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3)
"명성이라..."
솔직히 설레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에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런 감정을 토로하자니, 제피로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뉴비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네. 너 회귀라도 했냐?"
"회귀요?"
"미래에서 왔냐고."
"아뇨. 그랬으면 이렇게 살았겠어요?"
"하하. 그것도 그렇네."
한참 웃던 제피로스가, 이내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 에이전트 하나 둘래?"
"음, 헌터 에이전트 말이죠?"
최상급 랭커 라인의 헌터들은 대부분이 에이전트를 고용했다.
모든 업무를 헌터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헌터들은 던전 공략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래서 여러 계약 등을 거의 도맡아 전담으로 처리하고 비율로 수익을 챙기는 헌터 에이전트는 현대에 각광받는 직업군이었다.
"추천할 만한 사람이 있나요?"
"유명한 에이전트들이 있긴 하다만..."
예를 들자면 헌터계에는 거의 지식이 없는 나도 이름을 아는 스캇 드레피스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이 랭커들은 거의 스캇 드레피스의 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가 에이전트를 맡은 헌터들로 이루어진 드레피스 사단은 던전 개발 회사들에서는 원수쯤으로 여겨졌다.
워낙 악독하게 돈을 뜯어내니까.
많게는 던전 공략 부산물의 80%를 헌터가 가져가는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던전 소유자는 회사인데, 20%밖에 못 가져가는 셈이다.
20%라도 챙기는 것이 던전을 놀리는 것보단 낫기에, 회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드레피스의 사단에 공략을 맡긴다.
그 명성답게, 공략 성공률은 하늘을 뚫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동안은 내가 맡아주지. 공짜로."
"네? 정말로요?"
기본적으로 헌터 업계에 대해서 잘 꿰고 있으며, 인맥도 많은 제피로스였다.
그가 에이전트를, 그것도 무료로 맡는다니.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식으로 계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진심이었다.
제피로스가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충주의 채석장까지 와서 스톤골렘들을 잡고 공략 불가 판정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냥저냥 다른 게이트들이나 다니다가 공략 가능 한계인 8레벨을 넘었겠지.
공략 불가 판정 던전이 공략 불가인 이유는, 레벨이라는 시스템으로 그걸 공략할 수 있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제피로스의 이 판단 덕분에, 나는 엄청난 이득을 얻은 것이었다.
이런 판단력을 가진 제피로스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최고 조건으로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해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내 제안에, 제피로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난 회사에 임원직으로 매여 있어서 계약상 겸업 금지야. 이 에이전트 활동은... 그냥 취미 생활 정도로 해두자. 어차피 나는 이제 부자거든."
"... 예?"
"그런 게 있어."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제피로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울리는 휴대폰.
메신저에 쓰여 있는 이름을 확인하고서, 아차 싶어졌다.
"저, 사실 오늘 조금 바빠서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가서 좀 쉬고."
"아, 구두 계약도 계약 맞죠?"
나는 녹음 기능을 활성화해서 입에 가져다 대고는, 나직이 말했다.
"나 헌터 김세균은, 제피로스 류현수에게 에이전트 계약의 전권을 위임한다. 2024년 5월 15일 오후 6시 22분."
녹음한 파일을 제피로스에게 톡으로 보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든 알아서 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그냥 잘 달리기만 하겠습니다."
"너는 그냥 달릴 테니, 트랙은 내가 깔아라?"
"해 주신다면서요? 무료로."
이 에이전트는 무료로 해 줍니다... 같은.
이런 찬스를 놓칠 수가 있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웃고 있는 제피로스를 뒤로 하고, 차로 뛰어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어, 민철이 형. 결정했어?"
아무래도 오늘이 끝나기까지도, 꽤 긴 시간이 남아 있을 듯 보였다.
**
김세균이 차를 타고 출발하기가 무섭게, 류현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서, 선배... 혹시 방금 떴던 그 메시지...
"무슨 메시지?"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보셨잖아요...
"아, 그 메시지?"
류현수가 시야 한쪽 구석에 최소화 해둔 메시지창을 다시 열었다.
[김세균 님께서 3단계 게이트, '버려진 스톤골렘의 사원'을 최초로 토벌하셨습니다!]
[대한민국, 충청북도 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충청북도 지방의 모든 게이트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이 약화됩니다!]
그냥 단순히,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를 공략했다는 것의 가치가 문자 그대로 공략 불가 판정을 받았던 게이트를 공략한 것에 지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의 관심이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으리라.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는, 마치 빙고의 마지막 남은 칸 같은 존재였다.
한 지역이 모두 공략되면, 해당 지역에는 '평정' 판정이 내려진다.
평정 판정이 내려진 지역은 몬스터들이 약화되고, 던전 난이도도 한결 쉬워진다.
이걸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대체 얼마일까?
10%만 약화된다고 해도, 단순 산술적으로 열 명의 헌터가 해결할 일에서 한 명이 없어도 된다.
20%라면 두 명이다.
던전 개발 회사들 입장에서는, 압도적으로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헌터들에게는 안 좋은 일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공략 시간 자체가 단축되니, 남은 시간을 더 활용할 수도 있는 일.
이러나저러나, 해당 지역 경제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 평정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각 지역별로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들, 이른바 '불가사의' 게이트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지금 해소된 거였다.
─세상에, 정말로 불가사의 게이트를... 김세균 헌터가 클리어한 거에요?
"그래. 스폰서 계약 권리관계는 내 이름으로 잘 옮겨놨지?"
─... 네, 어쩐 일인지 귀신같이 빠르게 승인이 났더라고요.
"푸흐흐, 신태호 이 새끼, 이사회에서 엿 좀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제피로스가 낄낄대며 웃었다.
김세균 정도 되는 루키의 스폰서쉽 계약을 고작 10억에 얻을 기회였다.
그걸 몇 시간도 아니고 몇 분 사이에 날려 먹은 대표의 판단은 이사회에서 엄청난 폭격을 받게 되리라.
어쩌면 해임안이 의결될 수도 있고.
"아, 그리고 내 회사 스톡옵션이 얼마나 남아 있더라?"
─1,000억 조금 안 될걸요? 창립 멤버들 다 그 정도로 분배받았잖아요.
"너는?"
─저는 5억 정도 있으려나.
"안 팔았지?"
─아직 바인딩 기간요. 3달 남았어요.
"축하한다."
─뭐를요?
"돈 벌게 된 거."
─... 그게 무슨 소리예요?
"충북 지역에 게이트 제일 많이 보유하고 있는 회사가 어디냐?"
─헐.
RHS는 충북 지역의 53개 게이트 중에서 17개를 불하받아 독점권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였다.
애초에 거점 지역이 충북이었다.
나머지는 국영 게이트거나 다른 회사 보유분이었는데, 충북의 알짜 게이트는 거의 RHS 소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셨다고요?
"기본 아니겠냐. 어쨌든, 김세균 그 친구 덕에 내가 돈을 좀 많이 벌게 될 것 같거든."
스폰서쉽 계약도 개인 계약으로 땡겨 왔고, 행사할 수 있는 스톡옵션으로 볼 수 있는 이득도 엄청날 터였다.
스톡옵션은 정해진 가격에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였으니, 주가가 오르면 그게 고스란히 차액으로 이어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조화의 이해' 스킬북 요즘 시세가 얼마더라?"
─회사에 하나 있어요, 지난달에 경매에서 낙찰 받아온 가격이 128억인가 그랬죠?
"언제 시세가 그렇게 오른 거야, 참 내."
─요즘 네크로맨서가 대세잖아요. 마법계열 공통 전설급 스킬북이면 가격이 오를 수밖에요.
잠시 혀를 내두르던 류현수가, 이내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거 아직 회사에 있어?"
─있죠, 우리 회사 랭커급 마법 계열 헌터들은 이미 다 익히고 있으니까. 신인급들 위해서 준비해 놨으니까요. 그런데, 설마 김세균 헌터 주려고요?
"왜, 안 되냐?"
─아무리 그래도... 우리 회사 소속도 아닌데...
"내가 공들이고 있다고 말해. 절반은 내 사비로 부담할 테니, 절반은 회사에서 접대비 처리하라고 하고."
─저, 접대비요?
"신 대표가 계약 까서, 우리 헌터님께서 크게 실망하셨거든. 그 실망감을 달래려면, 돈이라도 더 써야지. 어쩌겠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류현수에, 배수진은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어버버거렸다.
─대, 대표님이 승인을 해줄까요? 이걸...?
"신 대표가 까면, 이사회에 안건으로 올린다고 그래.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 신 대표님께서 김세균 헌터와의 스폰서쉽 계약을 까버린 게 안건으로 함께 올라오겠지?"
─어... 그렇겠죠.
"군말 없이 집행하면, 나도 우리 신 대표의 실수를 입 다물고 있을 거라고 전해. 우리 굳이 각 세우지 말자고도 전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당연하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세균이 보낸 톡의 녹음을 확인하고서는 씨익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내가 그 친구 에이전트거든."
한동안 흐리멍덩하게 죽어 있던 류현수의 눈이, 다시금 던전을 제패하던 전성기 제피로스의 그것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
민철이 형은 일단 OK사인을 보내주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던 그에게 가장 결정타는, 내가 10억 원이 들어온 계좌를 보여준 것이었다.
적어도 한동안 월급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좋아, 형. 그러면 거래처들에 연락해서, 반값에 다 처리해 준다고 그래,"
─반값? 반값에 처리한다고? 그럼 뭐가 남아? 소각로 돌리는 비용도 안 남겠다.
"다 방법이 있어서 그래, 그리고 그 정도는 되어야 계약을 가져올 수 있어. 위약금도 생각해야지."
애초에 하청이니,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도 높게 걸 수 없었지만, 있긴 있었다.
그 위약금을 지불하고도 업체를 변경할 만한 메리트를 줘야 한영시스템, 어제까지 내 직장이었던 회사로부터 계약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특히 성광바이오, 진웅제약, 조광제약, 운미제약, 구성당이랑은 무조건 계약 체결해야 해. 저 회사들은 30%에 해줘도 돼."
─30%? 안될 말이지, 내가 무조건 50% 이상으로 따온다.
"하하, 알겠어."
저 다섯 개 회사가 프랑스로부터 루미나리온 사체를 매입해서 추출 후 엘릭서를 제네릭 생산하는 대표적인 국내 업체였다.
