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라온은 손목에 걸린 푸른색 꽃팔찌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게 이렇게 되나?'
매일 같이 라스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기 때문에 냉기와 정신 저항은 마스터급 이상이다. 조금 더 빨리 왔다면 모르겠지만, 글래시아를 익힌 지금은 냉기고 저주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전부 네 덕분이네. 고맙다.'
라온은 팔찌에서 살짝 튀어나온 라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끄응, 본왕은 이럴 생각이 없었느니라.
라스가 가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래도 너 때문에 저들의 공격이 의미 없어진 건 사실이니까.
-우으윽! 건방진 놈!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라스가 냉기로 만든 팔을 바들바들 떨었다. 녀석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거라고 중얼거리고 팔찌로 들어갔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줄곧 낮은 음성을 유지하던 청주귀가 악을 질렀다.
"어린놈의 정신력이 어떻게 이런…."
빙아귀의 눈에도 당황이 비쳤다. 생선 가시처럼 길쭉한 눈동자가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정찰병들의 호위."
라온은 덤덤한 눈빛으로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정찰병들을 가리켰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말이 되든 안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희와 난 적인데."
검을 휘돌렸다. 만화공의 기운이 깃든 붉은 칼날이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덤벼."
"크으윽!"
"망할 놈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빙아귀와 청주귀의 기운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전력을 끌어 올린 듯 공간을 비트는 투기가 하늘에 닿을 것처럼 치솟았다.
"라시크마. 비라튼! 주!"
청주귀가 허공에서 지팡이를 휘젓자, 눈보라가 거세졌다.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덩이에 시야가 모조리 막혔다. 이전보다 더 강한 저주와 냉기가 담긴 폭풍이었다.
쿠오오오!
빙아귀가 양팔을 펼쳤다. 거친 투기가 놈의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수백 개의 가시를 만들어냈다.
"크아아아아!"
빙아귀가 포효를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방어하려는 순간 놈이 사라졌다. 폭풍에 숨어 기습하려는 것 같았다.
라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감각의 바다를 열었다. 뒤쪽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바닥에서 솟구치는 빙아귀의 기습이었다. 눈을 뜨고, 광아검의 흐름대로 검을 그었다.
쩌어어엉!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충격음이 울리고 라온의 검이 처음으로 뒤로 밀려났다.
"감각 하나는 더럽게 좋은 놈이군. 하지만 아까와는 다를 거다! 이 눈 폭풍은 나의 공간이니까!"
그 말대로다. 검격의 위력과 속도가 격이 달라졌다. 숨겨둔 힘을 개방한 것만이 아니라, 이 눈보라가 놈을 강화하는 것 같았다.
"뒈져라!"
빙아귀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내지른다. 팔뚝과 정강이에 달린 가시와 칼날이 회전하며 투기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콰아아아!
라온이 만화공을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시뻘건 불꽃에 휘감긴 칼날을 내리쳤다. 투기와 오러가 격돌하며 만들어진 막대한 파동이 바닥에 가득 깔린 눈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하지만 눈앞에 있어야 할 빙아귀는 보이지 않았다. 눈 폭풍 속에 숨어서 다시 기습을 준비하는 거다. 상어가 먹잇감을 노리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헛짓을 하는군.'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글래시아를 통해 빙아귀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치이잉!
빙아귀가 좌측에서 다가와 심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검면을 돌려 벼락처럼 떨어지는 투기를 흘려냈다.
콰아아아!
물러서는 빙아귀를 쫓으려 할 때 눈 폭풍이 다시 거세지며, 가시처럼 날카롭게 갈린 얼음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청주귀와 빙아귀는 각자 장기를 살린 합공으로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라온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얼음 조각을 서리의 코트로 막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네놈은 이제 내 얼굴도 보지 못한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눈 속에 파묻혀 죽게 될 거다!"
눈 폭풍 속에서 빙아귀의 목소리가 들린다.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누구 앞에서 주름을 잡는 건지."
라온의 왼발이 의념을 담고 움직였다. 공간을 격하는 태화보. 순식간에 눈 폭풍을 가로질러 우측의 끝에서 나타났다.
-뭘 하려는 것이냐.
'저놈들이 하려는 거 그리고…'
꽃팔찌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네게 배운 거.'
-뭐?
되묻는 라스의 말을 무시하고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감각의 바다도, 글렌의 코트도 아니다. 서리의 은신. 암살자가 어둠을 두르듯 끝없이 쏟아지는 눈과 냉기를 몸에 둘렀다. 존재감과 기척을 죽이며 나 자신이 눈이 되는 듯한 이미지를 그렸다.
암살자로 살며 평생을 해온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빙아귀가 이쪽의 위치를 눈치채기 전에 이미 자신의 존재감은 눈과 같을 정도로 가라앉았다.
"뭐야! 어디 갔어! 청주귀! 놈이 보이지 않는다!"
뒤를 쫓아온 빙아귀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근처에 있다! 네놈을 노리고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움직여!"
눈 폭풍 밖에서 들리는 청주귀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놈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젠장! 저 자식 주절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어!"
빙아귀가 이를 악물고 다시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라온은 빙아귀의 뒤에 이르러 있었다. 열기를 머금은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살의를 두른 검이 빙아귀의 목에 닿는 찰나 놈이 몸을 틀었다. 극한에 이른 반응속도. 괜히 에덴의 투구를 받은 괴인이 아니었다.
푸카아아악!
하지만 검은 더 빨랐다. 목 대신 빙아귀의 상반신이 사선으로 갈라지고, 살벌한 양의 핏물이 치솟았다.
"끄아아아악!"
빙아귀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비명을 터트렸다. 마무리를 지으려고 할 때 놈의 아가리가 빛살처럼 튀어나와 왼팔을 물어뜯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쪽을 노리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끄르르륵! 팔을 통째로 뜯어주마!"
"팔? 무슨 팔?"
"당연히 네놈의…억!"
빙아귀가 물어뜯던 라온의 팔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네놈이 물고 있던 건 내 팔이 아니라, 그 위를 덮은 얼음이다."
빙아귀가 팔을 물어뜯으려는 찰나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팔에 두꺼운 얼음의 방패를 만들었다. 놈이 물은 건 그 방패였다.
"잘 물고 있으라고."
"흐읍!"
빙아귀가 팔을 놓고 물러서려고 할 때 라온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르고, 예리한 검격. 다리를 움직이려던 빙아귀의 몸이 우뚝 멈췄다.
"끄윽, 네, 네놈은 정말…."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빙아귀의 목이 갈라졌다.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진 상어 투구가 누런 눈에 파묻혔다.
"쯧, 힘은 더럽게 세네."
라온이 흐느적거리는 왼팔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턱은 글래시아로 만든 냉기의 방패를 뚫고 뼈를 깨부쉈다. 무시무시한 치악력이었다.
"팔이 부러졌어도 끝은 내야지."
눈 폭풍 너머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는 청주귀를 노리고 땅을 박찼다.
"허억!"
글래시아로 눈보라를 뚫어내자마자 청주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계속 쏟아내던 얼음 조각이 더 거세게 몰아쳤다.
"꺼져라!"
주술을 사용하는 건지 도망치는 속도가 무인 이상으로 쾌속했다. 하지만 태화보를 사용하는 라온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나를 지켜라!"
잡힌다는 것을 깨달은 청주귀가 악을 지르며 지팡이를 부러뜨렸다.
"크아아아아!"
회색 연기에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나며 만신창이가 된 도리안과 에드퀼이 튕겨 나왔다. 아이스 트롤 로드가 연기를 뚫고 나와 라온을 향해 돌진해왔다.
"크아아아아!"
"크라라라!"
"캬아아악!"
성벽을 공격하던 몬스터들도 동시에 뒤를 돌아 라온에게 달려온다. 세뇌시킨 몬스터들을 모조리 불러 모으는 주술 같았다.
"아직이다! 난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이어서 허공에 거대한 눈의 검과 창을 만들어 쏘아낸다. 어떻게든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크라아아!"
어느새 쫓아온 아이스 트롤 로드가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내리쳐왔다.
터엉!
라온이 가람보법을 밟아 청주귀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은빛 곡선 위로 피어나는 열 개의 불꽃이 하나의 톱니처럼 회전한다.
촤아아악!
설원의 지평선을 따라 그어지는 붉은 궤적이 얼음의 무구를 가르고 나아가 청주귀의 가면을 쪼갰다.
"흐어억,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청주귀의 주름진 얼굴 위로 빨간 선이 그어졌다. 놈이 얼굴 중앙에서 흐르는 핏물을 잡으려 들었지만 헛수고였다.
"네, 네놈을 그때 죽였어야 했는…."
그 말을 남기고 청주귀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귀기 어린 눈빛이 촛불처럼 훅 꺼졌다.
후우욱!
끝없이 쏟아지던 눈보라가 멈추고 광기를 흘리던 몬스터들이 모조리 멈춰 섰다.
"크륵…."
도끼를 내리치려던 아이스 트롤 로드도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라온이 적의 수장을 물리쳤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
성벽 위에서 열기 띈 테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군기가 끓어오른 병사들이 내지른 검과 창이 당황한 몬스터들을 찢어발겼다.
다만 라온은 바로 앞에 있는 아이스 트롤 로드를 공격하지 않았다.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떨리는 놈의 눈. 그 어지러움이 전생의 자신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크르르."
아이스 트롤 로드의 눈동자에서 광기가 사라진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똑똑한 놈이다. 그 눈빛 역시 불의 고리를 익혀 세뇌를 벗어났던 전생의 자신과 같았다.
"크어어어어어!"
아이스 트롤 로드가 포효를 터트리며 뒤로 물러섰다. 싸움이 아니라, 죽어가는 몬스터들을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의미의 신호였다.
'제대로 된 왕이로군.'
라온은 몬스터들을 부르는 아이스 트롤 로드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살기 위해서 몬스터들을 미끼로 쓰던 청주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지도자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지만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미안하지만 보내줄 수는 없다."
물러나려던 아이스 트롤 로드의 길을 막아섰다.
"크라라라!"
아이스 트롤 로드가 비키라는 듯 길쭉한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널 보내줬다간 훗날 이 성이 무너질 거야."
방금의 행동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이녀석은 왕의 자격을 갖췄다. 인간을 사 냥개로만 여기는 데루스 로베르트보다 제대로 된 왕이 될 수 있는 놈이다. 그렇기에 이곳에서 끝을 내야 했다.
"왕답게 살지 못했으니, 왕답게 보내주마."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크으으!"
아이스 트롤 로드가 표정을 굳힌다. 어울리지 않던 도끼를 내려놓고 푸른 투기를 끌어낸다. 세뇌를 당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투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우우우웅!
아이스 트롤 로드의 주먹 위로 푸른 투기가 압축되며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크기가 줄어들수록 그 안에 어린 투기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증폭되어갔다.
후우우욱!
라온이 남아 있는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방울져 떨어지는 불꽃의 오러가 칼날 위로 모여든다. 겨우내 만들어진 고드름처럼 오러의 창날이 벼려졌다.
"오라. 이름 없는 트롤의 왕이여."
"크아아아아!"
아이스 트롤 로드가 땅을 터트리며 도약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압축된 기운이 폭발하며 시야 전체가 푸른 투기로 가득 찼다.
치이잉!
라온이 뒤로 젖힌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칼날에 모여든 불꽃의 오러가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질주한다.
만화공 십화.
일염극.
휘몰아치는 화염의 창이 투기의 해일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136화
라온이 검을 내리자, 일염극의 불길이 풀잎처럼 흩날렸다.
사그라지는 불길 위로 달을 가리고 있던 아이스 트롤 로드의 거체가 무릎을 꿇었다. 왼쪽 상반신에는 불길의 창에 꿰뚫려 시꺼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찌지지직.
시간이 돌아간 듯 녹아내린 아이스 트롤 로드의 피부와 살이 차오른다. 로드답게 어마어마한 재생력이었지만, 의미 없었다. 놈의 심장은 이미 일염극의 불꽃에 조각났으니까.
"크르륵…."
가슴을 부여잡는 아이스 트롤 로드와 눈을 마주쳤다. 만년설을 담은 듯한 하얀 눈동자에서 생기가 줄줄이 빠져나갔다.
'모르겠군.'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삶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으며 혹은….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고마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주마."
"크르륵!"
라온이 다시 검을 세웠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목을 베려고 할 때 아이스 트롤 로드가 턱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크으으…."
마지막까지 싸우려는 듯 주먹을 말아쥐고 두 다리로 당당하게 섰다. 무릎을 꿇고 죽지 않겠다는 의지. 끝까지 왕다운 모습이었다.
"대단하군."
진심으로 감탄했다. 몬스터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크아아아아!"
아이스 트롤 로드가 포효와 함께 달려든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균형이 조금씩 무너졌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그 의지가 빛 바라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검을 그었다. 지그하르트의 고고함이 어린 칼날이 아이스 트롤 로드의 숨통을 끊었다.
"쿠룩!"
아이스 트롤 로드의 두꺼운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확연한 웃음.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녀석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크어어억!"
"크르르륵!"
"캬아아아!"
놈의 마지막 포효를 들었던 몬스터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난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왕답게…."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아이스 트롤 로드는 왕답게 죽어갔다. 이쪽이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로.
'잘 가라.'
라온은 왕답게 죽은 녀석이 지금의 자신처럼 좋은 환경에서 환생하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왕이로구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라스가 아이스 트롤 로드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트롤은 인간으로 따지면 네놈보다도 어리다. 그런 나이에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지. 실로 왕다운 놈이었느니라.
'그래.'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음에도 왕처럼 태어나 죽은 저 어린 트롤을 보면 알 수 있지. 왕은 만들어지지 않고, 종족을 초월해 태어나는 법이다.
라스가 뒤를 돌아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했었다고?'
-그렇다. 하지만 네놈을 보고 그 생각이 바뀌었다.
'무슨 말이지?'
-처음 네놈을 보았을 때 왕의 기질 따윈 초코 쿠키의 초코칩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네놈은 변했다. 무력만이 아니라 영혼의 격이 달라졌느니라.
라스의 눈동자가 사파이어를 박아놓은 듯 번쩍였다.
-장인이 찰흙을 빗어 도자기를 만들 듯 지금 네놈의 혼에 왕의 그릇이 만들어지고 있다.
'왕의 그릇….'
-그에 반해 네놈은 왕이 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맞아. 생각해본 적 없어.'
지그하르트 가주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가문을 잇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여러 이득을 챙기고, 실비아와 시녀들이 행복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왕의 그릇에 평민의 정신이라. 재밌군. 그 그릇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커질지, 네놈의 정신이 어떤 변화를 이룰지 흥미롭구나. 마계에도 너 같은 놈은 없으니까.
'그러면 내 몸을 안 뺏는다는 건가? 패배 선언?'
-무, 무슨 헛소리냐! 흥미롭다는 거지! 네놈의 영육을 뺏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노라!
라스가 짧은 팔을 버둥거리며 빽 소리를 질렀다.
-본왕은 한 번 노린 물건은 어떻게 해서든 얻어야 직성이 풀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의 육체를 가져갈 것이니라!
'아, 예.'
-말이 나온 김에 본왕의 기질을 말하자면 저 트롤 아이와 비슷하다. 자신이 위험하더라도 부하들을 살리는 진정한 왕이지. 차이점이라면 본왕의 강함은 누구에게도 밀리지…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얼음장보다도 차갑게 가라앉은 자신의 눈빛을 본 라스가 바르르 떨었다.
'너란 녀석은 이런 때에도 수다와 자기 자랑을….'
"라온 님!"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도리안이 달려왔다. 팔은 부러졌고, 전신에 멍이 가득했으며, 갑옷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너…."
나름 잘 버틴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녀석은 정말 사력을 다해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진짜 못 따라가겠네요. 청주귀와 빙아귀를 죽이고, 로드의 목까지 베시다니. 전 로드 하나만 상대하다가도 팔이 부러졌는데."
도리안이 부러진 팔을 만지며 훌쩍였다.
"너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왜 나섰지?"
"그게…."
녀석은 바로 말을 하지 못하고, 배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전에 광혈귀와 싸운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싸웠다기보다는 버틴 거였지만.
"그때 도망가면서 속이 너무 답답했어요. 막 찢어질 것처럼. 몸이 아픈 것도 무섭지만, 마음이 아픈 게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서 다시는 동료를 놔두고 도망치지 말자고 맹세했어요."
"이번에 그걸 지켰다?"
"예…."
도리안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 확실히 도움이 됐어."
라온이 도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녀석의 진심이 전해져 가슴 한켠이 따스해졌다. 도움을 받은 건 처음이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리고 당신도."
고개를 돌려 뻘쭘하게 서 있는 에드퀼을 보았다. 그의 상태는 도리안보다 심각했다. 갑옷이 피로 흥건했고 다리뼈가 조각난 것 같았다.
"…아닙니다."
"존댓말?"
에드퀼은 갑자기 존댓말을 사용했다. 예전에는 나중에 죽이겠다고 중얼거렸으면서.
"제가 하고 싶어서 나섰을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성으로 돌아갔다. 탁함이 없는 맑은 눈빛. 정말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영웅의 이름을 외쳐라!"
성문 위에 서 있는 테리안이 피에 젖은 검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병사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라온이라는 이름이 하분 성 전체를 뒤흔들었다.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내 이름….'
전생에서는 드러낼 수 없었던, 감추기만 했던 이름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뜨거운 전율이 심장을 두드렸다.
"가자."
간질거리는 가슴을 움켜쥐고 하분 성으로 걸어가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튀어 올랐다.
[뛰어난 업적을 이뤄냈습니다.]
[영혼의 격이 상승했습니다.]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칭호 <벽이 되는 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불굴의 의지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무수한 보상을 보며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라스가 튀어나와 악을 질렀다.
