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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통신 판매 (5)

"산이라는 게... 지리산이었어?"

"여기가 워낙 기운이 좋았거든요..."

솔렌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리산의 한 등산 코스였다.

안내가 길어지기에 아예 헬기에 태워 이동했는데, 아예 지리산까지 와버릴 줄이야.

"...저곳입니다."

솔렌이 긴장감과 함께 추욱 수염을 늘어뜨렸다.

안내 팻말을 참조해 보건대, 아마도 노고단이라는 장소.

뿔 오우거들의 토벌에 나서기 전, 솔렌이 걱정 하나를 덧붙였다.

"뿔 오우거들의 산채(山寨)는 정말 조심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함정이 주특기인 놈들이거든요."

"함정? 어떤 게 있었는데?"

"대부분 침입자를 죽이려 설계된 것들인데..."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밟으면 쏟아져나오는 화살, 굴러오는 바위, 회전하는 도끼날,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창날까지.

하나같이 전형적이기 짝이 없었지만...

"...저런 것이 있지요."

적어도 하나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솔렌이 가리킨 것은 붉은 얼룩무늬를 가진 와이번 무리.

대구에서 상대해본 바로는 기존의 와이번들보다 몸집도 클뿐더러, 8위계의 척력까지 두른 놈들이었다.

녀석들이 산 중턱에 다다랐을 즈음...

푸슈우웅!

산으로부터 거대한 작살이 발사됐다.

그리고...

콰득!

거대한 와이번의 가슴을 단번에 꿰뚫었다.

-끼에에에에에엑!

차르르르륵!

연결된 사슬에 당겨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 가는 와이번.

이 지리산이 거대한 두꺼비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발리스타라도 있는 거야, 뭐야..."

-끼에에에엑!

-까아악!

연이어 날아드는 작살.

십수 마리의 얼루무늬 와이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 입장에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헬기로는 못 들어가겠네."

"제 몸이라도 더 단단했다면..."

이용수가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제임스가 강화해준 헬기에, 8위계의 척력을 가지고 있는 이용수였지만, 저런 물건에 맞고도 무사할 수 있을 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용수와 솔렌을 아공간에 들여보냈고, 카멜롯에 있던 란슬롯을 불러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척!

부복하는 란슬롯.

휘이이잉!

그 앞으로, 푸르른 녹읍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상쾌한 바람이 머리칼을 휩쓸었다.

짹짹!

멸망한 세상.

삼 분의 일 가량이 불에 타 황량하게 변해버린 지리산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연은 존재했다.

바삭하고 밟히는 솔방울, 화들짝 놀라 도망치는 청설모까지.

맑은 공기가 폐부 깊은 곳을 채웠기 때문일까?

나는 란슬롯에게 내뱉고야 말았다.

직장 상사 금단의 언어를.

"란슬롯... 혹시 등산 좋아하나?"

"...!!"

흠칫 어깨를 떠는 란슬롯.

이 아름다운 산길을, 그것도 존경하는 상사와 단둘이 걷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여가 활동이 있을까?

란슬롯도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분명했다.

"조...좋아합니다."

"그렇지, 그렇지! 얼른 가자고."

마농족을 편입한 직후, 마침내 7위계에 다다른 나였다.

즌즉부터 7위계였던 란슬롯과 마침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

뿔 오우거들이 설치해놓았다는 함정들.

그중 유독 강해 보이는 작살이 날아오더라도, 무난히 받아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이야기도 좀 하면서..."

윗사람들끼리는 따로 또 할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난민으로 흘러들어온 마농족들을 보며, 한때는 평범한 존재였다던 카멜롯의 기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도 못다한 이야기가 있을 터.

대뜸 시작된 지리산 등반.

이 참에 란슬롯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

.

피잉!

다리 걸린 팽팽한 줄이 툭하니 끊어졌다.

철컥!

정체 모를 기관 장치의 톱니가 맞물렸고.

슈우우우웅!

쇠창이 빠르게 나와 란슬롯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꾸드득!

터엉!

뾰족한 창날이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졌다.

아주 성황이었다.

폭죽처럼 터져 나온 불꽃이 바람처럼 덮쳐들었고, 소형 폭탄이 낙엽처럼 떨어졌지만, 하나같이 우리의 척력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퍼엉! 퍼엉!

"어휴, 귀찮아."

날파리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감.

대부분 가려운 정도였고, 이따금 세게 들어오는 공격이라 해봤자 살짝 따가운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나와 란슬롯의 대화는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란슬롯이 내 질문에 답했다.

아주 오랜된 이야기를 꺼내듯이.

"바르나울의 흑마법사였습니다. 저희 아발론 차원을 집어삼킨 건..."

사로잡힌 마농족들을 구하러 가는 길이다.

멸망의 차원의 난민들.

불쌍하기 짝이 없는 마농족들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여기 카멜롯의 기사들의 비참함에 견줄 수는 없었다.

저주받은 아이템에 귀속되어,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언데드가 된 이들이니.

"어떻게 되는 거야, 차원이 아예 망해버리면?"

"침략자들의 목적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마석이지만... 땅 자체를 빼앗는 경우도 있고, 바르나울의 흑마법사처럼 하나의 차원을 '특산품' 제조 공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그렇다면 너희 아발론은 지금..."

"저희와 같은 꼴이지요. 아마 지금쯤 아발론은...언데드 그 자체일 겁니다."

란슬롯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완전히 죽어버린 차원.

하지만, 죽었음에도 여전히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차원.

란슬롯은 그런 이미지로 자신의 고향을 상상했다.

내가 물었다.

"...언젠가 우리가 아발론의 구해낼 수도 있을까?"

신중한 질문이었다.

당장 지금의 내게는 그럴말한 능력이 없었으니.

'언젠가'라는 가능성을 붙였음에도, 란슬롯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상공회의소는 침략자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타차원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주군께서는..."

"...침략자가 아니지."

"예."

란슬롯은 만약의 만약을 가정하듯,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어쩌면... 주군께서 아발론의 새 공장주가 되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르나울 이상의 수익을 내지 못한다면 상공회의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공회의소라..."

란슬롯은 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완전한 멸망을 몸소 겪었기 때문.

하지만 그만큼이나 놈들의 힘에 움츠러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야금야금 처들어오는 이유는 뭐야? 네가 말한 상위 차원들이 들어온다면 곧장 쑥대밭이 될 텐데."

"상공회의소가 원하는 건 결국 수수료니까요. 그들도 지구가 단번에 망해버리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알 낳는 거위를 단칼에 죽이는 셈이니까요."

간단히 말해...

"키워서 잡아먹겠단 소리네?"

"정확합니다."

건방지게 짝이 없는 소리였지만...어쩌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놈들이 상상조차 못 할 만큼 빠른 성장을 이뤄주면 될 테니까.

물론 나 혼자만이 아닌, 지구의 존재를 모두가 다 같이 강해지는 방식으로.

"주군"

란슬롯이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복종은 카멜롯의 저주에서 비롯된 겁니다."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카멜롯 소유자를 향한 절대적인 복종.

그건 해골 기사들에게 씌어진 지독한 저주의 일환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제된 복종과는 달리, 어떤 마음을 품는지만큼은 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농족들처럼, 카멜롯의 기사들 또한 구하고 싶다는 마음.

란슬롯 또한 그 마음을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게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 일 수밖에.

"저는 주군께서 침략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처음부터 그랬지요."

"...그래, 고맙다."

나로서도 그것뿐이었다.

아직은 이들을 구해줄 만한 능력이 내게 없었으므로.

하지만 부족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끼리의 대화라도, 그 중심에는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지금으로서는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산행이 그걸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렇게...

서서히 노고단 중턱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어딜 기어들어 오느냐! 간이 배 바깥으로 나온 놈들아!"

산 정상을 둘러싼 드높은 목책.

그 위로 빼꼼 뿔과 머리를 빼놓은 오우거가 괄괄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정을 설치할 만큼 머리가 좋은 놈들이었다.

다짜고짜 인간들을 사냥하러 나가기보다는, 지리산에 터를 잡고 주변의 괴물이나 사람들을 사냥하는 전략을 택했다.

덕분에, 그 아름답던 지리산이 괴물들의 산채(山寨)나 다름없게 변해버렸다.

뿔 오우거 정찰병은 재밌다는 듯 클클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너희의 실수다. 우리 산채에는 네놈들을 요리해줄 만한 장치들이 잔뜩..."

놈이 한사코 떠들어댔지만...

"여기 맞나 보다. 금방 왔네. 이제 김밥이랑 사이다 먹으러 가자."

"예, 주군."

나는 곧장 아공간으로 들어가 버렸다.

놈들에게 지옥을 선사해 줄, 포탈을 열어둔 채.

그리고...

슈슈슈슉!

"...잔뜩?"

그것이 오우거 정찰병의 유언이었다.

.

.

.

30분쯤 흘렀을까.

산채에는 성창에 꿰뚫린 오우거들이 사체가 즐비했다.

그와 더불어...

1만 마리의 마농족들.

그 무한에 가까운 털복숭이들이 내 주변으로 양 떼처럼 모여 들었다.

할짝할짝!

할짝!

녀석들이 고마움을 표시했고, 덕분에 내 바짓단은 어느덧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물론, 할 일은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흔적을 찾는 일에는 둘째라면 서러울 마농족들이 오우거들의 함정을 철거했고, 나 또한 사방으로 브리또를 뿌려가며 녀석들을 배불리 먹었다.

바글거리는 마농족들을 보며, 란슬롯이 걱정스레 덧붙였다.

"정말 많군요. 아공간에도 자리가 충분하지 않을 텐데..."

"그거야 걱정할 필요가 없지. 얘들 원래부터 여기 살고 싶다고 했었잖아?"

나는 그저 곧장 포탈을 설치할 뿐이었다.

[마석 1,0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57,943개입니다.]

애당초 전투력이 전무한 마농족들이다.

괜히 도심으로 내려가봤자 다른 사람들이나 괴물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일 터.

차라리 오우거들이 예쁘게 꾸며진 산채를 자신들의 둥지로 삼는 편이 더 나았다.

더욱이 포탈이 지켜주는 한, 이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을테니까.

"...정겸님!"

새로운 거처를 얻은 솔렌이 기뻐 내게 달려들었다.

깡충깡충 뛰어가며 내 얼굴을 향해 혀를 날름대는 녀석.

나는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 전에.. 이번엔 너희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

퍼어엉!

시내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폭염.

백민우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또야?"

그 정체는 고블린 주술사들.

