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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준비(1)

사전준비(1)

[당신은 입장 가능한 레벨보다 높은 게이트를 공략하셨습니다.]

[전설적인 업적! '오버런'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8% 증가합니다.]

이런 업적도 있네.

정상적이라면 레벨보다 높은 단계의 게이트는 입장하지 못하지만, 여러 예외적 상황으로 나 말고도 클리어 판정이 내려진 사람이 있긴 있나 보다.

어쨌든 능력치 상승 보상을 받았으니 좋긴 한데...

내가 공략했다는 메시지가 북중미 전체에 날아갔다는 게 문제지.

그런데 보아하니 표정이 어두운 건 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싱글벙글.

아, 다들 현역이 아니구나...

"브라더, 재밌는 일에 불러줘서 고맙다. 언제 방송이나 한번 나와."

"방송이야 백 번도 나가줄 수 있는데, 나 정도로 되겠어?"

"모르는 소릴, 아직 제피로스 하면 껌뻑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외모가 좀 흘러가서 알아볼지 모르겠는데."

"뭐 임마?"

낄낄대는 흑인 거한, 안드레와 대화를 나누는 제피로스.

나는 옆에서 입을 가린 채 덩달아 웃는 린다라는 여자분께 조용히 물었다.

"뭐 하시는 분이에요?"

"안드레? 안드레는 셰프 겸 스트리머야."

"셰, 셰프요? 스트리머?"

그렇게 말하니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보유한 스테이크하우스 지점만 미국 전체에 삼십 개도 넘을걸. 스트리밍 구독자도 삼천만 명이 넘고. '던전 쿠킹' 못 들어 봤어?"

"... 아, 본 적 있는 거 같아요."

설마 던전 들어가서 몬스터 잡아다가 바로 요리 갈겨버리는 그 야성적인 영상 주인공이 저 아저씨였어?

"안드레의 몬스터 스테이크하우스, 호놀룰루에도 지점 있을 텐데. 안드레! 오늘 회식은 너네 지점에서 할 거지?"

뒷말은 안드레를 향하고 있었고, 안드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가게 말고 어디서 하려고! 오늘 호놀룰루에 있는 고기란 고기는 싹 다 쓸어먹어야지."

"그... 몬스터 고기를 파는 곳은 아니죠?"

"걱정 마라, 소고기다."

"다른 두 분은..."

"나는 패션 브랜드 오너. '린다 윌리엄스' 못 들어봤어?"

저 여성분도 자기 풀네임으로 사업하시는 모양이네.

사실 전혀 모르는 브랜드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여성복 브랜드인데.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연락해. 여자친구는 알 테니까."

그, 여자친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네, 그런 거 같네요.

... 그나저나 무조건 알 거라고 호언장담하시는 수준이네.

명품 같은 건가.

"그럼 저 분도... 뭐 사업하시는 분이에요?"

조금 우울하게 생긴 깡마른 백인 남자, 에릭 쪽을 가리키며 묻자 린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쟤는 그냥 백수."

"사람한테 '그냥' 붙이지 말라고."

"맞잖아? 장가 잘 간 백수."

"..."

"오늘은 와이프가 안 찾니?"

우우우웅. 귀신같이 울리는 휴대폰. 

깊어서 우울해보이는 눈이 한층 더 깊어지는데?

린다 씨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잠깐 보내다가 뒤로 가서 전화를 받는다.

공처가 아저씨였군.

"저래 봬도 제시 베넷 고명딸의 남편, 그러니까 제시 베넷의 유일한 사위야."

제피로스가 뒤에서 쩔쩔매며 전화 받는 저 우울한 아저씨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제시 베넷이면...

"이글루닷컴 창업자요?"

세계 최대의 물류쇼핑기업의 오너 이름이 제시 베넷이었을 텐데.

세계 1위 부자 자리를 항상 다투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

"와, 다들 대단한 분들이신데... 왜 오셨죠?"

"뭐, 500만 명에게 뿌려지는 공짜 광고잖아? 회사 광고도 할 겸, 오랜만에 전역 알림창에 이름 한번 올리고 싶기도 했고. 옛날 생각 나잖아."

"나도 비슷하다."

린다와 안드레의 말이었고.

"... 난 와이프 옆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어디든 좋아."

막 전화를 마치고 돌아와서 눈이 더 퀭해진 불쌍한 아저씨의 말이었다.

저 정도면 비혼주의 바이럴 수준인데.

"아무리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데..."

"제피로스가 안전하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던전 견적 쪽에서 제피로스를 안 믿으면 또 누굴 믿겠어?"

끄덕.

세 사람이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로스.

대체, 저 사람은 현역 때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녔기에, 저런 신념에 가까운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걸까.

내가 아는 제피로스의 모습과는 또 다른, 업계에서의 제피로스를 보게 된 지금.

그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새삼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

빅 아일랜드에서 협회장 제이크 씨까지 합류해서, 그의 전용기를 타고 오아후 섬, 호놀룰루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전용기에 타자마자, 제이크 씨가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어이, 젊은 친구! 저런 퇴물들에게 무슨 조화를 부렸길래 현역 정예급도 쩔쩔매는 던전을 클리어한 거야?"

"듣는 퇴물들 기분 나쁘다. 배불뚝이 아저씨."

"어이쿠, 실례."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도 아니었고, 듣는 쪽도 말만 그렇게 할 뿐 고깝게 듣지는 않았는지 모두의 분위기가 좋았다.

"어쨌든 다들 고마워. 정말로 자네들이 내 궁둥짝을 지켰어. 오랜 친구들 덕을 보는 날이 오는군."

"말로만 고맙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흠흠. 하와이 주 헌터 협회는 이번 클리어의 공로를 높이 사서 인당 5만 포인트를..."

"장난쳐? 이걸 5만으로 퉁친다고?"

린다 씨가 뾰족하게 대거리하자, 본래도 붉은 그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우리 예산이..."

"알 바 아니고. 푼돈 받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니거든. 더 써."

울상이 된 제이크 씨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가 단호했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뭐, 내가 생각해도 5만보다는 더 받아야 할 거 같아서...

가볍게 외면해줬다.

"아, 알겠어... 7..."

"10만."

"야! 10만 포인트 집행하면 올해 예산 쫑이야!"

"뭔 헛소리? 평정 효과 받아서 본부에서 추가 예산 들어오는 거 생각 안 해? 이제 거점급 협회로 올라갈 텐데. 지금 이 시골 협회 예산으로 푸념하는 거야?"

"... 귀신이 따로 없지, 따로 없어."

업계에 대해서 본인 수준으로 잘 꿰고 있는 전문가들과 맞서는 건 쉽지 않았는지, 제이크 협회장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인당 10만."

"좋아. 우리 건 다 저쪽 꿈나무한테 보내주고."

"... 저요?"

웃으며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10만 포인트면 가치가 대체 얼마야.

"야! 네가 받지도 않을 거면서..."

"내가 받건 안 받건, 후려치는 건 못 봐주지."

"후우... 그래... 알겠다. 너네도 저 친구한테 양보하는 거지?"

안드레와 에릭 씨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포인트 필요 없어."

"... 포인트는 네가 가지고... 나중에 또 건수 있으면 불러줄래? 어, 자주 불러주면 더 좋고."

제피로스까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식간에 50만 헌터 협회 포인트가 늘어났다.

전에 받았던 5만 포인트까지 합쳐서 55만 포인트.

와, 이걸로 뭘 하지?

뭐, 사실 이런 걸로 소소하게 기뻐하기에는...

현재 미실현 수익률 : 3,133.76%

약 1,000% 수익률이 더 추가된 데다, 앞으로도 늘어날 일만 남은 계좌도 있었다.

지금 당장 팔아도 3조가 넘는 금액.

하와이에 올 때만 해도, 난생 처음 타보는 퍼스트 클래스에 기뻐하던 촌놈이었는데...

돌아갈 때는 항공사를 통째로 사도 될 정도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도 알고 있으려나?

물론 더 대단한 건, 나보다도 2배 넘는 부자가 된 내 옆의 이 양반이겠지만 말이다.

**

잘 다듬어진 수염과 드문드문 회색이 섞인 짙은 갈색 머리.

검은 정장을 갖추어 입고 안락의자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노크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모든 걸 꿰뚫는 듯한 푸른 눈으로 문을 바라본 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거라."

집무실 문이 열리고, 젊은 비서가 천천히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말씀하셨던 자료입니다. 그리고... 칼 아이작에게서 계속해서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계속 지시하신 대로 처리할까요?"

"멍청한 놈. 여기까지 와서 더 뭘 어쩌자는 거야?"

알렉산더 "카이저" 하인리히.

미국 헌터 업계 절대자의 입에서 험한 말이 흘러나왔다.

"타이밍이 안 좋은 건 인정한다만... 후속 대처가 문제다. 상대도 파악하지 않고서 일을 저질렀으니, 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의 시야에도 떠올라 있는 시스템 메시지.

[김세균 님, 류현수 님, 안드레 존스 님, 린다 윌리엄스 님, 에릭 도널드 님께서 50단계 게이트, '불지옥'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맨 앞의 헌터는 최근에 들은 이름이었고, 뒤쪽의 헌터들은 꽤 오래도록 알던 이름이었다.

특히 류현수라는 이름은 카이저에게도 꽤 익숙했다.

"제피로스. 그가 이번 일에 엮여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나서지도 않았을 테지."

저런 인물은 어설프게 막는다고 막아질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방해 공작 정도는 일상으로 느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 던전을 클리어해왔던 것이 1세대였고, 제피로스는 그 1세대의 최고 선두 대열에 카이저 본인과 함께 서 있던 인물이었다.

아마 상대가 제피로스였던 걸 알았다면, 헛수고하는 대신에 그냥 손절로 마무리하라고 권유했을 터였다.

말을 들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이번 일로 그들이 이득을 많이 챙겼다고."

"네, 제피로스는 약 50억 달러를, 김세균은 그 절반인 약 25억 달러의 수익을 본 것으로 추정됩니다. 잠정적으로는 이것에서 2배 정도는 더 수익을 낼 것 같습니다."

카이저가 두통을 느꼈는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심각하군. 아이작 이놈이 마지막까지 재를 뿌렸어."

"..."

"왜, 내가 과민한 것 같으냐?"

"아닙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눈.

"진심을 말해 보거라."

"... 제 짧은 생각이지만, 이제 고작해야 20레벨도 안 되는 헌터에게 너무 과한 걱정을 쏟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의 행적이..."

"유럽 시장을 잃기 전, 내 생각도 너랑 같았다."

"아..."

지금 카이저가 누굴 이야기하는지, 비서는 알고 있었다.

"아흐마드 트리아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는 애초에..."

"억만장자였지. 이제 저 녀석도 그렇게 되었구나. 하필 우리가 동아시아로 진출하려는 지금."

타이밍도 얄궂게, 칼 아이작이 본인의 자산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쳐 주었다.

카이저는 흘끗, SEGYUN KIM 이라는 영문명이 쓰인 사진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힘만 있는 헌터는 도구가 되지만, 자본이 함께하는 헌터는 권력이 된다. 내가 그러했고, 아흐마드가 그러했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이 알렉산더 하인리히의 사전에 영토를 내주는 일은 한 차례면 족해. 네가 하인리히의 이름을 단 이상, 네게도 마찬가지고."

