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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이튿날 아침.

진즉 오사카에 도착했을 나무상자를 떠올리며, 손가락만 한 작은 포탈을 열어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쿠우우...

어두컴컴한 공간.

벽면에 이따끔씩 놓인 작은 불빛이 칙칙한 내부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나무상자 표면에 좌표를 찍었던 포탈이다.

알맹이를 빼낸 뒤 정리를 한 것인지, 가까운 곳에는 해체된 나무상자 더미가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가볼까."

딱히 경비병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포탈을 마저 키워 밖으로 나섰다.

어둡고 거대한 공간.

분명 인간에 의해 축조된 건물일 텐데도, 특유의 습도와 우중충함이 거대한 동굴의 공동에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예상했던 대로, 후쿠오카 대표는 이곳에 있었다.

병원 침대에 완전히 결박된 그.

입에는 재갈이, 눈에는 안대가 꽁꽁 동여매져 있었다.

옆으로는 주렁주렁 메달리 수액이 달려 있었고, 몸 곳곳에도 호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기필코 그 생명을 붙여 놓겠다는 유신각성회의 의지가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러던 중,

"...!"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대한 공간 안에 놓인 침대는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이쪽도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와 호스, 입에 물린 재갈과 꽁꽁 싸맨 안대.

하지만 한 가지 지대한 차이가 있었다.

'...어인이 아니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그는 명백한 인간이었다.

"..."

그는 평온했다.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는 듯이.

인기척을 듣고 힘을 다해 버둥거리고 있는 옆의 후쿠오카 대표와는 달랐다.

스윽.

입의 재갈을 풀었다.

그가 인간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어떤'인간이지만큼은 확인해보아야 했으니.

"...어억?"

서서히 풀리는 재갈에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간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식의 반응.

마석을 꺼내든 채,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왜 어인이 아니죠?"

"..."

재갈이 물려있던 입이 꽤나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한참이고 턱을 어루만졌다.

애타게 기다리던 대답은...

"사토 다이치라고 합니다. 어인이 아닌 건 당연하죠. 협력을 거부했으니까요."

놀랍게도 한국말로 돌아왔다.

마석의 통역 능력과는 무관하게, 외국인 특유의 어색한 억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아시네요?"

"예. 조금... 예전에 많이 봤었거든요."

"뭘요?"

"겨울연가라고..."

"...?"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끽해야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생김새.

자그만치 20년 묵은 한류열풍의 충격이 내 안면을 강타했다.

'...정체가 뭐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고개를 풀썩 숙이며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적은 아니었다.

어인도 아니었을뿐더러, 유신각성회의 사람이 내게 한국말로 대답해주는 친절을 베풀리 없었으니.

스슥!

강화된 성창을 꺼내 그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그러곤 이제 쓸모 없어진 마석을 집어넣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여긴 왜 갇혀 있던 거에요?"

다이치는 잠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제 각성 능력이 이거든요. 한 번에 하나뿐이고... 몇가지 제약도 있지만..."

순박하게 생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몸.

그의 몸에는 빽빽한 문신이 들이차 있었다.

후우.

한숨을 몰아쉰 다이치는 자세한 내막을 털어놓았다.

"감쪽같이 속았어요. 입찰 경쟁에서 패배한 오사카에 마두귀(馬頭鬼)라는 7위계 괴물이 나타났는데... 정부 쪽에서 봉인해달라 사정을 했거든요. 요청을 들어줬죠. 저도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으니까요. 한데..."

그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뒤늦게 알게 됐죠. 정부는 이미 유신각성회에 장안당한 상태였고... 거추장스러운 마두귀를 봉인해준 덕에 놈들이 일본을 손에 넣었다는걸."

"그러면 여기 잡혀 있게 된 건..."

"제 몸에 봉인된 마두귀가 무서워서죠. 묶어둔 것도, 이렇게 살려둔 것도."

"...그렇군요."

잠시 상황을 계산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

"확인차 여쭐께요. 여기가 오사카에 있는 유신각성회의 본청이 맞습니까?"

"맞죠. 알고 오신 게 아니었나요?"

"음...제가 운전한 게 아니라서."

"...?"

황당하다는 듯한 다이치의 표정

나는 그 표정을 애써 무시하며 재차 질문했다.

"혹시 그 마두귀라는 거...한번 풀어놓으면 다시 봉인하기 어려워요?"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듯이.

"봉인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 풀어놨다간 우리 둘 다 공격에 휘말릴 겁니다. 그 보다 대체 어떻게 오신 거죠? 여기서 나가야 할 텐데..."

서서히 말이 많아지는 다이치.

나는 그 앞에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아공간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을 뿐.

지잉.

갑작스레 나타난 푸른색 포탈을 보며, 화들짝 놀란 그가 물었다.

"...이게 뭐죠?"

"일단 들어오세요."

무적의 방패가 되어줄 포탈.

그건 직접 겪어보는 편이 빠를 테니까.

***

콰아아앙!

화르르륵!

부서지고, 무너지고, 불길이 타오르는 풍경.

우리는 마두귀를 풀어놓은 즉시, 아공간으로 복귀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우지끈!

뿌리째 박살 나고 있는 놈들의 본진.

그 모두를 무심하게 담아낸 아공간 포탈의 수면을 보고 있자니, 무슨 재난영화라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르르륵!

화륵!

"...이래도 괜찮은 거겠죠?"

다이치가 조심스레 물었다.

눈앞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장면 전환이 연달아 이어진 탓이다.

꽈아아앙!

건물을 분지르고, 어인과 어룡족 괴물들을 불사르는 마두귀.

그 분투에 차마 손뼉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놈 또한 타차원의 괴물이었다.

또다시 다이치의 몸에 가둬두면 그만일 테지만, 우리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연이은 파괴.

그 끝에...

찌잉.

밝은 하늘이 드러났다.

마두귀가 유신각성회 본청 건물을 모조리 걷어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채, 서서히 다른 장소로 멀어지려 하는 녀석.

"가죠."

내가 다이치의 팔을 잡아끌었다.

쏟아 놓은 마두귀를 다시 집어넣어야 할 테니까.

이제 남은 것은 내 역할이었다.

놈들의 본진을 초토화했으니...

'확인하러 가야지. 집주인들 반응이 어떤지.'

유신각성회 회장.

그리고 상공회의소의 일본지부장까지.

이제 놈들의 목을 취할 차례였다.

53. 수산시장의 숨은 영수증 (4)

이른 새벽, 오사카 우메다에 위치한 유신각성회의 본청.

회장 슈메이는 수하의 보고에 반색했다.

"그래? 별다른 반응이 없단 말이지?"

"예, 회장님. 후쿠오카도 무사하다는 소식이고, 부산에서도 별다른 조짐이 보이질 않습니다."

"좋군, 좋아. 아무렴... 놈들도 피해가 없지는 않았겠지."

후우우!

슈메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자신했던 그들이다.

오로지 공격에 집중했던 탓에, 후쿠오카의 방위 전력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부산의 병력이 역으로 들어온다면 만만치 않은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

짝짝!

회장이 물갈퀴를 펼쳐 손뼉을 쳤다.

"일단은 시간을 벌었군. 잘됐어."

놈들이 넘어오기는 할 것이다.

승리 조건은 후쿠오카 대표의 사살이었으니.

하지만 슈메이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흐흐. 절대로 질 수가 없지. 이곳 오사카 본청이 무너지지 않는 한."

지금 후쿠오카 대표는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어인 특유의 생명력은 물론이요, 링거를 통해 영양을 공급하고 있으니...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상황.

하물며 철옹성이라 부를만한 본청이었다.

수백 마리의 어인들과 샤리트에서 데려온 괴물들.

놈들이 어떤 전력을 들고 나오든 완벽히 수성해낼 자신이 있었다.

"한 번 삐끗하기는 했지만... 이제 진짜 시작이야."

후쿠오카로의 침공이 곧 시작될 것이다.

불가피하게 일본에서의 내전 형태로 싸움이 굳어질 터.

이제 남은 일은 전국의 병력을 규합해 후쿠오카로 들어온 한국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바로 이 오사카를 구심점으로 삼아서.

"조센징들... 너희 뜻대로는 안 될 거다."

벌떡!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밝아져 오는 해안선을 나지막이 응시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찬란한 욱일(旭日)의 승천(昇天)을.

하지만...

띠링!

"음?"

그를 반긴 것은 딱딱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였다.

['후쿠오카' 대표가 사망하였습니다.]

['부산'지역이 '후쿠오카'지역과의 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승리 보상과 관련하여, 담당 부서인 상공회의소 일본지부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꽈아아아아앙!

우지끈!

갑작스러운 굉음이 그의 귀를 찢었다.

탁 트인 창가에 들이찬 푸른 지평선.

슈메이가 발견한 것은...

"...어어?"

떠오르는 태양이 아닌, 추락하는 그 자신의 시선이었다.

***

-아아아아악

악마.

딱 그리 부르면 좋을 모습이었다.

희번뜩 부릅뜬 눈, 기다란 입 사이로 드러낸 덧니.

소름끼치는 푸르를 소리까지.

치렁치렁한 천으로 하반신을 가렸고, 위로는 넓적한 어깨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꽤나 압도적인 외양이었지만.

