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9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1)

그렇게 내가 막 빛무리에 휘말려 던전 밖으로 나오고 있을 때였다.

[김세균 님께서 29단계 게이트, '광신도의 신전'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히자즈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히자즈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한 번 평정 메시지가 떴을 때,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김세균 님께서 29단계 게이트, '타락한 자들의 신전'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히자즈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히자즈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게다가 게이트의 이름이 바뀌었다.

메카에 모인 한 늙은 이슬람 율법학자가 외쳤다.

"신의 뜻이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이는 광신과 맹신을 일삼다가는 타락한다는 것을 알라께서 몸소 보여준 것이다! 갑자기 이런 메시지를 보내신 게 무슨 의미겠는가! 저 시아파의 무리들이 저지른 행동을 징치하시려 함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이.

"맞다! 그의 말이 옳다!"

"알라는 위대하시다!"

"우리는 알라의 뜻을 받들어, 저 타락한 자들을 토벌하여야 한다!"

"맞다! 맞다!"

"옳다!"

뭐야 저거 무서워.

이 동네에서 게이트 한 번 잘못 클리어했다가는 거의 중동전쟁이라도 내겠는데.

놀라운 건...

어떤 경찰도 그걸 제지하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음, 제지했다가는 그게 더 문제인가.

이미 제지할 수 없는 흐름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어떻게 빠져나가지?

"어이."

"선배님."

최강이 그 특유의 거구로 무심하게 길을 열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길이 열리는 기적!

그의 뒤로 헐레벌떡 사우디 경찰들도 달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소요 탓에 방출 지점을 늦게 파악해서!"

"아닙니다. 가시죠."

클리어를 했는데 이렇게까지 내게 관심이 안 쏠리는 건 또 오랜만이네.

뭔가 불판을 열어버린 기분이긴 한데.

뭐, 알아서 하겠지.

내가 자의적으로 공략한 것도 아니고 부탁받아서 한 거니까...

**

메카의 상황이 워낙 복잡했기에, 바로 인근 대도시인 제다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루 정도 지났을 때, 왕세자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함박웃음을 가득 지은 채로.

"김 헌터가 왕국을 구하는구려. 고생 많았소이다."

... 제가요?

"과, 과찬이십니다."

"아니오. 과찬이 아니외다. 사실 왕가의 상황이 영 말이 아니었소. WDDO의 미가맹으로 인한 열강의 횡포는 겪어보지 않은 국가들은 모를 테지."

우리나라도 아마 겪어봤을걸?

그때 거의 '검은 일주일' 수준이었지.

WDDO 미가맹 선언으로 인한 경제 제재로 한 달 내내 코스피가 떡락했다.

견디지 못한 정부는 바로 백기 투항.

어차피 가입할 거면 왜 강짜를 부려서 주가를 떨어트리냐고 욕 뒤지게 먹었던 전 정부.

그래서 정권이 바뀐 거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결국 강민국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이유는 WDDO 미가맹 때문이네?

그렇다면...

아마 사우디 왕가도 흔들리고 있었던 거겠지.

민심 떡락은 당연하잖아?

하지만 내가 메카의 게이트를 클리어해서 평정 효과를 받았으니, 이제 숨통이 좀 트일 거다.

평정은 해당 지역의 게이트가 지닌 경제 가치를 최소 20%에서 최대 50%까지 늘려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까.

엄청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구만?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세균 헌터가 게이트를 바꿔놓은 덕분에 많은 걸 얻고 있소. 우리 사우디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득이오."

그런가?

게이트가 바뀌어서 어떻게 됐는지까지는 확인 안 해봤는데.

"정확한 채산성은 검토해봐야겠지만... 해당 단계의 게이트에서 산출되는 금속이 신소재인 것으로 드러났소."

"... 거기 금속이 있어요?"

"갑옷 말이오."

"아."

나는 싹 분해해서 몰랐지요.

... 내 1호기의 단점 아닌 단점이다.

신경 쓰지 않으면 부산물도 못 남긴다는 거.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이득에 불과하오."

그래? 또 뭔 이득이?

"왕가에서 가장 큰 이득은... 국론이 통일되었다는 거요. 외부의 적으로 인해서. 그것 역시 그대의 희생 덕택이니, 내 미안함을 참을 수는 없으나 이득이 되었다는 것 또한 부정하지는 못하겠소."

... 설마 어제 그 율법학자가?

에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우연으로 생각하련다.

"테러리스트로 인해 얼굴을 많이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소?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 괜찮습니다."

누가 들으면 테러리스트한테 죽빵이라도 맞은 줄 알겠네.

아니 소문이 이미 그렇게 도는 거 아냐?

"지금 내가 여기에까지 와서 김 헌터와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를 아시겠소?"

"글쎄요?"

"사실 이 모든 걸 뭉개고 약속했던 보상만으로 끝낼 수도 있소. 게이트가 바뀌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의뢰한 토벌에 의한 결과이니. 그것까지 보상할 필요는 없지."

"... 그렇긴 합니다."

계약서에도 있다.

모든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면책.

이 면책이라는 게 양날의 검이라, 만약 게이트가 안 좋은 쪽으로 바뀌어도 면책이지만, 좋은 쪽으로 바뀌어도 그에 상응하는 이득을 더 챙기지는 못한다.

그래서 심드렁하기도 하고.

지금 심정은... 그래 너 좋겠다. 정도?

"하지만 우리 왕국은, 귀 헌터와의 친선을 유지하고 싶소. 우리 왕국은 넓고, 미답 던전들도 많지. 그런 와중에 그대와 같은 위대한 헌터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뭐, 기분이 상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즐겁게 해야겠구려. 본인은 귀하의 회사인 SG그룹의 헌터들에게 히자즈 지방의 모든 게이트를 개방하려 하오. 물론 이교도나 무신론자는 안 되겠지만. 그대 정도만 되어도 환영이오."

"... 예?"

"3년간 면세 혜택을 포함해서. 이게 본인이 주는 그대에 대한 선물이오."

어안이 벙벙했다.

엄청난 이권이라는 건 알았는데, 정확히 산술적으로 계산이 잘 안됐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세자가 짝짝, 가볍게 손뼉을 치자, 한 여자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아이템... 활인가?

"테러리스트에게 그대의 격에 맞는 정도의 다른 아이템은 없었고... 이 활 정도만이 그나마 가치 있는 물건이었소. 받으시오. 약속대로 그대 것이오."

아, 날 죽일 뻔했던 활이군.

설명이나 좀 보자.

[애드 아스트라]

품격 : 유물급 활

설명 : 별에 닿을 정도로 멀리 화살을 쏘아 보내고자 했던 한 장인의 집념이 창조해 낸 결과물. 실제로 별에 닿을 수는 없지만, 아득히 멀리 쏠 수는 있다.

내용 : 시선이 닿는 지평선의 끝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다. 거리에 비례하여 화살의 위력이 약해지지 않는다.

궁수들이 보면 개사기라고 말할 만한 활이긴 한데...

게이트 안에서 쓰긴 좀 애매하긴 하다.

애초에 게이트 안에서 지평선의 한계 정도로 멀리 저격할 상황이 거의 안 나오니까.

게이트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괜히 '던전'이 아니다.

물론 특이한 기믹들의 게이트도 있긴 하지만 소수였다.

... 그 소수를 내가 죄다 돌고 있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유물급이긴 하니... 가지고 있으면 뭔가 쓸 일이 있겠지.

팔아도 되고.

"자, 그러면 이제 함께 연회장으로 가시겠소? 그대를 위해 많은 걸 준비해뒀소."

"예, 가시죠."

그리고 이어지는 연회에서 나는 두 가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중동 연회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과...

내 입에 중동 요리는 별로 안 맞는다는 걸.

**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야말로 중동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일단 게이트가 바뀐 것부터 교리학자들마다도 의견이 분분해서, 누군가는 신의 계시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냥 우연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북예맨을 점령하고 있는 시아파의 후티와, 하사신 일파가 손을 잡고 사우디아라비아를 국지도발한 거였다.

사우디에서도 바로 군대를 출격하면서 헌터들에게 소집령까지 내렸다.

후티와 하사신도 헌터 총동원.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일단 사우디 쪽의 전력이 더 우세하긴 했다.

하지만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가세해서 자국 헌터들을 지원했다.

그래서 당황한 사우디가 찾은 건 어디일까.

사우디의 구(舊) 우방인 미국이었다.

미국 정부를 찾은 건 아니고...

카이저 코퍼레이션이었다.

일반적인 헌터들은 사람 백정 일은 안 한다. 

그렇지만, 개중에는 모종의 이유로 용병으로 활동하는 헌터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내가 받은 활처럼, 던전에서보다 현실에서 쓰는 게 더 효율이 좋은 무기나 스킬, 혹은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인 거다,

그들이 일하는 회사가 이른바 PHMC(Private Hunter Military Company, 사설헌터군사회사)였다.

헌터 업계의 문어발인 카이저 코퍼레이션답게, 산하에 PHMC도 몇 개 두고 있었다.

사우디 정부는 게이트 이권을 일부 넘기고, PHMC를 동원했다.

각성 시대 이후로 두 번째 열리는 대규모 중동 전쟁의 발발이었다.

과거에는 헌터들의 전반적인 레벨도 낮았기에 헌터의 역할은 제한적이었지만...

이번에 열린 전쟁은 달랐다.

... 라고 제피로스가 말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 정부의 지원이나 다름없지."

"... 그래요?"

"응, 각성 시대가 많이 무르익고 난 다음에는 거의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전쟁이니까. 미국 쪽에서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싶을 테니까."

"전쟁에서의 헌터의 역할이나 전술, 전략 같은 거겠네요."

"응. 미국 국방부에서 만들어놓은 전략전술을 카이저 코퍼레이션에서 의뢰받아서 남의 전쟁에서 시연해보는 거지."

남의 나라 전쟁을 자국 전략전술의 실험장으로 쓰다니.

대체 인간의 악의는 어디까지 심각해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 공략이 이런 대규모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게 즐거울 리 없었다.

약간 침울해 있는 내 등을 제피로스가 툭툭 두드려주었다.

"짜식, 기운 내라. 식칼로 음식 안 썰고 사람 찔렀다고 식칼이 슬퍼해야 하냐? 찌른 놈이 쓰레기인 거지."

사실, 불과 일주일 만에 점차 심각해지는 중동 전쟁의 구도를 뉴스로 보면서 그동안 의욕이 없어서 그냥 쉬었다.

물론 술 담그고 폐기물 처리하는 등의 회사 일은 했지만.

그래도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지.

얻어온 것부터 처리해야겠다.

"선생님."

"엉."

"혹시... 언데드도 팔리나요?"

"... 이건 또 무슨 언데드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아, 그게."

가볍게 설명해주었다.

양도할 수 있는 언데드 소체를 얻었다고.