그 말인즉슨, 사체에서 엘릭시르를 추출하고 남은 펠릿을 폐기물로 방출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저 회사들과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면, 폐기물 처리에 따른 푼돈 정도밖에 벌 수 없었다.
일단 민철이 형이랑은 얘기 끝났고.
다음 사람이 중요한데...
임규선 씨에게서 생각보다 연락이 늦었다.
거절이려나?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하려나.
그녀보다 나은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아 보이던데.
고민을 이어가던 때였다.
우우웅, 휴대폰에는 임규선이라는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안도의 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제, 제가 늦었죠? 늦잠을 자서...
"아닙니다. 안 늦었어요.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어, 폐가 되진 않을까요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면 집 앞으로 오세요오. 단지에 차 대고 근처 카페라도 가요.
"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이 사람도 아마 영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 있는데... 세균 씨 이름이 있어요... 3단계 게이트를... 최초로...?
"... 각성자셨습니까?"
이건 또 몰랐던 사실인데.
당연히 비각성자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네, 저 연금술사예요. 레벨은 별로 안 높지만.
"!"
현대 과학과 시너지를 내는 몇 안 되는 클래스가 연금술사였다.
그런데 MIT를 나올 정도로 능력 있는 과학자가 연금술까지 각성했다니.
원래도 놓칠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명확해졌다.
이 사람, 무조건 데려와야 했다.
대박(1)
대박(1)
동탄에 도착하니 극도의 피곤이 몸을 휘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나 탈진 현상이 단순 마나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할 일은 해야지.
주차해두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니,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규선 씨가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 오셨어요?"
"예, 잘 주무셨죠?"
"네... 세균 씨는... 잘 못 주무신 거 같은데요."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요."
"네..."
대답한 그녀가,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 가방을 뒤지다가, 그녀가 알약 하나를 건넸다.
"뭔가요?"
"피로회복제에요."
"... 감사합니다."
나, 그 정도로 피곤해 보이나.
머쓱해져서 그녀가 준 알약을 바로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정신이 갑자기 말끔해졌다.
"... 이거 뭐죠?"
이런 효능이라면 사서 먹고 싶은데.
"제가 만든 거예요."
이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만들었다고요?"
"네에, 제가 몸이 좀 약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영양제라는 게 몸이 허하다고 그냥 만들어서 먹을 수 있는 물건이었어?
"이런 게 개인이 만들 수가 있는 건가요?"
"아, 회사에서 시제품으로 만들었던 샘플인데, 프로젝트가 반려되서요..."
"이게 반려됐다고요? 효과 미쳤는데."
"단가가 너무 비싸서요. 거기에 엘릭시르가 들어가거든요."
... 미친 사람인가?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영양제에 엘릭시르요? 단가가..."
"아, 물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엘릭시르가 들어가진 않아요. 제가 엘릭시르의 효능을 한쪽으로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았거든요. 그걸 피로회복 쪽으로 특화한 물건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단가가 저렴하진 않지만... 그거 한 알에 예상 소매가가 만 원 정도 할 거예요."
"만원요?"
물론 비싸다. 비싸긴 한데...
이 정도 효능이면 시장성 충분해 보이는데.
특히 헌터들.
그들은 컨디션 유지를 위해서는 한 알에 만 원쯤은 웃으면서 넘길 수도 있는 이들이었다.
"이게 왜 거부됐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엘릭서로 만들어 팔아도 중량당 단가가 비슷한데... 왜 굳이 설비를 늘려가면서 피로회복제로 만들어서 팔아야 하냐고 했어요..."
뭐 말은 맞는 말이긴 하다.
엘릭서는 이제 생활 필수재다.
한 병에 몇천만 원짜리 약이 어떻게 필수재냐고 말하겠지만, 그것의 수요층 사이에서는 필수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복하면 수명이 2배가 되는 약을 위해, 부자들은 연간 백억 단위도 아끼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피로회복제는 먹어도 그만, 먹지 않아도 그만인 사치재에 가까웠다.
사람이 조금 피곤하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성광바이오 경영진의 판단이 맞다.
그런데...
"제 생각엔 성광바이오 경영진들이 바보짓 한 거 같은데요."
"네? 그게 무슨..."
"저라면 이만 원에도 먹을 거 같은데."
"예에...?"
"엘릭서잖아요, 이거. 먹으면 오래 사는."
"아, 아뇨... 그런 효능은 최소화하고 피로 회복 쪽으로 돌려놓은..."
"그건 이론상인 거고요, 어쨌든 엘릭시르가 들어간 건 맞잖아요."
"그, 그렇긴 하죠..."
"제가 일반인이라면, 감히 태어나서 꿈도 꿔본 적 없는 병당 몇천만 원짜리 엘릭서를 단돈 2만 원에 느낌이라도 내볼 수 있으면, 무조건 한 번쯤은 사서 먹어볼 거 같은데요?"
그래, 이건 말 그대로 '사치재'였다.
가성비를 따지면 사치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효율적인 소비의 구조를 박살 내는 게 사치다.
추출한 엘릭시르를 그냥 원료 형태로 파는 것보다는, 이렇게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편이 몇 배는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이쯤이면 사업 아이템까지 잡힌 거 같은데?
동시에 더욱 확실해진다.
이 여자, 놓치면 안 된다.
아니, 놓칠 수 없다.
그런 열의를 담아, 그녀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규선 씨, 우리 회사에 와주세요."
"아... 그게요... 네..."
"정말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어지간한 건 다 맞춰 드리죠. 연봉 협상은..."
돈 이야기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서는, 그녀가 주변을 흘끗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엘릭시르... 어떻게 추출한 건지... 궁금해요..."
"네?"
"아, 물론... 비밀인 거 알아요... 비밀유지서약서라도 쓸게요. 제 조건은 하나에요. 그거... 어떻게 했는지 알고 싶어요..."
"아."
내가 사람을 여전히 잘못 보고 있었구나.
이 연구에 미친 사람을 설득할 방법은 많은 연봉이나 인센티브가 아니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게 답이었다는 거지...?
"어차피 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내 세균 능력에 대해서 공유해야, 그녀랑 세균 관련한 대화도 나누고 새로운 세균을 추가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내 능력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보여줄 수도 없고...
"어디 여기보다 조용한 곳 없을까요?"
"... 집 있어요. 바로 근처에."
"예? 아니, 그건 좀..."
"왜요?"
뭐야, 집 앞까지 오지도 못하게 했던 사람 맞아?
"혼자 사는 여자 집에..."
"가족들이랑 사는데요..."
그게 더 부담스러워!
하지만, 딱히 갈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둘이 엄한 곳을 갈 수도 없잖아.
결국, 어느새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 손님 왔어."
"안녕하세요. 김세균이라고 합니다."
"어머나... 안녕하세... 남자? 남자친구야?"
"아니야! 그런 거! 드, 들어가요..."
얼굴을 확 붉히면서 나를 질질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규선 씨.
그녀의 방에 들어섰을 때,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여기서 주무시는 거예요?"
침대 하나 없는, 완전히 연구실이 방 안에 펼쳐져 있었다.
"아, 아뇨... 거실에서 자요. 방이 좁아서... 헤헤..."
"정말 그래야겠어요."
"그, 그래서... 비밀은..."
"아, 그렇죠. 혹시 버릴 쓰레기 같은 거 있나요?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거면 더 좋고요."
"자, 잠깐만요... 엄마!"
밖에서 잠깐 실랑이 벌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통을 들고서 가져왔다.
"여, 여기요."
가볍게, 안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들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세균을 풀어 분해했다.
유기물이라 분열 과정이 촉진되어 숫자가 조금 더 늘어난 건 덤이다.
그걸 본 규선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 저거... PE잖아요!"
"PE요?"
"Perpetuus Exomodulus요! 우리 회사에서 연구하던 박테리아!"
아아, 그런 이름이었지. 저런 괴랄한 풀네임을 누가 기억할까.
내 머릿속에는 그냥 세균, 아니면 1호기 정도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맞습니다."
"잠깐만요. 근데... 왜 살아있죠?"
대기 중에서 너무도 활발하게 섭식 작용을 이어가며 순식간에 음식물 쓰레기를 분해한 내 세균 군단의 모습에, 그녀가 경악하여 입을 떡 벌렸다.
"살아 있어... 정말로... 대기 중에서..."
"살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내 손이 향하는 방향으로, 수십억의 세균군이 뭉쳐 만들어진 검은 점들이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그 지점에 있는 물질을 분해하는 작용은 없었다.
"통제할 수도 있죠."
"..."
"저기요? 헐..."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으며 정신을 잃은 채 그대로 쓰러지는 그녀를 붙들어 바닥에 눕혔다.
아니, 이게 기절할 정도 일이야?
그렇게 5분 정도 지나자 그제야 눈을 뜨는 규선 씨.
"정신이 드세요?"
"... 죄송해요, 꿈을 좀 꾼 거 같아요. 박테리아가 막, 원하는 대로 통제되는 그런 꿈이요."
"그거 꿈 아닌데요."
다시 한번, 내 세균 군단을 움직여 주자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대신에 몸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세, 세균 씨."
"네."
"저 무조건 할래요. 아니, 제발 받아주세요."
어, 영입 성공한 거... 맞지?
너무 과하게 성공한 거 같아서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성공한 듯했다.
이제 제대로 시작만 하면 될 거 같다.
일단... 조금 쉬었다가.
**
규선 씨를 영입하는 것까지 성공하고 나서, 집에 돌아와 다시 죽은 듯이 잤다.
뭔가 데자뷰 같은 느낌인데.
나 어제도 이렇게 기절하지 않았어?
조금 짜증 나는 건, 여전히 아침 7시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는 거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데, 출근 시간에 몸이 적응해 있는 거겠지.
일단 눈을 떠서 휴대폰을 보니...
뭐야, 톡이 왜 이렇게 많이 와 있어?
─저, 이런 박테리아 균주는 어떠세요?
─이런 건요?
─이런 거도 있어요!
대부분이 규선 씨로부터 온 거였다.
봐도 모를 전문용어로 가득하긴 한데, 뭔가 엄청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알아서 잘 부탁드려요.'
대충 답장 보내놓고, 다음 사람.
민철이 형이었다.
─오늘 사직서 던져놓고 일단 회사 나왔다. 업체들은 네가 말한 중요하단 다섯 업체들 위주로 컨택할게.
여기도 아직 아침 7시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 하나 추가요.
다음은...
