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단계(2)
11단계(2)
확신까진 아니었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미시안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아이템의 내용, 그러니까 효과에만 관심을 두지만, 내가 본 건 설명 쪽이었다.
[설명] : 위대한 연금술사가 화산 내부 생태계를 오랜 기간 연구한 끝에 제작한 포션이다.
화산 내부는 완전 마그마나 용암으로 가득할 텐데, 무슨 생태계가 있겠어?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엑스트라모필레(Extremophile)이라는 극한 미생물들의 존재가.
나라고 내 능력이 세균인데 세균 공부를 안 했을 리 없잖아.
일이천 도는 족히 넘나드는 저 극한의 환경에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면, 오로지 극한 미생물의 가능성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시안은 그 존재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언데드 라이즈!"
확인까지 했으니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포션에 대고 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Magmophile 균주 사체 1억 362만 3074개.]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설명 감춰짐>
(2) Caulobacter Crescentus(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 <설명 감춰짐>
(3) Magmophile(마그모필레)
─개체수 : 103,623,074 개
─설명 : 화산의 마그마 속에서만 서식하는 박테리아다. 마그마의 융해된 무기물질을 먹이로 삼아 성장한다. 마그마 내부의 고온고압을 견디기 위해, 계속해서 단열 물질을 형성하여 피막을 만든다.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0.001g(기본 0.00001g, 통제력 200% 효과 적용)의 단열 물질 형성. <단열 물질 효과 : 화염 저항 +3,000%>
일단 언데드화로 포션 안에 사멸해 있는 마그모필레, 이제 3호기가 된 세균 군단을 일으키긴 했는데... 이제 어쩌지?
3호기의 화염 저항을 활용해서 버틸 수는 있지만, 결국 공격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화염 저항 효과를 1호기에 전달할 수 있다면 최상일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스킬 숙련도가 오르면서 생긴 효과가 3호기로 끝난 게 아니었다.
(2) 마나를 소비하여 언데드를 일시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아직 C급 숙련도의 이 기능이 남아 있었다.
"언데드 강화."
[강화 가능한 언데드 목록]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강화 효과 : 각 개체가 스킬, '포식 진화'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포식 진화]
─설명 : 흡사한 유전적 형질의 이종 미생물을 포식하여 그 형질을 일시적으로 흡수한다. 흡수하여 진화한 형질은 1세대에 한하며, 분열을 통해 유전되지 않는다.
─내용 : 필요 유전적 형질 일치도 0.8%(기본 80%, 통제력 200% 효과 적용), 필요 마나 1억 개체당 현재 마나의 13% (기본 1,300%, 통제력 200% 효과 적용)
이렇게 설명으로 보니 내 통제력 수치가 괴랄하긴 하다.
원래 필요 일치도가 80%면 거의 가까운 유전 형질의 미생물만 포식할 수 있다는 건데, 통제력 효과로 그 제약이 거의 없어졌다.
필요 마나 역시 엄청났는데, 지금은 사용할 만한 정도까지 내려왔다.
어쨌든, 지금 딱 필요한 스킬이었다.
"3호기, 살리자마자 미안하지만... 좀 먹혀줘야겠다."
[Perpertus Exomodulus 개체 1억이 스킬, '포식 진화'를 사용합니다!]
내 의지에 따라, 1호기의 1억 군단이 순식간에 포션 안에 있는 3호기를 덮쳤다.
[당신의 군단이 Magmophile 1억 개체를 포식합니다!]
[두 개체군의 유전적 형질 일치도가 23%입니다. 성공적으로 형질을 흡수하여 진화합니다!]
[Perpetus Exomodulus(진화 상태)]
─개체수 : 100,000,000 개
─설명 : 미생물, Magmophile을 포식하는 것으로 1세대에 한정하여 진화한 개체군이다.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5kg(기본 50g, 통제력 200% 효과 적용)의 무/유기물을 분해한다, 1억 개체당 초당 0.0005g(기본 0.00001g, 통제력 200% 효과 적용, '포식 진화'로 형질 흡수된 상태로 50% 열화됨)의 단열 물질 형성.
역시 완벽하게 능력을 흡수하진 못하는 건가.
절반 정도의 성능밖에 못 낸다는 건데.
그래도 내가 지금 믿을 만한 건 너밖에 없다.
최대한 빠르게 한다고 한 거였는데...
쿠웅! 어느새 육중한 용암의 거인이 근처까지 다가온 채였다.
"큭!"
가까이 간 것만으로도 후끈 뜨거운 열풍이 얼굴을 덮쳤다.
[아이템, '화산의 정수'를 사용합니다.]
일회용이라 아깝긴 하지만, 일단 화산의 정수부터 마셨다.
3호기를 쓰자니, 조금 전에 대다수의 개체가 포식되어서 고작해야 몇백만 개체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인벤토리에 넣어뒀다.
다시 숫자를 불리려면 규선 씨에게 가서 부탁해야겠지.
포션을 마시니 확실히 뜨거움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피부에 피막 같은 점액질의 단열층이 형성되는 느낌.
이게 3호기랑 같은 효과라는 거지?
그런데...
나를 향해 다가오던 용암 골렘이, 완전히 방향을 돌려 다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새끼 뭐야?"
황당해하는 것도 잠시,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스, '다시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당신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수호자가 당신을 공격하는 대신에 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보스, '다시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수호자의 잔재를 흡수합니다.]
[수호자가 강해집니다.]
"뭐?"
아니 저 새끼 양심이 있어?
저기서 더 강해진다고?
이게 무슨 놈의 11단계 던전이야!
하지만 불평할 틈도 없이 골렘이 움직였다.
[수호자의 잔재를 흡수합니다.]
[수호자가 더욱 강해집니다.]
보스는 내가 파괴했던 스톤골렘들을 흡수하며 강해지고 있었다.
"화산의 정수가 함정이었나."
위험하다고 이걸 마시는 순간, 페이즈 3로 돌입하게끔 던전이 설계된 듯했다.
이거 겁나 악질이네.
심지어 속도도 엄청 빨랐다.
잠깐 망설이는 순간, 벌써 네 개의 골렘들을 흡수한 채였다.
처음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 보스.
하는 수 없다.
1억의 진화 1호기 군단.
너네밖에 믿을 게 없다.
"생명석을 찾아서 파괴해."
그렇게, 순식간에 보스의 내부로 파고드는 1억 개체들.
성공인가, 실패인가?
가늠조차 어려운 순간에.
[진화 효과로 마그마 속의 무기물을 흡수하여, 'Perpetus Exomodulus(진화 상태)'가 더욱 활성화됩니다!]
[개체가 최고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일시적으로 개체의 모든 능력이 상승합니다!]
[보스, '다시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마지막 수호자의 잔재를 흡수합니다!]
[수호자가 완전해집니다!]
['온연히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나타납니다!]
보스가 강해지는 것과, 내 군단이 강해지는 메시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이제 거의 집채만 한 수준까지 커진 용암 골렘.
그 앞에서는 제대로 숨쉬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화산의 정수 효과가 종료됩니다.]
포션 효과가 종료되자마자 훅! 하는 열기운이 몸을 덮쳤다.
반지에서 갑작스레 변환된 아테나가 대부분의 열을 막아내긴 했지만, 그 복사열만으로도 거의 익을 것 같았다.
"언제... 끝... "
고통에 비하면, 불과 십 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결판이 났다.
[던전 보스, '온연히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뚝뚝 흘러내리던 용암이 검게 식으며, 내부에서 배출되는 가스가 구멍을 숭숭 뚫어놓고 있었다.
저 거대한 용암 골렘이, 용암이 식은 상태인, 현무암의 상태로 바뀌는 중이었다.
[당신은 11단계 게이트, '성급한 수호자들의 제단'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당신의 클래스 주요 능력치가 일부 상승합니다.]
[통제력이 5% 상승하였습니다.]
[전설적인 업적! 당신은 11단계 게이트, '성급한 수호자들의 제단'을 완벽하게 토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연금술사의 비망록'이 주어집니다.]
...
..
.
이후로도 꽤 많은 메시지가 떴던 거 같은데, 일단 나가서 확인해야겠다.
어쨌든,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11단계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를 클리어하긴 한 거다.
그걸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 게이트 안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메시지가 더 떠올랐다.
[김세균 님께서 11단계 게이트, '성급한 수호자들의 제단'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또 하나의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클리어.
동시에, 또 하나의 평정 지역까지 추가.
웅, 하고 통화 가능 범위에 들어온 휴대폰이 그제야 진동했다.
─해냈구나...!
"해냈긴 해냈죠."
겨우 해내긴 했지만, 클리어 한 건 한 거다.
게다가, 내가 어떻게 클리어했는지 볼 사람도 없을 테고.
애당초 촬영을 안 했고, 여길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반응들은 어때요?"
─어떨 거 같은데?
"열광?"
─고작?
피식 웃으면서, 제피로스가 말을 이었다.
─아마 어디가 관심이 없는지를 찾아보는 편이 더 빠를 거다.
나도 커뮤니티나 뉴스 등을 보고 있긴 했다.
다만 지난번 3번 게이트를 클리어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화력이 좋아서, 볼 만한 글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초당 몇 페이지씩 스크롤이 넘어가는데, 이걸 어떻게 보라고.
"그러면... 아마... 기자회견 같은 거도 열리겠죠?"
─기자회견? 당연하지.
원래 헌터들에게도 기피의 대상이 기자들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기자 회견 같은 건 피하는 게 상책.
─잠깐만 기자들 상대하고 있으면 금방 빼내 주마.
제피로스도 그런 의미에서 말했지만, 그렇게 되면 곤란했다.
"오후 10시까지 김포공항으로 갈 테니, 거기에 기자회견 세팅해주세요."
─세, 세팅을 해달라고? 기자들을? 그것도 공항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하는 제피로스였지만,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면, 그렇게 해야겠지. 알겠다."
**
제주에서 뜨는 거의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제주공항에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내 얼굴이 언제 그렇게 풀린 줄 몰랐는데, 이미 1단계 게이트 신기록 당시에 유출된 사진들이 커뮤니티에서 많이 돈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평가가, 잘 생겼네 보다는 평범하네, 음침하네 같은 평가여서 기분이 좀 상하긴 했었지만.
어쨌든, 아주 커뮤니티 활동을 열렬히 하는 정도가 아니면 내 얼굴을 알지는 못하는 정도.
그런데, 문을 열고 나섰을 때, 일제히 터지는 플래시 세례!
─빛으로 눈을 공격하다니! 정말 사악하군요! 제가 선제적으로 처리해도 될까요?
아테나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친 짓 말고 제발 얌전히 있어.
너 임마, 그리고 아까 용암 골렘 잡을 때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하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여기 있는 모든 기자들은 내 얼굴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고많은 사람 중에 내 평범한 얼굴이 지나간다고 플래시가 터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KBC에서 나왔습니다!"
"MBS에서 나왔습니다! 질문 하나만...!"
"SBV입니다!"
공중파는 물론이고, 각종 종편, 타방송사에...
그런데, 그런 언론사는 그야말로 관심 한 줌 줄 수준도 안 됐다.
"데일리 헌터입니다!"
"BBDC에서 왔습니다!"
"헌팅 타임즈입니다"
이런 외국계 언론사들에 비하자면 말이다.
그들의 앞에 나서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꺼낸 파워큐 엘릭서를 마셨다.
노란색 계통의 색깔을 이용하던 기존과는 다르게, 파란 색의 파워큐 엘릭서는 청량하게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거의 짜릿할 수준으로 몰려오는 각성감.
피곤 따위는 한 병이면 완벽하게 깨트릴 수준이었다.
너무 대놓고 광고한다는 이미지면 곤란하다.
그냥, 기자들이 누가 보아도 궁금할 정도로.
천천히, 음료를 목으로 넘겼다.
바로 그때였다.
도저히 참지 못한 한 기자가 손을 들어 물어 온다.
"HTBC의 조규환 기자입니다! 혹시 지금 마신 음료수가 뭡니까?"
월척이요!
11단계 공략보다도 주객을 전도할 만한, 거나한 월척이 기자회견장에서 물리는 순간이었다.
해외(1)
해외(1)
갑자기 음료수가 뭐냐니.
주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HTBC의 잔뼈 굵은 기자 조규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로 기자들이 많아지면 어차피 남들 다 하는 질문으로는 시청률 땡기는 것도 쉽지 않다.
차라리 조금 실없어도 신박한 질문 하나 던져서 단독 기사 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 심산으로 대충 물어보았던 조규환의 시선에, 김세균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들어왔다.
"아, 이거요..."
웃는 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김세균의 입이 열렸다.
"엘릭서입니다."
"... 예?"
"좀 피곤해서, 컨디션 회복 용도로 마시는 중입니다."
미친 새끼!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아무리 헌터가 돈을 잘 벌고 컨디션도 중요하다지만, 선을 넘은 건 넘은 거다.
한 병에 수천만 원짜리 엘릭서를 이렇게 대중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벌써부터 돈지랄에 맛을 들인 건가?
그게 아니면, 어지간히 금수저인 모양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불가사의 던전을 두 개나 깼다지만, 아직 저레벨의 루키였다.
쓰레기통에 처박힐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며 조규환이 머쓱하게 이어 물었다.
"엘릭서를... 피로회복제로 드시는 건가요?"
"네? 아... 아아아...!"
김세균은 손뼉까지 치면서 낄낄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지, 한참 혼자 웃던 김세균이 천천히 말했다.
"이거, 여러분들이 아시는 엘릭서가 아닙니다."
"예? 엘릭서라고..."
"엘릭서 성분이 들어가긴 했고 비싸기도 한데, 여러분이 아는 한 병에 몇천만 원짜리 엘릭서가 아니에요. 아는 제약사에서 스폰서라고 신제품 몇 개 줬는데 너무 효과가 좋아서 던전 다닐 때 꼭 들고 다닙니다. 이거 한 병에 2만원 정도 선이에요."
피로회복제 한 병에 2만원.
비싸긴 했지만, 목숨 걸고 일하는 헌터 직업군의 특이성, 그리고 엘릭시르라는 재료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이해 못 할 가격도 아니었다.
