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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0

40화 신의 눈을 가려라(2)

"결국 2황자가 황궁을 차지. 1황자는 경미한 부상을 입고 패퇴. 서쪽으로 도주 중."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제이슨의 시선은 무미건조하다.

당연히 일어날 일이었으니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 것이다.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비등한 세력이었지만, 모든 정보의 집합소인 이곳. 그리고 이곳의 장인 제이슨 클라록에게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결과인 탓이다.

"서쪽의 노턴 후작과 합류해 세력을 정비할 것으로 보임. 반면 2황자는 황궁은 장악했지만, 옥새 탈환에 실패라······."

서류를 내려놓고 지루하다는 듯 턱을 괴는 제이슨.

"교수의 계획 그대로 진행되고 있네. 멍청한 황족 놈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말이야."

황위 쟁탈을 위한 치열한 전쟁.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그 전쟁이 한 명의 교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걸 그들은 감히 상상이나 할까.

"양측의 피해는 어떻지?"

제이슨의 물음에 대한 답은 그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양쪽 다 피해가 심각합니다. 황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맞부딪쳤으니 1황자가 경미한 부상만 입고 도망친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 역시 계획의 일부지. 1황자가 당장에 죽으면 곤란하니까."

당장 2황자에게 힘을 싣고 있는 교수는 사실 황녀를 황제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지 않던가.

"교수가 데려온 자들이 결정적으로 전황을 뒤집었습니다."

비등했던 두 세력의 승패를 가른 존재가 바로 이들이었다.

교수가 데려온 빙의자들.

알려진 명성에 비해 너무 강한 자들.

물론 그들이 빙의자라는 건 제이슨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2황자에게 옥새를 쥐여주지 않은 것 역시 교수의 계획이겠지. 황궁을 장악한 그에게 옥새까지 들어간다면 로열 나이츠가 움직일 테니 말이야."

제국 무력의 정점이라 불리우는 자들.

오직 황제의 명만 따르는 그들이 옥새를 쥔 2황자를 황제로 인정한다면 그대로 끝이다.

황금 사자가 어느 한쪽에 붙는다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황궁의 재탈환은 불가능할 터이니.

"옥새의 위치는? 파악됐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교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린 게 아니겠습니까."

"쯧, 제아무리 교수라도 그렇게까진 못해. 빨리 위치 파악해 봐."

"예."

이번 전쟁에는 몇 개의 중요 키워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옥새.

황제를 상징하는, 국가를 상징하는 천 년 옥새.

그것의 위치를 파악하는 자가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것이다.

"그리고 황녀 쪽은 어떻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나?"

"아직 조용합니다. 다만 욘 토르노가 버티고 있는지라 가까이 진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동향만 파악하는 정도입니다."

"······동향만?"

제이슨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죄송합니다."

"우리가 그 무엇보다 빠르게 파악해야 할 게 황녀의 움직임이야."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변수.

"물론 가능성은 적지."

시르베르트 교수가 짜고 싶은 판의 모양새는 알겠다만, 너무 난이도가 높다.

"욘 토르노와 동부의 귀족들이 바보도 아니고 군사를 일으킬 리가 없잖아. 황녀의 무엇을 보고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냐고."

분명 그리 생각했을 터였다.

한 사람이 합류하지만 않았더라면, 교수의 계획이고 뭐고 그대로 그 정보를 비싼 값에 팔아버렸으리라.

하지만 히오 파블렌코가 정말로 황녀의 일행이 되었지 않나.

'빙의자들이 황녀를 황제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지.'

그것 하나만으로 일말의 가능성도 없던 계획이 왠지 모를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계획이 되어버렸다.

"동부의 일을 최우선적으로 알아봐. 아니, 아니다."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냥 내가 직접 가지."

무미건조했던 그 표정은 어느새 즐거움이 짙게 번져가고 있었다.

* * *

실비아는 가만히 눈을 감는다.

"쉬십시오. 언제든 말씀만 하시면 출발 가능하도록 준비해놓겠습니다."

도망가고 싶다면 언제든 가능하다는 욘 토르노의 말.

그 말이 마음을 아프게 헤집는다.

마치 너는 자격이 없다고,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기에.

무척이나 아프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다.

- 너 곧 죽어.

어차피 자신은 죽는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약속했지 않나.

- 죽기 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서 발버둥쳐보자.

그러니 그 약속대로 발버둥쳐보려 한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하겠어요."

그게 하찮은 물장구가 되어버릴지, 해일이 되어 바다를 집어삼킬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눈을 뜬 실비아의 의지가 결연하게 빛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 보일 테니 백부님."

이전과 달리 흔들림이 없는 은색 눈동자.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자의 눈빛.

"저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욘 토르노는 그런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본다.

잠시간의 정적 후에 무겁게 열린 입.

"이틀 뒤, 연합의 귀족들이 모두 모일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가시죠."

* * *

- 난 몰랐네.

푸르넬이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히오에게 묻는다.

- 남은 교단은 리퓨에 여신을 모시는 교단뿐이라지?

"맞아."

히오가 알기로 벤타이얼 세계 속 유일한 신은 리퓨에라 불리는 여신.

신성국이 받들어 모시는 여신뿐이었다.

- 허허허. 적어도 내가 인간으로 살아 숨 쉬던 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신이 존재했다네.

수없이 많은 신이 세계를 관장하고 인간은 그런 신을 찬양하던 시대.

그렇다면 그 많던 신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 글쎄···. 이걸 연구하던 흑마법사의 말에 따르면 신은 죽었을 거라는군.

푸르넬의 시대에 일어난 어비스와의 전쟁.

그것으로 죽어나간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신 역시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란 이야기.

- 지금 알려진 신이 리퓨에 하나뿐이라면 충분히 그럴싸한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리퓨에 교단만큼은 건재해. 최근에 신탁이 내려왔고 성녀까지 탄생했으니까."

- 그래도 힘이 약해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네.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도 얼마 없다면서.

"최소 주교급은 되어야 신성력을 다루지."

- 그러니 더욱 신빙성이 있지 않나. 나의 시대엔 한낱 시골 마을의 사제도 신성력을 다뤘으니까.

푸르넬의 말을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신이 소멸했고 남은 신은 리퓨에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신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는 말이었다.

- 신의 숫자가 줄고 그 힘이 약해졌다.

푸르넬이 속삭이듯이 묻는다.

- 그럼 누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가?

목소리만 들려올 뿐임에도 왠지 음흉하게 웃고 있을 그 모습이 상상되었다.

- 흑마법사라네. 신을 부정하는 자들.

신의 뜻을 거역하는 마법사.

그들은 푸르넬의 시대, 그 이전부터 신의 눈을 피할 방법을 연구하던 미친놈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죽음의 기운을 다루는 법. 그것으로 마법을 펼치는 흑마법.

- 많은 흑마법이 탄생했지. 그중에는 신의 눈을 피하는, 신성을 막는 그런 종류의 마법도 많았어. 물론 그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말이야.

흑마법으로 대마도사의 경지쯤에나 올랐다면 모를까. 워낙 신의 힘이 곳곳에 널려 있던 시대라서 흑마법이 힘을 못 썼다고 한다.

- 하지만 지금 시대는 어떤가. 신의 힘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어. 흑마법의 힘이 온전히 발휘될 것이란 의미지.

"그 말은 그럼 흑마법에 길이 있다는 말이야?"

- 어디 길만 있겠나. 자네는 그저 시도해보기만 하면 된다네. 내가 읊어주는 대로 말일세.

"······무슨 마법인데?"

푸르넬이 즐겁다는 듯 끌끌 웃기 시작한다.

- 다크니스, 신성을 가리는 어둠 마법.

* * *

다크니스.

본디 1서클의 흑마법으로서 단순히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 마법.

흑마법도 흑마법 나름이라 분류만 그리되어 있을 뿐이지 사실 죽음의 기운이 필요한 것도 아닌, 그저 단순한 1서클 마법이다.

- 하지만 이 흑마법사가 연구한 다크니스는 좀 다르다네.

첫 발상은 그것에서부터 시작한 게 맞다.

하지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완성된 마법은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 신성을 차단하는 것으로 효과가 변질되었으니.

- 그래도 다행인 점은 1서클 마법에서 영감을 얻은 마법답게 문양 자체는 복잡하지 않아.

문양은 복잡하지 않다.

이미 히오가 서클로서 새긴 것들로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문제는···.

- 사기(死氣)와 마력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필요하다는 것일세.

문양이 단순한 대신 다른 것이 많이 필요하다.

질보다 양으로 밀어붙이는 셈.

"나는 죽음의 기운을 다뤄본 적도 없는데."

- 그건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그 마력 다루는 재능이면 사기 또한 쉽게 다룰 거야. 거기다 우리 학파의 반지와 유령의 눈까지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가······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마법이 정말 통하느냐가 문젠데."

근거는 대충 알겠다.

신의 힘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으니 신성을 차단하는 마법안에서는 신의 시선이 닿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 물론 나도 장담할 수는 없네. 확신하는 방법은 시도하는 것뿐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눈만 가리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여.

"······좋아. 해보는 수밖에 없지 뭐."

가만히 앉아서 될까 되지 않을까 고민해봐야 나오는 것은 없다.

시도해 보면 답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럼 실험을 좀 해봐야겠네."

- 그렇지. 다크니스 마법도 미리 익혀놓고 그 많은 마력과 사기를 어떻게 준비할지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겠나.

"그건 내가 어느 정도 생각이 있는데······."

그렇게 푸르넬과 머리를 맞대고 한창 계획을 세우고 있는 와중.

똑똑-

짧은 노크소리 이후 곧바로 방문이 열렸다.

"히오 파블렌코."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의 기사 테오르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황녀 실비아.

욘 토르노와 단둘이 이야기하기 위해 응접실에 갔던 실비아가 돌아온 것이다.

"응? 이야기 다 끝냈어?"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딱딱했던 실비아의 표정이 금방 풀어헤쳐진다.

"응······."

"뭔가 잘 안 됐나 보네?"

"동부 연합 귀족들을 직접 설득하래. 당연한 말이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할 방법이 안 떠올라."

잔뜩 울상짓는 실비아.

뭐,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나마 이 정도로 대화가 끝난 거면 실비아에게 협조할 의사는 있는 것 같으니 최악은 아니랄까.

"이틀 뒤에 여기로 연합의 귀족들이 전부 모일 거야. 몬스터 웨이브를 막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그때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하는데······."

표정이 좋지 않은 실비아와는 달리 히오는 눈을 번뜩였다.

이거다.

"실비아."

기왕 다크니스 마법을 실험할 거. 화끈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 회의, 나도 같이 좀 가자."

아주 화려하게 말이다.

* * *

이틀 뒤. 욘 토르너의 성.

수천, 수만의 병사가 성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다.

동부에서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것이기에 제법 익숙한 장면이지만, 처음 보는 이들이 있다면 어디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것인 줄 알 정도의 군세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이끄는 각 가문의 가주들은 여독을 풀 새도 없이 회의장으로 집결한다.

올해의 몬스터 웨이브에 대해 회의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회의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예상치 못했던 인물과 마주하는 것이다.

"······황녀 전하?"

회의장의 상석에 앉아 있는 의외의 인물.

너무 뜬금없었기에 긴가민가했으나 저토록 눈에 띄는 외모와 빛나는 은발, 품위 있는 자태가 흔한 것이겠나.

"전하께서 어찌······."

연합의 귀족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각자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그리고 그때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녀의 옆에 앉아 있는 욘 토르노.

그리고 황녀의 뒤에 서 있는 덩치 큰 기사까지는 상식 범위 내의 인물이다.

헌데 그 옆에 있는 광대는 대체 무엇인지.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그 광대··· 아니, 히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씨익 웃으며 좌중을 둘러본다.

우스꽝스럽게 큰 모자를 고쳐 쓰고 벽에 기대어 놓은 큰 지팡이를 손에 쥔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의 작전 설명을 맡은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라고 합니다."

광대 같은 모습과

"여러분은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사기꾼 같은 말투.

아무리 봐도 이 엄숙한 회의장에 어울리지 않는 자.

연합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정작 욘 토르노와 황녀가 가만히 있지 않나.

"자, 그럼 작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번 작전명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서로 눈치 보는 와중에도 계속되는 히오의 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설명하는 작전명은.

"신의 눈을 가려라."

광오하다.

41화 신의 눈을 가려라(3)

볼렌스 백작은 동부에서 제법 위세가 높은 귀족이다.

욘 토르노의 뒤를 이어 다섯 손가락 안에는 꼽힐 정도.

그런 볼렌스 백작이 보기에 현 상황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다.

황녀의 갑작스러운 등장.

이건 조금 놀랍긴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재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라고 합니다."

한데 그거랑은 별개로 왜 광대가 나서서 작전을 브리핑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황녀와 욘 토르노는 그런 광대를 가만히 놔두고 있는 것인가.

···마법사? 그건 그저 광대의 다른 말이 아니던가.

"작전명, 신의 눈을 가려라. 여러분들의 소중한 병력도 아낄 수 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는 기가 막힌 작전이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결국 볼렌스 백작이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 광······ 자네."

"예?"

광대라고 나올뻔한 말을 간신히 틀었다.

혹시 욘 토르노나 황녀와 밀접한 인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몰려오는 몬스터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알고 말하는 겐가?"

"물론이죠."

길게 뻗어 있는 성벽의 모든 방위를 수비해야 할 정도의 대규모 공세.

그럼에도 수성의 이점을 크게 살릴 수도 없다.

"그 정도의 물량임에도 성벽을 끼고 막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대형 몬스터에게 피해가 막심할 테니까요."

상대하는 이가 인간이 아닌 몬스터인 까닭이다.

시작부터 성벽을 끼고 싸운다면 피해야 적겠지만, 성벽은 무적이 아니다.

대형 몬스터에게 피해가 누적될 것이고 그렇게 성벽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내성벽으로 후퇴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해지는 것이다.

"산맥 바로 아래까지 가서 구조물을 설치하고 한 단씩 병력을 물리는 방식으로 여태 싸워왔을 겁니다."

히오의 설명은 마치 몬스터 웨이브를 직접 겪기라도 한 것처럼 상세하다.

"기사와 스킬 사용자로 구성된 특공대를 꾸려 대형 몬스터를 최대한 요격. 나머지 병력은 시선을 끌고, 시간을 끄는 용도였을 겁니다. 특공대가 대형 몬스터를 최대한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물론 이는 위험하디 위험한 전략이다.

소수의 특공대를 위해 다수의 병력이 희생해야 하는 전략.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욘 토르노의 성이 수십 년째 건재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요격, 후퇴, 요격, 후퇴를 반복하고 기준치 이하로 대형 몬스터의 숫자가 떨어졌다 판단되면 그제서야 성벽 안으로 돌아갔겠죠. 본격적인 수성을 위해서 말입니다."

자세한 설명에 욘 토르노는 흔치 않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 표정이 그 표정이겠지만, 그는 충분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도 동행하겠어요.

전날 저녁에 있었던 황녀의 말.

연합 회의에 괴상한 차림의 자칭 마법사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 아닌가.

뭐, 그것까지는 괜찮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의 부탁이었으니 그 일행 한 명 정도 데려가는 것쯤이야. 감수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 제게 좋은 작전이 있습니다.

단순 동행이 아닌 작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 자세한 건 내일 모두 모였을 때 말씀드리죠.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놈을 가만히 두었던 것은 순전히 황녀 실비아 때문이었다.

이전의 대화에서 그 결연함을 보았기에.

반드시 해내겠다는 말을 하였기에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에게 알려준 정보라고 해봐야 몬스터의 대략적인 규모 정도.

그마저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한데······ 마치 보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리고 히오 파블렌코의 기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작전 대로만 한다면 전투의 시간도, 병력의 손실도 대폭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병력의 손실과 전투의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작전.

그에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볼렌스 백작이 직접 히오에게 물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왜 매년 힘들게 병력을 이끌고 여기까지 행차하겠나.

병력을 유지하고 이동하는 것도 전부 다 돈이다.

전투 한 번 할 때마다 손실되는 병력 역시 전부 돈이다.

그렇게 돈을 들여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내도 딱히 돌아오는 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손해만 보는 장사인 셈이다.

볼렌스 백작의 질문에 히오의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물론이죠. 여러분들은 전적으로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 모양새가 참 믿음 가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어느새 귀족들은 히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막대한 손실을 막을 수 있다지 않나.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방어보다는 공격을 위함이라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격을? 그것도 성에서 내려와서 말인가?"

"그렇습니다. 병사들을 앞세우는 게 아닌, 기사들로 최전선을 구성, 병사들은 최대한 가까이서 화살을 퍼붓다가 몬스터들이 접근하면 성 안으로 후퇴하는 걸로 하죠."

설명이 이어질수록 귀족들에 표정에 황당함이 깃든다.

