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8

61. 요정의 농담

엔크리드는 죽은 시신을 한곳에 모아 두고 순찰병을 기다렸다.

"이것도 일이네."

혼잣말하며 혼혈 요정 시신을 추스를 때다.

손을 더듬어 암살자를 들고 옮기려는데, 손끝에 묘한 감각이 잡혔다.

가슴쯤이었다. 손가락으로 따라가자 옆구리까지 이어진 감촉이 느껴졌다.

품을 열어 보니 몸에 차는 비도집이 보였다. 그 안에 남은 네 개의 휘파람 비도도 보였다.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잊을 뻔했네.'

훌륭한 무기다.

마침 던지는 법도 배운 참이니.

가지고 있으면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실제 몸으로 휘파람 비도의 위력은 여실히 겪지 않았나.

비도집째로 챙기고 하는 김에 다른 사람의 품까지 샅샅이 뒤져 크로나 따위도 챙겼다.

휘파람 비도 외에 무슨 가루와 뭘 담았는지 모를 가죽 주머니가 있었는데.

묘한 냄새가 나는 것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 같았다.

접촉하는 것만으로 중독되는 독이라면 당장 해독제를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본래도 독을 쓰는 걸 꺼리기도 했으니, 여러모로 마음에 부담이 되는 물건이란 거다.

엔크리드는 독주머니 따위는 그대로 놔뒀다.

이후, 엔크리드를 발견한 순찰병이 기겁할 정도로 놀란 건 당연했다.

근무 시간에 훌쩍 사라진 사고뭉치 분대장이 갑자기 시신 다섯 구와 함께 나타난 셈이니.

"뭡니까!"

처음에는 놀라 창을 겨누기도 했다.

"첩자다."

엔크리드는 짧게 설명했다. 그거로 충분하긴 했다.

"저 친구 아는 얼굴인데, 나흘 전에 들어온 행상 심부름꾼이라고 했었는데."

순찰병 하나가 쇠뇌를 들고 죽은 놈을 가리켰다.

행상, 어깨에 멜 수 있는 수준의 짐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상인을 말함이다.

적절한 위장이었다.

"신분 패 확인하지 않았나?"

"했지, 정교했어."

정교하게 위조된 신분 패라.

그런 걸 흔하게 만들 수 있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 혼혈 요정의 품을 창끝으로 뒤진 병사 중 하나가 머리통이 쪼개진 시신을 보며 인상을 썼고.

엔크리드가 한쪽에서 대기하는 상태에서 4중대장, 그러니까 요정 중대장이 나타났다.

그녀는 죽은 암살자의 품을 살핀 후에 곧 말했다.

"독을 지녔군. 암살자가 맞다."

독뿐 아니라 체형까지 살핀 뒤에 내린 결론이었다.

엔크리드는 순순히 암살자의 존재를 설명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기하는 내내 순찰병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으나, 오해는 짧았다.

"다섯을 잡은 건가? 한 명은 꽤 수준이 높았을 성싶은데."

"이 셋은 잭과 보, 로튼입니다."

순찰병 중 하나가 아는 척을 해 왔다. 잭은 창을 잘 다뤘고 보는 몸이 날랬다. 로튼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게 일반 병사 사이의 평가다.

그런 병사 셋에 혼혈 요정 암살자, 쇠뇌를 든 병사까지.

그들을 모두 상대했는데 크게 다친 곳도 없다.

생채기 몇 개가 전부다.

"...혼자서?"

순찰병이 옆에 있는 중대장의 존재도 잊고 물었다.

그만큼 놀란 것이리라.

"어쩌다 보니."

엔크리드는 답하고 중대장을 바라봤다. 요정 중대장은 말이 없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여전한 보석 같은 녹색 눈으로 엔크리드를 물끄러미 봤을 뿐이다.

"알았다. 복귀해라."

"네."

군례를 보이고 돌아선다. 그런 엔크리드를 보며 요정 중대장이 말했다.

"근무지를 이탈했으니, 나중에 벌충해야 한다."

칼 같은 말이로군.

이런 상황에서 근무지 이탈을 따지다니.

순찰병 셋이 서로 눈치를 봤다. 정작 엔크리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중대장은 상관이다. 따져 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부대 내의 군법과 규칙에 살벌하게 각을 세우는 이들이 있다.

요정 중대장은 그런 타입이 아닌 것 같지만.

저리 말하면 들어야 하는 게 부하의 의무 아닌가.

괜히 뻗대 봤자 남는 것도 없다.

"그럼."

엔크리드는 그제야 척척 걸어서 현장을 벗어났다.

그 후로 이틀, 변방의 수비대원 중 둘이 다시 엔크리드를 찾았다.

도시 내 현장 감사는 변방의 수비대의 몫이었으니, 현장 조사를 위한 움직임이었다.

엔크리드는 모든 걸 성실히 임했다.

"갑자기 습격했습니다."

"뭘 알고 근무지를 이탈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둘의 기색이 어색하긴 했지만, 바람이나 쐬고 싶었습니다."

"근무지 이탈이 마침 첩자를 밝히는 일이 됐다? 이쪽 둘은 단칼에 죽은 것 같은데?"

"대뜸 죽이려 들길래."

"그런데 정작 다친 곳 없이 제압했다?"

수비대원 둘의 질문은 생각보다 날카로웠으나, 엔크리드는 덤덤했다.

직접 본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이 자신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 두 번 좋으면 성벽도 무너뜨리겠어. 그만큼 실력의 격차가 있었다는 거겠지."

둘 중 하나가 김빠진 농담을 했다.

둘 다 엔크리드를 의심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암습당한 대상자를 의심하다니, 그것도 우습다.

무엇보다 변방 수비대에서 이미 엔크리드의 뒷조사를 철저히 한 덕도 있었다.

제 부대로 받으려고 했을 때 이미 끝난 조사다.

"고생했네."

"상급 달았다며? 축하하고."

"네, 감사합니다."

둘 다 직급이 자신보다 위였다. 변방수비대의 직급이 본래 그따위였다.

"정말 여기로 올 생각 없는 거냐? 실력이 아까운데."

조사가 끝나 돌아가려는데 짧은 머리의 수비대원이 말했다.

"네."

칼같이 자르는 대답이 말문을 막는다.

"어, 그래."

엔크리드는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문을 여는데 갑자기 오른쪽 머리 위에서 뭔가 훅 떨어진다. 엔크리드는 반사적으로 옆으로 몸을 꺾어 피했다. 피한 뒤에 아예 자세를 낮추고 굴렀다. 가까스로 피한 탓에 머리칼 일부가 잘렸다.

간신히 날아온 걸 피했다 싶어 뭔가 싶어 보니.

"오, 암습 피하기 통과!"

렘이 실실 웃으며 말하는 게 보인다. 렘이 휘두른 도끼가 범인이었다.

"렘, 이 미친 새끼."

절로 욕이 나올 만한 짓이었다.

허공에 엔크리드의 잘린 머리칼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조금만 늦었으면 목덜미 어디에 도끼날로 문신을 남길 뻔했다.

피를 철철 흘리며 생기는 문신, 흉터다.

"걱정 마슈. 못 피해도 머리카락만 좀 자르고 말 생각이었으니까."

"말을 말자."

세상에는 미친놈이 많지만, 그중 지독하게 미친놈 몇은 제 분대에 있었다.

엔크리드는 진즉에 그 사실을 깨우쳤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암살자까지 찾아오는 판이니, 이제 암습에 대비하는 법도 익혀야 하지 않겠수?"

"핑계가 좋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 자를 때 된 것 같은데, 아니유?"

렘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가 되긴 했다.

앞머리가 눈앞을 슬며시 가리곤 했다.

이전 혼혈 요정을 상대할 때야 고도의 집중 상태였고, 상대를 속이려고 몇 개의 수를 준비하느라 눈치를 못 챘다지만.

일상생활에 거슬릴 정도가 됐다.

"부탁 좀 하지."

엔크리드가 말했다. 렘이 나선 건 아니었다. 뒤에서 크라이스가 다가왔다.

"네이."

크라이스는 생각보다 손재주가 좋았다.

다른 놈들은 검, 도끼 따위의 무기는 기가 막히게 다루면서도, 사람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하면 기괴한 모양을 만들어 뒀다.

"앞머리는 좀 짧게 하고 나머지는 적당히 다듬을게요."

짧은 단도와 가위, 뿔로 만든 빗이 크라이스의 장비였다.

"동화 열 닢 주시고요."

"비싸졌어."

"실력이 늘었거든요. 그게 싫으면 도시 이발소로 가시든가요."

그건 싫었다. 도시 내에 있는 이발소는 비싸면서 손재주가 렘보다 더 없었다.

굳이 크로나를 두 배나 더 주고 갈 일이 없다는 거였다.

대신 도시 내 이발소는 상처를 돌보는 수단이 뛰어나 머리 깎는 사람 대신 다친 사람이 찾는 곳이 되었다.

"자, 시작합니다."

사각사각.

머리칼 잘리는 소리가 곧 귓가로 들리기 시작했다.

숙소 입구 바로 앞에 의자를 꺼내다 앉은 채였다. 어느새 머리 위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엔크리드를 구경하던 렘이 툴툴거렸다.

"악마의 똥가루 같으니라고."

눈이 떨어지면 한동안 연병장과 배수로 등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그건 누구에게도 평등한 일이었다.

렘이든 라그나든 빠져나갈 수 없는 노동이다.

눈을 치우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산더미가 될 터였다.

"싫군."

어느새 나온 라그나도 어깨를 모포로 감싸고 말했다.

"춥기는 춥군요."

그 옆의 작센도 마찬가지.

"아무리 몸을 데워도 이런 추위는 힘겨운 법이지요. 형제님."

아우딘도 나왔다.

왜 이리 다들 나와서 구경 중인지.

눈이 내리면 좀 덜 추운 법인데도 오늘은 유달리 기온이 떨어졌다. 밖에 앉아 있으니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아우, 손 떨리네요. 이러다 실수하면 귀 자르는데."

머리칼을 자르는 크라이스가 말했다.

"다 들린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습니다."

크라이스는 적당히 데운 돌로 손을 녹여 가며 머리칼을 자르는 데 열중했다.

엔크리드는 떨어지는 눈을 보며 첩자에 관해 생각 중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을까?'

행상으로 들어온 놈은 신분 패를 위조했고.

혼혈 요정은 몰래 잠입했다.

보더 가드는 생각보다 잠입이 어려운 도시고.

신분 패 위조는 중죄다.

둘 다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잭, 보, 로튼이 첩자로 전향한 것도 어색했다.

'셋 다 출신이 어디라고 했더라?'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 죽은 셋 알지?"

엔크리드가 물었다. 크라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이 엔크리드의 뒤에 서서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답했다.

"네, 알죠."

"셋 출신이 어디인지 알아?"

"잭은 소매치기하다가 잡혀서 복무했고, 보는 귀족 모독죄였던가."

"괜찮은 친구였네."

귀족 모독죄란 말에 렘이 한마디 거들었다.

"잘도."

엔크리드가 그런 렘을 비웃었다.

렘은 못 들은 척했고 크라이스는 말을 이었다.

"로튼은 무슨 상단 호위였다고 했었는데."

"무슨 상단?"

"그게 예전에 망한 상단이라고 했었는데, 뭐라더라."

셋 다 들어온 시기가 비슷했다. 1년 내외다. 크라이스는 정보통답게 아는 게 많았다.

'의도적으로 누군가 잠입시킨 거라면.'

신분 패를 위조하고 도시의 개구멍에 해박하며 범죄와 친한 곳.

그런 집단이 흔할까? 보더 가드 내라면 뻔한 곳이 몇 군데 있긴 할 것이다.

그중 가장 몸집이 큰 곳이라면.

'도둑 길드.'

말이 길드지, 이런저런 범죄에 관여한 놈들의 모임이다.

하물며 1년 전쯤 싹 물갈이가 됐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었다.

크라이스에게 물었더니 그런 소문이 돌긴 했는데, 자세한 건 자신도 파고들 수 없었다고.

엔크리드의 시선이 작센에게로 돌아갔다.

"도둑 길드 쪽에 아는 거 있어?"

대뜸 묻는 말이었다. 작센은 묵묵히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알 것 같아서."

왜긴.

비도 던지는 법부터 시작해서 감각을 단련하는 법.

엔크리드는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아무리 의도한 바가 없다고 해도 대강 작센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둑이나, 암살에 관련된 직종.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

그러니 묻게 된다.

작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렘이 뭐라고 하려는 걸 엔크리드가 눈빛으로 막았다.

라그나는 평소처럼 반쯤 풀린 눈으로 바라봤고.

아우딘은 조용히 두 손을 모은 채 대답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있었다.

사각사각.

크라이스가 머리칼을 마저 깎아 내며 침묵을 깼다.

"저도 알고 싶네요. 분대장을 노린 암살이 거기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거죠?"

크라이스는 눈치가 비상했다. 사실상 돌아가는 상황을 직접 받아들인 이들이라면 의심이 갈 법도 했다.

머리를 쓸 줄 아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크라이스는 두뇌 회전이 빠른 편이었다. 또한, 하류층에서 굴러 봤기에 아는 것도 있을 터였다.

고로 엔크리드의 의심은 합당하다고 크라이스는 생각했다.

곧 작센의 입이 열렸다.

어떤 대가를 바랄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다.

"1년 전쯤 물갈이됐습니다. 이후의 일을 아는 건 없습니다. 닿았던 끈이 다 끊어져서."

알아볼 만한데.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끝났어요."

곧 크라이스가 말했고 머리칼을 자르는 사이에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정말 싫다."

"나도 싫다."

"동감이다."

"형제님, 신께서 주신 시련입니다."

"진짜 짜증 나게 쏟아지네요."

렘, 라그나, 작센, 아우딘, 크라이스 순으로 쏟아지는 눈을 향해 한 말이다.

엔크리드는 그걸 보며 말했다.

"분대장 임의 권한으로 작전 하나 수립할까 하는데, 눈 치우는 대신 곧바로 나가는 거로."

그 말에 다섯의 귀가 쫑긋 섰다.

열 쌍의 눈이 굶주린 늑대처럼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눈 치우는 것만 빼면 뭐든 다 할 것 같았다.