적어도 병당 수천만 원의 원본 엘릭서를 막 벌컥벌컥 피로회복제 용도쯤으로 마셔대는 미친 짓보다는 훨씬 합리적이었다.
"뭐, 샘플로 쓰라고 몇 병 받았는데, 기자님도 한 병 드셔보시죠."
김세균이 휙 병을 던진 것을, 조규환 기자가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파워큐... 엘릭서... 혹시 이거 세일 파워큐입니까?"
세일 파워큐?
한국 사람이면 거의 모르는 사람 없는 유명한 드링크제 아닌가.
최근에 제조사인 세일제약이 오늘 내일 하며 간당거리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네, 세일에서 새로 내놓는 신제품이라는데, 효과가 죽여요. 아마 헌터라면 꼭 사 먹고 싶을걸요? 헌터 아닌 분들도 중요한 일정 앞두고는 드실 만하죠."
말하고는, 김세균이 눈짓으로 조규환 기자를 채근했다.
"어, 음... 잘 마시겠습니다."
간편히 마실 수 있는 에너지 드링크와, 이름만으로도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엘릭서의 조합.
썩 궁금했는지, 기자들의 시선이 오히려 김세균에서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조규환 기자의 들썩이는 목울대.
벌컥벌컥 목으로 파워큐 엘릭서를 넘긴 조규환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었다.
"이, 이거..."
사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피곤했던 그였다.
원래는 퇴근 시간인데, 갑자기 밤 10시에 기자회견을 부르는 미친놈이 어디 있냐고 씹으면서 나왔다.
그런데, 그 모든 피로가 일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피로 회복이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
그리고, 실시간으로, 그라데이션으로 변하는 조규환의 안색은.
좌중에 있는 수많은 카메라들에 잡히고 있었다.
접사로 찍힌 파워큐 엘릭서의 상표까지도 함께 말이다.
**
기자회견을 마치고서, 올라오는 기사나 커뮤니티 반응들은 꽤 흥미로웠다.
[3단계 불가사의를 넘어서 11단계까지. '불가사의에 도전하는 헌터' 김세균 씨, 다음 불가사의 던전 도전은 미정?]
[공략 불가를 공략한다, 김세균, 위대한 헌터의 발자취 미리보기!]
정상적으로 나에 대해 다룬 기사들도 있었지만...
[파워큐 엘릭서, 불가사의 던전 공략의 핵심?]
[세일제약, 엘릭서 성분의 피로회복제 내놓나?]
[HTBC 기자 표정 변화 화제. '그라데이션'급 피로회복? 파워큐 엘릭서, 출시는 언제?]
오히려 파워큐 엘릭서와 관련된 기사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파워큐 엘릭서는 언제 출시임?
─ㅋㅋㅋ ㅅㅂ HTBC 기자 표정 변하는 거 봄? 거의 실시간으로 좀비에서 사람이 되던데.
─광고라 했으면 못 믿겠는데, 기자회견장에서 그냥 아무 기자가 마신거임 ㅋㅋ 레게노.
─아! 엘릭서 마시고 싶다!
└조용히 해라잇! 쪽팔리게!
─솔직히 병당 2만원 개 혜자 아니냐? 평생 엘릭서 한 번 마셔볼 일 없을 텐데, 나같은 엠생이 찍먹 가능한 거에서 이미 끝남.
└ㄹㅇㅋㅋ 아 부자놈들 이렇게 좋은 걸 지들만 마셨냐고 ㅋㅋ
└내가 누구? '더 슈퍼 마제스티 어메이징 엘릭서 오너'
커뮤니티 반응 역시 엄청났다.
오히려 11단계 불가사의 공략보다도 더 화제가 될 지경.
"조규환 기자한테 감사해야겠는데요."
뭘 받은 것도 아닌데... 거의 광고 모델이 다 됐다.
아니 받긴 했지, 드링크 하나.
어쨌든,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약빨이 좋을 줄은 나도 몰랐지.
"어, 엄청납니다. 이 정도 반응을 광고비로 집행하려면 거의 몇천억은 들 겁니다."
홍보팀장이 거의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이보다 더 좋은 홍보 효과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저희 홍보팀에서도 계속 장작은 넣겠습니다. 업체 동원해서 출시까지 화제 이어갈 수 있도록 티 안나게 바이럴 조금씩 섞겠습니다."
"좋습니다. 다들 고생들 많은 거 알지만, 출시까지 조금 더 잘해봅시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아, CTO님은 남아주세요."
회의 끝난 회의실에 내 요청대로 남은 규선 씨.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어때요."
"좋죠... 이보다 좋을 수는 없죠."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죠?"
"무리는요. 성광 때보다 하루에 세 시간밖에 더 일 안해요."
"... 저기요, 그걸 우리는 무리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게 사회적 합의라."
성광 때도 거의 자발적 노예 수준이었던 걸로 아는데, 거기서 3시간을 더 일하면... 집엔 가긴 가는 거야?
내 머릿속에 들어오기라도 했다는 듯, 규선 씨가 말했다.
"CTO실이 넓고 좋더라고요. 예전 성광 연구실은 좁아서 침대 놓을 곳도 없었는데."
"... 설마 CTO실에서 숙식하는 건..."
"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헤헤."
"..."
연구팀에 X키를 눌러 조의 한 번 표해준다.
연구 개발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CTO가 저 정도면,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을 텐데.
언제 교통정리 한 번 해야겠군.
퇴근도 못 하고 집에 갈 생각 없는 부장 눈치 봤던 트라우마가 좀 올라와서 말이지.
"그나저나, 어쩐 일로..."
"아,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줄 거도 있고."
"물어볼 거요?"
새로 얻은 3호기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어떻게 더 분열시킬 방법이 없을까요?"
"음, 글쎄요."
나름 뭐 트라이 안 해 본 건 아닌데, 3호기들은 좀처럼 분열하지 못했다.
1호기나 2호기가 그녀가 만든 배양액에 들어가면 엄청난 속도로 분열해서 불어나는 것처럼, 3호기도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싶어서 물어본 것.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본래 서식 환경을 구현하는 거예요. 배양액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않거든요."
"본래 서식 환경이라면... 에이, 설마..."
3호기의 서식 환경은 당연히... 화산지대의 용암, 그러니까 마그마 속이다.
"여기에 마그마를 만들라고요?"
"그건 어렵죠."
"... 어떻게 하지."
"마그마를 찾아가는 수밖에요."
"설마. 던전에...?"
아, 그 11단계 던전에 다시 가야 한다는 건가.
어지간해서는 눈길도 주기 싫은데.
다시 공략하면 이전보다야 수월하겠지만...
"아, 아뇨... 어차피 단순 배양이 목적이면 아무 화산이나 가면 되잖아요?"
"... 그러네?"
나 바보인가.
굳이 화산 지형 던전을 찾아다닐 게 아니라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화산을 가면 되잖아?
음, 벌써 헌터 생활에 찌들은 중증의 헌터 뇌가 된 기분이다.
"화산이라... 어디가 좋을까요? 우리나라엔 없을 테고."
국내엔 지표에서 마그마나 용암이 흘러나오는 활화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그쪽은 잘 몰라서... 일본?"
"일본... 거긴 어지간해서는 피하고 싶은데요."
물론 가깝기도 하고, 요즘은 엔저로 물가도 저렴하고.
가기는 좋은데, 그건 일반인들 한정의 이야기였다.
헌터들의 입국은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이었다.
비단 일본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도 외국 헌터들에게 배타적인 나라였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그렇게 헌터에 배타적인 나라가 된 이유는 하나였다.
세계 최대의 인구 보유국.
그래서 게이트 품귀 현상에 시달리는 미친 나라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렇다.
'그 나라' 헌터들은 관광 비자로 입국해서 이른바 '게이트 도둑'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음, 그러면... 미국? 하와이에 킬라우에아 화산도 있고요... 뭐 옐로우스톤 국립공원도 있고... 게다가 미국은 헌터 정책이 반대잖아요?"
"그러게요 미국 좋네요 미국."
미국의 대(對) 헌터 정책은 우리나라나 일본과는 아예 정반대였다.
오히려 일반인 입국이 조금 까다로운 편이고, 헌터들은 웰컴이다.
적당히 이름값 있는 헌터인 것이 증빙만 되면, 바로 H-1H 단기 헌터 비자가 나왔다.
천조국의 저 방대한 영역은, 자국 헌터 수요만으로는 게이트를 전부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니, 차라리 외국의 헌터 인력이라도 동원해서 그걸 굴리자는 뜻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렇게 세계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헌터들로 굴러가는 미국의 '던전 경제'만 해도 어지간한 국가의 1년 예산 수준.
뭐, 물론 내가 미국 가서 헌터질 할 건 아니니 비자는 큰 의미 없었지만.
그래도, 일본처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이라..."
검색으로 확인해 보니, 세계 최대 규모의 활화산이란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용암이 지표까지 흐르는 게, 3호기 배양하기에는 딱 알맞을 듯싶었다.
"고마워요, 규선 씨. 덕분에 해결된 거 같아요."
"벼, 별말씀을요."
"그런 의미에서, 이건 선물."
웃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이게 뭐... 어머!"
책을 받아들자마자 깜짝 놀라 떨어트렸던 그녀가, 황급히 다시 주우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거..."
"네, 연금술 스킬북이죠."
클리어 보상으로 받았던 '연금술사의 비망록'은 연금술용 스킬북이었다.
당연히 내가 쓸 수는 없는 물건이니, 팔거나 누굴 주거나였는데 마침 최고의 적임자가 눈앞에 있네?
심지어...
"연금술과 미생물을 결합한 연구래요, 심지어. 이걸 어떻게 참냐고요."
그 '화산의 정수'가 괜히 미생물을 활용해서 만들어진 포션이 아니었다.
그 게이트에 저서를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연금술사는, 미생물을 연금술에 도입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내용을 비망록에 남겼다.
그리고, 그게 고스란히 스킬북으로 아이템화되었다.
연금술사 클래스 각성자이자 미생물 전문가인 규선 씨에게 주라고 칼 들고 협박하는 수준!
"제가... 정말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받아도 되냐니. 받아주세요! 수준이다.
"규선 씨가 아니면 누굴 주겠어요?"
"가, 감사합니다..."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로 큰 눈에 그렁거리는 규선 씨.
한 차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참아낸 그녀가, 당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 더 열심히 일할게요!"
"아, 아뇨... 여기서 더 일하면 곤란합니다. 제발 집에 좀 가세요."
뭐, 잠도 안 자고 일하려고?
어쨌든, 다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파워큐 엘릭서는 거의 예정된 대박 수준이었고, 연금술사의 비망록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제 주인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하와이라...
해외여행은 처음이네.
비행기는 제주도 다니느라 몇 번 타봤지만, 이 나이 먹도록 해외는 가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가긴 조금 무섭다.
영어도 딸리고.
"... 규선 씨."
"네?"
"영어 잘해요?"
아니, 당연히 잘하겠지.
MIT까지 나왔는데... 내가 뭘 물어보는 거야.
"조, 조금요?"
겸손하시기는.
"그럼 하와이, 같이 갈래요?"
"네에?"
절대 혼자 해외 가기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
"푸, 푸하하하학─!"
"그만 웃으세요..."
제피로스가 배꼽을 부여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신나게 웃던 제피로스가 킥킥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여자한테 까이고 다음 옵션이 나란 거지?"
"아... 까인 거 아니라니까요!"
아니, 맞긴 한데.
까인 게 아니라... 배려라고.
같이 꼭 가야겠다면 가겠지만, 비망록을 빨리 연구하고 싶다는 눈치 한가득인데 그걸 어떻게 강제로 데려오냐고.
어쨌든, 그래서 첫 해외 여행을 혼자 가는 건 무리라고 생각이 들어서, 새로 구한 동행이 제피로스, 그였다.
"갑자기 하와이는 왜 가야 한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뭐 하와이... 나쁘진 않지. 물가가 너무 비싸서 그렇지."
"돈이야... 걱정하실 거 없잖아요..."
날 믿고 천억이라는 거금을 던전 개발 펀드에 태운 제피로스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나도 눈 딱 감고 사재 20억 대부분을 넣어서 100% 수익률을 내긴 했는데...
역시 총알 단위가 다르니 벌어들인 것도 달랐다.
심지어 나보다 더 먼저 들어가서 더 저점에서 물을 탄 제피로스였기에, 거의 150%에 달하는 수익률!
천억의 150%면, 수익만 1500억을 본 셈이었다.
거기서 계약대로 내 원금 200억을 다 까줘도 1300억 수익이다.
부 럽 다 !
뭐, 덕분에...
첫 해외여행을 조금 호사스럽게 가긴 한다.
나는 지금 퍼스트 클래스에 타고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다.
해외(2)
해외(2)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 근 8시간에 가까운 비행에도 불구하고 거의 피곤하지 않았다.
이게 자본주의의 맛인가.
거의 몇백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불과 8시간 비행에 태웠는데도, 기분이 상쾌했다.
아, 물론 내 돈은 아니어서 상쾌할 수 있던 거다.
하루아침에 1,300억 원을 벌어들이신 우리 대(大) 제피로스 류현수 선생님께서 사주신 티켓이었다.
"뭐해?"
"대 제피로스 선생님에게 새삼스럽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요."
"... 비꼬는 거냐?"
"그럴 리가요.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기분인데."
제피로스는 1300억을 벌었지만, 나도 거의 20억의 100% 수익률이니 20억, 거기에 200억 채무도 한 방에 날아갔다.
그의 조언 덕에 220억을 번 거나 다름없었으니, 큰절쯤이야 몇 번도 할 수 있었다.
아니, 몇 번 하면 안 되는 건가...?
"헛소리는 그쯤 하고, 얼른 나가자."
"어?"
눈앞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입국심사 줄에 입을 떡 벌리며 제피로스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이 아니라, 텅 빈 다른 심사대를 향했다.
"우린 줄 안 서도 돼요?"
"USDE License S등급 이상은 외교관 라인으로 수행인 3명까지 동반해서 통과 가능하다. 어지간한 보안검색도 다 제외 대상이고."
"USDE?"
"United States Dungeon Expert License, 미합중국 던전 전문가 자격증이야."
"언제 미국 자격증까지 따셨어요?"