정작 어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딱 두 가지였다.

-아아아아악

-물! 물!

놈이 몸에 두르고 있는 불꽃이 너무나도 뜨겁다는 것.

그리고...

-피해! 빨리 벗어나!

그 몸이 아주아주 크다는 것.

봉인 풀린 마두귀.

그것은 멸망 속의 또 다른 멸망이나 다름없었다.

화르르르륵!

곳곳이 타올랐고.

콰아아아아앙!

태산 같은 주먹이 본청 건물을 허리째 날려버렸다.

마두귀의 불로 뒤덮힌 새빨간 두 발이 어인들의 점액을 순식간에 말려버렸다.

유신(維新)이었다.

새 질서를 받아들인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100여 년 만에 세계 지도를 펼쳤다.

부푼 마음을 떠안고, 바다 지평선에서의 욱일(旭日)을 기리며.

하지만...

-히이익!

맞이한 것은 자신들의 심부를 찢고 나온 새빨간 마두귀였다.

그들의 식탐을 단죄하려는 듯, 유신각성회의 식도를 태우며 마두귀가 불길처럼 솟아올랐다.

펄떡!

펄떡!

발갛게 달아오른 허물.

8위계의 척력이 무색하게, 어인들이 펄떡거렸다.

'...천적이라는 건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점액을 말려버리는 거센 불길.

놈들이 왜 그렇게까지 마두귀를 봉인하고 싶어 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겸 씨! 이제 집어넣겠습니다!"

다이치가 다급하게 외쳤다.

통제를 잃은 마두귀가 서서히 다른 장소로 이동을 시작했으니.

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좋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곤란했다.

다이치가 그러하듯, 모든 일본인이 유신각성회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어어어어어어어!

모종의 힘을 감지한 것일까.

마두귀가 발작하며 끝끝내 저항했지만...

슈우우우우욱!

오래가지는 못했다.

호리병에 빨려 들어가는 요괴처럼, 그 태산같던 마두귀의 형상이 다이치에게 밀려들었다.

사사사삭!

타다닥!

먹물처럼 튀어 오르는 염화.

그 먹색의 불꽃이 다이치의 몸을 문신으로 물들였다.

순식간에 봉인 작업이 완료됐다.

과연, 다이치의 말대로 썩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정겸...씨..."

쿠웅!

정작 본인이 혼절을 해버렸다.

지잉!

서둘러 다이치를 포탈 안에 던져넣으며, 큰누나에게 응급처치를 부탁했다.

"...조금 쉬며 깨어나겠지."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역할이었다.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 그리고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를 찾아내는 것.

공교롭게도, 그 중 하나는 갸우뚱 기울어지는 빌딩과 함께 저절로 이뤄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건물 한 동.

그것이 기울어내리기 시작했고...

꽈아아아아아아앙!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강타했다.

휘이이이...

타닥!

먼지가 걷어지고,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

그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던 중,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건?"

무너진 건물.

무엇이든 그대로 박살이 나야 정상이 아닐까?

하지만 멀찍이 내다보이는 것은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깨끗한 사무실 공간이었다.

위이이...

어쩐지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정체 모를 배기음.

주변을 휩쓸고 있는 멸망 속에서도, 홀로 고고함을 지키고 있는 신비로운 방이었다.

마치 저 홀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 공간이 상공회의소 일본 지부가 아닐까 하고.

그 사이로...

듬직한 체구의 어인 하나와 날카로운 인상의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

.

.

우선은 어인이었다.

부리부리한 눈.

큼지막한 코와 아가미 위 양쪽으로 뻗은 뿔까지.

비늘이 살짝 그을려 있기는 했지만, 나름 멀쩡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령기사들의 시선으로 보았던 타차원의 존재, '어룡인'에 한발짝 더 다가간 외양.

대뜸, 녀석이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노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파르르 떨리는 아가미.

어떻게 내 소행인줄 알았는가 했는데, 가만보니 주변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모르는 것이 이상한 수준.

아니, 한 명.

딱 한 명이 더 있기는 했다.

어룡인의 옆에 선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인간?'

작은 머리와 가지런히 배치된 눈코입.

비정상적으로 하얀 피부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외양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반듯하게 빗어넘긴 머리, 사각의 무테안경까지.

한껏 미간을 구기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인텔리'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거...

'인간이 아니구나.'

정? 인간미?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런 비인간적인 분위기는 유령이 와도 풍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장.

마침 놈이 기어나온 곳 또한 내 가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로 짐작하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태평하게 놈을 관찰할 시간이 없었다.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던 어인.

"...대일본 제국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이 치르게 될 거다."

꾸드드득!

놈이 제 몸을 급격하게 부풀리기 시작했으니까.

촤학!

점액질을 흩뿌리며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고,

까드득!

솟아오른 양손에는 용 발톱이 솟아났다.

한결 강력해진 모습.

지부장은 그런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유유히 뒤로 물러섰다.

"한번 잘 해보세요, 슈메이."

"...예."

어인, 슈메이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묻어나왔다.

지부장은 이번엔 나를 보며 말했다.

"그쪽도."

"...?"

분명 한 패거리라 생각했던 놈들이다.

하지만 슈메이를 대하는 지부장의 태도는 얼음장 그 자체였다.

"으아아아아아아!"

슈메이가 기습적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촤르르르르륵!

물속을 헤엄치듯, 놈의 비늘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점액.

놈이 재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쩌억 입을 벌렸지만...

푸하악!

"카아악!"

사출된 성창의 속도가 몇 배는 빨랐다.

아무렴, 시속 500킬로의 속도니까.

"으으...!"

되레 입천장이 뚫린 녀석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띠링!

[마석 1,000개를 투자받았습니다.]

"...뭐야?"

고개를 돌려보니 일본 지부장이 묘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격투기 시합에서 가산점을 얹어주는 심사위원 같은 표정.

실로 의문투서이였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쐐애애액!

금세 입에서 성창을 빼낸 슈메이가 또다시 내게 달려들었으니까.

물론...

푸욱!

푹!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십수 자루의 성창이 놈의 거대한 몸 곳곳에 박혀 있을 뿐.

긴장했던 것과 달리, 슈메이는 그렇게까지 강한 적수가 아니었다.

한편...

띠링!

[마석 3,000개를 투자받았습니다.]

투자금이 늘어났고,

'...작아졌잖아?'

어인, 슈메이의 몸집이 작아졌다.

장대했던 이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평범한 어인들보다 약간 더 큰 수준.

그야말로 내리막을 치닫는 수레와도 같은 추락이었다.

"...지부장...님."

그가 일본 지부장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정작 지부장의 시선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회장님!"

"...이, 이새끼!"

산산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적진의 한복판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서서히 주변으로 유신각성회의 잔당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슬슬 거들어 줄 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척!

척!

지잉!

그렇게, 포탈을 열어 카멜롯의 열두 기사를 소환했을 때...

[마석 10,000개를 투자받았습니다.]

투자금이 천장을 뚫어버렸다.

후욱...후욱...

슈메이는 이미 전투 불능의 상태였다.

지부장의 손짓이 이어질 때마다 차츰 제 힘을 잃어버리고 있었으니까.

마치, 받았던 무언가를 도로 빼앗긴 것처럼.

휘이이...

그저 남은 것은 카멜롯의 기사들, 그리고 유신각성회의 잔당들과의 어정쩡한 대치였다.

그 사이를.

저벅저벅.

일본 지부장이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그가 내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장, 헨리라고 해요."

짝짝.

그는 손뼉을 치고 있었다.

양손에 채워진 두 개의 손목시계를 잘그락거리며.

"싸우시는 동안 조회를 해봤습니다. 역시 한국분이셨네요? 마침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가 시선을 잠시 땅으로 던졌다.

성창에 찔린 채 거친 숨을 헐떡이는 슈메이가 보이는 자리.

"있잖아요. 사실, 원래 여기 일본이 꽤 괜찮았어요. 아실까 모르겠지만...지금 한국이 꽤나 노른자 땅이거든요."

입찰 경쟁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둔 한국.

하물며 지금은 인천에서의 패배까지 말끔하게 수습한 상황이었다.

놈이 말하는 '노른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 짐작이 되었다.

'...해 처먹을 게 많다는 거겠지. 그 거점으로 일본을 찍은 거였고.'

"한국 시장을 놓치는 건 꽤 아쉽지만... 뭐, 나름 능력이 있으니 그렇게 치고 나가는 거겠죠? 그래서 반대로 한국을 거점으로 다른 시장을 점유해가면 어떨까 해요. 뭐 예를 들면... 지금 당장 오사카와 도쿄 쪽에 선전 포고를 내려드린다거나?"

"지부장! 너 이 자식...!"

"아, 기한은 일주일은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윗선에서 낌새를 채서."

"이이이익!"

격분한 슈메이가 헨리에게 달려들었다.

몸에 꽂힌 십수 자루의 창이 울컥울컥 피를 뿜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일격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타앙!

털끝 하나 닿지 못했다.

'...저게 뭐야?'

아무리 더 강한 척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약간의 충격과 반동이 있기 마련이었다.