-뭐가 이리 많은 것이냐!
* * *
로베르트 가문의 서쪽을 받치는 루샤인 산.
화려한 경관으로 이름 높은 그 산 아래에는 아무도 모르는 지하 공동이 있었다. 밤보다 더 어두운 공동의 중앙에는 오백여 명의 아이들이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있었는데,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으으…."
"아…."
"끄윽…."
입술을 깨물며 버티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눈이나 코 혹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기절한 아이들이 나올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복면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이 쓰러지는 빈도가 늘어났고, 결국 남아서 버티는 아이는 108명뿐이었다.
중앙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가 큰 복면인이 공동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설원을 담은 듯한 은발을 뒤로 넘긴 데루스 로베르트가 술잔을 들고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는 이전보다 더 젊고 생기있게 보였다.
"세뇌작업이 끝났습니다."
복면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108명인가."
데루스의 고고해 보이는 동공에 108명의 아이들이 비쳤다.
"예. 예상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이번 개들은 꽤 쓸만하겠군요."
"저기서 반을 줄여라."
"예?"
"어중이떠중이는 의미 없다. 필요한 건 마스터급에게도 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냥개니까."
그가 입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듯한 건조한 미소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어, 어떻게 줄이면 되겠습니까?"
"그건 네가 할 일이지.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을까?"
데루스의 푸른 눈동자가 사이하게 번들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복면인이 머리를 땅에 찍으며 용서를 빌었다. 그의 이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레이지 웜은 먹였나?"
"예! 개량에 성공한 녀석들을 먹였으니, 라온처럼 세뇌가 풀릴 일은 없을 겁니다!"
"라온. 라온이라…."
하분 성에서 울려 퍼진 열기 띈 이름과 달리 서늘한 음성이 그 이름을 짓눌렀다.
"꽤 쓸만한 놈이었는데."
데루스가 오른손등에 돋아난 상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라온은 지금까지 키웠던 사냥개 중 최고의 실력을 가졌었다.
스스로 세뇌만 풀지 않았다면 육황의 최고 간부도 죽일 능력이 되는 놈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쉬웠다.
피익!
그가 라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손등의 상처가 벌어지며 끈적한 핏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 주인님!"
복면인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려고 할 때 데루스가 스스로 손등의 상처를 벌리며 미소 지었다.
"보아라. 라온은 죽어가면서 내게 이를 박아넣고 갔다. 저 아이들도 그런 존재로 키워라."
데루스의 푸른 눈동자에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나를 위해서라면 적의 목에 어금니를 박아넣고 웃으며 죽을 수 있는 사냥개로."
* * *
밀랜드와 출정대가 숨 쉴 틈 없이 달려갔지만, 이미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났다. 희미하게 하분 성이 보이는 설원에 도착했을 때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우르르 돌진해왔다.
"크윽, 전투 준비!"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며 전투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몬스터들은 싸울 생각이 없는 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몬스터들의 상태가 보인다. 피로 물든 몸뚱이, 텅 빈 손, 그늘 가득한 눈빛. 패잔병의 모습 그 자체였다.
'뭐지?'
밀랜드가 허겁지겁 도망치는 몬스터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다시 출발한다. 전력으로 달려라!"
그는 혼란스러운 눈빛을 감추고 다시 출발을 지시했다.
"예!"
불안한 건 출정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하분 성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정예만 모였기 때문에 밀랜드와 출정대는 정오가 되기 전에 하분 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상태는 출정대의 상상과 확연히 달랐다.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성벽 아래에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만 병사들의 시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출정대는 떨리는 걸음으로 하분 성으로 다가갔다.
"사, 사령관님! 여길 보십시오!"
밀랜드가 주변을 살피며 움직일 때 1번 정찰대장 바르티가 소리를 질렀다. 가보니 일반적인 아이스 트롤 보다 2배는 큰 괴물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이놈입니다! 이놈이 아이스 트롤 로드에요!"
"역시 함정이었군. 그런데 이걸 누가…."
"사령관님! 여기에 에, 에덴의 귀신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있습니다! 비, 빙아귀입니다!"
정찰병들은 빙아귀와 청주귀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악하여 눈을 부릅떴다.
"아이스 트롤 로드에 빙아귀, 청주귀?"
밀랜드는 세 괴물을 차례로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에덴의 두 괴수에 아이스 트롤 로드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의 시체들. 하지만 인간의 시체나 살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에덴이 함정을 팠다는 건 알겠지만 그걸 어떻게 버틴 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일단 가자."
밀랜드가 숨을 고르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성 내부에서 환호와 괴성이 들린다. 자세히 들어보니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라온?"
라온이다. 녀석의 이름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하룻밤 동안 발생한 일을 들은 밀랜드와 간부들은 회의실에 앉아 넋이 나간 것처럼 눈동자를 떨었다.
"내 평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그러니까요. 에덴과 아이스 트롤 로드가 쳐들어왔는데, 사망자가 한 명도 없다니, 꿈만 같습니다. 무신의 은총을 받은 게 분명해요!"
"무신의 은총이 아니라, 라온의 은총이지. 이번에도 그 녀석이 혼자 다 했잖아."
"빙아귀와 청주귀, 아이스 트롤 로드를 잡고 팔 하나만 부러졌다니, 진짜 괴물이야."
간부들은 라온의 무력과 전략에 감탄하여 혀를 내둘렀다.
"어찌 됐든 이겼잖아요. 축제! 삼일밤낮으로 축제를 엽시다!"
"삼일밤낮 가지고 되겠어? 일주일은 해도 돼!"
"그래. 이런 날은 우리 평생에 다시 없을 거라고!"
한동안 몬스터들이 오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간부들은 당장 축제를 열자며 손을 들었다.
"축제도 좋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밀랜드가 시장터처럼 시끄러워진 회의실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할 일이라고 하신다면…."
"너희들이 칭송하는 라온. 그냥 환호만 해주고 말 건 아니겠지."
"아, 당연하죠!"
"최고의 상과 금화 주머니를 내려야 합니다!"
간부들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살아 있는 건 라온 덕분이니까요."
이들에게 라온의 활약상을 이야기해주었던 테리안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밀랜드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두 눈을 번쩍였다.
"녀석에게 하분 성의 유물을 줄 생각이다."
137화
"유, 유물이요?"
"유물이라면 설마…."
"어…."
간부들의 시선이 밀랜드의 허리에 있는 설각검으로 향했다. 하분 성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은 바로 저 검이었으니까.
"차, 차기 성주를 라온으로 하시려는 겁니까?"
"그건 저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심이…."
설각검은 하분 성주의 상징이 되는 물건. 저 검을 준다는 건 라온을 차기 성주로 인정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간부들이 떨리는 눈동자로 테리안을 보았지만,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를 홀짝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밀랜드가 간부들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검은 유물이 아니라, 상징이다. 라온에게 줄 건 다른 것이야."
"다른 거요?"
"이거다."
그가 테이블 위로 눈처럼 새하얗고 얇은 갑주를 꺼냈다. 별빛처럼 반짝였고, 중앙에는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아!"
"이, 이거였군요!"
"그래. 오크 로드의 마석으로 만든 내갑. 백혼갑이다."
내갑은 옷 속에 입는 갑옷이다. 얇지만 파고들어 온 칼을 막을 수 있어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착용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성주의 상징인 설각검보다도 귀한 물건이지만, 라온이 해준 일이 있으니, 이 정도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밀랜드는 백혼갑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녀석은 스스로를 너무 안 챙겨. 이 갑옷이라도 입혀야 속이 편할 것 같다."
"저도 동의합니다."
테리안이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럼 저희도 상관없습니다."
"라온이 아니었다면 이 성은 전멸이었으니, 무얼 주어도 부족하죠."
"백혼갑이면 그 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겁니다."
백혼갑의 현재 주인과 미래의 주인 모두 동의했기 때문에 간부들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건은 그렇게 하고 축제는 5일 정도 여는 게 좋을 것 같군. 다만 바로 시작하지 말고 일주일 정도 상황을 본 뒤에…."
"잠시 괜찮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설격대주 에드퀼이 손을 들어 올렸다.
"뭐지?"
"라온 님의 이야깁니다."
"라, 라온 님?"
"라온 님이라고?"
갑작스럽게 나온 라온 님이라는 호칭에 간부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분 용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용병 중에 그런 천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가 사용한 무학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세월에 걸쳐 정립된 검술. 평범한 용병이 가질 수 없는 무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냐?"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음…."
밀랜드가 입맛을 다시며 에드퀼을 보았다. 평온한 눈빛.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확인을 하려는 것 같았다.
"저도 좀 궁금하긴 하네요."
울브스 용병단장 베토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피식 웃었다.
"우리 모두 알잖아요. 라온 그 친구가 용병이 아니라는 건."
"음…."
"뭐, 그렇긴 하지."
"난 이상한 곳만 아니면 돼. 오마라든가."
"떽! 라온 그 친구가 오마일 리가 있어?"
한 번 물꼬가 터지니 라온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모두 조용."
밀랜드가 책상을 툭 쳐서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너희들의 말대로 라온은 평범한 용병이 아니다. 사실 그런 업적을 세웠으니, 이 이상 숨길 수도 없지. 다만 확실한 건 그 아이는 이곳에 온 이후 항상 진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와 의미에 간부들이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언젠가 녀석 스스로 정체를 밝힐 때가 올 것이다. 그날까지 기다리도록. 그리고 그 아이의 정체는 내가 보장한다. 어둠에 물든 쪽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밀랜드는 이 이야기를 처음에 꺼낸 에드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빛이 맑다. 옛날 꿈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군요."
에드퀼은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 기간 봐왔지만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밀랜드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 끝났으면 지금부터 축제를 준비해라!"
밀랜드가 테이블을 힘차게 내리치며 일어섰다.
"그간의 피로와 고통을 모두 풀 수 있도록 아주 성대하게!"
* * *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작은 조명이 비치는 어둑한 방.
인간의 백골로 만들어진 괴기스러운 형상의 테이블 앞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우측에 앉은 남자는 어둠이 어린 듯한 두꺼운 로브로 전신을 덮었고, 안구에 푸른 불꽃이 타오르는 해골의 가면을 착용했다. 옆에는 금색의 지팡이가 홀로 서 있었는데, 시꺼멓고 사이한 빛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반면 좌측에 앉은 가는 손가락의 여자는 챙이 있는 남색의 모자를 썼고, 얼굴에는 코가 길쭉한 노파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뒤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둥둥 떠 있었다.
"실패했네."
노파의 가면을 쓴 여성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하분 성을 말하는 건가?"
해골의 가면을 착용한 남자가 턱을 틀었다.
"그래. 청주귀, 빙아귀 그 밥값도 못하는 버러지들이 죽었어."
"어떻게 실패했지?"
"뭘 물어? 생각 없이 하분 성주에게 달려들었겠지."
"빙아귀라면 모를까. 청주귀는 단순하게 움직이는 놈이 아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해골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이미 늦었어. 우리가 움직였다는 걸 들켰으니, 하분 성주는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을 거고, 육황에서도 지원을 나오겠지."
"흐음…."
"뭘 그리 심각해. 녹색의 왕 마석은 서쪽에서도 나타났으니까. 상관없잖아."
"나는 마석보다 세이렌의 그릇을 원했다. 그런 재능은 대륙 전체에서도 흔하지 않아."
강한 무력, 넘치는 마력의 재능은 어디에 가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세이렌의 화신 같은 기질은 쉽게 찾기 힘들다.
"대량 학살도, 대량 세뇌도 가능한 능력이다.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때가…."
"아니, 이런 때일수록 움직여야 한다."
해골 가면을 쓴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듯 탁한 소리가 울리고 테이블 위로 슬라임처럼 흐물거리는 액체가 솟구쳤다. 탁한 회색이라 내부가 보이지는 않았다.
"도플갱어? 그 멍청한 놈으로 뭘 어쩌겠다고. 도플갱어의 투구를 쓸 놈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내가 직접 개량했다."
남자는 테이블의 해골을 집어삼키려는 도플갱어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이 녀석은 삼킨 인간의 언행을 100% 재현한다. 가족이라고 해도 알아볼 수 없지."
"호오."
노파의 가면을 쓴 여성의 눈동자가 푸르게 반짝인다.
"소화와 동시에 그 인간의 기질을 흡수하는 방식인가? 아예 세포 자체를 개조했군."
"시간제한이 좀 있지만, 이 녀석이라면 세이렌의 그릇을 데리고 올 수 있을 것이다."
"밀랜드가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다."
해골의 가면을 착용한 남자가 자신감이 흐르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간의 기질 자체를 읽는 괴물이 아닌 이상 저 녀석의 변신을 알아차릴 수 없다."
* * *
하분 성에 축제가 열렸다.
웨이브 이후 하루 정도 가벼운 축제가 열렸던 적은 몇 번 있지만, 5일 연속으로 축제가 일어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성의 분위기는 만년설이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웠다.
축제의 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고조되었고, 표창식이 열리는 다섯 번째 날 극점을 찍었다.
"성벽에서 뛰어내려 아이스 트롤 로드와 접전을 벌였던 도리안과 에드퀼은 앞으로!"
"예!"
표창식 사회를 보던 테리안의 부름에 도리안과 에드퀼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하분 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아이스 트롤 로드와 몬스터들을 막은 두 사람에게 하분 성의 명검과 금화를 수여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상 위에 있던 밀랜드가 직접 검과 금화를 내려주었다.
"도리안.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몰라보게 달라졌구나. 앞으로도 발전하길 바란다."
"옙!"
"에드퀼.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변화가 나빠 보이지 않는구나. 계속 정진해라."
"예."
두 사람은 밀랜드에게 고개를 숙인 후 뒤를 돌아 관중들에게도 머리를 숙였다.
"우와아아아아!"
"우리 3번 정찰대의 자랑!"
"도리안! 도리안!"
"대주님! 최고입니다!"
정찰대와 검사들이 도리안과 에드퀼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럼 마지막 순서입니다."
테리안이 험험 헛기침을 한 뒤 가장 우측에 앉아 있는 라온을 보았다.
"웨이브에서 서른 명의 목숨을 구하고, 에덴의 귀신과 아이스 트롤 로드를 홀로 벤 무적의 검사! 라온 앞으로!"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하분 성의 검귀!"
"트롤 로드 슬레이어!"
라온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축제장을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고 함성을 터트렸다.
"후."
라온은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네 용기와 용맹 덕분에 성의 피해가 최소한으로 그칠 수 있었다. 하분 성의 성주로서 네게 감사를 표한다."
밀랜드가 처음으로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
모두가 보고 있는 이런 공간에서 밀랜드의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기에 당황하여 똑같이 머리를 내렸다.
"마주 숙일 필요 없어!"
"맞아! 성주님의 인사를 받는 걸로도 부족하다고!"
"라온! 당당하게 서라!"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지 씩 미소를 지었다.
"하분 성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한 영웅에게 하분 성의 유물 백혼갑과 금화를 내린다."
밀랜드가 하얀색 갑옷을 내밀었다. 금이 박힌 듯 빛이 반짝였고, 가슴 중앙에는 육각으로 세공된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너는 네 몸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백혼갑은 옷 안에 있을 수 있는 내갑이니, 항상 착용하고 다니도록."
"감사합니다."
보기만 해도 귀중한 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옷을 준 이유도 알 수 있었기에 가슴에 따스한 열기가 일어났다.
"우와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앞으로도 하분 성을 지켜주십시오!"
뒤를 돌자마자 성이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폭발했다. 다가오던 몬스터가 무서워서 달아날 정도의 환호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관중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앞으로 이런 날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마지막까지 즐기도록! 이번 순서는…."
테리안이 다음 행사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백혼갑을 살펴보았다.
'음, 어디서 본 느낌인데.'
옷이 아니라, 옷에 박혀 있는 에메랄드 같은 녹색 보석에 담긴 기운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지금도 가슴에 품고 있는 고블린 왕의 마석. 그것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크 누린내가 줄줄 흘러나오는데, 이제야 알다니, 한심하군.
라스가 감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오크?'
-그렇다. 오크 로드의 마석이니라.
'그렇군.'
손이 데일 정도로 열기가 가득했던 고블린 왕의 마석과 달리 이 마석에는 바위처럼 단단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이 차이 때문에 처음 봤을 때 마석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걸 노렸었나 보네.'
에덴이 왜 하분 성을 공격했나 고민했었는데, 이 마석을 노리고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에 어린 기운은 고블린 왕의 마석과 비교해도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으니까.
'흠.'
라온이 내부의 기운을 더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 마석에 손을 올렸다.
치이이잉!
그 순간 불의 고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며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세상이 변했다.
피로 물든 설원이 보인다.
인간과 오크의 시체가 산이 되어 쌓였고, 그 죽음의 언덕 위에 금발의 검사와 오우거보다도 큰 오크가 검과 도끼를 맞대고 있었다.
검사의 검에서 나선의 불꽃이 치솟았고, 오크의 도끼에서 흉악한 투기가 넘실거렸다. 두 괴물의 격돌에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져내린다.
수백 혹은 수천 번의 부딪침 끝에 불꽃의 칼날이 도끼를 가르고 오크의 목을 베었다.
오크는 웃었고, 검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몸을 돌린 검사가 이쪽을 본다. 붉은 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어둠에 휘감겨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뿜어진 금빛 화염이 시야를 뒤덮었다.
다시 세상이 변하고, 웃음과 활기가 넘치는 축제장이 보였다.
[불의 고리(5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만화공(4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성취가 모자랍니다.]
첫 판별식에서 보았던 메시지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꿀꺽.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이곳에서 오크 로드를 상대했던 건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검에 어린 불꽃과 다듬어지지 않은 금발은 판별식에서 보았던 남자와 꼭 닮아 있었다.
-네놈 방금 어디를 가서 무얼 보고 온 것이냐.