"나 때는 다 있었어. USDE, EUDE는 기본이고 ODE는 옵션이었지. EU는 너도 알다시피 유럽연합 자격증이고 ODE는 Ocean, 해양 자격증이다."
설명하면서 여유롭게 입국심사관에게 여권을 건네는 제피로스.
흑인 입국심사관이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 Have a nice day sir."
"You too."
영어는 잘 모르지만, 유튜브 같은 데서 많이 봤던 말이다.
복무에 감사드립니다. 같은 뜻이었던가.
보통 군인한테나 쓰던 말 같은데.
당연하게도 입국심사관은 내게는 그런 말 없이 그냥 여권에 도장만 쾅 찍고 보내주었다.
"저, 제피로스."
"왜?"
"군인도 아닌데, 입국심사관이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죠?"
영어 할 줄 알았냐? 같은 소리를 하면서, 제피로스가 질문에 답했다.
"미국인은 아니어도, 미국 땅에서 USDE 라이센스 가지고 있으면 비상시에 소집되는 인력이니까."
"... 네?"
"애초에 그걸 동의해야 라이센스가 나와. 주 정부가 비상사태에 USDE 라이센스 보유한 헌터를 소집할 권한이 있지. 연방 정부는 당연하고."
"헐. 그랬어요?"
"당연하지. 괜히 외국인 헌터한테 이런 좋은 혜택을 주겠냐? 괜히 재수 없어서 여기서 뭔가 터지면 바로 강제소집이다."
"그렇군요. 뭐, 금방 돌아갈 거니까요."
"렌트부터 하자. 여긴 차 없으면 힘들어. 그나저나 어디 갈 건데?"
"킬라우에아 화산? 거기 가려고요."
내 말에, 제피로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얌마, 미리 말했어야지. 화산지대는 여기 없어."
"... 여기 하와이 아니에요?"
"하와이에 섬이 몇 개인데. 공항 뜨기 전에 말해서 다행이다."
제피로스의 이어지는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보통 여행지로 가장 각광받는 호놀룰루가 있는 오하우 섬이고, 화산지대는 하와이의 가장 큰 섬인 하와이 섬, 혹은 '빅 아일랜드'로 통칭하는 섬에 있다는 것을.
바로 국내선 비행기 티켓을 끊고 빅 아일랜드로 향했다.
내리자마자 관광지 분위기 일색이었던 오하우의 호놀룰루와는 다르게, 빅 아일랜드의 시내이자 하와이 주의 제2 도시인 힐로는 관광지라기보다는 그냥 사람 사는 도시였다.
거기서 렌터카를 빌려서 킬라우에아 화산으로 향했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이 나이에 내가 운전하리? 하는 타박을 듣고서 한 건 아니고, 원래 내가 하려고 했다.
힐로에서 킬라우에아까지는 차를 타고도 거의 90분 거리.
심지어 도로 상황도 좋지 않아서 그보다 더 잡아야 했다.
90분이라는 시간 동안 죽음의 침묵으로 갈 수는 없었기에, 내가 먼저 눈을 감고 잠들려는 제피로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 동네는 게이트 없어요?"
"뭐...? 없겠냐? 당연히 있지. 심지어 꽤 중요한 게이트일걸? 첨단 산업에 쓰이는 희토류 성분이 이쪽 게이트 서식 몬스터에서 많이 나와서."
흐아암, 하품을 터트리면서도 대답은 잘해주는 제피로스다.
"모르시는 게 없네요. 같이 오길 잘했어요."
"내가 여자한테 까여서 같이 온 대타치고는 괜찮은 편이지."
"그러니까 그거 아니라니까요."
티격태격하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났다.
입장료까지 내고 화산 지대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지금까지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와..."
사방이 불타오른 땅에, 곳곳에 갈라진 틈새로 용암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계란 노른자 냄새랑 비슷한 유황 냄새로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물론, 이런 광경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크게 하품을 터트리는 사람도 바로 옆에 있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놀라웠다.
"난 차에서 좀 잔다."
"예, 그러세요."
제피로스를 차에 둔 채로, 안전지대에 차를 대놓고 내려서 천천히 용암이 꿀렁이는 대지를 향해 걸어갔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왕홀, 지팡이를 들고서 이제 거의 남지도 않아서 눈에는 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3호기도 같이 꺼냈다.
기분 탓일까, 그런 3호기가 용암에 반응하여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가서 빨리 성장해 봐."
기다렸다는 듯 용암으로 쑥 들어가는 3호기.
(3) Magmophile(마그모필레)
─개체수 : 3,623,074 개 (현재 최적의 상태에서 분열 중입니다. 동일 환경 유지 시, 20시간 33분 후 개체수 10억(현재 유지 가능한 최대치)에 도달 예정입니다.)
다행히도 안정적으로 분열을 시작했다.
문제는 20시간을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는 거겠지만.
"제피로스한테 먼저 돌아가라고 해야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 때문에 온 사람을 이런 곳에서 20시간 넘게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아니지, 잠깐만... 굳이 분열이 아니라... 새로 일으켜도 되는 거 아닌가?"
마그마에서 사는 미생물이라면, 분명 번식하고 사멸하고를 반복할 터였다.
그렇다면, 저 용암 안에는 어쩌면...
[스킬, '미시안'을 사용합니다.]
[스킬, '미시안'이 대상으로부터 미시세계의 존재를 포착했습니다.]
[Magmophile(마그모필레) 개체 다수를 발견했습니다.]
예상이 맞았다.
"언데드 라이즈."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Magmophile 균주 사체 3억 8766만 2232개]
"잭팟이다."
분열로 수를 불리려면 한참 기다려야 했겠지만, 그냥 용암에서 자연사멸한 개체들을 되살리는 것으로 수를 보충하는 방법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한두 번만 더 하면 끝나겠는데?
여유롭게 다시 용암을 찾아 미시안과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Put your hands up and don't even move your fucking ass!"
뭐야, 뒤에서 들려오는 영어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뭔가 말이 긴데, 잔뜩 화가 나 있고...
뭐 실수라도 했나?
돌아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말해주었다.
"아임 파인 땡큐, 앤유?"
한국인 국룰 인사지.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저 새끼 들고 있는 저거... 총 아냐?
"Are you playing with me? Get your fucking ass down and give me that shit!"
그러면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을 때.
"설마, 이거 달라고?"
권총이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들고 있는 아비센나의 왕홀이었다.
손짓으로 가리키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간도 크네. 헌터 아이템을 강도질한다고?"
헌터가 제대로 힘을 쓰면 고작해야 일반인이 총으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범한 마법사가 총을 마주하면 별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지팡이를 든 나를 노린 것 같기도 하고?
아이템 값이 워낙 비싸니, 운 좋으면 어지간한 부잣집 터는 것보다도 수익이 나으리라.
강도야, 너도 다 계획이 있구나?
하지만, 강도 친구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내가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푸스스스! 놈이 든 권총이 내 시선이 닿는 순간, 순식간에 부스러지고 있었다.
"Oh shit! oh shit!"
덜덜 떨면서 부스러지는 권총을 내던지고 도망치는 강도 친구.
정확히는,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지만.
2호기가 정확히 신발을 땅에 붙들어놓고 있었다.
그러자 신발을 벗고 달렸지만, 양말 역시 붙어버렸다.
양말을 벗고 달리자 맨발이 붙어버렸다.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신발, 양말, 골고루 허물 벗어놓고 맨발로 땅에 붙들렸다.
최강 레벨의 속박 능력을 자랑하는 2호기의 활약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실랑이를 벌였더니, 뒤늦게 하품을 터트리며 제피로스가 슬렁슬렁 걸어왔다.
"뭐야, 뭔 일이야?"
연신 헬프!를 외쳐대는 우리 강도 친구를 확인하고는 제피로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친구는 왜 멀쩡한 신발 양말은 다 땅에 벗어놨어?"
"강도예요."
"강도라고?"
"권총 들고 절 협박하더라고요, 아이템 넘기라고."
"와우, 간 큰 자식일세. Hey, you made a big mistake, this guy is a very famous hunter in Korea."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놈이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한 번만 봐달라는데?"
"그럴 수 없죠. 경찰에 넘겨야죠."
"뭐, 그러지."
제피로스가 911에 전화를 걸어 무어라 말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 한 대가 도착했다.
유창한 영어로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제피로스.
이거, 영어를 배우던가 해야지...
그가 경찰과 대화를 나누더니, 슬슬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해지던 내게 말했다.
"요즘 이 주변에서 헌터 대상으로 한 강도 사건들이 기승이었다더라. 심지어 몇 명은 죽었대. 대상이 지팡이류 아이템 든 마법사 계통 헌터들이었고."
"... 마법사는 총 피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요."
뭐, 나야 여차하면 아테나도 있었으니, 고작해야 권총 정도로 죽을 일은 없었을 테지만.
"이쪽 화산지대 근처에 게이트들이 많아서, 그걸 공략하러 온 헌터들을 노린 것 같다고 하네. 이야 이거... 하와이 안전하다는 것도 옛말인데?"
"별 경험을 다 해 보네요. 총 든 무장 강도라니."
그걸 상대하기에 충분히 강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던전도 아니고, 노상에서 총 맞아 죽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증언 관련으로 경찰서까지 임의동행해달라는데, 괜찮겠지?"
"어쩔 수 없죠."
여기까지 온 김에 3호기는 꽉 채워가고 싶었지만, 내일 또 와야지 뭐.
아쉬움을 조금 남겨두고, 렌터카에 타서 경찰차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운전해서 하와이 주경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경찰은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았다.
나는 본 대로 증언했고, 중간에 제피로스가 어떻게 통역했는지는 몰라도 이야기는 잘 전달된 것처럼 보였다.
한참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피로스가 미간을 확 좁히며 내게 말했다.
"네가 잡은 놈, 진짜 악질인데?"
"네?"
"최근 하와이에서 일어났던 헌터 강도 살인사건 세 건이 모두 이놈 짓이었다네. 가택 수색에서 증거 나왔대."
... 사람 새끼가 아니었네.
"하와이주 헌터 협회에서 현상금까지 걸어놨었다는데, 그걸 네가 잡았어."
"헌터 협회 현상금요?"
헌터 협회의 현상금이라니.
이거... 뭔가 생각지도 못한 대박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해외(3)
해외(3)
현상'금'이라고는 했지만, 헌터 협회에서는 보상을 돈으로 주지 않는다.
협회 내에서 통용되는 자산인 포인트로 지급했는데, 국제 협회에 가입되어 있는 협회에서 지급된 포인트라면 세계 어떤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박인 이유가 뭐냐면...
이게 그냥 단순한 포인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헌터 협회 포인트라... 아직 업계 입문도 얼마 안 됐는데 좋은 걸 얻었네."
"그러게요. 일종의 의결권 비슷한 거라고 들었는데, 맞죠?"
포인트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묻는다면, 헌터들은 이렇게 대답할 거다.
뭐든. 이라고.
작게는 현금으로 교환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써먹는 헌터들은 드물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협회 보유분의 희귀 아이템으로 교환하는 게 제일 무난한 교환법.
나도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피로스의 말이 이어졌다.
"협회 포인트는 아껴두는 게 좋을 거야."
"... 왜요?"
"아이템은 돈 주고 사면 되지만, 포인트는 돈 주고도 못 사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니까. 뭐 나는 그럴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겠지만... 예전에 협회에 거물 하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어떤 범죄에 휘말렸어. 살인 사건이었지. 그 양반은 가지고 있는 대량의 포인트를 전부 투자해서 자신의 가석방을 요청했고, 헌터 협회는 실제로 모든 정치력과 영향력을 투입해서 그를 가석방시켰다."
포인트만 많으면 살인죄도 무마할 수 있다고?
입을 떡 벌리고 있자, 제피로스가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협회의 명암 중 하나지. 그렇게 써먹으라고 말하는 건 아닌 거 알지?"
"아, 알죠. 당연히."
"어쨌든 들고 있으면 든든하지. 이번에 현상금으로 들어오는 게 5만 포인트 정도 될 테니, 잘 가지고 있다가 필요한 데 쓰라고."
뭐 당장 돈이나 아이템이 급한 것도 아니고, 어떤 걸로 바꿔야 할지도 잘 몰랐으니...
제피로스 말처럼 들고 있다가 좋은 데 써야겠다.
**
다음 날, 하와이 주 헌터 협회를 방문했다.
현상금을 포인트로 받기 위함이기도 했고, 겸사겸사 제피로스의 인맥도 좀 구경하러.
실제로 그의 장담처럼 제피로스는 여기서 꽤 유명 인사였다.
한국보다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거 같은데...
막 포옹도 하고, 악수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뭐라고 대화도 나누었는데, 영어를 모르니 알아먹을 수가 있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자니, 누군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목걸이였다.
"... What's this?"
최대한 아는 단어를 쥐어 짜내서 내게 그걸 건넨 여자에게 묻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통역 목걸이."
벽안에 금발 여자에게서 갑자기 깔끔한 한국말이 튀어나오니 당황스럽긴 한데...
통역 목걸이라고?
답답한데 잘됐다.
내가 그걸 받아 들려고 하자, 그녀가 휙 손을 빼면서 이어 말했다.
"만포인트."
"... 이거 하나에 만 포인트라고?"
5만 포인트를 받긴 하는데, 이딴 거에 만 포인트를 쓸 수야 있나.
"됐어요 그럼. 가세요, 휘휘."
손사래를 치는 나 대신에 그 목걸이를 받아 든 건 제피로스였다.
"Deduct the point from my deposit."
"Yes sir."
이어, 제피로스가 내게 목걸이를 건넸다.
"받아."
"... 그거 만 포인트라던데요. 포인트는 아끼라던 분이."
"이 나이에 무덤까지 싸 짊어지고 갈까?"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시거든요?"
"말이 그렇단 거지. 어차피 은퇴했는데 뭘. 어쨌든, 너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 보느니, 그냥 하나 사는 게 낫겠다 싶어서 가져오라고 했다."
"... 잘 쓸게요."
빚이 소소하게 또 늘었다.
이 양반한테 받은 걸 다 갚을 날이 오기는 할까.
목걸이를 건네받으니, 아이템 정보창이 떠올랐다.
