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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여행자 로튼

완벽한 사람의 생김새이었다.

오히려 너무 완벽하게 생겨서 사람 같지 않은 묘한 느낌이 들 정도.

지금 느끼고 있는 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신에게 선택받은 건가.

신은 정녕 존재했던 것인가에 대한 찰나의 고민을 마치고.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던 로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백운이라고 합니다."

소개를 하며 로튼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둘의 통성명에도 여전히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 

남자는 조금 전과 같이 낯선 분위기를 물씬 풍겨대고 있었다.

"칸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죠."

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로튼이 대신 칸의 소개를 했다.

그래서였나.

저런 걸 쓰고 있는 이유가.

바람이 불 때마다 망토 안으로 보이는 거대한 마스크와 안대.

얼핏얼핏 보이던 터라 제대로 본 게 맞나 헷갈리던 순간이었다.

포스가 장난이 아닌데.

칸의 몸 자체가 엄청 근육질이라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칸의 몸에서는 위험한 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오랜 세월을 싸움터에서 보내왔을 듯한.

무협으로 치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싸움꾼의 기 같은 게 느껴졌다.

"샤마크라를 보고 계셨습니까?"

샤마크라…?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자 로튼이 눈을 돌려 부락을 바라봤다.

"아, 저 부락의 이름이 샤마크라인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맞다고 대답하는 로튼의 눈은 여전히 샤마크라에 고정되어 있었다.

다르네.

부락을 바라보고 있는 로튼의 눈.

내가 샤마크라와 노인을 바라보던 눈과는 사뭇 다른 눈이었다.

난 회귀 전을 떠올리며 묘한 동질감을 느꼈었다면.

로튼은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굽어살피는 듯한, 자비로움과 동정으로 따듯하게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뜻밖의 말이었다.

모두가 안 좋은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을인데 아름답다니.

예루살렘에서만 하는 색다른 표현인가 싶었다.

"샤마크라는 이곳에서…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일 수도 있겠군요."

계속되는 의미심장한 말에 로튼을 멍하니 바라보자.

로튼이 입가로 옅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개방이 나타나기 전과 이후, 인간에게 가장 달라진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래도… 수명의 차이 아닐까요?"

회귀 전에 가장 좌절했던 것, 수명.

다른 이들과 달리 개방을 하지 못했었기에 속절없이 나이를 먹었었다. 

그에 따른 몸의 노쇠화 역시 자동으로 따라왔고 말이다.

우울했지.

절망스러웠고.

유물관의 골방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에 놓였었더라도.

수명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내 패배감과 좌절감은 계속되었을 터였다.

스윽.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 로튼이 말을 이어갔다.

"개방 전의 인간은 수명에 의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느꼈었죠. 사고나 병 없이 온전한 수명을 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는 로튼.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개방이 나타난 게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임에도, 이제는 모든 인간이 영생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있죠. 병이나 사고에 대한 죽음은 이전보다 더 안타까워하게 됐고요. 원래라면 영원히 살았을 텐데 죽어버렸으니까요."

왠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과는 달리 로튼은 약간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 일반적인 케이스라 치면 영원히 살 수 있으니까요."

"… 그것이 바로 오만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 지금 세계 사람들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는 로튼.

로튼이 말을 이어갔다.

"데몬이라는 죽음이 항상 곁에 도사리고 있음에도, 스스로는 영생을 누릴 거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데몬에게 죽임이라도 당하는 순간엔 마치 자신의 영생을 미개한 존재가 뺏어갔다며 억울해하고 한탄하면서 죽어 가죠. 그에 반해."

샤마크라를 응시하는 로튼의 얼굴에 다시 한번 웃음이 번졌다.

"다른 이들과 달리 저 마을의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어났으면 죽는다. 태고부터 존재해온 법칙을 이해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죠."

서… 설마 전도 당하고 있는 건가.

점점 심오해지는 로튼의 말에 도망가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었다.

태어났으면 죽는다는 게 불변의 법칙이었던 건 개방 전 과거였다.

이제는 아님에도 그때를 그리워하며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을을 아름답다고 말하다니.

살짝 오한이 들려는 참이었다.

슥.

도망가려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고개를 돌린 로튼이 내 눈을 응시했다.

역시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묘한 눈이었다.

"백운 님은 어떠신가요? 인간이 개방 후에 영생을 얻은 것이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도망가려다 갑작스럽게 받은 질문에 잠시 고민이 되었다.

신의 축복이라.

난 영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다.

만약 생의 길이가 제한되었다면 무기를 모으거나 무언가를 행하는데 있어 항상 쫓겼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기준으로 했을 때였다.

- 이 무능력자야!

회귀 전의 삶이 떠올랐다.

시스템에 속하지 못하고 바닥에서 기생을 하던 시절.

- 이걸 주는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야지!

영생을 얻었지만.

사람들은 동시에 많은 걸 잃었다.

"개인만 봤을 땐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넓게 본다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로튼.

"평생 살 수 있다는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사람들의 욕심은 늘어만 갔고, 타인에게 행해왔던 모든 게 사라져버렸죠."

스스로의 수명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베풀어 왔던 것들.

인간이 영생을 얻으며 가장 먼저 거둬 간 것이었다.

평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욕심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 행하여진 자연스러운 회수였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급을 나누고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자신 아래의 것들을 같은 존재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회귀 전엔 종말의 날까지 겪으며 자원이 제한되자 더욱더 각박해지며 고삐를 조였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전 인간이 앞으로도 더욱더 추악해질 거라 확신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로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야 할 게 사라진 인간은, 해선 안 되는 짓을 시작하는 법이니까요. 전 인간의 오만이 어디까지 도달할지 두렵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나 역시 인간이 추악해지는데 끝은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백운 님은 어떠신가요?"

"…?"

질문과 함께 다시 한번 오묘한 미소를 띠는 로튼.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미소였다.

"스스로가 절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다른 인간들처럼요."

"아뇨."

나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깊은 생각을 마치고 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느끼고 있던 그대로를 대답했다.

이제까지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니까.

당장 지난번 이집트에서의 싸움만을 떠올려도 그렇다.

라의 불꽃을 구하기 위해 다크메타로 뛰어들었던 순간.

만약 그 안에 있던 불꽃이 꺼져 있었다면 난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던 상황.

"제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오히려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멈춤 없이 위로 올라가는 것.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지금 있는 곳보다 항상 위이기에.

앞으로도 무기를 모을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사선을 넘어야 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더 발버둥 치는 거죠. 죽지 않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요."

살기 위해서 항상 죽음을 곁에 둬야 하는 아이러니함.

어찌 보면 참으로 묘한 상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위로 올라가는 걸 멈출 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렇군요."

아무렇게나 뱉은 대답이 만족스러워서일까.

로튼이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오만을 혐오하는 로튼에게 나는 오만하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난 겸손한 사람이야.

스스로도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백운 님은 다른 인간들과 달리 오만하지 않으시군요."

로튼의 칭찬까지 더해지자 뜬금없는 타이밍에 어깨가 솟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다른 인간들이라.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질감이 어디에서 오는 건가 했는데.

아마 인간이란 단어인 듯했다.

물론 나도 가끔 이 인간아 저 인간이 하면서 자주 사용하긴 했지만.

로튼이 사용하고 있는 인간이란 단어는 무언가 달랐다.

마치 자신과는 다른 존재를 부르는 듯한 이질감.

… 두… 두두… 두.

응?

로튼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조금 더 고민하려는 찰나.

발아래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거리는 꽤 있지만 많은 수의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슥.

…!

진동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칸.

칸이 고개를 돌려 진동의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불청객인가 보군요."

잠시지만 로튼을 응시했던 칸.

칸에게서 무언가 들은 건지 로튼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구구구구…!

잠시 후.

진동이 느껴졌던 방향에서 많은 수의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못해도 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다른 곳이었다면 자연의 섭리라 여겼겠지만."

스릉.

로튼의 말에 맞춰 칸이 차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너무 오랜 시간을 사용해와서인지 이가 다 빠져 낡은 검이었다.

"법칙에 순응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샤마크라는 제가 좋아하는 마을이니까요."

[앤 보니&메리 리드]

어느 정도 거리가 되자 나도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칸이 검을 사용한 근접 전투를 벌이는 듯하니 그전에 숫자를 줄여둘 생각이었다.

쿵!

!?

리볼버를 들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칸이 먼저 데몬을 향해 달려나갔다.

"쏘셔도 됩니다."

"네…?"

칸이 앞으로 나갔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쏴도 된다고 말하는 로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로튼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칸은 상처 입지 않을 테니까요."

휘릭!

순식간에 손을 뻗어 달려오는 데몬과 근접해 있는 칸을 향해 희미한 빛을 뿌리는 로튼. 

콰앙!

빛이 도달하기 무섭게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분명 칸도 휩쓸렸을 폭발이었다.

그럼에도.

서걱! 서걱--!

아무렇지도 않게 데몬을 베어나가고 있는 칸.

조금 전의 폭발에 영향을 받은 건 몇 마리의 데몬 뿐이었다.

"…!"

로튼의 공격을 직격으로 맞았음에도.

칸의 몸엔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은 듯했다.

마치.

방금 날아온 공격을 어떠한 법칙으로 인해 완벽히 거부한 것처럼 말이다.

* * *

데몬이 나타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강하다.

눈앞에는 더 이상 데몬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데몬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칸이 유유히 서 있을 뿐이었다.

"검귀… 칸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죠."

무척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특수한 능력이나 타고난 괴력을 사용하는 게 아닌, 순수하게 검 하나만을 이용해 벌이는 학살.

검귀란 단어만큼 지금의 칸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

꽈악.

꺼냈지만 아직 한 발도 쏘지 않은 리볼버.

난 아직까지 리볼버를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데몬이 더 나타날 거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로튼 님."

의아한 표정을 짓는 로튼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0화. 어째서

조금씩 멀어져 가는 로튼과 칸.

그런 둘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 혹시 불사자라 불리는 능력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무언가를 알아냈다거나 확신이 들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검을 기가 막히게 잘 사용하는 칸의 전투를 봐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물어보고 싶었다.

- ….

질문을 받은 로튼은 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어찌 보면 어이없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애매한 표정으로 한동안 날 바라봤었다.

- 꼴깍.

그리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약간 긴장한 건지 목으로 까끌한 침이 넘어갔었다.

로튼과 칸이 불사자를 죽이고 다닌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잠시 뜸을 들이는 로튼이 어떤 대답을 할까 나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왜 그런 걸 물었냐 하면 대답할 말도 없는 상태.

그런 상태로 질문을 건넨 건 나인데도 긴장을 하다니.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다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 불사자라… 아뇨, 없습니다.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던 로튼.

- 그렇군요.

로튼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오히려 본능만을 따른 무대뽀스러운 질문에 화를 안 낸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할 정도였다.

위처럼 간단한 대답을 한 후 가보겠다며 인사를 건넨 로튼.

나도 더 물을 건 없었기에 로튼에 맞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과했네, 과했어.

어느덧 작은 점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보며.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2년 새 전 세계에서 죽어 나가고 있는 불사자들.

회귀 전 기태랑의 죽음에 대해 찾던 중 불사자란 키워드에 꽂혀 이곳에 온 것이었다.

실제로 불사자를 죽이고 있는 게 동일인의 짓인지, 동일인이라 해도 기태랑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지 등 모든 게 미지수였다.

웬 미친놈인가 했겠네.

저벅.

괜한 짓을 했다 생각하며 앞에 널브러져 있는 데몬 시체들을 응시했다.

압도적인 검술로 데몬을 베어 넘겼던 칸.

도와줘야 할 필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기에 리볼버를 쏘거나 다른 무기를 꺼내 돕는 행동은 하지 않았었다.

그저.

집중해 지켜봤었다.

데몬을 베고 있는 칸의 검을 말이다.

검술 자체는 뛰어났지만.

- 카앙!

그 이상으로 특별한 건 없었다.

데몬의 신체 중 뿔에 부딪히자 힘없이 튕겨 나갔던 칸의 검.

여느 검들과 다를 바 없는 결과였다.

베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

만약 칸의 검이 뿔을 두부 베듯 잘랐다면 두 사람을 이대로 보내진 않았을 터였다.

뿔과 다이아몬드 사이에는 큰 갭이 있지만 보통이라면 둘 모두 검으로는 베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어떻게든 잡아뒀겠지.

확신과 증명해낼 수 있는 물증이 없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기태랑의 죽음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 싶으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했다.

"흐음."

로튼이 가지고 있는 힘이 상대의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걸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따지면 눈에 보이는 모두가 용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할아버지도 무효화 능력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능력 무효화란 힘이 존재한다는 것도 내 추측일 뿐이니까.

실존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능력. 

다른 이와 달리 신비로운 기운을 지녔다고 해서 로튼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말도 안 됐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며칠 동안 기록소에 나왔던 장소를 쌔빠지게 돌아다녔는데 얻은 게 별로 없었다.

조금 전 로튼에게 질문을 건넸던 것도 차라리 두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윽.

검으로 벨 수 없는 부위들은 모두 멀쩡한 데몬 시체들.

시체들을 뒤로하고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2급 헌터 하킨이 죽었던 장소.

그곳에서도 무언가 찾을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회귀 전의 기억으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정보.

기태랑이 죽는 날짜와 장소였다.

어쩔 수 없이 밀착마크로 귀결되는 건가.

적의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건 찜찜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벅.

마지막인 만큼 이번엔 부디 뭐라도 있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 * *

마지막 희망이었던 하킨의 사망 장소.

마침 도착해 있는 이스라엘 국가직으로부터 당시의 정보까지 얻었지만.

조졌다 조졌어.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 훼손이 너무 심해서 부검도 무의미했습니다.

출몰한 데몬을 처리하기 위해 본부를 나섰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하킨은 죽임을 당했다는 것.

이스라엘 헌터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도 별 다를 바 없는 내용.

터덜. 터덜.

이제 돌아가는 수밖에 없나.

가장 최근에 사건이 일어난 장소까지 와봤는데도 별 소득이 없는 상황.

이 이상 다른 나라를 더 가본다 한들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듯했다.

응?

그렇게 힘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눈앞으로 어떤 신전의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붐비는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탓인지 몹시 한적한 성벽.

신전의 관리로 보이는 남자가 성벽 주변을 반복해 거닐고 있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니까.

성벽 위에서 보면 하킨이 죽은 장소가 보일 정도의 거리.

가지고 있던 희망의 불씨는 거의 다 꺼진 상태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닐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음?"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가서일까.

남자가 먼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순박하게 생긴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자신을 유손이라 소개하는 남자.

잠시 날 바라보던 유손이 입을 열었다.

"길을 잃으신 건가요?"

길을 잃긴 했지.

며칠을 싸돌아다녔는데 하나도 얻은 게 없으니.

"아뇨, 지나가다 신전이 있길래 와봤어요."

진짜로 길을 잃은 건 아니었기에.

안심하라는 제스쳐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행이네요. 이곳 신전은 워낙 인기가 없거든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는 게 대부분이라 길을 잃은 사람이 아니면 오는 경우가 거의 없죠."

설명을 듣고 나니 처음 유손의 표정과 질문이 이해되었다.

평소라면 사람 그림자도 보기 힘든데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걸어왔으니.

영락없이 길을 잃어버린 줄 알았을 것이다.

"아까 계속해서 성벽 주변을 걸으시던데. 뭔가 찾고 있던 중인가요?"

산책을 하는 것 같진 않았었다.

성벽 여기저기를 유심히 보며 걸어 다녔으니 말이다.

"아."

내 질문에 미소를 지어 보인 유손이 성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며칠 전에 신기한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신기한 사람…?"

고개를 끄덕인 유손이 며칠 전 만난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눈에 띄는 금발과 어째선지 한마디 말도 없었다던 동행의 이야기.

"얼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유손이 만났던 건 로튼과 칸이었다.

그 둘이 저 높은 성벽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가 궁금해 성벽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고 유손은 설명했다.

"저도 조금 전에 만났는데."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짓는 유손.

유손에게 조금 전의 일을 말하자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신비로운 분이군요."

신비로운 분…?

로튼의 생김새와 분위기가 워낙 독특하다 보니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건 맞았지만.

저렇게 확신에 찬 얼굴로 감탄하며 말할 정도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로튼 님 생김새랑 분위기가 신비롭긴 했죠."

"음… 꼭 그것 때문이라기보단."

나름의 맞장구를 친 내 대답에 어째선지 미간을 찌푸리는 유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유손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신비롭다고 느낀 건 외관보다는 로튼 님이 한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들으셨나요?"

"개방과 나타난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영원해진 사람의 수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었죠."

"시작? 그 뒤에 이야기가 더 있었나요?"

나와 유손의 대답이 달랐기 때문일까?

로튼은 내게 한 이야기보다 더 많은 내용을 유손에게 들려준 듯했다.

"예."

고개를 끄덕인 유손이 소름이 돋는다는 듯 움츠러들며 양어깨를 어루만졌다.

"신비롭기도 했지만… 사실 좀 무서웠습니다. 오만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할 땐 정말이지 뭐랄까, 몸을 애는 듯한 살기가 느껴졌었거든요."

"…!"

알아낸 게 없어 힘이 없던 찰나.

유손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심판이라니.

로튼이 인간을 오만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았으나 죽이겠다거나 심판하겠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었다.

이야기의 뉘앙스가 너무 다른데.

"음… 뭐라고 했더라. 누구를 심판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었는데 단어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미간을 찌푸린 채 열심히 기억해내려는 유손.

평소라면 굳이 기억해내지 않아도 된다며 손을 내저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유손이 기억해내려는 단어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

기억해낸 건지 유손이 손뼉을 쳤다.

"불사자!"

"!!!"

우려하던 단어가 유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기억을 완벽히 되살린 유손이 내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오만에 빠진 불사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자기가 왔다고요!"

* * *

예루살렘과 어느 정도 떨어진, 이스라엘 땅의 어딘가.

쉬지 않고 걷던 로튼이 고개를 돌렸다.

몇 시간 전 칸이 데몬을 처치함으로 지켜낸, 샤마크라 부락이 있는 방향이었다.

"흠."

샤마크라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떠올리고 있는 건 부락이 아니었다.

로튼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건 샤마크라 앞에서 만났던 백운이었다.

"뭐였을까요."

로튼이 샤마크라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곳을 보러 가다 우연히 백운을 만나게 된 건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끌림.

갑자기 느껴진 감각에 이끌려 걷다 만나게 된 것이었다.

"크르."

로튼이 백운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칸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백운을 보자마자 과하게 반응하며 달려들려 했던 칸.

칸이 지금까지 로튼의 명령 없이 움직이려 한 건 처음이었다.

'칸이 멋대로 움직일만한 이유는 하나뿐.'

칸이 처음 만난 백운을 당장 죽여야 하는 위험으로 인지한 것이었다.

'어째서지.'

하지만.

지금 로튼이 의아해하고 있는 건 칸의 반응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스스로의 행동 때문이었다.

- 혹시 불사자라 불리는 능력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불사자를 아냐며 갑자기 물어왔던 백운.

백운이 왜 그런 걸 물었는지 알 순 없었다.

'….'

알 수 없었음에도.

- 아뇨, 없습니다.

로튼은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도, 할 필요가 있는 대상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뿌득.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일까.

로튼은 백운과 헤어진 이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샤마크라 쪽을 바라보는 로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남자가 무엇이길래…?'