전력에서 밀린다는 걸 알면 후퇴할 법도 할 텐데, 놈들은 끝끝내 민간인들을 살해하며 게릴라를 이어가고 있었다.

적강운검 운양이 백민우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슬슬 장소를 옮겨야 합니다. 안타까운 일지지만... 바깥지역은 피해가 훨씬 더 극심할 거에요."

"알아요. 아는데..."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는 것.

그건 멸망이 들이닥친 이후 변한 적이 없는 명제였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백민우의 둘도 없는 고향이었으니까.

퍼엉!

화르륵!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할 수는 없는 법.

고뇌하던 백민우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요, 갑시다."

"..."

그 방법뿐이었다.

주술사들의 테러는 계속될 테지만,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살릴수 잇을 테니까.

그렇게 부평쪽으로 움직이려던 찰나.

"...응?"

띠링!

메시기가 떠올랐다.

-----

[Web발신]

흉포한 추적자, 마농족의 분양이 시작됩니다.

팍스FC의 임직원분뜰께서는 마농족들의 도움을 받아, 숨은 괴물들의 뚝배기를 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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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족...? 분양...?"

"뭐죠, 이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두두두두두두!

거점이었던 차이나타운으로부터 미친듯한 발소리가 대지를 울리기 시작했다.

"...!?"

매서운 속도였다.

포탈에서 쏟아지는 수백 마리의 생명체들.

하지만 그 복슬복슬한 털을 보며 백민우는 생각했다.

"흉포한...추적자...? 저게?"

삽살개처럼 너끈히 얼굴을 뒤덮은 털.

하지만 두 발로 서서 귀를 쫑긋 기울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다람쥐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팍스 FC]

선명한 홀로그램 글씨로 그들의 소속이 명시되어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수백 마리의 마농족이 인천의 시내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따라가야겠죠?"

"가보죠. 정겸 대협이 괜히 메시지를 보낸 건 어닐 테니."

파앙!

경공을 발휘하며 두 사람은 거침없이 내달리는 마농족들을 뒤따랐다.

머지않아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끼이이이익!"

화들짝 놀란 고블린 주술사, 그리고.

헥헥!

두 사람 앞에 배를 깔고 드러누운 복슬복슬한 마농족이었다.

'...칭찬해달라는 건가?'

"하하..."

백민우는 그제야 지긋지긋하던 고블린 주술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헥헥.

프로펠러처럼 회전하는 마농족의 꼬리를 보며.

***

"...벌써 이렇게 됐나?"

어느덧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한국을 휩쓴 대규모의 괴물 출몰 사태.

셀 수 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안타까운 재난이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의 각성자들이 눈부시게 성장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 예예. 그럼 나저 수고 부탁드립니다."

모든 괴물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성철은 괴물로부터의 피해 소식이 놀라울 만큼 줄어들었다고 전해왔다.

그간의 각박했던 상황들이 차츰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다고.

"오랜만에 진짜 우리집 같네."

함께 구슬땀을 흘려주던 무림인들이 베이징으로 돌아갔따.

민우를 비롯한 대표들도 각 지역에 머물렀기에, 아공간에는 실로 오랜만에 우리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

아, 한 가족이 된 외계 반려동물까지 포함해서.

조물조물.

큰누나 김주연 씨께서는 솔렌을 끌어안은 채, 부드러운 뱃살을 만지고 계셨다.

"정겸아, 사랑한다."

"..."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

그 얼굴에서는 도무지 멸망의 흔적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한편...

물류센터 한쪽에 설치된 77인친 OLED TV와 푸근한 가죽 소파.

각종 과자와 음료, 컵라면이 구비된 테이블까지.

최적의 게임 세팅을 구축하겠다며 몇 시간 내내 야단법썩을 피운 김솔을 작품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이제, 마지막 퍼즐이다.

탁!

김솔이 갓 출하된 플레이스테이션을 날다람쥐처럼 낚아챘을즈음...

지지직..지직...

"...어?"

'물류 상황실'의 프린터에서 정체 모를 종이가 출력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여전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상공회의소의 설비에서.

종이에는...

[지구차원, 한국 및 일본 지역 중개 수익 급감에 따른 자구안]

- 태평양 지역으로의 타차원 통폐합 조치 결의

그런 제목과 내용이 적혀있었다.

실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안돼!"

파삭!

김솔이 비명과 함께 게임기를 떨어뜨렸다.

또다시 찾아올 격동을 예감하며.

59. 통폐합 (1)

물류센터 중앙에 모인 김씨 일가.

팔랑.

팍스가 출력해준 정체 모를 문서를 살피며, 김솔이 범인의 지목했다.

"아무리 봐도 너 때문인 거 같은데?"

"...역시 그렇지?"

상공회의소가 수수료를 거두는 방식은 게이트를 통해서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는 상공회의소에 의해 설치된 포탈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일본 또한 다이치와 일본 각성자들에 의해 하나둘 제거되고 있었다.

"아무렴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는 건가...?"

어저면 일종의 기업이라고 봐도 좋을 상공회의소다.

돈 나와야 할 곳에서 되레 적자가 나는데, 대응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나 다를까, 문서의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한국, 일본 지역에서의 중개 수익 급감.

-한국 지역, 자유개척 실적 저조 및 위계 보유자 급등.

-한국, 중국, 일본 간 '선전포고' 시스템 이용률 저조.

"캬아!"

동아시아 삼국의 화합, 그리고 한국의 각성자들을 성장시켜 태극기를 펄럭인 나의 활약까지.

내 입장에서는 트로피가 따로 없었지만...

된통 당한 탓인지 상공회의소도 꽤 과감한 전략을 들고나왔다.

-태평양 지역으로의 엘븐하임 대륙 전이.

지구 한복판에 대륙 하나를 박아넣는 무식한 전략.

그것이 놈들이 말한 '통폐합'의 전모였다.

"통폐합이라..."

낯선 단어는 아니다.

학과 통폐합, 기업 간 M&A.

손실을 줄이고, 더 많은 돈을 벌겠다는 심산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상공회의소는 자신들의 목표를 간단히 정리했다.

-한국, 일본 지역에서의 수익성 강화.

-한국 지역 위계 보유자 감소 유도.

간단히 말해...

"손실을 메꿔보겠다?"

[그렇습니다.]

"겸사겸사 한국도 한번 밟아주고?"

[그렇습니다.]

[한국, 일본으로의 공식적인 교전 공지는 7일 뒤 전달될 예정입니다.]

이건 상공회의소가 내부적으로 전달한 문건이었다.

실제 사람들에게는 전달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

상공회의소의 시설을 손에 넣은 덕에 남들보다 빨리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김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일주일 동안은 게임해도 된다는 소리 아냐?"

"...허튼소리 말고."

허투루 쓸 수는 없는 시간이다.

놈들의 계획을 먼저 알게 된 이상, 대응책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다시 싸움이군요. 뭐,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번에는 이용수가 덧붙였다.

재차 의욕을 다지는 중에서도 묻어나는 피로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싸우지 않아도 될지도 모릅니다."

"예...?"

'개척'도 '입찰 경쟁'도 아니다.

지구와 엘븐하임의 통폐합.

어쩌면 그들도 우리처럼 원치 않는 통폐합을 강요당한 것은 아닐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난민으로 들어온 마농족들, 그리고 카멜롯의 기사들까지.

이 넓은 다차원 우주에 침략에 의한 피해자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상공회의소의 이간질이 시작되는 건 일주일 뒤.

미리 엘븐하임과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불필요한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관건은...

"...엘븐하임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요."

"이제 그걸 확인해봐야죠. 일주일 내로."

아무리 평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더라도, 정작 엘븐하임이 침략자로 돌변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 시급한 상황.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네요. 그것도 일주일 뒤..."

그때, 팍스가 내 말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엘븐하임의 이미 태평양에 이전되어 있습니다.]

[교전 공지만 7일 뒤에 전해질 예정입니다.]

"...뭐? 벌써?"

엘븐하임 대륙은 이미 도착해있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도착한 새벽 배송처럼.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에 이야기를 나눠볼 수 밖에.

중개 상인이 달라붙기 전에.

***

우리는 팍스가 알려준 위치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이번 통폐합의 당사국은 한국과 일본.

그 때문인지, 엘븐하임 대륙이 들어선 위치는 일본의 동쪽 태평양이었다.

경로는 단순했다.

포탈을 통해 먼저 오사카로 이동했고, 가까운 항구를 이용해 잠수함으로 갈아탔다.

그러곤 오사카만, 그리고 와카야마를 돌아 동쪽 태평양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그렇게 몇 시간의 항해가 이뤄졌을까.

마침내.

"...진짜 있네."

태평양 한 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엘븐하임 대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우우우웅.

수중을 달리는 잠수함의 진동.

잠망경을 통해 내다본 엘븐하임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뭐가 저렇게 새카매?"

나무는 커녕, 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땅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로는 썩은 나무들이 덩굴처럼 얽혀 있었다.

오염된 해수로 물든 바다와 함께 놓이니, 악마의 소굴이라 봐도 손색이 없다.

십 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해안선에 다다랐음에도, 우리는 상륙을 미뤄두었다.

이파리 하나 없이 바싹 마른 숲길 사이로, 한 무리의 존재들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셋... 아니, 넷인가?"

잠수함을 타서인지,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터덜터덜 가벼운 발걸음.

그 외형에서 그들의 종족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엘프."

하얀 피부와 뾰족하면서도 길게 솟은 귀.

그리고 무엇보다 수려한 외모가 눈에 띄었다.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관의 엘프들이었지만...한 가지 명백히 다른 점이 있었다.

"...뭐가 저렇게 꼬질꼬질해?"

흰 피부탓에 더더욱 눈에 띄었다.

어디 탄광에라도 들어갔다 온 것인지, 덕지덕지 새카만 얼룩이 묻어있는 얼굴.

며칠은 굶었는지 깊게 파인 볼, 그리고 가녀리다 못해 기아에 가까운 팔뚝까지.

입고 있는 옷 또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중세식의 튜닉이 누렇게 변색이 된 것은 물론, 목 부분이 가슴까지 축 늘어져 있었으며, 배와 겨드랑이에는 빠짐없이 땜빵이 기워져 있었다.

휘이잉.

찢긴 옷자락 사이로 배꼽이 훤히 드러나 보였을 땐, 절로 가슴이 아려올 지경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건...

씨이익...

앞니 빠진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순진무구한 표정.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온몸의 긴장이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세상에, 앞니 빠진 엘프라니."

분명 잘생기고, 예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촌놈들 그 자체였다.