"명심하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예, 그리고 칼 아이작은..."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마치 기억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것처럼 그대로 말소였다.

"없었습니다."

비서도 자연스럽게 그에 부응하여 바로 답했다.

돈을 전부 잃은 금융인은, 그에게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

하와이에서 바로 며칠 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제피로스도 한동안 밀린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바쁜 모양새여서, 며칠 째 보지 못하는 중이었다.

나도 밀린 결재 좀 처리하고, 폐기물도 처리하고, 엘릭시르도 추출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에 조금 여유를 되찾을 무렵, 드디어 뉴스가 떴다.

[아이작 엔터프라이즈, 하와이 DDF 공매도 투자 실패로 파산하나?]

[대규모 숏 스퀴즈, 예정되어 있는 대박을 받아먹는 건 누구?]

무려 총 운용 자산규모 280억 달러에 달하던 월가의 신화가 무너져간다는 소식이 세계 각지에 전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먼 나라 얘기인 아이작 엔터프라이즈의 파산보다도 더 화제가 되는 뉴스가 따로 있었다.

[김세균 헌터, 하와이에서 50단계 게이트 최초 공략에 기여?, 1세대 은퇴 헌터 제피로스 류현수도 함께한 것으로 추정, (하와이 한인의 소리 단독)]

─미친, 제피로스 행님 아직 정정하시네.

─저 양반도 왕년에 김세균급 레전드긴 했지.

└윗놈 제피로스 올려치기도 정도껏 하셈. 솔직히 김세균급은 아니었음. 제피로스가 최초 공략한 게이트 중에 지금 공략 안 되는 곳 있나? 없잖아. 김세균은 몇십 년째 공략 불가 판정인 곳, 데뷔하자마자 두 개나 조져놨는데. 비교할 걸 해야지.

└이 새끼 말뽄새 보니 1세대 시절은 알지도 못할 거 같은데. 급식이냐?

─야, 외국 기사 보니까 제피로스만 공략한 게 아닌데? 안드레 존스, 린다 윌리엄스에 에릭 도널드까지... 이거 무슨 20년 전 기사인 줄?

└그 양반들 뭐하고 사냐.

└안드레 존스 개인방송이랑 레스토랑 존나 잘나감. 린다 윌리엄스도 거의 준명품급 브랜드 오너.

└에릭 도널드는? 

└미국 재벌 사위. 

└제일 부럽다.

└제일 부럽다 222

└3333

─야, 근데 김세균 레벨 얼마 전까지 11 조금 넘지 않았어? 50단계는 어떻게 기여함?

└오버런이라고, 흔하진 않은데 가끔 있어. 아마 특이한 방법으로 기여했을 거야. 오버런 업적 보상만 해도 꽤 좋은데.

└보상 뭔데?

└올스탯 8%

└개쩐다.

─다음 불가사의 어디지?

└강원도, 24단계 게이트던가.

└레벨 맞추려면 한참 렙업하느라 바쁘겠네.

음, 사실 레벨업은 아직 안 하는 중인데, 조금 찔리는군.

오랜만에 밀린 뉴스 기사들에 달린 댓글 보니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네.

그 기사가 나랑 관련된 거라 더 재밌다.

똑똑, 노크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아, 지금 회사였지.

"들어오세요."

내 말에 문을 열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오는 건 임규선 CTO였다.

"대표님."

"네, 뭐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문제는 없는데요..."

"그러면요?"

"그게... 비망록 연구하는 데 박테리아가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귀하디 귀한 CTO님께서 도와달라는데, 도와드려야지.

흔쾌히 알겠다고 말하려던 때.

잠깐 망설이던 그녀가, 시선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연구실에... 세균 보러 가실래요?"

뭐야 이거.

신종 플러팅인가?

사전준비(2)

사전준비(2)

뭐, 당연하겠지만 정말 세균 보러 오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내가 하와이 다녀오기 이전이랑 비교해도 꽤 많이 바뀌어 있는 건 기분 탓인가?

"뭔가 많이 바뀐 거 같네요."

"네, 샘플 숫자를 일단 많이 들여왔어요. 이제 그래도 이전 랩 정도의 샘플 숫자는 확보한 거 같아요. 비용은 좀 많이 들긴 했는데..."

눈치를 흘끗 보는데, 그저 웃음만 날 뿐이었다.

"돈 걱정은 마세요. 우리 회사 많이 벌고 있으니까."

파워큐 엘릭서의 시장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가격대도 병당 2만원 대로 맞춰둬서 접근성도 좋았고, 규선 씨의 새로운 레시피 덕분에 엘릭시르의 소모양도 절반 이하로 줄였다.

뭐 성광 같은 곳에서 우리 제품이 대박난 걸 보고서 바로 카피캣 상품을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첫째로 파워큐의 브랜드 가치가 어지간해서는 에너지 드링크 분야에서 따라올 제품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둘째로는 규선 씨의 새 레시피였다.

그녀가 성광에서 개발했던 제품 대비 엘릭시르의 비율이 절반 이하로도 피로 회복 성능 자체로는 오히려 배가되었다.

법에 따라서 엘릭시르의 비율을 표기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율이 높은 카피캣 상품 쪽으로 쏠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가격 경쟁을 붙여버리면 그만이다.

할인이 20% 정도만 들어가도 경쟁사는 절대 따라올 수 없었다.

왜냐, 그냥 엘릭서로 만들기만 해도 고정적인 수익이 보장되는데, 그 귀한 엘릭시르를 가지고 셀프 손해를 보는 꼴일 테니까.

그에 반해서 지금 이미 동일 규모의 엘릭서를 만드는 것 대비 2배의 이득을 보는 우리였기에, 20% 할인 정도로는 문제도 안 됐다.

그리고, 엘릭시르 자체의 조달도 말도 안 되는 염가... 아니, 아예 원가가 없는 수준으로 얻고 있으니까...

사실 극단적으로 말하면 90% 할인해서 기존 파워큐와 같은 2천원에 팔아도 남는다.

그런 제품이 정가로 잘 나가고 있으니 매출도 매출인데 순이익이 미쳤다.

어지간한 IT기업이나 금융권 뺨치는 순익률이 나왔다.

뭐, 여차하면 내 개인 돈도 있고.

사실 저렇게 벌어들여도 개인 돈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걸 그냥 은행에 맡겨두기보다는 연구 개발과 사업 확장에 더 투자할 생각이었다.

결론을 내자면...

이제 우리 연구덕후 CTO님께서는 돈복이 터진 거다.

그런 말을 대충 간략하게 요약해서 해주니, 거의 그라데이션에 가깝게 실시간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저, 이런 말 들은 건 처음이에요."

"... 뭐가요?"

"돈 걱정 없이 연구하라는 말요. 성광에서는 항상 예산으로 들들 볶여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그거 부담스러워요.

사실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이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이 왜 성광바이오에서 제대로 지원도 못 받고 퇴출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 경영진 새끼들은 개 눈깔인가?

MIT 출신에 연금술 각성까지 한 미생물 전문가.

어디 가서 구하려고 해도 구하기도 힘든 사람인데, 덕분에 나는 노났지만, 여전히 궁금하긴 했다.

"지금까진 안 물어봤는데, 성광에선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절 데리고 왔던 연구소장님이 좌천되셔서..."

"아."

한마디로 이해가 되네.

대충 그럴 거 같긴 했는데, 역시나 사내정치에서 밀린 거다.

"정확히는 연구소장님을 임명했던 바이오 사장님부터 물러나셨지만요."

"위에서부터 라인 단위로 쫙 물갈이된 거군요."

그 과정에서 규선씨에게까지 불똥이 튄 거다.

큰 회사에서는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물론, 엄청나게 큰 사고가 터졌을 때, 혹은 회사 승계 과정 같은 거에서나 있는 일일 텐데.

"뭔 문제라도 있었어요?"

"네... 큰 사고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서 따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여하튼 규선 씨는 거의 위에서부터 구른 눈덩이에 어어 하다가 휘말린 거네요."

"네, 맞아요..."

"여기서는 힘든 일은 없죠?"

"그게..."

흘끗, 내 눈치를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뭐야, 누가 괴롭히나?

"왜요, 무슨 일 있어요?"

"... 자주 보면 좋겠는데..."

"누굴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순간, 고개를 절로 갸웃거리게 됐다.

"저요?"

"... 네."

"..."

아니 이건 거의 플러팅이 아니라 프로포즈 수준 아닌가?

문제는 나는 아직 연애에는 관심이...

"저기... 죄송..."

"연구 자주 도와주신다고 하셨었는데... 대표님 너무 바빠 보여서 부탁을 못 드렸어요..."

"헉!"

앗, 아아...

데려오면서 분명 그랬지.

내가 세균을 다루는 능력으로 연구를 도와주겠다고.

그리고 계속 바깥으로 돌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제대로 김칫국까지 한 사발 원샷 드링킹...

"죄송합니다. 일단 제가 드릴 말이 없네요."

약속은 해놓고 못 지켰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사과의 의미로 대신 오늘은 하루 종일 연구를 돕겠습니다."

"정말요?!"

눈을 번쩍 뜨면서 나를 붙잡는 규선 씨.

저 몸에서 어디서 이런 박력이 나오는 거야.

"저, 그러면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내 말을 전혀 마다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녀는 바로 나를 이끌고 세균 샘플 중 하나로 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엉망진창 연구당했다.

**

"해가... 뜨네요..."

"어머, 그러네요?"

벌써 열세시간이 지났는데 이 사람 왜 쌩쌩해?

거의 밤새도록 언데드 라이즈 스킬만 쓴 거 같네.

다행히 보람은 있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 스킬의 숙련도가 B로 상승하였습니다.]

[숙련도 B 효과 : (1) 총 5종류의 언데드를 유지할 수 있다. (2) 마나를 소비하여 언데드를 일시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언데드 라이즈 스킬이 숙련도 C로 상승했다.

거기에 아비센나의 왕홀 효과를 받으면 B 숙련도였다.

놀랍게도 C에서 B로 넘어오면서 따로 효과가 늘지는 않았지만, 유지 가능한 언데드가 3종에서 5종으로 2종이나 확 늘었다.

발견한 유용한 세균 리스트도 많고, 던전도 고단계로 가면서 난이도가 확 높아져서, 3종만 굴려서는 제대로 클리어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가뭄의 단비같은 숙련도 상승이었다.

계속 역소환을 거듭해가면서 운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스킬 숙련도가 올라서, 이제 두 종류 개체를 더 추가 가능하대요."

"어머, 정말요! 그러면..."

이 사람 위험한데. 눈이 좀 갔는데.

일단 진정 좀 시키고...

"던전에서 쓸만한 개체가 필요한데, 추천해줄 수 있겠어요?"

계속 한 개씩 늘다가 갑자기 두 개가 늘어버리니까 선택 장애가 오네.

옵션 하나는 하와이에서 얻었던 새로운 세균이다.

대량의 메테인을 생성하니까, 잘만 쓰면 대규모 화염 마법 부럽지 않은 위력을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균주 샘플은 하와이 협회장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조달하면 되니까 수급도 어렵지 않을 것 같고.

나머지 하나가 문제인데...

"Clostridium botulinum, 이건 어때요?"

규선 씨의 제안에 설명을 보자니, 보톨리누스 독소를 형성하는 균주였다.

청산가리의 수억 배에 달하는 치사량으로, 1나노그램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극악의 독소를 생성하는 세균이었지만, 의료 목적으로 더 유명했다.