161화. 목적지는

며칠 전부터 여러 나라를 쏘다니며 찾아 헤맨 단어, 불사자.

찾아 헤맨 만큼 불사자란 단어를 듣게 된다면 분명 반가울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손의 입에서 그 단어를 들었을 땐 잠시지만 멍해지고 말았다.

스스로도 헷갈렸기 때문이리라.

유손의 입에서 불사자란 단어가 나오기를 바랐던 건지, 바라지 않았던 건지를 말이다.

잘 모르겠네.

안 나오면 여전히 알아낸 게 없으니 문제였지만.

나와도 그것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로튼과 나의 거리는 말이다.

아직까진 회귀 전 기태랑을 죽인 게 로튼이라고 확정 지을 순 없었지만.

로튼이 유손에게 했던 말을 봤을 때 의심을 품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다.

아직 어떻게가 남아 있긴 하지만.

기태랑을 죽였던 검흔은 칸의 것이라 치고.

어떻게 칸이 다이아몬드를 베었는지가 남아 있었다.

데몬과의 전투를 봤을 때 칸이 무언가를 숨기며 싸우는 것처럼은 보이진 않았다.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고, 그런 검에 베이지 않는 뿔이 부딪히자 잠시지만 자세가 흐트러지기까지 했었다.

역시 로튼인가.

불사자가 죽은 다른 국가에서 들었던 두 개의 목격담.

두 목격담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것이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장막이었다.

로튼에게 괜한 질문을 한 이유 중 하나.

칸의 검술도 검술이었지만.

질문을 건넨 이유엔 목격담의 영향도 꽤 있었다.

머리와 눈 색깔 때문인지는 몰라도 로튼을 색으로 표현하라면 고민할 것 없이 찬란한 황금색이었다.

색이란 막연한 공통점이긴 했지만 어찌 됐든 목격담과 겹치는 부분이었기에.

과하면서도 괜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질문을 건넨 것이었다.

로튼이 장막을 사용하면 상대의 능력은 무효화 된다.

그리고 무효화 된 틈을 노려 검귀라 불리는 칸이 마무리를 한다.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확률의 가설이었다.

생각해보자.

가설대로라면 로튼과 칸은 태랑 님을 죽일 수 있을까?

기태랑의 능력이 무효화 되었다 가정을 한 후.

아까 봤던 칸과 기태랑의 전투를 시뮬레이션해보았다.

….

결론이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죽일 수 있다.

칸의 움직임과 검술이라면 충분했다.

능력이 사라져 맨몸이 된 기태랑이 상대라면 말이다.

기태랑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구룡산 때를 떠올리면 웬만한 공격은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좋게 말하면 기태랑의 스타일, 나쁘게 말하면 오랜 경험으로 만들어진 습관이었다.

기태랑은 다이아몬드에 상처를 입히지 못할 공격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피하지 않는 공격이 최소 9할은 되었다.

- 태랑 님도 피하세요.

그래서였다.

돌산에서의 수련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었던 기태랑과의 대련.

난 그 대련에서 기태랑에게 제대로 피하기를 요구했었다.

- 언젠가 다이아몬드를 베는 적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제대로 피해 주세요.

처음엔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던 기태랑.

효과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내 나름대로의 1차 대비책이었다.

- 카앙! 쐐엑!

기태랑에게 두들겨 맞는 게 대련의 대부분이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나 역시 열심히 면도칼을 휘둘렀었다.

피해지지 않는 면도칼을 보며 기태랑이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대비책일 뿐이었다.

내 목표는 애초에 기태랑이 누군가의 공격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기태랑을 죽였던 녀석들을 사전에 차단 및 처단해야 했다.

타닷…!

유손에게 불사자란 단어를 들은 직후.

지체 없이 샤마크라 부락이 있던 쪽으로 몸을 돌렸었다.

늦었을 것 같지만.

부디 멀리 가지 않았기를 바라며.

아까 헤어졌던 로튼과 칸을 쫓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을 뻗었다.

그나저나… 왜지?

- 아뇨, 없습니다.

불사자에 관해 묻자 분명 모른다고 대답했었던 로튼.

마치 불사자란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어째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걸까.

유손의 말을 들어봤을 때 로튼은 분명 불사자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는 걸 넘어 몹시 혐오하며 심판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던 로튼.

그런 로튼이 어째서 내게 모르는 척 거짓말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전까지 난 불사자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어.

이곳에 온 이유 역시 말하지 않았고.

로튼이 내 마음이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로튼에게 있어 난 그저 지나가다 만난 행인 A일 뿐이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마음에 드는 답변을 한 행인 말이다.

내가 불사자 사냥꾼을 찾는다는 걸 모르면서도 거짓말을 했다.

무기왕 능력을 알아채서?

아니야.

가설로 세운 능력을 실제로 로튼이 가지고 있다면.

상대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무효화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탓…!

지금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로튼의 행동.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생각하는 걸 멈추고 정면을 응시했다.

집중하자.

어찌 됐든 로튼과 칸이 불사자 사냥꾼일 확률이 높은 상황.

일단은.

잡는다.

* * *

예루살렘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 지역.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로튼의 황금색 머리를 흩날렸다.

"아름답군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로튼이 미소를 머금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곤 파도 소리와 약간의 바람 소리뿐이었다.

고요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바닷가.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들끓던 시가지를 지나온 참이어서일까. 

오늘따라 바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로튼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바로 옆에 이런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데."

고개를 돌린 로튼이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가지를 응시했다.

"사람들은 어째서 저런 작은 곳에 쳐박혀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고자 싸우는 걸까요."

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던 로튼이 입을 열었다.

"분명 평생 살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겠죠.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갖춰놓기 위해 저러는 걸 테고요."

슥.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난 로튼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일깨워줘야죠. 불사자라 여겨왔던 자들이 무기력하게 죽는 걸 보여주며, 개방으로 인해 얻은 영생이 사실은 아주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요."

"…."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로튼을 바라보는 칸.

칸을 의식해서 말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로튼은 그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의해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럼 서서히 깨닫게 되겠죠. 자신들이 얼마나 작고 나약하며 하찮은 존재인지를. 태고부터 변해오지 않은 진실을 말이죠."

쿵!!

로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닷가 한 모퉁이로 요란스럽게 착지하는 무언가.

로튼이 고개를 돌려 자욱하게 번진 먼지를 응시했다.

"… 도착했군요."

쿠구구…!

사라지는 먼지 속에서 등장하는 거대한 문.

그리스에서 메토스가 나타난 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이었다. 

보다 더 화려한 문양과 함께 더욱 큰 크기를 가진 문의 등장.

끼이익…!

잠시 후.

거대한 문이 열리며 몇몇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

나타난 그림자들을 보며 이빨을 드러내는 칸.

"여전히 키우는 개가 사납구만."

"오랜만이야, 로튼, 칸."

"오… 오랜… 만."

로튼과 칸을 향해 각자의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세 명의 데몬.

셋 모두가 인간의 언어를 터득한 데몬이었다.

세계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등장만으로도 세계의 국가들을 충격에 빠질 수 있는 존재.

"세 분 모두 오랜만입니다."

동일한 개체가 여럿 있는 데몬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힘을 가진 데몬, 노네임드.

세 명의 노네임드가 로튼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이렇게 다섯 명이 모인 것도 오랜만이네."

한자리에 모인 다섯 명의 노네임드가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섯 명이라니. 네 명에 한 마리지."

"크르으!!"

등장부터 줄곧 칸에게 조롱을 날리고 있는 남자.

"진정하세요, 칸. 마렉도 그만하시고요."

"로튼이 그만하라면 그만해야지. 저리 꺼져라 멍멍아."

어깨를 으쓱 올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마렉이 얼굴 한가득 조소를 머금었다.

190이 넘는 키와 사방으로 튀어나와 있는 근육, 그리고 거대한 거구에 걸쳐진 갈색 갑주까지.

마렉은 한눈에 봐도 엄청난 괴력을 가졌을 듯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오늘 부른 이유는?"

로튼이 질문을 건넨 유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초록빛을 띤 눈으로 로튼을 응시하고 있는 유리아.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체구였지만.

몸 여기저기에 달려있는 식물과 꽃이 유리아가 인간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었다.

"감이 좋지 않아서요."

간략한 로튼의 대답에 유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의 부름에 기껏 왔더니 감이 좋지 않다니.

하지만 무언가 불만을 표시하진 않았다.

다름 아닌 로튼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세 분의 힘이 필요할 일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로튼… 감… 좋다."

옆에서 로튼의 말을 거드는 토롱.

토롱은 매우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 위로 덮여 있는 거대한 두루마기.

허여멀건 얼굴만이 드러나 있기에 멀리서 본다면 데몬인지 어린애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생김새였다.

"이랬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전투적인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마렉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뚝… 뚝.

이곳으로 오는 길에 무언가를 죽이고 온 건지 마렉의 양손에서 흐르고 있는 붉은 피.

마렉은 당장에라도 더 많은 걸 짓이겨 죽이고 싶어했다.

"죽일 건 얼마든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슥.

로튼이 들고 있던 문서 뭉치를 바라보았다.

세계 각지에 있는 불사자들의 기록이 적혀 있었다.

로튼이 불사자들을 찾아가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정보.

그들에게 있어서는 살생부와 마찬가지인 문서였다.

"뭐야 그건?"

"별거 아닙니다."

마렉의 물음에 무심한 얼굴로 문서를 넘기는 로튼.

대부분의 문서엔 붉은 엑스자가 그려져 있었다.

지난 2년간 바쁘게 돌아다닌 결과였다.

"심판이 필요한 자들이라고 할까요."

"심판?"

"자신의 생이 영원할 거라 믿는 오만한 자들이죠."

"큭! 벌레가 영원?"

영원이란 말에 마렉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와서 주어진 알량한 힘으로 그런 착각을 하다니. 놀랍군." 

"그렇기에 심판이 필요한 겁니다."

마렉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넨 로튼이 다시 문서로 눈을 돌렸다.

이제 엑스로 그어져 있지 않은 건 단 한 장뿐이었다.

이 한 장만 끝낸다면 일차적으로 목표했던 불사자 사냥은 모두 종료되었다.

'…?'

잠시 문서를 응시하던 로튼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재밌네요.'

마지막 장에 위치한 불사자.

우연의 일치인지 아까 만났던 백운과 같은 국가에 속한 사람이었다.

'어째선지는 몰라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군요.'

"토롱, 이동을 준비해주세요."

"목적… 지는…?"

바닷가로 고개를 돌린 로튼이 입을 열었다.

"한국입니다."

162화. 얼굴은 알았다

얼굴로 부딪혀 오는 차가운 바닷바람을 느끼며.

쿵!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해안가에 몸을 착지했다.

샤마크라에서 로튼과 칸이 걸어간 방향으로 오던 중 만난 시가지 마을.

마을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로튼에 대해 물었었다.

워낙 화려한 황금색을 하고 있으니 봤다면 기억에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화려한 금발을 가진 남자였어요. 해안가 쪽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해안가.

로튼과 헤어진 지 꽤 시간이 지난 뒤에 쫓아온 것이기에. 

이제 와서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었다.

"후우우."

그럼에도 막상 텅 비어있는 해안가를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제 가서 잡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속으론 제발 로튼과 칸이 있기를 바랐었기 때문이다.

빠득.

아쉬웠다.

미치도록 말이다.

그때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했어.

샤마크라 앞에서 우연히 만난 로튼.

그땐 로튼을 불사자 사냥꾼이라 확신할만한 어떠한 여지도 없었기에 지금 느껴지고 있는 아쉬움이 결과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으…!"

하지만 이를 인정하고 있는 건 머리뿐이었다.

마음으로는 아쉬움이 짙게 남아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때 잡았다면.

힘으로라도 붙잡아 조금 더 깊게 캐물었다면.

마지못해 로튼도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쉽게 가시지 않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얼굴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샤마크라 앞에서 더 자세히 캐묻지 않은 스스로가 답답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냅다 거짓말을 갈긴 로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갈겨주는 건 뒤로 미루고.

저벅.

쓸데없는 후회로 뜨거워진 머리.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응?

걷다 보니 움푹 팬 모래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큰 게 떨어져 인위적으로 깊게 파인 모양새였다.

그리고 파인 구멍 주변으로 흩어져 있는 발자국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이었다.

슥.

몸을 굽혀 찍혀 있는 발자국을 살폈다.

이곳에 서 있었던 게 로튼과 칸인지는 확실친 않지만.

찍혀 있는 발자국의 주인은 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 넷에서 다섯의 발자국.

- 이곳은 치안이 잘 되어 있는 편이 아니라서요. 해가 지는 시간대에 해안가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가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시간대 해안가를 방문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두 개는 로튼이랑 칸의 발자국이라 치고.

나머지는 누구지?

붙어있는 거리를 봤을 때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까지 접근하는 일은 없을 터.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칸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동료가 더 있는 건가.

비행이 가능한 게 아니라면 해안가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많은 유동 인구가 있는 시가지를 거쳐야 하는 길.

로튼이 더 많은 수의 사람과 해안가를 빠져나왔다면 분명히 눈에 띄었을 것이다.

두 명이라 그랬어.

한 명은 칸이겠지.

들어갈 땐 두 명이었는데 들어간 장소에 찍힌 발자국은 네다섯 명인 상황.

거기다 들어간 사람만 있고 나온 사람은 없으니 도보가 아닌 다른 이동 수단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흐음."

몸을 일으켜 넓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응시했다.

지금쯤 저 어딘가를 로튼과 칸이 날아가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막무가내로 칼데아를 꺼내 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스르르.

해가 떨어지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

어느새 해를 대신해 자리를 잡은 달이 해안가로 빛을 뿌렸다.

반짝.

"…?"

조금 더 떨어진 위치.

달빛에 반사된 무언가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넓게 펼쳐져 해안가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황금빛.

뭐지?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날개를 꺼냈다.

펄럭.

해안가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올라오고 나서야.

"…!!"

반사되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글자였다.

누구를 위해 남겨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빛을 새겨 남겨둔 듯한 메시지였다.

# Deus Lo Vult.

"데우스 로 울트."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언젠가 유물관에 처박혀 있던 시절 봤던 단어.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로튼이 심심해서 떠나기 전에 새겨놓은 글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과도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피식.

이곳으로 올 나를 위해 남겨둔 글자 같았다.

샤마크라부터 시원하게 속아 계속해서 뒤꽁무니를 쫓고 있는 날 위해서 말이다.

이 새끼 봐라.

명백한 도발로 느껴졌다.

내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하게 더 높은 곳에 있는 이가 원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스르….

잠시 뿜어내더니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 황금빛.

기록들을 쫓으며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거나 알아낸 건 없었지만.

그나마 한 가지 알게 된 건 있었다.

얼굴.

회귀 전의 정보로 알고 있던 게 기태랑이 죽는 장소와 날짜였다면.

이제 그런 짓을 할 용의자의 얼굴까지도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적어도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는 알게 된 셈.

펄럭.

날개를 움직여 공항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더 이상 쫓을 생각은 없었다.

기록을 쫓든 누군가를 쫓든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딱히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기다리자.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하려고자 하는 행동이었다.

가설대로 상대의 능력을 무효화시킬지도 모르는 로튼의 힘.

그런 사기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할지라도, 애초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힘을 상대로 파훼법을 미리 찾거나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리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이것도 저것도 불명확한 상황이라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정면돌파뿐이었다.

"…."

지금 당장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펄럭!

공항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부딪혀 보이는 길을 만들어낼 뿐이다.

* * * 

후우우우우웅---!

보라색의 구체가 어둠이 깔린 하늘을 가로질렀다.

"토롱의 구체는 승차감이 참 좋아."

유리아가 흡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술사 토롱.

토롱은 특수한 힘을 가진 구체를 생성해 물건이나 사람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구체의 속도는 무게의 영향을 받지 않기에 담을 수만 있다면 몇 명이든 동일한 스피드로 옮길 수 있는 능력.

"토롱이 있으니 이동이 훨씬 수월해졌군요."

유리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로튼이 미소를 머금었다.

로튼을 포함해 칸 역시 이동기를 지닌 건 아니었기에.

어딜 가든 항상 두 다리에 의지한 채 도보 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로튼이 고개를 내려 들고 있는 문서를 바라봤다.

'한 명 남았군요.'

앞으로 한 명만 더 죽이면 로튼이 바랐던 심판은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후로도 남은 일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로튼."

조용히 문서를 바라보는 로튼의 귀로 마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그 인간들한테 집착하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일 터인데."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는 로튼.

마렉은 항상 답답했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로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칸과 갑자기 사라져버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나?"

어느 날 심판을 향해 인간 세계로 간다는 말만을 남긴 채 칸과 사라졌던 로튼.

물론 마렉이 지금까지 함께 해온 의리나 정 때문에 서운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궁금했었다.

대체 심판이 뭐길래 그리 급하게 인간 세계로 넘어갔는지가 말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로튼.

무언가를 생각하던 로튼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죠."

* * *

오래전 어느 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였다.

축축한 동굴의 습기를 느끼며 찬란한 황금빛을 가진 데몬, 로튼이 몸을 일으켰다.

"크르…?"

로튼을 향해 어디 가냐는 듯 울음소리를 흘리는 칸.

그런 칸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로튼이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속 각자의 위치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마렉과 유리아, 토롱.

'….'

로튼이 잠들어 있는 그들을 바라봤다.

오랜 시간을 혼자 했던 로튼에게 생긴 동행.

의리나 정으로 맺어진 친구라기보단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동맹이었다.

- 쓸만한 능력을 가졌군.

먼저 손을 내민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괴물 같은 신체와 그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도 안 되는 괴력.

순수한 무와 힘을 가진 마렉은 로튼의 능력을 마주한 후 먼저 동맹을 제안했었다.

- 귀찮은 힘을 쓰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자신이 제한 없이 날뛸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는 것.

그 판을 만들기 위해서 로튼의 능력은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이었다.

- 좋습니다.

로튼 역시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이었기에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힘이 필요하다곤 느낀 이유는 간단했다.

규격 외의 존재를 만났었기 때문이다.

- 꿇어라. 꿇어서 빌어라. 그럼 살려주마.

로튼의 능력이,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권능이 통하지 않았던 말도 안 되는 존재.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 존재를 만났을 때의 무력함과 또 만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로튼은 힘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순수한 힘만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렉과 손을 잡았다.

비슷한 이유로 계속해서 손을 잡게 된 칸과 유리아, 토롱.

다섯이 동행하게 되며 적어도 인근 지역에서 이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데몬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저벅.

'….'

자는 이들을 뒤로하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온 로튼.

빠드득!

밖을 응시하던 로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넘어가야 하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로튼이 존재하던 곳과 이어지게 된 인간의 세계.

들려오는 소식으로 인간들이 개방을 통해 능력과 수명의 법칙을 벗어나게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인간들 중에 강한 능력을 얻어 불사자라 불리는 이도 있다고 하더군.

- 퍼석!

로튼은 그 말을 전한 데몬을 순식간에 죽여버렸다.

불사자란 단어에 발끈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벌인 짓이었다.

'진정한 불사자는 단 한 분뿐입니다.'

인간 따위가 조악한 잡기를 얻었다고 해서 칭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존재.

상대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무시해버릴 수 권능을 가진 존재.

그 존재만이 불사자라 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두근!

[불경한 이들을 죽여라.]

심장의 두근거림과 함께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고결한 소리였다.

'이전에 만난 절대자는 그분이 내리신 시련이었겠죠.'