아니, 요즘 시대를 감안한다면 시골 어디를 뒤져도 찾을 수 없을, 국어 교과서는 박물관 속에서나 발견할 진짜배기 촌놈들.

그때였다.

해변으로 걸어 나온 엘프들.

그들이 손을 뻗어 밀려드는 파도를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바다가...?"

오염된 해수로 인해 거무죽죽하게 뒤뎦여 있던 바다.

그 바다에 푸른빛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니까.

지잉.

즉시 포탈을 열었다.

저런 광경을 설명해줄 만한 존재가 내 아공간에 딱 하나 있었으니.

나무로 만든 해골 기사 퍼시발.

한때 정령사였다던 그를 불러냈다.

.

.

.

다재다능한 카멜롯의 기사들이었다.

퍼시발이 엘프들의 행위를 설명해주었고.

"정화 작업입니다. 엘프들의 재주 중 하나인데..."

그 사이, 모드레드가 유체화와 은신을 통해 엘프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프들의 대화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좀 더럽기 한데...여기 바다가 그래도 우리보다는 낫다.

-그걸 말이라고.

그때였다.

개중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엘프 소년이 돌을 주워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날렸다.

팟! 팟!

솜씨 좋게 십수 번을 바다에 빠지는 물수제비.

상당한 실력이었지만...

-케루!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미안해! 무심결에...!

이를 발견한 엘프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케루라는 이름의 엘프 소년을 눈물 쏙 빠지게 혼내기 시작했다.

고작 물수제비 하나 던진 것으로.

'...뭐지?'

이유를 듣게 되자, 황당할 지경이었다.

-엘리님이 신신당부하셨잖아! 지구에 돌 한 톨도 버리면 안된다고!

-응...바다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바다에 돌을 버렸다고 혼나는 아이.

왜 저렇게 과민반응을 하는가 했는데, 잠만경을 통해 그 광경을 관찰하고 있던 퍼시발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엘븐하임 대륙 전체가 저주로 물들어 있네요. 그래서 돌 한조각이라도 조심하는 모양입니다. 자칫하다가 저주가 지구에 옮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다시 말해...

"...환경보호 실천? 지구에 와서까지?"

"그런 셈이죠... 엘프들이 원래 그렇습니다. 모든 자연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결과적으로 무장해제 시킨 것은...

-자자! 다들 모여 봐!

-와아!

한 평 남짓 정화된 바다에서 그들이 꺼내온 것.

그러니까...바다의 해초였다.

-뿌리까지는 안 뜯었지?

-걱정 마! 내가 누군데?

엘프들은 깨끗하게 씻은 바위 위로 다시마 미역 비스름한 초록색 해초를 늘어놓았다.

그러곤...

-와앙.

앞니 빠진 입을 열어젖혔다.

나는 경악과 함께 퍼시발을 바라보았다.

"...원래 엘프라는 종족들이 해초를 먹나...? 저런 식으로?"

"..."

이번엔 퍼시발도 경악하고 있었다.

녀석의 호두까기 인형 같은 입이 쩍 하니 벌려져 있었으니까.

텁.

나는 녀석의 입을 닫아주며 물었다.

"...저거 배고파서 저러는 거 맞지?"

"...예."

까닥까닥.

퍼시발이 호두까기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이...

서늘한 엘븐하임의 해안과 헐겁게 나부끼는 엘프들의 옷자락.

그들은 순박한 웃음을 나누고 있었지만, 정작 내 마음엔 겨울이 찾아들었다.

"전쟁은 무슨 전쟁이냐... 유니세프가 와야 할 판인데."

아무리 봐도 침략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농족들이 난민이라면, 엘프들은 영락없는 전쟁고아와도 같은 꼴이었다.

그랬기에.

지잉.

즉시 포탈을 열었다.

슈우우웅!

즉시 물건을 출하했고, 팍스에게 요청해 엘프들에게 메시지도 써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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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팍스 프레시] 모둠 쌈 외 3박스, 눈앞으로 배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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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 미역을 주렁주렁 매단 채.

엘프에 대한 환상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누, 누구냐!"

"지...지구인들이야 분명...!"

"말도 안돼! 분명 상공회의소에선 일주일 뒤라고..."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는 엘프들.

하지만 잠수함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정체 모를 상대에 잔뜩 긴장에 찬 엘프들.

하지만...

"이것 좀 봐! 채소야! 채소...!"

소년 엘프, 케루가 탄성을 내질렀다.

청상추, 치커리, 적근데, 케일, 쌈배추, 깻잎까지.

[친환경 인증 국내산 야채 모둠 쌈, 500g 4봉. 가격은 30,360원입니다.]

비닐에 담겨 신선한 녹색을 자랑하는 풍성한 모둠 쌈을 보며.

엘프들이 채식을 한다기에 특별히 고른 물건이었다.

우뚝 멈춰선 엘프들.

해안을 사로잡은 적막 사이로...

꿀꺽.

그런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러한 적막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킁킁.

다른 고소한 냄새가 그들을 자극하기 시작했으니.

[바로 먹는 순수고구마, 130g 10개. 가격은 23,900원입니다.]

"..."

저벅저벅.

엘프들은 귀신에 홀린 듯 해안에 모여들었따.

그러곤 곱게 포장된 식료품을 하났기 집어 들기 시작했다.

질겅질겅.

상추를 씹고.

우걱우걱.

껍질도 까지 않은 고구마를 입에 밀어 넣으며.

"저...정체를 밝혀라! 지구인...!"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자연의 축복을 지키는 고귀한..."

"마...맛있긴 하다만...아무리 그래도 엘븐하임을 내줄 순 없다...!"

아직 아무런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우리와 달리, 엘븐하임의 엘프들에게는 이미 지구와의 전쟁 소식이 공지된 모양이었다.

상공회의소, 그리고 타차원의 공격에 의해 찢기고 상처 입은 엘프들.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자연'이었다.

근데 이제 발효를 곁들인.

[총각집 오래오래 시원한 동치미. 12kg 1개. 가격은 11,800원입니다.]

뽁!

소년 엘프, 케루가 살얼음이 낀 동치미 병을 뚜껑을 열었다.

그 주변으로 주춤주춤, 다른 엘프들이 모여들었고...

꿀꺽꿀꺽.

돌아온 자연을 삼켰다.

철철 흐르는 눈물과 함께.

60. 통폐합 (2)

"반갑습니다."

시원하게 넘긴 동치미 국물 덕분일까.

아니면 정령사 퍼시발의 인사 덕분일까.

잠수함에서 내려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엘프들의 긴장은 한결 거둬져 있었다.

"당신은...누구시죠? 누구신데..."

어디서 이런 신선하고 생기 넘치는 음식들을 가져왔느냐는 말.

그들은 머뭇머뭇 뒷말을 삼켰다.

물론 나로서도 대답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팍스FC의 대표이기도 하고요."

"한...한국!"

주춤.

엘프들이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지구인인 건 알아봤지만, 아예 전쟁 당사국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퍼시발이 눈치 좋게 앞으로 나서주었다.

그리고...

"저희는 엘븐하임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상공회의소의 수작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거든요."

"...!"

그 말의 효과는 강력했다.

주르륵.

엘프들의 눈가에서 하나같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그 쉬운 걸...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걸..."

메인 목으로 떠듬떠듬 말을 뱉는 엘프들.

갖은 고난을 겪어온 희생자들 답게, 이미 여러 차례 원치 않는 전쟁을 벌여온 모양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존재를 만난 것.

"그럼... 엘븐하임을 탐내지 않는 거에요?"

다른 엘프들 다시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빼든 소년 엘프 케루.

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갖고 싶지 않았으니까.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땅.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그저 엘프들이 전부였다.

"하긴, 땅 달라고 온 사람은 없긴 했어."

"엘븐하임이 좀 구리긴 해!"

엘프들이 껄껄 웃으며 순박한 자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농담이나 따먹을 시간이 없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엘븐하임에게 우리의 반전(反戰)의사를 타진하는 것.

하지만 그런 이런 변두리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타이밍 좋게,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남자 엘프가 성큼 걸어나왔다.

"그럼, 엘리 의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셔야겠군요."

그의 이름은 '에단'이었다.

그는 우리를 엘프들의 지도자인 엘리 의장에게 소개해주겠다며, 엘븐하임의 수도인 갈라돈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3일이나 걸린다고요?"

"예, 다행히 이곳 해안과 그리 멀지 않아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담담히 덧붙이는 에단을 보며, 나는 물었다.

"...혹시 걸어서?"

"그럼요. 자연께서 내어주신 이 튼튼한 두 다리가..."

에단이 씨익 웃으며 텅 빈 이빨을 드너냈다.

새삼 내가 얼마나 문명에 찌들었는지 느끼게 해줄 만큼.

깡촌 엘프와 걷는 국토대장정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곧장 포탈을 열었고...

덜컹.

육중한 쇳덩어리의 소리가 엘븐하임의 해안을 메웠다.

.

.

.

"와아...!"

"우와아아아아아!"

뒷자석에 구겨지듯이 탄 엘프들이 쩍 하니 입을 벌렸다.

코란도의 차량 내부를 구석구석 만져보느라 여념이 없는 그들.

달칵.

치이이이...

달칵.

치이이이...

뒤에 달린 무전기가 켜졌다 꺼지기를 수십 번.

문명을 향한 엘프들의 호기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부우우웅.

그렇게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내달렸을 즈음이었다.

"커어어어어어어..."

"드루루루루롸라라랑..."

엘프들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머리를 뒤로 젖힌 채, 쩍 하니 입을 벌리며.

"에단..."

"으음...예...네?"

"길 안내를 해주셔야죠."

"아참, 죄, 죄송합니다. 스으읍."

애써 침을 닦아내는 에단.

처음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에단의 길 설명은 간단하기 짝이 없었다.

코끼리 바위를 지나, 악어 바위를 왼쪽으로 돌고, 생쥐 바위가 나올 때까지 직진.

내비게이션의 업데이트를 고조선까지 롤백하면 이런 설명이 나올까 싶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다 왔어요."

"그 말 두 시간 전부터 했습니다. 에단."

헬기를 타면 한결 빨랐겠으나, 에단이 극구 만류한 탓에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프로펠러의 소리도 상당한 데다, 다른 괴물로 오인되어 엘프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부우우우우웅.

이용수에 의해 쏜살같이 나아가는 코란도 스포츠.

노면 사정이 좋지 않은 탓에 차는 꾸준히 덜컹거렸지만, 한나절을 족히 달린 끝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로 저곳입니다."