─이따 시간 나면 잠깐 들러. 줄 게 있다.
제피로스였다.
제피로스가 갑자기 내게 줄 게 있다니... 뭔가 설레는데?
'지금 가도 되죠?'
톡을 보내니, 휴대폰을 쥐고 있었는지 거의 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9시까지 와, 만날 사람도 있으니까. 올 때 헌터등록증이랑 신분증, 통장사본, 인감증명서나 본인서명사실확인서 들고 오고.
9시? 출근 시간이니 강남까지는 헬일 테니, 지금 당장 준비해야 간신히 시간 맞추겠는데?
그나저나, 갑자기 아침 댓바람부터 만날 사람이라. 누굴까?
궁금증을 안고 씻고 나와 강남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침 시간에 강남 가는데 자차 이동은 바보짓이다.
그런데.
"그거 봤어? 불가사의 게이트 공략?"
"어제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니더라."
"오랜만에 완전 특급 신인 출현인가. 어디 소속이려나?"
"외국계 아닐까? 국내 업체에서 그 정도 루키 키울 깜이 되냐?"
"성광그룹 재벌 3세라는 썰이 있어. 그룹 사활 걸고 밀어준다는 얘기가 있던데. 각종 비싼 스킬북에 펌핑 물약까지 다 먹여서 공략한 거래."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내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루머나 헛소문이어서 낯 뜨거워지는 게 문제였지만.
뭐? 재벌 3세?
어우, 내가 재벌 3세였으면...
휴, 그래도 얼굴까지는 안 팔린 게 다행이다.
강남까지 가는 1시간 동안...
나는 3번 정도 재벌 3세였고, 2번 정도 외국 교포 출신 용병이었고, 5번 정도 대형 길드의 모든 자원을 몰아 먹은 신인이었다.
이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로 화젯거리가 될 이야기였구나.
실제로는 쥐뿔도 없는 인생이었다는 게 알려지면 어쩌려나.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제피로스가 있는 RHS 본사 빌딩에 도착하니, 로비 입구에서 제피로스가 손을 흔들었다.
"제피로스!"
"류현수라니까. 오느라 고생했어. 이제 강남 근처에 집 하나 구하지 그래?"
"진지하게 생각 중입니다."
낭비할 생각은 없는데, 아주 진이 쫙 빠지네.
헌터 업계의 주요 관공서나 회사들이 강남에 있으니, 어지간하면 강남에 있는 게 편할 듯했다.
"아, 일단 이것부터 받아."
"이게 뭐... 스킬북이에요 이거?"
난생 처음 만져보는 스킬북은, 아주 오래된 낡은 책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직접 읽는 책은 아니고,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에 가까웠다.
근데, 스킬북이 뭔가 금칠도 되어 있고... 비싸 뵈는데.
[조화의 이해]
[품격] : 전설급 공용 스킬북
[설명] : 마나의 조화로움을 깨달은 자, 그 위대함을 느끼게 되리라.
[내용] : 자연 마나 회복량과 총량이 상승한다. 스킬 숙련도에 따라 상승치가 올라간다. 마나를 활용할 때 스킬 숙련도가 상승한다. <마법 계통 클래스에 한정하여 습득할 수 있습니다.>
"..."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래도 이름이 그대로였다.
조화의 이해... 다른 스킬북은 몰라도 이거 이름은 기억이 선명했다.
불과 한두 달 전에 저게 100억 넘게 낙찰되었다는 뉴스 기사 보면서 욕했거든.
무슨 스킬북 하나에 100억이 넘냐고.
그게 지금 내 손안에 있다고?
"이게... 제 거라고요?"
"그냥 작은 에이전트 계약 체결 선물 같은 거라고 생각해."
"안 작은데요. 이거 백억 넘는 거 아니에요?"
"오 뭐야, 아네?"
"와 씨..."
역시 이 스킬북도 짧은 텍스트가 강하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냥 심플하게, 마나 회복량과 총량을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북.
그런데, 그게 마법사에겐 알파이자 오메가 아닌가?
특히, 내게는 더욱 중요했다.
[마나 현황]
─현재 자연 마나 회복 속도는 초당 1%입니다.
─현재 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해 초당 0.303%(기본 30.32%, 통제력 200% 효과 적용)의 마나를 사용 중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대량의 세균 군단을 펌핑하여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자연 마나 회복 속도를 넘어선 분량은 향시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건 다른 네크로맨서나 정령사, 소환사 등의 소환 계통 직업군에 동일했다.
자연 마나 회복 속도를 무시하고 일시적으로 언데드 군단을 늘렸다가는, 종국에는 마나 탈진으로 모든 언데드들을 잃을 수도 있었다.
네크로맨서로서는 최악의 상황.
그래서, 네크로맨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연 마나 회복 속도와 마나 총량이었다.
그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주는 게, 바로 저런 류의 패시브 스킬이나 회복 속도를 끌어올려 주는 아이템들이었다.
"바, 바로 배워도 되죠?"
"그러라고 준 건데."
"감사합니다!"
이런 건 못 먹어도 고다.
먹다 체해도 고야.
바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자, 스킬북에서 빛이 나며 내 몸으로 흩어져 흡수되었다.
[전설급 공용 스킬, '조화의 이해'를 습득하셨습니다!]
[조화의 이해 (F)]
─마나 총량이 10% 상승합니다.
─자연 마나 회복 속도가 1% 추가됩니다.
이게 숙련도 F 효과라고?
순식간에 자연 마나 회복이 2%가 되었다.
산술적으로 2배 강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잠깐, 거기에 내 아이템까지 착용하면 숙련도가 D등급으로 오르잖아?
순간 멍해진 내 등을 제피로스가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스킬북 배웠으면 이제 손님이나 만나러 가자."
"아, 손님... 네... 누구죠?"
"충북도청이랑 자원개발부."
"... 네? 공무원요?"
갑자기 공무원들이 왜?
벼락부자 됐다고 세무조사라도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내 불안감을 읽었는지, 제피로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너 공략 불가 게이트 공략했잖아. 거기 걸려 있던 포상금은 받아야지."
"포, 포상금요?"
"엉, 뭐 그 위업에 비해서 많은 건 아니지만... 준다는 돈을 거절할 필요는 없잖아?"
"얼만데요?"
"고작 지자체에서 2억, 중앙 정부에서 10억. 합이 12억이다. 비과세로. 쯧, 미국이었으면 100억은 받았을 텐데. 정부 놈들, 이러니까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공략자가 안 나왔지."
백억짜리 스킬북에 이어서... 또 십몇억이야?
실감이 잘 안 나는데.
갑자기 돈이 저 혼자서 지갑으로 막 굴러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대박(2)
대박(2)
예전 회사에서도 공무원들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다만, 던전 폐기물 처리라는 업종 자체가 공무원들과는 떼놓을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자주 엮이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는 공무원은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간이라도 빼줄 것 같은 회사원을 보는 느낌이랄까.
"혹시, 11레벨 되시면 이 불가사의 게이트도 공략하실 생각이 있으신지..."
카탈로그까지 들고 와서, 적극 세일즈에 나서는 남자.
이 사람이 그래도 명색이 국장급이었다.
자원개발부 개발 5국 국장이라던가.
그 공무원의 세일즈를, 제피로스가 웃으며 제지했다.
"우리 쪽 헌터는 컨디션이나 상성에 따라 움직일 생각입니다."
"아! 그, 그렇겠지요! 그래도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어지는 상투적인 대화를 마치고 공무원들이 나가자, 제피로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공무원 놈들, 손도 안 쓰고 코 풀려는 건 여전하네. 공략 요청하려면 돈이라도 주고서 요청해야지. 조건 하나 없이 그냥 공략해 주세요~는 뭐야? 양심이 없어."
"주잖아요, 포상금."
"푼돈가지고 생색낸다는 거지."
그 푼돈으로 기쁜 나는 아직 소시민 태를 못 벗은 모양이다.
그런 내 눈치를 읽었는지, 제피로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굳이 정부 쪽 포상금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안 그래도 사방에서 연락이 오는데."
"... 사방에서요?"
"위로는 중국부터, 밑으로는 일본까지?"
"중국이랑 일본에서 절 찾는다고요?"
그거 별일이네.
"거기까지 시스템 메시지가 갔잖아. 한국만큼은 아니어도, 불가사의급 게이트가 클리어되는 건 거기서도 화제라고. 그쪽은 뭐 안 고인 줄 알아? 게다가 동북아 밖에서도 조금씩 화제가 되는 중이고."
"저단계 게이트 하나 클리어한 것치고는 파급 효과가 크네요."
"최초 클리어 메시지 못 본 게 오래됐으니까."
게이트들은 최초에 생겨난 이후, 한 번도 다시 생겨나거나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그것들은 거의 다 클리어됐고, 남은 게이트들은 아직 헌터들이 클리어하기에 너무 고단계라 클리어하지 못한 곳이나, 내가 클리어한 곳처럼 단계에 비해 너무 난도가 높은 불가사의급 게이트가 전부였다.
"뭐, 아직까지는 관심 정도겠지만... 만약 한 개라도 더 클리어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맞는 말이었다.
하나는 우연이겠지만, 둘부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커뮤니티만 봐도, 충청북도의 '평정' 효과를 여실히 체험하는 헌터들의 후기가 벌써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마지막 퍼즐 한 칸 때문에 평정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지역은 넘쳐났다.
그런 지역들에서는 나를 더 절실하게 찾겠지.
뭐 문제가 있다면...
내가 모든 불가사의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는 점 정도인가.
일단 스펙업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내겐 그걸 충족해 줄 사람이 있었다.
**
두꺼운 무테 안경을 낀 채로, 실험실용 가운까지 입은 규선이 내게 플라스크를 건넸다.
"여기요, 말씀하셨던 거예요."
반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는 플라스크.
"이게 뭐죠?"
"P.E가 가장 최적으로 삼을 수 있는 영양소로 이루어진 배양액이에요. 쉽게 분열시킬 방법을 찾으셨잖아요?"
"그랬죠."
과연 언데드 상태로도 일반 세균일 때와 같은 방식으로 분열할지는 확신이 없었지만, 일단 시도는 해 봐야지.
인벤토리를 열어 30억이 넘어가고 있는 세균 군단 가운데 일부를 남겨놓고, 대다수를 플라스크로 넣었다.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으니, 만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먹고 무럭무럭 쑥쑥 크렴, 1호기 세균 군단들아.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거의 플라스크에 눈을 가져다 대다시피 한 채로 뚫어져라 보는 규선이었다.