로튼은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았던 존재를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그분이 내리신 시련이었다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넘어가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군요.'

당장에라도 넘어가 불사자를 사칭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이전에 만난 절대자에게 묻혀놨던 로튼의 빛.

로튼은 빛을 통해 그 존재의 기운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다.

'때가 된다면.'

아직 그 존재의 기운이 남아 있는 걸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해석하고 있었기에.

로튼은 기다리고 있었다.

빛을 통해 그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을 말이다.

'제가 그분을 위한 심판자가 되겠습니다.'

* * *

과거를 회상하는 로튼의 귓가로 토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도… 착했… 다."

163화. 조우

서울에 위치한 헌터 중앙청.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왜 계속 따라다니는 거야."

"따라다닌다니 그냥 동선이 겹치는 거지."

음!

착실히 임무 수행 중이구먼.

사삭.

벽 옆으로 숨어 함께 걷고 있는 기태랑과 비광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훔쳐보는 거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한국을 떠나기 전 부탁한 대로 비광은 기태랑을 착실히 밀착마크 하고 있었다.

지금 나타나면 비광 님한테 쌍욕 먹겠지.

물론 단순히 쌍욕 먹을게 무서워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둘 앞에 나서는 순간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 추궁당할 게 분명했고.

숨기지 못하고 말하는 순간 원래 정해져 있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바뀔지도 모르는 미래 때문에 웬만해선 비광 님도 붙여놓고 싶지 않았지만.

비광은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책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스에서 나로 인해 이연화가 메토스를 만나게 된 걸 봤었기에.

기태랑에게 혹시 모를 변수가 닥쳐도 확실히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를 곁에 있게 한 것이었다.

아직까지 별일은 없는 듯하고.

투닥거리며 걷고 있는 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몰래 숨어 둘을 따라다닌 지 어느덧 일주일.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인데.

회귀 전 기태랑이 죽었다고 추정된 날.

바로 오늘이었다.

이미 죽은 뒤에 발견됐다 보니 하루나 이틀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너무 평화로운데.

내가 지금까지 세워온 가설들이 다 헛된 망상이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상황.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예루살렘에서 로튼을 만남으로써 미래가 변해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타날 때까지 태랑 님을 쫓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기태랑이 위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으면 또 곤란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미래 예지가 가능한 능력자라도 찾아봐야 하나.

아니면 로인을 찾아서 다시 데리고 오는 거지.

회귀 전의 정보가 유효하지 않게 된다면.

떠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였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자를 찾아 기태랑과 관련된 새로운 미래를 알아내던가.

아니면 로인을 24시간 기태랑에게 붙여 죽음을 감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럼 적어도 5일 전에는 형태는 알 수 없되 기태랑의 죽음을 미리 인지하게 될 테니 말이다.

사삭!

어쨌든 내일 정도까지는 회귀 전의 미래가 틀어졌다고 생각하기엔 이른 시점이었다.

계속해서 기태랑을 쫓아다니며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일단 초근접 밀착마크다.

그렇게 은밀하게 다음 이동을 시작하려는 순간.

웨에에에에에에---!!

!!

중앙청 내부로 귀를 찢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가장 높은 레벨의 경보.

일반적인 헌터로는 상대할 수 없는 데몬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슥.

고개를 돌려 전화를 받고 있는 기태랑과 비광을 바라봤다.

무언가 말을 주고받더니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는 두 사람.

우루루.

난리가 난 건 건물에 있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경보에 맞춰 각자 정해진 곳으로 몰려가는 헌터들.

탓!

우루루 이동하는 헌터들의 틈에 섞여.

함께 어딘가로 향하는 기태랑과 비광의 뒤를 따라붙었다.

* * *

"1소대 대형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해라!"

"예!"

두두두두두두두!

우우웅… 쾅!!

신고를 받고 먼저 도착한 도심의 기동대.

기동대에 속한 헌터들이 나타난 데몬을 한 마리씩 잡아나갔다.

"이 자식들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일단 나타났으니 잡고는 있었지만.

의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인 만큼 사방엔 겹겹이 경계선이 배치되어 있었다.

땅에서 솟구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위치.

"그래도 기껏해야 C급입니다! 무리 없이 처치할 수 있을 듯합니다!"

부하의 보고에 소대장인 임국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차차 알아봐야 겠지만.

어찌 됐든 지금의 토벌 자체는 순조롭게 끝날 터였다.

'프리랜서 헌터들도 도와주고 있으니.'

기동대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게 동영상을 올려 생계를 유지하는 프리랜서 헌터들이었다.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하다고 판단이 서자 다들 액션캠을 켠 채 데몬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금방 끝나겠군.'

임국전이 한숨을 돌리며 한창 사냥 중인 헌터들을 바라봤다.

이 정도 속도라면 잠시 후엔 완전히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쐐에에에엑---!

한숨을 돌리려던 임국전의 귀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언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였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쿠웅!!

캠을 켠 채 사냥 중이던 헌터들의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가 사방으로 퍼져 떨어진 게 뭔지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

마음을 놓고 있던 임국전과 소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먼지가 일어난 장소로 향했다.

툭… 툭… 툭. 툭. 툭.

"…?"

먼지 속에서 차례차례 날아드는 원형의 무언가.

임국전이 고개를 내려 데굴데굴 굴러 발아래까지 온 물체를 응시했다.

"!!!"

"으… 으아아!!"

사람의 머리.

조금 전까지 데몬을 사냥하고 있던 프리랜서 헌터들의 머리였다.

임국전을 포함한 소대원들이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벌레 새끼들이."

음성과 함께 먼지 속에서 걸어 나오는 거구의 데몬.

황갈색의 피부를 가진 데몬은 온몸에 피부색에 가까운 갑주를 두른 상태였다.

'마… 말을 해…?'

일본에서 등장했던 사로카의 일로 말을 하는 데몬이 있다는 건 알려진 상태였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낯설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거기다 얼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이라 봐도 무방한 생김새였기에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척.

기동대와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

멈춰 선 마렉이 정면을 응시했다.

날아든 머리통을 보며 잔뜩 굳어 있는 임국전과 기동대 헌터들.

'벌레 새끼다운 반응이군.'

너무 하찮아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적을 앞에 두고도 바로 공격을 하긴커녕 굳어 있는 꼬라지라니.

저런 놈들이 수명의 법칙에서 벗어났다고 영생을 울부짖고 있으니, 로튼의 분노가 어느 정도는 이해되는 것 같았다.

"키아아아아!"

빠각!!

마렉이 손을 휘둘러 옆에서 짖어대는 데몬을 짓이겨버렸다.

한국에 오자마자 흩어져 있는 데몬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던 마렉.

약육강식에 순응하는 데몬들에게 공포를 심어준 뒤 명령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쓸데없는 짓을 시키는군.'

물론 로튼의 계획이었다.

보다 더 효율적으로 이곳에 있는 인간들을 죽이기 위한 계획.

'약속은 지켜야 할 거다.'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마렉을 향해 로튼은 말했었다.

- 재밌는 상대를 보내드리죠.

지루해하고 있는 마렉이 싸울만한 상대를 보내주겠단 것이었다.

"고… 공격!!"

앞에 얼어있던 벌레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잔뜩 겁에 먹은 건지 떨림이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두두두두두두…!

콰가가가---!

외침과 동시에 마렉을 향해 쏟아져 오는 공격들.

"하암."

공격을 바라보며 하품을 하는 마렉.

마렉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공격을 쏟아붓고 있는 헌터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조금 더 발버둥 치거라."

드드드…!

약간 자세를 낮춘 마렉의 입가로 소름 끼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야 일 초라도 더 살 수 있을 테니!!"

* * * 

"뭐냐 너."

"하하…!"

기태랑과 비광을 쫓아 도착한 현장.

모습을 드러내자 비광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뭘 그렇게 돼. 똑바로 말 안 해?"

대충 얼버무리며 넘기려 하자 추궁을 시작한 비광.

그런 비광을 피하기 위해 앞에 늘어서 있는 데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죠!"

"좀 있다 보자."

마지못해 데몬에게 나아가는 비광을 바라보며.

기태랑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로 데몬을 처치해나갔다.

이거뿐이라고?

데몬을 썰어나가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주변에 모습을 보이는 건 낮은 급수의 데몬들 뿐이었다.

중앙청에 경보를 울릴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늘어져 있는 피들.

이상한 게 있다면 서 있는 장소에 누군가의 피가 흩뿌려져 있단 것이었다.

먼저 출동해 있었을 헌터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상황.

시체라도 있었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피만 뿌려져 있는 게 이상했다.

그렇게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으며 데몬을 썰고 있을 때.

"크르…!"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마크라 부락 앞에서 만났던, 이가 빠진 검으로도 순식간에 데몬들을 썰어버렸던 칸의 울음소리였다.

저놈이 여기에 있다는 건.

잠시 후 칸의 옆으로 금발의 로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연한 얼굴이었다.

역시 저놈이었나.

저벅.

"…?"

의아한 얼굴인 기태랑을 뒤로 하고.

기태랑과 로튼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됐다.

아직 로튼의 능력을 보기 전이었지만.

일차적인 목표는 성공했다.

기태랑이 무사한 상태로, 회귀 전에 기태랑을 죽였던 로튼을 마주했다.

어쩐지 당신과는 또 만날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네, 나도 만나고 싶었는데."

태연하게 말을 건네는 로튼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뭐냐 저것들은."

어느새 데몬들을 처리한 뒤 다가와 있는 비광.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급 헌터 두 명이라니.

이랬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뒤가 든든한 기분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개방한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힘이 있는 거 같아요."

"뭐…?"

비광이 못 믿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로튼을 응시했다.

아직 로튼이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지만.

내 말이 사실이라면 경계해야 하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를 쫓아온 건가요?"

덤덤하게 물어오는 로튼을 향해.

"애초에 쫓아오라고 해안가에 남겨놓은 거 아니었나?"

해안가에 적혀 있던 글귀를 떠올리며 말을 건네자 태연하던 로튼의 얼굴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억측이군요. 제가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니면 됐고, 하나만 물어보자. 왜 불사자라 불리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거야?"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정확히는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는 알 수 없는 이유죠."

역시 데몬이었나.

마주해서도 잠시 헷갈렸었다.

데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로튼의 생김새.

왠지 쌔하더라.

샤마크라 앞에서 로튼이 인간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이질감이 느껴졌었다.

그때 느껴졌던 이질감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로튼이 인간이 아닌 데몬이어서였다.

"내가 쫓아온 이유는 널 죽이기 위해서다. 이유는 묻지 말고."

저벅.

로튼을 향해 걸어가며.

조금씩 속도를 올려갔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태연히 입을 연 로튼이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당신과 싸우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뭐…?"

무슨 말인지 생각을 하기도 전.

로튼의 뒤로 망토를 뒤집어쓴 데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토롱."

데몬의 이름을 부르는 로튼.

딱하다는 듯 날 내려다보던 로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날려버리세요."

164화. 비켜

이런 샹.

"키이이이익!"

"크릉… 크릉."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데몬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울음소리를 흘리며 다가오고 있는 데몬들.

조졌다.

아찔할 정도의 낭패감이 들었다.

나를 향해 데몬들이 다가오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조금 전.

- 다 날려버리세요.

로튼의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토롱이라고 불린 데몬이 손을 들어 올렸다.

무슨 상황인지 판단을 하기도 전에 나와 기태랑, 비광을 동시에 집어삼킨 보라색의 구체.

대처할 수 있는 시간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미리 무언가를 준비해놓은 건지 구체는 주변 일대를 한꺼번에 집어 삼켜버렸다.

우웅!!

기분 나쁜 보랏빛이 몸을 둘러싸는 느낌이 들었고.

순식간에 시야가 변하는가 싶더니 이곳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로 보아 구체에 함께 빨려 들어간 기태랑과 비광은 다른 장소로 날려진 것 같았다.

생각도 못 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강제 공간이동을 시켜버리다니.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대처가 불가능한 능력이었다.

꽈악.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로튼이 노리는 건 태랑 님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로튼은 나와 기태랑을 떨어뜨려 놓았다지만.

적어도 로튼과 칸은 기태랑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컸다.

빨리 가야 돼.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있는 곳이 아까 있던 장소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젼 수리검]

마음 같아선 다 쓸어버리며 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존재하기 않았기에.

수리검을 하늘 위로 높게 던졌다.

빠르게 비젼을 해 기태랑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카앙!!

…!

하늘로 솟아오른 수리검으로 비젼을 하려는 찰나.

거대한 식물이 나타나 수리검을 아래로 내리쳐버렸다.

뭐야 또 저건.

"도망가려는 건가?"

저벅.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자.

온몸을 꽃과 식물로 뒤덮고 있는 걸로 보아 로튼과 한패인 데몬인 것 같았다.

몇 마리나 있는 거냐.

해안가에서 봤던 발자국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모습을 나타낸 놈들만 봐도 모두 노네임드급 데몬.

한 마리만 등장해도 난리가 나는 급인 걸 감안했을 때 이렇게 한꺼번에 등장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못… 못 간다…!"

저 새끼.

조금 전 나를 날려 보낸 토롱이란 놈도 함께였다.

"바쁘니까 좀 꺼져라, 식물년아."

"식물년이 아니고 유리아다. 오만한 벌레야."

드드드드득!

하늘을 뒤덮는 식물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쉽게 자를 수도 없을 듯한 굵기였다.

"방금 날려 보낸 수리검이 이동기인가 본데. 못 쓸 거다."

유리아가 식물로 하늘을 뒤덮은 이유였다.

조금 전 내 행동 한 번만으로 수리검이 이동기일 거라 파악한 유리아.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판단력만큼은 보통이 아니었다.

쯧.

[앤 보니&메리 리드]

수리검을 사용해 빠져나갈 수 없다면.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뚫는다.

[동기화]

* * *

"으… 뭐냐 이건 또."

백운이 떨어진 장소의 반대편.

정신을 차린 비광이 고개를 돌렸다.

유창한 언어 구사와 순식간에 장소까지 옮겨버리는 능력까지.

노네임드라는 걸 감안해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 태랑 님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비광이 자신에게 부탁했던 백운의 말을 떠올렸다.

이유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기태랑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던 백운.

'이런.'

백운이 그렇게 걱정했던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말았다.

기태랑 역시 구체에 함께 삼켜지긴 했지만 실제로 날려진 건 비광과 백운 뿐일 수도 있었다.

'놈들이 노리고 있는 건 기태랑인가.'

"키아아…!"

다가오고 있는 많은 수의 데몬을 바라보며 비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태랑이 노려질 걸 백운이 어떻게 알았는지.

눈앞에 나타난 노네임드급 데몬들은 대체 누구인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 해야 하는 행동은 명확했다.

'기태랑한테 가야 한다.'

기태랑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비광이었다.

기태랑이 외딴 섬에 수백 마리의 데몬과 방치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길했다.

백운이라고 기태랑의 강함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돌산에서 가장 가까이 지냈기에 누구보다 잘 알 터.

그럼에도 백운은 기태랑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이유가 있을 거야.'

기태랑이 위험에 처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며.

비광이 품에 있는 화투패를 꺼내 들었다.

'빠르게 뚫고 간다.'

그렇게 데몬을 쓸어버리려는 순간.

퍼걱!! 퍼석!!

"키에에!"

쿵!!

다가오고 있던 데몬들이 무언가에 의해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휘두름에도 울부짖는 데몬들의 상체를 터뜨려버리는 엄청난 괴력.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네임드로 보이는 거구의 데몬이 다른 녀석들을 죽이고 있었다.

뚝… 뚝.

또다시 피로 물들어버린 마렉의 두 주먹.

비광이 등장하기 전까지 죽였던 헌터들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두두두두!

이대로 있으면 죽임당한다는 걸 알아서일까.

비광을 둘러싸고 있던 데몬들이 모두 도망쳐버렸다.

스윽.

마렉이 고개를 돌려 비광을 응시했다.

"네놈이냐? 로튼이 보낸 건."

"로튼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너 뭐냐?"

쿵.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위압적이었다.

발을 짚는 순간 바닥이 울리는 걸음걸이.

'괴물이다.'

그런 마렉을 보며 비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부딪혀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을 만큼.

마렉에게서 풍겨지는 위압감은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쿵.

몇 발자국 비광에게 다가온 마렉이 입을 열었다.

"난 마렉이다."

"비광이다."

서로에게 이름을 밝힌 뒤 침묵하는 마렉과 비광.

"넌 몇 번째냐?"

"…?"

거만한 얼굴로 몇 번째냐 물어오는 마렉.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비광이 눈썹을 올리자.

"벌레들 중에서 넌 몇 번째로 강한지 물었다."

마렉이 질문의 의도를 밝혔다.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당황했던 비광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알고 싶어서다."

드드드…!

마렉이 비광을 달려들기 위해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짓이겨 죽일 벌레놈이 몇 번째인지 말이다!"

쿠웅!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드는 마렉을 응시하며.

비광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아마."

우웅…!

비광의 눈앞으로 펼쳐지는 몇 장의 화투패.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 거다."

비광의 대답을 끝으로.

콰앙!!

마렉과 비광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잭 더 리퍼]

다가오는 데몬들을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리볼버로 한차례 쓸어버렸음에도 쉬지 않고 달려드는 녀석들.

어디서 이렇게 끝도 없이 나오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휘릭… 쿠웅!

더럽게 귀찮네.

끊임없이 나오는 건 데몬 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식물을 뽑아내 휘둘러대는 유리아.

개방을 한 헌터 중에도 식물을 사용하는 이가 있었다. 

동영상을 통해 그들이 싸우는 장면도 많이 봤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한도라는 게 없는 건가.

어느 정도 식물을 뽑아낸 이후엔 리소스가 다해 휴식을 필요로 했던 헌터와 달리.

유리아의 식물엔 끝이 없었다.

쿠에에에! 

치이익!!

숫자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가지각색의 식물들.

식물이라 부를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 식물들은 생김새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공격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떤 식물은 줄기를 뻗어 쏘아지는가 하면 거대한 입을 가진 식물은 산성을 가진 침을 뱉어냈다.

키이잉!

그리고 저 난쟁이 자식.

가장 성가신 놈이었다.

다가가려 하면 순식간에 보라색 구체를 뿜어내 내 이동 경로로 식물을 옮겨 놓았다.

그 틈을 이용해 계속해서 위치를 바꾸고 있는 유리아.

토롱은 식물을 다루며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는 유리아를 이동 구체로 서포트하고 있었다.

날 옮기면 편할 텐데도 식물로 이동만 방해하는 걸 봐선.

토롱의 능력 사용엔 제약이 있는 것 같았다.

다가올 때마다 날 날려버리면 되는 걸 힘들게 식물로 길을 틀어막고 유리아를 이동시키고 있는 게 판단의 근거였다.

가령 한 번 이동시켰던 대상은 일정 시간 동안 옮기지 못한다던가.

굳이 날 옮기지 않는 이유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코오오오오!"

서걱!

식물을 타고 달려드는 데몬을 베어내며.

겹겹이 쌓인 식물 사이로 보이는 유리아와 토롱을 응시했다.

아직까진 토롱이 유리아를 이동시킨 적은 없는 상태.

가설이 맞다면 유리아를 옮길 수 있는 횟수는 일정 시간 동안 단 한 번뿐이었다.

푸화악!

옆에서 흩뿌려지는 피를 바라봤다.