그 유명한 보톡스가 이 균주로 만들어지는 보톨리누스 독소를 희석해서 쓰는 물건이다.

아까 연구하면서 소환해봐서 알고 있었다.

규선 씨는 뇌졸중 치료제 연구에 사용하는 중이었다.

"음. 1호기가 이미 있어서. 그것보단 조금 약하지 않을까..."

청산가리 수억 배에 달하는 치사량의 마비 독소도, 그냥 분자 단위로 분해해 버리는 포식자에 비하면 우위가 없다.

물론 독성이 강한 건 아는데, 몬스터를 독으로 마비시켜서 죽이나 분해해서 죽이나 그게 그거잖아?

게다가 1호기는 심지어 골렘 같은 무기체에도 먹힌다.

그런 내게 웃으며 말하는 규선 씨다.

"약하다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 네?"

"언제나 강한 힘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냥 위협이 필요할 때도 있고, 제압만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고요, 아니면 분해하기는 곤란한 상대가 있을 수도요?"

"오! 그러네여?"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1호기의 치명적 단점을 꼽으라면, 분해한 부분은 비가역적, 즉 되돌릴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규선 씨 말마따나, 너무 강한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서 누구랑 잠깐 시비가 붙는다고 그 사람을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잖아?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그게 아니더라도, 던전 부산물 문제도 있고.

사실 던전 공략에서는 이쪽이 더 치명적인 단점이다.

지금까지는 던전 부산물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부산물 자체가 중요해지는 상황이 올 거다.

신경 쓰면 국소적인 부위만 분해해서 제압할 수도 있지만, 그게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 과정에서 부산물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고.

'세균이 너무 강함' 같은 거다.

"적당한 위력의 딜링기라... 딱이긴 하네요?"

"보톨리눔의 분비량이나 개체를 조절하면,.. 마비 효과 정도만을 내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2호기의 속박도 좋지만, 가능하면 속박보다는 마비가 확실하다.

발 묶어둔다고 손이 못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내친김에 그럼 소환해 둘까.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Clostridium botulinum Type A 균주 사체 1억 7723만 6512 개.]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4) Clostridium Botulinum Type A(클로스트리디움 보톨리눔 타입 A)

─개체수 : 177,236,512 개

─설명 : 보톨리눔 독소를 분비하는 혐기성의 균주로, A형은 일반적인 의료 목적의 보톨리눔 독소를 생산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언데드화되어 약점이 극복되었다.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0.0063ng(기본 0.00006ng, 통제력 205% 효과 적용)의 보톨리눔 독소 생산. 

지금 당장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언데드로 일으켜만 두고, 지팡이랑 같이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CTO님, 퇴근하셔야죠. 태워다 드릴 테니 같이 가시죠."

퇴근해야지. 피곤해 죽겠다.

"벌써요?"

이 사람 무서운 사람이네.

"더는 안해요! 아니 못해요!"

"치, 알겠어요."

아무래도, 내가 연구소에 자주 오다가는 오래 못 살 거 같다.

한 달에 한 번만 와야지.

**

다음 날 아침.

한국으로 돌아오고도 벌써 나흘째 제피로스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그간에는 회사 일 처리한다고 나도 바빠서 따로 연락하지 않았는데, 이쯤 되니 조금 걱정이 되는데?

이 양반, 살아는 있는 거겠지?

연락하니, 의외로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근데 목소리가 좀 별론데.

"다 죽어가시는데요?"

─... 죽겠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었잖냐. 50단계 던전.

"거기서 다치신 거예요?"

깜짝 놀라 급히 물으니,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내가 원래 그래.

"... 원래 그렇다뇨?"

─청풍검법은 워낙 고기동을 추구하는 검법이라, 근육에 전해지는 과부하가 심해. 현역 때도 하루 던전 돌면 이틀은 앓아누웠는데... 내가 늙긴 늙은 모양이다. 사흘째 못 일어나겠어.

"... 그러니까, 근육통이라는 거예요?"

─근육통 맞지. 뒤질 거 같은 고통의 근육통.

현역 시절에는 그냥 팬으로서 보는 입장이었다보니, 이런 고충을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이런 고충이 있었구나.

─내가 이놈의 것 때문에 은퇴를 일찍 했다니까.

그 정도였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긴, 50단계 게이트를 은퇴한 왕년의 동료 몇 데리고 가볍게 클리어할 정도로 여전히 뛰어난 헌터인데, 은퇴할 이유가 있었으니 은퇴했겠지.

"일단 병문안이라도..."

─시커먼 남자 새끼가 뭔 병문안이여, 집어치워.

"쩝, 그러면 약이라도 챙겨 드세요."

─진통제야 잔뜩 먹었지. 근데 이 근육통엔 효과가 없어. 시판되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다. 심지어 몇 억짜리 약도 잠깐이야. 그렇다고 마약을 먹을 수도 없고.

"헌터라서 내성도 강하니까요."

어지간한 마약성 진통제라도, 헌터에게는 거의 듣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독 판정이라서 독 저항력에 반감되거든.

─진짜 이놈의 근육... 마비라도 시켜놓고 싶다.

"마비요?"

그러고 보니, 새로 얻은 5호기.

보톨리누스가 생성하는 보톨리눔의 효과가...

근육의 신경 신호를 차단해서 일시적인 근육 마비를 일으키는 거였지?

어쩌면...?

"지금 제가 갈테니, 잠깐 볼 수 있죠?"

─못 들었어? 일어나지도 못하겠다니까...

"누워서 보셔도 돼요."

일으켜드릴 테니까.

은퇴 헌터가 너무 강함(1)

은퇴 헌터가 너무 강함(1)

"이 미친놈이 진짜 왔네."

"집 들어오는 게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 그나저나 여기 유명한데 아니에요? 여기 살고 계셨을 줄이야."

성수동의 한강 조망권 초고급 아파트인 리버 스카이게이트.

대한민국 최고의 랭커급 헌터나 부자들만 사는 아파트로 유명했는데, 역시 제피로스 클...

"회사 거야. 사택이라고."

... 제피로스 회사 클라스.

"그나저나 오지 말라니까 왜 왔어. 하루이틀 정도 더 쉬면 나을 거 같은데."

"일단 받으세요."

손잡이가 달린 박스를 건네자, 제피로스가 받아 들고는 미간을 좁혔다.

"... 파워큐 500? 너네 회사 거냐?"

"인수한거 아셨네요."

"임마, 가져올 거면 파워큐 엘릭서인가 뭔가 신제품으로 가져오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엘릭서예요."

"응? 파워큐 500인데?"

"우리 회사에 정식 엘릭서는 제품군이 없어서 거기에 담아온 거예요."

규선 씨한테 부탁해서 만들어뒀지.

부자 된 김에 몸도 좀 챙겨야되겠다 싶어서, 남는 엘릭시르로 원본 엘릭서도 만들어 마시는 중이었다.

물론, 외관으로는 파워큐 500 유리병에 소분해 둬서 좀 짜치긴 하지만, 시판용 엘릭서에 비해서 엘릭시르 용량이 2배나 됐다.

"그러니까, 이게 한 병에 1억 짜리라는 거지?"

"요즘 엘릭서가 병당 5천 정도 하니까 그렇죠."

"저기 가져다 놔라."

"안 마시고요?"

"그거 마시면 나 반 죽는다."

"네?"

이상하기는 했다. 

제피로스 정도 되는 부자가 엘릭서 마실 돈이 없어서 근육통을 달고 살까.

어지간한 잔병치레는 마시는 것만으로도 낫게 해주는 명약이 독이 될 때도 있는 모양이다.

"병원에는 가보셨고요?"

"안 가봤겠냐? 불활성 마나가 근육에 잔류해서 계속 고통을 주는 거라서, 그게 다 빠지기 전까지는 계속 아픈 거란다. 엘릭서 같은 걸 먹으면 강제로 불활성 마나를 태우기는 하는데. 반발 작용 때문에 거의 죽는다. 그냥 버티는 게 무이자 할부면, 저건 일시불이야."

아니 저런 헌터가 사흘을 끙끙 앓으면서 간신히 버티는 통증을 일시불로 땡기면...

어우, 상상도 하기 싫다.

"그 통증 때문에 오히려 더 몸살이 난다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 그냥 버티는 게 최선이야."

"혹시 마비 치료 같은 걸 받아보신 적 없어요?"

"마비? 있지."

아, 있었구나.

"어떠셨어요?"

"통증은 가라앉긴 하는데, 제대로 된 곳에 작용하질 않던데?"

먹히긴 먹힌다는 건가.

그러면 가능성은 분명 있다.

"제가 새로 얻은 능력이 있는데, 그게 마비 능력이어서요. 실험해봐도 될까요?"

"... 뭐야, 마루타냐?"

"그런 셈이죠."

어차피 나도 5호기에 익숙해질 필요성이 있었다.

얼마만큼의 세균을 어느 부분에 얼마나 오래 투입하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효과를 알아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제압 용도로 사용하는데 너무 과해서 상대를 죽여버리거나, 너무 약해서 상대를 못 마비시킨다거나 하면 곤란하잖아.

물론, 내 말에 당연히 황당하다는 듯 나오는 제피로스다.

"와 씨, 뭐가 이렇게 당당해?"

"살살 할게요."

아무리 보톨리누스가 강력한 독이라고 해도, 극미량의 세균부터 조금씩 늘려가면서 효과가 나타나는 걸 보면서 하면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터다.

애당초 지금 보유한 1바이알(작은 병) 수준의 세균 균주인 2억도 안 되는 세균으로는 성인 남자 하나를 죽일 만한 독을 생성하려면 한참이나 걸렸다.

통제력 효과로 강화되어서 그보단 낫겠지만, 문제는 제피로스는 최상급의 헌터.

그의 독 저항력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2억 남짓의 균주로 제피로스를 위협할 가능성은 없었다.

"쯧, 알아서 해보든지. 그런데 나한테 달라붙었다가 실패한 힐러들도 한둘이 아니거든? 괜히 더 아프게만 하면 진짜 죽인다."

"힐러들이야 엘릭서랑 치료방식이 비슷할 테니까요."

엘릭서나 힐러나, 마나를 이용한 치료일 테니 작용기전은 비슷할 테지만, 나는 다르다고.

일단 인벤토리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고, 5호기를 꺼냈다.

"어느 쪽이 제일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음, 지금은 이쪽?"

쾌검술로 유명한 청풍검법답게, 검을 휘두르는 오른팔에 부하가 많이 걸리는 모양이다.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이어지는 근육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히는 제피로스.

모공을 통해 5호기를 100만 개체 정도 제피로스의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야, 너 뭐 한 거야. 시스템 메시지 뜨는데?"

"뭐라고 뜨는데요?"

"위험 물질이 들어왔다고. 내공으로 독 몰아낼 거냐는데."

역시 최상급 헌터쯤 되면 바로 반응이 되는구나.

지금 내 통제력이면 군단에 어느 정도 마나 저항력도 있겠지만, 제피로스의 내공을 버틸 수는 없겠지.

"원래 약이랑 독은 같은 거예요. 대부분의 약이 잘못 쓰면 독이고, 독 중에도 제대로 쓰면 약이 되는 거죠."

"수상한데."

그러면서도, 제피로스는 끌어올리던 마나를 바로 거뒀다.