그걸 들은 제피로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경매에 올려도 수요는 확실하겠네. 그런데 타국에 넘기면 정부에서 싫어할 거 같은데."

"그래요?"

"네크로맨서 육성은 현 정부의 중점 국책사업 중 하나니까."

네크강병. 이런 건가.

하긴, 나 처음에 각성할 때도 들었던 거 같다.

"일단 정부 쪽에 먼저 의사를 물어보는 편이 낫겠는데?"

"네, 뭐 그렇게 하시죠."

정부에서도 편의 많이 봐주는데, 나도 이번 기회에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야겠지.

"내친김에 지금 연락하지. 어, 조 국장. 지금 상의할 게 있는데, 그쪽으로 가도 되나? 이왕이면 장관님도 같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래. 어, 중요한 거야. 어어, 그래그래."

조형빈 국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통화를 마친 제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관리부요?"

"응. 야! 너도 준비해! 리프팅 좀 적당히 하고!"

최강 선배를 향한 제피로스의 잔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국내 각 지방으로 찢어져서 보내진 정부 부처들과는 다르게, 각성자관리부는 여전히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에 있었다.

이유야 뭐, 대부분의 각성자들이 서울에 사니까 그런 거다.

그만큼 현 정부는 헌터들에 대한 우대가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일반인들과 위화감이 들지 않게 잘 컨트롤하는 게 강민국 대통령의 능력이기도 했다.

그렇게 광화문의 각성자관리부로 가니, 조형빈 국장과 각성자관리부 장관, 그리고 차관과 차관보급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음, 너무 판을 키웠나?

"언데드...를 팔고 싶으시다고요?"

"네."

"일단 가능한지의 여부는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니까 팔겠다고 하신 거겠지요. 어떤 언데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50기의 기사.

20기의 신관.

기사는 그렇다고 쳐도, 신관이 특이했다.

언데드 신관은 대체 무슨 능력을 쓰는 걸까?

사우디의 내가 클리어한 뒤에 새로 생긴 '타락한 자들의 신전' 클리어 영상을 보면 답이 나왔다.

내가 거둔 언데드의 열화판 정도로 보이는 지성 없는 언데드 신관들은 기사들에게 버프를 걸어주고, 치료해주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언데드 군단을 지원하는 지원형 언데드인 거였다.

여지껏 마법 공격을 가하는 스켈레톤 메이지와 같은 원거리 공격형 언데드는 있었어도, 지원형 언데드는 거의 최초였다.

그걸 언급하자, 침을 꿀꺽 삼키는 각성자관리부의 이들.

"뭐 아마 아흐마드가 알면... 돈은 문제가 안 되지 않을까요? 참고로 저 아흐마드랑 친합니다."

그렇다고 그 소름 돋는 양반에게 이런 힘을 쥐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 헌터님이 정부에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요?"

"정부에서 사가라는 거죠 뭐."

"... 각성자관리부의 예산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물론 많긴 하지만, 다 용처가 정해진 돈이라는 게 문제였다.

애당초 예산은 남기는 게 아니다.

장관의 말에, 제피로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각성자관리부의 예산을 왜 씁니까?"

"예?"

"네크로맨서, 정부 중점 국책 사업 아닙니까. 왜 국책사업인데요, 유사시에 국방력에도 도움이 된다고 끼워 맞춘 거 아니었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 국방예산이죠, 국방예산. 국방부 돈, 끌어다 쓰면 되겠네."

제피로스의 말에, 장관과 차관, 차관보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이어 제피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피로스를 바라보는 그들의 머릿속은 아마 하나로 일치되지 않았을까.

'천잰데?'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2)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2)

가뜩이나 중동 전쟁의 여파로 각성자의 유사시 병력으로의 전용 가능성이 대두되는 것이 현시점이었다.

각성자관리부에서 국방부의 예산을 끌어다 쓸 명분은 충분하단 거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강민국 대통령도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국방부 쪽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저, 저희 예산이라고 넉넉한 건..."

"차세대 전차 도입 예산이랑 몇 개 더 넣어서 미루면 되는 거 아닙니까?"

"대통령님! 차세대 전차 도입은 중대사항..."

"네크로맨서 전력 확충은 더 중대사항입니다."

국방부장관은 옆에서 깐족대듯 말하는 각성자관리부 장관의 조동아리를 막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차세대 전차야 내년에 생산한다고 해도 어디 도망가는 거 아니지만, 지금 언데드를 확보하지 못하면 해외로 날아갈 겁니다. 계속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최초 클리어 보상입니다."

"내 생각도 같습니다. 미룰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개를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끄응, 저놈의 각성자 출신 내각!'

잠시 고민하던 끝에, 국방부장관이 결심했다.

저놈들이 물귀신 작전으로 우리 국방부를 끌고 간다면...

국방부도 물귀신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주식이 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외침에, 강민국 대통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주식?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지금 SG그룹으로 묶어두긴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오너인 김세균의 지분구조가 한없이 취약하다는 것이죠."

"그렇긴 합니다."

내각의 장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걱정하던 바였으니까.

"만약에라도 정권이 바뀐다거나 해서 다른 이에게 경영권을 넘기기로 결정하면, 속수무책으로 경영권이 넘어갑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위험한 건 사실이고요."

김세균의 지분율은 잘 쳐줘 봐야 전체의 1% 정도.

아무리 상징적인 의미의 오너라고 해도, 5% 정도는 채워야 그래도 안정감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채워주시죠. 연기금 보유분이야 국민들의 연금이니 무리가 있더라도, 개발공사 보유분은 충분히 옮겨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흠.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그 말에, 이번엔 정인현 각성자관리부 장관이 다급해졌다.

던전개발공사를 보유한 부처가 바로 각성자관리부였기 때문이었다.

"대통령님! 그건... 김세균 헌터의 의사를 먼저 물어야... 현금을 더 선호할 수도 있습니다."

"정 장관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현금을 달라고 해도 우리가 먼저 경영권의 안정화를 권해도 모자랄 판 아닙니까?"

국방부장관의 반박에 내각이 다시금 수긍했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흥미진진한 내각의 입씨름.

"던전개발공사에서 나오는 배당수익은 예산의 큰 비중을 차지..."

"우리 예산은 그냥 끌어다 쓸 수 있는 돈이고, 각성자관리부 예산은 뭐 귀히 모셔야 되는 예산이랍니까?"

"권 장관님!"

"정 장관님!"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대통령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진정들 하세요, 진정 좀."

"대통령님, 해도해도 너무해서 그럽니다. 쓸 수 있는 돈을 두고서 타 부처에서 끌어다 쓰는 이런 행태가 어디 있습니까!"

"던전개발공사에서 보유한 지분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그냥 소진해버리면 곤란합니다!"

여기서, 국방부 장관이 결정타를 준비했다.

"하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우리 국방부도 차세대 전차 예산을 미룰 수 있습니다."

뭐지 이놈이? 약 먹었나? 하는 시선으로 놀라 바라보는 각성자관리부 장관.

"그러니 각성자관리부도 일부 희생하시죠."

"희생이라면?"

"일단 던전개발공사에서 보유한 지분을 현 시가의 절반 정도에 우리 국방부에서 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대금으로 김세균 헌터에게 지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국방부에 전부 전가할 수 있었는데, 순식간에 반띵(?) 해야 하게 생긴 정 장관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끼워 맞춘다고 해도, 국방예산은 끼워 맞춘 예산이고, 네크로맨서 관련 예산이라면 누가 생각해도 각성자관리부에서 내는 게 맞았다.

게다가 국방부에서 대승적으로 반이나 부담하겠다고까지 하자, 여론은 순식간에 기울었다.

"음. 합리적인 판단 같은데. 정 장관은 여전히 반대요?"

"... 아닙니다."

정 장관이 깊은 한숨과 함께 수긍했다.

역시 날로 먹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국방부 장관도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뜨고 코 다 베어 가는 건 막았다.

절반만 베였으니, 그래도 지혈 좀 하고 붕대 좀 싸매면 괜찮아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국방부장관이 각성자관리부 장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마주한 자리에서, 거의 불꽃이 튈 지경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서로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

"... 지분요?"

"예, 어떠신지."

조형빈 국장의 말에 흘끗 제피로스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지분 밸류에이션을 얼마나 잡아주냐에 따라 달려있지 않겠어?"

"아무래도 시가보다는 조금 저렴한 선에서 넘기게 될 겁니다."

뭐 나도 지분을 늘리는 건 환영이긴 했다.

개인돈도 쓰고, 차입까지 해서 어떻게든 지분을 늘려놓긴 했는데 그래봐야 1%.

어쩌면 당연했다.

대한민국에 있는 내로라 하는 던전개발회사를 다 모아놨으니...

그걸 다 합치면 얼추 시총이 천조가 좀 안 되는 수준이었다.

기존 대한민국 최대 기업인 성광전자 시총의 2배 가까운 수치였다.

그것의 1%라고 해도 10조.

적은 돈은 아니지만...

오너라는 이름을 달기엔 솔직히 쪽팔리는 수준의 지분이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익 등으로 계속해서 지분을 늘려서 지금은 1.8% 선까지 만들었긴 한데...

5%까지는 늘려둬야 안정적이었다.

"저흰 좋습니다."

"예, 그러면 이제 단가를 정해야 하는데... 사실 성능을 모르는 상태로 그냥 일정 금액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죠."

나도 그게 애매하긴 하다.

어느 정도 성능이 나올지 모르니, 대체 얼마에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거.

그런데 한 번 넘기면 되돌릴 수가 없으니까... 테스트 같은 것도 불가능하고.

"그래서 제안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블라인드 비딩으로 경매에 붙여서 각 개체를 하나씩만 팔아보고, 성능을 테스트해보는 겁니다."

"오."

"성능이 기대치에 미달하면 낙찰가에서 하향하고, 웃돌면 낙찰가로 정부에서 수매하겠습니다. 그 뒤에는 적절한 대상에게 분양하면 되니까요."

분양이라... 

아니, 강아지 고양이도 아니고...

언데드 분양이라니까 낯설긴 한데 분양이 맞긴 하니까.

"좋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역시 강민국 정부.

마음에 든다니까.

**

그렇게...

희대의 언데드 경매가 열렸다.

아는 사람에게서 바로 전화가 온 건 덤이었다.

─브라더! 그런 좋은 게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했어야지! 바로 간다! 한국에서 보자고!

미친놈이 온다.

어지간하면 이 사람한테 낙찰될 거 같긴 한데, 다크호스들이 몇 있었다.

네크로맨서들은 전반적으로 부자다.

정확히는 부자가 아니면 강한 네크로맨서가 되기 힘들다.

언데드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초반 언데드는 약했다.

그 약함을 소위 말하는 '템빨'로 극복하는 게 네크로맨서였다.

비싼 장비 아이템들을 둘둘해주면, 골다공증 스켈레톤도 통뼈가 되는 게 인지상정.

언데드는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었다.

그런고로...