나도 그걸 이용해 더 높은 위계의 존재들을 사냥해왔으니까.

하지만 무쇠로 된 벽을 때리듯, 슈메이의 주먹은 지부장의 얼굴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지부장, 헨리가 영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한데 이것 좀 치워주실 수 있나요? 제가 안 맞는 건 잘 할수 있는데... 그렇다고 무슨 공격 능력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슈메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지부장은 한껏 너스레를 떨어댔다.

"한국에 후쿠오카로 향하는 게이트가 지급될 거에요. 그게 승리 보상이었으니까. 앞으로 선전 포고 시스템을 계속해서 일본의 각 지역들을 점령해 나가시고요. 아, 되도록 여기 오사카부터 좀 먹어주세요. 사무실이 저렇게 훤히 드러나 있는 건 좀 그래서... 한국에도 건축 각성자들은 좀 있죠?"

그가 눈짓했다.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도 홀로 고고하게 온존해 있던 푸른 빛의 사무실.

그 강고함은 일본 지부장의 막강한 척력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물었다.

놈의 전력이 어는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너는...대체 며 위계지?"

"위계요?"

푸흡.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한데, 상공회의소인들한테 그딴 건 없어요. 뭐... 없으니까 0위계쯤 된다고 보면 적절하겠네요. 이딴 험지까지 와서 일하는데 그 정도 복지는 있어야지."

적당히 둘러댄 녀석이 나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할 겁니까, 말 겁니까? 무슨 인밴토리 능력 하나 각성해서 우쭐하는 모양인데... 솔직히 당신 정도 되는 존재는 다차원에 쌔고 쌨거든요? 그러니 빨리 결정하세요. 내가 선택한 건 당신이 아닌 한국이고, 당신이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다른 쓸만한 놈 하나 새로 건지면 그만이니까."

"음..."

놈은 나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목적은 한국을 지킨 채, 다른 나라들을 하나둘 불바다로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놈에게 수수료로 넘겨주는 것.

"괜찮긴 한데..."

식민지에서 침략자로 돌아서는 것.

믿기 어려운 수준의 신분상승이었다.

다만, 한 가지 고민 되는 점을 녀석에 털어 놓았다.

"게이트를 설치하면 상공회의소로 수수료가 나가잖아?"

"그렇죠?"

"그거 좀 비싼 것 같아."

"...예?"

잠시 얼빠진 소리를 낸 녀석이 내게 되물었다.

"그 몇 푼 아까워서 게이트 포탈을 마다하겠다고요? 아니, 얼마를 원하시길래?"

놈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즉시 양손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각각 톡톡 두드려가며 계산에 임하는 헨리.

매서운 계산 속도였지만...아쉽게도 내가 더 빨랐다.

"공짜."

"...네?"

"공짜."

"잠깐만... 저게 무슨 뜻이지? 왜 통역이..."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지구와 달리, 저놈들에게는 공짜란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모양.

그 좋은 게 없는 세상이라니,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면...'

알려주기로 했다.

세상에는 이런 거래도 존재한다는 걸.

다만 그 전에, 한가지 확인해두고 싶은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거 정말이야? 나 같은 능력이 다차원에 쌔꼬 쌨다고?"

"그럼요? 혹시 못 봤나요? 여기 있던 봉인사인지 뭔지도 비슷한 능력이던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이치는 자신이 봉인할 수 있는 존재는 7위계까지이며, 같은 사람을 봉인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덕분에 확신이 들었다.

내가 명백한 규격외의 존재라는 것.

그리고 녀석은 그걸 모르고 있다는 것까지.

'뭐... 저놈들도 규격외이긴 하지.'

먼지 한 톨 닿지 않는 제로 그라운드의 척력.

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방어막을 두르고 있었으니까.

그 힘의 기원은...

'사원 복지라 이거지?'

그렇다면.

'회사 자체를 날려버리면 그만 아닐까?'

그러니 한 번 붙어보기 했다.

놈들의 특권이 강할지, 아니면 물류센터의 탐욕이 강할지.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척!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절도 있게 손을 치켜들었다.

이건 헨리에게 주는 가르침이기도 했으니까.

"헨리."

"결정했나요?"

"공짜라는 건, 이런 뜻이야."

"예?"

홱.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놈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턱이 빠질 듯이 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팽그르르 상하좌우로 구르는 녀석의 눈동자.

헨리는 아공간이 먹어치운 일본지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눈깔을 뒤집었다.

'잘 보고 있네.'

좋은 자세였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번 설명해야 한 번 보는 것만 못한 법이니까.

"이게 공짜야. 그러니까..."

경악으로 물든 헨리의 얼굴.

일본 지부가 사라진 덕택일까?

휘이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포마드 머리가 마침내 바람에 휘날렸다.

"이제 좀 맞자."

54. 통신 판매 (1)

뻐억!

물류센터와는 일절 관계없는 나의 맨주먹이 헨리의 복부를 강타했다.

다차원 상공회의소의 외계인에게 알려주는 ABC.

그 첫 단어가 '공짜'였다면, 다음은 '더불어 사는 법'을 알려줄 차례였다.

빠악!

놈의 고개가 위로 치솟았고,

"지구촌 사람들끼리!"

빡!

잠시 땅을 내려다봤다가.

"두루두루 오손도손하게 지내야지!"

퍼억!

한참 뒤로 밀려났다.

"커헉!"

"어딜 싸가지 없게! 돈 놀이나 하고!"

후두두둑!

쏟아지는 놈의 이빨.

손에 묻어나는 핏자국을 바라보며, 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야말로 의문이 사무쳤다.

한순간에 사라진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

그와 동시에 자신을 감싸고 있던 척력이 일순에 지워져 버렸으니.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녀석의 황망한 얼굴.

좀 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온데 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

나로서도 고민이었다.

다차원 상공회의소의 지부장.

지구에 들이닥치 멸망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해줄 존재가 눈앞에 떨어진 상황이니까.

'뭐, 목적이야 알고는 있지만...'

차원 간의 침략 전쟁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수료.

다차원 상공회의소는 그러한 침략을 부추기는 철저한 중개기관이었다.

그래도 궁금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삼킨 상공회의소의 일본 지부.

놈이라면 그 가치나 활용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럼..."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놈에게 필요한 정보를 캐내려던 찰나.

"...?"

문득, 회의감으로 가득 찬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흠칫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허무한 표정은 결코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씨발, 쪽박이네."

녀석이 하늘으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고....

푸학!

놈의 머리통이 즉시 터져나갔다.

풀썩!

놈의 몸이 옆을 철퍼덕 엎어졌다.

철철 새어 나오는 새빨간 핏자국.

그 옆으로.

잘그락.

검게 그을린 손목시계가 핏물에 잠겼다.

"...뭐야?"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고도 없이 죽어버린 녀석.

상공회의소가 자신의 치부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소름 끼칠 만큼 깔끔하고 간편했다.

후회도, 회의도, 원망도 아니다.

그저 짜증.

단지 그것뿐.

쿡쿡.

옆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이 거대한 우주의 입장에서 볼 땐... 결국 놈도 말단이었던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슈메이였다.

놈도 알고 있었다.

유신각성회의 수장인 슈메이, 비록 자신이 일본인들의 왕으로 군림했을지언정, 타차원의 거대한 존재들에 비하면 미약한 개미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지 않나? 다만... 나는 대일본이라는 새로운 중심을 만들고 싶었다. 그게 이 우주의 새로운 태양이 되길 바랐어."

방금 죽은 지부장에 비하면, 슈메이는 지극히 감상적이었다.

온몸에 꽂힌 십수 자루의 성창.

놈은 그 창대 하나하나로 갖은 핏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본인을 순교자처럼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역사에서 되짚어 볼 때, 분명 군국주의에는 그런 식의 착각도 존재했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 한들,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뭔 개소리야? 당연히 내가 중심이지."

"...?"

"너는 눈깔을 태양에 갖가 붙여놓고 사냐?"

우주가 아무리 광대하다 한들, 작달만한 내 시야에서 볼 뿐이다.

아무리 거대한 멸망일지언정,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나만의 멸망이다.

그러니 우주고 나발이고, 나는 아득바득 살아남을 수 밖에 없다.

이 멍청한 놈처럼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툭.

숨이 끊어진 슈메이는 풀썩 고래를 꺾을 뿐이었다.

이윽고 떠오르는 메시지.

[차원 계좌가 소유 이전되었습니다.]

[기존 예금주, 히로토 슈메이, 잔액 : 3,509개]

[이미 차원 계좌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금액이 합산됩니다.]

[남은 마석은 63,919개입니다.]

주변도 서서히 정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헨리를 패는 동안, 란슬롯을 비롯한 열두 명의 기사들은 유신각성회의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었으니까.

어느덧 화창하게 떠오른 태양.

나는 싸늘하게 죽은 헨리의 시신을 살폈다.

두 개의 손목시계.

그리고 새카맣게 타들어 간 하나.

녀석은 상공회의소의 작디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했다.

나머지 한쪽 손목이 빛났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알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스위스 명품 시계.

이 와중에도 지구산 명품을 가져다 쓰고 있던 지부장이 아니러니하게만 느껴졌다.

놈의 손목을 툭 하니 걷어찼다.