그다음엔 순탄했다.

대식세포, 그러니까 백혈구가 새로 들어온 이물질을 퇴치하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이미 200%나 넘는 통제력으로 강화된 내 세균 군단을 백혈구 정도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백혈구의 무리를 뚫고서, 근섬유 쪽에 제대로 안착했다.

"시작할게요."

내 지시에, 통제되던 5호기가 보톨리눔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어떠세요?"

"별 느낌 없는데?"

"이렇게 1분 정도 유지했다가 다시 해볼게요."

이 정도로는 안 되나.

그 순간이었다.

"어?"

"뭔가 느껴지세요?"

"좀 짜릿짜릿한데."

"계속해 볼게요."

100만 개체로도 반응이 괜찮은데?

외부에서 많이 희석한 보톨리눔을 대략적으로 주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근섬유 자체에 세균을 침투시켜서 직접적으로 독소를 배출해서 그러는 건가?

100만 개체 정도 더 추가하고 반응을 지켜보자.

어느 순간.

숙! 제피로스의 오른팔이 올라갔다.

"와 씨, 미친."

"뭐, 뭐예요?"

팔 올라가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야, 팔이 이 각도까지 올라가잖아. 사흘 내내 이거 반도 못 올렸는데. 하하하! 야, 이거 신통한데? 진짜 덜 아파지네."

"오오."

통한다.

"그러면 좀더 강도를 올려볼게요."

"오오, 그래그래. 그거야. 그거. 좋다, 좋다좋다."

뭔가 열탕에서 몸 지지는 아저씨 같은 말투로 어, 좋다 좋다를 연발하는 제피로스다.

"이제 거의 통증이 안 느껴진다."

"오케이. 혹시 검 휘두르는 데 지장이 없는지도 확인해 보시겠어요?"

일단 근육을 국소적으로 마비 상태로 만든 거니, 자칫하면 통증은 잡았는데 검술에 지장이 갈 수도 있었다.

그러면 곤란하지.

내 요청에 제피로스가 인벤토리에서 바로 자신의 검을 불러내 손에 들었다.

이윽고 몇 차례 검을 휘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뭔가 이상해요? 감이 별로에요?"

"음, 그게 아니라..."

이후로도 몇 차례 더 휘둘러보더니, 다시 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말했다.

"다른 곳도 좀 해봐라."

뭐지. 뭔가 불안한데.

그래도 하라는 걸 보니 나쁜 건 아닌 거 같고.

감 잡았으니, 다른 부위는 조금 더 쉬웠다.

그렇게 전신의 근육을 국소 단위로 한 시간 정도에 걸쳐 원하는 수준까지 마비 상태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세균도 거의 1억 마리나 투입했다.

"끝난 거지?"

"네."

제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툭 툭 털더니, 한쪽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뒤따라가 보니, 방이라기보다는 거의 운동장 수준의 방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 집기도 없고, 방음 타일로만 가득한 걸 보니, 수련실 같은 모양인데.

집이 얼마나 크면 안에 저런 걸 다 만들어놓냐.

이 수련실 사이즈만 해도 지금 내가 사는 강남 월세 아파트랑 비슷한 거 같았다.

다시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은 제피로스의 검이 기류로 일렁였다.

검기(劍氣)...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흐릿하던 기류가 뭉치고 뭉쳐, 내 눈으로도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실체화된다.

푸른 빛을 내는 내공의 집합체.

검강(劍剛)이 거기에 있었다.

검강까지 발현한 채, 제대로 검사위를 펼쳐 보이는 제피로스.

내가 매체를 통해 보던 옛날 제피로스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공간의 넓이에 제약이 있어서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울 정도로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한참 그렇게 검을 휘두르던 제피로스가 검을 다시 갈무리하고,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답답하게 그러지만 마시고 뭔가 말을 해보세요."

"임마. 내가 제대로 확신이 들었으면 진작 말을 했겠지."

"몸이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좋아. 좋은 게 문제지."

"좋은 게 왜 문제에요?"

내게 답해 주는 대신에, 제피로스가 코트를 걸치며 현관을 향했다.

"나 어디 가볼 데가 있으니까 이따가 보자. 여기서 쉬고 있어도 돼."

"아니..."

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그 특유의 빠른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아파트를 나갔다.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지?

**

"음..."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었다.

"뭐, 뭐야?"

기겁하며 몸을 빼려는 제피로스를 향해, 의사가 흐흐 웃어 보였다.

"가만있어봐."

"아니 뭘 하는지..."

"그레이트 힐링."

초록빛의 은은한 빛이 일렁이며 제피로스의 팔을 감쌌다.

"너 씨발 뭐 하는..."

이제 이어질 격통에 눈을 질끈 감은 채 공포에 떨던 제피로스.

그런데, 통증은 밀려오지 않았다.

"뭐야? 나 왜 멀쩡하냐."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한 건진 모르겠는데, 굉장히 정교하고 국소적으로, 네가 통증을 느끼는 부분이 마비되어 있어."

"아, 어."

"불활성 마나를 태우면서 오는 고통도 그래서 별로 느껴지지 않을 테고. 쉽게 말해서, 그 상태가 유지되는 이상, 힐 받아도 극한의 고통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을 거야."

오랜 친구인 의사와 눈을 마주하면서, 제피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 테스트 결과."

검을 휘두를 때 최고 속도와, 그 최고 속도 구간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체크하는 테스트.

이 분야에서 제피로스는 국내 최고였다.

전성기의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을 정도.

그런데.

그 기록이 지금 경신되어 있었다.

"야, 이거 잘못된 거 아냐?"

"아냐, 빨라졌어."

그것도 20%나.

게다가 전성기에 비하면 원래 20%가 떨어져 있던 수치니, 거의 50% 가량이 늘어난 거였다.

"말이 안 되잖아. 내 나이가 몇인데."

"40대 후반이긴 한데, 젊어서부터 성공해서 꾸준히 엘릭서도 먹었잖아. 던전 돌고 나선 자주 거르긴 했지만, 그래도 네 나이보단 육체 나이가 훨씬 젊지."

"아니 그래도."

말문이 막혀서, 결과지를 계속 바라보았다.

"너도 뭔가 이상하니까 와서 테스트부터 해본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검 휘두를 때, 폭발적으로 스프링처럼 근섬유를 꼬았다가 튕기지? 그 과정에서 신체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거지. 한계에 도달할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걸 몸이 아는 거야."

"... 그래서."

"그래, 휘두를수록, 한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정도가 점점 낮아지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그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 통제되니까, 아예 한계치까지 근섬유의 성능이 뽑아져 나오는 거야."

처음에는 99%, 98%.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고, 점점 떨어지다가 80%가 되었다.

이대로 더 휘두르다가는 계속 떨어지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의 퇴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하하..."

애초에, 처음부터 한계에는 근처도 못 갔던 거였다.

심지어 전성기에조차.

"김세균... 이 자식..."

"뭐? 누구?"

"그런 놈 있어. 마이클 조던 같은 이상한 소리나 하는 놈."

그렇게 말하는 제피로스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은퇴 헌터가 너무 강함(2)

은퇴 헌터가 너무 강함(2)

갈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남았다.

절대 거실 쇼파가 우리 집 침대보다 편해서 누워있던 건 아니고, 집에는 없는 100인치 TV로 보는 드라마가 재밌어서 그런 건 아니고.

덜컥, 문 열리는 소리에 현관을 바라보니 제피로스가 웃으며 돌아왔다.

"늦으셨... 뭐예요?"

양손에 한가득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뭐지?

"저녁 안 먹었지? 그러고 보니 둘이 술 한잔한 적도 없는 거 같아서. 우리 집 온 김에 하고 가야지."

"..."

뭐지 이 양반.

갑자기 급하게 나가더니, 저거 사 오려고 나갔던 거야?

뭔지 싶어 보자니, 치킨 냄새가 벌써 진동을 했다.

"치킨이에요?"

"어, 싫어하냐?"

"없어서 못 먹죠."

워낙 비싸야지.

그래서 직장 다닐 때는 큰맘 먹고 먹었는데, 이젠 그래도 돈 걱정은 없어서 종종 시켜 먹는다.

그렇다고 질릴 정도는 아니고, 여전히 맛있지 뭐.

"술도 하지?"

"마시긴 하는데 차 가져와서..."

"자고 가. 집에 방이 몇 개인데 걱정하냐?"

"하하. 그럼 마실게요."

"뭐 마실래? 와인? 위스키? 소주?"

"아무거나 주세요."

"그러면 오늘 마시고 싶은 걸로."

방에 들어가 들고 온 건... 샴페인인가?

"샴페인이에요?"

"그래. 자크 셀로스라는 샴페인이다."

"비싼 건 아니죠?"

"별로 안 비싸."

너랑 나한테는.

뒷말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들린 건 기분 탓이겠지.

"축하할 일이 요즘 많았는데, 제대로 축하 좀 해야지. 축하에는 이놈이 제격이고."

"그러네요. 주세요, 제가 딸게요."

"짜식, 이런 샴페인은 그냥 촌스럽게 따는 게 아니야."

순식간에 제피로스의 검지손가락에 작게 피어오르는 푸른 강기.

그걸로 그대로, 병목째 와인을 베어 버렸다.

코르크째 뚝 떨어지는 병목에서 조금 거품이 솟아났다.

"사브라주(Sabrage)라고 부르는 와인 개봉 방법이지. 나폴레옹의 기병대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기병칼인 사브르(Sabre)로 와인을 열었던 것에서 유래한 거야."

"오오."

멋져부러.

첫 병은 순식간에 비웠다.

샴페인이 이렇게 맛있었나.

맨날 소주만 먹던 촌놈 입에도 맛있는 걸 보니, 안 비싸면 나도 좀 사다 마셔야겠는데.

제피로스는 말없이 방에서 샴페인만 몇 병을 더 가져왔다.

거기에 얼음 바스켓까지 만들어서 담아두었다.

오늘 먹고 죽자는 소린가.

그리고 두 번째 병을 다시금 사브라주로 열려는 제피로스를 만류했다.

좋은 생각이 났거든.

"제가 열어볼게요."

"네가? 조심해라, 그거 잘못 하다가는 병 깨진다."

그러면서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건네는 걸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대신에, 1호기를 동원했다.

정확히 병목 주변의 유리만을 분해하도록 지시하자, 혼자서 똑 떨어져 나가는 병목.

제피로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봐도 봐도 신기하다니까. 마나도 안 느껴지는데." 

이건 사브라주가 아니라 뭐라고 불러야 하나. 세균이니까 세브라주?

그렇게 두 번째 병까지 비운 뒤에야 본론을 꺼내는 제피로스다.

"복귀해도 된다더라."

꿀떡꿀떡 넘기던 샴페인 잔을 우뚝 멈췄다.

"누가요?"

"의사가."

이어지는 제피로스의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었다.

대충 요약하면 힐러만 잘 붙어서 관리만 잘 받으면, 같은 시술을 계속 받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복귀, 그리고 오히려 전성기에 보였던 퍼포먼스 이상을 보이는 것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잘됐네요! 시술은 걱정 마세요. 이제 감 잡았으니 더 제대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직도 조금 벙벙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왜요, 복귀하기 싫으세요?"

"그럴 리가."

그럴 거 같긴 했다.

사실 나도, 이 정도 벌었으면 굳이 목숨 걸고 던전 돌 필요는 없다.