당황한 듯 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뭐?'
-방금 네 영혼은 네 몸을 떠나 있었다.
'떠났다고?'
-그렇다. 조금 전 너는 육체만 있는 빈털터리였다.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는 건가?
당황하여 눈을 부릅떴을 때 두 번째 메시지가 올라왔다.
[???와 마주했습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크게 상승합니다.]
* * *
쯥.
라온은 단상 위에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도리안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더럽게 못 부르지만, 지금은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그하르트의 선조가 불의 고리도 익히고 있었다니….'
불의 고리에 대한 메시지가 그냥 나올 리가 없다. 그 금발의 남자는 만화공만이 아니라, 불의 고리도 익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지그하르트에 불의 고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전생의 자신이 불의 고리를 얻었던 장소는 지그하르트와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이런 환상을 그냥 보여줄 리 없다. 분명 어떠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불의 고리 그리고 만화공의 극을 보기 위해서는 이 환상의 끝을 찾아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어.'
가뜩이나 쌓인 일들이 많은데 선조의 비밀까지 찾아야 하는 일이 추가됐다. 관심 끄고 싶지만 만화공과 불의 고리의 비밀이 담겨 있을 것 같아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정해져 있지.'
실비아를 직계의 위치에 돌려놓는 일. 데루스에 대한 복수가 무조건 해야 할 일이라면 직계의 자리를 되찾는 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일단 정식 검사가 되고 그 이후에….'
라온이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 도리안이 노래를 부르다 쫓겨나고, 단상 위로 양 갈래머리를 찰랑이는 유아가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유아가 양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우와아아아!"
"유아다! 유아!"
"이제 귀 호강 좀 하겠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상큼한 목소리에 병사들이 전투할 때보다 더 큰 함성을 터트렸다.
"이번에 새로 만든 노래니까. 잘 들어주세요."
유아가 뒤를 보며 신호를 주자, 바이올린과 기타를 든 병사들이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툭툭.
이전에 부르던 경쾌한 음악과는 다른 웅장한 흐름이 축제장의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겨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용맹한 자도, 강인한 자도, 현명한 자도 차디찬 겨울을 견디긴 쉽지 않으리라."
예상과는 다른 가사와 음악이었지만 유아의 선명한 목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한없이 고여 있던 겨울성에 어린 검사가 찾아온다. 강인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용맹했지만 다정했으며, 현명했지만 배움을 알았다."
가슴이 울렁인다. 그녀의 목소리가 고산의 북처럼 울리며 전신을 박동시켰다.
"무너진 성벽 아래 홀로 선 어린 검사의 칼날에 새벽의 여명이 깃들었다. 그 아름답고 고고한 빛에 북쪽 산의 괴수들은 의미 없는 족적만 남기고 사그라졌다."
내 이야기다.
유아의 낭랑한 목소리로 펼쳐지는 영웅담은 하분 성에서 시작된 자신의 이야기였다.
"가면과 투구로 본심을 가린 귀신들조차 어린 검사의 신념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물러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신이 깃들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이전의 싸움이 저절로 그려진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움켜쥔 라온의 눈앞으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당신의 업적을 노래하는 최초의 무훈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영웅의 길이 열립니다.]
138화
'영웅의 길?'
라온이 메시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라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 아!'
다시 내용을 읽어보려 할 때였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벼락같은 전율이 전신을 관통했다. 머리를 뚫고 들어온 전기가 발바닥까지 이른 듯한 느낌. 순간적으로 영혼이 한 차원 높은 곳에 다다른 듯한 기분이었다.
-쯧, 운 한번 더럽게 좋은 놈이로다.
라스가 메시지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짜증이 가득 찬 표정이다.
'이게 다 뭐야.'
-말 그대로다. 네 영혼에 영웅의 업이 깃들었다는 뜻이지.
'어째서?'
-말에는 힘이 어려있다. 그게 노래라면 더 강한 힘이 스며들지. 파인애플 소녀가 부른 노래에는 네 영웅적인 면모가 담겨 있으니, 그 말에 힘을 얻어 네 영혼의 격이 올라가게 된 거다.
'고작 그걸로?'
-당연히 고작 그게 아니다.
라스가 고개를 돌려 노래를 부르는 유아를 보았다.
-전에 한 번 말했지? 파인애플 소녀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본왕이 예상한 것 이상의 재능이다. 저 아이가 네 노래를 만들고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러줬기 때문에 저 무훈이 그 힘을 얻은 것이니라.
'그럼….'
-그래. 네 영혼의 격과 능력치가 상승한 건 저 아이가 너에 대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감사히 여기도록.
'허….'
-네가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수록, 저 아이의 노래가 많은 곳에 퍼질수록 네 영혼의 격과 능력치, 특성이 크게 상승할 것이다.
'장난 아니네.'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감정을 자극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유아의 노래 재능은 천재라는 단어조차 벗어난 수준이다. 뛰어난 음유시인의 노래에는 혼이 깃든다던데 그걸 직접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걸음은 겨울의 선율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유아는 무훈가를 완벽하게 마치고 방긋 웃었다.
"이야아아아아!"
"유아야! 아저씨가 격하게 아낀다!"
"우리 유아 여기 있기 너무 아깝다! 대륙으로 보내자!"
"유아! 유아! 유아!"
유아의 노래를 들은 병사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를 내질렀다. 땅이 흔들릴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유아는 세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단상을 내려가 라온과 도리안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어땠어요?"
"이야! 진짜 대단하더라! 감동 먹었어! 나랑 비슷한 수준인데?"
도리안이 어처구니없는 말을 지껄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노래를 만들 생각은 어떻게 했어?"
"할아버지가 항상 이곳에서 싸워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유아가 헤헤 웃으며 우측에 서 있는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서리의 가지 점장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라온 검사님이 많이 고생하셨다고 하셔서 제가 듣고 본 걸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어 봤어요!"
"그래."
라온이 무릎을 꿇어 유아와 눈을 마주쳤다. 토끼처럼 동그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고맙다. 잘 들었어. 정말로."
"네!"
유아가 머리를 쫑긋거리며 폴짝 뛰었다.
"그럼 나중에 저희 식당에…."
"와서 매출 올려달라는 말이지?"
"와, 이제 잘 아시네요."
"모를 수가 없지."
라온이 팔랑이는 유아의 머리카락을 보며 웃었다.
"그럼 나중에 꼭 와주세요!"
유아는 손을 흔들고 기다리고 있던 점장에게 달려갔다.
-라온.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라스가 팔찌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니라.
맞는 말이다. 다만 그게 자칭 마왕의 입에서 나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본왕이 보기에 네놈은 파인애플 소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이제 저 냉기 덩어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되었다.
-은혜를 갚는 건 빠를수록 좋지. 오늘이다. 지금 당장 서리의 가지에 가서 모든 음식을 시켜라….
'하아.'
라온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는 라스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다 본왕에게도 은혜를 입었지. 아주 큰 은혜를 말이다.
'어떤 은혜?'
-본왕이 글래시아를 전해주지 않았더냐!
'그것에 대해선 이미 대가를 주고받았잖아.'
-그런 막강한 능력을 고작 파인애플 피자 하나 사주고 땡 치려는 것이냐!
'어떻게 행동이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을 수가 있지?'
마계의 군주 자리를 땅따먹기로 얻었는지 라스는 정말 내심을 숨기지 못했다.
-숨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숨기지 않는 것이다. 마족은 욕망에 충실한 존재. 욕망을 말할 때만큼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본왕은 마계에 있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느니라.
그 말은 사실이다. 라스는 말을 안 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녀석을 왕이라고 믿는 이유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들었으면 가자. 나흘 동안 서리의 가지가 꽉꽉 찼으니, 오늘은 비어 있을 것이다!
'알겠다. 알겠어.'
라온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라스에게도, 유아에게도 도움을 받았으니, 적당히 갚아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음식으로 퉁치는 정도면 굉장히 싼 편이다.
-잘 생각했느니라!
라스가 키득거리며 팔찌 위로 솟구쳤다.
"어디 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서리의 가지에서 밥 좀 먹게. 너도 가자."
"어?"
도리안은 일어서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4일 동안 열어서 오늘은 휴일이에요. 그래서 유아도 나중에 오라고 했잖아요."
"아, 그래?"
라온이 눈을 끔뻑이며 팔찌 위에서 춤을 추던 라스를 보았다.
'오늘 안 한대.'
-…대체 무엇이냐.
라스가 냉기로 만든 손으로 고양이처럼 테이블을 긁으며 악을 내질렀다.
-본왕을 굶게 하려고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이냐! 왜 밥을 먹으려고만 하면 방해가 들어오는 것이야!
'운명이야. 병사 식당이나 가자.'
라온은 피식 웃고서 병사 식당으로 향했다.
-양파 스튜에 퍽퍽한 빵, 너무 익힌 닭고기에 맛없는 소스까지! 오늘 정식은 최악이란 말이다!
'메뉴는 어떻게 또 다 알고 있네….'
라스는 매일 바뀌는 병사 식당의 메뉴를 외우고 있었다.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튼 특이하다니까.
* * *
흉폭하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가득 차 있다는 사이안 협곡.
무너진 댐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듯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깎아지른 듯한 협곡 사이를 내달리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밀물처럼 쇄도해오는 협곡의 반대편.
인간의 벽이 있었다. 떡 벌어진 체격으로 양날 도끼와 두꺼운 대검을 든 전사들이 일렬로 서서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을 노려보았다.
우우우웅!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협곡을 울리고, 전사들이 무기를 세웠다.
"돌격! 모조리 죽여버려라!"
가장 앞에 서 있던 거인 같은 중년인이 몬스터들의 파도에 뛰어들어 사람 몸통만 한 도끼를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몬스터와 땅이 동시에 터져나가며 인간과 몬스터들의 대전이 열렸다.
"가즈아아아!"
"다 찢어버려!"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
"으아아아아!"
전사들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칼을 내리치고, 도끼를 찍었다. 건조했던 협곡이 피와 열기 그리고 전투의 희열로 가득 찼다.
인간도, 몬스터도 평범과는 격이 다를 정도로 큰 이 전장에 눈에 띄는 한 검사가 있었다.
단아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흑발흑안의 여검사가 전장을 휘젓고 있었다. 막강한 힘과 정립된 투로를 따르는 검격에 몬스터들이 한 줌 핏물이 되어 쓸려나갔다.
그녀는 이 전장에서 가장 작았지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용맹을 뿜어냈다. 사나운 기세에 몬스터들이 먼저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흑발의 검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 끊임없이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협곡에는 전사와 몬스터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노련한 전사들도 지칠 시간이었지만, 흑발의 검사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몸놀림으로 몬스터들의 목을 가르고, 심장을 터트렸다. 광전사 마법이 걸린 것 같은 사나움이었지만, 눈빛은 만월의 빛처럼 맑았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이야아아아아!"
결국 협곡의 전투는 인간들의 승리로 끝이 났고, 패배한 몬스터들은 동족들의 피를 밟으며 원래의 척박한 환경으로 돌아갔다.
"후욱…."
흑발의 검사는 그제야 검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검은 오늘 누구보다도 많은 피를 맛보았고, 그 발아래에는 가장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아주 신났구나. 마르타."
숨을 고르는 그녀의 뒤로 전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중년인이 다가갔다.
"내가 만족스러울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였다. 너희 가주라도 따라잡을 생각이냐."
중년인이 피에 젖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가 바로 사이안 협곡을 지배하는 카마인 성의 성주이자 최강의 전사라 불리는 베루안이었다.
"따라잡아야죠. 하지만 그 전에 넘어야 할 산이 있어요."
마르타가 검에 묻은 피를 털며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야 할 산?"
"아주 지랄맞게 높은 산이죠."
"네 또래 중에 널 넘어선 녀석이 있다고?"
베루안이 눈을 부릅떴다. 마르타는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제 몫을 하는 무인이었다. 왜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하나 했더니, 적수가 있었던 것 같다.
"세 번. 아니, 네 번 졌죠."
마르타는 그 이후엔 도망 다녀서 할 말이 없다고 중얼거렸다.
"걱정하지 마라."
베루안이 씩 웃으며 마르타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이곳에 온 후로 누구보다 많은 전투를 하고 육체와 정신을 단련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몰라도 지금은 네 아래일 것이다."
"아뇨."
마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놈은 제가 처음으로 만난 진짜예요.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가짜들과 다른 진짜 괴물. 지금보다 몇 배를 더 수련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 정도라고?"
베루안이 눈매를 좁혔다. 마르타의 재능은 자신의 아들보다도 위다. 이정도 천재에게 패배감을 준 아이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피부에 느껴져요."
마르타가 닭살이 올라온 팔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도 강해지고 있는 그 망할 녀석의 숨소리가."
최선을 다해서 수련을 해왔지만, 라온을 이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당당하게 라온을 꺾고, 명령을 듣겠다는 약속을 지우고 싶지만, 놈에게 이긴다는 상상이 되질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진짜 적인 백혈교는 라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곳이다. 라온을 이기지도 못하는 주제에 백혈교를 무너뜨리고 엄마를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녀석의 이름이 뭐지?"
마르타는 놀람이 담긴 베루안의 눈을 보며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기막을 펼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
주먹을 꽉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목숨을 빚진 은인이자, 제가 꼭 이겨야 할 남자에요."
"그 이유만은 아니로군."
베루안이 키득 웃었다.
"좋다. 남은 기간은 동안 내가 직접 너를 수련시켜주마."
"네? 갑자기 왜…."
"대신 가져와라."
그가 어깨의 도끼로 대지를 내리찍으며 턱을 치켜올렸다.
"그 라온이라는 녀석을 이겼다는 승전보를."
* * *
대륙 북서쪽에는 레뷘이라는 이름의 사막이 있다.
하얀 모래가 깔린 특이한 곳으로 레뷘이라는 이름 대신 백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래가 하얗다고 해도 사막은 사막이지만, 의외로 자원이 많아서 사람과 몬스터들이 공존하는 여러모로 기이한 장소였다.
그런 사막의 시작점에 작은 마을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원래부터 있는 곳이 아니라 대륙 육대상회 중 하나인 마이코 상회가 레뷘 사막 개척 사업을 위해 임시로 만든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푸른 머리칼의 인상이 매서운 청년이 부리나케 움직이고 있었다.
"버렌! 이쪽으로 와줘!"
"버렌! 여기 좀 이상한데?"
"어이! 버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청년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 나 좀 부르지 말라고! 다 알아서 할 수 있잖아!"
버렌이라 불린 청발의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다만 화를 내면서도 우측에 가서 땅을 다지고, 왼쪽에서 기둥을 세우며 모든 일을 도와주었다.
"버렌! 샌드 스콜피온이 나타났어! 빨리 와줘!"
"젠장! 왜 나만 찾는 거야!"
마치 안 갈 것처럼 화를 내던 버렌은 올리던 기둥을 내려놓고 마을의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입으로는 불평을 쏟아내지만, 부탁하는 일은 전부 도와주고 있었다.
"흐음."
외눈 안경을 끼고 있는 지적인 외모의 남성이 마을 밖으로 달려가는 버렌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예상외로군. 첫 인상과는 너무 달라."
"다 상회주님의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있던 노상인이 빙긋 웃었다.
"가르침? 난 저 녀석에게 해준 게 없어."
마이코 상회의 현 회주 레니튼이 눈을 내리감았다. 버렌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의욕에 불타는 아이였다. 낮에는 몬스터와 싸우거나 개척 사업을 돕고, 밤에는 개인 단련을 하는 게 벌써 반년이 넘었다.
평범한 사람은 버틸 수 없는 방식. 버렌의 마음에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가득하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친구입니다. 성격이 모난 것 같지만 속은 따뜻하고 무력도 16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죠. 아!"
노인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하분 성에서 일어났다는 사건 들어보셨습니까?"
"버렌과 비슷한 나이의 검사가 홀로 무너진 성벽을 지켰다는 이야기 말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더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더 큰 사건?"
"예. 그곳에 아이스 트롤 로드를 이끌고 에덴이 쳐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것도 밀랜드와 하분 성의 정예가 나갔을 때 그걸 금발의 검사가 홀로…."
노인은 레니튼에게 몇 달 전 하분 성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모두 말해주었다.
"거, 거짓말 같군."
"저도 그렇게 여겼는데, 진짜인 듯합니다. 하분 성의 병사들이 전부 보았다고 합니다."
"흐음, 그러면…."
레니튼이 마을로 돌아오는 버렌을 가리키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에게 그 이야기를 모두 전해 줘봐."
"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 좀 보려고."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노인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듯 버렌에게 다가가 레니튼에게 말해주었던 하분 성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망할 녀석!"
버렌의 녹색 눈동자가 사막의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가만히 있질 않는구나!"
그는 말아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네가 따라잡겠다고 말했던 목표인가?"
어느새 다가온 레니튼이 버렌의 앞에 섰다.
"맞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라온입니다."
"강한 모양이더군."
"강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넌 즐거워 보이는 거냐."
레니튼이 웃음이 차 있는 버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네가 목표로 삼은 상대가 강해졌으면 화를 내거나 절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죠. 강했고, 강해질 녀석이기 때문에 따라잡는 보람이 있는 겁니다."
버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메랄드처럼 선명한 눈동자가 번쩍였다.
"라온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제 목표도 거기에서 멈춰버립니다. 녀석이 올라가 줄수록 저도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
레니튼의 입매가 둥글게 올라갔다. 기꺼운 미소로 버렌을 바라보았다.
"뭐, 사실 이것도 그 녀석 때문에 알게 된 거긴 합니다만."
"라온이라는 녀석을 보고 싶군."
"분명 감탄하실 겁니다."
"다만 난 네가 더 끌리는구나."
"예?"
"진심으로 자신의 모자람을 알고, 상대를 높이는 녀석은 흔하지 않거든. 투자한다면 난 네게 했을 거다."