[바람 정령의 속삭임]
[품격] : 전설급 장신구
[설명] : 바람의 정령이 봉인되어 있는 목걸이로, 소리 형태로 전달되는 모든 소통 수단의 진의(眞義)를 착용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속삭인다.
[내용] : 청각으로 전달되는 모든 유형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한다.
목걸이를 착용하니, 이제야 영어로 된 대화들이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이해되어 들어왔다.
이쯤이면 급히 영어 공부부터 할 필요는 없겠는데.
그들 사이로 걸어가자, 수염투성이의 백인 아저씨가 나를 반기며 털투성이 두꺼운 손으로 세차게 악수를 나누었다.
"하하, 나는 여기 하와이 주 헌터 협회의 협회장, 제이크 앤더슨일세. 제피로스와는 한솥밥 먹던 사이지."
높으신 분이셨네. 그나저나 서양 아저씨 입에서 한솥밥이라니, 이런 표현까지 전달하다니... 통역 기능 좋은데...?
"한국 헌터 김세균입니다."
"오, 불가사의 정복자! 제피로스에게 이름 많이 들었네! 한국의 3단계와 11단계 불가사의 게이트를 클리어하셨다고?"
"운이 좋았지요."
진짜 어느 정도는 운빨이기도 했고.
"겸손하기까지. 내 이래서 아시안 헌터들을 좋아하지. 뭐 조금만 내세울 게 있어도 아주 위세를 부리는 요즘 놈들이랑 다르단 말이야."
"하하."
칭찬에 머쓱하게 머리만 긁적일 때,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그거 인종차별이라니까요."
"칭찬인데 무슨 차별이냐?"
"사람의 개별적 성향을 인종으로 묶는 게 차별이에요."
"끄응, 요즘 세상이란..."
뒤를 돌아보자,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에, 붉은 눈썹까지 한 미인이 서 있었다.
어딜 다니더라도 시선 한 번은 꼭 붙잡아 둘 듯한 외모.
잠깐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떠올랐다.
저 심슨 닮은 맥주 좋아할 거 같은 백인 아저씨랑... 이쪽 아가씨랑...
"부녀사이...?"
"네, 맞아요. 놀랍죠?"
"내가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네. 껄껄껄."
미친...
그냥 잘 지으신 정도가 아닌데요 아저씨.
콩 심은 데 장미가 핀 정도인데.
"스칼렛 앤더슨이에요."
"김세균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 저한테요?"
"강도로 죽었던 사람 중 한 명이... 제 친한 동생이었거든요."
아, 그 강도 새끼를 그냥 죽여버렸어야 했나.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해요."
"나도 협회장 이전에, 희생자들의 지인으로서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네. 혹시 필요한 게 있거든 말만 하게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게... 아저씨가 뭘 들어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제피로스에게 도움의 시선을 흘끗 보내자, 알아들었는지 그가 나섰다.
"이 친구가 아직 USDE 라이선스가 없어."
"신인이라고 했던가? 그렇겠구먼."
"자네가 힘 좀 써달라고."
"지금 레벨이 몇이지?"
"15입니다."
"Grade 트리플 A까지는 힘들어도, 더블 A까지는 내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불가사의 두 번 공략이면."
"트리플로 해. 더블 트리플 차이가 꽤 있잖아."
"세상이 바뀌어서 나라고 무작정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힘 좀 쓰라고."
"더블도 힘쓴 거라고!"
날 가운데 두고서 두 사람이 등급 가지고 투닥거리는 모습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USDE 등급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라는 게 문제였다.
"트리플 A랑 더블 A랑 차이가 뭐예요?"
의문을 풀기 위해 옆에 있는 스칼렛 씨에게 묻자, 그녀가 설명을 시작했다.
"제일 쉽게 설명하면, 더블 A는 지역급이고 트리플 A는 전국구예요. 더블 A까지는 아빠 권한으로도 발급 가능한데, 트리플 A는 전미협회에 기안 올려서 승인받아야 되거든요. 그거 귀찮아서 저러시는 거예요."
"아하. 트리플이랑 더블 사이에 혜택 차이는..."
"크게 없을 거예요. 그래도 트리플부터 시작할 수 있으면 S로 가는 길이 짧아지니까... 뭐 그런 거죠."
"아, 그럼 S는 어떻게 되는 거죠?"
입국심사 프리패스는 부럽던데.
"S부터는 무조건 실적요. 트리플 A 상태에서 실적이 계속 쌓이다 보면 위원회가 소집되고, 그 위원회 통과하면 S등급이에요."
"아하."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하는 수 없다는 듯 하와이 협회장, 털복숭이 아저씨가 말했다.
"좋아, 그래도 내 눈으로 봐야겠어. 15레벨이라고 했지? 15단계 게이트를 클리어해 오면 내 인정하고 트리플 A로 기안 올린다."
"그 정도야 뭐. 세균아, 가능하지?"
"... 갑자기요?"
"이 자식이 내 안목을 안 믿잖아."
아무리 봐도 남자들의 자존심 싸움 같은데.
그래도 뭐...
한국의 다음 단계 불가사의 게이트는 27단계였다.
입장하려면 한참 남았으니, 어차피 레벨업은 해야 했다.
"괜찮은 게이트가 있나?"
"있지."
그러면서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는 털복숭이 아저씨.
뭔가 꿍꿍이가 있어 뵈는데, 뭐지.
"그럼 게이트는 내가 정하지."
"아빠! 설마...! 거기로 하려고요?"
"당연하지! 트리플 A 받으려면 그 정도는 클리어할 수 있어야지!"
"아아... 정말..."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스칼렛.
왜, 뭐가 문젠데?
"거기... 복합 타입 게이트에요."
"복합 타입...?"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이 나오는 게이트를 의미한다."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제피로스가 대신해 주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협회장 아재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알 거 같네. 제이크 이 자식아, 거긴 반칙이지."
"어허, 뭐든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네 제자라면서?"
언제나 맥주에 한가득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얼굴로, 협회장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게이트는, 자네가 최초 공략한 곳이었지. 안 그래?"
"... 제피로스가요?"
제피로스가 최초 공략한 게이트를 내가?
"복합 타입 게이트 중에서도 최악이잖아, 거긴."
"흐흐, 그래서 자네가 클리어하기 전에는 아무도 건드리지도 못했지."
"해안을 맞대고 있는 화산. 해양 타입 몬스터와 화염 타입 몬스터가 동시에 나오니까."
헌터라고 해서 모든 타입의 몬스터를 다 잘 잡는 건 아니었다.
헌터에게도 능력에 따른 상성이 분명 존재하고, 그 상성에 따라서 공략을 결정한다.
그런데 아예 상반되는 두 속성의 몬스터가 동시에 나오는 던전이라면, 분명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화염 타입이야 이미 흡사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11단계 게이트 이야기인가.
내가 대충 공략 이야기는 언론에 공개하긴 했지만, 그 소문이 거기까지 난 건가.
"그런데... 해양 타입도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나?"
"음."
그게... 제가, 해양 타입도... 자신이 좀 있는데...
매주 톱날어룡을 잡다 보니 이골이 나서, 이제 물 속에서 2호기 컨트롤하는 능력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같이 지켜봤던 게 제피로스잖아?
제피로스라면 내가 해양 타입이나 화염 타입이나 문제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흘끗, 제피로스의 눈치를 보자., 그가 필사적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이 양반...
웃음 참고 있는 건가.
간신히 꾹 참았는지,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터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런 건에 내기가 빠질 수는 없겠지?"
"이봐, 하와이에선 도박 불법이야."
어지간한 휴양지마다 카지노가 그득그득한 미국에서, 하와이 주의 리조트에만은 카지노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협회장을 향해, 제피로스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쫄?"
그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어버리는, 마성의 한 글자였다.
심지어 미국인에게까지 통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목숨을 건 대가? (1)
목숨을 건 대가? (1)
"내가 그거 말하지 말라고 했지!"
평소에 제피로스에게 많이 듣던 말인지, 의미를 알고 있는 듯 보이는 협회장 아재였다.
쫄! 을 듣고 참는다면 남자가 아니다.
그것도 어메리칸 털복숭이 상남자 아재가 참을 수 있을 리가.
"그래서, 해 안 해?"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뭘 걸겠어?"
"차가 낡았는데, 차 한 대 어때?"
"호오, 어떤 차? 슈퍼카로 갈까?"
"적당히 10만 달러 내외에서."
너무 세게 부른 거 아닌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단순한 내기에 1억 3천을...
"전성기 제피로스 다 죽었구만. 예전 같았으면 확실히 롤스로이스 같은 거 질렀을 텐데."
"그렇게 갈까? 난 자신 있다만."
미친 사람들인가.
내기 한 방에 롤스로이스를 건다고?
그런 차에는 관심도 없어서 얼마인 줄도 모르겠지만, 차값이 움직이는 아파트 아닌가, 그거.
"콜. 스칼렛, 새 차 뽑을 준비 하려무나."
저 아재도 미칠 듯한 부자인 모양이군.
호기로운 미국 아재의 외침에, 스칼렛이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짚었다.
음, 나 같아도 조금 부끄러울지도.
"좋아, 그러면 공략은 언제?"
"내친김에 당장 가지. 왜, 안 되겠어?"
"안 되기는, 거긴 간단한 브리핑 정도면 끝이야. 세균아, 이쪽으로 와 봐라. 브리핑 바로 시작하자."
두 중년인들의 내기에 휘말려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공략이 정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제피로스의 브리핑은 명료했다.
"클리어하신 지 오래된 거 아니었어요? 잘 기억하시네요?"
"원래 헌터들이 자기가 공략한 던전 잘 못 까먹는다. 너도 한 10년 뒤에 술자리에서 네가 처음 공략한 그 3단계 던전 썰만 풀어도 1시간은 노가리 깔 수 있을걸?"
그런가?
그러고 보니 나도 몇 안 되지만, 생생하게 기억나기는 한다.
역시 목숨 걸고 싸운 전장이라는 건가.
"여하튼 네 능력이면 2시간 컷도 가능이야. 개체가 많은 건 아니거든."
제피로스가 흘끗 제이크 씨를 바라보면서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나도 브리핑만 들었지만, 제피로스의 말에 동의하긴 했다.
수생 몬스터인 바라쿠다와 화산 서식의 불도마뱀까지.
특히 바라쿠다는 무척 공격적이고 위험한 몬스터였지만, 그래봐야 물고기지.
육상으로 올라올 수 없는 수생 몬스터의 특성상, 물 밖에서 사용하는 내 '딸깍'을 벗어날 수 없었다.
"브리핑 다 끝났으면 빨리 출발하자고! 해 지겠어!"
우리가 빌린 렌터카 대신에 제이크 씨의 차량을 타기로 했는데, 헌터 협회 주차장 가장 좋은 자리에 주차된 그의 차는 입이 떡 벌어지게 거대했다.
엄청 크고, 기름도 미친 듯이 먹을 것 같은 오프로드 차량이 그의 차였다.
"이거... 거의 탱크 아니에요?"
"꼭 지처럼 무식한 것도 샀네."
"어허, 남자가 이 정도는 타야지."
"거 남자 되기 참 어렵네요."
그의 차를 타고 향한 곳은 킬라우에아 화산과 맞닿아 있는 해안 지대인 파호아였다.
킬라우에아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바다와 만나 형성된 해안 지대.
급격히 식은 용암이 가파른 암석 지대를 만들었다.
그곳에, 게이트가 있었다.
역시나, 제대로 관리되지는 않는 모양새.
"왜 저는 이런 곳만 오는 느낌이죠?"
"뭐가?"
"... 게이트가 죄다 허름..."
"당연하지. 관리 잘 되고 쓸모 있는 게이트가 이렇게 대중에 공개 상태로 남아 있을 거 같아? 다 어느 회사 손에 들어가 있거나, 국영이라도 입장료를 받겠지."
특히 자본주의의 산실이라고 봐도 될 미국이라면 더 그렇긴 하겠구나.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는 게이트는 채산성이 없거나 더럽게 난이도가 괴랄한 이딴 게이트뿐이라는 거지."
"끄응."
"흐흐,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 협회 차원에서 잘 관리하고 있는 거야. 저기 플로리다 같은 곳에는 아예 접근도 힘든 늪지대 쪽 게이트도 있어."
똥믈리에, 천상 그게 내 팔자인가 싶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했다.
"입장할게요."
"언제든지."
이곳은 인스턴스 던전, 그리고 1인 형식의 던전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 혼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5단계 게이트, '바다와 불의 노래'에 입장합니다.]
던전 이름 한 번 시적이네.
기깔나는 이름과 다르게, 그 안은 충격과 공포 수준이긴 했지만.
화산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용암이, 계속해서 바다로 들어가면서 거대한 연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저거 유독 가스일 텐데, 저쪽은 피해야겠다.
"던전 환경도 안 좋아, 타입은 물과 불이 결합한 복합 던전이고... 아주 똥도 이런 똥이 없네."
나는 그나마 세균 능력이라고 쳐도, 제피로스는 여길 대체 어떻게 최초 공략한 거야?
지옥이 따로 없는데... 그 양반도 대단하다니까.
"일단 불도마뱀 정리하러 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해변에서 바라쿠다 먼저 정리하라고 했었지?"
브리핑받은 대로, 불도마뱀들이 출몰하는 산 대신에 해변으로 향했다.
가스로 자욱한 곳을 피해서, 그나마 숨 쉴만한 곳으로 들어갔다.
다음엔 2호기들을 바닷속에 풀었다.
확실히 민물보다는 활동이 굼뜨긴 하네.
소금물과 같은 이온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개량된 개체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닷물은 박테리아에게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언데드 강화."
[강화 가능한 언데드 목록]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설명 감춰짐>
(2) Caulobacter Crescentus(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
─강화 효과 : 각 개체가 'Caulobacter Cementus'로 진화 변이할 수 있습니다.
[진화 변이 : Caulobacter Cementus]
─설명 : Caulobacter Crescentus가 진화하여 변이한 형태. 더 강력한 접착 물질(Cementum)을 분비하며, 이 물질은 박테리아가 사라진 뒤에도 유지된다. 박테리아와 분리된 접착 물질은 열을 발산하여 급격히 경화한다.