'...이깟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제멋대로 죽어버린 탓에 놈의 차원 계좌는 빼앗을 수 없었다.

아니, 설령 죽였더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아쉬운 대로, 놈이 내게 건네주었던 투자금을 전리품으로 삼기로 했다.

"뭐...어떻게든 정리가 되긴 됐네."

[마석 1,0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62,919개입니다.]

위잉!

놈들의 근거지가 있던 장소.

바로 이곳 오사카에 아공간 포탈을 설치했다.

그리고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전리품은 거기에 있었으니까.

***

물류센터로 돌아가자, 이미 정신을 차린 다이치의 모습이 보였다.

중앙에 놓인 접이식 테이블에는 다이치는 물론, 제임스, 운양 그리고 다이치를 치료해준 큰누나가 다 함께 앉아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느닷없이 성사된 한미일중 일반인 회담.

특히 다이치가 열띤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기서 딱 유진이 그렇게 이야기를 한 거에요. 욘사마가 고개를 돌리는데..."

"호오..."

어느덧 내게 다가온 김솔이 툭툭 옆구리를 찔렀다.

"...어디서 저런 파릇파릇한 화석을 데려왔냐?"

"...기운은 좀 차렸데?"

"팔팔하던데? 문신 때문에 무슨 야쿠자라도 넣어왔나 했는데...애는 착하더라."

그때, 나를 발견한 다이치가 쪼르르 앞으로 달려 나왔다.

"정겸씨! 무사하셨군요! 도우러 가려고 했는데 나가는 방법을 몰라서..."

"아닙니다. 덕분에 쉽게 끝냈어요."

나는 그에에 유신각성회를 괴멸시켰으며, 일본에 설치된 상공회의소의 지부까지 제거했노라 전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연신 감사 인사를 표하는 다이치.

그 또한 유신각성회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은 당사자였다.

무너진 군국주의가 명백한 해방으로 느껴질 수밖에.

하지만 아쉽게도 일본의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열린 열한 번의 입찰 경쟁 중 패배한 곳은 자그마치 아홉 곳.

마두귀가 오사카, 그리고 후쿠오카의 게이트 핵을 박살 냈다지만, 아직 일본에는 일곱 개의 게이트가 남아 있었다.

다이치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아, 정말요?"

"예, 유신각성회가 무너졌다는 것만 전해지면, 제법 인력을 모아볼 수 있을 거에요."

공교롭게도 그는 요코하마의 지역대표였다.

입찰 경쟁에서 승리한 두 차원 중 하나였고, 그만큼 생존한 각성자도 많았기에 다이치는 이들을 필두로 전국의 각성자들을 규합해보겠다고 말했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꼭 일본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겠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를 비롯한 일본 각성자들의 역할이었다.

남은 일곱 개의 게이트를 제거해 테라포밍으로 인한 오염된 해수를 걷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지키는 유신각성회의 잔당들을 처리하는 것까지.

한시라도 빨리 일본을 복구하기 바라는 마음을 더해 다이치에게 말했다.

"상황이 안 풀리면 이야기하세요. 마두귀 한 번 더 풀어놓죠."

그의 봉인 능력은 의외로 나의 아공간 포탈과 상성이 좋았다.

거대한 마두귀, 혹은 나중에 다른 괴물까지.

지역 단위의 전투를 벌일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테니까.

"그럼..."

다이치에게는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움직이라 일러두었다.

한 차례 기절했던 것은 물론, 오랜 시간 침대에 묶여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그였으니까.

적당히 마무리 인사를 마친 나는 팍스의 안내에 따라 새로운 장소로 향했다.

.

.

.

에메스 차원의 자재 창고.

그 한쪽 벽면에 이번 싸움의 전리품, 즉 상공회의소 지부가 들어서 있었다.

위이잉.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배기음.

모종의 신비를 담고 있는 듯,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오..."

가까이 들어서자, 상공회의소 지부의 면면이 드러났다.

타르르르르...

부단히 움직이는 톱니바퀴.

그 사이로.

달칵!

달칵!

몇 개의 스위치가 끊임없는 반복 운동을 거듭했다.

톱니의 궤도는 몇 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의 작은 톱니가 열 번 도는 동안, 보다 중심부에 있는 톱니는 한 번 또는 두 번을 도며 바퀴 소리의 균형을 더했다.

달칵!

달칵!

틱!

타르르...

마치 음악 소리와도 같은 기계들의 움직임.

사뭇 그 질서정연한 동작들로부터 건조함과 무심함이 묻어났다.

"어디 보자..."

이러나저러나,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나는 그런 이름의 서류를 찾고 있었으니.

"...없는 건가?"

딱딱한 사무공간.

놀랍게도 종이 한 장 찾아볼 수 없었다.

발견한 것이라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십 개의 디스플레이, 그리고 정체 모를 키보드뿐.

그 원리를 전혀 알 수 없는 자판 배열에.

틱틱.

그 어떤 버튼을 눌러도 화면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자판에 쓰여있는 것은 외계의 언어였지만, 마석을 이용해도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괜히 넣었나...?"

물론 후회는 하지 않는다.

이 사무실을 저장하지 않았더라면 지부장을 처리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내 거절을 들은 놈은 한국으로 건너갔을 것이고, 유망한 각성자를 꼬드겨 한국에도 비슷한 사태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때였다.

팍스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꽤나 오랜간만의 일이었다.

[저장된 대상에서 시스템 작동에 적합한 업데이트를 발견했습니다.]

[업데이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뭐?"

어쩐지 익숙하게만 들리는 메시지.

아공간에 물류센터를 집어넣은 직후, 당시의 각성 시스템이 바로 저렇게 알려왔더랬다.

새삼 떠올리는 거지만, 내 각성 시스템만큼은 다른 각성자들과 달랐다.

팍스라는 최신의 AI와 결합된 독특한 구조.

바로 이 '업데이트'덕분에 내 아공간 능력을 물류센터와 연동되며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이 어디까지인지.

"업데이트 하면 뭐가 좋은데...?"

[첫째로, 메시지 전송 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권역내에서 조건이 부합하는 대상에게만 가능하며 사용할 수 잇는 서식에 제한이 있습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그간 맞닥뜨리던 상공회의소의 메시지창이었다.

사실상 영토전쟁이나 다름없는 입찰 경쟁을 예고하고, 지역과 지역 간의 선전포고를 전달해주는 역할.

하지만, 꼭 그런 메시지만 전달하는 법은 없었다.

"대박인데...?"

지구의 모든 통신이 마비된 상태다.

권역 제한 있다곤 하나, 상대에게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무전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통신수단이 주어진 참이었다.

더욱이,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기대하던 것, 그것이 과연 여기에 있었으니까.

[둘째로,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출력이 가능합니다. 단, 하드웨어에 매겨진 등급이 낮아 신청 위계 등급에는 제한이 따릅니다.]

"...얼마까지?"

[최대 7위계까지입니다.]

일단은 그거면 충분했다.

윗 등급까지 가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한 단계 강해질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니깐.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팍스가 전해주는 상고회의소의 마지막 기능을 전해 들었다.

[마지막 기능은...위성 관측입니다. 단, 권역에 해당하는 장소만 관측할 수 있습니다.]

위성관측.

나는 무심결에 벽면을 덕지덕지 메운 디스플레이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저곳에 위성지도가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높은 고도에서, 때로는 눈앞에 보이듯 생생한 장면처럼.

카멜롯의 유령 기사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의 눈이 되어줄 물건이었다.

"...선물이 너무 많은데?"

공짜로 받았다고 하기엔 과분한 선물.

헨리와 상공회의소의 선행에 박수를 건넸다.

하지만 한 가지의 의문이 일었다.

"권역 내라는 말은...능력에 사정거리가 있다는 소리네?"

[그렇습니다. 설치된 장소를 기준으로 제한 권역이 설정됩니다.]

하지만 내 아공간은 나를 졸졸 따라다닐 뿐, 딱히 어딘가에 박혀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상공회의소의 지부 또한 마찬가지일 터.

팍스는 간단한 설명을 통해 내 생각을 재정리해주었다.

"다시 말해 지금 내 상황에서는...?"

[포탈이 설치된 주번, 모든 곳입니다.]

"...미친?"

앞으로의 그림이 그려졌다.

설치되는 포탈이 많아질수록, 내 시야는 넓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시야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날릴 수 있다는 것.

이건 더 이상 '일본 지부'가 아니었다.

'일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요, 더 이상 '지부'라고 부를수도 없었으니.

"...통합 물류 상황실."

어쩐지 그런 이름이 좋을 것 같았다.

55. 통신 판내 (2)

지잉...! 지잉...!

세차게 종이를 빼내는 상공회의소의 프린터.

지구의 프린터와는 생김새가 영 달랐지만, 그 용도 자체는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물류센터에서 A4용지를 가져왔고, 이후 팍스에게 출력을 부탁했다.

오래지 않아...

[출력 완료되었습니다.]

그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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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 존재 등록 신청서 (7위계)

귀하의 존재 등록을 환영합니다.

신청에 앞서, 아래 항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존재 등록 발급 준비물 : 본인을 대표로 하는 소속 단체.