"아…"
예상 밖의 말에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라온과는 굉장히 친한 모양이군. 맞수이면서 친한 관계라니 재미있어."
"치, 친하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적일 뿐입니다!"
"아닌 거 같은데. 친할 수밖에 없는 미소였는데."
레니튼이 빙글거리며 턱을 치켜올렸다.
"아니라구요!"
버렌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런 놈이랑 친해질 생각 없습니다!"
* * *
풀벌레와 파충류 그리고 몬스터들의 부조화스러운 울음이 숲 전체로 퍼져나가는 누런빛의 정글.
질끈 동여맨 은발을 뒤로 넘긴 보라빛 눈동자의 여검사가 똬리 튼 뱀처럼 꼬여 있는 정글을 달리고 있었다.
고귀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정글 안에 녹아든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카아악!
은발의 검사가 늪을 지나려고 할 때 늪지 아래에서 악어의 외형을 가진 암속성 몬스터 크로커다크가 튀어나와 입을 쩍 벌렸다.
치이잉!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둘렀다. 검날에서 뻗어나간 은빛 서리가 바닥을 스치며 몬스터와 늪지를 얼려버렸다.
"캬악!"
"키야…."
뒤이어 올라오던 몬스터들도 중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은발의 검사는 하나둘씩 늪지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진각을 밟았다. 쿵 하고 대지가 울리며 그녀가 밟은 부분부터 은빛 서리가 퍼져나가 주변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흡!"
은발의 검사는 허공에서 몸을 돌려 얼어붙은 늪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작은 새나 곤충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지만, 냉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숨결에 다가오기 전에 모조리 밀려 나갔다.
그렇게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직선으로 달리던 그녀의 앞에 갈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나무 가면을 쓰고, 창과 방패를 든 무인이 나타났다.
"크아아압!"
무인이 붉은 오러를 가득 담은 창을 내질렀다. 막강한 창격이 전신을 노리고 쏘아질 때 은발의 검사가 든 칼날 위로 서리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캬갸갸갸걍!
은빛 서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 무인을 포함한 주변을 모조리 얼려버렸다.
"끄으윽…."
가면을 쓴 무인은 다리와 팔이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은발의 검사는 무인에게 고개를 까딱이고 그가 지키고 있던 마을로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
"정글 돌파에 6시간도 안 걸렸어!"
"네가 1등이다. 루난!"
"어른들한테도 이 정도 기록은 흔하지 않은데!"
"어른들이 아니라, 전사장급 아니면 절대 못 하지!"
"루난! 진짜 대단해!"
마을 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공격하긴커녕 은발의 검사를 둘러싸고 환호를 질렀다.
"고마워요."
루난은 덤덤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지금 이 수준이면 앞으로가 더 기대되네."
"그러니까. 16살에 이런 무력을 가진 애가 있었나? 우리 족장뿐이지 아마?"
사람들은 루난이 앞으로 여중제일인이 될 거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있어요."
"응?"
"저보다 훨씬 강한 아이가 있어요."
루난은 드물게도 사람들의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훠, 훨씬 강하다고?"
"너보다?"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그 아이를 이기려고 이곳에 온 것이냐?"
루난의 곁으로 키가 큰 적발의 여성이 다가왔다. 나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새어 나오는 기세는 바다처럼 웅장했다.
"아뇨."
"아니다? 그럼?"
"옆에서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어요."
루난은 가문에 있을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그대로 흘러냈다.
"그런가."
가면의 여성은 큭큭 웃고서 루난의 등을 거칠게 쳤다.
"어떤 일이라도 목표가 있는 건 좋은 일이지. 다만 네 재능은 보다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다. 너무 앞만 보지는 말도록 해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루난의 다음에 올 정글 돌파 시험자를 기다렸다.
"음."
루난은 이 부족의 족장이자, 마스터에 이른 전사 레이의 등을 보며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먹을까.'
카탐 정글의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글 돌파를 이뤘으니, 오랜만에 구슬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치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근데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허공에 발장구를 치며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을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이곳을 안내해주었다. 라밈이다.
"와, 넌 어디서 들어왔냐?"
끼륵.
라밈의 뒤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마귀 소리였다.
"어? 이 녀석 왜 이렇게 붙어? 내가 좋냐?"
까악!
마을로 들어온 정글 까마귀와 친해진 건지 라밈과 까마귀가 노는 소리가 흥겹게 들려왔다.
"좋아! 내가 큰맘 먹고 키워주지. 먼저 이름부터 짓자고!"
라밈이 입맛을 쩝쩝 다시다가 손뼉을 쳤다.
"라온! 너 그림자처럼 시꺼머니까 라온이 좋겠어!"
라온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루난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라밈의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가자, 덩굴처럼 꼬인 깃털을 가진 정글까마귀와 라밈이 마주 보고 있었다.
"루난? 너 시험 중 아니었어?"
"끝났어."
루난은 가볍게 대꾸해준 뒤 까마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까악!
까마귀는 왜 보냐는 듯 고개를 모로 틀고 깍깍 울었다.
"흥."
루난은 까마귀와 눈싸움을 하다가 고개를 돌려 라밈을 바라보았다.
"헉!"
평소와 달리 힘이 들어간 루난의 눈빛이 라밈이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일이야.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얘 이름이 뭐라고?"
루난이 뒤에서 잔걸음을 걷는 까마귀를 가리켰다.
"라, 라온인데…."
"이름 바꿔."
"아니, 이미 라온이라고…."
"이름 바꿔."
"딱 그림자처럼 꺼멓잖아. 원래 검은 애들한테 라온이라는 이름이 자주…."
"이름 바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무서우리만큼 가늘어졌다.
"갑자기 왜…."
"이름 바꿔."
점점 강해지는 루난의 압박에 청년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얘 왜 이래!
* * *
에덴과의 전쟁이 끝난 후 4개월이 지났다.
웨이브에 이어 로드와의 전쟁에서 많은 몬스터가 죽었기 때문인지 더 이상 성 주변에 얼씬거리는 몬스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꾸준히 정찰을 나갔지만 몬스터들이 모이거나, 특이사항도 발견되지 않아 하분 성은 유례없이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그 평화를 만들어낸 라온은 다른 사람과 달리 바쁘게 지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수련이다.
그는 부상 당했던 팔을 트롤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복하자마자 연무장에 박혀서 하루종일 검만 휘둘렀다.
"후욱…."
오늘도 달이 떠오를 때까지 만화공과 검술을 수련했던 라온이 몸을 일으키며 탁한 숨을 뱉었다.
'잘되지 않는군.'
백혼갑의 보석을 만졌을 때 보았던 금발 검사와 오크 로드의 전투. 그 격돌에서 검사가 사용했던 만화공의 검술을 재연해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그의 검술 경지와 오러의 수준이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긴 그 오크 로드도 무시무시하게 강했으니까.'
금발 검사와 맞서 싸웠던 오크 로드는 몬스터가 아니라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무인과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해야지.'
전생과 현생 모두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고 살았다. 꾸준히 검을 수련하고 몸을 단련한다면 언젠가 그 경지도 문을 열어줄 것이다.
"라온 님!"
다시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야간 경계 가실 시간이에요."
"아."
라온이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아쉬움 섞인 숨을 뱉어냈다. 임무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그래. 가자."
검을 집어넣고 도리안을 따라 성벽으로 향했다.
"도련님은 같은 검술을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하는 거지."
"학!"
평범하게 대답을 해줬을 뿐인데,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다.
"그냥 한다고 하니까. 진짜 다른 세상 사람 같네요. 어우. 난 못 해."
녀석은 못 참겠다고 중얼거리며 배 주머니에서 약초즙을 꺼내 마셨다.
"하나 드실래요?"
"됐어."
라온은 손을 젓고서 성벽 위로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에 달은 맑다. 저 멀리 스터린 산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안개가 보일 정도였다.
'좋은 날이네.'
오늘 경계는 경치를 보는 맛이 있겠다고 생각하며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경계 임무도 그냥 보낼 필요는 없다. 가만히 서서 주변을 살펴야 하니, 감각의 바다를 늘리기엔 제격인 시간이었다.
'그건 그렇고.'
라온은 감각의 바다를 통해 주변을 관찰하며 손목에 걸린 라스를 보았다.
'요즘 조용하네.'
서리의 가지에 가서 식사를 하자는 땡깡만 제외하면 녀석은 최근 이상하리만큼 잔잔했다.
'좀 덤벼줬으면 좋겠는데.'
라스와 내기를 하거나, 싸운다면 능력치가 쉽게 올라가기 때문에 녀석의 시비가 그리웠다.
쯥.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꽃팔찌에서 라스가 연기처럼 피어 나왔다. 녀석은 멀리 보이는 스터린 산의 정상 부근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할 말이 있다.
'지금은 밥 못 먹어. 임무 중이야.'
-그런 게 아니다! 본왕을 식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었어?'
-끄으윽! 진짜 너란 놈은… 휴우.
라스가 이를 바득 갈았다.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뭔데?'
-오랜만에 본왕과 내기 하나 하자.
'내기?'
내기라고?
사기 도박꾼들이 사기 칠 때 가장 어려운 일이 호구를 판에 앉히는 거라고 한다. 이 상황은 호구가 절로 걸어와 판에 앉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온의 눈동자에 붉은 열기가 일었다.
호구 라스가 또?
139화
"내기? 갑자기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라온이 냉기를 삐죽삐죽 풍겨 올리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주 간단한 내기다.
라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 뒤에 말을 이었다.
-그 뾰족귀가 낸 시험이 이곳에서 1년 동안 살아남는 거였던가?
'그래. 이제 반년도 안 남았지.'
여러 사건이 터져서 짧게 느껴졌지만,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7개월이 지났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이제 5개월도 남지 않았다.
-그거다. 본왕은 네가 남은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간다는 쪽에 내기를 걸겠노라.
'뭐?'
라온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라스를 내려다보았다.
'그거 진심이야?'
-당연하다. 마왕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 많이 봤는데.'
-시, 시끄럽다! 내기만큼은 지킨다!
'흐음….'
얘 진짜 호구인가?
5개월도 남지 않은 시간. 웨이브도 끝났고, 에덴도 물리쳐서 말 그대로 수련만 하다가 돌아가면 되는 편한 상황에 뭐 이런 내기를 거나 싶었다.
아니야. 호구는 맞지만, 바보는 아니지.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정보를 가지고 내기를 거는 게 분명했다.
-할 것이냐?
'일단 보여줘.'
-알겠다.
라스가 팔찌에서 완전히 나오자마자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남은 시험 기간 동안 하분 성을 벗어나지 않기.
성공 시 : 모든 능력치 +5, 칭호.
실패 시 : <분노>의 감정 15포인트 생성.
실패 시에 올라가는 분노 포인트가 높긴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좋았다.
'이런 내기를 거는 걸 보니, 에덴의 무리라도 찾아오나 보네?'
-글쎄.
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불리한 건 말하지 않는 것이다.
"흐음…."
라온은 내기 메시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에덴이 다시 올 가능성은 높지 않아.'
에덴의 귀신이 하분 성을 노렸다는 정보가 풀린 후 육황 중 두 곳의 전투부대가 근처에 와 있었다.
에덴 놈들에게 상식이라는 게 있다면 한동안 하분 성을 건드릴 리가 없었다.
아니, 아니지. 놈들에게 그런 건 없어.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에덴의 귀신들은 정신이 나가기로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놈들이다. 누가 지키건 말건 찾아와 자신에게 있는 오크 로드의 마석을 노릴 미친놈들이었다.
'뭐, 괜찮겠네.'
시련과 고난은 빠른 성장의 밑거름이 되는 법. 다시 에덴이 찾아온다면 성장한 무력으로 베어버릴 뿐이다.
'좋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어.'
-너 치고는 탁월한 선택이니라.
라온이 내기를 받아들이자, 내기 성립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가 성립되었습니다.]
녀석은 사라지는 메시지를 보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기가 이루어졌으니, 본왕이 충고를 하나 하지.
'충고?'
-그래. 네놈과 나름 미식의 정이 쌓였으니 하는 충고이니라.
'미식의 정이라…."
참으로 사소한 정이었다.
'무슨 충고지?'
-당장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네놈만이 아니라, 네놈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들을 데리고.
라스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조만간 이 성 자체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 * *
-빌어먹을!
라스가 냉기로 만든 손으로 바닥을 쿵 내리쳤다. 호언장담과 달리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뭐야!', '왜 다시 자!',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말을 하며 한숨을 푹푹 쉬는 걸 보니, 녀석의 계략이 완전히 망한 것 같았다.
'그러게 왜 내기를 걸어서.'
라온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 녀석 정말 호구 끼가 있긴 한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보상만 받아 가게 생겼다.
-그 게으름뱅이 놈이 다시 잘 줄은 본왕도 몰랐다. 정말이지 잠탱이 그 자체인 놈이니라!
'잠탱이?'
-화가 나니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라스는 짜증 난다며 고개를 홱 돌렸다. 녀석의 반응을 보니 무언가가 주변에 있긴 했던 모양이다.
'이제는 상관없지만.'
라스의 똥 씹은 표정을 보니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라온이 가볍게 몸을 푼 뒤 검을 뽑았다.
백혼갑에 박힌 오크 로드의 마석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다시 환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금발 검사가 보여주었던 검술의 궤적은 아직 뇌리에 남아있었으니까.
"후우우."
라온은 머릿속으로 그 검사의 검술을 그리며 눈을 떴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검을 중단에 놓았다.
화아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쏘아지는 일섬. 불꽃이 어린 칼날이 차디찬 새벽 공기를 꿰뚫었다.
'느려.'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검로는 비슷하지만, 금발 검사의 검보다 느렸고, 정확성이 떨어졌다.
'다시 해보자.'
검을 뒤로 젖힌 뒤 같은 궤적으로 내뻗었다. 조금 더 빨라진 것 같지만 그 남자의 검에는 많이 모자랐다.
'다시.'
라온은 조금의 발전이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찌르기를 반복 또 반복했다.
"후우."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오직 만화공의 찌르기만 계속하던 라온이 숨을 고르며 허리를 폈다.
'조금은 나아졌군.'
반복 수련을 한 덕분에 약간이지만 그 남자의 검에 다가갔다. 검의 속도가 올랐고, 그 안에 조금 더 정밀한 오러를 담아낼 수 있었다.
-느리구나. 아주 느려. 본왕이라면 진즉에 그 검을 깨우쳤을 것이다.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괜한데 화풀이 하지 마.'
-크으….
'어차피 끝난 거면 지금 내기를 포기하든가.'
-닥치거라. 본왕은 포기를 모르는 마왕이니라. 절대 기권을 외치지 않는다.
'참으로 우유부단한 마왕이시군.'
-우, 우유부단? 지금 본왕에게 우유부단이라고 한 것이냐!
라스가 팔찌 위로 나오며 냉기의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는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의 이명 중 하나가 바로 단호한 마왕이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돌아보지 않는 절대적인 판단력으로 마족들에게 경외를 받았던….
'다시 수련해야겠네.'
-좀 들어!
라온이 검을 고쳐잡았을 때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고오오오!
무시무시한 냉기를 뿜어내며 전신을 휘감았다.
아무래도 공짜로 보상을 주게 생겨서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간 듯싶다.
'안 덤비는 게 좋을 텐데, 자칭 단호한 마왕님.'
-닥쳐라! 내기고 뭐고 이 기회에 네놈의 육체를 가져가겠노라!
본인이 먼저 걸었던 내기가 제대로 안 풀린 것에 화가 났는지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며 냉기와 분노를 뿜어냈다.
우우웅.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라스의 냉기와 분노가 파고들지 못하도록 마나 회로에 서리의 벽을 세웠다.
-본왕이 언제까지 같은 짓을 반복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냐!
마나 회로로 스며드는 라스의 냉기가 비틀어진다. 칼날처럼 얇고 가늘게 벼려져 글래시아로 만든 벽을 찌르기 시작했다.
찌지직!
얇으면서도 막강한 기운이 깃든 냉기의 창에 글래시아로 만들어낸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보았느냐! 냉기의 형태 변화를 완벽하게 이뤄낼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이제 네놈도….
'아, 이렇게 하는 거로군.'
라온이 빙긋 웃으며 글래시아를 운용하여 라스가 만든 창을 똑같이 만들었다.
캬아앙!
냉기로 만들어진 창과 창이 부딪치며 두 개의 창이 동시에 소멸되었다.
라온은 그렇게 사라진 냉기를 단전으로 끌어당겨 혹한의 냉기를 증가시켰다.
-이, 이놈!
'고마워. 또 새로운 걸 배웠네.'
-끄으으윽! 아직이다! 본왕은 포기하지 않았어!
라스가 더 얇고 가는 창을 만들어 마나 회로를 공격했지만, 매번 라온이 생성한 창에 막혀 사라지기만 했다.
'이것도 수련이 되네.'
라스의 창을 막기 위해서 더 빨리, 그리고 더 정확한 창의 제작이 필요했다. 정신을 집중하며 방어를 지속하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기력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감각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창으로 창을 막는 연습 덕분일까. 평소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능력치가 상승했다.
-이런 제기랄!
라스는 허공을 올려보며 악을 질렀다.
무게 잡던 라스가 다시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돌아와 참 다행이었다.
저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린다니까.
* * *
"라온 님."
눈썹처럼 가는 달이 하늘에 올라왔을 때 들뜬 얼굴의 도리안이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 임무 끝났습니다! 밥 먹으러 가시죠!"
"벌써?"
"벌써라뇨! 하루종일 근무 섰는데!"
도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주머니에서 의자라도 꺼내 던질 기세였다.
"미안.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몰랐어."
