하여 조립한다는 창의력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분명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대체 누가 이런 아티팩트를 만든 건지.
분명 베르덴 이상으로 사고가 유연한 제작사일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미치광이거나.
"후우...."
베르덴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연산 능력으로도 각 마법의 특징을 추출하고 조립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력회로도 꽤나 피로해졌다.
익숙할 정도로 훈련하지 않으면 실전에서 사용하는 건 꿈도 못 꾸겠지
그래도 크나큰 성과임은 분명하다.
잘만 한다면 성신 마법인 유성과 혜성을 제외한 비장의 수단이 더 늘게 될 테니까.
'이제 5위계에 오르기만 하면 되겠군.'
베르덴이 별장으로 돌아갔다.
좀 더 삼원색의 중심과 오큘러스에 대한 실험을 하고서, 며칠 뒤에 코헨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 전에 로든마이어 백작에게 들러야겠어.'
베르덴이 간단히 편지를 써서 백작가에 보냈다. 답장은 받지 않았다. 만약 본인이 저택에 없거나 또는 방문을 거절한다면 기사들이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어차피 가는 길이라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 * *
그렇게 백작의 영지에 도달하자, 기사들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자 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작이 나타났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백작이 달려오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애셔! 가드란 후작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장 말해라!"
* * *
무슨 일이 있었냐라.
베르덴은 순순히 설명했다. 방주에서 각색한 내용을 그대로 읊자, 백작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
이?
"이런 미친놈이!"
백작이 소리쳤다.
그것으로 부족했는지 연이어 욕을 내뱉었다.
"내가 의뢰한 실종을 해결하려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쾅!
"너는 미친 마법사가 분명해!"
백작이 숨을 몰아쉬었다.
사용인이 가져다준 차가운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고는 심호흡을 했다. 겨우 격정을 가라앉힌 백작이 가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럼 뭐 하나만 더 묻지. 도중에 라비슈른 후작가가 개입해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
"라비슈른 후작가와는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가? 그럼 라비슈른 후작가에서 가드란 후작과 루펠을 처리한 건가? 그렇겠지?"
"가드란 후작은 라비슈른 후작이 직접 처리했습니다."
"...루펠은?"
"제가 직접...."
"뭐?"
백작이 눈을 깜빡였다.
"제3중앙기사단의 단장인 루펠을 직접 죽였다고?"
베르덴이 수긍했다.
아,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 백작이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페일을 통해 베르덴에게 의뢰한 건 로든마이어 백작 본인이다.
그것이 눈덩이처럼 커져 후작가까지 닿을 줄이야. 아니, 닿은 수준이 아니라 후작가가 멸망했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로든마이어 백작조차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런 맙소사...."
백작이 탄식했다.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하지만 자신의 의뢰를 맡은 마법사가 후작가의 자제를 죽이다니. 다행히 라비슈른 후작가가 개입한 덕분에 왕성에서 납득한 모양이지만 정말로 위험했다.
마석 갱도? 은광?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자칫 오해를 받았으면 후작가를 암살한 흉수로 지목받아 처형될 수도 있었다. 로든마이어 백작가와 관련된 자들 전부!
백작이 서늘해진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다시금 심호흡을 하며 잡념을 쏟아 냈다. 겨우 본래의 무감정한 표정을 되찾는 백작을 보며 베르덴이 생각했다.
'그 정도까지 걱정할 건 아니라고 보는데.'
가드란 후작가가 벌인 짓은 덮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특히나 왕성의 권력이 강력한 공국에서는.
추산된 피해자만 천이 넘고 백작의 기사단과 백작까지 살해했으니 설령 가드란 후작이 살아 있다고 해도 처형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공왕의 친우라고 하지만, 공왕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단순히 친분 때문에 감형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베르덴의 의뢰주인 로든마이어 백작이 공왕에게 치하를 받을 만한 사안이다.
그래도 백작의 반응이 이해가 되긴 한다.
후작가의 멸문에 백작 본인이 조금이라도 관련되었다는 게 부담이 큰 거겠지.
'페일도 같은 반응이려나?'
백작에게 의뢰를 받아 베르덴에게 주선한 사람은 페일이다.
어쩌면 백작 이상으로 정신이 아찔했을 수도 있다. 페일은 귀족도 아닌 정보상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백작보다 부담이 클지도.
뭐, 어쨌든 그건 그거고.
"보수는 어떻게 주실 겁니까?"
"...너는 보수가 지금 눈에 들어오나?"
"그게 제 일입니다."
"하아...."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수에 대해 생각했다. 본래라면 계약서에 적힌 금액에 대해 지불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 건 너무 이례적이다.
의뢰를 위해 후작가와 단신으로 맞붙었다. 고작 1, 2억 엘크로 퉁칠 게 아니었다. 합당하다 해도 백작 자신이 탐탁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군.'
보수를 어떻게 줘야 할까.
돈으로 주기엔 가용할 현금이 부족하다. 이미 다음 해의 예산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했다. 금이나 보석... 아니, 돈의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다 문득 백작의 시야에 베르덴의 단검이 들어왔다.
항상 허리춤에 차고 있는 싸구려 단검집이 비어 있었다.
'그래, 그걸 주면 되겠군.'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자신의 방에서 단검 하나를 들고 왔다.
검은색 가죽 검집.
단검을 뽑자 흑색에 가까운 회색 도신이 드러났다.
"이건 다마스 강철 기반으로 만든 단검이다. 거기에 미스릴 13%, 오리칼큠 0.6%가 첨가되었지. 별다른 마법적 효과는 없으나, 강철 갑옷이나 마력 보호막조차 관통할 정도로 예리하고, 웬만큼 험하게 다뤄도 부러지지 않는다. 적당히 염동력을 활용하면 꽤나 좋은 공격 수단이 되겠지."
베르덴이 단검을 건네받았다.
손가락으로 도신을 톡톡 두들겼다. 맑은 금속의 울림이 느껴졌다.