"일단 중대장님 허락부터 맡고."

엔크리드가 얼굴에 묻은 머리칼을 털며 말했다.

"다녀오쇼."

"아직도 안 가고 뭐 합니까?"

"이쪽입니다."

다들 어서 가라고 성화였다. 엔크리드는 생각난 김에 움직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괜히 막사에 들어가서 저 살벌한 다섯 명의 눈빛에 들볶이기도 싫고.

그새 쌓인 눈을 녹여 얼굴에 묻은 머리칼을 씻어 낸 엔크리드는 곧바로 중대장 막사를 찾아갔다.

"머리칼을 잘랐군. 근데 여긴 왜? 또 암습이라도 당했나?"

암습 얘기는 농담일까?

중대장의 말이 엔크리드를 고민하게 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도둑 길드가 의심스럽습니다. 확인하고 싶습니다."

요정 중대장은 일인 숙소다. 그녀가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눈을 보며 뒷짐을 진 채 말했다.

"그 말은?"

"임의로 작전에 임하고 싶습니다."

"흐흠."

요정 중대장은 뒷짐 진 그대로 창밖을 바라보다 물었다.

"눈 치우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건 아닙니다."

반쯤은 진실이었으나, 또 나머지 반 또한 진실이니.

양심에 걸릴 건 없었다.

"좋아."

요정 중대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조심해야 할 거다. 도시 내 범죄 길드는 위쪽에 무척 잘하니까."

그녀가 말하며 오른 검지를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군사 도시는 시장 대신 대대장이 있으나, 대대장만 있는 건 아니었다.

행정 처리를 위해 국가에서 파견 나온 귀족도 몇 있었다.

그들이 보더 가드 핵심 권력 인사들이었다.

"그들에게 밉보이면 안 좋을 거다."

요정의 입에서 정치가 나온다. 굉장히 어색했으나 엔크리드는 그 조언을 받아들였다.

"네."

"나갈 때 횃대를 피해 크게 돌아서 가고. 여긴 내 방이다. 불을 내면 곤란해."

중대장의 숙소에는 짧은 횃대가 있었다. 덕분에 공기가 훈훈했다.

"네, 조심하죠."

답하면서도 엔크리드는 요정의 농담이 영 적응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62. 무릇 기사란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을 담지 않는 법.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사람을 보낼 테니까."

허락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출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숙소로 돌아가니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가 된 분대원이 보였다.

"채비해."

한마디로 상황을 전달하니.

"아우, 내 믿었수다. 분대장은 해낼 줄 알았수!"

"좋군요."

렘과 작센이 한마디씩 거들고 나머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강이라도 장비는 챙겨 가야 할 것 아닌가.

"일단 대기, 곧 명령이 떨어질 거다."

"그럽시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훈훈할 것이다. 드물게도 분대원 전부가 합심한 모습이었으니.

툭.

하물며 움직이다가 라그나와 렘이 부딪쳤는데도 둘 다 무심히 지나쳤다. 신소리 한 번 오가지 않았다.

"음흉한 들고양이야, 남는 망토 없냐? 더럽게 추운데."

렘은 특히나 추운 걸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의 말에 작센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싸움이 일어나도 좋았을 상황이었으나 유려하게 넘어간다.

'사이가 좋기도 하지.'

매일 이렇게 서로 적당히 물러나고 살면 얼마나 좋겠나.

물론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바삐 움직이는 분대원을 보며 엔크리드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곧 중대장이 보낸 사람이 왔다.

"뭘 했길래, 분대 전체가 작전 차출이란 거냐?"

4소대장이다. 중대장이 보낸 전령이었다.

"암살자의 끈을 쫓아 보려고 합니다. 도둑 길드요."

"...몸조심해라. 뒤에서 찌르는 비수는 기사 할애비라도 못 피해. 도둑은 위험한 놈들이다."

소대장이 오랜 고사를 곁들이며 걱정 담아 말했다.

등 뒤의 비수.

한때 대륙을 호령하던 장군 하나가 자신이 굳게 믿던 부하의 단검에 죽었다.

아주 먼 옛날, 전설까진 아니어도 역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설화의 하나다.

실제로 있었는지도 모를 그런 일.

엔크리드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아니, 기사는 피할 수 있는데."

라그나가 말하고.

"기사가 아니어도 피한다."

작센이 동조했으며.

"등 뒤에서 덤비는 데 맥없이 찔리면 병신이지."

렘이 마무리했다.

소대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셋이 몰아쳤다.

"말을 말자."

소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나갔다.

어쨌든 허락이 떨어졌기에.

"가자고."

엔크리드가 일어나며 말했다. 어제보다 더 추워진 날씨 탓에 숙소 안이 얼음장 같았다.

장비라고 해 봤자 렘은 손도끼 하나가 전부.

라그나는 전에 엔크리드와 바꾼 아밍소드 하나.

작센도 숏소드로 보이는 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아우딘은 기름을 흠뻑 먹이고 말린 짧은 곤봉 두 개를 챙겨 허리춤에 쿡 꽂고 나섰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지요. 혼내 주러 갑시다."

아우딘이 나서며 말한다. 그걸 들은 렘이 쿡쿡 웃었다.

"그렇지. 나쁜 짓이지."

다들 장비는 단출했으나, 작센은 두꺼운 털 옷을 껴입어 몸이 둔해 보였고.

라그나는 지나가는 거지도 탐내지 않을 천을 겹겹이 기워 만든 구멍 난 망토를 둘렀다.

그중 제일은 역시나 렘이었다.

"그러고 간다고?"

작센이야 당연히 허용 범위 안이고, 라그나도 관대하게 보면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여 줄 차림이다.

하지만 이건 뭔가.

모포를 아예 몸에 둘둘 말았다. 걸어 다니는 침상이라고 해야 할까.

팔을 뻗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발끝만 빼꼼히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추운 건 싫수다."

말린다고 들을까?

엔크리드는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다. 렘을 외면했다.

"가자."

사고뭉치 분대는 그대로 시장 바닥을 향해 출발했다.

"위험할 것 같은데."

크라이스가 홀로 중얼거리다가 따라나섰다. 팔뚝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을 치우느냐,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느냐에서 위험을 택한 거다.

어지간히도 눈을 치우기 싫은 거였다.

* * *

어떤 싸움이든, 끝나고 나면 수없이 되새기며 복기하는 건 엔크리드의 오래된 버릇이자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혼혈 요정은 휘파람 비도와 로튼으로 시선을 끌었다.

'속임수.'

간단하지만, 위력적인 가림막이다.

이후 노린 건 근접전이다.

딱 한 수, 필살이라 부를 일격으로 싸움을 끝내려 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혼혈 요정은 심장 애호가였다.

그것으로 타격 부위 예측이 가능했으며 반복된 오늘을 통해 놈의 무기 형태도 이미 경험한 바였다.

모든 걸 계산하고 싸울 수 있었다는 거다.

'실패했다면?'

엔크리드는 생각했다.

'난 운에 기대었나?'

혼혈 요정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계산대로 움직인다는 건 어느 정도는 운이 작용해야 했다.

엔크리드는 스스로 물었다.

첫 번째 오늘, 찌르기 변태 새끼를 죽였을 때.

엔크리드는 전력의 찌르기를 무기로 삼았다.

그 후의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는, 그야말로 도박판 위에 목숨을 올려 둔 짓이다.

그때를 복기하며 실수를 되새겼다.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한 걸까.

이번에는 아니었다.

'다른 수를 썼어도.'

결국, 이긴 건 자신이었으리라.

개인 전술 면에서도 압도했으나, 그 이전 실력에서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혼혈 요정이 작정하고 싸움을 걸어오고 뒤에서 로튼이 남았다고 해도.

'승산은 내가 더 높다.'

물론 지금처럼 깨끗하게, 별다른 부상 없이 이기긴 힘들었겠지만.

복기, 되새긴다. 그걸 수없이 반복한다.

걸으며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상황에 대입해 본다.

엔크리드를 발견할 순찰병은 두 번 놀랐다.

처음에는 시신을 보고 놀랐고, 상급 병사 수준이 된 사고뭉치 분대장을 보며 한 번 더 놀랐다.

말이 상급 병사지.

실제로 이만한 실력을 보인 일반병이 얼마나 있을까.

하물며 이번 전투 이전까지는 실력이 형편없었던 사람이었음에야.

결론만 말하자면 자타공인, 이제는 검술 면에서 이전처럼 바닥을 박박 기는 수준은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엔크리드는 궁리했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오늘이 있다곤 믿기 어려운 태도다.

하지만 또 이런 태도를 고수하기에 언제나 내일을 맞이한 걸지도 몰랐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엔크리드는 어젯밤 꿈까지 떠올렸다.

'할 일이 없는 건지.'

아무리 봐도 불가해의 존재인데.

검은 강의 뱃사공을 말하는 거였다.

꿈에 나타난 뱃사공은 전처럼 비웃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뱉었을 뿐이다.

"너 뭐냐?"

입이 없는 자의 음성이다. 그러하기에 음성에 깃든 감정이 여실히 전해졌다.

아니, 뱃사공이 원해서 전해진 것이다. 엔크리드는 본능적으로 그리 느꼈다.

한마디 말에 담긴 감정은 의아함이다.

실망, 분노를 비롯한 어떤 감정의 편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

뭐라 답해 줄 수 없었다.

꿈이었으니까.

물론 일반적인 꿈은 아니었겠지만.

"분대장."

너무 넋을 놓고 있었는지, 뒤에서 누가 팔을 붙들고 부른 뒤에야 엔크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미안, 뭐라고 했지?"

조금 전 자신에게 뭐라고 말한 걸 흘려들었다.

"그런 정신머리로 들어가면 도둑놈한테 칼 맞기 좋다고 했수다."

렘이 말했다. 그렇게 긴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정작 말한 렘 새끼는 이대로 돌입하면 모포에 감긴 채로 칼 맞고 뒈질 것 같은 차림새였다.

작센이 그런 렘을 무시하고 말했다.

"작전은 있냐고 물었습니다."

작전? 무슨 작전?

엔크리드의 눈에 꿈에서 만난 뱃사공과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의아함이다.

"무작정 도둑 길드를 수소문해서 쳐들어갈 생각입니까? 길드 본부 위치는 압니까?"

작센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두꺼운 옷 덕분에 팔꿈치 쪽이 들려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지만, 작센 자신은 태연했다.

상대는 소매치기, 인신매매 등 안 하는 짓이 없는 놈들이다.

길드의 이름은 길핀.

말 그대로 길핀이 이끄는 조직이란 의미였다.

통념상 도둑 길드라 부르지, 사실상 범죄 조직일 뿐이다.

그런 놈들이 본거지를 밝히고 활동할까?

아니었다. 도시의 어둠과 뒷골목에 기생하는 벌레답게 그들은 자신을 숨겼다.

"몰라."

"작전 수립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진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거요?"

렘도 끼어들어 물었다.

라그나는 끼어들지 않고 하늘을 보며 입김만 연신 뿜어내고 있었고.

아우딘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진짜 생각이 없었다고요?"

크라이스는 그 큰 눈으로 엔크리드를 바라보고 물었다.

"본거지쯤은 네가 알 줄 알았지."

"아무리 저라도 이 길드 위치를 어떻게 아냐고요. 그걸 밝혀내려고 접근하면 슥삭인데."

말하며 크라이스가 손날로 목이 잘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범죄 길드가 상비군을 죽여? 그만한 위치였나? 그런 짓을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사실 관심이 없었다. 이런 거에 관심을 둘 겨를도, 여력도 없었으니까.

"소규모 인원 작전을 수행해 본 적 없습니까?"

재차 작센이 묻는다. 분대 전체가 움직이는데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인다고 나무라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는 점점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그의 삶은 어떠했는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기 바빴고.

검 한 번 더 휘두르기 위해 자는 시간을 쪼개던 나날이었다.

그사이 전략에 관한 걸 배울 틈은 없었다.

물론 용병으로서의 경험도 있었고.

분대장으로서 복무 경험도 있다.

소수 작전에 참여한 경험도 수차례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흐름과 외부에 나와 진행하는 소규모 작전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전장에서, 가령 이전 정찰분대를 이끈 것과 같은 소규모 작전은 익숙한 분야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물며.

'그건.'

살아남으려고 궁리한 결과지, 치밀한 작전을 토대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전부 목숨을 던져 가며 알아낸 것들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그래야 하나?

또 목숨을 던지고 오늘을 반복해야 하나?

엔크리드는 걸음을 멈췄다. 더럽게 차가운 바람이 뒤집어쓴 망토 사이를 통과해 옆구리를 스쳤다.

시리디시린 바람이었다.

'그러고 싶진 않은데.'

오늘을 반복하는 걸 방법의 하나로 쓰고 싶지 않다. 죽음의 고통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으니.

무엇보다 본능이 말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온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수단은 생각해 뒀다.

"수소문하면 전부 알지 않나? 아무리 잘 숨겨도 도시 토박이들은 다 아니까."

세상은 비밀은 없다. 비밀은 죽음으로 완성되는 법이니까.

비밀을 아는 유일한 자가 죽으면, 아무도 그걸 알 수 없게 될 테니.

범죄 조직이 그렇게 자신을 숨길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결론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려울 거예요. 길핀 애들은 꼬리도 잘 끊고, 무섭기로 유명해요. 말단 애들 잡아서 달달 볶아 봤자 아는 것도 없을뿐더러 혹여 아는 게 있어서 실수로 불었다간 길핀이 팔다리를 전부 분지르고 혀를 잘라 버린다더라고요."

보복을 통한 공포로 조직을 지배한다는 거다.

그럼 어떻게?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과 그에 관한 궁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곳이 전장이라면 전략에 맞게 위치를 지키는 법도 어느 정도는 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분대장, 명령하십시오."

생각에 잠겨 있자니, 하늘만 바라보던 라그나가 말했다.

엔크리드의 눈이 라그나에게 향했다.

검만 쥔다면 대적할 상대가 흔치 않은 검술의 천재.

엔크리드가 보는 라그나다.

평소의 라그나는 게으르고 허술한 인간이었다.

툭 하면 길을 잃고 주머니에 든 걸 흘리고 다니는 그런 인간.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이지만, 라그나는 핵심을 잡아 후벼 팔 줄 알았다.