라온이 하늘을 올려보며 입맛을 다셨다. 정신없이 수련하다 보니, 밤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은 서리의 가지에 가서 먹죠. 오랜만에 좋은 사과가 들어와서 애플 미트 파이가 끝내준대요."
-애, 애플 미트 파이?
라온이 대답하기 전에 라스가 땅 위로 솟구친 지렁이처럼 불쑥 올라왔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 가자! 애플 미트 파이를 먹을 기회이니라!
4개월 동안 애플 미트 파이를 먹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던 라스의 입에서 냉기의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미 영업 끝났을 시간 아닌가? 오늘 평일이잖아."
"제가 유아한테 미리 예약을 해두었죠!"
"이런 건 재빠르다니까."
"사과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예약을 걸었습니다!"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꺼낸 의자를 넣으며 헤헤 웃었다.
"흐음…."
라스는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은 능력치도 얻었고, 곧 내기의 보상도 들어올 테니, 인심 써서 먹어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가자."
"옙!"
-오오! 탁월한 선택이니라!
라온은 경쾌한 걸음을 걷는 인간과 마왕을 데리고 서리의 가지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테이블을 정리하던 유아가 손을 흔들며 방긋 웃었다. 이미 영업이 끝났는지 가게 내부에는 손님이 없었다.
"영업 끝난 거 아니야?"
"예약해서 괜찮아요! 미리 준비해뒀거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유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점장이 없는 건지 주방에선 유아의 기척만 느껴졌다.
-크으, 이 향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가!
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냉기가 주점 바닥 전체로 깔렸다.
"어우, 오늘따라 춥네. 유아야 사과가 들어간 치킨 스튜도 좀 줘!"
도리안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 듯 어깨와 팔을 떨며 추가 주문을 했다.
-애, 애플 치킨 스튜! 애플 미트 파이에 애플 치킨 스튜!
라스의 입에서 냉기의 브레스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미안하다. 음식에 미친 마왕 때문이야.'
라온은 억지로 라스의 입을 다물게 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일 줄 알았으면 진즉에 좀 먹어줄 걸 그랬다.
-끄으으….
"식사 나왔습니다!"
라스의 냉기가 입을 뚫고 나오려 할 때 유아가 큼지막한 쟁반에 파이와 스튜를 가져왔다. 달큰한 사과 향이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점장님은 안 계시는 거야?"
"오늘 사과를 가져온 상인 아저씨랑 이야기하신다고 나가셨는데, 아직 안 오셨어요. 항상 이렇다니까."
유아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맨날 나만 일한다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사실 제가 할아버지보다 요리 잘하거든요."
유아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양갈래 머리를 흔들며 속삭였다.
-흐으윽, 애플 미트 파이에, 애플 스튜? 여긴 마계인가? 본왕이 마계로 돌아온 것이냐!
라스는 원하던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허공에서 방방 뛰었다.
-빨리 먹어라! 감질나서 죽겠노라!
'알겠어.'
파이와 스튜를 앞접시에 덜어낸 뒤 먼저 스튜를 떠먹었다.
"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맛이다.
사과의 달달함과 닭고기에 배인 짭짤함이 어우러진 맛이 혀를 거칠게 자극했다. 국물은 걸쭉하면서도 풍미가 있어 한 입을 먹은 것으로 입안 전체에 만족스러움이 차올랐다.
-마, 맛있다! 단맛과 짠맛이 바람과 불꽃처럼 어우러져 본왕의 혀를 맴도는구나! 마계의 맛이니라!
"우와! 맛있어! 진짜 맛있어!"
라스는 미식가인 주제에 맛 표현이 참으로 단조로웠다. 맛있다는 말만 연발하는 도리안 수준이었다.
"그럼…."
라온이 애플 미트 파이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딱딱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입에 넣자마자 파이가 카펫처럼 부드럽게 펼쳐진다. 깍뚝 썬 사과의 과즙과 잘 다진 고기의 육즙과 조화롭게 혀를 휘감았다.
따스하면서도 상쾌한 봄이 생각나는 맛. 아삭한 사과와 흐물거리는 고기의 각기 다른 식감에 먹는 재미까지 있었다.
"이건 대단하네."
라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곳에서 많은 음식을 먹었지만, 이 파이가 최고였다. 돈을 퍼부어도 아깝지 않은 맛. 왜 그렇게 빨리 매진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끝내주네! 오늘 사과가 진짜 미쳤어!"
애플 미트 파이를 먹어보았던 도리안도 혀를 내둘렀다. 이전보다 오늘 것이 훨씬 맛있다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아, 이것이다! 본왕이 네놈에게 붙어 있던 이유가 바로 이때를 위함이었어! 진정한 지옥의 맛이니라!
라스의 애플 미트 파이에 감동했는지 전신을 떨며 끊임없이 냉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곧 승천할 것 같았다.
"그 정도예요?"
"그래. 정말 맛있어."
"헤헤, 고마워요!"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아가 활짝 웃고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더 먹으라면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가지고 나왔는데, 전부 맛있었다.
-끄으윽, 본왕은 이제 가도 여한이 없노라. 세계를 맛본 느낌이다.
라스는 이제 눈을 까뒤집고 혀를 쭉 내밀고 있었다. 진정 만족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의 재능은 노래만이 아니라, 요리에도 있었던 것 같다. 나오는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점장의 음식보다 맛이 좋았다.
"잘 먹었어."
라온은 10인분에 가까운 음식을 모두 먹어 치우고 테이블에 음식값을 올려놓았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보다 4배는 많은 금액이었다.
"에? 이거 음식 가격보다 더 많은데요?"
"만족한 만큼 준 거야. 거기다 오늘 우리가 늦었잖아. 나머지는 팁."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맞는 말이다. 만족스러운 음식에는 그 값을 쳐줘야 하는 법이지.
"여기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
라스와 도리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또 올게."
머리를 꾸벅이는 유아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서리의 가지를 나섰다.
-파인애플 소녀는 목소리만이 아니라, 손에도 재주가 있구나. 본왕의 세 번째 시녀답도다.
'세 번째?'
-첫 번째는 아이스크림 소녀, 두 번째는 소고기 소녀 그리고 저 파인애플 소녀가 있지 않느냐.
아이스크림은 루난, 소고기는 마르타, 파인애플이 유아였다. 참 지 멋대로 사는 마왕이었다.
'한심해….'
라스에게 혀를 쯧쯧 차고 숙소로 가려 할 때 인상이 강해 보이는 노인이 다가왔다. 서리의 가지 점장이자, 유아의 할아버지였다.
"왜 이렇게 늦게 오세요! 유아 화 단단히 났어요!"
도리안이 큰일 났다고 중얼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점장은 매서운 눈빛과 달리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손녀에게 혼나러 가봐야겠어요."
그는 고개를 꾸벅이고 서리의 가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유아가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소리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혼나네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만지며 낄낄 웃었다.
"정말 인상이랑 다른 분 아니에요? 처음엔 무서웠는데. 저렇게 순하고 착한 분일 줄 몰랐어요."
"방금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이상한 거요?"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온은 대답 없이 점장이 들어간 서리의 가지를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상한데.'
* * *
흐흐흥.
유아는 라온과 도리안이 식사했던 테이블을 치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경첩 소리가 평소와 달리 섬뜩하게 울렸다. 움찔하고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유아가 행주를 꽉 움켜쥔 채 흥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 녀석과 이야기를 좀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할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주점의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쳤다.
"매번 이러신다니까!"
"바빴지?"
"좋은 사과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서 몸이 두 개여도 부족했다구요!"
"허허, 미안하구나. 그럼 내일은 나가서 놀거라. 할애비 혼자서 일하마."
점장은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다가와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이, 괜찮아요. 거기다 오늘 매출 엄청나게…."
자랑하듯 금화와 은화를 꺼내던 유아가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살폈다.
따스하고 큰 손, 눈가에 가득한 주름, 살짝 굽어진 허리까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가 아닌 것만 같았다.
'헉!'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그의 다정한 눈빛 속에 시꺼먼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다, 당신 누구야!"
유아가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감각이 말한다. 저 남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를 따라 하려는 무언가라고.
"유아야. 왜 그러는 게냐."
"당신 누구냐고!"
"늦게 왔다고 너무 하는구나."
장난친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다.
"우리 할아버지 어디 갔어!"
"유아야.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할아버지의 얼굴로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뱉는다. 말투도, 행동도 모두 같았지만, 저 존재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당신 할아버지 아니잖아! 우리 할아버지 어디 갔냐고!"
유아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뒷걸음칠 쳤다. 차가운 벽이 등에 닿는 감각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더 이상 갈 곳은 없는데 할아버지의 거죽을 쓴 괴물은 이미 앞에 와 있었다.
"유아야. 대체 왜 그러느냐. 장난이 지나치구나."
"하, 할아버지 어쨌어. 제발!"
"...."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자, 그가 석상처럼 멈춰 섰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진 건조한 눈빛이 굽어져 흘러내렸다.
"어떻게 알았지?"
세월을 담은 할아버지의 인자한 음성이 폐부를 긁는 것 같은 쇳소리로 변했다.
"아…."
유아가 주저앉아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자그마한 감정도 담기지 않는 사이한 눈빛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내놔!"
유아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순간에도 본인보다 사라진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괴물은 그 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지?"
그의 목이 인간이라면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메마른 어조가 반복되는 공포에 숨이 가빠져 왔다.
"아아…."
할어버지와 똑같았던 괴물의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었다. 색이 다른 찰흙 여러 개를 뭉친 듯한 괴기스러움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괴물이 손을 펼쳤다. 거대한 손아귀가 쩍 벌어지며 짐승의 아가리 같은 검은 구멍이 돋아났다. 구멍에선 회색 진흙 같은 것이 뚝뚝 흘러내렸다.
"유아야."
그 검은 구멍 안에서 할아버지의 형상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는 만큼 검은 구멍 역시 다가왔다. 유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알았지?"
히죽이는 괴물의 손아귀의 구멍이 유아를 집어삼키려는 찰나 그녀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이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벽을 부수고 솟구친 무시무시한 열풍에 괴물의 손아귀가 녹아내렸다.
유아는 자신을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는 부드러운 손길에 떨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휘날리는 잿빛 먼지 속 서슬 퍼런 기운을 피워내는 금발의 검사가 있었다.
치이잉!
검을 뽑는 그의 눈동자에 붉은 벼락이 일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140화
라온이 완전히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잠긴 서리의 가지를 보며 검집을 툭툭 쳤다.
'방금 그건 뭐지?'
조금 전 마주친 점장에게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졌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이 잡아낸 기질이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는데.'
점장의 얼굴과 눈빛, 걸음걸이, 말투를 비롯한 언행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서리의 가지에 갈 때마다 보았던 그의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겉이 아닌 속은 달라졌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인간의 거죽을 두른 느낌이었다.
'착각인가? 내가 요즘 너무 신경을 썼나?'
라온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발 검사의 검술을 따라 하기 위해 요즘 너무 정신을 쏟았기 때문에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지. 착각일 리가 없어.'
다른 건 몰라도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는 자신의 육감이 틀릴 리 없다. 이런 근접 거리에서 잘못 느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흐음.
라스가 확신을 주듯이 서리의 가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라온이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는 감각의 바다에 작은 파도가 치솟았다.
조금 전 주점으로 들어간 점장의 기척이었다. 평소 감각의 바다에서 느꼈던 다정한 출렁임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지워진 듯한 기계적인 흔들림이 느껴졌다.
'역시.'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자신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점장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라온 님. 안 가세요?"
숙소로 가던 도리안이 돌아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리안. 조금 이따가 큰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와."
"예?"
라온은 당황하는 도리안을 놔두고, 서리의 가지 뒤편으로 뛰어갔다.
-왜 바로 안 가는 것이냐.
'문으로 움직였다간 그놈이 유아를 인질로 잡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놈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소리 없이 뒤로 움직여 유아가 등을 기대고 있는 벽에 섰다.
누구든 공격하려 할 때 가장 방심하는 법. 라온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찌지지직!
점장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유아에게 손을 뻗는다. 사이한 기운이 보자기처럼 펼쳐지는 순간 라온이 만화공을 일으키며 벽을 부숴버렸다.
콰아아앙!
터져나가는 벽에 놈이 당황하는 사이 유아를 끌어당기고 검을 뽑았다.
"너 뭐 하는 놈이냐."
흘러내리는 회색 먼지 사이로 놈의 모습이 드러난다. 눈을 부릅뜬 점장의 얼굴이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 손이나 감추고 말해."
라온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점장의 손을 가리켰다. 거대한 손아귀에 돋아난 시꺼먼 주둥이가 뻐끔거리고 있었다.
"너는 또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점장의 입이 초승달처럼 길게 찢어지고, 머리가 해파리처럼 둥글게 부풀었다가 가라앉기 반복한다. 인간은커녕 몬스터도 아닌 것 같았다.
"아아…."
유아의 어깨를 감싼 손등 위로 그녀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라온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끄아아악! 저, 저게 뭐야!"
도리안이 찰흙이나 진흙을 뭉친 듯한 괴물을 보고 입을 떡 버렸다.
"저 괴물은 또 뭐예요!"
"유아를 데리고 있어."
라온이 기겁하는 도리안에게 유아를 넘겨주고 괴물의 앞에 섰다.
'이놈은 뭐지?'
-도플갱어다.
'도플갱어? 도플갱어의 변신은 완벽하지 않잖아.'
도플갱어는 인간을 먹고 그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몬스터지만, 외형만 같아질 뿐 언행은 확연하게 다르다.
외모만이 아니라, 완벽한 언행을 보인 저놈이 도플갱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흑마법으로 개조한 놈이니라. 생명의 존엄을 갈기갈기 찢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냈다. 바탕만 도플갱어지 저기 있는 건 키메라나 다를 바가 없다.
라스는 마족도 하지 않을 짓이라고 중얼거리며 도플갱어를 노려보았다.
"세이렌의 그릇. 세이렌의 그릇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가야 한다."
도플갱어는 기세를 뿜어내는 자신이 아니라 뒤에 있는 유아를 보며 회색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세이렌의 그릇
그 단어 하나로 충분했다. 저 개조 도플갱어를 보낸 건 에덴이었고, 놈들이 노리는 건 마석이 아니라 유아였다.
"세이렌의 그릇!"
도플갱어가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었다. 놈의 손이 고무처럼 늘어나 유아에게 쏘아졌다.
"날 너무 무시하네."
놈의 팔이 흐느적거릴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촤아아악!
라온은 팔의 궤도를 틀어막으며 검을 그었다. 벼락처럼 떨어진 검격이 도플갱어의 팔을 중간부터 잘라버렸다.
"세이렌의 그릇은 무조건…."
팔이 잘렸음에도 도플갱어는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유아를 노려보았다. 개조할 때 통각마저 지워버린 것 같았다.
우우우웅.
잘려 나간 도플갱어의 팔이 순식간에 돋아났다. 아이스 트롤 로드 이상의 재생력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도플갱어의 왼손이 바위처럼 부풀고, 오른손은 가시가 돋아난 채찍이 펄럭였다.
"키아아아!"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와 거대한 주먹을 내리쳤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쏟아졌지만 라온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뒤로 젖혔다.
도플갱어의 주먹이 머리에 닿기 직전 그의 검이 치솟았다. 금발 검사가 오크 로드의 팔을 잘라냈던 찌르기가 라온의 몸을 빌어 다시 세상에 현현했다.
퍼어어엉!
무시무시한 힘의 파동이 치솟으며 도플갱어의 왼쪽 어깨가 통째로 날아갔다.
"세이렌의 그릇!"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답게 도플갱어는 바로 오른손 채찍을 휘둘렀다. 가시 채찍이 뱀처럼 전신을 휘감아왔다.
라온이 채찍이 휘어지는 방향을 향해 만화공을 일으켰다. 칼날 위에서 춤추던 꽃잎이 너풀거리며 흩날렸다.
화아아아아아!
피어나는 화염의 꽃들이 채찍을 타고 올라 도플갱어의 상반신을 태워버렸다. 이대로 제압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키이이."
도플갱어는 불에 타는 육체를 스스로 잘라버리고,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몸을 재생시켰다.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재생 속도였다.
"세이렌. 세이렌의 그릇을 가져와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삶의 목표인 것처럼 도플갱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키아아아아!"
도플갱어가 괴성을 질렀다. 양손을 대검처럼 바꾼 뒤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다가온다. 검의 묘리 따위는 없지만 무시무시한 힘과 속도 때문에 위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촤아악!
라온은 도플갱어의 움직임을 모조리 눈에 담은 뒤 앞으로 나아갔다. 떨어지는 놈의 양팔을 찢어발기고 놈의 가슴을 갈라냈다.
푸카악!
만화공으로 베어낸 도플갱어의 가슴에서 회색 핏물이 쏟아졌지만 잠깐이다. 가슴의 상처 역시 순식간에 아물었다.
"키이이이."
불로 지지고, 칼로 잘라도 도플갱어의 육체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계속 자라났다. 고통도 느끼지 않는 놈이니, 이대로라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주먹은 오랜만이네."
라온이 검을 집어넣고, 주먹을 쥐었다. 만화공의 오러가 두터운 장갑처럼 주먹을 휘감았다.
"키아아아!"
도플갱어의 손이 철퇴처럼 변하고 놈의 전신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났다. 공격하면 역으로 다치게 만들겠다는 것 같았다.
"그걸로 될까?"
라온이 발을 구르고 도플갱어의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성인 몸통만 한 철퇴가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 쇄도해왔다. 방해꾼을 빠르게 제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공격.
그렇기에 알기 쉬웠다.
손등으로 첫 번째 철퇴를 흘리고, 왼 주먹을 뻗었다. 만화공의 기운과 공호권의 회전이 어린 권격이 도플갱어의 철퇴를 완전히 깨부쉈다.
퍼어어엉!