"계약서에 적힌 보수보다 가치가 훨씬 높은 것 같군요."
"당연하지. 몇 그램 안 되긴 하지만 무려 오리칼큠이 들어간 단검이니. 실종 사건의 범인을 찾으라고 했더니, 후작가를 들이받는 너에겐 적당한 보수일 터. 설마 마음에 안 드는 거냐?"
"아뇨, 좋습니다."
돈이 필요하긴 하나 단검이 더 좋다.
마침 다목적으로 사용하던 단검이 망가지기도 했으니. 베르덴은 흔쾌히 단검을 받았다.
"받았으면 그만 가라. 머리 좀 식히게."
* * *
베르덴은 코헨으로 돌아왔다.
별로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 삭막한 거리가 꽤나 오랜만인 듯 느껴졌다.
아직 날은 밝았다.
장기로 빌린, 꿀벌의 쉼터의 여관방에 들어가기 전에 페일에게 향했다.
베르덴과 마주한 페일.
예상대로 로든마이어 백작처럼, 아니 백작보다도 피폐한 얼굴이었다. 머리카락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죽어 가는 몰골.
그가 피로에 찌들어 보이는 눈가를 문질렀다.
"...이렇게 잠을 설친 건 근 10년 만에 처음이군요."
"로든마이어 백작도 그렇더군."
"...."
페일이 입을 다물었다.
95화 방주의 제안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가드란 후작가가 그런 범죄를 저질러 하루아침에 끝장나다니. 그리고 그걸 밝혀낸 장본인 중 하나가 애셔 님이라고. 그것도 제가 주선해 드린 의뢰 때문에.... 솔직히 공국을 떠야 하나 그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라비슈른 후작가가 직접 나서서 증거를 제시한 터라 공국 왕성에서 사건을 종결 처리 했으니.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잊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페일이 베르덴을 바라봤다.
"애셔 님,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후작가를 단신으로 쳐들어갔을 때... 자신이 있으셨던 겁니까? "
소울 트리를 토벌하여 로리엔을 구한 건 그래, 어떻게든 납득했다.
그런데 단신으로 후작가를 쳐들어가서 루펠을 죽이다니. 공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사를. 하물며 가드란 후작 또한 그에 필적하는 강자인데.
그런 물음에 베르덴이 답했다.
"그야 물론."
뭐, 사실을 말하자면 베르덴은 후작가가 아닌, 글러트니의 송곳니를 상대한 것이다.
그리고 원소 마법으로만 상대했다면 베르덴이 불리했을 것이다. 그 미친 듯한 재생력은 불사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성신 마법을 사용한다면 다르다. 전력을 낸다는 한에서, 베르덴은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내막을 모르긴 했으나, 페일은 더 묻지 않고 이내 수긍했다.
상대는 상식을 벗어난 마법사. 범인의 머리로는 억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곧바로 페일이 화제를 돌렸다.
"그렇군요. 아, 그런데 저희 정보상엔 어떤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 * *
베르덴이 페일을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보를 구입하거나 의뢰를 받거나 혹은 둘 다거나.
이번엔 둘 다였다.
"마법 물품 제작 장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베르덴에겐 오큘러스라는 새로운 스태프가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브를 쓰는 걸 억지로 미룰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고등 룬이라고 해도 오브와 감히 성능을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돈을 어느 정도 모아 놓았고, 앞으로의 수익도 생각하자면 지금 찾아 놓는 편이 옳았다.
"장인이라... 당연히 평범한 장인을 말하는 건 아니시겠죠?"
"적어도 그쪽 분야에선 리토 바르슬란 정도면 좋겠는데."
"음, 허들이 많이 높군요."
페일이 서류를 가져와 뒤적거렸다.
한동안 여러 파일을 읽어 본 페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애셔 님이 만족할 만한 장인은 공국 내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나은 사람을 꼽자면 휴양도시 브리엔테에 있는...."
"거기는 전에 가 봤다."
술주정뱅이 모르트. 실력도 좋고 가성비도 좋은 건 안다.
하지만 베르덴이 원하는 수준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을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페일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공국에는 없습니다. 적어도 해외로 나가지 않는 이상은."
"해외에는 있나?"
"물론입니다. 공국은 건국된 지 고작 3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요. 치안이 다른 나라만큼이나 나아진 지는 겨우 15년쯤 되었죠. 손재주가 좋은 장인이 자리를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입니다."
장인에겐 그에 걸맞은 장비들이 필요하다.
무턱대고 옮길 수 없는 만큼, 마땅한 자리를 잡아 눌러앉는 게 상식이었다.
"해외라면 어떤 나라를 말하는 거지?"
"벨디른 공화국도 공국보다 낫긴 하지만... 에스티리아 왕국에 '외수'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인이 머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수?
외팔이?
"한 손으로 마법 물품을 제작한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소문으로는 입과 발, 손 등 전신을 활용해 제작한다더군요. 그러나 그 완성품은 가히 예술에 가깝다고 합니다."
"왕국 어디에 있지?"
"위치는 모르나, 왕국 바깥으로 나갔다고는 못 들었습니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죠. 그건 왕국에 있는 정보상을 찾아 물어보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저쪽에도 정보상이 있나?"
"물론입니다. 애초에 이 그레이란 것도 왕국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아는 정보상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왕국이라.
당장 해외로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일단 돈을 더 벌고 가는 게 좋겠군.'
적어도 제작 비용을 충분히 지불할 수 있을 정도를.
베르덴이 의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처음으로 페일은 거절의 말을 꺼냈다.
"그... 현재 공국이 굉장히 혼란스럽니다. 그 이유는 애셔 님도 잘 아실 테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등급이 높은 의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귀족이든 상인이든 어떤 개인이든, 아주 조심스러워하고 있죠. 최소 몇 달은 지나야 정상화가 되지 않을까라고 보고 있습니다."
베르덴이 턱을 쓸었다.
거슬리는 글러트니에 집중했더니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의뢰를 수행하지 못한다라.