그냥 다 접고 있는 돈 쓰면서 행복하게 살아도 되니까.

그런데도 헌터로서의 생활을 놓치지 못하는 이유?

내가 강해지고, 그 강해지는 것의 보상이 계속해서 보이니까.

임계치를 넘어버리니 그 역치 자체가 사라져버린 돈과는 또 다른 마력이었다.

나 같은 초짜도 느끼는 걸 제피로스는 못 느낄까.

"너한테 계속 신세 져야 하니까. 그게 신경 쓰여서."

"에이, 뭔 그런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

그렇게 말하는 제피로스의 표정은, 정말로 한껏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네가 없어지거나 날 돕길 포기한다면 현재로선 난 다시 은퇴행이야. 내 헌터로서의 생명이 네게 귀속된다는 거다. 나로서는 일방적인 수혜 관계의 운명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거지. 이게 분명 건강한 관계는 아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말씀드렸잖아요.

"곧 같이 던전 돌게 될 동료 사이에, 무슨 섭섭한 말씀을."

내 말에 잠깐 멍해졌는지 입을 벌리고 있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미친놈."

고작 십 레벨 대의 내가 최상위 레벨에게 이렇게 공언하는 게 황당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할 터.

하지만, 제피로스는 이내 샴페인 잔을 다시 들면서 말했다.

"너도 부지런히 올라와. 아래 있는 공략 불가 게이트부터 잘 정리하면서."

"물론이죠."

우리의 샴페인 잔이 부딪치며, 황금빛 액체가 일렁였다.

어쩐지, 조금 과음할 거 같은 밤이었다.

**

밤새 제피로스가 보관해 두었던 샴페인을 전부 털었다.

비싼 술은 숙취가 없다고 한 새끼 누구야?

머리가 깨지다 못해 쪼개질 거 같다.

"제피로스!"

손님 침실에서 나와 불렀는데, 답이 없었다.

그렇게 거실로 나가니,식탁 위에 냄비와 쪽지 하나가 있었다.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간다. 데워서 먹고 가?"

냄비 뚜껑을 여니 해장국이 있었다.

밥그릇에 밥까지 한 공기.

대충 데워서 냄비째 말아 식사를 끝내니 조금 살 만했다.

어휴, 내가 미쳤지. 다시는 이렇게 술 마시나 봐라.

그렇게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누구시죠?"

집 앞에 정장 차림의 남자들 셋이 서 있었다.

그것도 터질 듯한 근육질의 떡대들 셋이 서 있으니, 좁은 강남 아파트 복도가 더 좁아 보인다.

앞에는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뒤의 둘은 그마저도 흑인 한 명에 백인 한 명이다.

아주 인종 쿼터 한 번 잘 지켰네.

"김세균 씨?"

날 찾아온 게 맞는데.

가장 앞의 한국 사람처럼 생긴 사람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김세균 씨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나 찾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법이 생긴 건 아닐 테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익숙하게 인벤토리를 열어 지팡이를 꺼냈다.

1~5호기에 해당하는 내가 보유한 모든 세균 군단들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당연.

내 반응에, 그들이 난처해하면서 양손을 들어 보였다.

"김세균 씨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데요?"

묵묵부답.

그래, 그렇다는 거지?

내가 배운 건 안 많아도, 무협 소설에서 배운 교훈이 있지.

선자불래 내자불선.

착한 놈은 애초에 오지 않고, 온 놈은 착하지 않다는 거다.

주소까지 알아서 찾아온 놈들이 선할 리가 없잖아.

긴장감을 놓지 않던 그 순간이었다.

"명함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명함? 줘봐요."

근육질의 정장 거한 중 한 명이, 품에서 꺼낸 명함을 내게 휙 던졌다.

다행히 암기 같은 건 아니었는지, 아테나가 반응하진 않고, 빙글빙글 돌다가 내 손에 잡혔다.

"카이저 코퍼레이션?"

"본사 소속 신성호 팀장입니다."

"... 설마 그 카이저의 회사?"

"본사의 창립자가 헌터 카이저님이냐고 묻는 거라면 맞습니다."

아니 이 인간이 벌써 갠세이 놓으려고 사람 풀었나.

무슨 세계 최고 헌터였다는 양반이 이렇게 쪼잔해?

"동행해주시겠습니까?"

"거절하면?"

"저흰 받은 명령은 무조건 수행하는 팀이라서요."

"강제로라도 데려가겠다는 뜻입니까?"

"..."

말은 없이, 그저 한 발짝 걸음을 내 쪽으로 가까이 옮길 뿐이다.

하긴, 저런 미친 떡대 놈들을 보낸 이유가 뭐겠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내 경고에도 가까이 다가오려던 녀석들이, 그대로 발이 엉켜 우당탕 자빠진다.

2호기의 속박으로 발을 붙잡아 둔 것이었다.

떡대 셋이 좁은 복도에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구만.

"내 주소도 알아낸 거 보면, 전화번호도 알아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만나고 싶으면 만날 사람이 나한테 전화하라 해요. 만날 장소는 내가 정하고."

"당신이 이렇게 대할 분이..."

"카이저가 직접... 아니 카이저 할아버지가 직접 왔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다음에 이런 식으로 내 집 앞에서 댁들 얼굴 보는 일 있으면, 그때는 지금처럼 몸 성히 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에 만면을 구긴 채 한참 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돌아가자."

그런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고?

아, 2호기를 아직 안 풀었구나.

"구두는 두고 가요. 비싼 브랜드 같은데,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로 딸기마켓에 가져다 팔려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한숨을 한 번 내쉰 그들이 구두를 벗고 양말만 신은 채 털레털레 사라졌다.

새끼들이, 까불고 있어.

근데 뭐 하는 놈인데 이렇게 거창하게 날 보잔 거야?

정말 카이저라도 되나?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옷 갈아입고 TV를 켜자마자,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전화하라고 해서, 전화했어요. 통화 가능하시죠?

웬 여자의 목소리인데, 약간 바람이 웅웅대는 소리가 들리면서 통역 목걸이가 빛나고 있다.

통역 상태가 발동되는 걸 보니, 외국인이란 건데.

그나저나 아니, 대한민국 개인정보 보안, 이대로 괜찮은 거냐?

알아서 털어보라곤 했지만, 이렇게 빨리...

내 정보 어디까지 털린 거야?

약간 당황한 기색은 접어두고, 최대한 태연을 가장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좀 바쁜데. 새로 생긴 구두 세 켤레 딸기마켓에 팔아야 해서."

─그들에게 모욕을 줄 필요는 없었잖아요.

"당신들도 날 만나고 싶었으면 그런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지."

─그건 인정해요. 사과드릴게요.

뭐야, 이렇게 깔끔하게?

─당신 같은 헌터에게 통상적인 리쿠르트(채용) 방법으로 접근한 건 잘못이었어요.

"리쿠르트?"

─신성호 팀장은 본사 리쿠르트 팀 팀장이에요.

그 떡대가?

"... 뭐 경호팀이나 시위진압대 팀장 이런 거 아니고?"

─헌터들을 채용하는 사람이니까요. 돌발 상황을 유도해서 영입 대상자를 파악하는 거죠. 명성만큼의 실력은 되는지, 인성이나 대응 능력은 어떤지, 성향은 어떤지 등등.

허, 미친 회사인가?

"난 그쪽 회사에서 무슨 제안 같은 걸 받은 기억이 없는데."

─지금 하잖아요. 참고로 리쿠르트 결과는 통과에요. 리쿠르트 1팀이 저항도 못 해보고 당할 정도면 말 다 했죠.

와, 거 인생에서 제일 안 기쁜 합격 통보네.

"됐수다. 그만 끊..."

─일단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말씀하시는 건 어떨까요?

"대답은 똑같을 텐데."

─저는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설립자이자 명예 회장이신 알렉산더 "카이저" 하인리히의 친손녀, 소피아 하인리히에요.

... 카이저 할애비가 아니라 친손녀가 나왔네.

"그래서요."

─단순한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직원이 아니라 지분을 보유한 오너 일가의 일원이라는 거예요. 드릴 수 있는 제안도 차원이 다르고요.

"끊습니다."

─자, 잠깐만요.

끈질기네.

─딱 한 번, 미팅 한 번이면 돼요. 그 후로는 다시 접촉하지 않을게요.

"그거 안 만나주면 귀찮게 만들어주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우리 회사 인사팀이 좀 유명해요.

"... 집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 있으니 위치 문자 찍어놓겠습니다. 거기서 보죠. 한 시간 뒤에. 진짜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약속 지켜요."

─좋아요.

**

한 시간 뒤에 만나자고 해놓고 약속 장소에는 10분 뒤에 왔는데, 이미 누군가 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애초에 이 근처에 있었나?

외모 하나는 기가 막히네.

어지간한 헐리우드 배우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길게 늘어진 금발에, 청록색 눈까지.

실제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심지어 그걸 즐기는 게 보인다.

게다가 더 신기한 건, 저 예쁜 얼굴에서 왕년의 카이저가 보였다.

진짜 친손녀는 맞나 보네.

"안녕하세요, 김세균 헌터."

"안녕 못합니다. 소피아 씨. 본론부터 말씀하시죠."

"네, 그럴게요. 돈으로는 어지간한 금액으로도 눈도 깜짝하지 않으실 테니, 회사를 조금 도와드릴까요?"

이번 일로 돈 많이 번 것까지 아는 건가.

그런데, 회사를 도와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귀 회사의 미국 진출을 도울게요. FDA 승인부터, 물심양면으로, 저희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서 돕죠. 필요하다면 괜찮은 제약사를 하나 인수해서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업 확장의 기본은 인수 합병 아니겠어요?"

"... 돈으로 안 된다는 건 알면서, 그건 돈으로 해결하려고요?"

"멀쩡한 회사를 인수하려면, 돈만으로는 안 되니까요."

싱긋 웃어 보이는 그녀의 아름다운 표정에,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안 멀쩡하게 만들겠단 소리야 뭐야?

"사업은 제 힘만으로도 키울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귀사가 제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당근 말고 채찍으로 넘어가 볼까요?"

"채찍..."

"아무리 당신 정도 되는 헌터라고 해도, 30단계를 넘어가면서부터는 필연적으로 동료가 필요할 거예요. 50단계를 넘어가면 피할 수 없고요."

하위 게이트는 거의 솔로 플레이 위주의 인스턴스 던전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상위 게이트의 다수는 통상 게이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5인 정도가 입장해서 던전을 클리어해야 새로 리필되는 방식의 게이트나 아니면 최대 30인까지 입장 가능한 레이드 류의 게이트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동료가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도 혼자서 무쌍 찍는 아흐마드 같은 양반도 있었지만, 극소수였다.

심지어 그 아흐마드조차도, 완전 도구처럼 활용하긴 하지만, 파티원이 없는 건 아니니까.

"제가 장담하죠. 우리 제안을 거절하면, 50단계 이후로부터 당신이 구할 수 있는 파티원은 이 동아시아에, 아니 세계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될 거예요. 미래를 생각하세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

갑자기 웃음이 났다.

"왜 웃으시죠?"

"내 생각에, 적어도 한 명은 있을 것 같아서."

"... 설마 제피로스, 헌터 류를 말하는 건 아니겠죠?"

"맞는데."