마치 검을 손에 쥔 것처럼 말이다.

"대장은 명령하면 됩니다. 명령 이행을 위한 방법은 할 줄 아는 놈이 하게 두면 됩니다."

그 한마디.

작게 읊조린 라그나의 말은 엔크리드에게는 대단히 크고 무거운 말이었다.

대장이라 했다.

본래 그의 지위가 그러했다.

분대장, 분대를 이끄는 장이다.

그럼, 지금까지 엔크리드가 분대를 이끄는 장이 맞던가?

'내가 분대장이었나?'

아니다. 실력은 형편없고 살아남기 위해 급급한 인간은 한 무리의 장이 되기 힘들다.

하물며 분대원 하나하나가 날고 기는 이들임에야.

하지만 지금 라그나의 한마디가 상황을 변화하게 했다.

"그러슈."

렘이 인정하고.

작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거지요. 맞습니다. 형제님, 대장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우딘이 동조한다.

"맞는 말 했는데, 왜요?"

크라이스만 분위기에서 엇나갔다.

그는 본래 마음속으로도 엔크리드를 분대장으로 삼았기에 그렇다.

"그렇지. 맞는 말이지. 작센, 방법이 있지?"

등가교환의 작센은 정보를 교환하는 정보상이기도 하다.

크라이스의 정보가 얕고 넓다면 작센의 정보는 좁고 깊다.

"있습니다."

"알려 줘."

"시장에 있는 여관을 잡고 기다리시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방법을 말하라는데, 자리를 비우겠단다.

"맡겨 주시면 알아 오겠습니다."

"좋아. 여관 잡으러 가자."

결정했다면 돌아보지 않는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여관으로 가는 길, 아직 시장 한복판에 이르지 않아 주변에 사람이 많진 않지만 잘 다져진 흙길 위에서 엔크리드는 마저 제 생각을 말했다.

"길드의 본거지를 찾아서 한 번에 쓸어버릴 거야."

상대는 범죄 조직이다. 혐의가 없다고 해도 무력으로 짓밟는 것에 따로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윗대가리라는 귀족이나 대대장의 뒷주머니에 구멍을 내고 찢어내는 일이 되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무릇 기사란,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을 담지 않는 법.

어릴 때 보고 듣고 배우고 꿈꿨던 대로.

엔크리드는 그리 살아왔기에.

지금도 그렇게 하려 한다.

63. 노크

금세였다.

과연 작센이랄까.

해가 머리 위를 지날 때쯤 부대를 나섰는데, 아직 노을이 땅에 옷을 입히기도 전에 작센이 돌아왔다.

"빠른데?"

호박 수프와 잘 익은 돼지고기 뒷다릿살 찜으로 식사를 해치운 뒤였다. 렘이 배를 두드리며 물었다.

잘 먹었다고 놀리는 것 같았다.

작센은 렘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엔크리드를 보고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곧바로 출발할 기세였다.

"앉아."

엔크리드가 앉은 채로 말했다. 작센이 주춤했다.

위치를 알아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꼬리를 잡은 게 들킬지도 모른다.

상대가 숨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대비할 수도 있다.

숨는 것보다 깨끗하게 뒤를 쫓는 끈을 잘라 버릴 의도를 품진 않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혼자였다면, 결정하고 실행하는 게 자신이었다면 고민할 거리도 못 되는 것들이다.

작센의 머릿속에 별생각이 다 머릿속을 헤집는데 분대장의 음성이 들렸다.

"여기 호박 수프가 맛있어."

그걸 누가 모르나.

여관 이름부터 '바네사의 호박 수프'였다.

시장 교차로에 있는 네 개의 여관 중 가장 음식 맛이 좋은 곳이다.

"크라이스가 사비를 풀었다고. 먹고 가자."

엔크리드가 재차 말하고 나서야 작센이 앉았다.

어쩐 일인지, 렘과 라그나, 아우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작센은 어깨 위와 머리 위에 덮인 눈을 대강 털었다.

벽난로의 온기가 안을 훈훈하게 데운 덕에 금세 눈이 녹았다.

덕분에 겉옷이 조금 젖었다.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호박 수프랑 아까 먹은 바비큐 줘, 일 인분."

"기다리시던 일행이 왔네요! 네!"

여급이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발랄한 친구였다.

대체로 부대 사람들은 호박 여관을 좋아했다.

음식 맛이 좋다는 건 그런 거니까.

부대 내 취사를 담당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라그나의 말을 빌리자면 부대 내 식사는 입을 학대하는 것과 같았다.

어떨 때는 먹을 만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그에 반해 바네사의 호박 수프 여관에서 먹는 식사는 훌륭한 수준을 넘어섰다. 보더 가드 최고의 요리사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흔히 돌았다.

"시간 끌면 안 좋습니다."

작센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아직 눈 안 그쳤어."

엔크리드라고 고된 노동을 하고 싶을까.

검술 단련이나, 체술 단련도 아닌 바에야.

그에게도 눈은 악마의 똥가루다.

아니, 부대 내 복무하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지금 도둑 길드를 치고 돌아가면 쌓인 눈이 그들을 반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렘 등이 아무 말도 안 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크라이스가 주머니를 연 것일 테고.

작센은 모든 걸 깨달았다.

"그렇군요."

그 뒤에는 먹는 일에 열중했다.

어느새 땅거미 스멀스멀 질 때가 돼서야 엔크리드를 포함한 모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또 오세요!"

발랄한 여급이 말했다. 크라이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줬다.

둘은 이미 아는 사이 같았다.

여관 안에 머무는 내내 둘이 속닥거리는 장면이 많이 보였다.

"알아?"

엔크리드가 묻자.

"이름 레이사, 나이 열일곱, 아버지는 신발공이고 어머니는 직공이지요. 둘 다 길드에 가입한 적은 없고요."

신발공은 가죽이나 기타 부자재로 신발을 만들어 파는 사람을 말했고.

직공은 옷감을 짜는 사람을 말했다.

둘 다 흔한 직업이었다.

제조 길드나 목공 길드도 엄연히 도시 내에 존재하는데 길드에 가입한 적이 없다면 실력이 출중한 편은 아닐 터고.

"꿈은 언젠가 수도로 가서 여관을 차리는 것. 지금은 바네사의 호박 수프의 음식 솜씨를 배우는 게 목표죠."

"꿈이 야무지네."

렘이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럴 만했다.

여관이라는 게 말이 쉽지, 아무나 운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들어가는 크로나도 크로나지만, 무장 경비를 두는 것도 필수니까.

술과 음식을 팔면 소란이 일어나는 건 일상이 된다.

오늘이야, 내리는 눈 탓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조용한 편이지만, 평소였다면 이미 투덕거리는 사람 몇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 전에도 문을 나서며 무장 경비가 힐끗거리지 않았나.

엔크리드가 보기에 은퇴한 병사 같았다.

보더 가드 출신의 무장 경비를 두면 여러모로 편할 것이다. 어지간한 소란은 알음알음 정리할 수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나면 어차피 경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부대 내 경비병을 불러야 한다.

부대 내 끈이 있다면 보다 빨리 경비병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은퇴한 병사를 경비로 쓰는 건 보더 가드에서는 필수 조건이었다.

여기에 여관은 세금도 꽤 많이 부과되는 편이고, 보더 가드를 기준으로 보자면 여관에 회의를 위한 홀은 물론이고 특실, 개인 연무장에 식당과 술집까지 갖춰야 했다.

보더 가드에는 영주가 없고 영주관이 없어 대소사가 전부 여관에서 이뤄지기도 했다.

실제 부대 내에 회의실이 있다지만, 거기는 군사 시설이다.

아무나 들이는 곳이 아니었다.

자연히 여관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여관을 수도에 차린다라, 무리가 맞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이유도 없겠지만.

"자세히도 아는구나."

엔크리드가 선두에 선 작센을 따라 걸으며 말했다.

"예쁜 여자는 다 미래의 고객이 될 수 있으니까요."

크라이스의 목표가 귀부인 살롱을 여는 거라고 했던가.

오롯이 여자만 받는 살롱이다.

당연히 급사는 전부 남자, 그것도 잘생긴 남자로 꾸린다고 했다.

창의력이 돋는 새끼다.

남자의 미모로 귀부인의 주머니를 털 작정을 한다니.

크라이스가 불안한지 계속 입을 열었다.

"근데 레이크 팬서는 괜찮을까요? 걔는 춥지도 않나. 왜 따라나서라니까 움직이질 않는 건지."

"아직도 걔 발톱 노리냐?"

"아니요. 노리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것 같던데요. 괜히 비싼 게 아니었어요."

엔크리드는 크라이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말만 그렇지, 아직 노리고 있을 게 뻔해 보였다.

"이름이나 지어 주시죠. 계속 데리고 다닐 것 같은데."

크라이스의 말에 엔크리드가 내심 고개를 끄떡였다. 언제까지 이름도 없이 이놈 저놈 부를 순 없으니까.

그리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으슥한 골목에 들어서고도 한참 걸은 뒤였다. 몇 번이고 꺾어서 들어가다 보니, 방향 감각이 나쁘지 않은 엔크리드도 길이 헷갈릴 지경이었다.

"너, 도둑 길드에서 크로나 처먹고 일부러 함정으로 가는 거 아니냐?"

렘이 괜히 이죽거렸다.

작센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새끼는 툭하면 말을 씹어."

렘이 불퉁거렸지만, 작센은 그 또한 무시함으로 렘을 대하는 태도에서 일관성을 지켰다.

"그만."

엔크리드가 한마디 더 하려는 렘을 말렸다.

"차별 대우 하는 거요? 나 서운해지면 재미없을 거요."

참으려고 엔크리드를 걸고넘어지면 좋은 신호였다.

여기서 말다툼을 끝내겠다는 거니까.

그 뒤는 조용했다.

라그나가 심심한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며 걸었고.

"겨울은 춥군요."

이 추위에도 바닥에 몸을 뉜 거지 무리를 본 아우딘이 한마디 한 게 전부였다.

눈은 그쳤지만, 단단하게 언 흙 위로 얇게 눈이 쌓였다.

내일 낮이 되면 태양 빛에 녹아 질퍽한 땅을 만들 터였다.

"여깁니다."

그렇게 반 시간쯤 골목길을 헤맨 뒤였다. 낡은 나무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더 가드 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문이었다.

해는 떨어졌지만, 달빛이 은은히 비춰 주어 시야에 불편함은 없었다.

엔크리드가 문을 밀어 열려는 찰나다.

"네가 왼쪽 할래?"

우두커니 멈춘 가운데 달빛을 등진 렘이 말했다.

"제가 오른쪽을 맡지요. 얻어먹은 값은 해야겠지요."

아우딘이 그 말을 받고.

"알아서 해. 난 나한테 덤비지만 않으면 그만이니까."

라그나가 하품을 했다.

"게으름뱅이 새끼 같으니라고. 분대장, 손님 왔수다."

엔크리드가 렘의 말에 몸을 돌렸다. 전부 거적 따위를 걸친 놈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오면서 봤던, 널브러진 거지새끼들이었다.

머릿속에 혼혈 요정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크니.'

엔크리드는 괜히 혁대 뒤편을 손으로 훑었다.

손끝에 나이프 한 자루가 걸렸다.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혼혈 요정을 죽이고 그 시신에서 쓱싹 해 온 거니까.

가슴팍에도 든든하게 비도집을 찬 상태였다.

휘파람 비도란 물건을 보니 흔히 만들 만한 게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나, 냉큼 챙겨야지.

바닥에 꽂힌 것과 요정의 몸에 있던 것까지 몽땅 챙겼다.

"어릴 때 못 배웠나 본데, 해 떨어지면 이런 데 들어오면 안 된다고."

거지 하나가 말했다. 말하며 앞니가 보였는데 누렇다 못해 검은 것 같았다.

밤이라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겨울이고 몇 발짝 떨어져 있는데도 고약한 냄새가 날 것 같긴 했다.

"지랄하네."

렘이 답하고 움직였다.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거리를 좁혔을 뿐이다. 앞으로 나선 거지가 소매에서 주머니칼을 꺼냈다.

칼날이 한 뼘도 되지 않은 나이프다. 그걸 들고는 찌르는 시늉을 했다.

"뒈진다. 너."

그게 그의 유언이었다.

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놈은 나이프를 쑤셨다.

거지가 배를 노리고 쑤셨는데 렘은 왼손으로 상대 손목을 잡아챘다.

렘은 그대로 거지를 안쪽으로 당기며 오른쪽 팔꿈치로 놈의 머리통을 갈겼다.

빡! 우득!

과감하며 확실한 일격이었다.

팔꿈치에 머리통을 맞은 거지의 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우득.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아우딘이 엄지와 검지, 중지만으로 거지의 턱을 잡아 뒤트는 게 보였다.

세 손가락으로 턱을 잡아 틀었는데 목이 꺾인다.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부린 묘기였다.

"미친 새끼가!"

"시발!"

남은 셋 중 둘은 핏대를 세웠고 하나는 눈치를 보더니 잽싸게 뒤로 내빼려고 했다.

렘과 아우딘의 싸움은 짧았다.

거리를 좁히고 나이프 따윈 무시한 채 일격, 그게 전부였다.

렘은 손날로 거지의 목울대를 후려친 뒤,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끊어쳤다.

그거로 거지 하나의 의식이 날아갔다.

아우딘은 더 단순했다.

왼발을 앞으로 툭 내딛더니, 왼 주먹을 쭉 뻗었다.

훙, 꽝!

주먹이 무슨 포탄 같았다.

발끝부터 시작된 허리의 뒤틀림에 이은 일격이다.

어깨부터 시작된 쭉 뻗은 주먹에 맞은 놈의 코가 사라졌다. 안면이 안으로 움푹 들어간 채, 무릎을 푹 꿇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일격에 안면 함몰이었다. 기절하고 쓰러지는 건 당연했다.

그사이 뒤로 도망간 놈은 엔크리드가 해결했다.

퉁, 퍽!

"꺽!"

도망가던 놈이 목 뒤에 꽂힌 단검을 장식 삼아 앞으로 고꾸라졌다.