존재 등록 발급 조건 : 단체의 소속 인원 (50,000명 이상)

본인 : (자필 서명)

▣ 다차원 상공회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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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등록 신청서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내가 8위계를 얻게 된 것 또한 이 서류에게 시작됐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바로 발급에 따른 조건.

"대표? 소속 단체?"

[그렇습니다.]

어느덧 '업데이트'를 끝마친 팍스였다.

상공회의소의 시스템에 대해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 것은 기본.

그 사용 방법을 알려주는 것 또한 앞으로 녀석이 하게 될 역할이었다.

팍스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시스템 내에 '단체'개설 기능이 존재합니다.]

['단체'를 개설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소속원을 모집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등록된 소속원은 다른 단체에 가입할 수 없으며, 별개의 단체를 개설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은...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거네? 위계를 올리려면?"

[그렇습니다.]

"무슨 선거운동도 아니고..."

더 많은 마석을 요구할 줄 알았다.

8위계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차원 계좌와 마석 1,000개였으니.

하지만 이번에 요구된 것은 돈이 아닌 사람이었다.

나를 지지해주는 것을 넘어, 아예 나의 소속이 되어줄 사람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라는 건 위계를 올리기 위한 일종의 꼼수 같은 거였으니까.

"어쩌면 그런 거 아닐까? 이게 권력자들을 위한 편법인 거지. 꼭 전투력이 강한 놈만 지배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차세대 고성능 AI께서 내 추론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헨리가 그 예시였다.

전투력이라고는 코빼기도 없으면서, 누구보다도 강한 척력을 두르고 있던 녀석이었으니.

아무튼, 이해 못할 조건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만 명은 좀 심했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건 내가 위계를 얻을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다른 동료들은 가파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위계를 올리며 성장해나가는 마당에 나 홀로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팍스도 그걸 알고 있는지, 즉시 본론으로 나아갔다.

[단체를 개설하시겠습니까?]

[단체 개설에는 마석 10,000개가 소모됩니다.]

"뭐... 포탈 설치하다 보면 언젠가 채울 수 있겠지."

아득한 숫자지만, 나를 돕는 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용산, 강남, 인천, 부산 그리고 베이징과 일본까지.

그곳의 모든 사람에게 내 소속이 될 것을 부탁하면 될 터였다.

"개설해줘."

요청하자, 팍스가 내게 물었다.

[단체명은 무엇으로 할까요?]

"그거라면 쉽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 아공간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팍스 FC (PAX Fulfillment Center)."

이것이 앞으로 우리의 이름이 될 터였다.

.

.

.

위계 등록에 대한 일을 얼추 마무리한 참이다.

하지만 헨리가 넘겨준 선물이 워낙 대단했기에, 아직도 살필 것들이 남아 있었다.

"어디 보자..."

본격적으로 '물류 상황실'의 능력들을 이것저것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메시지'에 포함된 부가 기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정체에, 어쩐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게 여기서 띄우는 거였어?"

[그렇습니다.]

그 정체는 홀로그램 화살표.

입찰 경쟁이 끝난 직후, 내게도 [서울 대표]라는 낯부끄러운 표시가 부여되었더랬다.

물론, 인천에서 사브로스 차원을 쓸어버린 뒤에 말끔히 사라지긴 했었지만, 이 홀로그램 표식은 선전포고의 당사잔인 [부산 대표]와 [후쿠오카 대표]의 머리맡에도 살펴볼 수 있었다.

상공회의소가 활용하는 시각적인 시스템의 일종.

"이젠 그걸 내가 띄어볼 수 있단 말이지? 권역 내이기는 하지만."

[그렇습니다.]

[글씨 크기와 색상, 표식의 위치도 임의로 설정이 가능합니다.]

"호... 그래?"

원래라면 복잡하기 짝이 없을 조작이었지만, 지금은 팍스가 모든 과정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테스트를 해보기엔 더할 나위 없는 상황.

즉시 팍스에게 요청사항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말이지... 일단은..."

.

.

.

평화로운 아공간의 팍스 풀필먼트 센터.

작은 누나, 김솔의 머리맡에는 큼지막한 홀로그램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LV.999]

한때 내게 달린 [서울 대표]를 보며 갖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김솔이다.

나 또한 그때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

모처럼 생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을 준비했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최강의 수신언, 거기에 금색과 붉은색이 점멸하는 특수효과까지.

하나하나 공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지."

한편, 운양을 비롯한 무림인들은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김 소저...! 각성 시스템도 이제 소저의 재능을 알아본 모양입니다. 999레벨이라니... 레벨은 또 언제 그렇게...!"

"드디어 새로운 경지를 밟은 게로군요! 경하드립니다!"

척!

척!

척!

존경과 함께 이어지는 포권.

붉은색과 금색의 화려한 조화가 무림 중국인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휘휘 휘파람을 불며 모른 체 하고 있었음에도, 김솔은 기가 막히게 그것이 나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김정겸, 뒤지고 싶냐?"

"...내가 뭘?"

"니 머리맡에 그거나 떼고 말해라..."

"내 머리...?"

고개를 들어보니 내 머리 위에도 뭔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다.

분명, 이런 건 달아둔 기억이 없는데.

[★★★ 대령 김정겸]

"...??"

상황 파악을 할 새도 없었다.

득달같이 달려온 유성철이 나를 향해 혀를 내둘렀으니까.

"김 대령! 드디어 마음을 굳히셨군요! 이렇게 저돌적으로 마음을 고백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군요. 이제 우리 국군과 영생토록...!"

"아뇨, 잠깐만..."

카멜롯에서 또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이제 어디서든 별을 보고 주군께 돌아갈 수 있겠군요!"

"아니, 애들아..."

란슬롯이 나의 이름을 연호했고.

모드레드를 비롯한 유령 기사들이 내 주위를 맴돌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대체 누가... 아니, 그보다 대령이 왜 별이야?"

정체 모를 현상.

이쯤 되자, 우리 머리 위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팍스?"

[아닙니다.]

"너...?"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업데이트 된 팍스였다.

***

부랴부랴 홀로그램을 지우고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차츰 사그라들 때쯤, 변화가 찾아왔다.

그 사실을 알린 것은 큰누나.

강남 세브란스에 있던 그녀가 다급히 포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겸아, 지금 바깥에서..."

"...왜 그래?"

심상치 않은 표정.

나는 부랴부랴 관측 장비가 놓은 '통합 물류 상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줄곧 꺼져 있던 화면들이지만, 업데이트 된 팍스가 솜씨 좋게 장비를 작동시켰다.

팟!

팟!

용산, 강남, 인천, 부산 그리고 일본과 베이징까지.

불이 들어온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포탈 주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뭐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산은 물론 강남, 인천 그리고 부산까지.

곳곳에 괴물들이 빼곡하게 들이차 있었으니.

"뭐가 이렇게 많아?"

물론 괴물들은 항상 있었다.

입찰 경쟁에서 승리했단 한들, 그 이전 시기부터 들어와있던 괴물들이 있었으니.

하지만 그 수는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대부분 척력이 없는 하위 개체들이었뿐더러, 성장한 각성자들과 나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은 합참의 병력이 서서히 한국을 수복해가고 있었으니까.

비록 느리다고는 하나, 한반도는 차츰 안정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는.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로운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모니터에 치열한 용산에서의 상황이 담겼다.

기관총을 발사하는 합참의 어느 한 병사.

투두두두두!

기관총이 노란 불꽃을 뿜어냈지만...

티잉! 팅!

붉은색 오크에게는 총알이 통하지 않았다.

"척력...?"

분명, 오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몸 곳곳에 녹색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놈들이 최소 수백 마리가 넘는다는 데 있었다.

강화되지 않은 기관총의 총알로는 놈들에게 생채기 하나 남길 수 없었다.

더 강해진 적들이, 더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베이징이랑... 오사카는..."

불행 중 다행일까.

다른 지역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어쩌면 상공회의소에 의한 일종의 '밸런스 패치'일지도 몰랐다.

입찰 경쟁에서 유난히 좋은 성적을 거둔 한국에 맞춘 시련.

그것이 나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빨리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큰누나가 동동 발을 굴렀다.

그야,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른 가족들, 그리고 무림인들과 유성철 또한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어서 빨리 나가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소식을 들은 다이치 또한 뭐든 돕겠다며 발 벗고 나섰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모두를 구할 순 없어요. 그 많은 장소를 전부 커버할 순 없으니까."

물론 싸우러 나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용산, 강남, 인천, 부산까지.

그 모두를 지킬 수는 없었다.

"...그럼 어쩌자고?"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만들어야지."

그 해답은 역시나 '보급'에 있었다.

괴물들의 척력을 뚫어낼 수 있을 무기의 보급.

나는 즉시 그것을 가능케 해줄 조력자, 팍스를 호출했다.

"팍스, 내 '출하'스킬 말야. 설치된 포탈을 통해 내보내는 것도 가능하지?"

[가능합니다.]

"최대 사정거리는?"

[포탈이 설치된 위치로부터 반경 500m거리까지 출하가 가능합니다.]

포탈이 설치된 네 개의 지역.

그리고 그로부터 500미터 반경의 거리.