─내용 : 접착 물질의 접착력이 상승합니다. 접착 물질은 세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면 빠르게 경화하여 굳어집니다. 굳어진 물질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2호기도 강화 가능 리스트에 떠올랐다.
아마 세균을 오래 사용해서 숙련도가 쌓여야 강화도 가능한 모양.
그렇게 얻은 2호기의 강화 능력은 카울로박터 세멘투스.
말 그대로 세멘툼, 시멘트를 형성하는 능력이었다.
기존 2호기와는 다르게 한 번 굳어진 시멘트를 다시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그건 1호기로 분해해버리면 됐으니, 사실상 패널티는 없는 수준.
"2호기, 개체 2억, 강화 부탁해."
[Caulobacter Crescentus가 마나를 흡수하여 진화 변이를 시작합니다!]
[총 2억 개체를 대상으로 한 진화 변이가 완료되었습니다.]
진화한 2호기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접착 물질의 그물을 형성한 채, 수중을 떠도는 바라쿠다 한 마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창을 방불케 하는 뾰족한 입을 지닌 물고기.
저기에 찔렸다가는 아마 재수 없으면 일격에 즉사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올 수는 없다.
무력하게 2호기의 그물에 엮여 든 바라쿠다가 발버둥 쳤다.
그렇지만, 이어 2호기가 접착 물질만을 분비한 채 이탈하자.
푸쉬시시시시! 물이 끓을 정도의 강한 열반응을 일으키면서 접착 물질이 경화되기 시작했다.
표면부터 천천히 익어버리는 바라쿠다.
수면까지 올라와 발버둥 치며 엄청난 물장구가 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멘트 덩어리에 파묻힌 거대한 바라쿠다 한 마리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 채 천천히 해저를 향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 마리 잡았고."
감도 같이 잡았다.
아무리 더 강한 몬스터라고 해도 큰 차이 없구만.
다른 바라쿠다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희생양이 되었다.
불과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떠올랐다.
[모든 바라쿠다 개체가 토벌되었습니다.]
[바다의 노래가 멈춥니다.]
[불의 노래가 더 세차게 울립니다!]
"좋아, 하나 끝났고."
남은 건 불도마뱀.
기본적으로 날래고 잽싼 도마뱀이, 수틀리면 입에서 불을 발사하기까지 한다.
간단히 상대할 만한 개체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Magmophile 개체 3억 개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화염 저항력이 3,000% 증가했습니다.]
준비 만전이라는 소리지.
화염 저항까지 높여두고, 천천히 산으로 올라갔다.
풀 한 포기 없는 화산에서 붉은색의 도마뱀들이 스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혀를 날름거리면서, 나를 경계하는 모습.
바로 그때였다.
휙! 튀어 오른 불도마뱀 하나가 내게 날아들었다.
물론, 내게 닿기도 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모습에 흠칫 놀랐는지, 다른 도마뱀들은 뛰어드는 대신에 거리를 둔 채로 있다가.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놈들의 뱃속에서 부글거리며 찌개 끓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화아아악! 내 시야를 일제히 화염이 덮쳤다.
제피로스 브리핑 듣고 미리 준비해 두길 잘했네.
준비 안 했으면 여기서 그대로 구워질 뻔했다.
그래도 저 녀석들도 영원히 불을 뿜는 건 아니었다.
한 차례 불을 내뿜은 뒤에는 한동안 불을 뿜을 수 없다고 했었지.
내가 불에 뒤덮이고 나서도 전혀 타격이 없는 모습이자, 도마뱀들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그대로 발톱을 세운 채 덤벼들었다.
아니, 덤벼들려고 했다는 게 맞겠다.
진화한 2호기 개체들이 이미 한껏 접착 물질을 분비해 놓고 다시 회수되었다.
시멘트로 변한 접착 물질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진 채 도마뱀들을 땅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녀석들의 머리를 1호기가 순식간에 분해하며 마무리.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불도마뱀 개체가 토벌되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브리핑까지 받아 이미 공략 방법을 아는 던전은 이렇듯 쉽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클리어 판정이 안 뜨지?
[당신의 활약에 분노하여, 불도마뱀 우두머리가 등장합니다!]
"뭐?"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위험합니다!
아테나의 외침과 함께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대로 무언가에 얻어맞아 몇 미터를 날아갔다.
"커, 커흑."
휘두른 꼬리에 맞은 거 같은데, 다행히도 대부분의 충격은 뒤에 갑옷처럼 형성된 아테나가 막아주었지만, 땅을 나뒹구는 충격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삭신이 다 쑤시네.
뒤를 돌아보자, 그냥 불도마뱀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4m 남짓의 불도마뱀이 있었다.
"씨발... 브리핑엔 저런 거 없었는데."
제피로스가 나 엿 먹으라고 알려주지 않은 건 아닐 테고...
아마 특정 상황에 나타나는 히든 보스 같은 거 느낌이다.
"진짜, 던전은 방심하면 안 된다니까..."
다 클리어한 상황에 이렇게 뒤통수 때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시팔!
그래도, 1호기만 있으면 괜찮다.
아무리 용 쓰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1호기의 분해 능력을 막아낼 수는...
[불도마뱀 우두머리가 당신을 한껏 경계하고 있습니다.]
[대상의 마나 보호막으로 인해 분해 능력이 저하됩니다.]
아니, 미친.
실제로 약간 붉은 색을 띠는, 반투명한 보호막이 얇게 불도마뱀 우두머리의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쯤 되는 보스는 마나까지 쓸 수 있다는 건가?
마나 보호막으로 인해 분해 능력이 저하된 데다, 두꺼운 비늘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저걸 분해하려면 한참이나 걸릴 거다.
아마 그 전에 내가 죽을 수도.
일단 내게 덤벼드는 우두머리의 발을 강화 2호기로 붙잡았다.
쿵! 돌진하던 우두머리가 갑자기 발걸음이 엉켜 그대로 땅을 뒹굴었다.
─크르르르르!
혀를 날름거리면서 나를 노려보는 우두머리.
순식간에 생성되어 경화된 시멘트를 귀찮은 듯 힘을 주더니, 그대로 부스러트렸다.
저것도 임시방편밖에 안 된다.
어쩌지?
이대로 시간 끌면서 1호기로 보호막을 뚫어내는 게 최선인가?
그때였다.
─소환자님, 대상은 드라코플라미스 이그네스 성체입니다. 현재 소환자님의 능력으로는 상대하기가 껄끄럽습니다. 도주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아테나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 저게 어떤 몬스터인지 알고 있어?"
─잘 모릅니다.
그럼 그렇지...
─창조주님께서 해당 몬스터를 주로 특정 미생물을 얻기 위해 사냥하셨던 기억만이 있습니다.
미생물?
저놈한테 미생물이 있다고?
밑져야 본전이다.
[스킬, '미시안'을 사용합니다.]
[스킬, '미시안'이 '불도마뱀 우두머리'에서 미시세계의 존재를 포착했습니다.]
[Methanobrevibacter Igneus(메타노브레비박터 이그네스)]
─설명 : Dracoflammis Igneus 속의 위장에서 주로 공생하여 서식하는 박테리아로, 혐기성이다. 유기물 및 무기물을 분해하여 대량의 고압 메테인을 생산한다. 박테리아가 생산한 메테인은 고체 상태로 공생체의 위장에 존재하다가, 적을 만나면 액체 상태로 분사하여 불을 방사한다.
다시금 날아드는 꼬리를 간신히 피하면서, 시스템 창에 떠오른 설명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알아낸 것 같다.
상대할 방법...!
목숨을 건 대가? (2)
목숨을 건 대가? (2)
일단 현재 언데드 라이즈 스킬로는 세 종류의 세균밖에 다룰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시적으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
어쩔 수 없지.
"2호기를 역소환한다."
[스킬, '역소환'을 'Caulobacter Crescentus'와 그를 비롯한 세균군에 사용합니다.]
"빈자리에, 저놈 배 속에 있는 세균들을 부활시킨다. 언데드 라이즈."
몬스터의 뱃속에는 수많은 종류의 박테리아들이 존재하겠지만, 미시안은 군집 형태 등으로 지배적인 개체만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저 이름 길어서 말하기도 힘든 세균 군집.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Methanobrevibacter Igneus 균주 사체 6511억 31만 9052개.]
이왕이면 화끈하게.
다 태워버리자고.
"부탁한다."
마나가 뭉텅이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유지 생각 없이, 최대치로 일으키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해본 적도 없는, 역대 최고로 많은 언데드 세균 군단을 일으킬 차례.
[경고! 현재 마나 수치로는 해당 개체수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조화의 이해' 스킬이 아니었더라면 일시적으로나마 일으키는 것조차 꿈꿀 수 없었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언데드 군단.
(3) Methanobrevibacter Igneus(메타노브레비박터 이그네스)
─개체수 : 651,100,319,052 개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18.7g(기본 0.178g, 통제력 205% 효과 적용)의 메테인 형성.
1억 개당 기본적으로 0.178g의 메탄을 생성할 수 있는 세균이, 내 통제력으로 강화되어 무려 18.7g의 메탄을 내뱉는다.
그걸 6511억 마리를 소환했으니. 단 1초만 유지한다고 쳐도...
대충 120kg의 메탄 가스가 생성된다는 거다.
소환하자마자 몸에서 쭉쭉 마나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최대한 버틴다.
놈이 버틸 수 없을 만큼의 메탄이 생성될 때까지.
1초, 2초... 5초까지 세고.
"역소환!"
[스킬, '역소환'을 'Methanobrevibacter Igneus' 세균군에 사용합니다.]
"허어억!"
아슬아슬하게 거의 다 빨려 나간 마나.
마나통은 간신히 5% 정도 남아 있었다.
1초만 더 유지했어도 아마 모든 세균 군단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거다.
그리고, 그 5초 사이에.
─꾸에에에에!
왕 도마뱀의 모골 송연하게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당연히 고통스러울 거다.
600kg의 메탄으로 위장은 터질 듯 부풀었을 테고, 그 메탄을 급격히 생성하기 위한 유기물로, 박테리아들은 아예 내장 기관까지 왕창 뜯어먹었을 테니까.
살아 있을 때나 공생 관계다.
내가 되살린 6천 500억의 언데드 세균 군단은, 가차 없이 명령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리고, 600kg의 메탄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내뱉으려는 놈.
얼추 브리핑에서 들었지만, 위장 내부에서 생성된 메탄이 작은 목구멍을 통과하면서 노즐과도 같이 분사되면서, 거기서 고온의 마찰열로 자연 발화하여 불을 뿜는 방식이다.
성체도 비슷한 방식이겠지.
그렇지만, 그건 적당량의 메탄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아예 위장 전체가 메탄으로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시점에는...
역화(Flashback)가 일어난다.
왕년에 용접 좀 배운 사람은 알 거다.
산소 역류로 가스통으로 불이 붙어 폭발할 수도 있다는 걸.
"잘 가라."
목의 노즐에서 붙은 화염이 분사되는 대신에, 가득 찬 몸쪽으로 폭발이 타고 들어갔다.
왕 불도마뱀의 배 속에서 이어 600kg에 달하는 메탄 가스가 일제히 점화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눈을 감고, 폭음으로 귀를 보호하려 귀를 가린 채 충격파를 막아내려고 복부를 지면에서 살짝 떨어트렸다.
고막이 터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입을 벌리고 아아아...! 소리까지 냈다.
군대에서 배웠던 핵폭발 대응 훈련이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동시에, 아테나가 갑옷 형태로 펼쳐지며 등 쪽을 완전히 감쌌다.
[Magmophile 개체 3억 개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화염에 대한 극도의 저항력을 보여주는 물질을 분비하며, 내 전신을 보호하는 세균 군단까지.
대비는 일단 완벽했다.
재수 없게 죽지 않길 기도하면서.
감은 눈앞이 거대한 폭발로 새하얗게 물드는 모습을 보았다.
한계치를 넘어선 폭음에 귀에서는 이미 삐─ 하는 소리밖에 들리질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귀에서 이제 이명이 사라졌을 즈음에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맙소사."
버섯구름은 핵폭발에서나 볼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작지만, 뭉게뭉게 피어난 버섯구름 아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불도마뱀 우두머리.
그 자리는 깊게 패인 크레이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동시에, 그제야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일단 레벨업은 2레벨 업.
[히든 보스, '불도마뱀 우두머리'가 토벌되었습니다!]
[위대한 □적!...]
뭐지?
저거 시스템 메시지가 좀 깨진 거 같은데.
그리고 뒤에 내용도 없고.
이런 일이 있었나?
어리둥절해할 때쯤, 눈앞에 메시지가 새로 떠올랐다.
[당신은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시스템이 보상 산정에 실패했습니다.]
[보상을 다시 산정합니다.]
[불가능한 업적! 당신의 레벨에서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 칭호가 주어집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자' 칭호 획득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1% 증가합니다.]
... 뭐야 이거, 불가능한 업적?
[돌발 생존 임무, '불도마뱀 우두머리로부터 10분 버티기'가, 토벌 임무, '불도마뱀 우두머리 구제'로 바뀌었습니다.]
다음 메시지를 보고서야 이해가 갔다.
원래 10분만 버티면 되는 거였나.
"그걸 먼저 알려줬어야지!"
어우, 괜히 끝까지 잡으려다 뒈질 뻔했네.
그래도 어떻게든 달성하긴 했으니, 보상을 받을 차례.
스크롤을 내리며 다음 메시지를 보았다.
[토벌 임무, '불도마뱀 우두머리 구제'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유물급 장비 아이템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유물급 장비 아이템 선택권이라고?"
전설급 장비 아이템도 엄청난 성능과 가치를 보이지만, 유물급 장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일단 복수 개수가 존재하는 전설급과는 다르게, 유물급은 유일하다.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세상에 유일한 아이템인 거다.
그 말인즉슨...
세상에 없던, 대체 불가능한 옵션을 지닌 장비가 세상에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최강 헌터 중 하나인 브랜던 필립스가 53단계 던전에서 획득했던 유물급 장신구가 유명했다.
브랜던은 약 1,000억 달러, 한화로 따지자면 130조 정도를 받고 정부로부터 협박까지 당한 끝에 미국 정부에 거의 강제 압류되다시피 팔았다.