막 쫓으려고 발끝에 힘을 주던 렘의 고개가 뒤로 돌았다.

아우딘도 눈을 몇 번 깜빡거렸고 반쯤 졸린 눈을 하던 라그나도 눈을 크게 떴다.

작센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펴졌다.

묵직하고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는 가운데.

"와."

크라이스가 짧은 감탄사를 토했다.

엔크리드는 오른손 끝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왜? 시간 낭비잖아. 쫓는 거."

"우리 분대장 언제부터 단검을 그리 잘 던졌수?"

렘이 물었다.

"하다 보니 늘었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내가 던진 나이프에 집중할 시간은 아니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 다섯이 덤볐는데도 놀라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하물며 크라이스조차 덤덤했다.

"안 놀랐냐?"

엔크리드가 물었다.

그는 이미 걸어오면서 누운 거지의 몸과 손을 보고 알았다.

괜히 용병질을 하며 먹고 산 게 아니었다. 어설픈 실력으로 오래 살아남으려면 뭐가 필요한가.

눈치다.

엔크리드의 눈치도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는 거지의 존재를 통해 작센이 제대로 된 길을 간다는 걸 알았다.

지키는 놈들이 있다면 앞에 뭔가 지킬 게 있다는 거 아닌가.

"네? 아, 안 놀랐어요. 어떤 거지가 무장한 병사에게 덤벼요. 핑계가 조악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앞이 범죄 길드의 본거지거나 놈들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확실해진 거죠."

누구나 눈치챌 만한 일일까?

아니면 크라이스가 영리한 걸까.

아무래도 전자 같았다.

그래도 대담하긴 했다. 전장에 나서면 요리조리 잘 도망 다니긴 해도 크라이스도 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병사였다.

이런 건 일도 아니었다.

"범죄 패거리치고는 놀랍긴 하네요."

"뭐가?"

"덤빈 놈들이 하는 짓을 보니까 교대로 근무를 돌린 것 같은데, 일개 패거리치고는 너무 치밀해요. 길핀이란 놈 수완이 엄청 좋은가 봐요."

크라이스는 영리하기도 했다. 일면을 보고 그 후면의 일을 생각할 줄 알았다.

"그것도 그렇네."

둘이 몇 마디 나누는 동안 작센은 문을 열다가 물러났다. 곧 검 손잡이를 잡는 걸 보니 베어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아우딘이 나섰다.

"제가 노크해 보겠습니다."

범죄 조직의 본거지다. 두드린다고 열어 줄 리가 없었다.

펑!

하지만 아우딘의 노크는 조금 달랐다.

"푸하, 잘하네. 우리 종교쟁이 친구."

렘이 감탄했다. 엔크리드도 내심 감탄했다.

아우딘은 오른 어깨를 당기고 왼발을 축으로 몸을 틀며 손바닥으로 문짝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자마자 손을 뒤로 뺐다. 끊어치기였다.

그러자 문짝의 경첩이 들리며 안으로 문이 말려 들어갔다.

그러니까 열린 거다. 다른 말로 하면 부순 거고.

호쾌한 노크였다.

64. 한 합

문이 열린 뒤, 안쪽에 처음 발을 내디딘 건 렘이었다.

"어느...."

들어가며 뭐라 말하려는데, 입을 열 틈도 없었다. 렘의 머리 위에서 뭔가 떨어져 내렸다.

렘은 예측이라도 한 듯 수직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머리 위를 가르는 섬광이 어두운 방 안을 가른다. 렘은 도끼를 휘두르자마자 곧바로 옆으로 몸을 튕기듯 날렸다.

이 모든 게 약속한 동작처럼 유려했다.

쿵.

이후 떨어진 시신만이 여기에서 벌어진 일을 알려 줬다.

"뭐야."

크라이스가 놀라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천장 위쪽에 숨어 있었던 놈이었다. 양손에 짧은 나이프가 쥔 채로 렘의 도끼질에 가슴부터 가랑이까지 갈라져 내장과 피를 바닥에 흘렸다.

피비린내와 더불어 죽음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일개 범죄 길드인 줄 알았는데."

크라이스가 중얼거렸다.

"이 새끼들이."

렘은 비틀린 미소를 보였다.

"귀엽게 구네."

그리 말하곤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꽤 넓었다. 네모지게 잘 만든 벽돌과 흙, 짚 따위로 만든 벽 옆으로 우측으로 꺾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렘이 성큼 나아가며.

"너냐?"

대뜸 말하고 도끼를 휘두른다. 가차 없는 도끼질이 두 번째 시신을 만들었다.

통로 옆에 숨어 있던 놈이었다. 꼬챙이 같은 걸 들고 찌르는 시늉을 했는데 무용했다.

렘의 도끼가 그보다 빨랐다.

상대는 범죄 길드다. 소매치기나 보호세나 뜯어내는 놈들이다.

반면 이쪽은 전투가 업인 병사 무리다.

하물며 엔크리드 자신이 상급 병사에 나머지는 자신보다 더 잘 싸우는 이들이다.

'당연히 우리가 유리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색다른 느낌이긴 했다.

범죄 패거리는 은밀하게 숨어 어둠 속에서 나이프 따위를 쑤셨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음에도.

렘은 그 모든 기습을 다 부쉈다. 미쳐 날뛴다고 볼 순 없지만, 조용한 광기 따위가 엿보였다.

덤벼들면 도끼로 다 쪼개 버리겠다는 광기.

렘은 그리 움직이며 입도 쉬지 않았다.

"아니면 너냐?"

죽일 때마다 입을 연다.

"너구나?"

쩍!

"너냐?"

다섯 번째 암습자는 아예 머리를 쪼개 놓고 물었다.

"죽은 놈은 말을 못 해."

뒤에서 엔크리드가 말하자, 렘이 핏물이 뚝뚝 흐르는 도끼를 들어 도낏자루로 제 머리를 긁었다.

"나도 아는데, 산 놈도 대답이 없잖수, 대답이."

대답이야 다른 놈이 갖고 있겠지.

오른쪽으로 꺾인 통로를 지나자 왼쪽에 방 하나, 우측에 방 하나가 더 보였고 정면에 응접실로 쓰는 공간도 보였다.

복잡한 구조는 아니다.

응접실, 방 두 개, 식료 저장고로 쓰일 만한 곳과 주방.

그게 전부다.

그리고 죽은 암습자는 다섯.

다들 말은 없었다.

"범죄 조직치고는 준비가 과한데요. 정말 분대장 노린 애들이 얘들인가 봐요."

크라이스가 죽은 시신을 살피며 말했다. 죽은 놈의 얼굴을 한참 보던 크라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얼굴이네요."

엔크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른다는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이자, 자신을 노린 놈들이 이들이 맞는 것 같다는 말에도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말하자면 반은 악마의 똥 가루를 피하기 위한 핑계였는데.

신분패를 위조하고 암살자를 인도하는 일에 범죄 길드가 적임임은 알지만.

'보더 가드의 직업 군인을 상대로?'

이 도시에서 발붙이고 살려면 쉬이 시도하지 못할 짓이다. 그런데도 했다.

이들에게도 이유가 있겠지.

물론 그 이유야 엔크리드가 알 바 아니었다.

반쯤 찍어서 온 건데.

대충 쏜 화살이 멧돼지 미간에 꽂힌 격이다.

"애걔? 이게 끝?"

안을 뒤지던 렘이 말했다. 대답하는 놈도 없고 나이프를 들고 덤비는 놈만 다섯이었다.

그야말로 미쳐 날뛴 렘 하나로 끝난 일이다.

"그럴 리가요. 이 정도 준비성이 있고 작센이 제대로 알아온 거면."

크라이스가 나섰다. 어두웠는지, 품에서 부싯돌을 꺼내 주변에 굴러다니는 짚을 엮어 불을 붙였다.

따닥 하고 부싯돌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짚에 불이 붙고.

싸늘한 공기가 감도는 집 안에 불빛이 생겼다.

짚단을 모아 만든 임시 횃불로 크라이스가 샅샅이 주변을 뒤졌다.

그러더니 곧 응접실 한쪽 바닥을 발뒤꿈치로 쿵 찍었다.

투-웅.

울림이었다. 안이 비었다는 말이다.

"제가 하지요."

아우딘이 나섰다. 바닥 위에는 싸구려 모피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의자까지 놓였는데, 모피 끝을 잡고 옆으로 훅 던졌다.

모피에 쌓인 의자가 꿍 하는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이후, 아우딘은 다시금 호쾌한 노크를 했다.

쾅.

앉은 자세에서 수직으로 내리꽂은 주먹에 나무로 만든 문에는 구멍이 생겼다.

구멍을 통해 손을 집어넣은 아우딘이 안쪽에 팔을 집어넣어 잠금장치인 걸쇠를 풀었다.

"어디로 연결되었을까요?"

"본거지."

크라이스의 물음에 작센이 답했다. 마치 이런 일이 있으리라 예상한 듯한 여상한 태도다.

렘이 엔크리드를 바라봤다.

타다닥 하고 타오르는 짚 횃불 덕에 본래는 회색이었을 렘의 눈이 붉게 보였다.

"계속 간다."

엔크리드는 렘이 뭐라 묻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기왕 시작한 일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일개 범죄 패거리 소탕이 아니라 길드라 불릴 만큼 몸집이 큰 상대다.

이름만 길드라 붙여 놓고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패거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노린 것도 이들이 맞을 확률이 높으니, 따질 건 따져야 하는 법이다.

어떤 머저리도 제 목숨을 노리는 놈을 얌전히 놔두진 않는다. 다행히도 엔크리드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당연한 소리!"

이번에도 렘이 먼저 나섰다. 토굴은 길지 않았다.

반 시간도 되지 않아서 위쪽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다.

더럽게 추웠지만, 렘은 거지를 만났을 때 이미 모포 따위는 던져 버린 뒤였다.

부르르 떠는 렘의 등을 보는데, 그 등에서 어째 분노가 느껴졌다.

"위에 누가 있다."

렘의 바로 뒤에서 걷던 작센이 말했다.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다.

"우리가 온 걸 예상한다는 거로군요."

맨 뒤에서 크라이스가 말했다.

"도적들이 도시 내에서 이리 활개를 치게 둬서는 안 되겠지요."

이번에도 아우딘이다. 문을 부수는 데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본래 취미가 이쪽일지도 몰랐다.

어설프게 만든 흙 계단을 두 개씩 오르더니 아래에서 위로 몸을 비틀어 어깨와 등의 경계선으로 문을 때린다.

색다른 기술이었다.

그걸 본 엔크리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꽝!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면 화염 마법이라도 폭발했던가.

그와 동시에 문짝이 위로 솟구쳐 날아갔다.

"우악!"

대기하고 있던 놈들의 놀란 소리가 들렸고.

그 뒤는 다시 렘의 무대였다.

"너냐!"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위로 솟구친다. 첫발에 계단을 밟고 두 번째 발에는 아우딘의 허벅지를 밟고는 허공을 날아 손도끼를 휘두른다. 엔크리드는 밑에 있었기에 렘의 궁둥이만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여실했다. 쿵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흘러 뚫린 구멍 가장자리로 흘렀으니까.

"저 형제님은 버릇이 안 좋군요. 남의 허벅지를 밟고 가다니."

아우딘이 허벅지를 탁 털고선 먼저 올라서고 그 뒤를 작센과 라그나, 그 뒤를 다시 엔크리드와 크라이스가 올라갔다.

화르르륵.

올라서자, 사방이 횃불이었다.

"어떤 미친 새끼들인가 했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다.

엔크리드는 좌우를 둘러봤다. 최소 서른 명이 넘는 장정이 보였다.

모두 무기 하나씩은 들고 있었다.

못 박은 몽둥이, 숏소드, 창, 가죽 주머니에 모래를 채운 블랙 잭이란 무기도 보였다.

무장이 다양하다는 소리였다.

횃불 덕분에 시야가 밝아졌다.

크라이스는 이제까지 눈이 되어 준 짚 횃불을 나온 구멍에 집어 던지고는 감탄했다.

"와우, 많네요."

그래, 많긴 하네.

엔크리드도 같은 생각이었다.

"군인이지?"

서른 명이 넘는 장정 사이, 홀로 고운 비단으로 셔츠와 바지, 그 위에 마수 가죽 코트를 걸친 놈이 보였다.

지팡이로 바닥을 짚고 선 채다.

다리가 불편해서 쓰는 지팡이는 아니었다.

귀족, 또는 부유한 상단주가 자신의 부를 상징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손잡이 끝에 보석이 박힌 지팡이였다.

두 다리가 멀쩡한데 지팡이가 무슨 필요가 있겠나. 허세의 상징일 뿐이지.

"길핀 패거리 맞나?"

엔크리드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귀티를 풍기는 놈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한 게 훤히 보였다.

"왜 다들 죽고 싶어서 난리인지."

"보더 가드 내에서 일어난 암습 사건에 관해 물으러 왔다."

엔크리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렘이 입을 열었다.

"너냐?"

짧지만, 굵은 물음.

뭘 묻나 싶었더니, 엔크리드는 이제야 알아챘다. 자신을 노린 암습자에 관해 물은 거였다.

근데 그렇게 묻는다고 답을 해 주긴 하나?

렘이랑 잘 어울리는 방식이긴 하지만.

'나라도 답을 안 해 주겠다.'

"전혀 모르는 얘기다."

상대는 당황은커녕 당당하기만 했다. 그 당당함이 오히려 의심스러웠고.

엔크리드의 분대원은 의심만으로 충분한 이들이었다.

"저 새끼로군요."

작센이 중얼거리고.

"흠, 쟤였나 보네."

라그나도 지팡이를 든 상대를 바라봤다. 아니, 평소의 라그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면 노려보는 수준이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를 직시했으니까.

평소에는 눈을 반만 뜨고 다녔다.

"형제님, 정말로 우리 분대장을 노리셨습니까?"

아우딘이 한 걸음 나서서 물었다. 가까이 있던 남자 서넛이 찔끔 놀랐다.

어두운 밤, 횃불이 만든 그림자 덕에 아우딘의 몸집이 더 커 보였다.

엔크리드의 키가 180cm에 가까운데 아우딘은 그보다 한 뼘이 더 컸다.

2m가 조금 안 되는 키다.