그 모두는 상공회의소의 위성 관측을 통해 면면들이 확인할 수 있는 구역이었다.

그 말인즉슨...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빠짐없이 무기를 보내줘. 으로."

[알겠습니다.]

[권역 내 포함된 인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연산 중...]

[연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와 으로 출하를 진행합니다.]

[포탈로부터 가까운 순으로 출하가 진행됩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팍스 FC의 이름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보급 작전.

이른바 '로켓 배송'의 서막을 알린 것은.

"출하."

나는 그렇게 말했다.

***

쿠와아아악!

부서진 현관 사이로 이빨을 들이미는 붉은색 오크.

"제발...안 된다. 이 새끼야!"

용산 주민, 권인혁은 파이프를 들어 놈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세우고 있었다.

"아빠!"

"여... 여보!"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내와 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권인혁은 온갖 힘으 쥐어짜고 있었다.

"들어가 있어! 아니... 뭐라도 막을만한 것 좀 가져와!"

그 또한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각성 능력을 발휘해 숱한 위기를 헤쳐왔고, 가족들 또한 지켜낼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 새깨는 대체 왜 안 죽는 거야!"

지금껏 잡아 죽인 오크만 해도 수십 마리다.

성장한 각성 능력 덕에 평소 주먹질 몇 번이면 제압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 붉은 색 오크만큼은 달랐다.

전투력 자체는 기존의 오크와 비슷했지만, 압도적인 맷집 탓에 도무지 처치할 수 없었다.

"아, 안돼..."

아무리 각성자라 한들 한계는 있는 법.

놈을 붙잡은 팔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일념에도 불구하고.

"제발... 제발...!"

눈을 질끈 감았다.

마지막까지 힘을 몰아넣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그를 찾아든 것은...

빠악!

경쾌한 타격음이었다.

"...뭐야?"

갑작스레 두 팔이 자유를 얻었다.

스르륵 허물어지는 소리.

권인혁은 서둘러 눈을 떴다.

"...왜지?"

그리고 조금 전까지 맞서 힘을 겨루던 오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만 보니, 놈의 머리맡에 처음 보는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건...?"

검집에 담긴 채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장검.

각성 시스템을 통해 '운광검 +1'이라는 물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어엇?"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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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팍스FC] 1박스 눈 앞으로 배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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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주 신속하게.

56. 통신 판매 (3)

"...뭐가 이렇게 좋아?"

권인혁은 감탄했다.

조금 전만 해도 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그였다.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시야가 샛노래졌떤 것이 지금도 생생했다.

하지만...

슈아아아악!

이걸 검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마치 붓이라도 휘두르는 기분이다.

휘두를 때마다 구름 같은 두꺼운 공기가 주변을 에워싸지만, 정작 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빛과 같은 쾌검을 자랑한다.

먹구름 사이 떨어지는 찬란한 태양빛처럼, 대뜸 배송된 검 한자루가 그의 멸망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최하학!

촤악!

풀썩 풀썩 쓰러지는 붉은 오크들.

쇠 파이프보다는 낫겠지 싶어 빼든 검이었지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오크들의 몸은 단단하기 그지없었으니까.

하지만.

"상쾌해...!"

돌덩이와도 같았던 놈들의 몸이 두부처럼 잘려 나간다.

숭덩숭덩 놈들의 목을 베어 넘기고 나니, 권인혁은 그 짧은새에 십수 마리의 오크들을 처치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한 마리도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었는데..."

어느덧 조용해진 길목.

오크들의 사체 위에 내려앉은 것은 위기 끝에 찾아온 평화 그 자체였다.

"정말..."

획!

권인혁은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팍스.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멸망 전, 혁신적인 물류 시스템을 구축해 인터넷 쇼핑계를 평정한 거대 기업.

왜 아직 기업이 살아남아 있는 걸까?

또, 어디서 이런 무기를 구했고, 또 그걸 어떻게 자신의 눈앞에 배송해주었을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최소한 한 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

"...고맙습니다. 팍스 FC."

꾸벅.

마른 하늘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결심했고.

"나중에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된다면... 꼭 팍스의 충성고객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팍스가 원하는 건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이었다는 것.

"...어어?"

스르륵.

운광검이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 안돼!"

파앗!

공중으로 치솟는 운광검.

현실로 떨어진 신선이 다시 하늘로 회귀하듯, 운광검은 그렇게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나무꾼 몰래 선계로 되돌아가는, 전래동화의 이야기 속 선녀처럼.

"돌아와!"

아쉬움에 사무치는 손길.

권인혁은 하늘로 뻗은 손을 거칠게 허우적댔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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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팍스 FC의 소속이 되어 무료배송 혜택을 즐기세요!]

[각성 시스템 > 단체 가입 신청 > '팍스 FC'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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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떠올랐다.

"...팍스 FC?"

그제야 떠올랐다.

팍스는 철저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었다는 것.

그리고 철저한 회원 '구독제'로 이뤄져 있었다는 것까지.

하지만...

"그거면 되는 거야?"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요구되는 것은 그저 '가입'뿐.

마석을 비롯한 재화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무기는 물론 생존에 필요한 물자들까지 지원될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혜택으로만 똘똘 뭉친 놀라운 조건.

권인혁은 망설임 없이 [가입]버튼을 눌렀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팍스 FC에 대한 여전한 감사를 표하면.

***

"좋아, 쭉쭉 올라가자!"

주식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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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FC]

대표 : 김정겸

소속 인원 : 9,61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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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인원이 그야말로 치솟듯 늘어나고 있었다.

7위계 달성을 위해 필요한 인원은 자그마치 5만명.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숫자였지만, 이 정도 수치라면 며칠 내 달성이 확실했다.

일단은 인명 구조가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팍스의 판단하에 안전이 보장된 사람들에게는 [팍스 FC]에 가입한 뒤에 추가적인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거지, 이거야."

눈코 뜰 새 없이 늘어나는 지지자들.

자고로 최고의 선거전략은 금권선거(金權選擧)가 아니겠는가?

특히 지금과 같은 아포칼립스 상황에서는 무기나 식량이 천금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위계를 얻어서 좋고, 사람들은 무기와 물자를 얻어서 좋은.

모두를 위한 상생(相生)이었다.

물론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지역마다 설치된 아공간 포탈은 장차 사람들을 보호하고, 물자를 분배하는 생존의 거점이 퇼 터.

사람들이 몰려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특히, 그 문제에 관해 작전본부장 유성철은 우려를 표했다.

"치안이 걱정입니다.모든 사람이 포탈 주변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할 텐데요."

더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고 더 안전하고 쾌적한 거처를 갖는다는 건 특권, 그리고 권력의 상징이 된다.

다시 말해...

"많은 싸움이 벌어지겠죠."

포탈의 출하 사정거리는 고작 500m.

설치 반경 주변이 금싸라기 땅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사람들의 생존 욕구, 그리고 욕망.

그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힘, 그리고 정당하게 합의된 사회적 권력이었다.

나는 유성철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국군이 아직 건재한 상황인데."

"그 말씀은...?"

"군에서 통제를 맡아주세요. 필요한 물자는 계속해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정겸 씨...!"

유성철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재건이었다.

이를 선결되어야 할 것은 국민들의 안전, 그리고 국가의 신뢰와 상징성을 이어가는 것.

인류의 거점이 될 포탈을 지키고, 그 주변의 행정력을 발휘하는 것은 합참 스스로가 바라 마지않는 임무였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자신이 되레 감격한 표정으로.

"맡겨만 주십시오. 예하 부대들에 지령을 내려놓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유성철과 손을 맞잡으며, 나는 한 가지 덧붙였다.

이제 합참 예하의 부대들이 위수 지역에 해당하는 포탈을 관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멸망은 전국으로 넓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가까운 방식으로 깊게 퍼져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규합해야 할 또 다른 세력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역 대표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입찰 경쟁을 치뤘던 각 지역의 각성자 세력이었다.

.

.

.

시작은 부산이었다.

부산에는 일본과 전투를 치뤘던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더욱이, 팍스가 사람들에게 무기를 불하해주고 있던 덕에, 설치된 포탈을 중심으로 빠르게 피해를 수복해나가고 있었다.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던 부산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다시 접선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한껏 투덜대며 다가왔다.

"아니! 지금! 괴물 잡느라 엄청 바쁜데!"

"바쁘신 거 아는데... 앞으로 포탈 주변의 통제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대신, 앞으로 부산 세력에 충분한 무기나 물자를 지원하겠습니다."

"예? 정말요?"

부산대표 박서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대신, 부산이 정리되고 나면 울산이나 김해 같은 주변 지역에도 지원을 해주셨으면 해요. 거기에도 분명 괴물들이 들끓고 있을 테니..."

포탈로 커버할 수 있는 지역에는 한계가 있다.

그걸 해소하겠답시고 1km마다 포탈을 깔아둘 수도 없을 노릇.

결국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군과도 임무가 다르다.

군이 포탈 주변의 행정력을 발휘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지역 대표를 비롯한 각성자들 세력은 구명 활동을 주력으로 움직이면 될 테니까.

애당초 대의를 가지고 지역 대표가 된 그들이었다.

여기, 박서윤 또한 사람들을 구하는 일에 그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녀는 덧붙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하죠! 내가 지금까지 뭘 하다 왔는데!"