인천국제공항이 난리가 났다.

제각기 화려한 도장의 전용기들 사진이 항덕들을 통해 SNS에 떠올랐다.

─와, 저 해골 도장 비행기 미국 억만장자 다니엘 크루그 전용기 아님?

└맞음. 세균맨 언데드 분양 경매 때문에 왔다는데?

└명동에 로데오 호텔 한 층을 통째로 빌렸대.

└다니엘 크루그 라이벌인 앨리엇 세이지는 바로 옆 호텔을 아예 통째로 전세냈대.

─ㅆㅂ 이게 무슨 돈지랄들이여.

└우리나라엔 좋지.

└이 며칠 사이에 예상 경제 효과가 조 단위일 거란다.

└헌터 엑스포보다도 높은 듯.

─그런데 그걸 주최한 게 세균맨이라는 거지?

└역시 뀨뀨신

└뀨뀨단 쳐내. 일은 세균맨이 하고 칭찬은 뀨뀨가 듣네!

└뀨뀨!

└뀨뀨!

한참 이어지던 반응이.

끝판왕의 등장으로 폭발했다.

─야 속보! 지금 트리아인 전용기 파리에서 떴대!

└그럼 곧 도착하겠네.

└파리에서 방금 떴는데 어떻게 곧 도착하냐?

└그거 트리아인이 던전에서 찾은 아이템으로 만든 유일한 전용기잖아.

└맞아. 공간을 접어서 이동한다던가. 그래서 속도가 마하 10 이상이래.

└파리에서 한국까지 1시간이면 올 듯.

나도 부러워하는 그 유명한 트리아인의 전용기, '에클레어(Eclair)'였다.

프랑스어로 번개라는 뜻.

진짜 번개처럼 날아다니네.

그래도 이 양반, 마중 안 나가면 삐지겠지.

우웅웅. 울리는 진동에 폰을 확인하니.

─브라더, 나 지금 출발해 :) 

마침 톡도 왔네.

강남인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대략 1시간이니...

뭐여, 파리에서 인천공항 오는 시간이랑 비슷하네.

조금 현타가 온다.

저게 끝판왕급 헌터의 삶이구나.

바로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비행기에서 내려서 입국수속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곧 이어서.

VIP 전용 출구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수행원 해골들이 짐을 잔뜩 짊어지고 뒤를 따르고, 앞에는 성큼성큼 명품을 두른 남자가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브라더!"

"오셨어요?"

"이야, 얼굴 까먹겠어. 프랑스 좀 자주 와!"

"하하."

내가 갈 일이 있을까 싶었더니, 이 양반이 직접 한국에 오는구만.

아흐마드와 내가 만나는 장면을, 모여 있던 기자들이 찰칵거리며 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흐마드는 익살스럽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포즈까지 잡아주었다.

"두 분의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우리 관계? 말해 뭐해! 의형제지!"

사방에서 터지는 함성.

아니야, 그거 아니야.

손사래를 치긴 했는데, 곧 아흐마드의 의형제로 매스컴에 박제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

경매가 열리는 일산의 킨텍스에 아흐마드와 함께 헬기를 타고 도착했다.

원래 차를 타고 오려고 했는데, 아흐마드가 본 드래곤을 부른다길래 뜯어말리고 헬기를 수배했다.

이쯤이면 거의 걸어 다니는 폭탄 수준이다.

그 걸어 다니는 폭탄이.

킨텍스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허, 분수도 모르는 양키가 왔네?"

"... 트리아인."

미국의 억만장자 네크로맨서, 다니엘 크루그였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능력으로는 밀려도, 돈으로는 안 밀릴 자신 있거든."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물론이지."

두 사람의 불꽃 튀기는 신경전 사이에서, 한 여자가 내 옆에 나타나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어머나, 무서워라. 저런 무서운 사람들하고는 노는 거 아니에요."

"... 앨리엇 세이지?"

"영광이에요, 헌터 세균 킴."

그녀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네크로맨서이자, 억만장자였다.

"그나저나 다들 기억하고는 있는 거겠죠? 우리가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소체에 경매한다는 거?"

"흥,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이미 사우디 29단계 게이트의 그 몬스터들은 봤다고. 열화된 상태로도 꽤 강력한 버프 능력을 주더군."

"그 절반만 되어도 10억 유로는 베팅할 만하지."

"... 뭐?"

아흐마드의 그 말이, 두 사람에게는 10억 유로까지는 무조건 늘어난다는 말과도 같이 들렸다.

고작 언데드 하나에 10억 유로...

질려버린 두 사람이었지만, 호기를 부렸다.

"그, 그래요. 10억 유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할게요."

"그쯤이야...!"

그들의 대화를 듣는 나도 질렸는데.

문제는...

뒤에 있던 조형빈 국장이었다.

완전히 사색이 된 그의 표정을 보니... 조금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에이, 설마 10억 유로를 넘겠어?

고작 언데드 하나에?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3)

김세균이 쏘아 올린 거대한 공(3)

메인 게임이 시작되기에 앞서, 일단 조금은 관심이 덜한 수호기사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뭐 기사 정도야."

"데스나이트 하위호환이야. 굳이 살 필요 없지."

억만장자급의 네크로맨서들은 굳이 사지 않으려 했다.

그들에게는 제작에 어마어마한 재료를 필요로 하는 초고가의 데스 나이트가 이미 있기 때문.

그러면서도 입찰은 찔러 보는 클라스.

"간지나게 생기긴 했더라고."

... 언데드를 간지로 사는 거냐.

뭐, 그렇다고 해도 무시할 만한 개체는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의 엄청난 제작가를 생각하면, 그 하위호환이라도 대체 가능한 수호기사의 존재는 징검다리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으니까.

탱커는 많을수록 좋다는 '탱다익선'이론도 네크로맨서계에 있기도 하고.

어쨌든, 나름 성황리에 경매가 이루어진 끝에...

"1582억! 더 없습니까? 셋 셀 동안 없으면 이 가격에 낙찰됩니다."

경매 진행자가 망치를 땅땅 두드리고 그대로 낙찰되었다.

낙찰받은 사람은 독일의 던전개발회사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는 네크로맨서였다.

그런 사람치고는 좀 소심해 보였지만.

그리고 계약 조건대로, 그 자리에서 양도받고 성능 시연을 해야 했다.

"라이너스 씨. 맞습니까?"

"예."

"지금부터 양도하겠습니다. 이는 불가역적으로 취소할 수 없음을 먼저 경고드립니다. 동의하시면 최종 양도합니다."

"동의합니다."

이미 돈도 입금받았고, 그에게 수호기사 소체 하나를 양도한다고 속으로 외치자.

['타락한 알로이스의 수호기사' 1기를 소환 자격이 있는, '네크로맨서' '라이너스 하임'에게 양도합니다.]

내 앞에 거체의 수호기사가 나타나더니, 소유권이 바로 라이너스라는 네크로맨서에게로 양도되었다.

"오오오..."

"생각보다 더 멋있는데?"

"하나 장만할 걸 그랬나."

"요새 자금 사정이 넉넉한 모양이지?"

"흐흐, 김세균 테마주 덕분에 많이 벌었지."

...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주변의 대화를 잠깐 듣다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라이너스에게 말했다.

"성능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속도..."

이어서 속도, 공격력의 테스트를 마쳤다.

놀랍게도 어지간한 하급 데스나이트의 속도를 상회했고, 공격력 또한 꽤 뛰어났다.

마지막으로 내구성 테스트.

"내구성 테스트를 맡아주실 분은 제 경호원인 아이언월(철벽) 최강 헌터님과 제피로스 류현수 헌터님이십니다."

제피로스는 워낙 유명했던 데다 최근 복귀했다는 게 다시 알려졌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언월이라는 이명(異名)은 그것만큼은 유명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먼저 제피로스 선생님이 나서서 검에 옅은 검강을 둘렀다.

"찔러 보면 되지?"

"네."

그리고 놀랍게도, 수호기사의 갑옷이 검강을 막아내고 있었다.

오기가 생긴 제피로스가 조금 더 검강의 농도를 짙게 두르고 찌르자, 그제야 스파크를 튀기며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내구성은 중급 데스나이트 정도는 되겠네."

"선배님도 한 번 때려보시죠. 운동 삼아서요."

철벽 최강.

그의 양손에 바즈라가 들리고, 전격을 가득 담은 일격이 수호기사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거대한 타격을 받은 듯 멈칫거리는 수호기사였지만, 쓰러지거나 역소환당하지는 않았다.

"응, 중급 데스나이트 정도 맞네. 이거보다 조금 더 힘주면 못 버티겠다."

그들의 이야기에, 독일 네크로맨서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신났네 신났어.

나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지만.

일단 신체 능력은 하급 데스나이트고 내구성은 중급이니, 하급 데스나이트보다는 우월하고 중급 데스나이트보다는 약간 떨어진다는 건데...

하급 데스나이트만 되어도 제작비가 2억 달러는 족히 호가했다.

중급으로 가면 5억 달러쯤.

그런데 1500억 정도에 낙찰되었으니, 싸게 사 간 거였다.

물론, 이미 성능 검증은 끝났으니, 정부에는 저것보다는 높은 가격에 넘겨야겠지만.

"축하드립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수호기사의 경매가 끝났을 때.

조금 경력이 되는 네크로맨서나 관계자들은 오래전 잊었던 이름을 떠올리면서 최강 선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언월, 맞습니까?"

"그렇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도 악수 좀..."

"저는 사인 좀..."

뭐야, 갑자기 분위기 팬싸인회야? 갑분싸?

당황하여 바라보고 있자니, 제피로스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넌 잘 몰라도, 쟤가 북미에서는 나보다도 인기 많았어. 난 유럽에서 더 먹어줬지."

"... 미국에서 인기 많게 생기긴 했네요."

한바탕 열린 팬사인회를 마친 최강 선배가 돌아오자, 툭 건드리며 은근히 물었다.

"왕년에 먹어주셨다면서요?"

"...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

"다시 던전 공략할 생각은 없으세요?"

"없네."

"단호하시네요."

"어떤 모지리를 지키느라 바빠서."

"켁."

순식간에 모지리 됐네.

"그 모지리랑 같이 던전 공략할 날이 되면, 복귀할 수도 있겠지. 던전 안에서도 지킬 수 있을 테니."

"... 든든하네요."

제피로스, 철벽.

두 과거의 영웅들과 함께 뛰는 던전이라.

벌써 기대된다.

**

그렇게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지나고, 두 번째 경매.

오늘의 메인이라고 볼 수 있는 '타락한 알로이스의 신관' 경매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작부터 생각보다도 더 불이 붙어버릴 기세였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성능을 보인 수호기사 경매가 영향을 미친 탓이겠지.

아흐마드 같은 미친놈은 인간 수행원도 없이 그냥 스켈레톤만 데리고 왔지만, 다른 억만장자 네크로맨서들은 비서를 포함해서 수십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왔다.