엘븐하임의 심장, 갈라돈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깐요."

갈라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지나가는 엘프들이 우릴 보며 흠칫 놀라곤 했지만, 에단이 괜찮다는 듯 표시를 보내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유히 멀어져갔다.

내부로 접어들수록 엘프들의 거처가 하나둘 뚜렷하게 들어왔다.

얼기설기 두꺼운 넝쿨을 엮어 만든 움막, 석고로 빚어 만든 회색 건물, 건너건너 보이는 주황색 지붕까지.

나름 찬란하리라 예상했던 엘프들의 도시.

하지만 그 실상은 다음과 같았다.

'...깡촌?'

코를 질질 흘리며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길목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견종(?)까지.

허름한 집들마다 널찍한 마당을 끼고 있었고, 그런 집들이 모인 '마을'의 중심에는 유독 커다란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에단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우리 엘프들의 상징, 갈라돈 의회입니다. 저기에 엘리 의장님도 계실 거에요."

"의회요...?"

가로로 긴 단층 건물에 불과한 갈라돈 의회.

그 앞에는 널찍한 평상이 놓여 있었다.

"아, 아침에 물 줬다니까!"

"아라우카리아는 반양지에 키워야..."

"아니,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해? 비료를 쓸 때는..."

평상에는 십수 명의 엘프 장로들이 저마다 수다를 떨며 앉아 있었는데, 저마다 맨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연신 부채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경로당이잖아?'

주름이 자글자글한 엘프 장로들.

웃음 섞인 호통을 내뱉고, 껄껄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은 한국의 정겨운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그 사이로 젊은 여성 엘프 한 명이 끼어들었다.

"어휴, 장로님! 쓰레기 아무데다 버리지 마시라고요!"

"아 왜? 모두 대자연께서 거둬가실 건데. 껄껄."

행색이 꼬질꼬질한 것은 다른 엘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가지런히 땋은 머리, 자로 잰 듯한 콧날, 멀끔한 이마와 선명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감히 아름답다는 말을 아낄수 없었다.

내가 감탄하고 있다는 걸 알아봤는지, 에단이 웃으며 말했다.

"저분이 엘리 의장님이세요. 아름다우시죠? 한참 그러실만한 나이거든요."

"음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

"200살 초반쯤 되실 거에요."

"...?"

"에단은요?"

"에이, 저야 멀었죠. 이제 160살 조금 넘었으니까."

그저 평범한 시골이 아니었다.

초고령화 농촌.

그것이 이 엘븐하임의 정체였으니.

엘프 장로들과 한바탕 실랑이를 마친 엘리 의장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에단?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은..."

에단이 그녀에게 해안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식사를 대접받았다는 것, 그리고 엘리 의장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는 것까지.

그녀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아이들이 신세를 끼쳤네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그보다..."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일주일 뒤 상공회의소의 공지가 이뤄질 테지만, 우리는 엘븐하임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노라고.

엘리 의장 또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짐작대로였다.

한국 그리고 일본과 달리 엘프들은 일주일 뒤 전쟁이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히 덧붙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이곳 엘븐하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이 없거든요."

싸움을 원하지 않는 엘프들.

그녀의 선언을 듣고 나니 한결 안심이 되었지만...

그녀는 내가 던진 질문을 날카롭게 되돌려주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도 과연 그럴까요?"

"그건..."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일본이 어떻게 움직일지, 나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웠기에.

하물며 한국도 그랬다.

명실상부한 엘븐하임의 의장인 엘리와 달리, 나는 한국의 대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한국 또는 일본에서 '침략자'가 생겨나는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었다.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엘리가 싸늘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당신들을 침략하는 일은 없을 거에요. 하지만, 처들어오는 적을 내버려 두지도 않겠죠. 엘븐하임을 공격한 자들은 모두 죽게 될 거에요."

그녀의 단언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모두요?"

"지구가 다차원에 개방된 지 얼마나 됐죠? 10년?"

대답하지 못했다.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엘븐하임은 얼마나 됐으리라 생각해요? 그것도 당신들보다 훨씬 더 긴 수명을 가지고요."

그저 긴 세월을 살아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그 긴 시간을 생존을 위해 분투했을 터.

그 결과, 엘리가 전해준 엘븐하임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7에서 6수준의 위계를 가지고 있어요. 저기 쓰레기 버리시던 장로님처럼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5위계이신 경우도 적지 않죠."

그 때문이었다.

엘리가 지구인 침략자들의 죽음을 단정한 것은.

순박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들은 놀라울 만큼의 강자였다.

그녀는 담담히 결론을 맺었다.

"돌아가서 사람들을 설득하세요. 와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그녀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부탁할게요. 우리가 조용히 죽어가게 내버려 둬요."

조용한 죽음.

그것은 내리막을 걷는 고룡의 서글픈 울림과도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량하게 썩어버린 엘븐하임의 대지.

엘프들에게 나눠줄 자연력은커녕, 평범한 자연의 소산조차 내놓지 못하는 죽음의 땅.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죽음이었다.

나는 물었다.

"해안가에서 만난 엘프들이 지구의 바다를 정화해주더군요. 하지만 정작 엘븐하임을 정화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죠?"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려세우더니, 따라오라는 듯 내게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죽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공간, 엘븐하임의 가장 깊숙한 장소로.

.

.

.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었다.

초라한 행색은 여전했지만, 나름 건장한 엘프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나무뿌리처럼 촘촘하게 얽힌 길.

그 골목과 골목을 엘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게 뭐죠?"

작은 묘목 하나를 발견했다.

무심하게 자라나 있는 팔뚝만 한 나무.

그 기둥과 가지는 배고픈 엘프들의 팔뚝만큼이나 가녀리고 연약했다.

하지만 문제는 크기가 아니었다.

싱그러운 초록빛.

엘븐하임의 땅을 밟은 이래, 처음으로 발견한 살아있는 식물이었다.

엘리가 담담히 그 정체를 말해주었다.

"...세계수에요. 사실 관례상 여기부터 모시고 왔어야 맞는건데."

세계수.

듣기만 해도 그 중요성이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묘목은 그 이름을 지탱하기엔 너무나 작고 연약했다.

툭 하니 치면 부러질 것만 같은 연약함.

그 모습이 어쩐지 엘븐하임의 엘프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게 여러분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유라고요?"

"...네."

엘리가 착잡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엘븐하임 대륙 전체가 저주에 걸려 있어요. 그동안 세계수가 저주와 싸워준 덕에 약간의 작물이라도 건질 수 있었지만... 그 힘이 영원할 수는 없으니깐요."

바다를 향해 물수제비를 던지던 케루, 그리고 그런 케루를 혼내던 에단까지.

엘프들은 이 땅에 뿌린 내린 저주에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누굽니까? 그 저주를 내린 건?"

무심결에 던진 질문.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르나울이에요. 흑마법을 사용하는."

란슬롯의 고향, 아발론을 덮친 흑마법사들의 차원이었다.

그 이름이 엘프들의 입에서 나올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바르나울은 세계수의 자연력을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그 목적이 달랐다.

아발론을 침략한 것이 돈 때문이었다면, 엘븐하임에 저주를 내린 것은 엘프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래서 세계수가 회생하지 못할 수준까지 이 땅에 흑마법을 뿌려댔죠. 상공회의소의 제지 덕에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이제는 그 또한 시간문제일 뿐이고요."

그 때문이었다.

엘리가 자신들을 죽어가게 내버려 두라고 한 것은.

바르나울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진 세계수에 시한부를 선고했고, 이 작은 식물의 운명은 곧 엘븐하임 전체의 운명이 되었다.

엘리는 그것으로 우리의 대화를 정리했다.

"이제 보여드릴 건 모두 보여드린 것 같군요. 서로 충분히 예의를 차렸으니,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일주일 뒤 기어코 엘븐하임으로 들이닥치는 지구인들이 없지는 않겠지만...그대와는 상관없다고 알아두죠."

콰앙.

그녀는 그렇게 엘븐하임의 관짝을 닫으려 했지만...

"그 저주 말인데..."

나는 그들의 죽음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나에게 세계수를 회복시킬 만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세계수가 많아지면 해결되는 문제입니까?"

양을 불릴 수는 있었다.

나무가 부족하면 더 심으면 그만이니까.

61. 통폐합 (3)

엘리가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계수가 많아진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죠?"

그녀는 내 말뜻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란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까.

그것이 복사된다는 발상 자체를 떠올리지 못하는 듯했다.

엘리는 그저 이렇게 덧붙일 뿐이었다.

"저주를 이겨낼 만큼 세계수가 장성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쬬.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이미 균형이 기울어져 버렸으니까요."

엘븐하임의 세계수.

지금은 묘목에 불과해 보이는 이 나무는 과거 구름에 닿을만큼 거대했다고 했다.

불과 수백 년 사이 조금씩 사그라들던 세계수는 바르나울의 저주와 싸우며 지금의 크기까지 줄어들었다고.

"바르나울의 흑마법은 우리 엘프들의 정화 능력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해요. 어디 전설의 드루이드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승산은 없다고 봐야죠."

"으음..."

엘븐하임의 운명을 비관하는 엘리.

나도 뭐라 덧붙이지는 않았다.

분명하다.

세계수를 무한정 복사한다면 엘븐하임을 뒤덮은 저주를 깔끔하게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이 밀리고는 있다지만, 지금 저 작은 묘목 하나가 대륙 전체를 두른 저주와 힘을 겨루고 있다는 뜻이니까.

과연 세계수다운 가공할만한 위력.

냉큼 삼켜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해당하는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연 세계수였다

물류센터에도 화초 같은 건 존재했지만, 엘븐하임의 셰계수와 견줄 수는 없는 모양.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아공간 레벨마다 주어지는 저장 슬롯을 사용하는 것.

레벨 5에서 이미 상공회의소 일본 지부를 수용했으니, 새 물건을 넣으려면 다음 레벨로 올라서야만 했다.

'...돈이 없어.'

레벨 6달성을 위해 요구된 마석의 양은 자그만치 10만 개.

반면, 지금 내가 보유한 양은...

[남은 마석은 68,331개입니다.]

한참 모자랐으니까.

.

.

.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을 즈음이었다.

세계수가 둘러싼 넝쿨 지대의 한쪽 너머.

올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공터처럼 마련된 공간이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엘프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순박한 미소가 날아가 버릴 만큼.

"뭘 하는 거죠?"

"사격 훈련이에요. 어찌 되었든...일주일 뒤 전쟁이 예고된 상태니까요."