식물을 피해내며 계속해서 베어낸 데몬.

데몬들에게서 뿜어진 피가 사방에서 흐르고 있었다.

됐다.

필요로 하는 충분한 피가 뿌려졌음을 파악하고.

[잭 더 리퍼 - 동기화]

피로 온몸을 빼곡하게 메꾸었다.

그리고.

파앗!!

훨씬 빨라진 속도로 유리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휙! 휙! 쿠우우웅!

내 접근에 맞춰 토롱이 식물로 길을 막았지만 헛수고였다.

동기화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반응속도와 스피드가 생겼기에.

식물이 앞을 가로막음과 동시에 베어내며 다음 루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리 와!!"

"큭…!"

빼곡히 앞을 막는 식물을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토롱이 자신의 몸과 유리아의 몸을 보라색 구체로 감쌌다.

한 번 이동시켰고.

사방을 덮고 있는 식물들에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토롱과 유리아의 기운이 말이다.

아끼려고 했는데.

기태랑에게 도달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무기를 아끼려고 했었다.

누가 뭐라 하든 가장 주의해야 하는 건 로튼의 능력이었다.

그 능력 속에서 날뛸 칸의 검술 또한 마찬가지.

가능하다면 쿨타임이 길게 걸리는 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싶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주변을 빼곡하게 감싸고 있는 식물을 둘러봤다.

웬만해선 면도칼로 뚫고 나가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조금 전 마지막 이동을 시켜서인지 계속해서 식물 뒤로 숨어다니고 있는 토롱과 유리아.

한 번에 다 날려버리지 않으면 계속해서 시간이 지체될 터였다.

꼴깍.

타죽진 않겠지.

원래라면 유탈라스로 몸을 감싼 후 불꽃을 사용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검을 휘두르는 칸을 상대할 때 유탈라스는 필수였다.

태랑 님을 지키며 싸워야 할 수도 있어.

비늘을 퍼뜨려 다양한 상황을 대비할 수 있었기에.

지금 저 두 놈에게 라의 불꽃과 유탈라스 두 개를 다 써버릴 순 없었다.

쐐에에에에---!

사방으로 식물 줄기가 날아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할 필요도 없는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한차례 심호흡을 한 후.

[라 - 불꽃의 문양]

불꽃을 꺼내 들었다.

치이익…!

끄윽…!!

상체에 그려진 문양과 동시에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라의 불꽃.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못 참을 수준은 아니었다.

스윽.

토롱과 유리아가 숨어 있을 장소를 바라보며.

"불꽃이여."

화륵…!

"공간을 불태워라."

응축되어 있던 불꽃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165화. 권능

콰득!

"키… 키아아…!"

뚜두둑.

달려든 데몬의 숨통을 끊어놓은 후.

기태랑이 정면을 응시했다.

조용히 서 기태랑과 데몬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는 로튼과 칸.

"구체에 삼켜졌던 다른 두 사람은 어디로 갔지?"

기태랑이 손을 털며 로튼에게 물었다.

보라색 구체에 삼켜진 뒤 비광과 백운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태랑만이 로튼, 칸과 함께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여유가 있으시네요. 다른 사람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로튼이 기태랑의 주변을 바라봤다.

비광과 백운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기태랑 주변으론 이미 수십 마리의 데몬이 널브러져 있었다.

완벽히 피떡이 된 상태로 말이다.

거기다 수많은 데몬을 처치하며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기태랑.

"오만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인가요."

로튼은 약간이지만 놀라고 있었다.

기껏해야 예루살렘에서 만난 하킨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의 기태랑은 그 수준을 훨씬 상회했다.

데몬에게 먹이는 한방 한방이 가진 묵직함.

단순히 능력에 의지하여 강해진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갔지?"

피식.

여전히 잔잔한 기태랑의 얼굴에 로튼이 실소를 터뜨렸다.

예상외의 선전에 놀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역시 인간은, 특히 불사자라 불리는 것들은 정말이지 오만하군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여유 부리는 모습이라니.

몇 마리 하찮은 데몬을 수월하게 처치했다고 저런 질문이나 해대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그 여유는 불사자라 불리는 자신이 다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거겠죠."

저벅.

로튼이 기태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몸이 가진 단단함은 제 상상 이상이었으니까요."

저벅.

"그리고, 당신의 여유를 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범인 사이에서 조금 뛰어난 정도로 스스로가 죽지 않을 거라 착각하는 오만.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오만.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없을 거란 오만."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

자리에 멈춰 선 로튼이 딱하다는 얼굴로 기태랑을 응시했다.

"당신은 너무도 오만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로튼의 얼굴은 잔잔했지만.

속에선 차가운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감히 자신을, 그분을 앞에 두고도 저런 표정이라니.

[오만하다.]

분노와 함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로튼이 절대적인 존재라 칭하며 명을 받들고 있는 그분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면에서 들려온 목소리.

로튼은 그 순간 확신했었다.

목소리의 정체는 모든 차원에서 정점에 서 있는 존재이며 자신은 그분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대리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불사자라 착각하는 이를 죽여라.]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그분의 말씀이었다.

스스로를 불사자라 착각하는 오만한 이를 만났을 때마다 들려온 말씀이었으니.

스윽.

로튼이 고개를 들어 기태랑을 응시했다.

"이제부터 그 오만을 무너뜨려 드리죠."

"뭐…?"

의미심장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태랑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무언가를 읊조린 로튼.

"Deus Lo Vult."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로튼의 두 눈으로 황금빛이 일렁였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우우우웅…!

"…!"

탓!

심상치 않은 기운에 기태랑이 발을 내디뎠다.

무언가를 더 하기 전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쐐에에에---!

"!!"

하지만, 어느새 나타나 로튼과 기태랑 사이로 뛰어든 칸.

칸이 기태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화아아악---!

로튼의 두 눈에서 시작된 황금색 장막이 기태랑과 함께 공간을 집어삼켰다.

* * *

쾅! 쾅! 쩌억!

"키아아아!"

퍽!

"크라라라!"

콰아앙!

달려든 데몬을 쳐내며 기태랑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체력과 힘 등 신체의 능력만 봤을 땐 초인 수준인 기태랑이었다.

그럼에도 몇 마리의 데몬을 쳐내며 숨이 가빠진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뚝… 뚝… 뚝.

어깻죽지부터 왼쪽 허리까지 길게 그어진 자상.

상처에선 쉴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칸의 검이 눈앞까지 다가왔고 황금색 장막이 쳐진 것은 말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촤아아악--!

10년이 넘도록 조금의 상처도 받은 적 없던 몸이.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져 검에게 상처받는 게 불가능한 몸이.

이가 다 빠져 낡아 버린 검에 베여 피가 솟구친 것이었다.

'위험했다.'

조금 전 공격을 떠올리며 기태랑이 아찔함을 느꼈다.

눈앞까지 칸의 검이 날아든 순간.

원래라면 아무 상처도 입히지 못할 것이기에, 피하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 태랑 님도 피하세요.

하지만, 어째서일까.

찰나의 순간 돌산에서 백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으로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베어 오던 면도칼의 감각과 함께 말이다.

'평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면… 죽었겠군.'

흥건.

물론 마지막 순간 반응했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목숨만 건졌을 뿐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져 온 칸의 검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제야 어울리는 상태가 되었군요."

로튼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거참 얄미운 놈일세.'

얄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가만히 서 싸움을 지켜만 보고 있는 로튼.

로튼은 마치 모든 상황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한 얼굴로 싸움을 관람하고 있었다.

"키아아아아!"

'생각할 틈도 안 주는군.'

다른 무언가를 떠올릴 틈은 없었다.

장막이 펼쳐지기 무섭게 쏟아지기 시작한 데몬 무리.

처리하는데 크게 문제 되지 않는 녀석들이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쐐애애액!

데몬을 처치하고 있다 보면 찔러져 들어오는 칸의 검격.

평소라면 피할 필요조차 없었을 공격이지만 능력이 사라진 지금은 달랐다.

조금 전 상체를 벤 것처럼 한방 한방이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

삭! 서걱! 쐐엑!

'아찔하구만.'

눈앞으로 휘둘러지는 칸의 검.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였다.

돌산에서 봤던 백운의 면도칼보다 조금 더 빠른 느낌이었다.

'공격은 매섭다만.'

칸은 한 마리 멧돼지 같은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고 공격에 올인하는 스타일.

휘릭… 쾅!

"크르…!!"

몸을 빙글 돌려 칸을 걷어찬 기태랑.

몸은 더 이상 다이아몬드가 아니었으나 힘과 스피드만은 여전했기에.

예상치 못한 카운터를 맞은 칸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

빠득.

그런 기태랑을 보며 로튼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인간들과는 달랐다.

능력의 개방 이후 상처를 아예 입지 않거나 입더라도 금방 치유됐었던 이들.

하나같이 몹시 여유로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착각에서 오는 여유로움이었다.

-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물론. 

로튼의 장막이 펼쳐지기 전까지였다.

몸에 새겨지기 시작한 검흔과 더 이상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 그들의 얼굴은 끔찍한 공포로 물들었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죽음을 눈앞에 뒀기 때문이었다.

'어째서입니까.'

하지만.

눈앞의 기태랑은 달랐다.

쾅! 쾅! 쾅!

로튼의 장막에 의해 능력이 사라졌음에도.

쾅!

칸의 검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죽어가고 있음에도.

"키아아아아!"

사방을 수백 마리의 데몬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콰앙!!

기태랑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지 않았다.

오히려 능력이 있을 때보다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얼핏 보면 공포에 질리긴커녕 즐거워하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왜, 일이 생각처럼 안 흘러가나?"

"…!"

잔잔하게 웃으며 로튼을 바라보는 기태랑.

빠드드드득!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로튼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런 로튼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여는 기태랑.

"능력이 없어지면 겁에 질려 빌빌거릴 줄 알았나? 아니면 자포자기한 채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알았나?"

로튼이 대답할 새도 없이.

스으으…!

"국가 소속 1급 헌터 기태랑. 다이아몬드 인간이라 불리기 전."

두 손을 올려 격투 자세를 잡는 기태랑.

기태랑이 로튼을 응시했다.

"인간계 최강이라 불렸었다."

콰드드득!!

소개를 마침과 동시에 앞에 서 있는 데몬의 목을 뜯어 놓으며.

기태랑이 호흡을 정돈했다.

"살아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만."

몸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즐거운 듯 웃어 보이는 기태랑.

기태랑이 늘어서 있는 데몬들과 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마리라도 더 길동무로 데려가주마."

* * *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아… 하아."

"크… 크르."

기태랑과 칸이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응시했다.

두 사람과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로튼까지.

장소에 서 있는 건 어느덧 세 사람뿐이었다.

주르륵.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는 수백 마리의 데몬 시체들.

시체에선 끈적한 피가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고 있었다.

'….'

숨을 몰아쉬던 기태랑이 고개를 내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바라봤다.

앞에 있는 칸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태랑의 몸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쉴새 없이 데몬들을 두들긴 주먹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뼈 여기저기에 금이 가고 부서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저벅.

기태랑의 상태를 눈치챈 걸까.

로튼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기태랑에게 다가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와 기태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로튼.

"여기까진 거 같군요."

"그런가보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기태랑에 로튼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로튼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계에 다다라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하는 주제에, 닿을 수 없는 존재를 눈앞에 직면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저런 얼굴이라니.

무언가 생각하던 로튼이 입을 열었다.

"살고 싶지 않습니까?"

로튼의 질문에 기태랑이 실소를 터뜨렸다.

"당연한 걸 묻는군, 살고 싶지."

예상하던 답변에 로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비세요. 그럼 살려드리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놀란 기태랑의 얼굴.

그런 기태랑을 보며 로튼이 미묘한 긴장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꿇으세요. 꿇어서 구걸하십시오.'

몰아부쳐져 죽음이 눈앞까지 왔음에도 공포에 질리지 않는 기태랑.

기태랑의 얼굴이 절망과 공포로 물드는 걸 보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는 비굴한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다.

'인간은 모두 똑같습니다. 그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죠. 그렇기에 영생을 원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자신에게 무릎을 꿇는 순간, 지금까지 작은 흔들림조차 없던 기태랑이 무너지는 순간.

바로 목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무릎 꿇기를 기다리고 있는 로튼을 향해.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무릎 꿇고 목숨 구걸을 한 적이 있나 보군."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소를 지으며 말을 건네는 기태랑.

"그래본 적이 없는 놈이라면 충분히 알 텐데 말이야. 내가 고개 숙이지 않을 거란 걸."

꾸드드드득!!

엄청난 분노에 얼굴이 일그러짐은 물론 손까지 떨기 시작한 로튼.

"…."

순간이지만 흔들림을 보였던 로튼이 천천히 얼굴을 되돌렸다.

처음과 같이 온화한 표정이었다.

저벅.

그 상태로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로튼

로튼이 딱하다는 듯이 기태랑을 한차례 바라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칸."

"크르!"

부름과 동시에 칸이 기태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고.

"씻을 수 없는 오만, 죽음으로 사죄하십시오."

로튼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쐐에에에에--!

움직이지 못하는 기태랑을 향해 날아드는 칸의 검.

불사자라 불렸던 마지막 오만이 무너질 거란 걸 확신하며.

로튼이 입가로 흡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다.

'끝이군요.'

기태랑의 도발에 잠시 흔들리긴 했으나 행하려 했던 걸 모두 이루었다 생각하니 몹시 만족스러웠다.

저벅.

그렇게 미소를 띤 채 여유로운 걸음을 딛는 로튼.

그런 로튼의 귓가로. 

기태랑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 왔군."

166화. KING NON VULT

라의 불꽃으로 유리아와 토롱을 포함한 일대를 날려버린 뒤.

쉴새 없이 수리검을 던지며 기태랑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콰직!

좀.

콰지직!

꺼져라!

지상에 있는 데몬들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하늘길이었다.

그럼에도 하늘 곳곳에 적지 않은 수의 데몬이 있는 상황.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불꽃으로 쓸어버린 것만 해도 족히 백 마리는 넘을 터였다.

그럼에도 지상과 하늘에 있는 데몬들의 숫자는 줄어들긴커녕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콰앙!

그나마 다행이라면 데몬의 수준 자체가 그리 높진 않아 도착한 헌터들이 순조롭게 처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무난하게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도와달라고 해도 못 도와주겠지만.

까다로운 능력을 가졌던 유리아와 토롱을 불태워버린 것.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토롱이란 놈이 반응하지 못해서 다행이야.

내 몸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터져나갔던 라의 불꽃.

아무리 노네임드급 데몬이 뽑아낸 식물이더라도 라의 불꽃을 이겨낼 순 없었다.

닿는 순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식물을 바스러뜨린 불꽃은 이에 그치지 않고 터져나가 토롱과 유리아가 있던 공간까지 순식간에 집어 삼켜버렸다.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았다면 가는 길이 무척 지체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키아아아라!"

"코라아아아!"

쯧.

수리검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던 중.

하늘 여기저기에 있는 데몬들을 바라봤다.

한방만 휘둘러도 가볍게 터져나가는 녀석들이었지만, 당장 수리검을 던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게 문제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아래가 더 빠르겠네.

후웅… 쿠웅!!

수리검을 눈앞으로 던지는 대신.

바로 아래 땅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수리검의 무게에 짓눌려 몇 마리의 데몬이 터져나가며 땅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척.

먼지 속으로 몸을 착지시킨 후.

[잭 더 리퍼 - 동기화]

면도칼을 꺼냈다.

장점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방에선 데몬의 피가 들끓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잭 더 리퍼의 동기화를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키이이이이."

착지한 먼지구덩이로 달려드는 데몬의 소리를 들으며.

선혈로 묽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서걱!

가볍게 눈앞의 데몬을 썰어버린 뒤.

쿠우우… 파앗!

최대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주변에 몇 마리의 데몬이 달려들었는지.

경로를 막은 건 몇 마리였는지.

그로 인해 난 얼마나 많은 녀석들을 베어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타닷!

어느 순간부터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려 그저 최대 스피드로 앞을 향해 내달리고만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기를 멈추고 달리고만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웅!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거대한 황금빛 장막.

다른 나라에서 만난 목격자들이 말한 장막이었다.

불사자라 부렸던 능력자들이 죽었을 때 공통적으로 목격됐던 녀석.

제발.

장막을 본 순간 온몸으로 오한이 느껴졌었다.

로튼이 펼친 장막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저 안에 있을 기태랑이 걱정되어서였다.

다른 능력자들은 장막이 펼쳐진 뒤 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었다.

부디 기태랑만은 무사히 서 있기를 바라며 발을 내뻗었다.

…!

그렇게 몇 발자국을 더 다가갔을 때.

장막과 가까워지며 안에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엄청난 수의 데몬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기태랑이 쓰러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

문제가 있다면 이미 리타이어 상태가 된 기태랑을 향해 칸의 검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잭 더 리퍼 - 해제]

으드득!

어금니가 부서질 정도로 악 다문 뒤.

[비젼 수리검]

[유탈라스]

비늘로 몸을 감싼 뒤 수리검을 든 손에 최대의 힘을 실었다.

후우우우웅---!!

몸을 한 바퀴 돌려 회전력까지 실은 뒤.

기태랑과 칸 사이로 수리검을 던졌다.

콰가아아아아---!

모든 개방자의 능력을 무효화시켜버리는 로튼의 장막.

아무런 대비 없이 저곳에 들어가는 게 맞는가 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내 능력 역시 사라질 텐데 노네임드급 데몬 두 명이 쳐놓은 덫으로 달려드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

하지만, 어째서일까.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무시무시한 장막임에도 난 조금의 걱정이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이 들었다.

나라면.

드득!

저 장막을 찢어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말이다.

[비젼]

* * *

뭐야…?

로튼의 장막으로 비젼을 사용한 순간이었다.

비젼에 의해 몸이 옮겨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어버렸다.

마치 무기와 관련된 빛을 건들며 공명이 발동되었을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저벅.

다른 게 있다면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칼데아 윙을 얻었을 때 이카로스의 시야로 기억을 보던 감각과 똑같았다. 

누군가의 몸 속이었고, 그 누군가는 정면을 바라보며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공명에 당황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들어와 있는 남자의 시야에 집중하자 엄청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 쌓인 엄청난 수의 데몬 시체.

뚝…!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내가 들어와 있는 남자였다.

그 증거로 온몸에선 쉴새 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웅…!

얼레.

낯선 광경 중.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넓은 공간으로 펼쳐져 있는 황금빛의 장막.

조금 전 들어가려 했던 로튼의 장막과 같은 것이었다.

"어째서…!"

허.

아니나 다를까.

시체 더미의 사이, 여전히 화려한 머리와 눈을 가진 로튼이 울부짖고 있었다.

울부짖음의 대상은 내가 들어와 있는 남자였다.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이전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샤마크라에선 끝이 안 보이는 여유와 온화함을 가지고 있었던 로튼이지만.

눈앞에 있는 로튼에게선 더 이상 그때 보았던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시는데!! 어째서 너에겐!!"

"조용히 하거라."

!!!

거울이 없어 내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아마 로튼의 얼굴을 뛰어넘는 경악한 표정일 터였다.

조금 전 귓가로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무기왕… 카이안!!

저벅.

로튼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카이안.

잠시 멈춰 선 카이안이 입을 열었다.

"신은 없느니라."

간단하면서도 효과가 좋은 말이었다.