신장만 큰 것도 아니다. 자세히 보면 전신이 근육이었다. 팔뚝 굵기가 어지간한 여자의 허벅지보다 두꺼웠다.

엔크리드를 포함한 사고뭉치 분대원은 전부 몸이 탄탄하고, 근육질이었다.

하물며 크라이스까지도 자신이 만나는 모든 여성을 위해 몸을 만들어 쫙 갈라진 복근을 보유했는데.

아우딘이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위세를 부릴 정도였다.

근육의 두께가 남자를 상징하는 척도라면, 아우딘은 대륙 제일의 남자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맞습니까? 형제님?"

"무슨 개소리야, 분대장이고 뭐고 일개 병사를 죽이는 데 암살자를 보내고 말고 할 게 뭐 있는데."

아우딘의 몸을 보고 움찔했는지, 놈이 필요 없는 말까지 뱉었다.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은 안 했는데."

암습이라고 했지, 암살자가 있었다는 말은 안 했다.

엔크리드의 말에 귀티를 풍기는 남자는 오히려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래서?"

어쩌란 거냐.

자신들은 서른 명이 넘는 범죄 패거리다. 무장도 단단히 했다.

이미 엔크리드 일행이 온다는 걸 알고 있던 눈치다.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는 소리다.

그래서 변하는 건 있나?

없다.

적어도 엔크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범죄 사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인정하거나 말거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건 상대도, 엔크리드도 마찬가지였다.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데 증거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범죄 길드라고 해도 저 중에는 엉겁결에 몽둥이를 쥔 놈도 있을 거다.

그런 이들까지 다 죽여야 할까?

엔크리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챙.

엔크리드는 말없이 롱소드를 뽑은 뒤 땅에 대고 죽 그었다.

검을 뽑은 걸 보고 몇몇이 움찔했지만, 덤비는 놈은 없었다.

겨울 추위에 언 흙바닥에 선이 생겼다.

횃불만이 광원의 전부이기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선이지만, 의미만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너른 공터에 짧은 선이 생겼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만든 선에 검 끝을 누른 채로 말했다.

"태어나 한 번도 약자를 죽이지 않은 사람, 얌전히 감옥에 들어갈 사람, 죽기 싫은 사람은 무기를 버리고 넘어와라."

여긴 전쟁터가 아니다.

범죄자라 해도, 지금부터는 일방적인 살육의 장이 될 것이다.

상대는 모르나, 엔크리드는 이 사실을 알기에 기회를 줬다.

"신중해라. 아니면 오늘 전부 죽는다."

살육을 입에 담는다. 그런 세상이다. 죽고 죽이는 게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그렇다고 해도 살인이 항시 즐거울 리는 없었다.

이곳이 전쟁터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준 기회인데.

"뭐래?"

"응? 누가 죽어?"

"너무 쫄아서 돌아 버렸나."

"어이, 친구. 오줌 지린 건 아니고?"

범죄자 브라더스가 한껏 엔크리드를 비웃었다. 귀 옆에 대고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놈도 있었다.

결국, 아무도 엔크리드가 만든 선을 넘지 않았다.

"뭐하슈?"

렘이 물었다. 엔크리드는 부끄럽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회는 주고자 했으니까.

"형제님, 저들의 눈에 마귀가 씌었기에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아우딘이 속삭였다.

다 죽이는 건 악수다.

엔크리드는 다음 방법을 택했다.

"칼 제일 잘 쓰는 놈이 누구냐?"

실력을 보여 줌으로 선택의 창을 넓혀 주는 거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자신이 있었다.

어지간한 상대가 나와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엔크리드는 검을 뽑은 채로 나섰다.

"상대해 줘라."

픽 하고 비웃은 길드장이 답했다. 재롱이나 보자는 것 같았다.

엔크리드의 눈앞에 상대가 섰다.

"너 좀 까분다?"

용병 출신으로 보였다. 수염을 길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많아도 마흔을 넘진 않을 것 같았다.

"너 그러다 죽어. 좋게 말할 때 그냥...."

발렌 식 용병검.

말하다 말고 때리기.

상대가 쓴 수법이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상대는 말 그대로 말하다 말고 대뜸 휙 하고 창을 찔렀다.

손에 든 창을 찔러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변태 병사의 찌르기보다는 부족했고.

깃대 앞을 막았던 미치 휴리어보다는 한참 밑이었다.

엔크리드는 날아온 창을 피하며 상대의 품에 파고들고는 검을 치켜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찌르는 검격.

푹!

일격이었다.

한 합으로 승부가 났다.

상대의 수준은 딱 예전의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하기에.

엔크리드는 자신의 성장을 실감했다.

'이 정도는.'

반복하는 오늘도 필요 없었다. 보는 순간 상대의 수준을 알았다.

한 합에 끝난 싸움이기에.

검에 찔려 죽은 놈이 꾸륵꾸륵 하며 피를 흘렸다. 엔크리드는 힘으로 놈을 옆으로 밀어냈다.

쑥 하고 검을 뽑자,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몸이 푸들푸들 떨더니, 뜨거운 김이 나는 피가 쏟아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칼질 한 번이면 상대에게 자신을 주지시키기 충분했다.

다들 엔크리드를 보는 시선이 변했다.

엔크리드가 다시 물었다.

"넘어올 사람?"

65. 넘어올 사람

'적의 행동을 예측했다.'

작센은 그게 칼날의 감각이 준 효능이라고 봤다.

제가 가르쳐 준 기술을 십분 활용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흐뭇한 거였다.

허나, 작센은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아서 감정을 돌아보는 법을 몰랐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눈앞에서 죽으면 신경 쓰이는 사람, 딱 그 정도다. 저자가 자신의 무엇이라고 신경을 곤두세운단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생각했다.

작센은 어쭙잖은 군인 놀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표는 명확하니까.

그리 생각하면서도 불쾌함은 여전했다.

그 때문이었다.

작센은 엔크리드의 뒤에서 길드장이란 놈을 빤히 바라봤다.

'생긴 게 마음에 안 드는군.'

작센은 적절한 핑계를 만들었다.

절대 분대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저 새끼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므로 덤비면 죽인다. 여기서는 임무에 충실할 것이다.

렘은 엔크리드가 야수의 심장을 부려 대담함을 무기로 삼은 걸 봤다.

창을 내지르는 적의 품 안에 파고드는 모습이라니.

몇 달 전이였다면 분대장이 저런 모습을 보이리라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부쩍 실력이 늘었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가르침이 있었으니.

'아무렴.'

그게 그를 기분 좋게 했다. 그런데 암살자 따위가 엔크리드를 노렸단다.

'그냥 전부 죽이지.'

렘은 상대를 전부 갈아 버리고 싶었다.

라그나는 새삼 엔크리드의 검술에서 자신의 흔적을 엿봤다.

'어디서 배웠을까?'

훌륭하다. 무게 중심을 옮기는 법, 발을 떼는 법, 검을 찌르는 법, 전부.

자신이 간간이 검술을 봐줬다곤 하지만, 저 정도로 숙달되려면 뼈를 깎는 수련이 있어야 하는데.

'신기하다.'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본래도 라그나는 엔크리드에게 호감이 있었다.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이 라그나에게는 좋은 자극제였으니.

암살자가, 범죄자 패거리가 그런 사람을 노렸다?

'다 죽이는 게 편한데.'

평소의 게으름을 잊고 라그나는 범죄 길드를 깡그리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다만, 이 자리의 주도권은 분대장에게 있다. 그의 뜻을 따라 줄 생각이었다.

아우딘은 엔크리드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손가락으로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잘 단련된 몸이야.'

하지만 체계적으로 만든 몸은 아니다. 신전의 몽크는 기술보다 몸을 먼저 만든다.

육체 단련의 비기다.

아우딘은 그걸 몇 번이고 개량해 자신만의 기법으로 만들었다.

'몸을 만들면 늘겠어.'

분대장은 우직한 노력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우딘의 머릿속 한쪽, 새삼 떠오르는 생각이다.

신은 어째서 저리 노력하는 자에게 재능을 내려 주지 않는가.

'신의 의중을 일개 인간이 알 수는 없으니까.'

자기 가슴에 꽂힌 비수와 같은 말이다. 그 말이 떠오를 때면 아릿한 통증이 심장부터 전신에 퍼졌다.

한데 지금 눈앞에서 노력으로 재능의 벽을 뛰어넘으려는 자가 있다.

신의 의중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믿는 자였다.

'나의 주여.'

아우딘은 속으로 기도했다.

'굽어살피소서.

빛나고자 꿈꾸는 자가 헛되고 눈먼 칼날에 죽지 않기를.'

기도에 마음이 담긴 것과 같이, 그 또한 누군가 엔크리드를 노린 것만큼은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등 뒤를 찌르는 비수에 죽는 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기에.

다만, 아우딘은 누구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두 다리를 전부 부러뜨리고, 대장은 팔을 하나 떼 버리면 될 것을.'

그러니 목숨 빼고 다른 걸 앗아가면 될 일이었다.

* * *

단 일 합.

엔크리드가 준 충격은 꽤 컸다.

그런데도 누구도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부족하다 이거지.'

무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충격을 연속으로 주면 된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꼭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거다.

"렘."

"네?"

"셋만 죽여라."

눈을 피한다는 핑계라곤 해도 이건 작전이자 임무였고, 엔크리드는 분대장이었다.

렘은 대거리 없이 나섰다.

엔크리드가 준 충격이 가시기도 전이다.

손도끼 두 자루를 손안에서 빙글 돌린 렘이 달렸다.

훅 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만큼 빨랐다.

사라진 렘이 흉악한 인상에 못 박힌 몽둥이를 든 놈 앞에 섰다.

몇 번이고 봐 왔던 장면이었다. 렘의 팔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채찍의 끝에 달린 도끼날이 섬광을 토했다.

후앙! 퍽!

후웅! 쩍!

우득!

첫 번째 도끼질이 흉악한 인상의 목을 잘랐고.

두 번째 도끼질은 흉악한 인상의 우측에 있던 놈의 머리를 쪼갰다.

마지막은 다시 좌측이었다. 렘이 허리를 틀며 눈매가 사나운 놈의 목을 도낏자루 끝으로 후려쳤다.

목이 잘리고 머리가 쪼개지고 마지막 하나는 목이 부러졌다.

그리 죽인 뒤, 렘이 손도끼를 바닥을 향해 사선으로 휘둘러 묻은 피를 털었다.

후두둑 하고 핏방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러곤 길드 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성큼성큼 걸어 돌아왔다.

"셋 죽였수다."

엔크리드는 두 번의 충격이면 기회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넘어올 사람."

같은 제안이 세 번째다.

이제는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 덤비는 상대에게 아량을 베풀 수 없으니.

죽고 죽이는 시대다.

상대를 죽이려면 자신도 죽을 수도 있음을 알 것이다.

"...변방수비대였나?"

귀티를 풍기는 길드장이 물었다.

"아니."

엔크리드는 조촐한 분대를 이끌 뿐이다. 다만, 분대를 이루는 면면이 독특한 이들일 뿐.

"보더 가드 사이프러스 사단 소속 보병대대다."

느슨하게 검을 쥔 채 출신을 밝힌다. 감출 이유가 없었다.

주춤주춤 눈치를 보던 놈 중 몇이 무기를 내려놓으려 하자, 길드장이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어디 한번 살아남겠다고 발악해 봐. 내가 그냥 두나 보자."

제 편을 향한 말이었다.

크라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핀이란 놈, 부하를 공포로 다스린다고 했던가.

수틀리면 사지를 분지르고 혀를 자른다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마라! 저 새끼들도 사람이다. 쑤시면 뒈지는 놈들이다. 몸에 갑옷도 제대로 안 두르고 온 거 안 보이냐? 죽여 버려! 몰매에 버티는 놈은 없는 법이다!"

주제에 문자를 쓰네.

엔크리드는 내심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숫자로 찍어 누르는 것.

일반적으로는 맞는 방법이다.

훈련받은 군인은 집단전일 때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법이니까.

소수의 싸움에서는 지나가던 깡패 새끼도 병사를 죽일 수 있었다.

빈틈을 노리고 칼날을 쑤시면 어떻게 살아남겠나.

소수 대 소수의 싸움이라면 깡패가 유리할 수도 있다.

당연히도 기사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들에게 통용되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리고 지금도 먹히지 않는 얘기이긴 했다.

"하지 마라."

엔크리드는 경고했다.

사고뭉치 분대는 애초에 전략과 전술의 바깥에서 제멋대로 싸우는 놈들이다.

전장에서도 다수를 상대로 신명 나게 싸우고 멀쩡히 살아 돌아오는 위인들이란 거다.

그런 이들에게 고작 서른 명의 무장 병력, 그것도 군인도 아닌 이들이 덤빈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놔두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놈도 있는 거니까."

"형제님, 이제는 신의 징치가 필요한 시점 같군요."

"뒤로 물러서서 구경이나 하시죠."

어쩐 일인지 아우딘과 라그나까지 의욕을 보였다.

작센은 아예 말도 없이 나섰다.

챙 하고 검을 뽑더니, 성큼 한 걸음 내딛자, 성격 급한 놈이 있는지 반대편에서도 도둑 한 놈이 튀어나왔다.

놈이 튀어나오면서 손에 쥔 넓적한 칼날의 시미터를 휘둘렀다. 훙 하고 작센의 머리 위로 날이 떨어진다.

작센은 시미터의 날과 수평으로 검을 들어 상대의 칼날을 제 검에 붙여 흘리고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부욱.

검이 상대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도 뱃가죽을 자르고 내장을 보여 주기엔 충분했나 보다.

"끄억."

핑크빛 내장을 쏟아 낸 놈이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덤비는 놈만 죽여."

엔크리드가 말했다.

그 말에 렘은 제자리에서 도끼만 휘둘렀다.

그런데도 분쇄기와 다름없었다.

도리깨를 휘두른 놈은 제 무기가 중간부터 잘리자,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도끼가 머리를 쪼갠 뒤였다.

물러나며 피와 뇌수를 흘리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라그나는 아밍소드 한 자루를 들어 위에서 밑으로 기계적으로 휘둘렀다.

어떤 신묘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려칠 때마다 시신이 늘었다.