혹시 모를 침략자들을 대비하여, 엘프들은 하나같이 활을 치켜들었다.

-준비!

한 엘프가 우렁차게 명령했고.

지이이익...

나머지 엘프들이 하늘을 향해 팽팽한 활시위를 당겼다.

-발사!

파아아아앙!

가공할만한 위력이 화살을 빠져나갔다.

찌르르...

주변을 울리는 소리.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위력이었지만, 정작 놀랄 점은 따로 있었다.

"...화살이 없네요?"

"화살을 사용하면 위력이 오히려 더 떨어져요. 대신 자연력을 변환한 에너지를 모아 발사하죠."

장비와 위계 간의 관계.

란슬롯이 한 차례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강화된 무기 아닌 이상, 사용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위계의 힘을 잃는다는 것.

이 때문에 대부분의 차원 존재들이 근접 무기를 선호한다는 것까지.

하지만 엘프들은 예외였다.

어엿한 궁수인 이들은 어쭙잖은 도구를 버리고 자신들이 지닌 자연력을 무기로 삼고 있었으니.

"화살도 아낄 수 있으니 나름 환경보호도 되죠."

엘리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정작 내 팔뚝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최소 7위계, 높으면 5위계에 달하는 엘프들이다.

활 하나만 주어지면, 그 수준의 공격을 어렵잖이 퍼부을 수 있다는 것.

평화로운 성격의 엘프들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들이 침략을 작정했더라면 지구는 단숨에 엘프들에게 넘어갔을 터였다.

엘븐하임을 침공하는 자는 모두 죽을 것이라는 그녀의 단언.

그 말에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이번에는 엘리가 덧붙였다.

"사실 어제도 해안에서 교전이 있었어요."

"어제요?"

"예, 하지만 당신들과는 종족이 다른 것 같던데..조금 물고기 같은..."

"물고기라면..."

다른 게 있을 리 없었다.

일본의 어인들.

유신각성회를 붕괴시키고, 다이치가 일본 각성자들을 모아 수습에 나섰음에도, 아직 잔당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엘프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때였다.

"정겸 씨, 잠시..."

아공간 포탈 안에서 나를 부르는 이용수.

그가 새 소식을 전해주었다.

"일본에서 다이치가 찾아왔어요."

"...다이치가요?"

엘븐하임으로 오기 위해 오사카를 경유했떤 우리였다.

오사카에 있던 각성자들이 그 소식을 다이치에게 전했던 모양.

출입을 허자하자, 다이치가 포탈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정겸 씨, 오래간만입니다."

반가운 인사와는 달리, 그는 꽤 침통한 표정이었다.

잠시 엘리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다이치와 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먼저 물었다.

"어인들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죠?"

"...어떻게 아셨어요?"

화들짝 놀라는 다이치.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와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 정리를 끝내긴 했어요. 이제 딱 하나 삿포로가 남았는데..."

삿포로에 남은 단 하나의 게이트 포탈.

공교롭게도 이곳 엘븐하임과 제법 가까운 위치였다.

이제는 딱히 위협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어인들이었지만, 디이치가 고전하는 이유가 있었다.

"놈들이 게이트 핵을 챙겨 바다 위에서 농성을 하고 있어요. 마두귀라도 풀어놓을까 고민했지만..."

7위계 괴물인 마두귀.

그건 다이치가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놈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겨버린 탓에, 그 수단마저 막혀버렸다고 했다.

더욱이 진짜 문제는 어인들이 아니었다.

샤리트 차원에서 넘어온 거대 괴물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니까.

"...크라켄이에요. 쉬지 않고 산성으로 된 먹물을 뿜어대는데... 주변 바다가 모두 오염돼버려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에요."

크라켄, 그리고 놈이 뿜어내는 산성 먹물.

일본 해역과 엘븐하임의 해안을 오염시킨 주범이 여기에 있었다.

"멀리서 공격하는 건요?"

"해봤어요. 정겸씨가 지원해주신 성창도 사용해봤지만, 척력이 상상 이상으로 단단한 탓에..."

성차마저 통하지 않는 척력.

지금껏 이만한 방어력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물론...

'미친 듯이 퍼붓는다면 어떻게 잡기는 할 것 같은데...'

이번에도 500m에 불과한 사정거리가 문제였다.

거기까지는 접근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놈의 산성 먹물에 잠수함이 버텨주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으니까.

필요한 건 간단했다.

'먼 거리에서, 그것도 고위계를 뚫어버릴 수준의 위력...'

그리고 그건...

'...여기 있잖아?'

멀찍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엘리를 바라보았다.

고위계를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위력의 원거리 공격을 쏟아내는 엘프들.

그 힘이 필요한 시점이었으니까.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침, 딱 돈이 필요했는데...'

매번 쏠쏠한 수입을 안겨주었던 게이트 핵이다.

먼저 부탁을 해온 건 다이치였지만, 내 입장에서도 수만 개의 마석을 얻을 기회였다.

엘프들을 통해 크라켄을 사냥하고, 수급한 마석으로 레벨을 올리고, 아공간에 저장한 세계수를 복사하는 게획.

가재 잡고 도랑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전략이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엘프들을 설득해야 할 텐데.'

순박하기 짝이 없는 엘프들이지만, 그들의 고립성만큼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륙 밖으로는 돌 한 조각도 내보내지 않던 그들이다.

아무리 평화가 목적이라지만 밖으로 나서 함께 싸워달라는 부탁을 이들이 순순히 들어줄 수 있을까?

그래도...

"...해봐야지 어쩌겠어."

핵심은 내가 세계수를 복사할 수 있다는 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엘븐하임의 새로운 철학으로 제시하는 일이었다.

한 그루의 걸출한 나무가 아닌, 작지만 숲을 이룰 수 있는 나무들이 되는 것.

엘븐하임이 홀로 동떨어진 섬이 아닌, 팍스 풀필먼트 센터를 이루는 하나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엘리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러곤 다이치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엘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삿포로에 있는 크라켄을 잡기 위해 엘프 궁수들을 동원해줬으면 한다고.

내 예상대로 그녀는 난색을 표했다.

"바깥이요? 엘븐하임 내부라면 몰라도 밖은..."

상공회의소의 이간질, 그리고 평화를 중시하자는 의견을 공유한 우리였다.

엘리는 딱 잘라 거절하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불가침(不可侵). 바르나울의 저주가 처음으로 엘븐하임을 뒤덮었을 당시, 갈라돈 의회가 결의한 내용이이요. 엘븐하임의 저주를 비롯한 그 무엇도 밖으로 빠져나가면 안 된다고요. 그건 우리 엘프들도 예외는 아니에요."

철저히 고립된 죽음.

그것이 바르나울의 저주가 내려졌을 당시, 갈라온 의회가 작성한 자신들의 유언이었다.

"지구에는 지구의 생태계가 있을 거에요. 저주에 시들어가는건 우리 엘븐하임의 자연으로도 충분하고요. 우리 또한 지구에 불필요한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니 거니..."

곤란한 표정을 짓는 엘리.

나는 엘븐하임에 식량을 보급해주려던 계획을 조금 더 앞당겼다.

그러곤 어렵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손위로 파릇파릇한 채소 하나를 출하했다.

지잉.

[국내산 배추, 1통 가격은 3,390원입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실한 배추 한 통.

뭔가 짐작이라도 한 듯, 그녀는 손을 내저었지만...

"대가로 주려는 거라면 도로 넣어두세요. 미안하지만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출하는 계속됐다.

척!

척!

"자, 잠깐..."

차츰 쌓여가는 배추.

그쯤 되자, 엘리의 표정 또한 경악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턱!

한참 동안, 족히 수백 개에 달하는 배추를 쌓아 둔 뒤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너무 한 가지만 생각하지 마세요. 고여 있다 보면 곪아가기 마련이이니까."

그러곤 담담히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지구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엘븐하임의 생각,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으니.

"지구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건 엘븐하임 뿐만이 아니에요. 주변 바다가 죄다 오염돼 있는 것도 이미 보셨을 테고. 타차원에서 넘어오는 수십 수백 종류의 위협이 지구 생태계를 도륙내고 있죠."

"그건..."

"결정적으로 제가 엘븐하임에 줄 수 있는 도움도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건 그냥 선물일 뿐이고... 진짜 엘븐하임에게 제시하고 싶은 대가는 따로 있어요."

사이좋게 겹겹이 쌓인 배추들을 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다음번 여기에 쌓이는 건 세계수가 될 겁니다."

그제야 엘리는 알아차렸다.

내가 사물을 무한정 복사할 수 있다는 것.

세계수가 유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엘븐하임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리라는 것까지.

***

촤아악!

백여 척의 K북선이 바다를 갈랐다.

목적지는 크라켄이 있다던 삿포로의 바다.

다행히 엘븐하임의 해안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 K북선의 용머리.

그 옆으로...

휘이이익!

엘프들의 금발 머리칼이 휘날렸다.

바보같은 웃음은 잠시 접어두었다.

오뚝한 콧날, 살짝 찡그린 미간, 진지한 눈빛까지.

잘생김으로 무장한 엘프들은 K북선의 단단한 지붕에 올라탄채,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복될 엘븐하임, 그리고 나무뿌리처럼 촘촘히 연결될 팍스FC와의 유대를 기대하며.

멀찍이 해안선으로부터 불룩 튀어나온 생명체의 형상이 보였다.

그 정체를 증명하듯, 바다는 한층 더 거무죽죽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물론...

치이이이...

배의 바닥을 녹이는 강력한 산성 성분까지.

선두 그룹에 있던 엘프 하나가 우렁차게 외쳤다.

"슬슬 배가 못 버팁니다."

"괜찮아! 조금 더 갈 수 있어!"

엘프들을 다독인 에단이 재차 외쳤다.

"정화!"

엘프들이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빠르게 달리는 보트 위에 앉아, 무심히 내민 손으로 물살을 가르듯이.

그렇게 그들의 손이 머문 자리 주변으로...

지이이잉...

검게 물들었던 바다가 차츰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배의 하부에 가해지던 손상을 막아낸 것은 물론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마침내 크라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체동물답지 않게 육중하고 둔탁한 몸.

돌, 아니 쇳덩어리 같은 머리와 다리 모두에는 마치 녹이라도 낀 것처럼 청록색과 구리색이 곳곳에 피어있었다.

깊은 바닷속에 수백 년간 넣어둔 거대한 닻과 같은 모습.

접근한 적을 수심 끝까지 끌고 들어갈 것만 같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외양이었지만...