뒤를 이어 내지르는 오른 주먹이 도플갱어의 우측 상반신을 향했다. 놈이 가시를 더 날카롭게 세웠지만, 주먹에 담긴 막대한 기운이 가시를 짓누르고 놈의 상반신을 터트려버렸다.
"지금부터다."
가볍게 쥔 주먹에 만화공의 기운이 만개한다. 열화처럼 타오르는 권기가 폭퐁이 되어 도플갱어의 전신을 몰아쳤다.
선이 아닌 면의 공격에 도플갱어의 재생력도 따라오지 못했다. 놈의 찰흙 같은 육체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세이렌의 그흡!"
라온은 주절거리는 도플갱어의 입을 부수고, 가슴을 후려쳤다. 고통은 느끼지 못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닌지 놈의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안 돼요!"
도플갱어의 상반신이 완전히 아작 나기 직전에 유아의 비명이 들려왔다.
"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저 안에 살아 있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유아가 무릎을 꿇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거, 검사님!"
"끼이이!"
그녀에게 라온의 시선이 돌아간 순간 바닥에 깔려있던 도플갱어가 육체를 뱀처럼 길게 바꾼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
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절한 바람을 담은 유아와 눈을 마주치고 도플갱어가 나간 방향으로 뛰었다.
-일부러 놔주었군.
'저 아이 앞에서 죽일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일단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아 앞에서 죽일 수는 없어서 심한 공격을 하지도 않았고, 마지막에는 일부러 놓아주었다.
'놓칠 일도 없고.'
라온은 이미 도플갱어의 기질을 파악한 상태였다. 어디로 도망가도 찾을 수 있었다.
'성을 벗어나는 건가.'
도플갱어는 성을 벗어나 스터린 산이 있는 북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성벽으로 올라가니, 점장의 모습으로 늑대처럼 설원을 달리는 도플갱어가 보였다.
'어딜 가려고.'
라온이 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묵직하게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투석기에 실린 바위처럼 나아가 도플갱어의 등을 후려쳤다.
뻐어어억!
살덩이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플갱어가 눈 속에 처박혔다.
"끼이이이!"
바로 일어서고, 터져나간 살이 재생을 시작했지만, 놈의 회색 눈동자에는 확연한 당황이 비치고 있었다.
"네 끝은 여기다."
라온이 다시 검을 뽑았다.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키며 자세를 낮췄다. 바로 죽이고 싶었지만 조금 전 유아의 눈빛이 생각나서 섣불리 검이 움직이지 않았다.
'구할 방법이 없는 건가.'
도플갱어는 굉장히 희귀한 몬스터다. 만난 사람도 별로 없으니, 그에 대한 대책이나 먹힌 사람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한심하군.
라스가 코웃음을 치며 팔찌 위로 튀어나왔다.
-파인애플 소녀가 말했지 않느냐. 저 안에 그 노인네가 있다고. 그 말은 사실이다.
'뭐?'
-글래시아를 운용해서 저놈을 자세히 살펴라. 겉이 아니라 내부를.
라온은 라스를 힐끔 내려다본 뒤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원을 그리며 퍼지는 감각의 바다를 오로지 앞에 있는 도플갱어에게만 집중했다.
"키아아아!"
도플갱어가 성벽을 쌓은 바위만 한 주먹을 내질러왔다. 가람보법으로 피하며 감각의 바다에 집중했다.
놈의 기운과 기질 그리고 액체처럼 흐르는 육체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뭘 느끼라는 건…어?'
병에 든 물처럼 출렁거리는 도플갱어의 육체 속에서 미약한 기운이 느껴졌다. 놈의 것이 아니다. 다 타버린 초처럼 희미했지만, 분명 인간의 생기였다.
-이제 알았나. 주점의 노인네는 아직 살아있다. 저놈은 아이가 사탕을 끝까지 빨아먹듯이 입안에서 노인을 굴리며 그의 기억을 뽑아먹고 있던 거다.
'구할 방법은?'
라온이 검을 고쳐잡았다. 유아에겐 받은 게 많다. 구할 수 없다면 모를까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주고 싶었다.
-지금의 네겐 무리다.
라스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속에 있는 노인이 아니라, 흑마술에 뒤덮인 도플갱어만을 죽이기 위해서는 지금 네 경지로는 안 된다.
'어떤 경지를 말하는 거지?'
-인간 식으로 말하자면 무기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신검합일?'
도플갱어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리며 물었다.
-맞다. 검과 하나가 되어 도플갱어만을 베어야 하기에 지금의 네겐 무리다.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그 노인네까지 동시에 죽을 것이다.
'그거라면 괜찮아.'
-뭐라?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도 도움이 있다면 할 수 있지.'
라온이 검을 집어넣고 허리 뒤편에 찬 진혼검을 뽑았다. 요기가 피어나는 새빨간 검신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 싶어. 도와줄 수 있겠어?"
우우우웅!
진혼검은 뭘 묻냐는 듯 선명한 검명을 터트렸다. 새빨간 칼날 위로 아지랑이처럼 요기가 타올랐다.
치이이잉!
만화공의 불꽃과 요기가 뒤섞이며 핏빛처럼 붉은 기운이 라온과 진혼검을 휘감았다. 흘러내린 강물이 바다가 되듯 진혼검의 요기가 만화공의 기운에 어우러졌다.
-허, 경지로 이루는 신검합일이 아니라, 검과 인간이 같은 의지로 이루는 신검합일이라는 건가?
하나가 된 듯한 오러와 요기의 자연스러운 조화에 라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만 가능은 하겠군.
라온은 라스의 확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무엇을 베어야 하느냐 뿐.
도플갱어의 혼만을 갈라내야 하기에 어디를 벨지가 가장 중요했다.
-기회는 한 번이니라. 그 이상을 버티기에 그 노인의 상태는 좋지 않다. 무엇을 베어야 할지 잘 골라라.
'알고 있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래시아로 느꼈던 점장은 곧 호흡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충격 없이 단번에 베어야 했다.
"끼이아아악!"
라온이 집중 상태에서 도플갱어의 전신을 살필 때 놈이 괴성을 지르며 팔을 쭉 펼쳤다.
콰아아아!
도플갱어의 출렁이는 육체가 꽉 접었다가 펼친 고무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6미터에 다다를 정도로 거대해진 놈이 집채만 한 주먹을 내리쳐왔다.
라온은 달빛을 가리며 쏟아지는 거대한 주먹을 무시하고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느려지는 세상. 그 정지된 듯한 시야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도플갱어의 내부를 훑었다.
'찾았다!'
도플갱어의 좌측 허리 부근에 콩알. 아니, 쌀알보다도 작고 얇은 부위가 공허한 기운을 분수처럼 뿜어냈다. 저 알갱이가 바로 도플갱어가 가진 힘의 근원이었다.
찌직!
라온이 진혼검을 역수로 쥐었다.
만화공의 기운과 요기가 물에 떨어뜨린 두 색의 물감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핏빛처럼 붉은 기운이 칼날 위로 치솟았다.
신검합일이란 본디 검사만의 경지로 이루는 물아일체. 하지만 지금 자신은 진혼검과 의지를 일치시킨 진정한 의미의 신검합일을 이루었다.
진각을 밟고, 손을 뻗는다. 진혼검이 내 손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죽음을 느낀 도플갱어가 내부의 핵을 이동시켰지만, 극에 이른 감각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칼날의 끝에서 피어난 붉고 붉은 섬광이 도플갱어의 심혼을 꿰뚫었다.
141화
수십 장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절삭음과 함께 도플갱어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용광로에 들어간 쇳덩이처럼 육체가 녹아내리고, 그 안에 잠겨 있던 점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인 모습은 갓 껍데기를 깬 달걀을 보는듯했다.
"성공한 건가."
라온이 진혼검을 내렸다. 더 이상 도플갱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신음과 함께 물처럼 흘러내릴 뿐이다.
-제대로 들어갔다. 확실하게 핵을 부쉈어.
'다행이군.'
-알려주긴 했지만 정말 해낼 줄은 몰랐다.
라스가 이쪽을 올려보며 눈매를 좁혔다. 억지로 이뤄낸 신검합일은 그에게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점장도 살아 있으니, 끝났…."
도플갱어의 시체에서 점장을 꺼내려던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꺼져가던 흑마법의 기운이 갑자기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런!"
라온이 점장을 휘감고 있는 도플갱어의 점액을 억지로 벗겨내고 그를 뒤로 보냈다.
우우우웅!
만화공의 오러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자마자, 도플갱어의 녹아내린 육체에 응집되던 흑마법의 마나가 검은 불꽃이 되어 치솟았다.
콰아아아앙!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게 압축된 기운이 폭발했다. 몸이 뒤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지만,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는 라온의 눈에는 이미 그 흐름이 어려 있었다.
뽑아든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질주하는 붉은 선이 어둠의 기운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쿠와아아아!
갈라진 어둠의 마나가 라온과 점장을 비켜나가 설원 위에서 폭발했다. 정면에서 맞았다면 큰 부상을 입을만한 위력이었지만 찰나의 반응과 정확한 궤도의 검격이 완벽한 방어를 이뤄냈다.
"망할 놈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시꺼멓게 죽어버린 땅을 노려보았다. 조사조차 할 수 없게 도플갱어를 터트리다니, 에덴은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먼 놈들이었다.
-에덴이라는 놈들은 모조리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친놈들이지.'
고작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라스도 이제 에덴이 광인들의 집단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라온이 뒤를 돌아 점장의 상태를 살폈다. 피부 이곳저곳이 녹았고, 생기가 많이 소모되었지만, 다행히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회복부터 해줘야… 어?'
오러로 점장의 몸 상태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우우웅!
걸레짝이 된 도플갱어의 사체에서 시꺼먼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썩은 나뭇잎 같았던 시체가 구슬처럼 둥글게 모이더니 인간의 얼굴 형상을 그렸다.
챙이 있는 큰 모자, 길쭉한 코, 주름이 가득한 얼굴. 추레하게 보이는 노파의 모습이었다.
"잘 봤어. 아주 잘 봤어!"
노파의 입이 열린다.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그것이었다. 농염했고, 여유로웠으며, 진한 광기가 느껴졌다.
"너구나."
"뭐?"
"빙아귀를 죽이고, 청주귀의 계획을 무너뜨린 게 바로 너였어."
노파가 히죽 웃으며 턱을 모로 틀었다.
"늙고 병든 밀랜드가 청주귀의 계획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오늘도, 그때도 전부 네 짓이었어."
검게 번들거리는 노파의 눈동자가 전신을 끈적하게 훑어내렸다.
"너…."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마녀의 가면이다. 에덴에 있을 마녀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500년 전 왕국의 대마법사라는 지위를 버리고, 몬스터의 길에 섰던 존재. 실비아가 읽어준 전래 동화에도 나오는 배신의 마녀 멀린이었다.
"멀린의 가면을 쓰고 있는 건가?"
"날 알아? 날 안다고? 정말?"
노파의 목소리가 칵테일처럼 달큰하게 떠올랐다.
"아아, 좋네. 좋아. 감각도 좋고, 눈치도 빠르고 다 마음에 들어."
"뭐?"
"거기서 가져가야 할 건 세이렌의 그릇이 아니라, 너였어. 진짜는 너였다고!"
물결처럼 굽이치는 음성에 들뜬 욕망이 넘실거렸다.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무슨…."
"냉정한 눈빛도, 차가운 목소리도, 그 얼굴도 최고야. 나와 함께 가자. 내가 최고의 남자로 만들어 줄게."
도플갱어의 시체로 이루어진 멀린의 얼굴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내 곁에서 영원히 살게 해줄게."
가면에 불과한 멀린의 입이 쫙 찢어진다. 귀까지 올라간 입꼬리를 보자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꺼져."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내리쳤지만, 연기를 벤 것처럼 멀린의 얼굴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단호함도 멋져."
멀린은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젠 얼굴이 아니라, 몸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년이 감히 본왕의 영육을 노리다니!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며 몸을 일으켰다. 피어나는 냉기와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공간을 휘감았다.
-뭐 하는 것이냐! 아까처럼 베어라! 저년이 방심하고 있을 때 검과 하나가 되어 저 마법을 찢어버리란 말이다!
'검과 하나….'
점장을 구할 때처럼 신검합일을 이룬 검을 내리치라는 뜻이었다.
라온이 진혼검을 검집에 넣고, 검을 들었다.
-뭣하는 것이냐! 그 미물을 써서 베라니까!
'될 거 같아.'
조금 전 도플갱어의 핵을 뚫어버린 손맛이 아직 남아있다. 지금이라면 홀로 신검합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하려고? 또 뭘 보여주려고?"
멀린의 눈동자가 노란 광기로 타올랐다.
"더 보여줘. 이 눈으로 전부 봐줄테 니까."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베어야 하는 건 눈앞에 있는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를 조종하는 마법의 흐름이었다.
조금 전 진혼검과 함께 도플갱어를 벨 때 검이 내 팔이 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로 그 느낌을 찾아야 했다.
고오오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만화공의 기운을 일으켰다. 열기로 타오르는 오러가 육체와 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검날에서 비틀어지는 오러를 물처럼 유연하게 가다듬었다.
검과 나는 하나.
신검합일이란 검에 자신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경지. 그리고 그 경지에 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져야 한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오러로 육체와 검을 휘감자 검이 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팔이 조금 더 늘어난 듯한 느낌.
라온은 그 감각을 유지한 채 하늘로 세운 검을 내리쳤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강하지도 않았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검격.
하지만 그 안에는 적을 베겠다는 라온의 의지가 어려 있었다.
콰아아아!
의지가 깃든 붉은 참격이 멀린의 형제를 완벽하게 찢어발겼다.
"아아아악!"
멀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가면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신검합일이 마법만이 아니라, 그녀의 본체에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요검을 쓰지도 않고 신검합일에 이른 거야? 이 사이에 성장한 거야?""
비명은 잠시였다. 칭찬과 환희의 음성이 그 뒤를 이었다.
"아아,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넌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
멀린은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미친년."
라온이 검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검합일을 이룬 것보다 저 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 기뻤다.
-본왕의 육체를 노리다니, 저년은 에덴 중에서도 특히 미친년이로구나. 본왕이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뼛속까지 얼려버렸을 것이야.
라스가 어림없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누가 네 육체야. 내 몸은 내 거야."
라온은 팔짱을 낀 라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은 하분 성 밖. 하분 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내기 조건이 단순한 성이 아니라, 이 지역을 말하기는 하지만 녀석이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걸 수 있었다.
하지만 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것을 노리지 말라고 짜증을 내며 녹아내린 멀린의 형체를 노려볼 뿐이다.
-흥, 이딴 걸로 내기에 이겼다고 할 생각 없으니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본왕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냐.
'도플갱어 안에 점장이 있는 것도 알려주고, 신검합일에 대한 힌트도 주고, 너 오늘 왜 그러는 거냐? 안 하는 걸 하면 죽는다고 하던데 이제야 떨어져 나가는 건가?'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예전에 말했을 터다. 본왕은 부하와 하인을 버리지 않는다고 그 늙은이는 세 번째 시녀의 조부가 아니더냐. 구할 수 있다면 구하는 게 옳다.
'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시리아가 루난을 괴롭히던 것을 알려준 것도 라스였다.
설마 진짜였어?
루난과 마르타, 유아에게 시녀라고 했던 게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친 건 자신이 아니라, 저 자칭 마왕 놈이었다.
-그리고….
라스가 스터린 산의 정상 부근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을 끼워 넣지 않아도 내기는. 아니, 네 몸은 본왕이 먹어 치울 것 같거든.
* * *
인간과 몬스터의 살점들이 장식품처럼 걸려 있는 기괴한 공간. 중앙의 백골 테이블에서 이 방과 어울리지 않는 들뜬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으으으."
배신의 마녀 멀린의 가면을 쓴 여성이었다. 그녀의 턱 끝으로 핏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피어나는 신음. 하지만 그 신음엔 고통보다는 환희가 담겨 있었다.
"아아."
여성이 살짝 가면을 들었다. 떨어지는 핏물을 손가락으로 받아 그대로 혓바닥 위에 찍어 내렸다. 붉은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신다.
"무조건 데려올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얼굴, 그 눈빛 다른 년에게는 안 줘…."
그녀가 모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흥분으로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우웅.
멀린의 가면을 쓴 여자가 긴 손톱으로 팔의 살을 쥐어뜯고 있을 때 허공이 일렁이며 안구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는 해골 가면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것이냐. 왜 도플갱어의 생명 반응이 끊어진 거지?
"죽었어."
-뭐? 대체 어떻게!
"밀랜드가 이전보다 강해졌어. 도플갱어의 기척을 읽고 세이렌의 그릇을 구해냈지."
살짝 들린 멀린의 가면 위로 붉은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그녀는 이 일과 상관없는 밀랜드의 이름을 팔았다. 아예 라온의 이름을 꺼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개조는 무슨 개조를 했다는 거야. 멍청해서 정체를 들킨 것도 모자라 세이렌의 그릇을 노린다는 것도 지 입으로 주절대던데"
-네 주술이라면 그 전에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난 구경만 할 거라고 말했잖아."
-망할 년이….
"너와 내 목적은 같지 않아. 그리고 난 딱히 세이렌의 그릇을 원하지도 않았고."
-세이렌의 그릇은 어떻게 됐지?
"살아 있어."
-후우.
살아 있다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해골의 가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년. 네년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안구에 열화와 같은 빛을 뿜어내며 멀린의 가면을 노려보다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흐으으."
여성이 살짝 들린 멀린의 가면을 얼굴에 바짝 붙이며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는 내 거야.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 * *
라온은 만화공의 정심한 기운으로 점장의 몸에 어린 흑마법의 기운을 지우고 활력을 넣어주었다. 창백하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빨리 잡아서 다행이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돌이킬 수 없을 뻔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
"후우…."
"라온 님!"