정수리가 쪼개지고 어깨가 잘리고.

아우딘은 몽둥이 두 개를 양손에 나눠 쥐더니, 날아오는 날붙이를 쳐 냈다.

따다다다당!

덕분에 아우딘 쪽이 제일 시끄러웠다.

아우딘은 무기를 쳐 내고 거리를 좁혔다. 발이 무척 빨랐다. 렘과 비교할 정도로.

그리 거리를 좁힌 아우딘은 몽둥이를 적절하게 휘둘러 적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렸다.

쩍, 우득!

"끄아아아아악!"

다리가 부러진 이들의 비명이 공터를 울렸다.

이 소리에 순찰 경비병이 출동하진 않을까 싶어질 정도였다.

다행히도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크라이스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토굴에서 반 시간.'

골목길 끝에서 찾은 거점도 애초에 도시 외곽 쪽이었다.

이쪽 장원은 아마도 일부 부유한 상단이 도시 내에 투자한 고급 장원 지역일 것이다.

평소에는 사람이 많이 없는 곳이다. 거기에 상대는 길핀 길드라는 범죄 조직 아닌가.

윗선에 뒷돈을 댔을 테고.

'주변에 사람이 오가지 않게 물렸겠지.'

어설프게 순찰병이 오가는 것보다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일을 처리하기 더 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크라이스는 상대의 숫자에 당황하지 않았고 위협도 느끼지 않았다.

그도 사고뭉치 분대원이다.

자신과 함께하는 분대원의 수준을 대충은 알았다.

상급 병사가 된 엔크리드가 쩔쩔매는 수준이니.

'전원이 변방수비대 이상이지.'

그럼, 답이 나온다.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답이.

크라이스의 뇌는 활기차게 돌아가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했다.

이걸 위해 일부러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그 친구는 나중에 처리하고.'

애초에 흘린 정보도, 지금 상황도 어느 정도 크라이스의 의도 안에 있었다.

이 중에 이걸 눈치챈 사람이 있을까?

분대장은 알아챌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우직한 바보처럼 보이지만, 분대장은 머리를 쓸 줄 알았다.

렘도 단서가 있으면 알지도 모르지만.

그는 도시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 모르니.

'아마 모르겠지.'

라그나와 아우딘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작센은 제가 원하는 것만 명확하면 다른 걸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됐다.

그사이에도 시신이 무수히 늘어 가고 있었고.

아우딘 쪽에서는 비명이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아우딘은 다리 한쪽만 부러뜨리고 끝내지 않았다. 꼭 돌아와 다른 쪽 다리도 부러뜨렸다.

그러며 설교도 잊지 않았다.

"성자가 되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삶은 지양하십시오."

반도 못 알아들을 말을 다리를 부러뜨리면서 하니, 알아들을 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아우딘은 한결같이 행동했다.

엔크리드는 눈이 바빴다.

처음에는 작센의 절제된 동작에 빠져들었다.

'정검식.'

기본은 정검식이다. 상대의 검을 이용한 반격, 정해진 검로를 따라 상대를 의도대로 움직이게 한다.

거기에 쾌검이 섞였다.

공수가 하나가 된 검, 정검의 묘미다.

단순한 검식을 넘어, 검을 휘두르는 판단력이 남달랐다.

확실히 상대를 죽일 수단을 택한다. 살인을 위한 검이었다.

배울 만한 게 많았다.

그 뒤는 렘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오는 적을 후려치는 것뿐이지만, 도끼의 궤적이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그린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정중환쾌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검 같았다.

당연했다. 렘의 도끼질은 철저히 감각에 의한 거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기검이다.

물론 도끼를 쓰니 기부(奇斧)식이라고 해야겠지만.

엔크리드는 여기서도 배웠다.

라그나의 중검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익힌 기본 검술의 극한을 보여 준다.

어설프게 막으면 그대로 돌파해 목표점을 때린다.

그 일격이 정수리를 깨고 어깨를 잘랐다.

아우딘의 체술은 또 어떤가.

검술은 기본적으로 체술을 기반으로 한다. 주먹과 발을 쓰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검술이라 할 수 없었다.

근접전을 익히는 건 필수 조건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우딘의 싸움에서 배울 게 제일 많았다.

짧은 몽둥이 두 개로 다리를 부수는 과정을 눈에 담는다.

예전이었다며 보고도 몰랐던 동작이 머릿속에 담겼다.

엔크리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넷의 모습을 보고 기술을 훔치기 바빴다.

몸으로 실현해 내는 건 다른 문제지만.

확실한 건 배울 게 많은 건 많은 거였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긴 시간을 소요할 수 없었다.

전의를 잃은 자들이 속출했다.

그 와중에 작센은 평소답지 않게 우직하게 길을 뚫었다.

지팡이를 든 길드장을 향해서다.

거리를 좁힌 작센이 대뜸 검을 휘둘렀다. 머리 위를 노린 상단 수평 베기였다.

길드장 놈이 지팡이 손잡이를 위로 뽑았다. 일반 지팡이가 아니라, 소드 스틱이었다.

안에 칼날을 숨긴 지팡이였다.

팅 하고 뽑힌 길쭉한 칼날이 작센의 검을 막았다.

챙 하고 둘 사이에 불똥이 튀었다.

그러자 길드장 뒤를 지키던 두 놈이 합세하려 했고.

"하지 마라."

"싸우게 둬."

어느새 다가온 렘과 라그나가 말했다.

길드장의 호위로 나선 둘이 서로를 바라봤다.

덤빌까?

둘의 눈이 렘과 라그나가 걸어온 길로 향했다.

피의 길이다. 시신만이 즐비했다. 살아남은 건 무서워 바지에 오줌을 지린 놈과 눈치 보고 덤비지 않은 놈들뿐.

호위 둘은 조용히 무기를 내렸다. 둘 다 단검을 쥐고 있었다. 아예 단검을 검집으로 도로 넣고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항복과 굴종의 자세다.

"너 이 새끼들!"

길드장이 호위 둘이 하는 짓을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어쩌겠나.

세상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인 것을.

분위기에 휩쓸려 덤빈 놈들만 불쌍할 뿐이었다.

작센은 무표정했다. 붉은색 띠를 두른 갈색 눈이 길드장을 쫓았다.

"항복하겠다!"

놈이 외쳤다. 작센은 듣지 않았다.

"항복하겠다니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주겠다!"

어조가 다급했다.

채채채채챙!

놈이 입을 터는 사이 작센의 검이 급격하게 빨라졌다. 소드 스틱을 연속으로 다섯 번 때렸다.

불똥이 겨울밤 사이로 튄다. 밤의 어둠과 화르륵 타는 횃불.

죽은 시신과 신음을 흘리는 무리.

공포에 질린 자들과 공포를 선사한 자들.

그 사이에서 작센의 목소리가 울렸다.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게 길드장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곧 작센의 검이 길드장의 비싼 옷을 헤집고 가르며 목을 벴다.

스걱.

섬뜩한 소리, 길드장은 억울함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아직 할 말이 많았다.

자신의 뒤를 누가 봐주는지 아느냐고.

무엇보다 권력자란 놈들한테 쏟아부은 크로나가 얼마인가.

억울하고 또 억울하다.

당연한 일이다. 칼 맞아 죽은 사람은 언제나 억울한 법이니.

작센이 피 묻은 검을 늘어뜨렸다.

어느새 주변 모든 싸움이 끝나 있었다.

엔크리드는 분대원 모두의 동작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상황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두운 밤, 겨울의 시린 공기와 횃불을 배경 삼아, 엔크리드는 한 걸음 나섰다.

어쩌다 보니 딱 중앙이다.

둥글게 감싼 횃불 사이, 그림자가 모이고 시선이 모인다.

그리 모두의 시선을 모은 뒤,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넘어올 사람?"

한마디면 충분했다.

살아남은 모두가 무기를 떨궜다.

66. 두 번째 직업을 제안받다.

"다 죽입시다."

무기를 놓아 버린 걸 넘어서 오줌을 지린 사람도 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렘이 피가 묻은 도끼를 들고서 말하니.

"사, 사, 살려 주십쇼."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

안 그래도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었다.

렘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부 개척민 출신, 낮춰 부르길 야만인이라 한다.

렘은 서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개척의 땅은 후환을 남겨 둬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다.

"암살자 보낸 거 맞는 것 같고, 여기서 누가 범인이네 마네 따져 봤자 남는 게 뭐라고, 멱 따고 끝냅시다. 그게 깔끔하지 않수?"

겁에 질린 자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엔크리드와 무릎 꿇은 범죄자 무리 사이에 선 렘이 언제라도 도끼를 휘두를 것 같았으니까.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너 모포는 어디다 던져 뒀냐?"

렘은 엔크리드가 하기 싫다면 자신이 나서서 손을 쓰겠다고 할 참이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물음이 돌아왔다.

"뭐요?"

"모포."

분명 숙소에서 나설 때는 모포로 몸을 칭칭 감은 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포를 죄다 버렸다.

"골목길 어귀쯤?"

거지를 보기 전이다. 특유의 본능, 야수의 후각이 렘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다.

"그럼, 오늘 잘 때는 어쩌려고?"

왜 계속 저런 걸 묻는 건지 모르겠으나, 처음 모포를 버렸을 때부터 렘은 다 계획이 있었기에 답했다.

"매일 외박하는 놈 모포를 덮으면 되니까 걱정 마쇼. 분대장 모포 안 뺏을라니까."

"내 물건 건드리면 죽는다. 아니, 내가 죽인다. 반드시."

작센이 알아듣고 반응했다. 툭 하면 외박하는 놈, 작센이다.

작센은 만나는 여자가 많았다. 도시에 들어오면 밤마다 숙소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치사한 새끼가 쓰지도 않을 거."

"건드리지 마라. 야만인."

"하여간 음흉한 들고양이 새끼, 속도 좁아요."

둘이 투덕거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엔크리드가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럴 필요 없다. 렘."

처음 도둑 길드를 노렸을 때부터 엔크리드는 계획이 있었다.

렘의 어설픈 모포 탈취 계획보다는 조금 더 그럴듯한 계획이.

암살자를 들여보낸 게 얘들 같아서 시작한 게 반, 다른 계획이 반이다.

'이건 의외지.'

이들이 암살의 배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반 이상이었다.

애초에 아즈펜이 보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누가 크로나를 걸라고 했다면 길드가 배후가 아닌 쪽에 걸었을 거다. 잃어도 상관없는 동화 몇 닢만 걸었겠지만.

만약 이들이 배후라면, 또는 배후가 아니라면.

그런 것보다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날이 꽤 춥잖아. 따뜻하게 지내고 싶지 않냐?"

렘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무슨 얘기를 하나 싶은 얼굴이다.

"어?"

비상한 눈치와 머리가 잘 돌아가는 크라이스만 알아들었다.

그가 큰 눈을 껌뻑이며 '설마' 하고 제 분대장을 쳐다봤다.

엔크리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단련하겠답시고 용병계에서 구른 게 몇 년인가.

거기서 발렌 식 용병검의 존재를 알기도 했으나, 검 외에 배운 게 몇 배는 많았다.

가령.

'날 털어먹으려는 도둑의 주머니를 터는 건 온당하다.'

이런 거다.

엔크리드는 마음먹었다.

이게 자신의 꿈에 영향을 준다고도 생각 안 했다.

어차피 범죄 패거리 아닌가.

이들이 축적한 재산도 바람직한 방법으로 모은 것도 아닐 진데.

후환이나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걸릴 법도 했지만.

'상관없지.'

실력이 붙으니, 자연히 다른 일에도 자신감이 붙는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입김을 뿜어낸 엔크리드가 이어 말했다.

"털자. 숙소에 마법 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열 마수 가죽 몇 개는 깔아 보자."

또다시 침묵이다. 생각지도 못한 경우였던 거다.

곧 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내가 확보한 땅에서 나온 물건은 내 것이지."

렘다운 표현이었다.

"따뜻하게?"

라그나도 반응했다. 추운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허허, 신께서 말씀하시길, 도적의 것을 훔쳐 널리 좋은 곳에 쓰라 하셨으니."

실제로 성서에 저런 말이 쓰여 있을까? 아니면 신전에서 저런 말을 가르칠까?

둘 다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아우딘은 자신이 한 말을 굳게 믿음으로써 이 일의 온당함을 전했다.

"나쁘지 않군요."

작센 또한 고개를 끄덕였고.

"그냥 털기만 할 겁니까?"

크라이스는 발전된 의견을 뱉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춥다."

죽은 이들의 내장과 피가 뿜어내는 열기도 금세 식게 만드는 기온이다.

그들은 곧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던 이들을 향해 크라이스가 들어가길 종용함으로 남은 이들도 들어 왔다.

두 다리가 부러진 이들이 남았기에.

"전부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오세요."

크라이스의 말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던 이들이다.

이대로 도망가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쫓을 겁니다. 아까 그 도끼 든 사람이. 또는 다리 부러뜨리는 게 취미인 사람이."

라그나도 작센도 잘 싸웠지만, 패거리의 눈에 가장 무서운 건 도끼질 하는 렘과 몽둥이로 다리 후려치는 아우딘이었다.

그야말로 공포였다.

"보더 가드 내에서 상비군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이 밤에 마수가 돌아다니는 끝 계절을 탐험이라도 하시게요? 동사 또는 마수의 먹이가 됩니다. 안 죽일 테니, 들어 오세요."

크라이스는 설득의 귀재였다.

엔크리드는 안으로 들어가며 크라이스의 말을 듣고는 칭찬을 건넸다.

"넌 사기를 쳐도 잘 쳤을 거다."

"그거 칭찬입니까?"

"응."

"아닌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자 벽난로에 불이 붙어 있었다. 곳곳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죽은 놈이 여기서 살았던 것 같았다.

벽난로 위에는 날이 서지 않은 가검 두 자루와 방패가 교차 되어 걸려 있었고 양쪽 벽에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었다.

"비싼 거냐?"

엔크리드가 그림을 힐끗 보며 물었다. 크라이스는 자세히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요. 싸구렵니다. 누가 저딴 걸 샀을까 싶네요."

예술적 소양이 없는 엔크리드가 봐도 그랬다.

"내가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다."