조금 전까진 경악으로 물들어있던 로튼의 얼굴로 분노가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감히!! 그분은 존재하신다!! 만물의 정상에 계신! 모든 차원과 세계를 지배하신 분이다!!"

입에서 왜 피가 튀어나오지 않나 싶을 정도의 절규였다.

얼마나 진심으로 화가 났으면 목소리가 저렇게 갈라지는 걸까.

"그런 대단한 신이 왜 네놈 안에 있단 말이냐?"

"난 그분의 대리인이다! 그분은 내 안에 계신단 말이다!! 난 신이다! 난 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응? 마지막에 뭐가 좀 이상했는데.

"…."

이상함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피식.

카이안이 실소를 터뜨렸다.

"스스로 만들어낸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거냐? 불쌍하구나."

무언가 대꾸하려는 로튼을 향해 카이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하라는 손짓이었다.

"그럼 그렇게 대단한 신의 권능이 왜 나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냐?"

잠시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로튼.

설명할 수 없는 질문인 것 같았다.

"내가 알려주마. 왜 통하지 않는지."

저벅.

한 발자국 더 다가간 카이안이 로튼을 내려다봤다.

"King Non Vult."

"…!"

"짐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무슨…!"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로튼.

그런 로튼을 바라보며 카이안이 말을 이어나갔다.

"잘 듣거라 우매한 벌레야."

카이안의 입가로 그려지는 차가운 미소.

"짐의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윽.

조금 더 고개를 내려 시선만으로 로튼을 찍어누르는 카이안.

"모든 것의 위, 그곳이 짐이 있는 곳이다."

"헛소리!!"

"명백한 진실이니라. 왜냐면… 나보다 위에 있던 것들은 내가 다 끌어내려 소멸시켰으니까."

꼴깍.

나조차도 엄청난 아찔함에 마른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로튼을 향해 말하는 카이안은 진심이었다.

"자 벌레여, 정하거라. 널 구해 줄 수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만이 네 목숨을 살려 줄 수 있지."

동정을 한다거나 자비를 베풀려는 게 아니었다.

카이안은 눈앞에 있는 로튼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하찮은, 길을 걷다 밟을 수 있는 작은 날벌레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미소를 지운 카이안이 차가운 눈동자로 로튼을 응시했다.

"꿇어라. 꿇어서 빌어라. 그럼… 살려주마."

* * *

카이안의 말을 마지막으로, 공명이 풀리며 빠져 나와진 공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크… 크르!!"

이젠 안대와 마스크를 벗어 명백한 데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칸이 눈에 들어왔다.

몹시 당황한 듯한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칸의 얼굴이 말이다.

드드드…!

비늘이 감싸진 손에 막혀 있는 칸의 검.

이가 다 빠진 검은 엄청난 경도를 자랑하는 유탈라스의 비늘에 기스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슥.

고개를 돌려 칸의 바로 뒤에 있는 로튼을 응시했다.

로튼도 칸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칸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로튼의 얼굴은 경악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어… 어떻게…?"

많이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고 있는 로튼.

그런 로튼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드드득!

"크르!!"

손으로 칸의 검을 붙잡은 채로 나아갔다.

수리검과 유탈라스를 동시에 꺼냈기에 힘의 증폭은 나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

칸이 안간힘을 쓰며 버텨보고 있었지만 내 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로튼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째서…!"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로튼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거냐!!"

내 능력이 무효화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모를 테니까.

"신께서 원하시는데 어째서!!"

로튼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를 격하게 토해내고 있었다.

피식.

"…?"

어느 정도 다가가 실소를 터뜨리자 로튼이 눈살을 찌푸렸다.

웃음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

공명에서 본 장면을 한 번 떠올린 뒤.

일그러져 있는 로튼을 향해 입을 열었다.

"King Non Vult."

"!!!!"

로튼이 모를 리 없는 문장을 읊어주자.

로튼의 얼굴이 경악을 넘어 패닉 상태로 빠져버렸다.

로튼은 더 이상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지경에 온 듯했다.

드드드득!

"크라아아아!"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딛자 주인으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힘을 싣는 칸.

하지만, 헛수고였다.

지금 내 눈에 칸 따위는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천천히 밀며 로튼에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갈 뿐이었다.

저벅.

로튼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어째서 무효화가 되지 않냐는 로튼의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저벅.

"그것을."

드드드득!

이젠 거의 로튼의 코앞까지 붙어버린 칸의 몸.

그런 칸의 검을 옆으로 치우며 패닉에 빠져있는 로튼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원하지 않는다."

사아아아…!

"이 싸이비 이중인격 새끼야."

167화. 비늘과 수리검

로튼은 겁에 질려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악을 쓰며 소리 지르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

대신 로튼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현재의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

로튼의 눈엔 여러 가지 의문이 담겨있었다.

어째서 눈앞에 있는 내가 자신의 무효화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지.

어째서 과거에 자신을 무릎 꿇렸던 존재가 했던 말을 똑같이 읊을 수 있는 건지를 말이다.

"다… 당신 역시 알고 있을 텐데요. 인간이 스스로를 영생이라 여기는 순간 얼마나 오만해지는지를요…!!"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울부짖는 로튼을 보며.

샤마크라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내가 한 말이었다.

회귀 전 겪었던 사람들의 탐욕과 갈취.

로튼이 말하는 오만과 같은 맥락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생 살 수 있다는 사실이 가져다준 폐해가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봐왔었다.

"알고 있지, 알고 있는데."

이제는 눈동자마저 떨고 있는 로튼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회귀하기 전에 봤던 기태랑의 영상과 뉴스들이 생각났다.

죽는 순간까지 데몬을 처치했었던 1급 헌터 기태랑.

기본적으로 헌터는 데몬을 처치하는 존재였지만 모두가 인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싸운 건 아니었다. 

루트.

사람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헌터의 루트란 게 있었다.

헌터로써 어느 정도 명성과 권력을 얻게 되면 정부 혹은 대기업의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고, 스카웃이 된 이후로는 이전처럼 데몬과의 전투에 나서지 않게 되는 루트였다.

대부분의 헌터가 이 루트를 탔었다.

- 전 오늘부로 헌터에서 은퇴하겠습니다.

부와 명예까지 모든 걸 얻어 풍족해진 그들은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았다.

정부나 기업의 높은 자리를 꿰차 행복한 삶만이 남아 있는 상태.

굳이 위험한 전장에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유명한 헌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데몬과 싸우는 전력은 줄어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다.

- 1급 헌터 기태랑입니다!

하지만.

기태랑은 달랐다.

데몬이 강하든 강하지 않든.

기태랑은 항상 나타나 데몬을 처치했고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렇기에 영웅이라 불린 것이었다.

등장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사람들을 지켜온 존재였다.

- 영웅 기태랑 님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기태랑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걸로 끝내지 않았었다.

진심으로 슬퍼하며 오랜 시간 동안 기태랑을 위한 추모 행렬을 이어나갔다.

그만큼 기태랑에게 구해진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당신 혹은 당신과 친한 이는 예외라는 건가요!"

"난 아니야."

솔직한 마음이었다.

난 기태랑과 달랐다.

인류를 구한다거나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무모한 희생을 한다거나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난 그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고. 그 하고자 하는 일에 태랑 님을 죽지 않게 지키는 게 있는 거야. 그것뿐이다, 내가 널 막는 이유는."

으드득.

로튼의 얼굴엔 더 이상 온화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심에서 끌어 올려진 분노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

개무섭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게 약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인간의 오만함을 알면서도 자신에겐 예외를 두다니! 그것이야말로 진짜 오만이거늘! 너 역시 오만하구나!!!"

오만이라.

저번 대화까지를 떠올려보면 오만이란 단어를 참 혐오하는 거 같으면서도 좋아하는 로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로튼을 보니 나 역시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러는 넌?"

"…?"

"그렇게 영생을 오만이라 꾸짖으며 혐오하면서 말이야."

나보다 아래에 있는 로튼을 내려다보며.

얼굴 한가득 조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넌 어째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목숨을 구걸한 거냐?"

"!!!"

"넌 신이니 대리인이니 그래도 된다는, 그딴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스윽.

"살고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한 놈이. 스스로를 심판자니 대리인이니 멋드러진 단어로 치장하고 영생을 원하는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거."

드드드…!

"그게 가장 큰 오만이다."

오만이란 단어가 자신에게 향하자.

"주…."

온몸을 떨어대던 로튼이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죽여라아아아!!!"

"크르르르!!"

손으로 막고 있는 검을 통해서.

로튼의 고함에 반응하려는 칸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회귀 전 기태랑을 베어 넘겼던 칸의 칼.

그 칼이 지금은 내 손 앞에 놓여 있었다.

콰악.

"크르…!?"

칸이 칼을 빼기 직전.

비늘이 둘러진 손으로 칼을 붙잡았다.

드드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칼.

칸의 얼굴로 당혹감이 번져나갔다.

"너도 신났을 거야. 장막 안에서는 못 베는 게 없었을 테니까."

휙… 덥썩.

"크… 크르… 크…!"

검을 포기하고 빠져나갈지도 몰랐기에.

검을 당겨 칸의 얼굴을 반대 손으로 붙잡았다.

후우.

칸을 붙잡으니 예상치 못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기태랑을 베어 넘겼던 장본인, 칸.

드디어 붙잡았다는 사실에 느껴진 안도감이었다.

스윽.

울부짖는 칸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려 로튼을 응시했다.

"너무 원망하진 마라."

드드드…!!

"크르으그!! 크라아아!!"

손아귀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서로 지키려는 이가 다른 것뿐이니까."

콰드드드득!!

"…."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칸의 울음소리.

동료의, 혹은 부하의 허무한 죽음 때문이었을까.

로튼의 얼굴엔 미묘한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외롭진 않을 거야. 두 명 먼저 가 있거든."

"!!"

두두두두두…!

발아래로 진동이 느껴졌다.

조금 전 로튼의 외침을 듣고 사방에 있던 데몬들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상은 물론이고 하늘마저 빼곡히 덮고 있는 많은 수의 데몬.

모여들고 있는 데몬들을 잠시 바라본 후, 로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구경하고 있어라."

이미 패닉에 빠진 로튼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유탈라스 & 비젼수리검]

칸의 검을 막아내느라 몸을 뒤덮게 해놨던 유탈라스의 비늘.

몸에 있던 비늘을 해제시켜 반대 손에 있는 수리검으로 붙여나갔다.

드드드.

수리검을 빼곡히 채운 뒤에도 한참 남아있는 유탈라스의 비늘.

남은 비늘은 수리검 주변에 머물며 시린 푸른 빛과 함께 흩날리고 있었다.

사아아…!

비늘을 통해 전해지는 수리검의 감각을 느끼며.

수리검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용천검]

* * *

 

처음부터 목소리가 들린 건 아니었다.

태어나며 눈을 떴을 땐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였다.

휘이이이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는 건지.

누구로부터 태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태어났고, 태어났기에 여기에 있다는 사실만이 로튼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

로튼이 태어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로튼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세계에 대한 룰을 알게 되었다.

약육강식.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룰이자 법칙이었다.

콰직!

로튼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달려드는 데몬을 죽였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중 하나였다.

무언가 로튼을 노린 채 달려들면, 로튼은 그 무언가를 죽였다.

이런 일상을 반복해가며 로튼은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강함.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자신은 매우 높은 위치에 있단 깨달음이었다.

- 네놈이냐? 주변의 데몬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게.

그러던 중 로튼을 찾아온 강자.

데몬이었지만 로튼과 같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개체였다.

- 이 구역은 내 거라서 말이야. 죽어줘야겠다.

언어뿐만이 아니었다.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데몬.

공기에 있는 물을 얼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네놈에게 흘러 들어가는 공기. 그 공기 안에 있는 액체를 얼릴 거다. 좀 고통스럽겠지만 금방 끝나니 참아라.

그렇게 죽음을 예고하며 상대가 능력을 발동하려는 찰나.

로튼의 눈에서 퍼져나간 빛이 장막을 만들었다.

- …?

동시에 발동되다 말고 사라져버린 적의 능력.

로튼은 능력이 사라져 아무것도 못 하는 적에게 다가가 평소처럼 가볍게 죽여버렸다.

- ….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강한 적의 능력을 완전히 없애버린 뒤 손쉽게 죽이자 지금까지 몰랐던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별함.

- 난 특별하다.

스스로가 가진 권능과 특별함.

이 두 가지가 주는 황홀함과 만족감을 느끼며 로튼의 마음속엔 강한 탐욕이 생겨났다.

- 나만이… 특별해야 한다.

자신만이 권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권능을 가진 자신만이 영원한 생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계속해서 특별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는 탐욕이 말이다.

- 나 이외의 것이 권능과 영생을 탐내는 건… 오만하다.

그렇게 오만에 대한 정의를 내린 순간.

[오만한 자를 죽여라!]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과거를 회상하며.

로튼이 하늘을 바라봤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나만이 특별해야 하는데.'

"키아아악…!"

"끄… 끄르르!!"

'어째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로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푸른색 비늘로 감싸지더니 하늘로 솟구쳐 오른 수리검.

수리검이 지나간 곳을 수많은 푸른색의 비늘이 길을 그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우웅.

하늘로 올라가 잠시 멈춰있나 싶더니 미묘한 진동을 시작한 수리검.

그때부터였다.

비늘을 둘러싼 수리검에 의해 분쇄가 시작된 것은 말이다.

콰드드!

수리검은 땅과 하늘을 가리지 않았다.

데몬이 있는 곳이라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갔다.

닿는 순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려버리는 데몬들.

어느 것에도 부서지지 않는 비늘은 잘게 나누어진 예리한 칼날과 같았다.

수리검의 회전력까지 얻게 되자 이젠 완벽한 이동형 분쇄기가 되어버린 유탈라스의 비늘.

위이이이이…!

범위 역시 엄청났다.

수리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수 천개의 비늘.

마치 푸른색 비늘로 이루어진 작은 토네이도가 사방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

지상엔 더 이상 온전한 형체를 한 데몬은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부터 작은 조각이었던 것마냥 잘게 부서져 뿌려진 데몬들.

하늘에 있는 데몬도 마찬가지였다.

후두둑.

잘게 썰린 조각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데몬 조각의 한가운데.

이 끔찍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백운이 서 있었다.

'….'

로튼은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앞에 서 있는 백운으로부터 느껴지는 감각.

이전에 느꼈던 절대적인 존재를 만났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우우우웅…!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데몬을 쓸어버리고 로튼의 머리 위에 위치한 수리검.

콰가가아아아…!

수리검이 비늘과 함께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혹시 또 무릎 꿇으려는 거면, 하지 마라."

피범벅이 된 얼굴로 그려지는 여유로운 미소.

로튼을 향해 입을 연 백운이 손을 들어 올렸다.

"난 소인배라서 말이야."

콰아아아아아아아!!

들어 올려진 손에 반응한 건지 더 맹렬하게 회전하는 수리검.

"살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휙.

백운이 망설임 없이 올렸던 손을 내리고.

콰가가가가!

피로 물들여진 용천검이 로튼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168화. 도박사 

콰아아아앙!

떨어지며 굉음과 함께 엄청난 먼지를 일으킨 용천검.

우우우…!

먼지가 뿜어짐과 동시에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황금빛 장막이 걷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로튼의 몸이 흔적도 없이 분쇄되었기 때문이리라.

쩌는군.

수리검와 유탈라스의 힘 증폭이 합쳐지며 만들어진 엄청난 파괴력.

용천검이 떨어진 땅은 조금 파인 수준이 아니었다.

주변까지 갈라져 운석이 떨어진 거 마냥 지형 자체가 변해버린 상태.

단점은 이건가.

끈적.

고개를 돌려 어깨를 바라봤다.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데몬의 사체들.

하늘에 있던 녀석들까지 갈아버렸더니 생긴 사태였다.

완전 날아다니는 믹서기구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유탈라스의 비늘.

비늘을 감싸며 손을 떠난 수리검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었다.

무협에 나오는 어검이 이런 느낌인가.

무협에서 어검술을 높게 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무기만을 움직여 적을 몰살시킬 수 있다니.

무척이나 매력적인 무기였다.

저벅.

잠시 용천검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 후.

몸을 돌려 기태랑에게 걸어갔다.

언제부턴지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기태랑.

로튼의 장막이 사라지며 기태랑의 몸은 다시 다이아몬드화 된 것 같았다.

"태랑 님, 괜찮으세요?"

기태랑의 능력은 돌아왔지만 걱정이 됐다.

몸 안쪽이 다친 거라면 오히려 몸이 다이아몬드화 된 게 치료를 못 하게 막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태랑이 특유의 미소를 머금으며 상처 입었던 상체를 들춰 보였다.

와우.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를 쏟아내고 있었던 상체의 상처.

그랬던 상처가 지금은 말끔하게 붙어 있었다.

"피를 좀 많이 흘려서 어지럽긴 하지만, 훨씬 낫군."

기태랑이 목과 팔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처럼 장기가 다치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몸일세.

다이아몬드화 되며 언제 다쳤냐는 듯 금세 아물어버린 상처들.

새삼스레 이 정도면 진짜 불사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괜찮다는 말을 한 후 날 빤히 올려다보는 기태랑.

시뻘개서 그런가.

슥슥.

온몸에 칠갑되어 있는 피를 슥슥 닦고 있자.

기태랑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훨씬 더…."

콰앙!!

"!!"

그 순간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꽤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더 있었던 건가…!

구체에 삼켜져 함께 날려졌던 비광을 떠올렸다.

내가 날려졌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토롱과 유리아.

비광이 날려진 곳에도 데몬이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비광인가."

태연한 기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음이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는 기태랑.

"태랑 님 좀 있다 봬요."

그런 기태랑을 뒤로 한 채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기태랑의 능력을 무효화 할 수 있는 로튼은 잘게 분쇄되어 죽은 상태.

다시 능력을 되찾은 기태랑이 누군가에게 죽는 일은 없을 터였다.

"천천히 가도 돼."

다급해하는 나를 향해 기태랑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광이 노네임드급 데몬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려진 미소였다.

"네가 안 왔다면 죽었을 놈이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슥.

고개를 돌려 비광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는 기태랑.

잠시 그 방향을 보고 있던 기태랑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장막처럼 능력을 완전 무효화시키는 녀석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비광이 지는 일은 없어."

친구이기에 믿는다 같은 뉘앙스가 아니었다.

당연한 이치를 읊듯 기태랑이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비광이랑 동전 던지기를 한 적이 있거든."

머엉.

덤덤하게 말하는 기태랑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당황스러웠다.

정확히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동료가 강한 적과 싸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오는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보통이면 얼른 도우러 가야한다던지 그 녀석은 꼭 이길거야…! 하며 기도를 하기 마련인데.

기태랑은 어떠한 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동전 던지기 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난 앞면, 비광은 뒷면에 걸었지. 한 100번 던졌던 거 같고."

여기까지 말한 기태랑이 고개를 돌렸다.

기태랑은 날 응시하며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백 번 중에 앞면이 몇 번이나 나왔을 거 같아?"

"5… 50번…?"

나름 확률과 통계에 근거한 정직한 답변이었다.

던져진 동전이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

확률은 50 대 50, 반반이었다.

싱긋.

내가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기태랑.

잠시 후.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는 기태랑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내 귓가로,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들려왔다.

"0번."

"…?"

"100번 던져진 동전에서 앞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 전부 뒷면이었지."

"…!"

콰아앙!

다시 한번 굉음이 들려왔다.