정확히 어떤 기능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재 추정 가치가 2,000조 원이 넘었다.
명색이 천조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상, 누가 2,000조 원을 주더라도 팔 일은 없겠지만.
이건 너무 유명한 일화라서 일반인이었던 나도 알 정도였다.
커뮤니티 사이트에 130조 번 호구.jpg라는 짤방으로 올라왔거든.
"... 이거 이러다가 나도."
같은 소리 하네. 부정 탄다.
일단 유물 아이템 뽑기까지는 확인했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겨진 임무를 달성하여, 50단계 게이트, '불지옥'의 입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제 자격이 있는 모두가 해당 게이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어?"
게이트 안에 게이트?
뭐, 드물기는 하지만, 아예 없는 일은 아니었다.
와나, 그나저나 이름 살벌하네.
더 살벌한 건 단계지만.
나는 한동안은 들어가 보지도 못할 게이트구만.
아마 미국에서도 최상위의 랭커급 헌터들만 공략 가능한 단계이리라.
... 그런데 말이지.
"... 응?"
나, 설마 이거...
신규 게이트 찾은 거냐?
그것도.
[미합중국, 하와이 주의 평정을 위하여 1개의 게이트가 남아 있습니다.]
이 동네도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만 남아 있었네?
**
일단 절대로 입장 못할 그림의 떡 같은 50단계 신규 게이트를 뒤로하고 밖으로 방출되어 나왔다.
"뭐야,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렸어?"
심드렁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제피로스의 얼굴에 걱정이 걸려 있었다.
"협회장 아재는요?"
"차에서 잔다. 클리어는 잘한 모양이네."
게이트를 완전히 클리어하고 강제 퇴장될 때만 나타나는 황금색 빛무리를 확인한 제피로스가 그게 완전히 걷히기 전에 사진을 찰칵 찍었다.
"증거 자료는 확보했으니, 발뺌도 못 하겠군. 그런데 내 생각보다 늦었는데?"
"게이트가 생각보다... 어려웠거든요."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걸요."
제피로스가 머리를 턱 짚었다.
"왜 네 녀석만 던전에 들어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런데, 뭐 메시지같은 거, 뜬 거 없어요?"
"... 나한테? 없는데?"
그러면, 50단계 게이트 정보는 공개되는 게 아니라 일단 내 독점이라는 거다.
"혹시, 하와이도 공략 불가 게이트가 있어요?"
"하와이 지역은 공략 불가 게이트는 없는데, 미발견 게이트는 있지. 하와이 주 정부, 그리고 헌터 협회까지 총동원돼서 찾고는 있는데, 아직까지 못 찾고 있다. 하와이 전체, 그리고 인근 해저까지도 샅샅이 뒤지는데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입구가 숨겨진 게 분명해."
역시나... 내가 찾은 게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다.
흘끗, 잠든 협회장 쪽을 확인하는 내 모습을 본 제피로스가 미간을 좁혔다.
"너, 설마."
눈치도 빠르셔라.
"그거 맞을걸요?"
"마트료시카 게이트라고?!"
인형을 열면 그 안에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게이트 안에 게이트가 나온다고 해서 흔히 헌터들은 저렇게 부르곤 했다.
"맞아요."
"세상에..."
이 게이트를 최초 공략한 사람이 제피로스.
그게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20년 만에, 던전의 진실이 밝혀진 셈이었으니 놀랄 수밖에.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전말을 말했다.
불도마뱀을 잡고 유물급 이야기까지 가면 너무 과해서 안 믿어줄 거 같아서, 일단은 히든 미션을 깬 정도로 해뒀다.
"그래서 오래 걸렸구나..."
"이 정보, 분명 돈이 되겠죠?"
"돈이 되냐고? 당연하지! 어마어마한 돈이 되겠지! 그것도...!"
말을 채 잇지 못하는 제피로스.
이미 DDF(던전 개발 펀드)를 통해 정보만으로 막대한 차익을 벌어들인 경험이 있는 나였기에, 어떤 방식으로 투자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하와이 주의 DDF에 투자하면, 괜찮게 차익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죠?"
"후우, 그렇겠지... 거기에 심지어..."
"심지어?"
"여긴 미국이라고! 금융과 파생 상품의 천국 말이다!"
잠시 헛웃음을 흘리던 제피로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국은 금감원 규제로 2배 레버리지 상품 정도만 있지만... 미국에는 무려 4배나 5배 레버리지도 있어."
투자를 잘 몰라도, 4배, 5배 레버리지가 무슨 뜻인지는 안다.
1%가 오를 때, 4배, 5배가 올라서 4% 5%가 오른다는 뜻.
반대로 1%가 하락하면, 4%, 5%가 폭락한다.
이것까진 생각 못했는데...
이렇게 되면...
대체 얼마를 벌게 되는 거지?
100%만 올라도 5배 레버리지 기준 500% 상승이다.
총알이 부족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 제피로스가 내게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나한테 단기로 천억만 빌려 가라."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그 천억을 그대로 레버리지 상품에 투자하면, 몇천억 단위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제피로스는 내게 그 기회를 주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보 값은 내야지. 이런 정보를 그냥 혼자 날로 먹으면 체한다. 나도 지금 손 떨린다. 준다고 할 때 받아."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우리 둘 다 부자 되자."
목숨 걸고 불도마뱀 우두머리에게 맞선 보람이, 너무 크게 돌아오고 있었다.
목숨을 건 대가? (3)
목숨을 건 대가? (3)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국 헌터들을 받아들이는 국가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단연 미국을 꼽을 터였다.
21세기형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미국으로 오는 헌터들.
과거에는 이런 헌터들이 도전하는 던전들이 전국적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던전 공략법이 알려지고.
결정적으로, '평정'의 개념이 알려지면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의 51개 주 가운데 완전히 공략된 주, 그러니까 평정이 완성된 주는 14곳뿐이지만, 인력이나 자본은 그곳으로 몰렸다.
특별한 부산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비슷한 던전 부산물을 얻기 위해서 평정이 이루어진 주와 그렇지 않은 주의 비용 차이가 심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헌터 밸리'라고 불리며 대규모의 고가치 던전을 보유한 캘리포니아 서안 지역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반면에 에버글레이드 습지처럼 접근이 힘든 게이트가 대규모로 분포해 있는 데다, 평정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플로리다 주 같이 던전 경제의 득을 보지 못하는 지역도 있었다.
"정확히 그 중간 포지션에 있는 곳이, 하와이 주일세."
시선을 잡아끄는 정열적인 붉은 넥타이를 맨 중년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일반인들이야 그의 얼굴을 모를 수 있겠지만, 월가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인물.
월가의 대표적인 행동주의 공매도 펀드, 아이작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인 칼 아이작이 이 남자였다.
"하와이가 중간에 있을 수 있는 이유, 누구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칼 아이작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이들이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한 젊은 청년이 패기롭게 손을 들어 답했다.
"기대감의 선반영입니다. 한 개의 미발견 게이트만 찾으면 평정 상태가 되니, 그 가치가 DDF에 반영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미발견 게이트를 못 발견한 게 얼마나 지났지?"
"어, 그게..."
우물쭈물대는 청년을 향해 칼 아이작이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자, 아이작의 자답이 이어졌다.
"무려 7년이다. 그 사이에 하와이 DDF의 프리미엄은 늘어만 갔지. 시간가치의 반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던전이 공략될 확률은 높아진다고 월가는 판단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언론을 이용해 월가 펀드들의 이런 천편일률적인 프리미엄 책정을 비판하고, 동시에 공격을 시작한다. 불만 있는 사람 있나?"
묵묵부답.
불만 따위 없음이 확인되자, 칼 아이작이 한쪽 입꼬리를 사납게 올리며 으르렁댔다.
"없는데 왜 다들 아직 궁둥이들 거기 붙이고 있나? 가서 바로 일들 안 하고."
이 폭군의 한마디에, 너나 할 것 없이 황급히 앗 뜨거라 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칼 아이작은 자신의 자리에 있던 서류뭉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하와이 신규 던전 탐사 관련 보고서'가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던전탐사회사들의 이름으로 된 여러 보고서였다.
아이작 엔터프라이즈는 하와이 DDF를 대상으로 한 공매도 공격을 준비하느라 꽤 오랜 시간과 돈을 들였다.
오래 공을 들였으니 이제는 수확의 철이 다가오고 있다고.
적어도 칼 아이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
하와이에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을 열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나랑 제피로스는 호텔방에 나란히, 각자의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뭐, 워낙 인기 없는 게이트다 보니 우리가 입을 열지 않으면 누가 발견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DDF를 미리 사둘 생각이었다.
Hawaii DDF X5 (+0.1%)
장이 열렸을 때, 우리가 살 펀드는 전일 대비 약한 등락을 거듭하며 횡보하고 있었다.
"이거 사면 되죠?"
"그래. 계좌에 돈은 들어가 있지?"
"네."
내 총알은 제피로스에게서 빌린 천억 원.
제피로스는 이천억 원.
"한 번에 주문 다 넣지 말고 분할해서 넣고."
"네. 그런데 주식 정말 잘 아시네요."
나 같은 주린이가 배울 게 많은데?
"뭐, 내가 주식으로 돈 좀..."
"많이 만지셨나요?"
"... 많이 잃었지."
앗, 아아...
"어떻게 된 게 내가 걸면 항상 반대로 흐르더라고. 벌면 날리고 벌면 날리고..."
그런데도 저렇게 돈이 많다고?
1세대 스타급 헌터의 재력이 새삼스럽게 감탄스러워졌다.
대체 주식으로 벌었으면 얼마나 부자였던 거야?
"여하튼 그러다가 젊은 시절 다 갔지 뭐냐. 너는 젊을 때 바짝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일찍 얻으려무나."
"이번 건 성공하면 이미 이루는 거 아닐까요."
"그렇네?"
물론 돈을 벌었다고 해도 하고 싶은 일과는 별개였다.
특히 회사 경영은 꽤 재밌었다.
잠깐 해외에 나와 있긴 했지만, 글로벌 시대였다.
계속해서 화상 회의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시차 탓으로 새벽에 선잠을 자는 게 문제였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는 순탄하게 돌아갔다.
오기 전에 추출해 놓은 엘릭시르로 생산이 충분히 이루어졌고, 곧 출시 예정이었다.
내게는 다행히도, 적어도 내 기준에, 세일제약 직원들의 능력은 출중했다.
오너들의 전횡으로 망할 위기에 몰렸던 회사에서, 성공이 충분히 보답받는 환경으로 변하자, 직원들의 마인드도 변했다.
엊그제 있던 화상 회의에서는 한 직원의 의견이 좋았다.
카디오비브레와 엘릭시르를 결합한 임규선 박사의 새로운 레시피가 기존 엘릭시르만 사용한 피로회복제 레시피 대비 성능이 더 좋아졌는데, 굳이 기존 용량을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용량을 아주 작은 용기로 확 줄였다.
덕분에 원가 절감이 50% 이상 이루어졌다.
이제 출시하면 대박 날 일만...
"김세균, 뭐 해?"
"네? 아, 잠깐 딴 생각..."
"몇 번을 불렀는데. 야, 네가 딴 생각해서 그새 올랐잖아."
Hawaii DDF X5 (+3.6%)
그러게. 그새 3.5%나 올랐다.
5배를 추종하는 레버리지 펀드다 보니, 등락폭이 휙휙 변했다.
"쩝, 죄송합니다."
"집중해라. 한두 푼 걸린 것도 아닌데."
"네, 집중집중."
정신을 집중해서,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주문을 넣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응?"
갑자기 내리꽂는 파란색의 빔에 우리 둘 모두 멈칫거렸다.
"뭐, 뭐죠?"
"그, 글쎄다?"
5배를 추종하는 펀드답게, 순식간에...
Hawaii DDF X5 (-17.7%)
거의 18% 가까이 빠져버렸다.
불과 몇 초 사이의 일이었다.
뭐, 하와이에 대지진이라도 난 거야? 아님 쓰나미라도 덮쳤어?
왜 이래?
그렇게 빠지던 끝에...
Hawaii DDF X5 (-88.27%)
거의 상폐 직전까지 몰렸다.
레버리지와 같은 파생상품이 결합된 상장지수펀드는, 단 하루 만에 기초자산 가치가 0원이 되면 자동 상장폐지가 된다.
즉 5배를 추종하니까, 하와이 DDF 지수가 하루 사이에 20%만 빠져도 그대로 상장폐지되는 거다.
"와, 미친... 소름 돋네."
제피로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마우스를 쥔 손을 화들짝 놀라 뗐다.
내가 딴생각 안 했으면, 좋은 정보 들고서도 갑자기 흘러내리는 폭락장에 휩쓸려 떠내려갈 뻔했다.
"이거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확인해야겠다."
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제피로스.
"여보세요?"
─야! 나 지금 바빠! 이따가 전화해!
스피커폰으로 나도 들을 수 있게 해 두었기에 누구와 전화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호머 심슨 아재... 아니, 하와이 주 헌터 협회장 제이크 앤더슨이었다.
"그 바쁜 거, 설마 하와이 DDF 지수 빠지는 거랑 연관 있냐?"
─그래 임마! 칼 아이작이라고!
"뭐? 그 칼 아이작? 아이작 엔터프라이즈?"
아이작? 나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유명한 사람인가?
─그럼 또 누가 있겠어? 그 새끼가 지금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다! 헌터 협회까지 엮어 싸잡아서 하와이 주 헌터 업계 전체의 무능으로 언플 몰아가는데, 이러다가 협회장 자리도 물러나야 하게 생겼어!
어우, 이 아저씨도 큰일 났군.
"그러면서 공매도를 때린 모양이군. 아이작 엔터프라이즈는 행동주의 공매도 펀드니까."
─그래, 조목조목 하와이 주의 던전 개발 업체들이 고평가되어 있다는 단서를 모아서 터트렸더라. 지금은 그저 시작이야. 아마 몇 개 회사는 문 닫아야 할 수도 있어. 어쨌든, 급한 거 아니면 다음에 통화하자! 지금 나 바쁘다니까! 앞에 기자들이 벌써 몰려들고 있어!