"그리고..."

다시 칼자루를 움켜쥐는 박서윤.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가입 좀..."

"네?"

"각성 시스템에 들어가서 '팍스FC'라고 검색하신 다음에..."

"예에?"

"다른 부산 각성자들한테도 꼭 좀..."

"..."

조금은 구질구질하게.

***

"크와아아아아아!"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

한 마리의 레드 오크가 울부짖었다.

그의 정체는 시쿨루스 차원의 전사장, 투르카.

포효하는 그의 목소리에, 부족의 전사들이 하나같이 함성을 더했다.

"끄와아아아아아!"

"쿠와아아학!"

전사들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도심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수백 마리의 레드 오크들.

그 광경을 전사장, 투르카가 흡족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군. 이렇게 빨리 열릴 줄을 몰랐는데."

그리 부유하지 않은 시쿨루스 차원이다.

애당초 자본력에서 밀리는 그들이었기에, 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입찰 경쟁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다차원으로부터 거지 차원이라는 비웃음을 샀지만, 사실 이들이 노리는 바는 따로 있었다.

"자유 개척이야말로 우리의 진짜 무대지."

더할 나위 없을 조건이다.

고위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시쿨루스는 이를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의 8위계 전사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꽤 오래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빨리 개척자 모집이 이뤄졌다.

"이곳 이름이 한국이라고 했나? 이 정도 속도면 꽤나 선전했던 모양인데..."

처참한 경쟁 성적을 거둔 지구 차원.

그리고 그 안에서 유독 좋은 성적을 거둔 땅.

결코 쉬운 싸움을 내어주지 않는 상공회의소라지만, 투르카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덤빌 테면 덤벼보라지. 너희가 고작 몇 잡는 동안... 우리는 수백을 도륙할 테니까."

톡톡.

투르카는 두꺼운 손을 계산기처럼 두드렸다.

치르게 될 비용, 그리고 이어질 막대한 양의 수익까지.

하지만...

스릉!

앞장선 선봉대의 목이 댕겅하고 날아갔다.

"뭐야? 쟤들 지금 죽은 거야?"

"전사장님...!"

다급히 목소리를 덧붙이는 부관.

"당하고 있습니다! 놈들이 생각보다..."

"잠깐."

부관의 말을 멈춰 세운 투르카.

그는 수십 차례 전장에서 쌓아온, 노련한 경험을 발휘했다.

"놈들 모두가 같은 무기를 사용하고 있구나.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소리지. 마치 우리 부족들처럼 말이야."

"놈들이 부족을요...?"

투르카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인간들으 살폈다.

특유의 동체시력으로 놈들의 구역을 특정했고, 귀를 기울여 녀석들의 읊조림을 포착해냈다.

-팍스FC...

-팍스가 글쎄...

-빨리 소속이 되어서...

기민한 조사를 바탕으로, 투르카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과연, 그게 너희 부족의 이름인가."

그러곤 수하들에게 자신의 뜻을 하달했다.

"모두 비켜서라.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따르겠습니다."

스읍!

제자리에 주저앉은 투르카.

그의 허벅지가 두껍게 팽창했다.

그리고...

타아앙!

압도적인 근력을 자랑하며 껑충 뛰어올랐다.

쐐애애액!

적진 한 가운데에 쏘아져 들어간 그는.

꽈아아앙!

놈들의 구역 한복판에 착지했다.

우수수 깨져나가는 보도블럭.

그 압도적인 등장에 인간들은 겁에 질린 채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정작 투르카는 푸른색으로 보이는 포탈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장의 향기를 맡은 그는, 바로 이곳이 적 부족장의 거처임을 직감했다.

그가 외쳤다.

"팍스FC의 수장은 나와 겨루자! 너도 명예를 아는 전사라면 불필요한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을 터. 나와 결투를 통해 이긴 자가 진 쪽의 목숨을 취하도록 하자!"

쩌렁쩌렁한 목소리.

거대한 몸집의 레드오크가 팍스 부족의 수장에게 일기토를 청하고 있었다.

그 촉구는 계속됐다.

슈우우웅!

꽈아아앙!

꽈아앙!

그 밖의 다른 레드오크들이 하나둘 공터에 착지했다.

서서히 수를 불려간 그들은 포탈 주위를 둥글게 싸며, 신성한 일기토의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쿨루스에 명예가 있으라!"

"투르카 님께 영광을!"

한껏 열기를 틔어내는 시쿨루스의 전사들.

하지만, 투르카만큼은 심장을 차갑게 식혀가며 포탈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가올, 팍스FC의 수장을 기다리며.

반응은 오래지 않았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

쐐애애애액!

쐐애애액!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백 자루의 성창이었다.

피잉!

핑!

콰득!

"아아아아아아악!"

절규를 내뱉는 레드오크들.

갑작스런 기습을 감행한 팍스FC의 부족장을 저주하며 투르카가 소리를 질렀다.

"비...비겁한! 너희에게는 전사의 명예가 없단 말인...!"

푸욱!

그에게 두 가지의 대답이 주어졌다.

하나는 자신의 복부를 꿰뚫은 성창.

그리고 다른 하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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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발신]

[방구석에서 일기토 승리 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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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편한 메시지였다.

팍스FC의 부족장은 이제 집 안에서도 싸울 수 있었으니까.

57. 통신 판매 (4)

"짜식이, 바쁜 사람 두고 오라 가라야."

치열한 전투(?)를 마친 참이다.

발을 툭 구르자, 앉아 있던 사무의자가 팽그그르 회전했다.

이곳은 아공간 내의 '통합 물류 상황실'.

위성관측, 추적배송, AI팍스의 눈부신 호흡으로 단숨에 오크 부족 하나를 날려버렸다.

설치된 포탈은 이제 이동 수단을 넘어, 지역을 수호하는 자동 포탑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적지대가 따로 없었지만...

"...너무 코딱지만 해."

500m라는 제한된 사거리.

바깥의 괴물들을 처치하기 위해선 결국 직접 발 벗고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투두두두두두!

세차게 울리는 헬기 소리.

나야 이곳 상황실에 있다지만, 밖에서는 이용수가 바쁘게 헬기를 몰고 있었다.

그가 아찔한 저고도로 헬기를 모는 한편, 나는 좌표로 지정해 두었던 헬기 하단의 포탈을 통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꽈아앙!

콰앙!

줄기차게 쏟아지는 H빔과 헬파이어 미사일.

같은 방식으로 이미 대구를 거쳤고, 이제 광주와 주요 도시들을 거쳐 서울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한편, 나는 꾸준한 괴물들의 단말마를 들으며...

"맛있네."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물우물.

터져 나오는 육즙과 쫄깃한 반죽.

오지수가 만들어준 따끈따끈한 멕시칸 브리또가 오늘의 메뉴였다.

기름진 음식에는 탄산이 빠질 수 없는 법.

벌컥벌컥.

"캬아!"

얼음이 가득 담긴 콜라로 당보충을 이어 나갔고, 모니터를 관찰하며 팍스에게 출하 명령을 반복했다.

"아무리 봐도 방구석에서 게임하는 모양새지만..."

억울하다.

나는 지금 인류를 구하는 중이니까.

밥 먹을 시간조차 아끼려다 보니 이렇게 되었을 뿐.

물론...

"...꺼윽."

솔직히 좀 편하긴 했다.

한편, 구슬땀을 흘리면 지금 막 아공간으로 들어온 김솔이 열불을 터뜨렸다.

"왜 너만 게임하는데! 왜 너만...!"

"이게 게임이냐. 그리고 어차피 너 격투 게임밖에 안 하잖아."

"배알이 꼴린다고 니놈 꼴이!"

으르르렁!

타다다다다닥!

김솔이 성난 코끼리처럼 내 머리를 쥐어뜯으러 달려왔지만...

-김 소저! 인천입니다!

"아오!"

그새 날아든 지원요청에 서둘러 인천 포탈로 빠져나갔다.

무사히 지켜낸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는 씁쓸하게 되뇌었다.

"사람이 부족하지. 사람이."

이번에도 사람이다.

어느 지역 가릴 것 없이 전국 단위로 터진 사태.

일본과의 싸움을 위해 집결했던 그 많은 전력이 저마다의 지역으로 되돌아갔다.

백민우는 인천, 송현구는 강남으로.

합참의 병력은 죄다 포탈의 방위 병력에 할애되었고, 다이치도 일본을 정리하기 위해 오사카로 떠났다.

무림인들과 가족들이 남긴 했지만, 모두들 포탈을 중심으로 두문불출 할 뿐, 포탈 밖의 적들을 소탕하는 임무는 오롯이 나와 이용수에게 맡겨져 있었다.

바로 이 '폭격'을 통해.

투두두두!

헬파이어 마시일이 괴물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뻐어어어엉!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괴물들.

드레이크, 고블린, 놀 무리 등 새로운 괴물들이 나타났고, 레드 오크나 서리 트롤처럼 한층 더 강력한 종족들도 출현했다.

대부분 8위계의 척력을 두른 존재들이지만, 그것까진 괜찮았다.

정말 문제였던 것은...