"행운의 신이 있다면."

확신에 가득 찬 기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 편인 수준이 아니라… 그놈이 행운의 신 그 자체일 거다."

* * *

콰앙! 콰앙!

"신기한 힘을 쓰는구나!"

"넌 무식한 힘을 쓰는구나."

비광을 향해 마렉의 주먹이 쉴새 없이 휘둘러졌다.

비광의 말대로 무식한 힘이었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공기까지 울려대는 괴력.

방어 없이 제대로 한 방 맞는다면 얼굴은 형체도 남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삭.

패 한 장을 뽑은 비광.

비광이 뽑은 패를 하늘로 던져 올렸다.

"12월의 야나기. 쏟아지는 비."

비광의 읊조림과 함께 패에서 검은색 가시가 쏟아져 나왔다.

"!!"

쿠우우웅!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땅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마렉.

마렉이 부서진 지반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원래라면 반응하지 않았을 공격이었다.

마렉의 몸 주변은 단단한 갈색 갑주로 감싸진 상태.

웬만한 공격은 갑주에 튕겨 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하지만.

쏟아지고 있는 검은색의 가시로부터 느껴지는 서늘함.

순간이지만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 지반을 들어 올리며 몸을 피했다.

콰가가가가--!

푸욱! 푹푹!

"크으…!"

예상대로였다.

너무 많은 수의 가시라 지반을 부수고도 한참을 쏟아진 가시.

처음 몇 개는 갑주에 튕겨 날아갔지만, 마지막 가시에는 갑주가 뚫려 몸에 닿고 말았다.

"이야 나름 단단한 갑옷이네."

비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보통 가시가 아니거든. 가시 하나하나가 닿을 때마다 대상을 부식시키는 효과가 있어."

치이익.

'…!'

비광의 말대로였다.

갑옷을 뚫고 팔에 꽂힌 가시.

가시를 시작으로 팔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능력이냐…!'

처음 시작은 순조로웠다.

주먹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순조롭게 비광에게 접근한 마렉.

이제 한두 번의 주먹질이면 비광이 짓이겨질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 콰앙!

마렉의 주먹 앞으로 날아든 작디작은 화투패 한 장.

주먹은 그 작은 패에 막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득.

생각처럼 힘이 통하지 않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마렉.

비광이 그런 마렉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잎은 10개 정도인가.'

고개를 내려 손에 들려 있는 패 한 장을 바라봤다.

7월의 홍싸리.

매달려 있는 잎의 개수만큼 적의 물리 공격을 방어해주는 패였다.

'괴물은 괴물이군.'

웬만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도 잎이 사라지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홍싸리의 잎을 공격마다 소모 시키고 있는 마렉의 힘.

여기서 끝내두지 않으면 수많은 희생을 불러올 수 있는 강함이었다.

다행이라면 마렉이 주먹을 휘두르는 물리력 외에는 별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

'빨리 끝내야겠군.'

지금은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마렉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비광의 능력을 알지 못해 만들어진 당황이었기에.

방어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아까와 같은 공격을 다시 쏟아부을 게 뻔했다.

"직접 때려봐서 알겠지만, 어차피 너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뭐…!!"

비광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들 자세를 취하는 마렉.

마렉은 비광의 말에 동의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기 하나 할래?"

"…?"

뜻밖의 이야기에 달려들려던 마렉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평소라면 벌레의 말 따위에 귀 기울이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휘둘러도 닿지 못하고 있는 주먹.

적의 능력을 알 수 없었기에 이대로 대책없이 싸우는 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무슨 개수작이냐."

그렇다고 손쉽게 비광의 제안에 응해줄 생각도 없었다.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별다른 의도는 없다.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공격도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로 손쉽게 이기는 게."

"…!!"

으드득.

도발에 입술을 깨물긴 했지만. 

아까처럼 무작정 달려들진 않았다.

공격이 안 통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난 도박을 사랑해. 질지 이길지 패를 까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긴장과 스릴. 그것들이 항상 날 미치게 만들거든." 

도통 의중을 알아차리기 힘든 비광의 말.

마렉이 숨어 있는 속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씨익.

그런 마렉의 반응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어 보이는 비광.

비광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나 스스로한테 리스크를 좀 줄까 하거든. 그래야 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훨씬 재밌을 테니까."

슥.

비광이 품 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앞면과 뒷면에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는 동전이었다.

"앞면과 뒷면이 나오면 너가 한 대 때리게 해주지."

"뭐라…?"

마렉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앞면과 뒷면 모두를 버리겠다니.

'무슨 꿍꿍이냐…!'

의심스러워하는 마렉을 향해 비광이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의 확률이 올라갈수록 재밌으니까. 그래서… 어때? 손해볼 건 없잖아."

비광의 말대로였다.

몹시 의심스럽지만 손해볼 건 없는 제안이었다.

딱 한 대.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비광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지금과 상황에서 마렉이 더 불리해질 건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힘든 내기 제안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다만, 좋다."

"현명하군. 바보가 아닌 이상 거절하면 안 되는 내기지."

비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전을 검지와 맞물려 있는 엄지 위로 올려놨다.

"난 이 동전이 앞면과 뒷면이 안 나온다에 걸지."

비광의 말과 동시에.

우웅.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동전으로 스며들었다.

내기가 성립되었음을 나타내는 빛이었다.

"…."

처음과는 달리 조용히 동전을 바라보고 있는 마렉.

그런 마렉을 향해 묘한 미소를 그려 보인 후.

비광이 손가락을 튕겼다.

티잉!

앞면과 뒷면을 가진 동전.

잠시 공중으로 튕겨 올랐던 동전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69화. 멀어져 간다

떨어지는 동전과 마렉을 번갈아 바라보며.

비광이 미소를 머금었다.

'고맙다.'

싸움을 끝내기 위해 필요했던 강한 패.

필요한 패를 뽑기 위해선 확률을 높여야 했다.

다른 일에선 행운의 신이 비광과 함께 했지만, 패를 뽑을 때만큼은 기존의 확률이 비광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팅.

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한번 튕겨 오른 동전.

마렉의 시선은 어느새 동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받아들일 줄 알았다.'

마렉이 내기를 받아들일 거란 건 처음부터 알았었다.

마렉의 입장에선 비광의 능력을 모르기에.

통하지 않는 공격이 마냥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었다.

'한 방만 맞추면 이긴다고 생각했겠지.'

처음부터 사람을 벌레라고 불러왔던 마렉.

마렉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런 와중에 벌레라고 여긴 자에게 공격이 전부 막혀버렸으니 당황했을 것도 물 보듯 뻔한 일.

'지더라도 손해볼 건 없다고 여겼을 테니까.'

마렉은 비광의 능력을 모르기에.

내기에 지더라도 그저 현 상황이 유지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당황은 판단을 짧게 만들고, 짧은 판단은 패배를 불러온다.'

상대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내기를 받아들인 건 짧은 판단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렉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손해 볼 것 없는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100%에 가까운 승률의 내기인데 말이다.

스윽.

'받지 않으면 멍청한 내기였다.'

비광이 고개를 내려 세로로 회전하고 있는 동전을 바라봤다.

동전의 회전이 멈추면 앞으로든 뒤로든 쓰러질 것이었다.

'동전을 던진 게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서서히 회전력을 잃어 가는 동전.

동전이 회전을 잃어갈수록 바라보고 있는 마렉의 얼굴엔 흥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

확신에서 오는 흥분과 미소였다.

도박장에 머무르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도박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젠지 알아?"

멈춰 가는 동전을 보며 비광이 입을 열었다.

"내가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며 다음 판단을 내린 순간."

휘이이…!

회전력을 잃고 완전히 멈춰버린 동전.

"!!!"

멈춘 동전이 내보이고 있는 건 앞면도, 뒷면도 아니었다.

"그 순간이 판단력을 흐리며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울퉁불퉁한 바닥임에도 반듯하게 세워진 동전에.

"이 벌레 새끼가!!"

오만상을 찌푸린 마렉이 비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기는 이기지 못했으니 이젠 힘으로 어떻게든 뚫어보려는 것이었다.

"다들 화를 내더구만. 지가 틀린 건데도 말이야."

"죽어라!!"

코앞까지 다가와 주먹을 치켜든 마렉.

마렉의 주먹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비광은 당황하지 않았다.

삭.

천천히 한 장의 패를 뽑는 비광.

"일월의 달과."

그리고 두 번째 패.

삭.

"팔월의 달."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주먹을 바라보며.

비광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일팔 광땡이요."

콰아앙!!

* * *

기태랑이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어쨌든 가볼게요!"

굉음이 들린 장소로 몸을 돌렸다.

응?

지체 없이 달려가려는 순간.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비광의 모습이 보였다.

햇빛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반사하고 있는 은색 정장.

볼 때마다 내가 은갈치 옷이라고 놀렸던, 비광만이 소화할 수 있는 화려한 차림새였다.

"거봐."

뒤에서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듯한 기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저리 멀쩡해.

멀쩡해서 실망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친 곳이 없다는 건 몹시 다행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멀쩡함에 나도 모르게 의아함이 생겨버렸다.

번쩍.

정말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싸움은커녕 방금 전 호텔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

그만큼 비광의 은갈치 정장은 작은 빛바램조차 없을 정도로 말끔했다.

"뭘 그렇게 멀뚱히 쳐다봐?"

오자마자 왜 그러냐는 듯 물어오는 비광에.

"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 과한 걱정을 한 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광은 상처 하나 없었다.

다행이다.

동시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회귀 전 비광은 기태랑 곁에 없었다.

그렇기에 로튼과 칸에게 살해당한 건 기태랑 뿐이었다.

- 태랑 님 옆에 좀 있어 주세요!

내 부탁이 있었기에 과거와는 달리 기태랑 곁에 있게 된 비광.

덕분에 비광은 토롱의 구체로 빨려 들어가 로튼과 함께 넘어온 데몬과 싸우게 된 것이었다.

나 때문에 비광 님이 잘못되는 줄 알았네.

그래서 다급하게 달려가고자 했었다.

기태랑은 구했지만 대신 비광이 당해버린다면 정말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얼레? 저건 또 왜 저래."

조금 더 다가오며 기태랑을 발견한 비광.

드디어 비광의 얼굴로 놀라움이 번졌다.

"너도 다치긴 하는구나."

괜찮냐는 걱정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껏 다친 적 없는 기태랑의 부상에 순수하게 놀란 것뿐이었다.

휘적휘적.

놀라고 있는 비광을 향해 기태랑은 딱히 대꾸하거나 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귀찮다는 듯 흔들어 보이는 기태랑.

"흐음. 다이아몬드 놈이 저 정도로 다쳤다라. 진짜 죽을 뻔하긴 했나 보네."

기태랑을 바라보던 비광이 내게 눈을 돌렸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는 비광에.

뜨끔.

약간을 넘어 조금 많이 뜨끔했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다이아놈을 지키라고 하더니."

비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라… 흐으음."

비광이 턱을 어루만지며 날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하…!"

웃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앞뒤 생각 안 하고 일단 붙어 있어 달라 부탁했었으니.

딱히 준비해둔 말도 없는 상태였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이제부터 비광이 캐물을 거란 생각에 잔뜩 긴장한 순간.

으쓱.

"뭐."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비광이 날 지나쳐갔다.

"네놈 비정상인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응…? 비정상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단어를 남긴 채 말이다.

물론 무슨 뜻이냐고 되묻진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어찌저찌 모면한 상황이 되돌려질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저벅.

비광이 기태랑 옆으로 다가가고.

"저기다! 1급 헌터다!"

"여기야! 빨리빨리!!"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장판이 된 도심 속에서 1급 헌터 두 명을 발견해서일까.

취재를 위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늙으면서 다이아몬드도 약해진 건가? 피떡 된 거 봐라."

"네가 여기에 있었으면 죽었을걸. 나니까 버틴 거지."

기자들이 달려오든 말든 평상시처럼 투닥거리고 있는 기태랑과 비광.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흐음."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로튼과 칸이 기태랑에게 도착하며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긴 했지만.

회귀 전과 달리 기태랑은 웃으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뭐.

저벅.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됐네.

* * *

그날 밤 저녁, 헌터 중앙처에 위치한 병원.

침대에 몸을 눕힌 기태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인가."

"영감은 여전히 극성이네."

기태랑이 다쳤단 소식에 버선발로 병실까지 달려온 헌터부 장관, 강태황.

- 이게 무슨 일이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는 기태랑을 보며 강태황이 한 첫 마디였다.

"고막 터지는 줄 알았네."

"나도. 베인 곳보다 귀가 더 아픈 것 같아."

그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고함을 질러대던 강태황이 나가며.

병실과 기태랑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붕대 효과는 있는 거냐?"

비광의 물음에 기태랑이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아마 없을걸."

"…."

서로의 실없는 질문과 답에 웃어 보이는 두 사람.

웃음이 그치자 비광이 입을 열었다.

"백운은?"

"글쎄 딱히 연락은 없네."

- 저 먼저 갑니다!

기자들이 도착하려는 순간.

백운은 호다닥 자리를 먼저 떠버렸다.

10급 헌터가 1급 헌터 두 명과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언밸런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나저나."

기태랑을 바라보던 비광이 입을 열었다.

"진짜 죽을 뻔한 거냐?"

방금과는 달리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에서의 물음이었다.

싱긋.

기태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100% 죽었을 거다. 백운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

놀라는 비광을 향해 낮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다. 

로튼의 황금색 장막과 무효화 되어버린 능력.

그 틈을 타 공격해온 칸과 어느새 도착해 그런 둘을 한순간에 압도해버린 백운의 이야기까지 말이다.

"네 능력은 완벽히 사라졌는데 백운은 멀쩡했다고?"

"완벽하게 멀쩡하더군."

기태랑에겐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어떻게 백운만은 로튼의 장막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나도 모르지."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며 기태랑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였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기태랑의 능력을 없애버렸던 로튼의 장막.

그 장막 안에서 백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능력을 사용하며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에 미스테리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백운에게 장막이 통하지 않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생각의 근거는 간단했다.

그저 그렇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장막이든 뭐든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절대적인 존재.'

자신과 로튼 사이를 가로막고 선 백운의 뒷모습을 보며.

기태랑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느꼈던 감각이었다.

'낯설었다.'

이상하게도 몹시 낯설었다.

낯설고 아득하며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앞에 서 있는 건 분명 돌산에서 2년을 함께 했던 백운임에도 말이다.

"그저 높아 보이더군."

솔직한 감상이었다.

비늘로 뒤덮인 수리검이 데몬들을 학살했기에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뒷모습.

경로를 막고 서 있는 뒷모습만으로도 높다는 감각을 느껴버렸다.

"높다라."

털썩.

높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비광이 의자로 몸을 묻었다.

높다.

짧은 단어였지만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뭐,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그렇지."

백운이 돌산을 내려가던 날.

두 사람은 같은 느낌, 정확히는 동일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지금도 이미 강하지만, 백운이 앞으로도 끝없이 강해질 거란 확신이었다.

"원래 하산한 제자를 만나면 뿌듯해야 정상인데 이건 뭐 무섭구만."

비광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기태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뿌듯한 건 맞지만, 동시에 서글프기도 하네."

오늘 낮에 봤던 백운.

백운은 점점 더 닿지 못하는 경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말이다.

슥.

고개를 돌린 기태랑이 창밖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너무 빨리 멀어지고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170화. 스윗 마이 홈

삑삑삑… 띠로링.

철컥.

문 안으로 들어서며.

"스으으읍."

공기를 들이마셨다.

코를 통해 폐까지 전해져 오는 달콤한 공기.

"으음, 홈 스윗 마이 홈!"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공기를 열심히 만끽한 뒤.

사놓기만 하고 한 번도 눕지 못했던 침대를 바라봤다.

후우웅… 풀썩!

그대로 몸을 날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씻고 오길 잘했어.

오늘 길에 목욕탕에 들려 묵은 때까지 모두 벗겨내고 오는 길이었다.

곧바로 침대에 누워도 죄책감 따윈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상태.

"끄어어어어어!!"

팔이 빠져라 기지개를 켠 후 몸을 똑바로 해 천장을 바라봤다.

"…."

조용하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굳이 들리는 소리를 찾자면 워낙 고요해 귀에 찾아온 삐 소리 정도.

이렇게 고요하게 누워있었던 적이 언제였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주 인싸의 삶을 살고 있구먼.

물론 친구가 많다거나 주말마다 약속이 넘쳐 나돌아다니기 바쁘다는 건 아니었다.

대신 세계 뉴스에 나오는 굵직굵직한 사건엔 항상 끼고 있으니 내 나름대로의 기준법에선 핵인싸로 분류되고 있었다.

유물관 아싸가 아주 그냥 출세했어.

인싸와는 몹시 거리가 먼 과거였다.

방구석에 처박혀 세월아 네월아 언제 죽으려나 기다리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대체 뭐지?

장막에 몸이 닿은 순간 발동되었던 공명.

무기가 아닌 것에서 공명이 발동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깜짝 놀랐네.

지금까지 공명으로 들어가기 전엔 항상 마음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빛을 뿜어내고 있는 무기에 내가 직접 손을 가져다 댔으니 안 끝나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정도.

하지만 아까는 아니었다.

그저 칸의 검을 막을 생각에 다급히 비젼을 사용해 장막 안으로 향한 거였는데. 

공명이 시작되어버렸다.

내 능력인데도 참 모르겠네.

자신이 개방한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용법을 모두 터득하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무기왕의 능력이야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치더라도 공명은 원래 내 능력인데도 발동 조건을 완벽히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어디 좀 부족한건가.

잠시 내 잘못인가 머리를 긁적인 후.

공명을 통해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카이안 님은 대체 어디까지 갔던 거지.

의문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기억에서 봤던 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지금까지 가봤던 장소와는 달랐다.

단순히 방문을 해본 적이 있다 없다의 차이가 아니라 공기와 분위기 자체가 다른 곳.

공기 속에 기본적으로 피의 향기가 묻어 있는 곳.

지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무기 구하러 간 건가.

무기왕 카이안.

카이안의 공간과 지금 내 공간을 비교한다면 몹시 쑥스러운 수준이었다.

무기왕 쥬니어의 쥬니어의 빅쥬니어 정도라 할 수 있겠지.

깔끔하게 인정하며 지구가 아닌 장소에서 로튼을 무릎 꿇렸던 카이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듣기만 해도 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음색이었다.

상대보다 명확히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음색.

실제로 카이안은 로튼을 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작디작은 벌레 정도로 보고 있었다.

꼴깍.

새삼스럽게 회귀 전 카이안과 대화를 나누고 힘을 계승 받았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의문이었다.

카이안이 대체 왜 나한테 힘을 계승해줬는지는 말이다.

"흐음."

처음엔 자신을 신의 대리인 혹은 심판자라 소개하고, 마지막엔 스스로를 신이라 칭했던 로튼.

만나기까지가 어려웠지 로튼을 처리하는 데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분명 위협적인 적이었다.

다른 헌터들이 한참 데몬과 싸우고 있는데 로튼의 장막이 펼쳐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었다.

다행이야.

기태랑을 죽일 수 있는 녀석이 사라져서도 다행이었지만.

좀 더 넓게 본다면 인류에 있어서도 몹시 긍정적인 것이었다.

개방자의 능력 자체를 무효화시켜 무기력하게 패배시킬 수도 있는 힘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인류 차원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위협적인 적이었던 로튼마저 벌레 수준으로 바라보며 무릎 꿇렸던 카이안.