"그렇게 되면 기사들이 고립되지 않나. 자네 말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기사를 희생시키자는 말인가?"

"기사들 역시 마음껏 몬스터를 학살하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성 안쪽으로 퇴각하면 됩니다. 간단한 작전이죠."

다크니스를 넓은 지역에 펼치기 위해 많은 양의 죽음의 기운이 필요하다.

히오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의 기운을 얻고, 연합의 귀족들은 제 병력의 희생이 없어서 좋고.

그렇게나 좋은 작전임에도 역시 귀족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그럼 성벽이 뚫릴 수도 있다고 자네가 자네의 입으로 말했지 않나!"

"그럼 그렇지. 몬스터를 겪어본 적도 없을 자에게 무슨 기대를······."

"시간 낭비요. 시간 낭비. 하려던 회의나 진행합시다."

혹시나 싶어 관심을 가졌다가도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 대부분.

그런 반응 속 몇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히오에게 묻는다.

"그 말대로면 그냥 성벽에서 수성하면 될 것이지 쓸데없이 나가서 왜 시간을 끄나?"

"그리 도망만 쳐서야 밀려드는 몬스터는 누가 잡으라는 말인가. 어허 참. 어디서 저런 자가 나타나서는······."

질문을 가장한 비아냥이었다.

그럼에도 히오는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질문자를 가리킨다.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작전의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으니.

"병사와 기사가 성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함입니다."

"시간을 번다?"

"네, 제가 준비할 시간만 벌면 됩니다."

"준비라니? 자네가 그 많은 몬스터를 다 죽이기라도 할 건가?"

"정확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병력과 시간과 돈을 크게 절약하는 셈이죠. 제게 큰 빚을 지시는 겁니다. 하하하하."

그 말이 원체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잠시 정적에 휩싸인 실내.

그리고 이어지는 화난 목소리.

"제정신이 아니군."

"내 전하의 앞이라 자중하고 있었네만 도가 지나치지 않나!"

"저런 사기꾼을 이곳에 들이는 게 말이나 됩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썩 나가게! 몬스터 웨이브가 장난인 줄 아는가!"

격한 반응에 히오가 손을 내젓는다.

"진정들 하시고요. 저도 그렇게 경우 없는 놈은 아닙니다."

반대손에 쥔 지팡이를 가볍게 흔드는 히오.

갑작스런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다.

처음과 똑같이 변함없는 실내.

그럼에도 히오는 주위를 둘러보며 미소 짓는다.

어떠냐는 듯, 잘 봤냐는 듯이.

"자, 어떻습니까. 이제 좀 믿음이 가십니까?"

장난스러운 그 모습에 귀족들은 더욱 격분한다.

자신들이 고작 광대 따위에게 우롱당했다 생각하는 것이다.

"뭐 하자는 겐가!"

"우릴 우롱하는 거야!"

"어디 이 빌어먹지도 못할 놈이······."

그런 반응 가운데.

"······이게 무슨."

놀란 채 몸을 굳힌 자들이 있었으니.

"무, 무슨 짓을 한 것이야."

스스로가 귀족이면서도 기사로서 성취를 이룬 이들.

그리고 귀족의 개인 호위 기사, 수호 기사.

히오의 장난스런 지팡이질 한 번에 그들 모두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본다.

물론 보이는 것은 화려한 샹들리에와 회색의 천장.

"제,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저도······."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귀족을 지켜야 할 기사들이 먼저 밖으로 뛰쳐나간다.

기를 어느 정도 다룰 줄 아는 기사라면 모두가 느꼈으리라.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스러운 기운.

급작스레 등장한 그것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확인하고픈 욕구를 참기 힘든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해본다는 명목하에 뛰쳐나가 버릴 만큼 말이다.

"나, 나도······."

"잠시만 나갔다 오겠네···."

그런 기사들과 함께 검을 익힌 몇몇의 귀족들까지 회의장을 빠져나가자 남은 귀족들만 어리둥절해진 상황.

그리고 놀란 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으니.

'이 무슨 패도적인 기운이란 말인가.'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일반 기사들이야 갑작스런 거대한 기운을 느끼고 놀란 것이 전부겠지만, 이곳에 있는 두 사람만큼은 그것을 넘어서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황녀의 수호 기사 테오르도와 동부의 왕 욘 토르노.

둘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웃으며 지팡이를 빙글 돌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가 이 경악스러운 기운의 주인임은 분명했다.

분명 히오가 지팡이를 살짝 흔듦과 동시에 발생한 현상이었으니.

테오르도는 검 손잡이를 으스러지라 꽉 쥔다.

'이것이······ 히오 파블렌코의 진짜 실력.'

저 장난기 넘치는 태도와 광대 같은 겉모습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되리라.

교수가 경계하고 제이슨이 두려워하던 자.

잠시 잊고 있었던 히오 파블렌코의 정체였다.

검사로서, 무인으로서 어찌 호승심이 일지 않으랴.

물론 저토록 강대한 기운에 맞서 이길 것이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욕심이 치솟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검은 어디까지 통할지.

오랜 시간 막혀있던 벽을 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욕망.

그러나 테오르도는 인내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황녀 실비아의 안위.

자신은 그녀의 유일한 기사이자 수호 기사였기에.

"······전하."

조금 더 실비아에게 바짝 다가간다.

그럴 가능성은 적겠다만 혹, 저 마법사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그에 맞서기 위해.

"히오가······ 뭔가를 한 거지?"

실비아는 기사처럼 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

능력을 쓰면 몸이 더욱 악화된다는 히오의 말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긴 해도 놀람, 흥분, 당혹 같은 짙은 감정은 절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실력 행사를 하려나 봅니다. 그······ 작전인가 뭔가를 실행하기 위해서."

"그렇구나."

실비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닥이는 테오르도의 말에 실비아는 문득 걱정이 든다.

성의 주인, 욘 토르노 때문이었다.

과연 욘 토르노는 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 무례한 무력행사에 진노할 것인가.

아니면 회의를 망친 것에 책임을 물을 것인가.

원체 원리원칙 주의자이고 귀족적인 사람이다 보니 걱정이 앞선다.

그런 생각에 실비아가 욘 토르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

엉거주춤한 자세의 욘 토르노와 눈이 마주쳤다.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어나려는 찰나의 순간과도 같은 자세.

그 순간에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그런 느낌.

"······백부님?"

근엄한 표정과 그렇지 못한 어정쩡한 자세.

"크흠···."

욘 토르노는 예의 그 무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다시 앉는다.

"혹시 밖이 궁금한 거라면 나가보셔도 돼요."

"아닙니다. 회의의 주체자로서 그런 경망스러운 짓을 할 수는 없지요."

"······그렇군요."

다시 자리에 앉아 근엄하게 회의장을 둘러보는 욘 토르노.

하지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실비아는 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것처럼 달달 떨고 있는 욘 토르노의 다리를 말이다.

* * *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가서 하늘에 떠 있는 푸른 태양을 발견하고야 만다.

참지 못한 욘 토르노까지 나간 건 의외였지만, 어쨌든 히오에게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나갔던 이들이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오고.

"······."

모두의 시선이 히오를 향한다.

히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 시선들을 받아넘겼다.

"자 보셨다시피 몬스터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준비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두 가지.

그 중 하나.

"마정석이 필요합니다."

많은 양의 마력.

당연하게도 현재 히오가 가진 마력으로는 턱도 없다.

개량된 다크니스 마법의 발동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마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넓은 지역에 모두 뿌리려면 상상 이상의 마력이 필요한 것.

다른 지역 같았으면 포기했겠으나 이곳이 어디던가.

몬스터가 넘쳐나는 동부, 그중에서도 최전선이 아니던가.

딱히 무리한 요구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욘 토르노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정석이야 많이 있다만······ 자네는 그걸 사용할 수 있는가?"

마법이 사라진 시대라 하더라도 마정석은 여러 곳에서 널리 사용된다.

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마정석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마법을 상실한 시대였으니 마력에 대한 수많은 활용법 또한 함께 상실해 버렸으니.

"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한 많이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회의장의 귀족 중 한 명이 손을 살짝 들며 히오에게 질문한다.

바깥에 나가기 이전과 비교하면 너무도 달라진 태도였다.

"자네가 준비할 동안 기사들을 앞세워 시간을 끌어달라 했는데······ 그건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은가? 혹여나 지체되어 기사들이 고립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아, 그것 역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

죽음의 기운 역시 많은 양이 필요하겠지만, 나름 대규모의 전쟁이 아닌가.

죽음의 기운은 순식간에 모을 수 있을 터였다.

"준비가 끝나면 제가 신호하죠. 그럼 계획대로 물러나시면 됩니다. 희생자는 거의 없을 것이고 여러분들은 소중한 병력들을 아무런 피해 없이 지켜낼 수 있는 겁니다."

그 말에 다시금 웅성이는 장내.

그들에게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매년 몰려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입는 손해가 얼마였던가.

그렇게 힘들게 막아내도 얻는 것이라고는 그리 비싸지도 않은 마정석 조금이 전부.

"우리는 퇴각만 확실하게 신호해준다면 찬성이라네."

그들로서는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늘을 뒤덮은 푸른 태양은 그들의 생각을 뒤엎을 정도로 거대하고 또 장엄했으니.

"그것 역시 걱정하지 마십시오."

거의 다 넘어온 듯한 그들의 모습에 히오는 다시금 씨익 웃어 보인다.

"신호는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히오 역시 이번 일로 얻는 것이 많을 것이기에.

"미친 듯이 화려할 테니."

다가올 전쟁을 기꺼운 마음으로 준비한다.

42화 신의 눈을 가려라(4)

- 신기하다니까. 몬스터가 종의 구분 없이 한데 뒤섞여 침략한다니. 이런 게 가능한 건가?

푸르넬은 몬스터 웨이브 자체가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 애초에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 난 녀석들까지 봄이 되면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쳐들어온다라···. 연구해볼 가치가 있겠구먼.

게임 속에서 자주 겪었던 히오와는 달리 푸르넬의 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뭐가 됐든 싸그리 사냥해버려야 한다는 건 변함없지."

-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 자네.

성벽의 가장 높은 망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푸르넬이 즐겁다는 듯 말을 걸어온다.

- 나 때는 밀려오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이 허다 했다네. 지원요청을 받고 가면 아이고 마법사님 하면서 극진히 대접해주다가도 네크로맨서라고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

이 말 많은 유령의 옛날이야기는 시작하면 끝이 없기에 대충 흘려들으며 발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한다.

성문을 활짝 열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들.

그 노력 덕분에 성벽의 한참 앞에는 새로운 방어선이 구축되어가고 있다.

전투가 시작되면 저곳을 중심으로 몬스터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리라.

- 자, 이제 감상은 그만하고 자네는 하던 거 마저 해야지?

푸르넬의 말에 히오는 뒤를 돌아본다.

망루 안 가득 쌓여 있는 주먹만한 크기의 돌.

- 이 비싼 것들을 이렇게 쌓아두고 쓸 수 있다니. 마법을 상실해서 좋은 점도 있었어.

이게 전부 다 마정석이다.

마법사와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돌.

- 어떤가. 이제 마정석에서 마력을 추출하는 건 쉽게 할 수 있겠지?

"그거야 뭐, 마력을 다루는 범위 내니까 쉬운데···."

마정석을 보조 배터리마냥 사용하는 법은 굳이 푸르넬의 가르침이 없더라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건 영 복잡하단 말이야."

문제는 지금 망루에 그려넣고 있는 문양.

아니, 문양을 이어붙인 하나의 거대한 진.

마법진이었다.

- 흐흐흐. 복잡해도 이게 다 공부다 생각하고 완벽하게 이해하게나. 이렇게 넓은 범위에 다크니스를 펼치려면 마법진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네.

언뜻보면 베르가가 마법을 펼치던 모양과 흡사했으나 세세하게 들어가 보니 정밀함과 규모에서 차이가 난다.

문양의 배치는 물론, 선 하나하나에도 모두 이유가 있었으니.

"아이고 머리야."

골치가 아픈 것이다.

- 앓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마정석 가져와서 방금 그 문양 위에 놓게나. 저건 익숙하지? 네크로맨서 문양이야. 사기(死氣)를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네.

마법진이 이토록 복잡한 이유는 히오가 생전 처음 보는 문양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은 새길 수 없는 고서클의 문양 몇 개.

- 좋은 기회지 않나. 이만한 마정석이 있으니 가능한 마법진이야. 저기 효율 좋은 몇 개는 좀 챙겨놓자고. 비상용으로 말이야.

푸르넬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품질 좋은 몇 개는 히오의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정도 부수입은 있어야 더욱 힘을 내서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차피 이게 다른 놈들 손에 들어가 봐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히오의 비상 마력 충전기가 되는 게 세상에 이로울 테고.

"이건 또 무슨 문양이야."

- 그건 퍼트린다는 개념이야. 좀 복잡한 건데 설명하려면 한세월이니 일단은 그렇게만 외워놓게나. 서클이 울라가면 접할 기회가 또 있을 걸세.

커다란 망루 바닥 전체에 마법진을 그리면서 마정석을 배치하고, 의미와 원리를 공부한다.

그렇게 몇 시간이 넘도록 끙끙거리고 있을 때.

"마, 마법사님!"

병사 하나가 망루 밑에서 히오를 부른다.

"몬스터들이 오고 있으니 준비하시라는 전언입니다!"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 * *

"고블린, 오크, 그렘린."

창을 쥔 병사가 중얼거린다.

"놀······ 저 뒤에 큰 놈은 오우거인가."

진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몬스터.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가에 긴장감이 맴돈다.

봄만 되면 벌어지는 지긋한 전쟁.

매년 자신의 동료들이 얼마나 죽어갔던가.

다만 올해는 뭔가 달랐다.

아니, 달라야만 할 것이다.

둥-

긴장감을 높이는 북소리.

둥- 둥-

점차 빨라지는 북소리에 심장은 빠르게 뛰고 흥분이 몸을 장악한다.

- 키에에엑!

저 멀리 들려오는 인간의 것이 아닌 소리.

끝없이 펼쳐진 먼지 구름.

활을 쥔 병사의 이마에 땀이 흐르고 창을 꼬나쥔 자는 손에 더욱이 힘을 준다.

쿵쿵 땅이 울리는 진동이 어찌나 거센지 몸도 같이 흔들린다.

둥- 둥-둥- 둥-

북소리가 더욱 빨라진다.

전투가 머지않은 것이다.

"장전!"

전장을 가득 채우는 뿔피리 소리.

대지를 울리는 진동.

흥분한 지휘관의 목소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백인장의 외침 속에서.

"발사-!"

쏘아지는 화살.

수천 수만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가 몬스터의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 끼에에엑!

단번에 목이 꿰뚫리고 정수리에 화살이 틀어박혀 절명하는 몬스터들.

그 몸이 무너져내리고 이에 발이 걸린 뒷열의 몬스터들이 우르르 넘어진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시체를 뛰어넘고 짓밟으며 달려드는 것이다.

"장전!"

그 무지막지한 광경 속에서도 병사들은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긴다.

그들 역시 나름의 베테랑이었기에 두려울지언정 해야 할 일은 해낸다.

"발사!"

다시금 일시다발적으로 치솟는 화살.

화살비가 한낱 고블린에게 재앙이 되어 쏟아진다.

또다시 우수수 쓰러지는 선두의 몬스터들.

화살을 여러 차례 나누어 쏘아대도 쓰러지는 속도보다 밀려드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그리고.

"버그베어다!"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대형 몬스터.

앞에 거치적거리는 코볼트 따위를 거침없이 손으로 내던지며 진격하는 곰의 형상을 한 몬스터.

"신경 쓰지 마라! 다시 장전!"

그 흉악한 모습에도 병사들은 흔들리지 않고 활을 당긴다.

어차피 저것은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 쿠어어!

거칠 것 없이 다가오던 버그베어의 움직임이 뚝 멎는다.

"지금입니다!"

본래 대형 몬스터만 전문으로 요격하던 기사단이 나선 것이다.

스킬로 움직임을 멈추고 빠르게 처치.

버그베어의 목이 땅에 떨어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발사!"

쏟아지는 화살.

병사들을 지키며 몬스터를 도륙하는 기사.

당장의 형세만 놓고 본다면 인간의 피해 하나 없이 몬스터들만 죽어나고 있는 꼴이지만, 이는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화살비를 뚫고 그 안쪽으로 달려드는 몬스터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고 그에 기사단이 감당해야 할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으니.

지금이야 인간이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조금만 지난다면 밀려드는 몬스터를 감당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무너질 거란 말이었다.

"백작님.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그렇기에 성벽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이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욘 토르노에게 묻는다.

"저희도 다 승낙한 작전이기는 해도··· 왜 아직 신호가 없는 건지."

"계획이 잘못된 것인지 확인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가 때를 놓치면 후퇴하기도 힘들어져요."