"당신이 제피로스랑 가까운 사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준비했죠."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태블릿 PC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여러 그래프가 나열된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제피로스의 피지컬 보고서에요. 이미 전성기는 한참 지났고, 낙폭이 점점 커지고 있죠. 이대로 1년만 더 던전을 돌아도, 다시는 검을 못 휘두르는 몸이 될 수도 있어요."

"... 확실히 대단하네. 이런 정보는 또 어디서 구한 거야."

"카이저니까요."

도도하게 읊조리는 그녀의 말에는, 자부심이 한껏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정보... 조금 오래된 거 같은데."

하루 정도.

"... 뭐라고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니, 설명할 필요도 없나?

잠깐 고민하던 찰나, 카페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대박! 제피로스 복귀했대! 남산 53단계 게이트 신기록 실화냐?"

아침 댓바람부터 어딜 가셨나 했더니, 몸이 근질거리셔서 버틸 수가 없었나 보구만.

피식 웃으며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를 열어보니, 헌터 탭이 '제피로스 복귀' '제피로스 은퇴 번복' '제피로스 53단계 게이트 신기록' 등의 기사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제피로스 은퇴 번복 인터뷰 영상'이라는 기사를 들어가서 동영상을 눌러 보았다.

─왜 은퇴를 번복했냐고요? 위에서 폼 유지하면서 기다려야 할 친구가 하나 있어서요. 그 친구랑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전에는, 은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씨익 특유의 악동같은 미소를 띠며 이어 말하는 제피로스.

─워낙 잔소리가 심한 친구라서 말이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소피아 하인리히의 얼굴에서는 가식이라는 미소의 가면이 와장창 깨져 나가 있었다.

스타(1)

스타(1)

"대답은 그걸로 됐다고 여겨도 되겠죠?"

말을 남겨놓고,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이를 악문 소피아 하인리히를 등진 채 일어났다.

내가 완전히 일어나 드리운 그림자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 잠깐요."

"또 뭐요."

와, 저 끈질김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RHS 던전개발회사는 아시죠?"

"... 제피로스의 회사 아닙니까."

"거기도 우리가 인수하기로 했어요."

"뭐 어쩌라는 겁니까?"

돈 많다고?

그 얘기는 이제 신물 날 정도로 들었다.

"제피로스는 당신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게 될 거예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당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당신 때문에 불행해질 거예요. 결국, 당신은 모두로부터 멀어지게 될 테고, 마지막에 기댈 사람은 없을 거예요. 믿어도 좋아요."

저 개년이?

진짜, 주먹이... 아니, 세균이 운다.

뻔뻔하게 눈 뜨고서 협박하는 꼴이 역겨울 따름이다.

사람을 어떻게 해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

저년한테는 가능할 거 같네.

거의 죽여달라고 일부러 고사라도 지내는 수준... 응?

일부러?

설마, 이 여자...

지금 의도적으로 어그로 끄는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짝 더 나섰다.

그러자.

"당신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이라도 제 손을 잡으세요."

한술 더 떠서 손까지 내민다.

그것도 도발하듯이, 손등만 까딱.

헛웃음만 흘리다가, 한마디만 남겼다.

"정말 다시 보지 맙시다."

이제는 완전히 뒤를 돌아서 카페 밖으로 걸어갔다.

나를 계속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로.

그렇게, 카페 밖으로 빠져나왔다.

**

세균이 나가고,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리는 소피아.

"고졸이라더니, 생각보다 똑똑하네."

그녀의 중얼거림에, 근처에 앉아 있던 평범한 일상복 차림의 여자가 일어나 걸어왔다.

여자를 향해, 소피아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능력은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요."

"리쿠르트 1팀이 제대로 했으면 된 일인데."

"앞으로 던전에서 기회가 오겠지요."

"흥. 덤으로 범죄까지 엮었으면 더 좋았을걸."

던전 밖에서 헌터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능력을 쓰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중범죄다.

거기까지 노리고 옭아맬 생각을 했던 소피아의 심계에 여자가 혀를 내둘렀다.

"그나저나 그 목걸이, 너무 믿는 거 아니에요? 김세균 안 무서워요? 막 다 녹여버린다는데."

"적어도 7초 동안엔, 우리 할아버지의 공격도 막을 수 있는 아이템인걸."

그러면서 목에 걸린 고풍스러운 목걸이를 잠시 자랑스레 내보이는 소피아.

목걸이를 잡는 그녀의 눈앞에,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아이아스의 일곱 장 목걸이]

[품격] : 유물급 장신구

[설명] : 신화적인 영웅 아이아스가 사용하던 방패의 권능이 일부 깃든 목걸이. 7겹의 방패로 777만 7777의 화살 세례를 막아내었다는 전승이 있다.

[내용] : 24시간에 한 번, 7초 동안 가해지는 모든 물리적, 마법적 공격에 777만 7777회 까지 면역이 된다.

7초 동안에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권능을 보일 수 있는 아이템.

"사기 아이템이긴 하죠..."

"세상에 할아버지보다 혼자의 힘으로 강한 사람이 있지도 않은데,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지?"

지금의 세상은 아흐마드 트리아인을 카이저보다 윗줄에 놓지만, 그들은 틀렸다.

아흐마드 트리아인은 언데드 군단이 있어야지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카이저는 본인의 신위다.

손녀인 소피아의 신념에 가까운 생각에 여자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피로스가 복귀했다는 건 예상 밖인데. 입수했던 정보, 확실한 거야?"

"그가 다니는 병원에서 빼돌린 거예요."

"쳇, 그러면 최근에 개선됐다는 건데."

"어쩌면, 김세균 헌터에게 그를 치료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게 인과가 맞으니까요."

"에이 설마, 불활성 마나로 인한 전사 계열 헌터의 노쇠화는 치료 불능이야. 애초에 그게 '치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렇긴 해요."

제피로스와 비슷한 클래스의, 날렵해 보이는 여자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더 심해지는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지는 건데, 그 고통을 견딘다면 사람인가?

"게다가 전형적인 전투형 마법 계열 클래스로 보이는데. 그런 치료 능력까지 있다고? 세상에 그런 불공평한 클래스가 어딨어?"

"뭐, 그것도 맞고요."

시스템으로 주어지는 클래스에도 어느 정도 법칙이라는 게 있었다.

공격, 버프, 치료, 군중제어.

네 가지를 모두 가진 클래스는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많아야 세 가지.

"김세균은 공격 능력과 군중제어 능력, 그리고 불을 버티는 능력까지 있다고 판단하는 게 맞잖아. 거기에 치료까지?"

재밌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한참이나 깔깔 웃던 그녀가, 서늘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 할아버지도 복귀할 수 있겠네."

카이저의 현역 복귀라.

제피로스의 현역 복귀만으로도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 헌터계가 들썩이는데, 카이저까지 복귀한다면, 그건 정말로 세계 경제계가 들썩일 일이다.

"이제 김세균이 중요한 게 아니야. 제피로스, 그가 어떻게 복귀했는지 그 방법부터 찾아야겠어."

카이저가 전성기의 위업만 되찾을 수 있다면, 동아시아가 문제일까.

70단계 이상의 미답(未踏) 게이트들을 공략할 유일한 희망이 재림한 순간.

세계는 다시 할아버지의 이름만을 부르짖을 거라고.

그녀는 장담할 수 있었다.

**

나오자마자 제피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웃으며 말하는 제피로스.

─아, 봤냐?

"봤죠. 몸은 어떠세요?"

─날아갈 거 같다. 넌 어디야? 해장국은 먹었어?

"예, 지금 강남으로 왔는데요..."

조금 전 있던 일을 간략히 말하자, 제피로스가 다급히 외쳤다.

─뭐? 카이저 코퍼레이션? 너 괜찮아?

"네, 뭐 멀쩡한데요. 소피아인지 뭔지, 카이저 친손녀가 왔어요."

─소피아 하인리히? 이런. 그 여자,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실질적인 CEO야. 한국에 왔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원래는 아무 이유 없이 방한한 것만으로도 경제지 2면 정도는 먹을 여자인데 말이지.

"강남 카페를 대놓고 왔던데요."

─... 언론 통제인가.

"..."

아예 정체를 숨기고 입국한 것보다도, 대놓고 들어왔는데 언론에 화제가 되는 걸 막을 수 있는 능력이 더 무서운 셈이었다.

조, 조금 쫄리네.

─그나저나 그 여자를 안 건드린 건 잘한 거다. 일부러 도발한 거였을 거야. 뭐라도 얻어내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런 거 같아서 안 건드렸죠, 근데 얻어내요?"

─네가 상해를 가하려 하는 증거를 잡아서 법적으로 몰아붙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네 능력 자체에 관심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 둘 다일 수도.

"난 그치들 관심 없는데, 뭘 그렇게 관심들이 많은지. 그나저나 정말 RHS를 인수하려고 할까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러라지? 잘됐네.

내 걱정에도, 제피로스는 한 치의 걱정도 없이 시원스럽게 답했다.

─안 그래도 스톡옵션 털고 나가려고 했는데. 지금처럼 주가 많이 올랐을 때가 제격이거든.

"주가가... 아?"

RHS의 임원인 제피로스가 복귀, 그것도 신기록까지 달성하는 위업을 보였으니, 당연하게도 RHS의 주가는 뻥 뛰었겠지.

스톡옵션을 가진 제피로스에게는 희소식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회사 주식 털고 나간다고 하면 누가 손해겠어?

호재가 순식간에 악재가 되는 거니까 폭락도 대폭락이지.

─그 여자는 내가 RHS 창립 멤버라고 뭐 대단한 의무감이나 소속감이 있는 줄 아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지. 제발 인수 들어오면 좋겠다. 고점에서 인수했을 때 난 지분 정리하고, 나락 가는 꼴 봐야지.

그거 재밌겠네.

─아마 널 도발하려고 그냥 되는 대로 해본 말이겠지만. 그 정도로 멍청하게 돈 쓰고 다녔으면 카이저 코퍼레이션이 지금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어.

"에이. 아쉽네요."

─그건 그렇고, 너도 이제 슬슬 던전 돌아야지. 지금 레벨이 몇이지?

"19레벨이요."

─20레벨 보상도 아직 안 받은 거였다고?

새삼스럽게 놀라는 제피로스.

─10레벨 단위로 주는 보상은 조금 더 특별한 경우가 많아. 20레벨 보상부터 확인하고 다음 행보를 정하는 게 좋겠어. 아, 그리고. 내가 메일 하나 보냈는데 확인할 수 있어?

"지금 볼게요."

─별건 아니고, 세계 각 지역의 네 레벨 대 미공략 게이트야. 대략적인 던전 형식은 나와 있으니까, 혹시라도 네 능력으로 쉽겠다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 내가 해당 국가 중앙 정부나 지역 정부랑 협상해줄게. 어차피 레벨은 올려야 하는데, 굳이 평범한 게이트에서 올릴 필요 없잖아. 저레벨의 가치를 톡톡히 누리면서 올라가자고.

"네, 지금 확인했어요. 이거 엄청나게 많은데요? 사무실 가서 컴퓨터로 봐야겠어요."

읽는 것만 한세월이겠네.

세계에 이렇게까지 미공략 게이트가 많았던가?

─클리어시 가치 있는, 평정까지 한두 개 정도 남은 미공략 게이트만 추려둔 건데?

"그게 그렇게 많다고요?"

휴대폰으로 간단히 슥슥 넘겨보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게이트 하나가 있었다.