그럼 어디서 돈을 벌어야 하지?
"그럼 왕국으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사실 일거리만 따지면 공국보단 왕국이 훨씬 규모가 큽니다. 법도 굉장히 느슨하고요. 물론 나라 자체가 공국보다 위험하긴 하나 애셔 님에겐 문제가 없겠죠. 제 옛 후배가 정보상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자리를 잡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후배? 실력은 어떻지?'
"좋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저보다 낫기도 하니까요. 저처럼 그레이에서 의뢰도 겸하고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공국이 안정될 때까지 계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이참에 한가해진 만큼 공국 그레이 북부까지 활동 범위를 늘릴 생각입니다."
베르덴의 생각이 깊어졌다.
왕국으로 활동 영역을 바꿈으로써 생길 손익을 가늠했다.
그러다 불현듯 공왕이 언급했던 '경매'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분명 경매에서 아티팩트 '삼원색의 중심'을 구했다고 했었지.
"그러고 보니 왕국에는 경매장이라는 게 있다고 하던데."
"아, 암흑가에서 열리는 경매장 말이군요. 예, 있습니다. 불법이긴 한데 왕국의 명물이기도 하죠."
정보를 구입한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페일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는 향락의 도시라는 곳이 있습니다. 도시 몇 개에 필적하는 규모의 도시인데 그 지하에도 그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가 있죠."
"지하 도시?"
"왕국 암흑가의 중심지, '로아프라'. 왕국의 가장 깊은 어둠입니다. 거기에서는 일 년에 단 한 번, 겨울이 끝나 가는 봄에 경매장이 열리는데 검, 방어구, 창, 스태프, 희귀한 마법 물픔 등 갖가지 물건이 출품됩니다. 그리고 가끔씩 아티팩트나 그에 필적하는 물건이 나오기도 하고요. 당연히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비쌉니다."
"경매장에는 어떻게 가지?"
"로아프라에는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있지만, 경매에 참여하려면 초청권이 필요합니다. 한 해마다 VIP석이나 정해진 객석을 제외하고 80장이 풀리는데 왕국 그레이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주 운이 좋아야 구할 수 있죠. 가장 비쌀 때는 3억 엘크에 팔린 적도 있습니다."
초청권 하나에 그 정도라고?
지불할 수 있기야 하지만 과한 금액이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인맥이 확실합니다. 암흑가란 본디 힘과 돈 그리고 인맥이 전부니까요."
인맥이라.
베르덴에겐 그런 인맥이 없었다. 애초에 왕국에 들어가 본 적도 없으니.
그러자 페일이 말했다.
"애셔 님에게는 이미 인맥이 있습니다."
"...나에게? 누구?"
"파이테 남작입니다."
파이테 남작.
베르덴이 공국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귀족이었다.
* * *
정보값을 지불하고 여관으로 돌아온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현재 베르덴이 공국에서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레이 전체에 비상이 걸린 지금, 받을 의뢰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페일 기준으로 4, 5등급 의뢰일 터.
지금 상황에 그 정도의 보수는 성에 차지 않는다. 차라리 개인적인 훈련이나 하는 게 낫겠지.
'그런 점에선 왕국행이 메리트가 있긴 한데....'
사실 이미 마음은 기울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이 베르덴이 믿고 있는 성장의 기반이다. 새로움을 기피하고 익숙함에 이끌리는 건 앞길에 방해가 된다.
어디 동굴 속에 박혀 최소 반년 이상 훈련이라도 한다면 5위계에 다다를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걸론 부족하다.
다채로운 경험, 물리적인 보상 그리고 실질적인 강함.
지금처럼 위 세 가지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보다 효율적이고 확실하니까. 베르덴이 공국에서 지내 온 시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느긋해지기에는 너무 이르다. 아직 목적을 이루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나지막한 노크 소리.
염력으로 문을 열자, 익숙한 기척을 내비치는 사람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애셔 님."
리스너.
브리엔테에서 처음 봤을 때의 외형으로 베르덴을 찾아왔다.
* * *
베르덴이 마법진을 그려 방 전체를 마력으로 감쌌다.
소리가 나가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리스너와 베르덴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송곳니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후, 방주는 철저히 남은 글러트니를 찾아 척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극히 적은 생존자가 해외로 나갔을지도 모르나, 확실한 건 공국 내부에 글러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박사와 송곳니의 토벌.
아직 글러트니의 전력은 남아 있으나 막대한 성과였다.
"그리고 테온은 일단 임시로 방주에 들였습니다. 글러트니에서 암살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만큼 렌 발하그 장로님께서 직접 교육을 진행하고 있죠."
"처형할 줄 알았는데."
"하하, 저흰 그렇게 매정하지는 않습니다. 테온은 어릴 적 납치되어 강제적으로 글러트니의 일원이 되었고, 글러트니의 조각 또한 품지 않았기에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그게 아니었다면 애셔 님의 말대로 했겠죠."
그런가.
뭐,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글러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질문 하나 해도 되나?"
"어떤 겁니까?"
"26년 전의 전쟁. 글러트니가 에스리티아 왕국에 관여했었나?"
공왕이 말했었다.
국민들을 제물로 사용한 마법사들과 그들을 데려온 신임 재상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죽었다고. 그걸 듣는 순간 글러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추측은 정답이었다.
"맞습니다. 글러트니가 전쟁을 틈타 왕국에 스며들었죠. 왕가에게 허락을 받고, 인체 실험에 사용한 숫자만 만 단위였습니다. 결국 방주의 선장이 직접 나서서 재상을 암살하고 글러트니의 마법사와 그들의 실험체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죠. 그 결과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는 글러트니는 전멸했습니다."
"당시 리비안트 공작이 독립을 선언한 것도 의도한 건가?"