걱정어린 말들에 욘 토르노는 망루를 올려다본다.

마법사가 있는 망루 위에서 심상치 않은 기가 느껴지고는 있다.

다만 그것이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기에 이리도 불안한 말이 나오는 것.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에 실비아가 나섰다.

"아니 그래도 전하께서 어찌······."

주변 귀족들의 만류에도 실비아는 강경했다.

"내 사람이고 내가 동의한 작전이지 않나. 일이 잘못되면 내게 책임이 있으니 직접 가서 확인해야지."

일이 잘못되면 책임지겠다는 말.

그 말은 곧 일이 잘 풀릴 경우 실비아의 입김이 강해진다는 뜻이기도 하였으니.

이왕에 엎질러진 물.

실비아는 다시 한번 히오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귀족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욘 토르노는 그런 실비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도 실비아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실비아가 높은 망루의 계단을 향한다.

담담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녀도 속으로는 불안했다.

히오를 믿고 밀어붙여서 성사된 작전이 아니던가.

그에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밖으로 나가 싸우고 있다.

한데······ 혹시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지.

히오가 여기서 실패한다면 덩달아 실비아의 미래도 없는 것이기에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빠르게 결단을 내리기 위해.

그렇게 계단을 올라 망루의 꼭대기에 올랐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드디어! 모였구나!"

밖을 내다보며 광소를 터트리는 마법사의 뒷모습.

무엇이 그리 기쁜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 히오 파블렌코의 뒷모습.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내뿜어지는 터질듯한 밝은 빛.

"어디 이번에도 안 된다고 말려보시게나. 여신이여."

하늘 높이 치켜드는 지팡이.

그에 더욱더 발광하는 마법진.

격동하는 힘.

잘게 진동하는 땅.

그리고 무심히 내뱉는 한 마디에.

"다크니스."

세상은 어둠에 잠긴다.

* * *

망루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다.

구름을 가리고 태양을 숨긴다.

전장을 삽시간에 뒤덮은 검은 연기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를 감추고 전장은 당연하게도 혼란에 휩싸였다.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

하늘을 완전히 차단해버린 검은 연기.

모두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환한 금빛이 솟구친 것은.

어두워진 공간을 밝히는 금빛.

성이 있는 방향에서 치솟는 금빛이 어둠을 뚫고 형체를 이뤄간다.

히오의 샤우트 마법이 스킬로서 발현된 것이다.

- 물러나라.

공기를 울리며 넓게 퍼져나가는 금빛과 목소리.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한다.

성벽 위의 가장 높은 망루.

그 첨탑의 배경으로 떠 있는 금색의 거인.

첨탑의 뒤로 상반신만 보임에도 어찌나 거대한지 가늠이 되지 않을 지경이다.

- 계획은 성공했다.

팔짱을 낀 채 전장을 내려다보는 금색의 거인.

낮고 굵은 목소리임에도 공기가 떨려올 만큼이나 커다랗게 울려 퍼진다.

지긋이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에 몸이 떨려온다.

- 그렇다면 신의 눈은 가려졌는가.

그 위엄 앞에 그 누구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둑하진 하늘.

그 아래에 나타난 거인과 그가 내뱉는 뜻 모를 말들.

그리고.

- 청염.

돌연 확 밝아진 세상.

본능적으로 위를 올려다본 사람들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한 검은 안개 아래, 불꽃으로 이루어진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으니.

- 적을 태워라.

하늘이 쪼개어진다.

아니, 하늘에 떠 있는 푸른 불꽃이 잘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나누어짐과 동시에 유성우가 되어 떨어지는 불꽃.

그 경이로운 광경에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이는 넋을 놓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사람을 피해 몬스터의 위로 떨어지는 불의 비.

그리고 그것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의외로 큰 소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저항 없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퍼석- 하는 허무한 소리뿐.

푸른 불꽃의 비가 몬스터 무리 위에 내리고 들려오는 조용한 죽음의 소리.

퍼석-퍼석-퍼석-퍼석-퍼석-퍼석-퍼석-퍼석-

끝없는 파도와도 같았던 몬스터의 물결이 허망하게 사그라진다.

이는 본래 허락되지 않았어야 할 압도적인 폭력.

너무도 강한 힘에 본디 제지당했어야 할 무자비한 폭력이다.

그것을 알기에 거인은 웃음을 터트린다.

쩌렁한 웃음이 대기를 찢으며 검은 안갯속을 뒤흔든다.

- 하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정말로 기뻐하는 그 웃음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는다.

고개를 땅에 처박는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랬던 목소리가 더욱 거대해지며 귓가에 울렸기에.

이것은 도저히 상식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두렵다.

상식 밖의 일은 언제나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그러니 그들은 간절히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모르겠다.

마치 천벌과도 같은 푸른 불꽃을 위한 기도인지.

신의 사자와도 같은 거인을 향한 기도인지.

아니면 이 압도적인 폭력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 결국!

확실한 한 가지는.

- 신의 눈이 가려졌구나!

신은 지금, 이곳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 하하하하!

몸이 떨리는 그 웃음소리는 검은 안개가 걷혀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점차 사라지는 검은 안개.

점차 희미해지는 금빛 거인의 형체.

그에 맞게 옅어져 가는 웃음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전장에 다시 햇볕이 내리 쬔다.

신의 눈이 닿는다.

그 눈에 비친 것은 아마······.

잿더미가 된 폭력의 흔적이지 않을까.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 391 / 1000)]

43화 신의 눈을 가려라(5)

"휴우."

전장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린다.

"스트레스가 쑥 내려가네."

입가에는 아직도 웃음기가 걸려 있는 채였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스트레스받았던가.

뭐를 하려고만 하면 머릿속에 '폭력은 안 돼!'가 번뜩 떠오르곤 했으니.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니 속이 얼마나 후련한지.

"실험도 성공적이고."

다크니스의 안쪽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신의 눈이 닿지 않는다.

물론 많은 마력과 죽음의 기운이 필요하기에 상당한 제약이 따르지만······ 오늘처럼 환경만 조성된다면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된 것.

"여러모로 얻은 성과가 많아."

- 그런데 자네 방금 진짜 흑마법사 같았네. 미쳐버린 줄 알았지 뭔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푸르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바닥의 마법진을 바라본다.

우선 다크니스가 통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뿐이랴.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

마법진의 활용법, 새로운 문양의 의미.

마정석을 사용하는 법과 죽음의 기운을 다루는 법까지.

- 이제는 테트라디아의 마법사라 당당히 말해도 되겠어. 내 인정하지.

원래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어쨌건 푸르넬이 인정할 만큼 마법사로서 경험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몬스터 웨이브를 아무런 병력 손실 없이, 최단기간에 끝내버렸으니 정치적으로도 실비아에게 많은 여유가 생겼을 터.

앞으로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업적 보상을 못 받는 건 아쉽긴 해."

- 업적? 아, 자네가 말한 그거 말이로군.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몬스터를 쓸어버린 시점에서 업적에 대한 알림이 떴어야 한다.

하지만 조용하다.

비록 초, 중급자용 이벤트였던 만큼 보상도 그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것.

강한 공격력에 비해 빈약한 스탯을 보유한 히오에게 꽤 쓸만한 것들이 많았을 텐데.

청염으로 전장을 가득 뒤덮을 수 있었던 것도 히오의 순수한 마력이 아닌, 마정석의 도움이었다.

아직 스탯이 많이 모자란 것이다.

- 욕심이지. 욕심이야. 신의 눈을 가려서 비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놓고 보상은 가지고 싶다? 에잉 쯧. 이래서 요즘 애들은······.

푸르넬의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마정석을 주워담는다.

대부분이 마력이 쏙 빨린 채 텅 비어 버렸지만, 몇 개는 아직 쓸만했기에.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는데.

"······음?"

문득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마법에 집중하고 여러가지 생각에 집중하느라 너무 늦게 파악한 시선.

그 기척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고.

"······."

계단을 오르다 말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실비아와 눈이 마주쳤다.

황녀로서 체통이고 나발이고 지키지 않기로 한 건지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실비아.

히오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어디까지 본거지? 혼자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던 것까지 전부 봤나?'

- 흐흐흐흐. 마법진이 완성되고 자네가 사악하게 웃기 시작했을 때부터 있었다네.

'······x발.'

- 음? 나한테 한 소린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보였을까.

지팡이를 치켜들고 혼자 웃고.

여신 어쩌고 하면서 혼자 외쳤던 그 모습을 봤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함이 몰려온다.

실비아에게는 고상하고 품격 있는 마법사로 남고 싶었는데······ 그른 모양이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먼저 움직인 것은 실비아였다.

틀어막은 두 손 사이로 흘러나오는 실비아의 중얼거림.

"멋있어······."

아무래도 황녀는 취향이 좀 독특한 것 같다.

* * *

어둠이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홀린 듯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들과 넋을 놓아버린 기사들.

치열한 전장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전장.

해일처럼 밀려들던 몬스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마정석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몬스터 따위는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러니 모두가 입을 다물고 망루에서 내려오는 히오를 바라본다.

성벽 위에 있던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기현상을 일으킨 것이 누구인지.

히오 파블렌코.

황녀를 따르는 정체불명의 마법사.

그 한 명의 인간이 일으킨 기적.

매년 적게는 수백, 많게는 천 단위의 희생자를 내었던 지독한 몬스터 웨이브를 하루 만에 종결시킨 기적.

그러니 그들은 기뻐해야 함이 마땅하겠으나 마음껏 기뻐하지 못한다.

눈으로 보았던 광경이 워낙에 압도적이었던 탓에.

저벅저벅 걸어가는 마법사의 존재감이 너무도 거대하게 느껴진 탓에 그저 숨죽인 채 멈춰 있을 뿐이다.

어떤 인간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금빛의 거인을 소환하며 푸른 불꽃으로 하늘을 뒤덮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불꽃은 어찌 몬스터만 골라서 조용히 불태우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마법사는.

히오 파블렌코는 걸어 다니는 재앙 그 자체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모두의 시선이 달라진다.

히오 파블렌코와 나란히 걷고 있는 인물.

은색의 머리칼에 고아한 걸음걸이.

제국의 황녀 실비아 베르덴.

그 힘없는 황녀의 옆에 상식을 초월한 마법사가 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 *

"아이고 힘들었다."

모자를 벗어 옆으로 집어던지고 푹신한 침대로 다이빙.

막상 전투 때는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온다.

- 주제에 맞지 않는 짓을 억지로 해댔으니 제법 피곤할 게야.

"주제에 맞지 않는 짓?"

-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계속 써댔지 않은가. 다크니스 마법도 마법진을 이용해 억지로 펼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정신적으로 힘들 수밖에.

생각해보니 그 말대로였다.

마정석을 양손 가득 쥐고 마력을 있는 대로 뽑아먹으면서 청염의 덩치를 키웠고.

다크니스 역시 마법진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마법을 발동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했기에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것.

"다크니스를 마음대로 쓸 수는 없겠어."

- 자네의 경지가 높아지면 자유로이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오늘 같은 준비 없이는 아직 쓰기 힘들 게야.

만약 마법진과 마정석의 도움 없이 혼자 다크니스를 쓴다면 신의 눈은커녕, 제 시야만 가릴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서클을 올려 마법의 경지가 높아지고 마력량이 늘어나면 그때는 본인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을 터.

결국에는 서클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일단 좀 쉬자."

몬스터 웨이브는 한 번에 정리되었다.

본디 몇 날 며칠에 걸쳐, 심하면 몇 주에 걸쳐 이어졌을 수성이 하루 만에 끝난 것이다.

물론 산발적인 공격이야 있겠지만, 그건 주둔하고 있는 병력만으로도 쉽게 막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히오가 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할 수 있었으니.

"사후처리 문제랑 동부 귀족들 설득하는 문제랑 설득하고 수도로 진군하는 문제랑 진군해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문제랑 전쟁에서 이겨도 황녀를 살려내야 하고 또······."

그 모든 걸 끝내도··· 사실 이제야 겨우 출발선이다.

실비아가 황제가 된다면 최소한 제국 때문에 골치 아파질 일은 없으니.

멸망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진 것뿐이었다.

- ······자네도 참 열심히 사는구먼.

끝없이 이어지던 갖가지 생각들이 푸르넬의 말 한마디에 가로막힌다.

열심히 산다라.

"그러게."

문득 궁금해진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참 열심이지 않나.

팔자에도 없는 허세를 부려가며 싸우고, 살아남고.

"무엇을 위해 살았더라."

피로해진 정신 탓일까.

정신이 과거를 더듬는다.

마음 깊숙이 묻어뒀던 과거.

히오가 아닌 이현승으로서의 삶.

부모에게도 버려진 고아.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좀 일찍 깨달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뭐, 가진 적이 있어봐야 아쉽지 않겠는가.

있던 것이 없어져야 그립지 않겠는가.

애초에 없었으니 아쉽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왠지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했다.

'왜 살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가.

기쁜 날이 있어도.

힘든 날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집으로 오면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삶.

왜 사는가.

답은 생각보다 금방 찾았다.

무더운 여름. 뒤척이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는데 문득 불어온 밤공기가 너무 시원했기에.

그래서 살고자 했다.

밤공기를 맡기 위해 산다니.

우습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조금 더 자라서는 주변의 소중한 인연들을 위해 살고자 했다.

친구, 선배, 동료, 연인.

베푼 만큼 돌려받았고 돌려받은 만큼 다시 베풀었다.

······소중했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

홀로 비참하게 살아남아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데 문득 다시 궁금해졌다.

이제는 정말 왜 살고 있을까.

창문을 열어 밤공기를 들이마셔도 시원하지 않다.

마음이 갑갑했다.

주변인들을 위해 산다는 핑계도 댈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벤타이얼에 빠져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현실에서는 더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

- 누가 오는군.

깊고 어둡게 침잠하는 상념을 깨우는 푸르넬의 목소리.

그리고 곧 노크와 함께 방문이 열린다.

"히오 파블렌코."

무뚝뚝한 황녀의 기사, 테오르도.

그가 불쑥 들어오더니 방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실비아는?"

"전하께서는 성주님과 대화 중이시다."

"웬일이야 네가 실비아를 놔두고 혼자 오다니."

"대화가 끝나면 바로 오실 거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끝까지 기다리다가 올 녀석이 혼자 오니까 신기해서 그러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테오르도가 이내 곧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려고 했는데······ 혼났다."

"혼났다고?"

"애 취급 좀 그만하고 빨리 가라 하시더군."

전혀 심각하지 않은 내용을 심각하게 말하는 그 표정에 히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네가 잘못했네. 너는 실비아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

"······과보호가 아니다. 당연한 호위인 것이지."

"그러니까 너무 따라다녀서 문제인 거 아니야. 실비아는 어엿한 숙녀라고."

"말을 조심해라. 고귀하신 분께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거참 깐깐하기는."

침대에서 일어난 히오가 터덜터덜 걸어와 테오르도의 맞은편에 앉는다.

이어지는 약간의 침묵.

그리고 무뚝뚝한 기사가 웬일로 먼저 입을 연다.

"실비아 전하께서는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왜인지 아는가."

덤덤히 내뱉는 말 속에 감춰진 것은 분명한 분노.

"두 황자의 장난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단순한 장난."

두 명의 황자는 어디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아온 것 때문일까.

아니면 날 때부터 성정이 그러했던 것일까.

"황비마마를 일찍 여읜 전하께는 이렇다 할 세력이 없었고 황후를 등에 업은 두 황자의 세상이나 다름없었지. 그런 상황에 실비아 전하의 목숨은 무척이나 위태로웠다."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 정도로 패악질을 부렸다고.

"너는 실비아가 어릴 때부터 곁에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쭉 모셔왔지."

"······대단하네."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한 사람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삶.

그것은 어떤 느낌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히오 파블렌코."

테오르도가 여전히 꼿꼿한 자세 그대로 히오를 바라본다.

"너는 강하다."

"······왜 이래 갑자기."

"너라면 실비아 전하를 황제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너라면 전하의 그 지독한 병도······ 방법을 찾아내겠지."

"뭐, 그게 뚝딱 해결되나. 노력해야지 노력."

"히오 파블렌코."

테오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하지 못할 일을 너는 할 수 있다. 전하께는 네가 필요하다."

무뚝뚝한 기사는 처음으로 본인의 절실한 감정을 내비친다.

"전하께서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다오."

아주 어렸던 그때부터 숨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던 실비아를.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고자 했던 작은 황녀가.

"살아갈 수 있게."

부디 그 가여운 목숨이.

간신히 버텨온 여린 몸뚱이가 허망하게 스러지지 않도록.

"부탁한다."

기사는 고개를 숙인다.

히오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진심을 다한 그 부탁에 히오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한다.

무엇 때문일까.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인 까닭일까.

아까부터 느껴지던 정신적 피로 탓인가.