"뭐죠... 이 게이트는?"

링크를 걸어 보내자, 제피로스가 확인하고는 답해주었다.

─챌린지형 던전? 흔하지는 않지. 일반인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처음 봤어요."

─그렇지, 몬스터도 없고... 들어가면 도전 과제랍시고 뜨는 걸 달성하라고만 하니까. 어지간해서는 선호되는 던전은 아니야. 몬스터 부산물도 안 나오고... 쉽게 말해서 인건비도 안 나온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최초 클리어 이후에는 보통 버림받지. 문제는 이 던전이라는 게 꼭 밸런스가 맞아. 죽을 위협이 없으면 난이도가 존나게 어려워요. 그래서 종종 저렇게 미공략 상태로 남아 있고.

"어려워 보이긴 하던데..."

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굳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이 바로 말한다.

─거기로 갈 거야? 18단계이니 레벨은 맞네.

"네, 재밌을 거 같네요."

─위치가 어디야?

"러시아요."

─러시아? 잠깐만, 근데 이 게이트 내가 들어봤던 거 같은데... 조금 더 알아볼게.

"네, 뭐 얼마든지요."

그리고 잠시 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제피로스가 말했다.

─야! 양심 좀 있어라!

**

다행히도 그 이후로 며칠은 조용했다.

계속 카이저 쪽에서 수작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여기로 가 주세요."

택시를 잡아타고 말하자, 택시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급 통역 목걸이 덕분이지만, 택시 기사 입장에서는 왠 아시아인이 갑자기 자기들 말을 현지인처럼 유창하게 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던전 아이템은 여전히 일반인들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다.

던전에 도착하자 일렁이는 게이트 뒤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심지어, 현지인들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가 힘의 시험 게이트 맞습니까?"

내 질문에, 가장 뒤에 줄을 서 있던 여자가 흘끗 뒤를 돌아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에이, 금수저네."

"... 뭐요?"

"그 통역 목걸이, 조심해요. 누가 지나가다 목째 따갈라."

"..."

택시 기사와는 다르게, 헌터인 게 분명한 여자는 정확히 목걸이의 가치를 알아보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비싼 거였나?

"천만 달러짜리 목걸이를 그렇게 대놓고 걸고 다니면, 물욕 없는 사람도 한 번쯤 탐내지 않겠어요?"

아, 이게 천만 달러나 됐어?

공짜로 받았다고 말하면 더 이상하겠지.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새겨들어요. 여기에 '쇼츠'나 '딩동' 촬영하러 오는 머리에 근육만 들어찬 각성자 철부지들이 한둘이 아닌 건 아는데, 그걸 노리는 도둑들도 그만큼 많다는 건 알아야."

그랬다.

이곳, 모스크바의 18단계 게이트, '힘의 시험'은. 말 그대로 각성자들이 자신의 힘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게이트 클리어 방법은 간단했다.

던전에 입장해서 앞에 있는 거대한 철벽을 파괴하면 클리어.

다만 23레벨 이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그 기준이 높다는 게 문제여서 여전히 미공략 게이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이곳이 '쇼츠'나 '딩동' 같은 숏폼 컨텐츠의 성지가 되었는가... 하면.

첫째는 하나도 안 위험한 게이트여서이고, 둘째는 철벽을 파괴한 정도가 수치로 표기되서였다.

그래서 각성자들이 몰려들어 자기 화력을 과시하는 챌린지 영상을 찍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

그... 챌린지 하라고 있는 던전이긴 한데...

어쩐지, 다들 겁나 비싼 던전용 마법 영상 촬영 장비를 들고 있네.

어쨌든, 앞의 여자는 그런 철부지 중 하나로 날 본 모양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

겉옷을 목에 둘러 목걸이를 가렸다.

괜히 트러블 일어나는 건 싫으니까.

비싼 아이템을 착용하고 다니니 이런 문제도 생기는군.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내 바로 앞에 있던 여자가 던전에서 나왔다.

황금빛 빛무리 없는 자의에 의한 퇴장.

역시나 당연하겠지만 클리어 판정은 아니었다.

27%, 신기록을 세웠다고 좋아하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던전에 들어섰다.

[18단계 게이트, '힘의 시험'에 입장합니다.]

[1시간 안에 벽을 파괴하여 당신의 힘을 시험하십시오.]

그리고 입장하고 약 20분 정도 지났을 무렵.

[벽이 100% 파괴되었습니다.]

[당신은 18단계 게이트, '힘의 시험'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당신의 클래스 주요 능력치가 일부 상승합니다.]

[통제력이 5% 상승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게이트만 있으면 좋겠네.

그리고 황금빛 빛무리에 휘말려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 때.

내가 본 것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자신들의 챌린지 대신에 나를 찍기 시작하는 수많은 카메라의 무리였다.

스타(2)

스타(2)

게이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쏟아지는 무수한 관심의 세례.

음, 이런 느낌은 좀 처음 느껴보긴 하네.

아니다. 처음 각성자 판정 받을 때도 비슷했던가?

그렇긴 한데, 그때보다도 훨씬 엄청나네.

하긴, 지금까지는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 완전 인기 없는 던전들만 다니면서 클리어했으니, 당장 던전에서 나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전역 메시지로 알려지고 나서 나중에 그 반응만 인터넷에서 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방에서 함성과 휘파람, 심지어 몇몇 여성분들이나 남성(?) 분들까지 과격하게 달려들 기세 아닌가.

아, 아뇨. 사양할게요.

나도 모르게 세균을 꺼낼 뻔했다.

그나저나, 여기 어떻게 나가지?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좀 당황스러웠다.

이곳의 관리자 공무원들도 당황스러워하는 건 매한가지.

점차 몰리는 인파 속에서 고민하던 찰나였다.

"당신이 김세균이었어요?"

내게 목걸이 숨기라고 충고해주고 바로 앞에서 27% 나왔다고 좋아하던 여자가 다시금 다가와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이 러시아에까지 알려졌나?

"그냥 금수저는 아니었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여기서 빼내 줄 테니까."

"... 누구시길래."

"수상한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마요."

뭐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타지에서 낯선 사람을 마냥 믿을 수는 없으니까.

가늘게 눈을 뜨고서 의심 섞인 시선을 보내는 나와 얼굴을 마주치고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리나 아브라모바. 내 이름이에요."

음, 이름을 안다고 뭔가 바뀌는 건 없겠지만... 일단 적어도 이름은 알았군.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경찰 병력들이 잔뜩 내렸다.

그들이 길을 터면서 내게로...

아니, 정확히는...

이 아가씨에게로 향했다.

경찰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이 여자한테 꾸벅 인사를 했다.

뭐야, 나보고 철부지 금수저 취급하더니, 정작 금수저는 당신이었다고?

"뭐 해요? 안 가고."

"아. 네."

그들의 안내에 따라 경찰차까지 가서 타자, 그제야 안도의 숨이 나왔다.

와, 사람들의 환호가 무서운 건 처음이네.

내 뒤를 이어 경찰차에 함께 탄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세계 최고의 루키로 유명한 김세균 헌터를 봐서 다시 한번 영광이에요."

"... 언제 그렇게 된 거죠?"

"한 번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두 번이 넘어가면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죠. 하물며 세 번, 네 번에 이르고 있으니... 누가 그 말을 부정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모스크바 헌터 협회의 협회장으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물론, 게이트에 걸려 있던 헌터 협회 현상금 포인트도 함께 지급될 거고요."

"... 협회장요?"

당신이?

아니 내 나이랑 비슷해 보이는데.

협회장은 그... 하와이 배불뚝이 아재처럼 은퇴 헌터가 맡는 거 아니었어?

"너무 의아해할 거 없어요. 아버지 덕이니까요."

아, 그렇겠지.

이런 젊은 사람을 협회장에 박아놓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높으신 사람인 거야?

"그쪽도 헌터인 거 같던데."

"각성자지 헌터라고 볼 수는 없죠. 던전 공략은 거의 하지 않으니."

"그런 것 치고는..."

강하던데.

내가 사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27% 정도를 파괴할 수 있는 정도면 클래스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통상 클래스에서는 꽤 강한 헌터 축에 속했다.

"호신 목적이에요. 아버지 지론이시죠."

하긴, 나도 강해지려는 거에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으니.

힘은 보험 같은 거라서, 있으면 억울할 일이 많이 줄어든다고 누가 그랬더라?

"혹시, 시간 괜찮다면 저희 집에서 같이 식사나 하시겠어요?"

... 요즘 따라 어디 가서 뭘 같이 하자는 여자가 계속 많은 느낌인데.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요?"

내가 낯을 좀 가려서.

처음 보는 사람이랑 식사하면 체할 거 같거든.

그것도 높으신 분이랑은 더욱이.

"반드시는 아니지만, 오시면 좋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와준다고 해주시면, 바로 알려드리죠."

이렇게까지 나오면, 못 이긴 척 받아줄까.

"뭐, 식사 한 번이 어렵진 않죠."

"고마워요. 정보는... 지금 러시아 헌터 협회에 '별의 유물' 정보가 있다는 거죠."

"그건 어떻... 아, 협회구나."

혹시나 해서, 협회 쪽에 '별의 유물'과 '혈금' 관련 정보를 의뢰하긴 했는데...

천 포인트 정도 주고서.

하와이 협회에서 의뢰한 건의 대답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네.

타국 협회에 의뢰 정보가 공유되는 줄도 몰랐고.

"그런데, 그걸 가져가려면 우리 아버지를 잘 설득하셔야 할 거예요."

아니, 그래서 너네 아버지가 누군데.

그런데 이 차, 좀 이상한 곳으로 가는 거 같은데.

사이렌까지 울리면서 인파를 헤치고 도달한 곳.

여긴, 내가 모스크바 오기 전에 블로그에서 봤던 너무 익숙한 광경이었다.

"붉은 광장?"

"와보셨나요?"

"아, 아뇨."

그리고 붉은 광장과 연결된 건물은.

"크렘린에 온 걸 환영해요."

제정 러시아의 황제들부터 소비에트 연방에 이어 현재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최고 지도자들의 거처로 사용된 건물.

대통령궁.

크렘린이었다.

**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가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십중팔구는 미국을 꼽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물어보면, 열중 열은 러시아를 꼽는다.

아니 꼽아야만 한다.

그게 사실이고, 모르면 상식 부족이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라는 건, 게이트 또한 가장 많은 국가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던전 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잘 돌아가는 국가라도 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 러시아 연방이다.

멍하니 주변을 흘끗거리며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아리나에게 물었다.

"성이 다르잖아요, 성이."

"무슨 소리에요?"

"당신 아버지 이름, 로마노프 아브라모프 아니에요?"

내가 아무리 가방끈이 짧아도, 뉴스는 잘 챙겨 본다.

러시아 대통령 이름을 모르려고.

비슷하긴 한데, 아브라모바, 아브라모프. 성이 다르잖아.

내 질문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러시아에서는 성별에 따라서 성이 바뀌어요. 아브라모바는 여성형 성, 아브라모프가 남성형 성이에요. 둘 다 같은 뜻이고요."

"와나."

성이라도 같았으면 조금 의심이라도 해봤을 텐데, 완전히 뒤통수라도 거하게 맞은 느낌이었다.

무슨 갑자기 분위기 크렘린이냐고.

삼엄한 경비 속에 나는 그녀와 함께 그대로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뉴스에서 봤던 그 양반이 맞긴 한데.