그녀는 거의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기요, 그 표정 조금 무섭다니까요.
"위험합니다.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마세요."
내가 통제하고는 있다지만, 그래도 순식간에 생명체 하나쯤은 분해하는 세균들이다.
내 제지에 아쉽다는 듯 물러선 그녀가 작은 숨을 포옥 내쉬었다.
"여전히 신기해요, 어떻게 세균을 이렇게 통제할 수 있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신기하다.
저 보이지도 않는 미시영역의 존재들이, 어떻게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따르는지.
뭐,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에 신기할 것 투성이긴 하다.
어쨌든 확인해 볼까.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개체수 : 3,124,357,329 개 (현재 최적의 상태에서 분열 중입니다. 동일 환경 유지 시, 5시간 32분 후 개체수 200억(현재 유지 가능한 최대치)에 도달 예정입니다.)
"오, 된다."
실시간으로 개체수 올라가는 수치가 보일 정도였다.
"정말요?"
"네, 5시간 32분 후에 200억까지 분열한다네요."
현재 200%의 통제력 기준 100억 당 초당 1%의 마나가 소비되니까, 200억이면 내가 현재 유지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개체수였다.
이렇게 쉽게 되는 거였으면 진작 부탁할걸.
"자, 잠깐만요. 5시간 32분요?"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있죠! 원래 분열 속도가 그렇게까지 빠른 박테리아가 아니라고요! 분열 속도가 그렇게 빨랐으면 애초에 연구도 불가능했을 걸요? 조금만 배양하다 보면 금방 주변을 다 분해해버리고 나와서 공기와 접촉해서 절멸했을 테니까."
"... 세균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인 거군요."
"맞아요! 세균 씨는 정말 똑똑하시네요! 어떻게 제 한 마디에서 저 결론을 내실 수가 있죠? 전공자도 아닌데."
"하하..."
제가요...?
"만약 P.E가 절대혐기성이 아니었으면 지구는 모조리 P.E에 덮여버렸겠죠."
그렇긴 하네.
모든 걸 분해해 버리는 세균이 약점까지도 없는 거니까.
"게다가 분열 속도가 빠른 것도 세균의 생존성에 영향을 미쳐요."
"빠르게 분열해서 주변을 다 분해해버리면 대기와 접촉해서 죽게 될 테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P.E라는 박테리아는 나름의 생존방식으로 그 분열성을 굉장히 억제한 형태의 박테리아에요. 그래서 저도 배양할 때 굉장히 어려웠고요. 그런데 거의 6.5배수를 5시간 남짓에 분열할 수 있다는 건."
"제 세균이 더 강하단 뜻이겠군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아도 알 것 같다.
통제력 200%의 효과겠지.
"아, 그리고... 괜찮은 박테리아를 찾으셔서... 제가 가진 게 지금은 별로 없어서... 일단 랩을 제대로 운영해야 제대로 된 박테리아를 수급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괜찮습니다. 당장 필요한 건 아니라서요."
"혹시 이거라도 필요하시면..."
그녀가 샬레에 담긴 세균 군주를 내게 건넸다.
"이건 뭔가요?"
"히르시아 발티카 (Hirschia baltica)의 형질을 적용한 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 (Caulobacter crescentus)에요."
"... 외계어는 아니죠?"
히르 뭐? 카... 뭐?
"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요. 현미경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초승달 모양이라서 크레센투스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카울로박터도 그 모양을 의미하는 이름이에요. 자루나 줄기 모양의 세균이라는 어원이죠."
"... 그러니까 초승달 형태이면서 자루나 줄기 모양인 세균이라는 것까진 알았습니다."
"네, 똑똑하세요."
이거 먹이는 거지?
MIT가 자꾸 똑똑하다고 하니까 뭔가 수치스러운데.
"그래서, 그 세균이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접착 물질을 생성해요."
"... 네?"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던 특이한 기능이네.
"그런데, 그 접착 물질이 너무 강해요. 그래서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죠."
"너무 강하다면 얼마 정도..."
"제곱밀리미터당 70뉴턴이니, 현존 가장 강력한 상용 접착제의 4배 정도요."
"헐...?"
"100원짜리 동전 하나에 자동차 4대를 매달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심지어 물속에서는 접착력이 더 뛰어나져요, 애초에 수생 박테리아라서요. 바닷물 같은 이온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히르시아 발티가의 형질을 결합해서 그 약점도 없어졌고요."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엄청 센 접착제라는 건 알겠다.
접착제라...
이거 CC기잖아.
이른바 군중제어(Crowd Control).
이 용어의 어원은 게임이었고, 게임처럼 변한 세상의 헌터 업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속박, 기절, 수면 등, 적의 행동을 방해하거나 무력화하는 기술들의 통칭이다.
게임에서도 CC기의 중요성은 엄청났지만, 헌터 업계에서는 더욱이 중요했다.
진짜 한끗으로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던전에서, 적의 발걸음 한 번을 붙잡느냐 마냐가 던전 공략을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로 작용했다.
"그리고 자상 치료에도 탁월해요."
"치료요?"
그 목적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 화학 물질이 아니라서 일단 신체에 해롭지 않고요. 이온 상태에서도 접착력이 유지되어서요. 원래 의료 목적으로 연구되던 거예요."
치료에 CC까지 한큐에 해결할 수 있다니.
생각도 못 했던 엄청난 놈을 얻었다.
아무래도 2호기는, 이놈으로 확정이다.
"바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네, 사멸한 개체가 좋다고 해서, 일부러 사멸시켜 왔어요. 생존 상태에서는 접착 성분 때문에 다루기가 힘들기도 하고요."
그 기분 알지.
초등학교 목공 시간에 순접 잘못 쓰다가 손에 붙어서 난리 나는 경우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 그게 나다.
후우, 심호흡 한 번 하고.
일단 지팡이부터 꺼내서 들었다.
이게 있어야 언데드 라이즈 스킬의 숙련도가 D로 올라서 두 개체 이상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언데드 라이즈."
[언데드 라이즈 스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대상 : Caulobacter Crescentus 균주 사체 1억 1841만 4470개]
"부탁해."
[Caulobacter Crescentus 균주 사체 1억 1841만 4470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충실한 수하가 되어 따를 것입니다.]
[현재 유지 중인 언데드]
(1) Perpetuus Exomodulus(퍼페투스 엑소모듈러스) <설명 감춰짐>
(2) Caulobacter Crescentus(카울로박터 크레센투스)
─개체수 : 118,414,470 개
─설명 : 민물 어디에나 흔히 존재하는 수생 박테리아다. 생명공학자 임규선의 기술로 유전자가 변형되어 염수 등의 이온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변형되었다. 물체의 표면에서 바이오필름을 형성하여 강력한 접착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능력 : 1억 개체당 초당 20g(기본 0.1g, 통제력 200% 효과 적용)의 접착 물질 생성 가능.
오오, 됐다.
"어때요?"
"됐습니다."
2호기 역시 내 의지대로 마음껏 돌아다녔다.
게다가.
"접착 물질을 생성하지 않네요!"
"네, 제 의지대로 통제되는 거 같습니다."
가장 큰 사용상의 난점인 접착 물질을 마구잡이로 생성해댄다는 문제마저 해결되었다.
아, 그런데 만약 지팡이를 착용 해제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팡이를 인벤토리에 다시 넣자.
[언데드 라이즈(고유) 스킬의 숙련도가 F로 하락하여 최근 일으켰던 언데드 개체군이 휴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다행히도 소환이 해제된다거나 하지는 않고, 휴면 상태로 돌입했다.
다시 지팡이를 들고, 2호기를 컨트롤해서 인벤토리 안에 넣어두었다.
"규선 씨 덕분에 좋은 세균을 또 얻었네요.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흔한 개체인데요 뭐."
"흔하다고 해도, 저는 모르니까요."
다시 한번, 규선 씨가 나를 돕는다는 게 새삼 행운이었다.
아무리 민물에서 흔히 발견된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 이런 세균을 특정해서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다음 불가사의 던전이 어디라고?
대박(3)
대박(3)
조촐하지만, 이제 우리 회사 사무실이 될 강남구의 한 작은 임대 사무실에 나와 민철 형, 그리고 규선 씨까지 세 명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나름의 역사적인 첫 회사 임원(?) 회의였다.
사람의 능력은 객관화하기 무척 어려운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을, 사업을 막 시작하게 된 지금조차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특히, 더 큰 권한을 가질 때 더 빛나는 진가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민철이 형이 대표적이었다.
50%만 받아도 된다고 했는데, 악착같이 80% 선에서 협상을 타결시켜 왔다.
그러면 확실한 보상이 있어야지.
"형이 더 얻어온 30% 차액의 절반 정도 형이 인센티브로 가져가. 그러니까... 대충 폐기물 처리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약 20%가 형 거야."
"뭐? 저, 정말로?"
"어. 당연하지. 대신에 앞으로 형이 많이 바빠질 거야. 영업이사니까."
"맡겨만 줘라! 다 할게!"
역시 먹은 만큼 일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벌써 의욕 만전이잖아.
다만 영업 쪽과는 다르게, 개발과 생산 쪽은 지지부진했기에 회의에 참석한 규선 씨의 안색이 어두웠다.
"죄, 죄송해요. 저는..."
"죄송하긴요."
이건 규선 씨의 능력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제로 베이스에서 제약사 레벨의 설비를 확보한다는 건 그냥 뚝딱, 하고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으니까.
규선 씨도 나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는 있었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괜찮은 제약사 매물이라도 하나 나오면 좋겠는데 말이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는, 있는 걸 고쳐서 쓰는 편이 백 배는 쉬웠다.
물론 당연히 그 정도의 돈은 없긴 한데...
이러나저러나 쉬운 일이 없었다.
사업하는 양반들,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머리를 벅벅 긁으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던 차였다.
"나 사실 하나 듣기는 했는데."
민철 형의 가뭄 속 단비 같은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뭘 들어?"
"아, 거래처 따러 돌다가, 우연히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몰라."
"사실이건 아니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거든?"
"쯧, 나중에 헛소문이었다고 뭐라고 해도 모른다."
"빨리 말이나 해."
여전히 말하는 게 맞나 싶었는지 잠시 망설이던 끝에, 민철이 형이 입을 열었다.