카이안이 대체 어느 경지까지 다다른 건지는 감히 가늠조차 하기가 힘들었다.

- 모든 것의 위, 그곳이 짐이 있는 곳이다.

로튼을 쫄게 만들기 위해 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덤덤하게 말했던.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 나보다 위에 있던 것들은 내가 다 끌어내려 소멸시켰으니까.

"크으."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오는 대사였다.

"다 끌어내렸으니까."

크으으!

개멋있어.

파닥파닥.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올라오는 취기에 몸을 이리저리 뒹굴었다.

한참을 호들갑 떨다가 다시 천장을 바라보도록 원상복귀 시킨 몸.

"후우!"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천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카이안 님이 어디까지 올라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싱긋.

올라가자.

* * *

띠리… 리.

음…?

스윗 마이 홈에서 한창 단잠에 빠져있을 때.

귓가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날 게 없는데.

띠리리리--!

들릴 리 없는 핸드폰의 벨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하도 좁은 집이다 보니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반대편에서 불을 뿜고 있는 핸드폰 한 대.

아.

한동안 핸드폰 없이 살았다 보니 잠시 망각해버렸다.

오는 길에 시원하게 거금을 주고 산 마이 스윗 스마트폰을 말이다.

엉금엉금.

핸드폰 앞까지 기어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름 없이 번호만 찍혀 있는 발신자.

당연한 일이었다.

옛날 핸드폰에 있던 전화번호부를 옮겨 오긴 했으나 애초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숫자였으니까.

"누구세요?"

감히 내 단잠을 방해하다니.

혼쭐을 내줘야겠다 생각하며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 어? 받았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질이야! 라고 하려던 참이었지만.

전화 너머로 들려온 앳되고 귀여운 목소리에 조금 전의 계획은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누… 누구세요?"

사실상 이성의 전화를 받아보는 건 회귀 후 처음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정자세를 한 뒤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를 받았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한차례 사과를 한 후.

# 안녕하세요, 백운 님! 저 전수희에요!

"응…?"

찹쌀떡…?

해맑게 자신을 전수희라 밝힌 목소리에.

슥.

핸드폰을 떼내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였다.

* *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대산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는 전수희.

전수희가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 잔 하셨네.

새벽 공기를 타고 은은한 알콜향이 풍겨왔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콜의 힘을 빌려 한 전화인 듯했다.

"번호는 대산에 제출하셨을 때 멋대로 저장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업무 때문에 제출한 번호를 마음대로 저장한 게 김대석이었다면.

바로 뺨을 날린 뒤 머리채를 잡아 강가로 처박아 버렸을 테지만, 앞에 있는 건 전수희였다.

찹쌀떡은 킹정이지.

"사과 안 하셔도 돼요. 이 시간에 청라에는 무슨 일이에요?"

평일 새벽 1시였다.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다음날 출근을 위해 취침했어야 하는 시간대.

더군다나 대산은 서울 한복판에 있기에 전수희는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됐다.

"아! 부모님이 청라에 계시거든요. 내일 휴가라 잠시 왔어요."

"오… 휴가도 사용 가능하군요."

처음 대산에서 전수희를 봤을 때 느낀 건 더럽게 바쁘다는 것이었다.

돈을 아무리 줘도 저런 업무 강도라면 못하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상사는 다름 아닌 최리아였다.

불… 불가능해.

휴가의 휴자도 꺼낼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음."

휴가란 말에 전수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영원한 휴가가 되기 직전이지만요."

동시에 수심이 깊어진 걸 보니 술을 들이킨 이유가 이거인 듯했다.

그나저나 영원한 휴가라니.

짤리기라도 한 걸까?

"아마 대산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방금 만났기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상태로 시작되려는 이야기에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좀 걸을까요?"

"아… 네!"

공원의 호숫가를 걸으며.

전수희가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난리가 났던 회사가 어느 정도 복구가 되었거든요. 그래서 일상 업무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는데."

그때였다고 한다.

직속 상사인 최리아가 전수희에게 회사를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 것은 말이다.

"너무 갑작스러웠어요. 그냥 똑같은 하루일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다른 회사의 자리를 알아봐주겠다며 얘기를 꺼냈다는 최리아.

너무 놀라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탓에 별다른 질문은 못 하고 생각해보겠다는 대답만을 한 채 빠져나왔다고 한다.

나였으면 옳다구나 하고 때려 쳤을 거 같은데.

술까지 들이키고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까지 한 걸 보면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처음엔 그냥 왜지…? 라는 의문뿐이었다가, 왠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척.

걸음을 멈추고 호수의 난간에 기댄 전수희.

호수를 바라보며 전수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과분한 자리에 있었구나… 라는 생각요."

"…?"

"백운 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개방한 능력은 진짜 보잘 것 없거든요. 회계 업무에 약간 도움이 되는 정도죠. 그런데 위치는 대산의 홍보 팀장이고요."

슥.

날 바라본 전수희가 서글픈 얼굴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주제에 비해 너무 과한 위치죠? 문득 깨닫게 됐어요. 능력도 없는 저 때문에 최리아 실장님이 지금까지 많이 곤란해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동그란 안경 너머의 땡그란 눈.

약간이지만 눈물이 맺혀 있는 눈을 보니 이제야 드링킹의 원인을 명확히 알 것 같았다.

전수희가 쓸데없는 자책이 심한 캐릭터구나 하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뭐 제가 그 독사녀… 아니지, 최리아 실장님은 아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물어본 건 아니지 않을까요?"

"네…?"

"아니 그분이 어디 보통 사람이에요? 수희 님이 진짜 앞길에 방해가 되고 도움이 하나도 안됐으면 옛날에 나가라고 했겠죠. 생각해 봐가 아니라 당장 짐 싸서 나가!! 하면서 책상 빼버렸을 거 같은데."

"네에? 최리아 실장님은 그런 분 아니… 푸흡."

최리아를 변호하려다 전수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반박하기에는 내가 너무 날카로운 묘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 전수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딱히 수희 님을 위로하려는 건 아니고요."

히메지 성으로 향했을 때를 떠올렸다.

위험에 쳐한 상황에 자신보다는 전수희를 먼저 챙겼던 최리아였다.

그 밖에도 평소 전수희를 끔찍이 아낀다는 게 꽤 티가 났었고 말이다.

"최리아 실장님은 수희 님이 걱정돼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요? 히메지 성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죽을 뻔했잖아요."

애초에 스타일을 봤을 때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생각해보라고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마음속엔 걱정이 한가득이더라도 이런 쪽으론 서툴다 보니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한 것일 터.

"…."

아무 말도 없는 전수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수희 님은 어떠세요?"

"네…? 어떻냐니… 뭐가요?"

간단하게 뭐라고 말하면 될지를 잠시 고민한 후.

눈을 땡그랗게 뜬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전수희를 응시했다.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 않으세요?"

171화. 평범이여 안녕

휘적휘적.

점점 멀어져가는 전수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30분 전까지만 해도 완전 죽상이었던 전수희였지만.

지금은 나름 힘차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부러울 때는 있었어요.

조금 전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대한 전수희의 대답이었다.

질문과 대답 사이에 약간의 텀이 있었던 걸 보면 나름대로 고민을 한 모양.

- 사실 무섭거든요. 죽을 뻔한 경험과 앞으로 또 이런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건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면 그 상황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것.

거기다 전수희는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상황을 반전시킬 힘이 없었다.

전적으로 상황의 흐름에 자신의 목숨을 맡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게 얼마나 무력하고 무서운지는 나도 잘 알지.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회귀하기 전에 뼈저리게 느낀 감정이었다.

소중한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걸 지켜만 볼 수밖에 없어 분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는 걸 두려워하며 숨어있을 수밖에 없는 복잡한 감정.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 그래서 부러웠고 고민도 됐어요. 아무리 데몬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마음만 먹는다면 개방 이전처럼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종말의 날 이후에는 얘기가 달라지지만.

적어도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자 한다면 옛날 데몬이 없던 시절처럼 살 수 있었다.

번화한 도심가는 이번 로튼 사태를 제외하면 아무 사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유지가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 부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위험하긴 해도 지금 대산에서 지내는 게 너무 좋고 즐겁거든요.

여기까지 말한 후 전수희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었다.

아마도 힘들지만 즐거운 대산에서의 생활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 ….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는 전수희를 향해.

최리아에게 가서 방금 한 말처럼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권했었다.

적어도 내 판단엔 최리아 역시 전수희가 그만두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그 성격을 감당해.

아무리 봐도 전수희뿐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한 달도 못 버티고 도망갈 게 분명했다.

슥.

시야에서 완전히 작아진 전수희를 뒤로하고.

몸을 돌려 호숫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감사합니다! 내일 당장 가서 말씀드려봐야겠어요!

기분 전환이 빠른 전수희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손을 흔들며 사라진 전수희.

스윗 마이 홈에서의 꿀잠을 방해한 죄는 몹시 크지만.

찹쌀떡이니까 봐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호숫가로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잘게 부수어 반사 시키며 호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 그런데… 백운 님은 어떠세요?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적 없나요?

어느 정도 멀어진 거리에서 전수희가 물어온 것이었다.

예상 외의 질문이라 대답을 하는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지만 말이다.

평범한 삶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평범을 어느 범주로 정의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일단 회귀 후의 내 삶이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응?

그렇게 평범이란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을 때.

환하게 밝혀져 있는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 운명인가.

단잠의 중간에 깨어버려서일까.

정신이 무서울 정도로 또렷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 봐야 잠도 안 올 듯한 상황.

저벅.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부스럭.

편의점에서 사온 캔맥주와 오징어 다리가 든 봉투.

봉투를 소중하게 쥔 채 철골로 발을 디뎠다.

청라에서 세우고 있는 최고층 빌딩의 공사 현장.

빌딩 꼭대기엔 공사에 사용 중인 크레인이 있었다.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단 말이지.

액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청명한 밤하늘 아래, 주인공이 공사지의 크레인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보는 장면.

평범한 몸이었어도 할 수 있는 일이긴 했으나 시도하진 않았었다.

그 만화에서의 느낌이 살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처럼 크레인 위에서 바람을 즐기긴커녕 혹여나 떨어져 죽을까 온 신경이 다 쏠렸을 터.

탓.

지금은 떨어져 죽을 일은 없기에 큼지막, 큼지막하게 도약해 위로 올라갔다.

어느새 도달한 옥상 크레인의 끝.

오우.

떨어져도 안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약간이지만 오금이 저리는 엄청난 높이였다.

거기다 몸의 지탱을 어렵게 만드는 바람까지.

아무 능력 없이 이런 높은 곳에 올랐다면 심장마비로 먼저 갔을지도 모르겠다.

부스럭.

하물며 그 위에서 오징어와 캔맥주를 먹는 건 더 미친 짓이지만.

치익!

미쳤다 생각하고 일단 캔맥주 한 캔을 땄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거품이 솟아오르는 맥주에 입을 가져갔다.

꿀꺽!

"크으으흐!"

목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느껴졌다.

휘이이.

동시에 불어와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과 무수한 빛들로 반짝이는 도심가의 풍경까지.

"죽이는구만."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만화 주인공이 느꼈던 것 이상으로 만족감이 느껴졌다.

질겅.

급상승하는 만족감을 느끼며 오징어 다리를 입에 물었다.

맥주도 들이켰고 바람도 즐겼으니 전수희가 물은, 머리로 침투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적이 없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때였다.

평범 좋지.

듣기만 해도 평화로워지는 단어였다.

일상에 녹아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살아가는 것.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여유롭고 사람 향기 물씬 풍기는 삶이었다.

나는… 정반대지.

평범과는 거리가 먼,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전투의 연속인 삶.

전수희가 물어본 것도 내가 이러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하고 많은 싸움을 이겨냈더라도 궁극적으론 평범한 삶을 바라는 이들도 많으니 말이다.

"흐음."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크레인에 올라오는 순간까지도 생각은 해봤지만.

역시.

난 아니야.

잠시 평범이란 단어가 머리를 침투했던 건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저 뜻밖의 질문이라 잠시 침투를 허용했을 뿐이었다.

지금이 좋다.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즐거웠다.

죽을 위험을 겪더라도, 다른 이와 어울려 살지 못하더라도.

남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가족의 형성과 유대감을 만들지 못하더라도.

난 계속해서 위로 향하고 있는 지금이 몹시 즐겁고 행복했다.

….

나도 모르는 사이 입가로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단순히 즐겁고 행복해서 그려진 미소는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작별인가.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삶.

전수희 덕에 우연히 평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지만.

덕분에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난 평범한 삶을.

싱긋.

원하지 않는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낮에 한바탕 난리가 났던 도심가.

싸움이 끝난 이후에 도착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청소부들! 날 밝기 전에 들어가고 싶으면 빨리빨리 움직여!"

국가에 소속된 청소부들이었다.

세척 혹은 복구에 관련된 능력을 개방한 청소부.

전투로 인해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사방으로 퍼뜨려진 사체의 잔해들을 치우는 역할이었다.

"와… 실제로 보니 더 경이롭네."

청소부 팀장 김경수가 현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눈앞에 놓인 광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예상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까 현장 오면서 보셨잖아요."

출동하기 전 청소부들이 보면서 온 동영상.

누군가 한창 전투가 벌어지던 현장의 하늘을 찍은 영상이었다.

"플라잉 믹서기."

동영상을 보며 온 청소부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누가 한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지만.

청소부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조졌다.

동영상을 본 청소부들의 감상 총평이었다.

하늘과 지상을 날아다니며 데몬들을 갈아버린 청색 수리검.

그 덕에 도착한 현장엔 말도 안 되는 범위로 데몬의 사체가 흩뿌려져 있었다.

"팀장님, 그냥 천천히 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날 밝을 때까지 못 들어갈 거 같은데."

"…."

평소라면 조용히 하고 빨리 시작하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이건 호통을 치기에도 참으로 미안한 현장이었다.

"에혀."

대답 대신 한숨을 푹 내쉬는 김경수.

김경수가 싸움의 중앙이었던 곳으로 걸어갔다.

호통을 치는 대신 먼저 청소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우리도 가자고."

"얼른 하자! 얼른!"

팀장의 솔선수범에 팀원들 역시 더 투덜대지 않고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능력을 발동하기 시작한 팀원들.

'끝나고 삼겹살이라도 사줘야겠네.'

팀원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김경수가 천천히 능력을 끌어올렸다.

'최대한 덮어야겠군.'

사체가 흩뿌려진 범위가 워낙 광대했기에.

예전처럼 하나씩 주워 담아 말끔하게 치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땅을 갈아엎어 흙으로 사체를 뒤덮는 식으로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드드드---!

능력이 발동되자 김경수의 팔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도로 작업 전엔 먼저 시멘트를 부수고 시작하듯.

다른 팀원들이 덮을 수 있도록 땅을 다지고 연하게 만드는 것이 팀장 김경수의 역할이었다.

구구구구구!

팔을 대자 땅이 진동하며 땅이 부서졌다.

부서짐과 동시에 어느 정도 갈아엎히며 사체의 일부분도 덮어 주는 상황.

'언제 다 뒤집… 응?'

그렇게 한참 땅을 엎던 김경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쌓여있던 흙이 뒤집히며 드러난 공간.

흙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슥.

'으.'

다가가 흙을 치운 김경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으깨져 죽어있는 시체였다.

사람의 몸과 거의 동일하지만 손이나 발을 봤을 땐 데몬으로 보이는 개체.

노네임드급 데몬 머리를 저렇게 만들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반짝.

데몬의 시체 옆으로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는 게 놓여 있었다.

조금 더 몸을 기울여 흙을 치워내자.

'검…?'

험난한 세월을 거쳐온 건지 이가 다 빠진 검이 나타났다.

검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낡은 검이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

툭. 툭.

시체를 옆으로 치운 김경수가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 들었다.

'데몬이 사용하던 검이라니.'

노네임드급이 아니면 데몬이 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꽤 희소성 있는 검이었다.

'상부에서 아주 좋아하겠구만.'

데몬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알고자 하는 정부.

노네임드급 데몬이 사용하던 검이니 정부에게 갖다 준다면 섭섭지 않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기 값은 굳었네.'

김경수가 기분 좋게 웃으며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음…?'

검에서 뜻밖의 걸 발견한 김경수가 눈을 가져다 댔다.

분명 데몬이 사용하던 검이었다.

풍화된 정도를 봤을 땐 인간에게 정해진 수명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사용했을 검.

그런 검의 손잡이에는 낯설지 않은 문자가 적혀 있었다.

'한문…!'

처음엔 데몬들끼리만 쓰는 언어인가 했지만.

분명 한문이었다.

검과 함께 풍화되어 잘 보이진 않지만, 아직까지 무슨 글자인지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형태는 갖추어져 있었다.

스윽.

흐릿흐릿한 한자를 읽기 위해 김경수가 얼굴을 가져다 댔다.

"척…."

부족한 한문 지식을 더듬더듬 되살리며 새겨진 세 글자를 읽는 김경수.

"척사윤."

칸이 오랜 세월동안 사용했던 검.

검의 손잡이에는 한문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척사윤이란 이름이 말이다.

172화. 이가 빠진 검

"… 야!"

음냐.

낯선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 어… 놈아!!"

무척이나 화가 난듯한 목소리였다.

누구야?

"미친놈아!!!"

미친놈이라니.

감히 누가 스윗 마이 홈에서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고 있단 말인가.

침입자를 단숨에 처단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떴다.

"엥."

엥이란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눈을 떴을 때 보여야 하는 건 낮은 층고의 천장일 터인데.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건 점점 밝아지는 중인 맑은 하늘이었다.

좋구먼… 이 아니지.

훽!

조금 전부터 소리가 들려오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시뻘개진 채 나를 향해 소리 지르고 있는 아저씨들과.

부스럭.

옆에 놓인 수많은 맥주캔들과 오징어 봉다리까지.

미… 미쳤어!

순식간에 상황 파악이 끝난 뒤 머리를 쥐어뜯었다.

약간씩 올라오는 취기와 선선한 바람에 못 이겨 잠에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일본에서 불꽃놀이를 보고 쳐자버린 것부터 잠귀신에 씌인 게 분명했다.

"야이 미친놈아! 당장 안 내려… 어! 어!"

놀란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소리 지르던 아저씨들이 황급히 손을 올렸다.

"가만히 있어! 위험해!"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위치인 만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아저씨들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아… 알겠으니까 일단 건너와!"

"알겠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후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띠링.

구독 서비스를 요청해놨던 국가직 헌터 어플에서 알림이 울렸다.

1급 기밀정보까지는 무리겠지만 공개해도 될만한 정보는 곧장 알려주는 편리한 서비스였다.

뭐지.

건너가기 전 핸드폰을 들어 알림을 확인했다.

청소팀이 나와 기태랑이 싸웠던 장소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알림이었다.

뭘 발견했다는 거야.

별거 없을 텐데.

그렇게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며 기사를 읽어나갔다.

저벅.

크레인과 이어져 있는 공사 현장으로 걸어가는 채로 말이다.

!?

우뚝.

기사의 중간 지점.

# 검의 손잡이에는 한문으로 척사윤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뜻밖의 이름에 걸음을 멈춰버렸다.

검의 손잡이에 적혀 있었다는 이름 세 글자.

척사윤.

당연히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앞에 적혀 있는 성은 낯선 성이 아니었다.