"아니, 자네 지금 나랑 통화해야 돼."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 여기 있는 김세균이 자네 엉덩이를 한 번 구해줄 것 같거든."
─나한테 롤스로이스 뜯어간 그 루키가? 나를 구한다고? 그게 무슨...
아, 어제 내기 승리 상품은 제피로스가 양보해서 결국 내가 가져가기로 했었지...?
"어제 그 녀석이 공략했던 던전 안에, 네가 찾던 마지막 던전이 열렸어."
─그게 뭔 헛소리야? 던전 안에 뭐가 어째?
"하와이 주의 평정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은 던전이 어제 그 15단계 던전 안에 열렸다고. 50단계 마트료시카 던전이야."
─... 뭐? 아, 아니... 그게... 아니... 진짜야?
"지금 상황에 거짓말이라도 하겠어? 천천히 말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까."
─이, 일단 끊는다.
아마 바로 확인해 보려고 협회 직원을 파견했으리라.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Breaking News라는 타이틀과 함께 미국 내 주요 언론사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붉은 수염투성이 얼굴.
제이크 앤더슨이 마이크를 잡고 서서히 입을 떼는 순간까지도.
Hawaii DDF X5 (-91.4%)
주가는 폭락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우린 슬슬 매집이나 시작할까?"
"네, 그러시죠."
딸깍.
마우스 클릭 한 번에, 91%까지 폭락한 Hawaii DDF X5의 대량 매수 주문이 들어갔다.
이렇게 매도세가 강하면, 굳이 분할 매수할 필요도 없었다.
하방에 깔린 수천억 단위의 잔량을 주워 오기만 하면 된다.
─일단, 본 협회장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기자 분들에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조금 전 본 협회장이 받은 연락에 의하면, 하와이 주의 마지막 게이트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웅성웅성.
TV로 보고 있었지만, 큰 웅성거림이 제이크의 마이크를 타고 들릴 정도로 기자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동요는 주식 시장의 동요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Hawaii DDF X5 (-79.7%)
DDF는 순식간에 전일 대비 10% 이상 회복되었다.
─해당 게이트는 15단계 게이트 안에 발생한 이너 게이트(Inner Gate)이며, 단계는 50단계입니다.
Hawaii DDF X5 (-19.7%)
─우리 하와이 주 헌터 협회에서는, 주 내외부의 개발 회사들 및 헌터들과 협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해당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하와이 주의 평정을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말 잘하시네, 그냥 술 좋아하는 아저씨로만 보였는데.
그리고 협회장 아재의 기자회견이 끝났을 때는...
Hawaii DDF X5 (+1.7%)
양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내 수익률 창은...
현재 미실현 수익률 : 1082.56%
1조 원이 넘는 숫자를 보여주고 있었다.
구하러 왔구나! (1)
구하러 왔구나! (1)
"이게... 무슨..."
하와이 주의 DDF 및 개별 기업들의 주가 현황을 살피는 칼 아이작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월가에서 잔뼈 굵은 공매도 투자자인 칼 아이작이었지만, 이런 상황과 마주하는 건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그만큼 모든 상황을 세팅하고,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만 들어가는 것이 칼 아이작의 투자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이후에야, 오랜 친구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자넨 던전을 믿나? 조사? 분석? 자네가 각성자가 아닌 게 아쉽군. 제대로 된 던전을 하루만 들어가 봐도, 자네 생각이 싹 바뀔 텐데.'
그 친구의 말을 들은 이후에도, 그의 투자 방식은 여전히 통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물론, 그의 조언으로 깨달음을 얻어 재기하겠다, 같은 물렁한 생각 따위는 아니었다.
칼 아이작은 바로 전화를 들어 어디론가 걸었다.
─여보세요.
"... 전화 받아줘서 고맙네."
─칼, 자네 무슨 일 있나?
"있지, 그것도 아주 큰 일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카이저."
**
정규 장 시간이 끝났을 때,
Hawaii DDF X5 (+100.7%)
현재 미실현 수익률 : 2,236.05%
뭔가 꿈을 꾸는 것 같이만 느껴졌다.
지금 바로 수익 실현해도 2조가 넘어갔다.
대량 매도 과정에서 일부 가격 손해를 생각해도 1조 8천억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싶어서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돈이 돈 같지 않고, 게임머니같이 느껴졌다.
"그 기분 안다."
옆에 있던 제피로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말했다.
"많은 돈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줄까?"
"그게 뭐죠..."
"간단해, 돈이 널 다루게 하지 않는 거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하던 일 열심히 하라고. 헛바람 들지 말고."
"언제는 '경제적 자유'를 찾으라면서요."
제피로스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
"왜요."
그럴 생각도 없긴 했는데, 너무 단호하니 왜 안된다는지 궁금하네.
"배 아프잖아."
"..."
"나는 네 나이 때 빵꾸난 주식 계좌 메우느라 던전을 몇 탕씩 뛰었는데. 너도 그쯤은 해야지."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내 헌터로서의 가능성을 아깝게 여겨서라는 걸 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같이 던전 공략하기 전에는 헌터 생활 그만둘 생각 없으니까."
"얌마, 난 은퇴야. 같이 뛰긴 뭘 뛰어."
"마이클 조던도 은퇴 두 번 번복하고 다시 레전드 됐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피식 웃어 보이던 제피로스가, 차트를 흘끗 보면서 말했다.
"그래도 칼 아이작이 보통은 아니야. 이 호재를 가지고 고작 장중 20% 상승 선에서 막아내다니."
5배 추종 DDF가 100% 상승이었으니, 실물은 20% 남짓 상승한 거였다.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전일 대비 최소 50%는 올랐어도 이상하지 않을 호재.
"갑자기 분위기 아이작 엔터프라이즈 될 때는,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작이 아니라 아이작 할애비가 와도 어쩔 수 없는 호재니, 시간문제다. 묻어두고 있으면, 계속 불어날 거야."
제피로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2조를 넘어서 계속해서 불어날 수익만을 기다리면 되겠다.
당연히 오를 게 뻔한 주식을 많이 올랐다고 굳이 익절해서 성급하게 수익 실현할 필요는 없겠지. 누구 좋으라고.
"그러니까, 너도 계좌 좀 그만 보고 이제 자."
제피로스가 내가 보던 노트북을 턱 덮으면서 말했다.
"잠깐 사이에 네 돈 다 안 날아간다."
"알겠어요."
어차피 잘 생각이었다.
자기 전에 하나 할 일은 있었지만.
제피로스가 호텔 객실을 나가고 혼자 남자, 인벤토리에서 티켓 하나를 꺼냈다.
['랜덤 유물급 장비 아이템 선택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요 며칠 바빠서 아직 보상도 확인 못 했는데, 이것도 절대로 작은 건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대박일 수도 있지.
"사용해줘."
그래도 2조라는 거금이 생겨서,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인 거 같다.
전 같았으면 심호흡도 몇 번이나 하고, 득템의 기원을 몇 번 올린 다음에 까봤을 텐데.
유물급을 이렇게 간단하게 오픈할 수 있는 걸 보니, 간이 좀 커지긴 한 모양이야.
한참 룰렛이 돌아가다가, 눈앞에 다섯 개의 선택지가 떠올랐다.
"아놔."
문제는, 네 개가 무기라는 거였다.
검, 활, 창, 도끼까지 골고루도 나왔네.
어차피 옵션을 확인할 수 없고, 당장 돈이 부족한 거도 아니니 재판매를 목적으로 뽑을 필요도 없었다.
"오, 그래도."
다행히, 마지막 하나는 반지였다.
장신구 중에서도 최대 열 개까지 착용할 수 있었기에, 반지의 수요는 엄청났다.
안 그래도 돈 번 김에 반지 칸 좀 채워두려고 했는데, 잘 됐다.
유물급 반지라면 어지간히 옵션이 좋지 않고서야 무기가 따라올 수 없다.
당연히 반지를 고르는 게 인지상정.
거무튀튀한 빛의 반지에, 붉은 수정이 매달린 게 썩 불길하게 생겼지만, 그게 오히려 더 힙하고 좋다.
이윽고 반지가 허공에서 툭 떨어져 손에 닿으면서,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미친 황제의 권위]
[품격] : 유물급 장신구
[설명] : 흑마법에 심취한 고대 제국 황제가 남긴 유물입니다. 주변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미친 폭군은 오직 언데드만이 자신이 통치하는 제국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언데드만이 존재하는 제국의 외로운 통치자로 남았습니다.
[내용] : 현재 사용자에게 모든 기능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봉인 해제를 위해서 최소 누적 백만 ~ 최대 1억 개체의 언데드 소환이 필요합니다.)
일단 네크로맨서용 아이템인 거 같은데.
봉인이라니...
"누적 1억 개체?"
다른 네크로맨서라면 학을 뗄 정도로 많은 수겠지만, 내게는 코 파면서도 가능한 숫자였다.
반지를 착용한 뒤에.
어차피 역소환했던 2호기를 다시 보충해야 했기에 미리 챙겨둔 여분의 샘플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서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했다.
[Caulobacter Crescentus 균주 사체 2억 8472만 223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충실한 수하가 되어 따를 것입니다.]
평소처럼 소환 관련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고.
곧이어서, 처음 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1억의 백성을 제국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아이템, '미친 황제의 권위'가 성능을 완전히 되찾습니다!]
"어디 보자."
아이템 품격이나 설명은 같고...
[내용] : 24시간에 1회, 언데드에 '제국 칙령'을 부여할 수 있다. 부여받는 언데드의 숫자나 칙령의 내용에 따라서 칙령의 지속 시간은 변동된다.
[제국 칙령(사용 아이템 스킬)]
설명 : 위대한 황제 폐하시여, 당신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어떤 명령이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필히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불가능하건, 가능하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이것만 봐선 모르겠는데."
뭐가 어쨌든, 특이하긴 하다.
유물 아이템답다고나 할까.
다만, 내가 아니면 거의 사용하기 힘들 것 같았다.
1억 개체라니... 말이 쉽지.
최소한의 봉인 해제 조건인 백만도 보통의 네크로맨서에게는 어려울 터다.
그 말인즉슨...
"리셀 가치가 똥이라는 거군."
백조원이 뭐가 어쩌고 어째?
천상 아이템으로는 돈 못 벌 운명이다.
정정당당히(?) 벌어야지.
"쩝, 아쉽네."
그래도 적어도 써먹을 수 있는 아이템이 나왔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지만, 벌써 깨어있던 것이 20시간이 넘었다.
이쯤 되어 쏟아지는 수마는 막을 길이 없었다.
... 제국 칙령 스킬은 내일 알아봐야겠다.
**
일어나자마자 느껴지는 허기에 호텔 조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 먹는 습관은 없는데, 어제 밥을 계속 걸러서 그런가, 엄청 배고프다.
미국식 조식 뷔페는 도저히 한국 사람 입맛에 안 맞지만, 여긴 그래도 한국인 여행객이 많이 찾는 호텔이어서 조식에 김치도 나오고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조식당에 내려오니 통화하는 제피로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는 손짓으로 기다리라고 하고서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제피로스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큰일인데. 어제 선발대 보냈는데..."
"보냈는데...?"
"쉽지 않을 거 같단다. 거기선 포기한다고 하네."
협회에서 보낸 선발대는 나름 주에서 끗발 날리는 헌터들로 구성한 최초 공략 시도 파티였다.
그런 정예 선발대가 쉽지 않다는 말만을 남기고 포기할 정도면 난도가 꽤 높다는 뜻이었다.
"던전 이름부터 심상치는 않았죠."
"불지옥... 이름 한 번 진짜 지옥 같긴 하네."
한동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피로스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 녀석이다."
"협회장님이요?"
"그래."
제이크 협회장의 전화를 다시 받은 제피로스.
순간, 협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들려왔다.
─큰일 났는데?
"들었어, 파티 하나 게이트 들어갔다가 도망 나온 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보다 더 문제야. 최초 공략 파티에 의하면 화염 저항이 최대한 높아야 간신히 도전이라도 해볼 만한 던전이라는데... 지금 화염 저항 관련 스킬이나 버프 가진 사람들, 죄다 내 연락을 안 받아.
"... 정보가 외부로 샜군."
─그래, 그 짧은 사이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조식당에 설치되어 있는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너, 보고 있지?"
─어, 보고 있다.
뉴스에서는 실패한 선발대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고, 패널까지 초빙해서 분석하고 있었다.
[어제 하와이 DDF가 많이 반등했는데요, 이게 사실 던전을 발견만 하고 클리어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이죠. 달라질 건 전혀 없었는데, 사람들이 무지성으로 매수해대고 있어요. 이거, 위험한 행동입니다.]
어디서 달았는지도 모를 던전 전문가 타이틀을 달고서 헛소리를 말해대는 패널.
하와이 DDF 매입을 마치 금방이라도 폭락할 것 같은 잡주에 투자하는 것처럼 한껏 과장하여 말해댄다.
그들의 대화를 보는 제피로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야, 이거... 좀 쎈 놈이 개입한 거 같은데. 누구려나... 헌터 업계 거물이 분명한데."
─씨발... 무슨 칼 아이작 이병 구하기야?
언론이 저런 논조의 여론을 갑자기 형성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거액의 공매도를 쳤다가 물린 칼 아이작의 펀드를 탈출시키기 위함이리라.
"아마 그전에는 악착같이 던전 클리어를 방해하겠군."
그렇게 되면 곤란하다.
레버리지 ETF는 상승장이 쭉 이어질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하락과 상승이 반복된다거나, 긴 하락 이후에 상승장을 맞이하면, 상승분만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순자산 가치(NAV) 대비 괴리율이 높아서 그런다나 뭐라나.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X5 상품에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 꺾이면 어쨌든 나중에 던전 클리어해서 주가가 오른다고 해도 제대로 이익을 챙겨가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어쩌냐... 이런 상황이면 한동안은 헌터들 동원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망할."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방법을 의논하는 두 사람.
그나저나 화염 저항이라.
아쉽네.
내가 50단계 던전에 제피로스랑 함께 들어갈 수만 있었다면... 다 해결될 텐데.
3호기의 화염 저항 성능은 이미 증명된 바니까 말이다.