"세일제약 있잖아. 천안에 있는 거."
"아, 그 우중충하던 회사?"
몇 차례 폐기물 회수하러 갔었는데, 최근에는 일감도 별로 안 줘서 거의 가지 않았던 회사였다.
갈 때마다 분위기가 우중충하니, 직원들 표정도 별로 안 좋아서 곧 망하겠다 싶긴 했는데.
진짜 망한다고?
"설마 거기 망해?"
"응, 일단 리스트에 있어서 영업하러 갔다가 곧 회사 정리할 거란 소식을 들었어."
"그 큰 회사가 어쩌다가 그렇게 됐지?"
그래도 세일제약이면 작은 회사는 아니었는데.
업력도 꽤 되는 회사였다.
잠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었다.
[세일제약, 7단계 던전 입찰해 화제, 던전 부산물 직접 조달로 비용 절감 효과 누리나?]
헤드라인부터 꽤 위험해 보이는 이야긴데.
후속 기사는 따로 없네.
혹시, 던전 이야기니 제피로스는 알고 있으려나?
이따 만날 예정이니 물어봐야겠다.
**
짧은 첫 회의를 마치고 제피로스가 있는 건물로 이동했다.
사무실을 강남에 두니 좋긴 좋구만.
월세가 토 나올 정도로 비싼 거 빼면 말이지.
이전에는 비싸서 마시지도 않던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양손에 들고 있다가, 하나를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오는 제피로스에게 건넸다.
"오, 커피네. 커피 좋지."
받아들자마자 피곤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로 하품을 쩍 하고는, 커피를 거의 흡수하다시피 빨아들이는 제피로스였다.
"일이 많은 모양이죠?"
"많지, 누구 덕분에."
"그 누구가 혹시 저인가요."
"그럼 누구겠어?"
"하하..."
"다음 정리할 만한 게이트 목록들 뽑았다. 톡으로 보냈으니 확인해 보고 결정해."
"예, 아 그나저나 여쭤볼 게 하나 있는데요."
세일제약에 대해 물어보자, 제피로스는 쪼로록, 남은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고는 말했다.
"세일제약? 기업의 대표적인 던전 투자 실패 사례 중 하나지."
"인터넷 기사로 보긴 봤습니다. 7단계 게이트에 투자했다고요."
"응. 어디인지는 인터넷에 구체적으로 안 나오지?"
"예, 그렇죠."
"그게 대청호 근처에 있는 게이트거든.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거기 나오는 몬스터가 물고기야. 톱니어룡인가."
물고기 몬스터?
"그러면 필드가..."
"물 속이지. 뭐, 아주 특이한 케이스는 아냐. 너도 알다시피 지구의 70%는 물로 덮여 있으니까."
실제로 바다에 생성된 게이트도 꽤 있었다.
대양과 연안에 고루.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이런 게이트들을 공략하는 전문 헌터들이 존재하지.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활동할 수 있거나, 물속에서 더 효율적인 스킬류를 보유한 헌터들인데, 업계에서는 어부나 피셔맨(Fisherman)이라고 부른다. 둘 다 어원은 같지."
"말 그대로 물고기 낚는 사람들이군요."
"그래."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세일제약이 왜 망했죠?"
"헌터들이 많지 않다고 했잖아. 고정된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적다. 어떻게 되겠어?"
"설마..."
제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거의 독점적 지위에 있는 한국 최대의 해양 헌터 조합인 피셔맨스 클럽(Fisherman's Club)이 처음에는 몇 번 일 맡다가, 나중 돼서 용역 단가를 미친 듯이 올렸어. 차라리 사서 쓰는 게 나을 정도로."
저렴하게 원료를 수급하려고 던전을 낙찰받은 건데, 그 단가가 사서 쓰는 수준까지 오르게 되면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던전 임대료는 임대료대로 국가에 내고, 헌터 용역비까지 감당하다 보면 망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되어서 소송까지 갔던 사안인데, 결국 피셔맨스 클럽의 무죄로 판결됐어. 내가 그 돈 안 받으면 일 못하겠다고 하는데 국가에서 강제로 저렴하게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 자칫하면 헌터 강제동원 같은 걸로 몰린다고."
"중국이나 북한 같은 곳에서나 있을 일이죠."
"얌마, 중국에서도 요즘 헌터 강제동원은 못 해. 그거 옛말이야. 헌터들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올랐는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중국 공산당도 못 버틴다. 북한은... 뭐 그 새끼들이야..."
아무튼, 세일제약에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는 말이지?
세일제약은 헌터들 때문에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그런데 세일제약은 왜 물어봐? 설마...?"
"제피로스. 만약에, 만약에요..."
"안돼."
"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세일제약 인수한다는 거면 추천 안 해."
귀신이 따로 없네.
"그냥 무작정 인수하겠다는 소린 아니고요. 던전까지 다 실사해보고, 가망 있어 보이면 인수하려고요."
"... 조건은 알아봐 주지."
그러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제피로스.
지금 바로 알아본다는 건가?
그렇게 몇 곳에 전화를 돌린 뒤에 그가 말했다.
"세일제약이 생각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네."
"얼마래요?"
"천원."
"....."
농담이죠?
하는 눈으로 보고 있자니, 진짠데? 하는 시선으로 받아내는 제피로스다.
"진짜에요?"
요즘 껌값도 천원보단 비싼데.
무슨 놈의 회사가...
"명목상 인수가지. 일단 체불된 직원 월급 15억, 체납된 던전 임대료 120억, 세금 17억, 그리고 은행권 채무 480억을 떠안는 조건이다. 사옥이나 공장 포함해서 보유한 자산 가치가 120억 정도 될 거야."
그럼 그렇지. 억억거리는 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그러면 합계가 얼마지.
휴대폰을 꺼내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대충... 632억이요?"
"은행권 채무는 인수 과정에서 잘 타협하면 반절 정도 깎을 수 있을 것 같다."
은행도 아예 법인이 파산해서 고철값만 건지는 것보다는 반 깎아주는 편이 나으리라고 판단할 것이라는 제피로스의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면 240억 빼서... 392억. 보유 자산 가치까지 제하면 272억."
물론 보유 자산은 매각할 수 없으니 빼야 하긴 했다.
그걸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인데. 뭐하러 사.
그래도 중견 제약사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저렴한 편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지금 내 전 재산 20억 남짓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거액.
"대신에 변제 계획만 잘 세우면, 은행에서도 상환 기간 정도는 늘려 줄 테니, 당장 필요한 건 직원 월급이랑 던전 임대료, 그리고 세금이다."
"152억이네요."
"152억 있어?"
"없죠."
"그럼 뭐 나가리지."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긴 한데...
어쩐지 이렇게 날려버리기엔 아쉬웠다.
"일단 인수 의향 있다고 하고 실사라도 해 볼 수 있을까요?"
"흐음. 그렇게까지 진심이라면... 알겠어."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통화를 마치고서, 제피로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천안 공장이랑 던전, 두 곳에 한해서 제한적 실사를 허용한대."
"그 두 곳이면 충분하죠."
실제 생산 설비가 있는 공장에, 애물단지인 던전을 해결할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됐다.
다행히도, 딱 7단계 게이트라 7레벨인 지금도 입장이 가능했다.
"그럼 바로 갈까?"
"혼자 가도 됩니다."
"이놈 보게. 아주 며칠 전까지 쥐뿔도 없었던 녀석이 간만 커져서. 이놈아, 너는 내 동반인이야. 허가는 내가 받은 거고. 아무리 다 쓰러져가는 회사라고 해도 실사하는게 쉬운 줄 알아?"
"그, 그게 아니고요... 바쁘실 텐데 괜히 폐가 될까봐..."
"알아, 농담이야."
씨익, 그 특유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제피로스다.
휴우, 괜히 식은땀 나네.
역시 이 사람 심기를 거스르긴 싫단 말이지.
내겐 은인 같은... 아니 은인이고.
"천안 공장은 데려갈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차는 내 차 타고 간다."
"... 그러면 너무 죄송한데."
천안에 대청호면 강남에서 꽤 먼 거리였다.
아마 오가는 것만으로도 반나절은 써야 하는 거리.
"됐다. 어차피 회사에 궁둥짝 붙이고 있어 봐야 눈칫밥만 먹는 꼰대가 자리 치워줘야지."
"감사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쩐지 감사할 일만 늘어나는 것 같다.
어떻게 갚지.
**
규선 씨까지 태우고 천안 공장에 도착해서 실사를 마쳤다.
그녀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좋았다.
"설비가 조금 낡기는 했는데, 여전히 쓸만해요! 신형 설비들도 있고요. 기대 이상인데요?"
"오케이. 고생했어요. 우린 이제 던전 실사하러 갈 거니까, 규선씨는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택시 타고 돌아가도 되죠?"
"네, 그럼요."
오케이, 일단 반은 합격이고.
그녀를 보내고 제피로스와 함께 대청호의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입구 근처에는 쇠창살과 함께 세일제약 자산, 사유지, 허가 없이 게이트 입장 금지 등의 표지판이 잔뜩 붙어 있었다.
의욕 없어 보이는 관리인도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쉽게 문을 열어주었다.
"휴, 수중 던전이라."
"입장부터 수중은 아니니까 걱정 마. 수영 계통 스킬은 없지?"
"예, 없죠."
"뭔 자신감으로 수영 스킬도 없이 던전부터 보자는 건진 모르겠다만... 일단 들어가자."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게이트에 입장했다.
[7단계 게이트, '톱날어룡의 호수'에 입장합니다.]
게이트에 입장하니, 대청호와는 조금 다른 전경의 호수가 쫙 펼쳐져 있었고, 나는 호숫가에 서 있었다.
"그래서, 이제 뭘 어쩌려고?"
"어떻게든 해 봐야죠."
가볍게 대꾸하고는, 가장 먼저 인벤토리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의 숙련도가 올라, 휴면 상태이던 언데드가 다시 활성화됩니다.]
적어도 수중에서는, 1호기보다도 더 든든한 친구가 생겼다.
수생 박테리아로서, 물 속에서 더 강력한 접착 성능을 발휘하는 물질을 분비하는...
나는 물속을 향해, 내가 보유한 모든 2호기 세균 군단을 풀었다.
동시에 명령했다.
'그물 형태로 접착 물질을 분비해서, 여기 있는 물고기들... 모조리 쓸어버리자고.'
2호기는 내 명령에 따라, 수중에서 촘촘한 접착 물질의 그물을 형성했다.