'어차피 가까이 안 가도 되니까.'

오염된 바다를 이용해 줄곧 거리적 이점을 가져가던 녀석이지만, 이제는 반대였다.

놈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지만, 반대로 우리는 놈을 타격할 수 있는 위치.

즉, 엘프들의 사정거리가 닿는 위치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둘러싸!"

크라켄을 중심에 둔 엘프들.

뭔가 낌새를 친 크라켄 또한 이동을 시작했지만, 엘프들을 실은 배가 다시 거리를 벌린 탓에 포위망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공격!"

타아아앙!

슈우우우우우웅!

슈우우우우욱!

엘프들의 자연력을 담은 수십 수백 발의 공격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피웅!

핑!

마치 총알처럼 매다 꽂히는 공격.

성창으로도 뚫을 수 없었던, 그 강철과도 같은 크라켄의 갑피를 두부처럼 찌르고 들어갔다.

우우우우...

낮게 울리는 크라켄의 비명.

놈은 깨달았다.

바다가 더 이상 자신의 피난처가 될 수 없음을.

뽀그르르르르륵!

물길을 따라 피어오르는 거품.

오렴된 먹물을 흘리며 녀석은 심해를 향해 탈출을 노렸지만...

-???

[화물차 안전 그물망+1. 가격은 20,930입니다.]

강화된, 그리고 수십 개를 엮어 만든 그물에 거대한 몸집이 가로막혔다.

과연 크라켄이었다.

파아아악!

촤아악!

녹슨 촉수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눈앞에 놓인 그물을 찢어발겼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세 장까지.

하지만 파도처럼 겹겹이 쏟아지는 그물을 맞이하며, 크라켄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끄르르르르륵...

하나둘 무거워지는 촉수와 흐릿해져 가는 시야.

그 끝에서 녀석이 본 것은...

푹!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 잔액 : 46,721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남은 마석은 115,052개입니다.]

빛나는 창에 의해 터져나간 게이트 핵의 노른자.

그리고.

콰득.

새카만 먹물과 함께 자신의 머리를 꿰뚫은 엘프들의 화살이었다.

62. 통폐합 (4)

투두두두!

삿포로의 게이트를 제거한 우리는 헬기를 타고 엘븐하임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곧장 엘리의 안내를 받아, 세계수가 있던 엘븐하임의 유적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 세계수가 있었다.

어제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 아니 한결 더 연약해진 모습으로.

마침내 달성한 6레벨이다.

새로 얻은 아공간 슬롯에 이 세계수를 넣을 차례.

복사를 진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엘리의 결심을 물었다.

"준비됐죠?"

엘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엘븐하임 대륙과 종족의 운명이 달린 일.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비장한 목소리로 결심을 내비쳤다.

"예"

하지만, 그때였다.

-세계수를 살려낸다고...? 그것도 외지인이?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

아니나 다를 까, 갈라돈 의회의 장로들이 물밀듯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엘리가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벌써 장로님들 귀에 이야기가 들어간 모양인데... 큰일이네요. 분명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세계수 복사 프로젝트

과연 시골은 시골이었다.

고작 몇 명에게만 전한 정보가 삽시간에 동네방네 퍼져나간걸 보면 그랬다.

우르르르르!

나와 엘리를 둘러싼 엘프 장로들.

그들은 하나 같이 두꺼운 이마 주름을 접고 있었다.

개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넓직한 얼굴을 가진 엘프가 신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한국에서 오셨다던가요... 귀한 식량을 나누어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모두들 감사히 여기고 있고요."

떼거리로 몰려오기에 걱정했지만 의외호 장로들은 신사적인 모습이었다.

근심에 찬 표정.

그럴 만했다.

자연력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지구인.

그런 내가 세계수를 회복시킬 수 있노라 나섰으니.

"하지만... 어떻게 세계수를 회복시킬 것인지 그 방법을 여쭐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모인 장로들 모두 그저 노인네들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연에 관해서는 알고 지내온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퇴화하고 있는 세계수를 대체 어떻게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인지..."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실력 검증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자에게 대륙과 종족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다는 소리.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는 요구였다.

아주 어려울 것도 없었기에, 나는 담담히 내 계획을 이야기해주었다.

"세계수를 제 아공간에 넣을 겁니다. 그 뒤에 다시 복사해서 꺼내드릴 거고요."

실로 간단한 작업.

하지만...

수백 년을 살다 보니 마침내 귀가 먹어버린 것일까?

장로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와전되기 시작했다.

"세...세계수를 넣어버린다고...!?"

"뭐? 어디다가?"

"그야 입에다 넣겠지!"

"아예 저장해서 두고두고 먹겠다는데?"

"뭐? 세계수로 술 한 병 거하게 담가서 한잔 씩 돌리겠다고?"

패닉에 빠진 엘프 장로들.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로들을 보며, 엘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쥐었다.

인제 보니 깡촌 동사무소의 복지 공무원이라도 되는 듯한 엘리의 포지션이었다.

그녀가 열심히 해명에 나섰지만...

"다시 복사해준다고요!"

"...볶아준다고? 아니 무슨 세계수로 볶음을...!"

"복! 사!"

"아니, 왜 볶냐니까! 세계수를!"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사실 그렇다.

큰 치료는 통증을 수반한다.

몸에 좋은 약이 쓰고, 종양을 떼어내기 위해서는 생살을 째고 들어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저..."

"안돼...! 세계수만은!"

내가 입을 떼자마자, 장로들이 후다닥 달려 나와 세계수를 둘러쌌다.

눈앞에서 사라질 세계수.

그 끔찍한 공포를 떠올리며 엘프 장로들은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왜냐하면...

"이미 넣었는데요?"

"...?"

유적에 고스란히 놓여있는 세계수.

아공간에 수용한 물건을 즉시 되돌려놓는 것쯤은 내게 아무일도 아니었다.

일말의 통증도 없이, 우는 아이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고 떠나는 숙련된 간호사의 주삿바늘처럼.

"이미 시작됐어요. 여러분들의 고향은 곧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그렇게, 나는 엘븐하임을 되살릴 씨앗을 확보했다.

어안이 벙벙한 엘프 장로들의 면면을 구경하면서.

.

.

.

툭!

툭!

이곳은 갈라돈 경로당... 아니, 의회의 앞마당.

평상 위에 빼곡히 들어앉은 엘븐하임의 노인... 아니, 장로들은 내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띠링!

[엘븐하임의 세계수, 가격이 설정되지 않았습니다.]

툭!

툭!

볏짚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는 세계수.

잔뿌리 하나 다치지 않은 수백 그루의 세계수 묘목이 마당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저게 정말 세계수라고...?"

"신성한 엘프들의 상징이..."

장로들은 좀처럼 입을 다물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입으로...

와르르르르르르!

"어풋푸!"

대규모의 흙먼지가 날아들었다.

[그린테크 유기농 텃밭거름 35L, 가격은 10,480원입니다.]

[다용도 분갈이 흙 40L, 가격은 23,500원입니다.]

실험실 능력을 통해 그 양을 수백 배까지 늘린 비료와 흙.

공중에 열린 여덟 개의 포탈이 깨끗한 토양을 토하듯 쏟아냈다.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세계수다.

아무리 오염된 땅이라고는 하나, 대륙 전체에 수천, 수만 그루를 심어놓는다면 분명 효과를 볼 터.

하지만, 오염되지 않는 토양을 보충해준다면 그 효과가 한결 빨라질 터였다.

그렇게 수북하게 쌓인 거름과 흙 위로...

"와! 흙이다!"

"흙이야 흙! 이게 얼마 만이야!"

여름철 계속에서 마냥 젊은 엘프들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어풋푸!"

"아...! 흙 먹었어!"

서로의 얼굴로 흙을 튀기며, 흙장구를 치는 엘프들.

빙그레 이 빠진 미소를 지으며, 갈수록 꾀죄죄해지는 모습이 실로 자연친화적이었다.

흙과 운명처럼 맺어진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 제발.'

마음 한쪽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었다.

물류센터의 의류 창고를 여는 수밖에.

마침, 엘프들의 수려한 외모에 맞는 아주 좋은 옷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

.

.

엘프들의 옷을 유니폼마냥 출하하기를 30분.

내 예상대로, 그들은 내가 기대하던 코디를 완벽히 소화하고 있었다.

"이게 지구에서 최고로 유행하는 스타일이라고요?"

엘리가 물었다.

푸른 열매 그림이 패턴처럼 박혀있는 몸빼바지에, 붉은 색 꽃무늬로 장식된 풍기인견 블라우스까지.

머리에는 빳빳한 밀짚모자를 썼고, 발에는 커다란 감색 장화가 신겨져 있었다.

나는 영락없는 시골 아낙네가 된 엘리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럼요. 이게 최고죠."

"역시 지구인들은 실용적이군요. 동시에 자연적이고요... 바람이 한올한올 느껴지는 이 통기성, 입은 듯 입지 않은 듯 자유로운 활동성까지..."

완벽한 할매 패션을 소화한 엘리가 찬란한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중얼거렸다.

'...좋은 옷이고 자시고, 지금은 이거지.'

당분간 엘프들이 할 일은 닥치고 세계수를 심는 일이었다.

그게 엘븐하임을 뒤덮은 저주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이들에게 있어, 시골 어르신들에 의해 검증된 K농업 작업복보다 더 좋은 선물을 있을 수 없었다.

"이거 엄청 부드럽다."

"너무 편해!"

낡고 해진 튜닉을 이제야 벗어젖히는 엘프들.

오색찬란한 시골 펑크 패션을 물드는 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엘리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정겸 씨, 도와주신 만큼 이제 이 엘븐하임을 번듯하게 꾸려나갈 볼게요. 이제 남은 일은..."

과연 자립심이 강한 엘프들이었다.

이미 충분한 도움을 받았다는 듯, 엘리는 엘븐하임을 자립시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에헤이...또 그러신다. 그러면 못 써요. 남 도움도 좀 받을 줄 아셔야죠."

"그, 그런가요?"

"그럼요. 좋은 사람들끼리 서로 돕기도 하고 사는 거지..."

나로서도 이들이 필요했다.

강력한 공격을 쏘아내는 엘프 궁수들, 그리고 태평양을 향하는 지리적 이점까지.

온건한 성품과 자연에 관한 지혜로 가득 찬 엘븐하임은 팍스FC의 신규 터미널 허브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지금 이들에게 모자란 건, 딱 하나였다.

'...일할 사람이 없지.'

바야흐로 농촌 인구 절벽의 시대였다.