이른바 지원팀이었다.

그들은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지원팀과 진지하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까지 경매에 참여하고, 어디서 물러날지에 대한 것인 듯 보였다.

"경매 시작가는 백억 원입니다."

시작가가 무색하게.

"천억."

"이천억."

"삼천억."

세 명의 네크로맨서가 바로 천억 단위로 레이즈를 시작한다.

순식간에 올라버린 가격에, 다른 네크로맨서들은 허무한 표정만을 지을 뿐이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신관이 아니라 수호기사긴 했지만, 그래도 경매에 참여해 볼 여지는 줘야 하지 않나...

"1조."

순식간에 1조 원을 돌파하자.

"내가 말했지? 10억 유로부터 시작이라고."

아흐마드가 호언했던 것처럼. 그 중간의 모든 걸 생략하고...

"1조 5천억."

바로 달려 버린다.

이를 악물고서 따라붙는 두 명의 억만장자.

"1조 6천억."

"1조 7천억."

"2조."

아흐마드가 다시 한번 우수리 생략하고 2조.

그 모습에, 엘리엇 세이지가 백기를 들었다.

"진짜, 남자들이란. 이런 바보 놀음에 더는 따라줄 수가 없네요."

"지갑 사정 얇은 걸 핑계 대지 말라고. 2조 1천억."

호기로운 다니엘의 외침을 격침이라도 하려는 듯.

"2조 5천억."

다시 뻥 튀겨버리는 아흐마드.

아니, 이게 맞아?

너무 과열된 거 아냐?

아무리 내가 돈 버는 거라고 해도 이쯤이면 무서운데.

그 돈에 맞는 성능이 안 나오면 어쩌려고.

다행히도, 다니엘의 표정이 형편 없이 구겨지더니 손을 들었다.

"저런 미친 짓에 동참해 줄 생각은 없어."

"지갑 사정 얇아서 대는 핑계처럼 들리는데?"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다니엘 크루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시, 시끄러워."

"2조 5천억, 더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네! 2조 5천억에 낙찰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감히 축하한다는 말조차 건넬 수도 없었다.

대체 얼마나 오버페이를 한 거야?

"여어, 브라더."

"무슨 돈을 찍어내기라도 하세요? 부업으로 돈 공장 차려놓은 거 아니에요?"

"남는 게 돈밖에 없어서."

거 부럽수다.

그리고 흔쾌히.

바로 2조 5천억을 현금으로 쏴 버린다.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가 그만큼 껑충 뛰어버린 건 덤이었다.

['타락한 알로이스의 신관' 1기를 소환 자격이 있는, '네크로맨서' '아흐마드 트리아인'에게 양도합니다.]

양도받자마자 소환하는 아흐마드.

이윽고 데스나이트도 한 개체가 소환된다.

절로 움츠려들게 만드는 강력한 기세를 내뿜는 데스나이트.

그 정도는 되어야지...

저게 전 세계에서 아흐마드만이 보유하고 있는 언데드 개체인, 초월급 데스나이트니까.

제작 추정가로 100조 원은 들어갔을 거라는 괴물이다.

프랑스에서도 엘릭시르의 판매로 전세계의 돈을 긁어모으지 않았더라면 감히 제작을 시도해볼 수조차 없었을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고작해야(?) 최상급 데스나이트만 보유 중인 두 억만장자 네크로맨서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돈지랄이야, 돈지랄."

"저걸 진짜로 만드는 미친놈이 있었을 줄이야."

"칭찬 고마워."

데스나이트를 필두로 해서, 거의 수백 기에 달하는 강력한 언데드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 관계자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원한다면 서울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는 건 일도 아닐 정도로 강력한 전력이었으니까.

다행히 서울 불바다에는 관심 없는 아흐마드가, 신관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일단 최대 몇 개체에까지 버프를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볼까?"

신관의 몸에서 검은 빛의 기운이 뻗어지더니, 아흐마드의 군단을 향해 적용되었다.

"20개체 정도인가."

많다고 볼 수는 없었다.

"적용 범위는 실망스럽긴 하지만... 얼마나 효과가 좋은지가 관건이겠네. 어디 보자... 오?"

시스템 창을 확인했는지 놀란 눈을 하던 아흐마드가 입을 열었다.

"물리 공격력이 30% 증가했고, 민첩성 등도 30%... 괜찮은데? 내 버프랑 중복도 되니까."

결론은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아흐마드의 데스나이트가 옆에 있던 듀라한을 향해 검을 찔렀다.

파삭! 하고 부스러지는 듀라한의 갑옷.

거의 역소환 직전에까지 이르러 허물어지기 직전의 듀라한을 향해, 아흐마드가 명령을 내렸다.

"치료해 봐."

그러자... 순식간에 수복되기 시작하는 듀라한의 갑옷.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거의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게 진국이네. 돈값은 충분히 하겠군. 고맙다."

웃으면서 순식간에 언데드들을 역소환시키는 아흐마드.

그걸 보던 다니엘 크루그와 엘리엇 세이지가, 내게로 다가와 거의 빌다시피 외쳤다.

"호, 혹시 더 없나?"

"같은 가격에 살게요! 더 없나요?"

그들의 다급함이 조금 이해가 안 되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아흐마드가 내 의문을 설명해 주었다.

"듀라한은 최상급 언데드 개체 중 하나거든. 이른바 네임드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언데드들은 타격을 입으면 술자의 마나만으로 완벽히 수복하는 게 불가능해. 수리를 위해 재료가 필요하지."

"그런데 지금... 재료도 없이 수복해 버렸잖아!"

비명이라도 지르듯 외치는 다니엘.

"일반적으로 제작에 드는 비용의 10% 정도가 수리 비용이에요. 저 듀라한의 제작 비용은 2천만 달러 정도 되고요."

대충 250억 정도 되나.

"조금 전, 치료 한 번으로 저 신관 언데드가 200만 달러를 아낀 거예요."

아흐마드가 으쓱이며 으스대듯이 말했다.

"뭐, 완전 역소환 상태에서 수복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소모되는 비용을 많이 절감할 수 있겠는데?"

하이엔드급 언데드로 계속해서 군단을 유지할수록, 그 유지비용 절감에 지속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사기급 언데드라는 소리였다.

잠깐만. 그러면...

"트리아인, 설마... 초월급 데스나이트에도..."

나와 같은 의문을 동시에 품은 모양이다.

100조 짜리 초월급 데스나이트.

어지간해서는 저 딴딴이가 파괴될 일도 없겠지만, 만약 파괴되거나 타격을 입는다면 수복하는 데 10조 이상이 드는... 걸어 다니는 돈귀신이다.

그런데 그것도 회복이 가능하다면...

"글쎄?"

히죽 웃어 보이는 아흐마드.

이 사람 일부러다.

일부러 초월급 데스나이트에는 실험을 안 한 거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반쯤 죽어가는 조형빈 국장.

그런데 반면에...

이거다! 하는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각성자관리부 장관.

뭐지, 저 양반... 뭔 생각을 하는 거지?

국책 사업(1)

국책 사업(1)

그렇게 수호기사 1500억, 신관 2조 5천억이라는 낙찰가로 희대의 경매가 끝이 났다.

"바빠서 먼저 갈게 브라더. 덕분에 좋은 걸 얻어가네. 고마워."

결국, 승자는 아흐마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각국의 유명 네크로맨서들과 안면을 튼 건 나쁘지 않았다.

"레벨 맞추면 연락만 해. 그쪽이랑 돌고 싶은 던전이 많다고."

"저도 마찬가지에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크루그와 세이지가 전용기로 돌아가며 남긴 말이었다.

뭔가 던전 같이 돌자는 약속이 많아진 거 같은데.

그 외에도, 몇몇 유명 네크로맨서들이 한국에 온 김에 던전 공략도 하고 가는 등의 부수적 경제 효과도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정부와의 협상 정도인가.

가격이 너무 튀어 버려서, 이대로 협상이 진행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2조 5천억 단가 그대로 팔아도 50조다.

그런데 정부 예산이 연간 7백조 수준이었다.

50조면 연간 국방비 전체에 육박하는 많은 돈.

강민국 대통령 집권 이후에 정부 재정 상태가 나쁘지는 않으니 추경이라는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그러면 또 시끄러워지겠지.

가뜩이나 야당에서 정부가 특정인... 그러니까 나를 너무 밀어주는 거 아니냐고 따지고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비록 경매로 정해진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에게 수십조 원이나 되는 정부 예산이 향한다면 말이 안 나올 리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뭐 알아서 하겠지."

표정은 좋더만.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각성자관리부 장관은 한동안 어디로 전화를 걸었다가 사라졌다.

그 때였다.

내 휴대폰도 울렸다.

뭐야, 누구지?

이건 정부에서 받은 비화기라 누가 번호를 알 리가 없는데.

발신자를 보니...

어우. 얼른 받아야겠다.

"예, 대통령님."

─성황리에 경매 마친 걸 축하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그냥 경매 축하하려고 전화까지 한 건 아닐 테고.

─언제 대통령실 한 번 들를 시간이 될지요?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 시간이야 뭐...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내서 쓰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급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예, 무리는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 일정도 없으니 오늘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면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각성자관리부 장관이 그렇게 웃고, 그 다음에 대통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게 우연일까?

제피로스에게 이야기하자 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을 못 잡았다.

"... 깎아달라고 부르려는 걸까요?"

"강민국 대통령 체면에 돈 깎아달라고 사람 부를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그것밖에 생각이 안 나서."

"제안이라고 하니까... 뭔가 제안이 있겠지. 그게 우리에게 이득일지 손해일지는 몰라도."

"... 같이 가주실 거죠?"

"그래, 뭐."

아직까지 이런 결정을 혼자 내리기에는 경험상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제피로스가 대동하면 걱정할 건 없겠지.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통령 관저에 도착하니, 안쪽에서 회의가 이어지고 있던 듯 잠시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까 경매장에서 보았던 각성자관리부의 정인현 장관과 조형빈 국장이 함께 배석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안 보이는 걸 보니 독대하고 있던 모양인데.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 들어와서 앉아요. 류 헌터도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통령님."

모두가 자리에 앉으니, 대통령이 먼저 운을 띄운다.

"이렇게 김세균 헌터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국책 사업 과제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서입니다."

"... 국책 사업 과제요?"

갑자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에 순간 멍해지긴 했는데, 나 대신에 제피로스가 대신 잘 답해주었다.

"어떤 과제인지를 들어봐야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이지요. 정 장관이 약간 급조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꽤 괜찮을 것 같아서."

정 장관의 아이디어라...

아까 웃고 있던 게 바로 그거 때문인가?

"2조 5천억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고급 언데드의 수리가 가능하다고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실제 눈으로 봤으니 뭐.

"정 장관님은 그 신관 언데드를 인수해서, 국영 언데드 수리소를 운영하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 국영 언데드 수리소요?"