이어 그물이 내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물 자체가 워낙 강력한 접착력을 지니고 있어서, 한 번 붙으면 그게 몬스터라고 해도 쉽게 떨어져나올 수 없으리라.
몬스터들도 아마 던전에서 그물을 구현할 줄은 몰랐을 거다.
처음에 접착 그물에 달라붙었을 때, 톱날 어룡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물에 다른 어룡들이 붙고, 또 다른 어룡들이 붙자.
"...!"
서로 발버둥치며 그물에서 빠져나가려는 어룡들.
제각기 자신이 가려는 방향으로 발버둥치면서, 어룡의 힘이 다른 어룡의 힘을 상쇄했다.
나는 힘 하나 쓰지 않았는데, 어룡들은 알아서 제풀에 지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걸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해야 할까.
심지어 순식간에 그물에 매달린 수십 마리의 어룡들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1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C급 클래스 전용 스킬'이 주어집니다.]
순식간에 3레벨이 오르면서, 내 시야가 시스템 메시지로 가득 차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7단계 게이트, '톱날어룡의 호수'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가 토벌되었습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이번에는 역대 최단 시간 클리어까지는 아닌 듯했다.
어룡들이 알아서 제풀에 지쳐서 죽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클리어 판정만 받았을 뿐, 밖으로 방출되지도 않았다.
인스턴스 던전이 아니라 통상 게이트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 몬스터들도 다시 리젠될 것이다.
"허, 허허허..."
제피로스에게도 클리어 메시지는 떴을 터.
그가 그것을 확인했는지, 허탈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리어는... 됐네."
"예, 그렇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문제요?"
"어떻게 죽이긴 했는데, 회수는 어쩔 거야. 여기 그냥 클리어하러 온 게 아니라, 부산물이 목적이잖아."
"아, 맞다."
호숫가에 손을 대고, 2호기들을 회수했다.
동시에 접착 물질도 성능을 잃고 물속으로 흩어졌다.
서로를 압박하던 접착 그물이 사라지자, 바닥에 깔렸던 톱날 어룡들의 사체가 부력으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호수 수면 전체가 배를 허옇게 까뒤집은 수십의 톱날 어룡들로 가득 차는 모습을 보면서, 제피로스는 질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박(4)
대박(4)
"내가..."
말문이 막힌 채 잠시 머뭇거리던 제피로스가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 경우가 있는 사람이거든."
... 갑자기?
"남이 굳이 안 밝히려는 능력을 묻는 건 굉장한 실례라는 것도 아는 사람이고... 그 정도 경우는 있단 말이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그가 희미하게 떨리는 입가를 감추지 못하고 다시금 물어 왔다.
"그런데, 궁금해서 못 참겠다. 대체 클래스랑 능력이 뭐냐? 나만 조용히 알게. 이런 미친 사기 클래스가 있다니. 세상에 억울해서 살 수가 있나."
라떼는 하나하나 검술로 잡았는데... 라고 한탄하다시피 하는 제피로스.
그에게 웃으며 답했다.
"네크로맨서입니다."
"무슨 놈의 네크로맨서가 그런 스킬을 써? 내가 아는 네크로맨서 스킬 중에 그딴 거 없는데."
"조금... 특이한 네크로맨서입니다."
"특이한... 너 설마 고유 클래스냐?"
"네."
"... 네크로맨서에 고유 클래스라. 그래서 평범한 네크로맨서 스킬을 못 쓰는 거군."
고유 클래스라고 해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자꾸 떠올려서 내적 친밀감 생길 것 같은 프랑스의 아흐마드 트리아인은 고유 클래스가 아닌 평범한 네크로맨서였다.
그런 괴물을 두고 평범하다고 말하는 게 맞나 싶긴 했지만, 일단은 그랬다.
"그러면 네크로맨서 스킬북은 필요 없겠네?"
"네, 못 익힙니다."
평범한 클래스가 유리할 수도 있는 이유는, 일단 스킬북으로 클래스 스킬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본래 IT 재벌 2세였던 아흐마드였기에, 그는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네크로맨서의 스킬북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익혔다.
그에 반해서 고유 클래스들은 보통 레벨업이나 업적 보상으로밖에 스킬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10레벨 달성해서 스킬 보상 받았구나.
"저, 10레벨 돼서 스킬 받았는데 잠깐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확인해 봐."
스킬창을 열자, 언데드 라이즈와 역소환 둘뿐이던 스킬창에, 한 가지 스킬이 더 생겨났다.
[미시안(고유)]
설명 : 전설적인 네크로맨서 아비센나가 제작한 마법이다. 미시영역을 관측할 수 있으며, 미시 존재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은 영역을 관측할 수 있다.
... 대충 설명만 들어서는 현미경 같은 건가.
일단 당장 써먹을 일은 없을 듯했다.
"표정 보아하니 보상으로 받은 스킬이 애매한 모양이네."
"뭐, 그런 것도 있고요. 그냥 활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유 클래스라... 쉽지는 않은 길을 걷는구만."
"제피로스도 고유 클래스였죠?"
일반적인 검사가 아니라, 청풍검수라는 고유 클래스였다.
"그렇긴 한데, 검사 고유 클래스는 마법사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라. 단순 비교할 정도는 못 되지."
"뭐, 어떻게든 되겠죠."
사실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 가진 능력만으로도 엄청난 것도 사실이었고.
한동안은 지금 스펙만으로도 던전을 뚫는 데 큰 지장은 없으리라.
내 눈에 담긴 그런 자신감을 읽었는지, 제피로스 역시 빙그레 미소를 흘렸다.
**
게이트에서 나온 뒤에, 제피로스에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일제약 인수 건."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 네가 계속 와서 정리하려고?"
"한 번 토벌한 게이트가 다시 완전히 리젠되려면 일주일 정도 걸리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쯤은 올 만하죠. 게다가..."
"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인데?"
"수중 던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모든 던전이 채산성이 있지도 않을 테고, 접근성이나 여러 요소를 고려해 보면... 해양 헌터 조합도 마냥 강짜를 부리고만 있을 수는 없겠죠."
자신들이 독점적 위치에 있을 때는 한없이 배짱을 튕길 수 있지만, 2옵션에 불과해진다면 그럴 수 없었다.
"던전이 안정적으로 해결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 적절한 가격에 다시 계약을 받을 수도 있겠죠. 게다가 조합이라는 게, 모두가 같은 생각인 건 아니니까요."
아마도 당장 돈이 급한 누군가는, 조합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돌아올 이득을 보고 일시적인 희생을 감수하는 것일 텐데, 그게 장기적인 이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희생이 무용해진다.
그러면, 그들도 계속해서 손가락을 빨지는 않을 터였다.
내 생각을 전해 들은 제피로스는 묵묵히 있다가, 웃으며 한 단어만을 말했다.
"합격."
"... 뭐가 합격이에요?"
"회사 하나 굴릴 정도 감각은 있다고."
"어, 그러면..."
"내가 투자하마."
"정말로요?"
사실 제피로스와 함께 여기 온 이유가 이거긴 했다.
어떻게든 설득해서, 그에게서 투자를 받아내려는 것.
나한테 돈 나올 구멍은 제피로스 정도뿐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그러면 지분은 어느 정도로..."
"지분은 됐어, 법정 이자 정도로 빌려주마. 마음 같아서는 무이자로 빌려줘도 상관은 없는데, 국세청에서 물어뜯을 테니."
"..."
뭐야 이 사람. 천사인가?
"괘,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돈이 좀 썩어나서."
아아, 이런 부자 같으니.
그의 머리 뒤에서 광채가 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뭐, 지분도 안 받고 법정 이자로 돈을 땡겨 준다는데, 조건이 안 붙으면 이상하지.
"말씀하시죠."
"DDF라고 알아?"
그게 뭐지?
모르는 눈치를 보이고 있자,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던전 개발 펀드(Dungeon Development Fund)의 약자다. ETF(상장지수펀드)의 일종이지."
"아, 들어본 거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제주 지역에 거점을 둔 회사들의 주가를 추종하는 제주 DDF에 묻어둔 돈이 한 500억 정도 있거든."
역시 부자다.
500억을 푼돈 묻어둔 것처럼 말하시네.
"그런데, 내가 조금 늦게 들어갔어. 지금은 조금 고평가된 상태지 그래서."
"고평가라니... 왜죠?"
"네 탓이잖아?"
"아니, 뭐 다 제 탓이래요."
제피로스가 껄껄 웃으면서 부연해서 설명했다.
"기대감의 선반영이야."
"기대감...?"
"다음 불가사의 게이트가 제주도에 있거든. 충주 게이트를 네가 클리어했으니, 혹시나 하는 거지."
주식의 세계는 참 오묘하군.
그러니까, 내가 충주 게이트를 깬 것만으로, 제주 게이트를 깰 거라는 김칫국을 원샷으로 드링킹하면서 주가가 선반영되서 올랐다 이거지?
"이 선반영이 실제 가치로 폭락하여 돌아오느냐, 아니면 기대감을 충족하며 그 이상으로 치고 오르냐는 한 사람에게 달렸지."
그게 누군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았다.
"어깨가 갑자기 무겁네요."
"더 무겁게 해줄까? 이 펀드의 수익률만큼, 원금을 차감해 주마. 뭐, 떨어진다고 원금을 늘리지는 않겠지만."
"... 그러니까, 만약 수익률이 100%가 나면."
"넌 빚을 공짜로 탕감받겠지."
100%까진 아니더라도, 50% 정도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RHS의 주가도 70% 가량 오른 걸로 알고 있고.
내가 만약 제주도의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
불가사의 게이트를 클리어하기만 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가져오는 셈.
물론, 내가 클리어할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클리어하지 못했을 때 손해가 큰 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내게는 엄청나게 이득인 계약.
"나는 그만큼 수익을 낼 테고."
500억이라는 거금을 펀드에 묻어둔 제피로스에게도 이득이기는 했다.
내가 클리어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손해를 볼 상황이었는데, 클리어만 하면 거액의 이득을 챙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요."
어차피 제주도에 있다는 11단계 불가사의 게이트에는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졸지에 많은 게 걸리긴 했는데, 다를 건 없었다.
**
제피로스가 나서자, 세일제약 인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의 예상처럼 은행권에서도 50%의 채무 탕감에 찬성했다.