그마저도 아니면······ 그저 심통이 났기 때문인가.

스스로는 평생을 찾지 못했던 해답을, 이 기사는 너무도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심술이 나는 것인가.

히오는 침묵한다.

기사는 고개를 숙인 채 조금의 미동도 없다.

"테오르도 리카르트."

기사는 고개를 숙인 채 답한다.

"말하게. 히오 파블렌코."

히오는 기사를 향해 질문한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지?"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건 그저 단순한 심술임을.

"당연한 걸 묻는군. 실비아 전하를 위해서 살아간다."

삶의 목표가 확고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

너무도 당연하게 나오는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저렇게나 한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대체 어떤 것일까.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을 수가 있는 것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테오르도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꼬물거리는 작은 손이 제 손가락을 감싸쥐었을 때부터 이미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위하는 마음에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

"그저 전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그게 네 목숨보다 소중해?"

"당연한 걸 자꾸 묻는군."

이것 이상으로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이니 히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살아간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기도 하면서 부러웠기에.

"고개 숙이지 마."

테오르도의 어깨를 잡고 일으킨다.

"너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지 않나. 친구끼리."

"······내가 왜 네 친구······."

히오는 테오르도의 커다란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려 맞잡는다.

"잘 해보자고. 나도 당장에 방법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실비아를 살리고 황제로 만들어야지. 애초에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밝게 말하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나타나는.

띠링-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떠오를 리 없는 메세지.

「업적 달성! -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라!」

「업적 달성! - 나 홀로 몬스터 웨이브!」

「업적 달성! - 몬스터 웨이브의 최대 공헌자.」

「업적 달성으로 1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업적 달성으로 30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업적 달성으로 150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업적의 추가 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밝았던 히오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다.

업적이 이리도 늦게 떠오를 리가 없다.

여신의 눈을 가려 폭력을 없던 일로 만들었으니 업적 또한 없는 것이 합당했다.

「업적 추가 달성 보상 - '스킬 진화의 서(중급)'을 획득합니다.」

「업적 추가 달성 보상 - '인내의 카탈로그'를 획득합니다.」

다급히 특성창을 열러 인내력 수치를 확인해보지만.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391 / 1000)]

내려가지 않은 인내력 수치.

분명 페널티는 받지 않았다.

허면.

「욘 토르노 성의 병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성 증가로 23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 스탯과 스킬 등을 강화해보세요!」

여신은 대체 왜······?

44화 실비아 베르덴

다크니스가 먹혔다고 해서 여신이 이번 일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보지 못한 만큼 정해진 시스템을 적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까지는 그 생각이 맞는 듯 보였다.

보이지 않았으니 페널티도 없고 보이지 않았으니 보상 또한 없다.

한데 페널티는 없는데 보상은 지급한다?

나쁜 일은 눈감아주고 좋은 것만 안겨주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건 혹시······?

"여신이 날 좋아하나?"

그럴듯한 추론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푸르넬의 목소리였다.

- 자네 진짜 적당히 하게나. 듣는 유령 입장도 생각하고 말하게.

"아니 이상하잖아. 나를 편애하는 게 아니고서야 보상은 주고 페널티는 눈감아주는 게 말이 돼?"

- 내가 리퓨에 여신의 생각을 어찌 아나? 그냥 주면 주는 대로 고맙습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으면 되지.

그 말도 분명 맞는 말이기는 한데 그와 별개로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이유인즉, 보상으로 주어진 아이템 중 하나에 있다.

아공간 주머니에 쏙 들어와 있는 업적의 보상.

인내의 카탈로그.

"이걸 좀 보라니까? 이래도 이게 편애가 아니라고?"

아이템을 꺼내 손에 쥐고 쳐다본다.

작은 책 모양의 아이템.

겉표지에는 유아틱한 그림과 함께 삐뚤한 글씨체로 제목이 적혀 있다.

[인내의 카탈로그 - 참으면 복이 와요!]

- ······여신의 미적 감각은 잘 알겠네.

"아니 그림 말고 아이템 설명을 보라고."

「인내의 카탈로그(특이)」

「특정한 용도로 제작된 카탈로그. 뛰어난 그림 실력이 돋보인다.」

「보유 시 '인내'와 관련된 모든 수치가 빠르게 상승한다.」

무려 인내력의 수치를 빠르게 올릴 수 있게 하는 아이템.

다른 이들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길바닥의 돌멩이와도 같은 아이템이겠으나.

히오에게는 그 어떤 전설급 무구, 전설급 아티팩트와도 바꿀 수 없는 미친 값어치의 아이템.

웬만한 아이템과 아티팩트는 안다고 자부하는 히오도 이런 아이템이 있는 건 처음 알았다.

애초에 '인내'와 관련된 수치를 가진 사람이 히오 말고 누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맞춤형 아이템이 보상으로 떡하니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 여신이 자신을 편애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주장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것이고.

- 그런데 자네 말대로라면 자네가 이룬 업적에 비해서는 객관적으로 부족한 보상이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해."

히오가 해낸 것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

게임 속에서도 이 몬스터 웨이브를 홀로 막아낸 이는 없었다.

이 좋은 이벤트를 혼자 독식하게 유저들이 내버려두지 않은 것도 있고, 혼자 몬스터 웨이브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을 때는 이미 세상이 개판 나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공헌도를 기록한 녀석이······ 그놈이었나?'

랭킹2위였던 녀석이 몬스터 웨이브에서 유니크 아이템을 보상으로 받았다고 한동안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유저들의 수준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좋은 보상이 뜬 셈.

그런데 히오는 혼자 다 쓸어버렸음에도 얻은 것은 명성 포인트와 아이템 두 개가 전부.

물론 인내의 카탈로그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아이템이지만······.

- 게다가 나머지 하나는 자네에게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닌가.

의아한 점은 보상으로 주어진 다른 아이템.

「스킬 진화의 서(중급)」

「중위 등급 이하의 스킬을 한 단계 진화할 수 있는 진화의 서.」

「책을 펼치면 바로 사용되니 주의해서 펼쳐야 한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진화의 서.

하지만 히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폭력 한 번이면 사라질 스킬을 진화시킬 필요도 없고··· 고작 한 단계 올려서 누구 코에 붙이란 말인가.

이제는 최상위 스킬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하나는 다른 이들에게는 쓸모없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책. 다른 하나는 내게는 쓸모없고 다른 이들에게는 좋은 책."

이왕 줄 거면 꼭 필요한 것들로만 꽉꽉 채워서 알차게 줄 것이지.

도대체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 구태여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여신이 자네의 편의를 봐준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네. 인내의 카탈로그라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그렇지? 게다가 한참이나 늦게 보상 알림이 떴잖아. 원래는 보상을 주지 않는 게 맞는데 굳이 손을 써서 보상을 줬다는 말이지."

- 그래도 좋은 것들로만 턱턱 내려줄 수는 없을 게야. 내 신학에는 조예가 없지만, 신성에는 인과율이 아주 강하게 적용된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네.

"인과율이라···."

어떤 원인에 어떤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법칙.

원인이 없다면 결과도 나올 수 없다는 뜻.

좋은 보상이라는 결과를 얻고 싶다면 그에 맞는 원인을 제공하라는 말이었다.

- 그러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인과율을 벗어난 게야. 자네는 원인을 없애고 좋은 결과만을 얻어냈으니 말이야.

"그럼······ 여신이 인과율을 어기면서까지 내게 이 보상을 주려고 했단 말이야? 대체 왜?"

- 그걸 알면 내가 여기서 유령 노릇이나 하고 있겠나?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신이라도 됐겠지.

여러 생각이 빠르게 교차하며 지나가는 가운데 푸르넬의 말이 이어진다.

- 물론 이것도 전부 잘못된 생각일 수 있네. 우리는 신에 대해 잘 모르지 않나. 변수가 많고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애초에 다크니스 마법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단 말일세.

"······마탑에서 좀 찾아보고 있으면 안 돼?"

- 내가 갈 수 있는 곳도 한정되어 있어. 신을 연구한 저서클의 마법사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다크니스를 연구한 흑마법사의 방을 찾은 것도 기적이야. 고급 정보를 얻고 싶으면 자네의 서클을 높여 포탈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을 게야.

푸르넬의 말대로 가만히 방구석에서 고민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다.

지금 하는 것은 전부 추측과 가정일 뿐. 확실한 건 없었으니.

"그래.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분명 답이 나타나리라.

그러니 지금은 얻은 것부터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든다.

"포인트 상점."

「포인트 상점」

「체력+1 : 10pt」

「근력+1 : 10pt」

「민첩+1 : 10pt」

「마력+1 : 10pt」

「영력+1 : 10pt」

···

「남은 포인트 : 807pt」

어찌됐건 포인트는 쏠쏠하게 벌었지 않나.

빈약한 스텟을 보충해야 할 차례였다.

"일단 마력 빼고 전부 고르게 올려야 할 텐데···."

마탑에서 얻은 마법사용 장비. 틈틈이 하는 마나 호흡법으로 다른 스텟에 비해 마력만 우뚝 솟아있는 형태.

다른 스텟은 거의 성장하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 고민인 것은.

"영력도 올려야 하나?"

이번에 새로 얻은 스텟, 영력이 포인트 상점에 등장했다.

이게 참 애매한 계륵 같은 스탯이란 말이지.

분명 영력을 올리면 좋은 점이 많다.

'유령의 눈'의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체'만큼은 아주 유용하게 썼었으니 그건 확실하다.

영력이 오를수록 유령의 눈과 영체의 다양한 효과가 드러날 터.

"하지만 그때는 포인트에 여유가 흘러넘쳐서 가능했던 거고."

지존 천마 시절 이미 포인트는 넘쳐났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영력에 투자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른 기본 스텟도 모자란 상황이 아니던가.

- 흐으···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자네의 세상에서 넘어온 자들은 모두 이런 걸 볼 수 있고 다룰 수 있다고. 역시 세상은 재밌구먼.

히오의 시선에서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푸르넬이 재밌다는 듯 끌끌 웃는다.

- 개인적으로 영력을 올리는 것을 추천하지. 영혼의 힘이 강해진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많다네.

"영혼의 힘? 격 같은 게 높아진다는 말이야?"

- 격이랑은 다르다네. 영혼의 힘이라는 건······ 음 설명하기 어렵군. 그냥 올리게. 네크로맨서 마법을 익히면 특히 유령의 눈을 쓸 일이 많을 게야.

"······그래. 제자가 스승을 믿어야지. 간다."

- 얼씨구. 스승 취급한 적도 없지 않나?

「스탯 '체력'을 2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체력'이 +20 상승합니다.」

「스탯 '근력'을 2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근력'이 +20 상승합니다.」

「스탯 '민첩'을 2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민첩'이 +20 상승합니다.」

「스탯 '영력'을 200pt로 구매합니다.」

「스탯 '영력'이 +20 상승합니다.」

「남은 포인트 : 7pt」

마침 딱 나누어졌기에 균등하게 분배하여 스탯을 올렸고.

- 오오! 신기하구먼! 당장이라도 자네 몸을 뜯어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야!

"······미친 네크로맨서 같으니라고."

이제야 조금씩 갖춰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빙의자들 보다 한참이나 늦게 출발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사기적인 히든 특성의 효과지 않나.

이제 빠르게 올라갈 수 있으리라.

* * *

"히오 파블렌코. 들어가겠다."

문 밖에서 들리는 테오르도의 익숙한 목소리.

곧 문이 열리고 테오르도와 실비아가 함께 들어왔다.

회의가 곧 열리기에 두 사람다 격식과 품위가 흘러넘치는 복장이다.

그에 반해 히오의 옷차림은 여전하다.

펑퍼짐한 로브와 커다란 스태프. 머리에 얹어진 마법사 모자까지.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이런 그를 비웃을 수 없을 터였다.

"이제 회의장으로 가면 돼?"

히오가 지팡이를 주섬주섬 챙기며 일어나자 실비아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아직. 회의 가기 전에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응 그래."

히오와 실비아가 마주 앉고 테오르도는 당연하다는 듯 실비아의 뒤에 선다.

"테오르도, 너도 앉지?"

그 말에 히오를 흘끗 보고는 딱딱하게 답하는 테오르도.

"신경 쓰지 마라."

"그러지 말고 옆에 앉아 테오르도. 우리뿐이잖아."

"예."

하지만 실비아가 나서자 냉큼 소파에 앉는다.

"······어제 친구까지 먹어놓고 깐깐하다니까."

"응? 둘이 친구 하기로 했어?"

"그저 히오 파블렌코가 일방적으로······."

"맞아. 둘이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나누고 어제부터 친구 하기로 했어."

"······내가 언제······."

"잘됐다!"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실비아의 모습에 멈칫하는 테오르도.

"둘이 친하게 지내니까 좋잖아! 앞으로도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

"······예. 전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테오르도의 표정을 보며 낄낄거리던 히오가 다시 실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회의 전에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이제 동부 연합을 설득해 군대를 일으켜야 할 텐데."

"응. 그렇지 않아도 그거에 관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뭘 또 부탁까지야. 편하게 말해."

회의 전에 찾아와서 하는 부탁이라.

뻔하지 않겠는가.

동부의 귀족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히오 파블렌코의 존재.

재앙스런 마법사의 힘을 목격한 이들은 히오를 신경 쓸 수밖에 없을 터.

그러니 히오가 나선다면 동부 연합이 실비아에게 힘을 싣는 것도 수월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회의에서 가능하면 가만히 있어줄 수 있어?"

실비아의 부탁은 히오의 예상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가만히······ 있어달라고? 내가 나서면 귀족들은 금방 설득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야. 그래서는 의미가 없으니까."

굳게 다짐한 실비아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욘 토르노 또한 그리 말했지 않나.

반드시 실비아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이건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황제가 되겠다는 자가 귀족에게 겁먹고 다른 사람의 뒤에 숨어서야 되겠느냔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말을 다른 이의 입을 빌려서 할 수는 없었기에 실비아는 히오에게 말한다.

"부탁할게. 이번 일마저 네게 의지하지 않게 해줘. 히오. 내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해."

평생을 두 황자의 눈치를 보며 자란 실비아.

위축될 수밖에 없는 환경.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감도, 자존감도 많이 부족할 터였다.

하지만 황제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실비아의 부탁은 스스로의 문제를 극복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았으니.

히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게.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회의장에서 실비아 몰래 귀족들을 압박할 방법이야 많다.

뭐, 정 안 될 것 같으면 인상이나 팍 쓰고 있으면 저들이 알아서 눈치 보지 않겠는가.

시르베르트의 계획과 제국의 미래. 지금도 점차 깊어지고 있을 어비스까지.

할 수 있다는 낭만 섞인 말로 넘어가기엔 여기에 걸린 것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별다른 걱정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이미 가능성을 높게 쳤기 때문이다.

실비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히오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회의에서 실비아가 그 어떤 말을 하든, 귀족들은 히오의 눈치를 보리라.

황녀의 가능성을 믿고 지지하는 것이 아닌, 히오의 힘을 믿고, 승리의 가능성을 보고 황녀를 지지하리라.

다만.

"······고마워! 꼭 해내 보일게!"

저리도 굳게 다짐하며 의지를 불태우는 실비아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려오기는 한다.

'어쩔 수 없잖아. 일단 황제로 만드는 게 급선무니까.'

어쩔 수 있나.

낭만을 따지기에는 걸려있는 것이 너무도 많고 또 무겁다.

'저 몸에 가득한 죽음의 기운부터 어떻게 해야 황제로 만드는 의미가 있겠지만.'

황제로 만들어도 실비아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영혼을 보는 특수한 능력 탓에 가득 쌓인 사기를 어떻게든 소모시켜야······.

'······잠시만.'

문득 어떠한 생각이 번뜩인다.

'실비아의 능력 때문에 쌓인 기운이잖아.'

이 세계의 주민에게도 특성과 스킬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빙의자처럼 확인할 방도가 없을 뿐.

'실비아의 능력 역시 스킬.'

실비아가 능력을 사용할 때 마력 사용의 기척이 잡혔었다.

그 말인 즉, 실비아의 저 능력은 특성이 아닌 스킬이라는 의미.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쌓이는 것은 강한 스킬에 따라오는 일종의 페널티 같은 것일 테다.

히오의 히든 특성처럼, 밸런스를 파괴할 수도 있는 사기적인 능력에 따라오는 당연한 페널티.

실비아의 스킬이 그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둘째치고.

'아직 스킬의 등급이 낮아 페널티를 해소할 방법이 없는 것이라면?'

탄력을 받은 사고가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한다.

여신에게 받은 두 개의 보상.

인내의 카탈로그는 히오의 맞춤이라 생각될 정도로 좋은 보상이었지만, 그것 말고 다른 하나.

전혀 쓸모가 없는 진화의 서.

'이게 실비아를 살릴 방법이었다면?'