"철저하게 무리 지어서 움직이고 있네."

[그렇습니다.]

위성으로 관측된 괴물들의 이동 경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밀집된 장소를 노리면서도, 포탈의 사정거리로는 들어오지 않는 움직임.

포탈에서 공격이 이뤄진다는 것을 철저하게 학습한 결과였다.

아니, 이젠 그 수준을 넘어...

"...아예 숨어버린다고?"

어느덧 광주 시내에 다다랐을 참이었다.

한창 폭격을 이어가고 있었건만, 고블린 부족이 기습적으로 건물 내부로 숨어들었다.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내가 건물만은 타격하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결과였다.

"하..."

이로써 확실해졌다.

놈들 대부분에게 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 헬기를 통한 폭격을 불가하다는 것.

지잉!

쿵! 쿵!

인천에서 돌아온 김솔이 콧김을 뿜으며 내게 다가왔지만.

"내가 잊었을 줄 알고? 막둥아, 머리 딱 대라!"

나는 PC방 이용 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나도 이제 나가야 된다."

"그래?"

그녀는 그제야 우악스런 손길을 거뒀다.

***

이용수가 목적지에 헬기를 세웠고, 곧 광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서울 대표님!"

투두두두두!

서서히 프로펠러를 멈추는 헬기.

내게 다가온 것은 광주의 지역 대표였다.

그는 광주의 군부대와 연계해 지역의 치안을 돕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합참을 통해 광주에 포탈이 설치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고 했다.

즉시 포탈을 설치했고.

[마석 1,000개 받았습니다.]

[남은 마석은 56,583개입니다.]

지잉.

"반갑습니다."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그와 마저 인사를 나눴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부산 대표와 나눴던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했을 뿐.

다만, 그는 나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이 충장도 상가 곳곳에 숨어들었어요. 흔적을 숨기는 데에도 능한 탓에,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이 넓은 광주를 언제 다 수복할 지..."

"그렇죠. 역시..."

나는 즉시 카멜롯의 기사들을 불러냈다.

그러곤 앞에 부복한 열두 명의 기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근처에 숨은 놈들이 있는지 찾아봐, 우두머리 위주로."

"존명."

후우욱.

모드레드를 비롯한 네 명의 유령 기사가 앞장섰고 나머지 여덟 또한 광주 시내의 괴물들을 처리하기 위해 뒤따랐다.

놈들의 기민한 움직임은 우두머리들의 판단력에서 비롯된 결과일 터.

갈 길이 바쁜 마당이지만, 보스들만 잡아주고 가더라도 광주의 상황이 한결 나아질 터였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기사들이 찾아낸 것은 고블린이 아니었다.

-주군, 직접 한번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

후욱!

나는 즉시 시야를 공유받았다.

그 시선을 채운 것은...

"...털?"

복슬복슬하다.

그리고 부드럽다.

몽글몽글한 윤관을 가진 수십 개의 털복숭이가 시선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홱!

털복숭이 하나가 몸을 돌렸다.

삽살개처럼 긴 털로 덮인 얼골, 하지만 몸이나 꼬리는 다람쥐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긴 털 사이로 놓인 단추같은 눈을 빛내는 녀석.

고블린도, 놀도 아니었다.

이건...

"...귀엽잖아?"

분명 지구의 생명체는 아니다.

저런 생김새의 동물은 듣도보도 못했으니까.

심지어 몸집도 사람 허리 반만한 것이, 결코 작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공격 의사가 아예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을 해친 흔적도 없고요.

새카만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

놈들은 파들파들 몸을 떨어가며 유체화를 해제한 기사들을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사...살려주세요!"

말을 하기까지.

"하..."

한결 복잡해진 상황에 머리를 짚었다.

하는 수 없었다.

"...내가 갈게."

아포칼립스에 털 달린 네발 동물이라니.

일단은 쓰다듬고 보자.

***

찹찹!

찹찹!

수십 마리의 털복숭이들이 허겁지겁 브리또를 먹어 치웠다.

아까 오지수로부터 받아 상품으로 등록해뒀던 음식.

타차원의 존재들이라 지구 음식이 잘 맞을까 싶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저마다 족히 수십 개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식성이 엄청나네.'

반려동물로 길렀다간 머지않아 가산을 탕진할만한 식성이었다.

나야 아공간의 복사 능력이 있으니 아무런 부담도 되질 않았지만.

녀석들의 배가 빵빵하게 차오른 뒤에야 비로소 녀석들의 수장, 솔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멋대로 지구에 들어와 죄송합니다... 저희는 마농이라는 종족인데..."

솔렌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자신들이 살던 차원이 타차원의 침략으로 인해 붕괴하였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거처를 찾던 중, 지구로 향하는 자유개척에 몰래 끼어들어 왔다는 것.

간단히 말해...

"난민이라는 거네...? 그것도 밀입국한...?"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상공회의소와 타차원의 침공은 비단 이곳 지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지구처럼 이제 막 침략이 시작된 차원이 있는가 하면, 이들처럼 완전히 멸절해버린 차원도 있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곳의 난민이 지구에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솔렌이 말했다.

"저... 그런데..."

"...아, 이런."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나도 모르게 솔렌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탓이다.

난민치고는 방금 샴푸라도 한 듯, 금빛으로 빛나는 털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하지만, 솔렌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계속 고블린들의 냄새가 나요. 근처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위험한 놈들이니 조심하셔야 해요."

"고블린 냄새가 난다고요?"

"예, 옆 건물 3층에서도 나고... 그 너머 옥상에도..."

"모드레드."

슈우우욱!

서둘러 솔렌이 지목한 장소로 유령 기사들을 보냈다.

그리고...

푸욱!

기사들의 칼날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고블린 부족장의 목을 베었다.

'...이렇게 잘 찾는다고?'

놀랍기 그지없었다.

단단히 기척을 숨긴 탓에 유령기사들이 수색 작전에만 의존하고 있던 상황.

하지만 마농족은 이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공항의 마약 탐지견처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도심에 숨어든 괴물들을 손쉽게 찾아내 소탕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비단, 광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토벌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겠지.'

설치된 포탈을 이용하면 된다.

지역마다 마농족들을 보내준다면 토벌 속도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 될 터.

식성이 과하게 좋은 게 문제지만, 그깟 밥이야 무한으로 먹여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아쉬운 것은 녀석들의 숫자였다.

고작해야 2~30마리에 불과해보이는 마농족.

모르는 척 솔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물었다.

"혹시 지구로 넘어온 마농 족은 이게 전부야? 다른 친구들도 밥이라면 얼마든지 먹여줄 수 있는데..."

솔렌은 내 손 밑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곤 새까만 눈동자에서 톡하니 눈물을 흘리곤, 처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게 전부일리...없지요. 원래는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았었습니다. 하지만 뿔오우거들이 산으로 들어오면서 모두 사로잡아버린 탓에... 빠져나온 건 저희뿐이었죠."

"사로잡혔다고? 얼마나?"

"합치면 1만이 족히 넘을 겁니다. 식량으로 삼을 목적으로요. 우리 마농족들이 먹을 곳이 어디 있다고...흐흑..."

"1만...!"

부드럽고 풍족한 솔렌의 뱃살을 주물럭거리며, 나는 1만이라는 숫자를 되뇌었다.

지역마다 마농족을 뿌려주고도 남는 숫자였으니까.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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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FC]

대표 : 김정겸

소속 인원 : 40,29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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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4만명에 육박한 소속 인원.

마농족들을 구해 팍스FC에 소속시킨다면 고대하던 5만 명을 달성 할 수 있었다.

"솔렌, 너희만 괜찮으면 말이지..."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배를 깔고 드러누운 솔렌을 쓰다듬으며, 가입을 제안했다.

눈앞에 놓인 서른 명의 마농족들을 손에 넣기 위해.

하지만...

솔렌은 그것을 뛰어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단체의 대표셨군요... 그거라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날름.

솔렌이 혀로 코에 물기를 더했다.

그러곤.

"마농족으로 태어나 오늘처럼 배불리 먹어본 적은 한평생 처음이었습니다. 정겸 님 같은 분이라면..."

띠링!

[단체, '마농족'의 대표가 '팍스FC'로 편입을 요청했습니다.]

[요청을 수락할 경우, '마농족'이 '팍스FC'의 산하로 편입되며, 소속 인원 또한 '팍스FC'로 병합됩니다.]

"잠깐, 이건..."

신뢰에 찬 눈빛을 보내는 솔렌.

소위 말하는 '간택'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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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족]

대표 : 솔렌

소속 인원 : 10,6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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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치면...지금 바로 7위계로 올라갈 수 있잖아?'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솔렌의 요청을 수락했고...

[마농족이 팍스FC의 산하 단체가 되었습니다.]

[소속 인원 : 50,911명]

"...정겸 님!"

솔렌이 꼬리를 흔들며 내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렇게...

'...세상에 이런 일도 있네.'

의도치 않게 외계 반려동물을 키우게 됐다.

하지만 기왕 기르게 된 것, 물류센터의 주인이 되어 속 좁게 서른 마리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말했다.

"산으로 안내해. 전부 꺼내줄 테니까."

만 명의 마농족들.

우리 고객... 아니, 애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