잘 건져 봤자 480억 중 보유한 자산인 120억, 그중에서도 일부만을 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절반인 240억을 보전할 수 있다면 당연히 찬성할 터였다.
나는 제피로스에게서 200억 남짓을 빌려서 152억의 당장 필요한 자금을 회사에 투입했다.
이제 직원 수 200명의 중견 제약사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빚더미에 올라앉긴 했지만...
"엄청나요."
규선 씨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내 부담감을 조금 덜어주었다.
임원진과 실무진까지 모두 참여한 자리.
새로 CTO(최고기술책임자) 자리에 부임한 규선이 이어 말했다.
"여기, 세일제약 주력 상품이 피로회복제잖아요. 톱날어룡의 심장에서 추출한 카디오비브레 성분으로 만들어진."
"네, 그렇죠."
세일 파워큐 하면 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유명한 피로회복제였다.
그 정도로 잘 나가니까 던전까지 직접 인수할 생각을 했으리라.
그것 때문에 망하긴 했지만...
만약 세일제약이 멀쩡했더라면 우리가 만들 피로회복제와 경쟁 상품이 되었겠지.
"그런데 제가 이쪽 연구진들이랑 실험을 좀 해 보니, 카디오비브레가 엘릭시르랑 상승 작용을 내요. 그래서 절반 정도의 엘릭시르만 투입해도 기존 제가 만들었던 피로회복제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어요."
"자, 잠깐만요... 그러면..."
엘릭시르 효율이 2배가 된다고?
전에 규선 씨가 말했다.
엘릭서로 만들어 파나, 피로회복제로 만들어 파나, 단가는 비슷하다고.
그런데 2배 효율이 되면, 같은 중량의 엘릭시르로 엘릭서를 만들어 파는 것보다 2배의 가격을 받아낼 수 있다는 거였다.
"물론, 카디오비브레 성분이 들어가야 해서 정확히 2배의 단가는 아니긴 한데요..."
"그 성분은 엘릭시르에 비하면 밟힐 정도로 흔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어룡류의 모든 몬스터의 심장에 존재하는 성분이 카디오비브레였다.
혈류를 개선하고, 혈액순환에 도움을 주는 성분 말이다.
당연히 엘릭시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한 성분이다.
그걸 좀 섞어서 엘릭시르 효율을 2배로 만든다면,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바로 양산 시작하죠. 천안 공장장님."
"예, 대표님."
"양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레시피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존 설비에서 조금만 변경하면 금방 생산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실직자가 될 뻔했던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공장장이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외쳤다.
"디자인 팀."
"네, 대표님."
"파워큐 엘릭서 시안 언제까지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내일까지 완성하겠습니다! 기존 파워큐에서 포장이랑 이미지만 조금 고급스럽게 변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피로회복제 쪽에서도 유명한 파워큐의 이름을 안 쓸 이유가 없었다.
뒤에 엘릭서라는 이름만 붙여서, 엘릭시르 성분이 포함되었다는 이미지만 주면 됐다.
"저, 대표님. 그런데 엘릭시르를 조달할 수 있을까요?"
"그건 걱정 마세요."
이미 첫 번째 회수한 펠릿에서 엘릭시르를 추출해 둔 상태였다.
혹시나 폐기물에서 엘릭시르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걸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 폐기물 수거업체도 거의 민철이 형을 대표 격으로 맡겨두었다.
외부에서 보면 세일제약과 폐기물 수거업체를 연관시키기 힘들 터였다.
"자, 다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 말에, 직원들의 눈이 떨렸다.
몇몇 직원들은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회사가 이대로 도산하면 어쩌지, 실업자가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그들의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리라.
얼마 전까지 한 명의 평범한 피고용인이었던 사람으로서, 그 기분을 이해 못 할 리가 없다.
"다들 걱정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보통 이렇게 도산 위기의 회사가 어렵사리 인수되면, 그것 역시도 문제였다.
보통은 직원들 역시 고통 분담이라는 명목으로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임금을 동결하거나 깎는 등 말이다.
혹시나 그렇게 되면 어쩌나, 직원들 사이에서 계속 걱정의 목소리가 있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고생 끝에 낙이 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은 보답받을 겁니다."
이제는.
내게도, 그들에게도.
예정된 대박이.
눈앞에까지 찾아와 있었다.
11단계(1)
11단계(1)
회사 대표로서 할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충 굵직한 것부터 처리한다고 처리하는데도 줄어들 기미가 없을 정도였다.
나 다니던 회사 대표는 맨날 놀고 먹는 것 같았는데, 내가 대표가 되니 왜 이렇지.
오늘 처리할 일 중 하나는 바로 피셔맨스 클럽과의 재협상.
뱃사람들은 거칠다.
직설적이고, 어쩌면 폭력적이고 단순하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해양 헌터 조합, 피셔맨스 클럽의 헌터들 역시 그러했다.
"아니, 아재요 보소. 그 법원에서도 끝난 얘기라 안 하요. 우린 잘못이 없다니까예?"
억양 강한 부산 사투리로 대거리하는 조합장을 향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니, 그니까... 응? 머라꼬예?"
"맞다고요. 조합장님 말씀. 조합 쪽에는 잘못 없죠."
"... 그럼 여는 왜 왔능교?"
"주인이 바뀌었으니, 협상도 새로 해야지요."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대번에 거만한 표정으로 바뀌며 단호히 말했다.
"협상이라꼬예? 협상은 무신 협상? 어림 반푼어치도 없심더!"
"자자, 흥분하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왜 사람 말을 안 들으려고 해.
"조합장님, 솔직히 까놓고 말합시다. 조합 내부에 우리 정도로 레귤러하게 일감 나오는 곳 있어요? 없죠?"
"..."
이미 헌터 익명 커뮤니티 통해서 조사는 다 끝내놓고 왔다.
괜히 강짜를 부려서 일감 잘 주던 거래처를 조져놨다고 조합원들 사이에서 씹는 소리가 넘쳐나더만.
"지금 제가 여기에 왜 온 줄 아세요? 조합장님한테 기회를 드리려는 거예요."
"그기 무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교."
조합장의 미간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걸 놓치지 않고 바로 들이밀었다.
"이거 보세요."
그건 영상이었다.
톱날어룡의 호수를 재공략하는 영상.
당연히 던전 내부에는 현대 전자기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지만, 던전 내부의 물품으로 만들어진 마법 물품은 가져갈 수 있었다.
녹화용 마법 물품을 제피로스에게 빌려 촬영한 거였다.
겸사겸사 이 과정에서 레벨 11도 달성했고, 한 번 했던 거라 그런지 익숙해서 훨씬 빨리 클리어할 수 있었다.
내가 보여준 영상을 한참이나 보던 조합장이,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 직이네."
명색이 조합장이면 그도 잔뼈 굵은 헌터였으니, 내가 보여준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특히 물을 위주로 활동하는 헌터는 더 진가를 알아볼 터였다.
'해양 헌터'가 별도의 카테고리로 빠져 있는 이유?
어지간한 마법사건 검사건, 물속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서 바깥에서 '딸깍'으로 해결해버렸다.
"조합장님, 조합장님 같으면 같은 돈으로 조합에 맡기시겠습니까, 이 친구한테 맡기겠습니까."
저게 나 본인이라는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촬영기기는 1인칭이니 당연히 내 얼굴은 나오지 않았다.
"그, 그게..."
"솔직히 말해서, 이 친구한테 맡기면 그만이에요. 단가도 합리적이고.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나 조합장님 면 살리려고 왔어요. 그런데 이러시면 섭섭해요 저?"
"그렇십니꺼..."
조합장이 한숨을 내쉬면서, '마, 저런 괴물딱지는 우데서 구해서...' 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틀어박혔다.
"그럼요, 아무리 저 친구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세일제약의 원래 거래처는 피셔맨스 클럽 아닙니까. 제가 새로 인수했다고 해도 의리는 지켜야죠. 뱃사람들 하면 의리 아닙니까?"
"맞지요."
물론, 그 의리를 먼저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개짓거리 한 건 저쪽이지만.
"어떻게, 거래처 바꿔요? 아니면 기존 계약 단가에 계속 가실 거예요?"
상황을 이렇게까지 몰아넣고서도 결국, 얻어낸 건 기존 계약이라면 조합장으로서의 위상에 금이 가는 건 당연한 노릇.
그의 망설임도 이해가 갔기에, 녹화한 영상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이걸 보면, 조합원들도 이해할 겁니다. 왜 조합장님이 이렇게 하셔야 하는지."
"후... 마, 그라입시더."
대표들끼리의 협상은 이걸로 끝이었다.
몇 명을 언제부터 파견할지 같은 나머지 세세한 것들은 실무진들끼리 이야기할 내용이었다.
협상도 끝났으니, 일어나서 가볍게 악수하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근데, 그 괴물딱지는 누군교? 내캉 1세대부터 바다 밥 먹은 놈인데도 그런 괴물은 첨 본다 안하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질문.
당신 바로 앞에 있는 그 친구긴 한데.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별로 자길 밝히고 싶어 하는 친구는 아니라."
**
피셔맨스 클럽 조합과의 협상도 잘 마쳤고, 파워큐 엘릭서도 양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물건을 잘 만들었어도 입소문만으로 팔아먹는 건 한계가 있었으니, 광고비를 집행해야 했다.
그런데 회사에 광고비 집행할 돈이 없었다.
남은 돈이라고 해 봐야 내 사재 20억에 제피로스로부터의 차입금 중 남은 돈인 50억 정도였는데, 그중에 한동안 직원들 월급 줄 돈이랑, 원재료 사올 돈, 설비 바꿀 돈, 거기에 은행 이자... 뭐 이래저래 들어갈 돈 다 합치면 먹고 죽을 돈도 없다.
"큰일인데."
그렇다고 또 제피로스한테 손 벌릴 수도 없고.
치트키도 한두 번이지, 계속 쓰면 욕해요.
그렇다고 뭘 팔아서 돈을 벌어와?
가슴팍도 모자라서 뭐, 팔뚝이라도 팔까? 허벅지?
"... 잠깐."
이거, 굳이 누구한테 팔 필요가 없잖아.
"만약 11단계 불가사의 던전을 깨고, 내가 파워큐 엘릭서를 홍보하면..."
그것 자체가 최소 수백억 원 대의 홍보 효과를 낼 터다.
물론, 그걸 위해서는 11단계 불가사의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하려고 했던 건데, 그걸로 지금 홍보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인 셈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제주도 불가사의 던전, 정말 깨야겠다.