막무가내에 가까운 추측인 건 알겠지만 어디 척씨가 흔한 성이던가.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필요해.

아직 이번에 대산에게서 받아온 자료를 검토하진 못했지만.

자료만 검토한다고 해서 눈에 띄는 증거가 나올 확률은 희박했다.

그밖에 잡을만한 지푸라기가 존재한다면 어떻게든 끄댕이라도 잡아야 했다.

아니 근데 이 데몬새끼가 왜 이런 검을 가지고 있던 거지?

기사를 보면서도 의문이었다.

칸은 분명 데몬이었다.

얼마나 산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아온 녀석일 터.

그런 녀석이 어떻게 사람의 이름이 적힌 검을 가지고 있는 걸까.

크으.

그때 뺏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의미 없는 후회인 걸 알았지만 내 손에 맞닿아 있었다 보니 아쉬움이 남았다.

손잡이에 저런 게 적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네.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대는 놈에게 잠깐 손잡이 좀 보자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거기다 로튼에게 신경 쓰느라 칸은 안중에도 없었으니 이러나저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척사윤의 이름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한 일.

슥. 슥.

결과론적인 아쉬움을 뒤로 하며 기사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 김경수 팀장에 의해 발견된 검은 헌터 중앙처에서 보관하고 있다.

좋았어.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비광과 기태랑을 만나러 가며 몇 번 갔었기 때문이다.

# 오늘 점심 이송팀에 의해 국가 데몬 연구소로 옮겨질 예정이다.

어허!

내 검을 어디로 옮겨!!

나의 것을 마음대로 옮겨버린다는 글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에 박혀 있을지 모르는 데몬 연구소로 옮겨지기 전에 가져와야 했다.

"어이! 진정하고 어서 이리와!"

아까부터 쉬지 않고 날 부르고 있는 아저씨들을 바라봤다.

내가 잘못한 건 명확하니 웬만하면 건너가서 욕도 좀 얻어먹고 꿀밤도 몇 대 쥐어박힐 생각이었는데.

해야 할 일이 생겨버렸다.

"선생님들! 정말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멋대로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넨 후.

"그럼 이만!"

크레인 밑으로 몸을 날렸다.

* * *

띠리리-- 띠리리-- 뚝.

비광 님도 안 받네.

호다닥 달려 도착한 헌터 중앙처.

일단 달려오고 봤는데 막상 도착하니 조금 막막했다.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비광과 기태랑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는 상황.

어제 일의 수습으로 워낙 바빠진 둘이다 보니 무리도 아니었다.

흐음.

점심이 가까워진 시간.

북적이고 있는 중앙처를 바라봤다.

어쩐다.

기태랑이나 비광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불가능했다.

기사대로라면 한두 시간 이내에 검이 이송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송되면 피곤해질 거 같은데.

국가 조직이 어떤 형태로 얽혀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이 다른 부서로 이관되는 순간 지금보다 훨씬 더 피곤해질 거란 확신이 들었다.

중앙처에서야 기태랑과 비광이 있으니 어느 정도 쉽게 넘어갈 일도 타 부처에서는 아닐 수도 있었다.

저벅.

마냥 이러고 있을 수 만은 없었기에.

정면에 보이는 접수대로 걸음을 옮겼다.

에잉!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비광과 기태랑을 만나러 왔을 때마다 안내해주던 직원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태인이란 이름이 적힌 명찰을 확인한 후 인사를 건넸다.

이미 많은 사람을 만나서인지 영혼이 사라진 듯한 눈의 이태인.

이태인이 고개를 약간 까딱이며 입을 열었다.

"네, 어떻게 오셨나요?"

"전 국가직 헌터 백운이라고 합니다."

"헌터 백운 님이요, 잠시만요."

타다닥.

앞에 놓인 키보드를 두들기는 이태인.

아마도 내 신분을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피식.

…?

검색을 마친 듯한 이태인의 입가로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뭐지? 비웃은 건가.

저 미소에 어떤 의미가 담긴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의미에서의 미소가 아니라는 건 세 살배기 아이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전 5급 헌터 이태인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새끼 봐라.

긴가민가한 미소에 욕을 아끼고 있었는데.

짧아진 말까지 보니 확실한 것 같았다.

내가 10급 헌터라는 걸 확인한 뒤 깔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 발견된 검 때문에 왔는데요."

일단 이태인의 반응을 뒤로하고 걸어오며 준비해뒀던 말을 건넸다.

난 어제 전투에 1급 헌터 기태랑과 참여했던 헌터이며 밤에 발견된 검에 볼일이 있다는 솔직한 이야기였다.

"…."

예상대로… 보다 심하네.

물론 해맑게 웃으며 검까지 안내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약간의 의심을 받으며 검증 절차가 필요하겠지 정도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태인의 반응은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풉… 푸하하!"

말을 들은 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이태인이.

대놓고 뒤로 넘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긴 하겠네.

한국에서의 10급 헌터는 헌터라 불리기에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보통 인형 눈 붙이기나 실뜨기 같은 소일거리를 하는 이들이 배치되어 있는 게 10급 헌터였기 때문이다.

"10급 헌터가 노네임드급 데몬과 싸웠다고요!? 하하하!"

그런 10급 헌터가 1급 헌터인 기태랑과 함께 노네임드급 데몬과 싸웠다고 하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 새끼 싸가지 없네.

이해는 되지만 이태인의 반응이 옳다는 건 아니었다.

10급이란 숫자를 보자마자 띄운 조소나 대놓고 웃음을 터뜨리는 꼬락서니는 아무리 봐도 잘못되었다.

"돌아가세요. 10급이라서 중앙처가 얼마나 바쁜 곳인지 모르나본데, 마을에 처박혀 있는 헌터 동사무소와는 격이 다른 곳입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이태인이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냉큼 꺼지라는 제스쳐였다.

흠.

이 새끼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덜컹.

옆에 있던 문이 열리며 특이한 제복을 입은 대여섯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생긴 기다란 철제 박스와 함께였다.

검이다.

박스를 열어본 건 아니었지만 확신이 들었다.

제복 옆에 채워진 완장엔 기사에서 봤던 데몬 연구소란 명칭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벅.

"어? 잠깐!"

내가 휙 몸을 돌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태인.

그러든 말든 상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

어느 정도 다가가자 맨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길을 막아섰다.

중앙처 건물 안이라 별일이 있겠냐마는 낯선 이의 접근을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혹시 옮기고 계신 게 어제 발견된 검 맞나요? 손잡이에 척사윤이라고 적힌."

더 이상 다가갈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멈춰선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흰 국가 데몬 연구소의 이송팀이며 헌터 중앙처로부터 검을 이관받았습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말끔한 설명에 감사 인사와 함께 검을 힐끗 바라봤다.

역시 빛은 안 보이네.

빛을 가지고 있었다면 칸이 들고 있을 때부터 보였을 터.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검에선 어떠한 빛도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단서가 될 수 있는 검이니까.

가져가야겠네.

물론 지금 가져갈 건 아니었다.

아무리 검이 필요하더라도 중앙처 건물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으니까.

상자 안에 든 게 검이란 건 확인했으니.

밖으로 나가 기다릴 생각이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검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타이밍을 말이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는 찰나.

꽈악.

왼쪽 어깨로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당신 뭐냐고!"

어느새 쫓아와 어깨를 붙잡은 이태인이었다.

"뭐야 저거? 왜 저러지?"

"무슨 문제 생겼나 본데."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그새를 못 참은 이태인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지딴에는 최대한 세게 붙잡은 채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이태인.

너무나 미약한 힘이었던지라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서 이딴 놈 때문에 피곤해질 만한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제 가려는 참이었…."

"무슨 일이냐?"

말을 끝마치기 전.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오만상을 찌푸렸던 얼굴에서 충성스러운 강아지의 얼굴로 변하는 이태인.

"자… 장관님!"

장관!?

이태인의 외침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 우람한 덩치와 함께 서 있는 강태황 장관.

짧게 자른 백발과 수염, 부리부리한 눈매까지.

뉴스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근엄한 얼굴로 검을 이송하던 국가 연구소 직원들까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졌다.

불타는 듯한 강렬한 눈매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강태황.

이렇게 커질 게 아니었는데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태인쉨!

나중에 꼭 한 대 쥐어박아야지 생각하며 강태황을 바라봤다.

나 역시 최대한 순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이다.

저벅.

그러든 말든 거침없이 내 바로 앞까지 걸어오는 강태황.

엄청난 포스였다.

장관이라는 위치를 떠나서라도 걷는 것만으로도 풍기는 위압감.

꼴깍.

강태황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췄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

스윽.

"…?"

아무 말 없이 날 내려다보더니 몸을 숙인 강태황이 입을 열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자네, 백운이지?"

"예… 예."

싱긋.

뒤이어 장난기 섞인 강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검, 필요한겐가?"

173화. 업로드

조금 당황스러웠다.

TV에서 자주 보긴 했지만 장관 강태황과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내 이름이야 태랑 님이나 비광 님한테 들었을 수 있다 치고.

검이 필요하냐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지만 아니었다.

강태황은 분명 검이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끄덕.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스러웠고 강태황이 내게 왜 이런 걸 묻는지 의도 역시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난 지금 앞에 있는 칸의 검이 필요했고 의도야 어떻든 강태황이 저 검을 내게 줄 수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였다.

싱긋.

"대답이 빨라서 좋군."

순간 장관님한테 고개만 끄덕였는데 괜찮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강태황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숙였던 몸을 들어 올렸다.

스륵.

동시에 어깨를 잡고 있던 이태인의 손에도 힘이 빠졌다.

만나자마자 바짝 얼어야 하는 존재인 헌터부의 장관.

그런 장관이 조금 전까지 무시하던 10급 헌터와 친근한 듯 귓속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다.

저벅.

내게 질문을 마친 강태황이 데몬 연구소 직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이 필요하냔 질문에 묻어있던 장난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관의 위압감을 힘껏 뿜어내는 걸음걸이였다.

권력이 좋긴 좋아.

내가 말을 걸었을 때와는 달리 바짝 얼어있는 연구소 직원들.

직원들은 어째서 헌터부 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기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검 이송의 결제는 누구한테 받은 겐가?"

"조금 전 차관님께 받았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하는 직원에 강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부에 속해 있던 물건 이송은 전적으로 내 결제를 받아야 하네. 차관에게 잠시 대리 권한을 준 상태긴 하지만 말이야."

원래는 신경 안 쓰셨겠구먼.

잠시라고 말했지만 강태황이 차관에게 대리 권한을 준 건 꽤 오래됐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어디 회사에 가서 제대로 일해본 적은 없으나 끝도 없이 밀려오는 안건의 결제는 장관이 하기엔 너무 잦고 귀찮은 일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슥.

어느새 직원으로부터 차관에게 싸인 받은 명령서를 건네받는 강태황.

긴장한 직원들 앞에서 여유롭게 명령서를 살피던 강태황이 입을 열었다.

"이송을 위해 여기까지 와줬는데 미안하게 됐군. 이번 명령서에 대해선 내가 검토를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말과 동시에 강태황이 검이 들어있는 박스를 응시했다.

"저 검의 이송도 잠시 미뤄줬으면 하고 말이야."

"…!"

강태황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로 당혹스러움이 번져나갔다.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 먼 거리를 왔을 터.

강태황은 그런 직원들을 향해 빈손으로 돌아가라 말하고 있었다.

당혹스럽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바로 연구소 쪽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혹스러울 순 있지만 입 밖으로 무언가 의견을 낼 순 없었다.

연구소 측 직원들도 어디까지나 국가에 속한 공무원이었고 눈앞에 있는 건 기관의 정점에 있는 장관이었다.

"천천히 하게나."

강태황에게 고개를 숙인 채 다급히 전화를 거는 직원.

"예… 예. 오늘 이송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굽신거리며 대답하는 직원이 든 전화기.

전화기 너머로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이송을 막는 게 누군데!?

"강… 강태황 장관님이십니다."

# ….

조금 전 소리 지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침묵이 찾아왔다.

더 이상 소리가 새어 나오질 않는 걸 보아 전화 너머의 사람도 강태황이란 이름에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보고 마쳤습니다. 검은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추후 이송은 헌터부에서 연락이 오면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검은 내가 직접 가져가겠네."

흡족스러운 얼굴로 검을 넘겨받은 강태황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뚜벅. 뚜벅.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스럽게 내 쪽으로 걸어오는 강태황.

연구소 직원들이 멍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검과 강태황을 바라봤다.

척.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강태황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자네는 차 한 잔 어떤가?"

"네… 넵!"

하마터면 거수경례까지 박아버릴 뻔했다.

이등병이 사단장을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그럼 가지."

저벅.

날 지나쳐 앞서가는 강태황.

그런 강태황을 따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

이태인은 여전히 바짝 얼은 채 갈 곳 잃은 눈으로 바닥을 보고 쳐다보고 있었다.

툭툭.

그런 이태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준 후.

꽈아악.

"끄억…!"

기죽지 말라는 뜻에서 손아귀에 한차례 힘을 줬다.

"그럼 수고하시고."

* * *

끼익.

"들어오게."

"옙!"

안으로 들어가는 강태황의 뒤를 따랐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구수한 커피 향기가 풍겨오는 방이었다.

여기가 장관실인가.

예상과는 많이 다른 방이었다.

머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장관이란 자리는 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위직.

왠지 그런 사람의 방은 모든 게 질서정연하고 먼지 한 톨 없는,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방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 앉게."

"예."

안내해준 자리에 몸을 앉힌 채 차를 준비하는 강태황을 바라봤다.

장관실에 들어온 강태황의 손에 칸의 검은 들려있지 않았다.

- 이삼일이면 가져갈 수 있을 걸세.

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이미 헌터부에 속한 검을 마음대로 이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 강태황.

최대한 빠르게 이관 절차를 거쳐 검을 건네주겠다고 강태황은 말했었다.

이렇게 꽁으로 들어오는 게 어디냐.

강태황이 아니었다면 연구소로 향하는 직원들을 털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걸렸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국가를 상대로 첫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거다 보니 최대한 지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탁.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앞 테이블로 하얀 김이 올라오는 커피가 놓였다.

으음.

믹스커피 스멜.

익숙한 향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게 제일 고급스러운 거라서 말이야."

"하하… 재료가 중요하겠습니까, 누가 탔느냐가 중요하죠! 허허!"

"그런가! 하하하!!"

분위기를 밝혀 주는 웃음이 오가고.

강태황이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얘기 들었네, 이번에 기태랑과 비광이랑 함께 싸웠다고."

"네 하하… 그냥 옆에서 조금 거들었습니다."

거들었다는 말에 묘한 미소를 머금는 강태황.

"겸손 차릴 필요 없네. 데몬들을 갈아버린 수리검의 주인이 자네인 건 다 알고 있으니까."

강태황을 따라 나 또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나 역시 강태황이 모를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어떤 말이 이어질지 짐작이 갔기에 방향을 조금 틀어볼까 싶어 건넨 말이었다.

정작 강태황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기태랑이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

"…."

이번 말에 대해선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강태황에게 구태여 겸손을 차리거나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탁.

잔을 내려놓은 강태황이 작은 한숨과 함께 날 응시했다.

"헌터부의 장관으로써 모든 헌터 한 명 한 명이 소중하지만… 특히 기태랑과 비광, 그 두 녀석은 내게 있어 무척이나 특별하다네."

들은 적이 있었다.

강태황과 기태랑, 비광은 국가 헌터부로 맺어지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데몬과 처음 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였지. 그러던 게 어쩌다 보니 1급 헌터와 장관인 사이가 됐고."

한 템포 쉰 강태황이 말을 이어나갔다.

"기태랑과 비광은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기둥이지만, 동시에 강태황이라는 인간의 버팀목이기도 하네."

이거 또 머쓱해지겠구만.

왠지 모르겠지만 짐작가는 강태황의 다음 행동에 미리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네가 기둥을 지켜줬기에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네."

스윽.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거구의 강태황.

그런 강태황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랑 님은 제게도 소중한 분입니다."

슥.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진심을 전달함과 동시에 머쓱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 * *

그날 밤 저녁.

백운이 강태황과 덕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

인터넷은 어제 올라온 한 동영상으로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 콰가가가가가!

믹서기 마냥 하늘과 지상을 날며 데몬을 쓸어버리는 청색의 수리검.

갑론을박의 중심엔 익숙한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 저거 무기왕입니다.

갑의 주장이었다.

말도 안 되는 화력으로 데몬을 갈아버리는 수리검이 무기왕의 것이라는 주장.

@ 뭘 봐서 무기왕이에요? 새로운 헌터 같은데. 뭐만 나오면 무기왕이라고 하네.

을의 주장.

을에 속한 사람들은 항상 불만이었다.

무기왕의 등장 이후 자신들이 응원하는 헌터들이 완전 찬밥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무기왕이다!

꾸준히 영상을 올리지 않으면 묻혀버리는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무기왕의 영상은 올라왔다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나버렸다.

국가 기관에서 관리하는 한튜브에 올라오는 만큼 별다른 편집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저 쭉 녹화한 영상이 올라왔을 뿐인데도 항상 이슈 몰이와 함께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해버리는 무기왕.

@ 또 다른 튜브 헌터들한테 피해주지 말고 괜한 주장 펼치지 마세요.

@ 뭐라는 거야. 피해는 무슨 피해? 영상이 딸리니까 인기가 없는 거지. 죄 없는 무기왕 탓을 하네.

"음."

무기왕이라면 빠질 수 없는 찐팬.

집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송유빈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저거 무기왕 확실합니다.

무기왕을 옹호하기 위해 막무가내 채팅을 친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무기왕의 영상을 빠짐없이 수십 번 봐왔던 송유빈인 만큼.

무기왕이 영상에서 사용했던 기술들엔 누구보다 빠삭했다.

@ songsong? 저건 또 뭐야.

@ 지난 영상들 봐보세요. 무기왕이 사용했던 푸른색 비늘과 수리검. 그게 합쳐진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나.

송유빈이 을 쪽 사람들의 신경을 살살 긁으며 코웃음을 쳤다.

누가 보든 무기왕의 능력이었다.

처음 무기왕을 세상에 알렸던 빛의 탄환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로카를 보내버렸던 푸른 비늘과 수리검만으로도 강력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몰라. 바보들이.'

# 콰가가가가---!

'그런데 진짜 미쳤네.'

동영상을 다시 돌려보며 송유빈이 혀를 내둘렀다.

무기왕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믹서기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엄청난 범위로 지나가는 길을 깨끗하게 만들어버린 청색의 수리검.

주인이 보이지 않는 수리검은 그 많던 데몬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마술을 만들어냈다.

'어디까지 강해지려는 거야, 대체.'

송유빈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운 고갯짓을 하는 사이.

띠링.

송유빈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 선배! 무기왕 동영상요!

'응? 무기왕?'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무기왕은 낮에 있었던 전투에 참여한 상태.

이렇게 짧은 텀을 두고 동영상이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기왕이 촬영한 게 따로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튜브로 접속한 송유빈.

'…?'

한튜브 메인엔 아무런 영상도 올라와 있지 않은 상태.

무기왕의 동영상이 올라오면 언제나 메인 배너였다. 

배너에 없다면 안 올라왔다는 것.

# 한튜브에 없는데?

# 한튜브 말고 뮤튜브요!

'잉?'

갈수록 의아해지는 소식에.

송유빈이 뮤튜브로 장소를 옮겼다.

174화. 진짜 혹은 가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