렘도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다들 벽난로에 붙어 서니, 그들 뒤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횃대에 불 좀 붙여. 어둡다."

엔크리드도 그 사이에서 불을 쬐며 말했다. 누굴 지칭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엔크리드가 말을 덧붙였다.

"길핀이 죽었으니, 그다음 놈이 나와서 해."

"길핀은 안 죽었습니다."

그러자 사지 멀쩡한 놈 중 하나가 나섰다. 머리 위에 머리털 대신 백사장이 있는 친구였다.

낮에 봤다면 눈이 부셨을 것이다.

눈썹 위로 긴 흉터가 있었는데, 흉터와 대머리의 조합으로도 인상을 변하게 할 순 없었다.

눈꼬리가 처지고 입술이 두꺼워, 도저히 살벌한 인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근데 뭐라고?

"길핀이 안 죽어?"

설마 무슨 마물처럼 재생력이라도 지녔다고?

그래서 목이 베이고도 살아난단 건가?

지금 저택 앞 공터에서 시체가 된 놈이?

그럴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백사장 대머리가 입을 열었다.

"제가 길핀이니까요."

뭐냐, 이 상황은.

"쟤가 대장이 아니라고? 아, 그거군요. 도마뱀 꼬리 자르기 같은 거?"

크라이스가 바깥을 가리키며 묻고는 스스로 답했다.

그 말에 엔크리드는 용병 업계에서 구르며 술자리에서 오갔던 잡담이 떠올랐다.

"가끔 범죄자 길드 새끼들이 하는 짓거리인데, 패거리 이름을 괜히 제 부하 이름으로 해 놓는 거야."

"왜?"

"수틀리면 부하를 팔아먹고 튀는 거지. 갑자기 범죄자 소탕하겠다고 군대가 들이닥친 다거나 할 때 쓰는 시답잖은 수법인 거다."

"넌 그걸 왜 그렇게 잘 아냐?"

"그쪽에 잠깐 몸담았거든, 하여간 그렇게까지 하는 놈들이 흔하진 않은데, 아주 개자식인 거지."

엔크리드는 실제로 이런 짓을 하는 놈은 처음 봤다.

보통 공명심에라도 제 이름을 패거리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훨씬 많았으니까.

부하의 이름을 앞세웠다, 이건 저 밖에서 뒈진 놈이 굉장히 음흉한 새끼란 거였다.

"개자식이었군."

알아들은 엔크리드가 말하자.

뒤에서 라그나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고.

눈치 빠른 크라이스가 상황을 대강 설명했다.

엔크리드의 계획은 그럴듯했지만, 단순했다.

도둑 길드를 쳐서 얘들이 협조하면 적당히 성의를 받아서 돌아오고.

반항하면 두들겨 패서 성의를 받아 돌아올 작정이었다.

물론 괜히 도둑 길드를 건드리면 후환이 따르겠지만.

그조차 무력으로 찍어 누를 자신이 있었다.

자신과 분대원이면 충분하리라.

그런데 진짜 자신을 노린 암살자와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정말 따뜻하게 해 줄 거요?"

뒤에서 렘이 속삭였다. 얼굴을 너무 들이밀어서 불쾌했다.

"꺼져라."

속삭여 준 엔크리드가 길핀을 바라봤다. 제 백사장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쓱쓱 쓰다듬은 길핀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죽일 거면 나 하나만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 주십쇼. 이 중에는 병든 노모를 모시느라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다고 다른 사람 주머니 터는 게 멀쩡한 짓은 아니지."

병든 노모를 모셨다고 해서 다른 이의 가슴팍에 칼을 들이대고 이득을 취하리란 법은 없다.

"에, 그냥 살려 주면 고맙겠습니다."

엔크리드는 팔짱을 끼고 똑바로 선 채로 길핀을 바라봤다.

이 친구 어째 강단이 있다.

자기만 죽이라는 말도 퍽 인상 깊고.

그럼, 아까는 왜 안 덤볐을까?

물어보니.

"제 이름 팔아서 수틀리면 도망갈 새끼를 위해서 왜."

이름 모를 길드장의 호위였던 둘이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도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쪽이었다.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뒈진 놈이 한 짓이 보였다.

제 부하들이 이리도 하나같이 자기를 싫어하니.

"모아 둔 거 토해 낼래? 그럼 곱게 가고."

엔크리드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암, 토해 내면 죽일 필요는 없지."

개척민의 사상 따위를 추위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렘이 동조했다.

다른 이들이라고 다를까.

"네. 근데 금고 열쇠는 뒈진 그 새끼가 숨겨 놔서."

"아, 괜찮아."

여기 노크만으로 잠긴 문을 여는 마법사가 계시거든.

금고 상자 따위야, 뚝딱이지.

길핀은 지혜로웠다.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하자 그동안 축적한 재물을 다 토했다.

"엇, 온열 가죽이다!"

"다 가져가시면 길 지키는 애들 다 죽습니다."

골목길 안쪽, 길을 지키는 거지를 말한 거였다. 이미 오면서 죽인 그 거지들.

그들의 허름한 옷 안쪽에 마수 가죽을 덧대어 놨다는 말에 크라이스가 말했다.

"이거 피 묻으면 못 쓰잖아."

죽은 거지의 것을 뺏을 순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엔크리드는 새삼 또 길핀을 다시 봤다.

'일개 수하까지 다 챙겼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름만 빌려줬다는 것치고는 본래 길드장보다 인심이 더 좋은 듯했다.

다들 알음알음 길핀의 뜻에 따르는 걸 보니, 딱 봐도 칼 좀 다룰 것 같은 호위 둘도 마찬가지고.

"좀 남겨 둬."

엔크리드가 적절히 제지했다.

다행히도 다들 물욕이 없었다.

아니, 한 명은 아니어야 하는데.

크라이스는 물욕이 넘쳐흐르는 분대원이다.

근데 어쩐 일로 물건을 확인만 하고 가져갈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안 챙기냐?"

"네, 아, 분대장.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는데."

엔크리드도 할 얘기가 있었다. 이들은 이미 정보를 듣고 대비했다.

정보가 샌 곳, 하나뿐이었다.

부대 내는 아니다. 여기에 온다는 걸 아는 건 둘뿐이다.

'중대장과 소대장.'

그 둘이 범죄자 길드에서 크로나를 상납받았을까?

'그건 아닐 것 같고.'

그렇다면 남는 건 한 군데다.

'바네사의 호박 수프.'

크라이스가 여급과 속닥거렸을 때, 실수인 척 도둑 길드를 소탕하러 간다는 말을 흘렸다.

"여급, 일부러 그랬냐?"

"아, 눈치챘어요? 분대장 머리 좋군요."

나쁜 편은 아니지.

험한 세상 살아남기 위해 얻은 눈칫밥이 몇 년인가.

"맞아요. 알게 모르게 이쪽 길드에 정보를 퍼다 주는 놈이 많으니까. 여급은 아예 전용 정보원이었을 겁니다. 발랄한 여관의 여급, 이런저런 정보를 수급하기는 딱 좋았겠죠. 아우, 무서워라. 그 순진해 보이는 애가 도둑의 정보원이라니."

무섭긴, 네가 더 무서울 것 같은데.

그걸 알면서 십분 이용한 거 아닌가.

"저도 확신은 없었어요. 이번 일로 안 거죠."

미리 말했어야 했다. 괜한 수작이었다고.

제 실수를 자각한 크라이스가 핑계를 늘어놨다.

"됐어. 넘어가. 하지만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분대원의 실력을 염두에 둔 짓거리였을 거다. 엔크리드 자신도 이쪽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본래라면 이번에 본거지를 치고도 남은 이들을 쫓고 찾아내야 했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크라이스도 노리는 바가 있는 거다.

도둑 길드의 전력을 모은 뒤 다 부숴서 얻을 것, 무엇이 있을까.

"저기 분대장, 크로나 필요 없어요?"

아량을 보인 엔크리드에게 크라이스가 대뜸 물었다. 그 큰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무구한 척, 눈을 이리 뜬다는 건 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표시였다.

크라이스는 제 외모를 이용할 줄 아는 놈이니까.

거기에 영리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게 엔크리드에게 통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슨 수작질인지 들어나 보자."

눈깔 예쁘게 뜨기는 안 통했지만, 크라이스가 한 말은 와닿았다.

제국 화폐, 크로나란 단어가 돈과 차용되는 단어로 쓰이니, 지금 크라이스가 한 말은 돈 필요 없냐는 물음과 같았다.

돈은 항상 필요했다.

포상금을 탈탈 털어 검 한 자루를 사는 바람에 그 외, 이런저런 장비를 갖추기도 버거울 지경이었으니까.

지금 털어먹은 거로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돈이야 앞으로도 꾸준히 필요한 거 아닌가.

"여기, 우리가 먹죠."

크라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그는 엔크리드에게 두 번째 직업을 제안했다.

67. 길드를 통째로

크라이스는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이득을 취할 길을 찾았다.

'도둑 길드라고 하지만.'

잘 보면 사업체나 다름없다.

보호세를 걷고 소매치기 사업 따위를 없애고 좋은 것만 끌어다 써도 괜찮을 그런 사업.

무엇보다 크라이스에게는 도둑 길드를 토대로 구상한 사업도 있었다.

여긴 보더 가드, 본래 치안이 빡빡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본래라면 범죄 길드가 먹고 살기가 녹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긴 아니다. 길핀 길드는 제대로 해 먹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보통 수완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온열 가죽, 저게 얼마짜리인데 열 몇 장이 나온단 말인가.

십만 크로나 이상의 주화와 어음도 몇 장 나왔다.

차용증도 나오긴 했는데, 저걸 써먹긴 힘들 것 같고.

자신의 구상과 이곳이 가진 사업체를 정리하면.

'절대 손해는 안 본다.'

크로나가 걸렸다. 크라이스는 현자라 불러도 될 만한 현명함을 발휘해 상황을 파악하고 받아들였다.

"도둑이 돼라?"

엔크리드가 되물었다. 크라이스는 잠시 분대장을 바라봤다.

꿈이 기사라 했다. 더 높은 곳을 가려고 한다고 했다.

제대로 된 훈련, 양질의 장비를 위해서라면 크로나가 필요할 것이다.

본디 기사란 전쟁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이들이다.

괜히 '살육의 전문가'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나쁘게 생각하실 건 없을 거예요. 길핀 무리는 이제 끝장났고, 그렇게 떠나면 다른 도둑 길드가 자리 잡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크라이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뇌에 혈류가 공급되며 회전했다.

길핀의 됨됨이를 보니,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길어야 한 달일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엔크리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해!"

한쪽에서 온열 가죽으로 만든 코트를 걸친 렘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럼, 춥겠냐?"

라그나가 그런 렘에게 핀잔을 줬다.

잠깐 시선을 돌렸으나, 곧 크라이스의 목소리가 엔크리드를 잡아끌었다. 차분하나, 묘한 열기를 숨긴 목소리다.

"그럴 바에야 길핀, 저 사람 괜찮아 보이는데, 저 친구 그대로 놔두고 사람 안 죽이고 물건 안 뺏는 도둑 길드를 만드는 겁니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정말 솔깃했다.

기사로서 명예를 지킨다?

그것도 크로나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엔크리드는 현실을 잘 알았다.

물론 기사급의 무력을 지니면 크로나야 알아서 굴러들어오겠지만.

실제 기사 수준의 무예가 중에는 돈만 주면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엔크리드는 기사의 명예란 제 마음을 따르는 것이라 믿는다.

지금 크라이스의 제안은 걸리는 게 없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오히려 좋은 쪽이었다.

'그거로 사람들 삶이 더 편해진다면.'

그럼, 우는 아이도 줄어들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시름도 줄 것이고.

어느 도시나 그렇듯, 힘겨운 삶을 이어 가는 이들은 있는 법인데.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지도 몰랐다.

처음에야 겨울을 날 땔감이나 뜯으려 했지만, 이 기회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일이다.

"괜찮죠?"

"괜찮네."

"수익은 제가 적절히 나눠서 분대장에게 드릴게요. 대신 다른 분대원들 잘 막아 주시고요."

왜 자신을 붙잡고 이러나, 했더니.

렘을 비롯한 일행 때문이다.

크라이스가 나서서 길드를 먹겠다고 하는 순간, 그냥 놔두지 않을 테니까.

"너한테는 무슨 이득인 거냐?"

문득 궁금했다.

상납금까지 내면서 도둑 길드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실제 수익이 얼마나 될 줄 알고?

"정보요."

엔크리드는 새삼 크라이스의 영리함에 감탄했다.

정보는 돈이 된다. 도시 내의 사소한 정보는 부대 내에서는 양질의 크로나가 될 수도 있다.

가령 꽃집 아가씨의 이름과 취미 정도만 알아다 줘도 그걸 사겠다는 애들이 줄을 서겠지.

다른 방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바로 알아듣네요. 이래서 분대장이 좋아요."

크라이스가 주먹을 내밀었다. 엔크리드도 제 주먹을 내밀어 툭 쳤다.

이로써 약속이 생겼고 거래가 일어난 거다.

엔크리드는 크로나를 얻고 부대원을 막아 주고.

크라이스는 길드를 갖게 되는 거래다.

엔크리드가 다시 벽난로 앞에 서자.

"전 괜찮습니다. 크라이스가 가져도 됩니다."

작센이 먼저 말했다.

...무서운 놈.

정말 예민한 귀였다. 최소한 열 발짝은 떨어져서 말을 나눈 것 같은데.

"길핀, 여기 시신 처리하고 남은 사람 중 살인을 쉬이 할 자, 혹여라도 약자에게 큰 피해를 준 자, 또는 앞으로 문제가 될 자를 추려라. 감옥으로 데려가겠다."

놔둔다고 해서 지금 이대로 놔두겠다는 건 아니었다.

"음, 몇 놈 정도는 내드려야 한다는 것 같은데."

"그리고 이제부터 이 친구가 길드장이다. 계속 여기에 남아 있어도 된다는 말이다. 아, 혹시나 여기 관두고 다른 길드 꾸리면 우린 또 만날 거고."

"그럴 담력 없습니다."

버릇인지, 길핀이 제 백사장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저기 병사님."

그러곤 말을 잇는다.

"왜?"