히오가 아니라 실비아를 위해 내려준 것이라면.

비로소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 그럴듯하게 들리는군. 그래도 스킬이란 것에 대해서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푸르넬의 말대로 마법이라면 모를까 스킬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히오가 가장 잘 안다.

그리고 히오가 보기에 이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이었다.

스킬에 달려 있는 페널티가 스킬이 진화하며 약화되거나 사라지는 경우는 제법 흔했으니.

"실비아."

히오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고 한 권의 책을 건넨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건네받는 실비아.

"이게 뭐야?"

"네 능력을 강화해줄 마법책이야."

"내······ 능력을?"

영혼을 보는 스킬.

푸르넬의 말에 의하면 단순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 죽음과 밀접하다는 그 능력.

그게 강화되면 어떤 힘을 발휘할 것인가.

"능력을 쓸수록 몸이 안 좋아지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 오히려 능력을 키워보려는 거야. 네 몸에 들어선 죽음의 기운을 네가 다스리든, 그것이 덜 쌓이게 하든."

"하지만······ 스킬을 강화하는 책 같은 게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

혼란스러워 하는 실비아의 물음에 히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마법이잖아."

고작 그 한 마디에 실비아는 납득한다.

이미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눈앞에서 봤는데 스킬을 진화시켜주는 책쯤이야.

있을 법도 하지 않은가.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는 실비아.

"책을 펼치면 바로 발동될 거야."

"내 스킬이 강화되면 어떻게 바뀌어?"

"그건 몰라."

그러고 보니 혼을 다루는 스킬이 있었던가.

수없이 많은, 개성 넘치는 스킬이 있는 벤타이얼.

그럼에도 혼을 다루는 스킬은 적어도 히오의 기억 속에는 없다.

비슷한 스킬이야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영혼이 언급된 적은 없는 것이다.

"네가 확실히 낫는다는 보장도 없어. 오히려··· 악화될 수도 있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실비아."

히오의 말에 실비아는 침묵하며 가만히 책을 내려다본다.

능력이 강화된다고 꼭 페널티가 약해지라는 법은 없다.

강화되는 만큼 악화될 수도 있는 것.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할게."

결심을 굳힌 실비아가 책을 향해 손을 뻗는다.

45화 실비아 베르덴(2)

적막에 휩싸인 방.

모두의 시선이 눈을 감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한다.

부드러운 은발.

새하얀 피부.

오똑한 코.

기다란 속눈썹.

실비아 베르덴.

영혼을 보는 소녀.

이윽고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인다.

여전히 부드러운 은발.

여전히 새하얀 피부.

여전히 오똑한 코.

여전히 기다란 속눈썹과.

······잿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실비아를 중심으로 공기가 일렁이며 퍼져나간다.

능력을 진화한 여파로 부는 미약한 바람.

그리고 그 작은 바람에 담긴 것은.

"회의장으로 가지."

섬짓한 귀기(鬼氣).

* * *

욘 토르노 성의 동부 연합 회의.

공식적인 회의 안건은 몬스터 웨이브의 사후 처리에 관한 건이었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는 게 좋겠습니까. 볼렌스 백작."

"글쎄요. 변경백께서 가타부타 말이 없으시니."

"분명 좋은 기회이기는 합니다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널리고 널린 탓이었다.

황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을 모르고 있는 이는 없다.

자세한 전황은 동부에 닿지 않았으나 큰 흐름 정도야 파악하고 있었으니.

황녀, 실비아 베르덴이 무슨 목적으로 동부에 온 것인지는 진작 알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몇몇 귀족들에게 은밀히 접촉해오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욘 토르노의 이름 아래.

동부의 특수성을 핑계로 그 어느 세력에도 합류하지 않았었다.

한데 황위 계승자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황녀가 찾아오고 욘 토르노는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우연인지 황녀의 계획인지. 지금 이 성에는 당장 전쟁을 일으켜도 무방할 정도의 병력이 모여 있다.

"만약 저희가 군대를 일으킨다면 승산이 있다 보십니까."

"우리 동부의 기사와 병사들이야 전부 백전노장이지요. 문제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냐 이겁니다."

"허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는······."

"크흠.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황녀 전하의 고상한 품위와 우아한 품격은 인정하지만, 아무래도 대제국의 황위에 오르기에는 뭐랄까. 위엄이 조금······."

"하지만 곁에는 마법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가 나선다면 승산이 높아요."

"마법사가 끝까지 함께 하느냐가 관건이겠군요."

만약 정말로 황녀가 이 혼란한 전쟁을 종결시키고 황위에 오른다면 그들은 이 지긋지긋한 동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단박에 실세가 되어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저들끼리 웅성이고 있는 와중.

"들어가시지요."

황녀, 실비아 베르덴이 회의장에 입장하였다.

욘 토르노와 실비아 베르덴.

그 뒤를 당연하게 따라붙는 기사 테오르도.

그리고.

"어허······."

"크흠."

마법사 히오 파블렌코.

자연스럽게 가장 상석에 앉는 실비아와 그 양옆에 앉는 욘 토르노, 히오 파블렌코.

며칠 전 같았으면 어딜 광대가 주제도 모르고 그런 곳에 앉느냐며 노발대발했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한다.

"다들 모인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지."

그런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시작되었다.

* * *

"의견 없으십니까?"

몬스터 웨이브 사후 처리에 관한 건.

이례적으로 조용한 회의장.

회의할 것이 없었다.

뭐 한 것이 있어야 회의를 할 게 아닌가.

사망자도 없고 경상을 입은 병사 몇 명이 전부인 전무후무한 승리.

작년만 하더라도 어느 가문 병력의 피해가 컸고 그 위로금과 마정석의 분배 등등.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손해를 메꾸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자들이 지금은 조용하다.

좀 전에 말했듯,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서서 뭘 한 게 있어야 할 말이 있지.

얼만큼의 손해를 입었고 자신의 영지가 얼마나 어렵고 주절주절 이야기하면서 길어졌을 회의가 금방 끝나버린 것이다.

"그럼 올해의 몬스터 웨이브 사후 처리에 관한 안건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장내에 침묵이 가라앉고 이유 모를 긴장감이 감돈다.

이제, 진짜 주제가 나올 차례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 실비아를 향한다.

"동부 연합."

그 많은 시선을 받으며 입을 열기 시작한 실비아.

"그란디나 산맥 아래, 릭케 자작령부터 이곳 욘 토르노의 성까지 드넓은 동부를 하나로 연결한 거대 연합."

그 목소리는 어쩐지 이전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연합의 귀족들에게 묻겠네."

알아차렸더라도 그저 긴장되는 장내의 분위기 탓이라 여긴다.

"그대들은 지금에 만족하는가."

실비아의 물음은 동부 연합의 불만을 제대로 짚은 물음이었다.

해마다 덮쳐오는 몬스터의 습격.

그에 매년 일정 지원을 받고는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금지(禁地)로 지정될 정도의 산맥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몬스터가 아닌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알기에 실비아는 말한다.

"나를 따르게. 기회를 주지."

자신을 따라야 할 이유를 구구절절 이야기할 것이란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그리 길지도 않은 설득.

아니, 이걸 설득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량을 베푼다는 태도이지 않나.

이것은 오만인가. 아니면 마법사를 등에 업은 자신감인가.

실비아의 말이 끝나고 이어진 침묵 속에 왠지 모를 오싹함이 느껴지지만······ 무시하며 볼렌스 백작이 나선다.

"전하의 말씀은······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참전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두 황자 전하의 세력이 몹시도 거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연합이 합류하여도 승리를 장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일부러 부정적인 말을 하며 황녀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볼렌스 백작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황녀의 입에서 마법사가 함께할 거라는 확답이 나오기를.

하지만 그런 백작의 기대와는 달리 실비아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건가."

"······그것이···."

"나는 패할 것이 뻔하니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은가."

"······송구합니다. 실언을 하였습니다."

뭔가······ 달라졌다.

그저 아름답기만 하던 꽃이 아니었나.

헌데 왜 덤덤히 내뱉는 저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영문모를 오싹함이 더욱 커져 간다.

"다시 한번 묻지."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느낄 정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나와 함께할 텐가. 아니면 여기에 머물겠는가."

정적에 휩싸인 회의장.

어색한 침묵이 아니다.

섣불리 입을 열기가 두려웠기에 발생한 침묵.

그만큼이나 싸늘한 음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의문이 떠오른다.

······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자신들이 아니던가.

황녀는 자신들의 병력이 없으면 계승 전쟁에 참여조차 할 수 없는 처지이지 않은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은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다.

이상하게 무거운 입을 억지로 열어 본다.

"물론······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으나··· 정보가 부족······ 하고······."

떠듬떠듬 나오는 말.

무거워지는 정신.

이상하다.

"괜찮네. 괜찮으니 계속 말해봐. 아주 솔직하게."

황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이렇게나 편안해지다니.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긴한데 그렇다고 말해보라는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사실 마법사의 참전만 확실시된다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긴 합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이고 또 이긴다면 대박이지 않습니까. 황녀께선 유약하시니 우리 동부 연합 구성원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힘을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제국이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죠."

역시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찮은 의문은 금방 사그라든다.

의문이 있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영문모를 즐거움.

"그런가. 그건 동부 연합 전체의 의견인가."

"하하하! 전체는 아니지만,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겁니다. 하하하하!"

이상하게 즐겁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하하하하!"

웃고봤더니 즐거워하는 건 볼렌스 백작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모두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에 근심과 걱정이란 것이 없다는 듯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 모습에 더욱 마음이 즐거워진다.

역시, 황녀 전하를 모시는 건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다.

"거짓을 고하지 않으니 즐겁지 않은가 백작."

"정말 그렇습니다! 실비아 황녀 전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즐거워하고 있다.

이리도 마음껏 웃어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란 말인가.

문득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한 마음이 치밀어오른다.

이런 즐거움을, 행복을 느끼게 해주신.

너무도 고마우신 실비아 전하.

울컥 쏟아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그래서 그냥 울었다.

"전하······."

"어찌 저희 같은 자들에게 이런 은혜를······."

"흐윽···."

"망극하옵니다!"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회의장.

부끄러움 따위는 없다.

황녀 전하를 모시는 일에 어찌 부끄러움이 있을쏘냐.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이번에도 혼자만이 아니었다.

위대하신 황녀 전하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역시나 모두 같은 것이다.

"자자, 그만 울고 나를 보게나."

황녀 전하의 말씀이시다.

모두가 고개를 들고 경건하게 황녀 전하를 바라본다.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반짝이는 은발.

그리고······.

어쩐지 조금 흐릿한 잿빛의 눈동자.

···잿빛은 무슨.

잠시 눈이 멀었나 보다.

그 어떤 보석보다도 반짝이는 은색의 눈동자.

영롱하고 아름다운 눈.

"오늘 정말 유익한 회의였지 않은가?"

그 말에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회의였습니다!"

"한없이 영광스러운 회의였습니다!"

"정말 다신 없을 은혜로운 회의였습니다!"

"가문의 영광으로······."

"그만."

실비아의 명령에 모두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그럼 모두 함께 수도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자세한 회의는 내일 다시 하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실비아.

"피곤하군."

그에 약속이라도 한 듯, 회의장의 모든 귀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윽고 실비아가 움직여 회의장을 벗어나자 아무런 잡음 없이 그 뒤를 따라나가는 동부 연합의 모든 귀족들.

북적이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썰렁해진다.

조용해진 회의장에 홀로 남은 히오가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짧지만 강렬한 한 편의 연극을 본 것 같은 느낌.

아니, 연극이 아니다. 이것은 인형극이다.

한 명이 조종하는 너무도 작위적인 인형극.

히오가 유령의 눈을 해제하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데.

"하하······."

모자 밑으로 드러난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 *

대륙의 정점에 설 만한 재목.

언젠가 푸르넬이 실비아를 보며 했던 그 말이 꼭 맞았다.

- 정신 계열 마법은 다루는 것도 까다롭고 막아내는 것 또한 까다롭지. 허나 까다로울 뿐 허점은 존재한단 말이야. 절대적이지가 않아.

이마를 짚고 있는 히오의 머릿속으로 푸르넬의 목소리가 퍼진다.

- 하지만 영혼 자체를 건드린다면 말이 달라지지. 허점도, 흔적도 없어. 아마 저자들은 제 목숨보다 황녀를 소중히 하며 평생 충성을 바칠 걸세.

이미 그들의 혼에 실비아의 존재가 새겨졌다.

무슨 수를 써도 지워낼 수 없으리라.

"······대항할 방법은?"

- 없네. 아니, 거의 없지. 5위계 기사라던 욘 토르노 또한 아무런 저항 없이 혼을 내어주었지 않은가. 물론 황녀가 욘 토르노에게는 크게 손을 쓰지 않은 것 같지만.

다른 귀족들과 달리, 욘 토르노는 그저 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정도로 그쳤다.

욘 토르노가 대단해서는 아니고 순전히 실비아의 자비 덕택이었다.

- 영혼의 격이 높으면 저토록 쉽게 지배하지는 못할 걸세.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 황녀의 능력이 더 발전한다면 격이 높아도 소용이 없어질 게야.

"······사기네."

- 무서운 능력이지.

정신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 자체가 그리된 것이다.

이보다 더 무서운 능력이 있을까.

- 그래도 자네에게는 통하지 않을 걸세.

"영력 때문에?"

- 그렇지. 스스로의 혼을 관조할 수 있는 초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그 괴물 같은 놈들과 자네 정도를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은 황녀의 능력에 저항할 수단이 없다 보면 되네.

물론 푸르넬은 그리 말하긴 했지만, 세상은 넓고 변수는 많다.

황녀의 능력이 꼭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푸르넬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인 것 또한 사실.

- 뭐, 아무 의미 없지만 말이야.

푸르넬의 말에 히오는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푸욱 내쉬는 한숨.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 기운 내게. 자넨 할 만큼 했어.

무슨 이유로 이리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냐면은 유령의 눈을 통해 실비아를 보았기 때문이다.

- 쉽게 얻은 강한 힘의 결말은 대부분 이리도 허망한 것이지.

그 몸에 가득 차다 못해 미어터지기 직전인 죽음의 기운을 본 까닭이었다.

완화되지 않은 페널티.

나아지기는커녕 강해진 능력만큼 오히려 더 악화된 그 페널티를 확인해버렸으니.

- 이젠 정말 끝이라네.

실비아 베르덴.

비운의 황녀는 곧 죽을 것이고 히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터였다.

"······최악이야."

고개 숙이며 간청하던 무뚝뚝한 기사와의 약속을.

46화 기사여

- ······미안하다.

텅 빈 회의장에 홀로 남아있던 히오가 자신에게 남긴 말.

이해할 수 없는 사과.

- 미안하다. 테오르도.

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았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와버렸다.

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저래서야 마치······ 실비아가 곧 죽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마법사지 않은가. 방법을 찾겠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마법사.

손짓 한번에 낮과 밤을 바꾸는 마법사.

그런데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 * *

"테오르도."

상념을 깨우는 실비아의 맑은 목소리.

그 부름에 테오르도는 답한다.

"예."

욘 토르노의 성.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실비아의 방.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는 실비아와 그 곁에 서 있는 테오르도.

"히오에게 다녀왔지?"

실비아의 물음에 테오르도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답한다.

"······예."

늘 그랬듯 무뚝뚝하게 끄덕이는 고개.

짧은 대답.

실비아가 시녀들에게 옷 시중을 받는 사이, 테오르도는 히오에게 다녀왔다.

그 딴에는 몰래 다녀온다고 한 것이겠지만, 이 요령 없는 기사의 생각 정도야 실비아에게는 뻔한 것이다.

"히오가 뭐래?"

실비아는 테오르도에게 물었고 대답을 기다렸다.

충직한 기사는 단 한 번도 황녀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질문에 대한 답을 안다면 즉시 대답이 나왔고.

답을 모르더라도 어떻게든 알아내 대답을 들려주던 테오르도가 아닌가.

실비아는 묻고, 테오르도는 답한다.

그것은 한번도 어긋난 적 없던 결과였으니.

실비아는 돌아올 대답을 기다렸다.

"······."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실비아의 물음에 언제나처럼 돌아오던 중저음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실비아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물을 뿐이다.

"히오가 뭐래?"

두 번의 물음.

"······."

돌아오지 않는 대답.

그럼에도 실비아는 기다린다.

곁에 있는 기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다린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히오 파블렌코가 말하길."

테오르도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평생토록 진실만을 담았던 입.

감히 거짓을 고한 적 없던 기사.

그런 기사가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간신히 내뱉는 말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거짓.

없던 사실을 만들어 전하는 거짓말.

"정말?"

하지만 그런 테오르도의 거짓에 실비아는 환하게 웃는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미소.

"다행이다! 역시 히오야."

그런 미소를 가득 선보이며 테오르도에게 말한다.