뭐야, 생각도 못했던 건데...

쌈박한데?

제피로스 역시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리 굳은 공무원에게선 나올 수 없는 생각이었으니까.

역시 각성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헌터들이 원하는 걸 제대로 알고 있다.

"같은 단가에 19개체 전체를 인수하려면 47조 5천억 원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대금 절반을 국영 언데드 수리소의 지분 50%로 가져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괜찮은 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제피로스가 나서 말했다.

"대통령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그냥 우리 쪽에서 직접 운영해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만."

응? 그러네?

"다를 바가 있지요."

"... 리스크 관리를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예. 정부에서 리스크를 한 번 짊어지는 꼴이 될 테니까요."

무슨 소리지?

내가 못 알아듣는 기색이자 제피로스가 나직이 설명했다.

"우리가 직접 운영하면, 언데드를 양도받을 네크로맨서에 대한 관리 의무도 생기는 거야."

"아."

쉽게 말해서 2조 5천억짜리 언데드를 들고 튀면 무척 곤란해진다는 말.

대신에 정부를 끼고 사업을 진행하면, 일단 절반 정도의 가치를 선금으로 받고, 네크로맨서 관리 의무는 정부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만약 회수할 수 있다면?

'제국 칙령의 내용을 수정한다. 다른 이에게 권속을 양도하고, 양도한 뒤에 내가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을까?'

속으로 중얼거려 다시 사용해 보았더니.

[제국 칙령 내용 : 일시적으로 역소환 상태로 아공간에 보관한다. 다른 이에게 권속을 양도한다. 원소유자의 의지에 따라 양도를 취소하고 권한을 되가져올 수 있다. 양도받은 상대방의 통제력에 따라 권한 회수에 실패할 수도 있다.]

[칙령 효과 지속 : 영구(통제력 250% 적용, 대상의 동의로 지속 시간이 연장됨)]

뭔가 뒤에 실패 조건이 달리기는 했는데...

문제가 없다.

왜냐면 내 통제력은 거의 규격 외니까.

랭커급 네크로맨서들의 통제력이 100%를 겨우 상회하는 수준에서, 내 통제력은 250%다.

말이 안 되는 수준.

어쨌든, 회수가 된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조건이 완전히 달라진다.

"회수가 가능하다면요?"

"... 회, 회수가 가능하다고요?"

정인현 장관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강민국 대통령이 뒷말을 받아 말했다.

"우리가 느끼던 유일한 리스크였고,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네크로맨서 관리의 책임을 진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는데... 만일 회수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아예 판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겠지."

"그 리스크가 해결되었으니, 굳이 50:50으로 나눌 필요도 없죠. 바로 구매하겠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 어차피 각성자관리부에서는 크게 손해볼 일이 없다는 거군요."

제피로스의 말이었다.

이해가 좀 갈랑말랑.

그리고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때,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각성자관리부의 수익성 사업을 위한 자산이었던 지분을 넘기고, 그걸 또다른 수익성자산으로 바꾸는 것뿐일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심지어 SG그룹의 지분은 가치가 많이 올랐으니, 수익 실현에 가깝지요."

지금이야 SG그룹의 규모가 천조 가깝지만, 아마 각성자관리부에서 지분을 인수한 금액은 그 절반도 안 될 거였다.

심지어는 초기 출자 등으로 1/10 가격 이하로 인수한 지분도 널렸을 터였다.

그런 지분 47.5조 어치를 우리에게 넘기고, 언데드를 받아가 국영 수리소로 배당금 이상의 수익이 보장되는 수익사업을 펼치겠다는 거다.

"... 각성자관리부 장사 잘하시네."

제피로스의 말이 내 기분을 대변했다.

정인현 장관이 웃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을."

"그러면 우리는 잠시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얼마든지."

대통령의 허락이 있자, 굳이 나가지도 않고 제피로스가 그 자리에서 앤서블 이어링으로 바로 말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그래요?

─언데드를 쥐고서 장기적인 수익사업을 우리가 직접 진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그 수익사업보다 지분의 상승률이 더 클 거다. 게다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장기적인 수익사업이 아니라 단기적인 지분 확충이잖냐.

─그렇긴 하죠.

애초에 SG그룹의 내 보유 지분이 너무 적어서 생긴 일이니까.

─이쯤이면 정부나 우리나, Win-Win이라고 해도 될 거 같다. 물론 네가 정말 언데드를 회수할 수 있는지에 따라 갈리겠지만.

─가능해요.

─그러면 그렇게 진행하자.

결론이 난 뒤에는 일사천리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일단 수호기사는 개당 4천억에 정부에서 일괄 구매하기로 했다.

이것만 해도 20조 원.

"이걸 미끼로 네크로맨서들을 낚을 겁니다."

명색이 데스나이트급의 언데드다.

무릇 네크로맨서라면 탐낼 수밖에.

정인현 장관의 말에 따르면 수호기사를 분양받는 대신에 정부 기관에서 의무복무 20년, 같은 조항으로 묶어두고 복무를 마치면 조금 저렴한 금액에 완전 불하하는 방식을 취할 듯했다.

회수할 수 없었다면 워낙 리스크가 커서 쉽게 할 수 없는 정책이었지만, 회수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정 장관은 거의 불도저처럼 밀어붙였다.

거기에 47.5조 가치의 신관 19기까지 합하면 얼추 70조원 정도 됐다.

"던전개발공사에서 보유한 SG그룹의 12.3%의 지분 가운데 10%의 지분을 넘기겠습니다."

SG그룹 지분이 현재 시가로는 100조니 거의 30% 할인한 가치에 넘긴다는 소리였다.

제피로스조차도 놀랄 정도로 파격적인 결정.

"괘, 괜찮겠습니까? 야당에서..."

"까짓것, 국감 몇 번 나가지요."

"이 친구가, 간만 커져서는... 국감이 장난인가?"

강민국 대통령의 타박에도, 정인현 장관은 당당했다.

"어차피 SG그룹은 당분간 배당은 줄이고 자사주 매입을 통한 의결권 확보에 치중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랬다.

상법상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SG그룹은 그룹사였다.

자회사끼리 다른 자회사의 지분을 사는 건, 자사주지만 합법적으로 의결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10%까지는.

너무 급조해서 묶어두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재벌 계열사들이 합법적으로 상호 보유한 10%의 자사주조차도 없는 거였다.

경영권을 가진 오너가 회사의 지배력을 늘리기 가장 쉬운 방법인 만큼, 각 계열사가 상호 10%의 지분을 보유할 수준으로 올려야 해서, 한동안 배당은 거의 없을 거였다.

어차피 배당 없이도 올라간 주가 자체가 배당 수준이지만, 한 번 매입한 지분은 수익실현하지 않고 장투하면서 배당 위주의 수익을 보는 던전개발공사에게는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영 언데드 수리소에서 따박따박 들어올 현금이 더 낫겠지.

그걸 이미 파악하고 있는 강민국 대통령이나 정인현 장관은 밝게 웃고 있었다.

"각성자관리부가 너무 부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네만. 허허허."

"많이 벌어야 또 헌터들을 위해 더 많은 정책을 펼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적으로도 그 전례가 없는...

국영 언데드 수리소가 그렇게 출범을 앞두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 자산은.

순식간에 100조가 올라버렸다.

하루아침에.

국책 사업(2)

국책 사업(2)

세간의 관심이 한껏 집중된 김세균의 언데드 경매.

모두가 지금껏 없던 신관 언데드의 말도 안 되는 성능에 경악하고 있을 때.

한 사람만큼은 다른 쪽에 경악하고 있었다.

"아이언월이... 다시 일어났다고?"

"예, 그 거구의 경호원이 아이언월이었습니다. 특유의 한 쌍의 바즈라와 전격을 실은 공격을 보면 확실합니다."

경매에 참여했던 네크로맨서 중에는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소속도 당연히 있었다.

그가 경매의 상황을 카이저에게 고스란히 보고하던 중, 아이언월 최강의 이름도 거론된 것이었다.

"... 알겠네. 그만 가보게."

"예."

네크로맨서를 물리고 나서, 카이저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이언월에 대해서는 카이저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와 같이 합을 이루어 던전을 공략했던 적도 한 번뿐이지만 있긴 했다.

당시에도 카이저는 최강의 위치에 있었지만, 아이언월은 그런 카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있을 정도의 강자 반열에 서 있던 자였다.

어느 순간 없어진 게 문제였지만.

당시에는 헌터 업계에서도 아이언월의 은퇴를 조금 놀라울지언정 크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사 계통 클래스 노쇠화의 첫 번째 케이스로 꼽히고 있었다.

그만큼 상태가 심각하고, 오래되었다는 뜻이었다.

"제피로스 하나라면 일회성이거나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언월은 이야기가 다르지."

비교적 최근까지 현역이었던 제피로스를 치료한 것과, 거의 10년 가까이 은퇴 상태였던 아이언월을 필드로 되돌린 것의 의미는 천지차이였다.

물론, 아직 던전 공략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정녕 희망이 김세균 그밖에 없다는 건가..."

눈앞에 있는 잔을 들어 올리는 카이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크루세이더답지 않은 모습.

어쩔 수가 없었다.

신앙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까.

알코올 의존증 판정을 받았을 때는 헛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소위 말하는 자기관리의 화신으로, 평생 술이나 마약 등으로 문제가 되었던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던 카이저였기에, 다 늙은 말년에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것.

심지어 믿었던 연금술 연구소에서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추출에 실패함. 물질의 정체 역시 파악 불가능.

─이미 연금술적 접근이 들어간 것으로 보임. 

─고등위의 연금술 스킬을 보유한 연금술사의 솜씨.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힐 수준.

김세균에게 그런 연금술사가 있다는 말 아닌가.

세계적으로도 손꼽힐 수준의 고등위 연금술사가 대체 왜 거기 붙어 있다는 말인가?

그런 연금술사는 카이저에게도 없었다.

연금술사가 진짜로 '연금'하는 건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지만.

고등위의 연금술사는 금을 만들지 않아도, 돈을 긁어모을 방법이 넘쳐났다.

그렇기에 대부분이 본인의 회사를 운영하거나, 글로벌 다국적 제약사의 지분을 보유한 임원인 경우가 많았다.

김세균의 연금술사로 추정되는 사람은 딱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저런 고등위의 연금술사가 대체 왜 저런 작은 제약회사의 CTO 자리에 만족하는 거지?

카이저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김세균을 어떻게 설득하는 건 이미 불가능해진 상황이라면.

"차라리 이 연금술사를 포섭해야겠어."

아마 현실을 잘 몰라서 저러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김세균이 자신의 밑에 있는 연금술사의 제대로 된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편이 맞을 터.

어쩌면 이 기적의 술도, 그 연금술사의 솜씨일 가능성이 높았다.

점점 심해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이저가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어, 나다. 지금 당장 서울로 가야겠다. 아니, 김세균이 아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보고서에 적힌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똑바로 외면서.