"검사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점장을 업었을 때 뒤에서 도리안과 유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경악한 얼굴의 밀랜드와 병사들 그리고 도리안이 유아를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도리안의 등에서 뛰어 내린 유아가 점장의 팔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 일어나! 앞으로 일 안 한다고 뭐라 안 할게! 제발!"
"유아야."
유아가 턱을 바르르 떨며 라온을 올려보았다.
"괜찮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아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앙!"
점장이 무사하다는 소리에 유아가 도플갱어 앞에서도 참던 울음을 터트렸다.
"유, 유아야."
그 울음이 각성제가 된 건지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점장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유아가 고개를 들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으로 점장과 눈을 마주치고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나 무서웠다고! 할아버지!"
"그래. 미안하다. 유아야."
라온이 점장을 내려주자, 유아가 점장에게 폭 안긴 채 더 큰 울음을 터트렸다. 점장은 힘없는 손으로도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싸안으며 서로를 확인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울렁인다. 아이스 트롤 로드를 잡고 영웅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한 만족감이 심장을 울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밀랜드는 유아와 점장 그리고 도플갱어가 터지고 시꺼멓게 그을린 곳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라온은 서리의 가지에서부터 지금 이곳까지 이루어진 도플갱어와의 전부를 말해주었다.
"으음, 부끄러워서 뭐라 할 말이 없군."
밀랜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것도 파악하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우연히 알았으니까요."
"그건 핑계가 되지 못해. 자네에게도 저 둘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네."
도플갱어. 그것도 흑마법으로 개조하여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밀랜드는 본인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유아와 점장에게 찾아가 직접 사과를 하고, 바로 경계 강화를 지시했다.
진짜 리더의 책임감을 보는 것 같아서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 * *
도플갱어의 습격 이후로 이틀이 지났다.
라온은 홀로 연무장에 서서 검을 쥐고 있었다. 위에서 수직으로 내리긋는 참격에 극쾌의 의지가 담긴다. 마치 처음부터 검을 내리고 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쾌검이었다.
하지만 라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아니야."
멀린의 가면을 베었을 때 깨달았던 신검합일의 경지는 다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 순간에만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 해보았으니, 조만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 없느니라.
라스는 어울리지 않게 조언을 해주었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거냐.'
-본왕은 원래 관대하다. 곧 네 몸이 본왕의 손에 들어올 테니, 더더욱.
도플갱어를 잡은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모르겠군."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 문이 열리고 유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검사님."
유아가 코를 훌쩍였다.
"하, 할아버지가 일어나셨어요."
"그래?"
점장은 유아와 잠시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잠들었다. 한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이제야 깨어난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검사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는데,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자신 역시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유아를 따라 의무대로 향했다. 낡았지만, 잘 관리한 병실로 들어가자, 점장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그 앞에 밀랜드가 서 있었다.
"사령관님?"
이곳에 밀랜드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뭘 그리 놀라는 건가. 병문안을 왔을 뿐인데."
밀랜드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직접 찾아오다니, 미안하다고 했던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
"검사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잘못했으면 저 어린 것들 혼자 두고 떠날 뻔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점장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머리를 숙였다.
"성의 주민을 구해줘서 고맙네. 이런 사태를 막지 못하다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어."
밀랜드가 입술을 깨물며 똑같이 고개를 내렸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밀랜드와 점장의 인사를 막으려 했지만 둘 다 요지부동이다.
"이건 사령관으로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전하는 감사일세."
"감사 인사도 받아주시지 않으면 전 해드릴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인사를 받아주고 나서야 두 사람이 머리를 들었다.
"라온 검사님. 이런 상황에 죄송하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에, 에덴의 귀신들이 제 손녀를 노렸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점장은 본인이 죽다 살아난 와중에도 손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령관님도 있으니, 지금 말하면 되겠어.'
에덴이 유아를 노리고 있으니, 지그하르트에 함께 가자는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거친 뜀박질 소리와 함께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3번 정찰대장 라딘이었다.
"사,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그가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말을 이었다.
"모, 몬스터들이 성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몬스터들이?"
"그 규모가 웨이브에 맞먹을 정도입니다!"
웨이브에 맞먹는다는 말에 밀랜드와 라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으음, 밖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잘 회복하게."
밀랜드는 점장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고서, 라딘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유아에 관한 일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유아야. 할아버지 잘 모시고 있어."
"네!"
억지로 힘차게 대답하는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밀랜드를 따라 성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하얀 폭풍을 일으키며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파도를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움직이는 걸 보면 또 에덴인가? 정말이지 끈질긴….'
몬스터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던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뭐지?'
성으로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의 기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예전이 식욕과 광기로 물들었다면 지금은….
공포 그리고 두려움.
몬스터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질겁한 표정으로 석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치는데 성벽이 방해라도 되는 것처럼.
'뭐야.'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142화
"두 번째 웨이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겠군."
밀랜드는 하분 성으로 몰려오는 누렇고 푸른 파도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웨이브급 전투태세를 발령한다! 대기 중인 검사와 병사들을 모두 소집해!"
그의 웅장한 목소리가 성벽 전체를 진동시켰다.
"병창을 열고, 전투를 준비해라!"
밀랜드의 빠르고, 정확한 지시에 멍하니 몬스터들을 보고 있던 정찰병들이 부리나케 성벽을 뛰어 내려갔다.
땡! 땡! 땡! 땡! 땡!
웨이브 때와 같은 최고 경계 경종이 하분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이게 또 무슨 일이야!"
"젠장! 올해 액땜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데!"
"닥치고 빨리 움직여! 곧 온다!"
"병창이 열렸으니, 무기부터 챙겨!"
경종을 들은 검사와 병사들이 숙소와 연무장에서 튀어나와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딘."
밀랜드가 입술을 깨물고 있던 라딘에게 손짓했다.
"네가 가장 마지막에 정찰을 나갔었나?"
"예. 3일 전에 다녀왔습니다."
"이 일의 징조는 없었나?"
"보고드렸듯이 특별한 변화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이 또 수를 썼을 가능성도 있겠군. 몬스터를 조종하는 세 놈들의 능력이니까."
밀랜드가 동의를 구하듯 라온을 보았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 이번은 아닌 듯합니다."
라온이 성벽 아래를 굽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예. 에덴 놈들이 멍청하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한 번 실패한 방법을 반복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몬스터들의 표정이나 기세가 평소와 다릅니다. 살육이나, 광기가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나도 그걸 느꼈다. 그래서 에덴이라고 생각했지."
밀랜드는 검집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일도 쉽게 넘어가긴 힘들겠어."
"그럴 거 같습니다."
-후우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가 잔불처럼 일어섰다.
-드디어 왔구나.
녀석은 앞의 몬스터가 아니라, 저 먼 곳. 희미하게 보이는 스터린 산을 노려보았다.
'뭐가 온다는 건데?'
-본왕이 말했잖느냐. 잠꾸러기가 있다고. 그 망할 놈이 드디어 깨어났다.
라스의 푸른 눈동자에 귀화가 타오른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으며,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1달 전에 도망치라고 말했던 거?'
-그렇다. 그때 말했던 놈이 이제야 일어났다. 그 도플갱어가 터질 때 깨어났겠지.
'무슨 드래곤이라도 되는 건가?'
라온이 라스의 시선을 따라 스터린 산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불안감이 드는 정도.
-드래곤?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라스는 코웃음을 치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뭔데.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도망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이미 늦었다. 비몽사몽일 때는 기회가 있었지만, 놈은 이미 너희를 포착했으니까.
'뭐?'
그 말에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훑어내렸다.
-놈은 이 성을 지우고, 너희 모두를 죽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합당한 제물을 바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제물? 무슨 제물! 대체 누가 오는 건데!'
라온이 라스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녀석은 평소와 달리 여유 넘치는 미소를 흘렸다.
-네 눈으로 직접 보아라. 본왕에게 그걸 말해줄 의리는 없으니.
'너….'
-말했지. 이번 내기는 결국 본왕의 승리로 끝나게 될 거라고. 이렇게 되면 승리 정도가 아니라, 네 몸을 가져갈 수도 있겠어.
라스는 저 위에서 내려오는 존재가 이 성을 밀어버릴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후우…."
라온이 깊게 가라앉은 숨을 내쉬었다. 라스의 반응을 볼 때 예측이 되는 존재가 몇 있었지만,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정렬!"
"창병과 보병은 성벽 앞에 정렬하라! 자리가 없는 궁병은 성벽 아래에 서도록!"
빠르게 준비를 끝낸 병사와 기사들이 각자의 위치에 서고, 긴장한 표정으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후, 시발…."
"올해 운이 더럽다더니…."
"아주 거지 같다. 거지 같아!"
병사들은 사막의 삭풍처럼 밀려오는 몬스터들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에겐 사령관님이랑 라온 님이 있잖아!"
"하긴 라온 님이 온 이후로 사상자가 크게 줄었지."
"아이스 트롤 로드 슬레이어에 이어 도플갱어 슬레이어이기까지. 역사를 쓰고 계시잖아."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야."
검사와 병사들이 자신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신뢰가 듬뿍 담긴 표정. 지금으로선 온전히 받아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사령관님."
라온은 혀끝에 이는 씁쓸한 맛을 느끼며 밀랜드에게 다가갔다. 이쪽을 보는 그의 시선에도 믿음이 가득 어려 있었다.
"혹시 말입니다. 이기기 어려운 적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기막을 일으켜 자신과 밀랜드를 덮었다.
"자네답지 않은 질문이로군."
밀랜드의 표정은 가면이라도 쓴 듯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당당한 기세를 유지하며 검집을 툭 쳤다.
"그래도 싸운다. 이 성 뒤에는 수많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버텨서 희생을 줄일 것이다. 그게 하분 성의 존재 이유니까."
"…그렇군요."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드래곤이라도 날아오면 모를까. 오는 놈의 정체를 모르니, 설득할 수도 없었다.
'결국 만나 볼 수밖에 없겠어.'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벨 각오를 하며 라온이 숨을 골랐다.
-흐음.
라스는 여유 넘치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본왕이 파인애플 소녀는 확실하게 구할 테니까.
'시끄러워.'
라온은 즐거워하는 라스를 밀어버리고, 정해진 위치에 섰다.
라스의 말은 진짜다.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올 것이다.
하지만.
"라온 님. 믿고 있겠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손가락이 뽑히도록 활 쏠 테니까. 뒤는 맡기세요!"
병사들 그리고 검사들이 자신의 등을 보며 힘을 얻는 게 느껴진다. 저 기대 어린 시선을 배신하고 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기대를 얻는다는 것도 그저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군.'
다른 사람의 신뢰와 기대를 받는 건 기쁨 그 이상의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았다. 암살자 때였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 망할 놈 때문에 별걸 다 배우네,'
라온이 라스를 노려보며 검병을 꽉 쥐었다.
"으아, 망했다. 망했어."
도리안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흘리며 배 주머니에서 통나무와 바위를 무더기로 꺼내놓았다. 몬스터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려 할 때 뿌리려는 것 같았다.
"전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밀랜드가 검을 뽑으며 마지막 준비를 지시했다. 병사들이 복명복창하며 창대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라온."
그가 고개를 돌리며 라온을 불렀다. 성의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번 전투사는 자네에게 맡기지."
전투사란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한 마디의 말이다. 지금까지는 항상 밀랜드가 해왔지만, 그걸 처음으로 라온에게 넘긴다는 뜻이었다.
"왜 제게…."
"내가 말하는 것보다 자네가 말하는 게 효과가 좋을 것 같으니까."
밀랜드가 턱짓으로 병사들을 가리켰다. 믿음이 어려 있는 시선들에 가슴이 들끓어 올랐다.
'전투사….'
살아온 방식 때문인지 말주변은 없지만, 바라는 건 하나 있었다.
라온이 몸을 돌렸다. 하분 성 전체의 시선을 마주하며 옅게 웃었다.
"모두 살아남아라!"
멋없는 한마디에 진심을 담았다.
"그, 그게 다예요?"
"생각보다 말을 너무 못하네."
도리안이 입을 떡 벌렸고, 베토는 피식 웃었다.
"음…."
"남자다워서 좋은데 뭘."
에드퀼은 그저 바라보았고, 테리안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단순해서 좋아."
"하긴 사령관님 전투사는 너무 길잖아."
"난 처음에 검술 학교 교장 선생님인 줄 알았다."
기사와 병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쟁 직전에 어려 있던 두려움과 긴장이 바람에 흩날리듯 사그라지고, 하늘을 찌를 듯한 군기가 일어섰다.
"일개 검사가 병력들의 사기를 최고치로 끌어 올리는군."
밀랜드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이게 지금 자네의 위치네. 지휘관을 넘어서는 신뢰가 있다는 뜻이지."
"저는 그저…."
"오늘도 부탁하네. 많은 병사를 구해주게나."
웃음을 지운 밀랜드가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다. 그 손이 주먹을 쥔 순간 세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쏴라!"
생존의 의지를 담은 은빛 화살 뭉치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몬스터들의 피부를 찢어발겼다.
"캬어어억!"
"크아아아아!"
"키아아아아!"
하지만 몬스터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용의 역린을 자극한 것처럼 눈동자를 일그러뜨리며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쏴!"
밀랜드의 지시에 수백 발의 화살이 연이어 떨어졌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더 많은 숫자가 생을 다하며 몸을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몬스터들이 동시에 몸통을 박아넣자, 성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올라온다! 백병전을 준비해라!"
"돌과 나무부터 던져!"
"이야아아아!"
도리안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돌과 나무를 던져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오크와 트롤, 크라트를 짓눌렀다. 창병들은 아래를 향해 창을 찔렀고, 궁병들은 끊임없이 시위를 튕겼다.
저무는 노을빛을 받은 칼날에 강대한 군기가 담겼지만, 몬스터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든 성을 넘겠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벽을 타고 올랐다.
라온이 몬스터들의 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눈동자에 가득 담긴 공포. 잘못 본 게 아니다. 몬스터들은 식욕이나 공격 의사보다 일단 이 성벽을 넘어 도망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크아아아아!"
가장 먼저 성벽을 오른 건 오우거다. 어마어마한 도약력으로 단 두 번 만에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이이익!"
"허억!"
오우거의 괴성과 살기에 겁먹은 병사들이 물러설 때 라온이 움직였다. 병사들의 머리를 깨부수려는 오우거의 오른팔을 단숨에 베어냈다.
"크어어어억!"
오우거는 반격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성벽 아래로 내려가려 했지만, 당연히 놓아주지 않았다. 빛살이 되어 뻗어 나가는 참격이 오우거의 머리를 날렸다.
"크어어어어!"
"캬아아악!"
뒤를 이어 트롤과 샤크몰이 개미 떼처럼 성을 올라왔다. 라온은 글래시아로 성벽을 덮으며 위기에 처한 병사들을 돕고, 몬스터들을 베었다.
"키아아아!"
성벽의 한 축을 부수며 샤크스팅이 올라섰다. 전신에 돋아난 가시들이 시위를 당기기 전의 화살처럼 바르르 떨렸다.
"허억!"
"샤, 샤크스팅이다!"
"가시가 날아온다!"
"히이익!"
샤크스팅의 가시가 살짝 들어가서 튀어나오려는 순간 놈의 목이 날아갔고, 그 뒤에서 라온이 나타났다.
"가, 감사합니다."
"라온 님!"
라온은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의 인사를 받고 성벽 너머를 보았다.
'동물까지 오는 건가?'
밀려오는 몬스터들의 뒤편에 스터린 산 부근에 살던 야생동물의 모습이 보인다. 웨이브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야생동물들이 도망치는 모습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으음…."
자신과 같은 걸 보았는지 밀랜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산 그에게도 지금 상황은 경악스러운 것 같았다.
"테리안!"
"예!"
그의 부름에 부사령관 테리안이 부복했다.
"정찰병들을 보내서 성 뒤편의 마을들을 피신시켜라. 성 내부의 민간인들까지. 전부!"
"예?"
생각지도 못한 지시에 테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빨리!"
"아, 알겠습니다!"
테리안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성벽 아래로 내려가 정찰병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역시.'
이제 이 상황이 웨이브보다 심각하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물러설 생각은 여전히 없어 보였지만.
라온이 입맛을 다실 때 성벽 위로 거대한 마름모꼴 그림자가 졌다.
"만타쿤이다!"
"두 마리! 양쪽에서 옵니다!"
병사들의 말대로 엄청난 크기의 가오리 형 몬스터 만타쿤이 날아가고 있었다.
라온과 밀랜드가 동시에 움직였다. 각기 좌측과 우측으로 떠오르는 만타쿤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두 자루의 검이 각각 다른 색의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앙!
반으로 갈라진 만타쿤 두 마리가 추락하며 성벽을 오르던 몬스터들을 덮쳤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며 일순간 소강상태가 되었다.
밀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주름진 노안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이어 오러 메시지를 보내왔다.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온다면 자네는 빠지게.]
[예? 그게 무슨….]
[아까 자네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겠어. 자네는 나보다 먼 곳을 보았군.]
그가 오크 무리를 베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위로 갈 수 있는 무인일세. 목숨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훗날을 생각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이쪽을 보는 일은 없었다.
'도망치라고?'
뒤를 돌아보았다. 신념과 믿음이 어린 시선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혼자 도망치려면 진즉 갔을 것이다.
콰아아아앙!
이를 악물고 검을 내리쳤다. 칼끝에 걸린 노을빛 불꽃이 섬전처럼 나아가 성벽을 가득 메운 트롤의 목을 갈랐다.
"혼자 도망칠 수는 없지."
라온이 서슬 퍼런 눈으로 여유롭게 웃는 라스를 노려보았다.
'네게 질 수도 없고.'
-의미 없는 발악인가?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지나봐야 알겠지.'