"수고했어 테오르도. 나도 이제 좀 쉬어야겠으니 얼른 가서 쉬어."

"······예. 전하."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테오르도.

문을 열기 전 실비아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다.

"그럼 쉬십시오."

"응. 오늘도 고마웠어 테오르도."

방문을 열고, 다시 문이 닫히기 전까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실비아.

테오르도는 방문을 닫은 채 그대로 서 있는다.

난생 처음으로 거짓을 고했음에도 부끄러움보다 안도감이 더 크다.

진실을 말했다가는 어떻게 됐을지.

실비아가 얼마나 좌절하고 아파했을지를 떠올려본다면 이런 거짓말은 수백 번도 더 할 수 있으리라.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는 실비아.

그래도 왠지 느낌이 좋다.

저토록 환한 미소를 보이지 않았던가.

오늘은 기분 좋은 꿈을 꾸며 푹 주무시지 않을까.

'내일은 마법사를 찾아가서 제대로 물어봐야겠어.'

분명 방법은 있을 테니까.

'잠에 드시는 것만 확인하고 가야겠군.'

그리 다짐하며 기사는 황녀의 방문 앞을 지킨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테오르도는 여전히 황녀의 방문 앞에 있다.

석상처럼 가만히 굳어버린 채로.

"흐윽······."

방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억눌린 울음.

문밖을 지키고 있을 기사가 들을까, 숨죽이고 숨죽인 채 흐느끼는 실비아의 울음소리.

요령없는 기사의 뻔한 거짓말쯤이야 황녀에게는 훤히 보이는 것임을 왜 몰랐단 말인가.

기사는 여전히 황녀의 방문 앞을 지킨다.

두 눈을 시뻘겋게 부릅뜬 채로.

으스러지라 쥔 주먹에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어 뚝뚝 피가 흐르는 채로.

억눌린 울음소리와 함께.

밤새도록.

* * *

"그러니까."

2황자, 벨로케 베르덴.

"승자가 나왔지 않소. 검성."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로 비탈리아누스에게 말한다.

"우리 형식적인 것들은 집어치웁시다. 다름 아닌 그대와 나 사이지 않소? 내 어릴 때부터 검성을 잘 따랐지 않소이까."

그럼에도 비탈리아누스는 기계처럼 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황위에 오르시면 모든 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대도 눈과 귀가 있으니 알 것 아니오. 내가 이제 황제라니까."

"선황제께서 황태자로 임명한 것은 일황자 전하이십니다."

"그러면 왜 형님께 붙지 않은 것이오. 그대도 내가 황위에 더 어울린다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지 않냐 이 말입니다."

"일황자 전하께서는 즉위식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허······."

이빨을 드러내며 인상을 찌푸리는 2황자, 벨로케 베르덴.

그 모습이 꼭 으르렁대는 짐승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형님 목을 확실하게 쳐라? 그럼 황제로 인정해주겠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기 시작하는 벨로케.

"정말이지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군."

한참을 그리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형님께서 군사를 일으켜 다시 오고 있다니 당신 소원대로 형님 목을 잘라서 가져다주지. 그때는 진정 나의 개······ 아니, 나의 검이 되는 거야. 하하하하!"

1황자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놓는다면 검성은 자신을 황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되면 황제만을 따르는 로열 나이츠 전체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발아래에 놓이는 것이다.

제국 최고의 무력집단이 앞장서 대륙을 피로 물들이리라.

"조만간 다시 보자고 검성. 아니······."

2황자는 그 짜릿한 순간을 상상하며 방을 빠져나간다.

"선황제의 수호 기사. 비탈리아누스 마헬."

홀로 남은 검성.

제국의 황금 사자, 비탈리아누스 마헬.

그의 차림새는 제복도, 갑옷도 아니었다.

검은색의 상복차림.

무미건조한 눈으로 2황자가 빠져나간 방문을 응시한다.

저런 시답잖은 도발 정도야 우습지도 않다.

다만 비탈리아누스는 오직 황제만을 따르기로 그의 주인과 맹세한 몸.

2황자나 1황자. 누가 이기든 검성은 그저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은.'

사실 이제 별 관심도 없다.

그저 지독히도 허무할 뿐.

방 한구석에 놓인 자신의 검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황가의 보물.

한때는 제 목숨과도 같았던 그것.

'······모르겠군.'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자신도 한때는 열정에 가득 차 검을 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누군가의 영광을 위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과연 무엇을 위해 검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어.'

무엇을 위해 처음 검을 들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 *

하루가 지나고 다시 회의장에 모인 동부 연합 귀족들과 실비아.

히오가 조금 뒤늦게 회의장으로 향했는데 분위기가 전날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제될 건 없습니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에서 인간을 상대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십 년 넘게 동부를 지켜온 저희 연합이 아닙니까. 병력 편제는 문제없습니다."

"지휘체계도 잘 잡혀있고 병사들의 경험도 많은 편입니다."

"비상 시를 대비했기에 보급품과 물자 또한 넉넉하고요."

열정적으로 회의에 참여하는 귀족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여념이 없다.

"동부 연합이 몬스터 웨이브를 막느라 정신없다는 건 모든 제국민이 알 테니 저희는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할 겁니다."

"설마 하루 만에 그걸 해결하고 수도로 진격한다고는 그 누구도 상상 못할 테죠."

그들의 지식, 경험, 기억 등은 모두 그대로. 바뀐 것은 오직 하나.

황녀를 위한다는 것뿐.

"히오 왔어?"

평상시의 말투로 히오를 반기는 실비아.

그럼에도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실비아가 무슨 짓을 해도 그들 눈에는 고귀한 황녀로 보일 테니까.

"무슨 회의 중이야?"

실비아의 안색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밤을 새기라도 한 듯 진하게 내려온 다크서클.

어떻게든 가리려 한 것 같지만, 티가 안 날 수는 없었으니.

히오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는 귀족들을 바라본다.

"병력 편제랑 이것저것. 승자가 나오기 전에 빨리 진군해야 하니까."

실비아가 군단을 이끌고 도착하기도 전에 황자 중 한 명이 황위에 오른다면 그때는 황위 계승 전쟁이 아니다.

반역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립을 자처하고 있는 수많은 네임드들을 상대해야 할 터.

특히 로열 나이츠와 검성이 가세한다면 정말로 힘들어진다.

"저희에게 부족한 것은 정보입니다."

"병력, 물자, 타이밍, 적들의 방심까지 모든 게 완벽해요. 단, 정보가 없을 뿐."

"가장 중요한 것이 정보 아닙니까. 정보도 없이 섣부르게 병력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정보의 부족.

내전에 참여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았기에 정보가 없고 그것을 빠르게 얻을 방법 또한 동부에는 없다.

결국 수도로 진군하며 알아볼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그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지 않나.

그러니 오직 황녀만을 위하는 동부 연합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아? 정보?"

상황을 대충 파악한 히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걱정 마. 방법이 있어."

"방법?"

고개를 갸웃거리는 실비아.

이 외진 곳에서 정보를 얻을 방법이 무엇일지 예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 잠시만."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히오.

그리고 잠시 후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 야!

- ······.

- 빨리 나와봐. 거기 있는 거 아니까.

- ······.

- 내가 모른 척 해주니까······ 뭐 언제까지 숨어 있으려고?

- 엇! 이게 누구야. 내 친구 히오!

- 옘병.

- 하하하하! 이런 우연이! 마침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말이야!

- 헛소리 말고 이리와. 빨리 안 와?

- 하하하하! 내 가긴 가겠다만, 정말 우연히 만나니까 반갑지 않나!

그런 대화가 몇 번 더 오가더니.

히오가 웬 사내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며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얼굴의 남성.

마치 목덜미를 물린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리고 있는 사내.

"하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우연찮게 이곳을 지나가던 히오의 소꿉친구······."

"제이슨 클라록이야."

회의장 내 모두의 시선이 제이슨을 향한다.

"제이슨 클라록?"

"그게 누군가?"

어리둥절해 하는 동부의 귀족들과 달리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시르베르트 교수와 함께 본 적 있는 사내.

암살과 정보 길드의 장.

한데 그때와는 얼굴과 체형이 완전히 딴 판이었다.

변장과 잠입의 귀재라고 하더니 상상 이상이지 않나.

······혹시 저 고양이 같은 자세도 변장의 일종인가?

실비아가 그렇게 놀라고 있는 사이 히오는 손에 잡힌 제이슨을 심문하는 중이었다.

"너지?"

"응? 뭐가?"

"시르베르트한테 내 위치 알려준 사람 말이야."

"하하하! 무슨 소린가 친구. 나는 모르는 일이야."

"얼마 받고 팔았어?"

"어허! 이거 섭섭하네!"

"시르베르트한테 물어본다?"

"······미안."

빠르게 인정하며 싹싹 빌기 시작하는 제이슨.

그로서는 나름 억울할 만도 했다.

히오에게 걸리지 않았었던 거리만큼을 방심하지 않고 계속 유지 했었으니.

다만 그가 몰랐던 것은 히오의 서클이 올랐다는 것.

그리고 여러 마법을 다루며 마력에 대한 감각이 더 넓어지고 예리해졌다는 것.

"자, 제이슨."

"응?"

"알고 있는 정보 다 불어."

"응······."

정보 담당은 그렇게 길냥이 줍듯이 해결됐다.

* * *

제이슨의 합류로 얻은 양질의 정보.

그에 늦은 시간까지 회의는 이어졌고.

회의가 끝난 늦은 밤, 히오의 방 안.

"히오 파블렌코."

테오르도는 히오와 마주하고 있었다.

"어제 끝까지 듣지 못했던 말을 들으러 왔다."

확답을 듣기 위함이었다.

어제 실비아의 능력 발현 직후.

혼자 회의장에 남아 절망하던 그 표정은 무엇이었는지.

자신에게 했던 그 사과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정말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맞는 것인지.

테오르도는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아······ 그거 말이야."

그에 히오는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말을 하며 쭈뼛쭈뼛 바닥에 앉는다.

아니, 그걸로도 모자라 그대로 드러누워 버리는 게 아닌가.

"잠시만······."

테오르도는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런 히오를 가만히 바라본다.

누운 채로 허리춤의 주머니를 뒤적여 한 권의 작은 책을 꺼내 드는 히오.

그게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양 누운 채로 품에 꼬옥 껴안는다.

그 모습 사이로 얼핏 보이는 책의 제목은.

- 참으면 복이 와요!

마치 어린아이가 적은 제목처럼 삐뚤하다.

"······뭐하자는 건가. 히오 파블렌코."

테오르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당장 실비아의 목숨이 걸려있는 판에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건가.

자신은 이리도 마음이 쓰라리고 조마조마한데 저자는 정말······.

"테오르도 리카르트."

하지만 장난을 친다기에는 히오의 표정 역시 테오르도 못지않게 진중하고 또 심각했으니.

바닥에 누운 채 유례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황녀를 살리고 싶나."

그 상태로 가슴팍의 책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말하는 히오 파블렌코.

"그럼 당장 나를 때려라."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그 말에.

"최대한 아프게 말이야."

테오르도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물러나 버렸다.

47화 기사여(2)

작은 스파크는 벼락을 다스리는 힘이 되었다.

작은 불꽃은 의지를 가진 푸른 태양이 되었다.

속성 마법은 같은 속성의 최상위 스킬로 진화.

그렇다면 네크로맨서 마법인 뱀피릭 터치는 어떤가.

네크로맨시답게 그와 관련된 최상위 스킬로 진화하지는 않을까.

짧게 번뜩인 생각이었지만, 꼬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생각을 이어간다.

네크로맨시는 죽음의 기운을 다룬다.

뱀피릭 터치는 상대의 생명력을 뺏어 나의 마력이나 체력으로 바꾸는 네크로맨서의 마법.

요는 이것이다.

상대의 '기운'을 뺏어 나의 것으로 만든다.

그것의 최종 진화형태는······ 어쩌면 죽음의 기운.

그뿐만 아니라 모든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실비아의 몸에 깊숙하게 스며든 죽음의 기운도 실비아가 아닌 히오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푸르넬?"

- 음? 뭐가 말인가?

"······아니다."

어차피 이 말 많은 유령에게 물어봐야 괜히 똥폼 잡으며 '음 그럴싸하군.' 이 말밖에 더하겠는가.

은근히 쓸모없다.

- 자네··· 방금 왠지 상당히 기분 나쁜 생각을······.

어쨌든 충분히 가능성 있는 계획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력을 목표치까지 채워야 하는데.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398 / 1000)]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지 않나.

인내의 카탈로그가 있긴 해도 목표치까지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 그때까지 실비아가 버티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히오는 얌전히 바닥에 드러누운 것이다.

"때려줘 빨리."

품에는 인내의 카탈로그를 꼬옥 안은 채로.

고통의 감내에도 인내력이 오른다는 것은 문양을 심장에 새기며 충분히 확인했다.

다만 그때처럼 쭉쭉 올릴 수는 없으리라.

기절할 정도로 극한의 고통만을 느끼고 육체적으로는 상한 곳이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물리적인 공격에 의한 고통은 매일 같이 할 수는 없을 터.

실비아가 죽기 전에 히오가 죽을 터였다.

"난 준비됐어."

비장한 히오의 말에 테오르도는 여전히 찝찝한 얼굴로 되묻는다.

"진짜··· 이게 실비아 전하를 살릴 수 있는 길인가."

"그래.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이마저도 통하지 않으면······."

굳이 뒷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이미 테오르도의 표정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으니.

"······알겠다."

테오르도가 손을 들어 올린다.

"최대한 육체적 손상은 없이 고통을 극대화하면 된다 했나."

"그래."

비장해진 표정.

"그럼 가겠다."

마찬가지로 비장한 대답.

"응. 와줘!"

야심한 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이상한 소리.

히오의 방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 * *

시르베르트가 한숨 돌렸다는 듯 안심하며 아티팩트를 작동한다.

- 4번 사용자 : 가장 큰 고비를 넘겼다.

동부의 황녀가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 1번 사용자 : 승산은 확실한 거겠지?

- 4번 사용자 : 확실해. 두 세력 전부 황녀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어. 동부의 군사 움직임을 파악하더라도 몬스터 웨이브 때문인 줄 알 테고.

- 3번 사용자 : 확실히 우리 쪽에도 황녀에 대한 말은 거의 안 나와. 간혹 황녀가 시체로 발견됐다는 둥, 어디 왕국에 팔려갔다는 둥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만 있지.

- 4번 사용자 : 로열 나이츠 분위기는?

- 1번 사용자 : 2황자가 검성을 찾아갔지만, 뻔하지. 퇴짜 맞고 돌아갔다.

- 4번 사용자 : 그거면 충분해. 변수는 없다.

변수는 없다.

시르베르트는 그리 장담했다.

정보의 우위도 이곳에 있으니 황녀를 배제한 두 세력은 감히 상상치도 못하리라.

전투의 끝자락에 등장할 황녀의 군대를.

- 3번 사용자 : 그나저나 아이라이츠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5인의 랭커 중 3위를 유지하던 플레이어, 아이라이츠.

아티팩트 기준, 2번 사용자.

원래도 그다지 교류가 없는 아이라이츠였으나 요즘엔 그 정도가 좀 심하다.

- 4번 사용자 : 뭐, 좀 독특하긴 해도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으니··· 바쁘겠지.

게임 속에서 자주 함께 만났기에 알지 않나.

조금······ 아니 사실은 조금 많이 독특하긴 해도 성격 좋고 재미난 녀석이다.

물론 빙의되고 난 이후에 만난 적은 없다만, 연락은 꾸준히 닿으며 그들의 말을 잘 따르던 아이라이츠가 아닌가.

"뭔가 좀······ 불안하긴 한데."

기우일 것이다.

별일 없을 터였다.

* * *

1황자, 알렌베르트 베르덴.

탐욕스럽기가 이루말할 수 없는 지경인 자.

그만한 성정에 황족이라는 배경.

거기에 더해 첫째라는 이유만으로 얻어낸 황태자의 자리.

거칠고 오만하며 갖기로 한 것은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자.

그것이 알렌베르트 베르덴이라는 작자였다.

그런 알렌베르트가.

고귀한 존재라며 평생을 떠받들어진 황태자가.

"헤엑. 헥!"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다.

혓바닥을 쭉 내민 채 마치 개처럼 헥헥거리는 모습.

"그러니까요. 황태자 전하도 궁금하시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런 황태자의 위에서 다리를 꼰 채 걸터앉아 있는 한 여인.

고혹적인 옷차림과 그에 걸맞은 화려한 외모.

허나 그렇게 요란하게 있음에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는 없다.

주변의 모든 이들의 동공이 풀려 있었으니.

"그게 정말 지존 천마가 맞는지 아닌지. 궁금하죠? 그렇죠?"

황태자의 은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묻는 여인.

그에 황태자가 답한다.

"헥! 헥!"