리스너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글러트니와 관련된 사안에는 개입하고 있으나, 글러트니가 남긴 영향마저 지워 없애는 건 방주의 역할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간 왕국 자체를 없애야 했으니까요. 공국의 독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글러트니가 숨어 있을지 몰라 감시자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2왕자와 라비슈른 후작가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두 분을 영입한 건 아닙니다. 타고난 집안과 어울리지 않게 권력에 초연하며 인간다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기에 받아들인 겁니다. 설사 글러트니가 없다고 할지라도, 시간상의 차이일 뿐 방주는 두 분을 영입했을 겁니다."
리스너가 베르덴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대답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
2왕자의 제안.
베르덴이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자, 리스너가 손을 들었다.
"애셔 님에게 대답을 듣기 전에, 방주에서 공식적으로 새로운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제안?"
"그렇습니다. 애셔 님께서 이뤄 온 과업과 그 가능성 등을 고려해, 방주의 선장들과 세 명의 장로 그리고 방주의 주인께서 회의를 진행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찬성은 과반을 넘었고, 이에 저는 대행자로서 방주의 제안을 애셔 님께 전달합니다."
리스너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중해졌다.
"혹시 마도왕에 대해 아십니까?"
마도왕,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
마법사로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
약 500년 전 존재했던 대마도사이자 사상 최초로 9위계 마법에 이른 초월자. 마법사라면 대부분 존경하는 위인이며 일부 극단적인 마법사들은 신으로 추앙하는 존재다.
"갑자기 마도왕은 왜...."
"저희는 마도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순간 베르덴이 한 발짝 다가갔다.
마도왕의 무덤이라고? 역사에 따르면 분명 어느 날 종적을 감췄다고 알려져 있는데 무덤?
마도왕이 죽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역사상 최강의 마도사인 마도왕이 자신의 무덤에 무엇을 남겼는지가 중요하다.
"방주에서도 '고대의 시련'이라고 특별히 분류한 장소입니다. 이미 몇 번이고 방주의 후보들이 공략하기 위해 나섰으나...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죠."
"...위치는?"
"그게 방주의 제안입니다."
리스너가 말했다.
"만약 이 고대의 시련을 극복하신다면, 방주에 들어오지 않으신다고 해도 예외적으로 애셔 님에게 시련을 부여해 드릴 겁니다. 그로 인한 보상 또한."
베르덴에게 유리하다.
당연히 대가 없이 주는 게 아닐 터.
"조건은?"
"그럴 경우 방주의 정보망과 방주의 일원들을 쓸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시련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이용할 수 없죠. 그 대신 애셔 님은 방주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단 두 가지를 제외하고."
"그게 뭐지?"
"하나는 방주의 회의에 한 번 참가할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인류가 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 그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르덴은 전무후무한 마법의 종주가 될지도 모른다.
규율 때문에 인류를 이끌 혹은 구할 가능성이 높은 존재를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방주의 판단이었다.
베르덴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리스너를 보며 말했다.
"받아들이지."
이것마저 거절할 생각은 없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퍼 주고 싶다고 하는데 싫다고 하는 건 멍청한 판단이었다.
"그래서 위치는?"
리스너가 손바닥만 한 보석을 꺼냈다.
타원형의 푸른 사파이어. 그리고 황동색의 금속이 그 중심을 고리처럼 감싸고 있었다.
"위치는 에스리티아 왕국, 그 어딘가. 이 유물을 해석하시면 그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가 제공해 드릴 수 있는 모든 정보입니다. 그리고 기한은 1년하고도 63일 뒤. 다음 방주의 회의가 열릴 때까지입니다.
리스너가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베르덴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무디 무사히 시련을 극복하시길."
고개를 숙여 작별 인사를 건넨 리스너가 바깥으로 나섰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베르덴이 작게 웃었다.
'어째서 마도왕의 무덤이 에스리티아 왕국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왕국에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96화 왕국행 (1)
파이테 남작은 공국이 독립하는 과정에서 얻은 공로로 귀족이 된 케이스다.
본래 남작이란 작위는 세습이 불가능하나, 파이테 남작은 다른 남작과 비교해 영지를 잘 다스렸기에 공왕에세 세습을 허가받았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파이테 영지가 워낙 낙후된 곳에 있어 아무도 영주직을 맡을 생각이 없는 게 컸다. 출세를 바라는 귀족들에겐 유배지로 여겨졌으니.
'운이 좋군.'
파이테 남작은 소소하게 살아가는 걸 좋아했다.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따로 없는데 출세는 무슨 출세. 남작은 자신의 분수를 진즉에 깨달은 지 오래였다.
작은 영지를 다스리며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이른 아침.
모닝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파이테 남작. 그가 신문을 주욱 읽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드란 후작가가 멸문했다고?"
내용엔 그 이유가 게재되어 있었다.
다비르크 백작 살해나 마을 사람들을 납치한 인신 매매 등 설령 왕족이라고 해도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입에 담기도 힘든 무거운 범죄들이었다.
"공국의 기둥이 어째서 이런 짓을?"
당연한 의문이었다. 부족한 게 없는 가문에서 도대체 왜.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이미 라비슈른 후작에게 처형당했으며 그 죄조차 명백하게 드러나 있으니.
그가 가드란 후작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남작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애초에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정도로 머나먼 존재라 아는 것도 없었지만.
그러다 신문에서 익숙한 이름을 봤다.
애셔.
수개월 전, 남작의 영지를 구해 준 마법사였다.
"허, 애셔가 죄를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해낸 모양인데.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군."
파이테 남작은 몇 번이나 애셔를 신문에서 접했다.
비르온 영지에서 강력한 언데드를 토벌한 것이나, 특수 개체에 버금가는 이형종을 토벌해 도시를 구한 것 등 말이다.
파이테 남작은 내심 뿌듯했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제대로 된 보답을 해 준 사실이 말이다.
신문을 다 읽은 남작은 평소처럼 산책을 나섰다.
나이가 40 줄이 넘은 지 꽤 되었으니 체력 관리는 필수였다. 옷을 단단히 껴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눈은 오지 않았으나 추위가 제법 매섭다.
남작은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작은 영지를 바라보며 성벽 위를 거닐었다.