수명이 압도적으로 긴 것과는 상반되게, 정작 엘프들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륙을 통틀어도 수천 명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이는 세계수 묘목을 심기에는 심히 부족한 숫자였다.

"원래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니 엘븐하임에게도 나름대로 결심이 필요할 겁니다."

"...무슨 결심이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할 결심이죠."

이제야 비로소 대륙 밖으로 한 발짝 나선 엘프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엘프들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세계와 더 많은 자극이 필요했으니까.

"엘븐하임은 잘 해낼 수 있을 거에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나는 이 빠진 엘프들의 순박한 미소를 떠올렸다.

결코 잘못 봤을 리 없는, 그 해맑은 미소를.

***

평화로운 한국의 이튿날 오후.

소속원 권인혁에게 팍스FC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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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팍스FC] 팍스맨 모집 공고

안녕하세요. 팍스FC 주간조 채용 모집 공고입니다. :)

☞ 장소 : 엘븐하임

☞ 업무 : 세계수 심기

☞ 급여 : 대량의 식자재 및 생존 도구 보급

☞ 지원 방법 : 지역별 포탈 담당자에게 문의

엘븐하임의 고풍스러운 엘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근무할 수 있는 사원분들께서는 많은 지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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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맨 모집?"

간단히 말해, 알바 모집이었다.

직장이고 뭐고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난 멸망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알바라니.

"허참... 이젠 별의 별..."

권인혁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뭐... 팍스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긴 한데..."

급여로 명시된 식량.

물론 권인혁은 이미 포탈로부터 정기적으로 식량을 보급받고 있었다.

비록 아주 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생존을 이어가기에는 아쉬움이 없을 만큼.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건 '생존 도구'라는 표시였다.

"그러고 보니, 구급약이 필요하긴 했지."

얼마 전 딸이 감기에 걸렸던 때가 떠올랐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데도, 차가운 수건을 대어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떤 그때를.

"팍스 쪽에는 고마운 마음도 있기도 하고..."

그에게 있어 [팍스FC]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신뢰의 상징이었다.

식량은 물론, 적들과 싸울 수 있는 무기를 내어준 존재.

그런 팍스FC가 품을 떼먹는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번 해보지 뭐.'

벌컥!

그렇게 권인혁은 집을 나섰다.

용산 합참 본부로 들러 '팍스맨'에 지원했고, 같은 이유로 모인 수백 명의 사람과 함께 포탈을 타고 엘븐하임에 도착했다.

그렇게 그가 목도한 것은...

'저게 엘프라고...?'

형형색색의 할매 패션으로 뒤덮인 엘프들.

고귀할 줄로만 알았던 엘프들이 몸빼바지를 휘날리며, 메뚜기를 잡고 풀피리를 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자, 용산 쪽에서 넘어오신 팍스맨들께서는 갈라돈 구역으로 이동하셔서 세계수 한 포대씩을 수령하신 다음..."

김솔이라는 이름의 관리자가 그들에게 업무를 부여했다.

그렇게 엘프들의 수도라는 갈라돈에 들어선 그의 인상은 다음과 같았다.

'...그냥 깡촌인데?'

"자자, 세계수를 수령하신 팍스맨들께서는 신속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시어서..."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고된 작업의 연속이었다.

'어휴...이것도 보통 일이 아니네.'

내내 허리를 숙여 '세계수'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식물을 심기를 몇 시간.

온통 탈진한 기분이 찾아들 때쯤...

"자자, 식사 중에는 질서 있게 이동하시어서..."

대뜸 새참이 제공됐다.

'...?'

배급원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엘프 장로들이었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일렬로 선 팍스맨들의 식판에 고봉으로 쌓은 보리밥과 산채 나물, 그리고 고추장소스와 부추전을 얹어주는 엘프 장로들.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것은 차디찬 황색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였다.

고된 노동 탓일까?

버겁게만 느껴졌던 시골의 고봉 보리밥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이렇게 맛있다고?"

허겁지겁 입에 들어가는 산채 비빔밥의 알알, 그리고 노릇한 부추전까지.

마지막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밤 막거리를 목으로 넘겼을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알바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거 농활이잖아.'

미처 알지 못했으리라.

낯선 외지인들을 가족처럼 받아준 엘프들.

그들의 얼굴에 뜬 바보 같은 미소가 없었더라면.

***

가진 인력을 총동원했다.

아공간의 가족들은 물론, 카멜롯의 기사들까지 세계수 심기에 끌어들였고, 대규모의 모집 공고를 때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팍스맨들을 끌어모았다.

속도가 수십 배는 빨라졌다.

갈라돈을 중심으로 방대한 규모의 세계수밭(?)이 형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차츰 엘븐하임의 중심 지대가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졸졸 흐르는 샘물, 나무, 그리고 작은 풀벌레들과 새소리까지.

엘프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추레하기만 했던 얼굴에 활기가 돌았고, 이 빠진 잇모 사이로 단단한 덧니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물론...

"헤헤헤."

그 바보같은 웃음은 여전했지만.

그러던 중, 한 가지 상황이 발생했다.

"주... 주군!"

란슬롯을 비롯한 해골 기사들이 벅벅 몸을 긁기 시작했던 것.

그 원인은 엘븐하임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한 자연력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해주십시오! 주군!"

"으히힉!"

고통에 몸부림치는 해골 기사들.

하지만, 카멜롯이 없는 한 이들의 고통을 줄여줄 방법이 없었다.

지잉.

서둘러 그들을 다시 아공간에 수용하려던 찰나...

"잠시 이리 와보십시오."

누군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어제 세계수 앞에서 나를 막아 세웠던 엘프 장로.

그가 해골 기사들 하나하나에 손을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주군."

가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제 간지럽지가 않습니다..."

열둘에 달하는 모든 해골 기사를 둘러본 엘프 장로가 말을 이었다.

"축복이 때론 저주로, 저주가 때론 축복으로 돌아설 때가 있지요. 그럴 땐 자연력과 같은 축복에 별도의 해석을 가미해야 합니다. 우리 존재에 걸맞은 방식으로 말이죠."

아공간의 재생능력.

우리 인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었지만, 정작 해골 기사들에게는 저주에 불과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힘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 또한 우리 존재들이 움직이는 윤곽을 따라 움직이는 법이고요."

그저 강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새롭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엘프들이 수천 년간 쌓아온 경험의 진면목이었고...

"그러니, 셀 수 없이 뻗은 대자연의 순리 속 어딘가에는..."

심지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을 인간으로 되도릴 방법이 존재할 겁니다."

재생과 회복.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은 비단 엘븐하임뿐만이 아니었다.

63. 별이 빛나는 땅 (1)

어느덧 상공회의소가 예고한 통첩일.

살벌한 전쟁의 시작을 알린 것은 일상적이게 짝이 없는 메시지였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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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차원 상공회의소에서 알려드립니다.

한국.일본 지역의 상권 활성화를 위한 통폐합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현 시간부로 태평양 지역에 형성된 '엘븐하임'지역과의 적대 관계가 설정되며, 상호 전투에서 발생하는 수익에 대해 한시적으로 할인된 중개 수수료가 적용됩니다.

세세한 전투 규칙에 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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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븐하임과의 전쟁.

그리고 상공회의소의 불친절한 설명은 한국의 일본의 각성자들에게 그간의 멸망을 상기시켰다.

사람들을 도륙하는 타차원의 괴물들.

더욱이 한국은 팍스FC와 국군에 의해 서서히 수복되고 있었다.

아공간 포탈 근처에는 괴물들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고, 되레 괴물의 부재를 갈증으로 느끼는 각성자들마저 나타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레벨업인데..."

"어차피 붙어야 하는 애들인 거잖아?"

그 때문이었다.

몇몇 각성자들이 한사코 그 먼바다를 건너 엘븐하임으로 흘러든 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침략자가 되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요트를 타고 엘븐하임의 해안에 상륙한 그들이 발견한 것은...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지난 며칠 내내 엘프들과 동고동락하며 세계수를 심던 팍스맨들이었다.

그리고...

"그거 메시지 받았다고 진짜 오는 놈들이 있네?"

"에잉! 몹쓸 놈들!"

팍스맨들 또한 모르지 않았다.

모두들 상공회의소가 보낸 메시지를 읽었으니까.

하지만 입장은 반대였다.

지난 며칠간 엘프들과 흙냄새를 나눈 팍스맨들.

다가올 침략을 막겠다며 자처해서 엘븐하임의 온 해안을 두른 그들이었다.

반면, 한국과 일본의 각성자들이 그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요트에서 내린 그들이 팍스맨들을 향해 쪼르르 달려 나왔다.

"이봐요...! 당신들도 엘프를 잡으러 온 겁니까? 그러면 같이..."

파삭!

엘프를 잡겠다는 말에, 팍스맨들의 이미가 제대로 구겨져 버렸다.

"뭐? 뭘 잡아?"

"다들 메시지 받지 않았습니까? 상공회의소에서 엘븐하임과 전쟁이 시작됐다고..."

"뭐어? 전쟁? 저언재앵?"

지난 며칠간 타다 못해 구워져 버린 팍스맨들의 구릿빛 얼굴, 그 얼굴에 짜증과 혐오가 들이찼다.

요트를 타고 온 각성자들로서는 그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뭐야? 같이 괴물 잡자고 한 것뿐인데...무슨 반응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선두에 서 있던 팍스맨 권익혁이 휙하니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쟤들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런 쓰레기 같은..."

"아니, 뭘..."

"...??"

그들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엘프들의 '진짜'모습을.

오만하고, 선민의식에 찌든 고귀한 존재.

그것이 엘프들에 관한 상식적인 이미지였다.

각성자들로서도 그 재수없는 엘프들의 콧대를 눌러주겠다며 애써 바다를 해쳐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게 엘프라고?'

지울 수 없는 촌티로 뒤덮인 시골 패션.

소탈한 밀짚모자와 때 묻은 목장갑까지.

순진하다 못해 멍청함이 묻어나는 엘프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존재 자체가 '겸손'인 그들.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각성자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색한 표정을 짓는 각성자들.

그런 그들에게 엘프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소년 엘프, 케루부터.

"아저씨, 우리 죽일 거에요?"

"아, 아니다! 무슨 소리니 그게...!"

그리고 새참 지원을 나왔던 엘븐하임의 장로들까지.

"엘븐하임의 점쟁이를 찾아왔다고?"

"아뇨, 점쟁이가 아니라 원래 전쟁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뭐! 전쟁이라고!? 엘븐하임과!?"