"저기, 그게 아무래도 해산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남아 있으면 다 죽을 것 같은데."

다 죽어? 왜?

엔크리드가 눈으로 물었다.

길핀은 머뭇거리다가 대강 이제까지 상황을 알려 줬다.

아마도 대부분은 몰랐겠지만, 뒈진 길드장은 아즈펜의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해 주는 업자였다.

첩자가 아니고 업자란 소리다.

"주기적으로 길드의 상황을 살피러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자리 갈아 치웠을 겁니다."

순해 보이고 제 사람 아낀다고 해도 길핀도 도둑 길드 사람이다.

보통내기로 지금 위치에 있는 건 아닐 터였다.

방문하러 온다는 사람, 그 작자가 문제였다.

"뒈진 놈이 안 보이면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안 그래도 저택까지 헐값에 팔아넘기고 전부 잠적할 생각이었습니다."

"몇 놈이나 오는데."

"한 놈인데. 그게...."

"그게?"

"프록입니다."

심장 공포증의 종자들.

가진바 근력이 인간보다 월등한 전투 종족.

엔크리드도 프록의 발에 차여 본 적 있었다. 덕분에 의무 막사 신세까지 졌었고.

"프록이 온다고?"

"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근데 무슨 변방 도시의 도둑 길드에 프록까지 와서 감시한다는 건가.

대륙에 나온 프록은 인정받은 프록이란 말이 있다.

이미 어느 정도 검증된 실력자란 거다.

나우릴리아의 병사 등급제로 보자면 최소가 특급 이상이다.

"여기가 대체 뭐길래?"

"자세한 건, 뒈진 저놈만 압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프록이 올 때마다 활동비라고 크로나를 주고 갔습니다."

돈을 걷어 가는 것도 아니고 주고 가?

아니, 진짜 뭐냐.

엔크리드는 도저히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묘하네요. 그거."

크라이스도 마찬가지였으니.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어쩌나.

"길드는 우리가 먹는다."

변하는 건 없다. 아직 시간도 남았음에야.

이후의 일은, 이후에 고민해 볼 문제다.

또는 그때가 돼서 해산하고 포기해도 될 일이고.

그렇게 길드를 통째로 접수하기로 했다.

길핀도 딱히 불만이 없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다행이리라 생각했다.

엔크리드는 이 도둑놈들이 지금은 다 동의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패거리가 과연 계속 얌전히 말을 들을까.

물론, 지금부터는 크라이스의 수완 문제겠지.

그가 하기로 했으니, 넘길 뿐이다.

"이건 내가 가져간다."

작센은 여자에게 줄 용도인지 반지나 장신구 몇 개를 챙겼고.

렘은 온열 코트와 깔개로 쓸 가죽을 챙기더니 이후 금고에 뭐가 들었나 구경 중이었다.

라그나는 길드가 모은 검을 한번 훑어보더니 다 쓰레기뿐이라고 품평했다.

이후에는 딱히 재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우딘도 마찬가지다.

"재물에 시선을 두면 눈이 어두워지는 법이라 했으니."

그는 기도만 했다.

대신 엔크리드의 부탁은 들어줬다.

"금고 좀."

"네. 형제님."

뒈진 길드장의 금고였다.

단단히 잠긴 자물쇠, 그 위에 사슬이 칭칭 감겼다.

아우딘이 앞에서 자물쇠를 손에 쥐었다.

우드드득.

그 뒤부터는 차력사나 다름없었다.

자물쇠를 손으로 우겨서 부순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다.

"아니, 너 몸뚱이 자식 힘 좀 쓰는구나."

렘이 감탄했다.

그리 자물쇠가 부서지니 사슬이 무슨 소용인가.

본래라면 쇠톱으로 한참을 갈아야 할 것이 단숨에 끝났다.

이게 바로 노크로 잠긴 문을 여는 분대원의 힘이었다.

엔크리드도 금고에 담긴 게 궁금했다. 그래서 성큼성큼 걸으며 다가갔다.

"직접 열어 보시게?"

렘이 엔크리드를 보고 말했다.

"그럴까."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금고에 다가가며 엔크리드가 물었다.

"그래서 그 프록은 언제 오는데?"

곁에 붙으며 길핀이 답했다.

"첫 계절이 시작되면 올 겁니다. 사계의 시작에 한 번, 세 번째 계절에 한 번 온다고 했습니다."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그렇다면 아직 시간은 있는 셈이다.

엔크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고 앞에 섰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했다.

툭 하고 손끝으로 금고의 걸이를 쥐고 들어 올렸다.

끼리릭.

경첩에 기름칠하지 않았는지, 녹슨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퉁.

그리고 금고가 열렸다. 묵직한 뚜껑이 뒤로 젖혀지며 금고 몸통에서 부딪히는 소음이 났고 그 소리가 아련하게 엔크리드의 귀에서 반복됐다.

투-웅. 투우우웅. 투우우우우웅.

보이진 않는다.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홀로 세상에 유리된 기분이 든다. 갑자기 주변 모든 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려고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음?'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조차 되지 않는다.

"뭐요? 좋은 거 들었수?"

갑자기 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엔크리드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눈을 깜빡이고 입을 열어 본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지금, 조금 이상하지 않았어?"

"분대장은 본래 좀 이상한 사람이우. 내 그걸 잘 알지."

아무도 느낀 게 없는 것 같았다.

렘의 헛소리를 한쪽으로 흘리며 엔크리드도 착각이라 생각했다.

"이제 봐야지."

그는 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상자 안을 살폈다.

몸통을 감싸는 가죽 갑옷이 들어 있었다.

"이건?"

엔크리드의 입이 열렸다. 길핀을 향한 물음이었다.

"잘 모릅니다. 뒈진 놈이 애지중지했다는 거 말고는."

들어서 꺼내 보니, 보통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니 탄성이 느껴졌다.

"귀한 가죽 같은데. 분대장 가지쇼. 뱃가죽에 구멍 나지 말고."

"나쁘지 않은 물건 같은데요."

렘의 제안에 크라이스가 물건을 살폈다. 물건 보는 눈이 있는 친구였다.

일단 챙겼다. 훌륭한 방어구는 칼밥 먹고 사는 이들에게 좋은 무기보다 몇 배는 소중한 물건이니.

"이건 내가 갖는다."

이견은 없었다. 챙기고 나머지 일은 크라이스가 알아서 하기로 한 뒤다.

"지금쯤이면 눈 다 치웠으려나?"

렘이 계속 나섰다.

엔크리드는 속으로 시간을 곱씹어보고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쌓인 눈이 녹지 않았다.

지금 돌아가면 밤새 눈이나 쓸어야 할지도 몰랐다.

고민할 일이 아니었기에, 엔크리드는 중얼거리며 분대원의 뜻을 모았다.

"우리 임무는 내일 아침에 끝나는 거로."

내일 아침이면 확실히 눈 치울 일은 없을 터였다.

"좋수다. 여기 아직 할 일이 많은 것 같수."

렘이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으며 동의했다. 지금만큼은 더없이 온순한 렘이었다.

그럴 만했다. 렘은 온열 가죽과 벽난로의 온기와 함께 행복이란 단어를 곱씹는 중이었으니.

"그러네, 아직 할 일이 많네."

벽난로를 기준으로 반대편, 라그나가 자리를 잡고.

"그렇군요. 신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이 있음에."

아우딘도 한마디.

"그럼 전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작센은 아예 개별 행동을 요구했다.

이럴 때면 이견의 여지가 없다. 손발이 잘 맞는다. 평소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번 일을 하며 거듭 드는 생각이다.

"분대장."

크라이스가 엔크리드를 불러 슬쩍 엄지를 치켜세웠다. 극찬이었다.

* * *

"휘하 분대원 전원 복귀 신고합니다. 도둑 길드 위치 파악했고 섬멸했습니다."

엔크리드의 말에 두툼한 외투를 두른 중대장이 고개를 힐끗 들었다.

지휘관 전용 연무장이었다.

두 개의 횃대에 불을 피웠음에도 여전히 추운 날이다.

추운 날씨 탓에 돌바닥처럼 얼어 버린 흙 위에서 중대장이 되물었다.

"섬멸?"

이 양반, 뭘 알고 되묻는 걸까.

엔크리드는 덤덤하게 답했다.

"네, 섬멸. 감옥에 갈 놈들 추려 보내고 나머지 반항하는 이들은 척살했습니다."

"그렇군."

중대장이 제 어깨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몸이라도 푸는 것 같았다.

진짜 뭔가 아는 걸까.

그렇다고 얌전히 '크라이스가 길드를 꿀꺽했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본거지에 있던 재물, 부대로 가져왔다고."

"네."

온열 가죽 몇 개와 장신구 몇 개 빼고는 전부 부대에 반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작전에 나가서 생긴 부수적인 이득이었으니까.

부대에 귀속되는 게 맞다.

그 와중에 알음알음 조금 빼먹는 건 눈감아 주는 게 관례이기도 하고.

"고생했다."

다행히도 중대장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보석 같은 녹색 눈으로 엔크리드의 파란 눈을 보고 제안했을 뿐.

"한판?"

"...무슨 말씀이신지?"

"요정의 검, 받아 보고 싶지 않나?"

"대련 말입니까?"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들었는데."

요정의 검은 가벼우나, 날카롭다.

세간의 평이다.

엔크리드도 요정의 검을 몇 번 받아 보긴 했다. 용병 생활 중에 요정을 마주치는 게 드문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때는 실력이 형편없을 때였다.

그들의 예민함은 발렌 식 용병검 따윈 통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붙어 봤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었으니까.

"네."

대련이다. 귀한 경험이 될 듯했다.

요즘에 든 생각이긴 한데.

'싸울수록 이득이다.'

엔크리드는 자신의 재능이 형편없음을 안다.

경험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 모든 게 반복되는 오늘을 맞이했을 때 빛을 봤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다고 해도 거절은 없었을 거다. 그게 엔크리드란 인간이었으니까.

"좋습니다."

"호쾌해서 좋군. 덤벼."

요정 중대장이 검을 뽑았다.

칭.

나이들, 요정족의 검이다. 진검 대련이다.

엔크리드도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챙.

둘은 롱소드와 나이들을 한 번 엇갈려 부딪쳤다.

팅.

동시에 둘이 뒤로 두 걸음씩 물러났다.

엔크리드는 신중했다. 요정족 중대장의 손짓 한 번에 쓰러진 기억이 있다.

의무 막사 때였다.

그때와 자신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모른다. 지금 확인해 볼 참이었다.

68. 여자를 안는 꿈을 꿨다 (1)

휙.

세상이 빙글 돈다.

퍽 하고 등부터 바닥에 떨어지자, 숨이 턱 막혔다.

"조금 더 세게 메다꽂으면 갈비뼈와 내장이 상할 거다."

통증을 참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그 위에서 중대장의 악기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

"한 번 더."

엔크리드는 할 수만 있다면 나이들에 목이 베여서라도 반복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대가 안 될 건 알았다.

렘이 요정 중대장을 힐끗 보고 한 말이 있었다.

"저 양반도 숫제 괴물이네."

이후 라그나의 평가와.

"중대장 중에서는 제일 낫군요."

아우딘의 덧붙임도 있었다.

"몸이 잘 만들어졌군요."

상대가 안 되는 걸 안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기에 엔크리드는 제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가지."

요정 중대장은 평소와 같았다. 무덤덤하고 무감정한 목소리와 함께다. 나이들이 휘어져 들어온다.

요정족이 만든 검 나이들은 휘어지듯 베고 어느 순간, 점이 되어 찌르는 검이다.

조금 전에는 찌르기를 피하려다가 거리를 허용했다.

이번에는 뒤로 발을 빼며 롱소드를 올려쳤다.

힘은 확실히 이쪽이 우위였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 나이들을 날리면 틈이 생길 것이다.

머릿속으로 싸움의 향방을 그린다.

무수히 많은 실전, 그것도 목숨을 건 실전 덕에 자연스레 생긴 전투 예측이다.

상대의 반응을 예측하고 그에 맞춰 대비한다.

본래 재능 있는 자들, 또는 실전으로 제 무예를 완성한 자들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나, 엔크리드는 수없이 목숨을 잃은 뒤에야 얻은 무기이기도 했다.

스아아악.

중대장의 나이들이 엔크리드와 롱소드와 맞부딪히기 직전, 나이들이 부드럽게 휘었다.

잎새 검이란 별명에 걸맞게 정말 나뭇잎이라도 된 것 같았다.

말랑거리며 칼날이 휜다.

중대장의 손목이 부린 묘기였다. 꺾고 흔든다. 칼날이 휘어짐을 보면서도 끝내 제 검으로 맞추려고 엔크리드는 더 힘을 줬다.

결국, 올려치기에 칼날이 닿지도 않고 흘렀다. 엔크리드는 허공을 벴다.

묘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유검술이다.

이후, 요정은 다시 거리를 좁혔다.

바짝 품에 파고든다. 대비한 엔크리드가 무릎을 세웠다.

탁.

중대장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을 겹쳐 무릎을 눌렀다.

힘이 제대로 실리기 전에 누름으로 엔크리드의 균형을 흔들었다.

알면서도 당한다.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했다.

분명 이렇게 근접전을 시도하리라는 걸 알았는데도.

되는대로 박치기를 시도하자, 중대장은 고개를 꺾어 피해 엔크리드의 이마를 어깨로 받았다.

이후는 전과 양상이 비슷했다. 타격 기술만 달랐다.

중대장은 무릎을 막은 양손을 깍지 껴서 엔크리드의 심장 부근을 때렸다.

퍽!

순간 또 숨이 턱 막히며 사지에 힘이 쭉 빠졌다.

이게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었다면 혀를 깨물어서라도 발악했겠지만, 대련이었다.

이렇게 된 시점에서 이미 패배였다.

"끅, 후욱, 후욱."

엔크리드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버틴 뒤 숨을 몰아쉬었다.

그대로 고개를 들자, 중대장의 녹색 눈이 보였다.

"더?"

그녀가 물었다.

"후아."

엔크리드는 심장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웃었다.

정말 기뻤다. 상대가 이겼다고 멈추지 않아서.

그렇게 다시 수없이 덤비고 또 덤비고.

맞고 또 맞고 널브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