선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일어나는 여인.

"뭐, 확인해 보면 알겠지."

* * *

윌코는 정보 길드에 소속된 정보원이다.

타고났다면 타고난 작은 덩치.

그에 따른 민첩함과 은밀한 걸음까지 정보원으로서는 엄청난 재능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1황자 진영의 감시와 정기적인 보고.

무척이나 중요한 임무인 만큼 정보 길드에서도 특급으로 분류되는 이들.

즉, 스킬 사용자까지 다수 동원된 그런 임무였다.

윌코는 스킬 사용자는 아니었으나 경험과 실력을 인정받아 이번 임무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고.

"별 특이사항은 없군."

서부의 대귀족 노턴 후작과 합류해 다시 수도로 진군하는 1황자, 알렌베르트 베르덴.

그 군세가 사뭇 대단하긴 했으나 윌코에게 주어진 임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들키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동향을 파악하는 정도.

그마저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윌터도 모르는 수많은 정보원들이 다른 곳에서 비슷한 보고를 올리고 있을 것이고.

더욱 자세한 정보는 특급들이 알아서 잘할 테다.

"이대로 보고를 올려야겠어."

윌코가 보고를 위해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딱히 보고할 건 없음에도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정해진 시간마다 보고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윌코의 눈에 얼핏 스쳐 지나가는 선홍색의 빛.

"······응?"

원체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갔기에 윌코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뭐지?"

하지만 보이는 것은 자신이 지나쳐온 길뿐.

선홍색의 그 무엇도 발견되지 않았고 잘못 봤겠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안녕 윌코?"

윌코의 눈에 가득 차는 붉은빛의 향연.

윌코의 동공이 삽시간에 풀려 버린다.

"어디 보자."

여인이 손을 내밀자 자연스레 손에 들린 종이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는 윌코.

그에 여인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잠시 확인하고 다시 윌코에게 건넨다.

"잘하고 있네? 우리 윌코."

그 말 한마디에 헤벌쭉 벌어지는 윌코의 표정.

"옳지. 그렇게만 하자?"

헤벌레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인다.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을까.

어느새 선홍색 눈동자의 여인은 사라졌고 윌코는 입가의 침을 슥 닦으며 다시 보고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또 한 번의 붉은빛이 번뜩이지만, 이번에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제이슨 덕에 두 세력 간의 정보를 모두 취합할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있는 것이다.

"으음··· 이렇게 한쪽 편을 들면 좋지 않은데······."

제이슨의 입장에서는 밑지는 장사인 것이다.

여기저기 붙으며 정보를 팔고 값을 높여야지.

한쪽에 붙어버리는 순간, 누가 정보 길드를 신뢰하고 이용하려 하겠는가.

"투자라 생각하지 뭐."

궁시렁대던 제이슨이 혼자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번 일이 황녀의 승리로 마무리되면 정보 길드의 신뢰도야 좀 내려가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들을 얻을 테니 말이다.

"그만 궁시렁거리고 대답이나 해봐. 와일들리 평야에서 대회전을 약속했다는 건 확실하지?"

"확실해. 그만한 군사를 이끌고 황성에서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났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수도는 폐허가 되어버릴 테니 그들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거야."

1황자와 2황자.

와일들리 평야에서 두 세력의 총력전이 약속됐다는 말이었다.

"둘 중 한 명이 뒤통수칠 가능성은?"

"없어."

제이슨이 단호하게 답한다.

"이미 와일들리로 움직이려는 움직임이 잡혔고 또 거절할 이유가 없지. 서로가 더 유리하다 생각할 테니 말이야."

"서로가 더 유리하다 생각한다고?"

"기사의 우위는 일황자쪽에 있어. 서부의 노턴 후작이 합류하면서 그 휘하 귀족의 정예 기사단도 합류했거든."

반면에 2황자는 황성 쟁탈전에서 잃은 기사단을 거의 복구하지 못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이미 세력이 나누어진 상태였고 남은 것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인데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외압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강대한 세력이라는 말이다.

2황자가 압박을 가했지만, 그리 많은 지원을 얻어내지는 못했고 그것을 예상하고 있기에 1황자 측은 본인들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 거라고.

"이황자는 스킬 사용자. 그중에서도 깨우친 자들을 믿고 있는 것이지."

황성 쟁탈전의 일등 공신.

시르베르트가 본인 대신 합류시킨 빙의자들.

2황자는 그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스킬 사용에 최적화된 빙의자들인 만큼, 그들 몇 명의 힘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번 대회전에 나서지 않을 거야. 아니, 적당히 나서는 척만 하다가 빠지겠지."

적당히 균형만 맞추고 빠질 것이다.

서로 간의 피해가 더욱 커지도록.

혼란이 가중되도록.

"그리고 그때 우리가 덮친다는 말이로군."

"그렇지."

여기까지가 시르베르트의 계획.

"확실하게 두 황자의 수급을 거둬야 해. 둘의 죽음이 확인만 되면 황녀 전하께서 유일한 계승자가 되니 가장 깔끔한 결말이야."

두 황자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지만, 모든 상황이 실비아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다.

적어도 제이슨은 그리 확신했다.

제국에서 가장 아는 것이 많다는 이 남자도 코앞까지 닥쳐온 실비아의 죽음까지는 몰랐기에.

"너 근데 어디 맞았냐? 아파 보이는데?"

"······맞기는. 됐고 움직이자 이제."

성의 계단을 내려가며 아래를 바라보니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열해 있는 수많은 병사들이 보인다.

비로소 전쟁의 준비가 끝난 것이다.

"성문 개방!"

거대한 성문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다.

실비아는 수척해진 얼굴로 말 위에 오른다.

그 뒤를 따라 수백의 기사가 함께 말 위에 오른다.

"출병!"

욘 토르노의 우렁찬 외침.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만의 병사.

황녀의 군단.

"목적지는 와일들리!"

그 장엄한 출병을 보며 실비아는 생각한다.

가자. 황성으로.

가자.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진군!"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수년간 이어져온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내러 가자.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463 / 1000)]

48화 기사여(3)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제이슨 클라록 덕분에 완전한 정보의 우위를 점하고는 있지만, 출발이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으니.

두 황자가 한창 박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등장하려면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넓은 대로를 따라 이동하며 휴식을 최소화하는 강행군.

피로는 누적되겠으나 막상 전투 자체는 싱거울 테다.

순탄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순조롭다.

"이상 없네."

매일 같은 시간에 올라오는 보고 역시 상황이 순탄함을 가리키고 있다.

두 황자는 오로지 서로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고 움직이는 동향 또한 지극히 정상적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다.

서로가 아닌, 다른 곳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동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제이슨이 정보를 통제한 것도 제법 큰 영향을 미쳤을 테고 다른 곳에 눈 돌릴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

특히나 동부는 아예 배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이리도 순탄한 것이다.

와일들리로 가기 위해 들려야 하는 도시는 총 세 곳.

그 중 첫 번째인 도시 코트린에 입성할 때도 그랬다.

순조로웠다.

수만에 달하는 군세를 보고 황급히 열리는 성문.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성주는 황녀를 보자마자 고개를 있는 힘껏 숙였다.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눈치 빠른 영주 덕택에 예정대로 하루 푹 쉬고 코트린을 나섰다.

그 다음으로 거쳐야 하는 곳은 도시 린포드.

린포드 역시 코트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쉽고, 빨랐다.

군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성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이다.

인접한 곳인 만큼 소식을 듣고 빠르게 대처한 모양.

아주 순조로웠다.

린포드에서는 잠시만 쉬고 지나쳐갈 생각이었다.

코트린에서 충분히 많은 휴식을 취했고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다시 빠르게 움직여야 할 차례.

그게 계획이었고 계획을 방해할 만한 건 일절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헌데··· 왜 이리되었을까.

"······."

테오르도는 그의 눈앞에서 죽은 듯 누워있는 소녀를 바라본다.

"······전하."

수척해진 얼굴.

미동조차 하지 않는 눈꺼풀.

미약하게 내쉬는 숨소리가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죽은 것처럼 보였으리라.

두 번째 도시 린포드에서 돌연 쓰러진 실비아가 여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린포드에서 가장 커다란 마차를 급하게 구했고 실비아를 조심스레 태워 이동하고는 있는데······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당장에라도 의원이나 신전을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태 각종 증상이 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의식을 잃고 오랜 시간 쓰러진 것은 처음이다.

"죽음의 기운이 머리까지 올라오기 시작했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테오르도의 고개가 돌아간다.

실비아를 살피던 히오가 테오르도에게 말을 한 것이었다.

옅은 회색을 띠던 눈동자가 점차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테오르도. 네가 멘탈이 나가버려서 어쩌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히오의 꼴도 좋지는 않았다.

인내력을 위해 몸을 한계까지 혹사한 것이다.

"하아······."

그꼴을 보고서야 테오르도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답지 않게 무너진 모습.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이럴 때면 돌처럼 단단하기만한 자신의 머리가 지독히도 원망스럽다.

"정말······ 그게 전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맞는 것인가."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사라지만, 방식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 않나.

맞으면서 기를 모아야 한다니.

기를 모아서 새로운 마법으로 황녀를 살릴 것이라니.

게다가 그러는 동안에는 다른 마법을 쓸 수도 없단다.

"그래. 그때까지 실비아가 버텨줘야겠지만."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싶다가도 히오의 진지한 표정과 그가 여태 보여준 것들을 떠올려본다면···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실비아가 살 수 있다고.

그리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테오르도. 흔들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래."

테오르도는 다시 히오를 바라본다.

겉보기에는 크게 티 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는 상처로 가득할 몸.

"히오 파블렌코.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지."

생각해보면 하잘 것 없는 인연이었다.

그저 일방적인 부탁.

부와 명예나 권력.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지내다 보니 그런 걸 탐하는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고.

허면 왜 히오 파블렌코는.

온갖 능력을 지닌 이 마법사는 왜 몸을 망쳐 가면서까지 실비아를 돕는 것인가.

그런 질문에 히오는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약속했잖아."

뭐, 갖가지 이유가 있고 실비아를 황제로 반드시 만들 수밖에 없는, 뒤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약속을 했지 않은가.

"너도 그렇고, 실비아도 그렇고. 약속했잖아."

실비아에게는 그녀를 황제로 만들어주겠다. 죽기 전까지는 함께 발버둥 쳐보겠다.

테오르도에게는 실비아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실비아가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겠다.

그리 약속했지 않은가.

그것은 히오가 이들을 돕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고.

"······약속이라."

테오르도는 눈을 감고 약속이란 말을 다시 한번 되뇌인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라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

"···알겠다."

눈을 뜬 테오르도의 모습은 이전의 테오르도로 돌아온 상태였다.

무뚝뚝하고 흔들리지 않는 기사.

해야 할 일을 무던히 해내어 가는 황녀의 수호 기사.

그런 테오르도의 눈에 히오 파블렌코의 모습이 담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

"그래 잘 생각했어. 지금은 좀 그러니까 조금 이따가 저녁이 되면 다시 나를 때려······."

"히오 파블렌코."

무뚝뚝한 기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 그만하지."

* * *

육체에 입은 데미지는 누적될 수밖에 없다.

서클을 심장에 새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말이었다.

체력과 정신력만 받쳐주면 끝없이 고통받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육체의 손상은 회복이 그리 빠르지 않다.

자연스레 고통받는 시간은 짧아지고 기절하는 횟수는 늘어난다.

그걸 알기에 테오르도는 말한 것이다.

"휴식해야 한다. 더 했다가는 영영 어디 하나 못 쓰게 되는 수가 있어."

"······그런가."

지금부터 쭉 휴식을 취해도 아슬아슬하다.

아마 전쟁에 직접 참여할 일은 없겠지만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빌빌거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쉽지만, 고통으로 인내력을 올리는 것은 여기까지라는 말이었다.

[히든 특성 : 폭력은 안 돼! (인내력 702 / 1000)]

며칠 동안 말 그대로 기절할 때까지 맞으면서 올렸음에도 이것이 한계이다.

첫째와 둘째 날에 가장 많이 올렸고 그 뒤로는 크게 올리지 못한 것이다.

픽 맞으면 픽 쓰러지는데 인내고 나발이고 오를 턱이 있나.

그나마 이것도 인내의 카탈로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수치.

그런 히오를 바라보며 테오르도가 묻는다.

"히오 파블렌코. 너는 참는 것에 상당히 익숙해 보이더군. 혹,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

"뭐······ 보다시피."

그리 답하며 고개를 돌려 테오르도와 시선을 마주한다.

이제는 그 무뚝뚝한 표정도 제법 눈에 익었기에 보이는 것이다.

"네 사정은 모르겠다만, 너무 참지는 마라. 인간의 정신력은 무한하지 않아."

"충고 새겨듣지."

무심한 눈 깊숙한 곳에 숨겨진 따스한 걱정을.

* * *

세 번째 도시, 아돈에 도착할 때까지도 실비아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까지 치고 올라온 죽음의 기운을 빼내지 않는 이상,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런 사실을 테오르도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답지 않게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준 테오르도가 아닌가.

이번이 실비아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될지.

아무리 죽음은 허망한 것이라지만, 한마디 말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이별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아돈을 지나가면 이제 곧 와일들리다."

어찌됐건 지금은 눈앞에 집중해야 할 때다.

전장이 머지않았다.

"시간은?"

히오의 물음에 제이슨이 어깨를 으쓱인다.

"적당해."

그 손에는 보고받은 서류뭉치가 한가득 들려 있는 채였다.

"이황자 벨로케는 와일들리에 도착해서 진영을 꾸리고 있는 모양이고 일황자 알렌베르트 쪽도 곧 도착할 모양이야."

며칠 동안 이어진 강행군 끝에 타이밍도 적절하게 맞췄다.

이제 남은 건 두 황자의 뒤통수를 치는 것.

그리고 인내력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간신히 버티고 있을 실비아를 살려내는 것.

그것만 해낸다면 미래에 있을 아주 굵직한 문제 하나가 해결되는 것이다.

도시 아돈에서 반나절 정도 걸어가면 넓디 너른 평야가 나타난다.

와일들리 평야.

그곳의 초입에 진입하며 제이슨은 마지막 보고를 점검한다.

- 일황자, 멀더 지역 우회, 이상 없음.

- 일황자, 말라딘 영지 통과, 이상 없음.

- 일황자, 오스트룸 진입, 이상 없음.

- 일황자, 와일들리 진입, 곧 이황자 측과 조우할 것으로 보임.

마지막 보고는 곧 이황자와 만난다는 보고.

모든 정보원들에게 비슷한 내용의 보고가 한 번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확실한 정보이리라.

연락이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해본다면 지금쯤 전쟁이 시작됐을 터.

그쯤에서 만족해도 되겠으나 제이슨은 이황자측 정보까지 모두 꼼꼼하게 확인한다.

- 이황자, 와일들리 진입, 이상 없음.

- 이황자, 와일들리 도착, 병력을 넓게 산개한 채 대기 중.

- 이황자, 와일들리 대기 중, 이상 없음.

- 이황자, 와일들리 대기 중, 전방에 다수의 병력 발견.

이황자 측 정보 역시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최종보고까지 점검한 후에 수뇌부에 전달했고 그에 욘 토르노는 모든 병력을 멈춰 세우고 휴식을 취한다.

전쟁 전, 마지막 휴식 겸 앞서 간 정찰대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작은 먼지 구름이 보인다.

말을 탄 채 달려오는 정찰대.

그들이 가져올 정보를 군단의 수뇌부는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수많은 병사들을 헤치고 욘 토르노의 앞에 도달한 정찰대.

땀으로 범벅된 얼굴. 덕지덕지 달라붙은 흙먼지.

그리고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다급한 표정.

"모,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소식은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이황자 측의 전 병력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수뇌부 전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게 무슨!"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광경.

정찰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평선 저 멀리 일렁이는 무엇인가.

길게 일렬로 늘어선 채 흔들흔들 거리는 어떠한 형체들.

점차 가까워지는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이황자의 병력이 왜!"

"일황자 군단은 어디 가고 왜 저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단 말인가!"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이냐 하면 역시······.

"정보가 새어나갔다."

1황자 측이든, 2황자 측이든.

어디론가 정보가 샜다.

히오가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돌린다.

"제이슨 클라록."

정보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

하지만 제이슨은 지금 그 누구보다 당황하는 중이었으니.

"그럴 리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 모든 서류를 다급히 틀어쥔다.

받은 보고를 다시 한번 종합해본다.

- 일황자, 멀더 지역 우회, 이상 없음.

- 이황자, 와일들리진입, 이상 없음.

- 일황자, 말라딘 영지 통과, 이상 없음.

- 이황자, 와일들리 도착, 병력을 넓게 산개한 채 대기 중.

정보가 새어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다.

현장에 파견된 정보원들만 몇 명이던가.