"...응?"
저 멀리 누군가가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손님이 찾아온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거리가 더 가까워지자 그제서야 불청객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애셔?"
봄의 인연이 겨울에 다시 찾아왔다.
* * *
"여기, 선물입니다."
무려 2천만 엘크짜리 최고급 레드와인.
전에 남작의 연회에서 먹었던 와인과 비슷한 종류의 것으로 구했다. 도수가 높지 않고, 새콤하면서 달달한.
당연하게도 금액의 자릿수가 다른 만큼 향기와 맛이 차원이 다를 것이다.
파이테 남작이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어이쿠, 뭐 이런 걸 다.... 그럼 마개부터 따겠네. 몸도 데울 겸 같이 마시도록 하지."
"그건 놔두시죠. 같이 마실 건 따로 준비해 놨습니다."
베르덴이 공간가방에서 다른 와인을 꺼냈다.
이것 또한 수백만 엘크는 하는 고급 화이트와인이었다. 입고 있는 장비부터 시작해 공간가방에다가 값비싼 와인까지 선물로 줄 정도라니.
전에 봤을 때와는 그야말로 딴판이었다.
"허허, 거참 엄청나게 출세했군."
파이테 남작이 슬쩍 선물받은 와인을 하인에게 넘겼다. 꽁꽁 잘 보관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베르덴과 남작은 서로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고 그 맛을 난롯불 앞에서 천천히 음미했다. 안주로는 마침 저번 주에 구입한 치즈를 준비했다.
몸에 취기가 살짝 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남작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이렇게 비싼 선물까지 준비하고."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음, 자네와 같은 대단한 마법사가 부탁이라니. 뭔가 무섭군."
"어려운 건 아닙니다. 남작님의 조카를 소개받고 싶습니다."
"조카? 조카라면 메딘?"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이 잠시 턱을 쓸며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혹시 에스리티아 왕국에 갈 생각인가?"
"맞습니다."
파이테 남작의 조카 '메딘'은 에스티리아 왕국에 있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은 '푸른 구름'이라는 이동 상단의 호위. 상단 전체가 왕국 전역을 주유하는데, 상단주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메딘은 높은 봉급을 받으며 간부로서 자리 잡고 있다고 페일에게 들었다.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나?"
"경매장의 초청권 때문입니다."
"아, 경매장. 그럼 이해가 되는군. 확실히 잘나가는 상단에는 경매장의 초청권이 우선적으로 배부되니. 남는 건 시중에 풀리기도 하고. 그래, 메딘 정도면 구할 수 있겠지."
남작도 왕국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어렵지 않네.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바로 소개장을 써 주겠네. 그런데... 괜찮겠나?"
"어떤 게 말입니까?"
"자네도 아는지는 모르지만 왕국은 공국과 다르네. 솔직히 말해 꽤나 무서운 나라지. 나도 벌써 이십 년이 넘도록 가 본 적은 없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은 하나하나 결코 좋지 않네. 물론 자네가 엄청난 마법사임은 알고 있지만... 왕국이 가지고 있는 악의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네."
이미 알고 있다.
페일, 방주 그리고 공왕 등에게 왕국이 얼마나 어두운 나라인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베르덴이 주저할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저도 만만하진 않습니다."
그런 대답에 남작이 웃음을 떠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자네는 결코 만만할 수가 없지.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그래도... 노파심에 한 번 더 말하겠네."
남작이 진지하게 말했다.
"왕국의 어둠은 깊네."
그러니 결코 집어삼켜지지는 마시게.
* * *
소개장을 받은 베르덴은 왕국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먼저 은행에서 돈을 전부 인출했다. 공국에는 마그누스 은행이 있지만 왕국에는 다이나 은행이 있다.
서로 제휴가 되지 않아 이렇게 현금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10만 엘크짜리 지폐가 100개 뭉친 현금 다발 약 백 뭉치.
자루를 몇 개 산 다음 꼼꼼히 공간가방에 차곡차곡 쌓았다. 거기다 보존 식품과 이런저런 물건을 챙기다 보니 공간가방을 거의 꽉 채웠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만약 그랬다면 주저앉았겠지.
그 후, 베르덴은 페일을 통해 '국제 마차-이카로스(Icarus)'를 고용했다.
국경을 넘어서까지 움직이는 게 국제적으로 허가된 마차 회사. 돈도 돈이지만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이용할 수 없는 서비스였다.
"에스티리아 왕국까지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정중한 운전사에게 대접을 받으며 마차 안에 들어섰다.
고정된 책상과 소파. 내부는 오직 일인용으로 개조되어 있었고 겨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스했다.
베르덴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바깥으로 보이는 공국의 풍경. 한동안 여기와는 작별이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고객님."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출발하며 풍경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렇게 베르덴은 에스리티아 왕국으로 향했다.
* * *
"다섯 번째 송곳니가 죽었다."
서늘한 음성이 공간을 휘감았다.
잠시 정적이 이어진 후, 이번엔 노인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렸다.
"루펠은 붉은 조각의 실험과 박사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을 맡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죽었다는 건...."
"실패한 걸지도 모르겠지요."
"쯧. 한심하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와 오만한 목소리가 뒤섞였다.
혼잡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건 서늘한 목소리였다.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방주에게 당했을 뿐."
"그렇다는 건 박사 또한...?"
"정황상 둘 다 죽었다고 봐야겠지."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다.
분명 글러트니의 부활과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원대한 계획이 머지않았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서늘한 목소리, 글러트니의 첫 번째 송곳니가 말했다.
"신인류의 탄생은 지금으로선 좌절되었다. 하지만 나는 붉은 조각으로 글러트니의 장기가 가진 능력을 깨울 수 있다는 건 인지했다. 즉, 글러트니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소리."
실험 자료는 날아갔지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붉은 조각의 제조 방법은 남아 있었으니까. 필요한 건 재료뿐.