문제는, 조금 특이한 차림이었다는 거다.

중갑에 검까지, 던전 아이템으로 완전 둘둘한 채로 수련에 열중한 모습.

아리나도 나도, 그걸 방해하지 않고 잠시 지켜보자, 이내 수련이 끝난 듯 검을 갈무리했다.

이윽고 던전 아이템들도 순식간에 인벤토리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정장 차림으로 바뀐 그가 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이거 긴장되네.

한국 대통령보다 러시아 대통령을 먼저 만나볼 줄은 몰랐지.

"메시지는 보았네. 김세균 헌터,"

"대통령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김세균입니다."

그의 알은체에 가볍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엄청나게 수련을 거듭했을 것 같은 굳은살 박인 손이 느껴졌다.

마치 제피로스의 손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 러시아 연방은 실력 있는 헌터들을 항상 우대하지."

땅은 넓은데, 인구는 그에 부합할 정도로 많지는 않다.

그러니 외국 헌터들을 적극 유입시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헌터의 권력이 가장 강한 나라 아닐까?

"자네가 귀화하겠다면, 당장 최고 대우와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와, 이 아재 노빠꾸네.

초면부터 귀화야?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내가 국제 정세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기초 상식은 있다.

이 사람, 10년 전쯤에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원래는 러시아 헌터 협회장이었고, 헌터들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기존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했지.

그러니, 헌터들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거다.

"죄송합니다."

그걸 알기에, 나는 웃으며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귀화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지만서도...

특히 이 나라에 귀화하면 더 곤란하다.

헌터는 던전에서만 힘쓰면 된다.

현실에서 사람 백정 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헌터를 현실 전력으로 삼는 국가였다.

물론 어떤 나라나 전시 등의 유사시에는 헌터들을 징집하긴 하겠지만, 상시로 던전의 몬스터들 대신에 사람 잡는 훈련을 하는 일정 이상 규모의 국가는 드문데, 그중 하나가 여기었다.

"흐음, 아쉽구먼. 강요할 수는 없지."

다행히도 누구처럼 집요하진 않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에, 세 사람이 식당으로 향했다.

수십 명이 한 번에 식사가 가능할 법한 거대한 테이블이 있었다.

세 사람이 앉으니 너무 휑해 보이긴 했는데, 그 테이블을 메우기 시작하는 음식들을 보니 전혀 휑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식사를 나누며 술이 몇 순배 돌아간 뒤에, 로마노프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려서 잘 모를 거 같은데, 내가 축구 구단을 소유했단 사실은 아나?"

"... 지나가듯 들어본 적 있습니다."

영국의 축구 구단이었던가?

그때까진 축구 인기가 엄청났다고 들은 거 같다.

"당시엔 각성 초창기였는데, 처음에는 각성자의 힘이라는 게 참으로 미미했지. 심지어 각성자들의 레벨이 낮았으니, 게이트가 그렇게 많고 다양할 줄도 몰랐고."

게이트는 입장 자격이 되어야 그 입구가 드러난다.

그러니, 각성 초창기에는 초기 단계 게이트만 나왔겠지.

그리고 초기 단계 게이트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은 거의 가치가 없다.

헌터들의 위상이 무시받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가능성을 봤네. 당시에 나도 각성했고, 바로 그날부로 축구 구단은 정리하고 던전 개발 회사로 갈아탔지. 유망한 헌터들도 여럿 영입했어. 그게 대박이 났지."

러시아 던전 경제의 주춧돌 같은 사람이라는 건 알았는데, 이런 일화가 있었던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깨달았지. 왜 이 힘을 던전에서만 사용해야 하는가? 밖에서도 쓸 수 있는데 말이야. 문제는 그걸 깨달은 게 나뿐이 아니더군. 어느 날 내 보스가 갑자기 날 구금하고, 모든 권한을 내놓으라고 했어. 나는 가만히 당하고 싶지 않았네."

웃으며 포도주를 한 잔 들이켠 로마노프 대통령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인지 물어봐 주겠나?"

"... 왜입니까?"

"강하니까. 나도, 내가 이끌던 헌터들도. 우린 강했으니까. 그런 강자들에게 감히 약자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꼴이 우습더군. 내가 평생을 모신 사람이었지만, 그는 확실히 약자였네."

짜르(황제)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렸던 러시아의 전(前) 독재자가 그렇게 축출되었다는 거군.

"우리 러시아는 그렇게 강자들의 사회가 되었지."

"멋지군요."

이건 빈말.

멋지다기보단 무섭다는 게 솔직한 감정이다.

"자네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겠지. 없을지도 모르고."

로마노프 대통령이 내 빈 잔을 직접 채워주면서, 빙그레 웃어 보였다.

"강한 자라면 여기서는 누구나 대우받고 별이 될 수 있다네. 자네라면 가장 빛나는 별이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네."

아니, 이 인간들이 요즘 나한테 왜 이래.

끝난 줄 알았는데, 시작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저는 던전 안에서만 빛나고 싶습니다."

"고작 던전이 자네의 빛을 가릴 수 있겠나."

"일단 지금 제가 필요한 별은 그게 아니라 다른 별이긴 하군요."

화제를 돌려야지.

그런 내 필사적인 의지를 읽었는지, 로마노프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의 유물이라. 유물급 이상 아이템의 수리나 강화에 필요한 최상급 재료 아이템이라지?"

그랬어?

유물급이면...

어우, 비싸겠는데.

"분명 그게 채굴되는 던전이 우리 러시아 연방에 있긴 하지."

"혹시나 그걸로 귀화를 요구하셔도, 저는 들어드릴 수 없으니 다른 제안을 하십시오."

딱 선을 그었다.

별의 유물이 뭐 러시아에서만 나오겠어?

내 단호박에 대통령이 피식 웃어 보였다.

"성격이 급하군.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뭐,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이것도 나름의 운명인가?"

운명?

그게 무슨 소리지?

"첼라빈스크의 그 던전은, 자네 나라의 회사가 완전히 망쳐놓고 간 던전이니까."

"회사... 라면..."

"성광그룹."

... 갑자기 분위기 성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별의 유물이 그 던전에서 채굴되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위험해서 입장할 수가 없는 던전이지. 우리로서는 아주 골칫거리야. 덕분에 첼라빈스크 지역의 평정 효과가 깨졌거든."

평정 효과가... 깨질 수도 있는 건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남겨둔 채, 로마노프 대통령은 냅킨으로 입을 한 번 닦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딸아이에게 듣게나. 만약 그 던전을 클리어해준다면, 향후 5년간 채굴되는 별의 유물의 10%를 주지."

10%는 너무 적소, 40%쯤 합...

아니,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일단 거길 클리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협상은 나중 얘기다.

그가 식당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보다가, 이내 건너편에 앉은 그의 딸, 아리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설명해 보실까요?"

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스타(3)

스타(3)

"러시아 연방에서는 국외 기업에 다수의 던전을 임대하고 있어요. 그 게이트도 그중 하나였죠. 이름은 별정령의 골짜기. 평범한 17단계 10인 인스턴스 던전 형식의 게이트였어요. 부산물도 썩 신통치 않고, 몬스터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날 골짜기 자체에 희소금속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음, 그렇군.

광맥이 있는 게이트는 흔하니까.

그런데...

"인스턴스?"

"네."

"그러면 혹시 채굴하고 나서 클리어해버리면..."

"던전은 초기화되죠."

"이 무슨 개사기가."

입이 떡 벌어졌다.

무한리필 광산이란 소리잖아?

이런 유형의 게이트는 진짜 드물 거다. 

나도 처음 들으니까.

물론 내부에는 일정 레벨 이상의 각성자만 입장할 수 있고, 현대식 채굴 도구를 가지고 입장할 수도 없으니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성광자원개발에서는 성광전자에서 필요한 희소금속의 안정적인 조달을 위해 던전 입찰에 참여했죠. 채굴량의 절반은 국가에 기부채납하는 조건으로요. 그러다가 사건이 터졌어요."

"뭐죠?"

"조금 더 깊게 캐고 들어가다 보니, 거기에 아주 희귀하지만 별의 유물이라는 광석이 나왔다는 이야기죠. 뭐,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세계의 많은 헌터들이 노리는 귀중한 재료고요."

몰랐는데.

나 같은 뉴비 말고 한 끗발 날리는 양반들은 이미 찾고 있었구나.

"정부에서는 그 소유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성광에서는 계약상으로는 나오는 모든 금속의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했죠."

그럼 그렇지. 그런 걸 쉽게 넘겨줄 리가 없지.

"하지만 재판까지 가는 끝에 성광이 승소했어요."

오오, 정의 만세.

물론, 눈앞의 공주님께서는 자기 나라의 손해니까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아무리 독재 국가라도 계약은 지켜야지, 안 그래?

"대신 기간제 계약이었던 것을 기간 및 횟수제로 변경했죠."

에헤이. 그럼 그렇지.

"왜죠?"

"별의 유물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채산성을 고려해서 적당히 채굴했을 텐데, 갑자기 채산성이 높아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기간 내에 최대한 인력을 투자해서 뽕을 뽑으려고 하겠죠."

무한리필이니까.

"맞아요, 그러면 별의 유물 시세가 급락할 거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어요. 별의 유물이 발견되기 전 평균 채굴 횟수대로 채굴하라는 게 판결 내용이었죠."

러시아 입장도 이해는 되네.

그리고 러시아치고는 합리적인 결론이고.

"그래서 횟수 제한이 걸린 성광자원개발은 더 많은 별의 유물을 채굴하기 위해 한 번의 채굴에 무리해서 깊은 곳을 탐광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문제가 생겼지요."

**

"그런데, 요즘 그 유물인가 뭔가, 나오는 양이 줄어든 거 같지 않아?"

리필되긴 했지만, 광맥의 위치가 항상 같은 건 아니었다.

심지어 별의 유물은 그 양이 점점 줄어든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채굴량이 줄고 있었다.

"조금 더 깊게 파자고! 더 깊은 곳에는 분명히 있을 거야!"

재수 없게도 쓰레기 능력을 각성한 각성자인 남자가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런 그에게 이 채광 기회는 꽤 중요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많은 유물을 캐내야 그만큼의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었다.

마침 위에서도 어떻게든 더 많은 별의 유물을 캐내라고 채근 중이었기도 했다.

남자는 곡괭이질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마침내.

푸스스스스!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거대한 광맥이 나타났다.

"오, 오오오오!"

그런데, 별의 유물이 보이던 찬란한 은빛이 아니었다.

빛이 나긴 했지만...

불길한 푸른색의 빛이었다.

그 빛에 노출된 순간, 갑자기 현기증이 핑 돌았다.

몬스터 정리를 맡은 헌터들도, 순간 어지럼증에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되었습니다.]

[돌발 임무! 17단계 게이트, '별정령의 골짜기'가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변이한 별정령의 골짜기'로 바뀝니다. 던전을 토벌하면 환경이 복귀됩니다.]

[던전의 변화로 러시아 연방, 첼라빈스크 지역의 평정 판정이 해제되었습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어, 몬스터가 리젠되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간신히 일어나서 상대해보려 했지만, 간단히 상대하고 한 마리만 남겨 풀링까지 할 수 있던 기존의 별정령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헌터들이 찢겨 나가고.

다음은 남자의 차례였다.

'얘들아...'

집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