-네가 무릎을 꿇고 경악하는 모습이 벌써 그려지는군.
'내가 무릎을 꿇더라도 이들은 살릴 거야.'
누렇게 떠오르는 달 아래. 붉고 푸른 시선이 맞부딪쳤다.
* * *
수성은 다음 날 일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건 혈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싸움이었기 때문에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은 숨을 헐떡였고,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이 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와 사명감으로 끝까지 창과 검을 내질렀다.
"거의 끝나간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
"버텨! 네 뒤에 동료를 믿어라!"
간부, 병사할 거 없이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끝까지 무기를 휘둘렀다. 그 열화와 같은 군기에 몬스터들의 파도가 잦아들고,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해가 뜨면 우리의 승리다!"
"우와아아아아!"
어제보다 확연히 줄어든 몬스터들의 숫자에 병사들의 눈에 다시 힘이 깃들었다.
"키아아아아!"
"크라라락!"
다만 몬스터들의 반응도 평소와 달랐다. 많은 숫자가 줄었는데도 도망치기는커녕 더 간절하게 성벽을 올랐다. 물론 생각 없이 올라섰다가 검사와 기사들의 검에 목을 헌납했지만.
"이놈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도망칠 때가 됐는데?"
"해는 왜 안 뜨는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일출 시간이 한참 지났잖아!"
몬스터들과 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해가 뜨지 않는다?'
밤이 계속되는 듯이 하늘은 여전히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밤의 커튼을 들추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솟구친 세 개의 뿔을 본 순간 무저갱을 마주한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아…."
저 먼 곳. 들리지 않아야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추워…. 졸려…. 귀찮아…. 하지만 깼어…."
그가 퍼렇게 질린 입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빛이 사그라드는 검은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영혼이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이런 놈이 존재했다니.
스멀스멀 피어나는 죽음의 기운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마왕의 위용. 마의 화신이 이곳을 노리고 있었다.
"추워… 간신히 잠들었는데…. 또 깼어…. 다 귀찮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백야를 짓밟는다. 세상의 빛이 모두 그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저놈이냐? 네가 말했던 잠탱이라는 게?'
라온이 이를 악물고 꽃팔찌를 내려보았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구나.
라스의 푸른 눈동자에서 섬뜩한 냉기가 요동쳤다.
-저 굼벵이의 이름은 받아들이는 자. 슬로스.
슬로스라 칭한 괴물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본왕과 같은 위에 오른 <나태>의 군주이니라.
143화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빌어먹을.'
진짜 마왕이 나타나다니.
라스의 호언장담을 듣고 생각했던 최악의 가정이 현실로 일어났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저 괴물은 라스와 동급의 마왕, 나태의 군주였다.
그 정체가 거짓이 아닌지 슬로스가 움직일 때마다 어둑한 하늘과 땅이 일그러진다. 숨 쉬듯 뿜어내는 막대한 마기에 공간이 깨져나가는 것이다.
"저, 저건 대체 무엇이냐…."
슬로스의 기운을 읽은 밀랜드가 검을 쥔 손을 떨었다. 마스터에 오른 그에게도 마왕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아니, 강하기에 더 큰 경악을 느낀 것 같았다. 철인 같았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구겨졌다.
-마계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기운을 모았군.
라스는 다가오는 슬로스를 굽어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잠만 쳐 자는 잠탱이 주제에 제법이구나.
'마왕이 왜 여기에 있지? 너만 인간계에 올라온 거 아니었어?'
라스가 가끔 다른 마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 땅에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라온으로서는 슬로스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놈이 왜 이곳에 있는지 알려줄 필요도 없지만, 그걸 알려줘도 아무 의미 없다.
'의미가 없다? 재수 없는 소리만 골라 하는군.'
-사실이다.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라.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라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저 말대로 알려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저놈이 왜 이곳으로 오는 거지?'
-너희들이 잠에서 깨웠으니까.
라스가 섬뜩한 눈으로 성벽에 선 병력들을 쭉 훑어내렸다.
-슬로스는 저 산 정상에서 쳐 자고 있었다. 죽은 듯 잠에 빠져서 처음엔 본왕도 몰랐지. 하지만 골짜기에서의 전투, 웨이브, 투구 쓴 미친놈들의 습격으로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났다.
'그럼 전에 다시 잠들었다는 잠꾸러기가….
-그래. 저 망할 놈이다. 마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자는 잠탱이답게 일어나지 않고, 다시 잠에 빠졌었지.
라스는 한 달 동안 잠만 자는 멍청이라며 누군가를 욕했는데, 그게 바로 저 마왕이었던 모양이다.
-도플갱어가 폭발하면서 터진 굉음과 흑마법의 기운을 느끼고 저 게으름뱅이가 완전히 깨어난 거다.
"허…."
잠에서 깨웠다고 저렇게 죽일 듯한 기파를 내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잠이 아니다. 저놈은 별종 중 별종. 잠 때문에 마왕이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지.
라스는 점점 강해지는 슬로스의 기파를 즐기며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슬로스는 마계에서도 잠만 쳐 자던 마족이다. 그런 놈이 어떻게 마왕이 되었을까?
'설마…'
지금 상황과 연결해보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 표정을 보니 알아차린 모양이군. 그래. 잠을 잘 때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초승달처럼 올라가는 라스의 미소에 살기가 흘러내렸다.
-마계는 싸움과 욕망의 땅. 그런 세계에서 대놓고 잠을 잔다는 건 날 죽여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놈은 오히려 공격해오는 마족들을 모조리 때려죽이면서 살아남았지.
'허….'
-시비를 걸면 죽이고, 공격을 해오면 죽이고, 잠을 깨우면 죽이는 게 몇천 년 동안 계속되었을 때 저놈은 마계의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 급박한 상황 때문일까. 라스의 마계 이야기가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럼 지금도….'
-맞다. 지금 녀석이 움직이는 건 몇 번이나 잠을 깨운 너희들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다.
'망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슬로스를 막을 방법이 없다. 잠을 깨운 보복을 하러 오는 마왕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저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건 오직 글렌 지그하르트뿐이었다.
-막는 법? 저 상태의 슬로스를 막을 방법은 두 가지다. 강자와 제물. 이곳에는 그 둘 모두 없지.
라스가 새하얀 대지를 뭉개며 다가오는 슬로스를 가리켰다.
'강자라고?'
-그래. 네 할애비나 본왕 같은 존재가 이 성에 있다면 슬로스는 싸움을 피할 것이다.
'왜?'
-이기든 지든 싸움이 오래 걸리니, 잠을 자지 못하지 않느냐.
'허….'
들으면 들을수록 미친놈이다. 슬로스는 라스 이상으로 정신 나간 마왕이었다.
"추워…. 졸려…. 다 귀찮아…. 하지만 내 잠을 방해하는 건…."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느려터진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닭살이 올라왔다. 목소리에 실린 힘이 무시무시했다.
"어? 어어…."
테리안이 슬로스의 존재를 느끼고 옷이 땀에 젖을 정도의 식은땀을 흘렸다. 눈동자가 썩은 달걀처럼 탁 풀렸다.
"저, 저 괴물은 뭐냐…."
"끄어억…."
"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검사와 기사 중 상위의 무인들도 슬로스의 압도적인 기파에 손에 쥔 무기를 떨어뜨렸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전의가 빠져나간다. 도망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제기랄.'
감각이 뛰어난 사람부터 슬로스의 기운을 느끼다 보니 강자일수록 빨리 절망을 하게 된다. 슬로스가 다가올수록 이 사태는 심각해질 것이다.
"졸려…. 너무 졸려…. 그렇지만 추워…."
슬로스는 졸립다와 춥다는 말을 반복하며 다가왔다.
'졸린 거야 그렇다 치고. 춥다고?'
마왕이 추위를 느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춥다고 하는 거지?'
-처음에 본왕이 말하지 않느냐. 저놈의 이명은 <받아들이는 자>. 추위도, 더위도, 공격도 모두 받아들인다. 그게 놈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귀찮아 보이는 능력이지만, 그에 따른 큰 장점이 있는 것 같았다.
'춥지 않은 곳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저놈은 나태의 군주다.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놈이지. 저 멍청이에게 상식이라는 걸 기대하지 마라.
라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쳐 있다. 아무래도 마왕은 정신이 나가야만 할 수 있는 것 같다.
"크허억!"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미, 미쳤어. 저걸 어쩌겠다고…."
이제 평범한 기사와 검사들도 슬로스의 기운을 느꼈다. 모두 투지를 상실하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후욱…."
라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낮췄다. 자신에게 전해지는 압박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네게 주어진 선택권은 두 가지다.
'두 가지?'
-본왕에게 네 몸을 넘기고 저놈을 막던가, 이대로 몰살을 당하던가.
라스의 눈동자가 선명한 빛으로 일렁인다.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두 방법을 제외하고는 네놈과 저 인간들이 살아나갈 방법은 전무하다. 장담하지.
'....'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라스의 말대로 상황은 최악. 헤쳐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저 산부터 이 성벽 앞까지는 결계나 다름없다.
'결계? 그런 건 느끼지 못했는데.'
-수백 년 동안 인간과 몬스터의 피와 한이 배이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피의 결계지.
'그게 어쨌다는 건데?'
-슬로스가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안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오는 순간 중재자인 도마뱀들과 경계를 벗어난 너희 영감 같은 것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라스가 바스락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성벽을 가리켰다.
-대전쟁이 일어나면 평범한 인간들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할 테지.
'그런 싸움이 일어나면 슬로스도 잠을 못 자잖아.'
-말했지 않느냐. 저놈은 뒷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본왕과 같은 존재가 성 앞에 서 있지 않는 이상 놈을 막을 수는 없다.
라스는 더 늦기 전에 몸을 넘기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며 미소를 그렸다.
'네게 몸을 넘긴다고 저 사람들이 산다는 보장이 있나?'
-최대한 노력해보마. 처음엔 어쩔 수 없이 폭주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조절할 수 있느니라.
'폭주라고?'
-육체 없이 네놈과 혼이 연결된 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육체와 간격이 한참 떨어졌으니, 처음엔 폭주할 수밖에 없다.
'미친.'
욕이 절로 나왔다. 폭주한 라스와 잠을 자지 못해 짜증이 난 슬로스가 부딪치면 이 성 전체가 날아갈 것이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해야 해.'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아악!"
"끄아아아악!"
"저, 저기 저거! 저게 뭐야!"
"괴물이다…."
이젠 병사들조차 슬로스의 기파를 느꼈다. 그 전율적인 힘에 바로 기절을 하거나, 쓰러져서 거품을 물었다.
"라온."
여전히 앞에서 버티고 있던 밀랜드가 자신을 불렀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정신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와라."
"…예."
라온은 억지로 허리를 펴고 성문 바로 위에 선 밀랜드에게 다가갔다.
"고맙다."
"예?"
"네가 미리 경고를 해준 덕분에 민간인은 모두 내보낼 수 있었어. 넌 하분 성에 와준 최고의 복덩어리다."
가는 웃음. 그는 지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른 이들을 데리고 물러나라. 이곳엔 내가 남아 버티겠다."
밀랜드가 내려간 검을 들어 올렸다. 검날에서 뿜어지는 강기가 시퍼런 횃불이 되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혼을 불사르는 서기였다.
"사령관님…."
"난 살 만큼 살았고, 많은 것을 이루었다. 너와 다른 녀석들은 이곳에서 죽기엔 아깝다. 너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어."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웃는 이 사람을. 평생을 하나만 바라보고 온 고집불통 사령관을 이대로 보내긴 싫었다.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라온은 밀랜드의 옆에 붙은 채로 검을 들어 올렸다.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며 만화공을 일으켰다. 은빛 칼날 위로 피어난 꽃송이가 만개하며 어둠을 불태우는 서광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두 자루 칼날에서 치솟은 열화와 같은 빛이 어둠을 갈라내기 시작했다.
"이건…."
"사, 사령관님! 라온!"
"두 사람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어!"
쓰러져서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사람들이 상서로운 열기를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모두 성을 빠져나가라! 사령관님의 명령이다!"
라온은 더 강한 빛을 뿜어내며 밀랜드의 지시를 외쳤다.
"그게, 무슨…."
"가, 갈 수 없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일어서지도 못하는 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게냐! 빨리 사라져라!"
밀랜드가 앞을 보며 악을 질렀다, 그의 입가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바로 옆에 있는 자신만 볼 수 있다. 그의 얼굴에서 생기가 지워지고 있었다.
"저, 저흰…."
"물러난다! 전부 일어나서 성벽을 내려가! 남문을 열어라!"
테리안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성벽을 내려갔다. 누구보다 힘들겠지만, 누구보다 밀랜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도, 도련님!"
도리안은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도련님이라고 외쳤다.
"도리안. 먼저 가라. 나도 곧 갈 테니까. 먼저 가!"
"정말 오실 거죠?"
"내가 여기서 죽을 놈으로 보여?"
"아, 알겠습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안 오면 죽여버릴 겁니다!"
녀석은 말아쥔 주먹을 들어 올리고, 정찰병들부터 성벽을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왔다. 맨날 죽는 소리를 해도 이럴 때는 믿음직스러웠다.
가라고 말해도 병사들은 쉬이 떠나지 못했다. 계속 뒤를 돌아 자신과 밀랜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너도 가라. 이 이상은 무리다!"
밀랜드가 새파란 입술을 떨며 어깨를 밀었다.
"조금만 더 버티겠습니다!"
라온은 경련이 오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저었다. 감각이 지금 떠나야 한다고 말하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라스의 퉁명스러운 음성과 동시에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이 강해졌다.
"춥고 졸립다…. 너희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성벽에 근접한 슬로스가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기파에 정신의 끈이 잠시 끊어질 뻔했다. 간신히 만들어 놓은 오러의 횃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휘청였다.
쿠구구구!
점차 강해지는 압박에 결국 만화공의 불길이 먼저 꺼졌다.
"크으윽…."
라온은 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이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장기조차 찢겨나갈 압력이었다.
"크아아아!"
밀랜드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허억!"
"어어억!"
"또, 또야!"
두 사람의 기세가 흐트러지자 퇴각하던 병사들이 다시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말했지 않느냐. 네게 선택권은 두 개뿐이라고. 이제 결정해라. 죽을 테냐. 아니면 본왕에게 몸을 넘길 테냐.
'두 개….'
라온이 끝까지 버티는 밀랜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들은 정보는 많아.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지만, 전생처럼 생로가 꽉 막힌 느낌은 아니다.
라스에게 얻은 정보를 잘 조합하면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자신을 믿어준 전우들을 꼭 살리고 싶었다.
춥다. 졸립다. 비슷한 강자. 시간. 귀찮음, 단순함.
라온은 라스에게 들은 정보를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이 순간 그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영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통 안의 구슬처럼 돌아가던 단어들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하나의 답안을 도출해냈다.
'이거라면….'
도박이지만 모두를 구하고 이득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이 도박에는 도움이 필요했다.
'라스.'
-결정했느냐? 결국 몸을 바치기로….
'거래를 하자.'
-뭐라? 거래?
'네 분노를 받을 테니, 저 무식한 마왕 놈 앞에서 서 있을 수 있게 해줘.'
라온은 확신을 담은 눈으로 라스를 보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뭐 하려고 하는 것이냐.
'네가 말했지? 내가 살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고. 이건 그것과는 다른 방법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네놈이 슬로스 앞에 설 수 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이냐!
'달라져. 그니까 할 거야 말 거야!'
-이득이 없다. 어차피 네놈의 몸은 결국 본왕의 손에 들어오니까.
'아니 안 들어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죽더라도 네게 몸을 넘기지 않을 거다.'
-개소리를!
'지금까지 봐왔으면 알겠지? 네가 거짓말하지 않듯이 나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스가 뼈를 으깨듯 이를 갈았다.
'네게 몸을 넘겨도 이 사람들은 죽어. 그렇다면 나도 이곳에서 함께 죽겠다.'
라온이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검병을 내려놓았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이놈!
라스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린다. 당황한다는 증거였다.
'만약 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네게 몸을 넘기지. 약속한다.'
-크으으윽!
놈은 성벽에 거의 다다른 슬로스와 자신을 번갈아 보며 이를 갈았다.
"끄으윽!"
라스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먼저 밀랜드가 무너졌다. 이 짧은 순간에 벌써 20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가쁜 숨만 내쉬었다. 기절하면서도 검을 쥐고 있다니,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콰아아아아아!
그가 쓰러지자 하늘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어깨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라스!'
-빌어먹을! 이 대가는 클 것이다
힘이 쭉 빠진 전신으로 활력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라스가 넘겨주는 기운이었다. 그와 함께 혼의 깊은 곳에 대가로 받은 분노가 스며들었다.
"후우욱…."
하지만 라스는 많은 기운을 주지 않았다. 전력을 다 써야만 간신히 버틸 정도의 힘이다.
'좀생이 같으니.'
라온이 바득 이를 갈며 불의 고리를 공명시키고, 만화공은 운용하면서, 글래시아를 풀어놓았다. 전생의 격까지 불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심장과 폐가 찌그러진다.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크으으으!'
영혼을 짓누르는 공포와 육체를 부수는 압력을 이겨내며 두 다리로 성벽 위에 섰다.
콰아아아아아!
결국 성벽에 도착한 슬로스와 눈을 마주쳤다. 귀찮음만이 가득하던 마신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돋아났다.
됐어.
방금의 눈빛으로 확신했다. 이 상황은 이용할 수 있다.
"나태의 왕이여. 너라면 느꼈겠지?"
라온이 피가 흐르는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나는 라스 님을 모시는 분노의 그릇이다."
-부, 분노의 그릇? 네놈이 왜 분노의 그릇이라는 것이냐! 무엇을 하려는 거야!
'뭘 물어.'
까부는 널 짓밟고, 두 번째 호구를 잡는 중이지.
1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