"아니! 아니라고요!"

대화를 이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죄책감으로 만든 거대한 무게 추가 달린 채.

***

한편, 나는 엘븐하임의 장로 윌그라임으로부터 기사들의 소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흑마법의 힘은 실로 막강합니다. 생명의 섭리를 뒤집은 일, 그걸 바로 잡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배의 수고가 들어가지요. 마치 쏟아버린 물을 주워 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말을 줄곧 늘어놓던 윌그라임은 이내,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모두를 상쇄할 만큼의 강력한 자연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운용해줄 만큼 실력 좋은 드루이드를 만나야 하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첫 번째 만큼은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겁니다."

윌그라임이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세계수로 이루어진 텃밭.

은은한 녹 빛의 기운이 엘븐하임을 치유하고 있었으니까.

"세계수의 자연력을 이용하면 되니깐요. 하지만 이렇게 작은 묘목이 아닌, 제대로 성장한 세계수의 심화된 자연력이 필요할겁니다."

"그만한 자연력을 얻으려면 얼마나 키워야 할까요?"

나무 하나 키우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퇴비, 비료, 깨끗한 물과 조명까지.

물류센터에는 식물을 키우기 위한 모든 재료가 갖춰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백 오십 년 정도면 결실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백 오십..."

차마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수백 년은 기본으로 사는 엘프들답게, 그 단위가 상상 이사이었다.

내 난처한 표정을 알아봤는지, 윌그라임이 한 가지 말을 덧붙여주었다.

"좀 더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뭐죠, 그게?"

"고난과 회복을 반복하는 방법이지요. 식물에게 있어 바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아십니까?"

세계수를 위한 독특한 양육방식.

윌그라임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바람에 충분히 흔들린 나무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하게 자라는 법이지요. 물론 엘븐하임의 저주는 세계수에 있어 지나친 바람이었지만, 충분한 자극과 회복을 반복한다면 비약적으로 속도를 키울 수 있을 겁니다."

간단히 말해...

"병주고 약 주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바로 그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윌그라임은 또다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계수에게 시련을 안겨준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워낙에 튼튼한 생물인 탓에, 드롭킥을 꽂아도..."

하지만...

"가능할 것 같은데요."

나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찬, '자동 고문 기계"를.

윌그라임과 대화를 마무리 지은 나는 서둘러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

.

.

위이이이잉!

세차게 돌아가는 고문 통돌이 카멜롯.

그 아래로...

땡그랑!

땡그르르르르르...

강화석이 떨어졌다.

'...엄청 빠른데?'

엄청난 생산량이다.

열두 명의 기사들을 모조리 집어넣었을 때보다 배는 빠른 속도.

카멜롯에 담아둔 구성물은 간단 그 자체였다.

흙과 비료, 그 위에 꽂은 세계수 한 그루와 물 조금뿐이었으니까.

'...이럴 줄은 정말 몰랐지.'

정말 몰랐다.

이 중세풍의 회색 모텔이 세계수를 위한 최고의 화분이었을 줄은.

카멜롯은 스파트타식 양육이 필요한 세계수에게 있어 최적의 요람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땡그렁!

땡그랑!

이 압도적인 셍산력의 비결에는 한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 있었다.

"...은근히 쿵짝이 잘 맞는 능력이란 말이지."

6레벨에 도달한 아공간.

내게는 새로운 능력이 개방되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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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공간 생명유지시스템 (02) (New!)

- 아공간 내부에서의 자연적인 부패, 변질, 노화가 극도로 지연됩니다.

- 아공간 내부에 치유 효과가 부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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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능력이다.

하지만 기존의 '미약한'이라는 문구가 제거되었고, 덕분에 치유 효과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다시 말해...

'세계수 양육을 위한 최상의 조건.'

카멜롯에 생명력을 갈취당할 때는 바로 이 생명 유지 시스템이 세계수의 자연력을 보충해준다.

카멜롯이 작동을 멈출 때는 손상된 생명력을 더 빠른 속도롤 회복시켜주는 선순환 구조.

병 주고 약 주고를 반복해야 하는 세계수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땡그랑!

땡그랑!

어느덧 수북하게 쌓여버린 강화석.

사용할 때마다 손이 벌벌 떨리던 것이 어제 일 같은데, 지금은 발에 챌 만큼 많은 것이 바로 이 강화석이었다.

이제는 분류도 포기했다.

그저 처치 곤란으로 뭉텅이로 쌓아놓았을 따름.

배부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다익선이라고,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추가 강화를 못 하는게 아쉽네."

카멜롯을 통해 생산되는 강화석의 등급은 D.

+2등급까지는 무난히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 강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C등급 이상의 강화석이 요구됐다.

때문에 강화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와중에도 별다른 실속이 없는 상황.

어쩌면...

"...물류센터의 저주인가."

박리다매를 우선으로 하는 풀필먼트 센터다.

명품이나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과 소비재로 승부를 보는 쪽.

저등급 아이템을 무한 사출하는 게 나와 어울리다면 어울린 전략이었으니.

물론...한 가지가 더 구비되어 있기는 했다.

"...엘프들이나 갖다줘야겠다."

거기에 '정'을 한 스푼 더한 것이 바로 나, 김정겸의 물류센터였으니까.

.

.

.

차르르륵.

엘프들의 의장, 엘리에게 한 주먹 가득 강화석을 쏟아주었다.

"어머나, 이게 뭐에요?"

빨간색 썬 캡을 벗어던지는 금발 엘프 미녀, 엘리.

그 행색 때문인지 정답게 이웃과 반찬을 나누는 모양새가 연출됐다.

엘리의 흰 손에 담긴 반짝반짝한 돌무더기.

그녀에게 강화석을 전해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성 강화석이에요. 싸울 때 보니까 다들 몇 발도 채 못 쏘고 다들 활이 부러지길래."

총알의 충격을 견디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던 내성 강화석이었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엘프들의 활을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터.

카테고리 수용을 통해 아예 복사된 활을 나눠주면 더 좋았겠지만, '도검류'와는 달리 물류센터에는 활을 저장할 만한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귀한 걸..."

연륜이 있어서인지, 엘리는 강화석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또한 그랬기 때문에, 받아든 강화석을 도로 내게 내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많아요. 분명 쓰실 일이 많을 텐데..."

"괜찮아요. 과장 안 보태고 진짜 산더미처럼 쌓여있거든요. 어차피 등급도 전부 D등급이고..."

등급이라는 말에 엘리가 덧붙였다.

"그러면 세공을 해서 쓰시지 그래요? 드워프들이라면 분명..."

"세공이요?"

내가 되묻자, 엘리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듯 말을 고쳐잡았다.

"아,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지구에는 드워프가 없겠네요. 이리로 넘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제가 착각을..."

"잠시만요. 그 드워들이 있으면 강화석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건가요?"

나는 되물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꼭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더 좋은 무기가 꼭 필요해.'

지구로 들어오는 침략자들의 수준은 차츰 높아지고 있었다.

크라켄을 잡기 위해 엘프들의 힘을 빌렸던 것이 불과 며칠 전.

물류센터의 저주를 운운하던 나의 자조는 명백히 현실적인 위기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등급이 올라갈수록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는 하지만요."

"혹시 드워프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녀라면 알지도 모른다.

엘프와 드워프.

판타지 세계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이 두 종족은 서로 이웃사촌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드워프들의 차원으로 간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지구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을 거에요. 다만..."

"다만...?"

"지구에 드워프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해요. 이번에 통폐합이 진행된 차원은 우리 엘븐하임 뿐만이 아니거든요."

"아...!"

드넓은 지구촌이었다.

최근 제법 글로벌하게 놀았다곤 하지만, 그래봤자 동아시아 삼국을 돌았을 뿐.

모든 연락망이 끊어진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는 그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다.

"라이시온이라는 이름의 산맥인데... 최근에 통째로 지구로 이전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직 살아있다면... 그곳 광산에 드워프가 한 명 남아 있을거에요. 드워프들은 한 번 터를 잡은 일터에서는 좀처럼 떠나질 않거든요."

엘븐하임이 섬처럼 지구에 떨어졌다면, 이번에 산이었다.

세공을 주로 하는 드워프답게, 광산과 함께 지구로 떨어졌다는 모양.

물론 상공회의소가 주도하는 통폐합이니만큼, 지금쯤 개판이 되어 있겠지만... 마석을 세공해줄 드워프가 반드시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서둘러 엘리에게 질문했다.

"혹시 지구의 어느 지역에 떨어졌는지도 알고 있나요?"

"제가 지구의 지리는 잘 모르긴 하지만..."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엘리가 덧붙였다.

"...미국? 그런 이름이었어요."

64. 별이 빛나는 땅 (2)

"미국이요?"

내 말을 들은 유성철이 무전으로 되물었다.

그러곤 현재 합참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연방정부가 붕괴됐습니다. 몇몇 살아남은 주정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내부 사정이 급한지 연락이 잘 닿지는 않는 상황이고요. 그런데... 미국에 가시려고요?"

"네. 엘븐하임에서 이야기하기로는... 애리조나에 거대한 산맥이 생겨났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더 높은 등급의 강화석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에 있는 세공사 드워프를 찾아야 한다고 전해주었다.

포탈을 이용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으니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도.

하지만 유성철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걱정거리를 떠안겨주었다.

"저번에 드린 수송기는 타지 마세요. 미국까지 가기에는 항속거리가 한참 모자라거든요."

"그럼 다른 비행기는 없을까요? 미국까지 갈 만한..."

"여객기를 빌려드릴 수는 있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자살 행위에요."

유성철의 단호한 목소리.

그는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나의 미국행을 만류하고 있었다.

"아까 미국의 상황을 말씀드렸죠. 사실 멸망이 시작된 직후, 주한미국이 철수를 결정했었어요. 뭐, 그들도 어쩔 수 없었겠죠. 당장 본국의 상황도 말이 아니었을 테니... 하지만 그 많은 주한미군 중에서 미국 땅을 밟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맹국 미국이 한국을 두고 철수를 결정했었는 것.

하물며 그 강력하기로 유명한 미군이 철수 작전에 실패했다는 것까지.

유성철은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개중 몇몇 항공기 파일럿이 한국으로 되돌아왔어요. 차마 태평양을 건널 엄두가 나질 않았던 거죠."

"...대체 태평양에 뭐가 있길래요?"

강력한 미 공군을 굴복시킨 하늘의 괴물들.

잠시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던 유성철이 내게 제안했다.

"직접 한 번 보시죠. 녹화된 영상이 있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