"재료라. 그렇다면 에스티리아 왕국이 어떻소이까? 수십 년 전 방주에게 토벌당하긴 했으나, 지금으로선 적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아니. 그곳은 이미 다른 어둠으로 물들었다. 섣불리 나섰다간 재료를 구하긴커녕 오히려 피해를 입을 테지."
"그럼 어디로 갈 것인가?"
"서쪽."
첫 번째 송곳니가 이빨을 드러냈다.
"블랙 아워와 보헤미른 마탑이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간다."
* * *
어렸을 때부터 베르덴은 특이했다.
평소에는 다른 아이처럼 천진난만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려고 했다. 고집이 어찌나 센지 고아원의 원장님이 말려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로벨린은 그런 베르덴을 봐 왔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나중가서는 그냥 일상이 되었다. 하루종일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덴이 마법에 관심을 가졌다.
아마 전직 종군 마법사라고 하던 이웃 할아버지가 손에서 피워 낸 불꽃을 본 이후로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떼를 써도 베르덴이 마법을 가르침받는 일은 없었다.
보통 아이라면 거기서 포기했겠지.
하지만 베르덴은 달랐다. 기어코 독단으로 마탑에 지원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로벨린은 상상했다.
베르덴이 사라진 고아원을, 그가 없는 앞으로의 허전한 일상을.
고민은 짧았다.
"그럼 나도 같이 갈래."
그렇게 같이 보헤미른 마탑으로 향했다.
얼마 안 가 강제적으로 떨어져야 했지만, 밖에서 마법 교육을 받고 마탑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베르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계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도중에 이론을 도둑질했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들리긴 했으나 천만에.
로벨린이 아는 베르덴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변함없이 그를 믿었다.
그렇기에 후회했다.
과거의 로벨린이 현재의 그녀에게 말한다.
'그날 억지라라도 마법 도시에 데려갔다면 베르덴은 죽지 않았을 텐데.'
암전하는 꿈속.
로벨린은 마음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르륵. 로벨린이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니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포션을 마시고 루아스교의 성직자에게 치료를 받았음에도 이 정도라니.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
탁. 탁.
목발을 써서 복도로 나섰다. 일정 거리마다 마법 물품으로 빛을 밝히고 있었으나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마탑의 동력원을 대체할 것을 찾지 못한 터라, 마탑의 넓은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복도를 지나자 곳곳에서 로벨린을 보며 수근거렸다.
"쟤지, 얼마 전에 4위계에 오른 애가? 근데 왜 저 꼴이야?"
"며칠 전에 블랙 아워의 마법사와 마법전을 벌였다던데."
"그것도 4위계 상위에 이른 마법사였다더군. 대체 어떻게 이제 막 4위계에 오른 자가 이길 수 있었던 거지?"
"특이 형질 때문이겠지. 알잖아? 로벨린의 화염이 얼마나 강력한지."
"화염 마법밖에 쓰지 못하지만... 확실히 동급의 마법사는 상대도 안 되긴 하지. 오죽하면 마탑주께서 토벌대에 들이시고 아끼실 정도니."
"저번에 싸우는 걸 봤는데 아예 형체도 남김없이 태워 버리던데. 그것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두려움 등.
갖가지 시선이 로벨린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런 눈길들을 무시한 채 복도를 지나치고는 임시 마력 구동 엘레베이터에 탑승했다.
마탑의 상층에 올라 마탑주와 대면했다.
마탑주, 발로크 베시아스가 물었다.
"듣던 것보다 멀쩡하구나. 그래, 상대는 어땠나?"
"문제없었어요."
"크흐흐, 이제 갓 4위계에 올라 놓고, 4위계 상위, 그것도 전격 마법사를 상대로 문제없었다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마법사는 별로 없을 거다."
로벨린은 가만히 며칠 전을 떠올렸다.
고위 속성의 전격을 다루는 4위계 상위 마법사. 속성으로 보나 위계로 보나 로벨린이 우세한 건 하나도 없었다.
하마터면 <낙뢰>에 맞고 즉사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피해 냈고, 마법전을 길게 끌었다.
전격 마법사의 약점은 지속성.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다루나 그만큼 마력 소비도 엄청나다. 로벨린은 전격에 노출되어 전신에 화상을 입었으나 죽지 않았다.
결국 상대는 지쳤고 그 틈을 노려 불로 태워 버렸다.
승자는 로벨린이었다.
"아주 잘했다, 로벨린. 지금 이 상황에 나를 흡족하게 하는 건 너와 내 제자들뿐이구나."
"약속은요?"
"약속이라. 그래, 물론 지켜야지."
발로크 베시아스가 서랍에서 마핵을 꺼냈다.
"너는 블랙 아워의 지부를 토벌하면서 위계 이상의 공적을 세웠다. 화염 마법에 특화된 특이 형질 덕분이겠지. 하지만 아직 미숙하다. 너는 배울 게 많고 성장할 길이 멀다. 지금 같은 마탑의 위기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건 손해다."
그러니.
"내가 도와주마."
로벨린이 마핵을 받았다.
잠시 마핵을 바라보던 그녀가 주먹을 쥐고는 마탑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발로크 베시아스에게 마핵은 투자를 의미한다.
즉, 지금 이 순간부터 로벨린은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지원을 받을 것이다. 마탑주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마탑의 주인이 될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발로크 베시아스가 웃었다.
"나의 네 번째 제자가 된 걸 환영한다, 로벨린."
로벨린은 기쁘지 않았다.
이건 그저 수단이다. 강해지기 위한 수단.
목적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베르덴.'
그를 죽인 블랙 아워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 그때까지 로벨린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97화 왕국행 (2)
에스티리아 왕국과 리비안트 공화국의 국경.
그 사이에는 두 개의 장벽이 양쪽으로 세워져 있었다.
마탑에 직접 의뢰하여 마법으로 만들어 낸 벽으로, 각각 공국과 왕국의 것이었다.