타인에게 그 보호 성능을 사용해주는 것도 당연히 가능했다.
딜러(1호기), 힐러 및 CC기 셔틀(2호기)에 이어, 버퍼(3호기)다.
그렇다고 내가 입장하지 않는 게이트에 세균을 보내서 활동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일정 거리 이상 술자와 떨어지게 되면, 세균들은 휴면 상태에 바로 들어갔다.
그런데.
[제국 칙령(사용 아이템 스킬)]
설명 : 위대한 황제 폐하시여, 당신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어떤 명령이건 목숨을 걸고서라도 필히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불가능하건, 가능하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설명에 있는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영 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깐 제피로스의 눈을 피해 뒤로 돌아가 3호기 군단을 향해 제국 칙령을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다.
결과는...
[Magmophile 개체 총 1,103,398,872 개에 제국 칙령을 내립니다.]
[제국 칙령 내용 : 술자가 없거나 아주 멀리 떨어진 환경에서 언데드가 정상적으로 활동한다.]
[칙령 효과 지속 : 3시간 57분 (기본 2.3분, 통제력 205% 효과 적용).]
... 이게 되네.
그렇다는 말은, 내가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아도 버프는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내 시선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 통화에 여념이 없는 저 은퇴한 헌터를 향하고 있었다.
구하러 왔구나! (2)
구하러 왔구나! (2)
"제피로스."
"응?"
나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보다.
"잠깐 이따 전화하자."
바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나를 바라본다.
"왜, 무슨 일이야?"
"혹시... 화염 저항 3000% 버프 받고 던전 들어가면... 자신 있으세요?"
"뭐? 나?"
이미 대략적인 던전 선발대 보고는 그도 받아봐서 알 터.
아무리 '전직'이라지만...
"솔직히 견적 뽑으셨잖아요."
"아니, 그건 직업병 같은 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던전 공략 시뮬레이션을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던전 공략 관련 내용으로 빼곡한 그의 노트가 오늘도 한 페이지 늘어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 애초에 이게 논의 거리도 안 된다는 건 알잖아?"
만약 게이트 밖에서 버프 주는 게 가능했으면 버프 관련 클래스들은 정말 게이트도 안 들어가고 바깥에서 '딸깍' 하나로 먹고살 수 있었겠지만, 세상이 만만하지만은 않다.
게이트 입장 과정에서, 모든 종류의 버프는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또한, 술자가 게이트 밖으로 나가도 버프는 해제된다.
이런 제약을 뛰어넘는 마법이나 아이템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극히 제한적인 게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한적인 능력을 보유한 이들은, 대부분이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제는 그 능력을 내가 보일 수 있게 된 거고.
"제가 바깥에서 버프를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 정말이냐?"
제피로스는 내게 화염 저항 관련 능력이 있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다.
"보실래요?"
그런데 상대 시스템창에 어떻게 표기될지 모르겠네.
일단은 세균 3억 마리 정도를 제피로스에게 붙였다.
"뭐, 뭐야 이거."
"뭐라고 떠요?"
"뭐 영어 어쩌고. 마그모... 뭐? 언데드 개체가 붙었어? 언데드 없는데."
주변을 흘끗거리는 제피로스를 채근했다.
"그리고 또요?"
"... 정말이네 이거. 화염 저항력이 3천 퍼센트 올랐어. 그런데 이 버프가 너 없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도 단독으로 유지된다는 거지?"
"네, 대략 4시간 좀 안 되는 정도."
"후, 견적 좀 내보자. 4시간, 화염 저항..."
팔짱까지 끼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한참 생각을 이어가던 제피로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는 무리야."
"세 명... 무리하면 네 명 정도까지는 커버 됩니다."
인당 3억 마리 정도가 전신 보호를 위한 수치였으니, 12억 마리 정도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다.
제국 칙령의 유지 시간이 조금 줄어들 것 같은데, 그건 타협을 봐야지.
"네 명까지?"
"무리하면요. 지속 시간은 줄어들 겁니다."
"그거야 어떻게든 땡겨 봐야지. 빠듯하면 빠듯한 대로 공략하는 게 1세대였다. 요즘 것들은 근성이... 아, 미안. 또 꼰대 'ON' 해버렸구만."
농담할 여유는 있으신 모양이네.
"그래서, 하신다는 거죠?"
"이 정도로 판 깔아줬는데, 해보지도 않고 뺄 수는 없잖아?"
어렸을 때, 제피로스랑 같이 던전을 도는 꿈을 몇 번이나 꿨었지?
그게 완전히 현실화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로 내려온 상황이었다.
괜스레 가슴이 벅차구만.
"좋습니다. 아, 그리고 DDF 건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들고 있어."
"지금 팔고서 던전 클리어하고 다시 들어가는 건 어때요? 아직 많이 안 떨어졌던데요."
"모르는 소릴."
쯔쯔, 혀를 차면서 제피로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나 바보 같은 소리라도 했나?
"세균아. 지금 DDF 가격이 왜 떨어지고 있겠니?"
"당연히 매도세가 많으니까..."
"그럼 그건 누가 매도하고 있겠어?"
"사람들이랑... 그 아이작 엔터프라이즈겠죠."
"아이작 엔터프라이즈는 뭐하는 회사지?"
"공매도 회사요."
뭐지, 스무고개인가.
"답 나왔잖아. 공매도가 뭐야, 빌린 주식을 갖다 판 거잖아."
"그렇죠."
"빌린 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갚아야죠."
"빌린 주식도 갚아야겠지?"
"예."
"갚으려면 어디서 가져다가 갚아야겠어?"
"시장에서 주식을 사다가... 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지금 아이작 엔터프라이즈가 주가 상승을 막으려고 무리해서 더 주식을 빌려다가 팔고 있다는 거죠?"
"그래. 대놓고 시장을 거스르는 거야. 아무리 언론 플레이를 해도 없던 게이트 입구가 발견됐으면 공략 난이도를 떠나서 일단 100% 상승은 박고 시작인데, 그걸 감당 못 해서 막고 있잖아. 거기에 우리가 보유한 지분을 지금 풀어주면 어떻게 되겠어?"
"우린 어느 정도 이익 실현은 할 수 있겠지만, 주가는 폭락하고, 그걸 신나서 받아먹고 도망가겠네요."
"맞다. 그러니 묶어둬야지. 절대 도망치게 못 두지.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죠."
어딜 도망가?
"흐흐, 공매도 만기일을 어느 정도로 세팅해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30일 아니면 90일이겠지. 만약 정말 우리가 클리어라도 해버리는 날에는... 만기일에 곡소리 나는 모습이 기대되는데?"
아이작 엔터프라이즈는, 하와이 DDF를 공격하려고 들어온 대규모 공매도 지분을, 만기일이 되면 전부 매수해서 갚아야 할 거다.
지금 가진 DDF를 들고만 있으면, 그리고 던전을 클리어하기만 하면...
확정적인 폭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
최강의 헌터는 누구인가?
이 화두를 둔 논쟁은 끊이지 않고 십수년째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재 진행형이었지만, 최근에는 어느 정도 결론이 나는 추세였다.
아흐마드 트리아인.
세계 최강의 네크로맨서이자 군단의 지배자.
그가 현대 던전의 최강자로 손꼽혔다.
하지만, 그보다 몇 세대 전에, 세계 최고로 인정받던 인물이 있었다.
그게 카이저였다.
과거 다수의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들을 클리어하며 명성을 쌓았던 남자.
현재는 여타 1세대들처럼 나이가 들어 공략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지만, 헌터 업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커지면 커졌지, 전혀 작아지지 않은 채였다.
그가 소유한 던전 개발 회사는 여러 차례의 인수 합병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덩치를 불렸고, 현재는 전미(全美)의 던전 개발 회사 중 절반 이상이 카이저의 영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록펠러와 JP 모건의 회사를 갈가리 찢어놨던 미국의 강력한 반독점법 규제가 없었더라면, 미국 전체의 던전개발회사가 카이저의 손에 들어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카이저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면서 함께 공략을 진행할 헌터를 찾던 제피로스였지만, 모두가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카이저라. 허. 현역 때도 카이저랑은 각을 세웠던 적이 없었는데. 다 은퇴하고 나서..."
"칼 아이작이 카이저랑 사적으로 꽤 친분이 깊다더군. 그냥 친분만으로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테고, 아마 꽤 많은 돈이 엮여있겠지만."
협회장 제이크의 말에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니까, 카이저가 지금 여기 던전 클리어하러 오면 인생 조져주겠다고 칼 들고 협박하는 거죠?"
"그 정도는 아니고... 아니, 그 정도인가?"
제피로스가 쩝 입맛을 다시면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제이크의 눈치를 흘끗 보고는, 한국어로 말했다.
"이해는 해. 나 같아도 괜히 카이저 같은 거물의 심기를 거스르긴 싫을 것 같거든."
"아무리 그래도 한마디에... 방법이 없을까요?"
"방법 있지."
이어 제피로스가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그렸다.
"돈요?"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면 해결할 수 있겠지."
"얼만큼요?"
"50단계 게이트를 공략할 만한 전도유망한 헌터가 자기 현역 생활과 은퇴하고 나서도 헌터 업계에 발 붙이고 사는 걸 포기할 정도의 돈?"
"... 듣기만 해도 현기증 나는데요."
50단계 게이트가 ㅈ이 아니다.
각성자 자체가 전 인구의 1%고, 헌터가 각성자의 10%라면, 50단계 게이트를 공략할 만한 수준의 헌터는 모든 헌터의 상위 0.001%다.
아니, 그런 초고위 헌터조차도 눈치를 봐야 하는 카이저란 작자가 더 미친 건가.
"최상위 헌터한테 카이저랑 척지라고 강요하려면 두당 기본 수천억 단위는 써야겠지?"
분명 많은 돈이긴 했지만, 이번 일로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그래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반반 투자할까요?"
"뭐래? 그리고 내가 넣은 돈이 네 두 배인데 왜 반반이냐? 2:1이면 모를까."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잖습니까."
"됐다. 그런데 돈 낭비하는 거 아니다."
"... 설마 혼자 공략하시려는 건 아니죠?"
아무리 돈이 중해도, 사람 목숨보다 중할 리가 있나.
"차라리 돈을 다 날리면 날렸지, 선생님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내 진심을 느꼈는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제피로스가 피식 웃었다.
"피 같은 돈을 날리긴 왜 날려? 얌마, 너 아직 나한테 천억 갚기 전이야."
"날려도 헌터 생활 조금 구르다 보면 갚겠죠 뭐."
"헌터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간만 커져서는."
쯔쯔, 하고 혀를 한 번 찬 제피로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카이저가 헌터 업계에 영향력이 크긴 해도, 절대적인 건 아니야. 그의 영향권 밖에 있는 헌터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을 어디서 찾죠?"
"불러야지. 사실 이미 불렀어."
이미 부를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와이 헌터 협회의 문이 열리면서, 2m 남짓의 흑인 거한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가 제피로스의 얼굴을 보고서는, 환하게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주먹다짐을 벌이려는 건 아니었고, 간단한 주먹인사였다.
제피로스도 마주 주먹을 뻗어 툭 부딪히고는 포옹을 나누었다.
"와썹 맨!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안드레. 거의 10년 만이지?"
통역 목걸이 덕에 의미는 통했지만, 흑인 스타일의 억양이 고스란히 담긴 한국말로 들려서 말투가 우스꽝스러워졌다.
"잠깐 기다려 봐. 린다랑 에릭도 곧 올 테니까."
"린다에 에릭까지? 오늘 무슨 파티인가?"
말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추가로 들어왔다.
깡마른 백인 남성과 평범하게 생긴 백인 여자까지.
서로 오랜만에 만난 건지, 반갑게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그들과 안부를 나누던 제피로스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오랜만에 SNS를 좀 뒤졌지. 은퇴자 중에 헌터 업계에 발붙이고 있는 놈들은 걸러내고, 거기서 또 셀카 사진을 좀 확인했다. 저 녀석처럼 몸 상태가 완전히 망가진 놈들은 제외했지."
어, 그건 그렇지.
호머 심슨... 아니 저 협회장 제이크 아재에 비하면 지금 온 세 사람은 확실히 몸 상태가 좋았다.
계속 관리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열댓 명을 걸렀고, 마지막으로 내 제안까지 받아들인 셋이 이렇게 온 거지."
"그러면 저분들이..."
"나랑 같이 던전 공략할 녀석들이다."
카이저가 헌터 업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면...
헌터 업계에서 아예 발을 뗀, 완벽히 은퇴한 사람들을 데려오면 된다는 발상!
발상은 할 수 있어도, 그걸 실현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
1세대 헌터의 인맥이라는 게 이런 건가.
그렇게 모인 넷은 바로 게이트로 향해서 내 버프를 받고 입장까지 속전속결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은퇴자들만으로 괜찮을까?
그리고 내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채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류현수 님, 안드레 존스 님, 린다 윌리엄스 님, 에릭 도널드 님께서 50단계 게이트, '불지옥'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미합중국, 하와이 주가 평정되었습니다!]
[하와이 주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당당하게 클리어를 마치고 황금빛 빛무리에 휘감겨 던전에서 퇴장하는 은퇴 헌터들.
내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유롭게 걸어 나온 제피로스가 검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내면서 내게 말했다.
"뭘 놀라? 던전 이름 자체가 불지옥인데, 그 던전 기믹 자체가 네 버프 때문에 박살 났는데, 이게 당연한 결과지."
"요 맨, 루키라고 했었나? 정말 엄청난 버프였어. 내 평생 불길에 휘말리고도 하나도 안 아팠던 적은 처음이야."
"대단한 버프네요. 심지어 던전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서 이런 수준의 버프를 걸어줄 수 있다니."
"이런 버프술사가 있었으면 은퇴를 조금 미뤘어도 될 걸 그랬군."
그, 그런 건가?
그들이 늘어놓는 칭찬을 한참 듣고 있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게이트의 공략자들이 만장일치로 당신의 기여도를 인정하여 공략자 명단이 정정됩니다.]
[김세균 님, 류현수 님, 안드레 존스 님, 린다 윌리엄스 님, 에릭 도널드 님께서 50단계 게이트, '불지옥'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 뭐라고?
사전준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