"임규선... 그게 포섭할 대상의 이름이다."

카이저의 명령이 떨어졌다.

**

강민국 정부의 특징은, 한 번 정해진 건은 불도저처럼 밀어버린다는 거였다.

종종 그게 권위주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결과가 워낙 좋으니...

여론의 눈치나 보다가 우물쭈물하는 정부보다는 훨씬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그 지배적인 평가가 현재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이어졌다.

집권 3년 차 지지율 85%.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정부의 역사를 보았을 때.

아니, 세계 정치사로 보아도 거짓말 같은 지지율이 유지되고 있었다.

집권 3년 차에 지지율이 80%를 넘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손짓 하나로 산을 옮길 수도 있는 극강의 권력이 된다.

그 극강 권력의 맛을, 지금 철저하게 보고 있었다.

그 요지부동의 정부기관이, 말 한 마디에 톱니바퀴처럼 착착 굴러가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내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국영 언데드 수리소의 얼개를 짜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고...

언데드 분양 과정도 끝이 났다.

─아니, 브라더!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으면 나한테 더 팔아도 됐잖아?

국영 수리소가 공개되고 나서 아흐마드의 볼멘소리 섞인 연락도 받긴 했지만, 국적 논리를 무시하는 건 아흐마드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저 작은 투정에 불과했다.

다른 세계적인 네크로맨서들도 경악했다.

동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각국의 정보기관이 언데드를 분양받은 네크로맨서들에게 접근했다.

제국 칙령으로 회수 기능을 더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포섭 제의를 받은 네크로맨서들은 국정원에 신고했는데, 그 제안받은 게 가관이었다.

수천억에서 수조까지.

심지어 물불 안 가리는 윗동네... 에서는 10조를 제안하기까지 했단다.

개당 2조 5천억짜리 언데드다 보니, 거의 움직이는 기업 수준이었다.

회수가 불가능했으면 사고가 터져도 터졌겠지.

다행히도 제안을 받아들인 멍청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분양할 때 회수가 가능하다는 것까지 보여주고 분양했으니,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바보는 없었다.

정부에서 주는 연봉도 꽤 높은데다, 개별 던전 공략에 언데드를 활용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조건이었으니 굳이 욕심을 더 낼 필요도 없었다.

뭐 내게는 남의 집 불구경 정도였다.

어차피 넘긴 이상 만일의 바보가 나오면 회수해서 재분양만 도와주면 되니까.

정부에서 알아서 잘 관리하겠지.

그때였다.

─저 좀 구해주세요. 누가 자꾸...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전송된 톡을 받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규선 씨로부터 온 톡이었다.

지금 내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 하나였기에, 바로 조형빈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조형빈 국장입니다.

"조 국장님, 부탁 하나만 합시다."

─말씀하시죠.

"지금... 대충 이런 톡을 받았는데요."

톡 내용을 들은 조 국장도 진지해졌다.

─예, 뭐가 필요하십니까?

"위치추적 부탁드립니다."

─...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대신에 여러 법적인 문제가 있으니...

"예, 물론이죠."

이어 빌딩 옥상으로 향했다.

주기된 헬기가 내 지시에 따라 바로 이륙했다.

곧 위치추적 인근 지점에 도착했는데...

"규선 씨 집 근처인가?"

착륙할 지점을 찾는 것도 힘들기에, 대충 근처의 공터에 레펠을 타고 내려왔다.

도착한 시점은 톡을 받고서 불과 20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저긴가!"

위치추적을 따라가 보니, 한쪽 길가에 정장 차림의 한 무리의 남자들과 여자 둘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 하나는 규선 씨가 틀림없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야?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규선 씨!"

크게 외치면서, 1호기 무리를 흩뿌렸다.

언제든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그대로 분해해 버릴 수 있게.

내 목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하는 규선 씨.

"대표님?"

다른 이들도 놀랐는지, 흠칫 놀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낯익은 얼굴.

"당신, 설마."

"...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죠?"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여기서 규선 씨랑 뭐 하는 거야?

"소피아 하인리히. 내가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텐데."

"... 나도 당신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여길 찾아온 건 당신이지 우리가 아니라고요."

"우리... CTO랑 뭐 하는 겁니까?"

"그냥, 좋은 기회를 알려주고 싶어서 제안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규선 씨를?

언제 그녀가 드러난 거지?

"이런 작은 회사의 CTO 따위로 썩을 인재가 아닌 것 같아서요. MIT 수석 졸업, 분자생물학, 미생물학, 화공학, 연금술 등의 분야에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 인재. 우리 카이저 코퍼레이션은 인재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 안 드러나는 게 이상하긴 하지.

아니, 네크로맨서 포섭 보면서 남의 집 불구경인 줄 알았는데, 우리 집이 불타고 있었네.

"구해달라는 건...?"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졸지에 이상한 사람으로 몰린 소피아 하인리히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녀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규선 씨에게 말했다.

"아무튼,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이런 작은 회사에서 썩기에 당신은 너무 아까우니까."

"계속 말했듯이,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 생각은 계속 바뀌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이만."

그녀가 앞으로 걸어가려다가, 뿌옇게 주변을 휘감고 있는 운무를 확인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안 치워주나요?"

"..."

그냥 보내야 하나.

화가 좀 나는데.

고민하고 있을 때.

"하! 됐어요, 알아서 지나가죠."

그 말과 동시에, 목걸이가 빛나면서 그녀의 몸에 배리어같은 게 형성되었다.

그런데...

내 1호기가 가득한 지점을 닿음과 동시에.

불과 0.1초도 버티지 못하고.

쩌저저저저적!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순식간에 배리어가 깨져 나갔다.

동시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리는 소피아 하인리히.

"... 뭘 한 겁니까?"

"어, 어떻게..."

극한의 공포로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뭔가가...

"보지 마세요."

"네?"

규선 씨가 다급히 내 시야를 가리고 나서며,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소피아 하인리히의 밑에 덮어주었다.

뭐지?

이어 소피아를 툭툭 다독이며 일으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려서, 몇 번이고 다시 자세를 잡아 부축하면서 일으켰다.

"규, 규선 씨."

"조금 걸릴 거예요. 먼저 연구소에 가 계세요. 이따 찾아갈게요."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소피아, 그녀의 경호원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일단 우리는 기다리죠."

...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혼자 저러는지 모르겠다.

**

[아이아스의 일곱 장 목걸이를 사용합니다.]

[7초 동안 777만 7777번의 공격을 방어합니다.]

7초 동안 '거의'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유물급 목걸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무적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할아버지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하루에 7초는, 그녀는 무적이 될 수 있는 존재였다.

김세균의 그 악명높은 분해 능력도, 7초에 한해서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으로, 목걸이의 능력을 발동한 그녀가 김세균이 뿌려놓은 운무 속으로 불쑥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배리어의 외곽이 운무와 맞닿자마자, 그대로 깨져 나갔다.

[배리어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녀가 파괴되어가는 배리어 너머로 운무에서 본 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압도적인 식탐 그 자체였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망연자실했고, 다음에는 공포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공포로 몸을 제대로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실례를 했고...

지금은.

"옷은 거기 있는 거 입으면 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더 말해요."

"... 고마워요."

"고맙기는."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오자, 규선이 빙그레 웃으면서 머그컵을 건넸다.

"뭔가요...?"

"유자차."

"유자... 차?"

따뜻했다.

피어오르는 상큼한 시트러스향은 입으로 가져다 대는 걸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호로록.

"마, 맛있어."

차는 아니었지만, 아주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오렌지 마멀레이드 생각이 나는 맛이었다.

이제 그런 마멀레이드쯤이야 몇억 병도 살 수 있지만, 재현할 수 없었던 그 따뜻한 잼의 맛이, 이 유자차에서 나고 있었다.

"저..."

"맛있죠? 가져갈래요? 챙겨줄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규선의 나직한 목소리.

이것 역시도... 꽤 오랜 시간 느껴본 적이 없는 따뜻함이었기에...

소피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어머, 왜 울어요. 이젠 괜찮다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가..."

"으아아아아앙!"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규선에게 안겨 울었다.

의학 혁명(1)

의학 혁명(1)

"울다 지쳐서 자더라고요. 침대에 재우고 나왔어요. 깨어나면 데려가시면 될 거예요."

"... 감사합니다."

경호원들에게 말해두고서, 내게로 와서 웃어 보이는 규선 씨.

멀쩡해서 다행이다.

젠장, 규선 씨를 노리고 올 줄은 몰랐네.

이제 경호 인력을 붙여둬야겠다.

"연구소에 가 계시라니까."

"어떻게 그냥 가요. 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너무 선입견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 그냥 애던데."

"허 참."

그 피도 눈물도 없을 거 같던 카이저 손녀가 저런 모습이라니.

낯설었다.

"우리 CTO님은 어디 안 갈 거죠?"

"저요? 제가 어딜 가요?"

"가고 싶어도 가지 마세요. 제가 돈도 많이 챙겨드릴게요."

"네? 별로 필요 없는데. 지금도 많아요."

최대한 챙겨주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니까.

그래도 카이저가 한 제안처럼 오버페이하긴 어려웠다.

그건... 미친놈들이니까 가능한 돈이다.

"저한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 뭐가 필요하신데요?"

"대표님요."

"..."

그렇게 로맨틱한 소리를 들으면 모쏠은 설레버린다니까.

"저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영화? 식사? 뭐든 사양하지 않고...

"최근에 Magnetospirillum Magneticum 박테리아의 행동 패턴 연구 과정에서 막힌 내용이 좀 있는데, 대표님이 도와주면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거 같거든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

"... 제가 뭐 실수라도 했나요?"

"아닙니다. 가실까요?"

기대한 내가 잘못이다!

**

미국으로 돌아가는 전용기 편에 몸을 실은 소피아 하인리히.

그녀가 소중히 안고 있는 건, 커다란 유자차 병 두 개였다.

다리를 올리고 쪼그려 앉아 유자차 병을 안은 채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김세균을 이길 수 있을까?"

이전에는... 감히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김세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할아버지, 카이저의 강함은 '강함'이라는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송두리째 깨져 버렸다.

마치 아이아스의 일곱 장 목걸이가 만들어 낸 배리어가 와장창 깨졌듯 말이다.

할아버지 카이저를 향한 그녀의 맹목적 믿음에, 거대한 한 줄기 금이 갔다.

그 금으로, 서서히 신뢰라는 물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김세균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강함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신념 아래에서 살아온 그녀가 따라야 할 대상은...

어쩌면 할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불측한 생각이, 불쑥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잊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을 멈출 길이 없었기에,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렇게 되면... 자주 볼 수 있으려나?"

따뜻했던 유자차를 떠올리며,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

계획 입안 한 달 만에, 국영 언데드 수리소가 가오픈했다.

위치는 영종도.

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굉장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단 부지가 넓었다.

그리고 민간 거주지에서 동떨어진 지역이 있었다.