일반적인 국경이라면 하나만 있어야 정상이나 둘은 전쟁으로 인해 갈라진 나라다. 작은 마찰이 큰 불로 번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장벽 사이에는 검문소가 있다.
공국과 왕국 사이에 오가는 모든 물류는 물론이고 여행객과 같은 통행자들도 관리 및 감독한다. 규모가 꽤 크기에 여기에 눌러앉는 사람도 많았다.
음식점이라도 차린다면 어지간히 맛이 없지 않는 이상 망하진 않을 테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검문소는 하나의 도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양국 간의 중립성을 상징하는 장소이기에 이곳을 담당하는 자들은 민간에서 나온 터라 이렇다 할 충돌은 없었다.
공국과 왕국은 서로 멀리서 감시하기만 할 뿐.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추위에 떨었다.
"아흐, 이러다 추워 뒈지겠네. 야, 신참! 근무 교대 한 지 얼마나 지났어?"
"예! 8분 지났습니다!"
"고작?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개뿔!"
"악!"
정강이를 차인 신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꼬우면 그만두라지. 날씨가 혹독하긴 하나 경비 일로 이만큼 봉급을 많이 주는 데도 드물었다.
그래서인지 워낙 고여 버려서 내리갈굼이 심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눈보라가 거세졌다.
선임 병사는 모포를 두르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신참은 선임 병사를 흘기며 성벽 아래로 침을 뱉었다.
'얼어 뒈졌으면.'
그러던 그때, 눈보라 속에서 금색과 흑색으로 치장된 호화로운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거친 말밥굽 소리에 선임 병사가 일어났다.
"저건... 이카로스 마차잖아?"
"그게 뭡니까?"
"검문소 경비라는 놈이 그것도 몰라? 하여튼... 저건 국제 마차다. 탑승자의 입국 수속부터 시작해서 전부 전문적으로 처리해 주는 마차. 엄청 비싼데다가 아무나 고용할 수 없는 건데...."
귀족인가? 아니면 돈 많은 상회의 간부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트집 잡힐 일이 없게 하는 게 최우선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선임 병사가 경비 생활 7년간 터득한 단 하나의 노하우.
"당장 가서 경비대장님 모셔와."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책임자에게 떠넘기는 것.
이곳은 검문소였다.
* * *
"고객님의 입국 처리는 저희가 완벽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니 오늘 하루는 검문소에서 지내셔야 할 겁니다. 여관은 이미 준비해 뒀으니 잠자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이카루스 마차의 운전기사가 경비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검문소장에게 향했다.
원래는 호위 서비스도 있으나, 베르덴은 거절했다. 대신 그만큼 비용의 일부를 깎았다.
베르덴은 눈이 쌓인 작은 도시를 둘러봤다.
'여기가 검문소군.'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
상단이나 여행객 또는 일자리를 찾는 용병과 모험가들이 가득했다. 검문소에도 의뢰는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덴은 천천히 도시를 거닐며 가장 큰 주점을 찾았다.
'이곳에 페일의 정보원이 있다고 했었지.'
에스리티아 왕국의 최신 정보를 알 수 있는 장소.
안으로 들어가 바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여성 바텐더가 베르덴에게 다가왔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베이커 3년산 레드와인하고 훈제 오리고기 하나."
그렇게 말하고 책상을 두 번 두들겼다.
여성 바텐더의 눈이 호선을 그리더니, 책상을 한 번 두들겼다.
정답이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가격이 싼 만큼 딱히 흥미가 돋는 맛은 아니었다.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있자 술에 취한 주정뱅이 하나가 비틀비틀 다가오더니 베르덴의 옆에 앉았다.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애셔 님. 어떤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흐트러짐 하나 없는 목소리.
주정뱅이 연기 하나는 일품이었다.
"왕국에 대한 최신 정보."
"최신 정보라. 다행히 도움드릴 게 많을 것 같군요."
주정뱅이가 턱짓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공국과 왕국에서 온 공고문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그중 '비행 금지령'이라고 적힌 왕국의 공고문이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달 전쯤, 어떤 마법사가 백작의 자제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작이 어떻게든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더군요."
귀족 자제에게 중상을 입히다니....
그런데 그렇다고 왕국 전역에 비행 금지령까지 내린다고?
"그게 에스티리아 왕국입니다. 귀족의 권위는 공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나죠. 명분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움직이는 게 대부분인 귀족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은 더욱."
"상황이라면?"
"현재 차기 왕위를 두고 다투느라 전국이 어수선한 상태입니다."
왕은 늙었다.
그렇기에 왕자들은 자신의 파벌을 형성하여 암중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왕이 왕좌에서 내려올 때, 누가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왕이 결정된다.
"1왕자, 2왕자 그리고 3왕자는 몰래 국고를 털어서라도 파벌을 유지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1왕자가 가장 강합니다. 그 거대한 암흑가를 등에 업었으니. 그리고 파벌 싸움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중립자들은 1왕녀에게 몰렸습니다."
"왕녀는 왕위 다툼에서 배제된 건가?"
"여성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애초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왕녀는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요."
왕녀는 현재 백치에 가까운 상태다.
어릴 적, 폭발 사고로 인해 그 후유증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고, 평생을 휠체어 위에서 그저 죽은 눈으로 살아왔다.
남은 건 극도의 자기방어기제뿐.
"그래서 세간에선 인형(人形) 왕녀라고도 합니다."
"치료는?"
"아시다시피 뇌를 다치면 신성력으로도 정상적인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교황이나 성녀급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리고 설령 치료가 가능하다 해도 왕자들이 반대할 겁니다. 왕녀는 한때 천재라 불릴 정도로 머리가 영특했으니, 아무리 가능성이 적어도 왕자들로선 경쟁자를 늘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왕국은 정치적인 내전을 겪고 있다.
기득권 계층이 저마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민생에 전혀 관심이 없다. 시민들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버티고 있었다.