그들의 눈을 모조리 속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 일황자, 오스트룸 진입, 이상 없음.

- 이황자, 와일들리 대기 중, 이상 없음.

그말인즉, 정보원 모두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말인데······.

이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만한 능력자가 황자 측에 있었다면 그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미친듯이 서류를 번갈아 비교해보던 제이슨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찾았다."

모든 아귀가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던 보고 내용에는 사실 아주 미세한 허점이 있었으니.

그것을 이제야 알아낸 것이다.

- 일황자, 와일들리진입, 곧 이황자 측과 조우할 것으로 보임.

- 이황자, 와일들리 대기 중, 전방에 다수의 병력 발견.

정해진 보고 시간상, 2황자 측의 보고 시간이 더 늦다.

그렇다는 말은 2황자 측에서 올라왔어야 하는 보고는 전방에 다수의 병력 '발견'이 되어서는 안 된다.

1황자 측과 '조우'가 됐어야 정상이다.

"다수의 병력 발견이라······."

제이슨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는다.

2황자 측에서 올라온 '발견'의 의미를 깨달아버렸으니.

"이거··· 우리를 말하는 거였군."

1황자 측에서 올라온 보고는 모두 거짓.

그들은 아직, 와일들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49화 기사여(4)

"지존 천마가 맞을까? 아닐까?"

간단한 문제다.

맞다면 능히 해결할 터이고.

아니라면 죽겠지.

그녀의 상상 속 지존 천마라면 이 정도 문제쯤이야.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간단히 해결할 테니까.

"보고 싶어라."

고혹적인 웃음.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

선홍빛 눈동자 뒤로 수만의 군세가 움직인다.

* * *

"바뀐 것은 없다! 예정대로 움직여라!"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

"진형을 갖추어라!"

급격히 커져가는 먼지 구름.

불규칙하게 진동하는 땅의 울림.

"뭐해! 얼타지 말고 빨리 좌익으로 움직여!"

긴장할 틈도 없이 벌어진 상황 속에서도 진형이 갖추어져 간다.

양측의 병력이 전면으로 맞부딪치는 회전.

병력의 숫자도, 질도 비슷한 상황에서 이제 전황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쿠웅-

무겁고 두터운 것들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소리.

중갑옷을 걸친 보병들이 선두에서 힘을 겨루고 그 사이로 긴 장창이 빼곡하게 찔러 들어온다.

밀어내느냐. 밀리느냐.

상처 입을 것이냐. 살아남을 것이냐.

순식간에 비명과 고함, 쇳소리와 피육음이 난무한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평원에 흥분과 절망이 드리운다.

싱그러웠을 풀은 피에 절은 군홧발에 짓밟히고 풀벌레의 울음 대신 인간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병사 하나가 악을 쓰며 창을 뽑아낸다.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오며 병사의 온몸을 적시고 그에 더욱 흥분한 병사가 창을 다시 들어 올리지만.

푸확-

이번에는 자신의 몸에 창이 꽂힌다.

뒤집어쓴 피 위로 다시금 흐르는 맑은 피.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고, 죽이더라도 죽는.

죽이고 죽고. 강한 흥분과 끔찍한 절망이 함께 하는 것.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길게 늘어서 벌이는 전쟁.

한쪽이 밀면 다른 쪽은 밀린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휘관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지만,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전장에서는 쉽지 않은 것이다.

전황은 팽팽했다.

병사의 숫자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것도 있고 사실 이것만으로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밀린다면 자연스레 기사단이 나섰겠지만, 원체 팽팽했던 탓에 오히려 기사단의 등장이 늦었다.

인간을 장기말로 봐야 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핵심 전력인 기사단이 조금이라도 먼저 나오는 것은 손해였으니.

하지만 전쟁은 무르익었고 병사의 숫자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졌을 때.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양측에서 기사단이 출병한다.

회전의 전형적인 순서이자 전쟁의 승패를 가를 가장 중요한 순간.

기사와 기사의 충돌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이 승기를 가져오리라.

그렇게 양측의 기사단이 전면에 나섰고.

"저건······?"

그제서야 2황자 진영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동부의 기사단!"

당연히 일황자의 군단이라 생각했던 것이··· 뭔가 잘못됐다.

"동부의 기사단이 왜 여기 있는가!"

"욘 토르노가 일황자와 손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일황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

과시하고, 드러내길 좋아하는 그 성정답지 않게 아무런 깃발도, 상징도 없지 않은가.

마치······ 몰래 진군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달라질 건 없다! 돌격해!"

하지만 그렇다고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이미 전장의 흥분과 열기가 뒤섞여 난전 비스무리하게 펼쳐지는 와중에 병력을 물린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자신들이나, 상대나 누구든 물러나는 순간 끝이다.

2황자 군단을 이끄는 노르딘 후작은 그리 생각했고 꽤 정확한 판단이었다.

당장 상황은 파악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후작은 자신만만했다.

그에게는 숨겨둔 한 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자네들이 나설 차례라네."

시르베르트의 인맥을 동원해 데려온 스킬 사용자.

아니, 단순한 스킬 사용자를 넘어선 깨우친 자들.

주어진 스킬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넘어 스킬을 발전시키고 진화하여 그 한 명 한 명이 기사단 급 무력을 발휘하는 강자들.

심지어 노르딘 후작 곁에 있는 그들 모두가 범위 공격 스킬을 보유한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전쟁에 특화된 능력이라는 말.

'흐흐흐. 시르베르트는 어찌 이런 자들을 데려왔는지.'

전쟁이 잘 마무리되고 자신이 제국의 실세로서 굳건히 자리한다면 시르베르트에게도 한 자리 내어주겠다 다짐하며 명령을 내리는 노르딘 후작.

"가서 그 화려한 능력으로 전쟁을 뒤집어버리게."

이들만 있다면 일황자든 무엇이든 전쟁의 판도는 순식간에 뒤집어지리라.

하지만 이 비밀 전력들은 노르딘 후작의 근엄한 명령에도 어쩐 일인지 꾸물거린다.

"야, 어쩌지?"

게다가 알아먹지 못할 말로 저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아닌가.

"몰라. x발···.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은데?"

"일황자가 아니고 왜 황녀 쪽이 먼저 나타나는 건데."

"누구 태민이 형이랑 연락되는 사람?"

"있겠냐. 로그아웃해서 물어보든가 해야지."

"아 씨······. 그럼 여기는 그냥 튀어?"

"씁. 명성 포인트 아깝긴 한데 뭐, 얼마 되지도 않을 거고. 그냥 가자."

"황녀 쪽이라도 도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괜히 나섰다가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일 망치고 대가리 깨지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고 혼나는 게 낫지."

그런 대화를 나누는 2황자의 비밀 전력.

전황을 뒤집어야 할 깨우친 자들의 대화에 노르딘 후작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슨 언어인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지만, 그들의 표정, 말투,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후작은, 아무래도 저들이 자신의 위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군단의 총사령관인 자신이 좋게 대해주니까 명령을 우습게 아는 모양.

감히 귀족도 아닌 것들이 말이다.

"내 좋게 말하니 우습게 들리는가! 나의 명령이 곧 지엄하신 황자 전하의 명령! 어서 출전하여 벨로케 전하의 위대함을 알려야 할 거야!"

그 지엄한 명령에 깨우친 자들은 단체로 노르딘 후작을 힐끗거린다.

"뭐래 저 병신은."

"야야, 냅둬. 열심히 하시잖아."

"됐고 가자. 길드장님한테 빨리 알려야 해."

"아······ 내 포인트."

여전히 알아먹지 못할 대화를 주고받더니.

"······자, 자네들?"

그 자리에서 푹 꺼지듯 사라져 버린다.

"크흠! 자네들의 능력이 대단한 걸 알았으니 이제 그만 나오게."

후작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 알고 있다는 듯 허공에 대고 말을 걸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허허. 그만 나오고 어서 출전하라니까."

그렇게 한동안 허공에 대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 * *

- 하아······ 넘쳐나는 죽음의 기운. 좋구나 좋아. 네크로맨서로서 참기 힘든 환경이야.

푸르넬의 말을 무시하며 제이슨을 가만히 쳐다본다.

"잘못된 지점은."

제이슨이 재빨리 대답했다.

"일황자야. 일황자 측에 정보가 샌 걸로도 모자라 정체 모를 변수까지 끼여있는 것 같아."

"정보 길드 내의 문젠가."

"아니. 그건 절대 아니라고 장담하지. 길드 내에서도 황녀에 대한 건 극소수만 알고 있고 금제 또한 확실해."

"그럼 정보가 샌 쪽은······."

"교수 쪽이겠지."

말을 덧붙이는 제이슨.

"게다가 일황자측에 다른 변수까지 끼어있어. 우리도 파악 못 한 능력자인 것 같은데···."

제이슨과 히오의 눈이 마주친다.

그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쉽게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

"빙의자."

시르베르트의 예측을 벗어난,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빙의자, 혹은 그가 속한 단체가 끼어든 것이다.

굳어버린 히오의 표정이 펴지지 않는다.

원인은 파악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떠할 것인가.

그놈 혹은 그놈들은 정보를 조작하고 무엇을 하려 할 것인가.

히오와 제이슨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간다.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장이 아닌, 그 반대편.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뒤쪽.

저 멀리 다가오는 또 다른 군단.

훤히 드러나 버린 황녀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전진하는 1황자의 군대.

"이런······."

외통수였다.

* * *

처절한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대의 마차.

마차의 주변은 고요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가장 치열한 곳이기도 했다.

이것은 각자가 모시는 주군을 지켜야 하는 전쟁.

상대가 추대하는 왕을 죽여야만 끝나는 전쟁.

끝끝내 살아남은 한 명의 혈통만이 황제가 되는 잔혹한 전쟁.

무서워 도망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다.

황녀의 삶이란.

그녀의 수호 기사로 사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던 기사는 문득, 검을 뽑아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날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처음 검을 쥐게 된 것이 언제였더라.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떠오르지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처음 검을 잡았더라.

멍하니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역시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떠오르는 것은 아주 작았던 손.

꼬물거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던 작은 손.

그러면서 배시시 짓는 웃음과 옹알거리던 목소리.

그것을 떠올리며 기사는 검을 땅에 꽂아 넣는다.

마차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닿을 리 없는 말을 전한다.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부디 행복하기를.

평생을 불행했던 소녀의 미래는 부디 행운으로 가득하기를.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기사는 몸을 일으킨다.

검을 뽑아들고 마차를 등진다.

지평선 끝자락으로 꿈틀거리며 몰려오는 검은 해일.

검과 창으로 무장한 채 황녀의 목숨을 끊기 위해 몰려오는 죽음의 파도.

그것을 바라보는 기사의 손에는 오직 검 한 자루뿐이었으나···.

무엇이 두려우랴.

이 순간을 위하여 그토록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기사여.

* * *

1위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氣)를 느낀 검의 입문자.

2위계.

내면의 기를 활용해 몸을 강화할 수 있는 자.

3위계.

기에서 오러를 따로 분리할 수 있는 경지.

4위계.

오러를 안정적으로 검에 실어,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경지이자 평범한 기사의 한계.

대부분의 기사가 벽을 넘지 못하고 이곳에서 좌절한다.

5위계.

단순 노력으로는 도달이 불가능한 경지.

정신, 육체, 기운을 하나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하며 깨달음을 통해 본인의 육체를 미약하게나마 재구성할 수 있는 경지.

6위계.

검기의 밀도가 눈에 띄게 농밀해지며 오러의 질이 급격하게 향상되는 단계.

같은 오러라도 그 힘과 정순함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지며 대륙에 이름을 날릴 수 있을 정도의 강자라 할 수 있겠다.

7위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인. 검기를 넘어선 검강을 발현할 수 있는 경지.

그러한 검강을 이용하여 본인의 의념을 형상화 할 수 있으며 7위계에 오른 무인은 개안(開眼)이라 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도 한다.

8위계.

초인 위의 초인.

역사에 이름 남긴 위대한 영웅의 경지이며 사실상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경지라고 일컫는다.

7위계가 산을 뛰어넘는 초인이라면 8위계는 산을 갈라버리고 그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 버릴 초인.

테오르도는 6위계의 기사이다.

초인의 경지를 목전에 둔 기사.

이 드넓은 전장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강자.

그러나 당연하게도 홀로 수만 명의 병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홀로 수십의 기사를 모두 이겨낼 수는 없다.

앞은 2황자의 군대가.

뒤는 1황자의 군단이 몰려오는 상황 속 기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검을 들고 싸우는 것.

그러니 쏟아지는 화살비를 헤치며 나아간다.

짙은 청색의 오러를 두르고 그것을 휘두르며 막아낸다.

그 옆을 군단의 정예 병사들과 기사들, 욘 토르노와 귀족들까지 합세하지만, 테오르도는 그보다 한발 앞서 기다린다.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이들이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그러다 보니 어느새 창을 쥔 병사들이 보였다.

"지나갈 수 없다."

보낼 수는 없었으니 검을 휘두른다.

그 어느 때보다 크게 피어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청색의 오러.

"기, 기사다!"

"고위계 기사다!"

병사들이 대경하며 물러나려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 그들의 뒤에는 또 다른 병사들이 밀려오고 있었으니.

그저 낙엽처럼 쓸려 나갈 뿐이다.

얼마나 그리 베어나갔을까.

테오르도의 앞이 시체로 발 디딜 틈조차 없어지고 그 자신조차도 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썼을 무렵.

"실로 괴물 같은 자로다."

1황자 측의 기사단이 등장했다.

"적이지만, 내 경의를 표하지. 나는 노턴 후작 각하를 모시는 듀란드 엡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멋들어지게 폼을 잡으며 자신을 소개하는 기사.

우습다.

테오르도와는 사는 세상이 다른 자였다.

짊어진 무게가.

전장에 나선 각오가 다른 자였다.

그렇기에 테오르도는 대답 대신 묵묵히 검을 들어올린다.

"무뚝뚝한 자로군. 마지막 예우로서 내 친히 상대해주겠네."

말에서 내린 듀란드가 테오르도와 마주 보며 검을 들어 올린다.

그 검에서 피어나는 옅은 하늘색의 오러.

"누구의 검이 더 날카롭든 후회 없는 승부가 될 걸세!"

듀란드의 오러와 짙은 청색의 오러가 맞부딪친다.

콰앙-!

오러와 오러가 부딪치는 폭발음.

오로지 파괴만을 위한 힘이 서로 반발하며 내지르는 비명.

그리고 그 부딪침 한 번에 우위는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힘에 밀려 번쩍 들려진 듀란드의 양팔.

한 걸음도, 두 걸음도 아닌 대여섯 걸음이나 뒷걸음질치는 두 다리.

불신으로 부릅떠진 두 눈.

반면에 피를 뒤집어쓴 테오르도의 표정은 처음과 같다.

콰앙-!

두 합에 하늘색의 오러가 꺼질 듯 점멸한다.

콰앙-!

세 합에 듀란드의 검에 금이 간다.

기사의 표본 같던 표정과 여유 넘치는 행동은 온데간데없고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만이 남았을 뿐.

콰앙-!

그리고 비로소 네 합을 겨루고 나서야.

"마, 막아! 전부 달려가 막으란 말이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지르며 도망치듯 물러나는 듀란드.

테오르도는 그를 마무리하기 위해 따라붙었으나.

콰앙-!

두 개의 검이 테오르도의 검을 막아 세운다.

양옆에서 도합 다섯 개의 검이 테오르도를 노리고 찔러 들어온다.

비겁하다?

그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목숨이 걸린 전장에.

그보다 더한 것이 걸려 있는 전장에.

비겁은 무엇이고 정당은 무엇인가.

다만 고상한 척하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본성이 다소 우스울 뿐이다.

푸확-

생각이······ 너무 길었음인가.

옆구리를 깊게 베며 지나가는 검 하나.

"끄아아악!"

대단한 일을 해낸 기사는 그 대가로 테오르도의 검에 목이 썰려 나갔지만, 그를 대체할 기사는 주변에 차고도 넘쳤다.

팔을 베면 어깨를 베인다.

어깨를 찌르면 허벅지가 찔린다.

오직 테오르도에게 집중된 기사단의 정예.

그만큼 다른 이들에게 갈 부담이 덜어졌을 터였다.

"죽어!"

힘차게 외치며 찔러 들어오는 검을 어깨를 이용해 받아낸다.

당장 다쳐도 되는 부위에 일부러 찔리며 반대 손으로 틀어쥐는 검.

"어··· 어?"

설마 진짜 찔릴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 하는 상대 기사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린다.

푸확- 눈앞으로 치솟아 오르는 피.

그것을 피하고자 잠시 눈을 감았는데 대여섯 개의 검이 몸을 스치고, 찌르고 지나간다.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어 오른다.

정신이 몽롱하고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꼭······.

끝이 보이는 것만 같다.

50화 기사여(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