결심하고서 제피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주도 던전, 오늘 바로 갈게요."
─요즘 바쁜 거 같더니, 괜찮겠어?
"괜찮습니다."
─그래도 희소식이 있어.
"희소식이요?"
─네가 좀 오래 기다린 덕분에 제주 DDF가 15%나 폭락했다. 선반영 약빨 끝났어.
"그게 왜 희소식이에요, 거기 500억이나 묻으셨다며."
─이제 원금 천억. 폭락에는 물타기가 기본 아니겠니.
미친.
"... 500억이면 물이 아니라 불이에요, 불."
아니 이 간 큰 아재 보소.
뭘 믿고 천억을 턱.
─너는 안 넣을래?
"먹고 죽을 돈도 없습니다."
그래도 떨어졌다니까 조금 혹하는데.
개인 재산이라도 조금 넣어볼까?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진지하게 변한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보낸 던전 정보는 꼼꼼하게 읽어봤지?
"네, 기본적으로 인스턴스 던전에, 동굴 타입이고, 갈림길이 계속 나오다가 중앙 광장에서 이어지는 구조. 그리고 중앙 광장에서... 아니, 왜 또 바위에요."
돌하르방...을 닮은 스톤골렘이 나온단다.
3단계 던전도 그렇고, 여기도 스톤골렘이냐.
─이상한 게 아니라, 원래 낮은 단계에서는 돌덩어리 깨고 생명석 파괴하기 힘드니까, 골렘이 최고존엄이야. 괜히 골렘이 저단계 학살자가 아니라고.
"후우, 그래서 골렘 뚫으면 그게 끝이 아니고 다음 페이즈가 있다고요.
─응, 그렇다네.
문제는, 그 페이즈가 클리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열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클리어 자격이 없는 고레벨이 던전에 들어와서 양학으로 골렘을 다 잡는다고 해도 정작 다음 페이즈로 못 간다는 거다.
[당신은 제단으로 갈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던전 밖으로 방출된단다.
애당초 자격 있는 사람.
그러니까 16레벨 이하의 헌터 중에는 골렘 페이즈조차도 클리어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서부터는 정보가 없어. 그래도 정말 갈 생각이냐?
"예."
나라고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던전의 컨셉은 일관된 경향이 있으니까요. 1층이 골렘이면, 2층도 비슷한 타입의 몬스터가 나올 테니, 상성 상으로는 자신 있어요. 골렘 타입이면 별로 무섭진 않을 것 같네요."
─그래서 권유한 거긴 하다만.
"그러면 그냥 응원이나 해 주세요. 괜히 트라우마 올라오게 하지 마시고."
3단계 게이트에서 죽을 뻔했던 경험이 아직도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 경험 덕택에 다신 게이트 안에서 방심하진 않을 것 같긴 하지만...
"정 안 되면 도망치죠 뭐."
역시, 목숨 걸고서 공략하는 건 내 성격과는 안 맞는다.
적당히 사리면서, 뒤에서 '딸깍'만 하고 싶다.
딱, 어룡 호수 정도만 되면 좋겠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품은 채, 김포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까지 찾았다.
제피로스가 안내인을 붙여준다고는 했지만, 괜히 부담스러워서 거절했다.
어차피 세 살 어린애도 아니고, 안내인 없이도 지도앱 하나면 다 찾아가는 시대였다.
차를 주차해두고 얼마 걷지 않아 한라산 자락에 있는 게이트 입구에 도착했다.
공략 불가 판정 게이트들이 다들 그렇듯, 여기도 위험이나 경고 표지판이 덕지덕지 서 있었다.
나는 깔끔히 무시하고 입장하긴 했지만.
[11단계 게이트, '성급한 수호자들의 제단'에 입장합니다.]
입장해서 조금 걸어가다 보니,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들이 서로 얽히더니 골렘의 형상을 만들었다.
확실히 얼굴이 좀 돌하르방 느낌이 있네.
골렘 상대로는 이게 제격이지.
미리 꺼내어서 들고 있던 지팡이를, 골렘의 발을 향해 가리켰다.
마나 공명음을 부와앙! 뿜어내며 발걸음을 떼려던 골렘이.
그대로 땅에 자빠진다.
쿵 하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면서 눈 앞을 가렸다.
자빠진 골렘을 향해, 1호기들이 퍼져 나갔다.
심지어 이 골렘은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골렘이었기에, 심장부까지 돌을 뚫고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구멍으로 파고든 1호기들이, 불과 1초도 되지 않아 생명석을 분해했다.
생명석이 분해된 골렘은 더는 마나 공명음을 내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돌덩어리가 되었다.
"역시 효과적이군."
동작이 굼뜬 골렘의 발을 2호기로 잠시 묶어두고, 1호기로 막타.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전투 방식이었지만, 골렘을 대상으로는 더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골렘을 쓰러트리고 앞으로 나아가자, 중앙 광장이 나왔다.
"여기서 여덟 마리의 골렘이 한 번에 나온다고 했지?"
들어가지 않았던 통로에서 한 마리씩.
여덟 마리의 골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어지간한 고레벨들에게도 벅찬 일이었다.
여기 나오는 골렘이 현무암질의 골렘이라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건 다행이었지만, 여덟 마리는 조금 많긴 하다.
고렙들의 후기대로, 중앙 광장으로 들어오는 아홉 개의 통로 중, 내가 들어온 통로를 제외한 나머지 통로에서 한 마리씩 골렘들이 걸어 나왔다.
다만, 골렘들에게는 불행히도.
동시에 나에게는 다행히도.
광장은 너무 넓었고, 골렘들은 너무 느렸다.
사전에 사방에 퍼트려 두었던 1호기들이 현무암의 구멍으로 들어가며 핵을 찾았다.
이윽고 거의 일제히 생명석이 파괴되며.
여덟 마리의 골렘이 동시에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언데드 라이즈(고유) 스킬의 숙련도가 C로 상승하였습니다.]
[숙련도 C 효과 : (1) 총 3종류의 언데드를 유지할 수 있다. (2) 마나를 소비하여 언데드를 일시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오."
레벨 오른 것도 반갑지만, 드디어 올랐구나, 숙련도.
이제 지팡이 없이도 2종의 세균을 유지할 수 있고, 지팡이를 사용하면 3호기까지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런데, 일시적 강화는 뭐지?
테스트해보고 싶긴 한데.
[제단이 열립니다.]
우르르릉! 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제단 하나가 나타났다.
일단 사상 최초로 이 던전의 2페이즈가 열렸... 는데...
저건 뭐지.
포션처럼 생긴 작은 약병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화산의 정수]
[품격] : 전설급 포션
[설명] : 위대한 연금술사가 화산 내부 생태계를 오랜 기간 연구한 끝에 제작한 포션이다. 복용 시 피부 겉에 얇은 피막을 형성하여 화염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내용] : 5분간 화염 저항 +3,000%
"와, 화염 저항 3천 퍼센트면, 불구덩이에 뛰어들어도 안 죽겠는데?"
저게 일회성으로 5분만 지속되는 포션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이런 포션 같은 건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쓸 일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집에 불이라도 나면 목숨은 건질 거 아냐?
그 전에, 화염 계통 몬스터를 상대로 살아남기도...
[2페이즈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성급하게 식어 버린 제단의 수호자'가 다시 불타오릅니다!]
"뭐?"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갑자기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주변을 바라보았을 때.
내가 쓰러트렸던 현무암 골렘들이 부글부글 끓으며 다시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뚝, 뚝.
용암을 떨어트리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골렘.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든 골렘이 다시 녹아내린 건 아니었다.
단 한 기의 골렘만 용암 형태로 일어났다.
[던전 보스, '다시 불타오르는 제단의 수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한 기의 포스가 엄청나다는 게 문제였지만.
현무암은... 용암이 급히 식어서 만들어진 암석.
빠르게 식은 터라, 가스가 빠져나간 흔적이 현무암 특유의 구멍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약 식은 골렘이 다시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용암(Lava) 골렘이 되는 셈...!
문제가 하나 있는데.
세균이 용암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나?
[대량의 개체가 사멸하였습니다!]
아직 골렘을 파괴하고 미처 회수하지 않았던 내 세균 군단이 용암으로 녹아내린 골렘에 그대로 불타 사라졌다.
"씨발. 그럴 리가 없지."
어떻게 쉽게 가는 법이 없네.
아무리 언데드 세균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유기물로 구성된 생물체다.
불에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갑자기 튀어나온 게 불 관련 몬스터라고?
지금 내 능력으로 저걸 상대할 방법이 있나?
바로 그 순간.
용암 골렘이 팔을 휘두르자, 녀석이 막고 있는 한 개의 통로를 제외한 나머지 통로가 전부 용암으로 틀어막혔다.
금방 굳어 단단한 암석층이 된 통로들.
저거, 1호기로 뚫으려고 해도 시간 꽤 걸리겠는데.
심지어 아직 반쯤은 용암 상태여서, 세균을 동원하려면 일단 식어야 했다.
사실상 막힌 통로로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한 계획.
"능력 안 되면, 그냥 약 빨고 튀라는 건가."
그냥 저 '화산의 정수' 포션을 먹고 유일한 통로로 도망치면 살아남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클리어는 끝이다.
보통 이런 고정형 보상 아이템은 최초로 보상받은 이후에는 다시 리필되지 않는다.
다시 입장한다고 해도 '화산의 정수' 포션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렇게 되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대놓고 저거 깰 때 사용하라고 배치해놓은 포션일 텐데. 그것조차 없이 깨라고?"
사실상 포기하고 그냥 포션 먹고 도망치느냐.
아니면 싸워서 길을 여느냐 둘 중 하나였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가능할까?
이미 용암 골렘이 느리지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고민할 시간 따위, 길게 뺄 틈이 없었다.
"에이 씨, 몰라!"
[스킬, '미시안'을 사용합니다.]
[스킬, '미시안'이 '화산의 정수'에서 미시세계의 존재를 포착했습니다.]
[Magmophile(마그모필레)]
─설명 : 화산의 마그마 속에서만 서식하는 박테리아다. 마그마의 융해된 무기물질을 먹이로 삼아 성장한다. 마그마 내부의 고온고압을 견디기 위해, 계속해서 단열 물질을 형성하여 피막을 만든다.
그리고 뭔가, 걸린 것 같았다.
11단계(2)
11단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