"보통은 살점이 썩으면 도려내기 마련입니다. 아파도 그게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왕국은 다릅니다. 살점이 썩고 고름이 차올라도 신경 쓰지 않죠, 그게 자기한테 피해를 주기 전까지는. 그래서 왕국은 옛적부터 안에서 썩어 버렸습니다. 그게 제가 지금까지 봐 온 에스티리아 왕국입니다."
주정뱅이의 목소리엔 혐오감이 깃들어 있었다.
베르덴은 다른 정보를 물었다.
직전의 정보처럼 큰 건 아니었으나, 에스티리아 왕국의 정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값을 지불한 베르덴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 * *
다음 날, 베르덴은 순조롭게 검문소를 떠났다.
확실히 이름 높은 국제 마차답게 가만히 있어도 복잡한 입국 절차들을 대신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왕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분증까지.
'돈값 제대로 하는군.'
베르덴이 마차 바깥을 바라봤다.
이곳은 에스티리아 왕국령.
눈으로 뒤덮인 하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런지 공국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르덴이 페일에게서 얻은 지도를 꺼냈다.
그중 베르덴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있는 도시에 시선을 향했다.
도시 아세른(Asern).
이곳은 페일이 소개장을 써 준 그레이의 정보상 '페르네'가 활동하는 장소였다.
'치안이 상당히 안 좋다고 그랬었지.'
주정뱅이에게 들은 정보로는 그러했다.
시장 겸 영주 노릇을 하는 백작부터 시작해서 빈민까지 멀쩡한 부분이 없다고. 부정부패, 그것이 에스티리아 왕국.
그렇기에 베르덴은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의뢰의 규모가 클지.
베르덴의 발판이 되어 줄 강자가 있을지 말이다.
'공국보다 나았으면 좋겠는데.'
물론 닥치는 대로 들이받을 생각은 아니다.
페일에게서 의뢰를 받았듯이, 자신만의 기준을 지키며 움직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베르덴의 성장을 위해서.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고객님, 아세른에 도착했습니다."
베르덴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거대한 마을이 원형으로 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오래된 건축 형태군. 안전 때문에 이런 형태는 금지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미 지어진 건 어쩔 수 없기에, 그럴 경우 마을을 지키는 성벽은 짓는 게 의무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런 벽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최외곽에서는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흘끗 거리를 바라보니 사람들은 익숙한 듯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아세른의 관문을 통과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린 베르덴이 도시 내부를 둘러봤다.
생각보다 번잡하긴 하나... 공국과는 달리 뭔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졌다.
"이카로스 마차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시길."
마차가 떠나가고 베르덴은 혼자가 되었다.
점심이 지나고 시간이 꽤 흘렀으나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딱히 식사를 할 생각도 없었고.
'먼저 다이나 은행부터 방문해야겠군.'
계좌를 개설하고 돈을 예금한다.
그다음으로 정보상 페르네를 만나면 되겠지. 순서를 정한 베르덴이 발을 옮겼다.
* * *
연보랏빛의 머리칼을 가진 페르네.
그녀는 왕국 그레이의 유능한 정보상이였으며 터줏대감이기도 했다.
한때는.
"꺄아아아아악!"
페르네는 미치기 직전이었다. 아니, 벌써 반쯤은 미쳐 있었다.
페르네는 아껴 두고 아껴 두었던 보드카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꿀꺽, 꿀꺽!
보드카 한 병을 단번에 비웠다.
그런데도 현실은 여전했다. 비틀거리다 이내 바닥에 드러눕고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나... 어떻게 하지?"
페르네는 정보상으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다. 실제로 바깥에서의 평가도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저 힘없고 빚더미에 앉은 여자였다. 왜 이렇게 됐을까. 그레이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다만 억울한 건 단순히 정보상으로서의 실력으로 밀린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개새끼들...!"
귀족과 부호를 후원자로 둔 신생 정보상들.
놈들은 너무 강했다. 삽시간에 그레이를 장악했고 온갖 고객들을 빼앗아 갔다. 의뢰를 주선해 주는 일도 마찬가지.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붓는데 그녀 혼자로선 저항할 수가 없었다.
여러 정보상을 흡수해 '조합'을 만들기까지 하니 정보의 양과 질로 우위을 점하기도 어려웠고.
페르네도 조합에 가입하라고 제의가 들어오긴 했었다.
하지만 거절했다. 정보상으로서의 오기였다. 어쩌면 자부심일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무도 정보를 사러 오지 않는다.
누구도 의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무리하게 돈까지 빌려 연줄을 유지했으나 기어코 끊어졌다.
이 바닥이 그러했다. 의리 따위는 없고 오로지 돈만을, 자신만의 이득만을 바라보는 괴물들.
'나도 공국으로 갈걸....'
페르네가 훌쩍거리며 뒹굴거렸다.
그때, 선배였던 페일을 따라갔더라면 좀 달랐을까.
갑자기 왕국을 떠난다고 하길래 내심 멍청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건 자신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페일은 공국 그레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데, 그에 비해 자신은 경쟁에서 밀려난 떨거지였다.
'아니, 당장은 후회할 때가 아니야.'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악명 높은 고리대급업자에게 수천 만 엘크나 빌렸는데 이자조차 제대로 갚지 못하는 상황이다.
벌써 1개월이 밀렸다.
2개월이 지나면 계약대로 강제 추심이 가능하다.
페르네에게 남은 건 몸뚱이뿐이다.
즉, 불법 노예가 되는 것이다. 여자로서 어떤 일을 당할지는 가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도망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접었다.
자신이 이 도시를 벗어나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분명 얼마 안 가 잡힐 게 분명하다. 그리고 더 끔찍한 일을 당하겠지.
지금이라도 죽어야 하나?
그렇다고 죽긴 싫었다.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너무 무섭기도 하고....
방법이 없다.
이것도 저것도 싫다.
페르네는 궁지에 몰렸다.
누군가 동아줄이라도 내려 주지 않으면 그대로 갇혀 죽을 것이다.
"아이고, 내 신세야...."
페르네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러던 그때, 문이 열리며 햇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돌린 페르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