아무리 언데드가 익숙해진 세상이라고 해도, 걸어다니는 시체를 도심에서 보는 건 파리 같은 미친 도시가 아니면 사양하고 싶은 일이리라.

그런 언데드가 매일 같이 들어오는 수리소를 낸다면 기본적으로 집값 떨어진다고 난리일 테고.

게다가, 가장 큰 이점은.

공항에서 가까웠다.

애초에 인천공항이 영종도에 있으니, 공항 바로 옆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국영 수리소의 대상을 국내 네크로맨서로 한정할 생각이 없단 거였다.

"외화를 쪽쪽 빨아먹겠다는 소리지. 뭐."

제피로스의 촌평이었다.

수리비는 통상 수리비의 절반 수준을 기본가로 두고, 국내 헌터들은 랭킹이나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기여도 등 여러 요소를 산정해서 할인해주기로 했다.

한국의 최고 레벨 네크로맨서인 랭킹 4위의 사명진 헌터는 아마 기존의 10% 남짓만 낼 터였다.

통상 수리비가 언데드 제작비의 10%니, 제작비의 1%의 수리비만 부담하면 되는 셈.

세계 네크로맨서 업계가 그야말로 난리가 난 건 당연지사였다.

경매 때 몰려왔던 네크로맨서들보다, 훨씬 많은 인파들이 가오픈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날아왔다.

가오픈 기간이라 50%의 또 50%를 더해서, 25%의 요금만 받는다는 것도 네크로맨서들이 몰려드는 이유였다.

전에 보았던 미국의 억만장자인 다니엘 크루그와 앨리엇 세이지 역시 다시 인천공항으로 전용기를 타고 들어왔다.

먼저 제작비만 약 40억 달러에 달하는 최상급 데스나이트를 맡기는 두 사람.

통상 수리비 4억 달러에, 75% 할인까지 하면 1억 달러.

그래도 엄청난 거액이었다.

억만장자들 입장에서도, 잠깐 한국에 들렀다가 나가면 3억 달러를 아낄 수 있는데,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 언데드 수복 완료되었습니다."

의무복무로 20년간 일주일에 3회 수리소에서 근무하게 된 네크로맨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데드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두 억만장자에, 돈지랄의 산물인 최상급 데스나이트까지.

그런 데스나이트조차도 알로이스 신관 언데드는 자연스럽게 수복해주었다.

"와, 진짜 고쳐지네."

"... 이런 미친 사기급 언데드를 고작 25억 달러가 아까워서 포기하다니. 진짜 내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기분이군."

"누가 아니래?"

두 사람이 투덜댔다.

이쯤이면 25억 달러쯤은 가볍게 뽑아낼 수 있는 성능이었다.

당시에는 그 돈을 아껴서 최상급 데스나이트 개체 하나를 늘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불과 오픈 첫날.

가오픈에 불과한 국영 언데드 수리소의 총 매출은 7천억 원이었다.

월급 같은 걸 전부 제하더라도 순이익은 6천억은 충분히 넘을 터.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로 돈을 벌어들이는 사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각성자관리부의 정인현 장관은 보고를 받고서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강민국 대통령 역시 밝게 웃었다.

한동안 세계의 외화를 빨아들일, 블랙홀 같은 국영 사업이 나타난 순간이었다.

**

정부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내가 너무 바쁘다는 거였지만.

"천상은 그렇다고 쳐도, 천하도 거의 출시되는 족족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 그렇게 비싼 술을요?"

천상이야 3억 짜리니 말할 것도 없었지만, 천하도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천하 40도는 300만원이었고, 30도는 50만원, 20도라고 해도 십만원은 족히 넘었다.

"요즘 국민들 소득 수준이 좋아졌지 않습니까. 호황이라서요."

단군 이래 최고 호황이라고 하던가.

던전 시장 개방 이후로 침체와 부진을 예상하는 경제 리포트가 많았지만, 적극 뚫고 지나간 강민국 대통령의 결정으로 코스피는 연일 고점을 갱신 중이었다.

이제 누구도 박스피라고 못 부른다.

"천하의 품귀 현상 때문에 리셀까지 나올 정도에요. 해외 판매는 지금 꿈도 못 꿉니다."

"리셀이요?"

"천하 40도 같은 경우는 웃돈이 거의 3배씩 붙는답니다."

"... 그거 거의 300만원은 할 텐데. 그걸 900씩 주고 사서 마신다고요?"

"천상과 가장 가까운 맛이라는 시음회 당시 Y튜버들의 후기가 퍼져서..."

하긴 3억보단 900이 낫지.

"... 천하보다 하위 라인업을 하나 낼까요?"

"가능하시겠습니까?"

"음."

천상은 내가 철저히 세균을 집중해서 통제해야 하기에 양산이 불가능하고, 천하 역시 그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같은 거였으니 양산이 당연히 안 됐다.

"조금 생각해봐야 할 거 같긴 한데..."

그냥 술을 대량으로 담그면서, 맛을 해치는 잡균들을 글러트니로 싹 다 잡아버리면서, 동시에 과하게 형성되는 세균 같은 걸 통제할 수 있다면... 가능할 거 같기도.

이렇게 하면 넥타르가 형성될 일은 당연히 없겠지만, 꽤 균일한 퀄리티의 준수한 술을 대량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 터였다.

쉽게 말하면...

청주의 다양미를 갖추었으면서도, 사케의 정제된 맛을 동시에 가진...

천하 20도의 퀄리티보다 약간 떨어지는 수준으로 양산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 나라에 돈도 많고, 사람들도 잘 살게 되었는데...

계속 초록병만 마시고 살 수 없잖아?

**

SG주조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제약으로 돌아왔을 때, 규선 씨가 어쩐 일로 강남 본사에 와 있었다.

"왠일이에요?"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또 연구에 필요하다는 건 아니죠?"

"네, 아니에요. 이번엔 보고에요."

"예예. 말씀하시죠."

별다른 생각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급속 외상 회복 포션과 내상 회복 포션의 역설계에 성공했어요."

내가 잘못 들었나?

"네?"

그거... 던전 클리어 보상이나 이런 걸로만 나오는 귀한 물건 아냐?

"제가 아는 그 포션 맞죠?"

"맞아요."

"그걸... 역설계했다는 건..."

"이제 양산할 수 있다는 뜻이죠."

미친.

저게 어떤 소리인지, 헌터가 아니면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상과 내상을 치료해주는 강력한 약.

다수가 입장할 수 있는 던전에서는 힐러의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모든 던전이 다수가 입장 가능한 타입으로 되어 있는 건 아니다.

솔플이 강제되는 인스턴트 던전 타입도 있었다.

그런 인던을 돌 때, 저건 거의 필수 아이템 수준.

별명이 '여벌의 목숨'이었다.

누구나 여벌의 목숨을 들고있고 싶은 건 당연지사.

수요는 많고 물량은 적으니 가격대도 당연히 저세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규선 씨의 말은.

자기가 여벌의 목숨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물론, 재료가 만만치는 않아요."

"아, 그렇겠죠."

"그간 연금술계에서 역설계를 계속 시도해왔는데 실패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어요. 넥타르가 들어가거든요."

아. 넥타르... 

조금 짜게 식긴 하는데.

"물론 많이 들어가진 않아요. 아주 극미량이 함유되는데, 그 극미량만으로도 꽤 효과를 낼 수 있더라고요."

극미량이라면...

뭐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바이알 하나 분량의 넥타르를 보여주면서, 그녀가 말했다.

"이 정도 분량이면 아마 만 병 정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저 코딱지만 한 분량으로 만 병?

무슨 넥타르가 헤엄치고 지나간 포션이냐?

아니, 그 말은...

"그냥 넥타르 자체를 판매하는 건 시장가가 정해지지 않았고, 리스크도 너무 크죠."

그렇긴 하지.

"그래서 포션 형식으로 제작해서 팔면, 더 부가가치가 오를 것 같아요."

... 임규선 이 사람.

이제 장사에도 눈을 뜨기 시작하는 건가?

정답이다.

엘릭시르보다 엘릭서가 더 부가가치가 높고.

엘릭서보다 한 단계 더 가공한 파워큐 엘릭서가 원료당 효율이 더 좋은 것처럼...

넥타르도 포션으로 만들어 판매하면, 엄청난 부가가치를 형성할 수 있을 거다.

"바로 진행하시죠."

어디, 포션 한번 찍어내 보자고.

그런데, 규선 씨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다.

"아실 줄 알았는데."

"... 뭐, 뭘요?"

"이거. 던전에서 나온 아이템이 아니에요."

그게 뭐...

"헉!"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던전에서 완제품으로 나온 아이템과, 던전 부산물로 만든 물건의 결정적인 차이.

그건... 각성자 전용이냐 아니냐는 것으로 명확히 갈렸다.

그래서 동일한 성능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던전 아이템의 효능을 비각성자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이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던전 완제품 아이템밖에 없던 포션이.

"비각성자용으로도 풀린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바로 알아차려 주실 줄 알았는데."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며 말하는 규선 씨.

삐질 만도 하다.

이건 어지러울 정도로 엄청난 효과였다.

각성자의 인구가 많아지긴 했지만, 아직 세계 인구의 90%는 비각성자.

그들에게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는 포션이라면.

"의학계의 혁명이네요."

그 파급 효과를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어서...

이제는 한동안 헛웃음만 내 입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의학 혁명(2)

각성자들의 능력이 오직 게이트 너머에서만 사용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90%의 각성자들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소위 말하는 헌터 아닌 각성자였고, 그들은 실생활에 자신의 능력을 활용했다.

뭐, 차라리 현대과학이 능력보다 더 나은 경우야 활용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현대 과학으로 이룰 수 없는 영역을 다루는 능력자들은 항상 각광받고 인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신성력을 다루는 힐러 계통의 각성자였다.

이제 힐러 없는 대형병원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각성 초창기부터 실생활의 영역에 파고든 각성자들이 힐러였다.

그래서 현대 의학은 완전히 몰락하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의 능력이 절대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일단, 특정 질환에는 오히려 쥐약이었다.

대표적으로 암.

힐러들의 신성력은 세포 재생을 활성화하는데, 그 재생이 암세포에 적용되면 걷잡을 수 없는 암세포 증식이 일어난다.

그래서 신성력을 사용하기 전에 암세포의 여부를 확인하는 비침습 검사를 시행하는 건 이제 당연한 프로토콜이었다.

게다가 현대 의학이 몰락할 정도로 힐러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얼마 안 되는 힐러들도 대부분은 던전으로 들어갔다.

병원에서 벌 수 있는 돈보다도 많이 버는 건 버는 거거니와, 일단 비교적 후방에서 힐을 넣기에 안전했고, 레벨도 올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활동하는 힐러들은 던전이 무서운 초짜거나, 아니면 은퇴 헌터 정도.

그렇게 숫자가 적다 보니 의료수가가 높아져서 중증 질환에나 힐러들이 동원되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활용되는 경우가 드문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김 간호사님."

"네, 선생님."

"이번 힐러,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거예요?"

"네? 그게..."

서울대 의대 출신의, 각성자 시대의 비각성자 엘리트, 외과의사 오민욱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새로 들어온 힐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니, 국소 부위에 힐 하는 방법도 몰라서, 엉뚱한 데다가 힐 넣고. 수술 중에 이상한 데가 회복되어서 아예 떡이 됐어요. 환부 다 테라토마(기형종)에 덮여서 걷어내고 새로 수술하느라 힘들었다고요."

"아..."

"이럴 거면 힐러 없이 하지. 돌팔이 힐러 놈들이 수가는 수가대로 챙겨가고."

투덜대는 의사 오민욱.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힐러들의 숙련도였다.

수술이나 의료 활동에 필요한 신성력과, 던전에서 쓰는 신성력은 궤가 아예 달랐다.

예를 들어서 조금 전 오민욱 의사의 수술 중에 일어난 일처럼 신성력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넓은 범위에 신성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암과 같은 기형종 테라토마가 자라날 수도 있었고, 회복이 이상한 쪽으로 되어서 수술에 방해가 되거나 시야를 가릴 수도 있었다.

"여하튼, 새로 온 힐러는 앞으로 내 수술에는 못 들어오게 하세요. 이번엔 어떻게든 수습했는데, 환자 죽일 새끼네."

"나름 던전 오래 돌다가 온 은퇴 헌터라고 들었는데."

"은퇴 헌터가 더 문제에요. 머리는 커서 말은 안 들어먹고."

지가 째진 상처나 치료했겠지, 암 수술을 해봤어?

오민욱이 투덜대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수술방 들어올 실력 안 되니까, 어디 정형외과 병동에나 보내라고 하세요. 뼈나 붙이고 앉았으면 딱이겠네."

모든 의료 분야에서 능력 발휘가 까다로운 건 아니었고, 정형외과 같은 영역에서는 그야말로 '신이시여' 소리가 나올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뼈가 붙는 데 걸리는 치료 기간을 극한으로 단축하니까.

단순 자상이나 화상 같은 것에도 뛰어난 영향을 미쳤다.

"그럼 전 이만 퇴근합니다."

한바탕 쏘아붙이고, 어색하게 웃는 간호사를 뒤로하고 손을 휘적이며 걸어 나가는 닥터 오민욱.

그런 그에게, 병원 정문으로 들어온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오민욱 선생님 맞으십니까?"

"제가 오민욱인데, 누구십... 어?"

아무리 헌터 업계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 사람의 얼굴을 모르면 이제 곤란할 정도로 매스컴을 거의 점거하고있다시피 한 남자.

"김세균 헌터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어이구,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고, 약간 의아해진 오민욱이 세균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저는 어쩐 일로."

"논문을 하나 봤는데, 흥미로워서요."

"논문이요? 제가 쓴 논문이 한두개가 아니라 어떤 건지..."

"이 논문입니다."

[각성자 치료에 있어서의 포션 사용 효율화에 관한 연구]

"이걸 인쇄까지 해오셨네요."

"예. 연구하셨던 내용이 맞는지..."

"예, 맞습니다. 말기 암 환자였던 은퇴 헌터 케이스였는데. 자기가 포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수술에 사용할 수 없겠냐고 그래서..."

"효과는 있었습니까? 논문 내용대로라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만."

"네, 기가 막히게요."

입맛을 다시면서, 오민욱이 이어 말했다.

"적용 대상이 각성자뿐인 게 아쉬울 정도죠. 뭐 비각성자에게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워낙 단가가 비싸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주사기로 마이크로단위의 극미량을 수술 과정에서 국소 부위에 투입했다고 들었습니다. 힐러가 동반하는 것보다 그 방식이 확실히 수술이 편합니까?"

"편하냐고요? 비교할 수도 없지요."

오민욱은 조금 전 수술방에서 있던 사건을 포함해서, 인간의 오류와 숙련도 이슈가 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사고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펼쳤다.

그걸 듣는 세균의 표정은 점차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사고가 일어나는군요. 그 과정에서 환자가 위험한 상황은..."

"수두룩 뻑뻑입니다. 말이 안 나와서 그렇지... 의료사고 비율로 따지면 어마어마할 겁니다."

"심지어 책임 면책이죠?"

"네. 동의서도 쓰고 들어오니까요."

그런데... 이 김세균은 갑자기 찾아와서 나랑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지?

닥터 오민욱이 그 고민에 빠져들 때쯤, 세균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무언가를 오민욱에게 건넸다.

액체가 찰랑거리는 두 개의 작은 병이었다.

"이게 뭐죠?"

"포션입니다."

"... 네?"

"급속 외상 회복 포션과 내상 회복 포션입니다."

어이구야.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제 연봉의 몇 배를 들고 있자니 무겁네요. 다시 가져가십쇼."

대학병원 교수 연봉이 적지는 않지만, 포션은 그런 교수 연봉으로도 한참을 모아야 살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세균이 웃으면서 돌려주는 포션을 받는 대신에 손을 뺐다.

"선물입니다."

"... 네?"

"정확히는 의뢰입니다. 그 포션은 역설계에 성공해서 제작한 포션이거든요. 던전 표가 아니라."

"아 그렇군... 네?"

던전 표가 아니라고?

눈을 번쩍 뜨는 오민욱 교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비각성자를 대상으로도..."

"예, 사용이 가능하겠죠."

오민욱 교수의 발이 들썩였다.

퇴근길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의학계가 뒤집힐 내용이었다.

당장에라도 수술에 써보고 싶었다.

"이걸 제게 주신 이유가 그겁니까?"

"네, 저는 비각성자를 대상으로 한 수술에서 포션의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물론, 오민욱 교수도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죄송하지만, 이게 실제 수술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꽤 오랜 기간을 거쳐야 할 겁니다."

"승인 문제라면 괜찮습니다."

"... 네?"

"저희 쪽에 있는 최상위 연금술 클래스 각성자가 공식적으로 인증 문서를 발행해서 보건복지부에 제출했고, 승인된 건입니다."

기존 던전표 외상 포션이야 던전 아이템인 만큼 당연히 의료 목적 사용이 승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역설계해서 만든 이 포션이 던전표와 동일하다는 걸 입증하는 '생동성 실험'만 거치면 따로 지난한 승인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이 바로 승인된다는 것이었고, 심지어 실험 과정조차도 임규선의 인증 문서로 대체되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대통령급의 지원까지 있다면...

'강민국 대통령이 긴급하게 승인 내라는 명령까지 내렸으니 뭐.'

정부 기관으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빠르게 승인이 났다.

"법적으로, 수술에 사용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굳이 제게 맡기시는 이유는..."

"오 교수님께서 케이스를 정리해서 여러 자료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그럴 생각이긴 했습니다만... 자료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균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가 너무 부자가 되어서... 나랏돈 좀 합법적으로 빼먹어보려고요."

"... 예?"

"건강보험 심사평가원 말입니다."

"심평원은 왜..."

잠시 이해하지 못한 채 있던 오 교수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 설마."

"네, 포션을 건강보험의 수가를 받는 약품으로 넣으려고 합니다."

"... 맙소사."

희귀병 치료약 중에는, 앰플 하나에 20억이 넘어가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개발비는 많이 드는데, 수요는 적으니, 그 정도 가격에는 팔아야 제약사가 안 망하고 이득을 볼 수 있는 거였다.

당연히 이런 20억 넘는 약을 개인이 사서 쓸 수는 없다.

그래서 건강보험이 나서는 건데, 건강보험에서 수가가 적용되어 19억 8천만원이 건보 재정에서 나가고, 개인이 부담해야 할 금액은 2천만원 정도 선이었다.

2천만원도 적은 돈은 아니나... 20억에 비하면 푼돈 수준이다.

포션의 가격 역시 10억 대.

아무리 비각성자에게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10억짜리 포션을 막 쓸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아시다시피 심평원은 제법 악명이 높지요."

"... 의사들의 적이라고 해도 될 정돕니다."

특히 외과의사들.

사람 살리려다가 조금만 삐끗해서 심평원 기준을 넘어서면, 의료비 보조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면 병원 재정에 빵꾸가 나는 거고, 윗선에서 엄청난 타박을 받게 되는 거다.

"그런 심평원에 수가 적용을 받으려면, 현장에서의 확실한 케이스가 필요합니다. 선생님께서 그 케이스를 만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물론, 의뢰비도 드릴 생각이고요."

"이 정도까지 판을 깔아주셨는데... 저는 당연히 콜입니다."

뻗대기만 하는 보기 싫은 돌팔이 힐러들을 수술방에서 볼 일 없게 되는 것만으로도, 오민욱 교수는 무조건 진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비슷한 시기.

알케미스트 월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큰 연금술 클래스 각성자들의 저널.

이곳에 발표된 한 대한민국 연금술사의 발표가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포션, 역설계에 성공하다!

─케미컬 오메가의 정체 밝혀지나?

사실 포션의 역설계가 시도된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무려 20년 전, 현재도 최고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인물. 

케이건 제약의 창립자인 필립 케이건의 시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연금술사들이 도전해온 과제가 포션 역설계였다.

그리고 필립 케이건은 10년 정도의 연구 끝에 결론을 내렸다.

"포션에는 케미컬 오메가라는 모종의 성분이 필요하며, 그것은 그 어떤 연금술로도 얻어낼 수 없다. 현재 알려지기는커녕 존재하지조차 않는 성분이다."

그 후로, 연금술계에서 포션을 역설계해서 제작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포션은 정복하지 못한 미답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연금술사들의 로망 같은 포지션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미답의 영역이 열렸다.

비록 케미컬 오메가.

속칭 '신의 물질'에 대한 내용은 의도적으로 빠져 있었지만 말이다.

연금술계의 석학들이 이 연구를 보고 내린 결론은...

처음에는 조작이 확실하다는 거였다.

하지만, 발표자가 김세균 소유의 연구소 소속이라는 걸 확인한 몇몇 유명 연금술사들은 자연스럽게 '기적의 술' 쯤으로 불리는 천상과 그것을 연계했다.

특히, 연금술계의 전설, 필립 케이건은 거의 확신을 가졌다.

그는 이미 누군가의 의뢰로 '천상'을 분석해보면서 그 안에 추출 불가능한 형태의 케미컬 오메가가 들어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 역시 확실하군. 한국에서... 그것도 저 술을 통해서 케미컬 오메가를 만들어내고 있어."

양산을 술을 통해 하고 있다는 건 특이하긴 했지만...

어쨌든 양산이 가능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런 이상...

"무슨 대가를 들여서라도... 저 기술을 얻어내야 한다."

연금술계 최종 단계의 이론상의 물질인 케미컬 오메가.

그걸 쥐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연금술의 극의를 깨달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격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